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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번 안내

18금용 티스토리 화산섬 창고의 비번은 해당 카테고리 글에 감상을 남겨주셨던 분에 한해서 트위터 쪽지 https://twitter.com/Idonwanause 나 메일 hicstans@gmail.com으로 성인임을 어필하여 문의하시면 됩니다. 제가 봐서 성인 같으면 답을 드립니다. 전부 답하지는 않습니다.

화산섬 본관

hicstans's multi isles for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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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AO3계정입니다. 불펌 아니에요. http://archiveofourown.org/users/hicstans/pseuds/hicstans


말하자면 대문 - 화산섬의 분관에 어서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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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디가드 대소동 7 ㅣ- 레히삼

“아, 참!”
서서의 외침에 조조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저 말이에요, 그 콘서트장 무대 주변에 화공 함정을 여럿 묻어놓았어요. 제가 발동시키면 가까운 적에게 화염구가 날아가요.”
“뭐라고?”
사마의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런 수를 준비해놨으면 왜 아까 총공격할 때 쓰지 않은 거냐? 그랬으면 거기서 잡았을 거다.”
“아, 그게요. 쓰려고 한 순간 비가 와서요.”
서서가 어깨를 움츠렸다. 사마의의 표정이 더 매서워졌다.
“신선의 도술이 고작 스프링클러 따위에 막혀서야......”
“나서지 마라, 사마의.”
조조가 말을 자르고 대신 서서에게 물었다.
“그 마법 여전히 작동한단 말이지?”
“예.”
“서서 굉장해! 그런 생각을 해내다니!”
유비는 두 눈을 반짝반짝 하면서 서서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서서도 사마의에게 언제 혼났느냐는 듯이 활짝 웃었다.
“그렇다면 리허설 도중에 공격하는 편이 낫겠군.”
조조가 제안했다.
“이번엔 이쪽에서 선제공격하는 거다. 무대 위에서는 리허설에 집중하느라 원소도 기습에 대처하기 어려울 거다. 그러니 리허설 전까지는 전투를 최대한 피해야 해. 공손찬, 할 수 있는 한 소속사의 일반인들 곁에 붙어있도록 해라. 원소가 함부로 본색을 드러낼 수 없도록 말이다.”
“알겠어.”


공손찬은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소속사에 나타났다.
“경호원을 갑자기 둘 다 해고하면 위험하다고 리나님을 설득했습니다.”
공손찬을 맞이한 건 전풍이었다. 겉보기엔 완벽하게 사무적인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어서 공손찬은 그 뻔뻔함에 속으로 치를 떨었다.
“가시죠. 바로 오늘 저녁이 본공연이라 서두르지 않으면 전부 망칩니다.”
“예? 바로 오늘 저녁이요?”
“어제의 사건으로 일정이 뒤엉킨 탓입니다. 리허설 끝내고 바로 공연 시작합니다.”
차 안에는 전풍과 리나 외에 다른 스텝들도 많이 있었다. 공손찬은 속을 누르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어차피 본공연 일시는 리나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일정은 리나의 고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본공연이 되면 일반인들이 너무 많아져.’
조조와 함께 세운 작전은 리나가 무대에 오른 순간 공격해 본색을 드러내도록 압박하고 총공격을 가해 탈락시킨다는 것이었다. 전력은 그대로라도 이번엔 세 군주가 처음부터 협력해서 공격할 것이고 서서의 함정도 발동시킬 것이니 이길 수 있었다.
다만 공연이 시작되어 관중들이 들어차면 애꿎은 일반인들이 다칠 위험도 커지고 리나가 또 경찰을 방패막이로 삼아 도망칠 수도 있다는 게 문제였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체인저와 조운패를 꼭 쥐었다.
콘서트장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공손찬은 마음을 놓지 않고 계속 다른 스텝들 곁에 붙어서서 유비와 조조를 기다렸다. 혼자서는 싸울 수 없었다.


“이쪽이에요.”
어수선한 콘서트장의 관계자용 통로로 잠입하는 두 그림자가 있었다.
주유라고 해서 인간계의 범죄에 절대 끼어들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리나를 노리는 사악한 스토커’가 군주라면 더욱 사양할 일이 아니었다.
야외 촬영 때의 습격에서 레전드 히어로의 기운을 확인한 이상 더는 손책을 말릴 수 없었다.
“들키면 우리가 스토커로 몰린다는 거 알죠?”
“조심한다니까.”
주유는 지금 다른 무엇보다 인간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참전한 신선은 CCTV를 비롯한 인간들의 감시장치를 피할 수 있고 일반인들의 주의를 끌지도 않지만 인간인 군주는 그렇게까지 보호받지 못했다. 주유가 도술로 가려주고서도 최대한 조용히, 눈에 안 띄게 움직여야 했다.
영웅패들 역시 신경이 곤두섰다. 이제까지 다른 영웅패의 기척을 감지하는 건 영웅패들의 몫이었다. 신선이 생겼다고 해서 신선에게만 다 맡겨두고 싶지 않았다.
주유가 콘서트장의 구조도를 손에 넣었기 때문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잠긴 문도 도술로 살짝 조작해서 열었다.
“거의 다 왔어요.”
번호키로 잠긴 문이 주유가 파란 영기 맺힌 손으로 한 번 쓸자 짤깍 열렸다. 그런데 손잡이를 돌리는 순간 칙 하고 작은 소리가 들렸다.
“물러나요!”
순식간에 검은 연기가 복도를 채웠다. 도술이 아닌 인간계의 공산품 연막탄이었다.
“막아내기를, 바람과 같이! 환류!”
주유는 신선이라 타격이 없지만 손책은 아니었다. 일단 군주를 감싸고 도술로 연기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좁은 복도인 탓인지 쉽게 빠지지 않았다.
거기다 다른 군주의 기척이 느껴졌다.
“주군, 싸울 준비를!”
주유와 태사자가 거의 동시에 외쳤다. 손책도 바로 군신일체에 들어갔다.
연막을 뚫고 레전드 히어로의 마력탄이 날아들었다. 몇은 피했지만 끝내 하나 맞는 순간 갑주가 쨍 하고 울렸다.
“이런 강력한 힘으로 스토킹이나 하다니!”
손책이 황개로 전환했다.
“배틀 트로이카, 개틀링 모드!”
연막 속에서 원거리 무기를 쏴댄다면 이쪽도 똑같이 대응할 수 있다고 보여줘야 했다. 과연 연막 저편이 소란스러워졌다.
“자, 잠깐!”
연막 저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거기 손책이야?”


‘리허설 끝나가는데 유비는 뭐 하는 거야?’
공손찬은 시계를 보고 무대 위를 보았다. 리허설 끝내고 무대에서 내려오기 전에 쳐야 하는데 유비도 조조도 소식이 없었다.
원소는 무대 위에서 감독과 의논중이고 다른 스텝들도 일에 바쁠 뿐 수상한 짓을 벌이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 점이 더 공손찬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아까까지만 해도 매니저와 함께 주변을 단속하던 전풍이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뭔가 꾸미고 있다. 공손찬은 확신을 품고 전풍을 찾기 시작했다. 더는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무대 뒤, 장미꽃 모양의 거대한 조형물 아래 전풍이 있었다. 정좌한 채 주변 상황을 잊은 듯 무언가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서서가 한 것처럼 함정을 파고 있다. 공손찬은 바로 조운과 일체화했다.
“어디서 허튼 수작을!”
조운의 장창이 전풍을 찌르기 직전 그를 감싼 투명한 막에 부딪혔다. 한 번 더 찌르자 막이 찢어졌으나 전풍도 눈을 뜨고 일어나 공손찬을 마주했다.
“방해 마십시오!”
전풍이 공손찬에게 연환을 썼다. 피하려고 했으나 사슬이 따라와 옭아맸다. 창으로 깨는 사이 전풍의 화공이 공손찬을 강타했다. 날아가 처박힌 공손찬은 일단 창을 내밀어 다음 공격에 대비했다.
“아니, 이게 뭐야?”
그런데 다음 공격 대신 들려온 것은 장각의 간드러진 목소리였다.
전풍이 바닥에 두었던 육각형의 패를 장각에게 던졌다. 그러나 장각이 더 빨랐다.
“가젯으로 나와 겨룰 순 없지.”
검게 끈적이는 다크 씰이 전풍의 트랩에 달라붙었다. 발동한 트랩이 검은 영기를 내뿜어 장각 대신 전풍을 감싸 내리눌렀다.
공격이 끊긴 틈을 타 공손찬은 몸을 굴려 일어나서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대로 탈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다시 고개를 들어 공손찬을 재촉했다.
“흠, 저쪽은 놓쳐버렸네.”
긴장감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장각이 고개를 돌려 전풍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감히!”
장각을 가두려던 트랩에 거꾸로 갇혀버린 걸 깨닫고 전풍이 검은 막을 두드렸다. 그러나 전풍 자신이 뼈대를 짠 주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할 소린데.”
장각이 트랩을 가리켰다.
“다크 펜타곤 바로 앞에 이런 트랩을 설치하려 하다니. 이거 나를 노린 거지? 리나 허락 맡고 한 일 아니지?”
“원소님을 위해 한 일이다!”
트랩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며 전풍이 소리질렀다.
“너 따위 버그가 언제까지고 주군을 현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장각이 쯧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주군의 작전을 멋대로 망치는 건 불충이 아니고?”
“맞아, 불충이지.”
원소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 자리에 들려왔다.
“유능하고 충성스럽다기에 널 골랐는데, 이런 짓까지 할 줄이야.”
화려한 무대 의상을 차려입은 리나가 성큼성큼 그 자리로 들어섰다. 그 표정을 보고 전풍이 당황했다.
“주군.”
“닥쳐.”
차갑게 내뱉은 리나가 장각을 돌아보았다.
“이거 얼마나 튼튼해?”
“안에선 못 부수니 걱정 없어.”
장각이 요사스럽게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럼 일단 이대로 놔두지.”
리나가 돌아섰다.
“공연 시작까지 이제 금방이야. 전풍을 어떻게 할지는 쇼가 끝난 뒤에 결정하겠어. 내가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 뒤에.”
“기다리십시오, 주군!”
전풍이 트랩 안에서 소리쳤다.
“저거 조용히 시킬 수는 없어?”
리나의 짜증 섞인 물음에 장각이 씨익 웃고 트랩을 조작했다. 전풍이 몇 마디 더 외쳤으나 음소거 누른 TV화면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럼 가지.”
리나는 전풍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무대로 돌아갔다. 장각은 그 뒷모습을 보며 다시 요악한 웃음을 지었다.
“침입자들도 연막탄에 걸렸으면 오는 데 시간이 걸릴 테고, 이제 쇼타임이야.”


유비와 손책이 서로의 목소리를 확인하고, 사마의와 주유가 서로 상대방 쪽으로 연기를 밀어내고 있었음을 깨닫자 양쪽 다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연막은 한쪽으로 날려버리고 서로 간단히 소개한 뒤 어째서 서로가 여기 있는지 설명할 때가 되었다.
“그러니까, 리나를 습격하고 있는 게 보통 스토커가 아니라 레전드 히어로라면 오디션 떨어졌다고 가만 있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
손책이 먼저 털어놓았다.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자기가 더 스토커 같아 쫄아드는 주군을 주유는 조금도 도와주지 않고 보고만 있었다.
“그래서 오늘 공연 무사히 마칠 때까지만이라도 가까이서 경계하고 싶었어. 레전드 히어로가 나타나면 내가 무찌르려고.”
“나랑 공손찬이 있잖아. 우리 붙은 거 몰랐어?”
유비가 볼멘 소리를 했다.
“지나간 일은 됐다.”
조조가 시계를 가리켰다.
“공손찬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서둘러야 한다. 그리고 손책.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이 바로 리나다. 원소라는 본명으로 배틀에 참전한 군주고 그동안의 여가수 연쇄 습격도 최근 리나 본인이 습격당한 사건들도 전부 리나의 소행이다.”
“뭐?”
손책은 그 이상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듯 굳어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고장나버린 주군 대신 주유가 나섰다.
“확실해요?”
조조가 상처받은 팬심을 헤아려줄 리 없으므로 유비가 나섰다.
“확실해. 본명이 전설의 이름인 것도 그렇고, 리나의 부매니저가 바로 신선이야.”
“그럼 우리도 표적을 바꿔야겠네요.”
주유가 손책을 돌아보고 말해봤지만 손책은 여전히 창백해진 얼굴로 뻐끔거릴 뿐이었다. ‘리나가, 왜?’라고 중얼거리는 것도 같았다.
“저쪽은 놔두고 우리 먼저 가자.”
조조가 유비를 재촉했다. 유비도 손책을 동정어린 시선으로 보면서도 서서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자, 잠깐.”
막 복도 끝까지 갔을 때 손책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두 사람을 불렀다.
“같이 가.”
“가서 원소와 싸울 거냐?”
조조가 의심스런 기색을 거두지 않고 손책을 노려보았다.
“원소는 이미 일반인도 여러 명 해쳤고 다른 군주의 영웅심을 흡수하는 반칙기술도 쓰고 있어. 최대한 빨리 탈락시키는 수밖에 없다.”
영웅심 흡수라는 말에 주유가 얼굴을 굳혔다.
“주군, 가서 싸워야 해요. 원소는 분명 사악한 존재와 손잡은 겁니다.”
“믿을 수 없어.”
손책이 힘들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가서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그 군주가 정말 리나인지.”
“리나가 맞으면 그땐 맞서 싸울 수 있나?”
조조가 냉정하게 지적했다.
“내 등 뒤에 적이 될지도 모르는 자를 두고 싸울 수는 없어. 지금 태도를 분명히 해라. 아니면 여기서 너부터 쓰러뜨리겠다.”
“조조.”
유비가 항의조로 말하자 조조가 손책을 보던 시선의 배 이상 험악한 시선으로 유비를 노려보았다.
“등에 칼맞아서 탈락하고 싶다면 너 혼자 탈락해라.”
“아, 아니. 내 말은.”
유비가 쫄아서도 할 말을 했다.
“손책도 그런 악당을 팬이라고 편들어줄 사람은 아니라는 거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면 제대로 싸워줄 거야. 그렇지, 손책?”
유비도 주유도 ‘그렇지? 그렇다고 말해. 그럴 거잖아.’ 하는 시선으로 뚫어져라 손책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눌린 것처럼 손책이 끄덕였다.
“그래. 리나가 악당이면 정말로 싸울게.”
굉장히 힘들여서 띄엄띄엄 말하는 걸 보고 조조는 주유 쪽을 보았다. 주유가 결연한 얼굴로 그 시선에 답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 주군이 그런 자의 편을 들게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래.”
조조가 누그러졌다. 그때 홀 쪽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빈둥지 증후군 2 (완) ㅣ- 레히삼



증거물실로 통하는 복도를 걷다 왕윤은 휙 뒤로 돌아섰다. 발소리도 없이 뒤따라온 사람이 발을 멈추고 그를 마주했다.
왕윤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경찰이 아닐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건 너무 이상했다. 빨간색 장식이 달린 하얀 코트에 머리카락에도 군데군데 붉은색 브릿지를 넣었고 심지어 붉은색 눈 화장까지 했다.
“감이 좋으시군요.”
막 ‘뭐야 이거?’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 상대가 입을 열었다.
“동탁의 정체가 궁금하시겠지요?”
다시 뭐 하는 놈이냐고 물으려다 왕윤이 입을 다물었다.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지?”
마침내 왕윤이 물었다.
“동탁과 아는 사이인가? 이.... 이상한 일들이...”
그가 고개를 저었다.
“넌 누구 편이냐.”
“왕윤님의 편입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이상한 사람은 얼굴 같은 게 그려진 육각형 패와 그게 끼워짐직한 슬롯이 있는 밴드 같은 것을 내밀었다.
“3백년에 한 번, 드림배틀이 열립니다.”
그가 뜬금없는 설명을 시작했다.
“전설 속 영웅의 이름을 지닌 사람들이 영웅패의 군주가 되어 자신의 꿈을 걸고 서로 싸우는 겁니다. 승리자의 꿈은 세계를 유지하는 에너지가 되고 그 사람은 소원을 이룹니다.”
왕윤은 눈만 굴려 주위를 다시 보았다. 익숙한 경찰서 내 복도였다. 다시 정면을 보자 여전히 그 이상한 사람이 서서 자기를 보고 있었다.
“그...게 나와... 아니 동탁과 무슨 상관이 있는데.”
“동탁 역시 군주이고 영웅패를 갖고 있습니다. 그 힘을 강도짓에 쓰는 겁니다.”
“꿈을 걸고, 강도짓을 한다고?”
그건 이 미친 소리 중에선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꿈이나 소원이라 하면 듣기엔 좋지만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해로운 꿈은 분명 있고 그런 꿈을 꾸는 자들이 흔히 범죄자가 된다. 동탁이 세상의 모든 보석을 훔치겠다거나 하는 꿈을 꾸는 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에 비하면.
“너... 너는 누구냐.”
“제 이름은 사마의. 드림배틀을 돕는 신선입니다.”
“배틀을 돕는다고? 진행 요원 같은 건가?”
말하고 왕윤은 사마의가 내민 물건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건...”
“레전드 체인저와 영웅패 여포. 영웅의 이름을 지닌 왕윤님이 드림배틀에 참전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입니다.”
“누가 그런데 참전한다고 그래!”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가 왕윤이 급히 입을 막으며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폈다.
“지금이 대화하기 적당치 않으시면, 후일 집으로 찾아갈까요?”
“그래.. 아니! 안 돼, 절대 집으로는 찾아오지 마.”
소리치고 왕윤이 심호흡을 했다.
“오늘 저녁, 퇴근하고 난 뒤.... 아, 그래.”
왕윤이 재빨리 마음을 정했다.
“오늘 낮에 동탁이 태... 경찰과 싸웠던 현장 알고 있나?”
사마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기서 보지. 설명 들을게 아주 많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때 뵙지요.”
붉은 빛이 번쩍이고 사마의가 사라졌다. 왕윤은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 옆 벽에 기댔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꿈을 꿨나 라고 생각하기엔 자기 무의식이 이 정도로 황당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아무튼 방금 그 사마의라는 신선...이 정말 동탁과 연관이 있다면 설명 정도는 들어둬야 했다. 그 드림배틀에는 참전하지 않더라도.
‘꿈을 걸고 싸운다고.’
이기면 그 꿈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그럼 진다면?
‘그런 게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일이라고? 대체 이 세상 어떻게 생겨먹은 거야?’


동탁은 정말로 부하 둘을 들고 백화점 옥상까지 뛰어넘었고, 태오와 싸운 현장에는 거대한 발톱 모양으로 콘크리트가 패어 있었다. 이런 힘은 경찰이 보통 방법으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왕윤은 영웅이 아니라 경찰이었다. 그러나 경찰로서는 동탁을 잡을 수 없었다. 만약 동탁이 자기 일을 방해하는 데 성공한 경찰 하나와 또 싸우고자 한다면 이번에는 왕윤이 태오를 구할 수 없었다.
왕윤은 체인저와 여포패를 받아들었다.
“내가 걸 꿈은.... 정의로운 세상. 악인들이 뉘우치고 갱생하여 더 이상 범죄가 없게 되는 것이다.”
허황된 꿈이었다. 절대로 이루어질 리 없는, 망상에 가까운 꿈. 그러니 괜찮을 것이다. 그가 동탁을 무찌른 뒤 다른 누군가에게 패해서 탈락하게 되어도 조금 더 포기한 어른이 될지언정 왕윤은 왕윤으로 남을 수 있다. 초선이와 태오와 행복하게 사는 꿈은 안전할 수 있었다.
“군신일체.”
여포의 강력한 힘이 그를 감쌌다. 마지막까지 반신반의했지만 이제 더 이상은 의심할 수 없었다. 드림배틀도, 레전드 히어로도 진짜 있었다. 그리고 이 힘을 범죄에 이용하려는 악당들도.
“레전드 히어로라고. 그러나 나는 경찰이지, 영웅이 아니다. 드림배틀보다는 범죄자인 군주를 탈락시켜 체포하는 걸 우선한다.”
왕윤이 다짐했다. 그의 등 뒤에서, 사마의가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 채.


경찰 모르게, 경찰보다 먼저 동탁과 싸워 그를 탈락시키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공원에서 괴상한 옷차림을 한 미친놈이 사람들에게 총을 쏘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오자 왕윤은 위험한 상황이니 일반 형사가 아닌 기동대를 출동시키라고 지시하고 자기가 먼저 뛰쳐나갔다.
서둘러 변신을 하고 달려간 그 곳에 동탁이 있었다.
태오를 밟아 누른 채로.
분노로 눈 앞이 하얗게 변했다. 아니 그래도 어떻게 이런 흉악한 도끼창을 사람한테 휘두르지..라고 걱정했던 것도 무색하게 왕윤은 한달음에 달려가 동탁을 반동강 낼 기세로 붉게 달아오른 낫과 같은 창날을 휘둘렀다.
“으어어!”
행인지 불행인지 동탁은 반동강이 나는 대신 멀리 날아가 처박혔다. 그자가 왕윤에게 무기를 겨누었다.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적의 공격이 실체가 없는 에너지탄인 걸 깨닫고 왕윤은 현장에 총알도 탄피도 남지 않았던 이유를 이해했다. 그리고 그 공격이 자신에겐 아무렇지도 않다는 사실도.
‘최강의 영웅패라더니, 진짜로 강하구나. 여포.’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영웅패의 기색이 좋아하는 게 느껴졌다. 칭찬 받고 좋아하다니 앤가 싶고 어째 태오가 연상되었다.
태오가 숨을 헐떡이며 몸을 추스르는 걸 확인하고 왕윤은 동탁에게 다가갔다.
뭔가 수작을 부리려던 동탁을 다시 한 번 쳐서 날려 보내고 도망치는 걸 쫓았다. 그러나 얼마 쫓지도 못해 경찰차 사이렌이 들렸다.
이 꼴로 부하들을 맞을 수는 없으므로 왕윤은 동탁 추격을 포기하고 변신을 해제했다. 도착한 기동대에는 동탁이 경찰들이 도착하자 도주했으면 도주 방향은 저쪽이라 알리고 그가 현장으로 돌아갔다.
“그런 힘이 있으면서, 남은커녕 자신도 지키지 못한다고?”
태오는 아까 그의 곁에 쓰러져 있던 청년과 같이 있었다. 태오에게 다가가 괜찮냐고 하려던 왕윤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내게 그런 힘이 있었으면 이런 일 일어나지 않았어!”
왕윤은 체인저와 여포패를 주머니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태오는 이 힘에 대해 알아선 안 된다. 왕윤이 참전했다는 건 더 알아선 안 된다.
안 그래도 왕윤 선배 같은 영웅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애였다. 그가 이렇게 된 걸 알면 자기도 참전하려 들 게 분명했다. 자기가 할 자격은 없는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왕윤은 태오가 힘을 탐해 이런 이상한 일에 뛰어들지는 않았으면 했다. 위험에선 최대한 멀리 떼어놓고 싶었다.
‘이번에야 말로 혼을 내야겠어. 동탁 관련 일에서도 빼버리자.’
태오가 낙담할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지만 이런 위험한 일에 휘말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태오를 징계할 이유와 징계 수위를 이것저것 생각하다 왕윤은 자기 친구와 함께 떠나는 녹색 옷의 청년을 주목했다. 좀 멍청해 보이지만 저쪽도 군주일게 분명했다.
‘아, 그래. 저놈도 태오하고 떼어놔야지.’


너의 꿈은 뭐냐.
모두가... 행복한 세상.
기절한 청년을 앞에 두고 왕윤은 난감해했다. 일단 나쁜 놈이 아닌 건 확인했고 그건 다행인데 이제 이 사람을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야아, 이 나쁜 놈 같으니! 주군에게 손대지 마라!”
눈앞으로 주황색 육각형이 폴짝 뛰어올랐다.
“응?”
“이 관우! 패배할지언정 주군을 버리진 않는다! 우릴 노려도 소용없으니 차라리 베어라!”
초록색 육각형도 쬐끄마한 은색 창을 휘둘렀다.
“.......말, 할 수 있네?”
자기도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뭐? 그럼 우릴 말도 못하는 짐승 취급했냐!”
주황색이 삿대질했다.
크와아아아앙!
왕윤의 의사와 상관없이 여포가 표호 했다. 이거 곤란하겠다 싶어 왕윤은 일단 변신을 풀었다.
“쿠카!”
여포가 역시 쬐끄마한 은색 창을 들고 폴짝 뛰어내려 두 영웅패에게 덤볐다. 왕윤은 서둘러 여포를 집어 들었다.
“안 돼, 싸우지 마.”
“쿠카!”
“자, 착하지.”
손으로 꽉 쥐고 강제로 머리를 토닥였다. 몇 번 낑낑대다 여포가 축 쳐젔다.
“어....”
초록색과 주황색이 왕윤의 눈치를 살폈다. 왕윤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해치거나 하지 않아. 너희... 주군이라고 부르니? 이 청년이 나쁜 사람이 아닌 건 확인했고.”
“아, 그런 거요?”
주황색 패가 먼저 무기를 내렸다.
“난 장비요. 반갑수다.”
“이보게 장비! 적 군주에게 어찌 그리 쉽게 손을 내미나 그래. 우릴 빼앗으려는 수작이면 어쩌려고.”
“여포가 충분히 강해서 별로 너희를 빼앗을 필요는 없는데.”
“쿠카.”
왕윤의 말에 여포가 뻐겼고 관우 장비는 여포를 노려보았다. 왕윤은 그만 웃고 말했다.
“그래... 너희가 이렇게 나설 정도로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인가보구나.”
“물론이오. 세상 모두를 행복하게 하겠다는 큰 뜻을 품은 훌륭한 분이지.”
관우가 신나서 말했다.
“그래 그것 참 나만큼이나..... 좋은 꿈이구나.”
허황된, 이라고 말하려다 왕윤은 말을 고쳤다. 이 영웅패들은 마치 아이 같아서 이들 상대로 동심을 해칠만한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댁의 꿈은 뭔데 그러슈?”
장비가 물었다.
“일단은 장소부터 옮기자.”
왕윤이 유비를 부축해 일어났다.
“너희 주군을 언제까지 맨땅바닥에 방치할 수도 없잖니.”
“진짜 좋은 분이셨구만!”
두 영웅패가 신이 나서 왕윤의 어깨에 올라앉았다. 일이 예상치 못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하며 왕윤은 유비를 집으로 데려갔다.


초인종이 울렸을 때 왕윤은 마음속 깊이 안도했다. 오지 않는 줄 알았다. 적어도 오늘은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태오의 안전을 위해서였고 실제로 그가 큰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전에 없이 단호하게 정색을 하고 꾸짖었다. 실망했다고까지 했다. 임무에서도 제외해버렸다. 그런데도 이렇게 또 찾아오다니.
‘너는 왜 이렇게까지 나를 좋아하는 거니?’
묻고 싶었다. 도대체 내가 뭐가 그리 대단해서 네가 자존심마저 굽히고 이렇게 매달리느냐고.
왕윤은 묻지 못했다. 태오 입으로 좋아한단 소리를 정말로 들으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염치도 없이 태오를 끌어안고 팔 안에 가두고 싶어질 것 같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자신의 역할은 태오를 보호하는 것이지 그를 구속하는 게 아니었다.
‘역시 너한테는 이런 얘기 할 수 없어.’
그래서 왕윤은 유비와 둘이서만 동탁을 칠 준비를 했다.
그래도 언제까지나 이렇게 어정쩡한 상태로 알면서 모르는 척 지낼 수는 없었다. 그러니 동탁을 배틀에서 탈락시키고 체포한 다음, 태오에 대한 위협이 사라진 다음에 차분한 마음으로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했다. 받아줄 수는 없더라도 외면만 하고 있어선 태오도 계속 제자리걸음일 테니까.
다행히 유비는 좋은 사람이었다. 어리고 순진하지만 꺾이지 않는 기세가 있었다. 그를 보며 왕윤은 자신이 언젠가 탈락하게 되면 꿈을 유비에게 의탁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라면 악한 자도 당연히 없을 것이다. 기왕 허황된 꿈이라면 보다 범위가 넓은 쪽이 실현되는 게 좋았다.
모든 사람이 행복한 세상이라니 잘 상상이 안 되긴 하지만 자기가 변신히어로가 되어 인외의 힘을 휘두르게 되리라고도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나중 일은 나중에. 지금은 동탁을 체포하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초선이 납치당했다.
왕윤은 두 가지 꿈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총에 맞고 쓰러지면서, 왕윤은 태오가 전설 속의 이름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태오의 슬픔을 덜어줄 만한 말을 해야 하는데 아무 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미안하단 말 한 마디가 그가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태오가 유비를 의지하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약속도 못 지키고 죽는 자기 대신 유비와 같이 협력해서 정의를 수호하고, 유비가 꿈을 이루어 그도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자기 마음을 고백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지만 또 다행이기도 했다. 두고 죽을 거라면 모르게 하는 편이 나았다.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사랑한다, 태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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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니 말인데 사마의가 처음부터 태오를 찍었을 리는 없잖아요. 실제론 사마의가 처음에 점찍은건 왕윤인데 순순히 타락할 인간이 아님을 깨닫고 장각을 시켜 초선을 납치해 위기로 몰아넣었다가.... 본편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면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보디가드 대소동 6 ㅣ- 레히삼

이번에도 도술의 조합으로 링블레이드가 무수히 늘어났으나 유비와 공손찬과 조조를 한꺼번에 압도하기는 무리였다.
공손찬이 가장 먼저 안량의 눈앞까지 쇄도했다. 장창에 맞고 안량이 나가떨어졌다.
“헛된 꿈도 여기서 끝이다!”
조조가 달려들며 하후돈으로 바꾸었다. 유비도 드래곤 블레이드를 높이 치켜들었다.
순간 천장에서 스프링클러가 작동했다. 화재 경보기가 요란하게 울었다.
“뭐야?”
“유비님, 천장에서 비가 와요!”
다들 잠깐 놀란 사이에 여기저기 문이 열리고 경찰이 쏟아져 들어왔다.
“꼼짝 마!”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출동했는지 다들 중무장하고 총을 들고 있었다.
유비가 당황해서 무대 위를 보았다. 안량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우리도 도망쳐야 해!”
조조가 유비와 공손찬을 재촉했다. 챙겨줄 의리는 없지만 진범도 아닌데 체포되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저들이 경찰들 두들겨 패고 달아나는 것도 원치 않았다.
서서가 다시 유비와 공손찬을 잡았다. 사마의도 조조 곁으로 달려가 퇴각을 썼다.


“위험했지? 나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꽁무니 빼는 줄만 알았더니 화재 경보기를 켜고 경찰을 불러 배틀을 중단시킨 게 바로 장각이었다. 거듭된 사건으로 전담 수사팀이 근처에 대기하고 있었기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덕분에 장각은 리나의 집 소파에 꼭 주인인 양 앉아 까불고 있었다.
“그 빨간 놈은 또 뭐야?”
리나는 다 마신 생수병을 집어던졌다.
“유비나 공손찬보다 훨씬 강한 군주지. 곤란하게 됐어, 흠흠.”
장각은 간드러진 목소리를 내며 안량패와 문추패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전풍이 그 손을 탁 쳐냈다.
“아, 왜. 문추패를 더 강하게 만들어준 게 누군데, 손도 못 대는 거야?”
장각이 짐짓 투정부리며 리나 쪽을 보았다. 리나는 정면을 노려보고 있다가 장각에게 시선을 돌렸다.
“좋은 방법 있어? 그 셋을 다 무찔러버릴 만한?”
“글쎄, 지금 안량패까지 개조하거나 다른 무기를 빌려줄 수도 있긴 하지. 하지만 역시 가장 빠르게, 큰 폭으로 강해지려면 다크 펜타곤을 이용하는 게 확실해. 나라면 배틀을 어떻게든 피해서 콘서트 날을 노리겠어.”
“그렇게 예정대로 잘 될까?”
전풍이 반론했다.
“리허설 날에 이런 대소동이 났으니 공연이 연기되거나 취소될 수도 있다.”
“아니, 그런 일은 없어.”
리나가 퉁명스레 말했다.
“그 콘서트 하나 열자고 방송국하고 소속사하고 광고업체들까지 몇 군데가 얽혀 있는데. 아마 벌써 ‘스토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국민여동생’ 같은 기사 준비하고 있을걸? 나한테는 말도 안 하고.”
“차라리 잘 됐네.”
장각이 사근사근하게 리나를 달랬다.
“가서 예정대로 춤추고, 노래하고, 영웅심을 한~껏 빨아들이라구. 널 이용하려는 인간들을 네가 이용해주는 거야.”
리나의 표정이 펴졌다. 전풍은 둘을 바라보다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리나는 유명해진 뒤 제법 큰 주택을 사서 살고 있었다. 전풍에게 주어진 방도 넓고 침대도 있었다.
전풍은 바닥에 앉아 핸드백을 열었다.
리나가 자긴 이제 안 쓴다며 준 것이었다. 딱히 신선에게 쓸모있는 물건이 아닌데도 그때는 퍽 기뻤다.
그래서 굳이 이 핸드백에 패를 넣어두었다.
육각형의 작은 패는 영웅패가 아니었다. 주문을 조합해 만드는 중인 정교하고도 강력한 트랩이었다.
장각은 다크 펜타곤을 완성시키는 대로 주군을 버리거나 암흑 에너지에 물들여 완전히 타락시킬 작정이다. 주군이 스스로 장각과 손을 끊을 생각이 없다면 자신이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콘서트 날에도 장각은 무대에 찾아올 것이다. 다크 펜타곤이 영웅심을 차질 없이 흡수하고 활성화하는지 확인해야 할 테니. 정확히 어디에 서 있을지까지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러니 그 자리에 트랩을 설치해뒀다가 장각을 잡을 것이다. 그리고 다크 펜타곤은 영웅심을 많이 빨아들이기 전에 부숴버릴 것이다. 에너지를 충분히 축적하지 못한 상태라면 혼자서도 부술 자신이 있었다. 주군은 콘서트 시작할 시점이라 가장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테니 미처 눈치채기도 전에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게 성공해서 장각을 죽이면 주군은 자신도 죽이려 들 정도로 화를 낼 것이다. 그러나 군신계약은 신선만 구속하는 것이 아니다. 주군도 신선을 버릴 수는 없으니 결국은 계속 함께 싸우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조조도 유비, 공손찬과 함께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을 동작빌딩에 데려갈 수는 없고, 이 녀석들도 이제 날 태연히 도원관에 들이지는 않을 테니 어디 조용히 이야기할 만한 장소를......’
“공손찬, 우리 마트 들러야겠다.”
“응?”
유비가 마침 지나가는 길에 있는 마트를 가리켰다. 공손찬도 조조도 나란히 어리둥절했다.
“왜?”
“손님도 있는데 우리 며칠이나 장을 못 봤어.”
“손님?”
무슨 소린지 몰라 조조가 눈 동그랗게 뜨고 유비를 보았다. 그러자 유비는 왕윤에게 한 수 배우고 싶다 말했을 때처럼 해맑게 웃었다.
“저녁때도 다 됐잖아. 기왕 같이 싸우게 됐는데 같이 밥 먹고 작전 짜자.”
조조뿐 아니라 공손찬도 유비를 황당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협력 같은 거 하지 말고 따로 싸울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 순간,
“그럼 사마의 님도 우리랑 같이 먹는 거예요?”
서서가 유비와 거의 똑같은 표정으로 입을 딱 벌렸다. 그리고 조조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던 사마의 앞에 폴짝 다가섰다.
“사마의 님도 인간들 음식 드셔보셨죠! 뭐가 제일 맛있었어요?”
언제나 무표정하던 사마의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조조는 사마의가 지금 ‘모르는 신선입니다.’라고 하고 싶을 거라고 확신했다.
“잠깐. 유비, 서서.”
공손찬이 나섰다.
“도원관 지금 청소도 안 되어있으니까 그냥 외식하자. 서서 짜장면 안 먹어봤지?”
“응, 그래!”
유비는 그거 참 좋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리고 서서에게 짜장면과 짬뽕에 대해 설명해주는 동안 공손찬은 조조를 돌아보았다.
“음식점에서 적당히 구석에 앉으면 이야기 나눌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
“좋아.”
드디어 같은 나라 말 쓰는 사람을 만난 기분에 조조는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중국집이 있었다. 테이블마다 칸막이까지 있어서 이야기 나누기에 더 부담없어 보였다.
구석의 4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유비가 의자 하나를 더 끌어왔다. 조조, 공손찬, 서서, 유비가 앉고 나자 사마의도 머뭇거리다가 앉았다.
“왜 그래?”
유비에 공손찬까지 조조와 사마의를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뭐, 불편한 거 있어?”
“아니, 아무 것도 아니다. 당면 문제나 이야기하자.”
“그래. 그 전에 주문부터 하고.”
유비는 메뉴판을 펼쳐 서서에게 제일 먼저 보여주었다. 주종이라기보단 애인이나 남매 같은 모습이 조조에겐 생경하기 그지없었지만 이번엔 공손찬도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그럼 짜장면, 짬뽕, 짜장면, 너네는?”
조조가 사마의에게 신선도 음식물이 필요하냐고 물었을 때 사마의는 분명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니 조조는 결코 신선을 굶기고 학대한 것이 아니었다.
“......볶음밥 둘.”
점원이 주문을 받아갔다. 조조는 유비를 노려보았다.
사마의는 서서가 능력 없고 승부욕이나 호전성도 없어 방해가 안 되면 다행인 신선이라고 혹평했었다. 전풍이나 주유를 두고 한 평가와는 사뭇 대조적인 그 말이 비로소 완전히 이해되었다.
유비가 만약 군주가 아닌 신선이었다면 서서 같은 신선이 되었을 것이다.
‘끼리끼리 놀고 있군. 이게 배틀이 아니라 소꿉장난으로 보이나?’
“그럼, 우리 모두 그 군주와 전풍에 대항해서 싸우는 것 맞지?”
공손찬이 먼저 운을 떼었다. 여기에는 조조도 수긍했다.
“잠깐. ‘그 군주’라니 너희는 아직도 군주의 정체를 모르는 거냐? 신선은 알면서?”
“전풍은 서서가 알아봤으니까. 그럼 조조는 군주가 누군지도 알아? 어떻게?”
“이름으로 알았지. 영웅의 이름을 지닌 사람은 관련자 가운데 본명이 원소인 리나 하나뿐이었다.”
“아.”
공손찬은 ‘그런 방법이 있었지.’하고 아쉬워하는 표정이 되었다. 유비는 두 눈 동그래졌다가 활짝 웃었다.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조조 굉장해.”
모든 칭찬이 듣기 좋은 것은 아니지만 유비의 진심어린 칭찬은 그중에서도 특히 껄끄러웠다.
“됐고, 그동안 경호원으로 가까이 있으면서 더 알아낸 정보는 없나? 라이벌 제거 말고 달리 갖고 있는 목적 말이다.”
“음......”
유비도 공손찬도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갸웃거렸다.
“가수로서의 라이벌뿐 아니라 드림배틀의 경쟁자들도 제거할 작정이었겠지.”
그럴 줄 알았으므로 조조가 기다리지 않고 자기 가설을 내놓았다.
“보디가드 명목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은 뒤 만만한 군주를 골라낸 거다. 손책이 떨어진 건 아마 강자라 부담되어서일 테고.”
손책이 리나 티셔츠 과시한 일은 유비도 몰랐으므로 반박 없이 수긍했다.
“우리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다 이거지.”
공손찬이 얼굴을 찌푸렸다. 조조 보기에도 만만해 보였으므로 그는 격려해주는 대신 지금 중요한 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너희를 이제까지 탈락시키지 못했고, 이젠 나까지 참전했으니 원소도 곤란해졌군. 오늘 거의 그쪽이 지기 직전까지 갔어. 너희와 내가 처음부터 제대로 협력한다면 다음번엔 확실하게 이길 수 있다.”
“그래.”
유비와 공손찬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가 공손찬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 우리 오늘 해고됐어.”
“해고?”
서서가 어깨를 움츠렸다.
“저 때문이에요. 같이 고용된 것도 아닌데 멋대로 따라와서 소란 피웠다고 유비님이랑 공손찬님까지 해고됐어요.”
“아니, 서서 잘못이 아냐.”
유비가 허겁지겁 달랬다.
“적이 쫓아와서 싸우러 간 것뿐인데. 사람한테 이거저거 하는 게 어딨어. 리나가 나빴지.”
“전 사람이 아닌데요?”
“신선도 이거저거 하면 안 돼.”
유비가 정색했다.
“말했지. 누구도 자신을 도구라고 해선 안 된다고. 서서는 물건이 아니야.”
수긍하는 서서를 보고 유비는 다시 웃었다. 조조는 그걸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유비다운 일이었다. 정에 휩싸여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
겉모습이 사람 같다고 해서 배틀의 도구와 소꿉놀이에 빠져 있다니.
유비가 왜 그렇게 약한 신선을 자진해서 맞아들였는지 비로소 훤히 보였다. 분명 자신과 친하고 즐겁게 놀 수 있는 신선이니 데려갔겠지.
조조가 사마의를 택한 것은 그가 최고의 신선이었기 때문이었다. 같이 먹고, 놀고, 다정하게 굴 상대는 필요하지 않았다.
사마의를 학대할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사마의가 강하지 않았다면 그를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배틀의 승리를 위해 필요하면 희생시킬 수도 있어야 했다.
역시 신선에게 섣불리 정을 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하지만 그는 유비에게 그 점을 지적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심드렁하게 그쪽에서 눈을 떼고 공손찬 쪽을 보았다.
“그럼 원소는 너희들과의 배틀을 포기했다는 뜻인가? 판을 크게 벌인 것치고는 너무 쉽게 발을 빼는군.”
“그러네.”
잠시 갸우뚱 하던 공손찬이 휴대폰을 꺼냈다. 진동이 오고 있었다.
“매니저야. 전풍 말고 그 안경 낀 쪽.”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공손찬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예?”
공손찬은 놀란 얼굴로 한참이나 가만히 듣고 있었다. 조조는 지금 당장 저 전화를 도청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
“하지만, 괜찮아요? 정말로?”
전화를 쥔 채 공손찬이 유비와 조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갈게요. 언제까지 가면 돼요?”
이제는 조조뿐 아니라 유비와 서서까지도 묻고 싶은 게 많은 표정으로 공손찬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공손찬은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고 정중히 인사말까지 한 뒤 전화를 끊었다.
“뭐래?”
유비가 불안해져서 물었다.
“해고된 건 너 하나뿐이니까, 난 내일부터 다시 나오래.”
유비도 서서도 어리둥절했다.
“그래서 나가겠다고 한 거야?”
“응.”
공손찬이 결연한 태도로 대답했다.
“우릴 떼어놓고 따로 공격하겠다는 거겠지. 알아. 그렇다고 걸어오는 싸움을 피할 순 없잖아?”
“그래도 정말 혼자 갈 건 아니지?”
유비는 여전히 불안한 얼굴이었다.
“물론. 혼자 가는 척 하면서 함정을 파야겠지.”
공손찬이 조조를 보았다. 조조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도 함께 간다.”
유비는 껄끄러워도 원소를 처리하기 위해서라면 잠깐 정도 협력할 수 있었다.
“당장 내일 리허설 다시 하니까, 소속사 와서 이제까지처럼 따라오래.”
“결국 그 콘서트장에서 결판을 내겠다는 건가.”
조조는 조금 석연치 않은 기분이 되었다. 자신은 둘째치고 유비와 공손찬이 한편이라는 건 원소도 모를 수가 없는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공손찬만 꾀어내다니.
“이번엔 정말 위험할 거다.”
조조가 공손찬에게 경고했다.
“무슨 꿍꿍이가 있든 그만큼 자신이 있으니까 유인하는 것일 테니.”
“하지만 지금 거절하면 우린 원소에게 접근할 기회가 없어.”
공손찬이 결연히 대답했다.
“경찰이든 다른 경호원이든 칭칭 감고 다니면서 보호받겠지. 오늘 한 것처럼. 그럼 앞으로 또 누굴 해치더라도 막을 수 없어.”
“각오가 되어있다면 다행이군.”
조조는 유비를 돌아보았다. 걱정 가득한 얼굴로도 공손찬이 하는 대로 힘있게 이를 악무는 모습이 예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왕윤 선배 앞에서도 저랬다. 도겸을 격려할 때도 저랬을 것이다.
역시 원소만 잡고 나면 유비와는 더 얽히지 말아야겠다고 새삼 다짐했다.

빈둥지 증후군 1 ㅣ- 레히삼

Characters: 왕윤. 태오. 유비
Rating: PG-13
Warnings: 캐릭터 사망
Summary: 왕윤도 태오에게 마음이 있었는데 태오는 아직 애라고 자기최면하는 쌍방 삽질의 향연


계기는 사소한 말 한 마디였다.
“거 반장님이 놔주셔야 그 놈이 장가를 가죠.”
태오가 팀원들과 잘 지내는지 궁금해 몇 마디 물었던 대화 끝에 저런 말이 나왔다. 왕윤은 당황해서 막 입에 대려던 자판기 커피를 치웠다.
“내, 내가 뭘?”
그가 되물었다.
“나 태오 안 잡고 있고 그런 관계도 아냐, 결혼을 일찍 했음 나 태오만한 아들이 있었을...”
“효자는 장가 못 간다잖아요.”
왕윤답지 않은 과잉반응을 부하는 웃어 넘겼다.
“효도보다 더하죠, 주말마다 반장님 댁에 가질 않나.”
임주임이 말했다.
“그 녀석 성격은 그래도 껍데기는 반반하니까, 소개팅 같은 것도 들어오고 그러거든요?”
“사람한테 껍데기가 뭐야.”
“네, 외모요, 외모. 암튼 얼마 전에도 다른 청 강력계 순경 하나가 파견 왔다가 홀딱 반한 것 같던데 소개팅 해볼 테냐고 떠보니까 주말엔 선배네 가봐야 한다고 거절해버리던데....”
“그랬어?”
왕윤은 금시초문이었다.
“그럼 안 되지, 안 그래도 바빠서 연애할 시간도 없는 동네인데.”
그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번엔 오지 말라고 태오한테 말해놓을 테니까 추진해봐, 그 소개팅.”
“네, 아버님 허락까지 받다니 이거 소개팅 아니고 선인가?”
“아버님 아냐.”
“아까는 아들이라면서요.”
알람이 울렸다. 넉살 좋게 웃던 임주임이 휴대폰을 보더니 고개 꾸벅 해보이고 가버렸다. 왕윤은 어쩐지 안도하며 커피를 마셨다.
“허 참, 그 꼬맹이가 벌써 소개팅 같은 걸 할 때가 되었나.”
법적으로 성인이고 경찰까지 되었지만 왕윤은 아직도 태오를 보면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르곤 했다. 무서웠을 텐데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의연하게 있다가 밧줄 풀어주고 이젠 안전하다고 해주자 그제서야 울어버리던 고집쟁이 꼬맹이가.
실상 여전히 고집쟁이 꼬맹이이긴 했다. 그 힘든 공부 열심히 해서 수석으로 졸업하고, 선배들한테도 한 마디도 안 지고 따박따박 대들고. 태오가 옳은 경우가 실제로 많으니 무조건 그러지 말라고 할 수 만도 없어서 그때그때 싸우지 말라고 중재하고 있긴 하지만 왕윤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다른 사람이 옳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태오는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의견이 갈릴 때 그가 먼저 물러나는 건 상대가 왕윤일 때뿐이었다.
특별하게 취급받는 게 좀 기쁘면서도 이러다 태오가 엇나갈까봐 왕윤은 걱정하고 있었다. 태오가 항상 옳지 않듯이 왕윤 역시 언제나 옳을 수는 없었다. 그를 맹목적으로 뒤쫓다 태오가 어떻게 잘못되기라도 할까봐 왕윤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애를 하면 좀 여유가 생길까.’
자신은 그랬다. 꼭 연애를 하면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고 이런 게 아니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사람은 조심을 하게 된다. 자신도 젊었을 땐 꽤나 날뛰었다. 세상 사는 요령을 터득하고 가정을 이루면서 다소 유해지긴 했어도 여전히 세상의 악을 모두 없앤다는 불가능한 꿈을 마음에 품고 있기도 했다.
‘이런 유치한 면은 태오가 닮으면 안 되는데 말이야.’
좀 까칠해도 똑똑하고 착한 녀석이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우선은 뭔가 큰 사건이 터져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기 전에 소개팅을 시켜야 한다.
‘소개팅이라....’
태오가 여자를 사귀는 모습이 잘 상상이 안 되었다. 다정하지 못한 성미야 무뚝뚝한 남자가 취향인 여자도 있을 테니 괜찮겠지만 너무 목표 지향적인 인물이라 과정이 중요한 데이트를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데이트 나갈 태오에게 해줄 수 있는 충고를 이것저것 생각하다 왕윤은 문득 쓸쓸해졌다. 태오에게 애인이 생기고 결혼까지 하게 되면 아무래도 지금처럼 가깝게 지내기는 어려울 터였다. 시간만 나면 집에 와서 같이 대화하고 초선이와 놀아주는 것도 더는 그럴 수 없을 거고 술 한 잔 하자고 가볍게 불러내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하하, 이거 뭐야. 빈둥지 증후군인가?’
입안에 고인 커피가 어째 달지 않았다.
‘이제 40대 들어선지 얼마나 됐다고 갱년기 같은 기분이야. 정신차려라, 왕윤. 이러다 초선이 시집은 어떻게 보내려고 그래.’
초선이 시집보낼 생각을 하니 절로 입이 종이컵을 씹었다. 20년도 더 남은 일이라고 되뇌며 왕윤은 남은 커피를 단번에 마셔버리고 일로 복귀했다.


왕윤은 시계를 보았다.
내키지 않아하는 태오를 달래 소개팅에 가라고 약속을 잡아주었다. 설령 그 김순경인가 하는 사람이 마음에 안 들더라도 만나보는 자체가 경험이 된다고 설득해서 등 떠밀어 보냈다.
‘태오는 잘하고 있을까.’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대놓고 말해서는 안 되고 듣기 좋게 돌려 표현해야 하며 그런 것도 대민 봉사를 하는 경찰로서 필요한 덕목이라고까지 말해놨으니 여자를 울리거나 뺨을 맞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어째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아 애 취급도 정도껏 해야 하는데.’
자신이 태오에게 유난히 무른 건 왕윤도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했으면 호통을 쳤을만한 일도 태오가 저지르면 엄한 얼굴로 타이르는 선에서 그치곤 했다. 그가 타이르면 심하게 말 안 해도 심하게 혼난 것 같은 표정으로 정말 반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시 너무 물렀다.
원래 경찰이 범죄 피해자와 이런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 안 된다. 경찰관도 사람이고 남의 인생을 책임질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범죄를 해결하는 이상 피해자의 인생에 관여해선 부작용만 생겼다.
그런데도 왕윤은 태오를 그렇게 냉정하게 밀어내지 못했다. 언제나 집안에서 붕 뜬 듯 외로워 보이는 아이가 가엾어서이기도 했고 악과 싸우겠다는 의지에서 자기 옛날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애가 경찰대를 졸업해 자길 따라와 줬을 땐 기뻤다. 초선이와 사이좋은 것도 기특했다. 이제는 태오도 그의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첫 소개팅 나간 게 잘 되어가나 걱정하는 것도 너무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왕윤이 다시 시계를 보았다.
‘슬슬 저녁을 먹어야 하나....’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왕윤이 놀라 현관으로 갔다.
‘누군지?’
왕윤의 집에 오는 사람이야 뻔했다. 하지만 오늘은 오지 말라고 했는데.
문을 열자 예상 그대로의 인물이 있었다.
“태오?”
“죄송합니다, 선배님. 일껏 자리를 마련해주셨는데.”
“아니 자리를 마련한 건 내가 아니고.... 들어와라.”
왕윤은 우선 태오를 집안으로 맞아들였다.
“왜, 소개팅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뇨, 꼭 그런 건....”
“상대는 어땠고?”
“그냥 좀 귀여운 타입이었어요. 잘 웃고.”
“그런데?”
태오가 눈을 피했다.
“그냥.... 전 좀 더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냐.”
왕윤은 내심 안도했다.
“그래 그런 것도 좋지. 아무래도 감정적으로 힘든 일이니까, 그런 위안 받을 데가 있으면.”
“네.”
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람을 만나봐야 자기 취향도 알 수 있는 법이지. 수고했다.”
그가 태오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앞으로 더 만나다보면 잘 맞는 사람 찾을 수 있을 거야.”
“더요?”
“그래. 설마 한 명 만나고 끝날 거였어?”
“아...”
사람 만나는 게 어지간히 귀찮은지 미간을 모으면서도 자기에게 대놓고 싫다고는 못하는 태오가 어쩐지 귀여워서 왕윤은 무심코 태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차, 애 취급 덜 한다 해놓고...’
그러나 그가 그만두기 전에 태오의 표정이 풀렸다. 그가 안심한 듯 웃으며 왕윤의 손길에 고개를 기댔다.
‘아.’
왕윤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날 좋아하는구나, 이 애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머리 쓰다듬을 때 고개 좀 기울인 것 가지고 뭘 확대해석하냐고 왕윤은 스스로를 꾸짖었다. 나이차도 나이차지만 자기가 자라는 걸 지켜봤던 아이 상대로 이게 무슨...
“...선배?‘
“응, 아니. 저녁이나 먹자.”
왕윤이 멈춰있던 손을 거두었다. 돌아서서 부엌으로 가는 발걸음을 너무 서두르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맙소사.’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손끝에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내가 왜....’
태오가 그를 좋아하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쉽게 어른을 동경하니까. 둘의 첫 만남과 그 이후 왕윤이 태오 앞에서 본받을만한 어른으로 있기 위해 노력했던 걸 생각해보면 그건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왜 자기가 동요한단 말인가.
‘하하....’
지금 설거지 해야 할 것도 없는데도 왕윤은 싱크대에 물을 틀었다.
‘미쳤구나, 나.’
태오는 아이었다. 이제 나이는 성인이지만 왕윤에게는 아직 보호해주고 싶은 아이였다.
그런데 그가 자신에게 기댔을 때 기뻤다. 이대로 계속 자기에게 기대주길 바랐다.
태오를, 그가 주는 호의와 안정감을 욕심냈다.
‘이건 안돼. 동경은 동경이지, 그걸 빌미로 그 애에게 사랑을 요구해선.’
찬물에 손을 담그고 왕윤이 심호흡했다. 두어 번 반복하자 머리가 맑아졌다.
마음은 몰라도 행동은 통제할 수 있었다. 태오가 자기 삶을 살도록 천천히 물러나주면 되었다. 어른답게, 보호자의 역할에 충실해서.
왕윤은 막 깨달은 마음을 작게 접어 구석에 잘 쑤셔 넣었다. 버리지는 않고.


태오의 다음 소개팅 상대를 고르기도 전에 관할에 큰 사건이 터졌다. 감정 문제로 고민하는 것 보다는 강도 사건이 훨씬 마음이 편했으므로 왕윤은 기꺼이 그 일에 매달렸다.
곰돌이 가면을 쓴 강도단이라니 웃기는 놈들이지만 그 피해상황은 웃기지 않았다. 그놈들은 벌써 네 번의 범행을 간단히 성공시키고 포위망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고가의 보석을 노리는 점을 고려해 보석 암거래 쪽에서도 덫을 놓았지만 아직은 입질이 없었다.
이상한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CCTV에 강도단의 리더로 보이는 사람이 잡혔는데 곰돌이 가면이 아니라 괴상한 모자에 갑옷을 입고 기관총을 들고 있었다. 이상한 옷이야 컨셉이라지만 기관총을 난사해 매장을 부수는 장면이 찍혔음에도 현장에서 총알이 발견되지 않은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얼음으로 총알을 만들어 쏘고 나면 녹아버린다던가 하는 소설 같은 이야기도 아닐 텐데.’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되는 것 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까 적어도 좀 상식적인 범행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투덜대며 왕윤은 이번 사건 보고서를 읽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그냥 부하 놈들일 망정 범인도 여럿 잡아넣었고 보스가 누군지도 확인했다. 결국 동탁은 놓치긴 했지만 이 정도 성과가 어디인가. 이번에도 태오의 단독 행동을 엄히 야단치기는 다 틀렸다고 생각하며 왕윤이 미소 지었다.
‘좀 못해야 혼도 내지, 혼자서 이 수를 다 때려잡고...’
아빠의 마음으로 흐뭇하게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던 왕윤이 마지막 부분에서 멈칫했다. 그가 사무실을 나왔다. 태오가 보이지 않자 그가 현장에 있던 다른 형사를 불러 물었다.
“예, 반장님.”
“보고서가 좀 이상해서 그러는데... 그놈이 백화점 옥상으로 건너뛰어 도망쳤다고?”
“그, 그게....”
형사가 우물거렸다.
“저도 보고도 못 믿겠습니다만 그게 그러니까....”
“정말 그랬다고?”
“네.”
“6차선 도로 건너편인데? 직선 거리만 따져도 20미터 정도는 될 텐데?”
심지어 백화점은 현장 건물보다 높이가 높았다.
“그.... 태오 녀석이 그놈하고 싸웠으니 저보다 잘 알지 않을까요?”
결국 형사가 꽁무니를 빼었다. 왕윤은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태오에게 묻자니 안 그래도 동탁하고 싸우다 멍투성이가 된 애한테 보고서가 이상하다고 추궁하고 싶지 않아서 왕윤은 일단 그 백화점 CCTV부터 확인해보기로 했다.


보디가드 대소동 5 ㅣ- 레히삼


리나는 크게 다치지 않았다. 병원에서 간단히 진찰받고 휴식을 취하라는 권고를 받아 집으로 돌아갔다. 유비와 공손찬, 서서도 일단 도원관으로 돌아왔다.
“동탁처럼 영웅심을 흡수하는 군주에게 신선까지 있다니.”
유비는 패잔병처럼 마룻바닥에 늘어졌다. 그러다가 서서 역시 시무룩한 걸 보고 얼른 표정을 폈다.
“그래도 아까 서서가 있어서 살았어. 신선은 정말 굉장하구나.”
“고마워요.”
서서는 표정을 펴지 못했다.
“그치만, 제가 더 강했으면 그렇게 도망칠 필요도 없었을 거예요. 두 분이 그렇게 혼날 필요도 없었을 거고요.”
“아니야.”
공손찬도 위로를 시도했다. 저렇게 말한다고 당장 강해지는 것도 아닌데 압박해서 상처주고 싶지 않았다. 세상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소녀에게 이미 세상의 아름답지 못한 면을 너무 많이 보여준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이제까지도 한 번에 이긴 경우는 거의 없었어. 항상 질 것 같다가 역전했다고. 이번에도 패배 직전까지 갔으니까, 다음번엔 이길 거야. 그치, 유비?”
“그럼!”
둘이 동시에 서서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서서가 까르르 웃었다.


다음날도 유비와 공손찬은 새벽같이 뛰어나갔다. 서서는 같이 출발해서, 두 군주가 리나를 집에서부터 경호해 콘서트홀로 가는 동안 먼저 콘서트홀에 가 있기로 했다. 곧 있을 라이브 콘서트의 리허설이 오늘이었다.
매니저에게 그렇게 혼이 났어도 강적을 만났는데 서서가 빠질 수는 없었다. 비록 전풍에게는 상대도 안 되었지만 아예 없는 것보단 나았다.
‘언젠가는 정말로 나 때문에 유비님이 패할지도 모르지. 그래도 지금 그럴 수는 없어.’
서서가 보기에도 미지의 군주가 쓰는 영웅패는 둘 다 강력했다. 하지만 관우, 장비, 조운도 강한 영웅패로 유명했다. 이번 패배는 변명의 여지 없이 신선의 차이에서 기인했다. 그 자리에 있던 신선이 자신이 아닌 제갈량이었다면 유비와 공손찬이 이겼을 것이다.
‘이 군주를 이기고, 공손찬 언니가 그 영웅패들을 손에 넣게 해주자. 그리고 제갈량을 설득하자.’
드림배틀을 위한 도구로 태어났어도 허무하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고 삶에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신선조차도 꿈을 꿀 수 있다. 똑똑하지만 앞뒤 꽉 막힌 그 친구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다. 유비님과 공손찬 언니와 살면서 자신이 얻은 행복을 그에게도 주고 싶었다.
‘유비님은 입버릇처럼 신선이 굉장하다고 하지만, 인간도 굉장하다고. 이렇게 큰 건물을 만들고.’
톱가수의 콘서트답게 무대의 규모는 굉장하고 무대장치도 예뻤다.
들키면 큰일이겠지만 요리조리 숨어다니는 일이라면 선계에서부터 다져진 실력이었다. 여기는 넓고 숨을 곳도 많아 더 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유비님과 공손찬 언니는 군주의 정체가 리나인지 매니저인지를 두고 신경전을 벌였다. 서서가 보기엔 양쪽 다 그럴싸해서 말을 보태기 힘들었다.
그리고 군주의 정체가 그렇게 중요한지도 잘 알 수 없었다. 서서도 신선이기에 일단 배틀이 시작되고 적이 쳐들어왔는데 싸워 무찌르는 게 중요하지 그게 누구인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지금 서서가 콘서트장을 돌아다니는 것도 군주의 틈을 엿봐 정체를 밝히려는 게 아니었다.
이대로 적이 또 쳐들어오면 지난번 전투와 똑같이 흘러갈 뿐이다. 이번엔 이쪽도 새로운 무기가 필요했다.
적 군주가 리나 근처에 나타나는 것만은 확실하니 이 콘서트장에도 나타날 것이다. 그렇다면 함정을 파 두는 것으로 대비할 수 있었다.
콘서트홀과 무대 뒤를 살피며 인적 없는 곳마다 화공+매복을 썼다. 엉뚱한 사람이 다치면 큰일이니 할 수 있는 최대한 깊이, 단단히 묻었다. 전깃줄 주변도 피했다.
‘저 장미꽃 안에도 숨길 수 있을까?’
무대 중앙에 리나가 서면 그 바로 뒤에서 배경이 되어줄 커다란 장미꽃 모양 구조물이 있었다. 모양이 뭘 숨기기 적당해보였다.
안에 조명장치가 있어 화공을 심었다간 대화재가 날 구조물이었지만 서서는 몰랐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서, 그냥 한 번 들어가보고 싶었다.
서서는 살금살금 그리로 다가갔다. 무대 전면에는 들어갈 만한 틈이 없었다. 도술로 순간이동하자니 이미 함정을 까느라 힘을 많이 소모했다.
뒤쪽엔 들어갈 만한 구석이 있기를 바라며 무대 뒤로 돌아간 순간, 여기서 볼 줄은 정말로 상상도 못한 얼굴과 마주쳤다.
“아니, 이게 누구야?”
장각도 놀란 것 같았다. 흑신선과 최약체 신선이 잠시 마주본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낙뢰!”
두 사람이 섰던 자리에 벼락이 떨어졌다. 서서와 장각은 서로 반대쪽으로 튕겨나가 굴렀다.
서서는 일어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뛰었다. 방금의 공격은 분명 전풍이었다. 게다가 장각까지 있으니 유비와 공손찬을 불러야 했다.
‘staff’라고 적힌 문을 보고 벌컥 열고 뛰어들었다.
“일껏 바쁜 시간 쪼개서 왔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금속 문이 콰당 하고 열리는 소리가 리나의 앙칼진 목소리에 묻혔다. 그리고 서서의 눈앞에 갑자기 흰 커튼이 쳐졌다.
“서서!”
앞뒤 분간 못하고 허둥대는 서서에게 유비가 달려와 커튼을 걷어주었다. 리나가 집어던진 흰색 무대 의상이었다.
그리고 유비와 서서는 곧 분장실에 있던 모두의 주목 아래 놓였다.
“그건 대체 뭐야!”
리나가 화난 얼굴 그대로 다시 한 번 소리질렀다.
“그거라뇨!”
유비도 언성을 높이더니 서서를 감싸고 섰다. 서서가 깜짝 놀란 얼굴로 유비를 보았다.
“제가 데리고 들어왔으니까, 제가 데리고 나갈게요. 됐죠?”
“되기는 뭐가 돼!”
리나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곁에 있던 매니저를 돌아보았다.
“쟤 잘라. 당장.”
매니저는 말릴 엄두도 못 내고 유비에게 가서 손을 내밀었다.
“무전기하고 수신기요.”
유비가 아, 하고 귀에서 수신기를 빼었다. 공손찬도 한숨지으며 자기 수신기를 빼고 무전기도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때 서서가 뛰어들어온 쪽에서 쾅 하는 소리가 났다.
“뭐지?”
다들 당황하고 있는데 그 문으로 전풍이 뛰어들어왔다.
“또다시 누군가 습격해왔습니다!”
전풍이 일반인처럼 다급하게 소리질렀다.
“다들 피하셔야 합니다!”


“군주는 리나다.”
몇 번의 인터넷 검색만으로 조조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간단한 일이었어. 레전드 히어로의 자격은 영웅의 이름이잖아. 리나와 그 주변 인물들 가운데 그 이름을 지닌 자는 리나, 원소뿐이더군. 혹시 예명이 뭔지 설명이 필요한가?”
“아닙니다.”
사마의는 얼굴을 조금 붉혔다. 조조는 비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웃기는 이야기야. 이름이란 태어날 때 지어질 수도 있고 자기 마음대로 고치거나 둘, 셋씩 가질 수도 있지. 내가 이름을 고치지 않았다면 너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을 것 아닌가?”
“이름이란 운명입니다.”
사마의의 태도가 다시 엄숙해졌다.
“타고난 것, 스스로 선택했으나 무엇을 선택하는지도 몰랐던 것, 알고 각오하고서 받아들인 것 모두가 운명입니다. 이름도 그러합니다.”
조조가 앉은 자리에서 사마의를 올려다보다 입꼬리를 조금 늘였다. 마음에 드는 답을 하는 데 성공했다는 신호였다.
“그럼 우리의 표적은 리나다. 유비와 공손찬, 손책은 일단 미룬다. 다만 방해가 될 것 같으면 망설이지 않는다.”
“명 받들겠습니다.”

그날부터 조조와 사마의는 리나 주변을 최대한 거리를 둔 채 감시해왔다.
호텔 주차장에서의 습격도 야외 촬영 도중의 습격도 목격증언과 경찰 자료, 사후 현장 조사만으로 원하는 정보를 추려냈다.
또다시 전신 복면에 수상한 화기를 휘두르는 인물들이 2~3인 나타나 소동을 일으켰다는 부분은 조조가 확인했고 신선이 동참한 드림 배틀이었다는 사건 재구성은 사마의가 해냈다.
“둘은 유비와 공손찬일 테고, 그들이 원소와 싸웠다는 거군. 게다가 원소도 복수의 영웅패와 신선이 있고.”
“그렇습니다.”
사마의가 성실하게 설명했다.
“역시 레인보우 이벤트로 참가한 신선입니다. 이름은 전풍, 전술적인 판단이 뛰어나고 도술의 명중률과 성공률도 독보적입니다.”
“너에 비교하면?”
“배틀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려면 호승심과 대담함이 필요합니다. 전풍은 지나치게 신중합니다.”
사마의는 조금 웃었다.
“공손찬은 신선이 없고 유비의 신선은 그 주군만큼이나 하잘것없습니다. 이대로 두면 원소가 그 둘을 탈락시키고 끝날 것입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이미 말한 대로다.”
조조가 두 영웅패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후돈과 하후연이 기다렸다는 듯 그 손 위에 올라갔다.
“약하다고 해도 적의 적이 있다면 사양할 필요 없지. 게다가 곧 대규모 라이브 콘서트가 있어. 라이벌이라고 일반인을 함부로 공격하는 자이니 더 위험한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도 모른다. 빨리 원소를 제거해 위험요소를 뿌리뽑아야 해. 오늘이 콘서트 리허설이라니, 마침 잘 되었다. 가서 원소부터 공격한다.”
“예.”


서서가 분장실에 뛰어든 걸 보고 전풍은 쫓아가는 대신 장각을 돌아보았다.
“괜찮나?”
괜찮으면 안 괜찮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본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질문에 장각은 뻔뻔하게 웃었다.
“보다시피 멀쩡해. 전풍이 쓴 낙뢰가 아주 정확~하게 서서랑 나 사이에 떨어졌는걸. 쪼끔만 옆으로 쐈어도 서서가 맞았을 텐데. 전풍의 조준 실력은 정말 대단하다니까.”
“그렇게 빈정대고 싶다면 서서를 눈앞에 두고 멍청히 보고만 있던 스스로의 반사신경이나 비웃어라.”
전풍은 손에 화사한 핸드백을 쥐고 있었다. 장각은 반격할 말을 찾는 대신 그 백에 시선을 주었다.
“주군의 물건이다.”
전풍이 핸드백 쥔 손을 뒤로 물렸다.
“그보다 일은 마쳤나?”
“성질도 급하긴. 설치는 다 마쳤어. 말해주려고 나오는데 갑자기 서서가 눈앞에 불쑥 나타나잖아. 어떻게 그 주제에 기척 감추는 재주는 그렇게 귀신 같지?”
“없는 재능에 땡땡이치는 재주만 키운 거다. 주군께는 내가 보고할 테니 그만 돌아가. 근처에 적이 둘이나 있다.”
“까칠하긴.”
장각이 혀를 차며 분장실 쪽을 보았다. 원소와 유비, 공손찬 말고도 사람이 많이 있었다. 아직은 그가 모습을 드러낼 때도 아니었다.
“그럼 나 갈게. 리나에게 안부 전해줘.”
“원소님이다.”
“그치만 본인이 리나로 살고 싶어하잖아? 드림배틀도 리나의 이름을 세상에 남기려고 하는 거고. 자기 개인적인 욕망을 채울 생각밖에 없는 인간들 데려다가 세상을 지킨다니 웃기지도 않아.”
“인사 전해드릴 테니 어서 가.”
노골적으로 인상을 쓰던 전풍이 돌연 입을 다물고 태세를 전환했다. 장각도 몸을 돌렸다.
“움직이기를 물결과 같이!”
하후봉황탄이 수십 발이나 한꺼번에 쏟아졌다.
장각과 전풍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벌써 내가 들키면 곤란한데, 미안하지만 알아서 잘 해봐.”
장각은 객석 사이로 몸을 굴려 비상구로 나가버렸다.
전풍은 어차피 기대도 안 했다고 쏘아줄 타이밍을 놓치고 분장실로 뛰어들었다. 이번엔 정말로 주군을 노리는 레전드 히어로가 나타났다.
“또다시 누군가 습격해왔습니다! 다들 피하셔야 합니다!”
지금은 리나의 부매니저 노릇을 하는 편이 유리했다. 과연 유비도 공손찬도 표정을 구기면서도 당장 전풍을 공격하거나 추궁하지 못하고 당황했다.
“어서 사람들 모두 밖으로 내보내요!”
전풍이 매니저를 재촉해 일반인들을 대피하게 했다. 그러는 동안 유비와 공손찬, 서서는 전풍도 리나도 매니저도 여기 있는데 누가 쳐들어왔나 확인하러 무대 쪽으로 뛰어들었다.
관우, 조운과 일체화한 그들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습격자는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갸웃거리는 유비 곁에서 서서도 똑같이 갸웃거렸다.
“장각일지도 몰라요. 방금 전에 그를 보고서 도망왔거든요.”
“장각?”
그때 다시 하후봉황탄이 쏟아졌다. 셋 다 쉽게 피했지만 유비는 충격이 컸다.
“조조? 설마 네가 여가수 연쇄습격범이었던 거야?”
다음 탄환은 유비 바로 앞에 떨어졌다. 유비는 주춤했다가 드래곤 블레이드를 고쳐잡았다.
“조조, 어디서 뭘 잘못 먹었는지 몰라도 더 이상은 용서 못한다!”
“유비! 뒤!”
공손찬이 유비와 서서를 등으로 막고 창으로 링블레이드를 쳐냈다. 하후봉황탄이 날아온 반대 방향에서 지난번의 링블레이드가 날아왔다.
무대 위에서 안량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노란 포인트로 장식된 코발트 블루의 레전드 히어로는 얼굴은 물론 몸매도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양손으로 링블레이드를 쥐고 자유롭게 다루는 모습은 춤추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드디어 나타났군!”
조조가 다시 피닉스 엣지를 겨누었다. 이번에 유비나 공손찬이 아닌 안량에게 정확히 에너지탄이 쏟아졌다.
“너희와 내가 서로 싸우는 것처럼 보여야 적이 이렇게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조조가 소리쳤다.
“내가 그런 치졸한 범죄나 저지를 놈으로 보였냐!”
“아, 아니었구나!”
유비는 환하게 웃었다.
“습격범을 잡으러 온 거지? 같이 싸우자!”
조조는 닥치고 안량과 싸우는 데 전념하기로 했다.

흑신선 16 ㅣ- 레히삼

“저, 언니.”
초선이 주유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응, 왜 그러니 초선아?”
“사마의 아저씨가 저... 초록 아저씨 괴롭혔어?”
“어..”
주유가 서둘러 변명을 짜내려 머리를 굴렸다.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거짓으로 상황을 모면하지 마라, 신선.”
하후돈이 말했다.
“사마의가 악한인 건 우리도 이미 알고 있고, 조조님을 구하기 위해 초선 아가씨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손책이 호통을 쳤다.
“애를 싸움터에 데려가기라도 할 작정이었냐?”
“싸, 싸우려는 건 아니고요.”
하후연이 나섰다.
“조조님을 그.. 거에서 분리하려면, 초선 아가씨가 가는 편이..... 조조님은 초선 아가씨를 아끼시니까 정신을 차리고 되돌아오실 수도!”
손책이 성큼성큼 다가가 초선의 어깨에서 두 영웅패를 집어 들었다.
“안 돼. 허락 못해.”
“우리는 조조님을!”
“안 돼!”
초선이 하후형제를 쥔 손책의 손을 찰싹 때렸다.
“여포 괴롭히지 마!”
“그러니까 저희들은 여포가 아니라....”
“조조 아저씨 괴물한테 먹혔다며! 초선이 가서 구해줄 거야. 방해하지 마!”
손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맞은 손등을 문질렀다.
“저기, 초선아.”
유비가 다가와 초선과 마주보았다.
“아, 유비 아저씨!”
“응, 유비 아저씨야. 근데 초선아, 괴물이랑 싸우는 건 너무 위험해. 나랑 이 손책 아저씨가 조조 아저씨를 구해올게. 초선이는 여기서 안전하게....”
“하지만 여포가 내가 조조 아저씨를 구해야 한다고 했는데?”
더는 여포가 아니라는 말도 못하고 하후돈이 한숨만 푹 쉬었다. 손책이 그들을 노려보았다.
“왜 애한테 쓸데없는 소리를 해가지고....”
“두 분이야 사마의만 무찌르면 그만이겠지만 저희는 조조님도 구해야 합니다!”
하후연이 당당하게 소리쳤다.
“그대로 돌아가셨을 리가 없어요. 안에 갇혀계신 거라고요! 그리고 조조님을 깨우려면 역시 초선 아가씨를 만나는 게 제일...”
“저, 제갈량.”
유비가 다시 소파로 갔다.
“네?”
“아까는 조조가.....”
애 앞에서 죽음 같은 소리 입에 올려도 될까 싶어 유비가 초선의 눈치를 살짝 보았다. 제갈량뿐 아니라 모두가 말뜻을 알아들었다.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파리한 얼굴로 담요를 꼭 쥐고 있는 채로도 제갈량은 유비에게 대답했다.
“몸이 인간의 몸이니까요. 그리고 살아있다면, 그가 목숨보다 귀히 여기는 초선이 만큼 조조를 깨워내기에 적합한 상대도 없겠지요.”
“하지만 정말...”
주유가 안고 있는 초선을 보며 말을 골랐다.
“가능성이 있을까? 개조 영웅패 정도야 도로 분리해내는 게 가능하겠지만 사마의가 그렇게 허투루 할 리가.”
“그러니까 더욱 조조를 깨워서 분리해야지. 그대로 사마의와 싸웠다간 우리가 이겨도 조조는 무사하지 못해.”
제갈량이 재차 주장했다.
“음.....”
주유가 고민했다. 조조와 사마의를 분리할 수만 있으면 적의 전력은 반도 아니라 반의 반 토막이 나는데다 구해낸 조조를 이들 편으로 만들 수 있다. 전투에 얼마나 도움이 될 진 알 수 없어도 유비와 손책의 영웅심에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분리까지 못 시킨다 해도 조조의 의식을 일깨워서 내적 투쟁을 벌이게 할 수 있다면 이들이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 가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전술적 이익’을 위해 애를 싸움터에 내몰아도 되는 걸까.
“안 돼. 위험해.”
손책이 반대했다.
“그냥 걷다가도 넘어져 다칠 나이라고. 공격이 스치기만 해도.... 크게 다칠 텐데 그렇게 둘 수는 없어.”
“하지만 난 조조 아저씨 구하고 싶어.”
초선이 말했다.
“조조 아저씨도, 아빠처럼 없어져버리는 거 싫어...”
그 말에 유비의 표정이 흐려졌다. 잠시 고민하다 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손책.”
“너 설마.”
“초선이에게 기회를 주자. 조조를 구하기 위해서.”
“너 이렇게 수단 방법 안 가리는 녀석이었냐.”
손책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아무리 우리가 불리하다고 해도 어떻게 이런 어린애 뒤에 숨을 생각을.”
“나도 어렸을 때 부모님 돌아가시고, 형도 없어졌어.”
손책이 입을 다물었다.
“안 돌아오는 형을 기다리며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 조르지 말걸, 같이 있을걸, 아니면 같이 갈걸..... 지금이야 사부님도 공손찬도 있고, 형도 다시 만났지만, 그래도 그 때 형을 되찾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으면 뭐든지 했을 거야. 위험하든 뭐든 가리지 않고.”
“......야.”
손책이 뒤통수를 긁었다.
“그렇게 나오면 내가 할 말이 없잖냐.”
“제가 초선이를 보호하면 어떨까요.”
제갈량이 입을 열었다.
“네가?”
“저는 다크 펜타곤의 힘에 잠식되어 정상적으로 회복하기가 어렵습니다. 아까는 닷새의 여유를 말했지만 실제로 그 기간을 꽉 채워 쉴 수는 없을 것이고 이르면 내일, 늦어도 모레에는 사마의와 싸워야 할 턴인데 지금 제 상태로는 예전처럼 싸우기 힘듭니다.”
유비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그렇지만 빙벽이나 축성 한두 번은 쓸 수 있고 정 안 되면 몸으로 감싼다는 방법도 있으니..”
“제갈량.”
“하지만 그러려면 뒤에 숨어있을 수 없게 돼.”
주유가 말했다.
“초선이는 앞으로 나서야 하니까. 그리고 사마의는 네가 보이면 발작할거야.”
“잘됐네. 적의 평정을 무너뜨리면 이기기 쉬워지지.”
제갈량이 남 일처럼 대답했다.
“그럼 안 돼, 제갈량.”
유비가 표정을 굳혔다.
“초선일 보호하려면 제갈량도 무사해야 하는 거잖아. 최선을 다해 안전해야지, 너도 위험은 조금도 무릅써선 안 돼.”
제갈량이 놀란 눈으로 유비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
“아뇨.”
제갈량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주군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럼, 우리도 참전하는 거지요?”
하후연이 초선의 어깨에서 폴짝 뛰었다.
“잘 되었습니다, 초선 아가씨. 이제 조조님을 구하러 갈 수 있습니다.”
하후돈도 기뻐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야.”
손책이 주유에게서 초선이를 받아 안았다.
“초선아, 오빠들은 오늘도 싸우고 온 참이라 엄청 피곤하거든. 푹 쉬고 다시 팔팔해지면 싸우러 갈 건데 기다릴 수 있니?”
“응, 손책 아저씨!”
초선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풋.”
제갈량이 비웃었다. 유비와 주유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왜, 상향이도 이만하던 때가 있었단 말이야. 그 땐 내가 안고 다녔다고!”
“그럼 손책아, 라고 부르라고 하시면 되겠네요. 손책님도 유치원생이던 시절 있었을 거 아닙니까.”
“맞는 말이지만 남의 주군 까지 마.”
주유가 제갈량의 볼을 잡고 쫙 잡아당겼다.
“아이고 그래. 초선이는 이만 잘까? 여기 와서 잔 적 있니?”
손책이 초선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잘 시간이기도 하고, 작전의 세부사항은 초선이 안 듣는데서 말하는 게 편하니까.
조조를 구할 수 있다고 100% 확신할 수는 없다. 그 가능성도 생각해서 작전을 짜야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초선이 앞에서 할 수는 없었다.
곧 손책이 돌아오고 이들은 의논을 시작했다.


조조네 집은 넓어서 초선이는 따로 재우고도 손책과 유비가 각각 잘 만한 방이 있었다.
유비는 제갈량을 방에 데리고 들어갔다.
“쉬어야 하니까 제갈량이 침대에서 자.”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는.”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유비가 제갈량을 밀어 침대에 앉혔다.
“신선도 자잖아. 그 전에 돌아왔을 때도 그랬고.”
“신선... 일까요.”
“응?”
제갈량이 작게 중얼거린 소리를 듣고 유비가 눈을 크게 떴다.
“제갈량이 신선이 아니면 뭐야, 색깔이 바뀌었다고 해도 제갈량이 내 신선인 건 변하지 않아!”
제갈량이 유비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유비는 자기가 또 바보 같은 소리를 한 것은 아닌가 고민했다.
“어.....”
“주군.”
제갈량이 유비의 손을 잡았다. 그걸 끌어당겨 자기 이마에 대었다.
“저는 오랫동안 타고난 것과 반대되게 살아왔습니다. 신선일 때는 신선의 운명을 거부했고, 겨우 그 길을 받아들이고 나자 깨어난 본성 역시 주체를 하지 못하고 그저 죽고자 하였습니다.”
“제갈량...”
“흑신선의 본성이 사라지고, 무엇이 남았는지 알지조차 못한 채 이제는 암흑 에너지에 잠식당해서 더 이상 제가 신선은커녕 세상의 순리에 맞는 존재인지조차 알 수 없는 누더기 같은 것이 되어버렸습니다만.”
“그런 말 하지마, 제갈량!”
유비가 제갈량에게 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을 그의 어깨에 올려 끌어당겼다.
“신선이 아니라면 그래도 상관없어. 세상에 어긋난다면 내가 보호해줄게. 제갈량은 내 친구고 가족이야. 내......”
“네.”
제갈량이 유비의 손에서 이마를 떼고 고개를 들며 웃어보였다.
“제가 할 말을 미리 해버리시다니요.”
“......응?”
“제가 무엇이든, 유비님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당신을 주군으로 삼아 함께 싸우며 유비님의 꿈을 이루고 싶습니다.”
“제갈량....”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응. 그래. 물론!”
유비가 대답했다. 제갈량이 일어나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갈량, 다시 주군을 뵙습니다.”



하루는 쉬기로 다섯 모두가 합의했다. 이마저도 언제 사마의가 이들이 여기 있는 걸 알고 들이닥칠지 모르는 가시방석 위의 휴식이었으나 그런 거라도 필요할 만큼 일행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그럼 각자 쉬자. 지금 뭐 같이 할 일은 없으니까.”
아침 식사후 주유는 그렇게 말하고 손책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점심 저녁에 내일 아침까지 먹어야 하니 장을 봐와야겠다고 궁리하는 유비를 옆에 두고 제갈량은 조금 의아해했다. 자신과 자신의 주군이야 정말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고 치료를 받았어도 기력은 따로 회복해야 했지만 손책과 주유는 비교적 멀쩡했다. 그런데 저 태도는 마치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사람들 같았다.
“제갈량, 나 나갔다 올게.”
유비가 일어났다. 제갈량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안됩니다. 위험합니다.”
“괜찮아, 슈퍼 가까워. 단지를 벗어날 필요도 없는걸. 잠시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갔다 오는 정도야. 괜찮아.”
“그래도....”
제갈량이 잠시 고민했다.
“단지 주군께서 사마의나 선계병들에게 습격받을까봐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사마의는..... 사람들의 영웅심을 흡수합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아주 고갈될 때 까지요.”
“알았어. 주의할...”
“주군이 습격받을까봐가 아니라! 영웅심이 모두 고갈되면...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뭐?”
“사마의는 분명 영웅심을 공급받기 위해 배틀과 상관없는 일반인들도 공격할 겁니다. 만약..... 사람들이 공격당한다면, 두고 도망치실 수 있겠습니까?”
유비는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정 집에 식재료가 없어서 굶을 지경이라면 차라리 제가.”
“안 돼. 제갈량이 더 위험하잖아.”
유비가 그의 팔을 잡았다.
“놓고 도망 올게.”
“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을 구하려고 내 목숨을 던졌다간, 사마의를 무찌르지 못하고 세상이 멸망하겠지.”
사마의의 목적은 멸망이 아니라 지배였지만 제갈량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큰 일 작은 일 구분할 줄은 알아. 원래 난 별 거 아닌 소시민이었으니까 그런 거 생각할 필요 없었지만, 지금은 생각해야 한다는 것도 알아.”
“...주군.”
“그러니 제갈량은 집에 있어. 나 혼자 잽싸게 다녀올게.”
“.....네.”
제갈량이 더 반대할까 두려운지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유비가 나가버렸다. 제갈량은 걱정스런 마음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보디가드 대소동 4 ㅣ- 레히삼


침대에 쓰러져 누운 공손찬의 얼굴은 어두웠다.
유비에게 새 친구가 생긴 줄만 알았을 때는 둘만 저렇게 손발이 맞아도 아무렇지 않았었다. 하지만 서서가 신선임을 알게 되고 레인보우 이벤트에 유비만 초대된 이후로는 소외감을 어쩔 수가 없었다.
‘역시 나도 빨리 신선을 얻고 싶다......’
드림배틀을 소개해주고 체인저와 조운을 주었던 신선이 생각났다. 역시 특이한 흰 옷을 입고 있었고 서서와는 다르게 근엄해보였다.
‘그 신선도 이미 군주를 얻었을까? 얼마나 강한 신선이었을까?’
오늘 들었던 목소리도 근엄하고 엄격했다. 나이 좀 있는 여자 같았다.
공손찬은 침대에서 한 바퀴 굴렀다. 오늘 그런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또 있었다.
“서서!”
굴러떨어질 듯 침대에서 내려와 방에서 뛰어나왔다. 서서도 깜짝 놀라 임시로 쓰는 스승님 방에서 나왔다.
“왜요?”
두 눈 동그랗게 뜬 서서에게 공손찬이 다그쳤다.
“선계에서 다른 신선들도 알고 지냈지? 주유처럼?”
“예, 예.”
“혹시 전풍이라는 이름의 신선도 있었어? 흰 정장에 노란 스카프, 노란 버클 차림으로!”
서서가 동그란 두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어떻게 아셨어요?”
“오늘 봤거든!”
“그 부매니저?”
유비도 서서만큼이나 두 눈이 커졌다.
“그럼 문제의 악당이 자기 신선을 리나 곁에 붙여서 기회를 노리는 거야?”
“아니면 리나가 군주일 수도 있지.”
공손찬이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도 리나는 무사했고 같이 식사했던 다른 가수만 습격당했어. 사실은 스토커의 짓이 아니라 경쟁자를 제거하려고 리나가 꾸민 짓이라고 해도 앞뒤가 맞아.”
“어......”
유비는 여전히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그치만 경쟁하는 가수가 레전드 히어로인 것도 아닌데 신선까지 동원해서 그런 짓을 한단 말이야?”
미적지근한 유비의 반응을 보고 공손찬이 눈을 치떴다.
“드림배틀이 아닌 범죄에 나섰던 군주 지금 처음 봐?”
“그건 아니지만.”
유비가 머리를 긁적였다. 둘 사이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서서가 슬쩍 입을 열었다.
“저기......선계에 있을 때 전풍은 굉장히 원리원칙을 따지는 신선이었어요. 드림배틀이 아닌 나쁜 일에 힘을 쏟을 리 없어요. 좀 무섭긴 해도 나쁜 신선도 아니었고요.”
“그래?”
유비가 서서에게 돌아섰다.
“그럼 주차장에서 공격한 신선이 전풍이 아닐 수도 있겠네?”
공손찬은 기가 막혀서 둘을 쳐다보고 빈정거렸다.
“아, 그래. 어차피 잡아야 하니까, 잡은 뒤에 보자고. 누구 말이 맞나.”
잠이나 더 잘 걸 그랬다. 공손찬은 씩씩거리며 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덮었다. 화가 난 탓인지 잠이 얼른 오지 않았다.
“주군.”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는데 조운이 베개 옆으로 다가왔다.
“영웅패도 선계에서 생성되어 신선들에게 교육받기 때문에 신선들을 좀 압니다.”
“그래?”
“유비님과 서서가 저렇게 친구처럼 지내서 그렇지, 신선도 군주에게 종속되기는 영웅패나 마찬가지입니다. 군주가 나쁜 사람이면 신선이 아무리 착해도 나쁜 짓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구나.”
공손찬이 손을 뻗어 조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도 내가 맞게 추리했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럼요. 이 스마트 조운이 보증합니다. 주군이 옳아요.”


“두 사람 왜 이렇게 늦었어요.”
소속사 매니저가 유비와 공손찬을 짜증스런 태도로 맞이했다.
그 짜증이 매니저 본인의 성질이 아니라 리나에게서 흘러내려온 짜증이라는 건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야외촬영 준비한다고 매니저들은 물론 경호원인 유비와 공손찬까지 옷과 소도구를 들고 뛰어야 했다.
“이게 뭐야! 또 설탕 넣었지!”
부매니저 전풍이 끓여온 커피를 맛만 보고 리나가 소리질렀다.
“나 다이어트 한다고 몇 번 말했어!”
리나가 커피잔을 깨 버릴 듯 내려놓았다. 전풍은 커피가 리나의 옷에 튀지 않았는지부터 확인했다.
“아침을 너무 적게 드셨습니다. 빈 속에 블랙커피는 해롭습니다.”
“나 살쪘다고 돼지 됐다고 하는 놈들한테나 가서 그렇게 말해!”
전풍은 조용히 커피만 닦아냈다. 리나는 전풍을 노려보다가 찌푸린 얼굴 그대로 유비와 공손찬을 돌아보았다.
“옷이 바닥에 다 쓸리잖아!”
웬만한 진상 학부모 급이라고 생각하며 둘 다 어깨를 움츠리고 옷짐 든 두 팔을 높이 들었다.
매니저는 그 와중에도 인상도 쓰지 못하고 웃으며 리나에게 다가가 일정표를 내밀었다. 그러나 두 사람을 스쳐갈 때 작게 욕설 뱉는 것이 유비의 귀에는 들렸다.


촬영지인 어느 공원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무 일 없었다. 도착해서부터가 큰일이었다.
예쁜 사진 한 장을 화보집에 싣기 위해 얼마만한 시간과 노동력이 드는지 유비도 공손찬도 이제야 겨우 알 수 있었다. 잔디밭에서 한참 이리 찍고 저리 찍다가 꽃나무 밑에서 또 찍는다고 또 한참이나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달라붙었다.
유비는 슬슬 다리가 아파졌다. 한창 촬영중일 때는 들볶이지 않는 대신 경호원답게 주위를 경계해야 하는데 이것도 경험이 없으니 금방 주의가 흐트러졌다.
그럭저럭 재단장이 끝나고 리나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불길이 솟았다.
“습격이야.”
유비와 공손찬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리나는 이 자리에 있는데 아까까지만 해도 곁에 찰싹 붙어 시중을 들던 전풍이 보이지 않았다.
“역시 신선이었어.”
공손찬이 중얼거렸다가 리나가 들었을까봐 입을 막았다.
“어서 가서 잡아!”
리나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는 소속사 사람들과 함께 차로 달려갔다.
리나가 혼자 떨어지지 않은 것만 확인하고 유비는 불꽃이 솟은 쪽으로 뛰어갔다. 상대가 군주와 신선이라면 자신과 공손찬만이 무찌를 수 있었다.
‘서서는?’
“유비님!”
어떻게 해서인지 몰라도 서서는 정말로 따라왔다. 군신일체를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서서가 곁에 나타나 함께 뛰었다.
“저쪽이에요!”
보도블럭으로 된 길을 무시하고 풀밭으로 곧장 뛰어들어 아까 불꽃이 솟은 곳으로 향했다.
“혹시 전풍이 널 공격하지는 않았어?”
유비와 나란히 쫓아가면서 공손찬이 물었다.
“아뇨, 저도 두 분 바로 근처에 있었거든요. 그래도 덕분에 아까 얼굴을 봤는데, 그 사람이 제가 아는 전풍인 건 틀림없어요. 강한 신선이니 조심하세요.”
“알았어!”
말과는 달리 공손찬은 빠르게 앞서나갔다. 조운의 속력으로 유비와 서서보다 훨씬 일찍 현장에 도착했다.
그러자마자 신선의 주문이 들렸다.
“다스리기를, 대지와 같이!”
현장은 공원 한가운데 조성된 작은 나무숲이었다. 나무들 틈에 숨었는지 이번에도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외친 주문에 공손찬이 꼼짝 못하고 발목을 붙들렸다. 호되게 바닥에 구르고서야 빛으로 된 사슬을 발견했다.
‘신선은 이런 일도 가능했어?’
“창으로 치세요! 깰 수 있습니다!”
조운이 다급하게 재촉하자 공손찬은 정신을 차리고 창끝으로 사슬을 부숴서 일어났다. 직후 공손찬이 있던 자리에 링블레이드가 날아들었다.
조운으로 피하고 막는 것도 오래는 무리였다. 굵은 나무를 등지고 겨우 버티는 동안 전풍도 군주도 얼굴도 보지 못했다.
“막아내기를, 대지와 같이! 축성!”
서서의 목소리와 함께 공손찬의 눈앞에 석벽이 솟아올랐다. 쉴 틈도 주지 않고 날아들던 공격이 막혔다.
“괜찮아?”
관우로 변신한 유비가 공손찬 곁으로 붙어섰다.
“난 괜찮아. 전풍과 군주가 함께 있어.”
쾅 소리와 함께 석벽이 흔들렸다. 유비를 따라온 서서가 움찔거리며 겁먹은 얼굴을 하다가 곧 유비의 드래곤 블레이드에 화공을 걸었다.
“석벽 무너지는 걸 신호로 나가서 공격하는 거예요!”
“그래!”
이만큼 이쪽이 궁지에 몰렸으니 적도 나무 뒤에 숨어만 있지 않을 것이다. 과연 석벽이 무너지자 정면에 군주가 있었다.
“레전드 히어로 문추!”
붉은 색과 회색이 섞인 섬뜩한 모습의 적에게 굴하지 않고 유비가 먼저 달려들어 드래곤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꼼짝 못하고 멎었다. 링블레이드 대신 적이 휘두른 금속 채찍이 검을 옭아맨 것을 깨달은 순간 채찍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으악!”
유비는 어쩔 줄 모르고 몸을 뒤틀었다. 서서가 유비의 무기를 강화해봤으나 쇠채찍을 끊을 수가 없었다.
대신 적 군주도 무기가 유비에게 얽혀 있는 틈을 노리려고 공손찬이 측면으로 찔러들어갔다.
“흥!”
군주가 코웃음치며 채찍을 쥐지 않은 팔을 공손찬에게 뻗었다. 그 팔에서도 쇠채찍이 튀어나와 공손찬의 창을 휘감으려 했다.
공손찬은 아슬아슬하게 피해 물러났다. 타격을 입히진 못했지만 적도 유비를 놓아줘야 했다.
“달라지기를, 번개와 같이!”
전풍의 주문에 공손찬이 다시 내지른 창끝이 허공을 갈랐다. 방금 전까지 싸우던 문추가 둘로 불어나 양 옆에 있었다.
서서가 놀라서 숨을 삼켰다. 유비도 공손찬도 당황한 사이 두 군주가 각각 공격해 들어왔다.
유비가 먼저 변신이 풀리고 쓰러졌다. 서서가 유비를 부축하며 공손찬에게 외쳤다.
“도망쳐요, 못 이겨요!”
공손찬은 유비와 서서를 감싸기 위해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서서가 조운의 벨트를 잡아당겼다.
“움직이기를, 대지와 같이! 퇴각!”
흙먼지가 휘몰아쳐 눈앞을 가렸다. 또 다른 공격에 당한 것인가 싶을 정도로 온몸이 뒤흔들리고 나서 정신 차려보니 공원 앞 큰길 가였다.
“엥?”
공손찬은 뒤를 돌아보고, 서서와 유비가 곁에 제대로 붙어있는 걸 확인하고 변신부터 해제했다. 리나가 타고 온 차 바로 근처인데 이미 경찰차와 구급차가 와 있었다. 발견되면 자칫 이쪽이 범죄자로 몰릴 판이었다.
“유비님, 괜찮으세요?”
서서가 유비를 부축해 일으켰다. 서서의 손끝에서 주황색 불빛이 일어 유비를 훑었다.
“크게 다친 곳은 없는데, 영웅심이 이상하게 많이 떨어졌어요.”
“아까의 채찍이 내 영웅심을 흡수했어.”
유비가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동탁이 했던 것처럼.”
“리나는 어디 있지?”
공손찬은 두리번거리다가 사람들이 몰려 있는 쪽을 발견했다.
리나가 창백한 얼굴로 주위의 부축을 받으며 구급차에 오르고 있었다. 전풍이 가장 가까이에서 부축해 구급차에 오르는 걸 보고 유비도 공손찬도 뻔뻔함에 입을 딱 벌렸다.
“거기 경호원 둘!”
미처 쫓아가기도 전에 소속사 매니저가 가로막았다.
“경호원이 리나를 두고 둘 다 자리를 비워요? 경호가 뭔지 알기는 하는 거예요?”
“저희는 범인을 잡으려고......”
“그래서 범인을 잡았나요?”
‘전풍 부매니저가 범인이에요.’라고 밝히고 싶었다. 그러나 매니저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고 드림배틀을 모르는 일반인이기도 했다. 유비가 슬쩍 공손찬의 눈치를 살피자 공손찬이 미간을 모으며 고개를 저었다. 둘의 뒤에서 같이 쫄아 있던 서서가 뭔가 말하려 드는 것도 발끝을 꾹 찔렀다.
“어서 구급차 따라가요. 그리고......”
매니저의 눈이 서서에게 닿았다.
“우, 우연히 지나가다가 마주친 거예요.”
유비가 헛된 변명을 시도했다. 포문을 열기에 앞서 표적을 찾는 것 같던 매니저의 눈빛이 유비를 정조준했다.


흑신선 15 ㅣ- 레히삼


“네 녀석이 어떻...”
“보다시피 풀려났다. 네가 날 얽어맨 비열한 덫으로부터.”
제갈량이 비웃음을 띄었다.
“내 주군은 보기보다 영민하시거든.”
“영민하다고? 그 유비가?”
사마염이 코웃음 쳤다.
“죽을 때가 되니 정신이 이상해지는 모양이군, 제갈량.”
사마의가 검을 들어올렸다.
“넌 항상 나를 무서워했지.”
제갈량의 말에 막 무기를 휘두르려던 사마염의 움직임이 멎었다.
“고작 나 하나를 죽이기 위해서, 자기 군주의 몸까지 빼앗아야 할 정도로 말이야. 얼마나...”
“닥쳐!”
사마염의 고함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그의 고함에 개의치 않고 계속 말하고 있는 제갈량에게 사마염이 칼을 휘둘렀다. 제갈량의 모습이 허무하게 반으로 갈려 사라졌다.
“이런 환각 따위를 미끼로 세워두면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그가 포효했다.
“네놈도 네놈의 군주도 당장 찾아내어 죽여버리겠다!”
짝짝짝
어디선가 박수소리가 들렸다. 내심 놀란 사마염이 몸을 도사리고 귀를 기울였다.
“대단한데, 사마의. 환각인걸 알아차리다니.”
역시 가까이에서 제갈량이 환각을 조종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마염이 흥분했다.
“네놈은 날!”
“그럼 숨은 날 찾는 것도 아주 쉽겠군 그래.”
사마의가 귀를 쫑긋 세우고 제갈량의 목소리를 들었다.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목소리가 울려 장소를 알기가 어려웠다. 신선의 기척을 찾아보려 했으나 그 쪽도 희미하기만 할 뿐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제갈량은 미끼일 뿐이었다. 도망가고 있을 유비와 손책을 찾는 편이 나았다. 사마염도 그건 알았다.
하지만 제갈량이 저렇듯 가까이서 그를 비웃고 있는데 그걸 그냥 두고 볼 수도 없었다.
선계병을 안으로 불러들이며 사마염은 동굴 안을 이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유비같은 것 언제라도 찾아서 죽여버릴 수 있었다. 지금은 제갈량의 목을 비트는 게 먼저였다.


유비 손책은 무사히 동굴을 나와 산 아래로 뛰어 내려왔다.
“그런데, 이제 어디로 가지?”
유비가 물었다.
“도원관은 아마 안 될 것 같은데....”
“안되고말고요, 이미 선계병들이 매복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주유가 말했다.
“어디든 빨리 갔으면 좋겠다.”
손책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이놈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 같다고.”
손책이 등에 업은 제갈량을 한 번 더 추어올렸다.
“그럴 리가요, 주군이 점점 지쳐서 그런 거죠.”
주유가 말했다. 한 사람분의 무게를 지고 유비와 주유와 똑같이 산을 달려왔으니 손책이라 해도 지치는 게 당연했다.
“이젠 내가 업을게.”
유비가 나섰다.
“그래라.”
손책이 멈춰서서 유비에게 등짐을 넘겼다. 환각을 만들고 탈진한 뒤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제갈량을 유비가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으음....”
유비에게 업히자 제갈량이 신음하며 몸을 뒤챘다.
“제갈량, 정신 들어?”
유비가 그를 업어든 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주군?”
“응. 걱정 마, 도망쳤어. 지금 막 산 벗어난 상태야.”
제갈량이 유비의 목에 팔을 감고 꼭 끌어안았다. 업힌 사람이 매달리니 의식 없는 사람을 짊어지는 것보단 힘이 덜 들었다.
“사마의가 쫓아오는 기색은 아직 없어.”
주유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서둘러 숨을 곳을 찾아야 해.”
“숨을 곳이라...”
유비와 손책은 우선 큰 도로를 목표로 가고 있었다. 어딜 가든 사람 다리 보다는 차가 빠르니까. 하지만 택시를 부르려면 먼저 어디로 갈지를 정해야했다.
“좀 멀리 지방으로 가면....”
“안 돼.”
유비가 말도 다 꺼내기 전에 손책이 기각했다.
“너 찾는데 하루도, 아니 한나절도 안 걸렸어. 알지?”
유비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러는 주군은 어디 숨을 곳 있어요?”
주유가 물었다.
“나라면.... 예전에 도장깨기 하러 다닐 때 외국에서.”
“너무 먼 곳은 곤란해요.”
이번엔 주유가 잘랐다.
“천년만년 숨어있자는게 아니잖아요. 잠시 숨을 돌리고 작전을 짠 뒤엔 되돌아와 사마의와 싸워야 한다고요.”
“그것도 늦어도 일주일 이내에.”
제갈량이 말했다.
“...일주일 맞나? 주유, 나 그..... 꼴이 되고 얼마나 지났어?”
“나타났을 때 기준으로 이틀.”
“그럼 5일. 그 이상은 옥새가 버티지 못할 거야. 적어도 사마의의 계산은 그래.”
“촉박하네. 멀리 갈 수는 없겠어.”
“그럼 여기서 가깝고 사마의가 찾지 못할 만한 곳을 찾아야 하는 건가.”
유비가 고민했다.
“어디 여관이라도 아무데 잡아서 틀어박혀야 하나. 사마의라도 온 시내를 다 뒤지지는....”
“저.”
제갈량이 입을 열었다.
“사마의가 절대 안 찾아볼 만한 곳이 한 군데 떠올랐는데요.”


주유가 도어록을 조작했다.
“여길 생각해내다니, 너 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알아.”
제갈량이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이젠 자기 발로 걸을 수는 있었지만 제갈량은 여전히 유비의 팔을 잡고 그에게 기댔다. 유비가 그의 어깨를 감싸안고 전전긍긍하는게 눈꼴시다고 생각하면서 주유는 동작빌딩 펜트하우스의 문을 열었다.
불꺼진 실내는 난장판이었다. 여기서 사마의가 조조와 합체한 거라고 깨달으며 주유가 불을 켰다. 손책이 잡동사니를 치워 앉을 곳을 만들었다. 유비는 제일 먼저 소파를 찾아 제갈량을 기대 눕혔다.
“생각보다 쉽게 들어왔어.”
주유도 털썩 의자에 앉았다.
“결계와 보안 장치가 겹겹이 있을 줄 알았는데.”
“버리고 떠난 둥지다 이거겠지.”
제갈량이 말했다.
“설마 사마의에게 또 배후가 있지는 않겠지....”
“자, 이제 다음 작전은 뭐지?”
손책이 손뼉을 짝 쳤다.
“우선은 쉬는 거요.”
주유가 말했다.
“쉬고, 힘을 회복하고.... 조조의 몸을 입은 사마의와 싸우러 가야죠.”
“조조가 잡아먹히다니.....”
뒤늦게 유비가 조조의 상태를 떠올렸다.
“그럼, 조조는 죽은 거야?”
“네.”
“아마도요.”
주유와 제갈량이 동시에 답했다.
“너무해.”
유비가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같이 싸우던 사람을 뒤통수를 쳐서.”
“사마의 입장에선 처음부터 같이 싸웠던 게 아니었겠지요.”
유비에게 조금 더 달라붙으며 제갈량이 말했다.
“제갈량, 추워?”
유비가 안을 둘러보더니 의자 옆에 있던 담요를 가져와 제갈량에게 둘러주고 자기가 꼭 끌어안았다.
“그런데 제갈량 저거.... 괜찮은 거야?”
손책이 그 쪽을 손짓했다.
“아직 까만색인거.”
제갈량은 브리지의 녹색은 원래대로 돌아왔으나 옷은 여전히 검게 물들어 있었다.
“이성을 붙들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제갈량이 대답했다.
“다크 펜타곤의 영향이 없지는 않지만, 전 이렇게 약해진 상태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계책을 내어 봐야 주군과 손책님이 거르시겠죠.”
“응, 물론이지.”
유비가 말했다.
“지금 같아선 좀 수단 방법 안 가려도 될 것 같은데 말이에요.”
주유가 말했다.
“사마의 놈, 동굴 무너뜨려서 콱 깔려버렸으면 좋겠다.”
“그 동굴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려고.”
제갈량이 졸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뭐 나도 그랬음 싶어서.... 있는대로 막말을 녹음해 뒀지만.”
“막말이라는 자각 있었냐.”
주유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제갈량을 보았다.
“내 폰은 이미 박살났겠지?”
유비가 아련한 표정을 했다.
“당연하죠, 자기가 죽어라고 찾아다닌 제갈량이 기척을 잘 은폐하고 숨은 게 아니라 폰에 녹음한 목소리 뿐이었다는 걸 알면......”
말하고 주유는 조금 몸을 떨었다. 미쳐 날뛰던 사마의가 동굴을 무너뜨렸다가 깔려죽는 시나리오가 조금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저... 다들 이제 좀 시장하지 않아?”
유비가 일어났다.
“장을 봐왔어야 하는데.... 냉장고에 뭐 있는지 볼게.”
그가 부엌을 찾아 들어갔다.
“여기 화장실은 어디려나.”
손책도 일어나 문을 기웃거리다 안으로 들어갔다.
“너 그러고 있을 거면 침실 찾아서 눕지 그래?”
주유가 제갈량에게 말했다.
“자는 거 아냐.”
제갈량이 다시 하품을 했다.
“생각 중이라고.”
“그래, 열심히 해라.”
주유도 일어났다.
“그래도 가만히 있는 건 불안하니까 결계라도 칠까...”
그렇게 거실에 제갈량 혼자 남았을 때, 현관문이 찰칵 소리를 내었다. 키패드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제갈량이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이야!”
주유가 달려왔다. 현관문이 열리고 나타난 것은 초선이었다. 막 공격 태세로 주문을 준비하던 주유가 놀라 달려가 초선을 안아들었다.
“세상에, 초선아? 네가 여기 웬일이니?”
“여긴 웬일이냐고 물어야 할 건 우리야!”
초선의 어깨에 하후연이 뛰어올랐다.
“어째서 손책.... 에 유비까지?”
손책도 유비도 뛰어나와 초선과 하후돈 하후연을 보았다. 현관문이 끼익하고 저절로 닫혀 잠겼다.
“제갈량..... 제갈량? 괜찮아?”
제갈량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자기 신선을 돌아본 유비가 깜짝 놀라 그에게 달려가 끌어안았다.
“왜 그래, 지금 아무 일도.....”
“주, 주군?”
제갈량이 유비를 꽉 잡고 매달렸다.
“그래. 나야, 제갈량. 왜....”
“사마의가....”
“사마의 아니야. 초선이야.”
유비가 덜덜 떠는 제갈량의 등을 쓸어내렸다.
“초선이가 왔어. 사마의가 아니라. 그러니 무서울 거 없어.”
“초선....”
제갈량이 고개를 들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제갈량이 유비를 보고, 초선을 보고, 주위를 둘러보고 여기가 장각의 아지트가 아님을 확인했다.
“아.......”
그가 눈을 감고 한숨을 토했다. 안도하고 나서도 그의 몸이 간헐적으로 경련했다.
“.....사마의가 무슨 짓을 했길래 그래.”
주유가 놀라서 제갈량을 보았다. 제갈량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도망을 장각의 아지트로 갔어.”
그리고 도망쳐 간 적의 본거지에서 적의 배후와 마주쳤다. 주유가 입을 딱 벌렸다.
“그런데 여기........ 너 미쳤어.”
“알아.”


보디가드 대소동 3 ㅣ- 레히삼


리나와 함께 심사위원석에 앉아있던 안경 낀 매니저가 유비와 공손찬에게 업무설명을 하며 계약서를 내밀었다.
“리나 씨는 아주 바쁜 사람이에요. 지금은 습격 때문에 입원한 가수들의 공백까지 메우고 있어서, 두 사람도 눈코 뜰 새가 없을 테니 각오해둬요.”
“으아.....”
공손찬이 리나의 일정표를 읽어보며 신음했다.
“팬레터와 선물을 가려내는 것도 두 사람 일이에요. 항상 리나 씨보다 앞서가서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기다려야 하고, 사소한 일이라도 제대로 못 하면 우리 모두 피곤해지니까 연예인 앞이라고 들뜨지 마세요. 자세한 건 내일 부매니저에게 물어보고.”
매니저가 꺼멓게 패인 눈두덩 위의 핏발 선 눈으로 유비와 공손찬을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유비 곁에 붙어서서 두 눈 때록 굴리고 있는 서서에게 시선을 멈췄다.
“일행인가요?”
“예!”
서서가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습관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려다가 매니저가 머뭇거렸다.
“습격 문제 때문에 리나 씨 주변 단속을 엄하게 하고 있어요. 유비 씨와 공손찬 씨는 이제 고용인이니 괜찮지만 친구라고 이렇게 달고 오지 말아요.”
“예......”
서서와 유비가 나란히 입술을 내밀었다. 애교부리는 강아지를 매정하게 혼낸 기분이 되었지만 매니저도 바빴다. 떫은 기분 같은 것 잊어버리고 10분 내로 설명을 끝내야 리나의 다음 일정에 따라갈 수 있었다.
‘부매니저라도 안 왔으면 어쩔 뻔했어. 어디서 리나 주제에 그런 사람 데려왔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죽지는 않을 것 같네.’
꼼꼼하고 엄격해서 일반적인 의미로 같이 일하기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새 경호원이 달고 온 친구 앞으론 못 오게 하라는, 지극히 당연한 말을 일부러 쫓아와서 강조하는 쪼잔한 참견쟁이이기도 했다.
하지만 덕분에 잡무가 줄고 수면시간이 늘었다. 리나의 짜증도 대신 받아준다. 그것만으로도 부매니저 전풍은 있어 줘서 고마운 사람이 되었다.


“아쉬워할 거 없어. 이거 보니까 따라와봐야 서서한테 재미있는 일은 하나도 없을 것 같은걸.”
내일부터 입을 정장을 다림질하며 유비가 서서를 달랬다.
“놀러가는 게 아니라는 건 알아요.”
서서는 시무룩한 채로도 옷 주름이 판판해지는 모양을 열심히 구경했다.
“그치만 유비님과 공손찬님이 바쁘게 됐는데 저는 곁에서 도울 수도 없다고 하니까 아쉬워요.”
“서서는 서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돼.”
유비가 자상하게 다독였다.
“그동안 도원관은 텅 비게 되잖아. 서서가 전화도 받고 택배도 받고, 그러면 되는 거야.”
“예......”
“그리고 혹시 군주가 나타나면 공손찬한테 말해주고.”
“예.”
서서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도원관의 잡일을 돕는 것도 유비에게 도움이 되겠지만 보다 신선다운 일이 역시 더 좋았다.
‘그런데 도원관에 가만히 앉아서 군주를 찾을 수 있나?’
“유비!”
공손찬이 폰을 들고 뛰어들어왔다.
“옷 다 다렸어? 아무튼 마르긴 한 거지?”
“어, 왜?”
“30분 내로 오래.”
공손찬이 폰을 들어보였다. 말하는 본인도 기가 막힌 듯했다.
“내일부터 시작 아니었어?”
유비가 기겁해서 옷을 들고 털어보았다.
“이거 입을 수는 있겠는데 그래도......”
“그럼 이리 줘. 나가야 해.”
서서는 유비와 공손찬이 꼬깃꼬깃한 정장을 걸쳐입고 나가는 동안 갸웃거리며 구경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영웅패들도 두 군주를 따라나가 순식간에 서서 혼자만 남았다.


리나는 원래 그날 저녁 마사지를 받으러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식사 약속이 잡혀 호텔로 행선지가 바뀌었다. 바로 지난번 피해자가 습격당했던 장소와 한 블럭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리나 님은 불안한 나머지 오늘부터 경호를 받겠다고 하셨습니다.”
낮에 본 안경 낀 매니저가 아닌 노란 브릿지에 흰 슈트의 여성이 공손찬과 유비를 맞이했다.
“저는 부매니저 전풍입니다. 유비 님, 공손찬 님 맞으시죠?”
“예.”
딱히 눈을 부라린 것도 아닌데 근엄하고 딱딱한 태도가 두 사람을 주눅들게 했다.
“그럼 저희는 어디서 대기하면 돼요?”
“오늘은 일단 건물 밖을 순찰하십시오.”
전풍은 호텔 주변 구조와 주의해서 봐야 할 것들을 그 자리에서 주르륵 읊어주었다. 전풍 본인이 빠삭하게 꿰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유비가 다 알아듣기엔 말이 빨랐다.
“질문 있습니까?”
“아뇨.”
공손찬도 움츠러들어서 대답했다. 자신과 유비는 다 구겨진 양복을 입고 나왔는데 부매니저의 흰 바지는 방금 세탁소에서 받아온 것처럼 선이 날카롭게 살아있었다.
‘저 사람은 옷에 뭐 튀지도 않나?’
“그럼 연락할 것이 있으면 이 무전기로 하십시오. 매니저가 받을 겁니다.”
말을 마치자 전풍은 휙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유비도 공손찬도 갑자기 바깥 날씨가 더 차갑다고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우리 저녁 먹었던가?”
공손찬이 신음했다. 명색 취직이니 치킨이라도 사다가 자축하려고 했는데 리나가 식사 마치고 나올 때를 기다리려면 꼼짝없이 굶게 생겼다.
“집에 소세지 남았던가......”
유비가 중얼거렸다.
“서서 굶으면 안 되는데. 부엌 들어가도 안 되는데.”
“지금 서서 걱정할 때야?”
공손찬이 투덜거렸다. 유비는 서서뿐 아니라 부엌도 걱정하는 거라고 설명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지금 공손찬의 걱정거리를 늘리고 싶지도 않았다.
“한 번 시킨 대로 돌아보기나 하자. 아무 일 없어보이면 뭐 사먹고.”


다행히 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틈을 봐서 공손찬이 근처 편의점에서 사온 삼각김밥으로 배도 채웠다.
“영화처럼 되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유비가 호텔의 불빛을 보며 꿍얼거렸다.
“리나 얼굴은 볼 기회도 없네.”
“리나는 못 봐도 되니까 어디 편히 앉아있었음 좋겠다.”
공손찬도 한숨지었다. 시간이 늦어지니 몸이 정말로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했다.
“길거리고 뭐고 그냥 퍼질러 앉아버릴까....”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귀에 꽂은 수신기가 지직거렸다.
“주차장으로 오라는데 주차장이 어디야?”
유비가 공손찬을 쳐다보았다. 공손찬은 파란 표지판이 어디 있나 둘러보았다.
“주군.”
영웅패 셋이 거의 동시에 옷 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레전드 히어로의 기척입니다.”
“뭐? 어디?”
영웅패들의 안내대로 공손찬이 앞장서서 뛰었다. 유비도 뒤따랐다.
조운이 안내해준 곳이 바로 주차장이었다. 아직 군주는 보이지 않았지만 공손찬은 군신일체부터 했다.
변신하면 속도만 빨라지는 게 아니라 감각도 향상되었다. 어딘가에서 타닥, 하고 불 붙는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불붙은 고리 같은 것이 날아왔다. 창으로 막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공중에서 갑자기 빙글 돌아 진로를 바꾸었다. 게다가 하나가 아니었다.
“으앗!”
조운의 속력이 아니었으면 두 눈 뻔히 뜨고 맞을 뻔했다. 그렇게 피했더니 두 고리 모두 빗나간 채 어디론가 날아가버리는 대신 빙글 돌아 공손찬에게 쫓아왔다.
하나를 장창으로 튕겨낸 순간 나머지 하나를 청룡파가 잡았다.
“괜찮아?”
관우와 일체화한 유비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쪽 방향이었어.”
공손찬이 창으로 어두운 구석을 가리켰다.
“굉장히 강한 영웅패 같습니다.”
조운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튕겨내는 데도 충격이 컸어요. 공격도 예측하기 힘드네요.”
공손찬은 마른침을 삼켰다. 강한 적에 대한 경계와 긴장만은 아니었다.
‘이런 강력한 영웅패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생각해보면,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이나 습격이 있었는데 잡기는 고사하고 단서조차 얻지 못했다고 들었을 때 이미 상대도 군주일 것을 예상했어야 했다. 이미 동탁 같은 놈도 봤는데 레전드 히어로의 힘을 스토킹 범죄에 쓰는 놈이 나오지 말란 법도 없었다.
‘영웅패도 그런 변태보다는 내가 써주는 편이 나을 거야.’
“잠시만요, 형님, 공손찬 님.”
관우가 두 군주의 주의를 끌었다.
“잡았던 고리 칼날이 사라졌습니다.”
공손찬도 유비도 서로 등을 맞대고 주변을 경계했다. 당장 공격이 날아오지 않자 처음 노리고 가던 방향으로 조금씩 발걸음을 떼었다.
호텔 건물 안에서 통하는 입구가 저만치 보였다. 어두운 주차장에 밝은 불빛이 비치자 둘 다 그쪽으로 일시 신경이 쏠렸다.
그쪽이 환한 덕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똑똑히 보였다. 화려한 미니드레스 차림의 여자를 보고 유비가 당황했다.
“리나가 오고 있어!”
“공격하기를 물결과 같이!”
근엄한 여자 목소리와 함께 주차장이 밝아졌다.
불이 켜진 것이 아니었다. 노랗게 빛나는 고리형 칼날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공손찬도 유비도 당황해서 고리를 튕겨냈다. 그러나 튕겨내도 되돌아오는데다가 수도 훨씬 늘었다. 움직임도 변화무쌍해 고리가 온 주차장에 가득 찬 것 같았다.
그 중 몇이 막 나오려는 사람들 쪽으로 날아가는 걸 보고 유비가 그리로 달려갔다. 관우청룡탄을 쏘자니 사람들 피해 안 주고 고리만 맞출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속력이 부족했다. 고리 하나가 간발의 차로 사람들을 덮쳤다.
“리나!”
무작정 달려가려다가 리나와 매니저에게 변신한 모습을 보여줘도 되는지 당황해서 멈춰섰다.
“유비, 괜찮아?”
뒤에서 공손찬이 달려왔다. 사방에 날아다니던 고리들이 어느새 사라졌다. 유비는 일단 구석으로 가서 변신을 해제했다.
그러자 곧 수신기에서 귀따가운 독촉이 쏟아졌다. 첫날 만났던 소속사 매니저였다.
-뭣들 하고 있는 겁니까! 지금 주차장에 범인이 나타났다는데!
“예, 옛!”
-가서 상황 살펴보라고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차장으로 나오려다 쓰러진 일행 중에 리나는 없었다. TV에서 본 다른 가수였다.
“괜찮으세요?”
공손찬도 변신을 해제하고 그리로 달려갔다. 가수는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그의 매니저가 곁에서 감싸다가 다쳤다. 공손찬은 일단 119를 불렀다.
“저희는 리나의 경호원입니다.”
의심하는 시선을 받고 공손찬이 얼른 자신을 소개했다.
“119 불렀습니다. 혹시 누가 습격했는지 보셨어요?”
멍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피해자들 중에 리나와 그 일행은 없었다.
“리나는 부매니저가 1층에 숨겼대.”
유비가 안도했다.
“경찰 올 때까지 꼼짝도 않겠다는데. 우린 여기서 경찰하고 119에 상황 설명하고 오래.”
“응.”
공손찬은 한숨을 내쉬었다. 범인이 노린 가수는 무사하지만 어쨌든 부상자가 또 나왔다. 범인이 또 한 번 승리했다.
‘그래도 단서가 생겼어.’


리나를 집까지 경호해 바래다주고 유비와 공손찬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꼭두새벽이었다. 서서는 그때까지 불도 안 끄고 기다리다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안 자고 있었어?”
녹초가 되어 뻗으면서도 유비가 서서를 다독였다.
“신선은 잠 안 자요.”
서서가 방긋 웃었다.
“지루하거나 피곤할 때 조금 졸 수도 있지만 인간처럼 푹 잘 필요는 없답니다!”
유비가 하듯 양손으로 엄지를 치켜세우는 서서에게 유비는 똑같이 활짝 웃었다. 그런데 공손찬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서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왜 그래요?”
“서서. 신선들의 도술 중에 무기 개수를 늘리는 것도 있어? 예를 들어, 원거리 무기가 원래는 두 개만 날아가는데 훨씬 많아지게 하는 거.”
“있어요.”
서서가 바로 끄덕였다.
“제가 쓰면 그렇게 많이는 안 늘어나지만요. 게다가 유비님은 원거리 무기 잘 안 쓰시니까 별 소용 없을 걸요.”
“아.”
유비는 실망한 기색이 되었지만 공손찬이 신경쓰는 건 그쪽이 아니었다.
“우리가 본 그 습격범은 신선이 있는 레전드 히어로였어. 고리 모양 무기를 날리는데 주문 외치는 소리와 함께 고리가 잔뜩 늘어났어.”
서서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저도 따라다니는 편이 좋겠어요.”
“그래. 상대가 그렇게 강하다면 이쪽도 전력을 다해야지.”
서서와 공손찬이 마주보고 끄덕였다.
“상대의 신선이 너보다 강한 모양인데 괜찮겠어?”
유비는 조금 걱정스러워 보였다.
“괜찮아요! 저도 신선이고, 유비님도 있잖아요.”
서서가 다시 활짝 웃었다.
“매니저한테 안 들키게 잘 따라다닐게요.”
서서에게 설득된 유비가 같이 화이팅 포즈를 취하는 동안 공손찬은 먼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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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라면 많이 써봤지만, 이렇게 원작에 대한 불만에 가득차서 그걸 표출하기 위해 쓰는 AU는 이번이 처음이다보니 사람들 반응이 궁금하다. 충분히 재미있는지, 설득력 있게 읽히는지.


흑신선 14 ㅣ- 레히삼


유비가 울며 사정했다. 주유가 한숨을 내쉬었다.
“안 죽여요. 안 죽이니까 유비님도 일어날 수 있으면 일어나 봐요.”
“안 죽여? 정말이지?”
“네. 그러니까 어서.”
유비가 일어났다. 똑바로 설 정도 힘은 없어서 엉금엉금 기다시피 주유를 쫓아갔다.
그를 보며 주유가 확 얼굴을 찌푸리더니 토할 것 같은 표정을 하고 고개를 돌렸다.
“...주유?”
“주군. 저것 좀. 빨리.”
주유가 유비 쪽으로 손짓했다.
“빨리 부숴서 좀 없애 줘요. 손은 대지 말고.”
유비가 굳어있는 새 손책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가 유비에게 드릴을 들이댔다.
“손책?”
그리곤 유비 바로 옆에 떨어져 있던, 아까 그가 제갈량의 입에서 끄집어 낸 조각을 드릴로 찍었다.
“이거 또 안 부서지네.”
손책이 투덜댔다.
그것은 길쭉한 나무 조각같이 생겼다. 검은 옻칠을 한 것 같은 매끄러운 표면에 銜枚라는 두 글자가 일그러진 모습으로 새겨져 있고 지네발 같은 것이 사방으로 뻗어 꿈틀거렸다.
“그럼 당장은 안 부숴도 되니까 멀리 치워줘요.”
주유가 재촉했다. 손책이 골프라도 치듯 드릴로 그걸 쳐서 옆으로 멀리 날려버렸다.
주유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손책이 물었다.
“네..... 너무 혐오스러운 것을 봐서 좀.”
“저, 주유?”
유비가 물었다.
“아까대로 그냥 뒀다 저게 다시 제갈량에게 들러붙는 건 싫지요, 그렇죠?”
주유가 말했다. 얼굴이 창백해져서 유비가 붕붕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치우느라고...”
“너무 머리 흔들지 마라. 진탕될라.”
손책이 유비의 머리를 잡아주었다. 제갈량을 내려놓은 주유가 와서 유비에게 치유 주문을 썼다.
“솔직히 놀랐어요. 어떻게 안 죽고 여기까지 온 거에요?”
“어.....”
유비가 난처한 표정으로 헤죽 웃었다.
“제갈량만 생각하면서 열심히 뛰다보니.”
“허.”
주유가 어이없어했다.
“뭐,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요.”
주유가 다시 기절한 것 같은 제갈량을 내려다보았다. 혹시 또 그를 죽이자고 할까봐 유비가 긴장했다.
“걱정 말아요. 살아 있어요.”
주유는 유비의 의도를 오해했다.
“그럼 저기 들어가서 저거... 뭐시냐 진 부수면 되는 거야?”
손책이 아까 제갈량이 막고 있던 통로 너머를 가리켰다. 주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유비를 보았다.
“저건 저와 주군이 하고 나올 테니까, 제갈량 챙기세요.”
주유와 손책은 통로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다 양 옆 벽에 늘어진 쇠사슬을 보고 유비는 몸을 떨었다.
“제갈량...”
유비가 옆에 죽은 듯이 쓰러져있는 제갈량을 보듬었다. 그러면서 소매 끝을 걷어보니 손목을 둘러 붉게 자국이 나 있었다.
“무기가 아니라 족쇄인줄도 모르고...”
아직 옷이며 머리카락이 검은색인 게 신경 쓰였지만 주유도 죽이자고 안 했으니 지금은 괜찮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유비가 제갈량을 살폈다.
검은 기가 사라진 입술은 평소처럼 붉지 않았다. 핏기 없이 창백한데 형편없이 부르트고 갈라져 피딱지가 앉은 입술을 유비가 살짝 손으로 건드렸다.
“으.....”
제갈량의 입술이 조금 움직였다.
“주....”
“응, 제갈량. 나 여기 있어!”
유비의 표정이 환해졌다.
“살아있지? 제갈량..... 인거지?”
“주....군.”
말하기 힘든지 제갈량이 입을 다물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살며시 눈을 다시 떴다.
“주군.... 인가요, 저.....엉말로?”
“응!”
유비가 웃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량이 몸을 튕겨 일어났다. 너무 빨라서 유비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가 유비의 목에 팔을 감았다.
“주군....”
유비를 안고 제갈량이 흐느꼈다.
“진짜...네요. 절, 또다시.”
“제갈량.”
유비가 제갈량을 힘있게 마주 안았다. 평소 유비 쪽에서 끌어안는 일은 많았어도 그 반대 경우는 없다시피 했었다. 그 동안 제갈량이 혼자서 얼마나 외롭고 괴롭고 힘들었으면 이럴까 싶어 유비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이거 환각은 아니겠지요?”
제갈량이 몸을 떨었다.
“아니야. 난 진짜 유비고 지금 선계와의 통로라는 동굴에서 널 발견했고...”
유비가 조금 몸을 떼고 제갈량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입에 든 것을 꺼냈더니 사슬에서 풀려났어. 그건 대체 뭐였어?”
“함매라고 하는... 말하자면 해킹툴입니다. 그걸로 절 지배해서...”
제갈량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유비가 그를 다시 꼭 끌어안고 다독였다.
“다크 펜타곤의 힘을 흡수했다곤 해도 전 더 이상 세상 멸망을 바라지 않습니다.”
제갈량이 유비에게 몸을 기댔다.
“다크 펜타곤을...”
“그조차도 제가 원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사마의가...”
“사마의?”
유비가 어리둥절했다.
“사마의가 왜....”
“모르고 계셨습니까?”
제갈량이 흠칫 긴장했다.
“그가 절 여기 두고 가면서, 자기가 조조님의 몸을 빼앗고 주군과 손책님도 죽인 뒤 이리로 다시 와서 절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두 분이 오셨길래 저는 이미 싸워 이기셨나 하고.....”
“손책!!”
유비가 제갈량을 추슬러 안으며 일어섰다.
“손책, 큰일났어! 사마의가....... 나쁜 놈이래!”
뭐라 불러야 맞는지 몰라 유비가 일단 그렇게 외쳤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손책과 주유가 달려나왔다. 제갈량이 주유의 눈 앞에 신선패의 청사진을 깔았다.
“가운데 공동 부분을 봐.”
제갈량이 긴장으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걸로 신선을 담아서, 군주의 몸에 이식하는 게 가능해.”
설계도를 살펴보던 주유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무슨..... 이 미친......”
“사마의는 우리 주군들을 죽이고 오겠다고 했어. 어떻게 마주치지 않았는지는 몰라도....”
제갈량이 눈이 석벽 너머로 향했다.
“마봉진, 부쉈어? 벌써?”
“벌써는 무슨 소리야, 애초 그거 부수려고 여기 온 건데!”
“제기랄.”
제갈량이 머리를 감싸쥐었다.
“이러면 사마의가 우리가 지금 여기 있는 거 알게 되잖아. 지금 전력으론 상대 못한다고.”
“그렇다고....”
군주들의 체인저와 신선들의 팔찌에 공지사항이 업데이트 되었다. 선계와 인간계 사이의 데이터 흐름 불량 문제가 해결되어 배틀이 재개된다는 공지였다.
“망했다....”
제갈량이 신음했다.
“사마의가 당장 이리로 올 거야. 이 상태로는 우리 절대 못 싸워.”
“싸워보기도 전에 포기하지 마! 네 상태는...”
“딱 죽기 직전.”
제갈량이 여전히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는 배와 옆구리를 감쌌다.
“나는 다크 펜타곤을 통째로 삼킨 것이 아니야, 그 힘의 일부를 들이마셨을 뿐이지.”
제갈량이 한탄했다.
“지금 조조를 손에 넣은 사마의를 어떻게 무찔러야 할지, 그건 나도 모르겠어.”


대군주 사마염의 선계병 군단이 도원관을 뒤집어엎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유비나 손책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는 거지, 이 쥐새끼같은 것들이.”
강동관에 보낸 선계병들도 손책을 찾지 못했다는 보고를 올렸다.
“설마 아직 강릉에서 돌아오지 않은 건가. 세계 멸망이 목전인데 참 한가들 하군.”
이제 그런 놈들 쯤 덤벼봐야 아무것도 아니긴 하지만 결판은 빨리 내고 싶었다. 이 순간을 너무나 오래 기다려왔다. 드디어 세계의 지배자가 될 길을 눈앞에 두었는데 별것도 아닌 놈들 때문에 지체되는 게 싫을 뿐이었다.
결코, 초조한 게 아니었다.
예상과 달리 조조는 완전히 소멸해버리지 않았다. 의식의 구석 어딘가에 처박혀 찾아 없애려도 찾을 수 없을 만큼 미미한 존재가 되어버렸지만 사마염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여 옥새의 신선이 사마염이 아니라 조조를 우승자로 여겨 되살리려고 한다면.
‘조조는 이미 죽은 거나 다름 없다. 그리 될 리가 없어.’
옥새의 에너지가 다한 지금 옥새의 신선이라 해도 힘없는 뒷방 늙은이에 불과했다. 정 안 되면 역시 죽이고 힘으로 옥새를 차지해버리면 되었다.
그러니 이제 유비와 손책만 없애면 승리였다. 그 놈들은 어디서 뭐 하고 있을까. 제갈량이 어디서 뭐 할지는 주유를 통해 알려줬으니 제갈량을 피해 숨거나 할 이유도 없이 서울로 돌아와 그를 무찌를 계획이나 짜고 있어야 맞았다.
‘혹시 이미 싸우러 떠났나.’
마봉진의 핵이 위치할 만한 곳은 여러 군데가 있었다. 어쩌면 그 위치 먼저 알아내고 조조에게 다시 협조를 구하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마음먹고 사마염은 마봉진을 펼쳐둔 쪽으로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있는데 공기의 결이 바뀌었다. 사마염이 놀라 통로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선계와의 소통이 정상화되어, 드림 배틀이 재개되었다.
제갈량이 혼자 뭔가 했을 리는 없었다. 손책과 유비가 벌써 그리로 가 제갈량을 없애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어쨌거나 선계 최강 신선인 제갈량에 다크 펜타곤의 힘이 더해졌다. 바보 손책이나 그보다도 더 바보 같은 유비가 싸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뭐, 어떻게 되었든 상관 없겠지.”
사마염이 혼잣말했다.
“상대가 누구든 이 사마염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닐테니까.”
제갈량을 자기 손으로 끝장내지 못한 게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그만큼 이용하고 짓밟았으면 보복은 충분히 되었을 것이다. 사마의는 좋은 쪽을 보기로 했다. 자기를 죽이려고 공격하는 유비를 보며 제갈량이 겪었을 심적 고통을 생각하면 이 결과도 별로 나쁘지 않았다.
‘그럼 놈들이 도망가기 전에 유비와 손책을 가서 잡아볼까.’
사마염이 통로로 향했다.
‘이제 정말로 곧 끝나는 거다.’


사방에서 기의 흐름이 모이는 곳이기에 동굴 입구는 한 곳이 아니었다. 유비와 손책은 주유가 찾아낸 반대편 굴로 서둘러 달려 나갔다.
유비가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주유가 말했다.
“사마의가 쫓아오기 전에 도망갈 수 있을 거에요.”
“응..... 그치만, 미끼 작전이라니.....”
“제갈량이 효과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제 생각에도, 사마의가 제갈량을 잡아다 한 짓을 생각하면, 그에 대한 사마의의 집착이 심상치 않은 수준이니까...”
“그게 싫은 거라고.”
유비가 울상을 했다.
“니들은 힘이 남냐?”
손책이 숨을 크게 쉬었다.
“잡담할 힘 있으면 달려.”
유비도 주유도 입 다물고 달렸다. 저 멀리 좁은 틈으로 햇빛이 보였다.


동굴 중앙으로 들어온 사마염은 눈을 크게 떴다.
그 자리에는 유비와 손책 대신 제갈량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마의.”
“제갈량?”
“날 봐서 놀랍나보군.”
제갈량이 미소 지었다.


보디가드 대소동 2 ㅣ- 레히삼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 사마의는 만족스럽게 주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영웅심 높고, 영리하고, 격투 기량도 높다. 인간에게 낯설 수밖에 없는 레전드 히어로의 전투방식에도 금방 적응했다. 하후돈 하후연의 장점이 매끄러운 연계로 다양한 상황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이지만 군주에게 그걸 활용할 전술감각과 반사신경이 없다면 그림의 떡에 불과한 특성이기도 했다. 조조는 두 가지 다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두 영웅패가 금방 주군에게 혹해서 따르게 된 것도 당연했다.
영웅패들도 신선처럼 군주에게 본능적인 호감을 품지만 군주가 하기에 따라 실망하고 싫어하게 될 수도 있다. 군주가 패해도 바로 다른 군주를 따라가면 소멸을 피할 수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군주를 배신하고 다른 군주를 따라간 사례도 있었다.
신선은 그럴 수조차 없다. 체인저는 두 신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옥새는 단 한 명의 관리자만 필요로 하므로.
지금 조조는 최신 범죄 정보를 정리하고 있었다. 레전드 히어로의 힘을 드림배틀이 아닌 치졸한 범죄에 활용하는 군주들을 색출하는 것, 그리고 유난히 강하거나 위험한 군주를 일찍 찾아내는 것에도 효과적이라고 했다.
정보를 얻기 위해 때로 인간의 현행법을 위반하는 낌새가 있었지만 사마의는 모른 척했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면모 역시 그가 필요로 하는 군주의 모습이었으니. 조조는 그가 원한 모든 것이었다.
흥미를 끄는 것을 찾았는지 조조가 몇 장의 서류를 반복해서 읽었다. 그리고 인터넷에 접속해 신문기사를 뒤졌다.
“사마의, 인간계의 지식도 어느 정도 배우고 내려왔다고 했지. 연예인에 대해서도 아나?”
“가무나 기예 등의 예능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인간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조조가 이맛살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얼른 덧붙였다.
“천시받던 시대도 있었지만, 지금은 매스미디어의 힘으로 지지자를 많이 모을 수 있고 수입도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성공한 자들은 그러지.”
사마의에게 연예계 강의를 해줄 필요까지는 없어보이자 조조가 표정을 좀 폈다.
“대신 얼토당토않은 범죄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지금도 유명 여가수만 골라서 습격하는 악당이 나타났는데, 여러 번 교묘하게 부상입히고 빠져나간 수법이 예사 실력 같지 않아. 경찰이나 경호 업체도 손도 제대로 못 쓰고 목격 증언 하나 제대로 못 건졌군. 피해자들이 하나같이 착란을 일으켰다는 점까지, 보통 인간이 아닌 것 같다.”
‘괴상한 전신 복면’이라는 증언이 ‘피해자가 충격받아 착란을 일으켰다.’로 와전되는 사례를 조조는 이미 몇 번이나 보았다. 사마의도 눈을 빛냈다.
“가보시겠습니까?”
“그래. 마침 괜찮은 미끼가 있군.”
조조가 연 웹사이트는 리나의 소속사 공식 홈페이지였다.
“너는 인간의 신분증명이 없으니 나서지 말고 뒤에 있어라.”


거의 아무런 제한도 붙어있지 않은 오디션 참가 자격 덕택에 당일 소속사 앞엔 구름 같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3층 창가에서 슬쩍 내려다보고 리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개나 소나 다 몰려왔잖아. 저런 것들 다 만나볼 시간 없다고.”
“주군의 팬들이지 않습니까.”
“팬? 내 가슴골이나 보려고 온 놈들이?”
리나는 더욱 인상을 쓰려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거울을 보며 열심히 이맛살을 폈다.
흰색 팬츠 슈트에 선명한 노란 색 스카프를 맨 중년의 여성 모습 신선이 안쓰러운 얼굴로 그 모습을 보다가 리나가 눈치채기 직전 고개를 돌렸다. 차분하고 엄숙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노란 브릿지가 살짝 흔들렸다.
“군주가 이런 오디션에 지원하기 적합한 경력과 자격을 갖추었다는 보장이 없으니 이렇게 할 수밖에요.”
신선이 쌍안경을 집어들고 밖에 모인 면면들을 살펴보았다. 정말 이 참가자들 중에 군주가 있다면 어떤 인물인지, 혹 지나치게 강하거나 경계해야 할 인물은 없는지 가려내야 했다.
“이렇게 멀리서 쌍안경으로 보면 구별이 돼, 전풍?”
얼굴은 폈지만 목소리에선 여전히 짜증이 뚝뚝 묻어났다. 전풍은 한결같은 태도로 대꾸했다.
“신선끼리는 서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자칫 신선을 거느린 강력한 군주와 지금 마주친다면......”
전풍이 갑자기 입을 다물고 쌍안경 쥔 자세를 고쳤다. 그답지 않게 당황한 모습에 리나도 창가로 다가갔다.
빽빽이 모인 군중 가운데서 하얀 옷의 누군가가 또 다른 하얀 옷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주유~~~!! 오랜만이야!!!”
두 팔을 붕붕 흔들며 달려오는 서서를 보고 주유도 잠깐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저 서서가 군주의 선택을 받았단 말이야? 아니, 서서니까 레인보우 이벤트 끝난 김에 그냥 놀러나온 걸지도?’
하얀 강아지처럼 주유 코앞까지 달려온 서서가 팔을 잡아 끌고 온 옆 사람을 가리켰다.
“이쪽이 내 주군, 유비님이야.”
기억하고 있었다. 드림배틀의 첫 승리자. 무도인이라더니 무술도 형편없고 뭐 하나 내세울 만한 능력이 없는 한심한 인간이라 황당했었다.
지금도 레인보우 이벤트까지 통과한 군주치고는 영웅심도 기세도 거의 발전한 기미가 없었다. 주유를 바라보는 눈빛도 똑똑해 보이지도 않았다.
주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서서가 유비에게 주유를 소개했다.
“이쪽은 주유라고 하는데, 선계에서 제일 강한 신선들 중 한 명이에요.”
“어, 그래?”
유비가 서서처럼 활짝 웃으면서 주유에게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워. 그쪽도 드림배틀 출전한 거야?”
“예.”
그럼 내가 놀러 나왔을까. 기가 막힌 표정을 적당히 감추고 주유가 유비에게서 다시 서서에게 눈을 돌렸다. 군주와 신선의 수준이 잘 맞아 보이기는 했다.
이 주유조차 이길 수 없었던 선계 최고의 실력자 제갈량과 최약체 서서가 붙어다니는 걸 두고 다른 신선들은 제갈량이 서서를 부하처럼 부려먹을 속셈이라고 하든지 반대로 서서가 제갈량을 구슬려 이용하려는 속셈이라고 말하곤 했다. 후자도 마냥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닌 것이, 한 명만 남을 때까지 서로 싸우는 운명이 예정된 신선들끼리는 친분이라는 것이 원래 불가능했다. 아무에게나 웃고 친절한 서서 쪽이 왕재수 제갈량보다 더 수상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드림배틀에 빠지겠다는 제갈량의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걸 주유는 일찍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 면이 더 참을 수 없었지만 결국 제갈량은 레인보우 이벤트에 참가조차 안 했고 서서는 자기와 꼭 맞는 주군을 얻어 인간계에 나왔다. 역시 이 둘은 그저 땡땡이 동지였다는 주유의 관측이 옳았다.
‘그나저나 이제 어쩌지? 여기서 배틀을 걸어야 하나?’
“어, 유비잖아!”
손책이 먼저 나섰다.
“너도 보디가드 지원 온 거야? 공손찬은?”
“당연히 같이 왔지.”
유비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손찬은 1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서서 이쪽을 보고만 있었다.
“안녕, 오랜만이네.”
눈이 마주치자 공손찬이 답지 않게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손책에게 인사하면서 주유를 흘끔 보고 물었다.
“그럼 주유는 손책의 신선이야?”
“예.”
주유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손책 곁에 붙어섰다. 이 공손찬이란 인간도 군주인 모양인데, 유비보다는 강해보이지만 주군에는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신선도 없었다.
“그런데 주군. 이 두 사람과 아는 사이예요?”
“응. 친구들이야.”
주유의 질문에 손책이 빙긋 웃었다.
“드림배틀의 경쟁자들인데요?”
“원래 진정한 무술가들의 우정은 승부를 겨루면서 더욱 다져지는 법이지. 게다가 지금은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다고!”
손책이 몸을 돌려 눈앞의 소속사 건물을 바라보았다.
“어떤 비열한 스토커가 리나를 노리든, 이 손책이 리나를 지키고 악을 섬멸하겠다!”


“돌아간다.”
뒤도 안 돌아보고 오던 방향으로 서둘러 걸어가는 조조를 사마의가 역시 서둘러서 따라갔다.
“배틀을 피하시는 겁니까?”
“그런 것만이 아니다. 저 오디션에 어느 군주의 음모가 숨어있든 미끼가 되어줄 군주가 셋이나 찾아왔으니 나까지 함정에 뛰어들어줄 필요가 없어진 거다. 저 셋이 음모에 넘어가든 역으로 깨든 곁에서 주시하다가 개입하는 편이 위험부담도 적고 내 승리로 이끌기 쉽겠지.”
“그럼 이 오디션이 문제의 습격범이 개입한 함정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조조가 걸음을 멈추고 사마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일찍이 받아본 적 없는 ‘이런 바보를 봤나?’하는 시선이어서 사마의는 조금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아, 역시 인간계에 익숙지 않아서 그런가.”
“면목없습니다. 부디 가르침을 주십시오.”
“좋다. 현대 인간들은 위기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이미 많은 경험을 쌓은 덕택에 제도적 장치도 매뉴얼도 꽤 발달해 있어. 습격자가 레전드 히어로라서 그런 전문 인력이 맥을 못 추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만 경호원을 뽑는다면서 관련 자격과 경력이 있는지, 심지어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는지도 살피지 않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설령 리나가 그럴 만큼 바보라고 해도 소속사나 담당 수사팀에서 말릴 거다. 그러니 누군가가 목적을 숨기고, 그런 반대도 무릅쓰고 이런 오디션을 강행한 거지.”
“그렇군요.”
마침내 사마의도 이해하고 약간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럼 음모를 꾸민 군주는 누구일까요?”
“그건 아직 알 수 없지. 리나 본인일 수도 있지만 오디션을 강행할 권한이 있는 누군가가 리나를 이용하고 있는 것일 수도.....”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조조가 표정을 굳히고 다시 걸음을 빨리했다.
“간단한 방법이 있다. 일단 빨리 돌아가 군주가 누군지 알아내고, 무슨 꿍꿍이인지 감시하다가 무찌른다.”


“저 근육질 남자는 떨어뜨리십시오.”
전풍이 리나에게 쌍안경을 넘겨주고 손책을 가리켜보였다.
“그의 옆에 있는 파란 머리에 흰 옷 입은 여자가 신선입니다. 그것도 선계에서 첫손꼽는 실력자였지요. 저 남자도 분명 강력한 군주일 겁니다. 지금 가까이 하기엔 위험합니다.”
“그래.”
“대신 저쪽, 저 주황색 치마에 흰 옷 입은 여자와 같이 온 저 남자를 합격시키면 됩니다. 저쪽도 신선이지만 선계에서 가장 약하고 실수도 잦기로 유명했습니다. 상대하기 어렵지 않을 겁니다.”
“쉬운 상대부터 하잔 말이지. 알겠어.”
리나는 조금 아쉬워 보였다.
“강한 군주라면 영웅심이 대단하다는 뜻이지? 흡수할 수 있다면 굉장할 텐데.”
“그러기에도 지금은 너무 이릅니다. 장각도 약속한 날짜까지를 기한으로 잡고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장각을 언급하면서 전풍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썼다.
“주군, 영웅심은 타고난 육신의 힘만이 아닙니다. 수련으로 약하던 군주가 강해진 끝에 승리를 거머쥔 선례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안량과 문추도 강력한 영웅패들이니.....”
“그만!”
리나가 탁자를 내리쳤다.
“그 얘기는 이미 끝났어.”
“하지만 장각은 주군을 이용할 생각일 뿐입니다.”
들은 척도 않고 화장을 손보는 리나에게 전풍이 고집스럽게 매달렸다.
“분명 머지않아 주군도 해치려 들 겁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그를 없애버리고 정정당당하게 배틀을 치르십시오.”
“날 이용하려 든다고? 그거 무서워 죽겠네.”
화장을 다 고치고 옷차림을 정돈한 리나가 시간을 확인하고 문으로 다가갔다.
“이용하려는 사람 다 쳐내기로 하면 아무하고도 같이 일 못해.”
전풍은 리나의 겉옷과 생수병을 챙겨들고 앞서가서 문을 열어주었다.


아무런 자격도 없이 참가한 어중이떠중이뿐 아니라 실제 실력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손책은 단연 돋보였다. 심사위원 석의 리나와 매니저도 은근히 감탄하는 눈치였다.
손책이 마지막에 갑자기 겉옷을 벗어부치고 리나 티셔츠를 과시하지만 않았어도 합격이었을 것이다. 주유는 그렇게 생각하고 주군을 노려보았다.
“스토커한테서 지켜준다고 나서서, 본인이 스토커처럼 보이면 어쩌자는 거예요.”
“스토커 아니라고. 엄연히 공식 루트로 파는 걸 내 돈 주고 산 건데. 짝퉁도 아니고. 난 절대 리나 관련 상품을 사면서 짝퉁이나 중고는 취급 안 해. 밤을 새워 줄을 서서라도......”
“예, 아주 스토커 안 같고 건전하네요.”
“주유가 나갔으면 붙었을 텐데.”
“저는 신분증도 없는데 무슨 수로요. 공문서 위조범으로 체포될 일 있어요?”
마음만 먹으면 도술로 눈속임하는 것까지는 가능하고 강동관 매니저 일도 그렇게 해서 시작했지만 일부러 말해주지 않았다. 상향 아가씨의 설명대로라면 이 오디션부터가 수상했다. 주군이 떨어져서 다행이었다.
“아무튼 여기 더 있어봐야 리나를 또 볼 수 있는 것도 아닐 테니 이만 가죠. 어머님께 또 혼나요.”
겨우 주군을 출구 방향으로 돌려놓았더니 두 사람이 온 방향에서 환성이 터져나왔다. 유비, 공손찬, 서서의 목소리였다.
“쟤들은 붙었나보네.”
손책의 목소리에서 부러움이 뚝뚝 묻어났다.
“잘 됐네요. 실력 있고 심성도 착하다니 리나를 잘 지켜주겠죠.”
유비나 공손찬 상대로 드림배틀을 하는 건 당분간 어렵겠다는 것 외엔 거의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주유가 손책을 잡아끌었다.
그건 상관없었다. 어차피 드림배틀의 승자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이지 많은 승리를 거둔 사람이 아니었다. 손책은 이미 강한 영웅패가 셋이고 신선도 있어서 다른 군주의 영웅패를 모을 필요도 없었다.
‘서서를 굳이 일찍 무찔러버릴 필요도 없지.’
소원대로 인간계에서 실컷 즐기고 있는 모양인데 그걸 당장 망치기엔 서서의 미소가 너무 해맑았다. 어차피 소멸이 예정된 삶을 저렇게 행복하게 살아서 안 될 것도 없었다.
그 악마새끼같던 제갈량조차 서서에겐 싫은 소리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멀쩡하게 인격이 박힌 자신이 무자비하게 나갈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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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풍田豊 (?~200) 자는 원호元皓. 원소의 모사. 지모가 뛰어나고 강직하였으나, 여러 차례 원소에게 바른말을 하여 미움을 산다. (김구용 삼국지 발췌)

아래는 아이러브니키를 이용해 저렴하게 만든 이 팬픽 오리지널 캐릭터 전풍입니다. 노란 브릿지를 구현할 수 없어 헤어밴드로 대신했습니다.

흑신선 13 ㅣ- 레히삼


얼마 가지 않아 유비와 손책에게도 보였다. 그 문을 막고 있는 자가.
“제갈량!”
유비가 소리쳤다. 제갈량의 눈이 그를 향했다.
그는 아치형 문의 가운데에 양 팔을 옆으로 벌리고 떠있었다. 모습도 표정도 이전 강릉에서 봤을 때와 동일했다. 다만 그 때 무기처럼 휘둘렀던 쇠사슬이 지금은 통로의 양쪽 벽에 박혀 길을 막는 형태가 되어있었다.
“저걸로 공격을 안 할 건가, 이번엔? 그럼 우리와 어떻게 싸울 생각이지?”
손책이 자문했다.
그 의문에 제갈량이 답했다.
제갈량의 주위에 검은 빛 반투명한 막이 떠올랐다. 반구형태로 그를 덮은 막 표현에 군데군데 파문이 생겼다.
“신선 마법 빙벽!”
주유가 외쳤다. 서두른 덕에 그 파문 중앙에서 화살이 솟아나와 이들에게 쏟아졌을 때 모두 막아낼 수 있었다.
“적이 원거리에서 싸우겠다면 근거리로 치고 들어가 주는 게 도리지!”
손책이 감녕으로 변신해 제갈량에게 달려들었다. 톱을 휘둘러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며 그가 막을 두들겼다. 유비도 황충으로 변신해 화살을 격추해서 손책을 엄호했다. 화살 걱정이 없어지자 손책은 태사자로 바꾸어 드릴로 막을 뚫으려 했다.
화살로는 부족함을 깨달았는지 파문이 사라지고 대신 막이 쑤욱 밀려나와 촉수와 같은 형태를 띄었다. 유비가 그것도 쏘았으나 촉수는 꾸물텅 피해버렸다. 자칫 난사했다 손책이 맞을까봐 유비가 공격을 멈췄다.
“공격하기를, 바람과 같이!”
주유가 유비에게 신궁을 걸어주었다. 유도탄으로 바뀐 탄환이 손책의 뒤를 노리는 촉수를 두들겼다.
“신선 마법 격뢰!”
주유가 재차 손책에게도 마법을 걸었다. 벼락의 힘을 받은 드릴이 방어막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저 놈이 움직이지 못하니까 그건 다행이네.’
두 군주에게 마법을 쓰면서 주유는 주변도 확인하고 제갈량도 분석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제갈량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암흑 마법을 난사하고 있었다. 세계 멸망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하면 이상하지 않지만 그래도 주유는 그게 마음에 걸렸다.
“신선 마법 축성!”
방어막 다른 쪽에서 또 화살이 솟았다. 손책을 엄호하는 유비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유비 앞이 아니라 막 근처에 축성을 깔면서 주유는 뭐가 문제인지 생각했다.
‘지금 우리만 이기면 끝나는 거 아니잖아, 조조님도 남아있는데? 그런데 우리에게 전력을 다한다고?’
매복을 직감한 주유가 주위를 집중해 스캔했다.
“유비님 피해요!”
자기 신선이 아니라 즉시 못 피하면 어쩌나 걱정했으나 유비는 주유의 말을 듣자마자 땅을 굴러 옆으로 피했다. 주유가 그 자리에 염멸을 깔았다.
“크아악!”
불 속에 뛰어든 꼴이 된 흑군주가 소리질렀다. 일어난 유비가 손책 쪽을 흘끔 보곤 관우로 바꿔 청룡도를 들었다.
“주유! 손책 엄호를 해줘, 내가 이 쪽을 맡을게!”
“네!”
주유가 손책에게 집중했다. 손책을 노리는 촉수에 화공을 쏘면서 그는 유비가 버티길 빌었다.


‘적이 또 나타난 건가.’
적의 이 방어막인지 공격막인지 헷갈리는 장벽을 뚫으며 손책은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매복이 있는 게 당연한 상황이라 놀랍지는 않았다. 지금 제갈량이 유비 손책 조조를 혼자 상대할 계획이었다는 쪽이 말이 안 되었다.
‘유비한텐 차라리 그게 낫겠지.’
아무리 결심을 단단히 했다고 해도 자기 신선이었던 제갈량과 싸우는 게 마음 편할 리 없었다. 매복한 흑군주와 싸우는 편이 유비도 전의가 솟을 것이다.
주유와 따로 떨어져 있으려니 마음이 불안했다. 하지만 유비에게도 보조가 필요하고 매복이 우려되는 상황이라 한 걸음 물러서서 전장을 조망할 시선이 필요하니 이게 최선이었다.
‘어서... 이걸 뚫어야.....’
전격 마법은 장갑을 무시하고 적에게 침투하는 속성을 지닌다고 이전에 주유가 설명했다. 그래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저 멀리 안쪽에 있는 제갈량이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유비와의 의리를 생각해서 가능하면 괴로워할 틈도 주지 않고 빨리 숨을 끊어주고 싶지만 그 정도 자비를 베풀려 해도 힘이 부족하면 불가능했다.
“이...아아아아아압!!”
손책이 기합을 넣었다. 머리로 날아드는 화살도 그의 다리를 감아 자빠트리려는 촉수도 그의 등을 노리는 흑군주도 유비와 주유에게 맡기고 모두 잊은 것처럼 눈 앞의 장막을 찢는데 온 힘을 다했다.
공격이 효과가 있는지 드릴 끝이 막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온 힘을 다해 밀어붙이며 손책이 드릴을 옆으로 휘둘렀다.
막이 찢겨나가고 구멍이 생겼다. 서둘러 막으려는 듯 검은 빛이 일렁이며 구멍을 좁혔지만 손책은 배틀 트로이카를 톱으로 바꿔 만든 빈틈을 찢어발겼다.
사람이 통과할 수 있을 만한 크기가 되었다고 판단하자마자 손책은 가차 없이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손책이 곧장 제갈량에게 달려들었다. 뭘로 공격당하든 무시하고 덮칠 심산이었다. 저게 드릴질 한 번에 죽을 리는 없지만 기회가 왔을 때 최대한 공격해둬야 했다.
제갈량이 그를 바라보았다. 빛 한 점 없이 가라앉은 눈동자는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어깨가 움찔 떨렸을 뿐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태사자 맹호충!”
손책의 드릴이 제갈량의 옆구리를 찢었다. 상처에서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리며 제갈량이 몸부림쳤다.
‘먹힌 건가? 공격이?’
이렇게 쉽게 되리라곤 생각 못했기 때문에 손책이 어리둥절했다. 당장이라도 주유가 함정이에요! 뒤! 라고 외칠 것 같았다.
그런 말은 없었다. 손책은 다시 드릴을 휘둘러 제갈량의 몸을 꿰뚫었다.
제갈량이 괴로워하며 몸을 굽혔다. 몸에서 힘이 빠져 늘어진 모습은 마치 족쇄에 매달린 죄수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제갈량은 비명 한 마디 지르지 않았다. 퍼뜩 손책은 유비의 말을 떠올렸다.
이건 절대 자기가 위험한 상황이라 할 수 없었으므로 손책이 제갈량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제갈량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이래서는 적과 싸우는 게 아니라 포로를 고문하는 것 같아 안 그래도 찜찜하던 차였다. 뭔가 다른 방법이 있다면 찾고 싶었다.
손책이 제갈량이 두른 머플러 끝을 쥐고 당겼다.
“!”
제갈량이 눈을 뜨고 몸을 젖혔다. 손책을 피하려는 듯 몸부림쳤다. 새로 뜬 그의 눈동자가 손책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까 본 것이 암흑이었다면 이것은 공동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허가.
폭발했다.
“주군!”
주유가 달려왔다. 손책은 눈을 떴다. 머리를 세게 부딪쳤는지 시야가 어지러웠다. 그래도 머플러는 아직 쥐고 있었다. 벗겨내는 데 성공했다.
“제갈량!”
유비가 외쳤다. 피를 토할 듯 비통한 목소리에 손책도 조금 정신이 들어 그의 등을 보았다.
‘등?’
손책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날려 온 거야?’
“끄으으으으.......”
죽어가는 짐승이 신음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맙소사.....”
주유도 이제 그 쪽을 보고 있었다. 손책도 눈에 힘을 주고 두 사람이 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으어으으으으.....”
소리를 내고 있던 건 제갈량이었다.
머플러 아래 가려졌던 입술은 검게 변색되어있었다. 검은 핏줄 같은 것이 입가에서 턱을 타고 목 아래로 뻗어 있는 게 보였다.
벌어진 입술 틈으로 들여다보이는 입 안에 뭔가가 있었다. 제갈량이 헛구역질 하듯 몸을 경련했다. 양 손목에 연결된 쇠사슬이 그를 매달고 있지 않았더라면 당장이라도 바닥에 쓰러져 굴렀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자신의 목과 입을 손으로 쥐어뜯었을 것이다.
“저게, 문제인거지?”
유비가 주유에게 물었다.
그리곤 대답도 듣지 않고 제갈량을 향해 달려갔다.
“유비님!”
주유가 소리쳤으나 유비는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발만 한 번 구르고 주유가 손책에게 회복을 사용했다.
“빨리 정신 차리세요, 주군. 저러다 둘 다 죽어요.”


유비는 앞뒤 안 가리고 제갈량에게 달려갔다. 눈 앞에 뭔가 나타나면 보지도 않고 베어버렸다. 마법이나 화살은 피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그냥 맞으며 돌파했다. 지금만은 그의 충실한 영웅패들이 외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구해줄게, 제갈량. 절대.... 절대로 또다시 널 잃지는 않겠어!’
유비가 가까워질수록 제갈량, 아니 제갈량을 조종하는 무언가의 발악이 거세졌다. 마법탄을 맞은 유비의 무릎이 꺾였다. 그러나 유비는 아픔을 참으며 계속 발을 옮겼다. 제갈량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 눈에서 유비는 자길 구해달라는 분명한 의사를 읽었다.
그러니 그만둘 수 없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만신창이가 되면서도 유비는 제갈량에게 걸어갔다. 제갈량에게서 검은 기운이 솟았다.
지척을 앞두고 유비의 무릎이 꺾였다. 그가 바닥에 뒹군 직후 아까 손책을 날려버린 것 같은 충격파가 덮쳤다. 다행히 이미 바닥에 엎드려 있었기에 유비는 두어 번 구르고 말았을 뿐이었다.
“제갈량....”
변신이 풀린 유비가 바닥을 기어 제갈량에게 다가갔다. 제갈량은 다시 공격하지 않았다. 그가 이를 악물고 도리질을 쳤다. 억눌린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흘렸다.
유비가 제갈량의 다리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 기대고 끌어안으며 일어섰다. 마침내 제갈량의 어깨를 잡고 끌어안았다.
“좀만 참아, 내가, 꼭.”
왼손으로 제갈량의 뒷목을 움켜쥐고 유비가 오른손을 제갈량의 입 안에 쑤셔넣었다.
제갈량이 짐승 같은 비명을 질렀다. 유비의 손을 물어뜯으며 버티려 했다. 그러나 유비는 제갈량이 몸부림치는 것도 자기 손에서 피가 흐르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제갈량의 입 안에서 뭔가 딱딱한 것을 더듬어 잡았다. 꺼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혀에 달라붙어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미안해, 제갈량. 좀 아플 거 같아.”
유비가 이를 악물고 온 힘을 다해 그걸 잡아당겨 뽑았다.
동굴이 흔들릴 정도의 굉음이 울렸다.
그게 제갈량의 비명이었는지, 유비의 기합이었는지, 선계와 인간계의 통로를 옭죄던 마법의 붕괴에 따른 것이었는지 그 모두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유비가 손에 쥔 것을 바닥에 떨구자 제갈량의 몸이 그에게 쓰러졌다. 자기 한 몸 버틸 힘도 남지 않았던 유비는 그를 안으며 같이 쓰러졌다.
“우....”
제갈량의 피에 젖은 입술이 움직였다.
“괜찮아.”
유비가 제갈량을 감싼 팔에 힘을 주었다.
“이제 괜찮아, 제갈량. 이제 정말로....”
“어... 으....”
오래 묶여 있던 혀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제갈량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대신 그가 유비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피와 눈물이 유비의 옷을 적셨다.
“괜찮아, 제갈량. 이제 다 괜찮......”
“끔찍한 상황에 혼자만 멋대로 괜찮지 말아줄래요.”
주유가 다가와 제갈량의 뒷덜미를 잡고 당겼다. 제갈량의 몸은 쉽게 딸려 올라갔다. 유비가 붙잡으려고 팔을 휘저었으나 손에 힘이 빠져 잡을 수가 없었다.
주유가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유비의 눈에 절망의 기색이 어렸다.
“아, 안 돼....”
유비가 신음했다.
“아직, 아직 안 풀린 거야? 그, 그래도, 그래도 떼어냈잖아, 죽이지 마, 제발 죽이지 말아줘, 이제는 방법이 있을 지도 모르는데....”


보디가드 대소동 1 ㅣ- 레히삼


Writer: 보행자
Characters: 유비, 공손찬, 서서, 조조, 사마의, 손책, 주유, 장각, 원소, 그 외 오리지날 캐릭터
Rating: 15
Warnings: 19, 20화 내용 스포
Summary:

● 원작 등장한 네 명 이외의, 적 군주의 신선을 보고 싶었습니다.
● 삼국지의 많은 책사들 중 한 명이라도 더 등장시켜보고 싶었습니다.
● 원소 캐릭터와 등장 에피소드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위의 이유로 19, 20화에 다음과 같은 변화를 주어서 쓴 AU 팬픽입니다.

● 레인보우 이벤트가 보디가드 대소동 이전 에피가 되어, 공손찬은 레인보우 이벤트 때까지 리타이어 하지 않았으나 영웅패가 하나뿐이므로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 유비는 원작의 레인보우 이벤트 전개대로 서서를 맞아들였습니다. 조조, 손책도 동일합니다.
● 안량과 문추는 별개의 영웅패입니다. 리나(원소)는 두 개의 영웅패가 있었기 때문에 레인보우 이벤트에 참가해 신선을 얻었습니다.
● 큰 줄거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리나는 여전히 부정적인 특성이 많은 악역이고 장각과도 손을 잡았습니다. 공손찬은 원소에게 패해 탈락할 것입니다. 조운은 유비에게 갑니다. 같은 인물, 같은 행동을 어떻게 프레이밍하느냐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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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공손찬 언니.”
서서가 여전히 답지 않게 풀죽어 있었기 때문에 공손찬은 자기가 아직도 화난 얼굴인가 싶어 미간을 만져보았다. 역시 아직도 찌푸려져 있었다.
“꽃밭, 저하고 유비님이 다시 만들었어요.”
“응?”
“서서가 팻말도 만들었는데 아주 예뻐.”
옆에서 유비가 거들었다. 서서와 나란히 풀죽은 표정을 하고 있으니 강아지 두 마리를 보고 있는 것 같아 공손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한 번 보자.”
유비와 서서가 팔랑거리며 앞장섰다. 뒤뜰로 나가보니 정말로 굶주린 토끼가 습격한 꼴이던 화단이 곱게 다시 정돈되어 있었다. 다시 심은 씨앗이 겉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기는 애초 유비가 가꾸던 곳이었다. 알아서 잘 심었을 것이다.
게다가 서서의 얼굴이 그려진 팻말도 뜻밖에 예뻤다. 서서에게 이런 손재주가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공손찬도 솔직하게 놀라고 말았다.
“이젠 서서가 책임지고 돌보겠대.”
공손찬의 기색을 읽고 유비가 슬쩍 웃었다.
“두 사람 다.”
공손찬이 다시 이마를 짚자 유비와 서서가 다시 나란히 찔끔했다. 정말이지 둘을 보고 있으면 영혼의 쌍둥이라는 게 실제로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화낸 건 화단이 망가져서가 아냐. 서서가 이상한 거 먹고 아플까봐 화낸 거지. 살충제라도 뿌려져 있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아, 살충제는 친 지 오래됐으니까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근데 바로 어제 퇴비를 줘서......”
“괜찮아요!”
머리 긁적이는 유비와 다시 미간이 좁아지는 공손찬에게 서서가 활짝 웃어보였다.
“신선은 인간들의 독에 거의 당하지 않거든요. 농약 정도는 짜잔~해독 가능하답니다!”
“정말? 진짜 서서 굉장하구나!”
유비가 다시 활짝 웃었다. 서서도 신이 나서 팔짝팔짝 뛰었다.
“그럼 둘이 알아서 잘 해봐.”
공손찬은 둘을 놔두고 재빨리 도장 안으로 되돌아왔다.
‘하아......저래뵈도 신선이란 대단하구나.’
우울하면 조운과 대화하는 게 요즘 버릇이었는데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전단지나 새로 만들어볼 생각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디자인이 너무 촌스러운가? 아마추어 티가 나나?’
그렇다고 프로 디자이너에게 외주하자니 지금 도원관은 그 비용조차 감당하기 힘든 처지였다. 이번에도 수강생이 안 늘면 난방비가 위태로울 텐데 외주비용까지 나가면 전기까지 끊길지도 몰랐다.
“주군?”
모니터 옆으로 조운이 튀어나왔다.
“화단이 여전히 마음에 안 드세요?”
“아니.”
공손찬은 잠시 마우스를 놓고 조운을 쓰다듬었다. 조운은 평소대로 그 손에 기대다가 이내 쪼그라들었다.
“죄송합니다.”
“응?”
“레인보우 이벤트 참가조건을 진작 알았더라면......”
공손찬이 당황했다.
“어, 아냐. 조운도 몰랐던 거니까 어쩔 수 없지. 영웅패를 더 모을 기회도 없었고.”
어쩔 수 없었다. 유비도 그걸 미리 알고 장비를 얻어온 것이 아니고, 공손찬 자신이 영웅패를 모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내지도 못했다. 조운에게 만족하고 있었으니까. 신선이 생겼다고 해서 유비가 갑자기 엄청나게 강해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같이 드림배틀을 치르고 있는데 유비가 도달한 단계에 자신이 도달하지 못한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이러다 내가 지면 어쩌지.’
무서워졌다. 처음 체인저와 조운을 받고 참가하게 될 때 왜 좀더 생각해보지 않았나 이제와서 후회가 될 정도였다.
하진 사범님이 떠나던 날이 떠올랐다.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꿈을 포기하고 떠나던 모습은 아무 것도 모르던 그 때에도 충격적이었다.
‘내가 그렇게 된다고?’
“주군.”
조운이 더욱 슬픈 표정을 했지만 지금은 공손찬도 조운을 다독여줄 수 없었다. 저 얼굴이 보고 있는 자신의 얼굴은 더 일그러져 있을 테니까.
“저, 공손찬 언니.”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열려 있는 문을 서서가 똑똑 두드리고 있었다. 다시 주눅들어 있는 걸 보고 공손찬이 벌떡 일어났다.
“또 무슨 일 냈어?”
“아, 아뇨......저녁 뭐 드실 건지 유비님이 물어봐 달래서요.”
“어. 미안.”
공손찬은 진심으로 반성했다. 유비의 신선이 된 죄밖에 없는 저 귀여운 소녀를 이렇게 구박하다니.
물론 서서는 물정 모르고 말썽부리기가 거의 유비급이지만 공손찬은 그 유비와 친남매처럼 살아온 사람이었다. 서서 개인을 미워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저녁은 그냥 유비가 먹고 싶은 거 하라고 그래. 아니면, 넌 뭐 먹고 싶어?”
“전 유비님이랑 공손찬님이 좋아하는 거면 뭐든지 좋아요.”
“아니. 그러면 안 되지. 너도 네 취향이 있을 거 아냐.”
공손찬이 유비와 싸우고 화해할 때처럼 웃으면서 서서에게 다가갔다.
“유비 요리 잘하는 거 알지? 말해봐. 선계에선 어떤 거 먹고 지냈어?”
“음......심심하면 과일 따먹고 그랬어요. 꽃이나 버섯도 먹고.”
“그런 것만? 그걸로 뭐 요리하거나 하지도 않고?”
“신선들은 원래 뭐 먹을 필요 없어요. 먹는 건 그냥 재미로 먹거나, 성분을 분석하려고 먹는 거예요.”
공손찬은 입을 딱 벌렸다. 보기엔 인간과 똑같은데 알면 알수록 차이점만 계속 나타났다.
“이봐, 서서.”
공손찬이 아직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데 조운이 책상 끄트머리까지 뛰어와 서서에게 손짓했다.
“혹시 말이야. 레인보우 이벤트 후에도 신선을 얻는 게 가능해?”
“응.”
서서가 대단한 일도 아니라는 듯 끄덕이자 공손찬은 귀가 확 뜨였다.
“진짜?”
“가능해요. 이벤트 후에라도 군주를 만나지 않고 선계에 남은 신선들을 만날 수 있으면요. 이번엔 습격 때문에 소멸한 신선이 많지만 그래도 몇 명은 남았을 거예요. 제 친구도 남아있고.”
“그럼 지금이라도 영웅패를 모으면 되는 거야?”
“예. 제가 선계로 안내해드릴 수 있어요.”
서서는 그게 자기한테 좋은 일인 양 활짝 웃었다.
“공손찬 언니는 강하고 착하시니까, 제갈량도 마음이 바뀔지도 몰라요. 영웅패 하나만 더 얻으시면 설득해볼게요.”
“그래, 고마워!”
조금만 생각해봐도 의문점 투성이인 발언이었지만 공손찬은 들뜬 나머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서서의 손을 잡고 팔짝팔짝 뛰었다. 서서도 신이 나서 같이 팔짝거렸다.
“그런데 영웅패를 얻으려면 다른 군주를 쓰러뜨려야 하잖아요.”
조운이 끼어들었다.
“요즘은 꽤 주위가 잠잠한데 어디 가서 얻으려고요?”
“찾아봐야지.”
공손찬이 씩씩하게 주먹을 쥐었다.
“그래, 서서 너도 인간계에서 계속 살려면 인간계 공부를 해야지. 같이 돌아다니면서 넌 탐방을 하고, 난 군주를 찾는 거야.”
“예!”
서서도 공손찬을 흉내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럼 일단......”
이미 어두워진 바깥을 보고 공손찬은 당장 나가는 대신 서서를 데리고 TV 앞으로 갔다.
TV에서 대단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TV는 인간적인 자극의 집합체고, 서서는 그런 것에 일일이 놀라지 않을 만큼은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TV를 틀고 채널을 몇 번 돌리자 예쁜 가수가 화면에 떴다.
“아, 리나다.”
“아는 사람이에요?”
TV부터가 신기한지 벌써부터 두 눈 동그래진 서서가 물었다.
“아니, 유명한 사람이라 내가 일방적으로 들어서 아는 거야. 저렇게 예쁘고 노래도 잘 하잖아.”
서서는 여전히 두 눈 크게 뜬 채 홀린 듯이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각하고 곽사도 저렇게 되고 싶어하는 거군요.”
“아, 그 파리랑 모기?”
문득 그들도 군주라는 사실이 떠올랐으나 공손찬은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도망 하나는 끝내주게 잘 치는 놈들이라 쫓아가 붙잡기 귀찮기도 하고, 신선을 얻는 게 진짜 목적이라고는 해도 기왕이면 뛰어난 영웅패를 얻고 싶었다. 영웅패 쪽에서도 진지하게 자기 능력을 높이 사주는 군주라야 더 기꺼이 따를 것이다.


저녁 메뉴 물으러 간 서서가 용건을 잊어버린 동안 유비는 알아서 공손찬이 평소 좋아하던 반찬으로 저녁을 차렸다. 저녁 먹는 자리에서 서서가 공손찬의 계획을 말해주자 유비도 바로 찬성했다.
“그럼 내일부터 같이 찾아보자. 셋이서.”
“좋아.”
“그럼 어디부터 가야 할까?”
잠깐 둘 다 생각에 잠긴 동안 서서가 다시 TV를 틀었다. 이번엔 뉴스가 나왔다.
“어, 리나가 또 나왔어요.”
연예가 소식 전문 채널이라 뉴스도 그쪽 위주로 나오고 있었다. 무심코 같이 TV를 보았다가 유비도 공손찬도 퍼뜩 놀랐다.
“여가수들만 공격하는 연쇄 폭력범?”
공손찬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미 여러 번 습격이 있었던 모양인데? 경찰은 뭐 하는 거야?”
화면에선 리나가 애처로운 얼굴로 자신을 지켜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디가드 공개채용 내역이 떴다.
“이게 뭐라는 얘기에요?”
서서가 두 눈을 말똥거리며 유비와 공손찬을 바라보았다.
“응. 어떤 악당이 유명 여자 가수들만 골라서 습격하고 있대.”
유비가 나서서 설명해주었다.
“그래서 리나도 표적이 될 게 뻔하니까, 저렇게 보디가드를 고용해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거지.”
“앗!”
갑자기 공손찬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유비도 서서도 깜짝 놀랐다.
“저 시급 봐! 특별한 자격조건도 없이 오디션만 통과하면 되는데 저만큼 벌 수 있어!”
공손찬은 신선을 맞을 기회가 아직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큼이나 두 눈이 빛나고 있었다. 유비도 공손찬이 가리키는 화면을 보고는 입을 딱 벌렸다.
“광고비, 난방비, 전열비......”
공손찬은 오디션 일정을 메모지에 베끼기 시작했다.
“유비 넌 옷장 좀 살펴봐. 입고 갈 만한 옷 있나.”
“그래!”
유비는 자기 방으로 달려갔다. 둘 다 갑자기 바빠진 걸 보고 서서는 두 눈을 때록 굴렸다.
“공손찬 언니, 영웅패는요?”
공손찬은 듣지 못하고 또 뭔가 준비를 하러 뛰어갔다. 붙들고 다시 묻자니 공손찬은 요즘 실제로 짜증이 늘었고, 돈 이야기 할 때 특히 더 그랬다. 모처럼 기분이 좋아보이는데 방해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외출은 외출이니까, 군주도 만날 수 있나 내가 찾아봐야겠다.’


“아니, 리나가 위기에 처하다니! 이 손책이 용납할 수 없다!”
갑자기 주군의 투지가 놀랄 만큼 치솟았다. 주유가 서류에서 눈을 떼고 주군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주유, 신선도 격투 잘 하잖아. 우리 저거 나가자.”
“신선의 장기는 도술이에요. 격투는 보조수단으로 배우는 거고. 누구나 저처럼 잘하진 못해요.”
주유는 손책이 가리키는 대로 TV 화면을 보았다.
“무술가 공개채용인가요? 왜 하는 거죠?”
“리나를 노리는 나쁜 놈이 있대. 그래서 리나가 그 나쁜 놈을 막기 위해 무술가를 고용하는 거지.”
“리나가 누군데요?”
손책은 잠시 생각이 멈춘 얼굴을 했다가 이내 미소지었다.
“아, 주유는 인간계가 처음이지. 그렇다면 모를 수도 있겠다. 리나는 말이지, 내 험난한 인생 속에 처음으로 피어난 한 떨기 꽃, 가뭄 끝의 단비 같은 여자라고나 할까?”
“그런 사이면 왜 주군에게 직접 연락해서 도와달라고 안 해요?”
“그야 리나는 날 모르니까. 고통의 순간에 리나의 노래가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꿈꾸는 듯한 표정도 잠시, 손책의 두 눈에 다시 투지가 타올랐다.
“좋아, 리나는 내가 지킨다!”
오디션 준비를 하겠다며 뛰쳐나가는 주군의 등을 어이없어하며 바라보던 주유는 서류를 대충 정리하고 자리를 떴다.
리나가 누군지, 주군과 어떤 관계이고 주군이 이제부터 무슨 바보짓을 하려는지 상향 아가씨에게 묻는 편이 빠르고 정확할 것 같았다.


흑신선 12 ㅣ- 레히삼


다음날 아침 손책은 엄청난 두통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다시 잘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주군.”
주유가 익숙한 태도로 그에게 물과 두통약을 주었다. 손책이 컵까지 마실 기세로 약과 물을 삼켰다.
“으......”
유비가 베개 밑에 머리를 박으며 괴로워했다.
“유비님도 두통약 필요해요?”
“응...... 응?”
유비가 베개를 던지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주유를 보고 실망한 표정이 되더니 다시 침대에 엎어졌다.
“.............여기에 제갈량이 있었어도 그 놈이 두통약을 챙겨주는 친절함을 발휘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응, 그렇겠지.”
유비가 꾸물꾸물 다시 일어나 약을 받아들었다.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그러게요, 반 병 밖에 안 마셨으면서.”
그리고 주유는 손책을 잡아 침대에서 끌어내렸다.
“자아, 이제 가야죠. 서울로 돌아가서 진법이 펼쳐진 정도도 확인하고 제갈량을 무찌를 방도를 강구하고 할 일이 많다고요.”
“응, 그래야지.”
머리를 감싸고 신음하면서도 손책이 대답했다.
“그러려면..... 저, 유비.”
“응?”
“제갈량 말인데.”
“죽여야 하는 거 알아.”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손책이 무색하게 유비가 바로 답했다.
“할 거야. 내 이기심으로 세상 멸망을 방치하거나 하지는 않아.”
“......그래.”
말하고 손책은 주유를 보았다. 두 사람 눈이 마주쳤다.
‘유비가 이럴 리 없어. 분명 뭔가 숨기고 있는 거야.’
“저, 손책.”
주종이 쌍으로 그를 수상해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유비가 물컵만 만지작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친구지?”
“그래. 물론.”
“그럼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손책은 긴장했다.
“뭔데?”
“그게, 위험할지도 모르는 거라..... 음, 제갈량하고 싸울 때, 죽이기 전에, 그 머플러 먼저 벗겨 봐도 될까?”
“응?”
각오했던 것과는 꽤 다른 부탁이었기 때문에 손책은 황당해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걸 왜? 죽이기 전에 한 번 제대로 얼굴을 보고 싶다 이런거냐?”
“그런 것도 있고, 역시 말을 안 한 게 이상해서.”
유비가 말했다.
“장각도 죽었고, 더 이상 그를 조종할 사람이 없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확인은 해보고 싶어.”
그가 손책의 눈치를 보았다.
“안 될까?”
“.....쉬운 일은 아닐 거라 생각하는데.”
“유비님의 의심에도 근거가 있긴 해요.”
뜻밖에 주유가 편을 들어주었다.
“말을 안 했다는 것도 몹시 신경쓰이고, 지금 그 녀석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니까. 예, 확인해보죠. 단 우리가 위험해지지 않는 선에서.”
“고마워, 주유.”
유비가 웃었다.
“고맙긴요. 유비님 혼자 몰래 하려고 하지 않고 미리 말로 해준게 고맙죠. 안 그래도 대체 뭘 숨기고 있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어, 티났어?”
“말했잖냐, 너 거짓말 하면 얼굴에 다 나타난다고.”
손책이 말했다.
“자, 그럼 가보자. 해장국 하는데 찾아서 아침 먹고.”


사마의는 꼬박 하루가 지난 뒤에야 조조의 곁으로 돌아왔다.
“주군.”
“그래, 사마의. 어서 와라.”
조조는 전에 없이 반가워하고 있었지만 사마의의 기색은 밝지 못했다. 조조도 금방 그걸 알아차렸다.
“탐색이 성과가 없었나?”
“아니오, 제갈량이 숨어있는 곳과 그를 무찌를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뭐라고?”
조조가 깜짝 놀라 자기 신선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지금의 제갈량을 무찌르기 위해선 인간의 몸과 신선의 힘을 가져야 합니다.”
“내겐 이미 그 두 가지가 다 있다.”
“제가 옆에서 돕는 것만으론 부족합니다.”
사마의가 영웅패보다 조금 작은 오각형의 패를 꺼내놓았다.
“신선패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이용해서, 주군께서 신선의 힘을 직접 가지실 수 있습니다.”
“그럼 뭐가 문제지?”
“제가 소멸해야 합니다.”
조조가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제가 이 몸을 잃고 신선패에 봉인되어 주군의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사마의가 무릎을 꿇었다.
“주군의 꿈을 위해 죽는 것이 신선의 영광. 심지어 이 일에는 세상의 존속이 달려있습니다.”
조조는 대꾸하지 못했다. 사마의가 계속했다.
“허락해주신다면 제 몸을 바쳐 세상을 유지하고 주군의 꿈을 유지하기 위한 밑거름이 되겠습니다.”
“세상과.... 내 꿈을 위해서.”
조조는 사마의에게서 등을 돌렸다.
본의든 아니든 그는 자신의 꿈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해왔다. 이제 그 목록에 이름 하나가 더 추가되려 하고 있었다.
“뜻대로 해라, 사마의.”
조조가 눈을 감았다.
“네가 이 방법 밖에 없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
“주군....”
하후돈과 하후연이 놀라 그를 보았다.
“미안하다. 내가 충분히 강하지 못한 탓이다.”
“미안하실 것이 없습니다. 주군께서 패배하시면 저는 어차피 소멸합니다. 미리 희생해 승리의 길을 열 수 있다면....”
“사마의.”
조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예?”
“세상을 위해서라고 해도, 이런 식의 희생은 역시 옳지 않다.”
“주군.”
“신선이라고 해도 생각도 감정도 있지. 절망할 수 있는 자가 희망은 가질 수 없다니 납득할 수 없다.”
“주군?”
사마의가 당황해 일어났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이룰 정의로운 세계에선 신선들 역시 희생할 필요 없게 하겠다.”
조조가 사마의를 마주보고 섰다.
“너의 희생을 기억하고, 두 번 다시 그런 희생이 필요하지 않도록 하마.”
“............네, 주군.”
사마의가 조조의 눈을 피했다.
“육체소멸. 봉인!”
사마의의 몸이 붉은 빛으로 화해 신선패에 빨려들어갔다. 붉게 빛나는 신선패가 조조의 몸에 빨려 들어가듯 가 박혔다.


제갈량이 숨어있는 곳을 찾는 건 정말로 어렵지 않았다. 주유가 진이 그려진 지도를 면밀히 살펴 후보 다섯 곳을 골랐고 그걸 보고 유비는 가까운 곳부터 가 보자고 제안했다.
도원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제법 큰 산이 하나 있었다. 어렸을 때는 공손찬과 그 산 아래 언덕에서 놀곤 했었다.
“....그 땐 이 산에 이렇게 큰 동굴이 있는지 몰랐지.”
공손찬이랑 진달래 따먹은 이야기를 끝내고 유비는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은 동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보통 사람들은 보거나 느끼지 못하는 공간일 테니까요.”
주유가 말했다.
“한 방에 찾다니 운이 좋네요.”
말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마음의 준비는 되셨나요.”
“나야 항상 뜨겁게 싸울 준비가 되어있지!”
손책이 말했다.
“응, 나도.”
유비는 조금 자신 없게 대답했다.
“근데, 우리끼리 괜찮을까.”
“어쩔 수 없잖냐. 조조 녀석은 전화도 안 받는데.”
손책이 말했다.
“정말 혼자 싸울 생각인가, 그 녀석. 그러다 괜히 각개격파나 당하려고.”
“우리도 따로 가고 있는 건 마찬가지잖아요.”
주유가 한숨을 쉬었다.
“전투 시작하고, 혹시라도 진짜 밀려서 위험해지거든 즉시 후퇴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조님까지 끌어들이는 겁니다. 그러니 위험할 것 같으면 두 분 꼭 잡고 붙어있어야 해요. 그래야 한 번에 퇴각 마법을 쓸 수 있으니까.”
“응, 그럴게.”
유비가 말했다.
“신경써줘서 고마워.”
“동맹을 챙기는 건 당연하잖아요. 공동의 적이 눈 앞에 있는데.”
말하다 말고 주유가 멈춰섰다.
“.......이런.”
주유가 앞을 보았다. 이 거대한 동굴 아마도 중앙으로 추정되는 곳에, 높고 둥근 벽으로 둘러쳐진 곳이 있었다. 그냥 석벽이 아닌 걸 주유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결코 침입을 허용하지 않도록 마법으로 세운 결계였다. 그리고 그 핵의 위치에 한 신선이 있었다.
“저걸 무슨 수로 뚫어.....”
주유가 신음했다.
“왜 그래, 주유.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꼭 그런 건 아니지만요..”
주유의 눈이 바삐 석벽을 훑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한 거지?”
주유가 어이없어했다.
“제갈량은 지금 자기의 마력과 생명력을 짜내서 결계에 공급하고 있어요. 아무리 제갈량이고, 다크 펜타곤의 힘까지 흡수했다고 해도 부담이 장난이 아닐텐데.”
“그거.... 그러니까 제갈량이 저 벽이랑, 그 흐름 방해한다던가 그거까지 하고 있다고? 그게 제갈량을 빨아먹고 있다는 거야?”
유비가 물었다.
“네, 바로 그래요.”
주유가 대답했다.
“부하가 큰 만큼 방어가 견고하고 손상을 입어도 바로 회복할 거고.... 그러니 저건 제갈량을 죽이기 전까지는 절대 열리지 않을 거에요.”
주유가 단언했다. 유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차라리....”
주유가 중얼거렸다.
“응?”
“차라리, 저거 너무 소모가 크고 오래 버틸 수도 없을 것 같으니까, 며칠 기다리다 제갈량이 저절로 말라죽고 난 뒤라면.”
“그건 안 돼!”
유비가 말했다.
“내, 내가 제갈량 죽을까봐 그러는 게 아니라, 어차피 우리가 저걸 뚫으려면 죽여야 한다면, 그러니까 그 며칠은 얼마나 걸리는 건데? 그 동안 옥새 버틸 수는 있고?”
주유가 놀란 표정으로 유비를 보았다.
“마력이 어떻게 되는 건지 나는 잘 모르지만, 제갈량이 배틀 진행을 방해해서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저렇게 한 거라면 지금 옥새가 못 버틸 때까지는 유지되지 않을까, 저거?”
“유비님.....”
주유가 놀란 눈으로 그를 보자 유비가 흠칫 목을 움츠렸다.
“나, 바보 같은 소리 했어?”
“......제갈량 녀석은 주군을 얼마나 쪼아댔으면 이렇게까지. 아뇨, 맞는 말이에요. 서두르는 게 낫지요. 그저.”
그가 잠시 유비 눈치를 보았다.
“유비님은 제갈량 죽이기 싫을테니까, 그럼 기다리자고 할 줄 알았어요.”
“멸망을 막을 거라고 했잖아.”
유비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동맹을 좀 믿어주라.”
“죄송해요.”
주유가 사과했다.
“저기에 입구가 있는 것 같은데?”
손책이 벽 한쪽을 손짓했다.
“입구가 아니에요.”
주유가 말했다.
“그럼?”
“.....그 쪽으로 가는 건 맞아요.”
주유가 심호흡을 하고 발을 내딛었다. 유비와 손책이 그 뒤를 따라갔다.



고백하기 (4, 완) ㅣ- 레히삼

-41화 이후 내용 스포가 있습니다.



갑작스런 돌풍에 제갈량은 얼른 유비부터 챙기려고 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폭탄이 날아들어 폭발하는 바람에 유비를 붙잡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돌풍이 가시고 나서 보니 유비는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자신이 유비에게 다가가는 걸 막으려는 듯 선계병들도 나타나 에워쌌다.
“하찮은 장난을 치는군.”
유비 곁에 선 장각을 향해 제갈량이 경멸을 담아 내뱉었다.
“그 하찮은 장난에 지금 넌 주군을 잃게 생겼는걸.”
이런 선계병들쯤은 긴 주문도 없이 쓸어버릴 수 있었다. 대꾸할 가치도 못 느끼고 일단 유비 위에 보호 결계를 덮었다.
유비가 당장 직접 공격당할 걱정은 이제 덜었다. 다음으로 적들을 향해 부채를 겨눈 순간 장각이 손가락을 튀겼다.
공중에 꿈을 비추는 화면이 나타났다.
배틀의 승패에 따라 나타나는 화면이 아니었다. 유비가 또다시 의식세계에 갇혀있는데 그 안의 광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번에도 유비가 상황을 눈치채기 어렵도록 현실에서 매끄럽게 이어진 가짜 세계였다. 그 세계 안에서 유비의 주의를 끌고 있는 건 다름아닌 제갈량 자신이었다.
뒤에서 접근하려는 선계병 한 무리를 공격해 날려버리고 제갈량이 유비 곁으로 달려가려 했다. 장각이 무슨 꿍꿍이든 또다시 저 안으로 들어가 유비를 꺼내오면 그만이었다. 선계병 같은 건 방해도 되지 않았다.
“성질도 급하긴. 저렇게 유비를 감쪽같이 속일 만한 인형을 내가 어떻게 만들어냈는지 수상하지 않아? 네 데이터에 손댈 방법도 없는데?”
궁금하다고 솔직하게 인정할 생각은 결단코 없었다. 장각이 또 다른 화면을 공중에 띄운 순간 그쪽으로 시선이 간 것도 어디까지나 또 무슨 수작인지 확인하려는 의도였다.
“........!!!???”
원술의 천박하고 유치한 꿈을 왜 갑자기 눈앞에 펼쳐놓는지 신경쓰지 않았어야 했다. 원술 황제님 앞에 무릎꿇고 그 손등에 입맞추는 인물이 왜 낯익은 흰색 롱코트를 입었는지. 대체 왜 저렇게 자신을 닮았는지.
“네가 굉장히 맘에 들었었나봐. 수박 겉핥기 수준의 환각이라고는 해도 무려 제갈량의 환각이잖아? 그걸 좀더 원본 느낌 살리고 뼈대를 보강해서 네 주군의 꿈에 붙여넣어봤지. 어때?”
원술이 자신을 가지고 무슨 망상을 품었는지, 의식세계 안에서 자신의 환각은 주군을 노골적으로 유혹하고 있었다. 주군은 태연한 척 고개를 돌리고 있지만 이쪽에서 보니 붉어진 얼굴과 떨리는 손끝이 다 보였다.
‘혹시 흔들리고 계신 건가?’
원술의 꿈속 환각은 기억이 흐려진 탓인지 원술의 취향이 반영된 탓인지 제갈량과 닮았으면서도 꽤 달랐다. 그걸 장각은 감쪽같이 진짜 제갈량과 똑같이 만들어 유비의 의식 속에 넣었다. 주군이 가짜임을 얼른 눈치채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도 주군의 반응이 신경쓰였다.
이럴 때가 아닌데.
다섯 방향에서 검은 빛줄기가 날아들어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제갈량을 옭아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선계병들이 역 오망의 위치에 서서 결계의 토대가 되어있었다.
“조무래기도 뭉치면 쓸모가 있지.”
장각이 코웃음쳤다.
“너라고 해도 좀 풀기 힘들걸? 내가 여기서 계속 강화하면 더 오래 걸릴 거고. 네 주군이 네 그림자에 넋이 나가 영웅심을 전부 빨리고 탈락할 시간은 충분해.”
“그런 바보같은 일이 일어날까보냐!”
제갈량이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한 번에 큰 힘을 모아 부수면 강화하고 말고 할 여지도 없을 터였다.
그러면서 눈으로는 주군의 환각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지켜보았다. 이럴 때가 아닌데도 속절없이 그것이 궁금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나한테 제갈량이 얼마나 소중한데....
-정말로요?
주군은 여전히 눈치 못 채고 계셨다. 가짜가 몸을 밀착해오는 대로, 쩔쩔매면서도 마주안고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주군.
가짜가 입술을 고혹적으로 움직였다. 주군의 뺨을 가볍게 쓸어올리는 손끝의 움직임도 자신의 환각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같은 얼굴인데 자신은 저렇게까지는 해본 적 없었다. 할 수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홀린 듯 환각을 바라보던 주군이 문득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환각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화내는 일이 드문 주군이 지금은 화내고 있었다. 싸늘한 얼굴로 체인저에 관우패를 꽂고 변신했다.
- 넌 제갈량이 아니잖아!
관우와 일체화한 유비가 한 가닥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그 가짜 제갈량을 베어버렸다.
애초 그 환각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꿈이었다. 중심이 깨어지자 꿈은 쉽사리 사라졌다.
쓰러져 있던 현실의 유비가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났다. 잠시 정신을 차리려는 듯 두리번거리다가 제갈량을 발견했다.
“제갈량!”
“저 선계병들을 한 무리씩 없애야 합니다!”
제갈량이 자신을 묶고 있는 결계를 가리켰다.
“알았어!”
유비가 마초와 일체화해서 한 축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선계병들의 대열이 크게 흐트러지는 것에 맞춰 제갈량이 그리로 힘을 발산하자 결계도 무너졌다. 얽매고 있던 에너지의 끈을 떨치고 제갈량이 매직 브레스를 썼다.


“그래서 지고 돌아왔지 뭐야.”
장각은 간드러지게 웃고 있었다. 사마의는 인상을 찌푸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지고 돌아왔는데 아주 기뻐보이는군. 진 게 자랑이냐?”
“그런 건 아니지만.”
장각은 여전히 웃겨 죽겠다는 기색이었다. 사마의 앞이 아니었으면 아예 떼굴떼굴 굴러다니며 웃을 것 같았다.
“굉~장한 구경을 했거든. 가짜라고는 해도 그 제갈량이, 그렇게 작정하고 유혹하는데 단칼에 베어버리다니. 밖에서 진짜가 그거 보고 어떤 표정을 하는지 사마의도 봤어야 했는데. 아주 울려고 하더라니까.”
사마의의 기색이 조금 바뀌었다.
“......아무튼 주군이 알아서 정신차리고 나오는 게 놈에게도 좋은 거잖아?”
“그래, 그런데도 표정이 그 정도로 썩었단 말이지.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흥.”
혹시 사진 찍어둔 것 없냐고 물을 뻔하고 사마의는 입을 다물었다. 장각은 사마의가 묻지 않는 것을 보고 찍어둔 사진을 꺼내지 않았다.


이겼다. 이겼는데도 도원관 돌아올 때까지 유비와 제갈량 사이엔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저, 제갈량.”
마침내 유비가 견디지 못하고 물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난 거야?”
“화 안 났습니다.”
유비와 눈도 안 마주치고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가면서 하는 말이었다. 유비는 따라가면서 따졌다.
“나 뭐 잘못한 거야? 제대로 판단해서 스스로 깨고 나왔잖아? 선계병들 물리치고 제갈량도 풀어줬고, 장각을 놓치긴 했지만......”
“화 안 났다고 말했습니다!”
제갈량은 유비에게서 얼굴을 돌려버리려고 했다. 유비는 고집스럽게 따라가 눈을 맞추었다.
“슬퍼보이는데?”
“주군께서 언제부터 제 기분을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이제는 유비도 조금 짜증이 났다.
“내가 제갈량 기분을 몰라준다고?”
“......”
제갈량은 다시 반대쪽으로 몸을 돌릴 뿐이었다. 유비도 다시 그쪽으로 따라갔다.
“그럼 말로 설명해줘. 내가 바보라서 또 눈치 못 채고 있는 거면, 설명해주면 되잖아. 들을게.”
제갈량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끝내 고집스럽게 다물었다.
“대체 왜 그래, 제갈량.”
유비도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혹시 내가 그 가짜를 너무 퍽퍽 베어버려서 그래? 하지만 그건 제갈량이 아니었잖아. 장각이 우릴 놀리고 해치려고 만든 가짜였잖아. 아무리 생긴 게 같아도, 제갈량이 제일 끔찍하게 싫을 거라고 생각하니 벨 수밖에 없었어. 그게 이상해?”
“가짜라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마침내 제갈량은 눈을 피해 돌아서던 걸 멈추고 유비와 정면에서 마주보았다.
약간이라도 누그러진 것인지 유비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확실한 건 지금 대답을 잘 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잠깐 고민했지만 그럴싸한 거짓말도,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도 찾아낼 수 없었다. 유비는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제갈량이 나한테 그럴 리가 없으니까. 나한테 반한 것처럼 유혹해왔는데, 제갈량이 진짜로 나한테 그렇게 반했을 리가 없잖아.”
솔직하게 답하는 것뿐인데 힘들었다. 진실이 목을 빠져나가는 감각이 쓰라렸다. 견디지 못하고 유비는 고개를 숙였다.
“주군은 대체....!”
제갈량도 짜증이 났다.
“주군은 정말 바보인 겁니까? 아니면 제가 이때껏 한 게 대체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렇게 차여놓고서 이제와서 속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드림배틀의 끝까지 유비님 같은 사람 사랑한 적 없노라 할 작정이었다. 그러니 없는 재주로 유혹한 적도 없는 것이었다.
고개를 그렇게 푹 숙이고도 감추지 못한 유비의 눈물을 보지 못했더라면 정말로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주군?”
제갈량이 나지막이 말을 걸어보았다. 어째서인지 쉰 것처럼 목소리가 갈라졌다.
“......미안.”
유비는 눈물을 닦아가며 계속 울었다.
“좋아해, 아까 그게 진짜 제갈량이었으면 정말 좋았을 거야. 진짜 내가 좋아서 그러는 거였으면, 진짜 행복했을 텐데, 그런데 제갈량은 그런 거 관심없잖아. 이기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
제갈량은 다리를 후들거리다가 그만 중심을 잃고 말았다. 유비가 얼른 손을 내밀어 잡아주지 않았으면 그대로 주저앉았을 것이다.
“주군.”
‘괜찮아? 어디 아파?’ 같은 소리를 지금 들었다간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일단 유비의 팔에 기대 몸을 지탱하면서 손으로는 유비의 입을 막았다.
“잘 들으세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언행을 보고 이게 또 가짜인 건 아닌지 의심하면 안 됩니다. 절대로.”
입이 꼭 틀어막힌 채 유비는 눈빛으로 왜냐고 물었다. 그 와중에도 제갈량이 쓰러질까봐 두 손으로 단단히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제갈량은 특별히 자상하게 설명해주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군신계약이고 뭐고 제가 주군을 죽여버릴 테니까요!”
제갈량이 유비의 입 막은 손을 뗐다. 그리고 대신 자기 입술을 갖다댔다.


제갈량이 반역을 저질러야 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날 저녁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유비는 밥 생각을 해냈다. 좁은 침대에서 제갈량을 굴려 떨어뜨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나 앉아 제갈량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일어나. 밥 먹자.”
“.....신선은 안 먹어도 됩니다.”
유비 때문에 흘러내린 이불을 도로 끌어올려 몸에 돌돌 말면서, 평소의 매끄러운 음성이 아닌 지치고 몽롱해진 음성으로 그리 말하니 그냥 투정부리는 아기 같았다. 유비는 피식 웃고 제갈량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소시지 볶아줄게.”
“나중에요.”
“난 제갈량하고 같이 먹고싶은걸.”
“갖다줘요.”
“그래.”
유비는 방긋 웃고 일어나서 부엌으로 가 저녁밥을 간단히 준비하고 소시지를 잔뜩 볶아서 쟁반에 담아 침실로 가져갔다. 그리고 여전히 웅크리고 누운 제갈량을 일으켜 앉혔다.
제갈량은 여전히 나른한 목소리로 무어라고 웅얼거리면서 유비의 품에 기댔다.
“어, 저기.....”
자연스럽게 끌어안았다가 유비가 당황했다. 이제 둘 다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는데 제갈량이 눈을 가늘게 뜨고 기대 오니 다시 마음이 동했다.
“저기, 혹시 한 번 더 해도 돼?”
“그냥 쉬고 싶다면요?”
유비의 품에 기댄 채로 제갈량이 대꾸했다.
“밥부터 먹어야지.”
강아지 귀가 있었으면 축 처질 기색을 하고서도 유비는 순순히 제갈량에게서 떨어져 앉았다. 그리고 소시지 접시를 내밀었다.
제갈량은 유비를 빤히 바라보다가 소시지 한 개를 집어 먹었다.
“아까는 잘 하신 겁니다.”
“응?”
자기 밥을 먹으려다 말고 유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말이야?”
“장각의 환각을 스스로 깨고 나오신 것 말입니다.”
“아.”
칭찬받는데도 유비는 여전히 눈치를 보았다.
“그치만, 역시 제갈량하고 같은 얼굴인데 그렇게 확 베어서 기분 상한 거 아니었어?”
“그건 서로 오해가 겹쳐서 화낸 것이니 지금 거론할 것이 아닙니다.”
제갈량이 소시지 하나를 더 집어다 물었다.
“오해는 풀렸고 끝났습니다. 제 말은, 가짜라고 깨달은 이후의 행동은 현명했다는 말입니다. 혹시 또 비슷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주군을 믿을 수 있겠습니다.”
“그래?”
유비가 다시 방긋 웃었다.
“다행이다.”
“진짜와 가짜를 어떻게 구별하느냐가 문제긴 합니다만 장각도 똑같은 수를 또 쓰지는 않을 테니.”
“그럼 제갈량이 구별해주면 되지.”
유비가 제갈량의 손을 꼬옥 잡았다.
“또 이런 일이 생기더라도, 제갈량 말대로 하면 되는 거야. 그렇지?”
“아예 안 생기면 좋겠습니다만......주군께서 지금대로만 하신다면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그러니. 이제 밥이나 마저 드세요. 다 식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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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때 유비는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린이임을 증명했습니다.



흑신선 11 ㅣ- 레히삼

“그렇지만 지금 이 상황 아주 곤란하다고요.”
주유가 말했다.
“우리 다섯이 온 힘을 다 해도 될까말까한데 내분까지 생기다니.”
“미안해, 주유.”
유비가 사과했다.
“나 때문에....”
“유비님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대책을 좀 내놔봐요, 제갈량을 회유하거나 되돌릴 방법이라든가.”
그 방법은 이미 실패했다. 유비는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주유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놈이 이번엔 뭐라던가요. 도망가자마자 잡혔으니 실컷 비웃었을 거고, 그 외에도 뭐라고 잔뜩 떠들었겠죠. 세상을 어떻게 멸망시킬 예정이라든가 다크 펜타곤의 힘을 얻어서 너희는 상대가 안 될거라든가..”
“아니.”
손책이 말했다.
“한 마디도 안 했어.”
“.....네?”
주유가 진심으로 어리둥절해했다.
“무....슨 소리에요? 그 물에 던지면 입만 동동 뜰 것 같은 지옥의 주둥아리가 말을 안 해요? 이기고 있으면서?”
“그러게.”
유비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밉다거나 죽이겠다거나 하는 말도 안 했어. 전혀.”
“이상하네요.”
“이상하지.”
“정상이 아니에요.”
“뭐가 잘못된 걸까?”
“......니들?”
손책이 홀로 식은땀을 흘렸다.
“그 외에 뭐 특이한 건 없었어요?”
“음, 새로운 무기를 들고 있었어.”
유비가 말했다.
“양 손에 긴 쇠사슬을 쥐고 휘둘렀어. 손책이 드릴로 부수려고 했는데 안 부숴지더라.”
“응. 하지만 튼튼한 거 말고 움직임엔 별 특징이 없었어. 그거하고 검은색 구 같은 마법을 던졌는데 폭발했고.”
손책도 설명했다.
“근데 제갈량 색이 이상했어.”
유비가 말했다.
“전에 봤을 땐 검은색이 도는 녹색이었잖아. 이번엔 어두운 보라색이었어.”
“...다크 펜타곤의 영향이겠지만 좀 찜찜하네요. 상징색이 바뀌는 일은 거의 없는데.”
“그래?”
“좀, 생각을 해봐야겠어요.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아서.”
주유가 눈 앞을 왔다 갔다 했다.
“눈에 보이는 이상으로 더 큰 음모가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렇다고 해도 배틀은 재개해야하니 제갈량은 없앨 수밖에 없지만.”
“....응.”
유비가 우울하게 움츠러들었다.
“마음 아프겠지만 어쩔 수 없어. 세계가 멸망하게 둘 수는 없잖아.”
손책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니까 지금은....”
꼬르륵-!
엄청나게 큰 소리에 손책이 말을 잃었다. 주유가 말없이 그의 등짝을 때렸다. 어느새 어두워진 주위를 둘러보고 유비가 일어섰다.
“지금은 밥 먹으러 가자. 배고프면 머리도 잘 안 도니까.”
“.....그래.”


그 날 밤은 비가 왔다.
휴게소의 차양 아래서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조조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까 싸웠던 제갈량에 대해 생각했다. 도구로 존재하는 신선의 삶이 허무하여 절망한 끝에 세상을 멸망시키고자 한다는 흑신선.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 그가 무찔러야 할 대상.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그가 이름을 바꾸고 드림배틀에 뛰어든 건 악을 처단하고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옥새에 에너지를 공급해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개최된 배틀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세상의 존속은 그의 목표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세상을 ‘지키기’ 위해 싸우게 되었다. 왕윤 선배가 없는 이 세상을 위해서.
‘선배가 없는 내 삶은 신선보다 허무하지 않은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악을 멸하겠다는 꿈이 있고, 사랑하는 초선이도 있었다. 선배가 없다 해도 살아갈 이유가 있었다.
조금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가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어두운 밤 하늘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여전히 속이 답답했다. 사마의라도 곁에 있었으면 싶었으나 그는 제갈량이 펼쳤을 진법을 파악하고 정보를 얻어오겠다며 선계로 넘어가버렸다.
“선배.”
그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저 잘하고 있는 걸까요.”
악을 모두 멸하겠다는 가능할 것 같지 않은 목표를 추구할 때는 들지 않던 생각이 세계를 지킨다는 누가 봐도 선인 목표를 눈 앞에 두자 들었다.
정말,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버스가 떠날 시간이 다 되었다. 조조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비를 맞으며 버스로 돌아갔다.


마봉진의 핵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사마의는 주위에 결계를 둘렀다. 거대한 석벽 형태의 구조물이 선계와 지상을 연결하는 에너지의 흐름을 감싸며 굳어졌다. 그 앞, 사마의의 정면에 사람 둘이 나란히 지나갈만한 크기의 아치형 통로가 나타났다.
“여기에 인주를 세우면 진을 깨고 드림배틀을 재개하려는 자가 반드시 싸울 수밖에 없는 장애물이 되겠지.”
사마의가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제갈량?”
제갈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소리도 미동도 없이 죽은 듯 엎드려있는 그를 내려다보며 한 번 혀를 차고 사마의가 쇠사슬을 감아쥐고 제갈량을 그리로 끌고 갔다.
제갈량의 몸이 바닥에 질질 끌려가며 팔이 들려 소매가 밀려 내려갔다. 드러난 양 손목에 채워진 족쇄에 굵은 쇠사슬이 연결되어 있었다.
“네놈을 짓밟아 줄 기회가 좀 더 있었으면 했는데....”
혼잣말 하며 사마의가 쇠사슬 끝을 통로의 양 옆에 걸었다. 문을 막고 Y자로 매달린 형태가 된 제갈량을 사마의가 올려다보았다. 이리저리 살펴보고 제대로 설치했다 싶자, 그가 제갈량의 턱을 쥐고 들어올렸다.
“시동.”
제갈량의 눈꺼풀이 열렸다. 의식이 없는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기다리고 있어라.”
사마의가 말했다.
“내가 돌아와 널 죽일 때까지. 조조를 잡아먹고 유비와 손책을 죽인 뒤에 말이다.”
제갈량의 몸이 움찔 했으나 곧 다시 축 늘어졌다. 사마의가 웃음을 터트렸다. 승리를 확신하는 자의 웃음소리가 빈 동굴에 울려 퍼졌다.


저녁식사 자리는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바닷가에 왔다고 고기가 아니라 횟집에 와서 모둠 회에 매운탕까지 시켜놓고 앉았지만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기분은 살지 않았다.
심지어 밖에선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손님도 거의 없어 썰렁한데 눈 앞의 유비는 깨작거리기만 하니 손책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유비 너 술 마실 줄 아냐?”
“어? 어.... 나이는 되는데.”
“그럼 좀 마시자.”
손책은 소주 다섯 병을 주문했다. 유비가 놀랐다.
“저걸 누가 다 마셔.”
“다 마시면 추가하면 돼요.”
주유가 맥주컵에 소주를 콸콸 부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유비의 눈이 땡그래졌다.
“걱정 말아요, 지금 취할 생각 없으니까. 주군 취하면 내가 끌고 가서 숙소 잡아야 하고.”
자기가 놀란 포인트는 그게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어서 유비는 조금 겁먹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너도 한 잔 해라.”
손책이 유비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다행히 소주잔으로.
“속이 답답하고 막.... 그럴 땐 좀 마시는 것도 도움이 돼. 뭐 건강 생각하면 함부로 권할 순 없지만.”
유비는 작은 잔에 찰랑거리는 투명한 액체를 쳐다만 보았다.
“너 정말, 여전히 제갈량이 세상 멸망시키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냐.”
술을 털어넣고 손책이 물었다.
“응.”
유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더 그놈 하는 짓을 막아줘야 하지 않냐.”
“어.... 어?”
“네가 좋아하는 제갈량은, 예전 모습인 거 아냐. 너 미워하고 죽이겠다고 하고 세상 부순다고 하는 쪽이 아니라.”
“그.....그렇지.”
“그럼 하얀 쪽이 원했을 법한 일을 해주는 게 맞지 않아? 네가 세상 망하는 거 그냥 보고만 있었으면 했을 거냐고. 그 제갈량이.”
“어.......”
제갈량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성격 나쁘고 입 험하고, 신선의 도리 따위 알 바 아니라고 하던 제갈량이지만 드림배틀에 대해선 몹시 진지했다. 유비 보기엔 지나치게 승패에 집착하는 것 같았지만 지면 제갈량은 소멸되어버리니까 그건 당연했다.
유비는 제갈량이 했던 말과 행동들을 쭉 떠올려보았다. 제갈량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기가 목숨 바치고자 했을까.
“그..... 원술의 세계에서 내가 뒤쳐졌을 때, 제갈량은 날 내보내려고 자기가 희생하는 쪽을 택했어.”
유비가 말했다.
“나 하나를 위해 그렇게 해줬으니 걸린 게 세상이라면 더 기꺼이 희생하겠지. 흑신선이 된 자신을 죽여서라도 세상을 구해주길 바랄거야.”
유비가 예상 외로 쉽게 담담하게 결론을 내려서 손책도 주유도 조금 놀랐다.
“그래. 그러니까...”
“하지만 난 싫어 그런 거.”
유비가 고개를 푹 숙였다.
“왜 제갈량이 희생해야 하는 거야? 단지 신선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신선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거죠.”
주유가 소주병을 하나 더 따서 컵에 술을 부었다.
“신선은 드림배틀을 위해, 세상의 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도구에요. 그런 상황에서 희생하는 건 당연한 거라고요.”
“그래서 장각이 신선들을 위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한 거고 말이지?”
유비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젠 그가 이해 가려고 하네. 이런 거 그냥 참고 있을 수 없잖아.”
“유비.”
“세상은 구할 거야.”
유비가 말했다.
“그래, 제갈량을 죽여서라도 세상을 구해야지. 그래야 너도 조조도 살고, 공손찬도 스승님도 초선이도 상향이도....”
“유비...”
“나 꿈 바꿀래.”
유비가 불쑥 말했다.
“주유, 그런 거 가능해? 군주가 중간에 꿈 바꾸는 거?”
“어..... 어, 그런 사례는 없지만, 마지막에 소원을 어떻게 빌지는 그 때 가서 정할 수 있으니까요. 불가능한 소원이 거절되어서 걸었던 꿈과 다른 소원을 빈 선례는 있고.”
답하고 주유가 유비의 눈치를 보았다.
“...제갈량을 살려달라고 하시게요?”
“아니.”
유비가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는 살아나서 기뻐할지도 알 수 없고...... 그냥.”
그가 어두운 창밖을 내다보았다.
“사람 뿐 아니라, 신선까지 포함해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빌 거야. 이렇게, 도구로 만들어져서 이용당하고 그러지 않도록.”
“하지만 그럼 드림배틀은.”
“그거야 옥새인지 마더컴인지가 알아서 하겠지.”
손책이 주유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신선을 도구로 이용하지 않는 건 나도 찬성이다.”
“주군.”
“나도 꿈을 바꾸겠다고는 못 해. 나도 꼭 이루고 싶은 것이 있어서 참전한 거라고... 그래도 내가 우승하면, 주유가 옥새의 신선이 될 거고.”
손책이 주유를 보고 싱긋 웃었다.
“우리 주유는 선계 최고의 신선이니까 분명 가능한 방법을 찾을 거야. 그렇지?”
“....주군.”
주유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이지, 일만 떠넘기고.”
“미안.”
“주군이니까 봐주는 줄 알아요. 난 유능한 신선이니까 분명 방법을 찾을 수 있을테니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요.”
“그래.”
손책이 싱긋 웃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먹자. 세상을 지키고 꿈을 이루려면 우선 먹어서 힘을 길러야지.”
“예.”
“으, 응.”
주유도 유비도 다시 수저를 들었다.
“먹고. 마시고. 그리고 힘을 내서 또 싸우자고. 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맞아요.”
주유가 자기 잔을 채웠다.
“그러니 지금은 마셔요.”
“그래!”



고백하기 (3) ㅣ- 레히삼



역시 거짓말 티가 난 모양이었다. 그날 제갈량은 하루 종일 저기압이었다. 소시지를 줘 봐도 대단하다고 칭찬해 봐도, 소시지는 맛있게 먹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래서 유비도 같이 우울해졌다.
엑셀 공부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제갈량은 평소대로 빈정거리는 대신 싸늘하고 무지막지하게 혼냈다. 학창시절 유비를 유난히 싫어하던 수학 선생이 생각날 정도였다.
제갈량에게 혼났다는 사실보다, 그럴 정도로 제갈량에게 미움 샀다는 사실 쪽이 더 서러웠다.
이날 밤 꿈에도 수학 귀신은 찾아왔다.
여전히 녹색 머리에 예쁜 얼굴이었다. 그러나 장부 정리를 가르치는 대신 화나고 우울한 얼굴로 유비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위로해주고 싶은데 소시지가 없었다. 대신 안고 다독여주고 싶어 다가가서 살짝 어깨에 팔을 둘렀다.
수학 귀신은 싫어하거나 뿌리치지 않았다. 용기를 얻어 꼭 끌어안고 다독였다.
그러다가 문득 입술이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톰한 입술을 한 번 만이라도 건드려보고 싶어서 다독이던 손으로 실수인 척 스쳤다.
수학 귀신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화내는 대신 유비에게 이미 안겨 있는 몸을 더욱 붙이고 입술을 오므렸다.
‘아.....’
숨을 삼키면서도 유비도 얼굴을 마주 가까이 했다. 품 안의 늘씬한 허리를 살짝 쓸었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도원관의 아침은 원래 이른 편이었다. 무술도장인 만큼 빨래도 원래 자주 했다.
그러니 아침부터 세탁기를 돌리는 건 절대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절대로.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응! 자, 잘 잤어, 제갈량!”
‘난 잘 자지 못했고 숨기는 게 있어! 떳떳치 못해!’라는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제갈량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새벽부터 무슨 사고를 친 겁니까?”
“아무 사고 안 쳤어!”
유비가 벌떡 일어나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가 그만 균형을 잃어서 타일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
제갈량은 혀를 차며 다가와 유비를 일으켜 주었다.
“이리 와보시죠.”
제갈량이 유비에게 회복을 썼다.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골반과 고관절은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작은 부상도 그냥 넘어가면 안 됩니다.”
골반과 고관절인 게 문제였다. 녹색 영기를 뿌릴 뿐 손을 직접 댄 것도 아닌데 간밤 꿈까지 떠올라 괜히 의식이 되었다.
“큰 부상은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그래서 대체 무슨 사고를 친 겁니까?”
그렇게 물어보며 제갈량이 세탁기를 보았다.
여기 더 있다가는 다 털린다. 유비는 이번에도 작전상 후퇴를 택했다.


“유비!”
아침 청소를 끝내고 도원관 문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손책이 쳐들어왔다.
“아무래도 이거 확실하게 해야겠다. 우리 상향이......”
손책조차도 입을 다물 만큼 도원관 분위기는 흉흉했다. 유비는 축 처져서 기구를 설치하는 중이고 제갈량은 냉기 마법이라도 쓰고 있는 것처럼 주변을 싸늘하게 얼리고 있었다.
“너네 무슨 일 있었냐?”
두리번거리다가 손책은 두 눈을 깜박깜박했다. 그리고 제갈량을 아주 이상한 거 보듯이 빤히 쳐다보았다.
“너 아까 00대교 아래 고수부지에 있지 않았냐?”
“예?”
제갈량이 보고 있던 아이패드를 내려놓았다.
“무슨 소립니까? 전 오늘 나간 적이 없습니다.”
손책은 더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틀림없이 너였는데? 웬일인가 해서 불러도 대답도 않고 가버려서 이상하긴 했다만.”
“정말 저였습니까? 옷은 어떻던가요?”
“지금 입고 있는 그거 그대로.”
제갈량이 벌떡 일어났다.
“주군, 거기 가봐야겠습니다.”
유비는 제갈량과 손책을 똘래똘래 쳐다보다가 물었다.
“어제 상향이가 봤다는 그 닮은 사람인 거 아냐?”
“손상향님은 드림배틀 참가자가 아닙니다.”
제갈량이 딱딱하게 설명했다.
“신선들은 참가자가 아닌 일반인들에겐 평범한 인간처럼 보이도록 약간의 눈속임을 두르고 있습니다. 지금도 제 모습은 주군과 손책님의 눈에 비치는 모습이 손상향님의 눈에 비치는 모습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래?”
“그러니 뒤집어 말하면 신선에겐 인간에게 없는, 인간계와 동떨어진 특성들이 드러나 있고 군주라면 이걸 모를 수가 없습니다. 다른 인간이 절 봤다고 생각한다면 우연히 닮은 다른 인간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지만 손책님이 절 봤다고 느낀다면 그건 진짜 저였든가, 누군가 절 고의적으로 흉내낸 것입니다.”
“어, 그거 큰 문제네.”
유비도 손책도 상황을 깨닫고 끄덕거렸다.
“그러니 직접 가서 알아봐야겠습니다.”
“그래.”
유비가 손책을 돌아보았다.
“너도 갈 거지?”
“물론. 주유 불러서 같이 갈게.”
손책이 전화기를 꺼내 주유에게 전화했다.
-주군, 상향 아가씨와는 잘 화해했어요?
“어.”
손책이 굳었다.
“맞다, 그러고 보니 유비 너, 어제 내가 상향이 여기 안 왔냐고 전화했을 때는 못 봤다고 했잖아?”
“그럼 우리는 먼저 00대교로 가보겠습니다.”
제갈량이 재빨리 유비의 덜미를 잡고 문으로 달려갔다.
“주유와 합류해서 따라오시죠.”
“앗, 잠깐만! 내 얘기 안 끝났어!”


“인간들의 가족관계란 참 어려운 모양입니다.”
손책이 쫓아오지 못하게 가속까지 써서 멀리 달아난 다음 제갈량이 느긋한 태도로 그렇게 빈정거렸다.
“제갈량이 인간관계를 논하다니 거 웃기네.”
장비가 유비의 옷 속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한 마디 하자 제갈량이 뻔뻔하게 대꾸했다.
“나는 인간이 아니니까.”
“그보다 말이지.”
유비가 화제를 돌렸다.
“누가 제갈량을 흉내낼 수 있는 걸까? 아까 말대로라면 신선의 흉내는 아무나 낼 수 없는 거잖아?”
“웬일로 맞게 알아들으셨군요. 하지만 신선이 다른 신선을 흉내낸다면 군주가 잠깐 보는 정도로는 구별할 수 없습니다. 자기 신선이라고 해도 절대적으로 알아본다는 보장은 없고요.”
“그럼, 다른 신선이 너로 변신하고 내 앞에 나타나면 나도 못 알아볼 수 있단 얘기야?”
“예.”
유비는 공포에 질렸다. 제갈량은 태연했다.
“뭘 그리 걱정하십니까. 그래봤자 겉모습일 뿐입니다. 말투까지야 어떻게든 따라할 수 있겠지만 제 능력은 따라할 수 없습니다.”
잊지 않고 잘난 척을 하는 제갈량에게 유비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능력이란 게 거의 다 전투 기술이잖아. 매직 브레스 써서 증명해 보이겠다고 하고서 확 날 공격해버리면?”
걷다 말고 멈춰서서 제갈량이 유비를 쳐다보았다. 정말 놀란 듯 두 눈 크게 뜨고 있었다.
“혹시 주군이야말로 저 모르게 바꿔쳐진 것 아닙니까?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해내셨습니까?”
“그게 칭찬이야?”
유비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제갈량이 피식 웃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실 정도면 굳이 걱정할 것도 없군요. 저와 주군만 알 법한 이야기를 좀 물어보기만 해도 금방 구별이 될 겁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다.”
유비가 더 곰곰이 생각했다.
“지금 가서 가짜를 만나게 될 테니까....아니, 이건 너랑 나랑 애초에 안 떨어지면 되는 거 아냐?”
수학 공부를 열심히 했더니 자신이 갑자기 똑똑해진 것 같았다. 유비는 신이 나서 설명했다.
“그렇잖아. 마침 거의 다 왔으니까, 내가 군신일체 하고 너는 매직 브레스로 나한테 붙어있으면 상대가 아무리 너랑 똑같은 얼굴이어도......”
순간 제갈량의 기색이 변했다.
“주군, 어서 방금 말한 대로!”
“응?”
당황하는 사이 제갈량이 부채를 들어 주위를 경계했다. 유비가 말뜻을 알아듣고 관우패를 꺼내 체인저에 넣는 순간 어디선가 돌풍이 날아들어 유비와 제갈량을 집어삼켰다.
“제갈량!”
눈도 뜨기 힘들 정도의 모래바람에 유비는 서둘러 변신하고 두 팔을 휘저었다. 제갈량을 찾아야 했다.
“주군!”
필사적으로 뻗은 손에 제갈량의 손이 마주 잡혔다. 유비는 안도하며 그 손을 끌어당겼다.
돌풍이 걷혔다. 끌어당겨 품에 안은 제갈량이 무사해 보여 유비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주군, 저는 괜찮습니다.”
제갈량이 유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만 놓아주세요.”
“응.”
그렇게 대답하고서도 유비는 팔을 풀지 않은 채 일단 주위부터 둘러보았다. 직전까지 제갈량과 걷고 있던 고수부지의 산책길이었다. 적은 보이지 않았다.
“음, 당장 또 공격해올 것 같진 않다.”
좋은 일인데 품 안의 제갈량이 간밤 꿈속의 수학 귀신처럼 느껴져서 팔을 풀기가 아쉬웠다.
“주군.”
제갈량이 다시 재촉하자 유비는 아쉽지 않은 척 팔을 풀었다. 계속 안고 있다가는 속을 들킬 것 같았다.
제갈량이 유비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런 다음 부채 끝에 녹색 빛을 띄우고 주위를 한 바퀴 훑었다.
“이상하군요. 적이 근처에 있을 텐데 잡히지가 않습니다. 설마 아까의 돌풍 하나로 만족하고 퇴각했을 리는 없는데 말이죠.”
“그러네.”
두리번거리면서 유비는 제갈량의 왼손을 꼭 잡았다. 제갈량이 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 또 공격해와도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절대 이참에 손 한 번 잡아보려고 이러는 게 아니라고 강조하다가 문득 돌풍 불기 직전까지 하던 대화에 생각이 미쳤다.
눈앞의 존재는 틀림없이 제갈량으로 보이지만 돌풍이 밀어닥친 순간엔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애초 두 사람이 나온 이유가 가짜 제갈량 때문이었다.
“제갈량.”
“예?”
“혹시 모르니까, 지금 매직 브레스 쓰는 게 좋겠어.”
제갈량은 싱긋 웃었다.
“그러죠.”
역시 요즘 들어 제갈량이 너무 잘 웃는다. 그렇게 생각하며 지켜보는 동안 제갈량은 태연히 주문을 외워 형태를 바꾸었다. 팔목에 장착된 매직 브레스를 보고 유비는 비로소 안도했다.
“이 상태에선 주군을 보조하는 데 집중할 뿐 넓은 범위를 경계하고 탐지하는 능력은 평소보다 떨어집니다. 조심해 주세요.”
“응.”
유비는 그 상태로 00대교까지 가서 주위를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적이나 수상한 낌새는 끝내 찾지 못했다. 가짜 제갈량을 보지 못한 것은 물론이었다.
“대비를 너무 단단히 하고 있으니까 적이 어떻게 해볼 엄두를 못 내고 숨은 것 아냐?”
“그럴지도 모르죠.”
제갈량이 주문을 해제하고 곁에 나타났다.
“당장 위험한 조짐이 있는 것은 아니니 차라리 돌아가서 다시 작전을 짜는 편이 낫겠습니다. 매직 브레스도 그렇지만 변신상태도 유지하는 것만으로 영웅심이 소모됩니다.”
“그래.”
유비도 변신을 해제했다. 그리고 다시 제갈량의 손을 잡았다.
“엄, 이러고 막 돌아가려는 순간 적이 나타나서 이번에야말로 널 바꿔치기할지도 모르잖아.”
제갈량은 조금 놀란 기색이 되었지만 멍청한 소리라고 기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도원관까지 이대로 손 붙잡고 돌아가는 건 괜찮습니까?”
“안 괜찮아?”
유비가 찔끔 해서 제갈량의 눈치를 살폈다. 제갈량은 유비를 마주보다가 풋 하고 웃었다.
“괜찮습니다. 돌아가죠.”
정말로 도원관 도착할 때까지 제갈량은 유비의 손을 꼭 잡은 채 옆에서 나란히 걸어주었다. 상황에 맞지 않게 데이트 같은 기분이 되어서 유비는 어쩔 줄 몰랐다.
“주군.”
도원관에 들어와 문을 닫자 제갈량이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얼굴이 빨갛습니다.”
“아니, 아무 일도 없는데.”
유비가 어설픈 변명을 시도했다.
“주군.”
제갈량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 걸음 다가서며 유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직 두 사람 사이는 두 걸음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렇게 딱 붙은 것도 아니고 제갈량도 평소대로 뒷짐을 지고 반듯이 서 있을 뿐이었다.
제갈량의 눈빛만이 평소와 달랐다. 어쩌면 유비 자신이 평소와 다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말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만......”
“뭘?”
“오는 내내 손 잡자고 한 것 정말로 경계하려는 목적뿐이었습니까?”
유비는 말문이 막혔다.
“확실하게 하고 싶습니다. 바라만 보는 데 지쳤습니다.”
제갈량이 한 발짝 더 다가섰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
“제가 주군을 위해 어디까지 했는지 아시면서, 그것이 주군께는 아무렇지도 않던가요?”
“무슨 소리야!”
유비가 덥석 제갈량을 끌어안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나한테 제갈량이 얼마나 소중한데....”
“정말로요?”
제갈량은 유비에게 몸을 기댔다. 목소리가 나른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소중한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흑신선 10 ㅣ- 레히삼


제갈량이 옆으로 손을 펼치자 주변에 검은 구체 같은 것이 여럿 떠올랐다. 그것들이 조조와 유비에게 쏟아졌다.
조조가 그것들을 쏴서 격추했다. 유비도 장비로 바꾸어 버클러로 공격을 막아냈다. 제갈량의 주의가 둘에게 쏠린 틈을 타 손책이 뒤편에서 드릴을 앞세우고 제갈량에게 달려들었다.
“태사자 맹호충!”
제갈량이 팔을 떨쳤다. 쇠사슬이 날아가 드릴을 감았다.
끼기기기기긱!
불꽃이 튀고 쇠 긁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소리가 멈췄을 때 태사자의 드릴은 쇠사슬에 감겨 멎어있었다.
“어떻게...”
제갈량이 다른 쪽 쇠사슬을 휘둘러 손책을 후려쳤다. 처음에는 버텼지만 두 번 세 번 계속되자 손책이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그만둬!”
유비가 달려가 장비의 도끼로 사슬을 내리쳤다.
“이러지 마, 제갈량! 넌 이런 걸 원하는 게 아니잖아! 세상 멸망시키고 싶지 않잖아! 왜 다시 이러는 거야?”
몇 번을 내리쳐도 쇠사슬은 끊어지지 않았다. 조조가 달려와 손책을 공격하는 사슬을 튕겨내고 그를 잡아 일으켰다.
“변신을 해제하고 물러나. 풀려나려면 그 수밖에 없다.”
손책이 변신을 풀었다. 드릴이 사라지자 얽힌 것도 풀렸다.
“태사자 맹호충으로 안 끊어지다니...”
손책이 이를 악물고 제갈량을 노려보았다.
“유비. 이건 네가 틀렸다.”
손책이 말했다.
“그 때 죽였어야 했어.”
“손책....”
유비가 울먹이는 소리를 냈다.
“너도 이제는 깨달아라.”
조조가 다시 하후 봉황탄을 장전했다.
“지금 우리만으로 상대할 수는 없다. 사마의와 주유가 돌아올 때 까지는 도망쳐야 해.”
“저런 자식, 주유만 같이 있었어도...”
손책이 다시 변신해 역시 필살기를 준비했다.
유비는 제갈량을 보았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산 것의 눈이 저런 눈빛을 띌 수 있다니 유비는 믿을 수가 없었다.
“제갈량.... 대답해줘 제갈량!”
공격을 준비하면서도 유비는 애타게 외쳤다.
“정말 다시 세상을 멸망시키고 싶어진 거야? 아니면... 어제 그 말이 거짓이었어?”
제갈량의 눈빛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가 뭔가 말하고 싶은 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새카만 기운이 전신에서 솟아 또다시 암흑 마법을 만들어 내었다.
“공격해!”
손책이 외치며 배틀 트로이카를 휘둘렀다. 조조와 유비도 동시에 필살기를 쏘아보냈다.
전력을 다해 쏟아낸 힘이 암흑 마법과 격돌했다.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주위의 나뭇가지가 뜯겨나가고 손책도 조조도 유비도 땅을 뒹굴었다. 변신도 해제된 채 잠시 아무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자박하고 눈앞의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가 났다. 유비가 고개를 들어 제갈량을 올려다보았다.
“제갈량.....”
눈물이 났다. 구해냈다고 믿었는데, 이렇게 또다시 멀어지게 되다니.
“날... 죽일 거야?”
그에게 손을 뻗으려던 제갈량이 멈칫하고 팔을 물렸다. 쇠사슬이 절그럭 소리를 냈다. 그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상태로 유비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제갈량이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러고도 좀 있다가 손책도 조조도 몸을 일으켰다.
“가, 간건가?”
“마무리를 지을 줄 알았는데. 왜지?”
세 사람은 서로 부상을 확인했다. 뼈가 부러질 정도로 큰 부상은 없는데 안도하면서 이제 어찌해야 좋을지 걱정했다.
“신선들 돌아오면 다시 싸우자.”
손책이 말했다.
“싸우는 건 좋다만 저 놈이 우리 편하게 준비된 뒤에 나타나줄까?”
“아 진짜 아지트 찾아서 쫓아가면 안 되는 건가.”
조조의 말에 손책이 투덜거렸다.
“왜.... 안 죽였을까?”
유비가 불쑥 중얼거렸다. 손책과 조조가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의미냐?”
조조가 물었다.
“그... 네 말대로 제갈량은 날 죽이려고 했잖아. 거의 그럴 뻔 했고. 그런데 이번엔 왜.....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뭔가 이유가 있겠지.”
조조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전과는 계획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고. 모양도 좀 바뀌었던데.”
“그렇다고 해도 목적은 여전히 세계멸망이겠지?”
손책이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주유는 언제쯤 돌아오는 거지....”
신호음이 한참 이어졌다. 받을 거라 기대하고 건 것도 아니어서 손책은 그냥 두었다. 막 이제 곧 음성 사서함 안내가 나오겠다 싶을 때 주유가 전화를 받았다.
“왔...”
-주군? 어디에요, 주군?
전화를 건 건 손책인데 주유의 목소리가 더 다급했다.
“조조랑 강릉 왔어. 유비도 잡았고.”
-잠깐 거기 꼼짝 말고 있으세요!
그리고 이들 눈앞에 파란색과 빨간색 빛무리가 모여들어 주유와 사마의가 나타났다.
“큰일났습니다.”
사마의가 먼저 말했다.
“제갈량이 장각의 아지트에 보관되어 있던 다크 펜타곤에 손을 댄 모양입니다. 지금 그는 세 분이 힘을 합쳐도 쉽사리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강할 겁니다.”
그건 말하지 않아도 세 사람 다 이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것 좀 보세요.”
주유가 넓은 청사진을 공중에 펼쳤다. 서울 지도 위에 크게 오각형이 겹쳐 그려져 있었다.
“선계의 에너지를 차단하기 위한 마봉진이에요.”
“그게 왜?”
“드림 배틀을 개최하고 지속하기 위한 에너지는 현 옥새에서 나옵니다.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다른 모든 활동이 그렇지만 이 에너지는...”
“저, 주유.”
손책이 말을 끊었다.
“방금 제갈량과 싸웠고, 위급한 거 알거든. 짧게 부탁해.”
“싸웠다고요? 이미?”
“그래. 왜 우릴 죽이지 않았는지 궁금해 하던 차였지.”
조조가 말하니 유비가 했던 말과는 뜻이 좀 다르게 들렸다.
“제갈량은 드림배틀이 끝나지 않게 하려고 합니다.”
사마의가 말했다.
“세 분 모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이대로 있게 되면 옥새에 에너지가 공급되지 않으니 세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럼 우리끼리 여기서 승부를 내면.”
손책이 말했다.
“그 놈이 인간계와 선계 사이의 데이터 흐름에 간섭했어요.”
주유가 말했다.
“이대로는 정상적인 드림배틀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배틀이 중단될 거예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 군주의 레전드 체인저에 붉은색 경고 문고가 떴다. 흑신선 토벌 명령을 보고 주유가 이마를 짚었다.
“배틀이 끝나고 우승자가 정해져야 세계가 유지되는데, 제갈량이 그걸 막으려 한다고.”
조조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주군.”
사마의가 대답했다.
“허나 그놈은 우리와 싸울 필요가 없다. 이대로 두기만 하면 세상이 멸망할테니까. 우리가 찾아가서 싸워야 하는데,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겠나?”
“그보다, 싸워서 이길 수 있는지가 문제입니다.”
사마의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싸워보니, 어떠셨습니까.”
조조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것만으로 두 신선은 답을 알아들었다.
주유가 한숨을 내쉬고 펼쳐놨던 청사진을 거두어들였다.
“데이터 흐름을 추적하면 되니까 어딘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어요. 하지만 싸워서 이길 수 없다면....”
“그건, 어떻게 알아낸 거야?”
손책이 청사진을 손짓하며 물었다.
“장각의 아지트에서 발견했어요. 장각이 정말 죽기는 죽은 모양이더라고요. 그래서 아지트를 숨기던 결계가 사라져서.”
“제갈량을 찾기 위해 선계를 샅샅이 뒤지다보니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제갈량은 떠난 다음이었습니다만.”
사마의가 말을 맺었다.
“다행인거다. 너희 둘끼리만 마주쳤다면 죽였을 테니까. 너희는 소멸해도 배틀의 지속에는 영향이 없지 않나.”
조조가 말했다. 손책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는 눈으로 노려보았으나 조조는 모르는 척 했다.
“아까의 압도적인 전력 차로 봤을 때, 신선 둘이 추가된다고 해도 잘해야 아슬아슬한 수준이겠지.”
“아, 큰일이네. 여기서 어떻게 갑자기 더 강해지지.”
손책이 표정을 찌푸렸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있어요.”
주유가 말했다.
“마봉진의 거점을 예측해 공격하는 게 가능한데다 제갈량이 아무리 많이 힘을 축적했다 해도 혼자서 이 정도 대규모 진을 유지하려면 무리가 따를 게 분명하니까요.”
“또 사람을 해쳐서 해결하려들 가능성은 없고?”
조조가 물었다.
“선계의 에너지니까 인간을 희생시킨다고 어쩌지는 못해요. 영웅심을 더 흡수하려 들 수는 있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게서 흡수해 봤자 효율이 떨어지니 그 쪽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내내 잠자코 듣고만 있던 유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조가 유비를 노려보았다.
“너, 이참에 확실히 하자.”
그가 유비에게 돌아섰다.
“이제는 정말로 제갈량을 죽일 수밖에 없다. 토벌에 참여할 건지 적대할 건지 선택해라.”
유비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이 없는 건, 적대한다고 봐도 되겠지?”
조조가 하후연 패를 꺼냈다. 그가 군신일체를 하는 즉시 총을 유비에게 들이댔다.
“조조! 야!”
손책이 변신할 새도 없이 달려가 팔로 쳐서 총구를 내렸다.
“변신도 하지 않은 녀석한테 무슨 짓이야! 죽일 작정이냐?”
“그래.”
조조가 태연히 대답했다. 손책은 아연해졌다.
“뭐....”
“지금 우리는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한 싸움을 하고 있다.”
조조가 말했다.
“어제 제갈량을 없앴으면 또다시 세상이 위협받는 일은 없었을 거다. 봐라, 손책. 알량한 동정심으로 악에게 자비를 베푼 결과를!”
“그렇다고 유비를 죽일 필요는 없잖아! 더 이상 유비랑 같이 싸우고 싶지 않다면 그건 찬성이야. 그래도 죽이자니... 정 방해가 될 것 같으면 어디 가둬두자고. 그러면 되잖아!”
“이 녀석이 얌전히 갇혀있을 리 없어. 제갈량이 이 놈을 어떻게 이용하려 들지도 모르지. 배틀이 중단됐다면 지금은 탈락시켜 사건에서 배제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너 미쳤냐!”
손책이 조조의 어깨를 잡았다.
“유비는 함께하던 신선을 살리고 싶어했을 뿐이야. 잘못은 했지만 죽을죄라곤 할 수 없다고!”
“그 행동 때문에 세상이 멸망한다면 죽을죄가 되겠지.”
“우리가 막으면 되잖아!”
“됐다.”
조조가 손책의 손을 쳐냈다.
“너희들과 말이 통할거라 생각한 내가 잘못이지.”
조조가 다시 공격할 거라 생각해서 손책이 서둘러 군신일체를 했다. 조조는 변신을 풀고 돌아섰다.
“가자, 사마의.”
“네, 주군.”
사마의가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가둬두든 같이 놀든 어디 마음대로 해봐라. 세상은 나 혼자 지킬 테니까.”
“뭐? 야! 조조!”
손책이 부르거나 말거나 조조는 빠르게 사라졌다.
“아유, 저거 그냥....”
손책이 혼자 열 내 봤자 가버린 조조에겐 들리지 않았다. 그가 변신을 풀고 괜히 돌을 찼다.
“미, 미안해 손책.”
유비가 추욱 쳐져서 사과했다.
“아냐, 방금은 저놈이 미친 짓 했어.”
손책이 화냈다.
“방해된다고 바로 사람을 죽이려 들어? 것도 지금껏 같이 싸운 사람을? 저놈 저거.”
“조조가 그럴 만도 해.....”
“너는 또 뭘.”
“조조가 예전에 경찰이었던 건 알지. 그 때 존경하던 선배가 있었는데, 레전드 히어로에게 죽었거든.”
“.....뭐?”
“나도 정확히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 그래도 조조가 죽일 수 있을 때 그 놈을 죽여 뒀다면 왕윤 아저씨는 안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알아. 그래서.”
“그래서, 죽일 수 있을 때 제갈량을 죽여 뒀더라면 괜찮았을 지금 상황하고 겹쳐보고 흥분한다 이거지.”
손책이 또다시 땅바닥을 찼다.
“망할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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