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크 월드에서 여왕님들의 오후

redring.egloos.com



모바일로 장편 읽기 힘든 경우에는 & 19금 글에 대해

모바일로는 긴 글 처음부터 찾아읽기가 거의 불가능하니 PC버전으로 봐주세요. 오른쪽 메뉴바의 맨 아래 또는 모바일 크롬의 데스크톱 버전으로 보기를 이용하면 됩니다.

아니면 http://archiveofourown.org/users/hicstans  에서 보셔도 좋습니다. 장편은 거의 올린 것 같지만 빠진 게 있으면 알려주시면 업로드 하겠습니다.



19금 포스타입 화산섬 창고의 멤버십은 저와 트위터 맞팔이거나 해당 카테고리 글에 감상을 남겨주셨던 분에 한해서 닉을 언급해서 가입신청해주시기 바랍니다. 전부 답하지는 않습니다.


포스타입이 무료 멤버십을 중단했고, 별로 유료 멤버십을 쓰고 싶진 않기 때문에... 19금은 티스토리 시대로 되돌아 갑니다.
저와 트위터 맞팔이거나 해당 카테고리 글에 감상을 남겨주셨던 분에 한해서 성인임을 어필하며 트위터로 비번을 신청해주시기 바랍니다.

옛날 글을 찾아 옮기기가 상당히 귀찮고... 자기가 옛날에 쓴 19금을 다시 읽는 게 좀 그렇잖아요. 그러니 안 옮겨진  글이 있으면 말씀해주시면 그때그때 업로드 하겠습니다.


니벨룽겐의 군주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Characters: 자이라. 로드. 요한, 프람. 미하일
Rating: PG-15 
Warnings: 없음
Summary: 특수수사관 보좌 자이라가 살인 용의자인 로드와 대면하다.


자이라와 크롬 고대 의상에 감명받아 쓰는 스팀펑크풍 느와르 AU. 




로드가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자이라 경. 내게 질문할 것이 있다고?”

“예, 그렇습니다.”

자이라는 그의 맞은편에 가 섰다.

앉지는 않았다. 그는 아발론의 군주와 마주앉을 수 있는 신분이 아니니까. 이곳은 취조실이 아닌 경시청의 응접실이고, 로드는 용의자가 아니라 그저 호의로 와 준 참고인일 뿐이다.

그 사실이 자이라를 심란하게 했다.

수사관 보좌가 심란해 하거나 말거나 로드는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그의 뒤에 조각상처럼 시립해있던 금발 기사가 라이터를 켜 불을 붙여주었다.

“그대도 한 대 피우겠나? 수입한 지 얼마 안 된 고급품인데, 향이 제법 좋아.”

“사양하겠습니다.”

자이라가 딱딱한 태도로 말했다. 로드가 피식 웃었다.

“그래, 담배는 나같이 신체를 단련할 일 없는 사람이나 피우는 거지.”

자이라의 머리에 ‘무능력자’라는 단어가 스쳤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자이라의 출신지인 플로렌스의 지배자 카를로스와 이 아발론의 군주는, 다른 지배자들과는 달리 기사의 소양을 타고나지 못했다. 아발론에선 어땠는지 몰라도 카를로스는 그 때문에 플로렌스의 적법한 지배자로 인정받기까지 큰 곤욕을 치렀고, 당연히 플로렌스에선 무능력자란 말은 금기어가 되었다.

그런 사정이 아니었다 해도 자이라는 눈앞의 이 지배자를 무능력자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마력은 타고나지 못했을지 몰라도 아발론의 지배자는 영민하고 교활하며 행동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영지도 좁고 재산도 적어 전대만 해도 지배가문의 말석에 지나지 않던 몰락한 아발론이 지금에 와선 플로렌스도 함부로 무시하기 힘든 세력을 갖추고 있다.

그런 급성장이 옳은 방식으로만 이루어졌을 리 만무했다.

“실례지만, 사흘 전에 오슬론 발 오후 6시 35분 기차를 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 항구에 좀 방문할 일이 있었거든. 요새 한창 사업을 키워나가는 중이라.”

로드가 여송연을 까딱였다.

“도착지 역에서 현금으로 운임을 지불하셨더군요. 차 안에서 표를 분실하셨다면서.”

“그래. 작은 종이쪼가리니까, 주머니에서 뭘 꺼내다 흘리기라도 했겠지.”

“그 다음날,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이틀 전 남행 노선 근처의 경사로 아래에서 시신이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연방 의회의 일원인 이반 미로슬라프 의원이었지요.”

“저런.”

로드가 담배 연기를 후 불었다.

“엘펜하임 소속 중에서도 보수파 의원이군. 잘 죽었다, 고 하고 싶지만 경시청 안이니 입을 조심하도록 하지. 그런데 그게 왜?”

“주머니에서 그 6시 35분 기차의 일등실 표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고인이 그 기차에 타셨다가 사고를 당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그래서 날 부른 건가? 안됐지만 누가 다투거나 언성을 높이는 소리 같은 건 못 들었어.”

로드가 자기 기사를 돌아보았다.

“요한 너는 뭐 들은 거 있나?”

“저 역시 기차가 흔들리는 소음 이상 별다른 점은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는군.”

“예, 그러셨을 겁니다.”

자이라가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

“기차에서 죽은 것이 아니었거든요.”

그 말에 로드가 눈을 깜빡였다.

“호오.”

그가 다리를 풀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건 조금 흥미 있어지는 걸.”

“기차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하기엔 현장에 흐른 피의 양이 적고 떨어지기 직전에 죽었다고 하기엔 기차 내 혈흔도 연결통로에서 약간밖에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상처로 봐선 피가 많이 흘렀을 게 분명한데 말입니다. 그가 기차에 타는 걸 목격했다는 사람도 없고요. 오슬론 중앙역은 항상 붐비니,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닙니다만.”

“엘프는 아무래도 눈에 띄니까, 라고?”

자이라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로드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래서, 내가 그를 죽인 다음 시체를 기차에 실어다 몰래 버린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사실은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자이라는 최대한 부드럽게 돌려 말했다.

“그런 불경한 짓은 않습니다. 그저 전하의 표가 범죄에 이용되었을 수도 있으니 어떻게 잃어버리신 건지 기억을 떠올려 보셨으면 하는 겁니다.”

로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자이라 경.”

그가 웃음을 죽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 눈으로 보면서 의심하지 않는다고 하면 세 살 짜리도 안 믿을 거야.”

자이라가 황급히 눈을 깔았다.

“눈빛이 불손해서 죄송합니다.”

“아니, 그건 불손이 아니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눈빛이라고 하는 건데.”

“전하를 잡아먹겠다는 생각은 결단코 한 적 없습니다.”

자이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높은 사람이 시비를 걸 경우는 못 알아들은 척 하는 게 상책이었다.

“아쉽네. 그런 생각은 해도 되는데.”

“로드.”

그의 뒤편에 선 기사가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농담이야, 요한. 그리고 자이라 경.”

목소리가 훅 가까워졌으므로 자이라가 눈을 떴다.

아발론의 군주는 어느새 일어나 자이라의 앞에 서 있었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싶었으면 내가 직접 나설 게 아니라 내 기사들을 시켰을 거야.”

“그리고 기사였다면 응접실이 아니라 취조실에서 저와 대면하고 있겠지요.”

자이라가 응수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전하께서 고인을 죽였으리라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 내가 그의 죽음을 사주하고, 시체 처리에 협력했다고 믿는 거군. 어차피 이 정도 증거로 내가 살인죄로 체포되어 투옥될 가능성은 없으니, 내게 혐의를 돌려서 내 명령을 실행한 기사를 감싼다고.”

로드가 감탄했다.

“플로렌스 출신의 기사가 할 수 있는 발상이 아닌걸.”

“저는 경시청의 수사관.. 보좌입니다. 군주마다 개성이 다르다는 것 쯤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래. 나라면 내 기사들을 감싼다.”

로드가 말했다.

“하지만 자이라 경, 그 표는 정말로 잃어버린 거야. 그런 식으로 의심의 눈초리를 내게 모으기에는 아발론을 견제하는 세력은 플로렌스 하나만이 아니야. 아예 아무 연관 없는 척 하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 내가 그런 식으로 시체를 버릴 작정이었다면 시체에게 내 표를 주는 대신 그냥 일등실 표를 한 장 더 샀겠지. 아발론이 플로렌스에 비해선 한참 가난하지만 그래도 그 정도 돈은 있거든.”

“죄송합니다. 아발론을 모욕할 뜻은 없었습니다.”

자기가 한 말은 아니지만 자이라는 일단 고개를 숙였다.

“내가 내 사람을 아끼는 건 자이라 경이 알 듯 다른 사람들도 알아. 내가 내 수행원들 몫까지 일등실 표를 끊는다고 수상하게 여길 사람은 없어. 그리고 그때 난 그렇게 큰 짐을 들고 타지 않았는걸. 그자... 고인이 자기 발로 기차를 타지 않았을 거란 추정에는 나도 동의하지만 짐가방에 실리기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로드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땐 꽤 어두워진 뒤였지. 역에 가는 길에 가로등지기들이 불을 켜는 걸 봤으니까.”

“그렇습니다만, 그게 왜요?”

“그, 기차가 강둑 옆 환락가 근처를 지나가잖나. 거기 불법 증축한 건물들이 기차와 꽤 가깝다고 알고 있는데.”

자이라는 곧 그 함의를 알아들었다.

“그런 곳 어디서, 시신을 기차 지붕으로 던졌다고요?”

“시신을 들고 건너뛰었을 수도 있지. 마력을 단련한 자가 관련되어 있다면.”

자이라는 생각했다. 그 경우 범인은 시체와 함께 기차에 무임승차 했거나, 공범이 있을 경우 한 명은 정상적으로 기차에 타고 다른 누가 시체를 기차 지붕에 실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기차에서 떨어진 것으로 보이도록 식당차 같은 데서 일등석 승객의 표를 소매치기 해 시체 주머니에 넣고 버린다면 현재까지 밝혀진 증거와도 일치한다.

그 경우 조직 범죄의 가능성이 올라간다. 자이라는 연방 의회의 의원을 암살할 만큼 대담하고 공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범죄 집단을 떠올려보다 최근 빈민가를 중심으로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유명 범죄자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그 의원은 겉으로는 강경 보수 노선을 표방하고 있지만 음지에서는 몰래 제국산 환락을 즐기고 있다고 하더군. 그의 정적인 내가 하는 말이니 믿기 힘들겠지만, 직접 조사를 해보면 어떤가.”

로드가 덧붙였다.

“...일단 기차 지붕과 강변 거리를 추가로 조사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이 사람에 대한 의심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본인이 한 일을 지금 생각해 낸 것처럼 말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죽은 의원은 연합 왕국 외부와의 교역 확대를 두고 로드와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세력의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럼 난 이만 가봐도 되겠지?”

로드가 자이라에게서 물러섰다. 기다렸다는 듯 요한이 그에게 코트를 걸쳐주었다.

“그리고 카를에게 전해줘. 내가 갈루스와 내통한다고 의심하는 건 상관없지만 이런 식으로 부하들 시켜서 떠보는 짓은 그만 두라고.”

자이라는 당황했다.

“저, 저는 경시청의 수사관.. 보좌입니다. 출신 지역의 군주라고 해도 정치적인 목적의 명령을 받지는...”

로드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자이라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자기 지역의 군주에게 반항하는 건 아주 어렵지. 그자가 자기 땅에서 처치 곤란한 인재를 중앙에 밀어 넣었을 뿐이라고 해도.”

로드가 조용히 말했다. 자이라는 부정하지 못했다.

“이젠 의회가 아니라 중앙의 모든 부처가 정치 암투의 무대가 되고 있으니, 나도 경시청에 사람을 넣어 놔야 하는 지도 모르겠어.”

“그러십쇼. 생각만큼 나쁜 곳은 아닙니다.”

로드가 은은하게 웃으며 자이라를 바라보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그대가 아주 마음에 들어.”

“가, 감사합니다.”

“카를을 버리고 내게 올 생각은 없나?”

자이라가 눈을 꽉 감았다.

“없습니다. 저는 카를로스 전하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군주도 사람일 뿐이야. 기사를 실망시키는 일도 있지. 단 한 번의 충성 맹세에 일생을 거는 건 구식이라고.”

“아발론의 군주께서도 전하의 기사들이 신식을 따르는 건 원치 않으실 겁니다.”

“이런.”

로드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내가 뭐라 말하든 거짓말 밖에 안 되겠군. 나중에 또 기회가 있겠지.”

그가 돌아서서 응접실 문 쪽으로 갔다.

“전하. 혹시 ‘니벨룽겐의 군주’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자이라가 물었다.

“물론이지. 요새 급격히 세를 불려가고 있다는 범죄 조직이잖나.”

“니벨룽겐 대삼림은 아발론의 실지가 아닙니까. 신경 쓰이지 않으십니까?”

“범죄자들이 거창한 이름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건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현재 거기는 산적이나 유랑민이 숨어사는 지역이니 나름 도적의 왕이라고 내세우고 싶었나보지. 안 그래도 곧 토벌해서 실효지배를 회복하려고 준비 중이야. ...의회에서 아발론의 군비 증강을 가지고 그만 좀 트집잡아주면 좋겠는데.”

로드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데 전하께서 대삼림의 지배권을 재확립하시면, 전하께서 니벨룽겐의 군주가 되시는 것 아닙니까?”

그 말에 요한이 살기를 뿌렸다. 웬만한 기사라고 해도 기가 죽을 정도였으나 자이라는 버텼다.

로드가 그의 손을 잡자 요한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기세를 죽였다.

“그래서 내가 뒷골목의 범죄자 왕초와 이름을 건 결투라도 해야 한다는 거야?”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전하의 명예를 더럽히는 악적을 잡기 위해 경시청에 힘을 빌려주시는 정도는 하셔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자가 뭔가 경에게 아주 미움을 샀나보군.”

로드가 웃었다.

“좋아, 기사 파견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도록 하지. 로잔나 통령은 좋아하지 않겠군...”

로드가 응접실을 나갔다. 자이라는 한숨을 토했다.



경시청 밖으로 나오니 프람이 차 옆에서 팔짝팔짝 뛰며 손을 흔들었다.

“로드~ 여기야 여기.”

“프람? 집에 가 있는 거 아니었어?”

로드가 걸음을 서둘러 그쪽으로 갔다.

“갔는데 로드 없으니까, 이리로 왔어. 걱정 마. 심부름은 확실하게 했으니까.”

프람이 제 2 마탑의 봉인이 찍힌 편지 봉투를 보여주었다.

“그래, 가면서 이야기 하자.”

미하일이 말없이 차 문을 열어주었다. 로드와 프람이 타고 요한은 미하일 옆자리에 앉았다.

“자이라는 계속 로드를 의심할 겁니다.”

차가 출발하자 요한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니벨룽겐의 군주’나 그 비슷한 범죄 집단이 한 짓으로 미뤄버리실 수도 있었는데, 위험한 일을 직접 하실 이유가 있습니까?”

“어차피 그것도 나잖아.”

편지를 뜯으며 로드가 말했다.

“그리고 범죄 집단이 귀족을 죽였다고 하면 수사가 집요해져. 그러다보면 자이라 같은 유능한 수사관은 그가 정말로 왜 죽어야 했는지 알아내겠지. 갈루스 공작원이 연방의회에까지 침투했다고 알려지는 것보단 내가 정적을 암살했다고 의심받는 편이 나아.”

로드가 편지를 읽었다.

“다행히 루실리카도 나와 같은 생각은 모양이군. 이 사건은 더 신경 쓸 필요 없겠어.”

“그렇다고 해도 군주이신 로드께서 경시청 같은 곳에 불려 오신 건 경우에 맞지 않습니다.”

요한은 이번 경시청행이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았다.

“이런 일이 재발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정말로 아발론 기사를 수사관으로 들여보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건 그래. 이유야 어쨌건 자이라의 활약으로 플로렌스의 영향력이 커진 건 사실이지. 카를 녀석, 그런 센스는 있단 말이야.”

“그치만 누구를?”

프람이 말했다.

“나나 슈나이더는 수사 같은 건 잘 못할 거야. 샬롯이나 요한은 출신 가지고 입방아에 오르내릴 가능성이 크고.”

“저는....”

“안 돼, 요한.”

로드가 그의 말을 막았다.

“네가 무시당하는 걸 내가 보고 싶지 않다.”

“...예, 로드.”

“그리고 니벨룽겐의 군주 대행도 네가 해야 하잖아. 바빠서 안 돼.”

“네.”

그리고 미하일은 외양 때문에 엘펜하임의 일원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크다. 아발론의 기사라고 티를 내고 다니면 그것대로 입방아의 원인이 된다. 그렇다고 로드가 내 기사들 괴롭히지 마라 으르릉컹컹하고 다니면 주객전도도 이런 주객전도가 없을 것이다.

“자이라를 꼬실 수 있으면 단번에 해결되는데.”

로드가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영입’이라고 말씀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미하일이 말했다.

“저희야 로드께서 인재를 탐내시는 걸 알지만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내 말이 그렇게 오해사기 쉬워?”

로드가 묻자 프람이 슬며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으응, 그래. 영입은 너무 서두르지 않도록 하자.”

로드가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언젠가 자이라를 데려올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다음에 기회가 있을 거야.”



--------------------------------------------------

--------------------------------------------------



이 아래론 안 읽어도 상관은 없는 배경 설정.


헬베티아 연합왕국


과거 갈루스 제국의 압력에 대항하기 위해 군소 왕국들이 연합하여 한 나라로 통합된 것이 기원. 갈루스 제국이 몰락한 후, 이들이 새 강대국으로 군림하게 되고 나서도 기적적으로 연합이 깨지는 일 없이 이 체제가 유지되어 왔다.

현재 아발론, 엘펜하임, 플로렌스, 사르디나, 다케온 다섯 지역으로 이루어진 연방제이자 과두제이다. 각 지역은 고유의 왕가나 체제로 다스리며 상호 간섭하지 않는다. 나라 전체와 관련되는 정책은 연방 의회에서 다룬다.

각 지역의 지배자들끼리는 법적으론 우열이 없으며 모두 군주이고 똑같이 전하라 불린다. (라플라스는 마탑주이고 로잔나는 통령이지만 공식 호칭은 모두 전하이다. 사석에선 본인이 선호하는 직함으로 불릴 수 있다.) 연방 의회 의장은 다섯 지배 가문의 수장 중에서 자기들끼리 뽑으며 나라의 대표자에 해당한다. 현 의장은 사르디나의 로잔나이고, 그 본인이 뛰어난 정치가인데다 시대 변화로 인해 중앙으로 행정력이 집중되며 의장의 권한이 커지고 있다.

몰락한 갈루스가 다시 강성해져 제국을 자칭하고 팽창 정책을 펴는 게 외부의 골칫거리, 기술이 발달하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불만 세력과 빈민이 늘고 지역 간 격차가 커져 지배자들 간에도 긴장이 높아지는 게 내부의 골칫거리.

의회는 사실상 귀족원. 의원들이 출신지역 군주의 말을 일사불란하게 따르는 사르디나와 플로렌스에 비해 각자 소신대로 활동하게 놔두는 엘펜하임 다케온 아발론은 상대적으로 의회 내 세력이 약하다. 단 다케온은 현 군주 후계자가 반대파 의원들에게 다케온식 합의 방법(=줘패기)를 자주 시전하여 많이 일관성이 생겼다.

마력을 타고나고 단련하여 일정 수준 이상에 오른 자를 기사라 칭하며 명예롭게 여겨지고 출신 상관없이 등용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하층민은 단련할 기회도 방법도 없어 좀 뛰어난 범죄자가 되는데 그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간단하게 썰만 풀 생각이었는데 특수수사관이라면 범죄자로부터 구애당해야지 - 그럼 로드가 범죄자를 해야겠군 - 둘을 어떻게 한 나라에 밀어넣지? 에서 눈덩이처럼 커져서 이렇게.... 




견해의 차이 1 (무삭제)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https://redring2.tistory.com/42

2편은 공개버전과 동일합니다.
연결된 트윗에 비번이 있습니다. 트위터 맞팔만 볼 수 있고 성인인증이 필요합니다.

견해의 차이 2 (완)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멀리, 아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울렸다.

안 그래도 아픈 머리가 더욱 울려 브랜든이 잠결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신종 고문인가?’

“아니니까 눈 떠라, 멍청아.”

그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브랜든은 눈을 떴다. 놀랐기 때문이다.

“......로잔나?”

“어이구 그래. 이 한심한 것이 구해준 사람을 알아보는구나.”

헛소리는 대강 무시하고 브랜든이 눈을 깜빡였다.

나무로 짠 천장이 보였다. 이게 어찌된 일인지 생각해보려 노력하고 있으려니 배 특유의 짠 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눈앞에 손 하나가 나타났다.

“자, 내가 손가락 몇 개 펴고 있는지 보여요?”

“....안 펴고 있잖아.”

“흠, 시력도 순조롭게 돌아오고 있네요. 좋아요.”

시프리에드가 손을 거뒀다.

브랜든이 고개를 들려다 등허리에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도로 쓰러졌다.

“웬만하면 움직이지 말아요. 목숨하고 사지가 붙어있게 하는 것까진 성공했지만 아직 제대로 움직인다고 보장할 수는 없는 상태라서.”

“붙여놨... 목숨을?”

브랜든이 조금 더 정신을 차렸다.

“이거..... 현실이야?”

“네. 현실이고, 살아있고, 치료받고 있답니다. 내게 고마워 할 필요는 없어요. 구해온 건 아슬란이니까.”

“아슬란... 아니 날 구해왔다고?”

브랜든이 다시 버둥거렸다. 아픈 것도 무시하고 상체를 드는 데 성공하자 주위가 제대로 보였다.

아르고노트의 함장실이었다. 로잔나는 언제나와 같이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아 있고 그 옆 벽에 헬가가 기대 서있었다. 그리고 시프리에드가 브랜든이 누워있는 환자용 해먹 옆에 서서 그의 상태를 관찰 중이었다.

한쪽 눈이 없는데 시야가 너무 또렷해서 브랜든이 왼눈에 손을 가져갔다. 눈꺼풀 아래로 멀쩡하게 움직이는 안구가 만져졌다.

“내가 뽑힌 지 얼마 안 되는 눈 하나 재생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요?”

시프리에드가 자존심 상한다는 듯 말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뽑고 재생해도 그 표식은 그대로 있던데요.”

“눈을 뽑는 것으로 없앴을 수 있었으면 진작 내 손으로 뽑았겠지.”

브랜든이 갑자기 움직여서 일어난 아픔을 삭이려고 노력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래서 너희들이 날 구한 거냐? .....왜?”

“그게 나쁜 일이라도 되는 듯이 말하네요?”

“아이고, 저거 봐라 저거. 내 말 맞지. 일껏 사람들이 힘써서 구해줬는데 고맙다고는 못 할망정 저러고 멍청한 삽질이나 하고 있잖냐. 내가 고양이를 주워다 먹여도 저보다는 보람이 있을 텐데...”

시프리에드와 로잔나가 동시에 말했다. 헬가가 하하 웃었다.

“통령도 참, 저 놈 저러는 거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닌데 뭘 그러슈.”

“나 지금은 너희 적이지 않나.”

브랜든의 말에 헬가가 쯧쯧 혀를 찼다.

“이제 와서 적은 무슨. 알드 룬에서 함께 싸웠던 건 기억 안 나나 보지?”

“...그건 포로에게 무장을 허용하는 아발론의 군주가 이상했던 거다.”

“뭐, 그 점은 나도 동의하지만.”

그러는데 문이 끼익 열렸다.

“당직 교대 문제없이 끝났고 바람 순조롭습니다. 이대로 내일 오후 정도면 도르튼 항구에 도착할 겁니다.”

보고하고, 발터가 브랜든을 보았다.

“깨어났구려.”

“너도 여기 있는 거냐? 거기에 아슬란까지.... 엔타로니아 공략은 어떻게 하고, 이만큼의 전력이 이렇게 빠져나와 있으면?”

“그래서 나까지 합류하러 가잖냐.”

로잔나가 말했다.

“뭐, 네놈이 동맹군의 발목을 잡긴 했어도 너 걸레짝 되는 데 그렇게 오래는 안 걸렸으니까. 지금이라도 가서 벌충하면 어떻게든 될 거다.”

역시 로잔나는 도움이 안 된다. 브랜든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발터를 보았다.

“우리끼리 멋대로 이탈한 게 아니오. 맹주가 당신을 구하라고 우릴 보내주었소.”

발터가 설명했다.

“어디를 찾으면 되는지도 알려주었고, 아마 치료사가 필요해질 거라고도 귀띔해주었다오. 그래서 헬가누님이 시프리에드를 찾아오고 나와 아슬란이 중부 대륙으로 왔고. 통령님도 원래 엔타로니아 전역에서부터 합류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일정을 며칠 늦춰 우리와 함께 가게 된 거요.”

“아발론의 군주가 나 있는 곳을 알았다고? ....그래, 그렇게 된 거였나.”

“무슨 소리지?”

헬가가 표정을 굳혔다.

“혹시 맹주를 의심하는 거냐?”

“아니... 왜 그 녀석이 황제의 대적자인지 알았을 뿐이다. 황제도 비슷한 능력이 있거든. 세상 어디에 있든 원하는 상대를 찾는 이능이. 이전 내가 정보를 탈취하려고 했을 때 정신을 보호한 미지의 힘도 그렇고, 근원은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의 능력은 분명 결이 같아. ....황제가 대적자를 착각한 게 아니었군.”

“아무리 황제라도 그런 걸 착각하겠냐. 세상 사람이 다 저 같이 멍청한 줄 아나보지.”

로잔나가 말했다. 브랜든은 못들은 체 하고 발터에게 계속 물었다.

“아슬란은?”

발터가 머뭇거렸다.

“그.... 배에는 힘 쓸 일이 많아서.... 데려오겠소.”

그가 후다닥 함장실을 나갔다. 브랜든이 한숨을 내쉬었다.

“날 보기 껄끄러운 거군.”

그 말에 헬가도 로잔나도 어쩐지 불편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돌렸다.

“나 같은 놈 때문에 자기 백성들과 척을 질 상황이 되었으니. 그 단순한 바보라도 지금쯤 후회를....”

“뭐? 야,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로잔나가 빽 소리질렀다.

“못 들어주겠네, 진짜. 다케온은 용병국가야. 머릿속이 600년 묵은 멍청이는 모르겠지만 거기선 왕하고 치고받는 것 쯤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슬란은 널 걱정해서 마음이 불편한 거다, 그 저주받을 고문실에서 널 안고 나온 게 그 녀석이라서! 진짜 내가 사르디나 놈들이 그딴 짓을 했으면 다 돌덩이 묶어서 상어 서식지에다 던져버렸을텐데....”

“네가?”

브랜든이 어리둥절했다.

“너, 로잔나 데 메디치가, 나를 고문했다는 이유로 네 백성들을 상어밥으로 던져준다고?”

“일단 ‘네 백성’ 어쩌고 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말부터 고쳐라, 노망난 꼰대 영감 취급해주기 전에.”

“이미 그런 취급 하고 있잖아?”

“그걸 알 정도의 지능이 있는데 왜 이렇게 말이 안 통하는 걸까.”

“발터가 아까 나가서 참 다행이에요. 있었으면 말리지도 관망하지도 못하고 혼자 안절부절 못했을텐데.”

시프리에드가 매우 한심한 것들을 보는 시선으로 로잔나와 브랜든을 보았다.

“내가 뭘, 이놈이 말귀를 못 알아듣는 멍청이여서 그런 거잖아!”

로잔나가 억울해했다.

“한때 왕노릇 했다는 놈이 죄에 합당한 법적 처벌과 불법적인 사적 제제의 차이도 모르고. 한심하다 한심해.”

“내게 법에 따른 정당한 처벌이 가능하긴 한가? 한다면 어느 나라 법을 적용할지부터 문제 아니냐. 그 아발론의 군주에게 맡겨 뒀다간 절대 내가 저지른 짓에 걸맞는 중형이 내려지지 않을 거다. 그런 걸 원하나?”

“그래, 웬 천지 분간 못하는 놈들이 지들 원한 풀겠답시고 사람을 납치 고문 폭행하는 것 보단 차라리 그 쪽을 원한다!”

브랜든이 놀라 입을 다물었다. 로잔나는 이걸 승리로 여겨도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브랜든이 한참이나 말없이 로잔나를 쳐다보았다. 그가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연 순간 함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브랜든이 깨어났다고?”

뛰어 들어온 아슬란을 로잔나가 지그시 노려보았다.

“내, 내가 뭐 실수했나?”

“아니 됐다.”

로잔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발터가 조용히 헬가 옆에 가 섰다.

“아슬란.”

막 헬가에게 물으려던 아슬란은 브랜든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흠칫 놀라 그 쪽을 보았다.

브랜든은 심호흡을 했다.

내키지는 않지만 감사인사 정도는 해야 했다. 실수든 뭐든 그가 브랜든을 구해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미안하네.”

아슬란이 고개를 숙였다. 막 감사의 말을 하려고 입을 연 브랜든은 그대로 딱 굳어버렸다.

“아마 알고 있겠지만 자네를 납치한 놈들은 다케온의 용병들일세. 내가 내 나라 사람들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하여....”

“아, 아니, 아슬란, 잠깐만. 그게 아니라.”

당황해 더듬거리며 브랜든이 우선 아슬란의 말을 끊었다.

“나는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아슬란이 어리둥절했다.

“친구를 구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그래, 이런 녀석이었지.”

브랜든이 머리를 짚었다.

“당연이고 뭐고 구해줬으면 고맙다고 하는 게 사람의 도리 아니겠냐.”

브랜든보다 먼저 로잔나가 아슬란을 질책했다.

“친구니까 돕는 건 돕는 거고, 저놈이 지가 멍청해서 미친 짓 하다 곤경에 빠진 건 저놈 잘못이다. 그걸 네가 미안해 할 이유는 없어.”

자기가 하려던 말을 로잔나가 먼저 해 버려서 브랜든은 입을 열지 못했다.

로잔나 말이 다 맞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내가 미안한 걸 어쩌겠나. 내가 제국에 속지 않고 다케온을 제대로 이끌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텐데.”

아슬란이 하하 웃었다. 브랜든이 고개를 저으려다 이맛살을 찌푸렸다.

등의 아픔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심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저 친구들 있는데 얌전히 누워있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브랜든은 자세라도 바꿔보려고 해먹 가장자리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등골을 칼로 쑤시는 것 같은 격통이 그의 몸을 관통했다. 손을 놓치고 그가 해먹 밖으로 쏟아질 듯 휘청거렸다.

“브랜든!”

아슬란이 달려와 그를 붙잡았다.

브랜든은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그의 몸을 지배하는 고통과 그의 팔을 꽉 잡은 크고 거친 손. 그만 자기가 어디 있는지 잊어버린 브랜든이 몸부림 한 번 치지 못하고 패닉에 빠졌다.

아슬란은 당황했다. 떨어질까봐 달려와 잡았을 뿐인데 브랜든은 뻣뻣하게 굳어있다 잘게 떨기 시작했다.

“브...”

“아슬란. 손 놓고 뒤로 물러서요.”

시프리에드가 말했다. 아슬란은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왜.... 아직 덜 나은 건가?”

“덜 나은 것도 그렇지만요.”

시프리에드는 브랜든에게 가까이 가지 않고 차분히 그의 상태를 관찰했다. 분리가 빨라서인지 다행히 날뛰거나 과호흡을 일으키는 등 위험한 반응은 없었다. 바다 위의 배는 그가 발견됐다는 지하실과 모든 면에서 아주 다른 환경이므로 그대로 두어도 천천히 진정할 것 같았다.

브랜든이 헛구역질을 하자 로잔나가 인상을 썼다.

“함장실을 더럽힐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복부 진탕으로 출혈이 너무 심해서 내장 싹 훑어냈으니까 지금 위액 한 방울도 안 들어있을 걸요. 자, 지금은 조용히.”

로잔나를 입 다물게 하고 시프리에드가 브랜든에게 말했다.

“브랜든 카스. 여기는 바다 위고 당신은 안전해요. 끝난 일에 정신을 먹히지 말고 자신을 추슬러 봐요.”

“에잉, 저런 건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헬가가 브랜드에게 갔다. 등에 가만히 손을 올려놓았다가 슬슬 쓸어내렸다.

“괜찮아.”

그가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 이제 다 끝났어.”

그 광경을 보는 발터가 미묘한 표정을 짓다 시무룩해졌다.

“걱정 마라.”

로잔나가 작게 말했다.

“저 놈은 사르디나 못 와.”

“아, 아니 그런 걸 걱정한 건 아닙니다만....”

“지금은 위급상황이니 빨리 진정시키려는 거지 너한테 해주던 거랑 같겠냐.”

얼굴이 붉어진 발터가 작게 헛기침했다.

그런 소리가 안 들리는 것처럼 헬가는 브랜든만 다독였다.

“자, 이제 괜찮아.”

“아니야.”

브랜든이 속삭였다.

“괜찮지 않아.”

“지금은 그렇지.”

헬가가 말했다.

“그래도 괜찮아져. 언젠가는.”

“그럴 리 없다.”

“있어.”

헬가가 웅크리고 있는 브랜든을 일으켜 마주보았다.

“나도 오십 년, 아니 사십... 삼십 년 전에 그 말을 들었으면 안 믿었을 거야. 하지만 괜찮아져. 적어도 견딜만해져. 사실이야.”

“나는....”

“그야 넌 계속 고통스러우려고 노력해왔잖나. 거기다 우리랑 달리 안 늙으니까, 아마 변화도 좀 더디겠지.”

로잔나가 인상을 썼다.

“언제 라르곤 얘기로 바뀐 거야?”

그래도 목소리는 낮췄다.

“글쎄요, 그건 저도 잘.”

시프리에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그럴 마음이 있다면 언젠가 괜찮아질 날이 올 거야.”

헬가가 브랜든에게 말했다.

“내기할텐가? 앞으로 50년 안에 괜찮아지나 안 그러나.”

“너는 앞으로 50년 살지도 못하잖아.”

헬가가 파하하 웃었다.

“그렇지. 내깃돈을 챙기기엔 좀 문제가 있군.”

브랜든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뭔가 생각했다.

“....무덤 만들 거지? 비싼 술이라도 구해다 뿌려주마.”

“누구 맘대로.”

로잔나가 역정을 냈다.

“헬가는 메디치 가족묘에 들어올 거야. 너한테 성묘 시켜줄 것 같아?”

헬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 그렇게 정해졌남?”

“네가 나한테 왔을 때부터.”

로잔나는 당당했다. 그러나 헬가가 난처한 표정을 했다.

“음, 통령에겐 미안하지만 난 고향 뒷산에 묻히려고 했는데. 거기에 크메르사트의 재를 뿌리기도 했고.”

그 말에 로잔나가 입을 합 다물었다.

“원래는 나도 재를 뿌리려고 했지만 무덤 정도는 만들어도 좋겠지. 내기 술도 받아먹어야 하고.”

헬가가 웃으며 로잔나를 보았다. 로잔나가 이를 바드득 갈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 네 멋대로 해라.”

“고마워, 통령.”

“대신 장례식은 내 맘대로 할 거다. 아주 요란하게 국장으로 치르고 내가 상주 할 거야.”

“맘대로 하슈.”

“헬가 네가 너무 오냐오냐 받아주니까 로잔나가 더 제멋대로 구는 거 아니냐.”

브랜든이 말했다.

“뭘, 통령은 내가 태어나기 백년도 더 전부터 제멋대로였을걸.”

너무나 사실이라 브랜든은 대꾸할 수 없었다.

“그럼, 이만하면 당장 심각한 문제는 대체로 해결된 것 같네요.”

시프리에드가 말했다.

“또 훌쩍 가버리려고?”

헬가가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아니면 브랜든이 죽는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오긴 했지만, 할 일을 언제까지고 미뤄둘 수는 없으니까요.”

“벌써 가나? 오랜만에 만났고 브랜든도 아직은.”

시프리에드가 고개를 저어 아슬란의 말을 막았다.

“남은 부상 정도는 아발론의 정령사도 마저 치료할 수 있을 거고, 정신적인 케어 쪽은 저는 자신 없고, 우린 모두 살아서 다시 만날 거니까요.”

“그래, 그럼.”

로잔나가 말했다.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며 좋은 와인을 준비해두도록 하마.”

“그거 좋군요.”

시프리에드가 방긋 웃고 그대로 사라졌다.

“거 참 바쁜 친구구만.”

헬가의 말에 로잔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뭔진 몰라도 할 일이 있다잖냐. 우린 우리 할 일을 해야지.”

“그래. 환자의 할 일은 얼른 자고 회복하는 거고.”

헬가가 브랜든의 머리를 눌러 해먹에 눕혔다. 이번엔 저항하지 않고 그도 순순히 누웠다.

“싸울 일은 걱정하지 말게. 우리가 어떻게든 할 테니.”

아슬란이 걱정을 덜어주려는 건지 시키려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래.”

몸이 힘든 건 사실이라, 안전하다고 인정하자마자 금새 잠이 몰려왔다. 잠들기 직전, 비몽사몽간에 브랜든이 중얼거렸다.

“구해줘서.... 고마워.”




견해의 차이 1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Characters: 브랜든. 아슬란. 헬가. 발터. 로잔나. 시프리에드. 그 외에 모브캐릭터.
Rating: R
Warnings: 고문. 신체 훼손(눈).
Summary: 브랜든이 자기에게 원한 가진 자들 손에 떨어지다.


공개용 15금 버전입니다. 그렇지만 아주 적나라하지는 않아도 신체 훼손이 나오니 주의해주세요.




브랜든이 눈을 떴을 때, 그 곳은 빛 한 점 들지 않는 밀실이었다.


영혼보관함은 어디로 갔는지 그의 몸은 허공에 떠 있었다.

그냥 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팔다리가 벌려져 사방으로 묶여 있고 목에도 족쇄인지 목줄인지 줄이 매여 있었다.

흡사 거열형 집행 직전의 모습이었다.

‘이건 대체 뭐라는 악취미지?’

브랜든은 자기가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아발론 동맹군이 에버다인을 점령했다. 총독은 도주했지만 어쨌든 승리였기에 그들은 그곳의 군사기지를 점거하고 잠시 휴식을 갖기로 했다.

그 직전까지 적의 것이었던 시설이라 보안 점검은 철저히 하고 마법 결계도 전부 해제한 뒤 처음부터 다시 쌓았다. 브랜든 본인도 힘과 지혜를 보탰다.

그러면서, 얼마 전까지 제국군 사령관이었던 저를 뭘 믿고 이런 것까지 손대게 해주나 싶어 어이없었던 기억이 났다.

그 때 맹주가 말했다. 체자렛이 침입하는 것 보다는 나으니 최대한 힘써달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 혜안은 미래를 내다봤다고 해도 좋을 수준이었다. 자기가 이렇게, 다시 체자렛의 손아귀에 떨어져버렸으니까.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특수한 시설에 가둔 건지, 마력도 움직이지 않고 망령도 부를 수 없었다. 이래선 정말로 무력한 어린애가 된 것만 같아 브랜든은 몸을 떨었다.

좋은 의도가 아닌 건 확실하지만 그 외엔 자길 가지고 뭘 하려는 건지 대체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있는데 멀리 벽 너머에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올 것이 왔구나 싶어 그가 몸을 긴장시키는 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갑자기 쏟아지는 밝은 빛에 브랜든이 눈을 감았다.

“정말로...!”

“꼴 좋다, 이 극악무도한 침략자 놈이!”

사람들 여럿이 쏟아져 들어왔다. 웅성거리는 소리를 종합해 보면 이들은 제국군의 침략으로 고통을 겪은 중부 대륙인들인 모양이었다.

체자렛이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채 생각해보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우악스레 브랜든의 머리카락을 쥐고 그대로 쳐들게 했다.

머리카락에 가려진 왼쪽 눈이 드러났다.

“이 붉고 검은 눈깔. 중부 사령관 본인이 맞군.”

“사르디나? 아니, 다케온인가.”

브랜든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지은 죄가 나를 따라잡았구나.”

“네가 한 짓이 죄란 걸 알긴 아나보군.”

브랜든의 머리카락을 쥔, 아마도 이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내뱉었다.

“그래, 내가 이럴 만한 짓을 저지르긴 했지.”

브랜든이 피식 웃었다.

“내게 품은 원한을 풀기 위해 내 살을 저며 낼 셈이냐. 좋다. 이게 내게 맞는 결말이겠지.”

“이 새끼가!”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어 브랜드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이 상황에 그딴 소릴 지껄이는 거냐! 니까짓 게 뭔데 우리가 하려는 일을 좋다 어떻다 하는 거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만으로 뇌가 울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침묵을 뭐라고 해석했는지 그가 브랜든의 배를 걷어찼다.

“역시 이딴 놈 그냥 고문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고! 지가 여전히 우리 머리꼭대기에 있는 것 마냥 잘난 척 하고 있잖아!”

“별로.”

브랜든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저 내 업보가 깊고도 무겁다는 걸 자각하고 있을 뿐이다. 날 죽이거나 고문해서 원한을 풀고 싶다면 뜻대로 해라.”

“그러니까.”

대장이 그의 왼쪽 눈에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브랜든이 비명을 질렀다. 불멸자의 신체도 나이든 영혼도 눈이 후벼지는 고통을 덜어주지는 못했다.

“그건 네놈이 결정할 일이 아니라니까.”

뽑혀나간 검은 안구가 바닥을 굴렀다.

“너 같은 갈루스의 개도 피는 붉은 색이냐.”

그 사람이 자기 손가락에 묻은 피를 보며 내뱉었다.

“브랜든 카스. 네놈은 불멸자라 죽여 지옥에 보낼 수도 없다지.”

누군가 그의 목에 묶인 줄을 콱 잡아당겼다. 브랜든이 숨이 막혀 몸부림쳤으나 줄은 느슨해지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가 여기에 네 지옥을 만들어주마.”

지난 오십년 간 라르곤을 되살릴 방법을 찾아 세상을 헤매면서, 브랜든은 실현가능성 없는 희망이야말로 지옥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비하면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은 견딜 만 할 것만 같았다.

게다가 이들은 모르는 건 같지만 그의 불멸은 불사를 포함하지 않는다. 육체의 손상이 한계를 넘으면 그는 여기서 죽고 후일 무저갱에서 부활할 것이다. 그리고 라르곤 같은 누군가가 다시 그를 깨우러 올 때까지 오직 그의 망령들에 둘러싸여.

고문자가 목줄을 놓았다. 브랜든이 기침을 하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역시 계획대로 가자. 이 제국의 개새끼가 어디 언제까지 허세를 부릴 수 있나 두고 보자고.”

“어디 피눈물 흘리며 애원할 때까지 짓밟아주지.”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떠들자 안 그래도 아픈 머리가 더 울렸다. 피눈물이라면 이미 흘리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브랜든을 둘러싼 누군가가 그의 옷자락을 쥐고 북 찢어버렸다.

셔츠와 바지가 찢겨나갈 때만 해도 맨살을 드러낸 뒤 채찍질을 하거나 인두로 지지려니 생각했던 브랜드는 속옷까지 벗겨져 나가고 나서야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 무슨 짓을 하려고!”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텐데. 생긴 건 이래도 몇 백 살 넘게 먹었다며?”

“나, 나 상대로 동하는 거냐? 몸은 어린애인데?”

그 말에 그의 몸을 더듬던 손길이 멎었다.

다음 순간, 픅 하고 갈비뼈 사이로 칼이 박혔다.

“그래, 네놈이 이렇게 싫어하는 거 보니 꼭 해야겠다.”

브랜든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폐까지 뚫렸는지 날숨에 피거품이 올라왔다. 불멸자의 몸이라 이정도로 죽지는 않지만, 호흡이 제대로 안 되는 건 그에게도 고통스러웠다.

“누구 멋대로 의연하게 고통을 감내하는 척 하겠다는 거야. 어디 울고불고 바닥을 길 때 까지 유린해주지.”


브랜든이 이를 악물고 비명을 죽였다. 몸의 고통보다 치욕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죄를 지었으니 죗값을 치를 건 각오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각오하지 않았다. 적의 손에 떨어져 죽임당하더라도, 적어도 품위 있고 의연하게 최후를 맞고 싶었는데.

대장이 브랜든의 등에 아직 박혀있는 단검을 뽑고 인두로 상처를 지졌다.

브랜든은 숨도 못 쉬고 비명을 내질렀다. 작열하는 고통이 뇌를 마비시켰다. 살 타는 냄새와 연기가 넓지 않은 고문실에 자욱하게 퍼졌다.

마침내 그가 인두를 떼자 브랜든은 축 늘어져서 숨만 겨우 할딱였다. 통제를 잃은 몸이 몇 차례 경련했다.

대장이 브랜든의 머리카락을 쥐고 고개를 들게 했다. 고통으로 흐려진 외눈을 내려다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고통스럽나? 너 때문에 죽고 다친 수람들이 몇 천 명은 족히 될 거다. 이보다 수십 수백 배 더한 짓을 해도 네놈 벌로는 부족해!”

브랜든이 입을 달싹였다.

“....아..다...”

“뭐라고?”

“나도... 내가 한 짓을....”

브랜든이 숨을 몰아쉬었다.

“이런.... 당해 마땅한...”

“하!”

대장이 브랜든의 머리를 내팽개치듯 놓았다.

“아직 그딴 소릴 할 기운이 있단 말이지. 어디 언제까지 그렇게 잘난 척 할 수 있나 두고보자고.”



창문이 없는 고문실에선 시간의 흐름을 알 수가 업었다.

보통의 죄수라면 그래도 하루에 한 두 번은 식사나 물을 주거나 잠을 재웠겠지만 브랜든의 불멸성을 철석같이 믿는 이 고문자들은 그에게 약간의 휴식도 허락하지 않고 교대로 계속해서 고문을 가했다.

손발톱은 잡혀온 지 얼마 안 되어 전부 뽑혔고 격통을 일으키는 독약을 투여하기도 했다.

죽지 않을 만큼 칼로 찌르고 달군 인두로 상처를 ‘지혈’ 하는 것도 반복되었다. 때리고 걷어차는 건 당연하고 고전적인 채찍질도 물론 빠지지 않았다.

브랜든은 자기가 바라는 만큼 육체적 고통에 초연하지 못했고 그의 정신은 빠르게 무너졌다. 이게 자기가 받아 마땅한 벌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끊임없는 고통은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의 생각보다 훨씬 더 여긴 지옥에 가까웠다.

한때 왕이고 영웅이었던 자의 마지막 자존심을 짜내, 고문자들에게 애원하지 않을 정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그는 스스로 혀를 씹어버렸다.

고문자들은 화를 내었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이상 더 벌을 줄 방도도 없어 그 건은 유야무야 넘어가고 말았다. 브랜든이 불멸자이니 그런 상처는 놔두면 회복되리라고 생각한 탓도 있었다.

그러나 브랜든은 보통 사람이었으면 이미 죽었을 몸 상태로도 숨이 붙어있긴 하지만 그 뿐, 그의 몸에 새겨진 무수한 상처는 줄어들지도 낫지도 않았다.

어느새 팔다리를 묶어 고정한 밧줄이 끊어져 나가고 목줄만이 남았다. 웅크릴 수 있는 정도 자유가 생겼으나 이미 손발이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무슨 짓을 당해도 비명을 지를 정도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쇠집게로 손가락뼈를 으스러뜨려도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조금 가빠질 뿐이었다.

문득 브랜든은 땅이 가까워진 것을 느꼈다. 거의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았다.

이제는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곧 죽을 수 있다는 최후의 희망을 갖고 고문자들이 들고 오는 벌겋게 숮이 빛나는 화로를 보았다.

이미 엉망으로 꺾여버린 손가락이 타들어갔다. 이게 마지막이길 바라며 그의 의식이 어둠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멀리서 쿵쿵거리는 진동이 전해져왔으나 그게 무엇인지 생각할 시간도 힘도 브랜든에겐 없었다.



문짝을 잡아 뜯어버리고 지하실에 들어선 아슬란은 눈앞에 펼쳐진 참혹한 광경에 그만 멈춰서고 말았다.

“브랜든!”

아슬란이 고문실 한 가운데 축 늘어져 있는 작은 인영에게 달려갔다. 그러는 동안 뭔가 그에게 달려든 것도 같지만 모두 밀쳐 치워버렸다.

“브랜든, 정신 차리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슬란은 브랜든이 정신을 차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전부 드러나 있는 맨몸 중에 상하지 않은 곳은 단 한 뼘 넓이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탈곡기에 넣고 갈았어도 이보다는 멀쩡하지 않을까 싶을 지경이었다.

가슴을 짚어 보았지만 이게 브랜든의 심장이 뛰는 건지 자기가 흥분해서 손끝에서 맥박이 느껴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 걸 알 만한 친구들에게 데려가려고 브랜든을 안아들고 일어나려다, 아슬란은 그의 목에 목줄이 매여 있는 걸 보았다.

아마도 마법적인 물건인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확 잘라버리고 싶지만 숨이 붙어있는지도 확신하기 힘든 브랜든의 상태로 볼 때, 이걸 힘으로 잡아끊으려 들 경우 충격이 전해져 도리어 그가 위험해질 가능성도 있었다.

모르는 건 아는 친구들에게 맡기는 게 상책이었다. 아슬란은 목줄이 매립된 벽을 부숴 묶인 채로 브랜든을 이 지하실에서 분리해냈다. 아슬란이 안아들자 말라서 하얗게 갈라진 입술이 조금 움직였다. 브랜든이 살아있는 징후에 안도하며 아슬란이 방패를 세워들고 고문실에서 달려 나갔다.



흐릿하게 의식이 돌아왔다. 자신을 인식하고 브랜든은 절망감을 느꼈다.

‘싫어.... 이제 제발 그만...’

어딘지 특정할 수 없는 곳이 몹시 아팠다. 아픔은 느껴지는데 몸을 움직이거나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 수는 없었다. 깊은 물 속에 가라앉은 듯 온 몸이 무겁고 사방이 그를 압박했다.

‘제발 죽게 해줘. 누가, 누가 나를....’

정말로 죽음이 목전에 있는지 그의 친구들이 생각났다. 라르곤, 헬가, 아슬란, 시프리에드, 발터, 로잔나.... 가끔 한심하고 짜증나지만 그래도 그에겐 과분했던 친구들.

그리고 언제 봤다고 같이 어둠 속을 걸어주겠다던 황제의 대적자.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시 의식이 흐려졌다. 정말로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라며 브랜든은 기꺼이 망각에 몸을 맡겼다.

‘구해줘....’


아발론 비밀작전 4 (완)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로드는 먼저 린과 단둘이 이야기를 마치고 그 다음에 다른 기사들하고도 이야기를 하라고 권했다.

그래서 샬롯과 린은 일단 작은 응접실에 마주앉았다.

미안해.”

샬롯이 먼저 운을 떼었다.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우물거리다가 널 더 화나게 만들다니.”

그럼 지금이라도 말해.”

샬롯과 둘만 남자 린은 평소의 기세가 조금 살아났다.

네가 루실리카 님을 잘 따르고 좋아하는 거 내가 모를 거 같았어? 루실리카 님도 네가 맘에 드시는 거 같던데. 난 다 이해해줄 수 있어. 친구니까, 그러니까...”

린의 얼굴이 다시 흐려졌다. 그러나 샬롯은 린이 계속 오해하게 놔두지 않았다.

, 그런 거 아냐! 루실리카 님이 좀 멋있긴 하지만, 혈육이라고!”

혈육?”

린의 큰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 , 내 아빠 있잖아. 우리 엄마랑 나 버리고 도망친. 그 사람한테 자매가 있었어.”

.”

루실리카 님은 내 고모야. 그런데 아직까지 말을 안 해서 그분은 모르셔.”

갑자기 너무 중대한 사실을 알게 되어 린은 한참이나 어안이 벙벙했다.

놀란 사이 재빨리 이야기를 끝내버리지 않도록 샬롯은 린이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엘펜하임 가기 전에도 알고는 있었어. 갔을 때 말할까도 했는데, 역시 망설여져서 고민한 거야.”

, 그런 얘길 나한테는 안 했는데?”

가족 다 잃고 힘들어하는 친구한데, ‘나한테 사실은 마탑주 고모가 있는데 그분한테 내가 조카라고 말해도 괜찮을지 고민이야~’라고 말해?”

그래도!”

린이 소리질렀다.

그래서 평생 숨길 작정이었어? 아닐 거잖아? 이렇게 찾아온 걸 보면! 루실리카 님하고 둘만의 비밀로 할 생각이었던 거야?”

미안해.”

샬롯이 얼른 사과했다.

오늘 잘 되면 그때 말하려고 했어. 하지만 네가 옳아. 너한테 먼저 알리고 의논했어야 했어.”

당연하지.”

여전히 화난 표정으로 린이 쏘아붙였다.

내가, 너한테 사실은 가족이 한 명 더 있다는 거 정도로 상처받을 거 같았어? 더 이상 옛날 일 때문에 울고불고 하지 않는댔잖아. 어떻게 그런 미하일이나 할 과보호를...”

미안해!”

린에게 들을 수 있는 최대의 모욕을 듣고 샬롯이 비명을 질렀다.

내가 잘못했어! 두 번 다시 안 그럴 테니 제발 미하일만도 못하단 소린 취소해!”

아니, 미하일 같다고 했지 미하일만도 못하다고까진 안 했거든?”

아무튼! 두 번 다시 안 그럴게!”

샬롯이 몇 번이고 싹싹 빌자 린도 차츰 누그러졌다.

진짜지? 앞으론 뭐든 나한테 제일 먼저 의논할 거지? 내가 듣고 상처받을까봐, 찜찜해 할까봐 같은 소리 안 할 거지?”

절대로 안 할게. 맹세해!”

샬롯이 손까지 들고 그렇게 말하자 린이 마침내 표정을 완전히 폈다.

프람하고는 어떻게 의논할 수 있었던 거야? 아니, 알 거 같다. 프람은 그런 걸 부러워할 이유가 없고 그런 성격도 아니어서지? 할머니가 아발론에서 제일 유명한 기사였으니 유명인의 가족이 되는 게 어떤 건지 미리 들어둘 수도 있을 거고.”

.”

바네사 경한테 감춘 것도 마찬가지였겠지. ... 그쪽은 감추고 싶을 만 했겠다. 난 아무튼 시간도 많이 지났고 적응도 했지만, 바네사 경한테는 그렇게 오래 전 일도 아니고.”

이번에는 린이 어깨를 움츠렸다.

사과 받았으니까 이젠 내가 사과할게. 조용히 루실리카 님하고만 이야기하고 싶었을 텐데 나 때문에 일이 엄청나게 커져버렸어.”

... 그렇지만, 네 말대로 어차피 모두에게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는걸. 도리어 지금 같은 분위기가 더 말하기 편할지도 몰라.”

그럴지도...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역시 혼자서는 떨려서 말 못하겠어. 프람 님도 든든하지만 너만큼은 아닌 거 같아.”

마른침을 삼키고 자세를 반듯하게 가다듬고, 샬롯이 엄숙하게 말했다.

너랑 같이 말씀드리고 싶어졌어. 루실리카 님 만날 때 프람 님이랑 같이 내 옆에 있어줄래?”

, 진짜?”

린이 머뭇거렸다.

나도 그러면 좋지만... 이렇게 될 줄을 몰라서 준비 하나도 안 했는데. 옷도 평소 그대로고.”

괜찮아. 뭐 이상하게 입은 것도 아니고. 루실리카 님은 그런 거 신경 안 쓰셔. 원정 동안엔 훨씬 초라한 꼴로 마주한 적도 있는 걸.”

지금은 원정중이 아니잖아.”

투덜거리며 린이 머리를 다시 다듬었다. 어쨌든 루실리카에게도 이 상황은 제대로 해명해야 했고, 그걸 샬롯에게만 맡겨둘 순 없었다.

 

 

린과 샬롯이 완전히 화해하고 나온 뒤엔 루실리카 차례였다.

로드와 기사 여러분에게 먼저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루실리카가 묻자 샬롯에 앞서 로드가 손사래쳤다.

아니, 그대를 언제까지고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난 이미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이 가기도 하니까, 먼저 이야기 나누도록 해.”

루실리카는 샬롯을 바라보고 로드를 바라보고, 빙긋 미소지었다.

그럼 그렇게 하죠. 준비 다 된 거죠, 샬롯?”

!”

다시 빳빳이 굳으려던 샬롯이 양 옆의 프람과 린을 보고 다부지게 대답했다.

그럼 이리 들어와요. 오늘을 위해 아껴 뒀던 좋은 와인을 꺼냈답니다.”

세 사람이 루실리카의 방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히자 로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미하일이 다시 로드에게 사과했다.

린과 샬롯의 개인적인 일이 모두의 관심을 끌게 된 건 전부 제가 경솔했던 탓입니다.”

저도 부추겼습니다.”

요한도 질세라 나섰다.

제가 자이라 경과 크롬 경을 끌어들이지 않았으면 상식 있는 기사들까지 다 이걸 중대한 문제로 착각하고 말려드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 뭐 나도 좀 놀라긴 했지만 그뿐이고, 루실리카와 샬롯만 괜찮다면 그렇게까지 죄송할 필요는 없어.”

그렇게 대답하며 로드가 다른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자이라는 일단 크롬을 돌아보았다. 크롬은 평소대로 빳빳하게 선 채 대답했다.

저 역시 요한 경과 미하일 경의 이야기를 듣고 동조했으니 마찬가지입니다. 사과를 받을 처지는 아닙니다.”

저도 경솔하게 샬롯 경을 미행했어요.”

바네사도 나섰다.

사려깊지 못했던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미행에 가담했던 기사들이 저마다 사과했다. 이제는 얼결에 오해하고 따라온 기사들 차례였다.

으흠, .”

발터가 헛기침을 했다.

놀라긴 했습니다만, 저는 아발론에 비상사태가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 쪽이 더 기쁩니다. 슈나이더 경이 근접전뿐 아니라 미행에도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나름 얻은 것도 있고요.”

슈나이더의 얼굴이 확 빨개졌다. 그 역시 이번 미행으로 소득이 생긴 것 같았다.

우연도 많이 작용한 듯싶습니다.”

올가가 입을 열었다.

운이 나빴다는 뜻입니다. 미하일 경을 탓하기엔... 저는 딱히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바네사의 얼굴이 풀어지는 걸 보고 그가 말을 이었다.

루실리카 님도 문제삼으실 것 같지 않으니, 다같이 사과하고 루실리카 님께도 간단히 예의를 갖추는 정도로 마무리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동감이야.”

로드가 최종적으로 결론내렸다.

다들 고생했어. 루실리카가 나오면 결론을 내리자고.”

 

 

샬롯과 함께 들어갔으니 오래 걸리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루실리카는 금방 다시 나왔다. 한 팔로 샬롯을 꼭 끌어안은 채. 프람과 린도 웃는 얼굴로 나왔다.

나만 빼고 다들 알고 있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루실리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도 다들 오늘 일이 이런 용건일 걸 몰랐단 말이에요? 그게 더 놀랍네요.”

그게, 난 샬롯의 행선지가 별궁이었다고 알았을 때부터 짐작하긴 했는데...미안.”

로드가 멋쩍은 얼굴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번 일은 내가 아발론의 군주로서 그대와 별궁의 모든 손님들에게 사과하지.”

저는 괜찮아요. 기쁜 날에는 마음을 넓게 써야죠.”

루실리카가 활짝 웃었다.

이런 소식을 들었으니 우리 귀여운 조카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지만, 먼저 당신과 아발론 기사들과 마무리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일단 나온 거예요.”

그리고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미하일은 다시 창백해졌다.

, 정말로...”

다들 샬롯을 걱정해서 이랬다는 거 알아요. 정 긴장되면 다 같이 가주자는 말도 했었다면서요? 말이 씨가 된 셈이군요.”

그 말을 했던 본인인 프람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니 문제삼지도 사과를 요구하지도 않을게요. 대신 앞으로도 우리 샬롯 잘 부탁해요.”

감사합니다.”

미하일이 고개를 숙였다. 다른 기사들도 모두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전 이만, 세 사람에게 점심을 사주기로 했거든요.”

루실리카가 남은 팔로 린도 끌어당겨 안았다.

그런 다음엔 샬롯과 둘만 하고픈 이야기도 많고. 그러니 여기 이렇게 다들 모여있지 않아도 돼요.”

그래.”

완전히 안도한 로드를 보고 루실리카의 미소가 짓궂어졌다.

당신에게는 이걸로 끝이 아닐 텐데요? 별궁의 다른 손님들에게도 똑같이 사과해야죠. 로잔나 통령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아주 궁금해 하고 있을 텐데.”

로드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걸 보고 루실리카가 풋 웃었다.

, 그럼 우린 갈까요.”

, 고모~”

로드와 기사단을 남겨두고 루실리카는 샬롯과 린, 프람과 함께 총총 걸어나갔다.

 


아발론 비밀작전 3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수요일은 아침부터 화창했다.

샬롯은 한껏 멋을 부리고, 긴장한 동시에 들뜬 모습으로 방을 나섰다.

준비는 다 됐지?”

프람도 새로 산 말끔한 정장을 빼 입고 있었다.

그럼 갈까?”

샬롯뿐 아니라 프람까지 멋지게 차려입고 나란히 걷는 모습은 금방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아침 산책을 나온 바네사도 두 사람을 보고 쾌활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두 사람 다 근사하네요!”

, ...녕하세요, 바네사 경.”

샬롯은 분명 안 그런 척 당황했다.

프람 님하고 놀러 나갔다 오려고요.”

, 잘 다녀오세요.”

그럴게요.”

샬롯과 프람이 빠른 걸음으로 시야에서 사라지자 바네사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자이라 경하고 이야기할 때만 해도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까지 나쁜 분위기는 아니었으니 샬롯과 프람이 알아서 할 수 있으리란 생각과, 요 며칠 미하일과 요한이 어두운 표정으로 정보를 캐고 다니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바네사 경, 좋은 아침입니다.”

새벽 훈련을 마치고 아침 먹으러 가려던 올가가 바네사의 기색을 보고 멈칫 했다.

안색이 어둡습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저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에요.”

바네사가 다시 웃었다.

그보다 올가 경은 휴일인데도 새벽부터 훈련인가요?”

휴일에도 루틴을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휴일 훈련은 평일보다 부담을 줄이고 있으니 무리할까봐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낮에는 휴식을 취하시는 거죠?”

물론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동안 바네사도 올가를 죽 지켜봐 왔다. 옆에서 억지로라도 쉬게 하지 않으면 모처럼의 휴일도 가벼운 훈련만 하면서 보낼 것이다.

,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샬롯 경에게 뭔가 어려운 일이 있는 거 같아서요. 옆에서 참견할 일은 아니지 싶은데, 답지 않게 긴장해 있는 걸 보면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닌가도 싶고...”

그렇습니까.”

올가가 골똘히 생각해보는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도움이 필요하다면 샬롯 경이 먼저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오늘 아침에 보니까 또 예감이 안 좋아서...”

오래 저항군 활동을 한 올가도 별일 아닐 거야. 기분 탓이겠지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해왔다. 바네사가 다시 부추겼다.

저도 괜한 참견이 아닐까 하는 걱정은 있어요. 샬롯 경이 모르게 살짝 먼 발치서 지켜보다가, 나쁜 일이 아니라는 것까지만 확인하고 돌아오면 좋겠는데, 제가 그러다가는 들킬 것 같고...”

정 그러시다면, 샬롯 경이 어디로 갔는지 혹시 아십니까?”

방금 나가는 걸 봤으니 서두르면 따라잡을 수 있을 거예요.”

바네사의 얼굴이 밝아졌다.

프람 경하고 둘이 다 멋지게 차려입고 나갔으니 번화가에서 쉽게 눈에 띄겠죠. 미행을 도와주시면 점심은 제가 살게요.”

프람 경도 같이 나갔는데, 둘 다 차려입었다고요?”

올가의 눈빛이 한층 진지해졌다.

중대한 일인 것만은 틀림없군요. 알겠습니다. 가서 확인합시다.”

 

 

거리는 북적이고 사람들은 활기찼다.

슈나이더를 따라나온 발터는 화창한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나오길 잘했군.”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슈나이더는 다시 발터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긴장해 있었다.

제가 오늘 추천하려는 과자는 한정판이라, 일찍 나오지 않으면 놓칠 수도 있기 때문에 부득이 약속을 일찍 잡았는데도 발터 경은 개의치 않으시는군요.”

나도 좋은 원두를 사러 나갈 때는 새벽부터 채비하거든.”

삼거리 제과점 앞은 과연 벌써 줄을 서려는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슈나이더와 발터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게 문이 열리자 곧 질서 있게 줄을 섰다.

일찍 오길 잘 했군.”

슈나이더가 사려던 한정판 민트초코 케이크와, 달콤하고 부드러워 커피와 잘 어울릴 슈크림을 듬뿍 사고 두 사람은 흐뭇하게 거리로 나왔다.

제가 전망 좋은 장소를 알거든요. 조금 걸어야 하지만 호젓하면서도 왕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여서......”

신나서 이야기하던 슈나이더가 멈칫 했다.

발터 경, 왜 그러십니까?”

발터는 대답 대신 하늘을 가리켰다.

기사가 아닌 일반인 눈엔 보이지도 않을 높은 하늘에 레이븐이 떠 있었다.

누군가에게 들킬 것을 경계하는지 높은 건물 지붕 등을 이용해 숨으면서 어딘가에 신호하는 모습은 어제 두 사람이 본 거의 그대로였다.

“......”

두 사람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중요한 작전을 방해하면 곤란하지.”

발터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니 우리도 최대한 눈에 안 띄게 행동하세.”

 

 

민트초코가 호불호가 갈린다는 것도 옛말이라니까요. 우리 바로 앞줄에서 동날 줄이야. 대신 나인이 좋아하는 딸기 타르트와 체리 무스는 사는 데 성공해서 다행이에요. 그런데 말이죠, 우리 앞줄에 있던 발터 경과 슈나이더 경 봤어요? 두 사람은 우릴 못 본 거 같아서 부를까도 했는데, 왠지 그랬다간 슈나이더 경에게 원망을 들을 것 같았거든요. 동경하던 영웅과 둘만 있는 자리인데 방해하면 안 되죠. 보세요, 이렇게 멀리서 보기에도...”

루미에가 말끝을 흐렸다. 나인도 루미에가 왜 그러는지 금방 눈치챘다.

두 사람이 타르트와 주스를 사 가지고 자리잡은 2층 테라스에서는 삼거리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저만치 같이 걸어가던 발터와 슈나이더가, 갑자기 여기서도 알 수 있을 만큼 심각한 분위기가 되더니 한 방향으로 이동했다. 뛰지만 않을 뿐 직전까지의 느긋한 걸음걸이와는 완전히 다른 움직임이었다.

저 두 사람 어디 미행 가나봐.”

나인이 먼저 긴장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제국 있을 때 나도 배웠어. 해본 적도 있어.”

제가 보기에도 그러네요. 대체 무슨 일일까? 로드는 아무 말도 없었거든요. 아발론에 무슨 일 생긴 거면 우리한테 말을 해줬을 텐데......”

저 둘도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잖아. 로드도 모르는 일이 방금 생긴 걸지도 몰라.”

그럼 로드한테 빨리 알려야겠네요.”

그래? 지금 따라가 보는 게 아니고?”

발터 경도 경험이 많으니 당장 급하게 해야 할 대처는 잘 할 거예요. 그보다는 로드가 이 사실을 빨리 아는 게 중요해요.”

그러네. 로드가 대장이니까.”

루미에는 타르트와 무스 케익을 싸들고 제과점을 뛰쳐나왔다.

 

 

로드는 모처럼의 휴일을 루인과 왕궁 안을 거닐며 보내고 있었다.

로드~제 말 좀 들어보세요. 글쎄...”

루미에는 거의 숨도 안 쉬고 나인과 함께 본 것을 설명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발터 경이 그랬다는 말에, 로드와 루인도 진지한 얼굴이 되어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 무작정 따라가지 않고 와서 보고한 건 잘한 일이야.”

로드가 루인에게 물었다.

오늘 비상 근무인 기사가 누구누구지?”

솔피 경과 조슈아 경, 프라우 경입니다.”

루인이 대답했다.

마침 재앙 대비를 위한 동맹 회담을 앞두고 별궁에 손님들이 모여있는 시기이니 휴일을 노린 음모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 세 사람을 지금 부르겠습니다.”

우리도 갈게요!”

혹시 모르니까 다른 기사들도 부를 수 있으면 전부 부를게!”

 

 

별궁은 평소 로드와 기사들이 살며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는 왕궁에서 합승마차 두 정거장 정도 떨어져 있었다.

샬롯과 프람은 비장한 태도로 그 안에 들어섰다.

준비됐지?”

, 그럼요!”

씩씩하게 외친 샬롯이 성큼성큼 엘펜하임 대사 구역까지 들어갔다.

어서 와요, 샬롯. 프람.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루실리카가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맞아주었다.

저도 샬롯 양과는 한 번쯤 깊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깥 분위기가 바뀌었다. 다닐과 비슷한 복장을 한 엘프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서, 루실리카에게 말하기 전에 샬롯과 프람을 흘끔였다.

그냥 말하세요. 무슨 일인가요?”

루실리카의 독촉에 그 엘프가 입을 열었다.

, 아발론의 기사들 거의 전원이 별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미하일 말고도 아발론의 기사들은 모두 잠입이나 미행을 할 줄 알았다.

소질이 없거나 아직 서툰 사람도 있지만, 별궁에 미처 제대로 접근하기도 전에 서로를 인지하기 시작한 건 그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발터가 황당한 얼굴이 되어 따졌다.

별궁에서 무슨 문제가 일어나는데 나와 슈나이더 경만 몰랐던 건가?”

너희만 몰랐던 것도 아니야.”

헬가가 턱을 쓰다듬었다.

나도 그냥 놀러나왔다가 너희들 보고 따라왔거든.”

미하일은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주위엔 요한과 린, 자이라, 크롬, 바네사, 올가, 그 외 지나가다 이들을 발견한 기사들까지 전부 몰려와 있었다.

위험한 일 벌어진 건 아니었던 거지?”

마지막으로 로드가 다가왔다. 그 뒤엔 루미에와 나인, 프라우와 조슈아도 있었다. 솔피는 먼저 별궁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왜 다들 이렇게 몰려나온 건가?”

하얀 얼굴이 더 새하애진 미하일을 흘끔이던 린이 숨을 들이마시고 나섰다.

, 제가 졸랐어요. 샬롯이 나한테는 말도 안 하고 몰래 어딜 가려고 해서, 저도 몰래 따라가 보려고 했을 뿐이라고요.”

아니, 일을 크게 만든 건 접니다. 린이 걱정하는데, 저 혼자서는 샬롯이 무슨 일로 그러는지 알 수 없어서 주변 도움을 청했습니다!”

로드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하일과 린에게 말려든 사람, 무슨 일인가 우연히 따라온 사람들이 전부 로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일단, 솔피가 별궁에 비상 경계령을 내리러 갔을 테니 그것부터 빨리 해제해야겠군.”

 

 

아발론의 거의 모든 기사들 앞에서, 루실리카는 어이없어 하면서도 이해한다고 말해주었다.

이게 다 미하일 때문이라고 하지 못할 정도로 쫄아버린 린을 보고는 샬롯도 대뜸 화내지 못했다.

그게......네가 모르게 하고 싶긴 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미리 말할 걸 그랬지.”

도리어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는 샬롯에게, 프람이 슬쩍 말했다.

어떡할래? 일단 린한테 사정 설명을 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샬롯이 루실리카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순서인 거 같네요. 저는 잠시 기다려줄 수 있으니까 걱정 말고 친구들하고 할 얘기 먼저 끝내요.”

,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루실리카가 샬롯에게 다정하게 웃었다.

중요한 일로 잡은 약속이지요? 그렇다면 더욱 친구들과 오해를 풀고 이야기하는 게 좋지요. 샬롯이 하는 일이니 분명 다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샬롯은 루실리카의 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발론 비밀작전 2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크롬은 근거 없이 함부로 칭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이라는 분위기를 읽는 것에도 뛰어나고 관찰력도 좋았다. 카를 3세가 공연히 첩자에게나 어울릴 임무를 자이라에게 맡겼던 게 아니었다.

게다가 운도 조금 따랐다. 자이라에게도 플로렌스에 두고 온 친구와 지인이 조금은 있어서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데, 그들이 플로렌스의 명절에 맞춰 보내온 와인이 있었다.

자이라는 적당히 기회를 보아 그 와인을 가지고 바네사의 휴식 시간에 맞춰 찾아갔다.

플로렌스 산 와인인데, 그동안 프리스트들에게 신세를 많이 졌으니 한 번쯤 대접하고 싶습니다. 마침 그레이스 씨에게 바네사 경이 와인을 좋아한다고 들어서요.”

플로렌스 산 와인이요?”

바네사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렇게까지 신경쓰실 필요 없는데. 아발론에는 저도 큰 은혜를 입었고 이제 동료이기까지 하잖아요. 제 책임을 다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눈에선 기대감이 반짝거렸다. 자이라는 빙긋이 웃으며 그 앞에 술병을 내려놓았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동료 사이니까 더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알아주시면 좋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럼 조금만...”

바네사는 테이블을 정리하고 평소 간식으로 두고 먹는 치즈를 꺼냈다.

자이라의 와인은 과연 훌륭했다. 술이 들어가자 바네사의 태도도 풀어졌다.

술잔을 주고받는 동안 자이라는 주의 깊게 캐내려는 태도를 감추고 자신의 일상적인 한담부터 했다.

아발론 와서는 대련할 때 힘을 더 자유롭게 휘두르고 있습니다만, 가끔 이래도 되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훈련장비가 파손될 때도 그렇고, 절 상대한 사람들이 다칠 때는 특히요.”

아이 참, 그런 걸 걱정하고 계셨어요?”

바네사가 까르르 웃었다.

프람 경은 더한데요? 샬롯 경이 지금이 그나마 나아진 거라고 했을 땐 저도 오싹했을 정도인데. 자이라 경 정도면 상대 수준에 맞춰서 힘조절 잘 하는 거예요.”

그렇습니까?”

자이라 경이나 프람 경이나, 큰 힘을 마음껏 휘두르는 게 중요한 분들이니 대련 중이라고 너무 조심만 하는 것도 부적절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다행입니다.”

부상을 치료하고 기사들의 건강을 돌보는 게 저와 샬롯 경의 임무인걸요. 다른 기사에게 맞아서가 아니라 잘못된 훈련을 해서 다치는 경우도 많이 봤어요. 자이라 경이 그렇게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플로렌스에선 대련 중 상대를 다치게 할까봐 크롬 외의 사람과는 대련을 피해야 했던 때도 있었다. 귀족 기사끼리 대련하다 다치면 중상이 아닌 한 해프닝으로 넘어가지만 노예 출신 기사가 귀족 기사를 다치게 하면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압도적으로 이겨버리지 않을 수도 없었다.

크롬이 나서서 변호해주고, 왕실 수호 기사단인 쏜즈 오더의 정기사까지 승격하고 나서야 겨우 마음 놓고 대련을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입단 찬성파를 늘리는 과정에서 기사단 내에 친분 있는 기사들을 많이 늘려둔 덕택이었다.

문득 앞에 있는 사람이 고귀한 직계 왕손이라는 사실이 무척 이상하게 느껴졌다.

자이라의 상념과 별개로 바네사도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지금 알고 있는 프리스트로서의 경험과 지식 대부분이 해방군을 이끌게 되면서부터 머리 싸매고 토할 것 같은 기분으로 익힌 것들이었다. 경험을 통해, 실패를 통해 배운 것도 많았다.

자이라 경을 앞에 두고 술맛 떨어지는 표정을 하고 말았다. 당황해서 표정을 수습하려다, 바네사는 자이라도 자신과 똑같이 당황한 것을 깨달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과거를 회상하기에 좋은 때가 아니군요.”

자이라가 먼저 바네사의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오늘은 즐거운 이야기만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바네사 경이 힘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으신 거라면...”

전혀 아니에요.”

바네사도 고개를 막 가로젓고 자이라의 잔을 가득 채워주었다.

저도 여기 와서 비로소 알게 된 거지만, 가끔은 힘들었던 기억을 그냥 묻어놓는 것도 필요하더라고요. 휴식을 위해서.”

동감입니다.”

자이라가 진심으로 동의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짊어지고 있다는 의식은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자신을 지나치게 몰아붙여 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경험담이니 믿으셔도 됩니다.”

고마워요.”

바네사가 방긋 웃었다.

여기선 샬롯 경이 치료를 나눠 담당한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마음이 편해지던지. 처음엔 너무 풀어지는 것 같았지만,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까 공부를 해도 더 머리에 잘 들어오고 치유의 연주도 실수가 줄어들지 뭐예요.”

다행입니다.”

자이라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샬롯 경과 이야기하지 못했군요. 요즘 프리스트들에게 바쁜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뇨.”

바네사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즘은 아시다시피 잠시나마 평화롭잖아요. 저도 이렇게 휴일을 즐길 정도인걸요. 샬롯 경도 뭔가 다른 일로 바빠보였어요.”

다른 일이요?”

최대한 지나가는 투로 물었으나 바네사는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심각해져서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잠시 더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사실 샬롯 경은 요즘 고민이 있어 보여요. 혼자 생각에 잠겨서 불러도 못 듣기도 하고, 무슨 일 있는 거냐고 물어보면 대답을 피하기도 하고. 전엔 그런 일이 없었거든요. , 이런 말 다른 사람한테 하는 거 실례려나?”

취중에 할 필요 없는 말까지 해버렸다고 생각하는 바네사에게 자이라가 말했다.

동료에게 고민이 있다면 모른 척 넘길 수 없죠. 참견 같아도 도움이 필요한 일인지 아닌지 확인 정도는 하는 게 좋습니다.”

역시 그럴까요?”

바네사가 진지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에 안 그러던 사람이 갑자기 그러니까, 저도 실은 좀 걱정스러워요. 로드께 의논해봐야 하나 싶던 차예요.”

 

 

수요일은 다가오는데, 바네사도 아는 바가 없다고 한다. 미하일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분이었다.

샬롯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다는 충동마저 들었다. 작정하고 숨기는 사람한테 그래봐야 답이 나올 리 없다는 사실만 아니었으면, 그리고 린에게 한 약속만 아니었으면 벌써 달려가 캐물었을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수요일에 샬롯과 프람을 조용히 뒤따라가는 것뿐이군요.”

요한이 비장하게 단언했다.

미행하자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망설이는 미하일을 보고 요한이 설득했다.

들키거나 소란이 날 게 걱정이죠? 그것도 방법이 있습니다. 샬롯과 프람이 어디서 무얼 하든, 몰래 숨어서 한다 해도 어차피 아발론 왕성 내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우연히 마주친 척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어요.”

우연히 마주친 척 변명한다고?”

미하일이라면 샬롯 눈에 띄었을 때 금방 미행인 걸 들키겠지요. 하지만 저라면 샬롯의 일정에 그렇게까지 간섭할 이유가 없으니 우연히 동선이 겹친 척 할 수 있습니다.”

비로소 미하일의 표정이 솔깃하게 변했다.

자이라 경도 계속 도와주겠다고 했으니, 수요일 전에 모든 걸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당일에 둘이 뭘 하는지 지켜보는 건 가능합니다. 샬롯과 프람이 저나 자이라 경에게 신경을 쏟는 동안 미하일이 들키지 않고 미행할 수도 있고요.”

 

 

화요일 저녁, 린은 뜻밖에도 미하일의 실패를 갈구지 않았다.

요한이 대신 설명한 쪽수로 밀어붙여 미행 아닌 척하기작전도 진지하게 고민했다.

자신을 갈굴 마음의 여유도 없을 정도로 샬롯의 행동에 애태우고 있다고 생각하니 미하일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

그럼 수요일 아침 일찍, 각자 기사단 기숙사를 나온 샬롯이 갈 만한 곳에 흩어져서 대기하죠. 그리고 샬롯과 마주친 사람은 레이븐이 볼 수 있게 미리 약속한 신호로 샬롯의 다음 행선지를 알리는 겁니다. 그리고 레이븐이 가는 곳으로 다른 사람들도 이동하되 역시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연출할 수 있도록 주위에 흩어지는 거죠.”

훈련장에 모여서 요한이 작전을 다시 정리하자 미하일이 보충했다.

레이븐은 필요 최소한도로만 공중에 나타날 거다. 샬롯은 정령사고 프람은 감이 날카로워서 너무 오래 주시하면 아무리 레이븐이라도 들키게 된다. 다들 여차하면 혼자 힘으로 미행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한다.”

.”

자이라와 크롬, 린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셋 모두 엄숙한 얼굴이었다.

시간이 없으니 지금 신호를 익혀두고 연습을 해봅시다.”

휴일 전날 저녁이라 훈련장은 텅 비어있었다. 이런 시간에도 굳이 훈련장에 밤늦도록 남는 인원 대부분이 공교롭게도 이미 이 작전에 참여했고, 다른 사람이 오더라도 이 구성이면 그냥 특별 훈련이라고 얼버무릴 수 있었다.

덕분에 다섯 사람은 남 눈치 볼 걱정 없이 열심히 훈련했다. 다들 노련한 기사들이고, 기사가 아닌 린도 평소 레이븐과 가까운 덕인지 금방 매끄럽게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작전이 아침 일찍 시작한다는 걸 감안해서 이쯤 끝낼까?”

미하일의 제안에 동의할 생각으로 요한이 입을 열었을 때였다.

훈련장 문이 열리고 슈나이더와 발터가 들어섰다.

, 여러분도 훈련중이셨군요.”

슈나이더는 언제나처럼 씩씩하게 외쳤다. 발터는 그의 뒤에서 미하일이 시가전 상황으로 설치해놓은 장애물들을 훑어보았다.

새로 출전할 일이라도 있나? 평소 훈련하던 것과는 장비도 인원 구성도 다르군.”

그런 건 아닙니다.”

요한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다양한 상황에 맞는 훈련을 위해, 일부러 평소에는 레인저인 미하일만 하던 정찰 훈련을 우리도 하는 겁니다. 마침 흥미가 동한 기사들끼리 모인 거고요. 혹시 발터 경도 흥미가 있으십니까?”

흥미롭긴 하네만 오늘은 슈나이더 경의 훈련을 봐주기로 했네.”

발터가 손을 내저었다.

나도 데인투스를 다시 한 번 가까이서 보고 싶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안심한 요한은 동지들과 함께 정리운동을 하고 훈련을 마쳤다.

 

 

미하일과 요한 일당이 훈련장을 나가고도 한참 후에야 발터와 슈나이더의 훈련이 끝났다.

밤이 이렇게 늦었는데도 귀한 시간을 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슈나이더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발터도 빙긋이 웃으며 답례했다.

나도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이었네. 파도 기사단 단원들이 모두 자네 같았으면 좋겠군.”

화기애애하게 뒷정리를 하던 발터의 눈에 문득 아까 다른 기사들이 썼던 시가지 재현용 장애물이 들어왔다.

“......”

, 장애물 창고는 일찍 잠그기 때문에 훈련이 늦게 끝나면 대형 장애물을 그냥 저렇게 구석에 뒀다가 다음날 아침에 마저 정리하는 일이 가끔 있습니다. 미하일 경이 규칙을 어긴 게 아니에요.”

그랬군. 아니, 그런 것보다...”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발터가 털어놓았다.

아까의 장애물 배치 형태는 왕궁 앞 삼거리를 연상시키더군. 자네도 그렇게 느꼈나?”

그렇습니다. 저도 그 거리를 재현했다고 느꼈습니다.”

연습이니 익숙한 거리를 무대로 삼았는지 몰라도, 왕궁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곳이 시가전의 무대가 될 리 없잖나? 미하일 경이 뭔가 위험한 낌새라도 알아낸 건가?”

슈나이더가 대답하기 전에 발터가 머리를 저었다.

아니, 이건 잊어버리게. 늙은이의 나쁜 버릇이 도졌군. 주변에 바람 한 줄기만 불어도 그 바람에 화약 냄새가 실려오는 건 아닌지 놀라는 건 내 고질적인 나쁜 버릇일 뿐이니 신경 쓸 필요 없어.”

마도대전 같은 참혹한 일을 겪은 분에게 제가 뭐라 함부로 말을 하겠습니까.”

슈나이더가 정중하게 말했다.

마침 내일이 수요일이니, 발터 경께 삼거리 제과점의 과자를 대접해 드리고 싶군요. 평화롭고 안전한 거리를 직접 다시 보시고 즐기신다면 불안해진 마음을 달래는 데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 휴일에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그럼 부탁하겠네.”

 

 


아발론 비밀작전 1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보행자의 로오히 팬픽입니다.

Characters: 아발론 기사단, 로드, 그 외
Rating: PG
Warnings: 개그
Summary: 아발론 기사단에 반역자가 나올 수 없는 이유



샬롯에게 고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사람은 언제나 린 블레이크였다. 고민을 혼자 끌어안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기로 결심했을 때 가장 먼저 찾아가는 사람도 언제나 린 블레이크였다.

그러나 로드의 원정이 길어지면서 그 당연하던 것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

엘펜하임과의 수교가 잘 되었을 때 샬롯은 온전히 기뻐하고만 있지 않았다. 그러면서 린에게는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린이 작정하고 추궁하기도 전에 페르사로 가버렸다.

다른 종족뿐 아니라 괴수하고도 공존할 수는 없는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고, 오랜만에 아발론으로 돌아온 샬롯이 털어놓았을 때도 린은 그런 엉뚱한 생각을 가장 먼저 털어놓은 상대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 쪽이 더 오래 마음의 앙금으로 남았다.

금방 끝나길 바랐던 원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가끔 정비와 휴식을 위해 귀국하기도 했지만 오래 머물지 않았다.

갈루스 공략이 거의 끝나갈 무렵까지도 그런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샬롯은 언제나 다 따라잡기도 힘들 정도의 이야깃거리와 새 친구들과 함께 돌아왔다.

바네사 경은 직책이 비슷하다보니 샬롯과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자신도 기사들에게 새 장비를 맞춰주느라 바쁜 건 마찬가지였음에도 린은 섭섭한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 수요일을 특히 작정하고 기다렸다.

로드도 모처럼 돌아온 기사들이 밀린 일에만 파묻혀 있기를 바라진 않았다. 그래서 돌아오는 휴일인 이번 수요일엔 모두들 억지로라도 일손을 놓도록 조치했다.

즉 이번만큼은 샬롯과 둘이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삼거리 제과점에서 미하일이 사온 부드러운 무스 케익은 퍼석 소리도 내지 않고 으깨져 버렸다. 화풀이에는 여러 모로 적합하지 않은 간식이었다.

알았다. 간식은 이따 먹자.”

여름 한정 레몬 무스 케익이 뭉개져 버렸지만 미하일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는 한편 남은 간식들까지 린의 포크에 희생되지 않도록 서둘러 치웠다.

샬롯이 그날 다른 약속을 먼저 잡았대? 누구와?”

린의 얼굴이 울 것처럼 붉어지는 걸 보고 미하일은 긴장했다. 두 사람이 평소 원수지간처럼 막말을 퍼부어도 우애가 유지되는 것은 막말해도 될 때와 안 될 때를 잘 구분하는 덕이었다.

그걸 말 안 했다니까!”

린이 더없이 원통하게 외쳤다.

물어봤는데, 대답도 안 하고 내뺐다고. 이 배신자...”

미하일도 진지하게 샬롯의 최근 행적을 되짚어 보았다.

심각한 얼굴로 혼자 고민에 빠져 있는 모습은 그도 요즘 자주 목격했다. 그 역시 무슨 일인지 물어보기도 했지만 항상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만 돌아왔고, 반대로 뭔가 좋은 일이 있는 듯 들떠 보일 때도 있으니 나쁜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 내버려두고 있었다.

샬롯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긴 걸까?”

린이 슬프게 한탄하자 미하일은 거의 조건반사처럼 튀어올랐다.

그럴 리가!”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냥 본인 희망사항이잖아.”

린이 미하일을 흘겼으나 그는 진지하게 다짐했다.

증거는 지금부터 내가 모아볼게.”

정말?”

린의 눈 속에 놀라움과 함께 기대도 반짝이는 걸 보고 미하일은 더욱 엄숙하게 다짐했다.

그래. 수요일 전날 저녁식사 때까지 내가 반드시 샬롯의 그날 일정을 알아낼게.”

가서 냅다 추궁하면 안 된다는 거 알지?”

린이 덧붙였다.

샬롯을 괴롭히고 싶은 게 아냐. 소란 피우지도 말고 샬롯의 일정을 방해하지도 마.”

잠입과 탐색이 전문인 레인저를 우습게 보는군.”

 

 

미하일은 장담한 대로 샬롯 주변을 탐지하기 시작했다.

대놓고 캐묻고 다닐 마음은 없었다. 지금도 가까이 지내는 친구이자 동료라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었다.

샬롯이 요즘 혼자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들을 피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왕성 바깥까지 멀리 나간 적도 없었고, 주로 누구와 어디를 다니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샬롯은 요즘 프람과 함께 다니며 새 옷을 사거나 그 외 다양한 물건을 고르고 다녔다.

샬롯도 그동안 린하고만 다닌 건 아니니 프람과 쇼핑 좀 한다고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샬롯이 린을 떼놓고 다닌 적은 있어도 누구랑 어디 간다는 사실을 말하지도 않고 며칠이나 피해다닌 건 심각하게 싸웠을 때 정도였다.

그런데 싸웠다는 말은 없었지. 샬롯은 정말 뚜렷한 이유도 없이 린을 피하고 있어.’

프람에게 물어보면 될지 고민하고 있는데 그에게 요한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미하일,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 무슨 일이지?”

혹시 말입니다. 요즘 린에게 무슨 이야기 못 들었습니까?”

늘 진지하고 심각한 요한이 오늘은 평소의 배나 심각해 보였다.

요즘 프람이 샬롯과 함께 뭔가 꾸미고 있는데, 제게는 도무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프람도?”

미하일은 이 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프람은 수다쟁이는 아니지만 비밀이 없는 성격이라 어지간한 건, 아니 어지간하지 않은 것도 질문을 받으면 답해주곤 했다. 특히 요한은 프람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샬롯에게도 물론 물어봤는데 대답을 해주지 않아서요. 혹시 린이라면 샬롯한테 뭔가 듣지 않았을까 기대했습니다만, 표정을 보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군요.”

그래. 샬롯이 린에게 뭘 숨긴 건 이번이 처음이라 린도 지금 걱정이 태산이야.”

우리가 힘을 합쳐야겠군요.”

요한이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된 이상 샬롯과 프람을 미행하는 수밖에 없나...”

미하일이 진지하게 중얼거리자 요한이 화들짝 놀랐다.

그렇다고 동료를 미행하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나도 그러다 들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도 무섭다. 그렇다고 이걸 그냥 보고만 있었다가 후회할 일이라도 생기는 건 아닌지, 그게 더 무서워.”

그렇군요.”

요한도 진지하게 동의했다. 그도 불안하던 차였다.

아무리 그래도 당장 프람과 샬롯을 미행하는 건 성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들킨 뒤도 무섭고, 지금 제가 미하일에게 물어본 것처럼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보는 게 순서입니다.”

그렇군.”

실은 미하일에게 별 정보를 얻지 못할 경우 자이라 경에게 물어볼 생각이었거든요. 자이라 경이 평소에 프람과 자주 훈련하기도 하고, 또 예리해서 그냥 지나치기 쉬운 것도 놓치지 않으니까요.”

그거 좋은 생각이군.”

미하일도 찬성했다.

 

 

자이라에게 두 사람이 찾아갔을 때 그는 마침 정원을 혼자 산책하고 있었다.

, 잘 만났습니다, 자이라 경.”

요한이 나서서 말을 걸었다.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 자이라도 단번에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무슨 일 났습니까?”

. 샬롯과 프람이 주위 사람들에겐 아무 말도 안 한 채 자기들끼리만 무언가 꾸미고 있습니다.”

무엇을 꾸미고 있는데요?”

그걸 모르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자이라는 요한과 미하일의 간절한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 슬쩍 볼을 긁적였다.

실례지만 그 두 사람이 반역 모의를 하는 게 아니라면 이렇게 근심하며 주변의 도움까지 구할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린이 걱정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미하일이 설명했다.

린은 샬롯의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샬롯이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면 린에게까지 숨길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 제 말은 샬롯이 정말 역모를 꾀한다는 게 아니고요. 무슨 일이라 숨기는지 알기라도 하고 싶다는 겁니다.”

샬롯 경이 역모를 꾀한다뇨? 그 무슨 말입니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요한과 미하일이 펄쩍 뛰었다. 어느새 다가온 크롬이 그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도저히 그냥 들어넘길 수 없는 낱말이 들려서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미하일이 서둘러 해명했다.

예를 들다 보니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크롬 경도 자이라 경이 갑자기 하는 일을 숨기고 대화도 없이 피한다면 섭섭하지 않겠습니까?”

크롬은 자이라와 눈을 마주치고 어색하게 수긍했다.

심정은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에 저나 자이라 경이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요즘 프람 경이 자이라 경과 자주 같이 훈련하니까요. 혹시 뭔가 보거나 들은 게 있다면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

자이라는 여전히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으나 일단 생각은 해보는지 가만히 눈을 굴렸다.

“......걱정거리가 있어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이렇게 해서 알아야 할 일이라면 위험하거나 여타 도움이 필요한 일일 텐데, 샬롯 경이라면 몰라도 프람 경에게 그런 일이 있다면 티가 났을 겁니다.”

그렇군요.”

수긍하면서도 요한은 찜찜한 기색을 버리지 못했다. 미하일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거라면 린에게 진작 말했을 겁니다. 린은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넌 몰라도 돼하는 식으로 덮고 지나가는 걸 가장 싫어한단 말입니다. 샬롯이 그 심정을 몰라주었다면 지금만큼 친해지지도 못했을 겁니다.”

크롬이 머리를 짜내 물었다.

혹시 생일이나 기념일 같은 게 다가오고 있지는 않습니까?”

깜짝 파티 같은 건 저도 생각해 봤습니다만 짚이는 날짜가 없습니다.”

미하일이 고개를 젓자 다들 침묵에 잠겼다.

넷이 여기 서서 뭐해?”

프람의 목소리에 다들 펄쩍 뛰었다. 미하일은 아예 얼굴까지 창백해졌다.

미하일, 어디 아파?”

천진하게 묻는 프람은 평소와 전혀 다를 게 없어보였다.

아픈 게 아닙니다.”

요한이 나섰다.

샬롯이 안 보여서 찾고 있습니다. 혹시 샬롯을 오늘 본 일이 있습니까?”

샬롯?”

프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 . 난 모르겠는데. 가서 찾아볼게.”

그리고 누가 붙잡기도 전에 쌩 하고 달려가 사라져 버렸다.

“...프람.”

요한이 바람에 흩날린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무겁게 중얼거렸다.

봤죠?”

미하일도 진지하게 주장했다.

프람이 샬롯과 함께 뭔가 몰래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렇군요.”

크롬이 진지하게 끄덕거렸다.

무슨 일로 저러는지 알아봐야겠습니다.”

자이라는 아직도 이게 제 3자들까지 끼어들 일인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미하일의 표정이 너무 절박해 보이고, 크롬 경도 열의를 보이고 있었다. 아직 아발론의 기사들 앞에서 내성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크롬 경이 요한과 미하일과 좀 더 가까워질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습니다. 같이 조사해 보지요.”

그러나 자이라도 당장 어떻게 조사해야 좋을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때 크롬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바네사 경에게도 물어보면 어떻습니까?”

바네사 경이요?”

요한의 반문에 크롬이 부연했다.

. 치유를 함께 담당해서 샬롯 경과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습니다. 뭔가 눈치챘을지도 모릅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요한이 찬성했다.

저도 미하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볼 생각도 해봤지만 아무래도 요령 좋게 물어볼 자신이 없거든요. 자이라 경이라면 다를 것 같군요.”

저요?”

자기를 콕 집어 말할 줄은 몰랐던 자이라가 당황했으나 크롬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좋은 생각입니다. 이런 일엔 자이라 경처럼 날카로운 사람이 적임자입니다.”

...해보겠습니다.”

 

 


로드가 없었던 세계 64 - 다음 생은 그대들을 위해 (완)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잠깐만, 황제 때리기 전에 나도 할 말 있어.”

자이라가 나섰다.

“그러니까 저 황제 처음부터 당신 편...”

자이라가 잠깐 고민했다.

“아니, 대적자라 부르는 거 보면 같은 편은 아닌가? 적인데 감긴 거야? 감겼는데 적인 거야?”

“어...”

로드도 혼란스러운 표정을 했다.

“뭐 두 사람 사이는 넘어가고. 아무튼 싸우러 온 거 아니잖아. 그런데 왜 전화했을 땐 그렇게 역적을 색출한 것 마냥 무게 잡고 공포 분위기 형성한 건데?”

“아 맞아 그거!”

로드가 다시 카르티스의 멱살을 잡았다.

“그 덕분에 잠시나마 루인이 죽은 줄 알고 내가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는지 알아? 대체 왜 그런 거야?”

“그게, 아발론인들이야 네가 거기서 한 일이 있으니 널 따르겠지만, 자이라는 네게 아쉬울 것 없이 협상만으로 편을 바꿨다 하니 검증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뭐....”

로드가 기가 막혀 입을 딱 벌렸다.

“너는 너무 사람을 의심하지 않으니까, 대신이랄 건...”

“이, 이 멍청한 자식아, 그렇게 사람을 의심만 하고 다니니까 네가 친구가 없지!!”

로드가 다시 한 번 뒷목을 잡았다.

“너 사실은 날 암살하러 온 거지. 아니면 이렇게 내 속을 태울 리 없어.”

“아니 하지만 그대의...”

“그만해.”

로드가 카르티스의 입가에 손가락을 걸어 옆으로 죽 늘렸다.

“내가 약해서 손가락으로 눌러도 죽는 거 나도 알아. 아니까 적당히 해두라고.”

“그게 아이라....”

“변명은 됐다.”

로드가 재차 말하자 카르티스는 억울하단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럼 루인이랑 뮤는 사이런딜에 안전하게 있는 거지? 린도.”

프람이 안도했다.

“아니 그들도 여기로 데려왔다.”

카르티스가 말했다.

“뭐?!”

“그들이 같이 오겠다고 했다. 그래서 여기 가까이까지 데려왔는데...”

“그런데, 지금은 어디 있는데?”

“여기가 보이니까, 내가 마음이 조급해져서.. 속도를 올리자니 그들한텐 위험할 정도라 두고 왔다.”

로드가 다시 한 번 카르티스의 멱살을 잡았다.

“마기가 강한 황야에다 전투력 없는 사람들을 떨궈놨냐!!”

“전투력 없지 않...”

‘프람, 요한, 나랑 같이 찾으러 가자.“

“나도 갈래!”

샬롯이 손들고 쪼르르 달려왔다.

“미하일은 말고. 린이 봤을 때 놀라지 않을 만큼 혈색이나 만들어 두시지.”

샬롯의 말에 나서려던 미하일이 얼굴을 감쌌다.

“다녀오세요. 그 동안 저흰 이자를 좀 때리고 있겠습니다.”

라플라스가 수상할 정도로 밝게 웃으며 말하더니 카르티스 바로 옆으로 날아가 공중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저 로드께 독보적으로 미움을 사신 기분이 어떻습니까?”

“...응?”

“설마 저 분이 그래도 버리지는 않고 구해주기로 한 걸 가지고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그야 로드께선 아발론을 침공하고 사람들을 압제한 저 같은 것도 살리고 제 죄 이상의 것은 치죄하지 않으시는 호.. 자비로운 분이십니다만 그러니 더욱 그 정도 대우는 그저 저 분 보기에 당신이 사람이긴 하다는 뜻밖에 안 됩니다. 그야, 한 짓을 생각하면 사람 취급을 받는 것도 감지덕지할 일이기는 한데요.”

카르티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라플라스는 웃으며 황제의 귀에 계속 말을 속삭였다.

“그래요, 저 분마저도 구할 가치가 있는지, 구하면 고쳐 쓸 수는 있는지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죄악을 저지른 주제에 너무 뻔뻔한 것 아닌가요? 지금껏 같은 회귀자라는 사실만 가지고 그 분께 특별한 의미가 있는 양 뻐겨 왔겠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들도 회귀의 기억을 공유할 거에요. 적이지만 로드의 유일한 이해자 같은 거, 절대로 될 수 없답니다.”

“저... 라플라스?”

카르티스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동공지진하며 로드가 슬며시 손을 들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 ‘지향성 높은 공격’ 이요.”

라플라스가 생긋 웃었다. 로드는 그 미소와, 살려달라는 카르티스의 표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발론에서 악마 취급 받던 게, 단지 종족 차별을 해서만이 아니었구나.’

“자, 저쪽은 신경 쓰지 마시고.”

조슈아가 그쪽으로 손을 저었다. 공기가 멈춘 듯 카르티스 주변의 소리가 전혀 안 들리게 되었다.

“저보다 심한 짓은 못 하게 제가 볼 테니까 가서 루인이나 데려오세요.”

“저보다 심한 짓 어떤 거?”

“.....죽이지만 않으면 되지요?”

“그것 말고도.. 아니다, 내가 빨리 갔다 올게.”



로드는 자기 기사들과 함께 서둘러 서남쪽 방향으로 달렸다.

조금은 말리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러고 가면 이것마저 카르티스를 공격하는 데 쓰이는 건 아닐까 우려가 되기는 했다. 그래도 정말 쥐어 패고 있는 것도 아니고, 카르티스라면 신랄한 말 몇 마디 들었다고 크게 상처입을 말랑한 성정도 아니었다.

로드는 카르티스가 괘씸하지만 불쌍했고 불쌍하지만 괘씸했다. 그가 아발론의 상태를 알면서 방치한 걸 알았을 때는 정말 머리털을 죄 뽑아버리고 싶을 만큼 화가 났다.

그렇지만 그래서 카르티스를 내다 버리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누구도 뒤에 남겨두지 않겠다는 그의 결심은 아직 유효했다.

‘아이고, 어쩌겠어. 내가 말랑한 호구다, 그래. 호구가 호구답게 사람 좀 주워가겠다는데 왜 뭐.’

속으로 투덜거리며 길을 재촉하다보니 저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 로드!”

린이 팔짝팔짝 뛰며 손을 흔들었다. 샬롯이 쌩하니 달려나갔다.

“린! 괜찮아?”

“나야 괜찮지 뭐. 악마라도 나타나면 어쩌나 하긴 했는데 여기 오는 동안 아무것도 없더라. 황제가 다 쓸고 갔나.”

“황제쯤 되면 악마들이 무서워서 도망간다 해도 이상하지 않지요.”

루인이 웃으며 로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루인.”

로드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저희를 걱정하셨나요?”

“당연하지, 카르티스 그 바보 같은 놈이 자이라의 충성심을 시험한다며 뉴 사이런딜에 숙청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연락을 하는 바람에....”

로드가 투덜투덜 불평하는 걸 들으며, 루인은 자기도 그 충성 검증에 찬성했단 소린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스터.”

“뮤.”

로드가 미소지었다.

“카르티스 클라우디스와 재회한 여파로 마스터의 인과율이 큰 폭으로 증가했어.”

“...그래?”

“덕분에 뮤의 기능이 많이 회복되었어. 이제, 세계를 재구성할 수 있어.”

“어....”

로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때가 된 거구나.”

“응.”

“이전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야. 카르티스도 나도, 같은 세계에 떨어졌지.”

“맞아.”

“그러니, 이번엔 조금 더 높은 성공률을 기대할 수 있겠지.”

로드가 후련하게 웃으며 뮤의 손을 잡았다.

“가자. 모두들 기다리고 있을 거야.”



임시 기지로 돌아오자 상쾌한 표정의 기사들과 풀죽은 얼굴로 무릎을 안고 앉아있는 카르티스가 맞아주었다.

‘저 정도면 그래도 괜찮아 보이네. 저렇게 딴딴하니 내가 말랑해 보이지.’

속으로 혀를 끌끌 차고 로드가 라플라스에게 손짓했다.

“준비해. 이제 세상을 돌릴 거니까.”

“지금요? 네, 그럼 지금부터 기억을 전이하겠습니다.”

라플라스가 카르티스, 프라우, 바네사를 제외한 이곳에 모인 전원에게 기억 전이 마법을 걸었다. 로드를 타고 뮤에게 흘러든 이곳의 기억들이 데이터로 화하여 저장되었다.

“아쉽다.”

프라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더 이상 로드를 기억하는 유일한 기사가 될 수는 없겠네.”

“무슨 소리야, 너는 여전히 특별해.”

“엥?”

“다른 사람들은 내가 찾아가서 기억을 돌려줘야 하잖아. 하지만 너는 나를 찾아올 텐데, 그게 같겠어?”

“와, 로드.”

프라우가 로드의 등을 팍 쳤다.

“저번 만남이 그렇게 좋았어?”

로크가 콜록거리면서도 웃었다.

“응, 저번도 이번도.”

“못 말리겠다니까, 정말.”

프라우도 웃었다.

“하이고 할 수 없네, 또 열심히 만나러 가야겠네.”

“기다릴게.”

“준비됐어.”

뮤가 말했다. 로드는 마른침을 삼키고 카르티스 앞으로 가 섰다. 그가 검을 뽑았다.

로드가 뒤를 돌아 기사들을 마주했다.

“여기까지 함께해줘서 고마워. 꼭, 다시 만나러 갈게.”

“다음에 봐요.”

루실리카가 손을 흔들었다. 곧 다른 기사들도 각자 작별 인사를 했다.

“다음에 봅시다, 로드.”

“다시 만나요.”

“다음 삶에서도 저는 로드의 기사가 되겠습니다.”

“꼭 다시 태어날 테니까, 찾아내요!”

솔피도 손을 흔들었다.

“만나서 기뻤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바네사가 작별 인사를 했다.

“로드!”

프람이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로드는 자기도 울어버리지 않도록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금방 다시 만날 거야. 고마워. ...모두 사랑해.”

“저...”

카르티스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나도 한 마디 해도 되나?”

“뭔데?”

카르티스가 로드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눈을 돌렸다.

“.....미안했다. 다 없어질 일이라고만 생각해서 불필요한 고통을 안겼다. 내가 능력과 생각이 부족하여 벌어진 일이다.”

“...응?”

로드가 놀랐다. 보고 있던 사람들도 전부 놀랐다.

“다음 삶에서, 부족하더라도 가능한 한 제대로 배상을 하도록 하겠다.”

“야 너 이런 말을 지금.”

카르티스의 검이 내리꽂혔다.

하얀 빛이 터져나가며,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 . . . . . . . . . . . . . . . . . . .



“로드, 조심해!”

넘어지는 로드의 몸을 프람이 받쳐 안았다. 로드가 눈을 깜빡였다.

공기에서 모래 먼지 대신 풀내음이 났다. 젖은 흙냄새도.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던 자연의 냄새였다.

“...프람.”

로드가 고개를 들어 프람을 보았다.

밝고 생기있는 얼굴, 긴 머리카락. 프람이 그를 걱정 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돌아왔... 돌아왔어. 이번엔 제대로.”

“돌아오다니, 내내 우리랑 같이 걷고 계셨잖아요. 어딜 갔다 오기라도 하셨어요?”

샬롯이 물었다.

“샬롯...”

로드가 샬롯을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샬롯보다 옆의 요한과 미하일이 더 놀랐다.

“로, 로드? 가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 로드께서 기사를 끌어안으면 안 되는 건 아닙니다만 좋습니다만 그래도 먼저 마음의 준비를.”

“요한. 미하일.”

“예, 로드.”

오늘 식사 메뉴를 되짚으며 뭐가 문제였나 생각하던 미하일도 로드가 부르자 그를 주목했다.

“내가...”

목이 메어와 마른침을 삼키고 로드가 그의 기사들을 마주했다.

“그래. 아주 멀리 다녀왔어.”

“네?”

“내가, 너희들에게 돌려줄 것이 있는데, 받아줄래?”



------------------------------------------------------

-------------------------------------------------------


예, 끝났습니다. 오래 걸려 여기까지 왔네요. 


지금은 딱히 후기로 쓸 만큼 생각나는 게 없으니까, 이야기 중 의문사항이나 궁금한 점이나 풀리지 않은 설정 뒷얘기 같은 거 질문하고 싶으신 분들은 덧글이나  https://peing.net/ko/idonwanause 에 남겨주시면 답해드리겠습니다.





로드가 없었던 세계 63 - 탑에 갇힌 공주님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드디어.......

땅을 긁는 것 같은 목소리가 울리고, 황제가 로드의 앞에 내려앉았다.

“정말인가, 그대가 나의....”

‘어?’

로드가 멈칫했다.

싸우기 전에 대화를 나눠보려고 의도한 건 맞았다. 그런데 황제가 너무... 가까웠다.

“대적자.”

로드가 반응하기 전에 카르티스가 로드의 양 어깨를 잡았다.

“실물이군. 현실이야.”

“뭐....”

로드는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카르티스가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기다렸다, 대적자. 정말 오래 기다렸어.”

카르티스하고 별로 어울리진 않는 감격에 찬 목소리가 로드의 머리 위에서 울렸다.

“왜 이제 온 거냐, 아니 이제라도 왔으니...”

“카르티스 클라우디스.”

로드가 고개를 들어 황제를 보았다.

“너, 나 알아?”

“어찌 그대를 모르겠나. 기나긴 내 굴레 속에서도..”

“그러니까, 알면서 지금...”

로드가 팔을 들어 카르티스의 머리카락을 콱 움켜쥐었다.

“대-.”

“야 이 새끼야!!”

로드가 거세게 몸부림치며 카르티스의 몸을 밀어냈다. 로드 힘으로 민다고 그가 밀릴 리는 없지만 카르티스는 순순히 로드를 놔주었다.

“네가 이랬다고? 응?!”

로드가 주먹을 휘둘렀다. 카르티스는 그 주먹을 가볍게 마주잡았다.

“그대의 힘으로 날 때리면 이 손이 다친다.”

“누가 내 걱정 하래?”

로드가 격노했다.

“사람들을 죽이고! 죽게 내버려두고! 세상을 이따위로 망쳐놨으면서 어디서 내 걱정을 해!”

“아니 그건 오해...”

“꿇어, 이 새끼야! 팔이 안 닿잖아!”

카르티스가 조금 고민하다 순순히 로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로드가 두 주먹 불끈 쥐고 카르티스의 머리를 내리쳤다.

“기다렸냐! 날 기다렸어! 이 꼴을 만들어놓고 날 기다리면, 내가 보고 화 낼 거란 생각은 안 들디? 네가 양심이 있으면, 없겠지만, 생각이라도 있으면, 그래 없겠지만!!”

“아니 대적자..”

“뚫린 입이라고 지금 말이 나오냐?”

“하지만 그러다 손가락 부러지면...”

“내 손가락이 걱정되면 이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데미지가 눈곱만큼도 안 들어가는 건 로드도 조금 신경 쓰였기 때문에 그가 주먹질 대신 카르티스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반응 없어?’

프람도 조슈아도 라플라스도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면 아프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카르티스는 전혀 표정 변화가 없었다.

반신 소리 듣는 회귀자쯤 되면 통증에 내성이 있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게 판단한 로드는 그냥 잡아당기는 대신 아예 뽑아버리기 위해 카르티스의 무릎에 발을 디디고 체중을 실어 잡아당겼다. 기사들의 바람을 이렇게 이뤄주게 될 줄은 그도 몰랐지만 지금은 사소한 거라도 이놈에게 흠집을 내야 분이 풀릴 것 같았다.

“대적자?”

카르티스가 의아한 얼굴로 그의 머리카락을 잡고 낑낑대는 로드를 불렀다.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러게.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지친 로드가 카르티스의 머리를 놓고 숨을 몰아쉬었다.

얄밉게도 손가락엔 머리카락 한 올 걸려있지 않았다.

“로드...”

샬롯이 경악했다.

“아무리 황제라도 그렇지, 머리도 못 쥐어뜯을 만큼 약했던 거야?”

“그런 건 아니다.”

그 대답은 카르티스 본인이 했다.

“너희 왕이 허약한 건 맞지만.”

로드가 카르티스의 입을 찰싹 때렸다. 카르티스는 개의치 않고 말을 계속했다.

“머리카락은 쉽게 빠지는 데 비해 오용되기 쉬우니까, 고정하는 마법을 걸어뒀을 뿐이다.”

“그래, 남의 유전자로는 온갖 짓을 다 한 주제에 자기 유전 정보는 보호했어?”

로드가 경멸 어린 눈으로 카르티스를 노려보았다.

“너 진짜 싫다.”

카르티스가 처량한 얼굴로 로드를 올려다보았다.

“너 주제에 상처받은 얼굴 하지 마! 동정심 착취하지 말라고!”

“하지만 대적자...”

“애초에 너 내가 만만하니까 이딴 짓 한 거 아냐? 이 꼴을 보고도 내가 너 못 버릴 거 아니까 당당히 내 앞에 나타난 거잖아!”

카르티스가 침묵했다. 로드가 다시 주먹을 쥐었다.

“그만둬라.”

황제가 다급하게 로드의 손을 감싸 잡았다.

“더 하면 진짜로 다친다. 지금도 손이 화끈거리지 않나.”

로드가 그를 뿌리쳤다.

“넌 그냥 말을 하지 마라. 속만 터지니까.”

카르티스에게서 등을 돌리고 로드가 한참을 씩씩대며 화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대적자?”

“너 새끼를 고쳐 쓰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인지 고찰하는 중이니까 닥쳐, 좀.”

카르티스가 입을 다물었다.

“이야.”

프라우가 휘파람을 불었다.

“우리 로드한테 저런 소릴 듣다니 댁 진짜 인간 말종이구나.”

카르티스는 대꾸하지 못했다.

“...무슨 말이 오가는 건지 모르겠어.”

프람이 낭패한 얼굴을 했다.

“황제가 아주 나쁜 놈이라는 거 말곤 하나도 이해가 안 가.”

“괜찮아, 그게 핵심이니까 그것만 알면 돼.”

“그게, 새삼 알아야 할 새로운 사실인가요?”

솔피가 물었다.

“바닥 밑에 지하실이 있는지는 파봐야 알잖아.”

“그러네요.”

바네사의 목소리는 얼음보다 차가웠다.

“저자는 아발론의 군주에게 한 번 구해지고도, 세상을 이꼴로 만들었단 뜻이잖아요.”

“아니, 오해다! 그건 아니야!”

그제야 카르티스가 다급해졌다.

“내가 이렇게 만든 게 아니다, 내가 여기에 나타났을 때 이미 세상은 이 상태였어! 내가 여기 떨어진 건 십일 년 3개월하고 12일 전이다. 이 제국이 완성된 뒤여서...”

“그래서?”

로드가 되물었다.

“그래서 넌 여기 와서 무슨 일을 했는데?”

“...그대를 기다렸다.”

“하.”

로드가 다시 한 번 카르티스의 머리에 주먹을 내리쳤다.

“네가 무슨 탑에 갇힌 공주님이냐, 두 손 처매고 나만 기다리고 자빠졌게? 사람들이 이러고 살고 있는데 뭔가 해야겠단 생각이 정말 안 들었어? 응?”

“나, 나도 뭔가 하긴 했다.”

“뭘?”

“현 제도의 큰 틀을 바꾸지 않는 선에서, 사람들을 구호하고 아발론에서 일어나는 인간 차별도 완화시키려고 조슈아를 총독으로 보냈고....”

“저한텐 그런 말씀 안 하셨잖아요.”

조슈아가 말했다.

“그야 그런 정책도 하긴 했지만, 전 그저 라플라스를 압박하고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고요.”

“그 미적지근한 변화가 인간의 처우개선을 위해서였다고요? 정말로?”

루실리카도 항의했다.

“당신 황제잖아! 그런데 고작 그게 전부라고?”

“현재의 틀을 왜 바꾸지 않았는데?”

로드가 물었다.

“너는 황제다. 어느 날 갑자기 평등 정책을 시행한다 해서, 사람들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더 나은 삶을 개척하도록 지원한다 해서 수상하게 여기거나 반항하는 사람은 없었을 거야. 그런데 왜?”

“그... 그대와 연결한 게 잘못된 줄 알고 한동안은 넋이 나가 있었고...”

“그래, 그리고?”

“우리 둘의 회귀 시점에 시차가 있으니, 여기서 기다려보자고 결심하고 난 뒤에도, 나의 것이 아닌 세상이라 생각하니 함부로 건드리기 조심스러웠다. 아무튼 30년은 여기서 버텨야 할지도 모르는데, 지금 작동하고 있는 체제를 급격히 바꿨다 문제를 만드는 것 보다는 그대가 올 때까지를 시한으로 천천히 바꿔나가는 편이.”

“내가 뭐 여기 청소 검사하러 오냐?”

“그리고...”

“그리고?”

“그... 이렇게까지 망한 세계는 나도 처음 겪는 거니까, 기왕 이런 데 떨어진 거 이런 상황의 데이터를 모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로드가 뒷목을 잡았다.

“으악, 로드! 쓰러지면 안 돼!”

샬롯이 로드를 받아 안으며 서둘러 치유 마법을 걸었다. 바네사도 검을 뽑아든 채 다가왔다가 샬롯이 하는 걸 보고 도로 칼집에 꽂았다.

“대적자? 죽는 거냐?”

카르티스가 허둥지둥 검을 소환했다.

“죽을 것 같으면 차라리 지금.”

“안 죽는다 미친놈아!”

로드가 벌떡 일어났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진짜.... 일이 완전히 틀어진 줄 알고... 너는 영영 잃은 줄 알고..... 얼마나 지금껏 그랬는데 넌 그냥 그대로 변화 없이.”

“그, 그럴 리가 없잖나!”

카르티스가 놀라 무릎걸음으로 로드에게 다가왔다.

“나는 분명 그대를 만나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다. 그저... 그... 미안하다.”

그가 사과했다.

“내가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널 헤아리지 못했다. 변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대 기준에선 너무 미약한 몸부림이겠지.”

그가 로드의 옷자락을 쥐고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날 버리지는 말아다오.”

“....하.”

로드가 자기 머리를 짚었다가, 황제의 머리를 잡아 눌렀다.

“대...”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지 마. 마음 약해지잖아.”

“그거, 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맞나?”

“따지지 말고. 말해두겠는데 나 너 용서 안 했어. 그리고 네가 지금 용서를 빌어야 할 대상이 나 같냐?”

로드가 옆으로 비켜났다.

황제는 그가 기만하고 방치했던 이 세상의 사람들을 마주보았다.

“그러니까 당신...”

라플라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래 예지에 집착했던 게, 저 분이 언제 올지 알고 싶어서였습니까?”

“그래.”

황제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제가 보고를 누락했습니다. 당신이, 이번 멸망도 막아버리지는 않을까 두려워서.”

바네사가 말했다.

“당신도 이 세상이 고통스러웠나요? 괴롭고 괴로운데 혼자서는 어떻게도 할 수 없어서, 간절히 구원자를 기다렸나요? 언제고, 세상이 끝나고 목숨이 끊어질 날만을, 그래도 되는 때를 고대했나요?”

카르티스의 표정이 충분한 답이 되었다. 바네사가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사람이 이래서 악의를 품는군요. 적의 고통이란, 이다지도 달콤해서.”

“바네사.”

로드가 손을 뻗었다. 바네사가 그를 밀어내었다.

“당신의 그 고통이 몇 개월 더 연장되는 데 제가 기여했다는 게 너무나 기쁩니다. 이런 것, 정당한 벌도 뭣도 아닌데도....”

바네사가 자기 얼굴을 가렸다.

“죄송합니다. 저도 다음 세상에서 여러분의 힘이 되어드리고 싶지만, 역시 이런 모습을 제가 사랑하던 사람들에게 보일 순 없습니다.”

“괜찮아. 죄송할 것 없어.”

로드가 다시 바네사를 끌어당겨 토닥였다.

“멸망은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런 걸로 죄책감 갖지 마. 사람이면 누구나 그 정도 복수심과 악의는 품어. 전혀 부끄러울 것도 미안할 것도 없어.”

바네사 눈을 마주보며 로드가 덧붙였다.

“그대를 사랑하는 사람들 역시, 그대가 겪은 고통에 마음 아프고 그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 데 자책할지언정 그대가 황제에게 악의를 품었다고 실망하거나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내가 장담하지.”

그예 카르티스가 뭐라 말하려 하자 로드가 그에게 눈을 부라렸다.

“아무 말도 하지 마. 지금은 사과도 하지 마. 네가 말 꺼내봤자 지금은 진심도 아니고 뭐가 미안한지도 모르는데 내가 시켜서 한 말 같잖아.”

황제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방금 들어서 알겠지만 나는 내 손닿는 모두에게 이 기억을 돌려줄 생각이야. 그러니, 이 모든 게 없어진 이후라도 너는 아무 은원 없는 깨끗한 새출발을 할 수는 없을 거다.”

“그런 게, 가능한가?”

“뮤는 가능하다고했어.”

황제의 표정을 보고 로드가 덧붙였다.

“편법이고, 발상은 내가 한 거야. 람다를 원망할 생각이라면 그만둬.”

“아니,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잘 했다. 그 또한 내가 받아 마땅한 벌일 테지.”

“그 뿐은 아니지요.”

라플라스가 말했다.

“그걸로 끝이라는 듯 말하지 마십시오. 그 외에도 당신이 치러야 할 속죄는 아주, 아주 많으니까.”

그의 목소리가 분노로 타올랐다.

“이유를 설명해주는 건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인간에 대한 차별 정책을 폐지하라 했어도 엘펜하임의 생산력을 더 나누어주라 했어도 반문 없이 따랐을 겁니다. 그저, 그저 엘프들에 대한 위협만 철회해주었어도, 그것만 되었어도 이보다는 나았을 텐데, 당신에게도, 그 편이 나은 상황이 되었을 텐데, 왜.....”

라플라스가 획 로드에게 몸을 돌렸다.

“저도 저 자를 때려도 될까요? 로드께서 때리시는 것보단 효과적으로 때릴 자신이 있는데요. 제가 저지른 건 생각 않고 남을 비난한다고 혼내셔도 할 수 없지만 이건...”

“응, 심정은 이해해.”

로드 자신이 분을 못 이겨 주먹질 해놓고 남을 말릴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그저, 그대의 공격은 화력이 너무 세고 여기서 마음껏 힘을 쓰면... 곤란하니까 지향성 높은 걸로 조금만 해줘.”



로드가 없었던 세계 62 - 마지막으로 황제가 오다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바네사는 라이레이의 합류를 기다리는 동안 로드 일행이 묵을 막사를 준비하겠다며 자기 수행원들을 불러 이것저것 지시했다. 로드의 기사들도 말을 쉬게 하고 짐을 정리하는 등 휴식을 앞두고 각자 할 일을 했다.

쉴 겸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로드에게 프라우가 다가왔다.

“로드, 여기 바네사 안 데려가겠다는 거 진짜야?”

“그래. 늘 그렇게 말해왔잖아. 왜 새삼 묻는데?”

“내가 여기 와서 바로 로드한테 말했던 거 기억하지?”

잠시 기억을 되새기던 로드는 프라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왕녀님 없이 재앙과 싸운다고 생각하면 아득하지 않아? 이 바네사의 기억을 가져가면, 가족을 잃지 않아도 왕녀님은 최강의 힐러가 될 수 있을 거야.”

“가족을 잃지 않고도....”

로드가 곰곰이 생각했다.

“그래, 그럴지도 몰라. 이 세계의 희생을 발판삼아, 다음 생에서는 희생 없이 강해진다... 유혹적인 제안이야.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건 황제의 방식이잖아.”

로드가 고개를 저었다.

“비효율적인 건 알아. 정말로 가족들이 무사하면 바네사 왕녀의 능력이 개화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강제로 강해지라고 하고 싶지는 않아. 그리고 다음 세상에서 참전할지 말지는 그 때의 바네사가 결정하는 거야. 본인이 싫다는데 억지로 강화해서 참전시킨다면 그건 정말 황제와 다를 게 하나도 없어.”

“그래서 바네사 없이 재앙과 싸우시겠다?”

“......생각하면 정말 아득한 일이긴 한데.”

로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내가 제국을 만들게 되는 것보다는 바네사 없이 재앙과 싸우는 편이 낫지 않겠어? 그리고 역시, 그 때의 바네사도 세상의 위기에 손 놓고 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 그야 이 황후보다는 능력치가 약하겠지만... 그건 내가 열심히 해서 메꿔야지.”

“어, 그래. 로드답다. 자기를 갈아 넣는 면이 특히.”

“갈아 넣는 게 아니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지.”

“야, 얼마 전까지 아발론 스타트업에서 전 직원 주 120시간 갈갈이 했던 왕이 그러면 설득력 있음?”

“.......내가 미안하다.”

“로드는 맨날 그 말 하는데 한 말 또 하는 사람 매력 없어.”

“그럼 미안하... 아이고 깜짝이야.”

어느새 로드 옆에 갈루스 에이전트가 한 명 서 있었다.

“놀래켜드려 죄송합니다. 혹시 일행 중에 낙오되어 따라오는 중인 분이 있으십니까?”

그 에이전트가 정중히 로드에게 질문했다.

“아, 아니 그런 사람 없는데.”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로드가 대답했다.

“난 절대 누굴 뒤에 낙오시키지 않아.”

“누가 우릴 따라오고 있었다는 소리야?”

프라우가 훌쩍 블레이드에 뛰어올랐다.

“그것 참 수상하네. 잠깐 보고 올게, 로드!”

어 하는 소리도 내기 전에 프라우가 날아갔다. 로드는 당황한 듯 보이는 에이전트의 어깨를 두드렸다.

“공중에서 정찰하는 게 그대들이 가 보는 것보다 더 안전할 테니까, 저건 내 기사에게 맡기고 바네사에게 보고하러 가는 게 낫겠어.”

내내 얼굴 없는 적으로만 싸우던 상대와 같은 편에서 대화하는 건 로드에게도 좀 어색했다. 그래도 제국의 도구로 살다 황후에게 목숨을 연장 받고 섬기게 되었는데 갑자기 또 무슨 왕이 등장해 동맹이 되어 버린 저들보다 어색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로드가 먼저 말을 걸어주는 게 나았다.

“알겠습니다.”

그가 슥 사라졌다.

‘카르티스가 제국을 만들지 않으면, 저 사람들도 보다 평범하고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겠지.’

로드는 문 쪽으로 걸었다. 며칠간 길을 따라 북상하고 야영을 하며 주위를 살폈는데 누가 쫓아오는 기색은 없었으니 지금 여기 접근중이라는 사람은 로드 일행을 따라온 건 아닐 것이다. 그렇긴 해도 이런 황야를 누가 우연히 헤매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라이레이 쪽에 무슨 일이 있어서 전령을 보냈을지도.’

그런데 로드가 정문에 도착하기도 전에 큰 소란이 벌어졌다.

“누가 물 좀! 급해 급해!”

“...프라우?”

프라우가 드물게 당황한 태도로, 블레이드에 싣고 온 사람을 바닥에 뉘였다.

갈루스 에이전트 하나가 물그릇을 들고 나타났고 기사들도 모여들었다.

“....자이라?!”

로드가 깜짝 놀라 자이라 옆에 가 앉았다.

“자이라, 괜찮아? 여긴 갑자기 무슨 일이야?”

탈진한 듯 숨을 몰아쉬던 자이라가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나서 정신을 차렸다.

“아발론의 군주?”

“그래, 나야.”

로드가 자이라의 손을 꼭 잡았다.

“여긴...”

“니스의 캠핑장이야. 바네사도 만났고 대화도 잘 했어. 협력할 거야.”

“그런가.”

자이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늦진 않았군.”

“늦다니, 우릴 쫓아왔나?”

놀란 건 로드만이 아니었다.

“쫓아왔다고요? 아니 우리가 거길 떠난 지가... 아무리 말이 마차보다 한참 빨라도 그렇지 얼마나 강행군을 한 겁니까.”

요한이 놀라 물을 더 내밀었다. 자이라가 물그릇을 밀어냈다.

“황제가 눈치챘다.”

그 말에 로드 뿐 아니라 주변의 모두가 얼어붙었다.

“엘펜하임에서 연락이 왔어. 황제가, 거기서 당신이 어디로 갔는지 물었어.”

“엘... 그러니까 뉴 사이런딜에서?!”

자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레론의 사람들도 지켜야 했고, 황제라면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아서 이쪽으로 간다고 말은 했어. 그러고 바로 나만 말 타고 이리로 온 거야.”

“그, 그럼 거기 사람들은? 루인은... 뮤는?!”

로드가 소리쳤다.

“그럴 리가 없어, 뉴 사이런딜에 변고가 생겼으면 뮤가 내게 연락을....”

그가 황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막사 같은 임시 건물 몇 채만 서 있는 이 주위를 황야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있었다.

“.....설마, 너무 멀어서 연락이 닿지 않은 거?”

뉴 사이런딜에서 니스까지 거리는 뉴 사이런딜에서 살레론까지 거리의 두 배가 조금 안 된다. 살레론까지 닿게 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걸 생각하면 뮤의 연락이 닿지 않았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 아, 안 돼, 루인, 루인....”

로드의 손이 덜덜 떨렸다.

뮤는 유니버스의 단말이니 카르티스라면 해치거나 위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루인에게는 아무런 보호장치가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빨리, 어째서 바로 아발론으로...”

“정신 차려!”

자이라가 로드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잃은 사람 생각은 나중에 해! 황제는 분명 이리로 쫓아올 거야, 싸울 준비를 하라고!”

“잃은....”

로드가 눈을 꽉 감았다. 떨리는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루인이 우리는 같은 편이 아니라고 했을 때 보다 지금이 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래도 지금 울 수는 없었다. 그는 왕이고 기사들은 그를 의지했다.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키고 주먹을 꽉 쥔 채 로드가 일어섰다.

“싸울 준비를 하자.”

로드가 말했다.

“황제가 곧 온다. 늦어도 하루 이내. 기사들 모두 전투 준비 후 집결하라. 그리고..”

“황제가 온다고요?”

어느새 바네사가 그의 앞에 와 있었다.

“그래. 우리 쪽에서 꼬리가 밟힌 모양이야. 미안하다.”

“전혀요.”

바네사가 의연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빨리 싸우고 끝낼 수 있으면 저는 좋습니다. 준비하죠.”

바네사가 곁에 선 에이전트에게 뭐라 지시했다. 그가 슥 사라지자 곧 장벽이 거무스름하게 일렁이며 빛났다.

“황제가 멀리서 일격에 쓸어버리지는 못하도록, 장벽을 강화했습니다.”

“그렇군요, 황제라면 반역자 상대로 대화를 할 필요성을 못 느낄 테니까요.”

조슈아가 부르르 떨었다.

“일격은 장벽으로 막고, 곧장 기사들이 달려나가 반격을 해야겠군. 그 전에 말을 들어볼 생각이 있는지 황제에게 말을 걸고 싶은데, 시도해 볼 수 있을까?”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모르겠군요. 그자가 처음부터 공격적으로 나온다면.”

“그럼 싸우는 걸 전제로 해서, 먼저 원거리 공격을 퍼붓고 근접 주력인 기사들이 돌격해서...”

“제 생각에는 시작부터 샬롯 경이 보호막을 쓰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황제 공격 범위가 여기서 저기 정도는 될 테니까요.”

“그건 내가 싸워본 황제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군. 그럼 프람을 이 쪽에 세우고...”

로드와 바네사에 조슈아까지 끼어 전술을 논의했다. 그러는 동안 샬롯이 자이라를 치료했다.

“싸울 수 있겠어?”

“어디 다친 것도 아니고, 지친 거야 좀 쉬면 가뿐하지.”

프람과 요한이 미하일을 끌고 나왔다.

“상태 안 좋은 때 미안하지만 상황이 급박해서.”

“괜찮아. 멀미는 끝났고 상태가 만전이 아니라고 못 싸웠다간 레인저 쫓겨났다.”

“세상의 끝이 이렇게 성큼 다가오다니....”

“불안해?”

“그럴리가요. 로드께서 가시는 길을 가로막는 건 누구라도 무찌르고 길을 여는 게 제 사명입니다. 그게 황제라 한들 달라질 게 없습니다.”


하늘이 어두워졌다.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둠이 퍼져 나가는 저 멀리, 밝은 빛 한 점이 보였다. 그 방향이 서남쪽인 걸 확인하고 로드는 서둘러 기사들에게 대열을 갖추게 했다.

누가 최종보스 아니랠까봐 등장 이펙트 오진다고 불평하는 프라우를 제자리로 밀어 보내고 로드는 바네사와 함께 앞으로 나섰다.

황제가 멀리서 일격을 날린다면 거기 쯤일 거라 예측했던 거리를 넘어서자 바네사는 조금 당황했다.

그러나 전술을 수정하거나 뭔가 다른 조치를 취할 시간도 없이 황제가 이들에게 가까워졌다.

황제가 가까워짐에 따라 위압감도 몰려와 기사들을 내리눌렀다. 움츠러드는 라플라스를 루실리카가 잡아주었다. 조슈아는 얼굴이 허예져서는 바네사를 보고 다시 등을 폈다. 바네사는 겉으로는 의연했지만 속까지 의연할지는 알 수 없었다.

진정하라기엔 그들이 겪어온 고통이 너무나 커서, 로드가 기사들 앞으로 나섰다.

“카르티스!!”

그가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와라! 너의 대적자가 여기 있다! 이 세계를, 너의 절망을 부수러 내가 왔다!!”



홍차와 칼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보행자의 로오히 팬픽입니다.
*엘리트 패스의 두 신속성 캐릭터를 보고 생각난 걸 써봤습니다.

Characters: 요한, 조슈아, 체자렛
Rating: PG
Warnings: 엘리트 패스 스포
Summary: 엘리트 제국의 두 신하들



엔타로니아 국왕도 항복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은발의 지휘관이 저렇게 순한 고양이처럼 웃는 건 단 한 사람 앞에서뿐이었다.

경하드립니다, 대제 폐하. 이로써 델 로스 연맹의 모든 나라들이 갈루스 제국 아래 무릎꿇었습니다.”

반신이신 대제 폐하께선 이런 낭보도 거의 귀찮다는 기색으로 듣고 계셨다.

폐하, 온전한 제국의 완성을 감축드립니다.”

참모님의 칭송에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저 특임대장이 가져온 문서를 매일의 업무를 처리할 때처럼 훑어볼 뿐이었다.

단지 첫 목표였을 뿐이다. 짐은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어.”

항복 문서 조인식과 델 로스 연맹 해체 선언식, 회의 개최일 등 여러 복잡하고 귀찮은 내용의 서류를 폐하는 한 번 슥 훑어보고 바로 서명했지만 조그마한 실수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까지 그랬듯이.

요한의 신은 실수를 하는 법도 없고 잘못된 판단을 하는 법도 없었다. 그는 완전무결했다.

 

 

갈루스 제국의 동부 대륙 통일을 축하하는 연회 자리는 각국 수장들을 모아놓고 대제 폐하 앞에 정식으로 머리를 조아리게 하는 자리이자, 그 모습을 전 대륙의 사람들에게 마도영상구로 보여주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래서 요한은 호화로운 기념식이나 근사한 만찬 같은 것에 잠시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언제는 그런 것에 한눈 판 적이 있었느냐마는, 이 날은 특히나 대제 폐하의 검으로서 흠잡을 데 없는 몸가짐을 보여야 했다. 제국의 태양이 녹슨 검을 차고 있는 꼴을 보여서야 안 될 일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외국의 왕족들, 대신들 중엔 앞날을 위해 제국의 인물들에게 줄을 대보려 하는 자들도 많았다. 조슈아에게도 몇 명이 달라붙어 말을 건넸다.

그런 자들도 요한에게는 감히 접근하지도 못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제국 망한 줄 알겠군.”

알드 룬의 태자 - 이제는 태자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멀쩡한 척 하던 얼굴을 완전히 구겨 놓은 특임대장이, 다음 목표물은 너라는 듯이 다가왔다.

표정 좀 펴지 그래요? 제국의 경사스런 날에까지 이빨 드러내고 있어봐야 본인만 힘 빠질 텐데.”

요한은 이 또래의 상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상 갈루스의 전군을 통솔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군인다운 면은 눈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고아였는데 역시 폐하의 은혜로 군인이 되고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호감에 가까운 동질감을 품었었다. 자신과 비슷한 충성심의 소유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처럼 매 순간 그분을 위해 단련하고 정진해도 모자랄 시간에 홍차나 마시고 낮잠이나 자는 놈이라는 걸 알게 되기 전까지는.

지금도 각지의 주요 인사들이 전부 참석한 자리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긴장감 없는 얼굴이었다.

경사스러운 만큼 중요한 자리니까 그에 어울리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거다.”

인상을 조금도 풀지 않은 채 대꾸했다.

각 나라 왕들이, 네놈 말 몇 마디에 넘어가 조약에 서명했다고 끝인 줄 아나? 제국에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이면 바로 딴맘 품겠지.”

각 나라들이 순순히 제국 아래로 들어오고 각자 왕실과 정부에 제국의 직속 통치기구를 설치하게 된 건 경제적 압박과 군사력의 차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런 격차를 각 나라에 조목조목 설명하고, 회유하고 협박하고 매수해 마침내 굴복시키는 일을 주로 나서서 한 사람이 바로 특임대장 조슈아 레비턴스였다. 군 지휘관보다는 외교관에 어울리는 업적이었다.

자기가 한 일을 사상누각쯤으로 깎아내리는 소릴 듣고서도 조슈아는 생긋 웃기만 했다.

딴맘을 품었다 한들, 그걸 이런 자리에서 함부로 드러낼 만큼 서툰 작자들이라면 그렇게 겁먹을 필요도 없지요. 아무 때나 으르렁거려야 간신히 유지될 제국이 아닙니다.”

“홍차에 젖은 네놈 혓바닥으로 지탱될 만큼 하찮은 제국도 아니지. 책상물림 주제에 군 지휘권이 필요하기는 한가?”

폐하께서 그렇게 판단하셨으니 제게 지휘권을 주셨겠지요?”

받아칠 말을 생각해내기 전에 요한은 체자렛이 두 사람에게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전략참모님.”

떠들썩한 자리일수록 나서는 법이 없는 체자렛의 등장에 두 사람 다 기세를 죽이고 고개를 숙였다.

오늘 같은 날 제국의 기둥들이 자기들끼리 신경전을 벌여야 할까요?”

죄송합니다.”

평소 태도를 보면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조슈아도 참모님은 두려워했다. 금방 꼬리를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자중하겠습니다.”

요한도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그가 섬기는 완전무결한 신은 대제 폐하이지만 그 신을 섬길 수 있도록 자신을 선택하고 여기까지 인도해준 분은 참모님이었다. 그 은혜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경사스러운 날이니 요한도 조금 즐겨보는 게 어떤가요. 경비는 이미 충분히 세워놨고 수상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아직 저녁도 안 먹었죠? 기사가 배를 곯아서야 쓰나요. 여기 음식들도 신경을 많이 썼으니 안심하고 먹어요. 소시지 요리가 훌륭하답니다. 맥주도 시원하고요.”

감사합니다.”

요한은 자신이 맥주와 소시지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참모님은 언제나 모르는 것이 없었다. 마치 폐하처럼.

언제나 교활한 말을 늘어놓는 조슈아도 폐하께는 감히 이러쿵저러쿵 하지 못했다. 폐하께 충언을 올리고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체자렛 님뿐이었다.

요한은 시킨 대로 얌전히 음식들이 차려진 테이블에 다가갔다.

동부 대륙 모든 나라에서 손님이 모였기 때문에 음식은 손님들이 자유롭게 가져다 먹고 따로 주문도 할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차가운 맥주와 소시지 접시를 들고 최대한 구석진 자리에 가 앉았다. 사람이 많은 것도 싫고, 이런 구석자리가 전체를 관찰하기 좋았다. 참모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긴 했지만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조슈아는 마음을 놓아버린 것 같았다. 요한과는 멀리 떨어진 다른 구석에 앉아서, 어느새 자기 심복 부하들과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저런 놈인데도 조슈아는 부하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아니, 만만해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

직속 부하란 것들이 곱게 빗은 머리를 동네 강아지 쓰다듬듯 쓰다듬어도, 홍차와 함께 가져온 과자를 허락도 없이 집어먹어도 화내기는 고사하고 바보처럼 웃기나 했다.

조슈아가 마음에 들지 않나요?”

가버린 줄만 알았던 참모님이 어느새 다시 곁에 다가와 계셨다.

조슈아의 지위가 그대보다 더 높아진 건, 제국을 위해 앞장서 싸우는 일과 후방에서 대군을 통솔하는 일의 차이일 뿐이에요.”

지위 때문에 시기하는 게 아닙니다.”

요한이 서둘러 해명했다.

저는 폐하께서 내려주신 지위라면 아무리 미천한 자리라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저 자가 과연 지위에 걸맞는 무력을 갖추기는 했는지 궁금할 뿐입니다.”

요한의 지위가 폐하의 뜻이라면 조슈아의 지위도 그런 거지요. 저래보여도 그는 당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폐하를 섬기며 능력을 입증해온 충신이랍니다.”

죄송합니다. 더는 의문 품지 않겠습니다.”

순순히 사죄하자 참모님의 태도가 누그러졌다.

좋아요.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이제 요한의 책무가 중요해질 날이 머지않았답니다.”

그렇습니까?”

폐하께서는 이미 동부 대륙 바깥의 나라들에 손 뻗칠 준비를 하고 계셔요. 그들 전부가 외교적인 압박에 무릎꿇을 리는 없으니... 꾸준히 벼려온 검을 휘두를 때가 된 거죠.”

알겠습니다.”

요한의 금빛 눈이 기대감으로 빛났다.

대제 폐하의 적을 쓸어버릴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로드가 없었던 세계 61 - 친애하는 타인에게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회귀를 하신다고요.”

한참 만에 바네사가 말했다.

“으, 응.”

“황제조차 죽지 않게 하실 거라면, 그가 아닌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그, 그렇지.”

말하고 로드는, 이제 황제 모가지를 그가 직접 비트는 한이 있어도 바네사의 가족들이 죽지 않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초에 그가 제국을 만들지 않게 할 거니까, 누구도 갈루스 제국의 팽창 정책으로 인해 죽거나 고통 받는 일은 없을 거야.”

“이런 비참한 결말도 다시는 없게 할 거고요.”

“물론이지.”

바네사가 고개를 들어 로드 뒤편에 모여 서 있는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은 모두 당신이 그러한 세상을 만들어 줄 거라 믿고 함께 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조슈아가 쭈뼛쭈뼛 목소리를 내었다.

“황제를 무찌르고 끝내는 게 아니라, 새로 만들어질 멀쩡한 세상에선 누구도 이런 식으로 고통 받을 필요 없도록.... 저, 제가 이런 말 하는 것 기만이라 여기셔도 할 수 없습니다만, 저도 제국이 없는 세상을, 인류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탄압하고 이용하는 일이 없는 세상을 바랍니다. 제가 제국 특임대장이 되지 않아서, 않아서....”

그가 마른침을 삼키고 로드와 나란히 바네사 앞에 무릎 꿇었다.

“죄송합니다. 왕녀님의 가족에게, 나라에, 제가 직간접적으로 죽이고 고문한 많은 사람들에게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와서 사죄해봐야 마음이 풀리실 리 없지만... 죄송합니다. 제 잘못으로 크게 괴로움을 끼쳐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드디어.”

바네사가 말했다.

“누군가 사과를 하는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당신은 어려서 제국군의 ‘특수 훈련’ 대상으로 선발되었고, 그 이후로 살아오며 명령받은 외의 생각이나 행동을 할 자유가 없었지요.”

바네사가 조슈아를 보지 않으며 말했다.

“명령을 거부하는 건 불가능했을 거에요. 설령 당신이 제국군에 들기 전에 죽었어도, 알드 룬을 침략한 갈루스군의 대장이 다른 얼굴로 바뀌었을 뿐이겠지요.”

조슈아는 뭐라 말할 수가 없어 계속 침묵했다.

“죽어서도 막을 수 없는 일로 당신에게 화를 내는 게 의미 없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저 당신을 볼 때 마다 처형당한 가족들의 모습이 눈앞을 떠나지 않아서, 살아남을 자격이 없다고 간주되어 동대륙에 버려두고 온 사람들을 잊을 수 없어서.”

“.....제가.”

“저와 함께 황제와 싸워주세요.”

바네사가 조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발론의 군주께서 황제를 끝장낼 방법을 갖고 있다 한들, 그 방법을 쓰기 위해선 우선 황제를 때려눕혀야 하겠지요. 그래서 저더러 함께 싸워달라 설득하기 위해 이리로 오신 걸 테고.”

바네사가 로드를 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목적이 그것만은 아니지만.”

“그러니 싸웁시다. 황제가 준 고통과 증오를, 온전히 되돌려주진 못하더라도 더 이상 받고 있진 않겠다 선언합시다. 그자 앞에서, 제국을 부정하세요. 그게 제가 요구하는 속죄입니다.”

“예. ...왕녀님.”

조슈아가 떨리는 손으로 바네사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자기 이마에 대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바네사라고 부르세요.”

바네사가 손을 놓고 일어났다.

“여기 온 다른 분들 역시. 저는 더 이상 황후도 왕녀도 아닙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네사 앞에 손이 불쑥 나타났다.

“로드의 기사, 프라우 레망이야. 잘 부탁해, 바네사 경.”

“바네사 경...”

입 안에서 그 말을 한 번 굴려보고 바네사가 프라우의 손을 잡았다.

“네. 저도 잘 부탁해요, 프라우 경.”

“어, 나도, 난 프람이야. 프람 베르그.”

“요한 테일드입니다. 역시 로드의 기사입니다.”

갑자기 다들 자기소개를 하는 분위기가 되자 샬롯이 당황했다.

“어, 으 저는 샬롯....... 살롯 레보스카야 그레이스입니다!”

그 말에 루실리카가 놀랐다. 로드도 놀랐다.

“샬롯... 이제 그 성을.”

“이, 이건 아빠와는 눈곱만큼도 상관없고! 어디까지나 고모님이 좋은 분이시다 보니까 그게 그....”

“샬롯!”

루실리카가 샬롯을 와락 끌어안았다.

“세상에 우리 조카는 어쩌면 이렇게 귀엽고 예쁘고 깜찍하고 사랑스러울까, 이런 최고로 멋진 딸을 두고... 드미트리놈 호적에서 파버리든지 해야지.”

“파버려요! 파버리고 저랑 고모님만 가족 해요.”

“그럴까요? 정말 그래도 돼요?”

솔피는 저런 거랑 자매 하라고 저주했냐는 눈으로 라플라스를 째려보았다. 라플라스는 그 시선을 오해했다.

“혹시 당신도 저런 거 하고 싶습니까?”

“누가! 말도 안 되는! 내가 미쳤냐, 댁이랑 저런 걸 하게?”

“예, 아니라니 참 다행이네요. 이런 거나마 우리 의견이 일치해서 기쁩니다.”

“그러고보니...”

바네사가 솔피에게 다가갔다.

“라플라스와... 같이 있는 건가요?”

솔피가 라플라스에게서 멀찍이 물러났다. 라플라스도 반대방향으로 멀어졌다.

“같이 있긴요! 그냥 어쩌다보니 의도치 않게 근접한 공간에 위치해 있던 것뿐이고.”

“보여도 죽이지 않게 된 것뿐입니다.”

라플라스도 말을 받았다.

“예. 바로 그 점이 놀랍다는 건데요.”

라플라스가 잠시 할 말을 찾았다.

“그건, 저 로드께서 죽이는 데 절대 반대 하셨기 때문에....”

“그건 저도 방금 들어서 압니다만, 그래서 라플라스공이 그 말을 듣고 솔피를 안 죽인다고요? 그땐 분명 황제 앞에서 자해까지 하다 팔다리가.”

“불유쾌한 과거 이야기는 그만둡시다.”

라플라스가 바네사의 말을 막았다.

“그저, 설득당한 겁니다. 이게 옳다고. 자신의 고통에 매몰되어 있지 말고 자기가 남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생각하라고.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을 해야 했는지, 앞으로라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고 옳은 판단을 내리라고.”

“앞으로...?”

“예. 이 세상은 곧 끝나지만 그 다음이 또 있을 테니까요.”

“예. 하지만 회귀하는 본인 외에는 이... 삶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까?”

“그게, 아까는 말할 기회가 없어서 설명 못 했는데.”

로드가 다가왔다. 무릎 꿇고 있다 다리 저린 게 도졌는지 프람이 그를 부축하고 있었다.

“내가 사람들의 기억을 맡아놨다가 다음 삶에서 재회해서 돌려줄 수 있어.”

“네? 그런 게 가능합니까?”

“응, 좀 편법이지만. 여기 사람들이 그대로 다음 세상으로 옮겨지는 건 아니고, 그때의 그대들에게 이 기억이 심어지는 형태가 되어 두 삶의 기억이 공존할 테니 힘들고 복잡한 일도 있겠지만.”

“우리는 물론이고, 당신에게도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은데요.”

바네사가 지적했다.

“뭐 그렇지.”

“그런데도 굳이 이 멸망과 실패의 기억을 가지고 가 주신다고요? 이런 것도 경험이니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굳이?”

“경험..도 경험이지만.”

로드가 민망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조물거렸다.

“그대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길 바랐어. 이 세상이 끝이 아니고 다음으로 이어진다고. 그 세상을 볼 수 있다고. 지금과는 여러 가지로 달라지더라도, 다시 한 번, 더 나은 상황에서 함께 세상을 구해낼 수 있을 거라고.”

“단지 그런 이유로, 이런 망가진 세상의 패잔병들을 이끌고 가시겠다고요.”

“패잔병이라니...”

“저는, 이 삶이 여기서 끝나기를 바랍니다.”

바네사가 선언했다.

“과거의 어리석고 행복했던 저 자신에게 이렇게 가혹한 경험을 가르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 고통이 저를 만들었고, 그것이 없으면 저는 그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철부지 왕녀에 지나지 않을 테니 당신에게도 그 세상에도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겠지만.”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

로드가 말했다.

“처음부터 원하는 사람만 옮길 거라고 다른 이들에게도 말했어. 싸우고 싶지 않은 사람은 싸우지 않아도 돼. 그게 그대가 원하는 안식이라면, 기꺼이 그 뜻을 따르도록 하지.”

“별로 기꺼운 표정은 아니신데요.”

“기억을 폐기하고 싶다 말할 정도라면 그대가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지 생각하니 슬퍼져서.”

“.....당신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네요.”

그 말에 로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제 황제한테서만 들으면 온 세상 사람들한테 다 이상한 사람 소리 들은 사람이 되겠군.”

“괜찮아, 로드는 좋은 쪽으로 이상한 거니까.”

프람이 위로했다.

“풋.”

바네사가 웃었다.

“그래요. 하긴, 그 황제까지도 구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일반적인 기준에서 정상적일 리는 없지요.”

로드가 얼굴을 구겼다.

“황제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은 이런 실패한 세계가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겠지요?”

바네사의 말에 로드가 놀라 긴장했다.

“그, 그렇지.”

“예, 그것보단 차라리 그자도 구원받는 게 나아요. 황제의 죄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속에서 천불이 끓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채 새 삶을 시작할 사람들에게는 그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몰라요.”

바네사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지 몰라서 로드는 프람의 손을 꽉 쥔 채 바네사의 말을 경청했다.

“저는 평생 올바른 길을 걸으려 노력했습니다. 황제에게 협조한 이상 제 손도 더럽습니다만, 적어도 왕족의 의무를 다하고,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살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마지막에, 이리도 비겁한 결정을 내리고 말았습니다만.”

“아니야.”

로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대는 이미 의무 이상의 일을 해냈어. 전혀 비겁하지 않아. 더 이상 고행의 최전선에 서지 않아도 괜찮아.”

그가 일부러 미소를 만들었다.

“혹시, 다음 생의 자신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없어? 기억은 남기지 않더라도 간단한 말 한 마디 정도는 남겨도 좋을 것 같은데.”

“그러네요.”

바네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의 저에게 남길 말이라...”

그가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친애하는 타인이여. 의무를 다하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니, 자기 마음의 소리를 따르며 자유롭게 살도록 해요.’ ”

“그래.”

로드가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꼭 그대로 전해줄게.”



-------------------------------------------------

-------------------------------------------------



바네사와 조슈아의 대화가 원작 하드 때와는 좀 달라졌습니다만.

여기의 바네사는 조슈아의 생각을 물을 필요가 없지요. 본인도 직접 겪었으니까. 그를 더 이상 증오할 수 없을 만큼 이해하는 상태이기에, 조슈아가 도망치지 않는다 - 직접 사과를 한다 만으로 용서할 이유는 충분할 거라 생각합니다.




로드가 없었던 세계 60 - 바네사의 계획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바네사가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무슨 자격으로.”

그가 도착한 일행을 훑어보았다. 모르는 사람도 많았지만 아는 사람 면면이 심상치 않았다.

“엘펜하임의 공작과 총독에 제 연구원까지 데리고 있는 겁니까.”

로드가 심호흡을 했다.

“나는 아발론의 군주. 황제의 대적자. 그가 지키는 이 세상을 부수고 사람들을 구하려는 자다.”

“세상을?”

바네사가 라플라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 분이 제가 예언한 그 ‘멸망’입니다.”

“사람이었다고요?”

바네사가 놀랐다.

“심지어 아발론이면, 엘펜하임이 점령 중인 그 지역이 아닙니까. 멸망을 막지 않을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도우실 줄은.”

“지고 복속 당했답니다.”

라플라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황제가 그 땅에 세운 질서가 하룻밤 새 무너지고, 저는 잘못된 판단을 내린 죗값을 두 생에 걸쳐 치르게 되었지요.”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바네사가 의혹 어린 눈초리로 라플라스와 로드를 보았다.

“싸워서 졌다고 하기엔 저 사람은 마력이 없는 일반인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뉴 사이런딜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총독은 무얼 했단 말입니까.”

잘못을 추궁하는 말도 아니건만 조슈아가 움츠러들었다.

“뭘 하긴요, 반란 세력에게 넘어가서 이용당하고 있었지요.”

라플라스가 태연하게 설명했다. 조슈아가 획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반란 세력 따위 아랑곳 하지 않고 인간 다 죽여 버리겠다고 미쳐 날뛰던 분이 할 말이 아닌데요.”

“글쎄요, 저는 적어도...”

“싸우지 말랬다.”

로드가 말하자 두 사람이 입을 다물었다.

“정권 탈환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중에 자세히 말하도록 하고, 본대로 나는 전투력이 없는 일반인이 맞아. 싸우는 건 나의 기사들이 하고, 나는 주로 설득을 하지.”

“설득이라고요.”

바네사가 말했다.

“저를 설득하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로군요.”

“맞아.”

“황제와 싸우는데 협력하자는 말이라면 좋습니다. 저는 황제에게 원한이 있어 무기를 들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하고든 함께 싸울 겁니다.”

너무나 쉽게 일이 풀려 로드는 기쁘면서도 어리둥절해졌다.

“괜찮겠어? 나와 내 기사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당신들이 누군지는 알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발목을 잡으면 안 되니 페르사의 대족장이 도착하면 전투 훈련 정도 같이 해 보면 될 겁니다.”

“저, 그것 말고도.”

“그리고 단 한 가지는 제 지시에 따라주었으면 합니다.”

바네사가 계속 말했다.

“황제와 싸우기 전에, 제가 먼저 그와 대화를 할 겁니다.”

“.....응?”

“가능성은 낮지만, 잘 된다면 아예 싸울 필요가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안 되면 그 때 황제와 싸우게 됩니다.”

로드는 혼란에 빠졌다.

자기가 해야 할 말을 바네사가 그대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유까지 같을 리는 없었다.

“왜? 무슨 말을.... 황제에게 뭐라 할 건지 우리에게 미리 말해줄 수는 없을까?”

바네사는 라플라스를 슬쩍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겠지요. 미리 안다고 달라질 사실은 아니니.”

황제의 스파이로 의심받는 걸까 싶어 로드가 변명하려고 입을 열었다.

“저는 황제에게 자살을 권유할 겁니다.”

로드의 입이 딱 다물렸다.

“이 세상, 이상하지 않습니까. 재앙은 이미 끝났건만 자연은 회복될 기미가 없고 악마라는 불길한 위협이 여전히 사람들을 노립니다. 그렇다고, 재앙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중이라고 하기엔 사람들이 막아낼 수 있을 만큼의 위협입니다.”

거기까진 생각해보지 못했던 로드는 우선 바네사의 말을 경청했다.

“처음에, 이 상황이 되기 전에 황제가 말했습니다. 이 재앙이라 하는 것은 인류가 강성해져서 균형을 무너뜨려 생긴 결과이니, 사람들 다수를 죽게 내버려두면 새로운 문명의 씨앗이 될 만큼의 사람들은 살릴 수 있을 거라고.”

“그게... 틀렸다는 겁니까? 이제 와서?”

조슈아가 물었다. 바네사가 고개를 저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실제로 인류 대다수가 죽자 재앙의 괴수는 물러가기도 했고. 다만 지금 세상이 회복되지 않는 것은 황제의 탓입니다.”

“더없이 강력한 황제가 건재하기에, 인구가 이만큼이나 줄어든 지금도 인류는 ‘강성한’ 상태로 간주된다는 건가.”

로드가 신음했다.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단지 말장난으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페르사에서 오래 실험해 온 자료도 있습니다.”

바네사가 말하자 솔피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저, 그럼 가끔 대족장을 통해 특정 지역에 악마 사냥 금지령을 내리던 이유가 그런 연구를 위해서였나요?”

“맞아요. 악마를 사냥하고 장벽에 마력을 공급하고 인간의 방어가 굳건해질수록 자연의 복구는 늦어지고, 악마들을 놔두고 마석을 사용하지 않을수록 식물이 자라고 땅이 회복됩니다.”

“그걸 위해 플로렌스에서 악마 소탕에 힘을 보태신 거군요. 페르사와 대조군으로 삼기 위해.”

라플라스가 말했다.

“아니오. 진짜 대조군은 엘펜하임 북부지방이지요. 여러분의 정기적인 사냥과 넓고 강한 장벽 덕에, 과거 대삼림이 우거졌던 땅인데도 아직 풀 한포기 나지 않지 않습니까. 아발론 반도 남부가 안전지대라서 눈에 띄지 않았을 뿐, 그 땅이야말로 가장 자연이 사멸한 곳이랍니다.”

“어, 어째서...”

라플라스가 입을 뻐끔거렸다.

“어째서, 미리 귀띔해주지 않은 겁니까. 그런 연구를 하고 있었으면, 우리가 자연을 더 말려 죽이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면.”

“알면 뭔가 달라졌을까요?”

바네사가 비웃었다.

“엘프들이 누리는 수준 높은 생활을, 가로등을 켜고 상수도가 나오고 더 많은 작물을 수확할 수 있는 삶을 포기했을 건가요?”

라플라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했을 거에요.”

루실리카가 앞으로 나섰다.

“당장 전부 포기할 수는 없겠지요. 농장을 돌리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을 거고. 그래도 불을 끄고 물자 생산을 줄이고 마석을 적게 소비하도록 방식을 바꿀 수는 있을 거에요. 노력할 수는 있다고요.”

“그래요.”

바네사가 수긍했다.

“그럴 수 있었겠지요. 당신이 2마탑주로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루실리카가 손을 내밀었다.

“루실리카 레보스카야입니다.”

바네사가 그 손을 바라보다 천천히 손을 내밀어 마주잡았다.

“바네사...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입니다.”

바네사가 루실리카를 유심히 보았다.

“당신도 저 아발론의 군주를 따르나요?”

“예. 그가 주장하는 것이 옳기 때문에요.”

“그렇습니까. 정권 교체 과정이 어떠했는지,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시간이 있으면 좋겠네요.”

바네사가 다시 로드에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로드의 표정을 보고 조금 놀랐다. 로드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슬픈 이야기라도 들은 듯 슬프고 안타까워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러시죠? 제 말이 비현실적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은 가요?”

“아니... 그런, 그런 건 아닌데.”

로드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황제는 자살하지 않을 거야.”

“예, 그 점이라면 저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바네사는 태연히 대답했다.

“그 때는 비웃어줄 겁니다.”

“뭐라고?”

“사람들의 생존을 우선으로 한다면서, 그자는 그러기 위해 주변 모두를 자기까지 포함해서 도구로 취급하고 비인간적인 행위를 강요하고 그럼에도 자신은 사람들을 위한다 내 뜻이 옳고 정당하다 주장했지요.”

바네사의 얼굴에 경멸감이 스쳤다.

“그러던 황제가 막상 자기가 인류의 걸림돌로 밝혀지자 말을 바꿔 추하게 살아남고자 한다면, 그의 위선을 손가락질 하고 이중 잣대를 비웃으며 그자가 해왔던 모든 일이 무의미했다 저주해줄 겁니다. 그런 뒤에 원래 저는 싸우다 미련 없이 죽어버릴 작정이었습니다만, 당신이 멸망이고 황제의 대적자를 자처한다면 그자를 이길 가능성이 있다고 봐도 되는 걸까요.”

“그래.”

로드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대답했다.

“나는 황제를 이길 수 있어.”

“잘됐군요. 그럼 숙소를 마련할 테니 오늘은 이만 쉬시고.”

“미안해.”

로드가 덥석 바네사의 손목을 잡았다.

“정말 미안해. 나도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은데.”

“제가 헛된 꿈을 꾼다고 하고 싶은 거라면...”

“황제는 자살하지 않아. 자신의 위선을 인정하지도 않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죠?”

“황제는 회귀자야.”

로드가 울 것 같은 얼굴로 고백했다.

“그가 죽으면, 세상은 카르티스 클라우디스가 열 두 살이던 때로 되돌아가. 재앙은 또 나타나고, 멸망도 또 일어나지. 그러니 그는 죽지 않아. 자기가 멸망을 불러들이고 있어도. 위선자의 가면을 벗길 수도 없어. 실제로 그게 맨얼굴이기 때문에. 그의 목숨이 무가치하다는 것도 그가 해온 일이 무의미하다는 것도 그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어서.”

로드가 바네사의 눈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복수를 위해서 만이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해서도 얼마나 고심하고 노력해왔는지 알아. 분명 세상 그 누구보다도 황제의 심장 가까이에 칼을 찔러 넣었어. 황제가 회귀자만 아니었어도 그는 당신 손에 죽든가 파멸했겠지. 하지만.”

“거기에, 아니 그 어디에도, 심장이 없었던 거군요. 애초부터.”

바네사는 이해했다.

“해온 모든 일이 무의미한 건 제 쪽이었어요.”

바네사가 스르르 주저앉았다.

“이게 처음이 아니었다면 많은 것이 말이 되어요, 그래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한참을 황망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바네사가 로드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걸 몇 번째 겪는 거죠?”

“세상이 이 상태까지 온 게 몇 번 인지는 모르겠어. 되돌아간 횟수라면, 본인의 말이지만 세 자리 수는 넘어간다고 하더군.”

“하...”

바네사가 공허한 얼굴로 웃었다.

“황제가 미쳐버린 것도 당연해요. 이런 허무함, 절망감을 몇 백 번이나....”

“바네사.”

“당신은 어떻게 하려는 거지요?”

“나는.... 나도 회귀자라서, 그를 내 시간선으로 끌어들여 그의 회귀를 끊을 방법이 있어.”

“황제의 세계가 아니라 당신의 세계로 세상을 회귀시킨다는 뜻인가요?”

“바로 그래.”

“그렇게 되면, 황제를 어떻게 할 건가요?”

로드는 대답을 망설였다.

“그가 수백 번 이 일을 반복했다면 역시 수백 번 사람들을 짓밟고 이용했단 뜻이에요.”

“맞아.”

“그런데도, 당연히 그를 심판해 갈루스 왕성 정문 위에 시체를 걸어두겠다는 말이 안 나오나요.”

“....미안.”

로드가 바네사 앞에 무릎 꿇었다.

“미안해. 내가, 황제까지 구하려고 죽음을 무릅쓰는 사람이라 미안해. 처벌은 할 거야. 그가 결코 자기 죄를 잊지 못하고 남은 생 전부를 바쳐 속죄하게 만들 거야. 하지만 죽일 수는 없어. 그건...”

“너무 쉬운 죽음이지요.”

바네사가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수없이 사람들을 기만하고 이용하고 짓밟았는데, 단 한 번의 죽음으로 그 죄를 갚겠다니. 그자의 목숨은 그렇게 가치 있지 않아요.”

“바네사...”

“그의 삶은, 단 한 번 남은 삶은 가치 있을까요? 이 고통과 원한을 갚을 수 있을 만큼?”

“...아마 아니겠지.”

로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죽음보다는 가치 있을 거라 생각해.”

바네사가 날카로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야 수 백 번도 더 겪었다는 죽음 같은 것보단 뭐라도 더 가치가 있겠지요.”

그가 다리를 모아 앉고 팔에 고개를 묻었다. 로드는 뭐라 더 할 말이 없어 그 앞에 무릎 꿇은 채 바네사의 말을 기다렸다.


로드가 없었던 세계 59 -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자이라가 잘 말해주었는지, 자크는 로드 일행에게 빠르고 튼튼한 말과 좋은 마차를 내주었다. 짐마차이긴 하지만 지금 툴루즈에 더없이 유용할 물건이라 로드는 미안해졌다.

‘이렇게 모두가 힘을 모아주고 있으니, 반드시 황제를 무찌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해.’

비록 지금 그에겐 슈나이더도 크롬도 중부 대륙의 영웅들도 없고, 황제는 더 강해졌으면 강해졌지 약해지진 않았을 테지만.

생각하면 암담하기 짝이 없지만 로드도 믿는 구석은 있었다.

이 황제는 아마 틀림없이, 제국을 만들어도 재앙을 막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거다. 지금 그가 다스리는 게 과거 동대륙에서 본 것 같은 모두의 생각마저 통제하는 질서정연한 세계 통일 제국이 아니라, 그저 생존자들이 군데군데 모여 사는 자치도시 연합 같은 형태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이미 실패했으니 대신할 자에게 책임을 넘기라고 하는데 과연 황제가 전력으로 방해할까.

‘그래도 전력으로 방해하면... 뭐, 나도 전력으로 맞서야지 어쩌겠어. 그래도 두 번이나 싸워봐서 전투 방식이나 패턴은 잘 알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로드.”

옆 마차에서 솔피가 폴짝 건너뛰어 왔다.

“건강은 괜찮아요? 사흘째 죽음의 땅에 나와 있는 건데 숨 쉬기 힘들다거나 팔다리가 저린다거나.”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난 멀쩡해.”

로드가 미소 지었다.

“걱정하는 게 아니라 신기해하는 거거든요. 분명 마력도 뭣도 없는 몸인데 너무 잘 버티시는 것 같아요. 황야의 전사도 이 주일에 한 번은 꼭 선조의 보살핌으로 돌아오는데.”

“페르사의 보호도시 말이야?”

“네. 인간 도시처럼 북적거리진 않아요. 강을 끼고 있어서 공간도 넓고, 안에 전부 살기보다 옛날 방식 고수하고 싶은 사람들이 부족별로 로테이션 하니까. 아, 아이들은 상주해요.”

“그렇군.”

그 고집 센 황야의 전사들도 정기적으로 도시에 들르고 아이들은 도시에서 키울 정도라니 죽음의 땅이 해롭긴 해롭구나 하는 경각심이 들었다.

“그래도 난 정말 괜찮아. 며칠 밖에서 지내는 것도 처음이 아니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죠?”

“바네사도 외유기간 동안은 밖을 떠돈다며.”

“그분은 죽은 자도 살려낸다 할 정도의 치료사니까요. 그리고 바네사님도 3주에 한 번 정도는 도시에 들르신다고 했어요. 보급을 위해서라도.”

“그런가.”

“심지어 여긴 플로렌스 북부, 마기가 강성한 곳이에요. 황제도 대악마 원정을 올 땐 행궁에 머무르는 걸요.”

“행궁?”

로드가 깜짝 놀랐다.

“황제가 그렇게 자주 여기에 와? 아니 이런 황야에 궁전을 지을 여유가 있어? 이쪽엔 도시도 없다고 들었는데.”

“아, 그게.”

솔피가 헤헤 웃으며 뺨을 긁었다.

“정말로 행궁인 건 아니고, 임시로 장벽을 가동할 수 있는 캠핑장 같은 곳이에요. 대악마 토벌 때랑 바네사님이 외유 중 휴식할 때 밖에 안 써요.”

“그럼 바네사는 지금 거기 있는 걸까?”

“아마도요.”

“혹시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습니까?”

마차를 몰던 미하일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 길을 며칠이나 더 가면 되는지 알 수 있으면 편할 텐데요.”

미하일은 눈 밑에 그늘이 져 있었다. 기차보다 느리고 덜 흔들리긴 해도 마차라고 멀미가 없진 않았다. 짐칸에 앉는 것보단 직접 마차를 모는 편이 멀미가 덜하다고 낮에는 하루 종일 마차를 몰고 밤에는 악마의 습격에 대비해 주변을 정찰하니 피곤한 것도 당연했다.

“에헤, 글쎄요. 저도 이 쪽 방향에서 오는 건 처음이라 잘... 스트라스 외곽 쪽에서 갈 때는 마차로 나흘 정도 걸렸는데 이쪽이 길이 더 멀쩡하니까 그보단 이르게 도착할 것 같네요.”

옛 플로렌스의 왕도는 방치된 지 삼십년이 지났다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멀쩡했다. 식물도 동물도 사멸하다시피 한 죽음의 땅에서는, 도로를 망칠만한 건 바람에 굴러가는 돌멩이 정도 밖에 없었다.

“살레론 주변만 해도 풀이 난 곳도 있었는데, 정말 플로렌스 북부 지방이 상태가 심각한가보군.”

“대륙의 변방일수록 마기가 적은 것 같기도 해요. 엘펜하임.. 그러니까 아발론도 그렇고 페르사도 야생 식물이 좀 있거든요. 원래 황야였던 땅이라 식물들도 적응이 쉬웠던 건지.”

“그럴지도 모르겠네.”

로드가 솔피에게 웃어주었다.

“이것저것 알려줘서 고마워. 도움이 많이 됐어.”

솔피가 로드를 쳐다보았다.

“왜?”

“혹시 매혹주문 같은 거 써요?”

“아니.”

로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매혹도 정신 지배도 세뇌도, 그 비슷한 아무것도 안 해. 못 해.”

“그런데 어떻게.”

솔피가 말하다 말고 조금 고민했다.

“저, 로드 연구 해봐도 돼요?”

“뭐?”

그 말은 로드가 한 게 아니었다. 다른 마차에서 라플라스가 루실리카에게 잔소리 듣는 걸 구경하던 샬롯이 깜짝 놀라 일어나 솔피의 멱살을 잡았다.

“위험해!”

미하일이 놀랐다.

“괜찮아, 괜찮아. 그보다 너 뭐라고?”

샬롯이 솔피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까딱였다.

“꿈도 꾸지 마. 로드가 아무리 호구여도 자길 실험체로 내줄 리가 없잖아.”

“하지만, 샬롯 경은 안 궁금해요?”

솔피가 애처로운 표정을 했다.

“적의 약점을 보는 눈에 사람의 마음을 끄는 근원을 알 수 없는 매력, 일반인이라고 하면서 마력도 읽어내고 다른 기사들의 능력도 증폭할 수 있고!”

말하며 솔피가 흥분했다.

“이런 기이한 실험.. 아니 인물이 눈앞에 있는데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한지 알고 싶지 않아요? 연구해보고 싶지 않아요?”

“그, 나도 궁금은 하지만 로드를 갖고 연구를 하다니 뭔 수로.”

“괜찮아요, 로드 안 해치고도 할 수 있어요! 피를 좀 얻어다가 유전정보를 증폭해서.”

“정 날 연구하고 싶다면 피 몇 방울 정도는 줄 수 있지만.”

로드가 말했다.

“네가 방금 말한 궁금한 점은 전부 후천적으로 습득한 특질이라서, 날 복제해 봐야 아무런 특이점도 없는 보통 인간이 나올걸. 만들어진다면 말이지만.”

“엑? 정말요?”

“정말이고 말고. 그리고 호문클루스 실험은 금지야.”

“너무해....”

“너무하지 않아. 그 외에도 실험 윤리에 대해 완전히 새로 배워야 할 거야.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어. 아발론에는 나 외에도 연구할 거리는 얼마든지 넘쳐나니까.”

로드가 솔피를 위로했다.

“로드으-!”

하늘에서 붉은색 벼락이 내리꽂혔다.

“정찰 갔다왔음! 어, 미하일 축하한다. 앞으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작동하는 장벽 같은 게 보이더라. 도시는 아닌 것 같고 뭐하는 덴진 모르겠지만 장벽이 있으면 적어도 악마 걱정은 없... 왓!”

마차가 갑자기 빨라지자 짐상자 위에 되똥 서 있던 프라우가 고꾸라지려다 겨우 중심을 잡았다.

“아니... 나도 좋은 소식이라고 생각해서 빨리 오긴 했지만 어딘 줄 알고 일단 달려?”

“바네사가 기다리고 있는 곳이야.”

로드가 말했다.

“이제, 거의 다 왔어.”



바네사는 쉬고 있었다.

쉬고 싶지도 자고 싶지도 먹고 싶지도 않았지만 해야 할 일이 있고 살아있어야 하기 때문에 몸이 움직일 수 있도록 유지한다. 제국의 황후가 된 이후 꾸역꾸역 하고 또 해온 그 업무를 오늘 하루 더, 바네사는 하고 있었다.

“황후 폐하.”

호위 하나가 막사 밖에서 고했다.

“남쪽 멀리서 움직임이 보입니다.”

“남쪽이라.”

바네사가 중얼거렸다.

“들어오게 해주세요. 내가 부른 것이니.”

“알겠습니다, 폐하.”

밖의 기척이 사라졌다. 바네사는 일어나 목을 축이고 옷차림을 정돈했다. 이런 세상에서 정갈한 몸가짐 따위가 다 무어냐고 생각은 하지만 그자 앞에서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무시하고 없는 취급을 할 셈이었는데,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그자의 존재를 신경 쓰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고 바네사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전부 조슈아의 죄라고 할 수 없음은 바네사도 알고 있었다. 적어도 그는 이제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죄책감을 갖고 괴로워하기도 했다. 황제와는 다르게.

그러나 아무리 알고 이해해도, 그자의 모습을 보면 처형당한 가족들이 떠오르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이제 끝낼 때가 되었어.’

조슈아를 죽여 속죄시키고 그를 용서한다. 그게 바네사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검대를 찾아 두르고 바네사가 막사를 나섰다.

조슈아가 그 제안을 거부할 가능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와 눈을 마주본 적은 없지만 내리깐 시선과 움츠러든 목덜미로도 그가 죽음을 갈구하는 것 쯤은 읽어낼 수 있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바네사는 장벽 안으로 마차 두 대가 달려 들어오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 조슈아 레비턴스가 다른 사람과 함께 오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으므로.

마차가 멈추고 사람들이 쏟아졌다.

“아, 살 것 같다. 장벽 안에 들어오니 공기부터 달라지네.”

“수고했어요. 미하일. 좀 기절해 있을래요?”

“기절시킬 수 있었으면... 진작....”

“만세, 이제 불침번 안서도 된다!”

“저기요, 다들 조용하고 얌전하게 좀 행동해 주실래요? 그야 바네사님께서 직접 여기까지 나오실 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댁들 주인 체면은 생각하라고요.”

“아니 난 괜찮으니까. 그보다 내리는 것 좀 도와줄래? 오래 한 자세로 앉아있었더니 다리 저려...”

“에구에구 우리 약골.”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어리둥절해 있는 것도 잠시, 바네사는 이들이 길을 잘못 들어 여기까지 흘러든 사냥꾼 일행인가보다 납득했다. 보통 사냥꾼들은 저렇게 많은 수가 모이지도 않고 도시 근처만 돌아다니는데다 길을 아무리 잘못 들어도 이 거칠고 외진 곳까지 올 가능성은 없지만 그것만이 말이 되는 설명이었다. 적어도 저게 조슈아가 끌고 온 일행인 것보다는 말이 되었다.

한쪽 마차 짐칸에서 라플라스가 포르르 날아 다리 저리다는 사람에게 왔다.

“많이 힘드시면 중력 감소 마법 걸어드릴까요? 저린 발로 땅 디디면 아프잖아요.”

“아니 괜찮아. 좀만 기다리면 풀려.”

“저.... 저기요오.....”

그 때 마차에서 내린 조슈아가 다 죽어가는 소리를 내었다.

“아, 너도 다리 저려? 라플라스, 나보다 조슈아한테....”

“아뇨, 그게 아니라 저... 저기 황... 후 폐하 계시는 데요.”

왁자지껄한 소음이 멎고 사람들 전부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네사는 존재감이 없어서 죄송하다고 라도 해야 하나 실없는 생각을 해버렸다.

다리가 저리다던 여자가 바네사와 눈이 마주쳤다.

반가움과 안타까움이 혼재된 눈빛이 한참이나 바네사를 보고 있었다.

“바네사.”

그 사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

“그....”

바네사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건, 무척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요.”

그 사람의 표정이 조금 더 흐려졌다.

왜 그런 표정을 하느냐고 바네사는 묻고 싶었다.

내가 당신의 무엇이기에 슬퍼하느냐고. 왜, 무엇을 미안해하느냐고.




로드가 없었던 세계 58 - 프로 남 걱정꾼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화물차 지붕에 올라앉아 솔피는 기울어 가는 해를 바라보았다.

별로 감상적인 기분에 젖어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좀 혼자 있고 싶은데 객차에는 ‘새 동료’들이 우글우글해서 아쉬운 사람이 자리를 피한 것 뿐이었다.

아래 객차 문이 열렸다.

“솔피, 이제 슬슬 저녁때가 다 되는데 실내로 들어오면 어떨까요?”

솔피는 지붕 위로 날아온 라플라스를 노려보았다.

역시 그 아발론의 군주란 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솔피를 데리러 오기에 더 적합한 사람이 저 안에 일곱 명은 있을 텐데.

솔피의 눈빛을 보고 라플라스가 움츠러들었다.

“나쁜 짓 하러 온 거 아닙니다...”

“정말 날 안 죽일 거야? 그렇게 미워했으면서, 저 아무 힘도 없는 사람이 명령했단 이유로 참을 수 있는 거야?”

“명령해서... 하곤 조금 다릅니다만.”

라플라스가 우물거렸다.

“로드께서 당신을 저와 완전 남이라고, 납치 세뇌된 엘프 아이라고 생각해 보라 하시더군요. 그랬더니 예전처럼 적대감이 들지 않습니다.”

“고작 그 정도 발상의 전환으로?”

“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 감정은 결국 자기혐오에 불과했단 뜻이지요.”

솔피가 눈으로 설명을 촉구하자 라플라스가 말을 계속했다.

“그 때 저는 살아온 삶을 부정당하고 황제의 도구로 개조되는 중이었으니까요. 저와 아주 유사한... 다른 존재가 이미 황제의 도구로 기능하는 걸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날 죽여 달라고 했다?”

“절 죽여 달라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황제가 화냈을 겁니다.”

황제의 분노. 그 말에 솔피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갑자기 라플라스의 입장이 이해되려고 해서 그가 힘껏 해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날 죽이려고 한 건 너무했어.”

“죄송합니다. 변명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그런 말을 듣고도 여전히 날 죽이고 싶어 했으면, 로드는 어떻게 했을까? 누굴 버리려고 했으려나?”

“당신을 영입하되 우리 둘을 격리했을 거라고 하시더군요.”

라플라스가 대답했다.

“로드께서 하시는 일은 아발론에서 여기까지 펼쳐져 있으니까요. 서로 얼굴 마주칠 일 없게, 완전히 다른 업무를 맡기고 조금씩.. 적응하기에는 시간이 없긴 합니다만 그런 거지요.”

“그 인간의 설득력으로 안 되면 격리 정도로 호전될 것 같지 않은데.”

라플라스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일단 죽이는 건 막고 봐야 하니까요.”

“그러니까 저 인간은 그냥 사람 죽는 건 다 싫은 거지?”

“정확합니다.”

라플라스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피가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라플라스는 ‘솔피 레벤하이트’가 미워서 죽이려던 건 아니었던 거다.

솔피가 자라던 연구소에서 인체 실험만 했던 건 아니었다. 인간 실험체도 가차 없이 처분하는 곳이었으니 실험동물에 대한 처우는 더 말 할 것도 없었다.

실험체 아이들이 연구소 잡무를 돕게 되었을 때, 실험동물이 새끼를 낳으면 즉시 어미와 새끼를 격리하란 지시를 받았었다. 같이 놔두면 곧 어미가 새끼를 물어 죽여 버린다고.

라플라스도 그랬던 거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솔피도 마음이 풀렸다.

“나도 당신 꽤 죽이고 싶어 했어.”

“그럴 만 했죠. 이해합니다.”

“우리 둘 다, 상대를 죽이고 싶어 했는데 못 죽였고 로드 때문에 앞으로도 못 죽이는 거네. ...피차 마찬가지니까,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로 칠까?”

“......네?”

라플라스가 놀랐다.

“저, 그 말은 마치.”

“용서해주겠다고. 아무튼 내가 안 죽었으니까.”

말하고 솔피가 갸웃했다가 다짐하듯 반복했다.

“그치. 안 죽었지. 그게 중요해.”

라플라스는 범죄 구성 요건 상 의도의 중요성과 살인의 경우 유독 미수범도 처벌하는 이유 등 온갖 생각을 떠올렸다.

“아 뭐해, 나한테 용서받았다고 하면 그 로드 아주 좋아할걸?”

“그, 그렇지요.”

라플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서해주어 고맙습니다. 이번은 물론 다음에 만나게 될 때도 이 일을 잊지 않겠습니다.”

“다음... 세상 말이지.”

솔피가 풀이 죽은 얼굴로 발을 까닥였다.

“거기에, 내가 있을까?”

“네?”

“난, 제국에서 만들어낸 도구잖아. 저 인간의 목적은 황제를 줘 패고 이놈 해서 제국 못 만들게 하려는 거고.”

“이놈 한다고 하니까 황제가 다섯 살 말썽꾸러기 같아졌습니다만....”

“아 대충 알아들어. 암튼 제국이 없으면 호문클루스 실험도 없을 거고... 나도 나인도 없어지잖아.”

솔피를 말없이 바라보다, 라플라스가 약간 사이를 두고 솔피 옆에 나란히 앉았다.

“사실은 로드도 그 걱정을 하더군요.”

“와, 그 로드 참 프로 남 걱정꾼이네. 그래서 어쩌기로 했는데? 제국 대신 아발론에서 우리 만들게?”

“아뇨, 그런 건 물론 아닙니다.”

“그럼?”

“제 소견이긴 합니다만... 호문클루스 실험을 하지 않게 된다면 두 사람은 엘프나 하프엘프로 태어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뭐?”

“사람이 태어날 때, 혼은 부모에게서 조금씩 나눠받고 영은 태어날 때 깃드는데 그것들이 합쳐져 자라며 그 사람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하지요.”

“누가 꼰대 아니랄까봐 뜬구름 잡는 소리로 시작한담.”

“생명 창조의 금기 하면 보통 신의 영역을 침범하고 운운하는데 그건 아니죠. 창조가 신의 전유물이라는 것도 사실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고 그렇게 생각하면 여자들은 태초부터 신의 영역을 침범해온 게 되어버리고 종 창조로 한정해도 그럼 육종학도 안 되는 거거든요.”

“그렇지.”

솔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매우 동의했다가 상대를 생각하고 ‘쳇’을 덧붙였다.

“고대 문헌에 남은 기록을 살펴보면 그런 것보다는, 세포 배양으로 만들어 낸 사람에게 제대로 영이 깃들어서 혼이 성장할 수 있는가, 즉 ‘사람이 될 수’ 있을지를 문제 삼는 쪽이 다수에요. ...금기라는 특성상 활발히 찬반토론을 나눌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현대에는 논의 자체가 안 되어 그 이상 발전한 이론은 없습니다만.”

“그래서 그게 뭐.”

“그런데 당신을 보면 성질은 좀 더러워도 제대로 사람 구실 할 수 있게 자란 것 같고.”

“남 말 하고 있네.”

“로드는 이번이 세 번째 삶이라는데, 언제나 당신과 나인이 동일한 모습으로 존재했다고 하니까요. 그 정도로 존재가 확고하다면 여러분은 이미 태어날 권리를, 고유의 인과율을 가진 거겠지요. 호문클루스의 몸이 만들어지지 않더라도 동일한 영이 비슷한 혼을 찾아 깃들 테니, 엘더엘프...는 번식을 할 만한 사람이 없고 혈통이 섞인 엘프나 하프엘프 중에서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라플라스가 싱긋 웃었다.

“샬롯 경의 자매가 될 수도 있겠네요.”

“누군진 몰라도 당신이 그런 표정 하는 거 보니까 싫어.”

“샬롯 경은 좋은 사람이에요.”

“그래도 싫어. 그리고 영이니 혼이니 뜬구름 잡는 소리 안 믿어. 난 마도공학자라고.”

“...예, 그럼 마도공학 용어로 혼은 유전 정보, 영은 형질 발현 환경으로 바꿔봅시다.”

“진작 그럴 일이지.”

만족하는 솔피를 보고 라플라스가 웃었다.

“당신 라샤드와 남매로 태어나도 괜찮겠어요.”

“그게 누군진 몰라도 날 욕하는 소리란 건 알겠다.”

“이제 그만 들어갈까요? 진짜로 밤이 되는데요.”

“이건 부정도 안 하냐?!”



자이라는 기분이 좋았다.

그제 도착한 엘펜하임 발 화물열차가 충분한 곡물을 실어온 덕에 올 겨울 식량 사정이 크게 나아질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젠 엘펜하임이 아니라 아발론이지.’

그 아발론의 군주가 새 동맹에게 보이는 호의임이 틀림없었다. 자이라 생각에는 이제 막 인간들로 주도권이 옮겨 갔으니 그들에게 식량을 더 풀어 민심을 다독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로드는 아발론 뿐 아니라 플로렌스의 사람들에게도 베풀고 싶은 모양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하자면, 어차피 이 세계는 올해를 못 넘길 테니 식량을 과잉비축하기 보다는 인심을 써 두는 게 어차피 없어질 자산으로 미래의 동맹을 챙기는 다음 세상까지 고려한 큰 그림이라 볼 수도 있지만.... 그런 계산을 할 사람으론 안 보인단 말이지.’

역시 자기도 그에게 홀렸다고, 전생의 인연이라는 게 있기는 있나 보다고 자이라는 생각했다.

‘이따 툴루즈에도 연락을 해봐야겠군. 거기는 요새 인구가 늘고 있으니까...’

전화가 울렸다. 자크가 사람 속을 읽었나 하고 봤더니 툴루즈가 아니라 엘펜하임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너무 보냈으니 돌려달라고 하는 것만 아니면 뭐든 환영이지.”

자이라가 전화를 연결했다.

“예, 살레론의....”

-자이라 시장.

그 자이라를 말 한 마디로 등골이 서늘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실, 한 명 뿐이었다.

“대, 대제 폐하.”

자이라가 전화에 표시된 발신자를 다시 보았다.

여전히, 엘펜하임 총독부였다.

-이곳의 새 지배자 일행들이 동쪽으로 향한 것은 알고 있다.

전화 너머 들리는 목소리뿐인데도 황제의 위압감이 자이라를 짓눌렀다.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말하라.

지금 전화를 끊고 도망치는 건 간단했다.

황제라 해도 기차가 플로렌스 동쪽을 향하고 있는 지금 아발론에서 살레론까지 오려면 사흘이나 이틀, 못해도 하루는 꼬박 걸릴 것이다.

‘그렇겠지?’

그러나 자이라는 도망칠 수 있어도 살레론의 시민들은 그럴 수 없었다.

최근 정책이 유해졌다고는 하나 황제는 여전히 그 황제였다. 정복전쟁과 점령 초 상황을 겪은 자이라는 차마 사람들의 목숨을 그의 변덕에 내맡길 수가 없었다.

“니스..로 갔습니다.”

자이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거기서 강화용 마도 물자를 찾겠다 했습니다.”

-알겠다.

전화가 끊겼다. 자이라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황후와 협력하려는 건 입 다물었다지만 그가 말 안 했다고 황제가 정말 모르리라 생각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황제는 지금 아발론에 있었다. 거기가 어떻게 되었을지 자이라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툴루즈로 전화를 연결했다.

-안녕하

“그 군주일행툴루즈도착했지 큰일이야당장불러와줘!!”

-네, 네?

자크가 당황했다.

-어, 그 사람들 오늘 아침 일찍 떠났는데요.. 지금 와서 쫓아가려면.

“왜 거기서는 늦잠도 안 자고!”

수화기를 내팽개치고 자이라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제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다.

“에밀!!”

부르는 동시에 달려나간 자이라가 부시장실 문을 부서질 듯 열어젖혔다.

“예? 시장님?”

“황제에게 들켰다. 나는 ‘몰래’ 반역자들과 내통하다 그들과 합류하기 위해 도망친다. 너는 막으려고 했지만.”

“시장님을 누가 막습니까. 다 날려버리고 도망가시겠지요.”

에밀은 즉시 알아들었다.

“경비대한테 갑옷 좀 찌그러트려두라고 하겠습니다. 저흰 걱정 말고 가세요.”

덜렁거리던 부시장실 문짝이 쿵 쓰러졌다.

“...저것도 분위기 파악을 하네요.”

“그래, 부시장. 항상 고마웠다.”

“저야말로 함께해서 영광이었습니다, 시장님.”

에밀이 경례했다.

“다음 생에서 봅시다.”



------------------------------------------------------

------------------------------------------------------



위의 혼과 영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전부 제가 쓰면서 지어낸 것으로 어디의 공설도 아닙니다.



과거의 과거에, ‘안 죽었으니까’라며 솔피를 용서해 준 사람이 있었지요. 하드 루실리카가 로드에게 쉽게 호의를 느끼는 것도 그렇고, 기억은 이어지지 않아도 적어도 좋은 기억은 무의식중에 남아있었으면 좋겠어요.




로드가 없었던 세계 57 - 함께 사는 세상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무사히 기차가 살레론을 떠나고, 남들 눈에 잘 안 띄는 구석 자리에서 솔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 유전정보제공자는 살레론을 떴는지 솔피가 또다시 기차를 타고 여길 지나가리라곤 생각 못한 건지 이번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따로 검문도 없었다.

이제 이대로 조용히 스트라스 외곽까지 기차로 간 다음 선조의 보살핌으로 가서, 대족장에게 제국령 엘펜하임의 체제 변화를 보고하고 연구소로 돌아가면 된다. 바네사님이 총독놈에게 무슨 말을 써 보낸 건지 그래서 총독 놈이 뭘 어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쓸데없는 호기심은 살아남는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야, 윗사람들 사정에 호기심 안 갖고 시키는 대로 잘 한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오래된 분노가 솔피의 마음속에 끓어올랐다.

자신은 분명 특별히 태어난 호문클루스 중에서도 뛰어난 자질을 인정받은 성공작이었다. 그런데도 창조물에서 창조자로 격상될 기회가 주어지는 대신 쓸모없는 실패작인 것처럼 버려졌다.

지금 솔피가 살아있는 건 그의 재능도 노력도 성취도 아닌 바네사의 자비 때문이었다. 물론 목숨을 구해준 데 대해선 무한히 감사하고 있지만, 바네사가 이전 주인보다 좋은 주인인 건 잘 알고 있지만 그래서 더 뼈저린 굴욕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역시 이대로 있을 순 없어.’

적어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는 있어야 했다. 알아야 발버둥이라도 칠 수 있고 죽더라도 자길 죽이려는 자들에게 엿이라도 먹여주고 죽을 수 있었다.

지금 뭔가 이전과 다른 일이 벌어지는 중인 건 분명했다.

페르사의 대족장이 엘펜하임 사정에 관심을 두고 황후가 처형자에게 밀서를 보냈다. 완고한 엘더엘프는 자기 제자에게 밀려났고 웬 인간들이 그의 곁에 있었다.

이런 정상적으로는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는 때다. 어떤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니.

“야.”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네?”

솔피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무해한 일반인인 척 한 보람도 없이, 잘못들은 것이길 간절히 바란 보람도 없이 바로 그 총독놈이 머리색을 바꾸고 밋밋한 코트로 체형을 감추고 긴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이 기차간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자.”

“저, 저는 할 얘기 같은 거 없는데요, 전달만 했을 뿐 편지 내용도 모르고...”

솔피가 다른 승객들 쪽을 흘끔 보았다.

아무도 이쪽에 관심두지 않았다. 소리가 차단되어있는 건지 안 말려드는 게 최선인 걸 알아서인지 솔피는 알 수가 없었다.

“할 말이 너는 없어도 이쪽엔 있으니까 말로 할 때 와라.”

솔피는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원을 감추고 몰래 기차에 타고 있는 건 둘 다 마찬가지라 해도, 이쪽은 옛날에 폐기된 호문클루스고 저쪽은 현직 권력자다. 소동이 나면 불리한 건 자신이었다.



조슈아를 따라 객실 밖으로 나가니 그가 화물차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따라와.”

“그냥 여기서 말하고 들어가면 안 돼?”

“보안을 요하는 일이라 그래. 따라와.”

보안은 얼어 죽을, 황제의 밀명이라도 새로 받았냐 투덜거리며 솔피가 조슈아를 따라 화물차 지붕을 건너뛰었다.

화물차 끝에 객차가 둘 더 연결되어 있었다.

“....왜 이 차만 따로?”

대답 없이 조슈아가 그 객차 문을 열었다. 불길함을 느낀 솔피가 도망치려 했으나 여긴 기차 위였고 도망칠 곳은 또다시 황야뿐이었다.

그 아주 잠깐의 망설임을 틈타 조슈아가 솔피를 잡아 객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솔피 레벤하이트.”

그 안에서 솔피를 기다리고 있는 건 라플라스였다. 솔피는 반사적으로 싸울 준비를 했다.

“웃기지마, 누가 순순히....!”

솔피가 싸우다 죽을 각오를 하고 있는데 라플라스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죽.... 응?”

“며칠 전에 공격한 것도, 과거에 당신을 폐기해 달라 황제에게 청했던 것도... 제 아집이고 화풀이였습니다. 저 때문에 위험과 고생을 겪게 해서 죄송합니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라플라스가 전력으로 빔을 쐈어도 솔피 정신이 이보다 혼미하진 않았을 것이다.

자기가 죽은 건가 미친 건가 죽음의 땅에서 며칠 지낸 악영향이 이렇게 한 발 늦게 머리를 침식하는 건가 부지런히 자기 상태를 고찰하던 솔피는 자기가 멍하니 라플라스 정수리만 바라보고 있는 걸 깨닫고 후다닥 한 발 물러났다.

“뭐, 뭐야 무슨 수작이야. 날 가지고 뭘...”

“수작이 아니야.”

라플라스의 어깨를 잡아 그를 일으키면서, 뒤쪽에서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아, 그때 엘더엘프 옆에 있던 그 여자.”

가까이서 다시 본 그 사람은 아무런 마력도 어떠한 힘도 느껴지지 않는 일반인이었다. 그런데도, 이 자리엔 엘더엘프와 처형자가 함께 있는데도 솔피는 이 사람이야말로 보스고 여기서 제일 위험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당신.... 설마.......”

“그래, 나는 아발론의 군주, 황제의 대...”

“황제의 대리인?”

로드의 고개가 푹 꺾였다.

“크크카크학크킥..... 로드답지 않게 무게 잡는다 했더니...”

뒤쪽에 있던 엘프 하나가 웃어 굴렀다.

“에이 뭘 로드 그런 걸 가지고 좌절해, 전엔 체자렛 소리도 듣....”

“프..라...우.”

로드가 프라우의 손목을 꽉 잡았다.

물론, 로드가 온 힘을 다해 쥐어봤자 아프지는 않았다.

“아니 방금, 아발론의 뭐? 아발론이 뭐더라, 지금 엘펜하임 있는 거기던가?”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던 나머지 솔피가 질문하는 눈으로 라플라스를 쳐다보았다.

“거기 맞아요. 지금은 다시 아발론입니다.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누구 멋대로? 황제가 알면....”

솔피가 몸을 돌려 기차간 문을 가리고 서 있는 ‘엘펜하임에서 황제의 권위를 대리하는 총독’을 쳐다보았다.

“.....전부 한패거리야? 황제 모르게 다 짰어?”

“그래. 황후와 마찬가지로.”

조슈아가 대답했다.

“그리고 저 분이.”

“황제의 ‘대적자’다, 솔피 레벤하이트. 여기 나의 기사들과, 나아가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과 손을 잡고 황제를 타도할 사람이다.”

정신을 추스른 로드가 자기소개를 마저 했다.

“그...... 말이 되는지는 일단 젖혀놓고.”

솔피는 골이 울려 머리를 짚은 채로도 경계는 풀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내겐 무슨 볼일이지? 나도 황제에게 원한이라면 있어. 있지만, 그걸 언제 어떻게 풀지는 내가 정해. 날 이용해서 황제와 싸우게 할 작정이라면 잘못 짚었어.”

“조슈아에게도 약속했지만 싸우기 싫다면 싸우라고 하지 않을 거야.”

“조슈아도?”

솔피가 경악한 표정을 풀지 못하고 다시 조슈아를 보았다. 조슈아는 어깨만 으쓱했다.

“아니.... 황제와 싸운다면서 저 놈을 참전 안 시킨다니, 저게 댁이 가진 제일 큰 전력....”

솔피가 조슈아를 보고, 라플라스를 보고 잠시 고민했다.

“...제일 큰 전력일 텐데 싫다면 싸움 안 시킨다고?”

라플라스가 조금 시무룩해졌다.

“솔피, 당신이 제게 악감정을 품고 있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얼마 전에 저와 조슈아가 싸웠을 땐 제가 이겼는데요.”

조슈아가 라플라스를 노려보았다.

“그걸 이겼다고 표현합니까? 지금 다시 싸워보면 결과가 다를걸요.”

“과연 그럴까요?”

“싸우지 마, 지금도 나중도.”

로드가 팔짱끼고 노려보자 두 사람 다 움츠러들었다.

제국의 이인자 두 사람이 아무 힘도 없는 일반인의 말에 따라 싸움을 그만둔다. 솔피는 자기가 뭘 보고 있는 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발론의 군주라고. 엘펜하임이 점령했던... 인간들의 왕이야? 엘펜하임 이상해진 게 네 짓이야?”

“제국령 엘펜하임이 이상해진 게 아니라 아발론이 정상으로 돌아간 거야. ..돌리려고 노력하는 거야.”

“근데 엘프들 그냥 살던데?”

“아발론에 원래 엘프들 살았어. 지배층이 아니라 그냥 같은 국민으로. 지금도 그렇게 하려고 하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을.....”

“말이 되게 만들 거야.”

로드가 말했다.

“아니면 왕이 무슨 소용이겠어?”

솔피는 말문이 막혔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솔피가 입을 다문 틈을 타 로드가 물었다.

“나인은 어떻게 됐어? ...살아있어?”

“살아있음 어쩌게? 마저 죽이게?”

솔피가 반사적으로 날선 대답을 돌려주었으나 로드는 도리어 표정이 환해졌다.

“살아있어?”

그걸 보고, 솔피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은 뭔데 자기와 전혀 상관도 없는 호문클루스의 생존 가능성에 표정이 밝아지는 것인가.

“살아있어. 살아는 있어.”

그래서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역시 저 엘더엘프 덕분에 폐기처분 대상이 되어서, 스콜피온 팽을 적출해야 했기 때문에 전투력은 급감했지만 말이지. 보통 수인족 전사 한 사람 몫밖에 못해.”

“그래.”

로드는 안도했다.

“살아있구나.”

쓸모없다고, 약하다고 하는데 기뻐한다.

솔피는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쓸모없다고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 황후조차도 솔피가 페르사에 연구소를 차리고 쓸모를 증명하자 기꺼워했다. 그냥 살려놨을 뿐인 나인과는 달리 가까이 두고 일을 맡겼다.

그게 당연한 건데. 이자는 쓸모없는 놈이 살아는 있다는 말에 기뻐한다. 심지어 진심으로 보였다.

“쓸모없다는 데 좋아?”

“한 사람 몫을 한다며. 그게 왜 쓸모가 없어.”

“쓸모없지! 우린 호문클루스라고, 보통 인간보다 우월하게 태어난, 남들보다 뛰어나야 마땅한 존재란 말이야! 그런 놈이 멍청한 척인족이나 똑같이 살고 있는데 그게 뭐가 자랑스러워서....”

“그래서 나인은 불행해?”

로드가 물었다.

“버려지고, 약해져서... 지금 불행해?”

솔피는 말문이 막혔다.

그렇진 않았다. 솔피에겐 역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지만, 나인은 척인족 전사들과 잘 지냈다. 목숨의 위기에 꼬리가 끊어지는 게 그들에겐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어서 그런지 어쩐지, 나인은 그들 중 한 명으로 받아들여졌고 솔피에게 향하는 두려움 섞인 경외감만큼은 아니어도 나름 한 사람의 전사로서 존중도 받는 모양이었다.

일 년에 한 번 정기검진 할 때 밖에 마주치지 않는 사이지만 불행하지 않다는 건 알았다.

“나인은 페르사에서 잘 지내고 있나 보구나.”

로드가 웃었다.

“살아서 잘 적응해 살고 있다면 충분히 자랑스러울 일이야. 꼭 제일로 강하고 쓸모 있지 않아도.”

“니가 뭔데!!”

솔피가 소리 질렀다.

“강하고 쓸모 있어야 살아남아! 바네사님도 날 나인보다 더 유용하게 생각하신다고! 너도! 강자들을 끌어 모았잖아! 엘더엘프와 처형자를 옆에 끼고 있는 주제에 약한 것들을 자랑스러워한다고? 그런 기만에 넘어갈 것 같아?”

“나는....”

로드가 조금 당황했다. 그 모습에 솔피는 작은 만족감을 느꼈으나, 로드는 그가 멋대로 만족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나인이 살아있어서 기뻐했을 뿐이야, 널 ‘넘어오게’ 하려고 한 말이 아니었어.”

솔피는 똑똑했고 드러난 말과 행동으로 사람의 심리를 분석할 줄 알았다.

“내 말에, 넘어오고 싶어진 거야?”

아무리 크게 아니라고 외쳐도, 솔피 자신을 속일 수는 없었다.

“솔피.”

로드가 한 걸음 더 솔피에게 다가섰다.

“네가 강하고, 유능하고, 그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거 알아.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해. 실험과 조작만으로 그렇게 될 리는 없지. 너는 분명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거야.”

“그래! 그러니까 난 우월해!”

“하지만 세상은 우월한 것 만으론 살아갈 수 없어.”

너무나 사실인 말이 솔피를 깊게 찔렀다.

“사람을 성과로만 판단하게 되면 성과가 높은 사람들조차 행복할 수 없어. 잘하는 일을 노력해서 더 잘하는 건 보람 있고 즐거운 일이지만 생존을 위협받으며 언제 이 자리를 잃을지 몰라 벌벌 떨면서 자신의 재능과 가능성을 쥐어 짜이는 건 고통스럽고 사람을 소모시켜.”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유능하고 뛰어나지 않아도 살아갈 권리, 행복해질 권리가 있어.”

“그런 말은 저자한테 해.”

솔피가 울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라플라스를 가리켰다.

“날 죽이려 한 건 저놈이라고.”

“그랬지. 하지만 나는 그게 라플라스의 잘못만은 아니라고 생각해.”

“....뭐?”

“널 폐기하기로 결정한 건 황제지. 아마도 라플라스와 너의 쓸모를 비교해보고, 자기 생각에 가치가 덜한 쪽을 내쳤을 거야.”

솔피 생각에도 그러했으므로 그건 할 말이 없었다.

“널 죽음으로 내몬 건 황제의 실력주의야. 그리고 살린 건 바네사의 온정이지. 아무리 강해져도 유능해져도 사람은 혼자서는 모든 문제에 대처할 수 없어. 약하고 어리석어보여도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그래서 나는 유능하든 무능하든 태어난 모두가 최대한 덜 불행해지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그리고 너도 여기 동참해주었으면 해.”

“왜?”

“네게 기회를 주고 싶으니까. 제국이 심은 가치관에서 벗어날 기회. 그리고 계속 살아갈 기회.”

말하고 로드가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말하고 보니까 협박처럼 말해버렸네.”

“협박처럼이 아니라 협박 맞잖아.”

“아니야. 사실 본론은 이제부터 시작인데, 회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라플라스 셀케나에 이어 조슈아 레비턴스가 제국령 엘펜하임을 벗어났다.

공기조차 굳어있는 것 같은 중압감 가득한 알현실에서 황제가 수하의 보고를 받았다.

황제가 끄덕이자 보고한 전령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황제는 생각에 잠겼다.

황제의 말이, 그가 정해준 제자리를 이탈했다.

라플라스의 이탈은 일견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처럼 보였다. 폭압만으론 사람들을 오래 다스릴 수 없다. 황제는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러니 그가 인간들에 의해 쫓겨났다고 해서 문제가 생겼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조슈아는 경우가 달랐다. 알드 룬의 왕녀가 외유를 나간 지금 그가 몰래 동쪽으로 향하는 건 명백히 의도가 있는 행위였다.

“.......확인 해봐야겠군.”

이제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황제가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것이 그가 기다리던 징조가 맞는가, 아니면 목적을 잃어버린 사람이 떠올리는 신기루일 뿐인가.

확인할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다.




휴가 2 (완)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그러는 새 바네사가 올리브를 하나 프라우 입에 물리고 가득 따른 술잔을 들려주었다. 목이 타서 프라우는 사양 않고 술을 쭉 마셨다.

“바네사 술버릇이 애교인가 봐? 전쟁 중엔 그렇게 무서웠는데.”

“그야 전쟁 중이었으니까요. 그런 때는 누구라도....”

“누구라도가 아니야.”

프라우가 몸을 낮춰 바네사의 눈을 바라보았다.

“바네사는 그런 식으로 자기 활약을 별거 아닌 일 취급하곤 하는데, 사실은 엄청 대단한 거 본인만 모른다니까? 해방군을 이끌던 바네사는 아군에게는 자애로우면서도 엄정하고 적에게는 무시무시한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였단 말이야.”

“제가요?”

“그럼!”

8검이었던 자는 믿을 수 없다며 따로 행동하겠다고 돌아서던 그 싸늘한 시선은 삶 하나를 건너뛴 지금도 아직 생생했다.

“왕이 된 뒤 신하들에게 휘둘릴까 걱정할 필요 같은 거 전혀 없다고. 애초에.... 음, 바네사의 나라를 이런 식으로 말하자니 좀 그렇긴 하지만, 알드 룬은 한 번 망한 거잖아? 망하고 새로 다시 세우려는 지금이 선례니 전통이니 하는 걸 다시 만들 절호의 기회인 거 아닐까? 아까 아슬란이 창업군주라서 뜻대로 후계자를 세울 수 있었다고 했는데, 바네사도 역시 카리스마 넘치는 리뉴얼 창업군주라고. 용병왕이 한 건 승리의 여신도 할 수 있어.”

“아앗, 그 별명은 부끄럽다고요.”

바네사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부끄러워도 할 수 없어. 역사책에도 실릴 텐데.”

“으아앙~”

바네사는 잠시 부끄러움에 몸부림쳤다.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은 이제 튀어서 좋을 것 없는 넷째 왕녀가 아니라 차기 국왕이라고. 과도한 겸손은 권위를 손상시킬 뿐이야. 만약 혼자 살아남아서 저항군을 이끈 게 일 왕자 였어도, 그저 상징적인 역할이었을 뿐이라며 의미를 축소할 거야?”

“그건 경우가.... 아니, 아니에요. 다르지 않아요. 차기 국왕이라고 생각하면.”

바네사가 한참 손을 꼼지락거리더니 심호흡했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해야 하니까 할 수 있겠지. 저항군 때도 그랬잖아.”

“....네, 그랬지요.”

바네사가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앞으로 왕, 그것도 리뉴얼 창업군주가 되어서.....”

‘아이고.’

프라우는 이마를 짚었다. 이상한 말 퍼트리는 거야 그가 늘 하던 거지만 샬롯이 풀피 채우는 것과 바네사가 리뉴얼 창업군주가 되는 건 임팩트가 달랐다.

“제도도 고치고, 전통도 바꿔서.”

바네사가 프라우의 손을 잡았다.

“프라우님. 저와 결혼해주세요.”

“...응?”

“귀국 전에 결혼을 해야 해요. 기정사실로 만들어 놔야 반대할 사람들 닥치게 할 수 있고, 안된다고 난리치면 그럼 귀국도 즉위도 안 한다고 하면 그만이니까. 프라우님은 제가 카리스마 넘치는 리뉴얼 창업군주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전 여전히 왕권에서 멀었던 어린 4왕녀이기도 해요. 신하들과 기싸움 할 거면 시작부터 시원하게 뒤통수를 후리는 게 효과적일 거에요.”

프라우는 다시 한 번 자기 언어생활과 그 파급력에 대해 반성했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나랑?”

“예.”

“그, 그게 그치만.”

“저도 알아요. 프라우님은 로드 좋아하시는 거.”

바네사가 일견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로드와 언젠가는 잘해보겠다고 생각하시는 건 또 아니잖아요? 그런 거라면 벌써 로드 쫓아다니면서 뭐라도 말을 했을 텐데.... 저도 이제 왕이 될 거고 신분제도 개혁하고 사람들이 덜 불행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거에요. 프라우님이 로드의 어떤 점을 제일 좋아하시든, 한 가지 정도는 제가 노력해서 맞춰드릴 수 있어요.”

바네사의 강렬한 눈빛을 마주보며 프라우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 머리 길러달라면 길러줄거야?”

“완전 쉽죠. 정말 그거면 돼요?”

“아.. 미안 내가 정신없어서 아무말을.”

프라우가 뒤통수를 긁으며 시선을 딴데로 돌렸다.

로드만의 특별한 점 하나는 바네사가 맞춰줄 수 없었다. 로드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고, 바네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바네사도 사람이다. 적어도 더 이상은 데이터 쪼가리가 아닌 살고 생각하고 느끼는, 프라우가 교류할 수 있는 타인이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인생에서 주인공이다.

바네사는 이미, 프라우가 제일 좋아하는 점을 맞춰준 거나 같았다.

“정말, 나로 괜찮아?”

프라우가 물었다.

“나 보기보다 좋은 놈 아냐. 왕녀님이 알면 학을 뗄 만한 비밀도 있다고. 알드 룬 해방군을 도운 것도 순수한 호의로만 한 게 아니고.”

“순수한 호의로만 남을 돕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로드도 아니고.”

말하고 바네사는 자기가 후후 웃었다.

“다른 목적이나 이유가 있어도, 프라우님이 제가 가장 힘들 때 힘이 되어주신 건 변치 않아요.”

“그래도....”

“어떤 이유라 해도.”

바네사가 말을 잘랐다.

“그 이유와 상관없이 프라우님은 다른 행동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어요. 세상에는 좋은 이유로 나쁜 짓을 하거나 나쁜 이유로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셀 수도 없이 많아요. 프라우님의 이유가 무엇이든, 그 때문에 나쁜 일을 할 수도 있었어요.”

그렇지 않다고 프라우는 생각했다. 로드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그의 앞에 나타날 때 멋지고 대단한 모습으로 재등장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나쁜 일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바네사를 돕지 않을 수는 있었다. 로드는 프라우가 그냥 로드를 찾아가기만 했어도 만족했을 거다. 프라우가 없다고 해서 바네사가 제국에 붙들려 로드를 만나지 못하게 될 것도 아니니까, 그를 돕는 대신 속도를 올려서 사르디나 정도에서 로드와 합류할 수도 있었다.

바네사가 싸늘한 시선으로 돌아서던 그 때 일을 만회하려 노력할 필요는 없었다.

‘아, 나 설마 그때부터 왕녀님한테 꼼짝 못하게 된 건가.’

프라우가 바네사에게 고개를 숙였다. 살짝, 두 사람의 입술이 스쳤다 떨어졌다.

“그 맞춰주는 거 말인데, 난 결혼 전에 오래 데이트를 하고 싶어.”

“하면 돼요!”

바네사가 벌떡 일어낫다.

“저도, 제가 마음이 급해서 막 청혼해버렸지만 식을 올리기보단 프라우님이랑 같이 놀고 음악도 하고 그러고 싶어요. ....세상도 돌아다니고.”

바네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국왕보단 방랑악사가 되고 싶어요.”

“하면 되지.”

프라우가 바네사의 손을 잡았다.

“바네사는 뭐든 될 수 있어. 그러니 하고 싶은 걸 하면 돼.”

바네사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거기서부터 시작해도 될 것 같았다.

“무기한 휴가 받았다며. 나랑 몰래 나갈까?”

“네!”

두 사람은 아하하 깔깔깔 웃으며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돌았다.

앞으로 무얼 하든, 지금은 휴가를 즐길 때였다.



-------------------------------------



지나친 음주는 건강에 해롭습니다.



저러고 블레이드 타고 왕궁 담 넘겠다고 테라스에서 뛰어내렸다가 음주 도검 운전(?)으로 정원에 처박고 것도 재밌다고 놀다가 다음날 나란히 얼음 주머니 머리에 얹고 꿀물 홀짝거리며 로드에게 잔소리 듣지 않을까 생각해요...



휴가 1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Characters: 프라우. 바네사
Rating: PG
Warnings: 없음
Summary: 바네사가 프라우에게 마음을 고백하다




바네사의 방 문 앞에서 멀찍이 떨어져 서서, 프라우는 고민 중이었다.

어제 알드 룬에서 바네사에게 편지가 왔다. 개인적인 우편이 아니라 공식 서한이 로드를 통해서 전달되었다.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로드가 그 서신을 바네사에게 전달한 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거라며 무기한 휴가를 주었고 바네사가 방에 틀어박힌 걸로 봐서 즐거운 소식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리고 프라우는 아직 고민 중이었다.

‘이걸 내가 참견할 일이 맞나? 그냥 왕녀님 혼자 이겨내게 놔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번에는 도움을 주고 친해지기도 했다지만 프라우는 이방인이고 이곳 사람들의 삶에 깊이 간섭할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전쟁 중에 도운 거야 로드의 정복 활동에도 보탬이 되었으니 괜찮지만 그 이상 개인적으로 정을 붙이다 길이 갈려 버리면 또 공허한 마음으로 방황하는 건 프라우 쪽이었다.

“어머, 프라우님.”

프라우가 휙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큼직한 바구니를 안고 오던 바네사가 프라우를 보고 멈춰 섰다.

바구니 위로는 와인병 꼭지가 빼꼼 올라와있었다.

바네사에게 말을 걸지 말지 고민을 하면서, 막상 방 안에 바네사가 있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뒤늦게 프라우의 머리를 스쳤다.

“어, 식당 다녀온 거야?”

“절 기다리고 계셨나요?‘

두 목소리가 겹치고 두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식당에서, 술과 안주거리를 좀 받아왔어요.”

바네사가 먼저 말했다.

“괜찮으시면, 잠시 술자리에 어울려주시겠어요?”

방 앞을 한참 서성여놓고 시간이 없다거나 할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는 것도 우스웠다.

“좋아. 말동무나 좀 해볼까 하고 온 거니 술동무가 되어도 좋겠지.”

말하며 프라우가 바네사가 들고 있던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무게에 놀랐다.

‘술 한 병이 아니잖아?’

혼자 마시려고 가져온 것일 텐데 대체 알드 룬에서 온 편지가 무슨 내용이길래 이렇게 많은 술이 필요한 건지 프라우는 조금 무서워졌다.


바네사의 방은 평소나 다름없이 정돈되어있었다.

바구니에서 치즈와 절인 올리브, 견과류 몇 점을 꺼내 탁자에 늘어놓고 바네사가 프라우에게 와인을 따라주었다.

“그러고보니 이전에 같이 지낼 때에는 같이 술을 마실 기회는 없었네요.”

“뭐, 전쟁 한복판이었으니까. 그래도 아발론 와선 다른 기사들하고 함께 마신 적 있잖아? 누구누구 생일 축하라던가.”

“예, 그랬죠.”

바네사가 우아하게 와인을 마셨다.

“여기 온 지도 시일이 꽤 흘렀네요.”

“그래도 대체로 좋지 않았어?”

“대체로 정도가 아니에요.”

바네사가 슬픈 표정으로 프라우의 잔에 와인을 더 따랐다.

“전 여기서 행복했어요. 적어도,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남은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최대로 행복했어요.”

역시 가족 관련한 소식이었나. 프라우는 내심 긴장했다.

“저, 가족들을 잃었다고 해서 왕녀님이 행복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어.”

“알아요. 아무리 슬프고 안타까워도 죽은 사람은 과거에 남겨지고, 산 사람은 계속 살아가며 변하지요. 나쁜 일도 좋은 일도 겪고, 새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기도 하고.”

말하며 바네사가 프라우를 보았다. 프라우는 은근슬쩍 눈을 피하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프라우님.”

“응?”

“제가 프라우님 좋아하는 거 알고 있지요?”

프라우는 마시던 와인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바네사 앞에서 술을 뿜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저기, 왕녀님, 난....”

“귀찮게 굴고 매달리려는 건 아니에요. 어차피 저는 이제....”

바네사의 얼굴이 울듯이 일그러졌다.

“왜 저였을까요? 저보다 첫째오라버니께서 살아계셨다면 좋았을 텐데.”

“무, 무슨 소리야?”

프라우가 벌떡 일어났다가 허둥지둥 바네사의 옆으로 가 어깨를 안아주었다.

“전쟁 중이나 후나 왕녀님이 얼마나 유능하고 훌륭했는데 그래! 쓸데없이 자기비하하면 로드 화낸다? 나도 화내?”

“비하... 하려는 게 아니라...”

기어코 바네사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저는 넷째였고, 왕위를 이을 가망 같은 건 조금도 없었어요. 그걸로 좋았는데, 어째서 저만 빼고 모두 죽어버려서....”

프라우는 애가 탔다. 이번 삶에선 제국 8검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조슈아나 황제한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떳떳한 척 바네사를 위로하자니 양심이 콕콕 찔려왔다.

그때만 해도 알드 룬의 멸망은 시나리오 배경이었고 알드 룬 왕가 처형은 바네사의 백스토리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 삶에서 해방군과 함께 싸우고 나란히 아발론의 기사가 된 지금, 바네사는 더 이상 캐릭터가 아니고 그의 가족들은 캐릭터 설정의 일부가 아니었다.

“한 명이라도 살아 있었으면....”

“그래그래.”

“..왕위를 넘길 수 있었는데.”

바네사를 다독거리던 프라우는 가까스로 혀를 붙들어 ‘응?’하고 얼빠진 목소리로 되묻는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

“넷째는 후사를 이을 필요가 없었단 말이에요.”

바네사가 프라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평화롭고 안정적이어서, 혼인동맹 같은 게 꼭 필요한 상황도 아니었고.... 그런데 모든 게 망해버렸어요. 저더러 이제 귀국해서 즉위하래요. 재앙과의 결전을 생각하더라도, 그 편이 제가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지고 아발론 동맹에도 도움이 될 거라면서.”

“어.... 음.”

그야 지금처럼 아발론이 알드 룬의 유일하게 남은 왕족을 기사로 데리고 있으면서 알드 룬 임시 정부와 불안한 눈치싸움을 하는 것보다는 바네사가 국왕으로 즉위하고 동맹의 일원으로 대 재앙 동맹을 지원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더 깔끔할 거라는 건 프라우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왕녀님은 왕이 되기 싫어?”

“싫어요.”

“어떤 점이 제일 싫은데?”

“왕이 되면 후사를 봐야 하잖아요. 결혼도 해야 하고.”

프라우는 입을 뻐끔거렸다.

“그.... 왕녀님 국왕 즉위의 제일 큰 걸림돌이... 혹시 나야?”

바네사가 고개를 흔들고 와인을 꼴깍꼴깍 마셨다.

“프라우님더러 책임지라는 건 아니에요. 이건 제 문제니까. 프라우님이 아니었어도 세상이 평화로웠어도 마찬가지였을 거에요. 큰오라버니한테 정략결혼 안 시키겠다는 약속도 받아뒀는데.... 쳇.”

바네사가 발그레해진 얼굴로 프라우를 올려다보며 생긋 웃었다.

“그래도 말하고 나니까 속 시원하네요. 프라우님은 다정해도 알맹이는 딱딱하니까, 평생 말 못하고 혼자 좋아하게 될 줄 알았는데.”

바네사는 장난치듯 프라우의 배를 꾹꾹 눌렀다. 프라우는 배를 감싸며 물러났다.

“내, 내가 뭘.....”

“저한테, 아니 아무한테도 로드한테도 말 안 하는 거 많잖아요.”

“님 그렇게 찌르심 아파요.”

“겨우 손가락인데 뭘 그래요.”

바네사가 팔을 뻗었다. 프라우가 바네사의 어깨를 잡고 몸을 뒤로 뺐다.

“그런 이유로 왕위를 마다하는 거야? 남들은 왕이 되려고 별 미친 짓을 다 하기도 하던데.”

“전 남들이 아닌걸요.”

“그래. 그렇지.”

프라우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데, 왕위가 싫은 게 아니라 결혼이 싫은 거면.”

“결혼이 싫은 건 아니에요, 상황 맞춰 남자랑 하는 결혼이 싫은 거지.”

“응, 그런 거면, 왕이 되어서 결혼을 안 하면 되잖아? 독신으로 산 왕은 꽤 있다고. 바로 옆에 다케온만 해도.”

“그쪽은, 신생국가고 카리스마 넘치는 창업군주잖아요.”

바네사가 정색하고 말했다.

“알드 룬은 유서 깊고 전통 있는 나라라고요. 각종 선례와 전범이 겹겹이 쌓여서, 왕이라고 해도 마음대로 뭐든 할 수는 없어요.”

“글쎄 아슬란도 자기 마음대로 뭐든 한 것 같진 않지만.”

“게다가 후계로 삼을만한 다른 왕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결혼하자마자 아이를 그것도 많이 낳으라는 압박에 시달리게 될 걸요. 그것만 아니면 뭐, 결혼을 여자랑 해도....”

프라우를 흘겨보곤 바네사가 다시 술잔을 들었다. 프라우는 저걸 말려야 하나 이참에 속에 있는 말 다 하게 놔둬야 하나 고민했다.

“진짜, 많은 거 안 바라니까 내가 안 낳아도 되는 후계자 감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왜, 아무도 안 남고....”

바네사가 눈물을 닦았다.

“저, 너무 못됐죠. 내가 왕위 떠넘길 사람이 없다고 죽은 가족들을 원망하고.”

“아니, 가족이라도 가는 앞길에 방해가 되면 원망정도 할 수 있는 거지. 살아있는 사람 죽었으면 하는 것도 아니고 죽어서 아쉬워하는 게 뭐가 못됐어.”

“그치만, 제 이기적인 마음으로.”

“이기심 없으면 그게 로드지 사람이야?”

“푸훗.”

바네사가 입을 가리고 깔깔 웃었다.

“뭐에요, 프라우님. 진지하게 울적해하는데 사람을 웃기고.”

“아니 뭐 난.....”

“그래서 좋아해요.”

바네사가 말했다.

“말투는 가벼워도 언제나 마음을 헤아려주고, 다정한 말을 즐겁게 해주고, 자유롭고,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사람 같은데.... 또 어떨 때 보면 불안하고 외로워보여서, 내가 채워주고 싶어지고.”

“....왕녀님.”

“바네사라고 불러줘요. 어차피 이제 곧 왕녀도 아니게 될 텐데.”

바네사가 프라우의 소매를 잡아끌며 발개진 얼굴을 부볐다. 그러느라 흐트러진 바네사의 앞머리를 프라우가 정리해주었다.

프라우는 심경이 복잡했다. 부담스럽지만 솔직히 기쁘기도 했다.

기대오는 바네사의 따뜻한 체온이, 그도 자신도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실감 같아 마음이 약해졌다.

“바네사.”

“와아.”

바네사가 즐거워했다.

이 맑고 꾸밈없는 애정을 보며 프라우는 부끄러워졌다. 자긴 그냥 지나가며 잠시 도왔을 뿐이었는데, 사람이 아니라 데이터 취급하기도 했는데.

제국 8검이었는데.

 


1 2 3 4 5 6 7 8 9 10 다음



tw

비번 안내

19금 포스타입 화산섬 창고의 멤버십은 저와 트위터 맞팔이거나 해당 카테고리 글에 감상을 남겨주셨던 분에 한해서 닉을 언급해서 가입신청해주시기 바랍니다. 전부 답하지는 않습니다.

화산섬 본관

hicstans's multi isles for love

팬픽션 위주인 홈입니다.
현재 (단 하나라도 글이) 있는 건
슬레이어즈 (제르제롯, 제르리나)
아포크리파 제로 (플라제이, 알렉사피 위주 제이드 총수)
안젤리크 (수암 광암 위주 클라비스 총수)
강철의 연금술사(에드로이,하보로이 위주 대령총수)
해리포터(해리-세베루스)
엑스맨(스콧 서머즈)
유희왕(진유우기-카이바)
마비노기(루에타르)
테니프리(..포스팅참조 요망;;)
아이실드 21(히루마 총수)

flag

free counters

a

ao3

제 AO3계정입니다. 불펌 아니에요. http://archiveofourown.org/users/hicstans/pseuds/hicsta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