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자면 대문 - 화산섬의 분관에 어서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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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 4 (완) ㅣ- 기타


문이 열리자 제일 먼저 라온이 달려들었다. 케일이 그를 끌어안고 토닥토닥하는 동안 온과 홍이 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왔다.
“아무 일도 없었어. 마주앉은 채 서로 점잖게 이야기만 했어. 때리긴 커녕 손도 안 댔어.”
케일이 서둘러 말했다.
“그래도 걱정했다!”
-걱정했는데!
-왜 안 나오나 조마조마했는데!
엉겨붙는 평균 8세들이 무거워서 좀 휘청일 것 같았다. 케일은 우선 라온을 공중에 띄우고 온과 홍도 어께에 안정적으로 걸쳤다.
“대화는 잘 끝났습니다.”
케일이 모인 사람들에게 선언했다.
“이 최한은 우리랑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평행세계에서 사고로 잠시 건너온 사람이고 얼마 뒤 돌아갈 겁니다. 그때까지 우리와 함께 지낼테니 싸우지 말고 손님으로 대우해주세요.”
“평행 세계? 그런 게 정말 있다고?”
에르하벤이 물었다.
“저도 믿기 어렵지만 이렇게 증거가 있으니까요.”
케일이 원작 최한을 가리켰다.
“저자는 왜 다짜고짜 케일님을 공격했던 겁니까?”
최한이 물었다.
“그쪽의 케일 헤니투스가 악당이라서.”
말하고 나서 케일은 만약 태양이 갑자기 꺼진다면 자기 일행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미리 알 수 있게 되었다.
“그게 그렇게 놀.....”
“납득할 수 없습니다!”
최한이 전에 없이 강하게 주장했다.
“케일님이 악당이라니, 그런 세계가 세상에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야 이 세상이 아니고...”
“최한 말이 맞다!”
라온도 맞장구쳤다.
“너는 착한 사람이다. 사람들도 많이 구하고 애들도 잘 돌보고 아주 좋은 사람이다. 왕세자랑 있을 때 이상하게 웃긴 해도 나쁜 짓은 안 하는 사람이다!”
“왕세자와 이상하게 웃는다고?”
원작 최한이 묘한 표정으로 케일을 보았다. 케일은 신음하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 맞다. 왕세자 이야기도 했어야 하는데.... 너 가기 전에 나랑 대화 한 번만 더 하자. 피와 살이 될 이야기니까 싫어도 들어.”
“그러지.”
생각 외로 원작 최한은 쉽게 대답했다.
“케일님.”
최한은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가게 놔두지 않았다.
“저쪽세계의 케일님이 저놈과 무슨 일이 있었든 오해가 분명합니다.”
“그런 거 아냐. 론은 알지. 나 재작년까지만 해도 내놓은 망나니였던 거?”
론이 인자하게 웃었다.
“필요할 때 까지 발톱을 숨기고 있으셨던 거지요.”
‘아니, 왜.’
최한이 한 말이었다면 그러려니 했을텐데 론이 저리 말하니 좀 소름이 끼쳤다.
“....그쪽의 난 망나니짓 안 때려치우고 계속 했다는 거지. 그야 오해도 있긴 있었지만.”
“결국 오해였군요.”
그거 아니지만 케일은 이제 냅두기로 했다. 그렇게 믿어서 최한이 마음이 편하다면 굳이 그 평화를 깰 필요까지는 없었다. 케일이 암과 닿아있다고 오해하지만 않았어도 최한도 그렇게까지 패지는 않았을 거고.
“아, 그런데 너 왜 내가 암과 손잡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거야?”
케일이 원작 최한에게 물었다.
“그쪽에 고대의 힘을 모으는 자가 있다고 들었다. 이런 힘을 하나도 아니고 여럿 갖고 있는 건 자연스럽게 일어날 일은 아니니까, 그런 조직이 개입했을지 모른다 생각한 거지.”
“암이라면 케일 헤니투스보다는 좀 쓸모 있는 인간에게 힘을 모으지 않을까?”
“사정이 있어서 잠시 저장해뒀다가 나중에 옮기려는 것일 수도 있잖아. 네말대로 헤니투스 백작가는 부유하니 뜯어낼 게 있었을지도 모르고.”
“하긴.”
원작의 케일 헤니투스가 그런 식으로 악당들한테 잠깐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말로 참 적합한 인재라는 데에는 케일도 이견이 없었다.
“자, 그럼 이걸로 문제는 다 해결되었어.”
최한이 또 뭐라고 태클을 걸기 전에 케일이 손뼉을 짝 쳤다.
“다들 가서 자기 할 일 하도록. ......최한.”
“네.”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또 하나의 자신을 험악하게 노려보던 최한이 표정을 바로하고 케일에게 주목했다.
“혹 시간나면 저 사람이랑 대련이라든가 해줘.”
당장이라도 ‘제가 왜요?’ 라고 말할 것 같은 최한을 보며 케일이 덧붙였다.
“저 녀석 더 강해지려고 여기 온 거거든. 실력이 늘어야 돌아갈 거야.”
그 말에 최한의 눈빛이 형형히 빛났다. 케일이 움찔 뒤로 물러날 만큼.
“알겠습니다.”
그가 결연히 말했다.
“어디 같이 훈련을 해보지요.”
“어디까지나 훈련이야.”
케일이 강조했다.
“죽거나 다치면 안 되는 거 일지? 양쪽 다 말이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론이 나섰다.
“제가 이 나이에 그 정도도 조절 못하겠습니까.”
“아니....”
론이 여기서 왜 나와? 라고 묻기 전에 비크로스도 라크도 힐스만까지도 나섰다. 모두의 적의를 한 몸에 받으며 최한도 웃었다.
“좋아. 지금부터 시작할까?”


해리스 별장이 반파되는 건 아닐까, 자기는 백작가 본성으로 도망가 있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한 것도 무색하게 다들 정말로 수련장에서만 싸우고 그 밖에서는 비교적 얌전히 지냈다. 이쪽의 최한을 내세워 협공해 반 죽이거나 하지도 않았다. 원작 주인공을 반죽음 시켜도 곤란하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어다.
다만 케일이 짱돌을 찾으러 가는 일정은 늦춰졌다. 다들 다른 최한에게 정신팔려 있는 동안 라온과 에르하벤과 잡일할 사람 하나 정도만 데리고 훌쩍 다녀오고 싶었으나 에르하벤이 최한을 관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천년을 산 용에게도 세계간 이동은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에르하벤에게 케일은 일단 최한이 어떻게 넘어왓는지 하고 그쪽과 이쪽 세계가 다른 점을 김록수와 영웅의 탄상에 대한 것 외에는 전부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케일과 최한이 만난 초기 일은 모르는 에르하벤은 별 의심 없이 그 정도 설명으로 만족했다.
당장 할 일도 없어진 김에 케일은 서재에 들어앉아 지금껏 자기가 지나왔던 여정을 반추했다. 그리고 원작에서 최한의 일행들이 몰랐거나 놓쳤음직한 정보를 정리했다. 이쪽이 진행은 좀 뒤져도 책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참 알차게 돌아다녔기 때문에 알려줄만한 정보는 의외로 많았다. 왕세자와 다크엘프들에 대한 것도 그렇고.
‘이쪽 최한 하는 거 보면 저쪽도 발연기겠지. 괜히 왕세자를 벗겨먹으려고 애쓰기 보다는 그냥 알고있단 사실을 알리고 좀 더 얕보이지 않는 협력관계를 새로 맺는 편이 최선일 거야.’
그 외에도 깨지지 않는 방패와 지배하는 아우라, 짱돌 같이 아직 주인이 없는 고대의 힘을 얻는 법, 인어들이 강해진 이유, 죽은 마나 이용법, 금색 쌍둥이로 제국의 뒤통수를 칠 계획 등 알아둬서 좋을만한 정보는 얼마든지 있었다.
최한에게 주고 외우게 할 생각이므로 그 모든 걸 최대한 알아보기 쉽게 종이 한 장에 정리했다. 원작의 진행을 어그러뜨리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주인공이 이런데 와서 그를 만나는 것도 원작 진행은 아닐게 분명하므로 케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정리한 종이는 접어 안주머니에 넣고 나머지는 전부 벽난로에 태운 뒤 케일은 최한을 찾아 나섰다.
오랜만에 밖에 나와보니 날이 맑았다. 훈련장 쪽으로 가면서 케일은 원작 최한이 이 정보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려나 생각했다.
자기가 소설의 등장인물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도 최한은 꽤 멀쩡해보였다. 자신이 겪었던 그 모든 고난이 그저 주인공에게 시련을 주기 위한 장치였을 뿐이었냐고 날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거기까지 생각을 못 한 건지, 아니면 케일처럼 이제 여기가 자기 세상이라는 걸 받아들인 건지.
케일은 건물 밖으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책 속이든 별도의 판타지 세상이든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불고 전쟁은 곧 일어나고 그걸 수습한 뒤에 그는 여기서 은퇴 백수 생활을 할 것이다.
“뭘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는 거냐.”
원작 최한이 다가왔다. 이쪽의 최한도 서둘러 그를 쫓아왔다.
케일은 종이를 꺼내 최한에게 건넸다.
“뭐야?”
“이쪽에서 알아낸 것 이것저것. 대단한 건 없지만 암과 싸우는 데 도움이 될거야.”
최한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종이를 받아들었다.
“이걸 왜 나한테?”
“그쪽의 암도 암이잖아.”
케일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여기서 난 최한에게 암에 대해 알게 되면 그에게도 알린다는 맹세를 했거든. 다른 사람이긴 해도 너도 최한이니까, 만일에는 대비를 해두고 싶다.”
“뭐 그런 거라면.”
최한이 종이에 써있는 걸 읽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그 종이는 돌아가서 보면 없을지도 몰라. 내용을 외워.”
“그 정도는 나도 생각하고 있어. 내가 바보로 보이냐?”
“어. 이해 안 가는 내용 있으면 억지로 생각하려 들지 말고 로잘린씨한테 그대로 전해.”
원작 최한이 케일을 노려보았다. 케일은 방긋 웃어보였다.
“바보는 저야말로 목표와 완전히 반대되는 짓거리나 하고 다니는 주제에....”
최한이 획 몸을 뒤로 젖혔다. 또 다른 최한의 주먹이 방금까지 그가 있던 공간을 갈랐다.
“케일님은 누구보다도 현명하시다.”
방금 자기는 스치기만 해도 골로 갈 것 같은 공격이 코앞에서 펼쳐진 데 더해 최한이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으므로 케일은 그만 정신이 멍해지고 말았다.
“지금껏 그분이 해 온 일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야말로 헛소리 허지 마라. 케일님은.....”
“최한..”
원작 최한의 앞에서 이쪽 최한으로부터 자기 찬양을 듣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므로 케일은 최한을 말렸다.
“나 그렇게 현명하지도 않고, 실수하거나 판단을 그르쳤던 적도 많아. 그쯤 해둬.”
“어째서 케일님께선.....”
최한은 더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입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있다 그가 다른 세계의 자신을 돌아보았다.
“적어도 케일님께 예의를 갖춰라.”
“예의라.”
딴 세계의 최한이 못마땅한 눈으로 케일을 흘겨보자 케일은 주춤주춤 자기 최한 쪽으로 갔다. 여차하면 뒤에 숨으려고.
“케일님.”
“히익.”
원작 최한이 그렇게 부르자 케일은 소름끼쳐하며 한 걸음 더 물러났다.
“넌 그렇게 부르지 마.”
“하지만.”
항의하려는 자기 최한을 케일이 말렸다.
“날 케일님이라고 부르는 건 너 하나인 게 좋겠어.”
그 말에 최한이 대번에 얌전해졌다. 엷게 볼이 붉어져서 수줍어하는 이 세계의 자신을 한심한 듯 쳐다보다 원작 최한이 케일에게 갔다.
“이제 가봐야겠어.”
“그래... 뭐?”
“대충, 이곳의 내가 어떻게 강해졌는지 알 것 같거든. 내가 그대로 따라할 수는 없겠지만... 수련을 꽤 되었고, 이것도 있고.”
원작 최한이 케일이 준 종이를 흔들었다.
“그러니..... 고맙다, 케일. 네 덕이 컸다.”
그가 케일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꽉 잡았다. 기겁한 최한이 둘은 떼어놓으려 다가가는 동안 원작 최한은 사라지고 케일이 비틀거렸다. 최한은 즉각 케일을 부축해 안았다.
“괜찮으신가요!”
“응, 괜찮아, 잡고 있던 게 갑자기 사라져서 잠시 균형을 못 잡았을 뿐이지 공격당한 것도 기력을 빨린 것도 아니야.”
케일이 최한을 안심시켰다.
“생각보다 쉽게 돌아가네. 걱정했는데 잘됬다.”
“......같이 사라져버리시는줄 알았습니다.”
최한이 침울하게 말했다. 케일이 어리둥절했다.
“응? 내가 왜 사라져?”
“그자가 케일님을 탐낸 나머지 자가 시계로 데려가 버리는 줄 알고.”
“탐.... 그럴 리가 없잔아. 그놈 나 싫어하는 거 봤으면서.”
“그래도 그자도 저니까... 아니 제가 케일님을 납치한다거나 하는 얘기가 아니고요. 물론 전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저자는 나타나자마자 케일님을 두들겨팬 나쁜 놈이니까 혹시 또 해를 끼치려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최한 답지 않은 지리멸렬한 변명에 케일이 피식 웃었다. 그가 최한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난 아무데도 안 가. 여기가 내 세상인걸.”
“네.”
최한이 안도했다.
“어쨌든 불청객은 돌아가 버렸으니 우리 할 일을 하자. 곧 전쟁이 난다는 걸 알았으니 그 전에 할 일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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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원작 최한도 케일에게 홀려서 떠나기 직전 정도 삼각관계를 만들어볼까 했는데 초반에 케일을 작신 패고 나니(...) 더 이상 쓸 의욕이 사라져서 서둘러 끝내버렸습니다. 후후.

교훈. 쓰고 싶은 장면은 되도록 글 후반에 배치해야 한다.








오해 3 ㅣ- 기타


속이 뜨끔했지만 케일은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거짓말 아니야. 뭘로 증명할까. 김치라도 담가줘? 죽음의 맹세라도 할...”
“그럼 너 나한테 뭘 잘못했다고 빈 거냐.”
“그야 네가 갑자기 사람을 때리니까 살고 볼려고 우선 아무 말이나 한 거지.”
“그것뿐? 그것만으로는 검은 용을 폭주에서 구할 수 없어. 단지 돈을 좀 쓴 것만으로 고대의 힘을 그것도 여러 가지나 얻을 수는 없다.”
최한이 고개를 들었다.
“네가 한 말이야 모두 사실이겠지. 죽음의 맹세를 해도 괜찮겠지. 하지만 그게 사실 전부는 아닐텐데?”
최한이 케일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너는, 분명, 이 세계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시작했어.”
“이런.”
케일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래서 눈치 빠른 애들은 싫다니까.”
최한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케일이 손을 내저었다.
“그래, 넌 착하고 순진할 뿐 바보는 아니지. 같은 한국인을 만났다는 충격에 세세한 건 그냥 넘어가길 바랐는데.”
“뭘 숨기고 있는 거냐?”
케일이 최한을 마주보았다. 분명 스무 살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케일 헤니투스인데 저 표정은 피곤한 선생님 같아 보인다고 최한은 생각했다.
“이건.... 너한테도 되도록 말하고 싶지 않은데.”
“뭔데 그러지?”
“사실을 알고 나면 감당할 수 없어질지도 모른다.”
케일은 진지하게 말했지만 최한은 코웃음쳤다.
“이제 와서?”
“...그러네, 이제와서.”
케일의 쓴웃음이 깊어졌다가 사라졌다.
“나는, 너의 이야기를 소설책으로 읽었다.”
최한이 숨을 삼켰다.
“[영웅의 탄생]. 이계 진입 먼치킨물. ...네가 주인공인 이야기.”
최한의 반응을 가늠할 수 없어 케일은 눈을 돌려 그를 외면했다. 한참이나 정적이 흐른 끝에 최한이 숨을 토했다.
“....그랬군.”
“별로 안 놀라네?”
“나도 판소 정도 읽어봤으니까. 갑자기 이계에 떨어져서 소드마스터가 되어 영웅으로 떠받들리다니 소설 같다는 생각 해본 적 있어.”
“그랬냐.”
소설에선 최한의 내면 묘사 같은 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해봤는 줄은 몰랐다.
‘왕세자 때문인가.’
그가 기름칠 해대는 소리를 들으면 현실감이 좀 없어지긴 한다.
“라온... 용은 베니온하고 시비도 붙은 김에 빼돌려서 풀어줬어. 레어 만들러 간다더니 왜 나한테 달라붙었는지는 몰라.”
최한의 침묵을 견디기 힘들어 케일이 먼저 털어놓았다.
“광장 테러 사건때는 분명 너랑 로잘린씨를 내세우려고 했거든? 그런데 폭탄을 하나 놓쳐서 내가 방패를 썼는데 그게 좀, 보기에 인상적이다 보니까 왕세자가 날 지목해서.”
말을 할수록 변명밖에 안 되었다. 케일은 고개를 숙였다.
“네 자리를 빼앗아서 미안하다. 고의는 아니었어.”
“내 자리?”
“주인공.”
지금 이쪽의 최한은 빈말로라도 주인공이라곤 할 수 없었다. 분명 처음에만 해도 적당히 헤어져서 갈길 가게 할 생각이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이번엔 둘 다 침묵했다. 한참만에 최한이 주저하며 물었다.
“해리스 마을은....”
“내가 케일 헤니투스로 눈을 뜬 게 6월 29일이었어.”
그 말에 최한이 움찔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
“......그래.”
최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너, 책을 읽었다면 혹시 그 비밀단체.”
“중간까지밖에 못 읽고 잤어. 내가 아는 건 그 단체 이름은 암이고 동대륙 뒷세계를 꽉 잡고 있고 북3국과 제국과도 손 잡았고 아직도 배후에 뭐가 더 있어 보인다는 정도야.”
“허.”
최한이 허탈한 표정을 했다.
“불굴연합에 제국... 이면 실질적으로 이 전쟁은 암이 일으켰다는 거냐.”
“그래.”
‘저쪽은 이미 전쟁이 일어난 다음인가보군. 뭐 도움 될 만한 거 있나 물어봐도 되려나.’
저 최한이 무섭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미래의 정보를 얻어도 세계가 안전할지 걱정도 되었지만, 조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케일은 머리를 굴렸다.
“제국은 우리 뒤통수 칠 준비를 하고 있는 거고.”
최한이 말했다.
“그래.”
“미치겠네....”
최한이 두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왕세자는 돌겠네더니 얘는 미치겠네인가.’
“이제 알았으니까, 대비할 수 있잖아.”
그래도 왕세자와는 달리 이쪽은 최한이므로 케일은 조금 다정하게 말해주었다.
“그 외에도... 아, 너넨 전쟁 시작한 뒤야?”
“그래.”
최한이 말했다.
“전쟁이 시작되고 나니, 내 무력함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뭔.....”
최한이 무력하다면 세상에 강한 사람 아무도 없을 거다. 차원이 다른 삽질에 케일은 그만 멍해졌다.
‘전쟁 대체 얼마나 심각한 거야?’
“적을 죽이는 건 할 수 있다. 하지만 몰려오는 병사들을 아무리 많이 죽여도 그것만으론 전쟁이 끝나지 않는다. 게다가 그 병사들도 결국 사람인데,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 막막해져서.....”
케일은 일어나서 저 최한의 어깨라도 두드려주고 싶은 기분을 애써 억제했다. 저 사람은 주인공이다. 자기 슬럼프는 스스로 극복해야했다.
“그래서 주술사의 도움으로 지금의 나를 극복하고 더 강하고 현명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이리로 온 거다.”
“...응?”
‘이야기가 왜 그렇게 돼?’
“오려고 온 건 아니고, 음, 내가 설명은 잘 못하겠는데 주술사 말로는 일종의 심층명상 같이 내면으로 파고들어 또 다른 나를 직면해서....”
말하다 말고 최한이 방문 쪽을 보았다.
“.........이런 걸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음.”
케일도 신음을 삼켰다.
“앞으로 주술사를 만나게 되면 조심해야겠군.”
“별로 네가 조심할 일은 없을텐데.”
최한이 말했다.
“아, 그래. 나야 약하니까 강해지려고 최면요법까지 받을 이유는 없지. 그래도 이쪽 최한한테 주의시켜둬야지. 위험하잖아.”
케일이 투덜거렸다. 최한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아니.”
최한이 눈을 돌렸다.
“너는 강하니까 위험하지 않다고 할 거냐? 그때 네가 날 죽였으면 온 홍 라온은 물론이고 이쪽 너도 가만있진 않았을걸. 로잘린과 라크마저 널 적으로 생각했을 거라고.”
케일이 말했다.
“자신의 가치를 확신하는군.”
“뭔소리야. 너는 갑자기 론 비슷한 게 나타나서.... 누구든 일행을 죽이면 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 같냐?”
“적으로 생각하겠지.”
최한이 일어나 케일에게 다가왔다. 케일은 앉은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니 있는 동안 얌전히 지내.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이해하지만 다른 사람들하곤 싸우지 말고. 이쪽엔 용도 둘이나 있고 돌아갈 방법은 찾아볼테니까....”
“너는.”
최한이 케일이 앉은 의자 팔걸이를 짚고 몸을 숙였다.
“내가 무섭지 않은 거냐?”
케일이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소릴....”
“나한테 개처럼 두들겨 맞고 기절했다 깨어난 지, 한 시간? 그 정도밖에 안 되었잖아? 그런데 나와 단둘이, 널 보호해 줄 만한 사람들과 완전히 단절된 채로 대화를 하겠다니.”
“들려줄 수 없는 이야기였잖아. 너랑 나랑 적이 아니고 네게 위협도 안 되고 도울 일도 있다는 걸 알아듣게 설명했을 텐데?”
최한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케일이 고개를 돌렸다.
“넌 짜증나고 기분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이는 놈은 아니잖아. 그 점을 믿었다.”
“믿었다고.”
“그래.”
뭐 잘못됐냐고 되묻는 것 같은 케일의 말을 듣고 최한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돌아갈 방법에 대해서는, 짐작 가는 바가 있다.”
“그래?”
케일은 안도했다.
“우리쪽에서 협조할 일이 있을까?”
“협조하게?”
최한이 되물었다.
“널 빨리 돌려보내고 싶으니까.”
케일의 말에 최한이 수긍했다.
“오래는 안 걸릴 거다. 이 주술... 이 뭐든, 목적은 내가 나와 맞서 강해지는 거니 그 조건을 충족하면 되겠지.”
“우리 최한을 연습용으로 빌려달라는 거냐?”
케일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최한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놈이 네 물건이냐? 빌려주게.”
“그런 뜻이... 미안, 말실수야.”
케일이 양 손을 들어올렸다.
“그런데, 음, 아무래도 우리쪽 최한이 너보다....”
케일이 여기저기 끼어들어서 이쪽의 최한은 원작에서보다 여러모로 활약이 적었다. 명성이야 싸움 실력에는 영향 안 미치겠지만 그래도 케일은 원작보다 약한 자기네 최한이 저 사람과 싸우다 다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너무 과격하게 하지는 마라. 다치지 않게 주의해.”
그 말에 최한은 좀 수상하단 표정을 했다.
“날 걱정해주는 건가?‘
“.....응? 뭔소리야, 우리쪽 최한 다치지 않게 살살 해달라고.”
“너야말로 뭔소리냐. 그 녀석이 나보다 조금 더 강해.”
“뭐?”
케일의 머릿속에 지금껏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최한이 ‘좀 더 강해지지 않으면..... 이라 중얼거리며 수련에 열중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케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미친, 대륙을 맨손으로 부술 셈인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원작보다도 강해졌단 말이야? 어떻게?’
“무섭나?”
최한이 갸우뚱했다.
“별로 안 기뻐하는군. 보기보다 이쪽의 나와 사이가 안 좋나? 그렇다 해도 어차피 나보다 강하든 약하든 네가 한방거리라는 점은 동일한데.”
“네가 맞을까봐 무서운 게 아니고... 아주 아닌 건 아니지만 그거야 네말대로 최한이 약해도 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케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야 최한이 강한 거야 괜찮지만, 아무래도 강한 사람은 문제를 끌어모으잖아? 난 백수로 조용히 살고 싶다고. 그렇다고 최한이 떠나란다고 떠날 사람도 아니고.”
최한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케일을 보았다.
“꿈이 백수라고?”
“그래. 백수 망나니로 적당히 별장에 처박혀서 놀고먹고 싶어.”
최한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채 케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케일이 조금 울컥했다.
“야, 너 보기엔 한심하고 경멸스러운 거 잘 알겠는데 나도 남들에게 범죄 안 저지르는 선에선 내맘대로 살 권리가 있거든?”
“어...... 뭐 그래.”
문 쪽을 흘끔거리며 최한이 성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여 안 할 테니 좋을대로 살아라, 김록수.”
그 이름을 듣고 케일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왜, 네 이름 맞잖아?”
“맞지만, 다른 사람들한텐 비밀이라고.”
최한이 다시 문쪽을 흘끔 보았다.
“듣는 것도 아닌데.”
“나중에 실수할 수도 있잖아. 그리고 여기선 내가 케일 헤니투스야.”
“그것 뿐이야?”
최한이 탐색하는 눈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케일이 눈을 꽉 감았다.
“나 사실은 삼십대 아저씨거든.”
“그래서?”
“열일곱하고 반말 까고 싶지는 않다.”
“지금까지 계속 깠잖아? 그리고 나도 열일곱은 아니야.”
“그건 알지만.... 사람은 보이는 것에 구애받잖아.”
“하긴.”
케일의 걱정과 달리 최한은 순순히 수긍했다.
“안에 든 게 30대 아저씨든 60대 영감님이든, 보이는 건 케일 헤니투스니까.”
케일이 표정을 구겼다. 저 선언이 꼭 자기를 여전히 망나니 케일 헤니투스로 취급하겠다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다고 내가 피해볼 것은 없지만.’
자기가 싫어도 저 최한이 새삼 다시 케일을 두들겨 패지는 않을 것이다. 그거면 되었다. 원작 주인공의 미움을 사긴 했어도 어차피 그는 곧 자기 세계로 돌아갈 거고 각자 자기 삶을 살면 그만이다.
“그럼, 우리 앞으로 어떻게 할지 합의는 된 거지?”
케일이 물었다. 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일이 일어나서 문으로 가 손잡이를 세 번 두드렸다.

가치관의 탄생을 읽고 생각나는 대로 쓴 것 감상

가치관의 탄생

책의 구조가 마음에 든다. 저자의 주장과 논거로 책이 끝나는 게 아니라 반대 논평이 덧붙어 있어서 더 깊이 생각해보기에 좋다.
저자의 주장은 경제 구조가 그 사회의 주류 가치관을 만들어내며 보편가치란 없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거 같은데?) 그 시대에 가장 필요한 가치관이 승리한다는 다윈주의 사회진화론이다. 그리고 경제 구조의 근원을 자원 획득 방식으로 규정하며 그 단계를 수렵채집, 농경, 화석연료로 나눈다.
인간이 자연에서 획득하는 자원을 전부 칼로리로 환산해 정량화한다.

시퍼드의 첫 번째 반론. 사회지배층의 가치관이 사회 전체의 가치관은 아니다. 수렵채집과 농경집단의 가치관 변화는 자원 획득 방식 보다는 집단의 크기와 더 관련이 있다.

스펜스. 가치관이나 사회 발전은 그렇게 간단히 정량화되지 않는다.

코스가드. [규범적 자아 개념은 어쩌면 가치화 능력의 원천이다. 그러나 인간 특유의 병폐와 망상을 골고루 부르는 부실함의 원천이기도 하다]
에너지 획득 방식에 따라 ‘유용한’ 가치관이 적자생존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가치화 능력이 실질이다. 가치를 지향하는데 사회구조(편견)이 그것을 왜곡시킨다. (가치관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된다)
수렵채집 사회의 폭력이 남용되고 화석연료 사회의 폭력이 억압되는 게 아니라 현대의 폭력은 간접적이어서 보이지 않는 것 뿐이다. 어디든 ‘폭력’은 용납되지 않고 정당화 정도가 달라진다. (그리고 그것은 이데올로기에 의한 왜곡에 영향받는다)
저자는 코스가스도 시퍼드의 논평에 대해 지나치게 본질주의적인 주장이고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반론한다. 인간에게 평등주의 평화주의 본성이 없으며, 농경시대의 차별적인 가치곤은 그 시대의 상식에 맞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고 그것이 지배 엘리트의 속임수라면 일만년이나 사람들이 속아넘어갈 리 없지않느냐고, 농경민도 똑똑하고 상식이 있다고 주장한다.

난, 애초에 상식이란 개념이 19세기 들어서야 생겨난 건 빼고 생각해도, 일단 ‘교육받지 않은’ 인간에게 당연히 상식이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 게다가 거짓이 수많은 사람들을 아주 오래 속이는 것은 실제로 가능하디. 종교의 예를 봐도 그렇고, 여자가 남자보다 지능이 떨어지고 판단력이 없는 하등한 동물이라는 거짓은 그보다 더 긴 기간 인간을 속였지 않은가. 화석연료 사회로 접어든지 2세기가 지났는데도 농경사회의 ‘상식’은 여전히 남아서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사람은 배우는 대로 움직인다. 사회가 위계적 질서를 가르친다면 농격민의 ‘상식’으로는 그게 거짓이라는 걸 알 수 없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평화주의적이라는 주장에는 나도 동의할 수 없지만 인간이 사회 전체의 세뇌교육에 ‘상식적으로’ 저항하는 건 더 말이 되지 않는다. 화석연료로 풍요로워져 물질에서 약간 해방된 인간이 평등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는 걸 보면 그쪽 가능성이 차라리 커보인다.
생존 압력이 커지면 위계질서에 기대는 경향은 저자도 말한거고.




[가치관의 탄생]에서 저자와 코스가드가 동물의 도덕성을 놓고 논쟁할 때 코스가드가 ‘동물은 반성적 자아를 가지지 않으므로 도덕의 주체가 이나다’고 한 부분을 ‘우리 개는 그런다’라고 반박한 거 뭐야 이 새끼라고 생각했는데 코스가드가 [규범성의 원천]에서 말한 동물의 근거가 인간의 근거와 마찬가지로 책무가 되는 것을 고통에 대한 논증으로 읽으니 저자가 말한 건‘우리 개는 내게 책무를 갖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뜻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쁜 새끼라고 생각해서 미안.



오해 2 ㅣ- 기타



케일이 다시 눈을 떴을 땐 해리스 별장의 자기 침대 위였다.
‘아.’
아픈 곳은 없었다. 혹시나 싶어 조심스럽게 발목을 움직여 보았다. 살짝 뻐근한 느낌이 들었지만 무리 없이 움직였다.
‘완전히 박살이 났는데, 멀쩡하네.’
“깨어났냐, 약한 인간!”
라온이 바로 귀 옆에서 소리 질렀다. 갑작스런 큰 소리에 골이 울려 케일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라온이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미안하다, 네가 얼마나 약한지 깜빡하고 혼자 뒀다. 앞으로는 내가 꼭 붙어 다니며 보호해주겠다!”
“아니...”
‘그럼 너 수업은 어쩌고...’ 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문이 벌컥 열리고 나머지 일행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깨어나셨습니까!”
“케일공자!”
“공자님! 무사하십니까!”
“괜찮으신가요!”
‘이렇게 멀쩡한 거 보면 다 치료해서 놔둔 거 다들 알 텐데 뭘 새삼 난리람.’
케일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듯 감격하는 일행들을 둘러보았다.
“온하고 홍은? 최한은?”
“그... 최한처럼 보이는 것을 잡아두고 있어요.”
로잘린이 말했다. 케일이 눈을 깜빡였다.
“누구고 어떻게 된 영문인지, 사람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자는 최한만큼이나 강하더군요. 그래서 만약을 대비해 온과 홍이 방 안을 마비독안개로 채우고 최한이 감시중이에요.”
케일이 라온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싸우지 말라고 말 안 했던가?”
“마비시켜두는 건 싸우는 게 아니다, 인간.”
라온이 당당하게 말했다.
“약한 인간을 죽도록 팬 나쁜 놈이다. 아주 위험하다. 그래도 네가 손님으로 대우하래서 팔다리는 안 자르고 놔뒀다.”
평균 8살의 무시무시한 손님 대접에 케일은 슬쩍 몸을 떨었다.
‘어쩌다 애들 교육이 이 모양 이 꼴이 됐지?’
아무튼 정신이 드니 속이 쓰리도록 배가 고팠다.
“나 식사 좀 갖다 줘. 그리고 그... 사람은 괴롭히지 말고 날뛰지만 않으면 그냥 놔둬. 나랑 해야 할 말이 있어서 이따 찾아갈 거라고 은홍이랑 최한한테도 말해둬.”


밥을 다 먹고, 라온과 론과 로잘린과 라크와 기타등등에게 자기가 걸을 수 있으며 침대 밖으로 나가 자기 발로 서도 위험하지 않고 쓰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고 난 케일은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진짜 최한이 갇혀있는 방으로 갔다.
진짜 최한. 자기가 떠올린 표현에 케일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쪽이 오리지널인 건 맞지만 이쪽의 최한이라고 가짜는 아니었다. 더 이상 [영웅의 탄생] 속 그 등장인물이라곤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을망정 그는 최한이었고 케일 자신의.
최한을 자신의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알 수 없어 케일은 잠시 머뭇거렸다. 부하가 아닌 건 확실했다. 동료. 일행. 아니면...
‘친구..라곤 할 수 없겠지. 이렇게 속이고 이용하는 친구가 어디 있어.’
한 말은 지키는 케일이지만 대놓고 거짓을 말하지 않았을 뿐 주위 사람들을 잘도 기만하고 자기 뜻대로 조종하며 이용했다. 편안하고 안정된 백수 라이프를 위해서. 자기가 최한이나 그 일행의 힘을 빼앗은 건 아니라고 합리화 했지만 케일은 이미 최한의 동료를 역할을 주인공으로서 그가 가졌을 많은 것들을 빼앗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문답 무용으로 자길 죽일 듯이 두드려패던 사람에게 보복할 마음이 전혀 안 드는 건 그래서였다.
“케일님!”
케일이 고개를 들자 최한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가 표정에 걱정을 가득 띄운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케일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쭉 살폈다. 특히 작살났던 발목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케일님, 이자는 제가 목숨 걸고 감시할 터이니 걱정하지 마시고 돌아가서 쉬십시오. 몸도 성치 않으신데...”
“성해.”
“네?”
케일이 다쳤던 쪽 발목으로 깨금발을 뛰어보였다. 최한이 당장이라도 심장마비를 일으킬 것 같은 표정으로 달려와 그를 안아들었다.
“이러지 마십시오.”
“최한?”
“케일님께서는 늘 괜찮다고 하시지만, 저는.....”
최한이 입술만 몇 번 달싹이고 입을 다물었다.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눈을 돌려 케일을 외면했다.
“...최한.”
케일이 그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내려줘. 나 저 사람하고 이야기 해봐야 해.”
최한은 잠시 고민하더니 케일을 내려놓는 대신 안아든 채 자기가 방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오리지널 최한과 에르하벤과 온홍이 있었다.
“어디서 이런 걸 주워온 거냐.”
에르하벤이 물었다.
“글쎄요, 제가 주워온 게 아니라서 답을 드릴 수가 없네요.”
“정말로?”
그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케일과 최한을 보았다.
“발목은 완전히 나았을 텐데?”
“예, 나았습니다.”
그가 다시 한 번 최한의 어깨를 두드려 내려달란 신호를 보냈다. 최한은 마지못한 태도로 천천히 그를 내려놓고 옆에 부축했다.
-다행이다!
온홍이 달려와 케일의 다리에 몸을 부볐다.
-걱정했는데.
-우리도 옆에 있고 싶었는데.
-아프면 안 되는데.
“안 죽는다고 했잖아.”
케일이 웃으며 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 말한 건 지켜.”
“하!”
명백한 비웃음 소리에 온과 홍은 발톱을 세우고 상대를 노려보았고 최한은 검을 뽑았다.
그 모든 적의에도 오리지널 최한은 반응하지 않았다.
“망나니 케일 헤니투스.”
그가 경멸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케일을 노려보았다.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지금부터 말할 생각이야.”
케일이 건조하게 대꾸했다.
“그러니 잠시만 싸움 걸지 말고 기다려.”
그러고 케일은 에르하벤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게 어찌된 일인지, 뭔가 알고 있는 거냐?”
에르하벤이 호기심을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그럴 리가요.”
케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거짓은 아니었다. 저 최한이 어쩌다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는 실제로 전혀 짐작도 안 가니까.
“그럼 뭘 말한다는 거지?”
에르하벤의 탐색하는 눈빛을 마주하며 케일은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서로 대화를 해보자는 거지요. 각자의 입장과 알고 있는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대화를 하다보면 모르던 것도 알게 되고 오해도 풀리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허.”
에르하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 어디 네 식대로 해봐라.”
“그 전에 말입니다.”
케일이 최한과 온 홍, 그리고 문 밖에 발 디딜 틈 없이 모여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아무도 엿듣지 못하게 이 방을 방음해주실 수 있나요?”
에르하벤은 당장이라도 튀어들어올 것 같은 라온을 바라보았다.
“뭐 그 정도야 쉽지.”
“에르하벤님까지 포함해서요.”
그 말에 에르하벤이 표정을 지우고 케일을 바라보았다.
“내게도 비밀로 하겠다고?”
“절대로 이 세상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럽니다. 에르하벤님께는 대화 결과에 따라 일부 정도는 말씀드리겠습니다.”
“케일님...”
최한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의 팔을 잡았다. 케일은 그를 외면했다.
“저놈한테는 말할 수 있고?”
에르하벤이 오리지널 최한을 턱짓했다.
“저 사람은 우리 세상 사람이 아니니까요.”
단언하는 케일을 에르하벤이 한참 주시했다.
“죽음의 맹세가 걸려있는 거냐?”
에르하벤이 말했다. 케일이 웃었다.
“제 목숨 따위보다 훨씬 큰 게 걸려있답니다.”
최한이 케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에르하벤이 케일을 바라보았다. 케일은 웃는 낮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좋다.”
에르하벤이 물러났다.
“대화가 끝나면 문 손잡이를 세 번 두드려라.”
그가 최한과 온 홍을 몰아 방을 나가려 했다.
“안됩니다, 케일님!”
최한이 케일에게 매달렸다.
“저놈은 위험합니다. 케일님을 공격했던 자와 단 둘이서만 대화하시겠다니 그렇게 둘 수는 없습니다!”
“...최한.”
케일이 최한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나 믿지?”
“케일님.”
“나는 이미 네 신뢰를 사려고 목숨을 걸었다.”
최한이 움찔했다.
“그게 부족하면, 새로 맹세를 해야할까?”
“아니....오.”
최한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어차피 이 이야기는 안 해주실 거잖습니까. 그 때 그랬듯이.”
“그래.”
케일이 최한의 손등을 토닥였다.
“괜찮을 거다. 저 최한도 너고, 말이 통할 테니까.”
구경꾼들은 물론이고 대화 당사자인 오리지널 최한마저도 완전 헛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을 했으나 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히... 다시 나와주십시오.”
“그래.”
케일이 최한을 문 밖으로 떠밀어 보냈다. 온과 홍도 주춤주춤 방을 나갔다.
마지막으로 에르하벤이 나가고 문이 저절로 탁 닫혔다. 오리지널 최한이 문쪽을 바라보았다.
“느껴지는 마나가 심상치 않던데, 저 사람은 뭐지?”
“고룡.”
“....뭐?”
자세한 설명 없이 케일은 의자를 찾아 최한 앞에 마주보고 앉아 다리를 꼬았다.
“질문해.”
“뭐?”
“네 쪽이 모르는 게 많을 테니까, 먼저 질문하라고.”
미소도 지우고 세상 무심한 눈을 하고 있는 상대를 마주하고 최한이 마른침을 삼켰다.
“넌 누구지?”
“김록수.”
예상과 다른 대답에 최한이 눈을 깜빡였다가 곧 그 뜻을 파악했다.
“너.....”
“너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에서 살던 사람이다. 너와는 다르게, 나는 이 몸에 깃들어 버렸지만.”
케일이 자기 쪽을 손짓했다.
“갑자기 판타지 세계에 들어와서 우왕좌왕하고 있다가 이쪽의 너를 만났어. 별 일은 안 했어. 밥 먹이고, 영주님께 해리스 마을 상황 전해드리도록 주선하고. 보통 그 정도는 하잖아.”
같은 한국 사람을 눈 앞에 두고 있다는 충격이 큰지 최한은 아무 말도 않고 멍하니 있었다. 케일은 계속 말했다.
“좀 정신 차리고 주변을 파악하고 나니 세상이 완전 괴물투성이더라. 나도 어디 가서 한 방에 죽어 나자빠지지 않을 만큼은 되고 싶은데 검도 마법도 전혀 재능 없는 몸이라 수련 없이 강해질 수 있는 힘을 찾았고 그러다보니 고대의 힘을 모으게 된 거지. 헤니투스가는 매우 부유하거든. 망나니짓 그만둬서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 돈 좀 쓰니까 어렵진 않더라.”
최한이 아무 반응 없이 듣고만 있는 게 조금 무서웠지만 케일은 계속 말했다.
“최한이 왜 나를 따르는지는 나도 몰라. 그 때 너 워낙 힘들어보였으니까, 조금 잘해준 상대인데도 큰 은혜라도 입은 듯이 느껴졌을 지도 모르지.”
케일이 말을 맺었다.
“모두 내가 그 망나니 케일 헤니투스보다는 조금 나은 인간이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자, 이게 내가 누군지, 최한은 어떻게 했는지, 고대의 힘은 어쩌다 모았는지 네가 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최한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케일은 불안한 기분으로 그를 응시했다.
한참만에 최한이 말했다.
“거짓말 하지 마.”



오해 1 ㅣ- 기타

Characters: 케일. 최한. 라온. 기타 케일네 일당들
Rating: G
Warnings: 원작 수준의 폭력
Summary: 케일 앞에 원작 최한이 나타나다.


백망되 팬픽. 최한 케일 최한.

짱돌 얻으러 가기 직전 시점. 일행을 레어에 남겨두지 않고 모두 데려와 해리스 마을에서 며칠 쉰다는 설정.




‘하, 귀찮은데....’
케일은 어둠의 숲에 들어가기 전에 며칠 쉬어서 체력을 비축해두고 싶었다. 드래곤 둘이 동행할 테니 짱돌은 무서울 것이 없지만 어둠의 숲 안을 돌아다니며 찾으러 다닐 일은 상상만 해도 피곤했다. 오래 걸어야 하고 노숙도 해야 했다.
그러나 최한과 부단장은 새벽같이 일어나 뒷마당에서 훈련을 시작했고 늑대 아이들도 당연히 합류했다. 정말로 소박한 해리스 별장은 밖에서 들리는 소음을 잘 막아주지 못했다. 거기에 더해 로잘린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온홍이 운동을 하라고 케일을 쪼아대었다.
-운동을 해야 오래 사는데.
-오래 살아서 여기저기 많이 가보고 해야 하는데.
끔찍한 잔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는 기분에 케일은 휘휘 고개를 젓고 주변을 다시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그가 멀리 별장 쪽을 바라보았다.
‘좋아, 이 정도면 그 녀석들이라고 해도 안 보이고 안 들리겠지?’
이러려고 일부러 모두 떼어놓고 혼자 나왔다. 케일은 근처 바위에 털썩 앉았다. 온 홍한테는 마을을 한 바퀴 돌고오겠다고 했지만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다. 여기서 시간 좀 때우다 오래 산책한 척 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아, 잠이나 자고 싶은데...”
아무리 그래도 바위에 앉아 잘 수는 없었다. 어디 적당히 기대거나 누울 자리가 있나 케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
좀 떨어진 나무 그늘 아래 최한이 있었다. 케일은 눈을 깜빡였다. 분명 아까는 없었던 것 같은데. 그야 소드마스터인 최한이 마음만 먹으면 케일 눈에 안 띄게 움직이는 건 식은 죽 먹기겠지만.
“음?”
케일을 발견한 최한이 그에게 다가왔다. 케일은 위화감을 느꼈다. 최한이 뭔가 이상했다.
“왜?”
최한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케일은 위화감의 근원을 알아차렸다.
이 최한은 자기와 눈이 마주치고도 표정이 밝아지지 않았다.
낮선 표정을 한 최한이 케일 앞에 와 섰다. 자기보다 훨씬 강한 상대의 차가운 눈빛을 받으며 케일은 옴쭐달싹 할 수 없었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상대는 최한이 아니다. 그 생각이 떠오름과 동시에 케일은 몸을 돌려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최한이 한 발 빨랐다. 순식간에 케일의 앞을 막아선 최한이 손을 뻗었다. 케일은 자기도 모르게 방패를 꺼냈다.
파창-!
최한의 주먹에 깨지지 않는 방패가 깨져나갔다.
“미친..”
마법 폭탄도 막았던 방패였다. 작게 만들긴 했어도 칼도 아닌 주먹에 부서질 줄은 정말 몰랐다.
저건 최한이 아니지만 최한이 맞았다. 저 주먹에 맞았다간 한방에 골로 간다. 케일은 바람의 소리를 이용해 도망치려 했다.
최한은 손쉽게 그를 낚아채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등에 가해진 충격에 숨이 날아간 케일은 꼼짝도 못하고 최한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작게 고개를 갸웃했다.
“망나니 케일 해니투스처럼 보이는데, 언제 이런 힘을 얻었지?”
망나니 케일 해니투스.
케일은 상대의 정체를 깨달았다.
‘진짜 주인공? 아니 그런 게 왜 여기 지금 나타나는데?’
이유가 어쨌건 한가지는 확실했다.
해리스 마을 사람들을 버러지 취급했던 그 망아니 케일 헤니투스가 여기 이 마을에 있어선 안 되었다.
“대답은?”
최한이 주먹을 쥐었다. 생명의 위협에 직면한 고대의 힘이 케일의 의지와 상관없이 반응했다.
쾅!
방패는 소용이 없었다. 불벼락이 최한을 내리쳤다. 단 몇 초 라도 그가 발이 묶이길 바라며 케일은 바람의 힘을 휘감고 집으로 달렸다.
“최-”
구원을 요청하는 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나뒹군 케일의 심장이 다급히 활력을 펌프질했다. 등이 거대한 망치로 후려 맞은 듯 아팠다. 척추가 부러졌어도 이상하지 않은 충격에 케일은 쓰러진 채 움직이지 못했다.
이정도면 최한의 공격이라도 잠시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모아들였던 힘이 순식간에 전부 무용지물이 되었다. 피 섞인 기침을 토하며 케일은 공포에 떨었다.
“내, 내가 잘못했어!”
최한이 더 말이나 행동을 하기 전에 케일이 소리쳤다.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고 반성하고 있으니까 제발 용서...”
자기가 하지 않은 잘못을 빌며 최한을 올려다 본 케일은 문득 섬뜩함을 느꼈다. 시간이 흘렀다고 마을 사람들을 잃은 직후 일이 잊혀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지금 최한의 눈빛에 어린 살기는 이상했다. 이미 옛날에 비오는 날 먼지나게 패줬던 패배자 상대로 지을 표정이 아니었다.
“그 힘, 어디서 났지?”
“....응?”
케일이 눈을 깜빡여 눈물을 털어내었다.
“어... 지금 궁금한 게....”
“대답해!”
최한이 소리쳤다. 케일은 영문을 몰라 멍하니 있었다. 뒤늦게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 했으나 그는 더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최한이 그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헉! 크..커헉..”
살살 찼는지 몸이 두동강 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장이 뒤흔들리는 충격에 케일은 속절없이 땅바닥을 긁었다.
“단순한 망나니라고 생각했었는데, 뭘 숨기고 있었던 거지?”
손상을 수복하려는 재생의 힘이 몸에 돌자 아픔은 가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피섞인 기침이 자꾸 터져나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케일의 사정따위 최한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다시 묻겠다. 그 힘, 어떻게 얻었지?”
뭐라도 말을 해서 최한을 진정시켜보려던 케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가 고대의 힘을 얻은 방법.
‘그걸 말해줄 순 없잖아?’
최한이 왜 그걸 알고 싶어하는지도 케일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욕심껏 고대의 힘을 모아들이긴 했어도 최한이나 그 일행의 힘을 빼앗은 건 아니었다. 방패는 애초에 주인도 없었다. 최한이 왜 흥분하는지 케일은 알 수가 없었고 그래서 뭐라 꾸며댈 말도 찾지 못했다.
그 침묵을 최한은 다르게 해석했다.
“입을 다문다 이거지.”
그가 케일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렸다.
“전에 맞은 건 장난이었다는 걸 알게 해주지.”
‘얘 왜 이래!!’
케일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최한은 적한테는 가차 없긴 해도 기본은 선한 사람이었다, 주인공 답게. 예전에 악연이 좀 있기는 했어도 그에게 새로 해를 끼친 것도 없는 피라미 상대로 이렇게까지 하는 건 이상했다.
“아악!”
그러나 지금 주인공 캐해석을 다시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최한이 그의 팔을 잡아 비틀었기 때문이었다.
“말 할 마음이 들면 얘기해.”
그 말을 시작으로 최한이 케일을 때리기 시작했다. 원작의 망나니에게 이랬을까 싶을 만큼, 빠르고 정확하게 아플 부분만 골라서, 그래도 죽지는 않을 만큼 두들겨 팼다.
케일은 뭐든 말하겠다고 외치고 싶었다. 항복이라고 살려달라고 뭐든 말하고 시키는대로 할테니 죽이지만 말아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최한은 자기가 때렸는데도 멀쩡해보이는 케일의 내구도를 오해했고, 몸이 상하는 만큼 심장의 활력이 온힘을 다해 재생의 힘을 뿜어내는 케일은 죽은피를 계속 토하느라 도저히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아, 아흑, 쿨럭, 자... 아악!”
토해낸 피가 옷을 적셨다. 계속 심장이 쿵쿵 뛰어대서 케일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케일이 눈물콧물 흘리며 피까지 토해도 최한은 묵묵히 폭력을 행사할 뿐이었다. 힘조절을 하는지 당장 팔다리가 부러져 날아가거나 내장이 터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케일이 뭔가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은 되었다.
‘답을 들을 거면... 잠깐 멈추기라도 하던가....’
최한의 손속을 몸으로 느끼며 케일은 최한이 첫 번째로 동료삼은 이가 고문 기술자라는 사실을 새삼 기억했다. 원작 최한은 선한 이지만 로잘린을 암살하려던 대공가에서 비크로스가 솜씨를 발휘하는 동안 눈돌리고 있지는 않았었다.
차여 구르던 몸이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쳐 멈췄다. 얼마나 맞았는지 재생력이 있음에도 더 이상 아픔이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대체 뭐라고 말해.’
최한이 대답할 시간을 줬대도 케일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방패만 해도 자기 영지 내였으니 뭐라고 핑계를 댈 수도 있지만 온 사방에 흩어져있던 고대의 힘을 전부 모아들이는 건 용도 미친 운이라고 한 일이었다. 게다가 최한이 이렇게 고문까지 할 정도로 흥분하는 이유를 모르는 이상 섣불리 거짓말을 하기도 어려웠다.
‘아파.....’
온 몸 구석구석 안 아픈 데가 없었다. 케일이 숨을 몰아쉬며 최한을 보았다.
아픈 게 싫고 죽는 게 싫어서 지금껏 그 고생을 했는데, 짱돌도 얻기 전에 여기서 주인공에게 맞아죽을 위기라니.
짱돌. 케일은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지금 그의 몸은 심장의 활력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재생이 조금만 삐끗해도 갈기갈기 터져버린다고 에르하벤이 말했다.
귓가에서 쿵쿵 뛰는 심장소리가 전에 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최한은 분명 죽지는 않을 만큼 조절해서 때린다고 생각중이겠지만 실상 케일은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꽤 버티는 걸.”
최한이 그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좀 더 세게 가야 하나.”
“아-”
‘안 돼 그럼 난 죽어!’라고 외칠 틈도 없었다. 최한이 다리를 들어 케일의 발목을 짓밟았다.
발목뼈 전부가 단번에 으스러지는 고통에 케일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발목이 아니었다. 케일은 이를 악물고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재생의 힘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최한은 날 죽이지 않아, 죽이지는 않아, 버티다보면 누가 올 거야, 누구라도 눈치채고 와줄 거야, 그러니 제발....’
최한이 케일의 다른 쪽 발목에 발을 올렸다. 피투성이가 되어 가슴팍을 움켜쥐며 벌벌 떠는 케일을 내려다보다 그가 잠시 망설였다.
“왜 그렇게까지 입을 다무는 거지?”
최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죽음의 맹세가 걸려있나?”
뜻밖의 말에 케일이 놀라 최한을 올려다보았다.
그야 걸려있긴 하지만, 그건 이쪽의 최한에게 한 맹세였다.
“그렇다면 심문해도 소용 없겠지만... 그놈들이 죽음의 신의 사제까지 손에 넣은 건가.”
최한이 중얼거렸다. 케일이 눈을 크게 떴다.
‘그놈들? 설마.... 암?’
그리고 케일은 이 상황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꼬여있음을 깨달았다.
“할 수 없지.”
최한이 한숨을 내쉬고 몸을 굽혀 케일의 목을 손으로 쥐었다.
케일은 피하려 했으나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가 도리질을 쳐도 최한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죽는다.
온 몸이 부서질 것 같은 아픔. 정말로 부서진 발목. 점점 더 커지다 이제는 박자가 어긋나게 들리는 박동소리. 최한이 손가락만 까딱하면 꺾여버릴 목.
“사, 살려줘....”
나는 네 적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해도 소용 없기도 했다.
“케일님!!”
막 정신을 놓으려는 케일을 비명과 같은 고함이 두들겨 깨웠다. 목을 감쌌던 손이 사라졌다. 눈을 뜬 케일은 자기 앞에 버티고 선 등을 보았다.
‘우리...최한.’
케일을 따르는, 이 세계의 최한이 케일을 감싸고 나서서 다른 자신과 마주보고 서 있었다.
“감히...”
억눌린 목소리와 함께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두 최한은 케일에게는 보이지도 않는 빠르기로 서로에게 덤볐다.
케일에게 보호막이 씌워졌다.
“약한 인간!”
라온이 모습도 감추지 않고 케일 옆으로 날아왔다.
“어쩌다 이렇게 맞은 것이냐! 약한데 왜 싸움을...”
“포션.”
케일이 힘겹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발목에.. 빨리.”
심장이 무슨 메디컬 드라마에서 삐-소리 나기 직전처럼 마구잡이로 뛰고 있었다. 기분탓인지 몰라도 팔다리가 잡아당겨지고 몸이 팽팽해지는 느낌이었다.
라온은 즉시 아공간에서 최상급 포션을 꺼내 으스러진 발목에 부었다. 한 병 더 따서 케일의 입에도 꽂아주고 병 세 개의 목을 한꺼번에 날리곤 발목에 콸콸 부었다.
“조금만 버텨라, 약한 인간. 죽으면 안 된다!”
케일은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것만도 죽도록 힘들었지만, 자기가 살아있고 살 거라고 알려주지 않으면 라온이 다 죽여버리겠다느니 하는 험악한 말을 할 것 같았다.
라온은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케일을 보며 포션병을 뚝뚝 분질러 케일에게 부었다. 박동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고 이 정도 뿌렸으면 죽은 사람도 살아나겠다는 기분이 들 때 쯤 해서 케일이 손을 들어 라온을 막았다.
“왜 그러냐 인간?”
“아깝잖아.”
이건 왕세자 돈도 아닌데. 포션값이 아깝게 느껴지는 걸 보니 살만해진 게 분명했다.
“네 목숨보단 아깝지 않다!”
라온이 소리쳤다. 그 때 실드쪽으로 검강이 날아왔다. 스쳤을 뿐인데 실드 두 겹이 단번에 깨져나갔다. 라온이 최한들을 돌아보며 벌컥 화를 내었다.
“싸우려면 멀리 가서 싸워라! 약한 인간이 위험해지면 이 위대한 용이 둘 다 가만 안 둘 거다!”
“케일님!”
최한이 싸움을 그만두고 케일의 곁으로 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숙해서 다 막지 못하고...”
“응급처치는 했다. 빨리 옮겨서 제대로 된 치료를 해야 한다.”
라온이 주장했다. 케일은 또 다른 최한은 어떻게 되었나 고개를 빼고 최한 뒤를 넘겨다보았다.
다행히 이쪽 최한도 저쪽 최한도 큰 부상을 입고 피칠갑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다른 세계의 최한은 검을 내린 채 어이없다는 눈으로 ‘케일님’을 챙기는 또 다른 자신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 죽이면 안 돼.”
고대의 힘을 고갈 직전까지 쓴 여파로 죽도록 배가 고팠다. 밥도 먹어야 하고 이 것도 수습해야 할 텐데 의식이 흐려졌다.
“알았다! 곱게 죽여주지 않는다!”
다섯 살이 끔찍한 소리를 했다. 케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싸우지 말고, 내... 손님으로...”



세계의 중심 65 ㅣ- 회색도시&검은방



‘아예 아무 말 말고 도망나올 걸 그랬나.’
여관을 나오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뒤따라오는 기척을 느끼고 허강민은 후회했다.
“저... 허강민씨.”
류태현이 그의 팔을 살짝 잡았다.
“너도 느꼈냐?”
“네. 양수연씨네요.”
허강민이 잠깐 멈췄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응? 양수연? 하무열 교수님이 아니고?”
“네. 그야, 하무열 교수님이 정말 손 놓으신 건 아닐테고 양수연씨를 배후조종하고 계시겠지요.”
“...너한테까지 읽히다니 하무열 교수님도 끝장이구나.”
“끝장일 것 까지야.”
류태현이 조금 뾰로통해졌다.
“저 바보 아니거든요. 하무열 교수님이 외출 허가 내주면서 아무 것도 안 하는 쪽이 이상하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허강민이 조금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오늘은 아무 문제도 없이 데이트하고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걱정꾸러기 노인네라고 교수님을 놀리지.”
“노인네 소리 들을 정도는 아니잖아요. 걱정꾸러기라는 쪽에는 찬성하지만, 또 워낙 이런저런 일이 많았으니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고....”
“응, 그래. 됐으니까 하무열 교수님 얘기 그만하고 데이트나 하자. 양수연이라면 교수님보다는 상식이 있으니 노골적으로 방해하거나 끼어들지는 않겠지.”
“예.”
류태현이 싱글싱글 웃었다.
“그럼 데이트를 선택하고 집..... 윽.”
그가 어깨를 움츠렸다. 허강민이 그를 째려보았다.
“........어쩔 수 없어요! 학생이 지도교수의 영향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그 가설 재고해보는 게 좋을 거다.”
허강민이 말했다.
“내 지도교수는 무려 김재하 아니면 하무열이거든.”
류태현이 벼락에라도 맞은 듯 몸을 떨었다.
“앞문에 늑대 뒷문에 호랑이....”
“그리고 나 역시 맹수지. 선량하고 무고한 나무꾼 같은 게 아니라.”
허강민이 씩 웃었다.
“늑대랑 호랑이를 싸움붙인 뒤 나무꾼을 물고 달아나볼까.”
그렇게 말하며 허강민이 류태현의 팔을 잡아당겨 팔짱을 끼었기 때문에 류태현은 나무꾼은 누구냐고 물어볼 필요가 없어졌다.
“물려가는 게 아니고 제발로 따라가는 겁니다.”
류태현도 허강민의 팔을 단단히 끼워 잡았다.
“그리고 나무꾼도 무서운 도끼를 휘두르거든요?”
“그래그래.”
허강민이 류태현의 머리를 토닥이는 시늉을 했다.
“데이트하러 가면서 지도교수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 시간도 이르고 금방 먹고 들어가야 하니 별로 대단한 데를 예약하지는 못했는데, 괜찮아?”
“안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허강민씨와 데이트 하는데.”
류태현이 행복하게 웃었다.
“말린 생선국만 안 나오면 돼요.”
“학식이냐, 그런 게 나오게.”
두 사람은 애인답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걸었다. 둘을 미행하는 양수연은 아직 여름도 다 안 지났는데 밤공기가 차다고 몸을 떨었다.


‘말썽꾼 두 놈은 잘 놀고 있으려나.’
하무열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제 슬슬 해가 넘어가는지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런 어수선한 때 안전치도 못한 곳에서 굳이 나가 돌아다니겠다고 고집을 부리기는, 에잉...”
움찔.
하무열이 깜짝 놀라 방금 움직인 것, 즉 하성철의 등을 빤히 쳐다보았다.
바짝 긴장해 있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 머리 속에서 무슨 생각이 흘러가는지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날 보고 한 소리는 아니겠지,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설마 눈치챈 건 아닐 거야. 티 내지 말고 모른 척 하자. 자연스럽게 뭔가 다른 화제를 꺼내볼까..... 까지 생각했으려나.’
“크흠, 저, 하무열 교수님. 오늘치 레포트를 채점하다 든 생각인데 말입니다...”
“어디 가보고 싶으신 데가 있습니까?”
자연스럽게 일어나 돌아서려던 하성철이 다시 딱 멈춰섰다.
“.....하무열 교수님은 남의 마음도 읽으시는 겁니까?”
“그럴리가요. 별 뜻 없이 중얼거린 혼잣말에 그리 반응하시니 혹시나 해서 찔러본 것 뿐입니다.”
“정말로 그것만으로 이렇게....”
하성철이 어쩐지 원망스런 눈빛으로 하무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까 제 한 말은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저 제자 녀석들이 이런 시국에도 사랑 놀음에 열중하기에, 외로운 몸에 심술이 나서 한 마디 투덜거린 것뿐입니다.”
“그.... 제가 생각하던 것도 본질적으로 그거나 별 다를 바 없는 일입니다.”
하성철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 정문 근처에도 번화가라면 있고 장신구나 화장품 같은 것도 파는 데가 있는 것 알고 있습니다만, 그런 건 주로 학생들 대상이지 않습니까.”
“예.....”
하무열은 놀랐다. 하성철이 그런 걸 파악하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저희 식구는 수도에서 살다 갔으니까요.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예전 자주 가던 가게에서 선물이라도 조금 사다주고 싶습니다만.....”
이런 어수선하고 안전하지 못한 때에 개인적인 일로 혼자 외출을 하겠다고 말할 수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하무열은 머리를 짚었다.
“40대 독신남인 내가 왜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응원해줄 일이 이렇게 많은 거지......”
“교수님?”
“뭐, 혼자 가시지 않으면 되는 일이지요.”
하무열이 손뼉을 짝 쳤다.
“척 보기에도 노련하고 능수능란해서 빈틈이라곤 없어보이는 만만찮은 사람 하나에, 이걸로 부족하면....”
하무열이 밖으로 나갔다. 하성철은 어리둥절해서 뒤따라 나갔다.
“어이, 마당쇠!”
하무열이 1층에 대고 불렀다.
“거기 있냐?”
“아씨, 내 이름은 안승범이라고, 안승범!”
계단을 쾅쾅 울리며 안승범이 2층으로 올라왔다.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제대로 이름으로 부를 건데!”
“사람의 이름이란 상대를 특정해서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있는 거지. 내가 마당쇠라 불렀고 자네가 대답해서 우리 사이에 원활하게 의사 전달이 되었으니 사소한 건 상관할 필요 없지 않나.”
“남의 이름을 사소한 걸로 만들지 마!”
“하무열 교수님.”
하성철이 그의 팔을 잡았다.
“안승범 군과 친하신 건 알겠지만 지나친 장난은 치지 말아주십시오.”
“친한 거 아니거든!...요?”
안승범이 말꼬리를 내렸다.
“저런.... 성질 나쁜 교수님하고 친하다뇨, 저 이래봬도 친구는 가려 사귑니다.”
“저런, 그래서 친구가 없었군.”
안승범이 하무열을 노려보았다. 하성철도 그에게 비난의 눈빛을 보내자 하무열이 조금 기세를 죽였다.
“그래서 말인데 마당쇠... 아니고 안승범 군.”
하무열이 점잔을 빼며 말했다.
“하성철 교수님이 긴히 외출을 하실 일이 있으셔서, 호위겸 짐꾼이 필요한데 같이 가겠나?”
안승범은 막 ‘내가 왜’라고 쏘아붙이려다 하성철 교수의 눈치를 보았다.
“....하무열 교수님이 아니고 하성철 교수님 용건인 거 틀림 없죠?”
“그렇다네. 사모님 선물을 사신다고 하는데....”
갑자기 하무열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안승범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고보니, 자네도 선물 사가야 할 사람 있지 않던가?”
“어, 없어!!”
안승범이 소리쳤다.
“흠, 그렇단 말이지. 내 방금 말은 잊지 않고 민지은양에게 전하도록 하지.”
안승범이 다시 입을 벌렸으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하성철이 그의 어깨를 살짝 짚었다.
“저, 나이든 사람의 오지랖이라고 생각해도 할 수 없네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좋아하지 않는 척 하기보다는 선물이나 꽃 같은 것을 갖다주며 티를 내는 편이 낫다네. 하무열 교수에게 놀림당하기 싫은 심정은 이해하네만.....”
안승범이 하성철과 하무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다니 흐읍 숨을 들이쉬고 기합을 넣었다.
“그럼, 교수님이 어떤 선물이 좋을지 충고.. 좀 해주실래요?”
그 말에 하무열이 크게 놀랐다.
“아니 안승범군이 남의 충고를 다 구하다니....”
“댁한테 물은 거 아니거든! 애인도 없는 40대 아저씨한테 누가 그런 거 묻겠냐, 사모님하고 잘 사시는 분한테 물은 거지!”
“저, 너무 늦게 나가면 올 때 통금에 걸릴까 걱정입니다.”
하무열과 안승범이 2차전으로 넘어갈까 두려워진 하성철이 재빨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네, 그렇죠. 빨리 준비하고 나갑시다.”


미행을 들켰다.
예상했던 일이라 양수연은 별 동요 없이 경호를 계속했다. 서로 잘 알고 자주 접촉하던 마법사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애초 하지 않았다. 그래도 류태현이라면 노골적으로 감시원을 떨어내지는 않을 거라는 하무열 교수의 말이 맞아들어갔다.
‘류태현은 그렇다치고, 허강민도 감시를 놔두는 건 조금 뜻밖이네.’
허강민에게 딱히 애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의 변화는 꽤 흥미로웠다. 거기에 류태현이 끼친 영향도. 수도에 온 김에 들른 수사국에서는 방탕한 범죄자 귀족 나부랭이를 경호하는 신세가 된 양수연을 걱정하는 동료들도 많았다. 강수혁 눈치를 보느라 크게 말하는 사람은 없지만 허강민이 그에게 무슨 행패를 부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기 보기엔 그만하면 얌전하더라고 양수연이 말했을 때도 승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독하게 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만약 허강민이 사랑 때문에 바뀌었다고 말했다면 양수연이 속았다고들 할지도 모른다.
양수연도 사랑으로 사람이 더 낫게 변한다는 말은 믿지 않았다. 권혜연이나 민지은이 뭐라고 하든. 바뀐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사랑 때문에 낫게 바뀌기보다는 나쁘게 바뀌는 게 훨씬 쉬웠다. 정말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해서 과거의 죄과를 갚아야 할 필요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긴 해도 저 둘은 조금 응원해주고 싶긴 하지.’
허강민과 류태현이 고른 식당은 겉모습은 깔끔하고 음식은 평범했다. 경호 명목으로 따라온 거긴 해도 남의 데이트를 엿들을 생각까진 없었기 때문에 양수연은 두 자리 건너에 앉아 천천히 자기 식사를 했다. 류태현과 허강민이 도망갈 낌새도 없고 아무리 백선교가 천지분간 못하고 날뛰어도 설마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로 가득한 식당에서 대놓고 무슨 짓을 하랴 싶어 경계가 느슨해져 있기는 했다.
‘그래도 정신 차려야지, 졸릴 정도로 풀어져 있으면 어떡해......’
양수연은 눈을 뜨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럴수록 눈이 더 감겼다. 아직 초저녁이고 벌써 졸릴 정도로 피곤할 일이 없었다는 생각도 점차 뇌리에서 멀어졌다.


하성철이 데려간 곳이 뜻밖에 크고 화려한 고급 화장품점이었기 때문에 하무열도 안승범도 꽤 놀랐다.
“제 처는 원래 부유한 상인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하무열의 눈에 어린 의문을 읽고 하성철이 조용히 설명했다.
“처음에 장인 어른은 저를 집안의 변호사로 삼으시려고 학업을 후원해주셨습니다. 제가 졸업할 때 쯤 사업이 어려워져서, 제가 결혼하고 공직에 올라 집안을 부양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원래라면 더 좋은 것을 누렸을 사람이지요.”
“벌이가 문제라면 판사보다는 변호사로 개업하는 편이 낫지 않았습니까?”
하무열이 작게 물었다.
“범죄자를 변호하는 일은 영 성미에 안 맞고 잘 되지도 않더군요. 어차피 벌이가 적을 거라면 명예가 있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무열은 수긍했다. 그리고 벌써 온갖 여성용 물건들을 앞에 두고 자극이 뇌용적을 초과해버린 안승범을 툭툭 쳐서 정신 차리게 했다.
“기왕 선물이니 인상적으로 비싸고 화려한 물건도 좋겠지. 그래서, 뭘 골랐나?”
“그, 어... 그, 으음, 그게......”
안승범이 다시 한 번 진열되어있는 화장품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다시 혼란에 빠졌다.
안승범이 넋이 나가 있는 동안 하성철은 별로 고민하지 않고 점원에게 박재분의 이름을 대었다. 곧 그쪽에서 몇가지 화장품과 도구들을 가지고 나왔고 하성철은 그 중에 두어가지를 골라 포장을 부탁했다.
“그리고 이 청년이 좋아하는 여성에게 선물을 하고 싶다고 하는데, 활기찬 젊은 여성에게 어울릴만한 것을 추천해주겠나?”
하성철의 말에 안승범의 정신이 돌아왔다.
“아, 그... 머리... 묶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안승범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말을 더듬었다. 점원들은 다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짓고는 색색가지 비단 리본을 꺼내 보여주었다. 안승범은 짙은 노란색을 골랐다.
리본의 가격을 듣고 안승범이 눈이 튀어나올 뻔 하기는 했어도 그 외에는 별 탈 없이 이들은 외출의 목적을 달성했다.
가게를 나가며 하무열은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자기도 여기에서 선물을 사다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누나라면 어떤 걸 좋아했을까 생각하다 고개를 젓고 걸음을 빨리해 일행에게 따라붙었다.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29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유비, 나 안 죽었어.”
마침내 공손찬도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좀 다쳤다고 왜 그렇게까지 걱정하는 거야? 네가 밥도 안 먹고 쳐다보다니 혹시 내가 아니라 너한테 뭔 일이 난 건가 무섭다.”
“난 너 걱정하면 안 돼?”
유비는 안심하는 대신 토라졌다.
“그런 일이 났는데 정말 멀쩡할 리 없잖아. 나도 너 걱정할 줄 알아.”
그렇다고 밥까지 못 먹은 적은 없지 않냐고 대꾸하려다가 공손찬이 맘을 바꾸었다.
이제까지 강도와 마주쳐본 적은 없었다. 그냥 교통사고나 시비 정도와는 완전히 다르게 느낄 법도 했다.
그리고 가끔은 유비가 자신을 챙겨줄 때도 있었으면 했던 것 같았다.
‘나도 완전히 멀쩡하지는 않은 모양이고.’
따뜻하고 맛있는 밥이 목을 넘어가자 몸이 얼마나 지쳐 있는지 실감이 났다. 식탁 앞에 앉을 때만 해도 조금도 느끼지 못했던 입맛도 점차 되돌아왔다.
다 먹고 치울 때가 되자 유비가 슬쩍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글쎄, 손상향한테 가볼까?”
그쪽은 무사한지도 보고, 설명도 듣고 싶었다.
충격이 커서인지 있었던 일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누군가 별일 아니었다고, 모든 일이 잘못된 구석 없이 제자리로 돌아갔다고 말해줬으면 싶었다.
“같이 가.”
유비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못 들을 뻔했다. 공손찬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유비를 쳐다보았다.
“네가 왜 따라와?”
역시 유비는 눈 떼면 자신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굴고 있었다. 일부러 엄격하게 딱 잘라 거절했다.
“괜찮으니까 집 잘 보고 있어.”
억지로 쫓아오면 정말 화내겠다는 뜻을 담아 그렇게 말하고 혼자 도원관을 나왔다.
그저 집 밖에 나왔을 뿐인데 바람도 상쾌하고 기분도 좋아졌다.
‘보통 강도 같은 걸 당하면 집 밖에 나서기 무서워진다던데. 어째 그 반대네.’


손상향도 오늘은 매니저 일을 쉬고 있다가 공손찬을 맞이했다.
“어서 와, 내가 도원관으로 먼저 찾아갔어야 하는데. 몸은 괜찮아?”
“너야말로.”
손상향 역시 겉으로는 전혀 다친 곳이 없어보여 공손찬은 얼떨떨해졌다.
역시 이상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더 컸다. 자신 덕분에 손상향은 무사할 수 있었다.
강동관의 상담실에서 이야기하게 될 줄 알았는데, 손상향은 공손찬을 집으로 데려갔다. 강동관에 사택으로 붙어 있어 금방이었다.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부유한 집안 살림을 보고 공손찬은 주눅이 들려 했으나 손상향의 태도가 워낙 친절해서 그럴 겨를도 없었다.
“오빠한테 다 들었어. 강도가 나타나서 흉기를 휘둘렀는데 네가 날 구해줬다고.”
“어, 그 정도야 당연히 해야 하는 거잖아.”
공손찬이 머리를 긁적였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너야말로.”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강도가 어쩌다 그런 큰길에서 멀지도 않은 곳에 나타났는지, 그래서 그 강도는 잡혔는지 같은 건 이상할 정도로 궁금하지 않았다. 가장 무서웠을 손상향이 먼저 말 꺼내지도 않는데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대신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강동관까지 오는 동안 생각한 말이었다.
“고등학생 전국대회 때 말이야.”
“응?”
“그때 일 사과하고 싶어. 미안해.”
손상향의 얼굴이 굳어졌다.
“실은 나도 적벽대학에 가고 싶었어. 그런데 돈이 없어서 못 간다고 하니 너무 속상해서......그래서 그때 그렇게 못되게 말한 거였어. 널 깔본 적은 없었어.”
“날 깔본 적, 없다고?”
손상향이 더듬거렸다.
“널 어떻게 깔봐. 대회에서 만난 중에 네가 가장 강했는데.”
손상향이 이걸 빈말로 받아들일 가능성을 생각하고 공손찬이 바로 말을 이었다.
“진짜야. 네가 없었다면 나도 이만큼 발전할 수 없었을 거야. 나도 대학에서 너와 계속 겨뤄보고 싶었어.”
“어......”
손상향은 대답할 말을 얼른 찾지 못했다. 공손찬뿐 아니라 그도 적벽대학에 가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지난 이야기지.”
같은 생각을 한 공손찬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장학금 탈 수 있는 대학으로 하향지원하고 체육 교사 같은 거라도 노려볼걸.”
“그게 무슨 말이야?”
손상향이 도로 간담이 서늘해진 표정을 했다.
“비룡권은 어쩌고? 비룡권 마스터로 이름을 날리려던 거 아니었어?”
“글쎄, 이젠 좀 허황된 꿈 같은걸.”
공손찬 스스로도 놀랄 만큼 술술 말이 나왔다. 전부터 담아놨던 말을 하듯.
“스승님도 대단한 고수인데 도원관은 그 모양이야. 내가 그걸 정말 되살려 놓을 수 있겠어?”
“할 수 있어!”
손상향이 왜인지도 모르고 펄쩍 뛰었다.
“맹호권도 우리 엄마 아빠가 살려낸 거야. 그 전까지는 별거 아니었어. 강동관은 아빠 유명세로 엄마가 차린 거라 전통 역사 그런 거 아예 없어. 도원관은 엄청 유서깊은 데라며.”
요즘 시대 도장에 역사 전통이 무슨 소용이냐고 말하고 다니던 자신이 왜 그 반대되는 말을 하느라 침을 튀기고 있는지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손찬이 저렇게 세상 다 산 얼굴을 하고 있으니 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공손찬은 꼭 성공하고 꿈을 이루어야 했다.
“꼭 비룡권 마스터가 안 돼도 좋으니까, 꿈은 크게 가져. 응?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도울게.”
공손찬의 표정을 보고 얼른 덧붙였다.
“생명의 은인이잖아.”
“어, 그래.”
공손찬도 비로소 배시시 웃었다.
“근데 좀 너무 거창하다. 은인이라니.”
“그럼 친구 사이에 라고 하면 어때?”
손상향이 살짝 손을 내밀었다. 아직도 머뭇거리는 기가 남아있었지만, 공손찬은 그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좋아. 오랜만에 친구가 생겼네.”
“내가 할 말인걸.”
둘 다 도장 운영에 몰두하느라 또래 친구를 사귈 여유가 없었다. 고등학교 때부터의 친구들과도 멀어졌다.
도장 운영하는 스트레스, 앞날에 대한 고민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생기다니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상향이랑 점심 먹고 갈게. 점심 알아서 먹고 강습 준비 해놔.
그런 카톡이 왔지만 유비는 안절부절 못했다.
“역시 강동관으로 마중가야 할까? 점심 먹고 딱 나가면 딱 맞을까?”
“오, 노. 공손찬 님은 아기가 아니라고요. 그보다는 맡은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게 중요하죠. 먼저 도장 청소부터 해요.”
“응, 그래.”
유비는 두 팔 걷어붙이고 조운의 지휘대로 온 도장을 반짝반짝하게 닦아놓았다. 점심은 아침에 차렸던 진수성찬이 많이 남았으므로 그걸 데워서 간단히 먹고, 강습 준비를 위해 교재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이팠다.
“늘 하던 대로 하면 되지 않습니까.”
보다못한 관우와 장비가 둘을 뜯어말렸다.
“공손찬 님도 괜찮을 거요. 미축 같은 인간도 잘 사는데. 아침에도 수선 피운다고 이상한 시선만 받았지 않소? 도리어 혼란스럽게 할 수 있으니 적당히 하시구랴.”
“응.”
유비가 축 처졌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조운은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점심 먹고 온다고 해도 이제쯤 올 때가 됐는데 말이죠.”
유비의 폰이 다시 울렸다. 유비는 화다닥 폰을 켜다가 떨어뜨릴 뻔했다.
-미안한데 상향이랑 저녁까지 먹고 갈게. 애들 어차피 적으니까 혼자 할 수 있지?


평소 둘이 하던 교습을 혼자 하니 눈앞이 팽팽 돌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원래는 공손찬이 전체적인 지도를 하고 유비가 개별적으로 보조했었는데 갑자기 유비 혼자 전부 해야 하니 눈 감고 밤길 더듬는 것 같았다. 그가 원래 아이들과 잘 맞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예 망쳤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자기가 고생한 것보다 공손찬이 이렇게 멋대로 교습을 쨌다는 점이 더 신경쓰였다. 이전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감기에 걸렸을 때는 쉬었지만 그건 아이들에게 옮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설명을 들으려고 해도 공손찬이 와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미축이 성인반 교습을 받으러 왔을 때까지도 도원관엔 버려진 강아지 표정의 유비뿐이었다.
“공손찬은 어딨냐?”
그냥 물어봤을 뿐인데 유비는 더욱 처졌다.
“무슨 일 있었어? 공손찬 어디 다쳤냐?”
“아니......”
힘없이 고개를 젓는 유비의 표정은 계속 어두워지기만 했다. 미축은 당황했다.
“그럼 어디 아파? 싸웠어?”
“아니.”
유비도 이걸 설명할 말이 없었다. 그냥 갑자기 공손찬이 무책임해진 것도 아니었다.
이번엔 꿈이 깨지는 광경을 직접 보지 못했다. 그러나 공손찬의 꿈이 무엇인지는 전부터 그도 뻔히 알고 있었다.
비룡권 마스터로 이름을 날리고 도원관을 부흥시켜 관장이 되는 것. 역대 관장들의 초상화가 걸린 곳에 자신의 초상화도 거는 것.
그렇게 어려서부터 확고하게 품어온 꿈이 이제 깨졌다.
도원관 관장도 비룡권 마스터도 될 마음이 사라졌는데 교습 같은 거 하고 싶을 리 없었다.
“야, 야, 공손찬한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미축이 창백해져서 유비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댔다.
그랬다가 문득 다시 물러나 도원관을 둘러보았다.
유비와 자신 외엔 아무도 없이 휑한 도장을 재차 확인하고, 심호흡을 하고 유비 앞에 똑바로 섰다.
“엄, 유비. 일단 삼가 조의를 표한다.”
“응?”
유비가 고개를 들고 전에 없이 엄숙한 미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공손찬의 명복을 빈다.”
“뭐, 뭐?”
“이럴 때일수록 마음 굳게 먹어야지. 이 형님이 있으니까 힘을 내. 너네 스승님한테 연락은 했어?”
유비가 턱이 떨어져 꼼짝도 못하는 동안 책상 아래에선 난리가 났다. 관우와 장비가 창 들고 뛰쳐나가려는 조운을 필사적으로, 조용히 뜯어말려야 했다.
“이거 놔. 저놈이 감히 누구 주군을 멋대로 죽여?”
“쉿, 쉿! 그렇다고 우리가 나서면 안 되지!”
관우가 속삭이며 조운의 한 팔을 붙잡았다. 다른 한 팔은 장비가 잡았다.
“저 인간이 좀 모자란 거 하루이틀 일이야? 그냥 큰형님이 알아서 설명하시면 되잖아.”
조운이 둘을 뿌리치기 직전 도원관 문이 열리며 풍경이 딸랑거렸다.
“미안. 오늘 많이 늦었지?”
공손찬이 상기된 얼굴로 유명 제과점 로고가 찍힌 쇼핑백을 들고 들어왔다.
“상향이가 자꾸 붙잡아서 말이야. 이거 고전당 카스텔라인데......”
비명도 못 지르고 주저앉은 미축을 보고 공손찬이 어리둥절해졌다.
“왜 그래? 내가 도깨비라도 달고 온 듯이.”
“아......공손찬?”
“그래. 너도 이거 좀 먹을래?”
유비도 이제 턱을 수습했다. 미축을 부축해 일으키고 공손찬에게 카스텔라를 받아들었다.
“아, 맛있겠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늦었어. 걱정했잖아.”
대회 우승날에도 사본 적 없는 최고급 가게의 비싼 케익이라니 유비는 도리어 더 불안해졌다. 물을 끓이고 카스텔라를 썰면서 공연히 더 예쁘게, 깔끔하게 썰려고 노력했다.
“상향이 좋은 애더라. 덕분에 오늘 오랜만에 실컷 놀았어.”
식탁에 앉아 공손찬이 미소지었다.
“다음주에도 만나기로 했어. 도원관하고 강동관 둘 다 휴일인 날로.”
“응, 잘 됐네.”
기계적으로 그렇게 답했지만 유비는 어째 안심할 수가 없었다.
공손찬이 저렇게 즐겁게 웃는 얼굴을 본 것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자기가 직전에 금메달 땄을 때도 저렇게 웃지는 않았다.


다음날 공손찬은 다시 제대로 교습을 했고 도장 일도 부지런히 처리했다.
그러나 완전히 예전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수련도 어쩐지 힘이 빠져서 했다.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혼자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유비가 먼저 말을 걸어도 상대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며칠 뒤엔 말한 대로 또다시 손상향과 만나고 왔다. 이번엔 일찍 돌아왔지만, 역시 전과는 달라진 것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 유비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좀더 똑똑했더라면 하는 생각은 어려서부터 늘 하던 것이었지만 이젠 더욱 간절해졌다.
드림배틀도 잊고 고민에 빠져 있던 어느 날, 공손찬이 컴퓨터 앞에 앉은 채 유비를 불렀다.
“나 여행 다녀오기로 했어.”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28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서서가 아니었다. 파란 색 장식 때문인지 굳은 표정 때문인지 보다 차가운 인상을 주었다.
“누구?”
손상향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신선이 그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짚었다. 심하게 지친 데다 적의라곤 드러나지 않은 동작이라 그만 손상향은 방어하지 못했다.
신선의 손이 닿자 그는 그대로 스르르 눈을 감았다. 푹 쓰러지는 몸을 신선이 부축해 공손찬 곁에 눕혔다.
“무, 무슨 짓이야!”
유비가 황급히 손상향의 맥을 짚었다. 빠르지만 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공격한 게 아니고 재운 겁니다.”
신선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저는 신선 주유. 이 분은 이제 기억을 지울 겁니다.”
“뭐라고? 대체 왜?”
유비는 일단 관우와 군신일체했다. 여차하면 공격하려는 태세를 읽었을 텐데 주유는 태연히 손상향의 이마를 한 손으로 짚은 채 다른 한 손에 찬 팔찌를 작동시켰다.
파란 영상이 떠올랐다. 손상향을 어떤 군주가 기습하고, 위기에 처한 손상향 대신 공손찬이 맞아 싸웠다.
영상 속의 공손찬을 보자 유비도 당장 과격한 행동에 나서는 대신 그 영상을 같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영상 속 공손찬이 궁지에 몰리면서도 끝까지 싸우는 모습에 유비는 부르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당장이라도 저기 뛰어들어 같이 싸우고 싶었으나, 이미 끝난 일이었다.
공손찬은 이미 탈락했다.
손상향은 정말로 아무 것도 몰랐다. 공손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대로 파악할 수도 없을 정도로.
그래도 뭔가 해보려고 어둠 속으로 걸어나간 순간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그럼 다음에 보자, 내 형제 신선들 중 누군가~
요사스럽게 웃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주유가 표정을 더욱 험악하게 했다.
영상이 꺼졌다. 주유가 팔찌를 다시 조작하자, 악몽을 꾸는 듯 괴로워 보이던 손상향의 얼굴이 점차 평온하게 풀어졌다. 혈색도 점차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유비도 방금 주유가 정말로 손상향의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손찬의 마지막 싸움을.
“어째서!”
비통하게 울부짖는 유비에게 주유가 설명했다.
“손상향 님은 배틀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드림배틀의 기억을 오래 갖고 있어봐야 혼란과 괴로움만 가중됩니다.”
“하지만 이거 좀 이상하잖아?”
조운도 나섰다.
“손상향 님도 군주의 이름을 지녔잖아? 어째서 아직까지 참가도 못했고, 앞으로도 할 수 없다는 거지?”
“전설의 이름을 지녔다고 해서 모두가 군주로 참전하는 것은 아니야.”
주유가 조운에게 답했다.
“그 사람 본인이 거절할 수도 있고, 다른 결격사유가 있을 수도 있어. 그걸 결정하는 건 신선이야.”
“그럼 손상향 님의 결격사유는 뭔데?”
지지 않고 묻는 조운에게 주유는 여전히 싸늘한 태도로 대꾸했다.
“말했잖아. 결정하는 건 신선이라고. 영웅패한테 가르쳐줄 의무는 없어.”
“지금 말 다했어?”
듣고 있던 유비가 소리쳤다.
“공손찬이 탈락했어! 조운의 군주가! 그런데 조운한테 가르쳐줄 의무가 없다고?”
주유가 당황해서 유비를 보았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건 다른 군주와 이미 약속한 일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다른 군주?”
유비도 이쯤 되자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손책이야? 어째서 자기 동생을 멋대로 방해하는 거야?”
“손책 님은 손상향 님을 보호하려는 거예요.”
“그게 이해가 안 돼. 이게 보호라고?”
“손책 님도 사정이 있어요.”
주유는 유비를 조곤조곤 타이르듯 말하고 있었다. 부드러워 보이지만 그의 뜻대로 따라줄 마음은 조금도 없는 태도라는 걸 유비도 알 수 있었다.
“좋아. 손책하고 얘길 해봐야겠어.”
유비는 손책의 연락처를 어디서 찾아야 하나 두리번거렸다. 주유는 아무 말 없이 파란 잔상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어쩌지? 손상향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전에 손상향 님이 두고 간 명함 있잖아요.”
조운이 가르쳐 주었다.
“거기에 사무실 번호도 있을 테니까, 그걸로 걸어서 손책 님을 찾으면 될 거예요.”
“그렇구나.”
허둥지둥 명함을 찾아보았다. 상담실 겸 사무실 책상 위를 한창 뒤지는데 파란 색 섬광이 다시 번쩍였다.
허공에서 주유와 함께 손책이 나타났다. 누워 있는 손상향을 보고 손책이 기겁해서 달려들었다.
“상향아!”
“지금은 그냥 자고 있을 뿐이에요. 깨고 나면 강도를 피해 달아나다가 공손찬 님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기억할 거예요.”
주유가 손책에게 설명했다.
“손책 님이 군주가 되신 후로 오경 님과 손상향 님, 손권 님에게는 선계의 존재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제가 조치를 취해두었습니다. 그런데 안량의 군주가 직접 이름을 주목하고 추격해와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대로 보호해달라고 했잖아!”
손책도 주유에게 항의했다.
“신선은 인간 군주에게 직접 간섭할 수 없습니다. 그 이상은 정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손책은 더 항의할 말을 찾아보기 위해 잠시 입을 다물었고 주유도 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둘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유비가 손책에게 물었다.
“나한테는 뭐 할 말 없어?”
“아, 그래.”
손책이 정신을 차리고 한숨 푹 내쉬었다.
“미안하다. 어떻게 된 건지 주유한테 듣고 왔어. 공손찬이 상향이 구해준 거지?”
“그것도 있고.”
유비가 숨을 들이쉬었다.
자신도 눈앞에서 일반인이 군주에게 쫓기고 있었다면 나서서 싸웠을 것이다. 탈락하더라도 원망하지 않고 보답을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찬이가 탈락했는데 아무렇지 않을 순 없었다.
“손상향이 군주가 될 길은 왜 막은 거야?”
“드림배틀은 위험하니까.”
손책이 곧바로 대답했다.
“우리 아빠가 드림배틀 때문에 돌아가셨어. 엄마랑 동생들만이라도 안전하게 지키고 싶다.”
“그러는 너는 왜 드림배틀을 하는데?”
유비가 따졌다.
“난 사정이 있어.”
“손상향은 사정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무슨 상관인데?”
손책이 벌컥 화를 내었다.
“난 상향이까지 위험해질까봐 이러는 거라고! 그래서 지금 참전하면 더 안전해지기라도 해?”
“그래서 전부 잊게 놔둘 거야?”
유비가 나란히 누운 손상향과 공손찬을 가리켰다.
“찬이가 무슨 생각으로 상향이를 도와줬는지, 상향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런 걸 다 지워버릴 작정이야?”
“그런 거 기억하면 뭐가 좋은데?”
유비는 어이가 없어서 대꾸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손책이 두 눈 꽉 감는 모습을 발견했다.
“난 봤어. 아빠가 죽는 모습. 그렇게 쉽게.......지금도 꿈에 나와. 영웅이고 뭐고 차에 치이니까 끝이었어!”
유비가 어쩔 줄 몰라하는 사이 손책은 돌아서서 손상향에게 다가갔다.
“그런 건 잊게 해주고 싶어. 너랑 공손찬에겐 미안하지만, 상향이가 그런 기억을 갖게 하고 싶지 않아.”
손책이 손상향을 부축해 업는 걸 유비는 보고만 있었다.
“주유, 그만 가자.”
“예.”
유비와 손책이 이야기하는 내내 없는 듯이 보고만 있던 주유가 한 걸음 나서서 손책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유비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실례 많았습니다.”
두 사람과 한 신선이 사라지고도 유비는 한참이나 움직이지 못했다.


아침 햇살이 따갑게 눈을 찔렀다.
‘창문에 커튼 치는 걸 잊었나?’
공손찬은 돌아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평소같으면 일어나서 커튼을 치거나, 그대로 아침 일정을 시작했을 텐데 오늘은 만사가 귀찮았다.
온 몸이 몸살이라도 난 듯 쑤시는 탓일지도 모른다. 이런 날은 수련도 평소대로 할 수 없었다.
‘무슨 일 있었던가?’
가물가물한 기억이 점차 뚜렷해졌다.
도장 일로 나갔다 오는 길에 손상향을 발견했었다. 아는 얼굴이라 무심코 좀 쳐다보고 있었더니, 노상강도가 나타나 손상향을 공격했다.
‘음......’
머리가 무거워서인지, 충격적인 경험이어서인지 기억이 흐릿했다. 평소 자신이 약하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는데, 정제되지 않은 적의와 함께 흉기까지 휘두르는 상대를 만나 싸운 경험은 대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혹독했다.
‘으......’
청소년대회 금메달리스트면 뭐하나. 막상 중요한 순간에 그렇게 무력해지다니.
속에서 무언가 울컥 끓어올랐다.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토해냈다.
“공손찬!”
유비가 또 노크도 없이 뛰어들어왔다. 하여간 자기가 아직도 애인 줄 아는 건 여전했다.
그래도 지금은 비명을 지른 게 자신이었다. 이불에서 고개를 내밀어 유비와 눈을 마주쳤다.
“괜찮아, 공손찬?”
유비는 당장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대답하는 대신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스승님보다도 먼저 만난 첫 번째 가족이고, 굳세지 못한 성격 때문에 걱정하면서도 이런 녀석이라 나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남몰래 의지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 아이를 어쩌다가 귀찮아하게 됐을까?
“공손찬, 나 잊어버린 거야?”
기어코 울어버리는 유비를 보고 공손찬이 당황했다.
“잊다니, 무슨 소리야? 내가 어떻게 널 잊어?”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고, 방금 자신을 도와 유비를 달랠 누군가를 찾으려 했다는 걸 깨달았다.
‘스승님을 찾고 있었나?’
스승님은 여행 떠나서 아직 안 돌아오셨다. 하지만 여차할 때 스승님을 찾는 버릇이 남아있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몸은 괜찮아? 아니, 어제 일은 기억나?”
유비가 여전히 울먹이며 묻자 공손찬은 다시 그에게 주의를 돌렸다.
“그만 울어. 나 안 죽었고 기억상실도 아니니까.”
그러고 보니 자신은 외출복에 잠바만 벗은 채로 눕혀져 있었다. 유비가 갈아입히기까지 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인데 그래도 불편했다.
“나 옷 갈아입게 좀 나가볼래?”
“어, 응.”
고개는 열심히 끄덕이면서도 유비는 미적거렸다.
“정말 괜찮은 거 맞지?”
“그래. 맞으니까 어서 나가.”
무서운 일을 겪고 몸져누운 건 자신인데 왜 유비를 달래주고 있어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결국 일어나서 직접 등을 떠밀다시피 하고서야 유비를 내보낼 수 있었다.
일단 도복으로 갈아입었다. 혹시나 해서 몸을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부러지거나 삔 곳은 물론 멍든 곳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긴 한데 좀 이상했다.
‘뭣에 홀린 것 같아.’
다시 어젯밤 일을 돌이켜 보려다가 퍼뜩 손상향을 생각해냈다. 그쪽이야말로 어떻게 되었나 걱정이 들었다.
문을 열고 나와보니 부엌에서 고소한 냄새가 풍겨왔다.
“조금만 기다려. 거의 다 됐어.”
아침 상을 차리느라 유비가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식비 아끼라고 잔소리가 나올 만한 상차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반찬들이 전부 공손찬이 좋아하는 음식들이라는 점이 더 신경쓰였다.
“유비, 나 멀쩡하니까 그렇게까지 안달하지 않아도 돼.”
가까이 가서 머리를 톡톡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유비가 억지로 웃는 표정을 그만두고 불쌍한 표정을 했다.
“정말?”
“응. 그보다 손상향은 어때? 그쪽이야말로 크게 다치지는 않았대?”
“엄.”
유비가 갸웃 했다.
“손책이 데려갔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렇게 크게 다친 거 같지도 않았고. 일단 먹자.”
아무리 자기 일이라지만 유비가 저렇게까지 남 걱정도 안 하고 자기 걱정만 하는 것도 기분이 이상했다. 게다가 전엔 자기 일에 나설 때도 저렇게 아기 돌보듯 한 적은 없었다.
도원관에 사람이라곤 둘뿐이어서인지 유비 한 명이 저러는 것만으로 도장 전체의 분위기도 다르게 느껴졌다.
잠시 부엌엔 두 사람이 밥 먹는 소리만 맴돌았다.
역시 이상하고 어색했다. 스승님 여행 떠나신 지가 언젠데, 두 사람 앉은 식탁이 유난히 허전하게 느껴졌다.
무심코 안을 둘러보다가 유비와 눈이 마주쳤다. 자기 숟가락 뜨는 것도 잊고 공손찬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27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유우가 워낙 약했기 때문에, 공손찬의 영웅심은 배틀을 한 번 치른 지금도 그리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드디어 혼자 싸워 승리를 쟁취했다는 고양감, 손상향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책임감과 정의감이 계속해서 흘러들었다.
대신 이번 상대는 정말로 강했다. 던지는 무기와 싸우는 것도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배틀이 길어지자 상대도 초조해진 것 같았다. 나비 군주의 영웅심이 노란 색으로 솟구쳤다.
강한 공격을 예감한 공손찬은 유니콘 스피어를 충전했다.
“호접선화륜!”
링블레이드가 빛나며 수십 개로 불어났다. 그것들이 나비처럼 너울거리며 한꺼번에 공손찬을 덮쳤다.
유니콘 스피어로 튕겨내며 전진했다. 어차피 전부 자신을 노리고 날아든다면 궤적을 놓칠 걱정도 없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공손찬을 보고 상대가 가면 아래에서 훗 웃었다.
“잊은 거 없어?”
손상향이 뇌리에 스쳤다. 당황한 순간 뒤에서 폭발음이 났다.
링블레이드 몇 개가 경비 부스에 박혀 연기를 내고 있었다. 손상향은 보이지 않았다.
그 잠깐 사이 상대가 영웅패를 갈아끼웠다. 아차 하는 사이 쇠채찍이 뻗어와 공손찬의 목을 감았다.
“커헉!”
벗어나려고 애썼으나 채찍을 끊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목졸라 살해하려는 듯 상대의 채찍은 계속 조여오기만 했다.
갑자기 불이 환하게 켜졌다. 그새 시간이 흘러 어두워졌기에 두 군주도 잠깐이나마 눈을 감아야 했다.
부스의 잠겨 있던 문을 뜯고 들어간 손상향이 주차장 조명들을 한꺼번에 켠 것이었다.
“경찰 불렀어! 알아서 해!”
부스 창가에서 외치는 손상향은 다친 데가 없어보였다. 공손찬은 채찍 쥔 손을 쳐서 빠져나오며 안도했다. 그저 불이 켜진 것뿐인데 상대의 손은 풀려 있었다.
“의외로 쉽게 동요하네. 혹시 경험 부족이야?”
의기양양해서 공손찬이 외쳤다. 이제 붉은 색 갑옷 차림인 적 군주가 말없이 다시 채찍을 휘둘렀다.
“정곡인가보네!”
방금 목이 졸렸던 탓에 머리가 멍하고 아팠지만 공손찬은 개의치 않고 싸웠다. 이길 수 있었다.
그때 불빛이 다시 사라졌다.
“어?”
그냥 조명만 꺼진 것이 아니었다. 마치 안개 같은 무언가가 순식간에 공손찬을 감쌌다.
한 치 앞도 안 보일 지경인데 쇠채찍은 계속해서 날아들었다. 이전 장개와 싸울 때 그랬듯이.
“이쪽도 암시야인가?”
“보통의 안개가 아닙니다!”
조운도 당황했다.
“이상한데요? 이건 영웅패의 능력 같지도 않아요. 일단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손상향이 위험해. 적이 이래놓고서 인질로 잡았을지도 몰라.”
이 정도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채찍은 계속 날아들었고 막는 건 점점 더 어려워졌다.
이래서는 도망치는 것도 어차피 무리다. 그렇게 판단한 조운은 대신 도박을 권하기로 했다.
“파이널 배틀 필드를 여세요, 이 어둠이 외부의 간섭이라면 그 안에선 사라질 겁니다!”


조운의 말대로였다. 파이널 필드 안은 다시 인공적인 빛으로 환해졌고 적의 레전드 머신도 뚜렷이 보였다.
파란 색과 검붉은 색, 두 대의 레전드 머신이 그대로 공손찬의 머신에 덤벼들었다. 합체할 것에 대비하고 있던 공손찬은 당황했다.
사실 그는 파이널 배틀을 좋아하지 않았다. 몸으로 싸우는 통상 배틀과 달리 머신의 조종간을 움직이는 것이 성미에 맞지 않아서였다.
그에 비하면 상대는 이제야말로 신이 난 것 같았다. 합체 대신 2대 1 구도를 만드는 것이 처음부터 작전이었는지, 두 대의 머신이 서로 원거리와 근거리를 잡고 공격해왔다.


갑자기 주변이 캄캄해져 불빛이 가려질 정도가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 괴인들도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 경찰은 올 기미가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인정하긴 싫지만 손상향도 겁에 질렸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 이후 이렇게 혼란스럽고 막막하기만 한 심정은 처음이었다.
폰은 아까 가방이 박살나면서 어디론가 굴러가 버렸다. 부스 안의 유선전화도 수화기를 들면 잡음만 났다.
아까는 분명 경찰이 신고를 받는 것 같았는데, 그랬다면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것도 이상했다.
손상향은 자신이 부수고 들어온 문을 돌아보았다. 역시 이대로 경비 부스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어봐야 아무 것도 제대로 풀릴 리 없었다.
‘무서워도 나가봐야 해.’
부스 안에서 아무 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쥐고 살짝 문을 밀었다.
바깥은 캄캄했다. 부스 안은 여전히 형광등이 빛나고 있는데 그 빛마저 바깥으로는 흘러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인기척도 없었다. 마치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 것처럼.
‘무서워서 상상력만 풍부해진 거야.’
마음을 다잡고 밖으로 나오자 검고 긴 사람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가 뿌린 어둠에 그대로 녹아든 듯한 검은 존재가 기분나쁘게 웃고 있었다.
“이쪽도 분명 군주의 이름인데, 어떻게 된 걸까?”
“누구냐!”
손상향이 쥐고 나온 것을 그리로 던졌다. 커다란 드라이버였다.
“어이쿠.”
긴장한 기색도 없이 가볍게 피하며 그가 웃었다.
“재미있는 상황이지만, 내가 너무 일찍 주목받아도 곤란하니까 말이야. 그냥 날 본 건 잊어 줘.”
검게 빛나는 손톱이 순식간에 눈앞까지 뻗어왔다. 손상향이 그 손을 낚아채 꺾으려 했으나, 움켜쥔 손이 어느새 비어버렸다.
“이런 이런.”
등 뒤에서 그 존재가 혀를 찼다.
“그랬군. 넌 이미 다른 신선이 간섭해놨어. 뭐가 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곧 알아내야겠네.”
손상향이 뒤로 돌아 발차기를 날렸으나 그 존재는 다시 피하며 방긋 웃었다.
“그럼 다음에 보자, 내 형제 신선들 중 누군가~”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쫓아가려 했으나 그 검은 그림자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주위를 감싸고 있던 어둠도 함께 사라졌다. 그저 불 꺼진 밤의 주차장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뒤에서 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숨돌릴 틈도 없이 돌아본 손상향은 다시 한 번 기겁했다.
“공손찬?”
언제 나타났는지 공손찬이 바닥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얼결에 달려가 받았다.
“어떻게 된 거야, 정신 차려!”
부축한 채로 맥박부터 짚었다. 뛰고는 있지만 빠르고 거칠었다. 얼굴도 창백하고 식은땀이 흘러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그 파란 색 괴인도 다시 나타나서 손상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설마 정말 군주가 아니었던 거야?”
여전히 뜻모를 소릴 하는 그에게 손상향이 일어나서 발차기를 날렸다. 그러나 가볍게 막혔다.
“군주가 아니라면 너한테는 볼일 없고.”
가면 뒤의 시선이 다시 공손찬을 향했다. 그걸 깨닫고 손상향은 공손찬을 부축해 둘러업고 뛰기 시작했다.
뭐가 뭔지 이해할 수 없어도, 저 괴물이 공손찬을 마저 해치게 놔두면 안 된다는 건 분명했다.
“도원관으로 가주세요!”
누군가 귓가에서 외쳤다. 낯선 남자 목소리였지만 괴로운 듯 절박한 목소리인 데다 공손찬의 집으로 가달라는 게 그리 수상한 요구도 아니었으므로 손상향은 그리로 목적지를 잡았다.
이대로 자신과 비슷한 체격의 기절한 사람을 업은 채 방향도 잘 모르고 뛸 필요까지는 없었다. 정신차려보니 큰길이고 지나가는 사람들에 차들도 보였다.
꿈을 꾸는 기분으로 택시 한 대를 잡아 도원관으로 가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차 안에 앉아 멍하니 공손찬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눈앞에 환각처럼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도원관 안이었다. 지난번 찾아갔을 때는 그냥 지나쳤던, 높이 걸려있는 초상화들 끝에 공손찬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렸다.
자신과 동갑내기인 그 얼굴 그대로임에도 위엄이 느껴져서, 그 자리에 아무나 초상화를 거는 게 아니라고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건 공손찬 같은 재능있는 신예가 바라봄직한 높은 목표였다.
바라보고 있는 사이 그 환상이 흔들렸다. 거울에 금이 가듯 불길한 소리가 들리고, 순식간에 도원관도 사진 속 공손찬도 유리처럼 깨져 흩날렸다. 그 파편이 눈에 튈까 반사적으로 감았다가 떴더니 아무 것도 없었다.
다시 달리는 택시 안, 공손찬은 자신의 무릎에 쓰러져 기절해 있었다.
환각은 처음부터 존재한 적 없는 것처럼 사라졌다.
“이봐요, 손님!”
택시기사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손상향이 정신을 차렸다.
택시는 서 있고 창 밖엔 도원관이 보였다.
“어.....”
공손찬은 여전히 정신을 차릴 기미가 없고, 반사적으로 주머니를 더듬었지만 지갑도 없었다. 어디다 떨어뜨렸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공손찬의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냈다.


“찬이가 왜 이리 늦지?”
유비는 시계를 보며 초조해 하고 있었다. 찬이니까 알아서 잘 하고 있겠지만 나갈 때 저녁 먹고 온다는 말은 없었다.
‘난 슬슬 배고픈데......’
전화라도 해볼 생각으로 폰을 꺼내드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공손찬!”
유비가 안도하며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유비 씨죠?”
그를 기다리고 있는 광경은 평온하게 ‘내가 좀 늦었지?’하며 들어오는 공손찬이 아니었다.
손상향이 기절한 공손찬을 업고 비틀거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손상향 자신도 당장 쓰러질 듯 하얗게 질린 채.
“공손찬이, 갑자기 습격을 받아서, 아니, 원래는 내가 습격받았는데......”
일단 공손찬을 넘겨받아 급한 대로 마루에 눕혔다. 어찌 된 일인가 다친 곳은 없나 살펴보다가 손을 보니 체인저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 손에서 조운패가 굴러떨어졌다. 이미 반쯤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군주가 손상향 님을 습격했습니다. 하지만 상향 님은 군주가 아니셔서, 속수무책으로.....헉헉....”
“조운!”
유비가 조운을 집어들고 울먹였다. 관우와 장비도 달려왔다.
“힘들 텐데 더 말하지 말게!”
“아니, 그 상황 전하려고.....여기까지 버틴 거니까......”
숨을 헐떡이며 조운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공손찬 님이, 그 파란 나비 군주를 대신 맞아 싸우셨어요.”
“파란 나비 군주? 그게 정말 있었어?”
“예. 게다가 마치 신선 같은 누군가의 방해도 있어서 그만.....”
조운이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유비가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죽지 마!”
“주군께, 정말 죄송하다고......”
“안 돼, 네가 살아서 직접 전해!”
유비는 조운을 얼굴에 대고 엉엉 울었다.
“내 영웅패가 되면 되잖아. 내가 대신 데리고 계속 싸워줄게. 내가 이제부터라도 너랑 찬이랑 지켜줄게......”
조운패에 번져나가던 회색빛이 흐려졌다. 점차 다시 하늘색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주군께서 항상 유비님을 지켜주고 계셨는걸요.”
조운이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그러네요. 이제 주군께선 예전만큼 유비님을 지켜주지 못하실 테니 제가 그 뒤를 잇는 게 그나마 주군께 다할 수 있는 마지막 충성이겠죠.”
조운의 몸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유비가 안도하며 조운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공손찬을 돌아보았다.
‘말도 안 돼......’
믿어지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공손찬이 벌떡 일어나서 ‘내가 탈락은 무슨 탈락이야. 이렇게 멀쩡한데.’하고 쥐어박을 것 같았다.
“주군.”
관우가 곁에서 무겁게 말했다.
“이제 조운은 주군의 영웅심을 받고 있습니다. 공손찬 님은 정말로 탈락하신 겁니다.”
“관우......”
울먹이는 유비에게 관우가 다시 힘주어 말했다.
“지금은 유비님께서 공손찬 님을 간호하고 손상향 님께도 이 상황을 설명하셔야 합니다.”
퍼뜩 유비가 옆을 돌아보았다. 손상향이 파리한 얼굴로 그들을 마주보고 있었다.
“어......”
유비는 황급히 머리를 굴렸다. 자신과 찬이가 서서를 만났을 때부터 시간 순서대로 말해야 좋을지, 그냥 드림배틀이 뭔지부터 설명해야 좋을지, 아니면 그 전에 커피라도 따뜻하게 한 잔 끓여줘야 좋을지......
“설명할 필요 없습니다.”
이들 옆에 어느새 신선이 서 있었다.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26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원소는 손상향이 행정실을 나갈 때까지 상큼하게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그러나 혼자 남자 재빨리 강동관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손상향이 체인저를 장착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설에 나오는 영웅의 이름들이라면 이미 다 외워뒀고 자신도 지금은 체인저를 하고 있지 않았다.
손상향은 강동관의 매니저 겸 트레이너고 이번 대회에도 직접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작년까지 학생 신분으로 참가했던 대회에선 꽤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었다.
처음에만 해도 만만하고 약한 상대를 고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몇 번 이기고 나니 좀더 강한 상대와 겨뤄보고 싶어진 참이었다.
안량뿐 아니라 문추도 본래는 강한 영웅패였다. 주소도 알고 대회 참가자가 아니어서 주목받을 걱정도 없는 손상향이면 다음 타깃으로 충분했다.


“어때, 공손찬? 이만하면?”
“응?”
생각에 잠겨 있던 공손찬이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아령을 쥐고 유비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나 이 아령도 이만하면 잘 들지? 이대로 무게 늘려도 되지?”
“어, 그래.”
공손찬이 끄덕거렸다.
“그대로 늘려서 수련해도 되겠어.”
유비는 아령을 내려놓고 공손찬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신경쓰이는 거라도 있어? 곽사 때문에 그래?”
“응, 그것도 있고.”
공손찬이 얼른 머리를 굴렸다.
“아까 너 곽사랑 싸우는 동안 한복과 유우가 어떻게 싸웠는지 들었는데, 좀 분위기가 이상했다나봐. 한복 쪽이 정신이 딴 데 팔린 것 같았대.”
“그래?”
유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네. 왤까?”
열심히 궁리하는 것 같아도 유비는 결국 그럴싸한 가설 하나 떠올리지 못했다. 결국 공손찬이 보충해 주었다.
“그냥 그가 컨디션 조절에 실패했을 수도 있고, 사고가 있었을 수도 있지. 아니면 고의적인 방해가 있었거나.”
“방해?”
유비가 인상을 썼다.
“그런 짓을 정말 한단 말이야? 누가?”
“그거야 모르지. 그냥 짐작이니까.”
공손찬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 이야기 자체가 유비의 주의를 돌리기 위한 거지 진지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지금 그가 정말 신경쓰는 건 따로 있었다.
유비와는 달리 도장 경영에 적극적인 공손찬은 도원관과 거리가 멀어서 직접 경쟁하지 않는 도장들도 잘 알고 있었다. 유우는 분명 유주관이라는 도장의 사범이었다.
명색 사범씩이나 되면서 일반인 대회에 나온 건 상금이 탐나서인 모양이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자신이 혼자 그를 찾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회가 다 끝난 뒤라면 가서 드림배틀을 건다고 해도 거리낄 것 없는 정정당당한 승부가 될 수 있었다.
유비에겐 말하지 않기로 했다. 혼자는 위험하다며 억지로라도 따라오려고 할 텐데, 이번엔 온전히 일 대 일로 결판을 내고 싶었다.
그 편이 무술가로서 성미에 맞기도 하거니와, 이번은 온전히 자신만의 싸움으로 삼고 싶었다. 유비가 하진 상대로 1승을 거두었을 때처럼.


마침내 유비가 유우도 꺾고 대회 우승을 달성했다.
어디까지나 상금을 노린 대회였음에도 막상 노란 메달을 목에 걸자 유비는 뛸 듯이 기뻐했다. 뿌듯하게 어깨를 펴고 공손찬과 함께 도원관으로 돌아왔다.
“잘 했어.”
“그치? 이번엔 나도 정말 잘 했지?”
오랜만에 공손찬과 도원관을 위해서도 한 몫을 했다는 사실이 유비를 더 들뜨게 했다. 받아온 수표를 공손찬이 그 앞에 대고 흔들었다.
“이 돈은 네 명의로 정기예금 넣어놓을게.”
한창 싱글벙글하던 유비가 두 눈을 깜박깜박 했다.
“당장 도원관 운영비용으로 쓰는 거 아냐?”
“얘는, 네가 벌어온 거고 이렇게 목돈인데 그렇게 쉽게 써버려도 돼?”
공손찬이 유비의 등짝을 갈겼다.
“당장 기둥뿌리 뽑히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큰 돈은 원래 이자 붙여야 하는 거야. 그래야 나중에 정말 필요할 때 쓰지. 게다가 네 명의로 들어온 돈인데 도원관 통장은 스승님 명의라고?”
‘그게 왜?’라고 말할 듯한 유비의 표정을 보고 공손찬은 이마를 짚었다.
“정말, 내가 없으면 너 어쩌려고 이래.”
“알았어.”
유비가 서둘러 사과했다.
“그럼 그 돈은 정기예금 넣어.”
애초 유비 돈인데 결정권이 공손찬에게 있는 이 상황부터가 정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공손찬도 그걸 마저 납득시키는 대신 도원관 벽을 가리켰다.
“아무튼 수고했으니까, 메달은 저기 잘 보이게 걸어놓고 오늘은 푹 쉬어.”
“응!”
다시 희희낙락하는 유비를 두고 공손찬은 방으로 들어갔다.
같은 나이인데 저렇게 애 같으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오랜만에 도원관에 도움이 되었다며 기뻐하는 애를 앞에 두고 인상 쓰고 싶지도 않았다.
‘가끔은 유비가 내 자식이고 난 육아스트레스 받는 거 같아.’
차라리 유비가 적당히 이기적이고 자신과도 경쟁하려 드는 아이였다면 어땠을까.
그건 그거대로 힘든 일도 많고 유비와 싸울 일도 많았을 거라고 알면서도 요새 가끔 하는 생각이었다. 만약 정말로 그랬다면 지금처럼 유비에게 자신이 없으면 안 된다고 은근히 유비를 깔보거나 짐스러워 할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드림배틀에 유비는 속 편하게 집중하고 자신은 그럴 수 없어 마음만 분주해지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역시 유우에겐 나 혼자 가야겠어.’
유비는 우승에 들뜬 나머지 대회에 영웅의 이름을 지닌 사람들이 잔뜩 출전했다는 사실도 벌써 잊은 것 같았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시장배 대회는 결국 손상향이 바라던 대로 되었다. 결승전은 이상한 점 없이 치러져서 유비가 이기고 상금을 탔다.
그러니 손상향은 마음 편히 기뻐하면 그만이었다. 아마도.
“오빠, 뭐 해?”
대회도 다 끝났는데 손책이 복사했던 대진표를 읽어보며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손상향이 대번에 긴장했다.
“설마 그 사람들 찾아가서 도장깨기 하려는 건 아니겠지?”
“어, 아냐, 아냐.”
손책이 두 손을 마구 휘저었다.
“그냥 읽어본 거야. 실력 봐서 아는데 내가 뭐하러 이 사람들한테 가서 싸움을 걸어?”
손상향이 조금 누그러졌다.
“오빠가 굳이 상대할 실력이 아닌 걸 안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그걸 왜 봐? 혹시 뭐 이상한 점 있어?”
“아니. 그게, 음......”
손상향이 눈살을 다시 찌푸리자 손책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여기, 대진표 이름들을 봐. 다들 창세신화에서 따온 이름이잖아. 신기하지 않아?”
“그래?”
손상향이 다가와서 대진표를 다시 보았다.
“그러네. 난 우리 엄마 아빠가 별나다고 생각했는데. 애 이름 이렇게 짓는 게 유행이었나?”
“그랬을지도 모르지.”
핑계대는 티가 너무 났기 때문에 도리어 손상향은 오빠가 정말 그게 신기해서 보고 있던 게 아니라고 속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끝나버린 대회의 대진표에 달리 주의를 끌 만한 부분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어, 그러고 보니 준결승 이후로는 그 이름 가진 사람들만 다 진출했네?”
손상향이 무심코 중얼거린 소리에 손책이 화들짝 놀랐다.
“오, 진짜 그러네? 이야~ 대단한 우연이다. 이름이 뭔가 원인이 되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야. 참 신기하다.”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럼 정말 이름 덕에 이기기라도 했다는 건가. 무의미하게 과잉반응하는 오빠를 손상향은 어이가 없어서 빤히 바라보았다. 손책도 그 눈치를 채고 수그러들어 눈치를 보았다.
“왜, 왜?”
“오빠 요즘 숨기는 거 있지.”
“어, 없어!”
손책이 펄쩍 뛰었다.
“없으면, 이렇게 혼자만 엉뚱한 행동 하는 건 어째서야? 나나 엄마한테는 말도 안 하고 도장깨기나 하러 다니고, 권이랑도 놀아주지도 않고, 연락도 제대로 안 받고.”
손책은 대꾸하지 못하고 눈길을 피했다.
“또, 또 그런다. 그렇게 피하기만 하면 해결될 것 같아?”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손상향의 다짐은 전화벨 소리에 방해받았다.
업무 전화인지 책상 위 유선 전화로 걸려온 전화를 받는 사이 손책은 잽싸게 달아나 버렸다.


원소가 손상향의 주소와 인적사항을 알아내는 건 쉬웠다.
다만 가족 전부가 영웅의 이름인 점이 신경쓰였다. 자칫 이들이 다 군주들이기라도 하면, 이각 곽사와 한복 때처럼 무작정 쳐들어가는 건 너무 위험했다.
게다가 자신의 이름 원소 역시 신화에 나오는 영웅 중에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쪽에서도 이미 대비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고민 끝에 가명을 쓰고 꾀어내기로 했다. 강동관과 몇 번 거래했던 광고대행사의 영업사원 리나라는 가짜 신분을 만들어, 강동관에서 먼 곳에 미팅 약속을 잡는 데 성공했다. 전화로만 조금씩 대화했기 때문에 손상향은 ‘리나’의 목소리가 지난번 잠깐 만나 이야기했던 원소 사장과 같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금방 들통날 엉성한 위장이지만 어차피 배틀에서 패해 탈락하면 관련 기억을 다 잃게 되어있으니 자신이 이기기만 하면 뒷수습도 걱정 없었다.


유비에게는 공과금 내고 쇼핑하고 온다고 말해놓고 공손찬은 유우가 있는 유주관으로 혼자 찾아갔다.
약간은 처음 체인저를 받았을 때의 긴장감과 고양감을 느끼며 조운과 군신일체 했다. 그리고 유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누구냐!”
다행히 유우도 곧장 변신하고 나왔다. 별로 술수를 부리려는 기미도 없어보여 공손찬은 창으로 그를 겨누었다.
“배틀이냐? 어떻게 알고 찾아왔지?”
그도 바로 자신의 영웅패를 꺼내 군신일체하고 태세를 갖추며 물었다.
“역시 대회 때문인가?”
“그래.”
공손찬이 가볍게 끄덕였다.
“그럼 역시 출전자 중 한 명인가? 혹시 유비?”
“아니!”
유우는 그저 대진상대 중 기억에 남은 이름을 댔을 뿐이다. 공손찬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도 유니콘 스피어엔 힘이 들어갔다. 유우가 막으려 했으나 힘에 부쳐 밀려났다.
상대의 실력은 역시 그저 그랬다. 그래도 공손찬은 사정 보지 않고 몰아붙였다.
박쥐 군주 도겸도 진작 이렇게 잡을 수 있었다. 장로나 그동안 겪어온 다른 군주들도 어쩌면.
손쉽게 파이널 배틀까지 승리하고 나서도 꿈꾸는 듯한 고양감은 다 가시지 않았다. 유우도 간직했던 꿈이 깨졌지만, 공손찬은 그걸 돌아보지도 않았다.
자신이 완전히 승리한 것만 확인하고 그 자리를 떠나 한참이나 걸었다. 그의 꿈이 무엇인지 알아봐야 뒷맛만 나빠질 것 같았다.
‘좀 진정해야겠다.’
잠시 길에 멈춰서서 숨을 골랐다. 자신은 승자가 되고 싶은 것이지 잔인해지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돌아가기 전에 머리를 좀 식혀야겠어.’
슬슬 유비가 걱정할 시간인 건 알지만 바로 도원관에 돌아가는 대신 시내로 나갔다.
세상의 운명을 걸고 진행되는 드림 배틀 같은 것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저녁 거리에 북적이고 있었다.
다음 상대를 찾을 때까지는 자신도 저들과 똑같았다. 군신일체는 한참 전에 해제했고, 주머니 속 조운과 체인저만 아니면 구별할 수도 없었다. 새삼스런 기분으로 사람들을 하나하나 관찰했다.
‘어.’
방금 공용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린 사람이 낯익다 했더니 손상향이었다. 공손찬은 자신도 모르게 길 구석으로 피했다.
강동관 매니저라더니 지금도 일로 나왔는지 정장풍으로 차려입고 있었다. 꽤 멋있어 보여서 잠시 눈을 떼지 못하고 지켜보았다.
‘나도 참, 스토커 같아.’
이러다 들키면 그보다 더 민망한 일은 없을 것이다. 고개를 돌리고 그만 갈 길 가려는데 조운이 옷 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주군, 근처에 군주가 나타났어요!”
“응?”
막 주차장 입구로 나오는 손상향에게 빛나는 무언가가 날아든 것도 그 때였다.
“핫!”
놀라운 반사신경 덕에 손상향은 정통으로 머릴 맞는 대신 굴러서 피했다.
“누구냐!”
손상향은 바로 맹호권의 기본 자세를 취하고 주위를 경계했다.
공손찬도 그냥 가는 대신 구석에 서서 체인저를 장착했다. 지금 손상향을 공격한 건 분명 군주였다.
‘가만, 그러고보니 손상향도 군주의 이름이잖아?’
이런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데 충격을 받아 공손찬이 잠깐 굳은 사이 다시 손상향에게 뭔가가 날아왔다. 금속제 고리였다.
들고 있던 가방으로 고리를 막고 그가 경악했다. 군신일체로 시력이 향상된 공손찬의 눈에도 가방의 끊어진 부분이 보였다.
‘그냥 고리가 아니고 칼날이었어!’
이제 그도 자기 영웅패를 꺼내서 드림배틀에 임할 거라고 공손찬은 예상했다. 그러나 손상향은 가방을 방패 대신 들어올린 채 경비 부스로 달려갔다.
드림 배틀이 벌어지면 파이널 모드가 아닐 때도 일반인들은 바로 길 건너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깨닫지 못하곤 했다.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사건을 눈앞에 들이대면 그냥 주차장 경비라 해도 피해자를 부스 안에 들여주고 경찰에 연락하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부스는 잠겨 있고 경비원도 보이지 않았다. 손상향은 당황했다.
“뭐 하는 거냐?”
푸른 갑옷에 노란 장식을 단 군주가 나타났다. 겨드랑이 장식이 나비 날개처럼 펄럭였다.
“배틀을 피하는 거냐? 겁쟁이처럼 굴지 말고 어서 변신해!”
푸른 나비 군주가 다시 링블레이드를 던졌다. 손상향은 피하려 했으나 상대가 너무 빨랐다. 인간을 뛰어넘는 속도와 순발력에 당장이라도 맞을 것 같았다.
한 번이라도 맞으면 갑옷을 입지 않은 손상향은 금세 피투성이가 될 터였다.
끝내 가방을 두 조각 내고 머리로 날아들던 칼날이 창끝에 맞고 떨어졌다.
“응?”
손상향이 자기 앞을 가리고 선 괴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죽일 듯 공격하는 푸른 괴인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갑주의 색과 장식이 좀 다르고 고리 칼날 대신 창을 들었다는 점이 다를 뿐.
“적당히 해, 이쪽은 군주가 아닌 일반인인 거 아직 모르겠어?”
그리고 곧장 나비 군주를 향해 창을 찔러들어갔다.
던지는 무기를 든 나비 군주는 긴 창을 상대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가볍게 날아 거리를 벌리고 다시 칼날을 던졌다.
손상향조차 다 궤적을 읽고 피해낼 수 없었던 칼날을 창으로 쉽게 튕겨내고 새로 나타난 군주가 거리를 좁히려 몸을 날렸다.
두 괴인의 공방을 지켜보며 손상향은 이게 어찌된 일인지 이해해보려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자신은 그저 강도를 당한 것이 아니며, 저 두 사람은 자신이 이제까지 알아온 세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무언가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밖에 알 수 없었다.
본능은 여기서 당장 달아나야 한다고 외쳤다. 지금 벌어지는 일은 어차피 그가 감당할 수 없고 감당할 필요도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저 창 든 쪽은 날 구해줬어.’
손상향은 두 동강 난 가방에 쓸 만한 게 있나 뒤졌다.
흉기를 들고 갑주를 입은 괴인을 맨손으로 상대하는 건 아버지 같은 고수라 해도 미친짓이었다. 저 창 든 괴인에게 기회를 주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했다.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25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손쉽게 이기고 나니 유비도 조금 자신이 붙었다. 다음날 치러진 조 결승에도 씩씩하게 참가했다.
낯선 사람과 공방을 주고받는 감각도 드림배틀 때와 비슷하면서도 달라서, 수련으로서도 귀중한 경험이 될 것 같았다.
‘문제는 다음 상대가 군주일지도 모른다는 건데......정말 괜찮을까?’
대진표를 보고 온 공손찬에 따르면 A조뿐 아니라 B, C, D조 모두 영웅의 이름을 지닌 사람들이 한 명씩은 꼭꼭 들어있다고 했다. 유비의 다음 상대 역시 영웅의 이름을 지녔다.
여기서 군신일체하고 드림배틀을 할 필요는 없겠지만 치열한 승부가 될 것 같았다.
-A조 결승, 유비 대 이각!
이름이 불리고 링 위로 올라왔다. 맞은편에서도 제법 육중한 체격의 남자가 올라왔다.
격투기 도장에서 주로 입는 도복이 아닌 추리닝 차림이지만 불편한 옷을 입은 것도 아니고 얕볼 이유는 되지 않았다. 녹색으로 염색한 머리 역시 무술은 머리모양으로 하는 것이 아니니 비웃을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회전에서 상대한 아저씨보다도 더 허술한 준비동작은 유비를 확실히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군주니까 아무튼 힘은 세겠지?’
시합이 시작되고, 곧 지금이 얼마나 익숙한 상황인지 깨닫게 되었다. 이 느낌은 그러니까......무술영화 흉내 내는 미축이었다.
게다가 힘도 그리 세지 않았다.
-유비, 승!
뻗어버린 이각을 보고 유비는 얼떨떨해졌다. 이제까지 군주 상대로 이렇게 쉽게 이겨본 적이 없었다.
이각이 영차영차 털고 일어나더니 유비를 노려보고 외쳤다.
“두고보자!”
‘꼭 지고 도망가는 악당같아.’
아무튼 이로써 A조 우승은 성공했다. 유비는 홀가분하게 링 아래로 내려갔다.
다음주에 준결승과 결승을 모두 이번처럼 이기면 막대한 상금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비와 공손찬은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예전 동탁이 날뛰었던 공원엔 버스킹 밴드 하나가 활동하고 있었다.
유비와 공손찬 외에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사실은, 공원에 가끔 멍청한 2인조가 나타나 소음을 일으키고 민원실을 피곤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요 며칠 동안은 조용한 편이었다. 그 두 사람이 활동비를 벌기 위해 시장배 무투대회의 상금을 노리고 출전해서였다. 격투기는 해본 적도 없는 두 사람이지만 따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랬는데.
“상대도 군주였단 말이야?”
곽사가 당황했다.
“그래. 무지 세더라고. 아니, 갑자기 그런 놈이 나타나면 어쩌란 거야?”
곽사는 B조 내에 다른 군주가 없어서 순조롭게 조 우승을 달성했지만 이대로라면 군주의 힘을 이용해 손쉽게 우승한다는 당초의 계획이 이미 무너진 거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말이지.”
이각이 복사해온 다음 대진표를 폈다.
“혹시나 해서 C조랑 D조도 알아봤더니, 거기들도 이긴 사람들이 죄다 군주더라고!”
곽사가 입을 딱 벌렸다. 잠시 둘 다 암담함에 꼼짝도 못했다.
“그래서 생각해봤다. 어떻게 이겨야 할지.”
이각이 비장하게 말했다.
“이 군주들에게, 다음 대회날 전까지 우리가 드림배틀을 먼저 거는 거야. 그럼 2대 1로 싸울 수 있으니까 우리가 이기는 거지. 그리고 그 군주는 드림배틀에 탈락했으니까, 꿈이 깨진 충격으로 다음 시합도 망치게 되는 거야.”
“오, 바로 그거야!”
기가 산 두 사람은 함께 환호하며 기타줄을 튕겼다.
“넌 천재야!”
두 사람의 환호성은 주군들과 함께 신나 있던 영웅패 중 하나가 퍼뜩 의문점을 찾아낼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그 다른 군주들은 어떻게 찾아갈 거예요? 어디 사는 줄 알고?”


후원자가 된 덕에 원소는 대회 참가자들의 신상을 쉽게 손에 넣었다. 제일 먼저 그들의 주소부터 훑었다.
딱히 대회에 직접 참가할 생각은 없었다. 참가자들의 실력을 확인하기 전엔 배틀도 신중하게 걸 작정이었다.
안량이 강해서 무난히 첫 승은 거두었지만 자신은 무술을 이제야 배우는 중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취미로 하는 일반인 대상 대회라지만 도중에 드림배틀을 벌이면 반칙으로 눈에 띌 수도 있었다.
이렇게 군주들의 신상을 쉽게 손에 넣고 그들의 기본 실력도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으로 만족할 작정이었다.
‘가만.’
A조의 탈락자 중에 이각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역시 영웅의 이름을 지닌 유비 선수와 맞붙어 진 사람이었다.
‘군주끼리 맞붙어서 진 건가? 별로 강한 군주는 아닌 모양이군.’
판정에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모든 경기는 일단 녹화되었다. 그 동영상을 찾아보고 원소는 실소를 머금었다.
자신도 이제 슬슬 다음 배틀을 치르고 영웅패를 늘려야 했다. 저렇게 약한 군주 상대라면 질 걱정 없이 싸울 수 있었다. 격투대회도 이미 탈락한 선수가 어찌되든 앞으로의 경기에 영향을 미칠 리도 없었다.
원소는 바로 자신의 차에 올랐다.


C조 우승자 한복의 집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전에 이각과 곽사가 알바하면서 만나 같은 버스를 탔던 걸 기억해낸 덕이었다.
“정확한 주소는 몰라도, 어차피 드림 배틀!”
“변신해서 이 근처를 훑다 보면 그쪽도 알아서 뛰어나오겠지!”
자기들 연습실에서 여기까지 미행해온 고급 승용차의 존재도 눈치채지 못한 채 이각 곽사가 군신일체했다.
둘은 일부러 각자 떨어져서 동네를 쑤석거렸다. 한복이 자기들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기타와 드럼도 연주했다.
“어디서 고성방가야!”
마침내 못 참고 나방 가면에 채찍을 든 군주가 뛰쳐나오자 이각 곽사는 다시 뭉쳤다. 그들은 그리 강하지는 않아도 손발 하나는 확실하게 잘 맞았다.
“야, 치사하게 둘이 덤비냐!”
궁지에 몰린 한복이 달아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겨우 담을 넘어 큰길로 뛰어드는 순간 눈앞에 또 다른 군주가 나타나 가로막았다.
코발트 블루의 나비 모습을 한 군주였다.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는 한복에게 가차없이 고리형 칼날을 던졌다.
한복도 일단 채찍을 들어 막고 응전했다. 그러나 차라리 당장 도망치는 편이 나았음을 금방 깨닫고 말았다.
새로 나타난 군주는 그 정도로 강했다. 뒤쫓아온 이각 곽사도 끼어들 엄두도 못 내고 보고만 있는 사이 배틀이 끝나버렸다.
한복의 체인저가 파괴되고 곁에 떨어진 붉은 영웅패를 나비 군주가 집어들었다.
“근거리에 강한 영웅패가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네 이름이 뭐지?”
“문추입니다.”
영웅패도 얼어붙은 듯 딱딱하게 대답했다.
“좋아. 너도 내 부하가 되어라.”
그리고 돌아보았을 때 이각 곽사는 이미 달아나는 중이었다.
원소는 그들을 굳이 쫓지 않았다.
이각을 찍어놓고 탈락시키려던 거라면 굳이 여기까지 조용히 따라오지도 않았다. 이각과 곽사의 영웅패들보다는 한복이 갖고 있던 문추가 훨씬 쓸 만해 보였다.
길바닥에 기절해 있는 한복에게도, 달아나는 이각 곽사에게도 더 눈길도 주지 않고 원소가 돌아섰다. 저런 잔챙이들에게 낭비할 시간 없었다.


이번에도 체육관은 두 구획으로 나뉘어 한쪽에선 A조 우승자 대 B조 우승자, 다른 한쪽에선 C조 우승자 대 D조 우승자가 겨루게 되었다.
준결승이지만 관객석에 앉은 사람들은 거의 다 선수들의 가족 친지뿐이었다.
이번엔 손상향도 관객석에 앉아있었다. 강동관에서 나간 선수들이 죄 예선에서 탈락한 덕이었다.
“어차피 취미반 선수들이잖아.”
손책이 그치고는 무난한 말로 손상향을 달랬으나 손상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C-D조 준결승을 주시하고 있었다.
C조에 강동관 선수가 있었기 때문에 C조 우승자 한복이 겉보기와는 다른 실력자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D조 우승자 유우 상대로도 선전할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다르게 돌아갔다. 한복은 그때만큼 기민한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했다. 지친 듯도 하고 정신이 딴 데 팔린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일 있었나? 그새 부상이라도 당했나?’
의문을 풀 사이도 없이 한복이 쓰러지고 유우가 승리했다.
손상향은 찜찜한 기분으로 A-B조 준결승을 돌아보았다.
유비의 상대는 머리를 빨갛게 염색한 껄렁해 보이는 남자였다. 그쪽도 이미 승부가 나서 유비는 서 있고 상대는 뻗어 있었다.


“젠장, 뭐 이리 센 거야!”
투덜대는 곽사에게, 자기 주위엔 더 강한 군주들이 수두룩하다고 말해주면 뭐라고 답할까 약간 궁금해 하며 유비가 두 손을 털고 어깨를 가볍게 풀었다. 이제 다음 경기가 결승이었다.
“너무 기고만장하지 마라.”
곽사가 갑자기 목소리를 음침하게 깔았다.
“난 이미 너보다 더 센 군주를 봤거든. 파란 나비 군주를 조심해.”
“파란 나비?”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 했지만 곽사는 바로 링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할 수 없이 유비도 공손찬이 기다리는 쪽으로 내려갔다.
“그자가 너한테 무슨 말 한 거야?”
공손찬이 묻자 유비가 들은 그대로 읊어주었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 날 도와주려는 건가?”
“설마.”
공손찬이 표정을 찌푸렸다.
“그쪽이 왜 우릴 그렇게 생각해주는데?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겠지.”
“다른 어떤 꿍꿍이?”
유비가 갸웃 하며 물어보았다.
“음......그 나비 군주와 우리가 싸우게 하려는 속셈이라든가?”
“그런데 우린 그 군주가 어디 사는 누군지 모르잖아? 실제로 있는 군주인 건 확실해? 찾을 방법은 있어?”
그건 공손찬도 대답할 수 없었다.
“아직 시합도 안 끝났어.”
유비가 엄숙하게 말했다.
“C조의 한복, D조의 유우도 군주의 이름이고. 조심해서 드림배틀 안 걸리게 할게.”
“정말?”
유비답지 않은 비장한 목소리에 공손찬이 되물었다.
“이번 대회 도원관에 중요한 거잖아.”
유비가 허리에 손을 짚었다.
“그러니까 드림배틀 때문에 방해받게 하지 않을게. 일단 여기서 우승하고, 드림배틀은 그 다음부터 하고.”
“그래.”
공손찬은 조금 얼떨떨하게 답했다.
“우리 유비가 드디어 어른이 되나보네. 열심히 해.”


“야, 유비한테 무슨 얘기 하고 온 거야?”
“파란 색 나비 군주를 조심하라고 말해줬지.”
지고 돌아왔으면서 곽사는 점잔을 빼고 있었다.
“저놈은 제법 세니까, 그런 말 들으면 그 군주를 찾아다닐 거란 말이지. 그럼 배틀 때문에 대회엔 그만큼 집중하지 못할 거고, 그러다 결승전에서 지게 될 거란 말씀!”
“오!”
“우리가 못 이길 바에야 유비가 우승하게 놔둘 수도 없지!”
“바로 그거야!”
“주군, 주군!”
자기들끼리 낄낄대느라 이각과 곽사는 영웅패들이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문이 열려 있어서 복도에 지나가던 사람이 다 들었다는 걸 그들만 몰랐다.
“걱정 마, 그냥 가 버렸네.”
양봉이 하품을 하며 한섬을 달랬다.
“별 거 아닌 소리라고 생각했나봐.”


그러나 손상향은 자신이 들은 게 무슨 뜻인지 깊이 생각해보고 있었다.
‘배틀이라는 건 또 무슨 소리지? 지금 다른 대회 같은 거 없는데?’
또 모르고 지나친 대회나 행사가 있나 이미 철저히 알아보았다. 적어도 공식적인 건 지금은 확실히 이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냥 지나치자니 저들은 일부러 유비의 우승을 방해하겠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공손찬을 빼놓고 생각해도 그런 졸렬한 짓을 그냥 놔둘 순 없었다.
한복이 이상할 정도로 쉽게 패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일단 행정실에 가보기로 했다. 저런 녀석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야 지급품에 장난을 치는 정도일 테니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면 막을 자신이 있었다.
행정실엔 마침 아무도 없었다. 손상향은 일단 선수 명단을 찾아 이각과 곽사의 이름, 경력 등을 확인했다.
이전에 다른 대회에 출전한 기록은 없고 이번 대회에서도 눈에 띄는 성적은 거두지 못했다. 역시 대회 운영진이나 심판에게 연줄을 댈 수 있는 자들은 아니었다.
‘지급되는 생수나 도시락에 몰래 손대려고 하려나? 그런 건 공손찬이 알아서 점검할 테고, 또 도시락은 시합 후에 지급되니까 당장의 시합에 영향을 주진 않을 텐데. 생수도 뜯은 걸 주면 대번에 이상해 보일 거고.’
이리저리 궁리하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손상향은 황급히 서류를 내려놓았다.
“아.”
들어온 사람은 긴 생머리에 젊은 미인이었다. 목에 게스트용 출입 카드를 걸고 있었다.
멋대로 뒤지고 있었지만 다행히 상대도 그냥 손님 같았다. 손상향은 얼른 떳떳한 척 활짝 웃었다.
“강동관의 손상향이라고 해요. 우리 체육관에서 참가했던 선수들이 물어볼 게 있다고 해서요.”
“저도 그냥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요.”
역시 상대도 게스트일 뿐이었다. 출입 카드를 가볍게 들어보이며 미인이 손상향을 마주 훑어보았다. 카드에 ‘원소’라고 인쇄된 이름이 보였다.
“아, 원소 사장님이시군요.”
상금이 갑자기 뛰게 한 장본인임을 알아보고 손상향이 살짝 다가갔다.
“이번 대회 후원자라고 들었어요. 유명한 대회도 아닌데 거금을 쾌척하셨다면서요.”
“사회 복지 차원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죠.”
원소가 어깨를 으쓱 해보였다.
“유명한 대회에 후원하는 건 다 기업에도 이익이니까 하는 일이잖아요? 이런 일반인 보건 대회를 후원하는 거야말로 기업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거죠.”
“하긴, 그러네요.”
손상향이 적당히 맞장구쳐주고 자연스럽게 시계를 보았다.
“담당자가 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너무 늦어지네요. 다음에 다시 와봐야겠어요.”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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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은 원래 연의 초반에 원소에게 기주를 빼앗기고 달아나는 인물입니다. 이때 원소와 공손찬이 서로 기주를 점령하려고 노렸기 때문에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적이 됩니다.
유우는 유주자사로 비슷한 시기에 공손찬에게 패해 참수됩니다.
둘 다 연의에서 중요한 인물들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름이 나오니까요.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24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손견이 죽은 뒤 오경도 손상향도 경영 일이 더 늘고 힘들어졌다.
셋이 하던 일을 둘이 하게 되어서만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릴 정도로 유명한 무술가였던 만큼 손견의 공백은 강동관 안팎으로 크게만 느껴졌다.
그러니 옛 라이벌을 만났다고 해서 감상에 젖어있을 시간은 없었다. 사무실엔 그 잠깐 나갔다 온 사이 일이 쌓여있었다.
차라리 잘 됐다는 기분으로 하나하나 해치우고 있는데 손책이 들어왔다.
“아, 노크 좀 하랬지!”
“미안.”
버럭 소리질렀던 손상향이 귀를 의심했다.
“지금 사과했어?”
“할 수도 있지. 그런 것보다.”
손책이 들고 있던 서류를 내밀었다.
“이거 좀 봐. 시장배 무투대회인데 일반인 대상이라 체육관이나 단체 회원이 아니어도 쉽게 지원할 수 있거든.”
“어, 이게 왜? 강동관에서도 이미 신청 받고 있는 건데?”
“그 공손찬이란 애가 도장 운영에서 너무 상대가 안 될 것 같으니까 김이 빠진 거 맞지?”
손상향은 의자에 앉은 채 삐딱하게 손책을 올려다보았다. 그것도 이유라면 이유랄 수 있겠지만 그것만이 아니라는 걸 일일이 설명해줄 자신이 없었다.
“뭘 생각하는지 몰라도, 이거 글자 그대로 취미로 하는 일반인 대상이야. 그러니까 지원 문턱이 이렇게 낮은 거지. 공손찬이나 나나 이런 데 나가서 금메달 따 봐야, 하나 자랑거리가 못 돼. 체면 안 깎이면 다행이라고.”
“메달이 문제가 아니라, 이거 봐.”
손책이 상금 부분을 가리켰다. 그 부분을 읽고 손상향의 눈이 커졌다.
“이, 이거 인쇄 실수 아냐? 0이 한두 개 더 찍힌 거 같은데?”
당장 컴퓨터 쪽으로 돌아앉아 해당 대회를 검색해 보았다.
말 그대로 국민 보건 차원에서 하는 대회지 전문 무술가가 발 담글 만한 대회가 아니었다. 그래서 세간의 관심도 모으지 못하고 상금도 그저 그런 대회였는데.
“......삼공그룹에서 이번에 후원을 시작했구나.”
손상향이 여전히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상금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늘었어. 아니, 성인반 김코치 이런 것도 확인 안 했단 말이야? 음......그렇다고 내가 나가기는 좀 그런데......”
“이렇게 큰 상금이 나오는 대회니까, 공손찬은 출전해서 도장 운영비 버는 게 나을걸? 그래서 좀 강동관하고도 겨룰 만해지면 너도 새로운 승부에 뜨거워질 수 있을 거야.”
자신의 체온은 지극히 정상이고 열병에 걸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오빠가 하는 제안이 이렇게 멀쩡하고 온건하다니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이 대회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자신이 직접 살펴봐도 문제가 없으면 그때 권하면 되었다.
자신도 매년 열리던 대회가 또 비슷하게 열렸다고만 생각해서 상금이 뛴 것도 모른 채 지나칠 뻔했다. 공손찬도 몰라서 참가 못할 수도 있었다.


적벽대학에 가고 싶었다.
거기서 비룡권으로 인정받고 이름을 드날리고 싶었다. 자신이 비룡권 고수로서 유명해지면 도원관에도 관원이 몰리고 비룡권이 사장된 옛날 무술 취급을 받지도 않을 것 같았다. 고등학교 체육부 코치도 너라면 가능하다고 격려해주셨다.
그러나 스승님이 난색을 표했다. 등록금과 기숙사에 못 들어가면 얻어야 하는 자취방, 대학에 가 있는 동안 도원관 사범으로 일할 수 없어서 생기는 공백 모두 지금 도원관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장학생으로 들어가려면 실기뿐 아니라 전과목 내신이 좋아야 하는데 공손찬의 성적으론 전장은 무리였다.
중고등학교 내내 금메달을 놓치지 않았는데 내신에서 뒤통수를 맞아버렸다. 고등학교 마지막 대회까지 금메달로 장식했건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스승님께 투정부리고 싶진 않고, 비싼 명문대에 가지 않아도 꿈을 이룰 방법이 있을 거라고 자신을 겨우 달래고 있다가 손상향과 마주쳤다.
적벽대학에서 다시 붙으면 달라질 거라고 주장하는 그가 얄밉고 부러웠다. 자기가 맨날 이겼는데도 자기는 거기에 갈 수 없었다.
‘혹시 그래서 내가 심한 말이라도 했었나?’
경기에서는 이겨놓고 대학에 못 가 앞으로의 승부가 기권패가 될지도 모른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 자기합리화를 했던 건 분명했다. 정확한 말은 기억나지 않아도 울 것처럼 얼굴이 빨개져서 뛰어가버리던 뒷모습은 곱씹다보니 기억났다.
‘내가 심했나. 하지만 그 정도 일을 이제 사과한다고 해봐야 약올리는 소리로 들릴 것 같은데. 내가 맞게 기억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블랙커피로 입 안을 축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게다가 강동관이면 지금 맹호권 한창 잘나가고 있잖아? 손견이 죽었다고 듣긴 했지만.....아니, 그럼 아직 상중이겠네?’
역시 어떻게 접근해도 사과는커녕 더한 무례가 될 것 같았다. 손상향이 먼저 그때 일을 꺼내지 않는다면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래서 다음날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유비도 평소와 똑같아 보였다. 무슨 일 있었냐고 묻지 않는 건 고마운데 배려가 아니라 진짜 어제 일을 싹 잊고 있어서 저러는 건 아닌지 조금 불신이 들었다.
점심 먹고 방에서 장부 정리하는데 유비가 문 밖에서 불렀다.
“공손차안~”
“왜?”
“손님이 왔어.”
“그래? 누군데?”
설마라고 생각하면서 옷차림과 얼굴을 정돈하고 방 문을 열었다.
“손상향이야. 너한테 할 얘기가 있다는데.”
“그래?”
없는 척 하고 싶다는 충동이 먼저 들었지만 이미 한 생각이 있어 그럴 수가 없었다.
“싸우러 온 것 같진 않아. 선물 사들고 왔던데.”
그 손책이라는 오빠가 대단한 사고를 치고 간 줄 아는 모양이었다. 아주 착각도 아니어서 조금 용기를 얻고 나가보았다.
“안녕, 공손찬.”
손상향은 조금 안절부절 못하는 기색으로 커다란 상자를 내밀었다. 고급 프로틴 한 박스였다.
“어젠 내가 말이 심했던 것 같아서. 사과하러 왔어.”
“사과?”
공손찬은 일단 상자를 받아들었다. 묵직했다.
“뭐 이런 것까지 가져올 만큼 대단한 일도 아니었는데. 그래도 고마워.”
이렇게 나오니 차라리 안심이 되었다. 공손찬도 얼굴을 폈다.
“나도 말 함부로 했던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커피 마시고 갈래?”
곁에서 듣고 있던 유비가 잽싸게 부엌으로 달려갔다. 공손찬은 긴장해서 손상향을 바라보았다.
“그래.”
의외로 그는 순순히 공손찬과 함께 상담실 소파에 마주앉았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로 오빠가 좀 방황하는 거 같아. 혹시 또 와서 행패부릴 것 같으면 나한테 연락해.”
손상향이 명함을 내밀었다. 강동관 로고가 박힌 고급 종이에 ‘강동관 매니저 손상향’이라고 적혀있었다.
“행패까지는 아니고 좀 소란스러웠을 뿐이야. 대단한 고수던데. 유비가 또 대련해보고 싶다더라.”
적벽대학에서 수련에 전념하고 있어야 할 네가 왜 매니저냐고 묻는 것보다는 쉬운 화제였다. 공손찬은 관대하게 답해주었다.
게다가 손책이 군주인 이상 언젠가는 결판을 내야 했다. 이렇게 말해두는 편이 나중에 드림배틀을 치를 때도 말려야 할 싸움이 아니라 무술가들끼리의 정당한 대련이라고 생각해서 물러나줄 테니까.
“뭐, 오빠가 무술 하나는 봐줄 만하지.”
손상향도 처음보다 기색이 좀 밝아졌다.
“짜잔~”
때맞춰 유비가 커피 두 잔과 크래커 한 봉지를 가져왔다. 평범한 싸구려 과자인 게 공손찬은 좀 신경이 쓰였으나 어차피 그런 건 예고 없이 찾아온 사람 쪽이 감수해야 하는 거였다. 그보다 급한 일이 있었다.
“커피는 어떤 거 좋아해? 단 거?”
자연스럽게 유비의 손을 잡으며 손상향에게 먼저 물었다. 다행히 꿀을 붓기 전에 저지할 수 있었다.
“블랙이 좋아. 식단관리 하고 있거든.”
“그래.”
공손찬도 당분, 지방보다 단백질 위주의 식단을 유지하고 있었다. 선수로 뛰지 않아도 몸 관리는 제대로 하고 싶어서였다.
“사실은 카페인도 너무 섭취하지 않게 주의하고 있어. 어쩌다 한 번 먹는 거지.”
“나도 그래.”
어색하던 분위기가 한결 더 풀어졌다. 손상향이 크래커를 집어 깨물었다.
“저 유비란 사범은 실력이 어때?”
“보기보단 실력 있어.”
유비가 둘이 앉아있는 소파에서 충분히 멀어진 걸 보고 답했다.
“힘도 세고. 투지가 좀 부족해서 그렇지 앞으로 많이 발전할 거야.”
손책이 이기고 돌아간 뒤에 센 척해봐야 소용없었다. 공손찬은 솔직하게 유비의 단점을 말했다.
“왜, 오빠가 또 겨뤄보고 싶대?”
“아, 당장은 안 되지. 안 그래도 대회 앞둬서 바쁜데 무슨 사고를 치려고. 잡아두고 일이나 시켜야지.”
“대회? 무슨 대회?”
공손찬은 시장배 대회 자체를 잊고 있었다. 대학생 이상부터 모집인데 도원관엔 미축 외엔 아이들 단원밖에 없고 미축은 아직 대회 나갈 실력이 아니어서였다.
“그, 일반인 대상으로 하는 시장배 대회 있잖아. 그거 우리 도장 취미반에서 많이들 나가거든. 갑자기 상금이 뛰어가지고.”
“상금?”
공손찬의 귀가 번쩍 뜨였다.
“응. 삼공그룹에서 후원해서, 나도 모르고 지나갈 뻔했는데 저번까지랑은 많이 다르더라고.”
“응, 그랬구나.”
공손찬은 일단 끄덕끄덕 대충 듣는 척했다. 속으로는 아까 유비의 실력을 낮춰 말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손상향도 별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었다는 듯 금방 다른 쪽으로 이야기를 돌렸다.
“아, 나 그만 가봐야 해.”
적당한 기회를 봐서 손상향이 일어났다.
“그래. 오늘 잘 와줬어.”
공손찬이 문 밖까지 배웅해주고 돌아오자 유비가 조마조마한 기색으로 다가왔다. 둘이 싸우지나 않을까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괜찮았어?”
“응.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었나봐.”
공손찬은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가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대회는 시청 주관으로 전부터 하던 거라 금방 검색되었다.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물론 상금이었다.
“어.”
너무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동네대회에 걸렸다고는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어찌 된 일인가 더 뒤져보았지만 변한 건 상금뿐이었다. 출전자격이 엄격해진 것도 아니고 참가비도 작년과 같았다. 한참이나 더 자세히 찾아보고 공손찬도 삼공그룹이 후원해서 달라진 거라고 납득했다.
“유비, 이리 와서 이거 좀 봐.”
설거지를 하고 나온 유비가 공손찬이 가리키는 대로 컴퓨터 화면을 보았다. 그도 상금을 보고 입이 딱 벌어졌다.
“우와, 우리 이거 나갈 수 있나?”
“응. 나이 되고, 기존 입상경력 같은 것도 필요 없어. 체급도 나누지 않고.”
그렇게 말하고 공손찬이 조금 뜸을 들였다.
“넌 무투대회 나가본 적 없지.”
“응. 이거 나가라고?”
유비가 바로 알아듣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걱정 마, 반드시 금메달 따서 이 상금 타올게!”
“오늘부터 특훈이야.”
공손찬은 웃지 않았다.
“대회라는 거 말처럼 쉽지 않아. 그냥 대련 정도로 생각하면 안 돼.”
“응! 걱정 마!”


유비는 정말 열심히 수련했다.
대회까지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기 때문에 공손찬은 엄격한 수련표를 짜 주었고 그걸 다 소화해야 했다.
다만 기왕 상금을 노리려면 조금이라도 승률을 높여야 하는데 찬이는 왜 안 나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슬쩍 물어봤더니 찬이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훈련 강도만 갑자기 올렸기 때문에 더 물을 수가 없었다. 그냥 자신이 열심히 연습해서 우승하는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날짜가 지나고 예선날이 되었다.
그동안 상금 소식이 알음알음 퍼졌는지 참가자는 정말로 예년보다 늘었다. A, B, C, D, 4개조로 나눠 토너먼트 예선을 치르게 되었다.
“넌 A조야.”
대진표를 보고 공손찬이 유비에게 일정을 말해주었다.
“오늘 한 번, 내일 한 번 겨루고 둘 다 이기면 다음주에 B조 승자와 겨루게 될 거야. 그 다음이 결승이고. 전부 이기지 못하면 상금은 못 타.”
“응, 걱정 마.”
사실은 지금도 무서웠지만 약한 소리는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스피커에서 유비의 이름이 들려오자 씩씩하게 걸어나갔다.
첫 상대는 좀 무섭게 생긴 중장년의 남자였다. 기세로 눌려선 안 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신호와 함께 그자가 먼저 덤벼들었다. 용케 허점이 보여 유비가 그리로 정권을 내질렀다.
주먹이 그대로 들어갔다. 뻗어버린 상대는 일어나지 못했다.


관객석에서 보고 있던 손책이 손상향에게 톡을 날렸다.
-유비 이겼어. 상대가 너무 약하더라.
답장은 없었다.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든지, 아니면 바빠서 답할 틈이 없는 모양이었다.
강동관에서도 취미반 여럿이 이번에 출전신청을 했다. 원래는 취미반 코치가 전담할 일인데 상향이가 직접 나서서 일을 분담했다. 상금이 뛴 줄도 모르고 지나치는 사람한테 믿고 다 맡길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상향이다운 조치이긴 한데 조금이라도 이 대회에 더 관여하고 싶어서 더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 역시 공손찬은 직접 출전하지 않았지만 이런 대회에서 승부를 이어가는 것보다는 유비가 이겨서 도원관 살림이 나아지는 게 진짜 목적이니까.
‘그런데 나 드림배틀은 어쩌지?’
유비도 공손찬도 드림배틀의 군주들, 언젠가 싸워 이겨야 할 상대였다. 그리고 꿈도 깨뜨려야 했다.
공손찬의 꿈이 무엇인지 불안해졌다. 자칫 상향이의 라이벌을 영영 잃을 수도 있었다.
‘상향이가 공손찬을 만족할 만큼 이긴 다음에 내가 배틀을 걸면 되나?’
배틀에서 진다고 반드시 아버지처럼 죽는 건 아니니까 그 정도면 어떻게 될 것 같았다. 어차피 공손찬 말고 상대할 군주가 안 남을 때까지는 미뤄둬도 되는 고민이었다.
‘그럼 다른 경기는 어떻게 됐나 볼까?’
시간 관계상 넓은 시립 체육관에 구획을 만들어 예선전을 한꺼번에 치르고 있었다. B조 우승자는 누가 될까 궁금해하며 B조 구역으로 갔다.
‘어라, B조에도 영웅의 이름이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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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주부 모먼트 좋아합니다.
손상향의 커피 취향은 모르지만 무도가로 식단 관리중일 테니 당분 섭취는 계획적으로 할 것 같아서 저렇게 설정했습니다. 공손찬과 똑같게 마시는 것도 좋지 않나요.

세계의 중심 63 ㅣ- 회색도시&검은방


‘내가 신중하지 못했던 걸까.’
하태성은 찜찜한 기분에 사로잡혀 여관 뒤뜰을 걸었다.
멀쩡해 보이는 시종이 멀쩡해 보이는 초대장을 전한 것뿐이라고 변명하기엔 숙소로 찾아오지 않고 외출한 사람을 쫓아온 행태는 분명 수상했다. 역시 그런 것 받지 말았어야 했다고 태성은 후회했다.
다과에 초대받아 가신 것뿐이고 하무열 교수님도 함께 가셨으니 아버지께 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이 꺼림칙한 기분은 없어지지 않았다.
태성은 하무열 교수님을 믿으려고 노력했다. 좀 좋아하기 힘든 사람이기는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고 실력만은 확실했다. 세미나에선 태성도 많이 배우기도 했고.
그 때 수상한 사람을 구별하는 법도 배웠다. 그 중에 들었던 말이 있었다. 멀끔하고 정중해 보인다고 수상하지 않은 게 아니고 자기 일 열심히 하고 있어도 수상하지 않은 게 아니라고. 말로 들을 땐 이해한 줄 알았는데, 실전에 들어가니 이 꼴이었다.
하태성은 깊은 자괴감을 느꼈다. 자기가 경계해야 할 사람을 제대로 찾아내기 전에는 이 기분이 계속될 것만 같았다.
마차가 들어오는지 마구간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혹시 아버지께서 돌아오셨나 그쪽으로 가본 태성은 들어오는 게 짐마차인 걸 보고 실망해 고개를 돌렸다.
‘....음?’
태성이 조심스럽게, 그냥 마구간에 있는 말을 쳐다보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 근처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방금 들어온 채소를 실은 짐마차에서 말을 분리해 마구간으로 끌고 가는 마부 소년이 자길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태성도 자기 외모가 좀 튀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긴 수도고 번화가였다. 사람의 외모가 조금 특이하다고 해서 저렇게 몰래 흘끔거릴 것 같지는 않았다.
‘설마, 저 사람들도 백선교나 장회장의 끄나풀인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무열 교수님은 백선교는 종교로 위장해 사람들 틈에 파고들었기 때문에 백선교도는 어디든 있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저 마부나 저 짐꾼이 백선교도이고 학생들을 감시하러 이 여관에 일부러 왔을 가능성이 분명 있었다.
“뭘 봐? 예쁘장한 나리가 우리 같은 놈들 일에 흥미 있어?”
어느새 그자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태성은 깜짝 놀랐다.
“그,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잠시 서서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틀림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렇기에 더 부끄러웠다. 실제로 수상한 사람을 가려내보겠다고 생각한 지 몇 초나 되었다고 수상해 보이는 사람을 앞에 두고 멍하니 있었다니.
“야 이 애송아. 손님한테 시비 걸지 말고 빨리 짐이나 마저 날라. 무슨 경을 칠라고 이게.”
머리를 박박 민 짐꾼이 달려와 어려보이는 마부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실례했수다. 거 손님도 이런 지저분한 데 나와 있지 말고 안에 들어가 있으쇼.”
무례한 태도로 고개만 꾸벅하고 가버리는 두 사람을 보고 태성은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냥 자기 할 일 하는 사람들을 얼토당토않게 백선교도로 의심하고 또 의심해놓고 경계도 제대로 하지 못하다니.
‘하무열 교수님이 들으면 비웃을 가치도 없어서 그냥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남들한테 보호나 받으라고 하시겠지.’
그게 틀린 평가가 아니라 서러웠다. 태성은 우울해져서 여관으로 도로 들어갔다.


김주황은 허건오의 뒤통수를 때렸다.
“야 이 멍청아, 감시 대상한테 그렇게 가까이 간 바보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냐.”
“아 내가 뭐! 그쪽이 먼저 쳐다봤는데,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모르는 척 하면 그게 더 수상하겠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얼굴을 봬줬냐? 나중에 미행이라도 하게 되면 어쩌려고 그래?”
“미행을 누가 얼굴 보여 가며 하냐, 그늘에 잘 숨어서 따라가면 되는 거지.”
“아 진짜 뭐 이런 말을 들어 처먹지 않는 애송이하고 일하게 되어서는...”
김주황이 얼굴을 찌푸리고 뒤통수를 긁었다.
“암튼 아까는 정말 멍하니 생각에나 빠져있더라. 위험같은 건 겪어본 적 없는 도련님이야.”
“나도 안다, 뭐.”
허건오도 투덜거렸다. 김주황은 허건오를 쳐다보았다.
저렇게 작고 별볼일 없게 생겼어도 저놈이 사람 죽이는데 망설임이 없는 칼잡이라는 건 김주황도 알고 있었다. 저런 넘이 감시 업무에 동원된 이유 역시.
‘대체 왜 백석에 찍혔는지는 모르지만, 저 도령도 인생 참 그지같이 꼬였구만.’


교수와 학생 일부가 어떤 위기와 위험에 직면해있든 간에 이들은 여기에 공부를 하러 온 것이고 학생들은 법원에 가서 재판을 방청하고 양측 변호사가 설전을 벌이는 것을 지켜보며 각자의 논리를 비교하고 평가했다. 자기라면 어떤 식으로 논거를 제시하겠다, 또는 승산이 없으니 적당히 합의하고 포기하는 게 낫다는 의견도 들렸다.
애들을 법정에 몰아넣고 하무열은 밖으로 나왔다. 답답해서 신선한 공기를 마셔보려고 했는데 도시의 공기가 협조를 안 해주자, 기왕 안 신선한 공기라면 더 안 신선하게 해주마 하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혼자 담배 좀 맛나게 태워볼랬더니 재수 없는 방해꾼이 나타났다. 하무열은 한쪽 눈만 치켜떴다.
“뉘슈?”
장희준의 표정이 조금 찌그러졌다.
“장희준 회장일세. 사람을 잘 기억 못하는 모양이군.”
“아, 사람은 잘 기억합니다.”
하무열이 벽에 기댄 등을 떼고 바로 섰다.
“그저 수사국 퇴직하고 난 뒤에는, 범죄자는 굳이 기억해 둘 필요를 못 느껴서 말이지요.”
“....듣던 대로 재미있는 사람이군.”
장희준이 불편한 티를 감추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미소를 지었다.
“하성철 교수와 가까운 사이인가?”
“나에 대해 조사 좀 했다면 내 취향은 훨~씬 연하라는 것도 아실텐데?”
하무열이 빈정거렸다.
“나이에 맞는 사람을 찾는 건 바람직한데, 그게 스토킹이 되면 안 된다는 건 모르시나보지?”
“스토킹이라니, 내가 언제 그가 가는 곳에 쫓아가기라도 했다는 듯한 말이군.”
장희준이 말했다.
“나는 언제나 수도에 있었고, 돌아온 것은 하성철 교수 쪽이오.”
“학생들과 교수 잔뜩하고 업무상.”
하무열이 말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요? 당신의 괴롭힘에서 살아 도망친 게 괘씸해서? 그렇다 해도 그런 조롱은 좀 과하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멀쩡하게 명예를 지키며 당신하고 상관없이 잘 살고 있는 사람을.....”
하무열은 입을 다물었다. 장희준은 표정관리를 잘 하는 듯 했지만 방금 말에는 아주 약간의 변화를 보였고 하무열은 그걸 감지했다.
그는 ‘멀쩡하게’나 ‘명예를 지키며’가 아니라 ‘당신하고 상관없이’에 반응했다.
하무열은 장희준이 왜 하성철에게 집착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리고 장희준은 하무열이 그걸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런 젠장.”
“말할텐가?”
장희준이 놀리듯 말했다.
“그가 알면 좋아하지 않을걸세.”
“그걸 알면서 불러다 그랬단 말이지.”
하무열이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내뱉었다.
“그 마음에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부분이 포함된다면 당장 댁에 가서 다시는 법원에도 학교에도 얼씬하지 마쇼. 아니면 당신은 그를 죽이게 될 거요.”
“내가 사람이 죽는 걸 꺼릴 거라고 생각하다니, 높은 평가에 감사해야 할 것 같군.”
장희준은 기분 좋은 듯 웃었다.
“어디 열심히 지켜보시지. 아무런 도전도 없이 얻는 결과는 시시하니까.”
“얼른 뒈지기나 하시지.”
하무열은 가버리는 장희준의 뒤통수에 대고 가운데 손가락을 세웠다. 마음 같아서는 가운데 손가락을 열 개 쯤 날려주고 싶은데 하무열의 손은 두 개 뿐이고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있었다.
‘손이 부족하면 빌려야지.’
다행히도 하무열은 남 엿먹이는 데에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 못해 그 용도로만 손이 열 개쯤 있는 것 같은 사람을 하나 알았다.
‘자기 일도 산더미인 녀석 끌어들이고 싶지 않지만, 지금은 비상사태고 그놈도 달리 정신 쏟을 일이 있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으니까.’
세상 천지 어딜 가나 문제 투성이라고 투덜대며 하무열은 반도 안 태운 담배를 던져버리고 다시 법원으로 들어갔다.


허강민은 차분한 태도로 하무열의 말을 경청했다.
“장희준 회장이라고요.”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나이도 먹을 만큼 처먹어갖고 비열하네요. 어차피 잘 서지도 않을 것 같은 노인네가...”
“얌마.”
하무열이 그의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왜 하필 하성철 교수님일까요?”
“너 내 설명 뭘로 들었냐?”
“아니 어쩌다 얽혔는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같은 얼굴이라면 훨씬 젊은 버전이 있지 않아요?”
장희준이 하태성을 쫓아다니는 걸 상상하자 하무열은 오소송 소름이 돋았다.
“끔찍한 얘기 하지도 마라. 게다가, 너 변태 영감이 어디 사람 얼굴만 보고 괴롭히든?”
허강민은 바로 납득했다.
“그러고보니 이쪽도 변태영감이네요.”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변태 영감이 샘솟는 샘이라도 있나.”
“뭐냐 그 벼락맞을 샘은.”
하무열이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부르르 떨었다.
“교수님 고향은 어디에요?”
“뭐임마?”
하무열이 허강민의 목에 팔을 걸어 조였다.
“너 이녀석 그게 널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주는 스승님께 할 말이냐, 이렇게 된 거 정말로 변태 영감 같은 짓을 해줄까?”
“놔줘요!”
허강민이 버둥거렸다. 정말로 범죄를 저지를 생각은 아니었기 때문에 하무열도 바로 놔주었다. 허강민이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다시 쓸어내렸다.
“어차피 미역 머린데 뭘 다듬느라고 그러냐.”
“데이트 할 거라서 그럽니다.”
평소대로 너스레를 떨 요량이던 하무열이 그 말에 딱 굳어버렸다.
“뭘 한다고? 누구랑?”
“류태현이랑 데이트요.”
허강민이 확실하게 대답했다.
“나가서 저녁만 먹을 거에요. 아직 해도 지기 전이고, 어디 공연장에 간다거나 공원 으슥한 곳을 산책한다거나 하는 짓은 안해요.”
“그거야 당연하지, 너 여기 대체 왜 왔냐.”
“법학과 실습하러요.”
허강민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너 자신의 처지를....”
“방학 내내 학교 바깥에도 못 나갔다고요.”
허강민이 억울하단 표정으로 말했다.
“네, 제 잘못으로 일어난 일인 건 아는데, 그래도 답답하고 류태현한테도 미안하다고요. 기왕 저 노릴 사람 없는 곳에 왔는데 둘이서 저녁 한 번을 먹는 것도 안 되나요? 빨리 나가서 해지기 전에 돌아올게요.”
“수도에도 백선교도들은 있다.”
“어차피 그들은 제가 여관 밖으로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류태현은 마법사잖아요.”
여관에 보호 마법을 거느라 탈진해 뻗은 마법사도 쳐주는 거냐고 하무열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내가 몰래 따라가서 경호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죠.”
허강민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 교수님이 친히 보호를 해준대도 싫다네.”
“보호는 감사합니다만 교수님이 쫓아오시면 데이트가 아니게 되잖아요.”
“나 말고 다른 사람이면 괜찮고?‘
능글능글 웃고 있는 교수를 허강민이 째려보았다.
“외출해도 되요, 안 되요?”
허강민은 그것만 물었다.
“.....쪼잔한 자식.”
하무열이 투덜거렸다.
“그래, 데이트 하고 와라. 말한대로 딱 저녁만 먹고, 해지기 전에 들어와라. 늦으면 쫓아가서 니들 옆에 찰싹 달라붙어준다.”
“네.”
허강민의 표정이 풀어졌다. 하무열이 질색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류태현이 그렇게 좋냐.”
“류태현이 아니라 데이트가 좋습니다.”
“오냐, 그 녀석에게 그 말 꼭 전해주마.”
“악당.”
허강민이 눈을 흘겼다. 하무열이 하하 웃었다.
“가봐라. 류태현한테도 좋은 소식 전해줘야지.”
“예.”
허강민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방을 나갔다. 발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는 걸 기다려 하무열은 조용히 방을 나갔다.
약속했으니 그가 따라가지는 않을 것이다, 직접은.
‘원래 관리직이라는 건 누구에게 일을 떠넘기느냐가 관건이란다.’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23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역시 너희들도 드림배틀에 참가한 군주였군.”
손책은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우리 이름 때문에 짐작하고 찾아온 거야?”
“그래.”
공손찬의 질문에 그가 솔직하게 끄덕였다.
“도장마다 찾아다니면서 영웅의 이름을 지닌 고수들과 겨루고 있지. 전단지에 보니 영웅의 이름을 지닌 무술가가 세 명이나 되어서 기대하고 찾아왔는데, 역시 이 손책의 상대는 없구나.”
“세 명?”
유비가 두 눈을 껌벅였다.
“스승님 얘기야.”
공손찬이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래서, 이참에 드림배틀까지 걸려고?”
유비가 기겁했다. 2대 1로도 이기지 못하는 고수와 드림배틀로 맞붙어야 한다면 결과는 뻔했다.
행인지 불행인지 손책은 이미 노골적으로 실망한 얼굴이었다.
“어쩐다, 여기서도 이 손책의 상대는 찾을 수 없다니......”
근심어린 얼굴로 도원관 안을 둘러보던 손책의 시선이 정면의 벽에 머물렀다.
이전 계승자들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는 벽이었다. 그 아래엔 도원관이 처음 열었을 때 달았다는 낡은 간판도 걸려있었다.
유비와 공손찬이 태어나기도 전에 새 간판으로 바꿔야 했다는, 지금은 민속촌에서나 볼 수 있을 구식 현판이었다.
그런 만큼 도원관의 역사와 전통이 서려 있는 그 간판을 보고 손책이 성큼성큼 다가가서 덥석 떼어들었다.
“어!”
유비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이건 내가 잠시 맡아두겠다. 되찾고 싶으면 실력을 쌓아서 강동관으로 와라!”
“잠깐,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공손찬이 일단 그를 가로막고 외쳤다.
“이건 절도에 기물 파손이야!”
“예, 그렇죠. 죄송합니다.”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공손찬이 놀랐다.
언제 들어왔는지 파란 무도복에 머리를 하나로 땋은 여자가 손책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똑같이 강동관이라고 적힌 파란 도복인데 이쪽은 찢어 입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풋내나는 새 도복인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목소리와 얼굴이 좀 익숙했다.
‘어디서 봤던 사람인가?’
공손찬이 기억을 더듬느라 가만히 있는 동안 새로 나타난 인물은 대뜸 손책에게서 도원관 간판을 빼앗아 들고 그의 귀를 낚아챘다.
“지금 도장깨기 하고 다닐 때야? 응? 응?”
“아니, 난 도장깨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아니면 대체 뭔데. 강동관 팽개쳐두고 여기 와서 뭐하는 거냐고. 간판은 왜 떼? 이게 무슨 무협지인 줄 알아? 아니, 무협지에서도 요즘은 이런 거 안 하거든?”
“넌 어차피 무협지 안 읽잖아....아! 아! 잘못했어!”
유비도 공손찬도 잠시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가 멍청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손책을 조용히 시켜놓고 그 사람이 도원관 간판을 유비와 공손찬에게 정중히 내밀었다.
“우리 오빤데 요즘 좀 이상해졌어요. 혹시 뭐 부순 거 있어요? 변상이라면 다 해드릴 테니까 너무 문제 삼지 말아주세요.”
“아니, 이상해졌다고 할 것까지야......”
손책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으나 공손찬의 신경은 이 새로 나타난 무도가 쪽으로 쏠려 있었다. 간판을 받아들며 상대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상대도 공손찬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곧 표정이 일그러지고 안색도 창백해졌다.
“공손찬?”
“날 알아요?”
공손찬은 그냥 물어봤을 뿐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그 질문에 더 동요한 것 같았다.
“날 기억도 못한단 말이야? 나야, 나! 손상향!”
“아.....”
이제 확실히 기억났다. 공손찬이 손뼉을 쳤다.
“그, 도 대회 때마다 제일 이기기 힘들었던!”
“그렇게 말하면서 맨날 이겼잖아!”
손상향은 이제 간판 같은 것 싹 잊은 듯했다. 주위를 둘러보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다.
“뭐야, 지금까지 이런 데서 수련해온 거야?”
“상향아, 오빠가 잘못했으니까 이제 집에 가자.”
손책이 아까보다 기세가 죽어서 동생을 달래려고 했다. 그러나 손상향도 공손찬도 그쪽은 더 신경쓰지도 않았다.
“도원관에 뭐 불만이라도 있어?”
공손찬이 딱딱하게 물었다. 나무로 된 오래된 수련도구들을 손상향은 자기네 장비 점검하듯 엄격한 눈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대학도 안 가고 전수받으려고 안달하던 비룡권이 고작 이런 도장에서 전수되고 있었어? 여기 이건 흰개미가 먹었네?”
“그건 예전에 좀 삭은 것뿐이야! 지금은 도장에 벌레 같은 거 없어!”
공손찬이 날카롭게 외치며 손상향에게 다가갔다.
“남의 도장이 어떻게 운영되든 무슨 상관이야. 내가 비룡권은 알아서 잘 살려놓을 테니까, 신경 끄고 오빠나 챙겨가. 무술인지 비즈니스인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그래. 내 알 바 아니지.”
손상향도 돌아서며 쏘아붙였다.
“아주 은둔 고수 나셨어. 산에 들어가 폭포수라도 맞지 그래?”
당장 둘이 주먹다짐이라도 하는 것 아닌가 유비는 조마조마해서 쳐다보았다. 그러나 손상향은 찬바람 쌩쌩 휘감은 채 그냥 도원관을 나가버렸다.
손책은 손상향이 나간 문과 공손찬과 유비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허겁지겁 자기도 나갔다.
공손찬도 사나운 기색으로 침묵하다가 방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혼자 남은 유비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일단 간판을 제자리에 곱게 다시 걸었다.
그러다가 눈치만 보고 있는 영웅패들과 눈이 마주쳤다.
‘뭐라고 설명하지?’
손상향의 이름이나 얼굴은 유비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둘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중고등학교 때 공손찬은 한창 각종 대회에 나가 금상, 최우수상, MVP 등등 이름만 들어도 감탄이 나오는 상들을 쓸어왔었다. 스승님과 자신도 그런 공손찬이 자랑스러워서 대회마다 찾아가 응원했었다.
대회에서 만나는 상대들 중 유난히 강한 라이벌이 있었다. 두 번째인가 세 번째 때부터는 아예 스승님부터 대진표에서 그 상대를 언제쯤 보게 될지 확인하곤 하셨다.
그래도 결국 최종 승리를 거두는 건 언제나 공손찬이었다.
그래서인지 유비에게 그때의 기억은 딱히 강렬하거나 인상 깊지 않았다. 그냥 둘이 같이 열심히 수련하고, 공손찬을 부러워하면서도 자신은 그렇게 무예에 걸맞는 인간이 아니라고만 여기고, 그러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공손찬은 이제 비룡권 고수가 되어 후계자로 인정받겠다고 했다. 수련도 더욱 불이 붙었다.
그런 공손찬을 보며 유비도 자신의 앞날을 진지하게 생각해봐야겠다고 결심하고.....여행 다녀온다는 스승님의 쪽지를 발견했다.
“형님?”
“어, 아냐. 아무 것도.”
유비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공손찬하고 예전에 알던 사이였나봐. 너희들은 너무 신경 안 써도 돼.”
“정말 그렇습니까?”
관우는 여전히 심각한 기색이었다.
“그 손책이라는 군주가 다시 공격해오면 큰일인 것 아닙니까?”
“어.”
듣고 보니 그랬다. 유비는 당황해서 공손찬의 방 문을 두드렸다.
“공손찬, 잠깐 얘기 좀 하자.”
방 안에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더럭 걱정이 든 유비가 문을 더욱 세게 두드렸다.
“대체 왜? 무슨 일이야?”
안에서 화가 잔뜩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손찬, 그 손책이라는 사람이 또 쫓아오면 어쩌지? 드림배틀로도 못 이길 것 같던데.”
“몰라. 어떻게 되겠지.”
“.....응?”
잘못 들어났나 싶어서 다시 물었더니 더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좀 생각해내 봐! 나한테 조르지만 말고!”
유비는 찔끔 해서 문 앞에서 떨어졌다.
‘공손찬이 왜 저러지? 손상향이 그렇게 싫은 상대였나?’


손책도 이번만큼은 찍소리도 못하고 손상향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 건으로는 이미 크게 혼난 적이 있으므로.
작년 말 상향이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 자신은 상향이가 당연히 체육 명문 적벽대에 갈 거라고 생각했었다. 무술도 요즘은 비즈니스라느니 멋없는 소리를 하지만, 그런 만큼 자신만의 스타일을 세우려는 야심이 컸으니까.
그런데 막상 원서 쓸 때가 되자 딴소리를 했다. 경영학과에 가서 강동관 경영에나 힘을 보태겠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펄쩍 뛰셨다. 어머니도 지금 경영할 일손이 부족하지는 않다며 난색을 표했다.
그 어머니가 평소처럼 기합을 넣어 온 집안을 날려버리지 않고 말로 설득하려 하실 때 뭔가 사정이 있다고 눈치챘어야 했다.
그저 무술에 전념하라고, 왜 제대로 도전도 안 하려 드냐고 말했다가 불벼락을 맞았다.
‘했어! 했다고! 늘! 늘! 늘! 그래서 맨날 이등이야! 그걸 알지도 못하면서 뭐가 잘났다고 충고야, 응?’
결국 상향이가 다 부숴놓은 트로피, 상장과 함께 집 밖으로 쫓겨나 늦가을 찬바람을 맞으며 싹싹 빌어야 했다.
같이 쫓겨난 아버지는 계속 2등만 한 걸 몰라서가 아니라 지금도 뛰어넘기에 늦지 않았다는 얘기라고 하셨지만 이미 그런 변명이 통할 단계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상향이와 권이 데리고 외출해 있는 동안 둘이서 반파된 집을 치우는 신세가 되었다.
찢어진 상장, 깨진 트로피마다 ‘은상’, ‘2위’, ‘은메달 수여’라고 새겨져 있었다.
상향이가 특별히 부족했던 게 아니고 끝끝내 이기지 못한 라이벌이 있었던 거라고 그때 아버지에게 듣고서야 알았다. 그것도 하필 같은 도내에 있어서, 대회에 따라서는 준우승조차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결국 호텔에서 자고 다음날에야 돌아온 상향이는 바로 대학에 가는 대신 일 년 간 강동관에서 트레이너를 하며 경영도 돕기로 했다. 경영학과에 가겠다는 고집이 누그러져 타협한 건지, 더 화가 난 나머지 진학도 미뤄버린 건지는 차마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건 예정된 불벼락이 떨어질 것 같았다.
‘그 라이벌이 이렇게 가까이 있었다니.’
하지만 상향이가 직접 이겨서 설욕하는 일은 이제 정말로 불가능해져 버렸다. 변신한 상태가 아니어도 드림배틀의 군주를 일반인이 당해낼 수는 없었다.
드림배틀의 군주가 되면 변신하지 않아도 신체능력이 증대된다. 이래봬도 최선을 다해 진지하게 배틀을 치르는 중인 손책은 그런 몸의 변화도 꼼꼼히 체크하고 있었다.
자신의 세 영웅패 가운데 ‘첫 영웅패’인 태사자의 영향이 가장 큰 것 같았다. 공격적인 자신의 성향과 잘 맞아서 거기엔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유비와 공손찬 역시 각자의 영웅패에 따라서 능력이 오른 상태일 터였다.
유비는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았다. 어쩌면 드림배틀 전엔 무술을 연마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다.
공손찬은 그에 비하면 싸워볼 만 했다. 사실 황조를 이긴 후 겨뤄본 상대들 중에선 가장 나았다. 순발력과 반사신경이 특히 빼어난 걸 보니 영웅패도 그런 쪽으로 특화된 모양이었다.
‘그래도 승산은 충분했는데, 내가 이겨선 소용없겠지.’
상향이 성격을 생각하면 역시 자신이 대신 이기겠다고 해봐야 작년 일의 재탕이 될 게 뻔했다. 춥지 않다고 해서 쫓겨나도 괜찮지는 않았다.
‘이제 어쩌지?’


“그렇게 톡 치면 쓰러질 낡은 도장이라니.”
손상향이 투덜거렸다.
오빠가 듣는 건 상관없었다. 어차피 안 듣고 있을 테니까.
엄마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작년에 공손찬과 만나 이야기해 본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출전한 마지막 대회였다.
기어이 은메달이었다. 너무 분해서 부모님의 위로 같은 것도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위로고 뭐고 다 싫어서 대회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화장실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적당히 찾아간 구석에서 어이없게도 공손찬과 떡 하니 마주쳐 버린 건, 그 전까지의 모든 만남이 그랬듯 역시 불운이었다.
공손찬의 표정이 밝지 않았던 것이 그때는 재수없게만 보였다. 욱 하는 기분에 마구 쏘아붙였다.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직전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떠올려서, 적벽대학에서 나란히 수련하게 되면 달라질 거라고 했던 것 같았다.
‘내가 거기 간다고 누가 그러든?’
지금도 말투까지 생생하게 기억났다.
자신은 오직 공손찬을 이기기 위해 수련해왔는데, 공손찬에게 자신은 좀 버거운 상대도 아니었다.
‘난 비룡권을 전수받을 거야. 비룡권 마스터가 되어서, 맹호권보다도 더 유명하게 만들 거라고.’
그때는 그 말이 그렇게 서러웠다. 무술가로서의 꿈이고 자존심이고 전부 짓밟아 놓은 것으로 모자라 맹호권과 강동관의 위상까지 남김없이 부숴버리겠다는 말로 들렸다.
그래서 경영학과에 가겠다고 했다. 무술로 이길 수 없다면 도장 운영과 후학 양성으로 맞서고 싶었다.
겨우 트레이너 겸 매니저로 일 년 간 일해보며 생각을 정리하겠다고 타협을 한 결과가 지금이었다.
‘도원관이랑 강동관 굉장히 가까웠네. 몰랐어.’
어느새 도착한 강동관에 들어가는 대신 잠시 번듯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트레이너가 되고서야 깨달은 것들이 있었다. 무술도 비즈니스라는 자신의 생각은 틀리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아버지 손견이 그토록 유명해진 것도 무술 실력만으로 가능했던 게 아니었다. 신중하게 참여할 대회를 고르고 강동관 홍보에도 적극 참여했다. 최상의 컨디션을 위한 식단, 스케줄, 옷과 운동기구 등등이 전부 돈이고 사업이었다.
아이가 무술가를 지망할 수 있도록 학비를 지원해줄 수 있는 집도 자신이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적었다.
재능이나 열정이 아니라 돈이 부족해서 호신술, 취미 이상 배울 수 없다는 수강생들을 몇 번 겪은 덕에 오늘 도원관에서 공손찬의 진짜 사정을 가늠해볼 수 있었다.
‘그런 다 망해가는 도장에서, 자존심 하나 겨우 붙들고 버티는 꼴이라니!’
생각할수록 비참했다. 그 공손찬이 저런 꼴로 살아야 한다면, 그에게 밀려 2등으로 남아야 했던 자신은 뭐가 된단 말인가.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22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유비는 도원관에 돌아가는 대신 정처없이 길거리를 헤맸다.
미축이 탈락했을 때는 정말 슬펐다. 장비를 위해서라도 꼭 그 박쥐 군주를 찾아 무찌르겠다고 다짐했었다.
아마 공손찬도 그 박쥐를 찾았다고 하면 당장 조운과 함께 뛰쳐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게 도겸 형이었다고?’
“주군.”
관우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예전에 미축님을 탈락시킨 그 군주가 틀림없습니다. 망설일 때가 아닙니다.”
“도겸 형이 은행강도 같은 짓을 정말 했을까? 혹시 그 군주를 이기고 박쥐 영웅패를 뺏은 거 아냐?”
“그쪽도 변신한 큰형님을 알아봤잖수. 예전 일을 기억하고 있는 거요.”
장비도 따졌다.
“당장 가서 배틀을 걸어야 하는 것 아니오? 혹시 혼자서는 무서운 거요?”
“아냐, 그런 거.”
유비가 고개를 도리도리 했다.
“그런데 도겸 형이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알고 찾아가? 집도 모르는데?”
“전화번호는 교환했지 않습니까.”
관우가 퇴로를 차단했다.
“어차피 그쪽에서도 아예 다른 동네로 달아나지 않는 한 주군과 또 마주치게 된다는 것 정도는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이럴 땐 정면으로 부딪쳐서 끝장을 내야 합니다.”
반대할 여지가 없는 정론이었다. 유비는 미적거리면서도 폰을 들었다.
“잠깐, 형님!”
관우가 갑자기 긴장한 목소리로 불렀다.
“근처에 강력한 군주가 나타났습니다!”


“유비가 그 녹색 군주였을 줄이야......”
도겸은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까운 놀이터에 앉아있었다.
당장이라도 유비가 그때의 동료들까지 데리고 쫓아올 것 같았다. 그런 꼴을 어머니 보여드릴 순 없었다.
“아 참. 그 주황색 군주는 그때 내가 탈락시켰지.”
그건 불법도 범죄도 아니었다. 드림배틀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을 쫓아온 것은 자신이 강도짓을 하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아, 뭘 그렇게 걱정합니까. 관우패를 쓰면서 고작 그 정도 실력밖에 안 되는 군주를. 이 장개가 또 한 번 활약하면.....”
“안 돼!”
도겸이 외쳤다.
“유비는 내 친구야. 싸우면 안 돼!”
“하지만 어차피 그쪽도 이젠 주군을 적이라고만 생각할 텐데요?”
“그야......”
“아니, 전과자라서 취직도 안 된다, 친구도 안 생긴다, 알바는 뼈빠지게 해봐야 돈도 안 되는데 그래가지고 언제 소원대로 부자가 될 겁니까? 내가 다 알아서 해주겠다는데.”
“안 돼!”
도겸이 버럭 화를 냈다.
“장개 너, 그러니까 내가 안 써주고 배틀도 안 하고 다닌 거잖아. 깨끗하게 살려고 배틀까지 접고 노력하고 있는데.....”
그의 손 안에 든 박쥐 모양 영웅패는 또 비몽사몽 잠들기 시작했다.
원래 밤에 팔팔한 대신 낮에는 항상 이 모양인 게 장개의 약점이었다. 그러나 하필 이 타이밍에 잠드는 건 할 말 없어지니 도피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일어나, 장개.”
평소 변신하기 위해 깨울 때처럼 쥐고 흔들었다.
“아, 낮에는 졸리다고 했잖아요. 아까도 돈 냄새 나서 겨우 일어났더니 돌려줘야 한다고......”
장개가 갑자기 투덜거리기를 멈추고 눈을 굴렸다.
“주군, 빨리 달아나야겠습니다. 군주의 기척이에요!”
‘싸우자’가 아닌 ‘달아나자’인 걸 보니 장개가 지금 정말로 졸립거나, 그만큼 강한 군주인 모양이었다. 도겸도 이번에는 장개의 말에 바로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장개를 주머니에 넣고 일어나자마자 붉은 갑주의 군주에게 가로막혔다.
“도겸, 역시 네놈이 박쥐 군주였군.”
도겸의 현재 주소지를 아는 조조는 군신일체 상태로 그 근처를 순찰하기만 하면 되었다. 장개의 경고는 조조의 낚싯바늘을 무는 결과밖에 낳지 못했다.
도겸은 다급하게 장개를 체인저에 꽂았다.
“일어나, 장개!”
검은 갑주에 박쥐 날개를 단 군주가 조조 앞에 나타났다.
조조는 태연히 그에게 피닉스 엣지를 휘둘렀다. 도겸이 반격하려 했지만 지금은 아직 낮이고 조조는 격투 기량부터 그보다 월등했다.
도망가다가 그만 뒤로 넘어져 버렸다. 조조는 틈을 주지 않고 하후연으로 바꾸어 사격했다.
“잠깐만, 조조!”
엉뚱한 방향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관우와 일체화한 유비가 달려와 끼어들었다.
“기다려 봐. 도겸 형한테는 나도 할 얘기가 있어.”
“또 너냐?”
조조는 기가 차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내 일을 방해하는 것 말고 또 무슨 볼일이 있다는 거냐?”
“그런 게 아냐. 도겸 형한테 잠깐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그리고 유비가 주춤주춤 물러나는 도겸을 바라보았다.
“도겸 형. 진짜로 형이 그 은행강도였어? 보석도 훔쳤고?”
도겸은 대답 대신 그대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하후봉황탄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는 사이였나본데, 좋은 사람인 줄 알았다면 속은 거다.”
조조가 다시 도겸에게 다가갔다.
“저놈은 드림배틀이 열리기 5년 전에 내가 체포했던 범죄자다. 그때도 금고를 털다가 잡혔지.”
유비는 놀란 나머지 듣고만 있었다.
“그때 도겸은 반성하고 있다고, 다시는 안 그럴 거라고 경찰서에서도 법정에서도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그 홀어머니라는 분도 찾아와서 애걸하고. 그게 통해서 형량도 가벼웠고, 가석방도 금방 성사된 거다. 그땐 나마저도 동정했었지.”
조조가 피식 웃었다.
도겸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복면으로 가려져 있어도 비참한 기색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결과가 이거다. 악당을 동정해봐야 더 큰 악을 낳을 뿐이야.”
도겸은 변명하고 싶었다. 장개가 부추겼다고, 다른 군주를 탈락시킨 건 드림배틀이니 어쩔 수 없었다고, 그럼에도 뒷맛이 나쁜 나머지 손 털고 배틀도 안 하고 알바에만 몰두했었다고.
하지만 소용 없을 게 뻔했다.
저 붉은 군주의 말이 옳았다. 자신은 반성하지도 못했고, 법정에서 다짐했던 것처럼 깨끗하게 살지도 못했다.


형광등 빛이 침침했다. 갈아야 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이번 알바비 얼마 받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도겸 형, 괜찮아?”
곁에서 들린 목소리에 도겸은 정신을 차렸다. 여기는 자기 집이고 침실인데 어째서인지 유비가 곁에 있었다.
“이 친구가 널 데려다줬다.”
어머니도 계셨다. 뭔가 따뜻하고 맛있는 냄새가 났다.
“원, 얼마나 무리해서 이렇게 쓰러진 거냐?”
어머니의 목소리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쓰러졌다고? 자신이? 언제?
기억을 더듬어봤으나 이상하게 흐릿했다. 현실감을 찾으려고 눈앞의 유비와 어머니를 보았다.
유비는 그냥 알바하다 만난 친구일 뿐이니 이제 집에 갈 일이었다. 그런데도 마치 친동생처럼 떨어지지 않고 어머니한테도 위로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이해는 가지 않았다. 그래도 유비 같은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알바도 좋지만 몸 상하면 안 돼.”
어머니가 도겸에게 죽그릇을 내밀었다.
“지금도 우리 두 사람 먹고 살 만큼은 되잖아. 얼마나 떼돈을 벌려고 그러니?”
어머니 말씀대로였다. 부자는 아니어도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과욕을 부렸다. 애초 이만큼 가난해진 게 자신이 범죄에 손댔다가 감옥가고 집안이 뒤집어진 때문인데, 그걸 갚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또 사고를 쳤다.
“죄송해요.”
아직 정신이 덜 돌아온 채로 도겸이 사과했다.
“이젠 욕심부리지 않을게요.”


‘스승님, 언제 돌아오세요?’
도원관을 청소하다 말고 공손찬은 우울한 얼굴로 벽에 걸려있는 사진을 올려다보았다. 셋이 나란히 찍은 사진이었다.
보육원엔 자신과 유비 말고도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사연이 더 절절한 아이도 있었고 더 크고 힘이 센 아이도 있었다. 공부를 더 잘 하는 아이도 물론 있었다.
어째서 자신과 유비였는지 지금 돌이켜보니 알 수 없었다.
그땐 유비와 떨어지지 않고 함께 살 수 있다는 게 기뻐서 그런 건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아직 스승님이 지어준 이름이 아니던 시절에도 유진은 순하고 정에 굶주린 아이였다. 조금만 챙겨줘도 친누나 만난 듯 졸졸 따르고 못된 애들 상대로 나서기까지 하는 게 기특하고 귀여웠다.
그러나 유비의 그런 성격은 지금 같은 때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스승님 대신 도원관을 운영하고 배틀까지 하려면 책임감과 함께 적당한 이기심이 필요했다.
스승님도 없이 둘이서만 헤쳐나가야 하는 지금,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유비는 점점 골칫덩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도겸이 탈락했다고 슬퍼하는 건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어쨌든 유비에게는 좋은 친구였고, 탈락했으니 유비나 자신에게 해를 끼칠 염려도 더는 없었다.
그러나 이후 도겸이 잘 재기해서 사는지 알아보기 위해 알바 빠지고 그 집에 다녀오거나, 길거리 점쟁이에게 야바위 당할 뻔했다가 그대로 드림배틀에 말려들거나, 유비는 쉴 새 없이 사고를 쳤다.
우길의 깃털이 꽂혔을 때 유비를 공격한 일은 지금도 끔찍했다. 그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지금도 정확히 기억나는데, 가장 끔찍한 것은 그 감정이 지금도 고스란히 이해된다는 점이었다.
‘유비가 엉엉 울며 빌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와중에도 결국 유비 덕에 위기를 넘겼다는 사실도 싫었다. 장로가 자신이 아닌 유비에게 우길을 부탁하려 한 것도 납득이 가서 더 싫었다.
역시 스승님이라도 계시면 좋을 것 같았다.
언제나 자신에게 의지할 뿐인 유비에게 이토록 치졸한 마음을 품었다고, 스승님께 솔직하게 털어놓을 자신은 없었다. 그저 도원관 운영이라도 걱정할 필요 없게 되면 이보다는 머릿속이 덜 복잡할 것 같았다.
딸랑-
이 와중에도 문의 풍경이 울리자 몸이 자동으로 뛰어나갔다.
“어서오세요.”
“여기가 비룡권 전수자가 운영하는 도원관이란 곳인가?”
들어선 사람은 남자였다. 새파란 무도복을 입었고 팔의 울근불근한 근육이 인상적인, 무협 만화 주인공 같은 인물이 허리에 손을 짚고 서서 도장 안을 둘러보았다.
“스승님은 지금 안 계세요.”
두 사람은 아직 정식 계승자로 인정받지 못했고 상대의 용건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공손찬은 일단 방어적으로 대답했다.
“그래? 그럼......”
노식이 여기 있을 거라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찾아왔던 것처럼 그가 당황해서 어물거렸다.
다음에 다시 오라고 할까 공손찬이 망설일 때가 되어서야 다음 용건을 말했다.
“좋아. 그럼 여기, 공손찬하고 유비라는 사범 있지?”
“어, 그건 우린데.”
뒤늦게 나온 유비가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그 남자의 표정이 밝아졌다.
“좋아. 나는 강동관의 손책! 지금 당장 맹호권이 더 나은지 비룡권이 더 나은지 겨뤄보자!”
손책이 맹호권의 기본 동작을 몇 가지 취하고 두 사람을 향해 주먹을 겨누었다. 공손찬은 어리둥절 해서 손책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왜?”
“그야 말한 대로, 비룡권과 맹호권 중 어느 쪽이 더 뛰어난 무술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지!”
“맹호권?”
유비가 말려들었다. 손책의 강인해 보이는 팔다리를 흥미로운 눈으로 훑어보다가 물었다.
“그건 어떤 무술이야?”
“뭐? 맹호권을 들어본 적도 없다고?”
손책이 충격받아 그 자리에 굳었다. 그리고 험악한 기세로 유비에게 덤벼들었다.
“감히 맹호권을 무시했겠다! 뜨거운 맛을 보여주지!”
“우왓!”
유비는 간신히 피했다. 손책의 공격이 계속 이어지는 바람에 반격도 제대로 못하고 도장 안을 뛰어다녀야 했다.
“비룡권의 위력이 겨우 이 정도냐?”
“아니, 댁이야말로 갑자기 남의 도장에서 무슨 짓이야!”
보다못한 공손찬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 틈에 유비는 태세를 정돈할 수 있었다.
손책은 대꾸 없이 공손찬도 공격했다. 공격 하나하나가 실제로 위력적이어서 공손찬도 금방 수세에 몰렸다.
‘그냥 바보인가 했는데, 진짜 고수잖아?’
유비도 다시 덤벼들었으나 둘이서 손책 하나를 당해낼 수 없었다.
“흥, 몇 백 년을 이어져 내려온 전통무예라더니 별 것도 아니군!”
손책이 두 사람을 비웃었으나 공손찬은 계속 덤벼들 수 없었다. 손책의 실력은 그 정도로 월등했다.
“별 게 아니긴 뭐가!”
유비가 무작정 다시 덤벼들었으나 금방 도로 나가떨어졌다.
“에잇, 더는 못 참겠군!”
도장 구석에서 발만 동동 구르던 장비가 손책을 향해 뛰어올랐다. 관우도 뒤따랐다.
“어딜!”
그들을 막아낸 것은 손책이 아니었다. 손책의 도복 속에서도 튀어나온 조그만한 영웅패들이었다.
“우리 주군은 절대 못 건드린다!”
갑자기 영웅패들끼리 싸우기 시작하자 세 사람도 사람들끼리 대련을 계속할 수 없었다. 일단 각자의 영웅패들을 거두어 손에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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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길전은 원작에 딱히 손댈 부분이 떠오르지 않아 원작 그대로 간 것으로 넘어갔습니다. 우길 좋아하는데....그 최후도 우길다워서 손댈 수가 없더군요.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21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안녕하세요, 서서가 놀러왔어요.”
언제부터인가 서서가 도원관에 다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별히 배틀 관련해서 하는 일은 없었다. 유비가 차려주는 밥을 같이 먹고 선계에서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다가 유비의 위로와 맛있는 밥으로 기운을 차려 돌아갔다.
처음엔 공손찬도 서서가 오는 게 좋았다. 왕윤 아저씨가 죽고 태오가 조조가 되어 떠난 이 우울한 때에 서서의 웃는 얼굴은 정말로 위로가 되었다. 신선들이 선계에서 인간 학생들처럼 공부도 하고 시험도 본다는 이야기도 신기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었다. 드림배틀에 정신이 팔려 개학 대목을 놓치고 봄소풍 등 만만한 이벤트도 까먹은 탓에 원생이 크게 줄었다.
문제의 보석 반지를 박물관에 돌려주고 받은 포상금이 워낙 커서 적금이라도 들어둘까 했더니, 이대로라면 올해 안에 녹아 없어질 판이었다.
“짜잔~오늘은 서서를 위해 오리 훈제를 사왔지!”
서서가 있는 동안엔 공손찬도 애써 웃는 낯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제 참을 만큼 참았다. 서서가 주황빛 빛무리로 변해 사라지자마자 공손찬은 정색을 하고 유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영수증 내놔 봐. 오늘 장 본 거.”
“그래. 잠깐만.”
유비는 한참 바지 주머니를 뒤지더니 그냥 돌아왔다.
“내가 영수증 항상 받아오라고 했어, 안 했어?”
“미안.”
유비는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공손찬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여기 와 앉아서 이거 좀 봐.”
도원관 장부를 펼쳐 유비 눈앞에 들이댔다.
“지금 우리 살림이 군식구를 계속 늘려도 될 때로 보여? 관우와 장비와 조운도 합치면 한 사람 분은 먹고, 미축도 툭하면 와서 얻어먹고, 얼마 전까지 태오도 여기서 살았잖아. 그게 다 돈이라고.”
“태오는 이제 안 오잖아.”
유비가 시무룩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태오의 소식이 끊긴 것을 걱정하자고 부른 것이 아니었다.
“드림배틀을 계속 할래도 돈이 있어야 돼.”
“알았어.”
“내일부터 다시 알바 자리 찾아봐. 어차피 이제 방학 때까지 오전반은 안 할 거니까 그때 할 수 있는 걸로.”


사실 도원관은 스승님 계실 때부터 만성 재정난에 허덕여왔고 이제까지도 수시로 뛰었던 게 알바였다. 유비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기분으로 새 알바자리를 찾았다.
역시 만만한 게 택배였다. 드림배틀 덕에 힘은 몰라보게 세어졌으니 전보다도 더 잘 할 자신 있었다.
“저희들이 도울 일은 없겠습니까?”
관우와 장비가 옷 속에서 튀어나오자 유비가 도로 밀어넣었다.
“괜찮아. 이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어.”
유비가 택배 상자를 들었다. 이번에 맡은 일은 상자를 크기별로 분류하는 일이었다.
다행히 그동안의 수련이 헛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엔 같이 하는 사람도 굉장히 능숙하고 손이 빨랐다.
“많이 해봤나봐? 잘 하더라.”
비슷한 또래의 남자이기까지 해서 더 친근감이 들었다. 이제 어릴 때처럼 형뻘의 남자만 보면 ‘혹시.....’하는 버릇은 없어졌지만 그래도 친근하게 대할 수 있으면 좋은 거였다.
“응. 하다 보면 익숙해지니까.”
멋없는 뿔테안경을 쓰고 옷차림도 유비만큼이나 초라한 청년이었다. 택배 상자에 파묻혀 오전을 보내고 나니 땀투성이에 먼지투성이가 되어 더욱 볼품없었다.
“난 이제 집에 갈 건데 도겸 형은 어떡할 거야?”
“아, 나도 집에 가서 점심 먹고 다른 알바 뛰러 갈 거야.”
도겸이 나란히 버스 정류장으로 가며 웃었다.
“집에서 직접 해먹는 게 조금이라도 더 싸니까. 한 푼이라도 아껴야지.”
기왕이면 여럿이 같이 먹는 게 더 좋다는 생각이 유비의 머리에 스쳤으나, 지금도 군입이 너무 많다고 혼난 지 이틀도 지나지 않았다. 도겸을 도원관으로 초대하는 건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도겸 형네도 돈이 문제구나.”
유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공손찬이 화내는 것도, 자기가 수련할 시간 아껴 알바를 뛰어야 하는 것도 스승님이 훌쩍 떠난 것도 동탁이 악한이 된 것까지도 전부 다 돈 때문인 것 같았다.
‘태오는 잘 지내고 있을까....아니, 이젠 조조라고 불러야겠지.’
“유비네도 돈이 문제구나.”
도겸이 다 알겠다는 듯 끄덕거렸다.
“하기야 세상 일이 다 그렇지. 나도 돈만 넉넉히 있었으면.....”
무슨 사연이 있는 건가 걱정스러워진 유비가 도겸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 그렇다고 뭐 사고치겠다는 게 아니고.”
유비의 눈빛을 뭘로 해석한 건지 도겸이 파다닥 손사래를 쳤다.
“나도 어디까지나 건실하게 일해서 벌 거야. 그래서 어머니 모시고 조용히, 열심히 살 거라고!”
“그래!”
유비가 서서에게 했던 것처럼 엄지를 척 세워주었다.
“열심히 하면 될 거야, 화이팅!”
도겸은 그런 유비를 감격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고마워. 그렇게 따뜻하게 격려해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새 전단지를 인쇄소에 맡기고 원생들 간식거리를 사고, 여름방학 때 할 만한 이벤트가 뭐가 있을지 고민하며 공손찬이 도원관에 돌아왔다.
“어서 와.”
유비가 활짝 웃으며 맞이했다. 유비가 이럴 때는 대개 상황에 안 맞을 만큼 비싸고 푸짐한 밥을 차렸을 때라 공손찬은 긴장부터 했다.
“이거 봐, 도겸 형이 알바를 하나 더 소개해줬어.”
유비는 상자에 가득 담겨 있는 인형과 인형 눈을 보여주었다.
“도겸 형?”
“택배 알바 같이 하는 형인데, 근방 좋은 알바 자리 다 꿰고 있더라.”
인형 눈 달기라면 확실히 시간만 있으면 틈틈이 할 수 있었다. 대신 돈은 썩 나오지 않기 때문에 염두에 두지 않았었지만, 이렇게 유비가 알아서 가져오기까지 했는데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좋아. 그럼 오후반 준비하기 전까지만 하자.”
나란히 앉아 인형 눈을 달기 시작했다. 곧 심심해져서 손으로는 작업하며 입으로는 수다를 떨었다.
“도겸 형네도 가난한가봐. 하루에 알바를 몇 개나 뛰더라고.”
“그래.”
드문 이야기도 아니어서 공손찬은 적당히 흘려들었다. 유비처럼 달리 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알바만 한다는 것도 요즘 같은 땐 흔한 이야기였다.
유비에게 친하게 지낼 수 있고 알바 일감도 물어다 주는 친구가 생겼다면 좋은 일이었다.
한창 열심히 달고 있는데, 역시 심심해서 틀어놓은 TV에 뉴스 속보가 떴다. 곰돌이패밀리의 잔당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어.”
공손찬이 TV음량을 키웠다. 경찰 수사 끝에 체포된 것이 아니라 놈들이 다 어쩌다 보니 맞고 쓰러진 꼴로 발견되었고, 경찰은 그걸 주워담기만 한 거나 다름없었다. 조직간의 항쟁 탓에 벌어진 일로 추정하며 정확한 사건 경위를 조사중이라는 말로 아나운서의 멘트가 끝났다.
“설마....”
유비가 중얼거리자 공손찬이 끄덕였다.
“그 설마가 맞아. 조조가 한 일이야.”
“결국 왕윤 아저씨가 반대한 길로 갔네.”
유비가 다시 우울해졌다. 공손찬도 TV를 돌렸다.


유비는 조조를 다시 만나 설득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조조를 먼저 찾아갈 방법이 없었다.
경찰서에 가봤지만 태오 형사는 만날 수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자세한 사정은 물어보지도 못하게 했다.
연락처를 두고 간 것도 아니었다. 전에 그가 전화하던 가족이 생각났지만 그 가족이 부모인지 형제자매인지 다른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다.
끈질긴 거 하나는 장점이라고 자부하는 유비도 이쯤 되니 힘이 빠졌다.
‘지금은 돈 버느라 시간도 없고 말이지.’
인형 눈 달기도 은근히 힘들었다. 겨우 목표량을 채워 가져와서는 도겸과 또 마주쳤다.
“피곤해 보인다.”
도겸이 걱정스런 눈으로 유비를 보았다.
“뭐, 익숙해지면 낫겠지.”
자신은 공손찬과 둘이 해도 벅찬 양을 도겸은 혼자서도 척척 해내고 있었다. 유비는 그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슬쩍 물었다.
“도겸 형은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알바에 능숙한 거야?”
“별 거 있겠냐. 그냥 다 경험이지.”
도겸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험한 경험 해보고 필사적이 되니까 다 하게 되더라고.”
“험한 경험?”
유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체 무슨 일이....”
“아, 아무 것도 아냐. 아무 것도.”
갑자기 손사래를 치며 도겸이 말을 돌렸다.
“세상 경험 너무 다양하게 할 필요 없어. 공연히 부모님 속만 썩인다.”
“으, 응.”
“나도 지나고 나서야 알았어. 내가 순전히 어머니 속만 썩이며 살아왔다는 거.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돈을 벌어서 효도해야 하는데.....”
자신도 돈이 없어 이러는 중이지만 도겸이 말끝마다 붙이는 ‘돈 벌어야 해’는 듣다 보니 갑갑하게 느껴졌다. 이번엔 유비 쪽에서 말을 돌렸다.
“알았어. 그런데 말이지, 내가 찾는 사람이 하나 있거든.”
“그래? 누군데?”
“잠깐 만나서 친하게 지냈다가 문제가 생겨서 그쪽이 떠났는데 연락처도 없어.”
“......그래?”
도겸은 유비를 대단히 불쌍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음, 그런 경우라면, 네 연락을 원했다면 알아서 연락처를 주고 가지 않았을까?”
유비의 표정이 세상 서럽게 변했다. 그걸 보고 도겸이 당황했다.
“아, 저기, 내 말은.....미안. 난 그냥 네가 더 좋은 인연 만났으면 해서.....”
유비는 도겸이 하는 말에서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 순간 길 건너에서 들려온 비명 때문이었다.
오토바이 날치기였다. 어 하는 사이에 행인의 가방을 낚아챈 오토바이가 길 저쪽으로 사라져버렸다.
‘이거, 관우와 일체화하면 쫓아갈 수 있나? 아니. 그럼 도겸 형 앞에서 변신해야 하잖아. 그래도 도겸 형이라면 믿을 수 있.....’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정신차려보니 곁에 도겸이 없었다.
깜짝 놀라 두리번거리는데, 오토바이 날치기가 사라진 방향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더 머뭇거릴 때가 아니었다. 유비는 서둘러 관우와 일체화해 달려갔다.
다행히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 곳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오토바이는 넘어져 있고 날치기도 납작 엎드려 벌벌 떨고 있었다. 놈에게서 가방을 빼앗아 들고 있는 뒷모습은 역시 변신한 군주였다.
거기까지였다면 또 다른 착한 군주가 나타났다고 납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군주는 검은 색 갑주에 박쥐 날개를 달고 있었다.
“박쥐?”
미축을 탈락시키고 달아났던 그 군주를 알아보고 유비도 분노했다. 막 그를 향해 드래곤 블레이드를 겨누려는데 박쥐 군주가 갑자기 변신을 풀었다.
“안 돼, 장개. 이건 주인 돌려줘야 해......우왓?”
어째서인지 박쥐는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유비를 눈치 못 챘던 모양이었다. 변신을 풀고 이쪽을 돌아보고서야 기겁했다.
그러나 유비도 충격받은 건 마찬가지였다.
“도겸 형?”
도겸도 지난번에 맞섰던 녹색 군주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다시 변신하고 전투 태세를 취하려 했다.
그러나 유비가 먼저 변신을 해제하고 본모습을 드러냈다.
“도겸 형이 그 박쥐 군주였어?”
“형님, 위험합니다!”
“아, 빨리 나로 변신해주쇼. 지난번 빚을 갚아야지.”
관우와 장비가 나서서 외쳤으나 유비는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유비.”
도겸도 충격이 커보였다. 무장 해제한 유비를 공격할 생각도 못하고 뒷걸음질쳤다.
그러다가 가방을 팽개치고 달아나 버렸다.


이제 곰돌이패밀리는 경찰 손에 맡겨도 될 만큼 정리가 끝났다.
조조가 이름을 바꾸며 결심한 일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최근 일어난 사건들 가운데 군주의 소행으로 의심가는 사건들을 추렸다.
사실 그런 사건들 대부분이 배틀을 모르던 시기의 자신 눈엔 괴이하기 짝이 없어서 굳이 애쓰지 않아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이젠 내막들도 대충 알 것 같았다.
황조는 손견과 드림배틀 끝에 그를 죽였으나 다른 군주에 의해 패배했다. 그 다른 군주가 누군지는 아직 모르지만 어쨌든 황조는 살인죄로 감옥에 갔고 당장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동탁 사건도 동탁이 죽고 패밀리도 궤멸되었으니 이제 끝이 났다.
남은 것은 박쥐 복면을 쓰고 보석과 현금을 노린다는 강도였다. 이놈도 괴력과 신출귀몰한 움직임으로 골치를 썩이다가 갑자기 활동을 중단하고 숨어버렸다.
파일을 훑어보며 자신의 관할 내 전과자와 의심스런 인물들의 명단을 작성해둔 것을 꺼냈다. 뚜렷하게 법에 저촉되는 일을 하지는 않은 사람 중에도 말썽을 피우거나 주위 평판이 나쁜 사람은 알아두고 기록해 두었다.
선배님이 아셨다면 화내셨을 일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그러나 악행을 저지르고도 피해자를 위협하거나 법의 사각을 이용해 공식적으로는 아무 오점도 없는 척 당당히 사는 자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런 자들을 그냥 놔두면 결국 큰 범죄를 저지르고 주위에도 더 큰 피해를 입히게 되어있었다.
게다가 자신은 지금 그들을 직접 해치거나 뒷조사하는 게 아니라 이름을 훑을 뿐이었다. 이들 중 영웅의 이름을 지닌 자가 있다면 그들도 군주가 되었을 테고, 그럼 모처럼 생긴 힘을 악행에 쓸 게 뻔했다.
“.....도겸?”
그 가운데 낯익은 이름을 보고 조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는 사람이에요?”
곁에서 지켜보던 하후연이 물었다.
“그래.”
좀 시끄러워서 그렇지 영웅패들은 강하고 유용했다. 거기에 말도 잘 듣고 나름 아이처럼 귀여웠다.
그리고 자신은 그들의 주군이었다. 충성스럽고 유용한 부하에겐 그만한 대우를 해줘야 했다.
조조가 도겸의 파일을 펼쳤다.
“박쥐 군주는 도겸이 틀림없다. 괴력이나 달리기 실력은 군주가 된 덕분일 테고, 금고를 연 수법이나 노리는 금품, 처분과정 등에서 보이는 성향도 의외로 개인차가 뚜렷하거든.”
“그런데 주군.”
하후돈이 동생보다 진중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갑자기 활동을 중단했다면 황조처럼 다른 군주에 의해 탈락한 것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일단 확인은 해봐야겠다.”
조조는 두 영웅패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가 여전히 군주라면 변신한 내 기척을 눈치챌 수 있겠지.”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20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제갈량은 처음부터 강력한 방어 마법을 두르고 있었다. 이런 기습은 자주 당해봤다는 듯이.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말이 좋아 전투지, 곧 일방적인 폭력이나 다름없는 양상이 되었다. 힘도 기술도 제갈량은 사마의가 닿을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장각의 말이 옳았다. 이건 그냥 괴물이었다. 처음부터 마주해서는 안 될.
제갈량의 연속공격을 피해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사마의는 문득 한 가지 의문을 느꼈다.
신선들의 수장으로서 파악한 제갈량의 능력도 분명 대단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는 수련으로 언젠가 앞질러주마고 벼를 수 있었다. 제갈량 역시 수련해서 그새 능력이 더 증대되었다고 가정해도 이 격차는 이상했다.
옥새의 데이터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 괴물도 평균치를 깎아먹을 만한 약점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중대한.
그토록 오만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제갈량은 처음부터 강력한 방어를 두르고 있었다.
전투 시작부터 지금까지 선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우위를 과시하는 것만이 아니라면?
‘설마......’
사마의는 그 순간부터 오직 제갈량에게 접근하는 데 주력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약간의 타격은 몸으로 받아내가며 돌진한 끝에 그에게 주먹을 휘두를 수 있었다.
사마의의 공격이 헛되지만은 않았는지 제갈량의 방어도 처음처럼 강력하지 못했다. 방어막을 뚫고 들어간 주먹을 피하려다가 제갈량은 그만 주저앉아 버렸다.
‘뭐야?’
그 어느 약한 신선도 이렇게 쉽게 자세가 무너지진 않았다. 당연히 이보다는 매끄럽게 방어할 거라고 예상했기에 도리어 다음 공격이 늦어졌으나, 제갈량은 그 빈틈을 이용하지도 못했다. 이어진 발차기를 고스란히 맞고 나가떨어져 버렸다.
“너, 격투는 전혀 못 하는 거냐?”
대답 대신 제갈량이 부채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그를 중심으로 회오리가 솟아올라 사마의를 튕겨버렸다.
접근하기 위해 힘을 너무 써버렸다. 신선들은 원래 자체 방어력은 다른 능력에 비해 낮았다. 어디까지나 갑주와 무기로 무장한 군주와 함께할 때 능력을 다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사마의도 마찬가지였다.
제갈량은 이미 자신의 고유 무기까지 생성해낸 상태였다. 격투에 둔하지 않았다면 방금도 자신만 두들겨 맞았을 것이다.
“이제 끝났나?”
제갈량의 숨결이 조금 거친 것은 두 대 맞고 구른 탓이었다.
사마의는 숨을 몰아쉬느라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럼 난 이만 간다.”
그게 끝이었다. 귀찮은 파리를 떨어낸 듯이. 제갈량은 사마의의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


장각은 고글을 고쳐쓰는 척 다이얼을 돌렸다. 스캔 모드로 사마의를 다시 훑어보는 것이었다.
역시나 평소와는 다르게 너덜너덜했다. 마력도 거의 고갈되었고 신체손상 정도도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심했다. 지금이라면 장각도 사마의를 소멸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그럴 순 없었다.
그의 협력이 필요해서만이 아니었다. 버그인 자신과는 다르게 모범적인 신선으로 살 수 있고, 옥새의 신선까지 노려볼 재능도 있는 사마의가 어째서 협력해주는지 알고 싶었다.
그냥 물어보는 것보다는 사마의의 실제 언행을 보고 판단하는 편이 더 진실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 용건은 그게 다야? 제갈량에게 얼마나 곤죽이 되도록 처맞았나?”
사마의의 표정을 보고 장각이 한 발 물러났다.
“알았어. 알았다고. 거 참 농담도 못하네. 인간계 소식으로 말하자면, 여포패의 주인이 좀 곤란해졌어. 동탁이 그 딸을 인질로 잡았거든.”
“치졸하군. 배틀로 이기지 못한다고 외부인을 끌어들이다니.”
“늘 있던 일이잖아?”
장각이 고개를 갸웃하며 팔짱을 꼈다.
“3백년 전에도, 6백년 전에도, 아예 전설이 된 고대에마저도 인간들은 늘 그렇게 치졸했어. 그러면서 자기들이 똑똑하다고 하지.”
“네가 할 말이냐?”
사마의가 기가 차서 되물었다.
흑신선이 된 영향인지 본래 성품이 그렇게 설정되어 있었는지 몰라도 장각 역시 잔인하고 사악한 건 마찬가지였다. 신선들을 해방시키겠다느니 말만 번드르르하지 그 잘난 ‘형제 신선들’을 해치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도 보이지 않았다.
당장 지금도 혼자 여러 신선을 대적하기 위한 기술을 연구하느라 한시도 쉬지 않고 열중하는 중이었다.
“아무튼 이제 곧 여포패는 동탁을 거쳐 우리.....”
사마의의 기색이 바뀌었기 때문에 장각도 입을 다물었다.
“이럴 수가.”
사마의는 팔찌의 탐지 기능을 활성화하고 지상의 드림 배틀 현황을 불러왔다. 붉은 색 스크린이 공중에 펼쳐졌다.
스크린에 떠오른 메시지를 읽고 장각도 감탄하듯 입술을 오므렸다.
“굉장한 영웅심이군. 저런 군주가 왜 이제껏 묻혀있었지?”
“이름 때문이다. 영웅의 이름이 아니야.”
사마의가 스크린을 조작해 진행중인 배틀을 더욱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그 역시 뛰어난 군주를 원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강한 신체와 정신을 지녔으되 신선의 지지에 깊이 의존할 만큼 약점이나 빈틈이 있으면 이상적이었다.
이제까지는 조운의 주인 공손찬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해왔다. 충분히 강하면서도 배틀 외의 온갖 스트레스로 심하게 초조해 하는 중이었다.
유비는 너무 약하고, 손책은 겉보기와 달리 중환자였다. 왕윤은 선량하고 느긋해 속이기 쉬운 사람 같지만 심지가 굳고 안정적이었다. 신선이 악한 방법을 권하면 솔깃해 하는 게 아니라 꾸짖을 사람이었다. 원소는 이미 그 강함에 여러 신선이 주목하고 있어 자신이 멋대로 손을 뻗기가 부담스러웠다.
‘이 인간이 이름을 고치고 참전한다면......’
이미 드림배틀도 알고 자질도 뛰어났다. 부족한 건 이름을 바꿔 참전하겠다는 결단뿐이었다.
그것도 어차피 시간 문제였다.


왕윤 형사의 장례식은 암울했다.
정원은 문상객 대부분에게 정중하게 예의를 차렸다. 조문 온 사람들도 대부분 고인을 존경하던 경찰들이나 그를 은인으로 기억하던 사건 피해자들이었다.
유비와 공손찬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
자신들이 조금만 더 강했으면, 똑똑하게 행동했으면 왕윤 아저씨가 그렇게 순직해버리지 않았을 것 같았다.
초선은 다시 엄마 곁에 있지만 까만 원피스를 입고 겁먹은 얼굴로 아빠 영정만 바라보고 있는 걸 무사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우리 이만 가자.”
공손찬이 유비를 쿡쿡 찔렀다.
“그래. 저기, 태오한테 인사만 하고.”
공손찬은 머뭇거렸으나 유비는 씩씩하게 태오에게 다가갔다.
그는 창백한 안색에 눈 밑도 움푹 들어가 있었다. 핏발 선 눈이 형형하게 빛나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해.”
공손찬이 먼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혹시 앞으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너희들 도움은 필요 없다.”
태오가 잘라 말했다.
“선배님의 꿈은 내가 내 방식대로 이룰 거다.”
‘내 방식대로’라는 말이 불길하게 들렸으나 동탁은 이미 체포되어 감옥에 있었다. 사적인 복수는 하려야 할 수도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공손찬이 조용해진 동안 유비가 물었다.
“들은 그대로다.”
태오는 공손찬보다 유비를 더욱 험하게 노려보았다.
“동탁 같은 놈에게까지 원칙을 따지고 인권을 따지니까 이렇게 된 거다. 지금은 너희 둘 다 그렇게 못 알아들을 소리라도 들은 듯이 멍하니 섰지만, 머지않아 알게 될 거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
그리고는 더 말 붙일 기회도 주지 않고 먼저 장례식장을 걸어나가 버렸다. 유비는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공손찬이 잡아끌었다.
“다음에 얘기하는 게 낫겠어. 충격이 큰가봐.”
“그래.”
유비도 할 수 없이 물러났다.
두 사람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장례식장을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뭘 어쩔 작정인 거지.....’
자신들이 위로가 될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원망하고 싶다면 원망하게 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드림배틀 중이고 태오가 군주들의 싸움에 말려들어 다치는 건 왕윤도 바라지 않았던 일이었다.
“저기, 공손찬.”
“왜?”
역시 어두운 얼굴로 침묵하던 유비가 물었다.
“동탁은 탈락한 거야?”
“어?”
공손찬이 멈칫 했다.
“왕윤 아저씨를 동탁이 죽였다면 동탁은 누가 탈락시킨 거지?”
충격에 휩싸인 나머지 가장 중요한 할 일을 잊어버렸다.
마침 도원관 가는 버스가 와서 섰으나 그냥 보내고 경찰서로 가는 버스를 찾았다.
“아니, 그냥 택시를 타자. 한발 늦어서 동탁이 화웅의 힘으로 탈옥하는 것보단 나아!”


“선배님, 역시 악은 악일 뿐입니다.”
하후돈의 붉은 갑주가 조조의 몸을 감쌌다.
감옥에서 꺼내주자마자 동탁이 표변할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쪽을 기대했다는 편이 옳았다.
선배님은 동탁 같은 악인이라도 구할 의무가 있는 게 경찰이라고 하셨다. 그 결과가 선배님은 죽고 동탁이 사는 것이었음에도, 끝까지 유비 같은 어리석은 순둥이에게 앞날을 맡기며 숨을 거두셨다.
동탁이나 그동안 겪어온 온갖 범죄자들이 다 착하고 바른 인물들이 되어서 사는 그 유치한 꿈은 정말 깨진 것일까?
눈앞에서 깨어져 허공으로 흩어지는 꼴을 봤어도 그는 알 수 있었다. 사실상 선배님의 꿈은 깨지지 않았으며 선배님은 그 꿈을 품고 죽었다. 드림배틀에서 탈락한 꿈이 되었을 뿐이다.
‘그런 어리석은 꿈이 이루어질 리 없잖아.’
그에 비하면 이건 얼마나 쉬운가. 동탁의 구제할 길 없는 추악함을 드러내고 그를 힘으로 눌러 제압하는 것은.
그 붉은 빛 도는 신선은 정말로 강한 영웅패들을 준비해주었다. 동탁이 아무리 날뛰어도 하후돈과 하후연을 이길 수는 없었다.
큰 타격을 입고 무너진 동탁을 보고 조조가 파이널 배틀을 준비했다.
“안 돼!”
무작정 도망치던 동탁이 다리 난간에 걸려 비틀거렸다. 조조는 틈을 주지 않고 하후연으로 바꾸어 사격했다.
도망가게 둘 생각은 없었다. 모든 극단적인 경우를 다 염두에 두고 나왔기에 당황하지도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선배님도 배틀이 아닌 흉탄으로 돌아가셨으니, 이 편이 동탁에게 더 어울렸다.
“사, 살려줘!”
난간에서 굴러떨어질 지경이 되자 동탁이 외쳤다.
“이건 다 장각이 시켜서 한 일이야!”
“장각?”
하후연의 피닉스 엣지를 겨눈 채 조조가 물었다.
“그래. 신선이라고 했지만 검은 옷을 입고 이상한 놈이었어. 이건 다 그놈 탓이야!”
익숙한 책임 떠넘기기였다. 이런 말 다 믿어주기로 하면 세상에 불쌍한 꼭두각시만 있고 자기 의지로 범죄 저지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끝장을 내기 위해 방아쇠울에 손가락을 넣었다.
“잠깐!”
갑자기 엉뚱한 방향에서 사람들이 뛰어왔다.
낯익은 목소리들이었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잘 되었다.
“잠깐 기다려!”
유비가 자신의 영웅패를 꺼내들고 외쳤다.
“그놈한테는 우리가 먼저 볼일이 있다고!”
“허? 정말 그렇게 생각해?”
기가 차서 되물었다. 선배님을 그렇게나 생각하고 있었다니, 전혀 몰랐다.
일부러 음성 변조 기능을 끄고 대꾸했다.
“이건 내 싸움이다. 너희가 신경쓸 일이 아니야.”
과연 유비와 공손찬이 나란히 얼어붙었다.
“태오?”
“그 이름은 버렸다.”
공손찬의 시선이 난간에 매달린 동탁과, 그를 겨눈 조조의 총구에 향했다.
“설마 지금, 동탁을 그냥 죽이려는 거야?”
“안 돼!”
상황을 깨닫고 유비도 비명을 질렀다.
“그러지 마, 왕윤 아저씨가 원한 건 그런 게 아니야!”
“그래서 선배님이 어떻게 되셨지?”
조조가 반문했다.
“악은 악일 뿐이다. 싹일 때 뿌리뽑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이건 싹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크게 자란 악이지만. 조조는 싸늘하게 비웃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선배님의 꿈을 이루는 건 나다. 너희 같이 마음 약한 녀석들이 아니야.”


그날 밤 조등은 집에서 오랜만에 손자를 맞이했다.
“마침 제 휴직기간이 일 년이고, 드림배틀도 일 년 이상 걸리는 경우는 없다더군요.”
“그러냐.”
손자의 손에 장착된 체인저를 노려보며 조등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드림배틀 기간 동안만 절 내버려 둬 주십시오. 이기면 세계는 제 뜻대로 개편될 것이고, 지면 그룹으로 돌아와 할아버지 말씀을 듣겠습니다.”
“난 네가 경찰로 살면서 세상 풍파를 배우고 어른이 되길 바랐었다.”
조등이 한탄했다.
“이번에도 내가 틀렸구나. 네 아비처럼 너도 잘못 키웠어. 지금의 네가, 왕윤 경위 품에서 울다 지쳐 잠들어 있던 그 꼬맹이보다 한 치라도 더 자란 것 같지 않구나.”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조조는 흔들리지 않았다.
“제게 그 정도로 실망하셨다면 일 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조등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돌아올 생각이 정말 있기는 했었냐? 내 인내심이 떨어질 때까지, 그저 나와 그룹을 피할 생각뿐이지 않았으냐?”
“제가 경찰이 된 건 집안이 싫어서가 아닙니다. 안 믿으시겠지만, 할아버지도 존경하며 살아왔습니다.”
놀라서인지 기가 차서인지 조등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가 경찰이 된 것은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선배님이 못다 이룬 꿈을 제 방식대로 이루려는 것뿐입니다. 실패하고 꿈이 깨진다면, 그때는 어차피 더 경찰에 남고 싶지도 않겠지요. 할아버지 뜻대로 수단 방법 안 가리는 탐욕스런 인물이 되어있을지도 모르고요.”
“지금도 그룹과 가문에 네 명의의 재산이 넉넉히 있다는 건 알지?”
조등이 고개를 내저으며 일어났다.
“그건 전부 네 거다. 처분하든 굴리든 마음대로 해라. 소원대로 드림배틀을 치르는 동안엔 내 간섭에 시달리지도 않을 거고 생활고도 없을 거다. 그것만으로도 넌 그 어느 군주보다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될 거다.”
조조도 자리에서 일어나 할아버지의 등을 바라보았다.
“대신 드림배틀 내내 널 지켜보겠다. 네가 위험해지더라도 돕는 일은 없을 거다. 왕윤처럼 죽게 되면 장례는 치러주겠다. 그리고 이기든 지든 살아서 배틀을 마치면, 널 그룹에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하는 건 나다.”
조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는 다른 어떤 말도 소용이 없었다. 자신이 지금 겁을 먹고 마음을 바꾼다 해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었다.
“기억해둬라. 너는 탈락하면 배틀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잃지만, 나는 참가하지 않았으니 모든 것을 기억할 거다.”
“알겠습니다.”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19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왕윤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도 태오가 원하는 대로 훌륭한 경찰이 되었으면 했다. 현실적인 문제가 어떻고 하면서 말리기엔 태오의 고집도 너무 세고,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주변 어른들의 강요로 그만둔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이미 반평생을 경찰로 살아왔는데 경찰이 나쁜 직업이라는 주장을 잔뜩 듣고 있으니 싫은 게 당연했다.
그러나 태오를 자신의 집에 숨기면 다음날 조등의 손이 미칠 게 뻔했다.
“태오야, 혹시 할아버지 모르도록 묵을 만한 곳 있니?”
태오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원소가 떠올랐지만 그쪽도 할아버지가 알 만한 사람인 건 마찬가지였다. 명색 소꿉친구 사이였던 원소에게 뒤통수 맞아 할아버지께 인도되는 체험은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원소 역시 전설의 이름이라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만 빼고 전부 초능력 전사가 되어 싸우는 중이라면 좀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태오가 침묵하는 동안 왕윤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별로 장사가 잘 되는 것 같지는 않은 허름한 도장이었다. 맹호권처럼 한창 유행하는 무술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비룡권이라면 오래 전에 사장된 취급을 받고 있었다. 왕윤이 평소 각종 무예와 격투에 관심이 많지 않았더라면 지금 처음 들어보는 무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곳이라면 조등 회장의 눈에도 띄지 않을 거야.’
유비의 순진한 아이 같은 눈망울이 떠올랐다. 그들에게는 큰 폐가 되겠지만 그래도 믿을 만한 곳이 달리 없었다.
마주 고민하면서도 이렇다 할 묘안을 내지 못하고 끙끙거리는 태오가 왕윤에게는 길 잃은 아이처럼 보였다.


동탁에게 위협당한 나머지 연고 없는 곳에라도 숨어야 하는 어려운 처지의 경찰을 유비는 기꺼이 돕겠다고 나섰다.
공손찬도 도원관으로 동탁이 쳐들어올 가능성을 걱정하면서도 찬성했다. 이제 힘을 합쳐야 하는데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스승님 방인데, 내년에나 돌아오신다고 하니까 부담없이 써도 돼.”
유비는 조금 들떠 있었다. 도원관에 새 식구가 들어왔고 꽤 괜찮은 사람 같았다.
왕윤 형사님이 부탁한 사람이라는 점도 기뻤다. 잘 돌봐주면 형사님께도 칭찬 들을 수 있을 거고 새 친구도 생길 것 같았다.
“옷은 내 거 빌려줄게. 속옷은 이따 사올 거고, 여기 도원관 도복도 있어. 잠옷으로도 괜찮아.”
태오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다. 보다 친근하게 다가가야 할 모양이었다.
“아, 왕윤 형사님 진짜 멋있으시더라.”
태오가 움찔 했다.
“여포와 일체화했을 때도 그렇고, 그냥 평소 모습일 때도 대단해. 앞으로 많이 배우고 싶어.”
“뭘 배우려고?”
태오가 쏘아붙였다.
“응?”
유비는 두 눈만 껌벅껌벅했다.
“왕윤 선배님은 칠보검까지 수여받으신, 이미 전설이나 다름없는 경찰이셔. 민간인이 무작정 흉내낼 수 있는 분이 아니야.”
“우와.”
유비는 입이 헤벌어졌다.
“진짜 대단한 분이시구나!”
‘......머리가 나쁜가?’
태오는 혼란스러웠다. 도발에 그냥 실패한 것도 아니고 상대가 도리어 신나하게 만들었을 때는 어떻게 수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칠보검이 뭔지는 알고 그러는 거냐?”
“아니. 뭔데?”
역시나 유비는 화내지 않았다.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우리나라에 현대식 경찰이 창립되었을 때부터 제정되어 이어진 경찰 최고의 훈장이야. 아무 경찰이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와.”
할아버지와 입씨름하는 게 바위에 대고 주먹질하는 격이라면 유비는 허공에 대고 주먹질하는 격이었다. 대체 저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어서 저러는지 태오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나 잠시 나갔다 온다.”
홱 몸을 돌려 방을 나가자 유비가 깜짝 놀라 뛰어나왔다.
“뭐? 어디 가? 위험하다며?”
“가족에게 내가 무사하다는 연락 정도는 해야 하니까.”
“아.”
유비는 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그래. 전화기 저기 있어.”
유비가 가리킨 것은 도장의 유선 전화기였다.
‘......’
결국 태오는 대화를 포기하고 혼자 밖으로 걸어나갔다.
“앗, 같이 가!”
태오는 유비가 그냥 따라오게 놔두었다.
주제에 걸음이 빨라 따돌리기 어려워서만이 아니었다. 상대하면 할수록 자신만 지치는 것 같아서였다.
어느 정도 걷다 보니 정류장 근처 공중전화가 보였다.
더 멀리 가서 전화하자니 따라온 유비도 거추장스럽고, 도원관은 정말로 자신과 아무 연고도 없는 곳이었다. 태오는 공중전화 부스 안에 들어가 동전을 넣고 할아버지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두 번 울리고 딸각 소리가 났다.
-태오냐.
“예.”
이제와서는 설득이고 뭐고 없었다. 태오는 최대한 빠르게 자기 할 말만 했다.
“덕분에 오늘 밤 잘 곳 구하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그래도 노숙은 면했고, 별로 당장 동탁에게 쳐들어갈 생각은 없으니 제 안전을 위한다는 핑계로 절 다시 잡아 가두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어쩔 작정이냐?
조등도 드물게 화가 난 목소리였다.
-네가 조위그룹과 아무 상관도 없게 되는 날이 정말 올 성싶으냐?
“경찰 복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태오는 전화를 끊어버리고 부스를 나왔다.
밖에는 유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기색을 보아하니 엿듣거나 하는 짓은 생각도 못해본 것 같았다.
“가자.”
“그래.”
유비는 태오의 눈치를 보며 졸졸 따라갔다.
‘위험한 와중에도 안부를 전할 만큼 소중한 가족이랑 통화했는데 왜 분위기가 살벌할까?’
“저기, 태오.”
“왜?”
“좋아하는 거 있어? 오늘 저녁에 해줄까?”
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실은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도 잘 알 수 없었다. 빨리 동탁을 잡아 유비를 더 볼 필요 없게 되는 것이 최선이었다.


오랜만에 선계로 돌아가는 장각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꼭 가야만 했다. 옥새의 데이터는 흑신선인 그가 함부로 손댈 수 없었다. 신선들의 수장으로 뽑혀 사실상 옥새의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는 사마의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했다.
첫 만남부터 최악인 상대였지만.
“안녕, 나 왔어.”
평소보다도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 있으셨나? 심기가 불편해 보....”
붉은 색 번개가 장각이 섰던 자리에 내리꽂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무 위로 피신한 장각이 방어벽 세울 준비를 하면서 물었다.
“어쩌다 천하의 사마의님이 번개 하나 제대로 못 쏘게 된 거야? 분명 예전엔.....”
이번엔 불덩어리가 날아왔으나 장각이 때맞춰 세운 빙벽에 막혔다.
“예전에 내가 널 어떻게 했는지 기억하면서 그딴 소릴 계속해?”
“그야.”
다른 나무 위로 계속 피하면서도 장각이 말을 이었다.
“나한테 그럴 수 있었던 사마의를 이렇게 곤죽으로 만들 수 있는 상대라면 나도 알아야 하니까. 신선들의 잘난 수장 사마의님의 정체가 뾰록난 건지도.”
말은 그렇게 해도 장각의 태도엔 여유가 있었다. 정말로 사마의의 본질이 옥새에 포착된 거라면 그가 이렇게 나올 수도 없었을 터였다.
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대충 짐작이 갔다.
“난 분명히 정직하게 보고했어.”
더 공격하지는 않고 씨근거리고만 있는 사마의에게 장각이 말했다.
“규격 외의 괴물이라고. 영웅패 중에 여포가 있다면 신선 중엔 제갈량이 있다고. 너한테 깨질 때도 맛본 적 없는 아득함을 그놈과 싸우면서 맛보았다고. 그게 다 널 갈구고 내 실패를 변명하는 거라고만 생각했어?”
“닥치고 내려와.”
말은 험악하게 했지만 사마의도 장각을 더 공격할 마음은 정말로 없었다.
저놈이 맞을 게 무서워서 입바른 소리를 그만둘 녀석이었다면 흑신선으로 사는 것도 진작 포기했을 것이다.
그런 점 때문에 옥새가 저놈을 흑신선으로 택했을지도 모른다. 타협을 모르고, 모든 고통을 웃어가면서라도 직시하려는 놈이니까.


처음 신선 사마의로서의 자신을 자각했을 때 그는 보았다.
인격이 완성되고 사마의처럼 각성하기를 기다리며 잠들어 있는 수많은 신선들 중에서, 그 중 하나에 흘러드는 검은 기운을. 그것은 분명 옥새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신선들이 깨어났을 때 장각은 선계의 버그, 대적자로 공표되었다.
진짜로 버그가 있었다면, 너무 일찍 의식이 깨어난 사마의 자신이리라.
깨어난 신선들은 선계에 흩어져 각자 자의식을 점검하고 세상을 인식하는 시기를 거치게 되어있었다. 일종의 걸음마와도 같아서 옥새에서도 거의 간섭하지 않는 시기였다.
사마의는 장각부터 찾아갔다. 선계의 지리를 자신의 감각으로 직접 확인하거나 자신에게 주어진 기능과 데이터를 훑어보는 일은 나중에라도 할 수 있었다.
갓 흑신선의 운명을 자각한 장각은 불안정하고 난폭했다. 다른 신선이 접근하자 공격부터 해오는 바람에 대화를 하려면 일단 제압해야 했다. 꼭 자신의 말을 듣게 하려는 생각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장각은 사마의가 자신보다 강하며 흑신선으로서의 사명을 위해서도 그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 후에야 비로소 사마의 입장에서 일이 수월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완벽한 신선을 연기했다. 다른 어떤 신선보다도 더 옥새의 원칙에 충실한 모습을 보이고 간혹 의문이나 불만을 표하는 신선이 있으면 나서서 훈계했다. 수장 자리도 힘써서 쟁취했다.
그러면서 다른 신선들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물론 신선들은 다 목숨을 건 라이벌 사이지만, 사마의는 그들 전부가 동맹해서 자신과 장각을 적대할 경우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순욱, 전풍 등은 뛰어난 신선이지만 나서서 주도권을 쥐려는 자세가 부족했다. 신선으로서는 바람직한 성격일지 몰라도 결국 사마의가 수장 노릇을 하며 신선들을 좌우하기에 편해졌을 뿐이었다.
주유처럼 나서기 좋아하고 야심만만해 보이는 신선을 마주했을 땐 잠시 긴장했다. 그러나 주유는 혼자 수련해서 강해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굳이 한시적인 수장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공격 마법의 최대 출력에서 사마의를 능가한 것으로 만족하고 도전하지 않았다.
대신 이런 말을 남겼다.
“됐어. 난 제갈량 그 자식을 패줄 수 있을 만큼 강해지는 게 더 중요해.”
그냥 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저 주유가 저런 말을 하게 만드는 신선이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해, 장각에게 제갈량을 찾아 죽이라고 명했다.
자신에겐 졌어도 장각은 강력하고 술수도 많은 신선이었다. 마법보다 기계장치에 의존하는 특성상 경험을 쌓고 연구를 거듭해야 제 실력이 나오는 신선이기도 했다. 처음 사마의에게 굴복했을 때와는 이미 격이 달랐다.
그러니 죽이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선전할 줄 알았으나, 장각이 돌아와 털어놓은 이야기는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그놈은 괴물이야. 사마의님도 그놈은 못 당해낼걸. 옥새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걸 만들어냈는지 모르겠어.’
흘려들은 게 아니었다. 기억해두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모범적이고 우수한 신선, 오직 인간 군주만을 위해 힘을 기르는 완벽한 보조자의 모습을 유지한 채 먼저 다른 신선을 찾아가 싸움을 걸기가 은근히 어려웠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기회가 왔다. 또 마법 연습에 빠지고 놀러나가려는 서서를 붙잡으려는데 눈앞에 마법에 의한 안개가 꼈다.
“누구냐!”
서서가 썼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신속하고 안개도 짙었다. 대항 주문을 읊으며 신선을 찾았다.
“여기.”
주문을 채 완성하기도 전에 안개가 휙 걷히고 신선 하나가 나타났다.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태도였다.
“서서를 제법 잘 추격한다 했더니, 겨우 이 정도 안개에 헤매서 술자를 찾지도 못하다니.”
아름답게 생성되는 것이 당연한 신선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미모의 소유자였다. 그 부드러운 생김새에 어울리지 않게 싸늘한 표정으로 사마의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누구냐.”
사마의도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전투에 앞서 서로를 인식하려는 의식에 가까운 말이었다.
신선들의 수장 노릇을 해서 얻는 이득 중 하나가 바로 모든 신선들을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하기 쉬워진다는 것이었다. 그 평균치만 봐도 다른 신선들을 아득히 뛰어넘던 신선. 주유나 사마의 자신보다도 위였던.
장각을 간단히 두들겨 쫓았던.
주유가 저놈만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이를 갈던 상대.
“제갈량.”
그가 말했다. 이름 정도 말해주지 못할 것도 없다는 듯이.
그리고 팔찌를 작동시켜 주변을 간단히 탐색해보더니, 뒷짐을 지고 휙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디 가는 거냐?”
사마의의 물음에 제갈량은 뒷짐을 진 채 고개만 살짝 까닥 했다.
“그건 알아서 뭐 하게?”
“뭐라고?”
사마의는 잠깐 제갈량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허둥거렸다.
“서서는 이미 네 탐지범위를 벗어나 멀리 달아났으니 내 볼일도 이제 끝났다는 얘기다. 가서 너 할 일이나 해.”
끝까지 이쪽에 등을 보이고 뒷짐을 진 채 한 말이었다.
이제까지 그 어떤 신선도 사마의를 이토록 무시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선계의 낙제생 서서만도 못하다는 듯이.
그 등에 벼락을 내리꽂은 건 반사작용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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