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

비번 안내

18금용 티스토리 화산섬 창고의 비번은 해당 카테고리 글에 감상을 남겨주셨던 분에 한해서 트위터 쪽지 https://twitter.com/Idonwanause 나 메일 hicstans@gmail.com으로 성인임을 어필하여 문의하시면 됩니다. 제가 봐서 성인 같으면 답을 드립니다. 전부 답하지는 않습니다.

화산섬 본관

hicstans's multi isles for love

팬픽션 위주인 홈입니다.
현재 (단 하나라도 글이) 있는 건
슬레이어즈 (제르제롯, 제르리나)
아포크리파 제로 (플라제이, 알렉사피 위주 제이드 총수)
안젤리크 (수암 광암 위주 클라비스 총수)
강철의 연금술사(에드로이,하보로이 위주 대령총수)
해리포터(해리-세베루스)
엑스맨(스콧 서머즈)
유희왕(진유우기-카이바)
마비노기(루에타르)
테니프리(..포스팅참조 요망;;)
아이실드 21(히루마 총수)

flag

free counters

a

ao3

제 AO3계정입니다. 불펌 아니에요. http://archiveofourown.org/users/hicstans/pseuds/hicstans


말하자면 대문 - 화산섬의 분관에 어서오세요.


비번 안내

모바일로는 오른쪽 칼럼이 안 보이므로 포스트로 올림.


비번 안내
18금용 티스토리 화산섬 창고의 비번은 해당 카테고리 글에 감상을 남겨주셨던 분에 한해서 (카테고리 마다 비번이 다릅니다) 트위터 쪽지 https://twitter.com/Idonwanause 나 메일 hicstans@gmail.com으로 성인임을 어필하여 문의하시면 됩니다. 제가 봐서 성인 같으면 답을 드립니다. 전부 답하지는 않습니다.

검은 남자 62 ㅣ- 회색도시&검은방



시백이 앞에서는 그렇게 듬직하게 웃어보였지만 양태수도 속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시백이 아무 설명도 안 했기에 도리어 그 공포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었다. 양태수 자신 장희준 회장의 힘을 모르는 바가 아니므로 시백이 지나치게 겁먹은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직서보다도 은근하고 안전한 방법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고민에 휩싸여서 출근해보니 회장님의 호출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꼭 좀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네.”
사람을 찾아오라는 명령 정도는 전에도 수행해본 적 있었다.
“자네도 언제까지고 내 옆에만 붙어있어서야 훌륭한 재능을 썩히는 게 되지 않나.”
회장님이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거기 적힌 주소로 가서 최재석이란 사람을 데려오게. 좀 난폭한 사람이니 힘을 써야 할 거야.”
양태수는 접견실의 테이블에 놓인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충청북도의 어느 읍이라고만 적혀있고 번지는 없었다. 대신 옆에 사진이 있었다.
“이 사람입니까?”
“그래. 자세한 주소는 거기 관할 파출소의 배준혁 경사에게 묻게. 그가 도와줄 걸세.”
“예.”
양태수는 자신이 평소 표정 그대로이기를 빌며 종이와 사진을 챙겼다.
“그럼 바로 출장 준비를 하겠습니다.”
“알겠네. 좋은 소식 기다리지.”
회장 앞을 물러나온 양태수는 경호실로 가서 자신의 출장에 맞춰 스케줄을 조정하고 공백이 없도록 안배했다. 그런 다음 집에 가서 짐을 챙겼다. 간밤에 시백이가 챙긴 것들까지 싹 트렁크에 넣고 실버 트와일라잇으로 갔다.
시백의 경비 스케줄을 직접 관리하는 계장은 클럽에서 그리 의미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양태수에겐 전부터 시백을 빌미로 촌지라도 받을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에게 바라는 대로 몇 푼 찔러주고 시백이 요즘 아프니 하루만 휴가 처리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양태수는 시백이를 차에 태우고 실버 트와일라잇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우리 이제 어디로 가는 거예요?”
운전석 옆자리에 앉은 시백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단 충북으로 간다.”
최재석을 장희준 회장 앞에 데려다 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도 가서 만나기는 해야 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기는 하지만 적어도 악인은 아니었다. 경고해주고 몸을 피하게 해주고 싶었다. 혹시 같이 도피하면서 힘을 합칠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런데 배준혁 형사는 어떻게 된 거지?’
박근태 경무관을 수행해 처음 온 후로 꾸준히 클럽에 드나들었으니 그도 클럽의 끄나풀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근태가 몰락하기 며칠 전 알게모르게 사라져 좌천되어 있었다.
시백이 앞에 더 나타나지 않게 된 것에만 만족하고 신경쓰지 않았던 자신을 반성하려다 문득 그가 좌천되기 한참 전부터 이미 시백이와는 더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도착하면 시백이와 주차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대신 건물 안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췄다.
양태수는 시백을 돌아보았다.
“시백아. 그 배준혁이란 형사 말인데.”
“예?”
시백이 흠칫 했다.
“그 사람 떠나기 전에 혹시 너하고 무슨 일 있었니?”
시백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떠났다고요?”
“그래. 몰랐니?”
“떠난 거였어요? 죽.....실종된 게 아니고요?”
양태수는 아연해져서 시백을 바라보았다. 클럽에서 볼 수 없게 된 것만 가지고 대뜸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그 사람 안 죽었어. 듣기로는 갑자기 어디 시골로 발령났다던데. 난 그 사람이 너한테 인사라도 하고 간 줄 알았다.”
시백은 안도하고 싶은 듯 울고 싶은 듯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양태수는 빨리 어디든 조용하고 안전한 곳에 가서 아들이 대체 뭘 알고 있는지 자세히 묻고 싶어졌다. 이 차 안에서 하는 이야기까지 새나갈 리는 없지만 운전을 하면서 들어도 괜찮을 이야기 같지도 않았다.
침묵 속에 시내를 벗어나 고속도로로 들어갔다.
몇 번이고 누가 뒤따라오는지 백미러를 흘끔여가며 충북 톨게이트를 통과했다. 지금은 출장 나온 것이니 실제로는 달아난 거라고 백석에서 눈치채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래도 마음은 불안했다.
주소지는 도내에서도 완전 시골구석이었다. 적당히 차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만 가서 시골길 곁에 차를 세우고, 양태수는 최재석이 예전에 줬던 전화번호를 찾아 걸어보았다. 그런데 없는 번호라는 안내음만 들려왔다.
“.....”
그때 최재석은 위장 잠입한 경찰이었고 그때 쓰던 번호는 해지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양태수는 그걸 알 리가 없었다. 창백해지는 얼굴을 양시백이 덩달아 겁먹으며 바라보았다.
“.....일단 내리자.”
아들 앞에서 아빠가 암담한 기색을 내비칠 수는 없었다. 어차피 회장님도 여기서부터는 발품 팔라는 투로 말씀하셨다.
커다란 검정 세단에서 내리는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을 보고 지나가던 사람이 움찔 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그 정도는 늘 있는 일이었으므로 양태수는 신경쓰지 않고 시백에게 말을 건넸다.
“일단 설명해주마. 오늘 회장님이 나더러 사람을 찾아오라고 하셨다. 여기 충북에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출장 업무를 핑계대고 몸을 피하면 그만큼 시간을 벌 수 있으니 따르는 척하고 온 거다.”
“그 찾으라는 사람은요?”
“당연히 찾아서 경고해줘야지. 그 사람이라고 잡히게 놔둘 순 없잖니. 게다가......”
너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시백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럴 거면서.....”
“응?”
“그럴 거면서, 왜 이제까진 장회장을 따랐어요?”
양태수는 창백해졌다. 시백은 양태수 자신만큼이나 치켜올라간 눈으로 사납게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하루이틀 일이 아니에요. 장회장도 클럽의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 일을 해요. 괴물을 섬긴다면서 사람들을 죽이고 납치하고. 그런데 왜 그런 사람을 경호해요? 저 말고 다른 사람 목숨도 소중하면, 왜 이제까진 모른 척했어요?”
양태수는 입만 덥석덥석했다. 할 수 있는 대답이 없었다. 시백의 비난엔 하나도 틀린 구석이 없었다. 게다가 그런 이야기를 시백이 안다는 것 자체가 끔찍한 진실을 암시하고 있었다.
“시백아.”
아내는 죽고 아들은 보육원에서 사라졌다고 알았을 때, 클럽의 복도에서 시백이를 찾아냈을 때 이후 세 번째로 손발에 힘이 풀리고 눈물이 났다.
“시백이 너......”
묵이 메어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거니?”
시백은 이를 악물었다.
“아주......일찍 물어보시네요.”
양태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양시백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버지도 속았다. 협박에 굴복해 입을 다문 건 자신이다. 그 정도 가지고 누그러지기엔 보고 겪은 일이 너무 혹독했고 죽은 줄만 알았던 아버지를 향한 원망이 너무 컸다.
차라리 몇 대 때리면 조금 나아질까. 기분이라도 풀릴까.
주먹을 움켜쥐고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험악한 얼굴과 덩치를 거의 그대로 물려준 자신의 원본 같은 모습을.
아버지가 저 주먹을 마음먹고 휘두르면 보통 사람들은 그대로 날아가버릴 것이다. 대개는 맞기 전에 벌써 기가 죽을 것이다.
그냥 길에서 마주치는 것만으로 깡패가 나타났다고 겁먹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행려병자가 되어 떠돌다 길거리 싸움에 말려들었는데 감옥가기 직전 장희준 회장이 건져 줬다고 들었다. 저런 덩치에 얼굴로는 동정을 사는 건 꿈도 꿀 수 없었을 텐데. 반대로 대단한 흉악범처럼 보인 나머지 더러운 일도 부담없이 맡길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걸지도 모른다.
오만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동안 주먹은 끝내 들어올리지 못했다.
맞는 건 지긋지긋했다. 아버지라고 해도 자기가 나서서 때리고 싶진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일으켜주고 위로해주기는 싫은데 이놈의 아버지가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적당히 일어나라는 말 정도는 자신이 해야 뭐가 진행이 되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시백이 입을 열었다.
“아저씨? 양시백?”
“시백 씨?”
생각지도 못했던 목소리들에 양시백도 양태수도 고개를 돌렸다.
최재석과 배준혁이 나란히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 다 놀란 나머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물론 양태수와 양시백도 놀랐다. 양태수가 일어났다.
“최재석?”
최재석은 찾아서 경고해주고 같이 달아날 작정이었다. 배준혁은 클럽의 끄나풀이니 피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 둘이 나란히 이 자리에 나타났다.
“여기는 어쩐 일입니까?”
배준혁이 어리둥절한 기색을 지우고 양태수에게 물었다. 그리고는 시백을 보았다.
“선생님.....”
시백은 어물거리며 고개만 꾸벅 했다.
준혁 선생님은 이제 클럽의 마법사였다. 하지만 ‘경감님’을 보호해 달라던 문자를 생각하면 어쩌면 아직도 인간적인 면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같이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 아는 사이였나?”
양태수가 경계를 다 풀지 않고 물었다.
“게다가 여긴 어쩐 일이지?”
“실은 내가 경찰이었거든.”
최재석이 머리를 긁적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네 명 외엔 아무도 없고 거리는 한산했다.
“수상한 사람들이 새까만 고급차 끌고 나타났다고 신고가 들어와서 나와본 건데.”
시백이 두 사람이 타고 온 차를 돌아보았다. 저런 차 끌고 이런 외딴 구석까지 찾아와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두 덩치.
“......신고 들어갈 만도 했네요.”
앞머리를 새삼 쓸어내리는 시백을 보고 최재석이 한 걸음 다가갔다.
“또 그런다. 야, 그렇게 눈 가리면 앞이 보이기는 하냐?”
“최재석 형사님.”
준혁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길거리에서 이럴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신고는 오인이었던 것으로 빨리 처리하고 조용한 곳으로 가서 이야기합시다.”
그리고는 양태수를 바라보았다.
“연락이라면 받았습니다. 무슨 명령을 받고 오셨는지도 알고요. 한데 시백 씨를 데려온 걸 보면 그 명령을 그대로 수행할 작정은 아니신 거죠?”
배준혁 형사의 말투엔 어딘가 섬뜩한 구석이 있어서, 양태수는 시백이 이 사람을 잠시나마 따른 것이 새삼 오싹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쨌든 길바닥에서 계속 이야기할 수 없는 건 사실이었다. 최재석과 배준혁을 따라 파출소의 관사까지 도착했다. 신고는 최재석이 전화로 오인이었다고 설명했다.
작은 관사에 네 명이 둥그렇게 모여앉았다. 배준혁이 커피 네 잔을 타 오고 찬장을 뒤져 과자도 한 봉지 가져왔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시백을 보고 은은하게 미소짓는 배준혁의 표정은 마치 아무 문제 없이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것 같아 양태수는 물론 최재석마저도 기분이 찜찜해졌다. 양시백도 다시 만난 선생님을 반가워하는 대신 입을 다물고 눈치만 보았다.
“여기서는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해도 안전합니다.”
배준혁이 의미심장하게 운을 떼었다.
“먼저, 제가 실버 트와일라잇에 속하게 된 것은 고의가 아니고 저는 그들의 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시백의 눈이 반짝 빛났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라는 표정이었다.
“장회장은 최재석 형사가 허강민의 뜻에 따라 박근태를 무너뜨렸다는 걸 알고 보복하기 위해 찾아오라고 한 겁니다. 박근태를 잃은 분풀이를 하려는 겁니다.”
양태수가 이를 으득 물었다. 최재석도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제가 마법사가 된 것도 박근태가 절 그리로 데려간 것이 계기입니다. 그들에게도 마법사는 흔치 않은 존재이기 때문에 저 같은 신입도 어느 정도 중시되지요. 대신 배반을 들키면 절대 달아나지 못합니다.”
배준혁이 양태수와 양시백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분도 여기로 오지 않고 아예 처음부터 딴 데로 달아났다면 절대 숨지 못했을 겁니다. 마법으로 하는 수색은 일반인이 대처할 수 없으니까요.”
양태수는 미심쩍은 얼굴로 배준혁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마법, 마법사란 말을 몇 번씩이나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다. 게다가 최재석도 양시백도 자신의 어리둥절함을 공유해주는 표정이 아니었다.
“역시 모르셨군요.”
배준혁이 그런 양태수의 기색을 눈치채고 말했다.
“실버 트와일라잇은 백선교와 마찬가지로 사악한 마법사들의 집단입니다. 지금 TV에서 백선교의 사이비 행각이라고 방송하는 내용들보다 훨씬 더 끔찍한 짓을 이제까지 지속적으로 저질러왔습니다. 게다가 아직 범죄 집단이라고 알려지지도 않았지요.”
“그런......”
양태수의 손끝이 덜덜 떨리는 걸 보고 최재석이 배준혁을 쿡쿡 찔렀다.
“그래서, 아저씨랑 얘랑 이제 어떡하지? 여기 숨겨줄 수 있나?”
“여기는 안 됩니다. 저 때문에 회장과 클럽의 눈이 직통으로 닿으니까요.”
배준혁도 고민하는 기색이 되었다.
“차라리 서울로 돌아가 경감님께 보호를 요청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양태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서 가장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느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양시백도 눈치만 볼 뿐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데, 장회장이 날 잡으려고 아저씨뿐 아니라 배 형사한테도 연락했다고?”
최재석이 묻자 배준혁이 태연히 답했다.
“그렇습니다. 장회장은 최재석 형사님이 잠입 요원 신분으로 그 일을 해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혹시 그 사실을 알면 경찰을 직접 공격하는 위험부담 때문에라도 손을 늦출 줄 알고 그 사실을 제가 알렸습니다만, 그럼 없애고 백선교의 짓으로 꾸미라는 답이 돌아왔을 뿐입니다.”
최재석은 얼굴이 파래져서 배준혁을 보았다. 장희준 회장이 그 정도로 막나가는 인물이라는 것도, 배준혁이 그런 사람에게 자신의 정보를 태연히 넘겼다는 것도 똑같이 기가 막혔다.
“최 형사님께는 죄송합니다만 어설프게 입을 다물어봐야 제가 딴 마음 품었다는 것만 들킬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탓할 수도 없었다. 지금 배준혁은 김성식 밑에 위장 잠입해 있던 자신과 별로 다르지도 않은 처지니까.
최재석이 입을 다문 동안 배준혁은 다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끝에 관사의 유선 전화로 다가갔다.
“일단 경감님께 연락해보겠습니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24 ㅣ- 회색도시&검은방

허강민은 어두운 건물 그늘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이 따로 있긴 하지만 거기는 문도 잠긴 채로 놔두었다. 도로에 면해있어 드나드는 게 눈에 띌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해는 길어지고 있다지만 아직도 6시도 되기 전에 져 버렸다. 버려진 건물이고 아무도 근처에 살지 않는다고 해도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더 주의를 해야겠다고 허강민이 생각했다.
안에 들어가자 시백이 맞으러 나왔다. 애들이 무서운 사람 상대는 전부 시백에게 떠맡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허강민이 튀김 봉지를 내밀었다.
“이게 뭐에요? ...우와아.”
봉지를 열어보고 시백의 입이 헤벌어졌다.
“튀김 좋아해?”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가 김말이를 집어 입에 쏙 넣었다.
“있지. 느끼하다거나.... 그거 눅눅하지 않냐?”
시백이 우물거리며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강민이 머리를 짚었다.
“새로 튀길 순 없겠지만 적어도 전자렌지에 돌려서 따뜻하게 해서 먹지 그래.”
시백이 김말이를 삼켰다.
“전자렌지요?”
“그래. 설마 십 년 후엔 그런 후진 가전제품은 안 쓰냐?”
“아뇨, 당연히 쓰죠. 하지만.... 여기 없는데요?”
“뭐?”
허강민이 어리둥절했다.
“무슨 소리야, 그럼 햇반 같은 건.”
그의 표정이 찌그러졌다.
“지금까지 늘 찬밥 먹었냐?”
“라면 국물이랑 먹으니까 괜찮았어요.”
시백이 변명했다.
“아무리 그래도 전자렌지 정도.... 잠깐만, 찾아볼게.”
비품 중에 없다 해도 분명 밀실트릭 중에 전자렌지를 이용하는 게 있었다. 그거라도 임시로 갖다 쓰면 될 거였다.
“그럼 이건 그 때 까지 기다려요?”
양시백의 말에 허강민이 멈칫했다. 그가 전자렌지를 찾아서 쓸 수 있게 손보려면 시간이 걸린다.
“...눅눅해도 상관 없다면 우선 먹어라. 많으니까 다른 애들하고도 같이.”
“네!”
시백이 신나서 뛰어갔다. 허강민은 그를 바라보다 문득 저들을 데려온 지도 시일이 꽤 지났음을 깨달았다.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애들은 돌려보내야 했고 미궁은 열어야 했다. 지금 간부들이 딴 데 정신 팔린 새 이렇게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언제까지나 이럴 수는 없었다.
빨리 양시백을 빼돌려야 했다. 그것도 자기가 의심을 안 받는 방식으로. 하지만 용케 빼돌리는데 성공했다 해도 어디에 숨겨둔단 말인가.
허강민이 배준혁을 떠올렸다. 인성은 의심스럽지만 경찰이고 자기 집이 있고 양시백한테는 나쁜 짓 함부로 못할 테니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면 양태수라도. 장희준이 백선교에 관여하는 걸 아는 허강민으로선 그의 경호실장을 믿을 마음은 안 들지만 혹시 모르니 무슨 관계인지 조사를 해 보는 것도 손해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접근하기 어렵고, 만에 하나 알고 방치하는 거면 도리어 내가 위험해져.’
역시 우선 배준혁과 의논해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가 다시 리조트를 나섰다. 시간이 없으니 한시 바삐 배준혁을 만나야했다.


늦은 시각이지만 경찰청은 불 켜진 곳이 꺼진 곳보다 많았다. 그걸 보며 박근태는 근심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 모두가 범죄를 막거나 해결하려고 저러고 있는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햇병아리 경위 시절도 아니고 이제와서 그런 얄팍한 감상은 품지 않았다. 당장 국장님 일만 해도, 그렇게 청렴하고 사리사욕 안 챙기는 사람도 드물텐데 그런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울 수 있고 또 그게 먹히다니.
‘대체 어떻게 내사과를 손에 넣은 거지.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렇지.’
“저, 근태씨.”
박근태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최근 바빠서 자주 보지 못했던 애인이 곁에 와있었다.
“아니 은희씨.”
근심하던 건 치워두고 박근태가 반갑게 웃었다.
“아니 여기는 어쩐 일입니까, 시간도 늦었.....는데.”
홍은희의 표정은 어두웠다. 박근태도 심각해져서 가까이 다가섰다.
“왜, 아버지께서 또 무슨 문제라도...”
“저, 생각해봤는데, 우리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박근태는 너무 놀라 아무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 때문에도 근태씨께 너무 폐만 끼치고...... 부디 행복하세요.”
홍은희가 돌아섰다. 박근태가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으, 은희씨! 잠시만요!”
팔을 잡히고 홍은희가 움찔했다. 박근태가 손을 놓았다.
“아버지 문제라면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이 있을 겁니다. 저 맡은 수사도 성공적으로 끝..났고 아마 곧 승진도 할 수 있을 거고.”
말하다 박근태는 멈칫했다. 범죄와의 전쟁이 마무리 되고 나면 하성철 국장이 명예롭게 은퇴할 것이고 자기가 그 뒤를 이을 거라 생각해왔다. 만약 그가 스캔들에 휩싸여 추락한다면 자기 입지도 위태로워진다.
“미안해요 근태씨.”
홍은희가 도망치듯 달려가버렸다. 박근태는 쫓아가지 못했다.
박근태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바로 며칠 전만 해도 모든 게 잘 되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진 것만 같았다.
“어머나? 박근태 경무관님. 이런 데서 뭐 하세요?”
또각또각 하이힐 발소리가 들렸다. 박근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강재인이 그의 앞에 와서 섰다.
“무슨 일입니까.”
박근태가 물었다.
“길을 서성이시는 걸 보니 한가하신 것 같아서요. 저랑 잠깐 드라이브라도 가실래요?”
박근태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했다.
“거절하겠습니다.”
그가 몸을 돌려 경찰청 쪽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어디로 가자는 건지 모를 만큼 눈치없는 분도 아니면서 그러시네. 상관의 전철을 밟고 싶으신 건가요?”
박근태의 발이 멎었다.
노골적인 협박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와 동시에 공포가 그를 덮쳤다. 자기에게 똑같은 의혹이 제기된다면 자신은 국장님만큼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회장님께 두 번째 기회를 받다니 꽤 드문 일이랍니다.”
강재인이 그게 무슨 좋은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현명하게 판단하세요. 원칙대로만 하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정말 믿으세요? 지는 편에 서지 않으려면 지금이 줄을 갈아탈 기회에요.”
-지는 편에 서게 된 걸 후회하나?
국장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그 때 자신은 지는 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정말로 그게 온전한 진심이었을까?
“저는.....”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경찰이 되었다. 폭력배를 일소하기 위해 범죄와의 전쟁에 뛰어들었다. 지금 장희준과 손잡으면 그 폭력배들을 부추기고 후원한 배후와 손잡는 게 된다. 당연히 해선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자신은, 스스로의 몰락을 감내하면서까지 정의를 지킬 수 있는가?
지난 번 만났을 때 장회장은 그와 박근태가 비슷한 면이 있다고 했다. 당시에는 단칼에 부정했지만, 그 말은 그리 틀리지 않은지도 모른다.
이 제안을 거절할 경우 해를 입는 건 자신 만이 아닐 수도 있었다. 문득 홍은희씨가 이별을 선언하고 간게 무척 다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인질로 삼지 말란 법은 없었다.
“하지만.....”
이건 수사팀을 배신하는 행위였다. 하성철 국장의 등에 칼을 꽂는 거나 마찬가지고, 자기가 사지로 보냈던 잠입 요원들의 희생을 헛되게 하는 일이다. 자기가 어떤 식으로 수사를 호도하든 부하 형사들은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게 보호일 수도 있었다. 이대로 수사를 계속하면 장회장은 수사팀 전체를 공격할지도 모른다. 이미 거짓증거와 부패한 내사팀을 내세워 압박하고 이렇게 노골적인 협박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말로 안 들으면 폭력이 뒤따를 게 분명했다.
하성철 국장이 정말로 누명을 벗는데 성공한다 해도 문제될 게 없었다. 스트레스 상황에 몰아넣고 약만 빼앗아도 그는 암살의 흔적 없이 간단히 제거될 것이다. 차라리 자기가 장회장과 손을 잡으면 그도 더 다치지 않고 무사히 은퇴시킬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권현석 역시.
그는 따르지 않을 것이다.
권현석이 따르던 건 편견없이 사실을 검토하고 유능하게 사건을 해결해서 그와 의동생을 구한 정의로운 경찰이지 부패 재벌과 손을 잡는 부패 경찰이 아니었다.
권현석은 수사를 강행할 것이다.
그리고 장회장은 그를 죽일 것이다.
권현석이 죽는다.
숨이 막혀 박근태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다시 한 번 명차를 강타당한 것만 같았다.
권현석이 죽는다. 가장 믿고 의지하던 사람에게 배신당해서.
박근태 자신에 의해서.
박근태는 비명을 질렀다.


‘이자식 어디 간 거야? 혹시 오늘 야근이라도 하나?’
불도 켜지 않은 텅 빈 집에 앉아 허강민은 이대로 배준혁을 기다릴지, 전화로 연락을 해봐야할지 망설였다.
미리 연락을 하고 왔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전중이었고 마음이 급했다.
‘나 요새 왜 이렇게 비이성적이지.’
마법사는 그게 당연한 거야, 라고 속삭이는 뇌리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허강민이 전화를 찾아들었다. 배준혁이라면 경찰청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연쇄살인범의 전화를 받아도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만한 재치는 있을 것이다.
찰칵
현관문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비틀거리는 발소리, 신발 벗는 소리가 뒤이었다.
“어이, 흥신소장.”
다가오던 그림자가 흠칫 멈췄다. 그가 허둥지둥 옷 속에 손을 넣었다.
허강민이 일단 양손을 들어올렸다.
“정신차려. 나라고. 허강민.”
총을 찾던 손이 멎었다. 배준혁이 털썩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총 없네요.....”
“있으면 쐈을 거냐? 얼마나 마신거야?”
허강민이 일어나 그에게 갔다. 멀리서도 술냄새가 진동했다.
“회식이었습니다.”
준혁이 말했다.
“다들, 안 죽고 살아서, 즐겁게.....”
“응, 그거 좋았겠네.”
가까이 오기는 했는데 이걸 부축하자니 부축해서 어디 데려가 뭐 할지 알 수 없어 허강민은 그냥 가까이에서 배준혁을 내려다보았다.
“기뻐하는 건 좋은데 살려야 될 사람 더 있는 거 잊지 마라.”
“누구...”
“양시백.”
배준혁이 입을 딱 다물었다.
“내가 데리고 있는 것도 슬슬 한계야. 잠시 일 시킬 생각으로 데려온 거고 나도 딴짓한단 의심 안 받으려면 이제는 세 번째 밀실을 진행해야 하고. 이제는...”
허강민이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안 죽이고 해결할 수 있는 거 그런 거 하고 싶지 않다만.”
어차피 리셋될 건데 시간과 노력만 많이 들고 말이지.. 라고 허강민이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아무튼 그래서, 내가 의심 안 받으면서도 밀실을 미루고 애들을 빼돌릴 계획이 필요하다만....”
허강민이 배준혁을 내려다보았다.
“너 지금 생각할 수 있냐?”
“글쎄요...”
준혁이 털썩 누워버렸다.
“그러고 자면 입 돌아간다.”
“지난 십년 간 이러고 잤지만 한 번도 입이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척 억울하다는 말투였다. 허강민은 이 연쇄살인범의 무방비한 옆구리를 걷어차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냥 그대로 죽었으면 싶었던 날이 얼마나.... 그런데도......”
“너 지금 이 상황에서도 그런 말이 나오냐?”
허강민은 어이가 없었다.
“과오를 싹 고치고 행복해졌다며?”
“전 아닙니다.”
준혁이 울음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살고, 원하던 사람이 살아서 곁에 있지만 저는..... 지연씨는.....”
그가 눈을 뜨고 허강민을 올려다보았다.
“어째서죠, 어째서 저는 잃은 사람을 되찾지 못하는 겁니까. 권혜연 순경은 아버지를 하태성 경위는 어머니를 양시백씨도 관장님을..... 적어도 죽지는 않았고....”
“장지연도 안 죽었다.”
“하지만 못 만납니다!”
준혁이 소리쳤다.
“혼자서는 장회장의 집에 갈 수 없습니다. 같이 봉사활동을 하던 곳에도 가봤지만 역시....”
그가 침울해졌다.
“역시.... 저 때문에 거기 왔던 거였어요. 지금은 없습니다. 정말 바보같아요. 진작 눈치챘더라면, 멍청한 소리나 하는 대신 진작 연애하고 진작 야반도주라도 했더라면.....”
“잡혀와서 장희준에게 산채로 껍질이 벗겨진 뒤 토막났을 걸.”
“자기 딸에게 그런 험악한 꼴을 보인다고요?‘
준혁이 얼굴을 찌푸렸다.
“저라면 절대 안 그럽니다.”
그가 꾸물꾸물 돌아누웠다.
“딸한테는.... 좋은 것만 해주고.. 싶...”
“....그래, 장회장은 너보다 미친 놈이로구나.”
백선교의 미친 신을 숭배하는 사람이니 당연히 그렇겠지만, 이라고 생각하다 허강민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장희준은 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장애가 있는 딸이 쓸모없다 여겨 후계자로 점찍은 남자를 엮어두는 데 사용해버리고 끝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여기 두 연쇄살인범이 그렇다고 해서 다른 모든 악당이 자기 가족만은 특별하게 아낀다고 가정하는 게 더 말이 안되었다.
하지만 박근태 의원은 장회장의 모든 것을 물려받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적어도 마법의 존재를 알았을 것이고, 유상일을 찾기 위해 옛 상관의 아들을 협박해 끌어들일 필요가 없었다.
그럼 장회장의 세력 중 그 부분은 누구의 것인가.
장지연은 정말로, 그렇게 무력하고 가련하기만 한 희생물이었을까.
시간은 배준혁이 죽었을 때 역류했다.
마법사는 그가 죽길 원치 않았다.
허강민은 서둘러 그 집을 나왔다. 뭐라 계속 웅얼거리는 배준혁은 그대로 놔두고. 본인이 입 안 돌아간다고 했으니 본인이 책임질 일이었다. 드디어 마법사를 발견했다.



검은 남자 61 ㅣ- 회색도시&검은방


첫날이니만큼 마법 수업은 일찍 끝내고 몇 가지 주의사항만 더 얹어서 류태현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다음 수업은 어떻게 준비할지 궁리했다.
류태현은 이상적인 학생이었지만 자신은 가르치는 일에 소질이 없었다. 게다가 이건 상대의 정신상태까지 신경써줘야 하는 수업이었다.
끙끙거리며 간단하게나마 수업 계획서를 만들어보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시죠.”
무슨 가둬놓고 꼭꼭 노크씩이나 해야겠냐고 비아냥거릴 준비를 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하성철 국장인 걸 보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하성철은 이제 업무에 복귀해 정복 차림이었다. 차분한 기색으로 다가와 좀전까지 류태현이 앉아있던 의자에 앉았다.
“너무 일찍 퇴원하신 거 아니에요?”
허강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내가 직접 나서야만 성사될 일이 너무 많아 어쩔 수 없네.”
하성철은 표정을 부드럽게 하고 허강민을 바라보았다.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으니 아무리 허강민이라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일단은 부드럽게 대해서 안심시켜주자고 생각했다.
“자네는 류태현 순경의 수업 문제도 있고 해서 당분간 더 병원에 있게 할 작정이네. 피의자라고 해도 증언 확보와 신변 보호가 중요할 때는 다 이렇게 하는 거니까 특혜라고 부담 가질 필요 없네.”
“저 정도의 중범죄자일 때도 말입니까?”
“도주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는 건 확실하잖은가.”
허강민은 어물거렸다. 가식이 아니라 진심으로 상대에게 예의 차려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와 계셔도 괜찮습니까?”
“자주 오지는 못할 거야. 그러니 필요한 거라든지 충고할 말이 있다면 미뤄두지 말고 지금 다 말하게.”
“필요한 건 특별히 없습니다. 류태현 가르치는 일에 도구가 필요할 단계는 아니거든요. 나중에 필요해진다고 해도 제가 아니라 류태현이 쓸 거니까 역시 국장님의 배려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자네의 마법 금제는 풀 방법이 없다고 했지.”
하성철은 아쉬워보였다.
“그 덕분에 절 체포하고 구금하는 절차는 간단해진 겁니다. 제가 간수나 경찰들을 저주하고 도망칠 길도 없어진 거니까요. 제가 일단 제 목숨을 돌보려고 탈옥을 결심한다 한들 은행 사건 때 구급차에서 달아난 것처럼은 할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자네 안위는 더 위험해진 것 아닌가? 자네 몸에 다른 해가 가지는 않는 건가?”
“마법을 못 쓰게 된 것 말고 다른 해는 없습니다.”
허강민은 다시 우물거렸다. 자신의 안위를 신경쓰는 사람이라면 장혜진이라든지 최재석이라든지 이미 잔뜩 겪어봤지만 도통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장혜진은 이제 어떻게 됩니까?”
생각난 김에 물었다.
“일단은 묵비권을 행사하도록 놔두고 있네.”
하성철이 선선히 답했다.
“하지만 솔직하게 전부 자백해주는 편이 본인에게도 좋을 거라고 믿네. 백선교가 자네를 도와 자신들을 적대한 사람을 그냥 놔둘 리 없고 일단 입막음부터 하자고 생각할지도 모르니.”
“수호 부적은 줬겠지요?”
“그래. 장혜진 양도 딱히 경찰을 못 믿어서만이 아니라 자네와 손발을 맞추기 위해 잠시 기다리는 것에 가깝고.”
“내 걱정 할 필요 없고 경찰들은 믿을 만 하다고 전해주세요.”
허강민은 조금 뾰로통한 표정이 되었다.
왜 다들 이렇게 자신을 걱정하고 돕지 못해 안달인지. 게다가 지금은 자신의 사정이 그런 도움을 거절해도 될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자존심이고 뭐고 주는 대로 감사히 받아야 했다.
“류태현을 가르치는 건 할 만 한가?”
“예. 정말로요.”
허강민은 화제가 바뀐 데에 안도했다.
“말 잘 듣는 학생입니다. 멍청하긴 해도 가르치긴 편해요. 어차피 저도 마법 배우는 사람을 괴롭힐 만큼 바보는 아닙니다. 그 녀석은 잘 달래고 보듬어가며 가르칠 테니 걱정 마세요.”
“그를 용서한 건가?”
“......”
허강민은 잠시 머뭇거렸다.
“......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털어놓아도 될 것 같았다.
하무열이라면 함부로 털어놓을 기분도 안 나고 괴롭힘 당할 꼬투리나 될 것이 뻔했다. 장혜진은 예전엔 자신의 짐을 함부로 나눠 지게 할 수 없었고 지금은 만날 수 없다.
하성철 국장은 자신을 괴롭힐 생각이 없다. 자신이 지우는 짐이 무겁고 버거우면 언제든 벗어버릴 힘도 있다.
무엇보다 계속 담아두기만 한 이야기가 점차 심적인 무게로 변하고 있었다. 한 번 장벽을 낮춰버리자 스스로도 억제하기 힘들었다.
“류태현이 다른 사람들처럼 대놓고 나쁜놈이었다면 아마 첫 번째 밀실에서 그와 여승아, 임선호, 하무열 형사까지 모두 죽었을 테고 저도 자살로 끝냈겠지요. 그동안 제가 류태현을 계속 괴롭히고 집요하게 위협했지만 그 역시 저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사실은 이 네 번째 미궁에서 어떻게든 류태현만은 죽여버릴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면 편해질까, 그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될까......”
허강민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힘마저 빼앗아간 일들이 너무 많아서, 당장은 그놈을 해치지도 괴롭히지도 않기로 정말로 결심했습니다. 백선교를 무찌르는 데 필요해서기도 하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더는 모르게 되어서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괴롭힐 수도 없지요.”
하성철이 손을 뻗어 허강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특별히 의도해서가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그러다 허강민이 머리를 피하자 얼른 손을 떼었다.
“미안하네. 아이 취급을 해버렸군.”
“......”
허강민은 잠시 하성철의 기색을 살피다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습니다. 아이 취급도 너무 오랜만이니까 좀 새롭네요.”
백선교에 있는 동안은 누가 자신에게 좋은 뜻으로 손대는 법이 없었다. 그런 기색을 들켜서 쓸데없는 걱정을 시키고 싶지 않았으므로 허강민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어보였다.
“어릴 때부터 지나치게 의젓하다느니 하는 소리만 들었습니다. 부모님조차도 절 애 취급하기는 어려워하셨지요. 복수귀가 되기 전에도 전 그리 다정한 사람은 못 되었으니까요. 공부 잘 하고 말썽 안 피우는 아들이었으니 불효 자식까지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무심코 돌린 화제가 허강민 자신도 원치 않은 쪽으로 흘러가버렸다.
그 정도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사고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걸로 됐다고 만족할 수 있었다. 부모님의 귀엽고 사랑스런 아이 노릇은 둘째와 막내가 다 해내고 있었으니까.
그 둘이 비참하게 죽도록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부모님이 시든 풀처럼 되어 돌아가실 때도, 자신은 그분들의 버팀목이 되지 못했다.
“만약에......”
허강민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백화점에서 죽은 게 막내가 아니라 저였다면, 둘째도 그리 되지 않고 부모님도 아직 어린 막내를 생각해서 버티셨을지도......”
“그런 말 말게!”
하성철이 허강민의 말을 잘랐다.
“자네 부모님은 노령에 큰 고통을 견디지 못하신 거네. 자식 셋 중 둘이 죽었는데 누가 더 귀여웠고 말을 잘 들었고 하는 게 무슨 소용이었겠나? 분명 자네 하나라도 살아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셨겠지.”
말하고 나서 하성철은 실수했다고 느꼈다. 허강민의 부모가 정말 그리 생각했다면 그 전제는 분명 첫째가 혼자 남아서도 냉정하고 차분하게 버텨내서 자기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예상이었을 테니까.
만약 자신이 허강민을 만나지 못해 장희준과 박근태의 음모에 따라 죽어버렸다면 자신 역시 죽는 순간까지 태성이가 복수 같은 걸 꿈꾸기보다는 평화롭고 이런 일과 무관한 삶을 살길 기원했을 것이다. 태성이가 박근태를 죽이고 장희준을 죽인다면, 그런 복수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허강민은 아직 침대 위에 얹혀 있던 하성철의 손을 꼭 잡았다. 마치 눈물을 참고 있는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실수가 아니었다. 이미 부모님의 소원도 허강민 자신의 괴로움도 그가 저지른 짓들에 의해 부질없어진 지 오래지만 그래도 허강민에겐 그 말이 필요했다.


밀실의 이전 피해자들에 경찰들까지 잡아넣은 대담무쌍한 미궁이 매스컴의 관심을 피하기란 불가능했다. 하성철도 권현석도 사건을 숨기기보다는 차라리 이 기회에 백선교의 사악함을 알리고 후속 수사를 지지하는 여론을 형성하자는 쪽으로 결론을 지었다.
그래서 TV는 모처럼만에 자극적인 소재를 잔뜩 얻었다. 수상한 사이비 종교가 깡패 집단까지 부리다가 경찰에 덜미를 잡히자 최후의 발악으로 경찰 간부를 납치해 죽이려 들었다. 그것도 상상을 초월하는 기괴하고 잔인한 방식으로. 밀실 현장 취재를 막고 류태현 등 피해자들을 직접 인터뷰하지도 못하게 차단한 것이 도리어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했다. 일종의 인신공양이었을 거라는 추측은 아예 기정사실처럼 사람들 입을 오르내렸다. 끔찍하고 선정적인 뉴스가 싫은 사람들은 케이블 채널에서 영화나 외국 드라마를 보는 수밖에 없었다.
양태수는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근무 중에 TV가 켜져 있는 곳에 가면 채널 선택권이 없고 집에서는 케이블 채널 설정을 할 줄 몰랐다. 백선교와 선진화파 관련 뉴스를 백석의 경호실장이 되어서 전혀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었다.
이제까지 장희준 회장의 떳떳치 못한 면에 고의적으로 눈을 감고 살기는 했다. 그러나 시백이를 되찾고 마음에 여유를 얻어서인지 시백이를 만난 곳이 회장님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실버 트와일라잇이라 그런지 회장님이 예전처럼 의지가 되는 인물로 느껴지지 않았다.
선진화파는 깡패 조직이고 사이비의 앞잡이이기까지 했으니 회장님께서 그놈들을 적으로 여기고 완전히 소탕되기를 바라신다고 해서 나쁠 일은 없다.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집에 들어왔다.
“시백아, 아빠 왔다.”
그래도 요즘은 행복했다. 그 파란 추리닝의 떡대와 엮였던 일을 계기로 시백이는 집에 얼굴을 비추기 시작하더니 잠을 자기도 했다. 혹시나 해서 밥을 해놓고 반찬가게에서 사온 반찬이나마 냉장고에 채워봤더니 조금씩 줄어들기까지 했다. 양태수는 손수 찬거리를 이것저것 만들어보며 그 최재석이라는 남자 다시 만나면 집에 다시 데려다 제대로 대접하고 감사를 표하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다.
오늘도 시백이는 집에 있었다. 시백의 경비 근무표를 알아두고 최대한 양태수 자신의 퇴근시간도 그때에 맞추고 있는 덕이었다.
시백이는 어색하게 목례만 하고 부엌으로 갔다. 그러나 이때는 마침 저녁때도 아니었고 같이 밥을 먹는 것 외에 뭘 하며 시간을 보내면 좋을지 시백도 아버지만큼이나 아는 게 없었다. 어색하게 물만 떠와서 소파에 앉았다.
“요즘 좋아하는 TV 프로 뭐니?”
양태수가 고민 끝에 결국 리모컨을 집었다. 시백이는 요즘 아이니까 케이블 채널 설정도 할 줄 알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좋아하는 프로 있으면 네가 편한 대로 채널 맞춰서 봐라. 아빠는 네가 좋다면 어떻게 해놓든 상관 없으니까. 어차피 많이 보지도 않고......”
일부러 해본 적도 없는 너스레를 떨어가며 시백이에게 리모컨을 넘겨주었다. 시백이는 대꾸해주지는 않았지만 리모컨을 받아들고 TV를 켰다. 그리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보았다.
그러다 하필 뉴스 전문 채널이 걸렸다. 백선교 피해 생존자 모씨의 인터뷰를 따냈다며 음성변조된 증언을 틀어놓고 있었다.
[.....뭔가 진짜로 봤대요. 괴물 같은 신을. 그러면서 막 이상한 소릴 하니까, 내가 ‘아이고 이 사람이 정신이 나갔구나’하고, 도저히 그게 제정신 박힌.....]
덜그럭 하고 리모컨이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양태수를 놀라게 한 것은 소리가 아닌 시백이의 얼굴이었다.
덥수룩한 머리로 눈가를 덮어 언제나 어두워 보이는 시백이였다. 그런 얼굴이 지금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공포’라는 두 글자를 그대로 얼굴에 그려놓은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시백아?”
그 공포가 거의 그대로 양태수에게도 옮았다. 아들의 어깨를 감싸안고 리모컨을 떨어뜨린 채 덜덜 떠는 손을 꽉 쥐었다. 놓으면 아들을 또다시 잃을 것처럼.
“시백아, 왜 이러니. 정신차려라. 응? 내 말 들리니?”
시백은 한동안 그렇게 굳어있었다. 양태수가 이대로 안고 응급실로 뛰어가야겠다고 결심했을 때에야 아버지에게 확 덤벼들어 마주 끌어안았다.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시백아.”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그래도 시백이 쪽에서 양태수에게 힘껏 매달리고 있었다.
“아빠.”
그렇게나 듣고 싶었던 말이 살려달라는 비명소리처럼 들려 고통과 혼란만 더했다. 더 이상 묻지도 못하고 양태수도 그저 아들을 부둥켜 안을 수밖에 없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을 끝낸 것은 경쾌한 음악과 밝은 목소리였다. 소스라쳐서 소리가 들린 쪽을 보니 어느새 뉴스가 끝나고 광고중이었다.
양태수가 한 손만 바닥으로 뻗어 리모컨을 집어들고 TV를 꺼버렸다. 연예인의 환한 얼굴이 번쩍 하고 사라졌다.
“......아빠?”
시백이 조금 정신을 차렸다. 극심하던 떨림도 점차 잦아들었다.
“그래, 시백아. 아빠 여기 있어.”
양태수도 겨우 한숨 돌리며 시백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대체 왜 그래. 어디 아파? 무슨 일 있어?”
“......”
시백은 양태수를 꼭 붙든 채 한참이나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런 끝에 뱉은 한 마디를 듣고 양태수는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아빠는 정말 모르시는 거죠?”
“응?”
시백이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엔 안도가 배어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리둥절한 나머지 방금은 착각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려는데 시백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양태수에게 나직이 말을 걸었다.
“아빠, 경호실장이라고 했죠.”
“그래.”
“위험한 일 같은 건 없어요?”
“꼭 그런 건 아니다만......”
양태수는 말끝을 흐렸다. 평범한 말로 안심시켜줄 때가 아닌 것 같았다.
“제가 아빠 은퇴해서 어디 시골 같은 데서 둘만 살고 싶다고 하면 어쩌실 거예요?”
“그러고 싶니?”
양태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위험을 감지하는 후각이 예민했다. 지금 시백이 전원주택에서의 안온한 노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무 설명도 없이 결론부터 던지고 있지만 그래서 더 심각하게 느껴졌다.
“알겠다. 모아둔 돈도 좀 있고 하니 너무 걱정 말고, 꼭 가져가야 할 것들만 챙겨라. 내일 적당히 변명하고 사직서를 내겠다.”
“예.”
고개를 끄덕이고서 시백이 양태수를 바라보았다.
“저, 제가 이랬다고는 하지 말고 그냥 우연히 은퇴하고 싶어졌다고만 해주실래요?”
“그래.”
양태수가 시백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 마라. 그 정도는 알고 있단다.”
비로소 시백의 얼굴이 완전히 풀어졌다. 양태수는 망설이다가 살짝 두 팔을 벌리고 다가가 시백을 다시 안았다.
시백은 몸을 빼지 않았다. 머뭇거리면서 조금씩 양태수에게 몸을 기댔다. 공포에 질려 매달리는 게 아니라 진짜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기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23 ㅣ- 회색도시&검은방


부하 형사들의 환호에 뿌듯해하던 현석이 재호의 어깨에 팔을 척 걸었다.
“그래서, 현석형님~은?”
“켁.”
막 건배하려던 재호는 사래가 들렸다.
“어서 해봐.”
유상일도 부추겼다. 다들 흥미진진한 눈으로 재호를 보았다.
“자아, 어서.”
권현석이 압박했다.
“내가 재호형사 애정하는 거 알지?”
“아, 알지만요오....”
“편애에 반대하는데요~”
미정이 손을 번쩍 들었다.
“어? 아 물론 미정형사도 애정하지.”
권현석이 오미정쪽으로 손을 뻗어 어깨를 안으려다 좀 멀어서 어깨를 두드리기만 했다.
“그럼 미정형사도 오빠...”
“그건 좀 아닌데.”
상일이 끼어들었다.
“형 나이를 생각해. 겉으론 파릇파릇해도 이제 사십줄 다 되어가는데....”
“그 정돈 아냐!”
“이건 상일 경위님 말이 맞습... 아니 사십줄이라는 게 맞다는 게 아니고요.”
준혁이 끼어들다 현석이 노려보자 움츠러들었다.
“열 살 연하의 여자 부하한테 오빠라 부르라고 강권하는 상사를 다른 누구로 생각해보세요.”
“그런 거 아냐!”
“네. 그러니 팀.... 분위기를 생각해서.”
팀장님이라고 부를뻔 하고 준혁은 겨우 말을 바꿨다.
“경감님은 좀 친근하게 경감님, 하고 부르는 것으로 하고, 유상일 경위님은 선배 어떻습니까.”
준혁이 상일과 미정을 보았다. 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 정도가 무난할지도.”
“그런 거면 나도!”
최재석이 손을 들었다.
“나도 재석 선배라고 불러주라.”
“서, 선배요?”
준혁이 당황했다.
“왜, 미남밖에 못 끼는 거야?”
“아, 아뇨. 그런 거 아닙니다. 절대. 아니 최재석씨... 선배가 미남이 아니라는 게 아니고.”
준혁이 얼굴을 붉혔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재석...선배.”
그가 고개를 꾸벅했다.
“그래그래. 나야말로. 이거 귀여운 후배가 생겼네.”
최재석이 준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시선을 느낀 그가 고개를 들었다. 유상일 서재호 오미정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아니.”
상일이 시선을 회피했다.
“귀여웠.... 구나 싶어서?”
“솔직히, 준혁이가 애교가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재호가 솔직히 말했다.
“맞아요. 엄청 철벽이라고요, 저 사람.”
“그런 거 아닙니다.”
준혁이 항의했다.
“제가 인간관계에 서투르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정도는 잘하려고 노력합니다.”
‘결과가 신통치 않기는 하지만요....’ 라고 고개 숙이고 중얼거리느라 준혁은 재호와 미정의 경악한 표정은 보지 못했다.
“아, 그, 그렇구나.”
미정이 어색하게 웃었다.
“응, 그렇지. 최재석 경... 선배님은 좋은 분인 것 같고.”
“뭐야, 너 어쩌다 좋은 사람이 된 거야?”
담배 다 피웠는지 주정재가 돌아와 최재석 옆에 앉았다.
“여자가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말은 잘생기진 않았다는 뜻이라던데....”
“그런 거 아니거든요.”
미정이 그를 찌려보았다.
“맞습니다. 미정형사는 최.. 재석선배가 좋은 사람이라서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준혁이 주장했다. 주정재가 눈을 깜빡였다.
“..나 없는 새 뭔일 있었어?”
“어, 호칭 정리?”
유상일이 말했다.
“일단, 요 세 사람이 우릴 선배라고 부르기로 했어.”
“어, 그거 친근하고 좋네.”
주정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상일은 좀 불만스러워보였다.
“난 좀 더 친근해도 괜찮은데.”
“그러게.”
권현석이 동의했다.
“내년을 기약하면 안될까요.”
서재호가 사정했다.
“뭐 어쩔 수 없나. 보자마자 형님으로 모시라고 하는 것도 좀 그렇고.”
유상일이 시원스레 물러났다.
“아, 시간이 이렇게 됐네.”
권현석이 시계를 보고는 공중전화로 갔다.
“아, 드디어 형 술버릇 나온다.”
상일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 쪽을 보았다.
“어떤 술버릇인데?”
주정재가 물었다.
“혜연이.. 형 딸한테 전화해서 시덥잖은 소리 늘어놓기. 저래도 화 안 내다니 혜연이는 참 착한 딸이라니까.”
“선배 따님도 착하겠죠.”
준혁이 말했다. 상일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럼 그럼, 얼마나 착하고 예쁘다고. 떼도 안 쓰고.”
“아빠를 많이 좋아하나봐요.”
“그럼! 오래 못 만났으니까, 막 투정부리거나 아빠 싫다고 하거나 뭐 그러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그런 거 전-혀 없어. 얼마나....”
“그럼 지금 아빠를 기다리고 있겠네요.”
준혁이 그의 말을 끊었다.
“겨우 다시 만난 멋지고 훌륭한 아빠니까, 한시라도 더 같이 있고 싶을 겁니다. 지금도 텅 빈 집에서 홀로 아빠를 기다리며 오시기 전에는 자지 않으려고 졸린 눈을 비비며 현관문을 쳐다보고 있겠지요.”
유상일의 얼굴이 하얘졌다 파래졌다. 준혁은 멈추지 않았다.
“어린 아이는 어른과 달라서 얌전하고 똑똑한 아이라고 해도 종종 실수를 하거나 사고를 당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돌봐줄 어른도 없이........ 아이에게 최고의 아빠는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는 아빠가 아닐까요?”
유상일은 입을 덥석덥석했다. 이마에 식은땀이 솟았다.
“아연이가 아빠따위 밉다고 하기 전에, 과자라도 사들고 빨리 집에 돌아가 봐야 하지 않을까요?”
할 말을 잃고 유상일이 주위 눈치를 살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난처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고 현석은 여전히 전화에 매달려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껏 실컷 걱정시켜 놓고 배준혁이 말했다.
“이미 이런저런 이유로 일찍 돌아간 사람 많습니다. 팀장님도 그렇고. 그러니 상일 선배가 일찍 빠져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일찍 빠져서 뭐라 하는 사람 이전에 여기 더 있었다간 준혁한테 무슨 일 당할지도 모른다고 상일은 진심으로 쫄아들었다. 깡패로 살면서 수틀리면 사람도 그어버릴 놈들 꽤 봤지만 이만한 위협을 느껴본 건 드물었다.
목적을 모르겠는 점이 특히 더.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그럼 난 일찍 가볼까....”
“어, 네. 살펴가세요.”
재호가 일어나 인사했다.
“그래, 내일 보자.”
“안녕히 가세요.”
다들 어색하게 유상일을 배웅했다. 그가 도망치듯 고깃집을 나가고 나자 이쪽 테이블은 아주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배준혁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그는 모른 척 어느새 타고 있는 고기를 불판에서 치우고 새 고기를 올려놓았다.
“그치만.... 틀린 말은 아니지.”
최재석이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아빠라면 자식 곁에 있어줘야 하고말고.”
“뭐야, 너도 숨겨둔 애 있는 건 아니겠지?”
주정재가 놀랐다.
“있음 내가 여기서 술 마시고 있겠냐, 가서 애랑 놀고 있지.”
“그러면서 뭘 그렇게 똥폼잡는데.”
“있어, 그런 게.”
그가 술을 더 따랐다.
“뭐 세상살이 뜻대로 안 되는 때도 있지만, 그래도 노력은 해야 할 거 아냐, 노력은.”
그를 빤히 쳐다보다 주정재는 딴 데 쳐다보며 술을 마셨다. 그 역시 연고가 없는 덕에 잠입요원 일을 하고 나왔다. 부모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드시죠.”
준혁이 그들 앞으로 새로 구운 고기를 밀어놓았다. 그러면서 양시백과 권혜연을 생각했다.
두 사람 다 피붙이도 아닌 아이들을 맡아 정성껏 키우고 돌봤다. 주정재는 권현석 경감님과의 인연 때문이라 해도 최재석은 어떻게 양시백을 만나게 된 걸까.
역시 깡패 생활하다 만난 거라면 작전이 일찍 끝난 게 수사팀에겐 다행이어도 양시백에겐 재앙일 수도 있었다. 이대로 최재석을 못 만나게 되면..
‘그래도 지금은 내가 아니까, 대신 빼내다 보호할 수 있을 지도.’
그것만 가능하다면 자신과 양시백과 권혜연은 이미 해피엔딩이었다. 적어도 그 파멸을 피하는데 성공했다. 하태성 경위도 과거로 왔더라는 소식은 전해들었지만 그가 어찌되든 배준혁은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러니.
그러니, 여기서 시간을 더 되돌릴 필요는 전혀 없었다.
이제 허강민은 방해물이었다.

“준혁 형사는 나중에 좋은 아빠가 되겠네.”
준혁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최재석이 웃으며 그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술을 받아들고 그는 자기가 방금 무슨 말을 들었나 생각했다.
“저, 뭐라고 말씀하셨죠?”
“좋은 아빠가 되겠다고. 애 곁에 꼭 붙어있을 거 아냐.”
“아......”
준혁이 쪼그라들었다. 최재석은 깜짝 놀랐다.
“저, 준혁 형사?”
“저는.....”
유상일을 닦아세워 회식자리에서 내쫓은 기세는 어디로 가고 준혁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 되어 받은 술을 마시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닥만 쳐다보았다.
“그럴........ 저야말로........”
그가 눈물이라도 곧 떨굴 것 같은 표정으로 몸을 웅크렸다. 최재석은 당황해서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저, 괜찮아? 무슨 일인지 몰라도...”
“괜찮습니다.”
그가 힘없이 웃었다.
“그저, 저는 앞으로 가정을 꾸리고 아버지가 되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가 술을 마셨다. 자기는 딸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딸을 위해 한 일도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심지어 이제 수정이는 없었다.
토닥이는 손을 느끼고 그가 고개를 들어 최재석을 보았다. 자기가 빌딩에서 밀어버렸던 사람이, 그렇게 무참하게 양시백에게서 빼앗았던 사람이 지금 그를 위로하고 있었다.
“최재석씨는 정말 다정하네요.”
준혁이 서글프게 웃었다.
“뭘 다정씩이나. 난 그저....”
준혁이 그에게 기댔다.
“죄송합니다.”
“응? 뭐가?”
“죄송해요. 저말로, 죄송합니다.....”
“준혁 형사 몇 병이나 마신 거야? 취한 거 처음 봐.”
자리로 돌아온 권현석이 놀랐다.
“그렇게 많이 안 마셨는데요. 원래는 술 센 친구입니까?”
재석이 물었다.
“글쎄, 취한 걸 본 적이 없어서.”
현석이 재호와 미정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희도 얼굴 빨개지는 거 이상은....”
“그치만 좀... 빨리 마셨으니까요. 그럼 빨리 취하고.”
오미정이 얼버무렸다.
“평소엔 조금씩 천천히 마시던데 오늘은 뭔가 일이라도 있었나....”
“저, 이 친구 집이 어딥니까?”
최재석이 배준혁을 부축하고 일어났다.
“슬슬 데려다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저, 제가 갈 수 있습니다.”
준혁이 비틀거리며 똑바로 섰다.
“택시 타고 가면 되니까...”
“그럼 큰길까지만 같이 갈게.”
최재석이 기어코 따라나섰다.
“정말 괜찮습니다... 저 같은 놈한테 너무 잘해주지 않으시는 게 좋은...”
“술 땜에 그래, 술 땜에. 자, 빨리 집에 가서 푹 자고 나면 다시 살만해질거야.”
최재석이 배준혁을 부축해 나갔다. 그 뒷모습을 쳐다보다 권현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뭔 일 있었어?”
“아뇨, 암것도.”
주정재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기분 탓이에요, 기분 탓. 자 어서 술이나 마저 마십시다.”


검은 남자 60 ㅣ- 회색도시&검은방


허강민 문제가 일단락되자 권현석은 정은창의 병실로 달려갔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정은창은 처음 집으로 데려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와 비슷해보였다. 그때처럼 경계심에 가득 차 으르렁대는 게 아니라 조용하고 얌전한 태도로 묻는 말에 답하고 있는데도 그랬다.
기어이 김성식을 직접 죽이고 싶어한 나머지 백선교의 꾐에 빠져 밀실의 범인 역을 자청했으니 더 이상 권현석과 경찰의 호의는 바랄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자수하고 싶은 게 더 있습니다.”
정은창은 권현석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경감님은 제가 소완국을 죽였다고 의심하고 계시죠. 사실은 이준영 쪽이었어요. 저와 함께 목격되었다는 소완국이 바로 이준영이라는 경찰이었습니다.”
권현석은 쥐고 있던 펜을 종이 위에 미끄러뜨렸다.
“어떻게 얼굴이 바뀌었는지는 김성식이 성형수술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마법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아무튼 그때 진짜 소완국은 이미 김성식 손에 죽어있었고 이준영은 제 테스트라는 명목으로 절 죽이려고 덤벼들었습니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만, 그래도 그를 죽인 건 접니다.”
권현석을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정은창은 있었던 일을 전부 털어놓았다. 황도진과 다른 조직의 이름 모를 깡패, 황도준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권현석은 받아적은 진술서를 내려다보았다. 전부 정은창이 끝까지 입 다물고 있었으면 몰랐을 일들이었다.
‘아니, 정말로 그랬었나?’
소완국 사건은 처음부터 권현석 자신이 가장 의심한 일이었다. 황도진 역시 그간의 정황으로 미루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김성식의 명령으로 하극상 장소에 간 장본인이었으니. 이제까지 몰랐던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죄송합니다, 경감님.”
정은창의 목소리에 권현석은 정신을 차렸다.
동생의 명복을 빈다는 말 정도도 들어보지 못해 괴로워하던 그 표정과 목소리로 정은창이 띄엄띄엄 말했다.
“그렇게 믿어주셨는데, 전 고작 이런 놈이었어요.”
“아니야.”
권현석이 정은창의 손을 잡았다.
“내가 먼저 너한테 과중한 짐을 지운 거야. 내 멋대로,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었을 뿐이야.”
근태 형이 생각나 권현석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고개를 숙이는 걸 보고 정은창은 권현석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밀실 안에서 여승아의 폭로에 충격받고 괴로워하던 류태현이 생각났다.
실수한 걸지도 모른다. 경감님 앞에서 떳떳해지고 싶어서, 경감님을 더 속이기 싫어서 자수를 결심했지만 경감님을 괴롭히기만 하는 결과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류태현과 여승아 사이가 그토록 끔찍하게 무너져내린 것처럼 자신과 경감님 사이에 있었던 것들도 무너졌다. 바람에 날려 먼지처럼 사라지겠지.
“......실형을 피할 수 없을 거야.”
권현석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 하마터면 못 들을 뻔했다.
“정보원이었던 거랑 상황 참작 다 해준다고 해도. 황도진이 죽은 건 경찰에 큰 손실이었고 이준영은 경찰이야. 내가 나서서 감싸기가 어려워. 그래도......원망해도 되니까, 면회 거절하지는 말아줘. 제발.”
정은창은 입만 뻐끔거렸다. 한참 만에야 겨우 할 말을 만들어냈다.
“제가, 제가 어떻게 경감님을 원망해요......”


다음날 류태현은 마침내 허강민의 병실 앞에 섰다.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상황에 안 맞게도 류태현은 아직 환자 신세인 것이 원망스러웠다. 말끔하게 면도하고 머리도 빗었지만 후줄근한 환자복과 슬리퍼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들어와.”
허강민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류태현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문을 열었다.
좁은 1인실은 류태현 자신의 병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허강민은 한 손이 가죽 수갑으로 침상에 묶인 채 누워있었다.
류태현은 천천히 그리로 다가갔다. 역시 밀실 밖에서 보는 허강민은 현실감이 없었다.
허강민은 날카로운 표정으로 류태현을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제정신은 돌아온 모양이군.”
“아, 예. 덕분에요.”
그리고 류태현은 다시 빨개져서 눈치를 보았다.
“저기......허강민 씨.”
“왜.”
“그 일, 그러니까 정말 꿈 아닌 건가요?”
허강민이 류태현을 노려보았다. 류태현은 흠칫 움츠러들었다가 그 시선에 살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리 와서 앉아.”
허강민이 침대 곁 의자를 가리켰다. 류태현은 그리로 가 앉았다.
“네놈은 괜찮은 거냐?”
“예?”
“내 어디가 반할 만 했던 거냐고. 혹시 널 죽이려고 드는 사람이 취향이냐?”
“아뇨.”
류태현이 고개를 흔들었다. 허강민은 짐짓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은행 강도들에겐 반하지 않았으니까. 아니, 그놈들은 널 위협만 했지 바로 죽일 생각까진 없었기 때문인가? 그럼 말이 되는군. 안승범도 처음에만 해도 널 수틀리면 언제든 죽일 작정이었는데 네놈은 찰싹 달라붙어서 끝까지 구해냈지. 그럼 하무열에게 반하지 않은 것도 그 작자가 널 괴롭히기만 했지 죽이려 들지는 않아서였나.”
“죽이는 사람이 취향인 거 아니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류태현이 항의했다.
“그럼 뭣 때문인데?”
허강민은 방금까지 류태현을 인신공격하던 태도 그대로 물었다.
“그냥 아무나 눈앞에 있으니까 덥석 안았다고 하지 마라. 넌 분명히 그게 나인 걸 인식했고 나니까 덤벼든 거야.”
“압니다.”
긴장으로 창백해졌던 류태현이 다시 빨개졌다.
“아무나 상관없었던 게 아닙니다. 정말로요. 전 허강민 씨를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왜냐고.”
“그냥 반한 걸지도 모르죠.”
여전히 빨개진 채로도 류태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저도 어제 밤새 고민해봤습니다. 왜 강민 씨인지, 왜 죄책감도 연민도 원한도 아닌 사랑인지. 논리적인 답은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전 허강민 씨가 살아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걸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다 할 겁니다. 절 용서해주지 않아도, 계속 미워한다 해도.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뭘까요?”
“.......”
허강민은 여봐란 듯이 팔에 돋은 닭살을 문질렀다.
“내가 지금 당장 너한테 마주 반한 건 아니다.”
차가운 목소리에 류태현은 새삼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담담한 얼굴이었다.
“네녀석이 한 짓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여승아가 한 짓에 새삼 분노해서 쫓아갈 기력도 안 남았지만 네놈을 용서할 이유도 없다. 난 그저, 붙어있는 목숨을 앞으로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으니 너도 여승아도 다른 사람도 해칠 수 없는 것뿐이다.”
류태현이 슬픈 눈을 하고 허강민을 바라보았다. 허강민은 그 눈빛을 굳이 외면하지 않았다.
“나와서 할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류태현이 물었다.
“미궁 안에서 그렇게 말한 것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든 강민 씨가 살아있어야 할 수 있겠죠.”
“그건 그렇다만.”
허강민이 내키지 않으나마 인정했다.
“그게 너와 상관 없다는 말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 목적이 뭔데요?”
류태현이 다시 물었다.
“나쁜 목적은 아닌 거죠? 적어도 남을 해치는 건 아니죠?”
허강민은 잠시 류태현을 빤히 보다가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뭔데?”
“근거는 없고 감입니다.”
사실은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이제까지 허강민이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그 살의와 악의는 언제나 궁극적으로 자신을 향해 있었다. 그러니 자신과 상관없다면 악의도 그만큼 옅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허강민은 여승아를 향한 복수심도 강하지 않다고 자인했다.
허강민은 눈을 가늘게 뜨고 류태현을 노려보았다. 명백히 바보 취급하고 있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
“백선교를 마저 무너뜨릴 거다.”
제대로 된 답변도 했다.
“날 위한 일이야. 이대로 경찰에만 맡겨놓으면 백선교는 또다시 살아남을 거고 나는 배교자로서 법의 심판을 받기도 전에 끔찍한 꼴을 당하겠지. 삶에 미련 같은 건 없다만 그보다는 곱게 죽고싶다. 그런 짓을 당하느니 경찰에 협력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나 같은 괴물에게도 그리 사치스런 생각은 아니라고 본다.”
“제가 도울게요.”
류태현이 덜컥 나섰다가 허강민에게 째림을 당했다.
“돕긴 뭘 도와. 내가 경찰을 돕는 거고, 너도 경찰이잖아.”
“아, 그러네요.”
머리를 긁적이다 류태현이 이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치만 이제 제가 마법사가 되면 도울 일이 생기겠죠?”
“그리고 마법사가 되려면 나한테 배워야 하지.”
허강민이 비웃음 섞어 지적했다.
“저랑 관계 없다더니, 관계 있네요. 엄청나게.”
허강민은 류태현을 다시 노려보았다.
“힘든 일이야. 끔찍한 일이기도 하고.”
류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다들 그렇게 말한다더라.”
허강민은 시큰둥하게 받아넘기고 침대 옆에서 노트를 잡아당겨 펼쳤다.
“지금 백선교와 맞서 싸울 마법사가 꼭 필요하니까, 사실은 네놈이 각오가 되어있든 말든 가르쳐야만 해. 네놈은 배워야만 하고. 그러니 제대로 배워. 뭣보다 제정신을......”
줄 없는 노트에 볼펜을 대고 막 뭔가 쓰려던 허강민이 손을 멈추고 류태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조금 걱정이 되어서.”
허강민의 표정은 진지했다.
“내가 네게 마법을 가르치는 건 네가 어디까지나 제정신을 유지하고, 백선교와 실버 트와일라잇의 마법공격으로부터 너와 다른 경찰들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서다. 마법을 배우다가 이성을 잃어버리고 네가 괴물이 되어버리면 안 배우느니만 못한 결과가 될 거다. 그런데 말이지. 너 지금은 제정신인 것 맞냐?”
류태현은 조금 울컥 했다.
“제정신 똑바로 박혀있습니다. 무열 선배와 국장님과 동료들을 지키고 백선교를 타도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증명해야 안심하고 가르쳐주실 건가요?”
“날 사랑한다면서.”
허강민이 눈 하나 깜짝 않고 대꾸했다.
“제정신으로 날 사랑한다고?”
“그건.....”
류태현이 어물어물했다. 역시 허강민은 자신의 마음을 짓밟고 조롱할 생각뿐인 것 같았다.
“앞서나가지 마.”
허강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미친 고백 따위 무시하겠다는 뜻으로 꺼낸 말이 아니다. 가족의 원수끼리가 아니더라도 사랑이란 복잡하고 사람을 동요하게 만들지.”
허강민은 여전히 진지하고 차분한 얼굴이었다. 그 눈빛에 이제까지 익숙하게 흐르던 광기도 살의도 없었다.
“갑자기 내가 널 열렬히 사랑할 수는 없어. 널 걱정하고, 다치지 않게 보호하고, 어떻게 해야 네 소원을 이룰 수 있을까 고민하고 노력할 수 있을 뿐.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있겠어?”
허강민의 목소리는 문장을 겨우 완성하고 꺼져버렸다. 류태현이 못 믿겠다는 듯 감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허강민 씨가 제게 그래준다고요?”
“......그래.”
“충분해요. 아니, 제 말은......”
류태현이 허강민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평생 허강민 씨에겐 증오만 받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런데......”
허강민은 조금 주저하다가 류태현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류태현도 허강민을 끌어안고 다정하게 등을 쓸었다.
“자,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지?”
허강민이 이내 류태현을 가볍게 밀어냈다.
류태현도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바로했다. 그러나 눈은 여전히 기쁨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무튼 이쪽을 봐.”
허강민이 노트에 볼펜으로 끄적이기 시작했다.
“괴물들과 이세계 신이 존재한다는 건 이미 직접 봐서 알지? 미궁 안에서 우리를 집어삼키려고 덤빈 건 그냥 단순한 괴물이야. 하지만 그걸 막기 위해 네가 불러낸 건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그 괴물들이 섬기는 신과 같은 존재지. 마법의 근원이 되는 존재이기도 하고.”
허강민이 볼펜으로 그린 둥근 그림은 지구상의 어떤 생명체와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그러나 류태현은 그것이 왠지 낯익다고 느꼈다.
이미 보았으니까.
“흔히 외우주의 신이라 불리는 이것들은 본래 인간에게 관심이 없다. 운전자가 차를 몰면서 자기 차바퀴에 밟혀 죽을 벌레에 신경 쓰는 정도 관심밖에 없지. 마법과 제의를 통해 비위를 맞추고 힘을 빌리는 것도 마찬가지야. 네 집에 사는 미생물이 네 각질이나 손톱 밑 때를 일용할 양식으로 삼는 거나 같아서, 네가 이대로 마법을 익혀 강력한 마법사가 되고 그 마법으로 백선교를 무찌른다 해도 검은 남자에겐 진드기에 물린 정도도 아니라는 거다.”
거기까지 말하고 허강민이 류태현을 보았다.
“과장이 아니야. 게다가 그래서 지금은 다행이기도 하지. 백선교를 통해 전수받은 기술로 검은 남자의 힘을 빌려서, 백선교를 공격해야 하거든. 검은 남자는 네가 배은망덕하다든가 자신을 배신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을 거야.”
마법을 배운다고 해서 판타지 소설 같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시작부터 인간은 집먼지 진드기만도 못한 존재라니.
검은 남자는 그 거품 괴물 앞에서 류태현을 재미있어 했다. 그것은 단순한 변덕에 불과하고 기분이 바뀌면 언제든 먼지를 떨어내듯 류태현을 떨어버릴 수 있었다.
“백선교는 왜 그런 존재들을 섬기는 거지요? 무엇을 바라고? 그런 것들이 뿌려주는 돈이나 권력이 그렇게 탐이 나는 건가요?”
“한 명 한 명의 사정이야 나도 모른다만 대체로 그런 것 같더군.”
허강민은 심드렁하게 노트 페이지를 넘겼다.
“일단 마법사가 된 뒤 정신이 그쪽에 맞게 변형되어 자제를 잃은 케이스도 많은 모양이고. 너는 그래선 안 된다.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잊지 마.”
“예.”
류태현이 진지하게 각오를 다졌다.
“그럼 오늘은 제정신을 유지하는 법, 정신이 흔들릴 때의 대처법부터 가르쳐주겠다. 마법사 아닌 인간들이 정신을 방어할 때도 쓸 수 있는 것들이지. 최대한 안전하고 유용한 것들을 우선해서 가르쳐줄 테니 새겨듣도록.”
진심이었다. 허강민은 류태현을 방어와 저주 해제 쪽에 집중시킬 작정이었다.
백선교를 무찌르기 위해 경찰에 마법 보호를 제공하는 것이 일차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류태현을 보호하는 것도 그 애인 노릇도 다 감수할 수 있었다.
하무열이나 권현석은 몰라도 류태현은 그걸 진심으로 믿고 따를 생각인 게 분명했다. 허강민이 가르쳐주는 대로 거의 빨아들일 기세였다.
하무열 형사는 이런 맛에 류태현을 곁에 두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경우가 달랐다. 류태현이 아무리 순진하고 무해한 눈빛으로 자신을 따르더라도 자신은 하무열이 복수를 포기한 것처럼은 할 수 없었다. 말한 그대로 냉정하고 성실하게 류태현을 돕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류태현도 그 이상을 바랄 정도로 어리석은 놈은 아니니, 적어도 백선교를 꺾어놓을 때까지는 이대로 괜찮을 것이다. 허강민은 그렇게 믿었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22 ㅣ- 회색도시&검은방


“결국은 이런 날이 오는구나. 꿈만 같네.”
유상일이 자기 앞에 따라진 술을 홀짝 마셨다.
“많이 감개무량하신가 봐요.”
오미정이 말했다.
“그럼, 처음에만 해도 길어야 몇 달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장기화 되어가지고..... 이대로 영영 못 돌아가는 건 아닌지 얼마나 무서웠다고.”
“유상일 경위님 같은 분도 무서움을 느낍니까.”
서재호가 조금 놀랐다.
“당연하지? 아, 죽거나 다치는 건 별로 안 무서운데, 아니, 죽는 건 좀 무서운가, 아무튼 이대로 깡패가 아주 되어버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건 무섭더라. 이제 끝났으니 상관없지만.”
그가 다시 한 번 술잔을 털어넣었다.
“그래. 이제 다 끝났지... 그리고.”
그가 벌떡 일어나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최재석과 주정재를 양 팔로 걸어 꽉 안았다.
“이 녀석들도 그대로 남았고 말이지. 아 정말 선진화파 핵심인원이 모두 경찰이었을 줄이야.”
“아, 그건 정말 황당했어.”
최재석이 맞장구쳤다.
“심지어 정은창 그 녀석도 경찰 정보원이었다며. 난 너는 몰라도 그 녀석이랑 주정재는 꼼짝없이 깡패인줄로만 알았는데......”
“뭐 임마?”
주정재가 최재석의 뒤통수를 철썩 때렸다.
“지들이 나만큼 위장 제대로 못한 것 갖고 남 욕하는 거 봐라. 내가 연기를 잘하는 게 뭐 잘못이냐?”
“아니 물론 그런 거 아니지.”
유상일이 달랬다.
“그냥 재석이는 뭐랄까 무도인다운 고지식함 같은 게 보여서 깡패엔 좀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그리고 니놈은 너무 잘생겼다 이거지. 아 까놓고 말해, 저렇게 생긴 놈이 뭐가 아쉬워서 깡패짓을 한다냐.”
“어이 이래봬도 중학생 땐 불량청소년이었다고.”
“네? 상일 경위님이요?”
듣던 오미정이 깜짝 놀랐다. 유상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야. 나도 현석 형도 아주 동네 망나니로 낙인찍혀서.... 근태 형님이 구해주지 않았으면 정말 깡패가 됐을지도 모르는 걸.”
“경감님까지? 아니 근데 경감님하고 형동생 하는 사이였어?”
최재석이 놀랐다.
“응. 같은 동네 출신이기도 하고...”
“거, 어느 쪽이 형이냔 소리 안 들어?”
주정재가 놀렸다.
“뭐야?”
대답은 등 뒤에서 들렸다.
“어이 주정재 경사, 내 생김새에 뭔가 불만이라도?”
“아, 아닙니다 경감님.”
주정재가 고개를 움츠렸다. 권현석이 하하 웃으며 그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었다.
“그렇지? 나 경찰답게 위엄이 넘치지?”
“형 못 본 새 많이 뻔뻔해졌네....”
유상일이 감탄했다.
“그러는 넌 많이 삭았지. 옛날에만 해도 귀여웠는데....”
“저게 삭은 얼굴이라고요?”
“겉이 아니라 속이.”
“아.”
“아 형도. 내 나이가 몇인데 언제까지나 파릇파릇할 거라고 생각했어?”
“자긴 저 나이에도 파릇파릇하니까 동생도 그럴거라 생각하나보지.”
주정재가 추임새를 넣었다.
“뭐 임마?”
“서재호씨... 재호 형사는 경감님을 형님이라고 못 부르겠네요, 그럼.”
지금껏 조용히 혼자 술을 마시고 있던 준혁이 중얼거렸다.
“경감님과는 달리 재호 형사는 삭을 거니까.”
“갑자기 나는 왜? 난 삭는 거 확정이야? 그보다 왜 삭는데?”
재호가 비통하게 소리쳤다.
“에..... 담배 피우니까요?”
그 말에 최재석 유상일 권현석은 모두 하필 그 때 담배를 꺼내 무는 중이던 주정재를 쳐다보았다.
“아 왜?”
“그야 난 안 피니까.”
최재석이 말했다.
“난 끊었고.”
유상일도 고개를 끄덕였다.
“간접 흡연도 건강에 해롭대.”
권현석까지 가담했다.
“아.... 나가서 피울게요, 나가서! 하여간 애아빠들이라고 유세 떨긴....”
주정재가 담배를 챙겨들고 나가버렸다. 권현석이 서재호를 쳐다보았다.
“저, 전 안 피우고 있습니다!”
“응, 잔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고....”
그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정재 삐졌으려나? 담배는 몸에 해로우니까 가능하면 끊었으면 싶긴 한데.”
“끊는 게 좋지요.”
배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간접 흡연은 직접 흡연보다도 더 나쁘다고 하니까요.”
“그런 거야?”
오미정이 놀란 표정을 했다.
“네. 그러니 유상일 경위님도 딸을 생각해서.”
“이미 끊었어.”
“잘하셨습니다.”
진심으로 칭찬받은 것 같은데도 상일은 어째 기분이 편치 않았다.
“현석 형이 끊으라고 엄청 잔소리를 했거든.”
괜히 변명도 덧붙였다.
“다아 인생 육아 선배로서 조언한 거란다.”
권현석이 누구 것인지 모르는 술잔을 들어 마셔버렸다.
“아, 좋다. 그 지긋지긋한 잠입 작전이 드디어 끝났어.”
그가 헤실헤실 웃었다.
“형 덕분이지. 황도진 도망가는 거 쫓아가 잡았다며.”
“은창이가 잡아둔 걸. 안 늦게 쫓아간 건 준혁 형사 공이 컸고.”
권현석이 쳐다보자 배준혁은 몸둘바를 몰랐다.
“위험한 곳이라 서둘렀을 뿐입니다.”
“아이고, 그러지 말고 좀 더 편하게 해.”
현석이 준혁의 등을 가볍게 쳤다.
“같이 지낸 지도 꽤 됐는데, 이제 슬슬 부드럽게 형님 하고 불러본다던가...”
“네, 네?”
준혁의 얼굴이 하얘졌다 빨개졌다.
“왜, 못하겠어? 이런 건 준혁 형사보다는 재호 형사가 잘하려나?”
“네?”
갑자기 지목받아 서재호가 입을 딱 벌렸다.
“저 저저 저는....”
“자. 현석 형님~ 해봐.”
권현석이 생글생글 웃으며 서재호를 압박했다. 재호는 순간 도망갈까 생각했지만, 어느새 상일이 그의 뒤로 가서 어깨를 잡고 있었다.
“좋지, 나도 막내는 이제 졸업하고 싶고.”
“막냅니까? 저 팀장님한테도 형님 해야 하는 겁니까?”
재호가 팔을 파닥거렸다.
“그건 진짜 무섭다고요!”
“아닌데, 근태형 무서운 사람 아닌데.”
권현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야 형이 귀여움 받고 있으니까 그런 거지, 객관적으로 볼 때 무서운 사람 맞아.”
유상일이 지적했다.
“누가 무서운 사람이라는 거지?”
유상일도 권현석도 최재석도 유상일에게 붙들린 서재호도 뒤를 돌아보았다. 한창 화제의 중심이던 박근태가 그들 뒤에 서 있었다.
“어, 형 왔어?”
권현석이 반색을 했다.
“잘됐다. 자, 여기 술.”
권현석이 술잔을 내밀었다. 박근태가 손으로 사양했다.
“아니, 나 갈비뼈가 아직.”
“아..”
“갈비뼈라뇨?”
최재석이 놀랐다.
“최재석 경사님은 그 때 기절해 계셔서 모르셨겠지만, 장산 병원에서 깡패에게 습격당해 부상하셨거든요.”
배준혁이 설명했다.
“그래... 다친 사람은 술 마시면 안 되지. 도세훈 경사도 일찍 집에 보냈는데.”
말과는 달리 권현석은 시무룩해졌다. 유상일이 그 잔을 빼앗아 자기가 쭉 마셔버렸다.
“자, 근태형님 대신 내가 마시면 되지!”
“흑기사입니까!”
그 틈을 타 재호가 상일에게서 떨어졌다.
“뭐 나야 형님을 위해서라면.... 악!”
“앗, 죄송합니다.”
그의 발을 꽉 밟은 준혁이 황급히 사과했다.
“저 쪽의 냅킨을 집으려다가 그만....”
“무슨 하이힐에 밟힌 줄 알았네....”
유상일이 눈물까지 찔끔하며 발을 문질렀다.
“하이힐에 밟혀보셨습니까?”
“아니!”
“잘들 놀고 있는 것 같군.”
자기네 막내가 괴롭힘 당하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박근태가 빙긋이 웃었다.
“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벌써?”
권현석이 놀랐다.
“기왕 왔는데 술은 못해도 고기라도....”
“일도 있고, 처음부터 잠깐 둘러보기만 할 셈으로 온 거야.”
박근태가 권현석의 어깨를 다독였다.
“자, 그럼 무서운 사람은 이만 사라질테니 잘들 놀다 가게나.”
서재호가 히익하고 고개를 움츠렸다. 박근태는 못 본 척 했다.
“다들, 길거리에 쓰러져서 관할서에 폐 끼치지 않을 만큼만 마시라고.”
쫄아든 부하들을 뒤로 하고 박근태 팀장은 고깃집을 나갔다. 이들 뿐 아니라 다른 테이블에서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우리는 놀라고 하고 형은 일한다고 하고.....”
권현석만 서운해보였다.
“수사는 성공했잖아?”
유상일이 의아해했다.
“후속 처리가 이것저것 남은 건 알지만... 뭐 힘든 일이라도 있어?”
“응.”
권현석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랄까... 정치적인 위기라고 해야 하나, 그런 문제가 좀.”
“역시 수사가 장기화 되다보니 공격 받는 건가... 하지만 이제 다 끝났잖아.”
“그래, 그렇지.”
권현석이 방실 웃었다.
“그러니 걱정은 접어두고 오늘은 술과 안주를 선택하고 집중하자!”
“와~!”
부하 형사들이 모두 박수를 쳤다. 권현석이 뿌듯한 표정을 했다.


검은 남자 59 ㅣ- 회색도시&검은방



“그럼.”
권현석이 주머니에서 작은 파우치를 꺼냈다. 파우치를 열자 그 안엔 갈색 헝겊으로 만든 수상해 보이는 주머니들이 있었다.
“밖에서 오는 저주를 막는 효과가 있댔어. 너도 하나 가지고 있어. 류태현의 침대에도 하나 숨겨 놓을 거야.”
배준혁이 상황을 전해 듣고 급히 만들어서 보낸 게 오늘 도착했다. 실버 트와일라잇의 눈을 피하기 위해 최재석의 이름으로 유상일에게 보냈고 미리 권현석에게 연락해 유상일이 개봉도 하기 전에 받아갈 수 있도록 했다.
허강민은 주머니를 받아들고 대뜸 풀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하성철이 가까이 다가가 같이 살펴보았다.
“어떤 물건들인가?”
“보호 마법에 쓰이는 것들이 맞습니다. 일단 이건 약초와 씨앗이고, 이건 아마.....깃털이겠군요.”
허강민이 들어보인 검은 털은 도저히 어느 새의 깃털로도 보이지 않을 만큼 기묘한 색깔과 모양에 냄새도 고약했다.
하성철과 하무열이 나란히 표정을 찌푸렸다. 말은 안 해도 둘 다 밀실에서 보았던 괴생물을 떠올리고 있었다.
“쓸데없는 걱정 마세요.”
허강민이 물건들을 도로 쓸어담고 주머니의 끈을 조였다.
“대개 이런 건 그냥 닭털입니다. 가공을 해서 기괴해보이는 거죠. 배준혁 경사가 충북에 혼자 숨은 채 이생명체 소환을 했을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권현석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어떻게 알았지?”
“억지로 감추려고 한 쪽이 무리였습니다. 그 사람이 박근태와 실버 트와일라잇에 충성스럽지 않다는 의심은 전부터 하고 있었는걸요. 그렇게 생각하기에 이상한 짓을 이미 꽤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말 조심해.”
권현석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준혁 형사가 그런 사실을 실버 트와일라잇에 들키면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압니다.”
정말 잘 알 녀석이 가벼운 태도로 대꾸해버리니 권현석은 찌푸린 얼굴을 펼 수가 없었다.
허강민은 주문 주머니 하나를 가져다 류태현의 침대 머리맡에 놓았다.
“국장님도 하나 갖고 계세요. 새로 방어 주문을 걸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자네가 걸린 그 금제는 풀 방법이 없나?”
하성철이 묻자 허강민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저주를 건 당사자인 강성중이 자발적으로 풀어주든지 죽든지 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류태현을 가르칠 때도 이론 수업밖에 못 할 거고요.”
“백선교에서 자넬 저주해 죽이려고 하면 막을 수는 있나?”
“그건 이것이 어느 정도 막아줄 겁니다.”
허강민이 권현석의 주문 주머니를 가리켰다.
“강성중이 미궁을 빠져나가려고 하는 우리에게 빡돈 나머지 대뜸 괴물을 보낸 것치고는 당장 연속 공격이 이어지고 있진 않아요. 그야 그런 걸 갑자기 소환했으니 강성중도 지금은 꼼짝 못하고 드러누워 있을 겁니다만 백선교에 다른 마법사들도 있으니 최소한 저는 바로 죽이려고 할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어쨌든 당장은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그리고는 문득 생각난 질문을 덧붙였다.
“혹시 지금 김성식에게 이 주머니 하나 전해주는 것 가능합니까? 백선교에선 김성식을 저주로 죽여 입을 막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도 이미 보호 부적은 있어. 그걸 주는 대가로 백선교에 대해 몇 가지 더 알아냈지.”
권현석이 표정을 찌푸렸다.
“그럼 당장 급한 일은 다 끝낸 거네요.”
“그래.”
허강민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이만 병실로 돌아가서 쉬어도 되죠? 지금 꽤 피곤하거든요.”


자기 병실로 돌아간 허강민 곁에 하무열이 남았다. 허강민은 못 본 척 이불을 뒤집어쓰고 돌아누웠다.
“어이, 허강민.”
“저 진짜 피곤합니다.”
허강민의 목소리에서 싹싹한 기색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절 총알로 차놓은 사람과 할 이야기도 없고요.”
“이제와서 질투난다고 할 것 같냐.”
하무열의 목소리에 기운은 없었다.
“그럼 류태현 쪽에 질투 난 건가요?”
“피곤해서 뻗었다는 놈이 입은 팔팔하구만.”
“우리가 동류인 나머지 그런 점도 같네요.”
허강민은 태연하기만 했다.
“류태현 깨어나면 아까 있었던 일도 기억하는 거냐?”
“기억하죠, 당연히. 책임 질 테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본론은 밀어두고 살살 긁어서 괴롭히고 싶은 생각이 물론 굴뚝같지만 지금 허강민은 환자였다. 마법사이자 미친놈을 계속 도발하고 몰아붙여서는 피차 위험하기도 했다. 할 수 없이 서론은 대충 끊고 본론부터 시작했다.
“넌 그 녀석한테 정말 애인 노릇 할 수 있는 거냐?”
“쓸모 있는 동안에는요.”
허강민이 태연하게 잘라 말했다.
“초보 마법사는 안정된 정신이 필수적입니다. 옆에서 애인이 보듬어주는 정도면 충분히 효과적이겠지요.”
하무열은 허강민을 노려보았다.
“그뿐이냐?”
“상대가 류태현인데 제게 뭘 바랍니까?”
하무열도 여기엔 대꾸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허강민이 류태현을 증오하는 걸 말릴 방도는 그에게도 없었다.
“걱정 마세요. 그의 정신이 완전히 안정될 때까지는 성실하게 애인 노릇 해줄 테니까요. 인간이 이래서 살가운 애인이 될 자신은 없습니다만 어떻게 흉내 정도는 낼 수 있겠죠.”
“정말로?”
“예.”
하무열은 허강민의 뻔뻔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성철 국장님께 이 얘기 그대로 들려드려도 되겠냐?”
“......뭐하러요.”
허강민이 우물거렸다.
“그 영감님하고는 정말 그렇고 그런 관계 아닙니다. 질투하거나 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네녀석이 사랑하지도 않는 상대하고 애인 흉내 내는 건 싫어하실 것 같던데? 네녀석이 상처받고 괴로울까봐.”
스스로 말하고서 하무열은 문득 깨달았다. 이런 관계를 흔히 일컫는 낱말이 하나 있었다.
이 두 사람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지만.


류태현은 그날 저녁 눈을 떴다.
“저 얼마나 잠들어 있었죠?”
“사흘이다, 잠꾸러기.”
곁에서 지키고 있던 하무열이 날짜를 읊어주었다. 류태현이 어깨를 움츠렸다.
“저 그렇게나 상태가 심각했군요.”
“지금은 어떠냐? 의사양반 말로는 몸은 이제 회복할 것 같다던데.”
“괜찮은 것 같습니다.”
류태현이 하무열마저도 불안하게 만들 만큼 자신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허강민 씨는요?”
류태현의 창백하던 뺨이 질문하면서 약간 붉어졌다. 그걸 보고 하무열이 혀를 찼다.
“진심이냐.”
“진심입니다.”
류태현이 그렇게 힘없는 목소리로도 단호히 말했다.
“저 허강민 씨를 좋아해요. 아마 계기는 죄책감이겠지만 지금 결과는 아니에요.”
“허강민이 너 싫다면?”
거기서 더 움츠러들 재간이 있었는지 류태현이 더 작아져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역시 그건 꿈이었나보군요.”
“허강민이 너 끌어안고 이런저런 거 하는 꿈이라면 꿈 아니다.”
류태현의 얼굴이 단숨에 새빨개졌다. 좀전까지 창백하던 얼굴이 지금은 잘 익은 복숭아 같았다.
“저, 정말요? 그거 꿈 아니었어요?”
“그래.”
하무열이 혀를 찼다.
“허강민 씨가.....정말 저하고?”
짜면 빨간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얼굴로 류태현이 더듬거렸다.
“하지만 그, 강민 씨도 싫어하지 않았는데. 나인 거 다 아는 것 같았는데......”
“그래. 진짜 허강민이 너 정신 못 차리는 거 보고 네 이불 속으로 들어가줬다. 못 믿겠으면 마음대로 해. 이제 곧 허강민과 다시 만나서 얘기하게 될 테니까. 당사자들끼리 해결 보라고.”
“만날 수 있어요?”
갓 현실로 돌아와서 아직도 반쯤 환상 속을 헤매는 것치고는 류태현도 놀라운 점을 제대로 잡아냈다.
“강민 씨는 이제 체포된 범죄자잖아요? 저하고 그렇게 쉽게 만날 수 있어요?”
“수사국장님 빽으로.”
류태현이 다시 움찔했다. 빨개졌던 얼굴이 본래 색으로 되돌아오며 하무열의 눈치를 보았다.
“저, 국장님하고 강민 씨 관계는 대체 어떻게 된 건가요?”
“내 생각보다도 훨씬 미묘할 정도로 건전한 관계인 것 같다.”
하무열은 새삼 표정을 찌푸렸다.
돈이든 향응이든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동기가 당연히 깔려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면 밀실 안에서까지 그렇게 서로를 감쌀 이유가 없었다.
그 둘은 정말로 상대의 안전과 생존을 목적으로 두고 움직였다. 수단이 아니라. 어떤 계산도 그 아래엔 깔려 있지 않았다. 그런데 불륜의 애인 관계 같은 것도 아니다.
이건 마치 가족 같지 않은가.
피는 통해 있지 않아도 서로 아껴주고 의지해서 생기는, 아주 어렸을 때는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가족.
“여승아 양한테 할 변명도 생각해둬.”
결국 이야기를 돌리고 말았다.
“별로 자네한테 미련 남아있어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털어놓고 가야지.”
“예.”
류태현이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일이 말짱 꿈이었다고 해도, 허강민 씨가 끝까지 절 증오한다고 해도 제가 승아한테 돌아갈 수는 없을 테죠. 전 이미 오래 전부터 승아에게 애인이 아니라 짐이었으니까요.”
“승아 양도 자네 짐이었지.”
별로 진지하게 동의하지는 않는 태도로 류태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어떻게 이때까지 승아가 함묵증인 걸 그렇게 숨길 수 있었죠? 담당 의사까지?”
“원래 환자 본인이 원치 않는 한 그런 건 입 다무는 게 정상이야. 하물며 자네는 호적상 남이잖나.”
“무열 선배는 어떻게 알았는데요?”
“시작은 그냥 감이었지. 약간만 조사해도 알 수 있는 일이었고, 승아 양도 끝까지 잡아뗄 작정은 아니어서 금방 답을 들을 수 있었어. 단지 그걸 대뜸 자네에게, 승아 양의 의사에 반해서까지 전해주는 게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야.”
류태현은 불만이 남은 듯 표정을 찌푸리고 침묵했다. 별로 이해를 바란 것은 아니므로 하무열도 더 이상의 변명은 하지 않았다.
“......강민 씨는 언제 볼 수 있죠?”
“오늘은 시간이 늦어서 무리고, 내일 오전에 볼 수 있을 거다. 그때까지 마음 편히 갖고 책을 읽든 TV를 보든 정신을 딴 데로 보내서 시간을 죽이라고 허강민이 전해달라더라. 초보 마법사가 스승의 도움도 없이 안전하게 시간을 보내려면 그뿐이라서.”
“그렇게 말했어요?”
허강민이 무려 자신에게 말을 전했다는 것만으로도 류태현은 충격이 커보였다. ‘아니, 해본 소리다.’라고 놀려주고픈 충동을 간신히 누르고 하무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 푹 쉬고 내일 허강민 앞엔 좀 덜 병자 같은 얼굴을 내밀도록 노력해봐라.”
이제 류태현은 아예 감격한 것 같았다. 여기 더 있다가는 이 사랑에 빠진 바보를 놀려주고픈 충동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아 하무열은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일 보자.”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21 ㅣ- 회색도시&검은방


“참, 양수연씨는요?”
류태현이 물었다.
“응? 그 여잔 원하는 대로 복수 잘 하고 죽었잖아? 새삼.”
“사고가 안 일어나면 허강민씨는 살인을 안 할 거고.”
“...복수 대행도 안 하겠지. 젠장.”
그가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양수연의 사고, 그러니까 자동차 사고는 그 때 당시 3년 전이었어. 그래, 그것도 안 일어나게 할 수 있겠다. 미리 차라도 고장 내지 뭐. 기증 받은 사람들이야 못 받으면 그만이고 강수혁과 김재하는....”
“역시 죽이지 않는 선에서, 나쁜 짓 더 못하게 응징하면 되겠죠.”
류태현이 말했다.
“기자를 못하게 하려면.... 손가락이라도 잘라서 기사를 못 쓰게 하면 되나요?”
허강민은 류태현을 처음 보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쳐다보았다. 류태현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았다.
“왜...... 그 정도로는 분이 안 풀리시나요?”
“애초 내 분이 아니다만.”
허강민이 머리를 털었다.
“너야말로 분풀이를 하는 거냐?”
“분풀이... 라기보다.”
류태현이 시선을 돌렸다.
“그가 한 짓은 쓰레기 같은 게 맞으니까요. 양수연씨 외에도 그 사람 때문에 억울한 꼴을 당한 사람쯤 수도 없이 많겠죠.”
“그거야 그렇다만 하무열은 대체... 아니, 아니다.”
그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하무열 형사랑 너무 놀지 마라. 인간성 나빠진다.”
“안 놉니다.”
류태현이 부루퉁하게 말했다.
“무열 선배, 양수연씨가 자살하게 부추긴 걸로 모자라서 장혜진씨가 허강민씨 협력자였다는 사실도 숨겼습니다. 그런..... 제멋대로 정의를 곡해하는 사람하곤 말 안 해요.”
“말 안 하냐. 무슨 중고등학교에서 친구 따돌리는 거냐.”
“그....렇지만, 달리 뭔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음, 뭐.”
허강민이 좀 머뭇거리다 일어났다.
“납득 했으면 난 가본다. 말했듯이 네가 도울 수 있는 일도 없고..”
“같이 갈게요.”
허강민은 잠시 귀를 의심했다.
“뭐, 뭐라고?”
“과거로요. 그 마법, 다른 사람도 같이 갈 수 있는 거죠, 아까도 미래에서 온 사람들 중 한 명이라고 했고.”
“말꼬리 잡긴.”
“틀렸나요?”
허강민이 이를 갈았다. 류태현은 자기가 옳다고 확신했다.
“허강민씨, 과거에 가서 한 다고 한 일 몇 가지나 되나 생각을 해봐요. 혼자 다 할 수 있겠어요, 마법사 아니라 뭐라고 해도?”
허강민이 소리칠 듯 입을 벌렸다. 그러나 다시 다물었다.
“게다가 아까 양수연씨 빼먹을 뻔 했죠? 지적해 줄 사람이 있는 게 낫지 않아요?”
류태현을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도 허강민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없을 때 노려 백화점 무너뜨리고, 윤지애 뭐든 얽어 넣어 면허 박탈하고, 임선호 불명예 제대랑 파혼 시키고, 양시백 찾아서 아버지에게 데려다주고, 양수연 차 부수고, 강수혁 김재하... 뭐 대충 사회생활 못하게 만들어야 하고 그리고 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만나는 놈들마다 나한테 뭘 해달라고 하네. 내가 무슨 소원의 나무도 아니고.”
“다들 과거에 후회가 있으니까요.”
류태현이 말했다.
“너도?”
허강민이 비웃었다.
“너도 후회가 있어?”
“네. 허강민씨의 동생을 구하지 못한 거요.”
류태현의 대답에 허강민이 멈칫했다.
“이제 와서, 여자친구가 아니라 아이를 구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어?”
류태현이 고개를 저었다.
“둘 다 구할 수는 없었는지에 대한 후회입니다. 꼭 자기가 어쩔 수 있었던 일만을 후회하지는 않잖아요, 사람은.”
막 ‘그 애도 구하려고 매우 노력했다며?’ 라고 빈정거리려던 허강민이 입을 다물었다. 허강민 자신도, 동생들을 구할 수도 있었던 수가 자기에게 있어서 그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는 건 좋은데, 이 기억 모두 갖고 가는 거다.”
허강민이 경고했다.
“주위 아무도, 네 여자친구도 이해하지 못할 거야. 네가 왜 밤에 잠을 못 이루는지, 어디 가면 비상구부터 확인하고 조그만 소리에도 흠칫 놀라는지. 애초에 왜 갑자기 폐소 공포가 생겼는지.”
“상관 없어요. 이번에야말로 두 사람 다, 아니 모두 다 구할 수 있다면.”
“그러다 여승아에게 채이면?”
류태현이 웃었다.
“그래도 무사히 살아있잖아요.”
허강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 같은 녀석하고 어디를 같이 가고 싶은 생각은 없어.”
“...네.”
“하지만.”
그가 고개를 돌렸다.
“지금 이 상황을 아는 사람 중 믿을 수 있는 상대는 다들 미성년자라서, 더 과거로 가면 정말 아무런 도움도 안 되겠지...”
“전 그때도 성인이었습니다!”
류태현이 서둘러 자신을 어필했다.
“저축도 좀 있고, 경찰의 도움이 필요하면 순경 시험 다시 쳐도 되고요. 그리고....”
그가 좀 망설였다.
“제가 암것도 모르는 채 마음 편히 행복해지지 않는 것도, 허강민씨에겐 좀 만족스럽지 않을까요.....?”
허강민이 입속으로 뭔가 중얼거렸다.
“네?”
“밀실에 가두지도 않았는데 왜 갑자기 똑똑해졌냐고! 그래, 과거로 끌고 가서 죗값만큼 부려먹어주마!”
허강민이 쿵쿵거리며 현관문으로 갔다.
“저, 허강민씨!”
“연락처 따위는 주지 않겠어. 필요하면 내가 연락할 테니까 네노...”
“그게 아니라.”
류태현이 허강민에게 달려와 불쑥 튀김 봉지를 내밀었다.
“........”
봉지를 낚아채서 허강민이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잠시 멍하니 있다 류태현은 자기 볼을 힘껏 꼬집었다.
‘이거, 꿈은 아니지?’


자기 집무실로 돌아온 하성철은 쓰러지듯 자리에 앉아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맥박이 빠르고 거칠었다. 심호흡을 하며 진정하려고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내사과에선 그 보도를 진짜 취급했다. 말년에 더러운 꼴 보지 말고 자진 사퇴하면 징계는 잘 처리해주겠다고 회유를 했다.
물론 하성철은 거절했다. 자기에겐 죄가 없다. 그 증거는 조작된 거다. 그렇게 주장하며 제대로 된 수사를 촉구했지만 누구 하나 들은체도 하지 않았다.
‘백석의 졸개들 같으니!’
사퇴할 순 없었다. 그가 지금 사퇴하면 신임 국장은 분명 백석 문건을 감추거나 훼손하려 들 것이다. 이 정도로 대놓고 양심이고 체면이고 다 내던지는 공격을 했으니 마무리를 위해서 부하 형사들까지 해를 입힐 수도 있었다.
‘그걸 근태가 하게 되는 건가?’
알 수 없었다. 허건오는 자기 관련한 단편적인 사실밖에 알지 못했다. 태성이와 말을 해보고 싶었다. 이들은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어째서.....
어째서 태성이는 아버지를 그렇게 싫어하게 되었을까.
하성철은 깨달았다. 자신은 이 누명을 벗지 못한다. 십년 뒤 하태성에게 아버지는 비리를 저질러 몰락한 사람, 부끄럽고 아는 체도 하기 싫은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절망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반사적으로 약병을 꺼내려다 하성철이 손을 멈췄다.
저항하고 버텨봐야 비리 경찰로 낙인찍혀 가족들까지 손가락질 받게 하는 결말 밖에 남지 않았다면, 이대로, 아직은 의혹뿐인 채로 그가 죽는다면 적어도....
똑똑
“국장님? 안에 계십니까?”
하성철은 깜짝 놀랐다. 박근태였다.
“국장님?”
다시 불러도 대답이 없자 박근태가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하성철에게 달려왔다.
“국장님? 괜찮으십니까?”
“아니... 잠시만.”
하성철이 다시 약병을 움켜쥐고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가 알약을 입에 넣고 발작이 가라앉길 기다리는 걸 박근태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내사과 놈들.... 이미 넘어갔습니까?”
“아마도.”
하성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진사퇴하면 정식으로 징계하지는 않겠다더군.”
그가 슬며시 눈을 떠 박근태를 올려다보았다.
“그 경우 장희준의 입김이 닿는 사람이 이 자리에 앉아 수사를 엉망으로 만들겠지.”
“제대로 조사해 누명을 벗을 방법이 있을 겁니다.”
“근태.”
하성철이 도로 눈을 감았다.
“지는 편에 서게 된 걸 후회하나?”
박근태가 숨을 삼켰다.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지는 편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
하성철이 일어나 옷을 바로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왔나?”
“아, 팀원들 회식 자리에 잠깐 들러볼 생각인데, 같이 가시면 어떨까 해서.”
“마음은 고맙지만 혼자 가게. 생각해야 할 일이 많아서.”
그가 어두운 창밖을 내다보았다.
누명을 벗어야 했다. 수사팀을 위해서도 태성이를 위해서도.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기억 속의 축하 회식 때와는 일 년 가까이 시간 차가 나는데도 장소는 똑같이 피맛골 고기집이었다. 기시감 때문에 현실 감각이 없어질 것 같아 준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 때와 다른 점은 많았다. 이경환 조용호 고상만이 없고 도세훈 최재석 주정재가 그 자리에 대신 참석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장지연씨가 오지 않을 것이다.
“양반 뭐해. 벌써 취했어?”
얼굴이 불그스레해진 오미정이 그의 어깨를 쳤다.
“그냥, 감격스러워서 그럽니다. 수사가 이렇게 끝나다니.”
“끝날 때도 됐지. 오래 끈 거라고.”
오미정이 목소리를 낮췄다.
“건너건너 소문으로 들은 건데, 이번에 황도진 체포 못했음 수사 중단 될뻔 했대. 그, 사람도 많이 죽고 그래서.”
“그런가요?”
배준혁은 갸우뚱했다. 그 때는 장산병원에서 완전히 실패했었지만 수사가 중단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국장이 박근태로 바뀌었고.
‘아, 그것도 박근태와 장희준의 조업이었나.’
여기서는 박근태는 아직 팀장이고 자신도 아직 경장이었다. 그때는 왜 진작 이상한 걸 깨닫지 못했던가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오미정에게 박근태의 앞잡이라고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었다.
“어이, 그렇다고 그렇게 심각해질 건 없지, 작전은 성공했다고.”
미정이 준혁의 등을 두드리며 하하 웃었다.
“네, 그렇죠.”
준혁도 따라 웃었다.
“봐, 웃으니까 얼마나 보기 좋아.... 기왕 잘생긴 거 웃고 다니면 좋잖아. 우리 알고 지낸지가 몇 년인데 이제 와서야 웃는 걸 보여주다니, 비싸게 굴긴.”
준혁이 난처하게 웃었다.
“그럴 의도는 없었습니다. 앞으론 좀 더 웃고 다닐게요.”
“좋아 좋아.”
미정이 술잔을 들어 쭉 마셨다.
“미정 형사 술 잘 마시네.”
유상일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오미정의 얼굴에 확 붉은 기가 짙어졌다.
“사, 상일 경위님.”
“응. 나도 축하에 끼어야지.”
그가 하하 웃으며 오미정과 서재호 사이에 턱 앉았다. 오미정이 서둘러 새 소주잔과 젓가락을 그의 앞에 놔주었다.



검은 남자 58 ㅣ- 회색도시&검은방

권현석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얼른 받아들이지 못하고 두 눈만 깜박였다.
그럴 수 있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허강민이 류태현의 환자복을 벗기고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걸 보면서는 무슨 일이 나려는 건지 모를 수가 없었다.
침대 쪽으로 한 걸음 내딛으려는 권현석을 하무열이 붙잡았다. 그리고 병실 밖으로 끌고나와 버렸다.
“말릴 작정이신가요?”
하무열이 메마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인간의 원시적 욕구에 집중하게 하는 건 땅에서 동동 떠오르려는 발을 도로 땅에 붙이는 데 일반적이고도 효과적인 방법이죠. 허강민은 그걸 활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대체 왜?”
권현석은 창백하게 질린 채 더듬거렸다.
“다른......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 꼭 저렇게 해야 돼?”
“다른 방법 있으면 썼겠지요. 허강민인들 류태현하고 저러고 싶겠습니까?”
거기엔 권현석도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하무열은 담배 생각이 간절해져서 복도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권현석은 이걸 어떻게 뒷수습할지 아득해져서 꼼짝도 못하고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들어오기 직전 내보냈던 순경이 빠른 걸음으로 권현석에게 다가왔다.
“하성철 국장님께서 오셨습니다.”
하얗던 권현석의 얼굴이 노래졌다.
“아, 아직 퇴원하시기엔 이른 거 아니었어?”
“병원 안을 돌아다니는 정도는 괜찮다고 의사의 허락을 받았네.”
순경의 뒤쪽에서 하성철이 천천히 걸어왔다. 환자복 위에 가디건을 걸친 채였다.
“허강민을 자네가 데려갔다고 들어서 대체 무슨 일인가 확인하러 왔네......무슨 문제가 나서 얼굴이 그 모양인가?”
하성철의 날카로운 시선이 권현석의 희여멀건한 얼굴과 하무열의 만사 포기한 듯 무표정해진 얼굴 사이를 오갔다. 그러다가 천천히 류태현의 병실 문 쪽으로 시선이 옮겨갔다.
“설마.”
하성철이 한층 더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금 허강민과 류태현을 한 방에, 그것도 단 둘이 있게 놔둔 건가?”
권현석은 이제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이대로 쓰러져서 현실도피를 해버릴 수도 없었다.
“죄송합니다만.”
하무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류태현은 마법사가 된 부작용으로 아예 미쳐서 사라져버릴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허강민은 그걸 도로 정신차리게 하는 중이고요. 방해하면 안 됩니다.”
납득할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지 표정이 풀린 것도 잠시, 하성철이 다시 권현석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허강민이 대체 뭘 하고 있어서 경감은 이런 표정인 건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사악하고 끔찍한 의식을 치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권현석과 하무열 둘 다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주 거짓말도 아니고, 국장님께 사실을 설명하고 납득시키는 것보다는 훨씬 편하고 국장님의 건강에도 좋을 것 같았다.
“밀실 안에서 허강민은 자기가 마법을 쓸 수 없는 몸이 되었다고 했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상황이 된 류태현 순경을 돕고 있는 거지?”
완전히 할 말을 잃은 두 사람을 하성철이 잔뜩 의심스런 얼굴로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들 곁을 비켜나 문으로 다가갔다.
“잠깐만요.”
권현석이 죽을상을 한 채로 말렸다.
“방해하면 안 됩니다. 그......허강민이 스스로 나오면 그때 물어보시면 안 될까요?”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하고 있나?”
하성철의 표정이 뚜렷하게 어두워졌다.
“저도 다른 수 있으면 쓰고 싶었습니다.”
권현석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배준혁에게는 하무열이 찾아오기 전에 이미 전화로 물어봤다. 그는 체포 직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꼬치꼬치 자세히 묻더니, 류태현이 마법사를 넘어 미칠 위기라고 허강민과 비슷한 말을 했다. 그리고는 잠시 방법을 생각해볼 시간을 달라고 하며 끊었다.
그러고보니 준혁에게도 지금 상황을 전해야 했다. 허강민이 정말로 효과 있는 방법을 쓰고 있는지도.
하성철은 병실 문을 보며 망설이다가 일단 기다리기로 했는지 근처 벽에 기대 섰다. 그걸 곁눈질하며 준혁에게 카톡을 보냈다.
[허강민이 류태현 상대로 뭔가 하고 있어. 너는 일단 기다려봐.]
역시 배준혁에게도 허강민이 그래서 뭘 하고 있는지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준혁이도 그건 묻지 않았다.
“경감님.”
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는데 하무열이 질문해왔다.
“국장님이 지금 류태현이 아니라 허강민을 더 걱정하고 있는 것 아십니까?”
산 넘어 산이었다. 권현석은 폰을 다시 꺼내 문자로 찍어서 보여주었다.
[밀실 안에서 무슨 일 있었어?]
국장님이 바로 근처에 있어서 택한 대화수단이었지만 상대가 나빴다. 하무열은 자기 폰을 꺼내 한참이나 끙끙대며 오자투성이 문자를 찍었다. 그리고 권현석에게 전송했다.
[지나치게 감싸기도 해ㅛ고, 허강민 역시 안 그런 척 국장님의 안위를 챙겼습니다 밀실 막판에 강성중의 분노를 감수해가며 PDA를 개조한 것도 국장님을 살릴 길이 끄뿐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알았어. 문자 찍어서 보여주기만 하고 전송은 하지 마. 안 해도 돼.]
일단 그렇게 찍어서 보여주고 권현석은 어디까지 말해야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허강민이 밀실 안에서까지 정말로 국장님을 챙겼다는 것도 놀라웠다.
국장님께 이야기를 다 듣긴 했지만 국장님의 이야기도 그 이야기 속의 허강민도 온전히 다 믿을 수는 없었다. 그동안 청탁이 전혀 없었던 것은 단지 허강민이 백선교에 충성스럽지 않기 때문에 자기 개인적인 목적에 따라서만 청탁하려고 빚을 아껴두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밀실 안에서까지 국장님의 안위를 우선하다니, 이건 마치 허강민이 정말로, 처음부터 지금까지 국장님을 걱정해서 구해준 것 같지 않은가.
근태 형의 표변을 겪은 뒤라 그런지 이런 이야기 속 편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니, 경찰로서는 이 편이 정상이었다.
그러는 동안 하무열 형사는 새로 문자를 찍느라 끙끙거리고 있었다. 스마트폰 처음 만지는 사람처럼 힘들어보여서, 권현석은 차라리 국장님을 노골적으로 피하는 꼴이 되더라도 둘만 딴 데 가서 얘기할 걸 그랬나 생각했다. 뭣보다 그렇게 끙끙거리고 있으니 국장님도 이쪽으로 신경이 쏠리고 있었다.
“무슨 연락 왔나?”
“아닙니다.”
하무열 형사가 폰을 포기하고 고개를 들었다.
“실은 밀실 안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국장님과 경감님 두 분 다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요.”
방금까지 폰으로 한 문자질의 보람을 싹 날려버리는 소리에 권현석은 아득해졌다. 하무열 형사가 이렇게 눈치없는 사람이었던가?
하성철 국장이 기색을 딱딱하게 하고 다가왔다. 하무열은 멀쩡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앉아서 이야기하고 싶군요. 보안이 될 만한 자리에서.”
“그러지.”
하성철의 기색은 험악했다. 권현석은 가까운 휴게실을 찾아 앞장섰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허강민과 국장님 사이의 관계를 하무열 형사와 셋이 논의하고 있는 동안 저 병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국장님의 주의를 벗어날 것이다.


허강민은 침대에서 일어나 다시 옷을 걸쳤다. 등 뒤에서 편히 잠든 류태현의 숨소리가 들렸다.
이제 저대로 푹 자고 눈을 뜰 수 있을 것이다.
류태현은 일단 자신이 어디에 속해야 하는지 기억해냈다. 하무열과 안승범과 민지은과 경찰 동료들을 기억해내고 백선교가 적이라는 것도 기억해냈다.
여승아를 상기시킨 것은 역효과였다. 그 둘 사이는 본인들이 알던 것보다 훨씬 어리석고 어긋난 관계였기에. 상대를 위해 이 무거운 짐을 진다고 양쪽 다 생각해왔지만 그러면서 누구보다 상대에게 무거운 짐이 되어있었다.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한 애인을 사실은 상처입히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호구 녀석에게 견디기 어려운 진실이었다.
‘애정이란 건 정말 난해해.’
환자복을 꿰어 입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류태현을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재빨리 나가버리고 싶은데 문은 밖에서 잠겨 있었다. 경감을 소리라도 쳐서 부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니, 그냥 잠시만 쉬자.’
의자를 끌어당겨 류태현에게서 등을 돌리고 앉았다.
류태현이 왜 자신에게 애정을 느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논리적인 구석이 전혀 없었다.
장혜진은 자신이 하무열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나아가 유혹한 것을 두고 외로워서라고 평했다. 감정을 못 느끼는 게 아니라 느끼는데 본인이 못 받아들이는 것뿐이라면서.
그건 그나마 논리에 닿는 이야기였다. 하무열과 자신은 실제로 공통점이 있었다. 똑같이 교활하고, 사람 목숨을 그리 절대선마냥 떠받들지 않았다. 필요하면 죽일 수 있는 게 사람이었다.
그에 비하면 류태현은 자신과 닮은 구석도 맞는 구석도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 미워할 이유만 빚더미처럼 불어났다.
그런데 왜 이놈은.
혼란스러웠다. 이제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류태현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불완전하게 끝났을 뿐 아니라 시작부터 어긋나 있던 복수. 여승아를 지금 죽인다고 해서 그게 보수될 것 같지 않았다. 임선호를 죽였지만 거기에 묵은 복수심은 없었다. 강성중을 방심시키기 위해 죽여도 되는 놈을 죽였을 뿐.
역시 밀실 안에서 그냥 죽는 편이 깔끔하고 좋았을 것이다. 강성중을 못 죽인 것이 조금 아쉽긴 한데 여승아와 류태현이 살아있는 건 그만큼도 아쉽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살아서 좋을 일도 없었다.
머리가 멍해지는 순간 허강민은 실수를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바로 옆에 갓 고비를 넘긴 초보 마법사가 있었다. 현실로부터 멀어지는 생각은 뭐든지 위험했다.
결국 고개를 돌려 류태현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새근새근 푹 잠들어 있었다. 좋은 꿈을 꾸는지 꿈 없는 깊은 잠에 빠져 있는지 조금 궁금해 했다가 후자라고 결론지었다. 류태현 역시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는 망가져 있었다. 방금 마법사로서의 입문식까지 마쳤는데 좋은 꿈 같은 것 보일 리 없었다.
‘멍청한 놈.’
순진한 아이 같은 얼굴로 잠들어 있는 모양이 얄미워서 머리카락이라도 잡아당기고 싶어졌다. 막 손을 뻗으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허강민, 나 권현석 경감이야.”
“들어오시죠.”
허강민은 손을 내렸다. 보란 듯이 한 줌 뽑아줄까도 했지만 해치려는 걸로 오해라도 받았다간 귀찮아지는 건 자신이었다.
어두운 병실 안에 경감이 눈살을 찌푸리고 들어왔다.
그 뒤로 하무열 형사도 들어왔다. 하성철 국장도. 하무열과 권현석이 그렇게까지 주의를 돌리고 말을 피했음에도 방 안에 은근히 떠도는 냄새 때문인지 이미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 챌 만큼 챈 기색이었다. 불도 켜지 않았다.
허강민은 흠칫 해서 자세를 똑바로 했다.
“어떻게 되었나?”
하성철 국장이 허강민에게 물었다. 허강민은 머뭇거리다 답했다.
“류태현은 이제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한 잠 자고 일어나면 한바탕 악몽에 시달린 꼴로나마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정신도 온전......하고요. 아마도.”
그걸 멀쩡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찜찜한 심정에 말이 절로 버벅였다.
“아마도?”
하성철 국장의 목소리가 한결 더 딱딱해졌다. 허강민은 아차 했다.
“정신이 안정된 정도라는 면에서라면 충분히 온전해졌습니다. 과정이 저부터 납득 안 되는 게 문제지요. 전 이 녀석을 증오하고 괴롭혀 죽이려고 그렇게 온 힘을 다 했는데 이 녀석은.......아까 일이 분명 류태현 원하는 대로 해주다보니 일어난 일입니다. 녀석이 절 확실하게 알아본 상태에서요. 이놈이 무슨 생각인지 전 정말 모르겠습니다.”
하성철 국장이 허강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어두운 방 안에서도 표정이 보일 정도였다.
“자네는 괜찮았나?”
하성철 국장은 여전히 화가 난 것 같았다.
“류태현에게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럴 수 있었나?”
“......”
허강민은 하무열 쪽을 보았다. 하무열은 ‘그러길래 내가 뭐랬어.’라고 약이라도 올릴 듯한 표정이었다.
“저는 류태현의 무의식에 들어가기 위해 역시 의식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렇게 털어놓았다.
“즉 저도 겉치레나 의식의 조정 같은 것 없는 날것 그대로의 감정으로 그를 맞이해야 했단 말이죠. 인정하긴 싫지만......류태현과 하는 게 제 무의식 속에서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면 아까 시도할 수도 없었다는 겁니다. 제 속마음이 거부했을 테니까요.”
하성철 국장은 여전히 복잡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허강민이 정말로 평온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어서인지 화난 기색은 점차 가라앉았다.
“이제는 일반적인 치료도 잘 들을 겁니다.”
허강민이 속으로 안도하며 말했다.
“저도 제 병실로 돌아가 쉬고 싶고요. 괜찮겠죠?”
“그래.”
“국장님은 괜찮으신가요?”
허강민은 두 사람을 복잡한 시선으로 보고 있는 권현석과 하무열에게 주의를 돌렸다.
“국장님께서 너와 내통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어. 법적으로는.”
권현석이 대꾸했다.
“그러니 회복하시는 대로 전처럼 업무 복귀 가능하시고 넌 지금대로......경찰 수사에 협조해주면 돼. 내 말은, 꼭 방금 같은 일을 반복할 필요는 없지만.”
“알겠습니다.”
허강민이 지리멸렬해지려는 말을 잘랐다.
“어차피 류태현도 이제 제정신을 차릴 테니 제가 방금처럼 떠먹여줘야 할 일은 없을 겁니다. 이불킥을 하건 저한테 싹싹 빌건 저 녀석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고요. 다만 한 가지.”
하성철과 권현석은 물론 하무열까지도 얼굴에 더럭 긴장의 빛이 스쳤다.
“류태현은 이미 검은 남자를 대면하고 그의 힘을 빌려 혼자서는 불가능했을 일을 해냈습니다. 그는 이미 마법사가 되었고, 있었던 일을 싹 잊고 일상을 구가하며 정상인인 척 하기는 불가능해진 겁니다. 주변 상황이 평화로웠다고 해도 그럴진대 지금은 백선교와 실버 트와일라잇 양쪽에 치이는 판이죠. 안 그렇습니까?”
“맞아.”
하성철 국장이 어두운 기색으로 긍정했다.
“그러니 류태현도 마법사로서 힘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주문과 제물 사용법 같은 거요. 그렇게 해야 자신과 주변을 지키고 계속될 공격도 견딜 수 있습니다.”
허강민이 다시 권현석 경감을 보았다.
“경감님께 이미 펫 마법사가 있는 모양이던데 그가 류태현을 가르칠 수 있습니까?”
“펜 마법사?”
권현석이 못 알아듣고 눈을 깜박였다.
“마법사의 등급 같은 거야?”
허강민이 피식 웃었다.
“아, 네. 경감님께서 마법사를 얼마나 예뻐하며 키우시는지는 잘 알겠습니다. 어떻게 마법사 부하가 생겼나 궁금했는데 그런 식으로 길들이셨군요.”
마침내 알아듣고 권현석이 표정을 확 찌푸렸다.
“백선교에선 사람을 그런 식으로 다루는 게 상식인지 몰라도 난 아니야. 입에 발린 말로 길들인 적 없어.”
“예, 그런가요.”
노골적으로 건성으로 답하다가 하성철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기색도 나쁜 걸 보고 허강민이 태도를 고치고 시선을 피했다.
“아무튼 그 사람은 곤란해. 지금 서울에 없거든.”
권현석이 딱딱하게 이야기를 돌렸다.
“그러니 류태현에게 마법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도 지금은 너뿐이야. 병원 안에서 가능하겠어?”
허강민은 권현석과 하성철을 번갈아 바라보고 끄덕였다.
“저와 류태현을 지금처럼 방해 없이 같이 있게만 해주면 됩니다. 걱정 마세요. 저도 이놈을 엄청난 마법사로 만들 생각 없습니다. 그저 당장 필요한 기술 몇 가지나 가르치고 그 외엔 최대한 이전처럼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주력할 테니까요.”
이번엔 권현석과 하성철이 서로 마주보았다.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죠?”
“그래. 나도 빨리 복귀해서 자네가 허강민과 류태현의 처우를 책임질 수 있도록 조치하겠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20 ㅣ- 회색도시&검은방



쾅쾅쾅
밖에서 누가 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그러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팀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권현석 경감은 경찰청 안을 전력 질주라도 한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그, 어, 저 국장님.”
그가 신문을 책상에 던졌다.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수사가 늦어진 이유 - 부패 간부 때문에?>
오랫동안 잠입한 경찰들의 목숨을 갈아넣다 겨우 보스를 체포해 체면을 세운 특수수사팀의 국장이 수사 대상인 선진화파로부터 뇌물을 받은 정황이 포착되었다고 조금 더 작은 활자로 요약되어있었다. 한쪽엔 증거라는 통장 사본의 사진에 하성철 사진까지 실려 있었다.
하성철도 박근태도 얼굴이 하얘져서 기사를 읽었다.
“저.....”
“모함일세!”
하성철이 소리쳤다.
“이런..... 이런 거짓 증거를 어디서 손에 넣었는지 몰라도 이런 식으로.....”
“우린 국장님을 믿습니다.”
권현석이 서둘러 말했다.
“백석이겠죠. 조직폭력배에게 돈을 댄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잡히자 발악하는 겁니다. 저런 거 당연히 모함이죠!”
“맞아.”
박근태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일이 까다로워졌는걸. 먼저 언론에 뿌려버리다니. 수사팀 입장이 곤란해지겠어.”
“그러게. 말은 주워 담지도 못하는데. 이래선 사실이 밝혀져도 국장님의 명예가...”
권현석이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신문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모함 따위, 조사하면 다 드러날 거야.”
하성철이 말했다.
“그래도 우리가 직접 어찌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박근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 밑작업도 없이 이런 대담한 짓을 벌였을 리는 없는데, 힘든 싸움이 될 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자네들은 동요하지 말고 수사를 계속하게.”
하성철이 어깨를 쭉 폈다.
“이건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하지.”
“네.....”
권현석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 내일 회식 하는 건.”
“예정대로 진행하게.”
“하지만.”
“어차피 나는 술도 별로 못 마시니 간다고 분위기 살지는 않겠지.”
“어떻게 국장님 빼놓고 회식을 합니까. 안 하면 안 했지.”
권현석이 말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형사들 사기에 문제 생길 것 아닌가.”
하성철이 주장했다.
“기왕이면 이 이야기도 그들 앞에선 되도록 말하지 않는 게 좋겠네.”
“알겠습니다.”
권현석은 수긍한 기색이 아니었지만 고개는 끄덕였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하성철이 웃어보였다.
“진실은 밝혀지게 되어 있어.”


왜 이럴 때 일수록 집에 마땅히 대접할 만한 게 없는 걸까. 류태현은 올 때 과일이라도 사오지 않은 자신을 탓하며 일단 물을 끓여 커피를 탔다.
그가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주방하고 일체이다시피 한 거실의 소파에 허강민이 앉아있었다.
‘꿈이 아니야.’
류태현이 커피믹스 봉지의 날카로운 가장자리로 손끝을 꽉 눌러보았다. 분명히 꿈은 아니었다.
허강민이 류태현의 집에 와있었다. 그를 죽이거나 밀실에 가둬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살리는 대화를 하기 위해.
그게 다소 미친 소리여도 류태현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떤 황당무계한 이유로든 허강민이 살인은 안 하면 그게 좋은 일이었다.
‘거기에 좀만 더 욕심을 부리자면, 나도 용서해주면 좋겠지만.’
여전히 증오한다고 했다. 그러나 더 괴롭히지는 않겠다고. 그러니 걱정 말고 여승아와 결혼하라고 말했다. 그 말만 믿고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이제 허강민과의 악연이 다 끝났다고, 그러니 더 이상 그와 얽히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하고 좋아하기엔 류태현도 그 정도로 순진한 바보는 아니었다. 미친 이유든 뭐든 명확하고 허강민이 진심으로 받아들일 만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 허강민을 집에까지 데려온 것이다.
그래서 정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면, 허강민이 진심으로 이제는 복수를 그만두고자 한다면 그때는 정말로 마음 놓고 승아랑 결혼할 수 있냐하면, 그건 아닐지도 모르지만.
주전자가 삑 소리를 냈다. 그가 서둘러 커피를 타고 거실로 들고 나갔다.
허강민은 어색하게 비닐봉투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기름 냄새가 솔솔 났다.
“허강민씨 튀김 좋아하세요?”
“응? 아니.”
그가 깜짝 놀라 봉지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런데 뭘 저렇게 많이.”
“한창 먹을 나이 애들이 잔뜩이라 잔뜩 샀는데, 너무 많았나...”
류태현이 뜨악해서 허강민을 쳐다보았다.
“애들이요? 누구요?”
“넌 알 필요 없어.”
그가 휙 류태현을 외면했다.
“응, 그래. 돕겠다는 것도 사실 필요 없어. 나 혼자 할 수 있고 네가 뭔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과거론 어떻게 가실 거에요?”
류태현이 본론부터 말했다. 허강민이 입을 다물었다.
“과거로 가더라도, 백화점에 침입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닐 거에요.”
과거로 어떻게 가는 건지도 더 추궁해보고 싶지만 류태현은 우선 그렇게 말해보았다.
“도울 사람 정말 안 필요해요?”
“내게 필요한 건 마법사야, 평범하기 그지없는 네가 아니라.”
“또 평범... 뭐라고요?”
“마법이라고. 과거로 갈 방법이.”
허강민이 만사 포기한 사람처럼 털어놨다.
“세상에, 인간이 모르는 사악한 괴물들이 준동하는데 그 힘의 일부를 인간이 빌려 쓸 수 있다. 그게 마법이고, 나도 마법사다. 햇병아리... 까지는 아니고 약병아리 수준이다만.”
“약병아리면, 삼계탕 뚝배기에 쏙 들어가는 손바닥만 한 그거요?”
“닭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니고.”
허강민이 류태현을 째려보았다.
“이쯤 되면 이 놈은 미친 게 틀림 없으니까 더 엮이지 말아야겠다 같은 생각 안 드냐?”
“이미 엮였는걸요.”
류태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런.... 미궁을 두 번이나 거치고 평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넌 계속 무난하게 좋은 사람을 연기하고 있잖아.”
“연기 아닙니다.”
류태현이 볼멘소리를 했다.
“다른 사람들과 다 같이 살아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요.”
“전례를 생각하면 충분히 이상하지.”
말하고 허강민이 표정을 찌푸렸다.
“그 얘긴 됐고, 그러니 너랑은 상관 없다는 것만 알면 돼.”
“마법으로 과거로 가서 백화점 사고를 막고, 현재로 돌아와 보면 가족들이 다 살아있고 저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는 건가요?”
“아니, 나만 이 상태.... 지금 기억을 가진 채로 사고 전으로 되감기는 거다. 이건 내 기억 외에는 아예 없었던 일이 될 거야. 아마도. 그러니 그 동안 군대나 입시였던 사람들에게 미안할 일도 전혀 없겠지.”
“그런 게 정말 가능해요?”
“가능해. 미래에서 넘어온 사람을 실제로 만났어.”
당연하게도, 류태현은 허강민이 사기당했을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런 거 어떻게 믿....”
허강민이 몸을 일으켜 류태현에게 손을 뻗었다. 류태현이 흠칫 몸을 움츠렸지만 손끝이 이마에 닿는 건 막지 못했다.


승아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어둡고 차갑고 먼지투성이인 음산한 폐건물 바닥에 피가 번져나갔다. 이미 늦은 걸 알면서도 그는 승아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허강민을 발견했다.
그 손에 칼이 들려있었다.
“당신이 결국 승아를!”
그가 허강민에게 덤볐다. 쓰러트리고 타고 앉아 목을 졸랐다. 저항다운 저항도 제대로 못해보고 허강민은 숨이 끊겼다. 시체를 내려다보며 그는 자기가 한 짓을 깨달았다.


“아아아아아아악!”
류태현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허강민이 한 걸음 물러났다.
“반응이 센데? 뭘 봤기에..”
류태현이 허강민을 와락 끌어안았다.
“.......허?”
“죽지 말아요!”
류태현이 울먹였다.
“제가 잘못했어요, 제 잘못이니까, 제발 아무도 죽지 말아요, 죽이지 말아요.....”
멍하니 있던 허강민이 뒤늦게 마구 몸을 뒤틀었다.
“너, 뭘 봤는지는 알겠는데 끌어안을 대상이 틀렸어!”
류태현을 차 밀어내고 허강민이 뒤로 물러나 숨을 몰아쉬었다.
“그거 그냥 환각이다. 네 무의식에 잠재된 끔찍한 악몽을 불러낸 것 뿐이야. 마법으로. 그러니까 정신 차려.”
말하고 허강민은 ‘마법이니까 정신 차려’는 별로 옳은 표현이 아니지 않았을까 조금 반성했다.
“사실 아니라고. 알겠지만 아무도 안 죽었어.”
이것도 맞지는 않았다. 허강민은 이마를 짚었다.
“그..... 아무도 안 죽게 하려고 이러고 있는 거니까 정신차려.”
“이런게.... 마법이에요?”
류태현이 눈물을 닦으며 일어났다.
“끔찍했는데요?”
“마법의 기원이 끔찍한 괴물이라고 말했는데 뭘 들었냐. 그리고 뭐, 그럼 내가 너한테 여승아랑 꽃밭에서 하하호호 나 잡아봐라 하는 꿈이라도 보여줬어야 했다고 생각해?”
류태현이 어물어물하다 도로 소파에 앉았다.
“승아가 죽었어요.”
그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옆에, 허강민씨가 칼을 들고 서 있었고. 그래서 제가 달려들어서....”
“날 죽인 거냐.”
허강민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류태현을 보았다.
“뭐 됐어. 네 꿈 내용 따위 중요한 게 아니라 마법이 있는 걸 안게 중요하니까.”
허강민이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내가 마법사이기 때문에 마법의 존재를 인정하는 거다, 그런 엄청난 일까지 가능할 줄은 몰랐지만. 최근에 그런 사람들을 만났고, 그래서 그들과 손잡아 과거로 가려는 거야. 가서 사고를 막고, 그 사람들의 원래 목적도 이루고....”
“그건 뭔데요?”
“그들도.... 사람 여럿 죽고 뭐 그런 비극이 있었어. 십 년 후에. 내가 마법을 배워 더 과거로 가는 대신 그 쪽 문제도 해결해주기로 했어. 그럼 모두가 살아서.....”
허강민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정은영과 임선호 마저도. 임선호야 지금도 살아있긴 하지만.... 그래도 전역하고 파혼 정도는 시켜야겠어. 내 동생 아니라도 다른 사람이 죽을 지도 모르잖아?”
“네, 그건 그렇죠.”
류태현이 수긍했다.
“정은영 사장은... 빈 건물이 무너져도 손해는 막대할거고 그것만으로도 꽤 몰락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죽이지는 말아달라고? 너란 녀석은.”
허강민이 비웃었다.
“어차피 죽이지는 못해... 그, 미래에서 온 협력자중 한 명이 아주 인명을 소중히 해서.”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 죽이지 않는 선에서 몰락시킬 거다. 정은영도 윤지애도.”
류태현은 그 누군지 모르는 사람에게 감사했다.
하지만 슬프기도 했다. 자기도 인명을 소중히 하는데, 허강민은 그가 하는 말은 모두 거짓이고 위선이라 단정 짓고 더욱 화내고 증오할 뿐이었다.
살인은 그만두라고, 자기가 설득할 수 있었으면 좋았는데. 지금 뒤늦게나마 중단한다면 다행이지만.


검은 남자 57 ㅣ- 회색도시&검은방


허강민은 금방 의식을 찾았다.
경찰의 각종 조치에 군말없이 따랐고 검진과 치료에도 저항하지 않았다. 먼저 뭘 묻거나 요구하지도 않았다.
권현석과 하무열이 병실에 나타났을 때도 눈살만 조금 찌푸렸을 뿐 조용히 있었다. 용건이 있으면 어디 온 사람이 말해보라는 듯.
“류태현 순경이 깨어나지 않아.”
권현석 경감이 그 이야기부터 했다.
“어떻게 된 건지 알겠어?”
허강민은 권현석을 가만히 훑어보았다.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하무열과 류태현의 안가에 마법 부적을 놓은 건 분명 경감의 조치일 텐데 경감 자신은 마법사로는 보이지 않았다. 마법사라면 지금 류태현이 어떤 상태일지 굳이 와서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검은 남자의 존재를 인지하고, 그 자리에 불러들여 원래라면 감당할 수 없었을 적을 무찔렀다.
당장 그 자리에서 집어 삼켜지는 건 면했다. 그러기 위해 류태현은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을 알았고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보았고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을 들었다.
지금은 대화해선 안 되는 상대와 대화하며 가서는 안 되는 곳으로 가려는 것이다.
마법사들조차도 피하고 미루기 위해 노력하는 운명, 완전히 미쳐버려 다른 세계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운명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는 마법사가 되기 위한 통과 의례를 너무 잘 치른 것이다.
“그를 살리고 싶은 거지요?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래.”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권현석이 표정을 찌푸렸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자신의 재능을 자각하고 마법의 본질을 접하고 활용하는 일을 지나치게 서둘러서 한꺼번에 해냈습니다.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긴 했습니다만 덕분에 지금은 브레이크 고장난 자동차처럼 돌진하는 중이지요. 절벽에 처박히기 전에 세우려면 다른 차가 옆에서 받아서라도 갓길로 밀어내야 합니다.”
“다른 차?”
권현석이 한층 더 표정을 찌푸렸다.
“꼭 저일 필요는 없습니다. 머리 쓸 줄 알고 마법 쓰는 데 좀 익숙해진 마법사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경감님 곁에도 한 명 있는 것 아닙니까?”
권현석은 입을 다물었다. 긍정적인 기색이 아닌 걸 보고 허강민은 권현석 편의 마법사가 대체 누구기에 저러나 잠시 의문을 품어보았다.
배준혁 경사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박근태를 따라 실버 트와일라잇에 가서 마법사가 되었고 지금은 시내에 있지도 않으니까.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배 형사는 딱히 수사팀에 해로운 행동은 하지 않았다. 마법 부적을 주고 사용법을 가르쳐주는 정도는 먼 지방에서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버 트와일라잇이 권현석 편에서 마법을 써도 좋다고 허락해줄 리는 없었다.
“이쪽 마법사는 지금 부탁할 상황이 아니야.”
권현석이 딱딱하게 말했다.
“류태현을 구하는 게 내키지 않겠지만 협조해주면 이쪽에서도 그만큼 성의를 보일 테니까. 기왕 체포되었고 백선교의 도움도 바랄 수 없는 처지인데 경찰에 협조적이고 깊이 반성하는 태도를 보인다고 조서에 기록되는 편이 좋잖아?”
뜸을 들이며 허강민의 기색을 살피던 권현석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내가 그렇게 시큰둥해 보이나. 그 얼굴을 거울 대신 살피며 허강민은 멍하니 속으로 중얼거렸다.
회유책에는 확실히 아무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생각할 의욕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류태현이 이대로 영영 사라져 버린다라. 그것도 자신은 이렇게 멀쩡히 따로 갇힌 상태에서.
“절 류태현 곁에 데려다 주실 수 있습니까?”
권현석이 눈을 번쩍 떴다.
허강민은 침대 가에 연결된 수갑을 가리켰다.
“여기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가서 류태현을 직접 보고 자세한 상태를 확인해야 뭘 해도 할 수 있습니다.”
“좋아.”
흉악 범죄자를 그 피해자 곁에 데려다놓는 일 정도는 이미 각오하고 온 모양이었다. 권현석은 바로 수갑 열쇠를 꺼냈다.
“달리 필요한 것은?”
“위스키나 보드카 같은 독주가 있으면 좋습니다. 그게 안 되면 뭐든 단번엔 기절시킬 수 있는 것. 그 외엔 있어도 별 소용 없습니다. 저도 지금 마법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태여서요.”
권현석은 불안한 표정을 하면서도 허강민을 침대에서 풀어주었다. 허강민은 순순히 침대에서 내려와 권현석을 따라갔다.
류태현은 혼자 격리되어 있었다. 병실 앞을 지키고 있던 경찰들은 권현석이 한 마디 하자 물러났다.
문을 열자 음습한 한기가 느껴졌다. 허강민뿐 아니라 권현석과 하무열도 주춤할 정도로. 분명 평범한 공간이어야 할 병실 안이 공기가 희박해지고 대신 다른 무언가가 들어찬 것 같았다.
허강민은 천천히 류태현 곁으로 다가갔다.
몸은 조용히 누워있는 것 같아도 정신은 끊임없이 울부짖고 있었다. 허강민이 손을 뻗어 이마를 짚어도 느끼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자신은 여전히 마법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주문과 정교한 기술을 쓰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것이지 이미 마법에 적합하도록 열린 정신을 되돌리는 것은 아니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류태현의 피부의 감촉, 숨소리, 체취,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허공을 향해 열린 정신은 어느 정도의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류태현의 정신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허강민에게도 익숙한 밀실 안 같은 곳을 헤매며 몇 번이고 출구를 찾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니알라토텝이 기다리는 밤하늘을.
허강민은 잠시 망설이다 그의 마음에 말을 걸었다. 그 미로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류태현.’
그의 목소리에 순경 제복을 입은 등이 움찔 떨렸다. 도망가거나 하는 대신 천천히 돌아서서 허강민을 바라보았다.
겁먹은 표정도 잠시뿐이었다. 류태현은 곧 얼굴이 밝게 풀어져서 허강민을 향해 한 걸음 씩 다가왔다.
‘다행이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허강민은 아득해졌다. 류태현이 현실 지각력을 잃은 나머지 허강민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게 분명했다.
예상보다도 상태가 훨씬 더 나쁘다. 조용히 접근해서 현실로 불러들이면 될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택도 없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동안 류태현이 허강민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는 손을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허강민 씨, 무사했군요.’
‘뭐?’
허강민이 멍하니 되물었다. 지금 류태현이 자신을 몰라보고 이러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류태현이 허강민의 손을 꼭 잡았다.
‘강민 씨만이라도 제가 지켜줄게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할게요.’
‘류태현?’
허강민은 류태현의 눈앞에 손을 흔들어보았다.
‘정신차려. 난 너한테 지켜달라고 한 적 없다.’
‘알아요.’
류태현은 방긋 웃고 허강민을 꼭 끌어안았다. 허강민은 당황한 나머지 그냥 끌려가서 안겨버렸다.
‘미워해도 돼요. 계속 증오해도 돼요. 허강민 씨가 계속 살아있기만 하면 돼요.’
‘이봐, 권현석 경감! 이놈이 이 지경으로 미쳤으면 그렇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류태현은 여전히 허강민이 제 애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끌어안고 쓰다듬고 있었다. 허강민은 들어온 이유도 잊고 몸을 빼려고 애썼다.
‘류태현, 정신차려. 나 허강민이다. 네 원수라고. 네가 왜 날 지켜야 하는데?’
‘그야, 죄도 갚고 싶고, 그리고......’
류태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허강민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온 것을 갑자기 질문받아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냥, 허강민 씨를 지키고 싶어서라고 하면 이상한가요?’
‘응. 아주 이상해.’
허강민은 혼란에 빠졌다. 지금 자신은 류태현의 무의식에 직접 침투해 있으니 지금 류태현이 하는 말은 위선이나 말재주 같은 게 아니라 가장 날것에 가까운 그의 본심이었다. 류태현이 진심으로 허강민을 지켜주려 하고 있었다.
이것이 허강민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진실이었다. 류태현은 여승아를 구하기 위해 그의 동생을 외면한 사람이지만 또한 그와 그의 동생을 구하기 위해 손을 내민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네요. 이유가 뭘까요.’
허강민이 혼란에 빠져 있는 동안 류태현도 점차 당황하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까지 허강민 씨가 소중할까요? 죄책감만으로 이렇게 되는 게 정상일까요?’
‘당연히 비정상이지, 멍청아.’
허강민이 몸에서 힘을 빼고 류태현의 등에 팔을 둘러 다독였다. 어쨌든 이놈을 달래서 깨워야 했다.
‘정신 차리고 이만 현실로 돌아가. 너 기다리느라 다들 목이 빠질 지경이라고.’
‘현실......’
류태현이 허강민을 안은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다들 저 기다리고 있어요? 정말로?’
‘그래. 하무열 형사도 권현석 경감도 여승아도 다.’
대충 떠오르는 대로 여승아의 이름까지 입에 올렸을 뿐인데 류태현이 흠칫 움츠러들었다.
‘승아가 저 보고 싶어해요?’
당연히 그럴 거라는 말이 대뜸 나오지 않았다.
지금은 자신도 류태현과 마찬가지로 본심을 감추기 힘들었다.
‘......어쨌든 널 살리려고 그렇게까지 했잖아. 보고싶겠지.’
‘허강민 씨는.’
류태현은 허강민의 말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이제 승아를 증오할 건가요? 저한테 했던 것처럼 승아에게도 할 건가요?’
‘그게 지금 중요해?’
허강민은 한 걸음 물러나려 했다.
그 질문의 답은 허강민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복수는 전제부터 어긋나 있었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미 너무 많은 것이 달라졌다.
텅 빈 집만큼이나 공허한 마음에 ‘복수’란 한 낱말이 흘러들어왔을 때와 지금은 같을 수 없었다. 여승아를 향한 분노를 모으려 해도 모아지지 않았다. 공허는 갈수록 커지기만 했고 자신에게 있었는 줄도 몰랐던 인간성은 그 공허에 깨끗이 삼켜졌다.
장혜진 말대로 자신에게도 남들만큼 감정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젠 전부 옛날 이야기. 여기 남아있는 건 그냥 바싹 마른 뼈에 불과하다.
‘강민 씨!’
류태현이 다시 힘주어 부둥켜안았다.
‘가지 말아요, 제가 잘못했어요. 저를 벌하세요. 제발......다른 사람 보지 마세요.’
‘뭐?’
너무 뜻밖의 소리에 류태현보다 먼저 현실을 잊을 뻔 했던 정신이 제자리에 돌아왔다.
류태현의 손이 자신을 그저 붙들고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강민 씨.’
류태현이 고개를 들고 허강민을 바라보았다. 그 눈이 심상치 않게 풀어져 있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어떻게 하면 강민 씨를 지켜줄 수 있을까요?’
이제 알 수 있었다. 임선호를 도발해 거꾸로 죽여버렸을 때 류태현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넘어갔는지. 그 이전부터 호구 소리 들어가면서도 왜 자신을 감싸기만 했는지. 네 번 지옥에 이끌려 들어오면서도 왜 미워하는 기색이 없었는지.
지금 허강민을 끌어안고 더듬는 손은 마치 애인 대하는 듯한 손길이 아니었다. 애인을 대하는 손길이었다.
허강민은 당황했다. 류태현의 정신이 허공으로 날아가버리지 않고 여기 있는 것은 자신이 여기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들어온 목적을 달성하고 있기는 한 건데, 이런 식으로 달성해야 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멍청히 아무 것도 못 하고 서 있는 걸 허락이라고 멋대로 생각해버렸는지 류태현의 손이 점점 대담하게 움직였다. 셔츠 단추를 풀고 그 아래 드러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숨결이 피부를 간지럽혀 몸서리가 쳐졌다.
‘류태현.’
‘예?’
여전히 허강민을 품에 안은 채 류태현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뺨이 발갛게 물든 채 눈망울을 빛내고 있으니 예기치 못한 색기가 흘렀다.
‘강민 씨?’
류태현의 목소리가 불안감으로 떨렸다. 허강민을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허강민은 망설였다. 지금 류태현의 의식세계 속에서 그를 밀어내는 건 어려울 뿐 아니라 위험한 일이었다. 자칫 류태현이 용서를 빈답시고 폭주해 자신의 의식을 눌러 죽일 수도 있고 그러기 전에 현실의 괴로움을 떠나 검은 남자를 따라가 버릴 수도 있었다.
자신은 마법을 쓰지 못하게 하는 금제를 스스로 깰 재주는 없었다. 여기서 류태현이 그렇게 사라져버리면 백선교 상대로 마법 쓸 사람이 사라진다.
허강민은 입술을 깨물고 다시 류태현을 다독였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제대로 된 마법사가 못 되기만 해봐라. 그땐 정말로......’
류태현의 키스를 받아들이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떤 협박을 입에 담아야 할지도 실은 잘 알 수 없었다.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해봐야 자신은 한 순간도 그를 용서한 적 없었다. 언제나 류태현에게만은 최대한 가혹했다.
그 결과가 이거라니.
허강민이 적극적으로 태세를 바꾸자 류태현도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소원하던 장난감을 받은 아이처럼 활짝 웃더니 허강민을 그 자리에 눕히고 셔츠 단추를 풀었다. 바지 벨트를 더듬어 잡았다.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 되어서 허강민도 류태현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19 ㅣ- 회색도시&검은방

류태현은 불법 유턴 다발 지역에서 파트너와 딱지를 끊고 있었다.
50미터만 더 가면 유턴해도 되는데 그 몇 초를 못 참고 차를 돌려놓고 경찰이 잡으면 왜 잡냐고 화를 낸다. 힘들진 않아도 진 빠지는 일이었다.
대낮의 도로는 그런대로 한산했다. 류태현은 점심은 뭘 먹을까 멍하니 생각하고 있었다.
무전기가 울렸다.
-저, 류태현 순경?
“네.”
-지금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허강민을 목격했다는 신고가 들어와서 말이야.
류태현은 귀를 의심했다.
-근데 좀.... 신뢰성이 의심되어서 말이지,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가서 보고 확인해주면 좋겠거든. 괜히 닮았다고 생사람 잡을 것 같아서.
류태현은 침착하려고 노력하면서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했다.
“어떤 신고였는데 그럽니까?”
-학교 앞 분식집에서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애들 둘 하고 떡볶이를 먹고 있다던데.
흉악하기 짝이 없는 사이코 연쇄 살인범이 애들과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류태현 생각에도 이건 착각일 가능성이 너무 높았다. 그렇지만 신고가 들어왔는데 그냥 무시하고 입 씻을 수도 없으니.
“네, 제가 가서 확인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학교 방향으로 한 걸음 떼려는데 웬 차가 유턴을 했다.
“어...”
“잠깐 정도 혼자 할 수 있으니 갔다와. 점심 시간도 얼마 안 남았고.”
차를 신호해 세우며 파트너가 말했다.
“빨리 다녀와.”
“그래, 다녀올게.”

그렇게 혼자 문제의 학교 앞 분식집으로 달려가고 있었는데.
“허, 허강민씨?”
만약에 진짜일 가능성도 생각해야 한다고, 자신을 들키지 않고 밖에서 슬쩍 보고 정말로 허강민이 있으면 즉시 지원을 요청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결심하고 무전도 즉각 누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골목길을 마주 걸어오던 허강민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어리둥절해보였다. 류태현을 보고 있는데도 증오나 살의가 없었다. 이 사람은 허강민이 아니라고, 세상엔 정말로 이렇게나 똑같이 닮은 사람이 있다고 류태현은 믿어버릴뻔 했다.
허강민이 표정을 굳혔다.
“너, 실물 류태현이냐.”
“네.. 가짜 류태현도 있나요.”
얼빠진 소리를 해버렸다는 자각은 조금 후에 들었다.
그러나 허강민도 얼빠져있긴 마찬가지였다. 뒤늦게 표정을 험하게 해봤자, 기름 냄새 풍기는 비닐 봉지를 손에 들고 멍하니 서서 그러면 별로 무서운 분위기는 잡히지 않았다.
‘연쇄 살인범이 직접 사러 올 정도로 여기 튀김이 맛있나?’
“너.....”
방금 한 뻘생각을 허강민이 지적하려는 줄 알고 류태현이 흠칫 놀랐다.
“계속, 위선 떨며 잘 살고 있는 것 같군.”
매도당하자 차라리 안도감이 들었다. 이건 허강민이 맞고, 그저 튀김 사가려다 류태현을 만나 당황해서 페이스가 무너진 것 뿐이고, 그러니 앞으로는 정상적인 일이 일어날 거라는 기대감.
‘아니 근데 이 상황에서의 정상은 좋은 게 아니잖아.’
“사고가 없었다면....”
너무 작은 목소리라 류태현은 못들을 뻔 했다.
“네?”
“네가 이기적인 위선자여도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는 않겠지. 그냥 평범하고 좀 친절한 경찰이 되어서, 평범한 남들이 다 그러듯이 자기 가족 제일로 챙기며 사는 평범한 보통 사람이 될 뿐.”
‘저기 한 문장에 평범이 세 번이나 들어가는 건 좀 너무한데요....’
류태현이 머릿속으로 쓸데없는 태클을 걸고 있는 동안 허강민이 혼자 뭐라 중얼거렸다.
“네?”
“널 증오해.”
류태현은 한 방 맞은 듯 상체를 뒤로 조금 젖혔다.
“하지만.... 그래. 극복해야겠지. 더 이상은. 아무도 죽지 않도록. 내가 증오하던 인간들까지도 불행해지지 않게......”
“저... 허강민씨?”
방금 말로 한 대 맞은 것도 잊고 류태현이 허강민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괜찮으세요?”
체포하러 왔는데, 허강민이 맞으면 체포하려고 열심히 생각하며 왔는데도 어째서인지 그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예상대로 허강민은 비웃었다.
“날 걱정하는 거냐? 나 널 증오하고 죽도록 괴롭혔고 앞으로도 그럴지도 모르는데?”
“그럴‘지도 모르는’ 건가요?”
류태현은 충격을 받았다.
“아까 말도 그렇고.... 심경에 변화가 있었나요? 뭐..... 종교에라도 귀의하셨어요?”
허강민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
“가.”
허강민이 말했다.
“기서 뭐든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그, 여승아랑 결혼이라도 하던가. 그거 좋겠다.”
“네?”
“그래. 가서 결혼해 살아. 이제 나 무서워 할 필요 없어.”
너무나 혼란스럽고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아서 류태현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는 경찰이니 허강민을 체포해야 한다는 생각마저도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알기나 하자는 내면의 목소리에 힘을 잃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무슨 일 있었어요?”
“있었지. 아니 있을 예정이지. 아니 있었을 예정... 뭐라 하는 거야.”
허강민이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있을지 하는데요?”
더 혼란에 빠져서 류태현이 다시 물었다.
“너하곤 상관 없어.”
“무지 있을 것 같은데요!”
“응, 그렇긴 하지.”
“대체.....”
류태현은 힘이 쭉 빠졌다. 허강민이 광기에 찬 연쇄 살인범이긴 해도 이런 식으로 미친 사람은 아니었는데.
“너 내가 미친 건 아닐까 생각하고 있지.”
“지금은 그런 의심을 하는 게 매우 당연하게 생각되는데요.”
류태현이 불퉁하게 쏘아붙였다.
“그래, 기왕 미친놈 취급 받는 거 알려주지.”
허강민이 웃었다.
“난 과거로 돌아가서 그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할 거야.”
류태현이 입을 딱 벌렸다. 미쳤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심각하게.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 순간 무전기가 울렸다. 류태현은 깜짝 놀라 허둥지둥 하다 무전기를 떨어뜨릴뻔 했다.
-류태현 순경?
“네, 네!”
-확인은 했어? 지금 어디야?
류태현은 말문이 막혔다. 허강민인걸 확인했다. 그러니 지원을 불러서 체포해야 했다. 정신이 온전치 않아보여도 그는 위험한 살인마였다. 그러니.
류태현이 그러고 있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 허강민이 몸을 돌렸다. 자기 할 말은 이미 다 끝났다는 듯이.
“자, 잠깐만요! 기다려요!”
지금 그를 혼자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체포하고 싶지도 않았다. 일단 결심하자 거짓말은 쉽게 나왔다.
“예, 확인했고 비슷하게 생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몸을 못 가누는 주취자를 발견해서요.”
-...낮인데?
“네. 그래서 더, 다른 무슨 일이 있는지 주거상황 같은 것도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사람 집까지 데려다주고 오겠습니다.”
-어디 사는 누군데?
류태현도 여기에는 변명거리가 바닥나 버렸다. 그가 입을 벌리고 황망한 표정으로 허강민을 쳐다보았다. 마치 도움이라도 구하는 것 같은 얼굴을 보고 허강민이 피식 비웃더니 낯선 이름과 주소를 불렀다. 류태현은 더듬더듬 그대로 보고했다.
-...그래, 혼자 괜찮겠어?
“예, 괜찮습니다. 곧 복귀하겠습니다.”
무전을 끊고 류태현이 허강민을 바라보았다.
“왜 그랬어?”
허강민이 먼저 물었다.
“지원요청해서 날 체포해야 하는 것 아니었어?”
“아까 그건 누구고 왜 외우고 있어요?”
류태현이 되물었다.
“위장용 신분. 혹 불심검문 같은 거에라도 걸릴 것에 대비해서 인적사항이 비슷한 사람 걸 외워뒀지. 그래서, 왜 그랬어?”
“뭔진 몰라도, 허강민씨가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류태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 거라면 저도 알고, 할 수 있는 한 돕고 싶습니다.”
“돕는다고?”
“예.”
허강민이 류태현을 노려보았다. 류태현은 기죽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래, 너한테도 네 여자친구한테도 좋은 이야기이긴 하지. 죄를 지을 필요도 내게 쫓길 필요도 아예 없어지는 거고.”
허강민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 아무도.... 애초 그 사고를.”
허강민이 류태현을 쳐다보았다.
“그 애를 막는 게 아니라, 그 전날. 그러니까 밤에, 아무도 없을 때 무너지게 하면 어떨까? 그럼 그 몇 백 명이, 그냥 다 아침에 TV보며 아니 세상에 저런 쯧쯧만 하고 자기네들이 어떤 꼴이 될뻔했는지는 전혀 모르고..... 그 정도면 괜찮을까?”
“밤에도 경비원이라든가 있지 않을까요?”
류태현은 자기도 모르게 장단을 맞춰주었다.
“아, 그래. 그럼 먼저 안에 있는 사람을 끌어내서 기절이라도 시킨 다음에.”
“저, 허강민씨.”
류태현이 팔을 뻗어 그의 손목을 잡았다.
“길거리보다는 어디 좀 조용한데서 얘기하면 어때요?”


하성철이 팀장실에 들어가자 박근태는 벌떡 일어나려다 가슴을 짚었다.
“무리하지 말게.”
하성철이 걱정스러운 기색을 했다.
“너무 빨리 퇴원한 거 아닌가? 일이 많다곤 해도.”
“괜찮습니다. 움직일 만 합니다.”
박근태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도 갈비뼈에 금이 갔지 않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예.”
박근태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증거물 분석은 얼마나 진척되고 있나.”
하성철이 물었다.
“잠입요원들 중 업무 복귀가 가능한 사람들을 임시로 투입해서 서두르고 있습니다. 스폰서에 대한 것뿐 아니라 김성식이 마약 거래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려던 정황까지 나와서 기소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그런 큰 희생을 치르고 얻은 결과이니 관련자는 모두 확실하게 처벌해야지.”
박근태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장산병원에서 황도진과 김성식을 체포하는 쾌거를 올리긴 했지만 김성식이 발각된 요원들을 대량으로 숙청하는 건 막지 못했다. 그놈은 당연히 사형을 당하겠지만 또 그래서 선진화파의 배후에 대한 증언을 확보하기 어려운 것도 고민거리였다. 정보를 많이 토하면 나쁜 건 다 김성식에게 미뤄버리고 형량을 줄여 주겠다고 황도진하고 교섭하자니 이놈이 보스인데다 그래도 오래 데리고 있던 동생인데 그렇게 배신할 수는 없다고 그러고.
작전은 성공했지만 희생이 너무 컸다. 빨리 가시적인 성과를 과시하지 않으면 그 배후에 의해 역풍을 맞을 우려도 있었다.
“아, 그리고 자네가 올린 그.... 수사팀 이미지 제고 기획안 말인데.”
“네.”
“유상일 경위를 미디어와 접촉시키는 건 안된다고 생각하네.”
“어째서입니까?”
박근태가 말했다.
“이미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고 있고, 수사팀 입장에서 사건을 알리는 건 자칫 수사팀에 대한 여론이 나빠질 경우에 대비해서....”
“경찰은 영웅이 되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닐세.”
하성철이 말을 끊었다.
“공식적인 기자회견이라면 나나 자네가 나가면 되겠지. 단지 그가.... 젊고 잘생겼다는 이유로, 잠입요원이던 사람의 얼굴과 신상을 공개해서 수사팀의 방패로 써먹는 건 부끄러운 일일뿐더러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네. 경위는 아직 젊으니 유명세를 즐길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나서서 부추기는 건 안 되지 않나.”
“...예, 알겠습니다.”
박근태가 수긍했다. 하성철이 그를 달랬다.
“우리 쪽에서 그, 언론 플레이를 해야 할 필요성은 나도 알고 있네. 팀의 형사들을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그럴 수 있는 방법을 같이 고민해보세나.”
“네.”
박근태는 고분고분하게 대답했지만 하성철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가 유상일 경위의 언론 노출을 꺼린 건 꼭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그런 언론 플레이로, 마땅히 해야 할 수사를 했을 경찰을 영웅으로 포장해서 결국 이익을 보는 건 누구란 말인가.
유상일은 박근태를 형님으로 따른다. 미래의 ‘박근태 의원’은 경찰 영웅 출신이라고 했다.
태성이가 했다던 말을 믿건 믿지 않건, 박근태를 그 ‘미래’와 근접하게 할 가능성은 모두 없애고 싶었다.
‘내가 이상한 말에 홀려서 일을 자의적으로 처리하고 있는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 유상일 경위가 힘써준 덕에 본부를 지키고 있던 조직원들도 거의 대부분을 체포할 수 있었지만 그러고도 아직 붙잡히지 않은 사람은 있었다. 보복의 가능성이 있으니 수사관을 보호하는 건 옳은 조치라고 하성철은 다시 한 번 결심했다.


검은 남자 56 ㅣ- 회색도시&검은방

류태현 역시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승아를 구한 줄로만 알았다. 승아를 위해 죄를 짓고 그 대가로 영영 승아와 허강민을 짊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반대였다. 승아가 자신을 구했다. 승아가 자신을 위해 죄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무고한 피해자를 연기하며 말을 잃어갔다.
그것도 이제 끝이다.
저승사자가 다가온다.
검은 물 속에서. 희부연 천장에서.
올라온다. 내려온다.
저 흔들다리를 건너. 우리 등 뒤에서.
다가온다
다가온다
다가온다
허강민이 조용히 일어났다.
“류태현?”
그의 말투가 이상했다. 은행에서 제정신이 아닌 채 들었던 것과 비슷했다.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여전히 칼을 들고 있는데도 류태현을 겨누지는 않은 채였다.
“하무열 형사.”
허강민이 류태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하무열을 불렀다. 그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겁먹은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왔던 길로 피해요. 어서.”
허강민 자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강성중이 다시 괴물을 보냈습니다. 저는 마법을 쓸 수 없는데 이놈이            하고 있습니다!”
말의 한 중간이 지우개로 지운 듯 들리지 않았다. 무열 선배가 답하는 말투로 보면 어지간히 낭패스런 일인 모양이었다.
궁금해 할 때가 아니었다. 물어볼 때가 아니었다.
다가오는 발소리
점점 가까워진다
안승범 씨가 쇠망치를 무기 대신 들고 사람들을 재촉했다. 다들 일어나 그를 따랐다.
무열 선배가 무어라고 외쳤다. 조심하라고 하는 것 같았다. 승아도 선배와 함께 피하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이 공간엔 자신뿐이다.
둥근 공간이 움직이며 검은 물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귓가를 긁는 공기의 떨림이 점차 거슬리는 울음소리로 변해갔다.
“류태현.”
허강민이 칼을 들고 다가왔다. 그 칼을 류태현의 손에 쥐어주었다.
“네놈한테 끔찍한 일을 벌이기가 싫어지다니 정말 나도 어떻게 된 모양이지.”
허강민이 류태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잘 들어. 너는 지금 니 알ㄹ 토 의 눈에 드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류태현으로 남고 싶으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대로 제 물을 골라. 네 혼 영 같은 건 나중으로 미뤄. 하지만 니알 토ㅌ이 널 맛보고 싶어하기에 지금 살 수 있는 거다. 곧 나타날 괴물을 잡 아먹을 유일한 방법이다.”
그가 류태현의 어깨를 지탱하고 함께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부글거리는 거품 소리, 끓어오르는 울음소리를 향해.
“강성중이 다시 괴물을 보냈다. 아까 봤던 건 그냥 시궁쥐, 아니 날벌레로도 보이지 않을 만한 것을. 내가 마법을 쓸 수 있었어도 지금처럼 칼 한 자루 가지고는 절대 무리였을 텐데 네놈이 때마침 사 괴 법마 물이 될 작정이라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볼 여지가 있지. 검은 남자가 이 자리에 나타날 테니까.”
류태현은 자신을 붙든 허강민의 손을 쥐어보았다.
허강민이 아까부터 하는 말을 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서운 것이 다가오는데 어째서 이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피하는 대신 여기 남아 자신을 지탱하려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백화점에서 아이를 죽였는데. 가족들까지 파멸시켰는데.
바짝 마른 입을 움직이려 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한 나절은 다물고 있었던 것처럼.
그럴 리가 없어. 아까부터 계속 울부짖고 있었는데. 이렇게 그 소리가 귓가에 쟁쟁한데.
눈앞에 기괴한 거품이 끓어올랐다. 거품 하나하나에 자신과 허강민이 비쳤다. 거품 하나하나가 형언할 수 없는 소리로 울부짖고 있었다.
“이런 걸 어떻게 해볼 여지가 있다고?”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 거품이 거대한 파도처럼 두 사람을 향해 솟아올랐다.
“그래. 지금이라면 가능하다.”
등 뒤에서 허강민이 나직이 말했다. 그가 뒤에서 자신을 감싸안아 지탱하고 한 걸음 나섰다. 검고 기괴하게 끓어오르는 거품의 파도를 향해.
“내가 도와준다니 믿기 힘들지? 허나 사실이다. 내 일생 셀 수 없는 거짓으로 치장해왔으나 말하는 순간만큼은 언제나 진실이었다. 그러니 이 순간만큼은 내가 도울 거라 믿어도 된다.”
류태현은 거품을 노려보았다. 거품에 비친 모습을. 허강민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저 검은 것은 허강민이 아니었다.
“사람들을 지키고 싶지?”
귓가에 검은 것이 허강민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렇다면 증명해 봐라. 내 지켜볼 테니.”
손에 든 칼이 길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을 들어 거품을 겨누었다. 거대한 파도의 어디를 찔러야 할지 허강민의 모습을 한 검은 남자가 가리켜 주었다.
“걱정 마. 아프지 않을 거야.”
지독하게 아팠던 예방주사 직전 들었던 목소리에 맞춰 검을 찔러넣었다. 검이 무수한 실처럼 갈라져 개개의 거품 속으로 파고들어 터뜨렸다.
검은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허강민의 모습을 한 채 뒤에서 류태현을 끌어안았다. 시작은 연인의 포옹처럼 다정했으나 끝은 철부지가 맘에 든 인형을 다루듯 난폭했다.
“허강민 씨!”
류태현이 견디지 못하고 외쳤다.
“어디 있어요? 니 아 ㄹ ㅌ텝이 허강민 씨는 어디로 데려갔어요? 아자토스의 공허까지라도 따라갈 겁니다!”


허강민이 수리한 PDA는 민지은이 맡았다. 근처까지 도착한 경찰이 해온 연락이 그 PDA로 전해져왔다.
덜덜 떨면서도 상황을 최대한 자세히 전달했다. 그러는 동안 강성중으로부터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다른 습격이 이어지지도 않았다.
“이대로 기다리면 되는 거야?”
여차하면 휘두르려고 들고 있던 쇠망치를 슬쩍 내리며 안승범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그리고는 류태현과 허강민이 남아있는 방 쪽으로 불안한 시선을 돌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하무열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류태현 녀석에게 마법사의 재능이 있었을 줄이야. 그놈만은 보이는 게 전부이길 바랐는데. 겉과 속이 같기를 바랐는데.”
“마법사가 되면 어떻게 되는 건데?”
안승범이 다그쳤다.
“안 될 방법은 없는 거야?”
“없어. 이제 류태현이 마법사가 되어서 그것을 무찌르든지, 아니면 우리 모두 죽든지 둘 중 하나야. 그 자리에 남아있어봐야 훌륭한 걸림돌이니까 도망친 거고.”
“틀려요.”
새파랗게 질린 채 주저앉은 장혜진이 중얼거렸다.
“무찌르지 못하면 지금 온다는 그 경찰들까지 다 죽어요. 강성중 그 작자는 대책은 생각하고 그걸 소환한 건지. 서울이 싹 쓸려나가기라도 바라는 건지......”
“그게 대체 뭐라는 괴물인가?”
하성철 국장이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본 적이 있나?”
“아뇨.”
장혜진이 그런 끔찍한 소리 말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소문만 들었어요. 간부들이 전에도 소환한 적 있는 괴물. 그냥 보는 것만으로 미쳐버린다고요. 깊은 바다 밑바닥에서 거품처럼 끓어오른다는데, 보고 미쳐버린 사람들이 한 말을 종합하면 그렇대요. 사람이 무찌르는 건 고사하고 그 앞에 잠시 서 있을 수도 없다는데 강민 씨 그 바보는......”
덜덜 떠는 장혜진의 손을 민지은이 꼭 잡아주었다. 장혜진은 그 손을 힘주어 맞잡고 천천히 심호흡했다.
쿵 소리와 함께 건물이 흔들렸다.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이 한 덩어리로 모였다. 귀를 막았다.
끔찍한 울부짖음이 귀를 두들겼다. 시멘트 바닥이 종잇장처럼 진동했다.
이 세상에서 만들어낼 수 없는 소리가 복도를 타고 울려오는 가운데 알아들을 수 있는 단 한 줄기의 비명이 섞였다. 류태현의 비명이었다.
여승아가 벌떡 일어났다. 하무열이 붙들어 자리에 다시 앉혔다.
“안 돼. 간다고 해서 도움이 안 돼. 류태현이 버텨내야 하는 일이야.”
하무열은 마치 자신을 향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점점 그 비명이 커져갔다. 거기 뒤덮여 울부짖음이 들리지 않게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다들 뒤늦게야 깨달았다.
어느새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고도 한참 만에야 서로 눈을 움직여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귀가 멍멍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조용했던 것만 같았다.
하무열이 살짝 여승아의 팔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는 본인이 먼저 일어났다.
하성철도 비틀거리며 일어나려 애쓰는 건 손짓해서 말리고, 혼자 그 공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승범이 따라오려는 것도 막았다.
기묘한 의무감으로 혼자 그곳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결과를 마주했다.
허강민과 류태현이 나란히 쓰러져 있었다.
서로의 손을 잡고 팔베개를 하고. 원수라기보다 다정한 형제, 아니 애인 같은 모습이었다.
시선을 주위로 돌렸다. 방 한가운데를 깊게 판 수렁과 흔들다리는 아까 봤을 때와 똑같아 보였다.
그 아래. 흔들다리 아래에서 수렁을 채운 채 조용히 흐르던 검은 물이 사라지고 이끼 낀 시멘트 바닥만 남아있었다. 시커멓게 썩은 이끼는 바짝 말라있었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는 강성중이 자취를 감춘 뒤였다.
임선호의 시신을 수습하고 안승범이 자의로 탈주한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일단 전원이 경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하성철 국장이 쓰러지기 직전 한 지시에 따라 권현석 팀장이 그들의 사건을 담당하게 되었다.
허강민도 일단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피해자들과는 별도로 구금되어 회복하는 대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었다.
경찰 관계자 중 가장 먼저 퇴원한 건 하무열 형사였다. 퇴원 수속이 끝나자마자 병원 밖으로 나가는 대신 류태현의 병실로 달려갔다.
“하무열 형사.”
마침 권현석 경감도 거기 있었다. 형사답지 않게 동글동글한 얼굴이 허옇게 질려 있었다.
운좋게 때마침 여기 있었던 게 아니라는 것을 하무열도 곧 눈치챌 수 있었다.
“우리 얘기 좀 해. 류태현 순경이 어떻게 된 거야?”
질문하면서 권현석은 하무열을 끌고 복도 구석으로 갔다.
“외상은 없는데 잠들어서 깨어나질 않아. 현장에서 발견된 그 상태 그대로 정지해 있다고. 게다가 의료진 말로는, 가만히 누워서도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는 듯 표정만 자꾸 일그러지는데 외부 자극 검사엔 무반응이라는 거야.”
하무열은 하성철 국장과 정은창을 생각했다. 둘 다 어렴풋이나마 마법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정은창은 처음엔 그럴싸하게 모르는 척했지만 나중에 허강민과 류태현만 남기고 물러나야 한다는 말에 제꺽 따랐다.
상관과 신뢰하던 정보원이 둘 다 마법을 안다. 권현석 본인이 제공한 안가에 마법 부적이 있었다. 경감도 마법의 존재 정도는 안다고 봐야 했다.
“경감님도 이게 그냥 부상 문제가 아니라는 건 아시는 거죠?”
확인차 해본 말에 권현석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야. 류태현 순경에게 그래서 무슨 일이 난 건지, 어떻게 깨워야 할지는 모르겠어. 하무열 형사는 어때? 혹시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어?”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하무열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제가 뭔가 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전 마법사도 아니고 류태현의 상태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게 가능한 사람은 제가 아는 한 한 명뿐입니다.”
“누군데?”
“허강민이요.”
권현석이 입을 딱 벌렸다.
“그럼 류순경을 구하는 건 불가능하잖아!”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하무열은 자신이 발견했을 때의 두 사람을 생각했다.
“아무리 상대가 류태현이라고 해도, 허강민도 그가 이대로 괴물들의 간식거리가 되는 건 바라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까지 대라고 하시면 좀 곤란합니다만.”
권현석의 표정을 보고 하무열이 헛기침했다.
“농담을 하는 게 아닙니다. 이번 밀실에서 두 사람 그 정도로 이상했거든요.”
하무열은 영리한 사람이고 말주변도 좋았다. 당연히 어지간히 이해하기 힘들고 표현하기 힘든 일이 일어나도 다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설명할 수 없는 일에 부딪쳤다. 막상 이렇게 되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데 서투른 자신을 발견하고 말았다.
“아무튼 허강민에게 말이라도 해보세요. 그럼 제가 무슨 말 하는 건지 아시게 될 테니.”
권현석은 하무열을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로 노려보면서도 일단 허강민이 구금된 병실로 향했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18 ㅣ- 회색도시&검은방


‘어째서 이번에도 공을 세운 영웅인거지.’
배준혁은 겉보기만큼 속도 평온하지는 않았다.
사건의 양상이 완전히 달라진 지금에도 유상일은 공을 세웠고 매스컴을 탔다. 아직은 검거 당시 뉴스 자료 화면에 잡힌 게 유난히 키가 크고 잘생겨서 눈에 띄는 정도지만 이번에도 홍보용으로 인터뷰라던가 시킨다면.
‘역시 박근태를 미리 죽이는 게 좋을까?’
지금이라면 선진화파 잔당의 보복으로 여겨질 거고 모든 관심이 그 사건에 쏠릴 테니 유상일은 안전하게 잊힐 것이다. 장지연이 죽기 전에도 자신은 정상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장희준과 손잡기 전이라고 해서 박근태가 멀쩡한 인간이었을 거라고 배준혁은 믿지 않았다.
유상일 관련으로 정리해야 하는 건 또 있었다. 그가 무사히 매스컴의 관심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수사팀 후배들이 그를 따르게 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특히 오미정의 경우는.
‘그날의 동료들에게 이런 꼴은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자신이 죽기 직전, 그는 그렇게 말했다. 오미정도 그날 있었건만, 돕고 싶어했건만 상일 선배에게 미정 형사는 고작 그 정도에 불과했다. 수사팀이 몰락하지 않더라도 그대로 둬서 오미정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었다.
수사팀의 붕괴를 막고 관련자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게 목표였다. 적어도 그 정도로 불행하지는 않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오미정은 수사팀의 일원이었다. 십 년 후 오미정이 들었으면 코웃음치며 매도했겠지만 배준혁은 진심이었다.
‘아직은 선배가 유부남이라고만 알고 있을테니, 사별했단 사실이 오미정 귀에 들어가지 않게 막아야겠다. 가족을 두고 잠입에 자원한 것 말고도 오래 깡패 생활을 했으니 여자들 보기에 불쾌할 버릇 몇 가지 정도는 들였겠지. 그런 걸 지적하며 깎아내리는 거야. 아, 그리고 야근에 지원 못하게 하고.’
몇 년 간이나 얼굴도 못 본, 그렇게나 그리워했다던 딸이 텅 빈 집에 혼자 있는데 놔두고 경찰다운 일에 신나서 밤늦게까지 현장을 다니다니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혔다. 이번이라고 보복 계획이 없으리란 법이 없었다. 실제로 일이 많으니 야근을 전혀 안 할 수는 없겠지만 하루에 두 번은 집에 전화하게 만들고 술자리에 참석할라치면 걷어차서라도 집에 보내고 말겠다고 새삼 결심했다.
유상일은 괴롭힘 당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후배에게 좀 괴롭힘 당하면서 딸과 무탈하게 사는 것이 눈 먼 숭배를 받다가 딸을 잃고 추락하는 것 보다 본인에게도 천배쯤 더 좋을 것이다. 배준혁은 온 힘을 다해 유상일을 집요하게 괴롭히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하태성네 학교는 학생들의 출입을 엄하게 통제하는지 점심시간인데도 학교앞 떡볶이집엔 사람이 없었다.
“연쇄살인범이라니...”
하태성이 허강민을 노려보았다.
“그래, 연쇄살인범이 뭐 어때서, 인질범이자 살인미수범씨?”
허강민이 비웃었다. 하태성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요.”
권혜연이 말했다.
“우선 하태성씨 보호조치요.”
“아, 그래. 안경 벗어줘.”
허강민이 손을 내밀었다. 하태성이 그 손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우린 미래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잖아요.”
남자들끼리 둬선 진행이 안 되겠다고 생각해 권혜연이 나서서 설명했다.
“그게, 음,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말하자면 에너지잖아요? 그래서 그냥 뒀다간 다른 마법사들이 우리를 감지해서 찾아낼 수 있대요. 별로 좋은 의도로 그러는 게 아닌 건 명백하고요.”
“저 마법사는요?”
하태성이 물었다.
“연쇄살인범은 어떤 좋은 의도로 무엇을 하고 있는데요?”
“너희들을 보호하고 있지. 아니 아직 넌 아니지, 나머지 세 사람을.”
허강민이 답했다.
“세 명이요? 권순경하고.... 양시백씨와 설마 그 흥신소장입니까?”
“잘 아시네요.”
권혜연이 놀랐다.
“그, 쭉 붙어 다녔지 않습니까, 세 사람. 목적도 같았고.”
“그땐 그래보였죠.”
권혜연이 한숨을 쉬었다.
“무슨 뜻입니까?”
“행동이 일치했던 것 뿐이지 우리는 사실 서로 다른 목표를 쫓고 있었다고요. 각설하고, 우리 셋은 현재 서로 만나거나 소재를 파악하고 있고 이 연쇄살인범이 해준 보호조치를 하고 있어요. 이 마법사만 특별히 믿는 이유는, 그가 우릴 먼저 찾아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 절반, 그의 사정이 이해가 가고 무해해 보이는 거 절반 해서 그렇고요.”
“무해한 사정이라고요?”
하태성이 허강민을 보았다.
“나에 대해, 아니 내가 일으킨 사건에 대해 들어본 적 있겠지? 내가 그런 범행을 저지른 이유도.”
하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오년 전, 사고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려면 이 마법을 사용한 마법사를 찾아내 방법을 배워야 하고 그러려면 너희들의 협력을 얻는 게 좋겠지.”
“이게 마법입니까.”
말하고 뒤늦게 하태성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했다.
“맙소사, 마치 마법 같다는 생각은 해봤지만 정말로.”
“시간여행이라니 저도 안 믿겨요.”
권혜연이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와 있는 이상 안 믿을 수도 없잖아요. 또.... 우리도, 죽었던 가족이 살아있는 걸 봤잖아요. 계속 그렇게.... 죽지 않게 하고 싶잖아요. 허강민씨도 똑같은 입장이라고요. 그러니.”
“그럼 지금은요? 그러니까, 이 상황은요?”
“사라지는 거지.”
허강민이 말했다.
“시간이 다시 한 번 되감겨서, 너희들이 두고 온 십년 후처럼 되겠지.”
“그럼 제가 허건오씨를 위해 한 일은.”
“뭘 했는데?”
하태성은 울컥했다가 진정했다. 허강민은 모르는 걸 묻고 있는 것 뿐이었다. 비꼬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십년 뒤 저의 동료였던 사람입니다. 박근태에게 살해당하지요.”
허강민이 박근태는 누구냐고 반문하지 않는 걸 확인하고 하태성이 말을 일었다.
“그걸 막기 위해, 그가 살인범이 되어 박근태 똘마니가 되는 걸 막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현재 그를 학대하고 있는 양부와 떼어놨습니다.”
“고등학생이 하기엔 좀 거창한 일이군.”
하태성이 조금 얼굴을 붉혔다.
“아버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성철 치안감. 여기 권혜연 순경의 아버지 권현석 경감의 상관이고, 덕분에 너까지 찾을 수 있었지.”
허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부라고? 몇 년 전에 재혼했는데? 5년 이내라면 애초 양부의 존재를 없앨 수도 있지.”
하태성의 표정을 보고 그가 덧붙였다.
“죽인다는 게 아니고, 재혼을 막는다던가, 친부가 죽은 거면 안 죽게한다던가 그렇게 원인을 차단하겠다고.”
“아.”
“양시백이 부탁했다. 사람 죽이지 말라고. 게다가.... 내 가족 살리려고 하는 일인데, 남 죽여가면 하면 좀..... 동티가 날 것 같.”
허강민이 불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과학적이지만, 기분이.”
하태성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마법사라면서요? 과학이요?”
허강민이 돌린 고개를 그대로 벽에 박았다.
“자, 당면 문제로 돌아옵시다.”
권혜연이 한 손으로는 허강민의 덜미를 잡아 벽에서 떼어내고 다른 한 손은 펴서 하태성에게 내밀었다.
“안경 주세요.”
“왜요?”
“보호조치 하려고요. 저도 도수 없는 안경까지 일부러 쓰고 있다고요.”
“그거 도수 없는 거였습니까?”
“네. 원래 안 쓰는데 머리를 보호.... 머릿속에 든 정보를 차단하려면 머리에 가깝고 적어도 반은 감싼 형태여야 한다고 해서.”
하태성이 자기 안경테에 손을 가져갔다. 매우 망설이다 그가 안경은 벗어 권혜연에게 건넸다. 혜연이 허강민에게 주자 그가 준비해 둔 주문 띠를 안경테에 감았다. 잠시 고민하다 하태성이 입을 열었다.
“저... 다시 십 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난 십 년 씩이나 돌아갈 생각은 없어. 사고 전이기만 하면 돼.”
“네. 몇 년이든 여기서 더 과거로 돌아가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같이 가게 되나요? 아니면 이... ‘기억’ 역시, 사라집니까?”
하태성이 물었다. 권혜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생각해본 적이 없네...”
“그거에 대해선 확답을 못하겠는데.”
허강민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처음에는 당연히 나만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실 이 마법도 관련자들을 줄줄이 끌고 온 모양새지. 마법사 본인 뿐만이 아니라.”
“누가 마법사인데요?”
하태성이 물었다.
“나는 배준혁을 의심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이상해요.”
권혜연이 말했다.
“소장님이 마법사였다면 적어도 진작에 유상일이나 설희를 찾아냈어야 맞다고요. 마법으로 사람 찾을 수 있는 거, 맞죠?”
허강민이 침묵으로 긍정했다.
“하지만 그럼 누구지요?”
하태성이 물었다.
“저는 아닙니다. 양시백씨도 이런.... 능력을 갖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들고요.”
“저도 아니에요.”
권혜연이 말했다.
“즉 그 마법사는 혼자서 어디 잘 숨어있거나, 여기, 으, 이 시대에 없.... 미래의 기억이 없다는 뜻이겠죠.”
권혜연이 혼란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허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혼자 잘 숨어있다 쪽이겠지.... 그런 거라면 나 같은 게 너희를 찾아내게 두지 말고 스스로 보호하려고 나섰어야 한다고 보지만.”
“그 마법사가 저희에게 적대적인 입장이라면요?”
“너라면 적대적인 상대에게 이런 힘과 기회를 주겠어?”
하태성이 침묵했다.
“대체 누가, 왜 이런 일을 한 걸까요...”
권혜연도 팔짱을 끼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셋이 나란히 팔짱을 끼고 이맛살을 찌푸린 채 애꿎은 떡볶이만 노려보는 가운데 예령이 울렸다. 하태성이 벌떡 일어났다.
“저 들어가봐야 합니다!”
“전 오후 수업 쨌는데.”
권혜연이 말하자 하태성이 말했다.
“이게 사라질지도 모른다 해서 마구.. 살 수는 없습니다. 들어가볼테니 나중에.”
“잠깐만.”
허강민이 그의 말을 막고 상자를 내밀었다.
“휴대폰 없어서 답답하지? 나 권순경 배소장 번호 넣어뒀어.”
“이런 걸 그냥 받을.”
“악당 돈을 쓰게 돼서 악당 수하라도 된 것 같아 기분 나쁘신가?”
허강민이 비웃었다. 울컥해서 하태성이 상자를 낚아챘다.
“나중에 연락하죠.”
하태성이 뛰어나갔다. 허강민이 무심한 척 떡볶이를 뒤적였다. 권혜연이 그를 째렸다.
“협조 얻어야 하는 상대인거 맞죠?”
“물론이지. 왜, 내가 수상해?”
“괴롭히고 있잖아요. 하경위님도 별로 박근태가 좋아서 그의 수하가 된 것은 아닐텐데.”
“다 큰 어른이, 심지어 경찰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안 지면 곤란해.”
“책임을 안 진다는 말이 아니라... 으이구, 그냥 놀리지를 말라고요.”
허강민을 핀잔주고 권혜연이 일어났다.
“저도 가볼게요. 괜히 어슬렁대다가 누가 알아봐서 신고당하지 말고 허강민씨도 들어가보세요.”
권혜연도 가고 허강민은 남은 떡볶이를 조금 쳐다보다 일어났다. 가려다 양시백 생각이 나서 튀김을 좀 샀다.
‘마법사는 못 찾고 애나 보고 있는 것 같아.’
속은 성인들이지만. 겉모습에 호도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도 역시 열대여섯 살 먹은 애들 모습을 하고 있으니 조금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막내 녀석이 살아있었다면 저 또래였을 테니까.
그 애는 맞지 못한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된 사람들이 괴로움에 허덕이며 기만에 발목 잡히다 이상한 우연으로 자기 손에 떨어졌다. 질투해야 할까 연민해야 할까 그는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권혜연은 아버지가 죽지 않기를, 하태성은 친구들이 수렁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배준혁도 적어도 현재는 수사팀 사람들이 유아연이 무사하길 바라고 양시백은 그 누구도 죽지도 불행해지지도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신은 그걸 모두 이루어야한다.
양시백의 바람은 많이 다운그레이드 해야겠지만. ‘적어도 죽지는 않았다’ 라든가 ‘죽지 못해 살지는 않는다’ 정도로.
‘뭐라 발버둥을 친들 내가 사람을 죽이는 자에서 사람을 살리는 자로 바뀌어야 하는 건 변함이 없군.....’
이걸 하무열이, 심지어 류태현이 알면 어떤 얼굴을 할까.
“허, 허강민씨?”
허강민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기가 생각하던 모양이 꽤나 실감나게 눈앞에 서있는 걸 보았다.
‘나 이렇게 상상력이 그래픽으로 풍부했던가?’



검은 남자 55 ㅣ- 회색도시&검은방


-검은방 4의 중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넓었다.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너비도 넓고 천장도 높았다.
그리고 구덩이도 깊었다.
방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완전히 바닥이 꺼져 있었다. 아래엔 새카만 물이 흐르는데 어둡고 깊어서인지 물이 원래 먹물처럼 검은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 구덩이 위를 가로지르는 것이 한 가닥의 흔들다리였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날 만큼 가늘고 바람도 없는데 삐그덕거리는. 밀실 초반에 하무열과 민지은, 장혜진 등이 건넜던 다리는 이것에 비하면 시멘트 다리였다.
허강민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흐린 백열등이 흔들리며 깜박이고 있었다.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모르는 구조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거창하고 단순할 줄은 몰랐다. 그런 만큼 계략이나 요령이 통할 구석 없는 함정이었다.
지금의 자기 몸 상태로는 절대 통과할 수 없는.
허강민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류태현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허, 허강민 씨?”
허강민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보는 것만으로 흔들리는 저 다리를 안 떨어지고 건널 자신 있는 사람들만 건너가. 난 아니니까 여기 남겠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류태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여기 남겠다니, 밀실 진행을 포기하겠다는 거예요?”
허강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또 한 사람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허강민이 돌아보고 소스라쳤다.
“나도 여기 남는 수밖에 없군.”
하성철 국장이 차분해 보이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저런 곳을 건널 자신은 없네. 운좋게 다리가 떨리지 않는다고 해도......”
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내 흔들었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
“발작하지 않을 리는 없어. 모두를 동요시킬 꼴을 보여주느니 여기 있겠네.”
허강민이 남겠다고 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사람들을 내리눌렀다.
류태현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제까지 이런 일은 없었다. 아무리 위험한 일이 일어나도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 버텨냈다. 한 사람도 버리고 가거나 한 적은 없었다.
하무열 형사를 돌아보았으나 하무열도 어두운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만에야 류태현의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들어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건너편에서 뭔가 조작하면 보다 안전한 다른 다리나 비밀 통로 같은 게 열릴지도 모르지.”
류태현은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건너가서 보다 넓고 안정적인 다리를 놓는 게 이 구조에선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비밀 통로 같은 게 없다면? 건너가지 못하고 남은 사람들을 다른 함정이나 괴물이 덮친다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맞잡은 여승아의 손에도 축축하게 땀이 배었다.
다시 허강민 쪽을 보았다. 허강민은 창백한 얼굴로 이쪽을 똑바로 쏘아보고 있었다.
아니, 허강민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류태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허강민의 시선이 닿은 곳은 류태현의 바로 뒤쪽에 앉아있는 하성철 국장이었다.
“.......전 정말로 여기서 죽을 작정을 하고 주저앉은 겁니다.”
허강민이 이를 바드득 갈며 중얼거렸다.
“그러지 못하게 한 빚은 반드시 받아내겠습니다.”
그리고는 장혜진을 돌아보았다.
“PDA 이리 내.”
장혜진은 굳은 얼굴로 PDA를 내밀었다. 그걸 받아들고 허강민은 정은창을 바라보았다.
“너는 리시버 있지? 어서 내놔.”
정은창은 홀린 듯한 표정을 하면서도 귓속에서 리시버를 빼어 허강민에게 넘겨주었다.
“마지막으로, 여승아.”
허강민의 차가운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칼 이리 내.”
정적이 경악으로 바뀌어 실내를 울렸다. 이미 핏기가 빠져나가 있던 여승아가 비틀거리지도 못하고 허강민을 바라보았다.
“임선호가 나한테 휘두른 칼은 갖고 들어온 게 아니야. 강성중이 방마다 숨겨둔 거였지. 서로 의심하고 물고 뜯도록. 임선호는 그 칼을 열쇠가 밀랍 속에 박혀 있던 방에서 찾았어. 그 방에 숨겨둔 칼이 실은 두 자루였다는 이야기다.”
허강민이 몸을 일으키자 류태현이 여승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허강민이 손을 내밀었다.
“지금 칼부림을 내자는 게 아니야. 드라이버 대용이 필요해.”
“드라이버?”
류태현이 멍하니 되물었다.
허강민은 더 설명하는 대신 다시 여승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서 내놔. 시간 끌면 위험만 더해진단 말이다.”
여승아가 머뭇거리며 칼을 꺼내놓았다. 그리고는 류태현을 외면하고 섰다.
류태현이 경악한 눈을 하고 꼼짝도 못하는 동안 허강민이 칼끝으로 리시버의 깨알 같은 나사를 풀어냈다. 그리고는 PDA 역시 똑같이 분해했다.
하무열이 갖고 있던 PDA가 시끄럽게 울렸다. 허강민이 리시버에서 나온 부품들을 분해한 장혜진의 PDA에 끼워넣고 리셋하는 걸 지켜보며 하무열이 전화를 받았다.
-아주 당당하게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PDA 속 강성중의 목소리는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PDA 가지고 장난치면 어떻게 된다고 했지?
“글쎄, 이걸 부수거나 버리면 이 장소가 날아간다는 말은 들은 기억이 나는데, 수리하면 안 된다는 말은 들은 기억이 없는걸?”
하무열은 평정을 가장한 채 한껏 상대를 놀리기로 했다. 예정대로 되지 않자 바로 동요하다니 이 인간의 수준을 알 만했다. 허강민이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지금 자신도 정면으로 도발하는 수밖에 없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여기를 날려버릴 수도 없을 만큼.
“그나저나 정은창에게 리시버가 있었다는 건 그가 이번 밀실의 범인 역이었다는 말인가? 이거 놀라운 반전이군. 한 명도 해치지 않는 범인이라니 백선교의 새로운 컨셉인가? 너무 참신해서 좋은 평은 못 하겠군. 시대를 앞서가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하무열이 열심히 떠드는 동안 허강민이 조립한 PDA가 다시 켜졌다. 허강민이 몇 차례 더 조작하더니 그걸 류태현에게 내밀었다.
“경찰 불러.”
“예?”
“이 리시버는 방해 전파를 피해서 설정된 주파수를 사용해. 그걸 조금 더 조정해서 경찰 무전기와 통하게 만들었어. 그러니 통화 버튼 누르고 경찰에 연락해라. 여기 주소는 불러줄 테니.”
류태현은 멍한 얼굴로 시키는 대로 했다. 정말로 경찰 무전기의 잡음이 터져나왔다.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 경찰의 목소리가 꿈만 같았다. 허강민이 불러주는 대로 주소까지 전달하면서 이 미친 건물도 의외로 시 외곽 정도지 어디 먼 산골짜기가 아니라는 사실까지 확인했다.
즉 경찰이 곧 올 수 있었다. 류태현은 꿈을 꾸는 기분으로 허강민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허강민은 류태현이 중얼거리거나 말거나 굳은 얼굴로 칼을 움켜쥐고 하무열을 노려볼 뿐이었다. 아니, 하무열이 통화중인 PDA 너머의 강성중을.
-기어이 밀실을 도중에 박살내겠다면.
강성중의 목소리가 음산해졌다.
-이쪽도 제대로 해야겠군. 그딴 짓을 그렇게 당당히 저지른 것을 후회하게 될 거다. 지금 품었을 희망은 곧 절망으로 바뀔 것이다!
“댁 목소리를 들어보면.”
하무열의 목소리는 여전히 느긋하게 빈정대는 투였다.
“아무리 해도 15세가 아니라 51세 같은데 어째서 말의 내용은 15세, 아니 그 미만인 걸까?”
PDA 너머에서 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잠시 후에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보자고.
“나이는 51세 맞는 건가?”
하무열은 강성중이 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하게 지금 뇌혈관을 끊어놓을 작정인 것 같았다. 그런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강성중은 하무열이 또 뭔가 말하기 전에 연락을 끊어버렸다.
방 안이 한순간 조용해지자 사람들이 서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어난 일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허강민은 칼을 여전히 꽉 움켜쥐고 꼼짝도 않은 채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거 아냐?”
안승범이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할 수 없었지.”
허강민이 나직이 답했다.
“나는 여기서 정말로 포기할 작정이었다. 그랬으면 저길 건너간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 수 있었을 테지만, 이젠 아니야. 여기서 우리 모두 살든지, 모두 죽든지 둘 중 하나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허강민이 메마른 목소리로 설명했다. 설명이 아니라 이야말로 저주를 위해 읊조리는 주문 같았다.
방 안은 고요했다. 함정이 새로 작동하는 기색도, 누가 습격해오는 기색도 없었다.
하지만 다들 알고 있었다. 허강민이 빈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여기서 모든 것이 끝난다. 여기서 내려놓지 못하면 억겁을 지고 가리라.
“.......허강민 씨.”
정적을 깬 목소리에 류태현이 흠칫 놀랐다.
이때까지도 그에게서 거리를 둔 채 벽만 보고 서 있던 여승아의 목소리였다.
“승아야?”
류태현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여승아는 창백한 얼굴로 비틀거리면서 허강민에게 다가갔다.
“당신을, 만나고 싶었어요.”
몇 년 만에 다시 만들어지는 목소리는 딱딱하고 어색하게 떨렸다. 그래도 망설임없이 흘러나왔다.
“여승아 양.”
하무열이 말리려는 듯 여승아에게 손을 뻗었다. 여승아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걸로 끝이 아니죠? 당신은 결국 태현이를 죽일 작정이죠?”
허강민은 눈살을 찌푸렸다.
“빌어도 소용없다. 어떻게 말문이 트였든 네 지극정성 따위 내겐 아무 의미도 없어. 류태현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원망하고 싶으면 네 애인을 원망해라.”
여승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당신은 틀렸어요. 완전히 잘못 알고 있어. 당신 동생을 해친 건 나예요.”
허강민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런 급조한 거짓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사람 여기 없어. 그런다고 네가 류태현을 살릴 길도 없어!”
“아뇨, 그날 정말로 무슨 일이 났는지 아는 사람은 저뿐이에요.”
여승아가 심호흡을 했다.
“처음 굉음이 들리고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태현이가 먼저 쓰러져 기절했어요. 날 감싸다가. 그래서 태현이를 부축해 빠져나가려고 하다가 그애를 만났어요.”
류태현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가셨다.
분명 처음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일어난다고 깨달았을 때, 반사적으로 승아를 감싸고 머리에 충격을 느꼈다. 눈을 떴을 때 두 사람이 자신에게 살려달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과 허강민과 모두가 아는 일이 일어났다.
“그애가 매달려오는데, 태현이를 부축하는 것만도 한계였어요. 태현이도, 내 몸도 겨우 지탱하고 있는데 아이가 매달리는 순간 그대로 무너질 것 같아서......뿌리쳤어요. 내가, 박다희 씨가 했던 것처럼!”
허강민의 눈동자가 비로소 흔들렸다. 류태현의 경악한 얼굴, 하무열의 침통한 얼굴로 여승아가 즉석에서 지어내는 말이 아니라고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건물이 덮쳐와서.......힘껏 밀치지 않았다면 태현이도 함께 깔렸을 거예요. 하지만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태현이는 무사히 밀어냈고 나와 아이만 깔렸어요. 그리고 당신이 아는 그 상황이 된 거예요.”
여승아의 눈이 풀렸다. 이미 정신이 그 시기로 반쯤 돌아가 있는 것 같았다.
류태현 역시 그때를 보고 있었다. 아프다고, 살려달라고 울고 있던 승아. 곁에서 역시 애원하던 아이. 허겁지겁 승아를 끌어내고 보기보다 무사해서 안도한 것도 잠시, 승아가 빠져나오면서 생긴 빈틈으로 잔해가 무너져내렸다. 아이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손톱이 뭉개지도록 흙을 파내고 시멘트를 긁었다.
도저히 맨손으로는 파낼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를 꺼내야 했다.
나가서 119에 맡기거나 할 수 없었다. 자신이 꺼내야 했다. 자신이 승아를 먼저 구하기 위해 아이를 외면했으므로.
그래서 둘이 함께 아이를 꺼내려 노력했다. 류태현은 그렇게 기억했다.
승아의 기억은 달랐다.
승아는 말렸다. 맨손으로는 못할 일이라고. 차라리 빨리 나가 도움을 요청하자고.
결국 도구를 찾아 그 자리를 떴다. 그동안 승아가 아이를 지키며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아니었다. 아이는 승아를 알아보고 원망했다. 승아는 아이의 코와 입을 막았다. 원망하는 말을 못하도록. 류태현이 듣지 못하도록.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을 때 아이는 실신해 있었다. 류태현은 그걸 보고 두 사람의 힘만으론 부족하니 나가서 구조요청을 하는 수밖에 없겠다고 했다.
아이가 죽었다. 의료사고가 언론의 관심을 끌면서 아이를 버리고 온 이기적인 커플은 그만큼 관심에서 벗어났다. 이대로 서로에게 기대서 버티다보면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얼굴에 검은 손자국이 남은 아이가 한 다리로 걸어와 초대장을 내밀 때까지........
“정신 차리게!”
어깨가 마구 흔들렸다. 깨어난 곳은 낯선 밀실이었다. 승아와 성질 나빠보이는 중년 남자가 자신을 흔들고 있었다. 중년의 여성과 안경 낀 청년 등 다른 초대받았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신 차리라니까!”
철썩 소리와 함께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밀실 안에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그 밀실에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 이후 네 번째 밀실이었다.
역시 참가자로 굴러떨어진 허강민이 보였다. 그가 뺨에 손을 댄 채 하성철 국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정신 차리라니 무리한 말인 거 아네.”
하성철 국장이 허강민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하지만 적어도 여기서 주저앉아 있다가 강성중의 뜻대로 되고 싶지는 않을 거잖나? 살아 나가기로 하지 않았나? 한 사람이라도 살리겠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언제’라고 말하고 싶은 듯 허강민이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다가 하성철 곁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장혜진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운이 좋으면 그럴 수도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허강민이 웅얼거리고는 류태현을 바라보았다. 아니, 여승아를 바라보았다. 둘 중 누구를 보아야 할지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17 ㅣ- 회색도시&검은방


권혜연은 초조하게 고등학교 교문을 바라보았다.
학교가 의외로 가깝길래 점심시간 동안 잠깐 다녀올 수 있을까 했는데 고등학교는 중학교보다 점심시간이 늦었다. 왜 유독 고등학교 들어가고 나서 도시락을 3교시마다 까먹었는지 뒤늦게 깨달은 기분이었다.
‘어쩔 수 없지. 오후 수업은 자체 휴강... 아니 조퇴지 참.’
점심시간에 맞춰 나오도록 전화는 했다. 목소리가 좀 애티 났을지도 모르지만 경찰다운 말투와 어조로 말했으니 전화 너머에서야 상대가 열여섯인지 스물여섯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하태성이라면 알아차릴 것이다.
누군가 교문 쪽으로 빠르게 달려나왔다. 옷은 교복이라도 여전히 특징적인 외모라 권혜연은 금방 자기 생각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교문 밖으로 나온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른 학생들 눈에 띄지 않게 건물 모퉁이에 숨어있던 혜연이 몸을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아.”
그가 다가와 마주보고 섰다.
“오랜만이에요, 하태성 경위님.”
“오랜만입니다, 권혜연 순경님.”
말하고 하태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저만이 아니었던 거군요.”
“네? 다른 사람들도 왔을 거라고 생각할 만한 일이 있었나요?”
“아뇨, 제가 이런 기회를.... 그러니까, 저 같은 사람 보다 더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권순경님이라던가.”
“양시백씨라던가?”
“네.”
권혜연이 그를 찬찬히 살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태성이 먼저 물었다.
“양시백씨도 넘어왔어요. 그런데.... 상황이 좀 안좋은가 봐요. 범죄 집단에 잡혀있다고 했어요.”
“네? 대체 어떤 상황이길래.”
“우린 미래를 바꿀 거에요.”
권혜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십 년 후의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위님도 그러고 싶지요? 그러려고 허건오씨 찾아내서 돌봐주고 있는 거죠?”
하태성이 깜짝 놀랐다.
“어, 어떻게 허건오씨에 대해서까지.”
“하태성 경위님 아버지와 저희 아버지가 현재 한 팀에서 일하고 계신데, 자식 걱정을 많이 같이 하시나봐요.”
하태성의 얼굴이 구겨졌다. 권혜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좀도둑을 본청 소환한 건 좀 너무 눈에 띄잖아요?”
“전 아버지께 허건오란 비행 청소년을 찾아달라고 했을 뿐입니다.”
하태성이 불퉁해져서 변명했다.
“멋대로 일을 키워가지고......”
“부모란 참 자식 생각대로 안 된다니까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속썩이는 아버지를 둔 두 사람이 서로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아버지들이 그랬듯이.
“아, 그런데 미래뿐 아니라 현재도 문제지 않습니까, 양시백씨가 범죄 집단에 잡혀있다면.”
하태성이 현재 문제로 돌아왔다.
“어떤 범죄 조직이지요? 아니 그렇다면 연락은 어떻게 한.”
“여기 있었군.”
갑자기 등뒤에서 그림자가 드리워져 하태성이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먼저 만나서 가자고 했잖아, 이 말 안 듣는 미래 경찰 같으니.”
“그럼 경찰이 살인범 말을 꼬박꼬박 듣는 게 좋을까요.”
권혜연이 팔짱을 끼었다.
“살인범이요?”
하태성이 깜짝 놀랐다.
“됐고 길거리서 얘기하는 건 너무 눈에 띄니까 어디든 들어가자고.”
주위를 둘러보던 허강민이 하태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태성 경위? 이야기는 들었어. 나는 허강민이라고 해. 연쇄살인범 겸 마법사를 하고 있지.”


“사람 살려.......”
서재호가 서류 더미에 고개를 박았다. 평소 같으면 누군가 잔소리를 했겠지만 오미정도 그 옆에서 서류에 고개 박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대로는 일주일은 퇴근 전혀 못할거야아......”
“하하하, 무슨 꿈 같은 소리를.”
도세훈이 웃었다.
“한 달이야. 일회용 속옷이나 많이 사다두라고.”
“미쳤어.”
오미정이 고개를 들었다.
“아 이지경이 되면 인력 충원이라든가 전문 증거 분석팀이라든가 붙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이걸 전부 우리끼리만 해요?”
“그 편이 보안상 유리하니까요.”
장산병원에서 귀환한 뒤 그대로 이틀을 다 같이 철야한 주제에 혼자만 하루만 철야한 것 같은 몰골을 하고 배준혁이 말했다.
“선진화파에는 분명 스폰서가 붙어있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입수한 문건을 분석하면 그게 누군지 어느 규모인지 명확히 밝혀질 거고요. 그러니 수사를 방해하려는 시도가 있을 것이고, ‘경찰이라고 해도’ 우리 팀 외의 다른 사람들이 증거물에 손대게 하면 안 됩니다. 그나저나 도경사님 머리는 이제 괜찮으신가요?”
“어, 응.”
실제로 하루만 철야한 사람이 이틀 철야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냥 뒤통수를 맞고 쓰러졌을 뿐이고 뇌진탕 징후도 없다고 하니까. 어지럽거나 구토가 나거나 두통... 또 뭐였지, 아무튼 그러면 정밀검사 받으라는데 지금은 일 때문인지 부상 때문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거 위험한 거 아닙니까.”
재호가 말했다.
“막 머릿속에서 어, 피 같은 게 뭉쳐서 위험해졌는데 모르고 계속 일하다가.”
“아이고 후배들이 이렇게 눈물겹게 날 생각해주다니, 역시 병가 내고 일주일쯤 푹 쉬어서.”
“우리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서재호가 도세훈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도세훈은 하하 웃으며 재호의 머리를 토닥였다.
“자, 일동 주목..... 재호 형사는 왜 바닥에 있어?”
문 열고 들어오던 권현석이 서재호를 내려다보았다.
“넘어진 김에 자고 싶은 심정 이해 하지만 일어나라고. 곧 충원 있을 거니까...”
“네?”
배준혁이 벌떡 일어났다.
“누구입니까?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인가요?”
권현석이 깜짝 놀랐다.
“누구... 뭐 짐작가는 사람이라도 있어? 싫은 사람?”
“아뇨.”
대답은 아니라고 했지만 긴장이 풀리지 않은 어깨가 그의 본심은 정반대라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어, 안 그래도 충원을 하자니 팀 외부 사람을 지금 들이는 건 좀 위험하지 않나 하는 얘기 하고 있었거든요.”
도세훈이 끼어들었다.
“아, 그거라면 걱정 마. 우리 팀원이니까.”
“네?”
“자, 다들 들어와.”
권현석이 문 밖에 대고 말했다. 곧 사람들 여럿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까지 선진화파 내부에서 우리와 함께 일한 잠입요원들이야. 아직은 신분전환 절차를 밟고 있지만 복귀하는 대로 차례차례 팀에 투입될 거니까 미리 소개해두려고 데려왔어.”
권현석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따라들어온 요원들도 웃고 있었다.
“자, 오른쪽부터 최재석 경사 유상일 경위 주정재 경사다. 최재석은 준혁이와 재호는 그 때 현장에서 봤을 거고, 유상일과 주정재는 그놈들 본부에서 지키고 있다가 진압 시작되자 깡패들을 나눠서 도망 보내는 척 함정에 몰아넣어 큰 충돌 없이 진압 성공하게 공작한 장본인이야.”
“아, 그 TV에서 현장 중계된 뉴스에서 봤어요.”
서재호가 말하고 유상일을 새삼 쳐다보았다.
“그래. 서두르고 있으니까 늦어도 이 주 내에는 투입될 거야. 그러니 다들 희망을 잃지 말도록.”
“아~니 그 힘든 잠입을 끝내고 왔는데 복귀 하자 마자 서류 산더미에 처넣는 겁니까. 너무하잖아요.”
주정재가 웃으며 권현석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게요. 한동안은 빈둥거리며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최재석도 입으로만 불평했다.
“미안미안, 후속 수사가 산더미인데 다른 팀을 추가투입하는 건 국장님이 반대하셔서 어쩔 수 없어.”
권현석도 웃으며 대답했다.
“이거 대충 분류라도 끝내 놔야 성공 축하 회식할 시간이 나지 않겠어? 가엾은 후배들 좀 도와주라고.”
“난 할거야.”
안 그래도 제일 키가 커서 제일 눈에 띄는 사람이 손을 번쩍 들었다.
“아, 그 깡패 소굴에 박혀있는 동안 얼마나 경찰다운 일이 하고 싶었는데. 서류 좋지! 다 나한테 갖고와!”
“말은.”
권현석이 팔을 뻗어 유상일의 뒤통수를 찰싹 때렸다.
“깡패 물이나 마저 빼고 와라, 인석아. 집에 가서 딸네미도 좀 보고. 공 세웠다고 추켜세워주니까 아주 세상 경찰일 혼자 다하는 것 같지?”
“어, 유..상일 경위님 결혼하셨어요?”
오미정이 깜짝 놀랐다.
“그래. 결혼해서 애까지 있는 놈이 잠입을 하러 들어간대서 내가 얼~마나 속썩었는지....”
권현석이 유상일의 뺨을 잡아당겼다. 유상일은 아픈 시늉을 조금 해주고 벗어났다.
“아, 그건 진짜 반성하고 있어. 복귀하고 나면 정말 아연이를 위해서만 살겠다고 몇 번을 마음 먹었는지....”
“서류 좋지! 다 나한테 갖고와!”
주정재가 아까 유상일이 한 말을 흉내냈다. 팀 전체가 와르르 웃었다.
“자, 일하는 사람들 방해는 이만하고 가자고. 너희들 진술하고 현장 검증할 일도 아직 잔뜩 남아있어.”
권현석이 잠입요원들을 밀어내는 시늉을 했다. 요원들도 별 저항 없이 후배들에게 손 흔들어주며 사무실을 나갔다.
“...유쾌한 사람들이네.”
조용해지자 도세훈이 총평했다.
“힘든 잠입을 막 끝냈으니 들뜨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배준혁이 무심한 듯 대꾸했다.
“다 좋은 분들 같은데요. 빨리 신분전환 끝내고 합류했음 좋겠어요.”
서재호가 말했다.
“일손도 늘고 말이지.”
도세훈이 웃었다.
“사기도 올라갈거라고요.”
오미정이 주장했다.
“미남이 들어와서?”
도세훈의 말에 오미정의 말문이 막혔다.
“어, 하지만 유부남이잖아?”
서재호가 말했다.
“심지어 딸도 있다고 하고.”
“나도 들었어.”
오미정이 서재호를 확 째려보고 다시 서류에 고개를 묻었다.
“그리고 그 딸을 두고 잠입 작전에 참여했죠.”
배준혁의 말에 모두 뜨악해서 그를 주목했다.
“무슨... 뜻이야?”
오미정이 물었다.
“아까 경감님이 하신 말씀을 반복했을 뿐입니다.”
배준혁은 다시 일로 눈을 돌린 채 평온하게 대꾸했다.
“그러니, 잘생기고 멋진 휼륭한 경찰이긴 하지만 살가운 아버지는 아닐 겁니다.”
종이에 펜 스치는 소리가 조용한 사무실에 사각사각 울렸다. 다들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입만 빠끔거리고 있는 가운데 배준혁 혼자 동요 없이 일을 계속했다.


검은 남자 54 ㅣ- 회색도시&검은방


류태현도 일단 이 방을 나갈 궁리부터 하기로 했다. 여길 살아서 나가기 위해 협조하겠다는 말이 진실이기만 해도 다행이었다.
“열렸어요.”
어느새 민지은이 문가에서 손짓하고 있었다. 이들이 고민하는 사이에 연 것이었다.
그런데 그 너머 복도가 암흑천지였다.
“어.....”
곤란한 얼굴로 문 너머를 바라보던 류태현이 허강민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제까지 방과 방 사이에 있던 것 같은 폭 넓은 복도가 있을 뿐이야.”
허강민이 바로 설명했다.
“천장에 형광등이 있는데 스위치는 켜져 있어. 이 방에서 다시 전기를 연결하면 불이 들어온다. 그런데 내가 아는 한은 어두운 채 지나가도 별 문제 없어.”
하성철은 불안한 눈으로 복도를 바라보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약병을 꼭 쥐었다. 조용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주목은 끌지 않았다.
“배전반은 이쪽이다.”
허강민이 낡은 나무 책장으로 다가가 그걸 움직이려 했다. 낡고 쓸모없는 책들이 잔뜩 꽂혀있어 잘 움직이지 않는 걸 보고 류태현이 가서 도왔다.
책장을 무너뜨리자 배전반이 드러났다. 잠겨 있지 않은 대신 이번에도 퓨즈가 없었다.
“빈 슬롯이 셋이군요.”
류태현이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는 동안 퓨즈 셋은 고사하고 하나도 본 적 없었다.
“고무장갑이나 절연체도 안 보이는군.”
하무열이 말을 받았다.
“이번에야말로 류태현 전기구이를......”
허강민이 배전반 옆에서 작은 레버를 찾아 내렸다.
“이제 전기가 차단됐으니 맨손으로 만져도 안 죽습니다.”
류태현은 멍한 얼굴로 배전반과 레버를 바라보다 허강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혹시......”
“왜?”
류태현이 신중하면서도 조금 화가 난 듯한 태도로 물었다.
“이제까지, 지난번 밀실들에 있던 배전반들도 그런 차단기가 있었습니까? 있었는데 제가 못 본 겁니까?”
허강민은 류태현을 빤히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응. 있었는데 네가 바보여서 못 본 거야.”
류태현은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허강민이 계속해서 놀려댔다.
“그거 생각 못 해본 거냐? 당장 설치하는 나는 어떻게 안전하게 설치할 수 있었겠어?”
류태현은 우거지상으로 하무열을 돌아보았다.
“속지 말아요. 거짓말입니다.”
보고만 있던 정은창이 끼어들었다.
“설치할 때 차단기를 쓰거나 어떻게든 전기를 끊어두고 작업한 건 맞는데, 설치가 끝나면 꼭꼭 차단기도 제거해서 고무장갑이 필요하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옆에서 도와서 알아요.”
“이 배신자.”
허강민이 정은창을 노려보았다. 진지하게 화가 난 눈빛이었다.
“예, 제가 여기 들어온 이유부터가 배신이지 않습니까.”
딴청부리는 정은창과 여전히 진지하게 무서운 표정인 허강민을 보고 장혜진이 기가 차서 중얼거렸다.
“지금 류태현 씨 골리려고 한 거짓말 들통난 게 경찰 끄나풀이었던 것보다 더 배신감 느낄 일이에요?”
“선진화파 같은 거 내 알 바 아니니까.”
허강민의 태도는 여전히 진지했다. 그 모양을 보고 하무열이 한 마디 했다.
“네녀석이 그렇게 저만 아니까 이 꼴이 됐다는 생각은 하냐?”
“연쇄살인마가 그럼 저만 알지 남 생각 할 것 같습니까?”
“언제까지 잡담만 하고 있을 건가?”
하성철이 표정을 굳히고 꾸짖었다.
“그럴 여유가 있으면 퓨즈를 찾든가 저길 그냥 지나갈 궁리를 해야 하지 않겠나?”
“예, 죄송합니다.”
허강민은 못 들은 척 했으나 류태현이 얼른 꾸벅 해보이고 주위를 뒤지려고 했다. 민지은이 난처해져서 설명했다.
“이 방은 이미 문 여느라고 뒤질 만큼 뒤졌는데 퓨즈는 못 찾았어요.”
“여기 커다란 쇠망치가 있긴 한데.”
안승범도 원래 용도가 뭐였을지 궁금해질 정도로 커다란 쇠망치를 들어보였다.
“이걸로 배전반을 부수면 불이 들어오는 건 아닐 거잖아?”
“당연히 아니지.”
허강민이 조금 수그러든 기색으로 설명했다.
“너희들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주운 칼 있지? 쇠망치로 손잡이를 부숴서 대충 쇠 부분만 남기고 저기다 끼워. 셋 다 끼우고 차단기를 다시 올리면 불이 들어온다.”
류태현이 칼을 꺼내다가 허강민을 보았다.
“지금 우린 칼이 두 자루밖에 없는데요?”
“난 넉넉하게 준비했어.”
허강민이 기분나쁘게 웃었다.
“아까 한 자루를 두고 와서 부족해졌나봐.”
안승범이 한 말에 다들 임선호 곁에 두고 온 흉기를 생각해내고 끄덕거렸다.
“가서 가져와야겠군요.”
류태현이 창백한 얼굴을 하면서도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나서서 온 길로 돌아섰다.
“같이 가.”
정은창이 나서서 따라갔다. 이미 왔던 길 정도는 두 명으로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서 다들 그 자리에서 쉬며 두 사람을 기다리기로 했다.


정말로 더 아무도 안 따라오는 것을 보고 정은창은 내심 당황했다.
그 역시 아까 임선호의 죽음은 정당방위가 아님을 눈치채고 있었다. 허강민이 주의 깊게 그를 도발하고 빈틈을 보여줘서 연출한 장면임을.
허강민의 교활함에 기가 질리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자신은 공범이 되어야 하는데 아무 것도 한 게 없었다.
앞서 가는 류태현을 바라보았다.
부상당한 몸이라고 들었다. 자신도 고문 상처가 남아있지만 가서 흉기를 먼저 쥐기만 하면 그 다음은 간단했다.
류태현은 전혀 옆 사람을 경계하는 기색 없이 걷고 있었다.
허강민은 류태현을 괴롭히고 또 괴롭혀 죽일 작정이라고 했다.
지금 자신이 나서서 죽이면 허강민은 방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자신도 김성식을 죽여야 했다.
자신의 복수를 위해 남의 복수를 망친 게 이번이 처음인가? 아니다.
허강민은 이미 자기 동생의 죽음에 연루된 사람 대부분을 죽였고 류태현만 남았다. 류태현도 이미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그러니 류태현의 목숨 하나만 자신이 거둬서, 이미 완성된 거나 다름없는 그의 복수에 작은 흠집을 내도 되지 않을까? 은서를 위해?
복수를 위해 다른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라고 말해준 사람이 바로 허강민이었다.
어느새 임선호가 죽은 곳까지 문 하나만 남겨놓고 있었다. 정은창은 심호흡을 했다.
두 명이었다. 이 안에서 두 명만 죽으면, 강성중은 정은창에게 김성식을 저주할 기회를 준다고 했다. 하나는 허강민이 죽였고 이제 한 명 남았다.
류태현이 문에 손을 짚고 심호흡을 했다. 흉기를 손에 넣으려면 이제쯤 그를 앞서가는 게 유리하므로 정은창은 몸을 긴장시키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정은창 씨.”
“예?”
류태현이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임선호 씨는 왜 갑자기 허강민 씨에게 덤벼든 걸까요?”
말투로 보아 류태현은 여전히 임선호가 허강민을 강간하려 했고 허강민은 정당한 자기 방어를 했다고 믿는 것 같았다. 그런 거 아니라고 설명해줄 필요는 없으므로 정은창은 적당히 입을 다물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안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랬다고요. 죄를 지었지만 살고 싶다고. 저도 똑같은 생각으로 이때까지 버텨와서, 임선호 씨도 저와 같은 심정이었던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허강민을 죽여야 살아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잠깐.”
정은창이 멈칫 했다.
“그놈이 전직 군인이었던 놈 맞지? 허강민의 둘째 동생을 자살로 몰아넣은.”
“예.”
류태현은 왜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허강민 밑에서 일했다고 했지? 그때 허강민이 그랬어. 자기 원수 중에 전직 군인이 있는데 파혼당했다고.”
류태현이 충격받은 표정을 하자 정은창이 머리를 긁적였다.
“몰랐어? 실은 방에서 쉴 때 그가 한 말이 있어서. 자길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그랬거든. 그러니 살아 나가야 한다고.”
“그럼 다른 가족이 남아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친구라도?”
정은창은 기가 막혀서 류태현을 바라보았다.
“내 말은, 그게 거짓말이었던 거라고. 기다리는 사람 같은 거 없는데도 마치 있는 것처럼 자기 최면을 건 거지. 그렇게라도 안 하면 정말로 아무 힘도 남지 않게 되니까.”
류태현의 표정을 보며 정은창은 주먹을 꽉 쥐었다.
류태현에겐 여승아도 하무열 형사도 있다. 그들뿐 아니라 안승범과 민지은처럼 사건 이후 만난 사람들도 류태현에겐 다들 친절하고 다정하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그가 살기를 바란다.
그러니 임선호처럼 모든 걸 잃고 껍데기만 남아 연명하는 사람은 제대로 상상조차 못 하는 거다.
권현석 경감이 그러듯.
류태현은 다시 문에 손을 대고 열었다. 그리고는 흉기가 아닌 임선호의 시신에 먼저 다가갔다.
정은창은 피웅덩이 위에서 한데 굳어가는 칼을 바라보았다.
류태현은 잠시 명복을 빌고 정은창을 돌아보았다.
“칼 거기 있지요?”
“어, 응.”
정은창이 칼을 주워들었다. 엉긴 피가 끈적했다.
“좀 닦아야겠네.”
구석에 푸대 자루였던 듯한 넝마가 좀 있었다. 정은창은 칼을 거기다 싹싹 문질렀다.
“그럼 가죠.”
“그래.”
앞서 가는 류태현의 등을 보다가 정은창은 자신의 칼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다 닦이지 못한 피가 찐득하게 묻어있었다.


두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안승범이 다시 앞의 복도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복도도 짧고 그 끝에 이어진 방의 불빛도 보였다.
“그냥 조심해서 가도 될 것 같은데?”
“이미 두 사람 갔잖나. 기다려보지.”
하무열이 안승범을 달래고 허강민을 바라보았다. 복도에 별 함정 없으니 그냥 조심해서 가도 된다고 말했던 주제에 지금은 불이 켜질 때까지 꼼짝도 안 할 기세였다.
빌려준 자켓 아래로 찢어진 바지와 그 아래 피부가 드러나 있었다. 하무열은 고개를 돌렸다.
허강민이 백선교 안에서 그동안 좋은 대접만 받고 살지 못했으리란 건 전부터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성적인 학대도 당하고 있었다는 건 그 녀석이 자신을 유혹했을 때에야 깨달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연민하기엔 그는 너무 먼 곳으로 가버렸고 너무 많은 일을 저질렀다. 류태현이라도 꺾이지 않게 보호하고 싶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은 남은커녕 자기 자신도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적어도 류태현만이라도.
끼익 하고 두 사람이 갔던 문이 다시 열렸다. 정은창이 피 묻은 칼을 들고 들어왔다.
“오래 기다렸죠.”
그 뒤를 이어 류태현이 들어왔다. 하무열은 안도했다.
“자세히 보니 정말 손잡이가 그렇게 튼튼하지 않아요. 안승범 씨라면 쇠 부분이 드러날 만큼 부술 수 있겠습니다.”
“좋아.”
안승범이 커다란 쇠망치를 내려놓고 일단 어깨를 휘둘러 근육을 풀었다.
“다들 물러나 있으라고.”
모두들 물러나서 귀를 막았다. 안승범이 세 자루의 검 모두 손잡이를 내리쳐 박살냈다. 허강민이 그걸 가져다 퓨즈 대신 꽂고 차단기를 올렸다.
불이 들어온 복도는 아무런 함정도 장애물도 없었다. 지나가면서 벽을 두드려 봤지만 비밀 통로도 없었다.
‘공연히 시간만 낭비한 거 아니야?’
안승범은 그런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다 생각을 고쳤다. 여승아의 창백하게 굳은 얼굴도 그렇고, 하성철 국장도 역시 벽을 짚으며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다. 심장병이 있다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밝아져서 안전한 길이라는 게 드러났으니 괜찮지 어두운 채로는 감당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들 아무 말도 않는 건가.’
류태현도 민지은도, 의외지만 하무열 형사도 병자를 짐짝 취급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슬쩍 허강민을 돌아보았다.
정말 허강민과 하성철 국장이 유착했는지 자신은 알 도리가 없었다. 확실한 건 두 사람이 정말 유착했다 해도 그건 밀실 들어오기 전까지의 이야기라는 사실이었다.
돈이 얼마가 오갔든 이 안에서 다 무슨 소용인가. 살아 나가기 위해 제일 먼저 저버려야 할 것이 상대방이었다. 서로가 얼마나 신의 없는 인간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
하물며 허강민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밀실을 빠져나가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골골대는 영감탱이’를 이 안에서 적당히 처분하는 편이 훨씬 그다웠다.
그런데도 복도가 안전하니 그냥 지나가자고 하는 대신 칼 세 자루를 가져다 불을 켜게 했다.
‘일행들에게 점수 따고 싶은 건가, 아니면 정말 하무열 형사도 틀릴 때가 있는 건가. 아니, 잠깐. 유착이 없다고 해서 허강민이 저 영감을 봐줄 이유도 없잖아?’
안승범은 저도 모르게 끄응 하고 신음했다. 밀실 안에만 들어오면 왜 이리 골머리 아플 일뿐인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밀실이 그럼 골머리 아파야지 머리 안 쓰고 편히 있어도 될 만큼 만만한 곳이어야 할까?’ 하고 허강민이 빈정거리는 것 같았다.
“머리 아파요?”
민지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안승범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아냐.”
어느새 복도가 끝나고 다음 방이 나타났다. 들어서자 모두가 입을 딱 벌렸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16 ㅣ- 회색도시&검은방


황도진이 떨어뜨린 총을 몸싸움 끝에 간신히 주워드는 데 성공했다. 총구를 황도진에게 겨누며 정은창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많이, 얼마나 자주 이 때를 꿈꾸고 생각해왔던가. 너무나 오래 바라오던 일이라 도리어 지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가 황도진에게 해 주리라 생각한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네가.....”
콰당!“
문이 부서지듯 열렸다. 방해를 직감한 정은창은 말이고 뭐고 우선 쏘려고 했다.
눈 앞이 아찔해졌다. 옆머리에 둔탁한 통증은 쓰러지고 난 다음에 느껴졌다.
“그만둬! 배형사! 우리 편이야!”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정은창은 멍하니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리는 쪽을 보았다.
권현석 경감이었다. 잠입요원과 정보원의 관리자. 그가 황도진에게 총을 겨눈 채 정은창을 보았다.
“정은창! 괜찮아?”
자신은 괜찮은가? 정은창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경찰이 난입했다. 경찰이 황도진을 체포할 것이다. 복수의 기회가 날아간다.
정은창은 떨어뜨린 권총을 찾으려고 바닥을 더듬었다. 권현석은 그의 무응답을 오해했다.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머리 다친 거야?”
“정은창! 네녀석이 쥐새끼였냐!”
황도진이 고함을 질렀다.
“성식이 그 바보 같은 자식, 툭만 하면 쥐새끼 찾는다고 애들 조져대더니만, 지 사냥개가 짭새인걸 몰랐어?”
“황도진! 너를 체포한다.”
권현석이 소리쳤다.
“조직 폭력 특별법 위반 및 살인과 살인 교사 죄로. 저항해 봐야 공무집행 방해나 경찰 폭행죄가 덧붙을 뿐인 거 알지?”
그가 부하형사들에게 눈짓했다. 서재호가 허둥지둥 수갑을 찾았다. 그가 찾길 기다리지 않고 준혁이 자기 수갑을 꺼내들며 황도진에게 갔다. 재호가 서둘러 가서 황도진의 팔을 잡고 수갑 채우는 걸 도왔다.
그걸 곁눈질하며 권현석이 총을 내리고 정은창에게 갔다. 그리고 바닥에 굴러있는 최재석을 보았다.
“앗, 최재석? 재석이 맞지!”
그가 최재석에게 달려가 몸을 흔들었다.
“기절한 거야? 어쩌다.... 황도진이랑 몸싸움 하다가?”
권현석이 정은창을 보았다. 황도진 죽이는 걸 방해받을까봐 자기가 마취해버렸다고 할 수도 없어서 정은창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누구?”
쩔그렁
“앗,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준혁이 사과하며 떨어뜨린 수갑을 주웠다.
“괜찮아. 내가 잘 잡고 있어.”
재호가 황도진의 손목을 더욱 꽉 움켜쥐며 안심시켰다. 서둘러 그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준혁이 현석에게 갔다.
“이 사람도 잠입요원이었습니까?”
“그래. 이쪽은 최재석 경사. 저쪽은 정은창.. 정보원. 아니 어딜 맞았길래 재석이 정도가 이렇게 정신을 못 차려?”
“구급차를 부르겠습니다.”
준혁이 무전기를 들었다.
“아니, 구급차를 불러도 여기까진 들어오기 어려우니 적어도 건물 바깥까지는 부축해 나가야겠군요.”
그가 최재석의 몸을 더듬었다.
“뼈가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으니 제가 업겠습니다.”
“어.... 그래?”
권현석은 쬐끔 당황했다. 준혁이 피해자 구호에 소극적인 사람인건 아니지만 지금 태도는 어딘지 부자연스러웠다. 뭣보다 대충 보기에도 최재석이 배준혁보다 십오 킬로는 더 나가보이는데.
권현석의 예상대로 최재석을 업고 일어난 배준혁은 조금 휘청거렸다. 그러면서도 현석이 내민 손은 밀어냈다.
“경감님은 저 정보원 챙기셔야죠.”
“정은창이다.”
“응, 그래. 정은창. 잘했어.”
권현석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황도진 체포하고 문건도 챙겼어. 선진화파는 이제 끝장이야.”
“끝장인가요.”
정은창이 멍하니 되물었다.
“그래. 가자. 이제부터 할 일이 많아.”


황도진이 체포되고 백석과 선진화파 사이의 거래를 기록한 장부가 경찰 손에 넘어갔다.
미래가 선언한 정면 대결에 장희준조차 한동안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우선은 문건을 되찾아야했다.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을 찾는 것이다.
‘변화’가 장희준의 계획을 대놓고 적대한다. 시간 역행 마법을 사용한 마법사는 그의 적이었다.
‘하지만 대체 누가?’
“말씀하신 대로, 경찰청 내 인물들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만.”
강재인이 보고했다.
“미래나, 회장님의 계획과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근 갑자기 행동 패턴이 달라진 사람을 찾았습니다.”
장희준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래? 누구인가.”
“하성철 국장입니다.”
“음?”
장희준이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어떤 점이 그렇던가?”
“일단 아들 걱정이 크게 늘었고요-”
“이봐, 재인이.”
장희준이 미간을 조금 모았다.
“부모란 자식 걱정을 하는 게야. 나도 늘 지연이 걱정을 하고 있잖나. 게다가 그 아들, 이제 고등학생인가 그럴 텐데 한창 걱정할 나이.”
“아들의 친구라는 비행 청소년이 문제를 일으킨 걸 끼어들어서 무마해주고 이것저것 편의를 봐줬다는 모양입니다. 이전에 접촉했을 때는 좀 더.... 공사를 구분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랬지.”
장희준도 조금은 진지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자기 자식이 걸린 문제가 되면 체면 따위 중요하지 않은 법이지.”
‘과연 자기 딸을 뒷세계의 여왕으로 만들려는 사람 답네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강재인은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그 아들은 언제 그런 문제아 친구를 사귄 걸까요. 또 경찰 간부 입장에선 아들에게 문제아 친구가 있어서 그 애가 잡혀왔다면 기왕 권한을 남용하는 거 그 애를 과중하게 처벌해서 아들과 떼어놓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빼내다 보호하고 아들과 만나게 해주는 게 아니라.”
“음.”
장희준은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지연 아가씨에게 아버지가 반대하는 친구가 생겼다간 큰일이 나겠다고 강재인이 조금 걱정을 했다.
“평소 행동 패턴과도 맞지 않고 상식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이상한 일을 하는 데에는 그에 걸맞는 이상한 이유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래.... 타당한 지적이야.”
장희준이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하성철 국장이 마법이라...”
마법은, 적어도 백선교에서 다루는 마법은 사악하고 뒤틀린 힘이었다. 하성철이 그런 것을 어떻게 접했는지, 어쩌다가 심지어 믿고 따르게 되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미래 언젠가 일어난 사건이라면, 국장이 아니라 그 아들 쪽이 관련자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강재인이 말했다.
“그래. 그렇지.”
그 쪽이 좀 더 받아들이기 쉬운 것처럼 장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성철을 조사하게. 아들도 부인도 전부 다. 그리고....”
그가 잠시 고민했다.
“수사도 이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놔둘 수는 없지.”


선생님한테 말을 전해듣고 하태성은 곧장 공중전화로 가 청소년 쉼터에 전화했다. 허건오와는 금방 연결되었다.
-저... 하태성 형씨...
“무슨 일입니까, 양아버지가 거기까지 쫓아오기라도 했나요?”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그게... 그저께 댁 아버지가.
“그게 학교로 전화할 만큼 다급한 일인가요?”
말하고 태성은 깨달았다.
“설마.”
-나도 입 다물려고 했다고! 근데 막..... 무섭고.......
자기 아버지가 ‘무섭다’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하태성은 미래에서 접했던 허건오의 거친 태도는 역시 다 허세였다는 생각을 굳혔다.
“무슨 얘기까지 했습니까?”
-다. 댁이 해준 십년 뒤 얘기랑, 뭐 그런 거.
태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뭐라 변명해야 좋은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차라리 전부 사실대로 말해버리고 부패 경찰이 되어 어머니를 비참하게 만든 주제에 아버지 노릇 하는 척 하지 말라고 쏘아붙여버릴까 하는 유혹이 고개를 들었다.
-저, 저기... 미안해.
허건오의 목소리는 몹시 가늘고 약해서 태성은 그만 못 들을뻔 했다.
“네?”
-그.... 미안하다고. 내가 또 ....대장 곤란하게 만들어 버린 거지?
“아닙니다.”
태성은 조금 미소를 띠었다. 비록 상대에게 보이진 않겠지만.
“그만큼 눈에 띄게 행동했으니, 언제 추궁당해도 추궁당할 일입니다. 허건오씨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말?
어머니 돌아가신 상황을 전하며 미안하다고 울던 그가 떠올랐다. 그 때에 비하면 지금 이런 일 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최악의 상황은 이미 면했다. 두려울 건 없었다.
“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아버지하고는 한 번 대놓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 그, 그래. 그거 잘됐네.
건오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 그래도, 내가 뭐라도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별로 허건오씨가... 아, 있긴 있군요.”
-뭔데?
목소리가 반색을 하는 것이 미안하긴 정말 미안한 것 같아 태성은 속으로 조금 웃었다.
“공부하세요.”
-공..... 뭐???
“십 년 뒤의 허건오씨는 뒤늦게 검정고시 공부를 하게 된답니다. 문제집의 앞부분만 까매지도록 열심히 노력은 하지만 뒤까지 풀지를 못해서 저한테까지 도움을 청하지요. 그러니 지금 열심히 해서, 십 년 뒤의 제 고생을 덜어주세요.”
-으엑, 그, 그런 게 어딧어, 치사해!
“쉬는 시간 끝나가니 이만 끊습니다.”
-십 년 뒤의 내가 어째서 공부 같은 걸~~
아우성치는 허건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전화를 끊었다. 쉬는 시간이 끝난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가 서둘러 교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할것인가 고민이 시작되었다.
수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허건오에게서 미래 이야기를 들어 갔다. 그런지 이틀이나 지났다.
그런데 왜 아무런 말도 없는 것일까.
아들이 십년 후에서 현재로 온다면 보통은 어떻게 행동할까?
‘보통’을 상정하는 게 의미 없는 이야기인건 태성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달리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도 알 수 없었다. 물론 처음에는 의심하고 걱정하고 정신과 진료라도 받게 하는 게 정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사실임을 알게 된 다음에는?
‘로또 번호... 아니 아직 로또 없지.’
있은들 그런 번호 외우고 다니지도 않지만. 아버지도 별로 공돈을 탐하는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집에서 돈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경우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야 돈을 밝힐 필요가 없었겠지, 범죄조직에서 둿돈을 상납받고 있었으니까.’
뇌물 뿐이랴. 향응도 받았을 거다. 어머니는 초라한 집에서 힘들게 살림하게 버려두고 자기 혼자 룸살롱 같은데서 여자 끼고 놀았을 게 분명했다.
그런 것 치곤, 십 년 전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다시 살게 된 지금 그가 술 마시고 외박을 한다던가 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생각에 빠져있다 수업이 끝난 것도 잠깐 깨닫지 못했다. 다들 우르르 일어나 움직이는 걸 보고 태성은 허겁지겁 교과서를 넣고 다음 수업은 뭔가 시간표를 확인했다.
지금은 점심시간이었다.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태성은 멋쩍어했다.
“어이, 하태성.”
갑자기 눈앞에 담임이 나타나서 그가 깜짝 놀랐다.
“네, 네?”
“너 오늘 무슨 날이냐, 두 번이나 학교로 전화가 오고. 너희 아버지 팀 권혜연 순경이란 사람이 전할 게 있으니 잠깐 교문으로.”
“권혜연 순경이요?!”
소리치고 하태성이 자기 입을 막았다. 그리고 선생님이 더 뭐라 말하기도 전에 교실을 뛰쳐나갔다.



1 2 3 4 5 6 7 8 9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