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자면 대문 - 화산섬의 분관에 어서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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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블로그고 레이아웃이 몇 번 바뀐 터라 제대로 안 보이는 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경우 제게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여러번 읽기는 귀찮고 길테니 접습니다. 그래도 한 번은 펼쳐주세요.

NC-17에 대한 새로운 공지 팬픽류

좀 정리할 필요성을 느껴서


티스토리 비번은 이글루스의 동일 카테고리 글에 몇 번 이상 덧글을 달았고 그 덧글의 내용으로 봐서 판단하기에 이 사람이면 보여줘도 되겠다 싶은 사람, 또는 실제로 아는 친구나 친구에게 소개받은 사람한테만 공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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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if 4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공손찬 방 침대의 시트를 빨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유비도 자기 방에서 자야 했다.
“그러니까 오늘 밤은 같이 자야 해.”
유비가 제갈량을 앉혀놓고 설명했다.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 고양이는 그저 유비를 쳐다볼 뿐이었다.
“내일이면 빨래가 마를 테니까 하루만 참아주면...”
“주군, 시트 여벌이..”
“자, 너희들도 빨리 자!”
제갈량이 알아듣는 것도 아니건만 유비가 서둘러 영웅패들을 싹 쓸어다 공손찬 방에 밀어 넣고 문을 닫아버렸다. 제갈량이 닫힌 방문을 보고 유비를 보고 고개를 옆으로 갸웃했다.
“걱정 마! 내 침대에서 두 명 잘 수 있고 나 잘 때 얌전해!”
제갈량이 반대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안 떨어져!”
“먀...”
제갈량은 고양이 상태고 별로 표정도 변한 것이 없는데 어쩐지 전혀 안 믿고 있는 마음이 전달되었다. 유비는 억울했다. 침대에서 떨어진 건 제갈량이 온 다음날 딱 한 번 뿐이었는데.
“그러지 말고 그냥 같이 자자, 내가 무슨 이상한 짓을 하려는 게 아니고 그냥 제갈량도 따뜻한 게 좋은 것 같고...”
고양이 앞에서 되도 않는 변명을 하고 있는 유비를 무시하고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하품을 하던 제갈량이 타박타박 유비 방으로 들어갔다. 유비가 그의 눈치를 보며 따라 들어갔다.
제갈량이 먼저 침대에 올라가 기지개를 쭉 폈다. 유비가 침대에 앉자 제갈량이 움직이다 말고 그를 쳐다보았다.
“...같이 자기 싫어?”
유비가 우우웅~ 하며 몸을 흔들었다. 제갈량이 고개를 팩 돌리더니 침대 안쪽으로 가서 몸을 웅크렸다. 옆에 유비가 누울만한 공간이 남았다.
‘좋았어!’
제갈량이 시끄럽다고 한 대 때릴까봐 유비가 속으로만 조용히 환호하고 후다닥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니 옆에 제갈량이 있는 게 느껴졌다. 옆에 유비가 누워서인지 제갈량은 동그랗게 몸을 마는 대신 쭉 펴고 엎드려 있었다.
‘몸은 인간..형이니까 잘 때는 저 자세가 편하겠지.’
유비가 몸을 옆으로 돌려 제갈량을 보았다. 슬쩍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자려는데 건드린다고 화내는 일 없이 제갈량이 입만 좀 오물거리고 가만히 있었다.
‘고양이들도 꿈을 꿀까. 제갈량이라면 어떤 꿈을 꿀까.’
신선은 꿈을 꾸지 않는다고 했다. 꿈을 꾸는 건 인간만의 특권이라고. 하지만 드림배틀에서 말하는 꿈은 소망, 이상 뭐 그런 거지 잘 때 꾸는 꿈은 아닐 거다. 그러니 이 제갈량도 꿈은 꿀 수 있을지 모른다.
“잘 자, 제갈량.”
유비가 속삭였다.
“좋은 꿈 꾸고.”


유비가 눈을 떴다. 아직 어두침침한 거 보니 이른 아침이었다.
‘아, 오늘은 일찍 눈이 떠졌네. 어제는 늦잠 잤는데.’
이불을 걷고 일어나는데 옆구리에 따뜻한 것이 와 닿았다. 옆자리를 돌아보니 제갈량이 그에게 등을 붙이고 누워있었다. 이불을 들추자 제갈량이 부르르 몸을 떨더니 눈을 떴다. 그가 항의하는 시선으로 유비를 올려다보았다.
“아, 미안미안. 더 자.”
유비가 다시 이불을 덮었다. 그리고 자장자장 등을 토닥여주었다. 제갈량이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머리도 쓰다듬었다. 제갈량이 몸을 옆으로 움직여 유비의 다리를 베고 기댔다. 생긴건 제갈량인데도 쫑긋거리는 귀도 하는 짓도 너무나 고양이 같아 유비가 그냥 머리만 쓰다듬는 대신 목덜미며 등을 조물조물 주무르기 시작했다. 평소 익숙하던 것과 아주 다른 자세로 지내다 보니 역시 불편했는지 유비가 관절 주변 근육을 만져주자 제갈량은 신음 비슷하게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면서도 유비에게 더 몸을 붙였다.
“좋아? 이건 어때?”
그가 척추를 따라 등을 꾹꾹 눌러주었다. 제갈량이 고릉고릉 소리를 내면서 몸을 쭉 폈다.
“그래그래. 더해줄게.”
계속 네 발로 다니려니 어깨와 허리가 힘들게 분명했다. 유비가 마사지해주자 제갈량이 기분 좋게 신음을 흘렸다.
‘어, 근데 이거 좀....’
안 그래도 이른 아침, 잠에서 깬 직후인데 자기는 제갈량의 허리를 만지고 있고 제갈량은 좋아서 몸을 뒤틀고 있는 상황이라니. 아무리 유비가 순진하고 흑심이 없어도 이게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 아니 이건 그런 거 아냐! 지금 제갈량은 고양이고! 원래 고양이한테는 마사지로 얼굴도 조물조물 하고 배도 만지고.....’
제갈량의 얼굴을 조물조물 하거나 배를 만지는 걸 상상하고 유비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냐.”
손이 멈추자 제갈량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유비를 툭툭 쳤다. 유비는 뭔가 평화롭고 고요한 풍경 같은 것을 떠올리려 애쓰며 제갈량의 허리를 마저 마사지했다.
‘파란 벌판에서 양이 한 마리... 두 마리.....’
꼬르륵.
갑작스런 큰 소리에 제갈량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아냐, 아냐. 괜찮아. 그냥.... 아침 먹으라는 소리야.”
유비가 열심히 제갈량을 안심시켰다.
“응. 제갈량도 배고프지? 밥 먹자. 밥.”
제갈량의 귀가 쫑긋하는 걸 보니 밥이란 말은 알아듣는 모양이었다. 역시 고양이가 되어도 천재신선이라고 생각하며 유비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행이다, 일어날 핑계가 생겼어...’
서둘러 제갈량에게 캔을 따주고 유비는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했다.
‘바보 같으니. 무슨 멍청한 생각을 하는 거야.“
유비가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말했다.
“저건 제갈량이고, 심지어 지금은 고양이야. 이상한 생각은 하지도 말자.”


남아있는 양배추와 양파에 반 봉지 남은 소시지를 볶아 유비가 조촐하게 아침상을 차렸다. 이제는 정말 장을 보지 않으면 먹을 게 쌀과 김치밖에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났는지 뒤늦게 졸려서 유비가 커피를 탔다. 막 식탁에 앉으려는데 자기 밥을 다 먹었는지 제갈량이 나타났다.
“자, 제갈량. 여기 앉아.”
또 제갈량이 자기 무릎 위로 뛰어오를까봐 유비가 제갈량을 위해 따로 의자를 빼주었다. 뒤로 넘어가지 앉도록 벽을 등진 쪽으로. 그리고 자기가 그 옆자리에 앉았다.
제갈량이 유비의 커피컵을 킁킁거렸다.
“아, 맞아. 제갈량 커피도 좋아했지. 좀 마실래?”
유비가 그에게 컵을 밀어주었다. 제갈량은 조금 더 냄새를 맡더니.
슥 몸을 옆으로 돌리며 모래를 긁어 컵에 덮는 시늉을 했다.
“..........커피도 싫어?”
가상의 모래가 들어간 커피를 마시며 유비는 어쩐지 서러워졌다.
유비가 서러워하거나 말거나 제갈량은 반짝도 밥도 전부 냄새 맡아보았다. 밥을 먹으려고 해서 유비가 젓가락으로 조금 떼어 입에 넣어주었다. 밥을 오물거리며 그가 반찬 중에서도 채소 볶음을 주목했다. 양파와 양배추 가운데 파묻힌 소시지를 그릇을 탁탁 쳐 가장자리로 굴려내더니 덥석 입에 넣어버렸다.
“아 그거 전에 뱉은 거....”
유비가 재차 마음에 상처를 입을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소시지를 뱉지 않았다. 눈이 동그래져서 먹더니 아예 반찬 그릇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아, 안돼, 손으로 잡지마 내가 골라줄게!”
유비가 허둥지둥 소시지를 골라서 제갈량에게 먹여주었다. 행복한 표정으로 소시지를 오물거리는 제갈량을 보면서 유비는 이게 어찌된 일인지 어리둥절해져버렸다.
“역시... 조금씩 고양이에서 제갈량으로 돌아오고 있는 걸까?”
그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서 오늘은 비록 커피에 모래를 덮었지만 내일은 커피를 마실 거고 그 다음에는 신선마법도 쓸 수 있게 되고...”
“신선마법 전에 신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황충이 말했다.
“아니면 저 상태로 무슨 사고를 칠줄 알고 그러십니까.”
“응, 그건 그래.”
유비는 재빨리 생각을 취소했다.
“저기 형님! 그렇게 다 골라주면 형님은 뭘 드시려고!”
“응?”
정신 차리고 보니 소시지 야채 볶음이 그냥 야채 볶음이 되어버렸다. 소시지가 떨어진 걸 깨닫고 제갈량이 시무룩해졌다.
“또 사줄게!”
유비가 씩씩하게 말했다.
“걱정 마. 금방 마트 다녀올게. 잠깐 혼자 있을 수 있지?”


유비는 서둘러서 소시지와 반찬거리 뿐만 아니라 고양이 캔과 간식용 육포도 샀다. 캣닙이 들어간 장난감에 조금 솔깃했지만 그 제갈량이 팔짝팔짝 뛰다가 넘어지면 다칠 위험이 너무 컸다. 고양이 장난감은 포기하고 그냥 자기가 열심히 놀아주기로 유비는 새삼 결심했다.
‘제갈량이랑 뭘 하며 놀면 재미있을까...’
지금까지는 뭐 했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안고 쓰다듬는 것 말고는 한 게 없는 것 같았다. 장난감을 흔들어주는 거 말고 달리 고양이와 할 수 있는 놀이가 없을까.
“야옹.”
고양이 소리가 들려 유비가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도원관 근처에서 가끔 보던 얼룩 고양이가 있었다.
“안녕, 얼룩아. 나 오늘은 집에 빨리 가봐야 하는데 말이지....”
고양이가 좀 더 유비에게 다가오더니 그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평소 같으면 아는척 해줘서 참 좋고 소시지라도 하나 사다 먹였을텐데 오늘은 정말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유비가 뒤로 다리를 빼었다.
“애옹.”
다른 고양이가 뒤로 달라붙었다. 평소에 고양이를 좋아는 해도 이렇게 인기있어본 적은 없는 유비는 당황해버렸다.
‘얘들이 갑자기 왜 이래?’
얼룩 고양이가 유비의 바지에 매달려 야옹거렸다. 혹시 밥이 떨어졌다. 유비가 근처 급식소로 가봤다. 급식소 그릇에는 사료도 물도 남아있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유비가 든 비닐봉지를 건드렸다. 발톱에 찢어질까봐 유비가 고양이캔과 간식이 든 봉지를 높이 들어올렸다.
‘아, 혹시 이거 때문인가?’
“저, 얘들아... 미안하지만 이건 안 돼. 제.. 우리집 고양이 거란 말이야.”
유비가 비닐봉지를 쥐고 사정했다. 그러나 이미 고양이 세 마리가 그를 포위하고 다가오고 있었다.
“야옹.”
애처로운 얼굴을 하고 고양이들이 유비의 다리에 매달렸다. 발톱을 청바지에 건 채 꾹꾹이를 했다. 제갈량의 다소 파괴적인 대형 꾹꾹이만 받다가 조그만 솜방망이를 보니 유비는 그만 마음이 약해졌다.
“....그럼, 딱 하나씩 만이야.”
캔은 어차피 셋이 나눠먹기엔 양이 부족할 것이다. 유비가 간식용 육포를 꺼내 봉지를 뜯었다. 길쭉한 육포 조각을 세 개 꺼내 세 고양이에게 각각 하나씩 물려주었다.
고양이들이 만족스러운 표정이 되어 유비에게 몸을 비볐다. 유비도 고양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른 한손으론 꼭 쥔 비닐봉지를 등 뒤로 높이 들고.
“자, 원래 간식은 한 번에 많이 안 먹는 거야.”
유비가 일어나서 살짝 뒤로 물러났다.
“다음에 또 간식 같은 거 사줄게. 잘 있어, 또 보자~”
고양이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유비는 후다닥 그 자리에서 도망갔다. 삼대 일로 포위당해 불가항력으로 간식을 뜯기긴 했지만 그래도 식사캔은 사수했다. 그냥 봉지를 들고 지나갔을 뿐인데 길고양이들이 전에 없이 반겨주는 걸 보니 유비는 제갈량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좀 궁금해졌다. 제갈량이 닭고기보다 참치를 더 잘 먹던 걸 생각해서 이번엔 모두 참치로 골랐다. 집에 가면 맛있는 캔을 잔뜩 사냥해오는데 성공한 유비를 제갈량이 자랑스럽게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렇게 유비는 꿈과 희망에 부풀어 도원관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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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히삼 세계의 꿈과 희망은 깨지라고 있는 법.....


후회 if 3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유비 옆에 제갈량이 누워있었다. 유비에게 폭 기대서 부비적부비적 애교를 부렸다. 유비가 그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제갈량을 끌어안으려고 팔을 벌렸다.
“제갈랴앙.....”
“냐앙!”
“꾸엑!!”
갑자기 배와 가슴을 밟히고 유비가 눈을 번쩍 떴다. 정신을 차려보니 제갈량이 그를 올라탄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갈색 귀가 쫑긋거렸다.
“냐아.”
그가 앞발이 아니라 손을 들어 유비의 얼굴을 툭툭 때렸다.
“이, 일어났어. 일어났어어....”
유비가 제갈량 아래서 기어나왔다. 그가 침대를 빠져나가자 제갈량이 유비가 나온 이불 동굴 속으로 쏙 들어가 몸을 말았다.
“....응, 거기 따뜻해서 마음에 들어?”
유비가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냐아아-”
따뜻한 이불동굴도 차지했으면서 제갈량은 아직 불만이 있어보였다. 유비는 잠깐 고민하다 곧 지금이 아침임을 떠올렸다.
“밥 먹을래?”
“냐아.”
팔다리를 모으고 엎드린 일명 식빵자세를 한 제갈량은 침대에서 움직일 뜻이 없어보였다. 배고픈 게 맞길 바라며 유비가 침치와 그레이비 소스라고 써 있는 캔을 따서 보시기에 담고 밥그릇에 물도 떠서 침대로 가져왔다.
어제는 엄청 경계하며 깨작거렸는데 오늘 아침엔 사양 않고 찹찹 먹었다. 그릇까지 싹싹 핥아먹는 걸 보니 일찍 일어나 밥을 주지 않은 게 몹시 후회되고 미안했다.
‘혹시 제갈량 혀도 까슬까슬해졌으려나.’
어제 유비 입가를 핥아주긴 했는데 그땐 너무 놀라고 곧 의자째 뒤로 넘어가서 혀 감촉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유비는 조금 억울해졌다. 제갈량이 핥아줬는데 기억도 못하고.
사료를 다 먹고 제갈량이 물그릇으로 주의를 돌렸다. 몇 번 물을 할짝거리다 그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물을 내려다보았다. 몇 번 더 핥아보다 그가 얼굴을 그릇에 담그려고 했다.
“아앗, 안 돼! 왜 그래!”
유비가 제갈량의 목덜미를 잡았다. 제갈량이 입가에 묻은 물을 낼름 핥았다.
“물이 잘 안 마셔져서 그래?”
유비가 물었다. 제갈량은 대답 없이 유비만 빤히 보았다.
‘그치, 고양이는 사람 말 모르지.’
잠깐 생각하다 유비가 제갈량의 턱을 손으로 받쳐들었다. 그리고 물그릇을 들어 조심조심 제갈량의 입에 물을 흘려넣어 주었다.
처음에만 해도 잔뜩 긴장해서 목을 빼려던 제갈량이 곧 유비의 의도를 깨닫고 입술을 벌려 물을 받아마셨다. 그 모습이 귀엽지만 안쓰럽기도 했다. 제갈량이 이렇게 아무것도 못해서 그에게 의지하는 게 기쁘면서도 속상해서 유비는 혼란스러웠다.
한참 있다 충분히 마셨는지 제갈량이 유비의 팔을 밀어내었다. 유비가 물그릇을 내려놓고 제갈량을 놔주었다. 입가로 흐른 물도 닦아주었다.
“다 먹었어? 아이 착하다.”
유비가 제갈량을 쓰다듬었다. 칭찬하는지 아는 것처럼 제갈량이 웃으며 유비의 손길에 기댔다.
다 먹은 쟁반을 들고 일어나려다 유비가 멈칫했다. 소스와 물이 시트에 튀어있었다.
“빨아야겠네.”
빨래는 문제가 없었다. 다시 여기서 식빵을 구우려고 자세를 잡는 제갈량만 아니라면.
“음... 그래. 여기가 따뜻해서 좋은 거라면 방법이 있어!”
유비가 벌떡 일어나 자기 방으로 갔다. 그리고 온찜질 매트를 꺼내 자기 침대에 깔고 이불을 덮었다.
“제갈량~ 여기가 더 따뜻한데 오지 않을래?”
제갈량이 유비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다니 뭔 오두방정을 떠는지 구경은 해주마 하는 새침한 태도로 유비 방으로 따라갔다.
“봐, 여기 따뜻해.”
유비가 제갈량의 손을 끌어다 찜질 매트에 올렸다. 제갈량은 매트 여기저기를 손으로 대보곤 폴짝 뛰어 침대로 올라갔다.
“됐다!”
유비가 온도를 약으로 고정하고 타이머를 맞춘 뒤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나서 공손찬의 방으로 가서 시트를 걷었다.
“저, 형님.”
영웅패들이 그의 곁에 모여들었다.
“아침은 언제 드실 겁니까.”
“아.”
유비가 멈칫했다.
“미안, 빨리 아침 차려줄테니까...”
“저희는 괜찮습니다, 안 먹어도 문제 없고. 하지만 주군은 인간이고 식사를 제때 하셔야 합니다.”
“응, 알았어.”
유비가 머리를 긁적였다.
“날 뒷전으로 하고 제갈량만 챙기려던 건 아니었어.... 그냥, 처음 하는 거다 보니까 더 긴장해서 하게 되는 거라고나 할까.”
“애완동물 안 키워보셨어요?”
“응. 키우고는 싶었는데... 나도 어렸고 사부님도 뭘 살뜰히 돌보고 그러시는 분은 아니다 보니까.”
유비가 쓸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래. 제갈량은 진짜 고양이가 아니고 신선인거 알아. 그러니까 원래대로 돌아올 때까지 챙겨줘야지. 안 그래?”
“예..... 그거야.”
“우선은 밥부터 먹자. 반찬 할만한 게 뭐가 남았을까...”
유비가 부엌으로 갔다. 영웅패들도 그 뒤를 따랐다.


밥을 먹고 나서 유비는 바로 이불을 빨았다. 세탁기 돌려놓고 청소 하면서 유비는 제갈량이 진짜 고양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털은 안 빠질 테니까.
‘저 크기로 털이 빠지면 장난 아니겠지.’
쓰다듬거나 할 땐 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건 머리카락이 있으니까 괜찮았다.
“원래대로 돌아온 후에도 쓰다듬게 해주면 좋을텐데.....”
영웅패들이 미친놈 보듯 보는 것도 모른채 청소를 끝내고 유비는 빨래를 널러 나갔다. 먼저 이불을 덮고 나머지 빨래를 가지러 들어가니 제갈량이 나와있었다.
“어, 안 자고 나왔어? 심심해?”
제갈량은 어쩐지 바보 취급하는 것 같은 시선으로 유비를 보더니 뒤뜰을 종종 돌아다녔다. 그러다 화단에 가서 꽃봉오리를 킁킁거렸다.
“아....”
제갈량은 고양이가 되어서도 서서의 화단을 좋아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유비는 조금 슬퍼졌다. 화단 옆에 발라당 옆으로 누워 햇볕을 쬐고 있는 제갈량을 보다 유비는 빨래를 마저 널었다.
“오늘은 꽤 흐리네. 얼른 구름 걷히면 좋을텐데.”
빨래는 물론이고 제갈량도 햇빛 따끈따끈한 편이 기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저렇게 흙바닥에 드러누워도 되나?’
어제 제갈량이 자기 손등을 핥던 게 생각났다. 고양이라고 생각하면 그루밍은 당연하지만 저대로 제갈량이 온 몸을 핥아대는 건 좀 걱정이 되었다. 그야 신선은 알아서 깨끗해지니까, 핥았다가 병에 걸릴 걱정은 없겠지만....
‘깨끗.... 해지는 거 맞지? 그 짜잔~ 안 하면 안 깨끗해지고 계속 먼지투성이로 있거나 하면 어쩌지? 고양이 상태일 때는 자동적으로 깨끗해지지 않으면?’
‘더러워지지 않는’ 게 아니라 ‘깨끗해지는’ 거라는 점이 뒤늦게 걱정이 되었다. 서둘러 빨래를 다 널고 유비가 제갈량에게 가보았다. 가까이 가자 제갈량이 실눈을 뜨고 유비를 올려다보았다. 잘 있는데 괴롭히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유비는 제갈량을 들어올렸다.
제갈량은 눈만 깜빡거리고 잠자코 유비가 자길 들어 올리게 놔두었다. 제갈량의 옷에 흙이 묻어있었다.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다가와 유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 흙은 털면 되지만 많이 더러워지면 자칫 냥빨을 해야 할지도 몰라.’
고양이는 목욕을 싫어한다. 역시 목욕을 싫어해도 물에 들어가는 건 좋아하는 개와는 달리 고양이는 아예 물을 싫어했다. 그래서 고양이를 목욕시키려면 큰 고생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제갈량같이 큰 고양이가 목욕 싫다고 날뛰면 어떻게 될지 유비는 상상하기 무서워졌다.
“자, 제갈량. 집안으로 들어가자. 안이 더 따뜻하고 창가엔 햇볕도 들어오고.....”
유비가 제갈량에게 묻은 흙을 꼼꼼히 털었다. 유비가 무슨 짓을 왜 하는 건지 제갈량은 이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래도 유비의 목을 안고 어깨에 기댄 채 유비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옷을 다 털고 유비가 제갈량의 손을 잡아들고 흙을 털었다. 땅바닥을 딛고 돌아다녀서 그런지 터는 것만으로는 완전히 깨끗해지지 않았다. 손은 제갈량이 그루밍을 하려들 경우 제일 먼저 핥을 곳이기도 했다.
유비가 손수건을 꺼내 침을 묻혀서 손가락 틈까지 싹싹 닦아주었다. 그리곤 다시 더러워질 새라 자기가 안아든 채 집으로 들어갔다.
제갈량이 자기 손을 보고 유비를 보았다.
“침 묻혀 닦아서 싫어? 들어가서 제대로 물티슈로....”
낼름.
제갈량이 유비의 얼굴을 핥았다. 유비가 입을 딱 벌릴뻔 하다 황급히 다물었다. 그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제갈량이 유비의 얼굴을 할짝거렸다. 막으려고 유비가 손을 들자 손가락을 물었다.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유비는 제갈량을 안아든 채 굳어버렸다. 그 틈을 타서 제갈량이 마음껏 유비를 그루밍했다.
‘아.... 제갈량 혀는 안 까슬까슬하구나.’
쓰러지기 전에 유비가 서둘러 소파에 가 털썩 주저앉았다. 몸이 출렁하자 제갈량이 놀랐는지 유비를 밀어내고 소파 가장자리로 가 저쪽을 바라보았다. 유비는 그저 그루밍이 끝났다는데 안도했다.
‘아니, 싫다는 건 아니지만.’
제갈량이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뺨이며 턱을 핥아주는데 싫을 리가 없었다. 그저 부끄럽고 쪽팔리고 얼굴맛이 이상했을까봐 무서울 뿐이었다.
‘...얼굴맛이 뭐야, 정신차리자 나.’
“냐앙.”
제갈량이 부르는 소리에 유비가 고개를 들었다.
“응, 제갈량 왜.....”
제갈량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창밖이 보였다. 아까보다 훨씬 더 어두워진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으아악, 금방 빨래했는데!”
유비가 우당탕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제갈량이 그의 뒷모습을 쭈욱 눈으로 따라가다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유리창에 빗물이 부딪쳐 흘러내렸다. 창밖으로 유비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빨래를 걷는 동안 제갈량은 유리창에 맺힌 빗방울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빨래를 전부 안에다 다시 널고 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문단속도 다 한 뒤 유비는 진이 빠져서 장부 정리나 하기로 했다. 이런 날은 컨디션도 저하되어서 무리하게 수련해봤자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책상 앞에 앉아 익숙하지 않은 숫자를 붙들고 끙끙거리고 있는데 옆에서 타박타박 소리가 다가왔다. 하는 짓은 고양이래도 몸이 고양이가 아니어서 제갈량은 소리 없이 걷기는 못했다. 유비는 제갈량이 움직이는 걸 알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고양이 발바닥 젤리를 만져볼 수 없어서 아쉽다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역시 손도 고양이발인게 좋았을까...’
제갈량 발 젤리를 말랑말랑 폭신폭신 만지작거리는 망상에 빠져있는 유비 앞에 제갈량이 나타낫다. 그리고 의자 옆에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제갈량. 배고파?”
그리고 유비는 생각해보았다. 그는 어제 고양이 캔을 다섯 개 사왔다. 어제 하나 오늘 아침에 하나 먹었고 지금 또 까주면 오늘 저녁하고 내일 아침 먹이고 나면 또 사와야 한다.
‘기왕이면 오늘 낼 정도에 원래대로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제갈량이 상체를 세워 유비의 허벅지에 손을 걸쳤다. 또 꾹꾹이를 하려나 기대했으나 제갈량은 그를 딛고 책상 위로 뛰어올랐다.
“으악, 안 돼, 제갈량!”
그동안 수련을 열심히 한 보람이 있어 유비는 제갈량이 노트북을 마구 밟아버리기 전에 그를 끌어안고 무릎에 앉힐 수 있었다.
“자, 착하지. 쓰다듬어줄게 여기 있어.”
“냐아.”
“응, 그래. 장부보다 제갈량이 더 귀여워.”
성인 남성 한 명 분 크기와 무게를 무릎에 앉히는 건 불편하지만 그 무게가 노트북을 박살내는 것보다는 나았다. 영웅패들의 시선을 꿋꿋이 무시하며 유비는 제갈량이 편히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같이 몸을 뒤척였다. 좁은 팔걸이 의자라 엎드린 형태로는 아무래도 자세가 안 나와서 사람처럼 무릎에 엉덩이 대고 앉히고 유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했다.
불편하다고 금방 딴데 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제갈량은 한참을 그렇게 안겨있었다. 그러고 유비가 장부를 보고 있으려니 귓가에 골골 소리가 울렸다. 유비가 제갈량을 돌아보았다. 유비의 어깨에 턱을 얹고 있는 제갈량의 옆얼굴은 편안해보였다.
‘나랑 있어서 좋아, 제갈량?’
묻고 싶은데 차마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무릎에 앉아 골골거리는 걸 보면 적어도 고양이 제갈량은 유비랑 있는 게 좋은 것 같았다. 유비가 제갈량의 턱을 살살 긁어주었다.
‘제갈량이 신선으로 돌아온 뒤에도, 나를 이렇게 좋아해줄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나 확신할 수가 없었다. 제갈량이 서서의 화단 옆에 누워있던 게 생각났다. 유비가 제갈량을 쓰다듬었다. 장부도 다리가 저린 것도 잊고 그가 제갈량만 꼭 끌어안았다.




후회 if 2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습식 캔 사료와 대형견용 방석을 사들고 유비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사료는 사료라도 닭고기와 연어에 소스를 끼얹었다는 설명은 신선의 존엄성을 그리 크게 해치지는 않을 것처럼 보였다. 물그릇도 사고 싶었지만 구슬 급수기는 제정신으로 돌아온 제갈량에게 죽기 직전까지 괴롭힘 당할게 두렵고 고양이 분수는 도원관 살림에 너무 비쌌다. 물도 밥도 그냥 사람 밥그릇이나 국그릇에 담아 주는 게 가장 품위도 지키고 돈도 안 들 것 같았다.
살 거 사고나니 집에 혼자 있을 제갈량이 걱정되었다. 제갈량이 도원관을 때려 부쉈을까봐도 걱정 되고 혹 장각이 쳐들어와서 지금은 제대로 저항도 못 할 제갈량을 데려가 버리지나 않았을지도 걱정이 되었다.
“제갈량!”
유비가 서둘러 도원관에 뛰어들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제갈량이 유비에게 뛰어올랐다.
“냐아!”
유비는 깜짝 놀라 자빠질 뻔했다가 제갈량을 받아 안았다.
“미안, 혼자서 심심했어?”
짐을 놓고 제갈량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면서 현관에 발을 들이자.
바닥이 따뜻했다.
유비가 슬쩍 발로 근처를 더듬었다. 일부분 외에는 그냥 찬 마룻바닥이었다.
“제갈량....”
유비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현관에 혼자 앉아있었을 제갈량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려고 했다. 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유비가 제갈량을 소파에 들어다 앉혔다.
“잠깐만 기다려. 밥 갖다줄게.”
유비가 오목한 접시에 캔을 따서 담고 밥그릇에 깨끗한 물을 담아 제갈량에게 갖다주었다. 제갈량이 한참을 냄새 맡더니 소시지 때보다 신중한 태도로 작게 한 입 떼어먹었다.
유비가 긴장해서 제갈량의 기색을 살폈다. 제갈량이 오물오물 닭고기를 씹었고, 삼켰다.
그가 사료를 한 입 더 먹자 유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잘 먹으니까 예쁘다.”
유비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먹다 말고 제갈량이 유비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유비가 다시 긴장할 때쯤, 다시 한 입을 먹었다.
“아주 큰형님을 들었다 놨다, 신선일 때보다 더하구만 더해.”
장비가 투덜거렸다.
“아구아구 다 먹어버리고 더 달라고 보채는 것보단 나은걸. 저 캔 비싸다고.”
조운이 말했다. 영웅패들까지 도원관 재정을 걱정해주는 현실에 유비는 진짜로 눈물이 날뻔했다.
‘제갈량이 고양이가 되어 비싼 사료만 먹어도 걱정 없도록 미리 돈을 벌어뒀어야 했는데...’
돈을 버는 이유가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은 그 후에 들었다.
이만큼 유비를 애태웠으면 충분하다 여겼는지 제갈량이 반쯤 먹은 캔사료에서 눈을 돌려 이번엔 물을 핥았다. 한참을 할짝거렸지만 인간의 혀로 충분한 물이 섭취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좀 더 편하게 마시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유비가 고민하는 기색을 느꼈는지 제갈량이 물을 마시다 말고 다시 그를 주목했다.
“냐아.”
제갈량이 유비 쪽으로 고개를 쭉 뻗었다. 저러다 제갈량이 소파에서 굴러 떨어지기라도 할까봐 유비는 서둘러 그 옆에 가 앉았다.
“먀아-”
제갈량이 유비의 팔에 고개를 비볐다. 그 모습이 워낙 귀엽고 또 이제는 자기에게 마음을 열어준 것처럼 보여서 유비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제갈량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갈량이 눈을 치켜떴다. 유비는 찔끔해서 손을 떼었다.
제갈량이 슥 손을 내밀었다. 할퀴어질 각오를 하고 유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제갈량은 할퀴는 대신 유비의 손을 긁어다가 자기 머리에 도로 올려놓았다.
“냐.”
“으, 응! 그래! 계속 쓰다듬을게!”
유비가 의욕에 넘쳐 제갈량을 쓰다듬었다. 고양이에게 하듯 머리부터 등까지 한 번에 쓰다듬자 제갈량이 기분 좋은 듯 몸을 쭉 폈다. 한 손으론 쓰다듬고 다른 손으론 물그릇 밥그릇을 쏟지 않게 치우며 유비는 마음껏 제갈량을 어루만졌다.
‘아, 제갈량이 고양이가 되니 좋은 점도 있구나...’
제갈량이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고롱고롱 소리를 내었다. 유비가 살짝 그의 볼을 손가락으로 찔러보았다. 제갈량이 슬쩍 째려보곤 유비의 손가락을 손으로 밀어내었다.
‘손도 고양이 솜방망이였어도 귀여웠을텐데.’
그러나 정말 고양이 발이었으면 손톱도 고양이 발톱이었을 거고 유비의 손등엔 피가 맺혀 있었을 거다. 있는 거에 만족하기로 하고 유비가 고양이 귀를 만졌다. 짧고 보드라운 털로 덮여있는 귀가 귀찮다는 듯 쫑긋거렸다. 장난삼아 귀에 숨을 후 불어넣자 제갈량이 고개를 파다닥 털었다.
‘귀여워어어......’
제갈량을 꽉 끌어안고 부비대고 싶었다. 그러나 그랬다간 제갈량이 또 할퀼까봐 유비는 자제했다.
제갈량의 귀를 만진 건 그저 자기 흑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의 어디가 얼만큼 변화했는지 알아야 변화에 대처할 수가 있으니 확인하려는 건전한 목적도 있었다.
귀를 확인했으니 다음은 꼬리였다. 유비가 제갈량을 쭉 쓰다듬으며 슬쩍 꼬리에도 손을 대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바지에 꼬리 구멍이 나서 빠져나와 있었다. 제갈량의 다리보단 조금 짧은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옷이 제갈량에게 맞춰 변하는 건가? 신선은 편리하네.’
그러고 보니 내내 몸을 웅크리고 있어 잘 몰랐는데 지금 쭉 편 모습을 보니 키가 조금 줄어든 것 같았다. 고양이는 들면 쭉 늘어나는 걸 생각할 때 그냥 눈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유비는 제갈량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들어올렸다.
“자, 제갈량. 잠시만 서 봐.”
제갈량이 귀찮은 듯 유비를 노려보았지만 바둥거리거나 할퀴지는 않았다. 수직으로 세워보니 줄어든 게 확실했다. 이전에는 유비와 비슷한 키였는데 지금은 그의 눈높이 정도에 왔다.
‘자칫 깔려 넘어져도 목뼈가 부러질 걱정이 조금 줄어들었으려나...’
“먀아.”
제갈량이 불편하다고 항의했다. 유비가 그를 소파에 도로 내려놓았다. 제갈량이 불만스러운 태도로 유비에게 등돌리고 돌아앉았다.
“아... 제갈량 또 화났다.
“아니 저 녀석은 뭐 저리 금방 화냅니까.”
장비가 화를 내었다.
“우리 큰형님이 뭐 저 비위 맞춰주기 위해 있는 줄 아나.”
“그럴지도.”
유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이 키우는 사람들은 집사라고 하잖아. 어디선 심지어 캔따개라던데.”
“인간의 존엄성 어따 팔아먹었습니까.”
“고양이가 그런 걸 신경쓸 리 없잖아.”
유비가 천천히 제갈량의 뒤통수에 손을 대었다. 제갈량이 안 할퀴고 가만히 있자 다시 그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관우가 헛기침했다.
“저, 형님.”
“응?”
“저녁은 언제 드실 겁니까?”
“아.”
고양이가 된 제갈량 문제로 이리 고민하고 저거 하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많이 늦었다. 유비가 일어나자 제갈량이 올려다보았다. 유비가 그의 머리를 두어 번 더 쓰다듬고 턱 밑을 긁어주었다.
“자, 착하지. 나랑 영웅패는 밥 먹어야 하니까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있어야 해.”
그리고 유비는 서둘러 부엌으로 갔다. 제갈량에게서 오래 눈을 뗄 수가 없으니 요리를 새로 하는 대신 밥을 푸고 밑반찬만 꺼내놓았다.
하지만 혼자라면 모를까 영웅패들도 있는데 이것만으로는 너무 적었다. 유비가 아까 제갈량이 한 개 먹고 버린 식은 소시지도 데워서 가져왔다.
‘냉장고에 먹을 게 없네...’
유비는 고민에 휩싸였다. 내일 장을 보러 나가야 할텐데 제갈량을 두고 나가자니 혼자 현관에 앉아 사람을 기다리던 제갈량이 못내 눈에 밟혔다. 냉정하게 구는 것 같아도 제갈량이 유비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는 게 명백한데 혼자 방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처음에 하악거렸던 거 생각하면 참 쉽게 같이 사는 사람으로 인정받았네. 고양이가 되긴 했어도 그 저에 여기서 같이 살았던 익숙함 같은 게 남아있는 걸까.’
어쩌면 이렇게 하나하나 익숙한 상황을 떠올리다 자기가 신선이라는 것까지 자각하면 원래대로 돌아올 지도 모른다. 역시 최대한 예전같이 대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불쑥 식탁 옆에서 제갈량의 머리가 솟았다. 그가 식탁 위를 슥 둘러보자 밥 먹던 영웅패들이 긴장했다. 그들이 슬슬 제갈량의 반대편이나 유비 옆으로 이동했다.
“왜, 배고파? 제갈량도 밥 줄까?”
아까 먹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제갈량 체격을 생각하면 사료 반 캔은 간에 기별도 안 갔을지 모른다.
“냐아.”
제갈량이 유비 옆으로 옸다. 그의 다리에 손을 올리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냥 심심한... 으악!”
제갈량이 유비 무릎 위로 뛰어올랐다. 보통의 큰 고양이였다면 사뿐히 안착했겠지만 제갈량은 조금 줄어들었긴 해도 여전히 거의 유비만 했다. 유비가 다리로 몸으 ㄹ버티고 양 팔로 제갈량을 안아서 겨우 의자째 넘어지지 않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제갈량, 나 밥먹...”
제갈량이 유비의 얼굴을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쭉 뻗어 그의 입가를 낼름 핥았다.
“우왓!”
애써 균형 잡은 보람도 없이 유비가 의자째 뒤로 넘어갔다. 다행히 뒤통수를 바닥에 갖다 박지는 않았지만 등도 옆구리도 아팠다.
“아고고....”
“냐아.”
유비가 넘어질 때 자기는 잽싸게 뛰어내려 피한 제갈량이 옆에 앉아 유비를 내려다보았다.
“제갈량......”
유비가 울상을 했다.
“자기 크기를 생각하고 움직여줘, 너 고양이가 아니라 퓨마만 하단 말이야.”
제갈량이 고개를 갸웃 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유비의 볼을 할짝였다.
“괜찮으십니까 형님!”
영웅패들이 식탁 가장자리로 달려와 내려다보았다.
“응, 난 괜찮아. 넘어지긴 했어도 머리도 안 부...읍!”
제갈량이 입술까지 핥는 바람에 유비는 입을 다물고 화다닥 일어섰다.
“나 입에 뭐 묻기라도 했어?”
조운이 손을 들었다.
“저, 실은 밥풀이 묻어있었는데요.”
“윽.”
유비가 쥐구멍을 찾았다. 절대로 자기가 원래 입가에 뭐 묻혀가며 먹는 사람이 아닌데, 그런데 딱 한 번 묻은 걸 제갈량이 핥아먹는 바람에....
제갈량이 핥았다. 그걸 뒤늦게 깨닫고 유비는 경직했다.
‘제, 제갈량이 내 입... 얼굴을 핥았어!’
유비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야 제갈량은 지금 고양이고 무슨 의도가 있었을 리는 추호도 없고 그냥 밥풀을 떼어먹은 것 뿐이겠지만.
‘아니.... 그게 더 부끄러워.’
유비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너무 부끄러워서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제갈량은 왜 그런 걸 핥아먹어서....”
“냐아.”
제갈량이 유비의 자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걸 지지삼아 몸을 쭉 폈다. 거대 고양이가 자기 몸을 타고 오르려고 하자 유비는 손을 내려 그를 받쳐주었다.
“영차.”
안아 올리기엔 좀 많이 크고 무거웠지만 그동안 열심히 단련한 덕분인지 그럭저럭 제갈량을 들 수 있었다.
“안 무거우십니까, 주군?”
“무거워.”
차라리 제갈량이 사람처럼 목에 팔을 걸고 있으면 안정감이 있어서 힘이 덜 들 텐데 고양이처럼 웅크려서 팔을 잡고 매달린 자세로 안겨 있으니 균형이 잘 안 잡혀서 힘이 더 들었다. 이대로 서 있을 수가 없어 유비가 소파로 가 앉았다.
“형님, 저녁은.”
“너희 먼저 먹어.”
소파에 앉자 제갈량이 편하게 몸을 쭉 폈다. 그래도 유비 무릎에서 내려가지는 않았다.
“제갈량은 무릎냥이었구나, 사람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애교있네.”
유비가 제갈량을 쓰다듬었다. 제갈량이 좀 더 유비에게 몸을 비비적거리다 눈을 감았다.


‘이제 그만 일어나야 하는데....’
제갈량의 무릎방석이 되어준 지 삼십 분, 유비는 초조하게 시계를 보았다.
저녁도 다 못 먹고 설거지며 뒷정리도 해야 했다. 무엇보다 다리가 저렸다.
유비가 살며시 제갈량의 머리를 받쳐들고 몸을 빼려 했다.
“냐아.”
제갈량이 투정부리듯 몸을 뒤채며 유비의 손을 밀어냈다.
“제갈랴앙, 나 다리 저려...”
유비가 호소하자 제갈량이 한 눈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고마워, 제갈량. 고양이가 되어서도 내 말을 알아듣다니 역시 천..... 악!”
제갈량이 모아쥔 손으로 자기가 베고 누웠던 유비의 허벅지를 꾹 눌렀다. 양 손으로 번갈아 꾹꾹 누르며 유비를 쳐다보았다. 그냥 누르는 것도 아니라 손가락 끝으로 꽈악꽈악 리듬감있게 눌러대는 통에 유비는 눈물이 찔끔 나 버렸다.
“아, 아파아...”
유비가 제갈량의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그런데도 제갈량은 팔을 쭉 뻗어 꾹꾹이를 계속했다. 제갈량이 꾹꾹이를 해주는 건 좋지만 사람 힘으로 저린 다리를 눌러대는 건 고문이 따로 없었다. 유비는 울지 않으려고 애쓰며 다리를 이리저리 돌려 저린 걸 빨리 풀려고 노력했다.
“큰형님, 그러고 있지 말고 그놈을 좀 혼내시구랴!”
장비가 소리쳤다.
“고양이고 뭐고 그거 맞춰주다가 형님이 결딴나겠소!”
“그치만 꾹꾹이는 애정표현인걸.”
“거 애정표현 두 번만 했다간 사람 잡겠네.”
“제갈량이 너무 커서 그래.”
유비가 그를 밀어내는 걸 그만두고 당겨서 끌어안아버렸다. 덥석 끌어안긴 제갈량은 바둥대더니 유비가 놔쥐자 폴짝 뛰어내려 어슬렁어슬렁 방으로 가버렸다.
“밀어내면 달라붙고 끌어당기면 귀찮아하고.”
장비가 투덜대었다.
“어느 장단에 춤추란 건지.”
“그래도 귀엽잖아.”
유비가 말하자 영웅패 전원이 그를 쳐다보았다.
“왜....”
“형님이 예전부터 제갈량에게 너무 무르다고는 생각했지만...”
관우가 헛기침했다.
“형님 사실은 얼빠셨습니까?”
“뭐...”
“그건 그래.”
유비가 반론하기도 전에 조운이 관우에게 찬성했다.
“조조한테도, 전혀 우호적으로 만난 게 아닌데도 막 좋아서 달라붙고. 폭죽 사건 때도 유기님이 미남이라 다행이라 그랬고.”
“내가 그랬어?”
유비가 되물었다.
“그러니 유비님이 제갈량에게 약한 건 할 수 없지. 제갈량보다 더한 미인을 어디서 찾아내지 않는 한은...”
“내가 인간이 되기 전에는 어렵겠군 그래.”
장비가 말했다. 유비는 웃지 않으려고 온힘을 다했다.
“아, 이럴게 아니라 빨리 설거지 해야겠다.”
유비가 일어났다. 그리고 부엌에 가면서 먼저 방을 들여다보았다.
제갈량은 침대에 웅크리고 엎드려 눈으 감고 있었다.
‘자나?’
집고양이는 원래 자거나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본업이라고 들었다. 고양이다운 행동양식을 보이는 것 뿐이라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먹다 말아서인지 식욕이 사라져서 계속 저녁을 먹는 대신 유비는 설거지를 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렸다. 그러고 나니 잘 시간이 되었다. 별 생각 없이 방문을 연 유비는 제갈량이 몸을 반달같이 뒤로 휘고 팔다리를 쭉 뻗은 채 침대에 사선으로 누워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
유비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제갈량은 계속 그 자세 그대로였다.
‘......고양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게까지 이상한 자세는 아니지마안.....’
그가 입을 꾹 닫고 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웃으면 분명 제갈량은 자기 비웃는 걸 칼같이 눈치채고 일어나 유비를 할퀴러 올 것 같았다. 마음껏 활개치고 자고 있는 제갈량을 깨우지 않도록 유비가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아, 난 어쩌지?’
공손찬의 방에 가서 자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리도 도원관에 방이 더 있어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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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가 제갈량에게 침대 뺏기고 소파에 쭈그리고 누워 힝 하게 하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도원관에 방이 더 있더라고요..... (내가 힝)



후회 if 1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Characters: 제갈량. 유비. 관우 장비. 조운. 황충. 마초.
Rating: PG-15
Warnings: 없음
Summary: 고양이가 된 제갈량을 유비가 건사하느라 고생합니다.


후회에서, 장각의 동물빔을 맞은 게 유비가 아니라 제갈량이었다면. :)




“드림배틀의 군주는 인간만이 될 수 있지.”
장각이 로켓포 같은 걸 어깨에 메고 유비를 조준했다.
“그럼, 네가 인간이 아니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어디 한 번 시험해 볼까아?”
선계병에게 팔다리가 붙들려 유비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장각의 포에서 보라색 연기 뭉치 같은 것이 유비에게 날아갔다.
“안 돼!”
제갈량이 변신을 풀고 나타나 유비 앞을 가로막았다. 보라색 연기에 감싸여 그가 비명을 질렀다.
“제갈량!”
유비가 팔에 힘을 주어 선계병을 떨쳐내었다. 마초의 너클로 그것들을 쳐 날려버리고 유비가 제갈량에게 달려갔다.
“제갈량! 괜찮아?”
연기가 사라졌다. 제갈량은 바닥에 모로 쓰러진 채 몸부림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많이 아파? 어떻게 해.....”
제갈량을 안아 일으키려다 유비가 눈을 깜빡였다. 변신 상태인 것도 잊고 마구 눈을 비볐다.
“.....제갈... 량?”
켁켁거리며 몸을 뒤틀고 있는 제갈량의 다리 쪽에 긴 밧줄 같은 게 꿈틀거렸다. 제갈량의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털로 덮인 그걸 눈으로 따라가 보니 제갈량의 엉덩이에 연결되어 있었다.
한참 켁켁거리며 숨을 몰아쉬다 제갈량이 유비를 올려다보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위로 삼각형 귀가 솟아있는 게 보였다.
“옴마나.”
장각이 자기 입을 막았다. 그가 슬슬 쓰러진 제갈량에게 다가왔다.
“세상에 이게 신선에게도 효과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어디 우리 제갈량은 무슨 동물이 되었...”
“레전드 히어로 조운!”
유비가 영웅패를 바꿔 끼웠다. 그리고 제갈량을 들쳐 메고 전속력으로 뛰어 도망갔다.
뭔진 몰라도 지금 제갈량을 장각이 손대게 둘 수는 없다. 유비 머릿속엔 그 생각 뿐이었다.


도원관까지 도망 와서 일단 앞뒤 문과 창문까지 다 잠그고 유비가 제갈량을 내려놓았다. 내려놓자마자 제갈량이 휙 몸을 날려 소파 뒤로 숨었다.
“저... 제갈량?”
유비는 충격을 받았다.
“방금, 네 발로 뛰었어?”
제갈량이 고개만 슬쩍 내밀었다. 유비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하악 소리를 내며 이를 드러냈다.
“제갈량? 괜찮은가?‘
관우가 뛰어내려 그에게 가까이 갔다. 제갈량은 몸을 도사린 채 자기 앞으로 걸어오는 영웅패를 주목했다.
“뭐가 문제인지는 몰라도 우리 형님은 적이 아니니 그렇게 경계하지 말고 침착... 으악!”
덥석.
제갈량이 관우를 물었다. 유비가 기겁을 했다.
“제, 제갈량! 관우를 놔줘!”
제갈량이 관우를 입에 문 채 유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유비는 깨달았다.
‘고양이다. 저 표정은 고양이야!’
관우를 문 채 제갈량이 입을 오물거렸다.
까득.
“깨물지 말게! 먹지 마! 안 먹히고 영웅패는 맛도 영양도 없...”
관우가 패닉했다. 유비가 서둘러 가서 제갈량의 목덜미를 꽉 잡고 관우를 뺏었다.
“안 돼! 먹는 거 아냐. 지지!”
유비가 단호하게 말했다. 제갈량이 세상 억울하단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먀아-”
“그, 그래도 안 돼. 영웅패는 딱딱해서 씹다가 다쳐.”
관우를 확실히 뺏은 뒤 유비가 제갈량을 놔주었다. 제갈량은 유비를 원망스런 시선으로 노려보더니 소파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곤 손을 고양이처럼 모아 쥐고 유비를 탁 때렸다.
“먀.”
제갈량이 유비에게 등 돌리고 소파 위에 웅크렸다. 다리가 거추장스러운지 한참 다리를 차고 몸을 뒤채다 팔걸이를 베고 모로 누웠다.
‘귀, 귀여워.....’
잠든 척 하지만 잠들지 않은 증거인 쫑긋거리는 귀도, 불만스럽게 탁탁 바닥을 치는 꼬리도, 고양이손으로 팔을 모으고 웅크린 자세도 너무나 귀여워서 유비는 잠시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만 같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장비가 소리치는 바람에 유비가 정신을 차렸다.
“제갈량 저 놈이 왜 저러고 우리 작은 형님을 물어간 거지?”
“고양이... 가 된 것 같아.”
유비가 말했다.
“겉모습은 예전 그대로긴 하지만, 하는 짓이....”
“겉모습도 별로 예전 그대로는 아닌데요?”
조운이 제갈량 곁에 떨어질 새라 유비를 꽉 붙든 채 제갈량을 살펴보았다.
“신선은 꼬리가 없다고요.”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유비가 조금 샐쭉해졌다.
“그치만 얼굴도 몸도 그대로고 변한 건 귀와 꼬리 뿐이잖아.”
자기 얘기 하는 걸 아는지 귀가 쫑긋거렸다. 유비가 자기도 모르게 그 귀로 손을 뻗었다.
“냐!”
유비의 손이 제갈량의 귀에 닿기가 무섭게 제갈량이 손톱을 세워 유비의 손등을 할퀴었다. 납작하고 무딘 손톱이라 피는 안 났지만 피부가 하얗게 일어나서 화끈거렸다.
“제갈량....”
유비의 눈에 눈물이 글썽해졌다.
“무슨 짓인가, 주군을 공격하다니!”
관우가 자기 물렸던 것도 잊고 펄쩍 뛰었다.
“형님께서 위협을 가한 것도 아니고 그저 살짝 쓰다듬어 보시려던 것 뿐인데 그렇게...”
“괜찮아.”
유비가 말렸다.
“내가 실수한 거야. 고양이는 낮선 사람이 손 대려고 하면 할퀴는 게 당연한 걸.”
“그래도 신선이...”
“지금은 신선 아닌 거겠지. 꼬리도 그렇고.”
유비가 제갈량과 반대쪽 끝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제갈량이 고개를 들고 그의 움직임을 주목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장각의 음모지요!”
조운이 잽싸게 말했다.
“그 놈이 쏜 연기를 쐬고 이렇게 되었잖아요.”
“그거 원래는 나 노리고 쏜 거였지.”
유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뭐랬더라, 인간이 아니게 해주겠다고 했던가?”
“인간이 아니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보자고 했습니다.”
황충이 덧붙였다.
“원래는 주군을.... 고양이로 만들 작정이었던 걸까요.”
“그건 이상한데.”
장비가 말했다.
“우리 큰형님이 고양이가 뭐야, 동물로 변한다면 차라리 개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네만.”
관우가 헛기침했다.
“아무튼 목표가 인간이었다면 신선이 맞아 오작동 했을지도 몰라요. 아니, 틀림없이 그럴 거에요.”
조운이 말했다.
“그래서 제갈량을 어떻게 하면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까?”
“그, 글쎄요, 그런 것까지는...”
조운이 물러섰다.
“원래대로 못 되돌리면 어떻게 해?”
유비의 얼굴에 공포가 서렸다.
“제갈량이 이대로 계속 고양이가 되어버리면,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제갈량은? 신선은? 배틀은?”
그가 제갈량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뒤를 돌아 숨을 몰아쉬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어떻게 풀 수 있는지 알 사람이 있을까? 주유나 사마의 한테라도 물어야 하나? 그치만 안 도와주면 어쩌지? 도와줘도, 다시 인간... 아니 신선으로 돌아온 제갈량을 주유가 이걸로 놀리면 그 땐 제갈량이 주유 뿐 아니라 나도 가만히 안 둘텐데.... 아니 내 목숨이 아까워서는 아니고, 제갈량이 날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도 무섭고 제갈량이 화나게 하고 싶지는 않고 배틀은 둘째 치고 아니 둘째칠 게 아니라 제갈량 없이 싸우다 내가 지기라도 하면...”
“냐.”
뭔가 유비의 오금을 톡 때렸다.
“으, 응?”
넘어질 뻔 하고 유비가 뒤를 돌아보았다. 제갈량이 쪼그리고 앉아 한 손을 유비 다리에 대고 꾹 눌렀다.
“냐아.”
“어... 뭐 불편한 거라도?”
유비가 머리를 굴렸다. 제갈량이 고양이라고 생각하면, 지금 뭐가 불만이어서 유비를 긁는 걸까?
도원관 근처에 길고양이 급식소가 있고 유비도 가끔 먹이를 주기 때문에 고양이의 행동이 영 낮선 것만은 아니었다. 그런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
1. 배가 고프다. 혹은 목이 마르다.
2. 심심하다.
3. 그냥 관심을 끌고 싶다.
우선 먹을 걸 줘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신선은 식사를 안 해도 된다고 하지만 고양이는 어떨지 모른다. 유비는 일단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었다.
“고양이가 비엔나 소시지 먹어도 되던가?”
어육 소시지도 먹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게다가 몸은 신선이고.
‘그런 거겠지?’
유비가 일단 소시지를 몇 개 꺼내서 후라이팬에 볶았다. 양파와 브로콜리도 넣으려다 지금은 고양이 입맛일 제갈량이 채소를 좋아할 것 같지 않아 뺐다.
제갈량은 부엌으로 쫓아와 유비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올려다보기 귀찮아졌는지 조리대로 뛰어오르려고 했다.
“안 돼, 위험해!”
좁은 조리대에 팔을 걸치고 바둥거리는 제갈량을 보고 유비가 기겁해서 그를 안고 내려놓았다. 그리고 좀 고민하다 식탁 위에 올려놔주었다.
“자, 이러면 부엌이 잘 보이지?”
제갈량이 목을 빼고 후라이팬에서 구르고 있는 소시지를 보았다. 흥미 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유비가 접시에 소시지를 담아 제갈량 앞에 놔주었다.
“자, 먹어봐.”
제갈량이 고개를 숙여 냄새를 킁킁 맡았다. 그리고는 덥석 소시지 하나를 물었다.
“냐!”
그리고 뱉었다. 뱉고, 뱉은 소시지에 흙을 긁어 덮는 시늉을 한차례 하고난 뒤 유비를 노려보았다.
“나한테 이딴 걸 먹으라고 주다니 제정신이냐, 라는 것 같은데요.”
조운이 말했다.
“응, 통역 안 해 줘도 나도 알아들어....”
도도하게 고개를 팩 돌린 제갈량이 식탁에서 뛰어내렸다.
“먁!”
그리고 우당탕 굴렀다.
“괘, 괜찮아 제갈량?”
유비가 깜짝 놀라 달려갔다. 머리 속은 고양이라도 몸은 신선, 고양이같이 가볍고 부드러운 움직임은 불가능했다.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망연자실해 있던 제갈량은 유비가 오자 서둘러 표정과 자세를 추스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손등을 핥기 시작했다. 너무나 열심히 태연한 척을 해서 아프냐고 물어보기도 미안할 지경이었다.
유비가 계속 쳐다보고 있자 제갈량이 발딱 일어나서 딴데로 갔다. 설렁설렁 도원관 안을 네 발로 돌아다니다 제갈량이 안 닫혀있던 유비의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방문을 밀어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 위로 뛰어올랐다.
침대는 높이도 낮고 푹신해서 제갈량도 쉽게 혼자 올라갈 수 있었다. 그가 베개에 머리를 괴고 몸을 만 채 눈을 감았다.
“지금은 얌전해졌습니다, 형님.”
관우가 보고했다.
“응, 그러네.”
유비도 문틈으로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전부터 제갈량이 자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렇게라도 보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정말 자는 건지, 자는 척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쓰다듬어보고 싶다...’
유비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긁힌 자국이 이젠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냉찜질이라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황충이 간언했다.
“내버려 두면 한동안 쓰라릴 겁니다.”
“응, 알았어.”
유비가 찬 물에 손등을 식히고 소독약을 발랐다. 그러고 나서 식탁 위를 보았다. 이제는 차게 식은 소시지 접시와, 가상의 모래에 덮인 먹다 뱉은 소시지가 처량해보였다.
“제갈량이 소시지를 싫어하다니....”
“역시 고양이니까 고양이 먹이를 먹여야 하는 게 아닐까요?”
관우가 말했다.
“창고에 길고양이 주려고 사다놓은 사료 포대가 있지 않습니까. 그걸...”
“아니, 그건 안 돼.”
유비가 고개를 저었다.
“분명 제갈량은 본디대로 돌아올 거야.”
“네? 어떻게 아셨습니까?”
“감이지만.”
“엑.”
“그러니까 제갈량이 돌아왔을 때를 대비해야 해. 제갈량이 다시 제정신이 들어서, 우리가 그 동안 제갈량에게 고양이 사료를 먹였다고 알아봐.”
영응패들은 모두 얼굴이 파래져서 고개를 휘휘 저었다.
“신선은 안 먹어도 괜찮으니 그냥 밥을 주지 맙시다, 그럼.”
장비가 제안했다.
“그건 안 되지, 우리는 먹을 건데 제갈량만 밥을 안 주면.”
유비가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고양이한테 필요한 게 뭐가 있는지 알아보고 사와야겠다.”
나가려다 유비가 자기 방을 돌아보았다. 혼자 둬도 괜찮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영웅패들을 남겨두자니 또 물릴까 겁났다.
‘빨리 다녀와야겠다.’
그래도 신선이 화장실을 안 가도 되어서 그건 다행이었다. 저 제갈량에게 고양이 화장실 사용법을 가르쳐야 했다면 어땠을지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꽃받침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Characters: 제갈량. 유비
Rating: G
Warnings: 없음
Summary: 제갈량과 유비가 공원에 산책을 나갑니다.



“제~갈랴앙, 그러지 말구우~”
“네, 네, 알았어요. 갑니다 가요.”
팔을 붙들고 늘어져 조르는 유비를 차마 떨치지 못하고 제갈량이 유비를 따라 도원관을 나섰다.
“나참, 평소엔 조깅 정도 혼자 잘 다녀오시더니 왜 갑자기....”
“그래도, 오늘은 날씨가 이렇게 좋잖아. 제갈량도 집에만 있지 말고 광합성도 좀 하고 그래야....”
“제가 테마 컬러가 녹색이긴 해도 이게 엽록소인 건 아닌데요.”
“....일광욕도 좀 하고 그래야.....”
말을 바꾸고 유비가 슬쩍 제갈량의 눈치를 보았다. 제갈량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더러 같이 뛰자고만 하지 마세요.”
제갈량이 시킨대로 꾸준히 수련을 해온 덕분에 유비는 이제 공원 오십 바퀴 정도는 무난히 달리고도 남았다. 그걸 같이 하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하지만 제갈량도 수련을.”
“제가 언제 체력으로 싸우던가요. 배틀 중에는 주군께 꼭 달라붙어 있을 뿐인데 제 다리를 단련해서 무얼합니까.”
“도망간다거나?”
“도망갈 일을 만들지 마십시오.”
“응....”
혼나고 유비가 시무룩해졌다. 너무했나 싶은 기분이 안 드는 건 아니지만 가는 곳이 공원이니 좀 기를 죽여놔야 쓸데없는 일에 안 휘말릴 것 같아서 제갈량은 매정하게 모르는 척 했다.
평소 가던 것보다 좀 먼 큰 공원은 점점이 나무그늘이 있는 너른 풀밭이었다. 조깅을 시작하기 전에 유비는 간단히 체조를 해서 몸을 풀었다.
“전 여기서 기다리지요.”
제갈량이 냉큼 나무그늘을 찾아들었다.
“응. 가만히 있으면 심심할테니까 저기 화단도 보고 커피라도 사 마셔. 길 잃을지 모르니까 너무 멀리 가지 말고.”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제갈량 손에 쥐어주고 유비가 달려나갔다. 혼자 남은 제갈량이 헛웃음을 흘렸다.
“길 잃기는 누가 길을 잃는다고 그러시는지. 세상 모두가 자기 같은 줄 아는 겁니까.”
들릴 리 없는 불평을 한차례 투덜거리고 제갈량이 매점으로 갔다. 커피를 고르고 그가 잠깐 망설이다 생수도 한 병 샀다. 날이 좋다는 건 햇볕이 강하고 기온이 높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런 날 신나서 평소보다 더 달려버리면 탈수가 올 지도 모르니 대비해두는 게 옳았다.
‘주군의 훈련과 건강 관리는 신선의 업무니까.’
도로 나무 그늘로 돌아가 커피를 홀짝이며 제갈량은 유비를 기다렸다.
그런데 유비가 나타나지 않았다. 공원 전체를 한 바퀴 돌고도 넉넉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설마 정말로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
자주 오는 곳이 아니라 해도 기껏 공원이었다. 길을 잃을 만큼 복잡한 구조일리 없었다.
‘다른 레전드 히어로의 기운도 없는데.’
정말 위험한 일이 일어났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내버려 두기도 불안했으므로 제갈량은 유비가 달려간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러고 유비가 뒤늦게 돌아와 나무 아래에 제갈량이 없는 걸 보고는 놀라 난리를 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늦어서 걱정시킨 죄를 물어 유비를 꾸중하면 될 일이었다.
한참 걷다 보니 유비의 뒷모습이 보였다. 일단 안도하면서 제갈량은 그가 왜 멈춰 섰는지 알기 위해 서둘러 그리로 갔다.
유비 옆에 웬 여자가 서있었다. 밝은 표정으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상황인 건 같았다.
‘아는 사람을 만난 건가? 그렇다 해도, 인사 했으면 계속 뛸 것이지 뭐 저런...’
그리고 가까이 가자 유비가 진짜로 인사를 하고 있던 대상이 보였다.
“미안해, 내가 간식거리가 없어서...”
“아니에요, 요녀석 안 그래도 체중 조절을 해야 해서 간식 줄이는걸요.”
유비 앞에는 하얗고 커다란 털공처럼 보이는 개가 헥헥거리며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유비도 무릎을 짚고 상체를 낮춰 개를 마주 쳐다보고 있는 게 저기 엉덩이에 붕붕 흔들리는 꼬리만 달려 있으면 당장이라도 저 개와 친구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없어도 이미 친구 먹은 것 같지만.’
하여간 개과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제갈량이 그 옆으로 갔다.
“조깅 그만두고 뭐 하세요?”
“아, 제갈량!”
유비가 반가워했다.
“구름이랑 인사하고 있었어. 자, 구름아. 이쪽은 제갈량이야. 안녕해봐.”
개는 제갈량을 멀뚱히 보더니 숨는 것처럼 주인 옆으로 갔다. 유비가 당황했다.
“어, 나한텐 반갑게 인사 잘 하더니 왜....”
“얘가 원래 사람 상대로는 낮을 가려요.”
구름이 주인인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유비씨한테 한 게 특이한 거에요.”
“사람 상대로는 낮을 가리는 거라면, 다른 개 상대로는 어떤데요?”
뭔가 짚이는 데가 있어 제갈량이 물어보았다.
“아, 개는 좋아해요.”
“역시.”
제갈량이 유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비가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제갈량?”
“.....아뇨.”
딴 사람도 있는데 여기서 주군의 개 같음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제갈량은 눈길을 피했다.
“그... 그래도 우리 구름이는 순하고 애교도 많아요.”
말로 안 해도 제갈량이 유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옆 사람에게도 전해져서, 민망해진 여성이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애교요? 어떤 거요? 손 같은 거?”
유비가 바로 말려들었다.
“에이, 그 정도는 기본이고요.”
그 사람이 엄지와 검지를 펼쳐서 착 내밀었다.
“자, 구름이 꽃받침!”
개가 헤죽 웃는 얼굴로 달려와 손가락 사이에 턱을 턱 얹었다.
“와, 귀여워라~”
유비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주인이 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손가방에서 작게 자른 육포를 꺼내 개에게 주었다.
‘애교...인가?’
제갈량은 어리둥절했다. 그야 개가 웃는 얼굴로 혀 내밀고 있으니 귀엽다면 귀엽지만 그게 사람 손가락 위에 얹혀있다 해서 더 귀여울 게 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응? 제갈량 왜 그래?”
제갈량이 자기처럼 꺄아 거리고 있지 않은 걸 이제야 눈치챘는지 유비가 제갈량을 돌아보았다.
“제갈량 보기엔 구름이가 안 귀여워?”
“아니 개는 귀엽습니다만.”
안 귀엽다고 했다간 냉혈한으로 몰릴까봐 제갈량이 조금 후퇴했다.
“이게 뭐가 귀여운지는 잘....”
제갈량이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었다.
제갈량은 그저 ‘이게’ 뭔지 분명히 하려는 것 뿐이었다. 절대로 뭔가 다른 의도가 있거나 어떠한 암시를 주려는 목적은 없었다.
“그야.”
유비가 슥 그에게 다가와 그 손가락에 자기 턱을 턱 얹었다.
“이렇게 부르면 와서 얼굴을 짠 내미는 게 귀여운 거잖아.”
제갈량은 입을 벌리려다 다물었다. 화를 내자니 왜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고 잔소리를 하자니 유비가 뭘 잘못했는지 그도 알 수 없었다. 뭐라고 하기는 해야 하는데, 이런 짓 앞으로는 못하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만 확실하지 왜 그래야 하는지는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제갈량이 손을 치우고 획 돌아섰다.
“어.....”
“바, 바보 같은 짓 그만하고 조깅이나 마저 하세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얼굴이 화끈거렸다.
“개가 하는 짓이나 흉내내고 아주 잘 하는 짓입니다. 아주 멍멍 소리도 내지 그럽니까.”
“....멍?”
“진짜로 하라는 얘기가 아니거든요?”
제갈량은 돌아서서 유비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그러나 얼굴의 홍조가 가라앉지 않았다.
“제갈량... 화났어?”
“예! 화났습니다! 그런 바보 같은 얼굴을 확 들이밀면 화가 나는 게 당연하잖아요!”
“응... 미안해 제갈량....”
유비가 움츠러들었다.
“난 제갈량도 즐겁게 해주고 싶었는데....”
“주군의 애교 같은 거 봐서 뭐가 즐겁습니까?”
말하고 제갈량은 자기가 그걸 ‘애교’로 인정했단 걸 깨달았지만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유비가 눈치 못 챘기만을 빌며 그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유비가 더 아무 말 안 해서인지 얼굴색은 빠르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침착을 되찾고 제갈량이 다시 유비에게 돌아섰다.
“...개는 어디 갔나요?”
개도 개주인도 보이지 않았다. 유비가 공원 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산책 마저 한다며 갔어. 우리 싸우는 줄 알고 자리를 피했나봐.”
“싸우는 건 아니..었는데요.”
제갈량이 슬쩍 유비의 눈치를 살폈다.
“응. 내가 바보짓 해서 제갈량이 화내는 건 늘 있는 일이고.”
“바보짓... 이긴 했지만...”
제갈량이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옆자리를 손으로 톡톡 쳤다. 유비가 그의 옆에 와 앉았다.
“주군이 개 흉내가 너무 어울려서 어이가 없었던 거지 화가 난 건 아닙니다.”
제갈량이 조곤조곤 말했다.
“혹시 다른 사람이 손 내밀어도 턱 얹지 마세요.”
말하고 나서야 누가 사람 상대로 그런 짓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또 모르는 거였다, 상대가 유비니까.
“응. 안 그럴게.”
유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또 참 말 잘 듣는 강아지 같아서, 제갈량이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유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
유비가 놀랐다. 제갈량이 당황했다.
‘아까부터 손이 왜 멋대로....’
서둘러 손을 치우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유비가 웃으며 제갈량의 손에 머리를 기댔다. 지금 손을 뗄 수도 없어 할 수 없이 제갈량은 계속 유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드림 배틀의 군주는 사람만 될 수 있는 거 아니었던가.....’
이제 와서 유비의 종을 의심해 봐야 소용 없었다. 유비는 이미 군주고, 제갈량의 주군이었으니까.
“수련 마저 합시다.”
제갈량이 먼저 일어났다.
“같이 뛰죠. 이렇게 설렁설렁 달리는 거면 하나도 힘들지 않을 거고.”
“응!”
뭐가 그리 좋은지 유비가 헤벌쭉 웃으며 따라 일어났다. 없는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환각을 눈을 깜빡여 털어버리고 제갈량은 유비와 함께 조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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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공원 두 바퀴 돌고 제갈량은 후회합니다. :D 체력이 넘치는 대형견을 산책시키는 건 참 어렵죠.





[CoC 리플레이] 형제의 오수 └리플레이


두 CoC 캐릭터 가빈과 이스나의 한때입니다.

가빈은 빨간반지, 이스나는 보행자의 플레이어 캐릭터입니다.
가빈은 약사, 이스나는 의사이며 친형제간입니다. 두 사람의 이입과 원활한 RP를 위해 의도적으로 형제 캐릭터들로 만들었습니다.
가빈과 이스나로 이제까지 플레이한 시나리오는 [수집가의 별장], [독 스프], [희나리], [귀환 산장(보행자 자작)], [히포크라테스 선서(빨간반지 자작)], [로커], [code Mythology~모서리의 공포], [라텐펭거의 낙원] 등입니다. 두 사람이 제 3자의 키퍼링으로 함께 플레이한 적도 있고 가빈 따로 이스나 따로 플레이한 적도 있습니다. 그동안 이스나는 한 번 로스트했다가 구제 시나리오를 거쳐 되돌아왔습니다.
특정 시나리오의 리플레이가 아닌, 그동안 여러 시나리오를 거치고 지쳤지만 아직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탐사자들의 심정은 어떠할지 가볍게 써보고 싶었습니다. 각 시나리오의 스포일러를 최소화하고 탐사자들에게 집중하기 위해 일부러 그동안 겪은 모험들을 뒤섞거나 부정확하게 묘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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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왔어.”
“응.”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이스나는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는 사람은 틀림없는 그의 형, 가빈이었다. 이스나는 티 안 나게 안도했다.
오늘 나갈 때 가빈은 친구와 함께 도서관에 다녀온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평범한 현대의 도시에서 평범한 약사와 의사로 남들처럼 출퇴근하며 사는 그들이기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식의 안도감은 느낄 일이 없었다.
그러니까, 꿈속에서 괴상한 장소에 떨어져 낯선 사람들까지 만나고 다 함께 탈출하는 체험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악몽이라기엔 지나치게 생생한 꿈을 꾸고 일어나, 가빈도 정말로 같은 꿈을 꾸었을 뿐 아니라 꿈속에서 만났던 낯선 인물들까지 전부 실제 어디선가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뒤 두 사람의 삶은 알게 모르게 바뀌었다.
꿈속에서 괴상한 모험을 하는 것쯤은 애교였다. 꿈으로 끝이라고 하기엔 참고 넘어갈 수 없는 일이 일어나 이사를 결심한 적도 있었고, 이스나는 편히 잤는데 가빈 혼자 꿈속에서 독 스프 접시를 마주한 적도 있었다.
지친 나머지 멀리 여행을 갔더니 여행지가 문제였던 적도 있었다. 착하고 상냥한 직장 동료의 권유에 응했는데 그 동료가 발단이 되기도 했다.
차라리 일에 충실해서 경력이라도 쌓기로 결심하고 대형 병원으로 옮겼을 때 벌어진 일을 이스나는 억지로 머릿속에서 밀어내었다. 환자가 달고 왔던 재앙 때문에 영영 형을 다시 못 볼 뻔했었다.
“어떤 책 빌려왔어?”
떠올리기도 힘든 기억을 괜히 곱씹는 대신 가빈에게 다가갔다. 이럴 땐 재미있는 소설에 몰두하는 것도 정신을 추스르는 방법이었다.
“응, 추리소설. 우리나라 거.”
가빈의 목소리가 묘했다. 세상 만사 달관한 듯 지치고 억양이 사라진 목소리에 이스나는 책을 받아들고 형을 빤히 쳐다보았다.
“설마.”
“그래. 그 설마야.”
가빈이 소파에 털썩 앉았다.
명색 나서부터 지금까지 떨어져 산 날이 몇 년도 채 되지 않는 형제간이었다. 긴 설명 없이도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을 또 겪고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이스나는 일단 전기 포트의 스위치를 켰다. 따뜻한 차나 커피라도 갖다줘야 할 것 같았다.
“혹시 도서관 가자고 한 그 친구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가빈은 어떻게 설명할지 정리해보는 듯 눈을 감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신경질적으로 도리질했다.
“일단, 나 말고도 아무도 안 죽었고, 세상도 안 망했어. 그거면 된 거지. 안 그래?”
“응.”
이스나는 커피 두 잔을 가져가 한 잔을 가빈 앞에 놓았다. 가빈은 커피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사실 아무도 안 죽은 건 아니긴 한데, 어차피 죽어 마땅한 인간이었거든.”
“그랬겠지.”
이스나는 더 묻지 않았다. 형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사태의 원흉쯤 되는 놈이 죽은 게 틀림없었다.
그동안 별별 일을 겪으며 무뎌진 면이 있긴 해도 가빈은 여전히 인명에 있어선 철저했다. 가빈 자신의 목숨이나 이스나의 목숨이 걸리지 않는 한 주위 사람들도 최대한 살리려 했다. 그리고 다행히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야 할 정도의 위기는 가빈에겐 온 적 없었다.
“저 소설은 안전하니까 읽어도 돼.”
“응. 그러니까 빌려왔겠지.”
잠시 둘 다 커피만 마시며 침묵했다. 그러다가 툭툭 한두 마디씩 늘어놓았다.
“이런 일 앞으로도 계속 일어나겠지.”
“아마도.”
서로에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두 사람답게, 앞뒤 맥락 다 자르고 짤막하게 던지는 몇 마디로도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직장, 집, 여행지 전부 한 번씩은 쳐들어왔고, 꿈에도 나왔고, 생시에도 나왔고.”
“응.”
“둘만 있을 때도, 둘 중 한 명만 있을 때도, 다른 사람들 있을 때도.”
“멀리 여행가면 위험할까봐 가까운 번화가의 방탈출 카페를 예약했을 때도.”
“그리고 이젠 친구랑 도서관에 가서까지.”
거의 동시에 한숨을 내쉬고 헛웃음을 지었다. 둘 다 책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인지라 도서관은 단순한 공공시설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마음의 고향이 침범당한 것처럼 막막했다.
“그냥 숨만 쉬어도 위험하네, 우린.”
이스나가 자조했다.
“실은 나 그 방탈출 카페에서 형이라도 옆에 있었더라면 했어. 물론 금방 형이라도 무사해서 다행인 거라고 알았지만.”
“그러냐. 나도 이번에 똑같은 생각 했는데. 비겼네.”
그런 생각 좀 했다고 이스나가 진심으로 미안해 하는 것 같아 가빈은 피식 웃었다.
자신도 동생도 영웅이 아니었다.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눈앞의 위기로부터 그때그때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그런 위기 속에서 때로 - 실은 자주 생각했다. 여차하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서라도 자신과 이스나는 살아남아야 한다고.
한 명을 관에 넣으라느니, 사슬로 묶어 가두라느니 하는 함정들은 그런 속내를 비웃는 듯 툭하면 나타났다. 아직까지는 그래도 달리 빠져나갈 길을 찾아서, 누굴 고의로 희생시켜야 하는 일까지 벌어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무사히 넘긴다는 법이 없지.’
둘 다 친척들과도 왕래가 없다시피 하고 교우관계도 빈곤했다. 연애나 결혼에도 흥미 없었다.
그래서 외롭거나 불행한 적은 없었지만 그건 혼자 살아도 괜찮은 사람들이어서라기보다 형제에게 인간관계의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는 탓이 컸다.
실제로 이스나가 사라졌을 때는 지금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일이 또 벌어졌을 때 자신이 자살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 이유는 딱 두 가지일 것이다. 그럴 기력이 없어서, 그리고 언젠가 또다시 되찾을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어서.
한 차례 혀를 차고 가빈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어쨌든 오늘은 무사히 돌아오는 데 성공했으니 잠시 아무 생각 없이 푹 쉬는 정도는 보상으로 누려야 했다.

가빈이 눈을 감고 기댄 걸 보고 이스나도 똑같이 기대 눈을 감았다.
딱히 피곤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당장 바쁘지 않다보니 옆 사람 졸음이 옮은 것뿐이었다.
‘그래도 한 번 사건을 겪으면 또 한동안은 조용하니까.....’
혹시나 해서 슬쩍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기분 나쁜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거실 풍경이 바뀌지도 않았다. 가빈이 악몽을 꾸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면, 꿈속에서 또 수집가의 별장 같은 곳에 떨어져 있는데 도중에 밖에서 깨우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게 단순한 꿈이 아니고, 따라서 그 안에서 변고를 당한다면 그냥 비명 지르며 깨어나고 끝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오래 전에 깨달았다. 그러나 그 안에서 잘 하고 있는데 깨운다면?
적어도 지금은 편안해 보이는 가빈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그냥 물러났다. 그 신화적 존재들이 그렇게 허술할 리 없었다. 그냥 ‘아무리 흔들어도 안 깨다가 모험을 마치고 나서야 깨더라’ 보다 한 치라도 나쁜 결과가 나온다면 감당할 수 없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니 의사로서의 직업윤리니 하지 않아도 이스나 역시 기본적인 생명존중 사상은 갖고 있었다. 최대한 형과 자신 외의 다른 사람들도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형의 목숨과 타인의 목숨을 저울질해야 한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차마 형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해줄 수는 없었지만 그는 이미 선택한 적 있었다. 아무리 의사고 남의 인명을 소중히 할 책무가 있다고 해도 가빈을 두고 남을 택할 수는 없었다.
그 선택의 결과가 최악의 형태로 뒤집혀 나타났던 뒤로, 형이 산장에 찾아와 자신을 구해준 뒤로 한동안 그런 이기심을 잊으려 노력했었다. 그러나 이스나는 이스나였고 환자를 위해 물불 안 가리는 이유가 ‘안 그랬다가 또 가빈과 자신을 잃어버릴까봐.’여서야 바뀐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하기야 그런 괴물들 손바닥에서 놀아나다가 교훈을 얻고 성장한다는 것도 웃기긴 하다.’
이스나는 실소를 머금고 다시 눈을 감았다.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덕분에 강해지는 건 이야기 속 악당이나 괴물이 상대일 때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이제까지 가빈과 이스나 형제를 괴롭혀온 상대는 인간의 두뇌로 헤아릴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형제 역시 이야기 속 영웅이 아니기에 레벨이 오르지도 강해지지도 못했다.
이런 놈들 상대로는 그냥 살아남은 것 자체가 포상이고 행운이었다.



[또봇, 바이클론즈, 회색 도시] 회색 지구 41 (완) ㅣ- 크로스오버

뿌옇던 천장이 점차 또렷하게 보였다.
태오는 두 눈을 깜박여보았다. 두 손, 두 발을 움직여보았다.
자신은 살아있었다.
“형!”
래오의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있었던 일을 미처 제대로 떠올리기도 전에 그의 팔을 래오가 덥석 붙들었다.
“태오 형!”
“오빠!”
“혀엉.....”
래오만이 아니었다. 미오, 지오, 피오 모두 달려들어 매달렸다. 모두들 울고 있었다.
그들을 더 제대로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려보다가 공중에 떠 있는 시삽과 눈이 마주쳤다. 곰 같은 덩치의 실버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꺼슬꺼슬하게 마른 입 안을 마찰시켜 목소리를 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무어라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손을 어떻게 내밀어야 할지도.
“물 여기 있어.”
래오가 눈치빠르게 물컵을 내밀었다. 태오가 고개만 약간 들어도 마실 수 있도록 머리를 받쳐주고 컵을 기울여주는 동작도 래오답게 능숙했다.
“래오. 다들......”
목이 메는 걸 참고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동생들과 실버와 약간 뒤쪽에 선 할머니에게 자신이 무사하다는 실감을 안겨주고 싶었다.
다음 문장을 만들어낼 필요는 없었다. 모두 일제히 울음을 터뜨려 무슨 말을 하든 들리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한참 만에야 다들 그럭저럭 진정하고 제대로 말을 나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환장용병단이 형을 납치했는데, 우리가 구조해왔어. 형은 캡슐에 가사상태로 갇혀있었고.”
래오가 형의 눈치를 보며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만 설명했다. 잡히자마자 기절해서 캡슐 속에 있었다면 고생할 일이 상대적으로 적었겠지만 그래도 납치는 끔찍한 경험이었다.
“피오 덕에 구출했고 용병단 중 하나도 잡았어.”
미오가 좋은 쪽부터 말했다.
“그러니 이제 안전해.”
“그래.”
태오가 미소지었다.
“너희들도 너무 걱정하지 마. 난 괜찮으니까.”
“형....”
래오가 다시 울 것 같은 표정을 하면서도 꾹 참았다. 동생들도 보는 앞에서 언제까지고 울 수는 없었다.
“그놈들 뭔가 대단한 노림수가 잇어서 그런 짓을 한 것 같지는 않아.”
할머니가 분위기를 봐서 처음으로 끼어들었다.
“박근태가 너희들의 약점이 될 만한 정보로서 태오의 집 주소를 놈들에게 누설한 거지. 아마 그 대가로 일신의 보호를 구하려 한 걸 테고.”
할머니가 다가와 태오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아무튼 놈들을 잡았으니 뒷일은 걱정할 필요 없다. 좀만 더 쉬고 오늘 오후부터 조금씩 움직여봐라.”
“예.”
듣고 나서 팔다리를 들어보니 확실히 많이 굳어 있었다. 태오는 침대 위에서 할 수 있는 가벼운 스트레칭 몇 가지를 해보았다.
“서두를 필요 없어. 오후부터 하라시잖아.”
스트레칭하는 태오를 래오가 말렸다.
“지금은 쉬자. 다 같이 얼굴 보는 거 오랜만이잖아.”
태오는 미오와 지오와 함께 자신의 침대에 매달려 있는 피오를 보았다.
“그래.”


그날 하루 오남매는 태오의 집에서 지냈다. 래오가 한 밥을 먹고 부대찌개도 먹었다.
그러면서 의식적으로 좀무국과 제국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복제 3분가사리를 넘겨주고 바로 사라진 화심 소장에 대해 이순희 태후도 네 명의 남매도 피오에게 자세히 묻지 않았다.
라디오자키와 시삽들은 피오가 여전히 갖고 있는 부채를 흘끔거렸지만 가까이 가서 만져보지도 못했다. 셰이드도 협조해주지 않았다.
그것만 빼면 오랜만에 예전 같은 풍경이었다.
밤늦은 시간이 되어 거실에 이불을 폈다.
이젠 거실에서도 모두가 한 군데서 자기엔 다들 너무 자란 감이 있었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불이 꺼지고 시삽들도 거치대에 가 누웠다.
시삽들의 깜박이는 불빛과 창으로 비쳐드는 달빛을 제외하면 완전히 어두워진 거실에서 피오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더 이상 깜깜한 방이나 귀신은 무섭지 않았다. 가족들과 싸우는 건 그 어느 때보다도 무서웠다.
굳게 결심하고 나왔었는데 흔들리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내일 아침이 밝으면 태오 형과 함께 이 집에 남든지 래오 형, 미오 누나, 지오 형과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헤어져 지낼 필요도 없고 서로 싸울 필요도 없었다.
불 꺼진 거실 형광등을 보며 할머니를 생각했다. 화심 소장을 생각했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돼.’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면 합의점을 찾기도 더 쉬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 합의점을 찾을 때까지는, 역시 형들과 누나와 함께할 수 없었다.
주위에 누워있는 가족들을 둘러보고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살금살금 셰이드의 거치대로 다가갔다.
피오가 손을 뻗어 잡기 전에 셰이드가 거치대에서 날아올랐다. 피오를 향해 조용히 미소짓고 화면 밝기를 최소로 낮춘 채 따라갔다.
처음부터 짐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옷만 챙겨 입고 셰이드와 함께 현관문을 나왔다.
‘밤바람이 차네.’
마당을 가로지르다가 문득 뒤에서 난 소리에 멈춰섰다.
“벌써 가냐?”
태오가 따라나온 걸 보고 피오가 당황했다.
“붙잡으려는 거 아냐.”
태오가 부드럽게 웃었다.
“잘 생각한 거야. 다시 의논하고 입장차를 좁히는 것도 일단 네가 돌아간 뒤에 해야 공정하게 할 수 있어.”
피오가 굳었던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여기 있으면 마음 약해질 테니까.”
사실은 벌써 조금 약해졌다. 피오는 두 주먹을 꾹 쥐었다.
“그러니 걱정 말고 가. 가서 연락해.”
태오가 다가와 두 팔을 벌렸다. 피오가 그 품에 폭 파묻혔다.
“화심 소장에게도 고맙다고 전해줘.”
피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태오가 말했다.
“그럴게.”
“도운 아저씨한테도 인사 전해줘.”
“응.”
피오가 고개를 들자 태오가 팔을 풀었다. 피오는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태오는 여전히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이 피오를 붙잡지 않도록.
“그럼 또 보자.”
작별의 말까지 하고 나자 피오는 더 망설이지 않고 돌아섰다.
대문을 열고 피오는 그 너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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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하지만 회색 지구는 여기까지가 끝입니다.
애초 바이클론즈 1기만 본 상태에서 구상한 이야기였고, 봉숭 아씨나 전복 대감 등 이후의 빌런들을 뒤늦게 넣기엔 무리가 있는 데다 스케일이 커지면서 감당하기가 어려워진 탓입니다. 이순희 여사의 과거 설정과 본심 같은 것도 자칫 공식과 충돌할 수 있고요.
회색도시 쪽의 큰 갈등이 대부분 해소되었고 리모와 도운, 피오와 나머지 네 남매의 관계도 호전될 가능성이 열린 시점에서 끊는 편이 적절하다고 생각해 여기서 끝내기로 했습니다.
이제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Characters: 제갈량. 유비
Rating: G
Warnings: 없음
Summary: 내게 사실을 말해봐 이후, 유비와 제갈량의 선계 데이트

윱제 데이트 외전입니다. :)



제갈량은 잠시 감고 있던 눈을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피곤해....’
벌써 나흘째 도원관에 돌아가지 못했다.
소원 처리도 일이지만 그 외에도 일이 많았다. 새 신선들을 만드는 문제만 해도 생각할 일이 산더미였다.
그가 어깨를 돌렸다. 신선은 뼈와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그러니 어깨가 결릴 리 없지만 그래도 기분상.
“도시락 싸들고 어깨 주물러 주러 온다더니.”
제갈량이 작게 불평했다. 유비라고 한가한 거 아니고 생업에 더해 가족 친구들까지 보살펴야 하는 거 아는데도 심술이 났다.
“유비님 바보.”
불평 해봐야 할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제갈량은 눈을 감고 다시 일을 계속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가 눈을 번쩍 떴다. 옥새가 위치한 선계의 넓은 풀밭 한쪽에, 녹색 빛이 원을 그리며 문이 나타났다. 문이 열리고 소풍 바구니를 든 유비가 선계에 발을 들였다.
조심스럽게 들어와서 주위를 둘러보던 유비가 옥새를 발견했다. 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손을 흔들며 이리로 달려왔다.
“제갈량! 나 왔어!”
제갈량이 활짝 웃었다. 달려오는 유비를 보며 그가 손짓해 소원들을 치우고 옥새를 열었다.
그리고 달려오는 유비를 향해 몸을 날렸다.
“우왓? 제갈량!?”
유비가 놀라 팔을 벌렸다. 제갈량을 받아 안으며 그가 뒤로 넘어갔다. 뒤통수가 땅에 부딪쳤지만 풀밭이 푹신해서 그렇게 아쁘지는 않았다.
“놀랐잖아!”
넘어져 깔린 건 자기면서 유비는 일어나며 제갈량부터 살폈다.
“내가 못 받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유비님을 믿고 있는 걸요.”
제갈량이 생글생글 웃었다.
“그, 그건 기쁘지만 그래도...”
“유비님이 다칠 걱정은 처음부터 안 했습니다. 이제는 선계 전체가 제 몸의 일부이나 마찬가지인걸요. 제가 유비님을 아프게 할 리가 없잖아요?”
유비가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더니 자기가 앉은 풀밭을 손으로 쓸었다. 손 아래서 사르르 누웠다 다시 일어나는 풀잎을 쓰다듬으며 그가 미소지었다.
“뭐 하세요?”
제갈량이 의구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제갈량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니까 귀여워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하다 제갈량이 고개를 획 돌렸다.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비유. 유비님은 국어공부를 좀 더 하셔야겠어요.”
“응, 그럴게.”
유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제갈량의 귀끝이 붉었다.
‘역시 귀여워...’
“그래서, 약속한 도시락은요?”
제갈량이 말을 돌렸다.
“응, 그게... 으아악, 어딧지?”
유비가 자기 빈손을 보고 아까 제갈량 받으려고 던져버린 도시락 바구니를 찾아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저 옆에 뒤집어져 있는 바구니를 발군하고 울상을 지었다.
“미안해 제갈량...”
“뛰어내린 건 전데 왜 유비님이 미안하신가요.”
제갈량이 혀를 차고 그 쪽으로 손짓했다. 뒤집어진 바구니가 바로 서더니 공중을 둥둥 떠서 그들에게 왔다.
“걱정 마세요, 쏟아지지도 옆으로 쏠리지도 않았으니까.”
“정말?”
유비가 반색을 하며 바구니를 열었다. 도시락이 막 담았을 때처럼 층층이 잘 있는 걸 보고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갈량이 유능해서 다행이다...”
“빨리 먹죠.”
자기가 쏟은 거나 다름 없는데 칭찬 받기도 민망해서 제갈량이 서둘러 도시락을 꺼냈다. 유비가 도시락 통을 쭉 늘어놓고 보온병에서 커피를 따랐다.
첫 번째 도시락을 열자 한 입 크기로 빚은 주먹밥이 나왔다. 양념한 밥 한가운데 소시지가 박혀 있는 동그란 주먹밥을 젓가락으로 집어 유비가 제갈량에게 내밀었다.
“아~”
“아...”
제갈량이 입을 벌리고 유비에게서 주먹밥을 받아먹었다. 그가 천천히 밥을 씹었다.
“맛있네요. 간도 잘 맞고.”
“그치?”
유비가 헤헤 웃으며 다른 도시락도 열었다. 햄과 치즈를 끼운 식빵을 역시 한 입 크기로 자른 미니 샌드위치와 색색의 과일을 작게 잘라 꼬치에 꿴 과일 꼬치 등 하나같이 예쁘고 한 입에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었다.
“제갈량 일할 때 옆에서 먹여주려고 만든 거니까. 이렇게 풀밭에서 소풍처럼 앉아있을 수 있을 줄 알았으면 더 다양하게 시도해보는 건데.”
“이만하면 충분히 다양합니다. 손 많이 갔겠는데요.”
제갈량이 정말 다리 여덟 개 있고 눈코입에 집게발까지 달린 게 모양 소시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응. 미루고 미룬 데이트니까 더 잘해야한다고 공손찬이 부추겼어. 인터넷에서 레시피나 예쁜 도시락 사진 같은 겉도 잔뜩 찾아다주고. 조운 때문에 우리 사이도 많이 응원하나봐.”
그건 아닐 거라고 말할 수도 없어서 제갈량은 조용히 소시지를 입에 넣었다.
‘유비님이 조운 데이트 도시락 싸게 한 거, 시집살이를 시킨 게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응원이었나?’
일부러 시집살이를 시키는 유비 보다는 도우려고 했는데 본의 아니게 고생시켜버린 유비 쪽이 더 말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제갈량은 너무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제갈량은 작은 브로콜리 밑동에 베이컨을 감아 화분처럼 만든 걸 젓가락으로 집어 유비에게 내밀었다.
“자, 유비님도 아~ 하세요.”
“아~”
유비가 받아먹고 생글생글 웃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제갈량은 다른 것도 더 먹였다.
“어, 근데 내가 제갈량 먹이려고 도시락 싼 건데.”
“아~”
제갈량이 입을 벌리자 유비가 서둘러 딸기 꼬치를 들어 제갈량 입에 넣어주었다.
“맛있어요.”
제갈량이 웃었다.
“그냥 과일을 잘라서 긴 이쑤시개에 꿰었을 뿐인걸.”
“갈변되지 말라고 사과주스에 설탕을 섞어서 자른 과일을 담가두셨잖아요. 그런 세세한 게 다 정성인걸요.”
“어, 그런 게 다 티나? 제갈량 대단해.”
유비가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자 제갈량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그가 유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좋네요..”
“나도 제갈량이랑 같이 있으니 좋아.”
유비가 도시락 그릇과 컵을 좀 밀어 치우고 제갈량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겨 안았다.
“유비님.”
“응?”
“행복하세요?”
“응. 나 지금 무지 행복해.”
“저도요.”
제갈량이 눈을 감고 평화로이 웃었다.
“저도 행복하라는 소원, 이루셨네요.”
유비가 놀랐다가 활짝 웃었다.
“응. 그러네.”
유비가 제갈량의 머리에 자기 머리도 기댔다.
“그럼 이제 앞으로도 쭉- 제갈량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그렇게 빌어야겠다.”
“굳이 소원씩이나 빌지 않아도 유비님은 이미 그런 사람인걸요.”
제갈량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본인이 하면 되는 일은 소원으로 안 들어드릴 거에요.”
“응. 알았어.”
힝 할 거라는 제갈량의 예상을 깨고 유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열심히 할게. 제갈량도 도원관 식구들도 조조도 손책도.”
“...너무 혼자 다하지는 마시고요.”
“혼자 다하고 싶어도 못하는 걸, 난 바보라서.”
“유비님은 바보가 아니...”
“그러니까 도와줘야 해, 제갈량?”
유비가 제갈량을 바라보았다. 제갈량이 미소지었다.
“네. 언제까지나.”





본편에선 데이트 한 번 제대로 못해본 두 사람도 이러고 꽁냥거리며 행복하게 살고 있답니다. ;)

내게 사실을 말해봐 21 (완)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저기....”
공손찬이 미간을 꾹꾹 눌렀다.
“사랑싸움은 둘만 있을 때 하고, 지금은 중요한 이야기를 하자. 일단.... 문제는 그것 뿐이야? 내 정신건강, 그리고.. 드림배틀에 대한 걸 알리지 않는 거?”
“네, 그 정도면 그 외 문제는 제 선에서 수습이 가능합니다.”
제갈량이 답했다.
“지금 당장 세상이 위험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예.”
“그럼 나 생각 좀 천천히 해볼게. 너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 데다 이거 내가 아는 게 사실이 맞는지도 알 수 없고 - 조운한테 들은 말은 사실이라고? 하지만 네 말은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데?”
“제갈량도 거짓말 안 했어.”
유비가 변호했다.
“적어도 지금 나타난 이후로 말한 건 그래. 예전에 거짓말 한 건 비밀을 지키는 게 너한테도 좋다고 생각해서였고.”
“음.... 그래. 널 못 믿을 수는 없지.”
말과는 달리 공손찬은 불편한 표정으로 유비를 보았다.
“네가 우승자라니.”
공손찬이 한숨을 쉬고 방을 나갔다.
“그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요?”
제갈량이 공손찬이 나간 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야, 너도 막 내 신선이 되었을 때 내가 우승할 거라는 말을 들었으면 이상하게 생각했을 걸.”
“그럴리가요. 전 그때부터 유비님이 우승자가 될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정말?”
유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네. 선계 최고인 제가 배틀에서 질 리가 없지 않겠어요? 물론 유비님이 좀 바보인데다 수련도 제대로 안 하고 있긴 했지만....”
“그, 그게 배틀 시작하고 나서 수련 열심히 한 거였는데....”
“하루치 분량을 일주일에 나눠서 찔끔찔끔 하는 거요.”
본전도 못 찾고 유비가 시무룩해졌다.
“하기야 배틀 전의 유비님은 그조차도 아니었다면 그런 한심한 최약체가 우승자가 되었다니 놀라울 만은 하겠네요.”
오랜만에 제갈량에게 말로 난도질당하고 유비가 울상을 했다. 제갈량이 몸을 숙여 비죽 내민 유비의 입술에 쪽하고 입맞춰주었다.
“공손찬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배틀에 대한 사실을 안고 가든 버리려 하든, 본인의 판단이고 결정이니 결과를 감당할 힘이 있을 겁니다.”
“응. 공손찬은 강한 애니까.”
유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음, 공손찬이 나한테.... 그 동안 있었던 일 물으면 대답해줘도 돼?”
“네, 괜찮겠죠.”
제갈량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다른 군주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 마세요. 이제 와서 싸움 걸러 갈 정도로 인격이 안 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가까운 사람도 있는데 사이 어색해져서 좋을 일은 없겠지요.”
“응. 그럴게!”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다 갑자기 유비의 기색이 다시 죽었다.
“그럼.... 제갈량 이제 다시 돌아가야 해?”
있을 리 없는 귀와 꼬리가 기운 없이 축 쳐졌다. 제갈량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잠깐은 시간을 내보지요. 그래서, 뭐 하고 놀까요?”


공손찬이 유비의 방에서 나오자 곧장 조운이 나타났다.
“유비님한테 이야기 들으셨어요?”
“응. 제갈량도.”
조운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공손찬을 바라보았다.
“뭐라던가요?”
공손찬은 잠시 망설였으나, 조운에게 말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이대로 기억을 할 것인지 도로 지울 것인지 선택하래.”
조운이 눈을 깜빡였다.
“뭐 다른 얘기는 없었고요?”
“그... 조력자들은 군주를...”
말하다 말고 공손찬은 입을 다물었다. 조운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잔인한 처사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꼭 알아둬야 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제갈량 말이, 전투 조력자들은 군주를 저절로 사랑하게 되어있대.”
조운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어 공손찬이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잠시 후 조운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공손찬님을 사랑하는 건 프로그램의 결과일 뿐이라고,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렇게 생각하기 싫겠지만..”
“시작은 분명 그런 것이었을 지도 모르지요.”
조운이 말했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 거라면 제 주군이 유비님으로 바뀌었을 때 제 충성과 애정이 모두 그분께 갔어야 하지 않나요. 하지만 전 공손찬님을 기다렸고, 또...”
그가 슬쩍 공손찬을 보았다.
“지금 공손찬님은 저랑 같이 배틀에 참전하셨던 공손찬님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그 때에 비해 말이나 행동에도 여유가 생겼고 사람을 대하는 것도 좀 더 편해지셨죠. 제게 무의식적인 친근감을 느끼고 계셔서 제가 그렇게 보는지도 모르지만요...”
“그 때보다 내가.. 철이 들었다고는 나도 생각해.”
공손찬이 인정했다.
“실패 한 번에 모든 게 끝장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인생에 다른 길도 있다는 것도 배웠고. 그런데 그게 왜?”
“이건 긍정적인 변화지만요, 만약 공손찬님이 패배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삐뚤어졌으면요? 아니면 새 꿈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 무기력해지면요? 그랬어도 지금 제가 공손찬님을 사랑했을까요.”
조운이 고개를 저었다.
“영웅패라면, 주군이 대놓고 학대하거나 하는 짓을 하지 않는 한 주군을 따르고 배신할 생각도 보통은 하지 않습니다. 이게 그 때 그 감정 그것만이라면, 공손찬님이 타락해도 전 계속 당신을 맹목적으로 따를 겁니다. 하지만 지금 전 그러지 않아요. 인간이니까. 그 때의 공손찬님이, 지금 공손찬님이 멋지고 좋고 눈부시니까 사랑하는 거에요.”
“...정말로?”
조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내가... 음, 나쁘게 바뀌면 차버릴 거야?”
“네. ......기분 나쁘거나 배신감 느끼실 지도 모르지만...”
“좋아.”
공손찬이 손을 내밀었다.
“상대가 어떤 모습이 되어도 사랑할 수 있는 게 로맨틱할지도 모르지만 난 로맨틱보다는 합리적이고 현실에서 가능한 게 좋아. 그래, 조운. 나랑 사귀자. 내가 나빠지면 차버리고.”
조운이 안심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둘이 손을 마주잡았다.
“단 뭐가 마음에 안 들면 즉시 차기 전에 내게 이야기를 해줘. 고치거나 대화로 합의 할 수 있게.”
“예, 물론이에요.”
조운도 웃었다.
“저야말로, 인간인 게 익숙지 않아서 실수한다거나, 문제가 보이면 꼭 지적해주세요.”
“그럴게.”
공손찬이 답했다.
“그럼, 기억은...”
공손찬은 생각했다. 자기는 다른 사람에게 패배해 꿈을 잃고 도원관을 떠났다고 했다. 그게 정말로, 기억을 지우는 편이 나을 만큼 끔찍한 일일까?
‘그야 비룡권으로 싸운 것도 아니고, 한 번 졌다고 최강자가 되겠다는 마음이 사라지는 건 말도 안 되지만.....’
공손찬을 이길 수 없어 손상향은 무술가의 꿈을 버렸다. 꼭 그 배틀이 아니더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공손찬은 도원관 역대 관장들의 초상화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더이상 저기에 자기 사진을 거는 게 예전처럼 일생을 건 꿈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도원관을 사랑하고 이곳을 최고의 무술 도장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저 자기를 순순히 유비에게 양보하고 싶은 마음도 아직 없었다.
‘꿈이란 게 항상 생각했던 그대로 이뤄지는 건 아니겠지.’
일자전승이라던 비룡권이지만 노식은 유비와 공손찬 둘 다를 후계자로 인정했다. 그럼 예전과 꿈이 달라졌다 해서 노력하면 안 될 것도 없었다.
“조운.”
“네.”
“아까 도원관 떠나는 이야기 말인데, 나 강동관에서 일하며 거기 운영을 배워보려고 해.”
“아.... 그런 이야기였어요?”
“그래. 그 때만해도 고민 중이었지만 방금 결심을 굳혔어. 훌륭한 선진 경영자가 되어 도원관을 일으킬 거야.”
“네, 그거 좋네요. 저도 도울게요.”
“그래. 공부도 같이 열심히 하자.”
둘이 마주보고 방긋방긋 웃는데 방문이 열리고 유비와 제갈량이 나왔다.
“아, 너희들. 나 기억 이대로 갖고 가기로 했어.”
공손찬이 말했다.
“그리고 조운이랑도 계속 사귈 거야.”
“알겠습니다.”
제갈량이 말했다.
“다 알고도 조운이랑.. 괜찮겠어?”
유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희 둘 괜찮은 만큼은 괜찮을걸.”
공손찬이 웃었다.
“그러고보니 너희들은...”
“잠깐 요 앞 공원에 꽃놀이랄 다녀오려고.”
유비가 보란 듯이 제갈량의 팔짱을 꼈다. 공손찬이 어리둥절해졌다.
“거기 꽃이 있었어?”
“피면요.”
제갈량이 간단하게 말했다.
“....방금도 지나온 공원인데, 지금 나가보면 막 딴 세상처럼 꽃나무 죽 있고 꽃 활짝 피어있고 가로등 환하고 그런 거야?”
말하고 공손찬이 제갈량의 방문을 보았다.
“도원관, 원래 2층이.....”
“자, 나가자!”
유비가 제갈량을 잡은 반대 손으로 공손찬도 잡고 힘차게 문으로 향했다.
“잠깐만요, 이러면 데이트가 안 되잖아요!”
제갈량이 소리쳤다.
“어때, 더블 데이트.”
“그래도.....”
“거 애인 없는 사람은 서러워 죽겠수다!”
2층에서 장비가 내려왔다.
“기왕 가는 거 우리도 갑시다, 꽃놀이.”
“설마 우릴 버리고 가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형님?”
관우도 같이 유비를 압박했다. 황충은 이미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뒤져 음료수와 간식거리를 꺼내고 있었다.
“유장 불러도 돼?”
말은 질문이었으나 마초는 이미 전화를 누르고 있었다.
“애써 시간을 냈는데.....”
제갈량의 표정이 껌껌해졌다.
“...이번에는 가족끼리 놀자.”
유비가 미안한 듯 웃었다.
“하지만 둘만의 시간은.”
“그건 따로... 아, 내가 선계로 가면 어떨까. 잠깐 있다 오는 건 괜찮지 않아? 도시락 싸가지고 제갈량 일하는 옆에서 먹여주고 어깨 주물러주고...”
“제가 일하고 있어서는 데이트는 아닙니다만. 뭐 그것도 급한 대로 대안이네요.”
제갈량이 한숨 쉬며 찬성했다.
‘저렇게 보니까 조금은 불쌍하네.’
유비와 제갈량을 보고 있던 공손찬은 조운이 팔을 잡자 그에게 관심을 돌렸다.
“우리도 팔짱 껴요.”
“그래.”
공손찬이 조운과 팔짱을 끼었다. 둘다 환하게 미소 지었다.
소풍 바구니까지 챙겨서 도원관 식구들은 집 앞 공원으로 갔다. 온 가족이 다 나오긴 했어도 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두운 공원을 팔짱 끼고 걷고 있으니 분위기가 부족하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조금 어두운 곳에 떨어져 서서, 공손찬이 조운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손짓했다.
“왜요?”
시킨대로 몸을 숙인 조운의 입술에 다른 입술이 와 닿았다. 살짝 닿고 떨어진 뒤 공손찬이 배시시 웃고는 음료수 나눠주고 있는 유비에게 뛰어가 버렸다. 공손찬에게 꽃잎이 떨어지는 걸 보면서 조운은 데이트에 신선마법이 좀 끼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게 사실을 말해봐 20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똑똑
“유비, 들어가도 돼?”
“어, 응!”
공손찬의 목소리가 심각해보였기 때문에 유비가 깜짝 놀라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인데 그래?”
“그게....”
공손찬이 의자에 걸터앉아 유비를 쳐다보았다. 유비는 자기가 오늘 뭐 잘못하거나 실수한 게 있나 서둘러 자신을 돌아보았다.
“미안해, 공손찬. 내가 과자를 사긴 네 몫까지 다 샀는데....”
“과자 얘기가 아니야.”
“그, 그럼 내가 샤워하고 네 바디로션 사용한 건 내 게 떨어져서... 내일 사올 거니까.”
공손찬이 미간을 모았다.
“... 그 문제도 아니니까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내가 묻고 싶은 건.”
유비가 긴장해서 마른침을 삼켰다.
“드림배틀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봐.”
유비는 심장이 떨어져 나간 표정을 했다.
“그.... 어떻게. 다 잊는 댔는데.”
그리곤 눈빛이 바뀌어 벌떡 일어났다.
“기억 난거야? 배틀 중에 있었던 일들이? 다행이다, 난 나 말고는 정말 영영 잊는 줄만 알고... 너 기억해냈으면 조조나 손책은. 손책은 괜찮지만 조조가 기억해도 되나 근데? 아, 손책도 주유 문제 걸리려나. 아니 주유가 안 죽고 인간으로 잘 살고 있으면 좋은 거니까.”
“잠깐만, 유비.”
공손찬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 그게 정말이라는 거야?”
“아, 완전히 기억난 게 아니라 꿈에서라든가 조금씩 생각나는 거야? 혹시 제갈량이 기억을 돌려주....”
“아닙니다.”
그 목소리는 유비 바로 옆에서 들렸다.
“나참, 떠보려고 한 것도 아닌 말에 그렇게 줄줄이 모든 걸 털어놓으면 어찌합니까? 정말이지 유비님과는 뭔가 비밀을 도모할 수가 없군요.”
“미안해 제갈량...”
제갈량이 나타나 막 반가워하려다 유비가 추욱 쳐져서 사과했다.
“그, 그런데 이렇게 내려와도 돼?”
“안됩니다.”
“제갈량....? 어디서 나타난 거야? 설마 둘이.”
공손찬이 유비가 앉아있던 침대를 보았다.
“아니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지요. 네. 방금 나타난 거 맞습니다.”
제갈량이 말했다. 공손찬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도 그, 드림.. 배틀 관계자야, 그럼?”
“네. 세계의 안정과 순환을 담당하는 옥새의 관리자입니다. 그 전에는 유비님의 신선으로 드림배틀에 함께했지요.”
“그럼 조운의 말이...”
“간략하기는 해도 모두 사실입니다.”
공손찬이 멍한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사실... 이라고? 정말로 꿈을 걸고, 패배해서....”
공손찬이 유비를 휙 돌아보았다.
“그리고 네가 이겼고?”
“내, 내가 널 이긴 건 아니야.”
유비가 착 움츠러들었다.
“리나가...”
“리나? 작년에 은퇴한 아이돌 가수?”
공손찬의 표정이 어이없어졌다.
“그런 사람들까지 드림배틀을 했다고?”
“응.”
유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나의 꿈은 뭐였는데?”
“자기가... 유일무이한 최고의 미녀가수가 되겠다고.”
“허. 고작 그런 꿈에....”
“고작이라고 할 건 아니죠, 그 사람 나름대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제갈량이 말했다.
“세상엔 훨씬 더 하찮거나 어이없는 꿈을 목표로 드림배틀에 뛰어드는 사람도 많습니다. 원소는 적어도 자기가 진심으로 추구하던 꿈을 걸고 전력을 다해 싸웠습니다. 방법은 나빴지만요.”
공손찬은 뭔가 항의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으나 말은 하지 않았다.
“제갈량, 그렇게 말할 필요는....”
“후궁을 백 명 두고 싶다는 사람한테 지는 편이 납득이 쉬울까요, 그럼?”
“아니.”
공손찬이 바로 말을 잘랐다.
“아니. 그래... 누구에게 어떻게 졌든 사실 그건 상관 없어. 기억도 안 나고... 근데.”
“근데 뭐?”
유비가 물었다.
“그럼.... 조운은 어떻게 되는 거야? 내.... 뭐냐 전투 조력자였다면서?”
유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러니까, 나 좋아하는 거 돼?”
“안될 건 뭡니까.”
제갈량이 말했다.
“그치만 그게, 사람 아니었던 거잖아?”
“지금은 사람입니다.”
“그렇다 해도 그게....”
공손찬이 한참 적당한 말을 찾아 헤맸다.
“그, 언제부터 좋아한 건데? 아니 그게 같이 싸우면서 전우애가 생겼다거나, 내... 꿈이나 인간성에 공감을 했다거나 그런 거야, 아니면.”
“아니면.”
제갈량이 말을 받았다.
“배틀을 위해 군주에게 도구로 주어지는 그들이, 자기 주군에게 ‘당연히’ 호의를 품게 되는 건 아니냐는 뜻입니까?”
“그래, 그거.”
“네 그렇습니다.”
“뭐?”
유비가 벌떡 일어났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제갈량도....”
“예, 신선도요.”
제갈량이 간단히 긍정했다.
“하지만 그건 조운한테 너무하잖아!”
공손찬이 외쳤다.
“그, 예전 상태는 어땠든 지금은 인간인 거잖아. 그런데 나한테 그렇게.. 매어있으면 안되지. 조운에게 선택권이 없다면 인간이 된 게 무슨 소용이야?”
공손찬이 머리를 짚었다.
“너무 나한테 맞춰준다고는 생각했지만, 그게 그런 이유라면 난 받아들일 수 없어.”
“다른 이유라면 괜찮고요?”
제갈량이 물었다.
“사람이 누구한테 반해서 잘해주고 싶고 그런 거야 뭐가 문제겠어? 하지만 이래선, 조운은 내가 뭘 하든 그저 맹목적으로 따를 거란 소리잖아. 자기 의사 없이.”
“그, 그런 건 아니야.”
유비가 목소리를 내었다.
“그야 조운이 널 좋아하는 건 나도 처음엔 좀 우려했지만, 그래도 맹목적으로 막 그러는 건 아니야. 자기 생각이나 그런 거 다 있다고.”
자기가 말하고도 좀 미진한 감이 느껴지는지 유비가 제갈량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사소한 건 됐고요.”
“사소...?”
“제가 온 건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지 결정하기 위해서니까요.”
“사태라니?”
공손찬이 물었다.
“내가 이.... 런걸 들어 알게 된 게 큰 사건이기라도 해?”
“원래라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좀 상황이 바뀌어서요,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왜, 뭐가 문제인 건데?”
유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탈락자의 기억을 지우는 건 본인의 정신건강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드림배틀에 대한 정보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갈량이 설명했다.
“드림배틀에 대해 사람들이 미리 알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말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했으면서 제갈량은 유비의 표정을 보더니 설명을 이어나갔다.
“미리 아이에게 영웅의 이름을 지어주거나 자기 이름을 바꿔서 배틀에 참전..”
“아!”
유비가 소리쳤다.
“그래서 스승님이 나랑 찬이 이름을 바꾸셨던 거구나! 처음부터 배틀에 참전하라고!”
“....네, 자길 쓰러뜨릴 아이들을 스스로 키워낸다는 발상이셨겠지요.”
제갈량이 유비의 말을 끊었다.
“이루고 싶은 꿈이 있어 참전하는 거면 차라리 좋습니다만, 레전드 히어로의 힘만을 노리고 이름을 바꿔서 힘을 얻은 뒤 범죄에 활용하는 사람도 많겠지요. 자기 이익에 따라 배틀의 진행에 간섭하려는 자가 생길 수도 있고. 그래서 기억을 지워가며 비밀로 하는 거긴 한데.... 요새는 상황이 바뀌었으니까요.”
“뭐가 바뀌었는데?”
유비가 물었다 .제갈량이 그를 한심하단 눈으로 쳐다보았다.
“유비님이요, 유비님. 당신이 드림배틀을 없애버린 덕에 배틀을 악용할 세력이 나타날 걱정은 사라져 버렸다고요.”
“아.”
유비가 머리를 긁었다.
“그럼 공손찬의 기억을 지울 필요는 없는 거야?”
“그렇다 해도, 옥새의 존재가 노출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으니 입막음은 해야겠지만요.”
“걱정 마! 공손찬은 입 무거워.”
“그야 유비님께 비하면 누군들 입이 가볍겠습니까마는...”
“나, 나 입 가벼워?”
유비가 충격을 먹었다.
“비밀을 못 지키시잖아요.”
제갈량이 축 쳐진 유비에게서 눈을 돌려 공손찬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어요?”
공손찬이 정신을 차렸다.
“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뭘?”
“선택지가 몇 있습니다.”
제갈량이 손가락을 꼽아보였다.
“첫 번째, 다시 다 잊어버린다. 두 번째, 기억은 이대로 두고 평생 입조심을 하며 산다.”
“이대로? 원래 기억을 돌려받는 옵션은 없는 거야?”
“그건 이미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서요.”
제갈량이 발뺌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보니까 기억을 유지하고 싶은 모양이네요.”
“당연하잖아?”
“전 지우는 쪽을 추천하고 싶은데요.”
“어째서요?”
공손찬보다 먼저 유비가 물었다.
“찬이는 내 가족이고, 믿을 수 있고 괜한 소리 하고 다닐 애 아니란 건 내가 보증할 수 있어. 말실수할까봐 그러는 거라면 찬이보단 내 기억을 지우는 게 시급할걸?”
“그건...”
제갈량이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음,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건 말실수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공손찬의 정신건강을 걱정해서입니다.”
“내 정신건강이 왜. 배틀 도중에 차라리 싹 잊는 게 나을 만큼 끔찍한 일이라도 일어났던 거야?”
공손찬이 물었다.
“네. 꿈을 잃었다고, 말씀 들으셨잖아요?”
공손찬이 반박하려다 말을 찾지 못했다.
“왜 갑자기 꿈을 포기하고 도원관을 떠나게 되었는지, 이유를 들으니 납득되고 마음이 편해지던가요?”
공손찬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조운과 있었던 일을 알게 되니...”
“무슨 말인지 알겠어.”
공손찬이 제갈량의 말을 끊었다.
“그래.... 분명 모르는 게 좋은 일도 있을 거야. 그렇지만, 다들 모른다면 모를까 도원관에서 나만 모르는 거잖아. 기만당하는 느낌이라고. 그리고.. 난 이미 모르는 쪽을 선택한 셈이야. 조운이 뭔가 숨기고 있는 걸 알면서, 마음에 걸리는 게 여러 가지 있는데도 눈을 돌리고 있었어.”
말하다 공손찬이 제갈량을 노려보았다.
“이것도 네가 한 거야?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해도 그냥 넘어가는 거?”
“제가 한 건 아니지만 일반인은 드림배틀에 관련된 걸 보거나 들어도 너무 궁금해 하지 않도록 조정이 되어있긴 합니다.”
“그랬어?”
유비가 놀랐다.
“이상한 갑주를 입은 복면 괴한이 리어카를 미는데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셨나요, 그럼?”
“아....”
“신선들도, 이렇게 눈에 띄는 미모와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돌아다니는데 아무도 두 번 쳐다보지 않았잖아요.”
“손권은 너 잘생긴 아저씨라고 했는데.”
“지금 질투하세요?”





아컴 나이트메어 21 (완)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제갈량......”
유비가 그의 손을 꼭 쥐었다.
“말씀하세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을게.”
유비는 어느새 다시 울고 있었다.
“게임 안에서 했던 이야기, 어디까지가 진실이야?”
“게임 안에서 했던 이야기가 좀 많은데 그 중 어느 거요?”
유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제갈량은 다 알면서 묻고 있었다.
유비가 자기 입으로 말했으면 해서.
“......제갈량도 내가 좋아? 나랑 같이 살고 싶어?”
“예.”
그렇게 망설이고 감추고 덮은 채 살려고만 했던 감정을 제갈량은 간단히 긍정했다.
“저도 유비님이 좋습니다. 군신 관계가 끝나면 사라질 마음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습니다. 유비님이 왜 이런 가짜 세상을 만들고, 이 안에서나마 저와 인간적인 유대가 가능한 관계를 만드셨는지 알았을 때 기뻤습니다. 그래도 이대로는 세상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제갈량이 유비의 손을 쥔 채 자신의 가슴에 갖다댔다.
“반드시 유비님 곁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주유도 사마의도, 다른 영웅패들도, 또 가짜가 나올까봐 무서운 나머지 이 세상에서조차 포기해버리신 서서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겠습니다. 그러니.....”
“괜찮아, 제갈량.”
유비가 제갈량을 끌어안고 계속 울었다.
“무리하지 마. 내가 바란다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그러다가 또 이렇게 되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서 문제였다니까요.”
제갈량이 유비의 등을 퍽 소리나게 때렸다.
“대체 이제까지 뭘 듣고 있었던 겁니까? 유비님께서 자기 소원을 직시하지도 못하고 다 파악하지도 못해서 일어난 일이라고요. 이제 겨우 문제점을 찾아 그걸 해결해보겠다는 신선에게......”
말을 맺지 못하고 제갈량이 유비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유비는 그저 그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래. 내가 잘못했어.”
차원문을 닫을 때가 되었다. 유비는 고대 표식을 쓰는 대신 주사위를 쥐었다.
“체력 굴림으로 닫겠어.”
조조도 손책도 유비를 이상한 거 보듯 쳐다보았다. 유비는 차원문을 닫는 데 성공했으나 봉인하지는 못했다.
“유비, 너 대체 왜......”
항의하려는 조조를 무시하고 제갈량이 다음 신화 카드를 뽑았다.
“검은 동굴에 다시 차원문이 열리고, 멸망 단계가 올라갑니다.”
주유가 괴물 눈알 그림의 토큰을 꺼내 올려놓고 선언했다.
“멸망 단계가 다 찼습니다. 이세계의 존재가 강림합니다.”
멸망 토큰이 가득 차자 종이에 인쇄되어 있던 니알라토텝의 그림이 역시 부옇게 번져 사라졌다. 대신 녹색 바탕에 선명한 금색으로 빛나는 ‘諸葛’ 두 글자가 떠올랐다.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광풍에 뒤집혔다. LED 랜턴이 촛불처럼 꺼져버렸다. 대신 카드에서 솟구친 녹색 섬광이 방 안을 눈부시게 가득 채웠다.
옥새가 강림했다.
조조와 손책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실신했다. 유비 역시 실신할 뻔했으나 제갈량이 감싸주었다.


태풍에 휩쓸린 듯한 충격이 가시고 나서 유비는 슬쩍 고개를 들어보았다.
“됐습니다. 이제 눈 떠도 괜찮습니다.”
제갈량의 후련한 목소리에 용기를 얻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와본 적 있는 선계의 숲이었다. 제갈량은 어느새 나뭇잎 장식이 된 옥새의 신선 복장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옥새는 두 사람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이번 일 때문에 잠깐 나왔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응.”
유비는 아직 얼떨떨한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과 제갈량, 옥새를 빼면 그냥 나무와 풀, 그리고 두 명의 신선밖에 보이지 않았다.
주유와 사마의처럼 보였다. 최소한 겉모습은 그들 그대로였다.
그러나 아컴에서 자주 겪었던 무시 못할 예감과 비슷한 느낌은 그들이 유비가 알던 주유와 사마의라고 단정짓기 어렵게 했다. 게다가 둘 다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부자연스러울 만큼 곧은 자세로 꼼짝도 않고 있으니 더욱 불안했다.
“가짜 세상에 불러들였던 그 신선들입니다.”
제갈량이 설명해주었다.
“유비님이 알던 그들은 물론 아닙니다. 가짜 세상에 안착시키기 위해 그들의 모습을 본떴고, 유비님도 그들이라고 생각해서 유비님이 바라는 모습대로 받아들이셨던 거죠.”
“그랬구나.”
유비가 슬프게 중얼거렸다.
“원래는 유비님 눈에 이들이 띄더라도 여기까지만 설명했을 겁니다만.”
제갈량이 혀를 차고 그들을 가리켰다. 둘 다 푸른 섬광과 붉은 섬광만 남기고 사라졌다.
“실은 두 사람의 데이터를 가지고 만들어내는 중인 복제입니다. 주유의 에너지는 지금 손책님과 융합해 있고 사마의는 버그 문제도 있어서 완전한 본인들로 되살아난다는 보장이 없기에 그동안 비밀로 하고 있었습니다.”
“복제?”
유비가 두 눈을 깜박깜박하다 정색했다.
“그럼 본인들이 아닌 게 당연하지.”
“신선은 프로그램입니다. 인간과는 다릅니다.”
제갈량이 말을 이었다.
“인간들이 논하는 복제인간과는 접근방향이 같을 수 없습니다. 유비님의 컴퓨터에 깔려 있는 게임과 강동관에 깔려 있는 게임은 똑같이 올드워치일 것 아닙니까? 그 둘이 다른 게임인가요?”
“그치만......”
반박하고는 싶은데 머리가 따라주지 않았다. 어물거리는 유비에게 제갈량이 웃어보였다.
“굳이 그 작은 머리로 애쓰실 필요 없습니다. 의혹이나 불안함이 전혀 없었다면 저인들 왜 유비님께 비밀로 하려고 했겠습니까? 다만 그들이 이번에 너무나 주유와 사마의 다웠고, 유비님도 혼자 끙끙 앓고 계셨으니 차라리 서로 터놓고 같이 끙끙거리기로 한 겁니다.”
“그럼......”
“어차피 사마의는 본인 그대로 살려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버그만 없애면 유능한 신선이니 선계에서 할 일이 많겠지요. 주유 쪽은 좀더 고민해봐야겠지만, 손책님이 도로 단명해지는 일도 없을 것이고 결국 본래의 주유가 되지 못하더라도 저 신선도 그저 버려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일단 여기서부터 출발해도 될까요?”
“그래.”
유비는 비로소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서서도 새로 만들고 있었냐고 물어볼까 하는 충동이 들었다. 그리고 차마 물어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가, 이번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되새기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서서는 어떻게 했어? 서서도 살려낼 거야?”
“......”
제갈량은 잠시 발끝으로 흙을 팠다.
“저 역시 서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럼, 저 둘도 안 되는 거잖아!”
“그렇습니다.”
제갈량은 순순히 긍정했다.
“제가 비겁했습니다. 서서의 삶과 죽음은 소중히 하면서 저 둘의 죽음은 멸시했습니다. 저 둘이 더 유용하다는 핑계로요. 그리고 유비님이 드림 배틀 시절 다른 두 군주와 협력하던 때를 그리워한다는 핑계로요.”
“너는 그립지 않았어?”
“그리워했다면......”
제갈량은 갑자기 어물거리더니 파놓은 흙가루를 걷어찼다.
“예, 전혀 안 그립고 바보 같은 시절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주유와 사마의를 살리고 싶을 정도로!”
유비는 입을 다물고 제갈량을 힘껏 끌어안았다.
“미안해.”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실을 알게 되어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이번 일로 제갈량이 괴로워하기를 원치는 않았다. 1차 원인은 자신이었다.
“난, 제갈량이 이제 혼자 뭐든 잘 할 수 있다고만 생각했어. 내가 제갈량한테 필요할 줄 몰랐어. 그냥......나도 제갈량이 보고 싶으면서, 제갈량은 내가 보고 싶을지 생각하지 않았어. 제갈량의 행복을 소원으로 빌어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만 생각했어.”
제갈량은 유비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옷자락을 꼭 쥐었다.
“모든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게 안 되더라도 내 주변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각자의 꿈을 위해 싸운 사람들이. 그래서 나도 그걸 보고 행복할 수 있으면 좋겠어.”
“같이 다시 해봅시다.”
제갈량이 속삭였다.
“할 수 있을 겁니다.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수확도 있었습니다.”
“그래.”
유비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제대로 말해야 했다. 거짓 세상 안의 거짓 세상에서 얼결에 해버린 고백 갖고는 부족했다.
“사랑해, 제갈량. 헤어지지 말자. 옥새의 신선으로 살더라도 가끔이라도 만나자.”
제갈량이 유비의 옷자락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말을, 왜 이제야......”
이젠 제갈량의 목소리에도 울음이 섞였다.
그리고 인간 한 명과 신선 한 명의 통곡이 텅 빈 선계의 숲에 울렸다.


“신선은 원래 이만한 일로 울지 않을 만큼 감정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유비의 팔을 베고 풀밭에 누운 채 제갈량이 볼멘소리를 했다.
“유비님을 모시다가 옮았나 봅니다. 어쩌실 겁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유비가 하도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서 제갈량은 피식 웃었다.
“글쎄요. 같이 고민할 일이 늘었네요.”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속이 빈 옥새가 여전히 두 사람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떠 있었다.
“너무 불안해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갈량이 유비의 손등을 토닥였다. 그제서야 유비는 자신이 제갈량의 옷자락을 꽉 잡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 제갈량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 이렇게 나와있는 것처럼 가끔은 나올 수 있어요. 옥새를 더 손볼 수도 있고요. 정 불안하시다면.”
제갈량이 유비에게 열쇠를 건네주었다.
“처음 절 찾아오셨을 때처럼 이걸로 언제든 또 찾아오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그래.”
유비는 열쇠를 쥐고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조조랑 손책은 어디 있어? 다른 사람들은?”
“그들은 모두 각자의 본래 자리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냥 푹 자고 긴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며 눈을 뜨겠지요. 자세한 내용은 흐려지거나 다른 꿈으로 대체될 거고요. 드림 배틀이 끝났을 때처럼요.”
“응.”
배틀의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 이 꿈만 기억해봐야 혼란만 가중될 터였다. 보드게임까지 생각해보면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그야말로 나이트메어 배틀이었습니다.”
“그래도 같이 학교 다니는 동안엔 행복했어.”
“저도 그랬습니다.”
제갈량이 유비의 품에 다시 파고들었다.
“잠시만 더 쉽시다.”
“응?”
제갈량이 먼저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유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제 일어나면 일 폭탄일 테니까요. 세상이 문제 없이 고쳐졌는지도 확인해야 하고, 주요 인물들의 기억과 정신이 무사한지도 확인해야 하고. 후자는 옥새의 힘만으로는 무리일 겁니다. 유비님과 오호대장군들이 노력해야 해요. 꿈을 꿨을 뿐이니 잊고 앞을 볼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주세요. 친구이자 가족으로서.”
“응.”
유비는 제갈량의 등을 토닥였다.
제갈량이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아 기뻤다. 언제나 입으로만 제멋대로지 행동으로는 과할 정도로 헌신적인 신선이었으니까. 주군을 자신이 짊어져야 할 사람으로만 여기고 주군에게 의지할 줄을 몰랐으니까.
‘이제는 주군은 아니지만.’
그러니까 과하게 헌신할 필요 없었다. 가끔은 어리광도 부리고 의지도 해줬으면 싶었다.
그렇게 말하는 대신 유비는 다시 제갈량을 쓰다듬고 그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 눈을 뜨면 많은 것들이 달라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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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유비는 선계에 출퇴근도장 찍으며 제갈량과 함께 세상을 어떻게 고칠지 끙끙거리고 가끔은 알콩달콩도 하고 살겠지요. 다른 인간들하고도 잘 지내고요. 손책과 조조, 주유와 사마의도......행복해졌다고 생각해주세요.
제목을 아컴 나이트메어로 할지, 나이트메어 배틀로 할지 오래 고민했었는데 소재가 된 게임 아컴 호러의 이미지를 좀더 강화하고 싶어서 아컴 나이트메어로 정했습니다. 줄거리 진행을 위한 편의상(그리고 가끔은 내가 까먹어서) 게임 규칙이나 이름 등은 조금 달라진 곳이 있습니다.

아컴 나이트메어 20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아컴에서 발로만 뛰어 조사하기가 벅차다며 조조도 모터사이클을 구입했었다. 바로 유비의 스쿠터 옆에 자기 것을 세우고 조조와 사마의가 내렸다.
“유비!”
조조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험악하게 굳어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총을 빼들고 두 사람이 있는 쪽을 겨누었다.
“뭐야, 뒤에 적이야?”
유비와 제갈량이 동시에 몸을 틀었다. 총소리가 울렸으나 두 사람의 뒤쪽엔 아무도 없었다.
“비켜, 유비!”
조조가 다시 외쳤으나 이번엔 사마의가 그의 팔을 잡고 말렸다.
“그렇게 갑자기 쏴버리지 말고 일단 유비님께 설명을 하시죠.”
그리고 유비 쪽으로 돌아서서 외쳤다.
“제갈량이 바로 문제의 단말이었습니다! 패에 새겨진 문자는 바로 그의 이름입니다!”
유비가 소스라쳐서 제갈량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놀랍도록 태연해서 유비는 잠시 자기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근거 있는 이야기입니까? 차원문 앞에서 할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데요.”
차원문은 보통의 문처럼 가만히 벽에 붙어서 누가 드나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근처에서 시끄러운 일이 벌어지자 천천히 부풀었다 오므라들었다 하며 그리로 반응해왔다. 아직 이들이 선 자리에선 보이지 않던 공간의 구멍이 천천히 동굴 안쪽으로부터 미끄러져 나왔다.
제갈량은 그쪽을 무시한 채 조조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지금 절 죽여야겠다고 결심하고 오신 겁니까? 제가 진짜 단말이라면 총알 한 방에 죽지는 않을 겁니다. 그 대비는 하신 건가요?”
조조 쪽에서는 가까워진 차원문이 똑똑히 보였다. 조조의 표정이 변하는 걸 보고 유비도 낌새를 채고 뒤를 돌아보았다.
유비는 여전히 흉흉한 기세인 조조와 태연한 제갈량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제갈량을 감싸며 게걸음으로 물러났다. 차원문과 조조 양쪽 다를 피하고 있었다.
“유비, 바로 지난번 봉인을 전부 부숴버린 힘이 제갈량의 마법광과 똑같은 색이었어.”
조조가 유비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제갈량을 공격하고 싶어도 유비가 그에게 바짝 붙어 보호하고 있으니 섣불리 그럴 수가 없었다.
“아컴에 처음으로 차원문이 열린 해는, 이번 세기에는 4년 전이 처음이고. 제갈량이 아컴으로 온 해지. 상형문자 해석도 지금 보여줄까?”
조조가 노트 찢은 종이를 들어보였다.
“맨 위의 새 날개 부분은 간단히 말해 그냥 장식이고, 그 아래가 두 개의 문자인데 ‘제갈’이라고 읽는다.”
제갈량은 유비를 돌아보았다. 유비는 완전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낯선 글자고 종이에 빽빽하게 적혀있는 설명도 이 거리에선 다 알아보기 힘들었다. 조조의 해석이 틀렸을 수도 있으니 이건 결국 자신이 제갈량을 얼마나 믿느냐의 문제였다.
그런데 머리 한 구석에서 끼쳐오는 확신이 있었다.
조조의 말이 옳다.
처음 문양을 봤을 때, 이것이 처음이 아니며 그는 이 문양을 본 적이 있다고 느꼈던 그 확신에 걸고 문양이 가리키는 존재는 제갈량이 맞았다.
“유비님.”
제갈량이 부드럽게 말을 걸어왔다.
“절 믿고 기꺼이 위험에 뛰어들었던 일 기억하시죠?”
카르코사의 탑에서 함께 뛰어내렸던 일이 떠올랐다. 제갈량이 추천해준 무기를 쥐고 듣도보도 못한 괴물에게 달려들었던 일도.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제갈량이 자신을 감싼 유비의 팔을 꽉 쥐었다.
“저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죽어달라고 했던 것 기억 안 나세요?”
유비의 팔을 움켜잡은 채 제갈량이 차원문으로 달려들었다.
아직 거리는 충분히 있었다. 유비는 제갈량을 뿌리칠 수 있었다.
그러는 대신 따라 달려갔다. 커다랗게 부풀어 맥박치는 차원문을 향해.
“유비!”
조조는 서둘러 주문을 완성시켰다. 그러나 막 차원문 안으로 뛰어드는 제갈량을 가리키는 순간, 뻗은 오른팔이 크게 흔들렸다.
표적을 잃은 주문이 흩어져버렸다. 조조는 자신의 팔을 잡은 사마의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그가 이를 앙다물고 흔들리던 눈동자를 바로했다.
“단말은 하나가 아니었지.”


차원문 안은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따가운 빛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방해가 예상 밖으로 강력하군요.”
“방해?”
여전히 제갈량의 팔을 꽉 잡은 채 유비가 물었다.
“예. 이 가짜 세상을 유지하려는 힘이요.”
가짜라는 말에 유비가 몸을 떨었다. 눈부셔서 제대로 뜨지 못한 눈을 떠 보려고 애썼다.
“억지로 떠도 됩니다.”
제갈량이 유비를 끌어당겨 감싸안았다.
“보기 힘든 것들 뿐이겠지만요. 받아들여야 하는 거고요.”
도로 감고 뜨지 말라는 말을 듣는 편이 덜 무서울 것 같았다. 그래도 유비는 용기를 내어 눈을 떴다.
따가운 빛이 사라지고 어둑어둑해졌다. 가로등만 빛나는 한밤중의 독립광장처럼 어딘가에서 빛이 비치고는 있는데 그리 밝지는 않았다.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바로 곁에 선 제갈량 외엔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어리둥절해 있는 유비에게서 한 발짝 떨어진 제갈량이 바닥을 가리켰다.
“이쪽을 보시면 이해가 빠를까요?”
유비는 제갈량이 가리키는 대로 내려다보았다. 리놀륨 바닥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재질을 잘 알 수 없는 바닥인데 두 사람이 선 곳엔 둥근 그림이 그려져 있고 테두리를 따라 글씨도 새겨져 있었다.
[다른 세계]
“뭐야, 이거?”
꼭 자신과 제갈량이 선 자리를 둥글게 영역으로 만들고 그 곳에 이름을 붙여놓은 것 같은 꼴이었다. 비틀거리며 테두리 밖으로 벗어나려는 유비를 제갈량이 붙잡았다.
“게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말이 보드를 벗어나면 어떻게 합니까.”
슈브 니구라스가 낳은 것을 만났을 때도 이보다는 덜 충격적이었다. 유비는 제갈량이 부축하는 대로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인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백해진 얼굴로 유비와 눈을 마주친 거인은......유비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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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는 정신을 차렸다.
보드를 놓고 자신과 제갈량, 조조, 사마의, 손책, 주유까지 모여 주사위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친한 고등학생 친구들끼리 노는. 그뿐이었다.
옆에서 제갈량이 툭툭 쳤다. 차례가 됐는데 뭐 하냐는 뜻으로 알아듣고 카드를 뽑았다. 다른 세상에서 겪는 이벤트를 정해야 했다.
“여기가 진짜라고 말한 게 아닙니다.”
제갈량이 다시 타이르듯 말했다.
“여기가 진짜라면 보드게임 중에 왜 이런 일을 겪겠습니까? 다시 말을 잘 보세요.”
유비는 시키는 대로 게임판을 내려다보았다.
‘잡역부’ 말은 주름잡힌 얼굴과 콧수염이 억센 인상을 주는 중년 남성이었다. 낡은 모자를 쓰고 손엔 산탄총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보고 있는 동안 그림이 물에 번진 듯 흐려지더니 전혀 다른 얼굴로 바뀌었다......경악해 있는 유비 자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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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유비는 비명을 지르고 정신을 차렸다.
눈을 떠보니 익숙한 하숙집 천장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언젠가 그랬듯 싸움에 지쳐 악몽을 꾸는 자신을 제갈량이 돌봐주는 중이라면.
아니었다. 다시 종이 보드 위였다.
“진짜 세계는 따로 있습니다.”
제갈량이 얼핏 담담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세상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유비님의 소원이 만든 세상이. 여기는 꿈속의 꿈이자 거대한 주문이 빚어낸 임시 세상입니다.”
“진짜 세상이, 내가 만든 세상이라고?”
“예.”
그런 엄청난 소리를 제갈량은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럼 거기선 모두가 행복하게 살고 있어?”
“아뇨.”
유비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혀를 쯧쯧 차며 눈길을 돌리는 제갈량을 보니 계속 모르는 편이 좋겠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역시 그게 문제였습니다. 각자의 꿈을 걸고 싸우는 절망에 찬 전쟁은 끝냈습니다만, 역대 우승자들에 비교해도 유난히 본인이 얻은 것이 없었지요. 세상 모두는커녕 주위 사람들도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습니다.”
제갈량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컴에 정착한 선조가, 누나 여동생 형 주치의 다 희생시키고 혼자 부자가 된 게 슬펐다고요? 공손찬 님, 서서, 유장 님에 저까지 다 떠나보냈는데 당신은 얻은 것도 없군요.”
유비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찝찔한 액체가 입 안으로 흘러들어온 것을 깨달았다.
“기억이 없을 뿐 각자의 새 꿈을 찾은 이들도 있고, 영웅패들도 인간이 되어 돌아갔기에 어떻게든 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조조님은 도장 사범이 왜 자기를 오랜 친구처럼 대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손책님과 손상향님은 서로 화해했지만 새 매니저를 구한다는 말에 유비님이 우는 것은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제갈량이 다가와 유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자책하지 마세요. 이번 일은 유비님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우승자의 꿈이 갖는 에너지를 과소평가한 제 책임이기도 합니다.”
“과소평가? 제갈량이?”
“예.”
유비는 눈물을 그치고 눈을 껌벅껌벅했다. 제갈량은 그 눈빛을 피하듯 두 눈을 내리깔았다.
“옥새를 개조했다 하나 유비님의 꿈이 새 3백년을 감당하는 동력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드림배틀을 끝내는 쪽으로 소원을 바꾸었어도 그 밑바닥에 깔린 소원은 여전했습니다. 세상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면 적어도 신선과 영웅패, 배틀로 희생되고 불행해진 인간들만이라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앞으로 불행해지는 것도 막고 싶다. 아닌가요?”
“맞아.”
유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승자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것 역시 옥새의 변할 수 없는 원리입니다. 저 역시, 적어도 유비님 곁의 인물들만이라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꿈과 현실의 격차가 지나치게 큰 상태에서 무리한 탓에 그만 가짜 세계가 만들어지고 말았습니다.”
“가짜 세계?”
“예. 그러니까 얼핏 보기엔 꿈이나 환각과 비슷한데.....”
“아니, 아니. 그쪽 말고.”
유비가 떨리는 손을 파닥파닥 내저었다.
“내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불행했던 거야? 찬이랑 스승님이랑 형이랑......모두가? 옥새의 신선이 작정해도 안 될 정도로?”
“아뇨. 그랬다면 애초 방심해서 무리하지 않았겠죠.”
제갈량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유비님도 어렸고, 인식할 수 있는 세상도 단순했습니다. 거기엔 가족들과 조조님, 손책님, 거기에 주유와 사마의와 이미 소멸해버린 영웅패들까지 포함되어 버렸습니다.”
유비는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스승님 계신 도원관에서 찬이랑 함께 등교하면, 학교엔 제갈량이 있었다. 관우와 장비도 있었다.
조조는 죽지 않은 왕윤 아저씨를 따라 경찰이 될 예정이었다. 사마의는 배신 같은 것 할 이유가 없으므로 얌전히 조조를 따랐다. 하후돈과 하후연도 있었다.
손책은 손상향과 손권에게 보다 세심하고 의지가 되는 형이었다. 주유는 그의 곁에 살아서 함께 있었다.
“......그게 다 가짜라고?”
“예.”
다시 울먹이는 유비에게 제갈량이 못박았다.
“지나치게 달콤한 가짜죠. 그래서 제가 직접 들어와 깨우려고 했는데도 실패하고 도리어 제가 이 세상에 편입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옥새의 신선이 교복 입고 학교나 다니는 신세가 되다니.”
“미안해!”
유비가 비명을 질렀다.
“나 때문에 제갈량이 또 위험에 처하다니!”
“위험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제갈량이 입술을 비죽였다.
“저도 과거의 한낱 신선이 아니고, 이 세계도 인간의 의식세계와는 다르니까요. 좀 꾸물거린다고 죽지는 않습니다.”
어디선가 콰르릉 하는 엄청난 소리가 들렸다. 유비는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사위 굴리는 소리입니다.”
제갈량은 태연했다.
“설명에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저쪽에서는 다음 차례로 넘겨 게임을 계속하도록 시켰습니다. 어차피 다른 세계에선 두 턴을 소모하는 게 정상이니까요.”
“아, 보드게임......근데 이건 왜 하는 건데?”
“게임 설명할 때, 이 게임의 목적이 뭐라고 했죠?”
“세상을 지키는 게임.”
“그럼 여기서 지면 어떻게 될까요?”
“세상 멸망.”
제갈량의 이제 알았냐는 눈빛을 보고 비로소 유비도 아컴 나이트메어의 진짜 목적을 깨달았다.
“저 역시 여기 편입되어 버렸을 때, 곧 원군을 둘 불렀습니다. 새로 생성된 신선들을요. 제가 편입되었듯 그들도 편입되었지만 대신 그 이상 해를 입지는 않았습니다. 유비님의 소원에 기반한 곳이고 제 자리처럼 그들의 자리도 처음부터 있었으니까요. 덕분에 그들과 함께 계획을 세우고 게임으로 위장한 주문을 쓸 수 있었습니다.”
제갈량이 고개를 들어 공중을 올려보았다.
같이 고개를 들면 게임중인 자신을 보게 될 것이 두려워 유비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무리 침입자의 분탕질에 관대한 세상이라도 아예 세상을 무너뜨려버리려는 시도까지 봐줄 리는 없죠. 세상 자체의 항상성과 관성이 안에 있는 사람들을 자극해 게임 패배를 막으려는 중입니다. 조조님도 손책님도, 진실을 모르는 이상은 이대로 살고 싶을 테니까요. 행복하게.”
“그럼 여기의 조조와 손책도 진짜 그들이란 말이야? 내가 만든 환상이 아니고?”
“물론입니다. 여기는 의식 속 같은 게 아니고 ‘세상’이라니까요.”
창백해져서 허둥대는 유비를 제갈량이 다시 부축했다.
“그러니까 게임에서 져야 합니다. 고대 표식 같은 건 잊어버리고, 이 거짓 행복을 끝내 주세요.”
유비는 제갈량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신을 희생시켜 세상을 구하겠노라고 거짓말할 때만큼이나 간절하고 진실된 얼굴이었다.

아컴 나이트메어 19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겨우 그 정도 근거로 제갈량이 이세계 존재의 단말이라고 말해봐야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계속 멀쩡한 얼굴로 의논하고 있을 수도 없어 도망치고 말았다.
조조도 제갈량이 정말 그런 존재라면 안타깝고 괴로울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완전히 확신하지 못하는 것도 절반은 그 때문이었다.
세계멸망을 눈앞에 두고 정에 휩쓸려선 안 되니 정말로 제갈량이 단말이라면 그는 그래도 처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비에겐 무리일 것이다.
생각난 김에 조조는 차원문의 상태도 확인해보기로 했다. 강을 건너서 섬으로 들어갔다.
섬 안은 버려진 숲속이었다. 차원문의 위치는 알고 있었으므로 조조는 주위에 괴물이 있는지 확인하며 천천히 안쪽으로 들어갔다.
저 앞에서 터벅터벅 마주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유비?’
괴물의 발소리라기엔 인간의 것에 가까웠고 차원문 근처에서 전형적으로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도 사라져 있었다. 바로 쫓아가 유비임을 확인할 것인지, 좀더 경계할 것인지 생각해보는 사이 풀썩 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조조는 서둘러서 섬 안쪽으로 달려갔다. 차원문이 열렸던 자리가 낡은 돌우물로 변해 있고 좀 떨어진 곳에 유비가 쓰러져 있었다.
주위에 괴물들이 없는 걸 확인해가며 다가가 맥을 짚었다. 제대로 뛰고 있었다.
‘휴......’
안도감과 동시에 강렬한 위화감이 들었다. 내가 왜 유비를 걱정하는지 알 수 없다는, 뭔가 안 어울리는 일을 하고 있는 듯한 위화감.
지난번에 좀 안 좋게 헤어졌고 성격도 안 맞아 대하기 불편한 녀석이긴 해도 동료나 다름없었다. 이 정도 신경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으......”
유비가 신음하며 움찔거렸다. 조조는 얼른 그를 부축해 자세를 편하게 고쳐주고 부상이 없는지 살폈다. 다행히 어디 부러진 곳도 없고 응급조치가 필요한 상처도 없었다.
일단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자 비로소 유비가 쥐고 있는 작은 상자에 주의를 돌릴 여유가 생겼다.
한 눈에 봐도 뭔가 있어보이는 상자였다. 겉을 마감한 금속과 가죽은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재질이 아니고 잠금쇠는 퍼즐처럼 기묘하게 꺾여있었다.
어디서 난 물건인지 더 조사하기에 앞서 유비를 깨웠다.
“아.....제갈량......”
“눈 떠봐라. 나다.”
방금 다른 세상에서 죽을 고생하고 온 주제에 해죽해죽 웃으며 유비가 눈을 떴다. 제갈량이 아니라고 알면 좀 표정이 식을까 했더니 조조의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도 그는 환하게 웃었다.
“아, 조조구나. 차원문 잘 닫힌 거야?”
“그래. 네 전리품도 무사하고.”
조조가 상자를 가리키자 유비가 그걸 제대로 보려고 영차영차 일어났다.
“지금 확인하라는 게 아니고, 안심하고 여길 피하기부터 하자는 거다. 일어나 봐.”
“응, 그래.”
이 섬도 이름붙일 수 없는 집처럼 차원문 없이도 충분히 위험한 장소였다. 조조는 유비를 재촉해서 일단 가까운 상업 지구의 거리로 갔다.
“사마의의 집이 가까우니 거기서 쉬어.”
“응.”
가게를 비워둘 수 없었기 때문에 사마의는 집에 없었다. 조조는 자기가 가진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유비를 소파에 앉혔다.
“용처럼 생긴 괴물이 이걸 지키고 있었거든.”
유비가 상자를 들어보였다.
“그놈이 마침 자고 있길래 다가가서 뺏어왔어. 안 깨더라고.”
“파수꾼치고는 미덥지 못한 놈이었군.”
조조는 다시 잠금쇠를 건드려 보았다. 지능 테스트라는 명목으로 유행하는 퍼즐과 비슷해서 좀 궁리한 끝에 풀 수 있었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나도 몰라.”
유비는 기대감으로 두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조조도 드러내지만 않았을 뿐 비슷한 기대감에 쫓겨 상자를 열었다.
안에 있는 것은 검푸른 돌 부적이었다. 둥글고 모나지 않게 다듬어져 있고 중앙엔 하얗게 오망성이 새겨져 있었다. 손에 쥐자 알 수 없는 열기가 느껴졌다.
“설마.....”
이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조조가 신음했다.
“왜, 뭔데 그래?”
조조는 돌을 다시 상자에 넣고 유비의 손에 꼭 쥐어주었다.
“고대 표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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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밖의 폭우와 천둥번개는 더욱 심해진 것 같았다. 정전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주위 상황도 잊고 조조가 유비에게 새 특별 아이템 카드의 기능을 설명해주었다.
“그러니까, 이걸 차원문 봉인할 때 쓰면 단서 없이도 봉인이 가능하고 멸망 카운트까지 늦춰진다는 거지.”
새 카드는 정말 그렇게 힘들게 가져올 만한 것이었다. 유비는 입을 딱 벌리고 이미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차 있는 멸망 단계를 바라보았다.
조조가 카운트 채우는 데 쓰는 작고 둥근 토큰을 집었다. 괴물의 눈알이 그려진 토큰을 뒤집으면 봉인 표시인 오망성이 그려져 있어, 같은 토큰을 놓는 방향에 따라 멸망 단계를 채우거나 차원문 봉인 표시로 쓰고 있었다.
“멸망 단계에 놓았던 이걸 그대로 뒤집어서 다음 차원문 봉인에 쓰는 거야. 그럼 멸망 단계는 떨어지고 봉인은 늘어나지. 그런 게 생겼으니 무리를 해서라도 바로 다음 차원문에 들어가는 게 낫겠다. 지금 너무 촉박해.”
유비가 세어봐도 자칫하면 몇 턴 지나지 않아 그냥 세상이 멸망하게 생겼다. 고개를 끄덕거리고 카드를 꼭 쥐었다.
“이제 제 차례군요.”
제갈량이 자신의 ‘교수’ 말을 옮겼다. 그가 목적한 차원문으로 가는 길목에 나이트건트가 있어 그것부터 무찔러야 했다.
또 단서를 써야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교수’는 간단히 나이트건트를 무찌르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잠깐, 그 말 좀 줘봐.”
조조가 나이트건트 말을 가리켰다.
“예, 여기요.”
제갈량이 내민 괴물 말을 쥐고 조조는 말 뒷면에 적혀있는 설명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그런 끝에 살짝 혀를 찼다.
“차원문이 열린 곳까지 가는 수고를 줄일 수 있었는데 아깝게 되었군.”
“예?”
“나이트건트의 특수능력은, 탐사자가 나이트건트에게 지면 체력이 깎이는 게 아니라 가까운 차원문에 떨어지는 거잖아. 방금 그냥 졌더라면 차원문까지 가는 턴을 절약하고 이번에 들어갈 수 있었을 거란 얘기다.”
“그렇군요.”
제갈량이 도로 말을 받아들며 끄덕였다.
“미처 그 생각을 못했군요.”
“괜찮아. 그래도 이걸로 턴을 벌면 되잖아.”
유비가 고대 표식 카드를 들어보이며 제갈량을 위로했다.
고대 표식으로 턴을 벌어봐야 멸망이 코앞에 다가온 것을 한 턴 늦춰줄 뿐이고 아까 봉인이 전부 제거된 것을 뒤집을 수 있는지 의심스러운 때였다. 그러나 유비는 고대 표식 하나로 이길 수 있는 것처럼 제갈량을 격려했다.
손책과 주유도 말을 옮겼다. 손책은 마녀의 집 차원문에, 주유는 새로 열린 독립광장의 차원문에 들어갔다.
자신의 턴에 조조는 잠시 망설였다.
‘그냥 나도 바로 차원문으로 들어갈까?’
지금 차원문은 넷. 둘은 손책과 주유가 방금 들어갔고, 하나는 유비가 고대 표식을 들고 들어가는 편이 유리했다. 마지막 하나는 방금 제갈량이 못 들어간 곳이었다. 굳이 다음 턴까지 기다려서 제갈량이 들어가게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제갈량이 못 들어간 차원문은 지금 당장 자신이 가기에도 너무 멀었다. 조조는 할 수 없이 일단 가까운 미스캐토닉 대학 도서관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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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캐토닉 대학 도서관은 긴 말이 필요없는 지식의 보고였다. 형이상학부와 문화인류학, 고고학 분야의 장서는 특히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실버 트와일라잇에서 접했던 것 같은 금단의 지식이 담긴 기괴한 문서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 해석본이나 이본, 심지어 원본 문서가 대학 도서관의 제한 서고에 감춰져 있으며 규모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고 했다. 대중에 개방된 열람실마저 실버 트와일라잇에서 흥미 있어할 만한 책들이 눈에 띄었다.
‘이 대학 괜찮은 걸까.’
그런 자료가 필요해서 온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지만 조조는 찜찜했다. 온 세상에서 하필 아컴이 이런 싸움의 무대가 된 것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 조조가 찾는 것은 녹색 단말에 새겨져 있던 상형문자를 해독할 단서였다.
제갈량이 정말로 문제의 단말이라면 지금 차원문만 열심히 닫아봐야 소용없었다. 그러니 이건 반드시 빠른 시일 내에 어느 쪽인지 판가름을 내야 했다.
고대와 현대의 다양한 문자를 훑어가며 비슷한 형태의 문자를 찾았다. 끼니도 잊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뒤진 끝에 마침내 목적한 것을 찾아내었다. 인간들의 꿈으로 생성되고 유지된다는 전설의 땅에서 쓰는 문자였다.
일반열람실 이용시간이 끝났다는 뜻으로 괘종시계 소리가 울렸다. 책을 덮고 일어나는 사람들 틈에서 조조는 책을 들고 다른 궁리를 했다. 이 책은 대출 불가였고 그는 내일까지 기다려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이제 겨우 문양이 그냥 글자가 아닌 그림 문자이고 맨 윗부분이 글자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까지 알아냈는데, 여기서 끝까지 알아내야만 했다.
열람실 안엔 당연하지만 사서의 눈을 피해 숨을 만한 곳이 없었다. 책도둑이 되더라도 몰래 들고 나가기로 하고 창가로 다가갔다.
책을 가방 속에 넣고 창문을 열었다. 그냥이라면 벽을 타고 내려가는 곡예를 시도해볼 텐데 한 손에 서류가방을 쥐고 다른 한 손만 써서 그러기엔 좀 위태로워 보였다.
가방을 그냥 던질까, 누가 소리 듣고 오면 어쩌지, 같은 생각을 하는데 누군가 창문 아래로 보이는 오솔길로 다가왔다. 사마의였다.
조조는 바로 서류 가방을 창 밖으로 던졌다. 눈앞에 쿵 하고 떨어진 가방을 보고 사마의가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리는 그의 표정이 답지 않게 어리둥절했으나, 조조와 눈이 마주치자 곧 상황을 파악하고 가방을 집어들었다.


유비는 하숙집에서 하루 쉬고 곧 차원문에 다시 들어가기로 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검은 동굴로 갈 준비를 했다.
“검은 동굴의 차원문이 어디로 통해있는지,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십니까?”
제갈량은 떫은 얼굴로 산탄총과 소채찍을 챙기는 애인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고대 표식이 나한테 있는데 꾸물댈 수는 없잖아.”
제갈량은 여전히 딱딱한 얼굴로 고대 표식이 든 상자를 노려보았다.
“무사히 그 안을 탐사하고 나오지 못하면 저것을 쓸 기회도 없습니다.”
스쿠터에 짐을 다 싣고 유비가 제갈량을 바라보았다.
“그치만, 서둘러야 하잖아. 아니면 이 세계가.”
“멸망하지요. 압니다.”
제갈량이 유비의 말을 막고 한 걸음 다가왔다.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건 알겠습니다. 타세요.”
유비는 제갈량을 꽉 끌어안고 다독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진짜 그렇게 했다가는 꼭 영화에 나오는 전형적인 사망 전 마지막 인사로 보일 것 같았다.
“그럼 무사히 다녀올게.”
일부러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웃어주고 스쿠터에 탔다. 그런데 막 시동을 걸려는 순간 뒷자리가 푹 가라앉았다.
“누가 혼자 다녀오랬습니까?”
제갈량이 뒤에서 유비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같이 갑시다. 무슨 일이 나든 하나보단 둘이 낫겠죠.”
당황한 것도 잠시, 유비는 스쿠터에 시동을 걸었다.
가는 길은 평소 지나던 큰길인데 거리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광풍이 불어 나무와 물건들을 쓰러뜨렸다. 여기저기 실종된 가족이나 친지를 찾는다는 벽보가 붙어있었다. 종말이 다가왔다고 외치는 사이비 설교자들이 사거리마다 하나씩은 꼭 있는데, 원래라면 경멸어린 무관심밖에 받지 못했을 그들이 열렬한 호응을 얻고 있었다.
검은 동굴은 시가지를 벗어난 곳에 있어서인지 가까이 갈수록 그런 소란은 줄어들었다. 대신 을씨년스럽고 불길한 분위기가 안개처럼 차올랐다.
“여기서부턴 걸어가야겠다.”
스쿠터로 오르기 힘든 험한 바위투성이 길 앞에서 유비가 스쿠터를 세웠다.
“그러죠.”
시동을 끄고 근처 나무에 묶어놓은 다음 유비는 제갈량을 마주보았다.
“엄.....사실은 혼자 오고 싶었는데, 위험하니까 따라오지 말라고 하면 알면서 혼자 가냐고 할 것 같았어. 그러면 대답할 말이 없겠더라고.”
“잘 아시네요.”
제갈량이 담담하게 긍정했다.
“그러니 지금도 뭐라 말씀하시건 절 여기 떼어놓고 들어갈 수 없다는 것도 아시겠지요?”
“그래.”
유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냥,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제갈량은 그 손을 내려다보다 마주잡았다.
“사실은 혼자 들어가기 무섭고 싫은 거지요? 그래도 참고 혼자 들어가려던 거지요?”
“응.”
유비가 멋쩍게 웃었다. 제갈량은 쓰디쓴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같이 가자고 하지 그랬습니까. 유비님이 겁쟁이여서 그런 것도 아닌데. 제가 그렇게 말하며 조롱할 것 같던가요?”
“아니.”
“그런데 왜 혼자 쓸쓸하지 않은 척, 무섭지 않은 척 합니까? 왜 그렇게 갑자기 어른이 돼서 세상 듬직한 척은 혼자 다 합니까?”
제갈량은 이제 유비를 노려보고 있었다.
“짊어질 수 없는 건 그렇다고 말하세요. 저라고 해서 모든 응석을 다 받아줄 수는 없지만.....그렇지만 진지하게 들으니까요. 무시하거나 비웃지도 않고요.”
제갈량은 유비에게서 돌아서서 옆쪽을 보고 한탄했다.
“이거 마치 제가 유비님을 너무 괴롭힌 것 같지 않습니까. 눈치보고 양보만 하고, 전부 들어드릴 수는 없다는 말은 그러니 말도 꺼내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고요.”
마지막의 불평은 좀 이상하게 들렸다. 자기가 그렇게까지 음울해 보였냐고 되물으려는데 이들이 온 길에서 시끄러운 엔진 소리가 들렸다.

아컴 나이트메어 18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아무리 좌절감이 커도 이대로 손 놓고 세상 멸망을 보고만 있을 탐사자들이 아니었다. 손책과 주유도 다시 괴물을 잡아 단서를 모으기 시작했다.
새로 열린 차원문을 누가 들어가서 봉인할지 의논하기 위해 주유가 과학관으로 탐사자들을 초대했다.
유비와 제갈량이 먼저 도착했다. 조조와 사마의는 한 시간 정도 늦을 거라고 했다.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던 주유의 연구실이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게 되면서 보다 손님맞이에 신경을 쓴 흔적이 눈에 띄었다. 등받이 없는 둥근 의자가 여섯으로 불어나고 빈 탁자가 하나 생겼다. 맹맹할 때까지 우린 차는 그대로였지만 오늘은 유비가 쿠키를 구워왔다.
“아몬드 비싸지 않았어?”
버터와 설탕을 듬뿍 써서 부드럽고 달콤한 데다 쿠키 하나에 아몬드 하나씩 큼직하게 쑥쑥 박혀있었다. 일용직 노동자인 유비에겐 무리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양도 많았다.
“축하할 일이 있으니까 힘 좀 줬지.”
유비가 싱글벙글 웃었다.
“나랑 제갈량 사귄다!”
주유는 눈도 입도 딱 커졌다. 손책도 잠깐은 그랬지만 곧 표정이 풀어지며 박수를 쳤다.
“오, 드디어 사귀냐. 축하한다.”
“헤헤, 고마워.”
유비가 제갈량을 곁으로 끌어당겼다. 제갈량은 부끄러워하는 듯 보이면서도 순순히 유비 곁에 붙었다.
“진짜 사귀는 거예요? 세상에......”
주유는 여전히 놀라움이 덜 가신 듯 어색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됐어. 안 될 거 없잖아.”
제갈량이 그런 주유를 보고 일부러 유비의 머리에 손을 얹어 쓰다듬었다. 유비는 다시 에헤헤 웃었다.
“자, 애인끼리의 시간은 둘만 있을 때 보내고.”
손책이 약간 빨개져서 헛기침했다.
“그럼 하는 일 자체는 달라지지 않는 거지?”
“그렇지요. 지금 모인 건 서로 협조가 잘 되는지 확인하기 위한 거고요.”
제갈량이 다시 유비와 띄워 앉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여기, 새 차원문을 봉인하기에 충분한 단서가 있는 사람 있습니까?”
다들 조용해졌다. 거기까지는 놀라운 일도 아니므로 제갈량이 바로 말을 이었다.
“지금 마녀의 집 외에 검은 동굴, 가지 않는 섬에 차원문이 열려 있지요. 이걸 다 봉인하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겁니다. 그 사이에 다른 차원문도 열릴 거고요. 그래서 하나 제안할 것이 있습니다.”
“뭔데?”
“단서 모으기를 잠시 미루고 차원문 닫는 일에만 집중해보면 어떻습니까? 그저 차원문만 닫는 것은 그 너머의 세계를 탐사해 얻는 지식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렇게 모든 차원문이 다 닫히면 다른 세계와의 연계가 끊기니 그것만으로도 아컴은 안정을 되찾을 겁니다.”
손책은 주유를 돌아보았다. 주유도 수긍했다.
“가능한 얘기야. 일단 아컴에 열린 차원문이 하나도 없게 된다면 공격해오는 괴물들도 기반을 잃게 되겠지. 단서 모으는 데 드는 시간과 노력을 아끼게 되니 지금보다는 훨씬 빠르게 닫을 수 있고.”
“좋아. 해보자고.”
손책이 흔쾌히 대답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다.”
조조의 목소리였다. 주유가 가서 문을 열어주었다.
“늦어서 미안하군.”
조조의 뒤로 사마의가 따라들어왔다. 조조가 이렇게 순순히 사과하는 것이 스스로도 조금 어색해보여서, 유비는 슬몃 장난기가 돌았다. ‘조조가 저렇게 곱게 사과하다니 조조가 아닐지도 몰라!’라고 외치고 싶은 충동이었다.
‘그랬다간 조조가 진심으로 화내겠지?’
유치한 장난기를 속으로 달래면서 유비가 그들에게도 쿠키를 내밀었다.
“나랑 제갈량 사귀기로 했거든. 그 기념으로 쿠키를 구웠어.”
역시 그런 애 같은 장난을 치기보단 그 사실을 알리고 축하받는 쪽이 중요했다.
“사귄다고? 너희들?”
조조는 어이없는 표정을 했다.
“지금 같은 때에?”
“지금 같은 때라서 안 될 건 뭡니까.”
유비보다 제갈량이 먼저 대꾸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잊었을까봐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설령 유비님께서 잊더라도 제가 상기시켜 드릴 것이고, 연애감정이 대사를 그르칠 수 있다는 정론은 굳이 복습하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냐.”
“하지만 이미 품어버린 감정을 어떡합니까. 범죄나 짝사랑도 아닌데 누르고 있으면 그게 더 위험합니다.”
제갈량치고도 유난히 단호한 말투였다.
“별로 간섭하려던 건 아니었어.”
자기가 공연히 시비 걸었다가 반격당한 꼴이 되어 조조가 인상을 썼다.
“그냥 좀 놀랐을 뿐이지. 됐고 다른 용건 쪽은? 이번에 실버 트와일라잇에서 좀 신경쓰이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그래? 무슨 얘긴데?”
유비가 조조 쪽으로 다가앉았다. 제갈량과의 사이를 나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반응하는 건 좀 섭섭했지만 거기에 화를 내기보단 말을 그냥 돌리고 싶었다.
“현실을 위협하는 존재가 자신의 단말을 보내놨고 아컴에서 그걸 찾아내야 한다더군. 지난번 의식에 사용된 육각형의 패도 그런 단말의 일종이라고 했다.”
“단말?”
유비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 존재의 일부, 손끝 정도라는 말이다. 그 존재 자체라고 말하기에 무리가 될 만큼은 극히 일부분이지만 별개의 존재, 도구나 부하라고 하기엔 분명 구별되지 않는 한 존재이지. 그런 것이 아컴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끊이지 않고 차원문과 괴물이 나타나는 거다. 칼 샌포드가 한 말이긴 해도 논리적이고 지금 상황에도 부합해. 아컴이라고 해서 원래부터 이렇게 일주일이 멀다하고 차원문이 열리는 곳은 아니었을 거잖아?”
“말 되네.”
손책이 끄덕거렸다.
“우린 차원문 봉인하는 걸 잠시 미루자는 얘길 하고 있었어.”
“뭐?”
조조가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그렇게 중요한 부분 다 자르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만 남겨서 말하면 어떻게 합니까.”
제갈량이 찡그렸다.
“단서를 모아 봉인하는 것보다 그냥 닫기만 하는 편이 시간이 절약되니 차라리 빠르게 모든 차원문을 닫는 편이 낫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열려 있는 차원문이 더 이상 한 군데도 없게 되면 그 단말도 이계와의 소통이 끊겨 무력화되겠지요.”
“그런 얘기였어?”
조조는 조금 진정했지만 여전히 딱딱한 표정이었다.
“지금 차원문 열리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른데 그렇게 잘 될까?”
“어차피 당장 봉인할 만큼의 단서도 없지 않습니까?”
조조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여기 온 건 너희들 결정에 무조건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야. 어차피 차원문은 지금 세 군데니까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이 알아서 들어가. 난 단서를 모아 봉인하는 방식을 고수하겠다.”
“조조.”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를 유비가 올망올망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힘을 합쳐 싸우는 사이에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서 조조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할 이야기는 그뿐인 것 맞지?”
“결론이라면 그렇게 났지만......”
주유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조조는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 나갔다. 사마의는 난처한 듯 문과 남은 이들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물었다.
“혹시 나 모르는 사이 조조님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네 사람 모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조조 일이라면 네가 제일 잘 알겠지.”
손책이 지적했다.
“그때 직전 실패하고 이번에 처음 만나는 건데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사마의는 복잡한 표정을 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사정이 있어서 저러실 겁니다. 너무 불쾌하게 여기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래.”
유비가 안심시키려는 듯 웃었다. 워낙 환하고 친절한 웃음이라 먼저 말 꺼낸 사마의가 주춤할 정도였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버 트와일라잇에서 알아낸 건 그게 다인가?”
제갈량이 유비와는 다르게 냉담한 기색으로 물었다.
“거기서 알아낸 건 그 정도가 맞습니다만 여기 지난번 사건 때 목격한 패의 생김새를 그려왔습니다.”
사마의가 스케치를 내밀었다. 녹색의 육각형 한가운데에 금빛 문양이 새겨진 모습을 보고 손책이 갸웃 했다.
“난 그때 눈부셔서 제대로 못 봤는데 자세히도 봤네.”
“손책님은 그때 전투에 집중하고 계셨으니까요.”
그 자리에 아예 있지도 못했던 유비는 입 다물고 열심히 그림만 들여다보았다.
“사마의. 이게 청동상 속에 숨겨서 아컴에 들여오려고 했던 그거랬지?”
“예.”
유비는 그림을 들여다보며 기묘한 기분이 되었다. 사마의의 설명대로라면 자신은 이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얘긴데 이상하게도 보면 볼수록 어디서 봤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살짝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그림일 뿐인데도 어쩐지 따뜻했다.
“본 적 있는 물건입니까?”
제갈량의 질문에 고개를 저으면서도 유비는 기시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음.....좀더 생각해볼게. 기억이 날 듯 말 듯해.”
이 일에 뛰어든 뒤로 이런 식의 찜찜한 기분은 자주 느꼈고, 기분 탓이라고 함부로 무시해선 안 된다는 것도 배웠다. 유비는 그것의 형상과 문양을 꼼꼼히 머릿속에 새겼다.
“아예 복사해드릴까요?”
“그래.”
관성적으로 그렇게 대답했지만 유비는 이 문양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 복사하겠다며 사마의가 종이를 도로 가져갔는데도 문양은 허공에 남아 눈앞에 어른거렸다.


손책은 마녀의 집에, 주유는 검은 동굴에, 유비는 가지 않는 섬에 각각 찾아갔다. 제갈량은 바로 직전에 차원문을 닫았으니 이번엔 아컴에 남아 단서를 모으기로 했다.
유비도 이세계 탐험에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겨서, 약간은 자신감마저 품고 차원문 안에 들어갔다. 괴상한 주변 풍경에 너무 마음 쓰지 말고 재빨리 눈앞의 한두 가지 난관만 해결한 다음 돌아오면 되는 일이었다.
‘어차피 난 여기가 뭐 하는 곳이고 왜 이렇게 생겨먹었는지 봐도 모른다고!’
별로 자랑스런 사실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으니 된 거였다. 눈이 부실 만큼 황금빛으로 빛나는 기괴한 신전 안에서, 여기가 무엇을 섬기는 곳이고 어떤 제의를 행하는지 조금도 궁금해하지 않으며 나갈 길을 찾았다.
긴 복도를 걷는데 무엇인가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유비는 기척을 죽이고 벽에 붙어서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 끝에 갈림길과 넓은 공간으로 이어지는 모서리가 있었다. 거기에 찰싹 붙어 그 너머를 살폈다.
과연 홀 같은 곳에 용을 닮은 괴물이 웅크리고 있었다.
다행히 괴물의 반대쪽으로도 길이 나 있으니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아보였다. 무엇보다 저 괴물의 눈은 눈꺼풀로 굳게 덮여있었다. 숨소리도 규칙적이고 깊었다.
‘저거 아무리 봐도 그냥 자는 거지?’
그렇다면 더욱 운이 좋다. 다소 긴장을 풀고 벽에서 떨어지려는 순간, 뭔가 번쩍이는 것이 유비의 눈에 띄었다.
괴물의 꼬리 부근에서 난 빛이었다. 가죽을 씌우고 반짝이는 금속으로 테를 두른 전형적인 보물상자가 유비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지금은 하나라도 단서가 필요해.’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유비는 다시 벽에 바짝 붙어 슬금슬금 괴물의 꼬리 쪽으로 다가갔다.
괴물은 뒤채지 않고 얌전히 잘 자고 있었다. 넘어지거나 실수하지만 않는다면 상자만 살짝 집어올 수 있었다.
가까이 가서 봐도 역시 괴물이 상자를 단단히 붙잡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상자에 뻗는 손끝은 떨렸다.
마침내 상자가 유비의 두 손에 잡혔다.


희끄무레한 해골 같은 그림자가 붉은 섬광에 휩싸여 불타올랐다.
섬광과 함께 그 형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조조가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영화에선 흰 보자기 쓰고 겁이나 주는 존재가 유령이지만 아컴에서는 아니었다. 총이나 칼이 통하지 않아 마법으로만 상대해야 하고 마주하는 것 자체가 정신력을 소모했다.
‘그래도 덕분에 이 근방이 한결 안전해졌어.’
애써 자신을 북돋는 생각을 하며 목격자가 없는지 주위를 살펴보다가, 여기가 가지 않는 섬으로 건너갈 수 있는 가장 좁은 강줄기 앞인 것을 깨달았다. 유령을 추격하다가 멀리까지 와 버렸다.
유비가 이곳의 차원문으로 들어갔다는 건 사마의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무사히 나오겠지?’
조조는 날짜를 따져보았다. 지난번 모임이 끝나고 바로 들어갔다고 가정하면 오늘이나 내일쯤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지난번에 혼자 화내며 먼저 빠져나온 것은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서로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때 막 깨달은 사실 하나 때문에 그 자리에 도저히 더 침착한 얼굴을 하고 앉아있을 수 없었을 뿐이었다.
사마의의 그림은 간략했지만 보다보면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의식을 저지하기 일보 직전인 상황에서 자신은 거의 그것을 잡을 뻔했다. 그때 보았다.
그 단말의 녹색은 제갈량의 눈동자 색과 닮았다.
마법을 쓸 때면 술자에 따라 같은 주문이라도 다른 빛깔을 띠며 발현되었다. 조조 자신은 붉은 색이었고 사마의는 검붉은 색, 주유는 선명한 파란 색이었다. 손책과 유비는 마법 주문을 배우지 못해 쓰는 것도 보지 못했다.
제갈량의 마법광은 녹색이었다.
‘나랑 제갈량 사귀기로 했거든.’
유비의 해맑은 목소리가 기억났다.


내게 사실을 말해봐 19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손상향이 정말로 더 말을 안 하자 공손찬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너는, 연애 안 해?”
“상대가 없어.”
손상향이 어깨를 으쓱했다.
“유비랑 그대로 사귀었어도 괜찮긴 했을텐데, 결국 오빠 때문에 그랬던 거 깨닫고 나니까 내 쪽에서도 좀 그렇더라. 유비 쪽에서도 날 너나 똑같이 보는 것 같고.”
손상향이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유비는 요새 어때?”
“어....”
여행 떠나 있던 때 있었던 일이라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손책과 싸운 손상향이 잠시 도원관에 피해있으며 일을 도왔던 적이 있는 건 공손찬도 들어 알고 있었다.
그 일에 대해 공손찬은 손상향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자기가 다 내려놓고 훌쩍 떠난 거긴 하지만 돌아올 땐 도원관이 폭삭 무너져서 잿더미에서 연기만 모락모락 나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하며 왔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아주 약간이나마 유비하고 썸 비슷한 걸 탔던 손상향에게 유비가 애인을 사귀어서 동거중이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그냥... 잘 지내. 예전보단 철도 좀 든 것 같고. 동생들이 잔뜩 생겨서인가.”
“동생들?”
손상향이 놀랐다. 그 반응에 공손찬도 놀라버렸다.
“실제로 동생인 건 아니고, 의동생. 작년에 나 없는 동안 싸움하다 알게 되었다고 해서 너도 아는 줄 알았는데.”
“난 본 적 없어.”
손상향이 고개를 저었다.
“...굉장히 짧은 시간 내에 사이가 좋아졌나 보네. 같이 살 정도로 가까워서 난 좀 오래 알고 지낸 줄 알았는데.”
“우리 오빠라면 알지 않을까. 주먹으로 대화하고 친해지는 거라면 오빠 특기고.”
“....음.”
나도 무술을 하지만 역시 무술 하는 놈들은 좀 이상하다고, 공손찬이 남 얘기만은 아닌 생각을 했다.
‘손책을 기준으로 하면 안 되는 거지.’
“너희 오빠는 요샌 어때?”
“어....”
손상향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요새는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가봐. 차라리 주유언니를 내가 확 꼬셔버릴까. 잘 할 자신 있는데.”
“손책이 무슨 짓을.”
“무슨 짓을 한 건 아니지만 옆에서 보고 있기 답답해서. 주유언니가 오빠한테 마음이 없는 건 아니거든. 강동관에 와서 맹호권도 배우고 있고 실력도 쭉쭉 늘고. 근데 오빠가 영 맘에 들게 맞춰주질 못하고 있으니까... 강동관에 꼭 필요한 인재인데.”
“인재가 아니라 애인을 사귀어라. 너 머릿속이 너무 경영자야. 그러니 남친이 없지.”
손상향이 공손찬을 째려보았다. 공손찬이 찔끔해서 문제집으로 눈을 돌렸다.
“공손찬 네가 강동관에 와 주면 나도 주유언니를 필사적으로 꼬실 필요는 없을텐데.”
“응, 필사적으로 꼬셔봐. 파이팅.”
“아니,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손상향의 태도가 진지해졌다.
“강동관에서 일해보지 않을래?”
공손찬이 수학문제에서 눈을 떼고 손상향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래. 대학 다니면서도 할 수 있고. 나부터가 그러고 있으니까. 급여도 학교 다니는 데 지장 없을 만큼은 보장할 수 있어. 네가 도원관을 제일로 생각하는 건 알지만, 그래도 평생 거기서만 일해서는 아무래도 발전이 어렵지 않겠어? 오빠는 바보지만 그래도....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고수들하고 많이 싸워보니까 예전보다 실력이 확 늘었더라고. 그래서 나도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겠다 싶어서 대학에도 온 거고. 너도 다른 도장에서도 일해보면 더 나을 거라 생각 안 해?”
설득력 있는 말이라 공손찬은 솔깃했다. 금전적인 문제도 신경 안 쓰인다면 거짓말이고 강동관은 무술 도장의 비즈니스 성공사례 그 자체였다. 거기서 배울 수 있는 건 무궁무진했다. 공손찬 같은 입장에선 일하게 해달라고 매달려도 모자랐다.
“도원관 일이 부담되면 지금은 그냥 유비에게 다 맡겨버려. 일은 해봐야 느는 거고 그냥 무술을 가르치기만 한다고 해도 이젠 사업 마인드를 갖춰야 해. 나중엔 네가 경영을 전담하게 되더라도, 서로 업무를 알아야 분담도 하는 거야.”
공손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상향의 말은 뭐 하나 그른 게 없었다.
게다가 유비 혼자라면 모를까 지금은 그의 일을 도울 수 있는 의동생이 다섯이나 있다. 황충은 달리 취직 준비를 하는 모양이고 마초나 장비는 경영을 맡기기엔 못미더워 보이지만 조운은 물론이고 관우도 사람이 진중하니 조금만 배우면 곧잘 할 수 있을 것 같아보였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도원관을 떠나 있기 적기인지도 모른다.
도원관을 떠난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조운이 떠올랐다. 그를 두고 떠나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감정이 덮여와 공손찬이 당황했다.
이렇게까지 도원관을 떠나고 싶지 않을 줄은 몰랐다. 이미 한 번 떠났던 곳이고 다 내려놓고 미련 한 조각 안 남긴 채 훌쩍 떠나버렸던 그 때와는 달리 지금은 배워서 성장할 기회를 잡으려는 거고 애초에 사는 건 계속 도원관 살면서 강동관으로 출퇴근을 하면 되는데 왜.
“어, 좀 생각을 해볼게.”
감정을 추스르려 노력하며 공손찬이 말했다.
“고마운 제안이고 네 말 하나도 틀린 게 없지만 그래도 다른 식구들이랑 의논하고 일정 조정을 해야 하니까.”
“그래.”
손상향은 다시 풀던 문제에 집중했다. 공손찬도 문제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문제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행 떠나있는 동안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리 떠나기가 싫은 거지? 대체 왜?’



조운을 만나 좀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는데 공손찬은 그날 조운을 만나지 못했다. 학교가 넓어도 평소에는 돌아다니다 보면 한 두 번은 마주치곤 했는데 이날은 어째 조운이 영 보이지 않았다. 메신저로 연락하면 되지만 강의중이거나 공부 한창 하고 있을 때 불러내면 미안했기 때문에 그러지는 않았다. 그래서 공손찬과 조운이 다시 마주친 건 도원관에 돌아온 다음이었다.
공손찬이 집안에 들어서자 식탁에 앉아 책을 보고 있던 조운이 고개를 들었다.
“아, 공손찬님 오셨어요?”
반가워하는 조운의 표정을 보며 공손찬은 자기가 이 모습을 보고 싶어 메신저 연락을 안 한 거라는 생각을 했다. 집에 돌아왔을 때 기다리고 있다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이 있는 건 당연히 좋지만 유비와 조운은 또 느낌이 독특했다.
“안녕. 그런데 방 어쩌고 식탁에 나와 있어?”
“공손찬님 오시는 거 보려고요.”
공손찬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조운의 손을 꼭 잡았다.
“어, 주.. 아니 그 갑자기.”
“우리 사귀잖아. 손 정도야 잡을 수 있지.”
공손찬이 태연하게 말했다.
“싫어?”
“아뇨!”
조운이 손을 꼭 마주잡았다. 그 손을 내려다보다 공손찬이 충동적으로 물었다.
“저, 조운. 내가 도원관을 떠나면 어떨 것 같아?”
조운의 얼굴에서 핏기가 싸악 빠져나갔다. 물어본 공손찬이 놀라 뒤늦게 수습을 시도했다.
“아니, 영영 떠나는 게 아니고, 어디까지나 가정이고 떠나게 되어도 완전히 떠나는 게 아니라 그저 다른 곳에 취직해서 출퇴근을.....”
조운은 듣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가 공손찬의 손을 더욱 꽉 쥐었다.
“가실 거면 저도 데려가주세요!”
“...조운?”
“다시는 헤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언제까지나 함께 하자고 하시고서....”
“저, 잠깐만, 조운.”
공손찬이 그의 말을 막았다.
“‘다시는’ 이라니?”
조운의 아차하는 표정을 보며 공손찬은 확신했다.
“우리 만난 적 있는 거지, 그렇지? 좀 이상했어. 나도, 널 두고 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어. 그야 우리 사귀는 사이니까, 같이 있고 싶은 게 당연한지도 모르지만, 좀 그런 거 이상으로.... 예전에 비슷하게 후회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야.”
조운은 입만 달싹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공손찬은 계속했다. 한 번 의혹을 입에 올리자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입 다물고 있던 것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네가, 아니 유비의 의동생 다섯 전부와 유비까지 내게 숨기는 게 있다는 생각은 했어. 애초 어쩌다 형동생하는 사이가 되었는지 이야기 안 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유비나 너희들 성격에 뭐 나쁜 짓을 했을 리도 없고, 무용담 삼아 떠들어도 당연한데. 만나고 바로 옷을 선물한 건 한눈에 반해서 그렇다 쳐도 사이즈를 정확하게 안 건 이상해. 유비한테 들었다 했지만 유비는 자기 옷 사이즈도 정확히 못 사온다고.”
말하며 생각하니 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이상했다.
“그 외에도..... 창술은 어디서 배웠어? 초등학교 문제집은 왜 푼거야?”
조운은 눈을 꽉 감았다. 더는 발뺌할 방법이 없었다. 어찌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갈량이든 유비님이든 나타나 이 사태에 지침을 주었으면 했다.
“조운.”
공손찬이 그의 얼굴을 붙들고 눈을 마주보았다.
“너는 알고 있지?”
“하지만...”
“왜 말 못하는데?”
“너무 미친 소리로 들릴 거에요.”
조운이 호소했다.
“게다가 공손찬님께 뭔가 나쁜 영향이 미칠 수도 있고요.”
“누가 그런 짓을 하는데?”
조운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리 이상하고 황당한 말을 하더라도 들을게. 정 못 믿겠어도 네게 화를 내지는 않을게.”
공손찬이 약속했다.
“그러니, 내게 사실을 말해봐.”
“저는....”
조운이 공손찬의 손에 자기 손을 겹쳐 쥐었다.
“공손찬님은, 제 주군이셨습니다.”
그리고 조운은 말했다. 드림배틀에 대해. 옥새에 대해. 유비와 공손찬이 참전하고 싸워나가고 공손찬이 패배한 후 조운이 유비를 새 주군으로 삼아 배틀을 계속한 것. 마침내 유비가 배틀에서 우승하고, 우승자의 영웅패로서 인간이 되어 돌아와 공손찬을 다시 만난 때까지.
“공교롭게도 그.... 우리 마지막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주군께선 제게 앞으로 절대 헤어지지 말자고 하셨습니다.”
조운이 고개를 숙였다.
“그 약속을 지키고 싶어서, 다시 돌아오고 싶어서 유비님 곁에서 열심히 싸웠습니다. 아 물론 유비님도 훌륭한 주군이셨고 그 꿈이 세상을 바꿨지만요, 그래도 전 공손찬님께 돌아오고 싶었습니다.”
“그런.....”
공손찬이 혼란에 빠진 얼굴로 자기도 식탁에 앉았다.
“그, 그럼 나머지 네 명도 따로 옛 주군이 있었겠네? 아니다, 한 명은 원래 유비 거였을 거고.”
“관우가요.”
“응, 그럼 다른 셋도... 자기 옛 주군한테 가는 거야?‘
“황충하고 마초는요. 장비는 좀 안 좋게 헤어졌던 모양입니다.”
“응.... 나쁜 군주도 있었던 모양이니까 그야 그렇겠네.”
잠시 멍하게 있다 공손찬이 머리를 감싸쥐었다.
“분명, 엄청 황당하고 말도 안 되고 이상한 이야기이긴 한데.... 그렇게 생각하면 다 맞아들어가긴 하네...... 아니 그럼 내 사이즈는.”
“그게 제가 갑옷처럼 주군 몸에 덮여 변신하는 식이라 몸...”
“스톱.”
공손찬이 조운의 입을 막았다.
“그건 더 말하지 말자.”
조운은 얌전하게 주군의 뜻에 따랐다.
“제일 납득 안 가는 건 유비가 세상을 구했다는 대목이야.”
다시 손을 떼고 공손찬이 말했다.
“그야 착한 녀석이지만.... 세상은 착하기만 해선 소용이 없다고.”
“네.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를 지어낼 작정이었다면 좀 더 그럴듯한 다른 줄거리를 짰을 겁니다.”
“음.”
공손찬이 잠시 들은 이야기를 곱씹었다.
“꿈을 걸고 싸워서, 졌다고.”
공손찬이 허탈한 표정으로 도원관 역대 관장들의 액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그렇게 갑자기, 다 던져버리고 싶었던 거였나....”
조운이 걱정스런 얼굴로 공손찬을 보았다.
“지면 다 잊는다는 거, 페널티가 아니라 보호책 같네. 믿기 힘든 이야기로 들었을 뿐인데도 이렇게 무기력한 기분인데, 그 싸움을 알고 기억한 채 쭉 지낸다면 제정신으로 버티기 힘들 것 같아.”
“주군....”
“아니. 아니지.”
공손찬이 말했다.
“난 패배했잖아. 이미 네 주군이 아니지.”
조운이 표정이 울 것 같이 바뀌었다.
“그래도 저는!”
“잠시만, 조운.”
공손찬이 그의 말을 막았다.
“나.... 좀 생각해봐야겠어.”
조운은 더 말하지 못했다.
“네가 뭘 잘못한 건 아니야. 화가 난 것도 아니고. 그냥.... 좀 너무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어서, 정리가 필요해.”
그러고도 마음이 안 놓였는지 공손찬이 조운의 머리를 안고 토닥여준 뒤 일어났다. 공손찬이 가버리고도 조운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말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드림배틀의 탈락자들이 기억을 잃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방금 공손찬님 자신이 인정했듯이.
‘하지만 더 이상 거짓말 하고 싶지 않았어.’
상대를 위하는 거짓말이라 해도 거짓과 의혹은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 이미 몇 가지나 이상한 점을 짚어내 신경쓰고 있었으니 이참에 털어놓지 않았으면 언젠가 싸우고 헤어지는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안 헤어진 걸까?”
알 수 없었다. 조운에게 화낸게 아니라 해도 마지막 그 포옹은 남자친구에게 하는 걸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조운이 자그맣고 육각형이던 시절 귀여움 받던 느낌과 더 비슷했다.
그걸로 괜찮지 않을까. 애초 그가 원하던 건 공손찬과 제일 가까이 붙어있어 헤어지지 않는 거였다.
‘아냐, 괜찮지 않아.’
영웅패일때 원래 바랐던 게 무어든 현재 조운은 인간이고 한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인 공손찬과 교류하길 원했다. 공손찬을 따르고 싶고 의지해주길 바라고 뭐든 해드리고 싶지만, 예전에는 그냥 그게 당연했으나 지금은 공손찬을 좋아하는 이유를 뚜렷이 떠올릴 수 있었다. 만약에, 공손찬이 어떤 계기로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다면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자기가 떠올린 생각에 자기가 놀란 조운이 그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게 맞았다. 공손찬은 인간이니 변할 수 있고 조운 역시 그러했다. 서로 맞지 않을 만큼 변해버린다면 관계는 깨질 것이다. 영웅패일 때처럼 어떤 일이 있어도 주군을 따르지는 않는다.
인간의 자유를 처음 실감하며 조운이 전율했다.



내게 사실을 말해봐 18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이게 옳은 선택이었을까?’
예상은 했지만, 관람차 안에선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창 밖을 내다보면 흐린 서울 하늘이 보였다. 좀 더 높이 올라가고 나면 멀리까지 보이는 재미라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저 흔들리는 작은 금속 상자 안에서 조운과 마주보고 앉아있는 것뿐이었다.
어떻게 봐도 바깥풍경보다는 조운의 얼굴 쪽이 더 볼만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기엔 민망해서 공손찬은 옆 창밖을 내다보며 도시 풍경이 참 흥미로운 척 했다.
‘차라리 나란히 앉을 걸 그랬나.’
하지만 그러면 서로 반대쪽을 내다보게 된다. 그것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확실히, 이 안에선 할 만한 일이 별로 없네요.”
조운이 먼저 말을 꺼냈다.
“밤에는 야경이 반짝거리니까 이보다는 볼만할 거야.”
어쩐지 공손찬이 변명했다.
“다음에 한창 꽃놀이철이 되면 야간 개장 할테니까 또 와볼까?”
“그거 좋겠네요.”
야경이 아니라 다음 데이트가 기대되는 것 같지만 조운이 좋아하니 공손찬도 기뻐졌다. 정말 이 사람이랑 계속 사귀고 좋아해도 되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 놀이공원뿐 아니라 다른 놀러 갈만한 데도 앞으론 함께 다니자.”
그 말에 조운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렇게 사소한 말에도 쉽게 감동해주는 조운이 귀엽지만 말한 입장에선 좀 민망하기도 해서 공손찬이 괜히 하하 웃으며 벌떡 일어났다. 관람차가 약간 흔들렸다. 조운이 놀라자 공손찬이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괜찮아, 이거 안 떨어져. 어렸을 때 소풍으로 탔을 땐 애들이 심심하다고 안에서 발을 굴러서 흔들리기도 했지만 그 정도로는...”
그 순간 관람차가 흔들렸다. 공손찬이 균형을 잡으려고 뻗은 팔을 조운이 잡고 당겨 끌어안아버렸다. 끼익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관람차가 앞뒤로 조금 더 흔들리다가 움직임이 가라앉았다.
-안내드립니다. 갑작스런 강풍으로 인해 캐빈이 흔들렸으나 안전에는 문제가 없으니 관람객 여러분께서는 안전하게 좌석에 앉아서....
공손찬도 조운도 방송 같은 건 듣고 있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으, 응....”
“바람... 때문인 것 같네요.”
“그, 그러게.”
다친 데도 없고 흔들림도 이미 멎었건만 어째 공손찬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가, 가까워....’
가깝다 못해 딱 붙어있었다. 심장이 귓가에서 뛰었다. 자기 심장인지 조운의 심장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등을 감싼 팔이 풀릴 줄을 몰랐다.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 일어나야 했다. 공손찬이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지고 팔로 의자 등받이를 짚었다. 조운도 드디어 팔을 풀었다. 맞닿은 몸을 조금 떼자 서로의 얼굴이 보였다.
공손찬도 조운도 얼굴이 붉었다. 쳐다보고 있자니 바보 같은 짓을 해버릴 것 같아 공손찬이 후다닥 뒤로 물러나 얌전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계속 창밖을 내다보았다. 조운을 쳐다볼 엄두가 안 났다.
다행히도, 조운 역시 붉어진 얼굴로 반대쪽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공손찬을 쳐다볼 엄두를 못 내고.


그 후로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하려고 둘 다 열심히 노력했으나 장렬히 실패하고 결국 두 사람은 예정보다 훨씬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어, 두 사람 벌써 왔어?”
유비의 목소리는 들리는데 나와보진 않았다. 뭘 하나 싶어 공손찬과 조운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유비가 소파에 앉아있는데 제갈량이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었다. 유비가 입술에 손가락을 세웠다.
“많이 피곤한 모양이니까 깨우지 말자.”
“...네.”
조운이 좀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제갈량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바람은 오버였다. 그런 식으로 ‘우연히’ 진도를 뺄 생각은 없었다. 그야 꽤 두근거리긴 했지만 정말 우연한 일이었다면 모를까 누군가의 의도가 배후에 있는 걸 아는데 모르는 척 공손찬을 속이고 싶지는 않았다.
‘유비님이야 상황을 알고 있으니까 데이트 하다 우연히 끌어안게 되어도 상관 없겠지만 공손찬님은 아니라고!’
“데이트는 잘 했어?”
유비가 물었다. 공손찬이 얼굴이 붉어져서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했다.
“네, 잘.”
조운이 변명하듯 말했다.
“음...”
공손찬과 조운이 조용히 한 보람도 없이 제갈량이 몸을 뒤채더니 유비의 배에 얼굴을 묻고 몸을 꾸물꾸물 움직여 유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유비가 사랑스럽다는 듯 웃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음, 쉬고 내일 수업 준비해야겠다.”
민망함을 견디지 못하고 공손찬이 먼저 도망갔다. 공손찬이 사라지자 조운은 대놓고 제갈량을 째려보았다.
“왜 그래?”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것 마냥 제갈량이 물었다.
“마지막에 바람은 좀 심했어.”
조운이 말했다.
“바람?”
유비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했다. 제갈량이 유비의 배에 묻고 있던 고개를 조금 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데 그래?”
자기가 한 일인데 왜 묻나 싶으면서도 조운이 사실대로 답했다.
“전망차에 탔는데 강풍이 불어서 공손찬님이 넘어질 뻔 하셨다고.”
“뭐?”
유비가 깜짝 놀랐다.
“어디 다치진 않았고?”
“네. 제가 받아 안았거든요.”
“그래서 내가 한 짓이라고 생각한 거로군.”
제갈량이 신음소릴 내더니 몸을 일으켰다.
“아니야? 그럼 그게 정말로 우연히...”
“아니 그건 아니고.”
유비의 무릎에서 일어난 제갈량이 아쉬운 표정으로 자기 누웠던 자리를 보았다.
“내가, 아니 정확히는 옥새가 한 일은 맞아. 둘의 데이트를 응원하는 방향으로 소소한 개입을 하려고 했는데....”
제갈량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인격과 감정을 지닌 신선이 필요한가. 아무리 데이터가 많아도 그것만으론 어느 정도가 ‘적당히’ 인지 판단이 안 되는 것 같네.”
“그럼, 또 제갈량이 직접 가서 일해야 하는 거야?”
유비가 울상을 했다. 조운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말은, 나와 공손찬님의 데이트를 옥새 소원 자동화 시범 사례로 써먹어 봤단 뜻이야? 심지어 유비님도 그걸 알고 있었고?”
“유비님은 몰랐어.”
“몰랐는데 그럼 어떻게 된 일인지 그 말만 듣고 눈치로 알아들으셨다고, 저 유비님이?”
제갈량을 대답하지 못했다.
“제갈량이 자기가 일일이 심사하지 않고도 옥새에서 자동으로 꿈을 선별해서 이뤄주는 방법을 만들려고 하고 있던 건 알았어.”
유비가 말했다.
“저랑 공손찬님을 실험 대상으로 삼은 건 몰랐고요?”
“응... 하지만 제갈량이 악의를 갖고 그런 것도 그래서 너나 공손찬이 다치거나 사이가 나빠진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제갈량이 아주 나쁜 짓을 했다는 듯이 밀어붙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애인 일이라고 관대함이 흘러넘치는 유비를 조운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결과가 썩 좋지 않았던 건 미안해.”
제갈량이 사과했다.
“그래도 사정을 좀 아는 사람 상대로 시험 적용을 해보는 게 낫잖아... 나도 데이트 하고 싶어.”
유비가 일어나 제갈량을 와락 끌어안았다.
“내가 제갈량 일 나눠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안 돼요. 세상 말아먹을 일 있습니까.”
관대하고 다정한 애인을 냉정한 말로 쳐 쓰러뜨리고 제갈량이 유비를 일으켜 앉혀서 볼에 입을 맞췄다.
“저 또 일하고 올게요.”
“응....”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유비를 바라보며 제갈량이 자기 방으로 뒷걸음질 쳐 들어갔다. 유비도 애타는 눈으로 제갈량을 바라보다 문이 닫히자 추욱 쳐졌다.
“문 앞까지 따라가서 꼭 끌어안아 주시지 않고요?”
“그랬다간 가지 말라고 투정부리게 될 것 같아서 안 돼.”
유비가 흘끔 조운에게 눈을 돌렸다.
“조운이랑 공손찬은 좋겠다. 애인이랑 데이트도 할 수 있고.”
조운을 더는 할 말이 없게 만들고 유비는 제갈량의 방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신선은.... 인간보다는 빨리 크겠지. 그렇지? 이대로 20년은 지나야 제갈량이 육아에서 해방돼서 데이트하고 놀 시간이 난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주군이었던 사람이라 조운은 성심성의껏 유비를 위로했다.
“당장 하루 이틀에는 안 되더라도 제갈량도 앞당기기 위해 수를 쓰겠죠.”
“응, 그래.”
유비가 조금 기운을 차렸다.
“제갈량도 열심히 하고 있을 테니까, 나도 믿고 기다려줘야지. 아.”
유비가 조운을 쳐다보았다.
“혹시 그 바람 때문에 데이트 망쳤어?”
“그런 건 아니에요.”
조운이 말했다.
“그냥... 갑자기 끌어안게 돼서 많이 당황하고 그런 정도지요. 사실 정말로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다면 좀 좋았을지도 몰라요.”
“음흉하긴. 남자는 다 늑대라더니, 조운까지 그럴 줄이야.”
“그.... 그러는 유비님도 남자잖아요! 유비님은 어떤 음흉한....”
말하고 조운은 바빠서 못 만난다고 울긴 해도 저 커플이 진도는 훨씬 빨랐다는 걸 상기했다.
“....됐네요, 알아서 잘하고 있는 사람들 걱정을 하느니 우리 공손찬님하고 다음엔 어디 놀러갈까 생각하는 게 낫지.”
“응, 그건 좋은데 곧 중간고사인 거 알지?”
유비가 찬물을 끼얹었다.
“공부 열심히 해. 반에서 꼴지하면 공손찬이 바보는 싫다고 할지도 몰라.”
“대학은 반이라고 안 해요. 그리고 유비님하고 계속 사이좋으신 거 보면 바보 안 싫어하시는 것 같은데요.”
반격에는 힘이 빠져있었다. 조운 본인이 공손찬에게 바보라고 여겨지고 싶어하지 않으니까.
“예, 올라가서 공부 할게요. 내일 강의도 있고....”
조운이 기운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 유비는 자기가 너무 심했나 반성했다. 본인도 공부하는 거 싫어하면서 남을 그걸로 괴롭히다니 너무한 짓이었다.
‘음, 뭔가 조운을 도와줄까... 근데 뭘 해줘야하지?’


수업도 없는 월요일 오전에 학교에 기어올 사람은 거의 없기에, 이때의 경대수 동아리방은 매우 한산했다.
“일찍 왔네?”
공손찬이 동아리방에 들어가자 손상향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야 늘 이렇잖아. 월요일이든 토요일이든 다섯 시면 일어나서 수련하던 버릇을 못 버리고..”
“그래도 어제는 데이트 했다며.”
손상향이 풀던 문제집을 옆으로 밀어놓았다.
“조운은 왜 안 왔어?”
“수업 들어갔어.”
“월요일 2교시에?”
손상향이 경악했다.
“수강 신청이 늦어져서 들을 수 있는 강의가 별로 없었다더라고.”
공손찬이 손상향 옆에 가방을 놓고 앉아 문제집을 꺼냈다.
“대학에 와서도 수학문제를 풀어야 하다니.”
“그래도 우린 좀 낫지, 공대쪽 가면 더 장난 아닌걸.”
“흐우우....”
“그래서, 데이트 어땠어?”
듣는 사람도 없는데 손상향이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재미있었어? 어디 가서 뭐 하고 놀았어?”
“그, 그냥 평범한 놀이공원이고 범퍼카랑 회전목마랑... 같은 거 탔어. 롤러코스터도.”
“회전목마? 그런 게 재밌어?”
“재미있던데?”
“......우와, 사랑하는 사람하고 라면 뭘 해도 재미있다 뭐 이런 거야?”
“사....”
공손찬이 얼굴을 붉혔다.
“어머 얘 좀 봐. 그 공손찬이 얼굴을 다 붉히네.”
“놀리지 마.”
공손찬이 손상향을 외면했다.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어?”
“진도가 뭐야, 공부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는 공손찬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키스도 했어?‘
“아, 아냐, 그냥 잠깐.....”
“잠깐?”
“안은 거 아냐, 넘어질 뻔 해서 조운이 잡아준 것 뿐이라고.”
“넘어져? 네가?”
“바람 때문에 관람차가 흔들렸단 말이야.”
거듭된 추궁에 결국 공손찬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전망차라니 왜 그렇게 재미없는 것만 골라 탔어.”
“아, 됐어. 데이트 얘기 금지. 나 공부해야 해.”
공손찬이 문제집에 고개를 박았다.


내게 사실을 말해봐 17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놀이공원 처음 와봤다더니....”
공손찬은 배신감에 찬 얼굴로 아주 높이 쌓아올린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조운에게 내밀었다.
“제겐 숨은 재주가 많답니다.”
‘너무 숨어있어서 뭘 할 수 있는지 저도 아직 잘 몰라서 그렇지.’
속으로 덧붙이며 조운이 아이스크림을 받아들었다.
인간계로 보내며 제갈량이 도원관에만 있지 말고 이것저것 많이 경험해보라고 말했을 땐 그저 인생을 즐기라는 소리로만 알았다. 대학에 다니고 공부를 하고 계속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자기가 뭘 할 수 있나 알아가는 건 꽤나 즐겁고 보람이 있었다. 이게 다 공손찬님 덕분이라고, 공손찬님이 아니었으면 자긴 인간이 되어 뭘 하며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을 거라고 조운은 생각했다.
“혹시 차 운전할 수 있는 거야?”
“그럼요.”
조운이 운전면허증을 보여주었다.
“딴지 좀 돼서 하려면 운전연습부터 해야하지만요.”
그러라고 유비가 시켰다. 당장 차 사지 말고 운전은 길거리에 좀 익숙해진 다음에, 연습을 많이 하고 나서 하라고. 유비의 자상한 인도 아래 조운은 슬슬 사춘기 청소년의 심정을 깨우쳐 가는 중이었다.
얼마 전에 초등학교 과정을 끝내고 중학교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인 걸 생각하면 발달 과정이 절묘하게 맞아들어간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공손찬님은 어떤 차가 좋으세요?‘
“음, 짐이 많이 실리는 차.”
조운의 미소가 조금 찌그러졌다.
“도원관에도 봉고차가 한 대 있으면 좋겠어. 그럼 좀 먼 거리까지 관원을 모을 수 있을 거고, 도원관 수리할 때 자재 같은 거 나르기도 편할 거고...”
공손찬이 한 발 늦게 조운의 표정을 알아채었다.
“어.... 혹시 조운 차 사려고?”
“아뇨 아직은.”
조운이 억지로 웃었다.
“아직은 차 없어도 불편한 건 없으니까요. 학교도 한 번에 가는 버스 있고.”
조금 걸어야 하지만 그 정도가 신경쓰이지 않을 만큼은 조운도 공손찬도 체력이 있었다.
“그냥 미리 취향을 참고해놓을까 해서요.”
“응.. 앗, 그거 흐른다.”
“예? 아!”
말하다보니 아이스크림이 녹아 흘러내렸다. 둘은 서둘러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그래도 손에 묻자 공손찬이 물티슈를 꺼내주었다.
쓰레기를 버리려고 주변을 둘러보다 조운이 회전목마를 발견했다. 그냥 말 뿐만 아니라 유니콘 모양이며 용 모양 등 가지각색 탈것도 같이 돌아가고 있었다.
“흥미 있어?”
공손찬이 물었다.
“아니 꼭....”
“왜, 조운은 백마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공손찬이 장난스럽게 웃자 조운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알고 하는 말이 아니라고 알아도 가끔 이렇게 영웅패 시절과 관련 있는 말이 나오면 괜히 두근거리곤 했다. 유비님을 존경하고 그분의 꿈을 이루는 데 참여한 걸 자랑스러워하는 것과 별개로 기억이 있고 서로 아는 상태에서 공손찬님과 인간으로 마주했더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은 가시지 않았다.
“그럼 타볼까요. 공손찬님은 뭐 타실 거에요?”
“음, 저 백마 옆에 유니콘이라던가?”
골라보며 두 사람은 회전목마 입구로 갔다. 공원이 한산한데다 그렇게 인기 있는 놀이기구도 아니어서 멈추기만 기다려 바로 탈 수 있었다.
회전목마가 돌고 말이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단순하고 유치한 놀이기구라고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두 사람이 마주보고 웃었다. 기둥을 놓고 다리 힘만으로 버텨보거나 팔을 벌리고 뒤로 누워 로데오 흉내를 내 보기도 했다. 그 꼴을 본 직원이 질색하며 위험한 짓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그 후 끝날 때 까지는 얌전히 있었지만 둘은 내려서까지 킥킥거렸다.
“역시 이런데선 좀 유치하게 노는 게 재밌는 것 같아.”
“그러게요. 아까 범퍼카도 그랬고.”
공손찬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 그럼 또 뭐를....”
“잠깐만요, 뭘 더 타기 전에요.”
조운이 그를 말렸다.
“점심 먹으면 어떨까요?”
조운이 새벽부터 열과 성을 다해 싼 도시락을 생각하면 공손찬도 무척 기대가 되었다.
“그럴까. 아침을 적게 먹어서 그런가 벌써 출출하네. 점심 먹고 마저 놀자.”


시어머니 모드의 유비에게 혹독하게 단련 받은 조운의 도시락은 세세한 것까지 장식이 들어가 있어 보기에도 호화찬란했다. 작은 메추리알에 당근으로 닭벼슬과 부리가 붙어있고 심지어 병아리는 노랗게 물들여 따로 만든 걸 보고 공손찬은 감탄을 넘어 좀 어이없어질 지경이었다.
“데이트용 도시락은 이 정도는 하는 거래요.”
조운이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마워. 정말 예쁘다.”
공손찬이 귀여운 고양이 모양 포켓 샌드위치를 한 입 물었다. 안에는 다진 고기와 채소를 카레 양념으로 볶은 소가 들어있었다.
“맛있어. 조운 요리 잘하네.”
조운이 함빡 웃어다. 단면이 웃는 얼굴 모양인 김밥이나 노른자가 하트 모양인 달걀 후라이 같은 건 솔직히 광기가 느껴질 정도였지만 조운이 저렇게 웃는데 첫 데이트에서 찬물 끼얹기도 그랬다.
다음에는 데이트 하기 전에 힘들게 도시락 같은 거 쌀 필요 없이 사서 먹거나 정말로 간단하게 샌드위치 주먹밥 정도만 하자고 미리 말해둬야겠다고 공손찬이 속으로 결심했다.
‘기왕 한 집 사니까 같이 도시락을 만들어도 될 것 같아. 그럼 이렇게 번거로운 걸 다 하자고는 하지 않겠지.’
“이걸 다 유비가 가르쳐줬어?”
“인터넷이나 잡지에 나온 레시피 참고한 것도 있고요. 공손찬님한테 사랑받으려면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유비랑 제갈량 데이트 나갈 때가 정말 기대되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순수하게 둘의 데이트를 응원하기 위한 마음씀씀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순진한 조운을 괴롭히다니 어디 네 데이트 도시락은 어떤지 보겠다며 공손찬이 속으로 별렀다.
목적이 뭐였든 사랑과 정성이 듬뿍 담긴 도시락은 실제로 맛이 있었다. 조운의 솜씨와 미적 감각을 칭찬해가며 열심히 먹다가 공손찬은 문득 여기가 놀이공원이고 놀이기구는 대부분 사람들을 뒤흔드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왜요, 더 드시지 않고...”
“더 먹고 싶은데, 놀이기구 타면 흔들리잖아. 너무 배불리 먹는 건 안좋겠다 싶어서.”
“아, 그러네요.”
조운이 수긍하면서도 남은 도시락을 아쉽게 내려다보았다. 삼단 찬합을 꽉 채우고 과일은 따로 밀폐용기에 챙겨온 도시락은 오인분은 족히 될 만한 양이어서 아직 반 가까이나 남아있었다.
“다시 잘 싸뒀다 저녁에 또 먹으면 어떨까. 깨끗하게 잘 먹었고 보냉백이 있으니 그 정도로 상하지는 않을거야.”
“그럴까요.”
조운의 표정이 펴졌다.
데이트 도시락을 싸뒀다 또 먹다니 낭만이 없는 것도 같지만 데이트 도시락을 남겨 음식물 쓰레기로 버리는 것 보다는 훨씬 낭만이 있다고 공손찬은 자기 합리화를 했다. 게다가 조운도 찬성했다.
‘딴 사람이었으면 이렇게 못했지...’
이게 첫 데이트인데 벌써 한참을 같이 산 가족처럼 편안했다. 이게 일반적이지 않은 건 공손찬도 안다. 하지만 낮설고 불안한 두근거림 보다 이게 나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도시락을 정리하고 소화도 시킬 겸 좀 걸었다. 길 옆에 사격 게임장이 있는 걸 보고 혹시 조운의 숨은 재주 중에 사격도 있을까 해서 그 쪽을 흘끔 보았지만 조운은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조운도 꽤 그런 것 같지만 공손찬 역시 데이트에 대해선 누구에게 듣거나 TV에서 본 정도 밖에 몰랐기 때문에 사격으로 따는 인형이 막연히 로맨틱해 보여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할 생각 없는 사람 부추기고 싶지는 않았다.
“공손찬님 저거 해보시게요?”
조운이 물었다.
“어? 아니. 해본 적 없고 자신도 별로..”
“잘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저것도 무기잖아요.”
“.....음, 총을 던져서 맞추라고 하면 틀림없이 잘 할 자신이 있지만 말이지.”
공손찬이 웃어넘겼다.
“저런 자잘한 인형은 방에 둬봐야 금방 먼지만 모으고.”
“인형 싫어하세요?”
“싫어하는 건 아니야. 기왕이면 자잘한 것 여러 개보다는 커다란 거 하나가 낫다고 생각할 뿐이지.”
조운이 깜짝 놀랐기 때문에 공손찬도 덩달아 놀랐다.
“왜 그래?”
“아, 여자들이 싫어하는 선물 2위가 커다란 곰인형 이라고 그러던데 공손찬님은 좋다고 하시니까요.”
그가 조금 생각해보고 덧붙였다.
“잡지에 나오는 말 너무 믿으면 안 되겠네요.”
“응, 그렇지. 그런데 나오는 건 일반적인 이야기고 개별 사람은 다르니까.”
조운이 대체 어떤 잡지를 읽는 걸까 신경이 쓰였지만 공손찬은 그렇게만 말했다.
“그리고 그 설문은 나도 들어봤어. 1위가 아마 꽃다발이었지?”
“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예쁜 꽃을 선물 받았는데 기분 나쁠 리가 없잖아? 그건 꽃다발이나 곰인형이 문제인 게 아니라, 뭔가 날이라 선물은 줘야겠는데 뭘 줘야할지 모르겠으니까 대충 꽃다발이면 되겠지, 하는 거라 싫어하는 걸 거야.”
“그런가요.”
“응. 상향이가 그랬으니까 틀림 없어.”
조운은 손상향이 누구에게서 그런 성의없는 꽃다발을 받았을까 생각해보았다.
“혹시 손책이...”
“응.”
공손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운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손책이 주유한테 하는 거 잘 관찰했다가 전부 피해야겠다..’
자기가 조운에게 어떤 가르침을 준지도 모르고 공손찬은 유원지 안내도를 꺼내 펼쳤다.
“이제 어디로 갈까. 밥 먹은 직후니까 너무 격렬하지 않은게 좋을텐데.”
“그런 거라면 관람차 어때요?”
조운이 제안했다.
“그, 커다란 바퀴에 매달려 도는 그거? 그저 천천히 올라갔다 내려올 뿐이지 별로 재밌는 거 없는데....”
밤이면 야경이라도 멋지겠지만 지금은 희뿌연 서울 하늘이 보일 뿐이다. 그러나 조운의 기대에 찬 표정이 풀이 죽는 걸 보며 공손찬은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음, 아주 어릴 때 타고 안 타봤으니까 지금은 또 어떨지 모르겠다. 느긋하게 쉴 겸 타보는 것도 좋겠어.”
조운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역시 이게 옳은 선택이었다고, 공손찬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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