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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로는 오른쪽 칼럼이 안 보이므로 포스트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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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20 ㅣ- 회색도시&검은방



쾅쾅쾅
밖에서 누가 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그러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팀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권현석 경감은 경찰청 안을 전력 질주라도 한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그, 어, 저 국장님.”
그가 신문을 책상에 던졌다.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수사가 늦어진 이유 - 부패 간부 때문에?>
오랫동안 잠입한 경찰들의 목숨을 갈아넣다 겨우 보스를 체포해 체면을 세운 특수수사팀의 국장이 수사 대상인 선진화파로부터 뇌물을 받은 정황이 포착되었다고 조금 더 작은 활자로 요약되어있었다. 한쪽엔 증거라는 통장 사본의 사진에 하성철 사진까지 실려 있었다.
하성철도 박근태도 얼굴이 하얘져서 기사를 읽었다.
“저.....”
“모함일세!”
하성철이 소리쳤다.
“이런..... 이런 거짓 증거를 어디서 손에 넣었는지 몰라도 이런 식으로.....”
“우린 국장님을 믿습니다.”
권현석이 서둘러 말했다.
“백석이겠죠. 조직폭력배에게 돈을 댄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잡히자 발악하는 겁니다. 저런 거 당연히 모함이죠!”
“맞아.”
박근태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일이 까다로워졌는걸. 먼저 언론에 뿌려버리다니. 수사팀 입장이 곤란해지겠어.”
“그러게. 말은 주워 담지도 못하는데. 이래선 사실이 밝혀져도 국장님의 명예가...”
권현석이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신문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모함 따위, 조사하면 다 드러날 거야.”
하성철이 말했다.
“그래도 우리가 직접 어찌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박근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 밑작업도 없이 이런 대담한 짓을 벌였을 리는 없는데, 힘든 싸움이 될 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자네들은 동요하지 말고 수사를 계속하게.”
하성철이 어깨를 쭉 폈다.
“이건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하지.”
“네.....”
권현석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 내일 회식 하는 건.”
“예정대로 진행하게.”
“하지만.”
“어차피 나는 술도 별로 못 마시니 간다고 분위기 살지는 않겠지.”
“어떻게 국장님 빼놓고 회식을 합니까. 안 하면 안 했지.”
권현석이 말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형사들 사기에 문제 생길 것 아닌가.”
하성철이 주장했다.
“기왕이면 이 이야기도 그들 앞에선 되도록 말하지 않는 게 좋겠네.”
“알겠습니다.”
권현석은 수긍한 기색이 아니었지만 고개는 끄덕였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하성철이 웃어보였다.
“진실은 밝혀지게 되어 있어.”


왜 이럴 때 일수록 집에 마땅히 대접할 만한 게 없는 걸까. 류태현은 올 때 과일이라도 사오지 않은 자신을 탓하며 일단 물을 끓여 커피를 탔다.
그가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주방하고 일체이다시피 한 거실의 소파에 허강민이 앉아있었다.
‘꿈이 아니야.’
류태현이 커피믹스 봉지의 날카로운 가장자리로 손끝을 꽉 눌러보았다. 분명히 꿈은 아니었다.
허강민이 류태현의 집에 와있었다. 그를 죽이거나 밀실에 가둬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살리는 대화를 하기 위해.
그게 다소 미친 소리여도 류태현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떤 황당무계한 이유로든 허강민이 살인은 안 하면 그게 좋은 일이었다.
‘거기에 좀만 더 욕심을 부리자면, 나도 용서해주면 좋겠지만.’
여전히 증오한다고 했다. 그러나 더 괴롭히지는 않겠다고. 그러니 걱정 말고 여승아와 결혼하라고 말했다. 그 말만 믿고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이제 허강민과의 악연이 다 끝났다고, 그러니 더 이상 그와 얽히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하고 좋아하기엔 류태현도 그 정도로 순진한 바보는 아니었다. 미친 이유든 뭐든 명확하고 허강민이 진심으로 받아들일 만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 허강민을 집에까지 데려온 것이다.
그래서 정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면, 허강민이 진심으로 이제는 복수를 그만두고자 한다면 그때는 정말로 마음 놓고 승아랑 결혼할 수 있냐하면, 그건 아닐지도 모르지만.
주전자가 삑 소리를 냈다. 그가 서둘러 커피를 타고 거실로 들고 나갔다.
허강민은 어색하게 비닐봉투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기름 냄새가 솔솔 났다.
“허강민씨 튀김 좋아하세요?”
“응? 아니.”
그가 깜짝 놀라 봉지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런데 뭘 저렇게 많이.”
“한창 먹을 나이 애들이 잔뜩이라 잔뜩 샀는데, 너무 많았나...”
류태현이 뜨악해서 허강민을 쳐다보았다.
“애들이요? 누구요?”
“넌 알 필요 없어.”
그가 휙 류태현을 외면했다.
“응, 그래. 돕겠다는 것도 사실 필요 없어. 나 혼자 할 수 있고 네가 뭔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과거론 어떻게 가실 거에요?”
류태현이 본론부터 말했다. 허강민이 입을 다물었다.
“과거로 가더라도, 백화점에 침입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닐 거에요.”
과거로 어떻게 가는 건지도 더 추궁해보고 싶지만 류태현은 우선 그렇게 말해보았다.
“도울 사람 정말 안 필요해요?”
“내게 필요한 건 마법사야, 평범하기 그지없는 네가 아니라.”
“또 평범... 뭐라고요?”
“마법이라고. 과거로 갈 방법이.”
허강민이 만사 포기한 사람처럼 털어놨다.
“세상에, 인간이 모르는 사악한 괴물들이 준동하는데 그 힘의 일부를 인간이 빌려 쓸 수 있다. 그게 마법이고, 나도 마법사다. 햇병아리... 까지는 아니고 약병아리 수준이다만.”
“약병아리면, 삼계탕 뚝배기에 쏙 들어가는 손바닥만 한 그거요?”
“닭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니고.”
허강민이 류태현을 째려보았다.
“이쯤 되면 이 놈은 미친 게 틀림 없으니까 더 엮이지 말아야겠다 같은 생각 안 드냐?”
“이미 엮였는걸요.”
류태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런.... 미궁을 두 번이나 거치고 평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넌 계속 무난하게 좋은 사람을 연기하고 있잖아.”
“연기 아닙니다.”
류태현이 볼멘소리를 했다.
“다른 사람들과 다 같이 살아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요.”
“전례를 생각하면 충분히 이상하지.”
말하고 허강민이 표정을 찌푸렸다.
“그 얘긴 됐고, 그러니 너랑은 상관 없다는 것만 알면 돼.”
“마법으로 과거로 가서 백화점 사고를 막고, 현재로 돌아와 보면 가족들이 다 살아있고 저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는 건가요?”
“아니, 나만 이 상태.... 지금 기억을 가진 채로 사고 전으로 되감기는 거다. 이건 내 기억 외에는 아예 없었던 일이 될 거야. 아마도. 그러니 그 동안 군대나 입시였던 사람들에게 미안할 일도 전혀 없겠지.”
“그런 게 정말 가능해요?”
“가능해. 미래에서 넘어온 사람을 실제로 만났어.”
당연하게도, 류태현은 허강민이 사기당했을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런 거 어떻게 믿....”
허강민이 몸을 일으켜 류태현에게 손을 뻗었다. 류태현이 흠칫 몸을 움츠렸지만 손끝이 이마에 닿는 건 막지 못했다.


승아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어둡고 차갑고 먼지투성이인 음산한 폐건물 바닥에 피가 번져나갔다. 이미 늦은 걸 알면서도 그는 승아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허강민을 발견했다.
그 손에 칼이 들려있었다.
“당신이 결국 승아를!”
그가 허강민에게 덤볐다. 쓰러트리고 타고 앉아 목을 졸랐다. 저항다운 저항도 제대로 못해보고 허강민은 숨이 끊겼다. 시체를 내려다보며 그는 자기가 한 짓을 깨달았다.


“아아아아아아악!”
류태현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허강민이 한 걸음 물러났다.
“반응이 센데? 뭘 봤기에..”
류태현이 허강민을 와락 끌어안았다.
“.......허?”
“죽지 말아요!”
류태현이 울먹였다.
“제가 잘못했어요, 제 잘못이니까, 제발 아무도 죽지 말아요, 죽이지 말아요.....”
멍하니 있던 허강민이 뒤늦게 마구 몸을 뒤틀었다.
“너, 뭘 봤는지는 알겠는데 끌어안을 대상이 틀렸어!”
류태현을 차 밀어내고 허강민이 뒤로 물러나 숨을 몰아쉬었다.
“그거 그냥 환각이다. 네 무의식에 잠재된 끔찍한 악몽을 불러낸 것 뿐이야. 마법으로. 그러니까 정신 차려.”
말하고 허강민은 ‘마법이니까 정신 차려’는 별로 옳은 표현이 아니지 않았을까 조금 반성했다.
“사실 아니라고. 알겠지만 아무도 안 죽었어.”
이것도 맞지는 않았다. 허강민은 이마를 짚었다.
“그..... 아무도 안 죽게 하려고 이러고 있는 거니까 정신차려.”
“이런게.... 마법이에요?”
류태현이 눈물을 닦으며 일어났다.
“끔찍했는데요?”
“마법의 기원이 끔찍한 괴물이라고 말했는데 뭘 들었냐. 그리고 뭐, 그럼 내가 너한테 여승아랑 꽃밭에서 하하호호 나 잡아봐라 하는 꿈이라도 보여줬어야 했다고 생각해?”
류태현이 어물어물하다 도로 소파에 앉았다.
“승아가 죽었어요.”
그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옆에, 허강민씨가 칼을 들고 서 있었고. 그래서 제가 달려들어서....”
“날 죽인 거냐.”
허강민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류태현을 보았다.
“뭐 됐어. 네 꿈 내용 따위 중요한 게 아니라 마법이 있는 걸 안게 중요하니까.”
허강민이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내가 마법사이기 때문에 마법의 존재를 인정하는 거다, 그런 엄청난 일까지 가능할 줄은 몰랐지만. 최근에 그런 사람들을 만났고, 그래서 그들과 손잡아 과거로 가려는 거야. 가서 사고를 막고, 그 사람들의 원래 목적도 이루고....”
“그건 뭔데요?”
“그들도.... 사람 여럿 죽고 뭐 그런 비극이 있었어. 십 년 후에. 내가 마법을 배워 더 과거로 가는 대신 그 쪽 문제도 해결해주기로 했어. 그럼 모두가 살아서.....”
허강민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정은영과 임선호 마저도. 임선호야 지금도 살아있긴 하지만.... 그래도 전역하고 파혼 정도는 시켜야겠어. 내 동생 아니라도 다른 사람이 죽을 지도 모르잖아?”
“네, 그건 그렇죠.”
류태현이 수긍했다.
“정은영 사장은... 빈 건물이 무너져도 손해는 막대할거고 그것만으로도 꽤 몰락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죽이지는 말아달라고? 너란 녀석은.”
허강민이 비웃었다.
“어차피 죽이지는 못해... 그, 미래에서 온 협력자중 한 명이 아주 인명을 소중히 해서.”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 죽이지 않는 선에서 몰락시킬 거다. 정은영도 윤지애도.”
류태현은 그 누군지 모르는 사람에게 감사했다.
하지만 슬프기도 했다. 자기도 인명을 소중히 하는데, 허강민은 그가 하는 말은 모두 거짓이고 위선이라 단정 짓고 더욱 화내고 증오할 뿐이었다.
살인은 그만두라고, 자기가 설득할 수 있었으면 좋았는데. 지금 뒤늦게나마 중단한다면 다행이지만.


검은 남자 57 ㅣ- 회색도시&검은방


허강민은 금방 의식을 찾았다.
경찰의 각종 조치에 군말없이 따랐고 검진과 치료에도 저항하지 않았다. 먼저 뭘 묻거나 요구하지도 않았다.
권현석과 하무열이 병실에 나타났을 때도 눈살만 조금 찌푸렸을 뿐 조용히 있었다. 용건이 있으면 어디 온 사람이 말해보라는 듯.
“류태현 순경이 깨어나지 않아.”
권현석 경감이 그 이야기부터 했다.
“어떻게 된 건지 알겠어?”
허강민은 권현석을 가만히 훑어보았다.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하무열과 류태현의 안가에 마법 부적을 놓은 건 분명 경감의 조치일 텐데 경감 자신은 마법사로는 보이지 않았다. 마법사라면 지금 류태현이 어떤 상태일지 굳이 와서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검은 남자의 존재를 인지하고, 그 자리에 불러들여 원래라면 감당할 수 없었을 적을 무찔렀다.
당장 그 자리에서 집어 삼켜지는 건 면했다. 그러기 위해 류태현은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을 알았고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보았고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을 들었다.
지금은 대화해선 안 되는 상대와 대화하며 가서는 안 되는 곳으로 가려는 것이다.
마법사들조차도 피하고 미루기 위해 노력하는 운명, 완전히 미쳐버려 다른 세계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운명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는 마법사가 되기 위한 통과 의례를 너무 잘 치른 것이다.
“그를 살리고 싶은 거지요?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래.”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권현석이 표정을 찌푸렸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자신의 재능을 자각하고 마법의 본질을 접하고 활용하는 일을 지나치게 서둘러서 한꺼번에 해냈습니다.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긴 했습니다만 덕분에 지금은 브레이크 고장난 자동차처럼 돌진하는 중이지요. 절벽에 처박히기 전에 세우려면 다른 차가 옆에서 받아서라도 갓길로 밀어내야 합니다.”
“다른 차?”
권현석이 한층 더 표정을 찌푸렸다.
“꼭 저일 필요는 없습니다. 머리 쓸 줄 알고 마법 쓰는 데 좀 익숙해진 마법사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경감님 곁에도 한 명 있는 것 아닙니까?”
권현석은 입을 다물었다. 긍정적인 기색이 아닌 걸 보고 허강민은 권현석 편의 마법사가 대체 누구기에 저러나 잠시 의문을 품어보았다.
배준혁 경사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박근태를 따라 실버 트와일라잇에 가서 마법사가 되었고 지금은 시내에 있지도 않으니까.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배 형사는 딱히 수사팀에 해로운 행동은 하지 않았다. 마법 부적을 주고 사용법을 가르쳐주는 정도는 먼 지방에서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버 트와일라잇이 권현석 편에서 마법을 써도 좋다고 허락해줄 리는 없었다.
“이쪽 마법사는 지금 부탁할 상황이 아니야.”
권현석이 딱딱하게 말했다.
“류태현을 구하는 게 내키지 않겠지만 협조해주면 이쪽에서도 그만큼 성의를 보일 테니까. 기왕 체포되었고 백선교의 도움도 바랄 수 없는 처지인데 경찰에 협조적이고 깊이 반성하는 태도를 보인다고 조서에 기록되는 편이 좋잖아?”
뜸을 들이며 허강민의 기색을 살피던 권현석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내가 그렇게 시큰둥해 보이나. 그 얼굴을 거울 대신 살피며 허강민은 멍하니 속으로 중얼거렸다.
회유책에는 확실히 아무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생각할 의욕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류태현이 이대로 영영 사라져 버린다라. 그것도 자신은 이렇게 멀쩡히 따로 갇힌 상태에서.
“절 류태현 곁에 데려다 주실 수 있습니까?”
권현석이 눈을 번쩍 떴다.
허강민은 침대 가에 연결된 수갑을 가리켰다.
“여기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가서 류태현을 직접 보고 자세한 상태를 확인해야 뭘 해도 할 수 있습니다.”
“좋아.”
흉악 범죄자를 그 피해자 곁에 데려다놓는 일 정도는 이미 각오하고 온 모양이었다. 권현석은 바로 수갑 열쇠를 꺼냈다.
“달리 필요한 것은?”
“위스키나 보드카 같은 독주가 있으면 좋습니다. 그게 안 되면 뭐든 단번엔 기절시킬 수 있는 것. 그 외엔 있어도 별 소용 없습니다. 저도 지금 마법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태여서요.”
권현석은 불안한 표정을 하면서도 허강민을 침대에서 풀어주었다. 허강민은 순순히 침대에서 내려와 권현석을 따라갔다.
류태현은 혼자 격리되어 있었다. 병실 앞을 지키고 있던 경찰들은 권현석이 한 마디 하자 물러났다.
문을 열자 음습한 한기가 느껴졌다. 허강민뿐 아니라 권현석과 하무열도 주춤할 정도로. 분명 평범한 공간이어야 할 병실 안이 공기가 희박해지고 대신 다른 무언가가 들어찬 것 같았다.
허강민은 천천히 류태현 곁으로 다가갔다.
몸은 조용히 누워있는 것 같아도 정신은 끊임없이 울부짖고 있었다. 허강민이 손을 뻗어 이마를 짚어도 느끼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자신은 여전히 마법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주문과 정교한 기술을 쓰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것이지 이미 마법에 적합하도록 열린 정신을 되돌리는 것은 아니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류태현의 피부의 감촉, 숨소리, 체취,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허공을 향해 열린 정신은 어느 정도의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류태현의 정신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허강민에게도 익숙한 밀실 안 같은 곳을 헤매며 몇 번이고 출구를 찾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니알라토텝이 기다리는 밤하늘을.
허강민은 잠시 망설이다 그의 마음에 말을 걸었다. 그 미로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류태현.’
그의 목소리에 순경 제복을 입은 등이 움찔 떨렸다. 도망가거나 하는 대신 천천히 돌아서서 허강민을 바라보았다.
겁먹은 표정도 잠시뿐이었다. 류태현은 곧 얼굴이 밝게 풀어져서 허강민을 향해 한 걸음 씩 다가왔다.
‘다행이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허강민은 아득해졌다. 류태현이 현실 지각력을 잃은 나머지 허강민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게 분명했다.
예상보다도 상태가 훨씬 더 나쁘다. 조용히 접근해서 현실로 불러들이면 될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택도 없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동안 류태현이 허강민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는 손을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허강민 씨, 무사했군요.’
‘뭐?’
허강민이 멍하니 되물었다. 지금 류태현이 자신을 몰라보고 이러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류태현이 허강민의 손을 꼭 잡았다.
‘강민 씨만이라도 제가 지켜줄게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할게요.’
‘류태현?’
허강민은 류태현의 눈앞에 손을 흔들어보았다.
‘정신차려. 난 너한테 지켜달라고 한 적 없다.’
‘알아요.’
류태현은 방긋 웃고 허강민을 꼭 끌어안았다. 허강민은 당황한 나머지 그냥 끌려가서 안겨버렸다.
‘미워해도 돼요. 계속 증오해도 돼요. 허강민 씨가 계속 살아있기만 하면 돼요.’
‘이봐, 권현석 경감! 이놈이 이 지경으로 미쳤으면 그렇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류태현은 여전히 허강민이 제 애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끌어안고 쓰다듬고 있었다. 허강민은 들어온 이유도 잊고 몸을 빼려고 애썼다.
‘류태현, 정신차려. 나 허강민이다. 네 원수라고. 네가 왜 날 지켜야 하는데?’
‘그야, 죄도 갚고 싶고, 그리고......’
류태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허강민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온 것을 갑자기 질문받아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냥, 허강민 씨를 지키고 싶어서라고 하면 이상한가요?’
‘응. 아주 이상해.’
허강민은 혼란에 빠졌다. 지금 자신은 류태현의 무의식에 직접 침투해 있으니 지금 류태현이 하는 말은 위선이나 말재주 같은 게 아니라 가장 날것에 가까운 그의 본심이었다. 류태현이 진심으로 허강민을 지켜주려 하고 있었다.
이것이 허강민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진실이었다. 류태현은 여승아를 구하기 위해 그의 동생을 외면한 사람이지만 또한 그와 그의 동생을 구하기 위해 손을 내민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네요. 이유가 뭘까요.’
허강민이 혼란에 빠져 있는 동안 류태현도 점차 당황하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까지 허강민 씨가 소중할까요? 죄책감만으로 이렇게 되는 게 정상일까요?’
‘당연히 비정상이지, 멍청아.’
허강민이 몸에서 힘을 빼고 류태현의 등에 팔을 둘러 다독였다. 어쨌든 이놈을 달래서 깨워야 했다.
‘정신 차리고 이만 현실로 돌아가. 너 기다리느라 다들 목이 빠질 지경이라고.’
‘현실......’
류태현이 허강민을 안은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다들 저 기다리고 있어요? 정말로?’
‘그래. 하무열 형사도 권현석 경감도 여승아도 다.’
대충 떠오르는 대로 여승아의 이름까지 입에 올렸을 뿐인데 류태현이 흠칫 움츠러들었다.
‘승아가 저 보고 싶어해요?’
당연히 그럴 거라는 말이 대뜸 나오지 않았다.
지금은 자신도 류태현과 마찬가지로 본심을 감추기 힘들었다.
‘......어쨌든 널 살리려고 그렇게까지 했잖아. 보고싶겠지.’
‘허강민 씨는.’
류태현은 허강민의 말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이제 승아를 증오할 건가요? 저한테 했던 것처럼 승아에게도 할 건가요?’
‘그게 지금 중요해?’
허강민은 한 걸음 물러나려 했다.
그 질문의 답은 허강민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복수는 전제부터 어긋나 있었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미 너무 많은 것이 달라졌다.
텅 빈 집만큼이나 공허한 마음에 ‘복수’란 한 낱말이 흘러들어왔을 때와 지금은 같을 수 없었다. 여승아를 향한 분노를 모으려 해도 모아지지 않았다. 공허는 갈수록 커지기만 했고 자신에게 있었는 줄도 몰랐던 인간성은 그 공허에 깨끗이 삼켜졌다.
장혜진 말대로 자신에게도 남들만큼 감정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젠 전부 옛날 이야기. 여기 남아있는 건 그냥 바싹 마른 뼈에 불과하다.
‘강민 씨!’
류태현이 다시 힘주어 부둥켜안았다.
‘가지 말아요, 제가 잘못했어요. 저를 벌하세요. 제발......다른 사람 보지 마세요.’
‘뭐?’
너무 뜻밖의 소리에 류태현보다 먼저 현실을 잊을 뻔 했던 정신이 제자리에 돌아왔다.
류태현의 손이 자신을 그저 붙들고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강민 씨.’
류태현이 고개를 들고 허강민을 바라보았다. 그 눈이 심상치 않게 풀어져 있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어떻게 하면 강민 씨를 지켜줄 수 있을까요?’
이제 알 수 있었다. 임선호를 도발해 거꾸로 죽여버렸을 때 류태현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넘어갔는지. 그 이전부터 호구 소리 들어가면서도 왜 자신을 감싸기만 했는지. 네 번 지옥에 이끌려 들어오면서도 왜 미워하는 기색이 없었는지.
지금 허강민을 끌어안고 더듬는 손은 마치 애인 대하는 듯한 손길이 아니었다. 애인을 대하는 손길이었다.
허강민은 당황했다. 류태현의 정신이 허공으로 날아가버리지 않고 여기 있는 것은 자신이 여기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들어온 목적을 달성하고 있기는 한 건데, 이런 식으로 달성해야 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멍청히 아무 것도 못 하고 서 있는 걸 허락이라고 멋대로 생각해버렸는지 류태현의 손이 점점 대담하게 움직였다. 셔츠 단추를 풀고 그 아래 드러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숨결이 피부를 간지럽혀 몸서리가 쳐졌다.
‘류태현.’
‘예?’
여전히 허강민을 품에 안은 채 류태현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뺨이 발갛게 물든 채 눈망울을 빛내고 있으니 예기치 못한 색기가 흘렀다.
‘강민 씨?’
류태현의 목소리가 불안감으로 떨렸다. 허강민을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허강민은 망설였다. 지금 류태현의 의식세계 속에서 그를 밀어내는 건 어려울 뿐 아니라 위험한 일이었다. 자칫 류태현이 용서를 빈답시고 폭주해 자신의 의식을 눌러 죽일 수도 있고 그러기 전에 현실의 괴로움을 떠나 검은 남자를 따라가 버릴 수도 있었다.
자신은 마법을 쓰지 못하게 하는 금제를 스스로 깰 재주는 없었다. 여기서 류태현이 그렇게 사라져버리면 백선교 상대로 마법 쓸 사람이 사라진다.
허강민은 입술을 깨물고 다시 류태현을 다독였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제대로 된 마법사가 못 되기만 해봐라. 그땐 정말로......’
류태현의 키스를 받아들이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떤 협박을 입에 담아야 할지도 실은 잘 알 수 없었다.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해봐야 자신은 한 순간도 그를 용서한 적 없었다. 언제나 류태현에게만은 최대한 가혹했다.
그 결과가 이거라니.
허강민이 적극적으로 태세를 바꾸자 류태현도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소원하던 장난감을 받은 아이처럼 활짝 웃더니 허강민을 그 자리에 눕히고 셔츠 단추를 풀었다. 바지 벨트를 더듬어 잡았다.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 되어서 허강민도 류태현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19 ㅣ- 회색도시&검은방

류태현은 불법 유턴 다발 지역에서 파트너와 딱지를 끊고 있었다.
50미터만 더 가면 유턴해도 되는데 그 몇 초를 못 참고 차를 돌려놓고 경찰이 잡으면 왜 잡냐고 화를 낸다. 힘들진 않아도 진 빠지는 일이었다.
대낮의 도로는 그런대로 한산했다. 류태현은 점심은 뭘 먹을까 멍하니 생각하고 있었다.
무전기가 울렸다.
-저, 류태현 순경?
“네.”
-지금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허강민을 목격했다는 신고가 들어와서 말이야.
류태현은 귀를 의심했다.
-근데 좀.... 신뢰성이 의심되어서 말이지,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가서 보고 확인해주면 좋겠거든. 괜히 닮았다고 생사람 잡을 것 같아서.
류태현은 침착하려고 노력하면서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했다.
“어떤 신고였는데 그럽니까?”
-학교 앞 분식집에서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애들 둘 하고 떡볶이를 먹고 있다던데.
흉악하기 짝이 없는 사이코 연쇄 살인범이 애들과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류태현 생각에도 이건 착각일 가능성이 너무 높았다. 그렇지만 신고가 들어왔는데 그냥 무시하고 입 씻을 수도 없으니.
“네, 제가 가서 확인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학교 방향으로 한 걸음 떼려는데 웬 차가 유턴을 했다.
“어...”
“잠깐 정도 혼자 할 수 있으니 갔다와. 점심 시간도 얼마 안 남았고.”
차를 신호해 세우며 파트너가 말했다.
“빨리 다녀와.”
“그래, 다녀올게.”

그렇게 혼자 문제의 학교 앞 분식집으로 달려가고 있었는데.
“허, 허강민씨?”
만약에 진짜일 가능성도 생각해야 한다고, 자신을 들키지 않고 밖에서 슬쩍 보고 정말로 허강민이 있으면 즉시 지원을 요청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결심하고 무전도 즉각 누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골목길을 마주 걸어오던 허강민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어리둥절해보였다. 류태현을 보고 있는데도 증오나 살의가 없었다. 이 사람은 허강민이 아니라고, 세상엔 정말로 이렇게나 똑같이 닮은 사람이 있다고 류태현은 믿어버릴뻔 했다.
허강민이 표정을 굳혔다.
“너, 실물 류태현이냐.”
“네.. 가짜 류태현도 있나요.”
얼빠진 소리를 해버렸다는 자각은 조금 후에 들었다.
그러나 허강민도 얼빠져있긴 마찬가지였다. 뒤늦게 표정을 험하게 해봤자, 기름 냄새 풍기는 비닐 봉지를 손에 들고 멍하니 서서 그러면 별로 무서운 분위기는 잡히지 않았다.
‘연쇄 살인범이 직접 사러 올 정도로 여기 튀김이 맛있나?’
“너.....”
방금 한 뻘생각을 허강민이 지적하려는 줄 알고 류태현이 흠칫 놀랐다.
“계속, 위선 떨며 잘 살고 있는 것 같군.”
매도당하자 차라리 안도감이 들었다. 이건 허강민이 맞고, 그저 튀김 사가려다 류태현을 만나 당황해서 페이스가 무너진 것 뿐이고, 그러니 앞으로는 정상적인 일이 일어날 거라는 기대감.
‘아니 근데 이 상황에서의 정상은 좋은 게 아니잖아.’
“사고가 없었다면....”
너무 작은 목소리라 류태현은 못들을 뻔 했다.
“네?”
“네가 이기적인 위선자여도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는 않겠지. 그냥 평범하고 좀 친절한 경찰이 되어서, 평범한 남들이 다 그러듯이 자기 가족 제일로 챙기며 사는 평범한 보통 사람이 될 뿐.”
‘저기 한 문장에 평범이 세 번이나 들어가는 건 좀 너무한데요....’
류태현이 머릿속으로 쓸데없는 태클을 걸고 있는 동안 허강민이 혼자 뭐라 중얼거렸다.
“네?”
“널 증오해.”
류태현은 한 방 맞은 듯 상체를 뒤로 조금 젖혔다.
“하지만.... 그래. 극복해야겠지. 더 이상은. 아무도 죽지 않도록. 내가 증오하던 인간들까지도 불행해지지 않게......”
“저... 허강민씨?”
방금 말로 한 대 맞은 것도 잊고 류태현이 허강민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괜찮으세요?”
체포하러 왔는데, 허강민이 맞으면 체포하려고 열심히 생각하며 왔는데도 어째서인지 그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예상대로 허강민은 비웃었다.
“날 걱정하는 거냐? 나 널 증오하고 죽도록 괴롭혔고 앞으로도 그럴지도 모르는데?”
“그럴‘지도 모르는’ 건가요?”
류태현은 충격을 받았다.
“아까 말도 그렇고.... 심경에 변화가 있었나요? 뭐..... 종교에라도 귀의하셨어요?”
허강민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
“가.”
허강민이 말했다.
“기서 뭐든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그, 여승아랑 결혼이라도 하던가. 그거 좋겠다.”
“네?”
“그래. 가서 결혼해 살아. 이제 나 무서워 할 필요 없어.”
너무나 혼란스럽고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아서 류태현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는 경찰이니 허강민을 체포해야 한다는 생각마저도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알기나 하자는 내면의 목소리에 힘을 잃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무슨 일 있었어요?”
“있었지. 아니 있을 예정이지. 아니 있었을 예정... 뭐라 하는 거야.”
허강민이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있을지 하는데요?”
더 혼란에 빠져서 류태현이 다시 물었다.
“너하곤 상관 없어.”
“무지 있을 것 같은데요!”
“응, 그렇긴 하지.”
“대체.....”
류태현은 힘이 쭉 빠졌다. 허강민이 광기에 찬 연쇄 살인범이긴 해도 이런 식으로 미친 사람은 아니었는데.
“너 내가 미친 건 아닐까 생각하고 있지.”
“지금은 그런 의심을 하는 게 매우 당연하게 생각되는데요.”
류태현이 불퉁하게 쏘아붙였다.
“그래, 기왕 미친놈 취급 받는 거 알려주지.”
허강민이 웃었다.
“난 과거로 돌아가서 그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할 거야.”
류태현이 입을 딱 벌렸다. 미쳤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심각하게.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 순간 무전기가 울렸다. 류태현은 깜짝 놀라 허둥지둥 하다 무전기를 떨어뜨릴뻔 했다.
-류태현 순경?
“네, 네!”
-확인은 했어? 지금 어디야?
류태현은 말문이 막혔다. 허강민인걸 확인했다. 그러니 지원을 불러서 체포해야 했다. 정신이 온전치 않아보여도 그는 위험한 살인마였다. 그러니.
류태현이 그러고 있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 허강민이 몸을 돌렸다. 자기 할 말은 이미 다 끝났다는 듯이.
“자, 잠깐만요! 기다려요!”
지금 그를 혼자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체포하고 싶지도 않았다. 일단 결심하자 거짓말은 쉽게 나왔다.
“예, 확인했고 비슷하게 생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몸을 못 가누는 주취자를 발견해서요.”
-...낮인데?
“네. 그래서 더, 다른 무슨 일이 있는지 주거상황 같은 것도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사람 집까지 데려다주고 오겠습니다.”
-어디 사는 누군데?
류태현도 여기에는 변명거리가 바닥나 버렸다. 그가 입을 벌리고 황망한 표정으로 허강민을 쳐다보았다. 마치 도움이라도 구하는 것 같은 얼굴을 보고 허강민이 피식 비웃더니 낯선 이름과 주소를 불렀다. 류태현은 더듬더듬 그대로 보고했다.
-...그래, 혼자 괜찮겠어?
“예, 괜찮습니다. 곧 복귀하겠습니다.”
무전을 끊고 류태현이 허강민을 바라보았다.
“왜 그랬어?”
허강민이 먼저 물었다.
“지원요청해서 날 체포해야 하는 것 아니었어?”
“아까 그건 누구고 왜 외우고 있어요?”
류태현이 되물었다.
“위장용 신분. 혹 불심검문 같은 거에라도 걸릴 것에 대비해서 인적사항이 비슷한 사람 걸 외워뒀지. 그래서, 왜 그랬어?”
“뭔진 몰라도, 허강민씨가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류태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 거라면 저도 알고, 할 수 있는 한 돕고 싶습니다.”
“돕는다고?”
“예.”
허강민이 류태현을 노려보았다. 류태현은 기죽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래, 너한테도 네 여자친구한테도 좋은 이야기이긴 하지. 죄를 지을 필요도 내게 쫓길 필요도 아예 없어지는 거고.”
허강민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 아무도.... 애초 그 사고를.”
허강민이 류태현을 쳐다보았다.
“그 애를 막는 게 아니라, 그 전날. 그러니까 밤에, 아무도 없을 때 무너지게 하면 어떨까? 그럼 그 몇 백 명이, 그냥 다 아침에 TV보며 아니 세상에 저런 쯧쯧만 하고 자기네들이 어떤 꼴이 될뻔했는지는 전혀 모르고..... 그 정도면 괜찮을까?”
“밤에도 경비원이라든가 있지 않을까요?”
류태현은 자기도 모르게 장단을 맞춰주었다.
“아, 그래. 그럼 먼저 안에 있는 사람을 끌어내서 기절이라도 시킨 다음에.”
“저, 허강민씨.”
류태현이 팔을 뻗어 그의 손목을 잡았다.
“길거리보다는 어디 좀 조용한데서 얘기하면 어때요?”


하성철이 팀장실에 들어가자 박근태는 벌떡 일어나려다 가슴을 짚었다.
“무리하지 말게.”
하성철이 걱정스러운 기색을 했다.
“너무 빨리 퇴원한 거 아닌가? 일이 많다곤 해도.”
“괜찮습니다. 움직일 만 합니다.”
박근태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도 갈비뼈에 금이 갔지 않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예.”
박근태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증거물 분석은 얼마나 진척되고 있나.”
하성철이 물었다.
“잠입요원들 중 업무 복귀가 가능한 사람들을 임시로 투입해서 서두르고 있습니다. 스폰서에 대한 것뿐 아니라 김성식이 마약 거래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려던 정황까지 나와서 기소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그런 큰 희생을 치르고 얻은 결과이니 관련자는 모두 확실하게 처벌해야지.”
박근태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장산병원에서 황도진과 김성식을 체포하는 쾌거를 올리긴 했지만 김성식이 발각된 요원들을 대량으로 숙청하는 건 막지 못했다. 그놈은 당연히 사형을 당하겠지만 또 그래서 선진화파의 배후에 대한 증언을 확보하기 어려운 것도 고민거리였다. 정보를 많이 토하면 나쁜 건 다 김성식에게 미뤄버리고 형량을 줄여 주겠다고 황도진하고 교섭하자니 이놈이 보스인데다 그래도 오래 데리고 있던 동생인데 그렇게 배신할 수는 없다고 그러고.
작전은 성공했지만 희생이 너무 컸다. 빨리 가시적인 성과를 과시하지 않으면 그 배후에 의해 역풍을 맞을 우려도 있었다.
“아, 그리고 자네가 올린 그.... 수사팀 이미지 제고 기획안 말인데.”
“네.”
“유상일 경위를 미디어와 접촉시키는 건 안된다고 생각하네.”
“어째서입니까?”
박근태가 말했다.
“이미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고 있고, 수사팀 입장에서 사건을 알리는 건 자칫 수사팀에 대한 여론이 나빠질 경우에 대비해서....”
“경찰은 영웅이 되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닐세.”
하성철이 말을 끊었다.
“공식적인 기자회견이라면 나나 자네가 나가면 되겠지. 단지 그가.... 젊고 잘생겼다는 이유로, 잠입요원이던 사람의 얼굴과 신상을 공개해서 수사팀의 방패로 써먹는 건 부끄러운 일일뿐더러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네. 경위는 아직 젊으니 유명세를 즐길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나서서 부추기는 건 안 되지 않나.”
“...예, 알겠습니다.”
박근태가 수긍했다. 하성철이 그를 달랬다.
“우리 쪽에서 그, 언론 플레이를 해야 할 필요성은 나도 알고 있네. 팀의 형사들을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그럴 수 있는 방법을 같이 고민해보세나.”
“네.”
박근태는 고분고분하게 대답했지만 하성철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가 유상일 경위의 언론 노출을 꺼린 건 꼭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그런 언론 플레이로, 마땅히 해야 할 수사를 했을 경찰을 영웅으로 포장해서 결국 이익을 보는 건 누구란 말인가.
유상일은 박근태를 형님으로 따른다. 미래의 ‘박근태 의원’은 경찰 영웅 출신이라고 했다.
태성이가 했다던 말을 믿건 믿지 않건, 박근태를 그 ‘미래’와 근접하게 할 가능성은 모두 없애고 싶었다.
‘내가 이상한 말에 홀려서 일을 자의적으로 처리하고 있는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 유상일 경위가 힘써준 덕에 본부를 지키고 있던 조직원들도 거의 대부분을 체포할 수 있었지만 그러고도 아직 붙잡히지 않은 사람은 있었다. 보복의 가능성이 있으니 수사관을 보호하는 건 옳은 조치라고 하성철은 다시 한 번 결심했다.


검은 남자 56 ㅣ- 회색도시&검은방

류태현 역시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승아를 구한 줄로만 알았다. 승아를 위해 죄를 짓고 그 대가로 영영 승아와 허강민을 짊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반대였다. 승아가 자신을 구했다. 승아가 자신을 위해 죄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무고한 피해자를 연기하며 말을 잃어갔다.
그것도 이제 끝이다.
저승사자가 다가온다.
검은 물 속에서. 희부연 천장에서.
올라온다. 내려온다.
저 흔들다리를 건너. 우리 등 뒤에서.
다가온다
다가온다
다가온다
허강민이 조용히 일어났다.
“류태현?”
그의 말투가 이상했다. 은행에서 제정신이 아닌 채 들었던 것과 비슷했다.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여전히 칼을 들고 있는데도 류태현을 겨누지는 않은 채였다.
“하무열 형사.”
허강민이 류태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하무열을 불렀다. 그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겁먹은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왔던 길로 피해요. 어서.”
허강민 자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강성중이 다시 괴물을 보냈습니다. 저는 마법을 쓸 수 없는데 이놈이            하고 있습니다!”
말의 한 중간이 지우개로 지운 듯 들리지 않았다. 무열 선배가 답하는 말투로 보면 어지간히 낭패스런 일인 모양이었다.
궁금해 할 때가 아니었다. 물어볼 때가 아니었다.
다가오는 발소리
점점 가까워진다
안승범 씨가 쇠망치를 무기 대신 들고 사람들을 재촉했다. 다들 일어나 그를 따랐다.
무열 선배가 무어라고 외쳤다. 조심하라고 하는 것 같았다. 승아도 선배와 함께 피하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이 공간엔 자신뿐이다.
둥근 공간이 움직이며 검은 물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귓가를 긁는 공기의 떨림이 점차 거슬리는 울음소리로 변해갔다.
“류태현.”
허강민이 칼을 들고 다가왔다. 그 칼을 류태현의 손에 쥐어주었다.
“네놈한테 끔찍한 일을 벌이기가 싫어지다니 정말 나도 어떻게 된 모양이지.”
허강민이 류태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잘 들어. 너는 지금 니 알ㄹ 토 의 눈에 드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류태현으로 남고 싶으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대로 제 물을 골라. 네 혼 영 같은 건 나중으로 미뤄. 하지만 니알 토ㅌ이 널 맛보고 싶어하기에 지금 살 수 있는 거다. 곧 나타날 괴물을 잡 아먹을 유일한 방법이다.”
그가 류태현의 어깨를 지탱하고 함께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부글거리는 거품 소리, 끓어오르는 울음소리를 향해.
“강성중이 다시 괴물을 보냈다. 아까 봤던 건 그냥 시궁쥐, 아니 날벌레로도 보이지 않을 만한 것을. 내가 마법을 쓸 수 있었어도 지금처럼 칼 한 자루 가지고는 절대 무리였을 텐데 네놈이 때마침 사 괴 법마 물이 될 작정이라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볼 여지가 있지. 검은 남자가 이 자리에 나타날 테니까.”
류태현은 자신을 붙든 허강민의 손을 쥐어보았다.
허강민이 아까부터 하는 말을 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서운 것이 다가오는데 어째서 이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피하는 대신 여기 남아 자신을 지탱하려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백화점에서 아이를 죽였는데. 가족들까지 파멸시켰는데.
바짝 마른 입을 움직이려 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한 나절은 다물고 있었던 것처럼.
그럴 리가 없어. 아까부터 계속 울부짖고 있었는데. 이렇게 그 소리가 귓가에 쟁쟁한데.
눈앞에 기괴한 거품이 끓어올랐다. 거품 하나하나에 자신과 허강민이 비쳤다. 거품 하나하나가 형언할 수 없는 소리로 울부짖고 있었다.
“이런 걸 어떻게 해볼 여지가 있다고?”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 거품이 거대한 파도처럼 두 사람을 향해 솟아올랐다.
“그래. 지금이라면 가능하다.”
등 뒤에서 허강민이 나직이 말했다. 그가 뒤에서 자신을 감싸안아 지탱하고 한 걸음 나섰다. 검고 기괴하게 끓어오르는 거품의 파도를 향해.
“내가 도와준다니 믿기 힘들지? 허나 사실이다. 내 일생 셀 수 없는 거짓으로 치장해왔으나 말하는 순간만큼은 언제나 진실이었다. 그러니 이 순간만큼은 내가 도울 거라 믿어도 된다.”
류태현은 거품을 노려보았다. 거품에 비친 모습을. 허강민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저 검은 것은 허강민이 아니었다.
“사람들을 지키고 싶지?”
귓가에 검은 것이 허강민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렇다면 증명해 봐라. 내 지켜볼 테니.”
손에 든 칼이 길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을 들어 거품을 겨누었다. 거대한 파도의 어디를 찔러야 할지 허강민의 모습을 한 검은 남자가 가리켜 주었다.
“걱정 마. 아프지 않을 거야.”
지독하게 아팠던 예방주사 직전 들었던 목소리에 맞춰 검을 찔러넣었다. 검이 무수한 실처럼 갈라져 개개의 거품 속으로 파고들어 터뜨렸다.
검은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허강민의 모습을 한 채 뒤에서 류태현을 끌어안았다. 시작은 연인의 포옹처럼 다정했으나 끝은 철부지가 맘에 든 인형을 다루듯 난폭했다.
“허강민 씨!”
류태현이 견디지 못하고 외쳤다.
“어디 있어요? 니 아 ㄹ ㅌ텝이 허강민 씨는 어디로 데려갔어요? 아자토스의 공허까지라도 따라갈 겁니다!”


허강민이 수리한 PDA는 민지은이 맡았다. 근처까지 도착한 경찰이 해온 연락이 그 PDA로 전해져왔다.
덜덜 떨면서도 상황을 최대한 자세히 전달했다. 그러는 동안 강성중으로부터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다른 습격이 이어지지도 않았다.
“이대로 기다리면 되는 거야?”
여차하면 휘두르려고 들고 있던 쇠망치를 슬쩍 내리며 안승범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그리고는 류태현과 허강민이 남아있는 방 쪽으로 불안한 시선을 돌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하무열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류태현 녀석에게 마법사의 재능이 있었을 줄이야. 그놈만은 보이는 게 전부이길 바랐는데. 겉과 속이 같기를 바랐는데.”
“마법사가 되면 어떻게 되는 건데?”
안승범이 다그쳤다.
“안 될 방법은 없는 거야?”
“없어. 이제 류태현이 마법사가 되어서 그것을 무찌르든지, 아니면 우리 모두 죽든지 둘 중 하나야. 그 자리에 남아있어봐야 훌륭한 걸림돌이니까 도망친 거고.”
“틀려요.”
새파랗게 질린 채 주저앉은 장혜진이 중얼거렸다.
“무찌르지 못하면 지금 온다는 그 경찰들까지 다 죽어요. 강성중 그 작자는 대책은 생각하고 그걸 소환한 건지. 서울이 싹 쓸려나가기라도 바라는 건지......”
“그게 대체 뭐라는 괴물인가?”
하성철 국장이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본 적이 있나?”
“아뇨.”
장혜진이 그런 끔찍한 소리 말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소문만 들었어요. 간부들이 전에도 소환한 적 있는 괴물. 그냥 보는 것만으로 미쳐버린다고요. 깊은 바다 밑바닥에서 거품처럼 끓어오른다는데, 보고 미쳐버린 사람들이 한 말을 종합하면 그렇대요. 사람이 무찌르는 건 고사하고 그 앞에 잠시 서 있을 수도 없다는데 강민 씨 그 바보는......”
덜덜 떠는 장혜진의 손을 민지은이 꼭 잡아주었다. 장혜진은 그 손을 힘주어 맞잡고 천천히 심호흡했다.
쿵 소리와 함께 건물이 흔들렸다.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이 한 덩어리로 모였다. 귀를 막았다.
끔찍한 울부짖음이 귀를 두들겼다. 시멘트 바닥이 종잇장처럼 진동했다.
이 세상에서 만들어낼 수 없는 소리가 복도를 타고 울려오는 가운데 알아들을 수 있는 단 한 줄기의 비명이 섞였다. 류태현의 비명이었다.
여승아가 벌떡 일어났다. 하무열이 붙들어 자리에 다시 앉혔다.
“안 돼. 간다고 해서 도움이 안 돼. 류태현이 버텨내야 하는 일이야.”
하무열은 마치 자신을 향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점점 그 비명이 커져갔다. 거기 뒤덮여 울부짖음이 들리지 않게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다들 뒤늦게야 깨달았다.
어느새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고도 한참 만에야 서로 눈을 움직여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귀가 멍멍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조용했던 것만 같았다.
하무열이 살짝 여승아의 팔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는 본인이 먼저 일어났다.
하성철도 비틀거리며 일어나려 애쓰는 건 손짓해서 말리고, 혼자 그 공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승범이 따라오려는 것도 막았다.
기묘한 의무감으로 혼자 그곳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결과를 마주했다.
허강민과 류태현이 나란히 쓰러져 있었다.
서로의 손을 잡고 팔베개를 하고. 원수라기보다 다정한 형제, 아니 애인 같은 모습이었다.
시선을 주위로 돌렸다. 방 한가운데를 깊게 판 수렁과 흔들다리는 아까 봤을 때와 똑같아 보였다.
그 아래. 흔들다리 아래에서 수렁을 채운 채 조용히 흐르던 검은 물이 사라지고 이끼 낀 시멘트 바닥만 남아있었다. 시커멓게 썩은 이끼는 바짝 말라있었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는 강성중이 자취를 감춘 뒤였다.
임선호의 시신을 수습하고 안승범이 자의로 탈주한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일단 전원이 경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하성철 국장이 쓰러지기 직전 한 지시에 따라 권현석 팀장이 그들의 사건을 담당하게 되었다.
허강민도 일단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피해자들과는 별도로 구금되어 회복하는 대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었다.
경찰 관계자 중 가장 먼저 퇴원한 건 하무열 형사였다. 퇴원 수속이 끝나자마자 병원 밖으로 나가는 대신 류태현의 병실로 달려갔다.
“하무열 형사.”
마침 권현석 경감도 거기 있었다. 형사답지 않게 동글동글한 얼굴이 허옇게 질려 있었다.
운좋게 때마침 여기 있었던 게 아니라는 것을 하무열도 곧 눈치챌 수 있었다.
“우리 얘기 좀 해. 류태현 순경이 어떻게 된 거야?”
질문하면서 권현석은 하무열을 끌고 복도 구석으로 갔다.
“외상은 없는데 잠들어서 깨어나질 않아. 현장에서 발견된 그 상태 그대로 정지해 있다고. 게다가 의료진 말로는, 가만히 누워서도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는 듯 표정만 자꾸 일그러지는데 외부 자극 검사엔 무반응이라는 거야.”
하무열은 하성철 국장과 정은창을 생각했다. 둘 다 어렴풋이나마 마법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정은창은 처음엔 그럴싸하게 모르는 척했지만 나중에 허강민과 류태현만 남기고 물러나야 한다는 말에 제꺽 따랐다.
상관과 신뢰하던 정보원이 둘 다 마법을 안다. 권현석 본인이 제공한 안가에 마법 부적이 있었다. 경감도 마법의 존재 정도는 안다고 봐야 했다.
“경감님도 이게 그냥 부상 문제가 아니라는 건 아시는 거죠?”
확인차 해본 말에 권현석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야. 류태현 순경에게 그래서 무슨 일이 난 건지, 어떻게 깨워야 할지는 모르겠어. 하무열 형사는 어때? 혹시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어?”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하무열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제가 뭔가 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전 마법사도 아니고 류태현의 상태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게 가능한 사람은 제가 아는 한 한 명뿐입니다.”
“누군데?”
“허강민이요.”
권현석이 입을 딱 벌렸다.
“그럼 류순경을 구하는 건 불가능하잖아!”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하무열은 자신이 발견했을 때의 두 사람을 생각했다.
“아무리 상대가 류태현이라고 해도, 허강민도 그가 이대로 괴물들의 간식거리가 되는 건 바라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까지 대라고 하시면 좀 곤란합니다만.”
권현석의 표정을 보고 하무열이 헛기침했다.
“농담을 하는 게 아닙니다. 이번 밀실에서 두 사람 그 정도로 이상했거든요.”
하무열은 영리한 사람이고 말주변도 좋았다. 당연히 어지간히 이해하기 힘들고 표현하기 힘든 일이 일어나도 다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설명할 수 없는 일에 부딪쳤다. 막상 이렇게 되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데 서투른 자신을 발견하고 말았다.
“아무튼 허강민에게 말이라도 해보세요. 그럼 제가 무슨 말 하는 건지 아시게 될 테니.”
권현석은 하무열을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로 노려보면서도 일단 허강민이 구금된 병실로 향했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18 ㅣ- 회색도시&검은방


‘어째서 이번에도 공을 세운 영웅인거지.’
배준혁은 겉보기만큼 속도 평온하지는 않았다.
사건의 양상이 완전히 달라진 지금에도 유상일은 공을 세웠고 매스컴을 탔다. 아직은 검거 당시 뉴스 자료 화면에 잡힌 게 유난히 키가 크고 잘생겨서 눈에 띄는 정도지만 이번에도 홍보용으로 인터뷰라던가 시킨다면.
‘역시 박근태를 미리 죽이는 게 좋을까?’
지금이라면 선진화파 잔당의 보복으로 여겨질 거고 모든 관심이 그 사건에 쏠릴 테니 유상일은 안전하게 잊힐 것이다. 장지연이 죽기 전에도 자신은 정상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장희준과 손잡기 전이라고 해서 박근태가 멀쩡한 인간이었을 거라고 배준혁은 믿지 않았다.
유상일 관련으로 정리해야 하는 건 또 있었다. 그가 무사히 매스컴의 관심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수사팀 후배들이 그를 따르게 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특히 오미정의 경우는.
‘그날의 동료들에게 이런 꼴은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자신이 죽기 직전, 그는 그렇게 말했다. 오미정도 그날 있었건만, 돕고 싶어했건만 상일 선배에게 미정 형사는 고작 그 정도에 불과했다. 수사팀이 몰락하지 않더라도 그대로 둬서 오미정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었다.
수사팀의 붕괴를 막고 관련자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게 목표였다. 적어도 그 정도로 불행하지는 않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오미정은 수사팀의 일원이었다. 십 년 후 오미정이 들었으면 코웃음치며 매도했겠지만 배준혁은 진심이었다.
‘아직은 선배가 유부남이라고만 알고 있을테니, 사별했단 사실이 오미정 귀에 들어가지 않게 막아야겠다. 가족을 두고 잠입에 자원한 것 말고도 오래 깡패 생활을 했으니 여자들 보기에 불쾌할 버릇 몇 가지 정도는 들였겠지. 그런 걸 지적하며 깎아내리는 거야. 아, 그리고 야근에 지원 못하게 하고.’
몇 년 간이나 얼굴도 못 본, 그렇게나 그리워했다던 딸이 텅 빈 집에 혼자 있는데 놔두고 경찰다운 일에 신나서 밤늦게까지 현장을 다니다니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혔다. 이번이라고 보복 계획이 없으리란 법이 없었다. 실제로 일이 많으니 야근을 전혀 안 할 수는 없겠지만 하루에 두 번은 집에 전화하게 만들고 술자리에 참석할라치면 걷어차서라도 집에 보내고 말겠다고 새삼 결심했다.
유상일은 괴롭힘 당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후배에게 좀 괴롭힘 당하면서 딸과 무탈하게 사는 것이 눈 먼 숭배를 받다가 딸을 잃고 추락하는 것 보다 본인에게도 천배쯤 더 좋을 것이다. 배준혁은 온 힘을 다해 유상일을 집요하게 괴롭히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하태성네 학교는 학생들의 출입을 엄하게 통제하는지 점심시간인데도 학교앞 떡볶이집엔 사람이 없었다.
“연쇄살인범이라니...”
하태성이 허강민을 노려보았다.
“그래, 연쇄살인범이 뭐 어때서, 인질범이자 살인미수범씨?”
허강민이 비웃었다. 하태성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요.”
권혜연이 말했다.
“우선 하태성씨 보호조치요.”
“아, 그래. 안경 벗어줘.”
허강민이 손을 내밀었다. 하태성이 그 손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우린 미래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잖아요.”
남자들끼리 둬선 진행이 안 되겠다고 생각해 권혜연이 나서서 설명했다.
“그게, 음,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말하자면 에너지잖아요? 그래서 그냥 뒀다간 다른 마법사들이 우리를 감지해서 찾아낼 수 있대요. 별로 좋은 의도로 그러는 게 아닌 건 명백하고요.”
“저 마법사는요?”
하태성이 물었다.
“연쇄살인범은 어떤 좋은 의도로 무엇을 하고 있는데요?”
“너희들을 보호하고 있지. 아니 아직 넌 아니지, 나머지 세 사람을.”
허강민이 답했다.
“세 명이요? 권순경하고.... 양시백씨와 설마 그 흥신소장입니까?”
“잘 아시네요.”
권혜연이 놀랐다.
“그, 쭉 붙어 다녔지 않습니까, 세 사람. 목적도 같았고.”
“그땐 그래보였죠.”
권혜연이 한숨을 쉬었다.
“무슨 뜻입니까?”
“행동이 일치했던 것 뿐이지 우리는 사실 서로 다른 목표를 쫓고 있었다고요. 각설하고, 우리 셋은 현재 서로 만나거나 소재를 파악하고 있고 이 연쇄살인범이 해준 보호조치를 하고 있어요. 이 마법사만 특별히 믿는 이유는, 그가 우릴 먼저 찾아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 절반, 그의 사정이 이해가 가고 무해해 보이는 거 절반 해서 그렇고요.”
“무해한 사정이라고요?”
하태성이 허강민을 보았다.
“나에 대해, 아니 내가 일으킨 사건에 대해 들어본 적 있겠지? 내가 그런 범행을 저지른 이유도.”
하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오년 전, 사고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려면 이 마법을 사용한 마법사를 찾아내 방법을 배워야 하고 그러려면 너희들의 협력을 얻는 게 좋겠지.”
“이게 마법입니까.”
말하고 뒤늦게 하태성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했다.
“맙소사, 마치 마법 같다는 생각은 해봤지만 정말로.”
“시간여행이라니 저도 안 믿겨요.”
권혜연이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와 있는 이상 안 믿을 수도 없잖아요. 또.... 우리도, 죽었던 가족이 살아있는 걸 봤잖아요. 계속 그렇게.... 죽지 않게 하고 싶잖아요. 허강민씨도 똑같은 입장이라고요. 그러니.”
“그럼 지금은요? 그러니까, 이 상황은요?”
“사라지는 거지.”
허강민이 말했다.
“시간이 다시 한 번 되감겨서, 너희들이 두고 온 십년 후처럼 되겠지.”
“그럼 제가 허건오씨를 위해 한 일은.”
“뭘 했는데?”
하태성은 울컥했다가 진정했다. 허강민은 모르는 걸 묻고 있는 것 뿐이었다. 비꼬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십년 뒤 저의 동료였던 사람입니다. 박근태에게 살해당하지요.”
허강민이 박근태는 누구냐고 반문하지 않는 걸 확인하고 하태성이 말을 일었다.
“그걸 막기 위해, 그가 살인범이 되어 박근태 똘마니가 되는 걸 막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현재 그를 학대하고 있는 양부와 떼어놨습니다.”
“고등학생이 하기엔 좀 거창한 일이군.”
하태성이 조금 얼굴을 붉혔다.
“아버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성철 치안감. 여기 권혜연 순경의 아버지 권현석 경감의 상관이고, 덕분에 너까지 찾을 수 있었지.”
허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부라고? 몇 년 전에 재혼했는데? 5년 이내라면 애초 양부의 존재를 없앨 수도 있지.”
하태성의 표정을 보고 그가 덧붙였다.
“죽인다는 게 아니고, 재혼을 막는다던가, 친부가 죽은 거면 안 죽게한다던가 그렇게 원인을 차단하겠다고.”
“아.”
“양시백이 부탁했다. 사람 죽이지 말라고. 게다가.... 내 가족 살리려고 하는 일인데, 남 죽여가면 하면 좀..... 동티가 날 것 같.”
허강민이 불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과학적이지만, 기분이.”
하태성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마법사라면서요? 과학이요?”
허강민이 돌린 고개를 그대로 벽에 박았다.
“자, 당면 문제로 돌아옵시다.”
권혜연이 한 손으로는 허강민의 덜미를 잡아 벽에서 떼어내고 다른 한 손은 펴서 하태성에게 내밀었다.
“안경 주세요.”
“왜요?”
“보호조치 하려고요. 저도 도수 없는 안경까지 일부러 쓰고 있다고요.”
“그거 도수 없는 거였습니까?”
“네. 원래 안 쓰는데 머리를 보호.... 머릿속에 든 정보를 차단하려면 머리에 가깝고 적어도 반은 감싼 형태여야 한다고 해서.”
하태성이 자기 안경테에 손을 가져갔다. 매우 망설이다 그가 안경은 벗어 권혜연에게 건넸다. 혜연이 허강민에게 주자 그가 준비해 둔 주문 띠를 안경테에 감았다. 잠시 고민하다 하태성이 입을 열었다.
“저... 다시 십 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난 십 년 씩이나 돌아갈 생각은 없어. 사고 전이기만 하면 돼.”
“네. 몇 년이든 여기서 더 과거로 돌아가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같이 가게 되나요? 아니면 이... ‘기억’ 역시, 사라집니까?”
하태성이 물었다. 권혜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생각해본 적이 없네...”
“그거에 대해선 확답을 못하겠는데.”
허강민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처음에는 당연히 나만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실 이 마법도 관련자들을 줄줄이 끌고 온 모양새지. 마법사 본인 뿐만이 아니라.”
“누가 마법사인데요?”
하태성이 물었다.
“나는 배준혁을 의심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이상해요.”
권혜연이 말했다.
“소장님이 마법사였다면 적어도 진작에 유상일이나 설희를 찾아냈어야 맞다고요. 마법으로 사람 찾을 수 있는 거, 맞죠?”
허강민이 침묵으로 긍정했다.
“하지만 그럼 누구지요?”
하태성이 물었다.
“저는 아닙니다. 양시백씨도 이런.... 능력을 갖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들고요.”
“저도 아니에요.”
권혜연이 말했다.
“즉 그 마법사는 혼자서 어디 잘 숨어있거나, 여기, 으, 이 시대에 없.... 미래의 기억이 없다는 뜻이겠죠.”
권혜연이 혼란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허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혼자 잘 숨어있다 쪽이겠지.... 그런 거라면 나 같은 게 너희를 찾아내게 두지 말고 스스로 보호하려고 나섰어야 한다고 보지만.”
“그 마법사가 저희에게 적대적인 입장이라면요?”
“너라면 적대적인 상대에게 이런 힘과 기회를 주겠어?”
하태성이 침묵했다.
“대체 누가, 왜 이런 일을 한 걸까요...”
권혜연도 팔짱을 끼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셋이 나란히 팔짱을 끼고 이맛살을 찌푸린 채 애꿎은 떡볶이만 노려보는 가운데 예령이 울렸다. 하태성이 벌떡 일어났다.
“저 들어가봐야 합니다!”
“전 오후 수업 쨌는데.”
권혜연이 말하자 하태성이 말했다.
“이게 사라질지도 모른다 해서 마구.. 살 수는 없습니다. 들어가볼테니 나중에.”
“잠깐만.”
허강민이 그의 말을 막고 상자를 내밀었다.
“휴대폰 없어서 답답하지? 나 권순경 배소장 번호 넣어뒀어.”
“이런 걸 그냥 받을.”
“악당 돈을 쓰게 돼서 악당 수하라도 된 것 같아 기분 나쁘신가?”
허강민이 비웃었다. 울컥해서 하태성이 상자를 낚아챘다.
“나중에 연락하죠.”
하태성이 뛰어나갔다. 허강민이 무심한 척 떡볶이를 뒤적였다. 권혜연이 그를 째렸다.
“협조 얻어야 하는 상대인거 맞죠?”
“물론이지. 왜, 내가 수상해?”
“괴롭히고 있잖아요. 하경위님도 별로 박근태가 좋아서 그의 수하가 된 것은 아닐텐데.”
“다 큰 어른이, 심지어 경찰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안 지면 곤란해.”
“책임을 안 진다는 말이 아니라... 으이구, 그냥 놀리지를 말라고요.”
허강민을 핀잔주고 권혜연이 일어났다.
“저도 가볼게요. 괜히 어슬렁대다가 누가 알아봐서 신고당하지 말고 허강민씨도 들어가보세요.”
권혜연도 가고 허강민은 남은 떡볶이를 조금 쳐다보다 일어났다. 가려다 양시백 생각이 나서 튀김을 좀 샀다.
‘마법사는 못 찾고 애나 보고 있는 것 같아.’
속은 성인들이지만. 겉모습에 호도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도 역시 열대여섯 살 먹은 애들 모습을 하고 있으니 조금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막내 녀석이 살아있었다면 저 또래였을 테니까.
그 애는 맞지 못한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된 사람들이 괴로움에 허덕이며 기만에 발목 잡히다 이상한 우연으로 자기 손에 떨어졌다. 질투해야 할까 연민해야 할까 그는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권혜연은 아버지가 죽지 않기를, 하태성은 친구들이 수렁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배준혁도 적어도 현재는 수사팀 사람들이 유아연이 무사하길 바라고 양시백은 그 누구도 죽지도 불행해지지도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신은 그걸 모두 이루어야한다.
양시백의 바람은 많이 다운그레이드 해야겠지만. ‘적어도 죽지는 않았다’ 라든가 ‘죽지 못해 살지는 않는다’ 정도로.
‘뭐라 발버둥을 친들 내가 사람을 죽이는 자에서 사람을 살리는 자로 바뀌어야 하는 건 변함이 없군.....’
이걸 하무열이, 심지어 류태현이 알면 어떤 얼굴을 할까.
“허, 허강민씨?”
허강민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기가 생각하던 모양이 꽤나 실감나게 눈앞에 서있는 걸 보았다.
‘나 이렇게 상상력이 그래픽으로 풍부했던가?’



검은 남자 55 ㅣ- 회색도시&검은방


-검은방 4의 중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넓었다.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너비도 넓고 천장도 높았다.
그리고 구덩이도 깊었다.
방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완전히 바닥이 꺼져 있었다. 아래엔 새카만 물이 흐르는데 어둡고 깊어서인지 물이 원래 먹물처럼 검은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 구덩이 위를 가로지르는 것이 한 가닥의 흔들다리였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날 만큼 가늘고 바람도 없는데 삐그덕거리는. 밀실 초반에 하무열과 민지은, 장혜진 등이 건넜던 다리는 이것에 비하면 시멘트 다리였다.
허강민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흐린 백열등이 흔들리며 깜박이고 있었다.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모르는 구조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거창하고 단순할 줄은 몰랐다. 그런 만큼 계략이나 요령이 통할 구석 없는 함정이었다.
지금의 자기 몸 상태로는 절대 통과할 수 없는.
허강민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류태현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허, 허강민 씨?”
허강민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보는 것만으로 흔들리는 저 다리를 안 떨어지고 건널 자신 있는 사람들만 건너가. 난 아니니까 여기 남겠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류태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여기 남겠다니, 밀실 진행을 포기하겠다는 거예요?”
허강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또 한 사람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허강민이 돌아보고 소스라쳤다.
“나도 여기 남는 수밖에 없군.”
하성철 국장이 차분해 보이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저런 곳을 건널 자신은 없네. 운좋게 다리가 떨리지 않는다고 해도......”
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내 흔들었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
“발작하지 않을 리는 없어. 모두를 동요시킬 꼴을 보여주느니 여기 있겠네.”
허강민이 남겠다고 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사람들을 내리눌렀다.
류태현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제까지 이런 일은 없었다. 아무리 위험한 일이 일어나도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 버텨냈다. 한 사람도 버리고 가거나 한 적은 없었다.
하무열 형사를 돌아보았으나 하무열도 어두운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만에야 류태현의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들어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건너편에서 뭔가 조작하면 보다 안전한 다른 다리나 비밀 통로 같은 게 열릴지도 모르지.”
류태현은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건너가서 보다 넓고 안정적인 다리를 놓는 게 이 구조에선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비밀 통로 같은 게 없다면? 건너가지 못하고 남은 사람들을 다른 함정이나 괴물이 덮친다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맞잡은 여승아의 손에도 축축하게 땀이 배었다.
다시 허강민 쪽을 보았다. 허강민은 창백한 얼굴로 이쪽을 똑바로 쏘아보고 있었다.
아니, 허강민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류태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허강민의 시선이 닿은 곳은 류태현의 바로 뒤쪽에 앉아있는 하성철 국장이었다.
“.......전 정말로 여기서 죽을 작정을 하고 주저앉은 겁니다.”
허강민이 이를 바드득 갈며 중얼거렸다.
“그러지 못하게 한 빚은 반드시 받아내겠습니다.”
그리고는 장혜진을 돌아보았다.
“PDA 이리 내.”
장혜진은 굳은 얼굴로 PDA를 내밀었다. 그걸 받아들고 허강민은 정은창을 바라보았다.
“너는 리시버 있지? 어서 내놔.”
정은창은 홀린 듯한 표정을 하면서도 귓속에서 리시버를 빼어 허강민에게 넘겨주었다.
“마지막으로, 여승아.”
허강민의 차가운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칼 이리 내.”
정적이 경악으로 바뀌어 실내를 울렸다. 이미 핏기가 빠져나가 있던 여승아가 비틀거리지도 못하고 허강민을 바라보았다.
“임선호가 나한테 휘두른 칼은 갖고 들어온 게 아니야. 강성중이 방마다 숨겨둔 거였지. 서로 의심하고 물고 뜯도록. 임선호는 그 칼을 열쇠가 밀랍 속에 박혀 있던 방에서 찾았어. 그 방에 숨겨둔 칼이 실은 두 자루였다는 이야기다.”
허강민이 몸을 일으키자 류태현이 여승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허강민이 손을 내밀었다.
“지금 칼부림을 내자는 게 아니야. 드라이버 대용이 필요해.”
“드라이버?”
류태현이 멍하니 되물었다.
허강민은 더 설명하는 대신 다시 여승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서 내놔. 시간 끌면 위험만 더해진단 말이다.”
여승아가 머뭇거리며 칼을 꺼내놓았다. 그리고는 류태현을 외면하고 섰다.
류태현이 경악한 눈을 하고 꼼짝도 못하는 동안 허강민이 칼끝으로 리시버의 깨알 같은 나사를 풀어냈다. 그리고는 PDA 역시 똑같이 분해했다.
하무열이 갖고 있던 PDA가 시끄럽게 울렸다. 허강민이 리시버에서 나온 부품들을 분해한 장혜진의 PDA에 끼워넣고 리셋하는 걸 지켜보며 하무열이 전화를 받았다.
-아주 당당하게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PDA 속 강성중의 목소리는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PDA 가지고 장난치면 어떻게 된다고 했지?
“글쎄, 이걸 부수거나 버리면 이 장소가 날아간다는 말은 들은 기억이 나는데, 수리하면 안 된다는 말은 들은 기억이 없는걸?”
하무열은 평정을 가장한 채 한껏 상대를 놀리기로 했다. 예정대로 되지 않자 바로 동요하다니 이 인간의 수준을 알 만했다. 허강민이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지금 자신도 정면으로 도발하는 수밖에 없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여기를 날려버릴 수도 없을 만큼.
“그나저나 정은창에게 리시버가 있었다는 건 그가 이번 밀실의 범인 역이었다는 말인가? 이거 놀라운 반전이군. 한 명도 해치지 않는 범인이라니 백선교의 새로운 컨셉인가? 너무 참신해서 좋은 평은 못 하겠군. 시대를 앞서가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하무열이 열심히 떠드는 동안 허강민이 조립한 PDA가 다시 켜졌다. 허강민이 몇 차례 더 조작하더니 그걸 류태현에게 내밀었다.
“경찰 불러.”
“예?”
“이 리시버는 방해 전파를 피해서 설정된 주파수를 사용해. 그걸 조금 더 조정해서 경찰 무전기와 통하게 만들었어. 그러니 통화 버튼 누르고 경찰에 연락해라. 여기 주소는 불러줄 테니.”
류태현은 멍한 얼굴로 시키는 대로 했다. 정말로 경찰 무전기의 잡음이 터져나왔다.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 경찰의 목소리가 꿈만 같았다. 허강민이 불러주는 대로 주소까지 전달하면서 이 미친 건물도 의외로 시 외곽 정도지 어디 먼 산골짜기가 아니라는 사실까지 확인했다.
즉 경찰이 곧 올 수 있었다. 류태현은 꿈을 꾸는 기분으로 허강민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허강민은 류태현이 중얼거리거나 말거나 굳은 얼굴로 칼을 움켜쥐고 하무열을 노려볼 뿐이었다. 아니, 하무열이 통화중인 PDA 너머의 강성중을.
-기어이 밀실을 도중에 박살내겠다면.
강성중의 목소리가 음산해졌다.
-이쪽도 제대로 해야겠군. 그딴 짓을 그렇게 당당히 저지른 것을 후회하게 될 거다. 지금 품었을 희망은 곧 절망으로 바뀔 것이다!
“댁 목소리를 들어보면.”
하무열의 목소리는 여전히 느긋하게 빈정대는 투였다.
“아무리 해도 15세가 아니라 51세 같은데 어째서 말의 내용은 15세, 아니 그 미만인 걸까?”
PDA 너머에서 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잠시 후에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보자고.
“나이는 51세 맞는 건가?”
하무열은 강성중이 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하게 지금 뇌혈관을 끊어놓을 작정인 것 같았다. 그런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강성중은 하무열이 또 뭔가 말하기 전에 연락을 끊어버렸다.
방 안이 한순간 조용해지자 사람들이 서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어난 일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허강민은 칼을 여전히 꽉 움켜쥐고 꼼짝도 않은 채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거 아냐?”
안승범이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할 수 없었지.”
허강민이 나직이 답했다.
“나는 여기서 정말로 포기할 작정이었다. 그랬으면 저길 건너간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 수 있었을 테지만, 이젠 아니야. 여기서 우리 모두 살든지, 모두 죽든지 둘 중 하나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허강민이 메마른 목소리로 설명했다. 설명이 아니라 이야말로 저주를 위해 읊조리는 주문 같았다.
방 안은 고요했다. 함정이 새로 작동하는 기색도, 누가 습격해오는 기색도 없었다.
하지만 다들 알고 있었다. 허강민이 빈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여기서 모든 것이 끝난다. 여기서 내려놓지 못하면 억겁을 지고 가리라.
“.......허강민 씨.”
정적을 깬 목소리에 류태현이 흠칫 놀랐다.
이때까지도 그에게서 거리를 둔 채 벽만 보고 서 있던 여승아의 목소리였다.
“승아야?”
류태현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여승아는 창백한 얼굴로 비틀거리면서 허강민에게 다가갔다.
“당신을, 만나고 싶었어요.”
몇 년 만에 다시 만들어지는 목소리는 딱딱하고 어색하게 떨렸다. 그래도 망설임없이 흘러나왔다.
“여승아 양.”
하무열이 말리려는 듯 여승아에게 손을 뻗었다. 여승아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걸로 끝이 아니죠? 당신은 결국 태현이를 죽일 작정이죠?”
허강민은 눈살을 찌푸렸다.
“빌어도 소용없다. 어떻게 말문이 트였든 네 지극정성 따위 내겐 아무 의미도 없어. 류태현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원망하고 싶으면 네 애인을 원망해라.”
여승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당신은 틀렸어요. 완전히 잘못 알고 있어. 당신 동생을 해친 건 나예요.”
허강민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런 급조한 거짓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사람 여기 없어. 그런다고 네가 류태현을 살릴 길도 없어!”
“아뇨, 그날 정말로 무슨 일이 났는지 아는 사람은 저뿐이에요.”
여승아가 심호흡을 했다.
“처음 굉음이 들리고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태현이가 먼저 쓰러져 기절했어요. 날 감싸다가. 그래서 태현이를 부축해 빠져나가려고 하다가 그애를 만났어요.”
류태현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가셨다.
분명 처음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일어난다고 깨달았을 때, 반사적으로 승아를 감싸고 머리에 충격을 느꼈다. 눈을 떴을 때 두 사람이 자신에게 살려달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과 허강민과 모두가 아는 일이 일어났다.
“그애가 매달려오는데, 태현이를 부축하는 것만도 한계였어요. 태현이도, 내 몸도 겨우 지탱하고 있는데 아이가 매달리는 순간 그대로 무너질 것 같아서......뿌리쳤어요. 내가, 박다희 씨가 했던 것처럼!”
허강민의 눈동자가 비로소 흔들렸다. 류태현의 경악한 얼굴, 하무열의 침통한 얼굴로 여승아가 즉석에서 지어내는 말이 아니라고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건물이 덮쳐와서.......힘껏 밀치지 않았다면 태현이도 함께 깔렸을 거예요. 하지만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태현이는 무사히 밀어냈고 나와 아이만 깔렸어요. 그리고 당신이 아는 그 상황이 된 거예요.”
여승아의 눈이 풀렸다. 이미 정신이 그 시기로 반쯤 돌아가 있는 것 같았다.
류태현 역시 그때를 보고 있었다. 아프다고, 살려달라고 울고 있던 승아. 곁에서 역시 애원하던 아이. 허겁지겁 승아를 끌어내고 보기보다 무사해서 안도한 것도 잠시, 승아가 빠져나오면서 생긴 빈틈으로 잔해가 무너져내렸다. 아이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손톱이 뭉개지도록 흙을 파내고 시멘트를 긁었다.
도저히 맨손으로는 파낼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를 꺼내야 했다.
나가서 119에 맡기거나 할 수 없었다. 자신이 꺼내야 했다. 자신이 승아를 먼저 구하기 위해 아이를 외면했으므로.
그래서 둘이 함께 아이를 꺼내려 노력했다. 류태현은 그렇게 기억했다.
승아의 기억은 달랐다.
승아는 말렸다. 맨손으로는 못할 일이라고. 차라리 빨리 나가 도움을 요청하자고.
결국 도구를 찾아 그 자리를 떴다. 그동안 승아가 아이를 지키며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아니었다. 아이는 승아를 알아보고 원망했다. 승아는 아이의 코와 입을 막았다. 원망하는 말을 못하도록. 류태현이 듣지 못하도록.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을 때 아이는 실신해 있었다. 류태현은 그걸 보고 두 사람의 힘만으론 부족하니 나가서 구조요청을 하는 수밖에 없겠다고 했다.
아이가 죽었다. 의료사고가 언론의 관심을 끌면서 아이를 버리고 온 이기적인 커플은 그만큼 관심에서 벗어났다. 이대로 서로에게 기대서 버티다보면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얼굴에 검은 손자국이 남은 아이가 한 다리로 걸어와 초대장을 내밀 때까지........
“정신 차리게!”
어깨가 마구 흔들렸다. 깨어난 곳은 낯선 밀실이었다. 승아와 성질 나빠보이는 중년 남자가 자신을 흔들고 있었다. 중년의 여성과 안경 낀 청년 등 다른 초대받았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신 차리라니까!”
철썩 소리와 함께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밀실 안에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그 밀실에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 이후 네 번째 밀실이었다.
역시 참가자로 굴러떨어진 허강민이 보였다. 그가 뺨에 손을 댄 채 하성철 국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정신 차리라니 무리한 말인 거 아네.”
하성철 국장이 허강민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하지만 적어도 여기서 주저앉아 있다가 강성중의 뜻대로 되고 싶지는 않을 거잖나? 살아 나가기로 하지 않았나? 한 사람이라도 살리겠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언제’리고 말하고 싶은 듯 허강민이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다가 하성철 곁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장혜진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운이 좋으면 그럴 수도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허강민이 웅얼거리고는 류태현을 바라보았다. 아니, 여승아를 바라보았다. 둘 중 누구를 보아야 할지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17 ㅣ- 회색도시&검은방


권혜연은 초조하게 고등학교 교문을 바라보았다.
학교가 의외로 가깝길래 점심시간 동안 잠깐 다녀올 수 있을까 했는데 고등학교는 중학교보다 점심시간이 늦었다. 왜 유독 고등학교 들어가고 나서 도시락을 3교시마다 까먹었는지 뒤늦게 깨달은 기분이었다.
‘어쩔 수 없지. 오후 수업은 자체 휴강... 아니 조퇴지 참.’
점심시간에 맞춰 나오도록 전화는 했다. 목소리가 좀 애티 났을지도 모르지만 경찰다운 말투와 어조로 말했으니 전화 너머에서야 상대가 열여섯인지 스물여섯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하태성이라면 알아차릴 것이다.
누군가 교문 쪽으로 빠르게 달려나왔다. 옷은 교복이라도 여전히 특징적인 외모라 권혜연은 금방 자기 생각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교문 밖으로 나온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른 학생들 눈에 띄지 않게 건물 모퉁이에 숨어있던 혜연이 몸을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아.”
그가 다가와 마주보고 섰다.
“오랜만이에요, 하태성 경위님.”
“오랜만입니다, 권혜연 순경님.”
말하고 하태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저만이 아니었던 거군요.”
“네? 다른 사람들도 왔을 거라고 생각할 만한 일이 있었나요?”
“아뇨, 제가 이런 기회를.... 그러니까, 저 같은 사람 보다 더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권순경님이라던가.”
“양시백씨라던가?”
“네.”
권혜연이 그를 찬찬히 살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태성이 먼저 물었다.
“양시백씨도 넘어왔어요. 그런데.... 상황이 좀 안좋은가 봐요. 범죄 집단에 잡혀있다고 했어요.”
“네? 대체 어떤 상황이길래.”
“우린 미래를 바꿀 거에요.”
권혜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십 년 후의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위님도 그러고 싶지요? 그러려고 허건오씨 찾아내서 돌봐주고 있는 거죠?”
하태성이 깜짝 놀랐다.
“어, 어떻게 허건오씨에 대해서까지.”
“하태성 경위님 아버지와 저희 아버지가 현재 한 팀에서 일하고 계신데, 자식 걱정을 많이 같이 하시나봐요.”
하태성의 얼굴이 구겨졌다. 권혜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좀도둑을 본청 소환한 건 좀 너무 눈에 띄잖아요?”
“전 아버지께 허건오란 비행 청소년을 찾아달라고 했을 뿐입니다.”
하태성이 불퉁해져서 변명했다.
“멋대로 일을 키워가지고......”
“부모란 참 자식 생각대로 안 된다니까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속썩이는 아버지를 둔 두 사람이 서로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아버지들이 그랬듯이.
“아, 그런데 미래뿐 아니라 현재도 문제지 않습니까, 양시백씨가 범죄 집단에 잡혀있다면.”
하태성이 현재 문제로 돌아왔다.
“어떤 범죄 조직이지요? 아니 그렇다면 연락은 어떻게 한.”
“여기 있었군.”
갑자기 등뒤에서 그림자가 드리워져 하태성이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먼저 만나서 가자고 했잖아, 이 말 안 듣는 미래 경찰 같으니.”
“그럼 경찰이 살인범 말을 꼬박꼬박 듣는 게 좋을까요.”
권혜연이 팔짱을 끼었다.
“살인범이요?”
하태성이 깜짝 놀랐다.
“됐고 길거리서 얘기하는 건 너무 눈에 띄니까 어디든 들어가자고.”
주위를 둘러보던 허강민이 하태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태성 경위? 이야기는 들었어. 나는 허강민이라고 해. 연쇄살인범 겸 마법사를 하고 있지.”


“사람 살려.......”
서재호가 서류 더미에 고개를 박았다. 평소 같으면 누군가 잔소리를 했겠지만 오미정도 그 옆에서 서류에 고개 박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대로는 일주일은 퇴근 전혀 못할거야아......”
“하하하, 무슨 꿈 같은 소리를.”
도세훈이 웃었다.
“한 달이야. 일회용 속옷이나 많이 사다두라고.”
“미쳤어.”
오미정이 고개를 들었다.
“아 이지경이 되면 인력 충원이라든가 전문 증거 분석팀이라든가 붙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이걸 전부 우리끼리만 해요?”
“그 편이 보안상 유리하니까요.”
장산병원에서 귀환한 뒤 그대로 이틀을 다 같이 철야한 주제에 혼자만 하루만 철야한 것 같은 몰골을 하고 배준혁이 말했다.
“선진화파에는 분명 스폰서가 붙어있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입수한 문건을 분석하면 그게 누군지 어느 규모인지 명확히 밝혀질 거고요. 그러니 수사를 방해하려는 시도가 있을 것이고, ‘경찰이라고 해도’ 우리 팀 외의 다른 사람들이 증거물에 손대게 하면 안 됩니다. 그나저나 도경사님 머리는 이제 괜찮으신가요?”
“어, 응.”
실제로 하루만 철야한 사람이 이틀 철야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냥 뒤통수를 맞고 쓰러졌을 뿐이고 뇌진탕 징후도 없다고 하니까. 어지럽거나 구토가 나거나 두통... 또 뭐였지, 아무튼 그러면 정밀검사 받으라는데 지금은 일 때문인지 부상 때문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거 위험한 거 아닙니까.”
재호가 말했다.
“막 머릿속에서 어, 피 같은 게 뭉쳐서 위험해졌는데 모르고 계속 일하다가.”
“아이고 후배들이 이렇게 눈물겹게 날 생각해주다니, 역시 병가 내고 일주일쯤 푹 쉬어서.”
“우리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서재호가 도세훈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도세훈은 하하 웃으며 재호의 머리를 토닥였다.
“자, 일동 주목..... 재호 형사는 왜 바닥에 있어?”
문 열고 들어오던 권현석이 서재호를 내려다보았다.
“넘어진 김에 자고 싶은 심정 이해 하지만 일어나라고. 곧 충원 있을 거니까...”
“네?”
배준혁이 벌떡 일어났다.
“누구입니까?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인가요?”
권현석이 깜짝 놀랐다.
“누구... 뭐 짐작가는 사람이라도 있어? 싫은 사람?”
“아뇨.”
대답은 아니라고 했지만 긴장이 풀리지 않은 어깨가 그의 본심은 정반대라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어, 안 그래도 충원을 하자니 팀 외부 사람을 지금 들이는 건 좀 위험하지 않나 하는 얘기 하고 있었거든요.”
도세훈이 끼어들었다.
“아, 그거라면 걱정 마. 우리 팀원이니까.”
“네?”
“자, 다들 들어와.”
권현석이 문 밖에 대고 말했다. 곧 사람들 여럿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까지 선진화파 내부에서 우리와 함께 일한 잠입요원들이야. 아직은 신분전환 절차를 밟고 있지만 복귀하는 대로 차례차례 팀에 투입될 거니까 미리 소개해두려고 데려왔어.”
권현석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따라들어온 요원들도 웃고 있었다.
“자, 오른쪽부터 최재석 경사 유상일 경위 주정재 경사다. 최재석은 준혁이와 재호는 그 때 현장에서 봤을 거고, 유상일과 주정재는 그놈들 본부에서 지키고 있다가 진압 시작되자 깡패들을 나눠서 도망 보내는 척 함정에 몰아넣어 큰 충돌 없이 진압 성공하게 공작한 장본인이야.”
“아, 그 TV에서 현장 중계된 뉴스에서 봤어요.”
서재호가 말하고 유상일을 새삼 쳐다보았다.
“그래. 서두르고 있으니까 늦어도 이 주 내에는 투입될 거야. 그러니 다들 희망을 잃지 말도록.”
“아~니 그 힘든 잠입을 끝내고 왔는데 복귀 하자 마자 서류 산더미에 처넣는 겁니까. 너무하잖아요.”
주정재가 웃으며 권현석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게요. 한동안은 빈둥거리며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최재석도 입으로만 불평했다.
“미안미안, 후속 수사가 산더미인데 다른 팀을 추가투입하는 건 국장님이 반대하셔서 어쩔 수 없어.”
권현석도 웃으며 대답했다.
“이거 대충 분류라도 끝내 놔야 성공 축하 회식할 시간이 나지 않겠어? 가엾은 후배들 좀 도와주라고.”
“난 할거야.”
안 그래도 제일 키가 커서 제일 눈에 띄는 사람이 손을 번쩍 들었다.
“아, 그 깡패 소굴에 박혀있는 동안 얼마나 경찰다운 일이 하고 싶었는데. 서류 좋지! 다 나한테 갖고와!”
“말은.”
권현석이 팔을 뻗어 유상일의 뒤통수를 찰싹 때렸다.
“깡패 물이나 마저 빼고 와라, 인석아. 집에 가서 딸네미도 좀 보고. 공 세웠다고 추켜세워주니까 아주 세상 경찰일 혼자 다하는 것 같지?”
“어, 유..상일 경위님 결혼하셨어요?”
오미정이 깜짝 놀랐다.
“그래. 결혼해서 애까지 있는 놈이 잠입을 하러 들어간대서 내가 얼~마나 속썩었는지....”
권현석이 유상일의 뺨을 잡아당겼다. 유상일은 아픈 시늉을 조금 해주고 벗어났다.
“아, 그건 진짜 반성하고 있어. 복귀하고 나면 정말 아연이를 위해서만 살겠다고 몇 번을 마음 먹었는지....”
“서류 좋지! 다 나한테 갖고와!”
주정재가 아까 유상일이 한 말을 흉내냈다. 팀 전체가 와르르 웃었다.
“자, 일하는 사람들 방해는 이만하고 가자고. 너희들 진술하고 현장 검증할 일도 아직 잔뜩 남아있어.”
권현석이 잠입요원들을 밀어내는 시늉을 했다. 요원들도 별 저항 없이 후배들에게 손 흔들어주며 사무실을 나갔다.
“...유쾌한 사람들이네.”
조용해지자 도세훈이 총평했다.
“힘든 잠입을 막 끝냈으니 들뜨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배준혁이 무심한 듯 대꾸했다.
“다 좋은 분들 같은데요. 빨리 신분전환 끝내고 합류했음 좋겠어요.”
서재호가 말했다.
“일손도 늘고 말이지.”
도세훈이 웃었다.
“사기도 올라갈거라고요.”
오미정이 주장했다.
“미남이 들어와서?”
도세훈의 말에 오미정의 말문이 막혔다.
“어, 하지만 유부남이잖아?”
서재호가 말했다.
“심지어 딸도 있다고 하고.”
“나도 들었어.”
오미정이 서재호를 확 째려보고 다시 서류에 고개를 묻었다.
“그리고 그 딸을 두고 잠입 작전에 참여했죠.”
배준혁의 말에 모두 뜨악해서 그를 주목했다.
“무슨... 뜻이야?”
오미정이 물었다.
“아까 경감님이 하신 말씀을 반복했을 뿐입니다.”
배준혁은 다시 일로 눈을 돌린 채 평온하게 대꾸했다.
“그러니, 잘생기고 멋진 휼륭한 경찰이긴 하지만 살가운 아버지는 아닐 겁니다.”
종이에 펜 스치는 소리가 조용한 사무실에 사각사각 울렸다. 다들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입만 빠끔거리고 있는 가운데 배준혁 혼자 동요 없이 일을 계속했다.


검은 남자 54 ㅣ- 회색도시&검은방


류태현도 일단 이 방을 나갈 궁리부터 하기로 했다. 여길 살아서 나가기 위해 협조하겠다는 말이 진실이기만 해도 다행이었다.
“열렸어요.”
어느새 민지은이 문가에서 손짓하고 있었다. 이들이 고민하는 사이에 연 것이었다.
그런데 그 너머 복도가 암흑천지였다.
“어.....”
곤란한 얼굴로 문 너머를 바라보던 류태현이 허강민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제까지 방과 방 사이에 있던 것 같은 폭 넓은 복도가 있을 뿐이야.”
허강민이 바로 설명했다.
“천장에 형광등이 있는데 스위치는 켜져 있어. 이 방에서 다시 전기를 연결하면 불이 들어온다. 그런데 내가 아는 한은 어두운 채 지나가도 별 문제 없어.”
하성철은 불안한 눈으로 복도를 바라보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약병을 꼭 쥐었다. 조용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주목은 끌지 않았다.
“배전반은 이쪽이다.”
허강민이 낡은 나무 책장으로 다가가 그걸 움직이려 했다. 낡고 쓸모없는 책들이 잔뜩 꽂혀있어 잘 움직이지 않는 걸 보고 류태현이 가서 도왔다.
책장을 무너뜨리자 배전반이 드러났다. 잠겨 있지 않은 대신 이번에도 퓨즈가 없었다.
“빈 슬롯이 셋이군요.”
류태현이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는 동안 퓨즈 셋은 고사하고 하나도 본 적 없었다.
“고무장갑이나 절연체도 안 보이는군.”
하무열이 말을 받았다.
“이번에야말로 류태현 전기구이를......”
허강민이 배전반 옆에서 작은 레버를 찾아 내렸다.
“이제 전기가 차단됐으니 맨손으로 만져도 안 죽습니다.”
류태현은 멍한 얼굴로 배전반과 레버를 바라보다 허강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혹시......”
“왜?”
류태현이 신중하면서도 조금 화가 난 듯한 태도로 물었다.
“이제까지, 지난번 밀실들에 있던 배전반들도 그런 차단기가 있었습니까? 있었는데 제가 못 본 겁니까?”
허강민은 류태현을 빤히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응. 있었는데 네가 바보여서 못 본 거야.”
류태현은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허강민이 계속해서 놀려댔다.
“그거 생각 못 해본 거냐? 당장 설치하는 나는 어떻게 안전하게 설치할 수 있었겠어?”
류태현은 우거지상으로 하무열을 돌아보았다.
“속지 말아요. 거짓말입니다.”
보고만 있던 정은창이 끼어들었다.
“설치할 때 차단기를 쓰거나 어떻게든 전기를 끊어두고 작업한 건 맞는데, 설치가 끝나면 꼭꼭 차단기도 제거해서 고무장갑이 필요하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옆에서 도와서 알아요.”
“이 배신자.”
허강민이 정은창을 노려보았다. 진지하게 화가 난 눈빛이었다.
“예, 제가 여기 들어온 이유부터가 배신이지 않습니까.”
딴청부리는 정은창과 여전히 진지하게 무서운 표정인 허강민을 보고 장혜진이 기가 차서 중얼거렸다.
“지금 류태현 씨 골리려고 한 거짓말 들통난 게 경찰 끄나풀이었던 것보다 더 배신감 느낄 일이에요?”
“선진화파 같은 거 내 알 바 아니니까.”
허강민의 태도는 여전히 진지했다. 그 모양을 보고 하무열이 한 마디 했다.
“네녀석이 그렇게 저만 아니까 이 꼴이 됐다는 생각은 하냐?”
“연쇄살인마가 그럼 저만 알지 남 생각 할 것 같습니까?”
“언제까지 잡담만 하고 있을 건가?”
하성철이 표정을 굳히고 꾸짖었다.
“그럴 여유가 있으면 퓨즈를 찾든가 저길 그냥 지나갈 궁리를 해야 하지 않겠나?”
“예, 죄송합니다.”
허강민은 못 들은 척 했으나 류태현이 얼른 꾸벅 해보이고 주위를 뒤지려고 했다. 민지은이 난처해져서 설명했다.
“이 방은 이미 문 여느라고 뒤질 만큼 뒤졌는데 퓨즈는 못 찾았어요.”
“여기 커다란 쇠망치가 있긴 한데.”
안승범도 원래 용도가 뭐였을지 궁금해질 정도로 커다란 쇠망치를 들어보였다.
“이걸로 배전반을 부수면 불이 들어오는 건 아닐 거잖아?”
“당연히 아니지.”
허강민이 조금 수그러든 기색으로 설명했다.
“너희들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주운 칼 있지? 쇠망치로 손잡이를 부숴서 대충 쇠 부분만 남기고 저기다 끼워. 셋 다 끼우고 차단기를 다시 올리면 불이 들어온다.”
류태현이 칼을 꺼내다가 허강민을 보았다.
“지금 우린 칼이 두 자루밖에 없는데요?”
“난 넉넉하게 준비했어.”
허강민이 기분나쁘게 웃었다.
“아까 한 자루를 두고 와서 부족해졌나봐.”
안승범이 한 말에 다들 임선호 곁에 두고 온 흉기를 생각해내고 끄덕거렸다.
“가서 가져와야겠군요.”
류태현이 창백한 얼굴을 하면서도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나서서 온 길로 돌아섰다.
“같이 가.”
정은창이 나서서 따라갔다. 이미 왔던 길 정도는 두 명으로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서 다들 그 자리에서 쉬며 두 사람을 기다리기로 했다.


정말로 더 아무도 안 따라오는 것을 보고 정은창은 내심 당황했다.
그 역시 아까 임선호의 죽음은 정당방위가 아님을 눈치채고 있었다. 허강민이 주의 깊게 그를 도발하고 빈틈을 보여줘서 연출한 장면임을.
허강민의 교활함에 기가 질리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자신은 공범이 되어야 하는데 아무 것도 한 게 없었다.
앞서 가는 류태현을 바라보았다.
부상당한 몸이라고 들었다. 자신도 고문 상처가 남아있지만 가서 흉기를 먼저 쥐기만 하면 그 다음은 간단했다.
류태현은 전혀 옆 사람을 경계하는 기색 없이 걷고 있었다.
허강민은 류태현을 괴롭히고 또 괴롭혀 죽일 작정이라고 했다.
지금 자신이 나서서 죽이면 허강민은 방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자신도 김성식을 죽여야 했다.
자신의 복수를 위해 남의 복수를 망친 게 이번이 처음인가? 아니다.
허강민은 이미 자기 동생의 죽음에 연루된 사람 대부분을 죽였고 류태현만 남았다. 류태현도 이미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그러니 류태현의 목숨 하나만 자신이 거둬서, 이미 완성된 거나 다름없는 그의 복수에 작은 흠집을 내도 되지 않을까? 은서를 위해?
복수를 위해 다른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라고 말해준 사람이 바로 허강민이었다.
어느새 임선호가 죽은 곳까지 문 하나만 남겨놓고 있었다. 정은창은 심호흡을 했다.
두 명이었다. 이 안에서 두 명만 죽으면, 강성중은 정은창에게 김성식을 저주할 기회를 준다고 했다. 하나는 허강민이 죽였고 이제 한 명 남았다.
류태현이 문에 손을 짚고 심호흡을 했다. 흉기를 손에 넣으려면 이제쯤 그를 앞서가는 게 유리하므로 정은창은 몸을 긴장시키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정은창 씨.”
“예?”
류태현이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임선호 씨는 왜 갑자기 허강민 씨에게 덤벼든 걸까요?”
말투로 보아 류태현은 여전히 임선호가 허강민을 강간하려 했고 허강민은 정당한 자기 방어를 했다고 믿는 것 같았다. 그런 거 아니라고 설명해줄 필요는 없으므로 정은창은 적당히 입을 다물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안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랬다고요. 죄를 지었지만 살고 싶다고. 저도 똑같은 생각으로 이때까지 버텨와서, 임선호 씨도 저와 같은 심정이었던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허강민을 죽여야 살아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잠깐.”
정은창이 멈칫 했다.
“그놈이 전직 군인이었던 놈 맞지? 허강민의 둘째 동생을 자살로 몰아넣은.”
“예.”
류태현은 왜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허강민 밑에서 일했다고 했지? 그때 허강민이 그랬어. 자기 원수 중에 전직 군인이 있는데 파혼당했다고.”
류태현이 충격받은 표정을 하자 정은창이 머리를 긁적였다.
“몰랐어? 실은 방에서 쉴 때 그가 한 말이 있어서. 자길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그랬거든. 그러니 살아 나가야 한다고.”
“그럼 다른 가족이 남아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친구라도?”
정은창은 기가 막혀서 류태현을 바라보았다.
“내 말은, 그게 거짓말이었던 거라고. 기다리는 사람 같은 거 없는데도 마치 있는 것처럼 자기 최면을 건 거지. 그렇게라도 안 하면 정말로 아무 힘도 남지 않게 되니까.”
류태현의 표정을 보며 정은창은 주먹을 꽉 쥐었다.
류태현에겐 여승아도 하무열 형사도 있다. 그들뿐 아니라 안승범과 민지은처럼 사건 이후 만난 사람들도 류태현에겐 다들 친절하고 다정하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그가 살기를 바란다.
그러니 임선호처럼 모든 걸 잃고 껍데기만 남아 연명하는 사람은 제대로 상상조차 못 하는 거다.
권현석 경감이 그러듯.
류태현은 다시 문에 손을 대고 열었다. 그리고는 흉기가 아닌 임선호의 시신에 먼저 다가갔다.
정은창은 피웅덩이 위에서 한데 굳어가는 칼을 바라보았다.
류태현은 잠시 명복을 빌고 정은창을 돌아보았다.
“칼 거기 있지요?”
“어, 응.”
정은창이 칼을 주워들었다. 엉긴 피가 끈적했다.
“좀 닦아야겠네.”
구석에 푸대 자루였던 듯한 넝마가 좀 있었다. 정은창은 칼을 거기다 싹싹 문질렀다.
“그럼 가죠.”
“그래.”
앞서 가는 류태현의 등을 보다가 정은창은 자신의 칼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다 닦이지 못한 피가 찐득하게 묻어있었다.


두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안승범이 다시 앞의 복도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복도도 짧고 그 끝에 이어진 방의 불빛도 보였다.
“그냥 조심해서 가도 될 것 같은데?”
“이미 두 사람 갔잖나. 기다려보지.”
하무열이 안승범을 달래고 허강민을 바라보았다. 복도에 별 함정 없으니 그냥 조심해서 가도 된다고 말했던 주제에 지금은 불이 켜질 때까지 꼼짝도 안 할 기세였다.
빌려준 자켓 아래로 찢어진 바지와 그 아래 피부가 드러나 있었다. 하무열은 고개를 돌렸다.
허강민이 백선교 안에서 그동안 좋은 대접만 받고 살지 못했으리란 건 전부터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성적인 학대도 당하고 있었다는 건 그 녀석이 자신을 유혹했을 때에야 깨달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연민하기엔 그는 너무 먼 곳으로 가버렸고 너무 많은 일을 저질렀다. 류태현이라도 꺾이지 않게 보호하고 싶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은 남은커녕 자기 자신도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적어도 류태현만이라도.
끼익 하고 두 사람이 갔던 문이 다시 열렸다. 정은창이 피 묻은 칼을 들고 들어왔다.
“오래 기다렸죠.”
그 뒤를 이어 류태현이 들어왔다. 하무열은 안도했다.
“자세히 보니 정말 손잡이가 그렇게 튼튼하지 않아요. 안승범 씨라면 쇠 부분이 드러날 만큼 부술 수 있겠습니다.”
“좋아.”
안승범이 커다란 쇠망치를 내려놓고 일단 어깨를 휘둘러 근육을 풀었다.
“다들 물러나 있으라고.”
모두들 물러나서 귀를 막았다. 안승범이 세 자루의 검 모두 손잡이를 내리쳐 박살냈다. 허강민이 그걸 가져다 퓨즈 대신 꽂고 차단기를 올렸다.
불이 들어온 복도는 아무런 함정도 장애물도 없었다. 지나가면서 벽을 두드려 봤지만 비밀 통로도 없었다.
‘공연히 시간만 낭비한 거 아니야?’
안승범은 그런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다 생각을 고쳤다. 여승아의 창백하게 굳은 얼굴도 그렇고, 하성철 국장도 역시 벽을 짚으며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다. 심장병이 있다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밝아져서 안전한 길이라는 게 드러났으니 괜찮지 어두운 채로는 감당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들 아무 말도 않는 건가.’
류태현도 민지은도, 의외지만 하무열 형사도 병자를 짐짝 취급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슬쩍 허강민을 돌아보았다.
정말 허강민과 하성철 국장이 유착했는지 자신은 알 도리가 없었다. 확실한 건 두 사람이 정말 유착했다 해도 그건 밀실 들어오기 전까지의 이야기라는 사실이었다.
돈이 얼마가 오갔든 이 안에서 다 무슨 소용인가. 살아 나가기 위해 제일 먼저 저버려야 할 것이 상대방이었다. 서로가 얼마나 신의 없는 인간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
하물며 허강민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밀실을 빠져나가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골골대는 영감탱이’를 이 안에서 적당히 처분하는 편이 훨씬 그다웠다.
그런데도 복도가 안전하니 그냥 지나가자고 하는 대신 칼 세 자루를 가져다 불을 켜게 했다.
‘일행들에게 점수 따고 싶은 건가, 아니면 정말 하무열 형사도 틀릴 때가 있는 건가. 아니, 잠깐. 유착이 없다고 해서 허강민이 저 영감을 봐줄 이유도 없잖아?’
안승범은 저도 모르게 끄응 하고 신음했다. 밀실 안에만 들어오면 왜 이리 골머리 아플 일뿐인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밀실이 그럼 골머리 아파야지 머리 안 쓰고 편히 있어도 될 만큼 만만한 곳이어야 할까?’ 하고 허강민이 빈정거리는 것 같았다.
“머리 아파요?”
민지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안승범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아냐.”
어느새 복도가 끝나고 다음 방이 나타났다. 들어서자 모두가 입을 딱 벌렸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16 ㅣ- 회색도시&검은방


황도진이 떨어뜨린 총을 몸싸움 끝에 간신히 주워드는 데 성공했다. 총구를 황도진에게 겨누며 정은창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많이, 얼마나 자주 이 때를 꿈꾸고 생각해왔던가. 너무나 오래 바라오던 일이라 도리어 지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가 황도진에게 해 주리라 생각한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네가.....”
콰당!“
문이 부서지듯 열렸다. 방해를 직감한 정은창은 말이고 뭐고 우선 쏘려고 했다.
눈 앞이 아찔해졌다. 옆머리에 둔탁한 통증은 쓰러지고 난 다음에 느껴졌다.
“그만둬! 배형사! 우리 편이야!”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정은창은 멍하니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리는 쪽을 보았다.
권현석 경감이었다. 잠입요원과 정보원의 관리자. 그가 황도진에게 총을 겨눈 채 정은창을 보았다.
“정은창! 괜찮아?”
자신은 괜찮은가? 정은창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경찰이 난입했다. 경찰이 황도진을 체포할 것이다. 복수의 기회가 날아간다.
정은창은 떨어뜨린 권총을 찾으려고 바닥을 더듬었다. 권현석은 그의 무응답을 오해했다.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머리 다친 거야?”
“정은창! 네녀석이 쥐새끼였냐!”
황도진이 고함을 질렀다.
“성식이 그 바보 같은 자식, 툭만 하면 쥐새끼 찾는다고 애들 조져대더니만, 지 사냥개가 짭새인걸 몰랐어?”
“황도진! 너를 체포한다.”
권현석이 소리쳤다.
“조직 폭력 특별법 위반 및 살인과 살인 교사 죄로. 저항해 봐야 공무집행 방해나 경찰 폭행죄가 덧붙을 뿐인 거 알지?”
그가 부하형사들에게 눈짓했다. 서재호가 허둥지둥 수갑을 찾았다. 그가 찾길 기다리지 않고 준혁이 자기 수갑을 꺼내들며 황도진에게 갔다. 재호가 서둘러 가서 황도진의 팔을 잡고 수갑 채우는 걸 도왔다.
그걸 곁눈질하며 권현석이 총을 내리고 정은창에게 갔다. 그리고 바닥에 굴러있는 최재석을 보았다.
“앗, 최재석? 재석이 맞지!”
그가 최재석에게 달려가 몸을 흔들었다.
“기절한 거야? 어쩌다.... 황도진이랑 몸싸움 하다가?”
권현석이 정은창을 보았다. 황도진 죽이는 걸 방해받을까봐 자기가 마취해버렸다고 할 수도 없어서 정은창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누구?”
쩔그렁
“앗,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준혁이 사과하며 떨어뜨린 수갑을 주웠다.
“괜찮아. 내가 잘 잡고 있어.”
재호가 황도진의 손목을 더욱 꽉 움켜쥐며 안심시켰다. 서둘러 그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준혁이 현석에게 갔다.
“이 사람도 잠입요원이었습니까?”
“그래. 이쪽은 최재석 경사. 저쪽은 정은창.. 정보원. 아니 어딜 맞았길래 재석이 정도가 이렇게 정신을 못 차려?”
“구급차를 부르겠습니다.”
준혁이 무전기를 들었다.
“아니, 구급차를 불러도 여기까진 들어오기 어려우니 적어도 건물 바깥까지는 부축해 나가야겠군요.”
그가 최재석의 몸을 더듬었다.
“뼈가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으니 제가 업겠습니다.”
“어.... 그래?”
권현석은 쬐끔 당황했다. 준혁이 피해자 구호에 소극적인 사람인건 아니지만 지금 태도는 어딘지 부자연스러웠다. 뭣보다 대충 보기에도 최재석이 배준혁보다 십오 킬로는 더 나가보이는데.
권현석의 예상대로 최재석을 업고 일어난 배준혁은 조금 휘청거렸다. 그러면서도 현석이 내민 손은 밀어냈다.
“경감님은 저 정보원 챙기셔야죠.”
“정은창이다.”
“응, 그래. 정은창. 잘했어.”
권현석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황도진 체포하고 문건도 챙겼어. 선진화파는 이제 끝장이야.”
“끝장인가요.”
정은창이 멍하니 되물었다.
“그래. 가자. 이제부터 할 일이 많아.”


황도진이 체포되고 백석과 선진화파 사이의 거래를 기록한 장부가 경찰 손에 넘어갔다.
미래가 선언한 정면 대결에 장희준조차 한동안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우선은 문건을 되찾아야했다.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을 찾는 것이다.
‘변화’가 장희준의 계획을 대놓고 적대한다. 시간 역행 마법을 사용한 마법사는 그의 적이었다.
‘하지만 대체 누가?’
“말씀하신 대로, 경찰청 내 인물들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만.”
강재인이 보고했다.
“미래나, 회장님의 계획과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근 갑자기 행동 패턴이 달라진 사람을 찾았습니다.”
장희준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래? 누구인가.”
“하성철 국장입니다.”
“음?”
장희준이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어떤 점이 그렇던가?”
“일단 아들 걱정이 크게 늘었고요-”
“이봐, 재인이.”
장희준이 미간을 조금 모았다.
“부모란 자식 걱정을 하는 게야. 나도 늘 지연이 걱정을 하고 있잖나. 게다가 그 아들, 이제 고등학생인가 그럴 텐데 한창 걱정할 나이.”
“아들의 친구라는 비행 청소년이 문제를 일으킨 걸 끼어들어서 무마해주고 이것저것 편의를 봐줬다는 모양입니다. 이전에 접촉했을 때는 좀 더.... 공사를 구분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랬지.”
장희준도 조금은 진지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자기 자식이 걸린 문제가 되면 체면 따위 중요하지 않은 법이지.”
‘과연 자기 딸을 뒷세계의 여왕으로 만들려는 사람 답네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강재인은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그 아들은 언제 그런 문제아 친구를 사귄 걸까요. 또 경찰 간부 입장에선 아들에게 문제아 친구가 있어서 그 애가 잡혀왔다면 기왕 권한을 남용하는 거 그 애를 과중하게 처벌해서 아들과 떼어놓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빼내다 보호하고 아들과 만나게 해주는 게 아니라.”
“음.”
장희준은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지연 아가씨에게 아버지가 반대하는 친구가 생겼다간 큰일이 나겠다고 강재인이 조금 걱정을 했다.
“평소 행동 패턴과도 맞지 않고 상식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이상한 일을 하는 데에는 그에 걸맞는 이상한 이유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래.... 타당한 지적이야.”
장희준이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하성철 국장이 마법이라...”
마법은, 적어도 백선교에서 다루는 마법은 사악하고 뒤틀린 힘이었다. 하성철이 그런 것을 어떻게 접했는지, 어쩌다가 심지어 믿고 따르게 되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미래 언젠가 일어난 사건이라면, 국장이 아니라 그 아들 쪽이 관련자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강재인이 말했다.
“그래. 그렇지.”
그 쪽이 좀 더 받아들이기 쉬운 것처럼 장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성철을 조사하게. 아들도 부인도 전부 다. 그리고....”
그가 잠시 고민했다.
“수사도 이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놔둘 수는 없지.”


선생님한테 말을 전해듣고 하태성은 곧장 공중전화로 가 청소년 쉼터에 전화했다. 허건오와는 금방 연결되었다.
-저... 하태성 형씨...
“무슨 일입니까, 양아버지가 거기까지 쫓아오기라도 했나요?”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그게... 그저께 댁 아버지가.
“그게 학교로 전화할 만큼 다급한 일인가요?”
말하고 태성은 깨달았다.
“설마.”
-나도 입 다물려고 했다고! 근데 막..... 무섭고.......
자기 아버지가 ‘무섭다’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하태성은 미래에서 접했던 허건오의 거친 태도는 역시 다 허세였다는 생각을 굳혔다.
“무슨 얘기까지 했습니까?”
-다. 댁이 해준 십년 뒤 얘기랑, 뭐 그런 거.
태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뭐라 변명해야 좋은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차라리 전부 사실대로 말해버리고 부패 경찰이 되어 어머니를 비참하게 만든 주제에 아버지 노릇 하는 척 하지 말라고 쏘아붙여버릴까 하는 유혹이 고개를 들었다.
-저, 저기... 미안해.
허건오의 목소리는 몹시 가늘고 약해서 태성은 그만 못 들을뻔 했다.
“네?”
-그.... 미안하다고. 내가 또 ....대장 곤란하게 만들어 버린 거지?
“아닙니다.”
태성은 조금 미소를 띠었다. 비록 상대에게 보이진 않겠지만.
“그만큼 눈에 띄게 행동했으니, 언제 추궁당해도 추궁당할 일입니다. 허건오씨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말?
어머니 돌아가신 상황을 전하며 미안하다고 울던 그가 떠올랐다. 그 때에 비하면 지금 이런 일 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최악의 상황은 이미 면했다. 두려울 건 없었다.
“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아버지하고는 한 번 대놓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 그, 그래. 그거 잘됐네.
건오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 그래도, 내가 뭐라도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별로 허건오씨가... 아, 있긴 있군요.”
-뭔데?
목소리가 반색을 하는 것이 미안하긴 정말 미안한 것 같아 태성은 속으로 조금 웃었다.
“공부하세요.”
-공..... 뭐???
“십 년 뒤의 허건오씨는 뒤늦게 검정고시 공부를 하게 된답니다. 문제집의 앞부분만 까매지도록 열심히 노력은 하지만 뒤까지 풀지를 못해서 저한테까지 도움을 청하지요. 그러니 지금 열심히 해서, 십 년 뒤의 제 고생을 덜어주세요.”
-으엑, 그, 그런 게 어딧어, 치사해!
“쉬는 시간 끝나가니 이만 끊습니다.”
-십 년 뒤의 내가 어째서 공부 같은 걸~~
아우성치는 허건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전화를 끊었다. 쉬는 시간이 끝난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가 서둘러 교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할것인가 고민이 시작되었다.
수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허건오에게서 미래 이야기를 들어 갔다. 그런지 이틀이나 지났다.
그런데 왜 아무런 말도 없는 것일까.
아들이 십년 후에서 현재로 온다면 보통은 어떻게 행동할까?
‘보통’을 상정하는 게 의미 없는 이야기인건 태성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달리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도 알 수 없었다. 물론 처음에는 의심하고 걱정하고 정신과 진료라도 받게 하는 게 정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사실임을 알게 된 다음에는?
‘로또 번호... 아니 아직 로또 없지.’
있은들 그런 번호 외우고 다니지도 않지만. 아버지도 별로 공돈을 탐하는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집에서 돈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경우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야 돈을 밝힐 필요가 없었겠지, 범죄조직에서 둿돈을 상납받고 있었으니까.’
뇌물 뿐이랴. 향응도 받았을 거다. 어머니는 초라한 집에서 힘들게 살림하게 버려두고 자기 혼자 룸살롱 같은데서 여자 끼고 놀았을 게 분명했다.
그런 것 치곤, 십 년 전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다시 살게 된 지금 그가 술 마시고 외박을 한다던가 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생각에 빠져있다 수업이 끝난 것도 잠깐 깨닫지 못했다. 다들 우르르 일어나 움직이는 걸 보고 태성은 허겁지겁 교과서를 넣고 다음 수업은 뭔가 시간표를 확인했다.
지금은 점심시간이었다.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태성은 멋쩍어했다.
“어이, 하태성.”
갑자기 눈앞에 담임이 나타나서 그가 깜짝 놀랐다.
“네, 네?”
“너 오늘 무슨 날이냐, 두 번이나 학교로 전화가 오고. 너희 아버지 팀 권혜연 순경이란 사람이 전할 게 있으니 잠깐 교문으로.”
“권혜연 순경이요?!”
소리치고 하태성이 자기 입을 막았다. 그리고 선생님이 더 뭐라 말하기도 전에 교실을 뛰쳐나갔다.



검은 남자 53 ㅣ- 회색도시&검은방


열쇠를 거의 다 파냈을 때 임선호의 노호성을 들었다. 류태현은 벌떡 일어나 들어온 문으로 달려갔다.
소각로 앞까지 도착해서 본 광경에 류태현은 사고가 정지했다.
임선호가 허강민의 멱살을 쥐고 바닥에 깔아눕히고 있었다. 손에 쥔 칼을 발견하고 살인을 말려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그 칼이 허강민의 숨통을 노린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지가 이미 두세 갈래로 찢겨 허벅지가 다 드러나 있었다. 셔츠도 비슷한 정도로 찢겨나갔고 그 아래 드러난 가슴엔 가늘게 상처가 그어져 있었다. 흰 피부에 빨갛게 피가 흘러내렸다.
류태현이 임선호에게 달려들었다. 칼을 빼앗으려고 손목을 잡은 순간 이미 그 손과 힘겨루기 중이던 허강민이 먼저 칼을 낚아채갔다. 그리고 바로 임선호의 어깨에 박아넣었다.
류태현이 허강민을 잡고 임선호에게서 떼어내었다. 허강민은 칼을 쥔 채 류태현에게 끌려갔다.
“대체, 대체 무슨 짓을.....”
착각이 아니었다. 흉기로 대충 찢은 탓에 옷 아래로 드러난 피부도 상처투성이였다.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지만 그 전에 뭐든 감싸줄 것이라도 찾아야 했다.
열쇠 있던 방에 구겨진 시트가 있었던 걸 생각해내고 류태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제서야 다들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둘러선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쓰러진 임선호 주위로 이미 피웅덩이가 넓게 번져가고 있었다. 하무열이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다.
피 묻은 칼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핏자국이 길게 쓸려간 끝에 류태현과 허강민이 있었다.
류태현은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방금 무슨 일이 난 건지 잘 실감나지 않았다.
허강민이 움찔거리며 자신을 밀어내려 들자 문득 힘주어 끌어안았다.
“놔, 징그럽게.”
허강민이 다시 류태현을 밀어내었다. 구해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전혀 아니었다.
‘구해....줘?’
류태현은 다시 임선호를 바라보았다. 눈의 초점이 잘 맞지 않았다.
“찌른 건 허강민이야.”
안승범이 얼른 설명했다. 표정을 보니 류태현이 굉장히 걱정해야 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놈이 먼저 덤볐어.”
허강민이 딱딱하게 설명하자 류태현이 얼른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건 봐서 알아요. 칼도 임선호 씨가 쥐고 있었고.”
반론하는 사람은 없었다. 핏자국 위에 굴러 있는 칼은 이미 발견된 다른 흉기들과 마찬가지로 날카롭고 길었다. 허강민의 가벼운 옷차림으로 숨기는 건 불가능했다.
“왜 이리로 둘만 왔던 거지?”
하무열이 그치고는 조심스러운 투로 물었다.
“저는 잠깐 볼일을 볼 생각이었습니다.”
허강민이 묵묵히 설명했다.
“공연히 따라와서 다짜고짜 덤빈 건 저놈입니다. 제가 수상한 짓을 할 작정이었다면 이리로 오지 않았을 겁니다.”
“어째서?”
안승범이 묻자 허강민이 그를 가리켰다. 그가 쥔 열쇠를.
“그것에서 밀랍을 완전히 벗겨내는 방법이 바로 저 소각로의 열기를 이용하는 것이니까. 금방 다들 생각해내고 이리로 올 게 뻔한데 어떻게 여기서 수상한 짓을 하겠어?”
일행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안승범은 열쇠를 내려다보다 소각로 문으로 가서 열고 열쇠를 그 안쪽에 밀어놓았다. 열쇠 홈에 아직 두껍게 달라붙어 있던 밀랍이 점차 녹기 시작했다.
그걸 기다리는 동안 아무도 더 말하지 못했다.
살인이 일어났는데, 누가 죽였는지 이토록 분명한데 허강민만 일방적으로 몰아붙일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저......”
류태현이 자신의 자켓을 벗어 허강민에게 내밀었다.
“좀 작겠지만 이거라도 걸쳐요.”
허강민은 자켓을 노려보다 같은 시선으로 류태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제 오른손이 닿은 것 때문이라면, 애초 냉장고에 손 넣게 만든 게 허강민 씨잖아요.”
허강민은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 요청 비슷한 시선을 보냈다.
“음, 저쪽 방에 구겨진 시트가 있었지.”
하성철이 헛기침하며 일어났다.
“그거라도 가져오지.”
“시트 감고 돌아다니기 불편할 겁니다.”
본래 페이스로 돌아온 허강민이 여승아를 가리켰다.
“지금 걸치고 있는 그 검은 코트 정은창 것 맞지? 그거라면 적당할 것 같군.”
물 함정 이후 쭉 걸치고 있던 코트 자락을 여승아가 움켜쥐었다.
“젖었던 건 소각로 지나면서 다 말랐잖아? 아직도 추운가?”
몇 사람이 반론하고 싶은 기색이 되었으나 마땅한 말을 찾지 못했다. 정은창 자신부터가 이미 소각로를 지날 때 괜히 더 더울 테니 이만 돌려달라고 할 생각도 했었다. 그러지 않은 건 코트가 열기를 막아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류태현은 당황해서 허강민과 여승아를 번갈아 보기만 했다.
“이거 걸쳐.”
하무열이 자기 자켓을 대뜸 허강민에게 씌웠다.
“이만하면 사이즈 맞구만. 어이, 마당쇠! 열쇠 다 녹았냐?”
안승범이 허둥지둥 소각로 쪽에 놓았던 열쇠를 가져왔다.
“어. 이제 쓸 수 있어.”
“그럼 됐구만.”
하무열이 허강민의 팔을 잡고 잠긴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허강민은 불평하고 싶은 표정을 하면서도 잠자코 따라갔다.
안승범이 잠긴 문을 여는 동안 류태현이 시트를 걷어내 털었다. 그리고는 임선호의 시신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 그 위에 덮었다.
“이봐.”
하무열이 눈썹을 접었다.
“사인과 경과가 명확하니 시신을 옮기지 않는 선에서 이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류태현이 중얼거렸다.
하무열은 혀를 차고 다시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누가 봐도 임선호가 허강민을 공격하고 강간하려 드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허강민이 내내 교묘하게 사람들을 도발하고 덫을 쳤음을.
다시 허강민의 옆얼굴을 노려보았다. 창백하게 떨고 있지만 공포에 질린 모습은 아니었다.
허강민이 이 안에서 범인 역할을 맡았다면 위험하다. 설계자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안승범이나 양수연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조금 무리해서라도 이놈이 강성중의 사주를 받은 ‘범인’일 가능성을 끄집어내는 게 옳을까?
“그런데 말이죠.”
정은창이 하무열을 보고 말했다.
“임선호는 그 칼 어디서 났을까요?”
다들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러네요. 중요한 문제인데 잊을 뻔했습니다.”
류태현이 어두운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범인으로서 들어와 있었다면 처음부터 무기를 숨기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맞아.”
안승범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백건영을 죽인 흉기는 들어갈 때 숨겨 갖고 들어갔었다.
“그런데 그런 거라면 저 아저씨는 죽었고 흉기도 드러났으니 이제는 괜찮지 않을까?”
흉기는 임선호의 시신 곁에 허강민이 떨어뜨린 그대로 두고 왔다. 아무도 그것에 기꺼이 손대려 들지 않았다.
문은 열렸지만 성큼 나서는 대신 다들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섰다.
범인이 중간에 마각을 드러냈고, 죽었다.
아무리 해도 안도감은 들지 않았다.
범인이 제거되었으니 남은 사람들끼리는 안심하고 믿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먼저 말을 꺼낸 안승범조차도 기색은 어두웠다.
“아무튼 이제 빨리 갑시다.”
류태현이 나직이 재촉했다.
“꾸물거리고 있으면 강성중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맞아.”
안승범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앞장섰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 움직였다.
류태현은 허강민 근처로 다가갔다.
하무열의 자켓도 상체만 덮는 짧은 것이라 셔츠 찢어진 건 다 가릴 수 있었지만 찢어진 바지 사이로 드러난 허벅지는 어쩔 수 없었다.
‘역시 코트가 한 벌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류태현은 아쉬워하며 허강민의 눈치를 살폈다.
허강민은 앞만 보며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류태현을 돌아보았다.
“나한테 뭐 할 말 있냐?”
“아, 어, 없습니다.”
류태현은 머뭇거렸다.
허강민은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다는 표정만 했을 뿐 팔을 뻗어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열자 엄청난 끼이이익 소리가 났다.
류태현은 기겁해서 허강민을 붙잡고 멀찍이 물러났다.
열린 문 너머로는 이제까지와 비슷한 폐허가 보일 뿐이었다.
“문이 뻑뻑해서 그런 거야.”
허강민이 류태현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위험한 함정이 있으면 내가 어련히 조심하지 않았겠어?”
“혹시 모르는 일입니다.”
류태현이 조그만 목소리로나마 대꾸했다.
“강성중이 허강민 씨 모르게 함정을 파 뒀을 수도 있으니까요.”
허강민은 류태현을 조금 노려보다 한 발짝 물러났다. 류태현은 자기가 앞장서서 들어갔다.
하무열은 조금 불길한 기분이 되었다.
류태현이 여승아를 아기 돌보듯 챙기는 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허강민까지 저렇게 깨지기 쉬운 유리 그릇쯤 되는 듯이 챙기는 건 이전까지의 류태현을 알고 있는 하무열에게도 석연치 않았다.
세 번의 밀실을 거치며 류태현이 더 이상 처음 만났을 때의 순진한 청년이 아니게 된 줄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무열이 걱정한 변모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밀실 안에 허강민까지 들어와 있다고 했을 때 그가 걱정한 것은 류태현도 마침내 허강민을 적대하고 죽이려 들 가능성이었다.
“저 위에 뭔가 있군요.”
선반 위에서 반짝이는 것을 향해 류태현이 손을 뻗었으나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았다.
하무열과 안승범이 동시에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으나 허강민이 더 가까웠다. 발돋움을 하고 팔을 죽 뻗자 간단히 라커 열쇠를 집을 수 있었다.
“자.”
류태현은 열쇠를 바라보다 허강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아, 네 키보다 높은 곳에 항상 중요한 물건이나 장치를 두는 건 일부러 그러는 거 맞아.”
허강민이 태연히 인정하자 류태현이 표정을 구겼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 건데요?”
“그야 네 녀석이 이렇게 표정을 구기고 곤란해 하는 게 재미있어서지.”
허강민은 여전히 뻔뻔하게 웃고 있었다.
“당신에겐 이 모든 일이 장난입니까? 우리의 목숨까지도?”
“그렇다면 어쩔 건데?”
허강민은 비웃음 위에 잔인한 미소를 띄웠다.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네게 친절해지기라도 할 것 같나? 나는 내 목적 때문에 잠시 협조하고 있을 뿐이다. 혹시라도 내게 자비를 구할 수 있을 거라는 헛된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류태현은 기세를 죽이지 않고 허강민을 노려보았다.
“그럼 허강민 씨의 목적은 뭡니까?”
허강민은 표정을 굳히고 입을 다물었다.
류태현은 여전히 허강민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걸 내가 네게 말해줄 의무는 없어.”
“아뇨, 있지요.”
류태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함께 이 미궁을 헤매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살아 나간다 이외의 목표가 있다면 알아야 합니다.”
“......”
이미 류태현뿐 아니라 모두가 허강민을 주목하고 있었다. 시선으로 포위된 것을 깨닫고 허강민이 이를 갈았다.
“나도 해야 할 일이 남아서, 여기서는 살아 나가야 해. 그러니 미궁을 나갈 때까지는 너도 다른 일행들도 해칠 생각 없어. 나간 뒤의 목적은 내 소관이고.”
류태현은 잠시 그 대답을 곱씹으며 허강민을 바라보았다. 태도는 마치 진실을 말하는 것 같은데 어디까지 믿어도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오래 반응이 없자 허강민이 다시 비웃었다.
“믿지도 않을 거면서 뭐하러 물었는데?”
“그 남은 할일이 뭔지는 말할 수 없는 겁니까?”
허강민이 류태현을 노려보았다.
“그건 살아 나간 ‘다음’에 할 일이고, 너랑은 상관 없어. 그러니 꼬치꼬치 캐물어도 소용없다.”
류태현은 다시 묻지 못했다. 허강민의 기색이 완강해서만은 아니었다.
‘상관 없다’라고 했다. 허강민이 류태현보고.
다른 밀실, 다른 군상극을 만드는 것뿐이라면 류태현이 상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허강민은 그 밖의 무엇을 하려는 걸까.
은행에서 마주쳤을 때가 떠올랐다. 밀실 밖에서 만난 허강민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랄까, 허강민도 남들처럼 길을 걷고 은행에 들르고 그러다 마주칠 수도 있다는 게 굉장히 이상하게 느껴졌다.
밀실 제작자 이외의 허강민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허강민은 밀실 제작도 아니고 류태현과도 상관 없는 일을 계획했다고 한다.
슬쩍 하무열을 돌아보았다. 밀실 안에서 혼란스러울 땐 결국 무열 선배가 그나마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하무열은 어두운 표정으로 주위를 관찰하고 있었다. 류태현의 눈빛을 일부러 피하는 듯한 태도에 지금 당장 조언을 구하는 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지금 허강민 씨 듣는 앞에서 대놓고 의논할 수도 없지.’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15 ㅣ- 회색도시&검은방


도세훈은 초조하게 병원 정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가 할 일은 여기를 지키고 있다 팀장님이 오면 상황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렇긴 해도 실로 몇 년 만에 현장에 나왔다, 총기까지 휴대하고. 고양감이 드는 게 당연했다. 자기도 뭔가 했으면 싶었다.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는 건 지루했다.
갑자기 병원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그가 조심스럽게 입구 쪽을 들여다보니 병원 복도에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저게 왜 갑자기 내려간 거야?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치지직 소리와 함께 무전이 울렸다.
-저, 도세훈 경사님? 오미정 형사?
서재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겁먹어 울 것 같은 목소리였다.
-에, 저, 저희 고립된 것 같습니다.
이런 데서 고립되었으니 무서운 것도 당연하지만 그래도 형사인데 이보다는 믿음직했으면 좋겠다고 도세훈은 생각했다.
-그...것 말고는 아무 문제도없으니까 걱정하지말고자리지켜주십셔!
무전이 끊겼다.
“...응?”
감이 안 좋았다. 도세훈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무전기를 노려보았다.
여긴 선진화파 하극상 장소고 김성식은 경찰 죽이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위험한 미친놈이었다. 이런데서 갑자기 갇혔는데 ‘아무 문제없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이상했다. 게다가 그 목소리. 아무리 서재호가 못미더운 허당이라고 해도 경찰이고 곁에는 경감님과 배준혁 형사도 있었다. 하다못해 그가 허둥거리면 배준혁이 무전기를 넘겨받아 침착하게 상황을 전달한다든가 할 수도 있었다.
“혹시... 더 큰 문제가 생긴 건가?”
예를 들어, 총 든 김성식과 떡 마주쳤다거나.
그래서 그가, 무슨 짓이든 하는 걸 후발팀에게 방해받지 않으려고 저런 무전을 보내게 시켰다거나.
‘그런 거라면 내가 나설 수밖에 없지!’
감히 경찰을 위협하고 있는 악당들의 뒤통수를 치고 공을 세우는 자신을 상상하며 도세훈은 총을 뽑아들고 정문으로 걸어들어갔다.


“저기 준혁이, 정말 이렇게만 말하면 되는 거야?”
서재호가 사정하듯 말했다.
“경감님이 다치셨잖아? 우린 여기 갇혔고. 어떻게 도움이라도 청하는 편이....”
“서재호씨.”
“으, 응?”
“방해되니 조용히 해주시죠.”
서재호는 조용히 했다. 팀에 합류한 건 이후라도 둘은 동기고 나이는 재호가 위건만, 지금 배준혁은 그를 부하 다루듯 이래라저래라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서재호는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권현석을 그냥 머리 받쳐서 뉘어두고 장대 가져오라면 장대 가져오고 무전 보내라면 무전 보내고 조용히 하라면 조용히 했다.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셔터가 내려가고 경감님이 머리를 맞고 쓰러졌는데도 준혁은 마치 그럴 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침착했다. 침착하게 경감님은 내버려두고 주변을 살펴서 필요한 것을 찾고 잠긴 문을 열었다. 별로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어떻게 하면 되는지 뭘 사용하면 되는지 척척 찾아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뭔가, 다른 뭔가가 준혁의 탈을 쓰고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서재호 형사.”
“네, 넵.”
그가 자기도 모르게 차렷했다.
“셔터가 좀 열렸으니 저기 끌차 끌어다 마저 여시죠.”
그러면서 자기는 경감님 누워있는 곳으로 갔다.
“나, 나혼자?”
“웨이트 트레이닝의 성과를 보일 때입니다. 지레의 원리도 당신 편이니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어, 그래.”
셔터 아래에 끌차를 끼우고 재호가 멈칫했다.
‘나 웨이트 하는거 준혁이에게 말했던가?’
별로 비밀인 것도 아니고 늠름한 경찰이 되기 위한 훈련의 일환이었으므로 경찰청 내에서 말한 적도 분명 있었다. 그렇지만 저 배준혁과 그런 잡담을 같이 했던 적이 있었는지는....
온 힘을 다해 끌차를 누르자 셔터가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걸 확인하고 준혁이 권현석을 흔들었다.
“경감님. 경감님? 일어나보세요.”
“으....”
흔든 탓인지 소리 탓인지 권현석이 눈을 떴다.
“무슨.....”
“갑자기 셔터가 내려와 퇴로를 차단당했습니다. 내부도 여기저기 막힌 것 같습니다. 황도진이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고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 한 짓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빨리 쫓아가야 합니다.”
설명하며 배준혁이 권현석을 부축해 일으켰다.
“시간이 없습니다. 황도진이 여기서 죽.... 하극상 당해서 죽거나 도망쳐버리면 수사가 수렁에 빠집니다.”
그가 권현석을 부축이 아니라 끌다시피 하며 열린 셔터로 갔다. 그가 서재호를 보았다.
“보고만 있지 말고 도와주십시오.”
“어, 그, 그래.”
서재호가 달려가 권현석을 반대쪽에서 부축했다. 권현석은 손으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흔들었다.
“나, 그렇게 오래 기절해 있었어?”
“아직은 시간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 빨리 갑시다.”
권현석이 무슨 말할 틈도 안 주고 배준혁이 걸음을 재촉했다.
서재호는 문득 깨달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하지만, 혹시라도 준혁이 이 셔터를 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말로 ‘미리’ 알고 있었던 거라면, 이들이 빨리 가지 않을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미리’ 알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그 점을 깨닫고 나니 방해하는 뭔가가 나타나면 죽이기라도 할 것 같은 무서운 눈빛이 절박하게 쫓기는 눈빛으로 보였다. 늦으면 정말로, 정말로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라 서재호는 확신했다.
“그래. 빨리 갑시다.”
서재호가 여전히 완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권현석의 팔을 어깨에 걸치고 앞서나갔다. 준혁은 잠깐 놀란 표정을 했지만 곧 잰걸음으로 앞장을 섰다.
그가 불안한 표정으로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돌렸을 땐 다시 굳은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퍽!
뒤통수를 맞고 도세훈은 앞으로 쓰러졌다. 그가 계단에 머리를 찧지 않도록 시백이 서둘러 그를 잡아 부축했다.
“감식할지도 모르니까 손대는 건....”
“이 사람 안 죽게 하는 게 목적 아니에요?”
허강민이 입을 다물었다. 양시백은 도세훈을 받쳐든 채 병원 건물에서 물러나 평평하고 돌 없는 땅을 찾아 편하게 뉘었다.
“이 사람은 또 누구지.”
허강민이 쓰러진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너 혹시 알아?”
“모르지만 사람은 안 죽을수록 좋은 거라고요.”
시백이 핀잔주자 허강민은 어물어물하다 말았다.
“그래서, 할 일은 이게 끝인가? 이 사람이 안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래를 바꿀 만한 때와 장소인 거잖아. 좀 더......”
허강민이 입을 다물었다. 엔진 소리가 가까워졌다.
미처 두 사람이 도망치기도 전에 자동차가 달려와 멈췄다. 그리고 차문이 열렸다.
“어, 우리 여기서 목격되면 곤란...”
“웬놈들이냐!”
차에서 사람이 내렸다.
경찰이었다. 제복을 입은 사십 남짓해 보이는. 앞으로 걸어나오자 전조등 빛에 얼굴이 드러났다.
양시백이 달려갔다. 그 사람이 당황해 권총을 뽑았다. 그러나 총보다 시백의 주먹이 빨랐다.
태권도 사범의 정권을 명치에 맞고 그 경찰은 영화처럼 뒤로 날아가 대자로 뻗어버렸다.
“....어?”
허강민이 눈을 깜빡였다.
“너 사람은 안 죽는 게 좋다고.”
“죽이진 않았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백은 그 사람의 맥을 짚어 정말 살아있는지 확인했다. 그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한 거야?”
원래라면 이렇게 물을 사람이 반대라고 생각하면서도 허강민이 물었다.
“그.... 박근태에요. 이 사람이.”
시백이 뻗어있는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젊지만... 그래서 저 사람이 막 호통치고 총을 드는 걸 보니까, 저도 모르게 그만.”
십 년 뒤에 박근태 의원은 양시백이 보는 앞에서 배준혁을 쏴죽였다. 그 점을 생각하면 명치에 한 방 쯤 정당한 화풀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뭐 괜찮겠지, 죽인 것도 아니고.”
허강민이 말했다.
“경찰이 한 명 뻗으나 두 명 뻗으나. 그 쪽에선 널 깡패 중 하나라고 밖에 생각 안 할 거고.”
허강민이 양시백의 모자챙을 잡아 눌러 씌웠다.
“경찰 더 오기 전에 가자. 시키는 대로 했으니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니네 선생님이 알아서 잘 하겠지.”
그 말에 시백이 세상 모든 불안함을 담아 병원 건물을 쳐다보았다.
“정말 괜찮으실까요. 저런데서 혼자....”
“딴 경찰들도 있을걸. 그리고 원래 저기서 그 사람한테 뭔 일 있지는 않았어.”
“그렇다고 해도요.”
허강민이 잡아끌었지만 시백은 병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금 선생님은 어떠려나요.”
“어떻긴. 고등학교 갓 졸업한 것 같이 생겨가지고 살인범의 눈빛을 하고 있지.”
시백의 기색이 확 꺾였다. 아픈데 찌른 게 조금은 미안하지만 여기서 정말 저기 뛰어들어 두 사람을 만나게 해줄 수도 없기에 허강민은 양시백을 잡아끌고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여기가 병원이었는지 감옥이었는지 의심스러워지는 철창문이 와르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됐습니다. 가죠.”
무슨 열쇠기술자 뺨 같은 건 왕복으로 칠 기세로 문을 딴 준혁이 서둘러 어두운 복도로 달려갔다. 이제 겨우 완전히 정신 차리고 상황 판단을 마친 권현석이 질문할 게 많은 눈으로 재호를 보았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 셔터 내려오고 경감님이 머리 맞고 쓰러지신 이후로 저럽니다. 뭘 찾아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실수나 망설임이 전혀 없어요. 꼭....”
‘꼭 게임 공략집 보며 하는 사람처럼’ 이란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보다 빨리 안 가면 어떻게 되는 건데?”
권현석이 물었다.
“도망칠 길도 없이 황도진이 여길 거래 장소로 골랐을 리는 없으니까 분명 우리가 여기서 꼼짝 못하고 있으면 황도진도 김성식도 도망가버릴 거야. 그러면 이번 작전은 실패하고, 분명 앞으로 수사에도 큰 지장이 생기겠지만.....”
그가 입을 다물었다. 수사의 장기화로 이들 팀은 정보 공개 압력을 받고 있고, 이번 작전이 실패하면 국장님도 더 이상은 막을 수 없게 될 거라고 근태형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분명 이들의 성패에 수사팀의 존속, 더 나아가 잠입요원들의 목숨이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배준혁은 그걸 몰라야 했다.
‘어떻게?’
“아...”
앞서가던 준혁이 멈춰섰다. 재호와 현석도 뒤따라 멈췄다.
“조심하십시오. 끊어진 전선이 물에 닿아있습니다.”
준혁이 신중하게 바닥을 살피며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물바다 저편에 문이 있었고 그 물에는 전기가 튀고 있었다.
“어쩌지. 저 보조 침대라도 타고 넘어서?”
재호가 말했다. 준혁이 고개를 저었다.
“침대 프레임도 철제입니다. 전원을 먼저 끊는 게 안전합니다.”
준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 어, 절연이 될 만한 물건이 있을 겁니다. 고무로 된 뭐라던가.”
그가 말하면서 배전반 쪽으로 갔다.
“그런 걸 이용해서 손을 보호하고 차단기를 내리면.....”
“조심해!”
권현석이 소리치며 준혁을 잡아 물 가장자리를 딛을뻔한 걸 잡아당겼다.
“자칫 감전이라도 되면 위험하잖아. 나도 마음은 급하지만 목숨 걸지 않는 선에서 서두르자고. 아직 시간 있어. 그렇지?”
“예, 예.”
준혁이 조금 혼란스러워하면서 대답했다.
“네, 있죠. 아마도.”
그가 심호흡했다.
“제가 좀 흥분했나봅니다. 중요한 작전이라 생각하니 긴장해서.”
“아냐, 뭘. 그럴 수도 있지.”
권현석이 그의 등을 두드렸다.
“조금 쉬어. 나랑 재호가 고무 찾아볼게.”
“네.”
준혁은 낡은 병상 끄트머리에 얌전히 앉았다.
그가 들어온 문 쪽을 보았다. 고무로 된 뭔가를 찾느라 서재호와 권현석은 그가 중얼거리는 말을 듣지 못했다.
“괜찮아... 실패한다 해도 또 기회가 있을 테니까.....”



검은 남자 52 ㅣ- 회색도시&검은방


“벽에 붙어서 한 줄로 쭉 가면 되겠네요. 그렇죠?”
류태현이 어지러운 생각들에 휩싸여 꼼짝 못 하는 사이 민지은의 주도로 다들 죽 늘어섰다. 여승아가 류태현을 잡아끌어 중간쯤에 섰다.
소각로는 규모가 큰 데다 불길과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보호가 없어 그냥 걷는 것만으로 숨이 턱턱 막혔다. 애초 이렇게 되라고 소각로 안을 뚫어서 만든 통로가 분명했다.
중간 정도 지났을 때부터 비틀거리기 시작한 하성철을 안승범이 부축했다. 벽도 뜨거워서 함부로 짚을 수 없었다.
채 50m도 안 되는 거리가 족히 100m는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간신히 문 앞에 다다랐지만 복잡한 퍼즐이 가로막은 걸 보고 민지은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 힘을 내야지. 여기서 익어버리기 전에 열 수 있을 거야.”
하무열이 격려하며 퍼즐 앞에 앉았다. 하노이 탑을 응용해서 만든, 실수할 위험이 적은 대신 시간을 넉넉히 들여야 하는 퍼즐인 것을 깨닫고 이를 갈았다.
“그냥 침착하게 푸는 수밖에 없습니다.”
허강민의 말투는 태연하고 뻔뻔했다. 그래도 사람들의 적의 어린 시선을 조금 피하고 싶어졌는지 문 앞에서 물러났다.
오는 길이 좁은 대신 문 앞엔 비교적 넓은 공간이 만들어져 있어 다들 여유있게 모여설 수 있었다. 허강민은 혼자 따로 떨어져 가장자리까지 물러났다.
장혜진조차도 가까이 가지 못했다. 지금 허강민은 일부러 혼자 있으려는 태도가 뚜렷했다.
“좀 이쪽으로 오시죠.”
류태현이 슬쩍 불러보았다.
“난간 없어서 위험해요. 뜨겁지 않으세요?”
허강민은 비웃을 뿐이었다.
“내가 왜 네놈 가까이 가는데?”
말문이 막힌 류태현을 보고 임선호가 허강민에게 이를 갈았다.
“일껏 생각해서 말해주는 사람한테 그 따위로 나올 거냐? 류태현 씨가 착해서 봐주고 있으니까 아주 만만해 보이지?”
“네놈은 악당이라 안 봐준다 이거냐?”
허강민은 코웃음을 쳤다.
“네놈한테도 류태현에게도 봐달라고 한 적 없다.”
임선호가 눈을 부릅뜨고 몸을 일으키려 하자 류태현이 말렸다. 임선호가 부릅뜬 눈을 류태현에게 돌렸다.
“류태현 씨가 그렇게 숙이기만 하니까 저놈이 저렇게 더 기고만장한 거 아냐! 류태현 씨 눈엔 저놈이 지금까지도 피해자로 보여? 류태현 씨가 싹싹 빌고 사과해야 할?”
“사과? 대체 언제 했는데?”
허강민이 빈정거렸다.
“나는 너희 둘 다에게 사과 같은 것 받은 적 없는데? 잘못했다는 말도 들은 적 없고?”
류태현이 당황했다.
“흔들리지 마, 류태현 씨.”
임선호가 이를 갈았다.
“살아나가야 하잖아. 저런 소리 일일이 신경쓰다 자기 목숨 못 챙긴다고.”
류태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죄를 지었지만 살고 싶다.
자신이 허강민에게 죄를 지었지만 그 이후 죄를 쌓아올리고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들여 해친 건 허강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밀실에서 버티고 살아남았다.
사과할 기회를 허강민도 준 적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류태현의 목숨인 이상 사과하려는 시도 자체가 앞의 전제를 무너뜨려버릴 수밖에 없었다. 은행에서 인질이 되었을 때 그 사실을 똑똑히 확인했다.
절망적인 평행선.
안승범을 끌어안고 뛰어내릴 때 생각했다.
자신이 여기서 죽으면, 그때는 허강민 씨도 자신을 용서해줄까?
“그런 생각으로 그 질긴 목숨 여기까지 붙여온 거냐.”
허강민이 임선호를 조롱했다.
“어이, 류태현. 그동안 양수연과 강수혁의 일이나 안승범의 과거 같은 걸 다 내가 직접 뛰어다녀 알아냈다고 생각했냐?”
갑자기 지목당하고 류태현이 흠칫했다. 임선호는 아예 창백해졌다.
“백선교에서 부리는 흥신소장이 있었어. 죄 지은 자들의 신상을 캐고 백선교에 보고하고, 가끔은 직접 납치도 하는. 그 흥신소장이 바로 저놈이다. 나도 미처 모르는 사이 내 원수가 내 하수인이 되어있었더군.”
류태현은 말문이 탁 막혔다.
류태현만이 아니었다. 일행들 사이에 충격이 파도처럼 퍼져나갔다.
“아저씨 진짜야?”
안승범이 치를 떨며 임선호를 노려보았다. 임선호는 허강민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느라 안승범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네놈 자식이......”
임선호의 주먹이 덜덜 떨렸다.
허강민은 여전히 삐딱하게 서서 그를 비웃고 있을 뿐이었다.
“일동 주목!”
엄격한 어조의 호통에 막 허강민을 향해 한 걸음 내딛은 임선호가 몸을 빳빳이 하고 멈춰섰다. 다른 사람들도 놀라서 하성철을 주목했다.
하성철이 꼿꼿이 선 채 임선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무열 형사가 퍼즐을 거의 다 맞췄네. 문 열고 나면 무슨 함정이 기다릴지 모르니 마음의 준비들을 하게.”
딸깍 딸깍 소리가 두어 번 더 나고 하무열이 몸을 일으켰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가세.”
하성철이 문 앞에서 재촉하자 하무열이 먼저 그 너머의 복도로 발을 옮겼다.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랐다.
허강민도 누가 재촉하기 전에 문가로 다가왔다. 주의 깊게 뒤쪽으로 물러나 있던 장혜진이 자연스럽게 그와 다른 일행들 사이에 서서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하무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경찰 고위 간부인 하성철은 딱딱하고 강한 어조로 명령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직업 군인이던 임선호는 그런 명령에 복종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아마 지금쯤은 임선호 스스로도 아차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일촉즉발의 그 상황은 이미 지나간 뒤였다.
허강민과의 유착 가능성을 제시한 지금까지도 국장님이 나서서 그를 감쌌다. 하무열은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했다.
정말로 떳떳하기에 용감한 것일 수도 있었다. 거리낄 것이 없기에 남들 시선 같은 것 의식하지 않고 허강민을 편들어서라도 내분을 막는 거라면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만약 정말로 허강민과 유착이 있다면, 그렇다면 도리어 아까처럼은 나설 리 없었다.
범죄자와 유착 같은 걸 하는 사람이 이런 곳에서 자기 목숨을 최우선으로 하는 게 당연했다. 자기 체면뿐 아니라 목숨까지 위태롭게 하면서 범죄자를 봐줄 리 없었다.
이번에는 정말 잘못 짚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내키지 않으나마 생각하면서 하성철을 돌아보았다. 소각로의 열기 속에서 힘주어 고함까지 지른 여파로 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잠시 쉬었다 가는 게 좋겠어요.”
민지은이 제안했다.
“그럽시다.”
류태현이 찬성했다. 그리고는 역시 호흡이 거친 허강민을 돌아보았다.
하성철이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임선호를 의식해서라도 좀 더 강한 척 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여기서 살아 나가지 못할 것이다. 이젠 더 이상 그런 전망을 부정할 수 없었다.
류태현 순경과 하무열 형사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자신의 몸으로는 더 버틸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살아 나가는 데 방해나 될 것이다.
허강민을 계속 감싼 것이 후회되지는 않았다.
그가 백선교 내에서 입지가 위태로워진 데엔 자신 탓도 있었다. 아니라고 해도 밀실 안에서 서로 적대하고 싸우게 둘 수 없었다.
허강민이 밀실 제작자이고 가해자이지만 사적인 복수나 응징으로 이 안에서 죽어버리면 남은 사람들끼리도 믿고 협력해 나갈 수 없었다.
하무열 형사가 유착 가능성을 짚었으니 몸을 사려야 한다는 생각도 안 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살아 나갈 보장도 없는 자신의 안위 때문에 당장 폭발할 것 같은 상황을 두고 보기만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어차피 의혹뿐이야. 하무열 형사도 나와 그가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알아낼 도리는 없어.’
그 점은 장담할 수 있었다. 허강민과 자신이 대체 어떤 관계인지는 실은 자신도 잘 모르겠으니까.


허강민은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국장님이 자신을 보호하고 있다는 건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고마워할 일만은 아니었다. 방금은 도리어 방해였다.
자신이 아무도 모르게 여기서 누군가를, 그것도 두 명이나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 누가 저 혼자 쓰러져 죽는다면 모를까.
아니, 그렇게 된다 해도 장담할 수 없었다. 마법이 존재하고 자신이 마법사라는 것까지 들킨 이상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이 저주했다는 의혹이 제기될 수 있었다. 강성중의 마력 제어로 지금은 마법을 못 쓴다고 말해봐야 증명할 수도 없었다.
강성중은 어차피 여기 있는 모두를 죽일 작정이니 그가 시킨 살인 따위 안 해버리자는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이미 미궁의 절반이 넘게 왔다. 강성중의 빈틈을 찌르려면 그의 뜻대로 놀아나는 척 해줘야 했다.
이대로 아무도 안 죽이고 전진만 하면 그가 마음에 안 든다며 개입해서 또 무슨 엉뚱한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그놈을 방심시키기 위해 임선호의 목숨쯤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었다.
그래서 차라리 모두가 보는 앞에서 도발해 죽일 작정을 했다. 허강민이 살인을 하더라도 의문을 품을 여지가 없도록. 그런데 국장님이 임선호를 누르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원망할 일이었다. 자신도 나름대로 계획이 있고 알아서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는데 공연히 나서서 방해한 것이니까.
국장님의 체면과 목숨까지 걸어서.
허강민은 이를 갈았다. 어떻게 지킨 명예인데, 부패 경찰 소리 안 듣게 하려고 자기가 얼마나 신경썼는데 이런 데서 그걸 내버릴 작정인가.
국장님이라면 이런 계획을 다 눈치챈다 해도 결국 말릴지도 모른다. 연쇄살인마가 또 살인하는 게 싫어서.
그가 싫어하든 말든, 그는 고고하게 남겨두고 자신은 하고 싶은 대로 류태현과 함께 지옥까지 뛰어내릴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는 허강민을 자신이 있는 선 안쪽으로 도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마치 이 괴물이 다시 사람이 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 건 불가능해요.’
여전히 자신을 노려보는 임선호의 시선을 느끼며 허강민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것도 다 국장님과 장혜진과 다른 사람들을 살리려는 겁니다. 어차피 이미 피에 젖은 손 한 번 더 젖을까봐 그렇게 나설 필요 없어요.’
이대로는 자신보다 국장님의 위치가 더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 작게 신경 거슬러 도발하는 건 이제 적당히 하고, 하성철이 개입할 여지도 없이 단번에 결판을 내야 했다.


쉬자고 앉은 자리가 여전히 불가에 너무 가까웠기 때문에 잠깐만 쉬고 자리를 뜨기로 했다. 조용히 짧은 복도를 지나 다음 방으로 갔다.
열쇠를 찾아 잠긴 문을 열어야 했다. 그 열쇠는 방 안 어딘가에 숨겨져 있었다.
여기저기 뒤지는 일이라 당장 감독의 자문을 구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다들 의도적으로 허강민을 피하고 있었다.
허강민은 모른 척 구석으로 물러나 자신도 적당히 주위를 뒤지는 척했다.
미궁 안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추한 꼴을 연출하기 위해 강성중은 미궁 후반부 여기저기에 칼을 숨기도록 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뜨거운 소각로를 갓 통과한 일행들이 흥분해 극단적인 짓을 저지르기 쉬우리란 판단에 칼 두 자루를 바로 이 방에 숨겼다.
과연 구석에 구겨져 있던 낡은 시트 아래서 작고 날카로운 칼이 나왔다.
일부러 남들 몰래 한 사람만 발견하기 쉽도록 그런 구석에 소리 안 나는 물건으로 덮어둔 보람이 있었다. 여승아가 칼을 발견한 것을 류태현조차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동안 류태현은 바닥 틈새에서 가는 바늘을 꺼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허강민은 여승아에게서 주의를 돌려, 류태현이 그 바늘로 칼끝도 들어갈 수 없는 작은 구멍 속 스위치를 제대로 찾아 누르는지 지켜보았다. 스위치를 누르고 비밀 장치가 작동되는 데에 다들 집중해 있었다.
여승아는 흉기를 찾았다고 알리지 않았다.
장치가 작동하고 열쇠를 품은 밀랍 덩어리가 굴러나왔다. 류태현과 민지은이 탄성을 질렀다.
허강민도 탄성을 지를 뻔했다. 그저 류태현과 민지은 곁에 찰싹 붙어 따라가기만 할 줄 알았는데, 칼을 보면 류태현에게 제일 먼저 알릴 줄 알았는데 혼자 감추는 쪽을 택하다니.
저렇게 보여도 상당한 공격성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억압받아온 만큼 일단 폭발하면 도리어 누구보다 격렬할지도 모른다.
미처 몰랐던 사실에 주목하느라 허강민은 그 반대쪽의 종이 상자들 틈에서 임선호 역시 선물을 챙기는 것도 눈치 못 챌 뻔했다.
“이 밀랍은 어떻게 부수죠?”
아무 것도 눈치 못 챈 류태현이 중얼거렸다.
“칼로 베어내는 것만으론 부족해 보입니다.”
“일단 하는 데까진 긁어내보면 어때?”
안승범이 제안했다.
“너무 딱딱해서 힘들면 내가 할게.”
류태현이 안승범에게 칼을 넘겼다. 안승범은 밀랍 덩어리를 조심해서 베어내기 시작했다.
기회는 지금이다. 하성철도 하무열도 열쇠에 주의를 쏟고 있는 것까지만 확인하고 허강민은 뒤로 물러났다.
이미 최악의 상황만 어떻게 피했다뿐이지 자신을 향한 불신과 적대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이 기세를 타기로 하고 허강민은 조용히 몸을 돌려 들어온 문으로 나갔다.
문을 지나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허강민은 모른 척 계속 걸었다.
“어딜 가는 거냐.”
뒤에서 임선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장실.”
허강민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런 거 일일이 물어보지 마.”
“아, 그래?”
뒤에서 임선호가 빈정거렸다.
“그것 참 믿음이 가는 소리군. 혼자 따로 떨어져서 수작부리려는 게 아니란 말이지?”
허강민은 기분나쁜 비웃음을 돌려주며 두 손을 펴보였다.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는데? 내가 여기서 혼자 네놈 죽여달라고 백선교의 신에게 기도라도 올릴까봐 무섭나?”
과연 임선호는 기세가 한층 더 험악해져서 허강민에게 다가왔다.
“방에서 안승범의 눈을 피해 뭘 숨겼지?”
“내가 뭘?”
허강민은 여전히 기분나쁜 비웃음을 띤 채, 주의 깊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켕기는 구석이 있는 사람처럼.
임선호가 소리를 지르며 허강민에게 덤벼들었다. 그의 손에 칼이 들려있는 걸 보자 허강민은 절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임선호가 허강민의 멱살을 쥐고 벽에 처박았다. 얼굴로 날아드는 칼날을 겨우 목을 돌려 피하고도 허강민은 기분나쁜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 칼은 언제 챙겼지? 나더러 몸수색 해야겠다더니 칼은 네가 가졌군. 나는 빈손이고.”
임선호가 눈썹을 꿈틀 하더니 칼 든 손을 아래로 내렸다. 허강민의 바지 주머니에 칼끝을 걸치고 죽 찢어내렸다.
칼이 날카롭고 바지는 충분히 두껍지 못했다. 주머니뿐 아니라 바지까지 찢겨나가고 드러난 살갗에 붉은 선이 그어졌다.
허강민이 칼 쥔 손목을 붙들었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14 ㅣ- 회색도시&검은방

집에 돌아오며 권혜연은 생각에 잠겼다.
배준혁이 범인이었다. 그가 배신 3인조와 최재석 관장을 죽였다. 자기 딸을 위해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분명 말이 되었다. 그는 첫 번째와 두 번째 현장에서 근처에 있다 눈에 띄었다. 세 번째에는 피해자가 죽기 직전에 단독으로 만났다.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해보니 왜 의심을 안 했는지 자신을 추궁해야할 것 같은 지경이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눈이 멀어있었던 거지?’
그가 아버지의 부하였기 때문에. 유상일을 선배라 부르며 구하려는 태도를 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했던 과거를 행복하게 기억했기 때문에.
‘아빠, 전 여전히 아빠를 사랑하지만, 아빠의 사람 보는 눈에는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네요.’
박근태 문제를 어떻게 무사히 넘긴다고 해도 아빠를 살려두려면 그 이후가 계속 고난일 것 같아 권혜연은 눈앞이 깜깜했다. 어떻게 해야 경찰씩이나 되어갖고 저렇게 대책 없이 범죄자를 잘 믿는 아빠를 무사히 지킬 수 있는 걸까.
일단은 정은창 아.저.씨.를 주워올 때 확실하게 혼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쩐지 강아지 안고 와서 ‘기르면 안 돼?’하는 애랑 혼내는 엄마 같은 구도가 떠올랐지만 무시했다.
그 외에 이런저런 아빠를 잘 타이를 방도를 고민하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권혜연은 인터폰으로 아빠를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일찍 오셨네요.”
“응. 오늘은 별다른 일이 없었거든... 안경 새로 한 거야?”
“네. 예뻐요?”
권혜연이 안경테에 손을 대고 생긋 웃었다. 권현석도 웃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권현석이 소파에 털썩 앉았다.
“너, 요새 반 애들하곤 잘 지내니?”
권혜연은 속으로 뜨끔했다. 학교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하려고 노력중이지만 그래도 티가 났을지도 모른다. 십년 새 잊어버리거나 달리 기억하고 있던 애들도 많고.
“뭐, 언제나 비슷하죠. 왜요?”
“혹시 새로 사귄 친구 중에 어른들 보기에... 음.”
“확실하게 말해봐요. 뭘 걱정하고 있는 건데요?”
학교나 애들이 뭔가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배준혁이나 허강민과 있는 모습을 누가 봤을지도 모른다. 그런 걱정에 심장을 졸이면서도 권혜연은 도리어 당당하게 나갔다. 상대가 먼저 정보를 털어놓게 한다. 심문의 기본이었다.
권현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빠 직장 상사중에, 너 또래 아들이 있는 분이 있는데, 그애가 요새 나쁜 친구를 사귀었대서.”
그런 문제였나. 권혜연은 힘이 쭈욱 빠졌다.
“네, 평소 말 잘 듣는 모범생이었는데 갑자기 부모하곤 말도 제대로 안 하려 들고 잔소리하면 문 쾅닫고 들어가고 그런다 이거죠?”
“그...게 정상인 건 나도 알아!”
안경에 이어 또다시 말이 안 통하는 아빠 취급을 받았다고 생각한 권현석이 매우 억울해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치만... 그쪽은 진짜로 심각하다고. 그 친구라는 애가 본청에까지 잡혀올 만큼.”
그건 과연 심각했다. 권혜연은 아빠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기로 했다.
“와 그건 진짜 심하네요.”
“그치? 그래도 아들 친구라고 국장님이 직접 아동청소년과까지 가서 부탁하고 그래서 가출 청소년 보호시설에 넣었다던데, 그런 거 하실 분인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걱정 말아요, 아빠. 제 친구 중엔 그런 애 없어요.”
권혜연이 아빠 옆에 나란히 앉았다.
“공부가 바빠서 친구 새로 사귈 시간도 없는걸요.”
그건 사실이었다. 스물여섯이나 먹어서 중학교 과정 정도에 쩔쩔매야 하다니 자존심 상하지만 열심히 하지 않으면 얼마 남지도 않은 기말고사가 폭망 확정이었다.
“실은 그것도 참 이상해. 대체 어떻게 친구가 된 거지?”
권현석이 고개를 기울였다.
“나이도 사는 지역도 완전히 다른데. 학교를 같이 다니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달라요?”
권혜연이 깜짝 놀랐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한두 살도 차이가 컸다. 같은 학년이 아니면 친구가 되긴 어려울 것이다. 아직 인터넷이 보급된 시대도 아니고.
“그래. 그 친구란 애가 너랑 동갑이어서 기억하고 있는 거거든.”
“혹시 이름 알아요? 그 중학생이든 국장님 아들이든.”
“국장님 아들 쪽은 하태성. 문제아 쪽은 허뭐였는...데.”
권현석이 권혜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는 사람이니?”
“아뇨.”
“정말로?”
권현석이 딸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맥이 이렇게 빠른데? 뭘 감추고 있어?”
아 우리 아빠 경찰 맞았구나, 라고 새삼스러운 생각을 하며 권혜연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이걸 설명하려면 진실을 몽땅 털어놓는 것 외에 해명 방법은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 털어놓자니 허강민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다. 설령 시간여행은 믿고 납득해준다고 해도 연쇄살인마와 협력하는 건 반대할 지도 모른다.
“아빠.”
권혜연이 잡힌 손목을 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사춘기이고, 사춘기 청소년은 부모에게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는 거에요.”
“혜연아? 하지만...”
아빠가 뭐라 더 말하기 전에 권혜연은 벌떡 일어나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갔다. 문을 쾅 닫고 잠가버렸다.
“혜연아? 혜연아!”
“곧 시험기간이거든요! 공부해야하니까 시끄럽게 하지 말아요!”
책상에 책을 펼쳐놓으며 권혜연은 배준혁이 사준 삐삐와 허강민이 준 휴대폰을 꺼냈다.
연쇄살인범에게서 받은 연락수단 두 개를 노려보다 권혜연이 휴대폰을 잡았다.
지금 삐삐는 의미 없었다. 지금 전화를 받을 방법이 이 휴대폰뿐이니까. 자기가 진짜로 이 나이였을 때에는 무척 갖고 싶었던 최신 기기가 아무 쓸모없는 구닥다리로 느껴졌다. 권혜연이 폰으로 문자를 찍었다.
[권혜연입니다. 아빠 팀의 국장님 아들인 하태성이 다니는 고등학교를 찾아서 저한테 알려주세요. 역시 왔을지도 몰라요.]
하태성의 아버지도 이 사건 관계자라니 운명은 정말 얄궂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문장을 쳐다보다 ‘아빠’를 ‘권현석’으로 고쳤다가 다시 ‘박근태’로 고쳤다.
처음에는 배준혁에게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허강민이 오늘 해준 말이 떠올랐다. 현직 형사보다 현직 범죄자를 믿어야 하다니 자괴감이 들었지만 지금은 중요한 정보를 배준혁과 공유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권혜연은 허강민의 번호를 넣고 전송 버튼을 꾹 눌렀다.
<문장이 45자를 초과하여 전송할 수 없습니다.>
‘아 정말 싫다 90년대.’


권현석은 요새 주위 상황 돌아가는 꼴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도진은 아직도 회유에 버티고 있고 김성식은 노골적으로 백석과 직접 손잡으려 들고 있다. 선진화파에선 언제 또 숙청이 시작될지 모르는데 수사팀까지 저마다 개인사가 터졌다.
국장님은 아들 걱정에 정신이 나간 것 같고 근태형은 또 고민이 있어 보이고 - 분명 홍은희씨 아버지 문제일 것이다 - 빠릿빠릿하던 준혁이까지 요새는 딴생각에 여념이 없어 어딘지 붕 떠 있었다. 심지어 권현석 자신도, 혜연이가 왜 하태성이란 이름에 반응을 보였는지 대체 어디에 쫓아가서 누구 멱살을 잡아야 할지 고민하느라 업무에 집중하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그나마 서재호가 요새들어 서류를 좀 덜 쏟는 게 한 가닥 마음의 위안이었다. 우리 수사팀 어쩌다 이렇게 고소한 콩가루가 된 걸까 고민하고 있는데 잠입요원에게서 첩보가 왔다.

장산 병원. 그 말을 듣는 순간, 배준혁은 도세훈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번 작전이 성공해야 했다. 성공해서, 백석 문건을 경찰이 확보하고 선진화파와 백석의 관계를 지금 밝혀야 박근태와 장희준은 유착할 수 없고 장지연은 박근태와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배준혁에게 장산병원 작전은 그런 의미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과정에 죽은 사람이 안 죽으면 안 될 것도 없었다.
도세훈의 장례식은 배준혁이 경찰이 되어 처음 참석한 순직 경찰의 장례식이었다. 이 잠입 작전으로 이미 많은 경찰이 죽은 건 알고 있지만 이름도 얼굴도 존재도 모르던 사람들보다 날마다 얼굴 보고 같이 근무하던 사람의 죽음이 특별하게 와닿는 건 당연했다.
연쇄살인범인 자신에게 이런 생각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배준혁은 기왕이면 도세훈도 살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그에게 뭐라고 귀띔해줄 시간도 없고 시간이 있었다 해도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서둘러! 지금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은 전부 나가!”
경감님의 재촉을 귓등으로 들으며 준혁은 휴대폰에서 허강민의 번호를 찾았다. 병원 내부에서 일은 자신이 처리하더라도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맡을 사람이 필요했다.
‘경찰 작전을 범죄자에게 가르쳐줘야 하다니.’
경찰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도세훈도 권현석도 그 외 작전이 장기화되어 더 죽어갈 잠입 요원들도. 그렇게 생각하며 준혁은 허강민에게 전화했다.


“허강민씨, 뭐하세요?”
양시백이 작업실에 들어와 문을 똑똑 두드렸다. 책상 앞에 앉아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허강민이 고개를 들고 기지개를 켰다.
“너냐. 일하는데 방해하지 마라.”
“그러니까 무슨 일 하냐고요.”
양시백이 그에게 다가가 물병을 내밀었다.
“네가 알아서 뭐하게?”
“돕는다거나.”
“글쎄다, 내가 돌을 산꼭대기로 굴려올리고 있는 거라면 네가 도울 일이 있겠지만.”
고개를 흔들고 허강민은 마지못해 물병을 받아들고 한 모금 마셨다.
“놔둬도 나 안 말라죽어.”
“물은 많이 마시는 게 건강에 좋대요.”
“것도 십년 뒤 유행이냐?”
“그럼 어때서요.”
“뭐가 어떻다기보다.”
허강민이 책상 위로 고개를 돌렸다. 넓은 흰 종이에 양시백은 알아볼 수 없는 문자가 끄적여져 있었다.
“뭔가 안 풀리는 거에요?”
안다고 자기가 도움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시백이 물어보았다.
“니네 선생님.”
뜻밖에 허강민이 대답을 했다. 시백은 대답과 내용 양쪽에 놀랐다.
“네? 선생님이 왜요?”
“아니 그 사람에게 뭔일이 있다는 건 아니고.”
순식간에 걱정하는 기색이 된 양시백을 허강민이 조금 째려보았다.
“난 그놈이 마법사라고 생각한다.”
“네?”
시백이 펄쩍 뛰었다.
“그, 그럴 리 없어요.”
“어째서? 그럼 연쇄살인범인건 그럴 리 있었어?”
“그건 아니지만....”
시백이 우물쭈물했다.
“그.... 마법사라면 그렇게, 힘들게 사람 이용해가며 발품 팔아가며 그럴 필요는 없었을 거 아니에요.”
“그건 그렇지.”
허강민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럼 대체 누구지. 이미 죽었거나 어쩌면 존재 자체가 지워져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어. 이 마법이 그만큼을 요구하는 거라면 난 어쩌지.”
“그, 그런 건 아닐 거에요!”
양시백이 위로하려고 했다.
“그... 마법사도 뭔가 원하는 게 있어서 마법을 썼을 텐데, 그렇게 자기가 홀랑 없어져버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 허강민씨도 분명 동생을 다시 만날 수.”
“내가 없어지는 건 상관이 없는데 그럼 시간 역전을 배워서 쓸 수 없으니까 문제인 거라고.”
허강민이 짜증을 냈다.
“너희들 중 누구거나 너희 근처 누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어디에 숨어있는 거야.”
“그게 문제에요?”
“역시 배준혁이 죽는 순간에 발동한 것 같으니까, 그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주고 싶어 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는 게 자연스러울 텐데. 누군가 그 놈을 그렇게 애틋하게 생각했을 만한 사람도 없고.”
말하다 말고 허강민이 양시백을 쳐다보았다.
“너 말고.”
“아, 저 벼 별로 애틋하다거나 그런 건 아닌...”
허강민의 전화가 울렸다. 액정 화면을 보고 그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별명이 양반이라더니.”
-용건만 말합니다. 오늘밤 장산병원. 최대한 빨리 와주십시오. 외부경계 경찰이 안에 못 들어가게, 죽지 않게 해주세요.
전화가 끊겼다.
“별로 양반은 못..... 음.”
허강민이 잠시 꺼진 전화를 바라보다 주머니에 넣었다.
“장산병원이라. 거기가 전환점같다고는 예전에 얘기한 적이 있지만.”
허강민이 일어섰다.
“거기서도 누가 죽었던가?”
양시백은 지하실의 2번 화이트 보드에 펼쳐진 ‘선진화파-수사팀 타임라인’을 떠올렸다.
“거기서 경찰 떼로 죽었다고 되어있지 않았어요?”
“그래. 잠입요원들. 하지만 우리하곤 상관 없.”
양시백의 표정을 보고 허강민이 헛기침했다.
“...안 죽게 하러 가면 되잖아. 너도 와.”
허강민이 겉옷을 걸쳐 입고 차키를 챙겼다. 시백은 굳은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랐다.



검은 남자 51 ㅣ- 회색도시&검은방


여승아는 류태현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자신 때문에 입은 상처. 그러나 자신이 치유해줄 길 없는 상처.
처음 초대장을 받았을 때, 초대장을 보낸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 줄 알았다. 자신이 한 짓까지도.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허강민의 입에서 그 이야기가 나오리란 공포가 죽음의 공포마저 압도하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살고 싶어서, 태현이와 함께 살고 싶어서 그런 짓까지 한 주제에 이제는 사실을 밝히느니 죽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을 밝힐 수는 없다는 강박과 들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양쪽에서 죄어드는 톱니바퀴처럼 정신을 짓눌렀다. 그 결과가 함묵증이었다.
하무열 형사는 증상도 원인도 결국 눈치챘다. 굳이 태현이가 없을 때 찾아와 그 이야기를 하고, 이미 들켰으니 털어놓고 후련해지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하무열 형사 나름의 배려라는 걸 모를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그 배려도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저 태현이에게 계속 비밀로 해달라는 쪽지를 써서 내밀었을 뿐이다.
태현이가 자신을 보고 미소지었다. 백화점 사건 이후 자주 보게 된 다정하고 애틋한 미소였다.
사건 이전에도 여승아와 류태현은 서로 사랑했다. 기념일도 정성들여 챙기고 한눈 판 적도 없었다.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미래도 진지하게 고려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니라는 사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세상의 수많은 연인들이 자신들처럼 만나서 사랑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헤어지고 또 살아갔다.
상대를 지키기 위해, 그의 애인으로 존재하기 위해 저버린 것들과 빼앗긴 것들을 곱씹고 그러면서도 서로가 여전히 사랑한다는 사실 하나에 안도해 새벽녘에야 잠드는 지금 같은 사랑은 꿈꿔본 적 없었다.
태현이는 자신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버티고 있었다. 자신 역시 그랬다.
사건 당일의 진실로부터 그를 보호하겠다.
그렇게 태현이를 지키고 나를 지킨다.
밀실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여승아는 그 결과를 곱씹었다.
차라리 우리 둘 다 백화점에서 죽었더라면.
그 말을 전했을 때 자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솔직했다.
태현이를 부축하고 있을 때 나타난 그 아이를 뿌리치지 못했다면. 그래서 두 사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자신이 주저앉고 그 위로 잔해가 무너졌다면. 세 사람이 다 깔려 정말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아이의 다리를 자른 2차 붕괴가 일어났다면.
그랬다면 적어도 이 고통은 모른 채 쉴 수 있었을 텐데. 백화점 전체가 자신을 짓눌렀다 해도 지금 자신을 짓누르는 죄의 무게보다는 가벼웠을 텐데.
“승아야.”
류태현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괜찮을 거야. 내가 계속 지키고 있을 테니 조금이라도 자.”
승아는 고개를 저었다. 부상도 채 낫지 않은 상태에서 창백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괜찮아.”
류태현이 다시 자신만만하게 웃어보였다. 손이라도 잡아주려는 듯 오른손을 내밀려다, 국장님의 넥타이만으론 역부족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뒤로 감췄다.
네가 더 상태가 나쁘니 네가 쉬어야 해. 라고 말하고 싶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태현이가 하고 싶은 대로 지키게 해주자. 이제까지 그랬듯이. 그렇게 결심하고 여승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슬슬 일어날까.’
안승범은 돌아누워 꼼짝도 않는 허강민을 바라보다 몸을 뒤척였다. 민지은의 창백하던 안색이 생각났지만 이런 곳에서 언제까지고 느긋하게 쉴 수도 없었다.
너무 오래 누워있어봐야 일어나기만 힘들어진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몸을 일으켰다.
“어이, 허강민.”
한 번 불렀을 뿐인데 허강민은 바로 일어났다. 자다 깨지 않은 게 분명했다.
“이만 가자고. 다른 사람들도 괜찮은가 보고.”
지난번 밀실에서 바로 자기 자신이 했던 짓이 떠올라 안승범은 자기가 말해놓고도 오싹 떨었다.
하지만 이 부근엔 사람을 손쉽게 해칠 만한 설비가 없었다. 자신도 여기 누운 동안 잠깐 정도는 졸았던 것도 같지만 허강민이 일어나 나갔다 오거나 무슨 짓을 했다면 눈치챘을 것이다. 그것도 모를 만큼 곯아떨어지지는 않았다.
지금도 경계하고 있었다. 앞장서서 문을 열면서도 뒤에서 허강민이 허튼 짓 하지 않나 조심스레 곁눈질했다.
그 덕분이었다. 허강민이 일어서면서 족자 뒤에 한 손을 재빠르게 넣었다 빼는 걸 하마터면 눈치 못 챌 뻔했다.
“네놈!”
일부러 더 크게 소리지르며 허강민에게 덤벼들었다. 한손으로 허강민의 오른손을 비틀어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족자를 잡아당겨 떼었다. 역시 낡은 족자라 쉽게 찢어져 벽에서 떨어졌다.
족자 뒤엔 먼지투성이 벽뿐이었다. 허강민의 손에도 흉기 같은 건 없었다.
“갑자기 웬 난리지?”
허강민이 차갑게 물었다. 힘주어 손을 뿌리치려 하지도 않았다.
“안승범 씨!”
민지은이 문을 벌컥 열었다. 그 뒤로 장혜진과 하무열, 임선호 등이 나타났다.
당장 안에 큰일이 나지 않은 걸 보고 민지은은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안승범도 조금 진정했다.
“무슨 일이 난 건가?”
하무열이 묻자 안승범은 허강민을 가리켰다.
“방금 그러니까, 이놈이 족자 뒤에서 뭔가 슬쩍 꺼내 감췄거든?”
“내가 뭘 꺼내 감췄는데?”
허강민이 심드렁한 얼굴로 질문했다.
“그것도 어디서 꺼내? 그냥 벽인데.”
류태현이 안으로 들어가 족자가 걸려있던 벽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안승범이 쥐고 있던 족자도 받아들어 앞뒤로 살펴보고 털어도 보았다.
“뭘 숨길 만한 비밀 주머니나 공간 같은 게 전혀 없는데요.”
“분명히 봤다고!”
안승범이 허강민을 움켜쥔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외쳤다.
“저놈이 일어서면서 벽 짚는 척 족자 뒤에 손 넣는 거!”
“벽 짚는 척이 아니고 진짜 벽을 짚은 거다.”
허강민은 이제 드러내놓고 안승범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안승범은 대꾸하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당장이라도 바른대로 털어놓을 때까지 두들겨주고 싶은데 보는 눈이 많은 데다 허강민 자신이 전혀 저항하지 않으니 선뜻 손이 나가지 않았다.
“몸수색을 해보면 어때?”
뒤쪽에서 임선호가 제안했다.
“그럴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허강민은 얇은 셔츠에 바지를 입었을 뿐이라 뭔가 감춰 봐야 옷 위로 다 드러날 게 뻔했다. 바지 주머니는 바지에 착 붙어있었다.
하무열도 방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족자도 다시 살펴보고 벽도 쓸어도 보고 두드려도 보았다.
“역시 뭔가 숨겨놨던 흔적은 없어.”
하무열이 그렇게 말하자 류태현도 건조한 목소리로 응답했다.
“이번만은 안승범 씨가 경계심이 지나쳐서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안승범은 허강민의 손을 놓았다. 허강민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방을 나갔다.
“어디, 이번엔 자는 사이 누가 죽었나 볼까?”
모두의 험악한 눈초리를 한몸에 받으면서도 하무열은 태연히 복도에 나온 사람들을 헤아려 보았다.
이번에는 빠진 사람이 없었다. 한 사람도.
서로 신기해서 둘러보고 세어도 봤지만 다들 살아있었다.
“이거 꽤 고무적인 일이군.”
하무열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만은 이 기세를 몰아 전원 생존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사람들의 기색이 밝아지는 걸 보고 정은창은 방금 하무열이 일부러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그랬다고 확신했다. 격려하고 나아가 허강민에게서 주의를 돌리게 하기 위해. 정말로 다들 기색이 밝아져서 앞으로 돌파할 일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정은창은 자신이 황도진을 죽이러 갔을 때를 생각했다. 그때 자신이 했던 것처럼 허리띠 안쪽에 작은 칼을 숨겼다면 허강민의 저 옷차림으로도 드러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작은 칼로도 살인은 가능했다.


다음 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사람들은 허강민에게서 미묘하게 거리를 두게 되었다.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봐야 상대는 허강민이었다. 이 미궁의 함정 대부분을 직접 만들었고 실제로 강성중도 모르던 약품 장치를 통해 마법진인지 뭔지를 부쉈다. 같은 방식으로 흉기를 손에 넣거나 자신만 아는 함정을 작동시켰을 수도 있었다.
겉보기로는 지나칠 정도로 아무 꼬투리도 잡을 수 없는 것이 더 사람들을 자극했다. 당장 드러나게 통제할 명분이 없으니 이제까지와 똑같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 점이 사람들을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허강민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까까지와 똑같은 태도로 걷고 있었다. 누구한테 말 거는 법도 없고 더 조심스러워지거나 나서는 기색도 없었다.
“계단 조심하세요.”
층계참까지 내려왔을 때 허강민이 중얼거렸다.
“저 아래 계단 어딘가에 낚싯줄을 매뒀거든요.”
지금은 불을 밝힐 수단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좁고 가파른 데다 줄까지 쳐져 있는 계단을 불빛도 없이 무슨 재주로 내려가라는 건가 다들 잠시 암담해서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 얘기를 왜 이제 하는 거야?”
안승범이 이를 갈며 물었다.
“왜, 좀더 일찍 했으면 뭔가 한결 나아질 이야기였나?”
이 계단 말고 다른 길은 없었고 불빛이 없는 것 역시 미리 알고 불을 준비할 수 있었는데 안 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놓은 놈이 뻔뻔하게 이죽거리고 있으니 안승범은 속이 끓었다.
“층계를 절반이나 내려온 뒤에 이야기한 저의가 뭐냐는 거다.”
임선호가 끼어들었다.
“네놈이 이 아래쪽에 줄을 쳐놨었다 해도 강성중 놈이 뭔가 또 수작을 부렸을 수도 있었잖아. 계단 맨 위에서 말할 순 없었어?”
“아무튼 여기까지는 무사히 내려왔잖아.”
허강민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피곤하게 꼬투리 잡을 시간에 아래쪽까지 무사히 내려갈 준비를 하자고.”
“벽에 두 손을 짚고 옆으로 붙어서 내려가면 어떨까요?”
류태현이 제안했다.
“그러면 발이 줄에 걸리더라도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려있지 않으니 넘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는 시범을 보이려는 듯 벽에 붙으려 했다.
“아니, 그러자면 자네가 앞장서면 안 되지.”
하무열이 류태현을 말렸다.
“그 오른손으로 짚은 벽을 뒷사람들이 다 손으로 짚고 몸으로 훑고 가야 되잖나. 계획은 괜찮으니까, 자네는 맨 뒤에 서게나.”
류태현은 갈굼당한 기색이 되어 뒤로 물러났다.
“그럼 제가 맨 앞에 서죠.”
정은창이 얼른 나섰다.
“그럼 되겠죠?”
하무열이 별 반대 않자 정은창은 잽싸게 벽에 붙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그를 따랐다.
“아, 줄 찾았습니다.”
계단 중간까지 왔을 때 정말로 발이 걸렸다.
정은창은 조심스럽게 그 자리에 앉아 줄을 더듬어 잡았다. 벽에 작은 못을 박고 묶었는데 매듭이 워낙 작고 단단해 손으로 푸는 건 무리였다.
“민지은 씨, 칼 좀 주세요.”
중간에 서 있던 민지은이 칼을 앞쪽으로 넘겼다.
정은창은 낚싯줄을 끊고 나서도 계속 벽에 붙어서 내려갔다.
“줄이 또 있거나 할지도 모르니까요. 정말로 강성중이 손대놨다면.”
마지막 단까지 두 번째 줄은 없었다. 그래도 정은창이 과민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민지은 씨, 칼 여기요.”
정은창은 자진해서 칼을 돌려줘버렸다. 무기를 챙겨두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걸 티낼 수는 없었다.
안승범과 임선호를 필두로 허강민을 향한 의심과 적대감은 눈에 띄게 커져가고 있었다. 여차할 때 나설 수 있을 만큼 자신만이라도 신용을 쌓아둬야 했다.


계단을 다 내려오자 짧은 복도 끝에 두껍고 큰 문이 있었다. 의외로 잠금장치는 없어서 쉽게 열고 들어갔다가 다들 멈춰섰다.
“소각로가 있었다더니.”
하성철이 기가 막혀 중얼거렷다.
문을 열고 들어간 복도는 좁은 데다 바로 옆에서 열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커다란 소각로 바로 옆에 난간 하나 없는 좁고 위태로운 통로를 만들어놓고 거길 지나가라고 해놓았다. 바닥 재질도 금속이었다.
“통로 그렇게 안 좁습니다. 오른쪽 옆의 풍경에 너무 신경쓰지 말고 똑바로 걸어가면 돼요.”
뻔뻔하게 설명하는 허강민을 임선호가 노려보았다.
“네놈은 저게 신경 안 써지냐?”
“복도 자체엔 함정이 없는 건가요?”
류태현이 끼어들자 허강민은 삐딱한 표정을 류태현에게 향했다.
“그래.”
임선호를 볼 때보다도 더한 거부감에 류태현은 막막했다.
승아까지 납치되었을 때는 분노에 사로잡혀 죄의식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러나 승아와 무사히 다시 만났고 다른 사람들도 무사해서인지, 허강민도 바둑돌 신세가 되어서인지 지금은 그렇게까지 분노가 솟지 않았다.
일단 여기서 다 같이 살아나갈 수만 있다면 허강민을 향한 분노나 원망은 접어둘 수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은행에서 만났을 때 자신은 또다시 허강민을 화나게 하고 말았다. 강도들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지만 결국 허강민의 속을 긁은 건 자신의 말이었다. 강도들이 크게 방해가 되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와 다시 말해보고 싶었다. 제대로 사과하고 싶었다.
이 끝나지 않는 악몽을 끝낼 수 있다면.
그도 자신도 죽지 않고 그럴 수 있다면.
자신은 허강민도 살리고 싶었다.
독가스가 피어오르는 퍼즐 방에 처음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사람이 쓰러져 있던 허강민이었다. 막 퍼즐을 풀고 문을 열고 있던 무열 선배도, 자신을 알아보고 민지은 곁에서 모습을 드러낸 승아조차도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승아보다 허강민이 먼저 눈에 띈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류태현은 속으로 자신을 질책하며 승아에게 달려가 그 손을 잡았다. 그러나 문이 열리고 다들 가스를 피해 뛰는데 허강민 곁에 장혜진뿐인 걸 보니 참을 수 없었다. 정신차려보니 한 손엔 승아를, 다른 한 손엔 허강민을 잡고 뛰고 있었다.
지금도 허강민에게 그중 가까이 붙어있는 장혜진을 바라보았다. 폐선 때를 생각하면 지금 같은 때 허강민보다는 다른 의지할 만한 사람을 찾아볼 법도 한데 도리어 끝까지 그를 감쌀 기세였다.
머리도 염색했고 인상이 좀 달라졌어도 여전히 미인이었다. 그때 이후로 쭉 허강민의 공범으로서 가까이 지낸 기색이 뚜렷했다.
키는 작지만 여자의 작은 키는 남자만큼 감점요소는 아니고, 영리하고 용의주도한 면은 허강민에게는 꽤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13 ㅣ- 회색도시&검은방


장희준은 아까 들은 보고를 되새기고 있었다.
시간의 인과가 바뀌었고, 그 진원지는 서울지방 경찰청이다.
이걸 뭐라 해석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미래에서 아마도 건너왔을 누군가가 경찰이라는 건지, 경찰에게 뭔가를 했거나 안 한 건지, 아니면 단지 그 지역에서 일이 일어났거나 안 일어난 건지.
일어날 일이 일어나지 않은 쪽일 거라고 장희준은 생각했다. 개인적인 흥미로 그쪽에는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지만 미래를 뒤흔들 만한 커다란 일이 최근 일어난 건 보지 못했다.
그가 비서를 호출했다.
“점을 새로 쳐주게. 박근태에 대해서.”
그는 자기 사람이 될 예정이었다. 그것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경찰청에 무슨 문제가 생기든 장희준에게는 직접 상관 없는 문제였다. 자기 사람이 든든하게 박혀있다면 변화를 더 유리하게 이용할 여지조차 있었다.
변화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두려움에 떨며 몸을 사리고 있었다. 가진 것이 많은 자들이 혹여 잃을까 두려워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두려워만 해서는 기회를 낚아챌 수 없었다. 딸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변화에는 우선적으로 대처해야했다.
“점괘가...나오지 않습니다.”
강재인이 당혹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이전에는...”
“미래의 변화에 대해 알고 있나?”
“네?”
강재인이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도 알 때가 되었지.”
장희준이 웃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시키는 일중에, 납득가지 않는 일이 좀 있었겠지?”
강재인이 예의바르게 무표정을 만들었다.
“저는 회장님의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그래. 앞으로도 그러는 게 좋을 게야.”
장희준이 말했다.
“김성식보다는 내가 자네에게 줄 수 있는 게 더 많으니까.”
강재인의 무표정이 얼어붙었다.
“미래에 대해 알고 싶나? 단, 알면 김성식에게는 돌아가지 못해.”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강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께서 거둬만 주신다면, 그런 남자에게 돌아갈 이유는 조금도 없습니다.”
“그래. 그게 힘을 가질 자의 자세지.”
강재인이 가슴뛰어 하는 걸 장회장은 잠시 음미했다.
“자네는 지연이에게도 잘해줬지.”
장희준이 운을 띄웠다.
“그 애를 수행해 여기저기 다니기도 했고 말이야.”
어떤 말이 뒤따를지 몰라 강재인은 잠자코 들었다.
“그 애가 다니는 ‘센터’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지?”
강재인 알기로 ‘센터’는 교회도 절도 아닌 이상한 종교 단체였다. 정식 명칭이 따로 있는 것 같았지만 건물 간판에는 무슨 심리 상담 센터라고만 되어있었고 참가자들도 센터라고만 불렀다. 장희준도 다니고 있지만 둘이 같은 때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강재인 보기엔 다소 이상한 일이지만 장지연은 둘의 참여 프로그램이 다르다는 식으로 얼버무렸다. 강재인은 그들이 사이비답게 장지연의 언어장애를 치료한답시고 말하기 훈련이라도 시키고 있는 거라고 추정했다.
“두 분이 믿으시는 종교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조금 복잡하지만 그렇게 이해하는 게 가장 가깝지.”
장희준이 미소지었다.
“지연이는 거기서 마법을 배우고 있네.”
강재인조차 여기에는 멀쩡한 얼굴을 하지 못했다.
“.......네?”
“아비니까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는 모든 걸 해주고 싶다네.”
장희준이 어쩐지 먼 곳을 보았다.
“하지만 그 애에겐 회사를 물려줄 수도 권력을 쥐어줄 수도 없지. 여자일 뿐만 아니라 장애까지 있으니까.”
뭐라 할 말이 없어 강재인은 ‘네’라고만 대답했다.
“그래서 그런 것을 쥘 수 있는 남자를 사위로 삼고, 지연이에게는 그 모든 걸 배후에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주려고 하네.”
뒷세계의 여왕 같은 걸 만드시게요, 란 말이 목까지 튀어나왔지만 겨우 참았다. 자기의 인내심을 칭찬하며 강재인은 이 새로 얻은 지식, 즉 백석의 회장이 노망이 들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용하는 게 좋을까 궁리했다.
“그런데 자네도 방금 점쳤지만 그 계획의 일부인 박근태가 미래의 영향을 받아버렸군.”
상사의 헛소리를 들어 넘기는 것도 비서의 업무 중 하나라고 강재인은 열심히 생각했다.
“아, 그래. 순서대로 설명해야 이해가 가겠지. 미래 어느 시점에선가 누군가가 현재로 넘어왔네.”
“....타임머신 같은 건가요?”
더는 도저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마법으로. 그리고 그게 누구이든 내 큰 그림을 방해하고 싶은 모양이야. 그러니 누군지 알아내야 해.”
그것 참 후보가 넘친다고 강재인이 생각했다.
“센터에 이야기를 해 놓을 테니 자네도 마법에 대한 훈련을 받게. 그리고 그쪽의 마법사들과 협력해서 경찰청을 감시하도록. 분명히 박근태 근처에 있는 자일세.”
“예, 알겠습니다.”
“마법사로 키워진 자들은 역시 좀 시야가 좁단 말이야. 세상을 잘 알고 있는 자네라면 더 새로운 관점에서 보고 성과를 낼 수 있을 거라 믿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어나며 강재인은 이런 얘길 누구에게 털어놓고 의논해야 할까 고민했다. 어째서인지 얼마 전에 김성식이 인사랍시고 찾아왔을 때 데려왔던 딱가리가 떠올랐지만 털어버렸다. 그런 놈이 도움이 될 리 없었다. 차라리 지연아가씨에게 털어놓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강재인은 장희준보다는 장지연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권혜연이 안경을 쓰고 거울을 보았다. 가는 빨간 테가 제법 잘 어울렸다.
“이거 괜찮아보여요?”
권혜연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허강민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금속이라. 그래, 나쁘지 않겠다. 전도율도 높을 거고.”
“뭐에요 그게.”
권혜연이 입을 비죽 내밀었다.
“하는 사람 마음에 드는 게 중요하지. 이걸로 주세요. 알은 도수 없는 유리로.”
도수 없는 안경을 왜 하냐고 되물을 법도 하건만 안경사는 별말 없이 테를 받아들고 안경을 가공해왔다. 허강민이 값을 치르고 두 사람은 근처 햄버거 가게로 자리를 옮겼다. 앉아서 바로 허강민은 준비해온 테이프 같은 것을 안경에 감고 뭐라 중얼거렸다.
“깜짝 놀랐어요. 배준혁씨와 같이 오실 줄 알았는데.”
“그 사람도 형사니까 퇴근하기 기다리다보면 너희 아버지도 퇴근할 거 아냐. 몰래 해야지.”
“그건 그렇지만.”
허강민이 테이프를 도로 풀고 권혜연에게 안경을 도로 내밀었다. 권혜연이 안경을 받아들고 썼다.
“아빠는 따돌려져서 무지 슬퍼했는걸요. ‘아빠 아직 그렇게 안 늙었는데, 안경도 같이 못 고를 만큼 노인네 아닌데~’ 하면서.”
흉내내며 권혜연이 킥킥 웃었다.
“좋아?”
허강민이 물었다.
“네? 네, 시야 가장자리가 좀 신경 쓰이지만 보는 덴 지장 없고....”
“안경 말고. 아버지 살아있는 거.”
권혜연이 허강민을 바라보았다. 그가 시선을 피했다.
“그야 당연히 좋겠지만.... 그, 어색하거나, 뭐 그런 거. 권순경 본인 입장에선 스물여섯이잖아? 그런데 갑자기 애취급 당하면 짜증날 거고.”
“좋아요. 엄청나게.”
권혜연이 확실하게 말했다.
“그러니 당신도 가족을 되찾고 나면 행복할 거에요.”
“...그래.”
허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콜라를 마시면서 권혜연은 눈앞의 인물을 관찰했다.
허강민 사건에 대해선 물론 알고 있었다. 순경 시험 볼 때 역대 주요 연쇄 살인범이 저지른 사건과 수법 분석 등을 공부했으니까. 그가 과거로 가서 가족을 구하고 그래서 밀실을 안 만들게 된다면 외울 게 줄어드니 장래 경찰들에게도 좋은 일을 하는 거라고 권혜연은 생각했다.
꺼림칙하거나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래도 죽은 가족을 살리고 싶다는 그 심정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가족을 되찾고 그래서 범죄도 안 저지른다면, 그런 일을 돕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저 허... 흠흠.”
말하다 말고 권혜연이 헛기침했다.
“왜 그래?”
“안 되겠어요, 당신 가명이라도 하나 정해야지.”
“가명?”
허강민이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런 게 필요한데?”
“.....수배범 주제에 지금껏 그런 게 필요 없던가요?”
지금은 아니지만 십 년 뒤에 경찰이었던 사람으로서 마법사든 뭐든 수배범이 본명 쓰며 당당히 돌아다닐 수 있는 건 좀 싫다고 권혜연이 생각났다.
“아, 예전에 위조신분증을 만든 적은 있어.”
허강민이 말했다.
“도피용으로. 하지만 공항은 너무 걸릴 위험이 높아서 못 썼고, 그 후론 백선교에 포섭당하고 나니 딱히 필요가.”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권혜연은 머리가 아파왔다.
“그 백선교란 곳은 도대체...”
“모르는 게 좋아.”
허강민이 말했다. 별다르게 목소리를 높인 것도 표정을 굳힌 것도 아닌데 그 말만으로 진짜로 모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권혜연은 마른침을 삼켰다.
“뭐 그건 그렇다 치죠. 하지만 가명은 있어야 해요.”
“왜?”
“왜냐니, 이런 공공장소에서 본명 부를 수는 없잖아요. 누가 듣고 신고하면?”
“이렇게 시끄러운데서 옆 사람 이름이 들린다고?”
권혜연은 그냥 ‘내가 부르기 불편해서’라고 이유를 댈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허강민이 먼저 말을 돌렸다.
“너는 그 미래의 사건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지?”
“별로 많이는 몰라요. 내가 아는 건 다 배준혁씨도 알고 있을 거에요.”
“말해봐. 다른 관점에서 듣고 싶으니까.”
“누가 들으면요?”
“소설 얘기라고 생각하겠지.”
권혜연은 할 말이 없었다. 사흘 동안 다섯 건의 살인이 발생한 유괴사건. 최재석을 찾아 나서기 전 자기라면 소설로도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했을 것이다. 심지어 그 직후 십 년 전으로 날려온 데다 자칭 마법사라는 또다른 연쇄살인범과 만나기까지 하다니, 이쯤 되면 판타지로 봐도 설정이 너무 무리수였다.
‘그치만 그 무리수 설정 때문에 아빠가 살아있단 말이지.’
도피는 적당히 해두고 권혜연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재 아저씨가 마침내 아빠 경찰 수첩을 넘겨준 것부터 해서, 최재석 추적이 유상일 추적으로, 배신 3인조 추적으로 변하다가 서재호와 오미정 만나고 계속 살인이 나고 방해하던 사람들까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 하며 결국 자기는 홍설희를 찾으러 가고 양시백과 배준혁은 백석빌딩으로 쳐들어가기까지.
“...결국 폭탄은 폭발했지만 저도 설희도 다치지 않게 구해내는 데는 성공했고, 그 직후 배준혁씨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총소리가 났어요. 박근태가 배준혁씨를 쐈다고....”
“그 직후 그 사람이 죽었고, 넌.... 학교였어 집이었어?”
“수학시간이었어요. 어찌나 황당하던지.”
권혜연이 고개를 저었다.
“가만, 그렇게 생각하면 이...... 과거 여행? 이게 일어난 시점은 배준혁씨 사망 시점이 되네요.”
“그렇지? 나도 그 사람을 의심하고 있어.”
허강민이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십 년 후에 그가 뭔가 수상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한 거 뭐 없어? 살인 말고.”
“의심이라면 어떤 거요? 아니 근데 살인 말고라니....”
말하다 말고 권혜연이 눈을 크게 떴다.
“무.... 그거 꼭 살인을 한 게.”
“뭐야, 그 녀석. 너한텐 말 안했냐.”
허강민이 혀를 찼다.
“그놈이 범인이야. 네 건 다. 양시백에겐 고백했어. 죽기 전에.”
“그.... 뭐..... 무슨........... 그런데 왜.”
“글쎄? 말할 만큼 중요한 상대가 아니라고 무시했거나, 말했다가 미움이나 경멸을 받을까 무서울 만큼은 존중했거나?”
“그런 건 존중 아닌데요. 그리고 왜 저한테 숨겼나보다 왜 그런 짓을 했는가 쪽이 궁금해요.”
“박수정이 자기 딸이라서, 그 애한테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전부 제거한 거지.”
허강민이 무심하게 말했다.
“양시백 말 들어보면 최재석은 그런 사람 아니라는데 왜 다 죽였는지까지는 나도 모르겠고. 뭐 살인범에게 이유나 논리가 있어봤자 정상인들이 이해하긴 힘들겠지.”
권혜연이 허강민을 쏘아보았다.
“댁도 살인범이거든요?”
“그러니까 아는 거지. 누가 뭐래?”
권혜연은 말문이 막혔다.
“자기가 미친 짓 하고 있는 거 알면.”
“공부 안 하는 애들은 자기들이 성적 망치고 있는 거 알지, 그렇지?”
“그건 다르죠. 공부 안 하는 건 적어도 범죄는 아니라고요.”
“그렇지.”
허강민이 히죽 웃었다.
“안 넘어가는데. 너는 적어도 양시백보다는 똑똑한 것 같군.”
“양시백씨는 사람이 단순하고 남을 잘 믿어서 그렇지 바보가 아니에요. 그러니 그를 함부로 이용해 먹을 생각일랑 그만둬요.”
“걱정마, 배준혁 손에 죽기 싫어서라도 그런 짓은 안 하니까.”
말하고 갑자기 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권혜연은 긴장했다.
“왜 그래요?”
“아니 너희들하곤 상관 없는 일이야.”
“우리 쪽에서 허강민씨에게 상관이 있는 데도요?”
권혜연이 추궁했다.
“그건..... 뭐 그래. 정 알고 싶다면 말해주지. 나 방금 꽤 진심으로 죽기 싫다고 생각했어.”
“네? 그야 보통.”
말하고 권혜연은 눈 앞의 사람이 ‘보통’이 아님을 생각했다.
“그야, 죽으면 복수도 못한다는 생각 정도는 예전에도 하고 살았지만.”
그가 먹다 남은 콜라컵을 만지작거렸다.
“앞으로 뭔가, 바랄 게 남아있으니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지 좀 오래됐어.”
“...허강민씨.”
“그렇게 금방 동정하지 마. 네 동정심을 착취하려는 시도일 수도 있다고.”
허강민이 일어났다.
“양시백에게도 한 말이다만 배준혁은 조심해라. 지금은 우리가 모두 이해관계가 일치하지만 혹시 그렇지 않게 되면 그놈이 제일 먼저 안면몰수할거니까.”
“그래도..”
“아, 그리고 이거.”
허강민이 작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휴대폰이야. 내 번호는 넣어뒀다. 언제 긴급하게 연락해야 할지 모르니까. 벨소리 진동으로 할 수 있으니까 아빠나 학교에 들키지 마.”
“십 년 뒤에는 휴대폰 정도 애들도 쓰거든요.”
권혜연이 폰을 받아들었다.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
권혜연이 뭐라 더 말하기 전에 허강민이 패스트푸드점을 나왔다. 굳이 집에 데려다 줘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저래보여도 어린애가 아니고, 집에 연쇄살인범이 찾아가는 게 더 문제이고.
권혜연이 마법사이거나 앞으로 될 가능성은 낮았다. 정신은 곧고 안정되어 있고 마법 같은 기괴한 것과는 마주쳤을 가능성도 별로 없었다. 즉 그냥 휘말린 것이다.
왜 휘말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 세 사람의 운명이 긴밀히 관련되어 있어서, 현재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선 세 사람이 다 필요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박근태와 장희준의 결합을 막는다. 배준혁은 장산병원 사건이 터닝포인트가 될 거라고 내다봤다.
어려울 건 없었다. 지금 그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지 지켜보고, 과거로 가서 동생을 구한 뒤 5년 기다렸다 현재가 되면 끼어들면 된다. 그러니 어서 빨리 배준혁을 추궁해서 마법을 받아내야했다.




검은 남자 50 ㅣ- 회색도시&검은방


“제가 허강민하고 같이 쓸까요?”
정은창이 슬쩍 묻자 임선호가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댁 허강민 밑에서 일하다가 배신하고 나갔다면서? 같은 방 쓸 수 있겠어?”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여기 누가 허강민하고 같이 쓸 수 있는데?”
임선호는 말문이 막혔다. 여기 있는 전부가 허강민에게 원한이 있거나 허강민에게 원한을 산 사람들이었다.
하성철 국장조차도, 하무열이 제기한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면 허강민의 적이자 죽이기 만만한 상대였다.
그리고 의혹이 사실이라면 더욱 한 방에 있게 둘 수 없었다. 두 사람이 협력해 음모를 짤 기회를 주는 셈이니.
“내가 허강민을 맡지.”
하무열이 그렇게 말한 순간 무시무시한 시선을 느꼈다. 류태현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안승범 씨가 맡아주세요.”
하무열만이 아니라 다들 놀랄 정도의 목소리였다.
“안승범 씨라면 제대로 감시가 되겠죠? 괜찮겠죠?”
류태현이 안승범을 돌아보았다. 하무열을 노려볼 때에 비하면 평범한 표정이었지만 안승범은 거절할 수 없었다.
“어, 그래. 맡겨 줘, 순경씨.”


허강민은 한 마디도 없이 순순히 안승범을 따라들어갔다.
안승범은 매트리스를 먼저 차지하고 앉아 그를 노려보았다. 허강민은 불평 없이 맨바닥에 앉아 백선교의 족자에 등을 대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약해져 있다는 말이 엄살만은 아니었다. 피부는 창백하고 숨은 고르지만 가늘게 떨렸다. 아프지 않은 척, 지치지 않은 척 할 때의 전형적인 태도를 안승범도 잘 알았다. 지금 허강민이 딱 그래보였다.
“......”
다시 만나면 자신을 가지고 논 앙갚음을 톡톡히 해 주리라.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런데 막상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니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 수가 없었다. 한바탕 패주고 싶어도 지금 팰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놔두기도 역시 아까워 한 마디 찔렀다.
“자기가 밀실 안에 갇히니까 기분이 어때?”
허강민은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다 툭 내뱉었다.
“별로.”
허세가 아니었다. 허강민의 목소리는 그 정도로 공허하고 무감각했다.
팰 의욕도 사라져 매트리스에 누웠다. 어차피 여기서 정말 허강민을 팼다간 순경씨가 화낼 것이다.
‘순경씨 화나면 무서우니까.’
좀전에도 섬뜩할 정도였지만, 실은 세 번째 밀실 마지막에도 불길 속을 헤치고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느낀 감정은 공포에 가장 가까웠다.
거역할 수 없다. 거부해선 안 된다.
고마워하고 있다. ‘살아난 덕에 좋은 일도 생겼다’ 같은 상황은 절대 아니지만 그때 죽지 않았어야 한다는 건 이제 알고 있었다. 자신은 죗값을 치러야 하고 한 일의 결과를 마주해야 했다. 허강민과 민지은과 류태현을 마주해야 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류태현의 뜻을 따를 것이다. 허강민을 감시하되 먼저 수상한 짓만 안 하면 그저 보복으로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순경씨가 원한 게 그거 맞겠지?’


하성철과 하무열이 들어간 방은 조용했다.
들어오자마자 하무열의 무례한 질문 공세에 시달릴 줄 알았던 하성철은 매트리스 구석에 누우며 먼저 한 마디 건네보았다.
“이불을 바닥에 깔면 자네도 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좀 눕지 그러나.”
“그러죠. 베개는 국장님 쓰세요.”
하무열이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돌돌 말았다. 그리고 다시 조용해졌다.
“약기운 때문에 그러나?”
“예.”
하무열이 움직이지 않은 채 답했다.
“이번엔 범인 편에서 제안받은 것도 없고, 다같이 살아서 탈출하는 것 외에 바라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무슨 짓 할까봐 걱정할 것 없이 쉬시면 됩니다.”
“알았네.”
말처럼 긴장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이 방들은 문에 잠금장치가 없어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감시해야 하는 형국이었다. 하무열 형사의 본심이 말한 그대로라고 쳐도 외부 공격이 있을 수도 있었다. 세 번째 밀실까지만 해도 공격은 밀실 내부에서만 이루어졌지만 이번엔 갑자기 괴물을 풀어놓기까지 했으니까.
“아무리 고민거리가 많아도 쉴 때는 쉬어야 합니다.”
다시 하무열 형사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여기서 끙끙거려 봐야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요.”
“노력하고 있네.”
하성철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자네 정말로 내가 허강민과 유착했다고 믿나? 그것도 그런 부정한 관계를 통해서?”
결국 선제공격에 나섰다.
“아직 아무 것도 믿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을 알아볼 뿐이죠.”
하무열은 태연히 하성철의 화가 난 얼굴을 마주보았다.
“자네는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한 건가?”
“저요? 그야 놈의 제안을 받아들인 시늉을 해야 했으니까 그랬지요.”
“세상 모든 협력이 그런 관계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면 그건 변명이 될 수 없네.”
“서로 합의한 관계였고, 전 이미 그 녀석을 체포할 의도였지 진정 손잡을 의도가 아니었다고 충분히 증명했습니다.”
하무열은 여전히 뻔뻔했다.
“국장님이야말로, 정말 제가 경찰답지 못한 짓을 했기 때문에 화내시는 것뿐입니까?”
“나는 부인도 있고, 하물며 남자 상대로는 그런 짓 생각도 해본 적 없네. 허강민은 내 아들 같은 나이야.”
하성철이 힘주어 부정했다.
“자네가 그런 짓 했다고 세상 모두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말게.”
“하지만 그렇다면 국장님과 그 녀석은 대체 뭘 주고받은 걸까요?”
하무열이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소리를 했다.
하성철은 그냥 무시하려고 했다. 자신은 정말로 그에게 아무 것도 준 것이 없고 허강민이 자신에게 준 것도 마법을 빼면 증명할 수 없는 것뿐이었다. 하무열은 마법의 존재도 남들보다는 잘 아는 것 같지만 허강민이 마법으로 보호해줬다고 법정에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자넨 어쩌다 마법 같은 걸 알게 되었나?”
문득 궁금해진 것을 물었다.
“이번 수사 동안 수상하게 느낀 것만으로 남들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 확신하기는 어려웠겠지. 달리 마법의 존재를 확신할 만한 일이 있었던 것 아닌가?”
“국장님 이야깁니까, 그거?”
하무열이 반문했다.
“국장님이야말로 평소 미신에 흔들리는 분이라는 인상은 못 받았습니다만. 어떻게 받아들이신 겁니까?”
“먼저 질문한 건 날세.”
권위를 내세울 만한 때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강하게 나가보았다. 자신의 켕기는 구석 때문에 기가 죽기엔 하무열이 한 짓 쪽이 너무 화가 났다.
“십년 전 사건 때 깨달았습니다.”
하무열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곳의 백선교도들 중엔 마법사가 없었습니다만 그들의 흔적은 남아서 먹잇감을 찾고 있었습니다. 사건의 후속조치 때도 마법사가 나타나 일이 어떻게 은폐되는지 감시했지요. 마법의 영향으로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꼬여버린 성질 나쁜 형사가 괜찮은 신입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접근하기도 했고요.”
“그들이 그때도 자네에게 접근했었나?”
“예. 다행히 제게 마법사가 될 자질이 보기보다 부족했고, 그땐 놈들도 잠시나마 몸을 사려야 하던 때라서 간만 보고 물러났습니다. 진짜로요.”
못 믿겠다는 기운이 등 돌리고 누운 상태에서까지 느껴졌는지 하무열이 한 마디 덧붙였다.
“이렇게 갖고 놀 만한 때가 무르익길 기다린 거죠.”
하성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무열도 더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방 안은 조용해졌다.


임선호와 정은창은 어색한 침묵 속에서 각자 누웠다.
임선호는 누워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뒤척였다.
“어이.”
참다 못한 정은창이 툭 던졌다.
“넌 어쩌다 허강민의 원한을 샀냐?”
“허강민 밑에서 일했다면서?”
임선호가 짜증스레 되물었다.
“그놈이 안 떠벌렸어?”
“그래. 안 떠벌렸다. 난 그냥 잔심부름이나 하는 따까리였으니까.”
허강민에게 여전히 감정이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은창은 임선호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류태현은 부드럽고 무해한 인상에 밀실 안의 함정들도 나서서 해결했다. 사정을 미리 듣지 않았다면 허강민이 착각해 생사람을 잡았을 가능성도 진지하게 고려했을 것이다. 썩은 냉장고에 앞장서서 손을 밀어넣을 수 있는 사람이 희생적인 인물이 아니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에 비하면 임선호는 김성식의 부하들 같은 인상을 하고 있었다. 핏발 선 채 번득이는 눈은 타인을 죽이고 짓밟아서 살아온 자의 눈이었다.
“허강민네 둘째 동생.”
임선호가 무겁게 내뱉었다.
“그놈이 나 때문에 자살했다. 됐냐?”
은서 이야기를 했을 때 허강민이 창백해지던 게 생각났다. 지금 자신의 표정도 그 못지않을 게 분명했다. 그래야 마땅했다.
“난 살 거다.”
정은창의 살기를 느꼈는지 임선호가 힘주어 뇌까렸다.
“살 이유가 있어. 아미가 날 기다린다고.”
정은창은 임선호의 등을 바라보았다.
동정심보다는 저런 인간에게도 소중한 사람이, 돌아갈 자리가 있다는 신기함과 질투심이 앞섰다. 하지만 하무열 형사가 그랬듯 ‘여자? 애인이야, 자매야?’하고 물어볼 의욕도 나지 않았다.
어차피 살인 명령을 받은 사람은 허강민이고 자신은 보조일 뿐이었다. 맨손으로 뒤탈 없이 죽일 방법도 없었다. 무시하고 그냥 쉬어서 체력을 회복하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차라리 잘 되었다. 저놈 옆에서 은서 생각에 쫓겨 악몽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장혜진과 나란히 누워서 민지은은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러다 백선교의 족자가 시야에 들어오자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보기 싫으면 떼어버릴까요?”
장혜진이 물었다.
“그러고 싶은데 먼지가 엄청나게 날 것 같아요.”
“그러네요.”
잠시 조용해졌다.
“장혜진 씨는.”
이번엔 민지은이 말을 걸었다.
“백선교가 진짜라고 믿는 거예요? 진짜 초자연적인 힘을 휘두르고 어디서 괴물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안됐지만 사실이에요.”
장혜진이 메마르게 대답했다.
“저나 강민 씨가 이상해진 게 아니에요. 아까 한 말들도 전부 진실이고. 그래도 백선교가 진짜니까 한 번 다시 믿어봐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죠?”
“난 믿은 적 없어요.”
민지은이 날카롭게 말했다.
“어릴 때 엄마가 멋대로 끌고갔을 뿐이죠.”
“나도 비슷했어요.”
다시 방 안이 조용해졌다.
민지은은 지금도 장혜진이 지니고 있는 PDA를 의식했다.
강성중이 듣고 있는 마당에 백선교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추궁은 밀실을 나간 뒤로 미뤄야 했다.
“이 밀실의 끝까지 도달하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거예요? 혹시 알고 있어요?”
장혜진의 침묵이 불길하게 이어졌다. 민지은은 등골이 차게 식는 것을 느꼈다.
“.......몰라요.”
한참 만에야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전 이 밀실의 구조도 잘 모르고, 아는 건 강성중이 이번에야말로 강민 씨 포함해서 전부 죽일 작정이라는 것뿐이에요. 아까의 인형 퍼즐만 해도 강민 씨가 달라진 걸 눈치채서 해결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 또 어찌 될지 모르죠. 또 괴물을 풀어놓을 수도 있고, 강민 씨도 예측 못할 함정을 따로 파놓았을 수도 있고.”
장혜진의 작은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민지은이 마른침을 삼켰다.
“지난 밀실에서 허강민도 우리 전부 죽일 작정이었죠. 아닌가요?”
“맞아요.”
“하지만 결국 몇 사람은 살아나왔어요. 저도 안승범 씨도 류태현 씨도 허강민의 예정대로였다면 그때 다 죽었어야 했어요.”
민지은이 장혜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도 그럴 수 있어요. 같이 살아서 나가요.”
장혜진이 그 손을 바라보다 마주잡았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12 ㅣ- 회색도시&검은방



제작중인 미궁으로 돌아가며 허강민은 배준혁과의 만남을 반추했다.
의문의 여지없이, 그는 위험한 살인마였다. 사건 개요를 말해주면서도 양시백은 깨닫지 못한 것 같지만 처음 양시백이 폐건물에서 시체를 발견했을 때, 그 자리에 경찰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배준혁은 양시백도 죽여 목격자를 없앴을 것이다. 양시백에게 아버지나 다름없었던 사람을 망설임 없이 죽여 버렸듯이.
그런 주제에 양시백이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식사는 제대로 하는지는 자세히 묻고 그 상황에서 구할 길을 고민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진정한 친구쯤 되는 줄 착각할 것 같은 진실된 태도로.
아마 진심이 맞을 것이다. 지금 배준혁은 정말로 양시백도 권혜연도 보호하고 싶어하고 있었다. 자신의 과거, 아니 미래, 아니 뭐든간에 그 때 자기가 했던 짓을 반성하고 속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은 그렇게 하는 게 자연스럽고 자기에게도 이익이기 때문에. 그리고 상황이 바뀌면 또 그렇게 정성스럽게 아끼고 보호했던 사람들을 망설임 없이 죽여 없앨 것이다.
‘상대적으로 내가 정상인이라는 기분이 들 지경인데 이거.’
허강민은 배준혁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이 사건에서 담당했을 역할에 대해 생각했다.
마법은 광기에서 나온다.
배준혁이 마법을 썼을까?
‘적어도 양시백이나 권혜연보다는 가능성이 높지.’
그는 마법사가 되기 적당한 정신 구조를 갖추고 있고, 시간을 되돌려서라도 해결하고 싶은 후회스러운 과거가 있고, 그걸 해결할 만한 지식과 입장을 다 갖추고 있었다. 허강민에게서 마법이란 말을 듣고도 전혀 반응하지 않은 건 경계하는 의미로 볼 수 있었다. 허강민 자신도, 과거로 되돌아간 자신 앞에 ‘우호적인’ 마법사가 나타난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할 테니까. 그렇게 강력한 마법사가 넷이나 자기 손으로 죽일 필요가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 그 사건은 무척 짧은 시간 동안 순식간에 일어났고, 딸의 안전이 달려있으니 마음이 급하고 눈이 어두워진 것도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허강민이 깊게 심호흡했다. 자신은 그리해선 안 되었다.
‘침착하자. 시간은 있어.’
차가 리조트에 도착했다. 허강민은 곧장 자기 작업실 옆방으로 갔다. 침대도 있고 그럭저럭 사람 살 수 있을 만큼은 치워져 있는 방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시백이 반색을 하고 나왔다.
“선생님 만나보고 왔어요?”
“그래.”
이놈보다 속없는 녀석은 우주에 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멀쩡해요?”
“그래. 몸도 건강하고 겉보기에도 멀쩡하고 경찰일 잘 하고 있고 권혜연과도 이미 만났다더라.”
“권순경님요? 그 사람도?”
“그래. 지금은 여중생이라 뭐 도움은 크게 안 될 것 같다만.”
“여중생..... 권순경님은 잘 지내고 있대요?”
“그렇겠지. 아빠도 살아있겠다.”
“아, 그 아버지....”
시백이 잠시 숙연해졌다.
“잘됐네요.”
“그래.”
허강민이 대충 대답했다.
“저..... 선생님은.”
시백이 잠시 숨을 삼켰다.
“제 생각, 하던가요?”
허강민은 자기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졌다.
“너 그 놈이 살인마고 네 원수인 거 알고 있지, 그렇지?”
“네. 당연하죠.”
시백이 볼멘소리를 했다.
“전 그냥.... 그러니까, 그런 짓을 했으니까 어쩌면....”
“후회하고 반성하고 너한테 용서받고 싶어했으면 하는 거냐?”
시백이 어물어물 말을 못했다.
“그놈 네 걱정 하더라.”
허강민이 말했다.
“네가 어떤 안 좋은 상태에 처해 있는지, 먹고 자는 건 어떤지, 맞거나 학대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묻고.”
“정말요?”
시백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나 같은 놈이 네 보호자랍시고 나섰으니 그 정도 걱정은 당연한 거다만.”
“어, 그, 그렇죠.”
‘나 같은 놈’ 쪽과 ‘당연한’ 쪽 어디가 그런 거냐고 묻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허강민은 배준혁이 말한 것들을 생각했다.
백석 저택에, 장희준의 경호실장이 양시백과 닮았을 뿐만 아니라 성이 같다고 했다.
배준혁은 십 년 전으로 돌아와 지금 주변 상황을 곱씹고 나서야 그가 기억났다고 변명했다. 그야 자기 딸이 위험한데 십 년 전에 잠깐 만났던 사람의 얼굴과 이름이 또렷이 떠오른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너 달리 정식 보호자는 없는 거지?”
허강민이 떠보았다.
“네. 아버지 어머니는 사고로 돌아가셨고, 최재석 관장님이 나타나시기 전까지는 쭉....”
“그 사람은 지금 잠입 작전 중이랬어. 깡패로 위장하고 있으니까 설령 그쪽까지 과거로 왔다고 해도 섣불리 연락할 수는 없다.”
“네.”
시백이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너 이대로 그 사람을 다신 못 만날지도 몰라.”
허강민이 충동적으로 말해버렸다. 양시백이 펄쩍 뛰었다.
“네? 왜요?!”
“내가 5년 전으로 가면, 네가 처음부터 백선교 같은 데 안 잡혀오게 할 거니까. 네가 그.... 직업 소개소? 거길 탈출할 필요도 없고 그러니 떠돌다 싸움에 말려들어 전과가 생기지도 않을 거고 그 사람은 너 말고 다른 비행청소년과 결연하게 되겠지.”
“.......어.”
시백이 추욱 쳐졌다.
“그....렇게 되네요, 진짜.....”
“설령 네가 직업소개소 시절을 거쳐서라도 최재석을 만나고 싶어한다 해도 내가 그렇게 놔둘 수 없어.”
허강민이 말했다.
“내가 과거로 가는 건 과거를 바꾸기 위해서다. 그 십 년 뒤 사건이라든가, 너희들이 불행해질 만한 일은 할 수 있는 한 미리 치워놓을 생각이다만 그래도 도저히 누구도 예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변화와 변수가 생기겠지. 그 상황에선 네가 거기 잡혀있더라도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을 수도 있고, 최재석도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어.”
“네... 그렇겠죠.”
시백은 시무룩해보였다. 허강민이 초조하게 머리를 굴렸다.
“그렇게 된다 해도 네겐 다른 적당한 보호자를 찾아줄게. 그, 최재석이 살해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쪽을 보면 그에게도 좋은 점이 있어. 원한다면 그가 잘 사는지도 지켜볼 테니까...”
“상냥하시네요.”
잠깐 허강민은 무슨 소릴 들었나 했다.
“...뭐?”
“저뿐만 아니라 선생님이나 관장님한테까지... 선생님은 관련자라서 그런다지만 관장님은 그것도 아닌데 저 때문에.”
“당연히 너 때문이지, 네 협조를 받아야 하니까.”
허강민이 말했다.
“그리고, 이건 내 동생 내 가족들을 구하려고 하는 일이야. 그런 거니까 그 과정에서 기왕이면..... 남들도 행복하면 좋잖아? 내 가족 구하겠다고 남의 가족을 짓밟으면 그건 류.....”
류태현 놈 같은 짓이다, 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으니 삼켜버렸다. 현재 협력하고 있다고 해도 양시백은 타인이었다. 그런 깊은 속내까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쓸데없이 고마워 할 필요 없어. 다 날 위해서 하는 거니까.”
“네.”
시백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보였지만 허강민은 모르는 척 했다. 그보다는 그 양태수라는 사람에게 접촉해서 양시백과 무슨 관련인지 알아내는 게 더 중요했다.
아니, 그가 알아내야 하는 건 양시백의 가족이 아니라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이었다.
‘어때, 양태수와 접촉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많을 거라고.’
기왕이면 남들도 행복한 게 좋다고 말하기는 했어도 다른 사람들의 행복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그가 최재석에 대해 조사하는 건 그저 그도 과거로 왔거나 관련한 사실을 알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기 때문이었다. 양태수에게 접근한다면 장희준 회장의 경호실장이라는 그의 위치에 이용할 만한 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장희준은 백선교 어르신 중 한명이고 꽤 유력한 위치에 있다고 하니까.
그뿐이었다.


눈앞에 서류가 있는데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황도진을 회유해서 백석과의 관계를 밝히는 일보다도 자기 아들의 비행이 더 중요하게 느껴지고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니 경찰간부로서 옳은 일이 아니지만.
‘그런데 이걸 비행이라고 할 수 있나?’
하성철은 이걸 뭐라 생각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정상적인 행동이 아닌 건 틀림 없지만 비행이라고 하기엔 또 태성이가 뭔가 나쁜 짓을 하거나 누굴 해롭게 한 건 아니고....
하성철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태성이 한 일이 뭐냐를 놓고 옳고 그름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새삼 사이비 종교를 수사하는 쪽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런 데서 이용당하는 어린 예언자 중에는 적어도 본인은 실제로 미래를 보고 사람들을 일깨운다고 믿는 애들이 많다고. 아마도 사춘기의 스트레스와 어른들의 부추김이 실제로 환각을 보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고.
하지만 그런 식의 ‘예언’은 보통 1999년에 세상이 멸망한다거나 운석이 쏟아지고 지진이 일어나고 뭐 그런 거지 한 비행청소년이 살인범이 되고 부패 정치인의 하수인이 되고 살해당한다, 같은 구체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심지어.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박근태가 그를 위로하려는 것처럼 말했다.
“황도진도 오래는 못 버틸 겁니다. 이대로는 자기만 잘린 꼬리가 된다는 거 모를 정도로 멍청한 인물도 아니고요.”
하성철은 박근태를 빤히 쳐다보았다. 십년 뒤엔 삼선의원이 되어 사채도 하고 용역 깡패도 부리고 아주 그린 듯한 부패 정치인이 되어있을 거라는 사람을.
“강원대군 쪽 움직임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암담한 보고를 올린 죄로 형님이 쪼이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권현석이 말을 거들었다.
“좀 더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으면 그 쪽을 통해서 설득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건 좀 어려울 것 같고 대신....”
박근태가 부패 정치인이면 십 년 뒤 권현석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그때도 박근태를 최선을 다해 감싸고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 경우 도망치려는 장기말을 처형하는 건 박근태 의원의 심복인 권현석 경정..이나 경무관이나 뭐건간에.
“국장님?”
“아, 응. 보고는 잘 들었네.”
하성철이 표정을 관리하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머리가 좀 아파서, 표정에 드러났나보군. 신경쓰지 말게.”
“네, 그럼.”
의구심어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두 부하는 순순히 변명에 속아주었다.
“권현석 경감.”
서류를 정리해 나가려는 사람을 하성철이 충동적으로 불러세웠다.
“네?”
“그... 혜연이는 잘 있나?”
“아.....”
권현석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성철은 긴장했다.
“무슨 일... 아니 내가 괜한 말을.”
“혜연이 눈 나빠졌대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목소리로 권현석이 그렇게 말했다. 하성철은 기운이 쭈욱 빠져버렸다.
“그..런 문제?”
“공부 너무 열심히 할 필요 없는데, 건강하게 잘 자라주기만 하면.....”
“진심이냐.”
박근태가 혀를 찼다.
“너 혜연이 중학교 들어갔을 때 성적 떨어졌다고 나한테.”
“그땐 중학교에 잘 적응해서 다니냐가 중요한 거였지, 점수 몇 점이 아니라! 건강 해쳐가며 열심히 해 봤자 어차피 어른 되면 다 까먹는 걸...”
“안경..정도로 건강을 해쳤다고 할 것까지는. 경감도 안경은 쓰잖나.”
하성철이 위로와 추궁의 중간쯤을 했다.
“제가 쓰니까 혜연이한텐 안 씌우고 싶은 거라고요.”
“알았어. 자자, 나가자고. 할 일 많잖아.”
박근태가 권현석을 다독이며 국장실에서 끌고 나갔다. 그러면서 하성철에게 눈인사를 했다.
역시 저들이 그렇게 되는 건 믿을 수 없다고 하성철은 생각했다. 그렇다고 태성이가 사춘기 스트레스로 환각을 보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허건오는 그럼 뭐란 말인가.
태성이와 이야기를 해봐야 했다. 그러나 뭐라 말을 꺼내야 좋을지 알 수도 없을뿐더러 태성이는 아버지를 피했다.
‘혹시, 날 피하는 것도 그 십년 후....와 관련 있는 건가? 나는 뭐가 되어있기에?’



검은 남자 49 ㅣ- 회색도시&검은방

모두들 잠시 아무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하무열과 눈이 마주치자 허강민은 얼굴 근육을 꿈틀거리면서도 침착한 어조로 답했다.
“우리나라 경찰 계급문화가 지나치게 수직적이라더니 다 뻥이었나보군요. 경사가 치안감을 성희롱할 정도라니 기강을 좀더 잡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경찰 기강은 경찰들이 알아서 할 일이니 연쇄살인마 네놈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하무열은 호기롭게 허강민을 추궁했다.
“국장님과는 어떤 관계지?”
“범죄자와 경찰이요.”
허강민이 우겼다.
“억지로 갖다 붙여도 소용없습니다. 아까 질색한 건 쉰 넘은 노인양반을 두고 못하는 소리가 없는 하무열 형사의 센스에 질색한 거고요. 제가 경찰과 거래해서 무슨 득이 있는데요? 밀실에 골골대는 영감탱이 달고 떨어지는 이득이요?”
“수사팀 총책임자이니 백선교가 취할 것이 많았겠지. 하지만 난 이게 백선교와 국장님 사이보다는 자네와 국장님 사이의 개인적 유착인 것 같군.”
“멋대로 지어내지 말게.”
하성철도 반박했다.
“나는 허강민과 유착해서 무슨 이득이 있단 말인가? 그에게 한 푼도 받은 적 없다는 건 나가서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네.”
“돈 말고 다른 걸 받으셨을 수도 있지요. 예를 들면......”
하무열이 천천히 하성철과 허강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 녀석은 경찰을 악의 길로 유혹할 때 좀 다른 뜻으로도 유혹하거든요.”
그 유혹이 무슨 유혹인지 하성철보다 류태현이 먼저 알아들었다. 하무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무, 무열 선배!???”
일동의 주목을 끌어모으고서야 류태현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추궁하고 싶은 표정으로 여전히 하무열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네 정말 못하는 소리가 없군!”
이제는 하성철도 정말로 화가 났다.
“내게 그런 말도 안 되는 모욕을 가한 것도 가한 거지만, 자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자네야말로 허강민과 정말......그런 짓을 한 게 아니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예, 했습니다. 저놈이 먼저 꼬셨지요.”
그런 말을 대놓고 하면서 하무열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 세 번째 밀실 전이었습니다. 그때 저놈은 절 자신과 동류로 만들 작정이었고 전 넘어가주는 척 해야 했지요. 그러니 유혹에도 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성철은 하무열을 노려보다 경멸조로 혀를 찼다.
“세 번째 밀실에서의 자네 행보 중 이미 입증된 것만으로도 중징계 사유가 된다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군.”
“설마요. 잘 아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원래 곧 퇴직할 사람이 제일 무서울 게 없는 법이죠.”
류태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가는 쪽 문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순경씨?”
숨죽이고 하무열과 하성철과 허강민의 공방을 바라보던 안승범이 물었다. 류태현은 이쪽에 등을 돌린 채 대답했다.
“밀실 나갈 궁리도 해야지요. 계속 앉아있기만 하다가는 또 폭탄이나 독가스에 위협당할 겁니다. 아닌가요?”
류태현답지 않게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분위기에 눌린 것처럼 안승범이 류태현 곁으로 다가가 같이 자물쇠를 살폈다.
“번호 자물쇠야.”
안승범이 말했다.
“어딘가에 힌트가 있을 거야. 다들 좀 뒤져봐.”
민지은과 정은창을 시작으로 하나둘 일어나 방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성철도 일어났다. 옷을 툭툭 터는 모습이 바닥 흙먼지보다는 방금까지의 대화 내용을 떨어내고 싶은 것으로 보였다.
한참이나 뒤졌지만 마땅한 단서가 나오지 않았다. 서로 헛수고만 하고 있다는 감이 오자 다들 멈춰서서 눈빛을 교환했다.
“이 냉장고 열어봤어요?”
보통 모텔 같은 데 있는 작은 냉장고가 구석에 있는 걸 보고 류태현이 다가가자 안승범이 말렸다.
“그거 내가 아까 열어봤어. 폭삭 썩었더라.”
“예?”
폐선에서 열었던 마계의 문을 떠올리고 류태현도 멈춰섰다. 그러나 달리 더 뒤질 곳도 없는데 번호 힌트는 보이지 않았다.
“지나온 곳에 있는 거 아냐?”
임선호가 들어온 문을 돌아보았지만 환각 가스를 피해 달려와 놓고 되돌아가자니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허강민 씨.”
민지은이 허강민을 돌아보자 허강민이 한쪽을 가리켰다. 바로 그 냉장고를.
“......”
류태현이 심호흡을 몇 차례 하고 숨을 참은 다음 냉장고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이 건물이 먼지투성이로 방치되기 시작한 그때부터 함께 방치되어 온 듯한 각종 음식물......이었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 냄새 맡는 기관은 눈이 아니라 코일진대 보는 것만으로 썩은내를 느낄 수가 있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걸 네가 나서서 여냐, 이 호구.”
허강민이 빈정거리는 걸 못 들은 척 류태현은 그 안을 노려보았다. 냉장고 문 안쪽에도, 내용물 표면에도 힌트는 없었다.
“저게 맞나?”
냄새는 이미 방 전체에 퍼지고 있었다. 하성철이 허강민에게 물었지만 허강민은 삐딱하게 고개를 돌렸다.
“유착 같은 거 없고 모르는 사이였다는 걸 증명하자면 영감님께 협조하면 안 되겠죠?”
하성철이 허강민을 노려보는 동안 류태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오른쪽 소매를 걷은 다음 오른손을 그 안에 집어넣었다.
‘폭력적, 혹은 혐오스러운 장면이므로 편집했습니다’ 메시지가 인간의 뇌내공간에도 뜰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아니었다. 류태현은 이미 울먹이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 것도.
마침내 냉장고에서 손을 뺀 류태현이 허강민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추궁하거나 하기 전에 허강민이 먼저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가 냉장고 문을 잘 닫은 다음 통째로 뒤집었다. 냉장고 바닥 부분에 자물쇠 번호가 새겨져 있었다.
“...................”
“이런 악마를 봤나.”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오는 류태현 대신 하무열이 혀를 차고 말했다.
“뭘 멍청히 서 있는 거야, 류태현. 어서 그 손 저놈 옷에 닦아서 복수하지 않고.”
허강민은 잽싸게 방 반대편까지 물러났지만 류태현은 도리어 그럴 기운도 잃어버렸다. 빨리 문이나 열자는 생각에 자물쇠로 다가갔다.
그런데 정말 손 닦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손수건 하나 없는데 자켓을 벗어 닦자니 빳빳한 청자켓인 데다 물 함정을 지나온 후유증으로 아직도 몸이 축축하고 으슬으슬했다. 자켓을 잃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허강민을 붙잡아 그 옷에 닦아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을 때 옆에서 하성철 국장이 넥타이를 풀어 내밀었다.
“이걸로 닦게.”
“가, 감사합니다.”
사양하지도 못하고 국장님의 넥타이를 받아 손을 닦았다. 문을 열고 다음 방으로 가면서 넥타이는 바닥에 버렸다.
“죄송합니다. 나가면 반드시 새 걸 사드리겠습니다.”
“괜찮으니 너무 마음쓰지 말게. 지금은 살아 나가는 것부터 집중하게.”
국장님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친절했다. 역시 허강민과 내통한 부패 경찰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태도였다.
‘이번만은 무열 선배가 틀린 거 아냐?’
게다가 그 ‘유착’이 단순한 뇌물이 아니라니.
순간적으로 이가 갈렸다. 지금 이런 상황만 아니었으면 무열 선배 멱살을 쥐고.....
머리를 식히려고 노력했다. 무열 선배는 어디까지나 진상을 밝히고 허강민을 잡으려고 노력한 것이다. 허강민과 ㅅ..........
옆에서 승아가 잡아당겼다. 그제서야 류태현은 다음 방에 들어온 것을 눈치채고 정신을 차렸다.
작은 강의실처럼 생긴 곳으로 한쪽 벽면에 칠판도 있고 책상과 의자도 죽 배치되어 있었다. 거기에 천장으로부터 쇠사슬로 연결된 갈고리가 줄줄이 내려와 있어 거의 류태현의 얼굴에 닿을 정도였다.
다들 질색하는 표정으로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류태현도 방금 승아가 아니었다면 갈고리에 부딪쳤을 것이다.
류태현은 승아의 손을 꼭 잡고 새삼 승아를 돌아보았다.
실어증은 나날이 악화되는 중이라고 했다. 초조한 나머지 담당 의사에게 하소연해 봐도 돌아오는 답은 언제나 똑같았다.
문병을 가면 대화는 갈수록 힘들어졌다. 필담도 언제부터인가 승아 쪽에서 눈에 띄게 기피했다. 그러다 최근에 보여준 글이 지금도 류태현의 머릿속에 박혀있었다.
차라리 우리가 죽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이 모든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허강민은 동생들과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다시 한 번 갈고리에 부딪칠 뻔하고 류태현은 눈을 깜박였다.
“좀 앉아서 쉬는 게 어때요?”
보다못한 민지은이 한 마디 했다. 여승아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민지은이 대신 해줬다는 듯 끄덕였다.
“아, 그 전에 잠시만요.”
류태현이 갈고리를 손으로 잡았다. 두툼한 부분에 붉은 색으로 ‘7’이라는 숫자가 칠해져 있었다. 피는 아니고 페인트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지만 색깔만으로 충분히 섬뜩했다.
“다른 것들도 다 이런가요?”
다들 자기 근처의 갈고리를 붙잡고 확인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갈고리 수는 10개고 숫자도 1부터 10까지 쓰여있었다. 사람 수도 열 명이었다.
“조심하세요.”
다들 입을 열지 못하는 가운데 허강민이 중얼거렸다.
“저 갈고리마다 맞는 추를 찾아 걸면 문이 열리고, 틀리게 걸면 폭탄이 터집니다. 그런데 제가 설치할 때만 해도 아홉 명을 생각하고 만들었기 때문에 갈고리도 아홉 개였거든요. 갑자기 한 줄 늘었다는 건 강성중이 설계에 손을 댔다는 뜻이죠. 쉽게 갈고리와 추가 늘어났을 뿐인지 아니면 완전히 다른 함정이 되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때맞춰 PDA가 울렸다. 다들 허강민을 원망할 틈도 없이 전화를 받았다.
-너무 전 감독의 공략에만 의존할 것 같아서 변화를 좀 크게 줬지.
강성중의 빈정대는 목소리였다.
-빨리 해결하는 게 좋을 거야. 시간 내로 해결하지 못해도 폭탄이 터지는 옵션은 그대로거든. 20분 남았지.
시계바늘이 째깍, 째깍 움직이는 소리까지 뒤따랐다. 모두는 일순 얼어붙었다.
“일단 추부터 찾아요.”
허강민이 침착하게 말했다.
“방 여기저기에 숨겨놨습니다.”
“또 쓰레기 속에?”
안승범이 노려보자 허강민은 대답 대신 자기가 나서서 뒤지기 시작했다. 강의실 용 작은 책상들을 하나씩 기울이자 그 중 하나의 서랍 속에서 무언가 굴러나왔다.
“이거다.”
허강민이 들어보인 ‘추’를 보고 다들 질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비 인형보다 좀더 크고 팔다리가 통통한 유아용 플라스틱 인형 몸체를 옷도 나일론 머리카락도 없애고 눈코입까지 약품으로 지운 기분나쁜 마네킹이었다. 배 부분에 역시 붉은 색으로 ‘1’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 걸 저 갈고리에 어떻게 걸어요? 걸 부분이 없는데.”
민지은이 질문했다가 곧 후회했다. 허강민은 냉큼 인형을 뒤집어 갈고리에 딱 맞는 쇠고리가 박혀있는 걸 보여주었다. 인형 뒷목 부분이라 걸면 교수형당한 시체로 보일 게 뻔했다.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허강민을 비난할 말도 찾지 못하고 다들 묵묵히 인형을 찾아 방을 뒤졌다. 시간도 촉박하고.
“책상 서랍에 손 넣지 말고 내가 한 것처럼 기울여서 쏟아. 몇 군데엔 유리조각들이 같이 들어있거든.”
“변태새끼......”
안승범이 허강민을 험악하게 노려보았다. 시간만 넉넉했으면 멱살이라도 쥐었을 기세였다.
여러 사람이 뒤지니 인형 열 개가 금방 나왔다. 역시 붉은 색으로 1부터 10까지 적혀있었다.
“숫자대로 거는 게 아닌 건 분명하군.”
하무열이 칠판을 가리켰다. 먼지투성이 방인데 칠판만 깨끗하고 보란 듯이 수학 공식이 적혀있었다.
“예. 원래는 저 공식에 맞춰 수를 변환한 다음 바뀐 숫자에 따라 걸면 맞고 틀리게 걸면 폭탄이 폭발하는 식이었지요.”
허강민이 인형들을 손에 쥐고 무게를 가늠해보았다.
“그런데 강성중이 방식을 바꾼 것 같습니다. 맞게 걸었는지 감지할 수 있도록 인형마다 무게가 다른 추를 넣었었는데 원래 제가 넣은 것과 무게가 달라졌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맞는 건데?”
허강민은 인형들을 차례로 하나씩 손에 들어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저 갈고리 위의 기계와 문 개폐시스템까지 바꾸기엔 시간도 강성중의 실력도 많이 부족했을 겁니다. 그러니 인형의 무게만 바뀌었다고 가정하고, 제 기억으로 5번 인형이 가장 무거운데 9번 갈고리에 대응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10번 인형이 가장 무겁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장 가벼운 인형에 대응하는 갈고리가 1번인데 1번 인형이 가장 가볍군요. 즉 번호별 단순 대응으로 바뀐 겁니다.”
시간은 이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재깍재깍 흐르고 있으니 서둘러 인형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다들 선뜻 나서지 못했다.
허강민의 말, 그것도 이렇게 애매모호한 추측성 말에 따라 폭탄을 터뜨릴지도 모르는 조작을 해야 했다.
모두가 숨죽이고 있는 가운데 장혜진이 제일 먼저 일어났다. 10번 인형을 허강민에게 받아들고 10번 갈고리에 다가가 걸었다.
“안 터지네요?”
류태현이 뒤를 이었다. 1은 1번 갈고리에, 2번 인형은 2번 갈고리에, 순차적으로 전부 걸자 끼익 하고 나가는 문이 열렸다.
“가죠.”
류태현이 중얼거린 말에 모두들 조용히 움직였다.
갈고리마다 인형이 목매달려 있는 꼴을 계속 볼 수 없어서만이 아니었다. 류태현의 기색이 어딘가 평소와 달라져 있었다. 여승아가 그를 거의 낯선 사람 보듯 바라보았다.


그 이후로도 류태현은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함정 대부분을 허강민이 해설해주고 민지은과 안승범, 정은창 등이 나서서 해결하고 있기에 입 다물고 조용히 따라오는 사람이 그만이 아니었지만 평소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하던 사람이 조용하니 위화감이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긴 복도 양쪽에 문이 늘어선 공간이 나왔다. 정면 복도 끝이 출구고 양쪽 문들은 작은 방들이었다.
분명히 쉬라고 만들어진 장소에서 일행들은 다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모든 살인이 이런 곳에서 쉴 때 벌어진 걸 생각하면.
그렇다고 안 쉴 수도 없었다. 하성철도 허강민도, 이제는 정은창까지도 뚜렷이 피로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역시 고문 후유증이 그대로 남은 데다 폐허나 다름없는 건물 안에서 동요하지 않기 위해 정신력을 최대한 끌어모으고 있는 상태였다.
“객실은 여섯, 우리는 열 명.”
하무열이 중얼거리며 객실 문을 하나하나 열어보았다.
문에 자물쇠는 없었다. 방 안도 아주 좁고 침대 대신 간이 매트리스와 베개, 이불이 있었다. 그 외엔 장식도 무늬도 없는 흰 벽에 백선교의 교리를 인용한 작은 족자가 걸려있을 뿐이라 방이라고 하기도 곤란한 수준이었다.
“방 하나에 둘씩 들어가고 한 방은 비워두지.”
하무열이 사람들을 돌아보고 말했다.
“한 명씩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여기 없겠지?”
정은창은 혼자 들어가고 싶었다. 은서의 악몽에 시달리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누구 하나 이견을 말하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짝을 지을까요?”
민지은이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여자는 세 명, 홀수인데 셋이 한 방 들어가기엔 방이 너무 좁고 한 명을 혼자 둘 수는 없었다.
“저하고 승아하고 같이 있을게요.”
류태현이 나서서 그렇게 말하자 민지은은 장혜진을 돌아보았다.
“그럼 장혜진 씨하고 저하고 같이 쓸게요.”
허강민의 공범이라고는 해도 여기까지 잘 협조해서 같이 왔다. 지친 것도 마찬가지고, 설령 딴 뜻이 있다 해도 자신이 보는 앞에서 당당히 저지르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게 정하고 남성들 쪽을 보았다. 이쪽은 허강민이란 폭탄을 누가 떠안느냐 하는 폭탄 돌리기가 될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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