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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금용 티스토리 화산섬 창고의 비번은 해당 카테고리 글에 감상을 남겨주셨던 분에 한해서 트위터 쪽지 https://twitter.com/Idonwanause 나 메일 hicstans@gmail.com으로 성인임을 어필하여 문의하시면 됩니다. 제가 봐서 성인 같으면 답을 드립니다. 전부 답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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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AO3계정입니다. 불펌 아니에요. http://archiveofourown.org/users/hicstans/pseuds/hicst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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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번 안내

모바일로는 오른쪽 칼럼이 안 보이므로 포스트로 올림.

6월 28일 수정.

포스타입 아이디를 빌려 성인인증글을 보는 사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포스타입에 올렸던 포스팅 전부 삭제하고 티스토리 보호글로 돌렸습니다. 이제 성인 인증 없이 성인이고 비번을 유출하지 않을 거라고 제가 확신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비번을 알리겠습니다.


비번이 걸린 글은 해당 카테고리 글에 감상을 남겨주셨던 분에 한해서 트위터 쪽지 https://twitter.com/Idonwanause 나 메일 hicstans@gmail.com으로 성인임을 어필하여 문의하시면 됩니다. 제가 봐서 성인 같으면 답을 드립니다. 전부 답하지는 않습니다.




[반월당, 마블 유니버스] 사랑손님과 천호님 1 ㅣ- 크로스오버

유단은 비참했다.
그해 겨울 반월당은 무너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비유가 아니고 정말로. 그 초소형 수리공들을 부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씨도 알고 있어서 그나마 최악의 상황만 면했을 뿐.
맹세코 백란을 다시 부르기 위해서다. 반월당의 상황을 극한까지 몰아붙여서, 천호를 부르려는 모두의 바람이 하늘까지 닿도록.
물론 백란이 본다면 코웃음치며 어떻게 두 달도 못가 가게를 말아먹냐고 하겠지만 일부러 그런 거다. 그 얄미운 여우를 도로 이 자리에 돌려놓기 위해. 투덜투덜 하면서도 돌아와 모두와 인사를 나누고 곤란한 지경을 해결하고 못다 한 이야기도 나누기 위해.
그러나 백란은 오지 않았다.
유단 자신이 또 위험에 처하면 구하러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팔목귀가 사라진 여파인지 그런 위기는 또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스스로 찾아 뛰어들 수도 없었다.
그동안 자신이 위기를 달고 와서 도움을 구할 때마다 그 여우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투덜대고 인신공격 하면서도 자기 목숨까지 내던져가며 살려줄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으므로. 자신은 정말로 백란에게 무거운 짐이었던 거다.
그래서 나중엔 방향을 바꿨다. 차라리 자신이 반월당을 제대로 근사하게 운영해보인다면, 더 이상 짐이 아니라고 보여준다면 다시 오지 않을까.
그렇게 마음먹고 노력한 끝에 반월당은 겨우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게 되었다. 재정난이야 백란이 있을 때도 똑같았고, 몰아치는 사건사고들도 제법 해결할 수 있게 되어 흑요가 세 끼를 요리하고 차를 준비할 여유는 생겼다. 천호가 없는 반월당에 와 봐야 소용없다고 소문이 나서 요괴 손님들이 뜸해진 탓도 있는 것 같지만 어쨌든 여기는 전통찻집이니 차를 낼 여유는 있어야 했다.
그러나 가게가 평화로워진 건 다른 의미에서 식구들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이대로 반월당은 영업을 계속할 것이다. 백란 없이.
더는 흑요도 고서를 찾아보지 않았다. 쌍둥이는 여전히 백란의 침실과 서재를 쓸고 닦지만 이전의 소망을 담은 활기가 없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백란 대신 개학이 돌아왔다. 그것도 고3 올라가는 개학.
이게 사는 건가.
새 담임은 수능이 어쩌고 내신이 어쩌고 열심히 떠들고 있지만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올해부터 죽어라 책만 들이판다고 해서 대학에 갈 수 있을 리도 없고 어차피 책만 들이팔 수도 없을 거고.
수업 끝나고 반월당 가서 할 일들만 생각하며 대충 시간을 때우는데 갑자기 창문을 탕탕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개구리 정승이었다.
창문 바깥에서 개구리 발로 찰싹찰싹 치며 다급하게 외치는데 유리에 막힌 데다가 자리도 멀어서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유단은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교사 밖까지 뛰어나오자 벽을 타고 다시 화단으로 기어내려온 개구리 정승이 폴짝폴짝 유단 앞으로 뛰어왔다.
“대체 무슨 일이야?”
“큰일났어! 너희네 가게의 그 도깨비 양반이 빙판길에 넘어졌느니라!”
“에엑?”
반월당 앞 회화나무길엔 그늘진 곳이 많아 늦게까지 눈이 녹지 않고 남아있곤 한다. 그래도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유단은 개구리 정승을 안아들고 헐레벌떡 뛰었다. 아니, 뛰려고 했다.
개구리가 또 순간이동을 해버렸다. 또다시 멀미라도 한 듯 속이 울렁거리며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번에는 반월당 앞 골목에.
“그러니까 미리 말 좀 해달라고!”
버럭 소리쳤지만 개구리와 싸우기엔 유단 자신의 마음이 급했다. 개구리를 안은 채 반월당으로 뛰어들었다.
“늦었군요. 그냥 돌아가버릴까 하던 참이었습니다.”
반월당의 나무 테이블에, 도씨와 흑요와 쌍둥이와 함께 앉은 여우요괴가 한 말이었다.
유단은 멍한 기분으로 천천히 한 발자국씩 다가갔다. 가면서 자기 손등을 한 번 꼬집어보았다. 아팠다.
“그새 자해하는 버릇을 들인 겁니까. 목숨의 위협이 뜸해지니 허전했나보군요. 어차피 이제 요괴들 사이에 점차 이름이 퍼지고 있으니 목숨의 위협은 뜸해질지언정 끝나지는 않을 텐데요. 굳이 자해까지 하지 않아도.”
“백란.”
“예.”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갈색머리 위에 솟은 여우귀도, 세상만사 자신과는 하등 상관없는 일인 척하는 저 무표정도, 수묵 담채화에서 혼자 걸어나온 듯한 옷차림과 몸가짐도.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는데.
백란 옆에는 빈 의자와 찻잔이 있었다. 채설이 김이 솟는 차를 따르고 과자 접시를 앞으로 밀어주었다.
“천호님께서 천계의 차와 과자를 가져오셨어요!”
채우가 신나게 조잘거렸다.
“수업 방해하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천호님이 안 계셔서 그동안 얼마나 넋 나간 얼굴을 하고 다녔어요. 옛 원수를 갚는 일이 끝났으니 이제 천호님께는 아무 쓸모도 없고 귀찮기만 한 존재가 된 거라고....”
“내가 언제 그랬어!”
유단이 버럭 소리쳤다.
“허허, 말하는 것 좀 보게.”
도씨가 부채를 까닥거렸다.
“천안이 잠깐 고장났다고 당장 한강에 걸어들어갈 기세였다던 사공님 말씀 그대로였으면서. 저러다 말겠지, 저러다 말겠지, 해도 한 해가 다 가도록......”
“내가 언제! 아니 어디 나만 그랬어? 도깨비야말로......”
유단은 흠칫 해서 이 항아리 도깨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빙판에 넘어졌다더니.
“놀랐죠! 천호님의 묘안이었어요.”
채우가 활짝 웃었다.
“일초라도 더 빨리 오게 하려고 임시변통을 쓴 겁니다.”
백란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런 얕은 수를 가지고 묘안이라고 아첨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번엔 사정이 있어서 잠깐 내려왔을 뿐, 볼일 끝나면 바로 돌아갈 겁니다.”
기가 막힌 나머지 한 마디 하려던 것이 머릿속에서 새하얗게 지워졌다. 유단이 멍하니 물었다.
“돌아간다고?”
“예.”
“볼일 끝나고 바로?”
“예.”
유단은 더 이상 묻지도 못하고 백란을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그러고 서 있을 겁니까?”
태연히 찻잔을 입가에 대는 사람은 백란뿐이었다. 유단도 도씨도 흑요와 쌍둥이도 정지화면 같은 꼴로 백란을 보고만 있었다.
“처, 천호님.”
채우가 간신히 입을 떼었다.
“저희들 보고 싶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지금 보고 있지 않습니까?”
백란이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자리는 어차피 천계입니다. 여러분과의 인연이 깊다 한들 위치가 다르니 오래 이어질 수 없습니다. 그동안 성심껏 저를 보필해준 것은 기억하겠습니다만 여러분도 빨리 새 인연에 충실해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층으로 통하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모두와 마찬가지로 정지화면이 되었던 유단이 억지로 정신을 차리고 그 뒤를 따라갔다.
이층 서재로 올라가는 백란의 모습은 예전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백란 없이 보낸 지난 일 년이 꿈만 같았다.
백란은 서재에 도착하자 책상 앞에 앉았다. 유단은 그 앞에 앉았다.
이렇게 똑같은데. 자신이 괴이를 달고 와서 귀찮게 굴던 바로 그 모습으로 되돌아왔는데.
백란은 눈앞에 앉은 유단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책 한 권을 펼쳤다. 혹시나 해서 들여다봤으나 고금괴이전이 아니었다. 한자가 빽빽해 유단은 무슨 책인지도 알 수 없었다.
“저기, 그때 말인데.”
“팔목귀를 토벌하러 갔을 때 이야기라면 그만두십시오.”
백란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 유단은 굴하지 않았다.
“그때 페이스 무너뜨리고 벌벌 떨고 했던 거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창피해하지 않아도 돼.”
“제가 언제 그랬다는 겁니까?”
“그러니까 그런 일 없었다고. 쪽팔릴 걱정 없이 돌아다녀도 돼.”
마침내 백란이 고개를 들고 유단을 바라보았다.
“뭔가 착각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제가 천계에서 사는 건 인간계에서 있었던 싫은 일이나 힘든 일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원래 천계의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물고기가 물에서 살고 길짐승이 땅 위를 걷는 것과 완전히 같습니다. 이렇게 조른다고 변할 일이 아닙니다.”
유단은 입만 뻐끔거렸다.
하려고 준비했던 말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렸다. 대신 가장 두려운 가능성, 이제 현실로 떠오르기까지 한 발짝 남겨놓은 가능성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백란이 소중히 여긴 사람은, 대신 액을 받으려 하고 목숨줄을 잡고 놓아주지 않으며 몇 번이고 온갖 수고를 수고로 여기지 않고 자해도 불사해가며 구해준 사람은 유단이 아니다. 신라의 왕자 비형랑이다.
“이번에는 볼일이 있어 특별히 내려온 것입니다.”
어쩔 줄 모르고 굳어있는 유단을 내버려둔 채 백란이 태연히 말을 이었다.
“가서 쌍둥이에게 손님방 하나를 마련하라고 하십시오. 아주 귀한 손님이 한 분 묵어갈 것입니다.”
“귀한 손님?”
유단이 기계적으로 물었다.
“누구 천신이라도 하나 오는 거야?”
“비슷합니다.”
잠시 기다려 봤지만 백란은 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뭐든 설명하기 좋아하니 좀더 길게 설명해주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유단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그 방을 나왔다. 백란은 책에서 눈을 떼지도 않았다.


반월당의 사랑채에 있는 많은 방들 중 하나를 쌍둥이가 골라 청소했다.
“귀한 손님이니 알아서 잘 모셔야 한대.”
채설이 이불을 다독이며 말을 걸었다. 말 안 듣는 동물을 다루는 태도였다.
“그렇게 달래봐야 막상 손님이 들어가보면 싹 어디 숨어버리는 거 아냐?”
사몽 속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유단이 물었다.
“이번엔 아닐 거예요.”
화로를 가져오며 채우가 대꾸했다.
“천호님께서 귀한 손님이라고 직접 모셔오는 경우는 이제까지 없었어요. 여기서 묵어가는 경우는 더 없었고요. 여기 물건들도 다들 긴장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어느 정도기에 천호님께서 그 정도로 극진히 대접하시려는지.”
“천신 비슷하다더라.”
유단은 더욱 심사가 뒤틀렸다. 이런 세간들까지도 인간 꼬마는 우습게 보고, 지체 높은 신령은 귀히 모신다 이거지?
“잠깐, 그런데 직접 모셔와?”
“예. 좀전에 마중나간다고 나가셨어요.”
“무려 마중씩이나? 그 방구석 폐요가?”
유단은 입을 딱 벌렸다.
“도씨 아저씨는 천호님하고 같이 나갔고 누님은 그래서 지금 심기일전해서 부엌 청소하고 요리 준비중이에요.”
자신이 처음 반월당에 들어왔을 때가 생각났다. 무슨 안 나가는 점쟁이처럼 불길한 소리나 읊어대던 도깨비, 다짜고짜로 베어버린다고 날뛰던 구렁이, 사람 잡아 간 빼먹는 여우라고 자기소개를 하던 여우.
“차별대우도 정도가 있지! 어느 놈의 귀한 손님인지 반월당 이제 내 거니까 방세 받아버릴 테다!”
“이것이면 되겠습니까?”
뺨에 차가운 것이 와 닿았다.
뺨이 얼어붙는 기분에 유단은 꼼짝도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천호님!”
쌍둥이가 벌떡 일어나 유단의 등 뒤를 향해 인사했다. 백란을 보며 밝아진 얼굴이 그 옆을 보더니 나란히 놀란 얼굴로 변했다. 누군지 굉장히 뜻밖의 손님인 모양이었다.
“그거 이제 적당히 떼.”
장난기 어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뜻인지는 다 알아들을 수 있는데 어째서인지 한국말을 쓰고 있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얼굴에 동상 걸릴라.”
“진짜 얼어붙고 있는 거였어?”
유단이 빙글 돌아섰다.
백란이 손에 시퍼런 얼음조각을 든 채 서 있었다. 얼음 때문인지 장갑을 낀 것을 빼면 평소나 똑같은 차림이었다. 손님 모시러 간다고 빼입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 옆에 선 ‘손님’을 보고 유단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반월당에 신기한 손님이야 늘 찾아온다. 요괴나 신선이었다면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이 손님은 녹색 포인트가 들어간 검은 정장을 구김살 하나 없이 차려입은 훤칠한 서양인이었다. 흑발에 녹색 눈, 창백한 피부가 뱀 같은 인상을 주는데 천안으로 봐도 둔갑한 뱀은 아니었다. 훨씬 더 강력하고 위험한 존재였다.
동방청제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처럼 폴리스 라인을 치고 빛을 뿜으며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이 외국인에게선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무식한 데다 성질까지 급한 인간이라 예의범절이라는 걸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백란이 그 외국인에게 공손히 양해를 구했다.
“그냥 지나가는 고양이가 시끄럽게 굴었다 치고 너그러이 보아넘겨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외국인이 그 인상에 어울리는 미소를 지었다.
“신경쓸 것 없어. 미드가르드 인이 원래 그렇지. 신세 지는 마당에 까다롭게 굴 수야 있나.”
그 미소 그대로 외국인이 유단을 보며 말을 건넸다.
“천호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과연 듣던 대로구나.”
“천신들한테 내 험담을 하고 다녔어?”
발끈하려던 유단은 백란이 다시 얼음조각을 들이대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보고만 있지 말고 받아.”
외국인이 재미난 구경거리를 만났다는 듯이 말했다.
“미드가르드의 하찮은 얼음과는 다르니까 맨손으로 만지지 말고. 뙤약볕에 아무렇게나 굴려놔도 네가 늙어죽기 전엔 녹지 않을 거다.”
“흑요 누님이 좋아하시겠어요.”
보고만 있던 채우가 끼어들었다.
“부엌에 냉장고 있잖아?”
“부엌뿐이겠습니까. 여름이면 부채가 필요없을 겁니다.”
유단을 무시하고 백란이 긍정했다.
“여름엔 에어컨 있거든!”
백란이 놀랍다는 표정을 했다.
“저 없이도 알아서 잘 해나가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여름철 전기세를 걱정할 필요도 없을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럼 이건 그냥 제가 가져가도 되겠군요.”
그리고는 재빨리 비단 보자기에 싸서 품에 넣어버렸다. 유단이 말릴 틈도 없었다.
“뭡니까, 막상 안 준다니까 아쉬워하는 그 태도가.”
백란이 천연덕스럽게 약을 올렸다. 그 옆에서 채설이 중얼거렸다.
“유단이는 저대로 안 받을 거야. 저렇게 어마어마한 냉기를 품은 얼음인데 심술났다고 안 받다니. 이제 여름마다 저 냉기가 생각나겠지. 천호님께서 주시는 부채도 없는데. 더위에 늘어질 때마다 유단이가 얼음을 받았어야 한다고 우리 모두 유단이를 쳐다보게 될 거야. 언니는 냉차를 유단이 몫만 빼고 만들 거고, 그러다 유단이 혼자 더위를 먹을 거고......”
“받을게! 받으면 되잖아!”
다시 백란을 쳐다보았다. 백란은 여우다운 미소를 지으며 얼음을 다시 꺼냈다. 이 난리를 치는 동안 얼음은 정말 물기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빙하기 때부터 품어온 듯한 냉기를 뿜고 있었다.
‘설마 정말 빙하기 때 얼음인가?’
받아드는 순간 천안에 맘모스가 보일 것 같아 잠시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외국인이 기분나쁘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선물을 보고 필요 없다는 소리부터 하는 인간한테 얼마나 귀한 물건인지 설명해가며 억지로 쥐어줘야 하다니. 이 인간이 방자한 건 너희가 너무 오냐오냐 해줘서가 아니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랬습니다.”
백란이 다시 공손한 태도로 돌아와 설명했다.
“액을 뒤집어쓰고 살려달라고 찾아온 주제에 오만불손하기 그지없었지요. 자기 목숨이 달린 일조차 그럴진대 평소엔 오죽하겠습니까.”
“그렇군.”
외국인은 재미있게 생긴 벌레를 보는 시선으로 유단을 훑어보았다.
“나는 본래 저런 인간을 용납하지 않지만 널 봐서 저 인간은 건드리지 않겠다. 복도에서 이러고 있느니 그간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
“감사합니다. 그럼 안으로 드실까요?”
얼음을 대충 떠넘긴 백란이 외국인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탁 닫았다. 유단과 쌍둥이는 복도에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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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표기법은 매머드인 것 압니다만 어쩐지 유단은 맘모스라고 발음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냥 제 취향일지도 모릅니다.


이 크로스오버 타임라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토르 1, 망량선 -> 트릭스터 컨벤션 -> 어벤저 1 -> 환상열차 -> 아이언 맨 3, 토르 2, -> 동맹 성립 -> 윈터 솔져 -> 사랑방손님과 천호

계산해보니 시간대가 안 맞는다고 느껴지더라도 그러려니 해주세요. 원래 크로스오버란 그런 겁니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34 ㅣ- 회색도시&검은방



어떻게 된 일이냐는 질문에 허강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류태현이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
“과거로 가는 게 불가능해졌다는 건....”
“그런 얘기까지 했어?”
허강민이 이번에는 정말로 놀랐다.
“아니 어쩌다가? 그 사람들 대체 뭘 믿고 너한테 그런 것까지 미주알고주알....”
그가 갑자기 류태현을 째려보았다.
“왜, 왜요?”
“시도때도 없이 남들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네놈이 짜증나서.”
“저 별로 뭐 페로몬 같은 걸 뿌린 것도 아니고.... 아니 다들 제 편이 되거나 하지 않는데요? 저희 지구대에.....”
“그래, 뭐 그렇다고 해두자.”
“박경장이라고... 네?”
“상관없다고. 이제 와서.”
그리고 허강민은 소파에 드러누웠다. 류태현은 당황했다. 허강민이 류태현을 상관없어 한다. 허강민이 류태현 앞에서 무방비하게 드러눕는다. 다 꿈에도 생각 못했던 일이었다.
“상관 없다뇨?”
의도한 것보다 훨씬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왔다. 허강민은 류태현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제가 하는 말에 반박할 필요도 없다는 말이에요? 과거로 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허강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죽고 싶어 한다면서요?”
허강민은 계속 무시했으나 류태현은 개의치 않고 말을 계속했다.
“그럼, 기왕 눈앞에 있겠다 죽기 전에 절 죽여서 복수를 하고 죽겠다는 생각도 안 드나요?”
“뭐하러?”
허강민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런다고 해서 다들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네가 제물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어떻게든 살고 싶어질 것도 아닌데. 뭐하러?”
류태현은 말문이 막혔다.
허강민은 목적을 잃었다. 복수조차 삶의 동력이 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그에게 살라고 설득할 수 있을지 류태현은 알 수가 없었다.
“뭔가..... 하고 싶은 건 없어요?”
류태현이 목소리를 쥐어짰다.
“뭐든 생각나는 거 없어요? 좋아하는 거라든가? 하다못해 먹고 싶은 거라든가?”
말하고 류태현은 그가 사가던 튀김 봉지를 떠올렸다.
“튀김 같은 거라도 사올까요? 허강민씨 튀김 좋아.. 하지는 않는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아 맞아, 애들 있다고 했잖아요?”
류태현이 새삼 어리둥절했다.
“웬 애들이에요, 그러고보니?”
“.....어.”
“튀김을 사다줄 정도로 신경 쓰던 애들을 이대로 방치해놔도 괜찮아요?”
“그.... 험상궂은 아저씨가 어떻게든 할 거야.”
허강민이 변명했다.
“그러니까 책임 없어요?”
류태현이 몰아붙였다.
“어쩌다 알게 된 애들인데요? 설마 애들을 복수극에 이용해 먹고 있던 건 아닐테고.”
허강민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류태현의 기색이 나빠졌다.
“정말이에요? 애들을 복수극에 이용했다고요? 아무리 죄가 있어도 그렇지....”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일을 시켰을 뿐이라고, 밀실에 넣은 거 아니야!”
변명하고 나서 허강민은 버럭했다.
“아니 내가 누굴 이용하든 네 녀석이 무슨 상관이야, 죄인 주제에 그런 거 챙기면 뭐 위선이 진짜가 될 것 같아?”
“위선 아니에요.”
류태현이 말했다.
“위선 아니라고요, 저는 정말로 모두를 살리고 싶습니다. 허강민씨와 마찬가지로. 백화점 붕괴도 양수연씨 사고도 다 막고 싶었습니다. 허강민씨와 같이 계획했잖아요.”
허강민이 침묵했다.
류태현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 류태현을 위선자라 비난하면 자신 역시 위선자가 되어버린다. 자신의 진심마저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다. 구하는데 실패했으니, 어차피 없었던 것이 되어버렸지만.
“....실패했으니, 이젠 의미 없어.”
허강민이 간신히 그렇게 말했다.
“강민씨.”
류태현이 허강민의 팔에 손을 얹었다.
“울면서 그런 말 해 봐야 설득력 없는데요.”
“뭐..”
허강민이 류태현의 손을 뿌리쳤다. 뿌리치고 손을 얼굴에 갖다댔다. 손에 습기가 묻어났다.
“어째서 불가능한지 모르지만, 강민씨 잘못이 아니에요.”
허강민의 손을 잡으려다 도로 물리고 류태현이 말로만 속삭였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잖아요? 할 수 없을만한 것까지 온 노력을 다했잖아요?”
“네까짓 게 뭘 안다고!”
허강민이 일어나 류태현의 멱살을 잡았다.
“내가 뭘 했는지, 왜 실패했는지 네놈이 알아? 아냐고!”
“모르죠.”
류태현이 담담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가능한 모든 걸 다 생각하고 시도했으리란 건 압니다, 강민씨는 그런 사람이니까.”
류태현은 밀실을 생각했다. 복수를 위해 그런 걸 만들 수 있는 사람이 가족을 살리려는 일을 허투루 했을 리 없다. 당연히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퍼붓고 그러고도 불가능해 더 이상 살아있을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거다.
“저.... 복수, 계속할 생각 정말 없나요?”
류태현이 허강민의 눈치를 살폈다.
“있으면 어쩔 건데? 죽어줄거냐?”
“아뇨, 그건 아니고....”
허강민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류태현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런 달리 할 일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는 네녀석이야말로.”
허강민이 류태현의 멱살을 놓고 물러섰다.
“경찰 주제에, 눈 앞의 연쇄살인범을 체포하거나 사살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드는 거냐?”
“안 듭니다. 게다가 그 두 사람이 그러게 둘 것 같지도 않고요.”
허강민의 얼굴에 수긍한 기색이 떠오르는 걸 보고 류태현은 조금 더 나갔다.
“허강민씨를 많이 걱정하던걸요.”
“나를?”
허강민이 표정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없어.”
“왜요?”
“왜....”
그가 잠시 고민했다.
“걱정할 이유가 없어.”
“걱정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뭔데요.”
허강민은 대꾸하지 못했다.
“이러는 저는 허강민씨를 걱정할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 이러고 있나요?”
“너는 호구고.”
“그 사람들도 호구일지 모르죠, 얼굴 무섭게 생겼다고 호구 아니란 법 있나요?”
류태현이 쏘아붙였다. 허강민이 잠시 말을 잃었다.
“그..... 남자 쪽은 호구 맞는 것도 같지만, 장지연은 그렇게 만만한 사람일 리가.....”
허강민이 말끝을 흐리며 우물쭈물했다.
“아니.... 그.... 그럴리는 없지만 그래도.....”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르겠다. 정보가 부족해.”
“어떤 사람들이에요? 이 일과는 어떻게 관련이 있는데요?‘
류태현이 물었다. 궁금하기도 할뿐더러 이렇게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끌면 허강민이 자살 생각을 안 떠올릴 것 같았다.
“그 여자 쪽이 마법사야. 시간을 되돌린.”
“네...... 네?!”
“엄청난 괴물이지. 그에 비하면 난 그냥 보통 사람일 정도로.”
허강민이 쓰게 내뱉었다.
“무, 무슨 짓을 했는데요?”
류태현이 두려움에 떨며 물었다.
“아무것도.”
“네....에?”
“그래, 아무것도 안 했어. 아니 못했다고 해줘야할까. 그만한 힘을 갖고도, 아버지에게 눌려 사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유일하게 뭔가 한 것이.....”
허강민이 고개를 저었다.
“이해할 수 없어.”
류태현은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었다.
“가족인데. 부모자식인데. 그 쪽은 나나 양태수가 놀랍다지만 난 그 쪽이 더 놀라워. 아버지인데, 딱히 미워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그렇게까지 딸의 인생을 망쳐놓을 수 있다는 게.”
“저, 대체 무슨 사정이 있는 거에요?”
“세상에 흔해빠진 이야기. 다 너 잘되라고 이러는 거란다, 하면서 자식의 인생을 산지옥으로 만드는 부모 이야기야...... 적어도 우리 부모님은 내가 기계공학 전공하는 것도 대학원 가는 것도 말리지 않으셨는데... 아니 대학원은 좀 말리지 그러셨냐는 생각도 들지만.....”
허강민이 소파에 주저앉아 얼굴을 감쌌다.
“그렇게 돌아가시다니 너무하잖아. 나는 살아있는데.”
허강민을 위로하고 싶었지만 류태현이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에게서 가족을 빼앗은 건 자신이니까. 그럴 의도가 없었다 해도, 결과를 바꿀 순 없으니까.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죄송해요, 허강민씨.”
류태현이 말했다.
“동생을 구하지 못한 것도, 시간을 되돌리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 것도 정말 미안해요. 말뿐인 공허한 소리겠지만....”
“그래!”
허강민이 벌떡 일어나 류태현을 밀쳤다. 류태현은 저항없이 넘어졌고 허강민이 그를 타고앉아 목을 졸랐다.
“사과 따위 공허하다고! 다들 이미 죽었는데! 무슨 짓을 해도 살아돌아오지 못하는데!”
류태현이 허강민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나 그의 손을 떼어내지는 않았다.
“죄송해요. 정말로 죄송해요.”
그가 눈물을 흘렸다.
“저도 살리고 싶었어요. 정말 간절히 살리고 싶어 손톱이 부러지도록 시멘트를 파냈는데, 왜 둘 다 살릴 수 없었던 걸까요. 왜 되돌릴 기회조차 없는 건가요.....”
“닥쳐.”
허강민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였다.
“닥치라고. 다 네놈 잘못인데......”
그가 류태현 위로 무너졌다.
“그래야했는데.....”
류태현이 허강민의 등으로 팔을 돌려 그를 끌어안았다. 허강민은 그를 떨쳐내지 않았다.

류태현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허강민은 돌이킬 수 없는 가족들의 죽음을 뒤늦게 애도했다.



-전화기가 꺼져있어 소리샘으로 연결합니다. 삐소리 후에는 통화료가.....
준혁은 통화 종료를 눌렀다.
허강민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야 그도 바쁜 일 정도는 있을 거고 밤새 살인 미궁을 만들고 낮에는 잘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데 어떻게 이렇게 방치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빨리 박근태를 죽일 공모를 해야 하는데.
‘아니, 어쩌면 안 죽이려 들지도 몰라.’
허강민은 아무나 내키는 대로 죽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박근태가 죄인이긴 하지만 보기에 따라 아직은 죄가 없다고 할 수도 있었다. 죄가 있다 해도 어차피 리셋될 건데 뭐 하러 미리 죽이냐고 하면 할 말이 없었다.
‘아, 이런. 둘 다 내가 죽여야 하나. 시백씨한텐 뭐라고 변명하지....’
허강민은 뭐 적이 많은 것 같으니까 시체만 잘 처리하면 자기에게 혐의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흉악범이니 쏴죽이고 체포하려다 저항해 사살했다고 둘러대도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박근태는 달랐다. 박근태라면 만인시중에 혼자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굴러 죽어도 적어도 세 사람은 배준혁의 범행을 의심할 것이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재석선배가 멀쩡하니 시백씨가 나한테 또 배신당해도 의지할 사람은 있는 거니까...’
“배준혁 경장.”
배준혁이 뒤로 돌아섰다. 그리곤 깜짝 놀라 경계를 붙였다.
“국장님.”
“지금 한가한가?”
그가 텅 비어있는 휴게실을 둘려보았다.
“네? 네, 그렇습니다.”
“그럼 잠시 내 방으로 오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그 말만 하고 하성철이 돌아섰다. 준혁은 놀라고 긴장해서 그의 뒤를 쫓아갔다.



[반월당, 마블 유니버스] 동맹 성립 2 (완) ㅣ- 크로스오버


아스가르드의 주연이라고 해서 항상 며칠씩 밤새 술을 들이붓는 건 아니었다. 이번엔 생소한 문화권의 사절들을 맞이한 데다 그 사절들이 꽤나 차분하고 근엄한 인물들이었다. 적당히 먹고 마신 다음에는 객실로 안내해줘야 했다.
그러나 잔치를 딱 하루만 하고 만다는 건 아스가르드의 전사들에겐 너무한 이야기였고 오딘은 ‘다음날 실무 협상에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참석할 자신이 있다면’ 원하는 만큼 늦게까지 남아도 좋다고 허락해주었다. 그리고 오딘 자신은 전사들이 눈치보는 일이 없도록 궁 안쪽의 내실로 먼저 들어가버렸다.
그러면서 남몰래 녹색 가루를 뿌렸다. 너무 희미하고 옅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금방 흩어진 듯 했지만, 사실은 바람과 함께 어디론가 날아갔다.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객실에서는 백란이 사절들끼리의 짧은 밀담을 끝내고 다들 불편 없이 잠자리에 드는지 확인한 다음 비로소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확신이 서자 품에서 뿔잔을 꺼내들었다. 어디선가 녹색 가루가 날아들어 뿔잔 안에 물결치는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다시 밖으로 나왔다.
녹색 가루는 뿔잔 안에서 흔들리며 일정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 방향을 주시하는 한편 다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따라갔다. 그런 백란을 도우려는 듯 가루는 일부러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샛길을 골라 안내했다.
캄캄한 배수로 같은 곳까지 따라들어갔더니 비밀 통로였다. 어느새 백란은 오딘의 왕궁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복도에 서 있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횃불이 일정 간격으로 걸려 있어 복도를 밝혔다.
그 복도 맞은편에 오딘이 서 있었다. 백란을 보고는 가볍게 손짓해서는 근처의 방으로 안내했다.
도착한 곳은 왕실 보물고였다. 백란은 차분한 무표정을 유지한 채 천천히 오딘에게 다가갔다.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오딘의 말투가 변했다.
“새롭고 대단한 물건들을 보면 호기심이 발동하는 게 당연하지. 듣도보도 못한 것들이 이리 와보세요, 내가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있는지 보세요, 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점잔빼고 있을 거야?”
“그럼 여기 있는 이것부터 묻고 싶습니다만.....”
백란이 마침 가장 가까이 있는 오색 영롱한 구슬을 가리키려다가 정신을 차리고 손가락을 들어 오딘을 가리켰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 늙은 바보의 허를 찌르는 데 성공했을 뿐이야.”
싱긋 웃고 금빛 예복의 노인은 녹색 예복의 흑발 젊은이로 변했다.
“정당한 결투였어. 내가 아스가르드에서 범죄자인 건 맞지만 날 그렇게 만든 건 오딘이야. 그가 먼저 나를 자신의 아들이자 왕위계승권자라고 속였어. 아무 것도 모르는 아기를 데려다가 절벽 끝에 놓고 키운 거야. 아기가 자라고 머리통이 굵어지면 휘청이다가 알아서 추락하도록. 그러니 나도 내 억울함을 호소할 자격은 있는 거 아냐?”
백란이 대답하지 않자 로키가 한 걸음 다가갔다.
“왜, 이제와서 날 비난할 작정이야?”
“아닙니다.”
백란이 차분하게 답했다.
“사실은 아까 거짓말한 것이 있습니다. 저는 컨벤션에서 헤어진 후 로키 전하께서 외계의 군대를 빌려 인간계를 침공하고 숱한 목숨을 앗아가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이전 아스가르드에서 추방되실 때도 제게 말씀 안 하신 일이 많이 있으리란 것 역시 처음부터 짐작했습니다.”
백란도 로키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제가 여유가 있고 토르 전하나 그곳의 영웅들처럼 사전 정보도 있었다면 저 역시 전하의 적이 되었을 겁니다. 최소한 동맹은 될 수 없었을 겁니다. 허나 일어날 일은 이미 다 일어났고 여기는 천계도 인간계도 아닙니다. 제게 전하를 징벌하거나 고발할 권위가 있는지도 의심스러운데 굳이 지난날의 은덕을 저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정보 좀 교환하고 신세 한탄 좀 들어준 거 가지고.”
“그때는 그 정도 일도 감지덕지였습니다.”
백란이 담담히 설명했다.
“아까 알 만큼 알면서도 굳이 모르는 척 로키 전하의 이름을 입에 올린 것은 아스가르드 인들이 전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정말로 아스가르드가 그토록 전하께 냉담한지, 속죄와 배상을 거쳐 화해할 여지는 없는지.”
“그럼 이젠 충분히 확인이 되었겠군. 그런 건 불가능하고 아스가르드의 모두에게 난 왕자가 아니라 적이라는 사실이.”
“모두는 아니던데요.”
“그래. 온 아스가르드에 자그마치 한 명이라니 그것 참 고무적인 숫자지.”
로키가 빈정거렸다.
“그것도 내가 ‘명예롭게 전사’했으니까 가능한 거야. 아무리 그리워해도 살아 돌아올 리 없으니까. 내가 몰고올 말썽을 감당할 필요가 없으니까. 게다가 정말로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알면 그가 과연 나를 용서할까?”
백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을 듣지 못한 것처럼 보물고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로키를 보고 물었다.
“오딘 폐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로키는 기묘한 표정으로 백란을 마주보았다.
“살아있다면?”
“놀라운 일이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백란의 표정은 놀라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말 살아있다면 증거를 보여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네 겉모습은 언제까지고 그대로 멎어있는 건가?”
로키가 다시 침묵을 깨었다.
“아무리 그래도 네 고향에서 정양하다보면 회복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언젠가는 가능할 겁니다. 살아난 즉시 천계로 돌아가서 치료에 전념했더라면 이제쯤 완전히 회복했을지도 모릅니다만 천 년이나 성장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제 갓 돌아갔으니 너무 서두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백란이 갸웃했다.
“이 모습이 전하의 심기를 건드리는 겁니까? 매번 신경을 쓰시는군요.”
“너는 가끔 헤임달이나 오딘보다도 나이 먹은 것처럼 행동하니까. 겉모습은 고사하고 진짜 나이도 나보다 어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그 천년을 인간계에서 보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천계는 인간계에 비하면 지나치게 단순하니까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아스가르드도 그러니까.”
로키는 백란에게 손짓해 보물고 안쪽으로 이끌었다.
작은 응접실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금과 상아로 장식된 소파 둘이 테이블을 마주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편히 앉아서 이야기하자고.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오딘이 가장 비밀스런 이야기를 나눌 때 앉았을 화려한 소파에 로키가 앉아 백란을 향해 손짓했다. 백란도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 너와 친구의 원수는 대체 어떤 대마귀여서 너처럼 힘과 지혜와 든든한 아군들까지 있는 존재를 그토록 괴롭힐 수 있었던 거지?”
백란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건 정말 길고 지긋지긋한 이야기라 언급하는 것도 싫습니다. 전하께서 물으시니 간단하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로키는 잘 닦인 유리처럼 빛나는 황금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로키가 예전 백란 앞에 내놓았던 주스와 백란이 내놓았던 과자가 원래 차려져 있었던 것처럼 나타났다. 그걸 보고 백란이 눈썹을 폈다.
“그때 제가 제 이름의 유래를 말씀드리겠다고 약속했지요. 그 약속부터 지키겠습니다. 그땐 일부러 전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대단한 비밀이라도 숨어있는 것처럼 말씀드렸지만 사실은 지극히 단순합니다. 제가 처음 인간계에 강림했을 때 천호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인간들이, 제 빛이 너무 눈부셔서 금빛이 아닌 흰 빛을 내는 귀한 존재라고밖에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적은 지식을 토대로, 희게 빛나는 난초 같은 꼬리를 지닌 존재라고 부른 겁니다.”
“그런 거였어?”
“생각보다 시시한 이야기였죠? 먼저 물어본 건 로키 전하고 저는 전하와 살아서 다시 만나고 싶었습니다. 호기심 외의 다른 유인책을 찾기엔 그 시간이 너무 짧았죠.”
“그래, 그랬지.”
로키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혹시 그 컨벤션에서 날 돕지 못했다고 후회하고 있다면 정말로 그만둬. 그때 난 복수심에 불타는 중이었다고. 네가 날 도와 아스가르드를 침공하거나 그 못지않은 일을 해줄 게 아니었다면 분명 머지않아 날 도운 걸 후회할 만한 일이 벌어졌을걸.”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백란이 시원하게 납득하고 잔을 들어 마셨다.
“하면 지금 전하께서는 복수심을 품고 있지 않으신 겁니까?”
“지금이야 굳이 복수할 필요 없지.”
로키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나는 아스가르드의 왕이 되었고 내 통치는 좋은 평가를 얻고 있어. 날 무시하고 불신하던 녀석들이 내 앞에 무릎꿇으며 깨닫지도 못해. 이미 충분히 복수했다고 할 수 있지.”
“마음이 넓어지셨군요.”
“상황이 편해지면 누구나 그래.”
백란은 여전히 로키를 비난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스가르드의 진짜 왕 앞에서 아첨하거나 뭔가 얻어내려는 기색도 없었다.
로키가 쓴웃음을 더 짙게 했다.
“역시 넌 트릭스터치고는 지나치게 착한 놈이야. 생판 남을 도우면서 그 자체로 보람을 느끼다니. 그 친구 일도 그래. 진상이 어쨌든 납득이 가든 안 가든, 결국 네가 그를 믿은 거야. 그런 혹독한 일을 겪고도 친구를 믿어주고 천벌에서 구해주고 싶었으니까 그 고생을 해서 친구를 구한 거라고. 내 말 틀려?”
백란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정말로 누명을 썼습니다. 악귀가 그의 영혼을 도깨비로 만들어 저를 증오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천형죄인으로 만들고 매 환생 때마다 쫓아가 죽였습니다. 그가 다시 개안하고 되살아난 저와 손잡아 그 악귀를 죽이지 못하도록. 결국 악귀가 그 정도로 두려워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으니 적당한 벌을 주었다고 할 수 있지만 저도 친구도 너무 많은 것을 잃었고 너무 많이 달라졌습니다. 아니, 더 이상 그 친구라고 할 수도 없지요. 잘해야 후계자입니다.”
“아무튼 악귀는 죽었다며?”
“예.”
“그렇다면 더 이상 그렇게 예방선을 칠 필요 없는 거잖아? 지금의 환생자가 옛 친구 맞다고 생각해도 그 악귀에게 또 친구를 잃을 걱정은 없지 않아?”
백란이 입맛 떨어진 표정으로 잔을 내려놓았다. 로키가 피식 웃었다.
“말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실은 아까 만찬장에서 너 말고 다른 사절들한테 들을 만큼 들었거든. 그들 생각에야 거대한 악을 상대로 대승리를 거두고 개선한 이야기니까 널 대신해서 떠들어 준다고 나쁠 건 없다고 본 거지. 네가 이렇게 똥 씹은 표정 할 줄 알았겠어?”
“자기들도 그 대흉대악에게 속아 천년 동안 제게 방해만 되었던 주제에 잘도 수다를 떨었군요.”
백란은 입술을 비죽이면서도 더 이상 로키를 노려보지는 않았다. 로키는 싱글싱글 웃으며 자기 잔을 들어 마셨다.
“덕분에 난 네가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지 알았는걸. 너와 적이 아니라 친구로 시작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고.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군. 어쨌든 넌 지금 내 약점을 쥐고 있잖아.”
“제 입으로 발설할 생각 없으니 약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백란은 다시 보물고 안을 둘러보았다.
“전하가 아니었다면 제가 언제 이런 구경을 다 해보겠습니까?”
“몇 가지 정도는 맘에 들면 가져도 돼. 대신 훔치지는 말 것.”
“천신들 중엔 절 여전히 질시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무슨 음해를 들으셨는지 모르나 부디 가려 들으십시오.”
백란도 로키도 마주보고 웃었다. 사악한 장난꾸러기들의 웃음이었다.


로키는 보물고의 보물들 가운데 보여줘도 될 만한 것들을 골라 설명해주었다. 백란은 꼬리를 살랑거리며 설명을 귀담아 듣고 궁금한 것을 묻기도 했다. 그러면 로키는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아, 역시 똑똑한 존재와 대화하니 살 것 같네.”
로키가 다시 소파에 앉는 대신 길게 가로누웠다. 백란은 그 맞은편에 다시 단정히 앉았다.
“그런데 저 중에 갖고 싶은 거 정말 없어? 만약 하나쯤 집어가면 나중에 네가 아스가르드인들 상대로 내 정체를 폭로하고 싶어졌을 때 내가 네 주장의 신용을 떨어뜨리는 데 유용할 텐데.”
백란이 피식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치고는 드물게 큰 웃음이었다.
“그런 무서운 계책을 품고 계신데 제가 이곳의 티끌 하나라도 취할 수 있겠습니까. 무서운 농담은 적당히 하시지요.”
“그래그래. 미드가르드에서 허구헌날 사고를 쳐서 추심관이 뺑뺑이치게 만든 녀석이.”
“작은 일에 옹졸하게 군 천계 잘못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잘도 그 옹졸한 동네에서 살고 있군. 차라리 너의 도깨비 왕 곁에 있는 게 낫지 않아?”
백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로키는 여전히 웃고 있지만 눈빛은 진지했다.
“네가 거둔 승리잖아. 네 덕에 천벌에서 벗어난 친구고. 널 질시한다는 녀석들까지도 부정하지 못하는 정의롭고 명예로운 승리인데 충분히 즐기고 있는 거야?”
“충분히 즐기고 있습니다만.”
백란은 잠시 뜸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가 천벌을 받고 환생한 첫 번째 때, 아니면 두 번째나 세 번째 때 승리를 거두었다면 전하 말씀대로 그의 곁에서 위안을 찾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두 번째 환생자가 허망하게 죽어버린 후, 저는 그가 살던 성의 이름을 붙인 집에서 살며 그의 옛 가신들을 모으고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한 채 천 년을 버텼습니다. 어느덧 진실을 찾고 그를 구하겠다는 소망이 그런 다음 편히 쉬겠다는 소망으로 변해버릴 만큼.”
백란이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천 년 전 저는 아직 순진한 새끼 여우였고 그는 저보다 강했습니다. 지금은 제가 천년 묵은 대요괴고 그는 어쩌다 신통력을 좀 타고난 무식한 소년에 불과하지요. 그런데도 전 그에게서 과거의 모습을 찾게 됩니다. 그가 다시 망량화해서 저를 해칠까봐 두려워합니다. 팔목귀가 죽었다고 해서 그게 하루아침에 바뀔 리 없습니다.”
눈을 뜬 백란이 소매 속에서 작은 비단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화려한 궁전의 모습이 두루마리에 그려져 있었다. 백란과 로키가 들여다보자 수묵화에 색이 입혀지고 화려한 단청 아래 시종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현판에는 ‘난궁蘭宮’이라 적혀있었다.
“천계에 있는 제 거처입니다. 제 이름을 따서 궁 이름도 지었더니 천인들이 저마다 거기 맞춰 귀한 난을 바치는 바람에 이제는 정말로 난초가 많은 궁이 될 지경입니다.”
“센스 없기는.”
로키가 피식 웃었다가 재빨리 덧붙였다.
“오해하지 마. 네 작명센스가 아니라 천인들의 센스를 비웃은 거다.”
“압니다.”
백란이 두루마리를 다시 말았다.
“그 천년의 고생이 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고 확인 받고 싶습니다. 천계에서 푹 쉬면서 그가 저 때문에 안달복달하는 모습을 더 즐기고 싶습니다.”
“그래. 알겠어.”
로키가 찬찬히 수긍했다.
“난궁은 오로지 너만을 위한 장소인 거군. 그에 비하면 반월당은 네가 너의 도깨비 왕을 위해 만든 장소였고.”
“그런 겁니다.”
로키는 조심스럽게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백란을 속일 수는 없었다.
백란도 아스가르드의 다른 전사들과 이야기해봐서 지금 오딘의 통치가 아스가르드를 좋은 쪽으로 이끌고 있으며 평판도 좋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외부 사절 앞이라서 좋은 이야기만 했다고 하기엔 아스가르드엔 교묘한 연극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로키밖에 없었다.
모두들 진심으로 오딘이 좋은 왕이고 선정을 베푸는 중이라고 믿고 있었다.
로키의 이름은 언급하기도 불미스러운 취급을 받고 있었다.
“로키 전하.”
백란이 마른침을 삼키고 말을 건넸다.
“우리 같은 존재는 주머니 속에 아무리 많은 계책과 수단을 숨겨도 부족하다 여기고 편안한 중에도 위급함을 생각하지요. 저와 전하 간의 우호를 확인하고 오늘 좋은 구경도 시켜주신 답례로 전하께 한 가지 보험을 바칠까 합니다.”
백란이 종이여우 하나를 꺼내 로키에게 내밀었다.
“그때 컨벤션에서 맺었던 맹약을 연장하고 싶습니다. 제 처지가 그때처럼 궁하지 않으니 전하께도 가치있는 맹약이 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제 도움이 필요해지면 이것으로 불러주십시오. 능력 닿는 한껏 돕겠습니다.”
로키는 그 종이여우를 내려다보다가 백란을 바라보았다.
“천계가 아스가르드와 맹약했으니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 사적으로 맹약하는 것 자체가 천계를 거스르는 짓이다. 그건 각오하고 하는 말이겠지?”
“제가 지난 천년 간 인간계에서 무엇을 했는지 들으셨지 않습니까?”
백란은 태연했다. 로키는 종이여우를 받아들었다.
아무 설명도 없었지만 로키도 백란의 의중을 알 수 있었다. 자칫 지금의 위장이 벗겨져 다시 한 번 아스가르드의 왕에서 반역자로 굴러떨어졌을 때 도와주겠다는 뜻이다.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묻고 싶었다. 자신의 악행에 동참하지도 않을 녀석이.
어느 날 정말로 위장이 들킨다면 이런 식의 보험은 정말로 필요했다. 그러나 백란이 맹약에 얽매여 억지로 악행에 말려드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반대로 이 여우가 동맹을 구실로 악행까지 동참해줄 것처럼 말해놓고 자신의 뒤통수를 칠 가능성도 시험하고 싶지는 않았다.
“좋다. 너와 맹약하마.”
둘은 엄숙하게 마주보고 섰다.
“이것은 컨벤션에서 맺었던 맹약의 연장이며 서로 위급할 때 지켜주고 피신처를 제공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상대의 대의를 공유할 의무는 없으며 자신의 안위를 소모해 헌신할 이유도 없다. 신의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나다만 이 정도로 느슨한 맹약도 지킬 수 없다면 더 이상 나를 위대한 로키 전하라고 칭할 수 없겠지.”
느슨한 맹약. 서로를 적에게 팔아넘기지만 않으면 되는. 서로 부담도 가지 않고 대신 뒤통수 칠 기회도 얻지 못하는 이 정도의 맹약이라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백란이 로키의 뿔잔을 들어올리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트릭스터 사이에 맺을 수 있는 가장 진실된 맹약이 성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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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작이 하나 더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33 ㅣ- 회색도시&검은방

“그 과거로 간다는 마법...사는 어떤 사람이냐?”
하성철이 물었다.
“마법사란 이상한 사람입니다.”
태성이 미리 생각해둔 대로 답을 회피했다.
“알아둬서 좋을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이미 만나서 얽힌 전 어쩔 수 없지만.”
“위험한 사람이냐? 어떻게 네가 위험한 사람과 얽히는데 내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저도 성인입니다. 네, 몸은 아니지만 27년을 살았던 기억은 그대로 있습니다.”
하태성이 냉정하게 거절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하성철이 잠시 아들을 곰곰이 뜯어보아다.
“이런 말 하긴 뭐하다만, 그런 말은 스물일곱 살이 아니라 열일곱 살에게 더 어울리는구나.”
“제 말 뜻은!”
“쉿.”
하성철이 입술에 손가락을 세웠다. 자기가 한 말이 있어 태성은 이를 바드득 갈고 목소리를 낮췄다.
“아버지께서 아신다 해서 뭔가 좋아질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과거를 추적하는 데에는 고위 경찰만큼 유용한 것도 드물다만.”
“윽.”
태성이 혀를 찼다.
“그런 거 직권남용 아닌가요?”
“태성아.”
하성철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 허건오란 아이를 찾아다 보호시설에 넣은 것도, 이경환 경사를 협박해 대기발령 낸 것도 결국 직권남용이란다.”
“..대기발령이요? 고작 그 정도로.”
“네가 말한 계획이 실현된다면 그 쪽에서 들어오는 반격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태성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네, 적어도 지금 수사팀에서 제거는 해야 할 테니까요.”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조용호와 고상만도 백석 스파이입니다. 유상일에게 누명을 씌워서 십 년 후에 살해당했습니다만.”
“음? 그들은 우리 팀원이 아닌데?”
하성철이 고개를 갸웃했다.
“게다가... 유상일? 유상일 경위? 그가 누명을 썼다고?”
“네. 그가 십 년을 복역하고 나와서 박근태에게 복수극을 벌이다가... 연쇄살인이 일어나는 게 십 년 뒤 사건의 골자입니다.”
“하지만 유상일은 박근태와 막역한 사이인 데다가 그럼 권현석은? 그가 그런 일을 보고만 있으리라곤.”
“그는 살해당합니다.”
하성철이 침묵했다.
“.....나는, 권현석과 유상일이 박근태의 측근이 되어 타락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가 천천히 말했다.
“매우, 미안한 짓을 했군.”
“아, 허건오씨는 박근태가 악당이라는 거 이상은 말해주지 못했겠군요.”
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사건의 인과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라도 정보 교환은 필요해 보이는군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예상하고 태성이 자세를 고쳐앉았다.
“아, 그리고 현재에서 과거로 가고자 하는 마법사는 허강민입니다. 그 밀실연쇄살인범.”
“뭐.”


류태현이 도착한 곳은 숲으로 둘러싸여있고 멀리 강이 보이는 예쁘고 호젓한 집이었다.
대단한 부자나 고관의 별장 같은 곳이 아닌가 류태현은 생각했다. 딱 봐도 그린벨트거나 상수원 보호구역이거나 둘 다일 이런 곳에 이런 집만 동그마니 있으면 아무래도.
“여기입니다.”
그를 여기까지 태워온 험상궂은 남자가 말하며 차에서 내렸다. 류태현은 서둘러 따라 내렸다.
“저, 양태수씨? 허강민씨가 어쩌다 어떻게 아픈 건지, 이제는 말해줘도 되지 않을까요?”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양태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묻고 싶어도 저 무서운 얼굴이 인상을 콱 찌푸리고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도저히 무슨 말을 먼저 꺼낼 수가 없었다.
양태수가 망설였다.
“실은 아픈 것이 아닙니다.”
“네? 그럼.”
“직접 보는 게 빠르겠지요.”
양태수가 열쇠로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뒤처지면 쫓겨날세라 류태현이 바짝 뒤쫓았다.
“아. 오셨. 나요.”
소파에 앉아있던 여자가 일어나 다가왔다. 이런 상황에 맞지 않는 연약한 느낌의 미인을 보고 류태현은 당황했다.
“아, 안녕하세요. 저.....”
“허강민, 씨는.... 저, 저쪽에.”
여자가 문을 가리켰다. 류태현은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문을 열었다.
아기자기한 느낌을 주는 방이었다. 방안에 침대가 있고, 침대 위에 허강민이 있었다. 자는 듯 눈을 감고 있고 색색 숨소리도 들렸다.
“재, 재웠...어요. 곧. 깨어.”
“자는 것 뿐이죠? 달리 뭔가.”
“다치거나 병이 있는 건 아닙니다.”
양태수가 말했다.
“다만.....”
“다만?”
“류태현씨에게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뭔데요?”
“그 전에 확인할 게 있습니다. 류태현씨는 과거로 가서 사고를 막고 싶은 거지요?”
“네.”
이들이 뭘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류태현은 최대한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럼 만약에.... 그게 매우 힘들거나 심지어 불가능해지면 어떻게 할 겁니까? 허강민과 맺은 동맹은 어디까지 유효한가요?”
류태현은 생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불가능... 한건가요? 과거로 가는 게? 그럼 허강민씨는요? 그, 멀쩡할 것 같지 않은데 설마 아니 당신들은 그럼 누구들인 겁니까, 협력자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런 것까지 알면....”
양태수가 여자 쪽을 흘끔 보았다.
덩치나 위압감도 그렇고 중요한 말을 하고 있는 건 양태수 쪽인데도 류태현은 어쩐지 저 여자 쪽이 보스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죽고 싶..어 하고, 있어요.”
여자쪽이 말했다.
“죽지.. 않게, 부, 부탁.”
말 뜻을 알아듣고 류태현은 숨이 턱 막혔다.
“저, 저는 안됩니다.”
그가 울 것 같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도움이 되고 싶지만 저는..... 제가 복수 대상이라고요. 과거를 고칠 수 있다면 협력 정도는 못할 것도 없긴 하겠지만 그것도 아니라면 허강민씨의 살 의욕을 가장 확실하게 꺾어놓을 게 바로 저란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지만 달리 부탁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양태수가 말했다.
“저와 아가씨는 집에 돌아가봐야 합니다. 허강민을 저 상태로 혼자 둘 수도 없습니다. 달리 다른 사람을 찾거나 부를 만한 시간도 없고. 적어도..... 적어도 내일까지 지켜보며 그가 자살을 기도하지 못하도록 막기라도 해줬으면 합니다.”
“강제로 묶어놓는 정도밖에 못 할 거에요.”
“그거라도 좋습니다.”
양태수가 다급하게 붙들었다.
“되도록 빨리 다시 올 테니 그 때 까지 죽지만 않게 해주십시오.”
류태현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양태수가 안도했다.
“감사합니다. 더 늦으면 의심받을 거라서.... 갑시다 아가씨.”
두 사람은 순식간에 나가버렸다. 자동차 소리를 들으며 류태현은 문득 자기는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문은 열 수 있을지 몰라도 외딴 곳에 갇힌 거나 다름없다는 걸 깨달았다.
신기할 만큼 공포심은 들지 않았다. 마치 밀실 안에 들어온 듯 침착해지고 낯선 실내인데 폐소 공포도 없었다.
그가 허강민이 자고 있는 방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아직 자고 있었다.
그새 깨어나서 악귀 같은 모습으로 류태현을 죽일 준비를 하고 있대도 놀라지 않았을 텐데 여즉 자고 있는 건 어째 놀라웠다.
자는 모습은 평화로웠다. 무슨 약을 먹인 건진 모르지만 악몽에 시달리며 괴로워하고 있지 않아서 류태현은 안도했다.
‘계속 이렇게.... 편안했으면 좋았을 텐데.’
과거로 가는 게 불가능하다고 했다. 죽은 사람들을 살릴 방법이 없다고. 그럼 허강민이 깨어나면..
‘아..... 미리 묶어놔야 하나?’
깨어난 뒤에 날뛰는 허강민을 제압해 묶을 자신은 없었다. 살리기 이전에 살기 위해서라도 그가 깨어나기 전에 미리 묶어놓는 게 최선일 것 같았다.
그 사람들이 끈을 준비해뒀을까 류태현이 방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러다 허강민과 눈이 마주쳤다.
“................”
“...............”
“..............아, 안녕하세요.”
“안녕 못해.”
“네, 그, 그렇겠죠.”
류태현의 기색이 축 쳐졌다. 허강민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왜 네가 여기 있는 거냐? 여기는 어디고? 그.... 사람들은.”
허강민이 새삼 긴장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 안에 별다른 게 없자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갔다.
“어, 어디 가시나요?”
류태현이 그를 붙들었다.
“어디 가긴, 기절했다 깨어나보니 낯선 방에 갇혀있으면 여기가 어디고 어떻게 해야 나갈 수 있나 파악하는 게 당연하잖아?”
“그야.... 아, 이 문은 그냥 열려요. 제가 열고 들어왔거든요.”
말하며 류태현이 나서서 문손잡이를 잡았다. 문득 이랬는데 문이 밖에서 잠겨있고 이번엔 허강민과 둘이서 이 밀실을 탈출해야 하는 거면 어쩌나 겁이 더럭 났으나 다행히 문 손잡이는 부드럽게 돌아갔다.
그런데 문을 밀자 어디 걸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설마!’
허강민이 류태현의 손을 턱 잡았다. 막 패닉에 빠지려는데 그가 류태현의 손째로 손잡이를 돌렸다. 그리고 당겼다.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류태현이 허강민을 돌아보았다.
“방문은 안쪽으로 현관문은 바깥쪽으로 열리는 걸 모르는 바보도 있냐?”
“아....”
“문의 방향 정도로 네 녀석의 탈출을 봉쇄할 수 있다는 걸 이제 와서야 알다니 나도 참 운이 없군.”
“바, 방금은 그냥 당황해서 그런 것 뿐이에요. 문 열줄 압니다.”
류태현이 얼굴을 붉히며 항의했다.
“그래, 그것 참 대단한 능력이구나.”
문 열고 나와서 하강민은 집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곤 거실 소파에 가 앉았다. 이미 어두워진 뒤라 거실의 큰 창문에 그의 옆모습이 비쳤다.
허강민이 바로 현관으로 뛰쳐나가거나 부엌으로 가서 칼을 찾거나 하면 어떻게 말리나 마음 졸이던 류태현은 뜻밖에 비폭력적인 허강민의 모습에 그만 어리둥절해져버렸다.
“저, 허강민씨....”
“넌 왜 여기 있지?”
허강민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허강민씨 못 죽게 하라고 불려왔어요.”
거짓말해서 뭔가 좋아질 상황도 아니다 싶어 류태현이 사실대로 대답했다.
“네, 그런 목적이라면 전 최악의 선택인 거 알고 그 사람들한테도 말했는데 묶어놔도 좋으니 살려만 두라고....”
말끝을 흐리며 류태현이 허강민의 눈치를 보았다. 살기 싫다는 사람한테 묶어놔서라도 강제로 살려두겠다 말하는 게 현명한 일일 리 없었다.
허강민은 피식 웃었다.
“네 주제에?”
“...네, 제 주제에 허강민씨를 잡아 묶을 수 있을 리 없지요, 경찰이어 봤자 연쇄살인범한테는 쨉도 안 되는 멍청이일 뿐이지요.”
류태현이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허강민이 고개를 저었다.
“너 그들이 누군지는 아냐.”
“남자 쪽은 양태수라고 했고 여자 쪽은... 아가씨라고만 했는데 그 쪽이 보스 같았어요.”
허강민이 깜짝 놀랐다.
“웬일이냐? 너 같이 눈치없는 놈이 맞는 추측을 다 하고.”
“........허강민씨........”
“살려두랬다고.”
그가 혀를 찼다.
“대체 왜? 날 살려둬서 이득될 건 전혀 없을텐데. 답지 않게 자비로운 흉내라도 내고 싶은 건가? 괴물 주제에.”
류태현이 허강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정확하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반월당, 마블 유니버스] 동맹 성립 1 ㅣ- 크로스오버

Writer: 보행자
Characters: 백란, 로키, 토르 등
Rating: G
Summary: 트릭스터 컨벤션의 후속작입니다. 반월당 완결 후, 토르 2 이후 백란과 로키가 다시 만납니다. 당연히 두 원작의 스포가 있습니다.


로키는 아스가르드가 지나치게 발전이 없다고 말하곤 했다. 모든 것이 정체되어 있다고.
그때는 아직 로키가 오딘의 둘째 아들, 아스가르드의 왕자이고 토르의 형제라 불리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던 평화롭고 좋은 시기였다.
그러니 그의 그런 지적에 귀를 기울였어야 마땅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좋은 시기였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로키를 떠올리고 토르는 그만 울적해져버렸다.
로키가 살아있었다면 오늘 분명 기뻐했을 텐데. 점잖은 척 하면서도 녹색 눈을 호기심으로 빛냈을 텐데.
그 좋은 시기가 끝나고 수많은 비극이 있었다. 그 비극 대부분이 로키의 소행이었지만 그 속에서 토르는 로키의 옛 불평 중 하나가 사실이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자신도 아스가르드도 지나치게 정체되어 있었다. 미드가르드든 또 다른 세계든 더 많이 접하고 배워야 했다.
그래도 지금의 아스가르드는 자신이 힘으로 적을 때려눕히는 것밖에 모르던 그 시절과는 꽤 달라졌다. 아버지도 어머니를 잃은 충격에서 벗어난 뒤론 보다 자애롭고 현명한 군주가 되셨다. 로키와 어머니, 제인의 일로 내심 아버지를 원망하던 토르였지만 지금의 아버지를 보면서는 적어도 또 ‘이 늙은 바보!’라고 외칠 충동은 나지 않았다.
아스가르드와 세계수 너머의 다른 세계와 수교하기로 결정한 것도 오딘이었다. 미드가르드를 경유하면 이제까지보다 훨씬 다양한 세계를 접할 수 있었고, 토르 역시 미드가르드에 깊이 관여하는 다른 세계라면 모른 척할 수 없기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다행히 그쪽도 평화와 질서를 추구하는 선한 세계라 수교는 순조로웠다. 오늘은 그 사절단이 처음으로 비프로스트를 밟은 날이었다.
사절로 온 천계의 인물들은 낯설 뿐 아니라 위풍당당한 모습들이었다. 그들도 내심으로는 긴장했다고 알 수 있을 만큼은 토르도 요령이 생겼지만 그래도 이 긴장감은 견디기 힘들었다.
양피지에 금박으로 글씨를 새겨 보낸 서한의 답으로 비단에 검은 잉크로 쓴 답이 왔을 때도 느꼈듯이 지금도 하나부터 열까지 낯설고 신비한 모습이었다. 옷차림도 예절도 너무 낯설어서 어떻게 맞아야 하나 당황한 전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로키가 있었다면 훨씬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영리하고 온갖 잡지식을 다 알아두는 그라면 보다 능숙하게 응대하는 한편 새로운 지식을 흡수할 기대감에 물 만난 고기 같았을 것이다. 미드가르드에 처음 떨어졌을 때의 경험에 비추어 조심스럽게 응대하며 토르는 정말 로키가 그리워졌다.
그러다보니 사절들 중 거의 유일하게 화사한 미소를 띠고 토르 앞에서건 오딘 앞에서건 부드럽게 응대하는 여우 요괴가 진심으로 예뻐 보였다. 아스가르드에 로키가 없는 대신 천계에 천호가 있어 눈치빠르게 분위기를 가다듬고 서로 풍습이 맞지 않아 불협화음이 날 때마다 악기를 조율하듯 상황을 수습했다.
물론 보통 여우는 아니었다. 황금빛 털에 감싸인 아홉 갈래 꼬리는 여우 요괴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높은 영물인 증거였다. 보기엔 어린 티 덜 벗은 소년이지만 천년이나 미드가르드에 머물며 인간들을 보호하고 악을 징벌한 존재라고도 했다.
로키 생각을 하고 봐서인지 천호를 보고 있으면 로키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끄러운 화술과 재치, 순간순간 낯선 것이 나타날 때마다 천성을 어쩌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호기심. 아직 성년이 되기 전의 로키를 보는 것 같았다.
로키가 저만큼 선량한 성격이었다면, 적어도 그렇게까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그도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저 여우 요괴와는 말이 잘 통했겠지. 적어도 로키가, 다크엘프들의 침략 때 명예를 씻고 살아서 함께 돌아오기까지 했더라면.
“귀한 손님들을 위해 만찬을 준비했소.”
오딘의 목소리에 토르는 정신을 차렸다. 지금 회한에만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만찬장으로 자리를 옮기자 천계의 근엄한 사절들도 조금씩 분위기가 풀어졌다. 아무렴, 좋은 술과 맛있는 고기를 싫어하는 족속이 있을 리가. 소녀시절의 시프보다도 더 서릿발 같은 기상을 빛내고 있던 청룡 장군도 열심히 튀김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흐뭇해져서 토르도 벌꿀술을 들이켰다. 오딘도 친구들도 다 웃는 얼굴이었다. 아스가르드에 강력하고 명예로운 동맹이 탄생하는 날이었다.
분위기가 꽤 무르익었을 때 천호가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똑바로 토르에게 다가왔다.
“아스가르드의 왕자, 오딘과 프리가의 아들이며 묠니르의 주인이신 강대한 토르 전하를 뵙습니다.”
계속해서 천신들을 대신해 외교적인 대화를 풀어가던 천호인지라 다들 그쪽을 주목했다. 동맹의 앞날을 위해 중요한 제안을 하든 그냥 토르의 명성에 걸맞는 찬사를 늘어놓든 기꺼이 들어줄 마음으로.
“아스가르드 땅을 밟아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나 전하의 위명은 일찍이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천호는 술병을 들고 있었다. 아스가르드 식 술 항아리가 아닌 작고 홀쭉한 흰색 호리병은 예쁘긴 한데 술이 많이 들어갈 것 같지는 않았다.
“바로 전하의 동생 되시는 강대한 마법사이자 대현자, 하늘을 걷는 이 로키 전하에게 들었지요.”
토르의 손에서 술잔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챙 하는 소리가 얼어붙어버린 연회장에 울렸다.
“로키라고.”
“예. 제가 이전 인간계에 있을 때 그분을 뵙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헤임달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스쳤다. 로키가 죽기 이전의 일이며 즉 로키가 지금 어딘가에 살아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고 모든 전사들이 제각기 안도하고 실소했다.
토르는 웃지 않았다.
“저는 인간계에 있는 동안 대흉대악의 음모로 몇 번이나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여, 끝내는 가솔들과 짐짝 하나를 전부 거두어 달아날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런 절박한 때에 우연히 마주쳤지요.”
천호는 태연히 설명했다.
“그분은 이 작은 여우를 미천하다 하여 괄시하시는 대신 후히 대접하시고 위로와 지혜가 되는 말씀도 들려주셨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이 자리에서 그분께도 술을 올리고 그때의 은덕을 기리고자 했는데, 어찌하여 로키 전하는 이 자리에 보이지 않으십니까?”
토르는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듯했다. 뭐라 해야 좋을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로키를 좋게 기억하는 사람이 한 명쯤 있었으면 했다.
오딘은 로키가 명예롭게 전사했다고 인정해주었지만 딱 그뿐이었다.
만약 토르 자신이나 여기의 다른 전사들 중 누군가가 얽힌 일이었다면 모두 입을 모아 그 전사의 자비를 칭송했을 것이다. 이미 고인이 된 누군가라면 더욱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아스가르드가 무엇을 잃었는지 한탄했을 것이다.
지금 연회장엔 로키를 칭송하거나 추모하는 대신 어색한 침묵만 내려앉아 있었다.
천호도 자신의 말이 뜻밖의 반응을 불러들였다고 깨달은 것 같았다. 내내 입가에 걸치고 있던 미소를 지우고 누가 설명해달라는 듯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누구든 조금이라도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이 상황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토르가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로키가 그런 일을 했다고?”
토르보다 먼저 오딘의 목소리가 조용해진 연회장에 울렸다.
“그러하옵니다.”
천호가 오딘을 향해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누구에게도 함부로 알릴 수 없는 외로운 싸움 중에 흔치 않은 위안이었지요.”
“그대는 미드가르드에 오래 머물렀다 했지. 그 이후로 로키의 소식을 들은 적이 없는가?”
“저를 위협하는 대흉대악에 맞서 싸우는 일이 너무나 초급하여, 천계로 돌아오기 직전 얼마 동안은 인세의 다른 소식에 그만 어두워지고 말았습니다. 제 견문이 좁아 무례를 저질렀다면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허나 아스가르드에서 로키 전하를 칭송하는 것이 무례가 될 일인지 이 여우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그대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무엇을 용서한단 말인가.”
오딘이 인자하게 웃었다.
“그대가 그대의 숙적과 싸우는 동안 로키 역시 그에게 주어진 시련과 맞서 싸워야 했지. 안타깝게도 그는 그 싸움으로 명예와 목숨 중 하나를 잃어야 했다네.”
천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오딘이 잔을 들어 벌꿀술을 가득 부었다. 그리고는 천호에게 손짓했다.
“아들의 죽음을 아비에게 상기시키는 일이 무례라면 그 아들의 미덕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덮고도 남음이 있지. 가까이 오게.”
천호가 오딘에게 다가갔다. 오딘이 술잔을 내밀자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들었다.
“아스가르드를 위하여. 죽음으로 아스가르드와 아홉 세계를 수호한 모든 영웅들을 위하여.”
오딘이 자신의 잔을 들어올렸다. 다른 전사들과 천신들도 잔을 들었다.
그 잔들이 비워지고 연회장의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로키의 이름을 다시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토르는 그렇게 쉽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오딘은 ‘죽음으로 수호한 모든 영웅’이라 말하며 로키를 직접 언급할 기회를 피해버렸다. 다크엘프 침공 이후 항상 그런 식이었고 다른 친구들과 전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키가 해온 짓들이 있으니 그들의 심정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달랐을 것이다. 역시 로키에게도 영웅의 자질이 있었다고, 기뻐하는 동시에 안타까워 하셨을 것이다.
토르는 여전히 오딘 곁에 서 있는 천호를 바라보았다. 오딘이 내린 벌꿀술을 마시고 답례로 술을 따르는 옆모습은 역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러웠다. 미드가르드에서 콜의 아들을 비롯해 저런 표정으로 속마음을 감추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천호에게 가까이 가서 다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처음 미드가르드로 쫓겨났을 때 이후 온갖 일들을 겪으며 생긴 조심성이 당장 나서려는 충동을 막았다. 오딘과 대화중이라고 해도 그는 끼어들 자격이 있지만 지금은 로키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오딘뿐 아니라 아스가르드의 다른 누구도 없는 자리에서 조용히 이야기하는 편이 여러 모로 나았다.
천호는 오딘을 상대하느라 그런 토르의 심정을 알아줄 여유가 없는 듯했다. 신비한 향이 나는 호리병 속의 술을 다 따르고 오딘에게도 벌써 세 번째 잔을 받았다.
그 세 번째 잔을 입가에 갖다댄 순간 천호의 금빛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계속 천호를 주시하고 있던 토르는 눈치챌 수 있었다.
“토르 전하?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천호가 놀란 기색을 거두고 토르를 마주보았다.
“빤히 쳐다보시는 모습이 잔에 비쳐서 놀랐습니다.”
자신이 놀라게 했을 줄이야. 토르는 머쓱해져서 일어났다.
“용건이 있다면 이리 와서 말하지 그러느냐.”
오딘도 인자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토르는 할 수 없이 일어나서 오딘의 옥좌로 올라갔다.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천호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사과를 받아주었다. 옆에서 오딘이 거들었다.
“네가 로키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 게로구나. 내 눈치 보지 말고 이야기 나누려무나.”
그래도 오딘은 토르가 로키를 추모하는 것까지는 봐주실 모양이었다. 토르는 천호와 오딘 곁에 앉았다.
“로키를 아는 다른 세계 존재를 본 건 처음이라, 묻고 싶은 것이 많다네.”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어벤저 동료들도 거기 해당되지만 일단 그렇게 설명했다. 모처럼 로키를 좋게 기억하는 인물을 만났는데 나쁜 이야기는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 그를 언제 어디서 보았는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물어도 되겠나?”
“만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아스가르드도 천계도 아닌 곳이었지요.”
천호가 미소지었다.
“저는 절박하게 은신처를 찾는 중이었고 로키 전하 역시 그랬습니다. 아스가르드에서 다소 불미스런 일을 겪은 듯 했는데 자세한 말씀은 해주지 않으시더군요.”
아스가르드에서 쫓겨나 은신처를 찾을 때라면 토르도 언제인지 짐작이 갔다. 로키가 대관식을 망치고 아버지와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자신과 미드가르드까지 위험에 처하게 했을 때. 비프로스트를 이용해 요툰하임을 파괴하려 했을 때.
자신은 그때도 로키가 죽은 줄만 알았다. 비록 살아 돌아온 그가 돌이킬 수 없는 악당이 되어있긴 했어도, 지금까지도 때때로 그때처럼 이번에도 로키가 살아 돌아오지 않을까 헛된 기대를 하곤 했다. 허공으로 떨어져 사라져버린 그때와 달리 이번엔 눈앞에서 죽어 시신을 확인했는데도.
“그때 일이라면 나도 토르도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깊이 후회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구나.”
토르가 침묵하는 동안 오딘이 부드럽게 설명했다.
“쫓겨나 방황하던 로키가 만난 상대가 자네여서 그나마 다행이었군. 분명 로키와 공감할 부분이 많았겠지?”
“그랬습니다.”
천호가 싱긋 웃었다.
“그때 저도 전하처럼 악귀나 제 적이 아닌, 천계의 눈을 피할 문제로 걱정이 태산 같았거든요.”
“천계를 피하려고? 어째서?”
토르가 기겁했다.
“그대도 천계에 잘못을 저질렀는가?”
“제가 아니라 제 친우가, 앞뒤 가리지 않는 어리석은 정의감으로 저지른 일이었습니다.”
천호가 태연히 답했다.
“악행은 아니었습니다. 누굴 해치는 일도 아니었고요. 절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한 일이었으나 덕분에 저도 그도 큰 곤경에 빠졌습니다.”
“그랬나?”
친구를 구하려는 마음으로 악행도 아닌 일을 했는데 어떻게 그런 괴멸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토르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오딘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선의가 항상 좋은 결과를 낳지는 않는 법이지. 그 친구가 눈앞의 위기만 보지 않고 네게도 사정이 있다는 걸 조금만 더 알아줬더라면 그런 일은 피할 수도 있었을 것 아닌가?”
“바로 그러합니다.”
천호가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연 지혜의 신이라는 명성이 헛되지 않으십니다. 그냥 솔직하게 제게 미리 털어놓고 조언을 구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때는 그가 저를 구하려고 움직였다는 것이 제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이라서 그냥 넘어갔지만 역시 바보를 챙기다가 저까지 바보가 되는 경험은 자주 할 것이 못 됩니다.”
천호가 로키를 닮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면까지 닮다니. 토르는 그 친구 쪽이 조금 불쌍해져서 물었다.
“그래서 그 일은 어떻게 되었나? 친구가 벌을 받지는 않았나?”
“그랬다면 저도 이 자리에 있지 못했겠지요. 다행히 그 일을 심판하러 온 추심관이 호의적으로 판단해주어 저도 친구도 고비를 넘겼습니다.”
“멋대로 행동해 위기를 자초한 것은 친구인데 그대는 당연한 듯이 자신의 운명과 결부짓는군.”
오딘이 지적했다.
“생사를 함께할 정도라니 아름다운 우정이로다.”
“그의 원수가 저의 원수이기도 한지라 그가 죽는다면 저 역시 앞날을 기약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지나친 겸손은 필요 없네.”
토르가 다시 나섰다.
“우정과 신의는 아스가르드에서도 고귀한 미덕이라네. 그럼 그 원수는 이제 갚은 건가?”
“그렇습니다. 원수는 갚았고 의혹도 누명도 전부 해결되었습니다.”
모든 게 다 잘 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천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때 로키 전하께서는 사정을 듣고 당신 일처럼 안타까워하며 걱정해주셨습니다. 그렇기에 그 일은 이제 잘 끝났다고 꼭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토르도 함께 울적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 로키가 이 자리에서 들었다면 분명 기뻐했을 거다.”
오딘이 천호에게 인자하게 웃어보였다.
“저 역시 로키 전하께서 무사히 당신의 자리를 되찾기를 원했습니다.”
천호가 토르를 돌아보았다.
“로키 전하께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겁니까?”
토르는 당황했다. 로키가 저지른 악행들을 거짓으로 축소하거나 왜곡할 수는 없었다. 그럴 말주변도 없었다.
그렇다고 오딘이 먼저 설명하게 할 수는 없었다. 아스가르드로 압송해온 로키를 오딘이 어떻게 대우했는지를 생각하면.
“로키는......그만 악의 길에 빠지고 말았다네.”
토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외계의 다른 악한 세력과 손잡고 미드가르드를 침공했었지. 그가 그렇게까지 되기 전에 막았어야 했는데......”
“어쩌다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천호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자신의 출신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어. 나는 전혀 몰랐고, 왕의 재목이 되기에도 한참 부족한 주제에 대관식에만 신경이 쏠려 있었지.”
다행히 오딘은 당장 끼어들 생각은 없어보였다. 흰 눈썹 아래의 외눈은 이참에 토르가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교훈은 얻었는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사실을 깨달았을 땐 로키가 내 적이 된 뒤였어. 나는 화가 난 나머지 그를 다시 설득하거나 해보지도 못하고 싸웠고, 그래도 생포했으니까 아스가르드에서 어떻게든 다시 시작해 보려고 했지. 음, 그 도중에 로키가 허공으로 사라져 죽은 줄만 알았던 때가 있었는데 그대가 만났던 때가 아마 그때일 거야.”
“예. 로키 전하께서 제게 한 이야기를 봐도 그때 같군요.”
“로키가 뭐라고 말하던가?”
토르는 긴장했다. 스스로 반성하는 것과 로키의 입으로 비난받는 것은 차이가 컸다. 그때의 로키라면 한창 토르와 오딘을 원망하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역시 전하의 출신 때문에 상심이 커 보였습니다.”
천호가 기억을 더듬느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아스가르드와 아무 상관도 없는 미력한 존재이기에 그저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드리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위태로운 지경인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그 당시 인간계에 있던 제 거처로 모셨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악의 유혹에 빠질 일도 없었을 것을.”
“그대는 그때 천계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나.”
오딘이 끼어들었다.
“다른 세계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도망친 존재를 숨겨줄 때가 아니었지. 그런 걸로 후회할 필요 없네.”
로키를 돕고 타락을 막을 절호의 기회를 그냥 날린 일인데 저렇게 쉽게 말하다니 역시 아버지는 여전히 로키에게 너무하신다. 토르는 조금 울컥했다.
“그래도 로키는 결국 스스로 명예를 되찾았어. 다크엘프들의 침공으로부터 아스가르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랬군요.”
조금 놀란 눈으로 토르를 바라보던 천호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토르 전하께서는 진정 로키 전하를 생각하시는군요.”
“어, 그렇게 보이나?”
로키에게는 그런 말 들어본 적 없었다. 서로 원망하고 다투고 공동의 적 앞에서도 완전히 믿을 수 없어 경계하던 게 마지막 추억이 되어버렸다. 이제와서 그런 말을 들어봐야 기뻐해도 좋은 건지 잘 알 수 없었다.
“로키가 혹시 내 이야기도 하던가?”
“예.”
천호가 조금 곤란한 표정을 했다.
“했지요. 아주 약간, 지나가는 말처럼 했을 뿐이지만요.”
내내 청산유수처럼 말하던 천호가 갑자기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토르는 철렁했다.
“날 원망하던가?”
천호는 이제 눈에 띄게 난처해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때 로키 전하는 무척 상심하셨던지라......제가 함부로 말을 옮겨도 좋을지.......”
토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알았네. 굳이 말 안 해도 되네.”
대체 얼마나 심한 말을 했으면 저럴까. 자신이 실제로 로키에게 들었던 온갖 싫은 말, 비난, 조롱 등등을 전부 합친 것보다 더 심한 말을 들은 기분이었다.
“바보를 상대하다가 자기까지 바보가 되었다고 딱 한 마디 하셨습니다.”
혹시 천호는 로키가 가끔 그랬듯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토르가 고개를 들고 천호에게 한 마디 하기도 전에 오딘이 토르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지금 우리가 맞이한 것은 한 무리의 사절단이 아니냐. 왕자가 한 사람만 오래 붙들고 있으니 천호가 힘들어 보이는구나.”
토르는 얼결에 술잔을 받아들었다.
아버지 말씀이 옳았다. 사절단에는 천호보다 지위가 높고 중요한 인물들이 많았다. 천호가 거의 통역사나 다름없이 활약중이라고 해서 천호하고만 대화하는 건 대단한 실례였다.
오딘이 눈빛으로 토르를 재촉했다. 토르는 머쓱해서 일어났다.
“동방청제께서 토르 전하와 잘 맞을 것 같군요.”
천호도 거들었다. 토르는 아직 일정이 넉넉히 남아있고 천호와 이야기할 기회 역시 얼마든지 또 오리란 점을 위안삼을 수밖에 없었다.
오딘도 그렇게 말해놓고 당신은 천호만 계속 붙들고 대화하지는 않으셨다. 천호를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도록 놓아주고 만찬의 주인답게 전체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32 ㅣ- 회색도시&검은방


“저는....... 제 인생도, 제 능력도 아, 아버지의 것이라고만 생각... 했어요.”
장지연이 힘주어 말했다.
“그게 아니라면. 저는.”
그가 결심한 표정으로 양태수를 바라보았다.
“그 아이의... 안전을 보장, 하 할게요. 제 제 사람이, 되어주세요.”
“네?”
양태수가 당황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아, 아버지는, 악한 사람이에요. 저.”
장지연이 허강민을 가리켰다.
“살인에도 관여, 했고요.”
“네?!”
양태수가 허강민을 놓고 장지연에게 다가갔다.
“그게 무슨.....”
장지연이 허강민을 손짓했다. 양태수는 후다닥 되돌아가 허강민이 도망가기 전에 다시 붙들었다.
길게 말하기 힘든지 장지연이 한숨을 쉬고 허강민에게 눈을 돌렸다.
“백선교에, 대해. 설명을.”
허강민이 싫은 표정을 했지만 장지연이 쳐다보자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말입니까?”
“양태수씨...에게.”
“네.”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백선교는 인지로 형용할 수 없는 괴물을 섬기는 사악한 자들의 집단입니다. 장희준 회장님은 그곳의.. 뭐 높으신 분이라고 해두죠. 장지연님도 마찬가지고. 그 괴물이 추종자들에게 마법을 내려줍니다. 사실은 내려주는 건지 우리가 집진드기 마냥 떨어지는 각질을 갉아먹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래요.”
양태수가 뜨악한 표정이 되었다. 장지연은 풋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아까 그 이상한 이야기가 나온 겁니다. 저도 저분도.... 같은 마법사라 하기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와 국민학교 운동회 주자 정도 차이가 있지만 같은 마법사고요. 그리고 아마 지금 양태수씨에게 중요한 건.”
그가 심호흡했다.
“제가 양시백을 만난 건 노가다에 쓸 일꾼으로 백선교로부터 받아서이고, 잡아두고 있던 사람은 장희준 회장입니다.”
양태수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아픔에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허강민은 말을 계속했다.
“그런 식으로... 쓰고 버릴 아이들을 모아 훈련시키는 용역업체 비슷한 곳이 있습니다. 미래에 그는 어떻게인지 그 곳을 탈출해서, 최재석에게 주워져서 아까 말한 대로.”
“최재석?”
양태수가 깜짝 놀랐다.
“아까 말했던 관장이라는 사람이, 재석이라고?”
“네. 친구를 돕다 복수극에 말려들어 살해당한 그 사람이요.”
“재석이가 시백이를.... 그런데 왜 내겐....... 아.”
그가 고개를 숙였다.
“그 전에, 죽은 거군. 나는.”
양태수가 한 손으로 눈을 덮었다.
“어쩌면, 시백이에 대해 알아내서, 그를 구하려다 당신은 죽고 그 녀석은 탈출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허강민이 모르는 점 두 가지를 연결해 양태수에게 최선의 추측을 내놓았다.
“위로하려고 애쓸 필요 없네. 회장님이 나쁜 일에 손대시는 건 알고 있었어. 알고도 모르는 척 방치한 내 죄지. 마땅한 벌을 받은 거야....”
“그, 그러니, 이제....라도. 아 안 그러기로 해요.”
장지연이 말했다.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양태수가 물었다. 장지연이 망설였다.
“아가씨를 따르겠습니다. 그런 짓을 하는 자는 은인이라 해도 따를 수 없습니다. 심지어...”
그가 이를 악물었다.
“그 사람은, 약속을 어겼습니다.”
장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 허강민씨.”
허강민이 ‘나는 왜?’라는 시선으로 장지연을 보았다.
“다, 당신은...”
“저는 이제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장지연이 고개를 흔들었다.
“어째서요? 입막음을 위해서라도 죽이는 게 좋으실 텐데요?”
“사, 살 생각, 전혀 없나요?”
“살아서 뭘 하라고요?”
허강민이 쏘아붙였다. 장지연이 양태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살리고, 싶지요?”
“예, 물론입니다.”
“그, 그럼 살려서, 데려가죠.”
“네? 누구 맘.”
허강민의 항의는 도중에 끊겼다. 장지연이 가리키자 그는 손끝도 까딱할 수가 없었다.
“제 맘, 대로요.”


류태현은 전화를 쳐다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하태성이 준 번호는 읽고 읽고 또 읽어 이미 외울 지경이지만 그래도 혹시 잊거나 틀릴까봐 쪽지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내가 전화하면 허강민씨 화내지 않을까...’
자기한테만 화내면 다행이지, 하태성한테까지 화낼지도 모른다. 화만 내고 마는 게 아니라 협력 관계가 틀어져버리기라도 했다간 큰일이었다. 허강민은 하태성의 미래, 아니 과거 현재 미래를 몽땅 쥐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설마 자기한테 전화번호 좀 알려줬다는 이유만으로 남의 인생을 말아먹을 짓까지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연쇄살인범의 뭘 믿고.’
지난번 밀실 이후 연락 없이 지내는 누군가가 머릿속에서 혀를 찼다. 류태현은 그 목소리를 무시했다.
‘저는 선배와는 다릅니다. 지금은 허강민씨를 믿을 겁니다.’
그가 단호하게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갔다. 한참이 지나도 허강민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류태현은 조마조마하며 허강민이 전화를 받길 기다렸다.
한참이나 지나서, 혹시 번호가 유출된 걸 알고 허강민씨가 벌써 새 번호로 바꿨나 의심할 때 쯤 되어서야 전화가 연결되었다.
“허강민씨? 저 류태현입니다.”
불청객이라고 끊을세라 류태현은 서둘러 용건을 쏟아내었다.
“갑작스럽게 전화해서 죄송합니다. 저, 그래도 돕기로 했는데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뭐라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요? 일단 제가 아는 사람들 과거 행적을 조사하고 있기는 한데... 이런 건 중복해서 해도 낭비 아니거든요. 사람마다 알아낼 수 있는 것도 다르고.”
-류태현씨라고요?
허강민과는 전혀 다른, 나이든 남자 목소리가 되물었다.
“!”
너무 놀라 류태현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분명 허강민의 번호라고 하태성이 알려줬는데, 거짓이었을까? 아니면 자기가 긴장한 나머지 잘못 누르기라도 한 건가?
전화가 울렸다. 류태현이 멈칫멈칫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류태현씨?
아까 그 목소리였다.
“네, 네.”
답하고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자신을 밝혀도 되는 걸까 걱정이 들었다. 이 사람이 왜 허강민의 휴대폰을 갖고 있는지도 신경쓰였다.
“아.... 저 죄송하지만 전화를 잘못 걸....”
-허강민에게 건 것 아닙니까?
류태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저... 누구세요?”
결국 대놓고 물어보았다. 머릿속 누군가의 목소리가 혀를 찼지만 무시했다.
-저는 양태수라는 사람입니다.
조금 시간을 두고 상대가 대답했다.
-현재 허강민씨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어쩐지 허강민 본인에게 물으면 다른 답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허강민씨한테?”
상대가 잠시 침묵했다.
-아까 사람들의 과거를 조사하고 있다고 했지요.
류태현의 심장이 덜컥했다.
틀렸다. 이 말이 허강민 귀에 들어가면 기밀도 못 지키는 이런 멍청이 못써먹겠다고 내다 버릴게 뻔했다.
-당신 허강민이 계획한 일의 협력자입니까?
“네.”
이판사판이었다. 더 나빠질 일도 없을 것 같아 류태현은 과감하게 나가기로 했다.
“그 점을 지적하시는 걸 보니 양태수씨도 저와 비슷한 처지인 모양이군요. 지금 허강민씨는.”
-아니오.
“...네?”
-저는...
말하다 상대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류태현은 귀를 기울였다. 희미하게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양태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누가 있어?’
쉽게 생각하면 허강민 본인이겠지만, 그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전화를 남이 받게 놔뒀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럼 대체 누가. 아니 허강민은 지금 어떤 상태인건가.
-허강민씨가 지금 좀 아픕니다.
“네? 어디가요? 얼마나? 다쳤나요? 뭐하다가? 치료는....”
-그래서 지금 도움이 필요합니다.
전화 너머 상대는 류태현의 의문을 묵살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쪽으로 와줄 수 있겠습니까?
“갈게요. 어디로 가면 되죠?”
바보라고 아우성치는 하무열의 목소리를 최종적으로 무시하며 류태현은 허강민은 선택했다.


하성철이 퇴근했을 땐 이미 늦은 밤이었다.
“오셨어요?”
그런데 하태성이 깨어 기다리고 있었다. 하성철은 놀랐으나 곧 납득했다.
“걱정할 필요 없을 만큼은 해 놨다.”
“어떻게요?”
하성철은 슬쩍 안방 쪽을 곁눈질했다.
“제 방으로 갈까요?”
“굳이...”
“그 외에도,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고요.”
하성철은 조금 망설였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하태성의 방으로 가서 문을 닫았다.
“허건오씨에게 이미 들으셨겠지만, 저는 십 년 후에서.... 되돌아왔습니다.”
이 현상을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 하태성은 대충 그렇게 표현했다.
“어떻게...인지 알고 있니?”
“마법이라더군요.”
말하고 태성이 머리를 짚었다.
“네, 황당무계한 헛소리로 들린다는거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와 몇몇이 과거로 온 것이 확실한 이상 부정할 수만도 없습니다. 게다가...”
태성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정말입니까? 그 누명 이야기.”
하성철이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이다. 믿지 못해도 할 수 없겠지만....”
“솔직히 믿기지는 않지만, 이제 상관 없겠죠.”
“응?”
하성철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소리냐, 이제 상관 없다니...”
“여기서 또다시 과거로 가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허강민에 대해 말해도 좋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태성은 신중히 말을 골랐다.
“사고로 죽은 가족을 되살리고 싶어합니다. 그가 저와 다른 과거로 온 자들을 찾아내서 보호하고, 그 대신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을 쓴 사람을 찾는 걸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누가 한 건지 모른다 이거냐? 어떻게? 같이 왔다는 사람들은 누구누구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해.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야.”
“어째서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십 년 후에 벌어지는 연쇄 살인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연쇄살인?”
하성철의 목소리가 커졌다.
“쉿.”
태성이 손가락을 세웠다.
“제 방 소리 안방에서 들리지요?”
하성철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그 정도로 잘 들리는 겁니까?”
“네 엄마는 잠귀가 밝으니 말이다.”
하성철이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살인을 막기 위해 십년씩이나.”
“사건의 원인이 과거에 있어서요.”
“그래... 그렇다면 그 마법... 이 일을 한사람도 사건 관계자일게 아니냐. 피해자의 유가족이라던가.”
“그게 꽤 복잡한 사건이라서 말입니다...”
하태성이 먼산을 바라보았다. 피해자중 유족이라 할 만한 사람이 있는 건 최재석 뿐이지만 양시백은 마법사가 아니었다. 김주황과 허건오에게도 이런 일을 해 줄 만한 가족은 없을 거고 있다 해도 아직 사망 소식도 가기 전이었다.
“과거로 가려는 마법사가 여기서 더 이전에 관련자들의 인생을 바로잡을 궁리를 하고 있으니 사건 자체는 더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겁니다.”
“없어질 거니까 대충...”
“그런 건 아니고요.”
하태성이 자존심 상한 얼굴을 했다.
“대충 살고 있는 거 아닙니다. 공부도 하고 있고.... 정보라도 되도록 많이 모아주고 싶은데 김주황씨를 찾을 수 없어서 곤란합니다.”
“네가 전에 말한 동생이 한 명 있는 열 여덟살?”
하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보려고 해봤다만 정보가 너무 적어서... 아직 체포된 적은 없더구나.”
“좋은 일이긴 한데...”
태성이 한숨을 쉬었다.


검은 남자 69 ㅣ- 회색도시&검은방


류태현은 이를 악물었다. 강민 씨가 좋아서 저런 자와 관계를 맺었을 리 없었다. 밀실과 마법을 빼고도 백선교는 많은 악행을 저질렀고 성적인 착취와 폭력도 빠지지 않았다. 일개 순경이라도 수사팀에 들고 나니 보고 듣는 게 있었다.
[그 녀석 잘 한다는 건 인정하지만 말이야. 너무 홀리지 않게 조심하라고. 그놈의 정신에 이미 사랑 같은 사탕발림이 들어설 자리는 사라진 지 오래니까. 언제부터의 일인지는 알지?]
류태현은 대꾸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허강민 씨의 동생을 선택하지 않았을 때부터.
이제는 아문 줄 알았던 상처가 다시 벌어져 피를 흘렸다. 딛고 선 현실이 갑자기 맥없이 뒤흔들렸다.
[설마 그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했나?]
반박해야 하는데, 분명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 강민 씨와 사귀고 그와 아무렇지 않게 대화도 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르게 되었다.
눈앞이 흐려지더니 허강민 씨의 병실로 변했다. 강민 씨에게서 아른한 향과 섹스 후의 피로가 느껴졌다.
‘류태현 깨어나면 아까 있었던 일도 기억하는 거냐?’
무열 선배가 침대 곁에 서 있었다.
‘기억하죠, 당연히. 책임 질 테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강민 씨의 말투는 거의 귀찮아하는 수준이었다.
‘넌 그 녀석한테 정말 애인 노릇 할 수 있는 거냐?’
‘쓸모 있는 동안에는요.
초보 마법사는 안정된 정신이 필수적입니다. 옆에서 애인이 보듬어주는 정도면 충분히 효과적이겠지요.’
‘그뿐이냐?’
‘상대가 류태현인데 뭘 바랍니까?’
류태현은 이제까지 자신이 잘 버텨왔다고 생각했다.
네 번의 밀실 감금.
자신이 모든 일의 시작점이라는 죄책감.
또다시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승아에게 느낀 배신감.
자신 역시 승아를 배신하고 있었다는 사실.
네 번째 밀실에서 마침내 마주한 우주의 이면.
그래도 자신 곁엔 허강민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변했다고, 자신이 살기를 바란다고 믿었다.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생각해 보려 했지만 머릿속이 하얘졌다.
몸이 무겁다.
호흡이 흐트러졌다.
곧 의식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용해 졌다.


허강민은 침대 위에 정좌한 채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마력 봉인은 쉽게 풀리지 않을 기세였다. 남몰래 한 몇 번의 시도는 전부 실패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배준혁이 준 주문 주머니 하나로 안심할 수도 없고 자신이 이렇게 무력해져 있다는 사실도 싫었다. 류태현이 자기가 지켜주겠다며 기합을 넣는 것도 싫었다.
류태현에게 빚을 지는 기분이었다. 그를 증오하는 것으로 버텨온 지난날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이미 부정당했잖아. 뭘 새삼.’
하무열 형사가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허강민은 그 소리를 머리에서 밀어냈다.
이미 여승아에게 부정당했다. 그러면 어떻단 말인가. 여승아가 한 일이 있다고 그 다음 류태현이 한 일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러니 그는 류태현을 사랑할 수 없었다.
사랑해서는 안 되었다.
아무리 류태현이 간절히 매달린다고 해도 말이다.
‘사랑하는 척은 계속 해야겠지.’
그건 가능할 것이다. 류태현은 사랑받는 중이라고 착각하게 놔두고 적당히 애인의 의무라고 할 만한 것들도 다하고. 백선교를 완전히 정리할 때까지만.
그 이후도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때가 되면 자신도 정식 재판에 넘겨질 것이고 일생 감옥에서 나올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류태현과 얼굴 볼 일도 없어진다.
감형 같은 것 바란 적도 없었다. 국장님께서 거기까지 힘써주시면 말릴 작정이었다.
류태현이 하염없이 기다릴 게 무서워서만은 아니었다. 그동안 하성철 국장에게 코가 꿰인 듯이 이것저것 퍼준 것은 그가 죄를 짓지 않고 올바르게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자신 때문에 흉악범을 사적으로 감싸주는 경찰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장혜진이 했던 지적이 생각났다.
‘죄책감이라는 말 알아요? 외롭다는 말은요? 지금 허강민 씨가 느끼고 있는 것들을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표현해요.’
인정하기 싫지만 장혜진은 정곡을 찔렀다.
아마 지금의 자신을 본다면 장혜진은 다시 지적할 것이다. 지금 하성철 국장에게 느끼는 것은 인간적인 애착이 맞고 그래서 대가 없이 보호해주는 거라고. 그러니 하성철 국장 쪽에서도 좋게 대해주는 걸 사양하거나 어려워하지 말고 받아들이고 유지하라고.
‘......장혜진에겐 신세진 것도 좀 있으니, 그 정도 충고는 따라줘도 되겠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대로 얌전히 수사에 협조하고 마법을 가르치고, 재판에 넘겨지면 얌전히 재판받고 감옥에 가면 된다. 모범수가 되어선 안 될 이유도 없었다. 감옥생활이 엄혹하다지만 아무렴 류태현과 계속 대면하고 애인 노릇하는 것보다 더할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허강민은 하무열을 떠올리고 비웃었다. 그 양반은 자신이 류태현 상대로도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말했지만, 정말 그렇다면 자신이 왜 이렇게 류태현 피할 궁리만 하고 있겠는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가끔은 하성철 국장이 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처럼 그분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면 살아남아서라도 그분의 걱정을 덜어주고 싶었다. 괴물이 되어버린 자신이 다시 다른 인간에게 애착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류태현은 아니었다. 만나고 싶지 않았다. 강민 씨를 지켜주고 싶은데 자기 힘은 너무 부족하다며 안절부절 못하는 걸 보면 자해를 해서라도 비웃어주고 싶었다.
‘역시 난 류태현을 여전히 증오하고 있는 거야.’
안심해서 혼자 가만히 웃은 순간이었다.
-형......큰형......
얼어붙은 팔이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는 것 같았다.
한동안 들리지 않았었다. 환청이고 심리적인 병증에 불과하다고, 아니면 검은 남자가 치는 장난이라고 거듭 되뇌어봐도 어느새 자신은 거기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저 자신을 부르고만 있었다. 원망하는지, 도움을 청하는지, 복수를 청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어떻게도 하지 못하고 복수에만 매달렸다.
그 목소리가 왜 지금 다시 들리는가. 아니, 왜 그동안 안 들렸는가.
-형.... 나, 잊어버린 거야?
“아니야!”
그가 소리치며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돌아섰다. 새카만 어둠이 그를 받아 감쌌다.
불러들였다. 허강민은 자신이 마법사로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강민 씨.”
다정한 목소리가 어둠과 함께 그를 안고 다독였다. 이 자리에서 들릴 리 없는 목소리였다.
허강민은 얼어붙어서 고개를 들었다. 류태현이 방긋 웃으며 마주보았다.
헛것이어야 했다. 자신이 동요한 나머지 보는. 아니면 검은 남자가 또다시 그의 탈을 쓰고 나타나 놀리는 것이어야 했다.
꼼짝도 못 하는 허강민을 보며 류태현이 다시 한 번 웃고는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 순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환각도 검은 남자도 아닌 진짜 류태현임을 깨달았다.
“류태현?”
허강민이 당황해서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나 류태현의 팔이 어둠과 함께 허강민을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류태현은 이제 겨우 기초를 배우는 중인데, 마법 방어가 있는 방에 뚫고 들어와 사람을 제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제가 진짜 마법사가 되어서 놀랐군요?”
류태현이 이해심 많아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조금 속성 코스를 거쳤다고 해둘게요.”
허강민은 완전히 핏기가 가신 얼굴로 류태현 뒤에 펼쳐진 암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가 홱 돌아갔다. 류태현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어딜 봐요.”
류태현이 허강민을 노려보고 있었다. 류태현의 얼굴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난폭한 표정에 허강민은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이 류태현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지금부터가 아니었다. 자신은 언제나 류태현을 두려워했다.
모두를 믿는다고 했을 때부터. 악몽에 시달리며 가책에 젖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줬을 때부터.
복수를 결심했을 때 좋은 결말을 맞지 못할 각오는 했다. 하지만 예상한 것은 기껏해야 자살, 체포, 피살 정도였다. 그 이상 깊이 생각해볼 여유도 없었다.
마법사가 되고 자신이 맞을 수 있는 비참한 최후의 가짓수가 대폭 늘어났을 때, 그때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 자신이 상상을 넘어서는 악몽 같은 파멸을 맞이할 때 그 자리에 류태현이 있을 것임을.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증오받는 건 참을 수 있었어.”
류태현이 서글프게 속삭였다.
“사랑받지 못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류태현은 그저 허강민을 안고 있을 뿐이었다.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고 마법으로 저주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허강민은 꼼짝할 수 없었다. 류태현을 밀어내려는 시늉만 해도 무서운 일이 벌어질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것이 검은 남자가 요구하는 믿음이었다.
“차라리 그렇게 말했으면 좋았을 거야. 여전히 내가 증오스럽다고. 밉다고. 하지만 소중한 사람들과 경찰 동료들을 구하려면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목적이 같으니 당장은 도와주겠다고.”
“그때 그렇게 말했으면 넌 정신 차리지 못했을 거야!”
허강민이 비명질렀다.
“지금처럼 말이죠.”
류태현이 허강민에게 웃어보였다. 소름끼치도록 다정한 웃음이었다.
“전부 내 잘못이고, 내가 감당해야 할 현실인데 당신이 날 속인 순간 감당할 수 없게 됐어요. 감당하기 싫어졌어요.”
“그래.”
저항은 불가능했다. 마력 봉인이 없었다 한들 가능했을 것 같지 않았다. 류태현이 두른 어둠과 광기는 그 정도로 강력했다.
이제 저 어둠으로 졸라 죽이겠지. 찢어 죽일까?
류태현이 드디어 자신을 증오하게 되었다면 차라리 잘 되었다.
허강민이 그렇게 평온해지기도 전에 류태현이 허강민을 안아들었다. 그대로 힘들이는 기색 없이 등 뒤의 어둠 속을 향해 돌아서서 걸어들어갔다.
공간을 찢어 강제로 이곳과 저곳을 연결했다. 마법을 썼다기보다 마력을 난폭하게 휘둘러 현실을 두드려 부순 것에 가깝다는 것을 통과하면서 알 수 있었다.
주문 지식이 부족한 류태현이 스스로의 이성과 정신을 바쳐 힘을 쓴 것이었다.
“류태현, 대체 누가 이런 짓을 가르쳤지?”
도착한 곳을 보고 허강민은 계속하려던 말을 삼켰다. 백선교의 간부용 침실 중 하나였다.
경악으로 굳어버린 허강민을 류태현이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침대 구석에서 쇠사슬로 연결된 수갑을 찾아 허강민의 오른손목에 채웠다.
“에....오른손잡이 맞죠?”
강성중의 방은 아니었다. 침대도 가구도 다 기본으로 갖춰두는 최소한의 물건들뿐이고 시트에선 오래 안 쓴 냄새가 났다. 안 쓰던 방 하나를 신입에게 내준 모양이었다. 자신이 처음 입교했을 때처럼.
류태현도 아직 이 방에 익숙하지 않은지 허강민을 놔두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마치 밀실에 갇혀 탈출하려고 궁리할 때 같았다.
낯익은 모습에 허강민은 조금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래, 이제 날 어쩔 거지?”
“죽이진 않아요.”
류태현이 여상한 태도로 대답했다.
“저는 여전히 사랑하는걸요. 어떻게 죽여요. 허강민 씨가 절 사랑하게 만들어야죠.”
“뭐?”
허강민은 귀를 의심했다.
“어떻게 하려고?”
정신 조작은 지식 부족한 마법사가 우격다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최면과도 다르다. 아무리 이성을 잃고 폭주했다고 해도 이제 햇병아리인 류태현이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강성중에게 도와달라고 할 거면 그만두는 게 좋을걸. 널 위해 하는 소리야. 그 자라면....”
“그자의 손은 안 빌려요.”
류태현이 말을 끊었다. 그치고는 험악한 목소리였다.
“강민 씨에게 남이 손대게 두지 않아요. 저만 손댈 거예요. 저만 강민 씨를 사랑하니까, 제가 지킬 겁니다.”
“무슨 짓을 하려고?”
“강민 씨는 한 번도 절 이해해주지 않았죠.”
류태현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강민 씨에게 절 이해시킬 거예요. 제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어떤 심정으로 승아를 택했고, 어떤 심정으로 사람들을 믿었는지, 첫 번째 밀실에서 반창고 붙인 손끝을 보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마침내 강민 씨가 범인이라고 깨달았을 때......”
류태현이 다시 광기를 뿜어내었다. 그대로 숨도 안 쉬고 백화점 사고 이후 변해버린 삶과 선택의 기로들을 읊조렸다. 읊조리며 허강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저리 가.”
허강민은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공간을 찢은 어둠은 이미 사라져 여기는 그냥 사방이 막힌 방에 불과했다. 손이 묶여있지 않았다고 해도, 류태현을 쓰러뜨리고 나갈 수 있다고 해도 여기는 백선교 본산 한복판이었다.
류태현이 허강민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소중한 애인을 대하듯 그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갖다댔다.
-태현아, 살려줘.......
여승아의 비명과 애원이었다. 무너진 백화점의 잔해에 깔린 여승아가 애원하며 울고 있었다. 자신에겐 아무 의미도 없어야 할 그 애원이 심장을 훑어내릴 듯 고통스럽게 들렸다.
류태현의 기억이었다. 허강민이 류태현의 기억을 통해 세상을 보고 있었다.
그 옆에 소년이 하나 똑같이 깔려 있었다. 그 아이 역시 울고 있었다. 그 아이도 구해야 했다. 모르는 아이지만.
허강민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자신이 인정할 수 없는 감정이 자기 것처럼 밀려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류태현을 뿌리치고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머리를 감싸쥔 손이 갈퀴처럼 단단했다. 온몸을 류태현의 어둠이 짓누르고 있었다.
류태현의 기억이, 감정이, 멋대로 자신의 것처럼 흘러들어왔다.
회전방에서 정은영과 허강민이 쓰러져 있는 걸 보고 류태현은 충격받고 비통해 했다. 또다시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나간 때문만이 아니었다.
백화점 사고를 일으킨 장본인인 정은영. 그런 정은영은 죽어도 되는데 왜 저 사람까지 죽어야 되나. 그런 생각을 해버리고 류태현은 격렬한 자기혐오에 휩싸였다. 똑같이 소중한 생명인데 또 멋대로 저울질했다는 죄책감에 숨이 막혔다.
그때 옆에서 따스한 손길이 다가왔다.
여승아였다. 그때 살려냈던 애인이 지금 자신을 부축하는 모습에 겨우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세계의 중심 52 ㅣ- 회색도시&검은방


“자, 조서에 써 있는 얘기 제가 얼마나 기억하고 있나 테스트하는 게 이 자리의 목적은 아니지요. 제가 언급 안한 건 서류 읽어보면 다 나올 테니 참고하시고, 이제 백선교 대응책을 모색해야죠? 아니면 저를 해고 하느냐 마느냐가 우선입니까?”
“당연히 후자가 우선입니다. 허강민은 학교에 남았지만 학생과 교수는 다릅니다.”
아미 교수가 말했다.
“네, 그렇지요. 그럼 그건 윤리 위원회에서 알아서 하시고 백선교 대책 말인데요.”
“본인의 교수직에 별 미련이 없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하무열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학교에 남는 게 쫓겨나는 것보다 월등히 안전하고, 또 허강민 녀석도 걱정이 되고요... 2학기 수업계획 일껏 짜 놓은 것도 아깝고. 그렇지만, 제게 남을 가르칠 자격이 있느냐 물으면 별로 할 말이 없긴 합니다. 저 때문에 학생들이 더 위험해질 수도 있고요. 저 없어지면 안전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지만.”
그래서 남고 싶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아리송한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다 하무열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 이 문제는 이런 거 늘 판단하시는 분들께 맡깁니다. 다만 저를 자르실 경우 교수 말고 다른 교직원, 에, 경비라던가 그런 쪽으로 재고용해주시면 어떨까요? 백선교는 사악하고 교활한 집단입니다. 이쪽에도 교활한 사람이 하나 있어서 손해 볼 일은 없을 겁니다. 그 쪽과 내통할 가능성도 제로지요. 그놈들은 이미 제 원수와 손잡아버렸으니까.”
“알겠습니다. 그 의견 위원회가 열리면 전달하겠습니다.”
아미 교수가 말했다.
“더 건의할 것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답을 기대하지 않고 던진 질문이었지만 하무열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적어도 경비 인력에 한정해서라도 교내 무기 패용을 허용해야 합니다.”
“그건 너무 과한 주장입니다.”
자기가 발언할 자리가 아니라는 것도 잊고 권현석이 목소리를 내었다.
“학칙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라고요.”
“교수님이 그자가 싸우는 모양을 못 보셔서 그렇습니다. 양태수씨와 최재석씨에게 물어보십시오. 그 사람들조차도 일대일로는 밀렸습니다. 무기 없이는 두 사람이 힘을 합쳐도 모자랍니다.”
“그래도...”
“아니면 학교에 속하지 않은 인원은 절대로 교내에 들어올 수 없도록 조치할 수 있습니까?”
“차라리 그 편을 택하겠습니다.”
“권현석 교수님.”
아미 교수가 말렸다.
“학생과 교직원이 몇 명인데, 그런 대규모 마법이 가능은 합니까? 아니 가능하더라도 유지하는데 엄청난 노력과 비용이 들 겁니다.”
“학교와 구성원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감수해야겠지요.”
“일단 설치하고 유지보수는 안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하무열이 제안했다.
“공격 가능 지점이 학교 안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한두 번 시도해보고 침입이 불가능하다고 알면 그놈들도 다른 방법을 쓸 겁니다.”
“공격 지점이 더 있다고요?”
하무열이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전 학생이 아니니 미끼로 써도 윤리적 문제는 없습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아미 교수가 더 뭐라 말하려는 걸 하무열이 손을 저어 막았다.
“그리고 출입 통제 마법을 오래 유지하지는 않을 거란 사실을 대다수의 교직원들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스파이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저도 신성한 우리 대학에 그런 나쁜 놈은 없었으면 하지만 실제론 저 같은 나쁜 놈도 교수 노릇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겁니다.”


류태현이 있는 병실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
“아, 허강민씨.”
그가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벌써 돌아다녀도 괜찮아요?”
허강민이 침대 옆에 와 앉았다.
“난 그 괴물덩어리 근처에도 안 갔거든.”
사실은 붙들려 목이 졸렸지만, 그 때 류태현은 의식이나 있었는지 불분명한 상태였으므로 허강민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너야말로 벌써 괜찮은 거야?”
“방호 마법을 썼으니까요.”
“그렇긴 해도 무슨 인형 집어던지듯 던져댔는데.”
허강민이 류태현의 손을 살며시 잡아들었다. 그가 엄지손가락 뿌리 부분을 손으로 쓸었다.
“손은 좀 어때? 아직 아파?”
“맞춰서 이젠 움직여요. 아픈.. 가만히 있으면 괜찮은데 꽉 누르면 조금.”
사실은 거의 안 아프지만, 그렇다고 말했다가 허강민이 꽉꽉 눌러볼까봐 류태현은 조금 엄살을 부렸다.
“무지막지한 짓을 한다니까, 하무열 교수님.”
허강민이 혀를 찼다.
“하지만 덕분에 산거기도 해요.”
류태현이 말했다.
“방호 마법이 없었으면 구조하러 올 때까지 시간 끌지 못했을 테니까요.”
“그래, 그렇지.”
허강민이 류태현의 손을 꼭 쥐었다. 류태현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 서태준이란 사람과 하무열 교수님은 어떤 관계일까.”
류태현의 홍조를 못 본 척하고 허강민이 말을 돌렸다.
“교수님의 누님과 결혼했다고 했죠.... 그리고 누님을 죽였다고.”
류태현이 허강민의 눈치를 보았다.
비슷한 일을 허강민이 당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동생이 선물한 안경을 부쉈다고 죽이겠다고 쫓아다니던 사람이었다. 동생 본인이 해를 입는다면 집요하고 철저하게, 보는 모두가 미쳤다고 생각할 만큼 무시무시한 복수를 하고야 말게 분명했다.
‘상대적으로 하무열 교수님이 정상인처럼 보이네...’
“이런 일은 또 생길 거야.”
허강민이 겨우 비명 안 나올 만큼 류태현의 손을 획 잡아당겼다.
“나 때문에 너까지.”
“저 때문에 강민씨까지 였어요, 이번엔.”
류태현이 허강민의 손 위에 자기 손을 포갰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아요.”
‘그리고 손에 힘 좀 빼줘요, 아파요...’
“그래.”
애인이 마음으로 하는 호소는 전혀 듣지 못하고 허강민이 더욱 힘있게 류태현을 잡아 끌어당겼다.
“너는 혹시 원수라던가 과거에 묻어둔 원한같은 거 있어? 하무열 교수님처럼 쫓아올만한 거.”
“어, 없어요.”
조금 생각하고 류태현이 덧붙였다.
“전 평범한 사람인걸요.”
“그래, 날 만나기 전까진 그랬겠지.”
허강민이 류태현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손 놔달라고 할까말까 고민하는 입술에 입맞췄다.
“몰래 휴대 가능한 호신용구를 더 만들어야겠어. 외부 실험실에 나가기도 더 곤란해졌는데.... 할 일이 많으니까 빨리 나아.”
그가 도망치듯 서둘러 병실을 나갔다. 류태현이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지, 그렇지?’


“완전히 하무열 교수 뜻대로 놀아난 기분입니다.”
권현석이 박근태와 하성철을 앞에 두고 불평했다.
“무기 패용 문제만 해도, 출입 장벽을 세우고 싶은데 그렇게 말하면 반대할 테니까 더 말도 안 되는 걸 우선 들이밀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고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성철이 말했다.
“상대방의 양보를 끌어내기 위한 오래된 방법이지. 변론술에서도 가르치지만.”
“게다가 그런 식으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있으면 막상 본인은 잘라버리는 게 바보같이 느껴지니까.”
박근태가 쓴웃음을 지었다.
“미끼 발언도, 그런 말을 듣고도 상대를 저버리면 저버린 쪽이 무척 나쁜 놈이 되는 것 같잖아. 일부러 그런 거야.”
“물론 그렇지만, 진심이 아닌 건 아닌 걸세.”
하성철이 하무열을 두둔했다.
“미궁에 같이 들어갔을 때 느꼈지만 그는 상당히 위악을 떠는 타입인데다 선의도 악의도 똑같이 이용 대상으로 보지. 나야 윤리 위원회에 발언권은 없지만 개인적인 의견으론 그를 학교에 남겨두는 게 적어도 백선교를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네.”
“우리도 그가 교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너무 성격이 꼬인 사람이라는 거지요.”
박근태가 말했다. 권현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물론이지.”
하성철이 조금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걸.”
“네, 그렇죠.”
나머지 두 사람도 미소지었다.
“그런데, 네 말대로라면 이거 기밀 아니야?”
박근태가 권현석에게 물었다.
“그렇지만 우리 중에 백선교 스파이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권현석이 반박했다.
“우리 집 응접실에 도청 마법이 설치되어있을 리도 없고.”
“그러고보니...”
하성철이 고개를 기울이고 기억을 되새겼다.
“그, 유적지에서 미궁에 납치되기 전날, 하무열 교수가 그러더군. 전문 인력 영입 프로그램은 좋은 제도이지만, 한창 쌓아올리던 경력을 포기하고 학교로 숨어든 인간에겐 자기 직능에 계속 붙어있지 못할 만한 하자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한다고.”
박근태와 권현석이 둘 다 표정을 굳혔다.
“그렇게 무례한 소릴 하성철 교수님 면전에 대고 말했단 말입니까?”
“그 사람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 같은 줄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러는 자신이야 말로.”
둘이 입을 모아 하무열을 성토했다. 하성철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내 얘기도 하무열 교수 본인 이야기도 아닌 것 같아서 하는 말일세. 이 프로그램으로 들어온 교수 중 말 많은 자가 또 있지 않나.”
“아.”
권현석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박근태가 그를 쳐다보았다.
“누군데?”
“김재하 교수라고 평판 나쁜 사람이 있어... 자연과학부 소속인데 얼굴 볼일도 없을 것 같은 하무열 교수와 사이가 나빠서 사사건건 부딪쳐.”
“동족 혐오?”
“그럴지도.”
“그렇다 해도 하무열 교수가 한 말이니 단순히 자기가 싫은 사람을 모함한 것 뿐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모함 치고는 너무 빙 돌아가는 방법이기도 하고.”
하성철의 말에 박근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습격 받기도 전이라니 그때부터 이미 김재하를 백선교의 스파이로 몰 준비를 했다고 하려면 하무열 교수 본인부터가 백선교 스파이여야 할겁니다.”
“그렇다고 보기엔 그도 두 번이나 죽을 뻔 한 거죠. 그 모두가 위장이었다고 하기엔.... 그렇게까지 해서 얻는 게 뭘까요?”
“굳이 생각해보자면.... 허강민의 배신감?”
하성철이 말했다. 농담이라 생각해 권현석은 하하 웃었다.
“아니, 농담이 아닐세.”
하성철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수사국에 아는 사람 정도는 있어서 백선교에 대해 좀 여기저기 물어봤는데, 그들은 그런.... 커다란 감정 변동을 무척 중시한다는 것 같더군. 사람을 고문하다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보여주고는 꺾어버린다거나.”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 건데요?”
권현석이 경악했다.
“백선교 간부를 붙잡으면 꼭 물어보자고.”
박근태가 그를 다독였다.
“그런 거 이해 못하는 편이 정상이야.”
“물론 그렇지만.... 설마 하무열 교수님 정말로.”
“아닐 거라고 믿네.”
하성철이 말했다.
“적어도 그가 서태준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긴다는 건 확실하니까.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도 어떻게든 수사국에 남아있었던 이유도 도망친 서태준을 찾기 위해서였다고 하고.”
“그런데 대학으로 옮겼다는 건, 드디어 잊을 결심을 했는데 과거가 쫓아온 거네요.”
권현석의 얼굴에 연민이 어렸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라. 영원히 도망칠 수는 없는 거잖아. 맞서서 물리치는 게 낫지.”
박근태가 그를 위로했다.
“물리칠 수 있다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하성철이 중얼거렸다.
“네?”
“아니, 혼잣말일세.”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하무열 교수가 의심한다는 이유만으로 김재하 교수를 백선교 스파이로 몰 수는 없지. 의심스러운 점은 없는지 잘 살피는 것과는 별개로,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지는 말자고.”
“네, 물론입니다.”
박근태가 말했다.
“그렇지만... 흠, 자연과학부라니 쉽사리 우리 눈이 닿을만한 곳이 아니군요. 뭔가 방법이 없을까요.”
“신생학부고, 솔직히 난 거기서 대체 뭘 가르치는지도 모르겠어. 허강민 말로는 세상을 이루는 규칙을 배운다는데 그런 거 마법의 원리 시간에도 가르치잖아.”
권현석이 불평했다.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 법칙을 이용하는게 핵심이라더군. 내가 만나본 사람들은.”
박근태는 대외활동중에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려보았다.
“자연과학부에 새로운 교수가 들어오면, 김재하의 영향력이 좀 줄어들까?”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31 ㅣ- 회색도시&검은방



장지연은 요새 외출이 잦았다.
외출이라고 해도 뭔가 하는 건 아니었다. 재벌2세 하면 흔히 떠오르는 사치스런 쇼핑도 그는 별로 즐기지 않았다.
그저 인적 없는 곳에서 천천히 걷거나 멍하니 하늘이나 강물을 바라보거나 했다. 한창때의 젊은 아가씨가 어째서 저리도 수심이 깊은지 양태수는 알 수 없었다. 경찰의 선진화파 수사가 백석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긴 하지만 그건 장지연은 알 리 없는 이야기였다.
이 날도 장지연은 산책을 나가고 싶어 했다. 평소나 똑같이 양태수가 모시고 고수부지로 나갔다. 추울 텐데도 장지연은 강변에 서서 바람을 맞았다. 양태수는 말없이 옆을 지켜 섰다.
“양태수씨.”
“네.”
“오늘... 평소와 좀 다르시네요.”
“네?”
“긴장... 하고 계세요. 왜...?”
양태수는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그야 긴장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않을 셈이었다. 곱게 자란 아가씨가 어떻게 양태수 같은 이의 속마음을 알아챈단 말인가.
“양태수씨?”
양태수는 변명을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어차피 곧 허강민이 오겠지만 그때까지 아가씨를 여기 붙들어 놓는 정도는 해야했다.
차가 달려와 이들이 타고 온 검은 세단 옆에 와 섰다. 사람이 하나 급하게 내렸다. 차 문도 닫지 않고 이들에게 곧장 달려왔다.
“!”
장지연이 양태수를 돌아보았다. 양태수가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그냥 이야기만 나눠보겠다고 했습니다.”
절박한 목소리가 말했다.
“허튼 짓을 하려들면 제가 막을 테니, 그저 이야기만 들어주십시오!”
장지연이 대답하기 전에 낯선 사람이 이들 앞에 와 섰다.
양태수가 제지하기 한참 이전에 멈춘 그는 장지연을 보고 조심스럽게 한 발짝 가까이 왔다. 양태수는 혹시 그가 장지연에게 반했다던가 하는 이유로 만나고 싶어한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이런 식으로 쳐들어와서 죄송합니다. 저는 허강민이라 하고 백선교 소속이며 스승은 강성중입니다. 외람되지만 부탁드릴 것이 있어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허강민이 뜻밖에 예의를 차려서 양태수는 조금 놀랐다. 평소 태도라기보다 예문을 외워서 읊은 것 같은 느낌이긴 하지만 이자가 정말로 지연 아가씨에게 나쁜 마음을 품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아 그가 조금 안도했다.
허강민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습니다. 제게 방법을 가르쳐주십시오!”
양태수는 소리 없이 입을 딱 벌렸다.
그리고 기억이 떠올랐다. 허강민. 얼마 전까지 떠들썩했던 엽기 연쇄 살인마.
그런 걸 사칭하는 정신이상자에게 속았을 줄이야.
“시간... 이라고요?”
장지연이 입을 열었다.
“그 말은..... 제가 했다, 뜻이에요? 이걸?”
허강민 사칭범을 끌어내기 위해 앞으로 나서려던 양태수가 멈칫했다.
‘이걸?’
“네. 제 조사 결과 관련자중 마법사는 장지연님이 유일합니다.”
“관련자... 라니, 어떻게.”
“운이 좋았지요.”
허강민이 조금 미소지었다.
“그래서도 이게 운명이라 믿습니다. 제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 잘 알지만, 그래도.”
“언제... 왜 였나요?”
장지연이 물었다.
“십 년 후. 장지연님의........ 애인이 사망한 시점입니다.”
“애인....”
장지연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누구...에요? 언제 만나나요?”
“어..... 그게....”
허강민이 난처한 표정을 했다.
“원래라면, 약 한달 전에 만났어야 합니다.”
장지연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 그가, 딱 그 직전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바뀐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장지연님을 만나러 올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
장지연이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째서, 직접 안... 오고 그를....”
“그 때 당신은 죽은 지 오래였으니까요.”
장지연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죽은 지, 오래.”
“내년 말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그랬..... 군요.”
장지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에게.......”
그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 사람..... 저를, 만났기 때문에.... 불행해져서....”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허강민이 당황했다.
“그 사람은 장지연님을 만난 걸 후회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어떻게든 다시 만나고 싶어 애쓰는데.....”
“있었던 일을, 없어진 일들을 말해....주세요. 아는 거... 전부.”
허강민이 잠시 망설였다. 그가 양태수를 흘끔 보았다.
“그도, 관련.... 이, 있나요?”
장지연이 물었다.
“그가 아니고, 아니 아닌 건 아니지만, 그의 아들이요.”
허강민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말하기 시작했다.
장희준과 박근태가 손을 잡은 뒤, 수사팀이 몰락하고 장지연이 죽은 이후 미래에 펼쳐지는 복수 이야기를.


이야기가 끝나고 싸늘한 고수부지엔 침묵만이 감돌았다.
허강민이 장지연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우호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자기는 불쑥 튀어나와 멋대로 부탁을 하는 입장이고 상대는 자기 같은 건 손가락으로 눌러 죽일 수 있을 고위 마법사였다. 게다가 호의를 얻는데 성공한다 해도 그가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을 배워 쓸 수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였다.
“그랬...군요.”
한참만에 장지연이 침묵을 깨었다.
“어떻게.... 한 건지 알 것 같 아요.”
허강민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럼....”
“허강민씨.”
그가 다시 얌전하게 고개를 숙였다.
“네.”
“복수귀... 였죠? 그... 시, 시간을 돌리고.... 싶은 건.”
“사고를 막고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허강민이 서둘러 대답했다.
“가족들을 살릴 수 있다면 복수 같은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사고만 막을 수 있으면... 물론 장지연님께서 시키실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 이번 사건도 아직 완전히 바로잡혔다고 하긴 힘들고 백석이 공격받는 문제도 있으니 좀 더 과거에서.”
“사 상관 없어요. 백석 같은 건.”
장지연이 말했다.
“그.... 안 돼요.”
“네?”
허강민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안된다니, 뭐가...”
“당신은, 안 돼요. 시간을..... 되돌리려면......”
“제 능력이 부족한 건 알고 있습니다!”
허강민이 소리쳤다.
“필요하다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밀실 살인극보다 더한 의식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제 목숨이나 영혼도 기꺼이!”
“굉장, 하네요.”
장지연이 미소를 지었다.
“가족을.... 위해. 모 모든 걸 다 잃을, 각오가 정말로.”
“예!”
“그런... 가족은 어떤... 느낌일까요.”
장지연의 미소가 쓰게 변했다.
“저는, 아, 알 수가.”
그가 쓴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다. 허강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그렇지만, 그래서는 아니에요.”
장지연이 서글픈 눈을 했다.
“부, 불가능 해요. 당신은.”
“제가..”
“이, 인간, 하나의 목숨 정도로는, 불가능. 하.”
장지연이 잠시 심호흡을 했다.
“제가, 죽는... 순간이었을 거예요. 마법을, 쓴 건.”
허강민이 바짝 긴장하고 들었다.
“제, 혈통, 알지요?”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제가, 죽으면..... 끝이 아니에요. 제... 본질, 어,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쪽은, 바다로 돌아가....”
장지연이 잠깐 숨을 헐떡였다.
“영생을, 살겠죠. 제가.... 대가로 바친 건.”
말하기 힘든 듯 중간중간 끊겼지만 허강민은 이해했다. 장지연이 바친 영원한 삶. 시간을 되돌릴 정도로 강력하고 기괴한 것. 인간의 짧은 생명 따위 무의미했다. 그와 같은 선택받은 이종족이 아니면 이런 대마법은 불가능했다.
자신은 괴물인데, 꼭 필요한 상황에선 괴물조차 아니었다.
불가능하다. 그 점을 깨닫자 힘이 빠졌다.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누가 어깨를 잡고 흔들어 허강민은 정신을 차렸다.
양태수가 그를 걱정스런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 괜찮나?”
‘아.’
허강민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다리가 저려 비틀거렸으나 양태수가 부축해주었다.
“양시백은 제가 개조하던 버려진 리조트에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있습니다.”
허강민이 말했다.
“죄송하지만 데려오는 건 직접 하셔야겠습니다. 전.....”
그가 흐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지연은 아직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가 자신을 부축한 양태수를 살며시 뿌리치고 걷기 시작했다.
한강을 향해서.


“어딜 가는 건가!”
양태수가 그의 팔을 잡아챘다. 허강민이 의아한 표정으로 양태수를 올려다보았다.
“아.... 양시백을 넘겨드리는 조건이었죠. 하지만 전..... 이럴 시간에 빨리 데려가세요. 데리고 최대한 멀리... 도망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자넨 뭐? 설마.”
양태수의 시선이 허강민이 향한 쪽을 보았다.
“...한강에라도 걸어 들어가겠다고?”
허강민은 침묵했다. 양태수는 그걸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그가 여전히 허강민을 꽉 잡은 채 장지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거, 뭔가 의미가 있는 겁니까? 한강에 걸어 들어가는 게? 자살 말고?”
장지연이 고개를 흔들었다.
“놔주세요.”
허강민이 잡힌 팔을 뿌리치려 했다.
“이대로 자살하게 놔두라고?”
“네. 안 될 이유라도?”
양태수는 숨이 탁 막혔다.
“안 될 이유라니, 무슨 그런 소릴 하는 건가. 드디어 시백이를 찾았는데, 자네는 내 은인이나 다름 없...”
“우린 거래를 했을 뿐입니다. 제 요구를 들어주었으니 이제 대가를 받으면 되지 은인 따위 말도 안 되는....”
“양태수씨.”
장지연이 불렀다. 양태수가 흠칫 놀랐다.
“네, 네. 아.... 저 이런 일을 벌인 건 제가.”
“아들으...을 찾는다고, 들은 적이 있어요.”
“네.”
양태수는 장지연에게 고개를 숙였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책임을..”
“그런, 얘기가 아니. 에요.”
장지연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아버지, 도 아시지요? 그, 아들....”
“네. 절 구해주시고 시백이 찾는 걸 도와주신다 하셔서 지금까지....”
양태수가 말끝을 흐렸다. 장지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을..... 사랑하시나요?”
“네.”
어리둥절하면서도 양태수가 대답했다.
“버리고 떠난 애비라 염치는 없지만, 시백이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바칠 수 있습니다.”
“그런 소리 함부로 하는 거 아닙니다.”
허강민이 끼어들었다.
“그러는 자네는.”
“원래, 그런 건가요. 가, 가족은.”
장지연이 슬프게 웃었다.
“그래서, 저도.... 아이가 생기자, 반항, 을.”
“반항을 해서 아이가 생긴 건데요, 순서상.”
허강민이 중얼거렸다.




[반월당, 마블 유니버스] 트릭스터 컨벤션 3 (완) ㅣ- 크로스오버

로키는 겉으로 차분하게 위엄을 차리면서도 속으로는 이 상황에 낯설어하고 있었다. 천호가 이렇게까지 자기 편을 들어줄 줄은 몰랐다.
물론 말하지 않은 것이 잔뜩 있다. 천호가 아스가르드가 아닌 로키를 비난할 만한 일들. 적당히 입을 다물고 불리한 것을 숨겼을 뿐이다.
그러나 토르의 네 친구들과 헤임달은 천호만큼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들이었다면 이런 자리에서 처음 만나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도 천호처럼 친절하게 맞장구쳐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너는 요툰이잖아!’라고 말해버리고 자기가 똑똑한 줄 알겠지.
이 천호는 친절했다.
트릭스터란 속이는 존재이기에 로키도 천호가 하는 말을 다 믿을 생각은 없었다. 뭔가 악행을 잔뜩 저질렀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천계의 도움을 바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친구의 손에 목이 떨어졌는데 배신감에 불타는 게 아니라 다른 악귀의 음모로 단정지었다는 이야기 역시 고스란히 믿기는 힘들었다.
“당신의 지금 모습은 요툰과는 거리가 멀어보입니다만.”
로키가 조용해진 동안 천호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에시르의 모습을 취하는 것이 당신에게 의미가 있습니까?”
의미 없다. 거기까지는 로키도 누가 지적해줄 필요도 없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요툰 모습을 취하는 건 의미가 있나?
자신은 라우페이를 죽였다. 요툰의 왕을. 자신을 실제로 낳은 아버지를. 나아가 요툰하임 전체를 파괴하려 했다. 라우페이의 아들이 아닌 오딘의 아들이 되기 위해. 오딘의 아들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다시 요툰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아니, 자신은 요툰이 아니었다. 요툰이었던 적 없었다.
‘No, Loki.’
오딘의 모습이 눈을 덮었다.
“로키 전하.”
천호는 당황했다. 그가 소매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는 걸 보고서야 로키는 자신의 눈가가 젖어 있음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손수건을 건네며 천호가 고개를 숙였다.
“용서하십시오. 저는 그저 요툰의 눈은 몇 개인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눈?”
엉뚱한 소리에 로키는 그만 방금까지의 비참함도 잊고 되물었다.
“저의 죽음에 연루되었던 그 친구를 집요하게 노리는 악귀가 있습니다. 사악하고 강력해서 저도 거의 손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정체도 아직 모릅니다. 이제야 겨우 그 눈이 여덟이라는 정보를 얻었을 뿐입니다.”
“요툰도 눈은 두 개야. 덩치와 색 정도 빼면 에시르와 거의 똑같다고.”
기가 차서 설명해주었다.
“네가 방금까지 원수 상대로 속사정을 털어놨을까봐 무서웠냐? 요툰이 천 년 전에 그리로 건너갔을 가능성이 있기는 해?”
천호는 할 말이 없는 듯 움츠러들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는 그 친구를 노리는 악귀라고 했지 천 년 전 그 사건과 직접 관련 있다고는 말 안 했습니다만.”
“그거야 뻔하지. 친구가 누명을 썼다면 널 죽인 것은 따로 있다는 얘기고 넌 지금 그게 무엇인지 파헤치는 중인데, 그 친구를 죽이려 드는 집요한 악귀가 있다면 달리 뭐겠어? 옛날 사건의 진범이 너와 그 친구를 다시 죽여서 뒤탈을 없애려는 거지.”
“그렇지요.”
천호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그 정도 추론이 가능한 존재와 대화해보는 게 오랜만입니다. 바보를 상대하는 데 너무 익숙해졌나봅니다.”
“바보랑 엮이면 원래 그래.”
자신이라고 다를 것 없기에 로키는 관대하게 받아주었다.
“그런 바보하고 잘도 친구가 되었구나....라고 하고 싶지만 나도 할 말은 없군. 아니, 아스가르드에선 똑똑한 친구는 고사하고 ‘바보는 아닌’ 수준도 찾기 힘들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하물며 토르는 형제이기까지 하지. 안 보고 싶어도 그럴 수도 없다고.”
“놀려주는 재미는 있었습니다.”
천호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이 고생을 시키고 있으니 조금쯤 놀리는 재미라도 있어야지요.”
“토르도 놀려주면 재미있어.”
로키도 쓰게 내뱉었다.
그래봤자 이젠 적이다. 더 이상은 ‘조금쯤 놀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다시 만나면 둘 중 하나는 죽을 것이다.
자신과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은 이 트릭스터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다. 천호에게나 자신에게나 한바탕 꿈 같은 시간.
천호도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두 트릭스터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주위를 노려보던 여우가 로키에게 물었다.
“저는 이만 돌아가서 다른 계책을 찾을까 합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시렵니까?”
로키는 출입구를 노려보다가 일어났다.
“여기 언제까지고 있을 수는 없지.”
“그렇지요.”
“기왕 곧 떠나야 하는 거, 마지막 시도를 해보고 싶어.”
로키가 자신의 갑옷을 소환했다. 여우가 눈을 치켜뜨고 일어났다.
“네가 맞게 봤다. 내겐 이제 호의를 품은 존재가 아홉 세계에 단 하나도 없고 그래서 은신처가 절실해.”
로키는 여전히 출입구를 노려보고 있었다. 모든 시간과 공간을 향해 열려 있으면서 선택받은 자들만 들여보내는 문을.
“이 안에서는 이 안의 법칙에 얽매여 우리 둘 다 손써볼 여지가 없지. 하지만 출입구란 두 공간을 연결하는 곳이기에 반드시 그 ‘문틀’에 틈새가 생긴다. 그 틈새를 비집으면 컨벤션 내부도 외부도 아닌 곳을 찾을 수 있고 그러면 컨벤션 공간을 외부에서 접근할 수 있지.”
천호가 로키 앞을 막아섰다.
“위험합니다. 어떤 원리로 이런 공간이 생겼는지 모르는데 그 틈새로 빠지면 무엇이 기다릴지 누가 알겠습니까?”
로키는 천호를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너는 따라오지 않아도 돼. 혹시라도 컨벤션의 원리를 조금 알게 되거나, 오딘과 헤임달의 눈을 피할 장소를 찾게 되면 따돌리지 않고 네게도 알려주지.”
“그렇게만 된다면 저도 바랄 게 없습니다만 가능성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셨다면 계속 따라와 도우라고 하셨겠지요.”
로키는 침묵했다. 천호가 옆으로 손을 뻗어 아홉 갈래로 갈라진 금빛 창을 소환했다.
“제겐 여차하면 공간을 가르고 달아날 수단도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제 군대이지요.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이 여우도 어지간히 절박한 모양이다. 로키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남의 호의에 익숙하지 못한 로키였다. 그런 도움이 있다면 거절하기에는 자기 처지가 너무 아쉬운데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체면이 깎이지 않을까.
결국 로키는 아까의 뿔잔을 여우에게 내밀었다.
“기념으로 가져가라.”
천호는 뿔잔을 바라보다 로키를 바라보았다.
“네 지적이 옳다. 아주 무모한 시도고 그런 비장의 수단이 있다고 해서 무사히 빠져나간다는 보장도 없지. 그러니 지금 받아. 혹시 저 틈새에서 우리가 흩어져 곤경에 처한다면 각자 자기 살 길부터 찾는 거다. 그리고 나중에, 너와 그 인간이 천계를 피해 도망쳐야 하게 되면 이걸로 날 불러라. 나도 이런 곳에서 영영 사라질 만큼 녹록한 존재가 아니다. 너의 세계와 이쪽 세계가 충분히 이질적이니 오딘과 헤임달의 눈은 못 피해도 천계의 눈을 피하는 건 가능할 거다.”
천호는 창을 다시 감추고 두 손으로 뿔잔을 받아들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립니다만 저도 로키 전하를 위해서만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제 살길을 찾기 위해서, 제가 위로받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제 삶은 헛되지 않았다고, 천호 백란이 그 자리에 있어야만 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함께 위험에 뛰어드는 겁니다.”
“백란?”
로키는 여우를 지그시 훑어보았다.
“흰 난초라는 뜻 맞습니다. 인간들은 절 그렇게 부릅니다.”
“너는 황금빛 여우가 아니더냐?”
여우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붙은 이름입니다. 다시 뵙게 되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여우가 뿔잔을 조심스럽게 품에 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창을 소환했다.
“그럼 가실까요?”
로키가 먼저 자신의 창으로 문틈을 찔렀다.
비프로스트와는 완전히 다른 혼돈 그 자체가 벌어졌다. 모든 시간과 공간을 감당하기 위해 주최자가 이용한 것은 그 어느 시공간도 아니었다.
후회하거나 망설일 틈도 없었다. 잠깐 엿본 것만으로 두 트릭스터는 그 공허 속에 굴러떨어졌다. 지나친 호기심의 대가를 치를 때였다.


엄청난 폭우였다. 우산을 써도 소용이 없었다. 유단이 반월당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쫄딱 젖은 뒤였다.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꼴인 자신을 쌍둥이와 도깨비와 구렁이가 뭐라고 하며 맞이할지 마음을 비우며 들어섰는데 뜻밖에도 나와 있는 건 백란이었다. 양동이로 들이붓는 듯한 물줄기를 사극에나 나올 것 같은 얇은 종이 우산 하나로 그으며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해?”
오면 괴이 이야기부터 할 생각뿐이던 유단이 일단 물었다. 백란은 질문을 듣지 못한 것처럼 여전히 빗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단도 곁에 서서 백란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으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오른쪽 눈을 감아봐도 마찬가지였다.
“거기 뭐가 있어서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나 다름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백란은 안도했다.
실패에는 익숙했다. 이보다 더 비참한 패배도 이미 여러 번 맛보았다. 지겨울 정도였다.
정말 지겨웠다.
옆에서는 유단이 꿈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열심히 털어놓고 있었다. 더 바보같아지고 천안도 하나 잃었지만 그래도 살아있었다. 죽을 고비를 일상처럼 넘겨가면서 또 당연한 일상처럼 살아남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엔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가 달라진 만큼 자신의 사냥도 달라질지 모른다. 이번만은.
시공간의 틈에서 로키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은 없었다. 자신도 명부마도를 통해 겨우 살아나왔다. 명색 아스가르드의 왕자인 그가 말한 대로 자기 한 몸은 추스렸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가 준 뿔잔을 이용해 소환하는 것도 생각해봤다. 그러나 그가 사라졌을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자신의 요력이 통할 것 같지 않았다.
다시 퍼붓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온갖 것들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빗줄기. 옆에서 유단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다시 빗속을 바라보았다.
로키가 어떤 곤경에 처했든 그도 속이고 도망치는 데 능하다. 이 빗속에 시간의 경계가 느슨해져 유단이 과거의 서낭신이 되어버렸듯 로키에게도 빠져나갈 기회가 오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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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 1의 이야기가 끝난 직후의 로키가 망량선과 서천꽃신 사이의 백란과 만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정해본 이야기입니다. 둘이 잘 어울려서 쓰기 즐거웠어요. 후속편이 있습니다.

햄스터 리모 조각글 ㅣ- 또봇

옛날에 트위터에 올렸다가 떠내려가버린, 햄림 본편에 적당히 끼워넣을 데가 없는 장면 조각들




한참 자판을 두드리다 도운은 손을 뻗어 마우스를 쥐었다. 재정 문제가 해결된 건 좋은데 재단에 보고서 써야 하는 건 정말이지....
폭신.
"찍?"
리모가 고개를 들었다. 도운은 마우스 옆에 마우스 크기와 마우스 모양으로 엎어져 있다 마우스 대신 손에 잡힌 친구를 내려다보았다.
"아, 미안. 마우스인 줄 알았어."
"찍."
리모가 앞발을 옆으로 뻗었다.
"안 가리켜줘도 마우스 거기 있는 거 알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도운은 리모를 놓고 마우스를 집어 일을 계속 하는 대신 마우스 쥐듯 리모를 쥔 채 검지로 리모의 머리를 살살 문질렀다. 부드러운 털가죽 아래 작은 두개골이 만져젔다.
"찍."
"응, 잠깐 쉬려고."
손바닥이 따뜻하고 감촉이 부드러우니 기분이 절로 풀어졌다. 손 안에서 리모가 편한 위치를 찾아 꼬물꼬물 움직였다. 이런 게 애니멀 테라피인가 자기 가지고 애니멀 테라피 중인 걸 알면 리모는 물겠지 라고 생각하며 도운이 망중한을 즐겼다.
‘부드럽다.....’
“아, 도운.”
노교수가 다가왔다.
“리모 여기 있나요?”
“네, 여기.”
도운이 리모를 쥔 그대로 들어올려 노교수에게 보였다.
“리모는 왜요?”
“그, 햄스터는 시력이 나쁘잖아요. 원래라면 대신 냄새로 분간한다지만 리모는 시각 의존이 클 테니까, 답답할 것 같아서.”
노교수가 내민 건 조그만 안경이었다.
“시력 보강은 물론 증강현실 기능을 이용해 색이며 원거리 시야도 불편 없게 했답니다.”
그 정도 기능을 손가락 한 마디만한 철사에 우겨넣은 기술력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도운은 안경을 보며 고민했다.
“찍?”
“응, 그래. 우선 써 보자.”
도운이 리모에게 안경을 씌웠다. 리모가 앞발로 이리저리 위치를 조금 조정했다.
“찍!”
“좋아? 잘 보여?”
“찍!”
“어..... 근데.”
“왜요, 도운. 뭔가 문제가 있나요?”
잘 보이게 된 시야로 여기저기 보느라 정신없는 리모 대신 노교수가 물었다.
“문제는 아닌데....... 귀엽네요.”
“네? 그야 리모가 귀여운 건...”
“안경 쓰니까 더요.”
리모가 안경을 써서 여기서 더 귀여워지면 세상 모두가 노릴 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던 세모의 심정이 마구 이해가 될 지경이었다.
“저, 리모.”
“찍?”
“이건 기지 안에서만 쓰고, 나갈 땐 벗자. 응?”
“찍?”
“그, 너무 귀엽거든, 지금 너.”
“....찍.”
흰자위가 거의 없는 햄스터 눈으로도 째려보고 있는 건 확실히 느껴졌다.
“리모...”
“걱정 말아요, 영상 처리장치는 기지에 있고 전파 수신 범위가 그리 길지 않아서 어차피 멀리 가면 작동 안 하거든요.”
노교수가 말했다.
“찍....”
안경을 쓴 채로 시무룩해진 햄스터. 도운은 진작 자기도 캠코더를 들고 다닐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저, 그 안경 세모가 보면 좋아할 거 같은데, 부를까?”
“찍! ....찍?”
“일은 나중에 해도 돼.”
도운은 컴퓨터를 꺼버렸다.
“애들 불러다 놀자.”
그리고 도운은 리모의 사진을 찍어 또키로 전송했다. 이제 1분 뒤면 또일럿 전원이 기지로 달려올 것이다.
‘제일 먼저 오는 건 역시 세모겠지?’





리모는 모형 제트 위에 앉아서 세모가 숙제하는 걸 넘겨다보았다.
인간 몸일 때라면 문제 푸는 걸 도와주거나 간식을 만들어 갖다주거나 할 수 있었을 텐데 주먹만한 햄스터인 지금은 그저 지켜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세모에게 도움이 될까 이것저것 생각하다 결국 리모는 집중해서 공부하는 애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있다가 숙제 끝나고 나면 귀여운 짓이라도 해서 피로를 풀어주는 게 좋겠다고 결론 내렸다. 어떤 귀여운 짓을 해야할까, 세모가 어떤 걸 제일 좋아했던가 돌이켜보며 리모가 앞으로 할 일을 생각했다. 일단 숙제 끝낸 축하로 기쁨의 댄스를 선보인 다음 팔을 타고 올라가서 볼에 뽀뽀를, 그리고는.....


마지막 문제까지 마침내 다 풀고 세모가 몸을 쭉 폈다. 특별히 오늘 숙제가 많았던 것도 아닌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빨리 끝내고 아빠랑 놀고 싶어 초조했던 게 도리어 오래 걸린 것 같았다.
아무튼 숙제는 끝났다.
“자 이제....”
일어나려던 세모가 제트 모형을 보았다. 빨간 차 위에 하얗고 노랗고 동그란 햄스터가 눈을 감고 있었다. 숨 쉬는 대로 기우뚱기우뚱하는 게 졸고 있는 것 같았다.
세모는 눈을 떼지 못했다. 동그랗게 뭉쳐진 털뭉치가 만지면 얼마나 부드러울지 따뜻할지 깨우면 고개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찍?’할지 그리고 세모인 거 확인하고 표정이 환해지며 눈이 반짝거리고 생기가 돌며 수염 끝이 떨리며 기뻐할지 머릿속에 주르륵 스쳐지나갔다.
‘나도 제로처럼 눈이 카메라여야 했어...’
그러고 있는데 리모의 몸이 점차 차 앞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곤 세모가 보고있는 가운데 차창을 타고 앞쪽으로 데구르 굴러내렸다.
“아!...”
“찍?”
굴러 떨어진 리모가 책상을 짚고 고개를 파다닥 털었다. 그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두리번 두리번 하다 자길 쳐다보는 세모를 보았다.
“찍...”
“왜 그래요, 어디 안 좋으세요?”
세모는 더럭 겁이 났다. 햄스터는 가볍고 폭신폭신한 동물이라 저 정도 떨어진 걸로는 안 다칠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니까.
리모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세모의 숙제를 가리켰다.
“아.... 걱정 마세요. 막 끝낸 참이에요. 전혀 방해 안 됐어요.”
세모가 안심하며 말했다.
“아빠도 참, 저부터 걱정하시긴. 아픈 덴 정말 없으세요?”
세모가 리모를 손으로 안아올렸다. 리모는 잠시 있다가 세모의 팔을 타고 어깨로 올라갔다. 세모가 고개를 돌려주자 볼에 뽀뽀했다.
“찍.”
리모는 자랑스러워보였다. 세모가 웃음을 터트렸다.
“숙제도 끝났으니 이제 같이 놀아요, 아빠.”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30 ㅣ- 회색도시&검은방



“음.... 그러니까...”
미정이 술을 홀짝 마셨다.
“뭔진 모르지만, 고마워.”
“별말씀을.”
“아니 정말로....”
미정이 잠시 할 말을 찾았다.
“재호 형사 건, 고려해볼게. 아니 그 전에 재호 형사 생각은 어떤지도 모르는데..”
“좋아하고 있는데 말을 못하는 거니까 괜찮을 겁니다.”
준혁의 말에 미정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저, 정말로?”
“네.... 저 보기엔 그래보였는데요.”
미정이 준혁을 위아래로 쳐다보았다.
“....믿음이 안 가나요?”
준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믿을게. 이렇게까지 생각해줬는데, 믿어야지. 그리고 어차피....”
미정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상일 선배...에 대한 마음이 그렇게 빨리 사라질 리도 없고.”
“그렇지요.”
준혁이 담담하게 동의했다.
“사랑이 어디 마음대로 됩니까. 억지로 마음 돌리란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말이었던 것 같은데?”
“.......”
“음, 속마음을 있는 대로 들킨 것 같아 부끄러운데 근데 좀 후련하기도 하다. 이런 얘기 터놓고 해본 적 없는 것 같아.”
아하하 웃다가 미정이 준혁을 흘끔 보았다.
“저... 우리 다음에도 이렇게 같이 술 마시면 어떨까?”
“좋지요.”
준혁이 충동적으로 대답했다.
“재호 형사에 대한 이야기든 상일 선배에 대한 이야기든 수사팀 전반에 대한 이야기든, 털어놓고 말하다보면 혼자 끙끙대는 것 보다는 잘 풀릴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맞아, 내 말이 바로 그거야.”
미정이 술병을 들어 준혁의 잔에 콸콸 따랐다.
“그래서, 준혁 형사는 좋아하는 사람 있어?”
술잔을 집으려다 준혁은 탁자에 엎어졌다. 미정이 서둘러 반찬그릇을 치웠다.
“그, 그렇게 정곡을 찔렸어?”
“정곡이라뇨....”
한참 후에 준혁이 꾸물꾸물 고개를 들었다.
“저, 저는 단지.”
“있는 건 틀림 없구나, 좋아하는 사람.”
준혁의 얼굴이 목까지 새빨개졌다. 미정이 씨익 웃었다.
“누구야?”
“그, 미정 형사 모르는 사람입니다.”
“뭐 하는 사람인데?”
“뭐 하는....”
준혁의 어깨가 쳐졌다. 그가 울 것 같은 눈을 하고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장지연은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았다. 이번 삶에서는 봉사 활동조차 참여하지 않았다.
장회장이 반대했을 것이다. 회사를 물려줄 수 없는 딸이니 결혼으로 묶어둘 만한 남자가 나타나기 전에는 그냥 집안에 가둬두고 아무런 일도 공부도 시키지 않았다.
장지연이 남자였다면 장애가 있다 해도 그렇게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 준혁 형사?”
미정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왜 그래... 혹시, 잘 안 되는 중이야? 아니면....”
이미 차였냐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잘 안 되는... 중이기도 하고요.”
준혁이 억지로 웃었다.
“그... 사람도 뭔가 일을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요.”
“아버지가 엄하셔? 아니 그래도 그렇지 직장 정도는 혼수 마련하느라고 라도.... 아니 그럼 더 시집을 보내야 하잖아. 준혁 형사 정도면 일등 신랑감인데. 뭐 집에서 정한 약혼자라도 따로 있는 거야?”
“없을 겁니다.”
없앨 겁니다 비슷하게 들렸으나 미정은 잘못 들었으려니 했다.
“모르겠습니다. 이제 와선.... 제가 그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게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 아닐까도 싶고.”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거야?”
말하다 미정이 입을 다물었다. 준혁이 눈만 돌려 미정을 노려보았다.
“쉬워 보입니까?”
노려만 봤을 뿐인데도 등에 소름이 돋았다. 미정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니...”
“제가 포기해서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럴 거지만, 그렇다 해도 아버지에게선 독립시키고 싶습니다. 그래야 제대로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고요. 꼭 행복까진 아니라도 적어도....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을 거고.”
준혁이 아련한 눈을 했다.
“여자도 뭐든 될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았을 겁니다.”
여자도 그룹 회장이 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장지연의 장애도 문제될 게 없었다. 말하기가 좀 어려울 뿐이지 판단력도 있고 머리도 좋았다. 신입사원으로 시작할 것도 아니고 회장님 쯤 되면 모든 지시와 보고를 서면으로 하라고 한다 해서 누가 반항할 것도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장희준을 암살하면 달리 후계자가 없어서라도 장지연이 회장이 되지 않을까 문제 해결책 1순위가 살인인 연쇄 살인범다운 발상을 했다가 준혁이 고개를 저었다. 장지연이 회장이 되고 싶은지 아닌지 알지도 못하면서 일을 벌일 수는 없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경영권을 승계하는 일이 쉽고 스트레스 없을 리도 없고.
“정 안 되면 가출해 버리면 돼.”
미정의 말에 준혁이 살인 모의에서 깨어났다.
“성인이잖아? 부모라고 해도 강제로 집에 끌고 갈수는 없다고. 대판 싸우고 아예 연을 끊어버릴 수도 있고. 어, 나와서 당장 지낼 곳이 없다면 우리 집에 잠시 지내게 해줄게.”
“단칸방이지만 저도 집 정도는 있.”
미정이 째려보자 준혁이 당황했다.
“저, 이상한 짓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이상한 짓이 문제가 아니라 그 아버지가 준혁 형사한테 쫓아와 멱살 잡을지도 모르잖아. 그러니 딴 데 숨겨야 한다고.”
“아.”
준혁이 얼굴을 붉혔다.
“그런 걱정까지 할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고맙습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꼭 말할게요.”
“그럼그럼.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친구..요?”
준혁이 깜짝 놀랐다. 너무 놀라서 미정이 당황했다.
“어.... 아니야?”
“아뇨. 맞습니다.”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쯤 되면 그냥 동료 정도로 말하고 끝날 일이 아니지요. 그러니.”
그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저...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미정은 조금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 손을 보다 피식 웃고 손을 마주 꽉 잡았다.
“앞으로 잘해보자고, 친구.”
오미정의 손을 마주잡으며 배준혁이 미소지었다.
이제 오미정도 아마도 서재호도 괜찮을 것이다. 장희준은 여전히 수사팀을 흔들려 노력하고 있지만 수사는 이미 백석에 대한 수색 영장을 신청할 단계에 와 있고 설령 하성철 국장이 이대로 낙마한다 해도 그들이 공격당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내부의 적만 없다면.
이제 다시 과거로 가서 또 한번 현재를 바꿔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박근태와 허강민을 없애야했다.
‘허강민한테 박근태를 죽이게 한 뒤 그를 사살하는 게 좋겠어. 아, 그 전에 양시백씨를 빼내야지.’


오늘 밤도 잠이 오지 않았다.
양태수는 이럴 때 늘 그러듯이 저택을 구석구석 둘러보며 돌아다녔다. 적이 숨어있을 것만 같은 어둠도 갑자기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은 적막도 눈에 익을 정도로 늘 그대로 있었다. 초조함과 왠지 모를 두려움이 익숙함에 섞여들었다.
익숙한 건 좋았다. 안심할 수 있었다. 여전히 불안에 쫓기지만 늘 비슷하게 반복되는 일은 대비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 익숙함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양태수는 생각했다. 여기가 마음 편해서, 그래서 그만둘 수 없는 거라고.
어제 최재석은 백석 경호실을 그만두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그리고 둘이 같이 시백이를 찾자고.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양태수가 백석에 들어온 지도 벌써 몇 년이나 지났다. 아직도 시백을 찾지 못한 걸 보면 양시백은 백석의 눈과 귀가 닿지 못하는 곳에 있는 게 틀림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곳을 찾아보는 게 당연했다.
그의 제안을 거절한 게 정말 회장님의 은혜 때문인지 자기가 이 익숙한 환경을 떠날 용기가 없어서는 아닌지 양태수는 자괴감을 느꼈다. 아들을 찾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자고 생각했는데, 고작 이 안온함을 깨지 못해서.
날카로운 전자음이 울렸다. 회장님의 호출인가 싶어 양태수는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예, 양태수입니다.”
-양시백의 아버지시지요?
낮선 목소리에 양태수가 긴장했다. 들은 말의 의미는 한 발 늦게 다가왔다.
“당신 누구지? 시백이는 어떻게.”
-조용히 전화 받을 수 있습니까?
양태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택의 바깥담 옆이었다. 인적 없고 구석이라 남의 눈에 띌 걱정은 없었다.
“그, 그래.”
-저는 지금 양시백을 데리고 있습니다.
막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려던 말이 입안에서 증발했다.
-아이는 건강하고 안전합니다, 아직까지는.
“아직까지는?”
양태수의 목소리가 험악해졌다.
-제 간단한 요구를 들어주시면 그를 넘겨드리도록 하지요.
양태수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상대방은 동요 없이 말을 이었다.
“간단한 요구라고?”
-네. 저와 장지연씨를 회장님 모르시게 만나게 해주십시오.
양태수는 이리둥절해졌다. 유괴범이 왜 이런 조건을 거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슨 수작을...”
-장지연씨와 잠시 둘만 대화하고 싶은 것 뿐입니다. 그 분을 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모르고 계시나 보네요. 제가 해치고 싶어도 불가능합니다.
“무슨 소리야?”
양태수는 더욱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장지연은 물론 회장님의 외동딸이고 귀한 몸이긴 하지만 그래도 연약한 젊은 여성이고 누가 해치는 게 불가능할 이유는 없었다.
-이것 참, 모르는 사람에겐 설명할 말이 없는데....
“헛수작 부리지 말고 제대로 말해. 지연 아가씨께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아니 그 전에... 시백이는? 그 애는 어디서 찾았지?”
-제가 찾았다기 보단... 운이 좋았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거나 다름없이.
“하늘에서?”
양태수는 혼란스러워졌다.
“그 애가 정말 내 아들 양시백인 건 맞는 거냐?”
-아마도요? 두 사람이 매우 닮았다는 믿을만한 증언이 있고. 혹시 최재석 아세요?
양태수가 휴대폰을 부서질 듯 움켜쥐었다.
“그 녀석은 여기서 또 왜 나오는 거냐.”
-아는 사이고 아마도 우호적인 것 같네요. 그럼 틀림 없습니다.
양태수는 이 유괴범의 논리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너무 미치광이 같아서 뭔가 말이 되는 근거가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드님을 해칠 생각은 없습니다.
유괴범의 유괴범 답지 않은 말에 양태수가 정신을 차렸다.
“그럼...”
-그는 지금 위험에 처해있고, 조만간 저와 제... 동료들이 구해낼 준비도 하는 중입니다. 그러니 정 못 믿겠다면, 그냥 거절하셔도 됩니다. 당신이 만날 수만 없다 뿐이지 양시백은 다른 데서 안전하게, 어쩌면 행복하게도 살 수 있을 겁니다.
내용만 놓고 보면 안도해야 마땅한데 양태수는 조금도 안도가 되지 않았다.
“그런 얘길 하는 저의가 뭐지?”
-선택을 강요할 때 정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주의여서요. 뭐, 진실을 꿰뚫어보지 못하거나 듣고도 틀리면 본인 책임입니다만.
전화 건 자가 악당인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분명 지연 아가씨를 만나려는 이유도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거짓말은 아니다.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어서는 시백이를 찾을 수 없었다. 양태수는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어떤 방식의 만남을 원하나.”
-아무도 없는 데서 잠깐 대화만 하면 됩니다.
상대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밀실일 필요 없습니다. 양태수씨가 지켜봐도 상관 없습니다. 저는 그분께 부탁을 한 가지 할 거고 들어달라고 설득도 할 겁니다. 그 이상은 장지연씨께서 판단하시겠죠. 그뿐입니다.
“잠시 대화만 한다고.”
양태수가 잠시 고민했다.
“혹시 야외여도 상관 없나?”



[반월당, 마블 유니버스] 트릭스터 컨벤션 2 ㅣ- 크로스오버


“아무튼 지금은 네가 이렇게 살아있잖아. 그놈한테 추궁할 기회는 없었어? 복수하지 않은 거냐?”
“제가 살아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하늘로부터 벌을 받은 뒤였습니다.”
여우의 목소리에서 다시 감정이 사라졌다.
“천형죄인의 낙인이 찍혀, 몇 번을 환생해도 천지만물에게 외면당하는 고통스럽고 박복한 삶을 사는 벌이지요. 하늘에서 인간을 도우라고 내려보낸 존재를, 그것도 그 호의와 신뢰를 이용해서 해쳤으니 무거운 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대체 왜 저를 해쳤냐는 질문엔 답해주지 않았습니다. 물어보지도 않은 듯 하더군요.”
“묻지도 않았다고?”
“절 노리는 존재는 언제나 많습니다. 천호를 쓰러뜨렸다는 악명을 자랑거리로 노리는 마물부터 제 고기나 가죽을 얻어 신통력을 빼앗으려는 요괴들까지. 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 없었습니다. 절 죽인 죄로 천벌을 받을 위험 정도는 알고 있었을 거고요. 그런 것도 모를 만큼 바보였다 해도, 역시 저는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알기 위해 기를 쓰고 몇 토막의 뼈만 남은 몸을 수습해 일어난 것인데......”
여우가 빈 뿔잔을 바라보자 로키가 집어 건네주었다. 아까 마셨던 주스가 어느새 다시 가득 차 있었다.
“천계에서는 얼른 돌아와 인간계에서 입은 몸과 마음의 상처를 다스리라고만 했습니다. 인간계 따위 잊으라는 말도 했지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차라리 다시 죽어버리고 말지.”
“바로 그겁니다. 왜 배신당했는지, 내가 왜 죽었는지 알고 싶어 그 고생과 수모를 무릅썼는데 그걸 다 끝난 일 취급하라니요.”
내내 차분하고 냉정하던 여우의 목소리에 열기가 깃들었다. 아스가르드 식이었다면 벌써 바를 몇 번은 쪼개버렸을 기세였다.
이 여우도 이해받지 못하고 있는 거다. 보호해주겠다는 천계에 충성스런 가신들까지 있는데도 정작 가장 절실한 소망은 이런 곳이 아니면 털어놓지도 못하는 거다.
아버지와 왕실에 인정받고 싶다는 자신의 소망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전제부터 틀렸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을 뿐.
배신당하고 참살당한 이유를 알고 싶다는 소망도 그렇게 전제부터 어긋나 있을 수 있나? 필사적으로 추구한 끝에 도리어 모든 것을 망가뜨릴 수 있을까?
여우는 뿔잔을 들어 입을 축이고 숨을 돌렸다.
“천 년이나 인간계를 헤맨 보람이 없는 건 아닌지 그래도 최근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윤곽? 그 환생자를 잡아 다그치면 될 일이 아니었어?”
묻고서야 로키는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인지 깨달았다. 아스가르드가 자신을 정말 바보로 만든 모양이었다.
“미안. 그렇게 끝날 일이었으면 천 년이나 걸리지도 않았겠지. 뭔가 음모가 있었던 모양이군.”
“있었죠. 당연히.”
여우는 입술을 약간 내밀었다. 모처럼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난 줄 알았는데 멍청한 질문을 들어 기분 잡쳤다고 그 새치름한 얼굴에 커다랗게 쓰여있었다.
“무식하게 잡아 족치는 모습만 너무 오래 봐와서 나도 나쁜 물이 들었나보다.”
“그렇습니까?”
여우가 조금 누그러졌다.
“소문은 들었습니다. 전하의 고향을 모욕할 뜻은 없습니다만, 아스가르드는 저 같은 여우와는 맞지 않는 곳 같더군요.”
“모욕해도 돼. 나하고도 안 맞거든.”
더 이상 자신의 고향이라 부를 수도 없다고 설명하는 대신 그렇게만 말했다.
“그쪽 천계도 꽤나 단순무식한 모양이지만 이쪽만큼은 아닐걸. 그쪽은 그래도 널 해친 놈 천벌도 주고 널 보호하려고는 하잖아.”
여우는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아스가르드에선 로키 전하께서 참변을 당해도 외면한단 말입니까?”
“미드가르드에서 목이 달아난 적까지는 없다만 비슷한 경우라면 이미 겪어봤지. 아스가르드에 날 걱정하는 존재 따위 없어.”
“천계에서도 절 걱정해서라기보단 천계의 이름으로 내려보낸 존재가 배신당했기 때문에 진노한 것이었습니다만.....”
여우가 말끝을 흐렸다. 뿔잔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지금 전하께서는 아스가르드에서 쉽게 손을 뻗을 수 없는 피난처가 필요한 것 아닙니까?”
로키는 피식 웃고 자리에서 일어나 여우를 내려다보았다.
아스가르드를 벗어날 것도 없이, 오딘과 토르 앞만 벗어나도 자신보다 키가 작은 자들은 만날 수 있었다. 그런 자신을 토르와 비교해서 성장부진의 약골 취급하던 아스가르드 인들 보기에 이 떨어진 목을 이어붙인 여우는 종이 한 장 오려 만든 여우 인형처럼 보일 것이다.
“너 정도의 여우 한 마리가 은혜 베풀어야 할 그런 불쌍한 존재로 보이는 거냐? 이 내가?”
여우는 굳은 얼굴로 로키를 올려다보았다.
“무례를 용서하라고? 왜 그런 무례를 용서해야 하지?”
“왜냐면.”
여우가 천천히 대답했다.
“저야말로 지금 그런 은신처가 필요하니까요. 천계에서도 미처 찾아내지 못할 만한 곳이. 가능하다면 로키 전하께 도움을 청해서라도 꼭 마련하고 싶습니다.”
여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키에게 받은 뿔잔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로키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천 년을 인간계에서 헤매며 제 죽음에 생각지도 못한 다른 악귀가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인간은 저를 배신하지 않았으며 그때나 지금이나 제가 죽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도요. 그러나 증거는커녕 그래서 진짜 사건은 왜, 어떻게 일어난 건지조차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이래서는 천계를 설득해 그 인간의 누명을 벗기는 일은 너무 먼 미래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 바보가 바보답게 천계의 눈에 띌 만한 사고를 쳐버렸습니다. 이제 곧 하늘에서 조사가 내려올 텐데 제가 그 인간과 하고 있던 일을 들키면 공든 탑이 무너지고 맙니다. 그래서 여차하면 숨을 곳을 찾는 것입니다.”
“숨을 장소를 찾는다고.”
로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이 트릭스터 컨벤션에 찾아온 거군. 주최자가 누군지, 어떤 원리로 이런 장소가 가능해지는지 궁금해 하며. 아까 계속해서 공간을 바꿔보던 것도 이 안에서 해볼 수 있는 실험이었어. 미성년자가 술 사준다는 어른을 대뜸 따라온 것도 내가 주최자라는 소문 때문이었지?”
“이 안에서 트릭스터들끼리 해치는 건 금지 아닙니까. 전 미성년자도 아니고요.”
“이 컨벤션을 개인적인 목적에 활용해선 안 된다는 규칙은?”
“조사해보면 어떻게든 활용해볼 여지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주최자가 누구든 트릭스터들을 모아놓을 때 그 정도는 각오했겠지요.”
“맞아, 각오했겠지.”
로키가 피식 웃었다. 여우도 옅게 웃었다.


두 트릭스터가 힘을 합쳐 컨벤션의 비밀을 파헤친다는 계획은, 결과부터 말하면 실패했다. 컨벤션 공간 안을 한참이나 뱅글뱅글 맴돌았으나 수확은 없었다.
“이곳에는 이곳의 법칙이 있고 들어온 이상 종속되니 어쩔 수 없지요.”
여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두 트릭스터는 컨벤션 출입구 근처 대기실에 앉아 쉬고 있었다. 드물게 서로 친분을 쌓은 트릭스터들끼리 기다려주는 장소인 건지, 그냥 컨벤션이면 이런 장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만들어둔 것인지. 어쨌든 지금 두 트릭스터가 쉴 수 있으니 쓸모없는 장소는 아니었다.
“정녕 추심관 운이 좋기를 바랄 수밖에 없나봅니다. 그나마 제게 호의적이고, 고지식해서 속이기 쉬운 천신이요.”
“기대할 만한 사람이 있나보군.”
로키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얼마 전까지는 자신에게도 그런 사람 정도는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이 거짓 위에 쌓여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이 여우는 요툰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다.
여전히 둘뿐인 덕인지 로키도 쌓여있던 말이 새어나왔다.
“넌 그래도 네 편들이 있는 거야. 네 안전을 걱정하는 자들이. 네 계책을 이해해주지도 않고 네가 원하는 것을 도리어 방해할망정 걱정도 하고 충성도 바치고 도와도 주지. 그러니까 아무 소득 없었어도 적당히 체념하고 돌아갈 수 있는 거고.”
천호가 금빛 눈썹을 찌푸렸다.
“말씀하시면서 느껴지는 것 없습니까? 천계에서 그 바보의 정체를 아는 날이면 그 혼백을 다시는 환생도 할 수 없도록 불살라버릴 겁니다. 제 천년의 수고를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고는 다 절 걱정해서 하는 일이라고 말하겠지요. 전하는 정녕 그런 것이 부럽기라도 하신 겁니까?”
“그래, 부러워. 내겐 그런 내 편조차 없거든!”
버럭 소리질러버리고 로키는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까지 속을 드러내버릴 작정은 아니었다.
천호는 로키가 체통을 잃었다고 비웃을 마음이 없는 듯했다. 속 깊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하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로키는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천호는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걸었다.
“저는 전하께 천 년간 홀로 간직해온 비밀을 털어놓았습니다. 제가 바보라서, 아니면 새나가도 괜찮은 이야기라서 무의미한 수다를 떨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서로 무관한 세계의 지혜를 빌려서라도 해답을 찾고 싶을 만큼 절박한 겁니다.”
“하지만 네 사연과 내 사연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
로키가 내뱉었다.
“적어도 넌 네가 부끄러울 짓은 하지 않았지. 선량하고 자비로운 수호신 노릇을 하다가 어느 날 억울하게 목이 떨어졌을 뿐이야. 그 이야기에서 네가 비난받을 지점은 순진하게 인간을 너무 믿었다는 부분이지, 네가 불의한 짓을 하지는 않았어. 아니, 하늘에서 내린 영물이라는 것부터가 나와는 시작점이 완전히 다르다고. 나는......”
천호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로키는 잠시 숨을 돌렸다.
“그래, 넌 우리 세계와 완전히 무관하지. 요툰과 에시르의 반목도 네게는 남의 일이겠지. 하지만 너의 고향에도 천대받는 종족이나 태생적으로 혐오하고 적대하는 종족 정도는 있겠지?”
천호는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좀 복잡합니다. 근본이 사악한 마귀라면 존재합니다만 그런 것들은 나서서 천대하거나 포용하기도 전에 존재 자체로 모든 인간과 요괴와 신들에게 해가 됩니다. 종족이라는 관점도 애매한 것이, 똑같이 여우로 태어나도 어떤 것은 그냥 짐승이 되고 어떤 것은 저 같은 영물이 되거나 마물이 되지요. 전하의 의도는 어느 쪽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그쪽과 이쪽은 체계 자체가 완전히 다르군.”
로키는 천호의 머리에 솟아있는 여우귀를 바라보았다.
“아스가르드는 에시르 신족의 사회야. 검과 무예를 숭상하고 그 힘으로 세계수에 의지한 아홉 세계의 질서를 잡지. 아니, 내가 이제와서 뭐 이렇게 좋게 설명해주고 있담? 한 마디로 팔뚝 굵기가 전부인 세계야. 힘만 세면 그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곳이지. 마법이니 술수니 하는 건 죄다 전사답지 못하다고 천대받고. 그 주제에 정말로 힘 하나는 어느 세계보다 강해서 주변 세계 전부를 굴복시키고 군림하는 중이지.”
호기심으로 살랑거리던 천호의 꼬리가 축 처졌다. 절대로 가서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눈에 보여서 로키는 조금 흡족해졌다.
“그 주변 세계 중 아스가르드에 가장 위협적이던 종족이 있어. 결국엔 성물까지 빼앗기고 자기네 소굴 깊숙이 숨어 벌벌 떠는 신세가 되었지만 아스가르드에서도 다시 겪기 싫은 힘든 싸움으로 기억하고 경계를 게을리 안 했지. 서리거인, 혹은 요툰이라고 들어봤어?”
천호가 고개를 저었다.
“금시초문입니다. 사악한 종족인가요? 외관은 어떻습니까?”
“거인이라는 종족명이 어울릴 만큼은 크지. 대개는. 만년설 같은 푸른 피부에 눈동자는 붉고.”
어느새 다시 바짝 선 꼬리를 보며 로키가 떨떠름한 어조로 설명했다.
“근성이 사악한지 어떤지는......모르겠어. 미숙아를 키워볼 생각도 않고 내버리는 종족이니 선량하지는 않겠지.”
“아기를 버리다니.”
천년이나 산 값을 하는지 천호는 꼬리가 호기심으로 살랑일 때만 빼면 감정표현이 극도로 적었다. 그래도 이제까지의 언행을 보면 그런 일을 무자비하다고 평가할 품성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 미숙아를 엉뚱하게도 오딘이 발견했지. 전쟁을 끝낸 직후이니 아직은 적에게 자비를 보일 기분이 아닌 게 정상일 텐데, 이기자마자 승리에 도취되기라도 한 건지 그 아기를 확인 사살하거나 무시하는 대신......”
로키는 의미심장하게 말끝을 흐리며 천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했을 것 같아?”
천호는 가만히 로키를 바라보다 답했다.
“오딘과 프리가의 아들로 삼은 거군요.”
“이해가 빨라 좋군.”
로키는 씁쓸하게 내뱉었다. 자기 입으로 구차하게 설명하는 수고를 던 것은 좋은데 이 겉모습만 어린 여우의 통찰력은 불편했다.
영리한 자와 대화해볼 기회가 그동안 거의 없었다는 점이 새삼 실감이 났다.
“난 몰랐어. 오딘을 빼곤 아무도 몰랐지. 프리가도 몰랐던 것 같아. 남편이 갑자기 아기를 주워왔는데 근본이 궁금하지도 않았던 걸까? 적당히 지어낸 말에 속은 걸까?”
“알고 찬성했을지도 모르죠.”
“아니, 역시 아닐 거야. 당신 배로 낳은 아기가 아니란 거야 모를 수 없어도 불운하게 부모를 잃었을 뿐 태생은 좋은 에시르 아기 정도로 알았겠지.”
마음속에 맺혀있던 것을 털어놓으니 정말로 기묘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아스가르드의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지만 이 여우는 에시르도 요툰도 아니었다. 아마 그래서 이 여우도 자기 이야기를 그토록 쉽게 털어놓았을 것이다.
“알았다면 토르가 쫓겨나고 왕좌가 비었을 때 날 격려해 왕위에 오르게 했을 리 없어. 라우페이– 요툰의 왕이야 -를 죽였을 때 숙적을 죽이고 아버지를 지켰다고 그렇게 사심없이 칭찬했을 리 없어. 프리가는 그래도 나 역시 아들이라고 생각했어. 요툰임을 알았다면 그렇게까지 못 했을 거야.”
“데려다가 자신들의 아들이라 이름했으니 아들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천호가 눈썹을 찌푸리고 물었다.
“입양할 때 요툰임을 알고, 그걸 감수하고 키우기로 작정한 건 오딘 아닙니까? 요툰이라서 거절할 작정이었다면 입양해선 안 되었죠. 무책임한 일입니다.”
“맞아. 무책임하지.”
로키는 고개를 흔들었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29 ㅣ- 회색도시&검은방


“줄 거? 뭐?”
어리둥절한 재호 눈앞에 선크림이 놓였다.
“자외선은 피부 노화의 주범입니다. 날마다 꼭 바르세요. 세 시간마다 덧바르는 것도 잊지 마시고.”
“어, 어?”
재호가 어색하게 선크림을 받아들었다.
“...준혁이.”
“네.”
“전에 회식 때도 그랬지만, 왜 내 얼굴에 그렇게 관심이 많아?”
“관리 안 하면 30대에 40대 아저씨로 보이게 될 테니까요.”
“미정 형사는?”
“알아서 잘 가꿀 거니까요.”
“너는?!”
“저는.....”
준혁이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저는, 관리 하고 있습니다.”
“...진짜로?”
재호가 째려보았다. 준혁은 시치미를 떼었다.
“네. 그러니 재호형사만 관리하면 우린 모두 이십대 같은 삼십대를 맞을 수 있을 겁니다.”
서재호가 선크림 좀 바른다고 십 년 후에도 이십대 모습을 유지하는 건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준혁이 진지한 태도 그대로 말했다.
“와, 그거 좋네.”
미정이 깔깔 웃었다.
“내면은 성숙하고 외모는 젊게 유지하고. 완전 꿈같은 이야기잖아?”
“그래도 노려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준혁이 말했다.
“적어도...”
“응?”
“아닙니다.”
그가 고개를 젓고 밝게 말했다.
“십년 후에도 여러분과 같이 경감님이나 선배님들과 같이 계속 경찰을 하고 싶어서요.”
“응, 그야 당연하지.”
미정이 웃으며 준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앞으로 쭉 함께 하자고.”
“그런 거지요?”
준혁이 반색했다. 미정이 당황했다.
“으응, 뭐... 내 힘닿는 만큼은.”
“그거면 됩니다.”
준혁이 안심한 표정으로 웃었다. 드물게 환한 미소에 미정이 홀린 것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어, 나 잠깐만 전화 좀.”
재호가 울리지도 않은 삐삐를 움켜쥐고 일어났다. 그리곤 서둘러 공중전화로 가서 전화 거는 척을 했다.
서재호는 바보가 아니었다. 내내 목석같던 준혁이 갑자기 시덥잖은 핑계를 대며 가까운 사람들을 끌고 술을 마시러 왔다. 그리곤 미정을 열심히 칭찬하고 예쁘게 웃어준다.
‘상일 선배한테 계속 딸 얘기하는 거, 그래서였구나....’
오미정이 유상일에게 반한 건 서재호도 알고 있었다. 자기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입 다물고 물러났는데, 준혁은 적극적으로 선배를 견제하고 미정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해주고 미소를 보이며 넌지시 앞으로 계속 같이 있자고까지 말했다.
‘나란 놈은 어느 쪽으로도 상대가 안 되네.’
좋아하는 상대에게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준혁이 부러웠다. 부러워만 할 게 아니라 너도 나서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이렇게나 부족함이 넘쳐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미정이 공중전화 쪽을 흘끔거렸다. 재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자리로 돌아왔다.
“어, 미안하지만 나 일찍 가봐야 할 것 같아.”
그가 어색해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동창 녀석이 급하게 만나자고 하네. 별 일 아니겠지만 난 경찰이니까 혹시 몰라서 이야기 들어보려고. 둘은 좀 더 마시다가 가.”
“무슨 일 있는 거야?”
미정이 물었다.
“만약에...”
“괜찮아, 원래 좀 침소봉대하는 녀석이었어.”
재호가 손을 저었다.
“둘 즐겁게 놀아. 월요일에 보자.”
그가 준혁에게 눈을 찡긋해보이고 서둘러 나갔다. 준혁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무래도....”
“응?”
“재호 형사가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네요.”
“오해? 무슨 오해?”
오미정이 어리둥절해했다.
“그게... 저, 미정 형사.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응?”
“재호 형사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응?”
“물론 재호 형사는 상당한 허당이고 실수투성이이고 용기도 부족합니다만.”
“저.... 준혁 형사?”
“선량하고 심지가 굳고 의지가 되는 사람입니다. 업무 능력도 우수한 편이고요. 잘 다듬으면 외모도 봐줄만 할 겁니다.”
“......칭찬을 하든지 헐뜯든지 한 가지만 해주겠어? 헷갈리니까.”
“칭찬하고 있는 겁니다.”
단호한 대답에 미정은 할 말을 잃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개의치 않고 준혁이 말을 계속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순조롭지만, 언제까지나 그렇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 해도 재호 형사와 함께 있으면 괜찮을겁니다. 적어도.... 적어도 길을 잃고 방황하지는 않게 될 겁니다.”
준혁이 말을 끝냈다. 미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둘이 마주보며 침묵을 이었다.
“어.... 재호 형사는 길치라 길 잃을 걸 같은데?”
미정이 어색하게 농담을 시도했다.
“그럴 때는 미정 형사가 길을 찾을 수 있겠지요.”
준혁이 농담을 진지하게 씹어먹었다.
“네. 재호 형사도 혼자 두기엔 불안한 면이 있으니 서로 의지할...”
“잠깐잠깐.”
미정이 잠시 고민하다 소주를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지금 나랑 재호 형사 다리 놔주려는 거야?”
“네.”
미정은 입을 벌렸다. 그리고 다물었다. 다시 벌렸지만 말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재호 형사가 그렇게 싫은 겁니까?”
“아, 아니. 그런 건.... 아니 그러니까 동료로선 좋아. 좋은데, 남자로선 생각 안 해봤어.”
“지금부터라도 생각해보면 어떻습니까.”
준혁은 거침없이 밀어붙였다.
“물론 미정형사 보기에 재호 형사가 눈에 차지 않는 건 압니다. 압도적인 영웅의 풍모 같은 것도 없고 불타오르는 사랑을 하기에 적당한 상대도 아닙니다. 하지만 불꽃같은 사랑이라는 거, 듣기에는 좋지만 막상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누르느라 준혁이 잠시 심호흡을 했다.
“같이 삶을 계획하고, 가정을 꾸리고, 하루하루를 살아나가기 위해선 온화하고 한결같은 남자 쪽이 좋습니다. 서재호 같은.”
오미정은 다시 한 번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대체..... 아니, 그러니까 어쩌다....”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재호 형사를 높이 평가하는 건 알겠는데, 왜 나야?”
“왜라뇨?”
“왜 날 골랐어? 주변에 달리 소개시킬 여자가 없어서?”
“아, 그런 게 아닙니다. 미정 형사에게 재호 형사가 알맞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반대가 아니라.”
“잉?”
“전 지금 미정 형사의 행복을 위해 이러는 겁니다.”
준혁이 진지한 눈빛으로 미정을 마주보았다.
“인간 오미정이 행복하기 위해선 유상일보다 서재호를 선택하는 게 좋다고 권하고 있는 겁니다.”
“뭐....”
“상일 선배는 영웅이고 딸을 몹시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건 미정씨가 원하는 아버지상은 될 수 있을지언정 남편으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나, 난 그런게!”
“압니다. 상일 선배와 사귀거나 결혼할 생각까진 안 하고 있다는 거지요? 그가... 죽은 아내를 배신하는 건 원치 않을테니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던 미정이 그대로 굳었다.
“혼자 사랑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 알고 있습니다. 상일 선배의 행복을 위할 뿐이라고. 그를 위해 모든 걸 바쳐도 좋다고,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지요. 자신을 불사르는 사랑. 그런데 말입니다.”
준혁이 슬프게 웃었다.
“재가 되어버려도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사랑이 불타올라 재만 남기고 사라질 때 사람도 죽어 사라져버린다면 준혁은 미정에게 이런 말 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이 파멸로 끝나버린 뒤 십년 후, 준혁과 미정은 살아서 재회했다. 고통 받고 뒤틀려버린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파편을 쫓으며 죄를 짓고 새로운 파멸을 맞이했다.
“차라리 그랬다면 좋았을텐데.....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데도, 그런데도 사람은 죽지 않아서.”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 미정이 준혁의 손을 잡았다. 그는 빙긋 웃어주었다.
그는 왜 자기가 오미정을 행복하게 하고 싶은지 깨달았다. 둘이 이렇게나 닮은꼴이었기 때문에.
“그러니 미래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이 메어오는 것을 무시하고 그가 말을 계속했다.
“상일 선배와 함께하는 미래가 어떨지 그려본 적이 있습니까?”
“아, 아니 난 그런 건....”
“꼭 사귀고 결혼하고 그런 게 아니라도요. 계속 그의 곁에서, 지켜보며... 독신으로?”
“음.”
미정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글쎄, 정말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잘...”
그럴 만도 했다. 준혁의 십 년 전과는 달리 지금은 둘 만난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으니. 그래서 준혁은 재촉하지 않고 얌전히 기다렸다.
“그게.... 곁에 있는 것 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 이상 뭘 어쩔지는.... 모르겠네.”
“그럼 둘이 결혼한 미래를 생각해보면 어떻습니까?”
“뭐?”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상일 선배는 한창때 남자고 상처한지도 좀 되었으니 조만간 재혼해도 거리낄 게 없습니다. 아연이에게 엄마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어... 그렇다고 해도.”
“생각해보세요.”
잠깐의 침묵 후, 미정이 정말로 생각하는 기색이 되자 준혁이 다시 물었다.
“결혼하면 퇴직하실 겁니까?”
“어?”
“아무래도 그렇게 되겠지요? 아연이도 돌봐야 할 거고, 결혼하면 어차피 선배와 같은 부서에 있지는 못할 거고요.”
“어...?”
“그런데, 제가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스물 여섯에 강력계 경장은 남자도 되기 어렵습니다. 경력, 아깝지 않습니까?”
“아.....”
“미정 형사, 경찰이 될 때 하고 싶은 게 있었을 겁니다. 그 땐 아니더라도 점수 모으고 공부 하면서 승진을 준비할 땐 바라는 게 있었을 겁니다.”
미정이 소주잔만 내려다보았다. 준혁이 술을 가득 채워주었지만 손대지 않았다.
“......내 인생 내가 꾸려가고 싶었어.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말고. 특히 가족들에게는 의지하지 말고.”
준혁은 침묵을 지켰다. 미정이 말을 계속했다.
“돈을 벌어야 했고. 거기에 경찰이면 좀... 안전할 것 같아서. 여자 혼자 살아야 했으니까. 승진은, 음, 운이 좀 좋았다고도 생각하지만.....”
미정이 심호흡을 했다.
“기왕 경찰이 되었으니, 경찰다운 일을 해보고 싶었어. 사람들을 보호하고 사회의 악을 때려잡고.”
그가 방긋 웃었다.
“성공했지.”
“네, 성공했죠.”
준혁도 따라 웃었다.
“앞으로도 계속, 성공할 수 있습니다.”
“결혼해도 퇴직하지 말라고?”
“퇴직하면 후회할 겁니다.”
준혁은 진지했다. 최대한 양보해서 자아실현은 제끼고 봐도, 얼마 뒤 IMF 사태가 터지고 갑자기 공무원이 신의 직장이 되고 맞벌이가 당연해지는 것만 생각해도 그건 틀림 없었다.
준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면서도 그 태도가 충분히 진실해 보였는지 미정이 그 말에 수긍했다.
“우리 팀 좋아해. 경감님도 좋고, 팀원들도 좋고. 범죄와의 전쟁도 좋긴 해. 일은 힘들지만 하는 동안에는 진이 빠질 정도였지만 그래도 조직 폭력배를 싹 때려잡으니 속이 다 시원하더라.”
미정이 킥킥 웃었다.
“앞으로 계속.... 해도 되는 걸까.”
“물론입니다.”
“준혁 형사 생각에 그 편이 내가 행복할 것 같아서?”
“네.”
“그럼 재호 형사가 결혼하면 일 그만두라 그러면?”
“차면 됩니다.”
미정이 눈을 깜빡였다.
“정말로? 방금까지 막 엄청 좋은 사람이라고 약 팔아놓고 차라고?”
“미정 형사가 하기 싫은 일을 시키려는 남자라면 누구라도 차버리세요.”
준혁이 말했다.
“미정형사가 일을 계속하기 싫다면.... 뭐 그것도 고려해볼 수 있겠지만요. 아니라면.”
“아니야.”
미정이 단호하게 말했다.
“일 계속 할거야.”
“네.”
준혁이 미소지었다.




[반월당, 마블 유니버스] 트릭스터 컨벤션 1 ㅣ- 크로스오버


Writer: 보행자
Characters: 백란, 로키
Rating: G
Summary: 원작중에는 그런 언급이 없지만 백란은 충분히 트릭스터의 조건을 충족한다는 전제하에서, 모든 시공간의 트릭스터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백란과 로키가 만납니다. '반월당의 기묘한 이야기' 중대 스포가 있으니 원작을 다 읽고 보시는 것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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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사회 안에서도 이 주인공에 대한 평가는 창조주 신과 천진난만한 바보, 사악한 파괴자와 어린애 같은 장난꾸러기 등으로 엇갈릴 수 있다. 심리적 관점에서 보면, 트릭스터는 그것을 낳은 문화 자체의 두려움과 실패 및 이루지 못한 이상을 동시에 반영하는 일종의 희생양 구실을 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트릭스터 이야기 항목

[꾀보(트릭스터)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며 배신을 일삼는다. 그는 동물의 형체로 잘 둔갑하며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역겨운 상황에 잘 나타나지만 인류에게 햇빛이나 불과 같은 이익을 가져다주는 문화적 영웅의 한 종류로 간주될 수도 있다......그는 정말로 약간은 희극적인 주술사이며 신과 영웅의 중간 정도 존재이지만 어릿광대 같은 어조를 매우 강하게 쏟아내어 신도 영웅도 아닌 매우 이질적인 존재로 비쳐지기도 한다.] 데이비드슨, 북유럽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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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교활하다.
그들은 거짓말하고 속인다.
그들은 무질서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이 속한 곳에서 외톨이가 되거나 심지어 비난받지만, 그래서 그들이 상처받는지, 괘념치 않는지, 혹은 또 다른 대응을 취하는지는 다 제각각이다.
굳이 확실한 공통점을 찾자면, 그들이 혼자라는 것이다.
영리하고 유연한 사고가 그들의 정체성 가운데 큰 부분을 차지하기에, 그들 중 누군가가 마침내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우리가, 무리 중 유일하게 머리를 쓸 줄 안다는 사실이 자존심을 채워주기보다 ‘그래서 난 혼자야’라는 생각으로 바뀌어 신경을 건드릴 때, 그런 생각을 잊고 우리 식으로 마음 편히 놀 수 있는 장소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
혹자는 처음 그 말을 꺼낸 자가 가장 오래된 트릭스터 세트일 거라고 했다. 그 높은 지위와 가장 오래도록 살아남은 위명에 의지해 다른 트릭스터들을 불러모은 거라고.
혹자는 로키라고 했다. 그 어느 트릭스터보다도 자신의 자리에서 배척받고 있으니 다른 동류들을 모아서라도 새로운 활로를 개척해보려는 거라고.
혹자는 다 틀렸다고 했다. 그들처럼 지위와 권세가 있는 자들이 아닌, 도리어 초라하고 아무 힘도 없고 숭배받은 적도 없는 자들이 뭉쳐서 살아남기 위해 자리를 만들고 트릭스터 특유의 수완으로 강대한 존재들까지 모시는 데 성공한 거라고.
‘정답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아니야.’
시공간의 틈새에 열린 회합 장소에 로키가 들어섰다.
‘트릭스터들의 모임’, ‘트릭스터 컨벤션’이라고도 불리는 이 동호회 같은 모임은 트릭스터들이 하는 것답지 않게 정기적으로 꾸준히 열렸다. 트릭스터들의 무질서란 ‘때로는 자기 편한 대로 질서의 방식도 따르는 것’이니까.
로키는 여기 자주 오지 않았다. 일부러 빠진 적도 많았다.
여기서는 확실히 마음이 편했다. 전사가 아니라서 무시당하지도 않고 속이고 나쁜 짓을 한다는 이유로 비난받지도 않았다.
그래서 한동안 오지 않았다. 여기 오는 다른 이들과 동류라는 사실을, 그래서 아스가르드에서 환영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잊고 싶어서.
그러나 결국 이렇게 되었다. 아스가르드의 왕이 되었으나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쫓겨난 왕이 되었다. 이제 다음 행보를 결정할 때까지 갈 곳은 여기뿐이었다.
로키는 들어서자마자 바에 가서 술을 주문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컨벤션엔 미드가르드식 시설이나 인테리어가 많았다. 미드가르드 출신이거나 거기를 거점삼아 활동한 트릭스터가 많다는 이유로. 수많은 시공간 속 수많은 트릭스터들을 두루 만족시키려면 컨벤션 주최측도 안이하고 무난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그게 불만이어서 자기 편한 대로 주변을 꾸며놓아도 누가 뭐라 않는 것이 컨벤션의 매력이었다. 문제는, 로키는 자기 주변을 아스가르드 식으로도 미드가르드 식으로도 요툰 식으로도 바꾸고 싶지 않다는 데 있었다.
미드가르드 식 술 진열대를 노려보았다. 주문한 드라이 진을 홀짝이는 척하며.
수많은 트릭스터들이 컨벤션 내의 공간을 일부만 자기네 좋을 대로 바꾼다. 본래는 그만한 마법이나 능력이 없는 한갓 짐승들까지도. 그렇게 변화하는 모습을 관찰하다보면 이 장소의 비밀도 알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트릭스터들을 불러모으는 이런 자리가 어떻게 가능한 건지는 전부터 궁금했다. 호기심 역시 트릭스터의 정체성이고 지금 로키는 여기 오기 직전까지 있었던 일들을 잠시라도 잊을 만한 새로운 흥미거리가 절실했다.
자신은 여기를 아스가르드로 변화시킬 기분이 아니지만 남이 하는 걸 보면 된다. 마침 저기 누군가가 작은 방을 하나 만든 차였다. 마음에 안 드는지 찌푸린 얼굴로 갸웃거리고 있으니 금방 다시 바꿀 것이다.
낯선 문화권의 작은 방이, 여우가 옷소매를 펄럭이자 보다 크고 호화로워졌다. 그러나 여우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다시 작게 했다가, 침대를 놓았다가 없앴다가, 시대의 변천으로 보이는 다른 변화를 주었다가 하면서 쉬지 않고 계속 바꾸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시선을 느꼈는지 로키를 돌아보았다.
역시 여우였다. 제법 그럴싸하게 인간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머리 위에 솟은 여우귀와 엉덩이에서 살랑이는 여우 꼬리를 보면 그리 마음먹고 인간으로 변신한 것도 아닌 듯했다.
여우 트릭스터들은 대개 그냥 초라한 짐승이 아니면 사악한 요물이었다. 로키의 눈으로 보면 다 한갓 미물들인지라 이제까지는 눈에 띄어도 거의 무시해왔다.
이 여우는 많이 달랐다. 주변을 바꿀 때마다 엿보이는 금빛 영기, 기품이 느껴지는 우아한 행동거지와 길고 단정한 옷이 강한 능력과 높은 신분을 암시했다. 로키를 보고서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두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한갓 작은 여우가 눈을 어지럽게 해드렸군요. 진작 말씀하셨더라면 조용한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됐어.”
로키는 고개만 흔들었다.
“내가 여기 전세 낸 것도 아니고. 계속 해봐. 재미있었거든.”
“잠시나마 제가 쉴 곳을 남에게 구경시키는 취미는 없습니다.”
말투는 부드럽지만 내용은 정반대였다. 아스가르드에선 거의 들을 일 없는 트릭스터다운 대답이었다.
“쉴 장소를 만들고 있었나?”
“예. 여기 온 대다수의 손님이 그러듯이요.”
로키는 술잔을 들고 바에서 일어나 여우에게 다가갔다.
“그런 것치고는 팽팽하게 긴장해 있던데.”
“이 여우가 몸이 약해, 대충 만든 잠자리에선 제대로 쉬지 못합니다. 오딘과 프리가의 아들이시며 대현자이시며 아홉 세계에 따를 자 없는 마법사이신 하늘을 걷는 이, 위대한 로키 전하.”
그저 예를 갖출 뜻으로 한 말인 걸까, 아니면 이 여우는 자신이 여기 오기 전에 당한 일을 아는 걸까. 그래서 비꼬고 있는 걸까.
괜한 생각이다. 트릭스터들은 각자의 세계에 떨어져 지내는 존재들이고 그래서 이런 곳에라도 오지 않으면 서로의 소식을 알기 어렵다. 자신이 아홉 세계 모두에서 갈 곳을 잃은 비참한 존재라는 것을 알 리 없었다. 동요가 얼굴에 드러나지 않았기를 바라며 태연한 척 물었다.
“그러는 너는 어디의 무엇이지?”
“천령보화구미영호天靈保和九尾靈狐라 합니다. 상제의 뜻을 받들어 인간들을 돕기 위해 인간계에 내려온 아홉 꼬리 여우 요괴입니다.”
“하늘에서 내린 요괴라. 요괴는 본디 사邪라, 천계와는 상극인 존재 아니던가?”
“천계 나름의 논리에 따라 그런 존재들도 품고 심지어는 태어나게 합니다. 저 역시 한때는 왕가를 수호하는 영물로 숭배받았지요.”
“지금은 아니라는 거네?”
“다 지난 일이지요.”
여우는 담담하게 받아넘겼다. 그러나 그렇게 덤덤히 넘겨도 될 만한 일이었을 리 없었다.
로키는 여우를 바 쪽으로 손짓했다.
모든 시공간의 존재들이 모이는 이 컨벤션에서 공통의 가치를 인정받을 만한 화폐를 정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들은 트릭스터들, 영리할 뿐 아니라 호기심으로 살다시피 하는 존재들. 다른 트릭스터는 곧 다른 세계의 문물과 지식을 해박하게 축적한 존재들이고 그 지식을 나눠주는 것이 여기서는 귀한 선물을 주고받는 일이자 컨벤션을 유지하는 회비였다.
“네가 마셔본 적 없을 특이한 술이라도 주문해주지. 아, 혹시 독한 술 싫은가?”
“송구하지만 그렇습니다. 주정이 없는 차나 주스였으면 좋겠습니다.”
여우는 순순히 바까지 따라와 로키 곁에 앉았다. 이 컨벤션 안에선 트릭스터들끼리 싸우는 것은 금지. 그러니 이렇게 쉽게 따라오는 모양이었다.
로키는 잠시 생각 끝에 보이지 않는 바텐더에게 무언가를 주문했다. 곧 로키의 드라이 진 옆에 아스가르드식 뿔잔이 나타났다.
여우가 잔을 집어들고 안을 살폈다. 노르스름한 액체에서 상큼한 과일향이 났다. 알콜 향은 없었다.
“내가 너만할 때 마시던 거야.”
로키가 설명했다.
“아스가르드에선 술 이외의 마실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도 안 하고 살거든. 그러니 가끔은 독한 술에 취하는 대신 맑은 정신으로 생각을 정리하며 홀짝일 것이 필요해도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팔 수밖에 없더란 말이지. 내 취향의 몇 가지 과즙을 섞고 꿀로 맛을 낸 거야.”
여우가 귀를 쫑긋거리며 잔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로키에게 예를 표한 뒤 조심스럽게 잔을 입가에 갖다대 소리없이 마셨다. 대뜸 목이 꺾어져라 고개를 젖히고 꿀꺽거리지도 않고 잔을 바닥에 내려쳐 깨지도 않았다.
“이국적이고 시원한 향이 과연 정신을 가다듬기에 좋군요.”
여우가 옅은 미소를 짓고 일어났다.
“이 자리에 자주 오지는 못했는데, 이런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자리임을 생각해 좀더 시간을 냈어야 했군요. 로키 전하의 개인적인 비법에 따른 음료를 대접받다니 생각지도 못한 영광입니다.”
로키가 손짓하자 여우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로키 앞의 술잔을 바라보았다.
“이건 술 싫어하는 존재가 마실 게 못 돼.”
로키가 자기 잔을 집었다.
“그리고 난 네 왕이나 신이 아니니 나한테 그렇게 예를 갖출 필요도 없고.”
“컨벤션 주최자 중 한 명이라는 풍문이 있을 정도로 이 안에서 손꼽히는 분이십니다. 어찌 예를 갖추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거 헛소문.”
로키가 드라이 진을 훌쩍 마셨다.
“주최자가 누군지, 어떤 힘으로 이런 장소를 만들었는지 나도 궁금해. 나는 아니야.”
“그렇습니까.”
여우는 실망한 기색이었다. 트릭스터답게 잘 감추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걸 보는 로키도 트릭스터였다. 그리고 로키는 실망한 기색에 특히 익숙했다.
“주최자를 찾고 싶은 거냐?”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래.”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여우가 다 마신 뿔잔을 내려놓았다.
“이런 귀한 것을 대접받았으니 저도 약소하나마 안주가 될 만한 것을 대접하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좋아, 어디.”
뭘 먹을 기분이 아니긴 한데 결국 호기심이 우울함과 자기혐오도 눌렀다. 여우가 손짓하자 도자기로 된 접시에 옹기종기 놓인 고기와 과자가 나왔다. 아스가르드에서도 미드가르드에서도 보지 못한 스타일이었다.
“제 고향인 천계에서 만드는 과자입니다.”
여우가 설명했다.
“가보지 않은 지 천 년이 다 되었으니 지금은 유행에 뒤쳐졌을지도 모릅니다만, 그럴 가능성은 낮습니다. 변화와는 담을 쌓은 곳이니까요.”
“고향을 천 년이나 떠나 있는 거냐?”
천 년이라니 에시르 기준으로도 짧은 시간이 아니다. 로키는 비로소 조금 놀라서 여우를 새삼 훑어보았다.
“네 모습을 보면 천 년이나 살았다고 믿기 어렵다만. 너희 종족은 그 정도로 장수하는 거냐?”
“그런 게 아닙니다.”
여우가 고개를 저었다.
“어린 시절에 횡액을 당해 성장이 멎어버렸습니다. 수명을 개의치 않을 만큼은 신령한 존재입니다만 이 어린 모습은 상흔과 같습니다. 인간 손에 머리와 꼬리를 잘린 결과이지요.”
로키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 너는 인간들을 돕고 왕실을 수호하는 존재였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니, 말 안 해도 알겠군. 미드가르드 인들이란.”
“천지가 다 제 적이 되어도 그만은 제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 거라 믿었던 인간이었지요.”
여우는 그런 말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털어놓았다.
“위험한 적을 코앞에 두고 제가 다칠까봐 손을 늦추다가 자기가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그땐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바보라고 쓴 부적을 이마에 붙여 이마 가죽을 벗겨도 떨어지지 않게 했다가 추향대제가 끝난 뒤에야 떼어줬는데......”
여우가 피식 웃었다.
“안 그래도 궁에서 미묘한 처지인 천덕꾸러기 왕자인데 중요한 제례에 빠질 수도 없고, 바보 딱지를 이마에 붙인 채 나갈 수도 없어 고민하는 꼴이 볼만했지요. 뗄 수는 없어도 머리끈을 그 위에 감아 가리면 된다는 그 간단한 생각도 해내지 못하는 바보였으니 저는 마땅히 붙일 것을 붙였던 건데 가신들은 또 어찌나 성화던지......”
반쯤 과거로 돌아가 있던 눈동자가 지금으로 되돌아왔다. 어깨에서 슬쩍 흘러내린 비단 겉옷을 다시 똑바로 했다.
“날씨를 걱정할 필요 없는 곳에 간다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굳이 이런 걸 둘러주다니, 충성스런 가신들이란 주인이 누구건 원래 골치를 썩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가봅니다.”
로키는 표정만 딱딱하게 했다. 자신은 그런 부하를 거느려본 적이 없었다. 아스가르드의 병사들은 지위보다 힘과 위명에 굴복했고 한갓 호위병들조차 첫째 왕자의 명을 따를 때와 둘째 왕자의 명을 따를 때 태도가 달랐다.
팔자 늘어진 불평을 하는 여우를 조금 괴롭혀주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렇게 널 금이야 옥이야 하던 놈이 어쩌다 널 토막낸 건데?”
여우의 얼굴에서 핏기와 함께 표정이 사라졌다.
“모릅니다.”
이어진 대답은 조금 놀라웠다.
“적을 속이기 위한 반간계였다면 저를 진짜로 죽일 리 없었고, 오해였나 생각해봐도 그럴 만한 꼬투리가 없었습니다. 이것도 다 제 입장에서 희미해진 기억에만 의존해 하는 이야기이니 그에게 물어보면 또 다를지 모릅니다만, 저는 그를 배신한 적 없었습니다. 그가 저를 미워할 만한 짓을 한 적도 없었습니다. 말했듯 장난을 좀 치기는 했습니다만 그가 받아주지 않을 만한 장난은 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늘 그야말로 저를 너무 아낀 나머지 발목을 잡힐까봐 걱정했는데......”
로키는 토르를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도 토르가 먼저 자신의 등을 노렸다면 저렇게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결국 먼저 등 뒤를 찌른 건 자신이었다.
토르도 저리 말하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내 동생 로키를 늘 소중히 여겼는데 왜 로키가 나와 아버지를 배신했는지 모르겠다고.
뭐, 지금은 알 만큼 알 것이다. 오딘과 친구들에게 모든 설명을 들었을 테니. 지금은 아스가르드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세계의 중심 51 ㅣ- 회색도시&검은방


“조심해!”
하무열이 달려 나갔다. 막 정신을 차린 서태준이 고함을 지르며 이들에게 덤벼왔다. 하무열이 철퇴를 휘둘렀으나 서태준은 그 자루를 잡아버렸다.
“마, 말도 안돼.”
권혜연이 서둘러 일어나려다 휘청였다.
“찬 내가 발목이 나갔는데 어떻게?”
“이 인간. 머리가. 좀 심각하게 딱딱하거든.”
힘겨루기 하느라고 이를 악문 채로 하무열이 말을 보탰다.
“피해, 빨리....”
서태준이 하무열의 팔목을 잡아 비틀었다. 그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야압!”
양시백이 그의 옆에서 덤볐다. 서태준이 하무열을 놓고 물러나 피했다. 세 사람이 마주 대치했다.
양시백은 다친 데가 없고 철퇴는 빼앗겼어도 서태준은 팔 한 쪽이 부러졌다. 그런데도 이길 거라는 자신감이 들지 않았다. 양시백은 저게 사람은 맞나 의구심이 들 지경이었다.
‘재석 아저씨... 아니면 아빠라도 좋으니까 좀.’
콰당!
침실의 정문이 열렸다. 벽에 부딪친 문짝이 경첩에서 빠져 기우뚱했다.
양태수가 나타났다.
어째서인지 그을음을 뒤집어 쓴 채였고 다시없이 험악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있었지만 서태준과 대치중이던 사람들에게는 그보다 더 반가운 모습은 없었다.
“아, 아빠!”
양시백이 소리쳤다. 아들을 보고 표정이 환해졌다가, 그와 대치중인 서태준을 보고 양태수가 다시 표정을 험악하게 굳히고 검을 뽑아들었다.
“당장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면 죽이진 않겠다.”
“그래?”
서태준이 씩 웃었다.
“난 죽일 거다!”
그가 먼저 달려들었다. 검으로 철퇴를 정면에서 상대하는 건 바보짓이므로 양태수가 피하며 서태준의 옆구리를 노렸다.
“그 속셈 누가 모를 줄 알고!”
서태준이 양태수 쪽으로 몸을 돌리며 칼날을 철퇴로 막아냈다. 그대로 가로로 휘둘러 검을 부러뜨리려는 걸 양태수가 검을 거두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싸움 좀 해봤나보지?”
“내가 할 소리다.”
두 사람이 먹이를 노리는 맹수와도 같은 눈빛을 하고 서로의 주위를 맴돌았다.
양태수는 고민했다. 어떻게 봐도 자기 쪽이 여유로웠다. 자기는 ‘이미’ 사람들을 구한다는 목적을 달성했고 지원도 곧 올 거고 상대는 부상까지 입었다. 그런데도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안 들어다.
이대로 시간을 끌어볼까 하다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기껏 아들을 구하러 와 놓고, 기백으로 밀리고 싶지 않았다.
양태수가 먼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상대의 부상을 노려 왼쪽 위로 내리쳤다. 그렇게 하는 게 당연했기 때문에 서태준이 몸을 옆으로 피하며 철퇴를 횡으로 휘둘렀다.
옆구리로 날아드는 쇠뭉치를 양태수는 건틀렛 낀 왼손으로 철퇴의 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두 사람은 힘 대결에 들어갔다.
‘윽.’
양태수가 이를 악물었다.
‘꼼짝을 안 해... 이거 사람 맞냐.’
이대로 대치하면 손잡이를 쥔 상대가 유리했다. 그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쥐었다. 한 손으로 휘두르기엔 무겁지만 상대가 무기를 봉쇄당한 틈에.
“엥? 아직 안 끝났어?”
긴장감 없는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서태준이 철퇴를 놓고 뒤로 펄쩍 뛰어 물러났다. 빈 옆구리를 파고든 칼끝이 허공에 멈췄다. 최재석이 혀를 찼다.
“늦었잖아.”
양태수가 핀잔을 주었다.
“아, 기왕 애들 구하러 가는 거 혼자 활약 좀 하라고 일부러 천천히 와줬더니...”
너스레를 떨면서도 최재석은 빈틈없이 서태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저씨가 일대일은 못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애들 좀 다친 것 같아서 빨리 끝내야 하거든.”
“변명해 줄 필요 없어. 같이 간다.”
두 사람이 전투 태세를 하고 서태준을 포위하듯 거리를 벌렸다. 이제는 정말로 승기를 잃은 서태준이 어느새 물러나 자기 제자들 앞을 가로막고 있는 하무열을 보았다.
“이렇게 끝이라 생각하지 마라.”
그리고 그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뒤돌아 뛰었다.
“거기 섯!”
양태수와 최재석이 서둘러 뒤쫓았다. 그래도 여유는 있었다. 이미 이 건물은 포위되어 있고 수색대가 올라오고 있는데 설마.
서태준이 드레스룸으로 뛰어들어갔다. 두 사람이 쫓아가 문을 열어젖혔을 땐 마법의 잔상이 막 사라지고 있었다.
“비겁하게 도망가냐!”
최재석이 소리쳤다.
“어떻게 이런 데서 홀랑.... 마법 따위.”
“마법이 왜요?”
“으힉!”
최재석이 깜짝 놀라 문가에서 비켰다. 권혜연이 벽을 짚고 들어와 안의 마법진을 훑어보았다.
“동기화진이고 거리는 멀지 않겠네요. 지금이라도 수색 범위를 넓히면 어쩌면.....”
“혜연아아아아아아!”
이미 반쯤 부서져 있던 방문이 다시 한 번 쾅 소리를 내었다.
“늦으셨습니다, 교수님.”
권혜연보다 먼저 하무열이 권현석 교수를 맞았다. 권현석은 사람들의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하무열 교수님 다치셨어요?”
“저보다 이 녀석이 급합니다.”
하무열이 류태현을 내밀었다.
“아뇨, 선생님 먼저 봐주세요!”
양시백이 득달같이 배준혁을 들이대었다.
“머리를 맞았고 피난다고요! 류태현씨는 적어도 방호를 둘렀잖아요?”
“어, 그래.”
하무열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지금 위급한 사람 없으니까 내키는 사람 먼저 치료하세요.”
권현석은 조금 고민하다 배준혁의 상처부터 살폈다. 심하게 다친 게 아니라 해도 머리는 자칫 잘못될 가능성이 높은 부위고 류태현은 방호 전문 마법사가 방호를 두른 거니까.
“그런데 저 녀석 손 왜 저지경입니까?”
류태현의 손은 탈구된 엄지손가락이 그대로 방치된 탓에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잡아 뽑았거든요. 마력 제한 족쇄 벗기느라.”
“뭐라고요?”
“우선 배준혁씨 치료부터 하세요, 아빠.”
권혜연이 다가왔다.
“지금 여기 물어봐야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요.”
“응, 그래. 알았다.”
권현석이 허둥지둥 치료 주문을 사용했다. 한숨 놓은 하무열이 일어나 주변 상황을 보았다.
“너무 늦진 않았지요?”
최재석이 와서 웃었다.
“그야 쫌만 더 빨랐으면 그... 놈도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우리 최대한 서둘렀다고요. 아저씨는 막 불타는 계단을 뚫고....”
“네? 계단이 불타요?”
시백이 깜짝 놀랐다. 그 목소리에 걱정하는 기색이 있는 걸 듣고 양태수는 표정관리를 하느라 쩔쩔맸다.
“응, 좁은 계단에 무슨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쌓아놔서 치우고 가려고 하니까 불이 붙던데. 아저씨가 막 불타는 나뭇가지를 베고 헤치며....”
“그..렇게까지 엄청난 건 아니었어.”
양태수가 딴 데를 쳐다보며 헛기침했다.
“아, 그래서 검댕이....”
류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최재석이 양시백을 쳐다보았다.
“어... 걱정시켜서 죄송해요.”
양시백이 아주 작게 말했다. 양태수가 허둥지둥 그의 손을 잡았다.
“아니 네가 죄송할 게 뭐 있니, 자식을 구하러 오는 건 당연한 의무고.”
시백이 눈을 치켜떴다. 양태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이거 짜식이 말야, 솔직하게 구하러 와줘서 기쁘다고 하면 되잖냐. 쫌 늦었다곤 해도.”
최재석이 양시백의 어깨를 안고 머리를 북북 문질렀다.
“아무도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면 다행이다. 그런데 어째서 너랑 준혁 학생까지 잡혀온 거냐?”
“그게.....”
양시백이 목을 움츠렸다.
“사건 분석은 돌아가서 합시다.”
하무열이 말했다.
“치명적이지는 않아도 다들 다쳤고, 위험한 곳을 헤매느라 많이 지쳐있습니다. 우선은 안전한데서 쉬게 하고 현장 확인이나 진술 확보는 조금 늦어도 괜찮을 겁니다.”
“찬성합니다.”
치료를 끝내고 일어난 권현석이 말했다.
“그 편이 회복도 빠를 거고요. 그럼 하무열 교수님.”
“예, 이 애들 데리고 가면 되는 거지요?”
하무열이 짐짓 머릿수를 세었다.
“두 쌍 네 명 해서 다 있군. 그럼 양태수씨 돌아가는 길 경호를 담당해주시기 바랍니다.”
“네? 아, 네.”
“권혜연 학생도 같이 돌아가세나. 류태현은 지금은 마법사 구실하긴 힘들 것 같고.”
권혜연의 표정이 찌푸려졌다가 하무열이 발치를 눈짓하자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아빠, 저 쪽 안에 탈출용 마법진 있으니까 주변 좀 넓게 수색해 봐야돼요. 범위가 약 2km 안 될 것 같던데....”
“너무 힘빼지 마십쇼. 그렇게 쉽게 잡힐 놈이 아닙니다.”
하무열이 말했다. 권혜연도 권현석도 그를 쳐다보았다.
“....사건 정황은 가서 듣도록 하지요.”
권현석이 ‘가서’에 힘을 줘서 말했다. 하무열은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 애들을 이끌어 이 방을 나갔다.
“범인이 하무열 교수 아는 사람이라고? 허강민이 아니고?”
“수사국 제복 차림이었습니다.”
최재석이 말했다.
“싸우는 것도 제대로 훈련 받은 것 같았고, 교수님이 수사관이던 시절 알던 사람이라는 거겠죠.”
그가 잠깐 있다 덧붙였다.
“개인적인 관련도 있어보였고요.”
“허강민으로 부족해서 하무열 교수까지 백선교와 얽힌 과거사가 있다 이거지.”
권현석이 혀를 찼다.
“진짜 앞으로 걱정된다, 걱정돼.”


관련된 과거 사건의 정황이 수사국 내에서도 기밀로 되어있다는 이유를 들어 하무열은 비공개 진술을 주장했다.
몇 몇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그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수사국에 그 사건의 ‘객관적인’ 내용을 조회해 비교한다는 조건이었다.
“윤리 위원회 사람들은 당연한 얘길 협박처럼 하는 재주가 있다니까요. 이런 일에서 제 진술만 100% 믿어줄 거라고 생각하는 바보는 대학 아니라 어디에도 없을 텐데.”
하무열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피의자 심문을 할 때에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고 가끔 긴장을 늦출 수 있도록 음료 같은 걸 주는 법이라고 하무열 본인이 주장했기 때문이다.
“말씀하신 십 년 전에 있었던 ‘실패한’ 백선교 소탕 작정과 하은성 살해 사건에 대한 사건 기록을 가져왔습니다.”
양수연이 종이 봉투를 꺼냈다.
“찾느라 조금 고생했습니다. 기밀이라기보다는 다들 쉬쉬하며 말하기 싫어하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서류를 아미 교수에게 건넸다.
“그렇겠죠, 수사국의 간부가 인질을 살해해 작전을 망치고 도주하다 자기 아내를 살해한 사건입니다. 수사국 입장에서야 필사적으로 덮어두고 싶겠지요.”
진술 기록을 위해 동석해있던 권현석이 하무열을 쳐다보았다. 하무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때 나타났던 그 인간 얘기입니다. 서태준. 그가 제 누나를 죽였습니다.”
하무열이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아미 교수가 봉투에서 서류를 꺼냈다.
“..라는 게 제가 순 자기합리화를 했을 때 얘기고.”
하무열이 다시 눈을 떴다.
“작전을 망친 건 ‘우리’ 였습니다. 그가 무너지는 만큼은 저도 무너졌던 겁니다. 당시엔 제대로 자각하지 못했지만... 백선교 놈들의 함정에 빠졌던 거죠. 서태준은 존재만으로 범죄자를 기죽게 만드는 나름대로 유능한 경관이었지만 복잡한 사건이나 교묘한 함정을 꿰뚫어보는 능력은 부족했습니다. 그런 건 제 몫이었지요. 업무 동료로서의 상성은 괜찮았다고 이제 와선 생각합니다. 우리가 완전히 남이었더라면 차라리....”
그가 아련한 눈을 했다 고개를 흔들었다.
“뭐 작전이 정확히 어떻게 망했나 자세한 이야기는 거기 있을테니 읽어보시고, 자기 화살이 박힌 아이 시체를 보고 그는 패닉했습니다. 그리고 전 지금이 이자를 저와 제 누나 인생에서 제거할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표정으로 질문하고 있는 심문관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집에서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누나와 결혼하기 전부터 쭉 그랬지요. 어리고 힘이 없어 그런 결혼을 막지 못했다는 제 오랜 죄책감이 엉뚱한 데서 튀어나온 겁니다. 저는 그를 도와 사건을 조작해줄 것처럼 말하곤 도리어 없던 죄까지 만들어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가 백선교와 내통했다고요. 항변도 못하고 공권력을 빌어 살해해버릴 작정이었는데, 그는 도망쳐서 자수를 권하던 누나까지 살해하고 도주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백선교에 가 붙은 모양입니다. 하기야 그놈들은 그런 식으로 모든 걸 다 잃고 절망에 빠져 붕괴해버린 사람들을 주워가는 게 특기니까요. 심지어 당시의 저한테도 제안이 왔었죠. 참 뻔뻔한 놈들 아닙니까.”
하무열이 웃었다. 심문관들은 웃지 않았다.



검은 남자 68 ㅣ- 회색도시&검은방


백선교 수사는 순조로웠다. 새로 체포된 간부들이 상당한 세력가인데도 정치적인 방해나 압력 없이 수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언론에선 성역 없는 수사라며 추켜세우기까지 했다.
“실버 트와일라잇 때문입니다.”
배준혁이 류태현에게 설명했다.
“그들이 백선교와 경쟁관계이기 때문에 경찰에 힘을 실어줘서 정의의 이름으로 경쟁자를 제거하고 있는 거죠. 아마 백선교의 핵심 인물들을 다 잡아넣을 때까지 이런 비호는 계속될 겁니다.”
“즉 백선교 수사가 마무리되고 나면 실버 트와일라잇이 새 적이 된다는 뜻이지. 그리고 그때는 아무런 비호도 없을 거다.”
곁에서 하무열이 끼어들었다.
세 사람은 시 외곽의 야산에 있었다. 아무도 없고 아무 시설도 없는 산자락에 등산 나온 것처럼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배준혁은 류태현의 실습 조교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쉽게 승낙했다. 그리고는 적당히 인적 없는 야산을 골라 나오도록 했다. 마법 교습을 클럽에 들킬 수 없으니 시간과 장소만 정해놓고 현지 집합해야 한다고 했다.
하무열과 함께 온 것은 류태현의 발상이었다. 배준혁을 감시하는 것도 혹시 모를 실버 트와일라잇의 감시를 피하는 것도 혼자서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이럴 때 믿을 만 하고 마법도 조금이나마 아는 사람은 무열 선배뿐이었다.
같이 온다고 말도 안 하고 데려왔지만 배준혁은 하무열을 보고도 놀라는 기색 없이 웃으며 인사했다. 그리고 정보를 교환했다.
“클럽에서는 여전히 제게 수사팀 내부 정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류태현 순경이 마법사가 된 것을 보고해도 되겠습니까?”
“될 리가 있냐!”
하도 아무렇지 않게, ‘내일 갚을 테니 택시비 좀 꿔주시겠습니까?’ 하듯 물어서 류태현은 얼른 반응하지 못했다. 단칼에 잘라준 사람은 무열 선배였다.
“이쪽의 비밀병기를 적에게 미리 털어줘서 뭘 어쩌려고? 정말 실버 트와일라잇 클럽으로 넘어가기라도 할 작정인가?”
“그럴 리가요.”
준혁이 침착하게 대꾸했다.
“허강민이 밀실 제작자에서 희생자로 떨어졌으니 그가 마력을 봉인당하고 마법사로서 쓸모 없어졌으리라는 건 클럽에서도 단정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밀실은 도중에 중단되었죠. 간부가 보낸 괴물을 밀실 안에서 처리하고 모두 살아나와서요. 새 마법사가 있으리라고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류태현 순경은 수시로 허강민의 병실에 드나들고 있습니다. 제가 류태현 순경이 마법사가 된 것을 알고도 입다물었다고 클럽에서 눈치채면 전 끝장입니다.”
“류태현이 거기 드나드는 건 허강민에게 용서받고 싶어서 꾸준히 가서 싹싹 비는 거라고 하면 돼.”
하무열이 귀 후비는 시늉을 했다.
“클럽엔 자네가 마법사라는 거 경감님도 국장님도 모르는 비밀인 것처럼 말했다며? 그럼 경감님이 자네한테 마법 관련 이야기를 전부 감추는 것도 당연하지. 자넨 저 녀석과 국장님의 복안은 전혀 모르는 것으로 해야 해.”
“알겠습니다.”
하무열의 완강한 태도에 배준혁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물러났다.
“할 수 없군요. 그건 포기하겠습니다. 그럼 됐고, 허강민 씨에겐 얼마나 배웠습니까?”
갑작스런 화제전환에 류태현은 배 형사님과 대화하는 게 원래 이렇게 힘든 일이었던가 헷갈려하며 공책을 꺼냈다. 배준혁은 공책을 펼치고 죽 읽어보았다.
“과연 대단한 재능이군요.”
마지막 장까지 덮고 배준혁이 류태현을 보았다.
“쇼고스를 맨손으로 무찔렀다고 듣기는 했습니다만 마력이 봉인된 마법사에게 설명만 들어가며 배웠는데 이 정도라면 분명 대단한 겁니다. 제가 처음 배울 때는 이만 못 했는데 제 스승님은 재능이 충분하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런가요?”
“이제까지 이론 수업에 치중했으니 실감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배준혁이 공터 한쪽에 작은 돌들을 쌓아 돌탑을 만들기 시작했다.
“사람을 직접 공격하는 종류가 아니라 땅을 뒤흔들거나 주변 사물을 이용해 공격하는 것부터 해봅시다.”
“저기요.”
류태현이 살짝 물었다.
“공격부터 배워야 해요? 방어나 치유 같은 것부터 배울 수는 없을까요?”
“저는 쉬운 것부터 가르치려는 겁니다.”
배준혁은 돌탑을 톡 건드렸다. 주변 돌멩이를 모아 대충 쌓은 돌탑은 그것만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주변의 작은 사물을 움직이는 일이 당연히 인체에 영향을 미치는 일보다 훨씬 쉽지요. 작은 상처라고 해도 벌어진 상처를 봉합하고 새 살이 돋게 하고 기능을 회복하는 데는 복잡한 메커니즘이 작용합니다. 치유 마법은 초보자용 마법이 아닙니다.”
무너진 돌탑을 다시 쌓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아까와 비슷하게 얼기설기 쌓고 있어서 또 쉽게 무너질 것 같았다.
“공격 마법이란 말을 써서 오해한 모양인데, 정확히 말하자면 물체를 움직이거나 부수는 마법입니다. 기왕 배우는 거 공격에 응용하는 거죠.”
돌탑을 다 쌓고 준혁이 일어났다. 그리고 손짓으로 류태현과 하무열을 물러나게 했다.
“직접 해보시면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될 겁니다. 저 돌탑을 손대지 않고 무너뜨리는 것이 오늘의 학습목표입니다.”


“실패한 모양이죠?”
하무열에게 허강민이 피식 웃어보였다.
“성공했으면 저한테 쪼르르 달려와서 자랑했겠죠. 근무시간 핑계대고 안 오는 게 아니라. 그 녀석 특수수사팀에 배속돼서 딱지 끊으러 안 다닌 지 오래인 거 압니다.”
“애인이 그렇게 귀엽냐.”
하무열이 빈정거렸으나 허강민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가짜 애인이라도 웃긴 짓을 했을 때는 웃을 수도 있죠. 어때서요. 그래서, 어떻게 실패하던가요?”
“근접하는 것까진 성공했어. 바로 근처의 풀을 뽑는다든가, 살짝 흔든다든가. 이론으로만 배운 걸 실제로 할 땐 다 그 정도는 헤맨다고 배 경사가 가볍게 위로하고는, 바로 개박살 내지만 않았어도 그 지경은 안 났을 텐데.”
“어떻게 박살냈습니까?”
허강민이 눈을 빛내며 묻자 하무열은 대답 대신 허강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허강민의 눈빛은 증오하는 상대가 물먹은 것을 기대하는 잔인함보다는 가볍게 놀리고 웃으려는 장난기에 더 가까웠다.
“왜요?”
“아니, 아무튼 시간 다 됐으니 자기가 시범 보인다면서 돌을 집어 던져서 무너뜨렸어.”
“아.”
허강민이 혀를 찼다.
“그렇군요. 손대지 않고 무너뜨리는 게 학습목표였지 마법을 써서 무너뜨리라고는 하지 않았어요. 이런 하무열 같은 경찰을 봤나.”
“그거 내 욕이지?”
“하지만 전 마법 실습을 시키랬지 전투나 생존술 훈련을 시키라고 한 게 아닙니다. 학습목표를 잊은 건 배준혁 쪽 아니에요?”
“마법을 배우는 것보다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할 작정이었다더라.”
하무열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법으로 달성하기 힘든 목표가 있으면 바로 마법 이외의 어떤 수단이라도 취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력계 형사는 원래 다 그렇게 교활한가요? 징그러운 인간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다시금 혀를 차는 허강민을 하무열이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왜 그렇게 쳐다봅니까? 할 말 있어요?”
“그래.”
하무열의 말투에서 느슨한 장난기가 벗겨져 나갔다.
“류태현이 골탕먹어서 고소해 할 줄 알았는데 표정이 왜 그 모양이야?”
“전 류태현이 안전한 환경에서 마법 쓰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에게 맡긴 겁니다. 그런 식의 임기응변 훈련도 하기는 해야겠지만 중점은 이쪽에 두라고 전해주세요.”
“네 제자를 남이 엉뚱하게 가르쳐놔서 떫다?”
“예. 바로 그겁니다. 하무열 형사도 만약 류태현이 다른 사람을 선배님 선배님 하면서 따라다니면 기분 나쁠 거잖아요.”
하무열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
“너 여전히 류태현 미워하는 거 맞냐?”
허강민의 표정이 굳었다.
“나한테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놈 미쳐 죽으면 곤란하니까 사귀는 것처럼 말하고, 국장님한테는 너도 마음이 있으니까 가능한 거라고 말하고, 대체 본심은 뭐냐?”
“그걸 왜 하무열 형사에게 말해야 합니까.”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허강민은 난처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야 난 여전히 류태현의 선배고 그놈을 걱정하고 있으니까.”
하무열의 기색은 여전히 진지했다.
“그리고 너도 걱정하는 중이고.”
“저를 왜요?”
“그렇게 차버린 부채감이라고 해두지.”
허강민은 표정을 찌푸리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와선 상관없잖아.”
하무열이 계속 말했다.
“류태현하고 이대로 진짜 애인이 된다고 해도. 여전히 그 녀석이 증오스럽다면 네 마음이지만 아니라고 해서 널 비난하거나 비웃을 사람 없어. 국장님이라면 도리어......”
“그분 걸고 넘어지지 말아요.”
허강민이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
“국장님이 제게 뭘 바라시는지는 대충 알고 있습니다. 그 기대에 부응하든 못하든 하무열 형사가 상관할 일은 아닙니다.”
하무열은 웃음을 참으려고 애썼다. 허강민이 정곡을 찔려 허둥대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당장은 이대로 괜찮을지도 모른다. 허강민이 자신은 어디까지나 ‘실용적인’ 이유에서 류태현에게 ‘가짜’ 애인 노릇을 해주는 중이라고 겉으로 주장하게 놔두고, 행동으론 정말로 류태현을 아껴주고 곁에 두고 보듬는다면, 류태현이라면 그 정도로도 만족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나마 허강민이 점차 괴물에서 인간으로 되돌아온다면 국장님도 기뻐하며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힘쓸 것이다.
‘허강민은 내 아들 같은 나이야.’
자신이 허강민과의 관계를 의심하며 캐물었을 때 국장님은 그렇게 대답했었다. 밀실 안 같은 곳에서 그런 식으로 도발당하면 결국 사람은 본심을 뱉게 되어있었다.


마법 공부 말고도 류태현은 할 일이 많았다. 그도 이제 수사팀의 일원인 만큼 산더미같은 업무를 떠안고 있었다.
오랜만에 집에 와서 일단 쓰러지기부터 하려는데 전화가 왔다. 제발 호출이 아니길 빌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 오랜만이군.]
나이에 걸맞지 않게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 장난기만큼이나 뚜렷한 악의. PDA로 몇 번 들었을 뿐이지만 못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류태현은 피로도 잊고 벌떡 일어났다.
“강성중!”
[그래. 나다. 요즘 꽤 바빠보이더군.]
류태현은 이 집에도 숨겨둔 방어용 부적을 생각했다.
강성중이 그걸 깨고 들어올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마법사면 어쩌나 겁이 났지만 마법사간의 싸움은 정신력 싸움이라고 했다. 기죽어서는 안 되었다.
자신도 이젠 마법사였다.
[쇼고스를 무찌르고 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자라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초심자 신세인가? 기다리다가 목 빠지겠군.]
“날 감시하고 있었습니까?”
류태현은 당황해서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그냥 봐서는 눈에 띄는 게 없어 허강민 씨에게 배웠던 감지 주문을 한 번 써 보았다.
전신에 한기가 올라왔다. 마법은 결코 거저가 아니었다.
무엇인가 깎여나간다. 돌이킬 수 없이 변한다.
밀실을 빠져나오고 정신을 갓 차린 뒤 들어가기 전을 떠올렸을 때와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주문은 성공했다. 거실 한쪽 벽에 드라이플라워 다발과 함께 자신이 걸어둔 주문 주머니가 먼저 눈에 뛰어들 듯 들어왔다.
창 밖에도 무언가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검붉은 불길 같은 것이 안을 노려보며 빈틈을 찾으려는 듯 이리저리 접근했다 멀어졌다를 반복했다. 그러나 빈틈을 찾지 못하고 밖에서만 위협하며 눈알을 굴렸다.
[허강민이 네게 마법을 가르치는 중이지?]
자신이 허강민 씨의 병실에 드나드는 건 누구라도 금방 알 수 있다. 강성중은 자신이 검은 남자를 만나고 쇼고스를 쫓는 것을 보았다. 겨우 이 정도 들었다고 상대에게 전부 읽힌 양 벌벌 떨 수는 없었다.
“그래서요?”
류태현은 여유로워 보이려고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허강민 씨는 백선교를 무너뜨릴 겁니다. 그러기 위해 제가 마법을 배워야 하니까 가르치는 거고요. 물론 저도 목적이 같으니 열심히 배울 겁니다.”
[백선교를 없애?]
강성중이 웃었다. 세상에서 제일 실없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꿈은 크게 가질수록 좋지. 그래, 큰 꿈일수록 꺾는 맛이 있으니까. 하지만 거기까지 커버리면 곤란하다고. 실현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걸 스스로도 느껴서, 꺾어도 김 빠진 체념밖에 얻지 못하니까 말이야.]
저 밖의 마법이 무엇이든 강성중이 쓴 것임은 분명했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따라 그것도 움직였다. 눈코입도 없는데 느껴지는 ‘표정’이 강성중의 감정을 그대로 전달했다.
류태현은 이를 악물었다. 뭐라고 대꾸해도 강성중에게는 놀림거리밖에 안 될 게 뻔한데 대꾸하지 못하는 것도 속이 쓰렸다. 무열 선배 같은 말주변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대체 허강민이 얼마나 사근사근하게 잘해주면 그런 허황된 목표에 넘어가 마법에 정진할 수 있게 되는 거지?]
류태현이 침묵하는 동안 강성중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문장뿐 아니라 어조에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저열한 의도에 류태현은 화가 치밀었다.
“당신은 무슨 상관이야!”
[무슨 상관이기는. 한때 자네가 지금 있는 자리, 즉 허강민의 섹스 파트너 자리를 차지했던 선배로서 상관있지.]

첫 술 ㅣ- 또봇


Characters: 권리모, 권세모
Rating: NC-17
Warnings: 근친상간
Summary: 막 어른이 된 세모에게 리모가 술을 가르친다.

양달님 생일 선물로 드린 셈림에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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