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크 월드에서 여왕님들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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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인줄 알았는데 괴담이다]악녀인줄 알았는데...(10) 완 ㅣ- 기타

 

시빌은 탐정 일행이 타고 온 차로 병원에 보냈다. 그냥 지나가다가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고 하겠다는데, 그런 어설픈 변명이 통하면 그쪽이 더 큰일인 게 아닌가 싶다.

시빌의 가족들이 어떻게 나올지도 신경쓰여서 일단 그 저택에 가보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유진이 지금 거기 제발로 가 봐야 문제만 커진다면서 곧장 병원으로 보내는 쪽을 강력히 주장했다.

엠마 씨도 열성적으로 동의했다. 조금 겁먹은 것처럼 보인 건 아마 우리가 남의 집 귀한 따님을 해쳤다는 오명을 쓸까봐 무서워서일 것이다. 경찰서에서 시달리는 꼴을 한 번 겪어본 사람다운 반응이었다.

유진이 타고 온 차는 의외로 내가 타고 온 차와 가까이 있었다. 직전까지 내 부축을 받고도 휘청거리던 주제에 당연하다는 듯 운전석에 타려는 유진을 내가 뒷좌석에 밀어넣고 해서에게 운전을 부탁했다. 역시 나도 빨리 운전을 배워야겠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유진이 열이 오르며 다시 의식을 잃는 바람에, 나머지 뒤처리는 일단 쌍둥이와 엠마 씨에게 맡기기로 했다.

 

 

시빌 바넘은 길고 긴 악몽을 꾸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들인 베른의 황무지들은 그냥 황무지였다. 그걸 사기 위해 팔아넘긴 옥토에 비하면 한 푼 가치도 없는.

자신이라도 무언가 하고 싶었다. 집안을 다시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 아버지가 수상한 사람들을 집안에 끌어들여 또 뭔가 허황된 일을 하는 걸 그만두게 하기 위해.

아버지가 구차한 소리를 하며 한밤중에 창고로 불러냈을 때도 그 생각뿐이었다. 집안을 위해 뭐든지 하겠다는.

그 결과가 영원한 악몽일 줄 알았다면 결코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악몽에서 깰 뻔한 순간도 있었다. 어떤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낯설지만 또래 여성의 목소리여서인지 이상하게 두렵지 않고 매달리고 싶은 목소리였다.

믿을 수 없게도 악몽이 끝나는 순간, 다시 들려온 목소리도 분명 같은 인물의 목소리였다.

눈을 뜬 시빌의 곁에는 친척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빚에 허덕일 때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으면서, 사기나 당하는 얼간이라고 아버지를 비웃기나 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걱정하는 척 안면 바꿔봐야 조금도 감동적이지 않았다. 집에 변고가 일어났다고 떠드는 소리도 시끄럽기만 하고 하나도 정리가 안 되어 있었다.

어수선한 소음 가운데 로제 오베르가 가장 수상하다는 말이 순간 귀에 뛰어들었다.

로제 오베르...”

마침내 시빌이 입을 열자 친척들이 조용해졌다.

경찰 제복을 입은 여성이 시빌을 향해 몸을 수그리고 물었다.

뭔가 기억이 나십니까?”

기억은 희미했다. 애써 떠올려 보기엔 악몽이 너무나 끔찍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

로제 오베르가 절 구해줬어요. 그분은 어디 있어요?”

 

 

“...그렇게 되어서 우리가 시빌 양의 뒤통수에 구멍을 내고 저택 사람들을 몰살한 혐의를 쓸 걱정은 없게 되었습니다.”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 해서가 사과나무 저택으로 보고하러 왔다.

경찰서장도 이런 초자연적인 일들을 조금이나마 알고 우리 일을 눈감아주는 분이고요. 공식적으로는 강도들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미제사건으로 기록될 거예요. 시빌 양은 머리 부상과 정신적 충격으로 기억을 잃은 채 달아나던 중에 우연히 담판을 지으러 가던 마님과 마주쳐 구출된 것으로요.”

, 그 정도면 무난하네요. 사실과도 가깝고.”

그 거머리가 내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괴물이었다. 사람을 조종해서 우리 모르는 새 저택의 사람들까지 몰살시키다니. 유진도 그때 역시 끔찍하게 죽을 뻔한 거잖아.

시빌은 회복할 수 있대요?”

그동안의 인성질들이 전부 거머리의 조종이었다고 하니 시빌을 계속 미워할 이유는 사라졌다. 게다가 바넘 가 사람들이 죽은 것도 거머리의 음모인 모양인데 그 점을 생각하면 불쌍하기까지 하다. 부디 거머리가 붙은 동안의 일은 깨끗이 잊어버리기를.

죽은 사람들 쪽은... 거머리를 불러들인 게 바로 그들이니 자업자득이라는 엠마 씨 말대로라고 생각해두자. 역시 이 로판 원작은 피폐물이라니까.

그래도 함부로 먼저 불러들이고 관여하지 않으면 보통 그런 거랑 엮일 일이 없다는 말은 희망적이었다. 건전한 생활에 건전한 미래가 오는 법. 나도 그런 위험한 거랑 엮이지 않게 조심하고 유진이랑 알콩달콩 사는 일에만 집중해야지.

기억이 돌아올지는 알 수 없어도 머리 상처는 잘 아무는 중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계속 부분 가발 정도는 써야겠지만요.”

내 표정이 많이 걱정스러워 보였는지, 해서가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살짝 웃어보였다.

마님이 있었으니까 시빌 양이라도 살아난 거예요. 시빌 양도 무척 감사하고 있어요.”

마이어와 여러 모로 대조적인 성격에 외모인데 애써서 저렇게 웃을 때면 은근히 고자극이다. 가끔 조연들 옆구리도 꼼꼼히 데워주는 작품도 있던데 해서의 저 미모를 알아주는 사람도 언젠가 나타나면 좋겠다.

고마워요. 사실 시빌 좋으라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유진도 열이 내렸고 하니 언제 문병이라도 가볼게요.”

좋은 생각이에요. 남편분도 괜찮아지셨다니 다행입니다.”

. 천만 다행이죠.”

, 자기 발로 차에서 내려 집안에 들어와서는 웃는 얼굴로 나한테 잘 자라는 인사까지 하고서 침대에 머릴 대자마자 펄펄 끓기 있나요. 그러면 누가 모를 줄 알았냐.

생각하니 내 머리도 끓는다. 해서에게 보너스와 당근 케이크를 들려주어 돌려보낸 다음 마음 단단히 먹고 유진이 누워있는 침실로 돌아갔다.

정신 들었으니 이제 혼내줄 수 있겠지? 그 얼굴로 빌어도 소용없어. 넌 이제 죽었어.

 

 

유진은 이제 얼음주머니와 물수건을 치우고 땀에 푹 젖은 옷도 갈아입은 채 침대에 파묻혀 있었다.

안 그래도 뽀얀 얼굴이 창백해져서 대리석 같고 단정하던 흑발이 그 위에 흐트러져 있다. 눈밑에 그늘이 진 것도 꼭 색조화장 같이 관능미를 더한다. 한 마디로 병약 미인의 정석이지만 그런 건 폰 너머로나 보고 싶다.

로제.”

하루 종일 고열에 시달린 주제에 내가 들어왔다고 표정이 밝아지더니 일어나려고까지 한다. 난 그 앞에 앉으며 고개를 숙였다. 역시 저 얼굴 보면서 독한 말 못하겠어.

아직 다 나은 거 아니니까 누워서 내 말 들어요.”

그래도 목소리가 충분히 엄하게 나온 덕분에 유진이 움츠러들었다.

밤에 엄청 무리하고 다쳤던 거죠? 겉에 피는 안 났어도 내상 같은 거 입은 거죠?”

혼나는 중이란 감이 왔는지 유진이 움츠러든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랜만에 큰 마법을 쓰고 지친 상태에서 정신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몸에는... 내장에도 상처가 없습니다.”

확실히 피는 안 토했지. 그래도.

아무튼 그 밀밭에서 출발할 때부터 아팠던 거 맞죠?”

.”

그런데 운전을 하려고 했고.”

근엄한 태도를 강조하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병약미가 측정기 부수고 치솟는 얼굴이지만, 그게 뭐 어쨌냐는 표정이 너의 패착이다. 역시 얼굴로도 봐주지 못하겠다.

집에 와서도 멀쩡한 얼굴로 아무 일 없었던 사람처럼 굴었죠? 한밤중이니까 바로 잘 준비한 거지 낮이었으면 그대로 평소 일과 다 수행할 기세였죠?”

그건... 낮이었어도 바로 쉬었을 겁니다. 일단 집에 돌아왔으니까...”

아무튼 아픈데 멀쩡한 척 했잖아요. 내 앞에서!”

그걸 부정할 만큼 뻔뻔하지는 않은지 유진이 입을 딱 다물었다.

게다가! 애초 그렇게 위험한 짓 하러 가면서 나한테는 한 마디도 안 했죠? 탐정들은 위험할 거 같으니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먼저 전화까지 했는데! 내가 내 남편이 위험한 걸 우연히’, ‘운좋게알아야겠냐고요!”

할 말 있냐? ? 없지? 없지?

로제가 위험해지는 게 싫었습니다.”

나는 유진이 위험한 게 안 싫겠냐고요!”

, 이 남자 진짜 반성이 없네. 그렇게 커다랗고 비율 좋은 몸에 얇은 잠옷 한 장만 걸치고서 내 눈치 보느라 침대에 작게 웅크린 채 예쁜 눈 깜박거리고 있으면 다 용서해줄 줄 아는 모양인데 크나큰 오예...가 아니고 오해다.

역시 예정대로 가자. 내가 들이민 것을 보고 창백하던 유진의 얼굴이 아예 누레졌다.

계약서에 추가 조항을 좀 넣어야겠습니다.”

유진이 비명을 지르고 싶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불행 회로 돌아가는 소리가 너무 세차게 나서 내 귀가 따가울 지경이다. 이건 이거대로 안쓰러우니 빨리 본론을 말하자.

“기만적인 행위의 정의와 예시 부분 말인데요. 지금은 상대방을 향한 것만 언급되어 있더라고요. 그야 보통은 배우자를 해치거나 속일 걸 걱정하지 자해를 걱정해서 이런 걸 작성하진 않겠지만요.”

“저, 자해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아픈 걸 숨기고 멀쩡한 척 무리하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 자해입니다. 혹시 몰랐으면 이제부터 알아두세요.”

나는 엄숙한 태도를 흩뜨리지 않고 말했다.

“그러니까 내 요구는 이겁니다. ‘본인의 질병, 부상, 곤경 등을 고의로 배우자에게 은폐하는 행위’ 역시 기만적인 행위의 예시에 추가하는 거요. 대신 소급적용은 하지 않고, 따라서 이번엔 기회 차감은 없습니다.”

이번엔 차감이 없다는 대목에서 다 죽어가던 유진의 안색이 확 살아났다.

이 사람 내 상속 재산과 각종 계약서 점검할 때는 안 이랬던 거 같은데. 계약서라는 거 원래 이렇게 서명 후에 막 수정하고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이번엔 내가 화가 난 김에 밀어붙이는 거지만.

, 그래도 최대한 공적인 원칙을 중시해볼까. 추가하는 내용 곁에 수정 날짜를 적고 쌍방의 동의하에 추가했다는 기록을 남기자. 지장도 한 번 더 찍고.

기회를 차감할 만큼 유진이 싫어진 게 아니에요. 그 반대지.”

너무 군말없이 시키는 대로 계약서를 수정하고 있는 모양을 보니 속절없이 누그러져 버렸다.

유진이 다치고 위험해지는 게 싫다고요. 내가 지켜줄 힘이 없는 것도 아닌데. 유진 보기에는 내가 그 정도로 듬직하지 못한 건가요?”

“......”

이번에 구해준 것도 그렇고 드래곤 악령도 내가 주인공 파워로 무찔렀잖아. 그때 선셋 붙들고 있던 건 유진이니까 뭐 솔플은 아니었다고 인정하겠는데, 그렇다고 유진 혼자 위험한 일에 나섰다가 죽을 뻔하면 나는 뭐가 되냐고.

게다가 이제 큰 사건은 해결했다고 안심하는 순간 픽 쓰러져 이마가 불덩이였을 때는 진짜 고용인들 덕에 살았다. 제대로 된 간호는 그 사람들이 다 해줬고 난 손만 잡아줄 수 있었다. 그나마 새벽쯤엔 꾸벅꾸벅 졸다가 고용인들 채근에 침대 올라가 자 버렸고.

처음부터 끝까지 악몽이나 다름없었던 밤이 새삼 떠올라 유진을 꽉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진짜 난 유진 정신 못 차리고 있으니까 눈물 날 뻔 했는데...정신 들어서 나 찾는 목소리 듣고 얼마나 안심을 했는데......”

마주 안아오던 유진의 팔이 흠칫 굳었다.

제 목소리, 듣고 싶으십니까?”

?”

완전히 엉뚱한 소리를 엄청나게 진지하게 하고 있다.

당연하죠? 제가 유진의 목소리를 듣기 싫어한 적이라도 있어요?”

그러고 보니 내가 그동안 유진의 얼굴 가지고는 주접을 떨었어도 목소리 멋지다는 말은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목소리 주접도 조금만 떨어볼까.

유진 목소리가 얼마나 듣기 좋은데요. 얼굴하고 딱 어울리는 부드러운 중저음인걸요.”

얼굴 예쁘다는 말만 하고 목소리 곱단 말은 안 해줘서 섭섭했냐, 쪼잔하지만 귀여우니 봐준다.

밤에 잘 자라고 말해주는 게 거의 자장가 같아서, 그 목소리 못 들으면 저 밤에 잠도 못 잘 거 같아요.”

“...그랬군요. 알겠습니다.”

뭔가 진지하게 결심한 얼굴이다. 설마 발성연습이나 자장가 공부라도 시작하려는 건가.

그러니까 지금은 그 목소리 안 상하게 더 쉬기나 해요.”

계약서 수정은 마무리 되었으니 고용인들에게 트레이를 들여오라고 했다. 밤새 앓았으니 지금쯤 배가 많이 고프겠지.

환자식은 당근 수프와 당근 코울슬로, 오믈렛, 후식으로 당근 푸딩이다. 당근 케이크와 당근 쿠키는 옆에서 내가 같이 먹을 간식이다.

포크로 자른 오믈렛 안에도 다진 당근이 들어있는 걸 보고 유진이 묻고 싶은 게 많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 제가 당근을 좀 많이 먹어야 할 거 같아서요. 유진도 그동안 가리는 건 없어보여서 괜찮겠지 했는데 혹시 싫으세요?”

, 아닙니다.”

유진이 황급히 고개를 젓더니 오믈렛을 입에 넣고 웃었다.

로제가 주는 거라면 뭐든지 좋습니다.”

사실 얘는 지금도 밤눈이 무슨 올빼미 수준으로 밝으니 싫다고 해도 이해해줄 생각이었는데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반칙이야.

다 나아서 털고 일어나면 그때 상으로 당근 안 들어가는 초콜릿 케이크 같은 거라도 사줘야겠다. 두 사람 먹기 충분할 양으로.

그리고 운전 가르쳐달라고 해야지. 한 번쯤은 유진을 조수석에 태우고 내가 몰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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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었습니다. 적당한 이야기가 떠오르면 또 써보고 싶군요.



[로판인줄 알았는데 괴담이다]악녀인줄 알았는데...(9) ㅣ- 기타

쌍둥이와 엠마는 밀밭을 헤맨 끝에 날이 저물어갈 때에야 겨우 범위를 좁힐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하늘이 갑자기 캄캄해졌다.

공기의 진동에 세 사람 모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멀미처럼 고약하고 토할 것 같은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뭔가 벌어진다. 광산에 갇혔을 때 이후 느껴본 적 없는 감각에 엠마가 몸서리치며 외쳤다.

귀 막아!”

소름끼치는 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공간을 찢었다.

귀를 막지 않았다면 무엇을 들었을지. 공포에 눌려 숙이고 있는 이들의 머리 위로 무엇인가 떠올랐다.

그것이 날아가는 풍압에 눌린 채 셋 중 누구도 고개를 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오늘이면 제단을 준비할 거라고 예측한 것이 맞아들어갔다. 그렇지만 아무리 단순 수작업이라고 해도 고작 이런 평범한 인간 한 명이라니. 어제 죽인 버러지들의 장기를 꺼내오지 않았으면 공양이 부족할 뻔했다.

유진은 혀를 차며 살아있는 인간 하나, 바닷물에 익사한 자의 심장과 허파 2인분을 공중에 띄워올렸다. 그리고 새로 익힌 문양을 그리며 주문을 읊었다.

오늘 밤이 그가 혀를 써서 주문을 읊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마음속에 기묘한 불안감과 슬픔이 차올랐다. 그러나 혀를 가만 놔두었다가 로제의 눈 밖에 날 공포에 비하면 사소한 수준이기에 쉽게 그 기분을 외면해버렸다.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로제와 대화할 때는 필담을 하면 된다. 정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긴다면, 도로 붙이면 그만이다. 그럴 때에 대비해 자른 혀를 잘 보관해둘 작정이었다.

적당한 정신 방벽을 찾아내 감정에 휘둘리다 말실수하지 않으리란 자신이 생기면 그때 붙여도 좋을 것이다.

공양물들이 게걸스러운 소음과 함께 허공으로 사라졌다. 유진은 집중해서 주문의 마지막 음절을 맺었다.

곧 거대한 형체가 공간을 찢고 모습을 드러냈다. 해파리처럼, 코끼리처럼도 보이지만 그것도 흐릿한 윤곽만 묘사할 때나 할 수 있는 표현이었다. 자세히 본다면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생명체와도 닮지 않았음을 깨닫고 상식이 파괴되는 공포에 미쳐버릴 것이다. 지금은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고대 문명의 주인이던 오래된 신의 별에서 온 자손.

그러나 유진은 원하는 존재가 제대로 소환되었다는 감상밖에 느끼지 못했다. 그는 ‘일반 상식’이라는 걸 지녀본 적이 없으므로. 아니, 이쪽이 그의 ‘상식’에 속한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했다.

악몽에서도 보기 힘들 기괴한 형상을 향해 그가 자기 가슴에 꽂고 있던 장미꽃을 내밀었다. 일견 로맨틱하게까지 보이는 모습으로 고운 입술을 열어 명령했다.

“이 꽃이 피어있던 저택으로 가라. 그곳에 있는 모든 인간을 죽이고 돌아가라.”

촉수 같은 기관 한 가닥이 흘러내리듯 뻗어나와 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음산한 폭음 같은 소리를 울리며 공중으로 솟구쳤다. 유진도 잠시 몸을 움츠려야 할 정도의 풍압이 주위를 내리눌렀다.

그는 원래 통제해야 할 변수가 늘어나는 소환 주문을 즐겨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무어 가를 멸절시킬 때 썼던 주문은 노리는 가문의 일원이 공양물로 필요했다. 공양물을 확보하려다가 시빌과 다시 마주칠 위험은 감수할 수 없었다.

게다가 바넘 성을 쓴다는 이유로 무고하게 희생될 사람도 많았다. 바넘 경이 강림 의식의 제물로 희생시키려는 사람들이라든가. 그런 만큼 의식은 더욱 확실하게 저지되겠지만 로제가 싫어할 것이다.

지금 바넘 저택에 있는 사람들은 의식을 주도하거나 적어도 돕는 사람들뿐일 테니 무고하다고는 볼 수 없다.

별에서 온 신의 자손이라도 시빌을 죽이기엔 어림도 없겠지만, 바넘 경과 다른 추종자들만 죽여도 대규모 공양은 불가능해진다. 내일 밤만 지나면 별들의 정렬도 흩어질 테니 하루 사이에 새 추종자들과 제단을 마련하지 못하면 위대하신 옛 영주도 헛물만 켜고 돌아갈 수밖에 없다.

제단을 확실하게 훼손하기 위해 파다 만 구덩이에서 유물을 도로 꺼내면서 눈으로는 소환한 것이 제대로 이동하는지 훑었다. 그저 확인 차원에서 습관적으로 한 그 행동 덕분에 곧장 날아가는 신의 자손 뒤를 쫓는 붉은 빛줄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숨돌릴 틈도 없이 그 빛줄기를 향해 주문을 읊었다. 검푸른 기운이 그에게서 솟아올라 붉은 빛줄기를 따라잡고 촛불 끄듯이 감싸 꺼트려버렸다.

신의 자손은 무사히 저택 방향으로 사라졌으나 유진은 치명적인 실수를 깨달았다.

저 붉은 빛이 솟구친 곳은 저택이 아니었다. 피붙이 고문자는 저택이 아니라 이 근처에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두 번이나 위치를 노출시켰다.

지금이라도 몸을 피해야 한다. 제단을 훼손하는 일도 포기하고 몸을 돌리는 순간, 여기서 볼 거라 생각하지 못한 사람과 마주치고 얼어붙었다.

“...로제?”

아니, 짐작했어야 했다. 로제는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개입해 그가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깨우쳐주곤 했으니까.

그래도 이번엔 변명할 말이라도 있었다. 서둘러 입을 열려 했으나, 로제의 눈이 먼저 그를 가쁘게 훑었다. 혐오와 공포로 얼룩진 그 눈빛에 너절한 변명이 전부 증발했다.

“지금... 뭘 불러낸 거예요? 그러느라 사람을 몇이나 죽였죠?”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최악의 공포와 절망에 휩싸인 정신이 삽시간에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무어 가의 제물은 정말로 날 실망시키지 않는다니까.”

여전히 시빌에게 기생해 있는 피붙이 고문자가 비웃음을 띠고 제물을 내려다보았다.

원래라면 이 정도 환각쯤 어린애 장난으로 여길 전대미문의 마법사가 완전히 정신이 무너져 흙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제물의 운명에서 달아나려 한 사생아가 너 혼자일 것 같나? 거의 성공할 뻔했던 아이는? 사생아가 가문에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을 내가 몰라서 계속 제물로 받았을 것 같나?”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듯 제물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아니, 들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 가장 보고 싶은 사람에게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듣는 중일 테니까.

“매번 똑같았지. 낙인이 건재한 아이들조차도,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드는 대신 보호하려 든다는 것만으로도 구원의 천사라도 만난 듯 매달렸단다. 자기가 무가치하다는 걸 아는 만큼 필사적으로, 절망스럽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지. 그게 결국 다 내 것이 되었고. 세대를 거듭하다보니 너같이 특출난 아이도 나왔지만 그래봐야 결과는 같아. 제물의 품질이 특상급이어서 나한테 더 편리해졌을 뿐이지.”

피붙이 고문자는 여유가 있었다.

바넘 저택의 추종자들은 지금쯤 몰살당했겠지만 제단은 무사하다. 제물로 쓸 바넘들은 내일 도착할 테니 직접 해야 할 노동량이 늘어났을 뿐이다.

잡동사니 제물을 조금 잃은 것은 타격도 아니었다. 그까짓 절차도 똑바로 안 밟은 입양아 따위 열이 아니라 백이 있어도 무어 가 사생아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 이 사생아를 토막 내어 제단을 완성하고, 시빌 바넘의 육신으로 남은 제물들을 참살한 뒤 마지막으로 시빌의 영혼까지 불태우면 의식은 성공한다.

그렇게 되면 로제 오베르에게 복수할 차례다.

그래. 제물을 도살하기 전에 할 일이 있지.”

이제 스스로의 목을 쥐어뜯고 있는 제물의 한 손을 붙잡아 들어올렸다. 장갑을 벗겨내자 로제 오베르의 소유임을 표시하는 주문과 반지가 드러났다.

새 주인이 꽤나 소유욕이 넘쳤나본데, 이런 주문 따위...”

약지를 가볍게 문질러 주문을 지워버렸다. 그러자 제물이 도망치고 싶은 듯 웅크리며 손을 잡아빼려 했다.

무시하고 다시 잡아당겨서 결혼반지도 뽑으려는 순간.

잡았다!”

로제 오베르의 목소리였다.

어느새 나타난 숙적의 목소리에 피붙이 고문자도 당황했다. 그 정도로 강대한 존재가, 이토록 아무런 존재감도 드러내지 않고 지척까지 접근해올 수 있단 말인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로제 오베르는......

 

 

곧장 밀밭 안으로 차를 몰고 들어오지 않은 걸 후회하며 헤맨 지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이 야맹증에 길치 정말 어떻게 안 되냐. 당근을 더 많이 먹어야 했나?

아니면 원수의 집안 밭이라도 먹을 걸 함부로 하지 않은 내가 너무 관대했냐?

당근! 당근을 먹을 테다!”

갑자기 당근은 왜요?”

기사 아저씨가 악착같이 따라온다. 아니, 위기상황에서 제일 보장 안 되는 게 엑스트라 목숨인데 이 아저씨 겁도 없네.

위험하다니까 왜 따라와요?”

위험한데 마님 혼자 가시라고요? 제가 유진 나리께 죽습니다!”

고용인들 눈에 유진이 대체 뭘로 보이는지는 나중에 따져보자. 어느새 해는 완전히 지고 달도 안 떠 완전히 깜깜해진 하늘에 찌르듯 빛나는 붉은 빛 쪽이 더 중요해 보인다.

제대로 보려고 멈춰선 순간 그 붉은 빛을 향해 밀밭에서 어두운 푸른 빛이 솟구쳤다. 붉은 빛을 순식간에 삼켜버린 저 빛, 기분 탓인지 몰라도 유진의 눈 색을 닮았다.

어차피 길은 잃었다. 그리로 방향을 잡고 다시 힘을 내 달렸다. 그리 멀지도 않아!

그리고 곧 내 판단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금방 도착한 그 곳에 유진이 쓰러져 있었다. 또 주화입마라도 당한 것처럼 몸부림치고 있는 그의 한 팔을 잡아당겨 손을 잡고 있는 건 시빌 바넘이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결혼반지를 뽑으려는 것 같다.

잡았다!”

기선제압을 위해 아무 소리나 지르며 일단 원흉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느라 흔들리는 풍성한 금발 타래를 움켜쥐었다.

너무 클리셰 쩌는 공격 같지만, 이대로 쫙 뽑아서 뒤통수에 참신한 면적의 땜통을 만들어주마!

마침 상대가 나보다 크다. 이럴 땐 살짝 발을 떼기만 해도 체중이 실리지!

.

?’

뭔 일인가 파악도 다 못하고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어버린 날 기사 아저씨가 일으켜 주었다. 금발 머리 타래는 여전히 내 손에 남아있다.

뭐야, 가발? 황당해서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머리카락 사이로 피와 함께 꿈틀거리는 거머리 같은 게 보였다.

으웩...”

소름이 끼쳐 머리타래를 바닥에 팽개쳤다. 그러자 팽개쳐진 자리에서 움찔거린다.

저런 걸 유진이 사준 구두로 밟아도 될까? 내가 망설이는 눈치를 챘는지 기사분이 먼저 나서서 콱 밟았다. 내 발보다 훨씬 커다란 구둣발로 몇 번 밟자 거머리가 조용해졌다.

돌아가면 새 신발 사드릴게요.”

이건 산재다. 비싼 걸로 사드려야지.

지금 그보다 급한 일 먼저 해결하고. 시빌이 쓰러지고 나자 유진이 어떤 꼴인지 눈에 더 제대로 들어왔다. 이렇게 캄캄한 밤인데도 흙바닥에 쓰러져 몸부림치는 그의 고통스러운 표정은 마음이 아프도록 똑똑히 보인다. 저 죽은 생선 눈을 또 보게 되다니.

앞뒤 잴 것도 없이 달려들다 기어코 거머리를 밟고 넘어질 뻔했지만 굴하지 않고 유진에게 다가앉아 그를 부둥켜안았다.

정신 차려요. 나 여기 있어요.”

너무 상태가 심각해서 계속 정신 못 차리면 어쩌나 했는데 유진은 금방 눈에 초점이 돌아와 나를 주목했다. 그리고 덥석 마주 끌어안았다.

공포 면역 토템 노릇을 이번엔 제대로 하고 있길 바라며 그의 벌벌 떠는 등을 쓸어주었다. 내 등을 붙든 손도 거의 진동벨처럼 떨고 있다.

유진이 거의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가느다랗게 속삭였다.

,......살려주세요...”

, 이제 다 끝났어요. 괜찮아요.”

패닉이 엄청 심했나보다. 그래도 의외로 겉에 보이는 상처도 없고 드래곤 레이드 때처럼 피를 토하지도 않는 걸 보고 나는 조금씩 진정이 되었다. 그러자 주변도 다시 눈에 들어왔다.

시빌은 가발인지 거머리인지가 뽑히면서 쓰러진 뒤로 움직이지 않는다. 거머리 붙었던 자리에 피가 흥건한데 저거 괜찮은가 모르겠네. 내 남편 손에서 멋대로 반지 뽑으려 드는 걸 보고 눈 뒤집혔다고 하면 정당방위 되려나? 비싼 변호사 구해야 할 때인가?

때맞춰 사람들 발소리까지 들려오자 얼결에 유진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유진도 더 달라붙었다. , 이제 또 숨이 막히려고 한다.

아니, 아가씨는 또 언제 온 겁니까?”

마이어가 랜턴을 높이 든 채 맨 먼저 나타났다. 그 뒤로 산탄총을 든 해서와 엠마 씨가 나타났다.

... 왠지 와야 할 거 같아서?”

돌이켜보니 순전히 촉으로 움직였구나. 그래도 결과가 좋으니 됐다.

해서는 주위를 둘러보다 시빌을 발견하고 가까이 가서 상태를 살폈다.

살아있어요. 그래도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겠습니다. 그리고 방금 제가 뭘 밟았는데...”

이런 상황에선 뭐가 엉뚱한 함정이 될지 모르므로 사소해 보이는 정보도 꼭꼭 공유하는 것이 세 사람의 버릇이었다.

? 어어.”

해서가 가리킨 게 바로 자기 발밑인 걸 보고 마이어는 랜턴을 더 높이 들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다가 뭔가 물컹한 걸 밟고 비틀거렸다.

피하라니까 너까지 밟으면 어떡해.”

그냥 놔두면 둘이 또 티격태격할 것 같아서 내가 얼른 나섰다.

괜찮아요. 어차피 다들 한 번씩 밟았어요. 맞다, 그거 거머리인데 시빌의 머리에 붙어있었어요.”

거머리...”

엠마 씨가 굉장히 지친 얼굴로 중얼거렸다. 혹시 본인도 한 번 밟으려 들까 기대했는데 그러지는 않았다.

그때 유진이 움찔거리더니 드디어 몸을 가누기 시작했다.

, 정신 들어요?”

.”

내 가슴에 기대 한 번 숨을 들이쉬더니 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따라가보니 다들 한 번씩 밟은 거머리를 보고 있었다.

이미 한 발 물러나 있던 마이어가 다시 크게 물러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유진이 그것을 가리키며 뭔가 작게 중얼거렸다.

거머리에서 불꽃이 솟았다.

고약한 냄새를 예감하고 나는 코를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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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자 크툴루의 별의 자손을 목도했습니다. 지식 주사위 굴려주세요.”

유진 이미 대상을 잘 알고 있습니다.”

수호자 “...그럼 성공한 것으로 간주하고, 이성 손실은 D...”

유진 이성 현재 수치 0, 최대치 0이어서 손실될 이성이 없습니다.”

 


[로판인줄 알았는데 괴담이다]악녀인줄 알았는데...(8) ㅣ- 기타

엠마가 예측한 강림 의식 최적의 날짜는 모레 밤, 그믐이었다.

그러니 늦어도 오늘 밤이면 제물들을 정해진 장소에 모을 것이다. 이제까지는 그게 어딘지 감을 잡을 수 없어 놈들의 꽁무니만 따라가야 했지만, 베른까지 좁히고 나니 이들의 히든카드에 기댈 수 있었다.

진짜 바넘 가가 원흉이었군요.”

한 번 놓쳤던 아이들을 태운 트럭이 향한 곳은 정말로 바넘 가 저택이었다. 세 사람도 그리로 달렸다.

대지주 가의 본가답게 인적 없는 직선 도로를 한참이나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대신 상대보다 더 빨리 달리기만 하면 이번에는 놓치지 않고 따라잡을 수 있었다.

제가 스피드에는 자신이 있다고요!”

가로등도 없는 밤길이지만 마이어는 액셀에서 발을 떼지 않았다. 로제의 지원으로 산 비싼 차로 그깟 구형 트럭을 못 따라잡으면 죽을 때까지 해서에게 놀림당할 것이다.

과연, 저 앞에 트럭 보여.”

침착한 척 하지만 은근히 참을성 없는 누이가 쌍안경으로 정면을 살핀 끝에 중얼거렸다.

그런데 좀 이상해. 아직 그냥 길가인데 트럭이 멈춰 서 있어.”

함정인가?”

나쁜 예감에 마이어도 군말없이 속력을 줄이기 시작했다. 사방에 장애물이라고는 양 옆의 밀밭뿐이라, 그도 곧 멈춰 서 있는 트럭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기서 뭔가 스멀스멀 움직이고 있었다. 이리로 접근해왔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텅 빈 눈을 한 작은 아이들이 이리로 마주 달려오는 소름끼치는 광경이 드러났다.

마이어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해서는 산탄총을 쥐었으나 차마 겨누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아이들은 이들의 차가 보이지 않는 듯 지나쳐 달려가 버렸다. 그 광경을 보고 엠마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암시에 걸려 있는 거야.”

먼저 차에서 내린 그가 호루라기를 세게 불었다.

날카로운 소리에 아이들이 꿈에서 깬 듯 멈춰섰다. 몇몇은 계속 달려가려 했으나 다른 아이들이 선 것을 보고 스스로 멈추거나 머뭇거리는 틈에 쌍둥이들이 쫓아가 붙잡아왔다.

하나, , ...... . 우리가 찾던 애들 맞는 것 같구나.”

이런 아이들 중에도 이름과 인상착의를 전해주며 꼭 찾아달라 부탁하는 사람이 있는 아이가 있었다. 그런 아이들 몇의 얼굴을 확인하며 엠마가 대화를 시도해보자 아이들도 띄엄띄엄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트럭이 갑자기 멈춰서더니 한참 후 짐칸의 문이 열리고, 당장 내려서 일직선으로 달아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난 거지?”

해서와 마이어가 여전히 멈춰 서 있는 트럭으로 눈을 돌렸다. 트럭에선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해서가 먼저 산탄총을 들고 트럭 운전석으로 접근하자 마이어도 랜턴을 들고 반대쪽으로 접근했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사람 그림자가 비쳤다. 그러나 쌍둥이가 바짝 다가가도록 미동도 없는 걸 보고 살아있는 적과 싸우게 되지 않으리란 걸 직감했다.

마이어가 랜턴을 높이 들어 차 안을 비췄다. 그리고 윽, 하는 신음을 토하고 말았다.

시체일 줄은 알았지만.’

해서도 반대편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충격으로 굳었다.

거기 어떻게 됐지?”

아이들을 일단 진정시키며 엠마가 묻자 해서가 고개만 저어보였다. 어린애들 듣는 데서 가슴이 파헤쳐져 장기가 적출된 시체 두 구가 있는데 바닷물 같은 짠내와 비린내가 엄청나다고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만세~!”

사진사 아저씨가 보고 있는 것도 잊고 나는 기쁨에 넘쳐 소리질렀다. 난 역시 객관적 금손이 맞았어!

유진을 찍은 것도, 사과나무 찍은 것도, 저택 전경이나 집안 소품 찍은 것도 다 결혼식 사진들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내가 찍은 거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이건 진짜 장당 폭리로 돈 받고 팔아도 팔린다. 이 영광을 내 절세미남 모델에게 돌립니다......

사진사 아저씨도 이전 사진 이야기를 듣더니 그건 분명 사진관 과실이라고 말해주었다. 여기서는 절대 그런 일이 없을 테니 다음에도 꼭 여기에 맡겨달라는 영업 멘트도 잊지 않았다.

, 그럴게요!”

사진을 챙겨갖고 나온 나는 곧장 유진의 사무실로 가달라고 기사분한테 부탁했다. , 나도 슬슬 운전을 배워볼까.

유진의 사무실은 로만타운 중심부의 땅값 비싸보이는 건물에 있었다. 나는 기대에 차서 사진 꾸러미를 품에 안고 사무실 문 옆에 설치된 초인종을 눌렀다.

그리고 문에 걸린 부재중 팻말을 발견했다.

저녁이라도 먹으러 갔나?’

초인종 소리에 답도 없고, 안에 사람이 없는 건 확실해 보인다. 문 위쪽이 유리로 되어 있지만 안쪽에서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어 안이 보이지는 않는다.

허탕 친 탓인가, 탐정 일행들이 전화로 들려준 이야기 때문인가, 저녁 먹으려고 나가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라 그런가, 묘하게 나쁜 예감이 든다.

분명 유진은 강력한 마법사다. 내가 본 마법사가 그 한 명뿐이긴 하지만, 그래서 엠마 씨한테 물어본 적이 있다. 세상에 유진 정도의 마법사가 흔하냐고.

이 세계에서 판타지 설정이 차지하는 비중도 알아볼 겸 한 그 질문에 엠마 씨는 얼굴빛부터 달라지더니 딱 이렇게 대답했다.

‘무서운 소리 마라. 그 하나도 너무 많아.’

즉 이건 내가 내 남주에게 콩깍지가 씐 게 아니고 객관적으로 유진이 세계제일 급 대마법사라는 얘긴데. 그런 마법사가 사색이 되어 긴장할 정도의 일이 과연 주인공 보정 없이 알아서 잘 해결될까?

물론 탐정 일행과 만나 같이 해결하자고 약속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내일까지 기다려야 하는 이벤트고. 유진이 그들보다 먼저 움직이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이지?

망설임은 짧았다. 나는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서 나와 차에 타고 말했다.

“바넘 저택으로 가주세요.”

기사분이 머뭇거렸다.

“지금 출발하면 저녁 늦게나 도착할 텐데요.”

“상관 없으니까 가요.”

유진이 먼저 가서, 그가 그 정도로 두려워하는 적과 싸우고 있다면 마땅히 따라가서 주인공 보정으로 도와주는 게 부인의 도리겠지. 음, 이런 표현도 설레는군.

그런 게 아니어서 유진은 정말 저녁 먹으러 나간 거고 나는 바넘 가의 평화로운 저녁 시간을 방해하게 되는 거라면, 그럼 뭐 어때? 어차피 그들과 예의 차릴 이유는 사라질 만큼 사라졌다. 내일 정식으로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더 일찍 담판을 짓게 되는 거지.

탐정들에게 더 자세히 듣지 못한 게 아쉽군. 멀리 있던 그들이 추적해왔다는 건 분명 그들이 건수 잡을 만한 악행이 있었다는 뜻인데. 그런 걸 약점으로 잡아서 유진 괴롭히지 말라고 협박하면 이야기가 더 잘 풀리지 않을까?

슬슬 배가 고파질 때가 되어서야 바넘 가의 진입로에 들어섰다. 장거리 운행중인 차 안에서 이렇게 생각에 푹 빠져 있을 수 있다니 굳이 면허 안 따도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여전히 끝 간 데 모를 밀밭 사이로 난 도로에 들어서며 기사분이 다시 머뭇거렸다. 갑자기 날씨가 나빠져서 그런 모양이었다.

낮에만 해도 맑았는데 어느새 먹구름이 가득 꼈다. 비라도 오려나 싶어 밤처럼 어두워진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갑자기 밀밭 어딘가에서 시커먼 게 쑥 솟아올랐다.

뭐지?’

껌껌해서 뭐가 제대로 보여야 말이지. 이 몸 역시 야맹증인가?

때맞춰 차까지 갑자기 시동이 꺼졌다. 기사분보고 방금 뭐였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고개를 숙이고 시동을 다시 거느라 끙끙대는 사람한테 그런 질문 해봐야 소용없을 것 같다.

시동은 다시 걸었지만 그새 그 시커먼 것은 저 멀리 날아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저쪽으로 가주세요.”

나는 처음 그 시커먼 것이 솟아올랐던 지점을 가리켰다.

주인공의 촉까지 갈 것도 없이, 저기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뻔하잖아?

기다려라, 주인공이 간다!

 

 

찾던 아이들을 구조했으니 쌍둥이와 엠마는 일단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맡기기 위해 로만타운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느라 날이 밝았지만, 대신 내친 김에 정보도 다시 모았다.

바넘 가가 석유를 발견해 일확천금의 꿈을 이룬 이야기는 한창 유명세를 타는 중이었기에 의심을 사지 않고 마음껏 탐문할 수 있었다. 투기꾼인 척 여기저기 묻고 다닌 끝에, 바넘 경이 가문의 경사를 자축한다는 명목으로 친척 모두를 이번 그믐에 초대했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다.

바로 내일이군.”

의도가 뻔히 보이는 초대에 해서가 기막혀했다.

아이들을 구한 것만으론 부족해. 친척이 몇 명인지는 몰라도 이대로 강림 의식을 강행하려 들 수도 있겠어.”

확실히 여기까지 준비했는데 차질 좀 생겼다고 포기하고 기약 없이 다음 기회를 기다리느니 나라도 일단 밀어붙이고 볼걸.”

마이어가 동의하고 해서와 함께 엠마를 바라보았다. 엠마는 미심쩍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함께 끄덕였다.

내일 밤엔 희생될 사람들이 저택에 모인 뒤일 테니 우리가 끼어들기엔 너무 늦어. 오늘 다시 공격해서 끝장을 내야 해.”

엠마가 수첩을 꺼내더니 작게 접어 끼워둔 종이를 펼쳤다. 직접 그린 기묘한 도형이 바넘 본가 저택 일대의 지도를 뒤덮고 있었다.

분명 저택 일대에 주문을 짜넣고 공양을 준비중이겠지. 그 주문을 심은 지점에 가서 파괴하고 복구하지 못할 만큼 망쳐보자.”

적의 본부를 치지 못하고 곁가지만 뚝뚝 꺾어 방해하는 전술이지만 마이어도 해서도 너무 소심하다는 불만은 표하지 않았다. 옛 영주 자체가 강림하는 대규모 제의라는 말에 그들도 긴장해 있었다.

하지만 엠마의 표정이 어두운 것은 강력하고 사악한 적에 대한 두려움만이 아니었다.

트럭을 처리한 기괴하고 잔인한 솜씨는 분명 그 괴물 놈의 짓일 것이다. 심장과 허파를 적출해간 것도 그놈이 공양물을 확보하기 위해, 사냥한 짐승의 트로피를 가져가듯 가져갔다면 설명이 되었다. 열 명이나 되는 보호받아 마땅한 생명들을 날파리 쫓듯 대충 치워버리려 한 것까지도. 그 자리에서 자기가 전부 먼저 공양해서 강림 의식의 제물로 쓰이는 걸 보다 확실히 예방하려 들지 않은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다. 로제가 정말로 그놈을 착실하게 길들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피붙이 고문자는 이 상황이 아무렇지 않은 건가?

로제가 들려준 이야기만으로 시빌 바넘의 정체나 지금 상황까지 정확히 알아낸 건 아니었다. 막연히 가주가 총지휘자이고 시빌은 그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을 거라 추측할 뿐.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옛 영주가 이미 이 현실에 깊이 개입해 있을 것만은 분명했다. 직접 강림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인간 추종자들에게만 맡겨둘 정도로 느긋한 존재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피붙이 고문자도 이 상황을 보고만 있을 리는 없다. 부족해진 제물을 보충하고 의식을 성공시키기 위해 새로운 음모를 꾸미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게 뭔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매우 불안했으나 그 이야기를 하는 대신 쌍둥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로 따라 일어났다.

시간이 없는데 뚜렷한 지형지물도 없는 밀밭 어딘가를 헤매며 주문 심은 곳을 찾아야 했다. 대략적인 예측치에 불과한 저 지도에 의지해서 한참이나 발품을 팔아야 할 텐데 이것저것 고려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는 바넘 경이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온 사람이었다. 바넘 가의 흥망에 그의 월급이 달렸으므로.

밀밭 어딘가의, 미리 시빌 아가씨가 깃발을 꽂아 표시해놓은 곳마다 땅을 파고 뭔지 모를 꾸러미를 넣어두라는 명령 정도는 꺼림칙한 수준도 못 되었다.

아직 구덩이에 묻을 것이 덜 준비되었으니 흙을 덮지 말고 그냥 놔두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고 명령받은 대로 밀밭에 걸어들어갔다.

깃발이 있는데도 아무 지형지물 없는 밀밭에서 길을 잃지 않고 똑바로 걷는 것은 은근히 힘들었다.

대신 방해꾼이 접근하는데 눈치 못 챌 걱정도 없었다. 떳떳치 못한 일이라는 낌새는 느꼈지만, 누가 어떻게 여기를 콕 집어 접근한단 말인가?

깃발을 뽑고 몸을 숙여 삽질에 열중하는 것만으로 완벽하게 밀밭에 덮여버린다는 걸 잘 아는 그는 마음놓고 작업에 열중했다. 그런 나머지 발소리가 다가오는 것을 너무 늦게 눈치챘다.

마치 이 장소를 정확히 알고 노려서 오는 것처럼 거침없고 빠른 발걸음이 등 뒤에 멈춰선 순간에야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얼어붙었다.

이런 밀밭 한가운데가 아니라 대저택의 응접실에 있어야 할 것 같은 말쑥한 신사였다. 심지어 양복 가슴께에 장미꽃까지 꽂고 있었다.

그 이질감이 그대로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밀밭뿐 아니라 어디에도 있어서는 안 될 존재를 본 것처럼.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얼굴까지도 섬뜩한 비현실감을 더했다.

역시 현실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청보랏빛 눈으로 서늘하게 내려다보며 신사가 검은 장갑 낀 손을 들어올렸다. 도축업자가 쇠망치를 들어올리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체자렛의 장난감 2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이번 편은 루인로드 메인입니다.


똑똑.

갑작스런 노크 소리에 프라우가 서둘러 바지를 꿰고 탱크톱을 뒤집어쓰고 로드 위에 이불을 푹 덮고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프...”

“가서 하자. 더 하더라도 왕성 가서.”

프라우가 문을 열자 예상대로 문 밖에는 루인이 있었다. 샬롯과 프람도.

“다른 기사들은?”

“서둘러 성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상대가 그런 존재니 어디까지 통할지 걱정은 되지만, 그래도 칸나님이 있는 왕성이 다른 곳보단 안전할 거라 생각해서요.”

“응, 그치. 내 생각도 그래.”

루인이 프라우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흐트러진 복장도 상기된 피부도, 전부 방금까지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괜히 낮이 뜨거워져서 프라우가 고개를 돌리고 뒷머리를 긁었다.

“저기, 이건 전부 체자렛의 음모 때문이고 내가 로드가 취약해진 틈을 타서 내 욕심을 채우려던 게 아니라.”

“그런 의심을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만, 변명해야 할 만큼 찔리는 게 있으십니까?”

프라우는 말문이 막혔다.

“먼저 돌아가십시오. 로드는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응.”

이러려고 부른 게 맞긴 한데 로드를 뺏기는 기분이 들어 영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가 독점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아는데.’



루인이 방에 들어가자, 셔츠 단추를 채우던 로드가 손을 멈췄다.

“루인.”

“상황은 대충 들었습니다만, 이제 괜찮으신 겁니까?”

“음, 그게... ‘상황’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어?”

“체자렛이 갑자기 나타나 로드께 미약 같은 것을 먹였다, 프라우경이 응급조치를 했다, 까지 파악했습니다.”

“그게, 미약은 아니야. 그럼 뭐냐고 물으면 나도 답은 못하겠는데, 내가 이성을 잃거나 천지 분간을 못하게 되거나 섹스를 안 하면 죽을 것 같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그래서 다행.. 이라는 분위기는 아니군요. 응급조치가 듣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해야겠지.”

로드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게 대체 뭔지 나도 모르겠지만, 한두 번 욕구를 만족시킨다고 해서 끝나지 않을 거란 확신은 들어.”

“그거 큰일이군요.”

루인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우선 어서 왕성에.”

“저, 루인.”

“네?”

“지금 콘돔 갖고 있어?”

루인은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돌아갈 때 까지 기다려 주실 수는 없는 겁니까?”

“없어?”

“있긴 합니다만....”

루인이 드물게 난감한 표정을 했다.

“밖에서 샬롯경과 프람경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로드가 앓는 소리를 냈다. 루인이 로드에게 다가갔다.

“그러니 로드, 조금만 참으시고...”

“루인...”

로드가 얼굴에서 손을 떼었다.

그의 눈빛을 보고 루인이 마른침을 삼켰다.

정말로, 체자렛이 그렇게 쉽게 수습 가능할 만한 문제를 던져줬을 리 없는 것이다.

루인이 꼼짝 못하고 보고 있는 앞에서 로드가 잠그던 셔츠 단추를 도로 풀어내렸다. 옷깃이 벌어지고 가슴이 드러나자 루인이 눈을 꽉 감았다.

“...일단, 기사들은 돌려보내고 오겠습니다.”



루인이 나가고, 혹시 그대로 도망갔나 싶어지는 시간이 지나서야 그가 돌아왔다.

“프람이 날 두고 먼저 돌아갈 수는 없대?”

로드가 장난스럽게 묻자 루인이 고개를 저었다.

“샬롯경 쪽이요. 무슨 일이 있을지 알아채곤 저를 짐승 보듯이 보는데....”

“저런.”

로드가 웃었다.

“지금 짐승인 건 내 쪽인데.”

루인이 로드에게 원망의 눈빛을 보냈다. 지금 농담이 나오냐는 말이 너무 뚜렷하게 얼굴에 쓰여 있어 로드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미안해, 루인. 그치만... 그래서 싫어?”

로드가 이불을 젖히자 기다리는 동안 완전히 알몸이 되어있던 그의 몸이 드러났다. 루인이 허리띠를 풀며 침대로 다가갔다.

“싫다고 하면, 정말로 그만두실 겁니까?”

“물론..이지. 내가 짐승이 되기는 했어도 싫다는 사람 강제로 덮치진 않아.”

“상대가 하고 싶은지 아닌지 알 수 있으시다고요.”

옷을 벗어던지는 루인의 손놀림이 점점 더 조급해졌다.

“그렇게 눈치 있는 분이 아니셨을 텐데.”

“루인.”

로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 말은, 혹시 이전에 내키지 않는데도 내가 밀어붙여 어쩔 수 없이 상대해 준 적이.”

“반대입니다.”

루인이 로드의 턱을 받쳐 들고 입을 맞췄다. 탐욕스럽게 입술을 벌리고 들어오는 혀에 마주 혀를 감으며 로드가 즐거운 신음소릴 울렸다.

루인의 목을 감아 끌어당기려는 로드의 손을 잡아 떼어놓으며 루인이 입맞춤을 짧게 끝냈다.

“제가 얼마나 자주 로드를 침대로 모시고 싶어 하는지 정말 아셨으면 절 내쫓으셨을 지도 모릅니다.”

“내가 루인을 내쫓을 리가 없잖아.”

로드가 루인의 옷깃을 잡고 그의 옷에 달린 수많은 단추를 조급한 손놀림으로 풀어 내렸다. 로드가 이끄는 대로 루인이 침대에 올라왔다. 벗은 옷을 침대 가에 걸쳐두고 루인이 콘돔을 꺼냈다.

“업무에 방해될 정도면 일하는 동안은 서로 얼굴 보지 않게 조정한다거나.”

“송구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아쉽습니다.”

루인이 로드의 뒷목을 받쳐 들고 다시금 입술을 맞댔다. 키스를 계속하며 루인이 한 손으로 콘돔을 까서 씌웠다.

“오래 끌 만한 상황은 아니겠지요.”

“그래.”

로드도 쓴웃음을 지었다.

“마음 같아선 밤새 붙잡아놓고 즐기고 싶지만..”

“진심이십니까?”

루인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진심이지만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

로드가 루인을 끌어당겼다.

“그러니 서둘러 즐기자고.”

“그러지요.”

루인이 로드의 허벅지에 손을 올려 쓸어내렸다. 그러나 그가 무릎 뒤에 손을 넣어 들어 올리려 하자 로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면 역시 준비가..”

“아니.”

로드가 루인의 어깨를 밀어 뒤집곤 그의 허리에 올라탔다.

“가만히 있어봐.”

루인은 시키는 대로 했다.

로드가 그의 위로 천천히 몸을 가라앉혔다.





로드가 고개를 젖히고 소리 질렀다. 붉게 상기된 몸을 바르르 떨며 여운을 즐기던 그가 힘이 빠져 앞으로 쓰러지자 루인이 팔을 뻗어 받아 안았다.

“어땠어?”

로드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어땠을까봐 물으십니까?”

“너무 나 좋을 대로만 했나 싶어서.”

“하하하.”

루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뭘 새삼스러운 말씀을.”

로드가 흰 눈을 떴다.

“그래서...”

“싫으냐는 말을 하기도 전에 루인이 로드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싫을 리가요. 앞으로도 많이 휘둘러 주세요.”

“응...”

로드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꺼풀이 감기며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미 루인의 몸 위에 엎드려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나 그나마 체중을 버티는 시늉이라도 하던 팔에 힘이 빠지니 로드의 몸이 루인 위에 무겁게 얹혔다.

“로드?”

나직하고 고른 숨소리가 루인의 순간적인 공포를 잠재웠다. 체력을 소진해 잠이 든 것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루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이거 큰일이군.”

로드를 잘 눕혀두고 일어나 수건에 물을 적시며 루인이 고민했다.

‘상대가 로드와 섹스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 알 수 있으신 게 정말이라면, 그리고 그들과 실제로 하는 데 거리낌이 없으시다면 앞으로 기사단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아발론 기사단의 일원들은 모두 로드를 좋아한다.

그냥 인간적인 호감일 뿐인 사람들도 많지만 성애가 포함되는 좋아함인 사람들도 여럿 있고, 꼭 진지하게 사랑하고 사귀고 싶어 하지 않더라도 로드가 허락한다면 한번 쯤 같이 자 보고 싶어 할 만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까딱 잘못하면 아수라장이 되어 치정으로 기사단이 무너지는 것도 순식간일터.

‘이걸 대체 어쩌면 좋지. 푸는 방법이 있긴 한 건가?’




[로판인줄 알았는데 괴담이다]악녀인줄 알았는데...(7) ㅣ- 기타

 

다행히 꼬로록 소리가 분위기를 깨기 직전 유진이 현실로 돌아와 주었다. 저녁 제안도 흔쾌히 승낙해서 이후로는 아무 일 없이 저택까지 도착했다.

정원을 갈아엎는 김에 정문에서 현관까지 일직선으로 드라이브웨이를 만들었다. 유진의 차는 사과나무 저택 정문을 지나쳐 시원하게 달려서 현관 앞에 섰다.

마블링 죽이는 스테이크를 기대하며 함께 안으로 들어갔는데, 내 시녀 일을 하는 앤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다가왔다.

코트 부인이 몇 시간 전에 쓰러져서 의사를 불렀습니다.”

? 쓰러졌다고요?”

멀쩡한 얼굴로 날 배웅했던 사람이 그 직후에 그냥 쓰러졌다고? 사고 같은 것도 아니고?

의사는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할 말을 잊은 사이 유진이 캐물었다. 그도 당황했는지 표정이 나빠진 걸 보고 앤이 어깨를 움츠렸다.

갑자기 큰 충격을 받은 것 같다고 합니다. 정신적으로. 제가 발견했을 때 전화기 옆에 쓰러져 있었기 때문에, 뭔가 나쁜 소식이라도 들은 건 아닌가 걱정됩니다.”

코트 부인의 장성한 아이들이 다른 곳에서 직장 생활중이라고 얼핏 들었던 것도 같다. 앤도 같은 걸 떠올렸는지 표정이 더욱 죽상이 되었다.

처음에 제가 거기까지 생각을 못 해서, 전화기는 무심코 지나쳐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로제, 일단 제가 가볼 테니 로제는 먼저 외출복을 갈아입는 게 좋겠습니다.”

유진의 말을 듣고서야 내가 한 걸음 나선 것을 깨달았다. ... 확실히 나쁜 소식 듣고 쓰러진 사람 문병하기엔 너무 화려한 차림이군. 그에 비하면 유진은 사무실에서 입고 있던 옷 그대로인지 가벼운 차림이다. 앤도 동의하는 기색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럼 부탁할게요.”

고개만 끄덕이고 바로 걸어가는 유진의 뒷모습이 초조해 보인다. 엄청나게 걱정되나보다.

 

 

코트 부인은 집사의 개인 사무실 겸 침실에 누워있었다. 유진은 혼자 그 방에 들어갔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가까이 가자 역시 오래된 바다 밑 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

전 같았으면 대충 있었던 일 싹 잊으라고 암시 걸어봐서 정신 차리면 좋고 아니면 처분했을 것이다. 마침 공양물이 있으면 편리할 상황이고.

하지만 로제가 알면 싫어할 것이다. 화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유진은 쫓기는 기분으로 비린내의 정도를 고려해 의사가 주고 간 약에 주문을 걸었다. 그리고 평소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암시를 걸어 전화 받았을 때의 기억을 조작했다. 이제 깨어나면 별일 아니라고 생각한 일에 고용주가 화를 내며 전화를 끊어서 당황한 기억으로만 남을 것이다.

들은 것과 그 충격을 잊는 것이 이런 상태에서 회복하기 위한 최선이니 기만을 목적으로 거는 암시가 아니다. 로제가 알아도 이해해줄 것이다.

쓰러진 것은 전화를 끊은 직후 머리가 어지러워져 실수한 때문이라고 기억하게 될 것이다. 쓰러진 이유가 달라지는 것도 충격을 잊으려면 꼭 필요한 일이니 로제가 알더라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유진은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다가 자신의 앞머리를 움켜쥐었다.

만약 전화가 아니라 대면한 상태였다면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실수였지 고의가 아니었다는 점은 전혀 참작사유가 될 수 없었다. 아니, 더 나빴다.

상류층 고용주들 중엔 고용인을 보는 시각이 옛 영주들이 인간을 보는 시각이나 별 차이 없는 자들도 많다. 하지만 로제는 다르다.

실수하면 고용인을 죽여버리는 남자를 곁에 두고 싶어할 리 없다.

‘역시 일찍 혀를 잘랐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지금이라도 자르려고 단검을 꺼내려다 때가 좋지 않다는 걸 기억해냈다. 벌써 내일 모레가 그믐인데 지금 혀를 자르면 주문을 자유롭게 쓸 수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자 더욱 공포에 질렸다.

게다가 그날 총력을 기울여 주문을 써야 하는 이유부터가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의 삶보다 죽음이 더 로제에게 유용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원래 그의 삶은 언제나 그의 죽음을 원하는 존재들 상대로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기만하고 연기해서 시간을 번 다음 먼저 상대를 죽여버리는 방식으로만 연장되었다. 유일한 원동력은 그 자신의 살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이번엔 경우가 달랐다. 로제가 그의 죽음을 원한다면, 그 가정만으로도 생존 의지 자체가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로제가 죽으라는데 감히 죽지 않고 이렇게 발버둥치는 쪽이 잘못이었다. 로제를 거스른 채, 미움을 받는 채로 살아남아 봐야 그런 삶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시빌의 정체가 무엇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협상의 여지가 전혀 없는지, 어느 것 하나도.

굳어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추슬렀다. 증세 완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고, 꾸물거리다가 로제와 마주칠 게 두려웠다. 오늘은 로제를 더 볼 낯이 없었다.

 

 

나리께서는 급한 연락을 받아서 나가봐야 한다고 전하셨습니다.”

평소엔 이럴 때 쪽지 한 장이라도 꼭꼭 쓰고 나가던 유진이 웬일이래?

내가 어리둥절해 있자 말을 전해준 고용인도 슬쩍 눈치를 보았다. 고용인들은 대개 유진을 무서워해서 그가 시키는 일을 할 때면 내 눈치도 평소의 배로 보곤 한다.

유진이라고 딱히 갑질을 하는 것도 아니고 괴롭히는 것도 아닌데, 나랑 비교되어서 그러나? 내가 여기 기준으로 좀 말랑한 고용주인 것 같긴 해.

아무튼 집사가 쓰러졌는데 이유도 모르지, 거기에 미남까지 없으니 전에 없이 집안 분위기가 엉망이군. 이러다 저녁 입맛까지 사라지겠어.

그나마 내가 문병을 가자 때마침 코트 부인이 정신을 차렸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전화도 나쁜 소식 같은 게 아니라 유진과 한 업무 전화였을 뿐이고 갑자기 어지러워 쓰러졌다고 했다. 과로인가 싶어서 휴가를 주고 당 충전하라고 잼도 선물했다.

앤은 의사를 다시 부르겠다고 했고, 나는 한 시름 놓은 채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이제 유진이 바넘 가 관련해서 하는 고민만 해결하면 끝인데...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오늘 시빌한테 대체 뭐가 불만인지는 한 마디도 못 듣고 빙빙 돌리는 소리만 들었단 말이지.

내가 다시 바넘 저택에 쳐들어가서, 시빌이든 그 아버지든 붙들고 담판을 짓는 게 제일 빠르지 않을까?

역시 그게 제일 간편하고 빠르다. 마음을 굳히고 만날 약속을 잡기 위해 일정표를 펼쳤다가 하마터면 잊을 뻔한 내일 일정을 발견했다.

사진관. 내일은 사진 찾아오는 날이다.

내 기술이 실은 모두 장비빨이었다는 걸 안 이후 사진기에 손댈 의욕을 잃었던 건 사실이다.

마침 결혼식 사진이 훌륭하게 나온 걸 보고 화보집의 꿈이라도 되살려서 그날 출장 왔던 사진작가를 고용하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유진이 단칼에 거부하는 거다. 내가 찍은 사진이 보고 싶다면서. 자기 얼굴, 그것도 그런 얼굴을 무슨 팥죽 사발처럼 만들어놓은 사진을 보고도 부인의 취미활동을 격려하려고 필사적이라니, 내 남주 인성 너무 완벽한 거 아냐.

처음이라 기계가 익숙지 않아서 그랬을 거라는 말로 시작해서 아예 없어진 사진도 있는 걸 보면 인화과정에 문제가 있었던 거라고까지 온갖 말로 격려하고 설득하고 우기는 바람에 마침내 나도 부상 후 재활에 임하는 스포츠 만화 주인공의 마음가짐이 되어 사진기를 다시 쥐었다. 그리고 무난하게 꽃이나 정물 사진부터 시작하려고 했는데 유진은 이번에도 나서서 모델이 되어주었다. 아니, 이 남자가 사진 찍히기를 이렇게 좋아했을 줄이야.

그렇게 필름 한 통을 다 쓴 다음 그때와 다른 사진관에 맡겼다. 이제 내일이면 내 재활의 성과가 밝혀진다.

유진의 격려 덕에 은근히 자신감도 다시 붙었는지, 걱정도 되지만 기대도 누를 수가 없다.

저번보다 발전한 기미 정도는 있지 않을까? 열심히 찍다 보면 내 실력도 돌아오고 화보집도 손수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좋아, 내일은 바넘 가에 카드를 보내서 담판 약속을 하고, 사진관에 가고, 봐서 정말 발전이 있으면 잘 나온 사진들 가지고 유진의 사무실로 가자. 가본 적은 없지만 전화번호가 있으니 주소도 알 수 있다고 운전기사분이 그랬다. 그리고 코트 부인이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도 들려주면 유진도 걱정을 덜겠지.

씩씩하게 의욕을 불태우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고용인이 먼저 전화를 받더니 내게 걸려온 전화라고 말했다.

“마이어 화이트 탐정의 전화입니다.”

“아, 내 방에서 받을게요.”

한 달이나 소식이 없어서 이쪽도 걱정되던 차였다. 후식으로 나온 쿠키를 든 채 방으로 달려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그동안 별일 없었어요?”

-아, 별일 있었죠.

이런 대답을 웃으면서 할 수 있는 것도 재주다. 가끔은 이래서 엠마 씨나 해서가 마이어에게 전화를 전담시키는 거 아닌가 의심이 든다.

-그래서 물어볼 게 있거든요. 혹시 요즘 베른에 무슨 문제 없습니까? 특히 아가씨, 아니 마님 주변에요.

“어떤 문제요? 초자연적이거나 마법 같은 문제는 없는데요.”

-그런 문제 아니라도 상관 없으니 뭐든지요. 남편 분 관련한 일이면 더 좋고요.

콕 집어 유진을 가리키자 나도 짚이는 게 생겼다.

무어 가와 바넘 가의 악연은 마법이 관련된 것이다!

그래서 마법은 위험하다며 나한테는 설명도 제대로 안 해주는 유진이 이번에도 마법사들의 격돌에서 날 따돌리려는 거다.

마법 전쟁이라, 다시 장르가 판타지 비중이 높아지는군.

“그런 거라면 지금 좀 문제가 있어요.”

나는 시빌 바넘이 접근해서 벌어진 일들을 설명했다. 역시 관련 있는 일이었는지, 마이어는 내가 생략하려던 부분들까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하마터면 유진이 차 안에서 털어놓은 콤플렉스나 오늘 우리 집 집사가 쓰러진 일까지 이야기해버릴 뻔 했네.

마이어가 질문 공세를 멈추자 이번엔 내가 추측한 것을 확인해보았다.

“바넘 가도 마법사 집안인 건가요?”

-...예. 그런 겁니다.

조금 주저하는 투 같았다.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마이어가 드물게 머뭇거리는 사이 내가 다시 물었다.

“위험하면 나한테 연락하라고 했었죠. 혹시 지금이 주인공이 나설 때인가요?”

-잠시만요.

수화기 너머로 세 사람이 의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충 해서가 반대하고 엠마 씨는 찬성하는 것 같았다.

세 사람 사이에서 발언권은 엠마 씨가 가장 큰 것 같다는 생각을 전부터 했는데 맞는 모양이다. 잠시 후 다시 여보세요, 하고 마이어가 이쪽에 말을 걸어왔다.

-우리가 처리하고 갈 일이 있으니까 모레 저녁에 로만타운에서 만나죠.

“좋아요.”

 

 

처리하고 갈 일이라는 건 물론 유괴된 아이들을 추적하는 일이었다.

인명을 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은 논의할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엠마가 설명하기를, 그 아이들을 이용한 위험한 공양이 예정되어 있다면 아이들을 탈취하는 것만큼 나쁜놈들의 음모를 방해하기에 효과적인 일도 드물다고 했다.

“범죄자들이 모는 트럭을 막고 아이들을 구하는 일은 로제가 직접 나서기엔 너무 험하지. 나도 그건 우리 셋이 알아서 감당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엠마가 그렇게 짚고 넘어가자 해서의 태도가 누그러졌다.

“하지만 바넘 가가 정말 피붙이 고문자의 강림을 준비하고 있는 배후라면, 그 저택에 직접 쳐들어가야 할 수도 있어. 그때는 로제와 가는 게 가장 안전할 거다.”

“저도 마님에게 뭔가 특별한 면이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만.”

옛 영주의 권속이 깃든 유물을 로제가 어떻게 파괴했는지 떠올리다가 해서가 다시 말했다.

“마법 전투가 벌어지는 거라면 차라리 그 남자 쪽이 낫지 않을까요?”

“아니, 이번엔 아니다.”

엠마가 단언했다.

“만약 다른 옛 영주였다면 나도 차라리 그 괴물 놈을 빌려달라고 했을 거다. 하지만 이번엔 상대가 나빠.”

“그 피붙이 고문자라는 게 그렇게 센 놈이에요?”

이번엔 마이어가 물었다.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니란다. 그러니까, 그 괴물 놈이 아무리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마법사라고 해도 피붙이 고문자에게는 바로 작년까지만 해도 자기 오븐 속에 들어있던 고기에 불과하다는 점이 문제야.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잘 아는 게 괴물 놈 자신이지. 그놈이 무슨 위험한 짓을 벌이건 이길 수 없어. 절대로.”

 


[로판인줄 알았는데 괴담이다]악녀인줄 알았는데...(6) ㅣ- 기타

별일은 없었어요. 유진 험담을 하려는 것도 듣지도 않고 차단해버렸고요.”

의외로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고까지 말하면 역효과만 날 것 같아 그쯤에서 말을 끊고 유진의 눈치를 살폈다. 여전히 사색인 채 내게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있는데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하다.

그야... 로제니까 무사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잔뜩 억눌린 목소리. 역시 화났나봐.

혼자 온 것도 아니고요. 상대가 무슨 꿍꿍이인지 알아보는 것도 필요하잖아요.”

무슨 꿍꿍이라던가요? ..., 그러니까 제 말은 그쪽에서 뭔가 무례하게 굴지 않았는지 걱정이 되어서......”

나한테 너무 날카롭게 대꾸했다고 생각하는지 얼버무리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나는 안심시키려고 일부러 크고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례한 말도 없었어요. , 무어 가 얘기를 꺼내길래 대놓고 딴 얘기로 돌려버렸더니 찍 소리 못하던데요. 그리고 꽃다발을 받았는데 빨간 장미라서 그냥 버리든가 하려고요.”

설명하며 돌이켜보니 별로 대단한 소득이 있었던 시간은 아니다. 하지만 시빌 바넘에 대한 내 인상은 조금 변했다.

한창 무어 가 이야기를 할 때와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랐던 걸 보면, 평소 자신의 개성이나 의견을 드러내는 일에 익숙지 못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가문의 후계자라고 모두의 기대를 받으며 고이 자랐지만 대신 아버지에게 들은 말, 가족이나 주변인의 기대에 맞춘 언행만 해온 거지. , 이렇게 표현하니 이 또한 로판에서 드물지 않은 캐릭터로군. 그렇다면 역시 공략을 하는 쪽이 정답이겠지?

그 꽃다발은 어디 있습니까?”

유진이 잔뜩 경계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거참, 꽃다발 하나까지 견제하다니 누가 전직 계략 남주 아니랄까봐. 나는 타고 온 차를 가리켰다.

저기 뒷좌석에요.”

유진은 곧바로 꽃다발을 찾아 들더니, 속에 폭탄이라도 숨겨져 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샅샅이 뒤졌다. 그 모양을 구경하다가 내 쪽에서 궁금해진 것을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경계하는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무슨 원수진 가문이라도 되나? 그렇다고 가문끼리 독 타거나 총질하는 게 용인되는 사회 같지도 않은데 저렇게까지 걱정하는 건 이상하다. 드래곤 퇴치 때 이후로 저러는 건 본 적이 없다.

유진이 만족할 만큼 뒤져서 처참한 꼴로 만든 꽃다발을 뒷좌석에 도로 쑤셔박고 몸을 일으켰다.

일단 여기는 벗어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자기 차로 돌아가다가, 내가 곁에 타려고 조수석으로 가자 얼른 막아섰다.

죄송하지만 차 안이 좀 지저분합니다. 치울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래요.”

언제나 방이든 차 안이든 깔끔하게 하고 다니는 남주가 잠깐 자취한다고 차 안에 이것저것 쌓아뒀단 말이지? 뜻밖의 귀여운 구석을 염탐해보려고 남주의 어깨 너머로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지저분? 저게 지저분?’

언제나처럼 먼지 한 톨 없고 조수석에 책 두 권, 뒷좌석에 큼직한 종이봉투 하나가 전부다. , 저게 지저분한 거면 대학 때 얻어 탔던 동아리 선배 차는 혼돈의 심연, 어둠의 다크니스, 멸망한 세계 최후의 흔적이야.

그런데 유진은 진짜로 저게 내 눈 건강을 위해 꼭꼭 감춰둬야 할 흉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포까지 찾아다 씌워서 아예 트렁크에 치워버렸다.

이제 타세요.”

너무 귀여워서 좀전까지 미심쩍던 기분도 잊을 뻔했다. 그치만 전직 계략 남주가 노리고 한 연출이라기엔 본인 분위기가 여전히 심각한걸.

차는 간신히 과속이 아닌 속도로 바넘 저택 근처를 벗어났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유진은 아무 말 없었다.

그에 비례해 나도 다시 한 번 추궁해볼까 하는 충동을 참기가 힘들어졌다. 뭣보다, 지금 유진은 다시 검은 장갑을 끼고 있다.

나한테 받은 반지를 낀 이후 한겨울에도 낀 적 없는 장갑을, 이 여름에.

약지 쪽에 반지 윤곽이 튀어나와 있는 걸 보고 있으려니 유진도 내 시선을 의식한 것 같았다. 최대한 내 시선이 그쪽에 닿지 않게 운전대 쥔 왼손을 돌렸다.

“...로제는.”

엄청나게 죄 지은 것 같은 목소리로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때가 되면 도축될 예정이던 사생아와 결혼한 게 후회된 적이 없습니까?”

 

 

자기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갔는지 깨닫고 유진은 또 급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결혼 전부터, 청혼 전부터 묻고 싶었지만 대답이 무서워 물어볼 수가 없었다. 가주의 망령이 실컷 떠드는 걸 듣고도 여전히 결혼할 마음이 들었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니겠냐고 애써 합리화하기도 했다. 그것이 로제 앞에서 그런 조롱거리를 놓쳤을 리 없으니까.

그리고 로제는 한 번도 그걸 신경쓴다는 티를 낸 적이 없었다. 제물 낙인을 보고서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웃으며 지워주기까지 했다.

그러니 자신도 로제 곁에 있다 보면 차차 수치감도 누그러지고 적응해서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상황이 달라지고 오래된 공포가 되살아나면서 그런 대책 없는 낙관도 사라졌다. 그렇다고 이렇게 대놓고 물어볼 마음도 없었는데.

제물 낙인이 지워지면 대신 비슷한 수준의 정신 방벽이 되어줄 주문을 찾자는 결심은 일찍부터 했던 것인데 아직도 진전이 없었다. 그 정도로 고등한 정신계 주문을 담은 신화서는 그조차도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진귀했다.

게다가 감정이라는 건, 특히 자신의 감정이라는 건 객관적으로 파악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지금의 자신은 감정에 잘 휘둘리고 충동을 억제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대처해야 할 약점으로 자각한 것도 결혼 후의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제 무덤을 파 버릴 줄이야.

더 무슨 실수를 할지 몰라 차를 길가에 세웠다. 그리고 억지로 고개를 돌려 로제의 표정을 본 순간, 진작 혀를 잘라버리지 않은 자신을 탓하게 되었다.

약이라고 준 게 사실은 독이었다고 자백했을 때도 저 정도로 경악하지는 않았다.

 

 

내가 뭘 들었는지 모르겠다. 꼭 도축이라고 한 거 같은데, 설마? 대체 왜?

저택에 잠입한 이유가 생존이라고 말했던 걸로 봐서 드래곤한테 살해 협박이라도 받고 있었나보다 했는데, 사실은 자기 가문한테 협박받은 거였어? 피폐물이 빙의 후 공략물로 바뀐 게 맞았구나. 그것도 고수위 고어물이었나봐.

내 대답이 얼른 돌아오지 않아서인지 남주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걸 보고 정신을 차렸다. 그래. 어쩐지 후회남치고도 자낮이 심하다 했어.

마침 차도 세웠겠다, 나는 과감히 두 손을 뻗어 유진의 손을 잡았다. 유진은 뒤늦게 손을 빼려 했지만 그보다 내 말이 빨랐다.

잘 들어요.”

내가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말했다.

제가 살다 온 세계엔 아동학대라는 죄가 있거든요. 그게 뭐냐면 아이를 꼭 유진이 어렸을 때처럼 키우는 거예요. 그거 엄청나게 중죄예요.”

“......?”

그렇게 못 알아듣겠단 표정 하지 마라. 불우한 유년기를 선사한 놈들한테 고작 죽빵을 날리려고 했던 과거의 내가 순진했지.

모르겠으면 그냥 외워요. 나쁜 건 그쪽이고! 유진은 피해자고! 그거 가지고 유진이나 제 체면을 깎으려는 사람이 있으면 그쪽도 나쁜놈이고! 저는 그런 거 전혀 신경 안 쓰니까 다신 그런 거 때문에 걱정하지 말아요. 알아들었어요?”

유진이 여전히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 사이 그의 손에서 장갑을 벗겨냈다. 이번엔 실수로 들춘 게 아니고 일부러다.

난 이런 흉터 같은 거 하나도 안 창피하다고요. 무슨 소문이 퍼지든 사교계에서 매장이 되든 말든 하나도 안 무섭고. 내가 괜찮아도 유진이 안 괜찮아요? 걱정 말아요. 베른 떠나서 어디든 유진의 과거 같은 거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살죠. 석유 부자가 고작 소문 무서워할 필요 없다면서요.”

어쨌거나 지난 일이고 유진이 새삼 괴로워할 이유가 달리 떠오르지 않아서 막 숨이 찰 때까지 질렀는데, 헉헉거리며 숨을 고르는 사이 집 나갔던 이성이 되돌아와 속삭였다. 너 이거 헛다리 짚은 거면 개쪽이야.

여전히 손을 잡은 채로 슬며시 눈만 굴려 표정을 확인하기로 했다. 그러게 왜 이성이 가출을 하고 난리야.

그런데 눈을 다 굴리기도 전에 몸이 홱 딸려갔다.

, 또 숨 막히게 끌어안겼어...

입으로 숨을 쉬면서 나도 마주 끌어안으려고 했는데 내 두 손으로 유진의 한 손을 잡은 자세여서 빼낼 수가 없다. 꼼지락거려 봤지만 겨우 코로 숨 쉴 공간을 확보하는 게 고작이었다. 한 팔로 사람을 이렇게 세게 끌어안을 수 있다니.

그래도 이런 반응이란 건, 내가 제대로 짚었다는 거겠지?

유진.”

반응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겸 슬쩍 물었다.

... 무어 가 사람들 지금은 어떻게 되었어요?”

유진이 움찔 떨었으나 곧 대답했다. 잠긴 목소리였지만 평온했다.

이미 모두 죽었습니다. 지금 세상에 무어 성을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요? 아쉬워라.”

겨우 한 팔을 빼내서 유진의 등을 쓸어주었다.

내가 전부 거꾸로 매달고, ...죽빵을 날려주고 싶은데. 아주 많이. 손가락마다 알 굵은 반지도 끼고. 그리고 또...”

빈곤한 창의력이 어째 죽빵에서 더 나가지를 못해서 버벅거리는데 유진이 작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로제가 그렇게까지 안 해도.”

“정말이죠?”

하기야 뼈대 있던 가문이 유진 하나만 남고 멸문했으니 별로 편한 결말은 아니었겠지? 악역에 걸맞는 사이다였을 거라고 생각해두자. 유진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으니.

좋아. 사이다를 이만큼 들이부었으니 바넘 가에서 무슨 음모를 꾸미건 고구마에 목 막힐 일은 없겠군.

슬슬 다시 출발해야 집에 가서 저녁을 먹을 텐데 싶지만 남주가 움직이지 않으니 기다려 주자. 그리고 오늘 저녁은 집에서 같이 먹자고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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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차 안 청소 좀 안 하고 벗어놓은 옷 좀 안 치웠다고 차에 네크로노미콘과 를리예 문서와 인신공양용 흉기들을 싣고 다니는 괴물만도 못한 취급을 받은 불쌍한 동아리 선배.


[로판인줄 알았는데 괴담이다]악녀인줄 알았는데...(5) ㅣ- 기타

 

대지주 가문이라더니 저택으로 가는 풍경은 끝 간 데 모를 농경지였다. 한창 초여름답게 푸른 곡식이 물결치는 모습은 로만타운 같은 번화가와는 또 다른 볼거리였다.

그러고 보니 이 세계엔 아직 내가 못 가본 곳이 많다. 유진도 로만타운보다 더 근사한 도시가 얼마든지 있다고 했지.

한가해지면 유진이랑 둘이 여행 다녀올까?’

이런 생각을 돈 걱정, 시간 걱정 없이 할 수 있다는 게 바로 금수저의 특권이다. 음하하.

슬슬 농경지 풍경이 지루해질 때가 되어서야 나타난 저택도 굉장한 위용이었다. 장미 넝쿨 저택, 아니 사과나무 저택에 비교해도 그리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사과나무 저택 쪽이 정원을 갈아엎는 김에 건물 외관도 보수해서 더 현대적이고 깔끔하기는 했다. 하지만 침침하니 오래된 벽도 나름대로 고풍스러운 맛이 있었다.

시빌 바넘은 티타임에 어울리는 복장을 하고 저택 현관에 나와서 날 맞이했다.

이렇게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태도도 첫 만남 때와는 딴판으로 예의발랐다. 나도 일단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저야말로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편분께 무슨 말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가문끼리의 은원에 아직 젊은 우리가 너무 얽매일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날 있었던 일이 부끄러워지더군요.”

,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다행이네요. 저도 옛날 일 같은 건 신경쓰는 쪽이 손해라고 생각하거든요.”

어느 정도 진심을 담아 한 대꾸에 시빌은 일단 싱긋 웃었다. 악녀치고 못생긴 악녀 없지만 이런 미인이 눈앞에서 웃고 있으니 파괴력 장난 아니다. 유진의 얼굴로 평소 단련을 해두지 않았더라면 새로운 취향에 눈떴겠어.

하기야 로판 악녀라고 항상 무찔러야 되는 상대만 있는 건 아니다. ‘얘도 알고 보면 사연이 있었어클리셰라든지, 더 나쁜 다른 흑막에 맞서 힘을 합치는 전개도 있지. 원래 공략물이었던 이 로판 분위기에도 그쪽이 더 어울린다.

좋아, 기왕 이렇게 만난 거 네가 공략 가능 캐인지 공략 불가 빌런인지 이번에 확인해주마!

단 걸 좋아하세요?”

저택 안으로 안내하며 시빌이 물었다.

물론이죠.”

가문 비장의 디저트라는 단어가 초대를 받아들일지 결정하는 데도 당연히 영향을 끼쳤지. 어디 이런 유서 깊은 가문의 비장의 레시피는 어떤지 검증해보실까.

시빌이 안내한 곳은 저택 정원에서 곧바로 들어갈 수 있는 발코니였다. 장미와 해바라기 등 다양한 여름 꽃들이 어울리게 장식되어 있고 테이블보는 먼지 한 톨 없는 흰색이었다. 찻주전자와 찻잔 세트는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가향차로 준비해 봤는데 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것으로 가져오지요.”

아뇨, 괜찮아요. 이 향 좋아요.”

먹는 것 중에 내가 싫어하는 건 맛없는 것뿐이다. 당근이라든지 싫어한다고 생각했던 재료 몇 가지가 있긴 한데 그것도 조리법과 먹는 환경의 문제였음을 빙의 후 깨달았다.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침대에서 먹는 당근 수프는 꿀맛이었지.

차 향기도 좋고, 차를 우리고 따르는 시빌의 손놀림도 능숙하고 우아했다. 과연 인성 빼면 모든 게 완벽한 로판 악녀답다.

티푸드로 나온 비장의 디저트는 냉장고에서 갓 꺼내온 듯 차가운 과일 타르틀렛과 조각케이크였다. 외양은 솔직히 평범한데, 한 입 맛보는 순간 무슨 배짱으로 비장의 운운했는지 이해했다.

우리 아버지께선 베른에 뿌리를 둔 명문가들을 연구하고 계세요. 특히 무어 가의 명성에 감탄하셔서 제게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지요. 그래서 저도 흥미가 생겼어요.”

차를 따르며 시빌이 노래하듯 여유로운 태도로 설명했다.

흔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알아주는 대지주 가문이었다고들 하지만 그것도 오히려 부족한 말이죠. 과거 베른에 있던 시절엔 왕가보다도 더 두려움을 샀다더군요.”

, 그래요? 이거 진짜 맛있네요.”

나는 일부러 티 나게 성의없는 대답을 하며 케이크 한 조각을 더 입에 넣었다.

베른에서 득세하던 시절의 무어 가라면 빨간 맛 책자에서 콕 집어 언급할 만큼 극악한 권력자 가문 아니었나. 왕실 권위도 씹어먹을 정도로 무서울 게 없었다니, 그때 본문을 못 읽어서 다행이란 생각마저 든다. 할 수 있는 온갖 나쁜 짓은 다 했겠지.

그러던 집안이 고향에서 밀려나 이리저리 떠돌다가 겨우 자리를 잡고 체면을 세우고 주제에 뼈대 있는 가문이라고 자존심은 있어서 사생아는 구박하고 그럴 거면 애초 품행을 단정히 하든가......그랬으면 내 남주가 못 태어났으려나.

시빌도 내 노골적인 무관심을 감지한 듯 물었다.

남편 분의 출신 가문인데 궁금하지 않으세요?”

유진에게도 말한 적이 있는데, 사람이 부모를 고를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 옛날 일까지 들이팔 시간에 지금 제 앞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하고 싶습니다. 가문끼리의 오래된 은원에 얽매이지 않는 분이니 아시겠지요.”

시빌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요. 하지만 사람은 출신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나요?”

그렇다고 출신 때문에 앞으로의 가능성까지 무시할 필요는 없죠. 시빌 양도 대지주의 딸이라고 해서 자기 신념이나 생각을 거기 어울리게 맞출 필요 없는 거고요.”

한창 빨간 맛 사상에 눈 뜨고 있는데 자신이 바로 타도해야 할 특권층의 수혜자이니 힘들고 혼란스러울 만도 하지. 엉뚱한 남한테 인성질을 할 정도로 스트레스 받느니 솔직하게 털어놔라.

사실은 시빌 양도 남의 가문 옛날 이야기보다 더 흥미로운 게 따로 있지 않나요?”

시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 내가 너무 정곡을 찔렀나? 그치만 먹을 때는 개도 건드리지 않는 법이란다. 선빵 날린 쪽이 잘못이야.

케이크 한 조각을 다 먹고 차로 입가심을 하도록 반응이 없어 조금 불안해지려는 찰나, 시빌의 표정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시빌 바넘의 얼굴 근육을 조종해 미소 띤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피붙이 고문자는 당황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아무 것도 안 통할 줄은 몰랐다. 암시도 안 걸리고, 디저트와 차에 심은 독도 안 먹히고, 흥미 있어 할 거라 생각해서 준비한 무어 가 이야기마저 본론은 꺼내지도 못했다.

만약 로제 오베르가 겉보기만큼 무지한 인간 여성이었다면 무어 가가 어떤 가문이었는지, 그 사생아가 무슨 짓을 해서 살아남았는지 반의 반만 들려줘도 질겁을 하고 괴물 남편을 영원히 안전하게 제거해버릴 방법이 있다는 말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파티장에서 그들을 직접 보기 전까지만 해도 한 번 시도해볼 생각이 있었던 선택지였다.

그러나 실상은 로제야말로 가장 무시무시한 괴물임이 이토록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로제를 기만하거나 세뇌해서 제물을 스스로 내버리게 만드는 건 시도할 가치도 없는 헛수고였다.

그러니 로제 본인을 공격해 무너뜨려야 하는데, 이렇게까지 저주도 독도 통하지 않는 상대라면 직접 힘을 휘두른다 해도 이길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역시 제대로 강림해야 내 힘을 제한 없이 휘두를 수 있어. 로제 오베르를 상대하는 건 그 다음 일이야.’

그믐의 의식은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숙주와의 연결이 갑자기 약해졌다. 지금의 바넘 가 영애역할과 무관한, 시빌 개인을 겨냥한 질문이 던져진 순간이었다.

지금 피붙이 고문자는 자신의 신체 일부 - 거의 촉수 끝 한 부스러기만 강림해 있었다. 전부 천문 계산 하나 똑바로 할 줄 모르는 얼간이 추종자들 때문이다.

허겁지겁 시빌의 대뇌에 이식된 덕에 겨우 의지를 행사하고는 있지만 숙주의 영혼도 눌려 부스러지는 대신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겨우 질문 하나에 이 정도로 타격을 받다니.

당황한 사이 시빌이 자기 입술을 멋대로 움직이려 했다.

...”

한 음절을 다 입에 올리는 순간 겨우 주도권을 돌려받았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던 그 표정은 착각이었을까? 시빌은 순식간에 웃음띤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살 떨리게 할 줄 아는 분이군요. 사교계의 거물들이 이제 긴장 좀 해야겠는데요.”

천만에요. 다들 안심하라고 전해주세요. 전 집에서 혼자 편히 밥먹는 걸 좋아하지 남들이랑 부대끼고 눈치보며 먹는 건 사양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겼지만 방금의 태도 변화는 좀 신경쓰였다. 지금 더 파고들어도 될까 알 수 없어서, 직전의 화제에선 비껴나갔으되 여전히 시빌 본인을 겨냥하는 질문을 한 번 더 던졌다.

시빌 양은 어때요? 그래도 친구들이랑 떠들썩하게 노는 편이 더 좋아요?”

저는...”

다시 한 번 불안한 표정이 되어 머뭇거리던 시빌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제가 남의 가문 흠이나 잡고 다니는 수다쟁이로 보일 소리를 먼저 했군요. 하지만 오베르 부인과 친해지고 싶은 건 사실이에요.”

내가 적당한 대답을 고르기도 전에 시빌이 초인종을 울렸다.

곧 거대한 꽃다발이 걸어왔다. 아니, 고용인이 들고 오는 꽃다발이 너무 크고 화려해서 사람 상반신이 다 가려진 것이었다.

우리 정원에 핀 꽃들로 만들었답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라벤더와 수국, 그 밖에 나는 이름도 다 모르는 싱그러운 꽃들이 메인인 장미의 붉은 색을 잘 강조해준다.

... 일반적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구성인데, 안타깝게도 유진은 붉은 장미를 싫어한다. 결혼 준비 때도 장식으로 붉은 장미는 안 된다고 해서 화훼 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지.

제릴과 엠마 씨도 드래곤을 생각나게 하는 장미 정원을 갈아엎겠다고 했을 때 기립박수를 칠 기세였고. 드래곤 퇴치 모험을 함께 겪은 사람끼리는 다들 공감하는 일인데 역시 일반인한테 이해해달라고 하기는 무리겠지?

고마워요. 제 방에 장식해둘게요.”

유진이 보기 싫어하겠지만 버리기는 조금 아깝다. 뭣하면 다른 꽃만 추려서 장식하고 장미는 전부 코트 부인에게 넘겨서 고용인들 나눠주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시빌이 어쩐지 피곤해 보였기 때문에 티타임은 그 정도에서 끝났다.

꽃다발을 차에 싣고 정원의 드라이브웨이를 벗어나 정문까지 빠져나왔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낯익은 차 한 대가 전속력으로 달려와 섰다.

원래 세계였다면 과속 딱지를 걱정했을 텐데 지금 그런 생각이나 할 때가 아니겠지. 나도 우리 쪽 차를 세우고 내렸다.

차에서 내리는 유진의 얼굴은 거의 사색이 되어 있었다. 걱정시킬 줄은 알았지만 좀 심한 거 아닌가?

로제.”

유진이 다가와 내 앞에 섰다. 다시 한 번 내 머리를 수박처럼 쥐고 살펴보려나 했는데, 이번엔 날달걀이다. 손을 대도 되나 망설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한참 이쪽저쪽 살펴보다가 손에 힘을 전혀 주지 않고도 머리를 쥐고 돌리는 기술을 선보이더니, 마침내 손을 놓으며 깊고 무거운 한숨을 푹 내쉰다.

, 이건 아무리 낙관적으로 생각해도 잔소리 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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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에서도 마담 자우어와 제릴을 묘사할 때라든지, 하녀를 당연히 공략대상으로 보는 거라든지, 로제는 얼빠일 뿐 아니라 바이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저 취향직격의 최고 절세미인이 마침 남성이었을 뿐입니다.


[로판인줄 알았는데 괴담이다]악녀인줄 알았는데...(4) ㅣ- 기타

 

심심하다아...”

서재의 소파에서 뒹굴 만큼 뒹굴었는데 시간이 안 간다.

유진이 아침 일찍 저택을 떠날 때만 해도 나 역시 나름의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유진 없는 동안 알차게 내 할 일을 하겠다는.

사실 급한 일은 파티 전에 끝내 놨기 때문에 오늘은 그냥 아침부터 아무 것도 안 하고 빙의 초반처럼 날백수 생활을 해도 되는 날이다. 하지만 아무리 유진이 못하는 게 없어도 내 사업, 내 돈 관리까지 통째로 다 해달라고 하는 건 역시 미안하지.

엠마 씨가 관리하던 재산의 실태를 직접 확인하는 일부터, 끙끙대는 나를 보다 못해 유진이 도와주고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파티 날까지도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유진은 비서도 한 명 두지 않고 자기 사업에 저택 관리에 내 일까지 도와주고 있다. 오늘도 사무실 일을 도울 사람 한 명쯤 데려가라고 권해봤는데 혼자 일하는 게 편하다면서 굳이 혼자 떠났다. 남편이 그렇게까지 모범을 보이니까 나도 어쩔 수 없이 자극을 받고 말았다.

어차피 경영의 세부 사항은 경영인들에게 맡기고 큰 지침만 잡아줘도 된다는 말도 들었지만 파티 날 있었던 일, 그러니까 그 악녀 씨와 나눈 대화도 좀 마음에 걸린다.

석유왕으로 꿀 빨고 사는 것도 좋지만 나중 또 다른 사상계몽 수필에 ‘옛 기업가들’ 중 하나로 내 이름이 박제되는 건 사양이다. 난 녹아내린 오징어 괴물이 아니라고!

새로 저택 돌볼 사람들을 고용하고 계약서를 작성할 때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면 이 세계는 실제 근대 유럽보다는 나은 것 같긴 하다. 그렇다고 알바를 전전하며 취준을 걱정하던 빙의 전 내 감성에 비추어 안심이 될 정도는 아니다.

그러니 최소한 내 저택, 내 유전에서만큼은 노동 착취가 없도록 내가 살필 것은 살피고 지시할 것은 지시해야 한다. 그리고 떳떳하게, 속 편하게 꿀을 빨 테다!

......그렇게 가상한 결심을 하고 한 시간 만에 깨달았다. 양심적인 고용주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었어.

그렇다고 경영 공부를 한 시간 만에 때려치우는 건 너무 쪽팔리니까, 오전 동안엔 결심한 대로 억지로라도 책상 앞에 붙어있었다.

대신 너무 오랜만에 공부라는 걸 한 나 자신을 격려하고자 오후엔 진짜 빙의 초반처럼 놀 생각이었는데.

“유진 보고 싶어...”

설마 하루도 안 지나서 보고 싶을 줄은 몰랐지. 늘 둘이서 찰싹 붙어다녔으니 며칠 정도는 떨어져 있어도 각자 할 일을 하면서 홀가분하고 좋을 줄 알았지.

“내 쪽이 집착여주였던 건가.”

대충 읽다 내려놓은, 집착 쩌는 남주 때문에 곤란을 겪는 게 주 갈등 요소인 로맨스 소설을 괜히 흘겨보다가 노크 소리에 문을 쳐다보았다.

“마님,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이젠 마담 자우어가 아닌 내가 마님이라는 게 가끔 어색하다. 이번에도 날 불렀다는 걸 한 박자 늦게 알아차리고 대답했다.

“네, 들어와요.”

새 집사 코트 부인은 로제 어머니뻘도 더 되게 나이가 많아서 처음부터 절로 존대가 나왔는데, 알고 보니 고용인이라도 집사 정도 되는 상급자에겐 원래 그 정도 예의를 갖추는 법이라고 한다. 양심적인 고용주가 되자고 결심해놓고 시작부터 기본 예의도 내다버린 고용주가 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빙의 설정이 어른 될 때까지 저택에 갇히다시피 살아온 물정 모르는 병약 미소녀라는 점도 이럴 때는 편리하다. 여차하면 그 핑계 대고 몰라서 그랬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

코트 부인이 받쳐 든 은쟁반엔 색색의 봉투가 가득했다. 석유왕인 데다 오래 은둔형 외톨이로 살아온 로제 오베르에게 호기심을 드러내는 사람은 많았다.

이걸 다 상대해줄 필요는 없고 대부분은 적당히 읽씹하면 된다는데, 난 아직 누가 상대할 만 하고 누가 아닌지 판단할 근거도 부족하다. 그래서 한번 이름 정도는 대충 다 훑어보기로 했다.

슬슬 졸음이 올 정도로 모르는 이름들이 눈앞을 흘러다니다가 드디어 아는 이름 하나가 튀어나왔다.

‘시빌 바넘’

다른 건 밀어두고 이 봉투부터 집어 열자 금박 입힌 예쁜 카드가 나왔다. 시대극에 나오는 아가씨들이 흔히 하듯이 향수라도 뿌려서 보냈는지 좋은 냄새도 났다.

내용도 의외로 정중했다. 지난번엔 자기가 실례를 저질렀으니 대신 티타임에 초대하고 바넘 가 비장의 디저트를 대접하고 싶다는 말이 고상한 예의를 갖추어 적혀있었다.

유진이 여기 있었다면 읽씹하라고 했겠지?’

내가 일곱 살짜리 골목대장이 아니라는 건 과연 받아들였을까? 뭐 나도 카드에 적힌 그대로 좋은 의도뿐일 거라고 믿는 건 아니지만 이대로 초대를 거절하면 루트 하나가 그냥 닫히는 거다.

한 군데 집중 공략 중인 것도 아닌데 열리려는 루트를 무시하고 지나쳐서 좋을 것 없겠지. 게다가 유진과도 관련 있는 루트인데.

자기 혼자 알아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혼자 사무실로 갔겠지만, 나도 남주 걱정할 줄 안다. 둘이 대처하는 게 혼자보다 낫고.

이렇게 대놓고 공개적으로 초대해놓고 설마 독이라도 타겠어?

마침 심심하기도 했겠다, 다른 봉투들은 그냥 전부 밀어두고 여기에만 답장하기로 했다.

 

 

그날 밤, 베른에서 좀 떨어진 어느 기차역 근처의 버려진 창고에 쌍둥이와 엠마 씨가 들이닥쳤다.

내가 그러니까 경찰 데려오자고 했지.”

해서의 목소리가 유난히 날카로웠다.

우리끼리 서둘러 봐야 늦었으니 지금이라도 공권력 개입시켜야 수배라도 한다고. 이제 이 텅빈 지하실 보여줘 봐야 어느 경찰이 신경쓰겠어?”

어차피 우리가 구하기는 늦었으니 경찰서 먼저 들르자고 하기엔 너무 많은 목숨 아니었어?”

마이어 역시 평소의 능글맞은 태도는 사라지고 퉁명스러워져 있었다.

둘 다 낭패감을 삭이느라 저런다는 걸 아는 엠마는 자신만이라도 침착해야 한다고 다짐하며 혹시 남은 단서가 있는지 창고 안을 뒤졌다.

겉으로는 평범하게 버려진 창고였으나 실제로는 각지에서 불법 입양해온 아이들이 열 명이나 수상한 마법으로 갇혀있던 곳이었다.

형사 데려와서, 황당무계한 마법으로 창고가 숨겨져 있는 꼴을 직접 보여줬다고 해도 누구나 본 걸 그대로 받아들이진 못 한다고. 한 번 쓰고 버릴 창고가 아니니까 이렇게 애들 데리고 튄 뒤에도 계속 감춰뒀겠지? 우리끼리 이럴 시간에...”

이럴 시간에 엠마가 이미 조사를 하고 있는 걸 보고 마이어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거기 뭐가 있습니까?”

문을 감추고 있던 주문이 여기 적혀있었어.”

겉보기엔 그냥 잡동사니가 대충 쌓여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엠마가 몇 가지를 치우고 나니 벽에 수상한 얼룩이 드러났다. 읽을 수 있는 형태는 아니어서 마이어는 일단 설명을 기다렸다.

우리가 밖에서 깨고 들어왔기 때문에 흐려진 거야. 원래 형태를 알아내면 적어도 어느 옛 영주가 관련되어 있는지는 알게 되겠지.”

고고학자인 엠마는 지워지거나 일그러진 자국을 복원하는 기술을 많이 알고 있었다. 형사였던 쌍둥이가 보기에도 감식반보다 유능했다.

과연 엠마가 뿌린 흰 가루가 벽에 달라붙자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획과 도형이 나타났다.

여전히 나는 못 읽겠지만.’

엠마가 수첩을 펴들고 조심스럽게 해석하는 사이 해서도 이리로 다가왔다.

지금이라도 기차역으로 가면 가능한 행선지를 좁히기라도 할 수 있겠는데요. 거기 뭐 단서 남았어요?”

마이어가 손가락을 입에 대는 걸 보고 해서도 조용히 기다렸다.

무서운 얼굴로 집중하던 엠마가 마침내 해석을 마치고 일어났다.

이건 좀 위험할지도 모르겠구나.”

이들이 하는 일 기준으로도 위험하다는 말이었다. 쌍둥이는 나란히 긴장해서 엠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단순 아동 인신매매가 아니라 굳이 입양의 형식을 취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기차역 간다고 했지? 서두르자. 자칫하면 그 아이들뿐 아니라 모두가 위험해져.”

엠마는 이미 수첩과 도구를 가방에 쓸어넣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기세에 덩달아 서두르면서 마이어가 슬쩍 물었다.

모두라면 구체적으로 얼마나요?”

모든 인류.”

 

 

사무실과 금고 속에 있던 제물 정리 말고도 유진이 할 일은 많았다.

로제에게 댄 이유인 바넘 가 뒷조사도 해야 했고, 신화서도 읽어야 했다. 피붙이 고문자와 무관한 세력의 옛 영주들을 해설한 책이니 도움이 될 만한 주문을 얻을 수도 있었다. 쓸 수 있는 수단은 전부 모을 작정이었다.

신화서는 항상 내 편이었지.’

알 아지프의 서를 처음 발견한 순간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희망이 배신당하지 않는 경험을 했고, 자신의 생명에 가치가 있다는 - 적어도 그 신화서의 첫 줄을 읽는 것조차 감당 못하는 버러지들보다는 가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살아남은 덕에 로제를 만나, 인생에 가장 소중하고 황홀한 순간이 새로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까지 배웠으니 생존이란 역시 쟁취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 신화서는 로제가 준 물건이기도 했다. 자신의 이름을 지어주려고 로제가 그렇게 수고를 들였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워, 틈날 때마다 그때를 떠올리며 펼쳐보곤 했던 덕에 이렇게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 주문 연구를 하기에도 수월했다.

해저에 가라앉은 옛 영주와 그 권속들의 도시, 그들의 문화에 대해 흥미롭게 읽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 시간이 이렇게 됐군.’

시계를 보니 집사 코트 부인의 전화였다. 저택을 나서기 전, 매일 오후 3시마다 사무실 전화로 저택에 특이사항이 생겼는지 보고하라고 말해두었다.

어제는 바넘 가 뒷조사가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이 시간까지 밖에 있다가 전화를 못 받았지만, 긴급한 일이면 아무 때나 다시 전화하라고도 했으니 괜찮았을 것이다. 수화기를 집어들고 사무적으로 입을 열었다.

납니다.”

-코트 부인입니다.

목소리가 평온한 걸 보니 역시 별일은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커피 잔을 집었다. 읽고 있던 책 탓인지 입 안에 소금기가 느껴졌다.

-어제 마님께서 티타임 초대를 받아들이셔서, 오늘 외출하셨습니다.

그렇습니까? 누구의 초대입니까?”

-바넘 가 영애 시빌입니다. 오늘 2시에 바넘 저택에서...

커피 잔이 박살나 버렸다. 스스로도 뭔지 모를 노성을 터뜨리느라 그걸 깨닫지도 못했다.

 


[로판인줄 알았는데 괴담이다]악녀인줄 알았는데...(3) ㅣ- 기타

유진에 대해 한 가지 더 알아냈다. 춤도 잘 춘다!

내가 배울 때도 따로 연습하는 기색이 없었는데, 밥 먹고 춤만 춘 사람처럼 스텝이 완벽하다. 춤 교습용 로봇하고 추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 정도로.

그에 비하면 나는 음...파트너의 얼굴에 정신팔린 탓이다. 절대 연습이 부족했던 게 아니다.

나한테 몇 번이나 발을 밟히고도 눈썹 하나 까딱 없이 스텝을 이어나가는 게 미안해서 두 곡 정도 지나자 적당히 끝내고 구석으로 물러났다. 다행히 유진도 아쉬운 기색 없이 따라왔다.

미안해요, 이번이 처음이라...”

내 궁색한 변명에도 웃는 얼굴로 끄덕여줄 뿐이다. 아니, 어쩐지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느낌이다.

유진.”

혹시나 싶어서 나직이 물었다.

아까 일 아직도 신경쓰여요?”

내 굳건한 애정과 신뢰를 보여주려면 아예 아무 말 않고 잊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랑 있으면서 유진이 딴 데 정신 파는 일은 흔치 않다. 확실히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또 어디서 고구마 줄기가 튀어나올지 모른다고.

과연 유진은 찔리는 기색이 되어서도 더 달래거나 추궁할 필요 없이 곧장 대답했다.

실은 아까 그 사람, 제가 모르는 경로로 무어 가와 관련 있던 가문이 맞았습니다. 게다가 별로 좋은 관계도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요? 어쩐지 까칠하더라니.”

. 분명 로제에게도 좋은 뜻으로 접근한 게 아닙니다. 다음에 또 접근하면 아예 상대하지 말고 피하세요.”

그럴게요.”

유진의 얼굴이 절박해 보였기 때문에 일단 그렇게 대답하고 되물었다.

그 가문 간 트러블은 어떻게 할 거예요?”

일단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바넘 가를 조사해봐야겠습니다. 대책은 그 다음에 세워야죠.”

하기야 그쪽이 하는 말만 듣고 움직일 수는 없죠.”

끄덕거리는 내게 유진이 눈치 보듯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당분간 저는 로만타운에 있는 제 사무실에서 지낼까 합니다. 괜찮겠습니까?”

거기서 지낸다고요? 잠도 거기서 자고?”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도 잠시 거기서 묵었기 때문에 지낼 만 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고요.”

로만타운이면 저택에서 출퇴근할 수 있는 거리인 거 아니에요?”

맞습니다만...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로제는 주로 러시아워를 피해서 외출했으니 모를 수도 있겠는데 여기도 출퇴근 시간엔 도로가 많이 번잡합니다.”

K-직장인의 향기가 내 남편에게서 나려고 한다. 크흡. 아무리 그래도 유진의 시간을 출퇴근 도로에 뿌리라고는 못하겠다.

그거면 돼요? 정말 금방 끝나요?”

물론입니다. ...”

이럴 땐 구체적인 예측치를 내놓는 편이 좋다는 걸 유진도 잘 안다. 마치 밤하늘이라도 올려다보는 것처럼 천장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믐. 이번 달 그믐 전에는 결론이 나올 겁니다.”

 

 

파티가 끝나고 돌아온 로제는 화장을 지우고 따뜻한 욕조에 몸을 푹 담갔다가 곧바로 잠들었다.

많이 피곤했나보군.’

유진은 로제의 잠든 얼굴에 손을 뻗어 쓸어보다가 그만 손을 거두었다. 로제가 먼저 잠들고 나면 버릇처럼 하던 일인데, 무슨 자격으로 감히 그래왔는지 갑자기 알 수가 없어졌다.

-지금 이 상태로라도 널 곱게 돌려준다면 로제 오베르는 용서해줄 수도 있겠어.

그런 존재들이 늘 하는 기만이야.’

속으로 몇 번째인지도 모르고 되뇌었다.

날 받는다고 해서 정말 로제를 봐줄 리 없어.’

그러니 순순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집어삼켜지는 대신 다른 돌파구를 찾아보느라 시간을 끈다고 해서 그렇게 배은망덕한 짓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지금의 생존과 행복이 다 로제에게 일방적으로 받은 것이니 로제를 위해서라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건만, 여전히 비겁하고 저열한 나머지 너절한 변명거리를 모으고 있었다.

그것들은 인간을 거래 상대로 삼을 만큼 동등하게 여기지 않아. 가볍게 던진 말 가지고 거래를 시도해봐야 로제를 구할 수는 없어. 제물 낙인을 그토록 쉽게 지워버렸으니 그 앙갚음이 하고 싶겠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래 쌓은 경험과 지식으로 그는 별들의 주기와 운행을 읽을 줄 알았다. 필요하면 지형지물의 방해도 무시할 수 있었다.

덕분에 이만 잊고 싶던 과거의 공포가 왜 하필 지금 다시 현재가 되었는지도 늦게나마 알 수 있었다. 별들의 정렬 상태가 그 존재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하고 있었다.

숙주에 기생하는 형태로나마 강림에 성공한 것이 그 덕분이리라.

인간이 그토록 하찮다면 아예 인간에게 신경 끄면 좋을 텐데. 옛 영주들 중에도 인간 추종자의 경배와 소환 시도를 귀찮게만 여기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가지고 노는 것만은 그토록 좋아한 나머지 강림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하는 부류가 있었다. 피붙이 고문자도 후자에 속했다.

그리고 이번 달 그믐이면 별들이 최적의 위치에 정렬한다.

시빌 바넘을 숙주로 한 지금 상태는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 분명 추종자들을 조종해 제대로 된 의식을 치르고 완전히 강림하려 할 것이다. 그 최적의 날이 이번 달 그믐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니 그 때가 되기 전에 의식을 망치고 추종자들을 섬멸해야 했다.

로제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속이는 일도 최대한 줄여서.

왜 떨어져 있어야 하는지 이미 제대로 된 설명을 피하긴 했지만, 함께 있다가 일망타진 당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적의 주의를 끌어서 로제는 일차적인 위험을 피하는 편이 합리적이지 않은가? 계약서의 예외 사항 중 긴급하거나 위급한 상황이 있었으니 계약 위반은 아니다.

인간을 여럿 죽이고 공양해버릴 작정이지만 역시 죽이는 것 외에 로제를 보호할 방법이 없는 상황이니 예외 사항에 들어간다.

그는 무어 가의 망령이 사라지고 얼굴 없는 옛 영주가 떠나던 날을 기억했다.

자신이 마법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일부나마 보여 버렸을 때, 곧바로 제사 단검을 넘긴 것은 로제가 자신을 무서워하고 싫어하게 될까봐 두려워서였다. 거기에 상황이 완전히 정리될 때까지 마법 방면으로도 로제를 지켜줄 호신용품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걸로 옛 영주의 유물을 파괴하는 위험천만한 짓을 저지른 사람이 로제였다.

이번엔 그러니 위험한 짓을 할 기회 자체를 제거할 것이다.

어차피 오늘 밤은 잠이 오지도 않을 것이고 억지로 잠들어봐야 편한 잠자리가 되지 않을 것이기에 유진은 아예 일어나 앉아서 차근히 계획을 짰다.

위험한 마법은 쓰지 않기로 약속했을 때 많은 유물과 제물들을 로만타운의 사무실에 정리해 넣고 이제까지 방치해 두었다. 내일 당장 금고를 열고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추려야 했다.

보존에 신경쓰지 않았고 더 모으지도 않았으니 그동안 혹시 훼손되었거나 부족할 수도 있지만 그 정도는 바넘 가의 추종자들을 도살해 해체하면 즉석에서 벌충할 수 있었다. 시빌 바넘만 주의하면 그 외엔 자신이 당해내지 못할 상대는 없었다. 인간 추종자든, 괴물이든.

 

 

바넘 가는 유서 깊은 대지주 가문으로 오랫동안 위세를 떨쳐온 곳이었으나, 지금은 시대의 격변 속에서 서서히 기울어가는 중이었다. 현 가주가 베른의 석유 사업에 투자했다가 큰 손해를 본 뒤로 추락은 더욱 가속되었다.

그러나 속아서 산 불모지 중 한 군데에서 기적적으로 석유가 솟기 시작하며 상황이 뒤집혔다.

포기하기 전 마지막이란 기분으로 들이팠더니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일화가 새로운 투기꾼들을 위한 떡밥으로 로만타운의 술집마다 오르내렸다. 그러나 실상은 외동딸을 옛 영주에게 바쳐서 얻은 기적이었다.

한 치 앞을 못 보는 어리석은 자들이었으나 피붙이 고문자가 신경 쓸 바는 물론 아니었다. 이런 탐욕스런 바보들일수록 무어 가문처럼 효율적이고 간교한 무리에는 없는 장점이 있었다. 바로 아까워할 필요 없이 쓰고 버릴 수 있다는 것.

피붙이 고문자는 그 노골적이고 알기 쉬운 잔인함으로 도리어 추종자를 쉽게 모으는 편이었다. 바넘 가 수준의 일회용품은 금방 또 구할 자신이 있으니 이번 대규모 제의 때 전부 써버려도 상관없었다.

완전 강림을 위한 대규모 제의는 그만큼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한다. 바넘 경은 먼 친척이나 입양아 등을 서둘러 긁어모아 머릿수를 채우고 있었다.

의식이 성공하고 옛 영주가 완전히 강림하면 딸 시빌을 숙주로 삼을 필요가 없어질 테니 딸을 돌려받고 가문의 대도 이어질 거라는 가당찮은 희망을 품고.

옛 영주가 현실에 강림하는 일인데 고작 그런 잡동사니 제물이 양만 좀 많다고 충분할 리 없잖은가. 가주의 하나뿐인 딸 시빌 바넘의 영혼은 의식의 완성을 위한 핵심 에너지가 되어 불타버리고, 그 육체는 지금보다도 더 유용한 그릇이 될 것이다.

솔직히 그걸로도 충분할지 알 수 없었다. 로제 오베르와 무어 가의 도망친 제물에게 접근한 데엔 그 이유도 있었다.

무어 가의 제물 낙인은 제물을 감시하는 기능도 있었으나 장미 넝쿨 저택은 얼굴 없는 옛 영주의 영역이었다.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지금도 추측에 의존하고 있었다.

직접 본 로제 오베르는 그 추측에 어느 정도 들어맞는 모습이었다. 순진하고 물정 모르는 온실 속 화초 같은 상속녀의 탈을 쓰고, 연약한 인간이라면 근처만 가도 오금이 저릴 괴물에게 자기 것이라는 마법 꼬리표까지 달아서 부리고 있었다. 얼굴 없는 옛 영주를 저택에서 추방하고 제물 낙인을 지워버리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한 걸 봐도 그렇고, 분명 옛 영주들조차 측량하기 어려운 미지의 존재였다.

겉으로는 아무 것도 모르는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는 것도 그리 생각하면 도리어 자연스러웠다. 파티장 휴게실에서 있었던 일도.

진짜 힘은 그 편린조차 내보이지 않고도 자기 전리품이 위험한 걸 감지해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개입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아는 얼굴로, 입으로는 엉뚱한 소릴 늘어놓으며 상황을 장악하고 순식간에 자기 것을 도로 챙겨갔다. 어디 되찾을 수 있으면 되찾아 보라는 듯이 과시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아무리 미지의 권능을 지닌 무서운 존재가 상대라 해도 그렇게까지 도발당했는데 겁먹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옛 영주로서 위신이 서지 않았다.

잃었던 제물을 되찾는 것은 그 첫걸음에 불과했다. 로제 오베르를 후회하게 만들어 주어야 했다.

일단 보다 가까이에서 관찰해봐야겠어.’

지난번 일로 미루어 보건대 로제 오베르는 자기 힘을 마음껏 휘두르기보다 인간의 거죽을 벗지 않는 선에서 상황을 교묘히 조종하는 것을 선호했다. 천 개의 가면이라 불리는 그 위대한 존재가 그런 식이듯이.

그러니 이쪽도 대담하게 움직일 때였다.

시빌 바넘의 책상 서랍을 열고 바넘 가의 문장이 금박으로 화려하게 박힌 카드를 꺼냈다.

 


[역전재판] 사랑이란 이름으로 ㅣ- 기타

Characters: 나루호도. 카미노기.
Rating: PG
Warnings: 없음
Summary: 화려한 역전 이후, 나루호도가 구치소로 카미노기를 찾아가다.

카미노기 소류/아야사토 치히로, 나루호도 류이치/아야사토 치히로가 깔려있지만 커플링이 목적인 글은 아닙니다.
화려한 역전에서 일어난 사건이 납득이 안 가서, 새로운 진상을 팬픽으로 썼습니다.

역전재판 3까지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구치소의 방탄유리를 사이에 두고 다시 마주 본 남자는 기분 나쁠 정도로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카미노기 소류씨, 당신에게 질문, 아니 확인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나루호도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혼자 왔나?”

“네?”

“기왕 나를 찾아올 거라면, 마요이를 대동하고 와 주었어도 좋았을텐데.”

“당신 좋을 일 할 생각은 없습니다.”

나루호도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그리고,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마요이에게 들려줄 수 없는 것이고요.”

“이제 와서 무슨 얘기지?”

카미노기는 진심으로 의아해보였다.

“이미 밝혀진 진실보다 그 애에게 더 가혹한 이야기는 없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런데, 있더군요.”

나루호도가 카미노기를 노려보았다.

“아야사토 마이코가 죽지 않고 암살사건을 해결할 수도 있었을 가능성.”

“그게 무슨 소리지?”

“이번 사건, 근본적으로 이상합니다. 재판 당시에는 저도 진상을 밝히는 데 급급해서 생각이 미치지 않았는데, 계획 단계부터 이상해요. 당신은 대체 왜 이런 난해하고 실패 가능성 높은 살인을 해야 했던 겁니까?”

“키미코의 계획을 알았을 때 자네에게 미리 상담하지 않은 건 실책이었지.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래도 치히로의 하나뿐인 동생을 구하기 위해서.”

“아니요. 틀립니다.”

나루호도가 말을 끊었다.

“마요이를 구하려 했다고 하기엔 수단이 너무 극단적이지 않습니까? 치히로씨의 동생을 지키기 위해 치히로씨의 어머니를 죽이다니, 그런 언어도단이 어디 있습니까. 결과적으로 마요이가 살긴 했지만 그걸로 마요이를 보호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마요이의 마음까지 지키지 못한 건 내 실책 맞아. 극단적인 수단이긴 했어. 하지만 상황도 극단적이었지 않나. 마요이도 마요이지만 자칫하면 9살짜리 꼬마 여자애가 자기도 모르게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데, 그렇다고 경찰에 알릴 수도 없고.”

“그렇다 해도 살인보다는 쉬운 방법이 있었지요.”

나루호도는 물러서지 않았다.

“하미는 계획서에 뜯은 자국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분명 하미보다 먼저 그걸 손에 넣었어요. 그 시점에서 계획서를 태워버리면 끝납니다. 키미코는 형무소에 있으니 하미에게 새로운 살인 계획을 전달할 수는 없고.”

“그 여자의 집념을 과소평가하는군. 형무소의 검열이 정말로 새 살인 계획을 막을 수 있을 것 같나?”

“면회를 도청하는 노력으로 못 막을 것은 아닐 겁니다.”

“하.”

카미노기가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나루호도는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굳이 경찰에게 영매에 의한 살인을 납득시키지 않아도 살인을 막을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어. 그 ‘말도 안 되는 살인 계획’을 키미코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증거로 삼아 아이의 면회를 제한하거나 하다못해 그걸 빌미로 키미코를 협박할 수도 있었겠지. 그 계획서를 아야사토 가문에 알려서 하미의 입지를 묻어버리겠다고 하면 그 사람도 들었을 지도 몰라. 그랬으면 키미코도 죄를 더 짓지 않고 마이코씨도 죽지 않고 하미도 아야메도 이용당하지 않고 마요이는 암살 위협을 겪지 않아도 되었는데. 그런데 당신들은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셋이나 있었는데, 아무도 살인 외의 방법은 생각조차 못했다는 듯이.”

“더 하기 전에, 내가 한 마디 해도 될까.”

카미노기가 말했다.

“안타깝게도 내겐 그 계획서를 태울 기회가 없었다. 그걸 펼쳐보고 도로 봉해둔 건 내가 아니라 아야사토 마이코니까.”

“잠깐!”

나루호도가 외쳤다.

“마이코씨는 쿠라인 마을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텐데, 너무 눈에 띄어요!”

“가뜩이나 남자가 적은 마을에 눈에 붉은 바이저를 단 남자가 돌아다니는 것은 눈에 안 띄고?”

카미노기가 반박했다.

“오랜 세월 암살 위협을 받아온 아야사토의 본가다. 당주만 아는 비밀통로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

“아니 그래도.”

“심지어 그 계획서가 숨겨져 있던 곳은 키미코의 개인적인 공간이었다. 영장을 들고 당당히 갔다 한들 여자 형사를 보내라는 소리를 들었을걸. 내가 계획서를 손에 넣는 건 불가능해.”

나루호도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렇게 몰래 드나들 방법이 있었으면 딸들이나 좀 만나러 올 것이지.....’

“그래서, 태울 기회를 놓친 것도 그런 계획을 짠 것도 마이코씨이니 본인은 죄가 없다 주장하는 겁니까!”

“그건... 아니야.”

카미노기가 조금 움츠러들었다.

“계획을 말리지 못한 것도 살인에 협력한 것도 결국 나고, 실행범 주제에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소릴 할 생각이었으면 여기 얌전히 들어오지도 않았겠지.”

“안 들어올 방법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법정에서 다 밝혀졌는데.”

“거 말꼬리 잡는 솜씨는 여전히 일품이군. 이건 꼭 증인 심문을 당하는 것 같은데. 여기는 법정도 아닌데 말이야.”

“그건.. 죄송합니다. 버릇이 되어서. 그래도 숨겨진 진실을 파헤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 않을까요.”

“숨겨진 진실이라. 우리가 살인 외의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해서.”

나루호도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당신들이 지키려고 했던 건, ‘아야사토 마요이’가 아니라 ‘야야사토가의 차기 당주’입니다.”

카미노기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그 둘이 다른가?”

“아주 다릅니다.”

고개를 젓는 나루호도는 슬퍼보였다.

“마요이는 가문의 명예가 회복되어 자기 입지가 탄탄해지는 것보다 어머니가 돌아와주는 걸 더 기뻐했을 겁니다.”

카미노기의 기색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진짜로 알고 있군 그래.”

“네. 마이코씨는 마요이를 지키고 싶어 했지만 동시에 그 애가 물려받을 가문의 명예도 회복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마요이가 암살을 당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요. 쿠라인류 영매도가 진짜임을, 당주인 마요이의 영력을 제대로 과시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나루호도가 말을 계속했다.

“다리가 끊어지는 계획 외의 사건이 일어나긴 했어도 결과적으로 영매가 진짜이며 불러들인 영이 살인도, 증언도, 거짓 증언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법정에서 증명되고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마이코씨의 계획이 성공한 겁니다.”

“마요이가 치나미를 영매한 채 재판장에 나타나는 건 계획에 없었어.”

“그럴 리가요. 마요이가 치나미를 영매하지 않았다면 하미가 다시 영매했을텐데, 그럴 가능성을 생각했다면 마이코씨를 죽여서 치나미의 영혼을 자유롭게 풀어줄 수는 없었습니다. 마요이가 위기에 제대로 대처할 거라고 믿지 못했다면, 살인까지 저지르고도 다시 마요이가 하미에게 죽을 위험을 무릅쓰느니 치나미를 영매한 마이코씨를 죽이지 못해야 옳습니다. 처음부터 마이코씨를 묶어두고 치나미를 부를 수도 있었겠지요.”

카미노기는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즉 당신들은 마요이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미리 암살을 예방하는 대신 도리어 죽을 곳으로 떠민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나루호도의 기색이 거칠어졌다.

“그러느라 마요이는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냉굴에 갇히고 십 수 년 만에 만난 어머니를 알지도 못하는 새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어. 그런데도 그 애는 자기보다 더 비참한 처지에 몰린 하미를 위해 밝게 웃으며 견디고 있다고. 댁들은 마요이의 마음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가문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딸을 장기말로 이용한 거잖아. 키미코와 뭐가 다르냐고!”

“흠.”

카미노기의 손이 커피잔을 찾듯 허공을 헤매다 뒷목을 문질렀다.

“마이코라면 뭔가 변명할 말이 있었겠지만 나는 없어. 유죄를 인정하지.”

“그렇게 쉽게 유죄인정할 짓, 처음부터 안 하면 안 되었던 겁니까?”

나루호도가 한탄했다.

“마이코씨는 자기 가문에 책임질 일이 있으니 그렇다 칩시다. 아야메는 어머니와 언니에 대한 죄책감과 속죄였겠지요. 그런데 당신의 동기를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아야사토 가문의 사람도 아니잖아요? 치나미에게 원한이 있다곤 해도..”

카미노기가 나루호도의 눈을 피했다.

“...설마 정말 치나미를 죽여보고 싶.”

“그럴 리가 있겠나!”

그가 황급히 부정했다.

“그게..... 말로 설명하긴 좀 그렇긴 한데,”

카미노기는 한참 말을 골랐다.

“음, 그 내가 마요이를 보호하겠다고 결심하고 마이코씨와 접촉했을 때, 치히로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털어놨거든. 이유 없는 접근을 허락할 사람이 아니라서.”

“예. 그게 왜요?”

“..........치히로의 남자이니 당연히 아야사토의 일원이고 이 일에 협력할 거라는 전제를 깔고 계획을 짜더군.”

“.................”

“그, 내 사랑을 장모님에게 인정받는 기분이라 도저히 거부할 수가.”

“이의 있음!”

나루호도가 삿대질했다.

“실제론 사귀지도 못했잖아!!”

“그러니까 더 짜릿했던 거라고!”

카미노기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내 입장도 생각해보게. 죽었다 살아나보니 치히로는 죽고 마요이는 살인 누명을 썼는데 치히로의 복수를 하고 마요이를 구한 것도 변호사 사무실을 물려받은 것도 생판 딴 놈이고 나는 치히로의 인생에 아무 자리가 없어. 그런데 치히로의 어머니가 나를 아야사토의 일원으로 취급해줬다고. 살인이 돌이킬 수 없는 죄인 건 알지만, 치히로를 위해서 거기까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계획의 위험성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더군.”

“그게 당신의 사랑이라고요.”

나루호도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건 틀렸습니다.”

“함부로 말하지 마. 자네는 이런 사랑을 해 본 적도 없.”

“해봤습니다.”

나루호도의 말에 카미노기가 말을 멈추었다.

“나도 내 모든 것을 던지는 게 사랑이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치는 게 당연하다고 믿고, 이용당하고 있는 걸 알면서도 독약병을 씹어 삼키기까지 했지요.”

나루호도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게 아니라고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치히로씨입니다.”

“뭐.”

“상대방의 마음과 진의를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인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건 제대로 된 사랑이 아닙니다. 자신을 내던지는 사랑 같은 건 사랑이 아니라 자기가 틀렸다는 걸 인정할 수 없는 바보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아요. 당시 전 그런 바보였고, 치히로씨가 그런 바보를 끝까지 믿고 변호하며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우쳐주었습니다.”

치나미의 재판 기록이라면 카미노기도 외울 만큼 읽었다. 그는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치히로씨가 나를 구해주고, 제대로 된 변호사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마지막에 항상 치히로씨의 도움을 받는다며 화를 냈었죠. 네, 전 아직 미숙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진정한 변호사라는 무엇인가 생각하며 치히로씨의 길을 따르려고 합니다.”

나루호도가 숨을 들이쉬었다.

“이게 내 사랑입니다.”

“....하.”

카미노기가 큭큭 웃기 시작했다.

“그래, 이게 네가 내리는 벌이로군. 모든 면에서 네게 패배하는 게.”

“벌을 주러 온 건 아니었지만요.”

나루호도가 멋쩍어하며 눈을 돌렸다.

“제 사랑... 얘기까진 할 생각 없었는데 어쩌다보니... 그리고 이걸로 이기네 지네 하는 거 의미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저도 짝사랑일 뿐이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나루호도는 딴청을 부렸다.

“그래서, 정말로 날 벌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면 진상을 확인하고 내 동기도 알았으니 여기 온 목적은 이제 다 끝난 건가?”

“그게, 실은 하나 더 남았습니다.”

“여기서 더?”

카미노기는 기가 막혔다.

“그래, 말해보시지. 여기서 얼마나 더 나를 비참하게 만들 수 있을지 이젠 기대가 다 되는군.”

“당신을 비참하게 만들 목적으로 제안하는 건 아닙니다만.”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걸.”

“에....”

나루호도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카미노기의 얼굴에 경계심이 서렸다.

“그게, 전 변호사입니다.”

“그래. 그게 왜.... 설마.”

카미노기가 탁자를 쾅 내리쳤다.

“날 변호하겠다고?”

“당신이 한 짓은 분명 계획살인이지만, 또한 마요이가 암살당하는 걸 막기 위한 행위였고 피해자의 적극적인 동의까지 있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피해자의 승낙은 살인 같은 중범죄에는 해당되지 않는 게 원칙이긴 하지만, 위법성을 조각하기에는 부족해도 형량을 깎을 수는 있다고 봅니다.”

“자네는 지금까지 완전 무죄만 변호했었잖아?”

“아뇨, 살인만 무죄고 다른 여죄가 있는 경우는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 카르마가 아니라서 완벽한 승리에 집착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렇다 해도....”

“치히로씨는 제게 항상 변호사는 끝까지 포기해선 안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야 이 비겁한.”

“저는 당신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치히로씨도 그랬을 거고요.”

카미노기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어차피 사형당하기 전에 몸이 버티지 못할텐데 구태여.”

“기왕 죽었다 살아난 거 더 버텨봅시다.”

“......그래.”

카미노기가 고개를 들었다.

“버텨야지. 치히로를 위해서. 아니.”

그가 나루호도를 가리켰다.

“치히로의 유지를 너 같은 녀석 혼자 잇게 하려니 안심이 안 되니까.”

“드디어 다시 고도 검사다워졌네요.”

나루호도도 마주 웃었다.

“그럼, 다음엔 법정에서 뵙겠습니다.”





[로판인줄 알았는데 괴담이다]악녀인줄 알았는데...(2) ㅣ- 기타

 

역시 이번엔 주문을 쓰는 쪽이 정답이었다. 유진은 속으로 뿌듯하게 미소지었다.

그의 결함에서 오는 불안감, 초조함과 상관없이 로제와의 관계는 꾸준히 단단해져왔다. 다 로제의 관대함과 착한 마음씨 덕이다.

거기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로제에게 어울리는, 취향의 상냥하고 능력 있으며 숨기는 것 없는 남자가 되어야 했다.

충분히 각오하고 시작한 노력이건만 고통스러웠다. 그것은 곧 지금의 자신이 그런 이상형에서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실감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탄 난 인격의 소유자였으며 가진 능력은 무엇 하나 로제에게 보여줄 만한 게 없었다. 그런 사실을 숨김없이 털어놓을 마음도 당연히 품을 수 없었다.

그러니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노력으로 가능한 장점만이라도 필사적으로 그러모아야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의 얼굴만큼은 지금도 로제의 취향에 맞는다는 사실도 희미하게나마 용기를 주었다.

그러니 그 얼굴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말이 얼마나 섬뜩하게 다가왔는지! 남들만큼 동조하고 내면화하지 않았을 뿐 그는 보통 인간들의 상식과 윤리관에 어둡지 않았다. 세상 어떤 관대한 여자라도 부정한 남편을 용납하지는 않았다.

평소 그의 얼굴에 반해 접근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 신사인 척 해봐야 그는 이미 포식자에 더 가까운 존재였고 사람들은 호랑이를 마주한 토끼처럼 본능적으로 몸을 굳혔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쓸데없이 둔감하거나 조심성 없는 누군가가 접근한다면.

이미 로만타운 중심부에 들어선 차가 호텔에 도착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예방책을 생각해내려니 이성적일 수가 없었다. 마침 로제의 드레스에 길게 붙은 머리카락을 보자 한 가지 주문이 떠올랐고 그걸 떼어내면서 마음을 굳혔다.

소유주의 증표.

본래는 제물을 점찍어두거나 귀중한 물건을 도난당하지 않게 지키는 데 쓰는 주문이지 술자 본인에게 쓰는 경우는 없는 주문이었다. 그러나 유진은 즉석에서 주문의 형식을 약간 손본 다음, 로제가 파우더룸에 있는 사이 그 머리카락을 결혼반지 낀 손가락에 감고 마법을 걸었다.

이제 누구나 유진 오베르는 머리카락의 주인에게 우선권이 있는 소유물임을 무의식 레벨에서 감지할 것이다. 로제에게 인사를 건네며 로제의 목걸이에 따로 인사하지 않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관심을 거둘 것이다.

소모한 것은 자연적으로 빠진 머리카락 한 올뿐이니 로제가 해를 입은 것도 아니다. 위험한 마법은 쓰지 말라던 말을 어긴 것도 아니다.

효과도 확실했다. 주문 건 후 지금까지 파티장의 모두가 그에게는 의례적인 인사마저 최소한으로 절약했다.

자신을 타인의 소유물로 간주하고 있는 데서 굴욕감 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 그는 날 때부터 다른 존재의 소유물로서 훨씬 불유쾌한 구속을 감수하며 살아왔다. 감히 꿈꿔본 적 없는 기적으로 해방된 지 이제 겨우 일 년도 되지 않은 탓에, 결혼반지보다 조금 강한 구속 정도는 익숙함에서 오는 안도감마저 주었다.

기분이 좋아진 나머지 그는 로제 주변에 이물질들이 득실대는 상황도 웃으며 참아넘길 수 있었다. 어차피 돈이나 세력이 탐나 기웃대는 기생충 같은 것들에 로제도 관심이 없었다. 그저 파티 음식이나 제대로 즐기면 그만이었다.

연어 스테이크가 식기 전에 갖다주려고 걸음을 서둘렀다. 거슬리는 이물질들 사이로 로제의 모습이 보이자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가까이 가자 로제의 표정에서 불편한 기색이 감지되었다. 처음 보는 어떤 여자와 마주하고 있는 걸 보니 저 주제를 모르는 것이 감히 로제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접시를 쏟지 않을 정도로만 속도를 높였다. 로제와 건방진 이물질도 유진이 다가오는 걸 알아차렸는지 이쪽을 돌아보았다.

미처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이물질이 로제에게 고갯짓을 해보이더니 자리를 떴다. 파티장 구석마다 있는 휴게실로 쏙 들어가버리는 걸 보고 일단 로제에게 다가가 연어를 내밀었다.

... 사람이 뭔가 무례한 소리라도 했습니까?”

냉큼 연어를 받아 포크를 꽂는 동작은 평소대로 호쾌했지만 로제는 원래 스트레스나 불쾌한 일 정도로 식욕을 잃지 않는다.

무례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고, 집안끼리 아는 사이였대요. 무어 가문하고.”

무어 가문하고요?”

. 시빌 바넘이라고 하던데 혹시 아세요?”

무어 가문에도 평범한 사업상 교분을 나누던 가문은 몇 있었다.

옛 영주를 섬기는 끔찍한 작태는 다른 개인이나 가문과 공유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제물의 수급이나 공양의 뒤처리 때문에 몇몇 범죄 조직과는 결탁해 있었다.

유진은 결혼식을 앞두고 그 두 가지 교분을 전부 확인해 하나하나 끊어내었다. 평범한 거래 관계를 맺고도 그저 계약서를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상대 가문의 인물들에게 저주를 거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무어 가의 흔적을 세상에서 지워버리며 그런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확인했다.

무어 가문의 진면목을 모른 채 그저 표면상의 사업에만 관여하던 사람들은 상속자 루카스 무어가 본가 저택의 화재로 죽은 뒤 마지막 남은 방계 친척 유진 무어가 갑자기 떠맡겨진 가업을 부담스러워한 나머지 전부 손 떼고 정리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거래처 목록에서 무어 가문을 지웠다. 이런 일은 그저 잘 꾸민 서류와 말솜씨로도 가능했다.

흉악 범죄자들을 상대할 때도 로제가 알면 싫어할 만한 일은 되도록 하지 않았다. 암시만 적당히 걸어줘도 그들은 무어 가와 결탁한 사실 자체를 완전히 없던 일처럼 잊어버렸다.

그렇게 양지와 음지 양쪽을 오가며 무어라는 가문이 섰던 자리를 완전히 없애버린 것은 다른 누구보다 자신을 위해서였다. 새 출발에 앞서 과거와 완전히 작별하고 싶었다.

그러니 이런 파티에 참석할 정도로 부유한 가문을 실수로 모르고 지나쳤을 리는 없었다.

유진?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

연어를 부지런히 입에 가져가면서도 로제가 물었다. 유진은 황급히 진실을 걱정스럽지 않게 들리도록 다듬었다.

제가 아는 한은 그런 가문과 엮인 적이 없습니다. 오래 전 일이거나, 아니면 그저 말을 붙일 핑계를 대려고 지어낸 걸 겁니다. 의외로 그런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러면서 눈은 시빌이 들어간 휴게실 문에 고정했다.

제가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그래요.”

아무렇지도 않은 로제의 목소리를 듣고 유진은 곧장 휴게실로 걸어갔다.

역시 그저 핑계일 것이다. 로제의 재산에 혹해 부스러기라도 뜯어낼 수 있을까 잔머리를 굴리는 기생충이 할 만한 짓이다. 그런 주제에 저 단순하고 태평한 소녀의 비위 하나 똑바로 못 맞춰서 잠시나마 표정을 굳히게 하다니.

감히 누구를 상대로 허튼 수작을 부리려 들었는지 제대로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로제의 사교계 데뷔 날에 피를 봐서는 안 되니까...

휴게실 문을 열어보니 안에는 아까 그 여자 혼자뿐이었다. 수상한 기운이 감돌지 않는 것까지 확인하고, 가벼운 경고나 해줄 작정으로 안에서 문을 닫은 순간.

분명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사악한 기운이 휴게실을 감쌌다.

등을 돌리고 있던 여자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천하디 천한 버러지가, 귀여움 좀 받았다고 자기가 사람인 줄 아는구나.”

토할 듯이 익숙한 사특한 기운에 유진은 전신의 피가 전부 빠져나가는 공포를 맛보았다.

빠져나간 피가 바닥을 뚫고 떨어졌다. 지하에 숨겨져 있던 축사 밑바닥까지.

그곳에서부터 온 일생 동안 그를 따라다니던 구속의 근원.

감히 누구를 상대로 허튼 수작을 부리려 들었는지 깨닫고 그만 다리가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대체 무슨 강대한 권능을 발휘해서 널 빼앗아 갔는지는 모르겠다만.”

인간 여자의 모습을 유지한 채로 피붙이 고문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지금 이 공포도 제법 마음에 드니까 특별히 마음을 넓게 써 주지. 일단 널 돌려받고 저 로제 오베르는 그 다음에 딱 일억 년만 고통받게 해주마.”

로제의 이름이 나오자 흐려지던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덜덜 떨리는 왼손을 뒤집어 손등을 바닥에 긁었다. 제물 낙인의 흉터는 분명 힘을 잃고 옅어져 있었다. 결혼반지가 바닥에 스치며 내는 소리가 힘을 주었다.

그러려면.”

피를 토할 듯 목을 긁어내리며 준비 없이 쓸 수 있는 가장 강한 주문을 사용했다.

강림부터 제대로 했어야지!”

피붙이 고문자, 아니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몸에 화상 물집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 듯 벌린 입에서 단백질 타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파티장에서 사람을 태워 죽인 뒷수습을 어떻게 할지는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금 저것을 없애지 않으면 로제가 위험해진다.

-건방진......

입이 아닌 어딘가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연기와 물집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주문의 힘이 밀려나 유진에게 역류했다.

포기하고 주문을 취소하지 않으면 자신이 불타오를 것이다. 완전히 강림한 상태가 아니라고 해도 인간이 겨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유진은 집중을 흩뜨리지 않고 다시 밀어내려 애썼다. 자신이 불타오르는 것보다 로제가 이 존재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것이 더 무서웠다. 그의 기준으로 몸속에서부터 불타 한줌 재가 되는 것은 그리 끔찍한 죽음도 아니었다.

순간 주문의 효과가 아예 사라져 버렸다.

-과연 인간치고는 제법 재롱을 부릴 줄 아는구나.

어느새 숙주를 멀쩡하게 회복시키고 유진의 주문까지 무효화시켜버린 피붙이 고문자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역시 지금 당장 먹어치우기는 아까워.

피할 생각도 못하고 덜덜 떠는 유진의 턱을 받쳐 들어올리고 속삭였다.

-남의 손을 타버렸으니 별 기대도 안 했는데... 무어 가에서 생산한 제물은 날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니까.

익숙한 굴욕과 공포가 채 울분으로 끓어오르기도 전에 속삭임이 이어졌다.

-지금 이 상태로라도 널 곱게 돌려준다면 로제 오베르는 용서해줄 수도 있겠어.

생각이 삽시간에 헝클어졌다. 이번에야말로 떨지도 못하고 굳어버린 그를 보며 포식자가 히죽 웃었다.

-어디...

유진, 춤곡 시작하려고 해요.”

공포로 마비된 귀에 밝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유진은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나처럼 태평한 얼굴을 한 로제가 휴게실 문을 열고 서 있었다.

 

 

연어를 다 먹어치울 때까지 휴게실이 조용한 걸 보니 좀 찜찜해졌다.

남편이 외간 여자와 단둘이 밀실에 있어서냐고? 그래서인 건 맞다. 하지만 보통 그럴 때 걱정하는 일과는 좀 다른 걸 걱정하고 있다.

결혼 후 둘이 보내는 시간이 늘면서 유진에 대해 새로 알아낸 게 몇 가지 있다. 자주 악몽을 꾸고, 그럼에도 옆에서 조금만 토닥여주면 금방 숨소리가 편해진다.

그리고 나 외의 다른 사람들에겐 싸늘하다.

여주에겐 순정을 바치면서 남들에게 싸늘한 것도 로판 남주에겐 흔한 클리셰지만, 악녀가 시비 좀 걸었다고 험악하게 구는 것까지는 자제해 줬으면 싶다. 물론 진짜로 내 고기에 테러를 했다면야 유진이 그 드레스에 와인 좀 뿌리더라도 싸다고 생각하겠지만.

마침 춤출 때도 된 것 같아, 휴게실로 가서 문을 가볍게 노크하고 열었다.

유진, 춤곡 시작하려고 해요.”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왜인지 주저앉아 있는 유진. 그리고 그 앞에 마주 서서, 거의 키스라도 할 것처럼 몸을 숙인 악녀 씨.

고개를 돌려 나를 발견한 유진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했다.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내가 먼저 서둘러 다가가서 일으켜주고 말했다.

넘어졌는데 눈에 때마침 뭐가 들어가기까지 한 거죠?”

그냥 넘어진 걸 일으켜주려는 타이밍이었을 수도 있지만, 유진의 눈에 핏발이 선 걸 보니 눈에 뭐가 들어간 쪽이 더 있을 법 하다. 그리고 악녀 씨도 의외로 친절한 면이 있어서 그걸 살펴주려는 순간 내가 문을 연 거지. 고구마를 위한 억지 전개쯤 다 꿰고 있다 이 말씀이야.

유진도 악녀 씨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이걸 어떻게 해명해야 하나 난처했을 텐데 내가 앞질러서 직접 본 것처럼 상황을 이해해버리니 말문이 막힐 법도 하지. .

오는 길에 유진이 급발진했던 것도 다 이 상황의 복선이었나보다.

여전히 핏기가 돌아오지 않은 유진의 얼굴이 안쓰러워 그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처연미도 좋지만 넌 웃을 때가 제일 예쁘단다.

그리고 악녀 쪽을 돌아보았다. 저쪽도 아직 얼떨떨한지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다. 나는 다시 생긋 웃어주었다.

그럼 우린 이만 춤추러 갈게요. 다음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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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이 공격할 때 쓴 주문은 COC 룰북에 있는 죽음의 주문을 참고했습니다. 마법사 중에서도 지극히 타락한 자들만이 쓰는 주문이라고 합니다.


[로판인줄 알았는데 괴담이다]악녀인줄 알았는데...(1) ㅣ- 기타

Writer : 보행자

Rating: PG-15

Warnings: 원작 전체 스포

Summary: 외전도 다 끝나서 해피엔딩을 만끽중인 로제와 그 남편 앞에 로판 악녀(?)가 등장합니다.



필명으로 써낸 책이 성공했고, 결혼도 했다.

결정적으로 올해 514, 그러니까 로제 오베르의 생일을 기점으로 나는 법적 성년이 되었다.

이것은 석유왕이자 땅부자로서 내가 본격적인 경제활동을 할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자면 지역의 다른 명사들과 친목을 다지는 사교활동도 필요하다.

결혼식도 5월의 생일 파티도 아는 사람들만 최소한으로 불러서 했기에 이번에 로만타운의 호텔에서 열리는 무슨 기념 행사라던가가 내 첫 사교계 데뷔무대가 되었다.

보통 로판의 데뷔던트는 막 왕도 알현하고 일 년에 한 번 전국의 아가씨들이 모이고 하는 고풍스러운 행사던데 여기는 그보다는 근대풍이라 그런지 그렇게 거창한 격식은 없는 모양이었다.

다행한 일이다. 내가 원하는 건 적당히 사업 굴리기에 문제 없을 정도로만 눈도장 찍은 다음 맛있는 파티 음식과 미인 남편의 화려한 파티복 맵시를 즐기는 것뿐이니까. 이미 로판의 해피엔딩을 본 나다. 새삼 사교계 암투 같은 고구마는 필요 없다 이거야.

괜찮을 겁니다.”

이젠 루카스 무어가 아닌, 오베르 가의 데릴사위 유진 오베르가 된 내 남편은 여전히 끝내주는 운전 실력으로 호텔까지 차를 몰고 있다.

오베르 가의 재력이면 굳이 사교활동에 열 올리지 않아도 사업에 지장 생길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느긋한 모습을 보여주는 편이 더 효과적일 겁니다.”

거기다 무어 가의 만만치 않은 부도 고스란히 오베르와 합쳐졌다. 나름 유서 깊은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가 졸부 석유왕 가문에 성도 버리고 들어온 그림인데 남주의 짠내나는 과거사를 생각하면 또 놀랍지가 않아서 말리지도 못했다.

무어 가의 남은 부동산과 현물 재산도 전부 결혼식 전에 처분했다고 말할 때 유진의 표정은 그 정도로 후련해서, 대체 과거가 어느 정도로 피폐 서사였던 거냐는 질문마저 나오려다 쏙 들어갔을 정도였다.

사랑하는 남편의 아픈 과거를 막 들쑤시다니 난 그런 사패가 아니다. .

...남편, 남편!

이 절세미남 로판남주가 내 남편이에요!

호텔에 빨리 도착해 이 남자의 얼굴을 막 자랑하고 싶어진다. 아직 저 멀리 보이는 호텔의 불빛을 보며 가슴을 두근거리다못해 그만 본심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거 혹시 유진의 눈부신 미모가 파티장 모든 여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아버리는 거 아냐? 물론 얘는 이미...”

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 교통사고인가? 요즘 차는 에어백도 없는데!

유진?”

죄송합니다. 신호, 신호가 바뀌는 걸 늦게 알아차렸습니다.”

유진의 운전대 쥔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까지 지레 겁먹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호는 빨간불이고 유진은 정지선을 정확히 지켰다. 뒷차가 와서 받은 것도 아니다.

왜 그렇게까지 충격을 받으셨나요.

내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감지했는지 유진이 빠른 속도로 중얼거렸다.

“다, 다른 여자들이 제게 눈독 들이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 일이 걱정되신다면 전 호텔까지 바래다만 드리고 곧바로 저택에 돌아가겠습니다. 시간 맞춰 모시러 올 테니...”

아니, 급정거 다음에 왜 또 급발진이세요.

생각을 무심코 입 밖에 내는 게 아니었다. 나는 일단 남주를 둥기둥기 해주기로 했다. 계략 남주에서 후회 루트를 타서인지 과거사 때문인지 유진의 자낮 속성은 결혼 후로도 거의 나아진 기미가 없었다. 시간이 해결해주길 바라며 이렇게 그때그때 다독여주는 수밖에.

그럴 필요 없어요. 눈길 좀 끌면 어때요. 다 유진이 너무 예뻐서 그런 건데. 내가 오늘 유진하고 춤 추려고 얼마나 연습했는지 알아요?”

1층에 악기 등이 구비된 교습실이 있었던 복선을 이렇게 회수했다.

엠마 씨에게 부탁해 섭외해온 가정교사는 이런 쪽의 전문가여서 춤과 사교계 예절, 불문율 등을 빡세게 가르쳤다. 그 막대한 재산을 양심적으로 관리해온 것도 그렇고, 드래곤 악령만 아니었어도 엠마 씨는 꽤 훌륭한 양어머니가 되었을 텐데 이제 와서 아쉽다.

교습은 생각보다 받을 만 했다. 가정교사가 유능하기도 했고, 걱정했던 예절과 관습도 의외로 고리타분하지 않아 별로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하기야 이미 미성년 여성이 운전기사만 달고 혼자 돌아다니며 돈을 펑펑 써대도 괜찮은 세상이었지.

그치만 방금 사고 날 뻔하고 나서인지 과학 기술은 좀 더 발전했으면 좋겠다. 이제 막 시작한 미남과의 석유왕 라이프가 에어백 없는 자동차 때문에 어이없이 끝나버릴 순 없잖아.

문제는 내가 문과에다 잡학 상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빙의자가 현대 과학기술을 막 재현해 발명왕 되는 클리셰는 무리라는 거다. 음 어쩌지......

고민하는 사이 신호가 바뀌고 유진이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이번엔 아까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운전해서 아무 사고 없이 호텔까지 도착했다.

로제, 여기 머리카락이.”

파티장에 입장하기 직전 유진이 내 등에서 긴 머리카락 한 올을 떼어냈다. 눈도 좋다.

흰 드레스인데 미용사가 부주의한 사람이었군요. 다음엔 다른 미용사를 불러야겠습니다.”

? 아니 한 가닥 정도 오는 길에 빠졌을 수도 있죠.”

갑부가 되었다고 갑질까지 할 생각은 없다. 열심히 손사래 치는 내게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유진이 말했다.

사교계는 첫인상이 중요합니다. 저는 잠시 기다릴 테니 입장하기 전 파우더룸에서 매무새를 점검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러죠.”

가정교사 쌤도 같은 말을 했던 게 생각나 별 생각 없이 파티장 입구 근처에 있는 파우더룸에 들어갔다.

, 그냥 좀 고급스러운 화장실 정도를 생각했는데 이건 고급 미용실에 더 가깝잖아. 단정하게 차려입은 호텔 직원들이, 내가 입도 열기 전에 다가와 커다란 거울 앞에 세우고 옷차림과 머리 모양을 익숙하게 가다듬는다. 우와...

애초 온갖 꽃단장이 신부 화장할 때만큼이나 완벽하게 되어 있어서 새삼 손댈 일은 많지 않았다. 오래 걸리지 않아서 되돌아 나온 나를 보고 유진이 웃음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들어갈까요.”

결혼식 때처럼 곧은 자세와 번쩍이는 정장. 그보다 더 빛나는 얼굴.

기분 좋은 설렘을 느끼며 그의 손에 내 손을 얹고 파티장에 들어섰다.

 

 

맛있다아...’

얇게 썰어 튀기듯 구운 쇠고기를 얹은 작은 타르트가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소하다.

먹기 좋게 껍질을 벗겨놓은 바닷가재가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저택의 식사가 충분히 호화롭고 수준 높아서 그동안 외식을 해도 빙의 전처럼 특식을 먹는다는 기분은 느끼기 힘들었는데, 그 기분을 오랜만에 맛보니 황홀하기까지 하다.

거기다 고개를 들면.

연어는 어떻습니까? 저쪽에서 주문 즉시 구워주고 있군요.”

파티장 샹들리에가 유진의 얼굴에만 그 찬란한 빛을 뿌려주고 있다. 아아, 오늘도 로판 남주의 얼굴은 절경이구나......

오늘을 위해 내가 디자인을 골라준 맞춤 정장이 그의 늘씬하고도 탄탄한 몸을 완벽하게 감싸고 있다. 내게 받은 건데 밀봉해서 보관하는 대신 입고 돌아다녀야 한다는 말에 유진은 당황했지만, 파티장에서 이걸 입은 모습이 보고 싶다고 분명히 말하자 결국 입고 오염과 훼손을 감당하기로 했다. 거참, 저런 고급 옷이 어차피 금방 해질 리도 없는데.

얼굴 감상하느라 대답은 했나 안 했나도 모르겠는데 유진은 어느새 연어를 주문하러 갔다. , 5초 전의 내가 알아서 잘 대답했나보군. 걸어가는 뒷모습도 훤칠한 체격과 거침없는 걸음걸이, 근사한 의상의 쓰리콤보로 눈을 못 떼게 만든다.

흐뭇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의아해졌다.

저런 인간 등대가 돌아다니고 있는데 주변의 누구도 눈부셔하지 않는다?

다른 손님들과 인사를 나눌 때도 그랬다. 이런 파티의 주역으로 떠받들리는 건 처음이라 긴장해서 눈치 못 챌 뻔했는데, 내게 한 마디라도 더 붙여보려고 애쓰던 사람들도 내 곁의 유진에겐 간단한 인사만 건넬 뿐 그 이상 눈길도 주지 않았다. 또래 여자들마저도.

역시 그건가? 부인이 바로 옆에 딱 붙어있는데 남편한테 수작을 부릴 정도로 개념도 상식도 없는 그런 삼류 악녀는 없는 평탄하고 평화로운 사교계?

하기야 본편도 외전도 꽉 닫힌 해피엔딩에 딱 과하지 않을 정도로만 사이다 서사였는데 이제 와서 그런 고구마, 그것도 너무 뻔해서 쉰내나는 고구마가 등장할 리 없지. 등장한다 해도 내 남주의 트루 러브를 흔들림 없이 믿어주면 그만이다.

느긋하게 연어를 기다리며 남은 큐브 스테이크를 입 안에 털어넣었을 때였다.

남의 입 속에서 꺼내간 고기를 포식하는 기분이 아주 각별하신 모양이군요.”

바로 등 뒤에서 들리는,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듯 영롱하기까지 한 여자 목소리. 거기 어울리지 않게 내용은 밑도 끝도 없는 시비.

덜미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걸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화려하게 굽이치는 금발이 내 또래로 보이는 화사한 얼굴을 감싸고 흘러내린다. ‘로제 오베르는 병약 컨셉 때문인지 아무리 먹어도 가냘픈 몸매에 키도 별로 크지 않은데, 이쪽은 당당한 표정에 어울리게 키도 후리후리하게 크고 몸매도 저렇게 가슴을 강조한 드레스를 문제없이 소화할 정도로 풍만하다.

여주와 대조적인 타입의 미모를 가지고 남의 스테이크에 침이나 뱉어놓는 인성질이라니, 너무 전형적인 로판 악녀의 등장에 그만 짜게 식고 말았다.

, 너무 맛이 좋아서 그만 침 뱉어 놓은 줄도 몰랐네요.”

보통 이럴 땐 뭔가 더 촌철살인이 될 만한 근사한 일침을 놓던데, 방금 먹은 고기에 그런 수준낮은 테러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서 되는 대로 답해버렸다. 저 얼굴에 토해주면 만화 같고 딱 어울리겠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그게 만화처럼 쉽지 않다.

어머나. 이제 와서 모르는 척인가요?”

악녀가 고개를 갸웃 하며 천연덕스럽게 웃는다. 그런데 저건 무슨 소리지? 설마 내가 침 뱉은 거 알면서도 먹을 만큼 강철 같은 비위의 소유자로 보이나?

꼬리표 좀 갈아붙였다고 처음부터 정당한 당신 것이 되는 게 아니랍니다.”

스테이크 얘기가 아니었나보다. 테러 당한 고기가 아니었다는 안도감과 함께 비로소 이 추정 악녀가 하려는 이야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금술잔에 좋은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쟁반에 아름다운 안주는 일만 백성의 기름이라는, 이전에 읽은 사상계몽 수필과도 통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런 것치곤 이 악녀 씨의 옷차림도 만만치 않게 화려하지만, 전에도 말했듯 사람이 부모를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보니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뜻밖에 어린 나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태어나기도 전부터 가문이 부를 쌓아온 과정이 의식되어서 더 날카롭게 구는 걸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엄한 남을 붙들고 화풀이를 하면 못 쓴단다.

인사가 늦었군요.”

이 풋내나는 급진주의자를 뭐라고 달래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악녀가 우아하게 절했다.

제 이름은 시빌. 바넘 가문의 외동딸입니다.”

, . 로제 오베르입니다.”

적당히 대답하는 티를 굳이 감추지도 않았다. 나는 석유왕이라서 네 질풍노도의 사상에 맞춰주기가 힘들단다. , 이젠 내가 경영에 직접 관여할 수 있으니 노동 환경이 어떤지 살펴서 노조를 허용하고 임금을 올려주는 정도는 할 거지만.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시빌은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인맥을 어필했다.

바넘 가는 최근 무어 가와도 교분이 있었답니다.”

?”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던 이야기를 허겁지겁 도로 잡아챘다. 지금 무어 가라고 했니?

시빌은 낚시에 성공한 사람의 미소를 짓더니 시선을 내 뒤쪽으로 던졌다. 나도 무심코 같이 돌린 시선의 끝에는 유진이 연어 스테이크 접시를 들고 이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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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빌 바넘이란 이름은 크툴루의 부름 룰북의 캐릭터 이름 예시 중에서 골랐습니다.


[로판인줄 알았는데 괴담이다]로제 오베르 - 천 개의 가면을 지닌 그에게서 제물과 영역을 탈취한 자의 기록 ㅣ- 기타


Writer : 보행자

Rating: PG-15

Warnings: 딱히 없음

Summary: '로판인줄 알았는데 괴담이다'의 그레이트 올드 원 관점에서의 요약

 

수하들은 오늘도 위대한 존재 곁에서 피리를 분다.

그 곡조는 때로 찬양이고 때로 간구이며 때로 제사이며 제물이다. 그 동일하고 다양한 행위 중에 사도들의 동향을 전달하는 보고이자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악보 없는 무수한 연주의 형태로 전달되는 이야기 중에, 미물들의 정신을 파괴하고 순조롭게 문명이란 같잖은 것을 없애버리거나 뒤틀어 일회용 제단으로 삼는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리란 건 저차원에 존재하는 미물들도 예상하기 쉬운 일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 혹은 당연하게도 그 중엔 성공담만이 아니라 실패담도 존재한다.

아래 이어지는 사본은 그 곡조 중 한 가락의 조악한 번역이다.

 

 

무한한 가면을 지닌 그가 - 위대하신 그분과는 달리 매우 근면한 그가 이번에도 공포를 생산할 새로운 사념의 공간을 창조해냈다.

스스로 만들어낸 문명 속에서 인류는 가끔 자신들이 진정한 의미의 지성체가 아닌 문명을 지탱하는 톱니바퀴이자 희생양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기억해내고 몸서리치고는 한다. 대개는 금방 망각을 대가로 평온한 일상을 손에 넣지만, 싸구려 괴담만으로도 망각 아래 묻힌 진실을 콕콕 건드릴 수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괴로워하고, 그러면서도 진실과 닿았다가 떨어지는 그 오싹한 감각을 잊지 못해 부나방처럼 괴담을 찾아 되돌아온다.

이 공간 - 세계는 그런 괴담을 보다 정교하고 복잡하게 생산해낼 무대였다. 가면 중 하나가 적당히 지어낸 사념의 공간일지언정 이 안에서 이야기가 완성되는 순간 사념은 생명력을 얻고 현실이 된다.

준비는 철저했다. 사념에서 출발한 이 세계는 엉성하지만 괴담의 요소는 다 갖추고 있었다. 그의 복제품인 옛 영주들이 오래된 죄악과 공포를 창조해냈고, 이야기의 주무대가 될 음산한 장미 넝쿨 저택지하엔 비장의 수로 여차하면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진짜 유물도 심었다. 그러기 위해 옛 영주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근원에 가까운 존재에게 직접 유물과 지식을 하사받은 망령 가주도 설정했다.

그러나 인류에 관심 가진 어느 존재라도 주목할 만한 핵심 인물은 따로 있었다. 젊고 아름다우며, 아무리 사념이라지만 너무 편의적인 설정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빼어난 재능을 지닌 마법사 괴물. 탯줄을 자르기도 전에 낙인부터 찍어 고이 숙성시킨 최고의 제물.

그 제물은 장미 넝쿨 저택에 갇혀 두려움에 떨던 가련한 소녀 로제 오베르에게 구원자의 가면을 쓰고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희망과 공포 사이를 헤매게 하여 더욱 빠르게 기력을 소진시키고, 마침내 빈껍데기만 남겨 무대 위의 무대, 그 제물이 애처로운 희망으로 쌓아올린 제단 위에 제발로 터덜터덜 올라가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공양이 성공하는 순간, 그 순간이야말로 제물의 육체적, 사회적 전성기의 절정이다.

제물은 자기 공양의 대가와 함께 제물 낙인에 의해 송환될 것이다. 그리고 희망과 성취의 절정이 절망으로 뒤집히는 감각을 메인 디시로, 이미 그에게는 소용없을 공양의 대가를 디저트로 본래의 주인에게 바치게 될 것이다.

혹 그 제물이 실패하더라도 로제 오베르가 살아날 길은 없다. 남은 선택지라는 게 수상한 양어머니 손에 이끌려 망령 가주의 하찮은 화풀이에 희생되는 것뿐이니까.

적어도 그런 것처럼 보였으니까.

마지막 퍼즐 조각이자 희생양 로제 오베르를 완성하기 위해 가면 쓴 그는 진짜 인간을 한 명 소환했다. 이 사념을 현실이라 믿음으로써 현실로 만들고 두려워함으로써 괴담으로 만들 존재를.

그것이 실수였다.

그 존재 - 편의상 그 세계에서 얻은 이명 로제 오베르라 부르겠다. - 는 이 세계를 현실로 받아들이되, 자신의 입맛대로 뒤틀어 고정하는 이능을 지니고 있었다.

가면 쓴 그가 그 사실을 정말 몰랐을까? 최소한 알았더라도 과소평가한 것만은 분명하다.

로제가 장미 넝쿨 저택에서 아무런 공포도 느끼지 않고 유쾌한 생활을 이어가는 걸 보고만 있었으니까. 도리어 행복 끝에 닥친 공포와 절망이 더 압도적인 법이라며 기대감만 키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로제는 착실하게 장미 넝쿨 저택을 자신의 색채로 오염시키고 있었다. 특기인 인지왜곡으로 자신의 정신은 보호한 채 이미 공포와 절망에 완전히 절여져 나약해진 주변인들 앞에서 거침없이 힘을 과시해 압도했다.

끝내는 매혹술까지도 사용했다. 제물이 약혼자의 명분을 뒤집어쓴 것을 역이용해서.

그 매혹술이 대단한 수준이었던 건 아니었다. 평범한 인간들의 지성과 매력만 갖춰도 사용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수준이어서, 상대가 완벽한 제물만 아니었어도 실패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완벽한 제물이었다.

낙인을 통해 그의 감정은 철저히 억압되어 있었고 세심한 사육으로 스스로 깨우치거나 단련할 기회도 얻지 못했다. 스스로 축사를 부수고 목장주를 물어뜯은 이후에도 그럴 필요조차 깨닫지 못했다.

지극히 초보적이고 얕은 술수에조차 힘없이 찢겨 피 흘릴 연약한 속살이 단단한 낙인 뒤에 감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로제의 인지왜곡은 어느새 주변의 주박에 흠집을 낼 만큼 강력해져 있었다.

술자와 가까이, 오래 있을수록 힘을 얻는 것이 매혹술이다. 그러나 제물은 생전 처음으로 매혹술에 노출된 탓에, 그리고 자신의 계획에 지나치게 심취한 탓에 어리석게도 스스로 로제와 접촉하는 시간을 늘렸다. 자신의 정신에 일어나는 변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으므로 대처하지도 못했다.

그 어리석음, 혼란, 고통, 환희 모두 본래는 낙인의 주인에게 돌아가야 할 것들이었다.

밤새 새하얗게 내린 눈을 보고 발자국을 낼 기대감에 뛰어나갔더니 남의 발자국이 떡 하니 찍혀있다.

오븐의 알람을 듣고 딱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하게 구워진 통구이를 꺼내는 순간 가장 맛있는 부위를 남이 떼어먹었다.

더없이 굴욕적인 방식으로 제물을 빼앗기는 동안 사념 속 옛 영주들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미 현실로 굳어가는 사념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끝내는 저택 지하의 유물 - 가면 쓴 그가 직접 개입해 이야기를 돌려놓을 마지막 가능성도 로제의 손에 파괴되었다. 절박한 흥정도 무시되었다.

그러니 원래는 그 유물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을 근무수칙이 허망하게 파괴된 것도 필연적인 결말이리라.

제물이, 아니 로제의 약혼자가 이미 힘을 잃어가던 낙인에서 완전히 벗어나 황홀경 속에서 새 주인이 하사하는 사슬을 자신의 손가락에 채운 것도.

저택을 구성하던 다른 인간들 모두 로제에게 굴복해 그의 권속이 된 것도.

로제의 방해물이 이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가면 쓴 그가 떠난 것으로 만족치 않고, 로제는 이 세상 전체를 자기 색채로 물들이고 옛 영주들을 추방하리라 선언했다. 이에 옛 영주들도 당연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의 반격은 주로 로제 본인보다 권속들을 노렸다. 권속들의 과잉 충성과 경쟁은 옛 영주들에게도 전통적이라 할 만큼 만성적인 골칫거리였으니까. 무어 가의 몰락도 시초는 무어 가 대신 옛 영주들의 환심을 사려던 오베르의 과욕 아니었던가? 오베르가 무어를 추방한 대가로 얻은 것이 영광 대신 저주였다는 건 영주들에겐 도구끼리 싸워 둘 다 망가졌다는 뜻일 뿐이다.

그러나 약혼자와 부하들을 충동질하거나 조종해서 일으킨 모든 사건은 로제의 인지왜곡에 작은 흠집도 내지 못했다. 무신경하고도 세심한 로제는 매번 가장 적절한 순간 귀찮은 기색도 없이 권속들에게 개입해서 자신의 힘과 지혜를 과시하고 그들을 잠잠케 했다.

그리하여 음산한 장미 넝쿨 저택은 이제 싱그러운 사과나무 저택이 되었으며, 그 주인 로제 오베르는 권속들의 충성과 봉사를 누리며 지금도 그곳에서 군림한다. 그리고 로제의 진명을 아는 영광을 홀로 누린 옛 제물은 여전히 권속 중 첫째가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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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쯤 로맨스에서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러브크래프트 적으로 묘사해보고 싶었습니다.

 


체자렛의 장난감 1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Characters: 로드. 체자렛. 프람. 요한 프라우. 기타 로오히 등장인물들.
Rating: PG-15
Warnings: 성행위 암시. 약물. 촉수. 온전히 합의되었다고 볼 수 없는 성관계.
Summary: 체자렛에게 미묘한 약이 먹여진 로드가 기사단 인원들과 이하생략.

체자로드. 프라로드. 루인로드. 기타 성인이고 로드와 할 마음 있는 등장인물/로드.

이번편은 프라로드 메인입니다. 



사건은 아발론 회식날 일어났다.

전후 처리도 급한 불은 끄고 포로 문제를 마무리해서 업무에 조금 숨통이 트이고 나자, 로드는 정상 업무 복귀 기념 회식을 제안했다. 저녁 늦게까지 술을 마시는 대신 다음날은 출근 시간도 늦춰지는 오랜만의 휴식이라 대부분의 기사들이 자발적으로 참석했다.

미하일이 추천한 안주가 맛있는 왕성 근처 술집을 통째로 빌려 회식을 하던 도중, 로드가 건배사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모두가 함께하는 축하자리라니, 아주 즐거워 보이네요. 너무 즐거워보여서, 저도 한 자리 끼고 싶어질 정도일지도?”

로드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체...”

갑자기 나타난 인간, 아니 인간 아닌 무언가의 이름을 로드가 다 말하기도 전에, 체자렛이 로드의 허리에 팔을 감아 끌어당겼다.

“역시, 조금 심술을 부려주고 싶네요.”

그리고 한 손으로 로드의 뒷목을 받쳐 들고 그대로 키스했다.

양팔로 두 몸을 완전히 밀착시키고 로드의 다리 사이로 허벅지를 밀어넣은 자세는 목적을 헷갈릴 수 없을 만큼 노골적이었다. 기사들 다수가 충격에 휩싸였고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 무기를 움켜쥔 기사들도 체자렛을 공격했다가 로드에게도 해가 갈 것을 우려해서 움직이지 못했다.

키스가 길어지고 몇몇 기사들이 위험이고 나발이고 맨손으로라도 체자렛을 떼어내기 위해 덤비려는 순간 체자렛이 로드를 놓고 물러났다.

“기사단 내에 어떤 혼돈이 몰아닥칠까, 상상만 해도 짜릿해지네요.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콜록거리며 소매로 입술을 거칠게 문지르는 로드를 보며 체자렛이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절했다.

그리고 사라졌다.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적도 없었다는 듯이.

“로드?”

프람이 물컵을 내밀었다.

“괜찮아? 방금 체자렛이...”

로드가 입을 헹궈 뱉어버렸다. 그리고 인상을 쓰며 가슴을 짚었다.

“아무래도 뭔가 먹여진 것 같아. 토하는 게...”

로드가 휘청 뒤로 넘어갔다. 프라우가 잽싸게 블레이드로 등을 받쳤으나 로드가 미끄러지듯 주저앉자 끌어안아 지탱했다.

“뭐야! 독인가?”

“글...쎄...”

로드의 목소리가 몽롱하게 늘어졌다. 그가 프라우에게 몸을 기댔다.

“어, 어떡하지? 해독주문 쓰고 있는데, 안 들어요. 독이 아닌 것 같아요!”

샬롯이 울상을 했다. 메이링도 서둘러 로드를 진찰했다.

“독은... 독은 아니오만, 뭔가 체내의 균형이 무너지긴 했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프라우...”

로드가 프라우의 목덜미에 뜨거운 숨을 뱉었다. 로드의 팔이 허리를 감아오는 걸 느끼며 프라우는 이게 무슨 증상인지 알아챘다.

“시발.”

그가 욕을 내뱉었다.

“실화냐? 체자렛 알티온, 이딴 삼류 에로망가 같은 짓을 했다고? 최종보스의 가오 다 뒤졌냐?!”

“뭔지 아시겠습니까!”

요한이 달려들 듯 외쳤다.

“뭘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필요한 게....”

“어, 으, 이, 일단 루인 불러와.”

로드가 뭔가 헛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입을 막고 프라우가 서둘러 머리를 굴렸다.

“그, 그리고 이 근처에 여관 같은 거 있던가?”



로드 곁에 사람이 없을수록 좋다며 걱정하는 기사들을 훠이훠이 내쫓고 프라우는 여관방 문을 닫고 돌아섰다.

돌아보니 침대에 눕혀뒀던 로드가 일어나 옷을 벗고 있었다.

“뭐하는거얏!”

프라우가 달려가 로드의 손목을 붙잡았다. 로드가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더니 프라우를 보고 생긋 웃었다.

“프라우.”

“으, 응?”

“너, 나 좋아하지.”

불길한 예감에 프라우가 몸을 떨었다. 로드가 팔을 끌어당겨 자기 손을 붙들 프라우의 손끝에 자기 혀끝을 갖다 댔다.

“저, 저기, 저기 로드.”

“나랑 섹스 하지 않을래?”

프라우의 머리가 텅 비었다. 텅 빈 머릿속에 ‘차려진 밥상’ ‘체자렛 뭔생각??’ ‘에로 동인 클리셰’ ‘약물 폭행’ ‘쫄?’ 등의 낱말만이 남아 날아다녔다.

“나, 나중에 후회할 지도 모르는데.”

“프라우.”

로드가 휙 뒤로 누웠다. 로드를 잡고 있던 프라우가 그의 위로 무방비하게 쏟아졌다.

“내가, 나중에 후회할 거 같은 짓은 안 하는 사람이야?”

“그....”

약을 먹은 건 로드지 프라우가 아닐 텐데도, 그 역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래 로드라면 나중에 울며불며 내 탓 할 사람 아니긴 한데 그래도 지금 제정신 아닌데 해도 되나? 로드 이성 얼마나 남아있는 거지? 깨고 나면 싹 잊는 거 아냐? 아니 잊는 편이 더 좋은 건가?’

프라우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동안 로드가 멋대로 프라우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비볐다.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려다가 프라우가 최후의 인내심 한 방울까지 짜내 입술 사이에 손바닥을 끼웠다.

“그만해, 로드. 이러다 나 짐승이 돼도 몰라.”

“프라우.”

로드가 끼어든 프라우의 손바닥에 키스했다.

“내 짐승이 되어줘.”


프라우가 잡아먹을 듯 덤벼 키스했다.

로드의 얼굴을 두 손으로 꽉 붙잡고 거칠게 입술을 밀어붙이며 입안을 휘저었다. 그런 프라우의 목을 팔로 감아 안으며 로드가 코로 웃었다.

‘날 짐승으로 만들어서 좋아?’

소리 내서 묻고 싶었지만 입이 너무 바빴다. 로드의 손이 프라우의 뒷목을 쓰다듬고 등으로 내려갔다. 슬금슬금 옆구리로 손을 내려 프라우의 가슴을 건드렸다.

간지러울 만큼 가벼운 손짓에 프라우가 몸을 비꼬았다. 싫은가 싶어 손 뗄 만도 한데, 로드는 대담하게 탱크톱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가슴을 쥐었다.

로드가 생각보다 손이 크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으며 프라우가 일단 키스를 멈추고 로드의 셔츠 단추를 마저 풀었다.

흘러내리는 셔츠를 로드가 몸을 흔들어 뒤로 떨어트렸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바라보듯 로드의 맨몸을 보던 프라우가 살며시 그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

“정말로...”

“정말로.”

로드가 프라우의 손을 잡아당겨 자기 가슴에 눌렀다.

“이건, 아니 그래도.”

“프라우.”

로드가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뭐가 무서워. 이게 꿈일까봐? 내가 먹고 버릴까봐? 아니면, 이건 가짜고 진짜 나는 너랑 이런 짓 하는 거 싫다고 할까봐?”

정곡을 찔려도 여러 번 찔려서 프라우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떡하면 좋지.”

로드가 벨트를 풀고 바지와 속옷을 단번에 내렸다.

“어떻게 해야, 내가 나이고 이게 진심이란 걸 증명할 수 있을까.”

“진심.. 이야?”

로드가 고개를 돌린 채 로드의 맨몸을 곁눈질했다.

“장르가 이렇게 바뀔 수 있다고? 체자렛이...”

“프라우.”

로드가 프라우의 머리를 잡아당겨 이마를 맞댔다.

“체자렛이 뭔가 했어. 그건 맞고 나도 걱정스러워. 그래도, 너니까 하고 싶은 거야. 해도 괜찮은 거야.”

“사람 꼬시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 보니 우리 로드 맞는 건 틀림없네.”

프라우가 로드에게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살며시 조심스럽게.

로드도 자연스럽게 입을 벌려 프라우가 혀를 섞었다. 매끄러운 혀놀림이, 다른 누가 아닌 로드와 입맞춤 하는 중인 걸 상기시키는 것 같아 프라우는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로드와 이러고 있다는 게 너무 이상했다. 체자렛의 흉계도 신경쓰였다.

하지만 나중 일을 생각해서 지금 하고 싶은 일을 자제하는 건 프라우가 아니었다.

‘에라 모르겠다.’

키스를 이어나가며, 프라우가 자기 옷을 벗어던졌다.

그러나 점퍼는 그렇게 벗을 수 있어도 탱크톱은 머리 위로 벗어야 했다. 프라우는 할 수 없이 입을 떼었다.

“젠장 좀 벗기 쉬운 옷을 입을걸.”

“급할 거 없어.”

로드가 프라우의 뺨에 입을 맞추곤 그의 허리띠를 풀었다.

“내가 널 벗기는 것도 자극적이고 좋잖아?”

로드의 손이 반바지 속으로 쑥 들어갔다.






로드가 고개를 젖히며 신음을 토했다. 짜릿한 오르가즘이 몸을 씻어 내린 뒤, 힘이 빠져 털썩 침대에 늘어진 채 로드가 숨만 할딱거렸다.

“좋았어?”

프라우가 능글능글 웃으며 로드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를 슬쩍 째려보면서 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은 좀 들고?”

“...그래. 아니, 정신이 나갔던 건 아닌데.”

천천히 숨을 고르던 로드가 팔을 들어 자기 눈을 가렸다.

“정신이 나갔거나 뭐에 씌었던 거면 더 편했을까.”

“그 말은 역시 멀쩡한 맨정신으로 나랑 잤다는 뜻이야?”

“그래. 그저... 그땐 매우, 섹스가 하고 싶어져 어쩔 수 없었을 뿐이야.”

말하고 로드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마치 섹스 할 수만 있으면 누구라도 상관없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그런 건 아니야. 너니까 하고 싶어졌던 거야.”

“응, 우리 로드인 건 잘 알고 있으니까 계속 카사노바 발언으로 확인시켜줄 필요 없어.”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치만 정말로 나한테 ‘만’ 발정했던 건 아니잖아? 그 순간 부축한 게 프람이나 요한이었으면 어땠을까?”

로드가 짐시 침묵했다.

“프라우, 나는....”

프라우가 손을 내저었다.

“아, 괜찮아 그런 걸로 상처 안 받아. 체자렛이 그렇게 나만 좋을 일을 해 주는 쪽이 이상하지.”

고개를 끄덕이고 프라우가 침대에 널린 옷을 주섬주섬 챙겼다. 등으로 돌린 채 옷을 입으려는데 로드가 뒤에서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너만이 아닌 건 맞지만... 그래도 너여서 좋았다고 생각해.”

프라우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거짓말 같아?”

“아니, 로드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니고 매우 설득력 있고 로드답다고 생각 하고 있고 그런데 지금 내 가슴 만지고 있는 거 자각하고 있는 거 맞지?”

“...아.”

로드가 움찔했다. 그러나 손은 떨어지지 않았고 도리어 로드가 프라우의 어깨에 머리를 얹고 등에 몸을 밀착해 왔다. 귓가에 뜨거운 숨소리가 흘렀다.

“프라우... 너니까 한 번 했다고 지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바지를 다리에 꿰다 말고 프라우가 굳었다.

“내 체력은 그렇지만 로드 체력은? 체자렛 대체 로드에게 뭘 먹인 거야?”

“내 체력이 왜?”

로드가 미간을 모았다.

“아니.. 내가 기사들에 비하면 약하지만 나이가 몇인데 두 번을 못 할까봐?”

프라우가 바지를 다시 벗을까 말까 치열한 고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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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략된 부분은... 쓰긴 했는데... 올리자니 귀찮아서 뭐 그렇게 됐습니다.



피의 연회 1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Characters: 로드. 샬롯. 프람. 요한. 자이라. 크롬. 그 외 로오히 캐릭터 다수.
Rating: PG-15 
Warnings: 없음
Summary: 갈루스가 평화회담을 제안하고, 사절 환영 연회 자리에서 사건이 터진다.




니벨룽겐의 군주 후속. 전작이 자이라의 수사관 의상에 감명받아 나왔듯이 이번은 요한의 기사단 제복에 감명받아 쓰는 겁니다만... 안 그래보여도 어쩔 수 없........




갈루스 제국이 헬베티아 연합왕국에 평화회담을 제의했다.

평복 차림이어도 누가 봐도 기사인 전령이 새벽 첫 기차로 달려와 전해준 서신을 읽으며 아발론의 로드는 슬쩍 미간을 모았다.

“뭐 나쁜 소식이라도 있어요?”

샬롯이 로드의 잔에 레모네이드를 채워주며 물었다.

“갈루스가 평화회담을 제의했다는군. 무슨 꿍꿍이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거절할 수는 없으니, 대책마련을 위해 로잔나가 군주 회의를 소집했어. 영지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중앙에 가봐야겠네. 좀 쉬나 했더니.”

“그래도 이제는 기찻길이 뚫려서 중앙까지 이틀이면 가잖아요. 로드는 군주니까 급행을 편성할 수도 있고.”

“그러면 다른 승객이나 화물 운송이 지연되잖아. 국가비상사태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정말 비상사태 아니야? 갈루스는 이미 자기 근처 나라들을 싹 점령했잖아. 그럼 다음은 당연히 여기 차례인거잖아?”

프람의 말에 로드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그야... 그렇지. 델 로스 연맹국을 전부 합병해 제국을 선포해 놓고 헬베티아하곤 평화를 말하다니 말도 안 되지.”

“그런데 왜 그런 프람님도 안 믿을 거짓말을 하는 건데요?”

샬롯이 물었다.

“뭐? 나도 안 믿을 거라는 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의 뜻인데요.”

“회담을 빙자해서 나라를 염탐하거나 중요인물을 매수하거나 암살할 심산이거나, 어쩌면 이미 확장한 영토를 내부단속 하는 동안 안전을 보장받고 새 정복에 나설 시간을 벌려는 의도일 수도 있지.”

로드가 말하기 시작하자 샬롯과 프람이 티격태격을 멈추었다.

“하지만 이건 보통의 경우라면 그렇다는 것이고 카르티스... 갈루스 황제가 무슨 생각인지는 알 수 없어. 도리어 그가 그렇게 일반적인 일을 할 리 없다는 생각만 드는군.”

“로드께선 그 사람을 잘 아세요?”

샬롯이 물었다.

“아니, 모른다니까.”

“그렇지만, 남이라서 당연히 모르는 게 아니라 아는 사이인데 모르는 것처럼 말씀하셨어요.”

“그랬나?”

로드가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조금 알긴 해. 예전에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있어서.”

“뭐? 그런 얘긴 안 했잖아!”

프람이 놀랐다.

“나도 모르게 언제? 어디서?”

“얘기 안 했던가? 나 예전에 도망쳐서 여기저기 떠돌며 이것저것 배우러 다닐 때, 갈루스 아카데미에도 잠시 있었잖아. 그때 같은 수업을 들었어. 그러고보니 그놈 그 때 나이도 속이고 신분도 속이고 그냥 학생인 척..... 아니 그건 나도 그랬지.”

로드가 뒤통수를 긁었다.

“그때만 해도 그냥 학우 정도였으니까 편지엔 안 썼지. 괜찮은 사람이라곤 생각했지만 갈루스인하고 정말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해서, 당시엔 별로 깊이 생각하진 않았어.”

“그때면 아직 황제 즉위하기 전이네요. 갈루스 왕자가 자기네 아카데미에 왜 정체를 감추고 다니는데요?”

“뭐 나랑 비슷하지 않을까? 왕실에서 몸을 피해야 했다거나 직접 겪으며 인재를 가까이서 보고 영입하고 싶었거나.”

“그럼 로드도 영입하려고 그랬어요?”

샬롯이 물었다.

“응? 내가 인재는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 거기선 조용하고 얌전하게 살았어.”

“로드.... 조용하고 얌전하게 사는 사람은 뒷세계의 왕 같은 거 되지 않아요.”

샬롯이 너무 뼛속 깊은 곳을 때렸기 때문에 로드는 잠시 탁자에 엎드려 부들부들 떨었다.

로드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동안 요한이 정원에 들어왔다.

“영입 제안은 아니고, 교제 신청이라면 받긴 했지만.”

“로... 네?!!!”

요한이 비명을 지르며 로드가 있는 탁자로 단숨에 이동했다.

“교제신청이라니요?! 로드께 말씀이십니까?? 어느 놈이 감히 주제도 모르고 그런 짓을 했.”

“진정해, 진정해 요한. 옛날 일이야. 옛날일이고 이미 거절했고.”

로드가 서둘러 요한을 다독였다.

“제국 황제가 그랬대요. 로드께서 갈루스 유학하실 무렵에.”

샬롯이 기름을 부었다.

“그런데 정말 교제신청인 건 맞아요? 로드처럼 오해를 부르는 방식으로 영입제안을 한 건 아니고요?”

“그건 아니야. 이후로 본 그 녀석의 영입제안은 꽤나 집요했거든. 폭력도 마다하지 않았고.”

“그놈이 감히 로드께 폭력을!”

“아니, 안했다고. 그래서 영입제안이 아니라 교제신청이라 생각하는 거라고. 그런데 그건 뭐야?”

말도 돌릴 겸 로드가 요한이 들고 온 서류를 가리켰다.

“아, 죄송합니다. 이걸 전하러 왔는데.”

요한이 서류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로드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로잔나님이 전신을 보냈습니다.”

“이런 거 격식 없다고 싫어하는 분이 별일이네. 분명 회담 관련이겠지만, 얼마나 급한 소식 이길래?”

받아든 로드가 내용을 읽었다.

그리곤 눈을 감았다 뜨더니 다시 읽었다.

“뭐, 뭔데 그래?”

심상찮은 기운에 프람이 로드 뒤로 가서 내용을 봤다.

“단장은 V. T. A. ..VTA가 뭐야? 샌드위치 같은 건가?”

“프람, 샌드위치는 BLT....”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

로드가 종이를 와락 구겼다.

“미친 건가? 아니 그.... 이게 대체!”

로드가 탁자를 쾅 내리쳤다. 흔히 볼 수 없는 과격한 반응에 기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래요? 누가 미친 건데요?”

넘어지지 않도록 레모네이드 잔을 잡은 채 샬롯이 물었다.

“카르티스. 그자가.... ‘평화 회담’을 할 협상단의 단장으로 알드 룬의 왕녀를 보냈어. 자기가 정복한지 몇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속국의 왕족을. 뭐지? 니들도 이 꼴 나기 전에 항복해라? 이런 꼴 당하고 싶지 않으면 결사항전해라?”

로드가 이마를 짚었다.

“모욕인 건 확실한데 대체 뭘 노리고 이런 건지는 짐작도 안 가는군.”

“그 사람이 개새끼라 그냥 모욕이 하고 싶었을 뿐이면요?”

“샬롯! 로드 앞인데 말을 좀 가려서 씁시다.”

“괜찮아, 이건 나도 카르티스가 개새끼라고 생각하고 있고.”

로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로잔나도 오죽 어이가 없었으면 이걸 전보로 쳤겠어.”

그가 잠시 레모네이드 잔만 노려보았다.

“대체 황제는, 카르티스 클라우디스는 무슨 짓을 하고 싶은 걸까.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정복..은 그래 권력욕으로 할 수 있다 쳐도 이건 대체..... 예전에 봤던 그는 이런 사람은 아니었는데.”

로드가 한탄했다.

“한때 알던 사람이 정체모를 개새끼가 되는 건 슬픈 일이야.”

“로드...”

요한이 로드의 옆으로 가까이 와 섰다. 로드가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요한경의 한결같음에 위로받으시는 도중 죄송한데 어쨌거나 급히 중앙에 가실 거죠. 특별열차 편성할까요?”

샬롯이 물었다.

“.....해.”



경시청 특수 수사관 사무실 앞에 서서, 크롬은 노크하려고 들어 올린 손을 움직이지 못한 채 한참이나 가만히 서 있었다.

그가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 이번에야말로 노크를 하려는 순간, 안쪽에서 문이 열리고 나오던 사람이 그의 앞에 멈춰 섰다.

“크롬 경.”

“...오랜만이군, 자이라.”

“무슨 일이십니까?”

자이라가 용건을 묻는 게 당연함에도 크롬은 어쩐지 서운했다. 마치 이제는 용건 없이는 만날 일이 없는 남이 된 기분이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안부 인사나 하러 들렀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기에 크롬은 개인감정은 꾹 누르고 용건을 이야기 할 수밖에 없었다.

“들어가서 이야기해도 되겠나?”

“예, 물론입니다.”

자이라가 비켜주자 크롬이 사무실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실은, 우리 전하께서 부탁을 한 가지 하셨다.”

실제로 카를로스가 한 말은 부탁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크롬은 그렇게 말을 꺼냈다.

“얼마 뒤 중앙궁전에서 연회가 열릴 거다. 그때 경비를 자원해 줄 수 있겠나?”

질문을 의미를 생각하듯 자이라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크롬 경이 그분을 호위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겁니까, 아니면 그 연회가 특별히... 조심스럽고 위험한 자리인 겁니까?”

“일단은 후자지만, 전자의 의미도 없지는 않아.”

크롬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연회의 참석자들은 군주와 기사를 가리지 않고 모두 마력 제어 장치를 착용하게 될 예정이다. 적을 압박하기 위해서이니 군주의 호위기사는 물론이고 연방 의장조차도 예외는 없다더군.”

“적이라고요?”

자이라가 놀랐다.

“그거 마치 위험한 적을 초대해서 연회를 한다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거의 비슷해, 갈루스에서 오는 사절을 환영하기 위한 연회니까.”

크롬이 설명했다.

“말로는 평화 회담을 제의했다던데, 갈루스 황제가 정말로 평화를 생각하고 있을 리는 업지. 그래서 로잔나 통령은 그 자리에서 누구도 싸우지 못하게 만들려는 거고, 카를 전하는... 마력 제한을 받지 않은 믿을 수 있고 유능한 기사가 가까이 있었으면 하시는 거다.”

“카를로스 전하께선 ‘우리 편’ 조차도 믿지 않으시겠다는 뜻이군요.”

자이라가 지적하자 크롬은 난감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해주게. 카를 전하께선 자기 무력을 지닌 다른 군주들에 비해서 조금... 자기 보호에 열성적이신 면이 있지 않나.”

자기 보호라. 자이라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군주가 자신의 안위를 신경 쓰는 건 분명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자기 보호를 위해, 기사로 인정해주기도 싫어서 중앙 정부의 정책에 협조한단 명목으로 멀리 보내버린 사람을 몰래 불러다 이용하려 드는 건 자이라 보기엔 자기 보호보다는 비겁함에 가까워 보였다.

자기에겐 없는 마력을 천한 노예 따위가 갖고 있단 사실을 참을 수 없이 거슬려하던 카를로스의 행태를 되새기며, 자이라는 똑같이 마력이 없는데도 도리어 자기가 기사를 감싸는 다른 군주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군주도 사람일 뿐이야. 기사를 실망시키는 일도 있지. 단 한 번의 충성 맹세에 일생을 거는 건 구식이라고.”

‘그러는 당신도 사람인 건 마찬가지잖아?’

자이라가 고개를 흔들어 아발론의 군주에 대한 생각을 그만두었다.

크롬이 그 동작을 오해했다.

“자이라 경... 필요하다면 내가.”

“아니 거절하려는 게 아닙니다.”

자이라가 서둘러 대답했다.

“그저 잡념을 떨어내려다가..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다만 그런 식의 연회라면 경비 인력은, 특히 군주의 입김이 닿아있을 수 있는 인원들은 외부 경계로만 돌려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멀리서나마 카를로스 전하를 호위하는 일은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괜찮네. 그런 것까지 그대에게 요구하지는 않아.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정해진 것도 아니고, 정말로 큰 일이 있어났을 때 자네가 경시청이 아니라 연회장 외부에서 달려온다고만 알아도 한결 마음이 놓일 테니까.”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자넬 안 믿으면 누구를 믿겠나.”

크롬의 말은 예전처럼 다정했다. 자이라는 감상에 잠기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그나저나, 갈루스에서 사절을 보내다니 군주들께서 다들 경계하시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만, 혹시 오는 사람 중에 특별히 더 위험인물이라 할 만한 사람도 있습니까? 타국의 인사를 환영하는 연회 자리에서 마력을 제한하다니 역시 좀 드문 일 같아서요.”

“그게... 아직 기밀 사항이긴 한데.”

크롬이 새삼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네에게까지 숨길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그들이 입국하게 되면 알려질 거고.”

자이라가 긴장했다.

“누가 오는데 그러십니까.”

“조슈아 레비턴스.”

크롬이 말했다.

“델 로스 동맹국을 갈루스의 속국으로 만든 일등공신, 그자가 직접 여기에 온다.”




[역전재판] 재회 ㅣ- 기타


Writer: 보행자
Characters: 카미야 키리오, 카르마 메이
Rating: G
Summary: 역전재판 2 결말에서 역전재판 3 사이에 카미야 키리오와 카르마 메이가 만났다는 설정입니다. 역전재판 1, 2의 스포가 있습니다.



위증죄, 공무집행 방해죄, 시체손괴죄.

그 외에도 몇 가지 더 추가될 수 있지만 살인죄를 뒤집어 쓸 걱정은 완전히 사라졌다는 말을 듣고 구치소로 돌아올 때까지 카미야 키리오는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감된 자신 앞으로 날아온 편지 한 통, 그 봉투에 적힌 발신인의 이름을 보고 그는 다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카르마 메이.

그 검사였다. 오오토로를 유죄로 만들고 싶으면 증언을 거부하라던.

자신은 그때 어떻게 했던가.

미츠루기 검사의 페이스에 휘말려 결국 증언을 이어나갔고, 오오토로를 유죄로 만들지도 못했다. 오늘의 결과는 오로지 나루호도 씨와 미츠루기 씨의 활약 덕이었다. 자신은 그저 교훈을 얻은 관객에 지나지 않았다.

교훈...’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은 또다시 의존하려 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편지 한 통에 벌벌 떨고 있는 지금 모습은 과거 서투르던 신입 시절 잘못을 저지르고 유리에 선배님의 호출을 받았을 때와 똑같았다.

편지를 쥔 손이 덜덜 흔들렸다.

찢어버릴까, 던져버릴까, 그런 다음 카르마 검사의 질책 따위 무시했으니 의존에서 벗어난 거라고 가슴을 펼 수 있을까.

‘......하지만 고작 편지일 뿐이야. 편지를 버리면 그거야말로 나약한 짓이야.’

드라마에서 간혹 나오는 것처럼, 태연한 얼굴로 간단하게 찢어버리는 그런 모습은 어차피 이미 무리다.

그렇다면 일단 편지를 읽고 내용이라도 확인한 다음에......

어차피 그 다음에 편지에 적혀있는 그대로 할 생각 아니냐고 마음 한 구석에서 빈정대는 소리를 들으며 봉투를 뜯었다.

얇은 종이 한 장에는 정갈하면서도 힘찬 글씨가 적혀있었다.

그 사람다운 필체였다. 그러나 내용은 완전히 뜻밖이었다.

질책하는 말은 단 한 줄도 없었다. 도리어 그 사람치곤 꽤 부드러운 어조로, 법정에서 도움이 되지 못했으니 대신 출소 후 언제든 상담에 응해주겠다는 말과 연락처가 적혀있었다.

어쩌지, 어쩌지.’

매니저 일은 유리에 선배님께 배운 대로 완벽하게 해나갈 수 있었는데, 이런 편지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는 누구에게도 배우지 못했다.

내가 결정해야 해.’

 

 

카르마 메이의 주 활동무대는 외국이었으나 일단 국적은 아버지와 같았고 카르마 가의 본가도 국내에 있었다.

따라서 메이는 아버지 대신 당주 노릇을 하기 위해서라도 가끔 귀국해야 했다. 출소한 카미야 키리오의 연락을 받은 것도 때마침 귀국할 일정을 잡았을 때였다.

메이는 일부러 일정을 당겨서 일찍 귀국해 원래 예정을 다 소화하면서 키리오와도 만날 시간을 확보했다. 그리고 키리오를 본가 근처의 자기 사무실로 초대했다.

자잘한 죄목이 많은 것치고는 일찍 나올 수 있었군.”

위증죄와 시체손괴죄 등 모두 합쳐 집행유예로 끝났습니다. 여러 사정을 참작해준 거라더군요.”

키리오는 카르마 메이가 정말로 자기를 만나준 게 놀라운 눈치였다. 냉정함을 가장하는 일을 그만둬서인지 전보다 표정이 풍부해지고 속을 읽기 쉬워졌다.

미츠루기 녀석이 손을 썼겠지. 검사가 먼저 낮은 형량을 구형하면 재판관이 그보다 높게 선고하기는 힘드니까.”

미츠루기를 입에 담자 메이의 이맛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놈에게 큰 은혜라도 입었다는 표정은 할 필요 없어. 내가 빠진 사이 법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다 전해들었다.”

메이는 키리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증언을 뜯어내려고 협박한 일을 신경쓰고 있었겠지. 역시 카르마의 룰을 감당하기엔 물러터진 놈이라니까.”

카르마 검사님이 하신 일이 아니었어요?”

내가 맡은 건 오오토로의 살인까지였다. 그런 뒤처리는 다른 놈들이 했지.”

하지만 카르마 검사님도 제게 친절한 편지를 보내주셨지요. 그리고 지금 이렇게 만나주셨고요.”

미츠루기 녀석과는 사정이 달라. 그때 내가 한 일은...”

메이의 표정은 풀어질 줄 몰랐으나 손으로는 키리오 앞에 차를 따르고 있었다.

네 성향이야 진작 눈치챘고, 그래서 다루기 쉽겠다고도 생각했지. 하지만 상황이 바뀌고 증언 거부만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을 지경이 되어서까지 미련하게 입만 다물고 있는 건 계산에 들어있지 않았어.”

키리오가 고개를 숙였다. 역시 오랜 삶의 방식이 하루아침에 변할 수는 없는지 처음 메이 앞에서 의존 성향을 드러냈을 때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메이는 계속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내가 검사석에 있었다면 바로 대처할 수 있었겠다만, 그럴 수 없었지.”

그건 킬러의 저격 때문이었고 검사님 잘못이 아니었어요.”

이유 같은 건 결과 앞에서 아무 소용 없어. 게다가 나는 그때 네가 그 정도로 내 귀띔을 맹신할 거라고는 예상 못했다. 이건 내 실패야.”

메이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네가 의존하던 상대는 유리에 선배였고, 그 복수를 준비하느라 의존이 더 심해진 상태 아니었나?”

. 그랬어요.”

그렇게 심하게 얽매여 있던 상대를 놔두고 다른 사람에게 의존한다? 그렇게 아무한테나 쉽게 넘어가는 사람이라면 평소에 냉철한 척하는 위장이 가능했을 리도 없어. 스타의 매니저 노릇을 유능하게 해낼 수도 없지.”

키리오가 고개를 들었다.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때 검사님은 아무나가 아니었는걸요. 모르셨어요?”

내가?”

분명 선배님을 잃은 후로도 그분께 의존하고 있던 건 맞아요. 선배님께 배운 대로만 일하고, 그래서 도리어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무시할 수도 있었어요. 덕분에 냉철하고 유능한 매니저 행세를 할 수 있었죠. 하지만 그것도 사건이 일어난 날까지였습니다.”

키리오의 표정이 차분해졌다.

그 두 남자 중 한 명은 살해당하고 한 명은 잡혀가고, 호텔엔 경찰이 가득 차고, 어떻게든 오오토로를 살인범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무대는 더 이상 제게 익숙한 연예계가 아니었어요. 경찰의 탐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법정에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유리에 선배님은 그런 건 가르쳐준 적이 없어요.”

그랬군.”

그때 깨달았어요. 선배님은 더 이상 내 곁에 없다는 걸. 엄마나 교수님이 더 이상 내 곁에 없는 것처럼. 내가 의존하던 사람이 사라졌고 나 혼자라는 걸.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눈앞에 나타난 거예요. 법정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내가 항상 동경하고 흉내내던 완벽한 여성이.”

내가 그렇게 보였다고.”

목소리에 섞인 씁쓸함을 느꼈는지 키리오가 다시 어깨를 움츠렸다.

죄송합니다. 이런 이야기 역시 불쾌하시겠죠.”

불쾌할 걸 알고 있었나?”

교수님이 그래서 저와 연을 끊으셨는걸요. 그런 못난이인 줄 몰랐다면서,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어머님은?”

그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 역시 그렇게 된 일이었군.”

메이가 다시 담담한 태도로 돌아왔다.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래도 네가 직접 하는 말을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했지. 더 이상의 빈틈은 용납할 수 없으니.”

.”

그리고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네가 새 의존 상대를 찾자마자 교도소에 홀로 남겨지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여자인지.”

키리오가 놀란 표정이 되었다.

교도소란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던 사람이 쉽게 적응할 만큼 편한 곳이 아니지. 그런데 집행유예로 일찍 나왔다고는 해도 예상했던 것만큼 불쌍한 몰골은 아닌걸.”

그런가요?”

키리오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그래서였다. ‘의존의 뒷감당을 해주지 못한 배상만이라면 당연히 출소 전에 해줄 수 있는 게 훨씬 많은데도 편지 한 통만 주고 손 떼 버린 건. 아까는 다르게 말했다만 원래 담당 검사는 나였으니 마음만 먹었으면 미츠루기를 밀어내고 내가 형량을 정할 수 있었어. 교도관들도 검사가 봐주는 수감자 앞에선 태도가 달라지지.”

그랬군요.”

난 그 교수가 널 떼어낸 심정도 이해한다. 그렇게 나약한 인간 뒤치다꺼리나 하며 살 생각은 없어. 너도 그게 널 위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쯤은 이제 알겠지? 게다가...”

자랑스럽지 않은 사실을 털어놓기 위해 메이는 잠시 목을 축여야 했다.

난 네가 생각하는 만큼 완벽한 사람이 아냐.”

?”

나도 동경하고 닮고 싶어한 사람이 있었다. 한 치의 의문도 품지 않고 복종하며 살아왔지. 내 인생도 그가 정해준 그대로였어.”

키리오는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그 사람은 바로 얼마 전에 형편없이 추락했지. 누구보다 완벽한 척 하던 주제에, 범죄를 저지르고 거짓으로 얼기설기 덮어놓은 완벽이 무너지자 자멸했어......내 우상은 고작 그런 인간이었어.”

메이가 다시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러니 원수를 갚을 일이 아니었어. 나루호도나 미츠루기가 원수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어. 그보다 훨씬 중요하고 절박한 문제가 생겼으니까. 내가 그동안 목표로 삼았던 완벽한 검사가 범죄와 협잡으로 꾸며진 허상에 불과했다면, ‘완벽이란 뭐지?”

상대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지만 어차피 알아들어야 할 건 카르마 고우에 얽힌 옛이야기가 아니었다. 키리오도 미츠루기가 왜 원수냐고 묻지 않았다.

미츠루기를 뛰어넘으면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봤어. 하지만 그러지 못했지. 미츠루기를 이긴 변호사를 내가 이기면 되는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이기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놈이 패소하고서도 웃는 얼굴까지 봐야 했어. 심지어 미츠루기는 그놈과 함께 웃고 있었지!”

부드득 이를 갈다가 메이가 진정했다.

그리고 아직도 난 나루호도를 이기지 못했어. 어때, 실망스럽지 않아?”

아니요.”

키리오는 잠시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대답했다.

포기하지 않으셨잖아요. 나루호도 씨를 이기는 것이든 완벽한 검사든.”

그래 보여?”

. 저는 물론 완벽한 검사같은 거 모르겠고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이미 실패하고 끝난 일이라면 절 만나주시지 않았을 것 같아요. 아닌가요?”

메이는 잠시 표정을 가다듬고서야 다시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래, 맞아. 나는 카르마의 완벽을 다시 정의하기로 했어. 카르마의 룰은 이제 카르마 고우가 아니라 카르마 메이가 정하는 거야.”

그를 바라보는 키리오의 눈빛을 보고 메이가 당황했다.

이봐, 분명히 말하지만 내게 의존해도 난 아무 지침도 내려주지 않을 거야!”

그거 다행이네요.”

여전히 뺨을 붉히고 눈을 빛내며 키리오가 대답했다.

오오토로에게 유죄가 선고되었을 때 저는 구원 받았다고 느꼈어요. 드디어 선배님에게서 벗어난 기분이었죠. 그리고 그때 전 카르마 검사님께 의지하지 않고도 증인석에서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어요. 보통 사람에겐 당연한 일이겠지만 저 같은 사람에겐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그렇게 위험하고 힘든 순간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내 두 발로만 서 있는 건.”

그래. 잘 했어.”

그런데도 검사님의 편지를 본 순간 무서웠어요. 다시 검사님께 의존하게 될 것 같아서. 그 봉투를 뜯는 데 얼마만한 용기가 필요했는지 검사님처럼 강한 분은 모르실 거예요.”

비웃음 당할까 무서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메이는 그를 비웃지 않았다.

출소 후에 찾아오라고 해주셔서 고마워요. 덕분에 저는 검사님께 의존하지 않고도 교도소 생활을 버틸 수 있었어요. 그리고......”

키리오의 미소가 자랑스럽게 변했다.

유리에 선배님의 다른 친구분이 제게 새 일자리를 소개해 주셨어요. 선배님의 죽음이 자기도 안타까웠다면서,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선배님을 위해준 보답을 하고 싶었대요.”

그래?”

. 대형 백화점에서 이벤트 기획 같은 걸 하게 됐어요. 일단은 계약직이지만 실적이 좋으면 정규직도 노려볼 수 있어요.”

다행이군.”

비로소 메이도 다시 웃었다.

흥미로운 이벤트라면 나도 보러 가지.”

감사합니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이번에 귀국한 건 집안 재산 문제 때문에 잠깐 들른 거고 금방 다시 출국해야 하거든.”

...”

그러니까.”

메이가 키리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훌륭한 기획자가 되라고. 스스로의 힘으로. 나도 새로운 룰을 완성해서 돌아올 테니까.”

돌아오신다고요.”

키리오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메이도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래. 그때는 특별히 채찍 다루는 법을 가르쳐주지. 아무한테나 가르쳐주는 거 아니니까 팔 힘 길러두라고. 보기만큼 쉽지 않거든.”

감사합니다. 열심히 운동할게요!”

키리오가 메이의 손을 꽉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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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장르에선 본편에 실제 국명이 나와도 그걸 쓰기가 꺼려지더군요. 대놓고 현실이 아닌데 현실 국명이 나오면 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2 (완)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여행자가 슬며시 손을 들었다.

“질문을 받는 게 싫으면 해서 참여할 수도 있잖아요? 지금 브랜든님 질문도 한 번도 안 했는데.”

“너희들에게 궁금한 것 따위 없다.”

브랜든이 즉답했다.

“저희는 안 궁금해도, 라르곤님에 대해선 더 알고 싶은 거 없어요? 정말로?”

그 말엔 브랜든도 좀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적어도 이런데서 술의 힘을 빌려 물을만한 건 없다. 라르곤은 평소에도 늘 솔직하기도 하고.”

헬가가 손을 내저었다.

“어이 답을 듣는 게 전부가 아니야. 이럴 땐 누가 곤란한 질문을 하지 못하게 미리 무난한 질문을 던져서 방어를 할 수도 있고...”

“라르곤에게 곤란한 질문을 하겠다고?”

브랜든이 살벌한 눈으로 헬가를 노려보았다.

“으, 아니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내가 하겠다는 게 아니라! 여긴 어째 다들 점잖게 진짜 궁금한 것만 묻고 그러지만 전에 기사단에서 할 땐 막 짓궂고 저속한 질문 같은 것도 나오고 그랬단 말이야.”

“술자리에 애인 얘기가 빠질 순 없지.”

온달이 추임새를 넣었다.

“그래, 원래 술 들어가면 다들 풀어져서 그러고 노는 건데...”

브랜든이 이마를 짚었다.

“됐고, 질문 끝났으면 넘어가라.”

“그래, 뭐 그래도 이번엔 대답 비슷한 건 했으니까... 새로 알아낸 건 없고, 알던 걸 더 잘 알게 되었을 뿐인 것 같지만.”

“앎이란 게 원래 그렇잖아요.”

시프리에드가 술을 홀짝이며 말했다.

“정말 모르는 건 질문할 수도 없으니까요.”

“엥? 모르니까 묻는 거 아니에요?”

“아주 모르는 거랑 대충 아는 거랑 정확히 아는 건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거지.”

온달이 헬가의 질문에 대신 대답했다

“적이 있다고 알아야 정찰을 보내서 적이 정확이 어디에 얼마만큼 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이런 거야.”

“아, 그렇게 말하니 그러네.”

“제비 돌리라고.”

참다못한 브랜든이 자기가 제비를 내밀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뽑은 라르곤 손에 꼬투리 없는 성냥이 뽑혀 나왔다.

“저네요.”

“어... 라르곤에겐 뭘 묻지?”

헬기가 뒷머리를 긁었다.

“쟤는 평소에도 숨기는 게 없으니까 이럴 땐 도리어 물을 만한 게 없네.”

“그럼 내가 해볼까?”

온달이 나섰다.

“어, 온달님 저에게 궁금한 거 있었어요?”

“그래. 아주 궁금한 게 있어.”

온달이 음흉하게 웃었다.

“너는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지?”

“......네?”

“그야 너는 웬만한 사람은 다 좋다고 하겠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것 아니겠어? 그중 제일 좋은 게 누구냐고. 물론 이 자리에 없는 사람, 죽은 사람까지도 포함해서.”

“...뭣!”

브랜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놈, 그런 걸 물어서 어쩌려는 거냐!”

“어쩌긴, 꽤 흔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같은 거잖아. 아, 이 동네에선 애들한테 그런 거 안 묻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온달은 계속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저속하지 않으면서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궁리해봤을 뿐이야. 왜, 뭐 걱정되는 거라도 있나?”

바드득 이를 가는 브랜든을 보며 온달이 즐겁게 웃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라르곤이 브랜든의 팔에 손을 얹었다.

“브랜든.”

“아, 아니 지금 싸우려는 건 아니고.”

“질문에 대한 대답이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너야.”

브랜든이 잠시 말을 잃었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붉어졌다.

“아, 아니 날 배려해서 그렇게 말해줄 필요는 없어. 그냥 솔직하게 말해도....”

“왜 내가 널 제일 좋아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건데?”

라르곤의 목소리에선 억울함이 묻어났다. 브랜든은 말문이 막혔다.

“그.... 하지만 너희 할아버지라든가 당연히.”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걸.”

라르곤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할아버지 좋은 분이셨고 나도 아주 좋아했고 지금도 가끔 그립기는 하지만, 이제 더는 만날 수 없는 분을 혼자서만 계속 더 많이 좋아하게 될 수는 없는 거잖아. 너는 나랑 함께 있고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계속 더 좋아하게 될 거니까, 지금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너 맞아.”

브랜든이 얼빠진 얼굴로 입만 벌렸다 다물었다.

“그.... 어... 고, 고마워.”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발그스름한 귀끝을 보며 온달이 혀를 찼다.

“죽 쒀서 개 줬군.”

“그 개한테 물려볼테냐?”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목소리만 음산하게 브랜든이 위협했다. 말 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듯 검은 손의 그림자가 바닥에서 치솟았다.

“자, 자, 노는 자리! 노는 자리!”

헬가가 하하 웃으며 제비를 내밀었다.

“기왕 라르곤한테 제일 좋다는 말 들어놓고 망치지 말라고. 어서 뽑아!”

“맞아요. 얼른 다음 판 하죠.”

여행자도 맞장구치며 제비를 뽑았다.

“아, 저네요. 이번 질문.”

여행자가 난처하게 웃었다.

“뭘 아는 게 있어야 대답도 할텐데.”

“내가 질문하마.”

브랜든이 고개를 들었다.

“네? 저희들에게 궁금한 것 없다면서요?”

“방금 생겼다. 불만이냐?”

“아뇨, 아니지만....”

불길한 기분을 누르며 여행자가 애써 웃었다.

“저, 과거에 대해 물어보시면 대답할 수가 없어요...”

“걱정하지 마라. 널 괴롭히려고 하는 질문은 아니니까.”

그 말에 여행자도 헬가도 시프리에드도 온달을 쳐다보았다. 라르곤은 브랜든을 보았지만 그가 말리기도 전에 브랜든이 질문을 입에 올렸다.

“너는 누가 제일 좋으냐.”

“네? 어, 그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인물들뿐만 아니라, 없는 사람 죽은 사람 포함해 네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

여행자가 하려던 말을 멈췄다.

“과거는 모른다, 그래서 대답할 수 없다, 그렇게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정말 그걸로 끝이냐? 그래, 개별 인간 한 명 한 명의 이름이나 생김새는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네게 동료가 있었다는 건 알고 있겠지. 네 평생을 함께 해왔을, 네 목숨도 맡길 수 있는 소중하고 신뢰하는 동료가.”

놀란 여행자가 입을 달싹였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브랜든이 그런 여행자를 외면했다.

“네가 우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정도는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들과, 여기 있는 놈들 중 누가 좋으냐는 거다.”

“그, 그런 걸 어떻게 답해요!”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으로 놔두고 지금 아는 한도 내에서만 대답하고 싶다면 그래도 된다. 마음대로 해라.”

브랜든이 질문을 끝냈다. 그러나 여행자는 여전히 충격 받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야, 이 자식아.”

온달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누가 배배꼬인 놈 아니랄까봐 공격을 하려면 내게 할 것이지...”

“......어느 쪽도 포기 안 해요.”

여행자가 말했다.

“지금의 여러분도,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사람들도. 그래서 여기의 문제도 해결하고 돌아갈 방도도 찾으려는 거고...”

그가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누가 제일 좋냐니 바보 같아요. 모두가 좋고 소중한 게 당연하잖아요. 이 사람은 이래서, 저 사람은 저래서 더 마음이 쓰일 수는 있지만 그런 걸 순서 매기고 줄 세워 싸우고....”

그가 씩씩거리며 술을 한 잔 더 따라 마셨다.

“굳이 이름을 대자면 지금 제일 좋은 건 시프리에드님이에요, 댁들 같이 유치하지 않아서! 그리고 남의 호감을 괴롭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두 사람이 제일 싫네요!”

그리고 여행자가 시프리에드에게 폭 기댔다. 시프리에드가 그를 토닥여주며 실소했다.

“그러네요, 저도 유치한 두 사람이 제일 싫네요.”

시프리에드가 바라보자 온달도 브랜든도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나.. 난 저 녀석이 날 싫어해도 상관 없...”

“브랜든.”

라르곤이 부르자 브랜든이 식은땀을 흘리며 고뇌했다.

“그... 나는 그러니까.....”

라르곤이 말없이 계속 브랜든을 쳐다보았다. 더 버티지 못하고 브랜든이 여행자에게 말했다.

“그런 질문을 해서 미안하다.”

“그래 잘했어.”

라르곤이 브랜든을 토닥토닥 쓰다듬었다.

“그래도 저 광대놈에겐 사과 안 할 거다! 저놈이 먼저 너에게!”

“그래그래, 온달님이 먼저 사과하면 그때 해.”

그러나 지금 온달은 라르곤에게 사과하고 있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너... 그렇다고 정말 나까지 싫은 거냐?”

한 눈으로 온달을 째려보던 여행자가 혀를 쏙 내밀곤 시프리에드에게 답삭 매달려 부비작부비작 어리광부렸다.

“시프리에드니임~”

“네, 뭔가요?”

“나중에, 이 일 끝나고 나면요, 그 다음엔 제게 오시지 않을래요?”

“네?”

“오세요. 제가 술도 창고에 꽉 채워드릴게요.”

“어머, 그것 참 구미 당기는 조건이긴 하네요.”

“그럼 오시는 거죠? 약속이에요.”

꼬물꼬물 시프리에드의 손을 찾아서 새끼손가락을 걸고 그대로 여행자는 소르르 잠들어버렸다.

“이런, 단명종에겐 술이 과했나.”

시프리에드가 여행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술창고 기대하고 있을게요.”

“나는?”

온달이 처량하게 물었으나 여행자는 색색 숨소리만 낼 뿐이었다.

헬가가 온달의 어깨를 토닥였다.

“괜찮아, 두 잔을 연달아 들이켰으니 기억 날아갔을지도 몰라.”

“그걸 위로라고 하는 거냐?”

“그럼 차였대요 얼레리 꼴레리 해줄까?”

“........위로해라.”

다행히도, 브랜든도 라르곤 눈치를 보느라 온달을 더 놀리지는 못했다.

오직 그것만이 다행인 술자리가 그렇게 끝났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1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Characters: 헬가. 여행자. 온달. 시프리에드. 라르곤. 브랜든.
Rating: PG
Warnings: 없음.
Summary: 2차 마도대전. 헬가가 합류한 뒤 델포이아로 향하는 배 위에서, 심심해진 수상한 집단이 진실게임을 벌인다.


라르브랜 온달로드 로드시프가 깔려있습니다.



헬가가 짊어지고 온 술통을 턱 내려놓았다.

“우리 진실게임 하자.”

“....네? 뭘요?”

여행자가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다들 할 일도 없고 심심하잖아. 그리고.... 다들 바닥에 엎드려서 뭐 해, 뭐 잃어버렸어?”

“그런 건 아니고 놀고 있었어요. 온달이 조약돌 가지고 하는 놀이를 알려준대서.”

여행자가 말했다.

“헬가님도 할래요? 공기라는 돌을 던져서 받는 건데.”

헬가가 기겁했다.

“그렇게 위험한 놀이를?”

“사람한테 던지는 거 아니고요.”

“아.”

“그런데 그 술통은 뭐에요?”

라르곤이 산으로 가는 이야기를 기슭에서 잡아챘다.

“이거 럼이라고, 뱃사람들이 마시는 독한 술이야. 암튼 진실게임 하자. 파도기사단에서 배웠는데 사람이 금방 친해지는 덴 술게임만한 게 없대.”

“술을 마시는 놀이인가요?”

시프리에드가 흥미를 보였다. 온달도 헬가를 주목했다.

“예. 둘러앉아서 돌아가며 서로 질문을 하는 거예요. 질문 받은 사람은 사실대로 대답해야하고, 대답 못 하겠으면 벌로 술을 한 잔 마시는 거죠.”

“네? 벌로.... 술을요?”

시프리에드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린 처음 들어본다는 표정을 했다.

“술을 마시는 게 어떻게 벌이 되는 거죠?”

“아, 뭘 하자는 건지 알겠어.”

온달이 끼어들었다.

“하, 대륙은 달라도 이런 건 비슷하군.”

“가우리에도 진실게임이 있어요?”

여행자가 물었다.

“질문에 답하라는 건 아니고, 걸린 사람한테 춤을 추라거나 노래를 부르라거나 뭐 그런 걸 시키는 거지. 사람이 시킬 때도 있고 이런저런 명령이 쓰인 주사위를 던져서 하기도 하고. 역시 못하면 술을 마시는 거고.”

“그러니까 어떻게 술이...”

“술이 벌이 되는 게 아니라, 남이 마시라는 대로 마시는 게 벌이 되는 거야.”

온달이 시프리에드에게 설명했다.

“내가 마시고 싶을 때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시는 게 아니라 남이 마시라고 옆에서 박수치고 있는 걸 시키는 대로 마셔야 하는 게 바로 벌주인거라고.”

“그, 그런가요?”

시프리에드가 이해가 되는 듯 마는 듯 여전히 동공지진했다.

브랜든이 옆에서 혀를 찼다.

“성질 나쁜 거 자랑하기는.”

“호, 그래? 그럼 어디 내가 주는 술을.”

“저리 치워!”

온달과 브랜든을 보며 여행자가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우리 일행 진짜 이대로 괜찮은 건가...”

“그러니까! 술게임을 해서 서로 친해지자니까.”

헬가가 말했다.

“더 싸우지 않으면 다행 아니에요?”

“그...”

헬가가 브랜든과 온달을 보았다.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그가 풀죽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치만, 난 너희들에 대해 잘 모르는걸.”

그 말엔 싸워가던 온달과 브랜든, 둘의 머리를 내리쳐줄 준비 중이던 시프리에드도 고개를 돌렸다.

“니들끼린 오래 같이 다녔고 서로 익숙해졌을 것 아냐. 그에 비해 신참인 내가 여기 확 녹아들려면 좀 화끈하게 서로 깔 거 까고 술 마시고 풀어진 모습도 보고 그래야 할 거 아니겠어?”

“그건....그렇지만....”

아무도 섣불리 말을 못 하고 있는 사이 공깃돌을 치워들고 라르곤이 일어섰다.

“하죠. 안 그래도 다들 심심한데.”

“좋아, 너라면 알아줄 줄 알았어!”

“다만 우리 일행 중엔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는 분들도 있고 여행자님은 아예 기억을 못 하시니까, 답할 수 없거나 싫어할만한 질문을 일부러 하지는 않는 걸로 해요. 서로를 더 잘 알고 친해지려고 하는 거지 시비 걸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좋은 생각이에요.”

브랜든보다도 먼저 여행자가 라르곤의 말에 찬성하고 나섰다.

“뭐 확실히, 빨리 친해지는 데는 술 만한 게 없긴 하지.”

온달도 찬성하며 시프리에드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런 건 적당히 취해야 재미있는데 말이야.”

“괜찮아요, 고주망태가 되지 않는다 뿐이지 저도 분위기 정도는 타요.”

“그럼 하자.”

헬가가 싱글벙글 웃으며 탁자를 치우고 술잔을 놓았다.

“순서는 어떻게 정하는 거에요?”

라르곤이 물었다.

“그냥 한 바퀴 돌아도 되고, 다음에 누가 걸릴지 모를 스릴을 즐기고 싶으면 제비를 뽑아도 되고.”

“제비를 뽑지. 그냥 한 바퀴 돌다니 재미없잖아.”

온달이 말하자 여행자가 성냥 꼬투리를 꺾어 제비를 만들었다.

“예, 처음은 나다!”

헬가가 하하 웃었다.

“좋아, 난 대답하기 싫을 만한 거 없으니까 마음껏 물어봐!”

여행자가 손을 들었다.

“슈미트 여관에서도 정어리 홍차를 파나요?”

“윽, 그건.”

헬가가 난감한 얼굴로 머리를 긁었다.

“그게.... 원래는 그건 외지인들에게 장난치는 메뉴거든. 사르디나인들이 정어리에 자부심이 있기는 해도 그게 비리다는 걸 모를 정도는 아냐.”

“역시.”

온달이 혀를 찼다.

“근데 또 그게 어떻게 소문이 퍼졌는지 사르디나 명물이라며 먹어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생겨서 말이야. 여행을 하다보면 이상한 걸 맛보는 것도 추억이 되고 그러잖아. 그러다보니 이젠 그냥, 악의는 없는 관광객용 메뉴라고나 할까. 그렇게 됐어.”

“그렇게 된 거군요.”

여행자뿐 아니라 다른 일행들도 끄덕끄덕 납득했다.

“근데, 지금은 우리가 서로 잘 알고 친해지자고 진실게임 하는 거잖아. 좀 더 나한테 궁금한 걸 물어야 하지 않아?”

“죄송해요. 너무 궁금해서.”

“응, 그거야 나도 이해를 하는데...”

뒷머리를 긁던 헬가가 다시 표정을 폈다.

“뭐, 첫판이니까 연습했다 치자. 그럼 계속해볼까?”



처음에는 조금 삐걱거렸지만 다들 금방 진실게임의 규칙에 적응했다.

개성이 강한 일행인 만큼 질문 방식은 저마다 달랐다.


라르곤은 누구도 마음 상하지 않을 만한 소재를 열심히 찾아냈고.

“시프리에드님이 마셔본 중 제일 독한 술은 뭐에요?”

“거인족이 만든 술이었는데 70도 정도 했어요. 전 맛있었지만.. 인간에게 권할만한 건 못 되죠.”

“그쯤이면 그냥 소독약인데요...”


헬가는 좀 개인적일 것 같은 화제도 거리낌없이 질문했다.

“넌 기억을 잃었다며, 어디서 뭘 하다 기억을 잃었길래 과거를 통째로 몰라? 어디서 정신을 차렸나 같은 걸로 좀 유추해본다거나 못해?”

“그게, 제가 기억하는 건 페르사인데 제가 거기 사람일 리는 없잖아요. 그리고 시프리에드님 말로는 하늘에서 떨어졌대요.”

“뭐? 넌 낙법 같은 거 잘 못 할 것 같은데 그렇게 높은 데서 떨어졌다고?”

“아니... 낙법을 할 줄 알아도 하늘에서 떨어지면 죽지 않을까요?”


신입이 기존에 구성된 팀에 쉽게 녹아들기 위해 하는 술게임이니 아무래도 헬가가 질문을 많이 했고 다른 사람들도 헬가의 질문은 되도록 받아주었다.

“가우리에도 연극은 있지. 그런 거 보면서 울어본 적 있어?”

“...있다.”

“뭐? 어떤 얘기였는데? 왜 울었는데?”

“질문은 한 번에 한 가지만 해라.”


물론 모두가 협조적인 건 아니었다.

“어이 복덕방 영감 너.”

벌컥.

“질문 시작도 안 했어!”



술도 두어잔씩 들어가고 다들 질문에도 익숙해진 뒤, 몇 번 째인지 모를 제비가 또다시 돌았다.

“이번엔 누구... 아, 또 저 복덕방 영감이네.”

헬가가 아쉬워했다.

“내가 걸린 것에 불만 있나?”

“그야 넌 뭘 물어도 제대로 대답 안 하잖아. 당연히 재미없지.”

이 자리에서 지금까지 다섯 잔 이상 마신 사람은 술을 눈앞에 두고 안 마시다니 못해먹겠다며 질문과 상관없이 술을 들이켠 시프리에드 말고는 브랜든 뿐이었다.

안 취하는 시프리에드와는 달리 그는 그래도 눈가가 발갰다.

“이, 이번에는 브랜든도 대답할거에요.”

라르곤이 나섰다.

“지금까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서 그런 거고. 이번엔 대답 할 거지, 응?”

라르곤이 반짝이는 눈으로 브랜든을 바라보았다. 거절하고 싶은 듯 입을 뻐끔거리던 브랜든이 결국 먼저 시선을 돌렸다.

“...질문 먼저 들어보고.”

그걸 보며 헬가가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와, 니네 진짜...”

“질문해라. 내 과거에 대해서는 묻지 말고. 내 현재 외형이나 능력이나 인간관계 그리고 미래 계획에 대해서도 묻지 마라.”

“과거 현재 미래 다 빼면 대체 뭐가 남는데?”

헬가가 어이없어했다.

“저, 누구 저 조건에 안 걸리는 질문 할 수 있는 사람? 있어?”

헬가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시프리에드는 고개를 저었고 온달과 라르곤은 생각에 잠겼다.




저주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Characters: 시프리에드. 브란두흐.
Rating: PG-15
Warnings: 치명상에 해당하는 신체 훼손
Summary: 1차 마도대전 당시, 아직 어린 시프리에드가 마주한 전쟁의 한자락.



시프리에드의 아버지는 과보호 성향이 있었다.

시프리에드도 어느 정도는 아버지는 이해했다. 그가 아무리 자라고 강해진들 고룡인 아버지 보기엔 터무니없이 작고 약했다. 수명도 짧았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연약한 피붙이를 보호하고 싶어 하는 건 생물로서 당연한 태도였다.

그러나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아직 아기 신세를 면할 수 없는 건 온화하고 이해심 많은 시프리에드라 해도 종종 참기 힘들었다. 수명이 짧다곤 해도 인간에 비하면 말도 안 될 정도로 길었다. 몸도 이미 다 자란데다 힘도 세고 마력도 강해서 인간 마을에 몰래 놀러 가면 그 누구도 시프리에드가 아직 어른이 아니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시프리에드는 기회만 닿으면 둥지를 빠져나가 인간들 사이에서 놀았다. 그러면 안 된다는 아버지의 잔소리는 귓등으로 흘렸다. 인간들 마을에 시프리에드가 위험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사람들이 일찍 죽으니 정붙이면 안 된다는 건 비논리적인 말장난에 불과했다. 꼭 평생을 함께 해야만 의미 있는 인연이 되는 건 아니었다. 헤어지는 게 싫어 아무와도 친교 맺지 않는 건 지성체가 아니라 산이나 바다에게나 어울리는 존재방식이었다. 아버지의 주장대로 시프리에드가 어른이 된 다음으로 미뤄봐야 뭔가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아버지야 오래 사시니까 삼사백년 쯤 금방 가겠지만 나한테는 긴 시간이라고. 언제까지나 아이 취급 받으며 나중으로 미룰 순 없어.’

그래서 시프리에드는 사람들을 만나고 친구를 사귀었다. 아버지도 단명종과 결혼했으면서 자기한테만 안 된다고 말하는 건 부당하다 생각하면서.



그리고 ‘침략’이 일어났다.

다른 우주에서 넘어온 사악하고 거대한 존재가 재미삼아 사람들을 죽이고 세상을 파괴했다. 사람들은커녕 드래곤들조차 그들에게 차마 맞서지 못하고 자기 둥지 깊이 숨기 바빴다. 숨고 도망치는 걸로 부족해서 그 폭군들, 옛 지배자들에게 굴복하여 그 앞잡이가 되는 자들마저 있었다.

인간들의 나라가 차례로 멸망하며 시프리에드가 자주 놀러가던 마을도 불타버렸다.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

소식을 전해준 아버지는 곧장 둥지 내외를 폐쇄하는 마법식을 설치했다.

“전부 죽었다고요? 그 사람들이?”

시프리에드는 믿을 수 없었다. 인간이니 당연히 자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듯 갑작스럽게, 모두 살해당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 이제 정말로 위험하니까, 너도 밖으로 나가지 마라. 늦어도 삼십년 정도면 저들의 인과율도 다할테니....”

“제가 직접 가보고 싶어요.”

시프리에드가 말했다.

“그래도 한 둘 쯤은 도망친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요. 찾아보기라도 해야...”

“이렇게 될 줄 몰랐던 것도 아니지 않니.”

고룡은 계속해서 결계를 강화해나갔다.

“우리는 이 전쟁에 끼지 않는다. 삼십년쯤 금방 가고 인간도 멸종하지는 않을 거란다. 그러니 친구는 나중에 사귀려무나.”

그 말에 시프리에드는 아버지야말로 일이 이렇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음을, 그래서 시프리에드가 놀러나가는 걸 막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시프리에드는 화내지도, 아버지에게 따지지도 않았다. 인간 혼혈이라 고룡의 지혜와 세상의 이치를 읽어내는 통찰력은 없지만 시프리에드도 그 나름대로 지혜로웠다. 지금 화낸들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으며 아버지에게 뭔가 변화가 일어날 리도 없었다.

그래서 시프리에드는 조용히 기다렸다. 그리고 아버지가 방심한 사이 가출을 했다.



사람들하고 힘을 합쳐 지배자들과 싸우는 건 생각만큼 보람차지는 않았다.

인간들은 시프리에드의 도움은 받으면서도 계속 그를 경계했다. 강력한 존재가 지배자들의 하수인에게 홀려 적이 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했다. 또는 인간이 아닌 그 역시 지배자의 하수인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드래곤들이 참전을 거부하고 숨어버렸기 때문에 그 원망을 시프리에드에게 돌리는 자들도 있었다.

전시 상황에서 나와 다른 자에게 경계심을 갖는 게 나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이용만 하려는 티가 계속 보이면 마음이 지치는 것도 사실이었다. 시프리에드뿐 아니라 용인종이나 다른 아인종들도 비슷한 고초를 겪는다고 했다. 압도적으로 강한 덕분에 해코지를 당할 걱정은 없는 시프리에드는 상황이 나은 축에 속했다. 제일 힘들고 위험하고 해도 티가 안 나는 일만 시프리에드 몫으로 떨어지기는 하지만. 

‘대체 이건 언제 끝나는 거지.’
아버지는 30년 남짓만 지나면 지배자들이 물러갈 거라고 말했다. 인간들은 멸종하지 않을 테니 걱정할 것 없다고도. 그러나 가까이 와서 보면 30년을 기다리며 버틸 수 있는 인간들은 아무도 없어보였다. 모두들 내일 당장이라도 굶어죽든 다쳐 죽든 미쳐서 죽든 할 것 같았다. 이게 30년이나 이어져도 산 인간이 남아있을 거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시프리에드는 전력을 다해 막고 있지만,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날 시프리에드는 피난민을 마중하는 역할을 맡았다. 인간들의 저지선이 또다시 무너졌고, 범람하는 멸망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안전해 보이는 곳을 찾아 사방에서 몰려왔다.

시프리에드가 참여하고 있는 이 요새는 그런 피난민들을 되도록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안 그런 곳도 많았고, 이제는 여기도 지배자들의 하수인에게 조종당한 민간인들이 요새에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명목으로 피난민을 받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인간들의 패거리질이 어떻게 되든 시프리에드는 알 바 아니지만 피난민들을 폐허에 버려두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혹시 모를 정신지배나 침투를 정화하고 안전하게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시프리에드가 호위를 자청했다.

시프리에드가 만난 피난민 무리들은 모두 지치고 겁에 질려있었다. 망령이 자기들을 쫓아오고 있다며 당장 요새로 들어가 숨지 못하면 죽을 것같이 굴었다. 인간이 자기들의 고통을 과장하는 건 늘 있는 일이었지만 이들을 내리누르는 어둠이 이 시기 치고도 유난히 짙었기 때문에, 시프리에드는 일단 치유의 비를 뿌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다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어린아이였다. 무리 외곽에 외따로 떨어진. 의지할 곳 없는 연약한 아이들이 무리에서 배척받는 건 드문 일이 아니지만 저 아이는 어딘지 이상해보였다.

시프리에드가 집중하여 눈을 감았다 떴다. 일단 주목하기 시작하자 이상한 부분이 우후죽순 눈에 들어왔다. 피난민 중 일부라 하기엔 행색에 너무 멀끔했다. 옷도 화려하고 표정에는 공포심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공중에 떠 있었다. 불길한 기운이 휘몰아치는 함 위에 올라앉아, 사람들과 시프리에드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자가 히죽 웃었다. 시프리에드는 반사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려 자신을 보호했다.

갑작스럽게 사방이 어두워졌다. 본래라면 보이지 않을 흉한 망령들이 시프리에드와 피난민들을 둘러싸고 몰아쳤다.

“으으... 으아아악!!! 망령의 왕이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 했으나 될 리가 없었다. 곧 어둠에 휩싸여 이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시프리에드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어디서 더러운 수작을!”

시프리에드가 치유의 비를 내렸다. 이 정도의 부정함은 씻어낼 자신이 있었다.

“사라져라, 지배자의 하수인이여. 사악한 손길를 거두고 사람들에게서 물러나라!”

망령의 왕은 시프리에드도 들어본 적 있는 괴물이었다. 브란두흐 카디아라크. 자기 나라 사람들 전부를 지배자들에게 들어다 바치고 불로불사를 얻은, 사악하고 어리석은 왕. 말하는 사람이 원래 어디쯤 살던 사람인지에 따라 말이 이리저리 바뀌기도 하지만 들은 말을 종합하자면 대략 그러했다. 

과정이야 어떠했든 나라 단위 사람들의 파멸에 책임이 있는 자라니 가능한 이 자리에서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저자와 지금 전면전을 벌인다면 이 피난민들은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삿된 것을 물리치고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치유의 비를 맞으며 사람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도망쳐요!”

멍하니 굳어있던 사람들이 그 말에 놀라 허둥지둥 도망치기 시작했다. 망령의 군주가 그들을 다시 추격해 해치려 들까봐 시프리에드가 걱정했으나, 그자는 흩어지는 사람들을 쫓는 대신 시프리에드를 주목했다.

“그 기운은 드래곤인가. 아니, 보통 드래곤은 아니군.”

망령의 군주가 입을 열었다.

“인간이 아닌 자가 어째서 인간들을 비호하는 것이냐.”

시프리에드는 잠시 고민했다. 지배자들의 하수인 따위, 말상대할 가치도 없고 혹여 홀리려 들면 위험할 수 있으니 말을 걸어와도 절대 듣지 말고 모조리 무시해야 한다고 듣기는 했다.

하지만 인간들의 전쟁에 끼지 말라고 막던 아버지의 말이 연상되어 입 다물고 있기엔 짜증이 났다.

“내 반은 인간에게서 왔으니 이건 남의 일이 아니야.”

시프리에드가 차갑게 일갈했다.

“그러는 당신은, 인간이었으면서 어째서 동족을 등지고 이계 침략자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거지?”

“반인반룡이라. 아, 그렇군. 고룡의 후예인가.”

브란두흐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시프리에드를 훑어보았다.

“드래곤들은 이 일에 끼지 않기로 하였을 터인데.”

“드래곤들은 그랬지. 나는 아니야.”

이자가 자기에게 흥미를 보이는 게 기분 나쁘긴 하지만 한편으론 다행이기도 했다. 인간들이 요새까지 도망치려면 멀었고 그때까진 어떻게든 시프리에드가 망령의 왕을 잡아둬야 했다.

‘아니, 굳이 잡아두는 데 그칠 필요 없잖아?’

시프리에드가 힐러인 건 치유술을 제일 잘해서이지 다른 걸 못해서가 아니었다. 저런 망령 따위에 자신이 지배될 리 없고 달리 지배해 군대로 삼을 인간이 주위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상황은 충분히 자기가 유리했고 저 작고 가는 목을 치는 건 몹시 쉬워보였다.

“좋아.”

망령으로 가득 차 요동치는 함을 쓰다듬으며 브란두흐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강하고도 순수한 영혼을 내 군세에 넣을 수 있다니 오늘은 운이 좋군.”

“누구 마음대로!”

시프리에드가 브란두흐에게 달려들었다. 망령이 자욱할 정도로 몰려와 시프리에드를 물어뜯으려 했으나 자신의 저항력과 치유술을 믿고 시프리에드가 곧장 브란두흐를 노렸다.

아스클레피온의 뾰족한 끝이 말뚝처럼 브란두흐의 가슴에 박혀들었다. 순식간에 시프리에드의 손톱이 그의 목을 그어 잘라냈다. 잘린 머리가 허무하게 튕겨져 날아갔다.

“역시 지배자들 자체도 아닌 인간 권속 따윈 전혀 무서울 게.”

“으하하하하핫!”

시프리에드가 깜짝 놀라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처음엔 다른 적이 나타난 줄 알았으나 지평선은 여전히 황량했고 사방 눈 닿는 곳엔 이들 뿐이었다.

게다가 이건 브란두흐의 목소리였다.

“내가 아직 인간인줄 알았느냐, 어리고 어리석은 아이야!”

잘려나간 머리가 미친 듯이 웃어젖혔다. 심장이 꿰뚫렸을 몸은 여전히 영혼보관함 위에 그대로 앉아있었고 비명 지르는 망령의 떼가 그 몸과 시프리에드의 주위를 가득 메웠다.

“장식을 잘라내었다고 이긴 줄 알다니, 인간이 아닌 것이 어찌하여 인간과 같은 약점을 갖는단 말이냐.”

‘실수했다. 인간 모습에 속았어!’

실제로 저 존재의 본체인 건 망령이 담긴 함 쪽이었다. 이전에 인간이었다고 해도 지배자의 권속이 된 이상 이 세계의 생물이라 할 수 없는데, 약해보이는 겉모습에 방심하여 그 점을 생각하지 못했다.

너무나 치명적인 실수라 시프리에드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지금이라도, 다시 공격을...’

그러나 망령의 왕은 그가 다시 정신 차리고 일어설 틈을 주지 않았다. 일단 공포와 불안이 마음에 자리 잡자 정신방벽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이렇게 죽은 순 없어, 망령이 되어 죽은 후에도 적에게 부려지다니 그럴 수는...’

“두려워 마라.”

피가 흐르는 잘린 머리가 시프리에드의 눈앞에 나타났다. 목소리만은 다정하게 그것이 속삭였다.

“네 앞에 펼쳐질 영원의 고통으로부터 내가 널 구해주려는 것이다.”

‘뭔 헛소리야?’

아예 관심 갖지 않아야 하는 것 알지만 너무 예상치 못한 개소리라 시프리에드는 대꾸를 하고 말았다.

“지금 나를 영원의 고통에 몰아넣으려는 놈이 뭐라고?”

“나와 있으면 적어도 고독하진 않을 것이다.”

망령의 왕이 시프리에드를 유혹했다.

“너는 인간도 아니고 드래곤도 아니다. 하늘 아래 너와 같은 자가 달리 없으니 너는 숭배 받을지언정 이해받지 못하고 영광은 있어도 친구는 없으리라.”

그렇지 않다고 외치려다 시프리에드가 멈칫했다. 그가 친구로 여겼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고 했다.

“너는 강하고 고결하니 곁에 몰려드는 사람은 많을 것이나, 인간들은 뛰어난 자를 경원시하고 자기와 다른 자를 배척하니 그중 태반이 너를 이용하려는 것뿐이며 그 중 네 곁에 남아줄 이는 없다. 혹여 있다 하여도 고작 몇 십 년의 위안일 뿐, 결국 너는 영원히 고독할 것이다.”

망령의 왕이 피로 젖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불멸자이며 너의 수명을 따라잡을 수 있는 존재이니, 내 손을 잡아라. 네가 홀로 남게 될 영원의 시간동안, 내가 곁에 있어주마.”

시프리에드가 입을 벌렸으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것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헤어진다 해도 만남은 의미가 있었다. 언젠가 죽는다 해서 태어남이 축복이 아닐 리 없었다. 이것은 사악한 옛 지배자의 권속이며 호흡있는 모든 것을 죽이고 파멸시키는 존재이다. 선의도 신의도 없는 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선 안된다. 달콤한 궤변에 넘어갔다간 저자와 똑같은 괴물이 될 뿐이다.

시프리에드가 마력을 폭발시켜 브란두흐를 밀쳐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가 일어나 몸과 정신을 추슬렀다.

망령의 왕이 혀를 찼다.

“끝내 힘든 길로 가고자 하는가. 원한다면.”

그가 재차 공격하려는 듯 완드를 들어올렸다.

콰르릉!

지축이 흔들리는 굉음과 동시에 눈이 멀 정도의 빛이 내리쳤다. 연달아 번쩍이는 벼락의 틈에 서서 시프리에드가 미처 시력을 회복하기도 전에 그의 몸이 휙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버지?”

아버지가 구하러 왔다. 가출했어도 안도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망령의 군주와 싸워 이길 자신은 이미 사라졌으므로.

시프리에드를 받아든 고룡이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잠깐만요, 아버지! 저자 아직 안 죽었어요!”

커다란 용의 눈동자가 시프리에드를 향했다.

“그게 왜?”

“왜라니.... 끝장내실 수 있잖아요. 망령의 왕은 위험한 존재고 저에게도.”

“저것은 언젠가 합당한 끝을 맞을 것이나 그게 지금은 아니다.”

“그럼 저 흉악한 것이 계속 사람들을 죽이고 조종하여 지배자들 보기에 즐거운 광경을 만들도록 놔둬야 한다는 말인가요?”

고룡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말했듯이 우리는 이 전쟁에 나서지 않는다. 네가 세상의 전면에 나서는 것도 인간 친구들을 사귀는 것도 나중에 일어날 일이니 미리 골몰하지 말고 지금은 수련을 더 해두는 것이 좋겠다.”

“.....예.”

가출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지배자도 아닌 그 권속에게 죽을 뻔 했으니 아버지께 반박할 말도 없었다. 수련의 필요성은 시프리에드도 절실하게 깨달은 뒤였다. 자기는 아직 미숙했고 망령의 왕조차 이기지 못해선 지배자들과 싸울 수 없었다.

그리고, 단순히 싸워 이기는 것 이상으로.

-너는 영원히 고독할 것이다.

시프리에드는 눈을 꼭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 말은 정신 지배도 암시도 아니었다. 차라리 그런 것이었다면, 정화하고 잊을 수 있었을 텐데.

-내가 곁에 있어주마.

순전히 말로만 이루어진 저주가 시프리에드의 마음을 얽어매었다.

‘누가 질줄 알고.’

그가 일을 악물었다.

‘그런 말에 굴복하지 않을 거야.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그들이 죽어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강해지겠어. 지금은 아니라도 다음에는 반드시.’

시프리에드가 검붉게 얼룩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시간이 지나면 지배자들이 물러간다 해도 그걸로 끝일 리 없었다.

-너는 숭배 받을지언정 이해받지 못하고 영광은 있어도 친구는 없으리라.

‘아니, 그렇지 않을 거야.’

그때는 이 저주를 끊어내고야 말겠다고, 시프리에드는 굳게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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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망의 2차 마도대전 시기가 오자 자기가 그 망령의 왕과 친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저주는 사라졌지만 브랜든이 영원을 함께해줄 친구로 남아버렸으니 아마도.... 해피엔딩?


이 브랜든은 지배자들이 떠나고 그 영향력에서 벗어난 뒤 당시의 기억은 많이 잃어버립니다.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지만 고룡의 후예와 마주했던 순간 같은 사소한 기억은 흐려져 버려서, 나중에 시프리에드는 두 배로 어처구니없어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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