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자면 대문 - 화산섬의 분관에 어서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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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로 장편 읽기 힘든 경우에는 & 19금 멤버십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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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새신 크리드 오디세이] 소녀의 꿈 ㅣ- 기타

#카산드라가 어렸을 때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가 크로노스 이야기였다는 하데스 DLC의 언급을 보고 보행자가 쓴 팬픽입니다.
#오디세이 퀘스트 '스파르타의 늑대' 스포가 조금 있습니다.



“농담이겠지? 자네가 애를 돌봐? 자기 앞가림도 못 하면서.”
“내 앞가림도 못 한다니? 얘는 내가 아주 잘 돌봐줄 거라고!”
타이게토스 산. 태어났을 때 이미 통과했고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배운 곳. 너같이 강한 아이는 그걸 자랑스러워하면 그만이라고 배운 곳.
그곳에 일곱 살 나이로 다시 가게 된 이후 악몽 같은 순간들만 덮쳐왔다. 조각배 하나에 의지해 바다를 건너고 어딘지도 모르는 땅에 도착했지만, 그 어느 것도 자신을 짐승처럼 대롱대롱 붙잡고 절벽 아래로 던져버린 아버지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퍽이나 잘 돌보겠네! 무서운 남정네를 함부로 따라가면 안 된다는 것도 모르는 이런 조그만 애를 갖다 뭘 어쩌려고? 아무리 케팔로니아라도 해서 될 일이 있고 안 될 일이 있지!”
“무서운 남정네라니? 내 어디가 무섭다고 그래?”
카산드라 보기에도 이 마르코스란 사내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아버지 콧김에도 날아가버릴 것처럼 생겨서, 차라리 지금 성내고 있는 여자 쪽이 더 무서울 것 같았다.
“이것 봐, 얘는 이래뵈도 벌써 무기도 쓸 줄 알고, 활쟁이 아줌마까지 신경 안 써줘도 훌륭한 용병이 될 거라고. 그런데 집과 밥이 없지. 나는 얘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얘는 용병이 돼서 밥값을 하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아니겠어?”
슬슬 귀가 따갑다고 느낄 때쯤 마르코스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날 무슨 키클롭스 패거리로 보는 거야? 내가 정말 얘를 팔아넘기기라도 하면 그때는 내 집 기둥뿌리를 뽑아다 활로 만들어도 돼. 진짜로.”
“곰팡이 피고 흰개미가 먹은 기둥으로 무슨 활을 만들어. 불쏘시개나 하지.”
흥, 하고 나서 아줌마가 카산드라를 돌아보았다.
“이 아줌마는 드루실라라고 하는데, 저기 저~쪽에 산단다. 네가 정말 용병으로 클 거라면 활도 쏠 줄 알아야지? 가끔 우리 집에 들러서 연습해라. 좋은 과녁하고 활이 있단다.”
마르코스에게 말할 때와는 딴판으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물론 활 값은 네 훌륭한 보호자께서 내주시겠지. 그 정도는 해야 키워준다고 말할 수 있는 거 아니냐?”
활 같은 겁쟁이의 무기는 쓰지 않는다고 답해야 스파르타의 아이일 것이다. 그러나 스파르타 생각이 떠오른 순간 왈칵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애가 피곤한가보군.”
드루실라가 카산드라에게서 물러났다. 그러자 마르코스가 주머니에서 돈을 몇 푼 꺼내 드루실라에게 내밀었다.
“자, 여기 활 값.”
“호오?”
드루실라는 자기가 말한 건데도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돈을 내려다보았다. 마르코스가 어깨를 죽 폈다.
“어때. 이래도 내 말을 못 믿겠어?”
“좋아. 키클롭스 패거리 취급한 건 취소하지. 어디 앞으로도 지금만큼만 해보라고.”
드루실라가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돌아서서 울타리 사이 대문으로 향했다. 마르코스가 그 등에 대고 손을 흔들자 카산드라도 따라 흔들었다.
“잠깐.”
가다 말고 멈춰선 드루실라가 다시 기세가 험악해져서 되돌아왔다.
“왜, 왜? 볼일 남았어?”
“남은 게 아니고 애초에 내가 왜 왔겠어? 내 돈은 대체 언제 갚는 거야?”
“아니, 돈은 방금 받았잖아.”
마르코스가 스파르타에서라면 엉덩이를 걷어차일 태도로 싹싹 빌었다.
“이건 얘 활 값이지. 그리고 내가 꿔준 건 이 두 배였어!”
드루실라가 으르렁대자 마르코스가 카산드라의 양 어깨를 뒤쪽에서 잡았다. 꼭 카산드라 뒤에 숨으려는 것 같았다.
“그게 말이지. 나도 오늘 갚으려고 했는데, 얘 이제 갈아입을 옷도 필요하고, 잠자리랑 그런 것도 필요하고, 내가 얘를 당장 내일부터 굶길 순 없잖아?”
드루실라는 당장 마르코스를 잡아먹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카산드라와 얼굴이 마주치자 억지로 표정을 풀었다.
“얘야. 혹시라도 저놈이 마음에 안 들게 군다, 그러면 손에 든 그 창으로 콱 찔러버려라. 알았지?”
“예.”
“대답이 시원찮군. 누군가 아주 배불리 먹여서 커다랗게 키워놔야겠어.”


드루실라가 무서워서인지 마르코스는 정말로 카산드라를 잘 키우려 노력했다. 먹을 것도 제때 챙겨주고 새 옷과 신발도 사왔다.
곧 카산드라도 케팔로니아에서의 낯설고 새로운 삶에 적응했다. 스파르타 인은 왕족이라고 사치를 용납하지 않았다. 마르코스가 차린 딱딱한 빵과 포도주는 이전의 집에서도 흔히 먹던 수준이었다.
‘전쟁터의 군인은 이보다 더 형편없는 걸 먹고도 적을 쓰러뜨릴 수 있어야 한단다.’
“왜, 맛이 없어?”
갑자기 빵을 내려놓는 카산드라를 보고 마르코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저녁만 참아. 두리스가 돈을 갚으면 내일은 올리브하고 꿀을 사서 근사한 만찬을 차려줄게.”
저 말은 어제 저녁에도 한 말이었다. 카산드라는 고개만 끄덕였다.
‘남자가 되어서 한입으로 두 말을 하는 놈이 있으면 입을 하나 더 만들어줘야지. 칼을 머리에 꽂으면 아무튼 구멍이 하나 더 생기니까.’
아버지가 그 말을 했을 때 어머니는 곁에서 웃으셨다. 재미있다는 듯이. 재치있고 합당한 말이라는 듯이.
아버지는 또 이런 말도 했었다.
‘스파르타의 남자라면 이 정도는 자랑할 게 못돼. 당연한 일이니까. 이 정도 힘도 없이 어떻게 너와 알렉시오스를 지킨단 말이냐?’
“카산드라?”
아버지의 묵직한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구리 냄비가 댕댕거리는 것 같은 마르코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눈가가 젖어 있는 걸 깨닫고 카산드라는 당황했다. 눈물은 약자나 흘리는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타이게토스 산에서 어머니는 우셨다. 울부짖으셨다.
“아, 오늘은 날씨가 참 좋네. 저기 별 보이지?”
갑자기 마르코스가 쾌활한 목소리로 돌아와 창밖을 가리켰다.
카산드라도 따라서 바깥을 보았다. 정말로 밤하늘이 맑고 별도 많았다.
“이런 날 컴컴한 집안에 틀어박혀 깨작거리니까 입맛이 없지. 자, 우리 별 보면서 식사할까?”
마르코스가 먼저 접시와 포도주 병을 들고 일어나자 카산드라도 얼결에 자기 접시를 들고 따라서 밖으로 나왔다.
우물가에서 무엇인가 쪼고 있던 이카로스도 카산드라 곁으로 날아왔다.
그날 이후 어째서인지 자신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이 독수리는 맹금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친근하게 굴고 가끔 사슴을 사냥해 집 앞에 던져놓기까지 했다. 그러면 마르코스가 해체해서 구워주었다.
“자 여기 사다리로 올라가자. 먼저 올라가.”
마르코스는 카산드라 먼저 지붕에 오르자 아래에서 접시와 포도주 병을 올려주었다. 그런 다음 자기도 사다리를 탔다.
“어때, 바람도 시원하고 좋지?”
여전히 유쾌한 그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수한 별이 반짝이는 모습은 분명 장관이었다.
무수한 횃불이 모여서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근사하다니까. 아, 저기 저 별자리 보이냐? 염소자리라는 거거든.”
마르코스가 한쪽을 가리켰다. 빛나는 별이 너무 많아 그 중 어느 별들 이야기인지 얼른 알기 힘들었다.
“저게 말이야. 제우스 신을 그 부모 티탄들 대신 길러준 아말테이아 염소야. 몰랐지?”
“부모를 대신해서?”
“그래. 제우스 신도 자기 부모한테 버려졌거든.”
카산드라는 자기가 누구고 어디서 왔는지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다. 마르코스도 물어본 적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내 사연을 알았냐고 추궁할 말을 고르는 동안 마르코스는 쾌활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크로노스가 자기 아버지인 우라노스를 거세하고 신들의 왕이 되었다는 거 아니? 그때 그는 무서운 저주를 받았단다. 언젠가 그도 아버지와 똑같이 자기 아들 손에 쫓겨날 거라고. 그래서 크로노스는 부인 레아가 낳는 자식들을 다 삼켜버렸지.”
카산드라는 두 눈 깜박이는 것도 잊고 마르코스의 입만 바라보았다.
“그런데 짜잔! 제우스가 태어났어. 이미 레아도 남편에게 화가 날 대로 났지. 그래서 아기 제우스 대신 돌을 삼키게 하고, 진짜 아들은 아말테이아에게 보내 숨겼던 거야. 제우스는 아말테이아의 뿔에서 나오는 젖을 먹고 쑥쑥 자랐지.”
“뿔에서 젖이 나와?”
“신성한 염소니까.”
마르코스는 자기 덕에 아말테이아가 신성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점잔을 뺐다.
“다 자란 제우스는 레아와 공모해서 아버지에게 구토제를 먹였지. 그래서 먼저 삼켜졌던 자신의 형제자매들을 다 구해내고, 그들과 힘을 합쳐 싸워서 마침내 크로노스와 티탄들을 전부 타르타로스 깊숙이에 가두었단다.”
“크로노스를 무찌른 거야?”
“그럼.”
“어떻게 싸웠는데?”
카산드라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마르코스는 눈을 굴렸다.
“엄, 더 자세한 이야기가 필요한 거구나. 아, 맞다. 헤파이스토스가 번개를 만들어줘서 그걸 들고 싸웠지. 케팔로니아에도 있잖아? 번개를 던지는 제우스 상.”
마르코스가 그 조각상의 동작을 따라하려고 일어나다가 그만 포도주 병을 찼다. 지붕 아래로 굴러떨어지려는 걸 카산드라가 날랜 동작으로 낚아챘다.
“와, 진짜 언제 봐도 날쌔다니까.”
마르코스가 박수를 쳤다.
“넌 분명 저 독수리보다 날쌘 용병으로 자라날 거야!”
“삐익!”
항의하듯 우는 이카로스의 턱을 카산드라가 살살 쓰다듬으며 웃었다.
“왜, 내가 못 그럴 거 같아?”
“참 신기하단 말이지. 독수리가 사람을 따르다니.”
마르코스가 슬쩍 카산드라처럼 손을 내밀었다가 이카로스가 쪼려고 하자 뒤로 뺐다.
“그래, 사람을 따르는 게 아니고 카산드라만 따르는 거지. 사람 차별하기는. 너 정말 제우스 신이 보낸 동물이냐?”
“그럴지도.”
대답은 카산드라가 했다.
“그래서 난 제우스 신의 수호를 받는 용병이 되는 거지. 어때, 이카로스? 그럼 우리 둘 다 유명해지는 거야.”
“독수리를 거느린 제우스 신의 사자.”
마르코스도 꽤 그럴싸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 아래 제우스 신전의 신관도 이 이야기는 자세히 알고 있을 거야. 더 듣고 싶으면 내일 가서 물어봐라.”
“그래.”
카산드라도 열성적으로 끄덕였다.
그러다가 아차 하고 물었다.
“혹시 그 신관님한테도 뭐 빚진 거 있는 거야? 내가 가서 기다려 달라고 해야 해?”
“아냐!”
마르코스가 꺼이꺼이 우는 시늉을 했다.
“아이고, 생판 낯모르는 애를 데려다 먹여주고 재워주는데 이런 소리나 듣고. 그냥 봉헌물을 대신 갖다 바치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어쨌든 심부름은 심부름이군.”
“봉헌물이라고? 넌 제우스의 축복을 얻고, 신관님께 눈도장도 찍고 이야기도 듣고, 나한테 심부름값까지 받을 텐데?”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그래.”
“이런 물건 배달도 다 용병이 하는 일이야. 일찍 배워두라고.”
카산드라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빵조각을 집어 씹었다. 아까는 돌을 씹는 것처럼 맛이 없었는데 그새 배가 고파져서인지 지금은 술술 넘길 수 있었다.
열심히 먹는 그를 보며 마르코스는 오늘 밤만이라도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의 끔찍한 잠꼬대를 듣지 않을 수 있기를 남몰래 빌었다.


마르코스의 기원은 이루어졌다. 이날 밤 카산드라는 타이게토스 산 대신 다른 꿈을 꾸었다.
어머니가 살아서 카산드라 앞에 나타났다. 기뻐하는 딸의 손에 구토제와 번개를 쥐어주셨다.
카산드라는 구토제를 아버지의 죽에 타고 번개를 힘있게 움켜쥐었다. 이카로스가 삐익 울자 그것이 부러진 창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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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염소자리는 겨울의 별자리인데 마르코스와 카산드라는 춥지 않았을까요?
A : 알아주는 허풍선이답게 아무 별이나 가리켰습니다.

[내스급] 식사를 합시다 ㅣ- 기타

Characters: 송태원. 한유진
Rating: PG-15
Warnings: 없음
Summary: 송태원이 날마다 야근만 하는데 화가 난 한유진이 특단의 조치를 취합니다.

유진태원 연성 교환입니다. 리퀘 내용은 야근하는 태원에게 유진이 찾아와서 저녁 먹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공무원을 하고 싶어하는 각성자는 드물었다.
등급이 올라가면 더욱 그랬다. C급 던전 한 번만 제대로 돌아도 공무원 연봉 쯤 우습게 버는데 박봉과 윤리 규정, 경직된 조직 사회에 구속당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각성자 관리실은 사람이 적었다. 그런데 헌터들은 날이면 날마다 사고를 쳤다. 그러니 각성자 관리실은 전원 상시 야근이 기정사실이었다.
송태원이 연애를 시작했다 해도 그건 바뀌지 않을 것 같았다.

“저녁 시킵시다.”
시계를 흘끗 보고 직원 중 한 명이 전화를 들었다.
“오늘은 나가서 먹을까요. 배달 음식 질리는데....”
“송실장님, 뭐 드시고 싶은 거 없어요?”
“없습니다.”
송태원은 컴퓨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거 조금만 더 하면 끝나니까 먼저들 드십시오.”
“네...”
“실례합니다아, 여기 각성자 관리실 맞지요?”
어떤 사람이 일단 들어오고 나서 문을 두들겼다. 저녁 8시에 공무원을 찾아오다니 어떤 미친 악성 민원인인가 해서 관리실 식구들은 모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한유진씨?”
송태원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피곤한 눈가를 문질렀다.
“여긴 어쩐일이십니까. 어느 에스급이 문제라도 일으켰나요?”
“네.”
무시무시한 말을 간단하게 하며 한유진이 송태원에게 갔다. 가는 길에 다른 사람들에게 납작한 상자 하나씩을 나눠주었다.
“이게 뭡니까?”
“도시락이에요.”
유진이 말했다.
“해연길드 직원 식당에서 배식하고 남은 걸로 제가 직접 쌌으니까 비매품이고 단가 제로고 공무원 어쩌고 법에 저촉 안 되니 드셔도 됩니다.”
“한유진씨.”
송태원이 미간을 좀 더 문질렀다.
“비매품이라 하셔도 이런 건 부.”
“송실장님.”
송태원이 뭐라 말하기 전에 유진이 남은 도시락 두 개를 들고 그의 책상으로 갔다.
“지금 저한테 법에 대해 설교할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송태원은 잠시 생각했다. 피곤해서 머리 회전이 느렸다. 그래도 아까 한유진이 어떤 에스급이 문제를 일으켰다고 한 말은 뒤늦게 생각이 났다.
“이번엔 누굽니까?”
송태원이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도시락을 갖다 주신 걸 보면 급한 일은 아닌가보군요. 혹시 한유현입니까? 그렇다면 이건 역시 받을 수.”
“송태원 헌터인데요.”
유진이 불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네?”
“문제 일으킨 거, 송태원 헌터라고요. S급에 여러모로 과도한 몸을 하고 있는 남자고 각성자 관리실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인데요, 혹시 아세요?”
“....저 아닙니까?”
“네. 그 인간이 말이죠, 저랑 사귀거든요? 근데 바빠서 자주 데이트는 못한대서 이 주일에 한 번은 같이 저녁을 먹기로 약속을 했어요. 그런데 이 주 지난지가 언젠데 사흘째 안 들어오네요. 성인이고 헌터라도 사흘이나 안 보이면 실종 맞죠? 실종신고를 해야겠는데 각성자 실종은 어디다 말하면 되죠? 여기가 각성자 관리하는 곳이니까 여기서 말하면 되나?”
“....한유진씨.”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서 송태원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네, 죄송하고 그 다음은요?”
송태원은 고민했다. 그가 꽉 막힌 놈이긴 해도 이대로 여기 청사 휴게실에라도 가서 둘이 같이 도시락을 나눠먹고 끝날 일이 아닌 건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근사한 식당을 예약하거나 할 수도 없었다.
침묵하는 송태원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다 한유진이 송태원을 밀어 도로 의자에 앉혔다.
한유진이 민다고 밀릴 몸은 아니지만 송태원은 순순히 한유진이 하는 대로 의자에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바빠요?”
“조금만 더 하면 끝납니다.”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숫자로 환산해서, 얼마나 조금?”
“.....30분 정도... 하면 서류 처리는 끝납니다.”
“서류처리‘는’?”
송태원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한유진이 들으라는 듯 성대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랑 같이는 고사하고 혼자 밥 먹을 시간도 없겠네요?”
사실은 그렇다고 말할 수 없어 송태원은 침묵을 지켰다.
“좋아요. 일 방해하지 않을게요.”
“죄송합니다.”
송태원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래도 식사를 거르면 안 되죠.”
유진이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남은 음식으로 직접 쌌다’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음식은 정갈하고 깔끔해 보일 뿐만 아니라 맛있는 냄새를 풍겼다. 유진이 밥을 한 숟갈 떠서 김으로 말았다.
“뭐 하십니까?”
“송실장님은 일 하세요.”
“네?”
“입만 벌려요.”
“네?”
“내가 옆에서 먹여줄테니까. 일하면서 먹으면 되잖아요?”
송태원은 입을 딱 벌렸다. 물론 밥을 먹여달라고 벌린 건 아니었다.
“한유진씨, 저 이건...읍.”
왜 입을 벌렸건 상관하지 않고 한유진은 송태원의 입에 밥을 넣어주었다.
“오삼불고기 좋아해요?”
송태원은 거의 씹지도 않고 밥을 삼켰다.
“저, 제가 먹을 수 있습니다!”
“일 바쁘다면서요.”
한유진이 송태원의 얼굴을 잡아 모니터에 고정했다.
“애인하고 고. 작. 이. 주. 에. 한. 번. 식사도 못 할 만큼 바쁘신데, 어서 일하셔야죠.”
그러면서 한유진은 밥에 오징어 불고기를 얹어 김으로 감쌌다.
“죄송합니다 한유진씨! 두 번 다시 약속을 미루지 않을테니까 제발!”
“음, 이러고 서서 먹이는 건 조금 불편하네요.”
송태원의 입에 또 밥을 처넣어주곤 한유진이 짐짓 주위를 둘러보는 척 했다.
“적당히 보조 의자 같은 게 없으니까, 여기 앉을래요.”
한유진은 태연한 얼굴로 송태원의 무릎에 앉았다.
“한유진씨!”
“아, 이러면 모니터 가리나? 옆으로 앉을게요, 그럼.”
송태원의 왼쪽 허벅지에 엉덩이를 대고 오른쪽으로 다리를 뻗고 앉아 한유진은 숟가락에 밥과 시금치 나물을 얹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으니까....”
“송실장님 설마 다 큰 어른이 편식을 하는 건 아니죠? 채소는 몸에 좋아요. 어서 드세요. 자, 아~”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송태원이 멈칫멈칫 입을 벌렸다. 그가 받아먹자 한유진이 칭찬하듯 그의 머리를 토닥여주었다.
송태원이 불편한 듯 다리를 움찔거렸다. 미니 고로케를 케찹이 찍다 말고 한유진이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혹시 다리 저려요?”
“아, 아닙니다!”
유진이 자세를 바꾸려는 듯 몸을 꿈틀거렸다. 송태원이 숨 넘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서둘러 말했다.
“안 저립니다! 가볍습니다! 편안합니다! 그러니 움직이지 말아주세요!”
한유진이 슬며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남이 먹여주는 게 편하고 좋죠? 앞으로 송실장님 야근하면 종종 와서 이렇게 먹여드릴게요.”
두 번 다시 야근 따위 안 할 테니 용서해달라고 엎드려 빌고 싶건만 너무 불가능한 소리라 송태원은 속으로 눈물만 흘렸다.
송태원이 속으로 울거나 말거나 - 아니, 그가 우는 걸 잘 알면서 - 무정한 애인은 여전히 방실방실 웃으며 그의 무릎 위에 편안히 앉아 한 숟갈 한 숟갈 손수 밥을 먹여주었다.
눈물을 삼키고 이를 악물며 송태원은 이젠 불법은 아닌 한도 내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각성자 관리실 인원을 충원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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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직원들은 한유진이 처음 밥 떠서 김으로 쌀 때 쯤 해서 모두 도시락 상자 들고 휴게실로 도망갔습니다. 그 사람들은 안전합니다. :D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33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그리고 이쪽은 내 신선 서서야. 인사해.”
유비가 서서를 가리켰다.
“그렇구나. 이쪽은 내 신선 주유.”
주유는 약간 어색하게 인사했다. 바로 아까 흩어지기 시작해서, 헤어진 지 이제 반나절밖에 되지 않았다.
“주군끼리 친한 줄은 몰랐어.”
서서는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것 같았다. 방긋 웃으며 주유가 정말 반가운 것처럼 말을 건넸다.
“우리도 힘내자.”
“그래.”
이럴 때는 서서의 저 성격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며 주유가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리고 조금 망설이다가 물었다.
“제갈량은 정말 안 나온 거야?”
“응.”
서서가 끄덕였다.
“같이 싸울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네가 그러는데도 안 나왔으니 단단히 작정한 게지.”
주유가 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제갈량이 누군데?”
유비와 손책이 나란히 묻자 서서와 주유가 동시에 대답했다.
“제 친구예요.”
“실력은 있지만 성격이 나쁘고 충성심도 없어요. 신선으로서 기본 자세가 안 되어 있으니 신경 쓸 필요 없는 신선이에요.”
“그래?”
“사실은 착해요.”
서서가 덧붙였다.
“그래뵈도 굉장히 성실하고요.”
주유는 ‘아니, 그건 아니지. 아무리 친구라도 그렇게까지 금칠해주는 건 아니지.’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아무튼, 손책님께는 인격이 제대로 박힌 신선이 필요해요. 저와 같이 일해야 하니 저와의 상성도 고려해야 하고요.”
주유가 손책을 잡아끌었다.
“우린 이제 다음 신선 찾으러 가요.”
“그래.”
주유에게 끌려가며 손책이 유비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이따가 보자.”
“그래.”
유비도 손책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저쪽도 두 번째 신선 찾는 거구나. 빨리 찾을 수 있을까?”
그들이 멀어진 뒤 유비가 중얼거렸다.
“아닐 수도 있어요. 주유가 너무 강하니까.”
서서가 담담하게 설명했다.
“동료 신선이 강하면 좋은 거 아냐? 그만큼 이길 가능성이 높아지잖아.”
“그렇긴 한데, 주군의 레전드 머신을 오퍼레이팅하고 이긴 뒤에 옥새를 차지하는 건 주군과 더 가까웠던 신선 쪽이거든요. 남은 한 명은 보조자가 돼요. 주유 상대로 자기가 더 낫다고 주장할 수 있는 건 사마의 님 정도니까, 강한 신선들은 도리어 다른 군주에게 가서 더 인정받고 싶을지도 몰라요.”
“복잡하네.”
유비는 머리가 아파질 지경이었다.
“그래요. 너무 복잡해요.”
서서의 기색도 무거워졌다.
“그냥 그런 거 너무 신경 안 쓰고 각자 마음에 드는 군주 찾아가고 신선끼리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맞아.”
유비가 동의했다.
“나도 기왕이면 서서랑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신선을 만나고 싶어.”


몇몇 신선에게 말을 더 걸어보았지만 결과는 신통치 못했다. 다들 태도만 정중했지 그래서 유비에게 오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밤이 되었다. 다 똑같이 생긴 방이 군주 수대로 있었기 때문에 각자 아무 데나 들어가서 자면 되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손을 흔들고 나가려는 서서에게 유비가 물었다.
“신선들은 밤새 뭐하는데?”
“피곤하면 눈 감고 가만히 눕거나 앉아서 휴식해요. 인간처럼 의식이 완전히 정지하지 않을 뿐이에요.”
역시 신기했다. 서서를 보내고 침대에 누워서도 유비는 얼른 잠들지 못하고 오늘 새로 알아낸 것들을 곱씹었다.
‘이젠 같이 살아야 하니까, 일찍 잘 알아둬야 실수하는 일이 없겠지? 방도 따로 줘야 할 거야. 스승님 방으로 하자. 찬이는 한 달 있다가 올 거니까.’
이벤트 참가 전날 첫 번째 목적지에 잘 도착했다는 공손찬의 전화를 받았을 땐 안도감에 울 뻔했다. 그래도 공손찬은 아예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게 아니었다.
스승님도 어쩌다 전화는 하시지만 어디서 뭘 하는지 제대로 말도 안 해주고 언제 돌아간다는 말도 없었다. 답답해서 물어봐도 제대로 된 답 듣기가 어려웠다.
공손찬은 그러지 않기로 단단히 다짐한 것 같았다. 이틀에 한 번은 꼭꼭 전화하고 여기 어디라는 말도 해주었다. 유비가 묻는 말에도 성실하게 답해주었다.
‘그러니 찬이는 돌아올 거야.’
같이 레인보우 이벤트에 참여하지 못해 아쉽지만 돌아오면 그땐 말도 잘 듣고 철이 든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이내 잠들었다.


손책은 알람의 도움 없이도 일찍 일어나는 편이었다. 어려서부터 꾸준히 습관을 들여온 덕이었다.
게다가 여기는 선계였다. 낯선 환경이 마음을 들뜨게 해 깨자마자 침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하루도 힘내자!”
평소엔 강동관 근처 공원으로 조깅을 다녀오지만 여기선 숙소 주변을 몇 바퀴 도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그리고 주유와 함께 신선들을 만나보는 것이 오늘 예정이었다.
그런데 숙소 밖으로 나와보니 공기가 이상했다.
신선들이 모두 한 군데 모여있는데 서로 의심스런 눈으로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것 같은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뭐야, 무슨 일 났어?”
손책이 다가가자 다들 조금씩 기색을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선뜻 입을 여는 신선은 없었다.
“손책님.”
주유가 그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지금 좀 문제가 생겼어요.”
“무슨 문제?”
주유는 대답하기에 앞서 신선들의 눈치를 보았다. 말하면 안 된다고 나서는 신선이 없는 걸 보고서야 입을 열었다.
“간밤에 신선 한 명이 소멸당했어요.”
“신선이 소멸당했다고?”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손책이 두 눈을 깜박거렸다.
“대체 왜?”
“그걸 몰라서 문제라고요.”
신선들의 기색을 다시 훑어보며 손책도 서서히 무슨 일이 난 건지 실감했다. 영웅패들이 소멸하듯, 신선 한 명이 간밤에 소멸했다.
게다가 그 이유를 아무도 모른다.
‘어떻게 된 거야?’
자신도 모르게 주유의 팔을 움켜쥐었다.
“너는 괜찮아?”
“예.”
주유의 목소리에선 평소의 자신감이 묻어나지 않았다.
“누구 짓인지 알면 더 괜찮아질 것 같아요. 이 안에선 배틀도 금지고 도술도 공격용은 금지인데 어떻게 된 건지도.”
“무슨 일이 난 거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다른 군주들도 하나둘 나타났다. 조조를 보고 사마의가 다가가 설명했다.
“간밤 관정이라는 신선이 갑자기 소멸되었습니다. 외부의 공격 같습니다.”
“외부의 공격? 누구의?”
“그건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이벤트 공간은 선계의 다른 공간과 격리되어 있어서 아무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조조는 다른 신선들을 둘러보았다. 사마의의 말이 맞느냐는 질문이 섞인 시선에 몇몇이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끼리 싸워서 소멸시킨 것은 아니고?”
직설적인 질문에도 사마의는 불쾌한 기색 없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이 안에서는 신선들끼리 싸우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 신선이 소멸되는 걸 목격한 신선이 있나?......소멸되었다는 건 어떻게 알지?”
어느새 조조는 형사시절 살인 사건을 접수했을 때와 똑같은 태도가 되어있었다. 하마터면 시신을 보여달라 할 뻔하고 표현을 수정했다.
“목격한 신선은 없습니다.”
사마의가 그런 조조의 혼란을 눈치 못 챈 듯 설명했다.
“이벤트 기간 동안엔 다른 신선의 대략적인 위치와 상태가 공유됩니다. 간밤 모두들 쉬느라 경계가 풀어졌을 때 갑자기 비상사태를 알리는 메시지가 공유되었습니다. 그리고 관정의 데이터와 신호가 소실되었습니다.”
“신선이 그렇게 삽시간에 소멸하는 것이 가능한가?”
“도움을 요청하고 이상을 알릴 여유도 없이 강력한 공격을 받았다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안에 지금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없어야 정상입니다.”
사마의가 조조에게서 멀찍이 물러나더니 근처에 선 나무를 가리켰다.
“다스리기를, 번개와 같이!”
사마의의 손끝에서 번개가 튀었다. 그러나 나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보셨듯이 여기서는 신선들의 공격 마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럼 범인은 신선이 아닌 거로군.”
조조는 생각에 잠겨 신선들을 둘러보았다.
“죽은......소멸한 신선은 어떤 신선이었지? 특별한 능력이 있었나?”
사마의가 고개를 저었다.
“능력은 중하급이었고 눈에 띄는 특수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 그를 시기하거나 원한을 품었을 만한 신선도 없었나? 신선 외의 다른 존재도?”
“예.”
자꾸 인간 기준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신선들끼리 공격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그래선 안 되었다.
조조가 생각을 정리하느라 조용해진 동안 유비도 주위를 둘러보다가 서서를 발견했다. 역시 불안한 얼굴인 서서가 재빨리 유비 곁에 붙어섰다.
“그럼 여기 누가 침입했다는 건가?”
다들 조용해진 가운데 손책의 큰 목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그렇잖아. 신선들 아니고, 군주들도 신선을 갑자기 죽일 이유가 없지. 죽일 수도 없을걸? 여기선 군신일체도 안 되니까. 그럼 외부 침입자가 있다는 뜻이지.”
“일리있는 말이군.”
조조가 일단 수긍했다.
“하지만 여기에 외부인이 어떻게 침입하는데?”
신선들 중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고 사마의를 흘끔거렸다.
“일단 옥새에 접속해 보겠다.”
사마의는 동요하는 기색 없이 그들에게 말했다.
“뚜렷한 원인을 찾을 때까지 다들 모여 있도록 해라. 경거망동하지 말고,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나한테 연락해라.”
“예.”
신선들이 사마의에게 정중히 대답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조에게 인사하고 사마의가 붉은 빛무리로 변해 사라졌다.


옥새에 직접 연락할 수 없고, 사마의조차 없는 상황은 신선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제까지 군주를 결정하지 못해 거리를 두던 신선들도 제각기 눈에 들어오는 군주들 곁에 모였다.
이미 군주를 정하고 다른 신선들을 견제하던 전풍, 곽도도 이번엔 그들이 원소 곁에 모이도록 내버려 두었다.
“너희들 하는 걸 보니까.”
원소가 그 신선들 앞에서 입을 열었다.
“사마의가 그동안 신선들의 우두머리였고 옥새의 명령도 대신 전달했던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그럼 그의 군주가 배틀도 더 유리해지는 것 아닌가?”
원소가 묻자 전풍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답했다.
“어느 정도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마의도 다른 신선들의 정보를 자세히 훑을 수는 없습니다.”
“흠.”
“어차피 그는 조조님에게 가겠다는 의사를 표했습니다. 조조님이 거절하지 않는 한은 그분의 신선이 될 겁니다.”
“그래. 나도 알아.”
전풍은 능력도 뛰어나고 처음 자신에게 드림배틀을 소개해준 신선이기도 했다. 그러니 영입하는 편이 옳겠지만 가끔 저렇게 잔소리쟁이 선생님처럼 굴 때가 있었다.
“사마의는 고지식한 원리원칙 주의자일 뿐입니다.”
곽도가 옆에서 말을 보탰다.
“수장직을 맡아서 얻는 정보도 어차피 다른 신선들도 마음먹고 조사하면 얻을 수 있는 수준입니다. 걱정하실 필요 전혀 없습니다.”
곽도는 능력만 보면 전풍에 못 미쳤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훨씬 편하고 말이 통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다른 신선들에 비해서는 역시 뛰어났다.
남은 기간 동안 이변이 나지 않는 한은 이 둘을 데려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나 버렸지. 자칫하면 이 둘이 소멸될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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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 수를 늘린 건 3백년 간 혼자 옥새를 지켰을 선대 신선들도 외로웠을 것 같아서이기도 합니다. 다만 바로 직전의 드림배틀에선 신선이 하나뿐인 군주가 승리했기 때문에 지금의 옥새엔 보조자가 없다는 설정입니다.
관정은 공손찬 휘하의 장수로 연의에서 공손찬이 패망할 때 전사합니다.

[백망되] 자기애 ㅣ- 기타

Characters: 알베르. 케일.
Rating: PG
Warnings: 없음
Summary: 자기애와 자기혐오는 종이 한 장 차이.

알베케일... 이지만 한방향 짝사랑입니다.




알베르 크로스만은 자기와 마찬가지로 혀에 기름칠이 잘 된 사람을 꺼린다.
처음에 김록수로 그 문장을 봤을 때는 그저 이용해먹기 껄끄러운 사람들은 싫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왕세자와 처음 대면하고 본의 아니게 그의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케일은 조금 다른 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평생 자신의 본모습을 보일 수 없고, 들키는 순간 바닥까지 추락해 치욕스런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는 삶.
동족 혐오, 그건 종종 자기 혐오에 기반을 둔다.
‘그래도 내가 알 바는 아니지.’
그랬다. 알베르가 케일을 내심 싫어하고 껄끄러워하더라도 로운과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한은 계속 케일과 협력할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러니 왕세자에게 사실을 미움 받는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케일은 알베르 앞에서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 불경하단 소리를 들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전쟁 끝날 때까지만 함께하고 그 이후론 서로 안 볼 사이였다. 케일한테는 왕세자와 어떤 감정을 주고받는지 그것이 진실한지가 아니라 일이 끝나고 자기 식구들과 맞을 안락한 은퇴생활이 중요했다.
그러니 왕세자의 일을 도와도 그건 그저 은퇴 계획의 일환일 뿐이었다.

“요새 들어 왕성에 자주 오는군.”
“오라고 텔레포트 좌표 알려주신 거 아니에요?”
이제는 왕세자의 집무실이 자기 집처럼 익숙한 태도인 케일을 보며 알베르가 한 마디 했으나 케일은 평소나 다름없이 무심하게 튕겨냈다.
“응, 그야 그렇지만.”
알베르가 일하는 케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쟁 준비라니 말이 쉽지, 국가의 역량이 총동원되는 엄청난 일이었다. 심지어 대외적으로는 비밀리에 해야 했다. 그런 걸 케일은 개인의 자격으로 심지어 알베르보다도 더 먼저 준비하기 시작했다. 동맹을 모으고 적의 약점을 알아내고 한 나라급의 전력이 될 인재를 혼자 모았다. 심지어 그 힘을 알베르에게 아낌없이 나눠준다.
보상으로 금전을 챙기고 있긴 하지만 케일이 제공하는 것들은 대개 돈 같은 건 그 몇 배를 주고도 얻을 수 없을 만한 것들 뿐이었다. 알베르도 알고 있었다. 로운의 왕도 갈아치울 수 있을 능력의 소유자가 대가 없이 자신을 선택해 주었다는 것을.
기쁘고 자랑스럽지만 동시에 두려워 견딜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 이유를 케일이 쥐고 있으니, 언제든 케일이 다시 거두어 갈 수도 있었다.
케일은 왜 알베르 크로스만을 선택한 걸까.
알베르 뿐 아니라 케일의 존재와 위상을 아는 모두가 알아내려 노력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알베르는 최근 꽤 그럴듯한 가설을 하나 세우고 있었다.
그건 최근 수도에 도는 소문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저녁 식사는 왕궁에서 하고 갈텐가?”
알베르가 짐짓 말을 던졌다.
“일입니까?”
“아니, 만날 사람은 없어. 오늘 만찬은 우리 둘이서만 하면 어떨까 해서.”
케일이 알베르를 쳐다보았다.
“일 얘기 아냐. 전혀.”
알베르가 확언하자 케일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요. 먹고 가죠, 그럼.”
흔쾌히 받아들이는 케일을 보며 알베르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거였나.’
그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로운 귀족가에서 업무상 독대도 아닌데 단 둘이 만찬을 함께하는 건 가족, 가까운 친척, 연인 사이에서나 하는 일이었다. 이 자리를 거절하지 않는다는 건 케일이 알베르에게 그런 쪽의 관심이 있다는 명확한 의사표현이었다.
‘드디어 답을 해주다니. 진작 대놓고 확인할 걸 그랬지.’
의심한 지는 꽤 되었다. 케일은 일찍부터 알베르에게 지나칠 정도로 격의없이 굴었고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서슴없이 거리를 좁혀들었다. 그래서 알베르는 혹시나 하면서 그에게 여러번 미끼를 던져보았다. 그의 외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넌지시 떠보기도 하고, 왕세자의 집무실 가까운 이동 마법진의 코드를 건네 보기도 했다.
그동안은 내내 사람 헷갈리도록 모호하게만 반응해온 케일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알베르는 둘만의 저녁식사에 초대한다는 강수를 두었고, 마침내 답을 얻는데 성공했다.
‘하아, 정말이지 저놈은 호락호락하지 않다니까.’
속으론 투덜대면서도 알베르의 표정은 밝았다. 저 속을 알 수 없는 놈이 원하는 건 알베르 크로스만이고 그건 그 외의 누구도 줄 수 없었다. 이제는 혹시라도 케일이 변덕을 부려 다른 왕자를 선택하거나, 극단적으로는 본인이 왕위에 오르려 들 생각을 하고 있을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이유를 알았다고 해도 약점 잡은 듯이 케일을 휘두르고 마구 부려먹을 생각은 없었다. 알베르는 그런 바보는 아니었다. 자기가 우위에 있는 한도 내에서는 정성껏 마음을 다해 아껴줄 생각이었다. 인재는 귀히 여기는 게 마땅하고 또 케일은 능력을 제하고 생각해도 겉모습도 아름답고 자신과 잘 어울렸다. 그를 성심성의껏 유혹해서 자기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 터였다.

만찬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어쩌다보니 결국 화제가 일 이야기로 빠져버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음식은 맛있고 말 안 듣는 귀족들을 찍어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논의는 즐거웠다.
알베르는 이게 세간에서 말하는 데이트는 아닐까 생각했다. 화제가 약간 정치적이긴 하지만 자기와 케일 사이였다. 무의미한 신변 잡담 같은 거 해봐야 재미있지 않았다. 애인사이라고 항상 사랑만 속삭일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즐거우면 그만이었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우리 케일 공자는 참으로 유능하고 충성스럽단 밀이지.”
뒤가 구린 귀족가 하나를 아주 털어버릴 계획이 끝난 뒤 알베르가 흡족한 미소를 띄웠다.
“우리 사이에 그런 말 맙시다.”
케일은 무심한 얼굴로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었다. 저 포커 페이스를 무너뜨릴 상상을 하며 알베르는 즐겁게 웃었다.
“그래서 내 자네에게 선물을 하나 하고 싶은데, 뭐 갖고 싶은 거 있나?”
“돈으로 주십쇼.”
그런 대답이 돌아올 거라 생각했으므로 알베르의 표정은 무너지지 않았다.
“돈 말고. 보석류로 고르게. 검은 옷을 즐겨 입으니 다이아몬드로 엮은 목걸이 같은 게 좋을 것 같군. 자네 머리색과 비슷한 루비로 브로치를 만들어도 좋고. 아니면.....”
의도적으로 말끝을 늘이며 알베르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최근에 진상 받은 보석 중에, 내 눈색과 아주 비슷한 사파이어 한 쌍이 있는데. 어떤가, 그걸로 귀걸이를 만들면 우리 사이를 과시하기에 아주...”
“우리 사이가 뭐라고 과시 씩이나 합니까.”
그렇게 특이한 보석이면 환금성도 떨어지고, 귀족들 눈에 띄어봤자 귀찮은 일만 는다. 케일은 알베르의 말을 끊었다.
“그런 거라면 차라리 뒀다 왕세자빈이 될 사람에게 주는 게 낫지 않아요? 아, 가짜 눈색이라 그건 곤란한다... 그래도 대외적으로 보여주기에는 괜찮을 것 같은데요.”
이제쯤이면 불경한 놈이라든가 무슨 말이 나와야 하는데 알베르가 조용했다. 불길한 느낌에 케일이 고개를 들어 알베르를 바라보았다.
알베르는 굳은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케일.”
한참 조용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둘 만의 만찬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건 너무 무례한 것 아닌가.”
어둡게 가라앉은 표정과 목소리에 케일은 조금 머쓱해졌다.
“죄송합니다. 둘만 있는 자리니 상관 없겠거니 하고... 앞으론 주의하겠습니다.”
알베르는 할 말이 많은 눈으로 케일을 바라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내 본모습 쪽을 선호하는 거면, 오닉스나 흑진주를 줄까? 평소 옷차림에는 어울리지 않겠지만 머리장식으로 한다면 괜찮을 것 같은데.”
“저하.”
케일이 의구심 어린 눈빛을 했다.
“왜 제게 보석을 주려고 하시는 겁니까?”
“왜냐니... 내 선물이 받기 싫은가?”
“의도를 알 수 없는 건 싫습니다.”
케일이 단호하게 말했다. 알베르는 당황했다.
“의도를 알 수 없다니. 이건 그냥 내 마음을 표현하려는 거라고. 음흉한 속셈 같은 건 전혀 없으니 마음 놓고 받아도 돼.”
“다른 것도 아니고 저하를 연상할 만한 보석을 주면서 아무 속셈도 없으시다고요?”
“우리 서로 같은 편이란 건 이미 합의된 사항 아니었나? 뭘 그렇게까지 경계해?”
알베르는 케일의 이런 반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보석을 선물하겠다는데 거부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고 있는데 케일이 말했다.
“그거야 그렇지만 보석 선물이라니 과하잖아요. 우리가 서로 호감을 가진 관계인 것도 아니고.”
뭐라 더 말하려던 알베르의 목소리가 쑥 들어갔다. 그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케일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케일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눈치챘다.
“저... 하지만 우린 동류잖아요?”
“음... 그래. 그렇지.”
알베르가 식탁 위의 음식으로 시선을 내렸다.
“맞아, 이미 전쟁이 시작된 것도 아니고 아직은 물밑에서 움직여야 할 자네에게 너무 주목을 모을 필요가 없겠지. 뭔가 상을 주고 싶은 마음에 내가 성급했군.”
뭐라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케일은 침묵했다. 케일의 침묵을 들으며 알베르는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혹시나 하는 마음을 버렸다.
“나는 아직 처리할 일이 남아서, 미안하지만 먼저 일어나도록 하지. 자네는 느긋하게 즐기다 가게.”
알베르가 일어섰다. 발걸음을 서둘러서 식당을 빠져나간 그는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국가 기밀에 해당하는 서류도 많아 아무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그의 집무실은 알베르에게는 침실보다 훨씬 마음 편한 공간이었다. 문을 닫고 잠근 뒤 그가 스르륵 주저앉았다.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케일은 그에게 호감이 없었다. 껄끄럽지만 이익이 일치하기에 참고 같이 지냈을 뿐이었다.
알베르도 처음에는 케일을 그렇게 대했다. 언제 그게 틀어진 걸까.
“뭘 기대했던 거야? 나 같은 놈한테. 날 아는 놈한테.”
알베르가 중얼거렸다.
이럴 거라면 뭐하러 잘해줬느냐고 케일을 원망하는 마음이 솟았다. 그러나 다시 돌이켜 보면 케일은 알베르에게 많은 이익을 안기고 비밀을 지켜주기는 했어도 다정하게 군 적은 없었다. 그의 불경한 태도가 친밀감 때문이라 착각한 건 알베르였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을 이해하려다 과도한 확대 해석을 해버린 것 뿐이다. 알베르는 실패를 인정했다.
‘그래도 전쟁에서 승리하고 왕이 되려면 아직 그놈이 필요해. 어서 감정 정리하고 다음에 만나면 금일봉이라도 찔러주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자.’
왕세자쯤 되면 바보같이 굴다 채였다 해도 감정적으로 행동할 수 없었다. 그래도 지금 흐르는 눈물이 저절로 멈출 때까지 놔두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딱 그만큼만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기로 마음먹고 알베르는 계속 소리죽여 울었다.





[백망되] 띠동갑 ㅣ- 기타

Characters: 알베르. 케일. 아미르.
Rating: PG-15
Warnings: 없음
Summary: 승전 기념 연회에서 케일과 알베르가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커플이 되다.


[케일알베로, 케일이 승전 기념 파티에서 다른 영애와 춤을 추는 걸 보고 파티 따위 괜히 열었다며 손수건 물어뜯는(?) 알베르와 그런 알베르의 모습을 케일이 춤추면서도 관찰하다 만족스러워하고 있는 장면] 을 리퀘받아 쓴 글입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고백 받으려다 천벌 받는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승전 선언을 했는데 축하연이 빠질 수는 없었다.
물론 알베르는 대대적으로 승전 축하 연회를 열었다. 왕궁에서 여는 연회 말고도 이날은 수도 및 각 지역의 거점 대도시에서 일반 국민들에게도 술과 음식을 나눠주며 로운의 승리를 축하했다.
로운의 승리를 축하하는 자리니 당연히 주역은 알베르와 케일이었다. 질색하는 케일을 만약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전공을 높이 사서 훈장에 작위까지 내려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강제로 참석시키는 데 성공해서 알베르는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나랑 같이 나란히 귀족들 앞에 나설 기회라니 다른 사람들은 팔 하나쯤 내줘서라도 갖고 싶어 할 기회인데 저놈은 왜 그러는지 참.’
물론 노는 자리가 아니긴 했다. 적어도 왕세자와 총사령관 둘에게는. 어떻게든 새로 개편될 정치 권력에 한 발이라도 걸쳐보고자 그에게 달라붙어 입발린 말을 하는 자들을 상대하고 제국을 상대할 때 필요할만한 것들을 징발할 수 있도록 교묘히 약조를 걸어대는데 조금 지친 알베르는 케일의 모습을 찾아 너른 연회장 안을 쭉 둘러보았다.
둘러보긴 했어도 바로 찾을 거란 기대는 사실 하지 않았다. 사람 떼거리를 귀찮아하는 그이니 어디 구석에 숨어있거나 심하게는 불경하게도 왕세자에게 떠난다고 고하지도 않은 채 집으로 도망쳤으려니 생각했던 것이다.
케일은 금방 눈에 띄었다. 춤을 출 수 있도록 넓게 비워놓은 연회장 중앙에 있어 그보다 더 눈에 잘 띌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케일은 어떤 영애와 춤을 추고 있었다.
붉은색과 연록색의 대비가 눈길을 확 끌만큼 아름답고 서로 어울렸다. 한참이나 쳐다본 끝에 알베르는 상대 여성이 우바르 영지의 아미르 영애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동북부 해군 기지가 있는 그곳이었다. 군기지를 적극적으로 투자 유치하고 헤니투스의 자본을 끌어들여 영지의 자주성도 지켰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역시 케일의 앞선 전쟁 준비 과정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전쟁 중에 아미르 영애는 연락 장교로 일하며 케일이 부재중인 동안 해군 기지를 통솔했다.
파티 따위 귀찮기만 하다고 투덜댔던 주제에 케일은 파트너에게 뭐라 속삭이며 즐거운 듯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미소가 가식이 아니란 건 알베르가 제일 잘 알았다.
우바르 영지와 해군 기지를 생각하다보니 엉뚱한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아직 전쟁은커녕 전쟁 준비도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 훈장 따위 싫고 자기는 일찍 은퇴해 쉴 거라던 케일이 지나가듯 그런 말을 했었다. 우바르 해안가의 절벽 같은 경치 좋고 한적한 곳에 별장이라도 짓고 조용히 살고 싶다고.
그땐 뭔 흰소리냐고 웃어넘겼던 말인데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가 지금 기억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같은 지역. 같은 정치적 입장. 집안끼리도 우호적이고 두 사람은 비슷한 나이의 선남선녀다. 전쟁 때 같이 일한 걸 생각하면 유능하고 마음도 맞을테고.
어느덧 곡이 끝나고 새로운 춤곡이 시작되자 두 사람은 쉬려는지 음료대 쪽으로 물러났다. 춤이 끝났으면 헤어질 법도 하건만 두 사람은 같이 잔을 받아들며 뭐라 즐겁게 말을 나누었다. 중간에 케일이 흘끔 이쪽을 본 것도 같았으나 바로 파트너에게 눈을 돌려버렸다.
알베르는 케일을 협박해 승전 연회에 끌고 온 걸 후회했다.
‘설마... 아니겠지? 저놈은 일찍 은퇴하고 싶어했다고?’
물론 그 이른 은퇴 생활을 아내와 같이 하면 안 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둘 다 집안의 장남장녀라는 사실이 걸리지만, 케일은 백작가를 물려받지 않을 거라 했다. 또 생각하면 케일같이 유능하고 젊은 나이에 공훈을 세우고 이름을 날린 청년이 세간의 눈을 피해 조용히 은퇴하려면 집안의 후계자와 결혼해 ‘안주인이 되어 내조에 힘쓴다’라는 것도 먹히는 변명거리가 될 것이다.
필히, 두 사람이 어울려보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 하나만은 아니었다. 우바르 자작 근처에 모여든 나이든 귀족들이 두 사람을 흘끔거리며 자작에게 열심히 말을 붙이고 있는 것을 보면. 심지어 그 옆에 헤니투스 백작도 기꺼운 표정으로 그들의 아들딸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 반대하는 사람은 없는 걸까 알베르는 다른 귀족들의 기색을 살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기에도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하다못해 상대가 로잘린이었다면, 인재의 국외 유출을 걱정해 볼 수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미르라면 둘 다 알베르의 사람이니 반대는 고사하고 쌍수들어 환영해 마땅한 관계였다.
정치적으로,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알베르는 지금 자기가 똑바로 생각을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케일의 결혼을 원치 않는다. 상대가 아미르 영애든 로잘린씨든 드래곤이든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막고 싶은 마음은 알베르의 것이었다. 문제는 그에게 있었다.
들고 있던 술잔을 지나가던 시종에게 건네고 알베르가 대꾸조차 않는데도 지금껏 옆에서 혼자 열심히 떠들던 귀족 누구에게 양해의 말을 건넨 뒤 알베르는 테라스로 향했다. 호위에게 밖을 지키라 명령하고 유리문을 닫고 커튼을 쳐버린 뒤 알베르는 휴식용으로 마련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망했다.’
머릿속에 그 한 마디만이 맴돌았다. 망했다. 완전 망했다. 누구한테 의논도 못해볼 정도로 확실하게 망했다.
‘내가 케일 그놈을 사랑하다니.’
그게 아니라면 이 마음 이 기분이 설명되지 않는다. 알베르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심호흡을 했다.
일어나 버린 일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수습을 해야 했다.
‘당분간 케일을 만나지 말자. 적어도 맞대면하진 말자.’
그와 케일은 동류였고 눈빛만 봐도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를 마주했다간 순식간에 다 들켜버릴 것이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문제라면 이제 본격적으로 제국 뒤엎기에 들어가야 하고 그러면 그놈과 의논해야 할 일이 참으로 많을 거란 일이지만, 그래도 통신구를 사이에 둔 채 약간의 환각 마법이라도 이용해서 표정을 속이면.....
케일 헤니투스의 곁에는 드래곤이 있었다. 알베르는 탁자에 고개를 박았다.
“돌겠네.”


‘아, 완전히 표정 굳었다.’
알베르 쪽을 흘끔 보고 고개를 돌린 케일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저 알베르가, 가식과 내숭의 달인이 자기 때문에 표정관리를 못했다고 생각하니 솔직히 기분 째졌다.
“케일 공자, 지금 매우 성격 나빠 보이게 웃고 있는 거 알아요?”
“그렇습니까?”
아미르가 지적하자 케일은 재빨리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정돈했다.
“저 왕세자 저하를 놀리는 게 아주 재미있다는 건 알겠지만 적당히 해둬요. 사람 마음을 갖고 노는 게 되지 않을 만큼만.”
케일은 방금 정돈할 표정이 무너질 만큼 놀랐다. 아미르가 피식 웃었다.
“우리 춤추는 내내, 말은 나랑 하면서도 눈으론 저하를 쫓았잖아요.”
“음....”
신음을 흘리며 케일이 눈을 꽉 감았다. 알베르를 흔들었다고 좋아했는데, 사실 흔들린 것은 자기 쪽이었나보다.
“자, 얼른 가봐요. 난 우리 어머니와 더 할 말이 있으니까.”
“성실하시네요.”
“케일 공자가 할 말인가요, 그거.”
웃으며 아미르를 보내주고 케일은 서두르는 티를 내지 않으며 알베르가 들어간 테라스로 갔다. 호위기사가 지키고 섰긴 했지만 케일을 보고는 그냥 들여보내주었다.


“벌써 지치셨습니까, 저하.”
탁자에 고개를 박고 있던 알베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 했는데.”
“제가 아무나입니까.”
케일이 알베르 맞은편 자리에 허락도 구하지 않고 와 앉았다. 알베르가 그에게 눈을 흘겼다.
“불경하긴.”
“제 그런 점을 좋아하시잖아요?”
여유있게 웃으며 과자를 집으려던 케일은 알베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주목했다.
“그래. 좋아하지.”
한 숨 띄웠다 알베르가 대답했다.
“이런 좋은 인재가, 제국을 무너뜨리고 나면 바로 은퇴해서 모습을 안 보일 거라니 아쉬운 일이야.”
알베르가 웃었다.
“그래도 어쩌겠나, 자네가 떠난다면 놔줘야지. 내가 잡는대서 잡힐 놈도 아니고, 쓸데없는 욕심을 부렸다가 자네를 적으로 돌렸다간 상상하기 싫은 결과가 날테니.”
케일이 미소를 지웠다. 알베르는 계속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나? 앞으로 계속 내 곁에서 로운을 위해 일해줄...”
“아뇨.”
“거봐.”
알베르가 방긋 미소 짓고 어두운 정원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정계에선 사라져도 일 년에 한 번 신년 파티 정도는 참석하게. 아, 이런 건 자네보다 나중에 부인 될 사람에게 부부동반으로 초대장을 보내는 것이...”
“저하.”
케일이 다시 한 번 알베르의 말을 끊었다.
“지금 우세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없는 대답 기다리지 않고 케일은 일어나 알베르에게 가 그 앞에 섰다.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알베르의 얼굴을 케일이 턱을 감싸 들어올렸다.
보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받친 손바닥에 눈물이 괴었으니까.
“걱정 말게.”
알베르가 케일의 손을 밀어내고 눈물을 닦았다.
“감정에 휩쓸려 멍청한 짓을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우린 동류야. 나 믿지? 그러니까...”
“와.”
케일이 알베르의 눈물로 젖은 손으로 자기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올렸다.
“저하 생각보다 훨씬.... 아니 이러면 내가 띠동갑 도둑놈이 되는 거라 싫었는데.”
“응?”
케일이 다시 한 번 알베르의 턱을 잡고 들어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마주 겹쳤다.
“무.....”
알베르의 항의는 목구멍으로 도로 넘어갔다. 입술 틈을 비집고 침입해 들어온 혀가 입천장을 건드리자 알베르는 좀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그가 케일의 어깨를 양손으로 힘껏 잡았다. 아플 텐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케일은 알베르의 뒷목을 받쳐 들며 입맞춤을 깊게 했다.
“흐읍...”
혀끼리 맞닿고 마주 얽히는 감각이 미끄럽고 부드러워 묘하게 부끄러웠다. 말랑말랑하고 간지러운 느낌이 입안을 휘젓다가 마침내 떨어져 나가자 알베르는 참았던 숨을 헐떡였다.
알베르 얼굴을 보다 케일이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첫키스였어요?”
“자넨 진짜 숨 쉬듯이 불경을 하는군.”
“숨도 못 쉬는 것보다 낫죠.”
“대체 무슨 장난.....”
“저랑 사귑시다.”
알베르의 머릿속이 하얗게 날아갔다.
“에?”
“에가 뭡니까. 긍정이든 부정이든 확실하게 말해주세요.”
“잠깐만, 그러니까 여기서 사귄다는 말은......”
“결혼을 전제로 교제해주십사 하는 말입니다.”
알베르는 입만 뻐끔거렸다. 케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저하 사랑합니다.”
“.....아미르 영애는?”
“일 얘기 했습니다.”
알베르가 눈을 깜빡여 속눈썹 끝에 새로 맺힌 눈물 방울을 털어냈다.
“정말이에요. 민간 항구 개항 문제로 새 투자 규모를 합의하느라 그랬습니다. 제가 고래족들로부터 동대륙과의 무역 항로를 받았는데 아시다시피 헤니투스 영지에는 바다가 없잖아요? 그러니 우바르 영지로 이어야....”
“잠깐만, 뭘 받았다고? 고래족한테?”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중요해! 그런 엄청난 이권을 혼자 먹으려고 입 다물었단 말이지.”
“혼자 안 먹습니다. 우바르 영지에 항구를 만들어야 하니 거기도 지분이 있고 운영은 빌로스가 할 거고.”
“나는 쏙 빼놓고 말이지, 하, 케일. 난 우리가 비즈니스 파트너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개통도 안 한 항로 가지고 쪼잔하게 굴래요? 항구 건설에 투자하시면 되잖아요, 안 그래도 정식으로 무역을 하려면 외교의 도움도 있어야 하니까 만들어놓은 해군 기지를 이용해서 먼저 항로 개척 겸.....”
정원 쪽에서 찬바람이 휭하고 불어왔다. 한참 열을 올리며 일 얘기를 하던 두 사람은 자기네가 원래 무슨 얘기 중이었나를 깨달았다.
“어.... 음, 그래서.”
알베르가 헛기침을 했다.
“나를 사랑한다고?”
“......네.”
“그래서 질투 유발하려고 아미르 영애와 다정하게 춤췄다고?”
“그건 일 얘기.”
“그쪽으로 또 가고 싶지 않으니까 사랑 문제에 집중하자고.”
알베르가 단호하게 말하자 케일이 고개만 끄덕였다.
“먼저 자각했으면, 왜 먼저 고백하지 않고?”
“제가 어찌 감히 로운의 태양이신.”
“숨 쉬듯 불경하면서 새삼 말 돌리지 말고.”
케일은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그게..... 음, 제 양심상 차마 먼저 고백하기 어려웠다고 해두죠.”
그 말에 알베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자네 내년이면 죽는 건가?”
“네?!”
케일이 입을 딱 벌렸다.
“설마 또 고대의 힘이..”
“아뇨! 왜,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됩니까? 전 시한부란 말도 싫다고요!”
“죽음이란 말을 좋아해서 죽는 사람도 있나?”
“아무튼! 안 죽습니다!”
“그럼 뭐가 문제인데.”
“...네?”
“고백하기에 양심이 찔린다는 건 네 쪽에 큰 하자가 있다는 소리 아니야? 그런데 이 케일 헤니투스에게 대체 곧 죽는 거 말고 어떤 하자가 있을 수 있는 거지?”
케일은 잠시 침묵했다. 사실은 자기는 케일 헤니투스가 아니고, 김록수와 알베르 사이에는 넉넉잡아 십 이 년의 나이차가 있다는 사실을 그가 납득하도록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저하는 왕이 되실 분이잖아요. 아무래도 일개 귀족 자제에 지나지 않는 저보다는 저하께서 먼저 말씀하시는 게 사리에 맞지요.”
알베르는 케일을 빤히 쳐다보았다. 천천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걸 신경 쓰는 줄은 몰랐는걸.”
완전히 납득한 건 아니지만 그냥 넘어가 주겠다는 신호에 케일은 조금 안도했다.
“그래.... 결혼을 전제로 한 교제라고.”
알베르가 그 말을 입 안에서 한 번 굴렸다.
“허튼 소리는 하지 않는 자네이니 이미 뒷공작은 다 끝나 있다고 봐도 되겠지?”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결혼 저 혼자서 해요? 저하께서도 앞으로 해주셔야 할 일이 아주 많습니다.”
케일이 정색했다. 알베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야 당연하지. 그래도, 반대를 분쇄할 계획은 이미 이 머릿속에 다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알베르가 케일의 머리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케일이 빙그레 웃었다.
“제국을 뒤엎고 나면, 다크엘프 모습으로 황위에 오르실 거잖아요.”
케일이 엄청난 소리를 이미 기정사실인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쿼터라곤 해도 보통 사람보다 훨씬 오래 사시겠지요. 그러니 적어도 당분간은 후계 필요 없습니다.”
“그야 그렇지.”
알베르가 쓴웃음을 지었다.
“순혈 다크엘프나 엘프가 아니라면 누구와 결혼을 하든 내 후계가 나보다 먼저 늙을 테니까.”
“네. 그러니 백 년 뒤 일은 그 때 가서 생각하고 지금은 저와 연애를 합시다.”
“생각보다 무책임한 계획인걸.”
“백 년 뒤에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누가 알아요.”
너는 알고 있지 않냐고, 적어도 어떻게 바꿀지 계획이 있지 않냐고 말하는 대신 알베르는 케일에게 맞장구쳐주었다.
“좋군, 연애.”
알베르가 방긋 웃었다. 케일도 마주 웃었다
케일이 알베르의 얼굴을 양손으로 받쳐들었다. 그리고 또 키스하려는 거려니 생각한 알베르의 예상을 배반하고 케일은 알베르의 눈꺼풀에 입맞추고 눈꼬리에 맺혀있던 눈물을 할짝 핥아올렸다.
“...!”
알베르가 얼어붙어버린 동안 반대쪽 눈에도 여유롭게 키스하곤 케일이 다시 바로 섰다.
“눈물 자국 남으면 안되잖아요. 연회 한중간인데.”
“케일!”
“얼굴 빨개진 거 가라앉으면 나오세요. 제가 저하 빈자리 때우고 있을 테니까.”
“자네 정말....”
“불경하다고요?”
“불경은 옛저녁에 했고. 대체 어떻게 그렇게 내 마음을 맘대로 갖고 주무르는 건가. 마치......”
알베르가 잠깐 고민했다. 케일은 알베르가 자기를 뭘로 비유하려나 궁금해서 안 나가고 기다리고 섰다.
“케일.”
“네.”
“그, 아까 ‘띠동갑’이 뭔가?”
케일이 얼어붙었다.
“말이 생소한 것이, 내가 모르는 언어 같은데....”
띠가 없는 로운이니 띠동갑이란 말도 당연히 없었다. 갑작스레 삐꾸가 난 자동 번역 기능에 케일은 현기증을 느꼈다.
“띠동갑 도둑놈이라 말했으니 그 말은 나나 내 마음을 지칭하는 것이겠지? 무슨 의미인가?”
사실은 저하가 저와 열 두 살 가까이 나이차가 난다는 의미입니다, 라고는 당연히 말할 수 없었다.
“그.. 으, 저하를 지칭한 게 맞습니다. 동대륙 어디 말인데, 한없이 귀하고 소중한 사랑하는 사람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케일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말을 지어냈다. 당연히 당장 거짓말임을 알아채거나 정확히 어디 말이냐고 추궁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알베르는 시원하게 넘어가버렸다.
“그렇군. 동대륙에 갔다왔단 말은 들었지만 그새 말까지 배워왔을 줄은.”
뭐라 변명을 하고 싶지만 거짓말에 함부로 말을 덧붙였다간 더 크게 망할 것 같아서 케일은 입 다물고 미소만 지었다.
“그 케일 헤니투스가 날 훔쳐가고 싶을 만큼 사랑한다 이 말이지.”
알베르는 흐뭇해보였다.
“...네.”
“그럼 나도 자네를 띠동갑이라고 부르도록 하지.”
“...네?”
“안 그런가? 우리 로운의 보물인 케일 헤니투스 공자야 말로 누구보다도 빛나고 한없이 귀하고 소중한...”
그가 슬쩍 케일의 눈치를 보았다.
“..내 사랑하는 사람인데.”
‘아, 좆됐다.’
앞으로는 영원히 애인한테 띠동갑임을 확인받게 생겼다. 하지만 그 사랑스런 애인이 저렇게 평소엔 절대 볼 수 없는 약한 표정으로 올망올망 보고 있는데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딱 우리 둘만 있을 때만요.”
적어도 절대 최한 듣는 데선 안 된다.
“좋아.”
알베르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자기도 일어나 케일에게 왔다.
“같이 나가지.”
“얼굴 아직 붉은기 안 가셨는데요.”
“뭐 어떤가. 사랑하는 이와 마음이 통했는데 얼굴쯤 붉은들.”
알베르가 커튼을 걷고 다시 연회장으로 나아갔다. 옆에 케일의 팔짱을 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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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침대에서 띠동갑 소리를 듣는 케일.(묵념)

저기서 백 년 정도 지나고 나면 공화정 전환 해볼만 하지 않을까요. 제국도 혁명할 예정인 거 로운도 나중에라도 공화정 함 해봅시다.

[백망되] 도플갱어 ㅣ- 기타


Characters: 케일. 라온
Rating: G
Warnings: 없음
Summary: 헤니투스가에 떠도는 나폴리탄 괴담을 들은 케일이 진상을 파악하다.




<헤니투스 가 고용인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말> 중

-한밤중에 인적없는 복도나 정원 구석에서 검은 머리 케일 공자님을 마주쳤다면 못본척 하고 지나가거나 하던 일을 계속 해라. 갑자기 사라져도 놀라거나 소리지르면 안된다.
가만히 놔두면 해롭지 않다. 스테이크나 사과파이를 갖고 있다면 건네도 괜찮다.





케일은 자기 앞에 움츠리고 서서 매우 송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총집사장을 기가 찬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내 도플갱어가 저택을 배회한다는 소문이 떠돈다고?”
“소문이라기보단 일종의 괴담입니다.”
총집사장이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유서깊은 귀족의 성이라면 어디나 서넛 쯤은 떠도는 이야기입니다. 괘념하실 것 없습니다.”
“아니 괘념을 하려는 건 아니고.”
케일이 찻잔을 내려놓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보통 그런 건 분명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소리가 들려도 노크하지 말라거나 어디엔 선선선대 누군가의 유령이 헤매고 있으니 열려있는 방문을 들여다보지 말라거나 그런 식이잖아? 나 닮은 유령이라니, 꽤 최근에 생긴 괴담이구나 싶어져서.”
“그렇긴 합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이 소문이 퍼진지는 이 주 정도 밖에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총집사장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아랫것들 입단속은 제가 할터이니 공자님께선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글쎄....”
케일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사람들이 날 보고 화들짝 놀라 숨는 일만 없어지면 나야 신경 안 쓰지.”
“주의시키겠습니다.”
“기왕 하는 김에.”
케일이 팔걸이를 손끝으로 톡톡 두들겼다.
“혹시 앞으로도 그런 게 보이면 그냥 놔두라고 그래. 위험하지 않으니까.”
“네? 아, 알겠습니다.”
“갑자기 슥 사라지거나 해도 놀랄 필요 없다고. 그냥 벽에 걸린 초상화나 똑같다 생각하고 그 이상 뭔가 하려 들 필요는 없다고 말해둬.”
“예, 공자님.”
“뭐 사과파이 같은 건 줘도 좋으려나.”
“....네?”
“아니, 됐어. 나가봐.”
“예.”
총집사장이 케일의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케일이 뒤를 돌아보자 그곳엔 검은 머리카락에 암청색 눈을 한 케일이 서 있었다.
“약한 인간, 나, 난....”
“폴리모프 했다고 왜 말 안 한거야?”
케일이 라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위대한 용은 연습 같은 거 필요 없는 줄 알았는데.”
“몸을 완전히 재구성하는 일이다. 위대한 용이라도 처음부터 완벽하게 되지는 않는다.”
라온이 케일 옆으로 왔다. 케일이 일어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키도 생김새도 머리를 묶은 모양까지도 똑같았다. 어두운 표면에 얼굴을 비춰보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케일이 활짝 웃었다.
“왜 갑자기 웃나, 인간?”
“네가 인간으로 폴리모프를 한 게 기뻐서.”
라온은 인간을 싫어했다. 싫어서 폴리모프도 하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하고 이해가는 이유라 케일은 나중에 라온이 인간형으로 폴리모프를 하게 된다 해도 엘프의 모습을 할거라 생각했었다. 에르하벤도 그러니까.
그런데 라온이 택한 형태는 인간이었다. 라온이 인간을 싫어하지 않게 되어서, 베니온에게 학대받은 경험을 털어버려서 케일은 정말로 기뻤다.
“기, 기쁜가? 네 모습인데?”
라온은 놀랐다.
“사람들도 용만큼은 아니지만 자기랑 똑같은 게 있는 건 싫어한다고 들었다. 내가 변한 모습을 본 사람들 중엔 약한 인간이 죽을 징조라고 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그런 전설이 있긴 한데, 난 신경 안 써.”
어차피 그의 도플갱어라면 케일 헤니투스가 아니라 김록수의 모습을 하고 있는 편이 맞을 것이다.
케일이 라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와는 달리 매끄러운 비늘이 아니라 부드러운 머리카락인 것이 느낌이 생소했다.
“다른 모습으로 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어서...”
“애들은 원래 따라하며 배우는 거야. 몇 번만 더 해보면 분명 네 개성이 반영되어 용의 위대함에 걸맞는 외양으로 변할걸.”
라온이 케일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 모양도 위... 나쁘진 않다.”
“...그래?”
“그래. 여기서 조금만 변할 거다.”
케일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든가.”
라온이 활짝 웃으며 케일을 끌어안았다. 케일이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런데 안아주려면 작은 편이 좋은데.”
“그래!”
라온이 다시 작은 드래곤 모습으로 변했다. 라온을 무릎에 앉히고 케일은 다시 티타임을 즐겼다.


진심 4 (완) ㅣ- 기타

그렇게 심하지는 않지만 수위가 있어서 포스타입에 성인한정으로 올립니다. 


http://posty.pe/1f4gzu


비번은 00


진심 3 ㅣ- 기타


최한은 어둠의 숲을 바라보았다.
여기로 돌아와 버렸다. 다른 어디도 갈 데가 없었다.
‘애초에, 여기서 나간 게 잘못이었을지도 몰라.’
이 숲을 나가 처음 만난 사람들은 몰살당했고 두 번째로 만난 사람은 그의 손으로 해를 입을 뻔 했다. 이런 배은망덕하고 주위에 불행을 퍼트리는 역병 같은 존재에겐 어둠의 숲 같은 곳이 어울렸다.
숲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가자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졌다. 마치 케일님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온 것 같다고 최한은 생각했다.
‘케일님은 괜찮으실까.’
몸은 약해도 마음이 강한 분이니까 잘 이겨내시리라 믿었다. 그의 신뢰를 배반한 주제에 그를 생각하는 척 하는 것도 뻔뻔스럽지만 그래도 최한은 진심으로 케일이 자기 같은 건 금방 잊어버리고 계속 행복하게 살길 원했다.
‘....’
아니, 실은 원하지 않았다. 케일이 그를 기억해주기를, 심지어 용서해주기를 원했다. 그를 절망 속에서 구해줬던 것처럼 한 번 더 손을 내밀어주기를 원했다.
‘후안무치한 것도 정도껏이지.’
차라리 독 늪에 머리를 처박고 죽어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거 괜찮은데?’
독에는 내성이 있지만 소드 마스터도 숨을 못 쉬면 죽는다. 지금 그에게 딱 어울리는 결말 같았다.
목표를 정한 최한이 힘차게 검은 숲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대낮인데도 어두운 숲은 검게 얼룩진 나무들로 가득했다.
그 검은색 한가운데, 선명한 빨간색이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진짜로 여기로 왔냐.”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길머리에 케일이 서있었다.
최한은 눈을 비볐다. 이 근처에 환각을 일으키는 나무 같은 게 새로 자랐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최한.”
케일이 한 걸음 그에게 다가왔다. 최한은 도망도 못가고 그 자리에 못박혀 서있었다.
“케일님....”
최한이 신음소리같이 중얼거렸다.
“그래 나야. 환각 아냐.”
다가온 케일이 최한의 손을 잡았다. 최한은 벼락이라도 내리친 듯 몸을 떨었다.
“케일님?”
뒤늦게 이게 현실임을 깨닫고 최한이 깜짝 놀랐다.
“여, 여기는 어둠의 숲인데... 어떻게 케일님 같은 분이 여기에.”
“안쪽도 아니고 입구에서 스무 걸음도 안 들어오는 이 정도는 내 힘으로도 돌아다닐 수 있어. 그보다 최한.”
케일이 고요한 눈으로 최한을 바라보았다.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이 두려워 최한은 고개를 숙였다.
“최한, 나를 봐.”
최한은 잠시 망설였다. 케일을 보고 싶었지만 감히 볼 낮이 없었다. 케일이 그의 손을 꽉 쥐었다.
“내가 싫은 거야?”
“그, 그럴 리가요!”
최한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너 잘못한 거 있지?”
“.....네.”
“잘못을 했으면 사과하고 용서를 빌어야지, 그냥 휙 도망가 버리면 다야?”
“죄송합니다.”
최한은 도로 고개를 숙였다. 케일이 그의 턱을 잡고 들어올렸다.
“케일님.”
“뭘 잘못했는지 말해봐.”
턱을 잡혀 강제로 케일을 마주본 채로 최한은 당황했다. 그러나 그의 손을 뿌리칠 수도 또다시 도망갈 수도 없었다.
“제가.... 케일님께 불경한 마음을 품고....”
“그거 말고.”
“....네?”
“누굴 좋아하는 건 잘못이 아니야.”
케일이, 최한의 눈을 들여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제가 케일님을 강제로 끌어안고 입맞춤을.”
“그래. 그건 잘못이지.”
최한이 정답을 맞혔다는 듯이 케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말고는?”
“어.......”
최한은 고민했다. 숲에 들어올 때만 해도 세상 모든 죄를 다 짊어진 기분이었는데 막상 케일에게 추궁당하며 생각해 내려 하니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돌아오라고 하셨는데 도망친 거요.”
“역시 듣고도 도망간 거냐.”
케일이 째려보자 최한은 다시 죽고 싶어졌다.
“죄 없는 사람을 뒤통수쳐서 기절시킨 건?”
케일의 말에 최한이 흠칫했다.
“그건... 그놈이 케일님을....”
“내가 동의한 관계였어.”
케일이 말을 끊었다.
“내 허락도 없이 멋대로 키스한 너보다는 나은데.”
최한이 눈을 꽉 감았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럼 제가 어떻게 했어야 했나요. 케일님께서 그자와..... 그걸 그냥 보고 있었어야 하나요?”
“말로 할 수도 있었어.”
케일이 최한을 끌어당겼다.
“나에게 좋아한다고, 그러니 다른 사람과 관계하지 말라고 말로 할 수도 있었지.”
“하지만 제가 어찌 감히.”
“한아.”
최한이 눈을 크게 떴다. 케일이 그를 끌어안았다.
“누굴 좋아하는 건, 사랑하고 닿고 싶어 하는 건 잘못이 아니야.”
“케, 케일님.....”
“나야말로.....”
케일이 숨을 들이쉬었다.
“미안해.”
“뭐가 말인가요?”
“나는 널, 그런......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하지는 않아.”
품에 안은 최한의 몸이 경직하는 걸 느끼며 케일이 그의 등을 다독였다.
“나는 널 봐도 같이 연애를 하고 싶다거나, 성관계를 맺고 싶다거나 하는 기분은 들지 않아. 네가 문제인 건 아니야. 남자든 여자든, 난 그런.... 필요를 못 느껴.”
최한은 뭐라 답해야 좋을지 몰라 꼼짝도 못하고 안겨만 있었다.
“그래도 널 좋아해. 네가 웃었으면 좋겠고 행복했음 좋겠고 원하는 걸 하며 즐거웠으면 좋겠어. 너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가 힘을 합쳐 암을 무찌르고 함께 편안한 은퇴생활을 누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그가 잠깐 띄웠다 덧붙였다.
“너만 좋다면.”
“저는, 저는 당연히.”
“이것도 일종의 사랑이라고 생각해. 네가 원하는 것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만, 내가 줄 수 있는 감정은 이런 거라서.”
케일이 몸을 떼고 다시 최한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러니까.... 이걸로 만족해주지 않겠어?”
“.....네?”
최한은 자기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만족해 달라니... 그건 마치, 케일님이, 제게.”
케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인이 되어 달라고 하는 거야.”
최한은 입을 딱 벌렸다.
“하지만, 케일님이, 저 때문에 그렇게까지.”
“널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라고.”
케일이 정정했다.
“그리고 네가 그렇게 송구해 할 만한 상황도 아닌 걸? 로운 왕국에 백작 영식쯤은 수십 명도 더 있지만 소드 마스터는 너 하나라고. 좀 더 뻐겨도 돼.”
“그, 케일님은 그냥 흔한 백작 영식이 아니잖아요.”
최한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케일이 킥킥 웃었다.
“그래서, 대답은?”
최한이 파바박 고개를 끄덕였다. 케일이 그의 목에 팔을 감아 당기고 입술을 겹쳤다.
잠시 멍하니 굳어있던 최한이 곧 정신을 차리고 케일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케일이 입을 벌리자 최한의 혀가 파고들었다.
의욕만 앞서는 서툰 키스였지만 혀를 마주 감고 입안 곳곳을 혀끝으로 건드리며 케일이 최한을 이끌었다. 최한도 곧 그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케일을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키스를 마친 최한이 케일의 목을 입술로 지분거리다 슬쩍 핥았다. 입술이 더 아래로 내려가며 최한이 케일의 크라바트를 끄르려고 했다.
“자, 잠깐만 최한, 그만!”
케일이 저지하자 최한이 깜짝 놀라 몸을 떼었다.
“아... 죄송합니다. 케일님은 이런 건 싫어하신다고.”
“아니, 싫은 게 아니고.”
금방 다시 쭈그러들려는 최한을 케일이 다독였다.
“막 하고 싶어지지 않을 뿐이지 싫은 건 아냐. 키스해도 되고 그... 다음도 해도 되긴 하는데 여긴 어둠숲이잖아.”
“아.”
최한도 무슨 소린지 깨달았다. 야외라거나 하는 문제 이전에 어둠의 숲은 사방이 독과 위험 천지였다.
“여기서 옷을 벗을 순 없으니까.”
“...집안이라면 괜찮은 거지요?”
“기왕이면 침실까지 들... 최한!”
최한이 케일을 번쩍 안아들었다. 그리곤 달리기 시작했다.
“나도 내발로...”
“이게 빠르고 안전합니다.”
빠르긴 빨랐다. 최한은 케일을 들고도 그날 도망갈 때보다도 더 빠르게 내달렸다. 자칫 혀라도 씹을까 무서워 케일은 입을 꼭 다물고 최한의 목에 팔을 감아 매달렸다.
최한은 정말로 순식간에 해리스 별장까지 달려왔다. 케일은 만약 이 별장이 없었다면 최한이 레인시의 영주관까지 달려가는데 얼마나 걸렸을까 생각해보았다.
굳이 문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가는 시간도 아까운지 최한은 밖에서 바로 케일의 방 테라스로 뛰어올라갔다. 마침내 최한이 그를 내려놓자 케일은 어질어질해져서 주저앉아버렸다.
“케일님? 괜찮으세요?”
최한이 당황했다.
“괜찮아.”
케일이 최한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좀 멀미가 나서.”
“죄송합니다, 케일님이 흔들리지 않게 신경 썼어야 했는데....”
“그렇게 마음이 급했어?”
케일이 웃었다. 최한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제가 너무... 급했지요?”
“응?”
“케일님께서 제 마음을 받아주신다는 게 너무 기뻐서, 제가 마음이 달아서 케일님의 몸 상태도 고려하지 못하고 그만.”
“아니, 나 그렇게까지 약하지는 않거든.”
케일이 못마땅한 기색을 했다.
“그래도, 좋아해도 된다고 허락받자마자 이렇게 밝히는 건 역시 싫으시겠죠..”
“안 싫다니까.”
케일이 최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백하고 바로 침대는 확실히 빠르긴 하지만, 네가 계속 불안해하는 것 보다는 나으니까 괜찮다고 하는 거야.”
“케일님은 어째서.”
최한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물었다.
“제게 이렇게까지 잘해주시나요?”
“말했잖아. 이것도 사랑이라고.”
케일이 최한의 눈꺼풀 위에 입술을 눌렀다.
“그러니까 그렇게 쫄아있지 말고.”
“예.”
최한이 활짝 웃었다.
“그래... 들어가자.”
케일이 테라스 문을 열었다. 최한이 그를 따라 들어갔다.






진심 2 ㅣ- 기타


초대장을 건네고 파티장에 입장한 케일은 우선 안을 둘러보았다.
음악은 시끄럽고 불빛은 어두웠다. 공기 중엔 술냄새가 감돌았다.
‘디스코볼만 돌아가면 나이트 클럽 같겠다.’
새로 등장한 인물을 훑어보던 파티 참가객 중 몇몇의 얼굴이 굳는 게 보였다. 케일 헤니투스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케일은 곧장 바로 가서 독한 술을 시켰다. 두어 잔 걸치고 나니 술기운이 돌며 긴장이 조금 풀렸다.
아무도 와서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그를 훔쳐보는 시선이 등 따갑게 느껴졌다. 기분 탓인지 시끄러운 사람들 말소리도 아까보다 조금 조용해진 것 같았다.
‘뭐야, 나 생각보다 더 유명한 거야?’
케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이것저것 하긴 했어도 대부분 물밑에서 일어난 일이고 일반에 드러난 건 작년의 광장 테러를 막은 때 정도였다. 그것도 사실 일은 라온과 최한과 로잘린이 다 했고 자긴 그저 눈에 띄었을 뿐인데 아직까지 사람들이 안 잊고 있다니.
그래도 사람들이 함부로 접근하지 않는 건 다행이었다. 이대로 나쁜 소문은 나고 실제로 사람들과 뭘 하지는 않아도 되는 게 케일이 생각하는 최선이었다.
그가 술을 더 주문했다. 자기 쪽에서도 파트너를 찾는 시늉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 썩 끌리는 사람도 없거니와 먼저 접근했다 상대가 오케이 해버리면 큰 문제였다. 차라리...
옆자리에 누가 와 앉았다. 고개를 돌리자 처음 보는 남자가 케일을 보며 싱긋 웃었다.
“이런덴 처음이신가보군요.”
“예... 뭐 그렇습니다.”
숨길 일도 아니어서 케일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뭐 하는 덴지는 알고 오신 겁니까?”
“정신 놓고 놀다가 하룻밤 상대를 찾는 곳으로 알고 왔는데요.”
뚱한 표정을 하고 케일이 그리 말하자 상대는 폭소했다.
“맞는.... 말씀입니다만, 그 은빛 공자님 정도 되면 이런데 까지 와서 상대를 찾지 않아도 좋다고 쫓아다닐 영애들도 많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대답해야 선량한 이미지를 탈피할까 케일은 잠깐 고민했다.
“책임질 일은 만들기 싫어서요.”
“현명하시군요.”
남자의 웃음이 깊어졌다. 그가 케일 쪽으로 몸을 숙였다.
“상대를 아직 못 고르셨다면 저는 어떠십니까?”
케일은 깜짝 놀라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분명 남자였다. 자기보다 키도 크고 어깨도 넓은.
“책임질 일을 만들지 않으려면 이쪽이 낫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네요.”
케일은 수긍했다. 콘돔이나 피임약이 없는 이 세계에선 믿을 건 피임용 마법도구 뿐인데 마탑 멸망 덕분에 그것도 당분간은 새로 구하기 어려웠다. 케일도 오늘은 간만 볼 생각으로 챙겨오지 않았고.
그 사람이 케일의 등에 살짝 손을 대었다. 그가 거부하지 않자 손이 슬슬 허리로 이동했다.
“공자님도 흥미 있으신 걸로 알아도 되겠지요?”
“음.... 그게.”
케일이 몸을 빼자 손이 다시 떨어져 나갔다. 그 상태로 그는 잠시 고민했다.
섹스를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난봉꾼이 되겠다면서 단 한 번도 안 하고 지나갈 수도 없었다.
이 사람은 생긴 것도 괜찮고 매너도 좋았다. 거절하면 물러나는 것이 적어도 무슨 위험한 일은 안 일어날 것 같았다.
케일 헤니투스의 첫 경험이 이름도 모르는 낮선 사람인 건 좀 미안하지만 그런 건 난봉질을 하자고 결정하기 전에 고려했어야 했다.
“....좋습니다.”
케일이 말했다.
“어디로 갈까요?”
“여기 위층에 침실이 있답니다.”
두 사람은 일어나서 계단으로 갔다. 그 사람이 다시 한 번 케일의 허리에 팔을 감았고 케일도 이번에는 거부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함께 가는 것을 흘끔거리며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기색이 보였다. 내일쯤이면 ‘케일공자 그렇게 안 봤는데 문란하네. 실망이다’ 같은 소문이 온 수도에 쫙 퍼졌으면 좋겠다고 케일은 생각했다.
‘얼른 하고 집에 가야지.’
난봉질 하러 나온 사람 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케일은 상대가 이끄는 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으려는데 누가 문을 턱 잡았다.
“....최한?”
케일이 어리둥절했다.
“왜 그래?”
“저는 케일님의 호위입니다.”
최한은 어둡게 가라앉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낮선 사람과 단둘이서만 방에 계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어.”
케일은 약간 남아있던 술기운이 싹 달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음, 그렇긴 해도 이건......”
케일이 당황했다. 그야 낮선 사람을 경계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둘이 원나잇을 하는 자리에 최한을 배석시킬 수도 없었다.
“너라면 문밖에서도 호위 할 수 있지 않아?”
비명 지르면 곧장 들어올 수 있을 테니까... 까지 생각하고 케일은 그 말은 즉 최한이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거라는 뜻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건 안 된다. 케일은 문 밖에 서서 최한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는 비크로스와 최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비크로스는 괜찮아도 최한이 문 안이든 밖이든 호위로 서서 케일이 낮선 사람과 뭘 하는지 보거나 듣는 건 안 될 일이었다.
“....안되겠어, 역시 넌 집에.”
“저는 상관없습니다.”
케일을 데려온 남자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최한을 보았다.
“호위가 보고 있다 해서 뭐 달라질 것도 없지 않나요. 보고 싶으면 보라지요.”
그 사람이 뒤에서 케일을 끌어안았다. 허리에 팔을 단단히 감고 고개를 숙여 케일의 목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워서 케일이 흠칫 목을 움츠렸다. 최한의 눈빛이 더욱 험악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사람은 케일을 감싸 안은 채 침대로 갔다.
“저....”
“갑자기 마음이 바뀌셨습니까? 아니면 역시 호위는 내보내고 싶으신가요?”
“네. 역시 누가 보고 있는 건 좀.”
케일이 최한을 돌아보았다.
“나가있어.”
“케일님...”
“아니, 아예 집에 돌아가라. 호위는 비크로스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최한은 비참한 얼굴로 한참이나 케일을 응시하다 밖으로 나갔다. 케일은 한참이나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자, 상대를 앞에 두고 한눈팔면 안됩니다.”
남자가 케일의 옷을 벗겼다. 셔츠 단추가 풀리고 맨살이 남의 눈앞에 드러나자 케일은 그만 얼굴을 붉혔다.
‘아니, 이럴 게 아니라.’
그가 자기 손으로 벨트를 풀고 바지를 벗었다. 상대도 자기 옷을 벗었다. 먼저 알몸이 된 케일이 침대에 누웠다.
‘후딱 해치워버리고 가야지.’
자기 이미지 깎겠다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좀 기가 막히기도 했지만 이것도 다 편안한 백수 생활을 위해 하는 일이었다. 최한이 심하게 충격 받은 것 같아 마음에 걸렸지만 어차피 그는 곧 자기를 떠나 영웅이 되어야 할 사람이었다.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상대가 침대에 올라와 케일의 위에 자기 몸을 겹쳤다. 한차례 깊이 키스한 뒤 그가 케일의 턱선에서 목으로 입술을 옮겼다. 손이 가슴을 주무르다 유두를 잡아 굴렸다.
“아!”
케일이 신음하며 고개를 젖혔다. 상대는 케일의 허벅지를 쓰다듬다 다리를 벌려들고 자기 몸을 사이에 끼워 넣었다.
“잠깐만, 조금 천천히....”
“이제 와서요?”
격렬하게 키스하려는 듯 상대방의 몸이 케일을 덮쳤다. 케일은 반사적으로 눈을 꽉 감았다.
털썩.
그의 머리가 케일의 옆으로 떨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 케일은 눈을 깜빡였다.
그가 눈을 뜨자 눈 앞에 최한의 얼굴이 보였다.
‘뭐.....’
케일이 놀라 움직이지 못하는 새 최한이 케일의 몸 위에 덮여있던 남자를 잡아 침대 밖으로 던져버렸다. 기절했는지 맥없이 굴러 떨어지는 몸뚱이를 보다 케일은 다시 최한에게 눈을 돌렸다.
“....”
그를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등지고 서서 케일을 내려다보는 최한은 그가 일찍이 본 적 없던 흉흉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케일은 갑자기 자기가 지금 알몸이고, 그 몸이 고스란히 최한의 눈 앞에 드러나 있다는 사실을 의식했다.
“최한....”
최한이 케일의 몸을 획 들어 힘껏 부둥켜안았다. 케일은 꼼짝도 못하고 그에게 안겼다. 갑작스런 공포감이 그의 몸을 마비시켰다. 상대가 최한인데도.
“잠깐, 놔.... 읍.”
최한이 다급해보일 정도로 급하게 키스해왔다. 케일은 고개를 돌리고 싶었으나 뒷목이 꽉 잡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혀라도 깨물자니 그래도 최한이라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숨이 막혀 머리가 핑 돌 때쯤 되어서야 최한이 그를 놔주었다. 케일은 최한의 어깨에 기대 숨을 헐떡였다.
“케일님...”
최한의 팔이 허리를 감았다.
“하지 마.”
케일이 서둘러 말했다.
“이러지마, 최한. 정신 차려.”
“케일님, 전.”
“날 어쩌려는 거야? 강간이라도 할 참이야?”
그 말에 최한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가 천천히, 케일을 다시 침대에 내려놓았다.
케일은 안도했다. 최한이 이대로 이성을 잃으면 어쩌나 무서웠는데 다행히 그 지경까지 가지 않고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침대에 앉은 채 케일이 최한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제 당장 눈물이라도 흘릴 듯 죄책감 어린 얼굴로 바짝 움츠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모기만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케일님.... 케일님을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런데.....”
‘그래, 알아차리지 못한 내가 바보다.’
케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파티자리에 몰래 쫓아온 것, 둘만 둘 수 없다고 고집부린 것, 어쩌면 최한이 그를 떠나지 않으려 하던 일 등 눈치 챌 만한 기회는 많았다.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건 케일 자신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나 최한은 케일의 고민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저, 저는..... 아니.”
고개를 푹 숙인 최한의 발치에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케일님.”
그리곤 케일이 뭔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뒤돌아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어. 이, 이봐 최한!”
케일이 창문으로 달려가 밖을 내다보았을 땐 이미 최한은 저 멀리 도망치고 있었다.
“돌아와! 야!”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 최한을 케일이 쫓아갈 방법은 없었다. 결국 옷을 다시 챙겨 입고 기절한 사람은 침대에 곱게 눕혀준 뒤 케일은 비크로스와 집으로 돌아왔다.
‘이걸 어쩌면 좋지?’
다음날 아침이 되어도 최한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온홍라온에겐 케일이 최한은 심부름 보냈다고 얼버무렸지만 그 변명이 언제까지 통할지도 알 수 없었다. 최한을 찾아야 했다.
‘어디로 간 거지?’
수도에 최한이 헤니투스 저택 말고 알 만한 곳이래야 빌로스네 상단 정도밖에 없었다. 하지만 케일은 그가 케일이 알 만한 데로 가지는 않았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도 빌로스에게 말은 해두자. 자칫 그 파티 소개시켜준 게 빌로스인 걸 최한이 알았다간 무슨 사달이 날지도 모르니까.’
일단은 빌로스 뿐 아니라 최한이 알 만한 사람 전부에게 혹 최한을 보거든 화 안 낼테니까 돌아오라고 전해달라는 편지를 보내놓고 케일은 생각에 잠겼다.
최한을 찾는 것도 문제지만 찾은 뒤 어떻게 해야 할지도 문제였다.
최한이 그에게 연정을 품은 건 이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걸 탓할 생각은 없었다. 외 하필 자기냐는 의문은 있지만 어차피 그런 감정은 논리를 따르는 게 아니니까 그 점은 이해했다.
하지만 그래서 케일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받아주면 간단할 것이다. 최한은 도망칠 필요도 죄책감 가질 필요도 없고 어쩌면 좀 행복해지기도 할 것이다. ‘영웅의 탄생’에서 그가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케일도 그에게 안정과 행복을 주고 싶었다. 열일곱 남자애인걸 생각하면 그야 육체관계도 원하겠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감수할 수 있었다. 애정이나 욕구 없이도 행동은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걸로 충분한 걸까.
대답해야 할 사람은 여기 없었다.
‘대체 어디로 가 버린 거야.’
어디다 내놔도 위험하지 않을 최강의 소드 마스터인 걸 알아도 어쩔 수 없이 걱정이 되었다.
‘그래... 내가 최한을 꽤 좋아하긴 하나 보다.’
케일은 인정했다.
‘찾아서 물어보자.’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32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신선 순욱이라고 합니다, 조조님.”
역시 조등과 판박이다. 이것이 순욱이 본 조조의 첫인상이었다.
드림배틀을 끝까지 거부하고 녹음기를 이용해 정보만 가져간 할아버지나, 이름을 바꿔 기어이 참가한 손자나 결국 똑같은 인간이었다. 인간의 의지로 선계의 일을 간섭하려는 자들.
신선들이 인간을 섬기고 그 의지를 따르는 것은 그걸 이용해 드림월드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인간 역시 선계의 의지에 복종하도록 만들어진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간혹 인간이 허가된 범위를 넘어서려 한다. 신선보다 약간의 자유를 더 허락받았다는 이유로, 인간 역시 옥새와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시스템에 순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려 한다.
애초 자신이 조등을 주목하지 않는 편이 가장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인 이상 자신은 조조가 선계와 충돌하는 일이 없도록 곁에서 지켜봐야만 했다. 그러려면 그의 신선이 되어야 했다.
사마의가 더 야심찬 성격이라 신선의 수장 자리를 손에 넣었지만 순수하게 능력을 놓고 보면 자신도 그리 뒤지지 않았다. 자신을 거절할 군주는 없었다.
팔찌로 자신의 스테이터스를 띄워 조조에게 보여주었다. 각종 수치들뿐 아니라 전체 신선들 중에서의 비교 순위도 나와있었다.
과연 조조는 무표정을 유지하면서도 화면을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흥미가 돋았다는 증거였다.
“훌륭하군. 그런데.”
조조가 순욱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왜 내 신선이 되려는 거지?”
“조조님은 강하시고, 이길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군주이십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조조가 약해서 금방 탈락할 군주였다면 이럴 필요도 없었다.
“좋다.”
조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최대 7일까지 지낸다고 들었다. 그러니 신선들을 일단 다 만나보고 천천히 결정하겠다.”
“알겠습니다.”
순욱은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숙였다.
“기한이 넉넉한 것은 그 기간 동안 신선과 군주가 함께 지내며 상성을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사마의가 덧붙였다.
“판단을 미루시더라도 일주일간 저희와 함께 다니시는 편이 좋습니다.”
“그렇군.”
“인간 군주들이 지낼 장소는 이 안쪽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사마의 역시 금방 조조를 택한 것이 순욱은 놀랍지 않았다. 사마의는 수장이 될 때도 저렇게 서둘렀었다.
한 군주에 신선이 둘 따라갈 수 있으니 지금 꼭 견제할 필요도 없었다. 사마의가 앞장서는 대로 조조가 따라가자 그도 따라갔다.
얼마 가지 않아 다른 신선들과 군주들도 보였다. 조조를 보고 접근하려던 신선 두엇이 사마의와 순욱을 보고 멈칫 하더니 뒤로 물러났다. 조조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저들이 어떤 신선인지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사마의가 묻자 조조가 고개를 흔들었다.
“너희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저리 쉽게 물러날 정도면 알 만하지. 난 최강을 원한다.”
“안심하십시오. 참가한 신선들 중 최강은 접니다.”
자신만만하게 답하는 사마의를 순욱이 빤히 쳐다보았다가 얼른 표정을 바로했다.
그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참가한 신선들 중에선 정말로 사마의가 최강이라 할 수 있으니까.
조조는 순욱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저 앞에 나타난 다른 군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원소 주위에는 한꺼번에 여러 신선들이 모여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원소는 그들이 서로 능력치 비교하고 말싸움을 주고받는 걸 느긋하게 구경만 하고 있었다.
조조는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역시 너도 참가했구나, 원소.”
원소는 조조를 보고 잠시 놀란 표정을 했다가 곧 얼굴을 풀었다.
“경찰도 그만두고 잠적했다더니, 어떻게 참가한 거야?”
“이름을 바꾸었다. 이제 내 이름은 조조다.”
“아하.”
원소가 천천히 끄덕이며 조조를 훑어보았다.
“잘 어울리네.”
“칭찬으로 듣지.”
“곰돌이패밀리가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궤멸당했다는 뉴스 봤어.”
원소가 호전적인 미소를 지으며 사마의와 순욱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라면 무서운 적이 될 것 같네.”
“너 역시.”
원소가 격투기 고수라는 말은 들어본 적 없지만 원체 다재다능하고 성실한 친구였다. 조조도 방심할 수 없었다.
“이 안에서는 드림 배틀은 금지라고 들었어.”
“나도. 정 분쟁이 나면 서로의 영웅심 수치를 비교해 강한 쪽의 뜻대로 하라더라.”
“일종의 모의 배틀이군.”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조조는 자기들끼리 다투는 걸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는 원소 주위의 신선들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곧 거두었다.
“우리 사이에 승부를 내는 건 이벤트 다음에 천천히 하자.”
“그래.”
조조가 아직 태오이던 시절에도 가끔은 생각했었다.
만약 경찰이 되겠다는 꿈이 없었다면 자신도 조위그룹의 후계자 수업을 받았을 텐데, 그때 자신과 원소 중 누가 더 뛰어난 사업가가 되었을지.
철이 들고 관심분야가 멀어지고 둘 연애시키려는 참견쟁이 어른들을 피하면서 지금은 많이 서먹해진 친구였다. 설령 돈독한 사이라고 해도 유비와 공손찬처럼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승부를 언제 낼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적어도 레인보우 이벤트 끝나고 인간계로 돌아가자마자 대뜸 맞붙고 싶지는 않을 뿐이었다.
‘기왕이면 서로의 능력이 최고조일 때 전력으로 맞붙고 싶으니까.’
원소도 비슷한 생각인 듯 호전적으로 웃었다.
“그럼 이따가 보자. 이벤트 기간 동안엔 계속 서로 얼굴 보고 지내야 하는 것 같으니.”
“그래.”
조조가 원소에게서 물러났다. 막 자리를 뜨려다가 생각난 것을 물어보았다.
“대답 안 해줘도 되는데, 혹시 원술도 여기 있어?”
원소가 피식 웃었다.
“여긴 없는 것 같아. 내가 참가할 때쯤 해서 갑자기 날 열심히 피하기 시작한 걸 보면 참가는 했는데 말이지.”
“그렇군.”
조조도 납득했다.
“너한테 바로 탈락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럴까도 했는데 쫓아가기 귀찮아서.”
원소가 풋 웃었다. 조조도 웃었다.
주위에 다른 군주들이 늘어나는 걸 보고 두 사람은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사람 많은 곳에서 늘 하던 버릇대로였다.
그리고 곧, 조조는 바로 한 백 미터쯤 멀어질 걸 그랬다고 후회하게 되었다.
“조조!”
유비가 두 손을 붕붕 휘두르며 다가왔다.
“역시 너도 참가했구나! 그동안 잘 있었어?”
무시하고 갈까도 했지만 사방이 다 트여있고 노골적으로 숨기도 창피했다. 할 수 없이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유비를 노려보았다.
“혹시 서서 못 봤어?”
이번에도 유비는 조조의 살기 따위 못 느낀 것 같았다. 활짝 웃으며 사마의와 순욱에게도 손을 흔들었다.
“너도 벌써 신선 얻었구나. 어떤 애들이야?”
사마의는 유비에게 슬쩍 눈인사만 하고 순욱은 불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조가 대신 소개해주었다.
“이쪽은 사마의, 이쪽은 순욱인데 아직 내 신선으로 확정한 건 아니다.”
“아, 그래?”
순욱은 이 바보 같아 보이는 군주가 혹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면 거절할 마음의 준비부터 했다. 유비는 그러는 대신 더 엉뚱하게 들리는 질문을 했다.
“두 사람 혹시 서서 봤어?”
‘서서? 그 서서?’
아까부터 냅다 서서만 찾던 바로 그 군주였다. 순욱이 기가 막혀 말을 않는 동안 사마의가 성실한 어조로 답했다.
“신선들은 시험 구역 안에 무작위로 흩어져 전송됩니다. 많이 모여있는 곳에서 못 찾았다면 숲 구석구석을 전부 뒤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 알았어.”
유비는 돌아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숲을 어디부터 돌아볼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 유비님!”
그가 막 움직이려는 찰나 숲 어딘가에서 서서가 튀어나왔다.
“죄송해요, 기다리셨죠!”
“서서!”
유비도 그리로 달려가 서서와 두 손을 맞잡았다.
“어디 있었던 거야?”
“죄송해요. 선계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돌아보고 싶었어요.”
답지 않게 엄숙한 표정을 하던 것도 잠시, 서서가 다시 활짝 웃었다.
“하지만! 드림배틀에서 승리하면 되돌아올 수 있으니까요!”
“그래!”
맞잡은 손을 흔들며 유비도 웃었다.
조조는 그쪽에서 눈을 떼고 사마의와 순욱을 보았다.
“인간들을 위한 숙소가 있다고 했지? 안내해라.”
“예.”
조용히 있고 싶어진 마음 다 안다는 듯 둘 다 앞장섰다.


온통 숲속인 선계라 혹시 군주들도 나무 위에서 자야 하나 걱정했는데 그런 건 아니었다. 도리어 꽤 현대적으로 보이는 다인용 별장 같은 것이 서 있어서 조조를 놀라게 했다.
“군주를 위한 시설은 당연히 인간에 맞춰 생성됩니다.”
사마의가 여전히 충직한 태도로 설명했다.
“이제 인간계에 나가서 생활해야 하는 신선들을 위한 교육 목적도 있습니다.”
순욱도 거들었다.
“내부 설비도 전부 동시대 인간계에 맞춰집니다. 그래도 혹 불편한 점이 있으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알겠다.”
내부도 깔끔하고, 침대와 옷장 등 가구들은 상표명이 안 붙어있을 뿐 공산품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러고 보니 부엌이 보이지 않잖아.’
막 신선들에게 물어보려는데 쿵쿵 요란한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또 다른 군주도 숙소부터 확인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오, 진짜 좋다. 강동관 합숙소보다 나은데?”
파란 색 도복차림의 건장한 남자가 복도에서 웃고 있었다. 아까 주유라는 신선을 불러대던 그 남자였다.
여기서는 드림배틀을 치르는 게 불가능하다고 했다. 조조는 그에게 다가갔다.
“아, 그쪽도 군주?”
그도 조조를 발견하고 손을 내밀었다.
“나는 강동관의 호랑이 손책! 당신은 누구지?”
“....조조다.”
유비를 마주했을 때와 비슷하게 불길한 기분이 되어서 조조가 대답했다.
“아, 그래! 뜨거운 승부를 하자고!”
손책이 하하 웃었다. 조조는 일주일 동안 이 군주와 최대한 먼 방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쪽은 벌써 신선 둘을 다 정한 건가?”
손책이 사마의와 순욱을 보더니 자기 곁에 있는 신선의 어깨를 턱 짚었다.
“그쪽들도 우리 주유와 뜨거운 승부를 가릴 수 있겠군!”
사마의와 순욱 역시 이 군주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기색이 되었다.
“우린 다시 나가서 다른 신선들을 만나볼 셈이다.”
사마의와 순욱에게 인류에 대한 이상한 편견을 심어줄 것 같아 무서워진 조조는 재빨리 손책과 작별했다.


한참 돌아다니던 유비는 문득 전혀 지치지도 않고 배고프거나 목마르지도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폰을 꺼내 시계를 보니 선계 들어오기 전에 확인한 시간 거의 그대로였다.
“선계는 인간계와 시간의 흐름이 달라요.”
서서가 설명해 주었다.
“지금은 인간계의 시계는 맞지 않을 거예요.”
“그럼 먹을 때랑 잠잘 때는 어떻게 해?”
“여기선 인간도 뭐 먹을 필요가 없어요. 잠은 자야 하지만요.”
서서가 기억을 더듬느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신선은 정말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지만 인간은 선계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정도까지는 안 되는 거랬어요. 인간의 신체리듬을 맞추기 위해 잠은 숙소에서 자야 해요. 시간 맞춰서 하늘도 어두워질 거고요.”
유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은 보이지 않는데 정말로 오후가 된 것처럼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신기하다.”
“숙소는 이쪽이에요.”
“그래, 가보자.”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신선들도 각자 군주들을 둘러싼 채 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대충 인사는 다 나누었으니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고르기 시작한 것 같았다.
가는 동안 유비와 서서도 다른 신선들에게 말을 건네 보았다. 그러나 대개는 예의바르게 대답만 하고 그 이상 대화를 이어가려 하지 않았다.
“이제 첫날이라 그런가.”
유비가 중얼거리자 서서가 어깨를 움츠렸다. 첫날이라 신중해지는 거라면 다른 군주에게도 비슷하게 거리를 두어야 할 것이다. 신선들은 유비와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어, 손책.”
군주들 틈에서 아는 얼굴을 발견하고 유비가 그리로 다가갔다.
“유비구나.”
손책도 유비를 보고 마주 다가왔다.
“공손찬이 떠났다는 얘기는 상향이한테 들었어.”
손책도 유비 앞에서는 조금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잘 지내다 돌아왔으면 좋겠다.”
“나도 그래.”
유비도 언제까지고 그 일로 손책을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내가 공손찬 몫까지 열심히 싸우기로 했으니까, 우리 좋은 승부를 내자.”
“그래.”
둘은 굳게 악수를 나누었다.

진심 1 ㅣ- 기타

Characters: 빌로스. 케일. 최한. 비크로스
Rating: PG-15
Warnings: 없음
Summary: 아무도 해치지 않는 망나니짓을 하기위해 케일이 난봉질에 손댔다가 최한이 빡침.





“운 좋게 순진한 호구 하나 잡아서 팔자 편 주제에, 그게 네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안내된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폭언에 케일이 눈살을 찌푸렸다.
“빌로스?”
“케, 케일 공자님?”
빌로스가 당황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와 같이 있던 사람도 케일을 보고는 깜짝 놀라 물러났다.
“어. 흠, 난 이만 가도록 하지.”
그 사람이 도망치듯 사무실을 나서며 케일에게 허리를 깊이 숙여 절했다. 어쩐지 기분이 나빠져서 케일이 문을 탁 닫았다.
“아니 기별도 없이 웬일이십니까?”
답지않게 빌로스가 허둥거렸다. 케일이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라크의 옛 마을 문제로 의논할 게 조금 있어서.... 그냥 지나가다 잠깐 들렀는데, 방해 했나?”
“아닙니다. 공자님께서 방해라니요. 언제 오셔도 대환영입니다.”
빌로스가 굽실댔다. 그건 당연했다, 케일이 그에게 벌어다 준 돈을 생각하면.
그렇지만 지금 태도는 뭔가 달랐다.
“저자는 누구야?”
케일은 일단 말을 던져보았다.
“본가의 행수 중 한 명인데... 제가 요새 잘 나가니까 배가 아픈가봅니다.”
“뭐 그런 사람도 있겠지.”
여상히 대답하고 케일이 빌로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계속 보고 있자 계속 안절부절 못하던 빌로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방금 말은 저놈이 멋대로 아무 소리나 지껄인 겁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절대로 공자님을 호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응?”
예상과는 아주 다른 변명에 케일이 눈을 치켜떴다. 빌로스는 그 표정을 오해했다.
“제가 케일 공자님 덕에 많은 돈을 벌긴 했습니다만 다 공자님이 허락하신 한도 내에서 한 겁니다. 수수료를 갈취하거나 공자님 몫 배분을 속인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워낙 금액이 커서 모르는 놈들이 오해하는 것 뿐, 저는 절대 공자님의 선량함을 이용하려고 든 적도 없고, 그 정도 바보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케일은 빌로스가 자기에게 사기를 쳤을 까봐 이러는 게 아니었다.
“저 사람이 말한 ‘순진한 호구’ 라는 거..... 내 소리야?”
이번엔 빌로스가 눈을 크게 떴다. 케일이 아까 오간 말의 의미를 전혀 못 알아들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그는 쓸데없는 변명을 해버린 걸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대체 내가 왜 호구야? 심지어 순진? 나 같은 망나니를 두고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데.”
케일이 투덜거렸다.
“지분을 좀 주긴 했지만, 오래 같이 일할 사람한테 그 정도 투자는 하는 거지. 그놈은 상인이 되어가지고 상도덕도 없나.”
빌로스는 눈을 깜빡였다. 케일의 말 중에 이해 안 가는 게 하나 있었다.
“네...? 망나니요?”
“응. 나 술 마시고 술병 던지고 기물 부수는 걸로 유명하던 망나니잖아.”
빌로스는 케일이 농담을 하는 건지 의심했다.
“그야, 예전에 그런 일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정도 가지고 우리 은빛 공자님을 망나니라고 할 수는 없지요. 어린 시절 잠시 방황했던 일을 가지고.”
“....그걸론 망나니 아니야?”
케일이 충격 받은 표정을 했다.
“그럼 뭘 해야 망나니인데?”
빌로스는 케일이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다. 자기에겐 망나니짓 십 년 했으면 그만둘 때도 되었다고, 발톱을 숨기고 있던 매가 날아오를 때가 되었다고 선언했던 케일이 진심으로 자기를 망나니라 여기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케일 공자님은 웬만한 짓 해선 망나니 소리 안 나올걸요. 뭐 대다수 사람들은 아직 공자님의 진명목을 모르긴 하지만 그래도 해 오신 일이 얼맙니까. 정보에 밝은 사람이라면 일부라도 알 테고, 명성이 흐려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말에 케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빌로스.”
“네, 공자님.”
“그 명성이 흐려질 정도의 망나니짓이 뭐가 있을까?”
“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케일이 진지해보였으므로 빌로스도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음, 다른 귀족에게 괜한 시비를 걸어 두들겨 팬다거나.”
“사람 다치는 건 말고.”
순식간에 선택지 대부분이 사라져 버렸다.
“.....술 마시고 대낮에 길가에서 부녀자를 희롱하거나.”
“성범죄도 말고.”
“........도박판에서 허랑방탕하게 돈을 탕진하신다거나?”
“난 도박은 안 하는 성미야.”
자기 보기에는 도박이나 다름없는 짓 이미 많이 하셨다고 말하려다, 빌로스는 케일이 단 한 번도 손해를 본 적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100% 따는 도박은 없다. 남들이 보기엔 아무리 가능성이 아슬아슬해보여도, 케일은 도박에 나섰던 적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망나니가 될 마음이 있긴 하세요?”
“술 마시고 술병 던졌잖아? 예전엔 그걸로 망나니 소리 많이 들었는데.”
“사람 맞힌 것도 아니고 부순 건 영주님이 물어주셨는걸요. 게다가 자기 영지 내에서. 귀족한텐 그 정도론 누가 뭐라고 안 해요. 영지민 상대로 더한 짓 하면서 멀쩡하게 귀족 행세 잘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케일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런 놈들도 좀 손봐줘야 하나.. 아니 그런 거 일일이 하고 다닐 시간은 없는데.”
심각하게 고민하는 케일을 보며 빌로스가 혀를 찼다.
“왜 망나니 흉내를 내셔야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포기하시죠. 사람은 태어난 대로 사는 겁니다. 나쁜 짓은 하기 싫어하는 망나니가 세상 어디 있어요?”
“아니 나쁜 짓 하기 싫어하는 건 아닌데....”
케일이 관자놀이를 눌렀다.
“정말 방법 없어? 범죄는 아니지만 사람들 눈살 찌푸리는 그런 짓이 있긴 있을 거 아냐?”
“난봉질 이라든가가 남아 있긴 있네요.”
빌로스가 말했다. 케일이 싫은 기색을 했다.
“그런 건 사람 만나야 하고 시간 걸리잖아. 남의 마음 갖고 노는 것도 싫고.”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죄다 싫어하면서 뭔놈의 망나니냐고 빌로스는 되묻고 싶었다. 저런 정의로운 마음가짐으로 할 수 있는 망나니짓이라면 차라리 영지민에게 행패 부리는 귀족에게 행패 부리기를 권하고 싶었지만 그건 백이면 백 케일의 인기와 명성을 높여줄 것이다.
“상대방도 진심이 아니면 되겠네요, 그럼.”
그가 단 하나 남은 탈출구를 찾아주었다.
“악행은 아니니까 신경 안 쓰는 사람도 있겠지만 문란하다고 소문나면 인기는 확실히 떨어지겠죠. 공자님 조건에 맞는 방법은 이게 유일할 것 같네요.”
“음.....”
케일이 신음을 삼켰다.
“정말 그 방법 밖에 없어?”
“공자님이라면 뭔가 기상천외한 발상을 하실지 모르지만 제가 아는 한도에선 없습니다.”
“그래, 그럼 그런 식의 클럽... 파티 초대장 좀 구해줘.”
“네?”
빌로스가 놀랐다.
“정말 하시게요?”
“그래.”
“정말요?”
“내가 빈말하는 거 봤어?”
빌로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도.....”
“그래도 뭐?”
“아뇨, 구해드리겠습니다.”
난봉질이라니 케일도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 후 잊히기 위해선 미리 자기 인기와 이미지를 좀 억눌러둘 필요가 있었다. 이전 영웅의 이면에 실망한 사람들이 그만큼 새 영웅들을 열렬히 환영해주면 그게 제일 좋고.
‘원래 스캔들은 쉽게 퍼지니까 그런 목적의 장소에 있는 것 만으로 나쁜 소문은 나겠지. 꼭 실제로 난잡하게 놀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래도 이게 제일 쉬울 거야.’


그래서 다음날 저녁 케일은 예정에 없던 밤외출을 하게 되었다.
평균 9세들은 집에 남겨놓았다. 라온이 없는 게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장소가 장소였다. 정말 난잡한 짓을 할 생각이 없다 해도 애들을 그런데 데려갈 수는 없었다. 애들 교육에 나쁠 뿐 아니라 정서 발달에도 안 좋았다.
그래서 케일은 이미 정서 발달을 걱정할 의미가 없는 비크로스 한 명만 데리고 밤길을 나섰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최한과 마주쳤다.
“이 밤중에 호위도 없이 어딜 가시는 겁니까?”
케일 뒤에서 비크로스가 저 놈은 나 안 보이는 건가 투덜댔으나 최한은 그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놀러 나가는데 애들이 따라가면 방해되어 그래.”
케일이 조용히 말했다.
“놀러가신다고요? 뭘 하시러 가는 데요?”
“어른들의 놀이.”
최한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니 너도 돌아가서.”
“저, 보기에는 이래도 열일곱 살은 아닙니다.”
최한이 케일의 말을 끊었다.
“따라가겠습니다.”
“....그래, 그럼.”
뭐라 말릴 말도 없어서 케일은 동행을 허락했다. 어둠의 숲에서 홀로 보낸 시간은 인간을 성장시키는 나이로 환산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최한을 그대로 열 일곱 취급할 수도 없었으므로.
‘그래도 이런 덴 따라오게 하고 싶지 않은데.’
가서 자기가 할 짓을 생각하니 입맛이 썼다.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31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선계로 돌아온 서서는 언제나처럼 제갈량을 찾아가려 했다. 그러나 오늘은 제갈량이 선계 입구 근처까지 나와있었다.
“웬일이야?”
원래도 자기가 놀러가자고 조르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성미인 데다, 레인보우 이벤트가 다가오면서 선계의 공기도 한껏 흉흉해졌다. 아무리 제갈량이 최강이라지만 그런 그를 질시하는 신선들 모두의 적의를 감당하며 돌아다니는 것도 못할 노릇이었다. 서서조차도 요즘은 굳이 끌어내지 않던 차였다.
“나도 가끔은 내 발로 돌아다닐 줄 알아.”
제갈량은 기분이 나빠 보였다. 언제나 불행하고 침울하면서 안 그런 척 하고 다닌다는 것을 서서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오늘은 그 안 그런 척까지 그만둔 것 같았다.
같이 선계 안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언제나 화기애애한 친구였던 두 신선 모두 조용하기만 했다.
“그 유비란 군주가 정말 우승할 수 있다고 생각해?”
언제나 자신 앞에서는 부드럽게 말을 돌려 하던 제갈량이 오늘은 직설적으로 던졌다. 서서도 오늘은 솔직해지기로 했다.
“우승할 수 있어.”
부채를 까닥이던 제갈량의 손이 멎었다.
“진심이야?”
“진심이야.”
서서가 단언했다.
“유비님은 영웅패들도 강한 애들로 모았고, 꿈도 누구보다도 크고 훌륭해. 그런 분이 승리하는 게 드림배틀의 취지에도 맞아.”
“형편없고 이기적인 인간이 승리해서 이후 3백년이 엉망진창이 된 경우도 많이 있어.”
제갈량이 냉담하게 대꾸했다.
“선하고 훌륭한 인간이라고 승리가 보장되지는 않아. 게다가 그 인간의 꿈은 옥새의 역량을 넘어서. 전투 실력도 그 강한 영웅패들의 힘을 절반도 끌어내지 못할 수준이고.”
“그건 유비님의 영웅심이 지금 그대로 늘지 않았을 때 얘기지. 영웅패들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지시면 문제 없어.”
서서가 제갈량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었다. 하지만 자신과 함께 유비님의 신선이 되어달라는 부탁은 군주를 섬기지 않겠다는 그의 일생을 건 결심을 꺾어달라는 말이었다.
제갈량이 자신 때문에 그의 신념을 꺾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반대로 신념 때문에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제갈량. 레인보우 이벤트 정말 빠질 거야?”
“그래.”
제갈량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끄덕였다.
“이미 명단에서 내 이름을 삭제했고, 잠깐이지만 옥새의 호출을 막을 방화벽도 만들었어.”
그리고 제갈량이 슬쩍 서서의 눈치를 보았다.
“다시 접속해서 네 이름까지 지울 수도 있어. 너만 좋다면.”
“난 유비님께 가고 싶은걸.”
제갈량은 잠시 더 말하지 못하고 걷기만 했다.
정말 하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이제 서서를 설득할 말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유비님이 너 때문에 패배할 수도 있어. 네가 너무 약해서.”
과연 그 말에는 서서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신선들도 최대한 이길 것 같은 군주를 골라. 한 번 정하면 바꿀 수도 없으니까. 그런데 유비보다 강한 군주는 얼마든지 있지. 군주 한 명이 신선을 둘 거느릴 수 있지만, 과연 그리 강하지도 않은 군주를, 너와 협력해서 승자로 만들어야 한다면 기꺼이 유비님께 갈 신선이 있을까?”
냉정하게 현실을 들이밀면서 제갈량은 서서를 똑바로 보지 못했다.
다른 신선들이 서서를 무시하면 그가 가서 처절하게 두들겨 주곤 했는데, 그들이 하던 것과 똑같은 소리를 지금 자신이 하고 있었다.
한참이나 서서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역시 제갈량이 봐도 그런 거지?”
서서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가라앉아 있었다. 울음을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유비님은 나한테 꼭 자기 신선이 되어달라고 했어. 내가 아니면 싫다고.”
‘그건 유비가 그만큼 군주로서 자질이 부족하다는 증거일 뿐이다.’라는 말이 뇌리에 떠올랐으나 제갈량도 도저히 거기까지 말할 순 없었다. 다행히 그 말을 덜 무례하게 가공하기 전에 서서가 말을 이었다.
“누구도 자신을 도구라고 말해선 안 된다고 했어. 나랑 힘을 합쳐서, 같은 팀으로 일하고 싶은 거지 소유물로 부리고 싶은 게 아니라고 했어. 그런 군주하고 함께하고 싶은 신선이 한 명도 없을까?”
이번엔 제갈량이 말문이 막혔다.
신선들 대부분이 도구라는 한심하고 허무한 위치에 의문 갖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긴 하지만 다 그런 건 아닐 수도 있었다. 기왕이면 보다 착한 주군의 아끼는 도구가 되고 싶다 생각할 수도 있었다.
“레인보우 이벤트가 시작되면 난 제일 먼저 유비님을 찾을 거야. 그리고 다른 신선들에게 유비님이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 말해서, 실력 있는 신선이 유비님께 오게 할 거야.”


레인보우 이벤트 기간 동안 선계에서는 며칠의 시간이 흐르지만 인간계에서는 하루밖에 안 지난다고 했다.
유비는 개인사정으로 그날 휴관한다는 문자를 돌리고 안내 표지판도 문 앞에 걸었다. 공손찬이 와서 봐도 흡족해 할 만큼 문단속도 철저히 했다.
조조는 그만큼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경찰은 휴직상태고 하루 정도 자리를 비운다고 연락이 안 돼 곤란할 사람도 이젠 없었다.
왕윤 선배님 돌아가시고 사모님이 이사하신 후론 이전처럼 허물없이 찾아갈 수가 없었다. 이따금 안부 전화를 하거나, 그 근처에 악한 군주가 나타나지 않나 순찰하는 정도가 다였다.
동작빌딩 펜트하우스를 평소와 똑같이 카드키로 잠그고 사마의가 준 지도에 의지해 길을 꺼났다.
손책도 특별히 준비한 건 없었다. 일찍 일어나 아침 운동으로 몸을 풀고, 아침을 먹은 뒤 저녁 먹고 돌아온다는 말만 남기고 집을 나섰다.
셋 다 선계로 안내받았지만 입구는 제각기 달랐다. 이벤트 직전에 군주들끼리 다투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은 열쇠로 선계의 문을 열고 들어가 옥새와 마주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레인보우 이벤트에 대해 설명은 들었겠지?
옥새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신선이 유비를 보고 웃으며 말을 건넸다.
“예!”
유비가 기합을 넣어 힘차게 대답했다.
-이제부터 일주일 간, 선계의 한 구간을 격리해 신선들과 군주들이 함께 지내게 한다. 군주 한 명당 신선을 둘까지 선택할 수 있다.
“예!”
서서 외의 다른 신선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계속 힘차게 답했다.
-원만한 합의를 위해 그 공간 안에서는 싸움이 금지된다. 영웅패들도 데려갈 수는 있지만 그 안에선 군신일체를 할 수 없다.
옥새 속 신선이 한쪽을 가리키자 아무 것도 없던 허공에 파문이 일었다. 선계에 들어올 때 통과했던 것과 거의 똑같은 문이었다.
-그럼 건투를 빈다. 신선을 얻지 못해도 드림배틀에서 탈락하는 건 아니니 안심하고 들어가라.
“예! 그럼 서서와 함께 다시 뵙겠습니다!”
유비는 그 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수면을 살짝 통과하는 듯한 감각도, 그 다음에 펼쳐진 광경도 선계에 처음 들어왔을 때와 거의 똑같았다.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다운 숲이 끝간 데 없이 펼쳐져 있고 길도 나 있지 않았다. 햇빛은 밝고 따뜻한데 눈부시지 않았다.
“우와......”
유비는 사방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신선들은 이런 데서 사는구나.”
“그런데 언제까지 여기 서 있을 겁니까?”
관우가 고개를 내밀었다.
“신선들을 만나려면 찾으러 다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 그렇지. 서서!”
유비가 손나팔을 만들어 입에 대고 외쳤다.
“서서! 나 왔어!”
얼른 답이 돌아오지 않자 앞으로 무작정 걸어나가며 계속 외쳤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눈앞에 한 남자 신선이 나타났다.
“군주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훤칠한 키에 서서와 비슷한 흰 옷차림인 그는 유비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신선 노숙입니다. 서서를 찾으시는 겁니까?”
“응!”
유비가 힘차게 끄덕였다.
“신선들은 저쪽 공터에 모여있다가 지금 흩어지는 중이니 가다 보면 찾을 수 있을 겁니다만......”
그가 유비가 가던 방향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 했다.
“정말 서서를 만나고 싶습니까? 그보다 뛰어난 신선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상관없어, 난 서서의 주군이 되기로 약속했거든!”
유비가 힘차게 대답했다.
“......뭐, 여러 신선들을 만나고 천천히 결정하시면 되겠죠. 저도 군주들을 일단 많이 만나볼 생각이니까요.”
그가 다시 정중히 인사하고 다른 쪽으로 가버렸다.
“저 신선은 얼마나 강하려나?”
장비가 중얼거렸다.
유비는 대답하는 대신 가던 길을 계속 열심히 걸어갔다. 계속 서서를 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유비 말고도 신선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주유!”
손책의 목소리였다. 그의 우렁찬 목소리가 유비와 경쟁하듯 울려퍼졌다.


“거 시끄럽네.”
움직이던 신선들 중 몇이 투덜거렸다.
“주유는 어디 있지?”
“몰라. 저 군주 찾으러 갔나보지.”
각 군주들의 영웅패들과 능력은 이미 옥새에서 다운로드되었다. 어느 군주가 더 강하고 약한지, 숨겨진 약점은 없는지 신선들도 다 알고 있었다.
옥새에서 직접 받을 수 있는 마지막 정보였다.
이제는 신선들도 참가자이고, 자기 주군 이외의 군주들에 대해선 싸워보기 전까진 알 수 없게 될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 최대한 강한 군주를 만나야 했다.
불평은 그만두고 다들 팔찌를 작동시켜 군주를 찾았다. 군주들의 위치와 간단한 스테이터스가 표시되었다.
그러나 강한 군주를 찾아 흩어지면서도 신선들은 이제 한 가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주유는 강한 신선이니 그렇다 치고, 서서 같은 신선을 일부러 찾는 저 군주는 대체 누구지?’


“손책님.”
“주유!”
마침내 주유와 만나자 손책은 환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주유의 표정은 차가웠다.
“시작하자마자 저부터 찾으면 어떡해요?”
“그게 왜?”
손책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고 주유가 더욱 짜증을 냈다.
“신선을 저 하나만 들일 작정이에요? 다른 신선들도 만나보고, 잘 골라봐야죠.”
“하지만 주유가 최강의 신선이라면서.”
손책이 되물었다.
“그럼 주유를 들이는 게 더 중요한 거잖아?”
“그야......”
어물거리던 주유가 헛기침을 하며 떠오르는 웃음을 감췄다.
“좋아요. 아무튼 이렇게 만났으니 다른 신선들 찾으러 가요. 하지만 그들이 저 때문에 손책님 밑에 들어오길 꺼리게 된다고 해도 전 몰라요.”
“괜찮아! 주유가 있잖아!”
여전히 호쾌하기만 한 태도로 손책이 씩씩하게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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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을 둘 들일 수 있다고 설정한 것은 그냥 신선 캐릭터를 늘려보고 싶어서입니다.
조조-순욱 관계나 주유-노숙-제갈량 관계나 방통-제갈량 관계도 한 번 어레인지 해보고 싶다고요.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30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그래?”
유비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어디로?”
공손찬은 컴퓨터 화면을 가리켰다. 무예가들 사이에 이름난 사적지의 공식 홈페이지였다.
좋긴 한데 너무 멀지 않으냐는 질문을 하기도 전에 공손찬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새로 뜬 인터넷 창은 보다 대중적인 유명 관광지였다. 그 다음으로 호텔, 바닷가 등이 빠르게 겹쳐졌다.
“일단 여기랑 여기를 예약했고, 여기는 지나가다 여유가 되면 들를 거야.”
그게 설명 끝이라고 눈치채는 데는 약간 시간이 필요했다.
공손찬은 여행이든 놀이든 항상 미리부터 계획을 철저히 세우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가 봐서 사정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한 적은 이제까지 없었다.
“한 달 정도 걸릴 거야.”
“뭐?”
유비가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질렀으나 공손찬은 태연했다.
“경비는 용돈 저축해둔 게 있어. 학비를 모을 수 있을까 해서 안 쓰고 모아둔 건데, 여행 경비만큼은 되더라고.”
“하, 학비로 쓰려던 돈인데 그래도 돼?”
“계산해봤어. 지금대로 일 년 모으면 정말로 적벽대학 갈 수 있을지.”
공손찬의 목소리가 메말라졌다.
“우연히 보석반지 주워서 포상금 타는 일이 매달 일어나면 모를까 택도 없더라.”
“보석반지?”
“응. 그 동탁인가 하는 조폭 두목이 공원에서 소동냈을 때 말이야.”
유비는 말을 잇지 못했다. 공손찬이 동탁을 이상한 조폭 두목으로만 기억하고 있는 것도, 대학에 가고 싶어 남몰래 저금까지 하고 있었던 것도, 그걸 털어 여행을 가겠다는 것도 하나같이 그를 참담하게 만들었다.
“아무튼.”
유비의 표정을 보고 공손찬이 일어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난 스승님과 다르게 연락도 할 거고, 한 달 있으면 돌아올 테니까 걱정 마.”
‘도원관은?’이라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올 대답이 두려웠다.
공손찬의 입으로 ‘네가 알아서 해.’나 ‘도원관이 어찌되든 나랑은 상관없어.’라고 직접 듣게 될 것이 두려웠다.


공손찬은 다음날 캐리어 하나와 배낭 하나만 가지고 도원관을 떠났다.
유비는 ‘잘 다녀와.’라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나 공손찬은 신경쓰지 않았다. 성큼성큼 멀어지는 뒷모습은 콧노래라도 들려올 것처럼 가벼워 보였다.
그리고 유비 혼자 도원관에 남았다.
저녁때가 되자 밥을 두 공기 떴다. 한 공기를 얼른 관우 장비 조운 몫으로 나누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이 남았다.
다 먹은 뒤엔 내일 먹을 쌀을 씻어 안쳐놔야 하는데, 자신과 영웅패들 몫까지만 씻어놔야 했다.
‘아니, 서서도 올지도 몰라.’
그런 생각에 공손찬 있을 때만큼 쌀을 떴다. 그러나 순간 뇌리에 ‘요즘 쌀값이 얼만데 그래.’하는 공손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유비는 쌀을 도로 쌀독에 주르륵 쏟아버렸다.
‘진작 말 잘 듣는 건데. 말썽부리지 않고 알바도 더 열심히 뛰는 건데.’
자신이 멍청했다. 형도 사라졌고 스승님도 사라졌는데 공손찬이 떠날 줄을 몰랐다. 언제까지나 자신 곁에 있을 줄 알았다.
“주군.”
관우가 유비의 어깨에 뛰어올랐다.
“공손찬 님은 괜찮을 겁니다. 주군 혼자서도 도원관을 잘 다스리시며 기다리면 됩니다.”
“기다린다고?”
유비가 되물었다.
“예.”
장비도 반대쪽 어깨에 올라왔다.
“마음 추스르고, 새 꿈 찾아서 건강히 돌아오실 거요.”
“맞아요.”
조운까지 거들었다.
“공손찬 님은 유비님이 싫어져서 떠난 게 아니에요. 그분이 돌아왔을 때 유비님이 웃는 얼굴로 맞아주셔야죠.”
“정말?”
유비가 그만 눈물을 글썽였다.
자기가 철없는 어린애라서, 말썽피워서 떠나간 게 아니라고 공손찬의 영웅패였던 조운이 말해주었다. 유비는 참지 못하고 엉엉 울었다. 영웅패들이 깜짝 놀라 달래려고 했으나 들리지도 않았다.
“유비님! ......어라?”
주황빛 섬광과 함께 서서가 나타난 건 그때였다. 공간을 이동해서 처음 본 광경이 유비는 엉엉 울고 영웅패 셋이 달래주려 애쓰는 중인 걸 보고 당황했다.
“유비님? 괜찮으세요?”
“서서.”
유비가 허겁지겁 눈물을 닦았다.
“아무 일도 아냐. 오늘은 좀 늦게 왔네? 밥은 먹었어?”
“괜찮아요. 오늘은 놀러온 게 아니라 중요한 일이 있어서 알려드리러 왔어요.”
서서가 엄숙한 표정을 하고 유비에게 작은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레인보우 이벤트가 곧 시작됩니다. 준비해주세요.”
“레인보우 이벤트?”
“드림배틀 초반이 끝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는 뜻이에요.”
서서가 손짓하는 대로 두루마리를 풀어보았다. 그러자 종이 위에서 빛줄기가 솟아올라 은 열쇠로 변했다. 두루마리엔 지도와 안내문이 적혀있었다.
“둘 이상의 영웅패를 가진 군주는 이벤트를 통해 신선도 가질 수 있어요!”
“갖는다고?”
“예. 이제까지는 신선이 배틀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감독이나 관찰자에 가까웠지만, 레인보우 이벤트를 통해 주군을 정하고 나면 영웅패와 마찬가지로 각 군주의 소유물이 되는 거예요.”
서서는 전에도 자주 그랬듯 짜잔~ 하고 웃어보였다. 그러나 유비는 웃지 않았다.
“난 관우 장비, 조운도 소유물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 찬이도 그랬을 거야.”
서서가 당황한 얼굴로 유비를 빤히 바라보았다.
“배틀도 얘들하고 협력해서 함께 치르는 거잖아? 장로도 지게 되니까 우길을 생각했어. 인격이 있고 감정이 있는데 어떻게 물건 취급을 해?”
“그치만, 신선과 영웅패는 다 그런 용도로 만들어지는데요?”
“그런 말 하지 마!”
버럭 소리질렀다가, 서서가 깜짝 놀라는 걸 보고 억지로 진정했다. 이건 서서가 스스로 생각해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것도 옥새에서 정한 거야? 배틀의 다른 규칙처럼?”
“예.”
처음 하진 상대로 이겼을 때부터 수시로 드는 생각이지만 드림배틀이라는 거 정말 이상한 규칙이 많았다. 지고 탈락하는 군주들뿐 아니라 영웅패들에, 신선까지......
“그럼, 신선은 군주가 탈락하면 어떻게 돼?”
퍼뜩 생각난 것을 물었다.
“영웅패들처럼 되는 거야?”
“비슷해요.”
서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신선은 다른 군주를 새로 고르지 못하고 무조건 그 자리에서 소멸해요. 신선의 데이터는 영웅패보다 방대하면서도 불안정해서 그렇대요.”
유비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리고......”
서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이건 옥새에서 내려온 이야기는 아니고 제 친구의 추측인데, 영웅패보다 운신이 자유롭고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신선이 주군을 바꿀 수 있으면 군주를 배신하기가 너무 쉬워지니까, 그래서 금지한 것일 수도 있대요.”
“그렇다고 해서......”
유비는 뻐끔거리며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인지 제대로 된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서서.”
보다못한 관우가 한 마디 했다.
“지금 안 그래도 주군이 공손찬 님의 탈락 때문에 혼란에 빠져 계시니 당장 꼭 필요한 이야기만 전해드리고 말을 아끼는 게 좋겠네.”
“그래.”
서서도 유비의 상태를 보고 수긍했다.
공손찬의 탈락은 그도 슬프게 했다. 유비님께 진작 와서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주유가 관여한 걸 보고 어떻게 된 일인가 알아보는 사이 공손찬이 먼저 떠나버렸다.
제갈량도 가만히 있으라고 말렸다. 공손찬은 배틀에서 졌을 뿐이고 신선이 위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이 일로 주유에게 싸움 걸어봐야 똑같이 주군을 정하기도 전에 월권하는 신선이 될 뿐이라면서.
공손찬의 탈락 때문에 유비가 받았을 충격도, 승자가 되려면 그가 스스로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유비가 승자가 되려면 그만큼 강해져야 한다는 말에 넘어가 보고만 있었던 게 실수였다. 자신도 주유가 손책을 위해 나섰듯 노력했어야 했다.
“미안해, 서서.”
유비가 정신을 차리고 두루마리를 제대로 펴들었다.
“내가 지금 정신이 없어가지고. 그러니까 이건, 신선이 영웅패처럼 군주와 한 집에서 살게 된다는 거지?”
“예. 전투도 돕게 되고요.”
서서가 끄덕이고 안내문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설명했다.
“신선들은 배틀에서 마법을 쓰며 같이 싸워주고, 전술적인 판단도 내리고 영웅패와 레전드 머신도 정비해줘요. 유비님은 우수한 영웅패만 써보셨으니 실감이 안 나겠지만 영웅패가 불안정해지거나 군주와 충돌할 수도 있거든요.”
“그래?”
“예. 레전드 머신도 파손이 심하면 영웅패 스스로 수복하는 건 어렵고요. 그런 걸 다 신선이 해주는 거예요.”
“우와, 신선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구나.”
“예. 신선 없이 최종 배틀에서 승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요. 그런 선례도 없고요.”
유비는 안내문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당연하게도 신선을 얻으려면 테스트를 통과해야 했다. 열쇠를 가지고 지도에 나온 곳을 찾아가면 선계로 건너가 테스트에 참여할 수 있었다.
“좋아, 꼭 통과해서......”
‘서서를 쟁취할게.’라고 말하자니 자신이 아까 한 말에 어긋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르게 표현하려고 애써 봐야 결국 그 얘기였다.
머뭇거리던 유비는 서서의 표정이 심각해진 것을 발견했다.
“저......혹시, 다른 신선이 더 낫다고 생각하세요?”
서서가 어깨를 움츠리고 두 손을 조물거렸다.
“실은 저 선계에서 제일 약한 신선이거든요. 다들 저는 군주 밑에 들어가봐야 도움은 안 되고 방해만 될 거라고......”
“아냐!”
유비가 황급히 서서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잡아 감쌌다.
“서서가 어째서 방해야, 난 서서가 내 신선이었으면 좋겠어!”
“정말요?”
“그래. 서서 말고 누가 내 신선이 될 수 있겠어? 난 서서랑 같이가 아니면 드림배틀 더 안 할 거야!”
“예?”
너무 극단적으로 말했나 조금 후회가 되었다. 그러나 그 후회는 서서의 얼굴이 점차 환해지는 것에 반비례해 줄어들다 사라져 버렸다.
‘그래, 서서가 도구 같은 취급을 안 받으려면 내가 그렇게 취급 안 하면 되잖아!’
그러니 자신은 더욱 서서의 군주가 되어야 했다. 자칫 서서가 자기의 신선이 되는 대신 동탁처럼 나쁜 군주의 신선이 된다면, 그때야말로 약하다고 학대받을 수도 있었다. 보육원 살 때 상처투성이에 겁먹은 얼굴로 들어오던 아이들을 떠올리고 유비는 소름이 쭉 끼쳤다.
“제발 내 신선이 되어줘! 내가 정말 잘할게!”
두려움을 떨치려고 더욱 힘차게 외쳤다.
“서서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필요도 없게 내가 전부 무찔러 줄게! 약해도 괜찮아! 제발 나한테 와!”
“유비님, 진정하세요.”
서서가 잡힌 손을 흔들었다.
“저도 유비님이 좋은걸요. 같이 힘내서 꼭 끝까지 승리하자고요!”
“그래, 우리 함께 화이팅!”
“화이팅!”

오해 4 (완) ㅣ- 기타


문이 열리자 제일 먼저 라온이 달려들었다. 케일이 그를 끌어안고 토닥토닥하는 동안 온과 홍이 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왔다.
“아무 일도 없었어. 마주앉은 채 서로 점잖게 이야기만 했어. 때리긴 커녕 손도 안 댔어.”
케일이 서둘러 말했다.
“그래도 걱정했다!”
-걱정했는데!
-왜 안 나오나 조마조마했는데!
엉겨붙는 평균 8세들이 무거워서 좀 휘청일 것 같았다. 케일은 우선 라온을 공중에 띄우고 온과 홍도 어께에 안정적으로 걸쳤다.
“대화는 잘 끝났습니다.”
케일이 모인 사람들에게 선언했다.
“이 최한은 우리랑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평행세계에서 사고로 잠시 건너온 사람이고 얼마 뒤 돌아갈 겁니다. 그때까지 우리와 함께 지낼테니 싸우지 말고 손님으로 대우해주세요.”
“평행 세계? 그런 게 정말 있다고?”
에르하벤이 물었다.
“저도 믿기 어렵지만 이렇게 증거가 있으니까요.”
케일이 원작 최한을 가리켰다.
“저자는 왜 다짜고짜 케일님을 공격했던 겁니까?”
최한이 물었다.
“그쪽의 케일 헤니투스가 악당이라서.”
말하고 나서 케일은 만약 태양이 갑자기 꺼진다면 자기 일행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미리 알 수 있게 되었다.
“그게 그렇게 놀.....”
“납득할 수 없습니다!”
최한이 전에 없이 강하게 주장했다.
“케일님이 악당이라니, 그런 세계가 세상에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야 이 세상이 아니고...”
“최한 말이 맞다!”
라온도 맞장구쳤다.
“너는 착한 사람이다. 사람들도 많이 구하고 애들도 잘 돌보고 아주 좋은 사람이다. 왕세자랑 있을 때 이상하게 웃긴 해도 나쁜 짓은 안 하는 사람이다!”
“왕세자와 이상하게 웃는다고?”
원작 최한이 묘한 표정으로 케일을 보았다. 케일은 신음하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 맞다. 왕세자 이야기도 했어야 하는데.... 너 가기 전에 나랑 대화 한 번만 더 하자. 피와 살이 될 이야기니까 싫어도 들어.”
“그러지.”
생각 외로 원작 최한은 쉽게 대답했다.
“케일님.”
최한은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가게 놔두지 않았다.
“저쪽세계의 케일님이 저놈과 무슨 일이 있었든 오해가 분명합니다.”
“그런 거 아냐. 론은 알지. 나 재작년까지만 해도 내놓은 망나니였던 거?”
론이 인자하게 웃었다.
“필요할 때 까지 발톱을 숨기고 있으셨던 거지요.”
‘아니, 왜.’
최한이 한 말이었다면 그러려니 했을텐데 론이 저리 말하니 좀 소름이 끼쳤다.
“....그쪽의 난 망나니짓 안 때려치우고 계속 했다는 거지. 그야 오해도 있긴 있었지만.”
“결국 오해였군요.”
그거 아니지만 케일은 이제 냅두기로 했다. 그렇게 믿어서 최한이 마음이 편하다면 굳이 그 평화를 깰 필요까지는 없었다. 케일이 암과 닿아있다고 오해하지만 않았어도 최한도 그렇게까지 패지는 않았을 거고.
“아, 그런데 너 왜 내가 암과 손잡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거야?”
케일이 원작 최한에게 물었다.
“그쪽에 고대의 힘을 모으는 자가 있다고 들었다. 이런 힘을 하나도 아니고 여럿 갖고 있는 건 자연스럽게 일어날 일은 아니니까, 그런 조직이 개입했을지 모른다 생각한 거지.”
“암이라면 케일 헤니투스보다는 좀 쓸모 있는 인간에게 힘을 모으지 않을까?”
“사정이 있어서 잠시 저장해뒀다가 나중에 옮기려는 것일 수도 있잖아. 네말대로 헤니투스 백작가는 부유하니 뜯어낼 게 있었을지도 모르고.”
“하긴.”
원작의 케일 헤니투스가 그런 식으로 악당들한테 잠깐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말로 참 적합한 인재라는 데에는 케일도 이견이 없었다.
“자, 그럼 이걸로 문제는 다 해결되었어.”
최한이 또 뭐라고 태클을 걸기 전에 케일이 손뼉을 짝 쳤다.
“다들 가서 자기 할 일 하도록. ......최한.”
“네.”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또 하나의 자신을 험악하게 노려보던 최한이 표정을 바로하고 케일에게 주목했다.
“혹 시간나면 저 사람이랑 대련이라든가 해줘.”
당장이라도 ‘제가 왜요?’ 라고 말할 것 같은 최한을 보며 케일이 덧붙였다.
“저 녀석 더 강해지려고 여기 온 거거든. 실력이 늘어야 돌아갈 거야.”
그 말에 최한의 눈빛이 형형히 빛났다. 케일이 움찔 뒤로 물러날 만큼.
“알겠습니다.”
그가 결연히 말했다.
“어디 같이 훈련을 해보지요.”
“어디까지나 훈련이야.”
케일이 강조했다.
“죽거나 다치면 안 되는 거 일지? 양쪽 다 말이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론이 나섰다.
“제가 이 나이에 그 정도도 조절 못하겠습니까.”
“아니....”
론이 여기서 왜 나와? 라고 묻기 전에 비크로스도 라크도 힐스만까지도 나섰다. 모두의 적의를 한 몸에 받으며 최한도 웃었다.
“좋아. 지금부터 시작할까?”


해리스 별장이 반파되는 건 아닐까, 자기는 백작가 본성으로 도망가 있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한 것도 무색하게 다들 정말로 수련장에서만 싸우고 그 밖에서는 비교적 얌전히 지냈다. 이쪽의 최한을 내세워 협공해 반 죽이거나 하지도 않았다. 원작 주인공을 반죽음 시켜도 곤란하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어다.
다만 케일이 짱돌을 찾으러 가는 일정은 늦춰졌다. 다들 다른 최한에게 정신팔려 있는 동안 라온과 에르하벤과 잡일할 사람 하나 정도만 데리고 훌쩍 다녀오고 싶었으나 에르하벤이 최한을 관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천년을 산 용에게도 세계간 이동은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에르하벤에게 케일은 일단 최한이 어떻게 넘어왓는지 하고 그쪽과 이쪽 세계가 다른 점을 김록수와 영웅의 탄상에 대한 것 외에는 전부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케일과 최한이 만난 초기 일은 모르는 에르하벤은 별 의심 없이 그 정도 설명으로 만족했다.
당장 할 일도 없어진 김에 케일은 서재에 들어앉아 지금껏 자기가 지나왔던 여정을 반추했다. 그리고 원작에서 최한의 일행들이 몰랐거나 놓쳤음직한 정보를 정리했다. 이쪽이 진행은 좀 뒤져도 책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참 알차게 돌아다녔기 때문에 알려줄만한 정보는 의외로 많았다. 왕세자와 다크엘프들에 대한 것도 그렇고.
‘이쪽 최한 하는 거 보면 저쪽도 발연기겠지. 괜히 왕세자를 벗겨먹으려고 애쓰기 보다는 그냥 알고있단 사실을 알리고 좀 더 얕보이지 않는 협력관계를 새로 맺는 편이 최선일 거야.’
그 외에도 깨지지 않는 방패와 지배하는 아우라, 짱돌 같이 아직 주인이 없는 고대의 힘을 얻는 법, 인어들이 강해진 이유, 죽은 마나 이용법, 금색 쌍둥이로 제국의 뒤통수를 칠 계획 등 알아둬서 좋을만한 정보는 얼마든지 있었다.
최한에게 주고 외우게 할 생각이므로 그 모든 걸 최대한 알아보기 쉽게 종이 한 장에 정리했다. 원작의 진행을 어그러뜨리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주인공이 이런데 와서 그를 만나는 것도 원작 진행은 아닐게 분명하므로 케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정리한 종이는 접어 안주머니에 넣고 나머지는 전부 벽난로에 태운 뒤 케일은 최한을 찾아 나섰다.
오랜만에 밖에 나와보니 날이 맑았다. 훈련장 쪽으로 가면서 케일은 원작 최한이 이 정보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려나 생각했다.
자기가 소설의 등장인물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도 최한은 꽤 멀쩡해보였다. 자신이 겪었던 그 모든 고난이 그저 주인공에게 시련을 주기 위한 장치였을 뿐이었냐고 날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거기까지 생각을 못 한 건지, 아니면 케일처럼 이제 여기가 자기 세상이라는 걸 받아들인 건지.
케일은 건물 밖으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책 속이든 별도의 판타지 세상이든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불고 전쟁은 곧 일어나고 그걸 수습한 뒤에 그는 여기서 은퇴 백수 생활을 할 것이다.
“뭘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는 거냐.”
원작 최한이 다가왔다. 이쪽의 최한도 서둘러 그를 쫓아왔다.
케일은 종이를 꺼내 최한에게 건넸다.
“뭐야?”
“이쪽에서 알아낸 것 이것저것. 대단한 건 없지만 암과 싸우는 데 도움이 될거야.”
최한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종이를 받아들었다.
“이걸 왜 나한테?”
“그쪽의 암도 암이잖아.”
케일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여기서 난 최한에게 암에 대해 알게 되면 그에게도 알린다는 맹세를 했거든. 다른 사람이긴 해도 너도 최한이니까, 만일에는 대비를 해두고 싶다.”
“뭐 그런 거라면.”
최한이 종이에 써있는 걸 읽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그 종이는 돌아가서 보면 없을지도 몰라. 내용을 외워.”
“그 정도는 나도 생각하고 있어. 내가 바보로 보이냐?”
“어. 이해 안 가는 내용 있으면 억지로 생각하려 들지 말고 로잘린씨한테 그대로 전해.”
원작 최한이 케일을 노려보았다. 케일은 방긋 웃어보였다.
“바보는 저야말로 목표와 완전히 반대되는 짓거리나 하고 다니는 주제에....”
최한이 획 몸을 뒤로 젖혔다. 또 다른 최한의 주먹이 방금까지 그가 있던 공간을 갈랐다.
“케일님은 누구보다도 현명하시다.”
방금 자기는 스치기만 해도 골로 갈 것 같은 공격이 코앞에서 펼쳐진 데 더해 최한이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으므로 케일은 그만 정신이 멍해지고 말았다.
“지금껏 그분이 해 온 일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야말로 헛소리 허지 마라. 케일님은.....”
“최한..”
원작 최한의 앞에서 이쪽 최한으로부터 자기 찬양을 듣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므로 케일은 최한을 말렸다.
“나 그렇게 현명하지도 않고, 실수하거나 판단을 그르쳤던 적도 많아. 그쯤 해둬.”
“어째서 케일님께선.....”
최한은 더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입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있다 그가 다른 세계의 자신을 돌아보았다.
“적어도 케일님께 예의를 갖춰라.”
“예의라.”
딴 세계의 최한이 못마땅한 눈으로 케일을 흘겨보자 케일은 주춤주춤 자기 최한 쪽으로 갔다. 여차하면 뒤에 숨으려고.
“케일님.”
“히익.”
원작 최한이 그렇게 부르자 케일은 소름끼쳐하며 한 걸음 더 물러났다.
“넌 그렇게 부르지 마.”
“하지만.”
항의하려는 자기 최한을 케일이 말렸다.
“날 케일님이라고 부르는 건 너 하나인 게 좋겠어.”
그 말에 최한이 대번에 얌전해졌다. 엷게 볼이 붉어져서 수줍어하는 이 세계의 자신을 한심한 듯 쳐다보다 원작 최한이 케일에게 갔다.
“이제 가봐야겠어.”
“그래... 뭐?”
“대충, 이곳의 내가 어떻게 강해졌는지 알 것 같거든. 내가 그대로 따라할 수는 없겠지만... 수련을 꽤 되었고, 이것도 있고.”
원작 최한이 케일이 준 종이를 흔들었다.
“그러니..... 고맙다, 케일. 네 덕이 컸다.”
그가 케일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꽉 잡았다. 기겁한 최한이 둘은 떼어놓으려 다가가는 동안 원작 최한은 사라지고 케일이 비틀거렸다. 최한은 즉각 케일을 부축해 안았다.
“괜찮으신가요!”
“응, 괜찮아, 잡고 있던 게 갑자기 사라져서 잠시 균형을 못 잡았을 뿐이지 공격당한 것도 기력을 빨린 것도 아니야.”
케일이 최한을 안심시켰다.
“생각보다 쉽게 돌아가네. 걱정했는데 잘됬다.”
“......같이 사라져버리시는줄 알았습니다.”
최한이 침울하게 말했다. 케일이 어리둥절했다.
“응? 내가 왜 사라져?”
“그자가 케일님을 탐낸 나머지 자가 시계로 데려가 버리는 줄 알고.”
“탐.... 그럴 리가 없잔아. 그놈 나 싫어하는 거 봤으면서.”
“그래도 그자도 저니까... 아니 제가 케일님을 납치한다거나 하는 얘기가 아니고요. 물론 전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저자는 나타나자마자 케일님을 두들겨팬 나쁜 놈이니까 혹시 또 해를 끼치려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최한 답지 않은 지리멸렬한 변명에 케일이 피식 웃었다. 그가 최한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난 아무데도 안 가. 여기가 내 세상인걸.”
“네.”
최한이 안도했다.
“어쨌든 불청객은 돌아가 버렸으니 우리 할 일을 하자. 곧 전쟁이 난다는 걸 알았으니 그 전에 할 일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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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원작 최한도 케일에게 홀려서 떠나기 직전 정도 삼각관계를 만들어볼까 했는데 초반에 케일을 작신 패고 나니(...) 더 이상 쓸 의욕이 사라져서 서둘러 끝내버렸습니다. 후후.

교훈. 쓰고 싶은 장면은 되도록 글 후반에 배치해야 한다.








오해 3 ㅣ- 기타


속이 뜨끔했지만 케일은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거짓말 아니야. 뭘로 증명할까. 김치라도 담가줘? 죽음의 맹세라도 할...”
“그럼 너 나한테 뭘 잘못했다고 빈 거냐.”
“그야 네가 갑자기 사람을 때리니까 살고 볼려고 우선 아무 말이나 한 거지.”
“그것뿐? 그것만으로는 검은 용을 폭주에서 구할 수 없어. 단지 돈을 좀 쓴 것만으로 고대의 힘을 그것도 여러 가지나 얻을 수는 없다.”
최한이 고개를 들었다.
“네가 한 말이야 모두 사실이겠지. 죽음의 맹세를 해도 괜찮겠지. 하지만 그게 사실 전부는 아닐텐데?”
최한이 케일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너는, 분명, 이 세계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시작했어.”
“이런.”
케일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래서 눈치 빠른 애들은 싫다니까.”
최한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케일이 손을 내저었다.
“그래, 넌 착하고 순진할 뿐 바보는 아니지. 같은 한국인을 만났다는 충격에 세세한 건 그냥 넘어가길 바랐는데.”
“뭘 숨기고 있는 거냐?”
케일이 최한을 마주보았다. 분명 스무 살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케일 헤니투스인데 저 표정은 피곤한 선생님 같아 보인다고 최한은 생각했다.
“이건.... 너한테도 되도록 말하고 싶지 않은데.”
“뭔데 그러지?”
“사실을 알고 나면 감당할 수 없어질지도 모른다.”
케일은 진지하게 말했지만 최한은 코웃음쳤다.
“이제 와서?”
“...그러네, 이제와서.”
케일의 쓴웃음이 깊어졌다가 사라졌다.
“나는, 너의 이야기를 소설책으로 읽었다.”
최한이 숨을 삼켰다.
“[영웅의 탄생]. 이계 진입 먼치킨물. ...네가 주인공인 이야기.”
최한의 반응을 가늠할 수 없어 케일은 눈을 돌려 그를 외면했다. 한참이나 정적이 흐른 끝에 최한이 숨을 토했다.
“....그랬군.”
“별로 안 놀라네?”
“나도 판소 정도 읽어봤으니까. 갑자기 이계에 떨어져서 소드마스터가 되어 영웅으로 떠받들리다니 소설 같다는 생각 해본 적 있어.”
“그랬냐.”
소설에선 최한의 내면 묘사 같은 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해봤는 줄은 몰랐다.
‘왕세자 때문인가.’
그가 기름칠 해대는 소리를 들으면 현실감이 좀 없어지긴 한다.
“라온... 용은 베니온하고 시비도 붙은 김에 빼돌려서 풀어줬어. 레어 만들러 간다더니 왜 나한테 달라붙었는지는 몰라.”
최한의 침묵을 견디기 힘들어 케일이 먼저 털어놓았다.
“광장 테러 사건때는 분명 너랑 로잘린씨를 내세우려고 했거든? 그런데 폭탄을 하나 놓쳐서 내가 방패를 썼는데 그게 좀, 보기에 인상적이다 보니까 왕세자가 날 지목해서.”
말을 할수록 변명밖에 안 되었다. 케일은 고개를 숙였다.
“네 자리를 빼앗아서 미안하다. 고의는 아니었어.”
“내 자리?”
“주인공.”
지금 이쪽의 최한은 빈말로라도 주인공이라곤 할 수 없었다. 분명 처음에만 해도 적당히 헤어져서 갈길 가게 할 생각이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이번엔 둘 다 침묵했다. 한참만에 최한이 주저하며 물었다.
“해리스 마을은....”
“내가 케일 헤니투스로 눈을 뜬 게 6월 29일이었어.”
그 말에 최한이 움찔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
“......그래.”
최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너, 책을 읽었다면 혹시 그 비밀단체.”
“중간까지밖에 못 읽고 잤어. 내가 아는 건 그 단체 이름은 암이고 동대륙 뒷세계를 꽉 잡고 있고 북3국과 제국과도 손 잡았고 아직도 배후에 뭐가 더 있어 보인다는 정도야.”
“허.”
최한이 허탈한 표정을 했다.
“불굴연합에 제국... 이면 실질적으로 이 전쟁은 암이 일으켰다는 거냐.”
“그래.”
‘저쪽은 이미 전쟁이 일어난 다음인가보군. 뭐 도움 될 만한 거 있나 물어봐도 되려나.’
저 최한이 무섭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미래의 정보를 얻어도 세계가 안전할지 걱정도 되었지만, 조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케일은 머리를 굴렸다.
“제국은 우리 뒤통수 칠 준비를 하고 있는 거고.”
최한이 말했다.
“그래.”
“미치겠네....”
최한이 두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왕세자는 돌겠네더니 얘는 미치겠네인가.’
“이제 알았으니까, 대비할 수 있잖아.”
그래도 왕세자와는 달리 이쪽은 최한이므로 케일은 조금 다정하게 말해주었다.
“그 외에도... 아, 너넨 전쟁 시작한 뒤야?”
“그래.”
최한이 말했다.
“전쟁이 시작되고 나니, 내 무력함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뭔.....”
최한이 무력하다면 세상에 강한 사람 아무도 없을 거다. 차원이 다른 삽질에 케일은 그만 멍해졌다.
‘전쟁 대체 얼마나 심각한 거야?’
“적을 죽이는 건 할 수 있다. 하지만 몰려오는 병사들을 아무리 많이 죽여도 그것만으론 전쟁이 끝나지 않는다. 게다가 그 병사들도 결국 사람인데,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 막막해져서.....”
케일은 일어나서 저 최한의 어깨라도 두드려주고 싶은 기분을 애써 억제했다. 저 사람은 주인공이다. 자기 슬럼프는 스스로 극복해야했다.
“그래서 주술사의 도움으로 지금의 나를 극복하고 더 강하고 현명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이리로 온 거다.”
“...응?”
‘이야기가 왜 그렇게 돼?’
“오려고 온 건 아니고, 음, 내가 설명은 잘 못하겠는데 주술사 말로는 일종의 심층명상 같이 내면으로 파고들어 또 다른 나를 직면해서....”
말하다 말고 최한이 방문 쪽을 보았다.
“.........이런 걸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음.”
케일도 신음을 삼켰다.
“앞으로 주술사를 만나게 되면 조심해야겠군.”
“별로 네가 조심할 일은 없을텐데.”
최한이 말했다.
“아, 그래. 나야 약하니까 강해지려고 최면요법까지 받을 이유는 없지. 그래도 이쪽 최한한테 주의시켜둬야지. 위험하잖아.”
케일이 투덜거렸다. 최한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아니.”
최한이 눈을 돌렸다.
“너는 강하니까 위험하지 않다고 할 거냐? 그때 네가 날 죽였으면 온 홍 라온은 물론이고 이쪽 너도 가만있진 않았을걸. 로잘린과 라크마저 널 적으로 생각했을 거라고.”
케일이 말했다.
“자신의 가치를 확신하는군.”
“뭔소리야. 너는 갑자기 론 비슷한 게 나타나서.... 누구든 일행을 죽이면 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 같냐?”
“적으로 생각하겠지.”
최한이 일어나 케일에게 다가왔다. 케일은 앉은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니 있는 동안 얌전히 지내.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이해하지만 다른 사람들하곤 싸우지 말고. 이쪽엔 용도 둘이나 있고 돌아갈 방법은 찾아볼테니까....”
“너는.”
최한이 케일이 앉은 의자 팔걸이를 짚고 몸을 숙였다.
“내가 무섭지 않은 거냐?”
케일이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소릴....”
“나한테 개처럼 두들겨 맞고 기절했다 깨어난 지, 한 시간? 그 정도밖에 안 되었잖아? 그런데 나와 단둘이, 널 보호해 줄 만한 사람들과 완전히 단절된 채로 대화를 하겠다니.”
“들려줄 수 없는 이야기였잖아. 너랑 나랑 적이 아니고 네게 위협도 안 되고 도울 일도 있다는 걸 알아듣게 설명했을 텐데?”
최한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케일이 고개를 돌렸다.
“넌 짜증나고 기분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이는 놈은 아니잖아. 그 점을 믿었다.”
“믿었다고.”
“그래.”
뭐 잘못됐냐고 되묻는 것 같은 케일의 말을 듣고 최한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돌아갈 방법에 대해서는, 짐작 가는 바가 있다.”
“그래?”
케일은 안도했다.
“우리쪽에서 협조할 일이 있을까?”
“협조하게?”
최한이 되물었다.
“널 빨리 돌려보내고 싶으니까.”
케일의 말에 최한이 수긍했다.
“오래는 안 걸릴 거다. 이 주술... 이 뭐든, 목적은 내가 나와 맞서 강해지는 거니 그 조건을 충족하면 되겠지.”
“우리 최한을 연습용으로 빌려달라는 거냐?”
케일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최한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놈이 네 물건이냐? 빌려주게.”
“그런 뜻이... 미안, 말실수야.”
케일이 양 손을 들어올렸다.
“그런데, 음, 아무래도 우리쪽 최한이 너보다....”
케일이 여기저기 끼어들어서 이쪽의 최한은 원작에서보다 여러모로 활약이 적었다. 명성이야 싸움 실력에는 영향 안 미치겠지만 그래도 케일은 원작보다 약한 자기네 최한이 저 사람과 싸우다 다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너무 과격하게 하지는 마라. 다치지 않게 주의해.”
그 말에 최한은 좀 수상하단 표정을 했다.
“날 걱정해주는 건가?‘
“.....응? 뭔소리야, 우리쪽 최한 다치지 않게 살살 해달라고.”
“너야말로 뭔소리냐. 그 녀석이 나보다 조금 더 강해.”
“뭐?”
케일의 머릿속에 지금껏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최한이 ‘좀 더 강해지지 않으면..... 이라 중얼거리며 수련에 열중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케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미친, 대륙을 맨손으로 부술 셈인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원작보다도 강해졌단 말이야? 어떻게?’
“무섭나?”
최한이 갸우뚱했다.
“별로 안 기뻐하는군. 보기보다 이쪽의 나와 사이가 안 좋나? 그렇다 해도 어차피 나보다 강하든 약하든 네가 한방거리라는 점은 동일한데.”
“네가 맞을까봐 무서운 게 아니고... 아주 아닌 건 아니지만 그거야 네말대로 최한이 약해도 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케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야 최한이 강한 거야 괜찮지만, 아무래도 강한 사람은 문제를 끌어모으잖아? 난 백수로 조용히 살고 싶다고. 그렇다고 최한이 떠나란다고 떠날 사람도 아니고.”
최한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케일을 보았다.
“꿈이 백수라고?”
“그래. 백수 망나니로 적당히 별장에 처박혀서 놀고먹고 싶어.”
최한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채 케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케일이 조금 울컥했다.
“야, 너 보기엔 한심하고 경멸스러운 거 잘 알겠는데 나도 남들에게 범죄 안 저지르는 선에선 내맘대로 살 권리가 있거든?”
“어...... 뭐 그래.”
문 쪽을 흘끔거리며 최한이 성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여 안 할 테니 좋을대로 살아라, 김록수.”
그 이름을 듣고 케일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왜, 네 이름 맞잖아?”
“맞지만, 다른 사람들한텐 비밀이라고.”
최한이 다시 문쪽을 흘끔 보았다.
“듣는 것도 아닌데.”
“나중에 실수할 수도 있잖아. 그리고 여기선 내가 케일 헤니투스야.”
“그것 뿐이야?”
최한이 탐색하는 눈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케일이 눈을 꽉 감았다.
“나 사실은 삼십대 아저씨거든.”
“그래서?”
“열일곱하고 반말 까고 싶지는 않다.”
“지금까지 계속 깠잖아? 그리고 나도 열일곱은 아니야.”
“그건 알지만.... 사람은 보이는 것에 구애받잖아.”
“하긴.”
케일의 걱정과 달리 최한은 순순히 수긍했다.
“안에 든 게 30대 아저씨든 60대 영감님이든, 보이는 건 케일 헤니투스니까.”
케일이 표정을 구겼다. 저 선언이 꼭 자기를 여전히 망나니 케일 헤니투스로 취급하겠다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다고 내가 피해볼 것은 없지만.’
자기가 싫어도 저 최한이 새삼 다시 케일을 두들겨 패지는 않을 것이다. 그거면 되었다. 원작 주인공의 미움을 사긴 했어도 어차피 그는 곧 자기 세계로 돌아갈 거고 각자 자기 삶을 살면 그만이다.
“그럼, 우리 앞으로 어떻게 할지 합의는 된 거지?”
케일이 물었다. 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일이 일어나서 문으로 가 손잡이를 세 번 두드렸다.

가치관의 탄생을 읽고 생각나는 대로 쓴 것 감상

가치관의 탄생

책의 구조가 마음에 든다. 저자의 주장과 논거로 책이 끝나는 게 아니라 반대 논평이 덧붙어 있어서 더 깊이 생각해보기에 좋다.
저자의 주장은 경제 구조가 그 사회의 주류 가치관을 만들어내며 보편가치란 없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거 같은데?) 그 시대에 가장 필요한 가치관이 승리한다는 다윈주의 사회진화론이다. 그리고 경제 구조의 근원을 자원 획득 방식으로 규정하며 그 단계를 수렵채집, 농경, 화석연료로 나눈다.
인간이 자연에서 획득하는 자원을 전부 칼로리로 환산해 정량화한다.

시퍼드의 첫 번째 반론. 사회지배층의 가치관이 사회 전체의 가치관은 아니다. 수렵채집과 농경집단의 가치관 변화는 자원 획득 방식 보다는 집단의 크기와 더 관련이 있다.

스펜스. 가치관이나 사회 발전은 그렇게 간단히 정량화되지 않는다.

코스가드. [규범적 자아 개념은 어쩌면 가치화 능력의 원천이다. 그러나 인간 특유의 병폐와 망상을 골고루 부르는 부실함의 원천이기도 하다]
에너지 획득 방식에 따라 ‘유용한’ 가치관이 적자생존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가치화 능력이 실질이다. 가치를 지향하는데 사회구조(편견)이 그것을 왜곡시킨다. (가치관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된다)
수렵채집 사회의 폭력이 남용되고 화석연료 사회의 폭력이 억압되는 게 아니라 현대의 폭력은 간접적이어서 보이지 않는 것 뿐이다. 어디든 ‘폭력’은 용납되지 않고 정당화 정도가 달라진다. (그리고 그것은 이데올로기에 의한 왜곡에 영향받는다)
저자는 코스가스도 시퍼드의 논평에 대해 지나치게 본질주의적인 주장이고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반론한다. 인간에게 평등주의 평화주의 본성이 없으며, 농경시대의 차별적인 가치곤은 그 시대의 상식에 맞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고 그것이 지배 엘리트의 속임수라면 일만년이나 사람들이 속아넘어갈 리 없지않느냐고, 농경민도 똑똑하고 상식이 있다고 주장한다.

난, 애초에 상식이란 개념이 19세기 들어서야 생겨난 건 빼고 생각해도, 일단 ‘교육받지 않은’ 인간에게 당연히 상식이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 게다가 거짓이 수많은 사람들을 아주 오래 속이는 것은 실제로 가능하디. 종교의 예를 봐도 그렇고, 여자가 남자보다 지능이 떨어지고 판단력이 없는 하등한 동물이라는 거짓은 그보다 더 긴 기간 인간을 속였지 않은가. 화석연료 사회로 접어든지 2세기가 지났는데도 농경사회의 ‘상식’은 여전히 남아서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사람은 배우는 대로 움직인다. 사회가 위계적 질서를 가르친다면 농격민의 ‘상식’으로는 그게 거짓이라는 걸 알 수 없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평화주의적이라는 주장에는 나도 동의할 수 없지만 인간이 사회 전체의 세뇌교육에 ‘상식적으로’ 저항하는 건 더 말이 되지 않는다. 화석연료로 풍요로워져 물질에서 약간 해방된 인간이 평등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는 걸 보면 그쪽 가능성이 차라리 커보인다.
생존 압력이 커지면 위계질서에 기대는 경향은 저자도 말한거고.




[가치관의 탄생]에서 저자와 코스가드가 동물의 도덕성을 놓고 논쟁할 때 코스가드가 ‘동물은 반성적 자아를 가지지 않으므로 도덕의 주체가 이나다’고 한 부분을 ‘우리 개는 그런다’라고 반박한 거 뭐야 이 새끼라고 생각했는데 코스가드가 [규범성의 원천]에서 말한 동물의 근거가 인간의 근거와 마찬가지로 책무가 되는 것을 고통에 대한 논증으로 읽으니 저자가 말한 건‘우리 개는 내게 책무를 갖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뜻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쁜 새끼라고 생각해서 미안.



오해 2 ㅣ- 기타



케일이 다시 눈을 떴을 땐 해리스 별장의 자기 침대 위였다.
‘아.’
아픈 곳은 없었다. 혹시나 싶어 조심스럽게 발목을 움직여 보았다. 살짝 뻐근한 느낌이 들었지만 무리 없이 움직였다.
‘완전히 박살이 났는데, 멀쩡하네.’
“깨어났냐, 약한 인간!”
라온이 바로 귀 옆에서 소리 질렀다. 갑작스런 큰 소리에 골이 울려 케일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라온이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미안하다, 네가 얼마나 약한지 깜빡하고 혼자 뒀다. 앞으로는 내가 꼭 붙어 다니며 보호해주겠다!”
“아니...”
‘그럼 너 수업은 어쩌고...’ 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문이 벌컥 열리고 나머지 일행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깨어나셨습니까!”
“케일공자!”
“공자님! 무사하십니까!”
“괜찮으신가요!”
‘이렇게 멀쩡한 거 보면 다 치료해서 놔둔 거 다들 알 텐데 뭘 새삼 난리람.’
케일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듯 감격하는 일행들을 둘러보았다.
“온하고 홍은? 최한은?”
“그... 최한처럼 보이는 것을 잡아두고 있어요.”
로잘린이 말했다. 케일이 눈을 깜빡였다.
“누구고 어떻게 된 영문인지, 사람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자는 최한만큼이나 강하더군요. 그래서 만약을 대비해 온과 홍이 방 안을 마비독안개로 채우고 최한이 감시중이에요.”
케일이 라온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싸우지 말라고 말 안 했던가?”
“마비시켜두는 건 싸우는 게 아니다, 인간.”
라온이 당당하게 말했다.
“약한 인간을 죽도록 팬 나쁜 놈이다. 아주 위험하다. 그래도 네가 손님으로 대우하래서 팔다리는 안 자르고 놔뒀다.”
평균 8살의 무시무시한 손님 대접에 케일은 슬쩍 몸을 떨었다.
‘어쩌다 애들 교육이 이 모양 이 꼴이 됐지?’
아무튼 정신이 드니 속이 쓰리도록 배가 고팠다.
“나 식사 좀 갖다 줘. 그리고 그... 사람은 괴롭히지 말고 날뛰지만 않으면 그냥 놔둬. 나랑 해야 할 말이 있어서 이따 찾아갈 거라고 은홍이랑 최한한테도 말해둬.”


밥을 다 먹고, 라온과 론과 로잘린과 라크와 기타등등에게 자기가 걸을 수 있으며 침대 밖으로 나가 자기 발로 서도 위험하지 않고 쓰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고 난 케일은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진짜 최한이 갇혀있는 방으로 갔다.
진짜 최한. 자기가 떠올린 표현에 케일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쪽이 오리지널인 건 맞지만 이쪽의 최한이라고 가짜는 아니었다. 더 이상 [영웅의 탄생] 속 그 등장인물이라곤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을망정 그는 최한이었고 케일 자신의.
최한을 자신의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알 수 없어 케일은 잠시 머뭇거렸다. 부하가 아닌 건 확실했다. 동료. 일행. 아니면...
‘친구..라곤 할 수 없겠지. 이렇게 속이고 이용하는 친구가 어디 있어.’
한 말은 지키는 케일이지만 대놓고 거짓을 말하지 않았을 뿐 주위 사람들을 잘도 기만하고 자기 뜻대로 조종하며 이용했다. 편안하고 안정된 백수 라이프를 위해서. 자기가 최한이나 그 일행의 힘을 빼앗은 건 아니라고 합리화 했지만 케일은 이미 최한의 동료를 역할을 주인공으로서 그가 가졌을 많은 것들을 빼앗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문답 무용으로 자길 죽일 듯이 두드려패던 사람에게 보복할 마음이 전혀 안 드는 건 그래서였다.
“케일님!”
케일이 고개를 들자 최한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가 표정에 걱정을 가득 띄운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케일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쭉 살폈다. 특히 작살났던 발목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케일님, 이자는 제가 목숨 걸고 감시할 터이니 걱정하지 마시고 돌아가서 쉬십시오. 몸도 성치 않으신데...”
“성해.”
“네?”
케일이 다쳤던 쪽 발목으로 깨금발을 뛰어보였다. 최한이 당장이라도 심장마비를 일으킬 것 같은 표정으로 달려와 그를 안아들었다.
“이러지 마십시오.”
“최한?”
“케일님께서는 늘 괜찮다고 하시지만, 저는.....”
최한이 입술만 몇 번 달싹이고 입을 다물었다.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눈을 돌려 케일을 외면했다.
“...최한.”
케일이 그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내려줘. 나 저 사람하고 이야기 해봐야 해.”
최한은 잠시 고민하더니 케일을 내려놓는 대신 안아든 채 자기가 방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오리지널 최한과 에르하벤과 온홍이 있었다.
“어디서 이런 걸 주워온 거냐.”
에르하벤이 물었다.
“글쎄요, 제가 주워온 게 아니라서 답을 드릴 수가 없네요.”
“정말로?”
그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케일과 최한을 보았다.
“발목은 완전히 나았을 텐데?”
“예, 나았습니다.”
그가 다시 한 번 최한의 어깨를 두드려 내려달란 신호를 보냈다. 최한은 마지못한 태도로 천천히 그를 내려놓고 옆에 부축했다.
-다행이다!
온홍이 달려와 케일의 다리에 몸을 부볐다.
-걱정했는데.
-우리도 옆에 있고 싶었는데.
-아프면 안 되는데.
“안 죽는다고 했잖아.”
케일이 웃으며 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 말한 건 지켜.”
“하!”
명백한 비웃음 소리에 온과 홍은 발톱을 세우고 상대를 노려보았고 최한은 검을 뽑았다.
그 모든 적의에도 오리지널 최한은 반응하지 않았다.
“망나니 케일 헤니투스.”
그가 경멸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케일을 노려보았다.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지금부터 말할 생각이야.”
케일이 건조하게 대꾸했다.
“그러니 잠시만 싸움 걸지 말고 기다려.”
그러고 케일은 에르하벤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게 어찌된 일인지, 뭔가 알고 있는 거냐?”
에르하벤이 호기심을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그럴 리가요.”
케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거짓은 아니었다. 저 최한이 어쩌다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는 실제로 전혀 짐작도 안 가니까.
“그럼 뭘 말한다는 거지?”
에르하벤의 탐색하는 눈빛을 마주하며 케일은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서로 대화를 해보자는 거지요. 각자의 입장과 알고 있는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대화를 하다보면 모르던 것도 알게 되고 오해도 풀리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허.”
에르하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 어디 네 식대로 해봐라.”
“그 전에 말입니다.”
케일이 최한과 온 홍, 그리고 문 밖에 발 디딜 틈 없이 모여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아무도 엿듣지 못하게 이 방을 방음해주실 수 있나요?”
에르하벤은 당장이라도 튀어들어올 것 같은 라온을 바라보았다.
“뭐 그 정도야 쉽지.”
“에르하벤님까지 포함해서요.”
그 말에 에르하벤이 표정을 지우고 케일을 바라보았다.
“내게도 비밀로 하겠다고?”
“절대로 이 세상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럽니다. 에르하벤님께는 대화 결과에 따라 일부 정도는 말씀드리겠습니다.”
“케일님...”
최한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의 팔을 잡았다. 케일은 그를 외면했다.
“저놈한테는 말할 수 있고?”
에르하벤이 오리지널 최한을 턱짓했다.
“저 사람은 우리 세상 사람이 아니니까요.”
단언하는 케일을 에르하벤이 한참 주시했다.
“죽음의 맹세가 걸려있는 거냐?”
에르하벤이 말했다. 케일이 웃었다.
“제 목숨 따위보다 훨씬 큰 게 걸려있답니다.”
최한이 케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에르하벤이 케일을 바라보았다. 케일은 웃는 낮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좋다.”
에르하벤이 물러났다.
“대화가 끝나면 문 손잡이를 세 번 두드려라.”
그가 최한과 온 홍을 몰아 방을 나가려 했다.
“안됩니다, 케일님!”
최한이 케일에게 매달렸다.
“저놈은 위험합니다. 케일님을 공격했던 자와 단 둘이서만 대화하시겠다니 그렇게 둘 수는 없습니다!”
“...최한.”
케일이 최한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나 믿지?”
“케일님.”
“나는 이미 네 신뢰를 사려고 목숨을 걸었다.”
최한이 움찔했다.
“그게 부족하면, 새로 맹세를 해야할까?”
“아니....오.”
최한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어차피 이 이야기는 안 해주실 거잖습니까. 그 때 그랬듯이.”
“그래.”
케일이 최한의 손등을 토닥였다.
“괜찮을 거다. 저 최한도 너고, 말이 통할 테니까.”
구경꾼들은 물론이고 대화 당사자인 오리지널 최한마저도 완전 헛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을 했으나 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히... 다시 나와주십시오.”
“그래.”
케일이 최한을 문 밖으로 떠밀어 보냈다. 온과 홍도 주춤주춤 방을 나갔다.
마지막으로 에르하벤이 나가고 문이 저절로 탁 닫혔다. 오리지널 최한이 문쪽을 바라보았다.
“느껴지는 마나가 심상치 않던데, 저 사람은 뭐지?”
“고룡.”
“....뭐?”
자세한 설명 없이 케일은 의자를 찾아 최한 앞에 마주보고 앉아 다리를 꼬았다.
“질문해.”
“뭐?”
“네 쪽이 모르는 게 많을 테니까, 먼저 질문하라고.”
미소도 지우고 세상 무심한 눈을 하고 있는 상대를 마주하고 최한이 마른침을 삼켰다.
“넌 누구지?”
“김록수.”
예상과 다른 대답에 최한이 눈을 깜빡였다가 곧 그 뜻을 파악했다.
“너.....”
“너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에서 살던 사람이다. 너와는 다르게, 나는 이 몸에 깃들어 버렸지만.”
케일이 자기 쪽을 손짓했다.
“갑자기 판타지 세계에 들어와서 우왕좌왕하고 있다가 이쪽의 너를 만났어. 별 일은 안 했어. 밥 먹이고, 영주님께 해리스 마을 상황 전해드리도록 주선하고. 보통 그 정도는 하잖아.”
같은 한국 사람을 눈 앞에 두고 있다는 충격이 큰지 최한은 아무 말도 않고 멍하니 있었다. 케일은 계속 말했다.
“좀 정신 차리고 주변을 파악하고 나니 세상이 완전 괴물투성이더라. 나도 어디 가서 한 방에 죽어 나자빠지지 않을 만큼은 되고 싶은데 검도 마법도 전혀 재능 없는 몸이라 수련 없이 강해질 수 있는 힘을 찾았고 그러다보니 고대의 힘을 모으게 된 거지. 헤니투스가는 매우 부유하거든. 망나니짓 그만둬서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 돈 좀 쓰니까 어렵진 않더라.”
최한이 아무 반응 없이 듣고만 있는 게 조금 무서웠지만 케일은 계속 말했다.
“최한이 왜 나를 따르는지는 나도 몰라. 그 때 너 워낙 힘들어보였으니까, 조금 잘해준 상대인데도 큰 은혜라도 입은 듯이 느껴졌을 지도 모르지.”
케일이 말을 맺었다.
“모두 내가 그 망나니 케일 헤니투스보다는 조금 나은 인간이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자, 이게 내가 누군지, 최한은 어떻게 했는지, 고대의 힘은 어쩌다 모았는지 네가 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최한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케일은 불안한 기분으로 그를 응시했다.
한참만에 최한이 말했다.
“거짓말 하지 마.”



오해 1 ㅣ- 기타

Characters: 케일. 최한. 라온. 기타 케일네 일당들
Rating: G
Warnings: 원작 수준의 폭력
Summary: 케일 앞에 원작 최한이 나타나다.


백망되 팬픽. 최한 케일 최한.

짱돌 얻으러 가기 직전 시점. 일행을 레어에 남겨두지 않고 모두 데려와 해리스 마을에서 며칠 쉰다는 설정.




‘하, 귀찮은데....’
케일은 어둠의 숲에 들어가기 전에 며칠 쉬어서 체력을 비축해두고 싶었다. 드래곤 둘이 동행할 테니 짱돌은 무서울 것이 없지만 어둠의 숲 안을 돌아다니며 찾으러 다닐 일은 상상만 해도 피곤했다. 오래 걸어야 하고 노숙도 해야 했다.
그러나 최한과 부단장은 새벽같이 일어나 뒷마당에서 훈련을 시작했고 늑대 아이들도 당연히 합류했다. 정말로 소박한 해리스 별장은 밖에서 들리는 소음을 잘 막아주지 못했다. 거기에 더해 로잘린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온홍이 운동을 하라고 케일을 쪼아대었다.
-운동을 해야 오래 사는데.
-오래 살아서 여기저기 많이 가보고 해야 하는데.
끔찍한 잔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는 기분에 케일은 휘휘 고개를 젓고 주변을 다시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그가 멀리 별장 쪽을 바라보았다.
‘좋아, 이 정도면 그 녀석들이라고 해도 안 보이고 안 들리겠지?’
이러려고 일부러 모두 떼어놓고 혼자 나왔다. 케일은 근처 바위에 털썩 앉았다. 온 홍한테는 마을을 한 바퀴 돌고오겠다고 했지만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다. 여기서 시간 좀 때우다 오래 산책한 척 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아, 잠이나 자고 싶은데...”
아무리 그래도 바위에 앉아 잘 수는 없었다. 어디 적당히 기대거나 누울 자리가 있나 케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
좀 떨어진 나무 그늘 아래 최한이 있었다. 케일은 눈을 깜빡였다. 분명 아까는 없었던 것 같은데. 그야 소드마스터인 최한이 마음만 먹으면 케일 눈에 안 띄게 움직이는 건 식은 죽 먹기겠지만.
“음?”
케일을 발견한 최한이 그에게 다가왔다. 케일은 위화감을 느꼈다. 최한이 뭔가 이상했다.
“왜?”
최한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케일은 위화감의 근원을 알아차렸다.
이 최한은 자기와 눈이 마주치고도 표정이 밝아지지 않았다.
낮선 표정을 한 최한이 케일 앞에 와 섰다. 자기보다 훨씬 강한 상대의 차가운 눈빛을 받으며 케일은 옴쭐달싹 할 수 없었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상대는 최한이 아니다. 그 생각이 떠오름과 동시에 케일은 몸을 돌려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최한이 한 발 빨랐다. 순식간에 케일의 앞을 막아선 최한이 손을 뻗었다. 케일은 자기도 모르게 방패를 꺼냈다.
파창-!
최한의 주먹에 깨지지 않는 방패가 깨져나갔다.
“미친..”
마법 폭탄도 막았던 방패였다. 작게 만들긴 했어도 칼도 아닌 주먹에 부서질 줄은 정말 몰랐다.
저건 최한이 아니지만 최한이 맞았다. 저 주먹에 맞았다간 한방에 골로 간다. 케일은 바람의 소리를 이용해 도망치려 했다.
최한은 손쉽게 그를 낚아채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등에 가해진 충격에 숨이 날아간 케일은 꼼짝도 못하고 최한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작게 고개를 갸웃했다.
“망나니 케일 해니투스처럼 보이는데, 언제 이런 힘을 얻었지?”
망나니 케일 해니투스.
케일은 상대의 정체를 깨달았다.
‘진짜 주인공? 아니 그런 게 왜 여기 지금 나타나는데?’
이유가 어쨌건 한가지는 확실했다.
해리스 마을 사람들을 버러지 취급했던 그 망아니 케일 헤니투스가 여기 이 마을에 있어선 안 되었다.
“대답은?”
최한이 주먹을 쥐었다. 생명의 위협에 직면한 고대의 힘이 케일의 의지와 상관없이 반응했다.
쾅!
방패는 소용이 없었다. 불벼락이 최한을 내리쳤다. 단 몇 초 라도 그가 발이 묶이길 바라며 케일은 바람의 힘을 휘감고 집으로 달렸다.
“최-”
구원을 요청하는 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나뒹군 케일의 심장이 다급히 활력을 펌프질했다. 등이 거대한 망치로 후려 맞은 듯 아팠다. 척추가 부러졌어도 이상하지 않은 충격에 케일은 쓰러진 채 움직이지 못했다.
이정도면 최한의 공격이라도 잠시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모아들였던 힘이 순식간에 전부 무용지물이 되었다. 피 섞인 기침을 토하며 케일은 공포에 떨었다.
“내, 내가 잘못했어!”
최한이 더 말이나 행동을 하기 전에 케일이 소리쳤다.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고 반성하고 있으니까 제발 용서...”
자기가 하지 않은 잘못을 빌며 최한을 올려다 본 케일은 문득 섬뜩함을 느꼈다. 시간이 흘렀다고 마을 사람들을 잃은 직후 일이 잊혀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지금 최한의 눈빛에 어린 살기는 이상했다. 이미 옛날에 비오는 날 먼지나게 패줬던 패배자 상대로 지을 표정이 아니었다.
“그 힘, 어디서 났지?”
“....응?”
케일이 눈을 깜빡여 눈물을 털어내었다.
“어... 지금 궁금한 게....”
“대답해!”
최한이 소리쳤다. 케일은 영문을 몰라 멍하니 있었다. 뒤늦게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 했으나 그는 더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최한이 그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헉! 크..커헉..”
살살 찼는지 몸이 두동강 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장이 뒤흔들리는 충격에 케일은 속절없이 땅바닥을 긁었다.
“단순한 망나니라고 생각했었는데, 뭘 숨기고 있었던 거지?”
손상을 수복하려는 재생의 힘이 몸에 돌자 아픔은 가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피섞인 기침이 자꾸 터져나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케일의 사정따위 최한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다시 묻겠다. 그 힘, 어떻게 얻었지?”
뭐라도 말을 해서 최한을 진정시켜보려던 케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가 고대의 힘을 얻은 방법.
‘그걸 말해줄 순 없잖아?’
최한이 왜 그걸 알고 싶어하는지도 케일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욕심껏 고대의 힘을 모아들이긴 했어도 최한이나 그 일행의 힘을 빼앗은 건 아니었다. 방패는 애초에 주인도 없었다. 최한이 왜 흥분하는지 케일은 알 수가 없었고 그래서 뭐라 꾸며댈 말도 찾지 못했다.
그 침묵을 최한은 다르게 해석했다.
“입을 다문다 이거지.”
그가 케일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렸다.
“전에 맞은 건 장난이었다는 걸 알게 해주지.”
‘얘 왜 이래!!’
케일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최한은 적한테는 가차 없긴 해도 기본은 선한 사람이었다, 주인공 답게. 예전에 악연이 좀 있기는 했어도 그에게 새로 해를 끼친 것도 없는 피라미 상대로 이렇게까지 하는 건 이상했다.
“아악!”
그러나 지금 주인공 캐해석을 다시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최한이 그의 팔을 잡아 비틀었기 때문이었다.
“말 할 마음이 들면 얘기해.”
그 말을 시작으로 최한이 케일을 때리기 시작했다. 원작의 망나니에게 이랬을까 싶을 만큼, 빠르고 정확하게 아플 부분만 골라서, 그래도 죽지는 않을 만큼 두들겨 팼다.
케일은 뭐든 말하겠다고 외치고 싶었다. 항복이라고 살려달라고 뭐든 말하고 시키는대로 할테니 죽이지만 말아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최한은 자기가 때렸는데도 멀쩡해보이는 케일의 내구도를 오해했고, 몸이 상하는 만큼 심장의 활력이 온힘을 다해 재생의 힘을 뿜어내는 케일은 죽은피를 계속 토하느라 도저히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아, 아흑, 쿨럭, 자... 아악!”
토해낸 피가 옷을 적셨다. 계속 심장이 쿵쿵 뛰어대서 케일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케일이 눈물콧물 흘리며 피까지 토해도 최한은 묵묵히 폭력을 행사할 뿐이었다. 힘조절을 하는지 당장 팔다리가 부러져 날아가거나 내장이 터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케일이 뭔가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은 되었다.
‘답을 들을 거면... 잠깐 멈추기라도 하던가....’
최한의 손속을 몸으로 느끼며 케일은 최한이 첫 번째로 동료삼은 이가 고문 기술자라는 사실을 새삼 기억했다. 원작 최한은 선한 이지만 로잘린을 암살하려던 대공가에서 비크로스가 솜씨를 발휘하는 동안 눈돌리고 있지는 않았었다.
차여 구르던 몸이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쳐 멈췄다. 얼마나 맞았는지 재생력이 있음에도 더 이상 아픔이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대체 뭐라고 말해.’
최한이 대답할 시간을 줬대도 케일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방패만 해도 자기 영지 내였으니 뭐라고 핑계를 댈 수도 있지만 온 사방에 흩어져있던 고대의 힘을 전부 모아들이는 건 용도 미친 운이라고 한 일이었다. 게다가 최한이 이렇게 고문까지 할 정도로 흥분하는 이유를 모르는 이상 섣불리 거짓말을 하기도 어려웠다.
‘아파.....’
온 몸 구석구석 안 아픈 데가 없었다. 케일이 숨을 몰아쉬며 최한을 보았다.
아픈 게 싫고 죽는 게 싫어서 지금껏 그 고생을 했는데, 짱돌도 얻기 전에 여기서 주인공에게 맞아죽을 위기라니.
짱돌. 케일은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지금 그의 몸은 심장의 활력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재생이 조금만 삐끗해도 갈기갈기 터져버린다고 에르하벤이 말했다.
귓가에서 쿵쿵 뛰는 심장소리가 전에 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최한은 분명 죽지는 않을 만큼 조절해서 때린다고 생각중이겠지만 실상 케일은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꽤 버티는 걸.”
최한이 그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좀 더 세게 가야 하나.”
“아-”
‘안 돼 그럼 난 죽어!’라고 외칠 틈도 없었다. 최한이 다리를 들어 케일의 발목을 짓밟았다.
발목뼈 전부가 단번에 으스러지는 고통에 케일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발목이 아니었다. 케일은 이를 악물고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재생의 힘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최한은 날 죽이지 않아, 죽이지는 않아, 버티다보면 누가 올 거야, 누구라도 눈치채고 와줄 거야, 그러니 제발....’
최한이 케일의 다른 쪽 발목에 발을 올렸다. 피투성이가 되어 가슴팍을 움켜쥐며 벌벌 떠는 케일을 내려다보다 그가 잠시 망설였다.
“왜 그렇게까지 입을 다무는 거지?”
최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죽음의 맹세가 걸려있나?”
뜻밖의 말에 케일이 놀라 최한을 올려다보았다.
그야 걸려있긴 하지만, 그건 이쪽의 최한에게 한 맹세였다.
“그렇다면 심문해도 소용 없겠지만... 그놈들이 죽음의 신의 사제까지 손에 넣은 건가.”
최한이 중얼거렸다. 케일이 눈을 크게 떴다.
‘그놈들? 설마.... 암?’
그리고 케일은 이 상황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꼬여있음을 깨달았다.
“할 수 없지.”
최한이 한숨을 내쉬고 몸을 굽혀 케일의 목을 손으로 쥐었다.
케일은 피하려 했으나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가 도리질을 쳐도 최한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죽는다.
온 몸이 부서질 것 같은 아픔. 정말로 부서진 발목. 점점 더 커지다 이제는 박자가 어긋나게 들리는 박동소리. 최한이 손가락만 까딱하면 꺾여버릴 목.
“사, 살려줘....”
나는 네 적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해도 소용 없기도 했다.
“케일님!!”
막 정신을 놓으려는 케일을 비명과 같은 고함이 두들겨 깨웠다. 목을 감쌌던 손이 사라졌다. 눈을 뜬 케일은 자기 앞에 버티고 선 등을 보았다.
‘우리...최한.’
케일을 따르는, 이 세계의 최한이 케일을 감싸고 나서서 다른 자신과 마주보고 서 있었다.
“감히...”
억눌린 목소리와 함께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두 최한은 케일에게는 보이지도 않는 빠르기로 서로에게 덤볐다.
케일에게 보호막이 씌워졌다.
“약한 인간!”
라온이 모습도 감추지 않고 케일 옆으로 날아왔다.
“어쩌다 이렇게 맞은 것이냐! 약한데 왜 싸움을...”
“포션.”
케일이 힘겹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발목에.. 빨리.”
심장이 무슨 메디컬 드라마에서 삐-소리 나기 직전처럼 마구잡이로 뛰고 있었다. 기분탓인지 몰라도 팔다리가 잡아당겨지고 몸이 팽팽해지는 느낌이었다.
라온은 즉시 아공간에서 최상급 포션을 꺼내 으스러진 발목에 부었다. 한 병 더 따서 케일의 입에도 꽂아주고 병 세 개의 목을 한꺼번에 날리곤 발목에 콸콸 부었다.
“조금만 버텨라, 약한 인간. 죽으면 안 된다!”
케일은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것만도 죽도록 힘들었지만, 자기가 살아있고 살 거라고 알려주지 않으면 라온이 다 죽여버리겠다느니 하는 험악한 말을 할 것 같았다.
라온은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케일을 보며 포션병을 뚝뚝 분질러 케일에게 부었다. 박동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고 이 정도 뿌렸으면 죽은 사람도 살아나겠다는 기분이 들 때 쯤 해서 케일이 손을 들어 라온을 막았다.
“왜 그러냐 인간?”
“아깝잖아.”
이건 왕세자 돈도 아닌데. 포션값이 아깝게 느껴지는 걸 보니 살만해진 게 분명했다.
“네 목숨보단 아깝지 않다!”
라온이 소리쳤다. 그 때 실드쪽으로 검강이 날아왔다. 스쳤을 뿐인데 실드 두 겹이 단번에 깨져나갔다. 라온이 최한들을 돌아보며 벌컥 화를 내었다.
“싸우려면 멀리 가서 싸워라! 약한 인간이 위험해지면 이 위대한 용이 둘 다 가만 안 둘 거다!”
“케일님!”
최한이 싸움을 그만두고 케일의 곁으로 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숙해서 다 막지 못하고...”
“응급처치는 했다. 빨리 옮겨서 제대로 된 치료를 해야 한다.”
라온이 주장했다. 케일은 또 다른 최한은 어떻게 되었나 고개를 빼고 최한 뒤를 넘겨다보았다.
다행히 이쪽 최한도 저쪽 최한도 큰 부상을 입고 피칠갑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다른 세계의 최한은 검을 내린 채 어이없다는 눈으로 ‘케일님’을 챙기는 또 다른 자신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 죽이면 안 돼.”
고대의 힘을 고갈 직전까지 쓴 여파로 죽도록 배가 고팠다. 밥도 먹어야 하고 이 것도 수습해야 할 텐데 의식이 흐려졌다.
“알았다! 곱게 죽여주지 않는다!”
다섯 살이 끔찍한 소리를 했다. 케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싸우지 말고, 내... 손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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