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자면 대문 - 화산섬의 분관에 어서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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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번 읽기는 귀찮고 길테니 접습니다. 그래도 한 번은 펼쳐주세요.

NC-17에 대한 새로운 공지 팬픽류

좀 정리할 필요성을 느껴서


티스토리 비번은 이글루스의 동일 카테고리 글에 몇 번 이상 덧글을 달았고 그 덧글의 내용으로 봐서 판단하기에 이 사람이면 보여줘도 되겠다 싶은 사람, 또는 실제로 아는 친구나 친구에게 소개받은 사람한테만 공개하겠습니다.





모바일로 장편 읽기 힘든 경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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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http://archiveofourown.org/users/hicstans  에서 보셔도 좋습니다. 장편은 거의 올린 것 같지만 빠진 게 있으면 알려주시면 업로드 하겠습니다.

벨렘의 대공 31 ㅣ- 기타

“어째서 그러셨습니까?”
리온의 질문에 광기 어린 조소가 막시밀리안의 입가에 걸렸다.
“모르시는 겁니까? 세상 모든 걸 사람 얼굴과 이름 빼고 다 아는 분이?”
“무슨 말로 장식하든 저는 한 개인일 뿐이고, 당연히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막시밀리안이 어쩐지 배신감 서린 눈빛으로 리온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겸손함과 친근함을 가장해 자기를 위해 반역도 불사할 무리들을 모으셨군요.”
“무지를 인정하는 것과 친구가 생기는 것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리온이 힘겹게 심호흡을 했다.
“저 안에서 여러 번 물은 것 같지만, 못 들으셨던 것 같으니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어째서, 제 무엇이 그렇게 참을 수 없어서 이렇듯 잔혹하게 죽이시려던 겁니까?”
리온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가 벨레즈에 해 되는 일을 한 것이 있습니까? 폐하의 명에 따르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어째서.....”
리온이 기침을 쏟아내었다. 알베르트가 그의 등에 손을 얹고 마법으로 진정을 시켰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지금 꼭 묻지 않아도....”
“아니, 지금 들어야 되오.”
리온이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유를.... 알지 못하면....”
“알면 뭐 달라집니까?”
막시밀리안이 물었다.
“내가 숙부님을 죽이려 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러니 당신은 자기가 실기 위해서 나를 죽일 수밖에 없을 텐데.”
리온의 얼굴이 굳었다.
“그렇게는 못합니다. 나더러 빌렘의 아이를 죽이라는 겁니까.”
그 말에 막시밀리안이 벌떡 일어났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리온에게 덤벼들려는 걸 바닥이 솟아나 그의 발을 붙잡아 막았다.
“당신한테 난 그저 자기 동생의 자손일 뿐이지!”
막시밀리안이 고함을 질렀다.
“언제나, 내게 관심 갖는 것도 내 말을 듣는 것도 내가 그 빌어먹을 ‘빌렘의 아이’이기 때문일 뿐이었잖아! 그거 외에는, 난 대체 당신에게 뭐냐고!”
“빌렘의.... 왕의 후계자로 태어난 게 싫었던 겁니까?”
리온이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이름을 버리고, 왕이 되고 싶지 않았던 거라면....”
미테가 리온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저기, 그거 아냐.”
“응? 그게 아니면?”
“그... 뭐라 말해야 하나. 아무튼 그거 아냐.”
답을 구하는 눈으로 리온이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어쩐지 다들 시선을 피했다.
“예.... 사람은 자기가 알고 생각하는 만큼 밖에 볼 수 없다고 하지요.”
알베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리온이 그를 바라보았으나 알베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 음, 저기, 전하.”
올리버가 아주 슬며시 손을 들었다.
“제가 열세 살 때, 제가 벨포드 할아버님의 증손자라서 절 귀여워하시는 거냐고 여쭌 적이 있습니다만, 혹시 기억하시나요?”
리온이 눈을 깜빡였다.
“그 때 전하께선 ‘그것도 있지만 네가 귀여운 애니까 귀여운 거지’라고 답하셨습니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끄집어내게 되어 올리버는 새빨개진 얼굴을 푹 숙였다. 그러나 리온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지금 왜?”
“말하자면, 저.... 사람은 전하께서 자기를, 빌렘 폐하의 증손이라거나 왕이라거나 그런 것과 상관없이 그냥 자기가 사랑스러워서 사랑해주길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주제에 조금도 사랑스럽지 않았던 것 같지만.”
“아, 아니, 지금은 저래도 어렸을 땐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이였거든!”
말하고 리온은 이게 아닌가 주위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그런 게 어떻게 상관없을 수가 있어? 세상에 귀엽고 사랑스럽고 재능 있는 아이들은 산더미같이 있어. 올리버가 귀엽고 재능 있는 아이이긴 해도 벨포드의 증손이 아니었다면 나는 만날 일도 없었을 거야. 막시밀리안도, 빌렘의 증손이 아닌 막시밀리안을 가정하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빌렘의 아이가 아니라면 왕도 아닐 것이고 나와도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는데?”
“왕이 아닌 저는 숙부님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까!”
막시밀리안이 새삼 충격 받은 얼굴로 소리쳤다.
“정말로 절 왕위에 올려 꼭두각시로 삼을 생각으로...”
“무슨 소리입니까!”
리온이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전 쓸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가 타고난 것을 버릴 수는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어린 시절 저는 하프엘프도 왕자도 아닌 삶을 바랐었지만 결국 저 자신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돌아왔습니다. 그런 이야기... 예전에 이미 해드리지 않았던가요?”
“사람은 태어난 것에도 도망칠 수 없다고요?”
지금은 자기가 나설 때가 아닌 거 알았다. 알지만, 알렉시스는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전 전하께선 태어난 건 죄가 아니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그런데, 거기서 벗어날 수는 없다고요?”
리온이 알렉시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
그가 눈을 깜빡였다.
“아니, 내 말은, 그 때 했던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
리온이 이맛살을 찌푸려가며 힘겹게 생각을 정리했다.
“태어난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내가 왕이 안 된 것부터 말이 안 되지. 내 말은.... 출신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죄가 안 된다는 거야. 그건 사람이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종족이나 출신가문 같은 거. 하지만 벗어나게 행동하는 건 가능하지. 범위는 있지만. 그리고 책임도 거기서 부터고.”
그가 고개를 내둘렀다.
“음, 지금 정리가 잘 안 되는데....”
“비유하자면, 카디올러스 후작이 그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기 할머니와 얼굴이 똑같은 건 자기가 어찌할 수 없으니 죄가 아니지만 만약 행동을 똑같이 하면 그건 죄가 된다 그런 건가요?”
“어, 대충 비슷해.”
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무실 밖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움찔움찔 움직여 무리를 이뤄서 아비게일은 그쪽을 흘끔 보았다. 그리고 무도회 때 보았던 가냘픈 미녀가 또 혼자 남는 것을 보았다.
‘아, 저 사람이 바로 카디올러스 후작이구나.’
“그러니까, 사람들이 출신에 덜 얽매이도록 제도를...”
“리온.”
미테가 리온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주 살짝.
“오래 질식해 있던 사람이 좀 정신없어지는 건 아는데 지금은 딴 얘기 중이었거든?”
“어, 맞아.”
리온이 정신을 차리고 심호흡했다.
“폐하께서... 어, 나한테 사랑받고 싶다...는 이야기였지?”
그가 자신 없는 표정을 하고 막시밀리안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게 절 죽이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겁니까?”
막시밀리안이 멍한 얼굴로 리온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그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다.
“모른다고! 이렇게까지 했는데, 여전히 모른다고!”
저러다 어디 부러지겠다 싶어 로위너가 그의 몸을 마비시켰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막시밀리안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 질렀다.
“이럴 거면 어릴 땐 왜 그랬지! 내가 왕이 될 자라서? 날 통해서 나라를 간접지배하려고? 이 권력에 미친 반역자가!”
터무니없는 모함에 집무실 안의 ‘반역자들’은 물론 밖에서 지켜보는 중이던 궁정인 일부도 헛웃음일 지었다.
“저.... 막시밀리안? 대체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데, 전 왕의 적장자로 태어나 태자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하프엘프에 마법사라 불안한 점이 있었다곤 해도 가만히 손 놓고 있기만 하면 어쨌든 왕이 될 수 있는 입장이었는데 온갖 난리를 쳐서 그만 뒀단 말입니다. 제가 왕권을 탐내지 않는다는 걸 이보다 어떻게 더 증명하면 좋겠습니까?”
리온은 혼란스러워보였다.
“게다가 절.... 저기 밀어 넣으시기 직전에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벨렘에 있는 게 폐하께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으니 둥지로 가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고. 그러..”
“나한테서 도망치려던 거잖아!”
막시밀리안이 소리 질렀다.
“내가 왕인데, 내 명령도 없이! 나의 신하라면 내 명령에 복종했어야지!”
리온은 이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더 들을 필요도 없네요.”
멜리젠데가 말했다.
“자기가 어찌할 수 없는,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 대한 질투심으로 미쳐버린 거에요. 말을 계속 하게 한다고 해서 저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되거나 하지 않을테니까, 쓸데없는데 기력을 낭비하지 마세요.”
“멜리젠데 경의 말이 맞습니다.”
알베르트도 찬성했다.
“뭔가 본인 생각에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다 해도, 죄 없는 사람을 몰래 죽이려 한 시점에서 정당성 같은 건 없어진 겁니다. 더 들어도 소용 없습니다.”
“내가 왕이니 내가 하는 일은 정당하다!”
막시밀리안이 악을 썼다.
“이건 내 나라라고! 레이노사, 백작, 네놈이...”
“아닙니다.”
리온이 그의 말을 잘랐다.
“왕은 나라의 대표일 뿐 나라가 왕의 소유물인 것이 아닙니다. 나라는 거기 사는 모두의 것이고, 왕에게는 그들을 보살필 의무가 있을 따름입니다.”
그가 안타까운 눈으로 막시밀리안을 보았다.
“왕의 권력은 그걸 위해 있는 겁니다.”
막시밀리안도 그의 태도에서 뭔가 느낀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다시 뭐라 말하기 전에 리온이 슬프게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는, 저만 없어지면 나라가 다시 제대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할 수가 없겠군요.”
리온이 고개를 들고 자기가 사랑하던 동생의 자손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은 더 이상 왕이어선 안 됩니다.”
“수, 숙부님....”
“이만 퇴위해주세요, 조카님.”


막시밀리안에게 선고를 내리고 리온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국왕의 집무실에 침입한 반역자들’이 그를 데리고 별궁으로 돌아갔고 아무도 그들을 막지 못했다.
대공의 편에 섰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으나 막시밀리안은 왕으로 남지 못했다. 신하들은 그의 명령을 거부했고 그는 왕궁 구석 별채에 감금되었다. 보어가텐 영지로 파발이 달렸다.
에브너 후작을 필두로 한 고등법원 법관들도 그 움직임에 동조했다. 며칠 걸려 그들은 법적인 근거를 찾아내었다.
집무실의 그 금고는 다름 아닌 셀림 자신이 각 나라들에게 만들어 선물한 것이었다. 동료 영웅들이 세운 나라에 대한 까마귀 둥지의 우호와, 각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며 그 증표로. 그런 것을 이용해 다름 아닌 셀림의 제자인 리온을 죽이려 한 것은 까마귀 둥지가 벨레즈에게서 돌아서게 만들 만한 중대한 범죄임에 틀림없었다.
게다가 스마라그디와의 문제도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엘프 대사 일행이 암살에 관여했기에 당장 전쟁이 벌어지거나 크게 배상을 해야 할 일은 아니게 되었지만 막시밀리안 국왕은 분명 벨레즈의 가장 큰 우방 두 곳을 적으로 돌리려 했다.
개인적인 목적으로 일부러 나라에 큰 해악을 끼쳤으므로 이건 국가에 대한 배신이고 반역이며, 그는 국왕의 자격을 잃었고 벌을 피해갈 수도 없었다. 그걸 근거로 귀족원에서 비상 회의가 열렸고 국왕의 퇴위가 정식으로 결정되었다.
사건 당시 리온 본인이 막시밀리안을 죽일 뜻이 없음을 피력했기에 전 국왕은 사형을 당하지는 않았다. 궁전 내의 탑 같은 곳에 감금하는 것은 어떤가 하는 말도 나왔지만 대다수는 그를 벨렘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트려 놓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폐주 막시밀리안은 포트덤 근처 황무지에 감금 시설을 지어 유폐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다음 국왕은 누구로 할 것인가는 조금 더 논란이 이었다. 당연히 보어가텐 공작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주류였지만 대공에게 왕을 갈아치울 만한 권위가 있다면 그가 직접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소수의 몇몇 사람들은, 그렇기 때문에 대공이 왕이 되지 않고 왕이 잘못할 경우 잘라내는 역할을 하는 편이 낫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내내 리온은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앓아누웠다. 거의 일주일간이나 의식을 찾지 못하고 열이 펄펄 끓어서, 성급한 사람들은 그가 이대로 죽을 거라고 헛소문을 퍼트리기도 했다.
그 덕분에 리온을 왕위에 올리자는 주장은 빠르게 지지를 잃었다. 개중에는 그가 왕이 되지 않으려고 일부러 칭병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날마다 이어지는 암살 시도에도 멀쩡한 얼굴로 입궐했던 그가 새삼 병이 날 리 없다는 논리였다.
남들이 뭐라 입방아를 찧든 리온은 로카넨 별궁은커녕 자기 침실에서도 한 발짝도 밖으로 나오지 않고 외부인 누구도 만나거나 연락을 하지 않았다. 단 한 번, 병문안을 핑계로 찾아온 보어가텐 공작 앞에 무릎 꿇고 신하의 예를 올리고, 그러면서 자신이 이제 늙고 병들어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없음을 말한 것만이 그가 한 유일한 정치적 의사표현이었다.
보어가텐 공작은 조용하고 신속하게 왕위에 올라 카테리나 2세가 되었다.
스마라그디와는 각자 자기네 범죄자를 재량껏 처벌하고 나라 간에 문제 삼지 않는 것으로 합의가 되었다. 스마라그디는 클라우스를 처형하고 셀레나 및 그를 따른 병사들을 종신 금고형에 처했다. 벨레즈는 펠레텐 백작과 우르술라 경을 처형하고 작위를 몰수했다.
셀림은 이번 일을 두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라인힐드 경을 까마귀 둥지로 불러들여 단독 연구실을 주고 1급 제자에 준하는 연구 지원을 하기로 결정한 것을 볼 때 그가 어느 편에 서있는지는 명백했다. 금고를 도로 뜯어가지는 않았지만 집무실도 수리되지 않았다.
그렇게 석 달이 지나갔다.


벨렘의 대공 30 ㅣ- 기타



혐오스러운 적이라 해도 인간의 비명 소리를 계속 듣고 있는 건 사람들의 정신을 깎아먹었다. 알베르트가 막시밀리안과 루시텔 주변에 소리차단 마법을 걸자 나머지 사람들은 조금 안도했다.
미테와 드미트리는 리온을 깨워 말을 전하기 위해 노력중이고 로위너는 어떻게 금고에 바늘구멍이라도 뚫어볼 수 없을까 고민했다. 실비우스는 몰려오는 근위대와 다른 사람들을 막고 있는 라인힐드 경에게 합류했다. 아들이 반역자가 되었으니 자기도 거리낄 것이 없다면서.
그리고 펠레아스, 멜리젠데, 마를렌, 올리버, 아비게일, 알렉시스는 모여앉아 암호를 추측해보려고 노력했다.
“이름일겁니다.”
펠레아스가 단정했다.
“아까 분명 ‘기억할 수 없다’고 했지요. 리온이 기억하지 못하는 거라면 역시 사람 이름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지만 알아내면 전체 이름은 제가 댈 수 있습니다.”
올리버가 말했다.
“전하를 막기 위한 암호라면 분명 정식 호칭 전부를 적어야 할테니까요.”
“전하께서 모르는 인물이라면, 서거하신 왕후마마라던가요?”
아비게일이 제안했다.
“아내 이름이라고 생각하면 암호로서는 꽤 흔한 패턴인데요.....”
말한 아비게일 조차도 저 막시밀리안이 아내 이름 같이 정상적인 암호를 썼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전하께서 유난히 못 외우는 이름이 있다거나....”
“전하께서 제 이름을 다섯 번은 잊어버리시긴 했지만 국왕이 모르니 암호일 리는 없지요. 누구든 왕은 알고 전하는 모르는 사람일 거에요.”
멜리젠데가 말했다.
“그런 사람 왕궁 안에만 한둘이 아닌데요....”
올리버가 난감하게 중얼거렸다.
“저자의 뒤틀린 마음가짐을 생각할 때 의외로 전하께서 아주 잘 아는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마를렌이 아무렇지도 않게 국왕을 폄하해 불렀다.
“이렇게 가까운 사람의 이름조차 외울 수 없는 리온을 비웃으려는 목적으로 말이지요.”
“그럼 레이노사 백작?”
아비게일이 말했다.
“저.... 사람 백작한테도 조금은 집착이 있는 것 같고 말이에요.”
“그럴듯하긴 한데, 전하께서 레이노사 백작의 이름은 외우십니다.”
올리버가 말했다.
“사람 이름은 외우지 않겠다는 서원 같은 것을 하신 게 아니라서, 충분히 많이 듣고 신경을 쓰면 꼭 책을 쓰지 않은 사람도 외우기도 하시거든요. ...제 이름도 아십니다.”
너무 자랑스러워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가 덧붙였다.
“근데 어차피 전하, 이제는 그 안경으로 사람 다 기억하잖아요.”
알렉시스가 말했다.
“그거 쓰고 만난 뒤에는 저도 기억하던데요.”
올리버의 표정이 조금 구겨졌다.
“그런 대단한 물건이 있어요?”
멜리젠데가 놀랐다.
“항상 쓰시지는 않습니다, 그건 전하 기준으로도 마력이 너무 많이 들어서.”
올리버가 변명하듯 말했다.
“그 안경의 기능, 저 사람도 알고 있었을까요?”
아비게일이 물었다.
“그렇다면 이 논의는 근본부터 성립 안 되는 거잖아요.”
“그.... 글쎄요, 안경을 쓰고 폐... 저자와 만나신 적이라면 분명 있었습니다만, 그런 이야기까지 나누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올리버가 불안한 표정으로 목을 움츠렸다. 만약 국왕이 그걸 알아서, 리온이 전혀 모를 만한 사람 이름으로 정했다면 고문으로 자백을 받는 것 외엔 아무 방법이 없게 된다. 아비게일도 마를렌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일부러 등 돌리고 있던 막시밀리안 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척 보기에도 잘 되어가고 있는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저딴 놈이 고집은 세서.”
마를렌이 내뱉었다.
막막한 기분에 아비게일이 알렉시스를 돌아보았다. 알렉시스는 인상을 쓰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거.....”
“응?”
“그 안경, 그걸 쓴 채로 본 사람을 기억하는 거겠지요? 아마도 기억을 할지 말지는 전하께서 정해서, 뭐 신호 같은 게 있고?”
“네, 그렇습니다.”
올리버가 말했다.
“아, 맞아. 우리랑 벨렘에서 처음 만났을 때, 안경 밀어 올리면서 이제는 기억한다고 그랬잖아. 그 때 기억한 건가, 그럼?”
아비게일이 말했다.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그런데 그게 왜요?”
“안경 쓰고 거울 보면서 자기 이름을 일부러 기억해뒀을까요?”
알렉시스가 말했다. 모두는 입도 뻥끗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데뷔탄트 무도회장에서 정식으로 인사할 때도 자기 이름을 이쿠스티카 대공 리오넬 이라고만 칭했어요. 또 델로레인 쪽 새 용사 이야기에는, 조르주 왕자가 우리 전하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자기 정식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데 놀라는 대목이 있거든요?”
“그, 리온도 지금은 자기 이름 다 외웁니다!”
펠레아스가 소리쳤다.
“그저 우리가 좀 놀려대서.... 그래서 자기 이름 전부를 대는 걸 싫어하는 것 뿐입니다. 백 년 전에 이미 외웠다고요!”
“그걸 저자가 알까요?”
마를렌이 말했다.
“집착하는 상대의 이름을 암호로 삼고, 당사자가 그걸 모를 거라 여기며 음습하게 좋아한다고 하면요?”
펠레아스가 소리쳤을 때부터 이들을 보고 있던 미테가 재빨리 루시텔에게 달려갔다. 그를 보고 알베르트가 소리차단 마법을 걷었다.
“루시텔! 그놈이 무슨 말 했어요?”
“아니, 울며 리온을 부를 뿐이다.”
루시텔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자기가 죽이고 있는 상대가 구해주길 바라기라도 하는 건지....”
루시텔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미테가 다시 금고 앞으로 달려갔다.
“리온! 암호를 알아냈어!”
미테가 소리쳤다.
“문에 손을 대! 그리고 열어!”
그러고 미테가 펜을 들어 암호 입력판에 재빨리 리온의 전체 이름을 적어 넣었다.
모두 숨도 못 쉬고 금고 문을 바라보았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갑자기 막시밀리안이 광소를 터트렸다.
“화살촉의 신경독이 마비를 일으킨 거다!”
그가 미친 듯이 꺽꺽대며 웃었다.
“그 화살, 그걸 옆구리에 박아줬거든! 살아 나오는 건 불가능해. 너희들이..”
“그래, 암호는 맞다 이거지?”
미테가 입력판에 리온의 이름을 반복해서 쓰고 또 쓰기 시작했다.
“손을 뻗어, 리온! 손만 금고 문에 닿으면 돼! 일어나!”
미테가 소리 질렀다.
“정신 차리고 일어나, 리온!”
그 순간 문이 아주 약간 밀려나왔다. 그걸 느끼자마자 금고가 저절로 열리는 것도 기다리지 않고 미테는 펜을 내동댕이치고 금고 문짝을 뜯어낼 듯 잡아당겨 문을 열었다.
리온은 왼팔 하나만 문 쪽으로 뻗은 채 금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오른쪽 옆구리에 화살이 박혀 있고 그 주위가 피로 물들어 있었다. 공기가 들어오자 그가 발작하듯 기침하기 시작했다.
드미트리가 달려들어 리온을 끌어내 눕혔다. 루시텔이 리온의 가슴을 누르고 심호흡을 유도했다. 알베르트가 화살대를 잡았다.
“상처가 깊지는 않으니 지금 뽑는 게 낫겠습니다.”
루시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베르트가 화살을 뽑아 던지고 곧장 치료마법을 퍼부었다.
짧게 헐떡이며 콜록거리던 숨소리가 점차 깊고 느리게 바뀌었다. 리온이 제대로 숨을 쉬기 시작하자 루시텔이 안도하며 그에게 다시 가호를 씌웠다.
“아까 뮬렘의 축복을 내리길 잘했지.....”
“살았네. 늦지 않았어.”
로위너가 털썩 주저앉았다.
“이렇게 놀라고 걱정한 거 몇 백 년 만인지 모르겠다. 아, 심장 떨려.”
“정말 큰일 날 뻔 했습니다.”
그 옆에 드미트리도 주저앉았다.
“우리 두 사람이 손도 쓰지 못하다니, 뭐 이런 일이....”
“하하하, 드미트리도 아직 어리다니까. 마법사는 원래 마법이 안 통하는 일에는 무용지물인거야.”
“누님 제가 아직 미숙한 것은 사실이나 삼백을 바라보는 나이에 어리다는 건 좀.....”
“어려.”
“........앞으론 리오넬을 애 취급하지 않을 터이니 어리다고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자, 태어난 지 오십년도 안 된 우리 갓난애기들은 저기 가지 말자.”
알렉시스가 아비게일과 올리버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더 없나 사람들을 살폈다.
“정말 쉰 살 이하는 우리 셋 밖에 없는 거야?”
아비게일이 리온의 주위를 둘러싸고 부산을 떠는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이들 외엔 정말로 엘프 아니면 하프엘프 아니면 대마법사 뿐이었다. 거기에 그림자엘프 하나.
문득 이 방에 있는 또 다른 ‘50세 이하 인간’이 생각났으나 아비게일은 그쪽은 돌아보지 않았다.
“성공하셨어요, 스승님?”
라인힐드가 들어왔다. 실비우스도. 그들 뒤로 방어막에 막혀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몰려왔으나 그들은 그래도 감히 집무실 안으로 발을 들이지는 못했다.
“그래. 구해냈어.”
로위너가 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라인힐드를 잡아당겨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고마워, 우리 제자.”
라인힐드가 기쁨으로 얼굴을 붉혔다.
“아직 안도할 때가 아닙니다. ‘저걸’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지요.”
실비우스가 방 한켠에 구겨져 있는 국왕을 가리켰다. 그가 알베르트의 손목을 잡아 꺾었기 때문에 실비우스의 말은 신랄하기 짝이 없었다.
“으음, 확실히 커다란 문제가 남았네.....”
리온을 구하기 위한 일이고 누구도 자기 행동을 후회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막시밀리안은 벨레즈의 국왕이고 이들은 국왕의 개인 집무실을 부수고 쳐들어와 심지어 그를 고문했다. 이대로 ‘사실은 쟤가 나쁜 놈이었어요!’로 끝날 일은 절대 아니었다.
“....죽여서 뒤탈을 제거할까?”
“누구를요?”
리온의 입에서 가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물 좀....”
리온의 얼굴 앞에서 물방울이 뭉쳐 그의 입안으로 흘러들어갔다. 몇 모금 마신 뒤 그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리온이 눈을 떴다.
“....미테?”
“야임마!”
미테가 리온을 덥석 끌어안았다.
“너 죽는 줄 알았다고, 저 안에서 정말로 죽어버리는 줄 알았단 말이야!”
“미안해. 미안.....”
리온이 힘없이 손을 들어 미테의 등에 얹었다.
“나도... 죽는 줄 알았어. 도저히 어떻게도 할 수가 없어서.... 고마워.”
리온이 다시 눈을 감고 미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구해줘서 고마워.”
“나 혼자 한 거 아냐.”
“응. 그렇겠지.”
리온은 움직이지도 눈을 뜨지도 않았다.
“지금은 고개 들 힘도 없어.... 고마워요, 모두들. 덕분에 살았어요.”
“그래.”
드미트리가 리온의 어깨를 두드렸다.
“무사... 살아서 다행이다. 버텨줘서 고맙다.”
“다음에, 누가 나 죽이고 싶고 하면 칼로 찔러 달라고 해야겠어.”
리온이 헛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이거 너무...... 너무............”
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 거기 얼마나.... 있었어?”
“대충 두 시간 반 정도요.”
올리버가 말했다.
“그런데, 누가 가뒀는지는 기억하시나요?”
리온의 등이 움찔 굳었다.
“저희 델로레인으로 망명 준비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리온이 일어나려고 바둥거렸으나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미테가 그의 팔을 어깨에 걸어 부축하며 일어섰다. 올리버가 달려와 반대쪽 팔을 잡아 지탱했다.
리온이 막시밀리안을 보았다.


리온의 인장 4 (완) ㅣ- 기타



리온의 인장 수여식은 벨렘 시민들에게까지 공개되는 왕실 연회로 열렸다.
원칙적으로는 검소하게 치른다는 말이 무색하게 규모도 크고 호화로웠다. 셀림의 제 1제자에 벨레즈의 왕자에, 새 용사이기까지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리온도 인장 시험 때보다도 훨씬 화려하게 차려입고 왕자다운 기품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왕실 연회의 주인공답게 긴장한 기색도 없이 뭇 귀족들의 축하 인사를 받고 적절하게 응수했다.
셀림은 참석해서 리온에게 덕담 같은 말을 건네고 곧 모습을 감추었다. 존재 자체가 전설인 인물이라, 다들 그걸 결례나 제자에 대한 무심함보다는 신비로움으로 받아들였다. 리온도 스승이 안 보이는 편이 더 홀가분한 것 같았다.
‘나를 피하는 걸지도.’
셀림보다는 오래 자리를 지키는 헬레나를 먼발치서 지켜보며 저스틴이 술잔을 들었다.
죽인 스승이 이렇게 살아 돌아왔으니 마주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금의 자신은 키멘의 선지자라 하나 5백 년 넘게 살아오며 힘과 지식을 축적한 그가 두려워할 것은 전혀 없는데도.
‘역시 내가 미운 걸까?’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섭섭했다.
비리디스를 사랑한 나머지 미쳐버리고 말았지만 셀림도 소중했다. 그마저 자신을 배신했다고 알았을 때 자살을 결심했던 그 심정은 지금도 싫도록 생생하게 기억났다.
자신이 죽어버린 결과 셀림도 행복해지고 모든 것이 잘 되었다고 받아들이는 것도 생각보다 힘들었다.
“저스틴, 피곤해?”
정신을 차려보니 시에나가 역시 술잔을 든 채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스틴은 당황했다.
시에나에게 언제나처럼 찰싹 붙어있을 작정이었는데, 방금은 셀림을 신경쓰느라 시에나가 어디서 누구와 이야기하는지 잠시 잊었다.
자신이 말을 걸었는데 저스틴이 얼른 대답하지 않자 시에나는 더욱 당황했다.
“너 정말 괜찮아? 혹시 또 옛날 생각한 거야?”
“아니야.”
저스틴이 얼른 대답했다. 전생에 마왕이었다고 해서 시에나가 자신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정말로 바라지 않았다.
“옛날 생각한 건 맞지만 그래도 괜찮아. 진짜야.”
“그럼 다행이지만.”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시에나가 말했다.
“과거는 잊고 새로 시작한다는 거 말처럼 쉬울 리가 없잖아. 그랬으면 네가 이런 식으로 환생할 필요도 없었겠지.”
저스틴은 시에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풋사과 같은 녹색 눈동자 외엔 거의 닮지 않은 얼굴을. 사실은 눈매도 사뭇 달랐다.
“그러니까 힘들면 그렇다고 얘기해. 나도 그렇고 다른 동료들도 다들 도울 테니까. 이미 마왕인 것까지 감춰줬잖아.”
“그래.”
저스틴은 입꼬리를 살며시 움직였다. 이럴 때는 웃는 것이 자연스러울 테니까.
오랜만에 마음 편한 기쁨을 느꼈다. 그러니 웃을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언젠가는 의식적으로 얼굴 근육을 움직이지 않고도 웃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제 수여식 한다.”
팡파르 소리에 시에나가 저스틴을 홀 중앙으로 잡아끌었다.
인장 수여식은 마법사의 가족, 친우, 스승 등이 모여서 축하해 주는 것이므로 새 용사들은 당연히 리온의 수여식을 축하해줘야 했다.
그런데 새 용사들 사이에서 리온의 비중이 꽤 높은 데다 벨레즈 1왕자인 것이 문제였다. 새 용사들은 리온을 축하해주되 경외하는 것으로 보여선 안 되었다. 새 용사들의 자리는 리온에게서 약간 떨어진 자리에 주의 깊게 마련된 의자였다. 일어나면 지나친 경의를 표하는 것이 되므로 수여식이 끝날 때까지 앉아있어야만 했다.
리온의 자격을 증명하는 증서를 가지고 벨레즈 지부장이 장로 둘과 함께 나타났다.
어느새 다시 나타난 셀림은 지부장 곁에 섰다. 리온은 헬레나와 부왕과 함께 그들을 마주보고 섰다.
리온이 품에서 인장을 꺼내자 밤하늘에 넓은 범위의 환상이 나타났다. 환상 계열 전문인 마법사들이 수여식의 백미를 왕궁 바깥에서까지 잘 보이도록 비춰주고 있었다.
리온의 인장은 선명하게 빛나는 루비였다. 굵은 원석 하나를 통째로 가공해서 만든 인장이 리온의 손 위에서 핏빛으로 반짝였다. 마법사 귀족들의 화려한 인장에 익숙한 사람들도 압도될 정도의 장중함이 느껴졌다.
인장에 리온이 식별 마법을 걸었다. 이제 이 인장으로 찍은 문양만이 리오넬 안드바리 이쿠스티카 프리마라 벨레니스를 대표할 수 있으며, 리온은 이것으로 날인할 때마다 자신과 마법과 까마귀 탑에 대한 책임을 생각해야 했다.
그가 까마귀 탑이 인정하는 인장 마법사임을 증명하는 서류에 첫 번째 날인이 이루어졌다.
검은 잉크로 뚜렷하게 찍힌 문양이 어떤 모습인지 리온이 종이를 들어보였다. 환상 마법 역시 그 증서를 집중해서 보여주었다.
그것은 인장의 둥근 테두리 외에 거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흰 원이었다.
‘저게 뭐야?’
시에나는 자기가 잘못 본 것은 아닌가 눈을 부릅떠 보았다. 그러나 다시 봐도 그냥 흰 원에, 작은 점 하나가 찍혀있을 뿐이었다.
“저스틴.”
“잘못 본 것이 아니다.”
말투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으나 저스틴도 당황한 듯했다.
“깨알만한 점 하나 찍혀있는 흰 도장으로 보인다면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
수여식 전경을 비춰주는 환상 마법사들이 실수한 것도 아니었다. 시에나와 저스틴은 다른 용사들과 함께 리온 가까운 자리에 앉아있어서 증서에 찍힌 문양을 직접 보고 있었다.
셀림과 헬레나도 이게 뭐냐는 시선으로 리온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나는 까마귀입니다.”
리온이 엄숙하게 대답했다.
“까마귀가 거의 보이지도 않을 만큼 넓은 하늘에서 드높이 날고 있습니다. 문장학에서 나는 새는 이상과 자유를 상징하니까요.”
셀림도 헬레나도 리온의 인장에 아무 간섭도 않기로 했던 자신들의 결정을 후회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미 인장은 찍혔고, 이 단계에서 변경한 경우는 문양이 중복되었을 때뿐이었다.
리온의 의기양양한 미소를 보면, 지금 셀림이든 헬레나든 부왕이든 나서서 인장 다시 파라고 설득하는 것보다는 사람 좀 외우라고 설득하는 쪽이 더 보람찬 일이 될 게 뻔했다.
리온은 당당하게 그 흰 동그라미 인장을 탑에서 보관할 증서에도 찍었다. 그리고 손가락에 끼었다.


어쨌든 인장이 수여되었으므로 축포가 터지고 술잔이 다시 돌아갔다. 마법으로 기교를 부린 눈부신 불꽃놀이가 밤하늘을 수놓았다.
새 용사들은 리온 주위에 모여들었다.
“평범하고 무난하게 정한다고 하지 않았어?”
평범이라는 단어가 그새 다른 뜻으로 변한 것인가 묻는 표정들 앞에서 리온은 뻔뻔하게 웃었다.
“아무튼 하늘을 나는 까마귀 맞잖아.”
“이상한 해석 붙을까봐 걱정된다며?”
“응. 그래서 이렇게 아무 것도 없이 깨알만한 까마귀 하나만 있으면 더 어떤 해석이 붙을 수 있겠어?”
리온이 인장을 친구들 앞에 내밀고, 짤막한 주문을 외웠다.
인장 앞에 물방울 같은 렌즈가 나타났다. 렌즈를 통해 커다랗게 확대된 인장 표면에 문제의 깨알만한 까마귀 역시 분간될 수 있도록 크게 보였다. 원래 크기였을 때는 그냥 깨알이었는데 확대해서 보니 분명 제대로 된 까마귀 형상이었다.
“어때?”
리온은 그것으로 모든 반론을 봉쇄할 수 있다는 태도였다.
“난 네가 인장 정도는 네 마음대로 정하게 해주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직도 곁에 있던 헬레나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문양을 디자인할 센스가 부족한 마법사는 그냥 장인에게 전부 맡겨도 흠이 되지 않아. 말 안 했던가?”
“말씀하셨죠.”
살짝 삐딱하게도 보이는 표정으로 리온이 대답했다.
“그리고 인장 문양을 정할 때 가장 중요한 건 그 인장을 평생 쓸 본인 의사라고도 하셨고요.”
헬레나는 잠시 반론할 말을 고르는 듯 눈을 굴렸다. 그러나 리온보다 훨씬 오래 살며 쌓은 연륜으로 반박할 말을 찾는 대신 그냥 고개를 저었다.
“그래, 네 뜻이 정 그렇다면.”
그리고 리온 곁의 새 용사들을 둘러보더니 한 발 물러났다.
“난 그만 네 아버지와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다.”
리온이 얼굴을 찌푸렸으나 따라나서지는 않았다.
헬레나는 아들에게 부드럽게 웃어보이고 그 자리를 떴다. 남은 사람들은 떨떠름해진 리온의 기색을 살폈다. 리온이 용사로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헬레나 마조라스와 벨레즈 국왕과의 관계를 두고 재결합하는 것 아니냐며 설레발치는 사람들도 나오게 했다.
“괜찮아, 그런 표정들 할 것 없어.”
리온이 다시 빙긋이 웃었다.
“어머니와 아바마마는 사이가 틀어진 게 아냐. 시간을 초월하는 사랑을 나누지 않으신 것뿐이지. 나도 두 분이 지금 다시 맺어지길 바라진 않아. 새 왕후마마도 좋은 왕후시고.”
‘좋은 어머니’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리온은 성장기의 대부분을 까마귀 둥지에서 스승님과 다른 제자들과 보냈다. 헬레나 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꼭 벨레즈의 왕과 왕후에게 어버이의 정을 바라고 매달릴 필요가 없었다.
리온이 인장을 다시 손가락에 끼고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았다.
“갑자기 그렇게 묵직한 반지를 끼는 거 괜찮겠어? 경량화 마법도 같이 건 거야?”
미테가 물었다. 이미 마법사들의 화려한 인장반지뿐 아니라 그저 부를 과시하기 위한 굵은 보석반지도 잔뜩 봤음에도 리온이 그런 걸 끼고 있으니 위화감이 들었다.
“당연히 경량화했지. 한 덩어리의 루비로 만든 거라 마법을 겹쳐 걸어도 마력이 흩어지거나 보석의 결정구조가 흔들리지 않아. 아바마마께서 특별히 내주신 것으로 만들었는데 제대로 감사를 드려야겠어.”
처음 원하던 대로 완전히 왕실과 연을 끊고 가출하는 것은 이제 완전히 실패했다.
그래도 스승님과도, 어머니와도 긴 대화를 나누고 지금까지보단 나은 관계가 될 여지가 생겼다. 그러니 아버지와도 그럴 수 있었다.


리온의 앞날에 그렇게 다들 낙관적인 전망을 품을 즈음 저스틴은 다시 연회장을 훑어보고 있었다.
수여식이 끝나고 축포가 터질 때 재빠르게 모습을 감춘 셀림은 역시 다시 나타날 기미가 없었다.
환생 후 많이 둔감해지긴 했어도 이쯤 되면 모르는 척도 할 수 없었다. 셀림은 저스틴을 피하고 있었다.
‘원망하고 있지 않은데. 사과하고 싶은 마음도 있는데.’
마지막의 유적형 골렘에서 살아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편지에 마지막으로 남길 말을 다 남겼다.
지금은 이렇게 살아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편지’에 미처 남기지 못한 말들이 떠올랐다. 하지 말걸 그랬다고 후회되는 말들이 떠올랐다.
흐라그눔 파괴를 위한 긴 여행 동안 수없이 뇌리에서 고쳐 쓰고 또 고쳐 쓴 편지였음에도.
환생하고 풀리오시안의 품에서 양육받을 때는 자신이 완전히 늙고 굳어버려 더 이상 변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고아원에서도, 풀리오시안의 치료소에서도, 까마귀 탑에서도 자신은 강 속의 바위 같았다. 강물이 어떻게 흐르건 움직일 일도 없고 변할 일도 없는. 가끔 겉에 이끼가 끼기도 하고 물살에 잠기기도 했지만 바위는 바위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시에나를 만났다.
예상보다도 훨씬 더 많이 달라진 모습에 당황했다. 키멘에게 사기를 당한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로.
시에나는 비리디스가 아니었다. 적어도 그가 기억하는 비리디스는 아니었다.
결국 진정하고 계속 살아서 계약을 이행하기로 한 것은, 우습게도 그 달라진 모습 때문이었다.
키멘에게 앞뒤 안 가리고 분노를 터뜨렸다가 신열에 걸린 그를 시에나는 걱정해주었다. 솔직하고 거리낄 것 없는 태도로.
비리디스도 동정심의 발로인지 잠깐이나마 마음이 흔들려서인지 호르텐시우스를 걱정하거나 도와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항상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면 호르텐시우스는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며 괴로워했다.
시에나는 그를 싫어하면서도 다치지는 않길 원했다. 그걸 숨기거나 왜곡하지 않았다.
드디어 환생한 보람을 느꼈다. 이제 두 사람은 생사여탈권이 치우쳐 있지도 않고 정치적인 간섭이나 음모를 의식해가며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할 필요도 없었다. 상대방의 감정 외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접근할 수 있었다.
셀림을 가르칠 때 이후 처음으로 행복했다. 계기가 무엇이건 지금 너를 사랑한다고 말한 것은 한 치의 가감도 없는 진실이었다.
그리고 변하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를 정도로 천천히.
처음엔 그냥 키멘과의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필요한 인재들이었던 사람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좋지도 싫지도 않았던 리온이 셀림의 제자라는 사실이 점차 그의 실력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고, 루시텔이 뮬렘의 사제로서 괴로워할 때는 왜인지도 모르고 곁을 지켰다. 벨포드가 가문에서 내쳐졌을 때도 그가 자신처럼 괴로워할 일 없이 편해지길 원했다.
강물 속의 바위는 어느새 마모되어 변했다.
그 변화를 사랑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원망했던 제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시에나 말대로 지금 자신의 주변엔 새 인연들뿐이었다. 새로 좋은 인연을 쌓아가는 것도 좋지만 끔찍하게 끝났던 옛 인연도 고쳐보고 싶었다.
그러나 셀림은 이 자리를 피해버렸다.
실망하기는 일렀다. 셀림도 마음을 추스르고 옛 스승을 만나도 안전하다고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사람이 무해하고 안전함을 보여주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 기다리는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동료들 곁으로 돌아가야 했다. 시에나가 먼저 자신을 찾으러 와주는 것도 좋지만 그건 아까 이미 겪었으니 이번엔 자신 쪽에서 동료들을 찾아가고 싶었다.


“어딜 갔다가 이제 와?”
역시나 시에나는 저스틴이 또 안 보여서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저스틴은 공들여 미소지었다.
“아무 것도 아니다.”
“혹시 리온의 인장 가지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들었어?”
셀림 찾기에 바빠 사람들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저스틴이 얼른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벨포드가 입을 열었다.
“다들 지금은 인장 이야기는 않더군요. 이번 일로 전하께서 왕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어떻게 될지만 이것저것 추측하고 있었습니다.”
“그야 인장 갖고 말하고 싶어도 말할 게 너무 없으니 그렇겠지.”
미테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리온이 여전히 왕위를 바라지 않는 것은 이미 새 용사들 사이에서도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이야기가 나오면 분위기가 가라앉으므로 그냥 인장이나 계속 놀리고 싶었다.
리온이 축하받고 기뻐해야 할 날이니 그런 것답게 보내는 편이 좋았다.
“그것 봐. 말할 게 없으니 말이 안 나오잖아.”
리온은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시험 직전까지만 해도 자기가 대륙 제일가는 바보일까봐 걱정하더니.”
루시텔도 기가 차서 웃음을 흘렸다.
“나야 여행 다닐 때의 그 맹랑한 천재로 돌아온 지금이 보기 좋다만, 왕실 사람들은 적응하려면 고생깨나 하겠구나.”
“맹랑한 천재라고요?”
리온이 두 눈 동그랗게 떴다. 자기 보고 하는 말이냐는 표정이었다.
“그래. 마력 넘치지, 주문 강하지, 그런 데다 인간 기준에서뿐 아니라 거의 모든 종족 기준에서까지 별종이지.”
“그렇게 거국적으로 별종이에요? 제가?”
드워프인 밀로스, 외국인인 조르주 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스틴도 같이 끄덕이고 덧붙였다.
“그게 나빴다는 건 아냐. 도리어 참 귀여웠지.”
미테는 리온의 키가 커졌다고 느꼈다.
아니, 머리만 커지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부풀어 키가 커지는 것처럼 보였다.
“좀 심한 말을 한 거 아닌가?”
라크리스가 저스틴을 찔렀다.
“하지만 사실인걸.”
리온은 부풀어오른 머리카락을 손으로 꾹꾹 눌러 가라앉혔다. 그리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입을 열었다.
“.....한편, 마왕의 문장은 단순한 검은 원일 뿐이다. 그의 극도의 오만함과 사악함을 드러내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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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용사 중 한 명이자 셀림의 제 1제자, 벨레즈의 이쿠스티카 대공이기도 한 리오넬 안드바리 이쿠스티카 프리마라 벨레니스의 인장은 보는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는 한다. ‘하늘을 나는 까마귀’라고 하지만 까마귀는 육안으로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작다.
벨레즈의 제 1왕자로 태어났음에도 한 번도 권력욕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왕후 소생에게 왕위를 양보했을 뿐 아니라, 신분과 종족을 가리지 않고 친교를 맺는 그의 자유분방하고 소탈한 성격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유에의 갈망과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성격이 이런 독특한 인장을 만들어낸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 인장의 까마귀가 너무 작은 나머지 얼핏 보면 그냥 흰 원으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쿠스티카 대공의 많은 업적 가운데 첫 번째가 흐라그눔 파괴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흐라그눔의 창조자 데스페라티우스의 인장은 검은 원이고, 그 불길한 문양은 오래도록 학자들의 수수께끼로 남았다.
대륙과 모든 생명체의 적, 시대를 뛰어넘어 겨루었던 자신의 숙적과 영원한 대척점임을 선언하기 위해, 그는 어둠과 절망의 원에 대비되는 빛과 희망의 원을 선택한 것이다. 그 빛 속에서 대공 자신이 날고 있는 모습은 가히 경외감마저 불러일으킨다......]
-문장학의 대가 로시펠로스 제르미네 루체의 저서, ‘문장과 인장, 개인의 역사’ 중에서


벨렘의 대공 29 ㅣ- 기타


“폐하.”
알베르트가 아직 바닥에 내팽개쳐진 채로 일어나지 않는 막시밀리안에게 가 그 옆에 무릎 꿇고 앉았다.
“레이노사 백작...”
“금고를 열어주십시오.”
막시밀리안의 얼굴에 뒤틀린 미소가 어렸다.
“끝내 반역자들의 편에 서는 건가, 백작? 나한테 바치던 충성은 모두 거짓이었지!”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손을 내밀어 막시밀리안의 상체를 잡아 일으켜 앉혔다.
“저는 벨레즈 왕실의 신하이고 당연히 폐하께 충성합니다. 그래서 폐하께서 이렇게 가까운 분과 상잔을 벌이시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알베르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득했다.
“리오넬 대공의 위세가 대단하다고는 하나 그도 폐하의 신하일 뿐입니다. 거슬리는 점이 있으시다면 불러서 질책하거나 멀리 내쫓으셔도 될 일입니다. 폐하의 손에 육친의 피를 묻히실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막시밀리안의 표정이 약간 흔들렸다. 가능성을 느끼고 알베르트가 그의 손을 자기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러니 폐하-”
“하지만 그가 말을 듣지 않으면?”
막시밀리안이 반문했다.
“숙부님이 내 명령을 거부한다면, 무엇으로 그에게 강요한단 말이냐.”
“그는 폐하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가 감수할 만한 명령만을 내렸기 때문이지. 그가 정말로 싫어할 만한 명령을 한다면? 그래도 그가 나를 따를 것이라 생각하나?”
보고 있는 미테는 기가 막혔다. ‘너 애냐!’ 하고 소리 지르며 멱살을 잡아 짤짤 흔들고 싶었다.
그러나 이건 리온을 구하기 위해 하는 일이다.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해주는 레이노사 백작에게 도움은 못 될망정 방해는 할 수 없었다.
미테는 막시밀리안의 눈에 띄지 않도록 슬쩍 옆으로 물러났다.
“독을 먹어도 화살에 맞아도 숙부님은 죽지 않는다. 근위대 쯤 한손으로 쓸어버릴 것이다. 그를 무엇으로 위협할 수 있단 말이냐.”
알베르트의 얼굴에 난감함이 스쳤다. 그러나 곧 그가 결심한 듯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럴 땐 저를 인질로 삼으시면 됩니다.”
그 말에는 실비우스의 기색이 험악해졌다. 상황이 상황이고, 알베르트가 진심이 아니란 걸 알아도 아들이 자기 목숨을 도구로 내거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있으려니 속에서 천불이 끓었다.
펠레아스가 그의 팔을 꽉 잡았다. 표정 관리를 할 자신이 없어 실비우스는 아예 그쪽을 외면해버렸다.
“폐하께서도 아시겠지만 대공은 저에게 빚이 있습니다. 제가 죽을 때 까지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빚이지요. 그 사람은 제 안위를 위태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백작을 해치겠다 위협하면, 숙부님이 굴복할 거라고.”
“네, 폐하.”
알베르트가 순종적인 신하처럼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러니 극단적인 판단을 내리지 말아주십시오.”
막시밀리안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잡힌 손을 빼고 몸을 좀 더 일으켰다.
“레이노사 백작.”
“네, 폐하.”
막시밀리안이 알베르트의 오른 손목을 쥐고 바닥에 짓눌러 꺾었다.
“날 바보로 아나?”
손목에서 우드득 소리가 났다. 알베르트가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켰다.
“숙부님을 위해서 목숨을 걸면서 잘도 내 신하를 자처하는군! 그렇게 숙부님이 좋으면 같이 죽지 그러나, 응?”
막시밀리안이 칼을 뽑았다. 예복의 장식이지만 날은 서있었다.
“왜 모두가 내가 아닌 그분 편만 드냐고!”
그가 알베르트에게 칼을 휘둘렀다. 더 참지 못하고 미테가 달려들어 칼 쥔 손을 걷어차 칼을 날리고 그의 손목을 비틀어 알베르트를 놓게 했다.
“너 따위가 왕이라니 이 나라가 불쌍하다. 죽어 이 새끼야, 그럴 거면 너나 죽어버리라고!”
“알베르트!”
실비우스가 달려와 아들을 부축해 일으켰다.
“괜찮습니다, 이쯤은.”
알베르트가 자기 손목을 쥐고 치료 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못 본 새 생각보다 더 심해졌군요.”
알베르트가 미테에게 밟혀있는 막시밀리안을 착잡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옛날부터 저랬단 거에요?”
아비게일이 소름끼친다는 표정을 했다.
“남의 위에 서는 자가 약간의 자격지심도 없다면 그게 더 문제입니다. 리온 전하 어렸을 때도 그 정도 불안정함은 있었기 때문에, 너무 걱정하지 않고 가끔 격려의 말만 건넸습니다만 갑자기 이렇게 심해졌을 줄은....”
“리온이 돌아와서 뭐 왕한테 위협이 될 만한 무슨 일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미테가 어처구니없다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타몰렌드 문물이 좀 유행하고 유스투스 학교가 분교를 내고.... 그것도 리온은 돈만 댔다고. 귀족이 그 정도 자선 사업도 안 하면 말이 안 되잖아? 그 외에는 국왕이 시키는 것만 하며 얌전히 지냈어!”
“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저인들 알 리가 있겠습니까.”
알베르트가 고개를 획 돌려 막시밀리안을 외면했다.
“하지만, 이제 어떻게 저 금고문을 열지요.”
“고수준의 인식 마법이 걸려있어.”
금고를 살펴보던 로위너가 말했다.
“아마 지정된 주인 외에는 절대 열 수 없는 구조일거야.”
“그리고 주인은 저 사람일 거고요.”
멜리젠데가 혐오스럽다는 눈으로 막시밀리안을 보았다.
“단순히 시기심이나 권력욕 같은 게 아니에요, 저건.... 그냥 금고를 부술 방법을 찾는 게 낫겠어요.”
“그 금고는 마법으로 부술 수 없다.”
막시밀리안이 웃었다.
“나라가 마법사 한둘에게 농락당하지 않도록 만들어진 것이니까. 그 금고는 이중 구조에 금고 벽 중간에 모든 적대적 마법을 흡수해서 무효화는 진이 새겨져 있지. 잠금은 마법이어도 안쪽까지 마법이 통하지는 않는다. 힘으로 부수고 싶다면 어디 한 번 해봐라.”
그가 미테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비웃었다. 미테는 이대로 다리에 힘을 주어 이자를 밟아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부들부들 떨었다.
“불행히도, 저자의 말이 맞다.”
뮬렘과 소통해 지혜를 구하던 루시텔이 험한 표정으로 금고를 노려보았다.
“저 두 대마법사가 아까 쓴 것 같은 마법으로도 겉면만 없앨 수 있을 뿐이다. 그 안쪽은 마법이 안 통하니 물리적으로 부술 수밖에 없는데, 이정도 금고를 힘으로 부수면 안에 있는 사람은 절대로 무사할 수 없다.”
“미친.... 우리 스승님이 와도 열 수 없게 만든 것 같잖아.”
말하고 로위너는 그게 사실임을 깨달았다.
“아씨 누구야, 이 편집증 환자!”
“아무튼 어떻게든 금고를 열 방도를 빨리 찾아야 합니다.”
펠레아스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리온의 숨소리가 점점 더 가빠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부상을 입었는지도 모르는데, 얼마나 더 버틸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외에도 금고 안의 소리를 뚜렷이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다들 안색이 좋지 못했다.
“암호를 대.”
미테가 막시밀리안의 가슴을 밟은 발에 힘을 주었다.
“여기서 벌레처럼 밟혀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 해.”
“싫다.”
막시밀리안이 비웃었다.
“그리고 암호를 알아도 소용 없어. 저건 내가 손 대고 열려고 해야 열리니까. 저걸 열 수 있는 건 세상에 오직 나 하나 뿐이니까. 저....”
가슴이 눌려 막시밀리안이 기침을 했다.
“저 대단하기 짝이 없는 숙부님을 죽일 수 있는 건 나뿐이란 말이다!”
미테는 발을 떼고 막시밀리안에게서 멀찍이 물러났다.
“누가 나 좀 잡아.”
미테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면 저거 당장 잡아 죽여버릴 것 같아!”
아비게일이 달려가 미테의 손을 꽉 잡았다. 미테 역시 그 손을 힘 있게 마주잡았다.
“미치겠네.”
로위너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마법으로도, 힘으로도 못 열면, 저걸 정신조종이라도 해야 하나?”
“로위너 누님!”
드미트리가 소리 질렀다.
“그건 금기입니다!”
“리온의 목숨보다 중요해?”
로위너의 말에 드미트리는 어물어물 대답하지 못했다.
“가능한 겁니까? 그런 게?”
펠레아스가 놀라서 물었다.
“이론은 있어. 나도 그 이상 연구하거나 주문으로 만들어 본 적은 없지만....”
로위너가 루시텔을 돌아보았다.
“시간 얼마나 있는지 혹시 알아?”
“대략.... 30분....최대로 잡아도 한 시간 정도?”
“그걸론 잔디깎이 주문도 못 만들어!”
로위너가 다시 좌절했다.
“고문하죠, 루시텔.”
미테가 말했다.
“지금은 다른 수가 없어요.”
“저도 찬성입니다.”
펠레아스도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은 리온을 살리는 게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합니다.”
“저스틴 같은 일인데 괜찮아요?”
아비게일이 미테에게 물었다.
“지금 같아선 저스틴이 여기 있었으면 좋겠어. 그 녀석이라면 저 미친놈의 입을 열 수도 있을 텐데.”
저스틴 경이 마왕 본인이었대도 이보다는 취급이 좋지 않을까 알렉시스는 생각했지만 마왕의 유산과 싸워 물리친 용사들 상대로 그런 망할 농담은 하지 않았다.
그보다 저 금고를 열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정말로 국왕 단 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절대로 열 수 없는 것일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왕이 급사라도 한다면, 그래서 아무도 열 수 없게 된다면? 저 안에 보관해둔 것들이 그렇게 없어져도 괜찮은 것들일 리 없었다. 그럴 거면 힘들여 보관하느니 태워 없애면 그만이었다.
케일란 성에도 영주의 금고는 있었다. 이렇게까지 난공불락인 물건은 당연히 아니고 평범한 암호 자물쇠였는데, 아버지는 암호를 적어 책상 비밀 서랍에 넣어놓았고 건강이 나빠지자 이제 열 한 살 밖에 안 된 아비게일에게 서랍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랬다고 알렉시스가 영주 대리가 되었을 때, 그 서랍 위치를 알려주며 아비게일이 말해주었다. 레너 남작에게는 안 가르쳐 주었지만 알렉시스는 오빠니까 알고 있으라면서.
상식적으로 이런 금고는 지정된 후계자 정도는 열 수 있어야 맞는다.
“그, 전에 전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요. 지금 폐하께서 후계를 얻지 못하면 ‘루디아의 손녀’가 왕이 될 거라고. 그 사람은 열 수 있지 않을까요?”
알렉시스가 제안했다. 후계자로 안 되면 지금 왕을 죽여서 그 손녀분을 왕으로 만들어 열게 하는 방법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까진 아직 말하지 않았다.
“그럴듯한 생각이긴 한데요....”
올리버가 신음을 흘렸다.
“보어가텐 공작님과 그 후계자이신 공작 영애 두 분 다 지금 영지에 계십니다. 마차로 일주일 길이고요.”
“차라리 스승님을 불러오는 게 빠르겠군....”
드미트리마저도 절망에 빠졌다.
“아니, 왕위 계승자라면 여기도 하나 있잖아.”
미테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본인이 계승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하긴 했어도, 리온은 국왕의 적장자라고. 시간은 꽤 지났지만 그게 아무 의미가 없을까?”
“암호 입력판과는 달리, 따로 손을 대도록 지정된 구역은 없어.”
루시텔이 말했다.
“어디다 대든 상관없다면 금고문 안쪽도 통할지 몰라.”
미테는 즉시 금고에 달라붙어 문을 두드렸다.
“리온, 리온? 정신 차려! 네가 열려고 해야 문을 열 수 있어! 내 말 들려?”
“그렇다 해도 암호는 여전히 알아내야 합니다.”
펠레아스가 굳은 표정으로 막시밀리안을 돌아보았다.
“너희들이 무슨 수작을 부린다 해도 내가 입을 열 것 같으냐!”
막시밀리안이 소리쳤다.
“숙부님도 저것만은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마법도 통하지 않고 암호도 알아봤자 기억할 수 없어. 허튼짓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건 해보기 전엔 알 수 없는 것이겠지요.”
펠레아스가 말했다.
“공포와 절망, 그리고 고통에 대해 당신이 알면 뭘 알겠습니까.”
“무리하지 마라.”
루시텔이 말했다.
“이런 자라도 일국의 왕이다. 고문하자면 정치적 문제가 걱정되겠지. 내가 하겠다.”
그가 막시밀리안의 앞에 와 섰다. 아름다운 금발이 물에 씻기듯 흘러 사라지고 검푸른 미역 같은 머리 타래와 푸른 가죽 같은 피부가 드러났다.
그것만으로 막시밀리안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기었다. 알베르트가 그의 뒤에 와 서서 퇴로를 차단했다.
“레이노사 백작!”
“뭐 도울 일은 없을까요?”
왕의 외침을 무시하고 알베르트가 루시텔에게 물었다.
“이 반역자가! 지금껏 내 귀에 거짓을 속삭여온 것이냐, 이 천벌 받을 배신자야!”
“누가 누구더러 배신자라는 건지 모르겠군요.”
알베르트가 차갑게 말했다.
“본인이 먼저 자기를 믿고 지지하고 따르던 숙부님을 배신한 건 생각도 안 나시나 봅니다?”
“그건...”
“역시, 사람을 안 믿고 배신도 안 당하는 편이 낫다니까.”
알베르트가 쓰게 중얼거렸다.
루시텔이 막시밀리안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자, 뮬렘의 어둠 속에서 너의 공포를 마주하도록 해라.”


벨렘의 대공 28 ㅣ- 기타


방이 환해지자 보리스가 눈을 깜빡였다.
“아까 그 시녀는 어디 갔지?”
“손을 씻으러 갔습니다.”
사실은 아무 말 없이 사라졌지만 이 정도는 감싸도 될 것이다.
“왕궁에선 처음 보는 사람 같던데.”
보리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전하께선 무슨 짓을 꾸미시는 거지?”
올리버는 대답하지 않았다. 보리스도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은 것처럼 올리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책상 위의 담배 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올리버가 앉아있던 자리를 박차고 바닥으로 몸을 굴렸다. 앉아있던 의자 등받이 윗부분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구멍이 났다.
“이게 어떻게!”
보리스가 파이프로 위장한 열선 마법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나 이미 기습의 이점을 상실한 그는 방 여기저기에 불에 탄 구멍만 늘렸을 뿐 올리버를 잡지는 못했다.
올리버가 탁자 위의 과자 단지를 들어 보리스에게 던졌다. 열선 마법에 단지가 깨져나가고 가루 난 쿠키가 공중에 흩날리며 온 방안에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올리버는 자세를 낮추고 보리스에게 돌진했다.
과자 가루가 잠시 시야를 가린 동안 올리버가 보리스의 허리를 들이받아 바닥에 뒹굴었다. 왼손으로 마법 지팡이를 쥔 손목을 잡아 바닥에 내리누르며 오른손으론 보리스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몇 번이고 주먹을 날리고 마침내 손에서 힘이 빠진 보리스에게서 올리버가 무기를 빼앗았다. 그리곤 벌떡 일어나 바로 보리스의 다리를 쏘았다.
보리스가 비명을 질렀다. 그가 이를 갈며 올리버를 올려다보았다.
“네놈.... 마력이 있었나?”
“참 이상하단 말이지. 엄연히 순수 인간인 마법사가 잔뜩 있는데도, 인간과 하프엘프 사이에 인간이 태어나면 당연히 마력이 없을 거라고들 생각하거든.”
올리버가 보리스의 반대쪽 다리에도 열선을 쏘았다.
“내가 귀끝은 둥글어도 밤눈이 밝은데다 마법광도 조금 볼 수 있는 거, 아버지 영향이 없지는 않을 거야. 안 그래?”
그 덕분에 파이프가 마법물품인 걸 늦지 않게 알아보고 피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땐 내가 인간인지 하프엘프인지 고민하게 만들었던 특징이지만 지금은 덕분에 목숨을 구하고 반격까지 할 수 있었다고, 올리버가 이런 특징을 물려준 아버지께 속으로 감사했다.
“네.... 이놈!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제아무리 대공이...”
“무사할걸?”
올리버가 씩 웃었다.
“전하께선 이미 당신을 의심하고 있거든, 펠레텐 백작. 지금 폐하와 말씀하시는 내용도 바로 그거고. 감히 우리 리온 전하를 해하려 들고도 무사할 줄 알았어?”
보리스가 깜짝 놀라 말을 잃었다. 그러나 곧 그의 얼굴에 비웃음이 서렸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애송이가.”
예상과 아주 다른 태도에 올리버가 멈칫했다.
“무슨 뜻이지?”
“멍청한 애송아, 내가 왜 대공을 적대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야 그분이 폐하께 갖는 영향력만큼 당신의 영향력이 줄어드니까.”
올리버가 즉답했다.
“폐하를 등에 업고 세도를 부리려면 달리 총애를 받는 사람이 있어선 안되니까....”
“너 보기엔 그게 총애 같더냐.”
보리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통찰력이 없는 건 아닌데 그래봤자 넌 아직 어린애다. 네 말대로 난 폐하의 총애를 등에 업고 있다. 그럼 내가 행하는 게 누구의 뜻이겠냐.”
그 말뜻을 이해하고 올리버의 눈빛이 멍해졌다.
“그런.... 말도 안 돼.....”
“이번에야말로 대공은 살아나오지 못할 거다.”
보리스가 즐거운 듯이 웃었다.
“너도 마찬가지고!”
그가 힘껏 몸을 굴려 올리버의 다리에 부딪쳤다. 충격적인 진상에 정신을 놓고 있던 올리버는 그만 차여 넘어지고 말았다. 재빨리 그를 깔아뭉갠 보리스가 올리버의 목을 쥐고 졸랐다.
“저.... 전하......”
“안됐구나, 대공 전하는 자기가 죽느라 바빠서 널 구하러 와주지 못하신단다.”
“리온은 바쁠지 몰라도.”
보리스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의 친구들은 한가하지, 그의 적을 잡으러 다닐 정도로는.”
보리스가 옆으로 쓰러졌다. 올리버가 목을 잡고 콜록거리며 루시텔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전하를 구하러 가야해요!”
“그래. 그러니 너는 어서 가서 별궁에 소식을...”
올리버가 품에서 양피지를 꺼내는 걸 보고 루시텔이 조금 놀랐다.
“마법 전서구를 쓸 정도의 마법사였나?”
“그럴 리가요, 열여덟에 그게 되면 대천재인데요.”
올리버가 책상으로 가서 펜에 잉크를 찍어 편지를 썼다. 그리고 허리띠에 달고 있던 파란 새 모양 장신구를 떼어냈다.
양피지를 말아 새 입안에 쑤셔 넣자 새가 반짝 빛나더니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올리버가 책상에 기대 한숨을 토했다.
“마법 전서구를 마법물품으로 만든 거에요. 마력만 있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대신 마력을 어마어마하게 잡아먹죠. 전하께서 만드는 건 다 그렇지만.”
그가 심호흡을 하고 다시 섰다.
“국왕의 집무실로 갑시다.”
올리버가 뛰어나가려 했다. 루시텔이 그를 잡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벨레즈 국왕이라고 해도 그냥 인간, 일대일로 리온을 상대해 죽이는 건 불가능해.”
“하지만 전하께선 폐하를 아들이나 손자처럼 아끼시는걸요. 방심했다가 당하실 지도 몰라요.”
“그렇다고 해도 네가 거기에 가면 반역이 된다.”
루시텔이 올리버를 보았다.
“나야 상관없다만, 너는.”
올리버는 더 듣지 않고 문을 열었다.
“내기 할까요?”
그가 말했다.
“지금 별궁에 모인 관계자, 전부 올 겁니다. 적이 왕인걸 알고도.”


신의 가호를 직접 입는 선지자는 질 내기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렇긴 해도 정말로 로위너, 드미트리, 마를렌, 미테, 펠레아스, 멜리젠데에 알베르트와 실비우스 아비게일 알렉시스까지 전부 하늘을 날아 왕궁의 중정, 왕의 처소 아주 가까이에 내려앉았을 때는 루시텔도 조금은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놀라는 사람들을 옆으로 밀어내며 이들은 올리버의 안내에 따라 국왕의 집무실로 향했다.
“전하께서 그리 들어가신 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났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고 안에서 어떠한 반응도 없습니다.”
집무실에 두껍게 둘러진 겹겹의 마법 방어를 생각하면 안에서 태양의 날 불꽃놀이가 터지고 있어도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게 정상이지만 그렇게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 불안감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래도 계속 이 상태인 걸 보며 뭐가 됐든 상황이 끝나지는 않은 걸 거야.”
미테가 좋은 쪽을 보려고 노력했다.
“노크한다고 열어줄 리는 없고.”
로위너가 문을 노려보았다. 드미트리가 문과 옆 벽에 손을 짚고 마법식을 읽어내기 시작했다.
근위병들이 몰려왔다. 그러나 미테가 그들의 발밑에 활을 쏘자 움찔 멈춰섰다.
“방해하지 마라. 거길 넘어오는 놈은 눈에 화살을 꽂아주겠다.”
여기 몰려온 근위병 대부분은 바로 그저께 눈에 화살이 박힌 시체를 실제로 보았기 때문에 미테의 협박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근위대장조차 어쩔 줄을 모르다 자세를 바로하고 미테렌시드를 마주했다.
“미테렌시드 경이 새 용사이고 나라의 영웅이신 것은 알지만 그래도 이건 폭거가 지나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장을 하고 국왕 폐하의 내실에 침범한 겁니다!”
“그래서?”
“그, 그래서.....”
“걱정 마, 저걸 열어봤는데 둘이 아무 일 없이 다정한 조손답게 대화하고 있다가 어리둥절하면 내가 책임을 질게.”
“어, 어떻게 말입니까?”
루시텔이 혀를 찼다.
“벨레즈가 참 오랫동안 아무 일 없이 평화로웠다는 건 잘 알겠다.”
“스승니이이이임!”
라인힐드 경이 근위병들을 이리저리 밀쳐 날려버리며 이들에게 달려왔다. 미테의 저지선을 가뿐히 넘어, 그가 로위너 앞에 가 섰다.
“저, 스승님이라고 해도 예고도 없이 이런 식으로 여기까지 들어오시면 안되는데요!”
말하고 라인힐드는 ‘뭐 임마. 개길래?’ 같은 말과 함께 꿀밤을 먹을 거라 예상하고 미리 머리를 가렸다.
로위너는 마법 꿀밤을 날리지 않았다. 그가 제자인 라인힐드도 드물게 보는 무섭도록 진지한 표정으로 자기 제자를 마주보았다.
“이 안에 국왕과 리온이 있고, 지금 국왕이 우리 막내를 해하려 든다는 강한 심증과 증언이 있다.”
라인힐드가 충격을 받았다.
“폐, 폐하께서... 왜.......”
“이유는 됐고, 나는 내 스승의 명령에 따라 그 애를 구하기 위해 벨레즈 국왕의 집무실을 때려 부수고 리온을 꺼낼 거다.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라인힐드는 마른침을 삼키고 집무실 문을 흘끔 보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근위대 및 이 대소동을 듣고 뛰어나온 조정 중신들을 마주하고 섰다.
“저는 제 스승의 뜻에 따라 여러분이 리오넬 사숙을 구하는 데 방해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게-!”
근위대장이 소리치며 이쪽으로 오려 했다. 라인힐드가 방어막을 펼쳐 그들을 막았다.
“로위너 누님.”
드미트리가 불렀다.
“이거, 해제할 방법은 없겠습니다. 문과 벽까지 전부 완전히 부숴야 합니다.”
“역시 그렇겠지.”
로위너와 드미트리가 문 앞에 나란히 섰다. 둘이 서로 눈짓하곤 동시에 주문을 엮기 시작했다. 둘의 손동작을 따라 폭풍 같이 마력이 몰려들었다. 두 사람의 대칭적인 손놀림이, 이것이 단순히 두 마법사가 마법을 쓰는 것이 아니라 두 마법사가 ‘함께’ 하나의 마법을 쓰는 중이라는 걸 깨닫게 했다.
두 사람 앞에 빛나는 마법진이 겹겹이 떠올랐다. 그들이 하나로 겹쳐지며 둘이 동시에 문으로 손을 뻗었다.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나고 왕궁이 반쯤 무너질 거라 생각한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문과 그 옆 벽만이 원래 없었던 것처럼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연극 무대라도 되는 것처럼 방 안의 전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혼자 안락의자에 앉아있던 막시밀리안 국왕이 벌떡 일어났다.
“무.... 이게 무슨 일, 무슨 짓이냐!”
제일 먼저 미테가 달려들었다. 그가 국왕의 멱살을 쥐고 바닥에 팽개쳐 눌렀다.
“리온은 어디 있지? 둘 다 여기 들어갔다며, 왜 너 한 사람 뿐이야?”
그러는 동안 방에 들어온 다른 사람들이 안을 둘러보고 리온을 찾아 책상이며 벽을 밀어보았다.
“창문도 없는데, 어디로 나간거지요?”
펠레아스가 당황했다.
“비밀통로 같은 게 있는 거 아냐?”
“그렇다 해도 왜 전하만 그리로 나가는데?”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방 안을 뒤졌다. 미테는 막시밀리안을 노려보았다. 막시밀리안 역시, 험하게 부릅뜬 눈으로 미테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지?”
“무슨 짓인지는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
손을 놓고 일어나 대신 막시밀리안의 몸통을 밟아 누른 뒤 미테가 시위에 화살을 메겼다.
“리온은 어디 있지? 대답하지 않으면 오른발을 쏘겠다.”
“지금 벨레즈의 국왕을 고문하겠단 말이냐!”
대꾸하지 않고 미테가 활 시위를 당겼다.
“근위대는 뭐하고 있는 거냐! 어서 이 반역자들을 잡아라!”
막시밀리안이 소리 질렀다.
“아, 그래. 넌 화살 맞아본 적 없지?”
미테가 말했다.
“맞아봤으면 이러지 못할 텐데. 자, 딱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지. 리온 어디 있어?”
“미테렌시드.”
로위너가 말했다.
“왕 고문할 필요 없어. 이쪽으로 와봐.”
미테가 막시밀리안에게서 발을 치우고 로위너 옆으로 갔다.
“저 벽 너머에, 마법으로 탐지가 안 되는 공간이 있는데....”
그리고 미테는 들었다. 그쪽에서 나는 희미한 숨소리를.
“리온?”
그 소리는 짧게 헐떡이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간간히 섞여 나왔다.
“리온!”
미테가 벽으로 달려가려다 벽난로를 보고 멈칫했다.
“마법으로 환경이 조정되는 방에 벽난로는 필요 없겠지요. 위장일 겁니다.”
마를렌이 지적했다. 미테는 주먹을 꽉 쥐었다 펴더니,
맨틀피스를 두 손으로 잡고 벽에 발을 대고 버틴 채 벽난로를 통째로 벽에서 뜯어내버렸다.
아비게일은 미테의 무용에 감탄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벽난로 뒤에서 나타난 것을 보고는 숨을 삼키고 말았다.
“이거.... 금고잖아? 전하는 어디.... 설마.”
모두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방이 조용해지자 금고 안에서 들려오는 할딱거리는 숨소리가 인간들에게까지 모두 들렸다.
이렇게 두꺼운 금고는 공기가 통하지 않는다.
리온은 저 안에서 질식해가고 있었다.
“이, 이거 어떻게 여는 거지?”
금고를 살펴보며 미테가 당황했다. 손잡이도 없는 평평한 앞면은 이게 마법으로 잠겼음을 암시했다. 한쪽에 얇은 판이 있고 펜이 달려있는 걸로 봐서 암호를 써넣어야 하는 것 같았다.
“미테.....”
금고 안쪽에서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나야!”
미테가 소리쳤다.
“걱정 마, 리온! 나랑 너네 사형 사자랑... 다들 구하러 왔으니까!”
“스승님....”
헛소리 같은 신음소리가 이어졌다.
“어머니........”
미테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리온이 죽음을 눈앞에 둔 최후의 순간에 무의식적으로 찾는 이름이 자기 것이라는 게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그걸 듣고도 당장 그를 구해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참담했다.
이 금고를 열어야 했다.
아마도 나라 안에서 가장 튼튼하고 정교할 금고를.


벨렘의 대공 27 ㅣ- 기타


벨레즈 국왕에겐 집무실이 둘 있었다. 하나는 신하들과 국정을 논하거나 외부 인사를 반쯤 비밀리에 접견할 때 쓰는 공적인 집무실, 다른 하나는 혼자 기밀 업무를 처리하는 개인 집무실이었다.
‘안쪽’ 집무실은 여러 겹의 강력한 마법과 물리 구조물로 보호받고 있어 셀림이 직접 온다 해도 도청과 투시가 불가능하다는 말이 있었다. 그 문을 열 수 있는 건 국왕과 왕후, 국왕의 직계 가족들 뿐으로 청소도 국왕이 보는 앞에서 시종장이 직접 했다.
리온은 가출 전에 아바마마를 따라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돌아온 이후로는 자기와는 상관없는 공간이라 여겨 왔다. 어려서 즉위한 막시밀리안의 섭정을 할 때도 이 곳에는 들어가지 않고 따로 집무실을 마련했었다.
막시밀리안이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이 안에 들어가고 문이 닫혔다.
창문이 없는 방이지만 마법 등으로 안은 환했다. 커다란 책상이며 선반에 서류가 잔뜩 쌓여있었다. 리온은 의식적으로 눈을 피했다. 여기 있는 것들은 국왕 외에는 봐선 안 될 기밀 서류들이었다.
왕후도 후계자도 없는 막시밀리안은 이곳에서 완전히 혼자였다. 역시 서둘러 훌륭한 왕후감이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리온은 생각했다. 막시밀리안은 어려서부터 외로움을 타는 아이였다. 아내와 자식이 생기면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막상 그는 파티도 별로 참석하지 않고 재혼 상대를 물색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문득 리온은 위화감을 느꼈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막시밀리안이 말했다.
“마법 치료라고 해도 단번에 멀쩡해지지는 않는다고들 하던데, 융단이 흠뻑 젖을 정도로 피를 쏟으시고도 하루 만에 이렇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찾아오시다니 솔직히 놀랍습니다. 셀림의 제 1 제자란 회복력도 남다른 것인지요.”
“그런 면도 있습니다. 이... 불로의 마법이 몸을 최상의 상태로 고정하고 노화 역시 ‘치료’하는 원리이기에 부상 같은 것도 쉽게 치료됩니다. 마력은 많이 들지만요.”
“암살범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짓을 했군요..”
막시밀리안이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가 화살을 집어 들었다.
자기가 맞을뻔한 화살을 알아보고 리온이 기겁했다.
“내려놓으십시오. 위험한 물건입니다.”
“저는 마법사가 아니라 보통 화살보다 더 치명적일 것도 없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마법을 파훼하고 교란하는 기능뿐 아니라 그 촉에는 신경독이 발려있다고 들었습니다. 자칫 찔리기라도 하면.....”
“숙부님께서 해독해주시겠지요.”
막시밀리안이 웃었다. 리온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손을 잡고 화살을 받아 책상 위, 아마도 화살을 감쌌던 천 위에 도로 놓았다.
“저를 믿어주는 건 고맙지만, 위험한 일은 안 하시는 게 좋습니다.”
막시밀리안이 그의 손을 마주잡고 들어올려 손등에 키스했다.
“저.... 폐하.”
“예전처럼 조카님이라고 불러주시면 좋겠는데요.”
리온의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네, 조카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막시밀리안이 그의 손을 잡은 채로 안락의자로 이끌었다.
국왕 한 사람 외 다른 손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만든 공간이라 마주앉을 의자와 탁자는 없었다. 막시밀리안이 안락의자에 앉으며 리온을 끌어당겼다. 리온은 어색하게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엘프 대사.....와 대사관 경비대장 외 엘프 병사 세 명이 지금 별궁에 잡혀와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데뷔탄트 무도회에서 저격을 한 실행범입니다.”
막시밀리안이 놀랐다.
“엘프 대사라고요? 그가 직접? 어떻게 그런.... 아니 그런데 별궁에 잡아두는 건.”
“펠레아스 경이 세토나 폐하의 위임장을 가지고 엘프 감찰관 자격으로 직접 체포했습니다. 형식상 저는 대사관에 둘 수 없는 범인들을 가둬두기 위한 공간을 제공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리온은 벨레즈의 왕족일 뿐 아니라 엘프 섭정공 헬레나의 아들이기도 했다. 대사관 인원을 믿을 수 없게 된 감찰관의 요청으로 장소를 제공했다고 하면 누구도 트집을 잡을 수 없었다.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리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들은 레이노사 백작의 저택에, 그의 아버지를 인질로 잡아 그에게 제 암살을 사주하려는 목적으로 침입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작에게 제 암살을 사주하고 독을 건넨 자는 왕궁의 수석 시의인..”
“우르술라 경.”
“예.”
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저와 조카님이 마셨던 차에 독을 넣은 것도 그 사람일거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요?”
막시밀리안의 추궁에 리온이 마른침을 삼켰다.
“엘프 대사와 우르술라 경의 범행은 서로 연관되어 있지만 막상 그들 사이에는 뚜렷한 접점이 없습니다. 그야 정식으로 조사하다 보면 숨은 연관이 나타날 지도 모릅니다만 현재로서는.... 그들을 연결하는, 이 모든 계획을 주도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막시밀리안이 리온을 올려다보았다.
“숙부님께서는 펠레텐 백작을 의심하고 계시는군요.”
“예.”
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이건 저도 방금 든 생각인데, 데뷔탄트 무도회 전에 제가 거기서 왕후감을 물색할 거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랬습니까?”
“네. 저도 폐하께 빨리 짝을 찾아주고 싶고, 그러니 그런 마음이 있는 여성들이 파티에 많이 참석한다면 그것대로 나쁠 것이 없어서 부정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소문의 출처는 확인했습니다. 그 역시 시종장입니다.”
“....그게 암살하고는 무슨 상관입니까?”
“그런 소문 덕분에 무도회에 사람이 몰려 참가객이 평년의 두 배 가까이 되었고, 그래서 저는 정원으로 파티장을 확장해야 했습니다. 실내에만 있었더라면 저격에 당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리온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저는 공개 행사에 거의 참석하지 않고 어디서 언제 나타날지도 예측하기 힘들지요. 반 년 전에 미리 알 수 있는 유일한 일정을 골라 최대한 그 때 암살이 쉽도록 주위 환경을 꾸몄다, 라고 생각해도 말이 됩니다.”
막시밀리안이 벌떡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집무실을 왕복했다. 리온도 따라 일어나 그를 바라보았다.
“.....변명처럼 들리시겠지만, 그는 언제나 제게 충성스러웠습니다.”
“압니다.”
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제가 벨렘에 머무르는 것이 폐하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기는 것도 압니다. 실은 제 생각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 일의 범인을 밝히고 나면 바로 까마귀 둥지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막시밀리안이 걸음을 멈추고 리온을 돌아보았다.
“그거 암살범의 뜻대로 해주는 일이 아닙니까?”
“카디올러스 후작과도 그랬지요.”
리온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저는 저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절 죽이려고 하는 운명인가 봅니다. 백 년 뒤엔 미리 조심해야겠어요.”
“백 년 뒤라고요.”
막시밀리안이 리온을 바라보았다.
“숙부님은 백 년 뒤에도 지금 모습 그대로이시겠지요.”
“예, ....그야.”
“숙부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막시밀리안이 뭔가를 결심한 듯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리온도 덩달아 긴장했다.
“무엇입니까?”
막시밀리안이 말없이 책상 뒤의 벽으로 갔다. 그곳엔 벽난로가 있었다. 언뜻 보기엔 방에 잘 어울리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벽난로였지만 의심을 품고 생각하면 난로가 책상과 너무 가까웠고 또한 이 방은 공기와 온도를 마법으로 조정했기에 난로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벽난로 둘레의 장식에 손을 대는 것을 보고 리온이 휙 뒤돌아섰다.
“이게 뭔지 아시는군요.”
“저도 한 때 태자였으니까요.”
“예... 그렇지요.”
막시밀리안이 벽난로 장식 틈에 숨어있는 스위치를 건드리자 벽난로가 소리도 없이 옆으로 밀려났다. 그러고 나타난 것은 금고 문이었다. 성인 허리 높이의 벽금고는 왕실의 기밀이 담긴 은밀한 장소였다.
금고 문에 손잡이는 없었다. 주인이 열려고 손대면 저절로 열리는 구조였다. 열 수 있는 주인은 국왕과 그 후계자 뿐. 그것도 왕이 미리 지정한 암호를 모르면 열 수 없었다.
막시밀리안이 금고 문에 왼 손 손바닥을 대고 오른손으로 특수펜이 들어 입력판에 암호를 썼다. 그러자 금고 문이 열렸다.
“숙부님, 이리로 오십시오.”
리온이 되돌아섰다. 그리고 금고가 열린 채인 걸 보고 움찔했다.
“폐하, 저는.....”
“숙부님.”
막시밀리안이 강하게 부르자 리온이 그의 옆으로 갔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이 금고 안에는 마력 고갈진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마법 추적이나 그런 것들로부터 안에 보관한 물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막시밀리안이 말했다.
“덕분에, 누가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위험한 마법 물품을 가둬두기에도 적격이지요.”
리온의 표정이 변했다.
“그렇게 위험한 것이 있다면 이런데 둘 것이 아니오라...”
“그래서 숙부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리온이 몸을 숙여 금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입구는 좁아도 안은 넓었다. 한눈에도 오래되어 보이는 서류가 촘촘히 쌓여있고 서류 아닌 것들도 여럿 있었다. 어두워도 볼 수 있는 그였으나 국왕이 말한 것 같은 물건은 바로 눈에 띄지 않았다.
“어느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막시밀리안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거기 오른쪽에 말입니다....”
리온은 갑자기 오른쪽 옆구리에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자기 몸을 돌아보았다.
화살이 그의 옆구리에 박혀있었다. 아까 본 그 화살이. 대를 쥐고 있는 건 막시밀리안이었다.
리온의 머릿속이 하얗게 날아갔다.
펠레텐 백작을 의심했던 이유, 그 모든 게 막시밀리안에게도 맞아 들어간다는 뒤늦은 깨달음은 그가 받은 압도적인 충격에 눌려 이 상황을 벗어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막시밀리안이 리온의 어깨를 잡아 금고 안으로 밀쳤다. 리온은 힘없이 그 안으로 굴러들어갔다.
“폐하....”
막시밀리안이 금고 문을 밀었다. 빛이 좁아졌다.
“조카님.”
리온의 신음 섞인 부름은 그에게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막시밀리안!”
금고 문이 닫혔다.


올리버는 보리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자를 정식으로 체포하고 국문하기 전까지는 모르는 척 평소대로인 척을 해야 한다고 알고 있지만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속마음을 감추는 것이 능숙하다고 늘 칭찬받는 그였지만 보리스 상대로는 미운 마음이 불쑥불쑥 치밀어 올랐다. 그가 올리버의 어머니가 대공 전하를 짝사랑하다 못해 하프엘프와 결혼했다고, 그랬는데 보람 없이 자식은 인간이 나왔다고 헛소문을 퍼트려서만은 아니었다. 보리스는 리온을 미워했다. 그가 섬기는 국왕은 적어도 리온이 귀국한 후로는 가까운 가족으로 깍듯이 대하건만, 그는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러다 결국 이 지경까지 와버렸다.
이제 곧 펠레텐 백작을 공식적이고 공개적으로 떳떳하게 미워하고 경멸할 수 있다는 전망이 매우 달콤하게 느껴졌다.
올리버는 불쾌한 티를 내지 않으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어때, 이제 곧 폐하께도 알려질 거고, 그럼 저 혼자 어딜 도망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로카넨 궁에 있는 엘프들이야 도망가면 스마라그디의 반 하프엘프 세력이 보호해줄지도 모르지만 보리스의 비호 세력은 국왕 뿐이었다. 그러니 이제와서 자기가 의심받는다고 알아봤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겉보기로 보리스는 태연해보였다. 올리버가 자기를 노려보고 있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정말로 그냥 멍하니 있는 건지도 모른다. 루시텔이 스리슬쩍 사라진 것도 눈치 채지 못한 걸 보면.
그림자엘프가 왕궁 내를 자유롭게 활보하고 다닌다고 생각하면 올리버도 기분이 안 좋았지만 루시텔은 전하의 친우이고 새 용사 중 한 사람이었다. 전하의 편인 그림자엘프가 전하의 적인 인간보다 훨씬 마음에 기꺼웠다.
“대화가 길어지시나 보군.”
보리스가 일어나 영구 마법 등잔의 덮개를 벗겼다.
올리버는 대꾸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보리스를 추궁해서 범행을 자백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전하께서 폐하와 담판하여 사건을 해결하려는 중인데 자기가 나서는 것도 주제넘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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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온이 양육자 최후의 질문에 직면합니다.
'내가 뭘 잘못해서 애가 이렇게 컸지?'

리온의 인장 3 ㅣ- 기타

“그런 거지. 그나마 이미 죽었거나 인장이 박탈된 마법사의 인장이면 아주 똑같지만 않으면 된다는 식이라 그 사례 이전이나 그 후에도 ‘나는 까마귀’로 하려고 하면 겹치는 일이 종종 있었대.”
“그렇군.”
리온은 그렇게 대답하고 바로 펠레아스에게 물었다.
“그럼 지금도 생존한 마법사 중에 그 인장을 쓰는 사람이 있는 거야?”
“......글쎄요?”
“그런 일이 자주 있었다면 지금은 도리어 아무도 안 쓰게 되어서 나는 안심하고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펠레아스는 여전히 널리 쓰인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리온. 이렇게까지 흔하디흔한 문양은 네가 쓰기엔 좀 진부하지 않아?”
미테의 지당한 말에도 리온은 흔들리지 않았다.
“까마귀도 새니까 하늘을 나는 게 당연하지. 흔하다는 건 곧 정석적이고 무난하다는 뜻 아니겠어? 난 이미 튀는 짓을 너무 많이 했잖아. 인장만큼은 평범하게 하고 싶어.”
왕궁에 온 뒤로 좀 소심해진 것처럼 보이던 리온이 이전처럼 고집스럽게 말하고, 작게 덧붙였다.
“‘근사한 까마귀 둥지’ 같은 수준은 되기 싫다고.”
“근사한 까마귀 둥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리온을 바라보았다.
“까마귀 둥지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
조용하던 저스틴이 물었다.
리온도 어차피 말해줄 생각으로 슬쩍 흘린 말인데 저스틴이 또 이제와서 스승의 스승 노릇하려고 저러니 빈정이 상했다.
세상 천지에 저스틴의 흥미를 끌 수 있는 대상은 시에나와 셀림뿐이었다. 전생에서부터 놓지 못한 지독한 집착이 셀림의 제자라는 이유로 자신에게까지 미치는 건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입을 딱 다물어버린 리온을 보고 저스틴은 골똘히 고민하는 기색이 되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리온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벽의 태피스트리를 열심히 감상하는 척했다.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날 놀리고 싶어서 저러는 거면 좋겠네.’
“까마귀 둥지는 건설된 후 아무 문제도 없이 지금까지 평화롭지 않았습니까?”
펠레아스가 리온을 졸랐다.
“게다가 ‘근사한’ 까마귀 둥지라니요? 무슨 뜻입니까?”
“걱정되는 기색이네. 역시 좋게 들리지 않는 거지?”
펠레아스의 정상적인 반응이 마음에 들었으므로 리온은 그냥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법사 탑이 까마귀 둥지의 이름을 따서 까마귀 탑이라고 불리게 됐을 때 이야기거든. 그때 까마귀 둥지의 이름을 좀더 근사하게 바꿔야 된다는 말이 나왔었대.”
펠레아스는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었다. 마법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더욱 호기심어린 표정이 되었다.
“‘탑’과 ‘둥지’라고 하니까 ‘둥지’ 쪽이 더 중요한 집단이라는 티가 잘 안 난다면서. 탑을 각지에 세우는 일을 주도한 제 2제자들의 발상이었는데, 그들에게 건의를 들은 제 1제자들도 타당하다고 생각해서 스승님께도 바꿔보자고 한 거야.”
드미트리 경은 잠시 셀림을 찾아갔기 때문에 여기에 까마귀 둥지에서 살았던 사람은 리온뿐이었다. 각국의 내노라 하는 인물들이고 새 용사이기까지 한 이들이지만 까마귀 둥지의 이야기는 여전히 별세계의 동화처럼 들렸다.
“그런데 스승님은 까마귀 둥지라는 명칭이 이미 익숙해졌고 마음에 든다면서, 정 근사하게 바꾸고 싶다면 ‘근사한 까마귀 둥지’ 어떠냐고 하셨어.”
“......”
“......”
“바꾸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하지.”
침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솔라니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로위너 사자 말로는 스승님이 바꾸기 싫은 나머지 그런 게 아니었대. 탑의 장로들이 실망하고 쫄아서 돌아간 뒤로도 계속 어떤 이름으로 고치면 좋을지 고민했다는 거야. ‘큰 까마귀 둥지’라든가 ‘튼튼한 까마귀 둥지’라든가......”
이제는 다들 대마법사 셀림의 충격적인 일면을 제대로 깨달은 표정을 했다.
“역시 세상에 믿을 마법사 없어.......”
시에나가 저스틴이 충격받건 말건 중얼거렸다.
“리온 너 스승님한테 물든 거였구나.......”
미테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르주는 저스틴을 보며 마법사란 스승의 악영향을 깊이 받는 존재라고 속으로만 확신했다.
“아무튼, 그러니까 내 인장은 아주 평범하고 무난하게 만들 거야. 누가 봐도 까마귀 인장임을 알아볼 수 있으면 돼. 어차피 구체적인 디자인은 내가 아니라 인장 몸체 만드는 장인이 하는 거잖아.”
“그래도 최소한의 지침은 본인이 내려야 합니다.”
펠레아스가 지적했다.
“한 마디로 날고 있는 까마귀라고 해도 까마귀의 크기는 어느 정도가 좋을지, 날개는 얼마나 세밀하게 묘사할지, 나무나 구름 같은 배경을 넣을지 말지 정하지 않으면 인장을 직접 만드는 의미가 많이 흐려지지 않겠습니까. 물품 제작 마법사들은 아예 처음부터 자기들이 직접 인장을 만들고 문양을 파는데 리온도 좀더 신경을 써야죠. 평생 리온을 상징할 물건 아닙니까.”
“음......”
리온도 그 말은 수긍이 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펠레아스 경 말이 옳아. 원하는 문양을 직접 그려낼 재주가 없더라도 자기 머릿속에라도 제대로 가지고 있어야 장인도 그걸 반영해서 작업하는 거지.”
새 용사의 정식 일원은 아니지만 미테 때문에 같이 있는 클라시아도 한 마디 했다.
“지금 세세한 것까지 다 하나하나 상상하기 힘들면 대략적인 이미지라도 잡아봐.”
리온은 심각하고 진지한 얼굴로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멋진’ 까마귀?”
갑자기 방 안의 기온이 뚝 떨어졌다. 저스틴이 입을 열려는 순간 시에나가 비호처럼 달려들어 입을 막았다.
“시에나. 저스틴이 뭐라고 할 줄 알고 막은 거야?”
시에나는 리온의 시선을 피해 눈을 굴렸다.
“뭐건간에 네가 화낼 만한 말이겠지?”
다른 사람들도 제각기 딴 곳을 쳐다보았다. 모두의 머리에 똑같이 떠오른 생각을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을 정도로 새 용사들은 동료를 소중히 여겼다.


결국 문장학과 인장학 책, 미테가 읽은 사례집 등을 읽으며 천천히 다시 생각해보기로 하고 리온은 도서관에 틀어박혔다.
왕실 도서관이라 자료는 넘칠 정도로 많았다. 마법사들의 인장만 전문으로 다룬 책도 많이 있었다.
“잘 돼가?”
역시 책을 읽으러 들어온 미테가 물었다. 퍼뜩 읽던 책에서 고개를 든 리온이 꿈에서 깬 표정을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냥 책 읽느라 바빴구나.”
자신에게도 흔히 있는 일이므로 미테는 비웃지 않았다. 대신 리온이 무슨 책을 읽고 있었나 표지를 보았다.
“아, 이건 ‘문장학의 기초’야.”
리온이 책을 이리저리 살펴보기 좋도록 내밀어 주었다.
“말이 기초지 내용이 굉장히 방대해. 문장에 흔히 들어가는 문양이나 글자, 색, 구도 등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 속에 숨은 법칙과 규칙을 설명하거든. 인장은 문장에서 파생되는 거라 거의 같은 규칙을 따라.”
“그렇군.”
어느새 미테도 눈앞에 펼쳐진 글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서, 주제는 여전히 그거야? 하늘을 나는 까마귀?”
“응.”
리온도 책을 잠시 밀어놓으며 답했다.
“나도 이것저것 생각해봤어. 근데 난 그 생각이라는 걸 가출 끝내고 돌아와서부터 시작했거든. 그 전엔 진짜로 그런 거 정하고 있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으니까. 그래서인지 마음이 막 급해지더라.”
“그거 설마 급한 김에 대충 정했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아니, 꼭 그런 건 아냐. 그런데 말이지.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내 인장은 새 용사 중 가장 뛰어난 마법사의 인장이 될 거라고.”
“그렇지.”
미테가 가볍게 수긍했다.
“펠레아스도 그렇게 생각할걸. 넌 과거 용사인 셀림의 제자고, 모험의 시작부터 있었지. 네 스승님이 사명 때문에 일부러 가출인 척 왕궁을 떠나게 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던걸.”
“응. 그건 스승님께서 나와 벨레즈 왕실의 체면을 보호하느라고 일부러 그렇게 퍼뜨리신 거야.”
“사실과는 다른데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 그 정도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도 쉬울 거고.”
미테의 표정이 좀 심각해졌다.
“하지만 네가 스승님이나 부모님한테 품은 원망은? 그건 그들 책임도 있는 거잖아. 역사책엔 그런 일이 없던 것처럼 기록될 텐데? 정말 괜찮아?”
“응.”
리온은 태연했다.
“그야 네가 한 말도 옳지만, 그렇다고 까마귀 둥지나 벨레즈 왕실이 욕먹는 것도 싫은걸. 내가 가출한 걸 두고 잘했네 잘못했네 입방아 찧는 사람들도 나올 거고. 그런 게 몇 백년이나 이어지는 건 싫어. 어차피 사실에선 멀어질 테고. 무엇보다.”
리온이 손가락 끝을 살짝 움직여 보았다. 마력의 불꽃이 맺혔다가 사그라졌다.
“난 높은 확률로 그 입방아를 살아서 보게 될 거야. 하프엘프고 강한 마력과 까마귀 둥지의 양생 주문이 있으니까.”
“그러네.”
미테가 조금 숙연해졌다. 그도 하프엘프지만, 아마 하프엘프치고도 장수할 테지만 리온에 비하면 일찍 죽을 것이 분명했다. 수명 연장 주문까지는 바랄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난 후대에 내가 어떻게 보일지도 신경써야 한다고. 참신하고 개성 넘치는 인장을 쓰면 이런 문장학자들이.....”
리온이 책 표지를 톡톡 쳤다.
“온갖 참신한 상상과 해설을 덧붙이는 것도 봐야 해. 내 다른 행적들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처럼. 그보다는 그냥 ‘무난하고 흔한 문양을 택했다’ 쪽이 차라리 안전하지 않아?”
“음......”
비로소 미테도 진지하게 수긍하는 기색이 되었다.
“우리 스승님께서 까마귀 인장을 택한 것도 그냥 별 뜻 없이 한 일이었대. 적어도 제자들한테는 그렇게 말씀하셨어. 그런데 이 책뿐 아니라 별별 책에서 까마귀에 무슨 심오한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떠들어 댄다고. 그러니 내가 뭘 택하든 왈가왈부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갖다붙일 여지가 적기라도 했으면 좋겠어.”
“그러네.”


이날은 저녁도 모두 같이 먹고 응접실에 모여 잡담을 나누었다. 마치 평범한 상류층의 저녁 모임처럼 되었지만 잡담의 내용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복잡하게 정했다가 후대에 엉뚱한 입방아에 오를 걱정이라니.”
시에나에겐 여전히 다른 세계의 일처럼 들렸다. 그러나 엄연히 현실이고, 남의 일조차 아니었다.
“이미 궁정 음유시인들은 스탠드에 새 잉크를 가득 채우고 펜촉을 다듬고 있습니다.”
조르주도 지적했다.
“후대의 상상력이 우리 행적 위에 덧칠되는 걸 막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부터 그들에게 전해줄 이야기의 ‘뼈대’를 잡아놓고 후대까지 퇴색되어선 안 될 부분과 적당히 윤색되어도 괜찮을 부분을 분리하는 편이 낫습니다.”
시에나는 슬쩍 저스틴을 돌아보았다. 모든 일에 초탈한 오래 전의 마왕이지만 또 그러니까 후대에 자신이 어떻게 전해질지 신경을 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하고 저스틴이 운명이 맺어준 한 쌍이라고, 사람들한테 엄청 로맨틱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도 싫은걸.’
어차피 저스틴이 마왕의 환생임을 감추기로 한 것 외에도, 지금도 저스틴은 연애할 상대보다는 자신이 돌봐줘야 할 작고 연약한 짐승처럼 보였다.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사랑으로 발전하기도 한다지만 그건 저스틴의 대책 없이 큰 사랑에 좀 익숙해진 뒤일 터였다.
그 조화의 방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지금도 가끔 꿈에 나올 정도로.
그러나 그 방이 나오는 꿈은 항상 악몽이었다.
“윤색되어도 괜찮은 부분은 어디까지인데?”
미테도 조금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기왕이면 최대한 있었던 사실 그대로 전하고 싶은걸. 후대를 위해 거짓으로 치장하는 게 정말 후대를 위한 일일까?”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한계를 정해둬야지요.”
조르주가 부연했다.
“용사들 중에는 정치적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든 인물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 리온마저도, 벨레즈 외의 나라들에선 내심 공적을 깎아내리고 싶어할 겁니다.”
펠레아스는 스마라그디도 예외라고 주장하고 싶었으나 입을 열 수 없었다.
헬레나 마조라스 공과 친 벨레즈 파에선 물론 리온의 공적을 기꺼이 인정하고 싶어했다. 이미 충분히 다른 용사들을 압도할 만한 기여도가 있기에 굳이 과장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하프엘프에 적대하는 세력이 얼마나 큰지 이번에 똑똑히 보았다. 심지어 벨레즈와의 정치적 연대는 반기면서도 하프엘프 문제는 그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엘프들도 있었다. 벨레즈와의 교류로 태어나는 하프엘프는 대개 상류층이고 벨레즈 내에서 잘 살고 있으니 에이벤틴 국경지대에서 생겨나는 부랑배 무리와 한데 묶을 필요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니 차라리 우리가 직접 서사시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내용, 잘못 해석해서는 안 될 내용을 정해 시인들과 역사가들에게 전해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외의 부분은 그들과 후대의 상상력에 맡기는 거지요. 완벽한 해결책은 못 됩니다만 적어도 새 용사들이 후대에 무엇을 전하고 싶었는가는 나중까지도 분명히 드러날 겁니다.”
과연 음유시인 영웅 델로레아스의 전통을 이은 나라의 왕자였다. 리온이 인장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조르주는 선대 용사들에 관한 서사시와 각종 역사서를 읽으며 이 문제를 고민해왔다.
“그게 제일 좋겠네.”
리온이 찬성하자 다른 사람들도 이어서 찬성의 말을 했다. 모두가 같은 뜻임이 확인되고 나자 조르주가 리온을 돌아보았다.
“그럼 지금 대략적인 방침을 정하고 서기를 불러서 이야기를 정리하죠.”
“그래. 음, 나는 되도록 있었던 일 그대로 적었으면 좋겠어. 우리가 용사라고 해서 너무 비현실적이고 근엄하게 묘사되는 건 싫어.”
“맞아.”
미테도 맞장구쳤다. 시에나도 직전까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므로 끄덕거렸다.
“어느 정도까지는 저도 동의합니다만.”
조르주가 약간 목소리를 떨어뜨렸다.
“우리의 단점이나 약점도 솔직하게 적히게 되는 겁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조르주 전하께서 벨레즈에서 델로레인으로 몰래 돌아가려고 한 일은 괜찮을 거예요.”
리온은 태연했다.
“불가피한 상황이었고, 흰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대다수는 전하보다 그 상위인간을 더 비난하겠죠.”
조르주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역시 리온은 벨몽드 백작, 아니 상위인간 프로세르피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에게 배신감뿐 아니라 동정심도 느끼는 것이 지나친 감상이라고는 스스로도 생각하지만 저렇게 부르는데 약간의 심술 정도는 부려주고 싶었다.
“그러면 리온 전하의 그 건망증도 고스란히 기록될 텐데요. 그건 괜찮습니까?”
“윽.”
리온이 표정을 구겼으나 조르주의 기대에 미칠 만큼은 아니었다.
“감수해야지요. 어차피 내가 이름 못 외우는 건 숨길 수도 없고, 꼭 불세출의 천재로만 기억되고 싶은 것도 아닌걸. 차라리 후대에 ‘꼭 사람의 이름과 직급을 외우고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편이 의미있을 것 같아요.”
미래에 자신과 같은 사람이 또 태어나더라도 기죽지 않게 해주겠다는 포부였다.
“하지만 넌 이제 다시 왕자님이잖아.”
왕자에게 말을 놓는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에 신경 끄기로 한 시에나가 물었다.
“신하들 이름 정도는 기억해둬야 하는 거 아냐? 꼭 왕이 안 된다고 해도.”
“으......”
리온이 반박하지 못하고 푸욱 가라앉았다.
“신하들 이름이 뭐야, 본인 이름부터 기억해봐.”
미테도 짓궂게 찔렀다.
“이제는 네 이름 왕실 시종이 호명할 때처럼 정식으로 다 읊을 수 있어? 리오넬 안드바리 이쿠스티카 프리마라 벨레니스라고?”
“너는 언제 그렇게 외웠는데?”
“그동안 축하연이니 뭐니 불려다니다 보니 외워지던데?”
“그거야 넌 원래 똑똑하고 이름 기억력도 비상하니까......”
리온이 역시 자기 이름을 기억 못할 만한 사람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에나와 밀로스, 루시텔 앞에서 재빨리 피한 시선이 최종적으로 머문 곳은 라크리스 앞이었다. 그러나 라크리스도 단칼에 내뱉었다.
“나도 그 정도는 외운다만.”
그건 리온의 실수였다.
라크리스는 각지 왕궁이나 대성전에 불려다니는 동안 평민 용병 출신이라는 사실에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아오고 있었다.
밀로스와 그 이후 참가한 인물들은 뒤늦게 들어와 공적도 적은데 각 나라의 대표라는 명분으로 상당히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 미테와 클라시아는 제도권 밖에서 사는 데 익숙한 사람다운 오만함과 무심함이 도리어 귀족들을 압도했다. 미테가 장차 왕자비가 되리라는 오해도 한몫했다. 시에나는 귀족들 앞에서 무시당하지 않는 것보다 저스틴을 앞으로 어떻게 대할 것이냐가 더 큰 고민거리였다.
결국 라크리스는 벨포드의 도움을 받아 복잡한 작위들을 외우고 귀족적 예절을 속성으로 익히며 이 시기를 버텨나가는 중이었다. 지금 리온이 라크리스를 쳐다본 건 그 정도로 경솔한 행동이었다.
“리오넬 안드바리 이쿠스티카 프리마라 벨레니스 아니냐. 여기 네 이름 못 외우는 사람은 너뿐일 거다.”
“하기야, 이젠 나도 외우니까.”
시에나가 가세했다.
“난 처음 들었을 때부터 외웠다.”
루시텔도 한 마디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분위기에 말려든 조르주까지 나섰다.
“배 위에서 리온과 처음 마주쳤을 때는 눈앞에 벨레즈 1왕자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야 할지, 그 왕자가 자기 정식 호칭을 다 못 외운다는 사실에 더 놀라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알았어, 내가 바보니까 다들 그만해줘.......”
리온이 고개를 숙이고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직 한 명이 남아있었다.
“셀림의 막내제자니까 그 정도 약점은 귀엽게 봐줄 셈이다만”
저스틴이 리온을 말썽 많은 손자 보듯이 보고 있었다.
“역시 좀 신기하지.”
“닥쳐 마왕!”
마침내 이성이 끊긴 리온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런 외침으로 남들이 저스틴의 정체를 깨닫기보다는 농담이라고 넘어갈 확률이 더 높았다. 그래도 지금 리온의 기색은 대단히 흉흉해서, 몇 사람은 이대로 리온이 저스틴에게 결투라도 신청하는 것 아닐까 긴장할 정도였다.
리온은 반듯하게 서서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한편, 마왕의 문장은 단순한 검은 원일 뿐이다. 그의 극도의 오만함과 사악함을 드러내기에는 전통적인 양식에 따른 해석이 완전히 불가능한 이런 것이 더욱 어울렸는지도 모른다.
“아, 그거 아까 읽은......”
미테의 표정이 우스꽝스럽게 변했다. 리온은 계속 읊었다.
마왕의 이 문장은 인장에도 그대로 쓰였다. 마법 인장은 어차피 문양보다 식별 마법에 더 의존한다고 하나, 만약 이것이 마법 인장이 아니었다고 해도 감히 이 검은 동그라미를 위조할 사람은 없었으리라.
마왕의 검은 동그라미 문장은 새 용사들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과거의 학자가 그것을 해석해놓은 대목이라는 것을 점차 다들 깨달았다.
그렇다면 마왕, 데스페라티우스는 이 검은 원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인가? 우리는 그가 상위인간을 일거에 몰살하고 절대적 지배자로 군림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마왕은 자신이 만들어낸 완전한 공백, 절대적인 절망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인장 끝을 단칼에 잘라내는 것만으로 모든 가공이 끝나는 것을 지켜보며, 단지 그것만으로 모두가 두려워하는 궁극의 암흑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음습한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적 없어.”
저스틴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냥 귀찮아서 까맣게 칠해버리고 끝낸 것뿐이야.”
“예, 그러셨어요?”
리온이 히죽히죽 웃고 말을 이었다.
소르타르코스에 따르면 권력을 과시하는 행태는 때로 극단적 무위로 드러난다. 이 관점에서 보면 데스페라티우스는 인장에 아무런 세공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절대권력을 과시했다는 해석 역시 가능하다. 식별 마법을 쓴다 해도 섬세한 세공은 인장 도용이나 위조를 방지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가. 누구나 흉내낼 수 있는 검은 동그라미 하나를 던져놓고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세태를 지켜보며 자신의 권력을 즐기는 마왕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만!”
저스틴이 비명을 지르고 탁자에 고개를 박았다.
“벌써 항복?”
리온이 히죽히죽 웃었다.
“아직 많이 남았는데.”
“항복이니까 그만.”
저스틴의 목소리로 듣기엔 어색하게까지 느껴지는 절박한 호소였다. 리온은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표정을 했다.
“그렇다면, 항복의 증표로 스승님의 옛날 이야기를 내놓아라!”
마법사 아닌 다른 일행들은 전부 맥이 빠지는 표정이 되었다.

벨렘의 대공 26 ㅣ- 기타


밖에서 누가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펠레아스 경과 루시텔이다.”
드미트리가 말하고 문을 열었다.
“자백은 받았어?”
펠레아스가 다 들어오기도 전에 리온이 질문했다.
“죄송합니다. 무도회 날의 저격과 백작가 침입은 인정하지만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자백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공범이 있는지도 입을 다물었습니다.”
“으..... 공범 알아내야 하는데.”
“고문이라도 할까?”
루시텔이 제안했다.
“아뇨.”
리온이 단칼에 거절했다.
“고문도 저스틴 같은 짓인 건가요?”
알렉시스는 놀릴 작정이었지만, 리온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서 안 돼.”
“....대체 저스틴 경은 뭐라는 대악마인거에요? 전하 말씀만 들으면 영웅이 아니라 무슨 인류의 적인 것 같아.”
리온도 펠레아스도 루시텔도 어쩐지 먼산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펠레텐 백작의 반역은 어떻게 밝히실 예정인가요?”
마를렌이 물었다.
“일단은 우르술라 경도 체포해서 공범을 추궁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리온이 우물거렸다.
“뭐 다른 방법은 전혀 생각 안 나시고요?”
“음..... 그게.......”
노크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암살범들은 전부 다시 재워서 임시로 짚인형에 하나씩 묶어놨어.”
로위너가 들어오며 말했다. 미테도 따라 들어왔다.
“달리 가둬둘 만한 곳이 있다면 말해.”
“없어요.”
리온이 말했다.
“근위대 숙소의 영창 한 칸이 전부에요, 별궁에 감옥이라고 할 만한 건.”
“넌 사법권은 전혀 행사 안 하는 거야?”
로위너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하기는 하지만..... 보통은 집에서 먼데서 사건의 용의자가 되어 시작하기 때문에.........”
“그래도 최근엔 별 일 없었잖아.”
미테가 위로했다.
“재작년 케일란에서 연쇄살인범 취급 받았을 때 이후론 없는 거 맞지?”
“그, 그 얘기 아세요?”
아비게일이 놀랐다.
“응, 그 때.....”
“실은 저희가 그 때 리온 전하를 처음 만났습니다!”
‘그 때 나도 거기 있어서’ 같은 말이 나오는 걸 막기 위해 알렉시스가 먼저 외쳤다.
“아, 그럼 당신들 둘이 그 백작 영애와 음유시인?”
“네, 맞아요!”
아비게일이 흥분했다.
“세상에, 전하께서 미테한테.. 미테렌시드 경에게 말하셨을 줄이야... 그래서 뭐라고 그랬나요? 저나 알렉시스에 대해서?”
“흠.”
미테가 리온을 흘끔 쳐다보았다.
“지금은 좀 위급한 상황이니까, 끝나고 느긋하게 이야기를 해보는 게 어떨까? 카른슈타인 학교에 초대하도록 할게.”
“네!”
아비게일은 날아갈듯 행복해했다. 알렉시스는 어떻게든 그 전에 아비게일 없이 미테만 따로 만나서, 사실은 미테도 그 때 케일란 근처에 있었음을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해야겠다 생각했다.
“저놈들 전혀 사주한 놈을 밝힐 생각을 않던데, 고문은 안 해?”
로위너가 리온에게 물었다.
“안 해요. 한다고 들을 것 같지도 않고.”
“음.”
“강력한 정신계 마법사시라면, 남의 생각을 읽거나 강제로 진실을 말하게 하는 마법 같은 건 없나요?”
아비게일이 로위너에게 물었다.
“그런 주문은 없어. 그런 주문과 꽤 비슷한 주문은 있지만, 너무 위험해서 함부로 쓸 게 못되고 쓴다 해도 정식 증언으로 인정받을 수 없어.”
로위너가 간단히 대답했다.
“그러니 공범을 밝혀야 한다면 그 우르술라란 사람을 잡아다가 심문해보는 수밖에 없겠네. 힐다한테 잡아오라고 할까?”
“힐다가 누구에요?”
처음 듣는 이름이 나왔으므로 아비게일이 올리버에게 소곤소곤 물어보았다.
“아마도 궁정 마법사장 라인힐드 경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음..... 그게 말인데요.”
리온이 말했다.
“암살 대상인 제가 이 사건에 사법권을 행사하는 게, 그것도 평소 절 미워했다던 시종장을 찍어놓고 범행을 증명하려는 게 보기에 따라 좀.... 안 좋을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그래서 이쯤해서 주도권을 폐하께 넘길까 해요.”
“...리온.”
펠레아스가 말했다.
“그거 지금까지 일은 다 우리가 해놓고 공은 다른 쪽에 넘긴다는 뜻입니까?”
“하지만 시종장은 폐하의 충신이고, 그를 내가 찍어내면 분명 뒷말이 나온다고. 폐하께서 직접 하시는 게 여러모로 좋은걸. 자백을 받아내기도 쉬울 거고.”
리온이 변명했다.
“펠레아스는 세토나 폐하의 대행으로 온 거니까, 막시밀리안 폐하 직속으로 수사대를 꾸리면 거기와 협력하면서 두 국왕이 힘을 합쳐 양측의 반역자를 색출한 것으로 만들면 돼. 그럼 벨레즈와 스마라그디 사이의 우호도 위협받지 않을 거고, 정치적으로 모양새가 낫고. 또 폐하께서도 독을 드셨는걸. 이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야.”
“그건... 그렇습니다만.”
“시종장과 시의가 짜고 왕에게 독을 먹이다니 벨레즈의 기강이 땅에 떨어졌단 소리를 듣겠네.”
미테가 말했다.
“엘프의 기강은 또 어떻고요.”
펠레아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사가 직접.... 그나마 제가 와서 체포에 참여하지 못했더라면 엘프의 기강은 땅에 떨어지다 못해 깊은 구덩이를 파고 흙탕물에 뒹굴고 있을 겁니다.”
“한두 명의 일탈자를 막는 건 원래 쉽지 않아. 잡아서 처리하는 게 중요하지.”
루시텔이 그를 다독여주었다.
“확실히 왕의 권위를 내세우는 게 뒷수습에는 도움이 될 것 같군. 그래서 왕과 교섭하는 일엔 누굴 보낼 거냐?”
“제가 가야죠.”
리온이 말했다.
“저 살아있다고 정식으로 밝히기도 할 겸, 올리버만 데리고 다녀올게요.”
“위험합니다.”
마를렌이 반대했다.
“왕성에는 아직 역적 도당 중 둘이 남아있습니다. 그들이 또 전하를 공격하려 들면 어쩌시렵니까.”
“막아야지요.”
리온이 말했다.
“지금 제 상태가 좀 엉망인 건 맞는데, 그래도 치료도 몇 번이나 받았고 마력 컨테이너에는 마력이 남아있어요. 시종장과 시의에 근위대장까지 적이라 해도 저 한 몸 정도는 피해 도망칠 수......”
그가 올리버를 보았다.
“저는 제 한 몸 건사 못합니다.”
올리버가 말했다.
“그러니 제 목숨을 걱정해서라도 호위를 더 데려가주세요.”
“......응.”
“어마어마한 충신이네.”
로위너가 다시 봤다는 눈으로 올리버를 주목했다.
“쉰도 안 된 아이가 그런 거 인정하기 어려운데.”
“...다 좋은데 그 괴이한 나이 개념 어떻게 안 될까요?”
쉰 살이 안 된 게 맞긴 맞지만 그래도 나이 열여덟에 쉰 살과 비교되고 싶진 않다고, 올리버는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벨레즈보다 나이 많은 사람 상대로 상식 찾지 마.”
리온이 올리버를 다독였다.
“뭐보다 나이가 많다고요?”
“그럼 누가 같이 가면 좋을까요? 기왕이면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이 좋겠는데요.”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올리버를 내버려두고 리온이 지원자를 모집했다.
“그 조건이라면 난 안되겠네.”
미테가 말했다.
“제가 가는 것도 입장이... 조금 그렇겠지요.”
펠레아스도 아쉬운 표정을 했다.
“우리도 곤란해, 리온은 지금 벨레즈의 대공으로서 움직이려는 거니까.”
로위너가 드미트리에게 말했다.
“힐다에게 우르술라와 보리스가 네 적이니 지켜보라고는 말해둘게.”
“고마워요. 그것만 해도 든든하네요.”
“경계를 사지 않을 만한 사람이 가야 한다는 건 동의하는데, 그렇다고 정말로 무해한 사람을 보낼 수도 없는 거지. 즉 누군가 위장을 하고 가야 한다면.”
루시텔이 나섰다.
“나보다 적임자가 있나?”
“이건 저 그림자엘프의 말이 맞네요.”
멜리젠데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호위 시녀의 차림을 하시는 게 좋겠군요.”
마를렌이 말했다.
“전혀 아무 대비를 안 하고 가는 것도 경계를 살테니 말입니다.”
루시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루시텔도 다녀올 준비 하러 갈게요.”
리온이 일어났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 알고도 당할 만큼 멍청하진 않아요.”


이제는 적들도 자기네가 들통 난 걸 알고 있을 것이므로, 그리고 암살이 일어난지 만 이틀이 다 되었는데도 국장과 애도기간을 선포하지 않는 게 국왕에게 정치적 부담을 줄 것을 우려해서 리온은 이번엔 자기임을 밝히고 공식적으로 왕궁에 들어섰다.
리온을 보고 근위대장은 대경실색했다. 너무나 꾸밈없이 놀라서, 리온은 그도 암살에 가담했을 가능성과 함께 그에 대한 평가도 대폭 낮춰버렸다.
왕실의 어른이자 전 섭정으로서 그는 언제라도 왕을 만날 권리가 있었다. 국왕도 놀라서 그를 맞으러 나왔다.
“숙부님이 무사히 별궁에 도착해 치료를 받으시는 중이란 보고는 받았습니다만.... 하루 만에 이렇게 돌아다니셔도 되는 겁니까?”
“폐하께서 붙여주신 시의가 매우 유능해서 말입니다.”
리온이 빙긋 웃었다가 표정을 진지하게 했다.
“데뷔탄트 무도회 이래 짧은 시간에 여러 일이 있었습니다. 개중에는 폐하께서 꼭 아시고, 결단하셔야만 할 일도 있습니다.”
“결단... 이라고요.”
막시밀리안이 긴장한 태도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다면, 우리 둘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보는 게 좋겠군요.”
“네.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응접실을 준비하겠습니다.”
보리스가 막시밀리안에게 허리를 숙였다.
“아니, 안쪽 집무실로 가겠다.”
“네?”
놀란 시종장이 그만 왕의 말에 토를 다는 무례를 저질러 버렸으나 막시밀리안은 태연했다.
“왜, 내 집무실에 숙부님을 들이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보리스가 고개를 숙였다.
“우리 둘만 이야기하겠다. 너는 숙부님의 시종들과 물러가 있어라. 다과는 필요 없다.”
“네, 폐하.”
“가시지요.”
막시밀리안이 앞장섰다. 리온은 올리버와 루시텔에게 웃어주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벨렘의 대공 25 ㅣ- 기타


“이제 됐습니다.”
실비우스가 리온의 어깨를 잡았다.
“범죄자의 변명을 들어줄 필요는 없습니다. 저자는 갈 곳 잃은 원한을 침소봉대하여 엉뚱한 사람에게 들이밀었습니다. 우리는 그것만 알면 됩니다. 그보다 공범에 대해 심문해야 합니다.”
“실비우스 이크티노스!”
셀레나가 소리 질렀다.
“너도, 내 부하에게 한 잔악한 짓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
실비우스가 혐오와 경멸의 눈빛으로 셀레나를 내려다보았다.
“내 이름은 실비우스 이크티노스 칼라인이다. 내 아내와 아들의 이름을 지우지 마라.”
실비우스가 대꾸했다.
“보안 전문 마법사의 집에 침입하면서 그 정도 각오도 안 했다니 너희가 우습군. 아니면, 칩거하는 과부는 잔악한 짓을 못할 거라고 생각했나?”
실비우스의 비웃음서린 미소가 잔인하게 빛났다.
“나는 펠레아스 경이 너무 일찍 도착해서 아쉬운데. 너희가 십 분만 거기 더 방치되어 있었어도....”
“실비우스.”
클라우스가 입을 열었다.
“이미 패배한 적을 더 모욕하지 마시오.”
“이미 패배했다고?”
실비우스가 그를 노려보았다.
“나와 내 아들을 위협해 놓고 말은 잘하는군. 그럼 패배한 것 답게 행동해보시지, 클라우스 대사! 누구와 공모했지? 전하를 암살한 다음엔 어찌하려고 했나? 설마 영원히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텐데!”
클라우스는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 명백한 거부의 몸짓에 실비우스가 더 뭐라 하려는데 알베르트가 그의 팔을 잡았다.
“저런 자와 더 말 섞으실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
실비우스가 알베르트를 돌아보았다.
“그래.”
그가 아들의 손을 꼭 쥐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공모자를 밝혀라.”
펠레아스가 말했다.
“우리는 이미 벨레즈의 수석 시의 우르술라 경이 레이노사 백작을 협박하고 리오넬 전하께 독을 쓰려 한 증거를 갖고 있다. 그러니 발뺌을 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잘 알고 있다면 내 증언 같은 것 필요 없겠군. 나는 이미 주모자임을 자백했으니...”
미테가 갑자기 달려들어 그의 등을 발로 걷어찼다. 그리곤 쓰러진 클라우스의 입안을 뒤져 은행알 하나를 찾아내었다.
“입안에서 딱딱한 게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라고.”
“자기가 뒤집어쓰고 죽을 작정이었나.”
펠레아스가 신음했다.
“멍청한 짓이지.”
미테가 말했다.
“자살해봤자 자기가 주동자가 아니라는 사실만 확실해지는데.”
“대사님!”
셀레나가 한 발 늦게 소리 질렀다.
“주가이아를 속이는 약인지도 모르지요.”
알베르트가 내뱉었다.
“이런 짓을 저질러 놓고도 목숨을 붙여 도망가려고 수작을...”
“대사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셀레나가 소리쳤다.
“대사님은 날 위해 이 일을 같이 해주신 거다, 후견인의 의무를 다하려고! 너희 같은 놈들이 감히 함부로.”
“아 어쩌라고.”
알렉시스가 내뱉었다.
“엘프는 남 죽이는 것도 후견인의 의무에 들어가? 그럼 내가 아 그러십니까 하고 얌전히 죽어주기라도 했어야 하는 거야?”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하여간 나쁜 후견인도 날 죽이려 들고 좋은 후견인도 날 죽이려 들고, 무슨 내가 후견인 전용 동네 북이야 그냥.”
“저놈이 알렉시스를 죽이려고 했어?”
아비게일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알렉시스를 몸으로 감싸며 쓰러진 엘프 대사를 노려보았다.
“당신들, 레이노사 백작의 아버님도 납치하려고 했지. 자기 가족을 위해서라면 남의 가족은 해쳐도 돼? 심지어 아무 죄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을?”
사방에서 비난이 날아들자 셀레나도 주춤했다.
“저....”
리온이 파리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내가.... 힘들어서 그런데, 심문은 펠레아스에게 맡길 테니 나는 잠시만.....”
“네. 전하께선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알베르트가 서둘러 말했다. 올리버가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잘하고 있을테니 걱정 마십시오.”
펠레아스도 어서 가서 쉬라고 등을 떠밀었다. 거기에 드미트리, 마를렌과 아비게일 알렉시스까지 따라와 수련장을 나갔다.


마침맞게도 수련장 옆에는 휴식을 위한 공간이 있었다. 긴 벤치에 리온을 뉘여 두고 알베르트가 원기 회복 마법을 걸었다. 그를 다시 진찰해보고 알베르트가 입을 딱 벌렸다.
“이런 몸을 하고 멀쩡한 척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미안하오, 레이노사 백작....”
“그야 미안하셔야지요. 지금에 비하면 어제는 아주 멀쩡한 상태셨습니다. 제가 한가한 은퇴 생활에 대해 불평을 했기로서니 이렇게 엄청난 일거리를 안겨주시면 어떡합니까?”
드미트리가 알베르트를 쳐다보았다. 알베르트는 드미트리의 화나서 노려보는 것 같지만 화난 건 아닌 시선을 받으며 잠시 의아해했다.
“저, 사형.”
리온이 말했다.
“저도 이제는 망한 농담을 알아듣는답니다.”
드미트리가 안도했다. 알베르트가 상처받은 표정을 했다.
“망했다고 할 정도입니까?”
“아니오, 그냥 우리 사이의 오랜 농담 같은 거라오.”
리온이 알베르트의 손을 잡았다. 알베르트는 그에게 몇 가지 치료 마법을 차례로 걸었다.
“신이 뮬렘이라곤 해도 선지자에게 치료받으셨다기에 제가 할 일은 안 남아있을 줄 알았습니다.”
알베르트가 변명조로 말했다.
“어제 독을 드셨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였을 줄은.....”
독 말고 하늘에서 떨어져 강에 빠지기도 했다고 일러바쳐볼까, 아비게일은 고민했다.
치료를 끝내고 나자 리온의 안색이 한결 나아졌다.
“잠시 주무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니, 지금 자면 악몽을 볼 것 같아서....”
말하다 리온이 알베르트의 눈치를 보았다.
“미안하오.”
“뭐가 말입니까.”
“저런 비슷한 말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어야 했는데, 백작을 심문 현장에 데려가지 말았어야...”
“그, 시어드릿이, 주가이아의 사제였습니까.”
알베르트의 말에 리온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자가 헬레나 공을 해칠 뻔 했다는 것도 그럼.”
“그자가 자기 목숨을 바쳐 주가이아의 학살자를 소환했소. 이 대륙의 모든 엘프를 죽이기 위해. 엘프가 사라지면 하프엘프가 인간을 지배할 수 있으리라 믿고.”
알베르트는 자기 아버지의 팔을 꽉 붙들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되지. 애초에 하프엘프가 인간에 비해 그리 우월하다면 에이벤틴에선들 그런 취급을 받고 살았겠소..... 그들은 증오에 눈이 멀어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았던 거요. 그래서 그렇게....”
리온이 슬프게 고개를 흔들었다.
“백작에겐 이런 얘기 하고 싶지 않았소. 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은 나조차도 그 때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 심지어....”
리온은 아까 알베르트가, 우리도 엘프 부모에게서 났다고 소리쳤던 걸 떠올렸다.
에이벤틴의 하프엘프들은 대부분 하프엘프에게서 태어났거나 엘프 부모가 있어도 버려졌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엘프를 모두 죽여도, 자기들과는 상관없는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건.
그리고 이제 엘프들이 그 일로 인해 하프엘프를 증오한다.
리온은 대표고 상징일 뿐이었다. 그들이 미워한 건 하프엘프 전체인 것이다. 그가 죽었다면 그 후 램버트의 하프엘프 자치령에 무슨 일이 생길지 리온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죄지은 자는 이미 주가이아의 뱃속에서 불타고 있건만, 그저 하프엘프로 태어나 살고 있을 뿐인 다른 사람들에게 그 증오가 미친다.
“...태어난 건 죄가 아니잖아.”
리온이 중얼거렸다.
“누구는 하프엘프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 살고 있는 줄 알아? 나만 해도.... 선택할 수 있었으면.....”
“저는.”
옆에 묵묵히 있다 마를렌이 입을 열었다.
“하프엘프로 태어나서 좋았습니다.”
리온이 고개를 들어 마를렌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태어났던 70년 전엔 대이동도 막바지였습니다. 어머니께선 인간 남편과 결혼해 인간 아이도 낳고 잘 살고 있었기 때문에, 탈출 행렬에 낄 생각이 없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하프엘프로 태어났지요. 그리고 어머니는 저를 데리고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마를렌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인간으로 태어났더라면 어머니는 계속 에이벤틴에 사셨겠지요. 당신께선 만족했다 말하시나 딸에게는 죽어도 물려줄 수 없던 삶을, 계속.”
그가 리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니 본인의 인생을 폄하하지 마세요.”
“....고마워요.”
리온은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엘프 내 반 하프엘프 세력은 제가 어찌할 일은 아니겠죠. 지금은 저.... ‘전’ 엘프 대사와 수석 시의의 연결고리, 암살 사건의 주모자를 찾는 게 급선무에요. 지금 의심스러운 건 시종장이고요.”
“그렇지.”
드미트리가 말을 거들었다.
“저 실행범들에게서 그의 이름이 나올까요?”
“안 나오더라도 정황증거 정도는 있습니다.”
올리버가 주장했다.
“클라우스 플라비우스와 펠레텐 백작은 오래 친하게 지냈고 백작과 우르술라 경 역시 그렇습니다. 그가 중간에서 계획을 짰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그래도 난 어제의 독이 마음에 걸려.”
리온이 말했다.
“적어도 펠레텐 백작은 막시밀리안에게 충성스러워. 날 미워하는 것도 그 때문일텐데, 폐하까지 독을 먹을 짓을 했다는 건 말이 안 돼.”
“이번처럼 전하께서 폐하를 먼저 해독하실 거라 예상했을지도 모르지요.”
알베르트가 말했다.
“도리어, 독으로 전하를 죽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니 전하께서 폐하의 해독을 우선하느라 본인의 해독이 늦어져 위험해지는 걸 일부러 노렸을 수도 있고 말입니다. 전하 같은 대마법사를 독살하려 들면서 즉사형 독을 쓰지 않은 이유가 설명이 되지요, 그럼.”
“그거 내 실력에 막시밀리안의 목숨을 거는... 거라고 생각하니 말은 되네. 음.”
이제 어렸을 때처럼 자기 실력이 형편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리온은 그 가설을 생각해볼 수 밖에 없었다.
“어.”
올리버가 놀랐다.
“왜 그래?”
“아니 별 것 아닙니다.”
“별거 아니어도 얘기해봐.”
“그게.... 어제 시종장은 궁 밖에 나갔다가 전하와 레이노사 백작이 도착한 다음에 들어왔다는 게 생각나서요. 그래도, 전하께서 오시는 건 예정되어있었으니 꼭 자기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아도 오시면 차에 독을 넣으라고 우르술라 경에게 말해두면 되는 일입니다. 어차피 마법사도 아닌 그가 직접 할 것도 아닐 거고.”
“음, 그 독은 비마법독이긴 했네.”
드미트리가 말했다.
“누구든 가루를 넣고 휘저으면 독을 탈 수 있었지.”
“그래도 여전히 직접 했다는 증거는 없는 거네요.”
리온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실행범들이 공범을 불면 좋겠지만 아니라면 이걸 어떻게 하나....”
실행범만 처벌하고 사건을 끝낼 수는 없었다. 그 실행범 중엔 엘프 대사가 끼어있었다. 벨레즈와 스마라그디에 조금만 신뢰가 적었어도 전쟁이 일어나고도 남을 사안이었다.
관련된 모든 암살범과 배후를 속속들이 캐내 뒷말이 나올 여지를 최대한 줄이지 않으면 분명 두 나라를 이간질하려는 세력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결과는 반 하프엘프 파들의 입맛대로 되어버린다.
클라우스는 이런 걸 노리고 자결하려 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냥 정치적인 거래로 없었던 일로 하기엔, 사건이 너무 공개적이었고 지금 내가 얕보이면 이후 램버트가 공격당할 가능성도 있어. 그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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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행자가 이 실비우스 보며 블랙 위도우(과부 거미) 같다더군요. 후후후... 뿌듯했습니다.
세계 최고 미인의 (문자 그대로) 미망인적 잔혹함이란 남녀 떠나서 마음을 끄는 데가 있다니까요.

벨렘의 대공 24 ㅣ- 기타


실행범을 붙잡았고 간 인원은 모두 무사하다는 전갈을 받고 별궁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범인들을 심문할 준비를 했다.
로카넨 별궁에는 감옥이나 취조실 같은 시설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장소는 1층의 수련실로 정했다. 바깥 연병장으로도 이어지는 넓은 공간엔 마법과 체술 양쪽의 훈련에 필요한 수준 높은 기구들이 갖춰져 있었다.
드미트리 일행은 날아서 들어올 것이기에 밖으로 통하는 큰 문을 활짝 열어두고 도착을 기다렸다. 처음 와보는 사람들은 수련실 내부를 구경했다. 리온도 마를렌도 말리지 않았다.
무기 거치대에서 아비게일이 본 적 있는 봉을 발견했다.
“이거 케일란에 오셨을 때 들고 계시던 거 맞죠.”
“아마도.”
리온이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 기억력은 정말 대단하군. 막상 나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땐 리온 전하를 흉내 낸 차림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아비게일이 말했다.
“가만, 그럼 혹시 이게.”
“아니야, 내가 가... 용사행 때 들고 다니던 봉은 지금 왕궁 전시실에 벨레니스의 검과 나란히 있지.”
리온이 말했다.
“저스틴과 시에나의 유물은 키멘 대성전에, 벨포드 것은 브렌켈 자작성에 있고 라크리스씨의 유성추는 램버트 시청에 있고 미테는 그때 쓰던 활 포트덤에 있는 기념관에 기증했고.... 한군데 모아놓으면 어떨까 싶지만 내가 말하면 정치 문제가 되어버리니 어쩔 수 없단 말이지.”
리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이름을 버리고 싶은 거냐?”
루시텔이 물었다.
“헛된 꿈인 거 알아요.”
리온이 목을 움츠렸다.
“이런 입장이기에 할 수 있는 일도 있는 거고. 그냥.... 세간에 죽은 것으로 알려지고 나니까 조금.. 아쉬워서요.”
아련한 표정을 하고 있던 리온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돌아오네요.”
모두가 열린 문밖 하늘을 주목했다. 곧 멀리 점이 보였다. 그 점이 점점 커지더니 하늘을 나는 양탄자와 그 위에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미테렌시드와 그 주변을 호위하듯 날고 있는 마법사들이 구별되어보였다.
그들이 안으로 날아들자 문이 저절로 닫혔다. 갈 때에 비해 한 명 늘어난 인원을 보고 다들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아비게일이 비명을 지르며 그 사람 앞으로 달려갔다.
“알렉시스!”
“걱정 마. 멀쩡해.”
로위너가 알렉시스를 잡아당겨 세우자 그가 흠칫 눈을 떴다. 그리고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후다닥 로위너에게서 멀어져 아비게일에게 덥석 안겼다.
“대체 뭐가 무서워서.... 괜찮아, 알렉시스. 이제 괜찮으니까.”
아비게일이 달달 떠는 알렉시스를 끌어안고 다독거렸다. 그리고 로위너를 노려보았다.
“당신 뭔데...”
“로위너 누님!”
리온이 후다닥 달려가 아비게일의 앞을 가로막고 사자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역시 거기 들렀다 오셨어요?”
“그래. 그때만 해도 실비우스 경이 여기 있는 걸 몰랐으니까.”
로위너가 고개를 들어 실비우스와 알베르트를 보고 생긋 웃었다.
“실행범도 잡았겠다, 저 둘 여기에 계속 있을 거면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거 맞지?”
“네.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고맙긴. 그래서 언제 둥지로 돌아올 거니?”
“이 사건은 마무리하고 가야죠. 누가 왜 꾸민 일이냐에 따라 정치적 파장이 달라지니까 최소한 두어 달은 걸리겠지만...”
그가 로위너의 눈치를 보았다.
“되도록 빨리 갈게요.”
“잠깐만, 네가 왜 둥지로 돌아오는 거지?”
드미트리가 끼어들었다.
“그야 나도 네가 이런 위험한 곳에 있기보다는 둥지로 돌아와 지내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다만.... 이건 마치.....”
드미트리가 로위너를 보았다.
“부탁을 들어주면 리온이 기억력 연구에 전면적으로 협조하겠다고 약속했어.”
“정신 나가셨습니까!”
드미트리가 노호성을 질렀다.
“사제를 보호하는 건 당연한 의무고 스승님께서 명령하신 일 아닙니까! 어떻게 그런 일에 따로 대가를 요구할 수가...”
“내가 요구한 게 아니고 리온이 제안한 거고, 또 내 의무는 리온을 보호하는 거지 그의 신하까지 보호해 달라고 할 거면 대가가 있는 편이 합당하지 않아?”
“대가가 필요하면 재료든 마법이든 받으시면 될 것 아닙니까. 어떻게 사제를 이용해서 실험을 하려고 들 수가 있습니까?”
로위너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팔짱을 끼었다.
“내가 무슨 불법 인체 실험이라도 한다는 듯이 말하지 말아줄래? 그냥 여러 가지 단어와 모양을 보여주고 그중 어떤 걸 얼마나 기억하나 물어봐서 기록하는 것 뿐이라고.”
“정말 물어봐서 기록만입니까? 리오넬에게 아무런 마법도 전혀 걸지 않고요?”
순간 로위너는 대꾸하지 못했다. 드미트리의 표정이 배로 험악해졌다.
“위험한 마법을 쓸 것도 아니고 본인이 동의하는걸.”
“정신계 마법은 본질적으로 위험합니다!”
“너 내 전문 분야 까고 있니?”
“리오넬은 아직 어리단 말입니다!”
“엄연히 성인이거든.”
“제 나이 절반도 안 되는데....”
“너도 내 나이 절반도 안 되니까 애 취급 해주랴?”
“그만 좀 하세요!!”
리온이 머리를 감싸 쥐고 소리 질렀다.
“저 123세라고요, 무려 123세! 그냥 인간이었으면, 아니 그냥 하프엘프였어도 이미 관짝에 들어가고도 남을 나이고 성인 된 지가 백년 하고도 3년이나 지났는데, 대체 언제까지 어린애 취급을 하실 거에요?”
그가 주먹을 부르쥐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가 정말...... 남 보기 부끄러워서........”
그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어깨가 떨리는 걸 보고 드미트리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저..... 내 말은 그게 네가 어른스럽지 않다거나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정신계 마법 실험이라는 게 좀.....”
로위너는 재미있어했다.
“그러게 왜 애를 울리고 그래.”
“애 아니라고요!”
리온이 빽 소리쳤다.
“그래, 아니고말고.”
로위너는 재빨리 물러섰다. 드미트리가 아주 조심스럽게 리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안하다.”
“이제 절 죽이려고 마법파괴 화살을 다섯 대나 꽂았던 놈들한테 질문 좀 해도 될까요?”
“그, 그래.”
리온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은 흘러있지 않았다.
드미트리를 놀래켜놓고 리온이 양탄자 위의 짐짝들을 끌어내리다 말고 손 놓고 이들을 구경하던 미테와 펠레아스에게 갔다.
“그런데 리온.”
로위너가 불렀다.
“네?”
“못 걸어서 마법으로 몸을 지탱해야 할 정도라면 그냥 가서 앉아라.”
리온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소리 질렀더니 힘 빠져서 그런 것 뿐이에요.”
그가 걷는 척 하는 걸 포기하고 둥둥 떠서 의자에 가 털썩 떨어졌다. 수련장이었지만 열심히 훈련하고 픽 쓰러지는 용도인지 큼직한 안락의자가 한구석에 놓여있었다.
“그랬구나, 우리 드미트리가 막내를 울리는 바람에....”
“안 울렸습니다.”
드미트리가 얼굴이 붉어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실험에 대해선...”
“이제 이 사람들 깨울까?”
로위너가 드미트리의 말을 자르고 리온에게 고개를 돌렸다.
“잠시만요. 무장해제 끝내고 구속 주문을 걸 때까지 기다려주십시오.”
펠레아스가 부탁했다. 그와 미테가 엘프 병사들과 대사를 양탄자에서 끌어내려 무장을 벗겨내고 수련장 바닥에 무릎 꿇렸다.
“구속은 내가 해줄게. 몸은 못 움직이고 말은 할 수 있으면 되는 거지?”
“저... 협회 표준 마법이 있어서 절차상.”
“그 표준 구속 마법 내가 만들었는데 왜?”
펠레아스는 입 다물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러고 있는 동안 알베르트가 리온에게 다가왔다.
“전하.”
“미리 말해두겠는데, 로위너 누님이 무서운 분이긴 해도 날 해치거나 괴롭게 할 사람은 아니라오.”
리온이 앞질러 말했다.
“내 불균형한 기억력에 대해서는 나도 의문점이 많고, 이참에 풀 수 있으면 좋다고 생각하니 불필요한 부담은 갖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그가 리온의 옆에 서서 암살범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펠레아스도 다가와 그의 반대쪽 리온 옆자리에 섰다. 로위너와 드미트리는 옆으로 물러났다. 사제의 일이니 방청은 하겠지만 심문이나 판단에 끼지는 않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그들 쪽으로 루시텔이 갔다.
마를렌이 아비게일과 알렉시스, 멜리젠데를 데리고 마법사들의 반대쪽으로 갔다. 실비우스는 알베르트의 옆에 섰고 올리버는 리온의 뒤로 갔다. 미테는 리온의 옆으로 가는 대신 퇴로라도 막는 것처럼 엘프들의 뒤로 가서 장검을 뽑아 짚고 섰다.
리온이 중얼거렸다.
“이거 나만 앉아있으려니 조금...”
“환자시잖아요.”
올리버가 말을 잘랐다. 아픈 게 죄라 리온은 더 끽소리를 하지 못했다.
로위너가 손가락을 튕겼다. 다섯 명의 엘프가 동시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급변한 상황을 보고 경악했다.
“어떻게.....”
“클라우스 플라비우스.”
펠레아스가 나서서 말했다.
“당신은 이전 레이노사 백작가의 별채에서, 자신이 셀레나 유키토스와 그 부하들이 저지른 범죄를 주도했음을 자백했다. 그 범죄가 리오넬 대공에 대한 암살 미수, 그의 보좌관 니키타 크루틴의 살해, 선대 레이노사 백작 부군 실비우스 이크티노스 칼라인 납치 시도를 포함함을 인정하나?”
클라우스는 펠레아스를 한참 노려보았다.
“인정한다.”
펠레아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왜 그랬지?”
지금은 범인에게 자기 변명할 기회를 주는 게 아니라 범행 계획과 공범 유무 등을 물어야 한다고 알고 있지만 그런 질문이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납득할 수 없었다. 그냥 불평분자가 아니었다. 이자는 벨레즈 주재 엘프 대사고 인간과 엘프 사이의 우호를 담당하는 인물이었다. 사실은 인간을, 하프엘프를 증오하면서 지금까지 친인간파인척 하며 대사 노릇을 했다니, 그런 지위에 있으면서 이 일로 스마라그디가 얼마나 피해를 입을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런 짓을 저질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너희는 양국의 우호를 바라는 세토나 폐하의 바람을 배신하고 나라의 안위를 저버리는 반역을 저질렀다! 대체 무엇 때문에.....”
“반역이라니, 언제부터 엘프들의 주인이 헬레나 마조라스가 되었지?”
셀레나가 소리쳤다.
“저자는 엘프가 아니다! 인간의 왕족에 불과한 자를 죽이는 게 어째서 엘프들에 대한 반역이 되는 것이냐! 암캐가 슬어놓은 잡종 따위를 무슨 엘프왕이나 되는 듯이...”
“닥쳐라!”
알베르트가 소리 질렀다.
“뭐가 문제냐. 왜 너희들은 우리를 그렇게 증오하는 것이냐! 하프엘프가 어디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했나? 우리도 엘프 부모에게서 나왔단 말이다! 대체 하프엘프가 너희에게 무슨 짓을 했길래 그리도.....”
“무슨 짓을 했냐고?”
셀레나가 웃었다. 그걸 물어봐주길 바랐다는 듯이.
“하프엘프들은 주가이아를 섬겼다. 그 더러운 악신에게서 힘을 받아 엘프들을 몰살하려 했단 말이다!”
누가 입을 막을까 두려워하듯 셀레나는 빠르게 말을 토했다.
“내 아버지는 하프엘프의 손에 주가이아의 꼭두각시가 되어 비참하게 돌아가셨다! 그걸로 부족해서 하프엘프 놈들은 학살자를 강림시켜 엘프를 학살했다! 그 자리에서 살아난 엘프는 저자의 어미뿐이다, 그런 꼴을 당하고도 잡종들의 편을 들어준 밸도 없는 암캐! 그런데!”
“그건 엘프들이 뿌린 씨였어!”
소리 지른 건 리온도 미테도 아닌 펠레아스였다.
“그곳의 대대장은 산적 토벌을 빌미로 근처의 하프엘프를 모두 죽이려고 획책했다. 헬레나 공과 나를 제외하고 그곳에서 살아남은 엘프들은, 병영이 이세계 괴물들에게 공격받은 것을 보고 도우러 온 하프엘프들과 싸우느라 병영을 떠나있었기에 살아남았고! 그래, 하프엘프 주가이아 사제가 엘프들을 몰살하려 했다. 그리고 그걸 막은 건, 학살자와 싸우고 그 등에 칼을 꽂은 건 미테렌시드다, 하프엘프란 말이다!”
펠레아스가 분노로 몸을 떨었다.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런 소리 할 수 없다. 적어도 하프엘프는, 자기 동족들의 과오를 스스로 처단했다. 너희는? 아버지의 원수가 하프엘프라서, 그 원수를 갚아준 하프엘프를 죽이겠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이냐!”
셀레나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었다고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자라면 애초 이런 일까지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원수를 갚기는 뭐가! 자기들이 엘프를 공격하다 그게 안될 것 같으니까 꼬리 자르고 착한 척 한 거잖아!”
“우리는 그자들과 공모하지 않았다.”
리온이 조용히 말했다.
“내가, 나의 어머니를 죽이려고 계획했다 주장하는 것이냐.”
“웃기지마, 그렇게 떳떳하면 왜 하프엘프가 학살자를 소환한 걸 감췄지?”
셀레나가 소리쳤다.

리온의 인장 2 ㅣ- 기타



잠깐의 휴식 후 후반부가 시작되었다.
리온이 단상에 섰다. 가볍게 손을 들자 등 뒤의 암막에 논문의 내용이 커다랗게 뜨기 시작했다.
‘즉석 주문 조합에서 손실되는 마력과 마법사의 심리상태가 끼치는 영향’
정형화된 인사말을 한 뒤 리온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논문을 소개했다.
“저는 신성력에 의한 추적의 표적이 된 것이 아닌지 스스로 알아내야 하는 처지가 된 적이 있습니다. 마법사는 저뿐이었고 관련 설비는 전혀 없었으며 마법 주문이 아닌 다른 형태의 추적에 대처하는 법도 배우지 못한 채였습니다.”
펠레아스가 합류하기 이전의 일인 모양이었다.
“위험에 처한 동료를 찾기 위해 카마인 산맥 반트레 시에서 위험지대 전체를 범위에 넣고 추적 주문을 써야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모두 다행히 성공했습니다.”
그 정도이니 시험 중단하고 그냥 인장 주시면 안 되냐고 호소하면 어떻게 될까, 농담 같은 생각이 펠레아스의 머리에 떠올랐다. 적어도 자신이라면 그 호소에 넘어갈 것 같았다.
“이후에 여유가 생겨서, 사용했던 주문을 정리해 다듬던 도중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즉석 주문과 정식 주문의 차이란 무엇인가.”
리온이 논문에 첨부된 도표를 암막에 띄웠다.
“까마귀 탑에서는 마법사가 배우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낸 주문 중에서, 작성에 24시간 이상 걸리지 않았고 작성자 스스로도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은 주문을 즉석 주문으로 정의합니다. 저 역시 그 정의를 따를 것입니다. 카마인 산맥에서 만든 주문은 기실 24시간을 초과해 만들었습니다만 주문의 난이도와 조건이 통상적인 수준을 크게 초과하므로 감히 즉석 주문의 범주에 넣었습니다.”
잠시 말을 끊고 리온이 시험관들을 둘러보았다. 마치 그런 악조건 속에서 만든 마법이 즉석 주문으로 인정 못 받을까봐 걱정하는 사람처럼.
“해서 제가 직접 체험한 이와 같은 사례들, 그리고 몇 가지 문헌을 참고해 즉석 주문의 장점과 한계, 유의점을 알아보았습니다.”


후반부까지 끝나자 시험관들이 토의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고 리온도 대기실로 물러났다.
보통 자율 방청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방청객이 몰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개 수험자의 친지들이나 후학 양성에 관심이 많은 원로 두엇이 오는 정도였다.
전 대륙에서 몰려온 내노라하는 마법사들 앞에서 자신이 합격했는지 떨어졌는지 발표된다니 보통의 수험자라면 죽고 싶어질 상황이었다.
리온의 인장 시험에 참관자가 넘치는 건 그가 용사가 되기 전부터 예정된 수순이었다. 셀림이 오랜만에 들인 제 1제자, 그것도 왕자의 인장시험이니 중요성은 그때 이미 차고 넘쳤다.
펠레아스는 리온의 가출에 인장 시험의 압박도 크게 작용했으리란 자신의 확신을 더욱 굳혔다.
과연 시간이 지나 다시 무대로 올라온 리온은 톡 치면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드미트리 경이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은 듯 살짝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그런 논문을 발표하고도 저런단 말이지.’
자신은 인장 시험에 떨어질 걱정까지는 하지 않았었다. 그저 충분히 천재다운 논문을 쓰지 못했을까봐, 자신의 역량이 실제만 못해보일까봐 걱정했었다.
만약 리온의 시험을 먼저 참관했더라면 떨어질 걱정에 죽을상을 하는 건 자신 쪽이었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빛내주신 모든 대륙의 마법사 여러분.”
개회사에 비하면 듣는 사람들을 제대로 의식한 듯한 말로 시험관 대표가 발표했다.
“까마귀 탑은 오늘 또 한 명의 훌륭한 인장 마법사를 얻었습니다.”
방청석에서 화답하듯 박수가 터져나왔다.
펠레아스도 박수에 합류했다. 이렇게 수준 차이가 나 버리면 시기할 기운도 나지 않았다.
인장 수여식 날짜와 장소도 발표되었다. 일주일 뒤 왕궁에서 수여식 겸 ‘수험자가 성의껏 베푸는 축연’이 벌어질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날까지는 새 마법사가 차분히 앞날에의 각오를 다질 수 있도록 다들 한 걸음 물러나서 지켜봐 주셨으면 합니다.”
보통은 방청석에 있던 친지들도 갓 합격한 수험자에게 바로 달려가 축하하는 법이지만, 셀림의 제 1제자이자 새 용사이자 벨레즈의 제 1왕자이니 무엇 하나 평범한 일이 없었다.
세 명의 마법 조사관이 방청객들을 출구로 안내하고 혹여 대기실로 물러난 리온에게 쫓아가 귀찮게 굴지 않나 감시했다.
펠레아스는 자신도 그냥 조용히 빠져나갈까 망설였다. 그러나 와서 지켜본 걸 감출 수도 없는데 자칫 축하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방청객들 틈에서 빠져나와 리온이 있을 대기실로 가는 길을 찾았다.
그 외에도 수수하게 차려입은 몇 명이 역시 나가는 길이 아닌 다른 쪽으로 가려다 마법 조사관의 제지를 받았다.
조사관은 그들과 몇 마디 나누더니 다른 길로 안내했다.
펠레아스는 멈춰서서 두 눈을 깜박였다.
그냥 리온을 보러 가려다가 가로막힌 사람들이 아니었다. 리온을 보러 가고 싶지만 참고 나가는 사람이 지금 한두 명이 아닌데, 저들이 따로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는 걸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펠레아스는 황급히 정신을 집중하고 방금 본 것을 지금이 아닌 과거의 일인 것처럼 연상작용을 통제했다.
역시 주의력을 흐리는 주문이었다. 저 조사관과 따라가는 일행들 모두 여기 모인 마법사들 상대로 주문을 쓸 수 있을 만큼 뛰어난 마법사였다.
주의력 흐리기는 일단 의심을 품고 나면 깨기에 어렵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소리질러 저들의 존재를 알릴 수도 있었지만, 일단 정체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펠레아스는 조용히 그들을 따라갔다.
자신이 벨레즈 지부 탑의 내부 구조와 시설을 더 잘 알았으면 훨씬 편했을 터였다. 무작정 따라간 끝에 외딴 복도가 나오니 조금 불안해졌다.
그때 마법 조사관이 몸을 홱 돌려 펠레아스를 마주보았다.
이쪽에서 걸고 있던 주의력 흐리기 역시 들켰다. 뭔가 대응을 하려는 순간 마법 조사관이 얼굴을 가린 검은 천에 손을 대었다.
펠레아스는 입을 벌렸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주문을 쓰거나 사람을 부르는 것도 잊어버렸다.


“잘 했어.”
드미트리 경이 미소지으며 리온의 어깨를 두드렸다.
“시험관들 말만 안 했지 다들 감탄하더라. 봤지?”
리온이 고개를 들고 놀란 얼굴을 했다. 낯빛도 여전히 창백했다.
“감탄했어. 다들.”
오해의 소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 드미트리가 직설적으로 다시 강조했다. 리온의 얼굴이 비로소 조금 풀어졌다.
“그러니까 안심하고 푹 쉬어도 돼. 축하도 받고.”
“예.”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리온은 대기실 소파에서 일어날 줄 몰랐다. 이대로 방청객들과 그에게 말 한 마디라도 걸어보고 싶을 사람 모두가 탑을 떠난 뒤에야 움직일 작정인 것 같았다.
드미트리도 셀림의 제 1제자로서 인장 시험을 치렀기에 그런 심정은 알고도 남았다. 더 재촉하는 대신 느긋하게 앉아 찻잔을 들었다.
“스승님이 보이지 않아서 실망했지?”
리온의 어깨가 떨렸다.
스승님이 자신을 억지로 떠맡은 혹이 아니라 진짜 제대로 된 제자로 인정해주신다는 사실은 이제 알고 있었다. 스승님이 그렇게 대놓고 말씀하셨는데 의심할 수는 없었다.
정말로 오늘 수험자의 스승 자리에 드미트리 사형 대신 스승님께서 앉아계셨다면 자신은 동요하고 겁먹은 나머지 시험을 망쳤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불평할 명분은 없는데 막상 스승님 없이 시험을 치고 나니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지난번에 한 이야기도 잊고 스승님께 난 정말 제자 맞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러지 말고 긴장 풀어. 푸딩도 먹고.”
드미트리가 차와 함께 차려진 커스터드 푸딩을 가리켰다. 단 과자니까 좋아할 줄 알았는데 영 손을 대지 않았다.
‘역시 말 몇 마디로 한꺼번에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건가.’
그도 스승님은 무섭고, 갓 제자가 되었을 때는 사형들과 사자들의 커다란 등을 보며 힘들어했다. 리온은 그 기간이 유난히 길어지고 심해졌으니 좀 기다려줄 필요가 있었다.
갓 어린 막내가 들어왔을 때 드미트리는 아이가 기죽지 않도록 어리광도 받아줄 줄 아는 사형이 되자고 다짐했었다. 지금이라도 다짐을 지켜야 했다.
잠시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리온도 조금씩 혈색이 돌아오고 푸딩도 떠 먹었다.
입맛은 까다로운 편인 리온이 잘 먹는 걸 보니 정말 고급품인 모양이었다.
“음......”
리온이 시계를 보았다.
“이제 왕궁으로 돌아갈 때도 됐죠? 다들 기다릴 테고요.”
“아니, 잠시만. 올 사람이 있거든.”
드미트리가 빙긋 웃었다.
“누군데요?”
“기다려 봐.”
리온은 단박에 불안한 얼굴로 되돌아왔으나 드미트리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다행히 오래 기다리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리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비명을 지를 듯한 표정으로 굳어버렸다.
“어머니를 보고 표정이 그게 뭐니.”
헬레나 마조라스 공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언제까지 문을 막고 서 있을 거냐. 어머니에게 서운한 게 다 안 풀려서 문전박......”
리온이 문 앞에서 튕겨나듯 떨어졌다.
“.....대하지는 않는다니 다행이구나.”
헬레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스마라그디에 있을 때 입던 엘프식 복장이 아닌 칼토니아식 로브였다. 기억 흐리기 주문을 쓰고 구석에 조용히 있는 동안엔 칼토니아에서 온 이름모를 방청객으로 보였을 것이다.
“호위는 충분히 데려오셨겠지요?”
드미트리가 헬레나의 일행들을 훑어보았다.
“물론이지. 이렇게 적어 보여도 엘프들은 소수정예가 기본이거든.”
헬레나와 엘프들 뒤로 펠레아스가 따라들어왔다. 어머니 앞이라 도로 긴장했던 리온이 그를 보고 표정을 폈다.
“아, 방청 올 줄 알았어요. 보니까 어땠어요?”
“훌륭했습니다. 인장 시험이 아니라 원로들의 학회에 참가한 것 같더군요. 게다가 그 주제는 전부터 준비했던 것이 아니었지요?”
가출 전에 준비한 내용이었다면 용사로서 활약하던 도중에 겪은 일들이 나올 리 없었다. 리온이 쑥스럽게 웃었다.
“이전 논문은 다시 읽어보니까 도저히 남들 앞에 내놓을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마침 새 연구 주제도 떠오른 김에 처음부터 다시 썼어요.”
펠레아스는 과연 첫 번째 논문이 그 정도로 심각했을지 매우 의심이 들었으나 잠자코 있기로 했다. 그도 누구든 자신의 인장 시험 때 논문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하면 듣고 싶지 않을 것이므로.
“그래요. 아무튼 통과했으니 마음 편히 갖는 게 좋겠지요.”
그리고 리온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자, 리온. 놀라지 말고 내 말 잘 들으십시오.”
“예?”
리온이 대번에 도로 긴장하는 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펠레아스가 털어놓았다.
“리온이 시험 치르는 모습을 꼭 보고 싶은 나머지 신분을 감추고 방청석에 있었던 사람이 한 분 더 찾아오셨습니다.”
리온도 이번에는 그게 누구인지 금방 깨달았다. 겨우 돌아왔던 핏기가 몽땅 도망가버렸다.
“혼내러 온 것도 아니고, 널 잡아먹으러 온 것도 아니니까 적당히 해라.”
마법 조사관의 검은 옷으로 얼굴과 전신을 가렸던 셀림이 맨 뒤에 있다가 다가왔다.
“원, 이 꼴을 보니 내가 정식으로 스승 자리에 앉아있었으면 진짜 너 심장마비 일으키는 꼴 봤겠구나.”
리온은 뻐끔뻐끔 하다가 겨우 목소리를 냈다.
“다 보고 계셨어요?”
“그래. 그만 하면 괜찮았다.”
리온은 눈알을 떨다 헬레나에게 눈을 돌렸다. 그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했다. 역시 내 아들이야.”
리온은 다시 뻐끔거렸다. 이 순간이 꿈만 같았다.
‘이럴 수 있으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왜 진작.....’
때를 놓친 칭찬은 마냥 기쁘게만 들리지 않았다. 그냥 개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진심이세요?”
“그래.”
제자가 바란 만큼 기뻐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는지 셀림의 미소도 어색해졌다.
“진심이니까, 이제 슬슬 적응해봐라.”
“예.”


셀림과 헬레나는 인장 수여식 때까지 리온이 느긋하게 놀며 준비하는 데 자신들이 방해만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각자 돌아갔다. 단, 수여식에도 참석해야 하므로 헬레나는 스마라그디까지 돌아가는 대신 엘프 대사관으로 갔다.
왕궁으로 돌아온 리온은 아바마마의 축하도 대충 넘겨버리고 용사들에게 찾아갔다. 역시 동료들과 있을 때가 가장 편했다.
“수여식은 마법사가 아니어도 참석할 수 있단 말이지.”
미테가 기대감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기다리는 동안 인장 수여식을 어떻게 하는지 좀더 알아봤어. 아예 사례집이 있던데?”
두껍고 새로운 이야기가 잔뜩 실린 새 책을 읽어서 미테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인장 문양은 네가 직접 정해서 만들어가야 하는데 생각해둔 거 있어?”
“응.”
시험 전 긴장하고 있던 모습에 비하면 뜻밖으로 리온이 흔쾌히 대답했다.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가는 까마귀.”
그 말에 펠레아스와 미테가 나란히 표정을 굳혔다.
“왜? 아니, 이건 내가 꼭 또 왕궁을 뛰쳐나가겠다는 게 아니고.”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정 왕위가 싫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요.”
펠레아스가 손을 내저었다.
“그래도 그 문양은 피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흔하거든요.”
“맞아. 사례집에도 나와있을 정도로.”
미테가 아예 사례 하나를 들려주었다.
“보통은 학교 졸업하고 여러 명이 한 번에 시험을 보니까, 인장도 한꺼번에 정하게 된단 말이지. 15차 시험 때 합격자 두 명이 그 문양을 고르는 바람에 문제가 됐었대. 코넬리우스 엘로즈도 아름가르트 로사 슈발렌도 서로 자기가 먼저 결심했으니 바꿀 이유가 없다고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어. 각자 집에 가서 그려보고 장인한테 주문했는데 주문일까지 같아서 누가 선점했다고 간주하기도 애매했고, 게다가 겹친 걸 알았을 때는 이미 인장을 완성해서 수여식에 가져온 뒤였거든.”
“세상에.”
리온이 놀랐다.
“넌 대체 어떻게 이름을 그렇게 잘 외우는 거야?”
“놀라는 지점이 거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냥 ‘두 명의 마법사’라고 들려줬어도 될 것을 굳이 전체 이름을 다 또박또박 들려준 미테야말로 이런 반응을 노린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두꺼운 사례집에서 미리 이 이야기를 골라 달달 외운 것도 아닌데 보고 읽는 것처럼 줄줄 읊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정도 잘난 체쯤 해도 되었다. 리온도 바로 본래 화제로 돌아왔다.
“인장의 주제가 겹쳤다고 해서 그림이 다 똑같아질 리는 없잖아? 마법사의 인장은 어차피 그림이 아니라 사용자의 마력패턴으로 알아보는 거고.”
실제로 그 이름모를 드래곤은 유스투스 호르텐시우스의 인장과 같은 그림을 사용했으나 담은 마력이 달라서 저스틴은 전혀 알아보지 못했었다.
“그래도 같은 주제인 걸 안 이상 그냥 넘어가긴 어려웠겠지. 나란히 인장시험을 봤으니 경쟁의식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펠레아스가 알 만 하다는 듯 끄덕였다. 다른 청중들도 그런 경쟁심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결했대?”
“혹시 참고할 만한 선례가 있었는지 다른 나라 지부에까지 자료를 요청했다가, 칼토니아의 중견 마법사 한 명이 역시 그 주제의 인장을 쓰고 있음이 밝혀졌대. 그래서 후배 두 사람이 다 바꾸는 것으로 결론이 났어.”
“진짜 흔했구나.”
리온도 납득한 듯 옅은 한숨을 토했다.

벨렘의 대공 23 ㅣ- 기타


두 용사와 용사의 사형을 레이노사 백작의 저택에 안내해주고, 자기 주제를 파악할 줄 아는 알렉시스는 아예 건물 안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상황을 살폈다.
‘그 백작의 아버님이 들어간 침입자가 나올 걱정은 없다고 했으니 밖은 안전한 거겠지.’
양탄자는 도로 말아 옆 커다란 나무에 기대 놔두고 알렉시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는 사람이 엘프라 그런지 별채 주위는 귀족가의 정원이 아니라 야산의 산자락 일부 같을 정도로 나무가 많았다. 그것도 정원수를 예쁘게 심고 다듬은 것이 아니라 자연 상태에 가깝게 가지치기도 안 하고 낙엽도 안 긁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풀도 고운 잔디가 아니라 어디 산의 잡초를 떠온 것 같았다.
계속 양탄자만 지키고 있는 것도 지루한 일이고, 또 못 온 아비게일 대신 미테의 활약을 잘 목격했다 전해주고 싶은 마음 때문에 알렉시스는 별채의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용사 일행은 2층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마법으로 몸을 띄워 2층 높이로 올라가는 마법사들은 그렇다 치고 튀어나온 곳도 거의 없는 수직 벽을 무슨 계단 오르듯 쑥쑥 걸어 올라가는 미테를 보니 과연 영웅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들었다.
‘음, 생각해보면 이것도 분명 역사적 사건이란 말이지. 게다가 새 용사 중 살아있는 전원이 모였고. 잘 관찰하고 기억해뒀다가 서사시나 회고록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음유시인으로서 이보다 더한 영광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비게일이 강에 뛰어들어 대공을 건지는 부분을 특히 정성들여 길게 쓰는 거다. 동경하던 영웅들과 한 서사시에 등장하면 아비게일이 몹시 좋아하겠지.
사심 가득한 미래를 꿈꾸며 알렉시스는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집안은 어두컴컴했다. 엘프들은 어두워도 잘 보인다더니 침입자도 추격자도 엘프라서 불을 켤 필요를 못 느끼는 것 같았다.
‘드미트리 경은 인간이겠지만.... 저쪽은 숨 쉬듯 마법을 쓸 테니 의미 없겠지.’
대공이 몸 상태가 나쁘다, 마력이 바닥났다 어쩌고 하면서도 아주 당연한 듯 손짓만으로 물건을 끌어오고 소리를 차단하고 해대는 걸 생각하면 사형인 드미트리 경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귀만 뾰족하지 않다 뿐이지 알렉시스 보기엔 그도 인간이 아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고 말소리는 아예 안 들렸지만 그래도 저 침입자로 보이는 엘프 넷이 더 이상 저항할 상황이 아닌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데뷔탄트 암살극의 실행범일 저들을 체포해 데려가면 여기서의 일은 끝이 난다.
‘저 사람들을 다 양탄자에 실어 가야 하나? 넷이나 더 태워갈 수 있나? 그렇대도 암살범과 같이 타고 가긴 싫은데.’
파티장에서 대공에게 화살이 박히던 순간은 지금 떠올려도 오싹했다. 튕겨 나오던 화살과 거의 동시에 그의 몸에도 화살이 박히고 사람의 몸이 화살에 밀리듯 쓰러지던 모습은...
‘.....어?’
화살은 다섯 대였다. 거의 동시에 날아와 바닥에 떨어진 화살이 둘, 박힌 화살이 셋.
엘프는 화살 두 대를 동시에 쏠 수 있는 걸까?
알렉시스가 유리를 두드리려고 손을 들었다. 그들이 전부가 아니라고 외치려 했다.
“멈춰라.”
뒷목에 칼날이 닿았다. 안쪽이 어두운 덕에 유리창엔 알렉시스의 모습이 비춰보였다. 그 뒤에 칼을 들고 선 엘프 역시.
“외부 경계를 하고 있기 다행이었군.”
그자가 알렉시스의 뒷덜미를 잡아 창문에서 떼어내었다. 알렉시스는 손 하나 까딱 못하고 그대로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비게일 안 보내길 잘했다...’
처음엔 그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 정신을 차리니 알렉시스는 억울해졌다. 차라리 모른 채 기습이었으면 어쩔 수 없었다고 할 수나 있지, 인원이 부족한 걸 눈치 채었는데 그러고도 손쓰지 못하고 잡혀버리다니.
‘내가 영웅은 아니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도움이 안 될 일이야?’
당장 살해당하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왜 살려뒀을까 생각하면 좋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뭐라도 하고 싶지만 무서워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벨포드는 용사가 아니고 용사들을 따라다닌 것 뿐이라고 하는 놈들은 다 이 꼴 당해봐야 해! 따라다니는 건 쉬운 줄 아냐! 발목 안 잡고 따라만 다닐래도 영웅급이 되어야 하는 거라고!’
공포와 무력감에 의미 없이 화를 내며, 그러면서도 여전히 손 하나 까딱을 못하며 알렉시스는 끌려갔다. 그를 붙든 엘프가 정문으로 가 문을 열어젖혔다.
“미안하지만, 감찰관 각하.”
알렉시스의 목에 칼날을 들이대고 그의 몸을 앞에 내세워 자신을 보호한 채 엘프가 소리쳤다.
“무장 해제는 그쪽에 요구하고 싶군.”
2층의 세 사람이 동시에 이쪽을 주목했다. 펠레아스의 얼굴이 경멸과 혐오감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알렉시스는 차라리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클라우스 플라비우스, 엘프 대사인 당신이 이렇게 비열한 일에 끼어들다니...”
“끼어들다니?”
클라우스가 반문했다.
“내가 주도한 것이라오, 고작 끼어든 것이 아니라.”
그가 조금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테렌시드, 당신이 얼마나 빨리 활을 쏠 수 있는지는 방금 봐서 알지. 활을 1층으로 던지시오. 어서.”
미테렌시드가 화살을 거두고 활을 난간 너머로 던졌다. 클라우스가 펠레아스와 드미트리를 보았다.
“내가 여러분 같이 재능을 타고난 천재는 아니지만 경험 많은 전투 마법사라오. 마력이 움직이는 기미만 보여도 칼을 찌를 것이니 허튼 짓은 하지 않아주면 고맙겠소.”
펠레아스가 분한 듯 이를 악물었으나 마법을 발하지는 않았다.
“대사님.”
셀레나가 클라우스에게 돌아섰다.
“부하들 챙겨서 나오게, 유키토스 대장.”
클라우스가 말했다.
“그 사람이 누군지는 알고 인질로 잡은 거요?”
드미트리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모르지만 여러분의 일행이고, 대공 전하는 자기 수하를 아끼는 분이란 건 알지요.”
펠레아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전하께서 어떤 분인지 안다면 어째서.”
“자기 수하를 챙기는 게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오? 나도 여기에 내 수하를 챙기러 온 거라오.”
펠레아스를 비웃어주고 클라우스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셀레나는 부상이 없는 부하에게 발을 다친 사람을 업으라고 지시하고 슬금슬금 문 쪽으로 물러났다.
“그냥 보낼 거에요?”
미테가 나직하게 물었다.
“인질의 안전을 위해서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만, 지금 적당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정말, 드미트리? 벌써 방법이 없어?’
드미트리가 흠칫 놀랐다. 그를 보고 있던 미테와 펠레아스도 덩달아 놀랐다.
“왜, 왜 그러십니까?”
펠레아스가 물었다. 드미트리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클라우스를 보았다. 클라우스도 그를 보며 경계하고 있었지만 마법을 쓴 것이 아니어서인지 인질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네, 사람은 다치지 않게 해주십시오.”
드미트리가 중얼거렸다.
미테와 펠레아스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클라우스와 셀레나는 인질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알렉시스는.
자길 잡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같이 뒤로 넘어갔다.
“으아악!”
“아, 미안.”
쓰러지다 말고 반쯤 누운 자세로 몸이 멎었다.
“서 있지도 못할 정도로 다리가 풀려있는지는 미처 몰랐네.”
알렉시스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건물 아주 근처에 있는 나무의 큰 가지에서 사람이 하나 훌쩍 뛰어내렸다.
알렉시스는 요정이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구름같이 가벼워 보이는 짧은 금발이 동그랗고 귀여워 보이는 얼굴에 얹혀있었다. 몸을 감싼 연두색 옷은 분명 마법사용 로브일텐데도 마치 여름용 드레스처럼 화사했다.
“세상에, 드미트리. 어떻게 이런 녀석들 상대로 아무것도 못하고 있을 수가 있어?”
그 사람이 알렉시스를 잡아당겨 일으켜 세워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침입자 다섯은 전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언제부터 보고 계셨습니까?”
드미트리가 뻣뻣한 태도로 물었다.
“얘네가 여기 도착했을 때부터.”
“...침입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은 안 드시던가요?”
“뭐하러. 보안 마법 잘 작동하던데.”
그가 생긋 웃었다.
“저.. 누구세요?”
1층으로 뛰어내려 활을 주워들고 미테가 물었다.
“셀림의 셋째 제자 로위너 프리스카란다, 리온의 친구들. 백 년 전에 포트덤에서 한 번 봤는데, 혹시 기억해?”
로위너가 기대하는 눈으로 미테를 보았다. 미테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때 ‘셀림의 제자들’이 여기저기서 적을 막거나 마왕의 건물 골렘을 파내거나 했던 건 기억이 나지만 누가 누군지 알아볼 만큼 기억이 나는 사람은 없었다.
“에이, 리온이 미테는 자기와 달리 사람 이름 엄청나게 잘 기억한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백 년 전 포트덤이면 흐라그눔을 눈앞에 둔 상황 아닙니까. 그런데서 잠깐 본 사람을 어떻게 기억합니까.”
드미트리가 질책했다.
“난 하는데.”
“평범하게 멀쩡한 사람을 누님과 비교하지 마시고요.”
순식간에 ‘평범하게 멀쩡한’ 사람이 된 미테는 눈을 굴렸으나 비교 대상이 셀림의 제 1 제자라면 항의하기도 곤란했다.
“이 사람들은 이거... 어떻게 한 겁니까?”
펠레아스가 쓰러진 사람들한테 다가가 맥을 짚었다.
“재웠어.”
“아, 집단 수면.”
미테가 납득했다. 펠레아스는 그러지 못했다.
“엘프고 마법사고 경계중이고 중간에 제외해야 할 대상도 있고 한군데 모여 있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쉽게요?”
“어려운 주문이야?”
미테가 물었다.
“리온은 백 년 전에도 썼는데. ..그 땐 해적 상대였고 한 놈은 놓쳤지만.”
“이런 게 쉽다면 마법사 범죄자들의 인생이 얼마나 편해지겠습니까.”
펠레아스가 한탄했다.
“리온 전하를 기준으로 마법사를 판단하지 마세요.”
그가 부상당한 엘프 병사들의 상태를 살폈다.
“죽이지는 않아도 확실하게 평생 전투 불능이 되도록 했군요. 대단... 하긴 한데 참....”
펠레아스가 몸을 떨었다.
“리온의 목숨을 노렸던 자들이니 원한을 품으셔도 이해는 합니다만, 그래도 이지경이 되기 전에 잡아주셨더라면 좋았을 겁니다.”
그가 로위너에게 말했다.
“내가 부탁받은 건 레이노사 백작과 그 아버지 두 명의 목숨과 안위 뿐이야.”
로위너가 냉정하게 말했다.
“실비우스 경이 여기 없는 걸 보고 그냥 가려다가 너희들 오기에 조금 더 지켜보다 나선거지.”
“그건... 감사합니다.”
드미트리가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이 범죄자들은 어디로 데려가면 됩니까.”
그가 펠레아스에게 물었다.
“원래라면 엘프 대사관으로 데려가야겠습니다만...”
펠레아스가 쓰러져 잠들어버린 클라우스를 착잡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대사가 범죄자인 지금 그곳의 인원들은 믿을 수 없고, 그렇다고 아직 사건의 전말이 다 밝혀진 것도 아닌데 벨레즈 왕실에 이들을 넘기고 엘프들은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엘프 쪽에도 벨레즈 쪽에도 적당히 대표성이 있는 곳에 둬야 한다면 리온네 별궁밖에 없네요.”
미테가 말했다.
“차라리 잘 된 일이긴 한데 대체 왕실에선 뭘 하고 있는 거죠, 피해자 주변인들이 알아서 범인 다 잡을 때까지 뭐 하나 제대로 조사한 것도 없고. 리온한테 우리 같은 친구들 없었으면 어쩔뻔 했어.”
“저는 역시 그 시종장이란 사람이 의심스럽습니다.”
펠레아스가 짧은 끈 다발을 꺼내서 쓰러져 있는 병사들의 팔을 뒤로 돌려 손목을 모아 묶었다. 마법 물품인지 매듭도 없이 손목을 휘감고 딱 맞아떨어졌다.
“엘프 대사와 인간 시의 사이에 이런 일을 모의할 정도의 접점이 있었을까요. 중간에 다리를 놔준 사람이 있었을 겁니다. 아마도 그가 주동자일거고요.”
“그건 이들을 데려가서 심문해보면 답이 나오겠지요.”
드미트리가 손짓하자 밖에 뒀던 양탄자가 날아와 바닥에 펼쳐졌다. 펠레아스가 엘프들을 그 위에 쌓았다. 눕혀 놓으려니 사람이 더 탈만한 자리는 거의 남지 않았다.
“나랑 드미트리는 날아가면 되고.”
로위너가 펠레아스를 보았다.
“저, 저도 비행마법 정도는 쓸 수 있습니다.”
펠레아스가 말했다. 미테는 놓인 사람들 안 밟게 피해서 양탄자 가장자리에 올라섰다.
“많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쯤 서 있어도 괜찮아요.”
“그럼.”
사람들 눈이 알렉시스에게 향했다.
“저, 전 그냥 걸어가겠습니다.”
올 때도 떨어질까 무서워서 가운데 앉아 양탄자 털을 움켜쥐고 달달 떨었었다. 저기 서서 하늘을 날다니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럴 순 없지.”
로위너가 그의 허리띠를 잡고 들어올렸다.
“너 리온의 부하지? 기껏 살렸는데 돌아다니다 죽으면 내가 막내한테 원망을 들어. 안 되지, 안 돼.”
발이 땅에서 떨어지자 알렉시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 안 죽을테니 제발 놔주세요오.....”
“나는 거 무서워?”
“네!”
“뭐, 좋아 그럼.”
로위너가 선선히 그렇게 말하자 알렉시스는 안도했다.
그리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벨렘의 대공 22 ㅣ- 기타

리온이 귀를 기울이듯 고개를 옆으로 갸웃했다.
“우르술라 경 실망이네, 명색 나라에서 둘째가는 치료 마법사가 발상이 이것밖에 안 되다니.”
“전하, 혼자만 듣고 계신데요.”
아비게일이 손을 들었다.
“음? 우르술라 경과 레이노사 백작의 대화인데, 뭐 다들 이미 알고 있을 이야기 뿐일세.”
“저희는 천재 대마법사가 아니어서 이미 알고 있지 못하거든요?”
멜리젠데도 항의했다.
“마법사하곤 상관없는데.... 음, 우르술라 경이 레이노사 백작에게, 이미 의심받았으니 무사하진 못할 거라며 협박하고 이참에 증오하는 대공을 죽여 원수를 갚으라고 회유하고 있어. 가방에 독병을 넣어둘 뿐이면 충분히 발뺌 가능하다고, 자기네가 뒤를 봐주겠다고.”
“사람을 바보로 봐도 유분수지.”
알베르트가 화를 내었다.
“무고해도 뒤집어쓸 판인데 제게 뒤집어씌우기 좋게 협력해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저 전하 안 증오합니다. 그저 만약에 대비해서 우르술라 경에겐 그런 것처럼 말해뒀을 뿐입니다.”
“백작은 정말 철저하구려.”
리온이 감탄했다.
“그런데 어째서 백작에 대한 우르술라 경의 시기심은 경계하지 않은 것이오?”
“.....실은 몰랐습니다.”
알베르트가 마지못해 털어놓았다.
“저를 싫어할 이유가 없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수석 시의 자리라는 게 그렇게까지 탐낼만한 것이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만은 아니었을 거요.”
리온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백작도 까마득한 강자라고, 내 말하지 않았소.”
알베르트가 떫은 표정으로 수긍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이렇게 명백한 증거물도 확보했으니....”
리온의 표정이 굳었다.
“.....이래서 백작저를 습격했군.”
실비우스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무슨 뜻입니까?”
“이, 우르술라 경이 백작을 위협하기 위해 부군을 들먹이고 있소. 납치해서 협박.... 시간을 따져보면 협박 하면서 납치하러 갔군. 걱정하실 것 없소. 그놈들은 전부 잡아다 두 사람 앞에 무릎 꿇릴 터이니.”
“셀림의 제 1 제자에 용사 중 두 명이 갔으니 그 점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실비우스가 말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로위너 누님도 직접 가실 것 같으니 말이오.”
“어떤 분입니까?”
알베르트가 기록장치를 흘끔거렸다.
“세상에서 다섯 번째로 무서운 분이시라오. 반역자들이 누구든, 이딴 짓을 저지른 걸 확실히 후회하게 만들어 주시겠지.”
“리온.”
루시텔이 말했다.
“그 다섯 명 중에 내가 안 들어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만, 기분 탓일까?”
“그야 제가 루시텔을 왜 무서워해요?”
“널 죽일 뻔 해서?”
루시텔이 제안했다.
“몇 백 번 중에 네 번이에요.”
“네 번째는 너 말고 라크리스를 죽이려고 한 거였어.”
“그게 그거죠.”
루시텔이 리온을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적 좋아하는 거 아니라고 하면 누가 믿어.”
리온이 입을 비죽 내밀었다.
“그래, 너희는 날 안 무서워해도 돼.”
루시텔이 한탄하는 어조로 말했으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너랑 미테랑...”
그가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저, 루시텔. 잠시만요.”
루시텔이 주머니에서 환약을 꺼내려는데 리온이 막았다.
“잡혀온 놈들이 예상대로 순혈주의 엘프이라면, 루시텔의 본모습을 보이는 것도 심문의 하나가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루시텔이 씩 웃으며 위장용 약을 도로 품에 넣었다.
“마주치는 모든 자에게 두려움을 사는 것이 그림자엘프의 긍지이니.”


레이노사 백작가의 별채는 나무로 둘러싸인 높은 목조 건물이었다. 이곳이 스마라그디의 진짜 엘프식 건물과 다른 점은 건물 북쪽으로 좁은 길이 나있다는 점 뿐이었다.
‘인간에게 부역하는 배신자 주제에, 그래도 고향은 그립다 이건가?’
실비우스 이크티노스가 거주하는 백작가 별채를 올려다 보며 셀레나 유키토스는 각오를 다졌다.
인간하고 붙어먹고 잡종을 낳은 배신자라고 해도, 군인이 되어서 엘프 민간인을 납치하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게다가 실비우스의 마법은 실제로 강했다. 건물을 빈틈없이 감싼 촘촘한 마력 그물을 우회해 침입하는 건 클라우스에게도 불가능했고 결국 마법 파훼 화살로 보호 마법을 파괴하고 최대한 빠르게 뛰어들어 그자의 반항을 억누르고 강제로 납치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 일이 꼬였지.’
대공만 죽이면 될 일이었다. 무방비하게 환히 드러나 있는 그를 쏴죽이고 그때 끝났어야 하는데, 화살은 대역이 맞고 독은 먹고도 도망쳐버렸다.
별궁에는 도저히 침투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거기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을 협력시키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가족을 납치해 협박하다니 끔찍한 일이었다. 그들이 잡종과 그 아비가 아니었다면 거절했을 것이다.
‘그래도, 대공이 제아무리 괴물이라지만 이미 독을 먹은 상태에서 또다시 치명상을 입으면 살아나지 못할 거다. 이것만 성공하면 돼.’
셀레나는 부하들을 이끌고 안으로 침투했다.
익숙한 구조의 건물이어서 수색은 편했다. 마법사의 집이니 함정에는 주의해가며, 이들은 안에 있을 사람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퇴로를 차단해가며 집을 샅샅이 뒤졌다.
곧 남은 곳은 침실, 서재, 연구실로 이루어진 개인 구역 밖에 남지 않았다. 숨는다면 역시 보안이 가장 잘 되어있을 연구실일 것이다. 보안 마법을 경계해 그들이 멀리서 마법으로 문을 부쉈다.
문이 손쉽게 부서지자 그들은 안도했다. 들어오기만 어려웠지 일단 들어오니 쉽다고도 생각했다. 연구실에 발을 디딘 엘프 병사가 발밑이 끈적하게 눌어붙는 느낌이 나자 코웃음을 쳤다.
“자기 사는 곳이니 위험하지 않은 함정을 만든 건 이해하지만 누가 이런 데 걸린다고.”
뭐 인간 도둑 정도는 걸릴지도, 라고 생각하며 그는 다리에 힘 강화 주문을 걸고 힘주어 다리를 당겼다.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 디딘 발밑이 화끈해졌다.
얼마나 강력한 끈끈이 주문인가 싶어 발밑을 내려다본 그가 소리를 질렀다.
신발이 녹고 있었다. 더 이상 화끈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발이 타는 듯이 아팠다.
“대장님!”
그가 비명을 지르며 팔을 허우적거렸다. 가까운 동료가 그의 팔을 잡고 당겼다. 그러나 발은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 녹고 있었다.
다른 엘프 병사 전원이 힘을 합쳐 당기자 마침내 그 병사가 바닥에서 떨어져 나왔다. 겨우 함정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그의 상태는 처참했다. 양 어깨는 뽑히고 발은 이미 아래 절반이 녹아 발뼈가 드러나 있었다. 기절한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바닥에선 떨어졌어도 부식은 계속되었다. 셀레나가 해독을 시도했으나 듣지 않았다. 대량의 물로 씻어내는 수 밖에 없는데 여기엔 그 정도의 물이 없고 있어도 안심하고 쓸 수 없었다. 마법으로 만들자니 마력도 시간도 부족했다.
놔두면 부상이 더 심해질 뿐이었다. 할 수 없이 셀레나는 지혈대로 부하의 양 발목을 묶은 뒤 발을 잘라버렸다. 목숨이라도 구하려면 이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이런 끔찍한....”
방문 바로 안쪽 바닥을 노려보며 셀레나가 이를 갈았다. 살이 타고 녹은 흔적과 냄새가 뱃속을 뒤집어 놓았다.
다른 부하 한 명에게 부상자를 데리고 대사관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한 뒤 셀레나는 반쯤 부서진 문짝을 뜯어내어 끓고 있는 바닥 위에 깔았다.
“이런 악독한 짓을 하다니, 용서치 않겠다....”
이번엔 자기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눈에 마력을 집중해 주위를 살폈다. 덕분에 닥쳐오는 물동이를 피할 수 있었다. 아까 겪은 게 있기에 실험용 물리 방어를 걸고 손으로 후려쳐 동이를 깨었다. 예상대로 강산이 들어있던 동이는 깨져서 내용물을 바닥에 쏟았다. 매캐한 연기가 올라오자 공기 정화를 썼다.
“한 번 당한 수에 또 당할 줄 알고?”
그 때 밖에서 비명이 들렸다.
셀레나가 뛰어나갔다. 비명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려가자 살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남아있던 부하가 공중에 떠있었다. 아까는 분명 아무 일 없이 지나갔던 복도 벽의 장식처럼 보이던 금속 띠가 그의 팔을 감아 매달고 있었다. 그 띠는 빨갛게 빛날 정도로 달아오른 채 매달린 엘프의 팔을 파고들었다. 셀레나가 마법 파괴 화살을 뽑아 그 띠를 쏘았다. 금속 띠가 끊어지며 엘프 병사는 바닥에 떨어져 쓰러졌다.
셀레나가 서둘러 물을 끼얹어 금속 띠를 식혔다. 겨우 띠를 제거하고 보니 팔이 거의 잘려 뼈만 간신히 이어져 있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뼈까지 태워 팔을 끊었을 지도 모른다.
‘.....대체!’
이렇게 간단히 함정에 걸릴 부하들이 아니었다. 걸린다 해도 금방 빠져나올 실력 정도는 있었다. 처음에야 방심했다 해도, 자기 부관까지 이 지경이 된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문득, 실비우스가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강적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대, 대장님...”
“말 하지 마라.”
출혈 걱정은 없지만 이런 깊은 화상 상처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그가 붕대를 꺼내 화상용 기름을 적셔 상처를 감싸고 팔을 몸통에 고정해 묶었다.
“그자는... 여기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부관이 외쳤다.
“아니라면 이렇게 정확하게 함정이 발동할 수가 없습니다. 이자는 우리를 보며 비웃고 있는 겁니다!”
“그렇겠지.”
셀레나가 이를 갈았다.
“잡아서 똑같이 해줄테다. 이런 잔악한 짓을 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둘 다 귀를 쫑긋 세웠다. 셀레나가 일어나 활에 화살을 매겨들었다.
올라온 사람은 아까 부상병을 업고 나간 병사였다.
“대장님...”
창백한 얼굴에 식은땀을 흘리며 그가 말했다.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셀레나가 어리둥절했다.
“들어올 때 집의 보호마법을 부쉈잖아?”
“그런데, 아까 우리가 깨고 들어온 곳으로 가보니 창문은 여전히 깨져 있는데 마법은 되살아나 있었습니다. 심지어.... 마력의 흐름이 아까와 다릅니다. 그물의 집중점을 찾을 수가 없어 깰 방도도 모르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그럴 리가 없다!”
셀레나가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계단의 양탄자가 미끄러졌으나 엘프 장교가 그 정도에 당할 리는 없었다. 가볍게 뛰어올라 낙하하는 철창을 피해서 난간을 딛고 1층에 착지했다.
그리고 부하의 보고가 사실임을 확인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들어올 때 본 저택의 보안마법은 정교하고 튼튼했지만 형식은 그렇게 새롭지 않았다. 그런데 안에서 보니 형태가 전혀 달랐다. 거대한 거미줄을 중심을 달리해 몇 겹으로 겹쳐 놓은 듯 어디를 부숴도 방어 전체를 부술 수 없게 되어있었다.
‘부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던 건 눈속임이었나? 우리를 끌어들여 죽이기 위한?’
공포가 셀레나의 마음을 침범했다. 그런데 갑자기 집을 둘러싼 마법이 스르륵 형태를 바꿨다.
‘뭐, 뭐지? 이번엔 무슨 공격을 하려고?’
그가 활을 들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부하들도 각자 들 수 있는 무기를 들고 주위를 경계했다.
“괜히 서둘러 와서 저들을 멀쩡히 살려줬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셀레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계단으로 이어지는 2층 복도에 활을 든 인영이 창문을 등지고 서있었다.
“그래서 다행이지요. 우리에겐 증언이 필요하고, 저들이 대사관 소속이라면 외교관 면책이 있을테니 사건의 전말을 밝히기도 전에 죽이면 리오넬이 곤란해질지도 모릅니다.”
키가 크고 짙은 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계단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만.... 살려서 체포할 수 있는 편이 좋기는 합니다.”
마지막으로 창문을 넘어 들어온 엘프 마법사가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이번에는 함정이 발동하지 않았다.
“나는 까마귀탑 스마라그디 지부 소속 1급 마법 조사관 펠레아스 림스크렐이다. 침입자들은 이름과 소속을 밝혀라!”
셀레나는 활을 들어 쏘았다. 펠레아스의 앞에 떠오른 방어 마법을 뚫고 날아간 화살이 미테의 손에 잡혔다. 받으라고 던진 걸 잡은 듯이 자연스럽게 미테가 그걸 드미트리에게 내밀었다.
“확실히, 마법사만 왔다면 조금 위험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에게서 화살을 건네받은 드미트리가 화살에 새겨진 마법을 훑어보았다.
“레이노사 백작이 말한 것과 동일한 화살입니다. 이들이 리오넬을 암살하려 왕성에 숨어들어 저격을 한 자들이라는 직접적인 증거가 될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수사 중인 마법조사관을 공격했지요.”
방어 마법이 뚫린 펠레아스는 험한 표정으로 셀레나를 노려보았다. 그가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쳐들어 보였다.
“세토나 폐하의 위임을 받은 엘프 감찰관의 자격으로, 나 펠레아스 림스크렐이 셀레나 유키토스 외 이곳에 침입한 대사관 경비대원들의 외교관 특권을 정지하고 무장 해제를 명령한다. 체포에 불응할 시 반역의 의도를 인정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그딴 게 세토나 폐하의 의지라고?”
셀레나가 분노에 떨었다.
“어차피 헬레나 그 암캐가 섭..... 아악!”
어깨에 화살이 박히고 셀레나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내가 그 양반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친구 어머니 욕을 그냥 들어 넘길 만큼 마음이 넓지는 않거든.”
미테가 차갑게 말했다.
“무장을 해제하지 않았으니 체포 불응이고, 지금 무력을 좀 썼기로서니 외교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
미테가 펠레아스를 보았다.
“저들은 이미 엘프 대사관의 일원이 아니라 벨레즈 귀족의 집에 불법 침입한 폭도들에 불과합니다.”
펠레아스가 경멸의 눈빛으로 부상병 투성이의 패잔병들을 내려다보았다.
“다시 한 번 명령한다. 무장을 해제하고 체포에 응해라.”
“미안하지만, 감찰관 각하.”
1층의 정문이 열리고 엘프 하나가 들어왔다.
“무장 해제는 그쪽에 요구하고 싶군.”



벨렘의 대공 21 ㅣ- 기타


“그렇다 해도 전하는 못 가십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실비우스의 말에 드미트리가 즉시 찬성했다.
“내가 다녀올 테니 너는 얌전하게 쉬고 있어라. 침입자들이 암살의 실행범이라면 웬만한 사람이 가선 위험하겠지.”
“레이노사 백작가에 쳐들어간 자들이라면 마법사 대비는 철저하게 했을 겁니다. 전사도 가는 편이 허를 찌를 수 있겠지요.”
미테도 나섰다.
“그들이 정말 엘프라면, 심지어 대사관의 경비대라면 저도 가야겠습니다.”
펠레아스도 나섰다.
“그 편이 공식적으로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겁니다.”
미테도 드미트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노사 백작저는 어디쯤 있습니까?”
드미트리가 물었다. 실비우스가 놀랐다.
“그런 것 쯤 전하의 마부라면...”
“마차는 늦습니다. 댁에 다른 가족들도 있을 텐데, 불상사를 막으려면 서둘러야 합니다.”
“....침입이 감지된 건 제가 지내는 별채뿐이긴 합니다만... 네, 빨리 잡는 편이 피해가 적겠지요.”
실비우스가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빨리 가시려고요?”
“날아서 갈 겁니다.”
그 말에 펠레아스의 얼굴이 헬쓱해졌다.
“여기서 벨렘 시내 거리면 배보다 양탄자 쪽이 간단할 거에요.”
그의 마음을 읽은 듯 리온이 일어나려고 꿈틀거렸다. 드미트리가 끈끈이를 풀어주자 그가 책상으로 갔다. 그리곤 지름이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보석이 박힌 금색 원반을 서랍에서 꺼내 올리버에게 던져주었다.
“2층 실험실 옆 창고방 보면 구석에 양탄자 말아놓은 게 있을 거야. 가져다줘.”
“네.”
올리버가 열쇠를 받아들고 나갔다.
“그러면 역시 제가 따라가는 것이 낫겠군요.”
실비우스가 말했다.
“레이노사 백작저의 위치라면 저도 압니다.”
아비게일이 손을 번쩍 들었다.
“안내역으로 따라가게 해주세요.”
“안 돼, 싸움하러 가는 거라고!”
알렉시스가 아비게일의 팔을 잡아 내렸다.
“싸울 줄도 모르면서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미테의 발목을 잡고 싶은 거야?”
아비게일이 입을 뻐끔거렸다.
“그, 그렇지만 누군가는 가야하잖아?”
“내가 갈게. 위치는 내가 더 잘 알지, 직접 가봤고.”
“그래도 내가 가고 싶은데....”
“내가 싸우는 걸 보고 싶은 거야?”
자기가 젊은 여성들에게 특히 인기 있다는 자각이 있는 미테가 아비게일 앞으로 갔다.
“날 좋아해주는 건 고맙지만 실전은 위험해. 아가씨가 웬만한 전사나 마법사라고 해도 여긴 데려갈 수 없는걸.”
“그렇지만 알렉시스는 저보다 더 힘없는데요!”
“체력이 없는 거지 팔씨름하면 내가 이겨.”
알렉시스가 항의했다.
“적들이 팔씨름으로 싸우자고 할 것 같아? 그리고 그러면 질 거잖아.”
“저, 내 의견을 말하자면.”
리온이 말했다.
“둘 중 누군가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면 오빠가 그러는 게 맞지 않을까?”
“전하!”
아비게일이 배신감에 찬 눈으로 리온을 노려보았다.
“동생을 지키고 싶은 마음을 알아줘. 위험한 일은 없게 할테니까....”
“잘 생각했다.”
드미트리가 그의 어깨를 꽉 잡았다.
“그러니 넌 안전하게 여기서 기다려라.”
“...그럴 거에요, 사형에 미테에 펠레아스까지 간다면 굳이 누가 더 갈 필요 없기도 하고.”
리온이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맞아. 저 정도 전력이면 드래곤도 다시 무찌를 수 있겠는걸. 나까지 갈 이유는 없겠군.”
루시텔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난 여기서 애보기를 하도록 하지.”
“다들 날 괴롭히려고 모인 거죠......”
리온이 신음했다.
“그걸 이제 알았냐.”
미테가 그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네 부고를 받게 한 벌이다.”
“힝.”
올리버가 양탄자를 들고 방에 들어왔다. 드미트리가 그걸 받아들었다.
“서두릅시다.”
드미트리가 앞장서서 걸었다.
“가실 거면 보안 해제식을 받아 가십시오.”
실비우스가 드미트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니면 위험할 겁니다.”
“위험이라니, 거주하는 곳에 위험할 만한 함정이라도 깔아둔 겁니까?”
드미트리가 어리둥절했다.
“침입자를 무사히 돌려보낼 거라면 보안 마법을 왜 쓰겠습니까.”
실비우스는 태연히 말했다.
“사형, 조심하세요.”
리온이 당부했다.
“그쯤 말 안 해도 당연히...”
“마주칠 지도 모르니까요.”
드미트리의 발이 멎었다.
“누구를?”


구금에서 놓여나자 알베르트는 곧장 별궁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걱정되어 미칠 것 같았지만 지금 그가 가본다고 해서 뭔가 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지금은 전하의 약속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알베르트는 자기 왕진 가방을 흘끔 보고 고개를 휙 돌렸다. 안에 들어있는 것을 생각하니 보기만 해도 기분이 더러워서 이 일 끝나면 전부 내버리고 새 왕진 가방을 꾸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이 일 끝나고, 자신이 무사히 살아있고 치료마법사로도 남을 수 있으면.
왼팔이 저릿저릿하게 아파오기 시작했다. 알베르트는 뻣뻣한 팔을 문지르며 조용히 진통 주문을 사용했다.
‘아버지는 무사하실까.’
걱정하지 않으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자기 목숨이라면 얼마든지 걸 수 있지만 아버지만은 안 되었다.
실은 자기 목숨도 걸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보다 딱 1년만 더 살고 싶었다. 바라는 건 그것 뿐인데.
그가 고민과 걱정과 불안과 두려움과 감상에 빠져있는 동안 마차는 빠르게 달려 별궁 정문을 통과했다. 리온 전하의 주치의 임에도 단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전하를 뵈어야겠다고 말하자 곧 안채 깊숙이까지 안내되었다.
알베르트가 마른침을 삼키고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방안에 아버지가 있는 것을 보자 갑자기 모든 긴장이 풀리며 그는 그만 안도해버렸다.
“아버지!”
“알베르트?”
실비우스가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무사했구나.”
“네, 저는....”
문득 자기 상태를 기억하고 알베르트가 한 발 물러섰다. 실비우스가 멈춰섰다.
“무슨 일이냐.”
“잠시만 가까이 오시지 마세요.”
그가 방안을 둘러보았다. 침대에 앉아있던 리온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자기 왕진 가방을 눈짓했다.
“훈증독이 들어있습니다.”
“독이라면 내게 보여라.”
루시텔이 벌떡 일어나 알베르트에게 갔다. 그림자엘프가 다가와자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던 알베르트는 곧 상대를 알아보고 가방을 내밀었다.
“조심해서 다뤄야 합니다.”
알베르트가 불쾌해하면서도 주의를 주었다.
“모든 독을 관장하시는 뮬렘의 사도인 내가 설마 독을 못 다룰까봐?”
루시텔이 가방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코르크 마개로 막힌 큼직한 병 안쪽이 뿌옇게 연기로 흐려져 있었다.
“벌써 반응이 시작되었는걸. 그냥 놔두면 곧 저절로 터지겠지. 그놈들은 백작도 살려둘 생각이 없었어, 뭐 이미 알고 있겠지만.”
어둡게 빛나는 검은색 막이 유리병을 감쌌다.
“이대로 뒀다가 한가해지면 강에라도 던져버려라. 숨으로 들이쉬는 독이라 아주 많은 물로 희석해버리는 게 제일이야.”
“물고기한테는 해가 없는 건가요?”
리온이 물었다.
“난 네가 지성체까지만 신경 쓰는 줄 알았다만.”
“강에서 잡히는 물고기는 결국 사람이 먹으니까요.”
루시텔이 병을 조금 노려보았다.
“물고기까지는 잘 모르겠군. 사막에 묻든지 바다에 던지든지, 둥지에 독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선물하든지 그건 알아서 해라.”
“그럴 게요.”
루시텔이 독병을 책상 위에 놓았다.
“그걸로 안전한 겁니까?”
알베르트가 물었다.
“뮬렘의 품에 독이 있으니 그분께서 쓰시고자 마음먹기 전까진 아주 안전하지.”
루시텔이 보증해주었다. 알베르트가 나직이 한숨을 토하고 왼팔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가 주문을 읊자 얇은 칼날이 나타나 오른손에 잡혔다. 그가 잠시 머뭇거렸다.
“아버지께서는 안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실비우스의 표정이 험해졌다.
“그놈들이 네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이건 적이 한 짓은 아닙니다. 그저.....”
그가 아버지 쪽에서 안 보이게 자기가 돌아섰다. 그리고 왼팔을 길게 절개하고 상처 안에서 손가락 두 마디 정도 길이의 마름모꼴 보석 조각 같이 생긴 걸 꺼내 리온 쪽으로 던졌다.
리온이 손을 뻗자 묻어있던 핏방울은 날려 사라지고 보석만 그의 손끝에 와 섰다.
“그게 뭡니까?”
실비우스가 물었다.
“극소형 기록장치요. 로위너 누님의 작품이라오.”
리온이 팔을 봉합해 상처를 치료하고 손가락을 움직여보는 알베르트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누구였소?”
“우르술라 경입니다.”
알베르트가 내뱉듯 말했다.
“하.”
리온이 탄식했다.
“그렇군, 그게 믿는 구석이었어. 내가 화살로 다 죽지 않아도, 시의가 치료하는 척 마저 죽일 수 있으니까....”
그가 눈을 깜빡였다.
“어, 그럼, 어제 독 먹었을 때 나 그 자리에서 그냥 기절했으면 정말로 그대로 죽었겠네?”
비이성적인 생각이라 여기면서도 본능대로 집으로 날아와서 살았다. 그러다 또 죽을 뻔 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게 옳은 판단이었다.
리온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올리버가 다가와서 그의 소매를 꼭 붙들었다. 리온이 그의 손등을 토닥여주었다.
“아무래도 그 사람, 전하께서 제게 근위기사를 보내고 나서야 절 이용해 여기 침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나 봅니다.”
알베르트가 말했다.
“어제 밤새는 내버려 두더니... 라인힐드 경에게서 이걸 전달받았을 때는 솔직히 뭔지도 모르는 걸 몸에 넣으라니 미친 거 아닐까 생각했습니다만.”
“설명이 많이 부족했소?”
리온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보기에도 강력한 마법물품인 건 틀림없으니 잘 감춰야 한다는 점은 이해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생살을 찢고 숨기다니.”
실비우스가 알베르트에게 다가가 그의 왼팔을 손으로 감싸 쓰다듬었다. 알베르트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상대가 탐지 마법을 쓸 경우 이게 가장 확실하니까요.”
“...그래도.”
실비우스가 안쓰럽다는 눈으로 아들을 보았다. 알베르트가 그에게 슬쩍 몸을 기댔다.
“아참, 전하.”
알베르트가 리온을 노려보았다.
“라인힐드 경은 무고하다는 걸 언제 아셨습니까?”
“그의 스승인 우리 셋째 사자가 벨렘에 온다고 들었을 때부터.”
알렉시스는 리온이 양피지에 대고 혼잣말하던 꼬라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무고하지 않았다 한들 뭐, 자기 스승님의 명령을 거스를 수는 없는 것 아니겠소.”
리온의 손끝에서 보석이 빙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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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보다 1년 더 살고 싶다 = 아버지 장례 치르고 복상 다 한 뒤에 미련 없이 죽고 싶다. = 줄초상 치를 다른 가족들 사정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알베르트도 참 나쁜 놈이란 말이지요....(한숨)

리온의 인장 1 ㅣ- 기타


---------------원작자인 보행자가 쓰는 것이니 외전이라고 하는 편이 옳겠습니다만, 그냥 팬픽처럼 편하게 읽어주세요.


흐라그눔을 파괴하고 그림자엘프 사교도의 수장 킬라우나를 죽인 공로로 새 용사들은 한동안 인정받고 여기저기 불려다니고 작위도 받고 상도 받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온갖 칭송과 축하와 축제의 물결이 겨우 누그러지고 찾아온 망중한을 용사들은 벨레즈 왕궁에서 지내게 되었다.
새 용사 중 여러 명이 벨레즈 출신이기에 자연스럽게 그리 된 것만은 아니었다. 가령 조르주는 슬슬 델로레인으로 돌아오라는 형님의 편지를 받았다.
“그래서 일단 조금만 더 있다 돌아간다고 답장을 쓰는 중입니다.”
용사들은 대개 점심을 다같이 모여서 먹고 아침과 저녁을 각자 따로 먹었다. 서로의 기상 시간과 취침 시간이 다 다른 데다 특정한 기준에 맞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고 강제할 사람이 없어서 점심때가 가장 모이기가 쉬운 때문이었다. 그래도 다들 모여서 잡담하는 이 시간을 좋아했다.
“리온 전하의 인장 수여식에 빠질 수는 없으니까요.”
“아직 시험도 안 봤는데 벌써부터 인장 받아놓은 것처럼 말하긴.”
리온이 쑥스럽게 웃자 미테가 옆에서 콕 찔렀다.
“너 설마 지금도 네가 떨어지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시험일이 내일이니 수여식까지 참석하고 돌아가는 게 합리적이지요.”
조르주도 시험일이 아니라 수여식이 내일인 것처럼 덧붙였다.
“리온도 이젠 자신감을 많이 얻었으니 너무 놀리지 마십시오.”
펠레아스는 조금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말했다.
“내일이 인장 시험인 마법사가 편히 먹고 마실 수 있으면 충분히 긴장 풀고 준비하는 겁니다.”
리온은 씹던 고기를 그대로 꿀떡 삼켜버렸다. ‘인장 시험에 반드시 낙방하는 주문’이 걸린 고기를 먹은 표정이었다.
벨포드와 조르주처럼 인간들의 상류사회에 익숙한 사람들은 어색하게 동작을 멈추었다.
“리온은 사형부터가 나서서 긴장 풀라고 막 괴롭혔거든요.”
시에나가 하하 웃으며 분위기 수습을 시도했다.
“아까도 점심때 된 것도 잊고 책에 파묻혀 있는 걸 드미트리 경이 억지로 끌어냈어요.”
사실은 시험공부에 열중해서가 아니라 책을 읽는 도중이었기 때문에 억지로 끌어내야 했던 것은 아닌가 조금 의심스러웠으나 그것까지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고보면 인장 수여식은 마법사에게 중요한 행사인데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군요.”
조르주도 이야기를 돌렸다.
“저도 참석해본 적도 없고 어떤 의식을 치르는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뭔가 비밀이 있는 건가요?”
“아닙니다. 마법사 인구가 그 외 인구에 비해 눈에 띄게 적다보니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르게 되는 겁니다.”
펠레아스가 설명했다.
“엘프들만 해도 모두 마법사지만 모두가 인장을 받는 건 아닙니다. 까마귀 탑 지부들도 각지의 실정에 맞게 기준을 달리 적용하고요. 엘프들은 마법 연구 자체에 인생을 바치는 사람들만 인장을 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마법사거나 마법사 사회를 깊이 이해하는 사람뿐이었다. 즉 이 자리에선 리온과 저스틴, 펠레아스, 루시텔뿐이었다.
“그럼 수여식도 나라마다 다르겠네.”
시에나가 보다 직접적으로 호기심이 동하는 화제를 꺼냈다.
“벨레즈의 수여식은 어떤 식이야?”
여기 벨레즈에서 인장을 받은 마법사는 한 명뿐이었다. 리온은 적의 공격에 대비하는 눈빛으로 저스틴을 주목했다.
“까마귀 둥지가 있는 나라의 수여식이라 겸양을 첫째가는 미덕으로 삼고 검소하게 치른다.”
저스틴이 일단 평이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결과는 시험 본 그날 나온다. 그러면 인장에 새길 문양을 정하고 스승에게 허락을 받아서 스스로 인장을 만든다. 그리고 가족, 스승, 친지 등이 보는 앞에서 증서를 수여받으며 인장을 공개한 다음 증서에 그것을 날인한다. 탑에서 보관하는 증서와 개인이 보관하는 증서 둘이 있는데 그때 찍은 인장으로 본인을 판별하기 때문에 피치 못할 사정이 없는 한 새 인장을 만드는 일은 없다.”
시에나는 저스틴의 소박한 청동 인장을 바라보았다. 시에나가 보고 있는 걸 깨닫고 저스틴이 자기 손을 들어보였다.
“인장의 재료나 형태는 순전히 본인 재량이다. 나는 돈도 없고 키멘의 금속이 청동이니까 이걸로 했는데 너는 사정이 다르겠지.”
왕자님에게 가난한 동료가 품음직한 자격지심 같은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가난한 주문사용자의 제자라는 환경조차도 스스로 주의 깊게 선택한 것이니 당연했다.
“인장에 거는 판별 마법과 보호 마법은 규격화된 것이 있지만 너라면 더 강력한 마법을 걸 수도 있을 거다. 규격 마법을 써야 한다는 강제는 없다.”
“그래?”
까마귀 탑에서 규격화해 널리 쓰이는 마법이라면 이미 충분히 강할 터였다. 자기가 그보다 강한 마법을 쉽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리온에겐 아직도 잘 와닿지 않았다.
“증서를 하나는 까마귀 탑에서 나온 교수가 갖고, 하나는 새 인장마법사가 받은 뒤 교수가 수여식이 끝났음을 선언한다. 정식 절차는 여기서 끝이고 새 인장 마법사가 선물을 돌리거나 축연을 연다. 네 경우엔 왕궁에서 알아서 축연을 준비하고 있으니 그건 신경쓸 것 없다.”
“그렇겠지.”
리온도 벌써부터 축연까지 걱정할 만큼 느긋하지는 않았다. 실은 다들 이렇게 벌써 시험 끝난 것처럼 말하는 것도 어색하기만 했다.
‘그래도 괜찮겠지. 사형들도 그렇게 말했고 스승님도 그랬고.’
스승님을 떠올리자 다시 몸이 떨렸다. 이렇게 방심하고 있다가 시험 당일에 큰코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인장 시험은 역시 인장을 지닌 마법사에 한해서 자유롭게 방청이 가능했다. 자칫 공정성에 의문이 제기되면 걷잡을 수 없어지므로 아예 투명하게 공개해버리는 것이었다. 입장시간만 제대로 지키면 사전신청도 필요없이 들어가 앉을 수 있었다.
펠레아스는 리온이 시험을 볼 장소인 까마귀 탑 벨레즈 지부의 대강당에 착석했다. 들어올 때 인장과 신원을 확인했지만 벨레즈 인장 마법사들 사이에 유행하는 흔한 옷을 입고 머리카락과 옷깃으로 뾰족한 귀를 가렸다. 그리고 주의력을 흐리는 마법을 썼다.
어차피 이미 방청석은 벨레즈뿐 아니라 대륙 각지에서 날아온 수많은 마법사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약간의 마법으로도 자신의 존재를 감출 수 있었다.
평소엔 소강당에서 치르는 인장 시험을 대강당에서 치르는 것도 이런 상황을 예측한 벨레즈 지부장의 조치였다.
인장 시험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었다.
전반부엔 수험자가 자신의 마법 지식, 혹은 마력의 크기나 조작 능력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 마법을 시연한다. 마력 컨테이너나 마법 물품의 도움을 받는 것은 당연히 금지된다.
후반부엔 마법 연구 논문을 가지고 나와 발표한다. 대개 전반부에 선보인 마법의 이론적 기반이 된 논문이다.
리온은 가출 전에 이미 인장 시험을 다 준비해놓은 상태였다.
왕실 안팎에서의 불화와 소통 부재, 스승과의 불화가 가출까지 하게 만든 원인이라고 들었다. 미테렌시드나 시에나는 가족 문제가 원래 그렇게 어려운 법이라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지만 펠레아스는 인장 시험 직전이었던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거라고 여겼다. 아버지의 재혼이나 사제간의 문제나 하루이틀 된 일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무책임한 성격도 아닌 리온이 하필 시험 직전 가출한 것이 우연일 리 없었다.
검은 로브로 얼굴까지 가린 마법사 세 명이 들어와 방청석 주위에 섰다.
방청석에서 시험을 방해하지 않는지 감시하는 마법 조사관들이었다. 본래 두 명이 하는 일이지만 이번엔 세 명이었다.
수험자가 리온이고, 스승 대리로 와 있는 사람이 드미트리 경이니 방청석에 그림자엘프 사교도가 떼로 앉아있다가 공격한다고 해도 리온이 죽을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펠레아스 자신도 그저 리온의 시험을 구경할 마음만으로 오지는 않았다. ‘열 사람이 열 사람을 감시한다.’라는 공개 시험의 논리에 따라 무장이 허용되는 것을 이용해, 흐라그눔 파괴 후 처음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 무장하고 들어왔다.
‘그래도 설마, 이 모든 마법사들이 다 사교도에게 포섭되거나 바꿔치기 되었을 리 없지.’
공개 시험과 자율 방청의 장점을 새삼 실감하고 무대로 주의를 돌렸다.
무대 위의 작은 방청석에 시험관 여럿이 앉아있었다. 그들에게서 약간 떨어진 자리에 드미트리 경이 있었다. 보통은 수험자의 스승이 앉는 자리라서 셀림이 없는 걸 보고 실망하는 기색들이 방청석에 공기처럼 차올랐다.
시험관 대표가 연단에 섰다.
“까마귀 탑의 전통에 따라, 리오넬 안드바리 이쿠스티카 프리마라 벨레니스가 이 길에 함께할 동료로서 합당한 자질을 지녔는지 판정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리온에겐 미안하지만 펠레아스에겐 좀 거슬리는 개회사였다.
엘프 지부에서 시험을 치를 때는 ‘까마귀 탑의 전통에 따라, 그리고 지부 장로단의 의지에 따라’라고 말한다. 까마귀 둥지 아래 모두 한 탑이라고 이론상으로는 말하지만 실제로 각 지부에서 마법사들을 통솔하고 총괄하는 집단은 탑 최상층의 장로단이므로.
벨레즈 지부의 장로들이 유난히 겸손한 것이 아니었다. 벨레즈 지부야말로 까마귀 둥지의 직접 통제를 받는 ‘적자’이므로 정통성 면에서 우월하다는 은근한 과시였다. 실제로 까마귀 둥지는 엘프 지부에 간섭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벨레즈 지부에도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음에도. 벨레즈 지부의 행정 역시 장로단에서 알아서 하고 있을 터였다.
다행히 개회사는 짧게 끝나고 곧 무대 한쪽의 작은 문이 열렸다.
오늘의 주인공 리온이 등장했다. 펠레아스의 관심도 다른 방청객들 모두의 관심처럼 그리로 쏠렸다.
리온은 가는 금사슬로 소박하게 장식된 붉은 색 로브 차림이었다. 머리카락 색깔과도 잘 어울리고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잘 차려입은 티가 나는 걸 보니 리온 말고 딴 사람이 고른 옷이 분명했다.
리온은 엄숙한 태도로 시험관들에게 절하고, 다음으로 사형에게 절했다. 동작에 흠잡을 곳은 없지만 역시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시험관 중 한 명이 손을 들어올렸다. 전반부가 시작되었다는 뜻이었다.
리온은 준비된 좌대 앞으로 다가갔다.
물건에 마법을 거는 경우 그 표준 대상이 되는 쇠구슬이 좌대에 놓여있었다. 리온은 손을 뻗어 구슬을 가리키고 입속으로 몇 마디 달싹였다. 그러자 쇠구슬이 천천히 좌대에서 떠올랐다.
‘시작부터 셀림의 제1 제자답군.’
굵은 사과만한 크기의 쇠구슬을 띄우는 것은 인장 마법사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저 정도로 짧은 주문 몇 마디만으로 띄울 수 있는 마법사는 흔치 않았다.
리온은 좌대에 손을 짚었다. 구슬과 같은 강철 재질의 좌대에 마법진이 그려지고 김이 솟기 시작했다.
구슬이 붉게 달아올랐다. 주위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강철 구슬에 열을 가해 녹일 작정인가? 저런 자리에서?’
리온은 전반부에 증명할 것으로 마력 용량을 택한 모양이었다. 열을 집중하도록 고안된 용광로도 아니고 그냥 공기중에서 강철을 저만큼 가열할 수 있는 건 분명 인장 마법사들에게도 흔치 않은 재주였다.
강철 구슬은 이제 붉게 빛나는 빛 구슬이 되어있었다.
리온은 눈을 찡그리고 한 손을 자기 눈앞에 슬쩍 내저었다. 그리고 다시 좌대 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방청석에서 작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좌대의 마법진은 두 개로 늘어 있었다. 강철을 녹일 정도의 주문을 유지하면서 어느새 마법진을 하나 더 그렸다.
그러나 방청석이 동요한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구슬 주위를 감싸고 어느새 거무스름한 막이 나타나 있었다. 열이 집중되어 시뻘겋게 빛나는 구슬의 빛이 리온과 사람들의 눈을 찌르지 않는 것은 저 얼음 막 덕분이었다.
‘대체 몇 가지 마법을 겹쳐 쓰고 있는 거야?’
강철을 녹일 정도의 열기 앞에서, 그저 손짓만으로 주위의 수증기를 모아 얼음 막을 만들었다. 먼지 농도를 높여 색을 탁하게 만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걸 띄워놓고 두 번째 마법진에 집중해 있었다.
즉 저 얼음막과 두 번째 마법진 둘 중 하나는 리온의 집중력을 거의 소모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두 번째 마법진은 좌대 위로 둥실 떠오르더니 진 자체가 움직여서 깔때기 모양으로 둥글게 접혔다.
이제는 작은 태양처럼 보이던 쇠구슬의 모양이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이미 한참 전에 완전히 녹아버린 것을 여전히 구 형태로 유지하고 있던 것도 리온이었다.
쇳물이 깔때기 위로 흘러내렸다. 마법진이 거푸집처럼 쇳물의 모양을 잡았다.
돌연 시험관 중 한 명이 리온에게 손을 뻗었다. 수정으로 된 작은 표창이 날았다.
표창은 깔때기를 정확히 노리고 있었다. 리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챙강!
수정 표창은 리온과 시험관들 사이의 중간 정도 거리에서 박살나 버렸다. 리온은 벌벌 떨며 강철을 깔때기 모양으로 성형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펠레아스는 시험관이 ‘이렇게 쉽게 부서질 리가 없는데.....’라고 하고 싶은 듯 표정을 구기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전반부의 마법 시연 도중 시험관이 방해하는 건 수험자의 수준이 높을 때 난이도 조절 명목으로 간혹 있는 일이었다. 시험 전에 방해가 있을 테니 너무 놀라지 말고 침착하게 대처하면 된다고 귀띔도 해주기 때문에 보기보다 위험하지 않았다.
펠레아스도 엘프들 사이에선 천재라 불리기에 방해를 받았었다.
그는 순전히 바람을 조종하는 마법만으로 쇠구슬을 부수었다. 시험관은 그 구슬에 강화 주문을 걸어버렸다.
펠레아스는 강화 주문을 빠르게 해제하고 강철 구슬을 고운 쇳가루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지금의 리온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표창이 깔때기를 부수기 직전에야 막아냈을 것이다.
펠레아스는 여행 도중 리온이 썼던 마법들을 돌이켜보았다. 그가 마법 물품 제작이나 가공을 전문으로 익혔다는 낌새는 느낀 적 없었다.
‘그의 전공은 그럼 뭐지?’
리온은 누구보다도 많은 마력을 지녔다. 공격 기술은 단순했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급하면 즉석에서 새 주문을 만들어 썼다.
리온과 함께 흐라그눔과 킬라우나와 맞서 싸우기까지 했지만 펠레아스는 그의 주력분야도 마력 한계도 알 수 없었다.
이 시험을 참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리온에게 인장을 지닐 자격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기습적인 방해도 실패로 돌아가고 리온은 슬슬 결과물을 완성해가고 있었다. 실험용 깔때기라는 것이 방청석에서도 잘 보였다.
이제는 웅성거리는 사람들도 없었다. 강철을 서투르게 녹이면 연철이 되어버려 다시 굳혀도 쓸모없어지는데, 리온이 만든 깔때기는 여전히 강철 특유의 옅은 광택을 머금고 있었다.
완성된 깔때기가 공중을 날아 시험관들 앞에 도착했다. 리온은 여전히 불쌍할 정도로 긴장해 있었으나 지친 기색은 없었다.

벨렘의 대공 20 ㅣ- 기타


리온은 잠시 숨소리도 내지 않고 루시텔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루시텔은 그 이상 위안이 될 만한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렇군요.”
리온이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가 뒷걸음질 쳐 침대에 걸터앉았다.
“데뷔탄트 무도회에서 암살이라니, 어딘지 선전포고 한 번 제대로 하네요. 델로레인하곤 그동안 이렇다 할 충돌 한 번 없었는데, 에이벤틴일까요? 솔직히 제가 그 쪽은 좀 이것저것 했으니까... 칼토니아는 국경도 직접 안 닿고.”
“저....리온.”
미테가 매우 조심스럽게 지적했다.
“벨레즈와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 하나 빼먹었어.”
리온의 어깨가 빳빳하게 굳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펠레아스가 벌떡 일어났다.
“엘프들은 벨레즈의 우방입니다, 심지어 지금 섭정은 헬레나 공입니다! 설령 스마라그디가 어떤 이유로 벨레즈와 전쟁을 결심했다 한들, 모후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암살하려 하실 리 없지 않습니까!”
방안이 고요해졌다. 모두 펠레아스나 리온을 쳐다보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실비우스가 입을 열었다.
“일부 엘프라면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스마라그디 내에 반 인간, 반 하프엘프 파는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런 자들이 마침내 대놓고 활동하기로 결심했다면, 리온 전하를 목표로 삼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소수의 불평분자들이 이렇게까지 큰일을 저지를 수 있다니 믿기 어렵습니다. 암살은 화살과 마법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닙니다.”
펠레아스가 도움을 청하는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엘프가 했다는 증거라도 있는 겁니까?”
“왕궁에 들어가서 저격 위치를 추정해 봤는데, 눈에 안 띄고 저격이 가능한 위치에서 그 정도로 정확하게 활을 쏘려면 인간은 불가능했어.”
미테가 말했다.
“인간도 마법으로 시력이나 근력을 향상할 수 있습니다. 엘프 아니라 하프엘프일 수도 있고....”
“풀이 안 밟혀있었어.”
미테가 조금 안쓰러워하는 눈으로 펠레아스를 보았다.
“종족이든 힘이든 다 무시하고, 화살이 날아가는 게 가능한 방향 전부를 뒤졌지만 풀이 밟힌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어. 인간이나 하프엘프는 흉내낼 수 없는 재주이니...”
펠레아스는 망연자실한 얼굴을 했다.
“저, 실행범은 엘프라고 해도 말입니다.”
올리버가 손을 들었다.
“왕궁에 숨어들어 암살을 하고 무사히 도망까지 가려면 왕궁 내 인간 협력자가 필수적입니다. 아까 저...분이 말한 ‘나라’에, 벨레즈는 포함 안 되는 겁니까?”
루시텔까지 포함해서 방 안의 전원이 올리버를 쳐다보았다. 불편한 주목에 목을 움츠리면서도 올리버는 말을 계속했다.
“폐하를 의심하시란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폐하께 충성하는 신하들 중에도 전하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특히 시종장은, 개인적으로도 전하를 미워한다고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들리는 소문으론 전하의 귀국도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라면 차에 독을 넣는 것도 간단합니다.”
“하지만 그 차는 폐하도 마셨어.”
리온이 반론했다.
“그런 위험을 감수했을 리는 없어, 아무리 펠레텐 백작이 나를 방해물로....”
“펠레텐 백작이라고요?”
멜리젠데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벨레즈 조정 중신 중에 펠레텐 백작이 있어요?”
“그런데요.”
리온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멜리젠데를 보았다. 멜리젠데가 그를 노려보았다.
“전하께서 절 잊어버리신 게 이번이 다섯 번째이긴 한데요, 그래도 얼굴이나 이름은 몰라도 어떻게 그걸 잊어버리실 수가 있어요?”
리온이 미테를 쳐다보았다. 미테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인데. 그 사람 전체 이름이 뭐지?”
“보리스 게르홀트 요르테반입니다.”
올리버가 말했다.
“오래된 왕당파에 친 엘프 가문이고요.”
“친 엘프라고요. 하!”
멜리젠데가 코웃음 쳤다. 그리고 미테를 보았다.
“저는 멜리젠데 유프라토스, 한때 펠레텐 백작부인 멜리젠데 유프라토스 요르테반이라 불렸답니다.”
“아!”
미테가 소리쳤다.
“그, 남편에게 감금당해있던?”
“네. 그 이후 파울 공의 수행원으로 병영에 갔을 때도 만났는데 기억하시나요?”
“아, 그 땐 기억이 안 나네요.”
미테가 미안해했다.
“그때는 좀... 너무 정신없는 일이 많아서요.”
“그땐 그렇긴 했지요.”
멜리젠데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남편에게 감금되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실비우스가 놀라 물었다.
“제 인간 남편 크리스토프 앙스게르 요르테반이 의처증에 시달리다 못해 마력고갈진을 새긴 방을 만들어 절 3년이나 가둬뒀답니다. 부인하고 사이가 좋았던 사람은 이해 못하겠지만요.”
실비우스의 얼굴이 굳었다.
“아, 그, 그때요?”
리온이 드디어 기억해냈다.
“그때 그 백작이....”
“크리스토프 앙스게르 요르테반이라면 현 백작의 할아버지의 형입니다.”
올리버가 말했다.
“엘프 부인을 맞았지만 아이가 없었지요.”
“없어서 정말 다행이었지.”
멜리젠데가 말했다.
아비게일이 놀란 얼굴로 올리버를 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올리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벨레즈 귀족 명부는 전부 외우고 있습니다.”
“그걸 다요?”
“전하께 필요한 일이니까요.”
자기도 보좌관이 되려면 저 정도는 해야 하는 건가 아비게일이 두려움에 떨었다. 알렉시스가 그에게 슬쩍 고개를 숙였다.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지 않아?”
“닥쳐.”
“하지만 본인도 아니고, 동생의 손자면 관련 없지 않을까요?”
리온이 말했다.
“이전 백작이 그 일로 반 엘프, 반 하프엘프로 돌아섰다고 해도 흐라그눔 토벌 이후 제가 귀환한 뒤에는 그런 생각을 공공연히 주장할 수 없었을 거에요. 직계도 아닌 후손들은 그저 자기네가 친 엘프 파라고 생각하며 살았을 수도 있다고요. 현 백작은 엘프 대사와 개인적으로도 절친하고....”
“그러고보니.”
루시텔이 말했다.
“벨렘 한복판에 엘프 정예 부대가 있었군 그래.”
잠시 차가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대사관 경비대장인 셀레나 유키토스는 나도 만나본 적이 있는데, 명백히 친 인간파이고 명예를 아는 젊은이요.”
실비우스가 말했다.
“엘프 대사인 클라우스 플라비우스도 오래 알고 지내....”
“카론 유키토스!”
미테가 소리 질렀다.
“펠레텐 백작은 몰라도 이건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그 병영의 부대장이 카론 유키토스였잖아. 엘프한테 유키토스가 그렇게 흔한 성일까?”
“아닙니다.”
펠레아스가 말했다.
“하지만 그게 왜 리온을 죽일 동기가 됩니까?”
“시어드릿이, 하프엘프가 주가이아의 사제였으니까.”
리온이 내뱉었다.
“시어드릿이 카론 유키토스를 죽였어. 하프엘프는 엘프를 증오하고 엘프는 하프엘프를 증오하니까. 이 연쇄는 끝나지 않는 거야? 겨우 엘프를 증오하지 않는 하프엘프 한 세대를 일궈놓았는데, 이젠 엘프들이!”
“리온.”
펠레아스가 그의 말을 잘랐다.
“저스틴하고 똑같은 소리 하지 마십시오.”
리온은 소리 없이 침대에 쓰러졌다. 미테와 루시텔이 펠레아스를 보았다.
“....두 분은 그 자리에 없었지만, 저스틴은 진짜로 그런 소릴 했습니다.”
펠레아스가 변명했다.
“응, 그랬으리라는 건 조금도 의심 안 하는데....”
미테가 이마를 짚었다.
“이미 둘 다 죽었는데도 시에나를 말리고 싶다.....”
이불에 고개를 파묻은 리온 쪽에서도 웅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때 뺨을 때리긴 했습니다.”
펠레아스가 덧붙여주었다.
“그것 참 위안이 되는군.”
루시텔이 한탄했다.
“나 쓰던 거 코미디로 개작할까봐.”
알렉시스가 아비게일의 귀에 속삭였다.
“살고 싶으면 하지 마.”
아비게일이 마주 속삭여주었다.
“그런데, 셀레나 유키토스가 카론 유키토스의 인척이어서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여겨 날 죽이려 하는 거라면.”
리온이 고개는 여전히 침대에 파묻은 채 옆에 있는 석고 두상을 통해 말했다.
“그렇다 해도 인간 협력자는 필요해. 그 후 독살 시도를 생각해 볼 때 궁 내 사정에 밝고 권한이 크면서 자기 동기 역시 있는 인간이. 게다가, 내가 여기에 돌아온 이상 그들에겐 더 이상 방법이 없어. 이제 그들은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려고 할까?”
“방비에 자신이 있는 거냐?”
루시텔이 물었다.
“직접 침투 해봤으니 알겠지요. 어떻던가요?”
리온이 되묻자 루시텔이 즐겁다는 듯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참 죽이기 힘든 왕자님이라니까.”
“칭찬 고마워요. 그래서 그들이 자기 보신을 하려면 뒤집어씌울 상대가 필요하잖아요....”
실비우스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그가 벌떡 일어났다.
“전하.”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처소에 침입자가 들었습니다.”
침대에 엎드려 있던 리온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럼 침입자를 추적해서....”
“일부러 풀어주고 쫓는다니, 그게 얼마나 오만하고 멍청한 생각이었는지는 그 때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실비우스가 이를 갈았다.
“이제 제 보안 마법의 목표는 침입의 봉쇄, 그리고 침입한 경우 탈출을 막고 적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겁니다.”
그의 눈빛이 어둡게 빛났다.
“독안에 든 쥐새끼들을 잡으러 가야겠습니다.”
“안되오.”
리온이 서둘러 일어났다.
“위험한 일이오. 내가 갈터이니...”
“가긴 어딜 간다는 거냐(야).”
드미트리, 루시텔, 미테렌시드가 동시에 말했다.
“자, 환자는 쓸데없는 소리 말고 누워서 쉬기나 해.”
미테가 빠져나가려는 리온을 달랑 들어다 침대에 올리고 이불로 돌돌돌 말았다.
“미, 미테! 나 숨!”
석고 두상이 외쳤다.
“이걸로 숨은 못 쉬어?”
미테가 두상의 코를 찔렀다.
“못 쉽니다.”
드미트리가 이불말이의 얼굴 부분만 까주었다.
“사형....”
“마력도 안 남은 주제에 위험한 곳에 갈 생각은 하지도 마라.”
드미트리가 이불 덩어리를 끈끈이로 감싸 침대에 붙여버렸다. 리온이 꿈틀거렸지만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만 말고 실비우스 부군도 말려주세요.”
리온이 처량하게 부탁했다.
“제 일인데 제가 가지 말라는 겁니까.”
실비우스가 화를 내었다.
“제 집에 침입한 놈들을 위험하다고 해서...”
“부탁이니 부디 안전한 곳에 있어주시오.”
리온이 말했다.
“실비우스 경이 해를 입으면 내 무슨 낮으로 레이노사 백작을 다시 본단 말이오.”
“전하께선 제게 그리 말씀하실 자격이 없습니다!”
실비우스가 소리쳤다.
“그자들이 알베르트에게 해를 입히기라도 한다면...”
“백작은 지금 자택이 아니라 왕성에 있소.”
리온이 서둘러 말했다.
“지금은 왕성도 안전해 보이지 않으시겠지만, 그 점도 조치를 취해놓았으니 백작의 안전만은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오.”
“그렇... 습니까.”
그 말에 실비우스가 조금 진정했다.



벨렘의 대공 19 ㅣ- 기타

그림자엘프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식으로 침입자를 가려내다니, 리온이 재미있는 짓을 다 했구나.”
문이 쾅 열리고 안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침입자에게 지팡이를 겨누었던 펠레아스가 멈칫멈칫 무기를 내렸다.
“루... 루시텔?”
“와있었나. 오랜만이군.”
루시텔이 씩 웃었다.
“좀 비켜줘요!”
방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리온이 사람들 틈을 뚫고 나왔다.
“루시텔!”
그가 환하게 웃으며 루시텔에게 가려다 비틀거렸다. 루시텔 쪽에서 리온에게 다가와 그를 붙들었다.
그리고 표정을 찌푸렸다.
“분명히 암살을 피했다고 들었는데, 어쩌다 몸 상태가 이지경이 난 거냐?”
리온이 뭐라 웅얼거렸다. 그러나 멀어서 잘 들리지 않았다.
리온이 손짓하자 방안에서 석고 머리가 그에게 날아왔다.
“어제 독을 먹었어요. 해독이 늦어서 그만.”
“너 정도 되는 마법사가 독을 먹은 데다, 해독이 늦기까지 했다고?”
루시텔이 찌푸린 표정 그대로 리온에게 말했다.
“넌 저스틴에게 뭐라 말할 자격이 없구나.”
리온이 입을 딱 벌렸다. 그의 손에서 석고 두상이 툭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리온이 세상 억울함과 원망을 담아 눈물까지 글썽해져서 루시텔을 보았다.
“그, 그렇게까지 심한 말을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펠레아스가 나서서 항의했다. 그가 리온을 부축하며 그를 다독여주었다.
“리온도 독을 먹고 싶어서 먹은 것이 아닙니다. 같이 먹은 사람이 국왕이라 그쪽의 해독을 우선시 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요.”
“국왕이라고?”
루시텔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흠..... 그래, 저스틴 같은 짓을 했다는 말은 취소하지. 그건 내가 너무했다.”
“.......저스틴 경은 독이 먹고 싶어서 먹는 사람이라는 거야?”
아비게일이 중얼거렸다.
“독은 안 퍼먹었지만 그보다 더한 짓이라면 잔뜩 했어.”
바닥에 굴러있는 석고 머리가 말했다.
“루시텔도 상상도 못할 짓도 많이 했고요.”
“.....그자 관련해서는 그림자엘프의 자존심은 세우지 않는다만.”
떫은 표정을 하고 루시텔이 두상을 주워들었다.
“네 미적 감각도 참 발전이 없구나.”
뒤쪽에서 드미트리가 조금 상처받은 표정이 되었다.
“이러고 있는 걸 보니 목이 많이 상했나보구나.”
루시텔이 리온에게 손을 뻗었다. 그가 순순히 고개를 젖히고 루시텔에게 목을 맡겼다. 뮬렘의 신성력이 리온의 목에서부터 몸 곳곳으로 퍼졌다.
“으.... 으음.........”
“해독이 늦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해독 안 하기라도 한 거냐.”
루시텔이 혀를 찼다. 한참 있다 그가 손을 떼었다.
“자, 다 되었다. 아니 이러고 끝낼 일이 아니구나.”
루시텔이 다시 손을 모으고 짧게 기도를 읊조렸다.
“뮬렘의 축복이 너와 함께하니 며칠 정도는 모든 독을 막아줄 거다. 이미 독을 썼다 실패했으니 더는 안 쓸 것, 이라고 안심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지?”
리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음, 아아. 아, 됐다. 고마워요, 루시텔.”
“별말씀을.”
루시텔이 웃어보였다.
“치료는 했지만 당장 마구 몸을 써도 되는 상태는 아니다. 아는 사람들하고 있을 때 정도 이걸 계속 쓰는 것도 좋겠지.”
석고 머리를 다시 리온에게 안겨주며 루시텔이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날 보여도 괜찮은 사람들이냐?”
리온이 눈을 깜빡였다.
“뭐.... 문제 있나요? 루시텔이 새 용사이고 제 친구인거 온 세상이 다 아는데.”
“음, 뭐 그렇지.”
루시텔이 푸른 피부가 번들거리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참, 루시텔. 저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요.”
리온이 말했다.
“뭐지?”
“니키타 크루틴, 이번에 죽은 제 대역인데요,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그가 고개를 숙였다.
“궁전에서 그리되었으니 이미 레카이유 사제가 종부성사를 치러버렸겠지만요, 하다못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만큼 머리가 안 돌아가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자, 잠깐만요, 전하. 뮬렘의 권속을 곁에 두셨던 건가요?!”
멜리젠데가 소리쳤다. 루시텔이 그를 보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너는 나를 뭐라고 생각하지?”
멜리젠데가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러나 공포에 떨면서도 말은 계속했다.
“마왕의 유산을 처리하기 위해 적의 적과 손잡는 것 하고 그런 자를 측근으로 삼는 건 다르지요!”
리온이 고개를 돌려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램버트, 아니 한 세대 전 에이벤틴의 하프엘프들 중에는 뮬렘의 신도가 꽤 있었어요. 왜냐하면, 몬테라를 섬기는 인간도 헬레노스를 섬기는 엘프도 똑같이 뮬렘을 싫어했기 때문이랍니다. 그들이 하프엘프를 싫어했듯이.”
리온이 말했다.
“어림잡아 인구의 오 퍼센트 정도는 뮬렘의 신도일텐데, 램버트의 범죄율은 벨레즈 다른 지역에 비해 그리 높지 않아요. 그러니 부모의 신앙을 물려받은 사람들에게 너희 신은 악신이니 다른 신을 믿으라고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리온이 루시텔에게 몸을 돌렸다.
“니키타는 사제는 아니고 그저 한 달에 한 번 예배에 참석할 뿐인 신도였지만...”
루시텔이 손을 저었다.
“뮬렘의 어둠에 의탁한 자라면 신성력을 얻지 못했다 해도 나의 교우다. 기꺼이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도록 하지.”
리온이 안도했다.
“슬슬 들어갈까?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루시텔이 말했다.
“암살 사건과 관련한 이야기입니까?”
드미트리가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어.”
리온이 고개를 들었다.
“미테 오네요.”
아비게일이 그동안 자기 옆으로 온 알렉시스의 팔을 힘껏 붙잡았다.
“참, 전하.”
아비게일의 손을 애써 팔에서 떼어내며 알렉시스가 리온에게 갔다.
“이거 찾았습니다.”
그가 리온에게 안경을 내밀었다.
“찾았나!”
리온이 표정이 환해져서 안경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석고상은 옆에 있는 올리버에게 넘겨주고 안경을 들어 썼다.
“윽.”
그리고 서둘러 도로 벗었다. 알렉시스가 당황했다.
“왜 그러세요. 호, 혹시 고장났습니까?”
“아니.. 이게 마력을 엄청나게 소모한다는 걸 깜빡해서.”
그가 아쉬운 눈으로 안경을 내려다보고 접어서 올리버에게 주었다.
“안경집에 넣어줘.”
올리버가 안경을 받아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 안으로 들어갔다.
아비게일은 들어가지 않았다. 그가 아까 알렉시스가 올라온 계단 방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너는 왜 여기 있어?”
알렉시스가 아비게일에게 말했다.
“여기 오면 미테를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왔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전하가 떨어져서 건지느라고.”
알렉시스를 답을 듣기 전보다 더한 혼란에 던져놓고 아비게일은 미테가 나타나기만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다.
“저, 안 들어가고 뭐하세요?”
올리버가 뒤에서 불렀다.
“더 오실 분이 있으니 기다렸다 같이 들어가려고요.”
아비게일이 말하자 올리버가 묘한 표정을 했다.
“미테렌시드 경 말씀이라면 이미 들어가셨습니다.”
아비게일이 깜짝 놀라 돌아섰다.
“복도 반대편에도 계단이 있어요.”
올리버가 미안해하며 말해주었다. 아비게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비게일이 휙 돌아서서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갔다. 알렉시스가 옆에 바짝 따라붙었다.
“경거망동은 하지 마.”
“나 애 아..... 경거망동 안 해.”
애 아냐라고 말하는 게 얼마나 애 같은지 깨달아버린 열여덟 살은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미테렌시드를 보았다.
미테렌시드는 루시텔의 손을 잡고 반가워하고 있었다. 붉은 긴 머리를 느슨하게 묶고 등에 커다란 장검과 활을 메고 있는 모습이 아비게일이 상상하던 미테와 너무나 똑같아서 경거망동 안 한다는 말도 잊고 아비게일은 그만 감격해버렸다.
아비게일이 미테에게 달려들거나 하지 못하도록 그의 옷소매를 꼭 잡은 채 알렉시스는 미테렌시드와 함께 들어온 엘프를 보았다. 그는 리온 옆에 서서 기품 있고 아름다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루시텔을 노려보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조금 의아해졌다. 아까 빨간머리 미녀가 나섰을 때는 무시무시하게 웃어줬던 루시텔이 이 사람 상대로는 쓴웃음만 짓고 있었다.
“전하.”
실비우스가 입을 열었다.
“저자와 계속 교류해 오신 겁니까?”
“그건 아니오.”
리온이 조용히 말했다.
“한동안 연락이 끊겨 나도 루시텔의 생사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오.”
“내 나이는 이제 백 여든에 불과해.”
루시텔이 말했다.
“뮬렘의 가호도 있으니 앞으로 삼십년은 끄떡없을 거다.”
“다행이네요.”
리온이 웃었다. 실비우스가 그를 돌아보았다.
“어째서 여전히 적을 수집하시는 겁니까.”
“그 말은 내가 해야 할 것 같은데?”
루시텔이 말했다.
“나는 전하의 적이.”
“설마 그 때 리온을 환궁시키는 게 그를 위하는 일이었다고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실비우스가 루시텔을 노려보았다.
“결과적으로 전하께서 큰일을 이루셨기는 했지만 그만큼 위험이....”
“아니, 내 얘기는, 당신들은 리온 자신이 뭘 원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는 거야.”
루시텔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 때 리온이 잡혀갔다면, 그야 위험은 없었을 거고 왕도 되었겠지만 평생 주눅 들어 살며 무력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걸. 흐라그눔이야 다른 누가 없앴을 수도 있겠지만 하프엘프들은 물론 엘프도...”
“루시텔.”
리온이 말했다.
“그 얘기는 안 하면 안 될까요.”
“애초에 말이죠.”
미테가 나섰다.
“둘 다 하고 싶은 말은 ‘나는 리온의 적이 아니고 아군이다, 너보다 내가 더 그를 위하고 있다’ 아닌가요? 그런데 왜 말론 리온을 괴롭혀요?”
그의 지적에 실비우스도 루시텔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아까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했지요.”
드미트리가 루시텔에게 말했다.
“리오넬의 안위와 관련한 이야기라면 속히 듣고 싶습니다.”
“맞아요. 무슨 일이기에 그동안 연락도 안 되던 루시텔이 벨렘에 나타난 건가요?”
미테도 물었다.
“실은 요새 내내 벨렘에서 지냈어.”
루시텔이 말했다.
“뭐하고 있었는지는 묻지 말고. 벨레즈에 해가 가는 일은 아니야.”
실비우스 뿐 아니라 올리버와 멜리젠데도 불편한 표정이 되었으나 리온과 미테는 태연했다.
“알겠지만 그림자엘프도 뮬렘의 신도도 암살자로는 최적의 조건이지. 그래서 리온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난 양쪽의 정보망을 사용해 암살자와 의뢰인을 추적했어.”
그 말에는 모두가 긴장해서 루시텔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아무것도 찾지 못했어. 그림자엘프도 뮬렘의 신도도 아닌 암살범이 저지르고 신중하게 입을 다물었을 수도 있기야 있지만, 너 정도의 거물을 암살하려면 가능한 암살자를 찾는 것도 쉽게는 안 되고 필요한 준비를 하려면 암시장의 눈에 띌 수 밖에 없다고. 그 과정에 그림자엘프나 뮬렘의 신도가 단 한 명도 안 끼는 건 불가능해. 그들 중 누군가 내게 거짓말 하는 것도. 즉.”
루시텔이 리온을 보았다.
“널 죽이려는 건 개인이 아니다. 나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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