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자면 대문 - 화산섬의 분관에 어서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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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번 읽기는 귀찮고 길테니 접습니다. 그래도 한 번은 펼쳐주세요.

NC-17에 대한 새로운 공지 팬픽류

좀 정리할 필요성을 느껴서


티스토리 비번은 이글루스의 동일 카테고리 글에 몇 번 이상 덧글을 달았고 그 덧글의 내용으로 봐서 판단하기에 이 사람이면 보여줘도 되겠다 싶은 사람, 또는 실제로 아는 친구나 친구에게 소개받은 사람한테만 공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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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22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유비는 도원관에 돌아가는 대신 정처없이 길거리를 헤맸다.
미축이 탈락했을 때는 정말 슬펐다. 장비를 위해서라도 꼭 그 박쥐 군주를 찾아 무찌르겠다고 다짐했었다.
아마 공손찬도 그 박쥐를 찾았다고 하면 당장 조운과 함께 뛰쳐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게 도겸 형이었다고?’
“주군.”
관우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예전에 미축님을 탈락시킨 그 군주가 틀림없습니다. 망설일 때가 아닙니다.”
“도겸 형이 은행강도 같은 짓을 정말 했을까? 혹시 그 군주를 이기고 박쥐 영웅패를 뺏은 거 아냐?”
“그쪽도 변신한 큰형님을 알아봤잖수. 예전 일을 기억하고 있는 거요.”
장비도 따졌다.
“당장 가서 배틀을 걸어야 하는 것 아니오? 혹시 혼자서는 무서운 거요?”
“아냐, 그런 거.”
유비가 고개를 도리도리 했다.
“그런데 도겸 형이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알고 찾아가? 집도 모르는데?”
“전화번호는 교환했지 않습니까.”
관우가 퇴로를 차단했다.
“어차피 그쪽에서도 아예 다른 동네로 달아나지 않는 한 주군과 또 마주치게 된다는 것 정도는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이럴 땐 정면으로 부딪쳐서 끝장을 내야 합니다.”
반대할 여지가 없는 정론이었다. 유비는 미적거리면서도 폰을 들었다.
“잠깐, 형님!”
관우가 갑자기 긴장한 목소리로 불렀다.
“근처에 강력한 군주가 나타났습니다!”


“유비가 그 녹색 군주였을 줄이야......”
도겸은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까운 놀이터에 앉아있었다.
당장이라도 유비가 그때의 동료들까지 데리고 쫓아올 것 같았다. 그런 꼴을 어머니 보여드릴 순 없었다.
“아 참. 그 주황색 군주는 그때 내가 탈락시켰지.”
그건 불법도 범죄도 아니었다. 드림배틀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을 쫓아온 것은 자신이 강도짓을 하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아, 뭘 그렇게 걱정합니까. 관우패를 쓰면서 고작 그 정도 실력밖에 안 되는 군주를. 이 장개가 또 한 번 활약하면.....”
“안 돼!”
도겸이 외쳤다.
“유비는 내 친구야. 싸우면 안 돼!”
“하지만 어차피 그쪽도 이젠 주군을 적이라고만 생각할 텐데요?”
“그야......”
“아니, 전과자라서 취직도 안 된다, 친구도 안 생긴다, 알바는 뼈빠지게 해봐야 돈도 안 되는데 그래가지고 언제 소원대로 부자가 될 겁니까? 내가 다 알아서 해주겠다는데.”
“안 돼!”
도겸이 버럭 화를 냈다.
“장개 너, 그러니까 내가 안 써주고 배틀도 안 하고 다닌 거잖아. 깨끗하게 살려고 배틀까지 접고 노력하고 있는데.....”
그의 손 안에 든 박쥐 모양 영웅패는 또 비몽사몽 잠들기 시작했다.
원래 밤에 팔팔한 대신 낮에는 항상 이 모양인 게 장개의 약점이었다. 그러나 하필 이 타이밍에 잠드는 건 할 말 없어지니 도피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일어나, 장개.”
평소 변신하기 위해 깨울 때처럼 쥐고 흔들었다.
“아, 낮에는 졸리다고 했잖아요. 아까도 돈 냄새 나서 겨우 일어났더니 돌려줘야 한다고......”
장개가 갑자기 투덜거리기를 멈추고 눈을 굴렸다.
“주군, 빨리 달아나야겠습니다. 군주의 기척이에요!”
‘싸우자’가 아닌 ‘달아나자’인 걸 보니 장개가 지금 정말로 졸립거나, 그만큼 강한 군주인 모양이었다. 도겸도 이번에는 장개의 말에 바로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장개를 주머니에 넣고 일어나자마자 붉은 갑주의 군주에게 가로막혔다.
“도겸, 역시 네놈이 박쥐 군주였군.”
도겸의 현재 주소지를 아는 조조는 군신일체 상태로 그 근처를 순찰하기만 하면 되었다. 장개의 경고는 조조의 낚싯바늘을 무는 결과밖에 낳지 못했다.
도겸은 다급하게 장개를 체인저에 꽂았다.
“일어나, 장개!”
검은 갑주에 박쥐 날개를 단 군주가 조조 앞에 나타났다.
조조는 태연히 그에게 피닉스 엣지를 휘둘렀다. 도겸이 반격하려 했지만 지금은 아직 낮이고 조조는 격투 기량부터 그보다 월등했다.
도망가다가 그만 뒤로 넘어져 버렸다. 조조는 틈을 주지 않고 하후연으로 바꾸어 사격했다.
“잠깐만, 조조!”
엉뚱한 방향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관우와 일체화한 유비가 달려와 끼어들었다.
“기다려 봐. 도겸 형한테는 나도 할 얘기가 있어.”
“또 너냐?”
조조는 기가 차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내 일을 방해하는 것 말고 또 무슨 볼일이 있다는 거냐?”
“그런 게 아냐. 도겸 형한테 잠깐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그리고 유비가 주춤주춤 물러나는 도겸을 바라보았다.
“도겸 형. 진짜로 형이 그 은행강도였어? 보석도 훔쳤고?”
도겸은 대답 대신 그대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하후봉황탄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는 사이였나본데, 좋은 사람인 줄 알았다면 속은 거다.”
조조가 다시 도겸에게 다가갔다.
“저놈은 드림배틀이 열리기 5년 전에 내가 체포했던 범죄자다. 그때도 금고를 털다가 잡혔지.”
유비는 놀란 나머지 듣고만 있었다.
“그때 도겸은 반성하고 있다고, 다시는 안 그럴 거라고 경찰서에서도 법정에서도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그 홀어머니라는 분도 찾아와서 애걸하고. 그게 통해서 형량도 가벼웠고, 가석방도 금방 성사된 거다. 그땐 나마저도 동정했었지.”
조조가 피식 웃었다.
도겸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복면으로 가려져 있어도 비참한 기색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결과가 이거다. 악당을 동정해봐야 더 큰 악을 낳을 뿐이야.”
도겸은 변명하고 싶었다. 장개가 부추겼다고, 다른 군주를 탈락시킨 건 드림배틀이니 어쩔 수 없었다고, 그럼에도 뒷맛이 나쁜 나머지 손 털고 배틀도 안 하고 알바에만 몰두했었다고.
하지만 소용 없을 게 뻔했다.
저 붉은 군주의 말이 옳았다. 자신은 반성하지도 못했고, 법정에서 다짐했던 것처럼 깨끗하게 살지도 못했다.


형광등 빛이 침침했다. 갈아야 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이번 알바비 얼마 받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도겸 형, 괜찮아?”
곁에서 들린 목소리에 도겸은 정신을 차렸다. 여기는 자기 집이고 침실인데 어째서인지 유비가 곁에 있었다.
“이 친구가 널 데려다줬다.”
어머니도 계셨다. 뭔가 따뜻하고 맛있는 냄새가 났다.
“원, 얼마나 무리해서 이렇게 쓰러진 거냐?”
어머니의 목소리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쓰러졌다고? 자신이? 언제?
기억을 더듬어봤으나 이상하게 흐릿했다. 현실감을 찾으려고 눈앞의 유비와 어머니를 보았다.
유비는 그냥 알바하다 만난 친구일 뿐이니 이제 집에 갈 일이었다. 그런데도 마치 친동생처럼 떨어지지 않고 어머니한테도 위로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이해는 가지 않았다. 그래도 유비 같은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알바도 좋지만 몸 상하면 안 돼.”
어머니가 도겸에게 죽그릇을 내밀었다.
“지금도 우리 두 사람 먹고 살 만큼은 되잖아. 얼마나 떼돈을 벌려고 그러니?”
어머니 말씀대로였다. 부자는 아니어도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과욕을 부렸다. 애초 이만큼 가난해진 게 자신이 범죄에 손댔다가 감옥가고 집안이 뒤집어진 때문인데, 그걸 갚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또 사고를 쳤다.
“죄송해요.”
아직 정신이 덜 돌아온 채로 도겸이 사과했다.
“이젠 욕심부리지 않을게요.”


‘스승님, 언제 돌아오세요?’
도원관을 청소하다 말고 공손찬은 우울한 얼굴로 벽에 걸려있는 사진을 올려다보았다. 셋이 나란히 찍은 사진이었다.
보육원엔 자신과 유비 말고도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사연이 더 절절한 아이도 있었고 더 크고 힘이 센 아이도 있었다. 공부를 더 잘 하는 아이도 물론 있었다.
어째서 자신과 유비였는지 지금 돌이켜보니 알 수 없었다.
그땐 유비와 떨어지지 않고 함께 살 수 있다는 게 기뻐서 그런 건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아직 스승님이 지어준 이름이 아니던 시절에도 유진은 순하고 정에 굶주린 아이였다. 조금만 챙겨줘도 친누나 만난 듯 졸졸 따르고 못된 애들 상대로 나서기까지 하는 게 기특하고 귀여웠다.
그러나 유비의 그런 성격은 지금 같은 때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스승님 대신 도원관을 운영하고 배틀까지 하려면 책임감과 함께 적당한 이기심이 필요했다.
스승님도 없이 둘이서만 헤쳐나가야 하는 지금,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유비는 점점 골칫덩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도겸이 탈락했다고 슬퍼하는 건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어쨌든 유비에게는 좋은 친구였고, 탈락했으니 유비나 자신에게 해를 끼칠 염려도 더는 없었다.
그러나 이후 도겸이 잘 재기해서 사는지 알아보기 위해 알바 빠지고 그 집에 다녀오거나, 길거리 점쟁이에게 야바위 당할 뻔했다가 그대로 드림배틀에 말려들거나, 유비는 쉴 새 없이 사고를 쳤다.
우길의 깃털이 꽂혔을 때 유비를 공격한 일은 지금도 끔찍했다. 그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지금도 정확히 기억나는데, 가장 끔찍한 것은 그 감정이 지금도 고스란히 이해된다는 점이었다.
‘유비가 엉엉 울며 빌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와중에도 결국 유비 덕에 위기를 넘겼다는 사실도 싫었다. 장로가 자신이 아닌 유비에게 우길을 부탁하려 한 것도 납득이 가서 더 싫었다.
역시 스승님이라도 계시면 좋을 것 같았다.
언제나 자신에게 의지할 뿐인 유비에게 이토록 치졸한 마음을 품었다고, 스승님께 솔직하게 털어놓을 자신은 없었다. 그저 도원관 운영이라도 걱정할 필요 없게 되면 이보다는 머릿속이 덜 복잡할 것 같았다.
딸랑-
이 와중에도 문의 풍경이 울리자 몸이 자동으로 뛰어나갔다.
“어서오세요.”
“여기가 비룡권 전수자가 운영하는 도원관이란 곳인가?”
들어선 사람은 남자였다. 새파란 무도복을 입었고 팔의 울근불근한 근육이 인상적인, 무협 만화 주인공 같은 인물이 허리에 손을 짚고 서서 도장 안을 둘러보았다.
“스승님은 지금 안 계세요.”
두 사람은 아직 정식 계승자로 인정받지 못했고 상대의 용건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공손찬은 일단 방어적으로 대답했다.
“그래? 그럼......”
노식이 여기 있을 거라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찾아왔던 것처럼 그가 당황해서 어물거렸다.
다음에 다시 오라고 할까 공손찬이 망설일 때가 되어서야 다음 용건을 말했다.
“좋아. 그럼 여기, 공손찬하고 유비라는 사범 있지?”
“어, 그건 우린데.”
뒤늦게 나온 유비가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그 남자의 표정이 밝아졌다.
“좋아. 나는 강동관의 손책! 지금 당장 맹호권이 더 나은지 비룡권이 더 나은지 겨뤄보자!”
손책이 맹호권의 기본 동작을 몇 가지 취하고 두 사람을 향해 주먹을 겨누었다. 공손찬은 어리둥절 해서 손책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왜?”
“그야 말한 대로, 비룡권과 맹호권 중 어느 쪽이 더 뛰어난 무술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지!”
“맹호권?”
유비가 말려들었다. 손책의 강인해 보이는 팔다리를 흥미로운 눈으로 훑어보다가 물었다.
“그건 어떤 무술이야?”
“뭐? 맹호권을 들어본 적도 없다고?”
손책이 충격받아 그 자리에 굳었다. 그리고 험악한 기세로 유비에게 덤벼들었다.
“감히 맹호권을 무시했겠다! 뜨거운 맛을 보여주지!”
“우왓!”
유비는 간신히 피했다. 손책의 공격이 계속 이어지는 바람에 반격도 제대로 못하고 도장 안을 뛰어다녀야 했다.
“비룡권의 위력이 겨우 이 정도냐?”
“아니, 댁이야말로 갑자기 남의 도장에서 무슨 짓이야!”
보다못한 공손찬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 틈에 유비는 태세를 정돈할 수 있었다.
손책은 대꾸 없이 공손찬도 공격했다. 공격 하나하나가 실제로 위력적이어서 공손찬도 금방 수세에 몰렸다.
‘그냥 바보인가 했는데, 진짜 고수잖아?’
유비도 다시 덤벼들었으나 둘이서 손책 하나를 당해낼 수 없었다.
“흥, 몇 백 년을 이어져 내려온 전통무예라더니 별 것도 아니군!”
손책이 두 사람을 비웃었으나 공손찬은 계속 덤벼들 수 없었다. 손책의 실력은 그 정도로 월등했다.
“별 게 아니긴 뭐가!”
유비가 무작정 다시 덤벼들었으나 금방 도로 나가떨어졌다.
“에잇, 더는 못 참겠군!”
도장 구석에서 발만 동동 구르던 장비가 손책을 향해 뛰어올랐다. 관우도 뒤따랐다.
“어딜!”
그들을 막아낸 것은 손책이 아니었다. 손책의 도복 속에서도 튀어나온 조그만한 영웅패들이었다.
“우리 주군은 절대 못 건드린다!”
갑자기 영웅패들끼리 싸우기 시작하자 세 사람도 사람들끼리 대련을 계속할 수 없었다. 일단 각자의 영웅패들을 거두어 손에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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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길전은 원작에 딱히 손댈 부분이 떠오르지 않아 원작 그대로 간 것으로 넘어갔습니다. 우길 좋아하는데....그 최후도 우길다워서 손댈 수가 없더군요.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21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안녕하세요, 서서가 놀러왔어요.”
언제부터인가 서서가 도원관에 다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별히 배틀 관련해서 하는 일은 없었다. 유비가 차려주는 밥을 같이 먹고 선계에서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다가 유비의 위로와 맛있는 밥으로 기운을 차려 돌아갔다.
처음엔 공손찬도 서서가 오는 게 좋았다. 왕윤 아저씨가 죽고 태오가 조조가 되어 떠난 이 우울한 때에 서서의 웃는 얼굴은 정말로 위로가 되었다. 신선들이 선계에서 인간 학생들처럼 공부도 하고 시험도 본다는 이야기도 신기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었다. 드림배틀에 정신이 팔려 개학 대목을 놓치고 봄소풍 등 만만한 이벤트도 까먹은 탓에 원생이 크게 줄었다.
문제의 보석 반지를 박물관에 돌려주고 받은 포상금이 워낙 커서 적금이라도 들어둘까 했더니, 이대로라면 올해 안에 녹아 없어질 판이었다.
“짜잔~오늘은 서서를 위해 오리 훈제를 사왔지!”
서서가 있는 동안엔 공손찬도 애써 웃는 낯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제 참을 만큼 참았다. 서서가 주황빛 빛무리로 변해 사라지자마자 공손찬은 정색을 하고 유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영수증 내놔 봐. 오늘 장 본 거.”
“그래. 잠깐만.”
유비는 한참 바지 주머니를 뒤지더니 그냥 돌아왔다.
“내가 영수증 항상 받아오라고 했어, 안 했어?”
“미안.”
유비는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공손찬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여기 와 앉아서 이거 좀 봐.”
도원관 장부를 펼쳐 유비 눈앞에 들이댔다.
“지금 우리 살림이 군식구를 계속 늘려도 될 때로 보여? 관우와 장비와 조운도 합치면 한 사람 분은 먹고, 미축도 툭하면 와서 얻어먹고, 얼마 전까지 태오도 여기서 살았잖아. 그게 다 돈이라고.”
“태오는 이제 안 오잖아.”
유비가 시무룩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태오의 소식이 끊긴 것을 걱정하자고 부른 것이 아니었다.
“드림배틀을 계속 할래도 돈이 있어야 돼.”
“알았어.”
“내일부터 다시 알바 자리 찾아봐. 어차피 이제 방학 때까지 오전반은 안 할 거니까 그때 할 수 있는 걸로.”


사실 도원관은 스승님 계실 때부터 만성 재정난에 허덕여왔고 이제까지도 수시로 뛰었던 게 알바였다. 유비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기분으로 새 알바자리를 찾았다.
역시 만만한 게 택배였다. 드림배틀 덕에 힘은 몰라보게 세어졌으니 전보다도 더 잘 할 자신 있었다.
“저희들이 도울 일은 없겠습니까?”
관우와 장비가 옷 속에서 튀어나오자 유비가 도로 밀어넣었다.
“괜찮아. 이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어.”
유비가 택배 상자를 들었다. 이번에 맡은 일은 상자를 크기별로 분류하는 일이었다.
다행히 그동안의 수련이 헛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엔 같이 하는 사람도 굉장히 능숙하고 손이 빨랐다.
“많이 해봤나봐? 잘 하더라.”
비슷한 또래의 남자이기까지 해서 더 친근감이 들었다. 이제 어릴 때처럼 형뻘의 남자만 보면 ‘혹시.....’하는 버릇은 없어졌지만 그래도 친근하게 대할 수 있으면 좋은 거였다.
“응. 하다 보면 익숙해지니까.”
멋없는 뿔테안경을 쓰고 옷차림도 유비만큼이나 초라한 청년이었다. 택배 상자에 파묻혀 오전을 보내고 나니 땀투성이에 먼지투성이가 되어 더욱 볼품없었다.
“난 이제 집에 갈 건데 도겸 형은 어떡할 거야?”
“아, 나도 집에 가서 점심 먹고 다른 알바 뛰러 갈 거야.”
도겸이 나란히 버스 정류장으로 가며 웃었다.
“집에서 직접 해먹는 게 조금이라도 더 싸니까. 한 푼이라도 아껴야지.”
기왕이면 여럿이 같이 먹는 게 더 좋다는 생각이 유비의 머리에 스쳤으나, 지금도 군입이 너무 많다고 혼난 지 이틀도 지나지 않았다. 도겸을 도원관으로 초대하는 건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도겸 형네도 돈이 문제구나.”
유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공손찬이 화내는 것도, 자기가 수련할 시간 아껴 알바를 뛰어야 하는 것도 스승님이 훌쩍 떠난 것도 동탁이 악한이 된 것까지도 전부 다 돈 때문인 것 같았다.
‘태오는 잘 지내고 있을까....아니, 이젠 조조라고 불러야겠지.’
“유비네도 돈이 문제구나.”
도겸이 다 알겠다는 듯 끄덕거렸다.
“하기야 세상 일이 다 그렇지. 나도 돈만 넉넉히 있었으면.....”
무슨 사연이 있는 건가 걱정스러워진 유비가 도겸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 그렇다고 뭐 사고치겠다는 게 아니고.”
유비의 눈빛을 뭘로 해석한 건지 도겸이 파다닥 손사래를 쳤다.
“나도 어디까지나 건실하게 일해서 벌 거야. 그래서 어머니 모시고 조용히, 열심히 살 거라고!”
“그래!”
유비가 서서에게 했던 것처럼 엄지를 척 세워주었다.
“열심히 하면 될 거야, 화이팅!”
도겸은 그런 유비를 감격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고마워. 그렇게 따뜻하게 격려해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새 전단지를 인쇄소에 맡기고 원생들 간식거리를 사고, 여름방학 때 할 만한 이벤트가 뭐가 있을지 고민하며 공손찬이 도원관에 돌아왔다.
“어서 와.”
유비가 활짝 웃으며 맞이했다. 유비가 이럴 때는 대개 상황에 안 맞을 만큼 비싸고 푸짐한 밥을 차렸을 때라 공손찬은 긴장부터 했다.
“이거 봐, 도겸 형이 알바를 하나 더 소개해줬어.”
유비는 상자에 가득 담겨 있는 인형과 인형 눈을 보여주었다.
“도겸 형?”
“택배 알바 같이 하는 형인데, 근방 좋은 알바 자리 다 꿰고 있더라.”
인형 눈 달기라면 확실히 시간만 있으면 틈틈이 할 수 있었다. 대신 돈은 썩 나오지 않기 때문에 염두에 두지 않았었지만, 이렇게 유비가 알아서 가져오기까지 했는데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좋아. 그럼 오후반 준비하기 전까지만 하자.”
나란히 앉아 인형 눈을 달기 시작했다. 곧 심심해져서 손으로는 작업하며 입으로는 수다를 떨었다.
“도겸 형네도 가난한가봐. 하루에 알바를 몇 개나 뛰더라고.”
“그래.”
드문 이야기도 아니어서 공손찬은 적당히 흘려들었다. 유비처럼 달리 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알바만 한다는 것도 요즘 같은 땐 흔한 이야기였다.
유비에게 친하게 지낼 수 있고 알바 일감도 물어다 주는 친구가 생겼다면 좋은 일이었다.
한창 열심히 달고 있는데, 역시 심심해서 틀어놓은 TV에 뉴스 속보가 떴다. 곰돌이패밀리의 잔당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어.”
공손찬이 TV음량을 키웠다. 경찰 수사 끝에 체포된 것이 아니라 놈들이 다 어쩌다 보니 맞고 쓰러진 꼴로 발견되었고, 경찰은 그걸 주워담기만 한 거나 다름없었다. 조직간의 항쟁 탓에 벌어진 일로 추정하며 정확한 사건 경위를 조사중이라는 말로 아나운서의 멘트가 끝났다.
“설마....”
유비가 중얼거리자 공손찬이 끄덕였다.
“그 설마가 맞아. 조조가 한 일이야.”
“결국 왕윤 아저씨가 반대한 길로 갔네.”
유비가 다시 우울해졌다. 공손찬도 TV를 돌렸다.


유비는 조조를 다시 만나 설득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조조를 먼저 찾아갈 방법이 없었다.
경찰서에 가봤지만 태오 형사는 만날 수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자세한 사정은 물어보지도 못하게 했다.
연락처를 두고 간 것도 아니었다. 전에 그가 전화하던 가족이 생각났지만 그 가족이 부모인지 형제자매인지 다른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다.
끈질긴 거 하나는 장점이라고 자부하는 유비도 이쯤 되니 힘이 빠졌다.
‘지금은 돈 버느라 시간도 없고 말이지.’
인형 눈 달기도 은근히 힘들었다. 겨우 목표량을 채워 가져와서는 도겸과 또 마주쳤다.
“피곤해 보인다.”
도겸이 걱정스런 눈으로 유비를 보았다.
“뭐, 익숙해지면 낫겠지.”
자신은 공손찬과 둘이 해도 벅찬 양을 도겸은 혼자서도 척척 해내고 있었다. 유비는 그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슬쩍 물었다.
“도겸 형은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알바에 능숙한 거야?”
“별 거 있겠냐. 그냥 다 경험이지.”
도겸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험한 경험 해보고 필사적이 되니까 다 하게 되더라고.”
“험한 경험?”
유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체 무슨 일이....”
“아, 아무 것도 아냐. 아무 것도.”
갑자기 손사래를 치며 도겸이 말을 돌렸다.
“세상 경험 너무 다양하게 할 필요 없어. 공연히 부모님 속만 썩인다.”
“으, 응.”
“나도 지나고 나서야 알았어. 내가 순전히 어머니 속만 썩이며 살아왔다는 거.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돈을 벌어서 효도해야 하는데.....”
자신도 돈이 없어 이러는 중이지만 도겸이 말끝마다 붙이는 ‘돈 벌어야 해’는 듣다 보니 갑갑하게 느껴졌다. 이번엔 유비 쪽에서 말을 돌렸다.
“알았어. 그런데 말이지, 내가 찾는 사람이 하나 있거든.”
“그래? 누군데?”
“잠깐 만나서 친하게 지냈다가 문제가 생겨서 그쪽이 떠났는데 연락처도 없어.”
“......그래?”
도겸은 유비를 대단히 불쌍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음, 그런 경우라면, 네 연락을 원했다면 알아서 연락처를 주고 가지 않았을까?”
유비의 표정이 세상 서럽게 변했다. 그걸 보고 도겸이 당황했다.
“아, 저기, 내 말은.....미안. 난 그냥 네가 더 좋은 인연 만났으면 해서.....”
유비는 도겸이 하는 말에서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 순간 길 건너에서 들려온 비명 때문이었다.
오토바이 날치기였다. 어 하는 사이에 행인의 가방을 낚아챈 오토바이가 길 저쪽으로 사라져버렸다.
‘이거, 관우와 일체화하면 쫓아갈 수 있나? 아니. 그럼 도겸 형 앞에서 변신해야 하잖아. 그래도 도겸 형이라면 믿을 수 있.....’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정신차려보니 곁에 도겸이 없었다.
깜짝 놀라 두리번거리는데, 오토바이 날치기가 사라진 방향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더 머뭇거릴 때가 아니었다. 유비는 서둘러 관우와 일체화해 달려갔다.
다행히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 곳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오토바이는 넘어져 있고 날치기도 납작 엎드려 벌벌 떨고 있었다. 놈에게서 가방을 빼앗아 들고 있는 뒷모습은 역시 변신한 군주였다.
거기까지였다면 또 다른 착한 군주가 나타났다고 납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군주는 검은 색 갑주에 박쥐 날개를 달고 있었다.
“박쥐?”
미축을 탈락시키고 달아났던 그 군주를 알아보고 유비도 분노했다. 막 그를 향해 드래곤 블레이드를 겨누려는데 박쥐 군주가 갑자기 변신을 풀었다.
“안 돼, 장개. 이건 주인 돌려줘야 해......우왓?”
어째서인지 박쥐는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유비를 눈치 못 챘던 모양이었다. 변신을 풀고 이쪽을 돌아보고서야 기겁했다.
그러나 유비도 충격받은 건 마찬가지였다.
“도겸 형?”
도겸도 지난번에 맞섰던 녹색 군주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다시 변신하고 전투 태세를 취하려 했다.
그러나 유비가 먼저 변신을 해제하고 본모습을 드러냈다.
“도겸 형이 그 박쥐 군주였어?”
“형님, 위험합니다!”
“아, 빨리 나로 변신해주쇼. 지난번 빚을 갚아야지.”
관우와 장비가 나서서 외쳤으나 유비는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유비.”
도겸도 충격이 커보였다. 무장 해제한 유비를 공격할 생각도 못하고 뒷걸음질쳤다.
그러다가 가방을 팽개치고 달아나 버렸다.


이제 곰돌이패밀리는 경찰 손에 맡겨도 될 만큼 정리가 끝났다.
조조가 이름을 바꾸며 결심한 일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최근 일어난 사건들 가운데 군주의 소행으로 의심가는 사건들을 추렸다.
사실 그런 사건들 대부분이 배틀을 모르던 시기의 자신 눈엔 괴이하기 짝이 없어서 굳이 애쓰지 않아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이젠 내막들도 대충 알 것 같았다.
황조는 손견과 드림배틀 끝에 그를 죽였으나 다른 군주에 의해 패배했다. 그 다른 군주가 누군지는 아직 모르지만 어쨌든 황조는 살인죄로 감옥에 갔고 당장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동탁 사건도 동탁이 죽고 패밀리도 궤멸되었으니 이제 끝이 났다.
남은 것은 박쥐 복면을 쓰고 보석과 현금을 노린다는 강도였다. 이놈도 괴력과 신출귀몰한 움직임으로 골치를 썩이다가 갑자기 활동을 중단하고 숨어버렸다.
파일을 훑어보며 자신의 관할 내 전과자와 의심스런 인물들의 명단을 작성해둔 것을 꺼냈다. 뚜렷하게 법에 저촉되는 일을 하지는 않은 사람 중에도 말썽을 피우거나 주위 평판이 나쁜 사람은 알아두고 기록해 두었다.
선배님이 아셨다면 화내셨을 일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그러나 악행을 저지르고도 피해자를 위협하거나 법의 사각을 이용해 공식적으로는 아무 오점도 없는 척 당당히 사는 자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런 자들을 그냥 놔두면 결국 큰 범죄를 저지르고 주위에도 더 큰 피해를 입히게 되어있었다.
게다가 자신은 지금 그들을 직접 해치거나 뒷조사하는 게 아니라 이름을 훑을 뿐이었다. 이들 중 영웅의 이름을 지닌 자가 있다면 그들도 군주가 되었을 테고, 그럼 모처럼 생긴 힘을 악행에 쓸 게 뻔했다.
“.....도겸?”
그 가운데 낯익은 이름을 보고 조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는 사람이에요?”
곁에서 지켜보던 하후연이 물었다.
“그래.”
좀 시끄러워서 그렇지 영웅패들은 강하고 유용했다. 거기에 말도 잘 듣고 나름 아이처럼 귀여웠다.
그리고 자신은 그들의 주군이었다. 충성스럽고 유용한 부하에겐 그만한 대우를 해줘야 했다.
조조가 도겸의 파일을 펼쳤다.
“박쥐 군주는 도겸이 틀림없다. 괴력이나 달리기 실력은 군주가 된 덕분일 테고, 금고를 연 수법이나 노리는 금품, 처분과정 등에서 보이는 성향도 의외로 개인차가 뚜렷하거든.”
“그런데 주군.”
하후돈이 동생보다 진중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갑자기 활동을 중단했다면 황조처럼 다른 군주에 의해 탈락한 것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일단 확인은 해봐야겠다.”
조조는 두 영웅패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가 여전히 군주라면 변신한 내 기척을 눈치챌 수 있겠지.”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20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제갈량은 처음부터 강력한 방어 마법을 두르고 있었다. 이런 기습은 자주 당해봤다는 듯이.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말이 좋아 전투지, 곧 일방적인 폭력이나 다름없는 양상이 되었다. 힘도 기술도 제갈량은 사마의가 닿을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장각의 말이 옳았다. 이건 그냥 괴물이었다. 처음부터 마주해서는 안 될.
제갈량의 연속공격을 피해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사마의는 문득 한 가지 의문을 느꼈다.
신선들의 수장으로서 파악한 제갈량의 능력도 분명 대단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는 수련으로 언젠가 앞질러주마고 벼를 수 있었다. 제갈량 역시 수련해서 그새 능력이 더 증대되었다고 가정해도 이 격차는 이상했다.
옥새의 데이터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 괴물도 평균치를 깎아먹을 만한 약점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중대한.
그토록 오만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제갈량은 처음부터 강력한 방어를 두르고 있었다.
전투 시작부터 지금까지 선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우위를 과시하는 것만이 아니라면?
‘설마......’
사마의는 그 순간부터 오직 제갈량에게 접근하는 데 주력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약간의 타격은 몸으로 받아내가며 돌진한 끝에 그에게 주먹을 휘두를 수 있었다.
사마의의 공격이 헛되지만은 않았는지 제갈량의 방어도 처음처럼 강력하지 못했다. 방어막을 뚫고 들어간 주먹을 피하려다가 제갈량은 그만 주저앉아 버렸다.
‘뭐야?’
그 어느 약한 신선도 이렇게 쉽게 자세가 무너지진 않았다. 당연히 이보다는 매끄럽게 방어할 거라고 예상했기에 도리어 다음 공격이 늦어졌으나, 제갈량은 그 빈틈을 이용하지도 못했다. 이어진 발차기를 고스란히 맞고 나가떨어져 버렸다.
“너, 격투는 전혀 못 하는 거냐?”
대답 대신 제갈량이 부채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그를 중심으로 회오리가 솟아올라 사마의를 튕겨버렸다.
접근하기 위해 힘을 너무 써버렸다. 신선들은 원래 자체 방어력은 다른 능력에 비해 낮았다. 어디까지나 갑주와 무기로 무장한 군주와 함께할 때 능력을 다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사마의도 마찬가지였다.
제갈량은 이미 자신의 고유 무기까지 생성해낸 상태였다. 격투에 둔하지 않았다면 방금도 자신만 두들겨 맞았을 것이다.
“이제 끝났나?”
제갈량의 숨결이 조금 거친 것은 두 대 맞고 구른 탓이었다.
사마의는 숨을 몰아쉬느라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럼 난 이만 간다.”
그게 끝이었다. 귀찮은 파리를 떨어낸 듯이. 제갈량은 사마의의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


장각은 고글을 고쳐쓰는 척 다이얼을 돌렸다. 스캔 모드로 사마의를 다시 훑어보는 것이었다.
역시나 평소와는 다르게 너덜너덜했다. 마력도 거의 고갈되었고 신체손상 정도도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심했다. 지금이라면 장각도 사마의를 소멸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그럴 순 없었다.
그의 협력이 필요해서만이 아니었다. 버그인 자신과는 다르게 모범적인 신선으로 살 수 있고, 옥새의 신선까지 노려볼 재능도 있는 사마의가 어째서 협력해주는지 알고 싶었다.
그냥 물어보는 것보다는 사마의의 실제 언행을 보고 판단하는 편이 더 진실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 용건은 그게 다야? 제갈량에게 얼마나 곤죽이 되도록 처맞았나?”
사마의의 표정을 보고 장각이 한 발 물러났다.
“알았어. 알았다고. 거 참 농담도 못하네. 인간계 소식으로 말하자면, 여포패의 주인이 좀 곤란해졌어. 동탁이 그 딸을 인질로 잡았거든.”
“치졸하군. 배틀로 이기지 못한다고 외부인을 끌어들이다니.”
“늘 있던 일이잖아?”
장각이 고개를 갸웃하며 팔짱을 꼈다.
“3백년 전에도, 6백년 전에도, 아예 전설이 된 고대에마저도 인간들은 늘 그렇게 치졸했어. 그러면서 자기들이 똑똑하다고 하지.”
“네가 할 말이냐?”
사마의가 기가 차서 되물었다.
흑신선이 된 영향인지 본래 성품이 그렇게 설정되어 있었는지 몰라도 장각 역시 잔인하고 사악한 건 마찬가지였다. 신선들을 해방시키겠다느니 말만 번드르르하지 그 잘난 ‘형제 신선들’을 해치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도 보이지 않았다.
당장 지금도 혼자 여러 신선을 대적하기 위한 기술을 연구하느라 한시도 쉬지 않고 열중하는 중이었다.
“아무튼 이제 곧 여포패는 동탁을 거쳐 우리.....”
사마의의 기색이 바뀌었기 때문에 장각도 입을 다물었다.
“이럴 수가.”
사마의는 팔찌의 탐지 기능을 활성화하고 지상의 드림 배틀 현황을 불러왔다. 붉은 색 스크린이 공중에 펼쳐졌다.
스크린에 떠오른 메시지를 읽고 장각도 감탄하듯 입술을 오므렸다.
“굉장한 영웅심이군. 저런 군주가 왜 이제껏 묻혀있었지?”
“이름 때문이다. 영웅의 이름이 아니야.”
사마의가 스크린을 조작해 진행중인 배틀을 더욱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그 역시 뛰어난 군주를 원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강한 신체와 정신을 지녔으되 신선의 지지에 깊이 의존할 만큼 약점이나 빈틈이 있으면 이상적이었다.
이제까지는 조운의 주인 공손찬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해왔다. 충분히 강하면서도 배틀 외의 온갖 스트레스로 심하게 초조해 하는 중이었다.
유비는 너무 약하고, 손책은 겉보기와 달리 중환자였다. 왕윤은 선량하고 느긋해 속이기 쉬운 사람 같지만 심지가 굳고 안정적이었다. 신선이 악한 방법을 권하면 솔깃해 하는 게 아니라 꾸짖을 사람이었다. 원소는 이미 그 강함에 여러 신선이 주목하고 있어 자신이 멋대로 손을 뻗기가 부담스러웠다.
‘이 인간이 이름을 고치고 참전한다면......’
이미 드림배틀도 알고 자질도 뛰어났다. 부족한 건 이름을 바꿔 참전하겠다는 결단뿐이었다.
그것도 어차피 시간 문제였다.


왕윤 형사의 장례식은 암울했다.
정원은 문상객 대부분에게 정중하게 예의를 차렸다. 조문 온 사람들도 대부분 고인을 존경하던 경찰들이나 그를 은인으로 기억하던 사건 피해자들이었다.
유비와 공손찬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
자신들이 조금만 더 강했으면, 똑똑하게 행동했으면 왕윤 아저씨가 그렇게 순직해버리지 않았을 것 같았다.
초선은 다시 엄마 곁에 있지만 까만 원피스를 입고 겁먹은 얼굴로 아빠 영정만 바라보고 있는 걸 무사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우리 이만 가자.”
공손찬이 유비를 쿡쿡 찔렀다.
“그래. 저기, 태오한테 인사만 하고.”
공손찬은 머뭇거렸으나 유비는 씩씩하게 태오에게 다가갔다.
그는 창백한 안색에 눈 밑도 움푹 들어가 있었다. 핏발 선 눈이 형형하게 빛나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해.”
공손찬이 먼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혹시 앞으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너희들 도움은 필요 없다.”
태오가 잘라 말했다.
“선배님의 꿈은 내가 내 방식대로 이룰 거다.”
‘내 방식대로’라는 말이 불길하게 들렸으나 동탁은 이미 체포되어 감옥에 있었다. 사적인 복수는 하려야 할 수도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공손찬이 조용해진 동안 유비가 물었다.
“들은 그대로다.”
태오는 공손찬보다 유비를 더욱 험하게 노려보았다.
“동탁 같은 놈에게까지 원칙을 따지고 인권을 따지니까 이렇게 된 거다. 지금은 너희 둘 다 그렇게 못 알아들을 소리라도 들은 듯이 멍하니 섰지만, 머지않아 알게 될 거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
그리고는 더 말 붙일 기회도 주지 않고 먼저 장례식장을 걸어나가 버렸다. 유비는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공손찬이 잡아끌었다.
“다음에 얘기하는 게 낫겠어. 충격이 큰가봐.”
“그래.”
유비도 할 수 없이 물러났다.
두 사람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장례식장을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뭘 어쩔 작정인 거지.....’
자신들이 위로가 될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원망하고 싶다면 원망하게 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드림배틀 중이고 태오가 군주들의 싸움에 말려들어 다치는 건 왕윤도 바라지 않았던 일이었다.
“저기, 공손찬.”
“왜?”
역시 어두운 얼굴로 침묵하던 유비가 물었다.
“동탁은 탈락한 거야?”
“어?”
공손찬이 멈칫 했다.
“왕윤 아저씨를 동탁이 죽였다면 동탁은 누가 탈락시킨 거지?”
충격에 휩싸인 나머지 가장 중요한 할 일을 잊어버렸다.
마침 도원관 가는 버스가 와서 섰으나 그냥 보내고 경찰서로 가는 버스를 찾았다.
“아니, 그냥 택시를 타자. 한발 늦어서 동탁이 화웅의 힘으로 탈옥하는 것보단 나아!”


“선배님, 역시 악은 악일 뿐입니다.”
하후돈의 붉은 갑주가 조조의 몸을 감쌌다.
감옥에서 꺼내주자마자 동탁이 표변할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쪽을 기대했다는 편이 옳았다.
선배님은 동탁 같은 악인이라도 구할 의무가 있는 게 경찰이라고 하셨다. 그 결과가 선배님은 죽고 동탁이 사는 것이었음에도, 끝까지 유비 같은 어리석은 순둥이에게 앞날을 맡기며 숨을 거두셨다.
동탁이나 그동안 겪어온 온갖 범죄자들이 다 착하고 바른 인물들이 되어서 사는 그 유치한 꿈은 정말 깨진 것일까?
눈앞에서 깨어져 허공으로 흩어지는 꼴을 봤어도 그는 알 수 있었다. 사실상 선배님의 꿈은 깨지지 않았으며 선배님은 그 꿈을 품고 죽었다. 드림배틀에서 탈락한 꿈이 되었을 뿐이다.
‘그런 어리석은 꿈이 이루어질 리 없잖아.’
그에 비하면 이건 얼마나 쉬운가. 동탁의 구제할 길 없는 추악함을 드러내고 그를 힘으로 눌러 제압하는 것은.
그 붉은 빛 도는 신선은 정말로 강한 영웅패들을 준비해주었다. 동탁이 아무리 날뛰어도 하후돈과 하후연을 이길 수는 없었다.
큰 타격을 입고 무너진 동탁을 보고 조조가 파이널 배틀을 준비했다.
“안 돼!”
무작정 도망치던 동탁이 다리 난간에 걸려 비틀거렸다. 조조는 틈을 주지 않고 하후연으로 바꾸어 사격했다.
도망가게 둘 생각은 없었다. 모든 극단적인 경우를 다 염두에 두고 나왔기에 당황하지도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선배님도 배틀이 아닌 흉탄으로 돌아가셨으니, 이 편이 동탁에게 더 어울렸다.
“사, 살려줘!”
난간에서 굴러떨어질 지경이 되자 동탁이 외쳤다.
“이건 다 장각이 시켜서 한 일이야!”
“장각?”
하후연의 피닉스 엣지를 겨눈 채 조조가 물었다.
“그래. 신선이라고 했지만 검은 옷을 입고 이상한 놈이었어. 이건 다 그놈 탓이야!”
익숙한 책임 떠넘기기였다. 이런 말 다 믿어주기로 하면 세상에 불쌍한 꼭두각시만 있고 자기 의지로 범죄 저지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끝장을 내기 위해 방아쇠울에 손가락을 넣었다.
“잠깐!”
갑자기 엉뚱한 방향에서 사람들이 뛰어왔다.
낯익은 목소리들이었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잘 되었다.
“잠깐 기다려!”
유비가 자신의 영웅패를 꺼내들고 외쳤다.
“그놈한테는 우리가 먼저 볼일이 있다고!”
“허? 정말 그렇게 생각해?”
기가 차서 되물었다. 선배님을 그렇게나 생각하고 있었다니, 전혀 몰랐다.
일부러 음성 변조 기능을 끄고 대꾸했다.
“이건 내 싸움이다. 너희가 신경쓸 일이 아니야.”
과연 유비와 공손찬이 나란히 얼어붙었다.
“태오?”
“그 이름은 버렸다.”
공손찬의 시선이 난간에 매달린 동탁과, 그를 겨눈 조조의 총구에 향했다.
“설마 지금, 동탁을 그냥 죽이려는 거야?”
“안 돼!”
상황을 깨닫고 유비도 비명을 질렀다.
“그러지 마, 왕윤 아저씨가 원한 건 그런 게 아니야!”
“그래서 선배님이 어떻게 되셨지?”
조조가 반문했다.
“악은 악일 뿐이다. 싹일 때 뿌리뽑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이건 싹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크게 자란 악이지만. 조조는 싸늘하게 비웃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선배님의 꿈을 이루는 건 나다. 너희 같이 마음 약한 녀석들이 아니야.”


그날 밤 조등은 집에서 오랜만에 손자를 맞이했다.
“마침 제 휴직기간이 일 년이고, 드림배틀도 일 년 이상 걸리는 경우는 없다더군요.”
“그러냐.”
손자의 손에 장착된 체인저를 노려보며 조등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드림배틀 기간 동안만 절 내버려 둬 주십시오. 이기면 세계는 제 뜻대로 개편될 것이고, 지면 그룹으로 돌아와 할아버지 말씀을 듣겠습니다.”
“난 네가 경찰로 살면서 세상 풍파를 배우고 어른이 되길 바랐었다.”
조등이 한탄했다.
“이번에도 내가 틀렸구나. 네 아비처럼 너도 잘못 키웠어. 지금의 네가, 왕윤 경위 품에서 울다 지쳐 잠들어 있던 그 꼬맹이보다 한 치라도 더 자란 것 같지 않구나.”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조조는 흔들리지 않았다.
“제게 그 정도로 실망하셨다면 일 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조등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돌아올 생각이 정말 있기는 했었냐? 내 인내심이 떨어질 때까지, 그저 나와 그룹을 피할 생각뿐이지 않았으냐?”
“제가 경찰이 된 건 집안이 싫어서가 아닙니다. 안 믿으시겠지만, 할아버지도 존경하며 살아왔습니다.”
놀라서인지 기가 차서인지 조등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가 경찰이 된 것은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선배님이 못다 이룬 꿈을 제 방식대로 이루려는 것뿐입니다. 실패하고 꿈이 깨진다면, 그때는 어차피 더 경찰에 남고 싶지도 않겠지요. 할아버지 뜻대로 수단 방법 안 가리는 탐욕스런 인물이 되어있을지도 모르고요.”
“지금도 그룹과 가문에 네 명의의 재산이 넉넉히 있다는 건 알지?”
조등이 고개를 내저으며 일어났다.
“그건 전부 네 거다. 처분하든 굴리든 마음대로 해라. 소원대로 드림배틀을 치르는 동안엔 내 간섭에 시달리지도 않을 거고 생활고도 없을 거다. 그것만으로도 넌 그 어느 군주보다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될 거다.”
조조도 자리에서 일어나 할아버지의 등을 바라보았다.
“대신 드림배틀 내내 널 지켜보겠다. 네가 위험해지더라도 돕는 일은 없을 거다. 왕윤처럼 죽게 되면 장례는 치러주겠다. 그리고 이기든 지든 살아서 배틀을 마치면, 널 그룹에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하는 건 나다.”
조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는 다른 어떤 말도 소용이 없었다. 자신이 지금 겁을 먹고 마음을 바꾼다 해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었다.
“기억해둬라. 너는 탈락하면 배틀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잃지만, 나는 참가하지 않았으니 모든 것을 기억할 거다.”
“알겠습니다.”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19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왕윤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도 태오가 원하는 대로 훌륭한 경찰이 되었으면 했다. 현실적인 문제가 어떻고 하면서 말리기엔 태오의 고집도 너무 세고,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주변 어른들의 강요로 그만둔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이미 반평생을 경찰로 살아왔는데 경찰이 나쁜 직업이라는 주장을 잔뜩 듣고 있으니 싫은 게 당연했다.
그러나 태오를 자신의 집에 숨기면 다음날 조등의 손이 미칠 게 뻔했다.
“태오야, 혹시 할아버지 모르도록 묵을 만한 곳 있니?”
태오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원소가 떠올랐지만 그쪽도 할아버지가 알 만한 사람인 건 마찬가지였다. 명색 소꿉친구 사이였던 원소에게 뒤통수 맞아 할아버지께 인도되는 체험은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원소 역시 전설의 이름이라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만 빼고 전부 초능력 전사가 되어 싸우는 중이라면 좀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태오가 침묵하는 동안 왕윤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별로 장사가 잘 되는 것 같지는 않은 허름한 도장이었다. 맹호권처럼 한창 유행하는 무술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비룡권이라면 오래 전에 사장된 취급을 받고 있었다. 왕윤이 평소 각종 무예와 격투에 관심이 많지 않았더라면 지금 처음 들어보는 무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곳이라면 조등 회장의 눈에도 띄지 않을 거야.’
유비의 순진한 아이 같은 눈망울이 떠올랐다. 그들에게는 큰 폐가 되겠지만 그래도 믿을 만한 곳이 달리 없었다.
마주 고민하면서도 이렇다 할 묘안을 내지 못하고 끙끙거리는 태오가 왕윤에게는 길 잃은 아이처럼 보였다.


동탁에게 위협당한 나머지 연고 없는 곳에라도 숨어야 하는 어려운 처지의 경찰을 유비는 기꺼이 돕겠다고 나섰다.
공손찬도 도원관으로 동탁이 쳐들어올 가능성을 걱정하면서도 찬성했다. 이제 힘을 합쳐야 하는데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스승님 방인데, 내년에나 돌아오신다고 하니까 부담없이 써도 돼.”
유비는 조금 들떠 있었다. 도원관에 새 식구가 들어왔고 꽤 괜찮은 사람 같았다.
왕윤 형사님이 부탁한 사람이라는 점도 기뻤다. 잘 돌봐주면 형사님께도 칭찬 들을 수 있을 거고 새 친구도 생길 것 같았다.
“옷은 내 거 빌려줄게. 속옷은 이따 사올 거고, 여기 도원관 도복도 있어. 잠옷으로도 괜찮아.”
태오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다. 보다 친근하게 다가가야 할 모양이었다.
“아, 왕윤 형사님 진짜 멋있으시더라.”
태오가 움찔 했다.
“여포와 일체화했을 때도 그렇고, 그냥 평소 모습일 때도 대단해. 앞으로 많이 배우고 싶어.”
“뭘 배우려고?”
태오가 쏘아붙였다.
“응?”
유비는 두 눈만 껌벅껌벅했다.
“왕윤 선배님은 칠보검까지 수여받으신, 이미 전설이나 다름없는 경찰이셔. 민간인이 무작정 흉내낼 수 있는 분이 아니야.”
“우와.”
유비는 입이 헤벌어졌다.
“진짜 대단한 분이시구나!”
‘......머리가 나쁜가?’
태오는 혼란스러웠다. 도발에 그냥 실패한 것도 아니고 상대가 도리어 신나하게 만들었을 때는 어떻게 수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칠보검이 뭔지는 알고 그러는 거냐?”
“아니. 뭔데?”
역시나 유비는 화내지 않았다.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우리나라에 현대식 경찰이 창립되었을 때부터 제정되어 이어진 경찰 최고의 훈장이야. 아무 경찰이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와.”
할아버지와 입씨름하는 게 바위에 대고 주먹질하는 격이라면 유비는 허공에 대고 주먹질하는 격이었다. 대체 저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어서 저러는지 태오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나 잠시 나갔다 온다.”
홱 몸을 돌려 방을 나가자 유비가 깜짝 놀라 뛰어나왔다.
“뭐? 어디 가? 위험하다며?”
“가족에게 내가 무사하다는 연락 정도는 해야 하니까.”
“아.”
유비는 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그래. 전화기 저기 있어.”
유비가 가리킨 것은 도장의 유선 전화기였다.
‘......’
결국 태오는 대화를 포기하고 혼자 밖으로 걸어나갔다.
“앗, 같이 가!”
태오는 유비가 그냥 따라오게 놔두었다.
주제에 걸음이 빨라 따돌리기 어려워서만이 아니었다. 상대하면 할수록 자신만 지치는 것 같아서였다.
어느 정도 걷다 보니 정류장 근처 공중전화가 보였다.
더 멀리 가서 전화하자니 따라온 유비도 거추장스럽고, 도원관은 정말로 자신과 아무 연고도 없는 곳이었다. 태오는 공중전화 부스 안에 들어가 동전을 넣고 할아버지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두 번 울리고 딸각 소리가 났다.
-태오냐.
“예.”
이제와서는 설득이고 뭐고 없었다. 태오는 최대한 빠르게 자기 할 말만 했다.
“덕분에 오늘 밤 잘 곳 구하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그래도 노숙은 면했고, 별로 당장 동탁에게 쳐들어갈 생각은 없으니 제 안전을 위한다는 핑계로 절 다시 잡아 가두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어쩔 작정이냐?
조등도 드물게 화가 난 목소리였다.
-네가 조위그룹과 아무 상관도 없게 되는 날이 정말 올 성싶으냐?
“경찰 복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태오는 전화를 끊어버리고 부스를 나왔다.
밖에는 유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기색을 보아하니 엿듣거나 하는 짓은 생각도 못해본 것 같았다.
“가자.”
“그래.”
유비는 태오의 눈치를 보며 졸졸 따라갔다.
‘위험한 와중에도 안부를 전할 만큼 소중한 가족이랑 통화했는데 왜 분위기가 살벌할까?’
“저기, 태오.”
“왜?”
“좋아하는 거 있어? 오늘 저녁에 해줄까?”
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실은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도 잘 알 수 없었다. 빨리 동탁을 잡아 유비를 더 볼 필요 없게 되는 것이 최선이었다.


오랜만에 선계로 돌아가는 장각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꼭 가야만 했다. 옥새의 데이터는 흑신선인 그가 함부로 손댈 수 없었다. 신선들의 수장으로 뽑혀 사실상 옥새의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는 사마의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했다.
첫 만남부터 최악인 상대였지만.
“안녕, 나 왔어.”
평소보다도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 있으셨나? 심기가 불편해 보....”
붉은 색 번개가 장각이 섰던 자리에 내리꽂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무 위로 피신한 장각이 방어벽 세울 준비를 하면서 물었다.
“어쩌다 천하의 사마의님이 번개 하나 제대로 못 쏘게 된 거야? 분명 예전엔.....”
이번엔 불덩어리가 날아왔으나 장각이 때맞춰 세운 빙벽에 막혔다.
“예전에 내가 널 어떻게 했는지 기억하면서 그딴 소릴 계속해?”
“그야.”
다른 나무 위로 계속 피하면서도 장각이 말을 이었다.
“나한테 그럴 수 있었던 사마의를 이렇게 곤죽으로 만들 수 있는 상대라면 나도 알아야 하니까. 신선들의 잘난 수장 사마의님의 정체가 뾰록난 건지도.”
말은 그렇게 해도 장각의 태도엔 여유가 있었다. 정말로 사마의의 본질이 옥새에 포착된 거라면 그가 이렇게 나올 수도 없었을 터였다.
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대충 짐작이 갔다.
“난 분명히 정직하게 보고했어.”
더 공격하지는 않고 씨근거리고만 있는 사마의에게 장각이 말했다.
“규격 외의 괴물이라고. 영웅패 중에 여포가 있다면 신선 중엔 제갈량이 있다고. 너한테 깨질 때도 맛본 적 없는 아득함을 그놈과 싸우면서 맛보았다고. 그게 다 널 갈구고 내 실패를 변명하는 거라고만 생각했어?”
“닥치고 내려와.”
말은 험악하게 했지만 사마의도 장각을 더 공격할 마음은 정말로 없었다.
저놈이 맞을 게 무서워서 입바른 소리를 그만둘 녀석이었다면 흑신선으로 사는 것도 진작 포기했을 것이다.
그런 점 때문에 옥새가 저놈을 흑신선으로 택했을지도 모른다. 타협을 모르고, 모든 고통을 웃어가면서라도 직시하려는 놈이니까.


처음 신선 사마의로서의 자신을 자각했을 때 그는 보았다.
인격이 완성되고 사마의처럼 각성하기를 기다리며 잠들어 있는 수많은 신선들 중에서, 그 중 하나에 흘러드는 검은 기운을. 그것은 분명 옥새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신선들이 깨어났을 때 장각은 선계의 버그, 대적자로 공표되었다.
진짜로 버그가 있었다면, 너무 일찍 의식이 깨어난 사마의 자신이리라.
깨어난 신선들은 선계에 흩어져 각자 자의식을 점검하고 세상을 인식하는 시기를 거치게 되어있었다. 일종의 걸음마와도 같아서 옥새에서도 거의 간섭하지 않는 시기였다.
사마의는 장각부터 찾아갔다. 선계의 지리를 자신의 감각으로 직접 확인하거나 자신에게 주어진 기능과 데이터를 훑어보는 일은 나중에라도 할 수 있었다.
갓 흑신선의 운명을 자각한 장각은 불안정하고 난폭했다. 다른 신선이 접근하자 공격부터 해오는 바람에 대화를 하려면 일단 제압해야 했다. 꼭 자신의 말을 듣게 하려는 생각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장각은 사마의가 자신보다 강하며 흑신선으로서의 사명을 위해서도 그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 후에야 비로소 사마의 입장에서 일이 수월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완벽한 신선을 연기했다. 다른 어떤 신선보다도 더 옥새의 원칙에 충실한 모습을 보이고 간혹 의문이나 불만을 표하는 신선이 있으면 나서서 훈계했다. 수장 자리도 힘써서 쟁취했다.
그러면서 다른 신선들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물론 신선들은 다 목숨을 건 라이벌 사이지만, 사마의는 그들 전부가 동맹해서 자신과 장각을 적대할 경우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순욱, 전풍 등은 뛰어난 신선이지만 나서서 주도권을 쥐려는 자세가 부족했다. 신선으로서는 바람직한 성격일지 몰라도 결국 사마의가 수장 노릇을 하며 신선들을 좌우하기에 편해졌을 뿐이었다.
주유처럼 나서기 좋아하고 야심만만해 보이는 신선을 마주했을 땐 잠시 긴장했다. 그러나 주유는 혼자 수련해서 강해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굳이 한시적인 수장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공격 마법의 최대 출력에서 사마의를 능가한 것으로 만족하고 도전하지 않았다.
대신 이런 말을 남겼다.
“됐어. 난 제갈량 그 자식을 패줄 수 있을 만큼 강해지는 게 더 중요해.”
그냥 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저 주유가 저런 말을 하게 만드는 신선이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해, 장각에게 제갈량을 찾아 죽이라고 명했다.
자신에겐 졌어도 장각은 강력하고 술수도 많은 신선이었다. 마법보다 기계장치에 의존하는 특성상 경험을 쌓고 연구를 거듭해야 제 실력이 나오는 신선이기도 했다. 처음 사마의에게 굴복했을 때와는 이미 격이 달랐다.
그러니 죽이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선전할 줄 알았으나, 장각이 돌아와 털어놓은 이야기는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그놈은 괴물이야. 사마의님도 그놈은 못 당해낼걸. 옥새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걸 만들어냈는지 모르겠어.’
흘려들은 게 아니었다. 기억해두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모범적이고 우수한 신선, 오직 인간 군주만을 위해 힘을 기르는 완벽한 보조자의 모습을 유지한 채 먼저 다른 신선을 찾아가 싸움을 걸기가 은근히 어려웠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기회가 왔다. 또 마법 연습에 빠지고 놀러나가려는 서서를 붙잡으려는데 눈앞에 마법에 의한 안개가 꼈다.
“누구냐!”
서서가 썼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신속하고 안개도 짙었다. 대항 주문을 읊으며 신선을 찾았다.
“여기.”
주문을 채 완성하기도 전에 안개가 휙 걷히고 신선 하나가 나타났다.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태도였다.
“서서를 제법 잘 추격한다 했더니, 겨우 이 정도 안개에 헤매서 술자를 찾지도 못하다니.”
아름답게 생성되는 것이 당연한 신선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미모의 소유자였다. 그 부드러운 생김새에 어울리지 않게 싸늘한 표정으로 사마의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누구냐.”
사마의도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전투에 앞서 서로를 인식하려는 의식에 가까운 말이었다.
신선들의 수장 노릇을 해서 얻는 이득 중 하나가 바로 모든 신선들을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하기 쉬워진다는 것이었다. 그 평균치만 봐도 다른 신선들을 아득히 뛰어넘던 신선. 주유나 사마의 자신보다도 위였던.
장각을 간단히 두들겨 쫓았던.
주유가 저놈만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이를 갈던 상대.
“제갈량.”
그가 말했다. 이름 정도 말해주지 못할 것도 없다는 듯이.
그리고 팔찌를 작동시켜 주변을 간단히 탐색해보더니, 뒷짐을 지고 휙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디 가는 거냐?”
사마의의 물음에 제갈량은 뒷짐을 진 채 고개만 살짝 까닥 했다.
“그건 알아서 뭐 하게?”
“뭐라고?”
사마의는 잠깐 제갈량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허둥거렸다.
“서서는 이미 네 탐지범위를 벗어나 멀리 달아났으니 내 볼일도 이제 끝났다는 얘기다. 가서 너 할 일이나 해.”
끝까지 이쪽에 등을 보이고 뒷짐을 진 채 한 말이었다.
이제까지 그 어떤 신선도 사마의를 이토록 무시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선계의 낙제생 서서만도 못하다는 듯이.
그 등에 벼락을 내리꽂은 건 반사작용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18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도원관을 네비게이터에 입력해 찾아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유비는 제발 자기 모르는 새 공손찬이 돌아와 있기를 바라며 문을 열었다.
“유비!”
소원은 이루어졌다. 안에 있던 공손찬이 두 눈 휘둥그레 뜨고 그에게 달려왔다.
“대체 어디 가서 연락도 안 받고.....어.”
유비 뒤쪽으로 나타난 낯선 사람을 보고 공손찬이 멈칫 했다.
“아, 이분은 왕윤 형사님이셔. 여포의 군주기도 하고.”
유비가 얼른 소개했다.
“그때 공원에서 우리 구해줬던 분이야. 좋은 사람 맞았더라고.”
“뭐라고?”
“선배님?”
공손찬의 뒤쪽에서도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쪽을 보고 이번엔 유비가 놀랐다.
“아, 그때 그 무서운 경찰......”
네 명이 둥글게 마주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태오야.”
가장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왕윤이었다.
“어떻게 나온 거냐?”
다른 사람들도 듣는 자리인지라 자세히 물을 수는 없었다. 태오도 간결하게 대답했다.
“몰래 나왔습니다.”
대로변에서 험악하게 생긴 사람들에게 쫓긴 것이 어떻게 ‘몰래’ 나온 것이 되는지 공손찬 듣기엔 미심쩍은 소리였지만 왕윤은 그걸로 됐다는 듯 끄덕였다. 경찰 작전이란 민간인이 모르는 부분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보다 선배님, 동탁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놈이어서 말입니다.”
태오는 숨을 들이쉬었다. 선배님이니 일단 끝까지 들어주시기는 하겠지만 역시 이런 말은 꺼내기 힘들었다.
“어떤 초자연적인 힘을 손에 넣은 것 같습니다.”
“그래.”
왕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챘구나.”
태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알고 계셨습니까? 언제부터요?”
갑자기 분위기가 더 무거워지자 공손찬은 당황해서 눈치를 보았다.
“저기....”
“이쪽 와서 앉아서 이야기하시죠.”
거의 상황을 눈치 못 챈 듯 밝은 목소리로 유비가 말했다. 왕윤이 얼른 유비를 따라가 식탁 앞에 앉자 태오도 가서 앉았다.
유비는 일단 커피를 타고 저녁을 준비하기로 했다. 분위기가 어색할 때일수록 맛있는 음식으로 풀어줘야 했다.
“아, 다행히 냉동실에 만두 있네. 이걸로 만둣국 끓이자.”
“그래.”
공손찬은 유비를 심각한 얼굴로 훑어보았다.
“정말 괜찮은 거야? 저 사람들?”
“응. 아니, 한 사람은 찬이가 데려왔잖아?”
“그야.”
식탁은 부엌 바로 옆에 붙어있어서 손님들 안 들리게 둘만 이야기하기엔 곤란했다. 공손찬도 지금 유비를 계속 추궁하는 건 포기했다.
“저녁은 만둣국 끓일게요. 커피 좋아하세요?”
유비가 일단 커피를 타가지고 왕윤과 태오 앞에 갖다놓았다. 큰맘 먹고 꿀도 가져와서는 손수 컵에 부으려 했다.
“선배님 단 것 안 드신다.”
자꾸 떠들면 공무집행 방해라고 했을 때와 거의 똑같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유비보다 왕윤이 먼저 반응했다.
“아, 어때. 괜찮으니까 줘 봐.”
“예!”
유비는 신이 나서 꿀이 든 컵을 주르륵 부었다. 그걸 보는 태오는 두 눈 동그래져서 뻐끔거렸지만 왕윤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선배님?’
그리고 티스푼으로 휘저은 다음 죽 마셨다.
태오는 선배님을 쳐다보고 유비를 쳐다보았다.
유비도 아무렇지도 않게 방실방실 웃고 있었지만, 선배님은 정말로 단 것을 싫어하셨다. 진짜로.
사모님도 남편에게 단 것을 권하지 않았다. 초콜릿이나 케익도 초선이가 내밀 때만 드셨었다.
“물 끓으려면 좀 기다려야 해요.”
태오가 어쩔 줄 몰라하는 동안 공손찬도 식탁에 와 앉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 해보려는 듯 웃고 있었다.
“저와 태오 형사는 그럭저럭 정보를 교환했거든요.”
공손찬이 왕윤의 인자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공원에서 봤던 그 무시무시한 군주와 연결짓기 쉬운 모습은 절대 아니었다.
“정말 군주세요?”
“그래.”
왕윤이 고개를 끄덕이고 여포패를 꺼내놓았다.
“나도 협력자가 있었으면 하던 차였다. 너와 유비가 도와준다면 든든할 것 같아.”
유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손찬도 얼떨떨해 하면서도 같이 끄덕였다. 그러나 태오는 그럴 수 없었다.
선배님과 유비가 오기 전 드림배틀이 무엇인지 설명은 다 들었다. 그렇다 해도.
“드림배틀의 군주는 일반인은 절대 당해낼 수 없는 겁니까?”
태오의 질문에 유비, 공손찬, 왕윤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래.”
왕윤이 단언했다.
“너도 이미 봤잖니. 너만 다칠 뿐이야.”
순간 태오는 깨달았다. 지금 선배님이 할아버지와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는 걸.
공손찬은 신화 속 인물들과 같은 이름을 지닌 사람이 군주로 선택된다고 했다. 할아버지 이름도 선배님과 마찬가지로 전설의 이름이었다.
“언제부터 아셨습니까?”
지금 이런 거 물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야기는 이따가 하자.”
왕윤이 유비와 공손찬을 눈짓하며 말을 돌렸다. 그 태도가 태오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아마도 처음부터, 동탁의 초능력에 자신이 어찌할 바를 모를 때부터 선배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지금 남들 앞에 두고 선배님께 화낼 때가 아니므로 억지로 입을 다물고 화를 눌렀다. 그러나 선배님이나 공손찬, 유비가 하는 말이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이야기는 막힘없이 흘러갔다. 동탁이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까지 노렸는지, 영웅심을 빼앗는 기술이 얼마나 위험한지, 다음에 동탁을 만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두 유비, 공손찬, 왕윤의 소관이지 태오의 소관이 아니므로.


“그래도, 영웅심을 빨아들여 단숨에 강해질 수 있다는 건 증명됐잖아.”
응접실 자기 소파에 앉아 씩씩거리는 동탁과 달리 장각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겉뿐만 아니라 속까지 실제로 기분이 좋았다. 딱 좋은 타이밍에 여포패의 주인까지 마주치다니.
동탁처럼 적당히 강하면서 어리석은 군주와 손잡게 된 것도 행운이었다. 방금처럼 대놓고 그를 이용해 실험중이라는 말을 했을 때조차 눈치채지도 못했다.
“충분히 힘을 축적하면 여포도 이길 수 있을 거야. 그럼 무서울 게 없어지지.”
“헹, 여포가 가장 강한 영웅패라도 되나?”
“응.”
장각이 단언했다.
“그 녀석이 최강이야. 아니, 싸워보고도 못 느낀 거야? 이 상대에겐 이길 수 없다, 그 압도적인 감각을? 괴물을 눈앞에 둔 공포를?”
동탁도 대답하지 못했다. 장각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걸 인정하기는 싫었으므로 공연히 되물었다.
“생생하게도 말하는군. 경험이 있나보지?”
“그런 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고.”
장각은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을 돌렸다.
“앞으로 어떻게 이길지나 궁리하라고. 미운 경찰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됐다고 꽁해 있지만 말고. 아니, 부잣집 도련님인 게 그렇게 무적의 방패야? 군주가 되어서도 건드리지도 못할 만큼?”
“그냥 돈만 많은 게 아니야. 넌 인간이 아니어서 이해 못 해.”
‘인간이 아니어서’라는 대목에서 장각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으나 동탁은 눈치채지 못했다.
괘씸하게도 부하들을 한꺼번에 다 쓰러뜨리고 자신의 제안까지 거절한 그 형사는 어처구니 없게도 조등 회장의 손자였다.
아무리 세상에 무서운 것 하나 없이 살아왔어도 재벌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 뒷조사를 명령했던 부하도 딱 거기까지 알아내자 더 이상의 조사를 포기하고 돌아왔으나 화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여포패의 군주가 누군지는 아나?”
동탁이 장각에게 물었다. 그놈이라도 패밀리의 방식으로 혼 좀 내주면 속이 풀릴 것 같았다.
“그쪽도 경찰이고, 이름은 왕윤이야.”
동탁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그놈에게 쓴맛을 보게 해주지. 이번엔 넌 구경만 해. 인간의 방식으로 박살을 내보이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기다리지도 않고 동탁이 응접실을 걸어나갔다.
장각은 움직이지 않았다.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동탁이 나간 문을 바라보다가 훌쩍 몸을 날려 동탁의 의자에 앉았다.
“인간의 방식이라. 그것 참 기대가 되네. 신선이 장차 자기 개인의 도구가 된다는 걸 알기도 전부터 맡겨놓은 것처럼 이래라저래라, 그러면서 여포의 정체를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보지도 않는 어리석은 군주의 음모라. 저~엉말 기대가 되는걸.”


유비와 공손찬, 왕윤의 합의는 간단히 이루어졌다.
유비와 공손찬은 일단 이제까지처럼 지내되, 왕윤이 동탁 관련 정보를 얻으면 도원관으로 연락한다. 왕윤이 경찰의 눈을 돌리고 행동의 자유를 얻는 동안 유비와 공손찬이 동탁을 상대하며 시간을 번다.
“안 그래도 동탁이 곧 다른 조직과 충돌할 조짐이 있어. 시간과 장소를 파악하는 대로 덮칠 작정이다.”
“동탁의 저택이나 주요 거점은 이미 경찰에서도 파악하고 감시중이지 않습니까?”
태오가 묻자 왕윤은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했다.
“그게 왜? 제대로 영장을 받든가, 현행범으로 체포할 상황이 돼야지.”
“하지만 이미 경찰의 싸움이 아니게 되지 않았습니까? 경찰과 악당이 초능력 괴인이 되어서 싸웠다고 조서에 적을 것도 아닌데 꼭 원칙에 얽매여야 합니까?”
“태오야.”
왕윤의 목소리가 엄해졌다.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경찰이 타락하는 건 순식간이야. 게다가 네 말대로, 조서에 어느 날 변신한 괴인이 공연히 동탁을 찾아가 폭행했다고 쓸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최소한의 요건이라도 갖춰야 나중까지 제대로 수사하고 재판도 받게 하지.”
남들 앞이라 목소리는 높이지 않았지만 왕윤은 꽤 화난 기색이었다. 태오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럼 저희는 형사님 연락 받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되나요?”
유비가 묻자 왕윤은 기색을 풀고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나와 태오가 잠시 개인적으로 의논할 일이 있거든.”
“그럼 저쪽 방에서 말씀하세요.”
공손찬이 상담실 겸 사무실로 쓰는 방을 열어주었다. 왕윤이 일어나서 그리로 들어가자 태오가 따라들어갔다.
문을 닫고 나자 왕윤이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허락받은 게 아니고, 억지로 빠져나온 거지?”
“그렇습니다.”
태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별장을 뛰쳐나오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거야 각오하고 나왔지만 선배님의 기색이 이러니 불안했다.
“이제는 회장님이 왜 그런 짓까지 했는지도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태오가 내뱉었다.
“선배님 역시 모른 척 하면서 방관하셨다는 것도요.”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알겠지.”
왕윤은 태오를 똑바로 보며 말하고 있었다.
“변신한 동탁이나 공손찬을 직접 보기 전에는, 말로만 들어서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전부 이해했으니 화도 싹 풀렸나? 아니, 그 반대에 가까웠다.
만약 선배님께서 이런 일을 말로 설명하셨더라면 믿지 못했을까?
막 태오가 입을 열려는데 왕윤이 먼저 말했다.
“태오야.”
“예.”
“그러니까 넌 이쯤 해서 빠지는 게 좋겠다.”
“예?”
태오는 귀를 의심했다.
“봤잖니. 이건 네가 끼기엔 너무 위험해. 게다가 휴직상태가 되었으니 경찰로서 끼기도 어려워.”
“그래서 할아버지 손아귀에 얌전히 돌아가라고요?”
태오의 목소리가 커졌다. 왕윤은 밖에 들리지 않게 조심하라는 뜻으로 손가락을 들어보였으나 그게 태오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사실은 선배님도 이대로 제가 그만두기를 바라셨던 겁니까?”
“아니야!”
왕윤이 먼저 목소리를 높였다가 황급히 낮추었다.
“난 당장 오늘부터 네가 어디서 지내야 할지를 걱정하고 있을 뿐이야. 게다가 할아버지와도 이야기는 해봐야 할 것 아니냐.”
태오도 겨우 이를 앙다물었다. 할아버지께 들키지 않고 묵을 곳을 찾는 것도, 할아버지가 자신이 정말 위기에 처했다고 믿어버리고 더 큰일을 저지르시지 않게 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했다.
“......설마, 할아버지도 그런 변신도구를 받고 드림배틀에 참여하신 겁니까?”
“그건 나도 모르겠다.”
왕윤이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것을 떠올려버린 듯 눈을 깜박였다.
“그분 이름이 그렇고, 때맞춰 상식적으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니 짐작해봤을 뿐이야. 전엔 이렇게까지 하신 적은 없잖아.”
“그건 그렇죠.”
태오도 겨우 조금 진정했다. 자신이 할아버지의 얕은 수에 그토록 쉽게 당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으니까.
하지만 그때 할아버지의 태도와, 띄엄띄엄 늘어놓던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생각하면 분명히 할아버지도 드림배틀을 알고 계셨다.
“그렇다고 해도 그냥 돌아갈 순 없습니다.”
태오는 고민에 빠졌다.
“절 동탁 일에서만 뺄 거면 일 년이나 쉬게 하실 필요는 없죠. 그 별장 안에서 일 년을 다 채운다는 것도 무리한 이야기고요. 어쨌든 할아버지는 이번 일을 계기로 진짜 그만두게 하시려는 겁니다.”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17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유비 걱정에 두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지만, 무작정 뛰어나와 돌아다녀서는 공손찬도 별 수 없었다.
지난번 동탁과 싸웠던 공원, 아직도 정체를 모르는 박쥐 군주와 싸웠던 뒷산 등에 가보고 나니 그만 더 갈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지......”
눈앞이 캄캄해져서 군신일체를 풀고 큰길로 나왔다. 기습에 대비하려고 계속 변신하고 있었지만 그 상태를 유지하는 데에도 영웅심이 필요했다. 지금은 영웅심을 조금 아껴야 할 것 같았다.
“일단 도원관에 돌아가서 다시 기다리는 게 어때요?”
조운이 물었다.
“그래야 할까봐. 하여간 속썩인다니까.”
일단 오늘 밤까지 기다려보고 경찰에 신고라도 할 마음을 먹는데, 한산한 도로에 굉음이 울려퍼졌다.
새카만 밴 한 대가 인도에 뛰어오를 듯 달려와 멈춰섰다. 지난번 일을 떠올리며 공손찬이 거기 주목하는 사이 밴에서 한 남자가 뛰어내렸다.
‘그때의 그 경찰이잖아?’
빈 건물 옥상에서 봤던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였다. 주위를 잠깐 둘러보더니 바로 백화점으로 달려갔다.
공손찬은 그 뒤를 쫓아갔다. 딱 봐도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중인데 오늘은 백화점이 하필 정기 휴일이었다.
과연 경찰은 잠긴 문을 붙잡고 당황하다가 이내 다른 건물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이리 와요!”
공손찬이 달려가 그 경찰을 붙잡고 방향을 바꿔 뛰었다.
“이쪽 식당 열려 있어요!”
식당에 뛰어든 순간 또 다른 차가 아까처럼 급정거하는 소리가 들렸다.
경찰은 식당 안을 훑어보았다. 저녁 시간이라 사람은 많아도 안이 탁 트여있어 숨기 적당한 장소가 아니었다.
공손찬은 그를 끌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유비가 전에 여기서 알바했었기 때문에 주인과 안면 정도는 있었다.
“안녕하세요, 잠시만 여기 숨을게요.”
큰 솥과 냄비를 두는 아래쪽 선반에 경찰을 밀어넣고, 공손찬은 가게 주인에게 설명부터 하려고 했다. 그때 식당 문이 열리고 깡패 같은 분위기의 남자들이 뛰어들어왔다.
“어서오세요! 몇 분이세요?”
공손찬이 주방을 나서며 힘차게 외쳤지만 남자들의 기색은 풀리지 않았다. 이런 때 뻔뻔하게 종업원인 척 해봐야 안 통하는 모양이었다.
‘괜찮아, 여차하면 조운으로 쫓을 수 있어.’
그 점을 떠올리자 마음이 편해졌다. 불안감이 가시고 태연해진 덕인지, 그자들은 괜히 식당 안만 한 번 훑어보고 나갔다. 주방까지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휴......’
공손찬은 주방으로 돌아가 경찰이 그 자리에 무사히 있는지 확인했다.
“그놈들 갔어요.”
경찰이 조심스럽게 숨어있던 곳에서 나왔다. 그러고도 주방의 뚫린 곳을 통해 밖을 내다봐서 그자들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공손찬을 돌아보았다.
“경찰이죠? 전에 본 적 있어요.”
어디서 봤냐고 추궁하면 어쩌나 했지만 경찰은 고개만 살짝 숙였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두 사람은 일단 좁고 바쁜 주방을 나왔다. 바로 식당 밖까지 나가는 대신 태오는 잠시 머뭇거렸다.
어떻게 탈출엔 성공했지만 갈 곳이 없었다. 독립 후 혼자 살던 집, 왕윤 선배님 댁 모두 할아버지도 아는 곳이었다.
‘아니, 지금 당장 여기서 함부로 나가기만 해도 들켜.’
망설이고 있는 그를 공손찬이 걱정 반, 의심 반 섞인 눈으로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경찰서 안 가봐도 돼요?”
“괜찮습니다.”
태오는 억지로 표정을 폈다. 민간인 앞에서 구구히 설명할 일이 아니었다.
“이제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 위험한 일에 끼지 않으셔도 됩니다. 30분 정도 여기서 기다리다가, 그 자들이 아주 물러갔다 싶으면 그때 귀가하시죠. 혹시 동행할 만한 가족이나 친구가 있습니까?”
“아......”
유비를 떠올리고 공손찬이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유비가 동탁과 싸우는 중이라면, 이 형사도 동탁 수사하는 중이니 뭔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미 실종신고까지 염두에 두고 있던 차였다. 공손찬은 일단 태오를 떠보기로 했다.
“방금 그자들이 동탁의 수하들인가요?”
“아, 그건.....”
차라리 그렇게 둘러댈까, 하던 태오가 퍼뜩 다른 부분을 짚었다.
“동탁의 이름은 어디서 들었습니까?”
“어, 그게, 오늘 경찰서에서요. 지난번 공원 사건 때문에 갔다가 들었어요.”
“공원 사건이라고요?”
태오는 자기 갇힌 뒤에 사건이 또 났음을 깨달았다. 새삼 할아버지를 향해 분노가 끓어올랐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 사람에게 묻는 건 간단하지만 왜 경찰이 자기 관할에서 난 큰 사건을 모르냐고 되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일단 시간을 벌어야 했다.
“잠깐만요. 제가 경찰인 줄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어디서 봤는데요?”
“그게, 아. 맞다. 은행 앞에서요.”
겨우 유비가 했던 말을 기억해내서 변명했다. 그러면서 공손찬도 속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이리저리 떠보며 정보만 캐내고 싶었지만 그런 것도 해본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 공연히 말실수라도 했다가 이쪽이 수상한 사람으로 찍히면 큰일이었다.
“그보다, 우리 집 식구가 이 시간이 되도록 안 들어오고 연락도 안 되는 중이거든요. 아무래도 동탁이 관련된 것 같아요.”
“예?”
식당 한 구석으로 가서 공손찬이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실은 공원에서, 동탁 일당이 펀칭 머신을 놓고 사람들을 꾀고 있었거든요. 그때 제 친구가 도원관 사범 유비라고 자기소개를 하고 펀칭 머신을 쳐서 반지를 땄어요.”
동탁이 왜 공원에서 그런 장사를 하고 있었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태오는 일단 가만히 들었다. 공원 사건이라는 게 뭔지 알아야 했다.
“반지를 가져가려고 하니까 동탁이 안 된다고 뛰어나와서 그 난리통이 된 거였거든요. 그 후로 잊을 뻔했는데, 그때 도망치면서 반지를 제가 그만 도원관으로 가지고 와버렸어요. 그 반지는 오늘 제가 경찰서에 갖다줬는데, 도원관에 와 보니 유비가 없어졌어요.”
“동탁이 반지를 되찾으려고 친구를 납치했을 거란 얘깁니까? 하지만.....”
“경찰서에서 그 반지가 진짜 장물이라던데요.”
그렇다면 이 추측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왜 동탁이 야바위 노점을 하고 있었는지는 여전히 이해가 안 가지만 그놈 관련해서 일어나는 일이 다 이런 식이라면 어차피 고민해봐야 시간낭비였다.
게다가 태오는 지금 갈 곳도 없었다.
“그럼 일단 그 유비란 친구를 찾아야겠군요.”
“예. 그럼.....”
공손찬은 아까 그놈들이라도 잡아서 족쳐야 하나 싶은 마음에 바깥을 내다보았다. 태오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집 근처에 목격자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동탁이 잡아갔다면 반지가 친구에게 없었으니 협박장 같은 게 도착해 있을지도 모르고요.”
“아, 그러네요.”
무시무시한 가설에 공손찬은 바로 문으로 뛰어갔다.
“앗 잠깐......”
바깥의 놈들이 정말 멀리 갔을지 알 수 없다. 태오가 따라가 말리려고 했을 때는 늦었다.
“저기다!”
막 다른 곳을 뒤지고 나오던 놈들이, 식당 유리문으로 보이는 공손찬과 태오를 발견하고 쫓아왔다.
허겁지겁 식당을 나와 뛰었으나 쫓아오는 놈들이 너무 빠른 데다 두 팀으로 나뉘어 한쪽은 차로 쫓아왔다. 결국 앞은 차에 막히고 뒤는 사람들에 막혔다.
태오는 공손찬을 걱정하면서 일단 적이 더 많아보이는 쪽을 향해 전투 태세를 취했다.
순간 뒤에서 푸른 빛이 번쩍였다.
뒤를 돌아봤다가 태오가 기겁했다. 어느새 공손찬이 있던 자리에 푸른 갑옷 입고 창까지 든 괴인이 서 있었다.
그 괴인이 경호원들을 전부 무찔렀다. 창을 휘두를 때는 태오도 섬뜩했으나, 창대로 쳐서 쓰러뜨릴 뿐 찌르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하고 괴인이 태오를 돌아보았다. 이대로 자신까지 공격하려는 거라고 생각할 뻔했지만, 그러는 대신 태오를 붙잡더니 전속력으로 달렸다.
아까도 발이 굉장히 빨라서 운동선수인가 했는데, 지금은 붙잡혀 따라가는 것도 힘들 정도였다. 이건 인간의 속력이 아니었다.
동탁이 사람 들고 날던 모습을 떠올렸다가 깨달았다. 이 사람은 그때 계단 근처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두 괴인 중 한쪽이었다.
뿌리칠까도 했지만, 적어도 이쪽에겐 도움을 받는 중이었다. 아까 나눈 이야기도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 황당한 상황을 말로 설명해줄 누군가가 꼭 있었으면 했다.


“찬이가 전화를 안 받아요!”
이번엔 유비가 걱정에 휩싸여 울먹였다.
“진정하고 일단 집에 가서 기다려 보면 어때?”
왕윤이 다독였다.
“하지만 직전까지 제 연락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전엔 이럴 때 전화하면 금방 받아서 막 혼냈는데.....”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악당 부하는 싫다고 말했던 젊은이가 겨우 이 정도 일에 울먹거리고 있으니 왕윤은 기분이 묘해졌다.
‘자기가 탈락하는 일은 두렵지 않지만, 친구가 악당에게 해를 입었을 가능성은 두렵다 이건가?’
안 그래도 이 유비라는 인물 자체에 호기심이 들던 차였다. 왕윤은 다시 유비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 집에 나도 같이 갈까? 혹시 가는 길에 습격이 있을지도 모르고, 친구에게 별 일이 없다 해도 어차피 그쪽과도 이야기 해봐야 하고.”
“예.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유비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표정으로 왕윤을 바라보았다. 범죄 피해자 중에 이런 식으로 경찰에게 매달리는 사람이 간혹 있지만 이 정도 일에 이렇게까지 간절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다시 한 번 자신이 어린애 꾀어낸 사기꾼이 된 것 같았다.
바보같아 보이지만 순수하고 용기있는 청년이기도 하다. 이미 여포를 지닌 자신에게 필요한 동료는 강한 군주가 아니라 이렇게 순수하고 선량한 군주였다.
“그럼 빨리 가요.”
왕윤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유비가 졸랐다. 왕윤도 유비를 따라 일어났다.
“어, 아빠 어디 가요?”
방을 나오자마자 초선이와 마주쳤다. 부인과 했던 약속이 생각나 왕윤은 흠칫 했으나, 초선이와 눈이 마주친 유비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난 유비라고 해.”
“응, 난 초선.”
역시 활짝 웃는 초선의 두 손에 여포패가 들려 있었다. 왕윤은 그만 기겁했다.
“초선아, 그거 어디서 주웠어?”
“응, 저기 거실.”
집 안에선 옷 주머니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그렇게 강조했는데 또 멋대로 뛰어나간 모양이었다. 왕윤은 여포를 향해 눈을 부라리려다 지금 그러면 초선이 그 눈빛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겨우 참았다.
그러는 동안 유비는 몸을 수그려서 초선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사범으로 일하는 덕에 아이들 대하는 일엔 익숙했다.
초선은 유치원생 정도 되어보이는 귀여운 여자아이였다. 유비는 혹시 이 괴물 같은 영웅패가 아이 앞에서 위험한 짓을 했을까봐 여포를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두 눈 부릅뜨고 이를 드러낸 험악한 얼굴을 하고도 여포는 초선의 손에 얌전히 들려 있었다. 기분 탓인지 조금쯤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이거 귀여워.”
초선이 활짝 웃으며 여포를 들어보였다. 아빠와 낯선 아저씨 모두 여포만 쳐다보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귀여워?”
왕윤이 물어보며 역시 유비처럼 앉아서 눈을 맞췄다.
“응. 아빠 장난감이야?”
“그래. 여포라고 하는데, 여포하고 뭐하고 놀았어?”
“이것저것. 같이 차도 마시고, 적도 무찌르고, 달리기도 했어.”
여포가 초선이한테 말썽을 피우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왕윤은 안도하며 초선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 잘 놀았다니 다행이구나. 그런데 사실은 그거 아빠 거라서, 아빠가 지금 가지고 나가야 하거든. 돌려줄래?”
초선은 단박에 아쉬운 기색을 하면서도 여포를 왕윤에게 내밀었다.
“쿠카!”
여포가 크르렁거렸다. 왕윤이 집어드니 할 수 없이 따라가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음에 보자, 여포.”
초선이 여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쿠카!”
여포가 갑자기 소리지르자 유비는 움찔 했으나 왕윤은 허허 웃었다.
“그래, 여포도 초선이가 좋은가보네.”
유비 보기에는 대체 어떻게 의사소통이 되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왕윤은 끝까지 웃는 얼굴로 초선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유비와 함께 집을 나섰다.
“요 녀석, 멋대로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했지.”
차에 오르고서야 왕윤은 다시 엄한 얼굴을 하고 여포를 혼냈다.
“쿠카.....”
“그래도 안 돼. 초선이가 널 그냥 장난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무사히 넘어간 거지. 다른 사람이 발견했으면 널 쓰레기라고 생각해서 내다 버리거나......”
“쿠카!”
“안 돼. 멋대로 사람을 때리면.”
왕윤은 안전벨트를 매고 차 시동을 켰다.
“이제 운전해야 하니까 조용히 해. 알았지?”
“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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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오의 '할아버지 별장에서 두근두근 방탈출'도 써보고 싶었지만 도저히 능력이 안 되었던 고로 스킵했습니다;; 태오니까 짱짱 잘 싸워서 어떻게든 빠져나왔다고 생각해주세요.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16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도원관의 가사는 대체로 유비가 밥과 정원 관리, 공손찬이 청소와 빨래를 맡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조절해서 돌아갔다.
공손찬은 세탁기를 돌리기에 앞서 방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혹시 구겨놓고 잊어버린 옷이 있나 뒤지다보니 벗어놓은 겉옷이 눈에 띄었다.
평소대로 주워서 주머니부터 확인하자 뭔가 딱딱한 것이 튀어나왔다. 플라스틱 케이스에 든 반지였다.
“이건......”
펀칭 부스 뒤편에서 갑자기 군주를 봤을 때 놀라서 놓친 줄 알았는데, 무심코 주머니에 넣고 변신했던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도 이런 건 챙겼네.’
어차피 모조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케이스는 역시 싸구려 플라스틱이지만 반지는 가까이서 보니 좀 달라보였다.
금속 고리의 광택과 디자인도 훌륭하고, 큐빅인지 다이아몬드인지 구별할 재주는 없어도 그때 군주가 했던 말은 기억이 났다.
‘내 보석을 진짜로 가져가려고?’
그 말대로라면 이건 진짜 보석이란 뜻이었다. 공손찬은 잠시 얼어붙었다.
“어, 저기, 유, 유비?”
충분히 크게 불렀다고 생각했는데 대답이 없었다. 긴장한 나머지 목소리가 안 나온 모양이었다.
“어, 어흠. 커흠.”
“유비님이라면 지금 도원관에 안 계세요.”
조운이 대신 톨톨 다가왔다.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아, 대단한 일은 아니고. 이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대단한 일이 맞았다.
‘이거 그 군주놈이 여기까지 찾으러 오는 거 아냐?’
욕심보다 먼저 걱정이 들었다. 그놈은 유비 얼굴도 알고 도원관 사범이라는 것도 알았다.
지금 빨래가 문제가 아니었다. 공손찬은 그 겉옷을 그냥 집어들어 걸쳤다.
“주군? 어디 가시려고요?”
“경찰서 가야 돼. 같이 가자.”
“예!”
조운이 겉옷 주머니에 뛰어들자 공손찬은 바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그놈은 왜 그런 자리에 진짜 보석을 내놓은 거야? 잃기 싫은 거면 처음부터 안 내놨으면 됐잖아!’


떳떳 건전한 시민임에도 막상 경찰서에 오니 긴장이 되었다. 그래도 지난 축제 사건 목격자인데 할 말이 있다고 하자 바로 강력계로 안내되었다.
“그때 거기서 우연히 이런 걸 주웠거든요. 장난감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아닌 거 같아서요.”
자세히 캐묻기 전엔 최소한의 이야기만 할 작정이었다. 경찰에겐 좀 미안하지만 이건 드림배틀이었다. 경찰에 정보가 많이 모여봐야 이로울 게 없었다.
처음엔 사무적이고 심드렁한 태도였던 경찰이 반지를 자세히 노려보더니 진지한 눈빛으로 바뀌어 벌떡 일어났다.
“잠시 기다리시죠.”
역시 비싼 반지였는지, 그 경찰은 한참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사무실 분위기도 어수선해졌다. ‘왕윤 경감님은?’ ‘하필 이럴 때?’ 같은 소리도 들려왔다.
“오래 기다리셨죠.”
그 형사가 되돌아왔다.
“이건 그 악당이 지니고 있던 장물입니다. 진술서를 써주시면 박물관에서 포상금도 나올 겁니다.”
“박물관이라고요?”
“예. 무슨 사연 얽힌 문화재였던가 그렇더군요. 그 악당이 오래 전에 박물관에서 훔친 겁니다.”
“대체 누군데 그런 짓을 한 거죠?”
“동탁이라는 놈입니다. 폭력 조직 보스니까 앞으로도 잘 모르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이미 늦었거든요.’
바로 뇌리에 떠오른 답은 그거였지만 공손찬은 시침 뚝 떼고 웃었다.
“네. 그런데 포상금은 얼마나 될까요?”
“어디 보자, 여기 그때 박물관에서 낸 공고문이 있군요.”
형사가 내민 서류를 보고 공손찬이 입을 딱 벌렸다.
“진술서 어디 있어요?”
미축 덕에 간신히 한숨 돌린 도원관 재정이 요즘 다시 흔들거리던 차였다. 드림배틀이 아무리 중해도 밥 굶고 냉난방 못 틀면서 싸울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축제 때 전단지 바짝 돌린 거 말짱 도루묵 됐겠네.’
평화롭던 공원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당분간 보호자들이 애를 집 밖에 내보내려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반대로 호신술의 필요성을 느껴준다든가, 어른이 바쁠 때 아이를 대신 봐줄 곳으로 생각해줄지도 모른다.
처음엔 둘 다 그럴싸해 보였지만 뚜렷한 확신이 안 서니 생각이 금방 나쁜 쪽으로 기울었다.
‘스승님이 여기 계셨어야 하는데.’
이럴 때 어떤 쪽으로 일이 흘러갈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스승님이라면 아실 것 같았다. 똑같이 상황이 나빠도 스승님이 계시면 훨씬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스승님께도 드림배틀 이야기까지는 못하겠지만.’
아무리 스승님이라도 이런 일 믿어주실 리도 없고, 이렇게까지 위험한 일이니 스승님 끌어들일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안 계신 지금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정직한 시민이 된 덕에 큰돈이 들어오게 되어 공손찬은 기쁘게 집에 돌아왔다.
“유비~ 나 왔어.”
집은 여전히 비어있었다.
“아직 안 왔나?”
별 생각 없이 아까 하려다 만 빨래부터 하고 청소도 하며 기다렸다.
그러나 세탁기가 다 돌아가고 빨래를 갖다 널고 저녁 먹을 때가 되었는데도 유비는 돌아오지 않았다. 언제 오냐고 톡을 해봤지만 역시 감감 무소식이었다.
‘얘가 대체 어딜 간 거야?’
평소라도 걱정이 될 상황인데 하물며 지금은 폭력조직 보스가 군주가 되어 날뛰는 중이었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자 공손찬은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유비는 이제 폴리스 라인이 걷힌 공원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장비로 변신한 채.
“이거 좀 위험한 거 아뇨?”
장비가 물었다.
“범인은 현장으로 돌아온다는데, 이러다 적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러쇼?”
“수련이야, 수련.”
유비가 대답했다.
“지난번엔 내가 너랑 싸우는 데 서툴러서 많이 힘들었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계속 일체화한 채로 움직여서 익숙해지려는 거지.”
“그야 그런 건 도원관 뒤뜰에서도 할 수 있는 거 아뇨? 이러다가 다른 군주 떡 마주치면.....”
“하지만 그 두 번째로 나타난 군주는 한 번 말이라도 건네보고 싶어.”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관우가 나섰다.
“그자가 대화 같은 것 않고 주군을 그냥 무찔러 버리려고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해보기 전엔 모르는 거잖아.”
유비가 고집했다.
“지난번에도 그자는 우릴 공격 안 했어. 이쪽이 먼저 말로 하자고 접근하면 알아줄 거야.”
유비의 근거 있어보이는 자신감에 관우도 장비도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아, 주군! 근처에 군주가 나타났습니다!”
“뭐?”
유비는 바로 터틀 액스를 붙잡고 주위를 경계했다.
과연 그의 앞을 군주가 가로막았다. 기습할 필요도, 숨을 필요도 없다는 듯.
어두운 붉은 색과 탁한 금속성 광택이 도드라지는 굵은 파이프, 더듬이처럼 길게 솟아오른 투구의 장식을 알아보고 유비는 액스를 방어 태세로 들어올리며 외쳤다.
“넌 누구지? 그 악당과 적이라면, 어째서 그 자와 싸우는 거냐?”
“넌 그가 누군지도 모르는 거냐?”
그때와 똑같이 굵직하게 변조된 목소리였다.
“그래, 몰라. 그가 우릴 먼저 공격했어.”
역시 말로 해볼 만한 상대 같았다. 유비는 용기를 얻었다.
“함께 힘을 합쳐 싸워보자. 그럼 다음번엔 쉽게 이길 수 있을 거야!”
그 군주는 잠시 유비를 훑어보다가 도끼창을 들이댔다.
“세상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구나.”
“응?”
유비는 도끼창 끝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네가 정말 손잡을 만한 녀석인지 확인해야겠다!”
도끼창이 그대로 돌진해왔다.
“우왓!”
서둘러 터틀 액스를 들어 막았으나 장비의 힘으로도 버틸 수 없었다. 유비는 뒤로 물러나다가 나동그라졌다.
숨돌릴 틈도 없이 공격이 이어졌다. 유비는 방어에 급급했고 그나마도 오래 가지 못했다.
쓰러진 유비를 내려다보며 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제법 실력이 있구나.”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놓고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그렇게 말하면 유비조차도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어나 계속 싸우고 싶어도 몸이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다.
“내 부하가 될 생각은 없나?”
“뭐라고?”
파이널 배틀 필드를 여는 대신 그가 유비에게 말했다.
“내 부하가 된다면 탈락시키지 않고 살려주겠다. 어떠냐?”
“다, 당신 목적이 뭔데?”
“동탁을 무찌르는 것이지. 네가 누군지 모른다고 한 그 군주 말이다.”
솔직히 흔들렸다. 무섭기도 하고, 그 악당을 무찌르는 건 유비도 바라는 일이었다.
그러나 뒤늦게 깨어난 신중함이 질문 하나를 덧붙이게 했다.
“당신은......”
꿈이 무엇이냐. 그 말이 입에서 나오지 못했다.
“내 목적 말이냐?”
그 군주가 먼저 대답했다.
“동탁과 나는 말하자면 라이벌이다. 내가 그놈을 이기고 보석을 탈취하면 네게도 나눠주지. 어떠냐?”
“싫어.”
생각하기도 전에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난 보석 강도짓 같은 거 안 해.”
이제 도끼창이 자신에게 다시 떨어지든지 파이널 필드가 열릴 것이다. 유비는 각오하고 두 눈을 꽉 감았다.
그러나 대신 다른 질문이 들려왔다.
“네 꿈은 뭐냐?”
잘못 들은 모양이었다. 이제 탈락의 위기가 코앞에 닥치니, 자신의 머릿속을 꽉 채운 의문이 남의 목소리를 빌려 들리는 것이었다.
자신의 꿈.
하진, 박쥐, 동탁처럼 악한 군주들뿐 아니라 미축, 언젠가는 공손찬마저 밟고 올라설 가치가 있어야 하는 자신만의 꿈.
“세상 모든 사람이......행복해지는 것.”
그래서 누구도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게 되는 것.
“그건......”
도끼창 군주가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무, 낭만적인 꿈이군.”
역시 순진해 빠진 소리로 들린 모양이었다.
그럼 뭐 어떠냐, 이런 힘으로 도둑질이나 하러 다니는 것보단 낫다. 이렇게 받아쳐주고 싶었지만 그만 정신이 멀어져 버렸다.


“이게 누구예요?”
남편이 업어온 웬 청년을 보고 정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교통사고 목격자인데 무섭다고 기절해버렸지 뭐예요.”
왕윤이 오면서 급하게 짜낸 변명을 늘어놓았다.
“병원에서 이상 없다고 해서 일단 집으로 데려온 건데, 깨어나면 바로 돌려보낼 테니 너무 걱정 말아요.”
정원은 의심스런 눈으로 남편이 업어온 청년을 훑어보었다.
후줄근하게 늘어난 옷 때문인지 동안 때문인지, 긴 소파를 꽉 채우고도 다리가 삐져나올 정도의 키인데도 작아보이는 청년이었다. 무서운 꿈이라도 꾸는지 얼굴빛도 나쁘고 표정도 조금씩 찡그렸다.
“......그런 거면 소파 말고 제대로 침대에 눕혀요.”
정원이 1층에 있는 왕윤의 방을 가리켰다. 2층엔 초선의 방이 있었다.
왕윤의 표정이 밝아졌다.
“초선이 눈에 띄지 않게 하고요.”
“물론이지요.”
왕윤은 유비를 다시 들쳐 업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눕혀놓고 기절한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정원은 원래 느긋하고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왕윤도 유비를 여기 데려올 엄두를 낼 수 있었던 것이지만 때로 걱정스러웠다.
‘그보다 지금은, 이 친구를 어떻게 한다.’
같이 보석 훔치자고 꾄 자신도 자신이지만, 거기다 대고 세상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으니 그런 나쁜 짓을 할 수 없다고 대답한 이 청년도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했다.
자신은 악당이 아닌 다른 군주를 탈락시키는 일엔 관심이 없었다. 가장 먼저 접한 군주가 동탁이라 이 사람도 한 번 시험해봐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
그러고 보니 지난번엔 이 사람 곁에 하늘색 갑주의 다른 군주도 있었는데, 깨어나면 그 사람 이야기도 물어보고 싶었다.
물어볼 것들과 앞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꼽아보며 책상 앞에 앉아 기다렸다. 다행히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아서 유비가 눈을 떴다.
“일어났나.”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일부러 느긋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걸었다.
유비는 두 눈 깜박깜박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태도가 너무나 순진하고 무방비해 보여서, 일부러 신문까지 갖다 펼쳐들고 있던 자신이 김 빠질 정도였다.
“여기 어디예요? 아, 아저씨는 누구세요?”
태오였다면 자신이 처음 만났던 꼬맹이 시절에도 이러진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왕윤은 웃음을 참으며 설명했다.
“나는 왕윤 형사고, 자네가 아까 싸웠던 여포의 군주야.”
유비가 입을 딱 벌렸다.
“자넬 해칠 생각은 없어. 아까는 그저 자네가 왜 동탁을 쫓는지 확인하느라 그런 질문을 한 거고.”
“경찰이라고요?”
유비가 여전히 두 눈 깜박이며 물었다.
“그래. 경찰이고 드림배틀의 군주지.”
유비가 태오처럼 똑똑할 거라고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왕윤은 그냥 뜸들이지 않고 다 설명했다.
“동탁은 원래 폭력 조직 보스인데 드림배틀에 참가하면서 얻은 힘을 범죄에 쓰고 있는 거다. 나는 역시 드림배틀에 참가해서 그를 탈락시키고 체포하려는 거고.”
유비의 입이 헤벌어졌다.
“좋은 분이셨군요!”
“아니, 그렇게 말할 것까진......”
이렇게 쉽게 믿어줄 줄 몰랐기 때문에 왕윤은 다시 한 번 당황했다. 사실만 말하고 있는데 사기꾼이 된 기분이었다.
“그럼 같이 동탁을 무찌를 수 있는 거죠?”
“그래. 원래라면 민간인을 끼울 수 없지만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니. 게다가 난 경찰이라서 도리어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기가 힘들거든. 지난번에도 다 잡은 걸 놓쳤고.”
여포가 아무리 강해도 자신이 경찰 팀의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는 건 어려움이 많았다. 도와줄 군주가 있으면 좋을 텐데 유비라면 믿을 수 있었다.
“말 나온 김에, 지난번 동탁과는 어쩌다가 그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싸우게 된 거냐? 너와 같이 싸우던 그 하늘색 갑옷의 군주는 누구고?”
“아, 그쪽은 공손찬이라고 저랑 같이 사는 친군데 믿을 수 있어요.”
중학생 된 뒤로 유비도 도원관의 가족관계를 남에게 설명하는 데 익숙했다.
“어려서부터 한 집에서 남매처럼 산 사이인데 이번에 드림배틀도 같이 참가했어요.”
“그럼 셋이 힘을 합칠 수 있겠군.”
고민하던 문제가 쉽게 풀려 왕윤이 웃음지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친구도 불러서 하는 게 어때? 군주의 정체가 관련된 일인데 네가 너무 친구 모르게 다 말해버리면 안 되지.”
“아.”
유비가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그럼 찬이 좀 부를게요.”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보고 유비가 당황했다. 부재중 통화가 셋 있고 톡도 와 있는데 전부 공손찬이 보낸 것이었다.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15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원래 축제용으로 설치되어 있던 부스 몇을 급히 비워 임시 의무실로 쓰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래도 겉보기엔 멀쩡했으므로 종이컵 커피를 한 잔씩 받고 앉아서 쉬게 되었다.
따뜻한 종이컵을 손에 쥐고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구급대원의 말을 더욱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동탁이 마구잡이로 갈긴 총에 쓰러진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응급처치를 받고 병원으로 이송되는 중이었다. 영웅심이 빨려나가 실신한 사람들도 중환자처럼 안색이 파리했다.
“으......”
유비가 신음하며 몸서리쳤다. 공손찬도 이미 붙어있던 어깨를 더욱 바짝 붙였다.
‘군주들끼리 몰래 하는 배틀 아니었어? 일반인은 말려들지 않게 하고?’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하진부터 아무 상관도 없는 아이들을 위험에 처하게 했었다. 그 사실을 기억해내고 두 사람은 더욱 기가 질렸다.
순경이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신분과 연락처, 목격증언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에게도 다가와서 물었다.
“기관총을 난사한 범인의 얼굴을 혹시 봤습니까?”
“아뇨.”
둘 다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유비는 펀칭 부스에서 일어난 일을 약간이라도 말하는 편이 좋을지 고민했다. 그러나 미처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순경이 가버렸다. 다들 비슷비슷하게 도움 안 되는 말만 하고 있으니 지친 모양이었다.
급한 부상자들이 다 실려간 뒤엔 남은 구급대원들이 유비와 공손찬처럼 겉보기에 멀쩡한 사람들에게 다가와서 간단한 진찰만 하고 명단을 작성했다.
나중에라도 두통, 어지럼증 등의 증상이 나타나면 바로 병원에 가라는 신신당부와 함께 겨우 놓여났다. 도원관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저녁이었다.
“역시 집이 최고야......”
유비조차도 저녁밥 해야겠다는 소리를 못하고 마룻바닥에 뻗었다. 공손찬도 그 옆에 나란히 뻗었다.
“그놈은 왜 그런 짓을 했지?”
공손찬이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니, 영웅심을 흡수해 강해지려는 건 알겠어. 그런데 영웅심이 그런 식으로 빨려나갈 수 있는 거였어?”
유비와 공손찬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누운 옆 바닥에 영웅패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그런 기술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관우가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대답했다.
“갑주의 형태를 보면 그 영웅패는 화웅이 분명한데, 그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일찍 알려졌을 겁니다. 그도 제법 강한 영웅패니까요.”
“그럼 어떻게 그런 기술을 쓰는데?”
유비의 질문에 관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우리가 몰랐을 수도 있지.”
조운이 중얼거렸다.
“영웅패들끼리는 교류 같은 거 없잖아. 능력도 대략적으로만 공유되고. 우리 장단점도 다 모르는데, 과연 남의 필살기를 알 수 있었겠어?”
“자기 능력도 다 모른다고?”
유비가 깜짝 놀랐다.
“그럼 어떻게 싸워? 아니, 너희들 능력 쓰는 법 우리한테 가르쳐주기까지 했었잖아?”
“기본 스테이터스나 필살기, 레전드 머신 조종법이야 자기 것 정도는 다 알죠.”
조운이 한숨을 내쉬었다.
“막상 실전에 들어가면 그것만으론 부족하잖아요. 강해보이는 기술이 상대에 따라서 쓸모 없는 경우도 있고, 어떻게 적절한 때에 적절한 기술을 쓰느냐는 직접 겪어가면서 깨닫는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음......아무튼 그렇다는 얘기에요.”
조운은 할 말이 남은 듯 우물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하기야 인간도 그렇지.”
공손찬이 끄덕였다.
“무술도 기본 훈련과 대련을 적절히 병행해야 실력이 늘고, 숨어있던 재능이 직접 해본 뒤에 드러나기도 하니까.”
“바로 그거요.”
장비가 짧은 팔로 옆구리를 짚었다.
“영웅패들 역시 능력을 제대로 써보는 것은 드림배틀이 처음이란 말이오. 그러니 훈련이 중요한 거고.”
“맞아.”
유비가 끄덕거렸다.
“그리고 전술도 더 신경써야 할 것 같아.”
공손찬이 덧붙였다.
갑자기 함정에 빠진 걸 감안해도 아까는 너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링 위가 아닌 좁은 천막 안, 민간인들이 잔뜩 모인 공터 등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그 상황에 맞는 전투법을 생각해내야 했다.
‘그리고 나도 영웅패가 하나 더 있으면 좋겠네.’
아직 공손찬은 자신만의 ‘첫 승리’를 거두지 못했지만 미축이 지고 장비가 유비에게 가는 걸 보니 그 다음 단계가 무엇인지는 뻔했다. 한 번 승리한 군주는 영웅패를 늘릴 수 있었다.
화웅의 군주는 반드시 자신이 쓰러뜨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 군주는 누구였을까?”
유비가 중얼거렸다. 혼잣말인 걸 알면서도 공손찬은 자신이 본 대로 꼽아보았다.
“이미 유명한 범죄자일지도 몰라. 가면 쓴 부하들도 있었고, 경찰들도 뭘 좀 아는 기색 같고.”
“응? 아니아니. 그 기관총 쏜 군주 말고.”
유비가 손을 들어 흔들었다.
“그 다음에 갑자기 나타난 그 강한 군주 말이야.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악당이 나타나니까 무찌르러 온 걸까?”
“글쎄. 그렇게 정의의 용사라고 확신하기엔 좀 이르지.”
공손찬이 시큰둥하게 잘랐다.
“그냥 악당들끼리 싸우는 것일 수도 있어. 그렇게 강한 군주인데 함부로 얽혔다가 우리가 탈락하면 어떡해?”
“그치만 우리 거기선 도움받았잖아.”
“그렇다고 해도 어차피 언젠가는 겨루어야 할 상대야. 조심해.”
말하고 나서 생각난 것을 공손찬이 덧붙였다.
“하기야 어디 사는 누군지도 모르고, 동기도 모르니 언제 또 만날지도 모르는구나.”


태오는 조등의 별장에서 눈을 떴다.
할아버지고 뭐고 한 대 패고 싶은 기분으로 일어났으나 방 안엔 혼자였다. 침대 머리맡에 쪽지 한 장이 놓여있을 뿐이었다.
[이번만은 상황이 특수하니 부득이 1년 휴직계를 냈다. 식량은 2층 부엌과 창고에 넉넉히 있으니 알아서 밥해먹고 1층으로 내려갈 생각은 마라. 창문도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다. 환풍기 성능이 아주 좋단다.
미안하지만 설명하기 곤란한 일이 생겨서 네 안전을 위해 한 일이니 너무 원망 마라.]
내가 뭘 읽은 건가.
태오는 두 눈을 의심하며 읽고 또 읽었다. 할아버지 필적도 맞고 내용도 틀리지 않았다.
일어서서 침실을 나가보았다. 와본 적 있는 할아버지의 별장이었다.
창문을 살펴보니 전부 방범장치가 되어있었다. 보통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집안을 지키기 위한 방식으로 작동하지만 지금은 아닐 것이라는 데에 할아버지 손목 정도는 걸 수 있었다.
손자한테 이따위 짓을 하는 할아버지이니 손목쯤 대신 희생한들 무슨 대수랴.
1층에 있는 것보단 작은 것으로 기억하지만 부엌도 있고 욕실도 있었다. 세탁기는 전엔 못 봤던 것 같은데 새것이기까지 한 걸 보니 이 불법 감금을 위해 새로 사놓은 모양이었다. 뜯지 않은 세제도 한 통 있었다. 섬유유연제도.
“......”
냉장고를 열어보니 냉장실 냉동실 모두 꽉 차 있었다. 심지어 내용물도 혼자 요리해 먹기 적당해 보였다. 분가한 뒤로 태오도 혼자 살림하는 데에 꽤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도 이거 갖고 일 년은 무리잖아. 아니, 그 전에 날 일 년이나 여기 가두겠다고?’
기가 막혀서 1층으로 내려갔다. 이 별장은 계단이 개방되어 있지 않고 복도식으로 되어 있는 데다 1층에 문이 있어 그걸 열어야 1층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역시 그 문도 잠겨있었다. 보기엔 전처럼 평범한 문고리였지만 잠긴 걸 확인하느라 조금 흔들었더니 금방 문 반대편에서 인기척이 났다.
“도련님이십니까?”
굵은 남자 목소리였다.
“회장님께서 당분간 도련님을 내보내주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속을 누르며 태오가 물었다.
“언제까지?”
“회장님의 다음 명령이 있을 때까지입니다.”
태오는 문고리를 노려보았다. 이걸 발로 차서 부술 자신은 있었지만 그 다음 일을 어떻게 할지는 그도 자신이 없었다.
1층에 저런 경호원이 몇 명일지, 대문은 어떻게 통과해야 할지 아직 제대로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2층을 훑어보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을 관찰하며 창에서 뛰어내려 대문까지 달려가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계산해보기도 하고, 데스크탑이 있는 걸 보고 켜보기도 했다. 인터넷 연결이 없었다.
고민 끝에 침실로 돌아와 유선 전화기를 노려보았다.
이게 보통의 유선전화기처럼 안전할 거라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왕윤 선배에게 이걸로 전화해봐야 도움을 얻을 수는 없을 게 뻔했다.
눈빛으로 전화기를 부숴버리고 싶은 사람처럼 전화기를 노려본 끝에, 수화기를 들고 할아버지의 번호를 눌렀다.
이제쯤 전화하리라고 예상하신 건지 할아버지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이제 일어났냐. 어지럽거나 몸 불편한 데는 없고?
“장난합니까?”
태오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수면제 부작용이 걱정되면 먹이지를 마시든가요! 이건 납치에 불법감금입니다!”
-사정이 그렇게 됐다.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짜증날 정도로 차분했다.
-너는 동탁을 체포할 수 없어. 공연히 너만 다칠 뿐이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시는데요?”
-너한테는 말해줄 수 없는 문제다.
“뭐라고요?”
-나도 이렇게 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다른 수가 없었어. 말로 설득하려고 하면 넌 절대로 들어먹지 않고 멋대로 뛰쳐나갈 테니까.
“당연하죠.”
태오가 쏘아붙였다.
“유치원생한테도 이렇게는 안 합니다. 왜 경찰이 범죄자를 체포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건지 말로 설명을 해주시면 될 것 아닙니까?”
-설명해도 넌 이해하지 못할 거다.
조등의 목소리엔 드물게 난처한 기색이 섞여있었으나 태오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절 정말 여기 일 년이나 가둬두실 겁니까?”
-휴직은 넉넉잡아 1년 시켰다만 그보다 일찍 사정이 바뀌면 당연히 일찍 꺼내줄 거다.
“그 사정은 어떻게 해결되는데요?”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다.
조등의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변했다.
-허튼 짓 말고 기다려라.
전화가 끊기고 뚜뚜 하는 맥없는 신호음만 들려왔다. 태오는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동탁이 아무리 위험한 범죄자여도 그렇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다 큰 어른을 잡아 가두는 건 상식적이지도 않고 할아버지답지도 않았다. 차라리 매끄러운 논리와 자신은 뒤쳐질 수밖에 없는 경험 등을 내세워 설득하는 편을 더 좋아하는 양반이었다.
게다가 동탁과 곰돌이패밀리가 뭐 그리 대단해서?
경찰에서 알아본 바로는 여느 범죄조직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보석 밀거래로 한때 악명을 떨쳤으나 동탁의 구시대적 1인 독재 운영으로 지금은 많이 쇠락한 조직이었다.
문득 부하 둘을 붙잡고 날아가던 동탁의 모습이 떠올랐다.
‘설마 동탁은 인간이 이길 수 없는 초능력자라도 된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잡으려고 해봐야 지난번처럼 될 뿐이라고?’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한동안 다시 전화기만 노려보던 태오가 결국 왕윤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이번에는 조금 오래 걸렸다. 그러나 선배님 목소리를 듣자 반가운 나머지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여보세요.
“선배님, 저 태오입니다.”
-태오야? 너 지금 괜찮니?
왕윤은 당황한 목소리였다.
-휴직 처리됐단 소식 들었다.
“제가 낸 휴직계가 아닙니다.”
태오가 서둘러 설명했다.
“이게 뭡니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져서 제가 납치 감금을 당해야 합니까?”
-납치 감금이라고?
“할아버지 짓입니다. 대체 왜죠? 동탁이 초능력 괴인이라서 인간인 저는 손쓸 수 없다 이겁니까?”
-......일단 좀 진정해라.
왕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쁜 건 할아버지와 동탁인데 선배님께 화풀이한 것을 깨닫고 태오는 기분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전화는 어떻게 할 수 있는 거냐? 아니, 너 지금 괜찮냐?
“별장이라 몸은 편합니다. 이건 여기 있는 유선 전화기고요.”
왕윤도 그 정도 설명으로 충분히 파악한 것 같았다. 상황을 정리해보는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도 바로 가서 도와주고 싶다만.
왕윤이 굉장히 미안한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했다.
-지금 내가 구하러 가겠다고 해봐야 소용없다는 거 너도 알지?
“압니다.”
태오가 다시 이를 갈았다.
“하지만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전엔 이렇게까지 하신 적은 없습니다. 왜 제가 수사에 나서면 안 되는지 이유라도 알아야겠습니다. 설마......”
태오도 이런 질문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남은 가능성이 하나뿐이었다.
“조위그룹이 곰돌이패밀리와 연관 있는 겁니까?”
-그건 아니야.
왕윤이 딱 잘라 대답했다.
-회장님 들을까봐 하는 소리가 아니야.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
“그럼 대체 뭐가 문제인 겁니까? 위험해서라면, 저 말고 다른 경찰은 위험해도 됩니까?”
-태오야.
왕윤이 다독였다.
-기회 닿는 대로 나도 회장님을 설득해보마. 과격한 짓 하다가 다치지 마라.
별로 과격한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힘으로라도 여길 탈출할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고 있을 뿐.
잠시 둘 다 조용해진 사이 수화기 너머가 소란스러워졌다. 태오가 기겁했다.
“사건입니까?”
-별 건 아닐 거다. 다음에 다시 전화하자.
왕윤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태오는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방금 온 연락이 꼭 큰 사건이라고 정해진 건 아니었다. 대단찮은 사건, 동탁과 무관한 사건, 아예 다른 부서의 소란이 열린 문을 통해 들려왔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 계속 갇혀있을 순 없지.’
할아버지가 먼저 폭력을 썼으니 그대로 갚아주는 것뿐이었다. 태오는 다시 한 번 2층 전체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14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다음날 출근한 왕윤은 태오가 휴직 처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집안 빽이라고 수군대고 있었다. 위험한 일 맡았다고 집안이 나서주다니 좋으시겠다고, 다른 누구보다 태오가 듣기 싫어할 소리들을 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왕윤도 부하들에게 그런 말 말라고 잔소리하는 것 외엔 아무 조치도 할 수 없었다.
동탁이 평범한 악당 두목이었다면, 혹은 조등의 이름이 전설의 이름이 아니었다면 전처럼 과보호라고 화낼 수 있었을 것이다.
태오에게 연락해서 위로라도 해주거나, 이렇게까지 하는 건 너무 심했다고 조등을 설득할 수도 있었다. 사실은 이제까지도 태오 모르게 조등과 긴 대화를 해본 적이 가끔 있었고, 항상 소득 없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이번만은 조등이 옳았다. 이것이 태오를 위해서도 최선이었다.
‘내가 빨리 동탁을 잡는 수밖에 없어.’
동탁 말고도 군주로 의심되는 범죄자는 몇 있지만 이렇게 조직을 등에 업은 경우는 동탁뿐이었다. 동탁만 제거해도 태오와 다른 경찰들이 겪을 위험은 크게 줄어들었다.
지금도 왕윤은 들어오는 모든 신고 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군주를 보통 경찰이 맞닥뜨렸다가 다치는 일을 막기 위해, 언제라도 직접 뛰어나갈 준비를 한 채였다. 마침 오늘은 관할의 어느 공원에서 봄맞이 축제 중이어서 더 신경이 쓰였다.
작은 규모의 동네 축제라 원래 강력계인 그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언제 어떤 군주가 나타나 선량한 시민들 상대로 소동을 일으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과연, 곧 무전기가 잡음과 함께 사건 소식을 뱉어내었다.


공손찬과 유비는 어디까지나 축제를 즐기러 간 것이었다.
간 김에 도원관 전단지를 잔뜩 돌리고 아이 데리고 나온 부모가 보이면 쫓아가서 따로 인사하는 등으로 녹초가 되긴 했지만, 적어도 거기서는 잠시 드림배틀을 잊고 상쾌한 날씨나 아기자기한 부스에 더 신경을 쏟을 수 있었다. 영웅패들도 인간들의 축제가 신기한지 구경에 정신이 팔렸다.
“공손찬, 저기 좀 봐봐.”
“뭔데?”
과자 사달라는 소리면 전단지 다 돌린 뒤에나 된다고 말할 생각으로 공손찬이 유비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저 펀칭 게임 도전해보면 어때?”
먹거리 부스가 아닌 오락 부스였다. 평범해 보이는 펀칭 기계가 있고 그 옆에는 화려한 플라스틱 케이스에 든 보석 반지가 반짝였다. 말이 좋아 화려한 거지 문방구에서 파는 장난감 반지 케이스처럼 유치한 장식 탓에 보석의 존재감이 묻힐 정도였다.
“저런 거 다 모조품이야. 큐빅이라고.”
‘참가비 천원’이라는 현수막을 보고 공손찬이 시큰둥한 표정을 했다.
“참가상은 무조건 증정이라고 해봐야 뭘 증정하는지도 안 써져 있고. 보나마나 천원 미만 가격일걸.”
“그치만 사람들 꽤 몰려 있잖아.”
유비는 펀칭 기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미 몇 사람이 도전해서 실패하자 부스 뒤편으로 참가상 받으러 사라진 차였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도원관 사범이 펀칭으로 만점 받았다고 하면 그것도 선전되잖아? 저 커다란 아저씨도 못 받았는데.”
“아.”
그건 공손찬도 솔깃했다.
“좋아. 어디 해봐.”
공손찬이 지갑에서 천원을 꺼내 유비에게 내밀었다.
“어디 수련의 성과를 보여주도록.”
“옙, 사범님.....아니, 나도 사범인데.”
유비가 중얼중얼하면서 천원을 들고 진행자 앞으로 나섰다. 마술사처럼 분장한 진행자가 돈을 받아들고 유비를 펀칭 기계 앞으로 이끌었다.
“엄, 도원관 사범 유비입니다! 만점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유비가 힘차게 외쳤으나 멋있어 보이기보다는 귀여워 보였다. 사람들도 피식피식 웃을 뿐 정말 만점을 기대하는 눈빛은 전혀 아니었다.
영웅심이 증폭되어 이전과는 다른 괴력을 지녔음을 아는 공손찬까지도 실은 정말 만점을 받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유비가 팔과 어깨를 가볍게 휘둘러 풀고 기계 앞에 섰다. 그리고 엄숙하게 자세를 잡아 펀칭 볼을 내리쳤다.
“만!”
기계 위에 달려있던 작은 박이 터지며 색종이 가루를 뿌렸다. 진행자도 놀란 듯 굳어있다가 허둥지둥 경쾌한 축하음을 틀었다.
“예, 굉장하군요! 축하드립니다!”
유비도 신이 나서 포권을 하고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구경하던 사람들도 박수를 쳤다.
“이제 반지 받아가면 되죠?”
“아, 그렇지요. 잠시만요......”
허둥거리며 부스 뒤편을 흘끔이는 진행자를 보고 공손찬도 나섰다.
“여기 이거죠? 정말 감사합니다~”
설마 큐빅 반지 가지고 못 준다고 딴소리하랴 싶으면서도 공손찬은 덥석 반지부터 집어들었다. 천 원짜리라도 야바위는 당하기 싫었다.
“그게 말이죠. 양도증서를 작성하셔야 해서요.”
“양도증서요?”
진짜 보석반지였단 말인가. 놀란 공손찬이 머뭇거리는 사이 유비가 끄덕였다.
“예, 어떻게 하면 돼요?”
“이리 오시죠.”
역시 뒤쪽 문으로 안내하는 걸 보고 공손찬은 일단 유비와 함께 따라가며 반지 상자를 단단히 쥐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부스 뒤편도 다른 부스들과 똑같이 비닐 포장을 쳐서 만든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리로 들어가는 순간 영웅패들이 다같이 기겁해서 튀어나왔다.
“주군, 여기 군주가 숨어있.....”
숨어있는 게 아니라 당당히 무기를 든 채 버티고 있는 적을 보고 셋 다 말문이 막혔다.
“오, 노! 어떻게 코앞에 군주가 있는데 몰랐지?”
비명 지르는 조운을 공손찬이 냅다 체인저에 꽂았다. 유비도 관우를 체인저에 꽂았다.
“감히 너희 같은 놈들이 내 보석을 진짜로 가져가려고?”
커다란 곰 같은 군주가 대뜸 기관총을 쏘아댔다. 좁은 부스 안이라 둘 다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나뒹굴었다.
유비가 서둘러 장비로 다시 변신했다. 공손찬은 천막을 찢으려고 유니콘 스피어를 내질렀으나 비닐 포장에 에너지막이 덧씌워져 있었다.
“별로 강하진 않습니다. 위장용 결계일 뿐이에요!”
조운의 외침에 공손찬이 유니콘 엔진을 충전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유비가 장비의 버클러로 탄환을 막아냈다.
“이것들이!”
동탁이 기관총을 놓고 직접 유비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버클러로 막았으나 충격은 그대로 전해졌다.
“조운질풍타!”
유비가 위험한 걸 보고 공손찬이 충전된 스피어를 동탁에게 내질렀다. 그도 피하려 했으나 옆구리에 스치자 중심을 잃었다.
“크억!”
유비도 버클러를 도끼로 바꾸어 휘둘렀다.
‘이대로 이길 수 있....’
순간 동탁이 민첩하게 몸을 뒤집어 공손찬에게 기관총을 쏘았다. 피하기엔 너무 가까워 정통으로 맞고 말았다.
“공손찬!”
그것도 아까처럼 탄환이 날아와 맞은 게 아니라 기묘한 광선이 공손찬을 맞춘 채 계속 쏘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아니, 뭔가 빨려나가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유비가 공손찬을 붙잡고 무작정 달아났다. 역시 좁아서 달아날 여지가 없는 걸 보고, 아까 공손찬이 스피어로 쳤던 곳을 노려서 장비의 도끼로 다시 한 번 내리쳤다. 과연 이번엔 버티지 못하고 비닐 포장과 결계가 한 번에 찢어졌다.
‘장비 진짜 세구나.’
살짝 감탄하며 공손찬을 부축하고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곳은 아까까지 돌아다니던 시끌벅적한 공원이었다. 사람들이 놀라서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유비의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주군, 뒤!”
장비의 외침에 유비가 급히 몸을 굴렸다. 기관총에서 나온 광선이 유비의 등을 스치고 그 사람들 중 한 명에게 맞았다.
그저 어리둥절해 있던 사람들이 그걸 보고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동탁은 그들에게 거리낌없이 총을 겨누었다.
숨을 것도 없이 탁 트인 곳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미처 깨닫지도 못한 사람들이 제대로 피할 재주는 없었다. 한가하던 동네 축제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공손찬, 정신차려.”
그나마 이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과 공손찬뿐이었다. 유비가 열심히 흔들자 공손찬도 정신이 들었다.
“저 기관총으로 내 영웅심을 빼앗아갔어.”
공손찬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용기 역시 영웅심의 일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장비의 버클러엔 막힐 거야. 둘이 서로 반대쪽에서 덤벼보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안 돌아가는 머리를 쥐어짜 유비가 제안하자 공손찬이 수긍했다. 어차피 지금 다른 수도 없었다.
제일 먼저 유니콘 스피어를 다시 충전했다. 동탁의 검은 코트는 역시 배틀 슈트인지 공격을 쉽게 흡수했다. 약한 공격은 듣지 않을 것 같았다.
“자, 그럼 흡수한 영웅심으로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볼까?”
동탁도 때마침 다시 두 사람에게 주의를 돌렸다.
기관총이 이번엔 다시 탄환을 쏟아내었다. 버클러로 막을 수는 있었지만 방패를 내민 그 자세에서 다른 동작을 취할 수가 없었다. 장비는 조운처럼 움직이기엔 갑주가 지나치게 무거웠다.
그 사이 공손찬이 반대쪽에서 동탁을 노리고 창을 찔러들어갔다.
“흥!”
동탁은 기관총을 들어 창을 막았다. 그 틈에 유비도 달려들었으나, 동탁이 더 빨랐다. 미처 도끼로 전환하지도 못한 버클러를 건틀릿으로 막아내고 두 사람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다시 기관총을 쏘아댔다.
공손찬이 버클러 뒤로 피했다. 이번엔 둘 다 어떻게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쩌지?’
순간 사격이 멎었다.
“에잉......”
동탁이 기관총의 탄창 부분을 붙잡았다. 장각도 기관총의 탄창 용량을 늘려주지는 않았다.
새 탄창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영웅심으로 탄창을 다시 채우는 것에 보통 직접 갈아끼울 때와 비슷한 정도로 시간이 걸렸다.
“이때다!”
유비와 공손찬이 다시 덤벼들었다. 먼저 도달한 공손찬이 내지른 창에 맞고 동탁이 뒤로 쭉 밀려났다.
유비도 도끼를 휘둘렀다. 자세를 고치기 전 공격해서 동탁의 무게중심을 무너뜨리고, 다시 내리치려고 도끼를 번쩍 든 순간 동탁이 그에게 영웅심 흡수 광선을 쏘았다.
“컥!”
단순한 통증 이상의 끔찍한 감각이었다.
휘청이는 유비를 공손찬이 붙잡고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광선이 아니라 무슨 끈이라도 날아와 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데리고 달아나야 하나?’
이대로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차라리 다음을 기약하는 편이 안전할지도 모른다.
그럴 틈을 재기 위해 동탁을 돌아보는데 그의 뒤에 거대한 도끼창이 나타났다.
‘응?’
공손찬이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에 그 도끼창이 동탁을 내리찍었다.
“크헉!”
동탁도 이번엔 속절없이 뻗었다. 덕분에 광선 공격도 멈추고, 공손찬도 유비를 붙잡고 물러날 틈을 얻었다.
그리고 보았다.
TV에서나 보던 대형 모터사이클을 사람으로 형상화한 것 같았다. 굵은 파이프가 열기를 내뿜고, 붉은 갑주가 둔탁한 금속빛으로 번들거렸다.
‘동탁의 적.....인가?’
새로 나타난 군주의 정체를 알 수 없으니 뭘 어찌할 수도 없었다. 공손찬은 그저 아까의 유비가 그랬든 유비부터 열심히 흔들어 깨웠다.
“네놈은 또 뭐냐?”
동탁이 그 군주에게도 기관총을 쏘았다. 그러나 탄환은 그에게 별 타격도 안 되는 것 같았다.
동탁은 기관총을 다시 영웅심 흡수 모드로 바꾸려 했지만, 이번엔 그럴 틈도 없이 도끼창에 찍혔다. 받아내려 해도 동탁이 힘에서 밀렸다.
“뭐, 뭐냐, 넌?”
동탁도 이제는 두려운 기색이 되어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새 군주는 묵묵히 동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 모습이 동탁과 공손찬, 유비 모두에게 거대해 보였다.
“보스!”
곰돌이 가면을 쓴 인간 몇이 달려왔다. 도끼창 든 군주의 서슬에 늘려 가까이 오지는 못한 채 외쳤다.
“빨리 달아나야 합니다! 경찰 기동대가 왔어요!”
그 말에 동탁과 그 군주 둘 다 기색이 바뀌었다.
동탁이 부하들을 따라 달아났다. 새로 나타난 군주는 그 뒤를 쫓으려다가 유비와 공손찬을 돌아보았다.
“아, 저흰 괜찮으니까 어서 쫓아가세요.”
해맑게 대답하는 유비의 옆구리를 공손찬이 꼬집으려 했으나 장비의 갑주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너희는 뭐냐?”
묵직하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군주 본인의 목소리라기보다 영웅패의 영향으로 변조된 목소리 같았다.
“어......”
뭐라 답해야 좋을지 고민하는 유비를 붙잡고 공손찬이 뒤로 돌아 그냥 뛰었다. 장비가 무겁긴 해도 조운이 잡아끌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공원 밖까지 달아났다. 다행히 도끼창 군주든 누구든 쫓아오는 기색은 없었다.
그러나 안도하기는 일렀다. 정말로 사이렌 번쩍거리는 경찰차들이 공원을 포위하고 기동대원들이 주위를 수색해가며 진입하고 있었다.
“일단 변신 풀자.”
지금은 복면 괴인이지만 군신일체를 해제하면 그냥 동네 청년 1, 2일 뿐이었다. 과연 변신 푼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친 기동대원은 동료들을 보고 외쳤다.
“여기도 피해자들 두 명 있습니다!”
곧 구급대원 둘이 달려와 유비와 공손찬을 그들 쪽으로 이끌었다.
“저, 저희들 안 다쳤는데요.”
공손찬이 사양해 보았다.
“두 분 다 얼굴이 백짓장인데요?”
구급대원이 별 소리 다한다는 듯 대꾸했다.
“혹시 본인도 모르는 부상이 있나 봐야 하니까 이쪽에서 일단 좀 쉬세요. 연락처랑 신분 확인되면 치료비 지원도 될 겁니다.”
일단 끌려가면서 유비와 공손찬이 서로 마주보았다. 그리고 수긍했다.
“......응, 지금 유비 너 얼굴이 말이 아니다.”
“공손찬 너도 그래.”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13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지원팀은 복면 괴인과 마주치지 않았다. 무사히 늦지 않게 도착해서 부상한 순경들을 실어가고 태오가 쓰러뜨린 동탁의 부하들도 체포해갔다. 태오 자신도 몇 군데 멍이 든 것으로 끝났다.
휴게실에 앉아서 이제 보고서를 뭐라고 쓸지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동탁 일당의 움직임을 어떻게 그렇게 빠르고 정확하게 알아냈는지부터 자세히 적어야 했다.
전에 뻔한 부분은 적당히 줄여서 쓴 보고서를 냈더니 상부에서는 ‘한 번 슥 보고 어떻게 거기까지 알아내냐. 감으로 때려맞춘 걸 포장하지 마라.’라고 답했다.
행인지 불행인지 상부에 태오를 오냐오냐 하는 아첨꾼만 있는 게 아닌 덕이었다. 세상 모르는 도련님이 괜한 만용으로 물만 흐린다며, 싫어하는 사람들은 또 벌레 보듯 싫어했다.
‘그렇다고 자기들 무능한 것까지 나한테 덮어씌우고 난리야.’
태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고민거리는 또 있었다.
동탁 일당을 어떻게 쫓아갔는지 말고도 보고서에 써야 할 내용이 있었다. 마침내 따라잡은 동탁을 어쩌다가 놓쳤는지라든가.
총까지 든 경찰들을 혼자 간단히 무찔러 버리는 건 동탁이 특출나게 강한 인간이라 그랬다고 설명할 수 있지만. 세상은 넓으니 그런 인간도 어쩌다 한 번은 나타난다지만.
‘도로 건너편이었다고? 양팔에 사람까지 하나씩 끼고 있었다고?’
차라리 잘못 봤다고 믿고 싶었다. 완강기를 탔든 곤돌라를 탔든 10층 옥상에서 안전하게 사라질 수단이 있었던 것이고 자신은 백일몽을 꾼 것이라고.
계단에서 본 두 명의 복면 괴인도 동탁의 도주를 도우러 온 끄나풀들이라고.
‘......그런 거겠지?’
찜찜하지만 눈앞에서 사람이 훨훨 날았다는 이야기보다는 받아들이기 쉬웠다. 보고서에 쓰기도 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본 건 뭐란 말인가.
거기서 생각이 더 나가지 못해 시간만 헛되이 보내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할아버지]
잠시 씹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무작정 씹었다가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보고 그냥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난번 얼굴 좀 긁혔다고 난리난 게 할아버지의 직접 지시가 아니었다고는 믿지만, 자신은 어쨌든 폭력 조직과 충돌하고 난 직후였다. 전화도 못 받을 정도로 큰일난 상태라고 오해 사고 싶지 않았다.
-태오냐.
“무슨 일입니까, 저 바쁩니다.”
조등은 삐딱한 전화 예절에 잔소리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곰돌이패밀리와 충돌이 있었다고 들었다. 보스를 봤냐?
태오는 손가락을 까닥이며 망설였다.
아버지와 달리 할아버지는 자신의 사건까지 간섭하는 법은 없었다. 곰돌이패밀리도 그룹과 아무 관계도 없었다.
-동탁과 싸웠냐?
“예.”
할아버지니까 허튼 잔소리나 하려고 전화하신 건 아닐 거라고 믿었다. 폰 너머로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일단 기다렸다.
-......별 문제는 없었고?
“없었습니다.”
할아버지인들 불곰 인간으로 변신해 괴력으로 훨훨 날아다니는 악당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으실 리 없었다. 태오는 눈도 깜짝 않고 거짓말했다.
-그랬단 말이지.
할아버지의 말투에서 서늘한 기운을 감지하고 긴장했다.
-그럼 이 할애비가 굳이 정보를 주지 않아도 알아서 다 할 수 있겠구나?
태오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는 손자를 혹하게 만들 자신 있는 뭔가를 갖고 계실 때였다.
“조건이 뭡니까.”
-전화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이런 뻔한 이야기로 태오를 만나서 제발 경찰 그만두라고 조르곤 하셨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한 번도 그러신 적 없었다.
-00호텔의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내일 오후 5시까지 와라.
“알겠습니다.”
전에 원소에게 들은 말을 떠올리며 순순히 대답했다.
수사에 그룹의 힘을 빌리기는 싫지만 답이 안 나오는 문제에 갑갑하던 차였다. 대형 범죄 조직은 경찰도 제대로 상대하기 힘들었다.


보고서엔 결국 동탁이 어떻게 도주했는지 못 봤다고 썼다. 다른 부상한 동료들과 잡은 놈들을 챙기느라 바빴다고 핑계를 대고, 제발 다시 써오라는 말만 없기를 바랐다.
“태오야.”
왕윤 선배님의 부름에 어깨가 빳빳해졌다. 역시 선배님 보시기에도 허술한 보고서인 모양이었다.
“아직도 안 가고 있었어? 크게 다치지 않았어도 이럴 땐 쉬는 거야.”
왕윤은 걱정부터 했다. 태오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오늘은 당직 서려고요.”
선배의 눈이 커지는 걸 보고 태오가 얼른 말을 이었다.
“내일 일찍 퇴근해야 해서 그럽니다. 할아버지께서 부르셔서요.”
“아.”
왕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표정을 펴지 못했다.
“왜 갑자기 부르시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오늘 제가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하니 가보려고요.”
“그래.”
어쩐지 선배님의 태도가 건성이었다. 이번엔 태오 쪽에서 물어보았다.
“오늘 뭐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었습니까?”
“아, 곰돌이패밀리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왕윤이 태오를 달래려는 듯 웃음지었다.
“경찰이 약한 소리 한다고 실망하지는 마라. 그런 대형 폭력 조직은 쉽게 뿌리뽑히지도 않고 경찰을 두려워하지도 않아. 조심해서 접근하지 않으면 경찰이 다친다.”
“실망하지 않습니다.”
태오가 힘주어 답했다.
“저도 그 정도로 물정 모르지는 않습니다. 조심하는 게 당연하죠.”
“허.”
왕윤이 헛웃음을 뱉었다.
“그걸 알면서 적의 보스를 혼자 쫓아가?”
동료들이 태오의 예측을 무시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도 했지만 왕윤은 일부러 모른 척했다. 무모했던 건 무모했던 거고 태오도 동료들에게 먼저 굽히고 들어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게다가 자신의 짐작이 맞다면, 보통의 경찰들은 동탁 추적에 적당히 실패하는 편이 성공하는 것보다 더 나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덕분에 부하는 여럿 잡았습니다.”
“네가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었어.”
왕윤의 목소리가 엄해졌다.
“안 되겠다. 내일 퇴근도 내가 알아서 처리해줄 테니 오늘 당직 서지 말고 집에 일찍 가서 쉬어.”
“선배님.”
“이건 영화가 아니야.”
왕윤은 엄한 기색을 풀지 않았다.
“정의를 위해 목숨 바치는 게 경찰이 아니다. 경찰도 사람이고,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는 게 정의야.”


“참나, 완전 무적이 되게 해주는 힘이라면서!”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온 동탁이 투덜거렸다.
드림 배틀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이 엄청난 힘을 일반인들은 감히 따라갈 수 없다는 점이 더 굉장했다. 첨단 보안 장치도 화웅의 힘 앞에선 소용없었다.
변신한 군주도 아닌 애송이 경찰 하나에게 쩔쩔맨 것이 그래서 더 속쓰렸다.
“그래도, 그놈도 결국 변신한 보스 앞에선 별 수 없지 않았습니까.”
부하가 듣기 좋은 소릴 했지만 그냥 아부일 게 뻔했다. 처음 화웅의 힘을 보고 경탄했을 때와는 목소리부터 달랐다.
“그놈 누군지 알아내.”
“옛!”
그렇게 대단한 놈이니 회유할 가치는 있었다. 그 자리에선 거절당했지만, 어차피 경찰을 회유하는 건 말 몇 마디로 되는 게 아니었다.
신상을 탈탈 털어 원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소중히 여기는 것을 알아낸 다음 협박과 회유를 적절히 섞어가며 괴롭혀 지치게 만들 작정이었다.
원하는 것은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였다.
저택의 응접실에 들어간 순간, 동탁은 그곳이 비어있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누구냐?”
응접실은 동탁이 부하들을 모아놓고 명령을 내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동탁만이 앉을 수 있는 중앙의 크고 화려한 안락의자에 웬 깡마른 남자가 기대 누워 있었다.
부하들도 당황하고 분노한 기색이 되었다. 철컥철컥 총의 안전장치 푸는 소리에 동탁이 일단 손을 들어 진정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군주로서의 감각으로 눈앞의 인물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금방 눈치챘다. 영웅패를 건네줬던 신선과 느낌이 비슷했다.
그러나 신선이라고 쉽게 확신할 수도 없었다. 새까만 옷차림에 폭발한 듯 사방으로 뻗은 분홍색 머리, 스팀펑크 풍 코스프레로밖에 안 보이는 복잡한 고글은 단순히 괴상한 패션 이상의 불길한 기운을 뿌리고 있었다.
동탁과 눈이 마주친 그가 요란한 동작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일어나려는 건가 했는데 그냥 방향을 바꾸어 다시 누웠다.
“뭐하는 놈이냐?”
동탁이 다시 질문하며 화웅을 꺼내들고 군신일체했다.
그 모습을 보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놈에게 부하들이 먼저 달려들었다. 그러나 제대로 공격하기도 전에 다들 꼼짝 못하고 멈춰섰다.
그 인물이 무기를 꺼내거나 뭔가 특별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다. 부하들도 함정 같은 걸 발견해서 멈춰선 게 아니라 그냥 영화 화면을 정지해놓은 것처럼 굳어 있었다.
안락의자의 인물이 한 손을 들어 오른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부하놈들도 몸을 오른쪽으로 홱 돌렸다.
왼쪽, 다시 오른쪽, 마치 광대처럼 과장된 동작으로 그 인물이 하는 지휘에 따라 부하들이 꼭두각시처럼 움직였다.
동탁도 여기에는 당황해서 꼼짝 못하고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그 괴상한 인물을 화웅의 베어 머신건으로 겨누었다.
“영웅패 화웅.”
자신을 향한 총구를 바라보며 그 인물이 긴장감 없는 말투로 읊조렸다.
“괴력을 이용한 근거리 공격과 기관총을 이용한 원거리 공격 둘 다 강력하고, 내구성과 지구력까지 좋지. 문제는 그보다 더 강한 영웅패들도 얼마든지 있다는 정도? 관우라든지 태사자라든지. 그것들도 이미 군주를 얻어 인간계에 나왔거든. 아, 안량도 나왔군.”
“신선이냐?”
“신선이냐고? 아하하하~”
그 질문이 뭐가 그렇게 웃긴지 손뼉까지 치며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기세로 웃어댔다. 긴장감 없어보이는 행동이었지만 부하들이 코러스처럼 놈을 따라 웃어댔다. 여전히 조종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 신선이지. 그것도 다른 어느 신선들보다도 똑똑하고 영리한 신선. 그런 나머지 이 고생이긴 하지만, 댁을 승리자로 만들어줄 수는 있어.”
신선이 한 손을 들어 휘두르자 부하들이 전부 실 끊긴 꼭두각시처럼 와당탕탕 넘어져 버렸다.
“내 이름은 장각.”
여전히 자신을 겨누고 있는 기관총이 전혀 두렵지 않은 것처럼 장각이 느릿느릿 일어나서 동탁에게 다가왔다.
“흐음, 이걸 좀 손보면 어떨까?”
그리고 다음 순간 베어 머신건은 장각의 손에 들려 있었다.
놀란 동탁이 주먹을 날리려 했으나 장각은 동탁을 공격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손에 쥔 무기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동탁도 있는지조차 몰랐던 스위치들을 누르고, 오각형의 수상한 금속 조각을 끼웠다.
“자!”
그리고 동탁에게 바로 돌려줘 버렸다.
“이 장각님의 특별 개조 서비스!”


밑바닥에서부터 고생 끝에 출세한 조등 회장이지만 취향은 고상하고 안목도 뛰어났다. 손자를 초대한 레스토랑도 그런 그의 안목에 어울리는 수준 높은 곳이었다.
태오는 결혼식 때보다도 더 신경써서 차려입고 긴장해서 그 자리에 나왔다.
할아버지는 평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딱히 긴장한 기색도 없었다.
“엄청난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생각해서 온 거냐?”
느긋하게 테이블에 앉은 조등은 곰돌이패밀리 같은 것 잊어버린 듯이 보였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지는 기분이라 태오도 긴장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나도 네가 경찰로 사는 게 좋지는 않아.”
마치 명절 덕담 같은 분위기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다 큰 손자가 어떻게 살든 간섭해봐야 나만 옛날 늙은이가 되겠지. 그래도 손자가 저 죽을 줄 모르고 위험에 뛰어드는 것까지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일 아니냐?”
“그 정도까지 위험한 건 아닙니다.”
태오가 반론했다.
“그래? 동탁을 직접 만나기까지 했는데 그렇더란 말이지?”
“예.”
도로 건너편으로 날아가던 동탁의 모습을 잊으려 애쓰며 그렇게 대답했다.
사실은 그걸 설명할 수 있는 어떤 단서를 할아버지께서 갖고 계신 건 아닌가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와 똑같아 보이는 할아버지를 마주하고 보니 도저히 그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놀림이나 당하면 다행이고 ‘그런 헛것을 보다니 역시 내버려둘 수 없구나. 집에 가자.’라고 하실 것만 같았다.
‘어차피 정말 동탁의 마술이 어떻게 된 건지 할아버지도 알고 계시다면 먼저 운을 띄우시겠지.’
코스는 짧고 간단한 편이었다. 메인 디시가 끝나고 디저트가 나올 때까지 조등은 가벼운 한담이나 일상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조바심이 난 태오가 먼저 이야기를 되돌렸다.
“곰돌이패밀리에 대해 뭔가 하실 말씀이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래, 그랬지.”
조등이 말을 받았다.
“구시대적인 집단이지. 동탁의 취미 생활이나 다름없는 조직이야. 팔아치우기도 힘든 비싼 보석을 수집하질 않나, 패밀리는 다 한 가족이라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 않나. 그런 것에 넘어가 봐야 보스에게 이용당할 뿐인 것을.”
“압니다.”
“사람 부리는 일에 물론 그런 사탕발림이 빠질 수는 없지. 정이니 의리니 하는 것. 그런 토대에서 신용이 쌓이기도 하고. 하지만 세상이 그것만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사탕발림은 사탕발림으로 끝내야 해. 디저트에 시럽을 뿌린다고 해서 시럽만 먹고 사는 사람 봤니?”
‘그래서요?’라고 되물을 뻔했다.
애정도 선의도 그걸 뒷받침할 힘 없이는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이야기 어려서부터 몇 번 들었나 기억도 나지 않았다. 차라리 집에서 먹은 밥공기 수를 기억할 일이었다.
“동탁도 분명 마피아 영화 흉내는 오래 가지 않을 거다. 흉악하고 비열한 면모를 드러내겠지. 부하들에게 아무리 존경과 신뢰를 사 봐야, 그런 자에게 신용은 배신할 때를 위한 포석이거든.”
조등이 시계를 보았다. 두 사람 다 접시는 그럭저럭 비운 차였다.
“슬슬 일어나자.”
“하실 말씀은 그게 다입니까?”
태오가 못 참고 재촉했으나 조등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먼저 일어났다.
“네 성질 급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할아버지 닮아서 그런가봅니다.”
태오는 일어나다가 의자 다리에 발이 걸려 휘청거렸다.
평소같으면 금방 다시 중심을 잡았을 텐데, 이번엔 테이블을 손으로 짚어야 했다.
“안타깝지만 세상 만사가 다 그래.”
조등이 다가와서 그를 부축했다. 태오는 밀어내고 똑바로 서려 했지만 팔에서도 힘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평소에 신용을 쌓고 좋은 관계를 만들어봐야, 가족간에서조차 결정적인 순간 뒤통수를 칠 자산이 될 뿐이라니.”
그게 뒤통수치는 인간이 할 소리냐고 항의하고 싶었다.
그러나 목청은 텅 비어버리고 눈앞마저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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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각의 첫 등장씬은 사실 원작 그대로지요. 그렇다고 그걸 생략할 수야 있나요.

세계의 중심 62 ㅣ- 회색도시&검은방



하무열이 시키는 대로 여관을 빙 둘러 여기저기에 마법을 걸고 난 류태현은 지쳐서 하무열의 침대에 픽 쓰러졌다.
“자려면 네 방에 돌아가서 자라.”
“자려는 게 아니라요....”
류태현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 어떤 놈들한테 위협받고 있는 거에요?”
“티났냐?”
“마법을 거는 게 전데 탈주를 막는 건지 침입을 막는 건지도 구별 못할 거라 생각하신 거에요?”
류태현이 볼멘 소리를 냈다.
“아니 그건 아니다만....”
하무열이 침대에 와 류태현 옆에 앉았다.
“백선교인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저희 방과 여기에 방어가 집중되어 있으니까요.”
“그냥 경계를 하려는 거야. 수도에 백선교도가 없을 리 없으니까.”
하무열이 변명했다.
“단지 그것 뿐이요?”
“공짜 노동력 부려먹었다고 뭐라고 하게? 걱정 마라, 네가 어떤 마법을 얼마나 썼는지 다 기록해서 과외 활동 명목으로 권현석 교수님한테 제출할 거니까. 방어 결계는 네 전공이지? 실습 점수에 보태질 거다.”
“감사합니다.”
류태현이 조금 떨떠름하게 인사했다.
“자기 애인 지키면서 점수를 따다니 이거 요새 말로.... 그, 개나리꿀?”
“교수님은 개그 욕심은 버리시는 게 좋겠어요.”
자기 개그 센스도 오십보 백보면서 류태현이 냉정하게 말했다.
“어허, 제자가 되어서는 스승의 개그를 까다니. 웃기지 않은 개그에 웃어주는 게 사회생활 첫걸음인 걸 몰라?”
“전 마법사라 사회생활 할 필요 없거든요.”
“이 녀석이.”
요새 들어 애인을 너무 닮아가는 제자에게 사회인의 응징을 가르쳐주려던 하무열이 갑자기 멈춰섰다.
그리고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노크하기도 전에 기척을 알아채신 거에요?”
류태현이 놀라 일어났다.
“학교 근처에서야 이 정도로 긴장하고 살지는 않았다만.”
그렇게 대꾸해주고 하무열이 문 밖까지 들리게 소리쳤다.
“예, 누구십니까.”
“저희들입니다. 하태성과 허강민이요.”
하태성의 목소리가 말했다. 하무열이 문을 열었다.
“류태현 데려가려고 왔냐?”
“아버지는 안 계신가요?”
하태성이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래. 뭐 전할 말이라도...”
“들어가서 말하죠.”
허강민이 하태성을 밀어넣고 방문을 닫아 잠갔다. 그걸 보고 하무열이 표정을 굳혔다.
“무슨 일인 거냐.”
“별로 하무열 교수님이...”
“장희준 회장이 하성철 교수님께 다과회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하태성의 말을 자르고 허강민이 전부 설명했다.
“아들을 통해서 말이냐. 그 영감이 진짜.”
“역시 이미 한 번 거절했군요?”
“단체 초대에서 빠지고 시종 따돌려서 두 번.”
“...저런.”
“세번째 초대엔 또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하태성이 기겁했다.
“아니, 그냥 집요한 게 기분 나빠서.”
하태성은 김빠진 표정을 했으나 허강민은 계속 심각했다.
“우호적인 제스처일리는 없겠군요. 이렇게 예의도 체면도 밥 말아먹은 초대라니.”
“그래. 하성철 교수님을 어떻게 괴롭히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나도 걱정이 된다.”
하무열이 잠시 생각했다.
“그렇다 해도 당사자도 없고, 초대 내용도 알 수 없는데 우리끼리 고민해 봐야 아무 의미가 없지. 교수님 오시면 전해드리고 어떻게 하실 건지 물어봐서 대책을 세워야겠다. 그러니 넌 네 애인 챙겨서 가라.”
“네.”
조금 불만스런 표정을 하기는 했으나 허강민은 더 아무 말 하지 않고 류태현을 데리고 방을 나갔다. 하태성이 하무열을 쳐다보았다.
“너는 왜. 더 할 말 남아있냐?”
“저.... 그거 안 받아오는 게 좋았을까요?”
“글쎄다. 안 받는 게 제일 좋았던 건 맞지만 거기서 거절했다고 문제 끝이었을 일도 아니니 자책일랑 하지 마라.”
하무열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원래 나쁜 놈이 마음을 먹으면 조심한다고 안 당하고 그러지 않거든.”
“그럼 조심은 왜 하는 건데요?”
“나쁜 놈이 마음은 못 먹게 하기 위해서.”
하무열이 말하며 하태성을 방 밖으로 밀어내었다.
“어른들 일은 어른들이 걱정할 테니까, 자네들은 레포트나 걱정하도록.”
“윽.”
그 하태성도 레포트는 싫은지 얼굴을 구기며 방을 나갔다.
돌아선 하무열이 초대장을 째려보았다.
“자, 저걸 어쩐다?”


“가야지요.”
“진심이십니까?”
하무열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하성철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제 제정신을 걱정해주실 필요 없습니다. 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있으니까요.”
하성철이 말했다.
“저도 그 자를 대면하긴 싫습니다. 그러나 가지 않는다 해서 장회장이 포기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거는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저,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뭔데요?”
“이 초대에 저와 같이 가주셨으면 합니다.”
하무열이 설명을 구하는 눈으로 하성철을 보았다.
“명분은 충분합니다. 장회장은 이전 초대에 뵙지 못한 것이 아쉬워서 따로 초대한다고 했으니 그 때 역시 가지 않은 하무열 교수님이 같이 가시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 치고는 초대장에는 하성철 교수님 한 사람 이름만 있는데요.”
대놓고 하무열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귀족 예법에 따른 모욕 따위 신경도 안 쓰는 하무열이지만 이건 조금 찜찜했다.
“구색조차 안 맞추려 든다는 건 교수님을 혼자만 부르려는 노골적인 의도군요. 그래서, 이쪽에서도 역시 예의에는 벗어나지만 너희 뜻대로 되어주지는 않겠다 가운뎃손가락을 날리시게요?”
하성철이 탓하는 눈으로 하무열을 보았다. 하무열이 슬쩍 고개를 숙여주었다.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협력해드리고 말고요. 무례한 짓을 예의바르게 하는 데는 절 따라올 자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례한 짓을 무례하게 하는데, 겠지요.”
하성철이 정정했다.
“제가 할 수 없는 일이라 부탁드리고 있긴 합니다만 너무 대놓고 싸움을 걸지는 말아주십시오. 교수님도 해를 입으실까 두렵습니다.”
“하하, 전 이미 백선교에 쫓기고 있는 몸이라 여기서 더 해를 입을 수 있는 여지가 많이 없답니다.”
하무열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럼 갈 준비를 해야겠군요. 겉모습만은 점잖게 입어야겠지요.”
하무열이 옷가방을 꺼냈다. 그리고 정장에 숨겨갈 수 있는 무기가 얼마나 있나 찾기 시작했다.


하성철 옆에 선 하무열을 보고 장희준의 비서는 눈썹만 조금 치켜올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을 안내했다. 뭐라고 말만 나오면 대거리 해줄 말을 한보따리 준비하고 온 하무열은 조금 김이 빠졌다.
‘설마 날 김빼놓으려는 고도의 책략은 아니겠지?’
누가 들으면 과대망상이라고 할 생각을 하면서 하무열은 하성철과 함께 정원으로 안내되었다. 잘 조경된 나무와 늦여름에 피는 꽃이 잘 어우러진 아름답고 소담스러운, 그러나 트여있어 누가 말을 엿듣거나 하기는 어려운 장소였다.
‘사방이 보이는 곳에서 밀담이라니 높으신 분들 머릿속은 정말 모르겠다니까.’
초대했으면서 장희준은 두 사람이 탁자에 앉아 기다린 지 좀 되어서야 나타났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상 눈곱만큼도 감사하지 않았지만 말만은 예의를 차려 하성철이 인사했다. 하무열은 옆에서 대충 따라했다.
“오랜만이오, 하성철 교수.”
장희준이 부드럽게 웃었다.
“건강이 많이 상했다고 들었는데, 직접 보니 괜찮은 것 같아 다행이구려.”
“좋은 환경에서 편하게 살고 있으니 그런가 봅니다.”
기실 학교와 학생들이란 백선교가 쫓아와 사람들을 납치하고 공격하지 않을 때라도 전혀 마음 편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하성철은 그렇게 대충 넘겼다.
“그래서, 무슨 말씀을 하려고 부르신 겁니까.”
장희준과 오래 마주앉아 한가롭게 차나 마시는 흉내를 내기에는 시간도 마음도 여유가 없었다. 어차피 먼저 무례를 저지른 건 상대편이니 하성철도 무례를 무릅쓰고 투박하게 용건을 물었다.
“이런, 성격이 많이 급해지신 것 같소.”
“학생들을 상대하다 보면 인내심이 닳아 없어지게 되니까요.”
“...좋소. 뭐 대단한 비밀인 것도 아니고.”
장희준이 씩 웃었다.
“실은, 제안을 하나 하고 싶네만.”
“어떤 제안을요?”
“일자리 제안이지. 내가 이번에 재단을 하나 만들려 하는데, 거기서 법률 자문을 맡아주었으면 하네.”
하성철의 얼굴이 굳었다.
“근무 조건은....”
“실례하겠습니다.”
그가 하고 싶은 일이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는 게 아니라 상대의 얼굴에 장갑을 던지는 거라는 걸 확실히 하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하성철이 벌떡 일어났다.
“방금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조건도 듣지 않고?”
“당신이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관심 없습니다.”
장희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정말로? 나는 굉장히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일세.”
“거기에 더해 모욕과 굴욕도 주시겠지요. 안녕히 계십시오. 차 잘 마셨습니다.”
입술도 안 댄 찻잔을 뒤로하고 그가 성큼성큼 그 자리에서 멀어졌다. 하무열이 뛰다시피 그를 쫓아왔다.
“죄송합니다, 좋지 못한 모습을...”
“제가 따라오길 잘했군요. 저런 자와 교수님을 단 둘이 만나게 둘 수는 없지요.”
하성철이 잠깐 발을 멈췄다.
“보는 눈이 없었더라면 그가 저를 강제적 수단을 동원해서 겁박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보다 더한 짓도 하고 남았겠지요.”
하무열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고 갈무리했다.
시종이나 하인이 가로막으면 어쩌나 걱정했으나 정문까지 나오도록 그런 일은 없었다. 문지기도 아무 의문 없이 대문을 열어주었다.
그래도 대문을 나서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하무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둘러 돌아가는 게 낫겠습니다. 걱정 마시죠, 여관 안은 안전할 겁니다.”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12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미축이 탈락한 후로도 공손찬과 유비의 일과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수련하고 도장 운영하는 틈틈이 순찰도 돌았다.
“어이, 유비. 요번에 개봉한 거 뭐시냐.....”
미축이 오랜만에 영화 전단지를 들고 나타났지만 공손찬뿐 아니라 유비도 고개도 들지 않았다.
“미안, 바빠.”
“뭐가 그리 바쁜데?”
“우리 특훈중이거든.”
공손찬이 엄숙한 태도로 대답했다.
“저녁마다 동네 구보 한 바퀴. 도원관 주변하고 시내까지 돌아. 체력 단련도 하고 다니는 김에 전단지도 돌리고. 너도 할래?”
옆에서 유비가 펄쩍 뛰었다. 사양하려던 미축이 유비의 표정을 보고 멈칫 했다.
“왜 그래? 내가 끼면 큰일나는 일이야?”
“엄, 아니. 그런 건 아닌데......아, 넌 여기서 더 수련이 늘면 힘들 거잖아.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안 그래?”
“응. 그렇지.”
유비도 참 핑계 대는 재주가 없었다. 둘이 저녁마다 뭘 하느라 바쁜 건지 미축은 잠시 머리를 굴렸다.
‘......뻔하잖아?’
남매 같은 사이라지만 둘은 같은 또래 이성이었다. 납득을 끝내고 미축이 손사래를 쳤다.
“아, 걱정 마. 방해 안 할 테니까. 그럼 영화도 둘이 보러 가지 굳이 나 끼우고 싶진 않겠네.”
“어.....”
이번엔 유비와 공손찬 둘 다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쑥스러워서 그런다고 생각한 미축은 뒤뜰로 나갔다.
“그럼 나 턱걸이 좀 하고 있을게.”
둘만 남자 공손찬이 유비를 흘겼다.
“진짜 미축까지 끼우자는 소린 줄 알았어?”
“그럼......”
유비가 머리를 긁적였다. 거짓말 들키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니 설명은 전부 공손찬에게 맡긴 거였는데, 아예 옆에서 다른 사람이 거짓말할 때도 상대 눈에 띄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할 모양이었다.
정말로 열심히 턱걸이만 하고 있는 미축을 창문 너머로 보고 공손찬이 달력을 보았다.
미축이 탈락하고 어느새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박쥐 군주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또 다른 보석상이 털렸다는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공손찬이 무서워서 일단 숨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두 사람은 꾸준히 순찰을 돌았다.
유비도 전보다 수련에 열중하게 되었다. 공손찬과 하는 대련도 더 이상 무섭다고 뒤로 빼지 않았다.
미축이 눈앞에서 탈락한 것과 같은 일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더 강해져야 했다.
교습이 끝나고 미축을 보낸 다음 두 사람은 시계를 보며 순찰 준비를 했다.
박쥐 군주가 늦은 저녁이나 밤을 선호하는 것이 분명하므로 두 사람도 늦은 시간에 둘이 함께 돌았다.
지난번 전투를 거울삼아 캠핑용 램프도 항상 갖고 다녔다.
그때 미축이 썼던 일반 손전등은 빛이 한 방향으로만 멀리 나가서 넓은 범위를 비추지 못했고, 유비의 불꽃놀이는 설치에 시간이 걸린 데다 오래 가지 못하고 다 꺼졌다.
이 램프는 캠핑장 용으로 불이 사방으로 고루 퍼지는 랜턴이었다. 그러니 두 문제점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도원관 주위와 뒷산 아래, 요즘은 시내까지 순찰 범위에 넣었다. 보석상이나 은행처럼 노릴 만한 곳들도 순찰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오늘도 도원관 주위는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두 사람은 시내로 나갔다.
시내는 밤에도 번화하고 밝았다. 이런 만인시중에서 무슨 배짱으로 뻔뻔하게 강도질을 하는지 유비는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당장 저 백화점에도 저렇게 사람이 많은데.’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길 건너편이 소란스러워졌다.
“뭐지?”
경찰차 몇 대가 쌩하니 도로를 달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밤에도 큰길엔 차가 제법 많은데 사이렌을 켜고 그 틈새로 순식간에 멀어졌다.
“사건인가?”
공손찬의 목소리에 긴장이 배었다.
“어떡하지? 어떻게 쫓아가지?”
유비는 경찰차들이 사라진 방향을 돌아보았다. 영화와는 달리 눈깜짝할 사이 지나가버리니 어디로 가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음.....”
공손찬도 난감해서 대답하지 못하고 인상만 썼다. 조운이라고 해도 경찰차를 따라서 뛸 자신은 없었다.
차라리 경찰차가 온 방향, 즉 사건이 난 장소로 가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 적어도 한창 소동이 난 곳을 찾아가는 것이니 찾지 못하고 헤맬 걱정은 없을 것 같았다.
“저, 저기 공손찬!”
역시 훌륭한 계책은 못 되는 것 같아 망설이고 있는데 유비가 기겁해서 그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저 위 좀 봐!”
“응?”
공손찬이 유비가 가리키는 대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뭐가 있어?”
“그게, 방금 지나갔는데 이쪽 건물 옥상에서 저 백화점으로 사람들이 슝 날아갔어!”
공손찬은 유비가 가리킨 두 건물 사이의 거리를 눈으로 가늠해 보았다. 지상으로부터의 높이도.
큰길을 사이에 두고 대각선으로 떨어진 건물들이었다. 둘 다 10층 높이는 되어보였다.
“잘못 본 건 아니겠지?”
이미 군주에겐 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아도 그런 말부터 나왔다.
“아닙니다!”
관우가 유비의 옷 속에서 튀어나와 항의했다.
“방금은 군주의 소행입니다. 그 기운을 분명히 느꼈습니다.”
“응. 그냥 실감이 안 나서 그래.”
“맞아. 사람이 저 거리를 뛰다니.”
유비도 공손찬에게 동의했다. 바로 얼마 전에 본인이 주택가에서 지붕을 밟고 날아다닌 기억이 생생해도 실감 안 나는 건 안 나는 거였다.
“아무튼 군주가 저 백화점 옥상으로 날아갔단 말이지?”
공손찬이 백화점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런데 횡단보도 신호등이 빨간색이었다.
차도 많고 보는 눈도 많았다. 공손찬도 유비도 영화 주인공처럼 과감하게 건너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유비가 맞은편 건물 쪽을 돌아보았다. 군주는 저기 있었다가 날아갔다. 그러니 뭔가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주군, 그자가 변신을 해제했습니다.”
조운이 말했다.
“이제 더 이상 탐지가 안 되는데 어떡할까요?”
공손찬과 유비가 시선을 교환했다.
“난 이쪽 가보고 싶어.”
유비가 맞은편 건물을 가리켰다.
“그래. 아니, 잠깐.”
공손찬이 조운을 내려다보았다.
“군주가 한 명이었어? 군주들끼리 싸운 게 아냐?”
“예. 탐지된 군주는 한 명이에요.”
공손찬은 고개를 들어 유비를 보았다.
“같이 가자. 군주는 이미 놓쳤어.”
“그래.”
두 사람은 같이 맞은편 건물로 뛰어갔다. 이쪽은 길을 건널 필요도 없고 ‘임대’ 현수막만 걸려있을 뿐 빈 건물이어서 무단 침입이긴 해도 어려울 게 없었다.
“박쥐 녀석이 또 뭔가 나쁜 짓을 한 건가봐.”
올라가면서 유비가 추측했다.
“은행 경비나 보석상 경비는 일반인이니까, 군주의 힘이면 잡힐 걱정 없다 이거지. 진짜 나쁜놈이네.”
그리고 군주끼리 싸웠을 때에 비하면 영웅심도 별로 줄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밤이라는 점도 상대에게 유리했다.
공손찬이 군주 추격을 포기하고 이쪽으로 유비와 함께 온 데엔 그 이유도 있었다. 기왕이면 상대가 약해졌을 때 싸워야 했다.
그런 것까지 하나하나 따져가며 싸우는 것은 평소 공손찬의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지는 것보단 나았다.
엘리베이터가 멈춰 있어서 계단으로 가야 했다. 건물 높이를 떠올리고 공손찬도 유비도 영웅패를 꺼내들었다.
“군신일체!”
훨씬 편히 오를 방법이 있는데 안 쓸 이유가 없었다. 각각 관우와 조운과 일체화해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과연 변신하니 10층도 금방이었다. 열려 있는 옥상행 철문을 보고 유비는 바로 뛰어나가려 했으나 공손찬이 막고 먼저 문틈으로 옥상을 엿보았다.
옥상엔 경찰 몇 명이 쓰러져 있고, 똑바로 선 사람은 검은 가죽 재킷 차림의 남자 한 명뿐이었다.
처음엔 악당인가 했지만, 쓰러진 경찰들의 상태를 살피고 편히 고쳐 눕혀주는 모습으로 보아 그도 역시 경찰인 모양이었다.
지금 저기에 복면 괴인 모습으로 뛰어들어 봐야 악당과 한패 취급밖에 못 받을 것 같았다. 공손찬이 뒤로 물러나자 같이 내다보던 유비도 물러났다.
“저 사람 나 본 적 있어.”
유비가 공손찬에게 속삭였다.
“박쥐가 은행 털었을 때 현장에 있었던 경찰이야. 엄청 무섭고 유능해 보였어.”
“겉만 보고 어떻게 아는데?”
“엄......”
“주군, 쉿!”
관우, 조운, 장비가 거의 동시에 경고했다. 두 군주는 재빨리 계단 아래로 숨었다.
간발의 차로 그 형사가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의심스런 눈초리를 하고 계단과 그 아래층 쪽을 샅샅이 훑었다.
유비와 공손찬은 몸을 바짝 움츠렸다. 숨은 곳이 사각이긴 해도 형사가 조금만 이쪽으로 들어오면 보일 만한 장소였다.
“......바퀴벌레인가.”
나직이 혀 차는 소리에 뒤이어 끼이이 하고 철문이 다시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도 완전히 닫히지는 않았다.
공손찬과 유비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몸을 움츠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바퀴벌레라니.....’
유비가 속으로 중얼거리는 동안 공손찬이 조용히 숨은 곳에서 고개만 내밀었다. 아무도 없는 걸 보고 유비에게 손짓했다.
“우리 빨리 여기 떠야 해.”
“왜?”
“저 형사가 옥상에서 혼자 뭘 기다리겠어? 쓰러진 동료들 구급차 기다리는 거야. 곧 구급대원이랑 다른 경찰들 올 거라고.”
“아.”
두 사람은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면서도 발소리가 크게 울릴까봐 발꿈치를 들고 걸었다.
군신일체 상태에서는 몸집도 커지고 힘도 세지고, 그러면서도 소리까지 죽일 수 있다니 새삼 감탄이 나왔다.


태오는 철문 곁에서 떨어지는 척 실은 귀를 대고 있었다.
분명 희미하게나마 말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두 명. 그렇다면 겁먹을 필요 없었다.
직전 말도 안 되는 적에게 어이없이 당한 일도 그를 움츠러들게 하지는 못했다. 도리어 정면으로 돌파해서 진상은 무엇인지 까발려주고야 말겠다는 결의에 타올랐다.
문을 열어젖히며 동시에 계단으로 총구를 겨누었다.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아래쪽에서 후다닥 뛰는 소리가 났다. 기척 죽여 숨었다가 공격해오려는 놈들인 줄 알았는데 반대로 달아나고 있었다.
“서라! 경찰이다!”
계단을 구르다시피 내려갔다. 어지간한 놈들은 자신이 이렇게 쫓아가면 한두 층만에 따라잡았는데, 역시 괴상한 갑옷 차림의 2인조라는 것밖엔 알 수 없는 그들은 엄청난 속력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태오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뭐하는 놈들이야?’
부하 둘을 양 옆구리에 끼고 길 건너까지 날아갔던 동탁이 생각났다.
비틀거리며 벽에 기댔다. 동탁에게 맞은 곳이 다시 아파왔다.
감히 자신에게 범죄 조직과 결탁하라고 권했다. 이미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수없이 저지른 조직의 보스지만 더욱 용서할 수 없어졌다.
이 와중에도 자신이 조등 회장의 손자라서 그런 협박이 무섭지 않은 것 같아 짜증났다.
‘당장 눈앞의 폭력 앞에선 다 똑같건만......’
역시 이걸 할아버지께 의논하지는 말자고 결심했다.
동탁도 어차피 눈앞의 경찰이 누군지도 모르고 막 던진 소리였다. 이번에 포기하지 못하고 기어이 자신을 회유하거나, 혹은 괘씸하게 여겨 해치려 든다면 누구인지 제대로 알아보게 되어있었다. 그리고 조등 회장의 손자 태오라는 걸 알면 즉시 꼬리 내리게 되어있었다.
할아버지의 후광은 그것으로 이미 차고 넘쳤다.
동탁은 재벌 회장을 적으로 돌려서가 아니라 법을 어기고 사람들을 해쳐서 벌을 받아야 했다.
어쨌든 복면 괴인이 둘이나 더 있으니 지원 오던 사람들이 마주칠 수 있었다. 태오는 구급차도 재촉할 겸 무전으로 경고해주었다.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11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결혼식이 끝나고 이제 빠져나갈 틈만 노리고 있던 태오가 원소와 마주쳤다.
“안녕, 오랜만이야.”
원소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굳이 피한 것도 아니었기에 태오도 예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원소에게 인사했다.
“안녕. 잘 지냈어?”
“그래.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제대로 연락해본 지도 오래인데 무슨 일일까 궁금해 하며 태오가 원소를 따라갔다.
이렇게 사람이 들어찬 곳인데도 조용히 이야기할 만한 휴게실은 있었다. 처음부터 이런 용도로 쓰라고 설계해둔 공간 같았다.
“경찰 노릇은 요즘 어때?”
“방해꾼만 없으면 평소엔 할 만 하지.”
원소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방어적으로 대답했다.
“그 방해꾼이라는 건 집안의 참견쟁이들 얘기야?”
“당연하지. 달리 뭐라고 생각한 거야?”
태오의 반문에 원소가 두 손을 들어올렸다.
“시비 걸려는 게 아니라, 요즘 좀 이상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지 않냐고 묻는 거야.”
“......그렇지.”
태오가 경계를 조금 풀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네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닐 텐데?”
“네가 알 필요 없는 사정이 생겨서, 이상한 범죄자들에 관심이 생겼거든.”
태오의 눈썹이 다시 찌푸려졌다.
“뭘 생각하는지 몰라도 위험한 짓이라면 그만 둬. 네 입지라면 굳이 거친 수까지 동원할 필요도 없을 만큼 튼튼하잖아?”
“이상한 연쇄 보석 도난 사건 일어나고 있지?”
원소도 경찰이나 범죄 쪽 정보망이 부족하지 않았다. 굳이 태오에게 말을 건 것은 원소가 편하게 이야기하며 반응을 관찰할 수 있는 현직 경찰이 태오뿐이기 때문이었다.
“뭔가 알고 있어?”
과연 태오의 기색이 바뀌었다.
“자세히 아는 건 아냐. 다만 좀 신경쓰이는 부분이 있어서 아는 걸 맞춰보고 싶어.”
“경찰 내부 정보를 거저 달라는 건 아니겠지.”
“휴가 며칠이나 받았어?”
원소가 생긋 웃었다.
“결혼식 끝났으니 식구들 피해서 바로 도망가고 싶지?”
휴가는 사흘이고, 이 기회에 태오를 집에 붙들어두고 다시 설득하려는 부모님뿐 아니라 어떻게든 태오가 팽개친 기회를 대신 잡아보려는 친지들도 문제였다.
원소와 따로 시간을 보낸다고 하면 그런 자들 상당수는 감히 따라붙을 수 없었다. 원봉 회장은 두 사람이 연애중이라는 헛소문이 돌았을 때 기뻐하기도 했다.
경영에 무관심한 태오 대신 원소가 조위그룹을 장악하면 삼공그룹은 원술에게 물려주는 것으로 후계 문제를 처리할 수 있으니까.
원술이 도저히 그룹 회장감이 아니라고 드러난 지금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정말 둘이 결혼하면 최소한 경영에 있어서는 원소가 태오를 휘어잡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친해진 계기부터가 집안과 어른들에 대한 불만이었고 태오에게 다른 상대가 있었기에 두 사람 사이가 원봉 회장 뜻대로 될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었다. 두 사람의 친교가 그럭저럭 이어진 것이 그 덕분이었다.
태오는 물론 원소도 지금에 만족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룹을 노리는 것은 원봉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그럼 10분 뒤에 주차장에서 보자. 자세한 얘기는 나가서 하는 거야.”


순욱은 바로 다음날 조위그룹 회장 사무실에 나타났다.
조등은 평소대로 회장의 업무를 보던 중이었다. 그는 실제로 나이에 비해 정정하고 부지런했다.
혹시나 해서 사무실 주위의 방비를 꽤 강화해두고 기다렸으나 순욱은 그때처럼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나타났다. 마치 처음부터 사무실 안에 있었던 것처럼.
“그건 어떻게 하는 거지? 순간이동인가?”
“예.”
순욱이 대답했다. 처음 만났을 때와 거의 똑같은 태도에 옷차림도 똑같았다.
“군주가 되면 인간도 그렇게 아무 데나 나타날 수 있나?”
“아닙니다. 군주의 능력은 영웅패에 따르는데 영웅패 가운데 순간이동이 가능한 패는 없습니다.”
“그렇군.”
조등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소파를 가리켰다.
“앉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군.”
순욱은 소파를 바라보고 가서 조심스럽게 앉았다.
“신화 시대부터 이 땅을 유지해온 방법이라고 했지?”
“예.”
“그럼 3백 년 전, 6백 년 전에도 치러졌다는 거군. 예외는 없었나?”
“없었습니다. 세상의 존폐가 걸린 일이니까요.”
“그렇게 중요한 배틀인데 이름 말고 다른 기준은 없고?”
“이름이 영웅의 이름이면 다른 기준은 없습니다.”
“그럼 영웅의 이름을 지닌 ‘모두가’ 뽑히는 건가? 이런 노인부터 아이까지?”
“그렇지는 않습니다. 본인이 원하지 않아서 거부하기도 하고, 신선이 보기에 참가할 만한 역량이 없으면 나서서 권하지 않습니다.”
“그럼 그 사람은 남들처럼 드림 배틀이라는 게 있는지도 모르고 살겠군.”
조등이 빙긋이 웃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자네 보기엔 이 늙은이가 나서서 싸울 만해 보이던가? 정말로?”
“무력이 아닌 지략으로 승리한 군주는 전에도 있었습니다. 조등님은 의지가 강하고 현명하니 강한 영웅패가 받쳐주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순욱이 영웅패와 체인저를 다시 내밀었다.
“영웅패 전위입니다. 영웅패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괴력의 소유자고 충성심도 높아 다루기 쉽습니다. 이만하면 유리하게 시작하시는 겁니다.”
“한 가지만 더 묻겠네.”
조등은 전혀 초조한 기색이 없었다.
“자네 같은 신선들의 역할은 그것으로 끝인가? 배틀을 안내하고 영웅패를 나눠주는 것?”
“아닙니다.”
조등과는 달리 순욱은 초조해지고 있었다.
평소엔 미신 따위 믿지 않는 요즘 인간들이라고 해도, 드림월드의 구성원으로 살아온 이상 본능 레벨에서 느끼는 것이 있었다. 신선의 말이 전부 사실이며 여기 참가하는 것은 엄청난 기회라고.
단 한 명의 승자만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조건이 가혹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불평하면서도 참가는 다 했다.
그런데 조등은 계속 변죽만 올리며 질문만 하고 있었다. 그것도 느슨한 규칙의 맹점만 골라서.
“자세한 이야기는 참가하신 후에 들려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신선의 역할은 드림배틀을 돕는 것에 국한되며 배틀을 주도하는 건 인간 군주라는 사실입니다. 이용당한다고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마 많이들 그렇게 생각해서 참가하겠지.”
조등이 말을 받았다.
“이렇게 수고는 많고 얻을 것은 적은 일에. 자신의 전부를 걸고 뛰어드는 모험에 끌리기엔 나는 너무 늙었네.”
“그럼 거절하시는 겁니까?”
순욱이 슬프게 고개를 저였다.
“전 조등님이 훌륭한 군주가 되실 거라고 기대해서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하지만 주도권을 쥔 게 인간이라면 자네는 날 조를 수 없겠지.”
“그렇습니다.”
순욱이 슬픈 기색을 지우고 말을 이었다.
“정 배틀에 참여할 마음이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허나, 드림배틀의 비밀은 널리 알려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겠지. 그렇게 느슨한 규칙으로 그토록 강대한 힘을 세상에 풀어놓는데 비밀도 아니라면, 부작용이 얼마나 넘쳐날지 다 상상하기도 어렵군.”
“그러니 죄송하지만 전부 잊어주셔야겠습니다.”
순욱의 팔찌에서 연푸른 빛이 번쩍였다. 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가 사라졌다.
텅 빈 사무실 안에 조등 혼자만 남았다. 그는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깜박 졸았나?’
시계를 보고 책상 위의 서류를 보았다. 평소같으면 벌써 다 끝나 있었을 서류가 아직도 그대로였다.
‘이런 적은 없었는데.’
이젠 정말 늙었나보다. 그런 생각이 더럭 들었다.
조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은 안 되는데. 아들놈은 쓸모없고, 손자놈도 정신 차리려면 멀었는데.’
경찰 같은 일을 하며 고생 좀 해보는 것도 인생 공부라고 생각해서 내버려 두었다. 자신과 꼭 닮은 성격이니 억지로 막으면 더 엇나갈 뿐이라고 생각했다.
정석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게 했지만 무능한 응석받이로 자란 아들 때문에 육아에 자신감을 잃은 탓도 있었다.
‘지금이라도 태오를 그룹으로 데려와야 하나? 억지로라도?’
조바심을 달래기 위해 사무실을 나왔다. 잠시 쉬며 마음을 추스르려고 했다.
그룹 본사의 펜트하우스는 회장이 이렇게 잠시 쉬고 싶을 때를 위한 별채로 꾸며져 있었다. 심란하거나 피곤할 때 늘 그랬듯 조등은 전용 엘리베이터로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펜트하우스의 거실에 앉아 버릇대로 리모콘을 들고 음악을 틀었다. 그런데 자주 듣던 음악 대신 잡음이 흐르고, 자신의 목소리가 뒤이었다.
-오늘 불가사의한 일을 겪었다.
일어나서 전축을 살펴보았다. 음악 CD 대신 새로 녹음한 음성 파일을 재생하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자신이 한 것이었다.
-질 나쁜 장난, 심하게는 백일몽이나 내 노망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더욱 확실하게 검증해야 할 일이다. 따라서 오늘 원술의 결혼식에 갔다가 겪은 일을 말해둔다......
화장실에서 괴상한 청년을 만나 괴상한 말을 들었다는 소리가 뒤이었다. 내용만 보면 자신이 단기 기억상실에 망상까지 보임을 깨닫고 괴로워할 만한 이야기였지만 조등은 차분하게 끝까지 들었다.
이 전축은 그냥 음악을 듣기 위한 기계만이 아니었다. 비밀리에 녹음해둬야 할 만한 일이 있을 때, 조등은 늘 지니고 다니는 녹음기로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녹음했다.
그리고 그 녹음기는 자체에 음성 파일을 저장할 뿐 아니라 무선으로 이 전축에도 저장하게 되어있었다. 드문 일이지만 녹음기를 강탈당하거나 EMP 폭탄 같은 것에 당할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역시, 결혼식장에서 있었던 일도 앞부분 조금만 빼고 다 녹음되어 있었다. 회장실에서 오늘 나눈 대화도 전부 흘러나왔다.
듣는 동안 기억도 점차 되돌아왔다. 기억을 지우고 인식 범위를 피해서 드림배틀을 숨겨왔지만, 이런 식으로 끝내 비밀을 파헤치는 사람에겐 결국 드러나게 되어 있는 거라고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순욱이 기억을 지우는 것으로 녹음된 분량이 끝났다.
조등은 옷 속에서 녹음기를 꺼내 들여다보았다.
더 조사하지 않아도 알 만했다. 녹음기 쪽은 깨끗이 지워졌을 것이고 이 기록을 위해 해둔 설정들도 다 초기화 되어있을 것이다.
“그래, 이런 식으로 인간을 희생시키고 이용해서 세상이 돌아가고 있단 말이지?”
왜 끝까지 거절했는지는 지금도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느긋하게 쉬는 대신 호출 벨을 눌러 보좌관을 불렀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다.
‘그러고 보면 원소도, 심지어 원술도 영웅의 이름이잖아. 태오의 이름이 안 그래서 정말 다행이군.’


원소와 저녁식사를 마치고 태오는 집이 아닌 쇼핑몰로 차를 몰았다.
선배님 댁에 빈손으로 가지 않는 건 예의를 넘어선 습관이 된 지 오래였다. 초선이가 아빠도 친척도 아닌 자신을 태오 아저씨라 부르며 따를 때면 자신이 정말 그 집 식구로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인형은 바로 지난번에도 사줬으니 실바니안 다음 시리즈를 사주는 게 나을까? 아직 안 나왔던가? 커다란 공주 칼을 갖고 싶어 하던데 그걸 사갈까? 아니, 그건 사모님께서 이미 사주셨을지도 몰라. 실바니안이 훨씬 비싸니까 그걸로 하자.’
이제까지 가격표를 들킨 적은 없었다. 사모님께는 너무 비싼 거 아니냐는 말을 돌려 들은 적이 있었지만, 아동용 장난감은 비싸도 겉으로 티가 덜 나고 싸구려는 불량품이 많고 등등 갖은 말로 변명하는 데 성공했다.
그 가정에 끼어들기 위해 내세울 만한 장점이 돈뿐이어서 일어나는 일이다. 스스로가 초라하고 한심해서 울고 싶었다.
‘연쇄 절도 사건이 해결되면 선배님도 좀 한가해지실 거야. 잘하면 포상도 있을 거고.’
괴상한 박쥐 같은 옷차림으로 정체를 감춘 절도범이 관할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요즘 잠시 범행이 뜸해지긴 했지만 잡지 못하고 이대로 놓쳐 버리는 꼴이 되어선 곤란했다.
이번에 원소가 준 정보가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암시장에서 보석 가격이 올랐고 전부터 그쪽 방면에서 악명 높던 곰돌이패밀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보스 동탁은 악당 두목답게 탐욕스러운 인물이고 보석 수집이 취미이니 박쥐가 훔친 보석이 암시장을 통해 그리로 흘러들어간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원소는 왜 그런 호기심이 생긴 거지? 게다가 왜 난 그걸 그냥 넘어간 거지?’
돌이켜보니 좀 이상했다. 원소도 원소지만, 자신도 그런 의문이 생기면 그냥 넘어가는 사람이 아닌데.
신호가 바뀌었다.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다시 차를 몰았다.
‘내게 머지않아 부탁할 거라도 있나보지. 그래서 빚을 만들어두려는 거야.’
가문의 촉망받는 후계자지만 찜찜한 꼬리표가 붙어 떨어지지 않는 원소와 가문의 반항아지만 쓸데없을 정도로 위치가 공고한 태오는 서로 말이 통하고 협력할 일도 많았다.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었다.
‘가문에서 완전히 떠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 알잖아.’
오늘 원소가 한 말이 다시 떠올랐다.
‘네가 네 인생 어떻게 낭비하든 내 알 바 아니니까 이제까지는 아무 말 안 했는데, 네 무서운 할아버지한테 발언권 얻지 못하면 결국 어영부영 끌려가 버릴 걸. 싫어도 조금 정도는 그룹에 네 자리를 만들어봐.’
‘그거야말로 그룹에 돌아가란 소리잖아. 너까지 그런 말 하다니 할아버지께 뭐 받았어?’
‘나야 일하다보면 회장님께 신세질 일도 생기지. 그보다 지금은 어영부영 끌려다니지 않아서 이 꼴이야?’
분하게도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족벌경영 자체가 문제였다. 할아버지도 아버지 어머니 둘 다 당신 뒤를 이을 그릇이 아니라고 인정하셨으면서, 왜 그쯤에서 포기하지 못하고 손자를 괴롭히신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 조위그룹에 마땅한 다른 후계자가 있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다.
피는 안 섞였어도 그룹의 일을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있으면 할아버지께 할 말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내세우려면 자신이 직접 찾아야 했다. 원소 말대로 그룹에 관여해서라도.
‘할아버지 눈에 찰 만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군.’
그 점만 생각해도 벌써 아득해지는 기분이었지만 다른 수도 없었다. 태오는 앞일을 차분히 계획했다.
그런 인재나, 적어도 그렇게 키워낼 재목 정도만 있어도 헛다리 짚지 않고 찾아낼 자신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안목과 취향은 그가 가장 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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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태오 내가 썼지만 나도 가진 장점이 돈뿐이라고 비참해져보고 싶다.....
‘커다란 공주 칼’은 어느 레히삼 회지에서 천하를 제패하고 정세를 논하는 초선 공주님을 보고 잊을 수 없어서 썼습니다. 유치원도 들어갔는데 마땅히 천하를 가를 칼 한 자루쯤 가지셔야지요.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10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사장실에 혼자 앉은 원소가 나른한 눈으로 달력을 돌아보았다.
법적 사촌동생 원술이 곧 결혼한다. 신부가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이번에 새로 합병한 계열사 사장 딸이라고 했다.
‘삼촌’ 원봉이 투덜거리던 얼굴이 눈에 선했다. 더 조건 좋은 여자가 줄을 섰는데 얼굴에 반해서 정신 못 차린다고 했다.
그리고 원소에게 너는 원술 같지 않아 다행이다, 돌아가신 형님 몫을 생각해서라도 다음 회장은 반드시 너를 시켜주겠다, 지겨운 소리를 늘어놓았다.
삼공그룹이 철저한 족벌주의기는 해도 원소의 ‘아버지’ 원성이 죽은 지 십 년이 넘었다. 이후 회장이 되어 죽 원가의 가장 노릇을 해온 원성의 동생 원봉이 아들을 제치고 조카딸을 더 인정하는 것은 죽은 형이 장자고 회장이었고 하는 구시대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원술이 아버지 기대에 맞게 자라주지 못했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전부 짜증나.’
자신이 이를 물고 노력한 건 이 집구석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이 두뇌, 이 능력으로 그저 부모 잘 만난 금수저, 팔자 늘어진 재벌집 아가씨 소리 듣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삼공그룹은 자신의 것이었다. 삼촌들이 뭐라고 하든, 원술이 무슨 얄팍한 수를 쓰든.
그래도 원술의 결혼식은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될 테고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오갈 수 있는 장소였다. 그룹이 아닌 자신의 인맥을 만들기 위해 원소는 이런 자리에 빠지지 않고 성실히 참석했다.
정장도 새로 맞췄다. 그룹 후계자에 걸맞는 품위를 보여주려면 돈을 쓸 줄도 알아야 했다. 원술이 사치한다고 해서 자신이 구두쇠가 될 필요는 없었다.
“원소 사장님이십니까.”
갑자기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원소가 고개를 들었다.
칼 같이 다린 완벽한 순백색 정장을 그림같이 차려입은 여성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임에도, 커리어우먼 컨셉 화보에서 그대로 걸어나온 듯한 모습이 원소의 사장실에 너무나 잘 어울려서 새로 뽑은 보좌관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최근에 보좌관이든 비서든 여기 불쑥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을 새로 뽑은 적은 없었다.
“누구냐.”
“제 이름은 전풍. 드림배틀을 돕는 신선입니다.”
겉모습과 꼭 어울리는 냉정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말의 내용은 잘못 들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괴상한 소리였다.
원소는 잠시 아무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눈앞의 인물을 빤히 바라보았다.


원술의 결혼식은 과연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모인 사람들의 면면도 굉장했다.
그 중에는 조위그룹 회장 조등의 모습도 보였다. 한창 성장하던 당시엔 삼공그룹과 경쟁도 있었지만 지금은 서로의 위세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사이가 된 지 오래였다. 고령임에도 여전히 정정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인사를 받았다.
“후계가 든든해질 때까지는 은퇴도 할 수 없으니 정정할 수밖에.”
남들이 아무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말을 스스로 태연히 한 조등이 곁에 선 손자를 돌아보았다.
“시대가 바뀌었으면 적응을 해야죠.”
평소엔 절대 입을 일 없는, 깊게 빛나는 암청색 고급 양복에 와인색 넥타이를 하고 앞만 노려보며 태오가 대꾸했다.
“전문 경영인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예끼, 그런 걸 못 들어봤겠느냐.”
조등도 다른 곳으로 시선을 향한 채 말을 받았다.
“돈 주고 고용한 남에게 내 회사를 통째로 맡기는 일은 어디 쉬운 줄 아느냐? 받은 만큼 일하는지 엉뚱한 생각은 않는지 감독하고 살펴보는 게 바로 경영이다. 너도 이제 다 컸으면 가출 핑계 정도는 그럴 듯하게 만들어봐라.”
잠시 불편하지만 익숙한 침묵이 흘렀다. 아직 결혼식 시작하려면 한참 기다려야 했다.
“늙은이 상대하기 싫으면 가서 애들끼리 놀지 그러냐.”
“여기가 편합니다.”
이건 빈말이 아니었다. 할아버지와 있으면 그나마 호적수와 있는 셈이고 말 섞기 싫은 사람 상당수를 미리 거를 수 있었다.
원봉 회장 역시 주위에 여러 사람이 모여있지만 아무나 가서 말 붙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신랑인 원술은 대기실에 있고, 원봉 곁에는 원소가 있었다.
태오와 달리 원가의 후계자 노릇에 충실한 원소는 오늘도 완벽한 모습이었다. 흠잡을 데 없이 차려입고 회장 곁에서 도도해야 할 때와 겸양해야 할 때를 잘 구분해 처신하고 있었다. 원봉 회장과 이야기하는 사람들 상당수가 원소와도 대화를 이어보려고 애썼다.
“누굴 닮았는지 참 미인이란 말이지.”
조등 역시 시선이 원소에게 옮겨가 있었다.
원소의 출생에 복잡한 사정이 얽혀있다는 소문은 태오도 익숙했다.
죽은 원성도, 그 동생이자 지금의 회장인 원봉도 상당한 미남이었고 형제답게 적당히 닮았다. 원소가 둘 중 누굴 닮아 미인인지는 얼굴만 봐서는 알 수 없었다.
‘실은 나도 확신이 서지 않아. 내 아버지가 원성인지 원봉인지.’
아직 서로 솔직하게 굴던 어린 시절 태오에게 원소가 했던 말이었다.
원성은 일찍 죽었고 그 부인은 아무 설명 없이 딸 원소를 원봉에게 맡겼다. 그리고 유산인지 위자료인지 알 수 없는 재산을 챙겨 원가와 삼공그룹을 떠났다.
법적으로 원소는 원성의 혼인 내 출생자이며 삼촌 원봉이 후견인으로서 키운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원소가 실은 원봉의 혼외자이며 불륜을 감출 겸 자식 없던 형에게 떠맡겼다가 형이 죽자 다시 거두었다는 소문이 따라다녔다.
할아버지라면 확실한 진상을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태오가 할아버지의 표정을 뜯어보았다. 그러나 원소가 원성의 딸이든 원봉의 딸이든 할아버지께는 굳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원소와는 요즘도 연락하고 지내냐?”
“바빠서 안 합니다.”
태오가 다시 딱딱하게 대답했다.
“저와 원소가 사귄다는 소문이라면 어차피 믿은 적 없으시지 않습니까.”
“그래. 나야 네 아비 같은 바보가 아니니까.”
심술궂게 웃은 조등이 나직이 덧붙였다.
“네가 진짜 마음에 둔 사람이 누군지도 알고.”
태오는 욕을 뱉지 않기 위해 그 자리를 벗어났다.
로비로 나왔지만 여전히 인파로 숨이 막혔다. 주차장으로 나가는 작은 문을 겨우 찾아 열었다.
“아!”
막 들어오려던 누군가와 부딪칠 뻔했다. 젊은 청년인데 순백색에 장식 많은 옷차림으로 보아 호텔의 스태프 중 한 명인 모양이었다.
대충 꾸벅 하고 지나가려는데 그 청년이 태오를 빤히 쳐다보았다.
“뭡니까?”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청년의 물음에 태오가 눈살을 험하게 찌푸렸다.
“흥미 없습니다.”
상당한 미남이었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었다. 지금은 특히 남의 플러팅 같은 거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다.
상대를 무시한 채 혼자 주차장으로 나왔다. 다행히 쫓아오지는 않았다.
‘어차피 가망도 없는데......’
사모님이 계신 때문만이 아니었다. 왕윤 선배님이 자신만할 때 자신은 유괴당한 초등학생에 불과했다. 설령 사모님과 초선이가 없었다 해도.......
이런 가정을 하는 자체가 쓰레기나 할 짓 같아 태오는 고개를 젓고 이어지는 생각을 억지로 털어내었다.
왕윤 선배님께 자신은 아이 같은 후배일 뿐이었다. 자신은 생명의 은인인 선배님이 가족들과 행복하기를 비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갈 때 초선이 새 인형 사줘야겠다.’
사모님께서 아무 것도 모르셔서 다행이었다. 귀찮을 정도로 집에 드나들며 남편의 좋은 후배라고 자칭하고 있는 자신이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러니 앞으로도 끝까지 모르셔야 했다.


‘아깝다. 영웅심은 정말 대단했는데.’
순욱은 태오를 따라가는 걸 포기하고 다른 하객들을 둘러보았다.
안량패를 얻은 군주가 여기 있다고 들어서 보러 왔는데 일반인 중에서 굉장한 잠재력을 지닌 인물을 먼저 보았다.
영웅심이란 군주의 체력이고 전투력, 의지이기도 했다. 사실상 어느 인간이든지 많든 적든 지닌 힘이었다.
군주가 되면 누구보다도 강력해질 인간인데 이름이 전설의 이름이 아니었다.
‘규칙이 그러니 어쩔 수 없지.’
원래 목적대로 안량의 주인이나 찾아보기로 했다.
팔찌의 탐지 기능을 활성화하고 동시에 은신 기능도 켰다. 선계의 존재가 드림배틀 관계자 외의 인간들에게 드러나지 않도록 해주는 기능이었다.
눈부신 인공 조명 아래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신선인 순욱에겐 낯설고 신기한 광경이었지만 한눈팔지 않고 원소를 찾아냈다.
과연 안량패에 어울리는 영웅심의 소유자였다. 먼지 한 톨 없는 정장 차림으로 수많은 인간들에게 익숙하게 떠받들리며, 겉으로는 지금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에서는 끝모를 야심이 꿈틀거렸다. 격투로 다져진 몸은 아니었지만 젊고 건강하니 안량이 받쳐주고 꾸준히 수련하면 금방 강해질 터였다.
레인보우 이벤트가 시작되면 저 군주를 만나보고 싶었다.
‘그런데......’
탐지 패널에 또 다른 예비 군주가 잡혔다. 분명히 영웅의 이름을 지녔고, 체력과 근력이 이상할 정도로 낮아서 그렇지 지력과 정신력은 원소보다도 높았다.
이쪽도 나름 흥미로운 타입이란 생각에 순욱은 그쪽으로 접근했다.
점잖아 보이는 풍채 좋은 노인이었다. 역시 이 자리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지 주위에 따라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이제까지 드림배틀의 군주들은 각자 개인의 무력이 높은 사람이 우선해서 선택되었다.
아무리 승자 한 명만 남는 배틀이라 해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할 약자를 택할 필요는 없었다. 실제로 오랫동안 승자는 처음부터 강했던 군주들 중에서 나왔다.
그러나 3백 년 전의 드림배틀에서는 최약체 군주가 승리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뛰어난 자질을 지닌 군주들과 초기에 동맹을 맺어서 탈락을 피하고, 수련해서 최소한의 힘을 갖추는 한편 다른 군주들의 배틀을 교묘히 조종해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짰다. 그리고 처음 동맹했던 상대들을 포함해 모두를 탈락시키고 최후까지 살아남았다.
사마휘님이 바로 그 군주의 신선이었기에 신선들도 그 선대의 군주를 두고 함부로 논쟁할 수 없었다. 어차피 함께 생성된 동료 신선들이라고 해봐야 서로에게 솔직하게 논리를 펼 수도 없었다.
순욱 역시 그 선대의 군주를 교활한 비겁자로 생각하는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인 떳떳한 승리자로 생각하는지 주위에 말할 기회는 없었다.
‘저 노인도 군주가 된다면 그런 방식으로 싸울 수밖에 없겠지.’
영웅의 이름을 지녔다고 해서 반드시 군주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그 사람이 군주가 될 만한 지 판단하는 것은 신선이었다.
마음을 정하고 순욱은 노인이 혼자 남을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결혼식 시작할 때가 되어 사람들이 각자 자리에 앉았다. 은신 상태이니 다들 신랑 신부에게 집중한 사이 접근해서 말을 걸어볼까 했는데, 신랑 신부에게 집중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았다. 노인과 그 곁의 인물들은 더 그랬다.
어떻게 해야 기회를 만들 수 있을까, 아예 식이 끝나고 귀가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도 노인이 간 곳은 화장실이었다. 주위에 다른 사람도 없는 걸 보고 순욱은 옳다구나 해서 따라들어갔다.
노인은 화장실에 순욱과 단둘이 남도록 눈치채지 못하고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었다.
순욱은 화장실 입구에도 은닉 주문을 걸어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세면대 앞에서 자신의 은신을 풀었다.
“거, 노인네 심장 좀 생각해주면 안 되나?”
조등이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잠그고 나직이 투덜거렸다.
“대체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나타난 건가?”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자네가 대단한 특수공작원이라면 마땅히 늙은이 하나의 눈쯤은 속일 수 있어야지.”
조등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청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귀여운 인상의 미청년이었다. 단정한 흰 옷에 연한 하늘색 포인트가 들어가 있고 머리카락에도 같은 색의 브릿지가 있었다. 마치 옷과 사람이 처음부터 세트로 찍혀나온 것 같았다.
겉으로는 여유롭게 굴고 있지만 조등도 이런 상황은 난생 처음이었다. 범죄자나 공작원, 로비스트라면 이런 식으로 마주쳐본 적도 있지만 이 청년은 그 중 어느 쪽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저는 인간이 아닙니다.”
역시 보통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순욱이 대답했다.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드림배틀을 수행하는 신선, 순욱이라고 합니다.”
조등이 눈살을 찌푸렸다. 현대 들어서 이런 이야기를 쉽게 믿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순욱도 그런 반응에 상처받는 대신 재빨리 설명을 이었다.
“삼백 년에 한 번, 위대한 소원을 선택하기 위한 드림배틀이 열립니다. 영웅의 이름을 지닌 인물들이 각자의 소원을 걸고 배틀을 치릅니다.”
조등은 언제쯤 이 이상한 인간을 위협해 쫓아버릴까 망설이면서도 일단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잡상인이나 질 나쁜 장난꾼으로 여기고 무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텅 빈 화장실에 혼자 있는데 혼자가 아니라고 가르쳐줬던 직감이 이 이야기도 허튼소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자신의 이름이 창세전설에 등장하는 지략가와 같은 것은 그저 우연이라고만 생각해왔다. 조위그룹이 한창 급부상할 때는 삼류잡지 같은 데서 전설을 인용해다가 아부성 기사도 많이 썼지만 정작 본인은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 늙어서 이름 때문에 이런 일을 겪을 줄은 몰랐다.
“이것이 배틀에 쓰는 체인저와 영웅패입니다.”
순욱이 장난감처럼 생긴 육각형 패와 그 슬롯이 달린 띠를 내밀었다. 조등은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설명할 것은 그게 다인가?”
“예?”
“그런 말만 듣고 직접 몸싸움에 뛰어들어 날뛰기엔 내가 많이 늙어서 말이야.”
조등이 짐짓 뒷목을 주물렀다.
“신체의 페널티는 영웅패가 많이 보완해줍니다. 무조건 힘이 세고 싸움 잘 하면 유리한 배틀이 아닙니다.”
“그럼 힘이 세면 불리한가?”
순욱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
“자네가 정말 인간이 아니라면 모를 수도 있지만, 인간은 이 만큼이나 늙으면 꼭 총칼에 당하지 않아도 죽을 수 있다네. 그저 놀라기만 해도 심장이 멎을 수 있지.”
분명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배울 때 그런 정보도 받았다. 비록 눈앞의 조등은 전혀 그럴 것 같아 보이지 않음에도 순욱은 대꾸하지 못하고 듣고만 있었다.
“지금은 바깥이고 중요한 이야기를 오래 나눌 만한 장소가 아니니 다음에 다시 만나고 싶군.”
“지금 계속 이야기해도 되는데요.”
“아니, 이런 중대한 이야기는 천천히 해야지.”
조등이 몸을 돌려 화장실 문고리를 잡았다.
“다음에 다시 찾아오게. 기왕이면 내 사무실이면 좋겠군. 올 수 있지?”
억지로라도 붙잡을까 하는 생각이 순욱의 머리에 스쳤다.
그러나 생각할 시간 정도는 주는 것이 통례이고, 참여하느냐 마느냐는 결국 인간의 의지였다. 신선은 인간을 강요할 수 없었다.
이미 조등을 포착했으니 집이든 회사든 쉽게 찾아갈 수 있기도 했다.
“그럼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정중한 인사를 등으로 받고, 몇 걸음 걷다가 조등이 뒤를 돌아보았다. 순욱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드림 배틀이라......’
믿으라는 쪽이 너무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저 청년은 허튼 소리를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다음엔 정말로 회장 사무실에도 나타날 것 같았다.
식장으로 돌아와보니 한창 축가가 울려퍼지는 중이었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 자신이 없어진 것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반항아 손자는 물론 자신의 경호원들까지도.
‘만에 하나 진짜라면 조심해야겠군.’
바라는 것은 많았다.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알기에 더욱 집착하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게다가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자리에서 아무도 모르게 휘두를 수 있는 힘이기도 했다.
순욱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드림배틀은 분명 달콤한 유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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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언급한 원소의 개족보는 축첩질을 불륜으로 바꾼 것만 빼면 정사 삼국지에 언급된 거의 그대로입니다.
이 원소는 여전히 여캐이고 비주얼도 같습니다.
순욱의 외모는 여자 제갈량의 순욱을 참고했습니다.

조등: 후한말 환관의 세력을 크게 키운 장본인. 환관이었지만 청류파의 호감도 살 만큼 정치력을 지녔고 십상시 중 장양, 단규가 조등의 밑에서 자랐음. 황제에게 공로를 인정받아 아들을 입양해 가문을 이을 특권을 받음. 황건란 시작 무렵 자기 집 침대에서 편안히 자연사한 것으로 추정.
조숭: 조등이 입양한 아들. 조조를 낳았고 태위직을 사들인 것, 도겸의 부하 장개에게 살해당한 것 외엔 이렇다 할 기록 없음. 도겸과 조조가 원수가 된 이유.
조조: 조숭의 아들이라기보단 조등의 손자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조조.


절망의 우상 2 (완) ㅣ- 회색도시&검은방



그리고 허강민을 가만히 놔두기로 결심한 건 하무열이지 류태현이 아니었다.
“저, 허강민씨?”
류태현이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혹시.... 기억나는 게 없으세요?”
허강민이 한쪽 눈만 떠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넌 누구지?”
한참 만에 나온 질문에 류태현이 입을 딱 벌렸다.
“왜 그렇게 놀라..... 나와 가까운 사이였어?”
잠깐 사이 류태현의 얼굴에 온갖 고뇌가 펼쳐지며 지나갔다. 사실대로 말할 것인가. 친한 동료라고 거짓을 말하고 허강민이 자기를 증오하지 않는 모습을 볼 것인가.
“순진한 멍청이 적당히 놀려라.”
마음에 안 드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하무열이 허강민을 노려보았다.
“네가 어딜 얼마나 부딪쳤든 류태현을 잊을 리가 없지 않냐. 죽어서도 쫓아올 것 같은 놈이.”
“.....쳇.”
허강민이 눈을 감고 등받이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기억 있어요?”
류태현이 물었다.
“기억하면서...... 놀렸다고요? 절?”
“속인 거지.”
허강민이 대꾸했다.
“네가 얼마나 멍청하고 위선적인 거짓말을 꾸며댈지 조금 궁금했어. 그뿐이다.”
“으응, 그래. 놀리는 것도 친밀감이 있어야 하는 거니까.”
하무열이 말했다.
“그래서, 어디까지 기억하는 거냐? 방금 하는 거 보면 대충은 멀쩡해진 것 같다만.”
“‘멀쩡’을 뭐라고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허강민의 태도는 시큰둥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딥니까?”
“지 정보는 감춰두고 남의 정보부터 캐시겠다?”
“오래 의식이 없다 깨어난 사람이 어디 언제인지 묻는 건 당연한데요.”
허강민이 고개를 죽 빼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런 허름한 사무실이라니, 이제는 경찰이 아닌가보군요, 둘 다.”
“그래. 하무열 소장님이라 불러라.”
“곧 동료가 될 사람한테 그런 딱딱한 호칭이 필요합니까?”
“도... 동료라고요?”
류태현이 깜짝 놀라 허강민의 손을 꼭 잡았다.
“저희 동료가 되어주실 건가요? 함께 백선교 잔당을 수색하고....”
“어이 류태현.”
하무열이 그의 뒷목덜미를 잡아챘다.
“그럴 리가 없잖냐.”
“하지만 방금 허강민씨가.”
“연쇄 살인에 납치 자살방조 살인미수 공무집행 방해 등등 죄목만도 열 대여섯 개는 가뿐히 넘어가는 이런 강력 범죄자를 경찰에 넘기지 않고 자의로 구금해두다니 우리 모두 감방 동료가 되고도 남을 일 아니겠어?”
허강민이 말했다. 류태현이 입을 딱 벌렸다.
“그, 그런 의미였어요?”
“소장님.”
민지은이 하무열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아니, 민지은양...”
“저 이만 퇴근할게요.”
민지은이 말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쓸모 있는 소리는 안 나올 것 같으니까, 저 내일 아침 출근할 때까지 밤새 말싸움과 과거청산 끝내시고 내일부턴 업무 이야기를 하도록 해요.”
“뭐야, 민지은. 너도 있었어?”
허강민이 놀랐다.
“그게 그렇게 놀라워요? 나도 백선교 피해자인데.”
“그렇긴 하지만 너같이 야무진 여자가 왜 하무열 같은 사람한테....”
“이제 슬슬 정규직이 되어볼까 해서요. 사대보험 월차 휴가 휴일 보장받았고 월급 밀리면 즉시 퇴사할 거고 성희롱이라든지 하는 문제가 생기면....”
민지은이 의미심장하게 하무열을 쳐다보았다. 하무열이 양 손을 들어올렸다.
“민지은양이 없으면 망할지도 모르는데 그런 멍청한 짓을 하겠나.”
“이렇게 해서 나쁜 점은 상사의 개그센스밖에 없는 직장이 되었는데요.”
“그거 심각하잖아.”
“허강민씨 편의점에서 일 안 해봤군요.”
허강민이 입을 다물었다.
“네, 모르면 아예 말을 안 하는 게 제일 좋지요. 그래서.”
민지은이 세 남자를 돌아보았다.
“뭣부터 논의하면 좋을까요?”
“일단은 입장 확인이 필수겠지. 어이, 허강민.”
하무열이 말했다.
“너 백선교와 싸울 생각 있냐?”
대답 없이 허강민이 자기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허강민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절 어디서 어떤 상태로 발견했습니까?”
“본산 이삿짐 나눠 보관하던 대피 사무소 비슷한 곳에서.”
“가져온 게 더 있습니까?”
“아니오.”
이건 류태현이 대답했다.
“허강민씨 발견하고 나니 그 외에는 눈에 안 들어와서....”
“찾고 싶은 게 있습니다.”
허강민이 류태현을 무시하고 말했다.
“네 녀석 왼발?”
하무열이 물었다.
“그거랑, 류태현의 오른손이요.”
허강민이 말했다.
“분명 둘 다 같은 데 있을 겁니다. 그놈들 손에 놔둘 수는 없어요. 그러니.”
“그러니, 네가 안무현 흥신소의 시크릿 멤버가 되어서라도 그걸 되찾아야겠다 이거냐?”
“시크릿 멤버가 되는 겁니까? 감옥에 가는 게 아니라?”
허강민이 반문했다. 하무열이 류태현을 쳐다보았다.
“지금 허강민씨를.... 되살려서, 감옥에 넣으면 뭔가 사회 정의에 보탬이 될까요?”
“그래서 탈주범을 숨겨주자는 거에요?”
민지은이 물었다.
“탈주범은 아니지, 체포된 적이 없으니까.”
하무열이 말했다. 민지은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런 거 말장난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말일세, 저 놈이 감옥에 가게 되면 무사히 복역할 수 있을 것 같나? 아니, 감옥까지 갈 수는 있을 거라 생각하나?”
민지은이 대답을 망설였다.
“.....안승범씨 때처럼 될 수도 있다 이건가요.”
다행히 안승범은 살아서 그 미궁을 나왔고, 탈주하려던 의도 없이 납치를 당했을 뿐인 것도 인정받았지만 허강민의 경우는 아마 그렇게 잘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절 어떻게 하실 생각인데요?”
허강민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사무실 저 쪽에 아주 좁고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고 밖에서 잠글 수 있는 창고가 하나 있는데 말이야.”
“정규 감옥에 갈 수 없는 절 위해 정성들여 감옥 환경을 재현해주신다고요?”
“뭐 그런 거지.”
하무열이 씩 웃었다.
“제가 이런 신세라.”
허강민이 왼 다리를 조금 움직였다.
“수색이나 뭐 조사업무에 쓸모 있을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내부 정보 알고 있는 것도 별로 없고 대부분은 이미 쓸모없어졌을 거고.”
“넌 그놈들 사고 패턴을 따라갈 수 있고, 네 머리와 손재주로 싸울 방법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겠지.”
“하무열씨는 기계치라 이해 못하는 것 같은데 저는 일개 대학원생이지 토니 스타크가 아닙니다.”
“그거 다행이군. 가둔 곳을 때려 부수고 탈출하지는 못할 테니까.”
“....하.”
허강민이 고개를 흔들었다.
“진짜로 절 동료로 삼을 작정입니까? 뭘 믿고?”
“동류로서 내 감을 믿고.”
하무열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저랑 동류 아니라고 총으로 쏴서 차셨잖아요.”
“네 발이 류태현의 손과 함께 숭배 받는 건 싫겠지?”
허강민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백선교 놈들 손에 죽고 싶지도 않을 거고.”
“...살고 싶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죽는 것 보단 낫지.”
침묵하던 허강민이 문득 고개를 들어 류태현을 쳐다보았다. 류태현은 당황해서 하무열 뒤로 숨었다.
“저, 저는 없는 걸로 쳐주셔도....”
“됐다.”
허강민이 고개를 돌렸다.
“이제 와서 너한테....”
그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이런 상태로는 제가 뭔가 하려고 해봤자 하무열씨 뜻대로 될 뿐이겠지요.”
“저랑 류태현씨 의견도 없는 걸로 치면 안 되는데요.”
민지은이 말했다.
“저놈은 없는 걸로 쳐달랬어.”
“류태현씨는 없는 걸로 치더라도 저까지 그러면 안 되죠.”
“그럼 네 의견은 뭔데?”
허강민이 민지은에게 물었다.
“역시 나 같은 거 믿을 수 없으니 경찰에 신고하는 게 낫겠어? 것도 좋겠지. 어디 해봐.”
민지은이 허강민을 노려보았다.
“저기, 민지은양..... 내 생각엔.”
“저라고 꼭 저 사람을 감옥에 처넣고 싶은 건 아니에요.”
민지은이 하무열의 말을 끊었다.
“그런 게 벌이 될 것 같지도 않고, 소장님이 말했다시피 무사히 복역을 할 수 있을 지부터가 의심스러운 상황이고..... 안승범씨는 정당한 죗값을 치르고 나와야 다시 떳떳하게 세상을 살 수 있다는 목적이라도 있지만 저 사람은 그런 것도 아닐 거고. 감옥 안에서 사고치거나 자살하지 않으면 다행이겠죠.”
류태현에게 화색이 돌았다.
“네! 역시 그렇죠! 민지은씨 말이 다 맞아요!”
“누가 보면 감옥 안 가는 게 너인 줄 알겠다.”
하무열이 중얼거렸다.
“그러니 부려먹는 것 자체는 찬성이에요.... 본인이 정말로 할 생각이 있을 때 이야기지만.”
민지은이 허강민을 보았다.
“할 생각 있어요, 정말로?”
허강민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 그가 다리를 끌어당겨 모아 안았다. 담요로 덮여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가 이제는 사라진 왼 발목 절단부에 손을 댄 걸 알 수 있었다.
“그래.”
혼잣말하듯 허강민이 중얼거렸다.
“할 생각 있어. 내 죄가 깊다 해서 남의 죄를 용서할 생각 따위 없으니까. 내가 끌어들인 만큼, 이용한 만큼은 내가 책임지고 갚아야 할 내 죄가 맞으니까. 나는 선을 넘어버린 악한이지만 그래도....”
그가 멍한 시선으로 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죽기 전에 할 일은 해야지.”
“좋아.”
하무열이 허강민의 어깨를 쥐었다.
“그럼 앞으로 잘해보자고, 안무현 사무소의 시크릿 멤버 허강민군. 앞으론 소장님께 예의바르게 굴도록.”
“월급도 안 주는 소장님한테 예의씩이나요?”
“안 준다고 누가 그래? 너 먹고 자고 입는 비용은 내가 다 대는 건데.”
하무열이 너스레를 떨었다. 등 뒤에서 류태현이 싸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건 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강민을 위해서도 이게 최선일 터였다.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일단 붙들어 놓은 다음에, 죽을 생각이 들지 않게 하는 건 잡아놓고 천천히 해도 늦지 않았다. 하무열 생각에는 그랬다.
“네, 그럼.... 계약하죠.”
허강민이 손을 내밀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필요한 비용 쓰는 거 외에는 월급 한 푼 안 받는 불공정 계약.”
“너도 나도 감방 동지니 차라리 공정하지 않냐?”
하무열이 그 손을 마주 잡으려 했다. 허강민이 손을 피했다.
“목표는 백선교 타도. 기한은 그들이 가진 우상을 빼앗아 소각할 때까지입니다.”
“...오냐.”
하무열이 손을 잡았다. 허강민도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류태현은 꿈을 꾸었다.
흥신소 사무실이었다. 하무열과 민지은 안승범에 좀처럼 골방에서 나오지 않는 허강민까지 사무소 식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보자기에 싼 보따리 하나를 보고 있었다. 아무도 풀어보려 하지 않았지만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알고 있었다.
백선교의 우상. 허강민과 류태현의 일부였던 무언가.
허강민이 그 보따리에 손을 뻗었다. 그가 그걸 들어 안도록 아무도 저지하지 않았다.
“이제 계약은 끝났습니다.”
허강민이 류태현의 손까지 가져가고 있는데도 류태현은 그를 막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네 번째 밀실에서, 그 때 이미 그에게 준 것이었다. 그가 갖고 가도 상관없었다.
아니, 그가 갖고 ‘가는’ 건 상관있었다.
“가지 말아요.”
류태현이 말했다. 허강민은 창문 앞에 섰다.
“내가 왜.”
흥신소는 3층에 있었다. 그러나 허강민이 저기서 뛰어내리면 죽는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꿈이어서 인가.’
“가지 마세요, 허강민씨.”
꿈꾸는 류태현이 아닌 꿈속의 류태현이 다시 한 번 말했다.
“누구 좋으라고 내가 안 가는데?”
허강민이 창문에 걸터앉았다. 목발도 없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알 수 없지만 꿈속이라서 그러려니 류태현은 납득했다.
“저 좋으라고요.”
‘꿈속의 나는 허강민씨를 말릴 생각이 없는 걸까.’
꿈꾸는 류태현이 자신의 제정신을 의심하는 동안 꿈속의 류태현이 허강민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허강민이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우상은 심연으로 떨어져 사라지고 허강민만이 류태현의 손에 잡혀 매달렸다.
“무의미한 일이야.”
“아니에요.”
“왼손 마저 잘리고 싶으냐?”
“칼도 없잖아요, 이제.”
“너는 날 못 끌어올려.”
“할 수 있어요.”
꿈꾸는 류태현이 그들에게 갔다.
그리고 허강민에게 자기 손을 내밀었다.
허강민이 물끄러미 그 손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칼이 없는 오른손을 들어 류태현의 왼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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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태현과 허강민의 손발을 되찾기 위한 안무현 사무소의 몇 년에 걸친 대 백선교 액션 활극을 쓰려고 생각하니 암담해져서, 류태현의 꿈을 이용해 미래를 땡겨왔습니다. 하하....
원작에서 한 일을 했을 뿐이니 저는 죄가 없습니다. (당당)



절망의 우상 1 ㅣ- 회색도시&검은방

Characters: 류태현. 하무열. 민지은. 허강민.
Rating: PG
Summary: 백선교의 자취를 감시하던 안무현 사무소에서 '우상의 파편'을 발견하다.
Warning: 원작 수준 미만의 고어.





‘역시, 날 떼어놓고 뭘 하고 있나 했더니....’
류태현은 하무열을 보았다. 건물 뒤에 숨어서, 차에서 옆 건물을 감시하고 있는 하무열을 감시했다.
안무현 사무소는 겉으로는 그냥 흥신소였지만 이들이 주로 하는 일은 백선교 추적이었다. 백선교에 의해 실종된 사람을 찾아내거나 백선교에 들어간 뒤 연락이 끊긴 사람을 찾아주거나 하면서 백선교 간부들과 그 범죄 증거를 쫓는다.
그런데 얼마전 하무열이 류태현에게 갑자기 바람난 아내 조사를 하나 맡겼다. 사무소가 운영이 되려면 돈 되는 의뢰도 해야 한다면서. 분명 말이 되는 소리였지만 이제는 류태현도 하무열의 말을 의심할 줄 알았다. 그 조사를 하려면 먼 지방으로 며칠 다녀와야 한다는 걸 알고 나니 하무열의 의도가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꿈속에까지 찾아와서 스카우트 할 때는 언제고 날 따돌리고 대체 뭘 하려는 거야?’
꿈을 꾼 건 류태현이니 하무열하곤 상관없지만 류태현은 속으로 이를 갈며 쌍안경으로 하무열을 살폈다. 류태현을 배제하려는 거 보면 백선교 중에서도 허강민이나 미궁과 관련 있는 인물이나 사건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면 ‘우상’ 관련이거나.
“무열 형도 참 바보라니까, 내가 몇 년을 밀실에서 굴렀는데, 그 정도 일로 마음에 상처라도 입을까봐 일에서 빼고.”
류태현이 나지막하게 투덜거렸다.
하무열이 감시하고 있는 건물 옆에 검은 밴이 와서 섰다. 밴 뒷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짐을 내렸다. 비닐로 겹겹이 포장된 상자는 포장과 거리 때문에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류태현은 그 틈새에서 제약회사 마크를 하나 알아보는데 성공했다.
‘무허가 진료라도 하려는 건가? 아니 백선교 놈들이라면 진료가 아니라 그 반대겠지.’
역시 여기는 ‘우상’ 관련 시설이 맞는 모양이라고 류태현은 생각했다. 그러니 이제 하무열에게 가서 다 알고 있으니 같이 하자고 말할 차례였다.
그리 마음먹고 막 그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감시하던 건물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응?’
그리고 하무열이 차에 시동을 걸고 재빠르게 도망갔다. 나르던 짐도 놔두고 사람들이 급히 차에 올라 하무열을 쫓아갔다. 일부는 건물 문을 잠그고 역시 흩어졌다. 저들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경계할 거고 여기 계속 있다간 저들에게 잡힐 거라고 류태현은 금방 알아차렸다.
그렇다 해서 하무열과 같이 도망갈 생각은 없었다.
류태현이 문제의 건물을 쭉 훑었다. 계단으로 통하는 큰 유리문은 놈들이 나가며 잠갔지만 2층에 반쯤 열린 창문이 보였다.
‘좋아, 안에 사람이 없다면 지금이 기회다!’
결심하고 류태현은 사람들을 피해 그 건물로 접근했다.


결과적으로, 안에 사람이 없을 거란 류태현의 추측은 틀렸다.
그러나 백선교도들이 류태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한때는 포교 사무실이었던 것 같은 먼지투성이 실내에 설치된 병상과 링거 스탠드, 그리고 그 위에 누워있는 인영을 보며 류태현은 자기가 꿈을 꾸고 있나 생각했다.
이렇게 생생하고, 깨고 싶지 않은 악몽이라니.
“....허강민씨?”
속삭임 같은 작은 소리만이 류태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류태현이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갈수록 이동식 철제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사람은 점점 더 허강민으로 보였다.
마침내 침대 바로 옆에 서서, 류태현이 허강민의 얼굴에 손을 대었다.
살아 있었다. 그리고 허강민이 틀림없었다. 안경도 없고 머리 절반이 붕대로 감겨있지만 류태현은 알아볼 수 있었다. 머리를 다쳤는지 그의 특징적인 곱슬머리가 뭉텅 잘려있어도, 파리하고 의식 없는 얼굴에 그를 살아 숨 쉬게 하는 것 같던 고통과 광기가 보이지 않아도.
“허강민씨...”
류태현이 링거봉투를 보았다. 평범한 수액이었다. 당장 허강민을 살려두는데 필수불가결한 무언가가 아니었다.
그가 망설임 없이 바늘을 뽑고 허강민을 담요에 말아들었다. 허강민이 왜, 어떻게 살아있든 백선교도들이 아니라 자기와 있어야 했다. 그게 옳았다.
“위험한 상태는 아니면 좋겠는데... 허강민씨, 조금만 버텨줘요.”


백선교도들에게 들켜 서울 시내 절반을 돌아다니며 쫓기다 겨우 사무소에 되돌아온 패잔병 하무열은 자기네 소파를 차지하고 누워있는 꿈에 볼까 두려운 얼굴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하무열이 꼼짝도 못하고 있는 새 민지은이 뒤에서 문을 잠갔다.
“왜 저 빼놓고 갔어요?”
“....류태현.”
류태현이 매우 할 말이 많은 얼굴로 하무열을 노려보았다.
“아까 전에 소장님이 감시하던 건물에 사람이 없어진 틈을 타 침입해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사전 지시는 없었지만 업무 내였다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웬 거리감이냐. 왜 삐졌냐.”
“...몰라서 물으시나요?”
류태현이 책상을 쾅 내리치려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허강민을 흘끔 보고 책상 모서리만 꽉 움켜쥐었다.
“허강민씨 일에 절 따돌려요?”
“그래서 너 하라고 한 일은 어떻게 됐는데?”
“다른 흥신소에 넘겼어요.”
“뭐 임마?”
“지금 무열이형이 내게 화낼 입장이라고 생각해요?”
류태현이 하무열을 다시 노려보았다.
“어떻게 허강민씨가 살아있다는 걸 알면서 나한텐.....”
“몰랐다.”
“거짓말 하지 말아요, 이 사람이 거기 있는 거 알고 감시하고 있던 거 아니에요?”
“아니야. 내가 입수한 정보로는 거기에 ‘우상의 파편’이 있다는 것밖에 알 수 없었고 나도 정보를 준 사람도 그걸 사람을 고문해 만들어낸 부적 조각이라고만 생각했으니까.”
하무열이 소파로 한 걸음 다가가 허강민을 내려다보았다.
“설마 이렇게 큰 덩어리인줄, 심지어 목숨이 붙어있을 줄은 정말 몰랐지.”
“...몰랐다고요.”
반신반의하면서도 류태현의 목소리는 조금 누그러졌다.
“사실이에요.”
민지은이 하무열의 편을 들어주었다.
“거기서 끔찍한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시면서 그.... 손가락 얘기를 해주셨거든요.”
“그런가요.”
류태현이 약간 납득했다.
“하지만 그럼 제가 고작 백선교의 만행을 무서워할까봐 따돌리신 거에요?”
“사무실의 재정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내 말은.”
“설득력 없습니다.”
류태현이 냉큼 잘랐다.
“절 바보 취급 하는 것도 적당히 해두세요.”
“....그래, 거기에 허강민 관련한 뭔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는 했다.”
하무열이 마침내 실토했다.
“아무튼 경찰은 그의 시체를 못 찾았으니까. 시체 조각이나 저놈의 ..... 뭐 소지품이나 그런 기념물이 될 만한 것들. 하지만 내가 걱정한 건 그게 아니야.”
“그럼요?”
“네 손이 거기 있을까봐 그랬어.”
그 말에 류태현이 입을 벌렸다 닫았다.
“백선교 보기에 너랑 허강민은 한 쌍이니까. 죽여서 우상을 완성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해도 네 손과 저 녀석의 시체 쪼가리를....”
“그, 그만해요.”
류태현이 하무열의 말을 막았다. 하무열은 ‘그러게 내가 뭐랬냐’ 라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으...”
갑자기 조용해진 사무실 덕에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들렸다. 류태현이 득달같이 허강민 옆으로 달려갔다.
“허강민씨?”
“잠시만요. 기절에서 깨어나는 사람 잡고 흔들지 말고요.”
민지은이 나서서 류태현을 물러서게 한 후 허강민의 상태를 살폈다.
“거기서는 어쩌고 있었어요?”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었어요. 수액을 맞고 있었고. 어, 그리고 근처에 약상자 같은 게 있어서 일단 챙겨왔는데요.”
류태현이 책상 위에 뒀던 종이 상자를 민지은에게 주었다. 안에는 바이알과 앰풀이 2/3정도 들어있었다. 민지은이 병을 꺼내서 작은 글자를 읽었다.
“이건 항생제고, 이건... 잠깐만요, 사전 좀.”
사전을 찾아본 결과 앰풀은 수면 진정제였다.
“허선생이 왜 안 깨어나는지는 알겠군. 그럼 항생제는 왜일까.”
하무열이 허강민을 감고 있는 담요를 휙 벗겨내었다.
“...그랬군. 손과 발이라니 잘 어울리는 조합이겠네.”
허강민의 왼쪽 다리는 발목 조금 위에서 끊겨있었다.


허강민이 깨어난 건 그날 늦은 저녁이었다.
“으.....”
의식보다 통증이 먼저 찾아왔다. 허강민이 괴로워하며 신음소릴 내었으나 가져온 주사약 중에 진통제가 없어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었다.
“차라리 빨리 깨워서 약을 먹일까요?”
류태현은 자기가 대신 아프기라도 한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약 때문에 잠든거니 흔든다고 깨어날 것 같지 않은데.”
하무열은 시큰둥했다. 그도 사무실 구석에서 계속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려오는 건 질색이었지만 류태현이 저렇게 대리로 아플 기세로 걱정하는 것도 별로 기껍지는 않았다.
“마취약 언제 없어지죠.”
류태현이 민지은을 쳐다보았다. 민지은은 어깨만 으쓱했다. 류태현은 다시 허강민을 뉘어놓은 소파 곁으로 갔다.
“아, 거 너무 봐서 허강민 닳겠다.”
“사람은 본다고 안 닳습니다, 하무열 소장님.”
저놈 저거 또 삐졌구만, 하고 중얼거리는 하무열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류태현은 허강민의 체온을 재고 아이스팩으로 열을 식히고 입술을 축여주었다. 목이 마른지 허강민이 무의식적으로 물 적신 손수건을 빨았다.
‘아.’
그걸 보고 류태현은 기뻐졌다. 물을 찾는다는 건 살고 싶은 본능이 남아있다는 뜻일 테니까.
‘물론 깨어나면 또 어떻게 마음 바뀔지 모르는 거지만 그래도....’
“아....”
허강민의 눈꺼풀이 움찔 떨렸다. 손이 조금 움직였다.
“아, 허강민씨 일어...”
“하지...... 마........”
“네?”
류태현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정신 차리고 처음 하는 말이 거부라니.
“정신 차려요, 류태현씨.”
민지은이 그를 흔들었다.
“지금 정신 차린 거 아니에요.”
“그, 그런가요?”
류태현이 다시 허강민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감겨있고 더 무슨 말도 하지 않았다.
“마취에서 깰 땐 좀 깜빡깜빡 하잖아요.”
“네.... 그랬죠.”
류태현이 자기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자기도 몇 번이나 겪은 일인데 허강민이 또다시 자기 도움을 거부하는 것 같자 그런 건 싹 뇌리에서 날아가 버렸다.
“저...... 류태현씨.”
민지은이 망설이다 말했다.
“이런 말 하기 미안하지만, 허강민씨에게 너무 집착하는 거 아닌가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건 알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없었다 해도요.”
류태현이 말했다.
“저는 허강민씨도 구하고 싶습니다.”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가 덧붙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요.”
그가 자신에게 ‘두 사람의 죽음을 방치한 죄’에 대해 고백했을 때부터, 류태현은 허강민을 구하고 싶었다. 모두 살아나가자고 말했고 분명 그러고 싶었지만 함께 미궁을 나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었던 건 분명 임선호보다는 허강민이었다.
‘그 때 좀 더..... 솔직하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강민의 원한은 그리 쉬이 풀릴만한 것이 아니고 당시의 자신 역시 자기 고통과 죄책감에 삼켜져 있느라 바빠서 남의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해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지금은 가능한 걸까?’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고 류태현은 생각했다. 허강민이 그의 도움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희박하긴 하지만.
“으......”
허강민이 헐떡거렸다. 그가 입술을 깨물며 도리질을 쳤다. 몸부림치다 좁은 소파에서 떨어질까 두려워 류태현이 허강민의 몸을 붙들었다.
허강민의 눈꺼풀이 떨리더니 천천히 벌어졌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가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허강민씨?”
류태현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잠시 헤매던 허강민의 눈동자가 류태현에게 향했다.
“......빌어먹을 악몽 같으니......”
허강민이 도로 눈을 감았다. 류태현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경직했다. 민지은은 딴 데 쳐다보며 헛기침했다.
“자, 현실도피도 거기까지다, 이 귀찮은 미역머리.”
하무열이 끼어들었다.
“네놈한텐 매우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이건 악몽이 아니다. 그러니 당장 눈 뜨고 생명의 은인들한테 고맙단 소리 하지 못하겠냐.”
“네.”
허강민이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제가 살아난 걸 기뻐할 거라는 그 어처구니없는 확신 어디에서 생긴 거에요?”
“기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한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하무열이 다가와 허강민의 볼을 잡아 쫙 당겼다.
“방금 깨어났으면서 여전히 입만 살아서는.”
“아!”
“무슨 짓이에요!”
허강민과 류태현 양쪽에서 항의가 터져 나왔다. 하무열은 눈도 깜짝 하지 않았다.
“이제 좀 살아있다는 실감이 드냐?”
“.....아니오.”
허강민이 눈을 떴다. 그가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하무열을 노려보았다.
“살아있는겁니까, 저?”
“그래. 있었던 일은 기억하냐?”
허강민이 침묵했다. 미간을 모으고 있는 꼴이 대답을 안 하려고 버틴다기보다는 머릿속을 뒤지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서 하무열은 관대하게도 허강민을 괴롭히지 않고 잠시 저대로 놔두기로 했다.


레히삼을 다시 써 보았습니다 9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으......”
뭔가 꿈이라도 한바탕 꾼 것 같았다.
악몽은 아니었다. 그러나 만화 주인공이 되어 악당들을 무찌르는 신나는 꿈이라 해도 가끔은 깨고 나서 피곤할 때가 있었다. 침대에서 굴러떨어진다든가......
일어나려고 한 바퀴 구른 순간 몸의 중심이 무너졌다. 침대가 사라졌다.
“미축!”
다리는 방바닥에 떨어졌는데 몸은 누군가에게 붙들려 도로 침대 위로 올라갔다. 두 눈을 떠보니 유비였다.
“유비.”
“그래, 나야. 괜찮아?”
유비는 미축이 침대에서 떨어지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다고 믿는 표정이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얼굴을 피해 미축은 일단 도로 침대에 올라갔다.
“아, 괜찮으니까 좀 비켜봐.”
“정말 괜찮아?”
“그렇다니까? 그보다 너 왜 내 방에 있냐?”
“응?”
유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무슨 소리야? 여기 도원관이야.”
“뭐?”
미축은 그제야 주변을 다시 제대로 둘러보았다.
자기 방이 아니었다. 오래된 목조건물의 좁은 방이고 옷걸이에 걸려있는 옷들도 유비의 옷이었다.
“어......”
“정신 들어?”
유비가 다시 걱정스런 기색으로 물었다. 미축은 두 눈 껌벅껌벅 하며 무슨 일이 있었나 돌이켜보았다.
언제나 시시하게만 흘러가는 일상에 뭔가 변화를 주려던 것이 생각났다. 뭐든 작은 일이라도 스스로 성취해보면 인생이 달라진다든가, 그런 블로그에서 체육관이나 헬스장 중도포기 안 하고 꾸준히 다니는 법 찾아본 기억도 났다.
‘......그런가, 안 하던 무술을 갑자기 해서 쓰러진 건가.’
역시 자기 깜냥에 무술은 무리였던 모양이다. 6개월 치를 한 번에 끊은 게 아깝게 느껴졌다.
기지개를 켜자 역시 팔 근육 어깨 근육 할 것 없이 당기고 아팠다.
“여, 역시 부상당한 거야?”
옆에서 유비가 기겁했다.
“아니, 그 정도는 아냐.”
기절했다가 일어난 건 자신인데 왜 유비를 달래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근육통 말고 다른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거, 별것도 아니구만 엄살은.’
어디선가 그런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미축은 말한 사람을 찾아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방 안엔 자신과 유비뿐이었다.
“왜 그래?”
유비는 여전히 미축이 여차하면 피 토하고 죽기라도 할 것 같은 태도였다. 미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무 것도 아냐. 갑자기 좀 무리했나보네. 빈혈이었나?”
“빈혈?”
“그래. 요즘 안 하던 운동을 갑자기 했더니 아무래도 몸이 허해진 거야. 이럴 땐 고기 앞으로 가줘야지!”
미축이 하하 웃으며 유비의 어깨를 두드렸다.
“물론 너랑 공손찬도 사줄 테니까, 앞으론 좀 살살 가르쳐라. 오케이?”
유비는 잠시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미축을 빤히 바라보다가 슬쩍 물었다.
“그럼, 그럼 비룡권 앞으로도 계속 배우는 거야?”
“아, 그걸 걱정한 거였어?”
그게 그렇게까지 걱정할 일이었나 싶지만 유비는 원래 눈물도 많고 겁도 많았다. 무협 영화 주인공이 정말로 죽을까봐 걱정하는 사람이 무슨 걱정을 못하겠는가.
“일단 등록한 게 있는데 어떻게 며칠 만에 그만두냐. 환불해달라고 하기에도 쪽팔리고.”
블로그에서 본 충고가 정말로 맞아들어갔다. 미축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기왕 시작한 거 끝까지 해야지.”
유비가 활짝 웃으며 박수까지 쳤다.
“포기하지 말고, 화이팅!”
“화, 화이팅.”
어차피 시간이 남아서 하는 취미일 뿐이었다. 단증 좀 딴다고 자기가 대단한 고수가 될 리도 없는데, 유비는 그런 엄청난 포부라도 밝힌 것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뭔가 기분이 간질간질 요상해졌다. 마치 중요한 것을 잊은 듯이.
‘뭘 잊었지?’
지갑은 운동복 주머니에 잘 있었다. 폰도 같이 있었다.
“공손찬! 미축 깨어났어. 괜찮아 보여.”
유비가 방 밖에 대고 소리쳤다.
“그래?”
곧 공손찬도 달려와 아까의 유비만큼이나 절박하고 어두운 얼굴로 미축을 살폈다. 자칫 아까 했던 문답을 그대로 되풀이하게 될까봐 두려워진 미축이 숨을 들이쉬었다.
“나 빈혈로 쓰러진 거고 다친 데 없고, 비룡권도 계속 할 거야.”
공손찬은 미축을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유비를 쳐다보았다.
“혹시 미축 괴롭혔어?”
“아니.”
유비가 울상을 했다.
“내가 언제 누굴 괴롭혔다고 그래.”
“응. 그런 적은 없지.”
공손찬은 여전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미축에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무술이라는 게 막상 시작하면 그 전에 생각하던 거랑은 많이 다르잖아. 정말 계속 할 거야?”
공손찬의 태도가 워낙 진지했기 때문에 미축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수강료는 정말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공손찬 말대로, 무술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고 멋있지도 않았다. 시작할 때 품었던 각오도 지금 떠올려보면 왠지 어설펐다.
처음부터 도전할 가치도 없는 일에 괜히 도전한 듯한 후회가 분명히 있었다.
‘그래도 이제 막 시작했는걸.’
공손찬은 물론 유비마저도 도복을 입고 무술을 할 때는 꽤 근사했다. 자신도 노력 정도는 해보고 싶었다.
한 번 쓰러졌다고 그만둔다고 하면 그게 무슨 마음 약한 소리냐고 타박당할 것 같았다.
“역시 좀만 더 해볼래.”
미축이 다짐했다.
“고수가 못 되더라도. 꾸준히 하다 보면 분명히 얻는 게 있겠지.”
유비가 다시 활짝 웃었다. 공손찬도 만류하듯이 말한 것치고는 미축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웃음짓고 있었다.
어디선가 굵직한 너털웃음 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요즘 재미있게 읽고 있는 무협 만화의 사범님 얼굴을 떠올리며 전화를 들어 마땅한 고깃집을 찾아보았다.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허가 남았지만 그런 건 원래 지용성인 법이었다.


“미안해, 고기 싸오고 싶었는데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어.”
다음날 유비는 관우와 장비 앞에서 고기 냄새 풀풀 풍기며 빌었다.
“대신 내가 언제 고기 사올게. 도원관 뒤뜰에서 구워먹자. 그게 더 맛있을 거야.”
“주군께서 굽는다면 당연히 더 맛있겠지요.”
“그런데 영웅패도 뭘 먹을 수 있는 거였소?”
정작 두 영웅패는 조금도 섭섭해 보이지 않았다.
“생소한 경험이었지만, 주군의 사랑과 정성을 섭취하는 것이니 역시 영웅패에게 유익할 걸세. 조운도 가끔 공손찬님의 샌드위치를 먹는다네.”
관우가 선배 노릇 하려는지 점잔을 빼며 말했다.
“헤, 미축은 먹을 걸 준 적은 없었는데.......”
장비의 목소리가 줄어들다가 꺼져버렸다. 유비와 관우도 시무룩해졌다.
“뭐 나쁜 주군이었던 건 아니었소.”
장비가 중얼거렸다.
“약해서 문제였지만 노력은 가상했으니까......기죽지 않고 잘 살고 있는 건 다행이오. 난 그거면 됐소.”
“그래. 비룡권도 당분간 계속할 것 같더라.”
하진과는 워낙 분위기가 달랐기 때문에 유비도 조금 궁금했다. 무엇이 하진의 결말과 미축의 결말을 다르게 했는지.
그러나 지금은 장비의 기운을 북돋아주는 것이 더 중요했다. 유비는 가져온 복숭아 통조림을 열었다.
“짜잔~!”
“과일을 깡통에 담았군요?”
관우가 호기심을 드러내며 깡통 안을 들여다보았다.
“응. 한 번 먹어봐. 생과일보다 더 달고 부드러워.”
유비가 복숭아를 꺼내 반으로 잘랐다. 그리고 작은 포크로 복숭아를 찍어 두 영웅패에게 나누어주었다.
티스푼과 세트인 작은 포크가 영웅패들에겐 삼지창만큼 컸다. 그런데도 그들은 넘어지지 않고 가볍게 복숭아를 집어들어 먹었다.
“오오, 이거 정말 맛있군!”
장비가 활짝 웃자 비로소 유비도 마음이 활짝 개었다.
“그럼 우리 셋이 이제부터 화이팅!”
“화이팅!”
유비에게는 지금이 공손찬 없이 처음으로 자신만의 친구들을 사귄 순간이기도 했다.
보육원에서뿐만 아니라 스승님 밑에서 자랄 때도 자신은 스승님과 공손찬 뒤만 따라다녔다. 놀러가거나 취미 활동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축처럼 공손찬의 친구여서 친해진 사람이 아닌 경우도 어쩌다 있긴 하지만 그리 대단한 사이는 아니었다.
관우와 장비는 순전히 자신의 힘으로 만든 자신만의 친구였다.


“휴가라뇨?”
태오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미결사건이 몇 갠데 신청한 적도 없는 휴가를 왜 사흘이나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강하관을 문 닫게 만들었잖나. 황조 빼고 전부 달아나려는 걸 자네가 일망타진해줬으니 포상휴가 정도는 있어야지.”
상관들이 다 왕윤 선배 같으면 오죽이나 좋을까마는, 불행히도 반대였다. 이 인사부장처럼 돈과 권력에 아부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자신이 그 피해자가 아닌 수혜자에 속한다는 사실이 더욱 구역질났다.
“삼공그룹 관계자도 아닌 분이 결혼식 날짜까지 알아다가 미리 배려해주시다니 대단하군요. 아주 청첩장까지 배달해주시지 그럽니까?”
태오가 노골적으로 빈정거렸으나 인사부장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아직 팔팔할 때 휴가도 쓰고 몸도 아끼고 그러셔야지, 도련님. 그래야 나중에 조위그룹 회장 노릇도 제대로 할 것 아닌가.”
“되든 말든 부장님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어디 맘대로 말해보라고. 결국엔 이 꼰대 아저씨한테 감사하게 될 테니.”
휴가고 뭐고 자기가 퇴근 안 하고 경찰서에 붙어있으면 어쩔 건가. 씩씩거리며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불려가기 직전까지 보고 있던 서류들이 다 옆자리들로 옮겨가 있었다.
‘또......’
자신이 재벌 3세이고 3대독자라는 사실은 여기 처음 배치될 때부터 모두에게 알려져 있었다. 이쯤되면 꼬리표가 아니라 아예 자기 가는 곳마다 앞서가서 먼저 깔아놓는 판처럼 느껴졌다.
그냥 후배로 대해달라고 혼자 발버둥쳐봐야 그렇게 대해주는 분은 왕윤 선배님뿐이었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꼽아보았다.
정말로 휴가따위 무시하고 출근해서 일할 수도 있었다. 누구도 자신에게 사건 정보를 공유해주지 않고 서류 정리나 공문 발송 과정에서 생기는 사소한 잡무 하나 도와주지 않겠지만 평소에도 자신은 혼자 일하는 편이었다.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고민하면서 버릇처럼 왕윤 선배님의 자리를 보았다. 지금은 비어있었다.
자신의 문제를 선배님께 떠넘기는 것 같아 선배님께 의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달리 볼 만한 곳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쪽에 시선을 둔 채 고민했다.
할아버지께 전화해서 항의하는 방법은 딱 한 번 써봤고 다시는 쓸 생각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말만 많지 집안에선 아무 힘도 없었다. 태오가 경찰로 사는 걸 할아버지보다 더 싫어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순순히 나갔다간 이런 일은 계속 벌어질 터였다.
‘그런데 선배님 언제 오시는 거지?’
책상 위의 상태를 보면 어디 멀리 나가신 건 아니었다. 그런데 시계를 봐 가며 시간을 재도, 30분이 지나도록 자리에 돌아오지 않았다.
잠깐 쉬러 나가신 거라고 믿으며 좀더 기다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전에 자신이 용의자를 제압하다가 얼굴을 다쳤을 때, 엉뚱하게도 선배님이 크게 곤욕을 치렀다. 표면상으론 미숙한 후배를 적절히 보호 감독하지 못했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았다.
희미한 흉 하나 남지 않은 가벼운 상처였건만.
참지 못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상관들 사무실이 있는 복도로 막 들어섰다가 그쪽에서 나오는 왕윤과 마주쳤다.
“선배님. 무슨 일 있었습니까?”
“아니, 무슨 일은.”
왕윤은 얼버무리며 눈을 피했다. 선배님답지 않은 태도에 태오의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당장 국장실에 뛰어들어봤자 자기 무덤도 아니고 선배님 무덤을 파는 형국이 될 터였다. 태오는 겨우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이만 부드득 갈았다.
“무슨 일 있었니?”
“아무 일도 없습니다.”
태오가 씹어뱉듯 설명했다.
“삼공그룹 원씨 가문의 누구였더라가 결혼식을 올릴 뿐입니다. 그저 계열사의 낙하산 사장이고 신랑 아버지가 원봉 회장일 뿐이죠.”
“원봉 회장의 아들이라면 원술? 그럼 너도 가봐야 하는 것 아니냐?”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닙니다. 그리고 경찰이 언제부터 남의 결혼식 가느라 휴가도 낼 수 있는 직장이 되었습니까?”
왕윤은 변명할 말을 조금 골라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미안하다.”
“선배님 잘못이 아닌 거 압니다.”
태오는 잠시 구두 끝만 내려다보며 손가락을 두드렸다.
자신 때문에 선배님이 피해를 보는 건 정말로 바라지 않았다.
“초선이가 요즘 심심해 보이더구나.”
태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요즘은 태오 아저씨 안 오냐고 하더라. 결혼식 가고 시간 남으면 우리집도 들러줘.”
“예.”
피할 수 없다면 좋은 쪽을 보자는 안일한 해결책이었지만 왕윤도 다른 수가 없었다. 태오가 더 연륜과 경험을 쌓고 발언권을 얻는 것만으로 해결될 것 같지도 않았다.
태오의 할아버지 조등이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부를 쌓아올렸다는 사실은 나라 안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악명높은 조위그룹 회장의 손자가 유괴되었을 때, 경찰들조차 인과응보라고 수군거렸다. 그러면서도 필사적으로 수사했다. 어린 아이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조등 회장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
조등과 조위그룹 때문에 망한 사람들의 이름이 여러 번 수사망에 올랐다. 조등의 조 자만 들어도 경기하는 사람들 붙들고 괴롭히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직 젊은 경위였던 왕윤은 수법과 알리바이 등에만 초점을 맞춰 수사했다.
그렇게 해서 잡아낸 범인은, 조등과 아무 상관도 없이 몸값만 노린 어설픈 풋내기였다.
‘역시 가끔은 지치는 걸 어쩔 수 없어.’
사무실로 돌아가는 태오의 뒷모습이 다시 그때처럼 작아 보였다.
영리하고 예민한 아이인데 의외로 단순하기도 했다. 이 험한 세상 언제까지 저 모습대로 살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역시 사람 힘으로는 불가능하겠지. 누구도 자신과 남을 해치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은.’
왕윤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가만히 여포를 쥐었다.
그래서 그 꿈을 걸었다. 부인과 초선이의 행복, 태오의 장래 등은 함부로 걸 수 없었다. 승자가 단 한 명뿐이라면 패배할 경우도 마땅히 대비해야 했다.
하지만 만약 승리한다면, 그때는 자신도 태오도 고민하고 괴로워할 필요가 없었다. 부인 정원과 딸 초선도 근심 걱정 없이 안전한 세상에서 살 수 있었다.
그런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도 안 되기는 했다. 그러나 어차피 이긴 뒤에 직접 볼 일이지 지금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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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살아서 맞벌이를 했더니 아이가 제대로 된 양육도 받지 못하고 집밥에 대한 광적인 집착도 해소하지 못해서 삐뚤어지는 클리셰와, 엄마가 뒈져 없어지고 아빠는 자기 옷 한 벌 제때 빨아입지 못하고 직장에서 사는데 아이가 어른스럽고 구김살 하나 없이 자라며 아빠를 경애하는 클리셰가 한 작품에 등장한 것이 짜증난 나머지 여기서는 왕윤 부인이 살아있습니다. 이름은 정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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