말하자면 대문 - 화산섬의 분관에 어서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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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17에 대한 새로운 공지 팬픽류

좀 정리할 필요성을 느껴서


티스토리 비번은 이글루스의 동일 카테고리 글에 몇 번 이상 덧글을 달았고 그 덧글의 내용으로 봐서 판단하기에 이 사람이면 보여줘도 되겠다 싶은 사람, 또는 실제로 아는 친구나 친구에게 소개받은 사람한테만 공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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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of Panic 2 ㅣ- 회색도시&검은방


“헛소리 작작 해, 야!”
통화가 끝난 줄도 모르고 소리지르던 유상일이 마침내 PDA를 내려놓고 씨근거렸다.
“경위님께 무슨 죄가 있다고 저러는 거죠?”
오미정도 PDA를 부수고 싶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나 자신과 경위님을 납치한 범인의 협박이 빈말이라는 확신을 얻기 전엔 그럴 수도 없었다.
‘이제 폭탄이라면 지긋지긋해.’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경찰로 살다 보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 레퍼토리 중 하나지만 흔한 잔소리가 흔한 잔소리가 될 만큼 자주 나오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상일 경위님도 이제 퇴원했지만 몸 상태가 예전 같을 리는 없었다.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한 게 당연했다. 곁에서 같이 흥분해서 날뛰어봐야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누명 쓸 뻔하다 겨우 면한 지 이제 한 달도 안 된 사람한테 죄인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범인은 그런 점까지 뻔히 알면서 도발해온 것이다. 선진화파 잔당인지 또 다른 악당인지 몰라도 유상일을 꽤 깊이 조사해서 일을 벌인 것이 분명했다.
아직 몸의 부상과 정신적 충격 양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상일이 범인의 도발에 대처하지 못하고 날뛰다가 자멸할 수도 있었다. 그러게 놔두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오미정이 잠긴 문을 살폈다. 처음으로 상일 경위님께 제대로 부하 노릇 하는 것 같았다.
쌍여닫이문은 어설프게 닫혀있고 문고리도 망가져 있었다. 대신 문고리 양쪽을 쇠사슬로 얽어 맹꽁이 자물쇠를 채워놓았다. 범인은 두 사람을 가두고 혼자 나간 뒤 밖에서 손만 안으로 넣어 쇠사슬을 감고 자물쇠를 채운 것이 분명했다.
‘안에서 잠그고 이 틈으로 빠져나갈 수는 없었을 테니까.’
쇠사슬과 자물쇠 때문에 망가진 문인데도 아주 약간밖에 벌어지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발을 넣어봤지만 무릎도 빠지지 않았다.
이걸 부수고 나갈 공구가 필요했다. 마침 지저분한 창고이니 잘 찾아보면 있을 수도 있었다. 발버둥쳐 보라는 PDA 너머의 목소리가 빈말이 아니라면.
“걱정 마, 오 형사.”
어느새 많이 누그러진 태도로 유상일이 말했다.
“대체 뭐라는 미친놈인지 몰라도 무사히 나가서 본때를 보여줄 수 있을 거야.”
“그럼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해봐야 더 이상 이전의 자신만만한 웃음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오미정은 모르는 척 맞장구쳐 주었다.
“저 자물쇠만 어떻게 부수면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쪽에 무거운 몽둥이나 그런 거 있어요?”
“자물쇠?”
유상일은 버릇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멈칫 했다.
“우리 소지품은 다 없어졌죠.”
“응. 그래.”
상일 경위님이 락픽을 갖고 다녔고 해정술에 능했다는 이야기는 오미정도 재호 형사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퍼뜩 생각난 것에 방금 지나쳤던 작고 가벼운 종이 상자를 집어들었다. 필요한 건 크고 무거운 공구라고 생각해서 지나쳤었는데 열어보니 옷핀과 의미심장한 길이의 철사 토막 두 개가 들어있었다.
“상일 경위님, 혹시 이걸로 저 자물쇠 딸 수 있겠어요?”
“응? 이리 줘봐.”
유상일은 철사 토막을 집어들고 곧장 문으로 다가갔다. 맹꽁이 자물쇠에 철사를 넣더니 얼마 걸리지 않아 풀어냈다.
“와아.”
“이 정도야 꼭 락픽이 필요한 것도 아니지.”
휘어진 철사 토막을 살펴본 유상일이 버리는 대신 주머니에 넣었다.
“또 필요해질지 몰라. 오 형사도 그 옷핀 챙겨.”
“챙겼어요.”
임시로 자신의 옷소매에 달아놓은 옷핀을 가리켜 보였다. 유상일이 끄덕이고 쇠사슬을 풀어냈다. 그리고 그 사슬 역시 버리는 대신 손에 감아쥐었다.
“여차하면 이런 것도 무기가 되거든.”
잘생긴 얼굴도 소용없이 영락없는 깡패 꼴이었지만 지금은 비상사태였다. 오미정도 고개만 끄덕이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이 나온 곳은 건물 1층에 만들어진 주차장이었다. 외부로 차가 드나들던 출입구는 셔터가 내려져 있고 자물쇠는 알루미늄 셔터 바깥쪽에 채워놨는지 안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관리인용 부스도 잠겨있었다.
“이건 아예 문을 부숴놨어. 락픽이 있었어도 소용없었을 거야.”
“창문도 다 막아놨네요.”
밖을 향한 창문을 전부 널빤지로 막아놓고 못질해놓은 꼴을 보고 유상일이 쇠사슬로 후려쳤다. 그러나 대여섯 번쯤 쳐서 마침내 갈라진 널빤지 틈으로 유리창 너머 쇠창살이 보이자 더 이상 해봐야 소용없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 하자는 수작이야, 정신나간 놈이!”
유상일이 분통을 터뜨렸다.
오미정은 문득 갈라진 틈으로 창살을 살펴보았다. 녹슨 정도로 보아 쇠창살은 널빤지로 막을 때 같이 설치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이 건물의 일부로서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원래 어느 건물이든 1층은 방범용 창살을 설치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오미정은 창살의 모양이 어딘가 낯익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짐승이 우짖는 것 같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상일 경위님? 왜 그러세요?”
생각하던 것도 잊고 오미정이 유상일 곁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숨을 삼켰다.
주차장에서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는 문에도 방화벽이 내려져 있었다. 대신 구석에 방화문이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있는데, 그걸 막은 빗장에 사진이 붙어있었다.
잡지에서 오려낸 듯 선명한 컬러 사진은 유상일이 아연이를 안고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한창 언론에서 영웅이라고 추켜세울 때 찍은 사진이었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이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다 알면서 이런 걸 유상일에게 들이댈 수 있는 악마가 누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빗장은 그냥 당기면 풀리게 되어있었다. 대신 사진이 문짝과 빗장에 테이프로 이어붙여져 있는 걸 보고 오미정은 사진 먼저 곱게 떼어내려 했다. 그냥 빗장을 빼면 사진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럴 필요 없어.”
유상일이 텅 빈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오미정을 밀어내고 빗장을 잡아뺐다. 정확히 사진 속 유상일과 유아연의 목 부분이 찢어져 버렸다.
“이깟 사진 따위.....”
오미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역시 상일 경위님은 직접 박근태 국장을 처단해 복수하고 싶었던 거다. 지지부진한 검찰 수사 따위에 맡겨두는 대신.
그러지 못한 것은 아마도 팀장님의 만류에 수긍해서가 아니라 지금 같은 무력감 때문일 것이다.
무슨 짓을 해도, 어떻게 복수해도 아연이는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무력감.
빗장이 떨어지고 문이 열렸다. 그 너머는 또 다른 폐허였다.


“허, 참. 무슨 공포영화도 아니고.”
주정재는 멀쩡한 척 너스레를 떨어보았다. 김성식 밑에서도 살아남은 자신이 이런 데서 쫄 수는 없었다.
“죄를 속죄하라니, 여기가 성당 고해소야? 신부님은 어디 계셔?”
PDA에선 더 이상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도 너스레를 멈추지 않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떤 큰 건물의 탕비실이었던 모양이었다. 과거형인 것은 이미 녹슬고 망가진 수도꼭지에서 뻘건 녹물인들 나올지 의심스럽기 때문이었다.
진작 보수하든 철거하든 했어야 할 건물이 왜 그대로 남아서 이런 범죄의 무대가 되었는지 몰라도 누군가 철거할 시도 정도는 했던 것 같았다. 사방 벽이 다 부서지다 만 꼴이고 낡은 대걸레나 솔도 뒹굴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더 뒤져봤지만 무기가 될 만한 망치나 톱은 없었다.
“이거면 몽둥이 정도는 되려나?”
대걸레를 들고 가볍게 휘둘러 보려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런 곳에 방치되어 있었으니 다 닳고 썩어가는 걸레여야 할 텐데 어제 사다 끼운 듯 두툼하고 깨끗한 새 걸레가 달려 있었다.
“뭐야, 이거. 청소라도 하라는 거야?”
PDA를 노려보다가 그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이, 꼬마. 넌 할 말 없어? 이게 이상하지도 않냐?”
꼬마라는 표현은 사실 공정하지가 않았다. 앳된 얼굴이고 앉아있음에도 주정재보다 더 크다는 건 한눈에 알 수 있는 덩치였으니까.
그러니 항의할 법도 한데 ‘꼬마’는 딱딱하게 다문 입술을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환장하겠네.....”
그대로 꼬마에게 욕을 퍼부을 수도 있었다. 걸레를 몽둥이 삼아 위협할 수도 있었다. 어느 쪽도 하지 못한 것은 첫째로 어딘가 있을 미지의 적이 더 두렵고, 둘째로 이 꼬마가 자신보다 더 크고 얼굴도 험악했기 때문이었다.
‘나 진짜 깡패 다 됐구만.’
잘난 척 거친 척 하고 다녀도 다 상대 봐가면서 하는 짓이라는 점에서 깡패만큼 비굴한 족속도 찾기 힘들었다.
실은 경찰도 그런 점에선 매한가지일지도 모른다. 몇몇 별종만 빼고.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갑자기 꼬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좀 봐요.”
타일 바닥 한 구석이 뭔가 칠해놓은 듯 새카맸다. 그뿐이라면 그냥 여기가 워낙 지저분해서 그러려니 할 텐데, 그 옆에 친절하게도 작은 고무 배스킷이 있고 세제 냄새나는 물까지 반쯤 차 있었다.
“......진짜 청소하라는 거였어?”
황당함에 중얼거리면서도 가서 걸레에 물을 적셔 박박 닦았다. 하기 싫다고 손 놓고 있어봐야 여기서 이 꼬마와 꼼짝도 못하고 언제까지나 갇혀있을 뿐일 테니까.
단순한 세제가 아니라 좀 위험할 정도로 독한 것이었는지 바닥 얼룩은 금방 벗겨져 나갔다. 그 아래 타일에 네 자리 숫자가 가늘게 새겨진 것이 보였다.
이 탕비실의 문에는 어울리지 않게도 최신식 키패드가 붙어있었다. 그 네 자리 숫자를 입력하자 신호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주정재는 독한 냄새가 풀풀 나는 걸레를 조심스럽게 봉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봉을 움켜쥔 채 먼저 문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이 형님이 이래뵈도 경찰이거든.”
꼬마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조용히 주정재의 뒤를 따라왔다. 묘하게 순종적으로 느껴지는 태도여서 주정재는 조금 기분이 풀렸다.
“그러니까, 어느 미친놈이 이런 짓을 벌였건 놈은 제 무덤을 판 거란 말이지. 넌 이 형님만 믿고 잘 따라와. 알았어?”
“예.”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얼마 전까진 경찰이었으니까.


배준혁은 아무 말도 없이 주위를 조사하고 나갈 길을 찾았다.
첫 번째 방이라 그런지 복잡한 것은 없었다. 그저 커다란 철문을 열려면 문 양쪽에 있는 레버를 동시에 내려야 할 뿐이었다. 보통의 건물에서 이렇게 해야 할 필요는 없을 테니 이것은 PDA 속 인물이 일부러 조작해놓은 문이 분명했다.
“여기서 나갈 생각이 있다면 저 문 옆의 레버 좀 잡아주시죠.”
평소엔 감정을 드러내려 해도 잘 드러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마음먹은 것보다 훨씬 더한 경멸과 혐오의 감정이 흘러나왔다.
함께 이 방에서 눈을 뜬 동행, 박근태는 화를 내지 않았다. 부하였던 형사의 퉁명스런 말투를 감지조차 못한 것처럼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배준혁이 선 반대편 레버로 다가갔다.
“셋을 세겠습니다. 하나, 둘, 셋.”
의외로 박근태는 순순히 박자를 맞춰 레버를 당겨주었다. 철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당긴 상태에서 고정하는 홈이 없는 걸 보고 준혁이 레버를 살짝 놓아보았다. 레버가 다시 올라가며 문이 닫혔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열리고 닫히는 속도가 충분히 느리니 열고 재빠르게 뛰어나가면 될 터였다.
맞은편의 박근태도 같은 생각인지 신경쓰여 노려보았다.
그럴 의욕도 없는 상태라 뛰어나오지도 못한다면, 가두고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앞으로 또 이렇게 둘이 협력해야만 하는 함정이 나올 수도 있었다.
“문이 열려 있는 동안 재빨리 뛰어나가야 합니다. 하실 수 있겠습니까?”
박근태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 정도로 대답 들은 셈 치기로 하고 준혁이 다시 셋을 셌다. 둘이 레버를 당기고 문이 열렸다.
레버를 놓고 바로 문 틈으로 달려나갔다. 도중 박근태와 어깨를 부딪쳤으나 간발의 차로 둘 다 복도까지 빠져나오고 문이 닫혔다.
“잽싸군요.”
그 주제에 살고 싶더냐는 노골적인 비아냥에 박근태는 대꾸하지 못했다. 그걸 더 견딜 수 없어서 배준혁은 그를 무시하고 복도를 살폈다.
아마 박근태는 자신이 이러는 이유를 여전히 모를 것이다. 기껏해야 상일 선배의 일, 백석과의 유착 건 때문에 부하 형사로서 품는 배신감과 경멸이라고만 생각할 것이다.
굳이 그것만이 아니라고 말해줄 이유도 없어 조용히 복도를 따라 걸었다.
이내 나타난 다음 문은 커다란 쇳덩이로 막혀 있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야만 겨우 밀어낼 수 있었다.
이번에도 박근태는 묵묵히 협조했다. 배준혁은 또다시 비아냥거릴 말을 골라보다가 그만두었다.
박근태와 장희준 회장이 오래 전부터 유착해 있었다고, 그동안 곁에서 수행하며 봐 왔다고 밝힌 배준혁의 증언은 법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다른 명백한 물증들에 지원사격 정도의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박근태의 표정은 굉장했다. 마치 그 자리에 선 배신자가 배준혁인 것처럼.
그럴 줄 알았으면 그 얼굴에 뱉어줄 독설이라도 더 준비해갈 걸 그랬다는 생각도 이제와서 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그저 증언을 다 마치고 조용히 퇴장하며 속으로 장지연의 앞날을 걱정했을 뿐이었다.
지금도 곁에 있는 박근태 따위 무시하고 함정을 돌파해야 했다. 살아서 나가야만 했다.
쇳덩이를 밀어내고 연 문 너머엔 캄캄한 암흑이 펼쳐져 있었다.
출발할 때 창으로 비치던 햇살을 생각하면 벌써 밤이 된 것은 아닐 터였다. 그저 여기부터는 창문을 전부 빈틈없이 막아서 만든 어둠이었다. 아마도 긴 복도 같은데, 이 상태로는 도저히 발걸음을 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직 문 이쪽에서 비치는 빛에 의지해 최대한 그 안을 훑어보았다. 그러자 비상용 손전등 같은 걸 두는 부스가 곁의 벽에 박혀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바로 손을 뻗어 손전등을 꺼내려고 하는 대신 신중하게 노려본 덕에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부스 안에 있는 것은 손전등이 아니라 위험하게 피복이 벗겨진 전선 다발이었다.
무시하고 지나갈까도 했지만, 앞에 이어지는 복도에 감추어진 위험이 어둠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그 부스가 입증했다. 어둡다고 무심코 저 부스에 손을 뻗었다가 감전될 수 있다면 부스를 무시하고 지나갔다가 역시 어두워서 무언지도 모르는 것에 손을 댈 수 있었다.
부스 위로 뻗어오른 전선 다발이 천장의 형광등에 연결되어 있는 걸 봐도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명백했다.
근처에서 찾은 고무장갑을 양손에 끼고,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므로 차단기를 찾아 내렸다. 고압전류라면 고무장갑만으로는 차단이 안 되고 장갑이 녹아버릴 수도 있었다.
전선을 제대로 연결하고 차단기를 다시 올리자 형광등이 켜졌다. 복도 끝까지, 주위를 제대로 봐 가며 걷기엔 무리없는 정도로 밝아졌다.
그러니 가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배준혁은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이 배전반에 박근태가 ‘실수로’ 손을 댄다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악의와 위험이 가득찬 공간에서 시신이 나온다면 이 공간에 함께 갇혀 있던 사람보다는 공간을 만들고 사람을 가둔 범인 쪽이 더 비난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배준혁의 심정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박근태는 이미 복도로 들어서 있었다. 배전반을 멀찍이 피해서.
배준혁은 일단 조용히 따라갔다. 이 밀실은 분명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기회는 금방 또 찾아올 터였다.

City of Panic 1 ㅣ- 회색도시&검은방


귀를 찢는 총소리에 서재호와 배준혁은 그 자리에 엎드렸다.
유상일은 엎드리지 않았다. 두 손을 들고 선 채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폭탄에 청테이프로 묶여있는 딸을 보면서.
헛된 몸부림이었다. 아마 유상일 본인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길지도 못했다. 경찰의 일제 사격 앞에서 인질범들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폭탄의 스위치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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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정은 세 번째 소주병을 비웠다.
내사과 놈들이 술집까지 쫓아와주는 친절을 발휘했기에 할 수 없이 대꾸해줘야 했다. 그들이 한 질문도 자신이 한 대답도 벌써 술기운에 녹아내리고 있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말 따위 듣지도 않을 놈들이 굳이 쫓아온 것은 그저 조직 내 괴롭힘의 일환일 뿐이었다. 그마저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연이가 죽었다. 상일 경위님은 중상을 입고 입원했다.
자신은 그 자리에 있지도 못했다.
경감님은 왜 재호 형사와 준혁 형사만 경위님께 딸려 보냈을까?
자신이 못미더웠을까? 여자라서?
경감님만은 차별 같은 것 안 하고 자신을 부하 형사로 봐준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난데없이 험악한 경찰 떼거리가 다녀간 탓인지 술집 주인의 기색이 좋지 않았다. 무시하고 눌러앉아 있을까도 했지만 단골 술집을 잃으면 곤란했다. 지금처럼 마음붙일 곳이 술집뿐일 때는 특히.
눈치껏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하숙집 아주머니 눈에 띄지 않게 재빨리 복도를 지나 문을 닫고 전화기의 자동응답기를 켰다.
쓸모없는 스팸 메시지, 내사과의 협박 메시지를 들으며 오미정은 오랜 습관을 저주했다. 전처럼 경찰청에서 오는 메시지를 냉큼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닌데 이놈의 손가락이 김유신네 말처럼 버튼을 눌러버렸다.
-오미정 형사, 나 권현석 팀장이야.
팀장님의 자상한 목소리도 지금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이 따라들어가 봤자 변하는 건 없었을지도 모른다. 중상자가 셋에서 넷으로 늘어났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건 경위님과 아연이를 위해, 정의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였을 것이다.
오미정은 재생되는 음성을 중간에 끄고 바로 삭제 버튼을 눌렀다.
-......기적적으로 퇴원.
간발의 차로 재생된 마지막 낱말의 뜻이 이해된 것은 그 다음이었다.
“퇴원이라고?”
지금 팀장님께서 언급할 만한 사람들 중 퇴원할 사람은 셋뿐이었다.
‘하지만 벌써? 셋 다 중상이었을 텐데? 폭탄이 코앞에서 터졌는데?’
그러나 그때 세 사람의 부상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심각했는지, 이후 경과가 어떻게 되어갔는지 잘 모르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연이가 끝내 폭탄과 함께 날아갔으며 그 책임은 전부 팀장님과 경위님, 그들을 따른 형사들이 뒤집어쓰게 되었을 때 모든 용기를 잃어버렸으니까. 집과 술집만을 오가며 외부와의 연락은 전부 끊어버렸으니까.
하지만 혹시 상일 경위님이 일찍 회복한 거라면, 지금이라도 자신이 도울 무언가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좌절하기엔 일렀던 걸지도 모른다.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으로 도로 뛰어나갔다. 머뭇거리다가 또 기회를 놓치느니 상일 경위님 앞에 술냄새 풀풀 풍기며 나타나는 편이 나았다.


“상일 선배가 아니어서 죄송합니다.”
양반이 대뜸 그렇게 말할 정도로 자신의 표정이 노골적이었던 모양이었다.
평소였다면 사과의 말이라도 하며 기색을 수습했을 것이다. 아니, 양반도 엄연한 동료고 어쨌든 한 명이라도 덜 다쳤으면 좋은 일이라고 처음부터 마음 넓게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입 꾹 다물고 걷기만 했다. 배준혁도 더 아무런 말도 없이 곁에서 나란히 걸었다.
딱히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경찰병원에서 최대한 멀어지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낯선 풍경이 나타나도 신경쓰지 않았다. 길은 이미 한참 전에 잃어버렸다.
“팀장님께서는 뭐라시던가요?”
“몰라.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양반과 대화하는 건 언제나 에너지가 많이 들었다. 좀 친해졌나 싶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오늘 처음 만난 사이처럼 선을 그었다. 동갑이고 하니 재호 형사와 하듯이 말도 놓고 허물없이 지내고 싶은데 늘 딱딱하게 존대를 하니 자신도 존대를 써야 했다.
이제는 더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았다. 이야기할 맛 안 난다고 준혁 형사 쪽에서 화를 내더라도 알 바 아니었다.
“미정 형사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역시 징계받았습니까?”
“응. 일단 근신.”
퇴원한 사람이 재호 형사였다면 이보다는 나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대화는 이어졌을 테니까.
“저는 이만 집에 가보려고 합니다. 미정 형사는 어쩔 겁니까?”
“글쎄.”
딱히 대답을 기다린 것은 아닌지 배준혁은 버스 정류장을 찾기 시작했다. 그 등에 대고 반쯤 충동적으로 물었다.
“양반은 이제 어쩔 거야?”
“글쎄요. 일단 팀장님께 연락해서......”
“뭐하러?”
툭 쏘아붙인 말에 배준혁의 등이 움찔 떨렸다.
“팀장님도 근신이야. 일단 근신시켜놓고 꼼짝 못하게 만든 다음 그 사건 전부 우리 책임으로 몰아가고 있어. 협상 같은 거 할 생각도 않고 경위님 들어가니까 대뜸 총질한 국장님이 아니라, 팀장님과 경위님이 잘못해서 아연이가 죽었다고!”
“저도 그건 압니다. 그러니까 더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뭐라도 해야......”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남았는데? 아니, 뭔가 할 이유가 남아있긴 해?”
배준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오미정도 고개를 숙였다.
지금, 그 지옥에 상일 경위님과 함께 뛰어들 수 있었던 네가 부럽다고 말하면 양반은 뭐라고 말할지 궁금해졌다.
기적적으로 일찍 퇴원했다고 해봤자 그도 반반한 얼굴에서 멍도 다 빠지지 않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양반답게 그 안에서 겪은 위험과 밖에서 오미정이 겪은 절망과 모멸감을 기계적으로 측정하려 들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다 소용없는 이야기였다.
“박근태가.....”
배준혁의 목소리는 속삭이듯 작았으나 두 사람을 에워싸고 있던 침묵보다는 컸다. 오미정이 고개를 들자 그가 당황했다.
“응? 뭐라고?”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왜? 이제와서 국장님을 막 불렀다고 뭐라고 할 것 같아?”
침묵에 암울하게 눌려만 있느니 박근태 욕이 나을 것 같아 오미정이 물고늘어졌다.
“이제와서 그 인간을 국장님이라고 봐줘야 해? 설설 기어야 해? 그 인두겁 속에 뭐가 들었는지 몰라도 그 새끼가.....”
한참 노골적으로 쌍욕을 퍼부었지만 속은 풀리지 않았다.
배준혁도 암울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다시 들었다.
“역시 전 팀장님께 가봐야겠습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야겠습니다. 듣지 못한 소식이 너무 많아요.”
하여간 양반은 양반이었다. 혼자 알아서 잘 다녀오라고 할까도 했지만, 반쯤은 충동적으로 따라나섰다.
무력감과 절망감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러고 가서 뭔가 더 나빠지지 않을 일이 남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준혁 형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가 옳든 그르든, 팀장님과 이야기하는 자리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준혁 형사가 하도 끈질기게 물어댄 통에 오미정도 속으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질극 후 상황이 어떻게 나빠졌는지 아는 바가 너무 적었다. 어쩌면 알아야 할 무언가가 남아있을지도 몰랐다.
양반이 운좋게 일찍 퇴원할 수 있었다면 상일 경위님도 그러지 말란 법 없었다.
그래도 다시 만난 동료 덕에 약간이나마 기운을 되찾았고 그 덕에 팀장님과 현실을 다시 마주할 용기도 얻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좀더 나중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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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석은 어질어질한 머리를 꽉 누르고 눈을 떴다.
주위에 인기척은 없었다. 영락없이 납치당했다고 생각했는데, 당장 손발이 묶여있지도 않고 주위에 감시하는 사람도 없었다.
살짝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폐허였다. 한때는 공공기관의 휴게실 아니었을까 싶게 긴 소파도 있고 테이블도 있었다. 서서 쓸 수 있는 금속제 긴 스탠드 재떨이에 자판기까지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먼지에 뒤덮여 엉망진창이었다. 소파는 다 낡고 가라앉아 있고 테이블 위의 유리는 온통 깨져 있었다. 재떨이는 바닥에 뒹굴며 오래된 모래와 담뱃재를 뱉어놓았다.
창문으로 흘러드는 저녁 햇살 덕에 이 모든 것을 파악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그 창문은 쇠창살로 단단히 막혀 있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야?’
일어나서 창 밖이라도 내다보려고 움직이는 순간 어디선가 핸드폰 벨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깜짝 놀라 소리의 진원을 찾아보았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쓰레기들 틈에 PDA가 하나 있었다. 벨소리는 거기서 나고 있었다.
주변의 다른 잡동사니들에 비하면 깨끗하고 낡은 느낌도 없었다. 그럼에도 버려진 듯 을씨년스런 느낌은 똑같이 풍겼다.
그런 생각을 하느라 머뭇거리는 동안에도 벨소리는 쉬지 않고 울렸다. 권현석은 홀린 듯한 기분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주변 파악에 오래 걸리시는군요. 벨소리는 세 번 울리기 전에 받는 게 예절 아니었습니까?
“누구냐.”
변조되었지만 젊은 남자 목소리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기분나쁜 조롱조로 PDA너머의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지은 죄를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죄?”
권현석이 흠칫 놀랐다.
-여기는 죄인들이 각자의 죄를 깨닫고, 인정하고 그 대가를 치르는 장소. 당신들의 죄를 죽음으로 속죄하는 장소.
“무슨 소리야?”
-그럼 나를 즐겁게 해 보시죠.
“이봐, 대체 무슨 꿍꿍이야? 원하는 게 뭐냐고!”
-마지막으로 PDA에 관련한 규칙을 전달하죠. 이것은 제가 만든 죽음의 밀실을 빠져나가는 동안 유용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계속 갖고 다니면서 저와의 연락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 말에 권현석은 이 기계가 말한 대로의 역할뿐이 아님을 확신했다.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장 모서리에 새로 설치된 CCTV가 보였다.
여기서 CCTV의 사각을 찾아봐야 헛일일 거란 감이 왔다. 저 CCTV처럼 PDA도 자신을 감시하는 용도였다. 아마 도청장치나 발신장치가 숨어있을 터였다.
-PDA를 버리거나, 부수거나, 그 외 어떤 식으로든 제 지시를 벗어나 잔꾀를 부리려다 발각되면 이 건물 전체가 날아갈 겁니다.
기가 막혀 대꾸하지 못하는 사이 통화가 끝났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야?’
황당함에 꼼짝도 못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덜커덩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자판기에서 난 소리였다. 자판기가 저 혼자 변신이라도 할 기세로 덜커덩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권현석은 스탠드 재떨이를 집어들고 천천히 그리로 다가갔다.
자판기 앞판 부분이 약간 벌어졌다. 그리로 누군가 튀어나오려는 걸 보고, 재떨이를 틈에 밀어넣어 지렛대 삼아 활짝 열었다.
“왓!”
안에서 정은창이 굴러나왔다. 굴러나오며 눈앞의 상대를 공격하려다가 감싸려다가 자신이 똑바로 서지 않으면 어쨌든 상대를 깔아뭉개게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깔아뭉갠 뒤였다.
지저분한 시멘트 바닥에 정은창을 받아내며 구른 권현석은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으....응.”
대답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는 권현석을 부축해 소파에 앉히고 정은창도 잠시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시간을 가졌다. 곁에서 권현석이 PDA로 들은 이야기도 설명해 주었다.
“또 선진화파 잔당인가 했는데 좀 이상하네요.”
“내 생각도 그래.”
최근 일어난 일들 덕에 두 사람도 혜연이도 충분히 조심하고 있었다. 일단 혜연을 친척집으로 피하게 하고 두 사람은 경찰청에서 살다시피 했다. 어차피 야근할 때와 별 차이도 없다며 헤헤 웃는 경감님이 안쓰러워 저녁밥 정도 나가서 맛있는 거 먹자고 데리고 나갔었는데......
“죄송해요. 그냥 나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저 때문에.....”
“응? 무슨 소리야. 자판기 안에서 살 작정이었어?”
딱 정은창 한 명 구겨 넣을 수 있을 정도로만 내부 기계를 들어낸 자판기를 권현석이 다시 살펴보았다. 대놓고 위험한 흉기나 함정이 숨겨져 있지는 않았지만 사람 하나를 다치지 않게 가둬야 할 때 고려해야 할 것들도 전혀 고려한 흔적이 없었다. 일찍 정신차리고 안에서 열지 않았다면 자칫 질식사할 수도 있었다.
타이밍이 나빠 자기가 빈대떡이 되긴 했지만 역시 사람이라고 알았을 때 바로 열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보다 왜 사람을 이런 데다 가두고......’
자판기 관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훑어보다가 작은 열쇠 하나를 발견했다. 납작하고 작은 평범한 열쇠였다.
“자판기 열쇠는 아닌 것 같고, 이게 뭘까?”
역시 주위를 살펴보고 있던 정은창이 그걸 보고 다가왔다.
“여기 좀 보세요. 이 휴게실 문이 자물쇠로 잠겨있거든요.”
보통의 방문처럼 생긴 문은 이 방의 다른 곳들처럼 낡아있었다. 문고리만이 최근에 새로 단 듯 튼튼한 새것이고 열쇠구멍이 방 안쪽으로 나 있었다.
“왜 이런 짓을 해놓은 거야?”
열쇠는 부드럽게 들어가 문을 열었다. 그 너머로 나타난 것은 긴 복도였다.
두 사람이 나온 휴게실은 긴 건물의 한쪽 끝에 위치해 있었다. 이제 그 안과 똑같은 폐허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비상구 표시등도 오래 전에 낡아 부서진 듯 어두웠다.
창문은 복도 끝에 하나 있지만 역시 창살이 가로막고 있어 그리로 탈출하는 건 무리였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내다보니 밖은 역시 버려진 건물 근처다운 지저분한 풀숲이었다. 그나마도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 수 없으니 넓게 관찰할 수가 없었다.
“범인은 우리가 여기서 헤매는 꼴을 지켜보며 즐기려는 모양이야.”
권현석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까 한 말을 보면 우리 말고도 여기 납치된 사람들이 더 있는 거고.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다른 사람들을 찾아보자.”
“예.”
믿음직하게 대답하고 앞장서는 정은창의 뒷모습을 보며 권현석은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았다.
말과는 달리 약간은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아직은 범인도 듣는 데서 말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입을 다물었을 뿐.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
정은창은 그에게 은인이라고 했다. 경감님마저 잘못되지 않아 다행이라고, 경감님이 무사히 살아남은 덕에 일이 이만큼이나마 바로잡힌 거라고.
그러나 권현석을 내리누르고 있는 자괴감을 그 정도 말로 덜어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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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도시 6부에서 우연히 생겨난 몇 가지 변수 때문에 약간 내용이 다르게 진행된 AU입니다.
총알과 폭발의 파편 몇이 우연히 배준혁의 옆으로 비껴간 것 외에 어떤 우연이 더 일어났는지, 그로 인해 무엇이 더 바뀌었는지는 앞으로 차차 나옵니다.



세계의 중심 60 ㅣ- 회색도시&검은방

법학관으로 가는 서재호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알고 있어도 박근태 교수는 무서웠다. 낮선 것도 한몫 했다.
‘고문 선생님이 있으면 부탁할 수 있을 텐데.’
서재호가 한숨을 쉬었다. 사회학부의 교수님 하나가 명목상 고문으로 있긴 했다. 그러나 그 교수님은 신문을 스캔들이나 퍼트리는 것이고 싸구려 도색서적보다 해롭다고 생각해 싫어했고 재호가 기사의 수준을 높이고 정보를 늘리려 시도하는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해 거의 도움을 주지 않았다.
지금은 도서관에 있으면 간식을 사주는 권현석 교수님이나 교내외 사건사고를 취재할 때 자주 마주치고 가끔 기사 가이드라인을 정해주는 하무열 교수님이 더 벽신문부 고문같이 느껴지곤 했다.
누가 서재호의 어깨를 툭 쳤다.
“어딜 그렇게 달팽이 기어가듯 가는 거지, 뭐 혼날 짓이라도 저질렀나?”
“히에엑!”
서재호가 와당탕 넘어졌다. 하무열이 자기 손을 쳐다보았다.
“그냥 살짝 건드렸는데.”
“놀라서 그럽니다. 아고고.....”
그가 허리를 두드리며 일어났다.
“생각에 잠겨 있는데 뒤에서 건드리면 놀라잖아요, 보통.”
“그렇지만 보통은 놀랐다고 대자로 엎어지지는 않지... 그래 누군지 안 보고 건드려서 미안하다.”
사과가 부실하다고 속으로 투덜대가 서재호가 하무열을 보았다.
“저, 교수님.”
“부탁이 있는데요... 제가 아니라 벽신문부 일이에요. 교수님도 흥미 있으실 거에요.”
“뭔데 그래?”
하무열이 뚱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서재호가 설명했다. 설명하며 가방에서 신문을 꺼내다 떨어트리고 주우려다 하무열의 다리에 머리를 박아가며 설명했다. 주요 판례로 남을 중요한 판결이라고 취재해두면 학교에 사료로 남기기도 부끄럽지 않을 거라고 역설하는 서재호를 보며 하무열은 속으로 주먹을 쥐었다.
‘바로 이거다!’


“법학과 학생 전부 다요?”
미정이 소리쳤다.
“쉿, 아직 확정 아니니까 너무 크게 말하진 마라.”
하무열이 입술에 손가락을 세웠다.
“그래도 가능성 높으니까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것 아닙니까?”
준혁이 묻는다기보단 추궁했다.
“그래. 박근태 교수가 적극적이고 학교 재정도 넉넉하니까 정말 법학부 전원이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다른 학부의 지원자까지도.”
이들에게 중요한 건 그 부분이었다. 적어도 이 주는 학교를 떠나있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 따라가려면 빠지는 수업에 대해 어떻게든 해야하니까.
“뭐 너희까지 전부 갈 필요는 없겠지. 하태성과 류태현이 갈 테니까 그들에게 취재 요령만 미리 가르쳐도 좋고.”
하무열이 말했다.
“류태현씨가 왜.... 아, 허강민씨 때문이군요.”
배준혁이 스스로 묻고 답했다.
“그래. 권현석 교수님이 아무리 과제로 묻어버리려 해도 그놈은 기어코 갈 거다. 그러니 너희까지 수업을 뺄 필요는 없겠지.”
“그러네요.”
서재호가 안도했다.
“우리가 뭘 미리 준비할 필요는 없겠어요.”
그랬다. 그러니 아직 학사일정 변경에 관한 회의도 거치도 않은 사안을 굳이 벽신문부에 와서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왜 이랬을까 하무열은 자문했다.
불안해서.
처음에 법원 견학팀을 수도에 파견하자고 제안하러 갔을 때 하무열이 구상한 건 자원한 소수의 학생들을 자기가 인솔해 수도로 가는 거였다. 하는 김이 허강민도 자원시켜 김재하와 멀찍이 떼놓고.
그런데 처음에는 시큰둥하니 생각 좀 해봐야겠다던 박근태가 무슨 생각을 얼마나 했는지 다음날이 되어선 아예 법학과 학생들을 전부 끌고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나왔다.
법리적으로 의미 깊은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높은 재판이라고 해도 저렇게 떼로 몰려가서 보고 싶은 건가 법학자란 다 저런가, 법 공부는 해도 어디까지나 실무자인 하무열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좋은 결과였다. 모두 함께 가면 하무열이 슬쩍 빠져나가 옛 동료들을 만나고 와도 눈에 덜 띌 거고 그나 허강민이 수도에 가려고 일부러 일을 벌였다는 사실도 쉽게 묻힐 거고 벽신문부도 보다 양질의 정보를 직접 취재할 수 있다.
‘하지만 너무 잘 풀리니까 찜찜하단 말이지.’
이것도 일종의 피해망상일지 모르지만 그가 추진하는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잘 될 리가 없었다. 어딘가 폭탄이 숨어있다 뒤통수를 칠 게 분명했다. 그런데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무열은 그게 불안했다.


학사일정 조정 회의가 끝나고 하성철은 학교에 남는 대신 집으로 돌아와 서재 문을 잠갔다.
“후우.....”
그가 안락의자에 기대고 앉아 깊이 심호흡 했다. 그러나 좀처럼 기분이 안정되지 않았다.
‘기분 탓이야.’
그가 스스로를 타일렀다.
‘별로 수도에 돌아가면 안 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저 내가 가기 싫다는 이유로 반대할 수는 없었어.’
그의 생각엔 이렇게 거창하게 굴 일이 아니긴 했다. 중요한 판결이 되긴 하겠지만 사건 자체가 너무 선정적인데다 아주 의외의 판결이 나올 여지도 적으니 그저 판결문만 바로 입수해서 분석해보는 정도로 족했다. 직접 재판장 분위기를 체험하는 게 공부가 되는 건 사실이고 사건이 사건이니 학생들도 흥미 있어 하긴 하겠지만.
‘쓸데없이 기금이 넘치지 않았으면 무산되었을 텐데.’
하성철은 공연히 장희준에게 화를 내었다. 그가 자기를 골탕 먹이기 위해 일부러 미리 학교에 돈을 주었을 리 없다는 건 알아도 사람 기분이 그렇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다녀오면 될 거야.’
하성철이 스스로를 달랬다.
‘별로 봐서 껄끄러울 사람이 법원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아는 얼굴과 마주치면 안부 정도 주고받을 수도 있겠지. 내가 무슨 불명예스러운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자신이 떳떳하니 괜찮을 거라고, 딱히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건만 자기일에는 특히 둔한 하성철은 그렇게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문을 열어주고 서준용은 그대로 나가버렸다. 허강민이 류태현의 방에 들어갔다.
“죽었냐?”
류태현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책상에 엎드려 머리를 푹 박고 그는 정신없이 자는 중이었다.
“며칠 밤을 샌 거야, 대체.”
허강민이 류태현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이러고 자면 목이랑 허리 아프지 않겠냐. 기왕 잘 거면 침대로 가지 그래?”
류태현이 옴칠 몸을 움직였다. 허강민이 그를 토닥이며 슬슬 부축해 일으켰다. 그를 안아들고 침대로 가서 바르게 눕힌 뒤 책상 위에 흩어져 있는 책을 대충 정리했다.
‘권현석 교수님 너무해. 인간도 아냐.’
류태현은 이번 수도행이 ‘재판 취재를 목적으로 한 벽신문부 부활동의 일환’이라고 포장했으나 물론 권현석은 그 변명을 믿지 않았다. 그리곤 사랑을 쫓아 학업을 버리려는 괘씸한 제자에게 수업에 갈음하여 산더미 같은 과제를 내주는 것으로 보복했다.
권현석의 의도는 가서 하라는 것이었지만 류태현은 출발 전에 하나라도 더 끝내 놓으려고 악착같이 과제를 해치웠다. 수도에 가면 허강민과 같이 있어야 하니까.
‘역시 이 녀석 하나도 평범하지 않아. 적어도 마법사 평균이 이상한 만큼은 이 놈도 이상해.’
류태현이 듣는다면 기뻐할지 슬퍼할지 알 수 없는 생각을 하며 허강민은 류태현의 머리맡에 걸터앉았다.
“으음......”
침대로 옮기는 동안에도 비몽사몽중이던 류태현이 눈을 찡그렸다.
“허강민씨....”
“그래, 나다.”
허강민이 류태현의 찌푸린 미간을 문질렀다. 류태현이 눈을 감은 채 손으로 더듬어 그의 손을 찾아 잡았다.
“좋아해요......”
이쯤 되면 집착증 같은 걸 의심해 봐야 하지 않을까 허강민은 고민했다. 정 떨어질 짓이라면 수십번 정 떨어지고도 남을 만큼 한 것 같은데 여전히 심지어 제정신 아닐 때에도 이러고 있었다. 생각하면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기왕 집착할 거라면 자기에게 집착하라고 하고 싶은 마음조차 있었다.
‘나도 끝장이구나.’
그래서 싫은 건 아니었다. 놀랍겠다.
“네가 날 버려놨어.”
허강민이 나직이 한탄했다.
“책임져, 임마.”
“네? 뭘요?”
이제야 깼는지 류태현이 눈을 깜빡깜빡했다.
“아, 허강민씨. 왔어요?”
그가 눈을 비비고 상체를 일으켰다.
“과제하다 깜빡 졸았네요.”
침대로 옮기도록 못 깼으면서 뭐가 깜빡 존 거냐고 허강민은 생각했지만 잔소리가 될 것 같아 말하지는 않았다.
“너무 무리할 필요 없어.”
허강민이 말했다.
“명색 수도고 법원 근처야. 내가 함부로 돌아다니지도 않을 거고. 그러니 꼭 너까지 오지 않아도.”
“제가 가고 싶어서 가는 거에요.”
류태현이 허강민의 손을 꼭 쥐었다.
“허강민씨가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제가 가고 싶어서 가는 거라고요. 그야 걱정할 게 뭐 있겠어요. 치안 좋은 장소에, 대인원에, 행성지 뚜렷하고 허강민씨도 조심할 거고 하무열 교수님도 있고...... 그래도 가고 싶어요.”
“그래.”
허강민이 그 손을 마주잡았다.
얼굴이 가까웠다. 허강민이 망설이다 류태현의 볼에 슬쩍 입술을 눌렀다. 류태현이 얼굴을 그 쪽으로 더 돌리려고 하는 건 고개를 숙여 차단했다.
“과제 계속 할 거냐? 기왕 존 거 좀 자서 체력을 회복하는 것도 좋겠다만.”
“어....”
고민하던 류태현이 방문을 보았다.
“서준용은 잠시 나갔어.”
잠시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허강민은 그렇게 말했다. 안 그래도 침대에 가까이 앉아 마주보고 자라고 권유하고 있는데 시간까지 넉넉하다고 암시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기가 떳떳치 못하다건 심지어 류태현을 배신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자기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한 피해자이고 모든 건 백선교와 손잡고 사람을 협박하려 든 김재하의 죄였다.
그래도 김재하의 배에 칼을 박아 넣고 그놈이 피를 토하며 죽는 꼴을 보기 전에는 이 쓸데없는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네.”
류태현이 하품했다.
“그럼 좀 잘게요. 허강민씨도.....”
류태현의 고개가 푹 꺾였다. 허강민이 그의 등을 받쳐 침대에 잘 눕혔다.
“그렇게 많이 피곤했냐.”
허강민이 류태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류태현이 사실을 알면 그를 비난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점은 완전히 믿을 수 있었다. 백선교 관련한 과거사가 밝혀졌을 때도 류태현은 흔들리지 않았다. 명백히 허강민의 잘못인 일에도 그랬는데 이번엔 심지어 그는 죄가 없었다.
그러니 이건 자신이 아니라 류태현을 보호하기 위해 비밀로 하는 거라고 허강민이 생각했다. 아전인수 같지만 진심이었다.


법원 견학 인원은 법 전공 및 부전공 학생 중 자원자에 교수 전원과 류태현으로 정해졌다. 자원자라고 해도 거의 대부분이었다. 수업도 없고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법리적으로나 말초적으로나 흥미로운 사건이기 때문에 빠지는 학생은 적었다. 류태현의 경우엔 그와 허강민의 관계를 온 학교가 다 아는데다 그가 붙어있으면 교수들이 허강민을 덜 살펴도 된다는 장점도 있어 권현석이 허락하자 별 반대 없이 합류할 수 있었다.
류태현은 가는 내내 마차에서 잤다. 흔들리는 마차 벽에 머리를 찧거나 엉덩이 배기지 않도록 충격 흡수 마법을 자기에게 걸고. 충격 흡수는 쌍방향인 걸 이용해 허강민은 류태현에게 기대서 졸았고 그래서 같은 마차에 탄 다른 학생들은 눈꼴이 시어서 여행길이 배로 불편했다.
그렇게 남들에게 폐를 끼쳐가며 같이 와도 물론 허강민과 류태현 둘만 방을 쓸 수는 없었다. 4인실에는 허강민 류태현 하태성 그리고 제비뽑기에서 패배한 불쌍한 법대생 한 명이 들어갔다. 배준혁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는 자기도 애인과 같이 있고 싶다며 과감히 탈주를 했다.
“학교 어디에 마시면 사랑에 눈 먼 바보가 되는 샘이라도 솟나...”
애들을 다 방에 몰아넣고 하무열이 중얼거리며 여관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하성철과 마주쳤다.
“많이 피곤해보이시는군요. 오늘은 일찍 쉬셔야겠습니다.”
지금부터 쉬어도 일찍이라고 하긴 그런 시각이지만 하무열은 말이라도 그렇게 했다.
“네, 오랜 마차 여행은 역시 지치는군요.”
하성철이 대답했다.
“그런데 어디 나가시는 길입니까?”
“내내 좁은 곳에 앉아있었으니 다리도 움직일 겸 주변 지리나 치안 상태를 한 번 둘러보려고요. 별 일 없겠지만 괜히 불안해서.”
하무열이 멋적게 웃었다.
“직업병.... ‘전’직업병이니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편히 쉬십시오.”
하무열이 고개를 꾸벅 해보이고 여관을 나갔다.
시간은 늦었어도 수사국이 닫을 정도는 아직 아니었다. 누굴 먼저 찾아가는 게 효율적일까 고심하며 하무열은 수도 거리로 나섰다.



[연의 AU] 등용 2 (완)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그날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러나 유기는 다음날 유비가 머무는 관역에 찾아왔다.
“와룡 선생의 이름은 이 기도 익히 들었습니다.”
이번에도 유비에게 이렇다 할 방도를 얻지 못하자 유기는 작정하고 제갈량에게 매달렸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온 것이 분명했다.
애절한 하소연을 흘려들으며 제갈량은 자신의 부인 황씨를 생각했다.
그 혼인은 꽤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자신이 부인 보는 눈이 없다며 조롱하는 노래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채모와 채부인의 자매였다.
즉 유기는 채부인의 조카사위에게 채부인으로부터 살려달라고 조르는 중이었다.
‘그걸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것인가, 유황숙을 믿으니 그의 책사도 믿을 수 있다는 것인가.’
후자라면 유비의 사람 끄는 힘이 대체 어디까지인가 무서워졌다.
지금도, 똑같이 답답한 소리를 하는데 유기와 유비가 다르게 보였다. 유비는 방도가 없는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유기를 생각해주는 것으로 보였다. 유기가 만약 유비와 같은 처지에서 똑같이 도리에 맞는 소리만 반복한다면 그냥 답답한 호인으로 보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당장 목숨을 구하고 집안싸움을 가라앉힐 방도가 눈앞에 있는데도 보지 못하는 것은 똑같건만.
자신에겐 훤히 보이는 길이 두 사람에겐 안 보인다는 점이 신기해서 제갈량은 저도모르게 웃고 말았다. 실수였다.
“선생님.”
유기의 목소리가 한층 더 절박해졌다.
“역시 와룡선생께는 방도가 있으시지요? 어찌하여 웃고만 계십니까?”
제갈량은 얼른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자신에겐 지금 나설 이유가 없었다. 유기는 겁에 질려 판단력이 흐려졌을 뿐, 채부인도 유기를 직접 죽일 수는 없었다. 집안을 어지럽히는 독부라는 평을 자초해 형주 안팎의 적들이 들고일어날 명분을 줄 테니까.
만약 자신이 틀려서 기어이 채부인이 유기를 죽인다면, 그렇다 해도 자신은 유비의 책사로서 얻은 명분을 활용할 뿐이었다. 유비도 그런 사태에 직면해서까지 유경승의 기업을 침노할 수 없다고 고집하지는 않을 테니까.
“선생, 진정 해줄 말씀이 없으십니까?”
유비는 정말로 유기가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자신의 책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한 마디 거들었다. 위태로운 처지인 당사자는 기인데 어째서인지 주군이 더 불쌍해 보였다.
‘주군이 책사의 동정심을 자극해서 무엇에 쓴다고.’
제갈량은 마음 독하게 먹기로 했다. 주군이 주군답게 계책을 내라고 명령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손을 씻고 오겠습니다.”
두 유씨가 눈빛으로 붙잡는 것을 뿌리치고 겨우 그 자리를 물러나왔다.
“선생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바깥을 경계하고 온 조운이 제갈량에게 다가왔다.
“별일 아닙니다.”
관우, 장비와 달리 조운은 일찍부터 제갈량에게 겸허하게 행동했다. 제갈량도 그를 보자 얼굴이 풀어졌다.
손건, 간옹, 미축은 차라리 괜찮았다. 문관으로서 굴러온 돌에게 내준 자리가 더 크게 느껴질 줄 알았는데, 제갈량의 일솜씨를 몇 번 보더니 단 며칠 만에 자신들의 윗사람으로 인정했다. 그 며칠 동안이라고 해서 딱히 무례히 굴거나 괴롭힌 것도 아니었다.
역시 업무보다는 유비와의 개인적인 친밀도와 그로 인해 정해진 서열이 더 문제였다. 제갈량이 오기 전까지 유비의 문사로 일한 건 간옹, 손건, 미축이지만 침식을 같이하며 유대를 깊이 한 의형제들은 관우와 장비였다.
조운까지 그들처럼 불만을 품고 시기했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형주의 앞날을 근심하고 있을 뿐입니다.”
제갈량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조 장군이 벌써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형주의 앞날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는 저도 조금 압니다.”
조운은 얼굴을 펴지 못했다.
“언제 창을 들고 나서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니 걱정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그래도 그 때가 지금 당장은 아닙니다.”
제갈량은 이런 식의 사교적인 대화에 서툴렀다. 원직이나 사원과 천하 정세를 논하고 상대의 말에서 허점을 찾아 공격하는 건 그렇게 쉬운데, 조운은 말로 골려줄 상대도 아니고 논파할 상대도 아니었다. 무난한 한담거리로는 떠오르는 문장이 없었다.
다행히 조운은 굳이 제갈량의 말주변을 시험하려 들지 않았다. 그 본인부터가 과묵한 사람인 덕이었다.
어색한 순간이긴 해도 관우나 장비와 대화할 때보다는 훨씬 편했다.


다음날은 원래 정해진 일정이 없었다. 오랜만에 형주 시내까지 왔으니 동생과 부인에게 보낼 선물이라도 사러 나가보기로 했다.
외출하고 오겠다고 주군에게 말해둘 생각으로 유비에게 찾아갔다. 유비는 때마침 서신 같은 것을 읽고 있다가 제갈량을 보고 와그작 구겼다.
“무엇인데 그러십니까?”
제갈량이 의아해져서 물었다.
“별 것 아닌 투서입니다.”
유비가 고개를 젓고 구긴 종이를 등잔불에 갖다댔다.
“채씨 가문을 비난하는 내용인데, 진정 형주와 한실의 앞날을 근심한다고 자화자찬하는 사람이 쓴 것치고는 그 문장과 내용이 저열하기 그지없습니다. 선생의 눈까지 더럽힐 필요는 없습니다.”
“익명으로 쓴 괴문서입니까?”
제갈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종이까지 들여 그런 것을 쓰다니 누군지 지독하게 서툴고 한가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아마도 내가 형주를 넘본다고 모략하고 싶은 사람일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고작 이런 괴문서에 도발될 거라 생각하는지.”
유비도 기가 차다는 얼굴이었다.
“이 나이 되도록 이룬 것 하나 없어도 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제갈량이 끄덕였다.
말하는 것과 달리 유비의 낯빛은 우울했다. 스스로 뱉은 말에 상처받은 것처럼 보였다.
이룬 것 없이 객장 신세를 못 면한 것은 사실이니.
‘오늘은 형주에 욕심 부려보라고 권할 수 없겠군.’
객장 신세가 그렇게 싫으면 나서서 형주를 취해보라고 하고 싶지만 하필 그런 저열한 투서가 주군을 엉뚱한 방향으로 도발했다. 투서가 적당히 주군의 뇌리에서 사라진 뒤에나 다시 말을 꺼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참.”
유비가 표정을 고치고 이야기를 돌렸다.
“어제 유기 공자가 찾아온 답례를 가야겠는데 내가 체하여 가지를 못하겠습니다. 선생이 대신 다녀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겠습니다.”
유기를 또 보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주군의 심부름이었다. 제갈량은 유비가 미리 준비해둔 답례의 예물을 챙겨 관역을 나섰다.


유기의 집에 도착한 제갈량은 역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유기 공자에겐 그보다 더 부담스러운 눈빛도 받았다.
“계모가 저를 죽이려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저는 손님으로 잠시 와 있을 뿐인데 어찌 집안일에 간섭하겠습니까?”
일부러 더 매몰차게 대답했다. 계모와 외가로부터 살해 위협까지 받는다면서, 시종들도 다 듣는 자리에서 이렇게 매달려 봐야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유기도 오늘은 작정을 하고 놓아주지 않았다. 음식을 내오고 차를 내오고, 멋대로 뛰쳐나가면 무례가 될 것을 이용해 끈질기게 시간을 끌었다.
‘더는 안 되겠군.’
남복을 하고 다니는 데 익숙해도 타인의 집에 혼자 오래 있으면 불안했다. 종자는 데려왔지만 그거 믿고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공자께서 지나치게 주제넘은 일을 청하고 계십니다. 이 량이 어찌 남의 집안일에 간섭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말이 누설되면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재차 잘라 말하고 벌떡 일어났다. 유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되면 그뿐이지 어찌 자꾸 가려고 하십니까?”
그리고 목소리를 살짝 낮추어 덧붙였다.
“제가 오래된 책을 하나 구했는데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오래된 책이라는 말에 발걸음이 멎었다.
“무슨 책입니까?”
“죽간이 상하여 제목과 지은이는 알 수 없었습니다. 내용을 상고하여 보면 알 것 같은데 특별히 선생님께 가장 먼저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듣다 보니 어떤 책인지 확인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억지로 붙들고 귀찮게 군 대신이라고 하면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제갈량은 유기를 따라 작은 누각으로 올라갔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높은 다락에서 유기가 말한 책을 내밀었다.
들은 대로 심하게 낡아 있어 조심스럽게 펼쳤다. 일단 앞부분을 읽어보니 병서였다.
“편히 앉아 천천히 보십시오.”
유기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벌써 열심히 읽고 있었다. 낯선 책을 보면 언제나 재빠르게 읽어 그 내용을 파악하고 외워두는 버릇이 있었다.
일단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고, 이미 읽어본 다른 책들의 내용과 견주어 저자가 누구일지 몇 가지 가설을 세웠다. 확인하려면 가서 다른 자료들과 대조하고 원직과도 이야기를 해봐야 했다.
정신차려보니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죽간을 다시 말며 유기에게 사과하려 했다.
그런데 유기는 그의 앞에 엎드려 있었다. 기색이 심상치 않았다.
“계모의 핍박으로 기는 하루하루 목숨도 기약할 수 없는데, 선생께서는 어찌 한 말씀도 해주지 않으십니까?”
제갈량은 벌떡 일어나 다락을 내려가려 했다. 그러나 사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이런 얕은 수에 속다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와 동시에 뒤에서 유기가 통곡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위로 하늘에 닿지 않고 아래로 땅에도 닿지 않으니, 선생의 말씀은 그대로 제 귀에 들어올 뿐입니다. 부디 이 목숨을 가엾게 여겨 주십시오.”
‘그는 여전히 모른다. 나의 비밀을 알고 이러는 것이 아니다.’
통곡소리를 들으며 제갈량은 안정을 되찾았다.
“저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잠시나마 겁먹었던 탓에 더욱 차디찬 목소리가 나왔다.
“집안일에 객이 간섭하는 법은 없습니다.”
“선생께서 끝내 사람의 생명을 돌아보시지 않는다면.”
유기가 돌연 품에서 비수를 꺼내들었다.
“저는 선생 앞에서 이 하찮은 목숨을 끊겠습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고 입증하려는 듯 그가 정말 비수를 자기 목에 겨누었다. 제갈량은 황급히 그에게 달려들어 팔을 붙들었다.
“공자께서는 정녕 신생과 중이의 일을 몰라서 이러십니까?”
유기가 멈칫 했다. 비수 든 손에서 힘이 풀렸다.
“신생은 위태로운 곳에 그대로 머물렀기 때문에 끝내 화를 당했고 중이는 그곳을 피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하면, 어디로 가면 됩니까?”
“지금 황조가 죽어 강하가 비었지 않습니까? 그곳을 맡겠다고 청하여 형주를 떠나십시오. 강하 수비를 명분으로 병사들을 모으면 공자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해 훗날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유기는 꿈에서 깬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다가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감사의 인사를 쏟기 시작했다.
거기에 겸양의 말로 답하면서도 제갈량의 얼굴은 차디차기만 했다.


부인의 몫으로 튼튼하고 잘 만들어진 베를, 균의 몫으로 서책 한 권을 사고 관역으로 돌아왔다. 유비가 기다리고 있었던 듯 바로 나와 맞이했다.
“좀 늦으셨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가 제갈량의 험악한 표정을 마주하고 유비가 멈칫 했다.
“무슨 일 있었냐고 물으셨습니까?”
따지면서 제갈량은 손짓으로 종들부터 물렸다. 주군과 책사가 언쟁하는 모습을 아랫것들에게 보일 순 없었다.
“주군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급체는 이제 다 나으셨습니까?”
“아, 그건 다 나았......”
제갈량이 정말로 화가 났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듯 유비도 얼굴을 굳혔다.
“주군께서는 지금 유기 공자를 걱정하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조조가 쳐들어왔을 때 공자가 도움이 될 것 같습니까? 저를 속여서까지 그를 도울 정성으로 어찌 주군의 앞길은 도모하지 못하십니까?”
“그 무슨 말이오, 내가 선생을 속이다니.”
유비가 황망한 표정을 하고 제갈량에게 다가섰다. 그러자 제갈량이 그를 피하듯 한 걸음 물러났다.
유비는 입을 벌리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내가 선생을 두렵게 했습니까?”
유비의 충격받은 태도를 훑어보다가 제갈량이 눈썹을 한층 더 찌푸렸다.
“하면 유기 공자에게 저를 누각으로 꾀라고 부추기지 않으셨단 말입니까?”
유비가 두 손을 마구 흔들었다.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럴 틈도 없었지 않소이까?”
“오늘 아침에 태운 괴문서는 정말로 괴문서였습니까?”
유비가 다시 한 번 당황하는 것을 보고 제갈량은 다시 책망할 말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 유비가 빨랐다.
“나는 선생을 속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 글월을 선생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어째서요?”
유비는 머뭇거리다가 겨우 답했다.
“채씨 가문을 공격하면서, 특히 채부인을 가리켜 여자가 땅을 다스리려 하니 반드시 집안과 땅을 한데 아울러 망하게 할 것이라고 욕한 글이었습니다.”
제갈량이 입을 다물었다.
“선생의 지혜이니 이미 내가 여인을 귀히 본 적 없는 사내임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런 내가 지금 이런 궁지에 몰려 선생을 만났기에 더욱 선생에게 정성을 다하려는 것입니다.”
유비가 고개를 숙이고 한 걸음 물러났다. 제갈량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제가 여인을 아끼는 주군에게 출사하려 했다면 지금도 융중에서 밭 갈고 있을 것입니다. 아마 그대로 늙어 죽게 되겠지요.”
목소리 역시 여전히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주군께서 하신 일이 아니라면 됐습니다. 오해로 주군께 무례히 행동해 송구합니다.”
“유기 공자의 저택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주군이 대단히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갈량은 있었던 일을 모두 설명해 주었다.
“사과의 뜻이라며 이 책은 제게 주더군요.”
제갈량이 그 낡은 책을 유비에게 내밀었다.
“대강의 내용은 기억해 두었으니 저자와 제목을 찾는 일은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에게 맡겨두고 싶습니다. 흥미 있으시다면 주군께서 가지셔도 됩니다. 아니면 미자중이나 손공우에게 주시든가요.”
유비는 책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이제 형주와 유경승의 집안은 일시적으로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유기 공자는 진문공이 될 그릇이 아닙니다. 형주의 다음 주인은 유종을 거쳐 조조가 될 것입니다.”
제갈량이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공자가 여기 남았다가 끝내 채씨 일족에게 죽음을 당했다면, 채부인은 인륜을 어지럽혔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유경승도 그때는 충격을 받았겠지요. 그럴 때 책임을 채모와 유종에게 씌우고 유경승을 설득했다면 주군은 형주를 손에 넣으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유비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군사께서 아까워하시는 마음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역시 내 영달을 위해 유경승의 가족을 그처럼 이용하고 버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누각에서의 일은 결국 주군의 뜻에 따른 거나 다름이 없군요.”
“선생께서는 유기 공자가 가엾다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유비가 여전히 눈치를 보면서도 물었다.
“공자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임을 알고 계시면서, 유경승의 집안 문제이니 손댈 수 없다고만 생각하셨습니까?”
“유기 공자는 삼척동자가 아닙니다.”
제갈량의 태도엔 변함이 없었다.
“채부인이 들어와 유종을 편애했다 하나 유경승의 장자이니 스스로 힘을 키워 맞설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난세에 힘을 기르지 못해 헛되이 죽어간 사람은 그 말고도 이미 많습니다.”
“그래서 난세를 끝내고 싶은 것입니다.”
유비가 한탄했다.
“평화롭고 법치가 제대로 선 세상이라면, 단순히 아비의 기업을 물려받는 일 정도에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불신하고 미워하는 일도 줄어들겠지요.”
“저 역시 그래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제갈량의 목소리가 아주 약간 누그러졌다. 그러자 유비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슬며시 떠올랐다.
“별로 제 심성이 연약하여 크게 상처받은 나머지 주군을 위해 힘을 다하지 않게 될까봐 근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앞으로 한 가지만 제 말대로 따라주신다면 이번 일은 잊어버리겠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채부인을 두고 여인이기 때문에 공격한 그 괴문서, 그와 같은 말이나 글을 또 보게 되더라도 이번에 하셨듯 제 앞에서 굳이 치우고 감추지 마십시오.”
유비는 반론하고 싶은 표정을 했으나 제갈량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열지 못했다.
“주군께서는 제가 불쾌할 것을 근심하셨지만, 그런 일에 일일이 상심하기엔 비슷한 것을 이미 충분히 많이 보았습니다. 그보다는 주군께서 저를 믿지 못하고 속이시는 쪽이 훨씬 불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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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마치고 공명은 찻잔을 만지작거리고만 있는 부인을 마주보았다.
“주군은 다정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을 돌보다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장수들을 아끼다가 처자식을 내버리기도 합니다. 유기 공자에게 끝까지 마음을 써준 것도 그 다정함 때문이고, 제가 여인이라 하여 더욱 보호하려다 허튼 일을 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 같지 않습니다.”
황부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났는데 그 분노의 대상이 유기인지, 유비인지, 채부인인지, 하늘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드러내기도 어려웠다.
늘 있는 일이었다.
“한 사람이 맞습니다. 다정함이란 그런 것입니다.”
공명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의 마음은 변합니다. 오늘 사랑한 것을 내일 미워하고 내버리기란 얼마나 쉽습니까. 정은 그런 마음을 따라 움직이니 오늘 순후했던 사람이 내일 잔인해져도 놀랄 일이 아닙니다. 오늘은 정을 붙였다가 내일은 떼는 것이지요.”
“하면 유황숙에게 출사한 것을 후회하십니까?”
마른침을 삼키며 무겁게 한 질문에 공명은 곧장 고개를 저었다.
“제가 믿는 것은 제도의 힘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학대하고 내버리는 것을 나라에서 금한다면 계모의 미움을 샀다는 이유로 아들이 죽는 일은 줄어들 것입니다. 또한 부인을 함부로 버리지 못하게 하고 어미에게 불효하는 아들을 아비에게 불효할 때와 똑같이 벌한다면 자기가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의붓아들을 미워하는 일부터 줄어들 것입니다. 사람들의 심성이 고와져서가 아닙니다. 엄한 법으로 누르기 때문입니다.”
공명은 아마도 황부인을 안심시키고 싶은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주군은 그 다정함 덕분에 사람들의 마음을 모았습니다. 그분이 여러 번 패하며 그분을 따른 사람들 역시 숱하게 죽었음에도 그 피를 주군께 돌리는 사람을 찾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런 주군에 의지해 법도를 세울 것입니다.”
공명은 서가를 가득 채운 죽간을 바라보았다.
“주군 역시 놀랍게도 난세가 끝난 세상을 ‘법치가 있는 세상’이라 칭하시더군요. 그 일 이후 며칠간 죽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는데, 주군 역시 인의의 치보다는 법가적인 엄정함을 원하고 계셨습니다. 그저 공부가 부족하여 막연한 이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을 뿐입니다. 저는 그것을 구체화할 재주가 있고요.”
“마치 천하 삼분론 같군요.”
황부인의 목소리에 평정이 돌아왔다.
“유황숙의 막연한 바람에 당신의 재주를 더해 구현할 길을 제시하는 것 아닙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공명의 얼굴에도 비로소 미소가 돌아왔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는 유황숙 곁에서 제 갈 길을 찾았습니다. 한 번 정했으니 끝까지 갈 것입니다.”


[연의 AU] 등용 1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 이전 글 맞선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오리지널 설정이 있으므로 앞의 글을 먼저 읽고 이번 글을 읽어주세요.



유비가 제갈량을 데려와 내준 공관의 별채는 유비 본인의 처소에서 관우 장비 다음으로 가까운 곳이었다. 거기에 그의 변변찮은 재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의 편의를 봐주었다.
그리고 자기 처소로 돌아가는 대신, 지내기에 편한지 붙여준 시종들은 말을 잘 듣는지, 저녁식사가 입에 맞는지까지 직접 확인하겠다고 겸상까지 했다.
유황숙이 소탈하고 자기 사람들에게 각별하다는 소문은 제갈량도 이미 들었다. 관우와 장비, 조운과는 침식도 같이하는 사이라고 했다.
딱히 감동받거나 끌리지는 않았다. 도리어 그런 걸 실제로 겪으면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자신의 경우엔 그들이 할 필요 없는 걱정까지 있었다.
유비가 자신까지 그렇게 대우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있었지만, 세 번이나 찾아와 지극 정성으로 모셔오고 밥상까지 맞대고 보니 걱정거리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제갈량은 맞은편에 앉은 주군의 웃음 띤 얼굴을 바라보았다.
후덕해 보인다는 말은 이 얼굴을 묘사하는 데 쓰이기 위해 있는 것 같았다. 황실의 피를 이었다는 허울좋은 명성 외엔 아무 것도 갖지 못한 그에게 왜 사람들이 모이고 제후들도 유황숙이라면 버선발로 나와 맞이하는지 조금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부인들에게는 냉정한 사람이었다. 다른 모든 사내들과 마찬가지로.
두 번이나 찾아와 편지까지 남기고 간 걸 알면서 세 번째 찾아온 사람을 초당 밖에 세워놓은 것은 그래서였다.
인덕으로 이름을 알렸으니 체면도 중시할 것이다. 부하들이나 백성들에게도, 자신의 심기를 거스른 사람에게도 가혹하게는 하지 못한다. 덕망 높다는 이름에 금이 갈까 두려워서라도.
세 번이나 찾아가서 공경하고 모셔온 사람이라고 신야 안팎에 소문이 퍼졌다. 이제와 여인이라고 눈치챈다 해서 드러나게 태도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공명 선생.”
그 후덕한 얼굴이 다시 인자하게 웃음지었다.
“역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음식을 앞에 놓은 채 제갈량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여행길이 피곤했나봅니다. 나면서부터 몸이 약해 먼 여행을 잘 견디지 못합니다.”
“저런, 그랬습니까?”
유비는 진지하게 걱정스런 얼굴이 되었다.
“약이든 뭐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 종들에게 이르십시오. 내 그들에게 이미 단단히 일러두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평이하게 답하면서 먼저 출사한 원직을 생각했다. 그도 유황숙은 후한 사람이고 세심하다고 했었다.
그는 먼저 유황숙을 찾아가 발탁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갈량을 추천했다.
상을 물리고 나자 유황숙 역시 초조한 것처럼 보였다. 이만 자신의 처소로 돌아갈 생각은 없는지 융중에서부터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기도 하고 신야의 지금 인구나 재정상태를 설명하기도 했다.
출사한 이상 알아두어야 하는 이야기이므로 제갈량도 이만 가달라고 하는 대신 참고 들었다. 게다가 신야의 사정은 들으면 들을수록 그냥 넘길 수 없는 이야기가 계속 나왔다.
“잠시 한 말씀 묻겠습니다. 고을의 백성이 몇이나 되는지 제대로 계수하신 것 맞습니까?”
“잠시만요, 그런 문제는 아직 서신을 교환할 때에 다른 경로로 확인하셨어야죠.”
“그 고을 현령이 유황숙을 우습게 보고 있는 겁니다. 아직 답하지 않았다면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제가 서찰을 써드리겠습니다.”
“그건 그 사람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보좌할 사람이 부족해서 벌어진 일 같습니다만.”
“가볍게 볼 일이 아닙니다. 마땅히 장부 맡은 이를 감사할 사람도 두어야 합니다.”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제갈량은 비로소 서원직이 자신까지 불러들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원직은 이 총체적 난국을 혼자 감당할 수 없어 같이 할 사람을 불러들인 것이다.
‘날이 밝으면 이 전직 칼잡이를 멱살이라도 쥐고......’
정신차려보니 한밤중이었다.
아차 싶었다. 지금이라도 유황숙을 내보내야 했다.
“선생의 가르침을 받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는 속 깊은 얼굴로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이미 날이 늦었는데 선생과 발을 맞대고 누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여인을 꼬드기는 사내가 다 이렇게 인자하고 선량하기만 한 얼굴을 한다면 거기 속아넘어간다고 해서 여인을 어리석다 비난할 일이 아닐 것이다. 당장 지금 자신조차도 옷을 다 벗고 자는 것도 아닌데 괜찮지 않을까, 이대로 곱게 속여넘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가볍게 고개를 저어 그런 생각을 몰아내었다. 이런 상황이 정말 닥칠 경우 사양할 말이라면 이미 넉넉히 마련해 두었다.
“선생이 혼자 주무시고 싶은데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소만.”
유비는 시종을 부르지도 않고 손수 침상에 이불을 폈다.
“나는 운장이나 익덕이나, 다른 내 수하들 모두 선생을 날 보듯이 공경하게 하고 싶습니다. 선생을 이리 모시게 되어 내가 얼마나 마음 깊이 기뻐하고 있는지 모두에게 확실히 알려서, 오늘뿐 아니라 그 어느 때라도 누구도 선생을 업수이 여길 수 없도록 못박아 두고 싶습니다.”
제갈량은 유비의 등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내가 가장 마음 깊이 믿는 사람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이미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는 마당에 선생이 거기 들어가지 않는다는 오해는 퍼뜨리고 싶지 않습니다.”
침상을 다 매만졌다 싶자 유비는 이불을 한 채 더 꺼내 바닥에 깔았다.
“그러니 부디 안심하고 주무십시오. 이 비에게 단 한 가닥의 추한 욕심이라도 있다면 천지신명이 이 하잘것없는 몸을 살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부터 아셨습니까.”
“원직 선생에게 들었습니다.”
이불을 다 펴고도 유비는 제갈량에게 등을 돌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제갈량도 지금은 유비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여인이라 거절하거나 무도하게 굴 사람으로 보였다면 추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원직 선생 스스로도 내게 출사하지 않았을 거라 하더이다. 그러니 그 믿음과 인정에 보답하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원직이 부질없는 일을 했군요. 나를 추천하는 것은 상관없으나 나서서 알리지는 말라고 그토록 당부했거늘.”
“어찌 그러셨습니까.”
유비의 말투는 초당 앞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공손했다.
“이 비에게 출사하는 것이 그렇게나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아니면 끝까지 숨기고자 하셨던 겁니까?”
“끝까지 숨길 수 있느냐는 제게 달린 것이 아닙니다. 아예 출사하지 않고 초야에서 한평생을 보낸다 해도 언제 무슨 일이 날지 모르는 시대인데, 출사하여 유황숙과 운명을 함께 하면서도 사내인지 계집인지도 모르게 할 수 있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제갈량은 초려에서 처음 사양할 때보다도 더 딱딱한 태도였다.
“아마 원직에게도 그의 마음에 들도록 말씀하셨겠지요. 여인이라도 능력만 있으면 된다든가, 결코 무례한 행동은 없을 것이라든가. 그러나 말로는 누구나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황숙께서 미리 언질을 듣지 못하셨다 해도, 오늘 밤 아무 것도 모른 채 돌아가서 주무시려 했다고 해도 먼저 모든 것을 밝힐 작정이었습니다.”
그 말엔 유비도 놀란 것 같았다. 이쪽을 돌아보려는 듯 어깨가 움직이는 걸 보고 제갈량이 말을 이었다.
“고작 하루째이긴 하나 저는 이미 당신에게 출사한 신하입니다. 초려에 있을 때와는 상황이 달라졌는데, 그래도 상관없으십니까?”
“아니,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제갈량의 말투에서 움직이지 말라는 뜻을 읽고 가만히 선 채 유비가 답했다.
“나는 선생이 천하를 경영할 재사라는 말을 듣고 찾아갔고 들은 명성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달아 모셔왔습니다. 원직 선생에게 미리 듣고 마음의 채비를 한 뒤였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초려에 있을 때나 여기 있을 때나 선생은 이 비가 모실 스승이십니다.”
그리고 유비가 돌아서서 제갈량을 마주했다. 말릴 틈도 없이 융중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릎꿇고 다시 절을 올렸다.


황부인은 남편이 출사할 때 바로 따라서 융중을 떠나는 대신 시동생 제갈균과 함께 집을 지켰다.
처음엔 당연히 따라갈 생각이었다. 그를 혼자 보내놓고 자신이 안심할 수는 없었다.
혼인 후 처음으로 부부의 의견이 갈린 순간이었다. 제갈량은 신야가 지낼 만한 곳인지 먼저 확인해보고 두 사람을 부르겠다고 고집했다. 황부인은 정말로 지낼 만한 곳이라면 따라가서 안 될 것이 없고, 아니라면 나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뜻이니 혼자 대처하게 놔둘 수 없다고 고집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제갈량의 뜻에 따르기로 한 것은, 그가 걱정한 것이 신야 내부 사정만이 아니라 외부 사정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신야에서 제갈량이 잘 적응한다 해도, 유표와 조조가 있는 한 거기에 언제까지고 있을 순 없었다. 머지않아 풍파가 닥칠 것이고 일이 어떻게 풀리든 유비의 거점은 옮겨질 것이니, 위태로운 임시 거점에 불과한 신야에 얽매여 봐야 이삿짐을 두 번 쌀 뿐이라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그렇게 남편을 보내고, 그냥 가만히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다. 신야의 소식과 형주의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 하인들을 내보냈다. 처음부터 형주 안팎의 정보를 모으기 위해 지참금을 탕진해 만들어둔 손발들이었다.
신야에서는 새 군사가 병사들을 모집해 훈련에 전념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유황숙이 그를 우대한 나머지 관우와 장비가 시기할 정도라는 소식도 들려왔다.
형주에서는 유표의 병이 깊어져 대외적으로도 거론될 정도가 되었다. 때마침 유비를 형주로 부른 것도 후계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서라는 말이 함께 떠돌았다.
그날 들어온 정보들을 놓고 황부인은 생각에 잠겼다.
유비는 형주에 와서도 그의 인망을 널리 퍼뜨리는 데 성공했다. 못미더운 유기나 아직 어린 유종보다 차라리 그가 형주를 이어받는 편이 낫다는 이야기까지 조심스럽게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비슷한 방식으로 물려받았던 서주를 유비는 끝내 지키지 못했다.
‘형주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가장 큰 인물은 역시 유종이지.’
채씨 일가의 세력은 누구보다도 그가 잘 알았다. 유황숙이 객장 처지에 그 정도의 인망을 얻은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채씨 일가가 줄 수 있는 실제적인 득실을 뛰어넘기엔 너무나 얄팍했다.
게다가 조조가 형주로 쳐들어오는 것이 이제는 시간문제가 되어버렸다. 그가 기이할 정도로 유비에게 집착한다는 것은 이제 사세를 아는 사람들에게 공공연한 이야기가 되어있었다.
한 번도 조조에 맞설 만한 세력을 지녀본 적 없는 유비건만 조조가 거슬려 하고 힘들어 했을 만한 거의 대부분의 사건에서 어김없이 존재감을 드러낸 것도 유비뿐이었다.
아니, 드러내고도 살아남은 유일한 존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원소는 이제 죽었으니까.
그 원소보다도 나중까지 살아남는 데 성공했으니 조조처럼 의심 많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에겐 더욱 유비가 못 견디게 느껴질 것이다.
‘그럼 유기 공자는 어떻게 되는 거지?’
하마터면 잊을 뻔한 유표의 장남에게 생각을 돌렸다.
형주목의 맏아들로 태어나고도 어쩌다 이런 신세까지 떨어졌는지 황부인이 알 도리는 없었다. 문제는, 그가 얼마나 미움받든 얼마나 세력도 인망도 빈약하든 여전히 유경승의 장자이고 정통성이라는 강점을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죽어야만 사라질 가장 중요하면서 허울뿐인 장점.
형주에서 온 소식 중엔 채부인이 유기를 독살하려 든다는 소문도 있었다.
사실일 가능성은 낮았다. 유경승이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든 설득해서 유종을 정식으로 세우는 편이 채씨 일가에게도 열 배는 나은 일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장자를 후처가 핍박해 죽였다고 하면 멀리 있는 조조에게나 가까이 있는 유비에게나 훌륭한 트집거리를 던져줄 뿐이었다.
채부인이 유표의 후처가 되면서 채모와 그 일가의 영달이 더 순조로워진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유표가 늙어 종이 호랑이가 되고 나니 채부인의 존재는 도리어 채모의 위신에 누가 되고 있었다. 채부인을 하태후나 심지어 여후에 빗대어 비방하는 무리가 있을 정도였다.
“마님, 신야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황부인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잘못 들은 말이 아니었다.
“신야라고?”
균도 쏜살같이 달려나왔다.
서신을 가져온 신야의 심부름꾼은 아직 어린 제갈균에게 서신을 내밀려 했다. 그러나 황부인의 시녀가 그 서신을 받아들여 황부인에게 내밀었다.
“남편의 편지가 맞습니다.”
황부인이 필적과 서명을 보고 웃음지었다.
제갈공명과의 신접살림 시절은 그렇게나 알차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죽간 가득 이어진 정갈한 글씨가 절로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형님이 무어라 쓰셨습니까?”
옆에서 균이 물었다.
“우리를 신야로 부르는군요.”
흥분이 가시고 황부인의 얼굴이 차분해졌다.
“잠시 머물렀다가 돌아가라 하십니다.”


신야의 분위기는 걱정했던 것만큼 나쁘지 않았다. 코앞에 닥친 전쟁을 준비하는 고을인데도 징발의 탈을 쓴 수탈이 거의 없고 도리어 평화로워 보일 정도였다.
“징발을 전혀 안 했을 리가 있습니까. 최대한 나누어서, 일찍부터 차근차근 짜내니 티가 덜 나는 것뿐이죠.”
오랜만에 만난 공명은 다소 피로해 보였다. 부인과 동생을 맞이하느라 당장 일하다 말고 손끝에 먹물을 묻힌 채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몸에 밴 먹물냄새와 쇠 비린내까지 뺄 재주는 그에게도 없는 모양이었다.
“병장기를 보충하고 있는 모양이지요?”
직접 검을 쓰지 않는 책사의 몸에서 비릿할 정도의 쇠 냄새가 난다면 짐작가는 건 그뿐이었다. 공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께는 뭘 숨길 수가 없군요. 하기야 숨길 일도 아니지요. 전쟁은 코앞이고, 신야가 작은 고을이란 점을 감안해도 준비가 너무 부족합니다.”
“유황숙도 그동안 사정이 있었지 않습니까.”
어디까지나 객장에 불과한 유비였다. 조조가 쳐들어올 조짐이 명백한 지금이니까 괜찮지, 일찍부터 병장기를 만들고 병사들을 양성했다면 채씨 집안의 견제는 더욱 심했을 터였다.
그러나 공명은 고개를 저었다.
“병장기와 말은 일찍 모으기 어려워도 군량과 돈은 보다 일찍부터 은밀히 모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황숙께서는 성실하고 청렴한 분이시고 손건, 미축 등도 그렇습니다만 고을의 살림을 맡아보는 능력은 대단치 않더군요.”
“원직은 뭐라 하던가요?”
공명이 이렇게 말할 때면 늘 하던 대로 황부인이 되물었다.
“늘 하는 이야기죠. 그들이 대단찮은 게 아니라 제가 대단한 거라고.”
이런 말을 할 때면 점잖게 겸양하기보다는 당연한 소릴 들었다는 듯 뚱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공명이었다. 그게 때로 어린애 같아서 황부인은 놀라면서도 기꺼워했다.
겸손은 미덕이다. 그러나 사내아이에게는 때로 겸손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다. 공융의 어린 시절 당돌한 일화는 그가 어려서부터 신동이었다는 이야기로 회자되었다.
계집아이는 아무리 재색을 겸비했어도 신동이라 불러주지 않았다.
공명의 얼굴에서 뚱한 표정이 사라진 뒤에도 밝은 미소가 남지는 않았다. 그것을 보고 황부인도 웃음을 거두었다.
지금이 웃을 시기가 아니었다.
“여기에서 제가 무슨 노력을 기울이든 조조의 대군을 막아낼 더 큰 군대가 솟아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방법은 둘 뿐인데, 하나는 성사되기 어려우나 일단 성사되면 그 뒤가 편안할 것이고, 둘은 당장은 쉽지만 앞날에 두고두고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공명이 조용조용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형주를 유황숙이 물려받는다면, 당장은 어려울 것입니다. 채씨 일가의 반대도 무릅써야 하고 아직 황숙을 주인으로 받들지 못하는 땅을 다스리며 조조의 침공에 맞서야 하지요. 하지만 조조를 성공적으로 막아낸 뒤에는 천하 삼분의 중심점이 될 것입니다.”
“쉬운 쪽은 무엇입니까?”
“형주를 포기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형주에 이어 조조가 노릴 것은 오의 손권이니, 손권과 손을 잡아 조조를 막아내고 형주를 다시 공략하면 자리를 잡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서촉을 노리는 것이지요. 허나 그때까지 주군은 오래 자리잡지 못하고 떠도셔야 합니다.”
일장일단이 있으나 어느 쪽도 선뜻 택하기 어려웠다. 어느 한 쪽을 택한들 예측대로 일이 풀린다는 보장도 없었다.
“하기야 굳이 물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황부인의 대답이 얼른 나오지 않자 공명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미 두 번째로 결론이 지어진 것 같으니까요.”
“유황숙께서 두 번째 계책이 좋다고 하셨습니까?”
공명은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복잡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난번 형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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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주의 분위기는 신야와 달리 살벌했다. 물론 유비도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채모가 유비를 죽이려 든 사건마저 유비 본인이 나서서 없던 일로 만들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객장인데 유씨인 죄로 형주 사람들은 유비를 계승 분쟁에 끌어넣었다.
유비의 야심을 떠보는 사람, 진심으로 유비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 채부인의 험담을 하거나 유기의 험담을 하는 사람들 틈에서 제갈량은 유비가 얻을 수 있는 것을 계산해 보았다.
전무 아니면 전유였다. 형주를 포기하고 빨리 조조로부터 도망치든가, 스스로 형주목이 되어 조조를 막아내든가.
두 번째가 물론 바라는 바였다. 쉽지는 않겠지만 조조 상대로 한 번만 승리해도 그 뒤는 탄탄대로였다. 융중에서부터 품고 나온 대전략을 위해서도 형주는 꼭 필요했다.
문제는 그 탄탄대로 앞을 험난한 절벽이 가로막고 있는 데다 유비부터가 절벽을 오를 생각도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작심하고 형주를 노려도 모자랄 상황에, 이제와서 큰아들에게 물려주라는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다니.’
유표 앞을 물러나오면서, 관역으로 돌아가는 즉시 한 소리 해주마고 벼르고 있는 제갈량의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유비도 제갈량도 멈춰섰다.
“숙부님.”
유표의 장남 유기가 유비에게 예를 표하고 곁을 나란히 걸었다. 단순히 인사치레로 배웅 나온 것처럼 보였으나 진짜 용건은 곧 나왔다.
“계모가 저를 미워하여 죽이려 합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제갈량은 유비를 돌아보았다. 유비도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효성을 다해 계모를 섬기라. 언젠가는 계모도 현질의 어진 인품을 알아줄 것이다.”
유비에게 말해봐야 소용없다고 여긴 유기의 시선이 제갈량에게 향했다.
제갈량은 가만히 있기로 했다. 유비가 아무 도움될 말도 해주지 않는데 자기가 나서서 말을 보탤 필요는 없었다.
유기는 제갈량에게도 직접 매달리고 싶은 듯 눈빛이 복잡해졌으나 마침 시종들이 말을 끌어왔다. 유비가 적로마에 오르며 이야기를 돌렸다.

스승과 제자 ㅣ- 기타

유스투스 호르텐시우스, 영면에 들다.

시체를 따라가면 마왕의 발자취 팬픽입니다. 본편 이후 50년 뒤 이야기이므로 스포일러 주의해주세요.




신의 축복과 가호를 받기 때문에 성직자는 보통 사람들보다 건강하고 장수한다. 그리고 그런 차이는 고위 사제로 갈수록 두드러졌다.
그러니 사람들이 선지자인 저스틴 리본즈는 아흔 살이 넘도록 정정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펠레아스와 에이베트도 각자 자기 종족의 최대수명까지 건강했었다.
그러나 일흔 넷을 넘긴지 얼마 안 된 지금, 저스틴은 곧 다가올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작년에만 해도 그는 건강했다. 그러나 시에나가 죽고 몇 달 지나지 않아 그의 기력은 급속도로 쇠하고 건강도 같이 나빠졌다. 다른 사제들은 놀라고 걱정했지만 저스틴은 담담했다. 도리어 조금 안도하기도 했다. 시에나가 없는데 자기만 쓸데없이 건강해서 이십년 쯤 혼자 살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키멘도 꽤 센스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는 업무에서 은퇴하고 신변을 정리하며 사람들을 멀리하고 신전에 은둔했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자기가 죽을 때가 가까웠으니 마음의 준비든 장례 준비든 할 일이 있으면 알아서 하라고 편지도 보냈다.
안부 편지와 함께 욕도 꽤 얻어먹고 저스틴은 언제 죽어도 괜찮도록 준비를 해둔 뒤 대성전 후원의 독신 수도자 숙소 끝방으로 돌아갔다. 여기 있으니 흐라그눔을 부수고 막 돌아왔던 때가 생각났다. 얼마 안 지나 닥친 ‘마왕 퇴치 기념일’에 고기 파이를 구워 용사들에게 돌렸던 것도.
그 중에 한 명은 세대가 다른 용사였다.
다른 수신자들과는 달리 그에게선 아무런 답도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 다음해 하지에 보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까마귀 둥지까지 도착은 했는데, 그 이후로 파이가 누구 손에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리온도 모른다고 했다. 한 번은 리온에게 그가 가져가서 직접 셀림에게 건네줄 수 있냐고 했더니 저스틴을 조금 노려보더니 그냥 가버리기도 했다.
그래도 저스틴은 매해 파이를 구웠고 매해 용사들에게 보냈다. 밀로스가 죽은 뒤에는 그의 자식들이 대신 받아 무덤에 바쳤다. 용사들이 하나둘 늙고 죽어감에 따라 같은 방식으로 파이를 받는 이들이 많아져서 이제 직접 먹는 사람은 리온, 미테, 루시텔, 펠레아스, 솔라니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올해도 구울 수 있을까.’
굽더라도 이제 직접 반죽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을 돕던 골렘들도 이젠 다 처분해서 하지까지 그가 살아있더라도 파이를 굽는 건 대성전의 요리수사들을 시켜야 하게 되었다.
조금쯤 감상에 잠겨 그가 산책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무릎이 삐걱였다. 이전에 죽었을 때는 몸은 말짱했었기 때문에 늙어서 신체 기능이 떨어지는 느낌이 꽤 생소했다.
별 생각 없이 방문을 열었다가 저스틴이 놀라 문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방 안에 사람이 있었다.
“어.....”
저스틴이 눈을 깜빡였다.
지난 오십여 년 간 매해 파이를 구워 보내고 매해 무시당했던 그 상대가, 그동안 아무리 애를 써도 얼굴도 볼 수 없었던 그 사람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셀림이 입을 달싹였으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저스틴은 이 상황에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셀림..?”
“스.....승님.”
셀림이 힘겹게 목소리를 내었다.
저스틴은 셀림이 오백년도 더 전, 마왕 앞에서 그랬던 것만큼이나 긴장해 있는 걸 알았다. 이제 그는 보통의 하위인간 마법사일 뿐인데. 지금 저스틴의 마법으로는 셀림의 머리카락 하나 상하게 할 수 없을 텐데도.
저스틴이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너도 앉아라.”
그가 옆자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아니면, 말 한마디만 하고 바로 갈 생각이냐?”
셀림은 키멘 대성전의 평범한 짚 매트리스가 불타는 용암 바닥이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보다가 저스틴에게서 몸을 띄워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런데, 갑자기 웬일이냐?”
셀림이 먼저 말하는 건 좀 힘들 것 같았기 때문에 저스틴이 관대한 마음으로 자기가 물어주었다.
“지금까지는 내가 편지를 보내도 선물을 보내도 답이 없고 네가 나타난다던 행사에 참석해도 먼발치서 보고 가까이 가면 사라져 있었는데.”
관대한 마음을 가질 생각이었는데 그래도 역시 조금은 꽁해있었다. 나름대로 아끼던 제자이고 그가 행복하고 위험에 말려들지 않기를 바라는 것도 진심인데 야속한 제자 놈은 스승을 배신하고 죽인 걸로 모자라서 환생한 스승하고 말 한 마디 하지 않으려 든다. 배신하고 죽인 건 자신이 마왕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 쳐도 파이 맛있더라는 답장 정도만 보내줬어도 좋았을 텐데.
“...............주시자가 나타났습니다.”
셀림이 말했다.
“키멘이? 왜?”
“마지막 기회이니..... 만나보라더군요.”
저스틴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냥 거래 관계라고만 생각했고 그 외에 저스틴 덕분에 키멘이 좋을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데면데면하려니 생각했는데, 키멘은 예상 외로 자기 선지자에게 마음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뜻밖이구나. 그런.... 오지랖을 부려줄 줄은. 그렇다곤 해도 네가 그런 권유를 받아들여 나를 만나러 오다니, 역시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겠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응?”
뭐를, 이라고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주시자가 ‘마지막’ 기회라고 했다는 건 지금 이후로는 저스틴을 만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셀림은 그의 죽음을 확인하러 왔다.
저스틴도 여기에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미 한 번 봤지 않느냐.”
“제 손으로 목을 베었었지요.”
셀림이 저스틴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이려다, 그렇다고 저스틴이 무슨 짓을 할지 못 보는 게 더 무섭다는 듯 그의 손과 입 언저리로 시선을 움직였다.
“그 때는 보고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해놓고?”
“그 때 스승님은 웃으셨습니다.”
셀림이 심호흡을 했다.
“즐겁다는 듯, 만족스럽다는 듯, 제가 대견하다고 스승님의 뜻을 잘 따랐다고 곧 칭찬이라도 해주실 것 같은 환한 미소를 지은 채였습니다.”
그가 토해내듯 말했다.
“저는 그 미소를 오백년 간 두려워했습니다.”
“....흠.”
저스틴은 그 때 어땠는지 생각을 해보았다.
죽기 직전 무슨 표정을 했는지 같은 게 기억날 리 없었다. 그래도 그 때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 라도 되새겨 보려고 애썼다.
“워낙.... 그 때 내가 제정신이 아니어서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만.”
저스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건 아마 정말로 네가 대견하고 네 실력과 성취가 기뻐서 지은 웃음일거다.”
여기 들어와 최초로 셀림이 저스틴을 마주보았다. 그 얼굴에 ‘그걸 지금 나더러 믿으라고??’라고 너무나 뚜렷하게 쓰여있어서 저스틴은 조금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렇지 않느냐. 내가 마왕이긴 했어도 넌 내 제자였다. 자기 제자가 가르쳐준 이상으로 성장해서 스승에게 도전할 정도로 실력이 늘었는데 대견하지 않은 스승이 어디 있겠느냐.”
“제가 스승님을 정말로 능가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야 그렇지.”
셀림이 푹 몸을 수그려 머리를 짚었다. 들리지 않게 입 안으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아마도 욕일 거라는 건 저스틴의 눈치로도 알 수 있었다.
“그때... 상황을 생각하면 확실히, 나의 또 다른 계책에 걸려 전부 내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것도 말이 되긴 하지.”
저스틴이 뒷머리를 긁었다.
“그래도 오백년이나 그럴 필요는 없지 않았느냐. 난 정말 그 때 죽었고.....”
“오백년 이후 전부 스승님의 계획대로 되었지요.”
그 말은 사실이라서 저스틴도 대꾸할 말이 없었다. 스승의 말문을 막히게 하다니 역시 셀림이 잘 자라긴 한 거라고 저스틴은 엉뚱한데서 조금 뿌듯해했다.
“그...때 편지에도 썼다만.”
저스틴이 말했다.
“네가 행복하게 잘 살길 바라는 건 진짜란다. 그 옛날에도 그건 마찬가지였어.”
“네.”
셀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스승님이 절....... 아끼셨다는 것을 부정하려는 건 아닙니다. 제가 마음에 차지 않는 제자였다면 진작에 내다 버리셨을 테지요.”
“.....셀림.”
저스틴이 그의 손을 잡았다. 셀림은 움찔했지만 뿌리치거나 밀어내지는 않았다.
“네가 나를 그렇게까지 무서워하는 줄은 몰랐다. 그래도 네게는 좋은 스승이 될 작정이었고 널 일부러 다치게 하거나 위협한 적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다른 인간들에겐 그러셨지요. 저만 예외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저만 예외라고 한들, 그걸로 만족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 그렇지.”
저스틴이 미소 지었다.
“잘한 거다. 당시에야 나도 널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래도 마왕의 치세를 끝내준 건 고맙게 생각한다.”
“그렇....습니까.”
“그래. 또 너 아니라 다른 누구였으면 곱게 자살하는 대신 더 큰 일을 벌였을지도 모르니까, 너여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셀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기왕 이런 무시무시한 스승을 퇴치했으면 너는 좀 더 좋은 스승이 되지 그랬느냐. 너의 제자들도 만만치 않게 너를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던데.”
셀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저는.... 별로 제자들에게 심한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때리거나 괴롭히거나 남을 그렇게 대하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습니다.”
“그럼.”
“리온의 경우는, 너무 어릴 때 데려왔던 것이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애의 집안 사정과도 관련이 있고요. 이제 갓 마법을 배운 아이가 몇 백 년씩 묵은 스승이나 사형들보다 못한 건 당연한 건데 그 점을 가르쳐 줄 만한 사람이 주위에 없었기 때문에....”
“드미트리 경은.”
“저 안 무서워합니다만.”
저스틴이 셀림을 쳐다보았다. 셀림의 표정에서 확신이 사라졌다.
“무서워....하나요?”
“내가 만났을 때는 그렇더라.”
셀림이 조금 입을 뻐끔거렸다.
“.....적어도 데리카와 드미트리만은 나를 안 무서워하는 줄 알았는데.....”
“나머지 여덟 명은 무서워한다고 인정하는 거냐?”
저스틴이 지적했다. 셀림은 입을 열지 못했다.
“뭐, 제자가 스승을 전혀 안 무서워하는 것도 말이 안 되긴 하지.”
저스틴이 웃으며 셀림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탑의 학원에 다녀봤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다른 마법사들도 다 자기 스승은 어려워하더구나. 그러니 그것 갖고 너무 고민할 필요는 없을 거다.”
셀림은 병 주고 약 주는 자기 스승을 슬며시 째려보았다.
그리고 자기가 그랬다는 걸 깨닫고 충격 받았다.
“이제 나는 곧 죽을 테고, 이번에야말로 영혼의 바다로 돌아가겠지.”
저스틴이 말했다.
“다음 환생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시에나와 또 만나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지만 못 만나도 할 수 없는 거고, 혹 인연이 닿아 만난다 하더라도 더 이상은....”
그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유스투스 호르텐시우스는 이제 완전히 끝이다. 데스페라티우스도, 저스틴 리본즈도 마찬가지. 나의 집착과 미련도 이제는 사라졌고 더 이상 순리대로 흐르는 것에 저항할 이유도 없으니.”
그가 셀림을 바라보았다.
“고통도 실패도 절망도 있었지만 적어도 새로운 삶은 행복했고 사랑하고 사랑받았고 나름대로 친구들도 있었고 제자도 남겼다. 후회 없는 삶이었다.”
“그렇습니까.”
“그래.”
저스틴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좋은 스승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래도 너의 스승이어서 기뻤단다. 잘 성장해줘서 고맙다. 이렇게... 마지막에라도 찾아와줘서 고맙고. 덕분에 여한은 없다.”
“.....스승님.”
저스틴이 팔을 벌렸다. 셀림이 멈칫멈칫 그에게 몸을 기대었다. 저스틴의 팔이 그를 감싸자 셀림도 그의 몸을 마주 끌어안았다.
“행복하렴...”
저스틴의 몸이 셀림에게 기대왔다. 그의 팔에 힘이 빠졌다.
“스승님?”
셀림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만 확인하기 두려웠다.
유스투스 호르텐시우스가, 저스틴 리본즈가 죽었다.
자신의 유일한 스승이. 자신이 평생 두려워했던 상대가.
한참이나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던 셀림은 멀리서 사람들이 다가오는 움직임을 감지하고 정신을 차렸다. 그가 저스틴의 시신을 침대에 바르게 눕혔다.
“안녕히.. 스승님. 부디 영면하시길.”
자신이 기원하지 않아도 어련히 키멘이 자기 선지자를 잘 챙겨갈 거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셀림은 명복을 빌었다. 그게 남은 인간들이 하는 일이고 자신은 인간이니까.
다가오는 사람들이 건물 안까지 들어왔다. 이제는 굳이 마법이 없어도 발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여기서 굳이 키멘의 대주교와 마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선지자가 키멘의 곁으로 돌아갔다는 계시를 받고 달려온 벨렘 대성전의 대주교는 잠들 듯 편안히 죽어있는 저스틴을 발견하여 종부 성사를 치르고 각 왕성과 신전과 다른 새 용사들에게 이 소식을 보냈다.


전서구를 받았을 때 리온은 까마귀 둥지에 있었다.
그가 즉시 벨렘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구름을 밟고 나는 마법을 쓸지 드미트리 사형의 배를 빌릴지 저울질하다 장례식에 가는데 마법 배는 조금 눈에 띈다는 생각을 했다. 구름을 밟고 날아가서 별궁 후원에 내려 조문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문을 써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아직 완성된 마법이 아니었다.
‘당장 빠르게 도착해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어차피 펠레아스도 솔라니도 오려면 시간 걸릴 거고.... 솔라니, 오려나.... 건강 안 좋아졌다고 들었는데.’
그가 실험하던 걸 정리하고 나오는데 문 밖에 전언용 마도구가 와있었다. 바퀴달린 네모난 상자 위에 기록용 수정구가 얹혀있는 형태로, 차라리 인형 골렘을 쓰지 그러냐는 의문이 드는 물건이지만 셀림이 고집했다.
-할 말이 있으니 와라.
스승님의 간단명료한 호출이었다. 어디로 오라는 지시 대신 상자가 돌돌 굴러갔다. 그걸 따라가며 리온은 방금 받은 전서구를, 스승님이 골렘을 안 쓰는 원인이 된 사람을 생각했다.
셀림에게도 이 소식은 갔을 것이다. 갑자기 자기를 부르는 이유가 무엇이든 저스틴과 관련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수정구가 안내한 곳은 셀림의 실험실 중 한 곳이었다. 리온이 들어가 보니 안은 치워져 있고 의자 둘 딸린 탁자 위엔 주전자와 잔 두 개가 놓여있었다.
“앉아라.”
셀림이 말했다. 그의 맞은편 자리로 가며 리온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작동은 하고 있지 않지만 이 방에는 마력 고갈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안에서 발동은 가능하지만 끄는 건 밖에서 밖에 안 되는 형식이었다.
“별로 널 가두려는 건 아니다. 만약의 사고에 대비하는 거지.”
“만약의 사고요?”
“너 술은 어느 정도 마시지?”
대답을 듣지 않고 셀림이 물을 생성해 주전자를 채웠다. 그가 주문을 읊자 물이 옅은 호박색의 액체로 바뀌었다.
셀림이 손수 두 잔에 술을 따랐다. 황송한 태도로 술을 받아든 리온이 향을 맡았다. 새콤한 향이 강한 과일 브랜디였다. 셀림이 마시는 것을 보며 리온도 술을 한 모금 입에 물었다. 사과향이 강하지만 묵직한 탄닌의 뒷맛은 포도에서 온 게 분명했다.
“이건 어느 지방의 술인가요?”
“아우러스 평원에서 나던 술이다. 그곳의 사과와 체리로 술을 담가 포도주와 섞어 증류했다고 들었다.”
벨레즈와 델로레인 사이의 너른 사막을 생각하며 리온이 잔 안의 술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왕이 즐겨 마시던 술이다.”
셀림이 말했다.
“그가 그 땅을 사막으로 바꿔버리기 전에.”
리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 술을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저스틴은, 인간들이 서로 갈라져서 따로 나라를 세우도록 장애물로 사막을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인간들이 대륙을 통합해서 상위인간들처럼 다른 종족을 압제할 거라고 생각한 걸까. 어차피 하위인간의 마력과 기술로는 불가능한데.”
“언젠가는 가능해질지도 모르지요.”
“흠.”
셀림이 술을 조금 더 마셨다.
“그런데.... 왜 갑자기 술이신가요?”
리온이 물었다.
“무서운 스승님에게서 벗어난 축하주다.”
리온이 다시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왜, 너는 무서운 스승님에게서 못 벗어났다고 하고 싶은 거냐?”
“아, 아니오. 그런 게 아니고요.”
리온이 황급히 술을 마저 마셨다. 잔이 비자 주전자가 날아와서 술을 따랐다.
“나도 내 주량은 잘 모른다만.”
셀림이 자기 잔에도 또 술을 따르며 말했다.
“두 번째로 주전자를 채우고 난 뒤에... 발동시키면 될 거라고 생각한다.”
“네.”
두 대마법사가 술에 진탕 취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일을 생각하면 마력고갈진 정도는 과한 조치가 아니었다.
“그런데 스승님, 술이 깰 때까지 여기 있을 거라면 침대나 쿠션 같은 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점은 생각 못한 듯 셀림이 눈을 깜빡였다. 그가 뭐라 중얼거리자 곧 실험실 구석에 침대가 나타났다.
“내일 아침엔 마실 물도 필요할 거에요.”
물주전자는 리온이 침대 옆으로 소환했다.
“너는 술을 자주 마셔봤던 거냐?”
“어쩔 수 없이 사교적인 자리에 나가야 할 때가 있으니까요.”
리온이 대답했다.
“그래도 취하지 않도록 주의는 하고 있어요.”
“취하려고 마시는 건 그 해 하지 이후 처음이다.”
그 해가 언제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일주일째 잠을 못 잤다. 당장이라도 성문에 걸려있는 목이 내게 고개를 돌리며 그간 잘 놀았냐고 할 것 같아서. 보다 못했는지 델로레아스가 끌고 가서 술을 퍼먹이더군.....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자고 일어나 보니 에이베트가 그 녀석을 거꾸로 매달아 놓았던데.”
그런 건 좀 기록으로 남겨두지 그랬냐고 리온은 선조들을 원망했다.
“그 때 마셨던 건 좀 더 평범한 포도주나 브랜디였을 거다. 아우러스가 사막으로 바뀐 뒤였으니까. 바람이 부는 길목에 높은 산맥을 만드는 것만으로 어떻게 멀쩡하게 비옥하던 땅이 사막으로 바뀌는지 보여주며 즐거워하셨지.....”
셀림이 다시 술을 홀짝였다.
“아마 그래서였던 것 같다.”
그가 먼눈을 하고 허공을 보았다.
“그 당시에도 좋은 것들은 있었다. 스승님에게도 마음에 들고 좋아하는 대상은 가끔 생겼다. 이 술이라든지, 너도 좋아하는 초콜렛 같은 것. 사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간혹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소중히 아껴가며 쓰기도 했지.... 그러다 어느 순간 변덕이 나면 부숴버리고 더는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리온이 오싹해져서 자기 스승을 쳐다보았다.
“언젠가 나도 그렇게 될 것이 두려웠다.”
셀림은 독백을 계속했다.
“마왕이긴 해도 내게는 스승님이었고, 스승답게 제자를 아끼고 보호해주시기는 했다. 그런데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한손으로 사람들을 구하고 다른 손으로 구한 사람들을 짓이기는 지배자였기에. 그 때는 누구도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시대였다. 어떠한 능력과 세력이 있어도 심지어 마왕에게 총애를 받아도 소용이 없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고 대비할 수 없고 그러니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도 몰랐다. 기대가 없어 좌절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절망의 시대였다.....”
다시 한 번 셀림의 술잔이 채워졌다.
리온은 정말 두 번째 주전자까지 만들어야 하는 걸까 지금 마력고갈을 발동시키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러니 스승이었어도, 가끔은 날 사랑해주셨어도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게 스승님께도 좋은 결과가 된 것 같고.”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건 변명이다만.”
“실제로 그랬습니다.”
리온이 말했다.
“결과만 놓고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설령 그가 저스틴으로 환생하여 시에나를 만나지 못했다 해도... 그대로 절망과 광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신과 뭇 인간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나았을 겁니다. 본인이 잘못을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고치지 못할 때 막아주는 것도.... 친구나 가족이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냐?”
“네. ....그러니.”
리온이 마력고갈진을 발동시켰다. 셀림의 잔을 다시 채우기 위해 떠오르던 주전자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다시 탁자에 떨어졌다.
“술은 그것까지만 드세요.”
“....건방진 제자 녀석 같으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셀림은 웃었다. 그리고는 주전자를 손으로 들어 자신과 리온에게 마지막 잔을 채웠다.
“그 분이 드디어 평화로이 영면하셔서 기쁘다. 나의 스승님이 키멘에게 돌아가 환영받으시기를. 그리고 그분의 다음 생이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셀림이 잔을 들었다. 리온도 따라 들고 두 사람은 단번에 잔을 비웠다.
“피곤하구나...”
셀림이 탁자에 엎드렸다.
“지금껏 언제고 마왕이나 그의 유산이 다시 나타나면 막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살고 있었는데...... 어쩌면 나도 이제 슬슬 죽어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네?!”
스승을 부축하려고 일어나던 리온이 놀라 굳었다.
“어..... 저........”
“뭘 놀라느냐. 나는 이미 그 마왕보다도 더 오래 살았다.”
“그, 그렇긴.... 해도요오......”
“걱정 마라.”
셀림이 피식 웃었다.
“네가 그런 표정을 하는 동안은 같이 있어주마.”
그 말에 리온이 겨우 안도했다. 그러고는 셀림을 부축해다 침대에 눕혔다.
“내일부터 일 년 간 복상을 할까 한다.”
눈을 감은 채 셀림이 중얼거렸다.
“스승에 대한 예이기도 하고.... 그 시절이 끝났다고, 내가 확신이......”
그가 잠든 걸 확인하고 리온도 주저앉아 옆에 기댔다. 셀림보다는 술이 셀지 몰라도 그도 독한 브랜디를 여러 잔 마셨다. 긴장이 풀리니 졸음이 왔다.


셀림은 본디 검은 옷을 주로 입었고 식사도 호화롭거나 값진 것을 찾지 않았다. 그의 스승이 마왕이었고 저스틴으로 환생했다는 사실은 그의 제자 중에서도 아는 사람이 적었다.
그래서 그가 홀로 상을 치르는 동안에도 까마귀 둥지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그래도 셀림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상을 치르고 나면 이제 하지에 고기파이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보존마법을 걸어 아무도 모르게 숨겨둔 51개의 파이를, 한 해에 하나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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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림의 설명대로라면 술에 탄닌이 남아있을 리가 없지요. 포트와인처럼 증류주에 와인을 섞은 것인데, 셀림이 술에는 무지하여 착각하고 있다는 설정입니다. ^^; 리온은 알지만 셀림한텐 말 못하죠.






검은 남자 80 (완) ㅣ- 회색도시&검은방



다시 최재석과 양태수, 양시백이 숨어있던 안가였다.
“류태현!”
하무열은 정말로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설마 진짜 울었나 하기도 전에 류태현을 확 끌어당겼다.
“전 괜찮습니다. 강민 씨는요?”
류태현은 하무열을 뿌리치고 허강민부터 챙겼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손에 매달려 있었다.
“강민 씨, 괜찮으세요?”
어쨌든 함께 빠져나왔다고 안도한 것도 잠시, 허강민이 바닥에 푹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류태현이 기겁해서 그를 부축해 일으키려 했다.
“강민 씨, 정신차리세요, 강민 씨!”
류태현만이 아니었다. 하무열과 최재석, 상황을 듣고 찾아온 하성철까지 허강민을 붙들었다.
“맥은 제대로 뛰고 있는데.”
마치 저주로 쓰러졌을 때고 되돌아간 듯한 모습에 다들 당황했다. 류태현은 벌써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안 돼요, 제발, 제가 잘못했으니까 눈 떠주세요. 예?”
다시 평정을 잃어가는 류태현을 보고 하무열은 마음 굳게 먹으며 주먹을 쥐었다. 허강민이 어떤 상태인지는 몰라도 지금 류태현까지 미쳐버리면 허강민을 구할 사람도 없었다.
막 류태현의 뒤통수를 치려는 순간 전화가 울렸다.
하성철이 자기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국장님, 권현석입니다.
권현석 팀장의 다급한 목소리에 하성철뿐 아니라 류태현까지 정신을 차렸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배 형사가 저더러 진술서 쓰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저주에서 벗어났다면서요. 어떻게 된 겁니까? 정말 류태현 순경이 저주를 푼 겁니까?
하성철 국장의 눈빛을 받고 류태현은 허강민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의식을 찾지 못했지만 숨소리는 조금씩 편해지고 있었다. 죽거나 집어삼켜진 것은 아니었다.
“강민 씨 덕에 배 형사님의 저주는 풀렸습니다.”
류태현이 더듬더듬 설명했다.
“하지만 양태수 씨와 양시백 씨는 아직 완전히 안전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피와 살은 장희준이나 그의 수하 마법사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요. 그들을 죽이기 전엔 끝난 싸움이 아닙니다.”
“그건 이제부터 할 일이지.”
하성철 국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 형사가 자유로워져서 증언한다면 수사팀 재결성은 충분히 가능해.”


배준혁이 제공한 것은 증언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몰래 사진을 찍거나 녹음해둔 것도 상당했다.
“팀장님과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는 명령은 받았어도 증거를 모으고 알릴 준비를 하지 말라는 명령은 받은 적 없었으니까요.”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엄청난 위험을 감수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양시백이 과자에 뻗었던 손을 도로 거두었다.
“시백 씨,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웃으라고 한 이야기가 역효과를 내자 배준혁이 당황했다. 최재석과 양태수의 눈총은 덤이었다.
“덕분에 실버 트와일라잇도 제대로 수사되는 중이고, 세 분도 희망이 생겼지 않습니까. 전 그거면 충분합니다.”
얼버무리면서 과자를 다시 양시백의 손에 쥐어주었다.
“시백 씨 먹으라고 사온 과자인데 별로인가요?”
“아, 아뇨.”
시백이 얼른 과자를 입에 물었다. 아주 약간이지만 볼이 빨개진 것을 양태수는 놓치지 않았다.
시백이가 예전 이상하게 행동했다가 배준혁에게 고백하고 차인 때문이라고 변명했던 것이 떠올랐다.
“배 형사는 요새도 많이 바쁠 텐데 용케 자주 오네.”
‘설마 우리 조그맣고 순진한 애기한테 눈독들이는 건 아니겠지?’를 어떻게 해야 피비린내 안 나게 전달할 수 있을지 양태수가 머리 싸매고 있는 동안 최재석이 보다 우회적인 공격을 했다.
“바쁘다고 안 올 수는 없습니다. 세 분의 위치를 적에게서 완전히 감추는 것은 불가능하니 보호 마법을 계속 점검하고 강화해야 하거든요.”
양태수도 양시백도 더 이상 얼굴에 마법약을 바르고 있지는 않았다. 대신 최재석까지 세 사람이 다 주문 주머니를 목걸이처럼 목에 걸고 있었다. 배준혁이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세 사람 전용으로 만든 상등품으로, 각자의 특성에 맞게 만들었으니 다른 사람 것을 바꿔 걸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당부와 함께 나눠준 것이었다.
배준혁이 얼마나 세 사람을 공들여 지키고 있는지 새삼 생각하고 양시백은 배시시 웃었다. 최재석도 양태수도 어느새 빙그레 웃고 있는 배준혁에게 대꾸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배 형사가 원래 저렇게 잘 웃었던가?’
최재석은 배준혁과 함께 근무하던 시기를 떠올려 보았다. 그때 배준혁은 딱딱하고 과묵한 사람이었다.
그때와 지금 처한 환경이 다르기는 해도 신경쓰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다른 분들도 다 괜찮으세요?”
양시백이 묻자 배준혁이 끄덕였다.
“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허강민 씨는요?”
끝내 깨어나지 않아 구급차에 실려갔던 중범죄자이자 은인을 떠올리고 다시 물었다.
“그는 요양원에 보호 감찰 대상으로 보내졌습니다. 정신적인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내린 듯합니다.”
양시백은 우울한 얼굴이 되었다.
자신은 그저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어도 허강민이 그때 류태현을 돕기 위해 실버 트와일라잇에 제발로 뛰어들었다는 것까지는 알 수 있었다. 그 날 이후로 경찰은 실버 트와일라잇 클럽을 직접 겨냥하는 새 수사팀을 발족시켰고, 배준혁은 나서서 증거와 증언을 내놓고도 죽지 않았다.
“어차피 이미 저지른 짓이 너무 많은 사람입니다.”
배준혁이 조심스럽게 다독였다.
“그에게는 지금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릅니다.”
양시백은 힘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하성철 국장은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허강민에게 거의 찾아가보지 못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만이 아니라 자칫 범죄자를 옹호한다는 트집을 잡히면 자신뿐 아니라 허강민까지 위험해지기 때문이었다.
하무열과 류태현 역시 그런 처지인 건 마찬가지였으나 그 와중에도 류태현은 최소 일주일에 한 번 허강민을 방문했다. 잠도 못 자고 무리하면서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범죄자를 옹호한다는 트집이나 허강민이 류태현의 관련자라고 모두에게 알려져서 더 위험하게 만들 가능성이라면, 이미 자신의 적들 누구나 자신과 허강민을 한데 엮어서 노리고 있을 테니 새삼스러울 것 없다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보호 감호 시설은 그럭저럭 괜찮은 곳이었다. 직원들과 의사, 간호사도 매주 찾아와서 간병하는 보호자를 둔 환자는 범죄자라도 보다 신경써서 대했다.
“허강민 씨, 저 왔어요.”
류태현은 간호 스테이션에 드링크 박스를 놓고 허강민의 방으로 찾아갔다.
허강민은 이제 일어나 앉을 수도 있고 음식도 입에 넣어주면 스스로 씹어 삼켰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말을 하거나 듣지도 못했다. 안경을 씌워줘도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책을 읽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평소 세면이 불편해진다는 이유로 점차 안경을 벗겨두게 되었다.
그래도 류태현은 올 때마다 안경집에서 안경을 꺼내 씌워주었다. 이젠 남의 얼굴에 안경 씌우는 것에도 꽤 익숙해져서 안경알에 지문도 안 묻히게 되었다.
“수사는 잘 돼가고 있어요.”
이번에도 대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류태현은 쾌활하게 이야기를 계속하며 병실 안의 수호 부적을 점검하고 갈아입을 새 속옷을 놓고 가져온 죽을 꺼냈다.
“장희준 회장까지 얽어넣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아요. 아마 그의 경우엔 사살해야겠지만.....고위 마법사를 살려서 감옥에 넣는 건 역시 너무 위험하겠죠?”
죽그릇을 열고 숟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그리고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게 식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맛을 보았다.
“......아직 뜨겁네요. 지난주까지만 해도 오는 길에 다 식었는데. 진짜 날씨 풀리고 있나봐요.”
류태현 자신이 먹기엔 괜찮은 수준이었지만 상대는 인사불성의 환자였다. 조금만 더 식혀서 주기로 하고 그릇을 옆으로 치웠다.
언제나 광기와 함께 눈에서 빛나던 총기가 사라지고 지금은 텅 비어있어 어눌하게까지 보이는 얼굴이 마음아팠다. 그래도 류태현은 눈을 돌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성철 국장님도 인사 전해달래요. 실은 저한테 가끔 용돈도 주세요. 강민 씨한테 좋은 거 먹이고 입히라고. 빨리 수사 끝나서 그분도 여기 오실 수 있으면 좋겠어요.”
자신이나 무열 선배에게 반응하지 않더라도 국장님 이야기에라도 반응을 했으면 좋겠는데 이번에도 허강민은 묵묵부답이었다. 익숙해진 실망감을 누르고 생각난 김에 무열 선배 이야기나 하기로 했다.
“무열 선배는 다음 주에 같이 오기로 했어요. 오랜만에 서태준 경감도 잘 있나 한 번 본대요. 그냥 강민 씨가 보고 싶다고 해도 될 걸 굳이 그런 식으로 말한다니까요.”
여전히 반응이 없는 흐리멍덩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솔직하게 말한다고 해서, 강민 씨가 듣는 것도 아닌데. 듣고 놀리는 것도 아닌데.”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도 처음 한동안은 이럴 때 울지 않도록 애썼으나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어차피 울어도 상관 없었다. 다 큰 어른이 엉엉 운다고 강민 씨가 놀려주기 위해 정신 차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잘못했어요......강민 씨는 절 구해줬는데, 저는 강민 씨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장 정신을 차릴 때까지 조치를 취했어야 했는데,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어요. 이번에도 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어요. 죄송해요.......”
이번에도 허강민이 정신을 차리고 타박하는 것보다 류태현이 지쳐 울음을 그치는 것이 먼저였다.
눈물을 닦고 묵묵히 죽그릇을 다시 허강민 앞에 놓았다. 이젠 확실하게 다 식었다.
“야채죽이에요. 브로콜리가 뇌에 좋다더라고요.”
허강민이 이렇게 된 것은 머리가 나빠져서가 아니고 경찰병원에서도 뇌손상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그래도 뭐든 두뇌나 정신에 좋다는 이야기가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걱정 마세요. 총명탕이나 사이비 건강기능식품 같은 건 안 사와요. 민지은 씨가 그런 거에 엄청 빠삭하더라고요.”
순간 허강민의 입 안에 넣은 수저가 약간 밀려나왔으나 류태현은 기분 탓이려니 했다. 평소에도 허강민은 간혹 이유식을 거부하는 아기처럼 수저를 혀로 밀어내었다. 서투르게 밀어넣다가 입 안에 상처를 냈던 건 맹세코 처음 한 번뿐이었는데도.
이런 본능적 몸짓 하나하나에 혹시 정신 차리는 건가 하고 희망을 품는 것도 지치는 노릇이었다.
죽을 다 먹자 류태현은 죽그릇과 숟가락을 챙기고 입가를 닦아주고 옷에도 흘리지 않았나 꼼꼼히 살폈다. 자신도 이제 간병에 많이 능숙해진 덕으로 하나도 흘리지 않았다.
“아, 벌써 이렇게 됐네.”
당장 집에 가서 죽그릇에 물을 부어놓고 침대에 머릴 박지 않으면 네 시간도 못 자고 출근해야 했다. 그나마 마법사라서 다른 팀원들에 비하면 휴식시간을 보장받는 편인데 그 시간도 제대로 활용 못해 비실거리면 동료들 볼 낯이 없었다.
“그럼 다음 주에 다시 올게요. 안녕히 계세요!”
가방과 겉옷을 집어들고 뛰쳐나가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뒤에야 류태현은 또 안경을 씌워둔 채 나왔음을 깨달았다.
그야 당연히 계속 씌워두고 조금이라도 예전의 허강민다운 모습을 보고 싶지만 매일 세수를 시켜주고 잠을 재우는 사람은 시설 간병인들이었다.
‘다음엔 드링크보다 더 좋은 거 돌려야겠다.’
처음 한두 번은 안경 씌우지 말라고 대놓고 잔소리도 들었다. 그래서 류태현도 꼬박꼬박 나오기 전에 안경을 벗겨놓으려고 노력해왔다.
‘한동안 잘 했는데 또 한 소리 듣겠네.’
자기가 혼나는 건 상관없지만 자칫 강민 씨가 화풀이를 당하면 큰일이었다. 마침 도착한 버스에 어쩔 수 없이 오르면서도 간병인 선물로 뭐가 제일 비싸고 좋은 선물일지 고민했다.


시설 규정상 문병객이 다녀가면 바로 간병인이나 간호사가 병실과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게 되어있었다. 허강민은 금치산자로서 불기소 처분되었으나 중범죄자이기도 하므로 시설에선 규정을 꼬박꼬박 지켰다.
그래도 류태현 순경은 신분과 방문목적이 확실한 사람이고 문제를 일으킨 적도 한 번도 없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병실은 깔끔하고 물티슈와 휴지까지 사비로 넉넉히 갖다놓았다. 환자의 상태도 문병 전후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처음 한두 번은 감상에 젖은 탓인지 굳이 인사불성인 사람에게 안경을 씌워놓더니 이젠 그러지도 않았다. 이번에도 안경은 안경집 안에 곱게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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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태현 : 허강민 씨가 정신을 빨리 차리게 하는 좋은 방법이 있다고요?
하무열 : 자, 맡겨두라고.
일단 신진대사를 증진시키기 위한 효소액을 자네가 싸온 죽그릇에 투척!
그리고 미세먼지 정화와 전자파 차단을 위한 선인장!
거기에 혈액순환을 돕기 위해 게르마늄 팔찌를 채우면.......
허강민 : 그만 못해, 어디서 이상한 것만 주워듣고 와서!!!!!
하무열 : 봐라, 벌떡 일어났지.
류태현 :
허강민 :

검은 남자 79 ㅣ- 회색도시&검은방


“그래도 말이지, 무슨 수를 써서 쳐들어갈지 미리 말 좀 해봐라. 조금이라도 덜......”
류태현이 손을 자신 앞에서 이상하게 흔들었다고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하무열은 그대로 푹 쓰러져 잠들어버렸다.
류태현은 쓰러지는 하무열을 받아 바닥에 곱게 눕혔다. 그리고 최재석이 있는 방 안쪽을 향해 목소리를 키워 말했다.
“전 잠시 나가봐야겠습니다.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 주시고 함부로 방 밖으로 나오지 마세요.”
“그래!”
방 안에서 들려온 대답에 류태현은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현관문 앞에 섰다.
심호흡을 하고, 정신을 내부로 침잠시켰다.
두 손을 들어 입 안에 손가락을 넣었다. 아까 토해내고 남은 피고름이 침과 함께 흘러나왔다.
찐득해진 손을 꺼내자 주문도 같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최재석과 양씨 부자, 하무열이 들었더라면 도망가고 싶어졌을 만큼 끔찍한 목소리였다.
‘제정신을 유지한 채로 성공해 보이겠어.’
할 수 있다. 류태현은 그렇게 자신을 다잡았다.
아까의 주문은 성공했다. 그 마법사는 류태현의 저주를 받은 채로 클럽에 돌아갔고 실버 트와일라잇에 통로가 생겼다. 콘크리트 벽에 난 가는 틈 같은 통로지만 뚫고 들어갈 수 있었다.
셔츠 가슴의 주머니에 넣어둔 배준혁 형사의 살점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길잡이였다.
힘주어 문고리를 돌리고 밀었다.
그 너머에 펼쳐진 것은 심연이었다.
이미 자주 본 것이었다. 강성중의 꾐에 넘어가 제정신이 아니게 되었을 때. 그때 몇 번이고 아무렇지 않게 했던 일이니 제정신인 채로도 성공할 수 있었다.
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주머니 속의 살점이 류태현을 끌어당겼다. 그대로 끌려갔다.
배준혁에게 배운 마법이었다. 그의 담보물을 찾아가기 위해.
그가 자신에게 위험한 짓을 부추겼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카락이나 손톱, 발톱도 아니고 피 뚝뚝 떨어지는 살점을 받았을 때는 할 말을 잊었다.
치료 마법을 썼으니 괜찮다고 말하며 그는 화상 흉터 같은 흉터를 보여주었다. 제물로 쓸 피와 살을 도려낸 부위라 치료의 효과가 부족했고 흉터가 크게 남았다고 설명하는 얼굴이 너무 담담해서 류태현은 도리어 슬펐다.
반드시 성공해서 구해주고 싶었다. 그런 일에 담담해질 만큼 익숙해지는 건 사람으로서 용납할 수 없었다.
미쳤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어둠과 공허를 이제는 그런 결심으로 버텼다.
살점이 한 곳을 가리켰다. 자신이 만든 통로도 그쪽을 제대로 가리키고 있었다.
힘차게 그리로 걸어나갔다. 무모하게.
마법은 적당히 무모해야 쓸 수 있었다.
공간이 찢어지고 현실로 돌아왔다. 마법사의 연구실이었다.
“아, 맞게 왔다.”
그도 허강민의 조언대로 마법 시료와 연습용 마법진 등을 방에 갈무리해뒀다. 그러나 이렇게 진짜 마법 전용으로 꾸며둔 넓고 본격적인 방은 본 적이 없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영화 같네. 좀더 현대적인 과학 실험실 같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쪽으로 돌멩이를 던졌다. 지나온 통로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주운 덩어리라는 것밖엔 아무 것도 모르는 물질이었다.
류태현을 지팡이로 가리키려던 마법사가 당황한 듯 그 검은 덩이를 쳐냈다.
그 틈을 타 류태현이 달려들었다. 눈을 감고 마법으로 자신을 강화시키며. 미쳤던 경험은 류태현에게 많은 것을 남겼다. 이제까지 드러내지 않은 것은 허강민을 또 괴롭히게 될까봐 두려워서일 뿐이었다.
지금은 배준혁과 최재석, 양씨 부자를 위해, 그리고 허강민을 위해 제대로 무모해질 때였다.
마법사가 류태현을 향해 움직임을 묶는 저주를 내렸다.
그러나 류태현은 묶이려는 다리를 잘라내 벗어버리고 마법사의 멱살을 쥐었다. 경찰 될 때 훈련받은 대로 그를 바닥에 메어치고 잘라냈던 다리를 불러내 그의 가슴을 밟았다. 말발굽에 밟힌 마법사는 주문을 외우지 못하고 컥컥거렸다.
“잘했어. 이대로 체중을 실어 으스러뜨려.”
검은 남자가 류태현의 입으로 말했다. 형상은 여전히 검고 허강민과 똑같았다.
“어서. 아니면 곧장 반격해서 널 문어처럼 회를 떠버릴 놈이야. 너뿐만 아니라 네가 지키려는 모두를.”
배준혁 형사가 떠올랐다. 최재석과 양태수, 양시백, 허강민도 떠올랐다. 무열 선배와 국장님도.
안승범, 민지은, 여승아권현석오미정서재호임선호정은창서현진백건영양수연강수혁허대수김재하서준용장혜진정은영박다희윤지애김주환최두한허........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사람의 몸통이 아닌 낡은 골판지 상자처럼 느껴졌다.
“류태현!”
비명 같은 목소리가 정면에서 들려왔다.
류태현은 고개를 들었다. 검은 남자가 어느새 자신 안이 아닌 밖에 있었다.
게다가 다리 한쪽이 말발굽도 아니고, 새까맣게 물들어 있지 않았다.
“강민 씨?”
꼭 허강민 본인이 나타난 것 같아 류태현은 어리둥절해졌다. 발에서 힘이 풀렸다.
“듣지 말고 빨리 밟아!”
다시 내면을 잠식한 검은 남자가 소리질렀다.
“이런 놈을 살려둬서 또다시 사람들을 구하지 못하려고?”
그 말이 옳다. 머리로는 납득했으나 류태현은 선뜻 발을 움직이지 못했다. 이미 인간이라고 할 수도 없는 존재인데 차마 죽일 수 없었다.
눈앞의 꼭 진짜 강민 씨 같은 존재가 주머니에서 과도를 꺼내들었다. 과도였지만 마법이 걸려 있었다.
“네놈의 그 비겁함과 우유부단함이 도움이 될 때도 있군. 보통 사람이었다면 벌써 밟아 죽이고 밟아 죽이는 존재에게 집어삼켜졌을 텐데.”
혹시 진짜 허강민이냐고 물어보려는 순간 그가 과도를 바닥에 쓰러져 있는 마법사의 벌어진 입 안에 찔러넣었다.
“내가 죽였다. 그러니 넌 죽이지 않았어. 죽일 수도 없어.”
과도를 놓고 일어난 그가 류태현을 똑바로 보고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귀에는 꿈같이 감미롭게 들리는데 뱃속은 끔찍하게 뒤틀렸다.
“아......치사하잖아. 다 된 밥에.”
류태현의 입에서 검은 남자가 불평했다.
“기껏 오랜만에 괜찮은 제물을 집어삼키나 했더니.”
“그놈이 또 미쳐서 내가 또 위험해지기는 싫다.”
허강민의 말투는 평소대로 시니컬했지만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긴장하고 있었다.
검은 남자가 그를 비웃었다.
“그래서 내게 진심으로 맞서겠다고? 내 입 안에 든 먹이를 꺼내가겠다고?”
“그래.”
그 말이 떨어진 순간 류태현의 입이 찢어질 듯 열렸다. 사람 하나가 입을 통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얼굴이 터져나가는 통증에 몸이 휘청거렸다. 어느새 인간의 다리로 돌아와 있었다.
쓰러지는 류태현을 허강민이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그제야 류태현도 온전히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진짜 허강민 씨군요.”
“그래.”
아직 어안이 벙벙해 있던 류태현이 문득 한 걸음 물러나며 외쳤다.
“그, 그럴 리 없어! 허강민 씨는 지금......”
“배준혁 그 망할 놈의 저주로 뻗었다 이거지?”
허강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나 묻자. 강성중이 내 DNA 정보와 네 정보를 갖고 있었다는 거 정말 깜박 한 거냐?”
“아, 아뇨! 그럴 리가 있나요.”
류태현이 강변했다.
“전 그저, 설명하는 걸 깜박 잊었다는 뜻이었다고요. 강성중이 죽고 본산이 훼파되었으니 이제 강민 씨도 저도 자유의 몸이 되었는데, 그땐 그런 걸 설명할 정신이 없어서......”
“그래. 그리고 내가 미궁에서 만났을 때부터 마법을 전혀 못 쓴 건 누구 때문이었지?”
“강성중이 저주해서......아.”
류태현은 다시 얼빠진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래. 그놈이 죽었을 때 난 마법을 되찾았다. 어차피 당장 달아날 것도 아니고 해서 입 다물고 병원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더니......속인 사람도 없는데 다들 속은 거냐.”
“그래서 배 형사님이 건 저주도 스스로 깰 수 있었던 거군요.”
류태현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런 채로 허강민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멈춰섰다.
자신은 허강민을 납치하고 짓밟았던 사람이었다. 그에게 함부로 가까이 갈 자격이 없었다.
“하여간 너답게 멍청했다만.”
허강민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하무열 형사가 글자 그대로 혼비백산한 꼴을 보게 해줬으니 봐준다. 내가 조금만 더 상황을 늦게 눈치채고 찾아갔으면 도착했을 때쯤 울고 있었을걸.”
“무열 선배가요?”
아직 제정신이 덜 돌아와서 잘못 들었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됐고, 지금 잡담이나 할 때가 아냐.”
허강민이 기괴하게 나뭇결이 뒤틀려 있는 벽장으로 다가갔다.
“기껏 다시 미쳐버릴 위험을 감수하고 왔잖아. 목적은 달성해야지.”
“아, 그래야죠.”
방금 죽은 마법사가 배준혁의 스승이 확실하다 해도 그의 생체 조직과 강제로 했을 복종의 맹세는 따로 파기해야 했다.
거기에 내부 방비를 안에서 공격하는 몇 가지 덫만 더 설치하고 나가면, 그것으로 물밑 마법 침투는 일단락을 지을 수 있었다. 배준혁 형사가 행동의 자유를 얻는 순간 클럽에 잠입했던 잠입 요원이 되는 셈이니까.
마법사의 실험실에 익숙한 허강민은 류태현보다 훨씬 빠르게 목적한 것들을 찾아내었다. 배준혁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의 피와 살을 분류해 모아놓은 것은 통째로 태워버리고, 구석에 놓인 큰 수반으로 다가갔다.
이끼 낀 대리석 수반 안엔 핏물이 담겨 있고 배준혁의 사진이 바늘로 무언가 덩어리에 꽂힌 채 그 아래 가라앉아 있었다.
“역시 당장이라도 죽여버릴 준비 만만이었군.”
허강민이 주문을 읊으며 수반을 뒤엎어 버렸다. 그리고 사진만 건져내 역시 태워버렸다.
그는 무척 서두르는 중이었다. 언제 실버 트와일라잇의 다른 마법사들이 올지 모르므로 류태현은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허강민을 도와 마법 덫까지 설치를 끝냈다.
“이제 가자.”
“예.”
벽으로 다가가다가 류태현이 멈칫 했다.
“저, 공간 찢고 왔다갔다 하는 거 괜찮으세요?”
“멍청아. 내가 여기는 어떻게 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허강민이 인상을 쓰며 재촉했다.
“빨리 길 열기나 해.”
“옛.”
류태현이 왔을 때 열었던 틈을 다시 비집어 열었다. 그러자 허강민이 류태현의 손을 나서서 잡았다. 예전 공간의 틈을 찢고 허강민을 납치했던 일 때문에 주저할 틈도 주지 않았다.
류태현은 마음이 복잡했다. 그때 이후 허강민 앞에 나타나지 않느라 제대로 된 사죄도 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사죄할 여유도 없었다.
‘돌아가서 하면 돼.’
마음을 다잡고 공간의 틈으로 들어섰다.
‘돌아가서, 모두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허강민 씨한테 사죄하는 거야. 그리고 제때 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하자. 물론 날 걱정해서가 아니라 내가 성공 못 하면 국장님과 모두가 다 위험해지니까 온 거겠지만.’
그래도 그 허강민이 모두의 위험을 막으려고 싸웠다. 류태현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돌아가는 길은 더 멀게 느껴졌다. 갈 때에 비해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빠른 진행을 어렵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제정신을 유지해야 해.’
허강민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그가 아니었으면 아까 마법사를 죽이고 그대로 집어삼켜졌을 것이다. 검은 남자 본인을 상대로 겨루어 구해줬으니 지금 반드시 제정신을 유지하고 함께 무사히 빠져나가 보답해야 했다.


허강민은 처음엔 류태현의 걸음을 재촉하려 했다. 그러나 점차 그럴 여유도 잃어버렸다.
검은 남자의 입속에 든 먹이를 꺼낸 대가는 작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싸우고는 있지만, 현실 영역을 벗어나자 그 싸움은 더욱 힘들어졌다. 그렇다고 포기해버렸다간, 단순히 류태현 대신 집어삼켜지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몽롱해지는 정신을 몇 번이고 다시 추스르며 류태현의 손에 집중했다. 지금 유일하게 현실과 자신을 연결하는 매개체였다.
돌아가는 길이 영원처럼 길어진 것은 류태현의 마법이 보잘것 없어서가 아니었다. 검은 남자가 잡아 늘리고 있었다.
‘나가야 해.’
류태현의 손에 의지해 나가는 것이 수치스럽다든가 꺼려지지는 않았다.
그와 다른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건 허강민은 납치 건에 한해서는 딱히 류태현이 원망스럽지 않았다.
성인군자였다 해도 마법사가 되고 나면 그냥 괴물이었다. 하물며 류태현의 정신이 그 정도로 불안정해진 것은 자신의 밀실들 탓이었다. 류태현은 자신의 의도대로 망가진 것뿐이었다.
그러니 사과 받아주는 셈치고 지금은 류태현에게 의지해야 했다. 그래야 검은 남자가 정신에 침식해 들어오는 걸 막을 수 있었다.
검은 남자가 바로 뒤까지 따라온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돌아보지 않았다.
앞만 보고 가야 했다.
그 앞에 아무 것도 없다 해도.

케일란의 음유시인 12 (완) ㅣ- 기타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접니다.”
알렉시스의 목소리였다. 아비게일이 벌떡 일어났다.
“들어와. 안 잠갔어.”
알렉시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전 내내 어디서 뭐했어? 난 공부도.... 알렉시스?”
아비게일이 놀라 그에게 가까이 갔다.
“괜찮아? 얼굴이 창백해.”
“전 괜찮습니다. 리오나드는요?”
“응? 그야 저기 있지. 리오나드? 알렉시스야, 나와 봐.”
리오나드가 미적미적 나왔다. 그런데 아까와는 달리 표정이 어두웠다. 알렉시스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한쪽 다리를 끄는 걸 눈치 채고 아비게일이 뭐라 말하려 했다.
“움직이지 마세요. 둘 다.”
아비게일도 리오나드도 움직임을 멈췄다. 알렉시스가 리오나드의 팔을 잡고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알렉시스?”
아비게일이 충격 받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래.... 또 그를 의심하는 거야?”
“아니오.”
알렉시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건 아닌데....”
문이 열렸다. 콘라드와 에릭이 들어왔다.
에릭은 단검을 콘라드는 장전한 석궁을 들고 있었다. 아비게일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콘라드가 리오나드를 향해 석궁을 쏘았다. 배에 화살이 박히며 그가 뒤로 쓰러졌다.
“무슨...!”
아비게일이 콘라드를 보았다. 그리고 창백한 얼굴로 리오나드를 내려다보고 있는 알렉시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방금....”
“성에 숨어들어 백작 계승자를 죽이다니, 그런 놈은 현장에서 사살하는 게 당연하지.”
콘라드가 웃으며 말했다.
“어린 백작 영애가 어설픈 동정심으로 살인자를 숨겨주었다가 살해당하고, 소동을 듣고 달려온 후견인이 범인을 사살한 거지. 그 과정을 쭉.”
그가 알렉시스를 쳐다보았다.
“목격한 사람이 증언하면, 그 누가 아비게일의 죽음에 내 책임이 있다고 하겠어.”
아비게일의 얼굴이 파래졌다 붉어졌다. 그가 단검을 들고 자기에게 다가오는 에릭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사람을 죽였어? 죄를 덮어씌울 살인자를 만들기 위해? 그러고 누명을 씌워 또 사람을 죽여?”
그가 소리쳤다.
“알렉시스에겐 무슨 짓을 했어!”
에릭이 칼을 들어올렸다. 알렉시스가 달려가 에릭에게 몸을 날렸다.
“도망쳐요!”
에릭이 칼 든 손을 휘둘렀으나 알렉시스가 붙들고 늘어지는 바람에 아비게일에겐 닿지 않았다. 아비게일은 문으로 달렸다. 그 앞을 콘라드가 가로막았다.
“놔!”
에릭이 알렉시스의 머리카락을 잡고 바닥에 그의 머리를 처박았다.
“이제 와서....”
그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일어나려고 몸부림치던 알렉시스가 고개를 들었다.
에릭의 뒷목에 석궁 화살이 박혀 있었다.
“저 사람 활솜씨 굉장하네요, 그 거리에서 빗나가다니.”
리오나드가 쥐고 있던 화살대를 놓고 뒤로 물러났다. 숨이 끊어진 에릭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뭐......”
콘라드가 에릭의 시신을 멍청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그 틈을 타 빠져나가려는 아비게일을 잡고 끌어당겨 칼을 뽑았다.
“이, 이렇게 된 거.....”
그가 아비게일을 찌를 듯 칼을 들이댔다. 알렉시스가 리오나드를 보았다. 그가 가보라는 듯 그리로 고갯짓했다.
알렉시스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섰다. 그가 코앞까지 다가가도록 콘라드는 칼 쥔 손을 부들부들 떨 뿐 아비게일을 찌르지 못했다.
“어, 어째서....”
“글쎄요, 겁쟁이라서요?”
알렉시스가 그에게서 칼을 빼앗아들었다.


빈 객실에 정중하게 ‘감금’ 당한지 세 시간 뒤, 노크소리를 듣고 리오나드가 책상에서 고개를 들었다.
“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들어온 건 알렉시스 한 사람이었다. 문을 꼭 닫은 뒤 그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바닥에 닿을 듯 머리를 숙였다.
“들켰나.”
리온이 쓴웃음을 지었다.
“화살이 몸에 박히는 걸 보았습니다.”
알렉시스가 말했다.
“그러고도 멀쩡할 수 있는 사람이 달리 누가 있겠습니까.”
“정말 박힌 건 아니야. 방어마법에 더해 공격에 가담한 자들의 눈에는 공격이 성공한 것으로 보이도록 하는 환각을 겹쳐 걸어뒀거든.”
‘공격에 가담한’이라는 말에 알렉시스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건 아니지.”
리온이 말했다.
“처음부터 날 공격할 생각도 아가씨를 배신할 생각도 없었어. 사실은 내가, 단순한 요리 마법사가 아니라서, 그 상황을 어떻게든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 것 아닌가?”
“실은... 그렇습니다.”
알렉시스가 대답했다.
“날 끌어들여 이용하려고 한 건 조금 괘씸하지만.”
리온이 말했다.
“쭉 아가씨 편이던 사람을 협력하게 하면서 후견인 쪽에서 상당한 위협을 했겠지. 그런데 기댈 곳이 없어진 다음에도 동생을 구하려 했으니 화살이 빗나가는 정도 좋은 우연은 일어나줘도 좋겠지.”
알렉시스가 조금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 아셨습니까?”
“둘이 똑같은 표정으로 오이 싫다고 했을 때부터.”
알렉시스의 표정을 보고 리온이 싱긋 웃었다.
“말했듯 스승님이 오이를 싫어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왜 오이를 싫어하게 되는지 연구를 조금 해봤거든.”
“...네?”
“오이를 죽도록 싫어하는 성향은 핏줄을 타고 전해지는 경향이 있더군. 예외 없이 확실한 건 아니지만, 의심을 품고 생각해 볼 근거로는 충분하지.”
“하아.....”
“불편할 텐데 앉게.”
리온이 탁자를 가리켰다.
“어서. 난 사람 꿇려놓는 걸 좋아하지 않아.”
그 말에 알렉시스가 조심조심 일어나 의자에 가 앉았다.
“몸은 괜찮나?”
“네, 마법 의사에게 치료받았습니다.”
알렉시스가 대답했다.
“지내기 불편하신 점은 없으신지요.”
“불편할 만큼 오래 있을 필요가 없었으면 좋겠군. 말했듯이 일정이 있어 여기를 곧 떠나야 하거든.”
알렉시스는 ‘리오나드’와 나눴던 대화를 되새겨보았다.
“혹시 여기엔 그저 버섯을 맛보러 우연히 들리셨다는 말씀 사실이었습니까?”
“내 이름 말고는 전부 사실이야. ...미테나 벨포드에 대해서 했던 말들까지 말이지.”
알렉시스는 쥐구멍을 찾았다. 리온이 하하 웃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걸 몰랐어. 내가 벨포드를 총애하고 항상 곁에 둔 건 사실이지만 그건 내가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괴멸적으로 못 외우는데 벨포드는 그런 걸 매우 잘 기억해서 내게 엄청나게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거든.”
“...그렇습니까.”
“당시 사람들은 전부 알았어. 내가 워낙.... 그가 결혼을 늦게 한 건 소심하고 자격지심 강한 성격 때문에 도무지 연애를 하질 못해서 그런 거고. 내가 방해했다는 소문이 있었다니 그건 정말 뜻밖이야. 내가 너무 부려먹어서 연애할 시간도 없었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었다니.... 다행이네요.”
알렉시스가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잠시 침묵하며 할 말을 골랐다.
“결혼은 안 하셨어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부나 다름없이 지냈습니다. 두 분 사이도 좋았고 다른 사람한테 눈 돌리는 일도 제가 알기로는 없었고..... 일곱 살이 될 때 까지만 해도 전 그저 아버지가 일 관계로 여행을 많이 다니시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헤어지시더군요. 이제 슬슬 가문을 이을 적자가 필요하다고.”
리온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알렉시스가 조금 더 용기를 내었다.
“그 후로도 가끔 만나러 오기는 했습니다. 어머니와는 서로 남처럼 대했지만 저는 그래도 자식으로 생각하셨어요. 게으르고 재주 없는 제가 살기 힘들까봐 유산도 물려주고 싶어 하셨고.... 그런데 케일란은 작위 외의 재산은 별로 없었거든요.”
“그래서 전속 음유시인으로 종신 고용한 건가?”
“종신은 아닙니다. 제가 싫었어요. 아버지께서 절 위해 애쓰는 걸 알아도 그게 기쁘면서도 그래도 미웠거든요. 이 영지도. 그래서 아버지는 아비게일이 작위를 계승할 때까지만 돌봐달라고 하셨습니다. 후계자를 지키는 중요한 일이니 끝나고 나면 큰 몫의 재산을 떼어 받을 명분이 된다고.... 아버지를 빼앗아 간 적생자 따위 꼴도 보기 싫었지만, 아버지께서 절 위해 뭐라도 해주시려고 노력하는 건... 거절할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대신 벨포드를 미워하고 소녀의 낭만을 와장창 깨부쉈다고?”
알렉시스가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마음은 알아. 나도 동생을 질투해 본 적 있고.”
리온이 알렉시스에게 가서 그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었다.
“그래도, 동생이 귀여워서 다행이지?”
“...예.”
알렉시스가 한결 후련해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저는 계승권이 있었어도 좋은 영주는 못 되었을 겁니다. 후사를 얻을 자신도 없고요.”
리온이 질문하는 시선을 보냈다.
“전 남자가 좋아서요.”
“그런가.”
“네. 그러니 이게 최선입니다.”
“알겠네. 사건 쪽은 잘 수습되고 있나?”
리온이 물었다.
“네. 아비게일이 영지 관리인과 법률 자문을 불러들여서 사정을 설명하고 콘라드를 구금했습니다. 케일란에 백작이 없고 영주 대리가 얽힌 중한 범죄이니 고등법원으로 갈 거고... 새 후견인은 아마 제가 될 것 같습니다.”
알렉시스의 표정이 조금 찌그러졌다.
“저에 대해, 다들 알고 있었더라고요, 집사도 관리인도 모두? 저 아버지와 생긴 건 별로 안 닮았는데.... 말이랑 행동 하는 짓이 아버지 젊을 때랑 똑같다면서....”
알렉시스가 다시 한 번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니 제가 해도 아무도 반발하지 않을 거라며....”
“자네 아버지가 영주로서는 인망이 있었나보군. 그리고 어차피 그 애 계승식 할 때 까지는 책임져야 한다며.”
“이미 혼자서 잘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지요.... 뭐 프란츠 단장도 에릭 대장이 죽였다고 착각하고 있긴 하지만요.”
“착각하기 좋은 상황이긴 했지.”
리온이 가볍게 답했다. 알렉시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역시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건가요?”
“그럴 리가. 내가 배우들을 의심해 보자고 했던 건 상황으로 볼 때 그들이 가장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지. 비슷한 다른 살인으로 아가씨의 죽음을 희석하고자 했다면 극작가가 아니라 차라리 미테역을 맡은 배우를 죽이고 미테를 흉내 내는 사람은 다 죽이고 다니는 미치광이 범인을 만드는 게 나았을 테니 경비대장이나 후견인은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 자네가 그리 말하는 거 보면 역시 배우 누구겠지? 혹시 여배우?”
알렉시스가 불신의 눈초리를 하고 리온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정말 몰랐어.”
리온이 헛기침했다.
“그저 백 이십년 정도 살다 보면 굳이 생각을 안 해도 이게 이렇게 되겠구나 싶은 때가 있어서 그래.”
알렉시스는 올해가 두 번째 마왕 퇴치 100주년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리온이 스승의 명으로 이계신의 사교도들을 조사하기 시작한 게 그가 갓 스무 살이 되던 해라는 것도.
그는 알렉시스보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구했고, 지금은 그의 여섯 배 가까운 나이로 여전히 이십대의 모습을 하고 눈앞에 서있었다.
아득한 기분을 느끼며 알렉시스는 이걸 표현할 말을 찾을 수 없다니 역시 자신은 음유시인으로서 재능은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진범은 어떻게 할 거지?”
알렉시스가 조금 허둥거렸다.
“아... 그, 성의 첩보조직 같은 걸로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그가 리온의 눈치를 보았다.
“살인자를 처형하지 않고 이용하는 거 안 좋게 보이는 거 압니다만 그쪽도 사정은 있고.....”
“나에게 변명할 필요는 없네. 영주 대리는 자네 아닌가.”
“....네.”
“본의는 아니었어도 나도 정치판에서 오래 굴렀어. 편법을 뭐라고 할 입장은 아니지.”
“네.”
알렉시스가 조금 긴장을 풀었다.
“그래서....”
리온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더 늦으면 목적지에 한밤중에나 도착할 것 같은데.”
“아.... 가보셔야 한다고 하셨지요.”
알렉시스가 일어나 문으로 갔다. 리온이 그를 따라나왔다.
“정체를 밝히고 법정에 증인으로 서실 생각은 없으실테니 ‘지나가던 요리 마법사’에 대한 건 아비게일에게 말해 적당히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하지만 후견인도 날 봤겠다, 고등법원에서 문제가 될 것 같으면.”
리온이 히죽 웃었다.
“에브너 후작을 찾아 리오나드 볼크가 문제를 물어왔다고 하면 잘 해결해 줄 거야.”
알렉시스가 조금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 신분 증명을 발급해준 사람이군요.”
“그건 어떻게.”
“귀족 연감을 찾아봤습니다. 그 때 이미...”
알렉시스가 리온 쪽을 손짓했다.
“좀 의심하고 있어서요. 전하와 전혀 상관 없는 사람이라 아니겠지 싶었는데.”
“아, 그건 삼십...이 년 전에, 그가 아직 햇병아리일 때 내기를 해서 딴 거야.”
리온이 웃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난 사건에 잘 말려들어가거든.”
어떤 식이었을지 좀 짐작이 되었다. 알렉시스는 되도록 가엾은 에브너 후작을 괴롭히지 않는 선에서 사라진 요리사 문제를 잘 덮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수배는 중단했지만 혹시 모르니 직접 성문까지 배웅하겠습니다.”
“그래.”
경비대장의 사망과 영주 대리의 살인 미수로 성은 어수선했다. 상황이 너무 빨리 바뀌었으니 성문쪽 경비는 아직 소식을 못 들었을지도 모른다. 알렉시스가 경비대원 한 명을 손짓해 불러 호위하게 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리온이 공중으로 뭘 잡아 던지는 시늉을 했다. 헨드릭은 미친 사람 보듯 눈을 돌렸고 알렉시스는 못 본 척 했다.
“그런데 나 가는 거 동생한테는 말 안 해도 되나?”
리온이 물었다.
“...원래 동기간에는 가벼운 심술 정도는 부리기도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말에 리온이 폭소했다.
“눈치챈 건가?”
“그때 왜 시계탑 꼭대기에 계셨던 건지 생각해 봤거든요.”
알렉시스가 잠깐 생각했다.
“아비게일이 알면 두 분 다 사흘 밤낮을 안 놔줄텐데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아니, 가지.”
세 사람은 시장을 지나 성문으로 왔다. 성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이 리온을 보고 놀랐으나 헨드릭이 그들에게 가서 속삭이는 동안 알렉시스와 리온은 문 앞에 가 섰다.
“심술도 좋지만, 동생한텐 잘해줘야 하는 거야.”
리온이 말했다.
“자네는 정말 동생보다 먼저 죽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사람일은 모르는 거잖아.”
그 말만 남기고 리온이 성벽 밖으로 걸어 나갔다. 분명 걷고 있는데, 달리는 것보다 더 빠르게 뒷모습이 멀어져갔다.
알렉시스가 눈을 깜빡였다. 그가 눈이 나쁘긴 해도 저 작은 회색덩어리가 달려가는 앞에 빨간 점이 있는 건 볼 수 있었다.
“아비게일이 알면 내 머리를 쥐어뜯으려고 들겠지....”
그래도 상관 없었다. 원래 남매는 그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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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테~!!”
멀리서부터 손을 흔드는 리온을 보며 미테가 일어섰다. 걷는지 나는지 순식간에 다가온 그가 미테를 보고 싱긋 웃었다.
“와, 미테.... 못 본 새 많이 늙었구나.”
“응.”
미테가 환하게 웃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살기를 못 본 것처럼 리온도 표정이 환했다.
“꼭 클라시아경 처음 만났을 때 같아.”
“......못 본 새 많이 어른이 되었구나, 리온. 다른 사람의 외모에 대해 듣기 좋은 소리를 해 줄 줄도 알게 되고.”
미테가 주먹을 펴고 리온의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었다.
“어, 혹시 화났어?”
“아니. 백 살 넘어간 뒤 들은 말 중에서 최고로 기분 좋아.”
하프엘프의 수명이 길어도 미테는 이미 노인이었다. 붉은 머리는 희끗희끗하게 세었고 얼굴도 손도 주름이 졌다.
“너는 하나도 안 늙었네.”
미테가 리온을 보았다.
“아직 더 알고 싶은 게 많거든.”
리온이 미테의 손을 잡았다.
“직접 만나는 건 십 년 만인가?”
“그보다 더 된 것 같은데. 너 타몰렌드로 떠나기 전에도 한동안 못 봤으니까.”
“앞으론 좀 더 자주 만나자. 편지를 주고 받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직접 보기도 하는 게 좋겠어. 우리 둘 다 바쁘기는 해도...”
리온이 말을 삼켰다.
“이번 기념식엔 펠레아스도 온대.”
‘새 용사들’ 중 지금까지 살아있는 건 이들 셋 뿐이었다. 그리고 늦어도 삼십년 뒤에는 둘이 될테고, 언젠가는 혼자가 된다.
“난 괜찮아. 스승님도 아직 정정하시고.”
리온이 짐꾸러미에서 길쭉한 원통형 물건을 뽑아들었다. 펼쳐놓은 걸 보니 널찍하게 네모난 융단이었다.
“이걸로 가자. 오늘 밤에는 벨렘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너 어제 왜 나더러 케일란에 들어오지 말라고 전했던 거야?”
미테가 물었다.
“문제가 생긴 거면, 너는 왜 바로 안 나왔고?”
“아, 그게 이야기가 조금 길어. 내가 또 살인용의자가 되었거든.”
“...몇 번 째냐.”
“아직 세 자릿수는 아니라고 생각해. 그리고 너도 용의자가 되었던 적 많았잖아.”
“많았지. 우리가 같이 된 적도 많았고.”
미테렌시드가 융단 위에 앉았다. 리온도 앉자 그게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나, 케일란에 널 좋아하고 동경하는 백작 영애가 살았는데.....”
“네가 말하면 인명이 하나도 안 등장하니까 꼭 아주 옛날 얘기 같아. 바로 어제 오늘 있었던 일일 텐데.”
“일단 들어줘. 그리고 아가씨와 친한 음유시인이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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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습니다아~~ ^ㅇ^ 이만하면 만족스럽게 썼네요.

이야기 중에 넣을 기회가 없어서 못 나왔지만 플로라의 최애캐는 루시텔이랍니다. 호박 브로치도 갖고 있고 점도 치지요. 플로라는 미테를 싫어하지만, 만나면 말은 잘 통할 지도 모릅니다. 미테도 루시텔은 좋아하니까요. :)

영주 대리가 되어 기사 작위를 받은 알렉시스 경과 이제 곧 어른이 될 아비게일이 벨렘에 가서 사교계 데뷔를 하려다 사건이 벌어져서 그들에 더해 에브너 후작도 등장하고 플로라가 부려 먹히는 이야기도 보고 싶네요. 알렉시스는 연애하고 아비게일은 미테를 만나고 리온은 적당히 멍청한 봉을 잡아 새 신분증명을 삥뜯고......
언젠가... 수도 사교계에서 벌어질만한 살인 사건이 떠오르면요. ^^


케일란의 음유시인 11 ㅣ- 기타


정신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성에 도착했다. 어차피 고발할 거라면 아비게일에게 보고하지 않고 고발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장차 백작이 되려면 이런 결정 내리는 것도 연습 해둬야 하는 건 아닐까 망설이며 알렉시스가 홀을 서성였다.
그러다 선대 백작의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다.
나이든 뒤에 그린 거라 그림인데도 안색이 나빠 보였다. 눈동자 색은 아비게일이 좀 더 옅지만 눈매는 그대로 닮았다. 혈색 없는 얇은 입술은 아비게일과 딴판이지만 사람의 인상은 눈이 결정하는 거라 둘은 무척 비슷해 보였다.
그래도 아비게일이 병약한 체질이나 잔걱정 많은 성격은 안 닮아서 다행이라고 알렉시스는 생각했다. 저 사람에게서 닮을 가치가 있는 건 얼굴하고 마흔이 넘어가도 전혀 벗겨지지 않은 머리숱 정도였다.
괜히 자기 머리를 한 번 만져보고 알렉시스가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눈 앞을 가로막은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경비대장님?”
발소리를 못 들었기 때문에 이상해서 알렉시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에릭은 평소와는 달리 징 박힌 부츠가 아니라 실내용 덧신을 신고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구체화하기도 전에 팔이 잡혔다.
“잠깐 이야기 좀 해야겠다.”
“네? 갑자기 무슨 이야기요?”
“시끄럽다. 조용히 따라와.”
커다랗고 굵은 손가락이 팔을 파고들었다. 알렉시스는 비명이 나오는 걸 참으며 그를 따라갔다.
“저.... 안 도망가니까 웬만하면 말로 해주세요.”
“그래. 안 도망가는 게 좋을 거다.”
에릭은 계속 그를 끌고 갔다.
‘그러니까 놔달라고!’
항의를 하든 않든 결과가 똑같은 게 너무 뻔해서 알렉시스는 입을 열 용기를 잃고 말았다. 곧 목적지에 도착한 에릭이 문을 열고 그를 안으로 던져 넣었다.
‘난 푸대자루가 아니라고.....’
융단 깔린 바닥에 엎어지고 고개를 들자 고풍스러운 큰 책상이 보였다. 그 옆에 있는 건 레너 남작의 다리였다.
“그냥.... 부르셨어도 될 텐데요.”
“알렉시스 혼.”
콘라드가 그를 내려다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가 옆으로 가서 벽에 박혀있는 커다란 구슬에 손을 대었다. 성주의 집무실에 설치된 보안용 소리 차단 마법이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소리 없이 문을 닫고 등 뒤에 와서 선 에릭을 의식하며 알렉시스가 마른침을 삼켰다.
“어떤... 상황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멍청한 척 하지 마라. 그렇지 않다는 것 이미 알고 있으니까.”
콘라드가 차갑게 말했다.
속은 어떻든 겉으로는 문제없이 처신하던 그가 이렇게 대놓고 행동에 나서다니. 이들은 자기를 살려 보내줄 생각이 없는 거다.
꼴사납게 덜덜 떨지 않으려고 알렉시스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하지만 남작님이 백작이 되실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도 이들이 무슨 생각으로 지금 행동에 나섰는지는 알아야했다. 알고 나면 뭔가 방법이 생길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었다.
“아가씨가 어떻게 죽든 후견인이 책임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살해는 고사하고 사고사나 천재지변이라 해도요.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저절로 죽기에는 아비게일은 병도 없고 건강하지요. 방법이 없습니다. 포기하세요.”
상속 순위가 낮은 후견인이 피후견인을 해쳐서 작위나 재산을 가로채는 걸 막기 위해 피후견인이 사망하면 후견인은 범죄를 저지른 증거가 없어도 정황 의심만으로도 피후견인의 자산을 상속받을 수 없게 되어있다.
“그래, 상속자의 후견인으로 지정되는 건 자기 상속권이 박탈되는 거나 마찬가지지.”
콘라드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하지만 내가 아비게일의 죽음에 정말로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증명할 수 있다면 그 문제가 해결된다.”
“그걸 어떻게 증명하실 건데요?”
이건 조금 진심으로 궁금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무죄를 증명하는 건 유죄를 증명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누가 봐도 확실하게 아비게일의 편인 사람이 사건을 목격하고 나의 무고함을 증언한다면 큰 도움이 되겠지.”
알렉시스의 얼굴이 굳었다.
“농담 마십쇼. 내가 왜.”
“스텔라 혼이 크레케발트에 있더군.”
알렉시스가 얼어붙었다. 콘라드가 히죽 웃었다.
“못 찾을 거라고 생각했나?”
“.....까마귀 둥지 코앞에서 살인을 할 수는 없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알렉시스가 겨우 내뱉었다.
“반드시 들킬 거고, 그러면.....”
“순진하긴.”
콘라드가 알렉시스의 머리를 토닥였다.
“정말 그 정도 확신에 어머니를 걸 수 있나? 응?”
알렉시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래봤자 고작 음유시인의 증언입니다.”
그가 필사적으로 호소했다.
“아비게일이 절 좀 가까이 뒀다고 해도, 이런 근본 모를 사생아의 말을 누가 그렇게 믿어준다고......”
“모를 줄 알았나?”
콘라드가 책상에서 서류 한 장을 집어 들어 흔들었다.
“루드비히는 잘 숨겼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스물 겨우 넘은 애송이를 데려다 전속 음유시인으로 앉혀놓고 해고도 못하게 감싸놓고 말이야. 그렇게 눈앞에 뻔히 보이는데 어떻게 모를 수 있겠나.”
콘라드가 손을 놓자 그 종이가 알렉시스의 눈 앞에 떨어져 놓였다.
스텔라 혼과 루드비히 포스트너 사이의 혼외자 알렉시스 혼의 출생 증명서였다.
“당시 루드비히는 총각이었고 배우자를 속이거나 한 게 아니니 너는 작위 상속권은 없어도 아들로 공식 인정은 받을 수 있지.”
콘라드가 말했다.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여동생을 힘써 돌보던 오빠의 증언이면 신빙성은 충분하지 않겠나.”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떨리는 손을 꽉 주먹 쥐었다.
“거절한다면....”
“너까지 죽을 필요는 없다.”
내내 아무 말도 없이 서있던 에릭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네가 여기서 발버둥 쳐봐야 어차피 아비게일을 구할 수는 없어.”
“왜죠?”
알렉시스가 에릭을 올려다보았다.
“왜 콘라드 편에 선건가요? 뭘 원해서?”
어깨를 짚었던 손이 목을 감쌌다. 이대로 죽이려는 걸까 긴장했으나 그 손은 목을 죄어오지는 않았다. 그 엄지손가락이 아랫입술을 건드리자 알렉시스는 답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그가 낮게 신음했다.
“그러게나 말이다.”
에릭이 동의했다.
“얼굴은 별로 닮지 않았는데.”
기가 막혀 알렉시스는 혀라도 깨물고 싶었다. 그럴 거면 왜 아버지를 많이 닮은 아비게일에게 눈 돌리지 않았냐고 하려다 그건 너무 소름끼쳐서 차라리 자기여서 다행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잠시 했다.
“아비게일을 살려주세요.”
알렉시스가 빌었다.
“꼭 죽일 필요는 없잖아요. 백작의 업무를 수행할 수 없을 만큼 영구적인 손상을 입는다면. 그러니까, 목숨만이라도.....”
“지금 장난하는 거냐?”
콘라드가 비웃었다.
“그래놓고 마법의사나 고위 사제에게 데려가면 된다고 머리 굴리고 있지?”
“사, 상처가 썩으면 치료 마법도 안 듣는다고 들었습니다!”
알렉시스가 필사적으로 호소했다.
“어차피, 이번 살인 사건의 범인에게 뒤집어씌우시려는 거지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 사람 요리 마법사라고 하니 분명 부패시키는 마법을 알 겁니다. 그러니 목이나 눈을 상하게 해서...”
“그걸 너는 어찌 알지?”
콘라드가 물었다.
“그 사람이 지금 아비게일의 방에 숨어있으니까요.”
알렉시스가 실토했다.
“누명을 씌우려면 지금이 딱 좋은 상황이니까, 저도 협력할테니 제발...”
“헛소리 하지 마라.”
콘라드가 알렉시스의 배를 걷어찼다.
“무리하게 욕심 부리다 다 잃게 되는 옛날이야기는 많이 알고 있을 텐데, 응? 음유시인이니까.”
그가 알렉시스의 무릎을 발로 밟아 짓이겼다.
“너와 네 어미 목숨까지 잃고 싶은 게 아니라면 쓸데없는 소리 말고....”
에릭이 알렉시스의 몸을 뒤로 잡아당겨 빼내었다. 발밑이 사라져 조금 휘청거리고 콘라드가 인상을 썼다.
“아, 그래. 거래 안 잊었어.”
그가 에릭을 노려보았다.
“그 놈이 쓸데없는 소리 못 지껄이게 하는 건 그럼 알아서 해. 들키면 끝장인 건 자네도 마찬가지인 거 명심하고. 제대로 길을 들여. 딴 짓 못하게.”
“물론입니다.”
에릭이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알렉시스를 일으켰다.
“차라리 곱게 구애를 했으면 거절하지 않았을 텐데요.”
알렉시스가 절망에 찬 눈으로 에릭을 올려다보았다.
“그랬나.”
에릭이 씁쓸한 표정을 했다.
“그래도 이젠 늦었겠지.”


아비게일이 크러이시아어 숙제를 하는 동안 리오나드는 그걸 옆에서 넘겨다보았다.
“거기 틀렸는데요.”
“엥? 어디?”
“셋째 줄 ‘따뜻한’ 이요. 날씨는 단수라서 그렇게 쓰면 ‘벌레들의 계절’이 되어요.”
“히익.”
아비게일이 서둘러 단어 위에 줄을 긋고 복수형을 단수형으로 고쳤다.
“크러이시아어는 왜 이리 복잡한 거야....”
“복잡한 만큼 의미가 명료하잖아요.”
리오나드가 말했다.
“방언은 자주 쓰는 단어 몇 개에 온갖 뜻을 다 밀어 넣어놔서 도리어 헷갈린다고요. 맥락이 없이 한 문장만으로는 의미 파악이 안 될 지경이라니.”
“리오나드는 요리사라며, 요리에도 크러이시아어가 필요한 거야?”
“어, 옛날 요리책 같은 것도 있고요, 마법을 쓰니까요. 마법은 간단한 거라도 고대 크러이시아어가 필요해서요.”
“마법 좋겠다.”
아비게일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마법 쓸 수 있었으면....”
“공기를 데우려다 벌레들이....”
“으아아아아아아!”
아비게일이 책을 들어 리오나드를 때리려고 했다. 그는 웃으며 아비게일을 피해 도망갔다.
“..어?”
그가 갑자가 멈춰 섰다. 아비게일도 멈췄다.
“왜 그래?”
“저는 저기 들어가 있을게요.”
잠시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다 리오나드가 시녀방으로 사라졌다. 아비게일은 잠시 궁금해 하다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누가 오나?’



케일란의 음유시인 10 ㅣ- 기타


“그래서 경비대는 저나 미테렌시드를 찾으려고 계속 시내를 수색중인가요?”
리오나드가 물었다.
“아마도. 달리 범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없으니까.”
알렉시스가 대답해주었다.
“아가씨 아니었다면 지금쯤 자백하라며 두들겨 맞고 있었겠네요...”
그가 하품을 했다.
“그런데 이제는 자야하지 않을까요? 어릴 때 일찍 자야 키가 크는 거에요.”
아비게일은 자긴 어리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래서 안 자겠다고 버티다가 키가 안 크면 어쩌나 무섭기도 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게요. 자긴 자야 하는데...”
이미 다 큰 알렉시스는 그 걱정은 없었지만 이대로 자기엔 다른 문제가 있었다.
“제가 아가씨 곁에 있는 게 걱정되면, 어디 다른 빈 방이나 숨을만한 곳이 있을까요?”
리오나드가 물었다.
“하지만 돌아다니다 들킬지도 모르잖아.”
아비게일이 말했다.
“이 층은 침실이 나와 콘라드 아저씨 것밖에 없어서 하인들도 별로 안 돌아다니지만 알렉시스 방 근처만 해도..”
“네, 숨으려면 여기가 제일 낫기는 하지요.”
성주인 아가씨의 방이라 아무도 함부로 드나들기는 고사하고 문 앞을 알짱거릴 수도 없다.
“뭐든 나쁜 낌새가 보이면 바로 사람을 부르세요. 이 사람은 수배범인거 잊지 마시고요.”
“도망중인 용의자일 뿐인데...”
투덜대며 리오나드가 시녀방으로 갔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가 들어가는 걸 보고 아비게일이 알렉시스를 보았다.
“제가 너무 의심한다고 생각하세요?”
“솔직히 그렇긴 해. 남자니까 더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것도 있고요...”
알렉시스가 시녀방 쪽을 흘끔거리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살인범으로 몰려서 자칫했으면 억울하게 맞고 있었을 거라는 말을 하면서, 태연하게 하품이나 하다니 정상은 아니라고요.”
“음.”
그 말은 아비게일도 수긍했다.
“두벤 영지에서 여기까지 일 없이 여행을 왔다는 것도 의심스럽고요.”
“그건 지나가던 길이랬잖아.”
“거기서 여길 거쳐 갈 만한 방향은 카마인 산맥 정도 되겠는데요. 아니면 아예 아우러스 사막을 건너거나.”
어떻게 생각해도 국경 지방의 시골구석은 지나가다 들르기엔 적합지 못했다. 살인범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래도 수상하긴 했다.
“주의할게.”
아비게일이 진지하게 말했다.
“네.”
알렉시스가 방을 나갔다. 아비게일은 시녀를 불러 잘 준비를 했다.


이 날 알렉시스는 잠을 설쳤다.
언제 아비게일이 비명 지르며 그를 부를까 몰라서만은 아니었다. 리오나드가 의심스럽긴 하지만 그가 아비게일을 해칠 의도였다면 이미 몇 번이나 기회는 있었다.
이 날 아침은 아비게일이 깨우러 오지 않았다. 졸린 걸 참고 억지로 일어나 아침식사 자리에 나온 아비게일을 확인하고 그는 밖으로 나갔다.
알렉시스는 먼저 시장을 둘러보았다. 이틀 전보다는 점포가 많이 들어차서 아직은 이른 시각인데도 불구하고 시장은 활기차 보였다. 그래도 곳곳에 무장하고 돌아다니는 경비병들이 보였다.
시장이 성문에서 멀지 않았기 때문에 좀 더 돌아다니다 보니 성문에서 검문하는 게 보였다. 축제 직전이라 드나드는 사람이 많을 때인데도 불구하고 검문은 엄격한 것 같았다. 들어오는 줄은 그래도 쭉쭉 줄어드는데 나가는 줄은 오래 걸렸다. 나가는 사람이 많지 않아 다행이었다.
‘정말로 외부인이 저지르고 도망갈 걸 걱정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리오나드를 잡아 그에게 다 뒤집어씌울 생각을 하고 있거나. 그러나 순순히 뒤집어쓸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은 이미 확신이었다. 만약 아비게일이 그를 발견해서 숨겨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알렉시스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그가 델로레인의 첩자여서 사막 이쪽 국경의 방비상태 같은 걸 알아보고 가려고 침투한 거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라도 정체가 확실해지면 그 이상은 경계할 필요 없을 테니까.
귀족 연감에서 찾아본 바로 두벤 영지의 주인은 에브너 후작이란 사람이었다. 고등법원의 명망있는 검사고 가문은 중립파라 누굴 위해서건 가짜 민적 문서를 만들어줬을 것 같지는 않은 인물이었다.
리오넬 전하와 연관이 없는 것도 확실하고.
‘역시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생각하면 등 뒤로 한기가 흘렀다. 자기가 그에게 칼 들이댔던 걸 생각하면 더욱. 리오나드의 정체가 새 용사 중 한 명일 가능성 보다는 미테렌시드가 정말로 케일란에 와있을 가능성이 더 높을 거라고 생각하며 알렉시스는 발길을 돌려 광장으로 갔다.
광장 한쪽에는 여전히 연극 무대가 있었다. 그리고 천막 옆에 [미테렌시드의 분노를 산 바로 그 연극!] [얼마나 발칙한 내용인지 직접 확인하세요!] 라고 쓴 종이가 붙어있었다.
“......하?”
알렉시스가 무대 주변을 둘러보았다. 포장을 친 범위를 눈대중해보니 그저께보다 어제 더 손님이 많이 든 게 분명했다.
‘이 사람들이 이거......’
알렉시스가 서둘러 별채로 갔다. 여전히 경비대원이 보초를 서고 있는 걸 보고 조금 움찔했지만 그 대원은 별 말 없이 알렉시스를 통과시켜주었다.


“살인을 홍보에 잘 써먹고 계시더군요.”
알렉시스가 들어가자 반가워하던 플로라의 표정이 빠르게 난처한 미소로 바뀌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우린 한철 장사니까. 하지제 이후 계속 여기 머무를 수도 없는 저희는 수확제까지 먹고살 만큼 지금 벌어야 하는 걸요. 불길하고 무섭다고 사람들이 안 오게 놔둘 수는 없다고요.”
알렉시스가 아무 말 하지 않자 플로라가 조금 더 표정을 풀었다.
“그래도 특히 비열한 대사 몇몇은 공연할 때는 슬쩍 까먹었답니다. 연기 방식도 덜 비굴하게 고쳤고요.”
“네, 그건 좋습니다. 상황도 알겠고요.”
알렉시스가 방안을 둘러보았다. 이번에는 플로라와 둘만, 바로 그 단장이 죽었던 방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소품 화살을 칼자국에 박아둔 건가요?”
플로라의 미소가 흔들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미테렌시드를 모욕하는 연기를 하고, 그게 무서워서 헛것을 봤다 말하고, 다음날 극작가가 죽자 새파랗게 질려 떨며 미테렌시드가 화가 나 죽였을 거라고 말해놓고 바로 그 날 저녁 연극은 그 내용을 그대로 공연하는 걸로 모자라 그 점을 홍보하기까지 하다니 좀 연기에 일관성이 없다는 생각 안 드시나요?”
웃음을 지운 플로라가 그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극단에는 여러 사람이 있습니다. 살인 사건으로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보자고 제안한 건 게르다에요.”
“그리고 당신도 찬성했고요.”
플로라는 더 말하지 않고 알렉시스를 노려보기만 했다.
“저와 아가씨가 다녀간 뒤, 여러분은 이 ‘전속 계약’에 위험한 문제가 딸려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아비게일 아가씨 쪽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거죠. 판단 근거는 알 수 없지만.”
설명하며 알렉시스는 플로라의 손을 흘끔 살폈다.
“그러나 단장은 큰 영지의 전속 음유시인이 될 기회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계승경쟁에 말려들어 피해보지 않고 조용히 빠져나가려면, 여러분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계약 연장에 실패하고 쫓겨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거지요? 단장의 반대를 꺾을 방법도 되고요. 범인은 증명할 수 없도록 미테렌시드에게 혐의가 가도록 해두고 자극적인 사건으로 손님을 끌어 모아 공연을 계속하면 극단도 손해는 안 볼 테니까요.”
“공연을 못 하고 어제 쫓겨났을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아가씨에게 호감을 샀고 제가 여기 음유시인인 것도 알았지요. 아가씨는 관대한 사람이니 미테렌시드를 모욕한 건 본심이 아니었다고 눈물로 호소하면 이번 하지제 연극 정도는 계속할 수 있게 해줄 거라 생각한 것 아닌가요?”
“하지제 직전에 살인 사건이 난 책임을 뜨내기에게 지워 해결해 버리고 싶으신 것 같네요.”
“그건 경비대가 하고 있는 짓이지요, 제가 아니라. 그들이 다른 뜨내기 하나를 살인죄를 덮어씌우려고 찾고 있는데, 우리 아가씨가 좀 그런 걸 용납 안 해서요.”
“그렇다면 저희가 아가씨를 위해 일할 수 있어요.”
플로라가 말했다.
“무고한 사람이 목이 매달릴 게 걱정이라면 저희가 빼내면 됩니다. 경비대와 사이좋지는 않은 것 같던데 그쪽의 위신을 깎아둬서 나쁠 건 없겠죠. 알렉시스씨는 음유시인이니 유랑극단이 얼마나 유용할 수 있는지 아실 거라고 생각해요. 뜨내기 한 명의 목숨까지 걱정해주는 그런 아가씨가 백작이 되시려면 더러운 일을 처리할 수하가 꼭 필요하실 텐데요.”
알렉시스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어째서.... 아가씨 쪽에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건가요?”
한참 있다 알렉시스가 물었다.
“우리 같은 사람이 점술가를 겸하는 게 이상한가요?”
“그것만으로 사람을 죽이는 건 이상하지요.”
“그건 확실히 이상하네요.”
알렉시스가 플로라를 바라보았다.
“그것 ‘만’ 이라기엔...... 밤에 둘만 같이 있을 기회가 있었다고만 말씀드릴게요.”
플로라가 불편한 기색으로 눈을 돌렸다.
“다른 무고한 사람이 말려들게 할 생각은 없어요. 미테렌시드 정도면 괜찮은 미끼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자기가 연기하는 인물에 애정이 전혀 없군요.”
“있어야 하나요?”
플로라가 반문했다.
“약자들을 위해 일했다느니 세상을 구했다느니 해 봐야, 그 여잔 그냥 자기 멋대로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 것 뿐이잖아요.”
지금 아비게일의 방에 있을 두 사람이 이 소릴 들었다면 아마 가만히는 안 있을 것이다.
“정말 아가씨를 위해 일하고 싶다면 미테렌시드를 모욕하지 않는 것부터 해야겠군요.”
알렉시스가 일어났다.
“우릴 고발할 건가요?”
플로라의 표정이 매서워졌다.
“증거는 없어요. 그리고 그 경비대장이 정말 그런 결론을, 그것도 당신이 밝혀내는 걸 반길 거라고 생각해요?”
“고발하러 가는 거 아니에요. 아가씨께 보고하러 가는 거지. 일한다면서요. 아가씨를 위해.”
플로라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이런 걸 그 아가씨한테....”
“정말 일할 생각이 있다면 아가씨를 바보취급하지 않는 법도 배우도록 해요.”
알렉시스가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두 번 다시 이런 짓 하지 말아야지.....’
알렉시스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며 빠르게 별채에서 멀어졌다.
상대를 얕봤다. 극단의 누군가가 범인이라고 짐작했을 땐 달리 물증이 없으니 가서 찔러보면 자백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플로라에게 말한 건 ‘미테렌시드 목격담’으로 보아 최소한 공범이 확실하고 또 범행을 들킨 그가 난폭하게 나오더라도 여배우 한 명 정도는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경비대원도 입구를 지키고 있으니 위험하지는 않을 거라고, 그러니 살인범과 둘만 마주해도 괜찮을 거라고.
그러나 실제로 플로라는 시종일관 침착하고 범행을 인정하지 않으며 역으로 협력을 제안하기까지 했다. 아비게일을 언급해서 간신히 말려들지 않고 빠져나오는 데 성공은 했지만, 만약 플로라가 거기서 그를 죽이는 게 낫겠다고 결정했더라면 자기가 과연 살아나올 수 있었을까 알렉시스는 별로 자신이 없었다.
‘.......그런 만큼 솔깃한 이야기이기는 한데.’
음유시인의 기예는 음악과 시가만이 아니었다. 교묘한 말솜씨와 연기력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적을 염탐하고 소문을 수집해 비밀을 알아내거나 반대로 소문을 퍼트려 비밀을 감추는 것도 역시 그들의 영역이었다.
그러니 별로 업무 외 일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더러 지금 ‘케일란의 스파이 마스터’ 같은 게 되고 싶냐고 한다면.
‘계약 조건은 계승까지만 이었는데.’
아비게일이 성인이 되어 작위를 계승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알렉시스는 정말 그 때 끝내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 삼 년 가까이 남았어.’
그가 속으로 되뇌었다.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역시 능력이 탐나는 것과는 별개로 플로라는 고발하는 게 옳을 것이다. 리오나드 문제도 있고, 아비게일이 살인자를 이용하기 좋아서 놓아주는 일에 찬성할 것 같지 않았다. 에릭이 반기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은 들지만 어차피 그도 지금 아가씨와 끝장을 보려는 건 아닐 것이다. 누명을 못 씌워서 아비게일의 명예에 흠집을 좀 못 내는 정도로 난리칠 이유는 없었다. 정 불만스러워하면 살인범을 찾아낸 공로를 양보해주면 될 거고.



케일란의 음유시인 9 ㅣ- 기타




아비게일은 알렉시스를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홀 가운데 걸린 선대 백작의 초상화를 올려다보다 그가 발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가씨.”
“나도, 같이 경비대에 가볼까 하고.”
“굳이 그러실 필요 없는데..”
“그래도 같이 가자.”
아비게일이 알렉시스의 팔을 잡았다. 알렉시스가 순순히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둘은 잠시 말없이 걸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세요?”
알렉시스가 먼저 물었다.
“어, 음, 그게.....”
아비게일이 망설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알렉시스의 부모님은 어떤 사람들이야?”
알렉시스의 발걸음이 멎었다.
“이미 짐작하신 것 같지만, 전 사생아입니다.”
알렉시스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는 음유시인이고, 노래도 잘하시긴 하는데 작곡이 더 전문이시고요. 꽤 규모 있는 극장의 전속 작곡가로 계세요. 딴.. 그러니까 제 아버지는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하셨고.”
“어, 그렇구나.”
아비게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어딘가의 귀족이라지만 별 의미는 없지요. 제게 계승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어렸을 땐 가끔 만났어요.”
“지금은 아니고?”
알렉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책임하네.”
“그렇죠.”
알렉시스도 동의했다.
“그래서 아가씨는 연애놀음 같은 거 하지 말고 되도록 빨리 아가씨 마음에 들고 성의 살림을 맡을만한 참한 귀족 영식을 하나 구해서 정식으로 결혼하고 후계자를 보셨으면 좋겠어요.”
“어....응.”
“그러니 내년 정도에는 벨렘으로 올라가서 사교계 데뷔를 하시는 게 좋겠지요. 열 일곱이면 좀 이르긴 하지만 상황이 이러니까 다들 이해할거고, 집안이 힘이 있는 남자와 약혼하게 되면 작위를 순조롭게 계승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요.”
“반대로 시가의 내정간섭에 시달릴 수도 있지.”
아비게일이 지적했다.
“...네, 그렇죠.”
“결혼하기 싫다는 건 아니야. 그저...”
아비게일이 조금 풀이 죽었다.
“확실히, 아버지께서 오래 살아계셨으면 좋았을 거야. 연애는 몰라도 여행은 좀 다녀보고 싶었는데.”
“미테렌시드의 행적을 쫓는 여행이요?”
알렉시스가 찔렀다.
“뭐 어때, 여행가면 재미있을 만한 곳을 영웅들도 다닌 건 사실이잖아.”
“그래도 혹 포트덤에 가시겠다면 어디까지나 관광객으로 가셔야지 모험가 흉내는 내면 안 됩니다.”
“자기가 대영웅인줄 알던 무능한 귀족 애송이 때문에 미테와 리온이 포트덤에서 개고생한 이야기는 나도 알아. 그리고 난 적어도 내 활솜씨가 형편없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고.”
당연하게도 아비게일은 미테렌시드의 회고록도 읽었다. 그 책은 미테렌시드가 살던 마을을 처음 떠나 겪은 일부터 보통의 새용사 이야기가 시작하기 이전에 그가 리온과 라크리스, 저스틴과 시에나를 처음 만나는 과정과 당시 포트덤의 분위기까지 자세히 다루고 있어 사료적 가치도 높았다.
그런 거 없어도 아비게일은 읽었겠지만.
“아버지 살아계셨으면, 백작이 되기 전에 이것저것 해볼 수 있었을텐데.”
“연애도요?”
“알렉시스는 연애 싫어?”
“방금 말씀 드렸는데...”
“아니 나 말고, 알렉시스 너.”
아비게일이 말했다.
“가문에 대한 의무 같은 건 없잖아. 그러니까 괜찮을텐데... 그래도 연애는 하고 싶지 않아?”
“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닙니다.”
알렉시스가 먼산을 바라보았다.
“그래? 혹시 봐 둔 사람 있어? 성에서 일하는 사람?”
아비게일이 옆구리를 찔렀다.
“괜찮겠다 싶은 사람이 있긴 있는데... 지금은 육아에 바빠서 생각 없네요.”
“육....!”
아비게일이 알렉시스를 노려보았다. 알렉시스가 싱긋 웃었다.
“그러니 제가 연애하는 게 보고 싶으면 빨리 듬직한 어른이 되세요.”
“와... 못됐어, 정말.”
알렉시스가 발을 멈추었다. 멀찍이 경비대 막사가 보였다.
“아가씨는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왜?”
“혼자 살짝 가서 대원 한 명한테만 이야기 전하고 올게요. 경비대장의 눈에 띄느니 그게 낫겠어요.”
“으응, 그래.”
아비게일도 에릭은 조금 무서웠다. 만나지 않아도 된다면 그게 제일 좋았다.
“웬만하면 밖에 여기 보이는 데서 얘기해. 에릭이 나타나면 나도 나설테니까.”
“..네.”
알렉시스가 경비대 막사로 갔다. 그가 경비대원 하나를 불러내 대화하는 걸 아비게일은 멀찍이 나무 뒤에서 지켜보았다.
대화는 잘 되고 있는 것 같았다. 둘 태도도 우호적이어 보이고.
경비대원이 알렉시스의 어깨를 잡고 끌어당겨 귀에 뭐라 속삭였다. 아비게일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어차피 내내 안 들렸는데도, 귓속말을 하니 무슨 소린지 꼭 알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더 들었다.
‘어차피 알렉시스가 와서 알려줄 거야. 성급할 필요 없어.’
그러고도 한참이나 지나서 경비대원이 뒤로 물러났다. 둘이 조금 더 이야기하고 알렉시스가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곤 몸을 돌려 아비게일에게 왔다.
“뭐 심각한 이야기라도 했어?”
“심각... 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가죠.”
알렉시스가 걸음을 빨리했다. 아비게일도 그와 나란히 걸었다.
“경비대에서는 범인 후보를 대략 둘로 좁힌 것 같아요. 리오나드와... 미테렌시드.”
“뭐.”
“경비대야 미테렌시드의 팬이 아니라, 되도록 사람을 죽이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그의 고결한 의지 같은 거 모르니까요. 죽은 사람이 미테렌시드가 화낼 만한 연극을 쓴 건 분명하고, 그라면 날이 없다시피 한 소품용 화살로도 사람을 쏴 죽이는 게 가능할 것 같다는 논리지요.”
“그건 논리가 아냐.”
“뭐 그렇겠죠. 아무튼 그래서, 칼로 죽이고 상처에 화살을 꽂았을 가능성을 경비대에 알렸기 때문에 그 요리사 양반의 혐의가 더 짙어지게 되었습니다.”
“잉?”
아비게일이 잠깐 멈춰섰다.
“그 말 그 사람이 해준 거잖아?”
“그렇지만 제가 경비대한테 ‘어이, 댁들이 의심하고 있는 그 요리사를 우리 아가씨가 숨겨두고 있는데,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하지 뭐야.’ 하면서 전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당연히 제가 생각해 낸 것처럼 말했죠.”
“음....”
두 사람은 다시 걸었다.
“그래서 괴력이 없어도 누구나 쉽게...는 아니지만 아무튼 미테렌시드 같은 사람이 아니어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리오나드의 혐의가 짙어지죠.”
“연극 내용에 항의했기 때문에?”
“네.”
“나도 했는데, 항의?”
“그래서 이러고 범인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거잖아요. 이대로는 아가씨의 명예 역시 땅에 떨어지니까.”
“그 사람은 살인범이 아니지만, 또 그가 살인범이라고 해도 살인범과 비슷한 행동을 했다는 것 만으로 명예가 실추되는 건 부당해.”
“그렇습니다만 어쩌겠어요. 적이 있을 땐 공격받을 거리를 안 만드는 게 최선이지.”
“젠장....”
아비게일이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리오나드가 범인이라면, 왜 화살을 갖다 박아놨는지에 대해선 뭐래?”
“미테렌시드 흉내요. 정의의 심판인 것처럼 하려고 그랬다는 거죠.”
“영웅에게 누명 씌우려는 짓으로 밖에 안 보이는데. 게다가 그럴 수 있을 만큼 힘이 있을 리도 없잖아.”
“마법을 썼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프엘프니까.”
“아, 경비대에선 그가 마법사 아닌 거 모르겠구나.”
내성 가까이 오자 건물 안팎을 돌아다니는 하인들이 보였다.
“아차, 콘라드 아저씨가 방에서 나오지 말랬는데.”
“이대로 그 사람한테 가서 잘못을 빌러 왔다고 나건 거 반성하고 있다고 해버리면 어때요? 그 말 하러 나온 것처럼. 먼저 잘못했다고 하는데야 뭐라고 더 하긴 어려울 걸요.”
“응... 그래.”
아비게일이 굳게 고개를 끄덕이고 앞장섰다. 그 뒤를 따르며 알렉시스는 리오나드가 정말 마법을 못 쓰는지 추궁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도망갔다면, 마음 편하게 찾아서 고발하면 그만이야.’


콘라드는 잘못을 알면 되었다고, 앞으로는 기품 있게 행동하라고만 하고 아비게일을 놓아주었다. 방에 돌아가 보니 리오나드는 도망가지 않고 시녀방에 잘 숨어있었다. 자기가 범인으로 확정되어가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가 미간을 모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당신, 마법은 혹시 쓸 수 있는 거 있어?”
알렉시스가 물었다.
“네. 요리에 소용되는 마법이 있어서 몇 가지 할 줄 압니다.”
“마법으로 요리를 하는 거야? 그럼 뭐 특별한 요리가 되는 거야?”
아비게일이 물었다.
“마법으로 요리를 만드는 건 아니고요. 물을 정화한다거나 음식의 상한 부분을 알아본다거나 차게 식힌다거나 그런 거에요. 마법으로는 별 거 아닌 주문들이지만 주방에선 유용하죠.”
“그런 거 말고 다른 마법은?”
알렉시스가 재차 묻자 리오나드의 표정이 슬쩍 굳었다.
“마법으로 사람을 해칠 수 있느냐는 질문이라면, 예, 그럴 수 있습니다. 환기를 위해 공기를 움직이는 주문 조차도 쓰기에 따라선 사람을 질식시켜 죽일 수도 있지요. 부엌칼이나 식탁용 나이프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제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수단이 있다고 해서 정말로 죽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 그럼 물론이지.”
아비게일이 웃는 낮으로 말하며 알렉시스에게 눈총을 주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알렉시스도 리오나드가 단장을 죽였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럼 달리 누구죠.”
알렉시스가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테렌시드와 리오나드 빼면 정말 극단 단원중 누구나 경비대장 정도 밖에 범인 후보가 안 남는데요.”
“경비대장은 이제 빼야지. 힘하고 상관 없는 범행인 거 알았으니.”
아비게일이 말했다.
“그럼 배우들 밖에 안 남습니다.”
“음....”
아비게일이 고민했다. 그런 연극을 하긴 했지만 나쁜 건 극작가지 배우들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혐의를 씌우고 싶지는 않았다.
“단장이 죽어서 제일 고생인 게 그들이라며.”
“그렇긴 해도 공연도 예정대로 하고 있고, 결과적으로 그렇게 큰 손해를 본 것은 또 아니어서요. 소품 화살도 역시 극단원 중 누가 제일 손대기 쉬울 거고요.”
“결과적으로는 그래도 큰 손해를 볼 뻔 했잖아.”
아비게일이 주장했다. 그건 그러므로 알렉시스도 더 말하지 못했다.




케일란의 음유시인 8 ㅣ- 기타


리오나드가 고개를 끄덕이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제 곧 만찬 준비 할 때가 되었는데, 아가씨는 참석 못 하면 오늘 저녁은 굶는 건가요?”
“아니, 방으로 갖다주겠지.”
말하고 아비게일이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알렉시스 식사도 이리로 갖다달라고 해서...”
“우리 아까 콘라드 보는 앞에서 싸웠는데요.”
“그, 그건 싸움이 아니라.”
“뭐건간에요.”
알렉시스가 리오나드를 경계하는 시선으로 보았다.
경계심이라곤 없는 아가씨 때문에 어쩌다보니 계속 같이 이야기하고 있기는 했지만 알렉시스는 이자를 믿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도리어 여차하면 그를 고발해서 자기 혐의를 벗을 생각까지도 하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도 범인 같아보이지는 않았지만, 자기가 죽을 수는 없으니까. 물론 진짜 범인을 밝혀내는 게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하지만 연극 단원들이 했다고 하기엔 그렇게 자기 발밑을 파는 것도 이상하고, 만약 범인이 정말 에릭 대장이면 그걸 무슨 수로 증명하지.’
“같이 식사를 하더라도, 제 방에 있다가 아가씨가 부르셔서 오는 게 맞겠지요.”
그가 일단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근데 그러려면..”
그러려면 알렉시스가 나가있는 동안 저 수상한 놈이 아가씨와 둘만 있게 된다. 아예 데리고 나갔으면 싶지만 남들 눈에 띌까 두려웠다.
“저는 시녀방에 얌전히 숨어있겠습니다.”
그 눈치를 채었는지 리오나드가 말했다.
“절대 나오지도 소리내지도 않고 부르실 때까지 없는 듯 있을게요.”
“그럼 될 것 같아.”
아비게일이 말했다.
“그럼 알렉시스는 빨리 가봐. 하인들 움직이기 전에 방에 가 있어야지.”
“네, 잠시만요.”
알렉시스가 리오나드를 끌고 시녀방으로 들어갔다. 이 방은 창문이 없어 안은 어두컴컴했다.
“금방 다시 올 거니까, 허튼짓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
“네.”
그가 얌전히 머리를 조아렸다.
“이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말고, 그 외에 아가씨를 곤란하게 할 만한 일은 절대 하지 말고.”
리오나드가 싱긋 웃었다.
“아가씨를 무척 아끼시네요.”
“그야... 뭐?”
“하기야 저만하면 꽤 귀여우니까요. 보토...”
리오나드는 자기 코앞에 나타난 단검 끝을 보고 주춤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아까 보니 서른둘이던데.”
알렉시스의 목소리가 얼음장 같았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전혀 아닙니다.”
리오나드가 양 손을 어깨 높이로 들어올렸다.
“나이도 신분도 전혀 맞지 않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앞으로도 계속 잘 알고 있는 게 좋을 거야.”
알렉시스가 칼을 치웠다.
“금방 다시 올 거니까 허튼짓 하지 말고.”
“네.”
알렉시스가 시녀방을 나왔다. 아비게일의 도끼눈을 무시하고 그가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역시 수상해.’
신분 증명은 진짜고 내용도 믿을 만 했다. 태도도 부드럽고 거짓으로 꾸민 기색은 없었다. 아까는 칼을 들이대긴 했어도 그가 별로 문제가 될 만한 말을 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리 불안한 거지.’
역시 그 밋밋한 회색로브가 문제인지도 모른다. 연갈색 머리카락과 뾰족한 귀도.
알렉시스는 자기 방으로 가는 대신 서재에 들렀다. 그가 귀족 연감을 꺼내 펼쳤다.


아비게일은 시녀를 불러 알렉시스의 식사도 이리로 가져오고 그를 불러달라고 했다. 아까 경솔히 행동한 걸 사과하려는 거라고, 혼자 밖에 나간 건 반성하고 있다고 콘라드 아저씨 쪽에도 저자세를 취해두었다.
알렉시스보다 음식이 먼저 도착했다. 알렉시스는 잠시 후 뚱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자기 방이 아니라 서재에 있더라는 말을 전해들은 아비게일은 그가 위장을 철저하게 했다고 생각했다.
“자, 이제 나와도 돼.”
아비게일이 부르자 리오나드도 나와 식사 자리에 앉았다.
“아, 미리 말하는데.”
아비게일이 선언했다.
“먹는 동안은 살인사건 이야기는 하지 말자.”
타당한 말이어서 두 남자도 금방 동의했다.
“그렇긴 한데 달리 무슨 이야기를 하죠?”
“어, 우리 평소에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적당히 할 말이 생각 안 나면 둘이서 미테렌시드 이야기나 실컷 하시던가요.”
그러고 자기는 빠지겠다는 듯 알렉시스는 음식으로 관심을 돌렸다.
“아니 전 특별히 미테렌시드의 팬인 건 아닌데요....”
리오나드가 말끝을 흐렸다.
“그럼 누가 제일 좋은데?”
아비게일이 물었다.
“아, 역시 리온 전하지?”
“네?”
리오나드가 깜짝 놀랐다.
“어, 어째서 그런 억측...을 하는 건가요?”
“그야 그 옷차림.”
아비게일이 로브를 가리켰다.
“통짜에 수수한 색깔. 딱 맞잖아.”
“.....회색인데.”
그가 쭈그러들었다.
“갈색 아닌데.....”
“거 봐요, 리온 전하 흉내 아니라고 그랬죠, 제가.”
알렉시스가 말했다.
“그랬나... 그래도 저 정도 비슷하면 오해할 수도 있지...”
아비게일이 변명했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영웅을 흉내 내는 건 아니랍니다.”
“그건 알아.”
아비게일이 알렉시스에게 눈을 흘겼다.
“알렉시스도 벨포드경 흉내는 전혀 안 내고 다니고.”
컥소리와 함께 알렉시스가 막 입에 넣은 고기를 뱉었다.
“무, 무슨 소리에요 제가 언제 대체 아니 누가 그래요?”
“하지만 벨포드경에 대한 책만 따로 책상 옆에 두잖아. [새 영웅들의 행적]에도 그 사람 부분만 종이 끼워두고...”
“그냥 자료일 뿐입니다, 저 서사시 쓰는 거!”
알렉시스가 힘써 주장했다.
“벨포드요?”
쪼그라들어 사라지다 말고 리오나드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벨포드 좋아하세요?”
“아니라고!”
“네.”
리오나드가 다시 움츠러들었다.
“그렇지만 벨포드 좋아하는 게 나쁜 일인 것도 아니잖아요. 오해받았다곤 해도 그렇게 싫어할 필요가 있나요.”
“나쁠 거야 없지만.... 그냥 너무 억측이라서.”
거의 항의하는 것처럼 들리는 말에 알렉시스가 일단 변명했다.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아비게일이 물었다.
“예, 아닙니다.”
“그런 것 치고는 벨포드에 대해서 세세한 것까지 잘 알고 있잖아. 그의 결혼이며 전 집안 사정까지. 그래서는 리온 전하의 애인은 미테가 아니라 벨포드였을 거라고까지...”
알렉시스가 아비게일의 입을 막으러 달려갔지만 이미 늦었다. 나올 말은 이미 나와 버렸고 리오나드는 입을 딱 벌리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그게, 정말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는 게 아니고.”
알렉시스가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그 때는 아가씨랑 만난지 얼마 안 되어서, 그, 미테렌시드 좋아하는 게 좀 바보같아 보여서 그만.”
알렉시스가 횡설수설했다. 아비게일이 그의 팔을 찰싹 때렸다.
“내가 미테 좋아하는 거랑 벨포드가 왜.”
“그... 아가씨가 리온 전하와 미테렌시드 사이의 정신적이고 고결한 사랑 같은 걸 너무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고 들이댄 것 뿐이라고요.”
“뭐야? 고작 그런 이유로...”
“저, 하지만 벨포드는 결혼했는데요.”
리오나드가 간신히 말했다.
“자식도 있었고. 지금 손녀가 그, 3대 자작일텐데.”
“마흔 다 되어서 결혼했잖아.”
알렉시스가 말했다.
“리온 전하는 하프엘프니까, 늙어가는 애인하고 사이가 벌어졌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벨포드 쪽에서 새로 만든 가문을 물려줄 수 있는 자식을 원했을 수도 있고. 그래서 사귀다 헤어지고 결혼했다고 해도 앞뒤가 맞아.”
“다, 단지 결혼을 늦게 했다는 이유로 그렇게까지.....”
“그가 능력이나 품성에 비해 총애를 받은 건 엄연한 사실이잖아. 심지어 올센 남작가가 정적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을 때, 리온 전하는 카디올러스에게 힘을 실어주면서까지 벨포드의 옛 가문을 감싸주셨는걸. 전하 눈에 조금도 예쁠 게 없는 가문일텐데 오직 벨포드 때문에. 게다가 당시 가십을 모아둔 기록 중엔 벨포드에게 여자가 접근하면 리온 전하께서 방해했다는 말도 있어.”
“아니 누가 그런 가십 같은 걸 기록씩이나 해서...”
리오나드가 망연자실한 얼굴이 되었다.
“그럼 당신은 리온 전하가 누굴 사랑했을 거라고 생각해?”
아비게일이 물었다. ‘미테지? 그렇지?’라고 써 있는 것 같은 눈빛을 받으며 리오나드가 원망의 시선을 보냈다.
“꼭 누구를 사랑해야만 하는 건가요?”
“...응?”
“로맨틱한 사랑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그저 친구로, 동료로 좋아하면 안 되는 거에요?‘
“아, 아니 이건 그냥...”
“그야 생각은 자유인 거 알아요. 저도 소르타르코스의 서사시를 읽으며 벨레니스와 델로레아스 사이가 끝내 틀어진 이유가 정말 건국에 대한 의견차 뿐이었을까 생각해 본 적도 있고, 벨레니스와 에이베트의 첫만남은 델라크로이즈의 풍자시 쪽이 더 사실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하고.... 그렇지만, 꼭 그래야 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리온이나 미테가 독신으로 지냈으니 애인을 숨겼을 거라거나 벨포드가 결혼을 늦게 했으니 애인이 있었을 거라고 단정하는 건 이상하잖아요?”
아비게일이 변명하기도 전에 리오나드가 말을 쏟아냈다.
“아가씨는 아마 리온과 미테가 신분차이 때문에 헤어졌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그 때 리온은 계승권 포기를 공식 선언한 참이었어요. 미테처럼 명예는 높지만 왕후로는 적당하지 않은 사람은 도리어 딱 적합한 결혼상대가 될 것 같은데요.”
아비게일이 입을 뻐끔거렸다.
“어..... 그, 그런가.....”
“게다가, 어, 그는 마법사라고요. 원래 마법사들은 결혼을 안 하는 경우가 많아요.”
알렉시스는 그럼 그 유수한 마법사 귀족 가문은 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이 이야기가 길어지는 건 원치 않았다.
“말했듯이 나는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방법도 있다고 보여준 것 뿐이었어. 아가씨 놀리느라고.”
알렉시스가 아비게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리오넬 전하와 벨포드경 사이에 정말로 애정관계가 있었을 거라고 믿고 주장하고 다니는 건 아니라고. 아가씨도 그냥... 낭만적인 옛날 이야기 같은 걸로 생각하시는 거고.”
“네.. 압니다.”
리오나드가 슬쩍 뒤통수를 긁었다.
“그게.... 남 일 같지가 않아서요. 그냥 결혼에 흥미가 없을 뿐인데 주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며 자꾸 맞선을 권유하는 게 귀찮아서...”
“하프엘프는 서른이라도 많은 나이 아니지 않아?”
아비게일이 물었다.
“앞으로 살 날이 백 년은 남았는데 벌써 그런단 말이야?”
“그러게요. 그래서도 함부로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요.”
“그건 결혼 독촉하는 사람들이 잘못했네. 알아서 하게 놔두지.”
‘얼씨구.’
어쩐지 말이 통하는 두 사람을 보며 알렉시스가 고개를 젓고 혼자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아가씨는 약혼자 있으세요?”
리오나드가 물었다.
“아니. 아버지께서 그러시는데 직접 사람 만나서 연애도 해보고 그래야 사는데 후회가 없대.”
리오나드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고 아비게일이 슬쩍 웃었다.
“특이하시지? 하지만 아버지도 그렇게 사셨고, 그러고 내게 그렇게 말씀하신 거 보면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게 괜찮은 것 같..”
“아가씨한테는 안 괜찮았잖아요.”
알렉시스가 말을 끊었다.
“젊어서 자식을 보았으면 아가씨가 성인도 되기 전에 돌아가시지 않았을 거고 그럼 아가씨가 이렇게 후견인 슬하에서 눈칫밥 먹을 필요 없었을 텐데.”
아비게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젊을 때 실컷 인생을 즐기고 뒤늦게 가문에 의무를 다한다고, 말은 쉽지만 현실은 이렇잖아요. 앞일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사람인데, 무책임하셨어요.”
말을 끝내고 놀란 아비게일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알렉시스가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불경한 소릴 해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벌을 내려주십시오.”
아비게일은 당황했다. 선대 백작에 대한 험담이니 벌 받을 짓은 틀림 없었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거니와 그가 갑자기 왜 이런 소릴 했는지가 더 신경 쓰였다.
“아, 아니. 벌까지 줄 생각은 없어.”
아비게일이 손을 저었다.
“가벼운 한담 중에 나온 이야기고, 없는 말을 지어내 모함한 것도 아니니까.”
“감사합니다.”
그러고도 알렉시스는 도로 자리에 앉지 않았다.
“저 경비대에 가서 살인사건 조사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듣고 우리 쪽에서 나온 이야기도 필요하면 전달하고 오겠습니다.”
그가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아비게일이 잠시 문을 바라보았다.
“같이 가보시면 어때요?”
리오나드가 권했다.
“아까 들으니 경비대는 그리 우호적인 곳이 아닌 것 같던데, 저 사람 혼자보다는 아가씨와 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그, 그럴까.”
아비게일이 일어섰다. 그러나 바로 따라 나가지 않고 잠시 망설였다.
“음유시인 중에는 혼외자가 많지요.”
리오나드가 말했다.
“아까 말 때문에 그를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그는 전 백작이 아니라 자기 아버지의 무책임함에 화를 낸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
아비게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갔다올게. 다 먹고 나면 저 줄 당겨서..”
“저는 요리사랍니다. 그런 절차는 잘 알아요.”
“그래.”
아비게일이 달리다시피 방을 나갔다.



케일란의 음유시인 7 ㅣ- 기타


“저, 좀 냉정한 말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살해당한 사람은 여기에 연고가 없는 유랑극단 단장이잖아요. 온지도 며칠 안 되었고. 사람을 죽일 정도로 깊은 원한이나 이해관계라면 그들 내부에 있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요?”
리오나드가 제안했다. 아비게일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지금 우리 성 상황이 조금 특이해서 정치적인 문제가 끼었을 가능성이 있어.”
아비게일이 말했다.
“말하자면, 그 어제 연극이 영주 대리 편을 들어버린 거거든.”
“...아.”
리오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렇게 이상한 연극을 올렸던 거군요. 정치적인 목적이 있어서.”
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래. 심하게는 경비대장 본인이 살인범일 가능성도 있는 상황이야.”
아까 맞았던 원한을 담아 알렉시스가 말했다.
“그 힘이라면 돌조각을 사람 몸에 박는 거 가능할 지도 모르고.”
“돌조각이라니?”
아비게일이 물었다.
“그게 아까.... 아참, 아가씨 늦었지만 말해두는데요, 연극 내용 바꿨습니다.”
아비게일이 깜짝 놀랐다.
“진짜?”
“네. 하지만 아까는 콘라드 앞이었잖아요. 제가 몰래 딴 대본을 승인해서 콘라드의 계획을 뒤집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요.”
“아.... 그러네.”
아비게일이 알렉시스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오해해서 미안해. 고마워.”
“고마우면 놔주세요. 답답하니까.”
아까 목 졸렸던 게 연상되어서 알렉시스는 아비게일을 밀어내었다.
“그래서 돌조각은 무슨 소리야?”
아비게일이 잊지 않고 다시 물었다.
“단장이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했잖아요.”
“응.”
“그런데 그 화실이 연극용 소품이었대요. 무딘 삼각형 돌조각을 모양만 그럴듯하게 붙인.”
“...엥?”
아비게일도 어이없어했다.
“그런 걸로 어떻게 사람을 죽여?”
“그러니까요.”
“마법사가 한 짓인가?”
“마법사라면 마법으로 살인 안 하죠, 들키니까.”
“저..”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리오나드가 살짝 손을 들었다.
“그 화살이 날아와 사람한테 박히는 걸 본 사람이 있나요?”
“그렇겠냐.”
알렉시스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아침에 보니까 화살이 박혀있었던 거지.”
“그럼, ‘박힌 모양’을 만드는 건 아주 쉬운데요.”
“뭐야?”
알렉시스도 아비게일도 놀라 그를 보았다.
“고기를 구울 때 흔히 라드나 버터를 끼워서 굽지만, 라드가 날카로워서 고기 틈에 박히는 건 아니지요. 칼집을 내고 라드 조각을 넣는거지.”
리오나드가 설명했다.
“마찬가지로 단검 같은 걸로 찔러 죽인 뒤 그 상처 자리에 화살을 끼우면요? 보통 화살이라면 칼날하고는 폭도 모양도 아주 다르니 금방 속임수를 알 수 있겠지만 연극용인 넓고 투박한 촉이라면 그걸로 벌어지는 상처가 더 커서 속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럼 활 가진 사람 찾아봐야 소용 없잖아.”
아비게일이 실망했다.
“작은 단검 정도는 저도 갖고 있어요. 흉기로는 못 찾겠는데요.”
알렉시스도 고민했다.
범인이 단검을 썼다면 왜 거기에 소품 화살을 꽂아둔 걸까. 보통 화살이었으면 활 가진 사람을 범인으로 몬다거나 표시된 화살로 누명을 씌운다거나 할 수 있겠지만 이건 무기로 쓰였을 리 없는 소품이었다. 목적을 알 수 없었다. 연극 배우 중 누군가를 범인으로 몰려고? 아니면 이런 걸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힘센 누구를?
“앉아서 이야기하자.”
아비게일이 두 사람을 탁자 앞으로 끌고 갔다.
“리오나드는 아침도 못 먹었대.”
“일어나자마자 도망쳤으니까요.”
그가 변명하듯 말하고 의자에 앉자마자 쿠키를 집어 물었다.
“오이 샌드위치 좋아해?”
알렉시스가 물었다.
“네.”
“왜?”
리오나드의 미소가 묘하게 바뀌었다. 세상 재미있는 일을 자기 혼자만 알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미소였다.
“스승님이 싫어하셔서요.”
알렉시스가 아비게일을 쳐다보았다. ‘정말 이런 놈 믿을 겁니까?’ 하는 마음의 외침을 눈빛에 담아서.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오이가 좋을 수 있는데?”
아비게일이 리오나드에게 불신의 시선을 보냈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알렉시스도 진심으로 동의했다.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다 리오나드가 폭소를 터트렸다.
“뭐가 우스워?”
알렉시스가 날카롭게 말했다.
“아니, 아닙니다.”
탁자에 고개를 박고 웃음소리를 줄이려고 노력하며 리오나드가 어깨를 떨었다.
“그, 그런데 계속 이러고 있어도 되나요? 시녀라던가 안 돌아와요?”
그가 겨우 웃음을 멈추고 물었다.
“내가 부르기 전엔 안 와. 레너 남작가 사람이라 가까이 안 두거든.”
아비게일이 말했다.
“얌전하고 싹싹하고, 나쁜 애는 아닌데 그래도 좀 그렇더라고. 본인도 그러려니 하는 것 같고.”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아가씨에게 신임을 못 받는 게 두 사람 다에게 더 좋다는 것도 알고 있을 거에요.”
리오나드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그럼 아가씨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누구 있나요?”
알렉시스는 그런 건 당신이 왜 묻냐고 추궁하고 싶었으나 아비게일이 앞질러 대답해버렸다.
“집사인 나겔씨는 믿을 수 있어. 로렌츠 요리장도. 법률 자문인 프랜시스 경하고 영지 관리인 비더마이어씨는, 날 지지한다기보단 적법한 후계자를 지지하는 거겠지만 적어도 날 해롭게 할 리는 없어. 에릭 경비대장은...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까지만 해도 충성스러워보였는데, 지금은 도저히.”
“그러게요. 선대 백작님도 꽤 믿고 계셨는데. 애도기간이 끝나자마자 눈빛부터 싸늘해졌어요. 어떻게 그러는지.”
알렉시스도 맞장구쳤다.
“그렇긴 해도 에릭 대장이 왜 그 단장을 죽이는데. 그 사람은 이미 콘라드 아저씨 편이잖아? 새삼 내 편을 들어 대본을 수정할 생각인 것도 아니었고.”
“그리고 아가씨와 그 일로 언쟁을 했지요.”
알렉시스가 말했다.
“그러니 별로 귀중할 것도 없는 그 ‘자기편’을 죽여서, 누명거리로 만들지 말란 법이 없지요.”
“내가 살인을 했다고 뒤집어 씌운다고? 고작 그런 이유로?”
아비게일이 충격을 받았다.
“아니, 저요.”
알렉시스가 말했다.
“뭐....”
“백작 계승자를 직접 공격할 수는 없으니까, 대신 저를 공격하는 거라고요. 제가 살인범으로 몰리면 어차피 모두들 아가씨가 시켜서 했다고 생각할 거고.”
“그런 거...!”
“그러니까, 싸우기 시작한 이상 철저하게 싸워야 합니다.”
알렉시스가 말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싸움이에요.”
충격 받은 얼굴로 아비게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그렇게 놀라워요?”
“아니.... 그건 아닌데.”
아비게일이 의기소침하게 목을 움츠렸다.
“어쩐지 일이 잘못되더라도 알렉시스만은 어떻게든 멀쩡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알렉시스가 혀를 찼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지만 그 어떤 방식으로 죽게 되더라도 제가 아가씨보다는 먼저 죽지 싶은데요. 태어나길 칠 년이나 먼저 태어났으니까.”
아비게일이 그를 노려보며 입을 비죽 내밀었다. 알렉시스는 못 본 체 말을 돌렸다.
“그러고보니 범인 후보 중에 미테렌시드도 있네요.”
“에엑?!”
“뭐라고요?!”
아비게일과 리오나드가 한꺼번에 소리를 질렀다.
“무,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미테는 몰래 사람을 죽이거나 하는 일은...”
“있었지요.”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 없는 거잖아.”
아비게일이 강변했다.
“새 용사로 명성을 떨친 뒤에 누군가 옛날 광전사 시절에 대해 시비를 걸자 ‘그 때 했던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죽이지 않고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있고 지금은 그게 수월할 뿐이다’ 라고 했는 걸. 이건 그냥 대본을 수정하라고 요구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잖아? 정 화가 나면 몇 대 패주면 그만이고.”
“아가씨, 미테렌시드에 대해 상당히 잘 알고 계시네요.”
리오나드가 감탄했다.
“좋아하거든.”
아비게일이 뻐겼다.
“특이하네요.”
“뭐가? 미테같은 영웅, 좋아하는 게 당연하잖아?”
“그렇지만 그 ‘광전사 시절’ 때문에, 미테를 좋아하는 건 귀족이면 철없는 애송이, 평민이면 반항심 있는 불평분자로 보이기 십상이잖아요.”
“백 년 넘게 산 사람을 처음 십 년 정도로 판단하다니 말도 안 되는 짓이야.”
“맞아요.”
리오나드가 맞장구쳤다.
“네에, 미테 팬 여러분의 의견은 잘 들었고요.”
알렉시스가 두 사람 다에게 눈을 흘겼다.
“내가 주장하는 거 아니에요. 아가씨도 만났던 플로라가 어제 밤에 단장의 창문 밖에서 붉은 뭔가가 보였다 사라졌다고 그래서요. 그런 연극을 했으니 죄책감 겸 두려움에 그런 헛것을 보는 것도 이상하지 않긴 하죠.”
“역시 그런 연기 엄청 하기 싫었구나.”
아비게일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게 정말이면 그 소품화살 문제가 대충 해결되니까 경비대에서도 아주 흘려듣지는 않았을 거에요. 어차피 지금 케일란 근처에 미테렌시드가 있거나 한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 단검 가능성 경비대쪽에 살짝 귀뜸을 해주거나 해야겠네요.”
“저, 질문이 있는데요.”
리오나드가 물었다.
“그런데 연극에서 미테렌시드를 모욕하는 거하고 아가씨의 계승 다툼하고 정확히 어떤 관련이 있나요?”
알렉시스와 아비게일이 잠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방금 봤다시피 아가씨가 미테렌시드의 팬이라서, 그분이 모욕당하면 날뛰다 바보짓을 할 거라는 전망이 있고.”
“나 그렇게 애 아닌데.”
아비게일이 심통난 얼굴로 팔짱을 끼었다.
“두번째로는 그 극작가를 성에 들여서 전속 음유시인이라는 내 입지를 흔들겠다는 속셈도 있을 거고.”
“어차피 알렉시스는 일 안 하는데.”
이번엔 알렉시스가 아비게일에게 눈총을 주었다.
“셋째로 이렇게 그자가 죽으면 우리가 범인 후보가 된다는 점이 있지.”
“상당히 저절로 얻어걸리길 바라는 방책이네요. 계승 다툼에 그렇게 한가해도 되나.”
리오나드가 고개를 갸우뚱 했다.
“뭐 이 년 반이나 남았으니까.”
알렉시스가 말했다.
“아직 바쁠 건 없지.”
“그런가요.”


케일란의 음유시인 6 ㅣ- 기타



핑계이긴 했어도 일을 하고 돌아온 거니 보고는 해야 했다. 콘라드에게 직접 해야 할지 나겔씨에게만 말하면 될지 저울질하며 위층으로 올라가다 알렉시스는 콘라드의 호통소리를 들었다.
“이럴 때 경거망동이라니, 네가 생각이 있는 애냐!”
흠칫 목을 움츠렸다가 알렉시스가 소리난 방향으로 달려갔다. 아비게일의 방 앞 복도에서 콘라드가 아비게일을 마주하고 화를 내고 있었다.
“콘라드 아저씨, 전 놀러 나간 것이 아니라...”
“핑계는 관둬라! 원, 열 여섯이나 먹도록 철도 안 들고 뭐 하는 건지...”
콘라드가 혀를 끌끌 찼다.
“방에 돌아가 있어라! 오늘은 만찬에도 나오지 말고.”
“네? 하지만...”
“시끄럽다. 하지만은 뭘 잘했다고 하지만이야?”
그러고 콘라드가 옆에 와 있던 알렉시스를 눈치챘다.
“너는 또 어디 갔다 이제야 오는 게냐, 아비게일도 혼자 놔두고!”
“축제 때 할 연극에 차질이 있을 것 같아 극단원들과 논의를 좀 하러 갔습니다.”
알렉시스가 보고했다.
“극작가가 죽긴 했어도 공연은 계속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 대체할 다른 예인들을 구할 수도 없고, 아주 빼버리면 축제 분위기가 뒤숭숭해질 것 같아 그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대로?”
콘라드보다 먼저 아비게일이 물었다.
“어제 그 연극을... 그대로 한단 말이야?”
“고작 연극일 뿐인걸요.”
콘라드가 듣고 있는데서 대본을 원래대로 바꿨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 사람들도 먹고 살아야 하고.. 그런 거에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아비게일이 배신감에 찬 눈으로 알렉시스를 보았다.
“이.... 배신자.”
“아가씨야말로 오늘 안 나가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어요?”
이쪽도 배신감을 담아 알렉시스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래놓고 저 일하는 새 슬쩍 빠져나갔다 오시다니. 영주 대리님 말씀이 맞아요. 오늘은 방에서 꼼짝 말고 반성하세요.”
“거 봐라, 네가 오죽 말썽을 부렸으면 알렉시스마저 저런 말을 하겠니.”
뜻밖의 지원군을 얻은 콘라드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어린애 취급을 받고 싶지 않으면 어린애같이 행동을 하질 말아야지. 어서 방으로 가거라.”
아비게일이 알렉시스를 노려보며 씨근거렸다.
“어떻게.... 어떻게 알렉시스까지 이래!”
그의 눈에 눈물이 괴었다.
“됐어, 뭐 내가 너 아니면 내 편이 없을 줄 알아?”
아비게일이 방으로 달려가 문을 쾅 닫았다. 딸깍하고 문 잠기가 들으라는 듯이 울렸다.
“허, 참.... 저래가지고 언제 어른이 될지.”
콘라드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연극 따위 사소하고 천한 것이 뭐가 중해서 저러는지. 뭐, 연극 일은 그만 하면 잘 처리했네.”
그가 알렉시스에게 말했다. 알렉시스는 고개만 슬쩍 숙였다.
콘라드가 가버리고 알렉시스는 아비게일의 방문을 슬쩍 쳐다보고 계단으로 갔다. 자기가 틀린 말 한 건 없었다. 나가지 않겠다고 하고 혼자 나간 건 알렉시스도 화내 마땅한 일이 맞았다.
하지만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그가 계단을 올라갔다 다시 살금살금 걸어내려왔다. 구경꾼들은 이미 다 물러가 2층 복도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계속 발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아비게일의 방으로 접근했다.
“됐어, 뭐 내가 너 아니면 내 편이 없을 줄 알아?”
그야 아비게일의 편은 알렉시스 말고도 많았다.
그렇지만, 단지 그것 뿐일까.
그가 자기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아비게일의 방 열쇠라면 몰래 복사해 놓은 것이 있었다. 지금이 이 비장의 도구를 쓸 때인지 조금 확신이 없었지만 지금은 자기 직감을 믿기로 했다.
‘뺏기면 나중엔 곁쇠로 따도 되고.’
열쇠가 소리 없이 열쇠 구멍에 들어갔다. 짤깍하고 문이 열리자마자 알렉시스가 재빨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어, 어?”
아비게일이 놀란 목소리를 내었다.
“지금 뭐하는.. 아니 어떻게.”
알렉시스가 방을 휙 둘러보았다.
아비게일의 방은 평소나 다를 게 없었다. 책상은 당당히 어질러져 있고 탁자 위에는 먹다 남은 다과가 놓여있었다. 침대는 하녀가 정리해뒀는지 말끔했다.
방안엔 아비게일 혼자 탁자 앞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뭐야, 알렉시스. 여긴 왜 왔어?”
아비게일이 그를 보고 화를 내었다.
“안 불렀거든? 나더러는 남자 방에 들어갔다고 뭐라고 했으면서...”
“...아가씨.”
“응?”
“혼자 계세요?”
“으, 응? 그, 그럼 내가 다른 누구랑 있기라도 하단 말이야 지금?”
아비게일이 당황했다. 알렉시스가 방으로 몇 걸음 더 들어왔다. 그가 탁자 위를 눈으로 훑었다.
“...오이 샌드위치가 없네요.”
“응?”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루다 빵만 먹고 오이는 빼서 따로 감추시잖아요. 그런데 왜 이번엔 그게 벌써 없어진 거죠?”
아비게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알렉시스는 다시 한 번 방을 훑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사람이 숨어있을 만한 곳은 없었다. 커튼은 가지런했고 책상은 창을 마주보고 있어 아래가 환히 보였다. 그가 옷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곧 속으로 고개를 저어다.
‘옷장은 안에 손잡이가 없고 지금 아비게일은 탁자 앞에 있어. 내가 들어오는 동안 문을 닫고 돌아와 앉을 수는 없어.’
숨은 게 누구든, 그자는 알렉시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 짧은 순간 순식간에 방에서 사라졌다. 투명 주문을 쓰는 마법사거나 창 밖에 매달려 있는 게 아니라면 어디론가 나갔을 거다.
알렉시스는 이 방에 시녀 대기실이 딸려있는 걸 기억했다. 아비게일이 레너 남작가에서 보낸 시녀를 가까이 두지 않기 때문에 그 방은 지금 비어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디더라?’
알렉시스가 방의 오른쪽 벽을 노려보았다. 분명히 저 태피스트리 어딘가의 뒷면 벽일텐데.
알렉시스가 아비게일을 쳐다보았다. 아까 그가 들어오는 순간 아비게일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 ‘어떻게’가 알렉시스가 문 열고 들어온 것에 대한 말이 아니었다면?
지금 알렉시스도 언뜻 어디였는지 헷갈리는 옆문을, 그 자가 아비게일이 놀랄 정도로 정확히 알고 열고 나가버린 거라면?
알렉시스가 숨을 들이쉬며 방문으로 달려갔다.
“아 안 돼, 알렉시스! 사람 부르지 마!”
아비게일이 뒤에서 그를 끌어안고 넘어졌다.
“나쁜 사람 아니야, 누명 쓰게 생겼대서...”
“지금 그게 문젭니까!”
알렉시스는 자기 입을 막으려는 아비게일의 손을 떼어내려고 노력했다.
“수상한 사람이 성에 들어왔다고요! 누군지 알고 숨겨주는 거에요, 이 철없는 아가씨가!”
“살인범 아니라고 합의 봤잖아!”
“우리가 합의하면 살인범이 아니게 되는 거에요? 아니 그보다 언제....”
알렉시스가 몸부림을 멈추었다.
“설마라고 생각하지만....”
아비게일이 일어나 왼쪽에서 세 번째 태피스트리를 옆으로 밀었다.
“나와. 이미 들켰고 알렉시스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아까는 배신자라면서요?”
알렉시스가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쭈뼛거리며 나오는 회색 로브 입은 하프엘프를 쳐다보았다.
“어... 안녕하세요.”
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갑자기 폐를 끼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저도 아가씨 방까지 들어오려던 건 아닌데 그만....”
“이름은?”
알렉시스가 물었다.
“리오나드 볼크입니다.”
그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두벤 성의 보조 요리사이고, 케일란에는 여행 중에 들렀습니다.”
알렉시스가 일어나 리오나드의 앞으로 갔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신분증 내놔.”
그 사람이 들고 있던 짐보따리에서 서류첩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알렉시스는 경계하는 눈으로 리오나드를 노려보면서 서류첩을 펼쳤다.
구스타프와 이렌 볼크의 아들 리오나드가 두벤에서 태어났으며 하프엘프이고 곡류를 전문으로 하는 요리사이며 올해로 서른둘이라는 내용이 출생 증면서와 여권과 경력 확인서 추천서 등에 나와 있었다. 그걸 대충 훑어보다 알렉시스가 갑자기 리오나드의 손목을 잡아당겨 여권의 마법 인장에 그의 손가락을 갖다댔다.
“...진짜군.”
“네, 훔친 신분증이거나 한 거 아닙니다.”
그가 난처하게 웃었다.
“마법 인장이 박힌 여권을 발급받는 건 무척 비쌌을 텐데, 왜 굳이 이런 걸 준비한 거지?”
알렉시스는 아직 봐줄 뜻이 없었다.
“하프엘프는 경력을 속이기 쉬우니까요. 아무래도 출생 증명서와 추천서 만으로는 사람들이 잘 안 믿어주더라고요.”
리오나드가 씁쓸하게 웃었다. 안 믿은 당사자인 알렉시스가 그걸로 뭐라 하기는 그래서 그냥 서류첩을 돌려주었다.
“짐도 조사해봐야겠어.”
그렇다고 의심을 다 거둔 건 아니었다.
“알렉시스, 사람을 왜 그렇게까지 의심해?”
아비게일이 말렸다.
“신분증 조사 했으면 됐지 짐까지 뒤지는 건 무례하잖아.”
“제가 발소리 내지 않고 와서 문 따고 들어오는 동안 아가씨는 눈치 못 채셨죠?”
아비게일이 아무 말 못하는 걸 확인하고 알렉시스가 말을 이었다.
“누가 오면 저기로 숨으라고 미리 시녀방 위치를 알려주셨나요?”
“...아니.”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떻게 제가 들어오는 걸 알고 존재도 모르던 시녀방에 순식간에 숨을 수 있었을까요?”
“저... 들렸는데요.”
리오나드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
“발소리요.”
그가 자기의 뾰족한 귀끝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일부러 발소리를 죽이고 있어서 숨어야겠구나 생각했어요. 시녀방은 이런 성주의 방에 그런 곳이 딸려있는 건 당연하고, 보니까 태피스트리 널판이 조금 들떠있기에 거기인줄 알았습니다.”
알렉시스가 리오나드를 노려보았지만 분하게도 반박할 말이 없었다.
“여기엔 왜 숨어들어왔는데?”
“숨어들어온 거 아니야.”
아비게일이 말했다.
“아니 그게 숨어들어온 건 맞지만....”
“저 사람 경비대에서 수배중이거든요?”
생각하니 새삼 등이 아파와서 알렉시스가 표정을 찌푸렸다.
“대체 어쩌다 마주쳐서 여기까지 데려온 겁니까?”
“나 정말로 오늘은 구경하러 나간 거 아니야.”
아비게일이 말했다.
“그래도 성 안 정도는 돌아다녀도 되겠지 싶어서.... 망루에 올라갔거든. 그게, 높은데서 내려다보면 뭔가 보이거나 생각날지도 모르니까....”
“높은 데는 위험하니까 올라가지 마시라고 한 말 기억은 하고 있으셨네요.”
아비게일이 변명조로 말을 끌자 알렉시스가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 아비게일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래서 시내를 내려다보는데, 거 서쪽 망루에서 시계탑하고 별로 안 멀잖아. 거기에 이 사람이 있는 게 보이더라고.”
“....그게 별로 안 멀다고요?”
알렉시스는 기가 막혔다. 자기라면 그 거리에서 이 사람인지 알아보긴 고시하고 그냥 사람이 있는지도 알기 어려울 것 같은데.
“그래서, 그렇게 높고 위태로운데 있으면 위험하겠다 싶어서.”
“높은 데는 위험하다는 걸 망루 올라가기 전에 좀 기억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아비게일이 알렉시스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옆문으로 빠져나가서 시계탑으로 갔어. 만나서 어제 봤던 그 사람인거 확인하고, 그 일로 살인 혐의 쓰고 쫓기고 있다기에 숨겨주려고 데리고 들어온 거야. 이 사람은 안 들켰어. 수업 빠져서 콘라드 아저씨가 들은 거지.”
아비게일이 설명을 마쳤다. 알렉시스는 리오나드를 노려보았다.
“이 성의 경비대는 어떤가요?”
리오나드가 물었다.
“유능하고 믿을 수 있어서, 범인을 곧 잡을 수 있을 것 같으면 저도 숨어서 의심을 키우느니 경비대에 가서 아는 것을 말하고 협조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아비게일을 쳐다보았다. 아비게일이 고개를 흔들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알렉시스도 거기엔 동의했다.
“무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대장이 고압적이고 손이 먼저 나가는 사람이기는 하지.”
알렉시스가 말했다.
“당신은 뜨내기 외부인이기도 하고... 여기에 연고는 없어?”
“없습니다. 그냥 지나는 김에 다른 데서 잘 안 나는 버섯을 먹어볼까 해서 들렀던 거에요.”
리오나드는 난처한 표정을 했다.
“날짜 맞춰 가야할 곳이 있어 늦어도 내일 모레에는 여기에서 떠나야 합니다만... 그때까지 수배 풀릴까요?”
“무슨 수로 이틀 만에 살인범을 잡는데.”
알렉시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케일란의 음유시인 5 ㅣ- 기타



별채에 가보니 아는 경비대원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여긴 웬일이야?”
“안녕, 헨드릭.”
알렉시스가 손을 흔들었다.
“연극을 계속할지 어떨지 확인하러 왔어. 단원들은 어때?”
“다들 충격 받고 불안한 것 같더라. 자칫 이대로 공연 중단되고 쫓겨나면 당장 굶을지도 모른다면서. 특히 시체 발견한 젊은 여자는 너무 무서워해서 여자 경비대원이 살살 달래가며 겨우 진술 받았어.”
“그래.”
알렉시스가 끄덕였다.
“경비대장님은 뭐래. 누굴 의심하는 것 같아?”
헨드릭이 알렉시스를 쳐다보았다.
“너 어제 여기 왔었다며. 아가씨랑.”
“그래. 연극 내용이 좀 그래서... 아가씨가 미테렌시드 좋아하시는 건 다들 알잖아.”
“그래. 그래도 조심해라. 뭐 알아내면 말해주고.”
“알았어.”
알렉시스가 안으로 들어갔다. 어제 극작가를 만났던 방으로 가니 보초를 서는 경비대원이 험악하게 그에게 눈을 부라렸다. 못 본척하고 알렉시스는 옆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케일란의 음유시인 알렉시스 혼입니다. 공연의 지속 여부를 의논하러...”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오시지요.”
키 크고 건장한 남자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알렉시스는 이 사람이 어제 연극에서 리온 역을 했던 사람인걸 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안쪽에서 플로라가 일어나서 인사했다.
“또 뵙습니다. ...어제는 아가씨께 실망을 안겨드려 죄송했습니다.”
그가 알렉시스 곁을 살폈다.
“오늘은 혼자 왔습니다. 일 얘기기도 하고요.”
알렉시스가 말했다.
“갑자기 흉사를 당해 다들 경황이 없으실 줄은 압니다만, 연극을 계속하는 문제 말인데요.”
“저, 가능하면 계속하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주연 남배우가 다급히 말했다.
“저희 같은 작은 극단은 하지제를 놓치면 가을까지 살 길이 막막합니다. 제발...”
“게랄드.”
플로라가 그를 제지했다.
“먼저 말씀하시게 방해 말아야지.”
“어, 응.”
게랄드가 알렉시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애초 여러분의 의견을 들으러 온 거고요.”
알렉시스가 말했다.
“아무래도 축제 앞두고 흉사라, 나쁜 말이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하던 걸 계속하는 편이 좋겠다고는 생각합니다. 계약도 극단 앞으로 되어있으니 여러분이 공연을 계속하고 잘 끝내면 다음해까지 여기 머무를 기회도 여전히 있고요.”
그 말에 극단원 전원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 그런데 다음해까지요?”
어제 플로라를 데리러 왔던 여자가 물었다.
“네. 단장이 뭐라 했든 전속 계약은 아니었습니다. 내년 하지제까지 머무를 수 있는 거에요. 계약 연장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제가 장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고요.”
“아.... 그랬군요.”
“그게 여러분들에겐 더 좋을지도 모르지요.”
알렉시스가 반쯤 충동적으로 말했다.
“여러분도 어제 들었지요? 아비게일 아가씨가 소리친 말.”
배우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플로라가 대표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괜히 말려드는 것보다, 이번 하지제나 잘 챙기고 떠나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여기가 아주 마음에 들어 정착이 하고 싶더라도 내후년엔 풍파가 많겠지요.”
“네.”
플로라가 고개를 숙였다.
“배려 감사합니다. 남을지 말지는 단원들과 상의하고 어느 쪽이 좋을지 결정하겠습니다.”
“네. 그런데 연극 말인데요.”
알렉시스가 말을 꺼내자 단원들이 긴장했다.
“어제 그대로는 좀 곤란합니다.”
“하지만 저희가 수정한 대본으로 허가를 받아서....”
“그 전에 쓰던 대본이 있겠지요? 보여주세요.”
“네.”
게랄드가 손때 묻은 대본집을 찾아 알렉시스에게 내밀었다. 크산토스의 희곡을 보다 단순하게 고친 대본으로 이런 극단에서 흔히들 쓰는 것이었다. 알렉시스가 첫 장을 펼치자 안쪽 면지에 이 대본을 검수하고 허가한다는 여러 영지의 확인이 있었다.
“서명용 펜 좀 주세요.”
단원들이 망설이다 게랄드가 방을 나갔다. 곧 옆방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나더니 그가 아마도 극작가의 잉크스탠드를 가지고 왔다.
알렉시스가 그 면지 구석에 ‘이 대본을 검수하고 사용을 승인함. 케일란의 알렉시스 혼’이라고 적고 서명했다.
“자, 이제 허가받은 대본이 두 개가 되었네요.”
“하지만....”
“영주 대리 눈치가 보인다 이거지요. 네, 좋아요. 제 조건은 이겁니다. 아비게일 아가씨가 관객 중에 있으면, 수정하지 않은 연극을 하는 겁니다. 그 정도는 가능하겠지요? 원래 하던 걸테고 미테렌시드의 대사 몇몇과 마지막 장면만 빼면 그리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니니까. 그 외에는, 뭐 영주 대리가 무서우면 수정된 연극을 계속 하세요.”
“그러다 들키면요?”
플로라가 물었다. 알렉시스가 대본집을 들어 자기 서명을 보여주었다.
“그 때 책임은 제가 집니다. 계약엔 아무 문제 없습니다. 들켜도 여러분은 하지제 동안 공연을 할 수 있어요. 연장은 안 되겠지만, 아까 말했듯 지금 이 영지가 정착하기 좋은 곳이냐 하면 글쎄요.”
“그렇게 해도 괜찮은 거에요?”
플로라가 놀란 눈으로 알렉시스를 보았다.
“저희 말고 혼씨요. 아가씨의 신임이 있다곤 해도..”
“선대 백작님의 유언이라 전 안 쫓겨납니다. 이쯤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가 대본을 게랄드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니 연극 내용은 알아서 하세요. 아가씨가 볼 한 번만 빼고. 알겠습니까?”
“네, 그렇게 할게요.”
플로라가 대답했다.
“뭐 어차피 살인사건 때문에 아가씨는 당분간 성에서 안 나오실 것 같긴 합니다만... 참,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갑작스런 흉사로 다들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알렉시스가 엄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단원들도 제각기 단정한 태도로 마주 숙였다.
“범인을 잡고 시시비비를 가리고 나면 케일란에서 장례를 지원하도록 힘써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경비대에서는 뭐라던가요?”
그 말에 다시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공연에 방해될 정도라면..”
“.....뭐 공연히 트집 잡아 괴롭히거나 단원들을 끌고 가 폭행하거나 하고 있는 건 아니에요. 지금 단장님이 살해당해서 제일 곤란한 게 우리란 것도 알아주시고요.”
게르다가 말했다.
“그저, 살인에 쓰인 흉기가 연극 소품이어서, 저희 짐마차를 전부 뒤엎어놓다시피 해서 말입니다. 안 그래도 빨리 정리하러 가 봐야 하는데 허가 없이 함부로 나가지 말라고 하니...”
게랄드가 말을 받았다.
“소품이요?”
알렉시스가 어리둥절해졌다.
“흉기는.. 아니, 연극 소품 중에 사람이 죽을 만한 게 있어요?”
“아니긴 한데....”
게랄드가 말끝을 흐리며 플로라를 보았다.
“제가 발견했을 때, 스테인씨는 의자에 앉은 채 가슴에 화살이 박혀 있었어요.”
플로라가 말했다.
“어제 연극에서 제가 쏘는 시늉을 했던 그 화살이에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냥 납작한 삼각형 돌조각이나 다름 없는 촉이에요. 활도 소품이라 당겨봐야 5미터도 안 날아가고요.”
“그런데 그게.... 박혀있었다고요?”
알렉시스가 되물었다. 플로라가 창백해지더니 비틀비틀 주저앉았다. 게르다가 그를 부축해 짚자리에 앉혔다.
“실은 어제..... 밤에 스테인씨의 방 밖에 누가 서 있는 걸 봤어요.”
플로라가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나무 사이로 언뜻 붉은 색이 보였어요. 밤이고 해서 잘못 봤으려니 했는데, 아침에 보니 스테인씨가....”
알렉시스는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플로라가 다시 한 번 몸을 떨었다.
“알아요, 제가 잘못 본거겠죠. 그저 어제 그런 연극을 하고 나니 미테렌시드에게 미안해져서, 그런 대본을 쓴 스테인씨에게 화가 나서...... 하지만 미테렌시드는 살아있고, 모욕에 참지 않는 사람이잖아요.”
“그게 미테렌시드 본인이었다면 차라리 끌어내서 매질을 했겠지요. 몰래 죽이는 게 아니라.”
알렉시스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 분은 두 번째로 마왕을 물리친 영웅, 남의 영지에서라고 해도 그 정도 권리는 있습니다. 게다가 미테렌시드가 모욕을 참지 않은 건 개인적인 이유보다는 하프엘프로서 다른 동족 대신 화를 낸 사례가 훨씬 많습니다. 자기를..... 질투심 많은 쌍년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암살을 하지는 않을 거에요.”
적어도 알렉시스 생각에는 그랬다. 아비게일 덕분에 미테렌시드 관련 일화는 꽤 많이 들었다. 많이 틀리진 않을 것이다.
“잘못 본 걸 겁니다. 그럴 만한 상황이었죠.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
“네, 네.....”
플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연극 잘 하시고요.”
“네, 감사합니다. 살펴가세요.”
예의바르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 알렉시스가 배우들이 모여 있던 방에서 나왔다. 옆방은 여전히 경비병이 지키고 있었다. 저기가 스테인의 방이고 사건 현장일 것이다.
‘단원들은 너댓명씩 한 방에 들어갔는데 혼자 독방을 차지한 건가. 인망 없었겠다.’
무딘 돌조각에 불과한 소품용 화살이 어떻게 사람을 뚫었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사건은 경비대에서 알아서 할 것이다. 집사의 충고가 아니라도 알렉시스는 자기 일 아닌 건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났다.


막 별채를 나가려는데 절걱절걱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신발에 쇠징을 박은 경비대들이었다.
알렉시스는 슬며시 맞은편 복도로 가서 옆벽으로 붙었다. 떳떳치 못할 건 없지만 경비대장이 저 중에 있다면 정면으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경비대장 에릭이 콘라드파여서가 아니었다. 그는 콘라드를 좋아하기 보다는 아비게일을 싫어했고, 특히 알렉시스를 싫어했다. 그는 여기에 일을 하러 온 것 뿐이지만 뭐라 꼬투리를 잡힐지 모르니 마주치지 않는게 상책이었다.
들어온 건 정말로 에릭이었다. 그가 극단원들이 있는 방향으로 가는 걸 보고 알렉시스가 안도했다.
에릭의 발걸음이 갑자기 멎었다.
“거기 누구냐!”
알렉시스가 놀라 뻣뻣이 굳었다. 에릭이 뒤돌아서더니 벽에 붙어있는 그를 발견했다.
“쥐새끼같은 음유시인 놈이!”
에릭이 성큼성큼 다가와서 알렉시스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려 자기 코앞으로 끌어당겼다.
“여기서 뭘 염탐하는 거냐?”
“여, 염탐이...”
숨이 안 쉬어져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켁켁거리는 그를 잠시 노려보다 에릭이 대뜸 옆에 있는 문을 열고 그를 안에 던져넣었다.
바닥을 한 번 구른 뒤 알렉시스가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려고 애썼다. 그러나 숨도 다 고르기 전에 에릭이 그의 앞에 버티고 섰다.
“염탐.. 하려던 게 아닙니다.”
알렉시스가 서둘러 말했다.
“연극을 속행할지 교섭하고 돌아가려는데 대장님이 들어오셔서, 방해되지 않게 옆으로 비킨 것 뿐이에요.”
“변명거리는 언제나 있구나, 교활한 것.”
아비게일이 없어서인지 에릭의 말이 거칠었다. 그러려니 하고 알렉시스가 숨을 조금 몰아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가도 좋다고 했지?”
에릭이 그의 어깨를 잡고 떠밀자 알렉시스는 속절없이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
“무슨....”
“어제 밤에, 여기에 왔었다던데.”
에릭이 물었다. 알렉시스는 어리둥절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똑바로 대답해!”
에릭이 걷어찰 것처럼 다리를 들었다. 알렉시스가 서둘러 답했다.
“예. 연극이 끝난 뒤 아가씨와 왔습니다.”
“와서 무얼 했지?”
“연극 내용에 대해 스테인과 ...언쟁을 조금.”
“자세히 말해.”
“아가씨께서 연극 내용이 사실과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스테인은 바꿀 수 없다고 하고....”
알렉시스가 잠시 망설였다. 에릭이 위협적으로 한 걸음 다가오자 그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스테인이 자기가 여기 전속이 될 것처럼 말했기 때문에, 아가씨는 자기가 백작이 되면 그를 해고할거라고 했어요. 그러고 더 아무 말 없이 성으로 돌아왔고요. 그 외엔 아무 일 없었습니다.”
“수상한 사람을 보거나 한 건 없나?”
“수상..... 관련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내가 판단한다. 본 게 있으면 다 말해.”
에릭이 강압적으로 말했다. 그가 어떻게 알렉시스가 여기 온 것에 대해 알았든 그럼 그 직전에 온 요리사에 대해서도 아는 게 당연했으므로 알렉시스는 숨김없이 말했다.
“우리가 스테인과 말하기 직전에, 다른 청년 하나가 역시 스테인과 연극내용을 두고 말싸움하다 가버렸습니다.”
“어떤 자였지?”
“빛바랜 회색 로브를 입고 자기 키 정도 되는 긴 지팡이를 든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갈색머리 하프엘프였습니다.”
하프엘프인 건 말하지 말까도 싶었지만 에릭에게 꼬투리를 주고 싶지 않았다. 저 쇠테를 두른 무거운 장화로 제대로 걷어차였다간 죽을 지도 모른다.
“그거 뿐?”
“네..”
그를 시장에서 봤다는 이야기는 입을 다물었다. 에릭이 알아낼 수 있을 만한 일도 아닌데다가 사건 전에 아비게일이 그 추정 요리사에게 관심을 두었다고 알게 되면 에릭이 뭔가 나쁜 발상을 할지도 모른다.
에릭은 이미 그들을, 아니 백작 계승자인 아비게일은 직접 의심할 수 없으므로 알렉시스를 의심하고 있었다. 잘못하면 살인 누명을 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몸이 떨렸다.
에릭이 그의 멱살을 쥐고 들어올려 눈을 마주보았다.
“너, 사람들이 봐준다고 건방지게 굴지 마라.”
“네..”
에릭이 알렉시스를 벽에 확 밀쳤다. 떠밀려 벽에 등을 부딪쳤을 뿐인데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알렉시스는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에릭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방을 나갔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헨드릭이 다가와 알렉시스를 부축해 일으켜 주었다.
“어이구, 이 약골. 겨우 그거 가지고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냐.”
“...겨우 그거?”
갈비뼈가 멀쩡한지 걱정될 지경이었다. 적어도 등에 멍이 들었을 게 분명했다.
“경비대원들은 더 심하게 때리기라도 해?”
“말도 마라. 사람이 막 날아다닌다니까.”
알렉시스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어보았다. 갈비뼈는 무사한 것 같았다.
“빨리 가봐. 대장님 기분 안 좋으니까.”
헨드릭이 속삭였다.
“늘 그런 거 아니었어?”
“지금은 조금 더 그래. 그 너랑 아가씨보다 먼저 왔다던 놈 수색중인데 감쪽같이 증발했거든. 묵었던 여관까지 찾았는데 언제 알고 도망간 건지..”
“그랬어?”
누명 씌우는데 골몰해서 할 일을 안 하고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이게 통상의 심문이었다 이건가...’
적어도 그렇게 주장하려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기는 했다. 멱살을 쥐거나 밀치는 이상 폭행을 한 것도 아니고.
“가볼게.”
그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나도 아가씨도 성 안에서 얌전히 있을테니까, 그건 걱정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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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브니키로 아비게일과 알렉시스의 포트레이트를 만들어보았습니다.


좀더 말괄량이 복장으로 하고 싶었는데 옷이 적당한 게 없어서, 연극 공연날 밤의 귀족 아가씨 다운 차림으로 했습니다. 꽤 생각했던 것과 비슷하게 뽑을 수 있어서 만족스럽습니다.

이쪽은 알렉시스입니다. 툴이 그래서 그렇지 남자 맞습니다. 이보다는 좀 더 시니컬한 표정을 원했는데 적당한 게 없데요. 대외 영업용 미소려니 해주세요. ^^;

케일란의 음유시인 4 ㅣ- 기타


그날 밤 알렉시스는 영 잠이 오지 않아 서재에 틀어박혀 책을 뒤졌고, 그 결과 다음날은 늦잠을 잤다.
자려고 했다. 축제 엿새 전인 오늘도 아침부터 성안은 시끄러웠다.
‘참 아침부터 활기차기도 해라, 이 시골 구석......’
베개에 머리를 박아 봐도 소용없었다. 게다가 기분탓인지 그 소란이 점점 그의 방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알렉시스!”
밖에서 아비게일이 문을 쾅쾅 두드렸다.
“알렉시스, 일어나봐! 큰일났어!”
“아가씨 죽는 거 아니면 제겐 큰일 아닌데요...”
알렉시스가 죽는 소리를 냈다.
“혹시 죽거나 크게 다치셨어요?”
“...그래.”
벌컥.
문이 열리고 아비게일이 침실로 뛰어들어왔다. 그러더니 이불을 획 걷어버렸다.
“으악!”
알렉시스가 이불을 잡아당겼다.
“무슨 아가씨가 남자방에 이렇게 당당하게 들어옵니까!”
“죽어서 유령이 되면 상관 없지!”
“안 죽었잖아요!”
한참 낑낑대고 이불을 당기다 알렉시스가 쥐고 있던 홑이불을 그대로 아비게일에게 뒤집어씌웠다.
“왔!”
“이제 좀 유령답네요. 잠시만 그러고 계세요.”
아비게일이 버둥거리는 틈을 타서 알렉시스가 서둘러 옷을 걸쳤다. 겨우 남의 눈에 띄어도 되는 모습이 되자마자 아비게일이 이불을 둘둘 말아 침대에 던졌다.
“머리 망가지잖아!”
“네?”
알렉시스가 큰 충격을 받았다.
“아가씨가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쓰셨어요?”
아비게일이 알렉시스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그의 손목을 나꿔채서 내달렸다.
“저, 무슨 일인지 먼저 말해주고 달리면 안 돼요?”
계단을 달려 내려가며 알렉시스가 불평했다. 아비게일이 고개를 돌리더니 손가락을 입술에 세웠다.
“쉿.”
‘...쉿? 그거 아가씨가 할 말인가요, 이 성에서 제일 시끄러운 주제에?’
어이가 없어서 항의도 못하고 알렉시스가 1층까지 끌려 내려갔다.
“아니 아가씨는 무슨 체력이... 선대 백작님은 병약하셨는데.”
“엄마 닮았나보지.”
딸 하나만 낳고 십 년도 안 되어 돌아가신 걸 보면 백작부인도 튼튼하진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알렉시스는 아비게일에게 끌려 복도를 뛰었다.
“빨리 가지 않으면....”
아비게일이 갑자기 멈춰섰다. 끌려오던 알렉시스도 멈춰서 숨을 골랐다.
“어...”
“어디를 그리 급히 가십니까, 아가씨?”
아비게일의 앞을 막아선 것은 성의 경비대장인 에릭 월더였다.
아비게일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에릭을 올려다보았다.
“성 아래에 흉사가 발생했다 하여 사건의 앞뒤를 파악하기 위해 가보려는 거요.”
태도만은 당당하게, 아비게일이 점잔을 빼며 말했다.
“그런 건 아가씨께서 상관하실 일이 아닙니다.”
에릭이 말했다.
“하지만 영주가 될 자로서...”
“그럼 더욱 구경거리나 쫓아다니는 애들 마냥 자기 발로 돌아다니실 게 아니라 가만히 성에 계시면서 저희의 보고를 들으셔야지요.”
말은 정중했지만 에릭의 눈빛은 비웃고 있었다.
“거기 음유시인, 아가씨와 놀아드리는 건 좋지만 지금은 살인 사건이 일어나 분위기가 흉흉하니 성안에서 조용히 데리고 있게.”
“살인사건이라고요?”
모욕에 대한 항의도 뒤로 하고 알렉시스가 물었다.
“누가 죽었는데요?”
“극작가 프란츠 스테인. 어제 연극 공연을 했던 극단의 단장이다.”


시녀에게 차를 끓여오라 이르고 아비게일은 알렉시스만 방에 넣고 문을 잠가버렸다.
“아가씨는 언제 아셨어요?”
아비게일이 방 왼쪽 벽을 가리켰다.
“옆방이 콘라드 아저씨잖아. 아침에 에릭이 문 두드려 깨우는 소리를 나도 들었지.”
“그러고 바로 절 깨우러 오신 거고요?”
“응.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제 그 사람이 죽은 거니까.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왜 죽은 건지도 좀 신경 쓰이고.”
“연극 내용과 관련 있을까봐서요?”
알렉시스가 핵심을 짚었다. 아비게일이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연극에 기분나빠한 사람 우리만이 아니었잖아.”
“그렇지만 보통은 기분나쁜 연극을 보고 화가 나도 야유를 하거나 썩은 채소를 던지지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고요.”
“알아. 전혀 다른 이유일 수도 있는 거고.”
“살인인 건 확실하대요?”
알렉시스가 물었다.
“죽을 만한 나이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병이 있었다거나 며칠 된 걸 먹었다가 탈이 났다거나.”
한여름이니 가능성은 있었다. 음식을 잘못 보관해 식중독에 걸렸다면 이렇게 빨리 죽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확인 정도는 해야 했다.
“그 사람들 별채에 있었잖아. 성의 주방에서 내간 걸 먹지 않았을까?”
“그래도 확인을.”
“그리고 어차피,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걸.”
“....그거라면 확실히 살인 말고는 없네요.”
칼이면 혹 자살이 아닐까도 생각해봐야겠지만 활은 스스로에게 쏠 수 없었다.
“그럼 누가 활을 쐈느냐는 건데....”
알렉시스가 표정을 찌푸렸다.
“왜 그래?”
“아니, 그..... 어제 우리보다 먼저 항의하러 왔던 사람이요.”
“그 사람이 왜?”
“미테렌시드가 겨눈 화살 앞에서도 같은 소리 할 수 있겠냐, 던가 뭐 그런 비슷한 말을 했잖아요.”
“그.. 음, 그랬지.”
아비게일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우리보다 먼저 돌아갔고, 활도 안 갖고 있었잖아.”
“활을 갖고 다시 왔을지 누가 아나요.”
“그래도 그럴 사람으론 안 보였는데.....”
“리온 전하 흉내를 내서요?”
“그런 게 아니고. 그게, 활은 좀 거추장스러운 무기잖아. 눈에 띄고 힘도 많이 들고. 로브 입고 활 쏘지 말란 법은 없지만, 차림이 좀 안 맞지 않아?”
“그건... 그러네요.”
알렉시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몰래 죽이려고 다시 올 정도라면 활 같이 큰 무기를 들고 다니느니 단검 같은 걸로 찌르는 게 편할 거고, 아무리 축제 기간이라 해도 그런 무기를 든 사람이 드나들었으면 성문에서 검문했을 거고 당연히 눈에 띄었겠죠.”
“아, 그러네. 활 가진 사람만 조사해도 금방 잡는 거 아냐?”
“그러게요. ...사냥꾼들은 많지만, 그들은 자기 화살에 표시를 하고.”
알렉시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왜 죽였는지는 여전히 궁금하지만 그건 범인을 잡으면 금방 알 수 있었다.
“아, 그럼 연극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아비게일이 물었다.
“극작가가 죽었는데 그 연극을 계속 하진 않을 거야, 그렇겠지?”
“음, 그건 콘라드에게 달려있지 않을까요? 어제 한 말로 봐서 이미 계약을 했을 거고, 7일간 공연하기로 했으니 하라고 극단에 명령하면 배우들이야 어쩌겠어요.”
“흠.”
“반대로 배우들이 전속 계약을 잡고 싶어서 계속 공연하려 할 수도 있지요... 이건 계약을 어떻게 했나 봐야 확실하겠네요.”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아비게일 아가씨, 차를 가져왔습니다.”
알렉시스가 일어났다.
“계약 쪽은 제가 알아볼게요. 저도 관련 있는 일이기도 하고.”
“알았어.”
“오늘도 축제 구경 하러 나가실 건가요?”
“음... 아니.”
아비게일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도 생겼는데,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축제 준비 구경이 뭐 급하겠어.”
알렉시스가 좀 안도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시녀가 들어오고 그는 방을 나갔다.


알렉시스는 집사의 방으로 갔다.
“나겔씨, 계세요?”
문을 두드리고 잠깐 기다리자 안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알렉시스인가. 들어오게.”
방에 들어간 알렉시스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성의 집사인 잉그리드 나겔은 보던 서류에서 고개도 들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이번 하지제에 연극을 공연하는 극단의 계약서를 보고 싶어서 왔는데요.”
“쫓겨날 게 아니라도 새 음유시인이 들어오는 건 신경 쓰이던가?”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상황이 변했으니까요.”
설마 이 집사가 스테인이 죽은 걸 아직 모를 리는 없었다.
“아가씨께서 알렸나보군.”
“뭐 그렇죠.”
잉그리드는 왼손으로는 계속 장부를 기입해 나가면서 오른손으로 서류더미 맨 위에 얹혀있는 종이를 집어 내밀었다. 알렉시스가 다가가 그걸 공손히 받아들었다.
그는 제일 먼저 계약 당사자를 확인했다. ‘스테인 극단’과 ‘케일란 영주(대리)’로 되어있었다.
‘그럼 프란츠 스테인이 죽었어도 계약은 계속 유효하겠군.’
계약 내용은 예상대로였다. 극단이 공연을 하도록 허가하고, 하지제까지 극단원들이 물의를 빚거나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 허가받은 연극을 성공적으로 공연할 경우 내년 하지제까지 시내에 머무르며 연극이나 노래를 공연하고 새로운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허가하고 후원한다는 내용이었다.
“...별로 전속도 아니었네.”
일 년간 열심히 비비면 그를 밀어낼 수 있다고 믿었던 걸까. 그랬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보통 그렇게 하는 거고, 알렉시스의 계약 쪽이 이상한 거니까.
이제 의미 없어진 경쟁은 잊어버리고, 알렉시스가 계약서를 다시 한 번 읽었다.
이대로라면 단원들이 계약을 승계하는데 별 문제는 없었다. ‘물의를 빚거나’ 쪽이 좀 모호하긴 한데, 프란츠가 케일란의 하지제를 망치고 싶어서 일부러 살해를 당한 것도 아닐 거고 단원 중에 살인범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걸로 트집 잡는 건 곤란했다.
하지만 그 연극을 그대로 계속 공연하면 아비게일이 화낼 것이다.
‘할 수 없지. 약간 협잡을 부려볼까.’
“스테인 극단원들에게 가서, 계약을 지속할지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잉그리드가 고개를 들었다.
“자네가?”
“네.... 축제의 행사 준비와 진행은 제 일이기도 하잖아요.”
“자네가 언제부터 일을 했지?”
“2년 전 부터요.”
잉그리드가 그를 노려보았다. 알렉시스는 어깨를 으쓱하고 싶었지만 되려 움츠러들었다.
집사가 다시 장부로 눈을 돌렸다. 알렉시스가 계약서를 다시 서류더미 위에 올려놓고 고개를 꾸벅했다.
“알렉시스 혼.”
그가 나가려고 문고리를 잡기 직전 잉그리드가 불렀다.
“불필요한 짓은 하지 말게. 아가씨는 살아계시기만 하면 돼.”
알렉시스가 잠시 침묵했다.
“네, 그렇죠.”
그가 집사의 집무실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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