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크 월드에서 여왕님들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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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티스 폐하의 지옥행 9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로잔나 통령의 협조 덕에 일찍 도착한 서부 대륙에서, 일단 아발론의 내분부터 막았다.
그 큰 전쟁의 시작이 야심만 많은 변경 귀족의 경솔한 일탈이었다고 알았을 때는 허탈하기까지 했다. 오스왈드 백작을 일찍 제압하고 반역의 증거를 모아 왕성에 해명하니 끝이었다.
플로렌스의 오랜 적폐 쪽은 외국의 왕인 그가 당장 어떻게 할 수 없으므로 여기서도 일단 수출 품목을 조정해 급진 사상이 흘러드는 걸 막아보기로 했다. 사상이 담기기 쉬운 책이나 하층민들을 도울 생필품은 수요가 있어도 팔지 않고 사치품 위주로만 팔게 했다.
카를 3세의 권위에 힘을 실어주는 쪽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해서 그가 전쟁까지 생각할 필요 없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유니버스로 본 플로렌스 정계는 심하게 불안정했다.

-자이라가 부기사단장이 되지 못하면서 노예들의 불만이 높아졌어.

람다도 불안해 보였다.

-그 문제로 크롬 레디오스와 카를 3세의 사이도 나빠졌어.
“안 돼. 지금 그 나라 왕실의 권위가 크롬 단장과 레디오스 가문에 얼마나 기대고 있는데...”
-둘 다 적개심 수치가 그 정도로 높지는 않아. 결국 화해할 거야.
“그걸론 부족해. 두 사람이 겉으로 잠깐 틀어지기만 해도 그걸 빌미로 딴 마음 품을 귀족들이 많다고!”

람다가 움츠러들었으나 카르티스는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왜 다들 이 모양이지? 왜 코앞의 이득 때문에 서로 싸울 궁리만 해대는 거야? 혹시 이 세상에 사람 죽이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게 나 한 사람뿐인가?”

카르티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 람다를 노려보았다.

“혹시 그런 거냐? 나 말고는 전부 살인이 하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데 억지로 참고들 있는 거냐? 전쟁이 반드시 일으켜야 할 숭고하고 위대한 일인 줄 아는 거냐?”
-마스터...
“나도 알아. 전쟁이 각국에서 능동적으로 피해야 할 재난이라는 관념이 제대로 자리잡은 건 오래 전 일이 아니라 2차 마도대전 뒤부터란 거. 그래도, 그러니까 더 모두들 생생하게 새기고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전쟁을 겪은 인물들이 아직 살아있기까지 한데?”

문득 그 생존자들의 대표격이 떠올랐다.

“...그래. 말한 김에 로잔나 통령은 지금 어쩌고 있나 검색해줘.”
-응.

유니버스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람다는 잠시 말이 없었다.

“왜, 무슨 일인데 그래?”
-미안해, 마스터......

람다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결과를 내놓았다.

-우리가 여기 신경을 쏟는 틈에, 사르디나가 엔타로니아에 전쟁을 선포했어.



“소식 빠르구나, 애송이.”

로잔나는 동맹국 수장을 맞이하는 것답게 우호적인 태도로 카르티스를 맞이했다.

“비밀 제휴를 들켰다고 너무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조건이 너무 나빴지. 나도 그거 갖고 너보고 뭐라 하지는 않을 테니...”
“그보다, 밀약이 들켰다고 해도 왜 바로 전쟁입니까?”
“왜냐니? 엔타로니아에서 갈루스와 사르디나의 협정을 트집잡고 훼방 놓는데 그럼 어쩌란 말이냐? 그놈들이 새로 개발한 금속선 설계도를 훔치려 들었다는 소식은 못 들었냐?”

카르티스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러고 있을 시간에 갈루스로 돌아갈 길이나 걱정해라. 알드 룬과 리브리안도 화가 단단히 났단다.”



안타깝게도 로잔나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리브리안은 갈루스와 사르디나의 밀약이 리브리안에 대한 모욕이라며 카르티스의 귀국을 막으려 했다.
처음에만 해도 회담을 통해 해결할 여지가 있어보였으나, 람다는 리브리안의 진짜 의도를 보여주었다.

-리브리안 왕은 여기서 마스터를 없앨 작정이야. 이미 복병과 저격수를 배치했어.
“저격수라면.”

람다가 조용히 끄덕였다.

-응. 올가 파블리첸코.

리브리안 왕이 거기까지 준비했다면 더 사양할 것도 없었다. 맞서 싸우고 강제로 길을 열어야 할 뿐.
길을 열 자신이라면 있었다. 올가를 죽이지 않고 지나갈 자신도.
하지만 그 다음엔 리브리안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 어차피 싸워야 한다면 올가가 갈루스 군에 큰 피해를 입히거나 거꾸로 전사해버리는 사태를 미리 원천봉쇄하고 싶었다.

‘저격수이니 멀리서 공격하고 피하려 할 텐데, 살려서 잡을 수 있을까?’

망설임은 짧았다. 이쪽의 수행원은 람다가 관측한 적군에 비해 소수였지만 그들을 다시 나눠서 저격수를 유인할 미끼를 만들고 자신은 직접 필중의 저격수를 생포하러 나섰다.
힘을 길러 재앙에 맞서 싸우기로 한 뒤부터 카르티스는 다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강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왔다.
강자들을 초빙할 때마다 가르침을 받고, 모든 일정을 훈련에 맞게 짰다. 매일의 식사와 디저트까지도 훈련 식단을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강해진 신체가 죽고 다시 열두 살로 돌아가면, 근골은 열두 살 때의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몸에 밴 경험은 거의 그대로 남아있었다.
마력도 완전히 원점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것을 람다는 ‘회귀한다고 해서 이제까지 쌓아온 것들이 전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라고 표현했다.
전술 지휘 경험이 기억으로 고스란히 남는 것은 물론이었다.
덕분에 ‘마탄의 사수’라 불리기까지 하는 올가 파블리첸코도 그의 상대는 될 수 없었다.


사로잡힌 올가는 걱정했던 것보다는 저항이 심하지 않았다.
처음 며칠간은 자기가 지고 잡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소비했고, 그 다음엔 포로의 처우가 정중한 것을 보고 쓸데없이 자극하기보다 협상이나 구출될 기회를 노리기로 했음을 유니버스로 열람할 수 있었다.
그런 이성적인 태도를 리브리안 군 수뇌부도 본받았으면 싶었다. 그들은 무력 충돌의 모든 책임을 카르티스에게 돌리며 선전 포고했다.
자기네의 귀중한 인재가 처형될 위험이나, 자기들이 먼저 공격한 게 들통날 위험은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올가까지 끌고 갈루스로 무사히 돌아오는 데 성공한 카르티스는 일단 국가를 전시 체제로 전환하고 올가와 독대했다.

“아무리 폐하의 실력이 뛰어나다 해도 정말 저까지 끌고 이토록 쉽게 귀국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얼핏 보기엔 담담해 보였지만 올가도 굴욕감과 패배감을 눌러 참고 있었다.
어려울 게 없어보였던 임무에서 어이없이 지고 생포되기까지 한 데다, 구출의 손길은 없었고 자력탈출도 실패했다.
그 모든 경우의 수를 카르티스는 아주 손쉽게 봉쇄하고 올가에게 큰 부상 하나 입히지 않은 채 끌고 올 수 있었다. 자존심이 너덜너덜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대를 리브리안 군에서 구한 것이다. 그 어리석은 무리들 틈에서 헛되이 죽지 않도록.”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는 건 헛죽음이 아닙니다.”

대충 예상한 말이라는 듯 올가는 막힘없이 대꾸했다.

“전 리브리안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리브리안을 배신하라는 말이 아니다. 당장 갈루스를 위해 키클롭스를 들어달라는 말도 아니다.”

카르티스도 여유가 있었다. 보통 이런 말은 결국 갈루스로 끌어들이기 위한 말장난이겠지만, 올가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내 적은 리브리안이나 엔타로니아가 아니다. 갈루스와 세계 전체를 파괴하기 위해 곧 나타날 거대한 재앙이지.”

올가는 어리둥절해졌다. 익숙한 반응이므로 카르티스는 계속 말했다.

“이 세계는 곧 재앙으로 멸망한다. 갈루스, 리브리안, 사르디나 어디 하나 예외 없이 사람들도 죽고 동식물도 사라진다. 그 재앙에 맞서 싸우기 위해 그대의 힘이 필요하다.”

올가는 대답 없이 카르티스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당장 믿어달라는 게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 어차피 곧 그대의 눈으로 보게 될 테니. 그때까지 갈루스에서 조용히 기다리면 된다. 탈출하거나 날 노리지 않는 선에서, 기다리는 기간은 불편하지 않게 보낼 수 있을 거다.”



리브리안의 도발에 수비로 일관하며 얼마 남지 않은 재앙을 기다릴 수도 있었다. 지난 생에서 전쟁에 말려들었을 때는 그렇게 했었다.
이번엔 다르게 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일어난 전쟁, 신속하게 리브리안 수도로 진격해 왕을 사로잡고 항복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당장 허튼 짓을 또 벌이지 못하도록 그곳의 군대를 장악해 묶어놓았다.
덕분에 재앙이 닥쳤을 때 리브리안은 전쟁에 휘말린 나라들 중 갈루스 다음으로 병력이 보전된 나라가 되었다.
그동안 올가는 계속 갈루스에 연금되어 있었다.
달아나지 못하게 철저히 감시하면서도 운동 시간과 시설을 넉넉히 제공하고 식단도 주의 깊게 제공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심지어 공포탄 사격 훈련까지 시켜주었다.
감시 임무를 맡은 군인들이, 포로가 어처구니없어 하더란 말을 할 정도였다. 물론 그 감시자들도 자기네 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티내지 않으려 애쓰는 표정들이었다.
덕분에 다시 불러낸 올가는 장기간 수감되어 있던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튼튼했다.
카르티스는 처음 재앙 이야기를 꺼냈을 때보다도 더 자신을 미친놈 보듯 쳐다보는 올가를 데리고 재앙이 할퀴고 간 현장 중 적당히 가까운 곳으로 갔다.

“이게 내가 말한 재앙의 결과, 그 중 극히 일부다.”

전부 자신을 속이고 농락하기 위한 거짓인 편이 좋았을 거란 표정으로, 올가는 카르티스의 말을 주의깊게 듣고 참혹한 현장도 살펴보았다.

“적국의 군인을 ......그런 식으로 감금한 이유가 있었군요.”

늘 과묵하던 그도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이제는 내 말을 이해하겠지? 진정 키클롭스를 겨누어야 할 상대가 누구인지도?”

카르티스가 올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이 재앙이 세계를 끝장내기 전에 우리가 협력해서 맞서 싸워야 한다.”

올가는 잠시 그 손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리브리안에도 이런 일이 닥친 것이지요?”
“그렇다. 그곳의 군대도 재앙과 싸우는 중이지.”

올가의 표정이 복잡해지는 걸 보고 다시 힘주어 말해보았다.

“키클롭스도 돌려주겠다. 함께 여기서 싸우자.”
“여기서 말입니까? 리브리안으로 돌려보내 주시지는 않을 겁니까?”
“저 재앙의 괴물들과 싸우는 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다. 지금 대부분의 나라들이 적군과 싸울 줄은 알아도 이런 재앙과 어떻게 싸워야 할지는 몰라서 우왕좌왕하다 망해가고 있는데, 리브리안은 비교적 선전중이지. 군권을 갈루스에 빼앗겨버린 덕에, 내 전술과 지침을 억지로나마 따른 덕이다. 그런데 중령은 누구보다 빼어난 자질을 지녔지. 여기서 힘을 합치는 편이 가장 효율적이다.”
“제가 귀국하면 폐하의 적으로 되돌아갈까 의심하시는 겁니까?”
“그것도 이유 중 하나다.”

카르티스는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그대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기도 해. 리브리안 왕은 그대가 여기 억류되었을 뿐 처형당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그대를 의심했어. 키클롭스까지 가지고 돌아가면 갈루스로 전향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겠지. 그래서, 사실 그대의 의향이 어떻든 돌려보내줄 마음은 없다.”

올가의 눈썹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동의를 얻지 못한 것은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적어도 여기서 재앙과 싸워도 리브리안 사람들 역시 살 길을 찾기 쉬워지리란 점을 생각하기 바란다.”


한동안 올가는 협조적으로 행동했고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만약 람다가 아니었다면 체념하고 현실을 받아들인 거라고 속았을 것이다. 람다는 올가의 반항심과 적개심, 리브리안을 향한 애국심이 수그러들기는커녕 더욱 불타오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점점 위태로워지는 전황 앞에서는 올가 한 명 감시하는 데 충분히 신경을 쏟을 수 없었다.
괴물을 갑자기 떼로 마주치는 바람에 정신없이 싸우고, 겨우 전멸을 면하고 나서 보니 올가는 도주한 뒤였다.

로드가 없었던 세계 12 - 암시장 나들이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잠깐만, 방금 대화 뭐야.”

샬롯이 끼어들었다.

“마치, 필요한 뭔가가 마탑에 있으니 털러 가자는 말이라도 나올 것 같은 소린데?”

“정확해.”

그 말은 블레이드에 다리를 걸치고 거꾸로 매달려 있던 프라우가 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마탑 출입 권한 얻어둘걸. 어쩔까, 로드? 필요하다면 지금이라도.”

“벌써 루실리카를 배신하면 안 돼. 네가 수배되어도 문제고.”

로드는 단번에 거절했다.

“아니, 꼭 내가 들어가 털어온다는 게 아니라, 정찰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네가 마도공학자로 들어가는 거면 연관이 있겠지만 고대사 연구자가 초월석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어?”

“우엥, 로드는 너무 빡빡해.”

“마탑을 털 거야?”

프람에게 생기가 돌았다.

“그래.”

“목표는 그, 초월석이라는 물건 뿐입니까? 그게 무엇인데요?”

요한이 물었다.

“기사의 실현되지 않은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의식을 치르는 데 필요한 자원이지. 요한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성장 한계를 돌파하려면 필요한 거야.”

“그런 의식이 있어?”

샬롯이 놀랐다.

“현재엔 실전된 기술이라 알려져 있지는 않을 거야. 초월석도 단순 보석이나 부적, 파워스톤 등으로 사용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기왕 마탑을 공격할 거라면 물건만 훔쳐내기보다 아예 마탑을 무너뜨리면 어떻습니까?”

요한이 제안했다.

“뭐?”

“지금 인간들은 엘프에 대한 불만이 매우 높습니다. 마탑은 엘프들이 교육과 행정을 독점하는 상징 같은 거고요. 마탑에 큰 피해를 입힌다면 엘프들의 기를 꺾고 무서워하던 아발론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행동에 나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면, 그 다음은?”

로드가 되물었다.

“그런 상징적인 시설이 대놓고 공격받는다면 엘프 지배자들도 인간을 탄압할 명분을 획득하게 된다. 다른 인간들도 모두 너희 수준으로 싸울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봉기는 시기상조야. 라플라스의 광역마법 한 번에 모두 쓸려나가 버린다.”

“그렇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요한은 바로 의견을 굽혔다. 로드는 요한의 방금 발언이 정말로 ‘생각이 짧았던’ 것인지, 아니면 지금의 지배 체제를 뒤엎기 위해선 일반인 희생을 감수할 수 있다 여긴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그 초월석인지 하는 보석만 훔쳐내면 되는 거지? 엘프 연구원들을 죽인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샬롯이 물었다.

“아니야.”

로드가 못을 박았다.

“그래. 어, 이 마석 한꺼번에 다 바꿨다간 엘프 가드 뿐 아니라 사냥꾼들도 난리가 날 거야. 내가 딴 사냥꾼들한테 서너 개씩 나눠주고 좀 떼줄테니 환전해오라고 할까? 니들한테서 빼돌려서 몰래 처분한다고 하면 별로 의심 안 받을 것 같은데.”

“그 편이 암시장보단 더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요한이 찬성했다.

“암시장 해서 말인데.”

프람이 말했다.

“도시 봉쇄 했으니까 고기값 좀 싸졌겠지? 고기파티 하자.”

“좋아. 일했으면 먹어줘야지.”

샬롯도 찬성했다. 요한은 로드를 쳐다보았다.

“그래. 체력 소모도 컸을테니 단백질을 보충하는 건 좋은 선택이야.”

로드의 허락이 떨어지자 요한이 마석을 분배했다. 각자 의심 안 받을 만큼은 지금 환전하고, 남는 건 다른 속죄자 조직원이나 샬롯이 아는 사냥꾼들에게 수수료 떼주고 환전시키고, 그래도 남는 건 뒀다 차차 처분하기로 했다.

프람 샬롯 프라우 조 환전은 프라우가 대표로 들고 갔다. 엘프라서 마석이 좀 많아도 의심을 덜 사는데다 유제품이나 과일 같은 고급 상품의 배급권을 받아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각자 할 일을 찾아 흩어질 때 샬롯은 속죄자 조직원 중에 다친 사람이 있을 테니 봐주겠다며 본부에 남았다. 그리곤 몇몇 상처를 싸매주고 난 뒤엔 옥상에 올라가 어두운 밤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로드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접근했다.

“뭔 일인데?”

샬롯이 빠르게 쏘아붙였다.

“아니, 나도 생각 정리할 게 있어서 올라온 거거든.”

“너 정말 왕 맞아? 정치하려면 거짓말도 할 줄 알고 그래야 하지 않아?”

“난 거짓말로 남을 조종하기 보단 진심으로 대하는 게 낫다는 주의라서.”

“그럼 아까의 거짓말은 뭔데.”

“생각 정리할 게 있는 건 사실이야.”

로드가 샬롯의 옆에 와 앉았다.

“그걸 네 옆에서 하면 안 될 이유가 있을까?”

“우와, 뻔뻔함의 극치.”

“정치를 하려면 뻔뻔한 짓도 할 줄 알아야 하지.”

로드가 싱긋 웃었다. 샬롯이 그를 노려보았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아니, 그냥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

“날 보고, 생각나는 사람?”

샬롯의 표정이 험해졌다.

“혹시.”

“아니, 너희 아버지는 몰라. 여기서는 물론이고 원래.. 멀쩡한 세계에서도. 꼭 가족이어야만 연상되는 게 아니라고. 그저 그 사람도 나에게 군주국의 왕이 할 소리냐고 면박을 준 적이 있어서.”

“누군진 몰라도 네가 그럴만한 말을 했겠지.”

“너무하네.”

로드가 웃었다.

“그래서.... 여기의 린 블레이크는 어떤 사람이야?”

샬롯은 잠시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로드를 바라보았다.

“생각을 읽는 건 아니야. 그저, 마탑에 속해있고 네가 목숨을 걱정할 만한 친구가.”

“친구 아냐.”

샬롯이 차갑게 끊었다.

“어렸을 때 멋모르고 같이 놀았던 적이 있었을 뿐인 관계야. 상관없는 사람이야.”

“내가 있던 세계에서, 린은 아발론 왕성의 연금술사였어. 연금술을 활용해 고대의 유물을 재현해내었는데, 연금술의 한계를 뛰어넘었다고 할 정도로 굉장한 성과를 내었지.”

“됐어, 알고 싶지 않아.”

“그리고 너의 가장 친한 친구였어. 언제나 둘이 합심해서 미.”

“닥치랬지.”

샬롯이 로드의 입을 콱 막았다.

“린은 마탑에 들어갔어. 엘펜하임 출신은 아니라도 엘프긴 하니까. 린 알면 미하일도 알겠지? 그 놈은 엘프 가드가 돼서 잘나가고 있고. 둘 다 고귀한 엘프님들이 되셔가지고 하프엘프 친구 따위 버려버렸어.”

샬롯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자기들도 아발론 살았으면서. 나쁜 새끼.”

고개 숙인 샬롯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잠시 망설이다 로드가 그 어깨를 살며시 감싸 끌어당겼다.

샬롯은 밀어내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신생 아발론 기사단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죽음의 땅에 서려있는 사기는 사람들을 침식하고 미치게 만들기 때문에 집단 토벌은 하루걸러 하루만 배정되었다. 이들은 토벌이 없는 날은 본부에서 전술 공부를 하고 전투 기술을 가다듬고, 토벌이 있는 날은 나가서 실전 훈련을 했다.

제일 바쁜 사람은 당연히 로드였다. 전술 지휘는 원래 했던 거라 해도 여기선 기사들 훈련도 그가 봐줘야 하고 이 세계의 문물도 파악해야 하고 마탑 습격 계획도 짜야 했다.

거기에 물론, 고기 파티도 빼놓을 수 없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팀에 엘프가 있으니까 확실히 좋긴 좋다.”

프람이 등에 진 새 대검의 손잡이를 연신 만져댔다. 듀렌달을 되찾았을 때 바로 쓸 수 있도록, 프람의 훈련용으로 크기도 크고 마력도 조금은 실을 수 있는 새 무기를 하나 장만했다.

프람이라고 좋은 게 뭔지 몰라서 지금껏 낡은 검을 썼던 건 아니었다. 돈도 돈이지만, 질 좋은 무기는 엘프가 아니면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던 거였다.

로드도 좋아하는 프람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엘프인 프라우도 제 2 마탑주님께 의뢰받은 연구에 필요한 운운해서 겨우 얻어낸 물건이니 질은 확실했다. 프람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실용적인 면을 빼고 생각해도 프람이 좋아하니 그것만으로도 기뻤다.

“됐어. 나 다 샀어.”

약재상에서 나온 샬롯은 드물게 활짝 웃고 있었다.

필요한 약을 전부 구한 것만으론 나올 수 없는 표정이라 로드는 슬쩍 짐꾸러미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고추를 여기선 약으로 쓰는 거야?”

“국영농장에선 고추 안 키우는데 날씨까지 춥고 흐려서 텃밭도 야생도 별로 없으니까. 약초나 생산량이 똑같아서 그래.”

“유통 경로의 문제라 이거군.”

“그거 먹으려면 혼자 먹어.”

프람이 경고했다.

“안 줘. 이 아까운 걸 왜 남 줘.”

샬롯이 메롱 혀를 내밀었다.

“싸우지 말고. 요한도 살 거 다 산 것 같으니 합류하자.”

로드가 샬롯과 프람의 등을 떠밀며 시장 거리를 걸었다.

요한은 얼마 안 가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감자 꾸러미를 들고 있고 그 옆엔 도축한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짊어진 그의 부하가 있었다.

“그것밖에 안 샀냐. 니네 인원이 몇인데.”

프람이 타박했다.

“50여명이 이 정도면 충분하지 넌 대체 얼마나 먹을 생각인건데?”

말하며 요한은 감자를 나눠들려는 로드를 슬며시 밀어냈다.

“하지만 지금 지나면 또 비싸지잖아.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둬야지.”

“저, 프람.”

요한에게서 감자를 뺏으려 애쓰며 로드가 물었다.

“도시 봉쇄와 고기값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야?”

“아, 그게.”

프람이 새삼 주위를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원래는 불법인데, 뉴 사이런딜 남쪽은 장벽 밖이라도 악마가 별로 안 나타나서 그냥 밖에다 가축을 기르기도 하거든. 근데 이렇게 악마들이 떼거리로 쏟아지고 도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면 그렇게 키우던 건 싹 잡는 수 밖에 없으니까, 암시장에 고기가 잔뜩 풀려서 싸지는 거야.”

“그렇군. 미리 다 도축해버렸으니 그 이후론 가격이 오르는 거고.”

로드는 암시장이라기엔 별로 음침한 구석도 없고 파는 물건도 거의 다 식품이나 생필품인 시장을 새삼 둘러보았다.

이들하고 너무 친해 보이고 싶지 않은 건지 샬롯이 먼저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로드가 감자를 나눠드는 건 포기하고 그냥 요한을 잡고 그 뒤를 따라갔다.

“필요한 건 다 샀어?”

“네. 달걀은 그 엘프가 구해온다고 했으니까요.”

“이름 말 안 하는 건, 암시장 안인데도 감시를 주의하는 거야?”

“주의는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이 인간의 편인 것도 아니고요.”

“...그래. 그렇지.”

잠시 그러고 걷다 로드가 뮤를 불렀다.

-뮤. 지금 내 주위 사람들 검색 가능해?

-가능해. 뭘 찾고 싶은데?

-우리 일행을 감시하는 사람이 있을까?

별달리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질문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요한이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경계를 해볼까, 정도 생각이었을 뿐이다.

-있어. 마스터 전방 왼쪽으로 100미터 남짓 거리 위쪽에. 미하일 블레이크가.

“미하일이?”

로드가 깜짝 놀랐다.

“응? 뭔 소리야, 갑자기 미하일이 왜?”

그새 다시 가까워진 샬롯이 돌아섰다.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로드는 그저 미하일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방향만 바라보았다.

프람의 기색이 바뀌었다.

“거기 뭐가 있어?”

요한이 나서려는 프람의 발을 밟았다.

“잠깐만. 눈치챘다고 알려줄 필요 없잖아.”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정확히 어딥니까.”

“이 앞으로 백 미터 정도, 왼쪽 건물 아마도 2 층 이상.”

로드도 낮게 속삭였다.

“짐을 잔뜩 든 상태에서 싸울 수는 없어. 단순 감시 목적이라면 본부까지 쫓아올거다. 끌어들이자.”

요한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샬롯에게 귓속말을 하며 돈을 건넸다. 샬롯이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들고 있던 약꾸러미를 로드에게 주고 뒤돌아서 암시장으로 돌아갔다.

“술을 좀 사다 달라고 했습니다.”

다시 길을 걸으며 요한이 해명했다.

“갑자기 멈춰서서 심각하게 말을 주고받았으니, 알아챘단 티를 내지 않으려면 핑계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술 마시고 풀어진 척을 하면 감시자가 가까이 오기도 쉬울 거고 말이지?”

프람이 말을 받았다.

“좋아. 그 거리에서 감시라면 엘프 레인저겠지? 본때를 보여주지.”

“본때를 보여주는 건 좋지만 죽거나 크게 다치게 하지는 마. 그도 기사단에 넣을 거니까.”

로드가 말했다.

“잉? 엘프를?”

“넌 프라우는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야... 그치만.... 그놈은 이상한 놈이고, 우릴 감시중이라면 저건 진짜 엘프일 거 아냐.”

프라우는 가짜 엘프냐고 되묻는 대신 로드는 은근히 무거워지는 짐보따리를 고쳐들었다.

“내게 생각이 있어.”




카르티스 폐하의 지옥행 8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카르티스는 익숙하게 의식을 가라앉히고 람다를 불렀다.
특임대장은 중요한 보고가 잘 끝나가고 있는 것 같아 마음 놓고 아부중이었다.
조슈아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꼿꼿이 서 있지만 실은 왕을 처음 보는 자리답게 긴장해 있었다. 분노나 자살 사고는 보이지 않았다.

‘또다시 원점인가.’

조슈아의 결말이 좋지 않았던 건 사실 어느 삶이나 마찬가지였다. 재앙이 닥쳐 죽지 않았을 때도 그랬다.
형제자매들 손에 자신이 죽어나갈 때면 그도 으레 측근으로서 같이 살해당했다. 자신의 오판 때문에 죽을 곳에 제발로 걸어들어가야 했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다음 생에서 조슈아가 자신을 피하는 일은 없었다.
의지할 곳 없는 고아인 그에게 가족과 돌아갈 곳이 되어주면 그는 금방 회귀 전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맹목적으로 따라왔다. 아니, 그에겐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거였다.

‘지난 생엔 내가 정말 지쳤었나보군.’

차라리 후련했다. 이제까지도 늘 마찬가지였는데, 그때 새삼 큰 비극이라도 겪은 듯이 지치고 숨어버릴 일이 아니었던 거다.
특임대장에게 몇 가지 지시를 더 내리고 그들을 돌려보낼 때까지 카르티스는 한 번도 조슈아를 돌아보지 않았다.


직접 외국과 접촉해 동맹을 만들고 기술을 주는 일이 차질을 빚었으므로 방식을 약간 바꾸었다.
최신 기술로 만들어진 물건들을 제한 없이 상품화하여 수출했다. 실수인 척 핵심 기술 보호에 소홀히 했다.
사르디나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앞다투어 기술을 베끼고 훔쳐갔다. 당연히 각국의 군사 기술에도 영향이 미쳤다.
갈루스의 신하들은 우려했으나 카르티스는 그들에게 동조하는 척만 했다.

“각국이 모두 협력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그들의 이기심이라도 이용해야지.”

본심을 털어놓는 건 람다 앞에서뿐이었다.

“각국에서 스스로 싸울 채비를 하게 되면, 그것도 재앙 앞에선 도움이 될 거다. 올가 파블리첸코가 가장 강해졌던 때는 갈루스가 리브리안을 침략할 거란 소문이 돌았을 때였지.”

람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검색 결과를 내놓았다.

-플로렌스의 카를 3세. 정복욕, 오만, 절박함.

나쁜 징조였다. 곧 전쟁을 일으키려는 군주의 심리상태로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왜 갑자기 전쟁이야?”

유니버스를 뒤져보니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다. 경직된 신분제 속에서 귀족들의 부패와 폭압은 극에 달했고, 국민 대다수인 피지배 계층의 불만도 극에 달했다. 갈루스와 동부 대륙에서 들어간 신문물은 그런 불만을 부추겼다.
노예 출신의 기사를 중용한 것만으로 불만이 다 가라앉지는 않았다.

‘급진 사상이 퍼진 게 나 때문이라고 했었지......’

남들이 다 불온하다고 하니까 불온사상이라고 했지, 카르티스는 이제까지 사상이나 교리 같은 것에 별 관심 둔 적 없었다. 적어도 최근의 서너 삶에서는 그랬었다.
그러나 이런 사상이 실제로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이상 이제 신경써야 했다.
도스에서 부패한 왕가가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힌 것은 언제나 재앙으로 왕실의 권력과 무력이 무너진 다음이었다. 플로렌스는 그런 점에서 도스보다 더 상황이 심각했다.
카를 3세는 그런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정복 전쟁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막아야 하는데, 이걸 어떻게 막지?”

오랜 악습과 폐단으로 썩어 있다고는 해도 플로렌스는 서부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다. 엘펜하임은 강력한 마도사와 마도공학자들이 있어도 인구 적고 폐쇄적인 땅이고, 헬베티아도 사정이 비슷했다. 아발론과 페르사는 플로렌스의 횡포에 오래 시달려온 힘없는 소국일 뿐이었다.

“...로잔나 통령의 심리 상태를 다시 검색해줘.”

서부 대륙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려면 배와 항구가 필요했다.


금속 전함 제작기술을 사르디나에 넘겨주고서야 플로렌스를 압박해 전쟁을 포기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통령의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원래 합작중이던 엔타로니아에서 눈치채면 어떻게 할지는 이제부터 생각해봐야 했다. 그래도 크롬 레디오스나 자이라 같은 인물들이 국가간 전쟁으로 희생되어 재앙과 싸워보지도 못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스터, 결국 전쟁이 일어났어.
“뭐라고?”

기가 막혔다.

“로잔나 통령,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개체 로잔나 데 메디치는 약속을 지켰어. 카를 3세도 거의 전쟁을 포기했었는데, 아발론에서 내분이 일어나는 걸 보고 승산 있겠다고 개입한 거야.
“이유야 어쨌든 이젠 무역 제재로 해결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군.”

재앙까지 몇 년 남지도 않았는데 전쟁이 벌어지다니,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플로렌스는 아발론의 왕성을 점령했으나 그곳의 기사와 백성들이 항복을 거부하고 저항을 이어나갔다. 점령지 정책의 실패였다.
결국 엘펜하임과 페르사도 개입했다.
쏜즈 오더의 부단장 자이라가 엘펜하임의 제 2 마탑주가 이끄는 드론 부대와 싸우다 전사하자, 노예 출신 기사를 일부러 죽을 곳에 내몰았다는 소문이 플로렌스 국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페르사는 부족한 병력을 메우기 위해 다케온의 용병단을 고용했다. 수인족이 많은 다케온에선 기꺼이 페르사를 위해 플로렌스와 싸우겠다고 나섰다.
서부 대륙 전체가 전쟁으로 황폐해지는 가운데 사르디나는 다케온의 병력과 전쟁물자를 실어나르며 크게 이득을 보았다.
그게 배가 아팠는지, 엔타로니아가 사르디나에 전쟁을 선포했다. 갈루스와 극비리에 추진하던 신형 함선 프로젝트를 사르디나가 훔쳐갔다는 이유에서였다.
안보가 위협받았으니 당연한 조치라며 엔타로니아의 수많은 사람들이 왕실의 결정을 지지했다.
카르티스는 서둘러 알드 룬으로 달려갔다. 서부 대륙은 이제 어쩔 수 없어도 동부 대륙만이라도 이 막나가는 연쇄에서 구하고 싶었다.

“알드 룬에도 해군이 있다는 사실을 폐하께서 잊어버리신 줄만 알았습니다.”

이번에 대면한 사람은 1 왕자가 아닌 알드 룬 국왕 본인이었다.

“어째서 알드 룬을 건너뛰고 엔타로니아와 함께 전함을 개발하신 겁니까?”
“저도 엔타로니아가 이렇게까지 호전적인 나라인 줄 몰랐습니다.”

지금 카르티스에게 필요한 건 체면이 아니었다.

“제 어리석은 결정을 사과하는 의미에서, 엔타로니아와의 협약을 파기하고 알드 룬과 다시 협약을 맺고 싶습니다.”
“우린 폐하께서 엔타로니아와 합세해 사르디나에 본때를 보여주려 할 줄 알았는데요. 로잔나 통령에게 유감이 많으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전쟁을 막고 싶습니다.”
“어째서요?”

알드 룬 왕은 정말로 모르겠다는 기색이었다.

“사르디나의 콧대를 꺾을 다시없는 기회 아닙니까?”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게 뭐 잘못됐습니까?”
“아니, 카르티스 폐하께서 우리 막내딸과 똑같은 말씀을 하실 줄이야.”

알드 룬 왕은 헛웃음만 지었다.

“동부에서 가장 군비에 목숨 건 나라가 갈루스 아니었습니까? 이제와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말문이 막힌 그에게 알드 룬 왕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선언했다.

“이미 우리도 전쟁 준비를 마쳤습니다. 사르디나의 독점을 박살낼 때가 되었습니다.”



결국 세 대륙 전체의 거의 모든 나라가 전쟁에 뛰어들었다.
플로렌스는 노예 반란으로 왕실이 무너지고 카를 3세와 크롬 레디오스도 피살되었다.
엘펜하임 군은 그쯤에서 만족하고 켈타인 산맥 북쪽으로 물러났으나 페르사는 그럴 수 없었다. 사르디나와 다케온에 전쟁비용으로 큰 빚을 져버린 탓이었다.
사르디나는 엔타로니아, 알드 룬과의 전쟁이 길어진 탓도 있어 빚 독촉을 험하게 했다. 원래도 플로렌스에 맺힌 감정이 많았던 페르사는 다케온 용병들이 플로렌스의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약탈해가도록 조장해 자기들의 위기를 모면했다.
그리고 페르사의 괴수가 깨어났다. 엘펜하임 북부 해안에서도 재앙이 나타났다.
페르사와 엘펜하임 모두 진지하게 재앙에 맞섰으나 이미 국력 소모가 심한 상태였다. 서부 대륙은 그 어느 때보다도 무력하게 폐허로 변해버렸다.
문레이크의 봉인도 깨어졌다.
그 사실을 깨달은 로잔나 통령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적국인 알드 룬의 함대를 바다로 쏟아져 나온 문레이크의 재앙 앞으로 유인하는 일이었다.
엔타로니아와 알드 룬 역시 전쟁에만 집중하다 재앙 앞에선 손도 못 써보고 망해버렸다.

“각국의 무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해졌는데...”

람다에게 부탁해 이전 생의 데이터들도 비교하기 편하게 정리해 보관해두고 있었다. 재앙이 발생하고 인류가 일정 한계 이상 죽어나가기까지, 이번 생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짧았다.

“뭐가 잘못된 거지? 왜 전쟁이 일어나 버렸지?”

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이번에도 답은 혼자서 찾아야 했다.
플로렌스에는 급진 사상이 퍼지기 전에도 묵은 문제가 많았다.
라플라스는 현명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지도자였으나 엘프들은 너무 수가 적고 폐쇄적이었다. 플로렌스의 악영향을 저지할 능력이 없었다.
그리고 사르디나는 전쟁무역에 눈이 어두워 전쟁을 부추기고 크게 키웠다.
즈라한 아티르칸, 아슬란 발카리오스 등은 본래 그리 잔인하지도 탐욕스럽지도 않은 인물들이었으나 페르사도 다케온도 군주의 의지가 철저히 나라 전체에 미치는 곳이 아니었다. 전쟁중에 무분별한 학살과 약탈을 막지 못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엔타로니아, 알드 룬은 사르디나가 오래 독점해온 해상 무역망을 빼앗는 일에 혹했다.
결국 멸망해가는 세상을 보며 카르티스는 새로운 다짐을 새겼다. 다음 생엔 기필코 세계대전을 막겠다고.



“선체를 금속으로 만들고, 돛이 아닌 마도엔진으로 추진력을 얻는다고...”

신형 선박 개발 계획서를 읽은 로잔나 통령이 흡족하게 웃는 걸 보고 카르티스는 속으로 안도했다.
급격한 변혁이 전쟁을 촉발한다면, 지금의 강자에게 더 힘을 실어주어 변화를 늦춰보기로 했다. 이런 식으로라도 사르디나와 우방이 된다면 중부와 서부 대륙에 영향 미치기가 수월하리란 계산도 있었다.

“좋다. 무역 협정을 체결하고 서부로 가는 뱃길도 열어주지.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갈루스 소유의 배도 생길 거다.”
“명목상으로는 전부 사르디나의 배여야 합니다. 알드 룬에서 알면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내가 그걸 모를까. 너야말로 조심해라, 애송이. 알드 룬 대신 리브리안을 거쳤다고는 해도 리브리안도 외국 아니냐. 나보다는 네가 비밀 지키기가 더 힘들지.”

로잔나 통령의 말대로였다. 알드 룬이든 리브리안이든 대륙 밖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외국을 거쳐야 하니 갈루스와 사르디나의 제휴는 비밀리에 이뤄지기가 어려웠다. 날아서 통과하고 싶다고 투덜대는 부하도 있었다.

‘마도엔진을 이용해도 그건 어렵겠지.’


로드가 없었던 세계 11 - 육성 플랜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다닐에게 남은 업무 몇 가지를 맡기고 루실리카는 라플라스에게 갔다.

라플라스의 침실은 강력한 보호마법이 걸려있어 극히 소수의 인원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 그 소수 중 한 명이면서 루실리카는 일단 문을 두드렸다.

대답은 없었다. 예상했던 일이라 루실리카는 자기가 문을 열고 음식 카트를 끌고 들어갔다.

라플라스는 침대에 파묻혀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그 평범한 수식어가 얼마나 현실과 가까운지 곱씹으며 루실리카는 라플라스를 내려다보았다.

생각할수록 암담했다.

라플라스는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프라우가 정말로 상생과 조화에 대한 설득력 있는 자료를 가져온다 해도, 그걸 자신이 전파하다 표변해버린 라플라스를 설득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다른 엘프들을 설득해 봤자 라플라스 한 사람이 반대하면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제 2 마탑주가 유명무실해졌듯 원로원 역시 이름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대체 왜,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아발론을 침략할 때는 루실리카도 찬성했었다.

그때는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옳지는 않지만, 엘프들을 살리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들을 차별하고 착취하는 것도, 재앙에 부모를 잃은 엘프 아이들에게 우유 한 잔이라도 더 먹여주기 위해선 감수할 수 있는 불의라 여겼다.

라플라스 역시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엘프들의 생존을 위해서 양심을 버리고 정의에 눈감아버렸다. 생존의 위기이니 어쩔 수 없다 여기며 엘프들 모두를 악한 길로 이끌었다.

‘아니, 전부는 아니지.’

생존을 위해 양심을 벗어던진 경험이 없기 때문일까. 프라우 그 아이는 당당하게 차별이 옳지 않다고 말했다. 인간 애인도 혼혈 아이도 부끄럽지 않다고 주장했다.

자기도 한때는 그렇게 옳다 믿는 일을 당당히 주장할 수 있었다. 누가 뭐라 하든 힘껏 추진할 수 있었다.

지금 그의 눈 앞엔 거대하고 움직이지 않는 장애물이 있었다.

루실리카가 살며시 손을 뻗어 라플라스의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죽여야 할까.’

루실리카의 손가락이 라플라스의 얼굴을 타고 내려갔다. 이마를 거쳐 코에 닿자 약한 숨결이 느껴졌다.

편한 호흡은 아니었다. 공기 정화 마법이 있어도, 죽어버린 세계의 생기 없는 숨결은 라플라스를 서서히 침식해 들어갔다.

입술과 턱선을 따라 내려가던 손가락이 목에 머물렀다. 라플라스가 바뀌지 않으면 엘프들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라플라스를 바꾸는 게 불가능하다면.

라플라스가 없는 엘펜하임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가 엘프들을 위해 몸 바쳐 희생해 왔다는 건 누구보다 루실리카가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암살로 끝나서는 안 된다. 소용없더라도 다시 한 번 설득해 봐야 했다.

그리고.... 라플라스가 없어지고 나면 황제가 엘프들을 어떻게 할지는 루실리카도 무서웠다.

‘모두 핑계야. 내가 라플라스를 죽이고 싶지 않은 거야.’

루실리카의 손끝이 라플라스의 목에서 떨어졌다.

“으.....”

루실리카의 결심을 기다려주기라도 한 것처럼 라플라스가 깨어났다.

“아, 루실리카.”

그를 알아본 라플라스가 생긋 웃었다. 그리곤 루실리카가 손을 빼기 전 그 손을 잡아 자기 얼굴에 부볐다.

“보고 싶었어요.”

“어제도 봤잖아요.”

“네, 그랬죠.”

“....황궁에만 다녀오면 이러는 것 같은데, 황제가 많이 괴롭히나요?”

라플라스의 움직임이 잠깐 멎었다. 그러나 루실리카가 뭐라 그 의미를 생각하기도 전에 그가 다시 루실리카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거긴 좀, 인구밀도가 높아서 그런지, 지내기 편치는 않아요.”

“그것뿐이에요? 당신의 생체 정보를 이용해 강화 병사를 만들어내는 작자들인데.....”

라플라스는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이 체제가 고착한 뒤부터, 라플라스는 절대로 루실리카를 황성에 데려가지 않았고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말해주지 않았다. 라플라스의 친위대들도 입을 꾹 다물었다. 루실리카가 답답한 나머지 조슈아에게 물었을 때는 황당하게도 ‘사랑받고 있네. 좋겠다...’라는 반응이 돌아왔었다.

“네, 여전히 말해줄 생각이 없다 이거죠. 그럼 식사나 합시다.”

루실리카가 손을 빼려 했다.

라플라스는 놔주지 않았다.

“...라플라스?”

“조금만 더 이러고 있을게요.”

“식사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죠.”

멸망 이후, 이슬에는 자연의 정기가 모이지 않게 되었고 라플라스는 이제 남들과 똑같이 식물과 동물을 끓여 식사를 해야 했다.

“먹는다고 별로 영양이 되는 것도 아닌 걸요.”

“그래도 안 먹는 것 보단 낫잖아요. 몸을 유지하려면 조금이라도 먹어요. 이렇게 뼈밖에 없으면서.”

루실리카가 자유로운 다른 쪽 손으로 카트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루실리카.”

라플라스가 루실리카의 손을 잡아당겨 자기 목에 갖다 대었다.

“절 연명시키려 노력해도 소용없어요. 알지 않나요? 생명의 정기는 고갈됐고 정령들조차 사라졌어요. 저도 오래 버티진 못합니다.”

“지금까지 버텨왔잖아요!”

루실리카는 손을 빼려고 했다. 그러나 라플라스는 루실리카의 손에 자기 손을 겹쳐 목을 조르는 것처럼 꽉 눌렀다.

“필사적으로 버텨왔지요. 엘프의 발전도 성장도 행복도 아닌 그저 생존을 위해 필사적이어야 했던 나날이었어요. 단지 그걸 위해, 다른 가치 있는 모든 걸 던져버리고.”

“라플라스!”

“우린 왜 이런 시절을 겪어야 했던 걸까요.”

루실리카가 마침내 라플라스의 손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섰다.

“죽고 싶지 않아요, 루실리카. 저도 죽는 건 무섭습니다.”

라플라스는 울듯이 일그러진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저는 많은 죽음을 보아왔습니다. 사랑하던 이들의 죽음에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제가 살아있음을 원망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가 마침내 고개를 돌려 루실리카를 바라보았다.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이번에야 말로, 제가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죽게 될 테니까요.”



프람이 마석 주머니를 거꾸로 들어 좌라락 쏟았다.

작은 무더기를 이루며 굴러 내리는 마석을 보고 요한도 샬롯도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우리.... 오늘 대체 몇 마리나 잡은 거지요?”

“유생체 타입 28마리, 그림자 타입 14마리, 찌꺼기 타입 4마리.”

로드가 요한의 혼잣말 같은 물음에 답했다. 프람이 놀라 로드를 보았다.

“그걸 다 세고 있었어?”

“훈련이니까. 어떤 훈련을 얼마나 했는지 알아두는 건 당연하잖아?”

“그...렇지.”

“이걸 정말 우리 셋이서 다 했다고?”

샬롯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좀 정신없이 싸우고 또 싸우긴 했지만, 저쪽 둘은 강하다고 소문난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루 만에 한 달 치도 더 벌어? 이거면 집도 사겠다.”

샬롯이 혹시 니들한텐 이게 평소 상황이냐고 묻는 표정으로 프람과 요한을 노려보았다. 두 사람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샬롯 너도 충분히 잘해줬어.”

로드가 말했다.

“유효타 횟수를 기준으로 프람이 34, 요한이 43, 샬롯이 23% 정도 기여를 했지.”

“미.... 그걸 다 셌어? 계산했어?!”

“지금은 훈련 교관이니까.”

사실은 뮤가 계산해준 거지만, 프람도 샬롯도 그를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니 조금은 허세를 떨어 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로드가 태연히 말했다.

“내가 싸운 건?”

프라우가 자기 마석 주머니를 던지며 투덜거렸다.

“장외 정리는 빼는 거야?”

“그럴 리가.”

로드가 프라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몰려드는 몹들을 적절히 처리해준 덕에 오늘 실전 훈련이 안전하게 잘 끝났어.”

“아, 오늘은 그것도 이상했어!”

프람이 소리쳤다.

“악마가 정말 끝도 없이 몰려왔잖아. 전에도 대악마 나타나서 정리에 동원돼 본 적 있지만, 이 지경으로 달려드는 건 한 번도 본 적 없다구. 오늘은 평소보다 훨씬 힘 안 들이고 쉽게 잡긴 했지만.”

그가 로드를 흘끔 보았다.

“칸나 없었으면 어림도 없었어. 평소대로였으면 싸우는 게 뭐야, 아주 깔려죽었겠다. 근데 다른 사냥꾼들은 이러지 않았던 것 같아.”

“우리 쪽 1, 2군 인원도 다 큰 부상 없이 복귀했습니다. 다른 팀에겐 평소 상황이었단 뜻입니다.”

요한도 맞장구쳤다.

“혹시 이것도 로드께서 안배하신 일입니까?”

“비슷해.”

로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악마들은 그를 노리고 몰려들었을 것이다. 회귀를 하면 그의 인과율이 증폭되는 대신 적대하는 힘도 강해진다. 그게 이 세계에선 이런 형태로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악마 하나하나가 강해지는 것보단 떼로 몰려오는 게 훨씬 나았다. 이렇게 훈련에 도움도 되고.

“대체 로드의 능력은 어디까지입니까.”

요한이 경외에 찬 시선을 보냈다.

“아니, 그렇게 띄울 필요는 없어. 나 혼자선 싸움도 제대로 못하고.”

“하지만 네가 지시하는 대로 싸우면 더 강한 마법도 쉽게 쓸 수 있게 되는걸.”

샬롯이 두 손을 모아 불꽃을 띄웠다.

“내가 하려고 하면 이 정도밖에 안 되는데, 아까는 대체 뭐였지.”

“아까도 불꽃 자체의 위력이 강해진 건 아니었어. 적의 약점에 타이밍 맞춰 찔러 더 큰 효과를 본 거지.”

로드가 말했다.

“그 외엔 마력 운용을 좀 다듬어 준 것 뿐이야.”

“적들의 약점이나 상태도 볼 수 있고, 마력도 읽을 수 있고. 싸움은 못 해도 과연 왕이라 이건가.”

샬롯이 감탄했다.

“경험에서 배운 거야. 난 너희들이 전성기일 때 어떤 상태인지 아니까, 거기에 맞춰서.”

“그럼 여기서 더 강해지려면 우리 뭘 하면 돼?”

프람이 눈 반짝이며 물었다.

“프람의 경우는, 무엇보다 듀렌달을 되찾아야겠지.”

“그래. 이런 낡은 검으로는 힘을 내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샬롯의 경우엔 마력을 집중시키는 훈련을 더 하면 공격력이 나아질 거야. 마법을 새로 배우기 전까진 그런 식으로 전투에 익숙해지고 마력을 가다듬도록 하자.”

“완전 맡겨놓은 것처럼 말하네. 마법을 가르쳐 줄 정도로 인간이나 하프엘프에게 우호적인 엘프 마법사라니 어떤 인물일지 난 상상도 안 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제는 샬롯도 내심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요한은....”

로드가 난처한 표정을 했다.

“제 성장에 문제가 있습니까?”

“아니. 다양한 상대와 싸우며 스스로 잘 훈련해왔기 때문이겠지만 지금 네겐 흠잡을 곳이 별로 없어. 체력 소모가 큰 게 걱정이지만 그건 식단을 개선하는 편이 빠를 거고.”

“그럼 무엇을 우려하고 계시는 겁니까?”

“슬슬 성장 한계에 부딪칠 것 같아서. 뮤. 아침에 부탁한 건 알아봤어?”

“응.”

내내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뮤가 깨어나듯 반응했다.

“도시 장벽 내에, 조건에 맞는 재화를 다량 축적한 곳이 있어.”

“다행이군. 어딘데?”

“엘프들이 마탑이라 부르는 연구시설.”

“아... 역시.”





로드가 없었던 세계 10 - 코드네임 칸나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안타깝게도 조슈아가 라플라스 살해 계획을 구체화하기 전에 저 멀리 남쪽으로부터 작은 움직임이 보였다.

“.......정말 기차가 오네.........”

안 오면 여기서 밤을 샐 판이니 와서 기쁜데 기쁘지 않았다. 조슈아가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사이 기차는 점점 이들에게 가까워졌다.

괴수가 나타난 주변은 전투 때문에 땅이 엉망이었다. 선로도 별로 무사하진 않아서 기차는 이들에게서 한참 떨어진 곳에 멈춰섰다.

제일 먼저 기차에서 뛰어내려 달려온 건 루실리카였다.

“라플라스! 괜찮아요?”

앞서있던 조슈아 옆을 쌩 지나쳐 루실리카가 라플라스를 잡고 좌우로 돌려가며 멀쩡한지 확인했다.

“괜찮습니다. 루실리카도 우리가 무사히 이길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기차 끌고 달려온 것 아닌가요.”

“그야 그렇지만요....”

루실리카가 거대한 괴수의 사체를 올려다보았다.

“이건.... 무슨 성 만한 크기잖아요. 난 보고가 과장됐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무사히 이겼답니다.”

라플라스가 방긋 웃어주었다.

그 모양을 물끄러미 돌아보던 조슈아가 기차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의 옆으로 철도 관리대 대장이 따라붙었다.

“저, 루인님께서는.”

“나도 알아. 비상 시국에 결정권자들이 모조리 뉴 사이런딜을 비우면 어떤 꼴이 나겠어? 직접 쫓아 나온 루실리카 쪽이 이상한 거지.”

“네. 명령하신 대로 도시 방비는 철저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 저건 잡았지만 그걸로 끝일지는 알 수 없으니 이동 능력 출중한 에이전트를 골라서 정찰을 내보내야 하고....”

조슈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중장비 가져왔지?”

“예, 대형 악마에서 마석을 채취하려면 필요하니까요. 딱 봐도 두개골이 두꺼운 게, 시간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객실에서 쉬고 계시면 당장 작업 들어가겠습니다.”

“아니. 두개골이 아니라 목뼈를 잘라라.”

“.....예?”

“저거 머리, 가져가겠다고.”

조슈아가 뒤를 손짓했다.

“저거 어때 보여. 악마 좀 잡아본 니들 보기에도 질릴 크기지?”

“네, 그야.....”

“그러니 사이런딜 주민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어?”



프람도 요한도 샬롯도, 북문 앞 공터에 떡하니 나타난 괴수 머리를 보고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공작과 총독 단 둘이서, 별다른 부상조차 없이 저걸 잡아 가져온 거라는 말이 여기 모인 사냥꾼들 사이에서 한창 웅성웅성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 과장이겠지?”

한참 만에 샬롯이 입을 떼었다.

“이렇게 사람들 겁주려고, 사실은 부하들 잔뜩 데리고 함정 같은 것도 파서.”

“아니, 내가 아는 조슈아와 라플라스의 전력이라면 둘이서 저걸 잡을 수 있다.”

로드가 단언하자 프람과 샬롯은 물론이고 요한마저도 눈을 홉떴다.

“정말입니까? 아니, 의심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저래서는 어떻게 저희가....”

“그리고 너희들도 저 정도는 할 수 있다.”

요한은 입을 다물었다. 대신 프람이 나섰다.

“아니, 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설령 멀쩡한 세계의 우리는 저런.....”

프람이 문자 그대로 집채만 한 머리를 흘끔 보았다.

“저런 걸 잡을 수 있었는지 몰라도, 여기선 그냥 좀 남보다 잘하는 악마 사냥꾼에 불과하다고. 제대로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고.”

“사람들의 잠재력을 최대로 끌어내어 성장시키는 방법을 내가 알아.”

로드가 말했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서로 합 맞춰보고 포메이션을 연습....”

“어이, 프람!”

프라우가 손을 흔들며 이들에게 달려왔다. 프람이 질색해서 뒤로 물러났다.

“이름 부르지 마. 친한 척 하지 마!”

“그치만.”

가까이 온 프라우가 로드를 가리켰다.

“부를 수는 없잖아. 그리고 그나마.”

그가 로드 쪽으로 머리를 기웃했다.

“빼고 일행 중 대장을 뽑으라면 너 아냐?”

“그러네. 저 .....도 제일 먼저 만났댔지.”

프라우와 말 섞기 싫은 샬롯이 제일 먼저 발을 빼었다.

“엘프가 날 친한 듯 부르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 가드들부터 수상하게 여길 거고.”

요한도 물러났다. 혼자 남아 당황하던 프람이 어떻게 좀 해달라는 눈빛으로 로드를 보았다.

“어... 원래 프람이 기사단장이긴 한데....”

“와, 나 완전 왕따.”

프라우가 감탄했다.

“너희들, 그렇게 프라우와는 말도 섞기 싫은 거야?”

“싫은 건 아닙니다.”

요한이 서둘러 부정했다.

“다만 이런... 남들도 볼 수 있는 자리에선.”

요한이 주변을 흘끔거렸다.

“속죄자들은 엘프 가드들에겐 감시 대상이라서, 엘프와 친한 것처럼 보이면 저 사람에게도 좋을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이렇게 모여 있는 것도 문제 아냐?”

“지금이야 사냥 대비 중이고 요한은 바로 옆 구역이니까.”

프라우가 말했다.

“서로 싫어해도 사냥꾼은 사냥 때 정도는 협력해. 이렇게 단체로 나가게 되면, 최소한의 협력도 안 했다간 모두 죽을 뿐이니까. 니들이 내가 싫어도 할 수 없어. 우리 할당 구역 받아왔으니 그만 떠들고 가자!”

뒤엣말은 남들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인 뒤 프라우가 앞장서서 걸었다.

저런 거대 괴수가 나타나 자잘한 악마나 찌꺼기들이 창궐할 우려가 있다며 총독부에선 사냥꾼들을 징발해 도시 밖 구역을 할당하고 소탕하게 했다. 그러면서 평소엔 혼자 다니던 사냥꾼들도 위험하다는 이유로 강제로 다른 사람들과 팀을 짜게 했다.

로드는 뮤를 이용해서 프라우 프람 샬롯이 한 조가 되도록 추첨을 조작했다. 요한은 표면상으론 자기 부하들과 나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나가면 이들에게 합류하겠지만, 사냥꾼들이 조대로 잘 다니는지 누가 감시하지는 않으므로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부를 이름은 있는 게 좋겠어.”

샬롯이 로드 옆으로 따라붙었다.

“언제까지나 손으로 가리키거나 묵음으로 말할 순 없잖아. 암호려니 하고 별명이라도 하나 지어. 사람 이름 같은 걸로.”

“음.....”

로드가 고민했다.

“나는 작명엔 별로 자신이 없어서, 기사단도 그냥 아발론 기사단인걸. .....그러고 보니.”

로드가 프람을 돌아보았다.

“아발론 성은 어떻게 됐지?”

“그 지역은 죽음의 땅에 먹혔으니까, 이젠 그냥 돌무더기가 되어 있겠지.”

프람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쪽으론 가보질 않아서 나도 잘 몰라.”

“그래.... 그럼 칸나도 없겠구나.”

“그건 누군데?”

“아발론 왕성의 요정. 기사들의 장비 관리를 도와줬어.”

로드가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칸나가 좋겠다.”

“뭐가?”

“로드의 가명으로 말이야?”

블레이드를 타고 공중에 떠올라있다 내려온 프라우가 물었다.

“그래.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의 이름이야. 의미상으로도 맞고... 나라도 칸나를 기억하고 싶어.”

“이름이 불리는 한 잊혀지지 않는다, 이거야? 뭐, 괜찮네. 코드네임 칸나. 메타적으로도 어울리고.”

“어울리면 어울리는 거지 메타는 또 뭐야?”

프람이 투덜거렸다.

“그럼 앞으론 남들 듣는 데선 칸나라고 부른다. 니들 생각에도 괜찮지?”

요한도 샬롯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러분 좋은 소식이 있어.”

프라우가 말했다.

“위에서 보니 저 쪽 한 500m 전방에 멧돼지 정도 크기 소형 악마가 여섯 마리 떼거리!”

“뭐? 그런 건 일찍 말하라구!”

프람이 검을 빼들고 앞으로 나섰다.

“한 명씩 현재 기량을 보고 싶었는데 갑자기 단체전이 되었군.”

로드가 난감하단 어조로 중얼거렸다.

“뭐 어때, 시간이 남는 것도 아닌데 화끈하게 실전부터 가자고!”

“아니, 넌 빠져.”

로드가 프라우의 옷을 잡아당겼다.

“엥? 왜?”

“지금은 저 셋의 실력을 높이는 게 우선이니까. 넌 날 보호해.”

“칫.”

“어차피 잡몹한텐 관심 없잖아? 자, 프람, 요한, 샬롯. 내가 지시하는 대로 싸우는 거다.”

“알았어.”

“로드의 명을 받듭니다!”

“이상한 지시면 안 들을 거야!”



노크 소리에 루실리카가 깃펜을 내려놓았다.

“루실리카님. 바쁘신 것은 알지만 식사는 하셔야지요.”

“아, 다닐. ...시간이 벌써 이렇게.”

루실리카가 책상에서 일어나 몸을 쭉 폈다.

“저녁은 라플라스와 먹을 테니까 식사는 그쪽으로 갖다달라고 전해주세요.”

“예. 그렇지만, 라플라스님도 돌아오셨는데 루실리카님은 이제 쉬셔도 괜찮지 않습니까?”

루실리카는 잠깐 말을 고민했다.

“그렇긴 한데 이번엔 오는 길에 거대 괴수까지 잡았잖아요. 피곤할테니 며칠은 더 쉬게 두고 싶네요.”

“예, 그건 그렇죠.”

다닐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자랑스러움이 떠올랐다.

“그 머리만 봐도 얼마나 엄청난 전투를 치르셨을지 바로 알겠습니다. 동원한 사냥꾼들도 그걸 보고 다 놀라서 끽소리도 못했다 하니, 적어도 당분간은 불온한 움직임을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그건 다행이네요.”

인간 사냥꾼은 골치아픈 존재였다. 뉴 사이런딜과, 그보다 남쪽에 위치한 다른 많은 정착지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악마와 싸울 수 있는 사냥꾼은 많을수록 좋았다. 그러나 엘프 통치자 입장에선, 마력과 무기를 지니고 전투력을 갖춘 인간이 늘어나는 게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엘펜하임은 원래도 인구가 적었고 재앙과 싸우고 새 땅으로 이주하면서 더욱 수가 줄어들었다. 아발론과 헬베티아를 제외한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높은 비율이 살아남았지만 재앙을 아예 안 겪은 현지 인간들에 비하면 너무 수가 적었다.

언제고 인간들 손에 몰살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인간 차별은 그만둬야 한다. 루실리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라플라스를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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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인. 신념이 있는 배반자.


아발론이 뉴 엘펜하임이 될 때 제일 먼저 항복한 유력자. 현재 총독의 행정관으로 일하고 있다. 아발론 인들의 증오를 한 몸에 받고 있지만 그 아발론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선 의사 결정 과정에 아발론인이 한 명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악명을 무릅쓰고 제국과 엘프들과 협력중.

조슈아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낮잠을 (가끔은 밤잠도) 깨울 수 있는 제국을 통틀어도 드문 인재.

조슈아가 은근히 자기에게 의존하는 걸 알고 이용하고 있다.




카르티스 폐하의 지옥행 7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별궁에 유폐된 미친 왕자에게도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 조금씩 들려왔다.
갈루스는 과거의 명성에 기대 겨우 체면 차리는 소국인 채 권력욕만 높은 첫째 왕자를 차기 국왕으로 맞았다. 다른 나라들도 타성에 젖어 안주하는 세월을 보냈다.
그동안 끝끝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건 때로 지겹고 때로 편하고 즐거웠다.

“이번 생에도 재앙이 오겠지.”

때로는 고통스러웠다.

“또 사람들이 죽을 텐데. 세상이 멸망할 텐데.”

람다는 대답 대신 체스 말을 옮겼다.
유니버스의 단말인데도 람다의 체스 실력은 평범했다. 카르티스는 이번에도 손쉽게 체크메이트를 따냈다.

“내가 이렇게 약해져서는 안 되었던 거야. 공연히 한 번의 기회를 낭비했어.”

람다가 고개를 흔들고 체스 판을 정리했다.

-마스터는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었어.
“내 행동을 판단할 권한이 없다더니?”
-스트레스 수치가 너무 높았다는 사실을 전달하고 있는 거야.

카르티스는 조금 웃었다. 이번 생엔 그도 가끔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휴식을 취했으면 다시 일을 시작해야지.”

그렇게 말하며 별궁의 침실에 다시 늘어져 누웠다.

-어떻게 할 건데?
“이번 생에 뭔가 하기는 늦었다는 건 알아.”

누운 채로 카르티스가 중얼거렸다.

“이번엔 무조건 내가 최대한 오래 살아남겠다. 그리고 내가 없을 때 유니버스에 이름을 올린 영웅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파악해서 다음 생에 참고하도록 하지.”


아까운 기분에 그렇게 말했지만 이번 생에도 역시 사람들의 행동은 한결같았다.
악수만 놓다 자멸하는 초보자의 체스 같았다. 낙후된 병기와 전술, 안이한 대응은 못 봐줄 지경이었다.
조슈아는 이번 생엔 아무런 재능도 피워내지 못한 것 같았다. 유니버스에 검색된 어느 전장에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녀석이 자초한 거다. 왜 죽는지도 모르고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한 채 죽었겠지.’

그런 생각도 이내 그만두었다. 너무 치졸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사람들 한 명 한 명에 의미 두어봐야 지칠 뿐이었다.
처음부터 조슈아의 제멋대로인 성미를 봐주지 않았어야 했다. 왕녀의 가족들이 발목을 잡게 놔두지도 말았어야 했다.
어리광 받아준다고 그들이 알아서 잘 살아남는 것도 아니었다.
거기까지 알아보는 동안 유폐되어 있던 별궁도 재앙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시종과 경비병들은 오래 전에 달아나 버렸다.
카르티스는 람다의 안내로 재앙이 미치지 않은 곳을 골라 몸을 피해가며 살아남았다.

“이 짓도 슬슬 끝내볼까.”

그 한 사람 살아서 숨을 만한 장소는 아직 남아있었으나 이번 생에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얻어내었다. 그런 결론에 도달하니 이번 생에 미련은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결국 다시 갈루스의 왕이 되어 모든 인물들과 나라들의 운명을 바꾸는 길을 시도해야 했다.
이번 생엔 조슈아의 인생 궤적을 따로 조작하지 않았다. 그저 무력을 얻기 위해 갈루스 전체의 기술 수준을 높이고 복지 정책을 폈다. 그리고 람다와 유니버스의 존재는 신하들에게 철저히 숨겼다.
이제까지도 신하들에게 자신의 큰 그림을 설명하자니 어쩔 수 없이 알린 것뿐이었다. 어차피 이젠 신하들을 굳이 납득시키지 않고도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을 만큼 요령도 생겼고 자신감도 충분했다.
낯선 개혁에 반감 갖는 신하가 어지간히 드센 인물이라 해도 정책이 성공한 것을 이미 보고 온 사람처럼 밀어붙이는 왕 앞에선 기가 꺾였다.
그렇게 갈루스의 국력이 팽창하자 이번엔 좀더 일찍 각국에 기술을 전파했다. 오차 범위 내라고 해도 그렇게 재앙이 일찍 닥칠 수 있다면 그도 서둘러야 했다.
한동안은 순조로웠다. 델로스 동맹들은 갈루스를 의심하면서도 기술은 탐냈다.
그렇게 동부 대륙 전체가 갈루스의 영향 아래 놓인 다음엔 중부 대륙 차례였다.
알드 룬의 왕과 1왕자는 이전 생에서보다 갈루스를 경계했지만 무역 협정과 기술 교류는 받아들였다. 그래도 바네사에겐 소개시켜주지 않았다.

“상관없다.”

유니버스를 훑어보며 람다에게 단언했다.

“일찍 왕녀와 손잡는다고 해서 재앙과 싸울 때 더 강해지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으니 굳이 접근할 의미도 없다.”
-그래.
“파블리첸코 중령도 마찬가지다. 억지로 일찍 접촉한다 한들 능력 향상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리브리안과의 국교만 상하는 일이 되겠지. 델로스 동맹을 자극하느니 중부 대륙에 집중하자.”
-그래. 로잔나 데 메디치, 헬가 슈미트, 발터 베른하르트의 검색이 끝났어.


사르디나 종신 통령과의 회담은 각오했던 것보다 더 골치아팠다.

“동쪽 끝 내륙에 처박힌 나라에서 사르디나까지 와서 원하는 게 고작 이런 거라고? 다케온과 문레이크와의 동맹 주선?”

사르디나의 통령이란 중부 대륙 한 나라의 수장만이 아니었다. 서부와 중부, 중부와 동부를 잇는 거의 모든 해로를 장악한 바다의 제왕 로잔나 데 메디치라는 뜻이었다.
로잔나 외의 다른 인물이었던 적이 없었다.

“문레이크와 유의미한 교류를 나눈 국가는 근 백 년 간 사르디나가 유일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예외를 만드는 일이니 고작이라고 할 순 없겠지요.”

로잔나의 앳된 얼굴은 싸늘하기만 했다.

“그렇게 잘 알면서 문레이크에 기웃대는 이유가 뭐지? 거기는 무역을 할 만한 나라가 아니야. 실익이 없다고 실망해도 난 모른다.”
“무역을 노리는 게 아닙니다.”

로잔나 통령은 남들도 다 자기처럼 타산적인 이유로 움직일 거라 믿는 사람이었다. 보통은 그게 맞겠지만 카르티스처럼 세계를 구하려고 코앞의 이익은 포기하는 사람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지.”

람다만큼이나 작고 앙증맞은 손가락이 대리석 테이블을 두드렸다. 불로불사의 힘에도 불구하고 낚싯줄, 작살, 노와 키 등 온갖 장비들의 굳은살이 다 박인 손이었다.

“그런데 그 쪽이 더 문제야. 문레이크의 비밀을 알면 평범한 해상 무역엔 득 될 게 없어도 고대 마법과 강력한 마법 장비들을 다룰 길이 열리거든. 바다 속 인간과 교류를 끊은 종족들에게 다시 접촉할 수도 있고.”

바다를 닮은 눈동자가 카르티스를 노려보았다.

“지금 동부 대륙의 모든 나라들이 갈루스의 돈과 기술에 의존하게 되었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냐, 애송이? 사르디나까지 그런 처지로 만든 다음 인간이 알 필요 없는 마법과 지식을 손에 넣으면 그때는 세 대륙 어디서도 갈루스에 대항할 꿈도 꾸지 못하게 되겠지. 꿈이 너무 크구나.”
“내가 원하는 건 세계 정복이 아닙니다.”

카르티스는 간곡하게 설득했다.

“갈루스에서 동부 대륙 각지에 전파한 기술은 각국을 갈루스에 의존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 반대지. 사르디나도 그렇게 될 겁니다.”
“허.”

로잔나는 코웃음만 쳤다.

“일국의 왕이 자선사업가처럼 말하면서 믿어주길 바라는 거냐?”
“2차 마도대전 같은 일이 또 벌어지는 것을 상상해 본 적 있습니까?”

로잔나의 얼굴이 굳었다.

“내가 세 대륙 전부를 탐하는 야심가라도 지금은 정복에 정신팔지 않을 겁니다. 그 전에 살아남아야 하니까.”
“...맹랑한 소리를 하는구나.”

로잔나가 싸늘해진 얼굴 그대로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겁이라도 먹을 줄 알았나보지? 마도대전은 너같은 애송이가 함부로 입에 담을 일이 아니야. 나와 사르디나가 맞서 싸우며 발버둥치는 동안 세상에 있지도 않았던 주제에, 거기서 살아남은 노인들에게 뭔가 아는 척 하지 마라.”


문레이크는 일반적인 국가의 정의에 들어맞지 않을 정도로 그곳만의 법칙으로 움직이는 곳이었다. 다케온은 용병들이 모여 만든 신생국가로 왕인 아슬란이 사르디나 통령의 두 측근과 생사를 함께했던 사이였다.
사르디나의 경계를 사자 문레이크는 문턱도 디딜 수 없었고 아슬란과의 협약도 형식적인 선에서 그쳤다. 재앙이 오면 용병 고용 형태로 협조할 수 있으리란 희망만 겨우 얻었다.
게다가 서부 대륙은 가는 것도 사르디나의 협조 없인 불가능했다. 알드 룬과 엔타로니아의 배는 중부 대륙을 건너뛰어 서부 대륙까지 직항할 수 없었다.

‘갈루스가 내륙에 위치한 게 원망스러울 정도군.’

유니버스를 검색하며 이마를 짚었다.
알드 룬과 엔타로니아도 전면적 협조라기보다 일시적 거래관계에 불과했다. 갈루스가 동부 대륙의 동쪽에 위치한 내륙이라는 사실이 이런 식으로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로잔나 통령의 아집만 아니어도......’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로잔나 통령은 그렇게 쉽게 제거될 인물이 아니었다.
갈루스 왕실은 왕자부터 하인까지 툭하면 죽어나가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자라는 게 끔찍해서, 그리고 재앙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하려고 하는 일이기에 최대한 적은 사람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매번 살아서 즉위하기 위해 큰형님을 일찍 죽인 것도 사실이었다. 측근이 배신해 죽이도록 방치한 삶도 몇 번 있었다.

‘그 둘이 뭐가 다르지?’

조슈아가 자살했던 삶 때, 알드 룬의 1 왕자는 정말 구조하기 늦은 상태였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유니버스 검색조차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그를 죽였다.
재앙에 맞서기 위해 자신은 이미 거듭 살인을 저질렀다.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검색장소를 엔타로니아로 옮겼다.
갈루스와 카르티스를 믿지 못하고 지금 정도의 협력도 위험하다고 반대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물론 재앙이 온 후로도 방해만 되는 인물들이었다.
이런 자들이 일찍 죽어 엔타로니아에 친 갈루스 인물들만 남는다면 훨씬 수월할 것이다.
생각에 잠겨 람다의 방을 나왔다.
유니버스를 모두에게 비밀로 하기 위해 요즘은 자신의 개인 공간에 람다의 방을 따로 마련한 다음 거기서 나오지 못하게 했다. 어쩌다 시종이나 하인의 눈에 띄면 그들의 기억을 지우게 했다.
그새 밀린 일거리가 책상에 수북했다. 점점 더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하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서류 작업을 하는 동안 중신들의 알현도 받고 있었다. 오늘은 특임대의 대장을 만나야 했다.
재앙에 대비하기 위한 군비 증강과 각종 군사적 조치는 기존의 정규군 체제 내에서 하기 어려운 것이 많았다. 그래서 마도장비 다루는 데 뛰어난 젊은 군인들을 따로 모아 특임대를 구성했다.

“폐하, 이번에 엔타로니아에서 시행한 합동 조사의 결과입니다.”

마도공학을 이용해 배를 강화하면 사르디나를 거치지 않고서도 서부 대륙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엔타로니아 해군이 흥미를 보인 덕에 한창 연구 개발이 진행중이었다.

“선체 강화는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보였습니다. 다만 추진력을 만족할 만큼 얻으려면 엔진을 더 개선해야 합니다.”

보고서를 낭독하는 사람은 오늘 만나기로 했던 특임대장이 아니었다. 대장이 데리고 들어온 아직 앳된 얼굴의 부관이었다.

“......이상입니다.”

낭독을 마친 조슈아 레비턴스는 재생을 끝낸 축음기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정면을 보고 섰다.
특임대장은 낭독한 내용에 따라 예산이 어떻고 기술 부처와의 협력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카르티스도 거기 귀를 기울이며 필요한 지시를 내렸다.
특임대라는 새로운 편제를 만들면서 영리하고 신기술에 빠르게 적응하는 사람으로 뽑으라고 했지 자기가 직접 명단을 뽑아주지는 않았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조슈아가 거기 들어갔다니.
논의를 마치고 카르티스는 조슈아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러자 특임대장이 먼저 소개했다.

“새로 뽑은 부관인데 아직 젊지만 장래성이 보이는 녀석입니다. 얌전하고요.”
“얌전하다고?”
“예. 입 무겁고 욕심도 안 부립니다. 출신은 한미하지만 그런 만큼 자기가 누구 덕에 제복을 입게 됐는지 똑똑히 알고 있죠. 폐하께서 즉위 전부터 추진하셨던 장학 프로그램의 성공 케이스입니다.”

로드가 없었던 세계 9 - 마왕의 똘마니들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요한은 로드가 되도록 남의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로드는 샬롯의 집으로 찾아가는 대신 속죄자들의 본부에 앉아 요한이 데려온 샬롯을 마주하게 되었다.

샬롯은 어제 자기가 뺨을 때렸던 인간을 알아보고 질색했으나, 요한을 봐서 말은 들어보겠다고 했다.

거짓으로 대충 때울 수 있는 상대도 아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로드는 샬롯에게 대부분의 사실을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자기가 황제와 동반자살 한 것만 빼고.

“조금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는데.”

로드가 말을 맺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준 뒤 샬롯이 물었다.

“그, 죽으면 시간을 되돌려 다시 시작한다는 거, 당신이 죽으면 그 세상이 끝장나고 다른 세상이 새로 시작한단 소리야?”

“결과적으로 그런 모양이 되지.”

“그런데, 한 번은 아발론에 반란 일어났던 때로 되돌아갔다며. 이... 이번 세계? 당신 입장에선, 여기선 그런 일 자체가 없었잖아. 댁이 회귀하는데 왜 그 이전 일까지 모조리 뒤바뀌는 거지?”

“그건....”

그건 실은 로드도 궁금했다. ‘두 번째 기회’ 때는 분명 그가 회귀하기 이전 상황 역시 변화해 있었다.

“회귀자가 한 명이 아니어서 그래.”

뮤가 답했다.

“마스터 한 사람의 존재 가능성이 극대화된 세계라면 언제나 비슷하겠지만, 마스터와 개체 카르티스가 합께 존재할 가능성이 극대화하는 세계는 그보단 양상이 다양해져.”

“미지수가 두 개 이상이 되면 해도 여럿이 되는 방정식 같은 거야?”

“대략 그래.”

뮤가 긍정하자 샬롯이 고민했다.

“완전 헛소리는 아닌 것 같긴 하네. 이렇게 돈도 보람도 없이 시궁창인 인생을 사느니 사기꾼에게 투자했다 화려하게 날려버리는 것도 괜찮을지 몰라. 우리 엄마만 숨겨서 보호해 준다면.”

샬롯이 요한을 보았다.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한데 내가 무슨 쓸모가 있어? 치료사라고 하고 있긴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 부러진 팔다리를 붙이는 정도고 그것도 며칠은 걸려. 황후는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치료해버린다며. 동네 조직간 항쟁도 아니고 황제랑 싸운다며 날 영입해서 뭘 어쩔 거야?”

“넌 더 강해질 수 있어.”

로드가 말했다.

“넌 전투 센스도 있고 마력 감수성도 운용력도 뛰어나. 배우지 않고도 그 정도 치유력을 운용할 수 있으니, 제대로 마법을 배우면.”

“누가 가르쳐 주는데?”

샬롯이 날 선 목소리로 반응했다.

“그 잘난 엘프들이 반쪼가리한테 마법을 가르칠까? 아님 네가 가르치기라도 한다는 거야?”

“나는 아니지만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을 알아. .....아직은 일방적으로 아는 거지만, 해 줄 거야.”

“나 찾은 것처럼, 그 사람도 찾아서 설득할 거라고?”

“그래.”

“와, 진짜 이걸.”

샬롯이 머리를 짚었다.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는 거잖아.”

“그래.”

“아이고 뻔뻔해라.”

“....그래서 싫어?”

로드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샬롯이 거기다 꿀밤을 먹였다.

“아얏...”

“그래, 한다 해. 죽기밖에 더 하겠냐.”

그렇게 말하는 샬롯은 어딘지 후련한 표정이었다.

“단, 하프엘프 어쩌고 하는 놈 있으면, 네 부하라도 가만 안 둔다.”

로드가 항복하듯 두 손을 들어올렸다.

“절대 안 그래. 나도 반대야, 그건.”

“처음 봤을 때 그 소리가 진심이었다는 건 알겠어.”

샬롯이 아주 약간 미안한 표정을 했다.

“여긴 그런 소리 진심으로 하는 사람 없어서.... 그래, 진짜 안 망한 태평한 세계에서 뚝 떨어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소리다. 왕인지는 몰라도 딴 세상에서 온 사람인 건 인정.”

“하하.....”

이전 삶의 샬롯에게서도, 어린 시절 놀림 받고 괴롭힘 당하던 때 남은 분노의 편린 같은 건 어쩌다 보일 때가 있었다.

지금 샬롯은 그 분노로 꽉 차있었다. 세상이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밉고 지긋지긋한 나머지, 로드가 하려는 일이 세상의 멸망으로 귀결될 것임을 눈치채고도 협력하려는 것이다.

자이라 때와도 비슷했다. 다만 자이라에게는 그와 싸워 플로렌스를 부순 뒤엔 부서진 우리 밖 새로운 세상을 보여줄 수 있었지만, 이 샬롯에겐 그럴 수 없으리란 점이 로드를 괴롭혔다.

세상을 ‘바로잡는다’ 같은 말을 써서 기만하고 있지만 로드가 하려는 일은 결국 이 세계의 멸망이었다. 그 사실을

프람은 온전히 믿지 않고.

요한은 알려들지 않고.

샬롯은 눈치챘으나 상관하지 않는다.

‘내 죄가 깊다....’

“로드, 그럼 앞으로 거점은 여기야?”

샬롯과의 대화가 끝날 걸 보고 프라우가 껄렁껄렁 다가왔다.

“그렇지. 너희 집은 엘프 거주구역이라 내가 돌아다니긴 좀.”

아침에 있었던 일을 상기하고 로드가 표정을 구겼다.

“그럼 나랑 짐 좀 가지러 다녀오자. 로드도 챙겨야 할 거 있지?”

“그래.”

검과 외투 정도 프라우 혼자 못 가져올 것도 아니지만 이렇게 불러낸다는 건 따로 둘만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다녀오십시오. 지내실 곳을 정돈하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요한은 순순히 둘만 보내주었다. 로드는 아침에 자기가 어떤 오해를 샀는지 요한이 몰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핑계인 줄만 알았더니 집에 와서 프라우는 정말 짐을 쌌다.

“너도 그리로 아예 옮기게?”

“아니, 그냥 짐만 좀 옮겨둘 거야. 2마탑주한테 속죄자들 본부로 연락해 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

“루실리카와 계속 연락하게 됐어?”

로드가 반색했다.

“아침엔 왜 데려갔던 거야? 가드들 기세가 험악해서, 나는 네가 무슨 말썽에라도 말려들어간 줄 알았는데.”

“중간에 전달이 잘못된 거래. 우호적인 연락이었어. 나한테 연구 과제를 맡기려고 부른 건데.”

프라우가 조금 미간을 모았다.

“좋은 소식. 루실리카는 비교적 제정신인 것 같아. 인간 차별을 타파할 명분을 찾고 있어.”

“아.”

로드가 침대에 주저앉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루실리카. 역시.”

“나쁜 소식은, 지금 루실리카에겐 라플라스를 뒤엎을 힘이 없어.”

“그건 이전에도 그랬어.”

로드는 한결 편안해보였다.

“그래서 아발론에 개입을 요청했지... 여기서도 루실리카의 조력으로 라플라스를 물리치게 되는 건가.”

“그렇게 간단하진 않을걸. 아발론 기사단은 아직 꼬꼬마고 저쪽엔 조슈아가 붙어있다고.”

“그래. 지금부터 부지런히 강해져야지.”

“강해진다니 말인데.”

이제부터 광렙노가다냐고 웃는 대신 프라우가 진지한 얼굴을 했다.

“샬롯에게 마법을 가르칠 사람, 루실리카야?”

“응.”

“정말로? 그 사람은 마법보단 백병전 타입 아냐?”

로드가 슬며시 눈을 피했다.

“..........로드, 여기 라플라스는 프람의 부모의 원수인 거 알고 있지?”

“너는 왜 그리 눈치가 빠른데.”

로드가 한탄했다.

“알아. 라플라스를 안 죽이고 영입하면 프람이 화내겠지. 화만 내지도 않을 거야. 나도 더 이상 프람에게 못할 짓 하고 싶지 않아. 그렇지만.”

로드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여전히, 누굴 죽여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그런 말을 하며 로드는 결의에 차거나 확신이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슬프고 비참해보였다.

“그러다 이런 지경에 처박혔다는 거 알아. 알지만.... 카르티스가.”

로드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가 ‘나다운 것이 뭔지 알 수 없어졌다’고 했잖아. 그리되는 건 싫어. 그렇게 돼서는 안 돼. 내 방식이 틀렸다면 고치겠지만, 아직은.... 이제 겨우 두 번 째 시도해봤어. 누구도 죽게 버려두지 않겠다는 이상을 틀린 것으로 치부하고 버릴 수는 없어.”

“프람을 상처 입히더라도?”

“프람을 상처 입히더라도.”

“뭐, 좋아.”

프라우가 고개를 끄덕이곤 챙긴 짐가방을 둘러메었다.

“그게 내 왕이 선택한 길이라면.”

“그걸로 괜찮아?”

로드가 물었다.

“너는 이런 나여도 재미있는 거야?”

프라우가 말없이 다가와 로드를 끌어안았다.

“난 체자렛이 아니야. 로드가 괴로워하는 건 당연히 안 즐거워. 그렇지만.”

프라우가 로드의 정수리에 키스했다.

“무엇이 옳은지 어째야 좋을지 고민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자기 이상을 관철하려고 애쓰는 로드를 보는 건.... 그건 솔직히 좀 즐거워.”

로드가 프라우를 밀어내었다.

“악취미야, 너.”

“로드가 너무 매력적이어서 그래.”

프라우가 헤죽 웃었다.

“자, 그럼 가자고. 세상을 구... 아니지, 멸망시키러.”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마왕 같잖아.”

한탄하면서도 로드가 그를 따라 집을 나섰다.

“것도 괜찮은데? 그럼 난 마왕의.. 기사는 이상하니까, 마왕 똘마니가 되는 건가?”

“프라우!”



서서히 어두워져가는 하늘에 붉고 푸른 석양이 펼쳐졌다. 생명이 죽어버린 황야 위로 얼룩지는 붉은 빛은 장엄하기보단 섬뜩해서, 보는 사람을 압도했지만 이미 반쯤 죽은 눈을 하고 있는 조슈아는 그런데 영향 받을 섬세한 감수성 따윈 갖고 있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은 왜 다 결과가 이 모양일까...”

조슈아가 한탄했다.

괴수를 잡지 못한 건 아니었다. 거대한 적과 날뛰는 아군 덕에 죽을 만큼 고생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괴수는 완전히 쓰러져 30분째 미동도 없고 조슈아도 라플라스도 위급한 부상은 없었다.

그저 괴수의 피로 진창이 되어가는 맨땅을 홀로 딛고 서서 사이런딜까지 어떻게 가야하나 여기서 밤을 보내야 하나 고민할 일이 남았을 뿐이었다.

‘나 왜 열심히 싸웠지. 그냥 적당히 손 놓고 뒈질걸.’

지쳐서 주저앉고 싶은데 적당히 걸터앉을만한 돌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허공에 엎어져있는 라플라스의 본을 받기엔 염력으로 자기 몸을 띄우는 건 휴식보단 노동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경계 안 해도 이 주변엔 더 없어요.”

라플라스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싸움도 끝났는데 쉬지 그래요?”

“태평도 하시네요.”

조슈아는 이를 갈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대답했다.

“여기, 뉴 사이런딜에서 못해도 150km는 떨어져 있단 말입니다. 허허벌판에 우리 둘 뿐이고 해까지 지고 있는데, 당신은 걱정도 안 됩니까?”

“예.”

라플라스가 하품을 했다.

“늦어도 한 시간 이내에 루실리카가 올 테니까요.”

“네?”

조슈아는 기가 막혔다.

“아까 그런 명령은 없었잖습니까?”

“인간은 꼭 명령을 해야만 움직이나요. 엘프들은 상황을 스스로 판단해서 알아서 행동하는데.”

조슈아는 잠시 여기서 라플라스를 살해한 뒤 재앙에 의해 죽었다고 둘러대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보았다. 염력으로 으스러뜨린 다음에 괴수 발에 깔려 죽었다고 하면 통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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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롯. 불. 타오르는 분노. 세상을 고치고 싶지만 무력함.


정령이 없는 세계의 정령사. 아픈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다.

엘프도 인간도 다 싫다. 배우지 않았지만 마력을 다룰 줄은 알아서 동네 힐러로 밥벌이하고 어머니 병구완 중. 급전이 필요하면 사냥에도 나선다. 약자는 무조건 감싸는 속죄자들과는 그럭저럭 협력관계.

아버지와 살았던 기억은 희미하지만 전쟁을 앞두고 사라진 건 틀림없기에 아버지를 증오한다. 콱 죽어버리고 싶어도 어머니가 눈에 밟혀 꾸역꾸역 살 수 밖에 없다.



카르티스 폐하의 지옥행 6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첫 번째 삶에서 보았던 조슈아의 죽음을 떠올렸다.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무력하고 허망한 죽음이었다.
누구의 목숨도 건지지 못했다. 그 본인은 물론 카르티스의 목숨도 단 몇 분 연장했을 뿐인,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 죽음이었다.
조슈아의 안색이 푸르게 변해가는 걸 보고 마력을 움직여 풀어주었다.

“......알겠습니다.”

다치지 않도록 아주 가볍게 눌렀는데도 그는 일어나지 못하고 힘겹게 떨며 입을 열었다.

“제가 이토록 무력하니, 폐하께는 저 역시 그 정도 쓸모밖에 없는 존재겠군요.”

다시 그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평생을 다 바쳐 갚아도 모자랄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며 모셔왔는데, 폐하께선 그런 생각이셨군요.”

쿵쿵 소리가 나도록 몇 번이나 박고 있는데 끝끝내 하던 말을 계속 했다.

“바네사 왕녀 전하도, 근위대 녀석들까지도......방금 전에도 폐하를 위해서라면 재앙의 괴물도 두렵지 않다고 외치는 걸 듣고 왔는데...”

몇 번 더 처박자 조용해졌다.

-마스터.

람다가 울상을 지으며 매달려왔다.

-그만 해. 그러다 죽어.

카르티스는 이를 악물고 부르쥔 주먹을 떨었다.

“......안 죽인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거듭된 삶 동안 한결같이 자신의 곁을 지켜온 충신이고, 지금도 쓸모가 다 사라지지는 않았다......아마도.
기절한 채 움직이지 않는 그를 내려다보다가 호출용 종을 울려 시종을 불렀다.

“근위대장이 쓰러졌다. 과로한 모양이니 데려다 의무반에서 치료받게 해라.”
“예.”

시종은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한 태도로 조슈아를 부축해 물러갔다.
직접 봤어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여기 있는 모두가 카르티스에게 의지하는 중이고 조슈아는 그의 가장 신임받는 신하니까.

‘정신을 차리면 다시 달래 봐야겠군. 나중에라도 왕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발설하면 곤란해.’



그러나 새벽이 되자 람다가 먼저 불러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개체 조슈아 레비턴스가 혼자 요새를 벗어났어.
“뭐라고?”
-마스터가 알아야 할 일 같아서. 위험한 수준의 분노와 자살 사고를 보이고 있어.
“그래. 알려줘서 고맙다.”

카르티스는 이미 뛰어나가고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을 모아둔 이 요새는 그나마 당장 괴물이 나타나지는 않는 곳이었다. 그러니 무슨 멍청한 짓을 생각하고 있건 늦지 않게 따라잡을 자신이 있었다. 람다가 방향도 가르쳐주었다.
재앙이 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번화한 시가지였던 폐허를 가로지르자 금방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미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은 카르티스와 평범하게 단련된 군인인 조슈아는 어른과 아이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발소리가 들릴 정도로 거리가 좁혀지자 조슈아가 먼저 멈춰섰다.

“그렇군요. 람다 님이 절 검색할 수도 있었어요.”

천천히 이 쪽으로 돌아서는 그의 얼굴에 간밤 같은 반항심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람다에게 들은 게 있으므로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조슈아, 아직 이 세상이 끝난 게 아니다. 돌아가서 마저 할 일을 찾아보자.”
“이제까지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게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제 인생도, 갈루스라는 나라도.”

조슈아는 자신이 딛고 선 망가진 포장도로를 발끝으로 툭툭 찼다.

“제가 열 살 무렵엔 자갈길 정도만 되어도 굉장히 좋은 길이었고 고아원 앞은 비만 오면 발목까지 빠지는 흙길이었습니다. 제가 운좋게 장학 프로그램에 선발되고 수도의 기숙학교에 다니게 됐을 때부터, 그 거리도 알아보기도 힘들 만큼 바뀌더군요. 저는 너무 오랜만에 돌아와서 길을 잃은 줄 알았습니다. 편지 주고받던 옛 친구들도 절 몰라본 것처럼요.”
“그게 문제였다는 거냐? 몰라보게 좋아진 것이?”

조슈아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순전히 기쁘기만 하지는 않았던 건 확실합니다. 모든 게 신의 가호라도 받는 듯 잘 풀리기만 하는 인생은, 어렸을 때만 해도 귀족 나리님들 것이지 저같이 근본 모르는 고아의 것이 아니라고 배웠으니까요.”

주위에 당장 닥쳐오는 위협은 없었다. 그래도 카르티스는 초조해졌다.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람다 님의 존재를 알았을 때 조금은 안심했고 조금은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사육제의 마술쇼가 속임수라는 걸 처음 알았을 때 같았지요. 처음엔 폐하 말씀대로 결과가 좋으니 불만 가질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뭐라 대꾸할지 다 안다는 태도로 조슈아가 고개를 막 흔들었다.

“아뇨, 재앙 때문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도스 국왕처럼 비겁하게 구셨다면 모를까, 이대로 끝내 저 괴물들에게 죽는다 해도 폐하를 원망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설마 세상이 이 꼴이 되었는데 제가 폐하만 있으면 살아남을 거라고, 그런 공상을 품을 바보로 보였습니까? 전 폐하 품속의 젖먹이 아기가 아닌데요?”
“너는 지금 내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다.”

카르티스가 재촉했다.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제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조슈아는 차고 있던 총을 빼들어 안전장치를 풀었다.

“저도 왕녀 전하도, 이제 얼굴도 잊어버린 고아원 친구들도, 심지어 폐하까지도 다 같은 사람이라고요. 도스의 급진주의자들이 설파했던 대로.”
“네가 그런 불온사상에 귀 기울였단 말이냐?”

람다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조슈아뿐 아니라 중신들 모두의 충성심을 정기적으로 모니터링하게 했는데, 조슈아의 충성심에 이상이 있었다면 몰랐을 리 없었다.
조슈아는 피식 웃었다.

“모르셨습니까? 그런 사상이 널리 퍼진 건 폐하 덕분입니다. 재능만 있으면 저 같은 고아도 귀족보다 먼저 중용하시고, 귀한 집에 태어나지 않아도 읽고 쓰고 벌어서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게 해주신 덕분에요. 갈루스에선 그래도 폐하의 은덕에 감사하며 살면 충분하니까 괜찮았지만 인접국 사람들은 그럴 수 없었던 겁니다. 알드 룬처럼 원래 골아픈 학문이 발달한 나라나 레오스처럼 원래 왕이 없던 나라가 아닌 도스 같은 나라에서 그런 사상이 발전하고 사람들을 실제로 움직이게 만든 게 우연이 아닙니다.”

쏠 준비를 마치고도 조슈아는 총을 내려다볼 뿐 어디에도 겨누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무기도 바꾸고 군대도 바꾸셨습니다. 제가 지휘관으로 빠르게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열 살 때 보던 관점 그대로 세상을 볼 순 없었습니다. 지휘관이란 인명에 가치를 매기는 존재란 점은 예나 지금이나 같지만......계산법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전 폐하의 계산법도 저와 비슷한 줄만 알았습니다.”
“너도 승리를 위해 병력 손실을 감수한 적은 있지 않으냐. 상급 지휘관이나 신무기를 지키기 위해 평범한 병사 여럿을 희생시켜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 병사들은 자기 목숨보다 중한 뭔가를 지킨다는 걸 알고 투입됩니다. 바네사 왕녀 전하는 간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시고요. 원래 사람은 그런 식으로 이용당하면 싫어합니다. 아까는 급진 사상까지 들먹였습니다만, 자기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이야기는 오래된 교훈이지요.”
“네 그 장광설의 결론이 그거냐? 속이고 싫은 일을 시켰기 때문에 내가 잘못되었다고?”

카르티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떼쓰는 아이처럼 굴지 마라. 지금 이러고 있는 순간에도 재앙이 남은 사람들을 마저 짓밟고 있다. 네 그 어리광이 그들을 구할 수 있나?”

대답하지 않는 조슈아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두 번 말하지 않겠다. 요새로 복귀해서 남은 사람들을 계속 지켜라.”
“왕명입니까?”
“그래.”

순간 조슈아가 상쾌하게 미소지으며 총을 들었다.

“항명하겠습니다!”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할 때와 똑같은 말투였다.
카르티스의 방어는 이미 저런 총으로 뚫을 수 없는 수준이기에 굳이 막지 않았다.
그러나 총알은 정확히 겨냥한 것을 부수었다. 조슈아 자신의 머리를.


우습게도 조슈아의 때 이른 죽음은 이후의 전개에 큰 변수가 되지 못했다.
바네사와 요새에 남은 사람들은 근위대장이 절망한 나머지 이성을 잃고 자살해버렸다는 카르티스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런 식으로 재앙 앞에서 정신이 무너져 죽은 사람은 이미 많이 있으므로. 바네사는 믿던 신하를 잃은 왕을 위로하기까지 했다.
요새의 모두가 어제까지처럼 카르티스에게 의지하는 가운데 지휘관의 공백도 바네사와 카르티스 본인, 곧 합류한 올가 파블리첸코가 금방 메웠다.
그렇게 조슈아 레비턴스가 있으나 없으나 큰 차이 없이 인류의 마지막 발버둥이 계속되었고, 끝을 맺었다.
그리고 카르티스는 다시 열두 살의 침실로 되돌아왔다.
이제 눈을 뜨고 정신을 추스르고 지남력을 회복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

이번엔 움직이지 않았다. 눈도 뜨지 않았다.

-마스터? 괜찮아?
“그냥 생각중이야.”

움직이지 않은 채 입만 열었다.

“너도 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그건... 람다에겐 마스터의 행동을 판단할 권한이 없어.

보지 않아도 람다가 움츠러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니버스의 단말’이 인간이나 엘프, 수인족 같은 지성체가 아니란 걸 일찍부터 알았다. 그래서 막연히 정령 비슷한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왔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어느 쪽이건 이렇게 사람이 전적으로 의지하고 이용하게 되는 도구에 가까운 존재가 작은 소녀 모습이라니 뭔가 이상하잖아. 함부로 의존하거나 불평할 대상이 아니라는 뜻에서 한 디자인인가?’

아무튼 람다에게 졸라서 답을 들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건 받아들여야 했다. 심호흡을 하며 덮쳐오는 두통을 다스렸다.
그 다음에 할 일은 알고 있었다. 살아남아 왕위에 오르고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이제까지 몇 번이나 반복해온 일들.

‘지겨워......’

이제까지 배신하거나 아군에서 적으로 돌아선 신하들은 다 원래 충성심이 옅거나 달리 원하는 게 많은 사람들이었다. 유니버스의 존재를 아는 신하들은 불만이 있어도 감히 드러내지도 못했다.
조슈아 같은 심복이 이런 식으로 거역하고 도망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내가 이 지겨움과 고통을 참고 산 게 그런 꼴을 보기 위해서였나?’
“카르티스 전하! 일어나세요!”

또다시 시종이 깨우러 왔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모든 게 귀찮았다.
열심히 살고 재앙을 막으려 노력해도 늘 이런 결과라면, 열심히 사나 마나 마찬가지란 생각만 들었다.


첫 번째 삶에서처럼 망나니 노릇조차 하지 않았다.
모두가 잔소리를 퍼붓고 걱정하는 척 하고 의사까지 불러와도 마찬가지였다. 먹고 입고 왕자로서 최소한의 공적인 자리에 참석하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공부도 단련도 않고 놀지도 않았다.
독살이나 공격에 대비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얼마 안 가 수도 밖의 별궁에 유폐되었다.
큰형님이 자신의 행태를 과장해 정신이상으로 몰았다는 걸, 굳이 람다에게 묻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별궁에 보내지면서 시종이 전부 교체되었을 때는 조금 긴장했다.
새 시종 중에 조슈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으나, 그 예상은 빗나갔다. 모르는 얼굴들뿐이었다.
어쩌면 이제까지의 삶 속에서 스쳐갔는데 잊어버린 얼굴들일 수도 있었다.

-조슈아 레비턴스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볼까?
“그럴 것 없다.”

방에 람다와 단 둘이 남자 다시 소파에 몸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이번에 유니버스를 이용하지 않는 건 너한테 화나서가 아니야. 그냥 이번엔 유니버스를 이용할 만큼 궁금한 일이 없어서 그래.”
-응......
“이따 산책 가자. 별궁의 정원이 좀 을씨년스럽긴 한데, 예쁘게 잘 다듬어진 정원도 어차피 너무 많이 봐서 지겨워.”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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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에서 보면 도스 왕족들이 처형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왕과 왕족들의 인망이 너무 없어서 도스 사람들이 굳이 반항하지 않았다고 하지요. 그래서 동부의 여러 나라 중 도스 왕을 굳이 악역으로 골랐습니다.

로드가 없었던 세계 8 - 아발론 기사단 (임시) 결성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앞으로 어떻게 할지 로드가 생각하려는데 저쪽에서 뭔가 날아왔다.

“저게 뭐지?”

뮤가 대답했다.

“프라우 레망.”

“아.”

알고 보니 프라우가 맞았다. 작은 점으로 보이지만 주변의 블레이드라든지, 가까워질 수록 붉게 보이는 포니테일도.

“여기 있었구나!”

로드의 앞까지 순식간에 날아온 프라우가 휙 그의 앞에 뛰어내렸다.

“한참 찾았다구! 집에 없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그건 내가 나오려고 나온 게 아니라.”

“들었어. 가드한테 쫓겨났다고.”

프라우는 울 것 같은 표정을 했다.

“미안해. 여기서 인간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미리 생각했어야 했는데. 이쪽 기억은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면 바로 안 나오니까 그만 방심해버렸어.”

“그건 괜찮아. 날 찾으러 다녔어?”

프라우가 히죽 웃었다.

“프람이 인간 거주 구역 쪽으로 데려가더란 말을 듣고 이 일대를 날아다니고 있었지.”

“내가 실내에 있으면 어쩌려고.”

“뭐, 정 안 되면 여기 쪽을 장악한 조직에게 찾아달라고 의뢰하면 되고.”

“어련히 너희 집에 돌아갈 건데, 범죄 조직하곤 접촉하지 마.”

“서문도 아니고 이 근처는 그래도 자경단이 있어서 치안이 그렇게 꽝은 아니야. 유명한 전직 깡패 세력권인데, 그 사람이 이상한 종교에 귀의했다던가..... 로드?”

프라우는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있는 로드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로드가 부끄러워해?”

“그... 프라우, 그 유명한 전직 깡패가.....”

쾅 소리를 내며 옥상 문이 열렸다. 요한이 공격 태세로 검을 들고 프라우를 노려보았다.

“날아서 침입이라니. 엘프가 여긴 무슨 용건이지?”

“유명한 전직 깡패 등장.”

뮤가 소근거렸다. 부끄러워하던 자세 그대로, 로드는 웃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꽉 물었다.

“어, 요한 하이... 아 글쿠나, 요한이 이상한 종교에 귀의한 전직 깡패였구나, 그럼 로드가 그 이상한 종교여서 저러는 거구나.”

“말로 설명 하지 마...”

로드는 다시 부끄러워했다.

발소리가 하나 더 계단을 올라왔다.

“너였냐, 시끄러운 녀석.”

“오, 프람.”

프라우가 손을 흔들었다. 그 쪽은 본체도 않고 프람이 요한의 검 든 손을 눌렀다.

“저쪽은 저... 왕하고 아는 사이야. 같은 편인 것 같더라.”

“프라우 레망. 로드의 기사야.”

프라우가 장난스럽게 경례했다.

“참고로 난 니들도 알지롱. 이전 기억이 있거든.”

요한의 기색이 사나워졌다.

“짜증나는 놈이군....”

“이건 너랑 의견 일치다.”

프람도 맞장구쳤다.

“자, 싸우지 말고.”

로드가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 가 섰다.

“우린 모두 같은 편이고, 앞으로 할 일이 있어.”

“오, 로드. 목표 정했어?”

“그래.”

로드가 심호흡했다.

“최종 목표는, 이 세계의 뒤틀림을 바로잡는 것. 그러기 위해서 황제를 무찌른다.”

프라우가 휘파람을 불었다.

“단기 목표로는 내 기사들을 다시 모으고.... 뉴 엘펜하임을 무너뜨려야겠지. 조슈아도, 라플라스도.”

“나도 할래.”

프람이 말했다.

“네가 아발론의 왕이라는 거, 어디까지 믿어야 좋을지 모르겠어. 그래도 할래.”

“저는 의심 없이 로드를 따릅니다.”

요한이 말했다.

“나도 또 할까?”

프라우가 자세를 잡고 허리를 숙여 절했다.

“프라우 레망입니다, 전하. 질릴 때까지 다시 한 번 모시도록 하지요.”

“그래. 다들 고맙다.”

로드가 말했다.

“그럼 제일 먼저 할 일은 샬롯을 설득하는 거다. 요한, 샬롯을 찾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으, 짜증나......’

제국령 엘펜하임으로 향하는 기차 안. 침대까지 갖춰진 넓고 호화로운 객실 안에서 조슈아는 혼자 화를 내고 있었다.

드디어 엘펜하임으로 돌아가는 건 기뻤다. 라플라스와 같이 가긴 하지만 자기가 그의 감시역이라는 건 이미 납득이 끝난 문제였다.

지금 조슈아가 짜증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 망할 영감은 왜 출발 후에 그딴 소릴 하는 거야? 낮잠을 잘 수가 없잖아!”

조슈아와 라플라스, 그들의 부하와 여행객 이주민 철도 관리원까지 모두 태운 채 기차가 출발한 뒤 라플라스가 조슈아에게 말했다.

이번 돌아가는 길에, 이 세계에 종말이 도래한 위치를 지나갈 거라고. 그 흔적을 볼 수 있을 거라고.

‘그냥 비유 같은 게 아니었단 말이야? 정말로, 그 괴수 같은 게 또 나올 거라고?’

그것도 이전보다 더 거대하고 더 압도적인 괴물일 것이다. 이미 망가진 것보다 더, 아주 세계가 종말을 맞을 정도 피해가 생기려면.

그런 거 나타나지 말고 그냥 자고 있는 동안 대륙이 조각조각 갈라져 바다 밑으로 가라앉든가 갑자기 대기 중 산소가 사라져서 모두 질식해 죽거나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뒈지면 안 되는 걸까, 세상의 끝에 이르러서도 자신은 싸워야 하는 걸까 조슈아의 심정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심란한 건 심란한 거고 그런 말을 들어버린 이상 조슈아는 가는 동안 기차에서 낮잠도 못 자고 주위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일하기 싫은데 왜 자꾸 일을 하게 되는 걸까. 조슈아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거기다 제일 화나는 점은, 그런 소리를 지껄인 주제에 막상 라플라스 자신은 자기 객실에서 세상 모르고 쳐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라플라스랑 얼굴 맞대느니 자게 두는 게 낫다. 라플라스랑 말 섞느니 자게 두는 게 낫다... 아니 근데.’

조슈아가 주먹을 부르쥐었다.

‘생체 실험은 뭐 저 혼자만 당하나? 나 때는 더 빡셌어. 강화 약물 맞고 과부하 건 채로 염력파를 백 번 씩 쏘게 시켰단 말이야, 체자렛 님은. 그래도 황후 폐하는....’

조슈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게 얼마나 의미 없는 생각인지는 그가 제일 잘 알았다.

“그래, 지금 잠이라도 자 둬야 돌아가서 멀쩡한 척을 할 수 있겠지. 그 사랑하는 엘프들에게.”

조슈아는 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라플라스는 호문클루스 제작 외엔 모든 실험에 협조하고 있었다.

그런 걸 맨정신으로 선택할 만큼 엘프들이 그에게 중요한 걸까.

조슈아는 알 수 없었다. 그도 나름 사람들을 살리는 걸 삶의 보람으로 삼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을 사랑하거나 그들을 위해 뭐든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차피 지옥도를 걸을 거라면 그런 대상이 있는 편이 자기처럼 속에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 나을 지도 모른다고, 조슈아는 라플라스를 남몰래 부러워했다. 인정하긴 싫지만.

‘절반도 더 왔는데, 여전히 아무것도 안 나타나네.“

조슈아는 창밖의 황야에서 눈을 떼었다.

황량한 폐허 풍경을 계속 보고 있으니 우울한 생각만 자꾸 드는 거다. 어차피 호문클루스 시술을 받은 개조 에이전트 들이 열차 사방을 감시하고 있었다. 최근 몇 년 간은 급박한 전투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조슈아가 자다 일어나서 싸우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뭔 일 있으면 부하 놈들이 알아서 깨우러 오려니 생각하고 조슈아는 겉옷을 벗으며 침대로 갔다. 타이슬링도 풀어 던지고 막 벨트 버클에 손을 대려는데 누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총독 각하! 총독 각하, 큰일 났습니다!”

무슨 문제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조슈아도 이미 보고 있었다.

열차 오른편으로 저 멀리, 괴수가 다가오고 있었다.

세계가 한창 멸망하고 있을 무렵 나타났던 것 같은 어마어마하고 거대한 것이었다. 요새 나오는 ‘악마’ 따위는 큰 것도 저 다리 한짝 만 못할 것이다.

조슈아는 서둘러 저것과 열차 사이의 거리를 가늠했다. 열차의 현재 위치를 반영해 괴수의 이동 방향을 추측했다.

지금 괴수가 향하는 방향은 대략 남서쪽.

벗어놓은 옷 사이에서 펜듈럼이 날아와 그의 손에 끼워졌다.

“비상사태 방송하고 라플라스 깨워! 아니다, 그 쪽은 내가 갈테니 기차 속도 올려!”

조슈아가 앞 열차칸으로 달렸다.

라플라스의 호위대는 엘프 우월주의 성향이 강한데다 갈루스 에이전트들을 증오했다. 그야 라플라스의 골수를 뽑아 만들어진 병사들이니 좋아하라는 게 무리겠지만, 말도 전하기 전에 살해당해버리면 곤란했다.

그의 앞을 막아서는 엘프 호위병들을 뒤로 날려 처박아버리고 조슈아는 라플라스의 객실 문을 뜯어 던지며 안으로 난입했다.

“일어나시죠, 라플라스공! 당신이 말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침대 머리쪽 이불이 꾸물꾸물 움직였다.

“예? 뭐라고요?”

“멸망의 괴수가 나타났다고요!”

다급한 조슈아와 달리 라플라스는 눈도 제대로 뜨지 않았다.

“그 쯤은 혼자 하시죠?”

“.....이 영감탱이 진짜!”

조슈아가 라플라스의 이불을 빼앗아 내팽개치는 것과 동시에 열차 오른쪽 벽을 깨부쉈다.

대경실색할 만한 무력 시위에도 라플라스는 슬쩍 눈만 찌푸렸다.

“하여간 젊은이들은 성격이 급해서...”

마침내 눈을 뜨고 고개를 든 그가 부서진 열차 너머 괴수를 보았다.

늘어지던 태도는 씻은 듯이 없어지고 라플라스가 침대를 박차고 몸을 띄워 열차 밖으로 날아갔다. 그의 무기 한 쌍이 그 뒤를 따랐다.

혀를 차면서도 조슈아 역시 염력으로 자기 몸을 띄워 열차 밖으로 나갔다.

“저건 우리 둘이 상대합니다. 열차는 전속력으로 뉴 사이런딜로 향하십시오!”

엘프 호위병에게 지시하는 라플라스는 언제 골골댔냐는 듯 아주 멀쩡해보였다.

“도착 즉시 모든 주민을 보호장벽 안으로 불러들이고 전 수비병력과 악마사냥꾼을 뉴 사이런딜 주변에 배치하라!”

조슈아도 자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저런 것은 큰 게 하나 나타나고 나면 자잘한 유생체들이 떼로 증식하곤 했다. 저걸 둘이서 무사히 처리한다고 해도 도시는 방비해야 했다.

괴수는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조슈아와 라플라스만 남겨둔 채 기차가 전속력으로 멀어졌다.

“어째서, 저런 게 나타났지?”

라플라스가 중얼거렸다. 니가 예지했지 않느냐고 조슈아는 말해주고 싶었지만 곧 괴수가 교전 가능 범위 안으로 들어왔다.

펜듈럼에서 뻗어나간 마력이 괴수의 왼쪽 눈을 쳤다.

괴수가 울부짖으며 몸부림쳤다. 쿵쿵 발을 구르는 진동에 아직 충분히 멀어지지 못한 기차가 들썩이는 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라플라스가 괴수의 머리 앞으로 날아갔다. 휘두르는 앞발과 달려드는 이빨을 피해 머리로 바짝 접근하더니 방금 조슈아가 공격한 위치를 톱니바퀴로 갈아버렸다.

‘성스럽게 생긴 주제에 은근 잔인하다니까.’

자기도 할 말 없는 생각을 하며 조슈아가 정신을 집중했다.

“이만 찌그러지도록 해라!”

괴수의 앞다리 관절이 공간째 으스러졌다.

괴수는 분명 기차를 쫓아가고 있었다. 저렇게 바로 코앞에서 날아다니며 공격해도 어그로가 끌리지 않는다면 못 움직이게 해서라도 사이런딜을 지켜야 했다.

괴수의 몸이 기우뚱 하자 그것이 괴성을 지르며 몸을 흔들었다. 터져 나오는 마력에 조슈아가 물러섰다. 괴물의 눈을 집요하게 공격해 결국 안구를 터트려 버린 라플라스가 괴물이 휘두른 머리에 맞고 그의 옆으로 날아와 처박혔다.

“라플라스? 괜찮...”

라플라스가 바로 공중으로 떠올랐다.

“남 걱정할 여유가 있으면 자기나 보호하시죠.”

라플라스의 눈에 광기가 넘실거리는 걸 보고 조슈아는 서둘러 온 힘을 끌어 모아 자신을 보호했다.

라플라스가 두 팔을 들어올렸다. 하늘이 끓어올라 불덩이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괴수와, 조슈아와, 라플라스 자신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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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실리카. 암. 방황하는 신념.


제 2 마탑주란 직함은 이제 유명무실하다. 사실상 라플라스의 행정 대리인.

황제의 정책에 발맞추기 위해서라도 인간 차별을 완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대안을 찾을 수도, 라플라스에게 반항할 수도 없다. 라플라스가 타락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 덕에 엘프가 이만큼이라도 살아남은 거라 저항의 명분도 수단도 없다.

가끔 대립하긴 해도 루인과는 마음이 맞는 편. 조슈아의 게으름뱅이 기질은 매우 못마땅해한다.

 


카르티스 폐하의 지옥행 5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방문 일정은 넉넉했다.
그동안 카르티스 곁에서 바네사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갈루스 수도의 자선 병원에 함께 방문해, 바네사가 직접 환자들 앞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알드 룬에서 빈민들을 위한 자선 연주회를 열 때도 간혹 하던 일이었기에 왕녀가 그만큼이나 갈루스에도 마음을 연 거라고 대부분 호의적으로 해석했다.
물론 실제로 카르티스와 바네사가 하고 있는 일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해석들이었다.

“람다. 왕녀의 지금 상태를 말해줘.”

람다와 둘만 남자마자 한 말에, 람다는 그를 걱정스런 눈으로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검색을 해주었다.

-......책임감, 불안감. 다소의 의심.
“회복 능력과 전술 능력도.”
-구체적인 수치는 여기.

람다가 보여주는 수치를 읽으며 카르티스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째서 실력이 늘지 않는 거지. 역시 아직은 믿기 힘든 이야기라 기합이 덜 들어간 건가?”
-대상은 성실하게 노력하고 있어.

람다가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지금 의심하고 있는 건 재앙이 올지 안 올지 의심하는 게 아니야. 자기가 정말 마스터 말처럼 대단한 인물이 될 수 있는지 의심하고 있어.
“이젠 나도 의심스럽다.”

이렇게 아무렇게나 투덜거리는 것도 람다 앞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남들 앞에서 카르티스는 언제나 혼자 열 수 앞을 내다보는 완벽한 왕이었고, 그래야만 했다.

“치유력만이 아니야. 지난 생에서 본 왕녀는 언제나 치료사일 뿐 아니라 알드 룬의 지도자이자 군 지휘관으로서도 뛰어났어. 만약 재앙을 막아내는 데 성공하고 살아남았다면 역사에 길이 남을 성군이 되었을 거야. 지금 여기 있는 바네사 왕녀는......그냥 부모 형제에게 의지하는 어린애일 뿐이야.”

한숨이 나왔다.

“이번 생에도 절박하게 노력하는 건 나뿐인가?”

조슈아도 바네사도 자기들이 앞으로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말로 설명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 지난 생보다 눈에 띄게 더 강해지지도 못했다.
인과율의 증폭 덕에 더 많은 인재를 모으고 그 자신의 전투력도 비약적으로 높였다. 갈루스의 기술 수준도 한 세대에 가능한 수준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높였다.

-마스터, 대상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의 능력은 분명 강해지고 있어. 재앙 앞에서처럼 빠르지 않을 뿐이야.
“그걸론 부족해. 노력했다는 말 따위 아무 소용도 없어. 지금 왕녀의 능력으로, 갈루스의 전 국민을 무장시키고 맞선다 해도......재앙 역시 그만큼 강해진다면, 인과율의 증폭이 무슨 소용이 있지?”

카르티스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같은 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 나로 인해 바뀌는 일들이 늘어난 건 알겠어. 그런데......그걸로 충분하지가 않잖아. 최선이고 노력이고, 다 재앙 앞에선 없던 일이 되어버리는데......”

한참 숨을 고르던 카르티스가 문득 고개를 들고 람다를 보았다.

“올가 파블리첸코는 지금 어떤 상태지?”
-의무감, 애국심, 그리고 약간의 불안감.
“불안하다고?”
-현재의 평화가 이대로 지속될 수 있을지 조금 의심하고 있어.

실망감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위 군인이나 정치가가 그런 불안에 빠지는 건 권태와 방심을 막기 위한 정신 단련에 불과했다. 파블리첸코 중령도 곧 닥칠 미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키클롭스가 대체 왜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건가......”

군 중령과 넷째 왕녀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올가 파블리첸코 역시 재앙에 맞설 생각으로 단련하는 것과 평화시에 무뎌지지 않도록 단련하는 것은 차이가 클 것이다. 그저 낭비되고 있을 그의 시간이 미치도록 아까웠다.

-마스터.

람다가 문득 다시 말을 걸어왔다.

-균열이 시작되었어.

이젠 재앙의 조짐이 시작되었다는 말을 들어도 경악하거나 공포에 휩싸이기에도 지쳤다. 그래도 이번엔 놀랐다.

“너무 이르잖아.”

지난번보다 2년이나 먼저 찾아왔다. 그러나 람다는 무심해 보일 정도로 담담하게 사실을 지적했다.

-오차 범위 안이야. 재앙이 특별히 빨라진 징후는 없어.
“그래, 이번 균열은 어디서 시작이지?”
-페르사.
“......페르사?”

생각지도 못한 국명에 정신이 멍해졌다.
그러고 보니 재앙은 동부 대륙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다른 대륙까지 눈 돌릴 여유도 없이 매번 끝장 나버려서 생각하지 못했을 뿐.
그래서 사르디나, 문레이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도 여겼다. 될 수 있으면 다케온의 용병왕도.

“하지만 갑자기 페르사라니. 거긴 서부 대륙이잖아.”
-고대에도 그곳에서 재앙이 나타났었고, 그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곳이기도 해. 이제까지 마스터가 너무 버거워해서 묻기 전엔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매번 동부 대륙에서 재앙이 표면화될 때면 다른 대륙에서도 비슷한 수준으로 재앙이 닥쳐왔어. 페르사는 앞서 말한 조건 탓에 항상 가장 먼저 곤경에 처하는 편이었고.
“그랬군...”

멍하니 좌절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원한 만큼 준비를 마치지 못했어도 이번 생에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했다. 닥쳐온 재앙 앞에서 어떤 대처를 취해야 좋을지, 어느 부서에 어떤 지시를 내리고 어느 나라에 무엇을 요청할지도 다 경험이고 시행착오였다.

“가만, 균열의 시작이 페르사라면 동부 대륙은 아직 무사한 건가?”
-응.

카르티스의 표정이 천천히 펴졌다.
이건 어쩌면 기회일 수도 있었다. 그동안은 항상 갈루스 본토나 인접국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대처방식을 알리고 설득하기도 전에 다들 공포에 질리고 기간산업도 파괴되었는데, 이번엔 적어도 동부 대륙의 나라들만큼은 설득하고 대비시킬 여유가 생겼다.


서부 대륙의 난리가 동부 대륙까지 알려지는 것은 무척 오래 걸렸다.
그래도 신빙성 있는 소식들이 사르디나를 거쳐 알드 룬으로 넘어오자 이 재앙이 결국 동부까지 덮칠 거라는 카르티스의 주장이 동맹 회의에 먹혀들었다. 함께 나서서 각국 수장들과 자기 가족들을 설득해준 바네사의 도움이 컸다.
덕분에 델로스 동맹은 나름대로 단결해서 대비했다...라고 재앙이 동부 대륙을 덮치기 직전까지 생각했다.
막상 동부 대륙에도 재앙이 나타나자, 당장 자기 나라가 무사한 게 중요하다고 다들 안면을 바꿔버렸다.
재앙의 괴물과 독기가 침범한 나라들은 외국에 함부로 손 벌렸다가 식민지로 전락할까 두려워했다. 아직 피해가 없는 나라들은 그 두려움이 망상이 아니라고 확인시켜주거나, 자기들이라도 살아야겠다며 국경을 닫아걸었다.
카르티스는 일일이 직접 뛰어다니며 위험에 처한 나라들을 돕고 머뭇거리는 나라는 독촉했다. 그나마 알드 룬과 엔타로니아가 협조적으로 나온 덕에 다른 나라들도 조금씩 다들 설득되었다.
그러나 결과를 바꾸지는 못했다.
도스 왕가는 도주하다가 반란을 만나 재앙이 아닌 자기네 백성들 손에 멸망당했다. 그 백성들은 재앙 상대로 뭘 해보지도 못하고 죽거나 주변국으로 흩어졌다.
알드 룬의 왕족들은 어떻게 이런 재앙 앞에 어린 막내를 앞세우겠냐면서 바네사보다 먼저 나가 싸우다 이번에도 먼저 죽어갔다.
나름 활약하는 것 같던 1 왕자도 전사소식이 전해졌다.
장례는커녕 시체도 찾지 못한 죽음이었다. 카르티스는 왕녀의 상태가 어떤지 람다에게 물어보았다.

-심하게 고통받고 있지만, 잘 극복할 거야.

언제나 무표정해 보이는 람다도 지금은 티 나게 표정이 어두웠다.

-자책이 거의 그대로 책임감으로 변하고 있어. 조의를 표하러 온 알드 룬 사람들도 이미 왕녀를 새 국왕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런가.”

한 시름 놓았다. 실은 걱정하면서도 이러지 않을까 짐작했었다. 지난 생에도 그랬으니까.
이번 생에 알아낸 바로는, 왕녀의 치유력은 마도공학 치료 같은 학문이나 마법의 영역이 아니었다. 일종의 선천적인 초능력에 가까웠다.
바이올린 연주를 통해 주로 효과가 나는 것도 음악가이고 연주자이기 때문에 익숙한 매개체를 찾은 것이었다. 만약 바네사의 취미가 바이올린 연주가 아닌 그림이었다면 그 그림이 매개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정신적인 무장 상태가 증폭되면 능력도 증폭되었다.

“폐하!”

문 두드리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조슈아의 목소리였으므로 바로 들어오라고 해주었다.
들어온 그는 근래 드물게 밝은 얼굴이었다.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있나?”

한 가닥 희망을 품으며 한 질문에 그가 끄덕거리며 너덜너덜한 종잇조각을 내밀었다.

“알드 룬의 1 왕자가 살아있을지도 모릅니다!”

종잇조각은 구조를 요청하는 편지였다. 떨리는 손으로 급히 휘갈겨 썼으나 1 왕자의 필적과 서명이 거의 확실해 보였고, 고립되었다는 장소도 그의 부대가 전멸했다고 알려진 장소와 가까웠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 단정할 수 없다는 건 압니다.”

카르티스의 태도를 보고 조슈아의 표정에서 기쁜 기색이 사라졌다.

“그 부대의 전령이 직접 가지고 온 것도 아니어서, 저도 왕녀 전하께는 함부로 허튼 소리가 들어가지 않도록 부하들 입단속도 시켰습니다. 그래도, 람다 님에게 한 번 검색해보게 하시면......”

그러고 보니 람다에게 정말 왕자가 죽었냐고 묻지 않았다.
조슈아도 그 사실을 깨달은 듯 태도가 달라졌다.
카르티스가 종이를 가볍게 공중에 띄웠다. 그의 마력이 순식간에 그것을 재 한 조각 남기지 않고 태워 없앴다.

“폐하!”
“왕녀는 한창 결의를 다지는 중이다. 도로 오라비 뒤에 숨게 놔둘 순 없어.”

조슈아는 잠시 자기가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마주하기 힘든 표정이었으므로 람다 쪽으로 돌아서버렸다.

“이미 입단속도 했다니 다행이군. 가서 예정대로 남은 병사들을 독려하고 재편성해라. 언제 여기도 괴물들이 몰려올지 모른다.”
“폐하.”

조슈아는 그 자리에 서서 따졌다.

“결의에 방해가 된다니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왕녀 전하께서 언제 몸을 사렸습니까?”
“일부러 몸을 사린 적은 없지. 하지만 1 왕자가 있는 한 그의 보호를 받는 건 당연한 일이라 여길 것이고 그 대신 알드 룬의 군대를 지휘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내친김이었다.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동안 왜 내가 평화를 누리는 대신 전쟁을 준비하는지 궁금했지? 재앙이 정말로 닥친 순간 놀라지도 않고 침착하게 대처하는 게 이상했지? 이게 답이다. 난 이미 재앙을 겪어봤다. 그것도 여러 번.”

조슈아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내가 왕녀에게 잔인하고 무례하다고 생각하나? 나는 이미 네가 저 재앙에 맞서다 죽는 모습을 보았다. 결국 알드 룬의 백성 한 명조차 건지지 못하고 절망하는 왕녀도 보았다. 그런 일을 또 겪지 않게 하려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가 주저하면서도 입을 열었다.

“...폐하의 말씀을 감히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정말 이 방법뿐입니까? 왕녀 전하께서 군 지휘에도 그처럼 출중하시다면, 지금 제게 설명하신 것처럼 전하께도 설명하고 떨쳐 일어나야 한다고 설득할 수 없었습니까? 아니, 당장 지금 1 왕자 전하께서 구출된다 해도 계속 앞장설 수 있는 몸 상태라는 보장도 없는데......”
“조슈아, 그만.”

카르티스가 문을 가리켰으나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1 왕자 전하께선 왕녀 전하와 알드 룬뿐만 아니라 갈루스 사람들도 지키려고 싸웠습니다. 지금도 그분이 전사했다는 소식에 제 부하들까지도 침울해져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분과 그분 곁에서 싸운 병사들은 구할 가치가 없단 말입니까? 죽는 가치밖에 없습니까?”
“그런 말은.”

마력으로 가볍게 누르자 조슈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컥, 커헉......”

그 버릇없는 입을 열지 못하도록 아래턱도 붙잡았다. 조슈아는 버둥대지도 못하고 반항심 가득한 눈으로 그의 왕을 노려보았다.

“일단 네 목숨 지킬 힘이나 갖춘 다음에 지껄여라.”

로드가 없었던 세계 7 - 문명인이 할 일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요한이 이들을 데려간 곳은 속죄자들의 본부라 할 수 있는 낡은 건물의 3층이었다.

거기까지 가서 요한은 따라오던 부하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셋만 남자, 요한은 로드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아까는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주위에 보는 눈이 많아, 이목을 끄는 것이 더 폐가 될 거라 여겨 모르는 척 한 것이니 부디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요한?”

로드는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날... 알아보는 거야?”

“예. 뮤님이 설명해주신 것과 똑같은 모습이셔서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기억이 있는 거냐고 물으려던 말이 쑥 들어갔다.

“뮤?”

“예. 이쪽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한이 일어나 안쪽 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거기엔 정말로 뮤가 있었다.

“마스터.”

“뮤?”

로드가 달려가 뮤의 손을 잡았다.

“정말 너구나.”

“미안해, 마스터.”

어쩐지 평소보다 창백해 보이는 뮤는 로드를 만나자마자 사과부터 했다.

“연산 오류가 생겨서, 마스터의 가능성이 없는 세계로 이동해버렸어. 연결된 사용자가 없으면 내 권한도 없어서, 마스터가 어디로 떨어졌는지 찾지도 못하고.....”

“넌 나보다 일찍... 아니지, 이른 시간대에 떨어진 거구나.”

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용자가 없는 게 문제라면 이젠 어때, 날 다시 만났는데.”

“괜찮아질 거야.”

뮤가 말했다.

“그래도 당분간은 예전처럼 넓은 범위의 검색은 어려워.”

“그건 괜찮아. 무사히 널 다시 만났으니 그런 건 상관없어.”

로드는 정말로 안도했다. 혼자 어쩔 줄 모르며 더듬어가던 어두운 동굴에 빛이 비췬 느낌이었다.

그야 프람도, 프라우도 곁에 있어줬으니 혼자라고 하긴 어렵지만.

로드가 요한을 돌아보았다.

“네가 뮤를 모호해준 거야?”

“약 2 주 정도 전에, 제 부하가 길에 사람이 쓰러져 있다며 업고 왔습니다.”

요한이 보고했다.

“데려와 보니 인간이 아니어서, 처음엔 엘프나 하프엘프인가도 했는데 진찰한 사람이 그것도 아니라고 하고. 뮤님이 깨어난 이후에야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요한. 덕분에 뮤가 무사했구나.”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요한의 말을 들으며 로드는 조금씩 느껴오던 위화감을 구체화했다.

“요한, 물어볼 게 있는데.”

“하문하십시오.”

“이전 삶... 그러니까 내 기사로 살던 때의 기억이 있어?”

요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안타깝게도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로드께서 저의 주인이시고 이 세상을 새롭게 해주실 분이라는 건 뮤님께 전해 들었습니다.”

로드는 아연해져서 뮤를 바라보았다.

‘대체 요한한테 뭐라고 한 거야?’

“너, 나한텐 왕이랬잖아.”

프람이 끼어들었다.

“사실은 신이었던 거야?”

“아냐, 난 그냥 왕일 뿐이야.”

말하고 그가 요한의 눈치를 살폈다.

“그게, 지금 세상이 잘못되어 있고, 내가 그걸 바로잡으려고 하는 건 맞지만, 내가 신인 건 아니야. 난 그저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일 뿐이야.”

“예. 로드의 뜻은 알겠습니다.”

걱정과는 달리 요한은 금방 납득했다.

“로드께서 걷고자 하는 길이 무엇이든 저는 그 뒤를 따르겠습니다.”

‘아니, 하나도 납득 안 했잖아.’

“미안해, 마스터.”

뮤가 속삭였다.

“뭐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어.”

“............응................”

로드는 조금 골이 띵해졌다.

원래도 요한에게 좀 맹목적인 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좋은 환경에서 자신을 갈고 닦으며 기사단 내외로 친교를 넓혀가며 균형감이 생긴 기사 요한과는 달리 이 광신자 요한은 자신의 그런 면모를 바로잡을 기회가 없었을 거다.

‘이상한 엄한 놈 따라가지 않고 날 기다려줘서 다행이라 해야 하는 걸까.’

요한이 자기를 기억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달콤했기에 상실감이 더 쓰라렸다.

‘프라우는 루실리카와 뭘 하고 있을까.’



“혼내려고 부른 건 아니라고 하셨죠.”

프라우가 원래 화제로 돌아왔다.

“고대 문물은 왜 갑자가 연구하시려는 건가요? 현생 살기도 힘든 상황인데요.”

“현생의 문제를 극복하는데 참고하기 위해서예요.”

루실리카가 답했다.

“고대 문명은 재앙으로 한 번 멸망했지만, 그 후손들은 살아남아 다시 문명을 이루었죠. 우리 엘프는 특히, 고대인의 직계 후예인 셈이니 그들의 교훈을 배워 세상과 문명을 재건할 의무가 있습니다.”

“문명이라.”

프라우가 피식 웃었다.

“생존으로 그칠 게 아니라 문명을 되살리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당연하죠.”

“그 문명의 기준은 뭔데요? 인간과 혼혈을 차별하는 건, 문명인이 할 일인가요?”

루실리카는 놀라 프라우를 바라보았다.

프라우는 쫓겨날 각오를 했다. 그러려고 던진 말이기도 했다. 로드가 여기 와있는데 시덥잖은 연구에 시간 뺏길 수는 없었다.

“당신.... 특이한 사람이라고 듣긴 했지만....”

“괴짜 별종이겠죠. 이 와중에 포장해 줄 필요 없는데요.”

“당신 말이 맞아요.”

“........넹?”

“지금은 인간 차별은 잘못된 거에요. 침략까진,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해도....”

루실리카가 괴로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런 말을 용기 있게 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요. 지금 권력을 쥔 엘프 대부분은 현 상황을 고수하고 싶어 해요. 보통 엘프들도 현재의 특권을 내려놓고 싶어 하지 않고. 그래서, 차별과 억압이 장기적으론 엘프의 생존에도 해가 되리라는 증거를 찾고 싶습니다.”

‘와.... 망했다. 이건 발 못 뺀다.’

프라우가 속으로 머리를 싸쥐고 있는 줄도 모르고 루실리카는 말을 계속했다.

“당신 같은 어린 엘프에겐 와 닿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엘프들은 상생과 조화가 중요하다고 배우며 타종족도 혼혈도 이웃으로 함께 살곤 했어요. 그 사상이 하늘에서 떨어진 건 아닐테니, 분명 근거가 있을 겁니다.”

“그으럼 아주 고대가 아니고 오백년에서 천 년 정도 사이의 엘펜하임... 켈타인 너머의 옛 엘펜하임 터에서 그 상생과 조화의 가치에 대한 자료를 찾으란 말씀이신가요?”

루실리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말이 통하는군요.”

“좀, 서두르는 게 아닐까요?”

“총독이 인간 처우 개선에 힘쓰는 지금이 새로운 사상을 퍼트릴 기회라고 생각해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프라우는 고민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면, 왜 인간 애인은 안 된다고 하시나요?”

“그건.....”

루실리카가 찔리는 얼굴을 했다.

“사람들의 인식이 개선되려면 오래 걸려요. 사회를 바로잡아야 하는 건 맞지만, 그 과정에 상처 입을 일은 줄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뭐, 말씀하시고 싶은 건 알겠습니다.”

프라우가 말했다.

“절 생각해서 말씀해주신 것도 알겠고요. 그치만, 한 사람 한 사람이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타종족과 관계를 단절해버리면, 그게 쌓이면 결국 인식개선은 요원한 것 아닌가요.”

프라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쿠키를 하나 집어 입에 물었다.

“왜 저를 고르셨는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 지금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 마탑에 틀어박힐 수는 없어요. 제 페이스대로 돌아다녀도 된다면 하도록 하죠. 대신 결과 나오기 전엔 보수는 청구하지 않겠습니다.”

“아니요, 비용은 대야죠.”

루실리카가 따라 일어났다.

“내가 아까 한 말은 미안해요. 난.....”

루실리카가 뭐라 더 말하려다 말았다. 뭐라 덧붙이든 변명일 뿐이니까.

“필요하면 중간중간 보고하며 받을 테니까 연락처 알려주세요, 그럼.”

프라우가 말했다.

“제 집은 어딘지 아실 거고요.”

“매번 청사로 오는 건 싫겠지요. 제 보좌관 다닐을 통해 연락하도록 하지요.”

“알겠습니다.”

더 하고 싶은 말도 있었지만 프라우는 서둘러 루실리카와 헤어졌다. 로드를 혼자 두고 온 게 계속 뒷골이 땡겼다. 인간이 차별받는 세상이라곤 해도, 주인공인 로드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진 않겠지만.

‘아니지. 주인공이니 무슨 일이 벌어지겠지.’

청사를 나오자마자 프라우는 블레이드를 타고 전속력으로 날았다.

‘멀쩡히 잘 있어야 해, 로드!’



“...그러니까, 요한이 애인을 사귀었단 소문은 널 주워다 보호하는 게 와전되어 생긴 거구나.”

“응.”

로드는 뮤와 둘이서 본부 옥상에 앉아 둘이 떨어져 있었던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서로 이야기했다. 언제나 자기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던 뮤에게 그가 모르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자니 평범하게 친구와 수다를 떠는 기분이 들어 로드도 조금은 즐거웠다.

“프라우 말이 여긴 식재료가 다양하지 못하던데, 푸딩 못 먹어서 어떡해.”

“요한이 달걀 구해서 만들어 줬어.”

“뭐?”

“직접 만든 건 아니고, 그레이스씨한테 주문해서.”

“그, 굉장하네.”

신에게 바치는 공물이라고 생각한 걸까. 뮤에게는 잘된 일이지만 로드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지금까지 충성스럽고 기사답다고만 생각했던 과거 요한의 행적들까지 혹시 광신의 흔적은 아니었을까 돌이켜보게 되었다.

“아, 그레이스씨라면, 요한은 샬롯하고는 교류가 있는 거야?”

“날 진찰한 힐러가 샬롯이야. 이 집단은 약자이기만 하면 누구라도 구호해, 그 점을 인정받아 사이는 나쁘지 않아.”

말하고 뮤가 잠시 생각했다.

“마스터도 샬롯을 만났어?”

“뺨을 맞았어.”

로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은 네가 내 과거 행적을 검색할 수 없다는 게 좀 다행이야. 꽤 꼴사나웠거든.”

“어떤 변수를 넣어 시뮬레이션 해봐도 마스터가 꼴사나웠을 가능성은 매우 낮게 나와.”

로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정말 그랬어. 상대방의 입장과 처해있는 상황을 이해할 생각도 못하고 내 멋대로 돕는답시고 끼어들어서.....”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첫번째 기회’ 때 한 일이 결국 그런 것이었을까.”

“마스터는 지금 쓸데없는 자학을 하고 있어.”

“알아. 그냥.... 이렇게 망가져 버린 세계와 사람들을 생각하니 역시 내가 다 잘못한 기분이 들어서 그래.”

뮤가 뭐라 말하기 전에 로드가 고개를 저었다.

“기분이 그렇다는 거야. 정말로 내가 뭐든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러다 삐끗하면 나에게만 모든 결정권이 있고 남은 그저 장기말이라는 식으로 흘러버릴지도 모르는 걸.”

로드가 일어나 쇠락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이 세계는 내가 한 선택의 결과니 내가 책임져야겠지.”

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뮤. 여기의 카르티스는.... 내가 아는 사람이야? 그와 나의 매듭을 한 줄에 합치는 작업은 성공했어?”

뮤가 고개를 저었다.

“몰라. 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원래 높지 않은 확률인데다 세계선 이동에 이 정도 오류가 났어. 실패했다고 보는 게 안전할 거야.”

“그렇군.”

로드는 별 말 없이 수긍했다. 그 편이 말이 되기도 했다. 그와 대화했던 그 카르티스가, 사람들 대다수를 죽게 방치하고 소수의 생존자만 보호한다는 발상을 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의 긴 지옥 중에서도 아마도 끝에 다다랐을 황제를 말로 설득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대화를 시작이라도 해보기 위해서는 일단 무찌르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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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불. 신이 없는 세계의 광신도.


요한은 언제나 신을 갈구했다. 이 뒤틀린 세상을 바로잡아줄 구원자를.

요한이 어른이 되고, 그런 것 없다고 거의 확실해진 이후에도 신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믿고자 그는 속죄자들을 결성했다. 자신의 죄를 씻고, 신께서 기뻐하실 만한 선행을 하다보면 언젠가 신께서 나타나 주실 지도 모른다고 믿고 싶었다.

그런 그에게 신의 사자가 나타나 신께서 곧 오실 거라 전하였다. 요한은 이제 자신의 모든 걸 바쳐 신을 섬길 준비를 끝마쳤다.



카르티스 폐하의 지옥행 4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얼떨떨한 나머지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좋은 기회였다. 알드 룬과 국교를 상하지 않고도 그 나라 최고의 인재를 끌어들일 기회.
올가 파블리첸코는 데려올 수 없어도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은 데려올 수 있었다.
그래서 바로 승낙의 말을 하고, 그 다음번 바네사와 만났을 때 그와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오라버니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이날은 오페라 극장 박스석이 아닌 만찬석이었다. 두 사람 외엔 서빙하는 시종들뿐이었다.

“오라버니는 제게 최선인 쪽으로 노력했다고 하더군요.”
“제 눈에도 동생을 무척 사랑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연애도 결혼도 이제까지 꿈도 꿔 보지 못했다. 그 어떤 계획이나 희망도 다 언젠가 찾아올 재앙에 가로막혀 상상으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만약 자식이라도 낳게 된다면, 사랑스럽고 장래가 기대되는 아이일수록 그 몇 배의 고통을 안겨줄 것이다.
문득 자신의 인생이 참 비참하고 황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자면, 전 이게 정말 최선인지 알 수 없어요.”

카르티스가 침묵하는 동안 바네사가 조용히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카르티스 폐하는 성군으로 이름난 분이시고 갈루스는 부강한 나라죠. 신분이 낮거나 가난한 사람들도 빠짐없이 왕실의 보살핌을 받는다 들었어요.”
“그런 말을 듣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지금은 인생을 돌이키며 슬퍼할 때가 아니었다. 내키지 않는 것 같은 왕녀를 어떻게든 설득해야 했다.

“왕녀 전하도 백성들의 삶을 언제나 돌아보고 빈민들을 위해 힘쓰셨다고 들었습니다. 갈루스에서도 분명 많은 일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과찬이에요.”

물론 일단 영입에 성공하면 시킬 일은 빈민 복지가 아니었다.
갈루스의 복지 정책에 힘쓴 건 조슈아처럼 하층민으로 태어나는 인재를 효율적으로 발굴하고 평범한 사람들도 최저 수준을 높여 재앙이 왔을 때 쉽게 무장시키기 위해서였다.
왕녀는 지금부터 고급 전략 전술 교육을 시키고 치유 마법을 갈고닦게 해도 모자랐다. 유니버스를 통해 측정한 바네사의 기량은 아직 순진한 넷째 왕녀다운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속마음을 들킨 것도 아닐 텐데 바네사의 태도는 별로 누그러지지 않았다.

“저도 갈루스에서 시행하는 빈민 구제책을 조사하고 공부해본 적은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저 신분을 떠나 시민들과 어울리고 그들이 행복한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지, 그렇게 나라의 앞날을 위해 긴 안목을 품은 적은 없죠. 그런 일에 도움이 되길 바라신다면 전 그리 훌륭한 왕비가 되지 못할 거예요.”
“겸양이 지나치십니다. 왕녀님은 지성과 위엄을 겸비했으니 갈루스에서도 금방 훌륭한 왕비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진심으로 한 말이었으나 바네사는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 부족한 저를 그처럼 높이 평가하시니, 마치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 같군요.”
“왕녀 전하께서 너무 겸손하게만 살아오신 겁니다. 알드 룬 궁정 밖으로 한 번 나가 보시면, 세상의 평범한 위정자들을 겪어보시면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갈루스의 왕비가 된다고 해서 그럴 기회가 있기나 하겠어요?”

그제야 유니버스에서 본 설명 한 구절이 떠올랐다.

바네사의 남몰래 품은 소망은 음악가가 되는 것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를 자유롭게 떠도는 것이기도 했다.

“사실은, 이제 곧 동부 대륙을 벗어나 중부 대륙과도 수교할 예정입니다.”

점점 더 노골적으로 시큰둥해지던 바네사의 기색이 바뀌었다.

“사르디나와도 협정을 맺고, 문레이크의 고대 마법을 갈루스에서 그동안 발굴해온 유물과 거래할 계획입니다. 동부 대륙의 어느 나라도 시도하지 못한 일이지요. 이번에 알드 룬과의 친교를 다진 것도 실은 그 준비이기도 합니다.”
“그런 이야기 제게 이렇게 다 하셔도 돼요?”
“물론 안 되지만, 그만큼이나 전하를 꼭 맞이하고 싶은 제 마음이라고 생각해주십시오.”

어안이 벙벙해진 채 두 눈을 깜박거리고 있던 바네사가 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그 정도로 제게 감출 것이 없다면 한 가지 더 여쭈어도 될까요?”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절박함은 전혀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았지만 그래도 바네사는 질문을 했다.

“지금 갈루스는 뚜렷한 이유도 없이 군비를 증강시키고 있다고 들었어요. 전사로 유명한 사람들을 나서서 초빙하고, 폐하의 측근들도 모두 장군이나 무기 개발자들이라고요.”

변명할 여지 없는 사실이기에 고개만 끄덕였다.

“다른 대륙까지 진출하는 건 정말 평화적인 목적뿐인가요?”

이번 생에서 재앙을 맞기 전까지 가장 큰 시험을 만났다.
카르티스는 조금 반성했다. 일단 듣기 좋은 말을 해서 데려다 놓으면 되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미 갈루스 궁정에서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전하께 털어놓았으니, 더 숨길 의미도 없군요. 사실은 전쟁에 대비하는 게 맞습니다.”

한꺼번에 전부 털어놓았다가 미친 취급받고 파담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알드 룬이나 사르디나를 정복하려는 건 아닙니다. 도리어 모두를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지난 생에는 재앙이 닥친 후 파블리첸코 중령과 바네사 왕녀와 함께 생사를 넘나든 적도 있었다.

“다 함께 협력해서, 인류 공동의 적을 무찌르고 사람들을 구하려는 겁니다.”

바네사 왕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카르티스를 노려보았다. 덥석 믿는 기색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순 헛소리 들었다는 표정도 아니었다.

“......마도대전 같은 것 말인가요? 그런 게 또 일어난다고요?”
“비슷하다고 해둡시다.”
“선뜻 믿기 힘든 이야기군요.”

바네사는 이미 한참 전부터 손도 대지 않은 채인 음식 접시를 내려다보다 포도주 잔을 들어 죽 마셨다.

“근거가 있는 이야기인가요?”
“고대의 유적에서 찾아낸 예언서나 수기 등이 있습니다만 델로스 연맹 회의 자리에서 내밀기는 많이 미흡합니다. 아니었다면 이미 각국에 솔직하게 털어놓고 정식으로 협조를 요청했을 겁니다.”
“......”

바네사가 침묵하는 동안 카르티스는 거의 숨도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으나 잔을 들지도 못했다.

“당장 자릴 박차고 나가 오라버니께 따지고 싶을 정도로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한 번 확인해봐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바네사가 다시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이렇게 하죠. 다음번엔 저를 갈루스로 초대해 주세요. 이 이야기는 오라버니께 비밀로 하고, 그저 제 미래의 남편이 될지도 모르는 폐하와 갈루스를 더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고 할게요.”
“감사합니다.”
“그곳에서 절 설득하는 데 실패하시더라도 폐하의 명예에 누가 되는 소문을 퍼트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크게 실망하겠죠.”



알드 룬의 1 왕자는 바네사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다.
막내의 계승권을 훼손하기 위해 억지로 귀천상혼을 시키려던 자신의 형과는 확실히 다른 인물인 모양이었다. 이 사람은 적어도 바네사가 기꺼이 결혼할 상대를 찾아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순진하고 다정한 아이입니다. 모쪼록 자상하게 대해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불면 날아갈 듯 말할 때는 역시 자기 동생이 어떤 인물인지 알기는 하는 건가 의심스러웠다.
어쨌든 절호의 기회였다. 귀국하자마자 바네사 왕녀를 맞이할 준비부터 했다.

“폐하, 왕실과 나라의 안녕을 위하는 마음에서 감히 한 말씀 올립니다.”

이전 생들에 비하면 많이 얌전해진 조슈아였지만, 이렇게까지 격식차려서 서두를 뗄 때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었다.

“알드 룬의 왕녀가 무기를 좋아한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습니다. 왕실의 경사에 관례적으로 쓰이는 예물과도 거리가 먼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환영하는 의미에서 바네사에게 증정할 예물로, 유물들 중 힐러가 장비하기 적합한 것을 골라오라는 명령을 받자 하는 소리였다.

“칼이나 갑옷 같은 노골적인 병장기가 아닌 선에서, 고대엔 전투에 쓰였을지라도 근래에 평화의 예물로 쓰인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왕실 관례를 네가 가르칠 셈이냐?”
“그것도 상황 나름이죠. 우린 알드 룬과 전쟁하다 강화하려는 게 아니고, 오는 사람은 늙고 하품나는 사감 선생 같은 외교관 떼거리가 아니라 장차 왕비님으로 모시게 될 아리따운 왕녀님이라고요. 애초에 지금 불려와야 할 사람은 근위대 대장이 아니라 시종장과 문화부 대신입니다. 나 참, 경호 대책 세우라고 부르신 줄 알았더니...”

조슈아마저 저런 말을 하다니, 갈루스에서도 모두들 이걸 국혼 예비 단계 정도로 보는 모양이었다.
그게 편리하니까 알드 룬에서도 다들 착각하게 내버려 두었지만 명색 손발처럼 여겨온 심복까지 이러니 짜증이 났다. 호의와 충성심에서 나왔다 해도 몰이해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는 걸 세상에 자신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폐하?”

조슈아가 움츠러들어 눈치를 보았다. 카르티스는 날벌레를 쫓듯 손을 휘저었다.

“죄송합니다. 명 받들겠습니다.”
“그래.”

대충 내보낸 뒤 람다를 불렀다.

-마스터, 지금 엄청나게 무서운 표정 하고 있어.

람다는 걱정스러워 보였다.

“피곤해서 그래.”
-지금 마스터는 모두를 너무 몰아붙이고 있어. 주변 사람들도 그렇고, 자기 자신도 그렇고.
“몰아붙일 수밖에 없잖아!”

람다에게까지 짜증부린 것을 깨닫고 카르티스도 억지로 격정을 누르고 심호흡했다.

“미안하다.”
-난 괜찮아.
“그냥...가끔 자신이 없어져.”

카르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막을 수 있는 재앙이긴 한 건지.”

람다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네가 뭔가 할 수 있는데 안 하고 있는 게 아니란 건 알아. 그러니 널 원망하진 않을 거다.”



바네사 왕녀가 갈루스에 도착했다.
국빈 방문에 으레 따르는 어려움 쪽은 거의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갈루스와 알드 룬은 서로 묵은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바네사는 조슈아 말마따나 왕비님이 될지도 모르는 아리따운 왕녀님이었다.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열렬히 환영했다.
왕의 예복을 관리하는 시종들까지도 알아서 기합을 넣고 카르티스가 조금이라도 더 근사하게 보이도록 정성을 기울였다.
실제로 이번 방문이 어떤 뜻인지 약간이라도 아는 사람은 람다와 바네사뿐이었다.

“갈루스의 군비를 증강하는 것도 다 재앙에 대비한 것이고, 이런 유물들을 모으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외국에서 말하거나 보여주기 힘들었던 것까지 다 털어가며 설명했다.
혹시 외국들을 설득하는 게 가능할까 싶어 그동안 자료도 증거도 철저히 모았지만 막상 바네사 앞에 내놓으니 한참 부족해 보였다. 아니, 부족했다.
그래도 바네사는 주의 깊게 들어주었다.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있어요.”

한 가지만이 아닐 텐데 관대하게도 그렇게 질문했다.

“이 모든 일이 사실이라 해도, 제가 뭘 할 수 있죠? 말씀하시는 태도를 보면 폐하를 제외하면 제가 가장 먼저 알게 된 것 같은데, 차라리 제 오라버니에게 털어놓고 군사 협약을 맺는 게 더 낫지 않아요?”
“그야 당연히 왕녀 전하만이 지닌 재능을 고려한 거죠.”

준비해뒀던 힐러용 유물 일습을, 안 어울리는 옷을 억지로 살펴보듯 건드리던 바네사가 카르티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왕녀 전하께서 연주를 매개로 심신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재앙이 닥치면 수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재능이지요.”

바네사가 처음으로 크게 당황했다.

“그, 그걸 어떻게... 아니.”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바네사는 누가 엿듣는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단, 제가 치료를 할 수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죠? 그건 정말 우연히 발견한 능력이고, 오라버니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데!”
“미래에 닥칠 재앙을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카르티스가 두 걸음 물러났다. 바네사가 겁먹고 달아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엎드려 이마를 박을 수도 있었다.
당장 달아나지는 않았다. 그래도 바네사의 목소리엔 의구심이 서려 있었다.

“그건 그렇다 쳐도, 수많은 사람들을 살린다니 역시 말이 안 돼요. 이건 그렇게 대단한 능력이 아니에요. 종이에 베인 상처나 겨우 치료하고, 감기 걸리면 좀 더 쉽게 털고 일어나게 도울 정도죠. 갈루스의 평범한 의사 쪽이 그런 극한 상황에서 훨씬 도움이 될 거예요.”
“앞으로 강해집니다.”

카르티스가 움직이지 않은 채 설명했다.

“재앙이 알드 룬까지 덮치고 왕과 왕자도 전사한 후에...”

바네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카르티스는 거의 설득 실패라고 생각했다.

“그렇군요. 아바마마가, 오라버니가 저보다 먼저......”

그 자리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왔다갔다 하며 쩔쩔매던 바네사가, 이내 태도를 정돈하고 카르티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전에, 그런 재앙이 오기 전에 제 힘이 더 강해져야 한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재앙을 막고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솔직히 말하면, 갈루스까지 찾아와 이야기를 들어드린 것도 만약 사실인데 무시하고 지나쳤다가는 너무 큰 비극이 닥칠 게 뻔해서였어요.”

바네사가 힐러용 장갑을 집어들었다.

“그런데 막상 저보다 제 오라버니, 언니들이 먼저 죽을 가능성을 생각 못하다니...”
“그건 전부 이제 전하의 물건입니다.”

카르티스가 다시 다가오며 한 말에 바네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쳐 주세요. 재앙이 왔을 때 제가 그런 일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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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네사 현재 노각 노초 1렙

로드가 없었던 세계 6 - 광신자 요한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요한 누구?”

프람이 되물었다.

“요한 테일드. 쌍검 쓰고... 아닐지도 모르지만. 키는 이만하고, 책임감 강하고 남 돕는 데 열심이고 선량하고 믿음직하게 생겼는데....”

더 설명할 말을 찾을 수 없어 로드가 버벅거렸다.

머리색이나 눈색은 다를 수도 있었다. 안경도 여기선 안 쓸 가능성이 높았다. 성격은, 로드를 만나지 않은 요한의 성격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상황에 따라선 선량한 얼굴조차 아닐 가능성까지 있었다.

“아, 광신자 요한 말이구나.”

“광.....신자?”

“속죄자들 두목. 보통은 그 이상한 놈 정도로 부르니까 깜빡했네.”

“광..신자라니 요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속죄자들이란 건 또 뭐고?”

“하는 짓은 좋아. 약하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돕고 다니고. 좀 이상해서 그렇지.”

이런 세상에서 남을 돕고 다닌다면 그것만으로도 ‘좀 이상한’ 범주에 충분히 들 것이다. 로드는 그런 문제이길 간절히 빌었다. 요한도 망가진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속죄자들이란 건 말하자면 전직 갱 집단이야. 요한 말로는 우리가 지은 죄가 많아서 세상이 이렇게 타락한 것이니 약자를 도우며 속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뭐 약한 사람들을 돕는 건 좋은 일이라곤 생각하는데....”

프람이 어깨를 으쓱했다.

“멸망 전에 어땠는지 기억하는 입장에선, 사람이 죄지어서 멸망이 온 게 아니고 멸망이 와서 사람들이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거든.”

“생존을 위협받으면 남을 미워하고 배척하게 되니까.”

“맞아.”

“하지만 요한은 빈민가 출신이니까, 그가 보는 세상은, 사람들은 멸망 전후가 그리 다르지 않을 지도 몰라.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도 모르지.”

그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팠다. 요한에게 더 나은 세상을 알려주어야 했을 자신이 없어진 게, 그를 범죄 조직에 가담하게 만들다니.

그래도 요한이라 자발적으로 손을 씻었다는 점이 뿌듯하면서도 괴로웠다. 여기의 그에게 자신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혹시 범죄 조직에 발을 들이는 사람들이 많아?”

“아무래도 그렇지. 이런 곳이다 보니까, 그런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먹고살기 힘든 경우도 많고.”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도 요한이 그러고 있었다니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걔도 그렇게 평범하게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조직을 나왔다던가 자기가 먹었다던가. 비슷한 사람들 모아서 그러고 있어. 이상한 소릴 하긴 하지만 하는 일은 믿을 수 있는 녀석이고 사람들 돕는 건 진짜야. 나도, 밖에서 구조해 온 사람이 진짜로 정신이 나가있거나 다쳐서 거동이 어렵거나 하면 속죄자들한테 갖다 맡기곤 해.”

“그럼 프라우가 안 끼었으면 나도 요한에게 데려다 줄 생각이었어?”

“넌 너무 멀쩡하긴 하지만. 그래도 당장 잘 곳도 필요하고 도시 돌아가는 이치도 배우고 일도 소개받으려면 그게 가장 쉬운 길이긴 하지.”

“그렇다면, 이제라도 그를 소개시켜줘.”

프람은 로드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좋아.”

프람이 다 먹은 그릇을 두고 일어났다.

“달리 할 일도 없으니 지금 당장 가자.”

가면서 로드는 프람에게서 요한과 속죄자들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주워들었다. ‘광신자 요한’이 ‘쌍칼 요한’ 이던 시절의 무용담이라든지, 지금은 인간 자조모임으로 총독부에도 인정을 받아 보조금을 받고 타도시에서 온 난민을 구호하는 데 협력하기도 했다는 이야기. 그렇긴 하지만 원래는 갱 집단이었던 데다 반 엘프 성향이 강한 건 어쩔 수 없어서 엘프 가드들은 속죄자들을 여전히 위장한 범죄집단으로 생각하며 경계하고 있다든지.

“사실 근거 있는 경계긴 해. 하층민들 돕다 보면 엘프 가드 몰래 해야 할 일이 어쩔 수 없이 생기니까.”

프람이 작은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로드는 프람 역시 가끔은 그런 일에 끼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길가다 프람이 노점에 들렀다. 솥이 끓고 있는 걸 보면 먹는 것 같은데 음식 냄새가 안 나서 로드는 그게 뭔지 궁금해졌다.

프람에게 돈을 받고 노점상은 큼직한 잎사귀를 접어 만든 컵에 끓이던 걸 한 국자씩 떠 주었다.

로드가 받아 내용물을 냄새맡아보았다.

“....물?”

아무리 봐도 맹물이었다.

“끓인 물. 여긴 깨끗한 물이 귀해.”

차도 아니고 끓인 맹물을 사 마셔야 하는 세계라니 지독하다고 로드는 생각했다. 또한 아까 스튜를 먹었으니 목이 마른 건 아닐텐데 굳이 물을 사주는 걸 보면 프람이 자기에게 여기서 사는 법을 이것저것 가르쳐 주려는 모양이란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여기 오기 직전 프람을 돌아봤던 때를 기억했다. 다시 만나러 가겠다는 약속이 이렇게 지켜질 줄 알았다면 그 때 자신은 다른 선택을 했을까.

“요한은, 어떤 사람이야?”

로드가 물었다.

“그가 한 활동 말고 그 자신은 어떻게 살고 있어?”

“음.... 갱 두목 시절은 몇몇 소문 말곤 내가 잘 모르고.”

프람이 기억을 뒤졌다.

“지금은 좀 금욕적이라고 해야 하나? 자신을 버린 듯이 약자 구호 일에만 매달려 있어. 총독부랑 일할 정도면 말 다했지. 뭘 좋아한다거나 누구랑 사귄다거나 하는 이야기도 들은 적 없고...... 아, 최근에 여자는 생겼다고 하더라.”

로드는 양손으로 감싸 쥐고 조심조심 마시던 더운물을 확 뿜어버렸다.

“쿨럭.... 뭐, 뭐라고?”

“그게 그렇게 충격적이야?”

“으... 아, 아니 그야 요한이 사귀고 싶으면 사귀는 거고 좋은 사람이 생겼으면 축하할 일인데.”

로드는 한참 콜록거리며 기도로 들어간 물을 뱉어냈다.

정말로, 축하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와 함께 하던 요한은 사생활은 없는 듯이 아발론을 위해서만 몸 바쳤으니까. 이참에 상대가 누군지 확인해서 괜찮은 사람 같으면 기억해 뒀다가.

로드는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당연한 듯이 다음 기회를 생각하고 있잖아. 이래선 안 돼. 이런 일이 반복되다간 내가 카르티스처럼 되어버릴지도 몰라.’

이번 세계는 객관적으로 망했지만, 그렇다고 포기해버릴 순 없었다. 자기가 죽어서 회귀하고 이 세계가 사라지고 다른 ‘제대로 된’ 세계에서 재회하면 끝이라고, 그런 발상이 결국 독이 된다.

많은 기회가 있다 해서 그걸 가벼이 여겨선 안 된다. 언제나 이번이 마지막이고 더는 돌이킬 수 없다는 듯이 살아야 했다.

아니면 이런 비극이 일어나 버린다.

“너 말이야.”

프람이 주저하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요한과 무슨 사이야? 아니 요한을 어떻게 아는 거야?”

로드는 말문이 막혔다.

“요한 뿐이 아니야. 실은 어제 그 엘프도 이상해. 너를 아는 것처럼 말했잖아. 넌 뉴 사이런딜에 처음 들어왔고, 기억도 제대로 없다고 하는데 도시 안에 아는 사람도 있고 그 외에도 아는 게 아주 많고 심지어 옷도 멀쩡하게 새것이고.”

프람이 답을 구하는 눈으로 로드를 보았다.

더는 숨길 수 없었다.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상대가 프람인데.

“좀 미친 소리 같을 텐데, 들어줄 수 있어?”

“얼마나 미친 소린데?”

“여기와 다른, 아직 멸망하지 않은 세계가 있었어.”

자신의 회귀, 세계가 갱신되는 원리에 대해서는 로드도 아직 모르는 바가 많았다. 로드는 어떻게 핵심만 추려 말하려고 노력했다.

“거기서 우리는 세계를 지배하려는 제국을 무찌르기 위해 싸웠어. 그러다 재앙이 닥쳐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전 세계 모든 나라와 협력을 해 멸망을 막으려 노력했어. ........하고 있어.”

“여기 말고, 다른 세계?”

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도, 내가 있어서, 너랑 동료였다고? 다른 나라들..... 플로렌스라던가, 헬베티아라던가 하고도 협력하고?”

“그래.”

“......엘프와도?”

로드는 눈을 감았다.

“그래. 엘펜하임과도.”

차마 라플라스의 이름을 꺼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이 프람에게 그는 부모의 원수에 불과했다. 세뇌되어 차별주의자가 된 거라고 말해본들, 나라가 정복당하고 부모형제가 살해당하고 차별받고 업신여김 받는 이 곳의 아발론인들에게 의미가 있을 리 없었다.

“허.”

프람이 피식피식 웃었다.

“저 엘프 놈들이, 인간들과 협력을 했다고?”

프람이 로드의 어깨를 붙잡았다.

“너는 누구야?”

“아발론의 군주.”

프람은 비웃지도 거짓이라 매도하지도 않았다. 아무 말도 없이 그가 로드를 바라보았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여, 프람! 여깄었냐!”

프람도 로드도 깜짝 놀라 갑자기 나타난 불량해 보이는 녀석들을 주목했다.

“참나, 집에도 없고 밖에도 안 나갔다고 그러고 한참을 찾았네.”

“찾았다고? 나를 왜?”

말하고 프람이 로드에게 속삭였다.

“쟤들 속죄자들이야.”

“너 어제 밖에서 사람 주워왔다며.”

그 말에 프람도 로드도 멈칫했다.

“그 사람 우리한테 넘겨.”

“뭐라고?”

프람이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며 로드의 앞을 막아섰다.

“니들이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우리가 아니고 두목님 지시야. 아 왜, 전엔 밖에서 온 사람들 우리한테 인계하고 그랬잖아.”

“그거야 니네가 그런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고 일자리 주선해주니까 그랬지, 이렇게 뭐 맡겨놓은 듯이 뺏어갈라고 그래? 목적이 뭐야?”

“우린들 아냐! 아니 싸우자는 게 아니거든? 뭐 나쁘게 할 것 같지는 않았다고. 우린 그냥...”

“확실히 알기 전엔 못 넘겨. 니들이 뭘 느꼈든 내가 알 바냐. 그 광신자 녀석이 직접 해칠 의도도 없고 보호하고 잘해줄 거라고 말하기 전엔 안 돼.”

“해칠 의도도 없고, 보호하고 잘해줄 생각이야.”

사람들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지고 요한이 그들에게 나타났다.

그가 프람을 보고, 로드를 보았다.

로드는 자신의 기사와 모든 면에서 달라 보이는 이 요한을 바라보았다.

머리색이나 눈색이 바뀐 것 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요한에게는 길들지 않은 야생 짐승과도 같은 거친 기세가 있었다. 요한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런 면이 있긴 했지만, 그대로 어른이 되어버린 이 모습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요한이 프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때, 이만하면 믿을 만 해?”

“장난하냐.”

“그럼 너도 따라와, 같이 확인하면 불만 없겠지.”

“확인하라니, 뭘?”

요한은 대답 없이 돌아섰다. 그의 부하들도 그 뒤를 따랐다.

프람은 망설였다. 로드가 발을 내딛자 프람이 그를 붙잡았다.

“너... 뭔 줄 알고 따라가는 거야?”

“뭔지는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요한이 날 찾는다면 이야기를 해봐야지.”

“아, 젠장.”

프람은 로드를 놔주는 대신 붙잡은 채 같이 가기 시작했다.

“그래, 그럼 나도 들을래. 어차피 나도 관련 있지?”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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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 암. 허무. 이제와서 의문을 가져봤자 다 늦었어.


대제 폐하를 따르면 된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인류의 일부라도 살아남았고 그들을 보호할 수도 있다.

대제 폐하도, 내 충성도 모두 옳고 정당하다.

그렇지만 이게 정말 최선이었을까.

자기 쓸모는 이제 끝났고, 누가 죽여줬음 싶지만 황제는 아직 살릴 사람이 남았고 바네사는 도구 따위엔 관심도 두지 않는다. 제국의 2인자이지만 사는 즐거움은 낮잠 정도.

뉴 엘펜하임의 총독으로 라플라스와는 자주 대립한다. 행정관 루인이 (그나마) 마음의 구원. 




카르티스 폐하의 지옥행 3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회담은 역시 순탄치 못했다. 동부 대륙의 각국이 모두 단단히 마음먹고 갈루스를 견제하러 모인 자리였다.
군비 증강 정도를 실제보다 상당히 줄여 발표하고, 군비의 필요성을 과장해 보았으나 역시 통하지 않았다.

‘이번 생도 마찬가지인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생엔 이런 견제를 극복하지 못해 원하는 만큼 준비를 마치지 못한 채 재앙을 만나야 했다.
그리고 원한 만큼 군비를 증강시켰다 해도 갈루스만의 힘으론 턱없이 부족했으리란 결론만 얻었다.

“듣고 계시는 겁니까, 카르티스 폐하.”

리브리안의 대공이 그를 채근했다.

“우리 리브리안은 이미 충분히 참을 만큼 참았습니다!”

리브리안은 그나마 재앙에 맞서는 것답게 맞선 나라 중 하나였으나 그건 저 대공이나 왕의 힘이 아니었다. 갈루스의 위협에 맞선다는 명목으로 그들이 키웠던 군대도 상식을 벗어난 괴물들 앞에선 헛되이 우왕좌왕하다 실제 전력의 반만큼도 내보이지 못하고 전멸해버렸다.
무력한 시체 더미를 등진 채 끝까지 싸운 리브리안의 영웅은 단 한 명의 엘프와 그가 지닌 고대 유물이었다.

‘람다는 그가 충성심이 높아 어지간해선 갈루스로 귀화할 가능성이 없다고 했지.’

안타까웠다. 만약 자신이 일찍 재앙에 대해 아는 것을 가르쳐주고 전술 지도를 해줄 수 있었다면 훨씬 효율적으로 싸웠을 수도 있었다.
그 자리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까지는 무리라도 보다 많은 시도를 해서 데이터라도 더 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까지 경험한 바로는, 역시 다수의 평범한 군대보다 특출한 개개인의 용사들이 발목 잡히지 않고 실력을 발휘하는 게 중요했어. 그런데 리브리안의 군대는 파블리첸코 중령에게 방해만 되었지.’

아직도 자신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대공을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어차피 각국의 최고위 왕족과 총리 등이 갈루스에 모여 회담을 하는 것부터가 힘의 균형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 있는가를 반증하는 것이었다.
과거 갈루스가 동부 대륙 전체를 다스리는 제국이었다는 명분으로 결정된 장소지만, 그 편이 ‘지금’ 동부 대륙 최강국이어서 라는 명분보다는 인정하기 쉬웠을 뿐이었다.

“갈루스는 리브리안을 위협할 용의가 없습니다.”

카르티스가 잘라 말했다.

“다른 모든 나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루스에서 군비를 증강하는 건 타국이 아니라 다른 더 큰 위협에 맞서기 위함입니다.”
“더 큰 위협이라니요?”
“외부에서 오는 위협입니다. 더는 말해도 모를 겁니다.”

잠시 조용해졌던 회담장이 곧 바글바글해졌다. ‘저놈이 미쳤나’를 외교용어에 맞게 순화하느라 정신없는 꼴들을 대충 구경해주고 말을 이었다.

“물론 말 한 마디로 믿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말하는 위협이 갈루스뿐 아니라 동부 대륙 전체에 똑같이 닥쳐올 것이며, 내가 각국의 앞날도 갈루스의 앞날과 똑같이 걱정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런 증거가 있습니까?”

알드 룬의 1 왕자가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물었다.

“여기 있습니다.”

카르티스가 내놓은 것은 국제 기술 협약 제안서였다.
의심스러운 얼굴로 읽어내려가던 모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얼핏 보면 대등한 우호 관계를 맺은 동맹국들끼리 맺을 수 있는 수준의 기술과 문화 교류 협약이었다.
그러나 작은 영토의 갈루스가 순식간에 다른 모두가 두려워하는 강대국으로 떠오른 원동력이 바로 월등한 기술 격차였다. 실제로 이런 협약이 시행되면 갈루스가 아닌 상대국 쪽만 일방적으로 이득을 볼 게 뻔했다.

“흥미가 있는 분들은 따로 자세한 이야기를 해봅시다.”



역시나 반향이 엄청났다.
갈루스 내의 불만과 불신은 그냥 무시했다. 어차피 지금의 갈루스는 카르티스 혼자 유지하고 있다시피 해서, 감히 반대 의견을 내봤자 왕의 충신들을 조금 불쾌하게 만들 뿐이었다.

“대체 뭘 노리고 하시는 일인지 저도 좀 궁금하긴 합니다.”

궁정 연금술사들이 불만스러워 하더란 이야기를 전하며 조슈아가 슬쩍 덧붙였다.

“그 ‘동부 대륙 외부에서의 위협’은 대체 뭡니까?”
“보통 뭐라고들 하더냐?”

질문에 질문으로 대꾸했으나 조슈아는 순순히 답했다.

“중부 대륙이나 서부 대륙에서 침략해오는 것 아니냐고들 합니다. 사르디나가 적이 된다면 확실히 동부 대륙 전체에 큰 위협이 될 테니까요. 갈루스는 내륙에 위치해 해군이 아예 없으니, 알드 룬의 협력이 없으면 대응할 방도도 없지요. 국부 유출을 감수해가면서까지 외국들에 기술을 나눠주시겠다고 하는 것도 그런 사정이라면 이해가 간다고요.”

카르티스가 반응하지 않자 조슈아는 이번에도 자기가 따로 하고 싶은 말을 덧붙였다.

“람다 님이 있으니 어떻게 다른 대륙의 수상한 동향까지 앞질러 아실 수 있는지는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 사르디나가 문제인 것 맞습니까?”

늘 느슨한 표정이라 긴장감 없어보이는 그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 카르티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실은 저희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신 게 있는 것 아닙니까?”

카르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때는 믿을 만한 부하들에게 재앙에 대해 미리 설명해주고 함께 대책을 궁리해본 적도 있었다.
그런 엄청나게 황당한 이야기를 믿게 만들고, 사람에 따라서는 자신이 회귀자라는 사실까지 털어놓고 함께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며 재앙에 맞선 끝에, 그들이 무력하게 죽어나가고 다음 생에 다시 아무 것도 모르는 그들과 마주하는 일을 몇 번 겪고 나니 더는 설명할 의욕이 나지 않았다.
이제 그가 진지하게 의논상대로 여기는 존재는 람다뿐이었다.

“폐하.”

조슈아는 하고 싶은 말이 남은 것 같았다. 그 기색을 무시하고 이만 나가보라 말하려 했다.
그때 시종이 들어와 보고했다.

“폐하, 알드 룬의 1 왕자가 접견을 요청합니다.”



그동안 쌓인 ‘경험’ 속에서 알드 룬 왕실은 그리 나쁜 인상으로 남지 않았다.
재앙 상대로 영리하게 대처하고 자신과도 협력하기엔 지나치게 꽉 막힌 인물들이기는 했다. 그러나 나라를 버리고 저만 살려 했던 도스 국왕과는 달리 이쪽은 적어도 왕족들 대다수가 끝까지 국민들을 지키다가 목숨을 바쳤다.

“지난번 말씀하신 협약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1 왕자의 태도도 어쩐지 회담 자리에서보다 부드러웠다.

‘분명 지난 생에선 겉으로만 예의 차릴 뿐 날 망상에 빠진 암군 취급했었는데. 기술 협약이 그렇게 솔깃한가?’

도박하는 심정으로 추진한 보람이 있었다. 속으로 품은 감상은 익숙하게 감춘 채 협약의 구체적인 부분을 조율했다.
지나치게 엄격한 알드 룬 국왕이 태자 책봉을 미루고 있지만 1 왕자가 결국 태자가 되고 차기 국왕이 될 게 확실한 시점이라, 여기서 합의한 내용이 회담 끝난 뒤에 변경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무사히 합의를 마치고 나서도 두 사람은 잠시 한가한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접국의 왕과 왕자로서 적절한 친교를 쌓는 것도 외교의 중요한 일부였다.

“다음엔 알드 룬에서 폐하를 초청해 양국의 우호를 다졌으면 좋겠습니다.”
“바라는 바입니다.”

왕자의 말에 선선히 수긍했다.

“갈루스도 알드 룬에서 얻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왕자는 이미 널리 알려진 알드 룬의 문화 예술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물론 카르티스가 원하는 건 따로 있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카르티스 클라우디스 폐하.”

이 사람을 알고 있었다.
다른 모든 나라들처럼 알드 룬도 폐허가 되어갈 때, 쓰러지는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가며 최후까지 굳건히 섰던 희망의 등불이었다.
소중히 여겼다던 가족들도 전부 잃고, 이미 알드 룬이란 나라 자체가 흔적도 안 남았다. 알드 룬 국민이었던 사람들도 그때는 거의 다 죽고 흩어져 눈대중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으나 무너진 왕가의 마지막 생존자는 꺾이지 않았다. 그대로 재앙에 집어삼켜졌다.

“알드 룬 왕실은 폐하를 환영합니다. 모쪼록 평안하고 즐거운 시간 되시길.”

왕녀다운 기품이 담긴 인사는 살짝 발랄한 웃음으로 끝맺었다. 초면인 외국의 왕 앞이었으나 무례하거나 가벼워 보이기엔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 전하.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판에 박힌 인사말을 적당히 늘어놓으며 카르티스는 바네사 왕녀의 손을 감싼 얇은 새틴 장갑을 보았다.
재앙에 맞서 싸울 때 바네사의 손엔 연주로 인한 굳은살 외에도 수많은 흉터가 있었다. 그 손에 저런 장갑은 끼는 순간 죽 찢어져 버릴 것 같았다.

“오늘 저녁엔 오페라 공연이 준비되어 있답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알드 룬은 재앙이 닥치기 직전까지 풍요롭고 예술이 발달한 나라였다.
그날 관람한 오페라 역시 극장이나 무대, 연출과 배우와 연주자들까지 호화롭기 이를 데가 없었으나 카르티스는 그런 걸 감상할 기분이 아니었다.
회귀로 다져진 예법이 겉으로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반응을 보이도록 도와주었다. 적절한 순간에 박수도 치고, 무대에서 가장 돋보인 배우에게는 선물도 보내도록 지시했다.
갈루스도 오랜 역사가 있는 나라답게 예술을 꽃피울 토양은 언제나 비옥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한때는 그 역시 예술 진흥도 국왕의 중요한 의무라고 여긴 적이 있었다.
오래 전 일이었다. 지금은 예술 따위 영영 사라져도 좋으니 재앙만 막을 수 있었으면 싶었다.
눈은 무대 위에 고정한 채 속으로는 유니버스에 접속해 알드 룬의 주요 인사들을 조사하고 있는 사이 막간이 되었다. 박스석에 나란히 앉은 바네사가 물어왔다.

“혹시 이런 화려한 공연은 취향이 아니신가요?”

말투는 조심스럽지만 내용은 꽤나 당돌했다. 게다가 감상하는 척만 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왕녀의 소박하고 꾸밈없는 성격을 고려해 솔직하게 사과했다.

“부끄럽습니다. 소양이 부족하여 왕녀 앞에서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지금의 갈루스는 예술에 한해 척박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기에, 앞에 있는 사람이 국왕 본인이거나 1 왕자였다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이었다. 그러나 바네사는 교양 없다고 비웃는 대신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저도 이런 공연보다는 좀더 간소하고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자리를 더 좋아해요. 물론 저분들 모두 빼어난 실력의 소유자들이지만, 누구나 여기 와서 저 아름다운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자선 연주회에 힘쓰는 분다운 말씀이시군요.”

엄격한 국왕과 각기 뛰어난 왕자 왕녀들. 알드 룬 왕실도 갈루스 왕실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4 왕녀인 바네사는 1 왕자와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인지 과거의 자신과는 달리 어느 정도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는 모양이었다.
자선과 예술에 몰두하는 것으로 야심도 경쟁의식도 없다고 증명하는 데 성공한 거라고들 하지만, 만약 자신이 왕자 시절 바네사처럼 살았다면 형님은 민심을 얻어 왕위를 노리려는 거라고 간주했을 게 뻔했다.

‘하지만 재앙에 맞설 때 왕녀는 빼어난 군 지휘관이자 정신적인 영도자였지. 독보적인 실력의 힐러이기도 했어.’

유니버스의 분석결과로 보나 재앙이 닥쳤을 때 실제 벌어진 일로 보나 결론은 명확했다. 알드 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은 1 왕자가 아닌 4 왕녀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이었다.
야심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람다도 그렇게 말했고 지금 왕녀의 소탈한 태도도 연기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 본인의 성향 탓일까? 1 왕녀로 태어나 야심도 정치적인 재능도 일찍부터 계발할 수 있는 처지였다면, 그랬어도 이런 인물로 자랐을까?’



알드 룬과의 기술 협약, 그 외 각종 우호적인 조약을 추진하는 동안 바네사 왕녀와 만날 기회는 뜻밖에도 많았다.
왕녀와 실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아니었다. 혹시나 해서 먼저 떠보기도 했지만 바네사는 이번 협약의 취지와 골자만 알고 있을 뿐 자세한 진행상황은 아예 모르고 있었다.
그런 바네사에게 왜 자꾸 나서게 하는지는 얼마 뒤 1 왕자와 독대한 자리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제 동생이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왕가에 내려온 천사, 빈민들에게 뻗은 구원의 손길, 그런 찬사가 전혀 과장이 아닐 정도로 착한 아이죠. 벌레 한 마리 못 죽이는 성미예요.”

재앙 후 닥친 혼란 속에선 다른 인간들을 배신하고 저만 살아남으려 하는 자들도 많이 나타났다.
전장의 구원자, 치유의 여신이라 불리던 바네사지만 그런 자들에겐 자비를 보인 적 없었다.

“생각 같아선 언제까지고 제 눈앞에서 좋아하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평온하게 살게 해주고 싶지만......”

혹시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이 두 명이냐고 람다에게 물어보기 직전 1 왕자가 본론을 꺼냈다.

“...안타깝게도 그애는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고이 자란 왕녀가, 취미가 아닌 직업으로 음악을 택하고 세상을 돌아다닌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어차피 그 전에 재앙이 올 테니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드 룬을 위해서나 그애의 장래를 위해서나 현실적인 절충안이 필요합니다. 알드 룬이 아닌 외국에서, 보다 제대로 된 권력을 손에 넣는다면 견문도 넓히고 다른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도 가능하겠지요. 어차피 그애는 지금도 음악뿐 아니라 빈민복지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선정을 베푸는 근면한 왕 곁에서라면 보람찬 인생을 살 수 있을 겁니다.”


카르티스 폐하의 지옥행 2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그 이후도 순탄치 못했다. 첫 번째 삶처럼 인생을 의미없이 낭비하기 싫으면 큰형님과 동기들을 전부 찍어누르고 왕이 되는 것 외에 살 길이 없다는 게 확실해졌는데, 3왕자인 그가 1왕자를 능가하려면 보통 재능으론 불가능했다.
람다를 통해 주변 사람들의 마음까지 읽고, 자기 편이 되어줄 만한 사람들을 일찍 골라낼 수 없었다면 여섯 번이 아니라 육십 번을 회귀했어도 무의미한 쳇바퀴가 되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됐으면 정말 지옥 같았겠지. 이번 생은 성공해서 다행이야.’

“폐하. 주무십니까?”

왕이 된 그의 집무실 책상에 서류더미가 쿵 하고 내려앉았다.

“저는 주말에 출근시켜놓고 잠이 막 솔솔 오나보죠? 휴가나 낼 걸.”
“안 잤다.”

눈을 뜨고 고개를 드니 조슈아가 있었다.
그를 다시 거두고 중용한 것은 옛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엔 그의 충성과 영리함도 한 몫을 했다. 유니버스를 통해 많은 인재를 새로 발굴했는데 그들에 비해서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 생부터는 아예 성장과정에 개입해 어려서부터 귀족 자제 부럽지 않은 교육을 받게 해주었다. 지금의 그는 갈루스에서 손꼽히는 엘리트였다.

‘그 교육과정 중에 분명 왕과 왕실에 지켜야 할 예의범절도 있었을 텐데......’

싫은 건 아니었다. 무슨 버릇없는 소리를 하건 단말마의 비명보다는 듣기 좋다는 걸 그동안 학습한 때문만이 아니었다.
회귀를 거듭하면서 만난 신하들과 친구들, 배신자들 모두 다음 생에는 모든 것을 잊고 생전 처음 만난 사람처럼 대해야 했다. 아니, 생전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다.
조슈아도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고아로 태어났지만 태자의 눈에 ‘우연히’ 들어 좋은 교육을 받고 출세한 이 조슈아가, 왕실의 광대이자 짐짝인 망나니 왕자의 수발을 떠맡았다 허망하게 죽어버린 시종과 같은 사람이라는 증거가 필요했다. 저런 뺀질거리는 말버릇도 소중하게 느껴질 정도로.
총애를 믿고 까부는 것이니 엄히 꾸짖어야 한다고 다른 신하들이 말해도 그래서 늘 웃어넘겼다. 그 신하들 역시 시기심이 아니라 진심어린 충성심에서 하는 말임을 알면서도.
서류를 읽는 척하며 표정을 가렸다.
회귀자가 된 후 고통스러운 죽음이라면 지겹게 보고 겪었건만 지금도 첫 번째 삶에서 만났던 재앙만 떠오르면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그동안은 자신이 살아남는 게 급해 그 미래에 닥쳐오는 재앙은 생각할 필요 없었다. 아니,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이번 생엔 무사히 왕위에 올랐다. 갈루스에 감히 그를 해칠 세력은 남지 않았고, 인접국들도 경계하면서도 적대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
아끼는 신하들도 백성들도 다들 그의 눈앞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는 지금이 되자 람다가 그 재앙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도 왜 그런 것이 나타났는지, 어떻게 하면 무찌를 수 있는지는 답해주지 못했다.

‘정말 그런 것이 또 나타날까?’
“고대 던전에서 이번에 발견된 유물들도 거의 다 병기들이더군요.”

조슈아는 왕이 잘 감춰온 고민을 이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마도공학자들과 연금술사들에게 넘겼습니다만, 가끔은 좀 평화로운 시기에도 유용한 게 나와줬으면 좋겠습니다. 고대인들은 다 전쟁만 하고 산 건지.”
“고대 인류를 멸망시킨 재앙과 맞서 싸운 흔적이라고들 하더군.”
“네, 그 전설 말이죠. 하지만 지금은 평화롭잖아요. 후손 된 입장에선 지금 우리한테 쓸모 있는 물건이 나와주면 더 고맙겠네요.”
“갈루스의 국력이 급성장하는 걸 시기하는 나라들이 많다. 평화로울 때 대비를 해 두는 것도 중요해.”
“글쎄요. 굳이 별일도 없는데 군비를 증강하는 게 더 주변국을 자극할 것 같은데요? ...하지만 폐하께서 하시는 일이니 다 나중에 보면 의미가 있겠죠.”

회귀로 다져진 연륜 덕에 신하들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왕이 고대 전설에 갑자기 흥미를 보이고 직접 무예를 연마해도 다들 이런 식으로 넘어가 주었다.
조슈아처럼 자신 외엔 어차피 기댈 곳이 없는 사람도, 손익에 따라 얼마든지 주인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나 카르티스 클라우디스가 충분히 섬길 가치 있는 군주인지 수시로 따지는 사람들도 모두 이번 삶엔 한결같이 자신을 믿고 따라주었다.
이들이 그때와 같은 재앙 앞에 마주하게 된다면......

“폐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신경 쓸 것 없다.”

다 감추지 못한 공포가 얼굴에 드러난 것을 깨닫고 카르티스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니버스에 접속하고 오겠다.”

혹시라도 재앙이 다시 덮쳐오면 일찍 알 수 있도록 람다에게도 꾸준히 관측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조짐이 보이면 언제라도 알려달라는 말과 함께.
그런데도 이렇게 수시로 직접 확인해야 마음이 놓였다.

-마스터.

람다의 목소리가 뇌리에 울렸다.

-비에른 지방에서 균열이 발생했어.
“균열이라고?”
-재앙의 조짐이야.

람다는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눈망울엔 뚜렷한 근심이 어려 있었다.
이번엔 장소도 시기도 달랐다. 지진 같은 징조도 없었다.
당황하면서도 람다의 정보에 귀를 기울이고 할 일을 생각했다.
‘과거’엔 갈루스 왕실의 누구도 이런 재앙이 올 줄 몰랐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게 평범한 자연재해가 아니라는 걸 왕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았고, 고대 유물로 무장한 강력한 전사들도 있었다.
조슈아는 제외하고. 그는 여러 생을 거듭하는 동안 한 번도 실전에 유용할 만큼 염력이 강해진 적 없었다. 정교한 훈련을 거쳐도 호신술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건 아니야. 그때처럼 괴물떼가 나오는 거라면 백성들과 비전투원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겠지. 어차피 행정 쪽이 특기인 녀석이니 그쪽을 맡기면 알아서 잘 살아남을 거야.’



그 후로는 천천히 지옥에 걸어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전사들 개개인의 무용도, 전술 전략도 소용없었다. 유적에서 구한 유물도 그 괴물들에 맞서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뒷일이고 뭐고 외국에 구원을 요청해 보았다. 거의 주권국가의 지위도 포기할 각오로 한 요청이었으나 대부분 무시당했다.
이런 이변이 다른 나라들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역시 괴물들과 싸우느라 다른 나라까지 도와줄 힘이 없는 나라, 언제 똑같은 일이 자기네 나라에서까지 벌어질지 몰라 지레 겁먹은 나라뿐이라 서로 도움은커녕 방해만 되었다.
들려오는 모든 보고가 끔찍하고 암담했다. 충성과 재능을 겸비한 아끼던 부하들도 출전할 때마다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가서 이기고 돌아오란 말이 공허하게만 느껴질 지경이 되어 출정 명령을 미뤘더니, 대기하라는 말도 무시하고 기꺼이 목숨을 바치러 나간 자도 있었다. 물론 그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싸우러 나가지 않으면 살 수 있는 시기도 얼마 안 가 끝나버렸다.
괴물들이 각지로 흩어지면서 백성들이 대피할 장소도 사라졌다. 슈바이켄의 가장 큰 대피소가 괴물들의 발 아래 폐허로 변해버렸다. 그곳에서 관리들과 병사들을 통솔하고 있던 사람은 조슈아였다.

“람다...어쩌면 좋나......”

유니버스는 어디까지나 정보를 제공할 뿐, 그것을 바탕으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건 자신의 몫이다.
이미 지겨울 정도로 잘 아는 사실임에도 카르티스는 람다에게 매달렸다. 이제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눈앞이 캄캄해진 적은 없었다.
형제자매의 시기, 부왕의 무관심, 신하들의 배신 같은 건 유니버스로 예측해서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뻔히 알면서 어떤 힘이나 술수로도 극복하지 못하는 이런 재앙은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또 한 차례의 죽음과 회귀를 예감하면서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다섯 번째 삶에서 즉위하지 못하고 죽은 것은,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잠깐 방심해서 실수한 탓이었다.
여섯 번째 삶에선 즉위에 성공했고 이후 신하들과 백성들 사이에서의 평판도 긍정적이었다. 외국들도 갈루스를 두려워했다.
그 모든 경험과 연륜 덕에 일곱 번째 삶에선 한결 더 수월하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왕을 기쁘게 떠받드는 충신들도, 속마음 다 들킨 줄도 모른 채 왕을 경계하는 나라 안팎의 적과 라이벌도 그의 눈에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재앙이 닥쳐올지 모른다. 아무리 훌륭한 왕이 되어 행복하고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더라도.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당할 수도 없으므로 일단 재앙의 원인이 무엇인지, 막을 방법은 없는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고대의 재앙을 기록한 마도서와 역사서 중엔 ‘재앙’을 고대 인류의 타락과 악덕 탓에 떨어진 일종의 업보나 징벌로 간주한 것들도 있었다.
인류가 있는 한 재앙은 무조건 닥친다는 가설보다는 매달릴 만한 것이었다.
갈루스 왕실부터가, 별다른 결점 없는 장자가 왕위를 물려받고 나머지 계승자들은 평화롭게 뒷전으로 물러나는 대신 기권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목숨 건 계승 다툼을 벌여야 했던 것이 오랜 왕실의 부패와 이권다툼, 무능하고 이기적인 왕들 때문이었다는 걸 지금의 카르티스는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훌륭한 왕이 되려고 노력했다. 부패한 왕족들과 귀족들을 제거하고, 낡고 부조리한 제도들을 개선하고, 민생에 힘쓰고, 기술을 발전시켜 나라 살림을 불렸다.
그러나 개개의 시도들이 성공할 때마다 그가 느낀 것은 성취감이 아닌 좌절감이었다.
그가 아무리 현명하고 뛰어나도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면 그 해결책이 다음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그 다음 문제까지 해결해도, 갈루스 국경 밖의 문제까지 눈에 들어오면 그건 도저히 갈루스 왕 혼자 노력한다고 해결할 수 없었다.
초조함과 좌절감, ‘그래도 혹시...’하는 희망고문 속에서 결국 또다시 재앙을 만났다.


좋은 왕이 되어 재앙을 예방한다는 계획이 그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폐기되었을 무렵 갈루스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어있었다.

“폐하, 이만 일어나셔야 합니다.”

조심스럽게 그를 깨우는 조슈아는 갈루스의 왕실 근위대 제복을 입고 있었다.
이미 회귀에 이골이 난 카르티스였다. 조슈아의 박복한 유년기는 몇 번 시간을 되감아도 거의 변하지 않았기에, 그의 성장기를 자신의 편의대로 조정하는 건 이제 흰 종이에 원하는 환경과 교육과정을 적어넣는 것만큼이나 간단했다.

“델로스 연맹 회담이 이제 두 시간 남았습니다. 지금부터 준비하셔야죠.”
“그래.”

카르티스는 잠시 마른세수를 했다.
주변국들이 벼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겉보기엔 별 위협거리도 없는데 갈루스 혼자 꾸준히 군비를 증강시키고 외국의 인재들까지 초빙하고 있으니. 평화로운 동부 대륙에 느닷없이 전쟁광이 나타나려는 조짐으로 보이는 게 당연했다. 그 자신이 도스나 리브리안 왕이었다 해도 똑같이 반응했을 것이다.
재앙이 자기네 나라까지 미치자 무조건 저만 살겠다고 도망쳤던 도스 왕의 하찮은 최후들을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회담이 끝나면 좀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검술 훈련을 하루만 빼시죠.”

카르티스는 고개만 흔들었다. 요즘은 신하들과 대화하는 것 자체가 지겹게 느껴졌다.

“폐하께선 이미 갈루스의 그 어느 전사보다 더 강력한 전사이지 않습니까? 당장 이 방에 암살자가 나타난다면 제가 폐하를 지키는 게 아니라 폐하께서 저를 지켜주셔야 할 정도인데요?”
“일정 변경은 없다.”

무뚝뚝한 대꾸에 조슈아가 입을 다물었다.
한때는 조슈아나 다른 신하들의 농담 섞인 충언에 웃으며 대꾸해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카르티스는 그러던 시절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대신 아쉬운 표정으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근위대장으로서 왕 곁에서도 무장을 할 수 있는 그가 지금 지닌 무기는 총과 강화 사브르였다.

‘어째서 초능력은 단련해도 늘지 않는 거지......’

검술이나 마법도 노력만으로 무한정 강해지지는 않는다. 언젠가는 타고난 재능의 한계에 부딪치는 날이 온다.
하지만 초능력의 계발엔 유난히 재능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지금 조슈아가 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고위 지휘관이 된 것은, 병장기의 빠른 발전으로 지휘관 개인의 무력이 전장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그만큼 떨어진 덕분이었다.
타국의 지휘관들 중엔 조슈아쯤 새끼손가락으로 비틀어 버릴 수 있는 강자들도 있지만 조슈아가 지휘하는 군대는 창칼이 아닌 총과 마도공학 장비로 무장하고 있었다. 생소한 병기에 빠르게 적응하고 거기 맞는 새로운 전술을 고안하는 일엔 고르고 고른 인재들 중 조슈아가 가장 뛰어났다. 부하들의 충성과 애정을 받아내는 재능도 있었다.
그러나 만족할 수 없었다. 고대 유물들을 복제한 마도장비의 위력도 재앙 앞에서 얼마나 도움이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미 희미해져 가는 수많은 자신의 삶들 중에도 여전히 생생한 몇몇 기억들이 있었다.
그 중 첫째가 바로 람다를 만나기 전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맞이한 첫 재앙이었다.
겁에 질려 이성을 잃은 채 퍼부은 조슈아의 일격이 재앙이 뱉어낸 괴물 하나를 그토록 쉽게 없애버렸다.
만약 그때와 같은 힘을, 목숨과 맞바꾸지 않고도 일상적으로 쓸 수 있다면. 저 마도대전의 영웅들만큼 강력한 힘으로 재앙에 맞설 수 있다면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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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 : "입사 지원서 내러 갔는데, 알고보니 회장실 책상 서랍속에 내 이력서 대신 작성해 놓은 게 있더라고요. 내가 쓴 것보다 더 정확하게 역경란까지도 빼놓지 않고. 탈주각은 그때부터 서 있었던 거죠."



카르티스 폐하의 지옥행 1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황제가 제국 내의 인물들뿐 아니라 그 외 손 닿는 모두의 인생을 자기 목적 때문에 일그러뜨려 버린 것 아니냐....라는 이야기를 반지언니와 한 끝에 보행자가 쓰는 글입니다.

*파우스트 전설은 독일에서 인형극으로 인기를 끌었지요. 독일 소설'인형놀음장이 폴레'에서 '파우스트 박사의 지옥행'이라는 인형극 제목을 본 적이 있습니다.


Characters: 황제. 조슈아. 바네사. 그 외.
Rating: PG-15
Warnings: 하드 8-16 스포
Summary: 하드 황제가 길다면 길게, 짧다면 짧게 털어놓은 그의 삶



“카르티스 전하.”

계속 자고 싶었지만 두들겨 깨우는 손이 집요했다. 안 깬 척 이대로 버티다가는 또 맨바닥에 굴려버릴 기세였다.
갈루스 왕실이 보수적이긴 해도 얼마 전 즉위한 큰형님마저 포기한 망나니 왕자는 그 정도 불경쯤 일상으로 겪는 일이었다.

“지금이 아무리 전하라도 도박장에서 외박하실 때가 아니라고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숙취로 울리는 머리를 짚으며 억지로 눈을 떴다.
초점 안 맞는 눈으로도 조슈아의 심각한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무슨 일 났나?”

알코올에 전 성대는 힘 안 들이고 껄렁한 목소리를 만들어냈으나 그의 머리는 언제 술에 젖었냐는 듯 빠르게 돌아갔다. 만약 그가 겉보기 그대로 술독에 빠져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었다면 부왕보다도 먼저 돌아가시고 말았을 터였다.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아무튼 오늘 밤 정도는 왕궁 침대에서 주무세요. 뒤치다꺼리 하는 제 생각도 해달라고요.”

말투는 장난스러웠지만 원래 염력술사인 조슈아는 도박장에 직접 들어오는 걸 싫어해 다른 시종을 보내곤 했었다. 마력구속구를 차지 않으면 왕실 시종인데도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직접 마력구속구 차고 와야 할 정도로 심각한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었다.

“알았어. 다음에 휴가라도 줄게.”

그의 충성스러운 시종이 돈이나 권력보다 더 좋아하는 것을 익숙하게 입에 담으며 기지개를 켜고 겉옷을 걸쳤다. 그러는 동안 조슈아도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던 왕자의 소지품을 익숙하게 챙겨 앞장섰다.
도박장 출구에서 직원의 안내에 따라 마력구속구를 벗을 때까지만 해도 조슈아는 평소 술집이나 서커스단 등을 떠날 때와 똑같은 태도였다. 그러나 바깥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왕실 문장을 가린 마차가 아닌 말 두 마리였다.

“오늘은 좀 작작 마실걸.”

버릇이 된 지 오래인 너스레를 떨면서도 카르티스는 훌쩍 말에 올랐다. 숙취와 불면 정도로 승마를 할 수 없으면 갈루스 왕실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새벽별도 뜨기 전이라 거리엔 둘뿐이었다.
그렇게 아무도 엿들을 수 없는 때가 되어서야 조슈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자세한 건 모릅니다. 대지진 복구현장에서 무슨 문제가 난 모양입니다.”
“또 여진인가?”
“그런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군사회의가 열렸거든요.”

조슈아는 영리하고 민첩하긴 해도 출신을 알 수 없는 고아였다. 용모 단정하고 염력 같은 잔재주도 있어 왕실 시종까지 되었지만 그래 봐야 카르티스처럼 아무도 곁에서 일하고 싶어하지 않는 왕자 곁의 빈자리를 채우는 신세였다.
그런 그가 군사회의 내용까지 파악하는 건 무리였을 것이다. 카르티스는 더 채근하는 대신 혼자 생각에 잠겼다.
슈바이켄 지방에서 대지진이 일어난 건 한 달도 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내고 타 지방 백성들까지 동요하게 만들었지만, 인접국인 게일문드, 리브리안 등에서도 비슷한 규모의 여진이 이어지면서 더 문제가 커졌다. 흉흉한 소문이 이런 시국에 도박이나 하러 모여드는 허섭스레기 같은 인간들 틈에서도 들렸을 정도였다.

‘민란이라도 일어났나? 대뜸 군사회의라니...’

살기 위해 왕실 분위기에는 민감해지도록 단련했지만 대신 통치술이니 제왕학이니 하는 분야는 겉핥기 정도밖에 익히지 못했다. 이런 재난들이 앞으로 무슨 문제로 이어질 수 있는지는 그저 짐작밖에 할 수 없었다.

‘바보 놀이 하다가 진짜 바보가 되었군.’

별로 슬프지는 않았다. 살아있는 바보가 죽은 똑똑이보다 나았다. 늘 자신을 무시하고 학식을 뽐내던 둘째 형님은 오래 전 독살당했고 자신은 이렇게 살아있었다.
지금도 이렇게 서둘러 봐야 재난 복구에 자신이 손댈 일은 없을 것이다. 권력 쥔 똑똑이들이 알아서 골치 썩이게 놔두고, 자신은 이런 재난 시국에 어울리게 자중하는 모습 좀 보이면 될 일이었다.
지금 도박장 다녀오지 않은 척, 작은 길을 골라 왕궁 뒷문으로 접근하는 것도 그런 자중하는 행동......중 하나......였는데.
갑자기 천둥이라도 친 것처럼 어디선가 굉음이 울려퍼졌다.
조슈아는 고삐를 당겨 말을 세웠다. 카르티스는 자기가 술이 덜 깼나 싶어 그러지도 못했다.

왕궁이 사라졌다.
분명히 이만큼 가까이 와서 시야를 방해하는 마지막 건물을 돌면 보이던, 장엄하고 아름다우며 지긋지긋하던 왕궁이 뭔지 모를 돌무더기가 되어있었다.

“전하, 이리 오세요!”

조슈아가 뭐라 외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왕궁이 무너지면서 낸 굉음에 귀가 일시적으로 멀어 버린 걸 뒤늦게 깨달았다.
돌무더기 위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다. 달빛에 의지해 먼발치서 보기엔 지붕이 무너져 만들어낸 괴이한 무늬 같았지만, 그것이 꿈틀거리고 번들거리며 왕궁 지붕의 기왓장과는 전혀 다른 빛깔을 드러냈을 땐 더 착각하지도 못했다.

“괴물...”

주위는 이미 비명지르며 도망가는 사람들, 기절해 쓰러지는 사람들 등으로 아수라장이었다. 카르티스가 그런 혼란 속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넘어져 짓밟히지 않은 건 말 위에 올라앉아 있는 덕택이었다.
괴물이 아가리를 벌리고 끔찍한 소리를 질러댔다. 그 소리만으로도 사람들은 거품 물고 나뒹굴었다. 카르티스도 말에서 떨어질 뻔하고 겨우 정신을 차렸다.

“조슈아, 어디 있나?”

역시 하얗게 질려 굳어 있던 조슈아가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둘 다 그 다음에 뭘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실은 무슨 일이 난 건지도 다 알 수 없었다.
도망치고 싶어도 괴물은 한 마리가 아니었다. 왕궁을 제 둥지인 양 으깨고 올라앉은 거대한 괴물 주위로 그것과 닮은 작은 괴물들이 스멀스멀 기어나오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답해줄 사람 하나 없는 질문을 헛되이 중얼거렸다.

“저, 전하, 도망을...”

조슈아가 울먹이며 카르티스를 재촉했지만 이미 늦었다.
가장 큰 괴물이 두 사람을 향해 아가리를 벌렸다.
도망치지도 못하고 얼어붙어 이때까지 멍청하게 구경만 하고 있던 사람들이 죽을 차례였다.
말고삐를 흔들었더니, 타고 있던 말이 그 자리에 푹 쓰러져 버렸다. 이미 한참 전에 선 채로 기절해 있었다.

“으아아......”

조슈아가 카르티스처럼 굴러떨어지지 않은 것은 그의 말이 더 용감해서가 아니었다. 말고삐를 당겨 도망가자는 생각도 못한 채 괴물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봐, 정신 차려!”

소매에서 펜듈럼까지 꺼내는 걸 보고 카르티스는 조슈아가 공포에 질린 나머지 정신을 놓아버린 것을 깨달았다. 그의 염력을 공격에 적합하게 집중하도록 돕는 무기인 건 알지만, 저걸로 잡을 수 있는 건 왕자도 몰라보고 덤비는 취객 나부랭이였다. 저런 인지를 벗어난 괴물이 아니라.

“그만 둬! 도망쳐야 해!”

억지로라도 끌고 가려고 뻗은 손이 조슈아를 잡는 것보다 먼저 펜듈럼에서 마력이 뻗어나갔다.
왕실 기사가 실력을 과시할 때도 본 적 없는 마력이었다.
염력엔 소리도, 빛도 없다.
그 말은 반만 맞았다.
달빛이 일그러졌다. 달빛에 빛나던 괴물의 뿔과 이빨도 같이 일그러졌다.
공간 자체가 구겨지고 맞부딪치며 나는 소리는 괴물의 우짖는 소리보다 크지 않았으나 그만큼이나 소름끼쳤다.
폭음이 귀를 찢었다. 정말로 고막이 터진 것 같았다.
다시 눈을 뜨고 주변을 분간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카르티스의 눈에 보인 것은 기적이었다.
그 괴물의 머리가 박살나 흩어져 있었다. 몸체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직전까지 왕궁의 폐허뿐 아니라 수도 전체를 다 뒤덮을 것 같던 괴물이 그냥 징그러운 피와 살점의 무더기로 변해버렸다.

“조슈아.”

눈물이 나왔다. 살았다는 기쁨에 카르티스는 쓰러지는 그를 받아 꽉 끌어안았다.

“굉장해. 대체 어떻게 이런 힘을...”

대답이 없었다.
카르티스의 옷에 축축하게 젖어든 것은 눈물이 아니었다. 조슈아는 눈코입에서 한꺼번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조슈아? 정신차려, 조슈아!”

붙들고 흔들었으나 귀에서도 피가 흘러나왔을 뿐, 이미 호흡도 맥박도 느껴지지 않았다.

‘초능력을 지나치게 쓰면 뇌에 과부하가 온다고요. 그러다 진짜 죽은 사람도 있다니까요?’

조슈아가 엄살부릴 때의 단골 멘트였다.

“아니야......”

더듬거리며 그를 바닥에 눕히고 다시 호흡을 확인했다. 그러면 다시 숨이 돌아올 것처럼.

“제발, 거짓말이라고 해줘...”

멍청하게 그러고 있는 사이 머리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
방금 조슈아가 죽인 것보다 더 큰 괴물이 다가오고 있었다.
카르티스 클라우디스가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었던 어처구니 없는 죽음이었다.


사후세계 대신 만난 것은 신비로운 분위기의 소녀였다.
소녀가 하는 말의 상당 부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차차 알게 될 거라고 여겼던 많은 부분을 아예 잊어버렸다.
그러나 두 번째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말만큼은 혹할 수밖에 없었다.
신중하게 결정하라는 소녀 - 람다의 말도 예의상 해보는 소리로 들렸을 정도로.
일상적인 보고 하나에도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붙이는 왕궁에서 자란 탓에 저지른 멍청한 실수였다.
유니버스는 과장도 기만도 모르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계약을 승낙하고 무서운 두통과 함께 의식을 잃었다.


“...전하, 카르티스 전하! 일어나세요!”

조슈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가끔은 형님들 그림자라도 본받아 보세요!”

사실 잠은 한 시간 전에 의식이 돌아오면서 깼다. 그저 자는 척하며 정신을 추스르고 있었을 뿐.
이불 속에서 더듬어 확인한 자신의 작은 몸, 방금 들은 목소리로 지금이 언제인지도 가늠할 수 있었다. 주의 깊게 시작한 망나니짓에 왕궁 사람들이 저렇게 진지하게 반응하기 시작한 게 분명 열두 살 자신의 생일 연회에서 엉터리 시를 지어 읊은 뒤부터였으니까.
카르티스가 이불을 젖히고 벌떡 일어났다.
왕궁의 자기 방이었다. 답답하고 화려하기만 한 감옥 같은 방이지만, 적어도 괴물에게 으스러지지 않은 방이었다.

“일어나셨군요.”

‘한 시간은 더 침대에서 뭉개실 줄 알았는데’가 생략되어 있다는 건 돌아오기 전 진짜 열두 살이던 자신도 알 수 있었을 정도였다.
큰형님의 첩자인 이 시종은 감시대상이 별 위협거리가 아니라고 판단한 뒤로 열두 살 꼬마 앞에서 빠르게 방심해 버렸다.
그런 방만함 탓에 일 년을 채우지 못하고 좌천되었지만 그만큼 대하기 쉬운 사람이었다.

“뭐 좋은 꿈이라도 꾸셨습니까?”

시종이 떫은 표정을 서투르게 감추며 물었다. 카르티스는 활짝 웃고 있었다.

‘인생의 기쁨과 소중함을 드디어 깨달았는데, 기쁠 수밖에.’

이번 생은 허무하게 낭비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독살당했다.
슬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람다 앞에서 카르티스는 허탈하게 웃었다.
범인은 자신이 우습게 보았던 그 시종이었다.

“미안하다. 내가 방심했어.”

-조심해, 마스터... 무한정 되돌릴 수는 없어.

“그래. 이번은 전적으로 내 실수였어.”

괴물에게 으스러진 왕궁을 보기 전까지, 왕궁은 감옥만도 못한 곳이고 형제자매는 원수만도 못한 사이라고 생각해왔다. 아니, 그렇게 생각한다고 착각해왔다.
그 광경을 본 순간 큰형님을 걱정해버렸다. 형님에게 찰싹 붙어 자신의 험담을 하는 것으로 생존술을 삼았던 막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아득해 했다.
가족의 정도 왕가를 향한 충성심도 다 없는 듯이 억누른 데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인데, 한심하게도 그걸 잊은 채 살아남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허무하게 낭비하지 않겠다고 다짐해놓고 지난번보다도 더 허무하게 낭비해버렸군.”

또다시 덮쳐오는 두통 앞에서 고민했다.
첫 번째 삶처럼 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조심성 없이 능력을 키우고 두각을 드러내면 두 번째 삶처럼 되어버릴 위험이 너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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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작입니다.

로드가 없었던 세계 5 - 세상이 이래선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로드는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눈꺼풀 너머로 느껴지는 빛이 이제 아침이라고 알려주었다.

잠결에 따뜻한 쪽으로 파고들어가던 로드는 자기가 침대에 홀로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으아악!”

으악, 뭐야. 왜 그래?”

벌떡 일어나는 로드 옆에서 프라우도 벌떡 일어났다.

, 였어?”

로드가 프라우를 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렇군... 여긴 너의 집이고 너의 침대니까 당연한 건데.”

울다 지쳐 잠든 로드한테서 침대를 뺏을 순 없잖아. 마침 여긴 밤엔 꽤 추우니까, 감기 조심도 할 겸 로드를 혼자 안고 잘 절호의 기회도 잡을 겸!”

언제는 여러 명이서 날 안고 잤다는 듯이 말하지 마.”

로드가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오늘 바빠?”

로드가 물었다.

아니, 먹을 거 남았으니까 며칠 사냥 안 나가는 정도는 문제없어. 로드는 오늘 예정이 어찌 되시는지?”

우선 프람이나 샬롯을 다시 만나봐야 할 것 같아. 요한도 찾아야 하고...”

쾅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에 공동주택의 연약한 벽이 부서질 듯 흔들렸다. 로드도 프라우도 어리둥절해서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엘프 가드다! 문 열어!”

밖에 있는 자가 다시 문을 쾅쾅 두드렸다.

프라우 너 뭐 범죄 저지른 거 있어?”

그러는 로드야 말로?”

!

잠금장치가 부서졌는지 문이 열리고 엘프 가드 셋이서 척척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 무슨 일인데 문까지 부수고.”

프라우 레망, 2 마탑주께서 널 찾으신다.”

설명은 그걸로 끝이었다. 가드들이 프라우의 양 팔을 한쪽씩 잡았다.

루실리카가 프라우를 찾는다고?”

로드가 그들 앞에 나섰다.

어째서지? 이유......!”

엘프 가드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로드의 배를 발로 걷어차 쓰러트렸다.

인간 따위가 건방지게 엘프들 하는 일에 끼어들어?”

로드가 배를 안고 뒹굴었다. 한 발 늦게 프라우가 입을 딱 벌렸다.

.. 너 너희들 그 사람 내버려 둬 다치게 하면 내가 가만 안 둘거야!”

가만 안 두면 어쩔건데.”

가드들이 비웃었다.

멀쩡하게 생겨갔고 왜 인간을 찾냐, 변태도 아니고. 엘프 애인을 사귀라고.”

이 새끼들이!”

프라우.”

로드가 손짓했다.

가봐.”

“....그래.”

여기서 프라우가 난동을 부리다 가드들하고 싸움이 나고 일이 커지는 것보다는 얌전히 루실리카를 만나고 상황을 파악하는 게 낫다. 로드의 뜻을 알아차린 프라우는 순순히 그들에게 끌려나갔다.

가는 프라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로드도 일어났다. 이른 아침부터 봉변이긴 했지만 루실리카와 접촉할 수 있으면 좋은 일이고 그도 프라우에게 말한 대로.

갑자기 뒷덜미를 턱 잡혔다.

너도 나가.”

남아서 문짝을 손보던 가드 하나가 로드를 잡아 집밖으로 끌어내었다.

잠깐만! 나는 왜?”

왜냐니, 빈 집에 인간 창녀를 혼자 둘 거라 생각했어?”

로드는 잠깐 뇌가 멎어 반응을 하지 못했다.

집 바깥까지 끌려나가고 나서야 로드는 자기가 바지도 없이 달랑 셔츠바람인 걸 알아차렸다.

, 잠깐만! 옷은 입고!”

어떤 옷?”

검은색... 바지하고 재킷....”

프라우의 옷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옷이었기에 그 가드는 어렵지 않게 로드의 옷을 찾아 그에게 던져주고 보란 듯이 프라우의 집 문을 잠갔다.

그자가 길 저편으로 사라지도록 로드는 옷뭉치를 끌어안은 채 망연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모욕이 너무 세면 화도 안 난다는 걸 로드는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대체.... 뭐야. 여기 사람들은 다 이런 취급을 받으며 사는 거야?’

아무튼 언제까지나 반벌거숭이로 길바닥에 서 있을 순 없었으므로 로드는 주섬주섬 바지를 입었다. 이른 아침이라 길에 지나가는 사람이 얼마 없는 게 다행이었다.


..... 그게 뭔꼴이야.”

막 바지춤을 끌어올리던 로드는 그에게 다가오는 프람을 보고 놀라 굳어버렸다.

가까워진 프람의 눈에는 분노가 넘실거렸다.

...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엘프 놈들이 다 그렇지. 아니 그래도 어떻게 옷도 다 못 입은걸 쫓아내냐?”

, 이건 프라우 잘못이 아니야!”

그대로 프람이 검을 뽑아 집이라도 부숴버리면 안되기에 로드는 서둘러 프람의 팔에 매달렸다.

그러고 나서야 자기가 한 말이 가정폭력 피해자나 함직한 소리인 걸 깨닫고 당황했다.

....러니까 가드들이! 와서 프라우를 잡아가면서 나도 내쫓은 거야.”

말하고 보니 이것도 프람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만한 말은 아니었다.

“...일단 옷 마저 입어. 가려줄게.”

프람이 돌아섰다. 옷을 마저 입으며 로드는 왠지 서러워졌다. 로잔나 통령도 인정한 말빨인데, 여기 와서는 그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옷을 입고 나서야 코트와 검이 없는 걸 알았지만 지금 프라우네 집을 문 따고 들어갈 수도 없었다. 프라우 있을 때 다시 오면 되려니 싶어 로드는 그건 그냥 포기했다.

아침은 먹었어?”

프람이 물었다.

“....아니.”

또 엘프가 어쩌고 하며 화낼까봐 로드가 불안하게 눈치를 보았지만 프람은 별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아침부터 먹으러 가자.”

...”

별 수 없이 로드는 프람을 따라갔다.

그런데 아침부터 여긴 웬일이야?”

묻지 않을 수 없는 게, 이 길을 지나다니는 다른 사람들은 전부 엘프였고 프람과 로드를 흘끔거렸다. 그냥 지나가다 우연히 들렀을 가능성은 없어보였다.

이러지 않을까 싶어 와봤어.”

프라우가 쫓아낸 게 아니라고 다시 변명하고 싶었지만 의미는 없을 것이다.

“...고마워.”

엘프 중에도 착한 엘프가 있을 수 있겠지.”

프람이 말했다.

한두 명 정도는 정신 똑바로 박혀있을 수도 있고. 그래도...... 그래봤자, 세상이 이래선 소용 없어.”

맞아.”

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 거주 구역을 벗어나자 급격히 주위가 낡고 거칠어졌다. 도로는 포장 안 된 흙길이고 회칠도 제대로 안 된 벽에 금이 가 있는 곳도 있었다.

프람이 그 중 한 군데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식당인지 어둑한 실내에 식탁이 여럿 놓여있고 사람들이 두엇 앉아 음식을 먹고 있었다.

스튜 2인분하고 빵 줘요.”

프람이 주문하자 나이 지긋해 보이는 주인이 스튜를 두 그릇 뜨고 빵을 하나씩 얹어주었다. 거무스름하고 딱딱한 빵이지만 뜨거운 스튜에 담갔다 먹으니 먹을 만은 했다.

어제는 아침부터 죽음의 땅에 나가있던 것 같던데.”

순식간에 한 그릇 다 먹고 스튜를 더 주문하는 프람을 보다 로드가 물었다.

오늘은 이러고 있어도 괜찮아?”

괜찮아. 거기 날마다 나가면 몸 망가져. 가끔 쉬어줘야 해.”

그래....”

그리고 네 거주민 등록을 해야 내 포상금도 나오니까.”

, 등록을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로드가 궁금하던 걸 물어보았다.

그러니까, 도시 밖에서 생존자를 데려오면 총독부에서 너한테 포상을 해준다는 건 알겠는데, 그렇게 사람들을 모아들여선 뭐에 쓰는지 혹시 알아?”

어디 쓰는 건 없어. 등록하면 일주일에 1.5kg씩 식량이 배급돼. 감자나 호밀이고 질도 썩 좋진 않아서 그냥 굶어죽지 않는 정도지만.”

그리고?”

그것만으론 부족하니까, 일할 수 있으면 여기 남쪽에 국영농장이 있어. 인간이 감독관 하는 데도 있으니까 그런 데로 가면 먹고 살만은 해.”

그것 뿐이야?”

로드는 조금 당황했다.

아니....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고 구휼할 책임이 있는 건 맞지만 이런 세상에서 그런 걸.... 한다고?”

, 새 총독 오고부터긴 해.”

프람이 자기 걸 다 먹고 로드의 그릇을 보았다. 로드는 반쯤 남은 스튜를 프람에게 밀어주었다.

그전엔 농장에서 일을 해야 배급이 나왔어. 질도 더 나빴고. 감독관도 전부 엘프 뿐이었고.”

라플라스.......’

이런 극한 상황에서 개개인을 원망해 봐야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도 해봤지만 역시 배신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엘프들의 생존을 위해서라곤 해도 아발론인들을 착취하고 짓밟다니.

그나마 그 상황을 개선하고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하는 게 카르티스라는 것까지, 아발론의 국왕된 자로서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다.

로드의 표정이 어지간히 비통했는지 프람이 스튜 그릇을 다시 그에게 밀어주었다.

.. 더 먹고 싶으면 양보할 필요 없어.”

아냐. 그건 너 먹어.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래.”

. 넌 생각 많을 것 같아 보이긴 하더라.”

프람이 말하며 스튜를 먹었다.

근데 가끔은 생각만 하지 말고 할 일부터 찾아 하는 것도 좋아. 적어도 그런 표정을 하기보단 말야.”

맞아.”

로드가 프람에게 미소를 보냈다.

너는 언제나 옳은 말만 해.”

프람이 자기가 그렇게 많이 말했나 갸우뚱 하는 동안 로드가 지금 해야 하는 일 중 하나를 골랐다.

혹시 요한이란 사람 알아?”

 

 

한참을 대기실에 갇혀있다시피 하던 프라우는 마탑주고 뭐고 콱 도망가버릴까 생각하고 있을 때 쯤 되어서야 겨우 응접실로 안내를 받았다.

가드들에게 끌려왔다지요. 미안해요. 지시하는 과정에 착오가 생겨 불편을 끼쳤습니다.”

프라우는 너무 무례하지 않을 만큼 재빠르게 루실리카를 훑어보았다.

미안하단 말은 진심인 것 같았다. 지난 생에서 만났을 때와 비교해 봐도 특별히 망가진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거야 한눈에 드러나는 게 아니긴 하지.’

안녕하세요, 마탑주님. 절 찾으셨다면서요?”

일단은 예의바르게 나가보았다.

. 앉아서 얘기하죠.”

탁자에는 허브티와 쿠키가 준비되어 있었다. 소박해보이지만, 물자가 귀한 이 세계 기준으론 사치까진 아니어도 정성을 들인 대접이었다.

프라우는 조금 긴장했다.

기다리는 동안 생각해봤는데 저는 마탑주님께서 지목해 데려올 만한 점이 전혀 없는 평범한 엘픈데요. 무슨 이유로 부르셨는지 먼저 들어도 될까요?”

별로 혼내려고 부른 건 아니에요.”

루실리카가 말했다.

듣자하니, 재능이 출중한데도 불구하고 마도공학 연구는 뒷전으로 하고 고대 유적을 찾아다닌다죠.”

.. 그렇죠.”

고대에 대한 연구를 맡기고 싶은 게 있어 불렀어요.”

2 마탑주가 직접 지명해서 의뢰하는 연구과제라니, 로드가 오기 이전의 프라우였다면 쌍수들어 환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프라우에게는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미 찾던 것을 찾았으니까.

, 죄송한데 제가 요새 따로 할 일이 생겨서요....”

당신에게 다른 일은 없을 텐데. 설마 인간 애인 관련인가요.”

프라우는 입을 다물었다. 여긴 넉살을 떨어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상대는 그에 대한 조사를 철저히 했다.

감정이야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자제는 할 수 있지 않나요. 더러운 짓은 그만두도록 해요.”

프라우는 머리가 띵해지는 걸 느꼈다.

아하하.... 그래.... 혼자 멀쩡할 리는 없지......’

프라우의 마음도 모른 채 루실리카는 잔소리를 계속했다.

당장은 좋고 즐거울 수도 있지만 이성을 지닌 성인이면 결과를 생각해야지요. 아이라도 생겨버리면, 이 세상에서 하프엘프가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나요?”

프라우는 어쩔 수 없이 샬롯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에도 샬롯은 있을 것이다. 로드가 이미 만났다는 듯 말하기도 했고.

그리고 루실리카는 모른다, 자기에게 하프엘프 조카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루실리카는 어떻게 할까. 외면할까, 아니면 어떻게든 도우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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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네사. 암. 안식을 갈구하나 얻지 못하고.


알드 룬 국민의 일부라도 살리기 위해 황제와 손을 잡았지만 늘 올가와 함께 죽을 걸 그랬다고 생각하고 있다. 힐러임에도 자해흔을 보이게 달고 다닌다. 체자렛 실종 후 인체실험 총책임자가 되었다.

자신의 세뇌 상태를 인지하고 있다.

너무 많은 것을 지고 너무 멀리 와버려서, 이제는 돌아갈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다.

‘황제의 양 날개’를 이루는 라플라스와는 서로 자기혐오를 투사하는 관계.

 



로드가 없었던 세계 4 - 제국의 이인자들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같은 시각 제국의 수도 울티마 포트리스의 연구 개발 구역.

“왜 내가....”

조슈아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는 연구 개발 부서가 싫었다. 이곳의 목적, 하는 일, 결과, 냄새 모든 것이 싫었다.

여기에 제 발로 들어오고 싶은 마음 따위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러나 살려달라고 쫓아온 사람들을 외면하지도 못했다. 그들도 그를 만든 자들과 같은 생체 실험을 하는 연구원인데도.

그를 보고 살았다는 표정을 짓는 연구원들에게 얼굴 찌푸려줄 새도 없이 조슈아가 펜듈럼을 꺼내 휘둘렀다.

찌그러져 날아오던 문짝이 땅에 떨어졌다. 온갖 잔해와 깨진 조각들을 밟으며 조슈아가 격리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멀쩡한 건 사면 벽밖에 없는 격리실 한 가운데서 라플라스가 공중에 뜬 채 몸부림치고 있었다. 침입자를 감지하기라도 한 듯 질식할 것 같이 농도 짙은 마력이 조슈아를 덮쳤다. 조슈아는 재빠르게 공간을 격리해 압축했다.

연구 구역이 무너지는 건 막았지만 폭주는 진정될 기색이 안 보였다. 조슈아는 일단 상대를 불러보았다.

“정신 차리십시오! 이런다고 해결되는 건 없습니다!”

반응이 없었다.

“정신 차리라고! 야! 의식 없냐! .....없냐. 망할.”

이건 골치 아팠다. 라플라스가 다치지 않게 제압하려면 이 이상 공격적인 수를 쓸 수는 없었다. 이대로 그를 쥔 채 힘이 빠질 때까지 대치할 수도 있긴 하지만 조슈아도 지친다.

‘아, 그냥 확 찔러 떨어트리고 싶다. 그치만 엘프들이 지랄할 텐데... 폭동 일으키겠지.... 아 생각만 했는데 벌써 골치 아파....’

조금 집중이 흔들렸을 뿐인데 라플라스의 마력파가 더욱 거세게 조슈아의 방벽을 때렸다.

“이 영감탱 정말 의식 없는 거 맞아?”

조슈아가 공간을 강하게 압축해 라플라스를 쥐어짰다. 어차피 본인도 의식 없고 주위에 엘프 친위대가 목격하는 것도 아니라면 목 졸라 기절시키는 정도는 들키지 않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라플라스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몸을 휘었다. 찢어질 듯 크게 떠진 은색 눈동자는 동공이 풀려 거의 까맣게 보일 정도였다.

‘아 이런 젠장 차라리 진작 찌를 걸....’

그 순간 조슈아의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옆으로 비켜 무릎을 꿇는 것과 거의 동시에 그를 지나쳐 빛줄기처럼 세검이 날아갔다.

옆구리를 관통당하고 라플라스가 풀썩 바닥에 떨어졌다. 조슈아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그 사람이 자기를 지나쳐 라플라스에게 걸어가는 걸 지켜보았다.

바닥에 쓰러진 채 몸부림치던 라플라스의 움직임이 차차 멎어갔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라플라스공.”

“황후 폐하.”

라플라스가 콜록거리며 숨을 몰아쉬면서 바네사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서렸다.

“웬일로 귀한 발걸음을 하셨군요.”

바네사가 칼을 뽑았다. 찌른 자리는 흔적도 남지 않을 정도로 바로 치료 되었지만 라플라스는 옆구리를 감싼 채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나이도 있으신데 건강을 조심하셔야지요. 이제 곧 고대하던 엘펜하임으로 돌아가실 수 있을 텐데, 지금 너무 무리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라플라스가 피식 웃었다.

“무리 시키는 분이 그리 말씀하시니 참 우습네요.”

“저는 분명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제 세포를 복제해서 호문클루스를 만들어 그것들을 가지고 실험하겠다? 안됩니다. 내가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것만은 안됩니다.”

“본인이.”

바네사가 칼끝으로 라플라스의 몸을 쿡쿡 찔렀다.

“실험대상이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이미 발달이 끝난 성체의 능력을 증폭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차라리.”

“그러는 황후마마께선.”

라플라스가 웃으며 빈정거렸다.

“왜 후사를 보지 않으시는지?”

바네사가 그대로 라플라스의 어깨에 검을 찔러 넣었다.

어깨. 팔. 손등. 어디든 검을 뽑으면 상처가 있었던 흔적조차 없어졌으나 그게 고통이 없단 뜻은 아니었다.

“이런다고, 뭐 달라지기라도 합니까? 우리는.”

“닥치세요!”

라플라스에게 화풀이하는 것만으론 분을 다 이기지 못한 바네사의 칼끝이 자기 자신의 몸을 향했다.

조슈아가 날카롭게 숨을 삼켰다. 여긴 자기가 끼어들 곳이 아니지만. 하지만.

멈춰버린 자신의 칼끝을 잠시 바라보던 바네사가 떨고 있는 조슈아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검을 가볍게 떨친 뒤 도로 검집에 꽂았다.

“이번 실험은 실패로군요.”

바네사가 건조하게 말했다.

“다음 번 보고일까지, 몸조리 잘하시기 바랍니다, 라플라스공.”

“황후 폐하.”

라플라스가 자해흔 가득한 바네사의 팔을 덥석 잡았다.

“아니랍니다. 실패가 아니에요.”

그가 바네사를 잡아당기며 자기 몸을 띄웠다. 순식간에 바네사에게 바짝 붙은 라플라스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 세계는 곧 멸망합니다.”

바네사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라플라스는 아주 기쁜 소식이라도 전하는 것처럼 생긋 웃었다.

“우리가 이미 겪은 이런 어중간한 멸망이 아니라, 완전한 끝이 도래했어요. 그래서.”

라플라스는 이제 미친 듯이 히죽거렸다.

“우리가 이 꼴이 되면서까지 지켜낸 모든 것들도 다 끝장이랍니다.”

바네사는 라플라스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가 다시 표정을 굳혔다.

“착란을 일으키셨군요.”

바네사가 라플라스를 뿌리쳤다.

“역시 실험은 실패입니다. 이렇게 결과를 내지 못해서야 황제 폐하를 뵐 면목도 없습니다.”

바네사가 라플라스를 뒤로 하고 격리실을 나왔다.

방금 말이 들렸음직한 범위 내에는 조슈아와 연구원 두엇 뿐이었다.

“오늘 실험 관련한 모든 걸 폐기하세요.”

조슈아를 부르지도 않았고 그를 보지조차 않았지만 그 명령이 누굴 향하는지는 명확했다. 조슈아는 고개만 숙여보였다.

그를 지나쳐 나가는 바네사를 보며 조슈아는 바이올린 활 대신 쥔 저 검이 언제고 자기 심장을 찔러주지 않을까 기대했던 옛날을 떠올렸다.

그것도 이제 옛날이었다.

지금은 그저.

조슈아가 자길 불러왔던 연구원들을 돌아보았다.

“날 부르고, 또 황후 폐하도 불렀냐? 눈치가 그렇게 없어? 포트리스 어제 들어왔냐고.”

조슈아가 한탄했다.

“그 눈치 해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래. 어차피 이제 못 살지만.”

눈치가 없어도 죽을 위기인 건 알아챈 자들이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조슈아가 펜듈럼을 가볍게 휘두른 것만으로 그들은 모두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 날아갔다.

“너무 억울해하지 마라.”

조슈아가 혼잣말했다.

“단번에 죽는 것도 일종의 복이야.”

조슈아는 연구 개발 구역을 나왔다.

사람을 죽이고 나면 우울해졌다. 이제 와서지만.

재앙이 끝난 이후, 체자렛이 사라졌다. 그 후로 조슈아는 약해져 가는 세뇌를 필사적으로 붙들고 자기가 하는 일이 아직도 의미가 있다는 자기 최면을 걸며 겨우 살아왔다.


자기 방에 돌아온 조슈아는 망설이다 뉴 엘펜하임으로 전화를 걸었다.

-네, 총독 각하.

“루인.”

-무슨 일입니까, 제가 야근할 때 방해받는 거 싫어하는 줄을 아시는 분이.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라고 말하면 미친놈 취급당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생존자 구호 예산을 예정보다 20%정도 더 확보했어. 내가 돌아가길 기다릴 필요 없이 미리 집행 시작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조슈아는 루인이 좋아할 만한 소식을 알렸다.

-그거 반가운 소식이군요.

루인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그럼 이제 더 많은 난민을 받아들여 지원할 수 있겠습니다. 대제 폐하께서 인가하셨으니 더는 엘프들과 기싸움 할 필요도 없겠지요. 수고하셨습니다.

조슈아의 살만함 수치가 소폭 상승했다.

이제 조슈아에게 그가 살아있어 뭔가 좋은 점이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루인 뿐이었다.

“엘펜하임은 어때. 뭐 필요한 거라도 있어?”

-각하께서 어서 돌아오시기만 하면 되겠습니다.

“나도 그러고 싶어.”

-진심입니까?

루인의 목소리가 놀랐다.

-오면 할 일이 한가득인데요.

“음....”

그야, 뉴 엘펜하임 총독부로 돌아가면 루인의 일하라는 잔소리도 시작될 것이다.

그걸 감안해도 조슈아는 돌아가고 싶었다. 울티마 포트리스에서 미친 신들에게 둘러싸여 혼자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맛보는 것 보단 업무가 훨씬 나았다.

“여기가 더 힘들어서 그래.”

-저런.

루인이 조금 웃었다.

-그거 심각하군요. 과연 제국의 수도는 무섭습니다.

“그래. 야근 너무 오래 하지 말고 자.

-네, 각하께서도요.

살 의욕을 조금 충전 받고 조슈아는 전화를 끊었다.

일단 엘펜하임으로 돌아가서, 세계 멸망에 대해서는 그 다음에 생각하기로 했다.



몇가지 자잘한 업무를 더 처리한 뒤 바네사는 휴식을 선언하고 황후의 처소로 돌아갔다.

과거 기준으론 초라할 지경이지만 현재에는 더없이 사치스러운 너른 공간은 적막하고 생기가 없었고 그 혼자 뿐이었다.

황제는 이곳에 오지 않았다. 바네사도 황제 있는 곳엔 가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런 계약이었다.

그럴 거면 왜 하필 결혼이냐는 질문에 황제는 돌이킬 수 없게 하기 위해서라 대답했었다.

바보같은 생각이었다. 결정한 순간 이미 돌이킬 길 같은 건 없었는데.

바네사는 화장대로 가 보석함을 꺼냈다. 그리곤 열지 않고 가만히 손만 얹고 생각에 잠겼다.

이 보석함 가장 아래 서랍에는 로켓이 하나 들어었었고, 그 로켓 안에는 올가 파블리첸코의 머리카락 한 올이 있었다.

라플라스가 말한 완전한 끝.

‘이젠 나도 당신의 뒤를 따라갈 수 있는 걸까요.’

황제는 올가에게도 바네사와 같은 제의를 했었다.

리브리안인 이 만 명. 올가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세뇌를 받아들인다면 그 대가로 자국민 일부를 살려주겠노라고.

올가가 그때 무어라 답했는지 바네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이만명이 사는 대신, 다른 이만명이 죽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거절하겠습니다. 자국민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해도 군인은 타국의 군인과 싸우지, 타국의 민간인을 학살하진 않습니다.’

‘왕녀님과는 경우가 다릅니다. 저는 일개 국민이며 리브리안을 대표하는 자가 아닙니다. 저는.. 인질범과 협상하느니 싸우다 전사하여 제 존엄을 지키고 싶습니다.


부러웠고, 원망했다. 그와 같은 길을 선택할 수 없었던 자신에게 화를 냈다.

바네사는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자책하고 또 자책했지만 돌이킬 길은 없었다.

지금까지는.

언제부턴가 황제는 집착적으로 라플라스에게 운명을 읽도록 시켰다. 새로운 멸망의 징조가 나타날 것을 두려워하는 듯이.

바네사는 오늘 일을 황제에게 보고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알았다간, 이번에도 멸망을 막아버릴 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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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플라스. 빛. 엘프를 지키기 위해 인간성을 버린 미친 신.


엘프의 수호자. 뉴 엘펜하임의 공작. 황제를 위해 운명을 보랴 죽음의 땅에 악마 토벌 나가랴 뉴 엘펜하임 다스리랴 엘더 엘프 아니었음 한 달에 세 번은 과로사 했다.

엘프들에겐 자애로운 영도자. 인간들에겐 악마공작. 본인이 세뇌된 걸 알고 있지만 계속 기능하기 위해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이제 와서 인간들에게 동정심 가져봐야 엘프들을 보호하는 일만 위태로워질 뿐이다.


로드가 없었던 세계 3 - 현재 상황 ㅣ- 로드 오브 히어로즈

-마스터.

뮤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조금만... 더 .... 하면..........

“뮤?”

로드가 눈을 떴다.

“일어났어?”

벌떡 일어나려는 로드를 프라우가 잡아 도로 눕혔다.

“배고프지? 감자 포타주 먹을래?”

그 말을 듣자 고소한 음식 냄새가 허기와 함께 밀려왔다.

“...프람은?”

“이미 먹고 갔어. 감자 포타주를 줘도 엘프네 집에 오래 있기는 싫은가 보더라. 먹이만 채가다니, 무정한 멈머 같으니.”

말하며 프라우가 포타주를 한 그릇 떠다 로드에게 내밀었다.

“일단 먹어. 내가 아는 건 다 말해줄 테니까, 대신 먹을 땐 먹는 것만 집중해.”

로드는 순순히 음식을 받아들었다.

“먹으며 들으면 체할만한 이야기라 이거지?”

먼저 상황을 알고 싶었지만 배도 고팠고 프라우의 판단을 믿었기 때문에 로드는 스프를 먹었다.

“요리도 할 줄 알았어?”

“오래 혼자 살면 싫어도 이것저것 배우게 되니까.”

프라우가 웃었다.

“더 맛있는 걸 해주고 싶은데, 여긴 식재료가 다양하질 못해서.”

“맛있어.”

로드가 포타주를 싹싹 긁어먹었다.

“어느 정도는 시장이 반찬일걸. 궁정 요리사보다 내가 더 요리를 잘할 리는 없잖아.”

“배고픈 나에게 네가 만들어 줬다는 게 제일 맛있지.”

로드가 침대 옆에 쌓여있는 책더미를 살짝 찔러보고 안 무너질 것 같자 그 위에 그릇을 올려놓았다.

“그래서, 이 세계의 너는 어떤 사람이야?”

“이주 2세대 마도공학자. 하라는 마도공학 연구는 안 하고 고대 유적 들쑤시다 제적당해서 마탑의 연구원은 되지 못했어. 가끔 고대어 번역을 하거나 사냥을 해서 먹고살고 있지.”

“사냥이면.”

“악마 사냥. 프람이 하던 그거.”

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주 2세대 라는 건.”

“여기, 뉴 엘펜하임에 와서 태어났단 소리지.”

프라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말이 좋아 이주지, 침략이야.”

“엘펜하임이, 라플라스가 아발론을 침공했다고?”

프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세뇌 상태의 라플라스는 순혈주의자이고 인간을 무시했지만.... 그의 민족주의는 고립을 택했어. 갑자기 침략이라니.”

“로드, 프람 말로는 니벨룽겐 대삼림 초입 쯤에서 발견되었다며, 대삼림 상태 봤어?”

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켈타인 산맥 너머는 어떨 것 같아?”

로드는 대답하지 못했다.

“원래 엘펜하임 지방은 약 30여년 전에 재앙으로 완전히 초토화됐어. 내가 이 엘프들을 편들 생각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지만, 살려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긴 했어.”

프라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에 로드가 있었더라면, 함께 재앙과 맞서 싸우거나 적어도 더 평화로운 방식으로 엘프들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로드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럼.... 프람의 부모님은.....”

“아발론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잡혀서 처형. 듀렌달이 지금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한다면 알아볼게.”

로드가 마른 세수를 했다.

“일단, 재앙 이야기부터 해줘.”

프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앙은 세계 각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고 인류는... 거의 90%이상 멸망했어. 인류 뿐 아니라 자연도 꽤나 망가져서 황폐화된 땅에선 재앙의 찌꺼기라 하는 괴물이 나타나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을 아직도 위협중이고. 재앙의 피해를 직접 당하지 않아 그나마 사람이 살 수 있게 남은 땅은 아발론 남부와 헬베티아 일대 정도야.”

“헬베티아?”

“응. 거기와 여기선 허공의 틈새가 열리지 않았어. 황제가 무슨 수를 쓴 건지도 모르지만.”

“황제라면, 카르티스?”

“그래. 그가 우리 이전 세계에서보다 빨리... 라고 해야 하나? 여기선 시간이, 아니 사람들이라고 해야 하나, 좀 태어나는 시기가 뒤죽박죽이어서 말이야. 내가 재앙 이후에 태어난 것처럼. 아무튼 여기 순서대로 설명하자면, 황제가 라퓨타를 만들었고, 그걸로 헬베티아를 점령했고, 엘펜하임이 제국에 복속되고 재앙이 일어나고 플로렌스는 자멸하고. 아, 그전까진 플로렌스와 엘펜하임이 전쟁 중이었어.”

“왜?”

“플로렌스가 서대륙을 통일하려 들었으니까.”

로드는 머리를 짚었다.

자기 쪽에서도 플로렌스는 페르사를 침공하고 아발론도 뒤엎으려 했다. 그 다음이 엘펜하임인 건 뻔한 결과였다.

“황제는, 핵심 인원들은 울티마 포트리스에 싣고, 그 외 살아남을 만한 인원들은 헬베티아와 아발론에 모아 방어시키고, 나머지는 전멸하게 내버려뒀어. 그 결과 재앙으로 멸망한 뒤 소수의 사람들만 살아남은 이 상태가 된 거야.”

“카르티스.......”

“그 후, 멸망할 거 다 멸망하고 난 다음에, 남은 생존자들을 끌어모아 보호하는 정책을 펴고 있지.”

“다른 곳에도 생존자들이 있어?”

“있어. 여기 주변에 두른 보호 장벽 봤지? 이런 걸로 성벽을 만든 ‘도시’가 플로렌스 여기저기에 있어. 페르사는 그렇게 보호되는 정착촌에 모여 사는 사람들도 있고, 악마를 사냥하며 황야에서 계속 살길 택한 사람들도 있다고 하고.”

로드의 표정을 보고 프라우가 덧붙였다.

“자이라나 크롬, 즈라한 등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도 구체적으로 아는 게 없어. 재앙의 순간에 있었는지 나처럼 끝나고 태어났는지도 알 수 없고.”

“응.....”

“여기의 난 현대엔 아무 관심이 없어서 정말 유명한 몇몇 빼곤 잘 몰라. 그래도 앞으로 알아볼게.”

“그래, 고마워.”

로드는 멍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즉, 여기의 카르티스는, 재앙과 맞서기를 포기하고 일단 자기가 산 다음 살아남은 일부만 보호하기로 마음 먹은 거구나.”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뭘 기준으로 살아남을 사람을 골랐을까? 제국에 유용한 기준?”

“그거랑 제국에 유용한 사람한테 중요한 기준. 엘프들을 따로 살 땅까지 내주며 이주시킨 걸 보면 라플라스가 황제에게 아주 유용했단 뜻이겠지.”

“이런..... 이런 멸망해 가는 세계에서 운명을 예언하는 능력이란 확실히 쓸모 있었겠구나. 어쩌면 그가 어디가 나중에도 안전할지 짚어줬을 수도 있어.”

로드가 뿌드득 이를 갈았다.

“나는 이 세계에 없었고, 그러니 그들에게 배신감 느낄 자격도 없다는 건 알지만....”

“아이고, 느껴, 느껴. 로드가 잘 이끌어주지 않은 게 수 백 년 묵은 국가 지도자들이 개짓하는 데 변명이 될 리가 없잖아.”

“나도 알아. 하지만..... 하지만.”

로드가 양 손에 얼굴을 묻었다.

“왜 나는 이 세계엔 없었던 거지?”

답할 말도 없고, 로드도 대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이 아니라 프라우는 침묵을 지켰다.

“다른 대륙은?”

로드가 다시 질문했다.

“로잔나는, 헬가는? 중부 대륙은 어찌 됐지? 동부는? 바네사와 올가는?”

“어.....”

프라우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지금 여기가, 단순히 인간이 잔뜩 죽은 것 뿐만이 아니고 그 뭐시냐.... 자연의 정기가 크게 손상된 상태거든. 해산물 먹기 껄쩍지근할 만큼 바다는 시커멓고 거기서도 악마가 나와. 하늘도 오늘이 사실은 흐린 날이 아니라 굉장히 맑고 화창한 날이 이런 거다?”

“배를 띄울 수 없어서 타대륙과의 교류가 끊겼다고?”

“응.”

“로잔나도, 제국에 꽤 쓸모 있을 사람인데.”

“황제 생각엔 안 그랬나 보지. 문레이크엔 황제가 하사하지 않은 보호 장벽이 있다는 소문은 있어.”

“동부는? 갈루스인들은 다 헬베티아로 옮겨온 건가?”

“....아니, 황제 보기엔 자기와 가까운데서 태어난 것 만으론 살아남기에 충분한 이유가 안 되었던 것 같아.”

“갈루스 국민이 그런 취급이었다면 동대륙의 다른 누구도, 바네사와 올가도 살아남지 못했겠군....”

로드가 비통하게 신음했다.

“결과적으로 약간의 사람이 살아남았다고 해도, 이 무슨 터무니없는 희생이란 말이야.....”

괴로워하던 로드가 문득 프라우를 보았다.

“뭐지? 할 말이 있는 표정인데.”

“그....으게, 차라리 알고 싶지 않지 않을까 싶은 사실이 있어서 말인데에.....”

프라우가 답지 않게 말꼬리를 늘였다.

“그렇다고 숨기자니 결국은 알게 될 일이고 그치만 지금 말하자니 로드 우는 거 또 보는 건 내게도 좀 데미지가 있거든. 그래서....”

“끔찍한 진실이라도 모르는 것 보단 아는 게 낫다. 말해다오.”

“바네사는 살아있어.”

로드가 눈을 번쩍 떴다.

“그런데, 라플라스와 같은 방식이야.”

로드는 잠시 들은 말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게....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으음.....”

프라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세계는 정기가 많이 손상돼서, 정령과 교감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졌어.”

로드는 샬롯을 떠올렸다.

“그럼....”

“여기 바네사는, 전장에서 아군 전체를 즉시 치료할 수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힐러야. 가치가 엄청나지.”

“예언의 힘에 비길 만큼. 바네사 한 명을 얻기 위해 알드룬 국민을 살려둘 만큼.”

로드가 이불을 틀어쥐었다.

울고 싶었다. 소리치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이 세상의 끔찍함이 너무나 무서웠다.

그래도 진정하려 노력하며 로드가 심호흡을 했다.

“....그래. 그래도 바네사에게는 라플라스 만큼의 배신감은 들지 않네. 이런 세계에서라도, 바네사가 가족들을 잃지 않았다면....”

“어.. 저기, 로드.”

불러놓고 프라우가 로드의 시선을 피했다.

“바네사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와 두 번째 만났을 때, 기억하지?”

“그래.”

“두 번째 왕녀님도 굳건하고 강한 사람이긴 했지만, 그게 능력치 면에선 첫 번째가 더 강했어. 왜라고 생각해?”

로드는 고개를 기울였다. 첫 번째 삶과 두 번째 삶에서 바네사에게 달라진 점이라면, 두 번째 때에는 프라우가 잠시 곁에 있어줬다는 것뿐이었다.

그 함의를 깨닫고 로드는 돌로 머리가 내리쳐지는 것 같은 충격을 맛봤다.

“설마.”

“내 생각인데, 바네사의 그 능력은, 나라와 가족을 잃고 마음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극한 상황에서 그래도 싸우기를 결심할 때에만 발현하고 강화되는 게 아닌가 싶어.”

“그럼.... 여기서도..... 그런데도.”

“그런데도, 황제와 협력해서, 지금은 황후 폐하야.”

로드가 침대를 내리쳤다.

“카르티스...!”

로드의 주먹질은 몇 번이고 이어졌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짓을. 어떻게 그런 짓을 일부러.”

침대를 내리치던 손이 자신을 향하자 프라우가 기겁해서 그 손을 붙잡았다.

“진정해, 로드. 진정해. 이건 자학할 일이 아냐. 로드의 잘못이 아냐.”

로드의 양 손을 모아 쥔 프라우가 로드의 머리를 자기 품에 꼭 안았다.

“이건 오류야. 그러니 우선 뮤를 찾아. 그 담에 오류를 바로잡고 리셋하면 되는 거야. 자해는 하지 마. 나를 봐서라도. 응?”

“......그래.”

로드가 힘을 빼고 프라우에게 기댔다.

“...........로잔나는 로잔나니까, 어떻게든 사르디나를 지켰을 거야. 헬가와 발터도 있으니, 황제에게 무릎 꿇지 않고도, 사르디나 일부 만이라도.....”

“그래그래.”

프라우가 로드를 토닥였다.

“마도대전도 헤쳐나간 영웅들인걸. 자기 앞가림 정도는 하고 말고.”

이 세계에서 살아온 기억을 갖고 있는 프라우는 그 가능성이 그리 높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로드가 우는 것보단 뭐라도 나은 법이다.

“괜찮아, 로드. 해결할 수 있어. 되돌릴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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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 불.


이주 2세대 마도공학자. 마탑에 들지 못해 주로 사냥으로 먹고살며 간간히 고대 유적을 탐사한다.


그리고, 여전히 질리지 않은 당신의 프라우.




아발론과 헬베티아만 무사한 이유는..... 게임에서 연합 레이드 안 열리는 땅이 그 두 곳 뿐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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