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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번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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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로는 오른쪽 칼럼이 안 보이므로 포스트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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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3일 수정
회색도시, 또봇 카테고리 글은 복구 끝냈습니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28 ㅣ- 회색도시&검은방


류태현은 뭐라고 해야 하나 안절부절 못했다. 아버지한테 그렇게 말하면 못쓴다고 하자니 알지도 못하는 남의 집안일에 참견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안하고 모르는 체 하자니 자기하고 관련 없는 일도 아니었다.
“저...”
“미안하긴.....”
류태현이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은 것처럼 하태성이 주먹을 꽉 쥐고 이를 갈았다.
“이제와서 미안하다고 하면, 누명이라면서, 그게 뭐!”
하태성이 주먹으로 앉아있던 바위를 내리쳤다. 보는 류태현이 움찔했지만 그는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류태현이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러냐고 묻지도 못하는 동안 하태성이 다시 전화번호를 눌렀다.
이번 상대는 받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누구야?
“하태성 경위입니다. 과거에 대해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허강민의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태성은 자기 용건을 말했다.
“과거로 돌아가면, 아버지를 감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보도되는 비리를 실제로 저지르는지 아닌지. 그리고 막아주세요.”
그가 이를 악물었다.
“이미 늦었다면 죽여서라도.”
-....내가 반사회적인 대량 살인마이긴 하다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에 대한 청부 살해까지 하라는 거냐?
“당신은 우리에게 일어난 미래와 현재의 재앙을 막겠다고 약속했지요. 그 목적을 위해서라도 해야 할 일입니다. 선진화파 수사가 경찰에게 불리하게 진행되면 박근태는 결국 장희준 회장하고 손잡을 거고 그럼 세부 사항은 달라지더라도 일어날 일은 다 일어날 테니까요.”
-그러니까 죽이자고. 거참, 무조건 죽여서 문제를 해결하려 들다니 너무 과격한 거 아냐?
“...거기 허강민씨 아니세요?”
-난 문제 해결이 아니라 복수를 한 거잖아. 내참, 두 명은 절대 죽이지 말라고 하고 둘은 방해되면 서슴없이 죽여 치우려고 하니 어느 장단에 춤춰야 할지 모르겠네.
“어차피.... 네? 두 사람이요?”
하태성이 어리둥절했다.
“그게 무슨.... 양시백과 권혜연은 죽이지 말자 쪽일게 분명하고 그럼.”
하태성이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그럼......”
그가 잠시 생각하고 조용히 말했다.
“배준혁 소장이 살인범이었군요. 그 네 명 다.”
-머리는 빨리 도는군.
허강민이 비웃었다. 하태성이 머리를 짚었다.
“그야.... 생각해보니 네 번 모두 그가 사건현장에 있었고, 마지막 목격자고...... 하지만 대체.”
-세상이 참 살인범으로 넘치지?
하태성이 얼굴을 붉혔다.
“놀리지 마십시오.”
-그래. 그런데 선진화파 수사가 너하고도 관련 있는 거냐?
“제가 아니라... 아뇨. 네, 관련 있습니다.”
자기가 아니라 아버지와 관련 있다고 해봐야 결국 관련 있는 게 맞았다. 아버지의 비리를 막아달라 부탁해놓고 이제 와서 발뺌해봐야 아무 의미가 없었다.
-과거로 가기 전에 알아둬야 할 게 산더미로군. 차라리 흥신소장은 데려가버릴까.
허강민이 혀를 찼다.
-됐고 지금은 나 바쁘니까, 과거로 가서 뭘 어떻게 할지 구체적으로 정하는 건 나중에 하자. 아버지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허강민이 전화를 끊었다.
“걱정하는 게 아니라... 이런.”
하태성이 전화를 노려보았다. 다시 걸까 고민하던 그가 전화를 도로 가방에 넣었다. 그가 머리를 짚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님 일은 누명일 거예요.”
류태현이 말했다. 하태성이 한쪽 눈으로 그를 째려보았다.
“어떻게 확신하는데요?”
“선진화파 수사라면 저도 TV나 신문에서 봤습니다. 그렇게 수사 성공하자마자 비리가 터지다니 이상하잖아요. 것도 경찰 내부조사 같은 게 아니라 언론에서 터트리다니.”
“그런 생각 저도 안 해본 것은 아닙니다.”
하태성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누명을 벗지 못했으니 저나 어머니에게도 수사팀에게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저희한텐 의미가 있어요.”
류태현이 주장했다.
“과거에 가서 감시해야 하는 게 경위님 아버지가 아니라.... 어, 이 적은 누구죠?”
하태성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류태현은 식은땀을 흘렸다.
“에.... 허강민씨가 그러니까 같이 가자고만 했지 세부 사항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데다 연락 방법도 없어서 제가 아는 게 없네요.”
그가 푹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니오, 류순경님이 죄송할 일은 없습니다.”
하태성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확실하게는 모릅니다. 막연하게 장희준 회장과 박근태 의원... 경무관이 악당이라 생각하는 것뿐. 자세한 것은 배준혁 흥신소장, 아 지금은 경찰입니다만, 그 사람하고 이야기 해봐야 분명해질 것 같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허강민씨 연락처가 없으시다고요?”
류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허강민씨가 바쁘다면 더욱 제 쪽에서도 정보를 수집하고 등등 준비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하태성이 잠깐 생각했다. 그가 가방에서 전화를 꺼냈다.
“과거를 두 연쇄살인범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지요.”
“네?”
류태현이 당황했다.
“그 말씀은...”
“제가 허강민씨 전화번호를 알고 있습니다만, 어떻습니까?”
하태성이 사악하게 웃었다.


배준혁이 서재호와 오미정을 데려간 곳은 평범한 고깃집이었다.
토요일 저녁이다보니 가게 안은 시끄럽고 북적였다. 준혁이 난감한 표정을 했다.
“어거 대화할만한 분위기가 아니네요...”
“분위기라니, 뭐 진지한 얘기 할 예정이야?”
서재호가 놀랐다.
“아뇨, 꼭 진지씩이나... 그래도 이건 회식이나 별로 다를 것도 없는 것 같아서.”
“뭐 어때. 마음 편하고 즐겁게 마시면 되지.”
오미정이 안을 둘러보다 가장 목소리 큰 집단과 멀찍이 떨어진 구석자리를 골랐다.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아 술과 고기를 시켰다.
“갑자기 술 먹으러 가자고 해서 조금 놀랐어.”
오미정이 말했다.
“회식 때 실컷 마시고 별로 지나지도 않았는데.”
“뭐, 꼭 술이 목적이 아니고요.”
준혁이 시선을 회피했다. 재호가 잔에 소주를 따라주었다.
“우리, 같은 팀에 근무한 지도 오래되었지 않습니까.”
준혁이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기왕이면, 좀더... 개인적으로도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오, 드디어 양반도 인간이 되고 있어!”
오미정이 감탄했다.
“너무하잖아, 예전에도 인간 아니었던 건...”
“별로 인간적인 인간이 아니긴 했죠.”
준혁이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부터라도 되고 싶지만... 네, 노력은 해 볼 생각입니다.”
그가 술을 홀짝 마셨다.
“적어도. 아니.”
그가 고개를 저었다.
“믿기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두 분뿐 아니라 모든 팀원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응? 그게 왜 믿기지 않아?”
오미정이 어리둥절했다.
“그야, 음, 행복을 바란다니 좀 낯간지럽긴 하지만 동료들 간에 당연하잖아?”
“그런가요.”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고 환하게 웃었다.
“네, 그러네요.”
서재호도 오미정도 그가 웃는 걸 넋 놓고 바라보았다. 재호가 먼저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했다.
“어, 근데 팀원들의 행복을 바란다면 상일 선배 너무 쪼지 않는 게 좋지 않냐? 심지어 경위님인데, 가끔 보는 내가 철렁한다고.”
“응, 그건 그래. 선배님이 막 권위 내세우고 그러는 분이 아니어서 망정이지.”
미정이 맞장구쳤다.
“맞아, 보다보면 도리어 상일 선배가 준혁 형사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니까? 그 잠입 동료들이랑 잡담하다가 준혁 형사 들어오면 깜짝 놀라 움츠리기도 하고.”
“그런가요?”
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전 별로 무서운 사람은 아닌데요...”
그러나 생각해보면 실제로 자신은 스물여섯 먹은 서툴러서 귀여운 후배가 아니라 서른여섯 먹은 연쇄살인범이었다. 상황만 맞았으면 그 상일선배도 죽여 버렸을.
그 점을 생각하면 위험한 미친놈을 겉모습과 상관없이 무서워할 줄 알다니 감이 훌륭하다고 감탄하는 게 옳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좋은 감으로 왜 형님은 잘못 골랐나 싶지만.’
역시 박근태를 죽여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옮겨온 첫날 어리버리하다 같이 백석에 가지 못한 게 새삼 원통했다. 비밀리에 수행할 때가 비밀리에 살해하기도 최적의 기회인데.
돌아오는 길에 한강에라도 차를 처박은 뒤 자기만 간신히 살아남아 박근태가 제안을 거절하자 백석에서 한 짓이라고 해버리면 된다. 박근태는 명예롭게 죽겠지만 경감님과 상일 선배의 마음을 생각하면 그가 훌륭한 경찰로 죽은 걸로 하는 정도 양보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장희준도 죽여 버리고 싶지만, 그건 몰래 할 방법이 도저히 안 떠오르고.
‘장지연씨의 행복을 생각하면 그쪽이야말로 급한데.’
박근태를 죽여도 장희준은 새로운 창잡이를 찾아 역시 장지연의 뜻과 상관없이 결혼시켜버릴 것이다. 그게 누구든 장지연의 행복에 도움이 될 리 없었다. 그러니 장희준을 죽여야 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그 여자 아버지를 죽여버릴 생각에 골몰하느라 준혁은 재호와 미정이 하는 말을 못 들었다.
“네?”
“아니... 재석 선배한테는 유난히 상냥하게 대하니까.”
재호가 움츠러들었다. 우선 겁먹은 걸 풀어줘야지 싶어 준혁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좋은 분인걸요.”
“응, 그야 그렇지만...”
“저도 제 태도가 딱딱하고 거리감 있는 건 알고 있습니다. 조금씩 고쳐보려고요. 아무래도... 새로 만난 사람에게 태도 고치는 게 더 쉽고 눈에도 띄어서, 더 그렇게 보이는 거 아닐까요.”
“아, 그, 그런가?”
재호가 조금 안도했다.
“무슨 일 있었어?”
미정이 물었다.
“네?”
“태도를 고쳐보겠다니, 좋은 일이긴 한데 그거 말처럼 쉬운 거 아니잖아. 무슨 계기라도 있었나 해서.”
“계기라.....”
준혁이 술을 더 들이켰다.
수사팀의 해체. 장지연의 죽음. 매달릴 곳 하나 없이 죽은 듯이 살아온 십 년의 세월. 본심을 죽이고 거짓으로 쌓아올린 상냥함.
“무척.... 후회할,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후회할 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쓸쓸한 목소리가 진심을 담았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주위 사람들에게 잘하자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호의를 받으면 고마워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사정을 신경 쓰고 뭐 그런 일들을 하려고요.”
“어.... 그거, 정말 잘됐, 아니 준혁 형사한테 생긴 일은 안됐지만 훌륭한 결심이네.”
미정이 어색하게 웃었다.
“난 좀 바뀌어보고 싶어도 영 안되던데.”
“바뀔 필요 없습니다.”
준혁이 서둘러 말했다.
“미정 형사는 지금 그대로 모습이 좋습니다. 아, 그러니까, 물론 앞으로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원숙해지고 지혜로워지고 여유도 생기고 그런 변화가 일어나겠지만요. 억지로 변할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미정이 입을 딱 벌렸다. 재호도 입을 딱 벌렸다. 준혁이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했다.
“저, 혹시 기분 나쁘십니까?”
“아, 아니. 전혀.”
미정이 고개를 흔들었다.
“어, 그, 그냥.... 그런 식의 칭찬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
특별히 칭찬을 한 것은 아닌 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재호가 헛기침했다.
“응, 그렇지. 우리 미정 형사 정도면 아주 괜찮지.”
미정이 재호를 째려보았다.
“갑자기 뭘 잘못 먹었대?”
“준혁이 하는 말은 좋고 내가 하는 말은 뭐 잘못 먹은 거야?”
“그야 평소 안 하던 소릴 하니까...”
미정이 준혁의 눈치를 보곤 자세를 바로했다.
“응, 그렇게 듣기 좋은 말 해주는 것도 좋은 변화일 것 같아.”
“네? 아, 네.”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면 나한테도 좋은 소리 해주라.”
재호가 너스레를 떨었다.
“재호 형사에게는 말보다 드릴 것이 있습니다.”


세계의 중심 49 ㅣ- 회색도시&검은방


“아, 거 커플 행각이 아주 못 봐줄 지경이군.”
하무열이 들으라는 듯이 크게 한탄했다.
“자, 눈물겨운 재회는 적당히 하고. 그래서 배준혁 너희들 온 쪽엔 별 일 없었냐? 누가 다치거나 하지 않은 건 봐서 안다만.”
“위험한 함정도 좀 있었습니다.”
준혁이 기억을 되새겼다.
“문을 여니 통나무가 쓰러져 깔릴 뻔 했다던가, 뭐 그런 수준이요. 지난번처럼 전기가 통하는 문이 있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아.”
“뭐 특이한 거라도 있었어?”
허강민이 물었다.
“좀... 의미를 알 수 없는 인테리어요. 별 의미도 없이 벽이 부서져 있다던가, 식사를 하다 만 것 같은 식탁이 있거나 했습니다.”
“식탁? 음식이라도 차려져 있었어?”
“다 썩은 음식이요. 포크랑 나이프가 날이 망가져 있었으니 일부러 보라고 연출해 놓은 것 같긴 한데.”
그가 주머니에서 숟가락을 꺼냈다.
“아, 굳이 따지자면 식사 자리에서 싸움이 난 것 같아보이더군요. 가운데 자리의 숟가락이 왼쪽 자리 너머로 날아가 있었습니다.”
“뭐지. 관련된 퀴즈 같은 거라도 나오려는 건가.”
허강민이 고개를 갸우뚱 했다.
“이전 미궁에는 저런 수수께끼 풀이 같은 것도 있었나요?”
류태현이 하무열에게 물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하무열은 굳은 표정으로 휘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냥 벽에 붙어있는 검은 천일 뿐인데 뭐가 이상한 점이라도 있나 싶어 류태현이 그 쪽으로 다가갔다.
하무열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거기에 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야.”
그가 류태현을 불렀다.
“빨리 가자고. 방을 이렇게 무슨 장례식장처럼 꾸며놓고... 참, 누구 무기로 쓸 만한 거 주운 거 있냐?”
“여기요.”
양시백이 가느다란 몽둥이를 내밀었다.
“가늘긴 해도 꽤 단단해요.”
“어, 그래.”
하무열이 조금 물러섰다.
“자네가 갖고 있는 편이 낫겠어. 모르는 사람 누가 나타나면 즉시 달려들어서... 아니.”
하무열이 아직도 고민중인 허강민과 배준혁 쪽을 보았다.
“사람들 끌고 도망쳐.”
“물론이죠.”
시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교수님도 도망치시는 거죠?”
허강민이 하무열의 등에 팔을 턱 얹었다.
“아니라고 생각하는 근거가 뭐냐?”
하무열이 태연하게 되물었다.
“아니 특별히 근거는 없습니다만....”
“근거도 없이 사람을 몰아붙여, 응?”
“몰아붙인 게 아니고 교수님도 안전을 챙기시란 얘기죠.”
“그게 싸울 일인가요?”
류태현이 하무열의 등에서 허강민을 떼어냈다.
“질투해?”
“그런 게 아니라..... 참, 교수님하고 허강민씨 온 쪽은 별 일 없었나요?”
류태현이 뒤늦게 물었다.
“그래, 별로 위험할 건 없었다. 그러니 쫄지 말고 빨리 가자.”
하무열이 서둘렀다.
“사랑하는 사람하고 함께라면 어디 있든 좋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여긴 아닙니다.”
배준혁이 말했다.
“빨리 나가죠. 다들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


이들이 들어온 두 문을 제하고 나니 뒤쪽 하인 구역으로 통하는 것 같은 작은 문이 하나 남았다. 배준혁과 허강민이 잠금장치를 조사했다.
“평범한 자물쇠네요. 열쇠가 여기 어디 있을 겁니다.”
“어, 그래.”
하무열이 관 앞에서 몸을 숙여 반짝이는 것을 주웠다.
“이거겠지? 아까 허강민 녀석이 안에 있는 거 그러낼 때 떨어졌나보다.”
“안에 뭐가 있었는데요?”
류태현이 물었다.
“수의용 드레스.”
허강민이 짧게 대답했다.
“나랑 교수님이 가져온 등은 기름이 다됐어.”
“저희 건 마법으로 건 거라 아직은 괜찮습니다.”
준혁이 등을 들어보였다. 하무열과 허강민은 류태현을 보았다.
“그게 전....”
그가 손목을 드러내 보였다.
“뭐야 그게.”
하무열이 가까이 와서 그 수갑을 만져보았다.
“이렇게까지 너덜너덜해도 기능을 하는 거냐?”
류태현은 비참한 표정을 했다.
“내가 수사관으로 있을 땐 이런 건 비싸기도 어마어마하게 비싼 데다 잘못되면 마법사가 놓여나는 거라고 다들 무서워하며 조심조심 관리했는데..... 이렇게 되어도 쓸 수 있는 건줄 알았으면.”
“류태현은 아직 학생이잖아요.”
허강민이 하무열에게서 류태현의 손목을 낚아챘다.
“어쭈 지 애인이라고 챙기는 거 봐라.”
“어때요, 좀 챙기기로서니.”
허강민이 뻔뻔하게 고개를 들었다. 하무열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교수님.”
준혁이 하무열에게 다가갔다. 그의 귀에 대고 뭐라 소근거렸다. 하무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뭐야?”
허강민이 경계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내가 이러니까 교수 윤리 위원회에 맨날 투서가 날아드는 거라고 잔소리 했다.”
하무열이 말했다.
“내참, 제자 돌보고 걱정하는 거랑 성희롱 하는 것도 구별 못하고...”
“돌보고 걱정하는데 더해 놀리고 괴롭히잖아요.”
류태현이 투덜거렸다. 허강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그것뿐이에요? 그런 걸 왜 귓속말로 하는데요?”
“당사자 앞에 놓고 말하기 민망하지 않습니까.”
배준혁이 말했다.
“이제 허강민씨도 애인도 있겠다, 두 분 좀 점잖게 거리를 띄우는 것도 좋겠습니다.”
준혁의 말에 류태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를 고까운 눈으로 보다 허강민이 손목 잡은 그대로 끌고 갔다.
“자, 바보도 찾았으니 빨리 나가자. 이딴 상상력도 기술도 부족하고 여기저기 무식하게 부숴놓기만 한 미궁 따위.”
“창의성을 발휘해서 위험천만하게 만든 미궁에 갇히는 게 좋은 겁니까.”
배준혁이 어이없어했다.
“아무튼 나가자는덴 찬성이다.”
하무열이 문을 열었다.
문 바깥은 어둑어둑한 복도였다. 그런데 옆 모퉁이 쪽이 환했다. 모두 긴장해서 그 쪽으로 가보았다.
거기엔 나선 계단이 있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이 천장을 뚫고 위로 위로 연결되었다. 뚫린 구멍으로 하늘이 보였다.
“...지붕이?”
“최근에 설치한 거야.”
허강민이 계단의 난간을 만져보았다.
“네. 이게 원래 있던 거라면 적어도 비가 들이치지 않게 하는 구조가 있겠죠.”
준혁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집의 바닥이랑 천장을 막 뚫어서 이런 걸 끼워넣었다고요?”
시백이 놀라서 같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대체 왜요?”
“왜긴 왜겠냐, 우리더러 위로 올라오란 뜻이지.”
하무열이 난간을 단단히 잡고 계단에 발을 실었다. 철제 계단이 크게 끼이익 소리를 울렸다.
“위험해보이는데요.”
류태현이 불안한 표정을 했다.
“달리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하무열이 뒤를 돌아 류태현에게 손짓했다.
“예?”
류태현이 다가왔다.
“위험한 상황이 될 지도 모른다.”
하무열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상황이 심각해지면, 그래서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되면.”
하무열이 류태현의 손을 꽉 잡았다.
“너 자신을 보호해라.”
“.....네?”
류태현이 허강민을 돌아보려 했다. 하무열이 그의 머리를 꽉 잡고 눈을 마주했다.
“꼭이다.”
“하지만.”
“류태현 뿐 아니라 모두에게 하는 말이야.”
하무열이 목소리를 키웠다.
“애인 챙기는 것도 좋지만 자기 안전을 제일 먼저 챙겨. 부끄러운 일 아니니까.”
“그런데 왜 절.”
류태현이 항의했다.
“그야 네가 제일 호구니까 그러지.”
하무열이 그의 손을 힘주어 쥐었다 놓아주었다.
“명심했으면, 자, 이제 가자.”
하무열이 발판을 힘주어 디디며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다행히도 발밑이 흔들리거나 빠져버릴 정도로 부실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떤 함정이 있을지 모르니까...’
층을 올라가며 뚫린 단면을 살폈다. 계단이 들어갈 만큼은 부서져 있었지만 거칠고 날카로운 단면이 난간 너머까지도 튀어나와 있었다.
“다치지 않게 조심해라.”
당연히 조심할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노파심에 말해보았다.
“교수님도 머리 조심하세요.”
걱정해준 보답으로 건방진 대꾸가 돌아왔다. 하무열이 피식 웃었다.
그의 바로 뒤는 류태현이, 다음으로 허강민과 배준혁이고 양시백이 맨 뒤에 서서 한손으로 난간을 잡고 다른 손으로 막대를 쥔 채 뒤쪽과 주변을 경계했다. 이만하면 믿음직한 조합이라고 하무열은 애써 생각했다. 무슨 일이 생겨도 도망은 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도망쳐 봐야 이 폐허 안이라면.
어느새 지붕 바로 밑까지 도달했다. 이제 한 걸음만 더 오르면 머리가 밖으로 나갈 것이다. 위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람에게 보이도록.
‘이제 와서 도망칠 수는 없지.’
하무열은 이를 악물고 한 걸음 계단을 내딛었다.

밖으로 머리가 나오자 하무열은 멈춰서서 주위부터 살폈다.
여기는 4층의 실내였다. 지붕이 날아갔는지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제일 먼저 정면에 보인 건 침대였다. 크고 화려했었던 것 같은 침대를 보니 이곳은 집주인의 침실인 것 같았다. 한때는 훌륭한 방이었을 곳이 낡고 황폐해진 데다 창문 있던 벽 뒤쪽부터 해서 천장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그가 계단을 마저 올라가며 방안을 한 바퀴 쭉 둘러보았다. 어딜 봐도 버려진 침실이고 특이할 것은 없었다.
사람도 없었다.
‘설마, 여기에 아무도 없는 건가?’
그럴 리가 없었다. 강성중의 말이야 믿을 수 없는 거라 쳐도 그런 거라면 이 폐허는 어째서.
하무열을 뒤이어 다른 사람들도 올라왔다. 아무도 없는 걸 보고 어리둥절한 것도 잠깐뿐, 나선 계단을 등지고 둥글게 둘러서서 어디서 뭐가 나타나도 바로 반응할 수 있는 대형을 취했다.
말 안 해도 알아서 잘해주는 건 고맙지만, 학생들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전투태세가 되는 것도 싫다고 하무열이 생각했을 때였다.
쾅!
아마도 드레스룸으로 이어지는 문이 부서질 듯 세차게 열렸다. 하무열은 펄쩍 뛸 만큼 놀랐다.
누가 그리로 걸어 들어왔다. 덩치가 산만하고 사납게 생긴 사람이었다. 낡은 수도 수사국 제복을 입고 손에는 철퇴를 들고 있었다. 그가 하무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랜만이다, 무열아.”
하무열이 나직이 이를 갈았다.
“서태준....”

검은 남자 65 ㅣ- 회색도시&검은방


“그렇다고 절 위해 밀실을 준비하거나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럴 상황이 아니기도 했고요. 엄, 그리고.......”
정은창이 갑자기 주저했다.
“저, 경감님.”
“응?”
정은창은 CCTV 쪽을 눈짓했다.
“지금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다 믿을 만 해요?”
“그건 갑자기 왜?”
“제가 이런 말 하기 뭣하지만 부하들 단속 잘 하세요.”
권현석은 백석 스파이들을 떠올렸다.
“응, 조심하고 있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억지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받아들이는 척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어련히 알아서 할 일까지 잔소리하기는. 왜 아주 상관도 조심하라고 하지?”
“박근태는 이미 쫓겨났긴 하죠.”
정은창의 태도엔 변함이 없었다.
“그건 저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런데 관련자들 다 밝혀진 것 맞아요?”
“무슨 소리야?”
권현석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제가 김성식의 명령으로 실버 트와일라잇을 감시했잖아요.”
정은창이 목소리를 약간 낮추었다. CCTV가 보는 가운데 어디까지 말해도 좋을지 가늠하는 것 같았다.
“그때 박근태를 수행하던 형사 한 명과 마주쳤습니다.”
배준혁 이야기다. 권현석은 마른침을 삼켰다.
“깡패라고만 생각하게 놔뒀다간 안 될 것 같아서 그에게 정보원이라는 걸 밝혀야 했습니다.”
정보원이라는 걸 밝히지 않으면 위험할 정도의 상황이었다. 배준혁 때문에. 권현석도 거기까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정은창은 아까 마법 이야기를 언급 안 하면서 눈짓으로만 암시할 때와 똑같이 암시하고 있었다.
“단순히 상관 경호만으로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죠, 보통. 제 머리카락도 뽑았습니다. 꽤 아팠어요.”
남이 들으면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폭행을 가했다고 이해하겠지만 권현석은 배준혁과 허강민에게 약간이나마 들은 것이 있었다.
“알았어.”
권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준혁 형사에게도 이야기해보고, 월권한 게 있으면 따끔하게 혼낼 테니까.”


배준혁은 되돌아오자마자 경찰청보다도 실버 트와일라잇에 먼저 들렀다.
“돌아와서 기쁘군.”
박근태를 따라다니며 장희준을 본 적은 많았다. 그때는 지금에 비하면 박근태 등 뒤에 숨어있던 거나 다름없었다. 장희준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자 저절로 몸이 떨렸다.
“당장은 조용히 일하며 권현석과 팀원들의 신임을 되찾도록 하게.”
장희준이 옅게 미소지었다. 준혁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고.”
“복귀시켜 주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준혁이 한결같은 태도로 대답했다.
“기회가 다시 올 줄 몰랐습니다.”
“자네는 충분히 쓸모를 증명했어.”
장희준 역시 온화하고 관대해보이는 미소를 조금도 무너뜨리지 않았다.
“백선교 간부들까지 잡아넣으려면 마법사 경찰이 반드시 필요하지. 자네는 곧 수사팀 내에서 공을 세운 형사가 될 수 있을 거야.”
예상대로였다. 백선교를 완전히 잡아넣을 때까지는 장희준도 경찰들의 활약을 보아넘길 것이다. 클럽의 허락을 받아 김성식에게 보호를 제공하고 증언을 얻어낸 것처럼 적극적으로 마법을 활용할 수도 있었다.
“허강민이 체포된 것은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허강민은 하성철 국장과 손잡고 백선교를 배신했네.”
놀라는 반응을 보여주기 위해 연기력을 동원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은 경감님께 들어서 알고 있는데, 장희준은 어떻게 거기까지 안 걸까.
“하성철 국장이 백선교의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부터 했었지 않나.”
장희준은 둔한 학생을 타이르는 투로 설명했다.
“한데도 그는 백선교 수사의 칼날을 조금도 늦추지 않다가 밀실에까지 떨어졌지. 그리고 이젠 허강민을 병원에 두고 보호하며 증언을 받아내고 있어. 그러니 허강민을 통해 백선교로부터 단물만 빨고 돌아선 그림이 분명하게 보이는 거지.”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자네도 조심하게. 마법사가 된 것 들키지 말고.”
“예.”
“권현석 경감이 마법을 눈치 챈 기색은 없는지 확인하게. 하성철 국장에게 어느 정도로 충성하는지도.”
“알겠습니다.”
클럽을 나온 준혁은 참았던 숨을 겨우 토했다.
경감님께 보고하고 주의를 촉구해야 했다. 경감님은 마법을 전혀 모르시는 것으로 해두는 편이 자신의 잠입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감출 수 있게 할 것이다.
경감님 본인이 지금 보호 부적을 지니고 있지만 그건 클럽에서 경감님을 직접 마법으로 공격하기 전엔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렇게 해서 드러나더라도 변명할 말은 있다. 하성철 국장이 허강민에게 소지하기 자연스러워 보이는 부적을 만들게 하고 그걸 적당한 구실만 붙여 경감님께 ‘선물’한 거라고 하면 된다.
수상한 부분을 전부 국장님과 허강민에게 떠넘기는 것은 그에게는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어차피 허강민과 손잡고 있는 사람을 덥석 믿을 수는 없었다.
배준혁은 자신의 목표를 신중히 설정해놓았다. 자신의 생존과 제정신 유지, 양시백과 그 가족의 안전, 경감님의 안전. 그 외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여차하면 희생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서 형사와 오 형사 등 수사팀의 동료들도 소중하긴 하다. 그저 우선순위에서 밀렸을 뿐.
그 대신 문제가 심각해지기 전까지는 좋은 동료가 되도록 노력하자고 생각하며 경찰청으로 들어갔다. 권현석이 먼저 그를 맞이해 휴게실로 데려갔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무슨 일 날 때마다 전화 연락을 주고받은 덕에 준혁은 경감님을 오랜만에 본다는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러나 권현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정말로 반가운 듯 활짝 웃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지?”
“저는 괜찮았습니다. 경감님이야말로.”
“나야 늘 하던 대로였지.”
권현석은 잠시 헛기침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준혁이 나직이 답했다.
“아무도 듣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
그래도 권현석의 목소리는 작아졌다.
“일단 물어볼 게 있어.”
“뭡니까?”
“정보원 중 한 명이 자네 이야기를 하더라고.”
“정보원이요?”
“그래. 생각나는 거 없어?”
준혁은 잠시 갸웃거리다가 금방 아, 소리를 내었다.
“기억납니다. 실버 트와일라잇에 멋대로 침입하려다가 제게 잡혔지요.”
“금방 기억해내네. 이미 꽤 지난 일인데.”
“그야 그자가 또 함부로 사고치다 클럽의 눈에 띄면 저까지 죽으니까요.”
그런 말을 태연한 얼굴로 해서 말문이 막히는 것도 한두 번이다. 권현석은 마음먹고 표정을 엄하게 했다.
“준혁이가 자기 머리카락 쥐어뜯었다고 하던데.”
“예. 죽이고 싶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그냥 보냈다가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제게도 보험이 필요했습니다. 정보원으로서 믿을 만한 사람이었습니까?”
권현석은 잠시 망설였다. 잠입 동안에 다른 목적을 숨기고 경찰 작전을 방해하기까지 했으니 믿을 만한 정보원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클럽 관련해서 말썽을 피우지는 않았어. 정보원 시절에 범죄 사실이 몇 가지 있고 이번 네 번째 밀실과도 관련 있어서 지금은 구치소에 있지만. 그는 네가 클럽의 끄나풀다운 미친 마법사여서 내게 해를 끼칠지 걱정하던걸.”
“그땐 확실하게 겁을 주느라고 좀더 무섭게 위협한 것뿐입니다.”
“알아. 준혁 형사가 미친 마법사가 안 되려고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거.”
배준혁은 그때 정은창에게 진실 강요 주문도 썼던 것을 기억해내고 그가 경감님께 거기까지 일러바쳤을까 잠시 걱정했다.
다행히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지금 구치소에 있다면 마법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자세히 하는 것이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아직까지 클럽에서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니 그자가 정말로 클럽의 눈에 띌 만한 사고를 친 건 아닌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자신도 마법으로 협박하고 고문한 이야기 자세히 할 필요는 없었다.
“혹시 머리카락 돌려달라고 하던가요?”
“그런 말까지는 안 했어.”
권현석은 여전히 딱딱한 표정이었다.
준혁 형사를 의심해서는 아니었다. 덕분에 이제까지 큰 고비를 몇 번 넘겼는지 생각하면 클럽의 첩자라는 의심은 할 수 없었다.
“그럼 머리카락 안 돌려줄 거야?”
“그가 믿을 만한 인물이라면 굳이 돌려줄 필요 없겠지요.”
권현석의 시선을 받고 준혁은 조금 움츠러들었다.
“그거 머리카락 주인의 목숨을 쥐고 있는 거지. 안 그래?”
“맞습니다.”
“경찰이 그저 만약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민간인의 목숨을 쥐고 흔들면 된다, 안 된다?”
“......안 되지만 저는 마법사이고......”
“마법사이기 전에 경찰이야. 인간이고.”
더 대꾸하려던 준혁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양복 안주머니를 뒤져 작은 지퍼백 한 뭉치를 꺼냈다. 손바닥 만한 각 봉지마다 짤막한 사람 머리카락이 한 줌씩 들어있고 매직으로 뜻모를 숫자가 한 자리나 두 자리씩 적혀있었다.
“그 사람 건 이것입니다.”
‘1’이라고 적힌 블루블랙의 머리카락 봉지를 권현석에게 건넸다.
“그냥 봉지를 뜯어 버리셔도 되지만 확실하게 하려면 태워 없애야 합니다.”
“언제라도 쓸 수 있게 갖고 다닌 거야?”
“마법사는 대개들 이렇게 합니다. 위급할 때 바로 꺼내 쓸 수 있어야 하니까요. 꼭 저주나 공격을 위해 갖고 다니는 것도 아닙니다. 추적 주문이라든지는 보호해야 할 상대에게도 쓸 수 있습니다.”
“그렇군.”
수긍하면서도 권현석은 정은창의 머리카락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정은창은 이제 구치소에 있으니 마법으로 추적하거나 상태를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보호 주문을 만들 때도 본인의 머리카락을 넣어 더욱 맞춤형으로 만들 수 있고요.”
“그래?”
그 이야기는 조금 솔깃했다. 권현석이 반응을 보이자 배준혁이 덧붙여 설명했다.
“물론 저는 아직 햇병아리 마법사이기 때문에 백선교의 고위 마법사가 작정하고 힘을 쏟으면 백퍼센트 장담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그런 강력한 주문은 한갓 정보원보다는 허강민이나 국장님을 겨냥하겠지요.”
“그렇군. 그럼 그 두 사람은 어떻게 보호하는데?”
“다행히 주문 주머니가 제가 할 수 있는 최상의 방어인 것은 아닙니다. 말 나온 김에, 허강민은 지금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알고 싶습니다. 직접 만나보는 것이 가능할까요?”


뇌물이 될 수 있을 정도의 최고급 브랜드를 제외하면 하성철은 의류 브랜드에 둔감한 편이었다. 그런 그도 눈앞에 내밀어진 넥타이가 순경 월급으로 부담스러울 만큼 비싸다는 건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때 분명히 괜찮다고 했네만.”
“그렇다고 정말 모른척할 수는 없었습니다.”
류태현 순경은 빳빳이 서서 하성철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그 넥타이는 오래된 것이었고 가격도 원래 쌌다고 기억하고 있네. 최소한 이보다는 쌌을 거야.”
“감사의 뜻을 더 담았다고 생각해주세요.”
몇 번을 더 사양해야 피자 체면 구기지 않을 수 있을까 하성철이 궁리하는 동안 류태현이 말을 이었다.
“꼭 손을 닦게 해주셔서만이 아닙니다. 그 안에서 국장님은 사람들이 동요할 때마다 침착하게 상황을 누그러뜨려주셨습니다. 그래서 더 그냥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나 역시 경찰로서 내 의무를 다한 것이네.”
하성철은 류태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허강민을 감싸준 것 이야기라면 더욱 자네가 감사할 일이 아니고.”
류태현의 어깨가 떨렸다.
어차피 하성철도 류태현을 불러서 한 번 긴 이야기를 해보고 싶던 차였다. 의자를 권하고 물었다.
“자넨 어째서 허강민에게 그런 마음을 품게 되었나?”
류태현도 예상했던 질문이었고 당연히 대답도 준비해왔다. 면접관 앞에 선 기분으로 답했다.
“아마 처음엔 동정심이었을 겁니다.”
속이거나 그럴 듯하게 포장해서 말하는 건 처음부터 고려하지도 않았다. 그럴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다. 나이든 국장님이니 애송이 순경의 거짓말쯤 꿰뚫어볼 연륜도 있으실 거고, 허강민 씨에게 직접 가서 같은 질문에 강민 씨에게는 뭐라도 답했는지 물어보실 수도 있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류태현은 국장님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부러워졌다. 국장님은 체포된 강민 씨를 최대한 배려하고 보호할 권력이 있고 허강민 씨는 그 보호를 싫어하지 않았다.
“무열 선배 말대로 길들여진 걸지도 모르죠. 이유는 저도 잘 모릅니다. 실은 맨 처음 밀실에 갇혔을 때 이미 반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을 정도입니다.”
감정을 누르고 당당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중요한 건 이유가 어떻든 지금 제가 허강민 씨를 좋아한다는 겁니다. 거기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게 느껴지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렇지 않게 될 걸세.”
하성철은 차분하게 류태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이유 없는 사랑이 세상에 있다는 건 아네. 문제는 그게 길게 지속되려면 결국은 이유가 필요해진다는 거야. 차라리 허강민이 잘생겨서라든가 하는 말이라도 듣고 싶은 이유가 그걸세.”
“저, 실제로 잘생겼습니다. 게다가 재주 많고, 그리고......”
“그를 싫어하고 피할 이유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지.”
하성철은 말을 잇기에 앞서 잠시 망설였다.
“이 자리니까 하는 말인데, 사랑하고 평생을 함께 하기로 했다고 해서 언제나 금슬 좋을 수는 없어. 싫증이 날 때도 있고 같이 살면서 알게 된 단점을 불만스럽게 곱씹을 때도 있고. 하지만 혼인 서약과 그 사람과의 자식, 주위 시선 등이 있으니 극단적인 쪽을 생각하기 전에 머리를 식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되는 거야. 로맨틱하지는 않아도 의외로 많은 부부가 그렇게 유지된다네.”
류태현은 어깨를 움츠렸다. 국장님이 하고 싶은 말씀을 알 것 같았으므로.
“자네와 허강민은 그런 외적인 버팀목이 전혀 없지. 그가 결국 감옥에 갈 것을 포함해서, 주위의 모두가 그와 자네를 갈라놓으려고 힘쓸 수밖에 없어. 자네가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어졌을 때 외부에서 떠받쳐줄 아무런 요인이 없지. 그런데 ‘그래도 그의 이런 점이 좋아서 떠날 수 없다.’라는 말조차 할 수 없다면 어떻게 자네가 그와 잘 될 거라고 믿을 수 있겠나?”
힐난하는 기색이 없어서 류태현은 더 괴로웠다. 국장님은 자신과 강민 씨의 앞날을 위해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을 말씀하시고 계셨다.
“허강민의 사정이 보다 평범했다면 나도 다 자란 남의 인생에 이렇게까지 참견할 생각은 안 했을 걸세. 하지만 지금의 그가 자네와 사귀다가 결국 관계가 끊어진다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류태현이 고개를 들고 하성철을 빤히 쳐다보았다.
“남......이라고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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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정은창의 머리카락이 '1번'인 이유는 '첫번째로 갖게 된 샘플'이라는 뜻입니다.
양시백의 머리카락도 있습니다. 적에게 뺏겼을 때 준혁에게 우호적인 인물(=약점)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18'이라고 적었습니다. 물론 양시백 본인은 모릅니다. :)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27 ㅣ- 회색도시&검은방

“저,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요?”
차 안에 있던 청테이프로 이경환을 꽁꽁 묶고 입까지 막고 나서 류태현이 물었다. 차창 밖 풍경은 이미 도심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류태현 순경님,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하태성이 딴소리를 했다.
“어....”
“미래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어, 미래보다는 과거에 대해서요.”
류태현이 멈칫멈칫 대답했다.
“과거로 돌아가 사고를 없앨 거라고요. 그리고.....”
류태현이 하태성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니까, 미래에서 온 사람, 인건가요?”
“하태성 경위입니다.”
고등학생 교복을 입고 운전을 하면서 그가 뒤늦은 소개를 했다.
“경위였던 건 미래 일이고, 이번엔 경찰대에 갈 생각 없으니 이젠 아니게 되겠지만 편의상 미래에 대해 아는 사람들끼리는 이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 네. 네... 전 류태현 순경입니다.”
류태현이 조그맣게 덧붙였다.
“아시겠지만.”
“허강민에 대해 아는 만큼은 압니다.”
그리고 잠시 차 안이 조용해졌다. 류태현은 이경환이 제대로 기절해있는지, 그리고 살아있는지 확인했다.
“그래서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요?”
류태현이 재차 물었다.
“그 사람을 처리할 수 있을 만한 곳이요.”
“처리.... 네?”
류태현이 확 앞자리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안됩니다! 살인이라니....”
“저 사람 어차피 십 년 뒤엔 연쇄살인범 손에 죽습니다.”
류태현이 입을 딱 벌렸다.
“그, 그래도 말이죠! 그.... 십년간은.... 아니 그렇게 따지면 우리 모두 언젠간 미래에는 죽는 거잖아요?”
류태현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 허, 허강민씨 조차도 이제는 사람 안 죽이겠다고 했는데 경찰이 되어선.”
“부패경찰이고 살인 미수범입니다.”
류태현의 턱이 빠졌다.
“그리고 지금은 절 위해 이러는 게 아닙니다, 저자는 하수인에 불과할테고 주모자가 저에 대해 알아냈다면 저자 하나 없앤다고 제가 안전해질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겐 다릅니다.”
“네? 저요?”
“네. 저와 류순경이 접촉하는 걸 봤으니 이 사람을 살려 보내주면 즉시 당신을 추적할 겁니다. 미래에 대해 알고 있는 걸 알아내려고 고문을 할지도 모르고 그러다 허강민씨와 연관된 것까지 알아차리게 되면 우리 모두가 위험해집니다.”
류태현이 몸을 움츠렸다. 틀린 말은 없었다. 허강민이 위험해질 일은 그도 최대한 막고 싶었다. 그래도.
“저, 그러니까 이 사람이 절 못 알아봤기만 하면 되는 일이군요. 그렇죠?”
하태성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못 알아봤을 리가.”
“저 아까 총 겨누고 있었어요. 팔에 가려져서 이름을 정확히 보지는 못했을 겁니다.”
류태현이 말했다.
“이 사람이 본 건 순경 계급장과 얼굴 정도일 텐데, 순경은 만 명 넘게 있고 전 무척 평범하고 기억에 안 남는 얼굴입니다. 추적하긴 어려울 거예요.”
“어려울 뿐이지 못하는 건....”
“저보단 하태성..경위님이 위험한 거 아닐까요. 이름 모를 순경1을 추적하는 것보단 이름도 다니는 학교도 알고 있는 고등학생을 추적하는 게 백배는 쉬울 텐데.”
하태성은 입을 다물었다. 하여간 한 마디도 안 지고 따박따박...이라고 생각하는 기운이 룸미러 너머로 전해져 와서 류태현은 조금 웃었다.
‘아니, 웃을 일이 아니지.’
“그런데 하태성 경위님은 정말 위험한 거 아닌가요? 아니 근데 이 사람은 누가 보낸거죠? 누가 적인 건가요?”
“일찍도 물어보네요.”
하태성이 한숨을 쉬고 차를 갓길에 세웠다. 그가 차에서 내려 류태현에게 손짓했다.
“안 죽일 거라면 적의 하수인이 들을지도 모르는데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류태현이 내리자 하태성은 길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적이 누군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미래의 적과 현재의 적은 알지만 이 적은....”
“왜 그렇게 적이 많은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하태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허강민씨가 과거로 돌아가면, 정말 이걸 다 뿌리뽑을 수 있는 걸까요.”
“저도 도울겁니다.”
류태현이 말했다.
“과거로 따라가서요. 허강민씨는 내키지 않는 것 같.... 대놓고 내키지 않아하지만, 그래도 혼자 다 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하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넷이나 되는데도, 아니 세 명이 미성년자라서 행동이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제대로 미래를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기억속의 이 때보다 훨씬 일찍, 아직 아버지 살아있는 동안 작전이 끝나기는 했다. 현직 형사인 배준혁의 공일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비리 혐의는 그때보다 더 크게 터져 공격받고 있고 김주황도 아직 찾지 못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류태현이 미소지었다.
“지금은 큰일이라도 과거엔 아주 사소한 일이라 쉽게 막을 수 있을 가능성이 높고, 또 허강민씨는 워낙 추진력... 아니 행동... 아무튼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하고 할 수 없는 일까지 해내니까요.”
그렇죠, 그 능력을 엽기 대량 살인에 쏟아 부어서 그렇지, 라고 빈정거리고 싶었지만 하태성은 참았다. 자신의 상황이 비비 꼬여있는 건 류태현 탓도 허강민 탓도 아니었다. 쓸데없는 화풀이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경위님..은 아까 학교 끝난 거면 집에 가야하지 않아요?”
류태현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늦어지면 걱정하실 거예요.”
“네, 그렇죠.”
하태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머니를 걱정시키고 싶은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그러려면 집에 빨리 돌아가야 하는 건 물론이고 이번 납치 미수 사건도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했다.
꽤 먼데까지 나왔기 때문에 지금 전속력으로 되돌아가도 어머니를 안심시키려면 뭔가 거짓말을 해야 했다. 그럼 차라리 납치범을 지금 처리하고 두 시간짜리 거짓말 대신에 네 시간짜리 거짓말을 하는 게 나았다.
하태성이 차 뒷좌석을 열었다. 이경환이 잘 기절해있는지 확인하는 동안은 가만히 있던 류태현이 하태성이 이경환의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내자 기겁했다.
“저, 뭐 하시는...”
“이자가 아까 자기가 경찰이라고 했습니다.”
지갑과 권총을 꺼내고 수갑은 이경환에게 채우고 하태성이 도로 차문을 닫았다.
“수갑도 총도 있고, 류순경 대할 때 태도를 보면 현직 형사가 맞는 모양이니 확인을 해야죠.”
하태성이 신분증을 꺼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뒷면도 보고 요철을 손으로 훑는 걸 보며 류태현은 괜시리 불안해졌다.
“위조인가요?”
“아, 아뇨. 아니 위조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그냥... 보던 것과 다르니 신기해서요.”
“네? 아, 미래니까 뭔가 바뀌나보죠?”
말하고 류태현은 상대가 ‘미래에서 온 사람’ 그것도 21세기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왜 그러시죠?”
류태현의 표정이 요상해진 것을 보고 하태성이 물었다.
“아뇨, 그.... 21세기니까, 혹시 그 때는 자동차가 날거나............. 아니군요.”
류태현이 고개를 푹 숙였다. 하태성이 혀를 찼다.
“괜찮습니다. 저도 어렸을 땐 21세기가 되면 자동차가 날고 사람들이 다 안테나 달린 은색 옷을 입고 다닐 거라고 생각했던 적 있습니다.”
“그, 그런가요.”
류태현이 안도했다.
“세상이 멸망한다 컴퓨터가 멈춘다 엄청 말은 많았지만 21세기도 이전이나 하나도 다를 게 없습니다. 휴대전화가 널리 보급된 정도나 변화일까요.”
“네...”
“사는 사람이 똑같으니 당연한 일이죠.”
하태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일어나는 범죄 양상도 비슷하고요.”
“범죄....”
류태현이 잠시 망설였다.
“왜요?”
“저... 하태성 경위님은 미래에 경찰이었으니까, 어.”
류태현이 못한 말을 하태성이 알아들었다.
“당신은 살아남습니다.”
그가 잠깐 생각하고 덧붙였다.
“이제는 의미 없는 정보지만요.”
“네...그렇군요.”
류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살아남는다는 건 다른 사람, 특히 허강민은 그렇지 못하다는 뜻일 것이다. 류태현은 허강민이 어떻게 되는지도 묻고 싶었지만, 하태성이 말했듯 이제는 의미 없는 정보였다.
“저....”
한참 있다 류태현이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걸었다.
“저 이경환 경사라는 사람 경찰이 맞는지 조회라도 해볼까요?”
“네? 아뇨, 안됩니다.”
하태성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짓을 했다간 그 자리에 있던 게 류태현 순경이란 사실이..... 아.”
하태성이 류태현을 쳐다보았다.
“근무중이었나요?”
류태현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만 명 중의 한 명이 아니게 되네요.”
하태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이러고 싶진 않지만, 류태현 순경을 보호하려면 별 수 없습니다.”
하태성이 책가방을 열었다. 류태현이 눈을 크게 떴다.
“그 그렇다 해도 살인은!”
류태현이 그의 손목을 꽉 잡았다.
“제발 다시 생각해보세요, 이래봬도 경찰이 맞으면 수사도 집요할 거고 그 적측에서도...”
하태성이 류태현을 째려보았다.
“죽이려는 거 아닙니다.”
“그럼요?”
하태성은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걸 잠깐 노려보다 번호를 눌렀다.
잠시 후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접니다, 아버지.”
허강민이라 생각해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류태현은 조금 놀랐다.
‘늦은 핑계를 엄마 아니라 아빠한테 대는 건가?’
“간단히 말해, 납치 시도가 있었습니다. 저에 대한.”
하성철이 숨이 막히는 소리를 냈지만 하태성은 신경 쓰지 않았다.
“실행범은 자칭 이경환 경사라는 사람입니다. 신분증과 수갑에 제식 권총까지 있는 걸 봐서 본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태, 태성아....
“조용히, 사건이 되지 않게 처리하고 싶습니다.”
하태성은 여전히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아니면 제가 처리할까요?”
이번에는 조금 침묵이 길었다. 명색 경찰이 되어 ‘처리’의 함의를 깨닫지 못했을 리는 없고, 약을 먹든지 고민을 하든지 둘 다 하든지 하는 모양이라고 하태성은 남일처럼 생각했다.
-내가 하마.
한참이나 지나서 파리한 목소리가 말했다.
-내가 알아서 어떻게든 할테니 너는...
“순찰 중이던 순경 한 명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말할 시간을 주지 않고 하태성이 자기 할 말을 계속했다.
“이름은 류태현. 입을 다물어주기로 했고 믿을 만 합니다. 그래도 근무 중 이탈에 대한 핑계와 보호가 필요합니다.”
-입을 다물어주다니 너 대체.
“도와줄 건가요 말 건가요?”
-...알았다.
귀동냥중인 류태현에게도 건강 상태가 매우 걱정되는 목소리로 하성철이 말했다.
“그리고 어머니를 안심시킬 거짓말도 하나 부탁합니다.”
-그래.
잠깐 침묵 후 하성철이 덧붙였다.
-그럼 내가 널 데려다 같이 저녁 외식을 한다고 이야기해놓으마.
“어머니를 빼놓고요?”
하태성이 힐난했다.
-안그래도 네가 요새 예전과는 좀 다르게 행동했지. 부자간에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해보고 싶었다고 하면 이해할게다.
하태성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네, 그럼...”
-뇌물수수 혐의는 누명이다.
하태성이 입을 벌렸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미안하다. 누명을 벗지 못해서. 너와 네 어머니를 힘들게 해서. 노력하고 있지만 이번에도 안될지도 모르겠다. 믿지 않아도 된다. 그저.... 미안하다.
전화가 끊겼다. 하태성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전화기만 노려보았다.



[또봇, 바이클론즈, 회색도시] 회색 지구 38 ㅣ- 크로스오버


집안에선 납치범에 대해 당장 알아낼 수 있는 걸 찾지 못했다. 협박전화 등에 대비하기 위한 최소 인원만 남기고 철수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하태성 경위는 대기조였다. 멀쩡한 가정집 2층에 방 하나가 통째로 뜯겨나간 흔적을 보고 태성은 아무런 불만 없이 이 괴상한 집의 비밀을 파헤치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이번 납치와 무관하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콘크리트 뜯긴 부분은 이미 비바람에 마모되고 흙먼지가 낀 상태였다. 드러난 화장실 타일바닥 역시. 그런데 왠지 변기만은 깨끗이 닦여있었다. 물도 안 고여있는데.
‘나 대체 뭘 따지고 있는 거지.’
이런 게 눈앞의 사건과 무슨 상관이 있나 싶어서 태성은 고개를 들고 바깥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차라리 전망도 좋은데 여기서 이 집의 접근경로나 다 확인하는 게 훨씬 합리적일 것 같았다.
집 앞 골목은 넓고 다른 주택들도 있으니 이웃들 눈에 띄지 않고 사람을 납치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낯선 사람은 금방 눈에 띌 것이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길을 걸어오는 선명한 보라색 옷의 남자는 그 정도로 눈에 띄었다.
외계인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옷차림도 이질적이고 한쪽 팔 대신 달려있는 금빛 의수는 장애보다는 차라리 힘의 상징 같았다.
집 가까이까지 성큼성큼 걸어온 외계인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고 태성과 눈을 마주쳤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경례를 붙일 뻔했다. 그 정도로 자신의 힘과 권위에 한 치의 의심도 없어보이는 인물이었다.
태성은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역시나 그 외계인이 막 집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현관을 지키던 순경도 군말없이 비켜주었다.
“누구십니까?”
대기조 중 경위는 자신뿐이었다. 태성은 너무 무례해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그 외계인 앞을 막아섰다.
“대 테러 전담반의 하태성 경위입니다. 신분을 밝혀 주십시오.”
그 외계인의 시선을 정면에서 받고 태성은 그만 빳빳하게 굳어서 경례를 붙였다. 외계인은 고압적인 태도를 풀지 않은 채 경례를 받을 뿐 태성의 요구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강하게 요구해야 할지, 눈치껏 닥치고 물러나야 할지 그 당당한 시선 앞에서 확신하기란 어려웠다. 그때 외계인에게서 삑삑 신호음이 울렸다.
외계인이 뭔가 작은 기계장치를 꺼내들며 다시 현관으로 다가갔다. 그 기계에서 울리는 삑삑 소리가 점점 커졌다.
“좀무국은 제국이 왜 불가사리를 고수하는지 이해 못하고 있어. 생체병기가 비인도적이라느니 하는, 불가사리의 본질을 전혀 모르는 소리나 하고 있지. 그러니 어떻게 돼? 고작 3분가사리의 잔재주 정도에 뚫리는 거지.”
현관의 키패드에 기계를 대고 다른 손에 든 단장으로 키패드를 한 번 꾹 누르자, 삑 소리와 함께 지렁이 만한 크기의 징그러운 뭔가가 키패드에서 빠져나와 기계에 부착된 투명한 플라스틱 용기 속에 떨어졌다. 외계인이 삑삑 소리가 멎은 기계에서 그 플라스틱 부분만 떼어내 태성에게 던졌다.
“그거 갖다 보여주면 그 고물 라디오도 뭔가 깨닫는 게 있을 거다.”
얼결에 받아들고 고개를 드니 외계인은 벌써 들어올 때와 똑같은 태도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태성은 그를 불러세우는 대신 팀장님에게 연락했다. 경찰청과 특수반의 두 팀장 모두에게.


“기생 불가사리입니다. 생명체가 아닌 기계에 기생해서 기계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바이러스죠.”
라디오자키가 래오, 미오, 지오와 이순희 여사 앞에서 설명했다.
“이것 때문에 집안의 보안 장치가 무력화된 겁니다. 범인은 역시 제국 세력입니다.”
“그런데 왜 그걸 화심 소장이 와서 가르쳐주고 간 거지?”
지오가 갸우뚱했다. 하태성 경위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한 몽타주는 분명 이들이 제국측 인물 중에서도 가장 두려워했던 불가사리 전문가 화심 소장의 얼굴이었다. 하태성은 화심을 본 적이 없으니 착각했거나 꾸며냈을 가능성도 없었다.
“전부 속임수일 가능성도 있지만, 일단 이 불가사리를 좀더 조사해보는 게 순서이겠습니다.”
라디오자키가 불가사리를 스캐너에서 내려 다른 장치 위에 얹고 전선을 몇 가닥 연결했다. 모니터에서 신호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과연, 이 불가사리는 통신과 보안 교란용이기 때문에 모선과의 통신 기능이 있습니다. 출동 준비하세요. 추적할 수 있겠습니다.”


에펙스의 연락을 받고 셰이드가 피오에게 날아왔다. 피오는 바로 화면에 비친 래오를 마주보았다.
-시외의 하수처리장 근처에서 단서가 발견되었어. 우리 지금 출발하니까 자세한 얘기는 거기서 만나서 하자.
“그래!”
피오는 바로 액션 바이크를 타고 달려나갔다.
어떻게 알아냈는지 같은 건 가서 천천히 들을 생각이었다. 다른 일도 아니고 태오 형의 일인데 래오 형이 자신을 속일 리 없었다.
초등학교 때 다른 친구들 중엔 간혹 형이/누나가 골탕먹였다느니 과자 가지고 거짓말했다느니 분개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오남매네 집에선 지오 형조차도 피오에게는 그러는 법이 없었다.
시외까지 나오자 셰이드가 에펙스와 톡시, 로키, 실버가 있는 위치를 추적해 피오를 안내했다. 인질범을 자극하지 않기 위함인지 다들 클론을 소환하지도 않고 다른 병력을 거느리지도 않은 채 이순희 여사의 우주선만 스텔스 모드로 숨어있었다. 형들과 누나도 액션 바이크 모드가 아닌 평소 차림이었다.
“아, 안녕. 오랜만이야.”
피오는 천천히 그리로 다가가 액션 바이크 모드를 해제했다.
“피오....”
래오가 눈길을 피하더니 이내 달려와 꽉 끌어안았다. 미오와 지오도 뒤따랐다.
“래오 형, 미오 누나, 지오 형....”
“피오야....”
시삽들은 한 걸음 물러나서 그 광경을 바라보다 셰이드에게 시선을 보냈다. 셰이드는 묵묵히 고개만 살짝 끄덕여 보였다.
“그동안 혼자 고생했어, 셰이드.”
톡시가 먼저 말을 걸었다.
“지금은 태오를 찾는 게 먼저야.”
셰이드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어떻게 단서를 얻은 거야?”
“그게 좀 이상해.”
에펙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태오네 집 보안장치에 기생사리를 침투시켜서 보안을 깨고 태오를 잡아갔던 거거든. 그 기생사리를 추적해서 여기까지 온 거고. 그런데 기생사리 잡아준 사람이 아무래도 화심 소장 같단 말이야.”
“으음.”
셰이드가 말이 없는 건 늘 있는 일이라 에펙스는 신경쓰지 않고 설명을 계속했다.
“그래서 지금은 태오를 미끼로 우리 전부 잡으려는 제국의 함정이 아닌지 신중히 탐색해보는 중이야.”
“그래.”
화심은 납치 세력과는 직접 관련이 없고 피오가 도움을 청하자 들어준 거라고 설명하는 대신 그렇게만 말했다.


지구의 지배층 가운데 오남매에게 불만 있는 자들과 접촉해 손을 잡는다. 환장용병단의 새 방침이었다.
장희준 회장은 전혀 이쪽 뜻대로 되어줄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똑똑한 사람이 좀 믿기는 힘들어도 유용한 법이라며 환장은 그와의 제휴를 밀어붙였다. 부하인 막장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박근태란 인간 정말 도움이 될까.....’
사회적 지위가 우위의 전부였던 사람은 그걸 잃는 순간 빈껍데기가 된다. 막장의 눈엔 박근태가 바로 그런 사람으로 보였다.
오태오의 근황과 집을 그 덕분에 알아냈으니 쓸모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 태오를 잡은 이후의 일은 저쪽의 참견 없이 알아서 할 때였다.
이토록 쉽게 손에 넣은 인질로 뭘 하면 좋을지 환장은 전복 대감과 의논하러 갔고 다른 셋은 전시용을 봉쇄....아니 접대하러 간 상태였다. 전시용이 또 포로를 풀어줘버리지 못하도록 절대 태오 가까이 못 가게 하라는 것이 환장의 엄명이었다.
현명하고 적확한 조치지만 난 덕분에 이렇게 심심하다. 이런 신세타령이나 하고 있는데 갑자기 경보가 울렸다.
“무슨 일인가?”
박근태의 질문을 무시하고 외부 모니터를 켜 보았다.
“헉!”
액션 바이크 네 대가 기지 안으로 뚫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막장은 황급히 방어 시스템을 발동시키고 박근태와 함께 감옥이 있는 안쪽으로 피했다. 이 기지 자체가 ‘관’을 응용한 하나의 거대한 불가사리가 아니었다면 가만히 있다 뒤통수 맞을 뻔했다.
침입자를 격퇴하는 장치들은 액션 바이크들이 하나하나 손쉽게 피하거나 파괴하고 있었다. 지구 지배에 골몰하는 와중에도 훈련을 게을리 안한 모양이었다.
“이대로는 저놈들 다 여기까지 도착하겠어!”
외부 모니터를 같이 보고 있던 박근태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다른 방법 없나? 저 인질이라도 활용해야 할 거 아냐!”
“오태오를 함부로 내주자는 거야?”
막장이 짜증을 내었다.
“그건 안 돼. 대장님께서 우주선 문도 안 열어주실 거라고. 댁네 회장님도!”
막장은 고민했다. 이대로라면 정말 오남매가 여기까지 도착하는 건 시간문제다. 혼자 싸워 이길 자신도 없다. 오남매를 상대로 시간을 끌며 나머지 멤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태오를 풀어주겠다 말고 무슨 말을 해야 시간을 끌고 오남매를 달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박근태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직전까지 지구 정계에 몸담고 있던 사람이니 그럴싸한 의견을 내주지 않을까?


관의 중심부까지 거의 다다른 순간 갑자기 공중에 화면이 켜지고 환장용병단 중 한 명의 얼굴이 비쳤다.
-더 이상 가까이 오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막장이 목소리를 깔고 오남매들을 위협했다.
“흥, 가까이 안 가면 대체 뭐가 좋은데?”
지오가 화면을 향해 빈정거렸다.
-너희들이 아니라, 너희들 큰형에게 좋을 거란 얘기다!
화면이 바뀌고 치료기 비슷한 길고 투명한 케이스가 비쳤다. 그 안에 태오가 누워있었다.
-지금이야 그냥 수면유도 상태지만 너희들 하기에 따라 어떻게 될지 몰라?
오남매들은 제각기 당황했다.
“야! 이거 너무 치사하지 않냐!”
지오가 다시 욕배틀이라도 벌일 기세로 소리질렀다.
-그래, 나 치사하다. 어쩔래.
“원하는 게 뭐야!”
래오가 소리쳤다.
“우리가 들어줄 수 있는 건지 어디 들어나 보자!”
-여기서 곱게 나가야지. 우릴 그냥 놔두고.
“말이 되는 소릴 해!”
지오가 버럭 소리질렀다.
“태오 형을 두고 그냥 돌아가라고?”
“형을 돌려주면 너희들은 안 건드리고 그냥 돌아가주지. 어때?”
래오가 협상을 시도했다.
“지금 우리 네 명만 와 있는 거 아냐. 우리 허락 없으면 절대 못 도망가.”
스크린 너머에선 잠시 답이 없었다.
-인질을 교환하는 게 어때?
다시 막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태오 말고 덜 중요한 녀석들과 교환하는 거다. 2시간 내로.....
잠시 스피커가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리모 회장을 데려와라. 그러면 교환할 용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2시간은 너무 촉박한 거 아냐? 코어 분리하는 데 네 시간은 걸릴 거라고!”
막장이 박근태에게 따지며 관의 코어를 분리 사출할 준비를 시작했다. 일반적인 비상 탈출이라면 당장이라도 할 수 있지만 지금 그랬다가는 좀무국 셔틀에 그대로 잡혀버릴 게 너무 뻔했다.
“촉박해야 저 어린 녀석들이 혼란에 빠지고 대처능력도 떨어지지. 부족한 두 시간은 다음 조건을 내걸어서 또 끌 수 있어.”
“저 녀석들이 정말 리모 회장을 잡아올 수 있다고 생각해?”
“그건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박근태가 이를 악물었다.
“어느 쪽이든 정부는 대혼란에 빠질 거다. 너희도 그걸 원하지 않나?”


래오의 연락을 받고 태후와 라디오자키도 당황했다.
가능할 리가 없었다. 어떻게 리모를 잡아 넘기고 태오를 찾는다고 해도 그 여파는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관의 외부는 완전히 포위했습니다만, 무력 돌파를 하면 태오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실버가 라디오자키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실버도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리모 회장은 지금 사태를 아직 모르지?”
태후가 고민했다.
“일단은 모르게 놔둬. 알면 우린 환장용병단이 문제가 아니야.”
그때 자키에게 새 통신이 들어왔다.


서재호가 잘못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조사 끝에 수상한 곳들을 추리고 나니 예상보다 꽤 많았고 그래서 본부에 남아 오퍼레이팅만 하는 대신 오미정과 함께 2인 1조로 의심가는 장소 중 한 군데에 갔을 뿐이었다. 오퍼레이팅은 나가서 사고칠 자격 없는 배준혁에게 떨어졌다.
그렇게 간 곳에 정말로 불가사리 반응이 있었다. 그래서 준혁에게 연락하고, 무전 연락을 계속하며 주변을 좀더 관찰하려 했다. 그러다가 그만 좀무국 우주선의 자체방어 시스템을 건드렸을 뿐이었다.
“두 사람 다 다친 곳은 없습니다.”
기절한 재호와 미정을 치료 캡슐에 반듯이 눕히고 자키가 안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다만 방어용 전기 충격 장치 때문에 가지고 있던 전자 장비가 전부 타버렸습니다. 이건 우리가 특수반에 배상해야겠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이순희 여사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태오를 어떻게 구해야 좋을지를 계속 고민했다. 관의 특성상 우회 진입로를 찾아 기습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지만 지금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서재호와 오미정에게 크게 신경을 쏟지 않은 것도 잘못이라고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서재호와 오미정의 무선 연락이 갑자기 두절된 것을 제국에 의한 공격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배준혁이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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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연중했던 글인데 비축분이 한 화 반 정도 남아있었더라고요. 물 들어올 때 노젓기로 했습니다. ^^;;;
기왕 연중할 거면 박근태 무찌르는 건이 마무리된 시점에서 끊는 게 그나마 사건의 완결성이라도 획득했을 텐데 무리하게 이야기를 이은 게 실수인가봅니다. 그래도 기왕 썼으니 어떻게든 태오는 구출할 겁니다. :)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26 ㅣ- 회색도시&검은방


점심을 먹고 나니 졸렸다.
최재석은 커다랗게 하품을 했다. 하고 나서야 여기는 깡패 소굴이 아니라 경찰청이니까, 좀 더 품위있는 척을 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내 적성은 경찰이 아닌 거 아닐까?’
그가 옆자리를 흘끔 보았다. 자기와는 달리 경찰이 매우 적성에 맞아 보이는 친구가 인상을 찌푸리고 책상 한 구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정의롭지 못한가 보려고 최재석이 고개를 빼었다.
“웬 액자야?”
유상일의 시선 끝에는 조그마한 탁상 액자가 빈 채로 놓여있었다.
“준혁 형사한테 받았어.”
선물이 아니라 결투장을 받은 것 같은 어조로 유상일이 말했다.
“아연이 사진 넣어두고 보면서 아침 저녁으로 전화하래.”
“엄.”
딸한테 전화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후배가 거기까지 강요하는 것도 좀 그런 거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재석이 뒤통수를 긁었다.
“부러운가보지.”
“뭐가?”
“어, 자기는 딸이 없으니까? 있으면 잘해주고 싶은데 없으니까 있는 사람이 대신이라도 잘해줬으면 싶어서?”
“자기가 결혼해서 딸을 낳든가!”
“시끄럽습니다.”
뒤쪽에서 들린 목소리에 유상일이 힉하고 소리를 질렀다.
“잠을 깨기 위해서라면 사무실에서 소리를 지르기 보다는 나가서 맨손체조라도 하고 들어오는 편이 좋을 겁니다.”
소리 없이 등 뒤로 다가온 배준혁이 마치 자기를 두고 입방아를 찧은 건 전혀 듣지 못했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재석 선배.”
“응? 나?”
역시 나도 혼나는구나 싶어 최재석도 목을 움츠렸다.
“커피 드실래요?”
대답도 하기 전에 눈 앞에 종이컵이 놓였다.
“어, 고, 고마워?”
“별말씀을.”
준혁이 생긋 웃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최재석은 이걸 마셔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거 독 감정하는 데 갖다 줘봐라.”
옆에서 주정재가 킥킥 웃었다.
“웃기지마, 암만 그래도 선배를 독살하겠냐.”
“할지도 모르지.”
주정재가 컵에 손을 뻗었다.
“저 놈 좀 이상하잖냐.”
“야 사람이 할 말이 있지.”
최재석이 주정재를 피해 커피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종이컵을 아까보다 더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는 유상일을 보았다.
“너도...”
“저 녀석 나한텐 스스로 타마시라고 하더니.”
“어? 그랬어?”
최재석의 말에 주정재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상일이 자식 질투하는 거 봐라.”
“질투 안 해! 대체 뭐에다.”
“재석이 니가 이해해라, 저놈이 자기 말고 다른 누가 더 예쁨 받는 걸 처음 겪어봐서 저러나보다.”
주정재가 과장되게 최재석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이 그건 아니지.”
유상일이 항의했다.
“거기 있을 때도, 나보단 은창이가 더 귀여움 받았잖아.”
그 말에 최재석과 주정재가 동시에 그를 미친것처럼 쳐다보았다.
“김성식한테 귀염받고 싶었어?”
“너 사실은 준혁이 한테도 귀염받고 싶은 거지?”
유상일이 아니라고 소리 지르려고 했다. 주정재가 준혁이 자리 쪽을 가리켰다. 유상일이 입을 딱 다물었다.
“됐고 주말에 우리끼리 술 마시러 가지 않을래?”
주정재가 음모처럼 속삭였다.
“정은창도 끼워서. 그놈 숨어있긴 하지만 그 정도는 나다닐 수 있대.”
“어, 이번 주는 내가 좀 곤란한데.”
최재석인 난감한 표정을 했다.
“그야 나도 정은창 보고 싶지만, 만날 약속한 사람이 있어서....”
“오, 여자?”
주정재가 눈을 빛냈다.
“남자다. 나보다 스무 살쯤 더 먹은 아저씨.”
주정재의 표정이 드라마틱하게 구겨졌다. 이번에는 유상일이 웃었다.
“빼놓고 만날 순 없으니 딴 날 잡아야겠네.”
“일도 바쁜데 술 약속이 줄줄이야.”
“몇 년 만에 세상에 복귀했으니 그건 어쩔 수 없잖아.”
말하며 최재석은 유상일 책상 위의 빈 액자를 다시 한 번 보았다.
‘남의 가족에 참견하는 기분도 좀 알 것 같긴 하네...’


‘이래서는 경찰대를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가게 될 거야...’
가방을 짊어지고 교문을 나서며 하태성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리셋할 인생이라고 대충 살 생각 없다고 했지만 스물 여덟 먹어 고2로 돌아간 주제에 과한 허세를 부렸던 건지도 몰랐다. 허강민이 5년 전으로 돌아가는데 성공하길 하태성도 진심으로 바랐다. 중1과정은 지금보단 훨씬 수월하겠지.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허강민 권혜연과 만났던 떡볶이집이 보였다. 당연하지만 지금은 안은 물론 밖에도 학생들로 가득했다. 먹고 싶었다 해도 저 인파를 뚫고 들어가는 건 엄두가 안 난다고 생각하며 태성은 가계에서 비껴 게속 정류장으로 갔다.
‘응?’
하태성이 고개를 돌렸다. 떡볶이집 인파에 교복과 다른 색이 하나 섞여있었다.
‘어째서 경찰이 이런델?’
견장을 보니 순경이었다. 옆의 학생들이 좀 비켜나자 교통경찰인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는 튀김 봉지를 들고 있었다. 근무중이라고 해서 잠시 간식 정도 사먹지 못할 건 없다. 뭔가 사건이 일어난 건 아니라고 알고 태성은 속으로 좀 안도했다. 이제는 경찰이 아니니 그와는 상관 없긴 하지만.
상대의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순경 류태현]
별 생각 없이 길을 비켜주려다 하태성이 흠칫했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상대 얼굴을 확인했다.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이 평범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허강민 사건의 주요 피해자. 살인 미궁에 네 번이나 끌려 들어갔던 사람.
하태성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지금이 류태현에게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안다 해도 말해줄 수는 없었다. 말한 들 믿을 리도 없고 자신과 허강민이 아는 사이라고 알리 수도 없었다.
어차피 허강민은 사고를 없애고 현실을 바꿀 예정이다. 류태현에겐 그걸로 충분히 해피엔딩일 것이다.
하태성은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그 자리에서 멀어졌다. 좀 수상하게 보였다 해도 자연스럽게 정류장에 가서 서면 사람 많은데서 대놓고 말 걸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의 옆에 웬 차가 와 섰다.
“하태성 학생?”
웬 험상궂게 생긴 덩치 큰 아저씨가 내리더니 경찰 수첩을 슬쩍 보여주었다.
“난 이경환 경사라고 아버지 부하인데, 국장님께서 널 집까지 태워다 주라고 하셨어.”
하태성은 놀라 그를 올려다 보았다.
이경환. 첫 번째 살인 사건의 피해자. 이자는 박근태 수하였다.
현재는 박근태도 아버지 부하이니 그가 사실을 말하고 있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하태성은 경계했다. 그가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아버지께 먼저 전화해볼게요.”
“뭐? 안 돼, 지금 시간이 없다고.”
이경환이 그의 팔을 잡으려 했다 하태성은 뒤돌아 뛰었다.
“아니 저 새끼가!”
이경환이 차에 탔다. 하태성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니, 차가 못 쫓아올 만큼 좁지는 않아.’
어디 가게나 가정집에라도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교복 입은 학생이 유괴당할 것 같으니 전화 한 통만 걸어달라고 하면 거절하는 사람은 없을거고.
그러나 문 열린 집을 찾기도 전에 차가 쫓아왔다. 칠 듯이 벽에 밀어붙이며 앞으로 가로막고는 이경환이 뛰어내려 하태성을 잡고 입을 틀어막았다.
“쓸데없는 짓 하지마. 죽고 싶어?”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하태성과 이경환이 동시에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보았다. 류태현이 총을 빼들고 이 쪽을 겨누고 있었다.
“애는 놔주고, 양 손을 머리위로 들어요. 천천히.”
깜짝 놀랐던 이경환이 순경 제복을 보고 긴장을 풀었다. 그가 짐짓 미소를 지었다.
“순경 주제에 나대지 말고 꺼져. 난....”
하태성이 온 힘을 다해 이경환의 명치를 팔꿈치로 찍었다. 그리고 그가 헉 소리를 내며 몸을 구부리는 틈을 타 뒷덜미를 꽉 쥐고 옆 벽에 힘껏 머리를 부딪혔다.
이경환이 쓰러졌다. 류태현이 입을 딱 벌렸다.
“어....”
“허강민이 더 이상 범죄 안 저지르길 바라지요?”
이판사판이었다. 하태성이 류태현에게 손짓했다.
“좀 도와주세요. 소동나기 전에 도망쳐야 합니다.”
류태현이 하태성을 쳐다보고 이경환을 쳐다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 허강민씨랑 떡볶이 먹은 그 사람이 맞군요?”
“...네?”
이경환을 차에 밀어넣다 말고 하태성이 놀랐다.
“어떻게...”
류태현이 가서 같이 이경환을 들어 차 뒷좌석에 구겨넣었다. 그리고 운전하려고 보니 하태성이 이미 운전석에 앉아있었다.
“빨리 타요.”
류태현이 뒷좌석에 타고 문을 닫자마자 차가 쏜살같이 골목을 튀어나갔다.


장혜진이 골치아프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대체 만들라는 밀실은 안 만들고 뭐 하고 있는 거에요? 간부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안승범까지 뭔가 계획대로 안 되고 있다는 걸 감지할 지경이라고요.”
“중요한 일이야. 급해.”
그 멍청하고 속이기 쉬운 녀석까지 의문을 가질 정도라면 자기 목숨도 내일 모레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허강민은 당면 문제부터 추궁했다.
“장지연에 대해 알아?”
“장회장의 따님이요?”
장혜진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째서 그런 거물을.”
“마법사인지, 강력한 마법사인지만 알려주면 돼.”
허강민이 조바심내며 물었다. 백선교 외부인데도 장혜진이 새삼 주위를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마법사에요.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장회장이 밀어줄 정도면 가능성 있다고 봐야겠죠.”
“역시.”
허강민이 비틀거리다 벽을 짚었다.
“혹시, 만날 수 있어?”
장혜진이 새삼 놀라 허강민의 입을 막았다.
“왜 그러는진 몰라도 꿈도 꾸지 말아요. 회장님한테 대놓고 허락받을 수 있는 일 아니면. 그런 일이라면 저한테 물을 리도 없고.”
허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성중이 벼르고 있어요.”
장혜진이 속삭였다.
“지가가 직접 하고싶어하니까. 무슨 문제가 생긴 건진 몰라도 빨리 몰래 해결해요. 책잡히지 말고.”
“나도 알아.”
허강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나온 거 강성중도 알겠지.”
그가 잠깐 생각하다 메모지를 꺼내 몇 줄 휘갈겨썼다.
“추가로 필요한 자재 목록이야. 제작 중에 약간의 사고가 생겨서 급히 땜빵해야 하니까 ‘강성중 모르게’ 보내줘. 일정이 어긋나는 건 나도 싫으니까.”
장혜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를 받아들었다.
“어디 무너지기라도 했어요?”
허강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낡은 건물이니까. 뭐 금방 부술 거고 류태현이 밟았다 무너져도 상관 없으니까 서둘러 보강하기만 해도 충분해.”
“네, 그래도 몰래 처리할게요, 완벽주의자씨.”
장혜진이 먼저 가버렸다. 똑똑한 여자니까 알아들었을 거라고, 이런 사소한 약점을 강성중에게 밀고하고 최소한의 자기 안전은 확보할 거라고 허강민은 내심 안도했다.
그리고 자신의 안전으로 말하면.
‘어차피 목숨 따위 아깝지 않아.’
모든 걸 걸고 도박에 나설 때였다.




세계의 중심 48 ㅣ- 회색도시&검은방



방안은 식당이었다.
넓지는 않았다. 식구들이 격식 차리지 않고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그런 작은 식당이었다. 자리 세 군데에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윽.....”
시백이 눈살을 찌푸리고 코를 막았다. 식탁 위에 차려진 게 음식이었던 때는 벌써 몇 주 전에 지나가 버렸다. 지금은 파리조차 안 꾈 것 같이 썩고 말라비틀어진 유기물 잔해일 뿐이었다.
“식탁은 제가 살펴볼 테니 시백씨는 문이나 벽에 위험한 거 없나 찾아주세요.”
준혁이 말하자 시백은 살았다는 표정을 하고 등을 돌렸다. 준혁이 식탁 위를 자세히 보았다.
의자가 뒤로 밀려 있었다.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 위에 걸쳐져 있었다. 따로 손님을 기다리던 것은 아니었다. 사람 셋이 식사를 하다 만 흔적이었다.
‘무슨 의미지?’
함정도 아니고, 이 미궁을 돌파하는데 필요한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이프는 뭉툭하고 더럽혀져 벌써 녹슬고 있었다. 포크도 일부러 끝을 뭉개놓은 듯 전혀 무기로 쓸 수 있는 것이 못되었다. 준혁이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숟가락으로 눈알을 파내는 귀신인지 요괴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긴 한데....’
하지만 눈알을 파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가는 것도 문제고 가까이 간들 공격할 수 있는 건 한 번에 한 쪽 뿐이었다. 죽이지도 못하고 반격당할 게 분명했다. 거기에 더해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고 교수님들이 들고 일어날 거고.
무기는 도저히 안 되지만 도구 정도는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준혁은 비교적 깨끗한 것을 골라 숟가락을 한 개 주머니에 챙겼다. 그리고 없어진 게 그거 하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석 자리에는 숟가락이 없었다. 준혁이 식탁 위를 다시 살폈다. 시험 삼아 그 의자에 앉아보았다. 왼쪽 자리 너머에서 뭔가 반짝였다. 일어나 가보니 숟가락이었다.
준혁이 자기가 앉았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거기서 왼쪽 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던졌다면, 거기에 사람이 없었다면 여기로 날아왔을 거란 계산이 나왔다.
‘대체 무슨 의미지? 이것도 수수깨끼인가?’
당장은 아니라도 앞으로 나올 문제의 힌트일지도 모른다. 준혁은 일단 자리의 배치와 날아간 숟가락을 머리에 넣었다.
“어, 여기 무기로 쓸 만한 게 있어요!”
시백이 환성을 질렀다. 던져진 숟가락은 그대로 두고 준혁이 그에게 갔다.
시백이 그릇장 위에서 길쭉한 나무 막대를 찾았다. 손잡이 없는 지팡이처럼 가늘고 길었으나 만져보니 목질은 제법 단단했다.
“네, 이거면 급한 대로 호신용구로 쓸 수 있겠네요.”
시백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런 그가 귀여워서 준혁은 살짝 발돋움해 그의 입가에 입술을 눌렀다.
“선...!”
“애인인데요.”
“그.... 예, 애, 애인... 이지만요.”
시백이 얼굴이 새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했다. 준혁은 잠시 지켜보다 시백의 손을 잡았다.
“시백씨.”
“네, 네.”
“저는 류태현씨에게 ‘착한 동아리 후배’ 이상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시백의 얼굴이 조금 더 달아올랐다.
“조금... 냉정한 말로 들릴 지도 모릅니다만, 그는 있으나 없으나 제겐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시백씨는 다릅니다. 없으면 안 됩니다.”
그가 시백의 손을 끌어다 자기 가슴에 얹었다.
“그러니... 질투할 필요 없어요.”
시백이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죄송해요.”
시백이 속삭였다.
“전.... 선생님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상냥하시니까... 바보같이.”
“제가 그랬던가요?”
힘껏 끌어 안겨 숨이 막히는 와중에도 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선생님 쪽에선 별 생각이 없어도 상대가 멋대로 반해버릴 수도 있고....”
“류태현씨는 혼나고 매도당하는 걸 좋아하는 걸요.”
“아참, 그랬죠. 제가 참.”
시백이 어색하게 웃으며 준혁을 놓았다.
“그러네요, 적어도 저 사람은 선생님한테 반할 리 없는데.”
류태현이 들었으면 아니라고 통곡할 소리를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버렸다.
“그럼 무기도 챙겼고, 여기는 더 뭐 없는 것 같으니 계속 가볼까요?”
“네!”


짧은 복도를 지나 도착한 곳은 아마도 연회실이었던 듯 넓고 큰 창문이 있는 방이었다. 이번에도 창문은 나무를 대고 못질되어 있었지만 샹들리에가 약하게나마 빛나고 있어서 들고온 등 없이도 내부가 보였다.
“다행이구만, 이거 기름 다 돼서 꺼질락말락이었는데.”
하무열이 문 근처에 등을 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을 둘러보다 그가 흠칫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빛이 있는데도 어두워 보일 만큼 검은 휘장이 덮은 벽 아래 관이 있었다.
허강민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하무열이 그의 팔을 꽉 잡았다.
“그냥 소품이야.”
“아니면요?”
허강민의 목소리가 떨렸다.
“애초에, 류태현을 잡아온 이유가.”
“이렇게 널 동요시키기 위해서이지.”
하무열이 허강민의 팔을 쥔 채 성큼성큼 관으로 갔다. 그리고 관뚜껑을 발로 걷어차 열었다.
안에는 수의가 들어있었다. 하얗고 치렁치렁한 천이 관에 가득했다.
“아..”
허강민이 비틀대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가 수의를 끄집어내었다.
“이 강성중, 천하의 개새끼가 이런 걸로 사람을 놀려.”
그가 관 모서리를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손을 감쌌다. 그리곤 다시 슬금슬금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이런 질 낮은 도발에 걸려들어서...”
허강민이 흠칫했다. 하무열은 눈을 크게 뜬 채 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안에 든 수의를.
수의에 뭔가 있나 싶어 허강민이 수의를 펼쳐보았다. 하지만 틈에 뭐가 끼어있는 것도 아니고 관에 딱히 뭔가가 들어있거나 표시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수의가 여성용일 뿐이었다. 드레스 자락처럼 치마 주름이 풍성했다. 허강민이 하무열의 눈치를 보며 수의를 다시 곱게 관에 넣었다.
“...교수님?”
“응, 그래.”
하무열이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다.
“역시 이건 그냥 분위기 잡는 장식이었을 뿐이야. 신경쓸 것 없다.”
그가 허강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류태현은 무사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샹들리에 빛이 확 꺼졌다. 방안이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하무열과 허강민은 서둘러 자세를 낮추고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의 숨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도 조용히 쉬려고 애쓰며 둘 다 긴장한 채 나타날 위협을 기다렸다. 허강민은 관에 귀를 붙였다. 수의를 들어내고 봤을 때 관 바닥에 별다른 것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또 모르는 거였다. 여기서 뭔가 사람 놀래키는 장치가 튀어나온다면 틀림없이 먼저 소리가 날 테니 대비할 수 있었다.
기척을 죽인 발소리가 들렸다. 저 건너에서 작은 불빛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적? 아니면 류태현?’
류태현이면 좋겠지만 여길 만든 건 강성중이니 방심할 수 없었다. 이들을 공격할 하수인을 같이 넣지 말란 법이 없었다.
‘그런 거라면 지금까지 조용했던 게 조금 이상하지만.....’
갑자기 관뚜껑이 덜컹 소리를 내었다.
“거기냐앗!”
고함소리와 무기를 휘두르는 소리가 들리며 발소리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칫.”
하무열이 허강민을 눌러 관 옆에 붙게 했다. 그리고 자기는 관을 뛰어넘었다. 자기들이 어디 있는지 누구인지 알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허강민은 소리 지르고 말았다.
“위험해요 교수님!”
그 순간 상대방 쪽에서도 소리를 질렀다.
“교수님?!”
“잠깐만요 시백씨!”
“허강민씨!”
번쩍하고 방이 밝아졌다. 샹들리에를 좀 벗어난 천장 일부가 환하게 빛이 났다.
“대충 가운데쯤인 것 같아서....”
준혁이 안 시킨 변명을 했다. 류태현은 이미 관 위로 고개를 내민 허강민에게 달려갔다.
“허강민씨이이~”
“류태현!”
허강민이 일어나 안겨오는 류태현을 덥석 마주 안았다. 꼭 끌어안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친 데는 없고?”
“네.”
류태현이 눈을 반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강민씨도.”
“그래.... 이 멍청아!”
허강민이 류태현의 머리에 주먹을 내리쳤다.
“잡혀왔냐! 마법사씩이나 되어가지고 홀랑 잡혀와버렸냐!”
“으악, 아파요!”
“아프라고 때리는 거지 그럼......”
“허강민씨가 화내는 것도 당연하지요, 류태현씨가 잡혀온 덕에 허강민씨까지 여기에 제 발로 따라 들어와야 했으니까.”
배준혁이 말했다. 허강민이 주먹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너는 왜?”
“허강민씨가 수상한 마차를 타고 사라지는 걸 보고, 위험하다 싶어 미행하다가 들켜서요.”
“잘 좀 하든가.”
허강민이 혀를 찼다.
“제발로 잡혀온 사람이 할 말은 아닌데요.”
“적어도 난....”
뭐라 말하려다 말고 허강민이 류태현을 노려보았다. 류태현이 고개를 움츠렸다.
“죄송해요...”
“뭐, 너라고 잡혀오고 싶어서 잡혀왔겠냐.”
하무열이 나서서 류태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보다 애인 두 쌍에 나 하나라니, 이거 소외감 느껴지는 걸.”
“그렇게 말하니까 애인하고 온 게 좋은 일인 것 같잖아요.”
허강민이 핀잔주었다.
“이 멍청이 때문에 난 얼마나.....”
“걱정을 했지.”
하무열이 상황에 안 맞게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랑스런 애인이 다치거나 해를 입었을까봐 어찌나 걱정을 하는지 심지어 이 허강민이 이성을 잃기까지 하고...”
“네?”
류태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성을 잃어요? ....허강민씨가요?”
“그래. 나랑 만났을 땐 막 벽을 부수려고 드는 중이었다.”
“가벽이었어요! 강도를 시험해 봤을 뿐이고!”
“나도 놀라서 대놓고 물어봤거든? 여기 부숴야 하는 거냐고. 그러니까 아니겠지만 마음이 급해서 그렇다고 자백하더라니까.”
“그럼 이런 데 갇혀서 마음이 느긋해야 맞습니까?”
“내가 창문 깨고 탈출할까 하니까 우리끼리만 도망가면 류태현에게 무슨 해가 갈지 모른다면서...”
“바보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바보니까! 교수님이 되어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왜곡 날조가 아주 숨쉬듯 자연스러워요?”
하무열과 허강민의 공방을 보던 류태현이 눈을 올망올망하게 뜨고 허강민을 바라보았다.
“제 걱정을.... 그렇게까지...”
“너 내 말을 뭘로 들었어!”
얼굴이 빨개진 허강민이 류태현의 목을 팔로 감아 당겨서는 머리에 두다다 꿀밤을 먹였다. 맞으면서도 류태현은 헤죽헤죽 웃었다.
“과연....”
양시백과 배준혁은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류태현씨... 정말 맞는 게 행복해 보이네요.”
“네. 이해는 할 수 없지만 저게 그의 행복이라면 존중해 줄 수밖에 없지요.”
“그래도 딱 맞는 짝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네. 자기에게 맞는 사람을 만나 사랑하게 되는 건 복이지요.”
배준혁이 웃으며 양시백의 손을 잡았다. 시백도 얼굴을 붉히며 그 손을 마주잡았다.


검은 남자 64 ㅣ- 회색도시&검은방


최재석 경사는 공식적으로 실종 처리되었다. 선진화파의 보복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인정한 거나 다름없었으나 수사가 진행중이고 잠입 요원의 신상은 매스컴에 거의 알려지지 않아 이런 일도 크게 파헤쳐지지 않았다.
후속 수사중인 서재호와 오미정은 물론 유상일에게까지도 권현석은 철저히 진실을 감췄다. 충격받고 슬퍼하는 동생이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양시백도 실버 트와일라잇의 악행을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그저 부려먹히는 잡역부에 불과했고 그 기간도 아주 짧았다.
그럼에도, 그 자백만으로도 차라리 모르고 싶을 만한 끔찍한 정보를 잔뜩 얻을 수 있었다. 인신매매, 납치, 인신공양.
전에 배준혁은 그들이 하는 짓 중 인신공양이 가장 상식적이고 보아넘길 만한 짓이라고 했다.
허강민의 밀실을 수사하며 그 잔혹함과 광기에 혀를 내둘렀지만 진짜 마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우울해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 허강민이 아는 걸 많이 털어놓은 덕에 후속 수사가 탈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백선교를 겨냥한 언론 플레이도 먹혔다.
소문을 들어보면 국장님도 요즘은 정치적인 공격에서 놓여난 듯했다. 방식을 바꿔서 뭐 지원해주겠다느니 귀찮게 구는 식의 접근은 늘었지만 예전보다는 나았다.
이 여세를 몰아 백선교를 소탕하고 장회장과 실버 트와일라잇도 낱낱이 파헤쳐준다. 그렇게 결심하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배준혁이었다. 권현석이 얼른 전화를 가지고 구석으로 갔다.
“아, 준혁 형사. 괜찮아? 버틸 만 해?”
-그럭저럭요.
준혁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감정의 기복이 없었다.
-여기 분위기가 솔직히 많이 어려워졌습니다. 갑자기 옆에 있던 동료가 피사....실종되었으니까요.
“그렇겠지.”
-저 역시 그 수사팀에서 온 사람이기 때문에 절 걱정하는 시선도 있습니다만 도움이 되기보다는 부담스럽습니다. 같은 관사를 쓰고 같이 행동했는데 어떻게 저는 무사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도 있고요.
“준혁 형사?”
배준혁의 무덤덤한 말투로도 뭔가 더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거기 사람들하고 같이 지내기가 힘들어?”
권현석 자신도 경찰이지만 거칠고 무신경한 남자들이 서열 따져가며 모이는 이 조직은 쉽게 끔찍한 집단이 되곤 했다.
-예.
배준혁이 긍정했다.
-이미 최재석 형사가 변을 당했는데 여기가 안전한 곳이라는 생각도 안 들고요.
“다른 곳으로 옮겨줄게.”
얼른 대답했다.
“거기서 최대한 먼 곳으로. 음......”
-어려운 부탁인 것 압니다만.
배준혁이 말을 이었다.
-경찰청으로 되돌아가는 것 가능할까요?
“응?”
권현석은 당황했다. 재석이와 다르게 준혁 형사가 시골로 간 것은 징계를 위한 좌천이었다. 본인이 희망한다고 쉽게 도로 부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렵겠지요. 그래도, 이 위기가 끝날 때까지 임시로라도 안 될까요? 부탁드립니다. 수사팀 복귀가 어렵다면 소속을 옮겨서라도요.
준혁 형사치곤 노골적이고 간절한 부탁에 권현석은 뭐라고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전에도 준혁은 클럽의 의사와 본인의 희망을 뒤섞어 전달한 적이 있었다.
“애써보겠지만 나 혼자 힘으론 잘 안 될 거야.”
일단 모호하게 답해보았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준혁 형사의 안전을 위해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덥석 도로 불렀다가는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난을 살 수 있었다. 혹시 실버 트와일라잇 쪽에서 그를 다시 이용하려고 부르는 거라면 그 잘난 클럽의 영향력과 인맥도 움직여야 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준혁 형사도 그걸로 충분하다는 투로 용건을 끝맺었다.


혹시나 해서 권현석은 국장실로 가기 전에 이경환을 슬쩍 떠보았다.
“요즘 일도 바쁜데 다리는 어때?”
이경환이 움찔 놀랐다.
권현석이 그를 괴롭힌 적은 없었다. 그래도 백석의 스파이임을 알게 된 뒤로 이경환과 조용호는 다른 형사들처럼 살갑게 대해줄 수가 없었다. 그들도 언제부터인가 그런 눈치를 채었고 수사팀에 유상일, 주정재 등 잠입 요원이었던 사람들까지 복귀하자 그만 완전히 주변인으로 물러나버렸다.
“다리 괜찮습니다. 언젯적 일이었는데요.”
머쓱한 듯 얼버무리고 이경환은 보던 서류에 얼굴을 박았다.
“준혁 형사 말인데.”
이번엔 어깨를 떨지도 않았다.
“지금 발령지에서 힘든 모양이더라고.”
“그렇습니까.”
잠시 기다려 봤지만 이경환은 그 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준혁 형사가 잠시 여기 파견 올 수도 있거든. 거기서 생긴 사건 때문에. 마주치게 될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괜찮습니다.”
전혀 괜찮지 않을 텐데도 그렇게 대답했다.
“신경쓰실 필요 없습니다. 필요하면 부르시는 거죠.”
“싫으면 굳이 그렇게 말할 필요 없어.”
“아닙니다. 전 정말 괜찮습니다.”
몇 번 더 찔러보았지만 이경환의 반응은 같았다. 팀장님 앞이라 어쩔 수 없는 면도 있겠지만, 허강민은 이경환이 클럽의 명령으로 하성철의 아들을 노렸더란 말도 했다. 이경환은 실버 트와일라잇에서 배준혁을 불러들일 경우 따를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조금 후 국장실로 찾아가보았다.
“국장님, 배준혁 형사와 이야기해봤는데 말입니다.”
권현석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돌아오고 싶은 모양이더군요. 최재석 형사 사건으로 신변도 불안해졌고 파출소 분위기가 살벌해지면서 동료들과도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거기 계속 근무시키기보단 어디로든 옮기는 게 좋을 것 같긴 합니다.”
하성철은 권현석을 잠시 바라보다가 반문했다.
“배 형사가 그런 말을 했다고?”
“예.”
“사실은 나도 이미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네. 최재석 형사가 변을 당했는데 같이 근무하던 수사팀 출신 형사는 안전을 장담할 수 있겠냐고.”
꽤나 떳떳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말을 돌려댔지만 결국 실버 트와일라잇의 청탁 겸 압력이 들어왔다는 이야기였다. 권현석은 고개만 끄덕였다.
준혁 형사를 다시 불러오는 건 자신에게도 수사팀의 보호에도 좋은 일이지만 실버 트와일라잇에서는 자기네 장기말을 다시 심는 일이었다.
준혁 형사는 잠입 요원이 하나 늘어난 것으로 치라고 했었다.
‘이제 잠입은 정말 지긋지긋해.’
“그 형사의 징계가 과중했다고는 생각지 않네.”
권현석이 침묵하는 동안 하성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수사팀이었다는 이유로 보복당한다면 안될 말이지. 권현석 팀장까지 그렇게 간청하니 특별히 선처해주는 거네. 두 번은 없을 거야.”
“알겠습니다.”
권현석이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서, 배준혁 형사는 곧 수사팀에 복귀할 거야.”
권현석은 사무실에 모여앉아 있는 형사들의 기색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불미스런 일로 떠났었지만 지금은 준혁 형사도 정말로 곤경에 처해 있어. 그러니 다들 따뜻하게 맞아주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같이 일했으면 좋겠는데 다들 할 수 있겠어?”
“예.”
오미정 형사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말똥말똥 크게 뜬 눈을 보면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준혁을 맞아들일 것 같았다.
“저흰 괜찮습니다.”
서재호 형사 역시 놀라기는 했어도 거부감은 보이지 않았다.
“걱정 마. 잘 돌봐줄게.”
유상일 경위까지 그렇게 말하자 권현석도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백석 스파이들은 이의를 제기할 마지막 타이밍을 그냥 넘겨버렸다. 권현석 자신을 제외하면 제일 계급이 높은 유상일이 찬성했고 하무열은 속사정을 안다.
서재호와 오미정은 나은 지 오래인 이경환의 경상보다 배준혁이 더 중요한 것 같았다.
“그럼 우리 팀의 기강을 믿고 불러들일게. 다들 고마워.”
권현석이 얼굴을 폈다.
“그럼 어디 숙제들 다 했나 볼까? 검찰청으로 보내야 할 게 있지?”
다들 ‘으악’하는 표정이 되어 허겁지겁 서류를 끌어모았다. 권현석이 다시 표정을 엄하게 했다.
“백선교 간부들까지 잡아넣느냐 마느냐야. 긴장 풀고 있었어?”
“그럴 리가.”
유상일이 그래도 자신은 할 거 다 했다는 듯이 권현석에게 서류 더미를 안겼다.
“허강민과 장혜진이 그렇게 술술 자백할 줄 몰랐어. 꾸며대고 있나 했다니까.”
“백선교에 지킬 의리 같은 거 없으니까 그렇겠지. 둘 다 보복이 두려워 입을 다물기보단 같이 죽자고 물고늘어질 성격이고.”
권현석은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저지른 범죄는 허강민 쪽이 훨씬 중하지만 백선교 이너 서클의 사정은 장혜진 쪽이 도리어 잘 알고 있었다. 허강민보다 더 오래 백선교에 몸담았고 눈치빠르게 정보를 캐고 다닌 사람도 장혜진이었다.
그리고 이제 허강민과 경찰에 협조하는 것만이 백선교의 저주로부터 살아남을 길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저주.......’
무지가 곧 공포라더니, 마법에 대해 여전히 주워들은 이야기밖에 모른다는 점이 더 권현석의 공포를 부추겼다. 그런 거 설명 안 해주고 말 돌리고 핑계대는 사람이 허강민 하나뿐이었다면 차라리 그놈이 자기 손에 쥔 카드를 아끼느라 그런다고 생각할 수나 있었을 텐데, 양시백에 배준혁 형사에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류태현까지도 똑같은 소릴 시작했다. 마법은 모르는 게 약이라고.
속을 끓이며 구치소로 찾아갔다. 정은창이 거기 있었다.
다행히 은창은 얌전한 태도로 면회에 응했다.
“견딜 만 해?”
CCTV와 녹음 장비를 의식하며 권현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 괜찮습니다.”
정은창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상일이가 증언해준댔어.”
권현석도 담담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게임장에선 상대가 먼저 공격했고 수도 많았다고. 게다가 시신에서도 흉기가 나왔어. 정당방위까진 무리지만 형량은 줄일 수 있을 거야.”
정은창은 권현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녀석 경찰이었다면서요. 그냥 정보원도 아니고.”
“그래. 그러니 법정에서도 진지하게 들어줄 거야.”
정은창은 잠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눈살을 찡그렸다가 폈다가 했다.
“대체 왜요?”
권현석이 불안해질 때에야 정은창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여전히 저한테 잘해주시는 거예요? 제가 뭘 했는지 다 아시면서. 유상일까지, 왜 제 형량을 줄이려고 그래요?”
“상일이는 자기 잠입 중에 힘들 때 네가 챙겨줬다고 했어.”
정은창은 그런 일 있었던가 하는 표정이 되었다.
“너한테는 기억도 안 날 만큼 사소한 일인지 몰라도 상일이한테는 안 그랬어. 원래 진정한 호의에서 나온 일이 대개 그래.”
정은창은 조용히 우물거렸다.
기뻐하거나 고마워하는 기색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권현석은 개의치 않았다. 자신도 어느 높으신 경찰 나리 덕에 누명을 벗었다고 처음 알았을 땐 얼떨떨하고 의심스러웠을 뿐,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할 수 있었던 건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그 경찰 나리와의 인연이 어떻게 끝장났는지를 떠올릴 뻔하고 권현석은 현재로 되돌아왔다. 면회 시간은 짧고 물어볼 것은 많았다.
“잠입해 있는 동안 허강민 밑에서도 일했지. 허강민의 진술을 대조해보고 싶어.”
“물어보세요.”
정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강민 밑에서 일하는 동안 그가 주로 어떤 이야기들을 했어?”
“복수 이야기요.”
정은창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제 진짜 목적을 눈치채고도 김성식에게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강성중이 나중에 써먹을 작정으로 숨겼던 것과는 조금 달라요. 약간 동지의식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놀랍지는 않았다. 권현석은 가볍게 끄덕였다.

세계의 중심 47 ㅣ- 회색도시&검은방


“와, 여긴 진짜 화려하게도 부숴놨네요.”
아래층으로 내려와 처음 들어간 방에서 허강민이 휘파람을 불었다.
“원래는 아마 휴게실 같은 곳이었나 본데...”
하무열이 그의 팔을 잡아 멈춰 세웠다.
“조심해라. 바닥에 유리 있다.”
“네. 저쪽 장식장이 박살났네요.”
“그거 말고도 깨진 건 많아.”
장식장 앞면 유리뿐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던 병, 도자기 파편도 여기저기 튀어 있었다. 나무로 된 가구도 부러진 모서리가 거칠어 잘못 건드렸다간 다칠 것 같았다. 하무열이 누가 서랍을 뽑아 반대 벽에 집어던진 것 같은 잔해를 살폈다. 부서진 단면에 먼지가 없었다. 부서진 지 얼마 안 되는 거다. 비교적 멀쩡하게 넘어져만 있는 탁자 옆엔 술병이 여럿 뒹굴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술냄새가 진동했다.
아주 최근에 누군가 여기서 술을 마셨다. 그리고 가구를 부쉈다. 하무열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강성중 놈 역시 발상이 딸리네요.”
허강민이 말했다.
“응? 뭐라고?”
“밀실탈출 트릭을 제대로 짤 자신이 없으니까 방을 온통 부숴놓고 이 잔해 중에서 열쇠 찾으라는 거잖아요, 제대로 머리를 써서 문제를 내는 게 아니라. 그야 제대로 문제를 내는 건 무척 어렵고 노력을 요하는 일이긴 하지만.”
“그걸 아는 놈이 교수님들이 온 힘을 다해 낸 시험 문제를 거들떠도 안 보고 백지로 내냐?”
“아예 시험장에 안 갔는데요. 그리고 저 말고도 많이들 열심히 풀었을 것 아니에요.”
“너만을 위해 추가 시험 내주면 열심히 풀 거냐 그럼?”
“그럼요. 맞는 답을 써낼 자신은 없지만.”
“이 새끼가.”
허강민과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으며 하무열은 조용히 심호흡했다. 지금은 옛날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 녀석과 여길 무사히 나간 다음에 그런 걸 곱씹어도 늦지 않았다.
여기는 창문이 완전히 막혀있지 않아서 밖에서 빛이 들었다. 허강민이 저 윗부분에서 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빤히 쳐다보았다.
“밖이 보고 싶으면, 무등이라도 태워줄까?”
하무열이 물었다. 허강민이 고개를 저었다.
“여기가 어딘지 안다고 구조 요청을 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닌 걸요.”
“끝까지 통과한다고 무사히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지.”
무거운 목소리에 허강민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렇게 생각하나요?”
“가능성을 생각하는 거야. 이번에도 누군가 버티고 서서 자길 죽여야 나갈 수 있다고 할지도 모르잖아.”
“그 경우 교수님은.”
“죽여야지.”
단호한 말에 허강민이 하무열을 쳐다보았다.
“물론 안 죽이고 제압할 방법이 있으면 당연히 그렇게 할 거다만. 그게 안 될 경우라면 망설이지는 않을 거다.”
“맨손인데도요?”
허강민이 바닥에 널린 유리 파편을 보았다. 일부러 밟아 잘게 부수기라도 한 듯 무기로 쓸 만큼 큰 조각은 없었다.
“그놈도 뭔가 배우긴 한다 이건가.”
하무열이 혀를 찼다.
“뭐 너무 걱정 마라. 죽일 마음만 있으면 세상 온갖 하찮은 것들이 다 흉기가 될 수 있단다.”
“...걱정 안 하라고 하는 말 맞아요?”
말하며 허강민이 문을 살폈다. 평범하게 푸른 녹이 슨 손잡이는 잡고 돌리자 덜걱거렸다.
“역시 이 잔해 속에서 열쇠를 찾아야 하나... 아니.”
허강민이 몸을 숙여 열쇠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이거 구멍이 막혀있는데요.”
“뭐? 그럼 어쩌란 말이냐?”
“그러게요. 금속은 아니고 아마 밀랍 같긴 한데.”
허강민이 열쇠구멍을 손톱으로 후볐다. 가루를 만져보니 역시 밀랍이 맞았다. 이걸 녹이려면 손잡이를 달궈야 했다. 등에 불이라면 있긴 하지만 안전을 위해서 심지는 저 안쪽에 고정되어 있는 형태라 불꽃을 어디에 갖다 대는 건 불가능했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 어차피 아직 열쇠도 없는데, 밀랍을 녹이려고 실컷 헛수고하고 탈진하라고 일부러 쉽게 녹일 수 있는 척 눈속임하는 것일 수도 있고요.”
그가 부서진 가구들을 뒤졌다.
“밀랍이 속임수라고 생각해보면 손잡이 자체를 부숴야 하는 걸까요. 하지만 그 정도 파괴력이 있는 뭔가를 쥐어줄 것 같지는 않은데. 밀랍을 녹이는 것도 문고리를 부수는 것도 아니라면....”
“손 다치지 않게 조심하라고.”
하무열이 불안한 표정으로 뒤에서 쳐다보았다.
“하고 있어요. 제 말은 달리.... 어.”
허강민이 온전한 병 하나를 찾아냈다. 병입구는 밀랍으로 봉해져 있고 갈색병 안에 액체가 무겁게 찰랑거렸다. 하무열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설마 술 마시다 남은 건 아닐 거고.”
“술병이라면 유리 마개를 밀랍으로 봉하지는 않지요. 이건 아마도...”
허강민이 문 손잡이를 쳐다보았다.
“질산일 것 같네요. 열기 전엔 확실하지 않지만.”
“위험한 거냐?”
“매우 그렇습니다.”
허강민이 병을 들고 문으로 갔다. 그리고 곤란한 표정을 했다.
“뭐가 문제냐?”
“밀랍이 워낙 두꺼워서, 밀랍만 깨고 유리는 안 깨질 만 한 세기로 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중입니다.”
“아예 그 문고리에 대고 내리치면.”
“한 방울만 잘못 튀어도 크게 화상을 입어요.”
“맙소사.”
하무열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뭐 그런 위험한 물건이 다 있냐.”
“다행히도 쉽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다못해 커튼 쪼가리라도 있으면 감싸고 벽에 쳐서 열 수 있을 것 같은데....”
“잠깐만, 그거 밀랍만 긁어내면 되는 거잖냐.”
하무열이 주머니에 넣어두고 잊었던 담배 자르는 가위를 꺼냈다.
“이걸로 안 될까?”
“줘보세요.”
허강민이 가위 뾰족한 끝으로 밀랍을 긁었다. 살살 긁어내다보니 병을 깨지 않고도 마개를 뽑을 수 있을 만큼 밀랍을 제거할 수 있었다.
“자, 교수님 물러서세요.”
허강민이 옷자락으로 마개를 잡고 조심스럽게 병을 열었다. 내용물을 문 손잡이에 붓자 연기와 찌르는 것 같은 냄새가 나면서 손잡이가 녹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액체가 튀지 않게 하려고 허강민이 다리를 뒤로 빼었다.
“윽, 이거 좀 묻었네.”
허강민이 병마개를 던져버리고 감싸서 잡고 있던 소매자락을 폈다. 그리고 묻은 부위를 가위로 잘랐다.
“찢어내게?”
“홑겹이라 이대로는 살에 닿는다고요. 옷 아까워할 필요 없어요. 안 찢고 잘 가져다 빨아도 어차피 여긴 구멍이 나니까.”
“마법약이란 무섭구만.”
하무열은 손잡이 녹는 걸 살폈다. 슬슬 잠금장치까지 망가졌을 것 같자 그 옆을 노리고 발로 찼다.
“놀랍게도 저건 마법 약이 아니랍니다. 지식만 있으면 누구라도 만들 수 있죠.”
“아까는.”
“비싼 도구가 많이 필요해요.”
“으이구.”
하무열은 허강민이 던져버린 빈 병을 보았다. 앞에 강성중의 하수인 마법사가 버티고 있다면 사소한 거라도 무기로 챙겨야 했다.
“안돼요, 저건 위험합니다.”
허강민이 하무열의 손을 잡았다.
“그냥 가요. 병 하나 정도는 달리 주울 곳이 있을 겁니다.”
“네가 이럴 정도로 위험하다 이거지. 오냐.”
하무열이 부서진 문을 발로 밀어 열었다.
“가자. 류태현 찾아야지.”


“여기도 별게 없네요.”
새로 들어간 방을 뒤지다 배준혁이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류태현이 의아해했다.
“열쇠는 찾았는데요.”
“뭐.. 무기가 될만한 걸 찾으세요?”
양시백이 물었다.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끝에 누군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꼭 무기가 아니더라도 뭘 조작하거나 할 때 맨손보다는 도구가 있는 게 덜 위험할 테니까요.”
“저, 이전 그... 거기는 어땠어요?”
류태현이 물었다.
“그렇게 많이 위험했어요?”
“오미정씨 머리 위로 돌이 가득한 서랍이 떨어졌을 때는 정말 위험했습니다. 제때 서재호씨가 넘어져서 오미정씨가 그 자리를 비키지 않았더라면...”
말하고 배준혁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설마 일부러는..”
“저, 이런 거라도 가져가면 없는 것 보다는 나을까요?”
류태현이 부서진 벽에서 떨어진 주먹만 한 벽돌 조각을 주워들었다. 배준혁이 미간을 모았다.
“맨손보다는 낫겠지만요.”
“벼, 별 도움 안 되나요.”
류태현이 축 쳐졌다. 존재하지 않는 개 귀와 개 꼬리가 축 늘어지는 것 같은 모습에 배준혁은 표정을 부드럽게 했다.
“주머니에 넣을만 하면 한 번 들고 가봅시다. 돌멩이에 불과해도 잘 사용하면 사람을... 제압하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요.”
원래는 이런 돌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말하려던 거라고, 눈치 없는 류태현도 이번에는 알아들었다.
류태현은 흘끔 양시백을 쳐다보았다. 자기 애인이 이렇게 짱돌로도 사람을 죽일 계획을 세우는 흉악한 사람인 거 시백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무서웠다.
“언제나 필요한 게 다 갖춰진 상태에서 싸울 수는 없는 거니까요.”
시백이 불쑥 말했다.
“재석 아저씨가 그랬어요. 위급 상황에선 주위에 있는 뭐든 활용해서 싸울 수 있어야 한다고.”
“최재석씨가 그런 말을 했나요?”
준혁이 조금 놀랐다.
“네. 아주 일상적인 물건들도 사람이 쓰기에 따라서 흉기가 될 수 있는 거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쓰는 거 배웠어요?”
류태현도 놀랐다.
“그런 건 배워서 되는 게 아니라 일종의 감각 같은 거라고 하긴 했어요. 그러니 상대가 무기를 안 갖고 있다고 방심해선 안된다고..”
‘그런 거였나.’
류태현은 조금 맥이 풀려 중얼거렸다.
“그건 그냥 적을 얕보지 말라든가 지형지물을 잘 활용하라는 정도 가르침인 것 같은데요....”
“네?”
“아니에요. 두 분은 용병이니까 다양한 상황을 겪으셨겠죠.”
“네, 그렇다고 들었어요.”
양시백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쁜 일에도 손댄 적 있고요.”
“너무 자세한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좋겠습니다.”
준혁이 말렸다.
“저들이 들을지도 모릅니다. 애초 목표물은 우리가 아니었다 해도, 약점이 될 만한 정보는 안 줄수록 좋을 테니까요.”
“네, 넷.”
양시백이 긴장했다.
“그 때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전부 들었어요?”
류태현이 깜짝 놀랐다.
“전부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일부는 분명 엿들었을 겁니다.”
준혁이 말했다.
“그러니 조심해둬서 나쁠 것은 없겠지요.”
“네.”
시백이 목을 움츠렸다.
“그러네요. 우리만 있는게 아니었죠.”
그 말을 듣자 류태현은 허강민을 떠올렸다. 여기 어디를 헤매고 있으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만약 그 강성중이라는 변태 범죄자가 그만 따로 빼돌려서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거라면...
류태현이 서둘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음이 급해져서 문으로 달려갔다.
“조심하세요, 서두르다간 다칩니다.”
준혁이 말했다. 멈칫한 류태현이 손잡이를 잡는 대신 어깨로 문을 밀어보았다.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그리고 큰 덩어리가 그를 덮쳤다.
“조심하라니까!”
류태현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얼이 빠져 입을 뻐끔거리고 있는데 눈 앞에 사람 얼굴이 보였다.
“괜찮습니까?”
준혁이 그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류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몇 개로 보입니까?”
배준혁이 손가락을 두 개 꼽아보였다.
“저 그렇게까지 상태 안 좋아보이나요?”
류태현이 소리쳤다. 배준혁이 방긋 웃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걸 보니 괜찮은 것 같군요.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문은 신중하게 여는 겁니다.”
“네...”
덜컥 함정을 작동시켜버린 죄가 있다보니 류태현은 바보 취급에 항의도 못하고 일어났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가 문 쪽을 돌아보았다. 문은 안쪽으로 열려있고 매우 크고 무거워보이는 데다 표면에 못 같은 게 박혀있는 통나무가 복도에 비스듬하게 쓰러져 있었다.
저게 자기를 덮칠뻔한 거라고 류태현이 한 발 늦게 이해했다. 그가 문 옆에 서 있는 양시백을 보았다. 명백히 그가 달려와 태현을 잡아당겨 통나무에 깔리지 않게 해준 것이다.
“고, 고맙습니다..”
류태현이 뒤늦게 감사인사를 했다. 양시백은 고개를 휙 돌렸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요.”
‘어?’
“아니, 류태현씨는 아직 일어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갑자기 준혁이 말을 바꿨다.
“피하기는 했어도 아슬아슬했고, 죽을 뻔한건데 아직 충격도 덜 가셨겠죠. 안에 무슨 함정이 더 있을지 모르니 먼저 들어가서 살펴보겠습니다. 시백씨.”
막 반대할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려던 양시백이 준혁의 손을 보고 멈칫했다.
“또 저런 장치가 있을 지도 모르니 저 혼자는 위험할 것 같은데요...”
“네! 물론 같이 갈게요.”
시백이 서둘러 통나무를 뛰어넘었다.
“네. 그럼 류태현씨. 바로 여기니까 뭐라도 나타나면 즉시 소리지르세요.”
그리고 두 사람은 방으로 들어갔다. 복도에 혼자 남은 류태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이상한데. 나 모르는 무슨 일이 있나?’


[CoC시나리오] 히포크라테스 선서 TRPG

히포크라테스 선서

제작자 빨간반지 (@idonwanause)




시나리오 소개

콜 오브 크툴루 기반 1인 시나리오입니다. 시간 배경은 현대이고 지역은 적당한 대학병원이나 그 비슷한 종합병원이 있는 곳이면 됩니다.
탐사자 또는 탐사자의 핵심 관계인이 로스트 되거나 사망할 가능이 있습니다. (높습니다) 그렇게 어렵진 않지만 전투 있습니다.

원래 특정한 조사자를 대상으로 만든 시나리오라 널리 써먹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플레이 했을 때 조사자의 소중한 사람이 플레이어끼리 자매인 조사자 형제라 감정 이입이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에 괜찮은 플레이가 나와서 (살아남았단 뜻은 아닙니다..) 제가 이걸 실제보다 훌륭한 시나리오로 착각하고 있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탐사자 권장사항

의사 또는 심리상담사여야 합니다. 핵심 관계인이 캐릭터에게 정말로 중요한 사람이고 플레이어도 이입할 수 있는 편이 좋습니다.
추천 기능은 의료, 근접전(격투) 또는 은밀행동. 자료조사. 응급처치. 높은 이성



내용을 알면 플레이가 의미 없어지는 시나리오이니 플레이 하실 분은 이 아래로는 읽지 마세요.





시나리오
(몰입을 위해 가능하면 설명하는 대신 수호자의 롤플레이로 전달하길 추천합니다)

탐사자의 환자가 심한 불면증과 악몽을 호소합니다. 약이며 상담 등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지만 소용이 없고 환자는 산 미라 같아 보일 정도입니다. 달리 원인을 찾을 수 없어 마지막 수단으로 수면 다원 검사를 하려는 상황입니다.
검사실에 환자를 눕히고 잠드는 걸 지켜봅니다. 약 5 분 정도 지나 탐사자가 이만 자리를 뜨려고 할 때 갑자기 환자가 비명을 지르고 발작합니다. 탐사자가 쫓아가 손을 잡으니 놔라, 이 자는 내 것이다 라는 소름끼치는 환청이 들립니다.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탐사자가 여기서 손을 놓으면 환자는 계속 비명을 지르며 말라 비틀어지다 사망합니다. (환자 사망 엔딩으로->)
그래도 손을 잡고 있으면 환자의 꿈 속으로 같이 떨어집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희고 안개가 자욱한 공간에 혼자 있습니다. ‘좋아, 정 그러고 싶다면 네 환자를 구할 기회를 줄게.’ 라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큰 소리는 아니지만 사방에서 동시에 말하는 것처럼 들리고 어딘지 기분 나쁘고 소름끼치는 목소리입니다.
“좋아, 게임을 하자. 환자를 구해서 나가면 너의 승리야. 단 패배할 때는 널 받아가겠어.’
탐사자가 수락하든 않든 목소리는 멋대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패배할 때를 대비해 담보물을 맡아둬야지. 네가 절대 잃기 싫을 걸로.’
탐사자의 핵심 인물이 갑자기 안개중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기도 전에 순식간에 팔 목 다리가 분리되더니 안개속에 녹듯이 사라집니다. 소중한 사람이 눈 앞에서 끔찍한 꼴이 되었기 때문에 1/1D4+1의 이성을 잃습니다.


정신차리고 보면 괴상한 방에 들어와 있습니다. 네모난 방 가운데 책상과 의자가 있고 좌우 벽 가득히 책장, 맞은편 벽에 문이 있습니다. 문 위에는 시계가 걸려 있습니다. 뒤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책상 위에 B4크기의 종이가 있습니다. 종이는 시험지로, 맨 위에 이름을 쓰는 난이 있고 아래에 문제가 빽빽이 있습니다. 문제는 ‘의사소통 일탈에 대해 서술하시오.’ ‘다음 중 알프라졸람의 적응증이 아닌 것은’ 같은 의료 관련 문제인데 군데군데 크툴루 신화에 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크툴루 신화를 전혀 접한 적 없는 조사자라면 문제지 뒷장을 보고 글자가 제대로 읽히지 않는다고 느끼며 메스꺼워합니다. 의학 관련 문제는 의료로 판정해 성공하면 풀 수 있습니다.
양쪽의 책장엔 크툴루 신화 관련한 책이 있습니다. 자료조사에 성공하면 문제지의 신화 관련 문제를 풀 수 있게 됩니다. 크툴루 지식이 5%늘고 이성이 1D4 깎입니다.
의학과 자료조사를 판정하고 나면 문이 열립니다. 둘 다 성공하면 문이 열리면서 <소중한 사람>의 옷을 입은 다리 두 개가 툭하고 떨어집니다. 실패해도 문은 열리지만 ‘소중한 사람의 일부’를 되찾지 못했다는 사실은 저절로 알게 됩니다. 둘 중 하나만 성공하면 다리를 한 짝만 되찾고 이성이 1이 깎입니다. 둘 다 실패하면, ‘그 실력으로 어떻게 뺏긴 걸 되찾을 거야, 응?’이라는 신랄한 조롱을 듣고 이성이 1D3+1 깎입니다.
획득한 다리는 가지고 다니게 됩니다. 원래라면 무겁겠지만 꿈이기 때문에 무게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문이 열리면 황량한 고원입니다. 저 멀리 동굴 입구 같은 게 보이고 옆에는 웬 구급상자가 있습니다. 무기로는 쓸 수 없는 메스와 붕대 소독약 등등이 들어있습니다. 아까 신화 서적을 읽는데 성공했으면 지능 판정으로 여기가 샤우그너 판이 있는 고원인 걸 알게 됩니다. 읽는데 실패했다면 헤매다 보면 동굴 밖에 갈 곳이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민첩이나 은밀행동으로 숨어들어갈 수 있습니다. 깊은 안쪽에 문이 보입니다. 동굴 앞쪽에 흉측하게 생긴 작은 인간 같은 것이 있습니다. 들키게 되면 교전이 벌어집니다.

초초 (조사자가 전투력이 높다면 한 마리 더 배치하는 걸 권장합니다.)
마주보게 되면 0/1D3의 이성을 잃습니다.
체력9 데미지 1D4(단검) 회피 45% 공격횟수 1회

갖고 있는 다리를 던져주면 먹는 동안 안으로 도망칠 수 있습니다.

전투 중 밖으로 도망치게 되면 잠시 고원을 헤매다 아까의 안개가 나타납니다. 다리를 내놓으면 도와줄 수도 있다고 꼬시고, 정말 주면 ‘그 사람 별로 소중하지 않은가보다, 담보물을 잘못 잡았어..’라며 그냥 사라집니다. 다리를 안 주면 단검이나 권총을 빌려줍니다. 다리를 넣을 백팩도 요구하면 줍니다.

패배하면 환자 사망 엔딩으로 가게 됩니다.


안쪽 문을 여는데 성공하면 팔 두 개가 역시 툭하고 눈 앞에 떨어집니다. 가지고 안으로 들어가면 거대한 코끼리 머리를 한 흉측한 신상 같은 게 보입니다. 아까 지능 판정에 성공했으면 이게 샤우그너 판인 걸 알 수 있습니다. (이성 상실 1D4/2D6+1) 그 발치에는 환자가 있고, 코 부분만 움직여 환자에게 가 닿습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면 코끼리 코는 촉수이고 환자에게 거머리처럼 붙어서 피를 빨고 있는 걸 알게 됩니다. 아까 구급상자를 주워오지 않았다면 제단 옆에 ‘누가 준비해준 것 같은’ 구급상자가 있고 메스와 소독된 거즈 등 응급 수술을 할 수 있는 도구가 있습니다. 촉수는 의료로 판정해 수술로 제거합니다. 실패하면 강행을 해 보고 그래도 실패하면 환자가 죽습니다. (환자 사망 엔딩으로->)
제거 수술 후 지혈은 응급처치로 합니다. 성공하면 환자의 상태가 안정됩니다. 실패하면 환자는 출혈을 지속합니다. 의료와 응급처치 판정을 다 성공하면 ‘소중한 사람’의 옷을 입은 몸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실패하면 눈을 뜨려는 샤우그너 판을 피해 도망치느라 발견하지 못합니다.


환자를 데리고 동굴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하면 또다시 안개 속에 이번엔 환자도 짊어진 채 서 있습니다. 얼굴이 확실히 보이지 않는 키 크고 마른 형체가 안개 속에서 나타납니다. 소중한 사람의 머리를 든 채.
‘세상에, 성공해버렸네. 내가 많이 도와주긴 했지만 정말로 샤우그너 판의 먹이를 빼앗아 왔어.’
형체는 매우 즐겁게 웃습니다.
‘실력도 없고 약해빠진 주제에 (조사자의 성과에 따라 조롱 또는 찬사를 덧붙여주세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형체는 혼자 신나게 웃고 즐거워합니다.
‘그럼 잘 가. 나중에 또 보자.’
그 형체는 머리를 든 채 가버리려 듭니다. 조사자가 머리를 돌려달라고 요구하면 환자와 바꾸자고 합니다. 거절하면 그대로 가버리고 조사자는 잠에서 깹니다.
조사자가 교환에 응하면 그 형체가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더 미친 듯이 웃습니다. ‘멍청한 인간 같으니! 다 이겨놓고 져버리다니!’ 시끄러운 웃음소리와 함께 잠이 깹니다.
조사자가 대신 자기를 주겠다고 하면 조사자는 로스트 됩니다.


엔딩

환자 사망
꿈에서 깨어나 보니 환자가 죽어 있습니다. 탐사자는 1D4의 이성을 상실하고 의료 분쟁에 휘말려 재산이 1D6+10만큼 떨어집니다.

환자를 탈환하고 잠에서 깰 경우.
잠에서 깨 보니 환자는 위급한 상황이긴 해도 살아있습니다. 다른 의사와 간호사들이 몰려와 환자를 돌봅니다. 소중한 사람에게 연락해 보면 그는 무사히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환자를 되찾는데 성공해서 게임에 이겼으니까요. 이성 1D6+10 회복. 그 외 재산이나 명성, 후원자(회복된 환자)등 조사자의 상황에 걸맞는 보상을 더해줍시다.

환자를 포기하고 잠에서 깰 경우.
잠에서 깨보니 침대에는 팔다리 머리가 토막난 커다란 봉제 인형이 누워있습니다. 환자도, 소중한 사람도 사라졌습니다.
1D10 이성 상실. 환자가 아예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의료 분쟁엔 휘말리지 않습니다.

조사자가 많이 후회하면 다음날 꿈에 그 안개가 나타납니다. ‘너랑 소중한 사람은 바꿔줄 수 있어. 어때?’
수락하면 조사자는 로스트 됩니다. 소중한 사람은 귀환합니다.





니알라토텝이 샤우그너 판의 먹이를 뺏어 탐사자와 노는 이야기였습니다.(...) 밥 좀 먹으려고 차려놓고 보니 엉뚱한 녀석이 가로채 즐겨버린 샤우그너 판을 불쌍히 여겨줄 필요는 없습니다 전혀.
어떤 게 게임 클리어 조건인지 확실하게 하기 위해 제목을 저리 정했지만 그래도 니알라토텝의 농간에 빠져 환자도 소중한 사람도 뺏기는 경우가 많을 것 같습니다. 곰돌이 인형을 토막 내 한 조각씩 던져주는 게 참 악랄하죠.. 착각하지 않아야 클리어가 쉽지만 착각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을테니.



검은 남자 63 ㅣ- 회색도시&검은방



그날 밤늦은 시각 강재인이 접견실에 들어섰다.
“배준혁 경사의 보고입니다. 조금 문제가 생겼습니다.”
막 잘 생각을 하고 있던 장희준이 일단 강재인이 내민 전화기를 받아들었다.
“무슨 일인가?”
-죄송합니다만 양태수 씨가 회장님을 배신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 똑같이 냉정한 목소리였다.
-아들을 데리고 와서는 최재석 형사와 셋이 피신할 작정이었습니다. 셋 모두 붙잡아 회장님께 보내야 한다는 건 알았습니다만 세 사람이 먼저 절 기습하는 바람에, 제압하려면 죽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희준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죽였다고? 셋 다?”
-예. 저주로 죽였기 때문에 셋 다 겉으로는 원인불명의 쇼크사입니다.
장희준은 탁자를 두드리며 잠시 곱씹어보았다. 수화기에서는 여전히 배준혁 형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신과 차를 오래 감출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최재석 형사는 백선교의 보복으로 살해된 것으로 처리하고, 양태수 부자의 시신은 차에 실어 가라앉히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양태수의 태도가 아들을 되찾은 뒤 예전 같지 않게 된 것은 장희준도 이미 느끼고 있었다.
최재석을 찾아오라는 명령에도 그런 그를 시험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었다. 어색한 핑계를 대고 아들까지 데려갔다고 했을 때 이미 그가 시험에 실패했다는 건 직감했다. 하지만 최재석까지 데려가려다 배준혁 손에 죽어버릴 줄은 몰랐다.
보기와는 다르게 무르고 정에 약한 사람. 그래서 다루기 쉬웠지만 오래 곁에 둘 만한 사람은 아니었던 거다.
그에 비하면 배준혁 형사는 냉정하고 가차없다. 경찰이 동료를 포함해 세 사람이나 죽이고도 침착하게 누구한테 보고해야 할지, 뒤처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실행에 옮긴다.
박근태는 너무 빠르고 아깝게 잃었지만 대신 괜찮은 부하를 남겨주었다.
“말한 대로 하게. 차가 백석과 연결되면 곤란하니 발견되지 않도록 잘 처리해야 해.”
“명심하겠습니다.”


다음날 배준혁 경사는 최재석 경사가 전날 저녁부터 보이지 않는다며 파출소의 동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최재석이 범죄 집단에 쫓길 이유가 있다는 암시는 처음부터 해뒀기 때문에 파출소장은 대번에 그런 쪽의 보복 가능성을 연상했다.
평화로운 시골에서 갑자기 대형 강력 범죄에 대처하게 되니 다들 최재석을 걱정하고 노력하면서도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단서도 거의 없어서 실종 당일 나타났던 검은 차와 수상한 2인조 덩치가 깡패였고 최재석을 납치하러 나타났던 것 아니냐는 가설이 제기되자 손쉽게 거기 넘어갔다.
소식을 듣고 파견된 권현석 팀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목격 정보가 단편적이고 빈약한 것을 아쉬워하며 최재석 형사가 2인조 깡패들에 의해 실종된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리고 주정재 경사와 조용호 경사를 남긴 채 본인은 일단 돌아갔다. 주 수사가 아직 진행중이니 팀장이 계속 거기 있을 수는 없었다.
그 돌아가는 차 안에 납치된 사람과 납치한 사람이 다 타고 있을 줄은 남은 경찰들이 꿈도 꾸지 못할 노릇이었다.
“당장은 안가에 숨어 살아야 할 거야.”
운전석의 권현석이 뒷자리의 최재석에게 말을 걸었다.
“다른 방법 생기는 대로 셋 다 반드시 살려줄게.”
권현석의 시선이 최재석 옆에 앉은 양태수와 양시백에게로 옮겨갔다.
뒷좌석에 셋이 나란히 앉느라 커다란 덩치들을 한껏 움츠린 모양이 코미디 프로 같았다. 물론 웃음은 나지 않았다.
“목격증언이 모호하니 실명으로 수배될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장희준 회장도 그쪽은 바라지 않을 거고요. 양태수 씨.”
태도를 고쳐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덩치나 인상은 무서울 게 없어도 그는 범죄의 피해자이자 증인, 공범이기도 했다. 게다가 아들이 보고 있었다.
“백선교 수사가 막바지이니 실버 트와일라잇에도 곧 화살을 돌릴 수 있을 겁니다. 당분간은 외출도 어렵겠지만 조금만 참아주세요.”
양태수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가는 동안에는 그 이상 대화가 없었다. 서울 시내의 한 빌라에 도착해 짐을 풀고 나서야 녹취용 녹음기와 서류를 꺼냈다.
제일 먼저는 양태수였다. 아들이 보는 앞에서 진술하는 게 민망하면 잠시 양시백은 옆방에 가 있는 게 어떻겠냐고 권현석이 제안했지만 양태수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젓고 진술했다.
어차피 양태수가 할 이야기는 양시백도 대충 아는 이야기들뿐이었다. 장회장 밑에 들어가게 된 계기와 그의 경호실장으로 일한 이야기. 범죄자로 보이는 이들이 저택에 드나들어도 못 본 척한 것 등.
권현석도 최재석도 그런 이야기를 담담히 늘어놓는 양태수와 전혀 놀라지 않고 듣는 양시백 중 어느 쪽에 더 경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당장 양태수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많지 않았다. 이제는 양시백 차례였다.
양시백은 비로소 실버 트와일라잇에서 본 것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직업 소개소란 명목으로 아이들을 끌어들일 때 이야기부터 양태수가 진정을 못 하는 걸 보고, 권현석도 최재석도 계속 같이 있게 하는 게 좋지 않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양태수는 여기서 같이 들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양시백이 머뭇거리더니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 듣는 데선 더 말할 수 없겠어요.”
“아저씨.”
최재석이 양태수를 잡아당겼다.
“양시가 저렇게 말하잖아.”
“하지만 우리 시백이는 아직 미성년자고 보호자가 옆에 있어야 해.”
“경감님도 애라고 무시하거나 나쁜 짓 하는 사람 아니니까, 믿고 잠시만 자리 비켜주자. 응?”
양태수는 한참이나 망설인 끝에 최재석이 잡아끄는 대로 일어났다. 최재석은 안도하며 같이 옆방으로 갔다.
“아니, 넌 가서 시백이 옆에 있어줘.”
옆방으로 와서 문을 닫고도 손을 놓지 않는 최재석에게 양태수가 말했다.
“난 괜찮아. 경감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둘만 있으면 시백이는 무서울 거야.”
“아저씨 정말 괜찮겠어?”
양태수도 파랗게 질려서 손을 떨고 있었다. 최재석은 양태수가 단순히 아들 걱정으로 겁에 질린 상태가 아니라고 깨달았다.
“시백이 옆에 누구라도 같이 있어준다면 나도 진정될 거야.”
과연 그럴까 싶을 정도로 심하게 떠는 양태수를 보며 최재석은 잠시 망설였다.
“애가 혼자 있잖아!”
양태수가 갑자기 벽력 같은 고함을 질렀다.
“알았어.”
최재석이 손을 놓고 말했다.
“가서 같이 있을 테니까, 아저씨는 여기서 조용히 있는 거다, 약속?”
“약속할게. 그러니까 어서.”
양태수가 최재석을 떠밀었다. 최재석은 일단 알았다고 말해가며 방 밖으로 밀려났다. 더 꾸물거렸다가는 양태수가 정말 폭발할 것 같았다.
권현석과 양시백이 있는 방으로 돌아오니 둘 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최재석을 바라보았다. 진술서도 최재석이 나갈 때 멈춰 있던 그대로였다.
“양태수 씨 괜찮은 거야?”
권현석이 물었다.
“아닌 것 같은데, 애가 혼자 경찰한테 진술하는 게 안심이 안 되니 곁에 있어주라고 고집을 부려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정말 그뿐이라면 이제 진정하겠죠.”
권현석도 최재석도 정말 그럴지 확인을 바라는 눈으로 양시백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제 문제에 좀 예민하셔서 그래요. 이제 괜찮을 거예요.”
양시백이 우물거렸다.
“정말로?”
최재석이 양시백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주고 다시 물었다.
“나랑 아저씨랑 너랑 이제부터 이 집에 조용히 숨어 살아야 해. 들키면 안 되고. 그러니까 소동이 날 만한 걱정거리가 있으면 지금 얘기해. 그래야 대책을 세우지.”
양시백은 한참을 더 머뭇거렸다. 권현석도 최재석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제 문제에, 좀 과하게 예민해요.”
마침내 여전히 우물거리면서도 털어놓기 시작했다.
“버렸다가 너무 오랜만에 찾아서 그런 건지 몰라도 저 화장실 가는 것까지 따라온 적도 있고, 밤에 악몽도 자주 꿔요.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괜히 두리번거리고.”
‘좀 미친 거 아냐?’ 같은 생각도 자주 했지만 남, 그것도 경찰 앞에서 그렇게까지 말할 수는 없었다.
최재석 아저씨도 배준혁 선생님도 다 좋은 분들이지만, 이 권현석 경감이란 분도 인상은 전혀 무섭지 않지만 경찰이었다.
권현석 경감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일단은 재석이가 조심해서 지켜보고 위험하다 싶으면 나한테 연락해.”
최재석이 무겁게 대답하자 권현석은 다시 양시백을 마주보았다. 양시백은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였다.
“무서워할 것 없어.”
권현석이 헛기침했다.
“그때 실버 트와일라잇에서 준혁이 구해달라고 말했던 게 너 맞지?”
시백이 고개만 끄덕였다.
“덕분에 준혁 형사가 위험에 처한 걸 알 수 있었어. 아직 거기서 완전히 빼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누굴 믿고 누굴 믿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있었고 수사팀에 닥칠 뻔한 위험도 막았어.”
시백의 눈이 동그래졌다.
“과장 아니야. 그때 네가 말해준 덕에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었어. 그동안 준혁 형사도 나도 섣불리 행동하다가 도리어 너와 네 아버지가 위험해질까봐 나서지 못했을 뿐이야. 이제라도 보호할 수 있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야.”
시백은 여전히 들은 말을 다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권현석은 다시 따뜻하게 웃어보였다.
“그때 네가 용기를 내 줘서 나도 준혁 형사도 정말 감사하고 있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생각나는 대로 천천히 말해봐. 마법도 마법사도 다 알고 있으니까.”
시백은 잠시 눈을 굴리다가 최재석을 보았다. 최재석도 고개를 끄덕이자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준혁 선생님은 진짜로 마법사인데 착한 편인 거예요?”
“그래.”
권현석이 물었다.
“마법사들을 만나봤어?”
“명령을 들은 적은 몇 번 있어요.”
시백이 몸서리를 쳤다.
“직업 소개소는 마법사들에게 부하가 될 아이, 제물이 될 아이를 공급하는 창구예요. 전 힘이 세다는 이유로 짐꾼이나 운전사 같은 걸 했지만.....전 굉장히 운이 좋은 쪽이에요. 죽은 애들도 미쳐버린 애들도 굉장히 많아요.”
시백이 말을 잇지 못하는 걸 보고 최재석이 손을 꽉 잡아주었다. 권현석은 물이라도 떠다 주려고 일어나서 방 문을 열었다가 양태수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
“엿들으려던 게 아닙니다.”
어설픈 변명을 하며 양태수가 한 걸음 물러났다.
“그냥, 시백이가 어려운 일을 당했는데 내가 몰라서는 안 되니까.”
“양태수 씨.”
권현석이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험악한 사내에게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자식에게 일어난 일이니까 더 자세히 알면 안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지금은 시백이도 아버지 듣는 데선 말하기 싫어하니까 조금만 참고 기다려 주세요.”
양태수는 우물쭈물하며 양시백을 바라볼 뿐이었다. 양시백의 표정이 험악해지는 걸 보고 최재석이 나섰다.
“아저씨 기왕 그럴 거면 얘 물이라도 떠다 줘.”
양태수는 황급히 부엌으로 달려갔다. 권현석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 했어.”
원래는 양태수 부자와 최재석을 따로따로 숨길 생각이었다. 급히 두 군데나 안가를 마련할 수 없어 일단 한 곳에 모은 건데 이 꼴을 보니 셋을 한 곳에 숨기는 수밖에 없어보였다. 안가에서 부자간 불화로 소동이 나면 곤란했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25 ㅣ- 회색도시&검은방


박근태는 커피를 받아들었다.
“죄송합니다...”
“아니, 나한테 죄송할 게 뭐 있겠나.”
하성철이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 박근태는 들써 쓴 담요를 좀 더 여몄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하성철이 물었다. 박근태는 입만 벌렸다 다물었다.
경찰청으로 복귀하던 순경들이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비명을 듣고 쫓아가 그를 발견했다고 했다. 경찰 제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청으로 끌고 들어왔고 곧 넋이 나가버린 그를 하성철이 인계받아 이렇게 담요를 덮어씌우고 난로를 틀어주었다.
박근태는 지금 부하들이 몽땅 회식으로 본청에 없어서 매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근태, 정말 괜찮나?”
‘국장님도 회식에 가버리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다른 팀에 인계되거나 최악의 경우 보호소에 처넣어지는 것 보다는 나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국장님을 대하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가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괜찮습니다.”
상사가 반복해서 묻는데 계속 무시했다간 아무리 온화한 사람이라도 화를 낼 것이다. 박근태는 일단 듣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 좀........ 피곤했던 것 같습니다.”
하성철이 미간을 모았다. 성질 급한 사람이었으면 벌써 개소리 집어치우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박근태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게..... 실은 방금 사귀던 사람이 찾아왔었는데.”
길에서 만났지만 그를 만나러 왔던 거라면 경찰청에 모습을 보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다른 누가 말하게 두기보단 자기가 말하는 게 나았다.
“헤어지자고 하더군요.”
어차피 알려질 일이었다. 장회장이 수하를 보내 회유하려 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째서?”
하성철이 놀랐다.
“그, 자세히는 모르지만, 오래 사귀지 않았나?”
“아버지 문제로 계속 결혼이 늦어지는 게 견딜 수 없었나봅니다.”
박근태는 눈을 감았다. 이게 최선이었다. 둘 관계가 완전히 끝났다고 소문이 돈다면 장회장은 홍은희를 건드릴 필요성은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갑자기.....”
하성철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별로 남의 개인적인 사정 같은 것 신경 쓰지 않던 상사가 그러고 있으니 박근태도 덩달아 의아해졌다. 타이밍이 이상하다면 분명 이상했다. 왜 하필.
“두 사람.... 음, 이런 질문해서 미안하네만, 아직 혼전이지만 혹시.....”
“네?”
박근태는 하성철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째서 그런 것을 묻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박근태의 표정을 보고 하성철은 답을 알아들었다.
“그게, 평소에는 이성적이고 침착한 여자라도, 임신을 하게 되면 감정 기복이 심해지고 막 비관적이 되는 경우가 있어서....”
박근태가 벌떡 일어났다.
“그, 그럼 설마 그....”
“빨리 쫓아가 보는 게 좋을걸세.”
하성철이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했다.
“지금 잘 해두면 앞으로 삼십년이 편할 거야.”
박근태가 혼비백산해서 뛰쳐나갔다. 하성철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저렇게 다급해서는 만난 뒤에 말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도 들었지만 박근태도 다 큰 어른이고 연애도 오래 했으니 괴멸적인 결과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못해도 지금 안 쫓아가는 것 보다는 낫겠지.


사이드 브레이크를 당기고 강재인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회장님께 뭐라 보고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도 좀 알기 어려웠다. 애인을 빼앗아 정신을 뒤흔들어 놓은 다음에 위협을 해서 공포심을 심어주고 회유를 하면 쉽게 넘어올 거라고 생각했다. 장희준도 강재인도.
그런데 박근태는 위협에 넘어가 강재인을 따라오는 대신 그대로 패닉에 빠졌다. 홍은희가 그 자리에서 토막나 죽었다고 해도 그 정도로 심하진 않지 않을까 싶은 기세로.
‘별로 마법으로 공포심을 불어넣은 것도 아니라고. 이 소심한 쫌팽이 같으니.’
박근태를 욕해봤자 보고할 말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그런 겁쟁이 쫌팽이 회장님이 신경 쓰실 만한 남자가 아니라고 헐뜯어서 되는 문제였으면 참 좋았을 텐데.
자기가 뭘 잘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니까 난 떳떳하다고 고개 들고 들어가자니 회장님이 원하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지긋지긋했다. 언제 목덜미를 물어뜯길지 몰라 긴장해야 하는 피식자의 삶. 장회장 아래로 완전히 들어갔을 때, 인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공포와 괴이를 접하고 그 일부가 되었을 때 이제는 포식자의 편에 설 수 있을 줄 알았다. 선 줄 알았다.
그러나 강재인은 여전히 포식자 곁의 피식자였다.
‘지금이라도 다시 경찰청에 가서 강제로라도 박근태를 끌고 올까.’
경찰들이 나타났다고 도망치지 않았어야 했다. 박근태의 모습을 취객이나 그런 걸로 위장해 보이고 집에 데려가게 차에 태워달라고 부탁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박근태가 자발적으로 따라오는 게 아니어도 사실 상관 없었다. 장희준은 피식자에게도 선택권이 있는 척 하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지만 그딴 거 있을 리 없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요란한 금속음에 강재인이 정신을 차렸다. 차고 문이 열리고 차가 한 대 들어왔다.
강재인이 심호흡을 하고 차에서 내렸다. 새로 들어온 차에선 장지연과 양태수가 내렸다.
“이런 늦은 시간에 어딜 다녀오신 건가요.”
힐난하는 투는 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강재인이 장지연에게 물었다.
“잠이, 안, 와서... 잠시. 산책을, 하, 하려고.”
“밤중인데, 위험하다고요.”
“그래서 제가 모셨습니다.”
양태수가 나섰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건 확인했고 누가 접근했다면 제가 막았을 겁니다.”
“서울 시내에 그렇게 인적없는 곳이 있어요?”
많이 있겠지만, 젊은 아가씨가 산책을 할 수 있는 곳은 아닐 것이다.
“하, 한강, 옆이요...”
“아.”
여름도 아니고 썰렁한 겨울 밤이니 사람이 없을 만도 했다. 아가씨를 걱정하는 척 추궁하며 현실도피하는 건 이쯤 하기로 하고 강재인은 양태수에게 돌아섰다.
“제가 아가씨를 방까지 모실게요.”
“네, 부탁합니다.”
양태수는 등돌려 밖으로 나갔다. 저렇게 크고 강해보이지만 저 사람은 자기에게 선택권이 없었단 것도 자기가 피식자라는 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며 강재인이 장지연과 집안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특수수사팀은 다들 평소보다 늦게 출근했다.
어디까지나 ‘평소보다’ 늦은 거지 막 숙취에 쩐 얼굴로 점심 다 되어서 출근하는 기강 해이한 사람은 없었다. 그저 조금 숙취가 있는 정도였다.
두통이 있는지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유상일이 오미정을 불렀다.
“미정형사, 나 커피....”
“시대가 어느 땐데 여자라고 커피 심부름을 시킵니까.”
말도 끝나기 전에 배준혁이 말을 잘랐다.
“상일선배, 깡패 집단에선 그런 식으로 했을지 몰라도 경찰이 그러면 욕 먹습니다. 커피 정도 스스로 타다 드세요.”
유상일은 입을 벌렸으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자기 잠입 전에도 경찰이었고 그 때도 커피 심부름 정도로 욕먹지는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저 무서운 후배한테 시대에 뒤떨어진 노땅 화석으로 매도당할 거라는 근거 있는 확신이 들었다.
엉거주춤 일어난 오미정이 유상일과 배준혁의 눈치를 보았다. 상일 선배에게 커피를 타다주는 건 완전 괜찮지만 또 여기서 괜찮다고 나섰다가 사무실의 커피 셔틀이 되어버리면 그것도 싫었기 때문에 나서서 말하기 곤란했다.
사무실 문이 열렸다.
“야, 다들 제시간에 왔네.... 분위기 왜 이래?”
최재석이 유상일과 배준혁과 오미정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유상일이 일어났다.
“커피 마시고 올게.”
그가 나갔다. 최재석이 둘러보자 오미정은 눈을 피했고 배준혁은 태연히 인사했다.
‘준혁이 왜 저래?’
재호가 미정에게 눈으로 물었다.
‘나도 몰라.’
미정 역시 눈으로 답했다.
“저, 미정 형사.”
준혁이 부르자 오미정이 펄쩍 뛸 만큼 놀랐다.
“으, 응, 왜?”
“이번 주말에 시간 있습니까?”
“어.”
반사적으로 대답해놓고 오미정은 혼란에 빠졌다.
“재호 형사는요?”
“이, 있는데 왜?”
“셋이서 술이라도 한 잔 하면 어떨까 해서요. 제가 살 테니까.”
“그, 그래. 좋지.”
공짜술이라면 당연히 좋지만 그보다 거절했다가 준혁이 화낼까봐 무서웠다. 어쩌다 이렇게 우리 모두 준혁이의 눈치를 보게 된 걸까 서재호는 속으로 조금 한탄했다.
유상일이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부하들이 다 무사히 출근한 것을 확인하고 권현석은 팀장실 문을 두드렸다.
“형, 어제 말한 대로 백석 문건을 복...”
평소대로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가 권현석이 정지했다.
박근태가 안에 없었다.
‘잠깐 화장실 갔나?’
이 시간에 출근 안 해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심지어 어제 술을 마신 것도 아니었다. 권현석은 기다렸다.
화장실에 간 게 아님이 확실해지고도 한참 지나, 불안해진 현석이 어떻게 연락이라도 취해봐야겠다고 생각할 때가 되어서야 문이 열렸다.
“근태형?”
그를 보고 권현석은 놀라 달려갔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어제 무슨 일 있었어?”
눈은 빨갛고 눈 밑은 꺼멨다. 어제 회식에서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며 술을 퍼마셨다고 해도 이보다는 상태가 나을 것 같아보였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박근태가 눈을 문질렀다.
“괜찮아. 아니 괜찮은 건 아니지만, 아니 나쁜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좋은.... 나쁜 일도 있고 아무튼.”
횡설수설하다 박근태가 문을 닫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왜 상일이에 이어 나까지 네 전철을 밟는 거냐....”
“내가 뭐? 아니 상일이나 내 전철을 밟은 건 뭐고 형은 또 뭘.....”
그리고 권현석은 자신과 상일에게는 이미 있는데 박근태에게는 아직 없는 게 뭔지 떠올렸다.
“딸이 생겼어?!”
“그건 아직 몰라.”
박근태가 다시 한 번 눈을 문질렀다.
“아들인지 딸인지. 어제 밤에 확인했어. 은희씨도 아직 몰랐던 것 같던데, 유부남의 감이란....”
권현석이 갸웃했다.
“유부남이라니 누구 얘기야?”
“됐고 지금 위험해.”
형을 축하하고 놀리고 신랑 매달기 할 준비로 뇌가 고속 회전하던 권현석이었지만 그게 일 이야기인 건 알아들었다.
“장회장이 무슨 짓을 했어?”
그가 다시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은희씨한테 나와 헤어지라고 했고, 나한텐 지기와 손잡자고 했지.”
“빌어먹을 노망난 늙은이가.”
“정말 노망이 난 거였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말이야....”
박근태가 한숨을 내쉬었다.
“은희씨의 안전을 위해서, 지금은 헤어진 것으로 해두기로 했어.”
“형.”
“어쩔 수 없었어. 어디 안가에라도 숨겨두면, 그럼 장회장이 손 못댈 거라는 확신이 안 들어.”
고개를 든 박근태의 표정은 비참해보였다.
“이렇게 강하고 야비한 적을 무슨 수로 쓰러트리지? 보복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이기려면.”
“회장을 감옥에 보내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겠지.”
권현석도 고뇌했다. 장희준은 재벌 회장이다. 직접 살인을 하거나 시켰다면 또 모를까 폭력배에게 돈을 주고 강제 철거를 시켰다 정도로는 집행유예로 풀려나버린다. 그래서 백석 문건중에 장회장이 명백하게 범죄를 지시하고 그 대가를 치른 증거가 있는지 확인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었다.
황도진이나 김성식이 장희준을 끌고 들어가주면 참 좋을 텐데.
“그러고보니 황도진이야 일종의 의리 같은 걸 지켜서 입 다문다고 치고, 김성식도 장희준에 대해 입을 안 여는 건 좀 이상해. 무고한 상대라도 물귀신처럼 끌고 들어갈 흉악한 놈인데. 뭐 약점 잡힌 거라도 있는 걸까?”
현석이 물었다.
“그 놈은 가족은커녕 여자도 없었어. 체포되고 바로야 장회장이 자기들 뒤도 봐줄 거라 생각해서 입 다물었을 거고.”
박근태가 곰곰이 생각했다.
“지금쯤이면 버림받았단 생각은 하겠지?”
“그래. 지금 다시 찔러보면 뭐가 나올지도 몰라.”
권현석이 다시 표정이 밝아져서 일어나려고 했다.
“잠깐만.”
박근태가 그를 잡았다.
“혹시 말이야.”
“응.”
“김성식이, 내가 장희준에게 넘어갔다고 생각하게 되면 더....”
“무슨 소리야!”
끝까지 듣지도 않고 권현석은 박근태의 팔을 덥석 붙들었다.
“그런 인간이랑 손을 잡는 척 하겠다고?”
“잡는 척 하겠다는 게 아니라 잠깐 김성식만 속이...”
“그래도 안 돼!”
권현석이 강하게 주장했다.
“잠입수사 같은 거 한번이면 족해. 두 번 다시 안 해 못 해 상일이에 이어 형까지 그러지 마.”
“어, 음.”
기세에 밀려 박근태가 입을 다물었다.
그가 현석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손을 잡고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어?”
“미안.”
박근태가 말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지?”
그가 권현석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직 안 끝났는데, 그 고생.”
권현석이 뾰로통해졌다.
“날 애 취급할 시간 있으면 김성식 심문이나 다시 하자고.”
“그래 그래.”
박근태가 권현석을 놔주었다.
이게 잘 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은 여전히 위협적이고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앞날이 암담하지만,
그래도 이게 잘 한 거였다.


검은 남자 62 ㅣ- 회색도시&검은방



시백이 앞에서는 그렇게 듬직하게 웃어보였지만 양태수도 속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시백이 아무 설명도 안 했기에 도리어 그 공포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었다. 양태수 자신 장희준 회장의 힘을 모르는 바가 아니므로 시백이 지나치게 겁먹은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직서보다도 은근하고 안전한 방법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고민에 휩싸여서 출근해보니 회장님의 호출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꼭 좀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네.”
사람을 찾아오라는 명령 정도는 전에도 수행해본 적 있었다.
“자네도 언제까지고 내 옆에만 붙어있어서야 훌륭한 재능을 썩히는 게 되지 않나.”
회장님이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거기 적힌 주소로 가서 최재석이란 사람을 데려오게. 좀 난폭한 사람이니 힘을 써야 할 거야.”
양태수는 접견실의 테이블에 놓인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충청북도의 어느 읍이라고만 적혀있고 번지는 없었다. 대신 옆에 사진이 있었다.
“이 사람입니까?”
“그래. 자세한 주소는 거기 관할 파출소의 배준혁 경사에게 묻게. 그가 도와줄 걸세.”
“예.”
양태수는 자신이 평소 표정 그대로이기를 빌며 종이와 사진을 챙겼다.
“그럼 바로 출장 준비를 하겠습니다.”
“알겠네. 좋은 소식 기다리지.”
회장 앞을 물러나온 양태수는 경호실로 가서 자신의 출장에 맞춰 스케줄을 조정하고 공백이 없도록 안배했다. 그런 다음 집에 가서 짐을 챙겼다. 간밤에 시백이가 챙긴 것들까지 싹 트렁크에 넣고 실버 트와일라잇으로 갔다.
시백의 경비 스케줄을 직접 관리하는 계장은 클럽에서 그리 의미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양태수에겐 전부터 시백을 빌미로 촌지라도 받을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에게 바라는 대로 몇 푼 찔러주고 시백이 요즘 아프니 하루만 휴가 처리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양태수는 시백이를 차에 태우고 실버 트와일라잇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우리 이제 어디로 가는 거예요?”
운전석 옆자리에 앉은 시백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단 충북으로 간다.”
최재석을 장희준 회장 앞에 데려다 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도 가서 만나기는 해야 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기는 하지만 적어도 악인은 아니었다. 경고해주고 몸을 피하게 해주고 싶었다. 혹시 같이 도피하면서 힘을 합칠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런데 배준혁 형사는 어떻게 된 거지?’
박근태 경무관을 수행해 처음 온 후로 꾸준히 클럽에 드나들었으니 그도 클럽의 끄나풀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근태가 몰락하기 며칠 전 알게모르게 사라져 좌천되어 있었다.
시백이 앞에 더 나타나지 않게 된 것에만 만족하고 신경쓰지 않았던 자신을 반성하려다 문득 그가 좌천되기 한참 전부터 이미 시백이와는 더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도착하면 시백이와 주차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대신 건물 안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췄다.
양태수는 시백을 돌아보았다.
“시백아. 그 배준혁이란 형사 말인데.”
“예?”
시백이 흠칫 했다.
“그 사람 떠나기 전에 혹시 너하고 무슨 일 있었니?”
시백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떠났다고요?”
“그래. 몰랐니?”
“떠난 거였어요? 죽.....실종된 게 아니고요?”
양태수는 아연해져서 시백을 바라보았다. 클럽에서 볼 수 없게 된 것만 가지고 대뜸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그 사람 안 죽었어. 듣기로는 갑자기 어디 시골로 발령났다던데. 난 그 사람이 너한테 인사라도 하고 간 줄 알았다.”
시백은 안도하고 싶은 듯 울고 싶은 듯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양태수는 빨리 어디든 조용하고 안전한 곳에 가서 아들이 대체 뭘 알고 있는지 자세히 묻고 싶어졌다. 이 차 안에서 하는 이야기까지 새나갈 리는 없지만 운전을 하면서 들어도 괜찮을 이야기 같지도 않았다.
침묵 속에 시내를 벗어나 고속도로로 들어갔다.
몇 번이고 누가 뒤따라오는지 백미러를 흘끔여가며 충북 톨게이트를 통과했다. 지금은 출장 나온 것이니 실제로는 달아난 거라고 백석에서 눈치채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래도 마음은 불안했다.
주소지는 도내에서도 완전 시골구석이었다. 적당히 차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만 가서 시골길 곁에 차를 세우고, 양태수는 최재석이 예전에 줬던 전화번호를 찾아 걸어보았다. 그런데 없는 번호라는 안내음만 들려왔다.
“.....”
그때 최재석은 위장 잠입한 경찰이었고 그때 쓰던 번호는 해지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양태수는 그걸 알 리가 없었다. 창백해지는 얼굴을 양시백이 덩달아 겁먹으며 바라보았다.
“.....일단 내리자.”
아들 앞에서 아빠가 암담한 기색을 내비칠 수는 없었다. 어차피 회장님도 여기서부터는 발품 팔라는 투로 말씀하셨다.
커다란 검정 세단에서 내리는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을 보고 지나가던 사람이 움찔 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그 정도는 늘 있는 일이었으므로 양태수는 신경쓰지 않고 시백에게 말을 건넸다.
“일단 설명해주마. 오늘 회장님이 나더러 사람을 찾아오라고 하셨다. 여기 충북에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출장 업무를 핑계대고 몸을 피하면 그만큼 시간을 벌 수 있으니 따르는 척하고 온 거다.”
“그 찾으라는 사람은요?”
“당연히 찾아서 경고해줘야지. 그 사람이라고 잡히게 놔둘 순 없잖니. 게다가......”
너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시백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럴 거면서.....”
“응?”
“그럴 거면서, 왜 이제까진 장회장을 따랐어요?”
양태수는 창백해졌다. 시백은 양태수 자신만큼이나 치켜올라간 눈으로 사납게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하루이틀 일이 아니에요. 장회장도 클럽의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 일을 해요. 괴물을 섬긴다면서 사람들을 죽이고 납치하고. 그런데 왜 그런 사람을 경호해요? 저 말고 다른 사람 목숨도 소중하면, 왜 이제까진 모른 척했어요?”
양태수는 입만 덥석덥석했다. 할 수 있는 대답이 없었다. 시백의 비난엔 하나도 틀린 구석이 없었다. 게다가 그런 이야기를 시백이 안다는 것 자체가 끔찍한 진실을 암시하고 있었다.
“시백아.”
아내는 죽고 아들은 보육원에서 사라졌다고 알았을 때, 클럽의 복도에서 시백이를 찾아냈을 때 이후 세 번째로 손발에 힘이 풀리고 눈물이 났다.
“시백이 너......”
묵이 메어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거니?”
시백은 이를 악물었다.
“아주......일찍 물어보시네요.”
양태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양시백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버지도 속았다. 협박에 굴복해 입을 다문 건 자신이다. 그 정도 가지고 누그러지기엔 보고 겪은 일이 너무 혹독했고 죽은 줄만 알았던 아버지를 향한 원망이 너무 컸다.
차라리 몇 대 때리면 조금 나아질까. 기분이라도 풀릴까.
주먹을 움켜쥐고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험악한 얼굴과 덩치를 거의 그대로 물려준 자신의 원본 같은 모습을.
아버지가 저 주먹을 마음먹고 휘두르면 보통 사람들은 그대로 날아가버릴 것이다. 대개는 맞기 전에 벌써 기가 죽을 것이다.
그냥 길에서 마주치는 것만으로 깡패가 나타났다고 겁먹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행려병자가 되어 떠돌다 길거리 싸움에 말려들었는데 감옥가기 직전 장희준 회장이 건져 줬다고 들었다. 저런 덩치에 얼굴로는 동정을 사는 건 꿈도 꿀 수 없었을 텐데. 반대로 대단한 흉악범처럼 보인 나머지 더러운 일도 부담없이 맡길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걸지도 모른다.
오만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동안 주먹은 끝내 들어올리지 못했다.
맞는 건 지긋지긋했다. 아버지라고 해도 자기가 나서서 때리고 싶진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일으켜주고 위로해주기는 싫은데 이놈의 아버지가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적당히 일어나라는 말 정도는 자신이 해야 뭐가 진행이 되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시백이 입을 열었다.
“아저씨? 양시백?”
“시백 씨?”
생각지도 못했던 목소리들에 양시백도 양태수도 고개를 돌렸다.
최재석과 배준혁이 나란히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 다 놀란 나머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물론 양태수와 양시백도 놀랐다. 양태수가 일어났다.
“최재석?”
최재석은 찾아서 경고해주고 같이 달아날 작정이었다. 배준혁은 클럽의 끄나풀이니 피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 둘이 나란히 이 자리에 나타났다.
“여기는 어쩐 일입니까?”
배준혁이 어리둥절한 기색을 지우고 양태수에게 물었다. 그리고는 시백을 보았다.
“선생님.....”
시백은 어물거리며 고개만 꾸벅 했다.
준혁 선생님은 이제 클럽의 마법사였다. 하지만 ‘경감님’을 보호해 달라던 문자를 생각하면 어쩌면 아직도 인간적인 면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같이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 아는 사이였나?”
양태수가 경계를 다 풀지 않고 물었다.
“게다가 여긴 어쩐 일이지?”
“실은 내가 경찰이었거든.”
최재석이 머리를 긁적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네 명 외엔 아무도 없고 거리는 한산했다.
“수상한 사람들이 새까만 고급차 끌고 나타났다고 신고가 들어와서 나와본 건데.”
시백이 두 사람이 타고 온 차를 돌아보았다. 저런 차 끌고 이런 외딴 구석까지 찾아와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두 덩치.
“......신고 들어갈 만도 했네요.”
앞머리를 새삼 쓸어내리는 시백을 보고 최재석이 한 걸음 다가갔다.
“또 그런다. 야, 그렇게 눈 가리면 앞이 보이기는 하냐?”
“최재석 형사님.”
준혁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길거리에서 이럴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신고는 오인이었던 것으로 빨리 처리하고 조용한 곳으로 가서 이야기합시다.”
그리고는 양태수를 바라보았다.
“연락이라면 받았습니다. 무슨 명령을 받고 오셨는지도 알고요. 한데 시백 씨를 데려온 걸 보면 그 명령을 그대로 수행할 작정은 아니신 거죠?”
배준혁 형사의 말투엔 어딘가 섬뜩한 구석이 있어서, 양태수는 시백이 이 사람을 잠시나마 따른 것이 새삼 오싹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쨌든 길바닥에서 계속 이야기할 수 없는 건 사실이었다. 최재석과 배준혁을 따라 파출소의 관사까지 도착했다. 신고는 최재석이 전화로 오인이었다고 설명했다.
작은 관사에 네 명이 둥그렇게 모여앉았다. 배준혁이 커피 네 잔을 타 오고 찬장을 뒤져 과자도 한 봉지 가져왔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시백을 보고 은은하게 미소짓는 배준혁의 표정은 마치 아무 문제 없이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것 같아 양태수는 물론 최재석마저도 기분이 찜찜해졌다. 양시백도 다시 만난 선생님을 반가워하는 대신 입을 다물고 눈치만 보았다.
“여기서는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해도 안전합니다.”
배준혁이 의미심장하게 운을 떼었다.
“먼저, 제가 실버 트와일라잇에 속하게 된 것은 고의가 아니고 저는 그들의 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시백의 눈이 반짝 빛났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라는 표정이었다.
“장회장은 최재석 형사가 허강민의 뜻에 따라 박근태를 무너뜨렸다는 걸 알고 보복하기 위해 찾아오라고 한 겁니다. 박근태를 잃은 분풀이를 하려는 겁니다.”
양태수가 이를 으득 물었다. 최재석도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제가 마법사가 된 것도 박근태가 절 그리로 데려간 것이 계기입니다. 그들에게도 마법사는 흔치 않은 존재이기 때문에 저 같은 신입도 어느 정도 중시되지요. 대신 배반을 들키면 절대 달아나지 못합니다.”
배준혁이 양태수와 양시백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분도 여기로 오지 않고 아예 처음부터 딴 데로 달아났다면 절대 숨지 못했을 겁니다. 마법으로 하는 수색은 일반인이 대처할 수 없으니까요.”
양태수는 미심쩍은 얼굴로 배준혁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마법, 마법사란 말을 몇 번씩이나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다. 게다가 최재석도 양시백도 자신의 어리둥절함을 공유해주는 표정이 아니었다.
“역시 모르셨군요.”
배준혁이 그런 양태수의 기색을 눈치채고 말했다.
“실버 트와일라잇은 백선교와 마찬가지로 사악한 마법사들의 집단입니다. 지금 TV에서 백선교의 사이비 행각이라고 방송하는 내용들보다 훨씬 더 끔찍한 짓을 이제까지 지속적으로 저질러왔습니다. 게다가 아직 범죄 집단이라고 알려지지도 않았지요.”
“그런......”
양태수의 손끝이 덜덜 떨리는 걸 보고 최재석이 배준혁을 쿡쿡 찔렀다.
“그래서, 아저씨랑 얘랑 이제 어떡하지? 여기 숨겨줄 수 있나?”
“여기는 안 됩니다. 저 때문에 회장과 클럽의 눈이 직통으로 닿으니까요.”
배준혁도 고민하는 기색이 되었다.
“차라리 서울로 돌아가 경감님께 보호를 요청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양태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서 가장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느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양시백도 눈치만 볼 뿐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데, 장회장이 날 잡으려고 아저씨뿐 아니라 배 형사한테도 연락했다고?”
최재석이 묻자 배준혁이 태연히 답했다.
“그렇습니다. 장회장은 최재석 형사님이 잠입 요원 신분으로 그 일을 해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혹시 그 사실을 알면 경찰을 직접 공격하는 위험부담 때문에라도 손을 늦출 줄 알고 그 사실을 제가 알렸습니다만, 그럼 없애고 백선교의 짓으로 꾸미라는 답이 돌아왔을 뿐입니다.”
최재석은 얼굴이 파래져서 배준혁을 보았다. 장희준 회장이 그 정도로 막나가는 인물이라는 것도, 배준혁이 그런 사람에게 자신의 정보를 태연히 넘겼다는 것도 똑같이 기가 막혔다.
“최 형사님께는 죄송합니다만 어설프게 입을 다물어봐야 제가 딴 마음 품었다는 것만 들킬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탓할 수도 없었다. 지금 배준혁은 김성식 밑에 위장 잠입해 있던 자신과 별로 다르지도 않은 처지니까.
최재석이 입을 다문 동안 배준혁은 다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끝에 관사의 유선 전화로 다가갔다.
“일단 경감님께 연락해보겠습니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24 ㅣ- 회색도시&검은방

허강민은 어두운 건물 그늘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이 따로 있긴 하지만 거기는 문도 잠긴 채로 놔두었다. 도로에 면해있어 드나드는 게 눈에 띌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해는 길어지고 있다지만 아직도 6시도 되기 전에 져 버렸다. 버려진 건물이고 아무도 근처에 살지 않는다고 해도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더 주의를 해야겠다고 허강민이 생각했다.
안에 들어가자 시백이 맞으러 나왔다. 애들이 무서운 사람 상대는 전부 시백에게 떠맡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허강민이 튀김 봉지를 내밀었다.
“이게 뭐에요? ...우와아.”
봉지를 열어보고 시백의 입이 헤벌어졌다.
“튀김 좋아해?”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가 김말이를 집어 입에 쏙 넣었다.
“있지. 느끼하다거나.... 그거 눅눅하지 않냐?”
시백이 우물거리며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강민이 머리를 짚었다.
“새로 튀길 순 없겠지만 적어도 전자렌지에 돌려서 따뜻하게 해서 먹지 그래.”
시백이 김말이를 삼켰다.
“전자렌지요?”
“그래. 설마 십 년 후엔 그런 후진 가전제품은 안 쓰냐?”
“아뇨, 당연히 쓰죠. 하지만.... 여기 없는데요?”
“뭐?”
허강민이 어리둥절했다.
“무슨 소리야, 그럼 햇반 같은 건.”
그의 표정이 찌그러졌다.
“지금까지 늘 찬밥 먹었냐?”
“라면 국물이랑 먹으니까 괜찮았어요.”
시백이 변명했다.
“아무리 그래도 전자렌지 정도.... 잠깐만, 찾아볼게.”
비품 중에 없다 해도 분명 밀실트릭 중에 전자렌지를 이용하는 게 있었다. 그거라도 임시로 갖다 쓰면 될 거였다.
“그럼 이건 그 때 까지 기다려요?”
양시백의 말에 허강민이 멈칫했다. 그가 전자렌지를 찾아서 쓸 수 있게 손보려면 시간이 걸린다.
“...눅눅해도 상관 없다면 우선 먹어라. 많으니까 다른 애들하고도 같이.”
“네!”
시백이 신나서 뛰어갔다. 허강민은 그를 바라보다 문득 저들을 데려온 지도 시일이 꽤 지났음을 깨달았다.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애들은 돌려보내야 했고 미궁은 열어야 했다. 지금 간부들이 딴 데 정신 팔린 새 이렇게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언제까지나 이럴 수는 없었다.
빨리 양시백을 빼돌려야 했다. 그것도 자기가 의심을 안 받는 방식으로. 하지만 용케 빼돌리는데 성공했다 해도 어디에 숨겨둔단 말인가.
허강민이 배준혁을 떠올렸다. 인성은 의심스럽지만 경찰이고 자기 집이 있고 양시백한테는 나쁜 짓 함부로 못할 테니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면 양태수라도. 장희준이 백선교에 관여하는 걸 아는 허강민으로선 그의 경호실장을 믿을 마음은 안 들지만 혹시 모르니 무슨 관계인지 조사를 해 보는 것도 손해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접근하기 어렵고, 만에 하나 알고 방치하는 거면 도리어 내가 위험해져.’
역시 우선 배준혁과 의논해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가 다시 리조트를 나섰다. 시간이 없으니 한시 바삐 배준혁을 만나야했다.


늦은 시각이지만 경찰청은 불 켜진 곳이 꺼진 곳보다 많았다. 그걸 보며 박근태는 근심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 모두가 범죄를 막거나 해결하려고 저러고 있는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햇병아리 경위 시절도 아니고 이제와서 그런 얄팍한 감상은 품지 않았다. 당장 국장님 일만 해도, 그렇게 청렴하고 사리사욕 안 챙기는 사람도 드물텐데 그런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울 수 있고 또 그게 먹히다니.
‘대체 어떻게 내사과를 손에 넣은 거지.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렇지.’
“저, 근태씨.”
박근태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최근 바빠서 자주 보지 못했던 애인이 곁에 와있었다.
“아니 은희씨.”
근심하던 건 치워두고 박근태가 반갑게 웃었다.
“아니 여기는 어쩐 일입니까, 시간도 늦었.....는데.”
홍은희의 표정은 어두웠다. 박근태도 심각해져서 가까이 다가섰다.
“왜, 아버지께서 또 무슨 문제라도...”
“저, 생각해봤는데, 우리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박근태는 너무 놀라 아무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 때문에도 근태씨께 너무 폐만 끼치고...... 부디 행복하세요.”
홍은희가 돌아섰다. 박근태가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으, 은희씨! 잠시만요!”
팔을 잡히고 홍은희가 움찔했다. 박근태가 손을 놓았다.
“아버지 문제라면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이 있을 겁니다. 저 맡은 수사도 성공적으로 끝..났고 아마 곧 승진도 할 수 있을 거고.”
말하다 박근태는 멈칫했다. 범죄와의 전쟁이 마무리 되고 나면 하성철 국장이 명예롭게 은퇴할 것이고 자기가 그 뒤를 이을 거라 생각해왔다. 만약 그가 스캔들에 휩싸여 추락한다면 자기 입지도 위태로워진다.
“미안해요 근태씨.”
홍은희가 도망치듯 달려가버렸다. 박근태는 쫓아가지 못했다.
박근태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바로 며칠 전만 해도 모든 게 잘 되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진 것만 같았다.
“어머나? 박근태 경무관님. 이런 데서 뭐 하세요?”
또각또각 하이힐 발소리가 들렸다. 박근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강재인이 그의 앞에 와서 섰다.
“무슨 일입니까.”
박근태가 물었다.
“길을 서성이시는 걸 보니 한가하신 것 같아서요. 저랑 잠깐 드라이브라도 가실래요?”
박근태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했다.
“거절하겠습니다.”
그가 몸을 돌려 경찰청 쪽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어디로 가자는 건지 모를 만큼 눈치없는 분도 아니면서 그러시네. 상관의 전철을 밟고 싶으신 건가요?”
박근태의 발이 멎었다.
노골적인 협박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와 동시에 공포가 그를 덮쳤다. 자기에게 똑같은 의혹이 제기된다면 자신은 국장님만큼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회장님께 두 번째 기회를 받다니 꽤 드문 일이랍니다.”
강재인이 그게 무슨 좋은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현명하게 판단하세요. 원칙대로만 하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정말 믿으세요? 지는 편에 서지 않으려면 지금이 줄을 갈아탈 기회에요.”
-지는 편에 서게 된 걸 후회하나?
국장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그 때 자신은 지는 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정말로 그게 온전한 진심이었을까?
“저는.....”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경찰이 되었다. 폭력배를 일소하기 위해 범죄와의 전쟁에 뛰어들었다. 지금 장희준과 손잡으면 그 폭력배들을 부추기고 후원한 배후와 손잡는 게 된다. 당연히 해선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자신은, 스스로의 몰락을 감내하면서까지 정의를 지킬 수 있는가?
지난 번 만났을 때 장회장은 그와 박근태가 비슷한 면이 있다고 했다. 당시에는 단칼에 부정했지만, 그 말은 그리 틀리지 않은지도 모른다.
이 제안을 거절할 경우 해를 입는 건 자신 만이 아닐 수도 있었다. 문득 홍은희씨가 이별을 선언하고 간게 무척 다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인질로 삼지 말란 법은 없었다.
“하지만.....”
이건 수사팀을 배신하는 행위였다. 하성철 국장의 등에 칼을 꽂는 거나 마찬가지고, 자기가 사지로 보냈던 잠입 요원들의 희생을 헛되게 하는 일이다. 자기가 어떤 식으로 수사를 호도하든 부하 형사들은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게 보호일 수도 있었다. 이대로 수사를 계속하면 장회장은 수사팀 전체를 공격할지도 모른다. 이미 거짓증거와 부패한 내사팀을 내세워 압박하고 이렇게 노골적인 협박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말로 안 들으면 폭력이 뒤따를 게 분명했다.
하성철 국장이 정말로 누명을 벗는데 성공한다 해도 문제될 게 없었다. 스트레스 상황에 몰아넣고 약만 빼앗아도 그는 암살의 흔적 없이 간단히 제거될 것이다. 차라리 자기가 장회장과 손을 잡으면 그도 더 다치지 않고 무사히 은퇴시킬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권현석 역시.
그는 따르지 않을 것이다.
권현석이 따르던 건 편견없이 사실을 검토하고 유능하게 사건을 해결해서 그와 의동생을 구한 정의로운 경찰이지 부패 재벌과 손을 잡는 부패 경찰이 아니었다.
권현석은 수사를 강행할 것이다.
그리고 장회장은 그를 죽일 것이다.
권현석이 죽는다.
숨이 막혀 박근태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다시 한 번 명차를 강타당한 것만 같았다.
권현석이 죽는다. 가장 믿고 의지하던 사람에게 배신당해서.
박근태 자신에 의해서.
박근태는 비명을 질렀다.


‘이자식 어디 간 거야? 혹시 오늘 야근이라도 하나?’
불도 켜지 않은 텅 빈 집에 앉아 허강민은 이대로 배준혁을 기다릴지, 전화로 연락을 해봐야할지 망설였다.
미리 연락을 하고 왔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전중이었고 마음이 급했다.
‘나 요새 왜 이렇게 비이성적이지.’
마법사는 그게 당연한 거야, 라고 속삭이는 뇌리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허강민이 전화를 찾아들었다. 배준혁이라면 경찰청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연쇄살인범의 전화를 받아도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만한 재치는 있을 것이다.
찰칵
현관문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비틀거리는 발소리, 신발 벗는 소리가 뒤이었다.
“어이, 흥신소장.”
다가오던 그림자가 흠칫 멈췄다. 그가 허둥지둥 옷 속에 손을 넣었다.
허강민이 일단 양손을 들어올렸다.
“정신차려. 나라고. 허강민.”
총을 찾던 손이 멎었다. 배준혁이 털썩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총 없네요.....”
“있으면 쐈을 거냐? 얼마나 마신거야?”
허강민이 일어나 그에게 갔다. 멀리서도 술냄새가 진동했다.
“회식이었습니다.”
준혁이 말했다.
“다들, 안 죽고 살아서, 즐겁게.....”
“응, 그거 좋았겠네.”
가까이 오기는 했는데 이걸 부축하자니 부축해서 어디 데려가 뭐 할지 알 수 없어 허강민은 그냥 가까이에서 배준혁을 내려다보았다.
“기뻐하는 건 좋은데 살려야 될 사람 더 있는 거 잊지 마라.”
“누구...”
“양시백.”
배준혁이 입을 딱 다물었다.
“내가 데리고 있는 것도 슬슬 한계야. 잠시 일 시킬 생각으로 데려온 거고 나도 딴짓한단 의심 안 받으려면 이제는 세 번째 밀실을 진행해야 하고. 이제는...”
허강민이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안 죽이고 해결할 수 있는 거 그런 거 하고 싶지 않다만.”
어차피 리셋될 건데 시간과 노력만 많이 들고 말이지.. 라고 허강민이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아무튼 그래서, 내가 의심 안 받으면서도 밀실을 미루고 애들을 빼돌릴 계획이 필요하다만....”
허강민이 배준혁을 내려다보았다.
“너 지금 생각할 수 있냐?”
“글쎄요...”
준혁이 털썩 누워버렸다.
“그러고 자면 입 돌아간다.”
“지난 십년 간 이러고 잤지만 한 번도 입이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척 억울하다는 말투였다. 허강민은 이 연쇄살인범의 무방비한 옆구리를 걷어차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냥 그대로 죽었으면 싶었던 날이 얼마나.... 그런데도......”
“너 지금 이 상황에서도 그런 말이 나오냐?”
허강민은 어이가 없었다.
“과오를 싹 고치고 행복해졌다며?”
“전 아닙니다.”
준혁이 울음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살고, 원하던 사람이 살아서 곁에 있지만 저는..... 지연씨는.....”
그가 눈을 뜨고 허강민을 올려다보았다.
“어째서죠, 어째서 저는 잃은 사람을 되찾지 못하는 겁니까. 권혜연 순경은 아버지를 하태성 경위는 어머니를 양시백씨도 관장님을..... 적어도 죽지는 않았고....”
“장지연도 안 죽었다.”
“하지만 못 만납니다!”
준혁이 소리쳤다.
“혼자서는 장회장의 집에 갈 수 없습니다. 같이 봉사활동을 하던 곳에도 가봤지만 역시....”
그가 침울해졌다.
“역시.... 저 때문에 거기 왔던 거였어요. 지금은 없습니다. 정말 바보같아요. 진작 눈치챘더라면, 멍청한 소리나 하는 대신 진작 연애하고 진작 야반도주라도 했더라면.....”
“잡혀와서 장희준에게 산채로 껍질이 벗겨진 뒤 토막났을 걸.”
“자기 딸에게 그런 험악한 꼴을 보인다고요?‘
준혁이 얼굴을 찌푸렸다.
“저라면 절대 안 그럽니다.”
그가 꾸물꾸물 돌아누웠다.
“딸한테는.... 좋은 것만 해주고.. 싶...”
“....그래, 장회장은 너보다 미친 놈이로구나.”
백선교의 미친 신을 숭배하는 사람이니 당연히 그렇겠지만, 이라고 생각하다 허강민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장희준은 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장애가 있는 딸이 쓸모없다 여겨 후계자로 점찍은 남자를 엮어두는 데 사용해버리고 끝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여기 두 연쇄살인범이 그렇다고 해서 다른 모든 악당이 자기 가족만은 특별하게 아낀다고 가정하는 게 더 말이 안되었다.
하지만 박근태 의원은 장회장의 모든 것을 물려받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적어도 마법의 존재를 알았을 것이고, 유상일을 찾기 위해 옛 상관의 아들을 협박해 끌어들일 필요가 없었다.
그럼 장회장의 세력 중 그 부분은 누구의 것인가.
장지연은 정말로, 그렇게 무력하고 가련하기만 한 희생물이었을까.
시간은 배준혁이 죽었을 때 역류했다.
마법사는 그가 죽길 원치 않았다.
허강민은 서둘러 그 집을 나왔다. 뭐라 계속 웅얼거리는 배준혁은 그대로 놔두고. 본인이 입 안 돌아간다고 했으니 본인이 책임질 일이었다. 드디어 마법사를 발견했다.



검은 남자 61 ㅣ- 회색도시&검은방


첫날이니만큼 마법 수업은 일찍 끝내고 몇 가지 주의사항만 더 얹어서 류태현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다음 수업은 어떻게 준비할지 궁리했다.
류태현은 이상적인 학생이었지만 자신은 가르치는 일에 소질이 없었다. 게다가 이건 상대의 정신상태까지 신경써줘야 하는 수업이었다.
끙끙거리며 간단하게나마 수업 계획서를 만들어보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시죠.”
무슨 가둬놓고 꼭꼭 노크씩이나 해야겠냐고 비아냥거릴 준비를 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하성철 국장인 걸 보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하성철은 이제 업무에 복귀해 정복 차림이었다. 차분한 기색으로 다가와 좀전까지 류태현이 앉아있던 의자에 앉았다.
“너무 일찍 퇴원하신 거 아니에요?”
허강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내가 직접 나서야만 성사될 일이 너무 많아 어쩔 수 없네.”
하성철은 표정을 부드럽게 하고 허강민을 바라보았다.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으니 아무리 허강민이라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일단은 부드럽게 대해서 안심시켜주자고 생각했다.
“자네는 류태현 순경의 수업 문제도 있고 해서 당분간 더 병원에 있게 할 작정이네. 피의자라고 해도 증언 확보와 신변 보호가 중요할 때는 다 이렇게 하는 거니까 특혜라고 부담 가질 필요 없네.”
“저 정도의 중범죄자일 때도 말입니까?”
“도주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는 건 확실하잖은가.”
허강민은 어물거렸다. 가식이 아니라 진심으로 상대에게 예의 차려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와 계셔도 괜찮습니까?”
“자주 오지는 못할 거야. 그러니 필요한 거라든지 충고할 말이 있다면 미뤄두지 말고 지금 다 말하게.”
“필요한 건 특별히 없습니다. 류태현 가르치는 일에 도구가 필요할 단계는 아니거든요. 나중에 필요해진다고 해도 제가 아니라 류태현이 쓸 거니까 역시 국장님의 배려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자네의 마법 금제는 풀 방법이 없다고 했지.”
하성철은 아쉬워보였다.
“그 덕분에 절 체포하고 구금하는 절차는 간단해진 겁니다. 제가 간수나 경찰들을 저주하고 도망칠 길도 없어진 거니까요. 제가 일단 제 목숨을 돌보려고 탈옥을 결심한다 한들 은행 사건 때 구급차에서 달아난 것처럼은 할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자네 안위는 더 위험해진 것 아닌가? 자네 몸에 다른 해가 가지는 않는 건가?”
“마법을 못 쓰게 된 것 말고 다른 해는 없습니다.”
허강민은 다시 우물거렸다. 자신의 안위를 신경쓰는 사람이라면 장혜진이라든지 최재석이라든지 이미 잔뜩 겪어봤지만 도통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장혜진은 이제 어떻게 됩니까?”
생각난 김에 물었다.
“일단은 묵비권을 행사하도록 놔두고 있네.”
하성철이 선선히 답했다.
“하지만 솔직하게 전부 자백해주는 편이 본인에게도 좋을 거라고 믿네. 백선교가 자네를 도와 자신들을 적대한 사람을 그냥 놔둘 리 없고 일단 입막음부터 하자고 생각할지도 모르니.”
“수호 부적은 줬겠지요?”
“그래. 장혜진 양도 딱히 경찰을 못 믿어서만이 아니라 자네와 손발을 맞추기 위해 잠시 기다리는 것에 가깝고.”
“내 걱정 할 필요 없고 경찰들은 믿을 만 하다고 전해주세요.”
허강민은 조금 뾰로통한 표정이 되었다.
왜 다들 이렇게 자신을 걱정하고 돕지 못해 안달인지. 게다가 지금은 자신의 사정이 그런 도움을 거절해도 될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자존심이고 뭐고 주는 대로 감사히 받아야 했다.
“류태현을 가르치는 건 할 만 한가?”
“예. 정말로요.”
허강민은 화제가 바뀐 데에 안도했다.
“말 잘 듣는 학생입니다. 멍청하긴 해도 가르치긴 편해요. 어차피 저도 마법 배우는 사람을 괴롭힐 만큼 바보는 아닙니다. 그 녀석은 잘 달래고 보듬어가며 가르칠 테니 걱정 마세요.”
“그를 용서한 건가?”
“......”
허강민은 잠시 머뭇거렸다.
“......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털어놓아도 될 것 같았다.
하무열이라면 함부로 털어놓을 기분도 안 나고 괴롭힘 당할 꼬투리나 될 것이 뻔했다. 장혜진은 예전엔 자신의 짐을 함부로 나눠 지게 할 수 없었고 지금은 만날 수 없다.
하성철 국장은 자신을 괴롭힐 생각이 없다. 자신이 지우는 짐이 무겁고 버거우면 언제든 벗어버릴 힘도 있다.
무엇보다 계속 담아두기만 한 이야기가 점차 심적인 무게로 변하고 있었다. 한 번 장벽을 낮춰버리자 스스로도 억제하기 힘들었다.
“류태현이 다른 사람들처럼 대놓고 나쁜놈이었다면 아마 첫 번째 밀실에서 그와 여승아, 임선호, 하무열 형사까지 모두 죽었을 테고 저도 자살로 끝냈겠지요. 그동안 제가 류태현을 계속 괴롭히고 집요하게 위협했지만 그 역시 저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사실은 이 네 번째 미궁에서 어떻게든 류태현만은 죽여버릴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면 편해질까, 그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될까......”
허강민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힘마저 빼앗아간 일들이 너무 많아서, 당장은 그놈을 해치지도 괴롭히지도 않기로 정말로 결심했습니다. 백선교를 무찌르는 데 필요해서기도 하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더는 모르게 되어서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괴롭힐 수도 없지요.”
하성철이 손을 뻗어 허강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특별히 의도해서가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그러다 허강민이 머리를 피하자 얼른 손을 떼었다.
“미안하네. 아이 취급을 해버렸군.”
“......”
허강민은 잠시 하성철의 기색을 살피다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습니다. 아이 취급도 너무 오랜만이니까 좀 새롭네요.”
백선교에 있는 동안은 누가 자신에게 좋은 뜻으로 손대는 법이 없었다. 그런 기색을 들켜서 쓸데없는 걱정을 시키고 싶지 않았으므로 허강민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어보였다.
“어릴 때부터 지나치게 의젓하다느니 하는 소리만 들었습니다. 부모님조차도 절 애 취급하기는 어려워하셨지요. 복수귀가 되기 전에도 전 그리 다정한 사람은 못 되었으니까요. 공부 잘 하고 말썽 안 피우는 아들이었으니 불효 자식까지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무심코 돌린 화제가 허강민 자신도 원치 않은 쪽으로 흘러가버렸다.
그 정도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사고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걸로 됐다고 만족할 수 있었다. 부모님의 귀엽고 사랑스런 아이 노릇은 둘째와 막내가 다 해내고 있었으니까.
그 둘이 비참하게 죽도록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부모님이 시든 풀처럼 되어 돌아가실 때도, 자신은 그분들의 버팀목이 되지 못했다.
“만약에......”
허강민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백화점에서 죽은 게 막내가 아니라 저였다면, 둘째도 그리 되지 않고 부모님도 아직 어린 막내를 생각해서 버티셨을지도......”
“그런 말 말게!”
하성철이 허강민의 말을 잘랐다.
“자네 부모님은 노령에 큰 고통을 견디지 못하신 거네. 자식 셋 중 둘이 죽었는데 누가 더 귀여웠고 말을 잘 들었고 하는 게 무슨 소용이었겠나? 분명 자네 하나라도 살아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셨겠지.”
말하고 나서 하성철은 실수했다고 느꼈다. 허강민의 부모가 정말 그리 생각했다면 그 전제는 분명 첫째가 혼자 남아서도 냉정하고 차분하게 버텨내서 자기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예상이었을 테니까.
만약 자신이 허강민을 만나지 못해 장희준과 박근태의 음모에 따라 죽어버렸다면 자신 역시 죽는 순간까지 태성이가 복수 같은 걸 꿈꾸기보다는 평화롭고 이런 일과 무관한 삶을 살길 기원했을 것이다. 태성이가 박근태를 죽이고 장희준을 죽인다면, 그런 복수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허강민은 아직 침대 위에 얹혀 있던 하성철의 손을 꼭 잡았다. 마치 눈물을 참고 있는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실수가 아니었다. 이미 부모님의 소원도 허강민 자신의 괴로움도 그가 저지른 짓들에 의해 부질없어진 지 오래지만 그래도 허강민에겐 그 말이 필요했다.


밀실의 이전 피해자들에 경찰들까지 잡아넣은 대담무쌍한 미궁이 매스컴의 관심을 피하기란 불가능했다. 하성철도 권현석도 사건을 숨기기보다는 차라리 이 기회에 백선교의 사악함을 알리고 후속 수사를 지지하는 여론을 형성하자는 쪽으로 결론을 지었다.
그래서 TV는 모처럼만에 자극적인 소재를 잔뜩 얻었다. 수상한 사이비 종교가 깡패 집단까지 부리다가 경찰에 덜미를 잡히자 최후의 발악으로 경찰 간부를 납치해 죽이려 들었다. 그것도 상상을 초월하는 기괴하고 잔인한 방식으로. 밀실 현장 취재를 막고 류태현 등 피해자들을 직접 인터뷰하지도 못하게 차단한 것이 도리어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했다. 일종의 인신공양이었을 거라는 추측은 아예 기정사실처럼 사람들 입을 오르내렸다. 끔찍하고 선정적인 뉴스가 싫은 사람들은 케이블 채널에서 영화나 외국 드라마를 보는 수밖에 없었다.
양태수는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근무 중에 TV가 켜져 있는 곳에 가면 채널 선택권이 없고 집에서는 케이블 채널 설정을 할 줄 몰랐다. 백선교와 선진화파 관련 뉴스를 백석의 경호실장이 되어서 전혀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었다.
이제까지 장희준 회장의 떳떳치 못한 면에 고의적으로 눈을 감고 살기는 했다. 그러나 시백이를 되찾고 마음에 여유를 얻어서인지 시백이를 만난 곳이 회장님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실버 트와일라잇이라 그런지 회장님이 예전처럼 의지가 되는 인물로 느껴지지 않았다.
선진화파는 깡패 조직이고 사이비의 앞잡이이기까지 했으니 회장님께서 그놈들을 적으로 여기고 완전히 소탕되기를 바라신다고 해서 나쁠 일은 없다.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집에 들어왔다.
“시백아, 아빠 왔다.”
그래도 요즘은 행복했다. 그 파란 추리닝의 떡대와 엮였던 일을 계기로 시백이는 집에 얼굴을 비추기 시작하더니 잠을 자기도 했다. 혹시나 해서 밥을 해놓고 반찬가게에서 사온 반찬이나마 냉장고에 채워봤더니 조금씩 줄어들기까지 했다. 양태수는 손수 찬거리를 이것저것 만들어보며 그 최재석이라는 남자 다시 만나면 집에 다시 데려다 제대로 대접하고 감사를 표하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다.
오늘도 시백이는 집에 있었다. 시백의 경비 근무표를 알아두고 최대한 양태수 자신의 퇴근시간도 그때에 맞추고 있는 덕이었다.
시백이는 어색하게 목례만 하고 부엌으로 갔다. 그러나 이때는 마침 저녁때도 아니었고 같이 밥을 먹는 것 외에 뭘 하며 시간을 보내면 좋을지 시백도 아버지만큼이나 아는 게 없었다. 어색하게 물만 떠와서 소파에 앉았다.
“요즘 좋아하는 TV 프로 뭐니?”
양태수가 고민 끝에 결국 리모컨을 집었다. 시백이는 요즘 아이니까 케이블 채널 설정도 할 줄 알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좋아하는 프로 있으면 네가 편한 대로 채널 맞춰서 봐라. 아빠는 네가 좋다면 어떻게 해놓든 상관 없으니까. 어차피 많이 보지도 않고......”
일부러 해본 적도 없는 너스레를 떨어가며 시백이에게 리모컨을 넘겨주었다. 시백이는 대꾸해주지는 않았지만 리모컨을 받아들고 TV를 켰다. 그리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보았다.
그러다 하필 뉴스 전문 채널이 걸렸다. 백선교 피해 생존자 모씨의 인터뷰를 따냈다며 음성변조된 증언을 틀어놓고 있었다.
[.....뭔가 진짜로 봤대요. 괴물 같은 신을. 그러면서 막 이상한 소릴 하니까, 내가 ‘아이고 이 사람이 정신이 나갔구나’하고, 도저히 그게 제정신 박힌.....]
덜그럭 하고 리모컨이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양태수를 놀라게 한 것은 소리가 아닌 시백이의 얼굴이었다.
덥수룩한 머리로 눈가를 덮어 언제나 어두워 보이는 시백이였다. 그런 얼굴이 지금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공포’라는 두 글자를 그대로 얼굴에 그려놓은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시백아?”
그 공포가 거의 그대로 양태수에게도 옮았다. 아들의 어깨를 감싸안고 리모컨을 떨어뜨린 채 덜덜 떠는 손을 꽉 쥐었다. 놓으면 아들을 또다시 잃을 것처럼.
“시백아, 왜 이러니. 정신차려라. 응? 내 말 들리니?”
시백은 한동안 그렇게 굳어있었다. 양태수가 이대로 안고 응급실로 뛰어가야겠다고 결심했을 때에야 아버지에게 확 덤벼들어 마주 끌어안았다.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시백아.”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그래도 시백이 쪽에서 양태수에게 힘껏 매달리고 있었다.
“아빠.”
그렇게나 듣고 싶었던 말이 살려달라는 비명소리처럼 들려 고통과 혼란만 더했다. 더 이상 묻지도 못하고 양태수도 그저 아들을 부둥켜 안을 수밖에 없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을 끝낸 것은 경쾌한 음악과 밝은 목소리였다. 소스라쳐서 소리가 들린 쪽을 보니 어느새 뉴스가 끝나고 광고중이었다.
양태수가 한 손만 바닥으로 뻗어 리모컨을 집어들고 TV를 꺼버렸다. 연예인의 환한 얼굴이 번쩍 하고 사라졌다.
“......아빠?”
시백이 조금 정신을 차렸다. 극심하던 떨림도 점차 잦아들었다.
“그래, 시백아. 아빠 여기 있어.”
양태수도 겨우 한숨 돌리며 시백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대체 왜 그래. 어디 아파? 무슨 일 있어?”
“......”
시백은 양태수를 꼭 붙든 채 한참이나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런 끝에 뱉은 한 마디를 듣고 양태수는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아빠는 정말 모르시는 거죠?”
“응?”
시백이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엔 안도가 배어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리둥절한 나머지 방금은 착각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려는데 시백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양태수에게 나직이 말을 걸었다.
“아빠, 경호실장이라고 했죠.”
“그래.”
“위험한 일 같은 건 없어요?”
“꼭 그런 건 아니다만......”
양태수는 말끝을 흐렸다. 평범한 말로 안심시켜줄 때가 아닌 것 같았다.
“제가 아빠 은퇴해서 어디 시골 같은 데서 둘만 살고 싶다고 하면 어쩌실 거예요?”
“그러고 싶니?”
양태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위험을 감지하는 후각이 예민했다. 지금 시백이 전원주택에서의 안온한 노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무 설명도 없이 결론부터 던지고 있지만 그래서 더 심각하게 느껴졌다.
“알겠다. 모아둔 돈도 좀 있고 하니 너무 걱정 말고, 꼭 가져가야 할 것들만 챙겨라. 내일 적당히 변명하고 사직서를 내겠다.”
“예.”
고개를 끄덕이고서 시백이 양태수를 바라보았다.
“저, 제가 이랬다고는 하지 말고 그냥 우연히 은퇴하고 싶어졌다고만 해주실래요?”
“그래.”
양태수가 시백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 마라. 그 정도는 알고 있단다.”
비로소 시백의 얼굴이 완전히 풀어졌다. 양태수는 망설이다가 살짝 두 팔을 벌리고 다가가 시백을 다시 안았다.
시백은 몸을 빼지 않았다. 머뭇거리면서 조금씩 양태수에게 몸을 기댔다. 공포에 질려 매달리는 게 아니라 진짜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기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23 ㅣ- 회색도시&검은방


부하 형사들의 환호에 뿌듯해하던 현석이 재호의 어깨에 팔을 척 걸었다.
“그래서, 현석형님~은?”
“켁.”
막 건배하려던 재호는 사래가 들렸다.
“어서 해봐.”
유상일도 부추겼다. 다들 흥미진진한 눈으로 재호를 보았다.
“자아, 어서.”
권현석이 압박했다.
“내가 재호형사 애정하는 거 알지?”
“아, 알지만요오....”
“편애에 반대하는데요~”
미정이 손을 번쩍 들었다.
“어? 아 물론 미정형사도 애정하지.”
권현석이 오미정쪽으로 손을 뻗어 어깨를 안으려다 좀 멀어서 어깨를 두드리기만 했다.
“그럼 미정형사도 오빠...”
“그건 좀 아닌데.”
상일이 끼어들었다.
“형 나이를 생각해. 겉으론 파릇파릇해도 이제 사십줄 다 되어가는데....”
“그 정돈 아냐!”
“이건 상일 경위님 말이 맞습... 아니 사십줄이라는 게 맞다는 게 아니고요.”
준혁이 끼어들다 현석이 노려보자 움츠러들었다.
“열 살 연하의 여자 부하한테 오빠라 부르라고 강권하는 상사를 다른 누구로 생각해보세요.”
“그런 거 아냐!”
“네. 그러니 팀.... 분위기를 생각해서.”
팀장님이라고 부를뻔 하고 준혁은 겨우 말을 바꿨다.
“경감님은 좀 친근하게 경감님, 하고 부르는 것으로 하고, 유상일 경위님은 선배 어떻습니까.”
준혁이 상일과 미정을 보았다. 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 정도가 무난할지도.”
“그런 거면 나도!”
최재석이 손을 들었다.
“나도 재석 선배라고 불러주라.”
“서, 선배요?”
준혁이 당황했다.
“왜, 미남밖에 못 끼는 거야?”
“아, 아뇨. 그런 거 아닙니다. 절대. 아니 최재석씨... 선배가 미남이 아니라는 게 아니고.”
준혁이 얼굴을 붉혔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재석...선배.”
그가 고개를 꾸벅했다.
“그래그래. 나야말로. 이거 귀여운 후배가 생겼네.”
최재석이 준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시선을 느낀 그가 고개를 들었다. 유상일 서재호 오미정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아니.”
상일이 시선을 회피했다.
“귀여웠.... 구나 싶어서?”
“솔직히, 준혁이가 애교가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재호가 솔직히 말했다.
“맞아요. 엄청 철벽이라고요, 저 사람.”
“그런 거 아닙니다.”
준혁이 항의했다.
“제가 인간관계에 서투르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정도는 잘하려고 노력합니다.”
‘결과가 신통치 않기는 하지만요....’ 라고 고개 숙이고 중얼거리느라 준혁은 재호와 미정의 경악한 표정은 보지 못했다.
“아, 그, 그렇구나.”
미정이 어색하게 웃었다.
“응, 그렇지. 최재석 경... 선배님은 좋은 분인 것 같고.”
“뭐야, 너 어쩌다 좋은 사람이 된 거야?”
담배 다 피웠는지 주정재가 돌아와 최재석 옆에 앉았다.
“여자가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말은 잘생기진 않았다는 뜻이라던데....”
“그런 거 아니거든요.”
미정이 그를 찌려보았다.
“맞습니다. 미정형사는 최.. 재석선배가 좋은 사람이라서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준혁이 주장했다. 주정재가 눈을 깜빡였다.
“..나 없는 새 뭔일 있었어?”
“어, 호칭 정리?”
유상일이 말했다.
“일단, 요 세 사람이 우릴 선배라고 부르기로 했어.”
“어, 그거 친근하고 좋네.”
주정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상일은 좀 불만스러워보였다.
“난 좀 더 친근해도 괜찮은데.”
“그러게.”
권현석이 동의했다.
“내년을 기약하면 안될까요.”
서재호가 사정했다.
“뭐 어쩔 수 없나. 보자마자 형님으로 모시라고 하는 것도 좀 그렇고.”
유상일이 시원스레 물러났다.
“아, 시간이 이렇게 됐네.”
권현석이 시계를 보고는 공중전화로 갔다.
“아, 드디어 형 술버릇 나온다.”
상일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 쪽을 보았다.
“어떤 술버릇인데?”
주정재가 물었다.
“혜연이.. 형 딸한테 전화해서 시덥잖은 소리 늘어놓기. 저래도 화 안 내다니 혜연이는 참 착한 딸이라니까.”
“선배 따님도 착하겠죠.”
준혁이 말했다. 상일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럼 그럼, 얼마나 착하고 예쁘다고. 떼도 안 쓰고.”
“아빠를 많이 좋아하나봐요.”
“그럼! 오래 못 만났으니까, 막 투정부리거나 아빠 싫다고 하거나 뭐 그러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그런 거 전-혀 없어. 얼마나....”
“그럼 지금 아빠를 기다리고 있겠네요.”
준혁이 그의 말을 끊었다.
“겨우 다시 만난 멋지고 훌륭한 아빠니까, 한시라도 더 같이 있고 싶을 겁니다. 지금도 텅 빈 집에서 홀로 아빠를 기다리며 오시기 전에는 자지 않으려고 졸린 눈을 비비며 현관문을 쳐다보고 있겠지요.”
유상일의 얼굴이 하얘졌다 파래졌다. 준혁은 멈추지 않았다.
“어린 아이는 어른과 달라서 얌전하고 똑똑한 아이라고 해도 종종 실수를 하거나 사고를 당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돌봐줄 어른도 없이........ 아이에게 최고의 아빠는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는 아빠가 아닐까요?”
유상일은 입을 덥석덥석했다. 이마에 식은땀이 솟았다.
“아연이가 아빠따위 밉다고 하기 전에, 과자라도 사들고 빨리 집에 돌아가 봐야 하지 않을까요?”
할 말을 잃고 유상일이 주위 눈치를 살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난처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고 현석은 여전히 전화에 매달려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껏 실컷 걱정시켜 놓고 배준혁이 말했다.
“이미 이런저런 이유로 일찍 돌아간 사람 많습니다. 팀장님도 그렇고. 그러니 상일 선배가 일찍 빠져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일찍 빠져서 뭐라 하는 사람 이전에 여기 더 있었다간 준혁한테 무슨 일 당할지도 모른다고 상일은 진심으로 쫄아들었다. 깡패로 살면서 수틀리면 사람도 그어버릴 놈들 꽤 봤지만 이만한 위협을 느껴본 건 드물었다.
목적을 모르겠는 점이 특히 더.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그럼 난 일찍 가볼까....”
“어, 네. 살펴가세요.”
재호가 일어나 인사했다.
“그래, 내일 보자.”
“안녕히 가세요.”
다들 어색하게 유상일을 배웅했다. 그가 도망치듯 고깃집을 나가고 나자 이쪽 테이블은 아주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배준혁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그는 모른 척 어느새 타고 있는 고기를 불판에서 치우고 새 고기를 올려놓았다.
“그치만.... 틀린 말은 아니지.”
최재석이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아빠라면 자식 곁에 있어줘야 하고말고.”
“뭐야, 너도 숨겨둔 애 있는 건 아니겠지?”
주정재가 놀랐다.
“있음 내가 여기서 술 마시고 있겠냐, 가서 애랑 놀고 있지.”
“그러면서 뭘 그렇게 똥폼잡는데.”
“있어, 그런 게.”
그가 술을 더 따랐다.
“뭐 세상살이 뜻대로 안 되는 때도 있지만, 그래도 노력은 해야 할 거 아냐, 노력은.”
그를 빤히 쳐다보다 주정재는 딴 데 쳐다보며 술을 마셨다. 그 역시 연고가 없는 덕에 잠입요원 일을 하고 나왔다. 부모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드시죠.”
준혁이 그들 앞으로 새로 구운 고기를 밀어놓았다. 그러면서 양시백과 권혜연을 생각했다.
두 사람 다 피붙이도 아닌 아이들을 맡아 정성껏 키우고 돌봤다. 주정재는 권현석 경감님과의 인연 때문이라 해도 최재석은 어떻게 양시백을 만나게 된 걸까.
역시 깡패 생활하다 만난 거라면 작전이 일찍 끝난 게 수사팀에겐 다행이어도 양시백에겐 재앙일 수도 있었다. 이대로 최재석을 못 만나게 되면..
‘그래도 지금은 내가 아니까, 대신 빼내다 보호할 수 있을 지도.’
그것만 가능하다면 자신과 양시백과 권혜연은 이미 해피엔딩이었다. 적어도 그 파멸을 피하는데 성공했다. 하태성 경위도 과거로 왔더라는 소식은 전해들었지만 그가 어찌되든 배준혁은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러니.
그러니, 여기서 시간을 더 되돌릴 필요는 전혀 없었다.
이제 허강민은 방해물이었다.

“준혁 형사는 나중에 좋은 아빠가 되겠네.”
준혁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최재석이 웃으며 그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술을 받아들고 그는 자기가 방금 무슨 말을 들었나 생각했다.
“저, 뭐라고 말씀하셨죠?”
“좋은 아빠가 되겠다고. 애 곁에 꼭 붙어있을 거 아냐.”
“아......”
준혁이 쪼그라들었다. 최재석은 깜짝 놀랐다.
“저, 준혁 형사?”
“저는.....”
유상일을 닦아세워 회식자리에서 내쫓은 기세는 어디로 가고 준혁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 되어 받은 술을 마시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닥만 쳐다보았다.
“그럴........ 저야말로........”
그가 눈물이라도 곧 떨굴 것 같은 표정으로 몸을 웅크렸다. 최재석은 당황해서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저, 괜찮아? 무슨 일인지 몰라도...”
“괜찮습니다.”
그가 힘없이 웃었다.
“그저, 저는 앞으로 가정을 꾸리고 아버지가 되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가 술을 마셨다. 자기는 딸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딸을 위해 한 일도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심지어 이제 수정이는 없었다.
토닥이는 손을 느끼고 그가 고개를 들어 최재석을 보았다. 자기가 빌딩에서 밀어버렸던 사람이, 그렇게 무참하게 양시백에게서 빼앗았던 사람이 지금 그를 위로하고 있었다.
“최재석씨는 정말 다정하네요.”
준혁이 서글프게 웃었다.
“뭘 다정씩이나. 난 그저....”
준혁이 그에게 기댔다.
“죄송합니다.”
“응? 뭐가?”
“죄송해요. 저말로, 죄송합니다.....”
“준혁 형사 몇 병이나 마신 거야? 취한 거 처음 봐.”
자리로 돌아온 권현석이 놀랐다.
“그렇게 많이 안 마셨는데요. 원래는 술 센 친구입니까?”
재석이 물었다.
“글쎄, 취한 걸 본 적이 없어서.”
현석이 재호와 미정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희도 얼굴 빨개지는 거 이상은....”
“그치만 좀... 빨리 마셨으니까요. 그럼 빨리 취하고.”
오미정이 얼버무렸다.
“평소엔 조금씩 천천히 마시던데 오늘은 뭔가 일이라도 있었나....”
“저, 이 친구 집이 어딥니까?”
최재석이 배준혁을 부축하고 일어났다.
“슬슬 데려다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저, 제가 갈 수 있습니다.”
준혁이 비틀거리며 똑바로 섰다.
“택시 타고 가면 되니까...”
“그럼 큰길까지만 같이 갈게.”
최재석이 기어코 따라나섰다.
“정말 괜찮습니다... 저 같은 놈한테 너무 잘해주지 않으시는 게 좋은...”
“술 땜에 그래, 술 땜에. 자, 빨리 집에 가서 푹 자고 나면 다시 살만해질거야.”
최재석이 배준혁을 부축해 나갔다. 그 뒷모습을 쳐다보다 권현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뭔 일 있었어?”
“아뇨, 암것도.”
주정재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기분 탓이에요, 기분 탓. 자 어서 술이나 마저 마십시다.”


검은 남자 60 ㅣ- 회색도시&검은방


허강민 문제가 일단락되자 권현석은 정은창의 병실로 달려갔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정은창은 처음 집으로 데려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와 비슷해보였다. 그때처럼 경계심에 가득 차 으르렁대는 게 아니라 조용하고 얌전한 태도로 묻는 말에 답하고 있는데도 그랬다.
기어이 김성식을 직접 죽이고 싶어한 나머지 백선교의 꾐에 빠져 밀실의 범인 역을 자청했으니 더 이상 권현석과 경찰의 호의는 바랄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자수하고 싶은 게 더 있습니다.”
정은창은 권현석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경감님은 제가 소완국을 죽였다고 의심하고 계시죠. 사실은 이준영 쪽이었어요. 저와 함께 목격되었다는 소완국이 바로 이준영이라는 경찰이었습니다.”
권현석은 쥐고 있던 펜을 종이 위에 미끄러뜨렸다.
“어떻게 얼굴이 바뀌었는지는 김성식이 성형수술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마법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아무튼 그때 진짜 소완국은 이미 김성식 손에 죽어있었고 이준영은 제 테스트라는 명목으로 절 죽이려고 덤벼들었습니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만, 그래도 그를 죽인 건 접니다.”
권현석을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정은창은 있었던 일을 전부 털어놓았다. 황도진과 다른 조직의 이름 모를 깡패, 황도준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권현석은 받아적은 진술서를 내려다보았다. 전부 정은창이 끝까지 입 다물고 있었으면 몰랐을 일들이었다.
‘아니, 정말로 그랬었나?’
소완국 사건은 처음부터 권현석 자신이 가장 의심한 일이었다. 황도진 역시 그간의 정황으로 미루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김성식의 명령으로 하극상 장소에 간 장본인이었으니. 이제까지 몰랐던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죄송합니다, 경감님.”
정은창의 목소리에 권현석은 정신을 차렸다.
동생의 명복을 빈다는 말 정도도 들어보지 못해 괴로워하던 그 표정과 목소리로 정은창이 띄엄띄엄 말했다.
“그렇게 믿어주셨는데, 전 고작 이런 놈이었어요.”
“아니야.”
권현석이 정은창의 손을 잡았다.
“내가 먼저 너한테 과중한 짐을 지운 거야. 내 멋대로,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었을 뿐이야.”
근태 형이 생각나 권현석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고개를 숙이는 걸 보고 정은창은 권현석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밀실 안에서 여승아의 폭로에 충격받고 괴로워하던 류태현이 생각났다.
실수한 걸지도 모른다. 경감님 앞에서 떳떳해지고 싶어서, 경감님을 더 속이기 싫어서 자수를 결심했지만 경감님을 괴롭히기만 하는 결과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류태현과 여승아 사이가 그토록 끔찍하게 무너져내린 것처럼 자신과 경감님 사이에 있었던 것들도 무너졌다. 바람에 날려 먼지처럼 사라지겠지.
“......실형을 피할 수 없을 거야.”
권현석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 하마터면 못 들을 뻔했다.
“정보원이었던 거랑 상황 참작 다 해준다고 해도. 황도진이 죽은 건 경찰에 큰 손실이었고 이준영은 경찰이야. 내가 나서서 감싸기가 어려워. 그래도......원망해도 되니까, 면회 거절하지는 말아줘. 제발.”
정은창은 입만 뻐끔거렸다. 한참 만에야 겨우 할 말을 만들어냈다.
“제가, 제가 어떻게 경감님을 원망해요......”


다음날 류태현은 마침내 허강민의 병실 앞에 섰다.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상황에 안 맞게도 류태현은 아직 환자 신세인 것이 원망스러웠다. 말끔하게 면도하고 머리도 빗었지만 후줄근한 환자복과 슬리퍼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들어와.”
허강민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류태현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문을 열었다.
좁은 1인실은 류태현 자신의 병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허강민은 한 손이 가죽 수갑으로 침상에 묶인 채 누워있었다.
류태현은 천천히 그리로 다가갔다. 역시 밀실 밖에서 보는 허강민은 현실감이 없었다.
허강민은 날카로운 표정으로 류태현을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제정신은 돌아온 모양이군.”
“아, 예. 덕분에요.”
그리고 류태현은 다시 빨개져서 눈치를 보았다.
“저기......허강민 씨.”
“왜.”
“그 일, 그러니까 정말 꿈 아닌 건가요?”
허강민이 류태현을 노려보았다. 류태현은 흠칫 움츠러들었다가 그 시선에 살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리 와서 앉아.”
허강민이 침대 곁 의자를 가리켰다. 류태현은 그리로 가 앉았다.
“네놈은 괜찮은 거냐?”
“예?”
“내 어디가 반할 만 했던 거냐고. 혹시 널 죽이려고 드는 사람이 취향이냐?”
“아뇨.”
류태현이 고개를 흔들었다. 허강민은 짐짓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은행 강도들에겐 반하지 않았으니까. 아니, 그놈들은 널 위협만 했지 바로 죽일 생각까진 없었기 때문인가? 그럼 말이 되는군. 안승범도 처음에만 해도 널 수틀리면 언제든 죽일 작정이었는데 네놈은 찰싹 달라붙어서 끝까지 구해냈지. 그럼 하무열에게 반하지 않은 것도 그 작자가 널 괴롭히기만 했지 죽이려 들지는 않아서였나.”
“죽이는 사람이 취향인 거 아니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류태현이 항의했다.
“그럼 뭣 때문인데?”
허강민은 방금까지 류태현을 인신공격하던 태도 그대로 물었다.
“그냥 아무나 눈앞에 있으니까 덥석 안았다고 하지 마라. 넌 분명히 그게 나인 걸 인식했고 나니까 덤벼든 거야.”
“압니다.”
긴장으로 창백해졌던 류태현이 다시 빨개졌다.
“아무나 상관없었던 게 아닙니다. 정말로요. 전 허강민 씨를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왜냐고.”
“그냥 반한 걸지도 모르죠.”
여전히 빨개진 채로도 류태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저도 어제 밤새 고민해봤습니다. 왜 강민 씨인지, 왜 죄책감도 연민도 원한도 아닌 사랑인지. 논리적인 답은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전 허강민 씨가 살아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걸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다 할 겁니다. 절 용서해주지 않아도, 계속 미워한다 해도.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뭘까요?”
“.......”
허강민은 여봐란 듯이 팔에 돋은 닭살을 문질렀다.
“내가 지금 당장 너한테 마주 반한 건 아니다.”
차가운 목소리에 류태현은 새삼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담담한 얼굴이었다.
“네녀석이 한 짓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여승아가 한 짓에 새삼 분노해서 쫓아갈 기력도 안 남았지만 네놈을 용서할 이유도 없다. 난 그저, 붙어있는 목숨을 앞으로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으니 너도 여승아도 다른 사람도 해칠 수 없는 것뿐이다.”
류태현이 슬픈 눈을 하고 허강민을 바라보았다. 허강민은 그 눈빛을 굳이 외면하지 않았다.
“나와서 할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류태현이 물었다.
“미궁 안에서 그렇게 말한 것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든 강민 씨가 살아있어야 할 수 있겠죠.”
“그건 그렇다만.”
허강민이 내키지 않으나마 인정했다.
“그게 너와 상관 없다는 말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 목적이 뭔데요?”
류태현이 다시 물었다.
“나쁜 목적은 아닌 거죠? 적어도 남을 해치는 건 아니죠?”
허강민은 잠시 류태현을 빤히 보다가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뭔데?”
“근거는 없고 감입니다.”
사실은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이제까지 허강민이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그 살의와 악의는 언제나 궁극적으로 자신을 향해 있었다. 그러니 자신과 상관없다면 악의도 그만큼 옅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허강민은 여승아를 향한 복수심도 강하지 않다고 자인했다.
허강민은 눈을 가늘게 뜨고 류태현을 노려보았다. 명백히 바보 취급하고 있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
“백선교를 마저 무너뜨릴 거다.”
제대로 된 답변도 했다.
“날 위한 일이야. 이대로 경찰에만 맡겨놓으면 백선교는 또다시 살아남을 거고 나는 배교자로서 법의 심판을 받기도 전에 끔찍한 꼴을 당하겠지. 삶에 미련 같은 건 없다만 그보다는 곱게 죽고싶다. 그런 짓을 당하느니 경찰에 협력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나 같은 괴물에게도 그리 사치스런 생각은 아니라고 본다.”
“제가 도울게요.”
류태현이 덜컥 나섰다가 허강민에게 째림을 당했다.
“돕긴 뭘 도와. 내가 경찰을 돕는 거고, 너도 경찰이잖아.”
“아, 그러네요.”
머리를 긁적이다 류태현이 이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치만 이제 제가 마법사가 되면 도울 일이 생기겠죠?”
“그리고 마법사가 되려면 나한테 배워야 하지.”
허강민이 비웃음 섞어 지적했다.
“저랑 관계 없다더니, 관계 있네요. 엄청나게.”
허강민은 류태현을 다시 노려보았다.
“힘든 일이야. 끔찍한 일이기도 하고.”
류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다들 그렇게 말한다더라.”
허강민은 시큰둥하게 받아넘기고 침대 옆에서 노트를 잡아당겨 펼쳤다.
“지금 백선교와 맞서 싸울 마법사가 꼭 필요하니까, 사실은 네놈이 각오가 되어있든 말든 가르쳐야만 해. 네놈은 배워야만 하고. 그러니 제대로 배워. 뭣보다 제정신을......”
줄 없는 노트에 볼펜을 대고 막 뭔가 쓰려던 허강민이 손을 멈추고 류태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조금 걱정이 되어서.”
허강민의 표정은 진지했다.
“내가 네게 마법을 가르치는 건 네가 어디까지나 제정신을 유지하고, 백선교와 실버 트와일라잇의 마법공격으로부터 너와 다른 경찰들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서다. 마법을 배우다가 이성을 잃어버리고 네가 괴물이 되어버리면 안 배우느니만 못한 결과가 될 거다. 그런데 말이지. 너 지금은 제정신인 것 맞냐?”
류태현은 조금 울컥 했다.
“제정신 똑바로 박혀있습니다. 무열 선배와 국장님과 동료들을 지키고 백선교를 타도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증명해야 안심하고 가르쳐주실 건가요?”
“날 사랑한다면서.”
허강민이 눈 하나 깜짝 않고 대꾸했다.
“제정신으로 날 사랑한다고?”
“그건.....”
류태현이 어물어물했다. 역시 허강민은 자신의 마음을 짓밟고 조롱할 생각뿐인 것 같았다.
“앞서나가지 마.”
허강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미친 고백 따위 무시하겠다는 뜻으로 꺼낸 말이 아니다. 가족의 원수끼리가 아니더라도 사랑이란 복잡하고 사람을 동요하게 만들지.”
허강민은 여전히 진지하고 차분한 얼굴이었다. 그 눈빛에 이제까지 익숙하게 흐르던 광기도 살의도 없었다.
“갑자기 내가 널 열렬히 사랑할 수는 없어. 널 걱정하고, 다치지 않게 보호하고, 어떻게 해야 네 소원을 이룰 수 있을까 고민하고 노력할 수 있을 뿐.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있겠어?”
허강민의 목소리는 문장을 겨우 완성하고 꺼져버렸다. 류태현이 못 믿겠다는 듯 감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허강민 씨가 제게 그래준다고요?”
“......그래.”
“충분해요. 아니, 제 말은......”
류태현이 허강민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평생 허강민 씨에겐 증오만 받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런데......”
허강민은 조금 주저하다가 류태현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류태현도 허강민을 끌어안고 다정하게 등을 쓸었다.
“자,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지?”
허강민이 이내 류태현을 가볍게 밀어냈다.
류태현도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바로했다. 그러나 눈은 여전히 기쁨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무튼 이쪽을 봐.”
허강민이 노트에 볼펜으로 끄적이기 시작했다.
“괴물들과 이세계 신이 존재한다는 건 이미 직접 봐서 알지? 미궁 안에서 우리를 집어삼키려고 덤빈 건 그냥 단순한 괴물이야. 하지만 그걸 막기 위해 네가 불러낸 건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그 괴물들이 섬기는 신과 같은 존재지. 마법의 근원이 되는 존재이기도 하고.”
허강민이 볼펜으로 그린 둥근 그림은 지구상의 어떤 생명체와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그러나 류태현은 그것이 왠지 낯익다고 느꼈다.
이미 보았으니까.
“흔히 외우주의 신이라 불리는 이것들은 본래 인간에게 관심이 없다. 운전자가 차를 몰면서 자기 차바퀴에 밟혀 죽을 벌레에 신경 쓰는 정도 관심밖에 없지. 마법과 제의를 통해 비위를 맞추고 힘을 빌리는 것도 마찬가지야. 네 집에 사는 미생물이 네 각질이나 손톱 밑 때를 일용할 양식으로 삼는 거나 같아서, 네가 이대로 마법을 익혀 강력한 마법사가 되고 그 마법으로 백선교를 무찌른다 해도 검은 남자에겐 진드기에 물린 정도도 아니라는 거다.”
거기까지 말하고 허강민이 류태현을 보았다.
“과장이 아니야. 게다가 그래서 지금은 다행이기도 하지. 백선교를 통해 전수받은 기술로 검은 남자의 힘을 빌려서, 백선교를 공격해야 하거든. 검은 남자는 네가 배은망덕하다든가 자신을 배신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을 거야.”
마법을 배운다고 해서 판타지 소설 같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시작부터 인간은 집먼지 진드기만도 못한 존재라니.
검은 남자는 그 거품 괴물 앞에서 류태현을 재미있어 했다. 그것은 단순한 변덕에 불과하고 기분이 바뀌면 언제든 먼지를 떨어내듯 류태현을 떨어버릴 수 있었다.
“백선교는 왜 그런 존재들을 섬기는 거지요? 무엇을 바라고? 그런 것들이 뿌려주는 돈이나 권력이 그렇게 탐이 나는 건가요?”
“한 명 한 명의 사정이야 나도 모른다만 대체로 그런 것 같더군.”
허강민은 심드렁하게 노트 페이지를 넘겼다.
“일단 마법사가 된 뒤 정신이 그쪽에 맞게 변형되어 자제를 잃은 케이스도 많은 모양이고. 너는 그래선 안 된다.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잊지 마.”
“예.”
류태현이 진지하게 각오를 다졌다.
“그럼 오늘은 제정신을 유지하는 법, 정신이 흔들릴 때의 대처법부터 가르쳐주겠다. 마법사 아닌 인간들이 정신을 방어할 때도 쓸 수 있는 것들이지. 최대한 안전하고 유용한 것들을 우선해서 가르쳐줄 테니 새겨듣도록.”
진심이었다. 허강민은 류태현을 방어와 저주 해제 쪽에 집중시킬 작정이었다.
백선교를 무찌르기 위해 경찰에 마법 보호를 제공하는 것이 일차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류태현을 보호하는 것도 그 애인 노릇도 다 감수할 수 있었다.
하무열이나 권현석은 몰라도 류태현은 그걸 진심으로 믿고 따를 생각인 게 분명했다. 허강민이 가르쳐주는 대로 거의 빨아들일 기세였다.
하무열 형사는 이런 맛에 류태현을 곁에 두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경우가 달랐다. 류태현이 아무리 순진하고 무해한 눈빛으로 자신을 따르더라도 자신은 하무열이 복수를 포기한 것처럼은 할 수 없었다. 말한 그대로 냉정하고 성실하게 류태현을 돕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류태현도 그 이상을 바랄 정도로 어리석은 놈은 아니니, 적어도 백선교를 꺾어놓을 때까지는 이대로 괜찮을 것이다. 허강민은 그렇게 믿었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22 ㅣ- 회색도시&검은방


“결국은 이런 날이 오는구나. 꿈만 같네.”
유상일이 자기 앞에 따라진 술을 홀짝 마셨다.
“많이 감개무량하신가 봐요.”
오미정이 말했다.
“그럼, 처음에만 해도 길어야 몇 달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장기화 되어가지고..... 이대로 영영 못 돌아가는 건 아닌지 얼마나 무서웠다고.”
“유상일 경위님 같은 분도 무서움을 느낍니까.”
서재호가 조금 놀랐다.
“당연하지? 아, 죽거나 다치는 건 별로 안 무서운데, 아니, 죽는 건 좀 무서운가, 아무튼 이대로 깡패가 아주 되어버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건 무섭더라. 이제 끝났으니 상관없지만.”
그가 다시 한 번 술잔을 털어넣었다.
“그래. 이제 다 끝났지... 그리고.”
그가 벌떡 일어나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최재석과 주정재를 양 팔로 걸어 꽉 안았다.
“이 녀석들도 그대로 남았고 말이지. 아 정말 선진화파 핵심인원이 모두 경찰이었을 줄이야.”
“아, 그건 정말 황당했어.”
최재석이 맞장구쳤다.
“심지어 정은창 그 녀석도 경찰 정보원이었다며. 난 너는 몰라도 그 녀석이랑 주정재는 꼼짝없이 깡패인줄로만 알았는데......”
“뭐 임마?”
주정재가 최재석의 뒤통수를 철썩 때렸다.
“지들이 나만큼 위장 제대로 못한 것 갖고 남 욕하는 거 봐라. 내가 연기를 잘하는 게 뭐 잘못이냐?”
“아니 물론 그런 거 아니지.”
유상일이 달랬다.
“그냥 재석이는 뭐랄까 무도인다운 고지식함 같은 게 보여서 깡패엔 좀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그리고 니놈은 너무 잘생겼다 이거지. 아 까놓고 말해, 저렇게 생긴 놈이 뭐가 아쉬워서 깡패짓을 한다냐.”
“어이 이래봬도 중학생 땐 불량청소년이었다고.”
“네? 상일 경위님이요?”
듣던 오미정이 깜짝 놀랐다. 유상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야. 나도 현석 형도 아주 동네 망나니로 낙인찍혀서.... 근태 형님이 구해주지 않았으면 정말 깡패가 됐을지도 모르는 걸.”
“경감님까지? 아니 근데 경감님하고 형동생 하는 사이였어?”
최재석이 놀랐다.
“응. 같은 동네 출신이기도 하고...”
“거, 어느 쪽이 형이냔 소리 안 들어?”
주정재가 놀렸다.
“뭐야?”
대답은 등 뒤에서 들렸다.
“어이 주정재 경사, 내 생김새에 뭔가 불만이라도?”
“아, 아닙니다 경감님.”
주정재가 고개를 움츠렸다. 권현석이 하하 웃으며 그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었다.
“그렇지? 나 경찰답게 위엄이 넘치지?”
“형 못 본 새 많이 뻔뻔해졌네....”
유상일이 감탄했다.
“그러는 넌 많이 삭았지. 옛날에만 해도 귀여웠는데....”
“저게 삭은 얼굴이라고요?”
“겉이 아니라 속이.”
“아.”
“아 형도. 내 나이가 몇인데 언제까지나 파릇파릇할 거라고 생각했어?”
“자긴 저 나이에도 파릇파릇하니까 동생도 그럴거라 생각하나보지.”
주정재가 추임새를 넣었다.
“뭐 임마?”
“서재호씨... 재호 형사는 경감님을 형님이라고 못 부르겠네요, 그럼.”
지금껏 조용히 혼자 술을 마시고 있던 준혁이 중얼거렸다.
“경감님과는 달리 재호 형사는 삭을 거니까.”
“갑자기 나는 왜? 난 삭는 거 확정이야? 그보다 왜 삭는데?”
재호가 비통하게 소리쳤다.
“에..... 담배 피우니까요?”
그 말에 최재석 유상일 권현석은 모두 하필 그 때 담배를 꺼내 무는 중이던 주정재를 쳐다보았다.
“아 왜?”
“그야 난 안 피니까.”
최재석이 말했다.
“난 끊었고.”
유상일도 고개를 끄덕였다.
“간접 흡연도 건강에 해롭대.”
권현석까지 가담했다.
“아.... 나가서 피울게요, 나가서! 하여간 애아빠들이라고 유세 떨긴....”
주정재가 담배를 챙겨들고 나가버렸다. 권현석이 서재호를 쳐다보았다.
“저, 전 안 피우고 있습니다!”
“응, 잔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고....”
그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정재 삐졌으려나? 담배는 몸에 해로우니까 가능하면 끊었으면 싶긴 한데.”
“끊는 게 좋지요.”
배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간접 흡연은 직접 흡연보다도 더 나쁘다고 하니까요.”
“그런 거야?”
오미정이 놀란 표정을 했다.
“네. 그러니 유상일 경위님도 딸을 생각해서.”
“이미 끊었어.”
“잘하셨습니다.”
진심으로 칭찬받은 것 같은데도 상일은 어째 기분이 편치 않았다.
“현석 형이 끊으라고 엄청 잔소리를 했거든.”
괜히 변명도 덧붙였다.
“다아 인생 육아 선배로서 조언한 거란다.”
권현석이 누구 것인지 모르는 술잔을 들어 마셔버렸다.
“아, 좋다. 그 지긋지긋한 잠입 작전이 드디어 끝났어.”
그가 헤실헤실 웃었다.
“형 덕분이지. 황도진 도망가는 거 쫓아가 잡았다며.”
“은창이가 잡아둔 걸. 안 늦게 쫓아간 건 준혁 형사 공이 컸고.”
권현석이 쳐다보자 배준혁은 몸둘바를 몰랐다.
“위험한 곳이라 서둘렀을 뿐입니다.”
“아이고, 그러지 말고 좀 더 편하게 해.”
현석이 준혁의 등을 가볍게 쳤다.
“같이 지낸 지도 꽤 됐는데, 이제 슬슬 부드럽게 형님 하고 불러본다던가...”
“네, 네?”
준혁의 얼굴이 하얘졌다 빨개졌다.
“왜, 못하겠어? 이런 건 준혁 형사보다는 재호 형사가 잘하려나?”
“네?”
갑자기 지목받아 서재호가 입을 딱 벌렸다.
“저 저저 저는....”
“자. 현석 형님~ 해봐.”
권현석이 생글생글 웃으며 서재호를 압박했다. 재호는 순간 도망갈까 생각했지만, 어느새 상일이 그의 뒤로 가서 어깨를 잡고 있었다.
“좋지, 나도 막내는 이제 졸업하고 싶고.”
“막냅니까? 저 팀장님한테도 형님 해야 하는 겁니까?”
재호가 팔을 파닥거렸다.
“그건 진짜 무섭다고요!”
“아닌데, 근태형 무서운 사람 아닌데.”
권현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야 형이 귀여움 받고 있으니까 그런 거지, 객관적으로 볼 때 무서운 사람 맞아.”
유상일이 지적했다.
“누가 무서운 사람이라는 거지?”
유상일도 권현석도 최재석도 유상일에게 붙들린 서재호도 뒤를 돌아보았다. 한창 화제의 중심이던 박근태가 그들 뒤에 서 있었다.
“어, 형 왔어?”
권현석이 반색을 했다.
“잘됐다. 자, 여기 술.”
권현석이 술잔을 내밀었다. 박근태가 손으로 사양했다.
“아니, 나 갈비뼈가 아직.”
“아..”
“갈비뼈라뇨?”
최재석이 놀랐다.
“최재석 경사님은 그 때 기절해 계셔서 모르셨겠지만, 장산 병원에서 깡패에게 습격당해 부상하셨거든요.”
배준혁이 설명했다.
“그래... 다친 사람은 술 마시면 안 되지. 도세훈 경사도 일찍 집에 보냈는데.”
말과는 달리 권현석은 시무룩해졌다. 유상일이 그 잔을 빼앗아 자기가 쭉 마셔버렸다.
“자, 근태형님 대신 내가 마시면 되지!”
“흑기사입니까!”
그 틈을 타 재호가 상일에게서 떨어졌다.
“뭐 나야 형님을 위해서라면.... 악!”
“앗, 죄송합니다.”
그의 발을 꽉 밟은 준혁이 황급히 사과했다.
“저 쪽의 냅킨을 집으려다가 그만....”
“무슨 하이힐에 밟힌 줄 알았네....”
유상일이 눈물까지 찔끔하며 발을 문질렀다.
“하이힐에 밟혀보셨습니까?”
“아니!”
“잘들 놀고 있는 것 같군.”
자기네 막내가 괴롭힘 당하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박근태가 빙긋이 웃었다.
“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벌써?”
권현석이 놀랐다.
“기왕 왔는데 술은 못해도 고기라도....”
“일도 있고, 처음부터 잠깐 둘러보기만 할 셈으로 온 거야.”
박근태가 권현석의 어깨를 다독였다.
“자, 그럼 무서운 사람은 이만 사라질테니 잘들 놀다 가게나.”
서재호가 히익하고 고개를 움츠렸다. 박근태는 못 본 척 했다.
“다들, 길거리에 쓰러져서 관할서에 폐 끼치지 않을 만큼만 마시라고.”
쫄아든 부하들을 뒤로 하고 박근태 팀장은 고깃집을 나갔다. 이들 뿐 아니라 다른 테이블에서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우리는 놀라고 하고 형은 일한다고 하고.....”
권현석만 서운해보였다.
“수사는 성공했잖아?”
유상일이 의아해했다.
“후속 처리가 이것저것 남은 건 알지만... 뭐 힘든 일이라도 있어?”
“응.”
권현석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랄까... 정치적인 위기라고 해야 하나, 그런 문제가 좀.”
“역시 수사가 장기화 되다보니 공격 받는 건가... 하지만 이제 다 끝났잖아.”
“그래, 그렇지.”
권현석이 방실 웃었다.
“그러니 걱정은 접어두고 오늘은 술과 안주를 선택하고 집중하자!”
“와~!”
부하 형사들이 모두 박수를 쳤다. 권현석이 뿌듯한 표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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