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자면 대문 - 화산섬의 분관에 어서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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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번 읽기는 귀찮고 길테니 접습니다. 그래도 한 번은 펼쳐주세요.

NC-17에 대한 새로운 공지 팬픽류

좀 정리할 필요성을 느껴서


티스토리 비번은 이글루스의 동일 카테고리 글에 몇 번 이상 덧글을 달았고 그 덧글의 내용으로 봐서 판단하기에 이 사람이면 보여줘도 되겠다 싶은 사람, 또는 실제로 아는 친구나 친구에게 소개받은 사람한테만 공개하겠습니다.





모바일로 장편 읽기 힘든 경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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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http://archiveofourown.org/users/hicstans  에서 보셔도 좋습니다. 장편은 거의 올린 것 같지만 빠진 게 있으면 알려주시면 업로드 하겠습니다.

내 마음에 스파이 1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Characters: 유비. 공손찬. 제갈량. 사마의. 주유. 그 외 레히삼 등장인물들.
Rating: PG-15
Warnings: 없음
Summary: 유비가 제갈량 교수네 집에 입주 가정부로 들어가다.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은 가족 간을 빼면 모두 비즈니스 관계의 성인이고 예의바르게 상호 존댓말을 씁니다. 속으로는 찔러죽이고 싶거나 말거나.




안녕, 공손찬.

기숙사에는 잘 들어갔어? 이사를 돕고 왔어야 했는데, 먼저 떠나게 돼서 미안해. 여기 일이 너무 좋은 조건이라 놓칠 수 없었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갑작스러웠지.
난 잘 있어. 집주인을 만났는데, 엄청 잘생겼어.
내가 얼빠인게 아니라, 정말 보면 와 잘생겼다, 사람 맞나 싶게 잘생겼어. 교수님이라길래 나이든 할아버지인줄 알았는데 젊어. 내 또래 정도로 밖에 안 보여. 엄청난 천재라더라. 여기 뭐라더라, 거주동? 뭐 아파트 같이 생긴 곳에 사는데 가구들 다 새건대 먼지는 많아. 이 교수님은 청소 안 하고 사나봐... 하긴 나라도 아침 7시에 나가서 밤 10시에 들어오면 가구 청소까진 무리겠지만. 청소는 안 해도 정리는 하는지 물건들은 다 놓인 자리가 제자리니 청소 하더라도 그 자리에 정확히 그대로 놓으라고 주의를 들었어. 좀 까다롭다는 생각도 들지만 천재한텐 자기 기준이 있는 거겠지.
좀 까다로운 거 빼면 교수님은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집 보여주면서 설명할 때도 억지로 미소짓고 있었고. 이상한가? 그치만 그 사람 평소에 잘 웃을 것 같은 사람은 정말 아니거든. 근데 새로온 사람 안내해준다고 안 익숙한 미소를 열심히 만들다니 다정하지 않아? 왠지 넌 또 날 바보취급하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뭐 또 쓸 거 빼먹은 거 없나. 모르겠다. 생각나면 또 쓰지 뭐. 아님 네가 지적해줄 거고. 아 내 방 넓고 좋아. 새집이라 깨끗하고. 창문도 크고. 여기 안쪽에선 사진 찍으면 안된대서 보여줄 수는 없지만. 아쉬워. 저 교수님도 좀 보여주고 싶은데. 하긴 그 교수님이 자기 찍어도 된다고 해줄리 없겠지...
잘 지내고, 너도 한가하면 편지 써.

유비가.



‘한가하면’ 편지를 쓰라니, 쓰지 말란 얘기니 그거?
안녕, 유비. 혼자 쓰는 방이 있다니 부러워 죽을 것 같아. 기숙사는 4인실인데. 그야 고시원에 비하면 감지덕지지만. 방세도 싸고. 아 정말 상향이가 정보를 물어다 줘서 살았어.
근데 너 대체 어디서 일하는 거야? 전화는 왜 안 되고? 메일이라도 안 왔으면 너 사기당해서 새우잡이 배에 팔려갔나 생각했을 거야. ‘독신 남성의 가사를 돌볼 남자 입주 가정부’라니 역시 그런 편리한 자리가 뿅하고 나타날 리 없다고, 경찰에라도 가봐야 하나 걱정하던 참이었다고. 근무지가 지방이라니 왜 미리 말 안 한 거야? 역시 이것저것 정신없더라도 너 혼자 알아서 하게 놔두지 말았어야 하는데... 멀쩡한 일인 거 정말 맞지? 맞으면 답장에 우리만의 암호를 써서 보내.
그 외에 네가 답장에 뭘 적어보내야 하는지 알려주지.
일하는 곳 주소, 전화번호, 무슨 일 하는지 자세하게. 월급과 보너스, 휴가, 식비, 4대보험등 업무 조건. 근로계약서는 썼는지. 뭘 사거나 돈을 빌리거나 종교에 가입하라거나 보증을 서지는 않았는지. 무슨 각서 같은 걸 쓰라고 하지는 않았는지. 전화는 어떻게 했는지 되도록 빨리 답장해줘, 문제 있으면 너 장기 뜯기기 전에 구해야 하니까.
...뭐, 메일을 보낼 수 있는 거 보면 최악의 상황은 아니려나. 정말 네가 써 보낸 대로 괜찮은 일이라면 너무 다행이긴 한데, 너무 행운이라 안 믿겨서 그래. 우리처럼 막 성인 된 애들이 제일 등쳐먹기 좋은 표적이라고 그랬단 말이야. 게다가 넌 어수룩하니까 뭐에 속아 넘어갈지 몰라서 걱정이라고.
사부님이 빨리 돌아오셔야 하는데.
도원관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 그 사부님 친구라는 분은 사부님만 돌아오면 다 해결될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지만 믿어도 되는지 그냥 안심시키려고 하는 말인지. 뭐, 우리가 어쩌지 못할 일인건 분명하니까 그건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넌 너 한 몸 잘 간수해. 근데 교수님이 미남이란 말을 몇 번 강조한 거야? 너 얼빠 기질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참....
고용주다. 건드리면 안 돼.
난 잘 지내. 기숙사도 무사히 입주했고 강의도 잘 듣고 있고.
답장 빨리 써.

공손찬 보냄.


잔소리쟁이 공손찬에게.

사기 아니래도 그러네. 근로 계약서도 썼고 월급도 보너스도 나오고 휴가도 있어. 식비는 따로 없긴 한데 그건 내가 나가서 사먹기보단 내가 밥한 거 같이 먹고 싶다고 해서 그런 거고.
실제로 같이 먹는 건 아니지만. 저번에 썼지만 교수님은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오거든, 일어나서 아침 서둘러 차리고 뭐 조금 다른 거 하고 있으면 벌써 먹고 뛰어나가니까. 밤엔 늦게 들어와서 먹을 때도 있고 안 먹을 때도 있고. 후, 어디 칼로리 낮고 기름지지 않고 건강에 좋은 야식이 뭐 없을까. 저렇게 운동도 안 하는데 밤중에 소시지 같은 거 먹으면 배 나올지도 모르잖아. 인류의 손실이야 그건. 그렇다고 야식을 먹지 말라고 내가 잔소리하기도 그렇고, 배고프게 하기도 싫고. 일단 데쳐서 기름을 빼는 정도는 하고 있어.
더 자세하게 쓰고 싶은데 비밀 유지 의무인가 때문에 그러면 안 된대. 어떤 무뚝뚝한 아저씨가 나한테 외부 연락할 때 써선 안 되는 것들 목록을 주고 어기면 법적인 조치를 할 거라고 그랬거든, 그러니까 그냥 월급 많고 비싼 거 먹는다고만 해둘게. 참 여기 슈퍼 엄청 비싸더라. 막 두부 같은 것도 우리 먹던 것보다 배 이상 비싸. 근데 엄청 보드랍고 맛있긴 해. 공부 잘하면 이런 거 먹는 건가 좀 부러워.
그리고 휴대폰은 여기선 못 쓴대. 근처에 전파 망원경? 그런 게 있어서 무선으로 하는 건 못쓴댔어. 그래서 전화도 메신저도 안 되고 연락 수단은 메일 뿐이야. 아쉽긴 하지만 진짜로 월급 많아. 착실하게 모으면 너 한두 번 장학금 못 타도 무사히 학교 다닐 수 있을 정도야.
음, 그리고 여기선 싫어도 착실하게 모으게 될 것 같아. 주변에 놀만한 데가 전혀 없어...

아, 근데 암호라니 무슨 소리야? 우리 그런 거 있었어? 아무래도 내가 잊어버렸나봐. 전혀 생각이 안 나. 그래도 이거 거짓말 아니야, 진짜. 나 유비 맞고 잘 지내고 있는 거도 맞고. 의심하지 말아줘, 찬아. 응?

진짜로 유비가.


유비 너.

이게 생각해서 말해주니까 잔소리쟁이라니 한 대 맞을래?
....때릴래도 어딨는지 알아야 쫓아가서 때리지. 대체 뭐냐고. 왜 네 일인데 나만 걱정하고 넌 태평한데. 하기야 넌 예전부터 그랬지. 내가..... 아니, 됐다. 네가 써 보낸 말은 안 믿기지만 답장이 왔다는 데 의의를 둬야지. 앞으로 별로 할 말 없어도 이틀에 한 번 씩은 꼭 메일 보내. 생존 신고라고 생각하고. 그 교수님 외모 자랑이라도 좋으니까.
암호 같은 거 없어. 딴 사람이 널 사칭하고 있을까봐 해본 말이야. 정확히 네가 할 것 같은 말을 써 보낸 거 보니 진짜로 유비가 맞나보네. 아니면 나보다 유비란 인간을 더 잘 알거나. 그럴 리는 없지. 조금 안심했어.
그치만 휴대폰을 못 쓰게 하는 직장이라니. 아니 직장에서만도 아니고 하루 종일 아예 못 쓰는 거잖아. 말이 돼? 덕분에 경쟁자가 없었다면 다행이긴 한데. 그 교수님은 대체 왜 그런데 사는 거야. 천문학자야? 아니 그건 이상해. 천문학자가 돈을 많이 벌 것 같진 않은데. 혹시 집안일 말고 다른 거 시키지는 않아?
너 보기엔 내가 걱정을 사서 하는 잔소리꾼 같겠지만 상황이 너무 수상하잖아. 교수가 우리 또래 미남이라는 것부터 뭔 만화도 아니고 말이야. 그리고 무슨 가정부 일에 비밀 유지 의무 어쩌고 하냐.
내 걱정을 덜어주고 싶으면 말했듯이 메일을 꼬박꼬박 보내. 소식만 계속 이어져도 마음이 놓일 테니까.
돈 걱정은 너까지 할 필요는 없어, 나도 공부 열심히 할 테니까. 그래도 너 철든 건 반갑다. 월급 받으면 꼬박꼬박 모아둬. 그리고 주변에 놀 데가 없으면 공부를 해보면 어때? 외국어라든가. 뭐라도 배워두면 다 도움이 될 거고 아무리 거기서 안 되는 게 많아도 교수가 진짜 교수라면 공부하는 게 안 된다고는 않겠지.
또 편지 써.

공손찬이.


안녕, 찬아.

근처 상가에 오락실 있는 걸 찾았어. 공부는 안 해도 되겠어.
그 교수님 28살이래. 세상에, 내가 22밖에 안 되어보인다고 했더니 좀 짜증내면서 ‘칭찬이라면 실패입니다.’하고 가더라. 난 칭찬을 하려던 게 아니고 정말 그렇게 보여서 말한 건데. 화났나봐.
교수님은 계속 바빠. 그래도 어제는 쉬는 날이었는지 아침엔 늦잠을 잤어. 인간은 맞는지 좀 의심스러웠는데 아침 먹으며 하품 하는 거 보니까 사람 맞았어. 하품하는 것도 잘생기긴 했지만.
아 맞아 너 전에 교수님 건드리지 말라고 한거 무슨 뜻이야, 나 그 교수님한테 그런 마음 없거든? 아니 있어도 내가 있는 거지 그 교수님한텐 난 그냥 가정부라고. 나랑 사귀거나 할 리가 없잖아. 저렇게 예쁘고 똑똑한 사람이니 분명 역시 예쁘고 똑똑한 사람하고 사귀겠지.
연애할 시간은 없을 것 같지만.
아, 어제는 그 험악한 아저씨가 와서는 나더러 누구 여기 들어온 뒤에 연락하는 사람 있냐고 묻길래 너한테 메일 보낸다고 했어. 내가 새우잡이 배에 잡혀갔을까봐 걱정이라서 이틀에 한 번은 편지 쓰기로 했다고 하니까 알았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일은 할 만 하냐고 하길래 그렇다고 했더니 좀 의심스러운 표정을 했어. 내가 집안일도 제대로 못할 것 같은가? 이래봬도 내가 청소 요리 빨래는 잘하잖아. 공부는 잘 못하지만.... 도원관보단 여기 일이 훨씬 쉬운걸. 청소해야 할 면적도 적고 식사도 엔간하면 불평없이 잘 먹고. 네가 불평했다는 건 아니야. 오해하지 마.
교수님 혹시 소시지를 아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소시지만 넣어주면 뭐든 먹는 것 같긴 해. 다음엔 소시지 밥을 해볼까 생각중이야.
......농담인 거 알지?
교수님이 소시지 좋아한대서 정말 소시지로 밥상을 뒤덮지는 않아. 건강 생각도 해야지. 야채 많이 썰어 넣고 볶음밥도 하고. 완두콩 골라내길래 다 먹으라고 잔소리도 하고.
상관하지 말라고 화내면 어쩌나 했는데 그러진 않더라. 별 말은 없지만 내가 마음에 드나봐. 어젠 소파에 엎드려 TV보다 일어날 때 신음소리 내길래 어깨도 주물러줬어. 안 잘리려고 나도 노력하고 있다고.
어, 더 뭐 써야할지 모르겠다. 공부는 안 어려워? 기숙사 생활은 할 만 하고? 공부에는 내가 아무 도움 안 되겠지만 그래도 뭐든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꼭 말해줘. 못 도와도 말해는 줘. 도시락이라도 싸주고 싶은데 둘 다 집이 아니니....
아, 더 뭘 써야할지 모르겠다. 이만 쓸게.

유비가.


안녕, 유비.

교수님하고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다. 편지만 봐도 까칠해보였는데. 하기야 웬만큼 까칠해도 네가 강이지상 하고 달려들어 꼬리 흔들면 쉽게 못 떨어내지. 기왕 취직한거 잘해봐.
근데 그 험상궂은 아저씨란 건 또 뭐냐. 혹시 그 교수님 뭐 국가 기밀이라도 취급하고 있어서 군에서 감시중이라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하하하..... 그래,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 끽해야 뭐 대기업 위탁연구 같은 걸 한다거나 그런 걸지도. 우리 학교에도 산학연 센터 있는데. 화장실에 갈 때도 출입증 찍어야 한다더라. 너야 멍청하니까 누가 산업 스파이로 의심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주의해. 잠겨있는 덴 들어가지 말고.
교수님 말고 너도 편식하지 마. 소시지밥은 농담이라고 해도 얼마나 고기만 먹어대는 거야? 채소 충분히 안 먹으면 변비 걸린다, 너.
쓸만한 말이 없으면 억지로 늘려 쓸 필요는 없어. 생존 신고하고 뭐 먹었는지 정도만 써 보내.
먹는 거 하니까 말인데 학생식당 밥 맛없어.... 식당 하는 사람이 뭐 이사장네 사돈네 뭐라던가 하는 소문이 사실일지도 몰라. 이렇게 맵고 짠 것 말고 아무 맛도 없는 음식을 팔아먹다니 그런 놈들이 서로 봐주니까 이럴 수 있는 거지..
넌 맛있는 거 먹어. 알았지?

찬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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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의가 파일을 밀어놓았다.
“교수님의 가정부가 외부와 주고받은 메일의 복사본입니다.”
제갈량은 촌스러운 노란색 종이 파일을 건드리지도 않았다.
“이미 다 읽어봤습니다. 유비는 자기 노트북에 자동 로그인 설정을 해뒀더군요, 험상궂은 아저씨.”
사마의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혐의점을 찾을 수 없으니 마음 놓으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감시자의 존재를 의식하는 암시와 의도를 알 수 없는 횡설수설 같은 말들이 아직은 의심스럽다는 게 암호 분석팀의 의견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경계해주시기 바랍니다.”
말하며 사마의는 이런 건 군에서 알아서 할 일이 아니냐고, 어째서 연구자인 자신이 직접 방첩 업무에 나서야 하는 거냐는 불평을 들을 각오를 했다.
“그러지요.”
뜻밖에 선선히 대답이 돌아와 사마의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제갈량은 사마의를 엿먹이는 것이 자기 연구 과제라고 착각하고 있는 게 틀림 없는 인간으로 이렇게 순순히 지시에 따라본 역사가 없었다.
“무슨....”
꿍꿍이냐고 물으려다 사마의가 입을 다물었다. 그 둘은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아군이며 협조하겠다는데 꿍꿍이를 추궁 받을 관계는 아니었다. 자기는 이성적인 인간이며 업무를 우선할 수 있다고 속으로 되뇌이며 사마의가 심호흡을 했다.
“꿍꿍이 같은 건 없습니다. 그저 제 생각에도 그 사람이 좀 수상하기에 경계를 하겠다는 것뿐입니다.”
“수상하다고요? 그 사람이?”
사마의는 새삼 제갈량을 쳐다보았다. 자기는 보지 못한 뭔가를 그가 알아차리기라도 한 걸까. 사마의가 본 유비는 단순한 바보에 지나지 않았다. 적국에서 제갈량을 노리고 기지에 스파이를 침투시킬 거라는 첩보를 미리 입수하지 않았더라면 전혀 수상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은 아직도 사마의는 그가 정말 스파이라기보다는 이들을 교란하기 위한 미끼거나 단순 하수인에 불과할 가능성을 높이 잡고 있었다.
그런데 제갈량은 어째서 그가 수상하다고 생각한 걸까. 유능한 정보 장교로서 자존심이 금이 가는 한편 저자는 유비와 한집에 사니까 뭔가 자기보다 많은 정보를 접했을 거라고 자신을 달랬다.
“예, 뭐 약간.”
제갈량이 답을 회피했다.
“그래서 그 메일을 주고 받은 상대방은 누굽니까?”
“수상하게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사소한 거라도 수사의 실마리가 됩니다.”
말을 돌리려는 제갈량을 사마의가 점잖게 타일렀다.
“개인적인 일입니다.”
“첩보에 개인이란 없습니다.”
오랜만에, 실은 제갈량과 만난 뒤 처음으로 그를 곤란하게 만들어 사마의는 조금 흥분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답을 듣고 말겠다고 결심하고 제갈량을 압박했다. 제갈량이 한참 그를 노려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 사람 제 취향입니다. 지나치게.”
“..........네?”
사마의는 어리둥절해졌다.
“취향이요? 댁한테 그런 것도 있었.......”
제갈량이 죽일 것 같은 눈으로 노려봐서 사마의가 입을 다물었다. 제갈량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업무상 관계에 있는 인간에게 하기엔 무례한 말을 했다는 걸 자각해서.



아컴 나이트메어 13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커다란 곤충 같은 괴물은 보기에 흉악해서 그렇지 별로 강한 적이 아니었다. 손책이 휘두른 도끼에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못 보던 종류의 괴물이네. 주유 갖다줘야겠다.’
이런 괴상한 이계생명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약점은 무엇이고 어떻게 싸우면 더 효율적인지 알아보기 위해 주유는 과학관의 자기 연구실에서 괴물들의 소지품을 뒤지고 해부도 했다. 덕분에 단서를 모아 그 괴물이 유래한 세계로 통하는 차원문을 봉인한 적도 있었다.
이런 괴물들에게 ‘소지품’이라니 이상하지만 괴물 중에도 인간만큼이나 각종 도구를 챙겨 다니는 놈들이 있었다. 이 곤충 괴물도 그런 부류인지 막 자루에 담으려는 순간 무엇인가 땅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집어들어 보니 깨진 금속 조각이었다.
‘내가 깨먹었나?’
주유한테 혼날 텐데. 혹시 고칠 방도가 있을지 몰라 깨진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사기그릇처럼 깨져나갔지만 청동이었다. 자신이 부순 게 아니라 원래부터 깨져 있었다면 혼나지는 않겠다고 생각하며 표면을 더듬었다. 둥글고 우툴두툴한데 도무지 뭐 하는 물건이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오래 고민하는 대신 그대로 챙겨서 과학관으로 갔다. 주유라면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전히 미친 악당 과학자의 실험실 같아보이는 주유의 연구실에 손책도 이젠 완전히 익숙해졌다. 심각한 얼굴로 지도를 노려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주유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가져온 청동 조각을 꺼냈다.
“이거 봐. 오늘 잡은 괴물이 이런 걸 갖고 있었는데 말이지.”
“아, 왔어?”
주유가 찌푸린 얼굴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마침 잘 왔어, 손책. 우리 큰일 났어.”
“큰일? 뭐가 그리 큰일인데?”
“동부 거리에서 실버 트와일라잇이 대규모 의식을 준비하고 있어. 그들의 비밀 의식이 성공하면 아컴의 모든 봉인이 풀리게 돼.”
손책도 그 소식엔 당황했다.
“어, 어쩌지? 어떻게 막지? 가서 나쁜놈들 다 때려잡아야 하나?”
“농담이지?”
주유가 짜게 식은 눈으로 손책을 노려보았다.
“그런 짓 하다가 우리가 경찰서 잡혀가. 게다가 음모가가 누군지, 어디 있는지는 어떻게 알 건데?”
“엄......”
대답하지 못하는 손책을 노려보다가 주유는 다시 지도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스크랩한 자료 등을 뒤지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아, 그런데 말이지.”
새로운 단서가 나타났다고 하면 주유의 기분이 조금 풀릴까 싶어 손책이 다시 자루를 뒤적였다.
“오늘 내가 또 못 보던 괴물을 잡았거든. 그런데 이 괴물이 이런 걸 갖고 있더라고. 뭘까?”
깨진 청동 조각을 내밀자 주유도 흥미가 생긴 듯 표정을 펴고 그것을 받아들어 살펴보았다.
“흠......청동 소조가 깨진 것 같네. 원래 크기도 그렇게 크지는 않았을 것 같고.”
뭔가 생각난 듯 주유의 표정이 변했다. 자료 아래쪽을 한참 뒤진 끝에 작은 사진 한 장을 꺼내들었다. 조각이 아닌 온전한 청동 흉상의 사진이었다.
“조조님이 찾고 있던 잃어버린 의뢰품이야.”
“뭐?”
주유가 사진과 조각을 나란히 놓고 보여주었다. 그리스 철학자 같은 분위기의 노인인데 벗어진 이마와 곱슬머리 부분이 조각과 똑같았다.
“그럼 조조는 이제 어떡해? 이게 이미 부서졌는데?”
“글쎄.”
주유는 손책만큼 곤란한 기색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이 흉상엔 미심쩍은 점이 많아. 이건 다음에 조조와 직접 만나 말해보겠어.”
“그래? 뭐가 그렇게 미심쩍은데?”
주유가 손책에게 흉상의 사진을 다시 보여주었다.
“이 흉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겠어?”
“아니.”
“이런 흉상으로 만들 만한 고대의 철학자들 그림 중 누구와 비교해도 맞지 않아. 게다가 사진 한 장만 가지고 판단하기는 좀 성급하지만 예술적인 가치나 골동품으로서의 가치도 의심스러워. 내 전공이 아니니 그동안 섣불리 판단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 조각을 보니 짚이는 데가 생겼어.”
“뭔데?”
과연 주유는 똑똑하다고 생각하며 손책이 그 앞에 바짝 다가앉았다. 주유는 설명하기에 앞서 손책의 반짝거리는 두 눈을 바라보았다.
“얘기해 봐. 진상이 대체 뭔데?”
“아직 진상이랄 것까지는 없고 그냥 가설인데......당신이 그렇게 내가 하는 말을 경청하는 자세로 있으니까 좀 기분이 새롭네.”
“에?”
손책은 어리둥절해졌다.
“나 그렇게까지 주유가 하는 말 무시했어?”
주유는 대답 대신 깊은 눈으로 손책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기분이 들게 하면서도 손책의 마음을 간지럽혀 괴롭히는 눈빛이었다. 무언가 중대한 것을 잊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가장 깊은 속내를 주유에게 보이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무시한 적 없는데, 주유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거나 그 마음을 몰라주거나 한 적 없는데 꼭 그랬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조의 일은 조조와 만났을 때 이야기하고.”
결국 주유는 이야기를 끊고 일어났다.
“문제의 의식은 동부의 거리에서 준비중이라고 하니 그 근처에서 단서를 모아보겠어. 당신은 어쩔래?”
“나도.”
손책이 따라 일어났다.
“같이 조사하자고. 단서도 교환하고.”
어째서 그런 기분이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럴 때는 무도가의 감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데 그 감이 말하고 있었다. 주유 곁에서 떨어져선 안 된다고.


유비는 향토사 연구회에 찾아갔다.
자기 같은 무식쟁이가 찾아가서 무슨 수확이 있을까 싶지만 제갈량 말로는 겉보기처럼 학구적인 단체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 그가 멋대로 혼자 차원문에 들어간 동안 자신도 자신의 몫을 해내고 싶었다.
‘냉정한 척 하면서 위험한 일은 혼자 다 하려고 든다니까.’
제갈량이 무사히 돌아오면 반드시 그 점을 지적하리라고 다짐했다. 유비보고는 약해서 위험하다, 뭘 몰라서 위험하다 잔소리를 하면서 자기는 천하무적에 전지전능하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사리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무사히 위기를 넘겨오고 있지만 유비는 자신보다 제갈량 걱정이 더 컸다. 저러다 언제고 유비를 감싸고 대신 죽기라도 할 것 같았다.
‘나랑 언제 봤다고 그렇게까지 하냐고.’
세상은 정글이라는 말도 있는데 자신 같은 뜨내기의 어디가 좋아서 그러는 걸까. 뭘 기대하고 있는 걸까.
향토사 연구회는 아컴의 역사와 개척자들의 계보, 유물 등을 수집 전시하고 연구하는 곳이었다. 이런 곳이라면 정말로 아컴 곳곳에 있는 불안정한 장소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소 같으면 눈에 쉽게 들어오는 유물 전시관을 먼저 구경했겠지만 오늘은 기합이 단단히 들어가 있었다. 제일 전문적이고 어려워 보이는 곳 - 기록 보관소로 직행했다.
아컴 시 초기 개척자들의 족보와 기록이 진열되어 있고 개중 유명한 인물들의 가계는 아예 도표로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다. 유비는 근엄한 인상의 초상화 아래 이름들을 훑으며 그동안 제갈량 곁에서 주워들은 이름들이 있는지 찾았다. 마녀 키자이어 메이슨이라든지, 웨이틀리라든지......
“필요한 게 있으세요?”
초라한 차림의 노동자가 기웃거리고 있는 것이 거슬렸는지 직원이 다가왔다. 유비는 얼른 붙임성 있는 미소를 지으며 개척사에 관심이 많아 공부하러 왔다고 둘러댔다.
“아컴 토박이세요?”
“아니지만 부모님은 아컴 사람이셨대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떠돌이가 되었지만 태어나기는 아컴에서 태어났다. 부모님 성함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사연을 들은 직원이 많이 누그러진 기색으로 유비를 사전 같이 두꺼운 책 앞에 안내해 주었다.
“부모님과 그 위 조상님들이 어떤 분들인지 여기서 찾아볼 수 있어요.”
곱게 손톱을 다듬은 매끈한 손이 책의 알파벳 색인을 짚었다.
“혹시 유명한 분들이셨다면 다른 책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나오고요. 한 번 보실래요?”
“예. 감사합니다.”
유비는 손수건을 꺼내 손을 깨끗이 닦고 책을 펼쳤다. 지저분한 손으로 책을 만지려고 하면 제갈량은 화를 냈다.
부모님은 돌아가시기 전에도 별로 부자였거나 대단한 분들은 아니었던 것 같아서 별 기대 없이 훑어보았는데 뜻밖에 이름이 있었다. 그것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본래는 상당한 명문가였던 모양이었다. ‘아컴 개척사’ 5장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주석이 달려있는 걸 보고 ‘아컴 개척사’도 찾아 펼쳤다.
최초로 아컴에 정착한 선조는 신앙심 깊고 관대하기로 이름 높은 인물이었다. 갓 이주했을 때만 해도 가난한 노동자였으나 근면 성실하여 주위의 인정을 받았고 그가 차린 작은 가게엔 점원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몰렸다. 깡패나 무법자가 감화되어 찾아온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빠른 출세 덕인지, 지나치게 떠받들려진 탓인지 좋지 못한 소문도 따라붙었다. 실상은 주변 사람들을 해치고 착취해서 부와 명성을 얻었다는 식으로.
근거 있는 비판인지 그저 악의에 찬 음해인지 이 기록만으론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누님은 막 집안이 부유해질 무렵에 말에서 떨어져 죽었고 여동생은 강도의 총에 죽었다. 어째서 약한 여동생이 오빠를 감싸고 죽었는지 미심쩍을 수밖에 없었다. 형도 어느 날 갑자기 재산을 물려주고 떠나버렸다.
당시의 아컴에선 드문 수준의 지식인으로서, 선조가 무식한 벼락부자에서 지역 명사로 대우받을 수 있게 도와준 친구이자 주치의도 있었다. 그도 선조가 티푸스에 걸렸을 때 헌신적으로 치료하다 그만 병이 옮고 말았다. 정작 선조는 건강을 되찾았는데 주치의는 회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책장에 물방울이 떨어지고서야 유비는 자신이 울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왜 내 선조는 이런 삶을 산 거지? 나는 왜 울고 있는 거지?’
아무리 부자가 되고 주위의 존경을 받았다 한들 가족 모두가 죽고 떠났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눈물을 닦으며 유비는 다짐했다.
자신은 절대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 평생을 가난한 떠돌이로 마치더라도, 그렇게 가족들을 잃고 혼자 남지는 않을 것이다.
“제갈량......”
멋대로 다른 세계로 혼자 가버린 그를 떠올렸다. 좀더 일찍 상황을 깨닫고 직시했어야 했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깊이 생각했어야 했다. 이렇게 혼자 남아버리지 않도록, 그를 잡았어야 했다.
“젊은이, 괜찮으시오?”
곁에서 누군가 어깨를 툭툭 치는 바람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낯선 중년의 신사가 걱정과 호기심이 섞인 얼굴로 유비를 보고 있었다.
“어디 아픈 거라면 휴게실은 저쪽이오.”
“아, 감사합니다.”
유비가 그에게 꾸벅 인사했다. 그리고 어느새 다시 줄줄 흘러내린 눈물을 닦았다.
“그렇게 마구 문질러 닦으면 더 붓게 되니 화장실에서 제대로 세수하시오.”
“예.”
교양 있고 친절해 보이는 신사가 걱정해주니 조금 진정이 되었다. 대개 이렇게 부유한 인간들은 유비 같은 잡역부를 직접 상대하지 않으려 드는데 이 사람은 대단히 소탈하고 붙임성 좋은 사람인 모양이었다.
“책에서 뭔가 나쁜 이야기라도 본 모양이군.”
신사가 ‘아컴 개척사’를 흘끔 보고 도로 덮었다.
“과거 같은 것에 너무 연연하면 미래를 볼 수 없소. 그대에게도 꿈이 있고 이루고자 노력한 바가 있을 것 아니오. 그걸 구현한 세상에서 사는 것이 이런 과거의 과오보다 중요하지 않소?”
“그렇죠.”
좀 알아듣기 힘들다고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신사의 온화한 태도 탓인지 실제로 좋은 말씀 맞아서인지 듣고 있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아, 이런.”
뭔가 곤란한 일이 갑자기 떠오른 듯 신사의 표정이 변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소. 부디 자신을 잘 추스르시오.”
“예. 안녕히 가세요.”
신사가 가버리고 나서야 유비는 그의 이름도 듣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아직도 이쪽을 보고 있는 서고 직원에게 다가갔다.
“방금 나간 신사분 말인데요. 누군지 혹시 아세요?”
“그럼요. 칼 샌포드라고, 유명한 분이시죠.”
충격받아 멈춰섰던 것도 잠시 유비는 바로 전시관을 뛰쳐나갔다.
중앙 홀을 둘러보아도 그 신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회관 밖까지 뛰어나가려는 순간 불쑥 누군가가 앞을 가로막았다.
“어딜 그렇게 급히 가십니까?”
눈앞에 제갈량이 서 있었다. 유비는 잠시 눈으로 본 것을 믿지 못해 멍청히 서 있다가 제갈량을 덥석 끌어안았다.
“제갈량! 무사했구나!”
“제가 죽기라도 했습니까. 보채지 마세요.”
제갈량이 유비를 마주 안고 등을 쓸어주었다.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봉인도 했고요. 일단 연구실로 돌아갔다가 조조님의 연락을 받고 찾으러 나왔습니다. 급한 일이 생겼거든요.”
“급한 일?”
되묻고 나서야 유비도 정신을 차렸다.
“아, 맞아. 방금까지 여기에 칼 샌포드가 와 있었어!”
“예. 저도 봤습니다.”
태연히 그렇게 답하는 바람에 유비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뻐끔거렸다.
“어차피 그자를 당장 처치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도 자신에게 적이 얼마나 많은지 뻔히 아는데 설마 아무 대책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고 있겠습니까?”
“응. 그렇지.”
유비가 어깨를 움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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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컴 호러의 보드에 적힌 장소 ‘고고학 연구학회’는 원문이 Historical society더군요.
역사 연구회라고 수정하려다가, 그곳의 조우 내용을 분석해보니 향토사 연구회 쪽이 더 뉘앙스를 잘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아 최종적으로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다음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조우 이벤트 중 하나입니다.

-지역에 대한 기록물을 읽는 중에 당신의 가계에 뭔가 섬뜩한 것이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정신력 1을 잃습니다.

세계의 중심 57 ㅣ- 회색도시&검은방



“나 분명 학교 밖 출입이 곤란해져서 교내에 연구실 마련하는 문제로 고생했던 것 같은데....”
또다시 하무열과 류태현과 같이 저녁을 먹으러 외출한 허강민이 현재 자기가 처한 상황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다.
“그래서 이 배려심 깊은 스승이 그 문제를 해결해 줬잖냐. 하는 김에 단조로운 식생활 문제도 해결해주는데 불만 있냐.”
“꼭 불만이 있는 건 아닙니다만.... 이번엔 교수님이 사시는 거고.”
그저 작년에 혼자 다닐 때에는 도리어 이렇게 자주 나와서 먹지 않았다고 허강민이 조금 투덜대었다.
“어이구 참. 류태현, 자네는 왜 하고 많은 사람들을 놔두고 저렇게 까다롭고 만족을 모르는 사람과 사귀는 건가?”
“어, 사랑하니까요?”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구만.”
하무열이 앞에 놓인 돼지고기 바비큐를 썰었다.
“자, 맛있게 먹어라. 돼지 통구이는 파는 곳이 없어서 그래도 최대한 비슷한 요리를 고른 거야. 까다로운 제자 녀석이 먹고 싶다는 걸 일부러 기억했다 사주다니 이 얼마나 마음이 넓은 스승이냐.”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이 얼마나 쪼잔하고 뒤끝이 긴 스승이냐고 해야 맞을텐데 말입니다..”
“내가 사잖냐.”
허강민은 닥치고 고기를 썰어 입에 넣었다.
“좀 뻣뻣하긴 하지만 먹을 만은 하네. 어이 류태현, 그 가장자리 부근은 먹지 마라. 딱딱하기만 하고 맛없어.”
그러면서 허강민이 안쪽에서 잘라낸 붉은 살을 포크로 찍어 류태현 입에 넣어주었다.
“이 녀석들이 아주..... 애정 행각은 남들 안 볼 때만 하는 거 모르냐?”
“모르는데요.”
허강민이 순진무구한 표정을 만들려고 노력하며 대답했다.
“어이구, 그러냐. 네가 모르는 것도 다 있고.”
“감정이니 애정이니 하는 건 잘 모르겠더라고요.”
“근데 류태현 사랑하는 건 알겠고?”
허강민이 생긋 웃었다. 하무열은 기가 막혔다.
“자, 교수님 많이 드새요.”
류태현이 부드러운 쪽 고기를 잔뜩 잘라 하무열의 접시에 얹어주었다.
이걸 그래도 자기 생각해 주는 사람은 류태현 밖에 없다고 너스레를 떨어야 할지 동정은 필요 없다고 다 엎는 척 해야 할지 고민하다 하무열은 그냥 고기를 먹었다. 아무튼 고기는 죄가 없고 학생들의 과도한 애정행각보다 걱정되는 문제가 하무열 머릿속에 있었으니까.
몇 번 더 시시한 공방을 주고받은 뒤 세 사람은 식사를 끝내고 식당을 나섰다. 이제 조금씩 해가 다시 짧아지고 있었다. 아주 어두워지기 전에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허강민이 다소 걸음을 서둘렀다. 그런 그를 하무열이 붙잡았다.
“고기만 잔뜩 먹어서 좀 텁텁한데 우리 집에 가서 차라도 좀 마시고 가면 어떠냐?”
“네? 교수님 집에 차가 있었어요?”
허강민이 놀랐다.
“너 교수 봉급을 너무 얕보는 거 아니냐?”
“아니 돈이 없어 못 사실 거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교수님은 학교 매점식 검정차 밖에 안 드실 것 같았는데.”
“그런 걸 집에 쟁여놓고 마시면 죽는다. 나도 박하차 정도 있어. 그러니 마시고 가자.”
하무열이 잡아끌었다. 뭔가 할 얘기가 있어서 이런다고 눈치챈 허강민이 류태현을 쳐다보았다.
“너무 늦기 전에 학교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류태현은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어두워지고 있는데...”
“걱정 마라. 내가 이따 교문까지 바래다주마.”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죠.”
허강민이 눈치 없는 류태현을 끌어당겨 같이 걸었다.
“하지만 강민씨... 아? 혹시.”
“응, 그런 거야. 드디어 눈치가 생겼냐.”
오랜만에 허강민에게 싸늘하게 매도당하고 류태현은 조금 기가 죽었다.
다행히 하무열의 집은 멀지 않았다. 집 가까이 와서 류태현이 하무열에게 소곤거렸다.
“혹시 허강민씨 안전에 관련된 이야기에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알아두는 게 좋은 이야기 정도야.”
“그런데 이렇게 술수까지 부려서 집으로 불러요?‘
“제자들 차 좀 마시라고 초대한 게 술수 씩이나?”
하무열이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류태현도 허강민도 아무 의심 없이 따라 들어갔다.
“자, 우리 집은 응접실이 따로 없으니 여기 식당으로....”
촛불을 켜다 하무열의 말이 멎었다.
“아차, 차과자를 사왔어야 하는데. 어이 허강민, 심부름 좀 해라. 칡소 삼거리에 있는 제과점 알지? 가서 차랑 먹을 과자 좀 사와.”
“예? 허강민씨 혼자 심...”
항의 하려는 류태현의 발을 허강민이 꽉 밟았다.
“네, 다녀오죠. 비싼 걸로 듬뿍 사올게요. 교수님한테 달아놓고.”
“하하 저 놈 교수를 발라먹으려 드는 것 봐라.”
허강민이 서둘러 현관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문에 닿기 전 옆 방 문이 부서질 듯 열리고 팔이 튀어나와 그를 잡아챘다. 허강민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서 상대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아악!”
허강민이 비명을 질렀다. 다른 팔이 그의 손목을 잡아 비틀었고 그는 후추 스프레이 통을 떨어트렸다.
“서태준!”
그 자의 손에 허강민이 잡힌 걸 보고 류태현이 달려 들어갔다. 그러나 그보다 빨리 하무열이 달려와 그를 잡았다.
“치안대로 가! 내가 막을 테니!”
“그, 그치만 강민씨가.”
류태현이 주저하는 새 서태준이 발버둥치는 허강민의 목을 잡아 졸랐다. 하무열이 식탁 의자를 잡고 달려가 서태준에게 휘둘렀다.
“저 놈 죽기 전에 빨리!”
“그렇게 이 놈이 걱정 되냐?”
서태준이 허강민을 거실 저쪽으로 집어던졌다.
“자기 가족은 배신하고 죽게 내버려 뒀으면서, 저건 사랑하고 있기라도 한 거야? 정신차려, 무열아. 네가 그런 감정 품을 수 있을 리 없잖아?”
“누가 그래. 내가 저 녀석에게 그런 감정 품었다고.”
하무열이 긴장해서 서태준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정신차려야 할 건 너지. 백선교의 입발린 말에 간단히 넘어간 주제에. 그놈들이 니 잘못은 하나도 없다고, 다 내 탓이라고 그러든? 다 큰 어른인 주제에 그런 우쭈쭈에 홀랑 넘어가서 지가 한 짓은 싹 까먹었냐!”
하무열이 뒤에 선 류태현을 자기 몸으로 가리며 슬슬 뒷걸음질 쳤다. 그걸 보고 서태준이 코웃음쳤다.
“뭐, 그렇게 뒷문으로 빠져서 도망치려고?”
하무열이 허를 찔린 표정을 했다. 서태준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너 같은 녀석이 언제든 도망칠 궁리만 하는 건 뻔히 아는 사실 아니냐. 뒷문에다 못질 해뒀다. 어디 부수고 도망가 보든가.”
서태준이 한 걸음 다가왔다. 하무열이 한 걸음 물러났다.
“눈 감아요!”
류태현의 말과 함께 서태준의 눈 앞에 섬광이 터졌다. 어둑한 집안에 갑작 강한 빛이라 눈으 감았는데도 눈 앞이 보라색으로 얼룩졌다.
류태현이 뛰어나갔다.
“안 돼, 바보야!”
하무열이 그를 잡으려고 손을 휘저었지만 그 전에 자신에게 강화마법이라도 쓴 건지 류태현은 순식간에 서태준에게 달려들었다.
“이야아압!”
류태현이 주먹을 내질렀다. 그 주먹이 가로막혔다.
손바닥에.
류태현의 주먹을 감싸 쥔 서태준이 그를 휙 잡아당겨 자세를 무너뜨리곤 등을 팔꿈치로 찍었다. 방호 주문을 사용했기에 등뼈가 부러지진 않았지만 둔중한 충격이 머리까지 찌릿 울렸다.
“멍청한 놈아.”
하무열이 한탄했다.
“그런 주문은 예고 없이 썼어야지, 나 감을 때 저 놈도 감잖아.”
“하지만, 그럼 교수님도 눈 상하는데.”
류태현이 숨을 헐떡였다. 서태준이 그의 뒷덜미를 잡아 들어올리더니 배에도 한 방 먹였다.
“눈이 멀쩡하고 저 놈 한테 잡히는 게 낫냐, 눈 상하고 지금 잡는 게 낫냐?”
“전자입니다!”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주제에 류태현이 소리쳤다.
“잡힌 건 구출할 수 있지만 눈은 다치면 치료 마법으로도 깨끗이 안 낫는 경우가....”
“바보냐.”
어이없다는 목소리는 서태준에게서 나왔다.
“내가 무열이는 살려서 데려가겠지만 너희들까지 살려줄 이유는 없다. 아군을 보호하는 건 맞지만 그 반대쪽엔 네 목숨도 걸려있다고.”
“저 방호를 겹쳐 걸어서 그렇게 쉽게 안 죽.”
서태준이 류태현을 내동댕이치고 그의 머리를 밟았다. 당장 두개골이 골절되지는 않았지만 뇌를 조여드는 아픔에 류태현은 더 말도 잇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그래, 그 잘난 방어 마법 다 닳는데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한 번 보자.”
서태준이 다시 한 번 류태현을 짓밟았다. 그러느라 다리를 들어올리는 순간을 노려 하무열이 달려들었다. 서태준은 서둘러 류태현에게서 떨어져 하무열이 휘두르는 의자를 피했다.
“저 놈 네 연적 아니냐? 왜 감싸는 거지?”
“아까 류태현이 날 보호할 땐 우리 아군이라 그러더니?”
하무열이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언제부터 그렇게 연애 가십에 관심이 많았어?”
“하무열 교수님은 교수님으로서 학생을 보호하는 것 뿐입니다. 강민씨랑 그런 사이 아니에요!”
류태현이 소리쳤다.
“그거야 너는 모르는 거지.”
서태준이 음흉하게 웃었다.
“어디 사이에 끼어있는 놈은 뭐라고 하....”
서태준이 아까 허강민을 던져놨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할 말을 잃었다.
허강민은 거기 없었다.
“이제야 눈치 채셨나?”
하무열이 비웃었다.
“그 놈 벌써 한 참 전에 현관으로 빠져나갔어. 내가 가르쳤지만 참 배짱도 좋단 말이야.... 자, 어때. 이제 곧 치안대 뿐 아니라 마법사 교수들이며 전에 봤던 험상 페어도 달려올 텐데, 이번에도 탈출 마법진 준비해 뒀나?”
서태준은 하무열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미 바깥 멀리에서 희미한 고함이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류태현은 죽이는 데 시간이 걸리므로 지금 인질로 쓸 수는 없었다. 하무열만 덥석 잡아 나가고 싶어도 그는 서태준을 잡을 수 있는 사람들이 올 때 까지는 시간을 끌 재주가 있었다.
“이 쥐새끼 같은 녀석이....”
“그 쥐새끼 같은 녀석 얕봤다가 망한 게 누구더라.”
하무열이 귀를 후비는 시늉을 했다.
“억울하면 덤벼봐, 어디.”
서태준은 이를 꽉 악물고 류태현을 마지막으로 힘껏 걷어찬 뒤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무열은 후다닥 문으로 달려가 빗장을 지르고 류태현을 붙들고 살폈다.
“괜찮냐! 살아있어?”
“네..... 쿨럭.”
류태현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괜찮아요. 뼈는 안 부러졌어요.”
“정말로?”
하무열이 류태현의 갈비뼈를 더듬었다.
“가슴통을 그렇게 세게 걷어찼는데.”
“전투 망치로 맞아도 죽지는 않을 정도로 하라고 교수님이 말씀해주셨잖아요.”
류태현이 일어나 앉았다. 그가 어깨를 돌려보았다.
“아고고.... 뼈만 붙어있는 거지 멍은 꽤 들 것 같네요.”
“그 놈 한테 맞았는데 뼈 멀쩡하면 됐지.”
하무열이 비로소 안도했다.
“내 제자 녀석이 보기보다 유능했구만.”
“보기보다 인가요... 허강민씨는 무사하겠죠?”
밖에서 사람 웅성거리는 소리, 뭐라 뭐라 고함 지르고 싸움이라도 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걱정 마라. 치안대가 바보도 아니고, 피해자를 여기로 다시 보냈겠냐. 거기 감금해서 보호하겠지.”
“감금....”
“아무튼 이제 무사해.”
하무열이 문을 쳐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놈이 멍청이라 정말 다행이다.....”
“그러게요, 허강민씨를 던져만 놓고 도망가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얕보니까...”
“그거 말고. 너.”
“...저요?”
“그래. 네가 간단히는 안 죽을 테니 인질 삼아 날 위협하는 건 별 의미 없겠지만 그래도 널 들고 도망갈 여유는 충분히 있었잖냐. 예정하곤 다르지만 너는 나나 허강민 상대로 인질이 되고 학생이나 학교 안으로 침투하는 데 써 먹을 수 있을 가능성도 있고 데려갔으면 여러 가지로 아주 유용했을 텐데 원래 목표는 나라는 사실에 얽매여서 계획 하나 일그러지니까 목표를 달성하는 다른 방법을 찾지도 못하고 실패를 벌충할만한 다른 걸 얻지도 못하고 그냥 허둥지둥 도망쳤단 말이지.”
“네...”
하무열의 말을 들으니 자기가 어떤 위험에 처해 있었는지 실감이 나서 류태현은 일어나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거참, 함부로 몰래 접근하기 힘들고 유사시 쉽게 도망칠 수 있을 만한 집을 일부러 고른 건데...”
쾅쾅
밖에서 현관문을 두드렸다.
“교수님! 안에 계세요?”
“오, 민지은양!”
하무열이 일어나 문으로 가서 빗장을 벗겼다.
“그 놈은?”
“방금 이 집에서 튀어나간 사람은 안승범씨와 정은창씨가 쫓아가긴 했는데 솔직히 가망 없어 보여요.”
“허강민은?”
“허강민씨는 치안대 보호소에 잘 갇혀있고요. 자긴 취객이 아니라고 투덜대긴 했지만 얌전히 있는 걸로 봐선 좀 다친 것 같긴 해요.”
문이 열리고 민지은을 앞세워 치안대원 여럿이 들어왔다. 류태현이 마법 불을 밝혀 집 안을 환하게 했다.
“저놈은 곧 얼룩소처럼 멍이 들 거지만 뼈는 안 부러졌고, 나는 보다시피 말짱하네.”
“글쎄요 그건 이제부터 알아볼 일이죠.”
민지은이 류태현을 부축해 일으켰다.
“우선은 모두 치안대로 와주세요. 조서도 써야 하고. 학교에도 연락이 갔으니까 다른 교수님들도 곧 오실 거에요.”


새로운 관계 3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고민하는데 빠드득 이가는 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닷!”
유비가 반사적으로 허리를 푹 숙였다.
“....유비씨에게 화낸 것이 아닙니다.”
제갈량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상대를 잘못 고른 것 뿐이지요.”
그 말 하며 제갈량이 조금 울컥하는 것 같았지만 곧 표정을 바로했다. 그가 세웠던 셔츠 칼라를 내리고 다시 거울을 보았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목에 희미하게 붉은 자국이 남아있었다.
“저...”
유비가 주머니를 뒤져 1회용 밴드를 꺼냈다.
“필요하면 쓰실래요?”
제갈량이 유비를 쳐다보았다.
“어째서 이런 걸 갖고 있는 겁니까?”
“어, 아무래도 요리사니까 다칠 일도 많고 해서요... 제가 좀 덜렁거리기도 하고.”
“고맙습니다.”
제갈량이 밴드를 받아들었다. 그걸 들고 그가 잠시 망설였다.
“절 싫어하는 건 아닌 건가요?”
“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오해에 유비가 제갈량을 빤히 쳐다보았다.
“제, 제가 제갈량씨를 왜 싫어하는데요.”
“보통..... 음, 자기가 원치 않는 성적인 관심을 보이면 싫어하잖아요.”
유비는 잠시 뭐라 해명을 해야 할지 아득해졌다.
그가 제갈량의 ‘성적인 관심’을 원치 않는 건 절대 아니었다. 다른 걸 더 원해서 그렇지.
“그, 싫은 건 아니고요, 저도 제갈량씨 무척, 어, 마음에 드는데, 바로 호텔로 가기 보다는 좀 더.... 같이 놀고, 데이트도 하고 손도 잡아보고 대화도 하고 그러고 싶어서요.”
유비가 필사적으로 말을 짜냈다.
“그..... 제갈량씨는 그런 거 원치 않는댔으니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한 번 보고 말고 싶지는 않다고요!”
제갈량이 또 화낼까봐 속으로 달달 떨다가 유비가 슬쩍 그를 흘끔 보았다. 제갈량은 화내고 있지 않았다. 그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그를 볼 뿐이었다.
“그럼, 제가 다음에 또 만나주겠다고 약속하면 호텔 갈건가요?”
유비는 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꼭.... 가야 하나요? 오늘?”
“인간에게 성욕이 있는 게 뭐 잘못됐습니까.”
“아니오.”
유비가 휘휘 고개를 저었다. 제갈량이 한숨을 쉬었다.
“변명 같겠지만 제겐 그런 정상적인 교제를 기피할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니 유비씨가 원하는 그런 관계는 되기 어려울 겁니다.”
“네......”
유비는 다시 풀이 죽었다. 너무 보기 불쌍할 정도여서 제갈량은 그만 저도 모르게 사과를 해버렸다.
“죄송합니다.”
“아니, 제갈량씨 잘못이 아닌걸요. 이유가 있든 없든 자기 인생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게 맞는 거지.”
“네, 뭐 그야 그렇지요.”
제갈량이 어색한 표정으로 딴 데를 쳐다보았다. 그 태도를 보며 유비는 제갈량이 이 일로 자주 비난을 들었던 건 아닐까 추측했다.
‘무슨 이유인지 듣고 싶지만, 물으면 실례겠지. 난 제갈량의 친구도 뭣도 아니니까....’
그런 생각을 하니 더욱더 어깨가 쳐졌다. 제갈량이 표정이 조금 더 불안해졌다.
“다음에도.... 또 보고 싶다고 하셨지요.”
제갈량이 말했다. 유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 네.”
“그.... 사귀는 게 아니어도 괜찮을까요? 그냥 아는 사이라던가.”
“네! 괜찮아요! 그냥 어쩌다 모바일 게임 하트만 보내셔도 되요!”
유비가 목이 떨어져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멀미할 것 같아 제갈량이 유비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아...”
“그럼, 우선 연락처만 교환하죠.”
“네.”
제갈량이 휴대폰을 꺼냈다. 유비가 명함을 내밀었다. 제갈량이 놀라자 유비가 멋쩍게 웃었다.
“일단은 사업이라 명함을 팠거든요.”
[유비네 소시지빵. 대표 유진]이라 되어 있는 명함을 보고 제갈량은 유비를 다시 보았다.
“아, 그, 가게 이름이 그렇다 보니까 다들 절 유비라 불러서 저까지 그만....”
본의 아니게 가명을 댄 꼴이 되어 유비는 제갈량의 눈치를 보았다.
“저, 혹시 소시지 좋아하세요?”
“아뇨, 가공육은 별로 안 좋아합니다.”
‘제갈량은 정말로 전생의 기억이 하나도 없구나. 아니 그냥 다른 사람이구나.’
유비는 새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그치만, 제가 만드는 소시지랑 베이컨은 첨가물 같은 거 하나도 안 넣고 제가 직접 고기 사다 훈제해서 만들거든요. 공장제 가공육하곤 다르니까 한 번 드셔보시면...”
“빵집이라면서요?”
“육가공 자격도 있어요.”
유비가 어깨를 으쓱했다가 제갈량이 떨떠름하게 바라보자 다시 기가 죽었다.
“진지하게 만드신다는 건 알겠습니다.”
제갈량은 명함에 나와 있는 번호를 자기 폰에 입력하고 통화를 눌렀다. 유비가 서둘러 자기 폰을 꺼내 번호를 저장했다.
“저는 이런 식으로 정해진 근무처가 없어서, 전화번호 외에 따로 드릴 건 없네요.”
“응? 선생님이면 학교가 있을 거.....”
제갈량이 바보취급 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유비는 당황했다.
“그냥 학교 선생이면 왜 이 파티 자리에 있겠습니까.”
유비가 여전히 못 알아듣고 있는 걸 보고 제갈량이 돌아섰다.
“정 궁금하면 제 이름을 검색해보시던가요.”
그 말만 남기고 제갈량이 화장실을 나갔다.
“그치만.... 안 나오던데.”
유비가 중얼거렸다.
“검색 해봤다고. 당연히. 그 땐 안 나왔으면서.”


“장각.....”
강유가 이를 빠드득 갈며 눈앞의 신선을 노려보았다.
“하하.... 저기, 해명할테니까 좀 놔주면 안될까아?”
옥새의 신선이 옥새를 떠날 수 없다고 해서 외부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장각은 보이지 않는 힘에 멱살이 잡힌 채 강유 눈높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기억할 거라며! 전 우승자 만나면 기억이 되살아나 알아보게 될 거라며!”
강유가 장각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장각은 켁켁 목이 졸리는 시늉을 했다.
“신선은 숨 안 쉬어도 되는 걸 내가 모를까봐서?‘
“숨 안 쉬어도 죽지는 않지만 대화는 좀 힘들어지지 않을까?”
장각이 넉살좋게 받아쳤다. 강유가 그를 놔주었다.
“꾸엑.”
풀밭에 뚝 떨어진 장각이 못 일어나는 척 엄살을 떨었다.
“신선 장각.”
“예, 예. 일어납니다. 일어나요. 거 참 어렸을 땐 귀여웠는데.”
강유가 째려보는 가운데 장각이 일어나 앉았다.
“역시 인간들의 삶을 너무 자세히 들여다보는 건 신선의 정신건강에 별로 안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옥새의 신선님. 그러니까..”
“말 돌리지 말고.”
장각이 어깨만 으쓱했다.
“그래서, 뭐가 불만이십니까.”
“제갈량님이 계속 연애에 실패해 오신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나도 인정한다.”
강유가 말했다.
“이전 우승자 와의 인연이 너무 강하게 맺어져 있으니까. 그럼 이제 그 둘이 만났으니 연애가 풀려야 할 게 아니냐.”
“얼굴만 보면 사랑에 빠진답니까.”
장각이 말했다.
“그러니 전생의 기억을...”
“제갈량이란 신선...아니 인간이, ‘넌 쟤랑 사랑에 빠질 운명이란다’라고 알려주면 ‘아 그렇군요, 저 사람을 사랑하겠습니다’ 라고 얌전히 따를 사람이 아니잖아요.”
‘왜 아니지?’라고 얼굴에 써있는 강유를 보며 장각은 조금 불길함을 느꼈다.
“....저기, 지금 옥새의 신선님은 제갈량의 점잖은 모습만 봤겠지만 그 녀석 원래 선계에서 내놓은 문제아였거든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강유를 보면서 장각은 제갈량이 왜 그의 앞에서 내숭을 떨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과거에 자기가 했던 짓이 따끔따끔하게 양심을 조여와 장각은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했다.
“처음에만 해도 제갈량은 드림배틀에 참전도 안 하려고 했고, 우여곡절 끝에 유비와 군신계약을 하고도 한동안은 사이가 나빴습니다. 뭐 자세한 얘기까진 됐고. 한마디로 제갈량은 반항심 충만한 사람이고, 운명이니 의무니 들이대 봤자 본인이 납득 못하면 엎어버려요. 그러니 둘이 만나자 마자 기억을 돌려주면 역효과일거에요. 먼저 자유의지로 연애를 한 뒤에 알아야 ‘운명 따위 마음에 안 들지만 이 사람이 마음에 드니까 어쩔 수 없지’가 될걸요.”
강유는 수긍하는 표정이 되었지만 노려보는 눈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뭐 개인 감정이 없진 않고.”
장각이 인정했다.
“전생에선 제갈량이 유비 때문에 마음고생 했잖아. 이번엔 유비가 제갈량 때문에 마음고생 좀 해도 되지 않아?”
그 말에는 강유도 반박하지 않았다.
“너무 무섭게 쳐다보지 말아용, 그래도 제갈량 연애 잘 안 풀리는 거 말고는 행복하고 근심 걱정없이 잘 살았잖아.”
“그건 그렇지.”
강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상하고 느긋한 성격의 부모님과 형, 유복한 관경. 타고난 성격 탓에 친구는 얼마 없었지만 학생 시절에도 누가 찍어놓고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자라서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를 공부하고 젊은 나이에 나름 명성까지 얻었으니 남 보기에도 성공한 인생이고 제갈량 본인도 만족하고 있었다.
옥새의 신선과 옥새 보수 담당자가 뭐 더 해줄건 없을까 머리 싸맬 필요 없을 만큼은 충분히, 제갈량은 인간의 삶을 즐기고 있었다. 연애만은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그건 전생에 강하게 묶인 인연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적어도 인간 쓰레기를 만나거나 헤어지는 과정에 제갈량에게 위해가 가해지는 일은 없도록 강유도 장각도 신경을 많이 썼다.
그러고도 제갈량이 연애를 기피하게 되는 건 막지 못했지만.
“아무튼 드디어 둘이 많났고, 유비는 제갈량을 기억하고 사랑하고 잘해주고 싶어하잖아. 그러니 결국 잘 될거야.”
장각이 달랬다.
“그래야지.”
강유가 옥새 주위를 떠도는 소원 중 하나를 잡아 키웠다. 화면 안에선 유비가 두 손 모으고 간절히 빌고 있었다.
[제갈량이 전화하게 해주세요 제갈량이 전화하게 해주세요 제갈량이 전화하게 해주세요........]


“맛있게 드세요~”
“네, 잘 먹을게요.”
유비는 문 밖까지 나가 손님을 배웅했다. 손님도 웃으며 인사하고 갔다. 한참 손을 흔들어주고 유비는 그대로 두 팔을 쭉 폈다.
“아, 오늘도 매진이네.”
유비네 소시지빵은 유비가 혼자 소시지부터 손수 제작해서 빵을 만들기 때문에 하루에 파는 물량이 적었다. TV까지 나가 가게를 홍보한 뒤에는 제일 인기 없는 빵도 오후 다섯 시 정도면 다 팔리고 없었다. 예전부터 단골이던 손님 중에는 왜 TV같은 데 나가서 빵 사먹는 걸 힘들게 하느냐고 투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유비는 그저 맛있는 걸 널리 퍼트려서 더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싶었다고 웃으며 변명할 뿐이었지만.
‘아, 그러고 보니 제갈량 찾았으니 경영 방침을 바꿔야할까?’
부모님 건물이라 월세 오를 걱정이 없기 때문에 가게 유지비와 자기 생활비가 나올 정도만 벌면 충분했다. 거기에 제갈량을 부양할 목적으로 저축도 좀 해놓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진 돈이 벌리면 좋고 안 벌려도 상관없다 생각하며 일했다.
원래 계획은 제갈량을 찾은 다음에 그와 의논해서 앞으로 인생 계획은 같이 세우는 것이었다. 이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제갈량은 뭐 하고 있으려나.’
파티에서 만나 연락처 주고받은 이후로 사흘이 지났지만 제갈량으로부터는 이렇다 할 연락이 없었다. 유비가 저녁때 ‘오늘은 잘 지내셨나요. 저녁은 드셨어요?’하고 메시지 보내면 ‘오늘은 좀 피곤하네요. 저녁은 아직 못 먹었습니다’ 하고 답변해주는 정도였다.
‘답도 안 해주는 것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생각하니 쓸쓸해져서 유비는 몸을 돌려 가게 문 옆에 달려있는 [맛있는 빵이 있어요!] 표지를 뒤집어 [오늘은 빵이 다 떨어졌어요 ㅠㅠ]로 바꿔놓았다.
“이제 슬슬 우드칩 더 주문할 때가 됐지....”
역시 빵 굽는 양을 늘려야 할 것 같다. 안 팔리고 남을 걱정은 없으니까, 우선 손이 덜 가는 것부터....
“오늘은 벌써 영업 끝난 겁니까?”
막 들어가려던 유비가 휙 돌아섰다. 제갈량이 그를 보며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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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는 28, 제갈량은 27 잡고 있습니다. 유비가 제갈량을 검색해 본 건 전생의 기억을 대부분 떠올리고 제갈량을 찾으라는 꿈을 꾸고 난 뒤인 21살 때. 제갈량이라고 해도 세상에 이름을 내기에는 조금 일렀지요. :)


새로운 관계 2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이번 편은 뭔가 경고(트리거 경고가 아니라 취향 경고)를 붙이긴 해야 할 것 같은데 뭐라 붙여야 할지 잘....
유비가 멘붕할 만한 일이 벌어집니다. 주의해서 읽어주세요.



“파티는 즐거우신가요?”
제갈량이 말을 돌렸다.
“네!”
유비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량을 보기 직전까진 언제 도망갈까 눈치보고 있었지만 제갈량을 만난 게 일생일대로 즐거웠기 때문에 매우 진심이었다.
“그런가요. 저는 이만 자리를 옮길까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 말을 하면서 제갈량이 유비에게 눈웃음을 쳤다. 유비는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걸 느꼈다.
“저, 어, 어디로 가는데요? 저도 같이 가도 되나요?”
제갈량이 하는 말이 2차에 가서 더 논다는 게 아니라 집에 가서 씻고 잔다는 뜻이면 어쩌지 하면서도 유비는 우선 매달려 보았다.
“네, 뭐.”
제갈량이 유비의 팔에 슬쩍 손을 올렸다 떼었다.
“유비 씨도 그럴 생각이 있다니 다행이네요.”
유비의 표정이 다시 한 번 환해졌다.
“유비씨도, TV에 나온다면 소문의 무서움 정도는 아시겠지요.”
갑자기 제갈량이 뜬금없는 말을 해서 유비는 눈을 때록 굴렸다.
“예, 물론 그렇죠.”
“그럼 입이 무거우리라고 기대해도 되는 거지요?”
“예, 물론.”
유비가 다시 한 번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드디어 대놓고 말할 수 없는 비밀 얘기가 나오려는 것 같아 유비는 긴장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좋습니다. 아무래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직업이라 좀 민감해질 수밖에 없더군요.”
제갈량의 직업과 지금 상황이 무슨 상관인지 유비는 잘 알 수가 없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뭔진 몰라도 제갈량이 하는 말이 옳겠거니 하고. 제갈량이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여기도 보는 눈이 있으니 나갈 땐 따로 나갑시다. 호텔은 제가 눈에 덜 띌 만한 곳을 아니...”
“네? 호, 호텔이요?”
유비가 놀랐다. 제갈량은 유비가 왜 놀랐는지 오해했다.
“네. 설마 집으로 가자는 건 아니겠지요. 호텔에서, 비용은 반반 부담으로. 이런 걸 꼭 말로 해둬야...”
유비는 드디어 제갈량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저 잠깐만요 우리 아.....”
제갈량이 서둘러 목소리가 커지려는 유비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주변을 휘휘 둘러보고 다시 유비를 노려보았다. 녹색 빛이 감도는 검은 눈동자가 분노를 품고 있었다.
“무슨 짓입니까. 미쳤어요?”
제갈량이 여전히 속삭이는 낮은 어조로, 그러나 눈빛으로 사람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험악한 표정으로 유비를 다그쳤다.
“내내 말 통하는 척 하더니 갑자기 왜 이럽니까. 이런 파티 처음 와봐요?”
유비의 충격 받은 표정이 답을 대신했다. 제갈량이 손에서 힘을 빼었다. 그러고도 유비가 가만히 있자 제갈량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허, 참.”
제갈량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방금까지..... 아 됐습니다. 그만두죠.”
제갈량이 일어나려 했다. 유비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자, 잠깐만, 꼭 그, 첫날부터, 그럴.... 필요는 없잖아?”
유비가 다급하게 말했다.
“이제부터 천천히 서로 알아가며....”
“놓으세요.”
제갈량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러지 말고.....”
“전생 어쩌고 할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제갈량이 중얼거렸다.
“난 운명의 상대 같은 거 안 찾고 길게 교제할 사람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놓으세요.”
“제갈량...”
“놓으라고 했습니다.”
유비가 여전히 놓지 않자 제갈량의 표정이 경멸로 바뀌었다.
“여기 온 사람 치고 내가 당신의 운명의 상대니 결혼해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거나 죽여버리겠다는 편지 한두 장 안 받아본 사람 없습니다. 이따위로 굴면 매장되는 건 당신 쪽입니다.”
매장되는 건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제갈량과 다시 만날 수 없게 되는 건 두려웠다. 유비는 손에 쥔 제갈량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유비가 천천히 손을 폈다. 멈춰 세우려던 것일 뿐 꽉 움켜잡은 건 아니라서 붉게 손자국이 남거나 하지는 않았다.
미안하다고, 다음에라도 또 만날 수 있냐고 묻고 싶은데 그럴 새도 없이 제갈량은 휙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유비에게서 멀어졌다. 유비가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제갈량은 아까 그와 이야기하던 사람인지 아닌지 잘 알 수 없는 다른 남자에게로 가서 말을 건넸다. 썩 즐겁지만은 않은 표정으로 뭐라 말을 나누다 유비 쪽을 흘끔 보았다. 유비는 휙 고개를 돌렸지만 안보는 척 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가 자기를 뭐라고 생각할지, 남들에게는 뭐라 말할지 생각하자 식은땀이 흘렀다.
‘이대로 영원히 날 안 보겠다고 하면 어쩌지?’
그럴 수는 없었다. 어떻게 다시 만났는데. 그를 만나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왜 제갈량은 날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유비는 억울했다. 명백히 제갈량은 자기 전생도 유비도 기억하지 못했다. 유비에게 말을 걸었던 걸 생각하면 호감 정도는 느낀 것도 같지만...
유비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제갈량이 유비에게 원나잇을 제안한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 수 있었다. 그가 한 말을 생각하면 이미 몇 번 해 봤대도 놀랍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이미지를 떨어내기 위해 유비가 헤드뱅잉을 했다. 한창 그러나 정신 차려보니 파티장 인원의 절반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유비는 얼굴이 새빨개져 화장실로 도망을 갔다. 꼭 도망만은 아니었다, 얼굴이 홧홧해서 물이라도 끼얹고 싶은 건 진심이었으니까.
그 와중에도 자길 보는 인원 중에 제갈량이 없는지 확인한 게 자기 생각에도 애잔했다. 제갈량은 유비를 못본 척 하며 또 다른 아마도 젊고 잘생겼을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와 말하고 있었다.
‘제대로 본 것도 아니잖아. 못생겼을지도 몰라.’
연거푸 얼굴에 찬물을 끼얹으며 유비가 생각했다. 그래서 제갈량이 못생긴 놈이랑 원나잇을 하면 뭐가 좋은가 하면 그건 아니지만.
‘제갈량....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거야......’
당연히 제갈량도 자기를 기억할 줄 알았다. 찾고,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자기는 기억도 못하는 데다 아무 남자하고나 원나잇을 하고 다니고 있을 줄은.
방금 생각은 자기 보기에도 너무 꼰대 같아 유비는 화장실 벽에 머리를 박았다. 그 상태로 유비가 심호흡을 하며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썼다.
‘정신 차리자, 유비야. 전생에 내 신선이었으니 현생에서도 당연히 날 사랑하고 기다려야 한다면 그건.... 제갈량을 아직 신선 취급 하는 거잖아.’
제갈량이 말했었다. 신선은 배틀을 위한 도구라고. 자기는 인간의 도구 같은 것 되고 싶지 않았다고.
유비는 제갈량이 어째서 전생을 잊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이제 도구가 아니게 되었는데 인간이 되어 마음껏 자기 의지대로 살 수 있는데 도구로 살던 기억 같은 게 떠올라 봐야 제갈량에게 무슨 좋은 영향이 있겠는가.
‘나더러 제갈량을 찾으라고 했던 그 꿈, 제갈량하고 재회해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라는 게 아니라 이제 제갈량은 나랑 상관 없는 사람이란 걸 가르쳐주려고 했던 걸까.’
눈물이 나왔다. 상황도 제갈량의 입장도 이해하고 제갈량에겐 이 편이 낫다는 것도 알겠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슬펐다.
‘환생해서도 결국 헤어질 줄 알았으면 그 때 헤어지기 전에 사랑한다고 말이라도 해볼걸.’
전생의 어리고 멍청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소매로 눈물을 닦으려다 얼굴 전체가 아직 물투성이인걸 깨닫고 유비가 종이 타월을 뽑아 얼굴을 닦았다.
그러고 있는데 화장실 입구 쪽에서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유비는 엉겁결에 칸막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냥 자연스럽게 나가면 되었을텐데 왜.’
아까 쪽팔렸던 게 너무 충격이 컸던 모양이었다. 지금이라도 자연스럽게 칸막이를 나가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지나쳐 나가자고 생각하며 유비가 다시 손잡이를 잡았다.
“잠깐, 너무 성급.....”
제갈량의 목소리에 유비가 얼어붙었다. 부딪치는 소리, 옷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거친 숨소리가 섞여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착각할 수가 없게 만들었다.
유비가 칸막이 문을 살짝 당기고 그 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공교롭게도 이 칸의 바로 맞은편 벽에 문제의 두 사람이 있었다.
제갈량을 벽에 밀치고 키스하고 있는 남자는 등만 보여 누구인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제갈량보다는 키가 작은데 덩치는 조금 더 커서 제갈량의 몸을 거의 다 가리고 있었다. 유비 쪽에서는 제갈량의 얼굴 절반 정도 밖에 보이지 않았다.
제갈량의 손이 공중을 헤매다 그 사람의 어깨를 붙들었다. 약간의 실랑이가 가라앉고 제갈량은 눈을 내리깐 채 키스에 응했다.
‘.....나더러는 조심해야 하니까 따로 나가서 호텔로 가자고 했잖아?’
억울한 마음이 떠올린 첫 번째 생각이 너무나 한심해서 유비는 다시 한 번 머리를 박고 싶었다. 그러나 화장실 칸막이 안에서 머리를 박을 수는 없었다. 여기에 딴 사람 있다고 소리 내면 지금 두 사람은 그만둘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자기가 이런 거 목격했다고 제갈량이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제갈량이 눈을 떴다.
소리를 지를뻔 하고 유비가 자기 입을 막았다. 그가 내다보고 있는 틈은 아주 좁았다. 누군가 보고 있다는 건 눈치챌 수 있어도 그게 유비란 걸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이쪽을 주시하며 제갈량은 그자와 키스를 이어갔다.
‘나, 전생에 제갈량한테 그렇게 못할 짓 했던가?’
순간 짐작 가는 일이 너무 많이 떠올라서 유비는 잠시 기억의 혼란을 겪었다. 역시 자기가 제갈량을 다시 만난 건 제갈량더러 유비를 뻥 차고 신나게 멋대로 살라는 제갈량에 대한 선계의 배려가 틀림없다고 생각하면 유비가 혀라도 깨물고 싶어질 때쯤 제갈량이 상대를 밀어내었다.
“이제 그.... 흡.”
상대가 제갈량의 목을 입술로 더듬어 내려갔다. 옷이 방해되자 넥타이를 당겨 풀려 했다.
“하지 말라고! 이런데서 어디까지 할 작정이야!”
제갈량이 그자의 어깨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제서야 상대는 입술을 떼었다.
“아, 알았어. 호텔 가면 되잖아. 비싸게 굴기는.”
그자가 투덜대었다.
“그럼 나가서...”
“아니.”
제갈량이 차갑게 말했다.
“기분 잡쳤어. 안 해.”
“뭐?”
상대가 표정을 험악하게 했다.
“아까랑은 말이 다르잖아!”
“넌 아까랑 행동이 다른데 말이 달라진 게 대수야? 얼른 꺼져.”
“이게 예쁘다고 봐주니까!”
그자가 제갈량의 어깨를 쥐고 다시 벽에 거칠게 밀쳤다. 숨어있던 것도 잊고 유비는 뛰쳐나가려 했다.
“헉!”
그런데 그자가 갑자기 경직했다. 꼼짝도 못하고 끙끙거리기만 하는 걸 보고 유비는 제갈량이 신선마법이라도 써서 상대를 제압했나 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인간인데?’
자세히 보니 제갈량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제갈량이 뭘 잡고 있는지 깨닫자 유비도 절로 무릎이 오므라들었다.
“놔주면 조용히 꺼질래, 아니면 딱 터지지 않을 만큼만 더 비틀어줄까. 응?”
제갈량이 위협했다.
“꺼질 거지?”
상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량이 놔주자 그자는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화장실을 나가버렸다.
‘아프겠다....’
나쁜 놈인데도 절로 동정심이 들 지경이었다. 이번 일을 교훈삼아 두 번 다시 힘으로 상대를 누르려는 짓을 못하게 되면 그것도 좋은 결과일 거라고, 유비는 그렇게 되길 남몰래 기원했다.


쏴아하고 물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유비가 슬쩍 눈을 굴려보니 제갈량이 손을 벅벅 씻어댔다. 한참을 그러더니 그가 세면대를 짚은 채 뭐라고 중얼거렸다.
빨리 제갈량이 가야 자기도 나갈텐데 하고 유비가 기다리고 있는데 제갈량이 물을 껐다.
“나오시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겁니까.”
‘히익.’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지만 들켰으니 안 나갈 수도 없었다. 유비는 쭈뼛쭈뼛 칸막이를 나와 제갈량한테서 좀 떨어져 섰다.
“죄송합니다. 제가 볼라구 본 게 아니고 나가질 못해서....”
“변명은 됐습니다.”
제갈량이 유비 쪽은 보지도 않고 종이 타월을 뽑아 물기를 닦았다.
“그래서, 재미있던가요?”
“아, 아뇨, 제가 그 나와서 그놈 잡으려고 했는데 그러기도 전에 너무 대처를 잘 하셔서....”
돕지 않은 주제에 도우려고 했다고 말로만 해봤자. 변명을 포기하고 유비는 다시 얌전히 고개를 푹 숙였다.
제갈량이 혀를 찼다.
“너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일부러 본 것도 아니고 별로 유비씨 잘못은 아니니까요.”
“싹 잊어버리고 못 본 걸로 할게요. 소문도 절대 안 내고요.”
“네, 그건 좋군요.”
제갈량이 조금은 마음이 풀린 것 같아 유비가 고개를 들었다.
제갈량이 반쯤 풀린 넥타이를 아예 풀어버린 뒤 거울을 보며 다시 매었다. 그러고 있는 옆모습이 너무 멋져서 유비는 잠시 넋 놓고 제갈량을 바라보았다.
‘아, 이러면 안 되지, 참.’
유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제갈량하고 이대로 헤어져버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뭐라고 말을 걸어야 제갈량이 화내지 않고 말을 들어줄지 알 수가 없었다.



세계의 중심 56 ㅣ- 회색도시&검은방


“정리 끝났으면 모두 모여서 저녁을 먹으러 갈까 하는데 가실 건가요?”
준혁이 미정을 불렀다.
“응, 나랑 양수연씨도. 이것만 치우고.”
두 사람이 접은 매트를 벽에 기대 세웠다.
“오늘도 전에 먹었던 거기?”
“민지은씨가 전에 알바 했던 데라 많이 줄 거라면서 꼬치구이집을 권하던데요.”
“대찬성!”
“이런 대인원이 가면 성가시지 않을까요?”
세미나실을 나오며 양수연이 민지은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정찬도 아니고 꼬치는 그냥 쭉 늘어놓고 굽는 거고 손님이 직접 가져가기도 하고. 이 팀은 예의바르고 깔끔하니까, 술 마시고 난동을 부리는 손님보단 훨씬 감사하죠.”
민지은이 활기차게 말했다.
“민지은씨는 능력이 많아서 좋겠어.”
오미정이 말했다.
“할 줄 아는 것도 많고 뭐든 쉽게 배우고.”
“그거야 세미나 내용이 내용이니까요.”
“그건 그렇지만 과연 치안대원이야. 이러다 큰 사건 같은 게 터져서 짜잔 해결하고 나면 치안대장 같은 게 되는 거 아니야?”
“아하하, 글쎄요. 여긴 별로 대단한 사건은 안 일어나도 명색이 치안대니까, 하무열 교수님께 배워두면 좋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수도 수사국은 과연 수준이 높네요.”
“그러게, 졸업하면 수사국 지원해보려고 했는데....”
“예? 미정언니가요?”
민지은이 놀랐다.
“왜, 나 수사관은 안 어울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기자 하실 줄 알았어요.”
“응, 그 쪽도 생각하고 있긴 한데, 난 재호랑은 달리 글 솜씨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좀 더 뒷배가 있는 상태로 움직이고 싶어서. 뭐 사건을 파헤쳐서 정의를 실현한다, 비슷하잖아?”
“그럴지도요.”
양수연이 동의했다.
“응. 그래서도 이 세미나 들은 거거든... 근데 하무열 교수님 하는 거 보면 이쪽도 까마득 하다.”
“하무열 교수님이 유난히 우수하신 거겠죠.”
양수연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다 저러진 않을 거예요.”
“그건 또 다른 의미로 싫은데....”
오미정이 미간에 주름을 모았다.
“뭐 저 분은 성격 나쁜 것도 능력의 일부 같으니까요.”
민지은이 웃었다.
“예를 들어 권현석 교수님 같이 다정하고 귀여운 분이라면 범죄자 상대로 매섭게 심문은 못하실 걸요.”
“하하하, 민지은씨가 교수님 과제를 안 받아봐서 그러는데....”
“어, 우리 아빠 그렇게 보여도 나쁜 놈들 상대론 무지 무서워요.”
권혜연이 이들에게 합류했다.
“위험지대 쪽으로 연구 여행을 떠났을 때 그 지역 폭력단하고 문제가 있었거든요...... 나한텐 자세한 건 안 말해줬지만, 은창 오빠도 폭력단이었는데 아빠한테 쳐맞고 부하가 되었다던데요.”
“그 교수님이 누굴 때렸다고?”
오미정이 놀랐다.
“에이, 설마 마법으로 속박했다거나...”
“정말 표정 무섭게 굳히고 말 안 들으면 감옥에 평생 처 넣어버린다고 위협했다던데요.”
“엑.”
“그런데 왜 정은창씨를 오빠라고 부르는 거야? 나이 차이 꽤 나잖아?”
민지은이 물었다.
“아, 그게.... 처음엔 아빠 놀리려던 거였는데 어쩌다보니 그렇게 굳어버렸어요.”
권혜연이 헤헤 웃었다.
“응, 그런 거라면 별 문제 없겠지만....”
민지은이 조금 머뭇거렸다.
“왜?”
오미정이 물었다.
“그게, 나이 차이 많이 나는데 나서서 오빠라고 부르라는 남자 치고 제대로 된 사람이 없거든요.”
“아.”
그 말엔 양수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야?”
미정이 물었다. 민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여자들하곤 금방 언니동생 하면서 남자들한텐 오빠라고 안 하는 거고?”
“뭐 그런 거죠.”
“오.....”
그런 이야기를 하며 이들은 꼬치 집에 들어섰다. 민지은이 나서서 맛있는 꼬치를 골라 주문하는 동안 일행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테이블에 앉았다. 민지은이 안승범과 뭐라 이야기 하고 있는 걸 보고 오미정이 탁자에 턱을 괴었다.
“좋을 때다.”
“오미정씨도 한창 좋을 나이인데요.”
양수연이 말했다.
“아유, 그렇게 말하니까 꼭 양수연씨는 나이 많은 것 같잖아요. 비슷하게 좋은 나이면서.”
미정이 웃었다.
“저 둘 사귀어?”
장혜진이 물었다.
“글쎄, 그렇지 않을까? 자주 붙어다니잖아.”
“남자랑 여자가 같이 다닌다고 해서 다 사귀는 건 아닌걸.”
“아, 혜진이가 그렇게 말하니 설득력이 넘치네.”
미정이 다른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허강민과 류태현을 건너다보았다.
“잘 어울리는 사람을 만났으니 다행이지.”
장혜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정말 둘 아무 관계도 아니었어요?”
권혜연이 물었다.
“전혀. 허강민씨한테 장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내 취항은 아니어서.”
“하지만 잘생겼는데.”
“남자는 잘생긴 게 다가 아니에요.”
양수연이 다소 과할 정도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기왕이면 잘생기고 키도 큰 게 좋지 않아요?”
오미정이 어쩐지 항의했다.
“물론 다른 조건이 모두 같다면 못생긴 것보단 잘생긴 게 낫겠지만요, 외모냐 품성이냐를 놓고 따진다면 품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렇게 말하며 양수연이 꼬치 쟁반을 들고 자기네 테이블로 가는 안승범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사랑에 빠지면 인간이 바뀐다는 말도 믿지 않아요. 사랑으로 감화시킬 걸 전제로 남자를 골라선 안 돼요.”
“응, 그렇단 얘긴 많이 들었어요.”
오미정이 민지은이 돌아오기 전에 이 화제를 수습하려고 애썼다.
“그래도 지은이 정도면 안승범이 굳이 사랑으로 감화 안 되어도 잘 잡고 살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저는 사람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요.”
권혜연이 씩씩하게 말했다.
“은창 오빠도 처음 만났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고 말이에요. 사람은 더 나아질 수 있으니까 사람인거 아닐까요?”
“그렇지만 본성이란 게 없진 않아.”
장혜진이 말했다.
“허강민씨도 꽤 바뀌었지만 여전히 성질 더럽고 까다롭고 사람 대하는 거 서투른 걸.”
“으음, 그렇게 말하니 반박할 수가.....”
“자아, 꼬치가 나왔습니다아~”
민지은이 커다란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앗, 그러고보니 왜 넌 일하고 있는 건데!”
오미정이 벌떡 일어나 꼬치 진열을 도왔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깜빡했잖아, 지금은 여기 알바 아니면서.”
“버릇이어서 그만.”
민지은이 웃으며 오미정과 함께 꼬치를 세팅했다.
“이대로 좀 더 구워서 먹으면 돼요. 거기 쇠고기는 지금 먹어도 되고 이건 내장이라 좀 더 바짝 구워야 하고요. 그래도 저거 정말 맛있어요.”
“냄새 좋은데요.”
양수연이 민지은이 내미는 꼬치를 받아들었다.
“여기 온 지 좀 되었는데도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나한테 말만 해요, 수연 언니. 학교 근처 먹을만한 데는 다 알고 있으니까.”
민지은이 장담했다.
“아, 그리고 피해야 하는 곳도 있는데 말이죠....”
민지은이 목소리를 낮추어 알바하며 목격했던 온갖 입맛 떨어지는 이야기를 속닥거렸다. 사람들은 때론 흥미진진하게, 가본 적 있는 곳이 화제에 오르면 몸서리를 쳐 가며 귀기울여 들었다.
“맙소사, 거기 튀김 맛있었는데....”
오미정이 몸을 떨었다.
“그래도 튀김은 높은 온도에서 가열하니까 식중독은 안 걸릴 거 아니에요, 어쩐지 자두 주스가 너무 싸다 했어....”
권혜연도 망연자실해졌다.
“그래도 이 동네는 이만하면 대부분 양심적이고 관리가 잘 되는 편이에요. 물도 깨끗하고. 딴 데선 더러운 강물을 그냥 퍼다가 우유에 섞기도 한다고요.”
“으아아악.”
“아니 왜 여기는 꼬치가 그대로 남았어?”
추가 주문을 하러 가던 안승범이 고개를 슥 들이밀었다.
“그렇게 조금씩 먹어서 힘이 나?”
“이건 조금씩 먹어서가 아니라...”
“종류가 별로면 다른 꼬치를 갖다 드릴까요?”
뒤에서 쟁반을 들고 있던 준혁이 물었다. 민지은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이야기에 열중해서 천천히 먹는 것 뿐이에요.”
“네. 아참, 민지은씨 치안대에 마법사용 수갑이 있는지 혹시 알고 있습니까?”
“네? 어... 네. 있어요.”
“어, 그랬나.”
안승범이 뒤통수를 긁었다.
“그 비품실 안쪽 금고에 있잖아요, 위급 상황용 연락 스크롤과 포박 완드와 함께.”
민지은이 어이없어했다.
“나보다 오래 치안대 있었으면서.”
“아 오래라고 해 봤자 나도 몇 달 밖에 안 됐고 그런 비품 하나까지 일일이....”
“뭐 있다면 다행입니다.”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요?”
“저쪽에서 말하다가 마법사들은 마력 제한이 걸린 상태에서 자기 방어 하는 법도 익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말이 나와서요.”
“어, 그럼 저도 손가락 뽑아야 하는 거예요?”
권혜연이 꼬치를 놓고 손을 뒤로 감췄다.
“아니 음, 필요한 훈련이긴 한데.....”
“꼭 엄지손가락을 뽑을 필요는 없지요. 멀쩡한 수갑이라면 손가락을 뽑아도 벗길 수 없을 거고.”
준혁이 약 주고 병도 주었다.
“윽.”
“모르지요, 하무열 교수님은 뭐라고 하실지. 그땐 특별히 운이 좋았던 거고 마법사용 수갑으로 묶이게 되면 그냥 마법은 싹 포기하고 비마법사와 똑같은 수단을 쓰라고 하실지도 모릅니다. 그 경우라도, 아니 그 경우면 더 연습은 필요하겠지요.”
권혜연을 더한 충격에 내던져놓고 준혁은 안승범과 함께 가버렸다.
“으으.....”
혜연이 드러난 팔을 문지르며 몸을 떨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수갑 반출 허가가 그렇게 쉽게 날 리 없으니까.”
민지은이 혜연을 위로했다.
“치안대 수갑을 빌릴 생각을 한다는 건, 학교에는 그런 게 없단 뜻인가요?”
양수연이 물었다.
“그야, 그런 게 왜 필요하겠어요?”
미정이 되물었다.
“학생들 중에 마법사가 많잖아요. 누가 만약에....”
“교수님들이 잡으면 되죠.”
“가둘 땐.”
“마력 봉인진 같은 걸 치면 되니까요.”
혜연이 말했다.
“....학교는 의외로 무력도 엄청나네요.”
양수연이 조금 질린 표정을 했다.
“함부로 쓰진 않으니까요. 쓴대도 방어용이고.”
“아, 학교에 관계자 및 허가받은 자 외엔 출입을 금지하는 마법이 설치된 거 알아요?”
장혜진이 말했다.
“네. 그래서 학교 안에선 이거 휴대하고 다니라고 주더라고요.”
민지은이 손가락 두 개 만한 나무패를 들어보였다.
“학생들은 어떻게 해요?”
“마법을 걸 때 처음부터 학생과 교직원 명부에 있는 사람은 드나들 수 있도록 하고 건 거겠죠.”
“쉽지 않았겠네요.”
“네, 그거 할 때 우리 아빠가 눈이 퀭해져서....”
“직접 하신 거에요? 권현석 교수님이?”
“세상에, 교수님 정말 대단하네요.”
“혼자 한 건 아닌걸요. 학생들 중에도 실력 있는 고학년 몇은 참가했다고 하고.... 나도 하고 싶었는데.”
“교수님도 아빠인데 힘든 일 딸 시키고 싶었겠어.”
민지은이 다독여주었다.
“아빠는 절 너무 과보호해요. 저도 꽤 실력 있는 마법사인데. 연구 여행에도 안 데려가려고 하고.”
권혜연이 볼을 부풀렸다.
“이래서는 아빠 말씀대로 교수가 되고 싶어도 경력을 못 쌓아서 못 될 거라고요.”
“저런, 그건 아빠가 너무했네.”
민지은이 말했다.
“다양한 경험을 해야 배울 수 있는 것도 있는데.”
“맞아요. 그래서 학교에서도 다양한 교수님을 영입하는 거잖아요.”
“그러고보니 2학기부터 자연과학부에 새 교수님이 오신다면서요.”
장혜진이 말했다.
“어떤 분인지 아는 사람 있어요?”
“어, 잠시만.”
미정이 수첩을 뒤적였다.
“이름은 고상만이고, 생물과 화학 전공이래. 의사 노릇도 했었다나봐. 박근태 교수님 추천이고 심사는 무난하게 통과한 모양이야.”
“자세히 아네요.”
“인터뷰 할 거거든. 이 정도 사전 조사는 기본이지.”
의기양양한 오미정을 보며 양수연은 고민했다.
공식적인 기록은 없었다. 그 대단한 수도 수사국에서는 이곳의 순진한 대학생들은 상상도 못할 만큼 많은 사건이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그저 없었던 일이 되어갔다. 양수연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끈질기게 파헤치지 않았다면 정말로 ‘누구도’ 알지 못한 채 묻혔을 일들이.
그런 떠도는 소문 중 어디선가 고상만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양수연이 아는 한 그는 직업 윤리에 투철한 사람이 아니었다.
알려야 했다. 그러나 이 학생들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하무열 교수님께 말하는 게 좋겠지.’


새로운 관계 1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Characters: 유비. 제갈량.
Rating: PG-15
Warnings: 없음
Summary: 환생한 유비와 제갈량이 다시 만나다.


새로운 세계의 후속편입니다.




“자, 이때 여길 이렇게 찝어두면 구운 뒤 모양이 잘 잡히게 되요.”
유비가 시범을 보이며 설명했다.
“이대로 오븐에 넣고 구우면 되는데, 아 물론 예열 꼭 하시고요. 그리고 집마다 오븐 출력은 다 다를 수 있으니까 오븐 처음 쓰실 땐 스콘이나 머핀 같은 간단한 걸 먼저 구워봐서 레시피의 시간과 온도와 비교해 조정해주세요.”
그가 말하는 것과 동시에 무대 뒤 패널에 온도 조절 요령이 비쳤다.
비쳤을 것이다, TV화면에는. 유비는 미리 구워 철망에 올려둔 소시지빵을 들어 카메라에 비췄다.
“정말 맛있어 보이네요.”
다른 출연자가 말했다.
“그런데 TV에서 이렇게 비결을 다 알려줘 버리면 유사장님은 뭘로 장사해요?”
유비가 생긋 웃었다.
“우리 가게 맛의 비결은 제가 직접 훈제하는 소시지와 베이컨에 있는걸요. 이걸 정말 똑같이 재현할 수 있는 분이 있으면 꼭 만나서 친구가 되고 싶네요. 저도 한 수 배우고.”
출연진들이 유비가 만든 소시지빵을 먹으며 감탄사를 늘어놓는 동안 유비는 TV카메라를 슬쩍 쳐다보았다. 진짜로 그가 이 소시지빵을 먹이고 싶은 바로 그 상대가 저 카메라 너머에서 이 프로그램을 보고 있길 기원하며.
‘제갈량...’
“그런데, 유사장님 성함이 원래 유비는 아니라면서요?”
유비는 재빨리 웃는 얼굴을 질문한 출연자에게 돌렸다.
“예, 빵집 이름이 ‘유비네 소시지빵’이어서 많이들 착각하시는데 원래 이름은 유진이에요. 유비란 이름은 창세 전설에서 따왔어요.”
그가 카메라에 잡히는 방향을 보며 활짝 웃었다.
“모두의 행복을 위해 싸우는 영웅이라니 멋지잖아요. 전 제 빵을 먹는 분들이 행복하길 바라며 빵을 만드니까 그 이름이 딱 좋다고 생각했어요.”
“하긴, 같은 빵이라도 가게 이름이 조조의 빵집이라면 꼭 빵을 사먹으려면 악을 무찔러야 할 것 같고 그렇겠네요.”
출연자 중 누가 신화에 밝은지 농담을 던지자 방청객들이 와하하 웃었다. 유비는 간신히 웃는 척만 했다.
“그래서 이제 유비라고 부르셔도 전 줄 알고 대답해요. 이러다 개명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거 멋지네요. 신화 속 영웅의 이름으로 개명이라니.”
“네.... 뭐.”
영웅의 이름 이야기가 길어지자 유비는 빨리 다른 화제를 꺼내려고 머리를 쥐어짰다. 빵집 이름과 그 유래를 말하려고 방송에 출연하는 거니 말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조조의 이름이 웃음거리가 되는 건 이제는 그들과 상관이 없어진 지금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니, 이제는 상관이 없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지도 모른다.
드림배틀은 끝났지만 자기는 전생을 기억하니까.


“수고하셨어요!”
“촬영 수고하셨습니다.”
<도전! 맛집의 비결> 촬영이 무사히 끝나자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쭉쭉 폈다. 예능이긴 해도 요리사가 아닌 출연자들이 직접 요리를 해보는 컨셉이라 자칫하면 칼이나 불 때문에 부상을 입기 쉬워 촬영 중엔 모두 좀 긴장하고 있었다.
“아, 겨우 끝났다.”
유비와 함께 출연했던 MC가 그에게 다가왔다.
“유진씨 처음에만 해도 엄청 긴장해서 딱딱하게 굳어있더니 금방 적응하네요. 오늘 보니 카메라에 대고 멋진 표정도 짓고.”
“어, 그랬나요?”
유비가 멋쩍게 웃었다. 자각하고 한 건 아니지만 카메라 보며 제갈량을 생각했으니 괜찮아 보이는 표정이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따 요 근처에서 파티 있는데 같이 갈래요?”
“파, 파티요?”
“네. 뭐 대스타가 오는 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한 발 걸친 사람들 위주로 부른댔으니 재미있을 거에요. 유진씨도 이제 그런데서 사람도 만나고 놀고 그래야죠.”
유비는 고민했다.
그는 딱히 다른 ‘스타’를 만날 생각이 없었다. 그가 TV에 출연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유비네 소시지빵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이고 가게를 홍보하는 이유는 제갈량이 보고 찾아오지 않을까 해서이다. 사람들 생각과는 달리 인기를 얻거나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은 없었다. 돈을 벌고 싶었다면 직접 소시지를 훈제해서 화제성을 모을 필요 없이 그냥 적당히 좋은 재료를 써서 빵을 많이 만들며 체인점이라도 늘리는 편이 나았다.
“글쎄요, 오늘은 피곤해서...”
“그래도 그런데 가서 인맥을 쌓아야 다른 프로도 더 출연하고 그러지.”
그건 좀 솔깃했다. 맛집 비결에는 벌써 세 번 째 출연하는 거지만 가게에 오거나 SNS로 접근하는 사람 중에 제갈량으로 의심 가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맛집 비결을 안 본다면 다른 프로에도 출연해보는 것 외에 유비에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제갈량은 인간으로 환생했다. 어른이 된 뒤에 살아가며 때때로 들던 기시감이 전생의 기억이라는 걸 깨달을 무렵 제갈량이 유비를 따라 인간이 되었으니 찾으라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이 아니었더라도 그를 찾긴 했을 것이다. 제갈량을 다시 만날 게 아니라면 전생의 기억을 왜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갈량이 인간으로 환생한 건 분명했다. 그러나 어디서 어떤 사람이 되어 사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갈게요, 파티.”
전생이 모두 뚜렷이 기억나는 건 아니었다. 전체 인생 중에선 짧은 시절이었지만 드림 배틀의 기억이 가장 선명했다. 마지막에 하늘로 사라지는 그를 보며 울었던 건 지금 생에 있었던 일처럼 기억났다.
그래서 제갈량을 찾고 싶었다. 찾기 위해 뭐든 하고 싶었다. 그러니 파티에 참여해서 인맥을 쌓아야 한다면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파티는 어두컴컴한 클럽에서 술 마시고 춤추고 방탕하게 노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냥 사교 모임 마냥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고 안도하며 유비는 술 대신 소다수를 한 잔 받아들고 모인 면면을 살펴보았다.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대부분은 방송일을 하는 사람일 테고, 그래서인지 대부분 평균 이상 미인이긴 하지만 그뿐이고 유비에겐 별 감흥이 없었다.
‘장래성 있는 새 예능 스타’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 몇몇과 이런저런 대화를 좀 하고 나니 금방 지쳐 피곤해졌다. 역시 자기는 연예인 체질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유비는 언제쯤 파티장을 빠져나가야 눈에 안 띌까 사람들 눈치를 보았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가벼운 파티 자리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짙은색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 남자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옆에서 열정적으로 말을 늘어놓고 있는 사람을 보고 있었다. 자세만 놓고 보면 경청하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손에 든 술잔을 돌리는 모습이 그의 말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가 무심한 척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그리고 유비와 눈이 마주쳤다.
유비가 깜짝 놀랐다. 그 사람을 자기가 계속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을 이제야 알아채었다. 자연스레 시선을 돌릴 타이밍을 놓치고 유비는 속절없이 그를 마주보았다.
잘생겼다.
정면에서 얼굴을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저거였다.
그야 저 사람도 방송 출연을 할 테니 잘생긴 건 이상하지 않지만 그는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유비는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다른 누구를 만났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벅찬 감정이 가슴을 채웠다.
‘저 사람이야.’
유비가 깨달았다.
‘저 사람이 제갈량이야.’
유비와 눈을 마주친 채 그가 술잔을 천천히 기울여 호박색 액체를 입술로 넘겼다. 그리곤 다시 일행에게 고개를 돌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와 계속 대화했다.
유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방금 그게 유혹이 아니라면 세상 무엇이 유혹인지 유비는 알 수가 없었다. 가서 말을 걸어야겠다. 결심하고 유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갈량도 자기를 따라 환생했다면 분명 그를 만나고 싶어 할 것이다.
유비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그 사람도 일어나 유비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유비에게 곧장 오지는 않고 파티장 한쪽에 있는 바에 가서 앉았다. 유비는 잠깐 망설였지만 그도 그리로 갔다. 둘은 서로 눈을 마주쳤을 뿐 통성명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비록 유비는 이미 그가 제갈량이라 확신하고 있었지만 제갈량 역시 그러리란 법은 없었다. 우선 대화라도 하면서 그가 유비가 맞는지 확인해보고 싶을 수도 있었다.
유비가 바에 가서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제 뭐라고 말을 걸지?’
대뜸 ‘제갈량 맞지? 나 유비야!’라고 했다가는 이 사람이 제갈량이 맞아도 유비를 바보 취급하며 화를 낼 것이다.
바텐더가 그의 앞에 와서 쳐다보자 유비는 허둥지둥 술을 주문했다.
“그, 그랑 마니에르 주세요.”
제과에 자주 쓰는 오렌지 술을 주문해버리고 유비는 자기가 일식이 아니라 제과제빵을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마터면 바에서 미림을 주문하는 인간이 될 뻔 했다.
“스트레이트로요?”
‘네.“
옆 사람이 유비를 흘끔 보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비가 그에게 활짝 웃어보였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상대도 그럭저럭 인사를 받아주었다. 유비는 용기를 내었다.
“우리, 예전에 만난 적 있지 않아요?”
상대방은 잠시 유비를 뜯어보았다.
“만난 적 없는데요.”
간결한 대답에 유비는 잠시 당황했다.
“없어요? 아주, 아주 옛날이라던가....”
“어쩌다보니, 바보도 알아들을 수 있게 가르치는 선생이란 평을 듣고 있기는 하지만 그게 제가 바보를 좋아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너무나 대놓고 바보 취급을 당하자 이 사람이 제갈량의 환생이 맞을 거란 추측은 확신이 되었다. 그러나 유비가 확신하는 것과는 별개로 제갈량은 유비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째서지? 나는 제갈량을 알아볼 수 있는 왜...’
“어, 저, 혹시 전생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 하세요?”
그 사람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유비를 바라보았다.
“완전한 헛소리지요. 세상에 우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당할 수 없는 약한 마음이 만들어 낸 그럴듯해 보이는 환상이요. 만약에 정말로 사람이 환생한다 해도 저는 제가 알지도 기억하지도 못하는 그 ‘전생’은 내가 아닌 남이라 취급할 겁니다.”
유비는 입을 딱 벌렸다.
차였다. 제갈량에게 이보다 더 확실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뭐라 할 수 있는 말도 없어 유비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바로 고개를 돌려 술잔만 내려다보았다.
유비는 문득 제갈량이 인간으로 환생했다고 해도 꼭 그와 다시 만나기 위해서 그런 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는 다연히 둘이 다시 만나 전생에 못다한 인연을 이어가기 위해서라고만 생각했으나 제갈량 입장에선 옥새의 신선이 되어 몇 십 년을 죽어라 일만 했으니 인간이 되어 삶을 즐겨보자는 생각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저기, 그걸로 끝입니까?”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걸어서 유비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쳐다봐 놓고는 쫓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전생의 인연?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그런 멘트로 꼬셔지는 사람은 없다고요.”
유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내용은 타박이었지만 이 사람이 자기와 대화를 이어갈 생각이 있는 것 만으로 유비는 기뻤다.
눈가가 촉촉해진 주제에 표정은 환한 유비를 보고 그 사람이 피식 웃었다.
“당신이 제대로 된 멘트를 생각해내길 기다리느니 내 식으로 하는 게 낫겠군요. 제 이름은 제갈량입니다. 당신은요?”
제갈량. 그 이름을 듣자 감격의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맞게 찾았다. 전생하고 이름이 꼭 같다니 이상하긴 하지만 유비 자신도 전생과 본명이 같았다. 역시 두 사람의 환생은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제 이름에 제가 모르는 뭔가 특이한 의미라도 있는 겁니까, 아니면 당신은 자기 이름도 말할 줄 모르는...”
“나, 난 유진... 아니고 유비라고 해...요.”
지금 당장 아는 척을 할 수는 없었다. 제갈량은 전생의 기억이 없거나 아니면 유비를 시험해보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서 유비는 교양 있는 현대인이 낮선 사람을 대하는 예절을 지키면서 제갈량이 좀 더 다가오고 싶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려면 자기소개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혹시 도전 맛집 비결 보세요? 제가...”
“TV 프로인가요?”
“네, 요리하는 예능이에요.”
역시 안볼 줄 알았다. 유비는 기운을 잃지 않으려고 말을 계속했다.
“화제의 맛집에서 메뉴를....”
“예능은 안봅니다.”
아예 집에 TV가 없을 것 같은 어조로 제갈량이 말했다.
“대체 어떤 점이 재미있게 느껴지는 건지 궁금해서 예전엔 몇 번 봤는데, 여러 가지를 봐도 여전히 별로 재미있지 않더군요.”
“....네.”
유비가 식은땀을 흘렸다.
“그럼 주로 어떤 프로를 보세요?”
“흥미 가는 주제의 다큐멘터리나 방송 강의요.”
제갈량이 아까 자신을 선생이라 칭했던 게 생각났다.
“저, 제갈량..씨는 아까 선생님이라고 하셨죠. 어떤 과목을 가르치세요?”
“역사요.”
“에.”
수학이나 과학 같은 차갑고 논리적인 과목일 거라 생각했던 유비는 좀 놀랐다.
“고루하고 재미없는 과목이라 놀라셨나요?”
제갈량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 그런 게 아니라... 제갈량, 씨는 이과 같아서 그만.”
“유비씨는 문과인 모양이군요.”
“네?”
“막상 이과인 사람들은 절 천생 문과로 생각하더군요. 제 얼굴엔 보는 사람과 반대 성향으로 보이는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애가 탔다. 생각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 그래도, 똑똑한 사람이 봐도 제갈량씨가 바보로 보이지는 않을 거잖아요!”
유비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제갈량이 허를 찔린 표정으로 유비를 쳐다보다 풋하고 웃어버렸다. 유비도 생글생글 웃었다. 좀 바보취급 당한 것 같기도 하지만 이미 잔뜩 당한 바보취급에 하나가 얹힌 것보다 제갈량을 웃게 한 게 더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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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in the corner I could see this other guy
He was kinda flirty, he was giving me the eye
So I took advantage of the fact that I'm a star
Shook my hair and took a casual stroll up to the bar
And as sure as hell this guy was coming up to me
He said, "Who am I and who are you and who are we?
What's our situation, do we have some time for us?"
I said I was not exactly waiting for the bus
He said, "If you're going somewhere can I come along?"
I said, "Keep on rocking baby, 'til the night is gone"

아바의 "On And On And On" 중 일부.
들으며 전생을 기억하는 유비의 망한 플러팅으로 꼭 써보고 싶었답니다.


부채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Characters: 유비. 제갈량.
Rating: G
Warnings: 없음
Summary: 유비가 제갈량의 부채를 가지고 장난치다 걸림.

리퀘박스로 들어온 소재로 썼습니다.



“제갈량.... 어?”
장부 정리를 하다 잠시 물어볼 것이 있어 제갈량을 찾아 나온 유비는 식탁 위에 나란히 놓인 선계 아이패드와 신선 부채를 보고 놀라 그 자리에 멈춰섰다.
아까까지 여기 있던 제갈량이 없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신선도 발이 달려있고 가고 싶은 곳을 돌아다닐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것들을 놓고 가다니 뜻밖이었다. 이걸 놓고 다니는 게 가능한 일인지도 여태 몰랐다.
‘어디선가 그냥 나타나는 건줄 알았는데.’
유비가 살며시 다가가서 제갈량의 물건들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패드는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아서 그가 부채에 가만히 손을 대었다.
전류가 흐르고 있어서 화상을 입거나 하지는 않았다. 유비가 용기를 내어 부채를 집어들었다.
금속 재질처럼 보이고 두꺼워서 무겁지 않을까 했는데 보기보단 가벼웠다. 하긴 제갈량이 손에서 빙그르 돌릴 정도니까 다루기 쉬운 게 맞을 것이다.
유비가 장난삼아 신선의 손동작을 따라해보았다. 손 안에서 빙그르 돌려서는 앞으로 척 겨누었다. 부채를 가슴 앞에 대고 슥 몸을 숙여 공격을 피하는 시늉도 해 보았다. 신선 마법 흉내도 빠질 수 없었다. 손동작이 기억이 안 나 그냥 부채를 아래에서 위로 슥 들었다가 자기가 빙벽에 부딪혀 납작해졌던 기억을 떠올리고 좀 떨기도 했다.
“이거, 내가 해선 마법 안 나오겠지.”
유비가 부채를 앞뒤로 돌려보았다. 제갈량이 들고 있을 땐 신비로워보였는데 자기가 들고 있으니 좀 많이 정교한 플라스틱 장난감처럼 보였다.
‘자기 거 갖고 놀고 있다고 화내려나. 장난감이 아니라고.’
잔소리하는 제갈량을 떠올리고 유비가 부채를 든 채 팔짱을 끼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상대를 깔보는 표정을 흉내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이건 장난감이 아닙니다. 드림배틀은 장난이 아니고요. 정말 생각이 있기는 한 겁니까?”
입술까지 슬쩍 비죽이며 그가 흥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제갈량과 눈이 마주쳤다.
“.............”
“.............”
“어..........”
“방금 주군께서 스스로 혼내셨으니, 저까지 같은 말을 되풀이 할 필요는 없겠네요.”
제갈량이 유비를 쳐다보았다.
“아주 잘하시던데요. 거울을 보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저와 똑같다니 주군께서 신선 노릇까지 같이 하셔도 되겠어요. 그럼 이제 필요가 없어진 저는 어찌하면 좋을까요.”
“아, 아니 제갈량 난 그냥....”
유비가 재빨리 부채를 식탁 위에 도로 올려놓았다.
“그냥 잠깐 장난을..... 잘못했어.”
변명을 포기하고 유비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마법 쓸 때 제갈량이 너무 멋있어 보여서, 한 번 따라 해보고 싶었어.”
막 더 잔소리를 하려다 제갈량이 입을 다물었다. 그가 유비에게 다가왔다.
“진심이십니까?”
“응? 응, 그야 당연하지! 제갈량 동작 정말 멋진걸. 부채 이러고 돌리거나 마법 쓸 때 손 이렇게 이렇게 내미는 거나.”
신나서 다시 따라하다 제갈량의 눈빛을 보고 유비가 다시 움츠러들었다.
“저기....”
“뭐, 부숴뜨린 것도 아니고 별로 화를 내야 할 정도로 문제를 일으킨 건 아니네요.”
제갈량이 아이패드를 보았다.
“이 쪽은 안 건드리셨죠?”
“으, 응. 그건 안 건드렸어.”
“그럼 됐습니다.”
제갈량이 자기 물건을 챙겨들었다.
“자, 어서 오후 수련이나 마저 하세요.”
“아 나 장부 정리하던 중...”
“그럼 그걸 마저 하시면 되겠네요.”
제갈량이 유비를 자기 방으로 쫓아보냈다.
유비가 사라지자 그가 부채 손잡이를 쥐고 슬며시 웃음을 흘렸다.
“정말 귀여우시다니까, 우리 주군은.”


피싱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Characters: 조조. 유비. 제갈량.
Rating: G
Warnings: 없음.
Summary: 피싱 전화를 받은 유비가 울며 조조를 찾아가다.

리퀘박스로 들어온 소재입니다.



“조조-!”
유비가 달려들었을 때, 조조는 한창 조깅 중이었다.
“또 뭐냐.”
상대해 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조조는 달리던 걸 멈추었다.
“말했지만 우리... 너 우냐?”
조조는 깜짝 놀랐다. 유비는 누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펑펑 울고 있었다.
“조조..... 나......”
우느라 제대로 말을 못하는 유비 대신 그나마 말은 통하는 그의 신선과 대화하려고 조조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유비 한 명 뿐이었다.
“제갈량은?”
그래도 말은 하려고 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고 있던 유비의 눈물이 다시 터져나왔다. 주저앉아 꺼이꺼이 울어버릴 기세인 유비를 잡고 조조는 이걸 어쩌나 고민했다.


“좀 마셔라.”
“흑, 고마워, 흐흐흑, 조조. 흐엉.”
“고마우면 좀 그만 울어.”
계속 울어대는 사람과 길가에 서서 이야기 할 수는 없으므로 조조는 유비를 끌고 근처 커피 전문점으로 들어갔다. 유비에게 시럽을 듬뿍 넣은 커피잔을 들려주고 휴대용 티슈까지 사다 준 뒤 마주앉아있자니 내가 이 놈 보모도 아니고... 싶은 진한 회의감이 들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알아야 돕든 말든 할 거 아니냐. 너의 신선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거냐?”
“그, 제갈량이, 납치당했대.”
유비가 코를 풀고 말했다.
“납치범들이, 돈을 안 주면 제갈량을 어디다 팔아버리겠다고...”
듣는 조조의 표정이 요상하게 변했으나 유비는 눈치채지 못했다.
“당장 이천만원을 입금하라는데 나 돈도 없고.... 저, 조조, 혹시 돈 있으면 좀 빌려주지 않을래? 내가 도원관을 팔아서라도 갚을.”
“유비.”
조조가 머리를 짚고 탁자에 팔꿈치를 괴었다.
“너말이다.... 피싱 사기라고 혹시 들어본 적 있냐?”
“응?”
“제갈량이 납치당한 건 확실해? 뭘로 알아봤는데? 뭐 우는 소리 비명소리 같은 거 들려주든?”
“어, 응.”
유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조는 조금 머리가 아파졌다.
“네 생각에, 신선이 인간한테 납치당하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
“서서는 납치당한 적 있어.”
서서가 정말 신선이었을까. 실은 인간이고 유비의 잃어버린 쌍둥이 같은 건 아니었을까 조조는 잠시 쓸데없는 고민을 해보았다.
“그럼 제갈량이 인간에게 잡혔다고 울고불고 할 것 같냐?”
“아니... 하지만 그놈들이 막 때리거나 했으면.”
‘그 놈 배에 구멍 뚫었던 상대가 지금 네 눈앞에 있다만?’
그러고도 태연히 서서 세상 잘난 척을 다 해대고, 실제로 전투를 이겨버리기까지 한 놈이었다. 납치범 따위한테 어떻게 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납치가 아니잖아, 피싱인데!’
대체 피싱범이 뭐라고 했길래 유비가 이토록 속은 건지 그게 알 수가 없었다. 보통 네 딸이나 아들이 납치되었다고 하지 네 신선을 데리고 있다고 했을 리는 없는데, 뭘 듣고 이 바보 녀석은 자기 신선이 납치되었다고 확신한 걸까.
“진정하고 생각해봐. 그놈들이 뭐라고 했어? 네 신선을 납치했다고 말하진 않았을 것 아냐?”
“내 가장 소중한 가족을 납치했다고 했어.”
조조는 탁자에 고개를 박았다.
“너.... 그게....”
말로 해봐야 소용 없다. 그렇게 판단하고 조조는 자기라도 이성을 추스르려고 노력했다.
“제갈량한테 연락해서 확인하면 되잖아?”
“어떻게 연락하는데?”
유비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너랑 사마의는 혹시....”
“휴대폰.”
“잉.”
“가끔 따로 조사 보내고 하느라 사줬다. 그래도 선계에 가 있을 때는 연락 안 되더만. 주유도 갖고 있을 텐데, 너는 안 사준 거냐?”
“...나 돈 없어. 내 폰 유지하기도 빠듯한데...”
“아.”
“그래서 당장은 돈이 없다고, 대출 받아서라도 마련할테니까 제갈량 해치지 말고 데리고 있어달라고 사정하는데 전화를 끊어버렸어....”
유비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벌써 제갈량한테 해코지했으면 어쩌지.... 납치범 잡아야 하나? 그래야 구할 수 있을까?”
“애초에 납치범이 아니고 피싱범이라고.”
조조는 1+1=2를 가르치는 심정으로 천천히 확실하게 말했다.
“유비, 네가 받은 전화는 피싱 사기라고 해서 ‘실제론 아무도 납치하지 않고’ 단지 그런 것처럼 꾸며서 전화를 거는 사기꾼들의 소행이다. 너같이 어수룩한 놈들이 속아 넘어가 돈을 입금하면 들고 튀는 게 목적이고, 실제로 납치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장 돈을 마련할 수 없다는 네 말에 사기를 그만두고 전화를 끊은 거다. 납치했다고 사칭했던 사람과 연락만 되면 사기가 들통나니까. 그래서 보통 전화를 못 끊게 하지. 확인하지 못하게 하려고.”
조조는 자기도 모르게 앞의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가 너무 달아서 뿜을 뻔 했다.
“크, 흐음, 음. 다시 말해서, 제갈량은 위험하지 않고 그저 너랑 지금 연락이 안 되는 것 뿐이고 그러니 네가 해야 할 일은 집에 돌아가서 얌전히 네 신선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거다. 알겠나?”
“그치만....”
유비가 쭈뼛쭈뼛 말했다.
“만에 하나 정말 제갈량이 위험하면....”
“네 신선은 인간들한테 납치당하고 그럴 녀석이 아니래도? 사마의는 제갈량이 스스로 싸움은 못한다고 했지만 나 보기엔 그만하면...”
“싸움은 그래. 그냥 사람 한둘 쯤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거야.”
유비가 인정했다.
“하지만, 머리는 좋아도 제갈량은 인간계 물정에 어둡다고. 누가 좋은 말로 꼬드기거나 내가 불렀다고 거짓말을 했거나....”
“너 제갈량이 한 일곱 살 쯤 먹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누가 세상 물정에 어둡다는 겁니까?”
유비의 앞뒤에서 동시에 반론이 터져 나왔다. 유비가 벌떡 일어나 휙 뒤로 돌아섰다.
“제, 제갈량!”
표정을 환하게 밝히며 유비가 그에게 달려갔다.
“무사했구나! 걱정읍.”
달려드는 유비의 얼굴을 부채로 막고 제갈량이 조조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미숙한 주군이 조조님께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죄송한 줄 알긴 아냐고 해붙이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조조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자기와 사마의 앞에서 그렇게 멋대로 입을 놀려댄 놈이 무려 사과를 했다. 미안한 마음은 진심일 것이다.
“됐고 저놈이나 챙겨가라. ....유비야말로 나쁜 놈들이 꼬여가지 못하게 잘 교육시키고. 아, 보증 절대 못 서게 하고.”
“그러지요.”
“저, 제갈랴앙.....”
부채가 꽤나 딱딱한 재질인지 유비는 코를 감싸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저는 멀쩡합니다. 그러니 사기꾼들의 사특한 말에 더 영향 받지 마십시오.”
“으응, 알았어....”
“잠깐만.”
조조가 나가려는 둘을 불러 세웠다.
“제갈량 너는,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해서 생긴 일인지 알고 있는 거냐? 어떻게?”
“그야 조조님이 아까 친절하게 설명 해주셨으니 까요.”
조조는 기가 막혔다.
“내.... 아니 어디서부터 들은 건데?”
제갈량은 대답 대신 조조에게 슬며시 웃어보였다.
“다음번엔 배틀에서 뵙겠습니다.”
그리고 제갈량은 유비를 끌고 사라졌다. 혼자 남은 조조는 허탈함에 몸을 떨었다.
“보고 있었으면..... 진작에......”
역시 유비도 저 신선 놈도 무찔러야 할 적일 뿐이라고, 두 주먹을 부르쥐고 조조는 새삼 전의를 다졌다.


아컴 나이트메어 12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독립광장에 작은 오망성 토큰 -고대 표식- 이 놓였다.
“이렇게 다섯 군데만 더 놓으면 이기는 거지?”
유비가 벌써부터 뿌듯한 표정을 했다.
“그러자면 단서도 또 차원문 하나 당 다섯 개씩 더 모아야 하고, 다른 괴물들도 처리해야 합니다. 즉 아직 멀었다는 얘기지요.”
제갈량이 카르코사에서 얻은 책 아이템의 설명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이걸로 마법 주문이나 단서 두 개를 얻을 수 있으니, 단서 둘을 얻어야겠습니다. 마법 주문은 이미 충분히 있으니까요.”
“다행이다. 꺼내길 잘했네.”
유비가 어깨를 으쓱 했다. 주사위 운이긴 했지만 진짜로 제갈량 앞에서 힘자랑에 성공한 것 같았다.
제갈량은 꼿꼿해 보여도 몸이 약해 체육시간엔 번번이 빠졌다. 주유는 게을러서 저런다고 헐뜯지만 유비는 자기가 강해져서 지켜주고 싶은 기분이 되곤 했다. 자기라고 손책만큼 강인하거나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선배님이 힘은 확실히 세시죠.”
생각에 빠져 있다가 제대로 듣지 못했다. 유비가 고개를 들었다.
“응? 누가 세다고?”
“선배님이요.”
제갈량이 대답했다.
“체력 하나 그나마 봐줄 만한 게 선배님 아닙니까.”
칭찬으로 듣기엔 지나치게 욕에 가까운 소리라 유비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게다가 자신은 체육 성적도 별로 좋지 못했다.
“어째서 그나마 있는 장점도 못 깨닫는지는 제가 알 수 없지만 선배님은 힘도 세고 열심히 배우니까 체육 성적 정도는 잘 나와야 합니다. 아닙니까?”
제갈량은 농담을 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유비는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유비 정도면 그냥 보통인 거 아냐?”
손책이 갸웃거렸다.
“너한테 보통으로 느껴진다는 건 센 게 맞아.”
조조가 지적했다. 그 표정이 워낙 찌푸려져 있었기 때문에 유비는 자기 힘이 센 게 조조가 불만 가질 만한 일인가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자기가 조조에게 위협적인 라이벌쯤 된다면 모를까, 조조는 자신보다 잘난 점이 너무 많아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 사람이었다.
“유비 선배의 체육 성적은 다음 시간에 개선해보기로 하고.”
주유가 신화 카드를 집었다.
“게임 계속 하죠? 이제 니알라토텝이 또 차원문을 열 차례예요.”
신화 카드는 매 턴에 제일 먼저 여는 카드였다. 그 턴에 새로 차원문이 열릴 장소와 신화적 이변 등이 적혀있었다.
“아, 이번엔 독립광장이네요.”
“방금 봉인한 곳인데?”
유비가 아까 놓은 고대 표식을 보았다.
“그러니 이번 턴엔 차원문은 열리지 않아요. 봉인이 좋은 이유가 그거죠.”
주유가 카드를 뒤집어 카드 뭉치 맨 아래로 돌려놓았다.
“대신 기차역에 괴물이 출현해요. 새로운 단서는 숲에 나타나고요.”
이내 다들 게임에 집중했다. 제갈량은 책 카드를 써서 단서 둘을 얻는 데 성공했고 조조와 사마의도 각자 간 장소에서 무사히 탐색을 마쳤다.


그렇게 몇 턴이 더 지났다. 차원문은 몇 번 더 열리고 닫혔으나 봉인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 두 곳을 더 봉인해 이제 세 군데에 고대 표식이 놓였는데 승리를 위해서는 여섯 군데의 봉인이 필요하니 절반 정도 달성한 셈이었다.
제갈량의 ‘교수’는 크게 활약했다. 정신 타격을 적게 받는 덕택에 만나는 것만으로 정신력이 깎이는 괴물 상대로도 수월하게 승리했다. 가진 마법도 강력했다.
체력이 3 밖에 안 되는 것이 단점이고 이 게임에서 체력 3은 한 번 타격으로도 바닥날 수 있는 수준이라 유비는 계속 조마조마하게 지켜보았다. 그러나 주유의 치유석을 매 턴 사용한 덕에 제갈량뿐 아니라 누구도 체력을 다 잃지 않았다.
처음 해보는 게임이긴 해도 유비도 제갈량이 가르쳐주는 대로 하니까 규칙 때문에 헤매지도 않고, 실수연발하다 질 걱정도 없었다.
그러니 즐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제갈량이 자신을 시험하는 말을 던지고 있어도, 게임에 몰입할 때마다 마치 정말로 저 게임판 안의 세상에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이 되어도.
이제는 밖에서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뭣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지만 제갈량이 원하는 대로 이 게임을 끝까지 해서 이기고 나면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결의를 다지며 유비는 다음 신화 카드를 집어 펼쳤다.
각자 자기 탐사자의 카드를 뽑을 뿐 아니라 신화 카드처럼 판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카드도 뽑아야 하는데, 이들은 딜러를 따로 정해두지 않고 그때그때 손 닿는 사람이 카드를 집어 펼치는 식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유비가 카드에 손이 안 닿는 걸 보고 제갈량이 대신 카드를 집어 읽더니 유비에게 건네주었다.
“잘 되어간다 했더니 곤란한 카드가 나왔군요.”
“왜? 어떤 카드인데?”
‘좋은 일이 수포로 돌아가다’라는 제목 아래, 이제까지 나온 신화 카드들과 비교해도 유난히 깨알처럼 빽빽한 글씨가 적혀있었다. 이 게임에서 특이한 카드, 튀는 카드란 곧 특이한 재앙, 갑자기 튀는 난이도를 뜻했다. 유비도 긴장해서 카드의 내용을 읽어보았다.
“어, 이거, 큰일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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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인이 전부 풀려버린다고?”
조조도 이 소식엔 침착할 수 없었다. 그가 두 눈 부릅뜨고 노려보자 사마의가 면목없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습니다. 동부 거리의 은신처에서 의식을 행하리라는 것도 겨우 알아냈습니다.”
“또 칼 샌포드의 짓인가.”
실버 트와일라잇의 수장을 생각하고 조조는 이를 갈았다.
지금도 놈들 때문에 활성화 되어있는 차원문이 넷이나 되었다. 그냥 닫아봐야 놈들은 또 열면 그만인데 이걸 그냥 놔뒀다간 이제까지 해온 일들이 전부 수포로 돌아간다. 당분간은 차원문 닫는 것도 미뤄두고 이 의식부터 저지해야 했다.
그러자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
“동부 거리라고.”
여전히 일생에 도움 안 되는 조직인 경찰서가 그곳에 있지만 이번 일에라고 도움이 될 리 없었다. 갱스터들의 소굴이 ‘히브의 가로변 식당’이란 간판을 내걸고 역시 동부 거리에서 버젓이 영업을 하고 있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이건 다른 녀석들도 알아야 해.”
뜻밖에도 아컴에서 일어나는 일을 조사하는 사람들은 더 있었다. 썩 마음에 드는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이건 머릿수가 필요했다. 여러 명이 협력해서 알고 있는 단서들을 모아 보면 의식을 막을 방도가 생길 수도 있었다.
일단 미스캐토닉 대학에 있는 주유의 연구실과 제갈량의 연구실에 전화하기로 했다. 유비는 전화가 없고 손책도 기숙사에 사는 데다 방에 잘 붙어있지도 않았다.
제갈량은 연구실에 없었다. 돌아오면 연락해달라고 조교에게 부탁하고 과학관으로 다시 전화했다. 주유는 전화를 받았다.
“실버 트와일라잇이 그동안 아컴에 생긴 봉인들을 제거할 의식을 준비한다고 한다.”
-어떻게요?
“아직 구체적인 방도는 나도 모른다. 그래서 말인데, 동부 거리에 관련해 수상한 움직임이 있으면 뭐든 놓치지 말고 알려줘. 그 의식을 동부 거리의 은신처에서 벌인다고 하니까.”
-알겠어요.
주유의 목소리에서 긴장이 배어나왔다.
-손책에게도 전해줄게요.
“혹시 유비나 제갈량 보면 그들에게도 전해줘. 연구실에 전화해 봤는데 조교가 받더군.”
-예. 제갈량은 마녀의 집에 새로 열린 차원문을 조사하러 갔으니 이미 거기 들어갔을 거예요. 조조님도 조심하세요.
전화를 끊고 조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차원문에 들어가 다른 세계를 탐험중이라면 제갈량은 지금 사태에 바로 대응할 수 없다. 그가 가진 단서들도 다 차원문 봉인을 위한 자료들일 것이다.
“전 독립광장으로 가보겠습니다.”
고민에 빠져 있는 조조에게 사마의가 말했다.
“이미 봉인된 장소를 공격하는 일이니 놈들이 직접 가서 봉인에 손상을 입히려 시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라.”
“조조님은 어찌하시겠습니까?”
“히브의 가로변 식당에 가볼 생각이다.”
조조가 코트를 걸쳤다.
“불법적인 일의 정보는 그런 곳에서 얻기가 더 쉬우니까. 평소보다 늦게 올 테니 기다릴 필요 없다.”
“예.”
조조는 여전히 사마의의 집에 묵고 있었다. 남의 집에서 오래 묵고 있는데 사마의가 세심하게 신경써주고 있어서 거의 불편한 점을 못 느낄 정도였다.
그렇다고 조조가 여기를 자기 집처럼 느끼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도리어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었다.
사마의의 집을 나온 조조는 말한 것과는 달리 프랑스 언덕으로 향했다. 실버 트와일라잇으로.
사마의가 눈에 띄게 수상한 짓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비나 손책처럼 단순하고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인물인 것도 아니고 주유나 제갈량처럼 안 친한 사이다운 선을 긋는 것도 아닌 그 이유없는 친절과 협조가 도리어 그를 믿을 수 없게 했다.
그동안 실버 트와일라잇을 직접 조사하는 일은 사마의에게 맡겨두겠다고 했었다. 회원인 그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고, 꼬박꼬박 새 차원문의 단서나 새로운 주문을 얻어오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것도 다시 생각하니 좀 이상했다. 어떻게 매번 허탕치는 법이 없을 수가 있나?
자신은 자주 허탕을 쳤다. 은행에서도 외딴 숲에서도, 공연히 시간만 낭비한 적도 있고 말썽에 휘말려 다치거나 사기를 당한 적도 있었다.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고 유비나 손책, 주유도 당연히 그랬다. 제갈량은 겉으로는 안 그랬던 척 하지만 본인 말일 뿐이었다.
‘역시 사마의는 뭔가 숨기고 있어. 애초 실버 트와일라잇 회원이니 너무 믿어선 안 돼.’
실버 트와일라잇은 처음 왔을 때와 거의 달라진 점이 없어보였다. 그동안 몇 번이고 열렸다 닫힌 차원문, 더 많이 소환된 괴물이 이곳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처럼.
조조는 비회원 공간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신문이나 잡지도 뒤졌다. 실버 트와일라잇에서 정기적으로 발행하는 소식지가 있어서 그것도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사람들 눈을 피해 2층으로 올라갔다.
회원 공간에 들어갔던 것은 사마의의 안내로 딱 한 번뿐이었다. 그러나 이후 조사를 계속하는 동안 그도 어느 정도 감각이 생겼다.
회원 공간으로 통하는 문은 다른 문들과 똑같이 생겼지만 자세히 보면 손잡이가 보통의 청동으로 만들어져 있지 않았다. 인스머스 산의 특별한 금속으로, 오래되어 푸르스름해진 보통 청동과의 차이를 말로 설명하라고 하면 조조도 불가능했다. 그저 보면 느낌이 온다고밖에는.
스스로도 그게 불만이지만 그렇게 해서 맞는 문을 찾아내 열었다. 언제 들어와도 불길할 정도로 환하게 빛나는 회원 공간에 들어섰다.
지난번 왔을 때 이곳의 서재도 보통의 도서관처럼 도서 대출카드를 작성한다는 걸 알아두었다. 최근에 누가 어떤 책을 대출했는지 조사하면 의식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재에 들어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대출 카드를 살펴보았다.
현실을 노리는 기괴한 존재는 하나가 아니었다. 그 중 어떤 존재의 힘을 빌려 의식을 치르려는 것인지 책을 보면 가늠할 수 있었다.
‘외우주의 신......차원의 너머에서 인간들을 지켜보는 자.....인간들을 현혹하고, 다른 어떤 이세계의 신들보다도 인간의 욕망들을 이해하는 자......인간과의 접촉이 누구보다도 깊었던......’
서재 문이 열렸다. 조조는 카운터 뒤로 피하려 했으나 들어온 인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재빠르게 조조의 앞을 막아섰다. 게다가 한 명이 아니었다.
조조를 둥그렇게 둘러싼 인물들은 전부 열 명이었다. 전부 쓰러뜨리지 못하면 빠져나갈 수 없다 해도 겁먹을 만한 숫자는 아니었다. 조조는 위축된 기색 없이 정면의 인물을 쏘아보았다. 칼 샌포드를.
“오해하지 마시오. 해치러 온 것이 아니오.”
칼 샌포드가 기분나쁘게 미소지었다.
“다만 당신이 우리 조직에 각별히 관심이 많은 듯하여, 특별한 기회를 주려는 것뿐이오.”
“기회?”
조조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물었다.
“그대는 우리를 오해하고 있소.”
칼 샌포드가 부드럽게 설명했다.
“그대가 세상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소. 아주 용감하고 고결한 일이지. 그러나 그대와 그대의 친구들은 한 가지 큰 착각을 하고 있소.”
“착각이라고?”
기계적으로 되물었지만 조조는 샌포드의 다음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지금 계속 차원문을 열고 현실을 찢으며 세상을 위협하는 건 우리 실버 트와일라잇이 아니오. 우리 역시 현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소.”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지?”
예상 그대로의 답을 듣고 조조가 대꾸했다.
“나와 다른 조사자들은 차원문을 닫고 괴물을 무찔렀다. 그동안 너희가 한 일은 경관들을 매수하고 신문기사를 조작한 것뿐이지 않았나?”
“아컴 시의 대중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소.”
샌포드 역시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현실을 위협하는 괴물들이 시내를 활보한다는 소식이 널리 퍼지면 도시가 어떻게 될 것 같소?”
그건 조조 생각에도 곤란한 일이 맞았다. 대꾸하지 못하고 조용해진 동안 샌포드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도 말 몇 마디로 진의를 증명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오. 그러니 직접 보고 판단할 기회를 주겠소. 실버 트와일라잇의 회원이 되어, 우리가 하는 일을 직접 보고 판단하면 어떻겠소?”
“나더러 여기 회원이 되라고?”
샌포드도, 여전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도 농담을 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러는 당신들은 나를 믿을 수 있나? 내가 계속 당신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방해하려 들면 어쩌려고?”
“그대가 그보다는 이성이 있는 인물이라고 믿기에 이런 제안도 하는 거요.”
샌포드가 푸른 색 카드를 내밀었다.
“피로 적은 계약서 같은 것은 필요 없소. 그저 이걸 가지고 돌아가서, 다음번 올 때는 회원 공간에 좀도둑처럼 숨어들어올 필요 없게 되는 것뿐이오.”
조조는 그 카드를 내려다보고 다시 샌포드를 보았다. 말투는 여전히 부드럽지만 그래서 거절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은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회비는 처음 가입시 3달러라오.”
분위기를 풀려는 의도보다는 조조의 페이스를 흐트러뜨리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직전까지는 거절할 경우 이들이 전부 공격해올 것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지금 거절하면 3달러가 없어서 거절하는 게 될 판이었다.
조조는 지갑을 꺼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거야. 돈이 없는 걸로 보이기 싫어서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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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인 제거는 아컴 호러에 실제로 존재하는 이벤트입니다. 다음 신화 카드를 뽑으면 발생합니다.

신화 카드 : 좋은 일이 실패하다
이 카드가 펼쳐지면 이 카드 위에 단서 마커 6개를 올려놓습니다. 플레이어들은 아컴에서의 조우 단계 중에 동부의 거리에서 단서 마커 1개를 버리고 이 위에 있는 단서 마커 1개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지속 효과 : 신화 단계가 끝날 때마다 주사위 2개를 굴립니다. 1이나 2가 나온 주사위 1개당 단서 마커 1개를 이 카드 위에 올려놓습니다.
성공: 이 카드 위에 단서 마커가 없으면 이 카드를 상자로 되돌립니다. 모든 플레이어는 특별 아이템 카드 1장씩을 받습니다.
실패: 이 카드 위에 단서 마커가 10개째 놓이면 이 카드를 상자로 되돌립니다. 게임 판에 있는 모든 고대 표식을 제거합니다.


세계의 중심 55 ㅣ- 회색도시&검은방



세미나가 끝나고 세미나실을 정리하고 나자 허강민 류태현 하무열 세 사람만 남았다.
“갑자기 폭음탄을 나눠주는 걸로 말해버리다뇨.”
허강민이 하무열을 노려보았다.
“어차피 개량하고 있는 중 아니었어? 그리고 덕분에 세미나실 얻어 쓰는 건데 방세라고 생각해.”
“그렇다 해도 미리 말해줄 수는 있었잖아요. 언제까지 만들지 기한도 있어야 하고.”
허강민이 투덜거리며 세미나실 문을 잠갔다.
“같이 저녁 먹으러 가요. 밖으로.”
류태현이 냉큼 그의 팔짱을 꼈다.
“너 이러면 내가 기분 풀릴 것 같아서 이러는 거냐?”
류태현이 흠칫했다.
“아, 아뇨, 그런 건 아닌데.”
허강민이 류태현의 팔을 잡아당겨 자기 쪽으로 몸을 붙였다.
“뭐 어때. 저녁 먹자.”
류태현의 표정이 환해졌다. 이번엔 하무열이 허강민을 째려보았다.
“애인이 그렇게 좋냐?”
“네.”
“어쭈? 저놈 좀 보게. 불과 석 달 전만 해도.”
“교수님이 그렇게 물어보시는데 그럼 달리 어떤 대답을 하겠어요?”
“나 때문이냐?”
“아뇨. 애인하고 팔짱 껴서 좋은 건 당연한 일이죠.”
“말은.”
그러면서 세 사람은 법학관을 나왔다.
“저녁은 뭐 먹을 거냐?”
하무열이 물었다.
“매콤한 소스를 곁들인 쌀요리를 먹을까 하는데.... 왜요?”
류태현이 되물었다.
“왜긴, 나이가 드니까 너무 기름진 음식은 건강에 해로워서 말이다.”
“....류태현, 나 돼지 통구이가 먹고 싶어졌어.”
“그, 그런 요리 학교 앞에서 팔아요?”
“정말 돼지 한 마리를 먹고 싶다는 게 아니라 나 떼놓고 둘만 먹고 싶다는 뜻이잖냐. 알아 들어라, 류태현.”
“그러는 교수님은 알아들으셨으면서 왜 계속 따라오시나요?”
“그야 류태현에게 저녁 대접을 받을 약속이 있기 때문이지.”
“언제.... 아.”
류태현이 기억해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험도 끝났고 채점도 다 했고 이제 겨우 제자가 약속한 소박한 저녁 한 끼를 같이 먹어도 거리낄 것 없는 때가 되었는데.”
“무슨 청탁을 받은 건가요.”
허강민이 물었다.
“안 받았다니까?”
“쌀요리에 구운 닭 정도면 교수님 건강에도 품위에도 문제 없겠죠?”
류태현이 조금 지친 기색으로 말했다.
“웬일로 류태현이 눈치있는 소리를 하는군.”
하무열이 그의 어깨에 팔을 척 걸쳤다.
“제 애인 괴롭히지 마세요.”
허강민이 말했다.
“괴롭히다니, 교수가 학생을 칭찬하고 있는데.”
“그게 칭찬인가요?”
류태현이 하무열에게서 빠져나오려고 몸을 틀었다.
“질투하긴.”
그러다 하무열이 류태현을 놔주고 옆 잡화점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어리둥절해서 류태현도 허강민도 멈춰서서 기다렸다.
금방 가게에서 나온 하무열이 허강민에게 동그랗고 납작한 주석캔을 하나 건넸다.
“이게 뭡니까?”
물으며 보니 뚜껑에 써 있었다.
[레몬 사탕]
“기억 안 나냐? 밀실에서 우리 만났을 때, 안 울고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사탕 사준다고...”
“누가 울어요 그런데서!”
허강민이 항의했다.
“너나 배준혁 같은 녀석 말곤 다들 울걸.”
“저도 안 울었습니다!”
“그 녀석이랑 동급 취급은 좀 너무하잖아요?”
류태현과 허강민이 동시에 항의했다. 하무열이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그래, 안 울었으니 그 사탕 나눠먹어라.”
“누가 길거리에서 소리 꿱꿱 지르나 했더니.”
길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허강민 류태현이 고개를 돌렸다.
“....김재하 교수님.”
허강민이 매우 마뜩찮은 표정으로 고개만 꾸벅 숙였다.
“오냐. 이런데서 뭐 하는 거냐. 장사 방해?”
“그런 거 안 했으니 얼른 들어가시게.”
하무열이 과장된 태도로 가게 문을 손짓했다. 김재하는 가게에 들어가는 대신 어쩐지 하무열 뒤로 한발씩 물러선 허강민과 류태현을 훑어보았다.
“허강민 하나론 부족해서 하나 더 달고 다니기로 했나보지? 나이 생각 않고 체력 낭비하다 확 골로 가는 수가 있어.”
“네? 교수님 체력이 왜...”
“전 류태현이랑 사귑니다. 그리고 교수님이라 해도 그런 무례한 소리를 대놓고 하면 안 됩니다.”
못 알아듣는 류태현의 발을 지그시 밟으며 그의 몫까지 허강민이 화냈다.
“당장 그 말 취소하지 않으면....”
“아, 놔둬라 놔둬.”
하무열이 손을 저었다.
“생전 존경이란 걸 못 받아봐서 그거 어떤 건지, 권력 남용하고 뭐가 다른지, 귀여운 제자들이 절로 따르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몰라서 그러지. 불쌍한 사람한테 너무 뭐라 하지 마라.”
모욕은 더한 모욕으로 되갚아주는 하무열의 말에 허강민도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뭐, ‘존경하는’ 하무열 교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김재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존경? 하! 애들을 뭐라고 꼬셔내서...”
“꼬셔낸 게 아닙니다, 가끔 너무 짓궂긴 해도 하무열 교수님은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맞고요.”
류태현이 말했다.
“전 허강민씨를 사랑합니다. 정말 하무열 교수님이 강민씨에게 음흉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제일 먼저 제가 교수님을 때려눕힐 테니 김재하 교수님은 신경쓰지 말고 갈길 가세요.”
이것만으로는 자기가 느낀 불쾌감이 제대로 전달이 안 되는 것 같아 류태현이 잠시 더 말을 골랐다.
“하무열 교수님한테 그만 찝적대시고요.”
김재하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너..... 감히 학생이.....”
“학생 교수간 부적절한 대화를 처음 시작한건 교수님인데요.”
허강민이 류태현을 감쌌다.
“너희들... 학기 시작하면 두고 보자.”
김재하가 도망치듯 물러갔다. 하무열이 휘파람을 불었다.
“순한 놈이 열받으면 무섭다더니.”
“다시봤어, 류태현.”
허강민이 그의 어깨에 기대 쿡쿡 웃었다.
“나도 우리도 아니고 하무열 교수님한테 찝쩍대지 말라니.... 얼마나 열받았을까........”
“어이 그렇게 말하면 내가 찝쩍댈 만한 매력이 없는 것처럼 들리잖냐.”
“찝쩍당하고 싶었어요? 김재하한테?”
“그건 절대 아니지.”
“그럼 좋은 거잖아요.”
“어허, 매력이 없어서 찝쩍 안 당하는 게 아니라 매력이 있어서 찝쩍거리는 짜식을 힘껏 걷어차 버리는 편이 더 재밌지 않겠냐.”
“그런가요. 전 그런 쓸데없는 추가 노동은 안 하는 주의라.”
“그리고 허강민씨는 제게 매력있으니까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매력 없어도 괜찮아요.”
류태현이 끼어들었다.
“없어도 괜찮긴, 제발 없었으면 좋겠다 겠지.”
하무열이 웃었다.
“아무튼 김재하놈이 망신을 당하니 속은 시원하군. 근데 류태현 너 2학기에 수업은 어쩔 거냐. 아니, 이미 허강민 꼬셨으니 자연과학부 수업 같은 거 안 들어버리면 간단하겠구나.”
“강민씨 꼬시려는 목적으로만 들었던 건 아닙니다. 마법 전공의 추천 교양이기도 했고... 전공 아니니까 안 들어도 되는 건 맞지만, 가능하면 허강민씨 듣는 건 다 듣고 싶은데....”
“무슨 헛소리를.”
허강민이 잘랐다.
“마법 전공이 얼마나 할 게 많은데. 남의 전공수업까지 따라다닐 생각 따위 하지도 마라.”
“허강민 꼬시려는 목적으로 들었던 건 인정하냐?”
하무열이 놀렸다.
“이제와서 뭘 새삼요. 그런데 꼬시려던 게 아니라 친해지려던 거였어요.”
“그게 그거지 뭐.”
“다릅니다.”
“결과적으로는....”
“저와 허강민씨가 서로에게 호감을 느껴서 교제하기로 했지요. 꼬신게 아니라.”
“됐으니까 꼬신다는 말 좀 그만해.”
허강민이 류태현의 입을 막았다.
“나는 다음 학기에 자연과학부 수업을 안 듣고, 너도 그렇고, 아무도 누굴 꼬시지 않고. 어때?”
“아예 자연과학부 강의에 안 나간다고요? 교수가 김재하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류태현이 물었다.
“그래. 게다가 이번에 한 명 늘어나는 모양이야.”
하무열이 말했다.
“급하게 오는 거라 어떤 사람인지 아직 알려진 건 없다. 박근태 교수님 추천이고 거 뭐시냐.... 생물, 쪽이라는 것 같던데.”
“저랑은 좀 다른 것 같네요. 그래도 새 교수님이라...”
허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둬서 나쁠 건 없겠죠. 정말로 자연과학과 이대로 안녕할 생각인 건 아니고... 그래도 다음 학기엔 법학 위주로 들을 거에요.”
“웬일이냐, 네가? 돌아온 탕아가 되기로 마음먹었어?”
“그렇다기보단.... 몸을 사리려는 거죠.”
허강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은 호신용구나 만드는 것 외에 제대로 연구를 할 여건도 안 되고. 원래부터 수업보다는 제 이론 따라 독자적으로 연구하고 실험하고 있었으니까 이제 와서 수업 안 듣는다고 해서 그렇게 큰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오냐, 이 교수님이 넓은 가슴으로 널 보호해주마.”
하무열이 팔을 벌렸다. 류태현이 폭 가서 안겼다.
“....풋.”
한 박자 늦게 허강민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고 류태현 오늘 뜻밖의 모습 제대로 보여주는데!”
“사랑에 좀 빠졌기로서니 이 녀석이 눈치있는 행동을 다 할 수 있게 되다니.”
하무열이 류태현을 떼어내었다.
“난 사랑 같은 거 빠지면 안 되겠어. 나처럼 이미 완벽하게 두루두루 뛰어난 사람이 사랑에 빠져서 파워업하면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 거 걱정하실 필요 없을 만큼은 충분히 단점이 많으실 거라 확신합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허강민은 웃으며 하무열을 잡아끌었다.
“자, 이제 류태현이 사는 맛있는 저녁을 먹으러 갈까요?”


세미나는 뜻밖에 잘 굴러갔다.
기본적인 체술, 각종 로프 다루는 법, 매듭법, 묶인 채 밧줄 풀기, 악당들 상대로 상황 파악하기, 마법 걸린 도구나 표지자를 파악하고 구분하는 방법 등 하무열은 자기 생각에 필요한 기술을 마구잡이로 학생들 머리에 우겨넣었고 실습도 자주 시켰다. 하무열 말대로 모두 재주 좋고 창의력 있는 학생들이라 다들 그리 어렵지 않게 배우고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나갔다.
가끔은 교수들도 참관을 왔다. 주로 자식들이 여기 나오고 있는 사람들이. 2학기 시작이 가까워 오자 학교로 복귀한 학생들 중에서도 세미나에 참여하는 이들이 생겼다. 학생은 아니지만 세미나에 참석하는 인원도 대폭 늘어났다.
“아이고 허리야......”
세미나가 끝나고, 매트를 치우며 미정이 허리를 두드렸다.
“미안해요. 역시 아까 너무 세게 던졌나요?”
양수연이 거들며 사과했다.
“아니에요, 실전 같이 훈련해야 실제에서 써먹을 수 있는 거지. 양수연씨는 동작이 확실하니까 배우기 쉬워서 좋은걸요.”
방학 동안 있었던 이런 저런 일들을 기사로 쓰려고 세미나에 기웃거리다 그대로 잡혀버린 것 답지 않게 오미정도 서재호도 참여에 열심이었다. 인원이 늘어나 한 사람 한 사람 봐주기 어렵게 되자 하무열은 양수연을 조수로 임명했다.


내게 사실을 말해봐 15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책상에 엎드려 잠든 공손찬을 침대에 눕혀 이불 잘 덮어주고 방을 나온 유비는 부엌으로 가다가 들어오는 조운을 보았다.
“아.”
조운이 막 환한 얼굴로 뭔가 말하려고 하는 걸 유비가 가로막았다.
“말 안 해도 돼. 공손찬한테 들었어.”
마구 자랑을 하고 싶은데 말이 막혀서 조운은 조금 풀이 죽었다. 그러나 금방 기운을 차렸다.
“주말에 같이 놀이공원 데이트 하기로 했어요!”
그가 헤죽헤죽 웃으며 자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같이 동물 머리띠 쓰고 솜사탕도 먹고 롤러코스터도 타고...”
“그런 거 그냥 빠르게 떨어지는 것뿐인데.”
“놀이기구는 재미없어도 괜찮아요, 공손찬님이랑 있는 게 재미있으니까.”
유비가 조운을 째려보았지만 정체모를 핑크빛 방어막이 유비의 눈빛 공격을 모조리 튕겨냈다.
“.....놀라갈 거라면, 도시락을 싸야겠네.:
“예? 아, 그렇죠! 사랑을 담아 손수 장만한....”
“그렇지.”
유비가 조운의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그럼 김밥 마는 것부터 배우자.”
“네!”
“그리고 과일 예쁘게 깎는 거랑 달걀 후라이 모양 잡는 거랑 소시지 귀엽게 칼집 내는 거. 포켓 샌드위치, 주먹밥, 장식 만들기도... 배워야 할 게 아주 많네.”
“.....네?”
뒤늦게 불길함을 느낀 조운이 한 발짝 물러서려 했으나 유비는 꽉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공손찬이 좋아하는 거 위주로 열심히 가르쳐줄게. 열심히 배울거지, 그렇지?”
“저어..... 공부, 해야 하는데.......”
“공손찬보다 중요해?”
“아니오........”


머칠 뒤, 놀이공원 데이트 전날인 토요일. 조운은 아침 수련도 거르고 눈이 퀭해서 아침 식탁에 나타났다.
“저, 자네 괜찮나?”
관우가 걱정해주었다.
“왜 사람은 잠을 자야 하지....”
식탁에 머리를 박고 조운이 헛소리했다.
“밤엔 자야 하는 거 또 까먹었어?”
마초가 물었다.
“거 공부가 어려우면 좀 쉬며 해보는 건 어떤가. 밤중에 괴로워하는 소리가 내 방까지 들리던데.”
황충이 말했다.
“그런가? 난 못들었는데.”
조운의 방을 가운데 두고 황충과 반대편 방을 쓰는 장비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우는 자기가 코를 골잖나. 다른 사람 소리가 안 들릴 만도 하지.”
장비 옆방인 관우가 참견했다.
“공부가 문제가 아니야....”
조운이 하품을 했다.
공부도 문제지만 그래도 이들에게 인간계의 일반적인 상식에 해당하는 정도 지식은 있는지 초등 단계부터 차근차근 교과서를 읽고 문제집을 풀면 대체로 문제없이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문제는 유비였다. 아직 강의도 아직 이해하기 힘들어 공부가 급한데 낮에 시간이 나면 조운을 붙들고 살림을 가르쳤다. 도시락 예쁘게 싸는 건 그래도 데이트에 소용되니까 열심히 배웠지만 그 이상 복잡한 요리나 온갖 살림 요령까지 가면 ‘저희 아직 결혼 안 했어요! 분가도 안 했어요!’라고 외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유비님 완전 시어머니야...”
“응? 유비가 조운 괴롭혀?”
공손찬이 식탁에 앉으며 물었다. 조운이 휙 튕겨올라 자세를 바로했다.
“아뇨, 괴롭힘 당하는 건 아니고요.”
“조운이 도시락 싸는 거 배워.”
유비가 말했다.
“내일 데이트에 대비해서.”
“어머나.”
공손찬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냥 거기서 사먹어도 될텐데, 힘들게...”
“힘들지 않습니다!”
조운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응.”
조운에게 다시 생기가 돌았다. 그러니 뭐라 더 할 수도 없어서 공손찬은 그냥 식탁에 앉았다. 막 아침을 먹으려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세요?”
유비가 나가보니 택배였다. 큼직한 상자에는 유명한 커피 회사 로고가 박혀있었다.
“아, 제가 주문한 거에요.”
조운이 달려가서 상자를 안고 들어왔다. 식탁 옆에 내려놓고 그가 새삼 식구들을 쭉 훑었다.
“제갈량은요?”
“.....요새 바빠서 당분간 못 올지도 모른대.”
유비가 우울하게 대답했다.
“이제 곧 꽃 피고 데이트 시즌에 중간고사 기간이 될 테니까.”
“아.....”
그 기간동안 쏟아질 온갖 꿈과 희망과 멸망에의 기원을 생각하며 모두는 숙연해졌다.
공손찬만 빼고.
“근데 제갈량은 왜?”
유비가 물었다. 조운이 상자를 가리켰다.
“이거, 캡슐 커피 머신인데 그게 제갈량은 커피 좋아하니까.....”
“뇌물이야?‘
“순수한 선물입니다.”
조운이 엄숙하게 말했다.
“정말? 내일 데이트 가는 거 잘 봐달라는 뜻 전혀 없어?”
조운은 대답하지 못했다.
“꽃 피는 거랑 제갈량 일이 무슨 상관인데? 혹시 제갈량 놀이공원에서 알바해?”
공손찬이 물었다. 유비가 당황했다.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 컴퓨터 뭐 한다는 것 같은데 난 들었는데 잊어버렸어.”
그가 필사적으로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런데 왜 조운이 뇌물을....”
“자, 이건 제갈량 선물이니까 제갈량이 제일 먼저 뜯어보게 방에 놔두자!”
유비가 상자를 번쩍 들고 제갈량의 방으로 갔다.
“커피머신 설치하면 혼자만 먹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처음 정도는....”
방문을 열기 위해 유비가 문 옆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유비가 문손잡이를 잡기 전에 문이 열렸다.
“아!”
유비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가 뭐라 더 말하기도 전에 안에서 나온 제갈량이 유비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를 꼭 안고 부비작거리는 제갈량을 마주 안아주며 유비가 흐뭇한 눈을 하고 그의 등을 토닥였다.
마침내 제갈량이 고개를 들었다.
“제....”
제갈량이 유비의 목에 팔을 감고 끌어당겨 그대로 입을 맞췄다.
그리고 오호대장군은 문제점을 알아차렸다. 제갈량은 나뭇잎 장식이 붙은 옥새의 신선 차림 그대로였고 열린 문틈으로는 선계의 공기가 솔솔 새어나오고 있었다.
“저, 저대로 둬도 되는 거야?”
“그렇다고 둘 키스하는 데 끼어들 수는...”
“뭐냐고, 연애질을 하더라도 정신은 챙겨가며 해야 할 것 아냐!”
오호대장군들이 수군거리는 사이 두 사람이 마침내 키스를 끝내었다. 제갈량이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한 걸음 물러났다.
“제, 제갈량?”
“잠깐 충전이 좀 필요해서요.”
유비에게 생긋 웃어주고 제갈량은 안으로 도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유비가 다시 열자 거기는 유비의 방을 복사해 만든 제갈량의 방이었다.
“...............”
혼이 빠져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던 유비는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그러다 왜 자기가 여기 서있었는지를 기억해 내곤 문을 열고 상자를 안으로 들이고 다시 문을 닫았다.
“어...... 제갈량이, 그, 새벽에 들어왔나보네. 피곤해 보이니까 지금은 자게 놔두자.”
유비가 어색하게 수습을 시도했다.
“으, 응. 그래. 어서 아침 먹자.”
충격적인 장면에 공손찬도 조금 정신이 나갔는지 별 말 없이 동의했다. 모두는 아주 조용히, 방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침을 먹었다.


아침 먹고 뒷정리가 끝난 후 유비와 조운은 내일 도시락을 쌀 재료를 사러 가고 장비는 자기도 살 게 있다며 그들을 따라갔다. 마초는 유장의 재활 치료가 어떻게 진행되나 보겠다고 나가고 관우와 황충은 오랜만에 대련을 해보자며 밖으로 나갔다.
순식간에 혼자 남아버린 공손찬이 자기는 뭘 할까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최근 공부가 바쁘다며 집안일을 소홀히 했던 게 생각났다.
“다들 잘 분담해서 하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아무 것도 안할 순 없지. 내가 뭐 할 거 없나?”
공손찬이 도원관 안을 쭉 살폈다. 그러다 달력에 표시된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날이 오늘인걸 보았다.
“좋아, 재활용 쓰레기는 창고 옆에 모아뒀지?”
공손찬이 부엌 옆으로 나가 창고 옆을 보았다. 그리고 산더미 같은 술병을 보고 깜짝 놀랐다.
‘뭐, 뭐야. 누가 이렇게 마셨어.’
예전에 위층 다섯 명이 모여 술판을 벌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무슨 다섯 명이 아니라 열다섯 명이 마신 것 같았다. 대학생이 되고 술자리에도 두어 번 나가봤지만 보통 이지경으로 마시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술 종류가 각양각색이었다. 맥주 소주 양주 막걸리에 과일 맥주까지, 무슨 슈퍼 가서 술이란 술은 전부 다 쓸어온 것 같았다.
“.....그냥 다섯 명이 다 술 취향이 다른가 보지..... 하하하. 다들 술 엄청 잘 마시나 보네.”
공손찬이 목장갑을 끼고 빈 병을 색깔별로 나누어 마대자루에 담았다. 그러면서 조운은 무슨 술을 좋아하려나 생각했다.
‘엄청 세련된 칵테일 같은 술 좋아할 것 같이 생겼는데 실제는 어떠려나. 그래도 소주는 써서 싫다고 할 것 같긴 해.’
커피도 써서 싫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맥주도 썼다.
‘언제 같이 술 마셔봐야겠다. 그 때 무슨 술 좋아하냐고 물어봐야지.’
술 취향 같은 거야 아무래도 상관없긴 하지만 그래도 이제 둘은 사귀는 사이이니까, 서로에 대한 건 이것저것 알아가는 게 당연했다. 공연히 얼굴이 붉어질 것 같아 공손찬은 바삐 병을 분리하고 플라스틱도 플라스틱 대로 담고 종이 쓰레기를 묶으려고 비닐 끈을 꺼냈다.
“....어?”
종이 쓰레기를 크기대로 쌓으려다 공손찬이 잠시 멈칫했다.
‘이런 게, 왜 도원관에 있지?’
초등학교 전과와 문제집들이 잔뜩 있었다. 그것도 학년별 과목별로 전부 다.
도원관에는 초등학생 관원도 있긴 했다. 가끔 부모님이 늦는 아이들은 도원관에 남아서 숙제를 하거나 놀다 갈 때도 있었다. 그런 애들이 다 푼 문제집을 도원관에서 버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한두 권일 것이다. 게다가 전 학년 다 있는 것도 걸렸다. 누가 초등학교 졸업하며 그동안 쓴 걸 전부 내다 버린 것 같은 모양새였지만 책은 모두 새것 같았다.
‘대체 뭐야?’
공손찬이 문제집 하나를 집어 펼쳤다. 누구 책인지는 몰라도 성실하게 공부한 흔적이 보였다.
그가 문제집 앞장을 펼쳤다. 초등 저학년용이기 때문에 앞에 학년 반 이름을 쓰는 란이 있었다.
[조운]
공손찬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다시 봐도 이름 적는 란에 써 있는 말은 조운이 맞았다. 그러고보니 글씨가 전혀 초등학생의 글씨가 아니었다.
그가 다른 전과를 집어 들었다. 이것 역시 이름 란에 조운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뭐지? 조운의 옛날 책? 취미로 초등 문제집을 푸는 대학생? 동명이인?’
망하니 있던 공손찬은 우선 신문지를 위아래에 대서 문제집 겉이 안 보이게 싼 뒤 재활용 쓰레기를 묶었다. 그러다 다시 생각해보곤 초등 1학년 국어 전과와 중학 1학년 수학 문제집 한 권 씩을 따로 빼냈다. 이러고 쓰레기를 버려버리고 나면 이 해괴한 일에 대한 증거가 아무것도 없게 된다. 증거를 챙겨서 대체 뭘 어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 봤을 때 자기가 꿈을 꾸거나 환각을 보았다고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따로 뺀 책을 자기 방에 갖다 잘 숨겨두고 공손찬은 재활용 쓰레기를 배출 장소에 내다놓았다.
쓰레기를 버리고 들어와 보니 그새 유비와 조운이 장보고 돌아와 부엌에서 한참 부스럭거리고 있었다.
“도시락을 벌써 싸는 건 아냐. 장식이나 포장 같은 거 미리 만들어 두느라고.”
공손찬이 들여다보자 유비가 변명했다.
“별로 도시락 미리 만들어 둔다고 뭐라고 할 생각은 없는데. 이건 뭐야?”
“포켓 샌드위치 만드는 틀이요. 여기에 속재료를 채운 식빵을 끼우고 누르면 이렇게 고양이 얼굴이 찍히는 거에요.”
조운이 설명했다.
“귀엽다.”
조운은 자기가 귀엽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으쓱했다.
“연습 삼아 지금 간단하게라도 만들어볼까요?”
“그래. 나 재활용 쓰레기 버리고 와서, 씻고 올게.”
“네~”
재활용 쓰레기를 언급해 보았지만 조운에게선 별 반응이 없었다. 역시 뭔가 착각은 아닐까 싶어 씻고 방에 가서 숨겨둔 문제집이 아직 있나 확인해보았다.
‘역시 이건 동명이인이라거나....’
공손찬이 다시 부엌으로 갔다. 새로 산 것 같은 예쁜 3단 도시락통 위에 [사랑하는 공손찬님♡을 위한 조운의 도시락] 이라고 써있는 카드가 끼워져 있었다.
“아, 그건 아직 생각만 해보고 있는 거에요!”
조운이 허둥지둥 도시락통과 카드, 리본 등 각종 포장재를 가렸다.
“도시락 내용물도 중하지만 겉도 꾸며보면 어떨가 해서...”
“으, 응.”
공손찬은 굳어가는 표정을 풀려고 애쓰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조운’을 쓴 글씨체가 동일했다. 그 초등학교 문제집은 조운이 푼 것이 맞았다.





한국과는 달리 드림랜드에선 토요일 아침에 배달하는 택배는 급행료로 요금을 더 냅니다. 시간에 쫓긴 조운이 데이트 전에 뇌물을 바치고자 급행료를 내었습니다.

새로운 세계 2 (완)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장각과 그런 대화를 나눈 이후로도 제갈량은 변함없이 옥새의 신선으로서 업무를 계속해나갔다. 지치거나 회의감에 사로잡힌 티도 내지 않았다. 그가 일찍 소멸할 계획을 대고 있는 걸 아는 건 장각 뿐이었다.
다음 세대 신선들은 순조롭게 배우고 성숙해졌다. 인간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고 그 선악과 사람들의 사정을 헤아려 사람들이 비는 소원을 판단하고 어떤 꿈을 어떻게 이뤄줄 것인지 결정할 수도 있게 되었다.
마침내 제갈량이 새 신선들의 리더를 따로 불렀다. 서서를 닮은 그 신선은 강유라는 이름이었다.
“부르셨습니까.”
강유가 옥새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래. 일어나렴.”
강유가 일어섰다.
“내가 널 부른 이유는... 너를 새로운 옥새의 신선으로 삼기 위해서다.”
“예?”
강유가 깜짝 놀라 제갈량을 올려다보았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아버.. 아니 제갈량님. 제가 옥새의 신선이 되면 제갈량님은... 아, 혹시 예비 옥새를 만들어서 업무 분담을.”
“아니.”
제갈량이 고개를 저었다.
“네게 옥새를 물려주고 나는 소멸할 생각이다.”
강유의 충격 받은 얼굴을 제갈량은 외면했다.
“이제 너도 다른 신선들도 모두 자기 몫을 해주고 있으니 내가 없어도.”
“아니에요, 제갈량님이 없으면 안돼요!”
강유가 옥새에 매달릴 듯 다가와 사정했다.
“저흰 아직 어리석고 실수투성이라고요, 제갈량님이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금방 세상이 엉망이 되어 버릴 거에요!”
“그건 아니지.”
그들 곁에 장각이 나타났다.
“너희들은 잘하고 있어. 제갈량이나 내가 없어도 세상은 멀쩡하게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
강유가 장각에게 따졌다.
“제갈량님께서 죽겠다고 하시는데 말리지는 못할망정 부추기다니요.”
“그와는 이미 오래전에 합의를 했어.”
제갈량이 말했다.
“너희들이 온전히 제몫을 하는 신선이 되면, 나는 그만 사라지기로.”
강유가 제갈량에게 돌아섰다. 그러느라 장각이 ‘합의는 안 했는데..’라고 중얼거리는 건 듣지 못했다.
“전대 우승자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강유가 말했다. 제갈량이 깜짝 놀랐다.
“네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알아봤으니까요. 드림배틀의 역사를 배우면서 마침내 그 배틀을 끝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한 건 당연하잖아요? 게다가 다름 아닌 제갈량님의 파트너였는데. 그래서 옥새의 데이터를 뒤져봤더니, 그 사람은 드림배틀과 관련된 기억을 잊어버리고 싶다는 소원을 빌었는데 제갈량님은...”
“그만해둬.”
제갈량이 괴로운 얼굴로 강유의 말을 막았다.
“유비님을 비난해선 안 돼. 인간은 수명이 짧고 세월을 훨씬 길게 느끼지. 그분이 혼자 견뎌야 할 시간은 나보다 훨씬 길어. 게다가, 나는 그래도 그가 사는 모습을 볼 수라도 있지만 그 사람은 꿈이나 망상은 아니었을까 의심스러운 이야기를 평생 혼자 지고 가야했어, 내가 정말 있는지도 확신하지 못한 채. 그런... 고통 속에 놔둘 수는 없었어.”
“하지만 제갈량님이 그만큼 더 괴로우시잖아요.”
강유가 울먹였다.
“자기를 잊어버린 사람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다니 그 고통은 고통이 아닌가요.”
“그래서 이만 끝내려고.”
제갈량은 작게 미소 지었다.
“내가 할 일은 이미 끝났으니, 이제 네가....”
“흐음, 흠.”
장각이 크게 헛기침했다.
“나도 할 말이 있어서 왔거든.”
“뭔데?”
제갈량이 열의 없이 물었다.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이제 와서 내 계획을 반대해 봐야 아무런 근거도 대책도.”
“있거든, 근거와 대책.”
장각이 제갈량의 말을 잘랐다.
“넌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데 공헌한 대가라며 날 되살렸지.”
“교육할 필요 없이 즉시 부려먹을 수 있는 신선이 필요했고 정상 신선들은 이미 모두 소멸한 뒤였으니까.”
“그래서 굳이 내 데이터를 찾아 버그를 수정해가며 되살렸단 말이지. 응, 부려먹었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어. 지금은 좀 낫지만 초기엔 정말 신선도 일하다 코피가 나거나 과로사 할 수도 있는 건 아닐까 연구 대상이 된 줄 알았다니까.”
강유는 ‘농담이겠지?’라는 표정으로 장각을 보고 있었으나 장각도 제갈량도 웃지 않았다.
“넌 공도 있지만 과도 있어. 악행의 죄과를 노동으로 갚는 건 그리 가혹한 조치도 아니지.”
“응, 그래 지금 그걸 불평하려는 건 아니고.”
장각이 데이터 큐브 하나를 제갈량에게 던졌다.
“그동안 내가 뭘 좀 생각해봤거든. 훑어보지 않겠어?”
제갈량은 의심스런 눈길로 장각을 한 번 쳐다보고 큐브의 내용물을 열람했다. 가유가 궁금한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걸 보고 장각이 그의 단말에도 공유해주었다.
“..이건!”
내용 파악을 끝내고 제갈량이 장각에게 놀란 눈을 돌렸다.
“신선을 인간으로 만든다고?”
“너도 새 체계를 위해 공헌했잖아.”
장각이 말했다.
“유비도 수명이 얼마 안 남았어. 그와 인연을 이어서, 둘이 환생해 다시 만나게 할 수 있는데 그런데도 여전히 그저 신선으로 소멸하고 싶어?”
“그, 그렇지만....”
제갈량이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런 게 가능하다고?”
“옥새도 개조했는데 너 하나 인간으로 만드는 게 왜 불가능하겠어.”
장각이 말했다.
“하지만... 유비님은 이미 결혼해서 자식도 있는데, 내가 이제와서 끼어들었다간 지금 이어져 있는 인연들을 교란하게 될거야.”
제갈량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식으로, 내 욕심 때문에 멋대로 세상의 질서를 어긋나게 할 수는 없어.”
“야.....”
“이야기는 끝났다, 장각. 돌아가.”
제갈량이 명령했다. 장각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했지만 옥새의 신선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럼, 저도 가보겠습니다.”
강유가 말했다.
“너는.”
“이건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적어도... 제게도 마음을 준비할 시간을 주세요.”
“....그래.”
제갈량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한 달 안에 다시 부르겠다.”
“네.”
장각도 강유도 옥새 앞에서 물러갔다. 혼자 남은 제갈량은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


제갈량을 뒤이어 옥새의 신선이 되라는 말을 들은 뒤 강유는 어떻게 하면 제갈량의 결심을 바꿀수 있을지 여러모로 고민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지금 제갈량이 괴롭다는 사실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제갈량은 옛 주군이었던 인간을 그리워하며 그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제갈량이 죽을 결심을 철회하게 하려면 그 점을 해결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고 있는데 제갈량이 그를 다시 불렀다. 결국 그가 소멸하게 둘 수 밖에 없는 걸까 절망하며 강유가 옥새 앞으로 갔다.
거기엔 장각이 이미 와있었다. 그가 이번엔 무슨 일일까 강유는 의아하게 여겼다.
그리고 제갈량을 보고 놀랐다. 그는 울고 있었다.
“상황이 바뀌었어.”
장각이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어떻게도 할 수 없었던 걸 유비가 한 방에 해결해 줬지 뭐야.”
“네? 기억도 없앴으면서 전 우승자가 뭘....”
“유비님이..... 죽음을 앞두고 소원을 빌었어.”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젊었을 때 잃어버린 꿈을 되찾고 싶다고. 그 때 잊어버린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다고.”
제갈량이 유비의 소원을 안고 울었다. 그 옛날 서서의 편지를 안고 울었을 때처럼.
“어째서..... 나는 언제나 다 늦은 뒤에야......”
“그래서. 전대 우승자의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야.”
장각이 즐거운 어조로 말했다.
“이건 꼭 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래.”
제갈량이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장각 네가 마련한 방법을 쓰겠어.”
“진작 그렇게 나올 일이지.”
장각이 웃었다.
“인간이 되어서 행복하게 살아. 유비 만나면 한 방 먹여주고.”
제갈량이 ‘내가 왜?’란 시선으로 장각을 보았다. 장각은 고개를 저었다.
제갈량이 강유에게 시선을 돌렸다.
“걱정 마세요. 제가 옥새를 맡아 세상을 잘 돌보고 제갈량님도 지켜볼게요.”
“그래.”
제갈량이 그에게 미소지어주었다.
그가 옥새에서 사라졌다. 초록색 빛무리가 흩어지려다 장각의 손짓에 따라 작은 다면체에 빨려들어갔다.
강유의 몸이 떠올라 옥새 안으로 이동했다.
“옥새 적응 수고해. 난 얘를 유비의 영혼에 엮어야 해서 잠깐 인간계에 내려갔다 올게.”
“그래. 허가한다.”
그러고 강유가 잠깐 망설였다.
“기왕 인과의 실을 흔드는 거, 기왕이면 그분이 행복하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조치해드렸으면 한다.”
“예이, 물론이지요. 말씀 안 하셔도 그리 할 작정이었답니다. 신참 옥새의 신선님.”
장각이 연극조의 과장된 인사를 하고 옥새 앞을 물러나왔다.
“행복하게 살도록 도와주고 말고. 물론, 인생에 아~무 고난이 없으면 재미가 없으니 살짝 귀여운 장난은 쳐 줄 생각이지만.”
장각이 제갈량의 의식체에 속삭였다.
“넌 아무 고민 없이 즐겁게 살게 될 거야..... 유비를 만날 때 까지는.”





이러고 다음 이야기는 환생 윱제로 이어집니다. :)

새로운 세계 1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Characters: 장각. 제갈량. 강유.
Rating: G
Warnings: 캐릭터가 자살을 원함
Summary: 드림배틀이 끝난 뒤 옥새의 신선이 된 제갈량이 새로운 신선들과 살아가다.




에너지가 주입되자 정적에 움직임이 생겼다. 움직임은 복잡해져 의식을 이루었고 그 의식은 천천히 깨어나 마침내 눈을 떴다.
맑은 선계의 공기. 고요한 바람소리. 푸른 숲속 풍경.
장각이 눈을 깜빡였다.
“.....어?”
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손을 들어보았다. 익숙한 자기 손이었다, 팔이 하얀 신선의 옷을 입고 있는 것만 제외하면.
“......어?”
장각이 벌떡 일어났다. 몸은 쉽게 뜻대로 움직였다. 그가 자기 얼굴을 더듬었다. 복잡한 고글 대신 단순하고 알이 둥근 보통 안경이 만져졌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시 봐도 선계였고 자기 아지트도 아니고 사마의도 없었다.
사마의.
“....죽은 신선은 그대로 완전히 소멸하는 것 아니었어?”
“넌 버그였으니까.”
혼잣말에 대답이 돌아왔다. 장각은 말소리가 들린 곳을 찾아 고개를 들었다.
“.....하.”
옥새 가운데 제갈량이 서 있었다. 그가 옥새의 신선이 되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고 장각이 설핏 웃었다.
“유비가 조조를, 아니 사마의를 이긴 거야? 축하해, 제갈량. 최후의 생존자가 된 것을.”
말하고 장각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근데 지금은 나도 살아 있잖아.”
“그래. 그것도 더 이상 버그가 아닌 정상 신선으로 살아났지.”
장각의 말을 듣는 듯 마는 듯, 제갈량은 옥새를 감싸고 도는 작은 소망들을 눈으로 훑으며 손가락으로 뭔가를 조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장각이 눈을 크게 떴다.
“옥새를, 개조했어? 작은 꿈들을 에너지로 삼을 수 있도록?”
“그래. 네 공이지, 적어도 일부는.”
“내가 하려던 건.”
“드림 배틀은 끝났어. 이번 배틀만이 아니라, 앞으로 영원히.”
제갈량이 장각의 말을 잘랐다.
“유비님이 소원을 빌었고 내겐 그 소원을 현실화 할 방도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드림 배틀은 끝났고, 이제 누구도 세계의 존속을 위해서 희생해야 할 필요는 없게 되었어.”
제갈량이 장각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너 보기엔 어때 보여? 새 세상이.”
장각이 말하려고 입을 벌렸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잠깐만, 제갈량.”
그가 손을 내저었다.
“지금 나 좀, 혼란스럽거든?”
“그럴 거라고 생각해.”
제갈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버그로서 드림배틀을 없애려 하던 기억이 고스란히 있는데 지금 다시 되살아나 신선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니 당연히 혼란스러운 점이 있겠지.”
“그런데 왜 되살렸어?”
장각이 물었다.
“아니, 그래. 짐작 가는 건 있어. 옥새를 개조할 계획은 내가 세운 거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설계도상으로만 작업했고 실제로 가능할지는..... 그 때는 백퍼센트 가능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렇게 확신할 수 없어. 당연히 예상치 못한 문제라던가 많이 생겼겠지.”
장각이 제갈량을 째려보았다.
“즉, 날 부려먹으려고 되살린 거야. 내 말 틀려?”
“아니.”
제갈량이 웃었다.
“나도 열심히 손보고 있긴 하지만, 옥새의 신선은 그거 말고도 할 일이 많아서 말이야. 유지보수만 따로 전담하는 신선이 필요했고, 네가 적임자라 생각했지.”
“그렇다 해도 이건 말이 안 돼.”
장각이 자기를 손짓했다.
“그런 능력을 지닌 신선을 새로 만드는 게 더 쉬웠을 거야, 아니면 날 되살리더라도 적어도 기억을 지웠어야 해. 내게 옥새를 맡겨?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제갈량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슨 짓을 하고 싶어?”
장각은 잠시 생각했다.
“.....아니.”
그가 풀밭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이상하네. 그..... 세상이 이미 바뀌어서 그런가, 버그가 사라져서 이런가. 머릿속으로는 이것저것 예전 생각이 남아있는데, 그런데....”
장각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옥새를 보았다.
“드림배틀은 사라졌다고.”
제갈량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장각이 피식 웃었다.
“숙원은 이룬 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지만.”
“새 시대가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마음에 든다는 말은 안했는데.”
“꿈을 이뤘다며. 어떤 소원이든 생각했던 그대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야.”
제갈량이 그의 눈앞을 떠도는 소원 하나를 집어 들었다가 도로 놓았다.
“그래서야? 우승자의 신선이 옥새의 신선이 되는 건 우승자가 바라는 세상을 가장 잘 이해하고 원하는 게 그 신선이어서 이듯이, 내가 이 세상을 원했기에 지금의 옥새를 돌보는데 적합하다고?”
“그것도 있고.”
제갈량이 꿈을 모두 치우고 장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는 악한 행위를 했고, 정해진 세계의 질서를 어지럽혔지. 그러나 너의 비전이 있었기에 지금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사실.”
그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새로운 세계는 너에게 빛을 졌다. 그러므로 이건 너에게 바치는 경의이며 너의 공헌에 대한 답례이다. 새로 주어진 기회를 헛되이 하지 말고 이제 신선으로서 세계를 위해 힘써주길 바란다.”
장각은 멍하니 제갈량을 올려다보았다.
“하, 하하....”
그가 천천히 일어나 똑바로 서서 제갈량을 마주보았다.
“새 세상이란 곳은, 아주 재미있을 것 같네.”
장각이 옥새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신선 장각, 옥새의 신선을 뵙습니다. 맡겨주신 임무 충심을 다해 수행하겠습니다.”
제갈량이 고개를 끄덕여 그의 맹세를 받았다.
장각이 고개를 들었다.
“자, 그럼 어떤 일부터 할까?”


두 신선이 힘쓴 결과 새 체계는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새 신선들도 만들었다. 아직은 작은 꿈으로 들어오는 에너지보다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소모하는 에너지가 더 많지만 새 신선들의 교육이 끝나고 이뤄줄 만한 좋은 꿈을 가려내는 작업이 원활해지면 곧 에너지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장각은 새 삶이 즐거웠다. 옥새의 자잘한 오작동을 수리하고 선계에 일어나는 변화를 감시하고 새 신선들에게 필요한 도구를 개발하는 건 보람차고 재미있었다. 심지어 어린 신선들을 교육시키는 일도 생각보단 힘들지 않았다.
이제 신선들은 경쟁자가 아니었다. 서로 싸우거나 죽일 필요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 친교가 싹텄다. 호기심이 넘치며 모두에게 상냥한 소녀 신선이 그들 중 제일 인기가 있었다. 장각은 은근슬쩍 그를 피해 다녔고 제갈량은 그걸 못 본 척 했다.
세월은 빠르게 흘렀다. 새 신선들을 견학 목적으로 인간계에 내려 보내고 한숨 돌린 장각은 오랜만에 제갈량에게 갔다.
“안녕, 제갈량. 옥새 요새는 어때?”
“멀쩡해.”
제갈량이 보던 걸 손으로 쓸어 치우며 대답했다.
“나도 늘 경계하고 있지만 오작동 걱정은 이제 없는 것 같아. 웬일이야?”
“애들이 떠나서, 한가한 김에 데이터 점검이나 할까 해서.”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야?”
제갈량이 옥새를 열어서 모니터용 단말을 장각에게 내려 보냈다.
“혹시라도 이전 네가 한 짓 때문에 부채감이 있는 거라면...”
“그건 아니지만, 나 같은 게 또 생기면 안되잖아.”
장각이 자기가 개발한 점검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최근 감지된 비정상적인 움직임이 있나 살폈다.
“그래, 내 경우엔 이렇게 잘 끝났지. 하지만 그건 분명 너와 유비의 공이야. 다음엔 이렇게 바람직하게 끝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제갈량은 침묵했다. 장각은 계속 오작동이나 규격에서 어긋난 기록을 확인했다.
“지금 사는 건, 만족스러워?”
한참 만에 제갈량이 물었다.
“넌 재미있고 신기한 거 좋아했잖아. 이렇게 늘 하는 일을 반복하게 된 건...”
“걱정 마, 아직 지루할 정도는 아니니까.”
“아직, 이겠지.”
장각이 작업을 멈추고 제갈량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뜻이야? 내가 언젠간 이 일에 질릴 거라고 생각해? 질려서, 다시 한 번 세상을 부수려 들 거라고?”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면 네가 그렇다는 거야?”
제갈량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장각을 바라보았다.
“뭘 놀라, 너에게 이상이 생기면 제일 먼저 아는 건 당연히 나라고.”
장각이 조작하던 단말을 툭툭 쳤다.
“네가 유비의 소원만 다시 보는 건 처음부터 있던 일이지만, 요새 들어 정도가 심해졌지. 심지어 20년도 더 된 이미 들어준 소원을 영구 저장해놓고 돌려보고 있잖아.”
제갈량이 장각의 시선을 피했다.
“그를 다시 보고 싶어?”
제갈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30년도 더 전 일이야.”
장각이 말했다.
“알아.”
“유비는 드림배틀에 대해 잊었어.”
“알아.”
제갈량이 눈을 감았다.
“잊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지.”
‘내게’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으나 장각은 알아들었다.
“그런데도 그런 사람을.”
“내가....”
제갈량이 말을 쥐어짰다.
“잊을 수가 없어.”
장각은 입을 다물었다. 제갈량이 탄식했다.
“나도 잊고 싶어..”
그가 눈을 뜨고 장각을 바라보았다.
“혹시.”
“어이어이, 넌 옥새의 신선이라고. 네 정신은 조작 못해. 내가 아니라 누가 와도.”
“......응.”
제갈량이 침울하게 대답했다. 한참이나, 그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물러나는 게 옳겠지.”
제갈량이 말했다.
“아직은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괴로워. 그러니 후임을.”
“미리 말해두겠는데 난 안 해.”
장각이 말했다.
“나도 너한테는 안 시켜. 시스템 유지 보수만으로 바쁜데다 네가 옥새의 신선이 되면 선계의 숲을 솜사탕 나무로 바꿀 거잖아.”
“그건 애들 재미있으라고 한 번 그런 거야.”
“이 자리는 좀 더 세상을 행복하게 하려 하지만 질서에서 벗어나지는 않는 그런 신선에게 어울려.”
제갈량은 장각의 변명은 못 들은 체 했다.
“이미 찍어둔 애가 있구나?”
장각이 단정했다.
“옥새의 신선 자리를 맡길 수 있을 만큼 교육시키려면 그래도 십 년 이상은 걸릴 거야.”
“그 정도는 버틸 수 있어... 못 믿겠으면 네가 감시하면 되겠지.”
“못 믿는 건 아닌데.”
장각은 슬퍼보였다.
“너 나한테, 신선이 희생할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었다고 했잖아.”
“난 구세대의 신선이니까.”
제갈량이 쓸쓸하게 웃었다.
“새로운 세대가 준비되면 자리를 내주고 사라져야지.”
“사라진다고.”
“희생하곤 달라, 이건 내가 원해서....”
“나는?”
장각이 되물었다.
“나도 구세대이긴 마찬가지야. 넌 나는 새옥새를 이용해 새로운 목적으로 다시 만들었기 때문에 새 세대에 속한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아. 네가 사라지면, 나는.”
“미안.”
제갈량이 장각의 눈을 피했다.
“나 때문에 너도 존재를 그만둘 필요는 없어. 하지만 만약 그러고 싶다면.”
“너랑 달라서 난 아직 후임을 안 키웠어.”
장각이 손을 내저었다.
“그만두고 싶은 생각도 적어도 아직은 없고. 다만.... 그래. 예비 계획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은 드네. 만약에 대비해서.”
“그래. 그건 너 좋을대로 해.”
그렇게 말하는 제갈량은 무척 지쳐보였다. 혼자 남는 게 저런 거라면, 제갈량이 사라지고 나면 자기도 예상보다 훨씬 빨리 존재를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장각은 생각했다.
‘그렇지만, 순순히 사라져 줄 수는 없지.’
장각이 자기 작업 공간으로 돌아갔다.
‘나는 이미 한 번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어. 두 번이라고 못할 건 없어.’


내게 사실을 말해봐 14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스토커 같더라도 그냥 공손찬님 시간표를 몰레 베껴둘걸 그랬어...‘
2교시 수업이고 중국어 시험 이랬으니 12시까지 어학관으로 가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중국어 기초]는 교양 수업이어서 대강의동에서 수업했고, 조운이 뒤늦게 오류를 깨닫고 대강의동으로 달려갔을 땐 물론 공손찬은 흔적도 없었다. 점심 먹으러 가지 않았을까 싶어 가까운 학생 식당에도 가봤지만 다른 곳으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빨리 고백해야 하는데...’
제갈량이 빨리 하라고 해서만이 아니었다. 공손찬과의 사이에 오해가 생겼는데 아직 풀지 못했다. 그대로 놔뒀다가 겨우 좁힌 거리가 멀어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았다.
공손찬님이 그를 차는 건 괜찮았다, 누굴 사귈지는 그분 자유니까. 하지만 그분이 조운의 진심을 오해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어디로 가야하지? 공손찬님 오늘 오후 수업 뭐 들으시지?’
전공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조운의 오늘 오후 수업이 교양이니 공손찬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공손찬님이 듣는 거 전부 따라 들어야 했다고 후회하며 조운이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학생 식당을 나섰다.
그러던 그가 식당으로 들어오는 손상향을 발견했다.
“아!”
조운이 그에게 달려갔다. 손상향도 조운을 알아보고 인사했다.
“안여하세요, 조운 씨.”
“안녕하세요. 저, 공손찬님 어디 계신지 아세요?”
“...네?”
손상향이 대답 대신 조운의 얼굴을 살폈다.
“왜 그러시죠? 저 얼굴에 뭐라도...”
“아뇨, 뭐가 묻은 건 아니고. 그저... 되게 초조해보여서요.”
“네, 그, 그렇긴 합니다.”
조운이 말했다.
“공손찬님하고 좀 오해가 생겼는데, 빨리 풀어야 해서....”
“혹시 그거, 주유 언니 관련 일인가요?”
정곡을 찔리고 조운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손상향이 조운을 노려보았다.
“저, 저는 주유를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왜 공손찬보다 먼저 손상향에게 해명하고 있는지 조운도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해명했다.
“제가 사랑하는 건 오직 공손찬님 뿐입니다.”
“그럼 주유 언니는 왜 그렇게 쳐다봤어요?‘
“그.... 예전에 알던 사람하고 닮아서.....”
손상향의 얼굴엔 ‘그걸 믿으라고?’라고 크고 뚜렷하게 써있었다, 조운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그럼 그 사람은.”
“죽었....어요.”
“아.”
다행히 그건 거짓말 같지 않았는지 손상향도 표정이 어두워졌다.
“....세상에 닮은 사람이 셋은 있다고 하죠.”
“네, 정말 그런가보네요.”
닮은 게 아니고 아예 동일인이지만. 조운도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 놀랐던 것 뿐이지 절대 반한 게 아닙니다. 제가 반한 건 예전에도 지금에도 공손찬님 밖에 없어요.”
유비님 정도는 넣어도 되겠지만 지금 말하기엔 완전히 쓸데없는 소리란 거 조운도 알고 있었다.
“그말, 진심이겠지요?”
손상향이 조운을 보았다.
“찬이 울리면 내가 가만 안 둘 거니까요.”
조운은 잠시 ‘공손찬님이 나 때문에 우실 리가.’와 ‘왜 그걸 손상향이 가만 안 두는데?’ 사이에서 갈등했다.
“네.”
조운은 그러고 고개만 끄덕였다. 손상향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가 휴대폰을 꺼냈다.
-공손찬, 수업 끝났어? 점심 같이 먹을래?
-아, 나 오후 공강이라 집에 가서 잠 좀 자게.
-버스 안?
-ㅇㅇ
“공손찬 집에 가고 있다네요.”
“고맙습니다!”
말하고 손상향이 고개를 들어보니 조운은 이미 저만큼 뛰어가고 있었다.
“.....빠르네.”
달려가는 조운의 뒷모습을 보며 손상향은 그가 차이기를 마음속 깊이 기원해주었다.


‘더 도원관 근처까지 닿는 버스가 있으면 좋을텐데....’
하품을 하며 공손찬은 걸음을 빨리했다.
변두리 지역이라 공원이 많고 고층 건물이 적어 풍경이 답답하지 않은 건 좋지만 역시 교통은 문제였다. 학교에서 한번에 오는 버스는 마을 어귀의 공원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마을버스로 갈아타면 도원관 근처까지 오긴 하지만 걷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려 공손찬은 그냥 운동삼아 공원을 가로질러 걷는 편을 택했다.
한낮의 공원은 밝고 활기찼다. 이러고 가다보면 그냥 잠깨겠다고 생각하며 공손찬은 아침에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유비에게 애인이 생겼다. 유비를 위해 기꺼이 성미를 죽이고 다정하고 예의바른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는 애인이.
솔직히 부러웠다. 애인 같은 건 좋은 사람 생기면 사귀는 거지 굳이 연애를 하기 위해 사람을 찾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바로 옆에 있는 사람한테 애인이 생겼다는 말을 들으니 내심 초조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조운 정도면 괜찮았는데....’
어쩔 수 없었다. 연애란 둘이 서로 좋아야 하는 거니까. 게다가 조운이 꼭 주유에게 한눈에 반하지 않았다 한들 그와 정말 사귀게 되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조운은 그에게 숨기는 것이 있으니까.
‘애인 사이에선 모조리 까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좀 찜찜한 구석이 있단 말이지.... 애초에 그런 미남이 갑자기 떡 나타나서 나한테 잘해준다는 것 부터가 이상하고.’
사실 그 점은 그 다섯 명 전원이 다 이상했다. 유비 일이려니 해서 별 말 없이 놔두긴 했는데 조운은 자기 일이기도 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그 느낌은 조운이 딴 여자에게 반한 지금도 여전히 들었다.
‘이거 대체 무슨 감정이지. 왜 사귀는 것도 가족인 것도 아닌 사람한테 책임감을 느껴? 혹시 나 조운한테 이미 반했나? 그런데 내가 둔하고 눈치가 없어서 못 깨닫고 있는 거야?’
연애를 해봤으면 경험에 비춰보기라도 했을텐데 이 정도 연애 비슷한 무언가도 공손찬에겐 처음이었다. 혼란에 푹 절어서 이맛살을 찌푸리며 걷고 있는데 눈앞에 뭔가가 나타났다.
“오, 우리 찬이를 이런 데서 만나다니 이건 운...”
“됐거든?”
지금은 도저히 미축의 저 뻘짓을 받아주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평소보다 더 매몰차게 말하며 공손찬이 가던 방향을 틀어 그를 피했다.
“찬아, 그러지 말고 이 오빠랑 놀이공원이라도...”
“다음 달이면 중간고산데 놀긴 뭘 놀아. 나 장학금 받아야 한다고.”
공손찬이 걸음을 빨리했다. 미축이 그를 쫓아 달렸지만 공손찬은 보법을 응용해 걷는 방향을 바꾸며 그를 휙 따돌렸다.
“아니 나도 수련을 했는데 찬이는 언제 또 이렇게 빨라졌...”
그래도 서둘러 쫓아가려는데 발이 턱 걸려 미축이 우당탕 넘어졌다. 비명소리에 공손찬이 뒤를 돌아보았다.
“조운?”
“공손찬님께서 귀찮다고 하시잖아. 왜 계속 추근대는 거야.”
조운이 미축을 노려보았다. 살벌한 시선에 미축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장비 말대로 넌 인간이나 좀 더 된 다음에 뭐든 할 생각을 해라. 대체...”
“...조운.”
공손찬이 불렀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조운이 흠칫 목을 움츠렸다.
“아... 제가 그 주제넘게 나서려던 게 아니라...”
“왜 미축한테 화내는 거야?”
“네?”
“미축이 짜증나게 굴긴 했어도, 이건 내 일이고 난 너한테 도와달라고 한 적 없어.”
그 말을 들은 조운의 표정이 비참해졌다. 말한 공손찬이 깜짝 놀랄 정도로.
“제가...”
“조운.”
공손찬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날 좋아해?”
“예.”
대답은 즉각,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나왔다.
“언제부터?”
“공손찬님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요.”
공손찬은 잠시 말을 잃었다.
“왜?”
공손찬이 물었다.
“아니, 보자마자 알 수 있는 건 겉모습 뿐이잖아. 정말 그것 만으로 사랑이... 돼? 첫눈에 반한다는 게 있는 거야? 아니 그 이전에.”
공손찬이 이마를 짚었다.
“그거, 확실해? 사랑인 거? 첫눈에 반한건지 어떻게 알아? 난...”
“...공손찬님까지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조운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제가 비록, 아니 처음 본 순간 알 수 있는 게 외모 뿐인 건 아니잖아요, 외모란 것도 원래 본인이 가꾸거나 꾸민 결과물이고 말이라던가 태도라던가 판단 근거는 얼마든지 있다고요. 제가 보는 공손찬님은 강하고 용감하고 자기 확신이 있지만 독선적일 정도는 아니고 자기 사람들을 돌볼 줄 알고 공부도 무술도 열심히 노력해서 성취하는 걸 좋아하고 잘못된 일에는 분노할 줄 아는 분입니다.”
공손찬이 입을 딱 벌렸다.
“너, 너무 좋은 점만 말했잖아.”
“고백하는 참이니까요. 단점도 말할까요?”
“아니.”
말해보라고 하면 정말로 말할 것 같아 공손찬은 서둘러 말을 막았다.
“그래서 공손찬님은 절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조운이 물었다. 공손찬은 당황했다.
“아.... 난.....”
그가 고민했다. 그러나 지금 적당히 모면하거나 포장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난.... 좀 혼란스러워.”
“네?”
“너랑 있으면, 좋거든. 즐겁고 마음도 편하고.”
조운이 얼굴 뿐 아니라 전신으로 빛을 뿜었다. 공손찬은 다시 한 번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음. 그게 그래도 첫눈에 반했다고 하기엔 이것저것 생각이 많이 들고 내가 너랑 사귀고 싶은 건지 데리고 다니면서 같이 놀고 귀여워하고 싶은 건지.. 아, 아니 귀여워하는 게.”
공손찬의 얼굴이 붉어졌다.
여기까지 솔직하게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게다가 조운에게 느끼는 이해할 수 없는 친밀감에 대해 조운에게 추궁하는 것도 이상했다. 이건 자기 감정인데 왜 스스로 파악 못하고.
그러는 사이 조운이 그에게 다가와 가볍게 손을 잡아 들어올려 손등에 입맞추었다.
“공손찬님이 원하시면 얼마든지 데리고 다니며 귀여워하셔도 되고말고요.”
“아...”
“감정에 확신이 없으시면 그대로 괜찮으니까, 한 번 데리고 다녀보시는 건 어떨까요?”
조운이 활짝 웃었다. 여기까지 해버리면 거절할 말도 없었다. 공손찬은 입만 뻐끔뻐끔 하다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공손찬님.”
조운이 감격한 얼굴로 공손찬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응, 저, 나 그럼 먼저 도원관에 갈게.”
공손찬이 슬금슬금 후퇴했다.
“데이트는 어디가 좋을까요. 놀이공원 좋아하세요?”
“응, 그래. 괜찮을 것 같아.”
“그럼 이번 주말에 가요.”
“그래. 그때 보자.”
후다닥 도원관까지 도망오고 나서야 공손찬은 조운도 도원관에서 살고 있으며 그러니 이건 전혀 제대로 된 도망이 아님을 깨달았다.
‘어쩌지.... 미쳤어 미쳤어.’
조운에게 고백을 받아버렸다. 심지어 승낙해버렸다.
조운하고 라면 사귀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공손찬이 도장 구석에 매달린 샌드백에 머리를 박았다. 이걸 어째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공손찬 일찍 왔... 거기서 뭐해?”
유비가 나와 공손찬을 보았다.
“조운이 고백했어...”
“그, 그래서? 찼어?”
공손찬이 고개를 들어 유비를 보았다.
“찼으면 좋겠어?”
“그.... 그건 아니지만...”
유비가 우물쭈물했다.
“그럼 안 찬 거야? 조운이랑 사귈 거야?”
“....일단은.”
감정이 확실해질 때까지 ‘시험 삼아’ 같이 다니기로 했고, 주말에 약속도 잡았다.
“사귀는데 일단은이 뭐야.”
유비가 입을 비죽거렸다. 공손찬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왜...”
“너랑 제갈량은 오래 알고 지냈지.”
“응, 그, 그렇지.”
“언제부터 서로 좋아한다고 알았어? 그런 쪽으로 좋아하는 거.”
유비에게 연애 상담을 하려니 패배감이 들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어....”
유비가 공손찬의 눈길을 피하며 멈 눈을 했다.
“제갈량이랑 좀, 어, 오해가 생겨서 한동안 말을 못했거든.”
“싸웠어?”
“싸운 건 아닌데 오해가 있었어. 그래서 제갈량을 못 보게 되니까, 너무너무 보고싶은 거야. 그래서 보고 싶다고 울며.... 전화를 했더니 나 때문에 바보가 옮았다고 책임 지래서, 책임 지겠다고 했어.”
“...아침에 널 볼 땐 세상 제일 사랑스러운 걸 보듯이 하더니.”
공손찬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내가 바보인 건 사실이니까 어쩔 수 없지 뭐.”
유비는 헤헤 웃었다.
“제갈량이 받아줬으니까 됐어.”
“응....”
역시 별 참고는 안 되었다. 공손찬이 한숨을 쉬고 똑바로 섰다. 잠은 흔적도 없이 달아나 뭘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요새 공부한다고 집안일에 소홀했는데 그거나 해야겠다.’
“지금 뭐 할 일 있어? 청소나 장보기나...”
“아까 관우가 청소 했어. 장비가 빨래 해서 널었고, 장보는 건 황충이 들어오면서 사온다고 했고.”
식구나 느니까 집안일 분담할 사람이 늘어서 그건 참 좋았다. 할 수 없이 공손찬은 방에 들어가서 수학 문제집을 꺼냈다. 이거면 금방 도로 잠이 오거나 적어도 조운 생각은 쫓아줄 것이다.


내게 사실을 말해봐 13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모두 밥 먹어~~ 아침밥 다됐어!”
해가 뜨기 무섭게 유비의 목소리가 도원관에 울렸다.
오호대장군이 하나둘 눈을 떴다. 어제 술판이 벌어졌던 황충의 방에 포개져 자고 있던 그들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내두르며 기지개를 켰다.
“형님은 괜찮으신가보군... 어제는 좀 걱정했는데.”
“일찍 술자리를 빠져나갔으니까 괜찮겠지. 아, 머리야.... 목말라....”
조운이 술상 위를 더듬거렸으나 거기에 액체라곤 남은 술 밖에 없었다.
“기분 좋으신 것 같아.”
마초가 말했다.
“거봐. 술 마시면 기분 풀린다고.”
장비가 흐뭇해했다.
“늦으면 소시지 야채볶음이 그냥 야채볶음이 되버려~ 빨리 와~”
재촉하는 유비의 부름에 일어나 방을 나가려던 다섯 명의 움직임이 잠시 멎었다.
“소시지.... 야채볶음?”
“그놈 온 건가!”
“우리가 술 취해 무슨 짓 할까봐 감시하러 왔나보군.”
관우가 얼굴을 찌푸렸다.
“우리는 애도 아니고 술 마시고 행패부리는 무뢰배도 아닌데 제갈량은 대체....”
“뭐, 큰형님 보고 싶어 우리 핑계 댄 거지.”
장비도 투덜거리며 방을 나갔다.
“얼른 가서 그놈의 소시지를 내가 다 먹어버려야.....”
계단을 다 내려와 식탁을 보고 장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고기 반찬이 푸짐한 건 제갈량이 왔으니 그렇다 치고, 이미 자리에 앉아서 얄미운 표정으로 소시지를 썰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제갈량이 자리에 없었다.
“얼른 와 앉아. 숙취는 어때? 콩나물국 끓였으니까 어서 먹어.”
유비는 평소보다 배로 방긋방긋 웃으며 다섯 동생들을 식탁으로 불렀다.
“공손차안, 오늘 이교시이~”
“알고 있어....”
공손찬이 하품을 하며 방에서 나왔다.
“또 밤샜어?”
“샌 건 아니고...... 중국어 오늘 단어시험 본 댔단 말이야. 아 왜 2외국어가 필수인 거야....”
공손찬이 나오는 모습을 보던 조운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분명 어제와 뭔가 다른 점이 있었다.
공손찬이 아니라 도원관에.
다들 나온 걸 확인한 유비가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제갈량~~ 아침 다됐어~ 먹으러 나와~~”
유비가 유난히 청량하고 큰 목소리로 노래하듯 불렀다. 그리고 공손찬 방문 옆에, 분명 어제는 없었는데 예전부터 있었던 방문이, 달칵 열렸다.
“네...”
제갈량이, 평소와는 달리 코트 없이 나타났다. 검은 바지에 흰 와이셔츠만, 그것도 셔츠 단추 하나가 열려 있어 예전에 늘 꼭꼭 싸맨 느낌이던 인상이 자연스럽게 풀어져 보였다.
누가 봐도 자고 나온 모습에 오호대장군은 모두 입을 딱 벌렸다. 그러나 그들의 경악이 커도 공손찬 만큼은 아니었다.
“제갈량.....이 왜 거기서 나와?”
공손찬이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제갈량은 아주 태연한 표정으로 비어있던 유비 옆자리에 와 앉았다.
“유비 방은 좁아서 둘이 쓰긴 힘들거든.”
공손찬이 입을 딱 벌렸다.
“동거? ...사귀자마자?”
“응.”
제갈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세는 낼게.”
자기가 방 만들어서 자기가 방세를 내고....라고 장비가 중얼거렸으나 다행히 공손찬에겐 들리지 않았다.
“아, 아니.... 유비 애인한테 방세를 받을 수는 없지.... 근데 정말 사귀는 거야? 애인으로? 심지어 동거... 면 같이 이미.”
공손찬의 얼굴빛이 빨개졌다. 그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미안해. 방금 말은 잊어줘.”
“그럴게.”
제갈량이 관대하게 말했다.
그리고 공손찬이 유비에게 눈을 돌렸다.
“너......”
“제갈량이 잘생겨서 사귀는 거 아니야!”
유비가 소리쳤다.
“제갈량이 좋은 거야, 제갈량의 얼굴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게 된 제갈량이 만난 중 최고 미인인 건 어디까지나 우연이고 난 얼빠가 아닌...”
“아닌가요?”
제갈량이 물었다.
“응! 아냐!”
유비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아쉽네요. 얼빠였으면 좋았을 텐데.”
“난 제갈량의..... 응?”
유비가 어리둥절했다.
“그게 뭐가 좋은데?”
“얼빠라서 내가 좋은 거면, 앞으로도 바람피울 걱정은 없는 거잖아요.”
유비를 제외한 모두가 제갈량을 흰 눈으로 흘겼다. 물론 제갈량은 꿋꿋하게 모른 척 했다.
“제갈량, 근데 왜 유비에게 존댓말 해?”
공손찬이 물었다.
유비 및 오호 대장군은 모두 깜짝 놀랐다. 제갈량이 하도 태연해서 무슨 신선도 자연스러워 보이는 필터 같은 거라도 걸려있나 했는데 아니었다니. 이대로 정체를 들키고 드림배틀에 대해 털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 모두 긴장해서 제갈량의 변명을 기다렸다.
“너도 알겠지만, 내가 좀 성격이 나쁘고 남 화나게 하는 말을 많이 하잖아.”
“응, 그렇지.”
“그렇지만 애인.... 상대로는 좀 더 부드럽게 대하고 싶거든.”
마치 애인이라는 말을 쓰는 게 부끄럽기라도 한 것처럼 제갈량이 조금 얼굴을 붉혔다. 오호대장군들은 가증스러움에 치를 떨었다.
“그래서, 말버릇은 쉽게 고치기 힘드니까, 존댓말을 쓰면 좀 예의바른 말이 나올까 해서.”
“이야.....”
공손찬이 감탄한 눈으로 제갈량을 보았다.
“응, 그래. 너 참사랑 인정할게. 유비가 부족한 점이 많은 바보지만 잘 데리고 살아줘.”
공손찬이 유비의 손을 들어 제갈량에게 쥐어주었다. 제갈량이 세상 상냥한 표정으로 공손찬에게 웃어주었다.
“고마워.”
“제갈량이 날 데리고 사는 거야? 내가 제갈량을 데리고 사는 게 아니고?”
“서로 데리고 사는 거죠.”
제갈량이 생긋 웃으며 유비의 손을 꼭 쥐었다. 유비도 얼굴이 붉어졌다.
“자아, 어서 밥을 먹읍시다!”
장비가 소리쳤다.
“그래, 식기 전에 먹자고.”
관우도 찬성했다. 그리고 말은 그렇게 했어도 둘 다 먼저 수저를 못 뜨고 유비를 쳐다보았다.
“응, 먹자!”
유비가 먼저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자마자 장비가 잽싸게 젓가락을 뻗어 소시지 야채볶음에서 소시지 세 개를 단번에 채갔다.
막 젓가락을 든 제갈량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가 장비를 노려보았다. 장비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우물우물 소시지를 먹은 뒤 다시 젓가락을 뻗었다.
“자, 장비. 여기 장조림도 먹어봐.”
유비가 어설프게 중재를 시도했다. 장비는 장조림을 집고, 젓가락 끝으로 소시지도 씰러 둘 다 가져가는 것으로 대응했다.
“....아무래도.”
제갈량이 입을 열었다.
“서열정리가 또다시 필요한 모양인데.”
그 말에 오호대장군 모두가 움찔했다. 제대로 공격 한 번 못해보고 전부 일격에 나가떨어진 그 굴욕적인 패배는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장비가 슬며시 공손찬을 보았다. 그를 대련의 참관인으로 끌어들인다면 마법 사용을 막을 수 있었다.
공손찬 옆에서 조운이 입으로 ‘안 돼’라고 말했다. 공손찬을 끌어들인다고 해서 제갈량이 다른 술수를 안 부릴 리가 없으며 설령 이번 한 번은 어떻게 이긴다 해도 후환이 두려웠다.
용맹보다 지략보다 전장에서 중요한 건 운이었다. 그 운을 조정할 수 있는 옥새의 신선과 싸우는 건 어떻게 봐도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공손찬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제갈량과 장비를 보았다. 좀 이상했다. 유비와 ‘남매 같은’ 공손찬에게는 처음부터 존댓말 쓰고 깍듯이 대해놓고 유비의 애인 상대로는 심술을 부리려는 모양이.
‘설마, 장비도 유비를...’
“저, 공손찬님 2교시인데 식사 서두르셔야죠.”
“아.”
조운의 재촉에 공손찬이 부지런히 밥을 퍼넣었다. 그리곤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메고 나왔다.
“필요한 건 다 챙겼어?”
제갈량이 물었다.
“빼먹은 건 없는지 한 번 확인하지 그래?”
달려 나가려던 공손찬이 멈칫하더니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작은 수첩을 손에 들고 다시 뛰어나갔다.
“고마워.”
공손찬이 수첩 든 손을 흔들었다.
“시험 잘 봐.”
그리고 제갈량이 고개를 돌리지 조운이 소시지 볶음을 그릇째 제갈량 앞으로 밀어놓았다.
“야, 너 치사하게.”
장비가 투덜댔다.
“공손찬님을 위해서라면 치사해질 수 있다.”
조운은 당당했다.
“이제 유비님도 찬성하신다고. 더 이상 거칠 게 없어!”
제갈량이 유비를 쳐다보았다.
“찬성하기로 하셨어요?”
“어....응.”
유비가 슬쩍 제갈량의 눈치를 보았다. 취해서 한 말이지만, 그렇게 얼버무렸다간 역시 취해서 한 고백이 어찌될까 무서웠다.
“주유 문제는 해결됐고?”
장비가 아픈델 찔렀다.
“윽, 그게....”
조운이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어제는 호기롭게 사실대로 말하면 된다고 큰소리쳤지만 술 깨고 다시 생각해보면 조운이 주유한테 반했다고 생각하자 바로 주유에 대해 알아다주고 응원하는 건 조운에게 마음이 있는 사람이 할 행동이 아니었다.
“나.... 남자로 안 보이는 걸까...”
“공손찬님이 꼭 남자를 좋아하실 거라고 속단할 수도 없지 않나?”
황충이 말했다. 유비가 입을 딱 벌렸다.
“그럴....... 리.......... 음, 찬이는 언제나 여자애들한테 인기 많았고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렛도 받고 그러긴 했는데....”
조운이 그새 소시지를 다 먹고 일어나려는 제갈량을 붙들었다.
“제갈량, 나 여자 몸으로 바꿔줘!”
“진정해.”
제갈량이 조운의 이마에 딱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서 공손찬이 그 여자들 중 누구랑 사귄 것도 아니잖아.”
“어....”
“우선 주유 건 해명이나 하면 어때? 공손찬이 정말 여자가 좋다고 하면 그 때..”
제갈량이 조금 망설였다.
“그때 조치해줄게. 그러니 빨리 고백해버려.”
“응!”
조운이 벌떡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곧 가방을 짊어지고 내려왔다.
“저도 학교 가보겠습니다!”
조운이 씩씩하게 달려나가버렸다.
“...진짜 진심인가보네.”
유비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유비님, 저도 이제.”
“아, 그래.”
유비가 일어나서 제갈량의 얼굴을 감싸 잡고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잘 다녀와, 너무 힘들게 일하지 말고.”
“네.”
제갈량이 눈꼬리를 휘며 달콤하게 웃었다. 그리고 ‘자기방’으로 들어갔다.
“그냥 위장용 방이 아니라 아예 선계로 통하는 겁니까.”
관우가 물었다.
“딴 사람이 열면 그냥 방이야.”
유비가 말했다.
“언제 올까. 아, 옥새의 신선도 휴가 받았으면 좋겠다...”
무슨 새댁 같다고 생각했지만 관우는 입밖에 내지 않았다.
“도장 열 준비를 하겠습니다.”
“아, 그래. 같이하자.”


내게 사실을 말해봐 12 ㅣ- 레히삼&삼국지 전반

황충과 장비가 궤짝으로 들고 들어오는 술의 양을 보고 유비는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저, 저걸 다 마신다고?”
“장정이 여섯이나 있으니 이 정도는 필요한 것 아닙니까.”
황충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어떤 술이 좋은지 아직은 몰라서 일단 파는 술은 다 여섯 병씩 달라고 했더니 이렇게 주더군요.”
황충은 하하 웃었다. 유비가 술병을 꺼내보았다.
다행히 정말로 모든 술이 여섯 병씩 있는 건 아니었다, 큰 슈퍼마켓이라고 해도 양주는 두어 병 있는 게 고작이니까.
그렇긴 해도 다양하고 또 많았다.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 하는 거라며 19세 생일날 사부님이 따라준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긴 이후 생전 술이라고는 고기나 생선 요리할 때 밖에 써본 적 없는 유비는 긴장해서 마른침을 삼켰다.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 하는 거다.
유비에겐 이 다섯 명의 몸만 큰 어린애들에게 제대로 술 마시는 법을 가르칠 의무가 있었다. 제갈량한테 부탁받은 일이다. 도망치거나 허투루 할 수는 없었다. 이들이 술 마시고 사고 치면 제갈량의 일이 늘어나는 거고 바빠지면 잠깐 식사하러 도원관에 올 시간도 없게 된다.
어차피 지금도 안 오긴 하지만.
사라지려는 의욕을 꽉 다잡으며 유비가 각오를 다졌다. 술을 가르친대 봐야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적당히 취하도록 술을 먹이고 심하게 주정하거나 바보짓 하지 못하게 감시하다 재운 뒤 다음날 아침에 콩나물국을 끓여주며 술을 너무 많이 마시면 건강에 해롭다고 설교를 해주면 된다.
‘좋아, 하자!’


“미아내...... 내가, 사회 경험이 없어서.........”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고 유비가 울먹거렸다.
“너희들 다 훌륭하게 키워야 하는데.... 이것저것 다 도와줘야 하는데....”
“우리 여기서 더 크면 도원관 천장이 안 괜찮을 것 같은데요.”
장비가 실없는 말을 지껄였다 관우에게 팔꿈치로 찔렸다.
“형님, 저희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형님께서 미안해하실 건 조금도 없습니다.”
“그래도, 황충한테도 마초한테도 별로 해준 게 없고....”
유비가 흐린 눈을 들어 조운을 보았다.
“조운도, 응원을 해줬어야 했는데. 비밀 좀 있음 뭐 어때, 둘 다 인간인데.”
조운이 반색했다.
“그렇죠? 유비님 생각에도...”
이번엔 장비가 조운의 옆구리를 찔렀다.
“많이 취하셨습니다.”
황충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잠시 찬바람이라도 쐬며 쉬다 오시면 어떻습니까.”
“응, 그래.”
유비가 일어났다. 비틀거리는 걸 관우가 재빨리 부축했다. 유비가 혹 발이라도 헛디딜까 걱정스러워 그가 계단까지 유비를 배웅했다.
“괜찮아, 나 괜찮으니까 관우도 들어가서 더 마셔.”
“네, 형님.”
그러고도 관우는 유비가 계단 끝까지 무사히 내려가는 걸 보고 술자리로 돌아왔다.
“큰형님 대체 얼마나 드신 거지?”
청주를 대접에 부어 벌컥벌컥 마시던 장비가 들어오는 관우에게 물었다.
“글쎄, 저 소주라는 술을 반 병 정도 드신 것 같은데....”
마초가 마신 술보다는 남은 술이 더 많은 술병을 가져다 킁킁 냄새를 맡았다.
“별로, 독한 술은 아닌 것 같은데.”
“큰형님 보기보다 술이 약하시구만.”
장비가 입맛을 다셨다.
“에이, 가끔 같이 마시자고 할랬는데 이래선 어렵겠네.”
“뭐 술은 건강에 해롭대잖아. 안 받으면 안 마시면 되는 거 아니겠어.”
조운이 속편한 소리를 했다.
“하, 유비님도 참, 나랑 공손찬님 사이 응원해주실 거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해주셨음 되는데. 술을 드시고 나서야 본심이 나오다니.....”
오랜만에 희소식이라 조운은 희희낙락했다.
“주유 문제는 어쩌려고 그러나.”
관우가 물었다.
“어쩌긴, 주유를 쳐다본 건..... 음, 내가 예전에 알던 사람하고 닮아서고 내가 사랑하는 건 공손찬님뿐이라고 말씀드려야지. 사실대로.”
“사실대로라.”
“사실 맞아. 내가 알던 주유는 신선이고 지금 이... 주유는 인간이니까, 다른 존재라고. 겉모습이 비슷하고 성격이 비슷할 뿐이지 존재 기반 자체가....”
“사실이라...”
황충이 무거운 기색으로 위스키를 다시 잔에 따랐다.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
“왜 못해?”
“아무래 그래도 일반인이 읽을 입사 지원 서류에다 ‘저는 엄한 신선과 자애로운 주군 사이에서 영웅패로서 함께 드림 배틀에 뛰어들어 주군을 우승시키고 인간이 되었습니다.’라고 쓸 수는 없지 않나.”
“으앗 그거 대체 뭐야아-”
조운이 술상을 두드리며 웃었다.
“어디 지원하는데?”
마초가 물었다.
“형주 폭죽에 들어갈까 해서...”
황충이 말끝을 흐렸다.
“유기님이 하시는 업무는 옆에서 보곤 했으니 인간의 일에 익숙지 않은 나라도 심부름 정도는 어떻게든 해낼 수 있지 않겠나.”
“아.....”
“뭐야, 다들 옛 주군 쫓아가버리는 거야?”
장비가 술을 대접에 콸콸 붓더니 단숨에 꿀꺽꿀꺽 마셔버렸다.
“거 따라갈 옛 주군 없는 사람은 서러워 살겠나.”
“자네의...”
황충이 말도 꺼내기 전에 조운이 그를 팔꿈치로 찔렀다.
“좋겠네, 모두 주군하고 사이가 좋아서. 난....”
“아우도 형님과 사이가 좋지 않나.”
관우가 그의 말을 끊었다.
“나도 따라갈 옛 주군이 없지. 아우나 나나, 천생 도원관에 뿌리박아야 할 것 같으이.”
“...작은 형님.”
“형님께 폐가 될까 싶어, 나도 뭔가 나가서 할 일이 없을까 고민해보기도 했지만.”
관우가 장비에게 싱긋 웃어보였다.
“아무래도 형님은 우리를 귀여운 아이로 생각하시는 듯 하니, 좀 더 의지하고 응석을 부려드리는 것도 좋을 것 같네만. 아우는 어찌 생각하나.”
“...것도 나쁘지 않겠네.”
장비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래, 우리 큰형님은 사람이 너무 무르니까, 두 명 쯤은 옆에 딱 붙어서 지켜드려야지.”
“나라고 어디 가는 건 아니다 뭐.”
조운이 한마디 했다.
“공손찬님이 도원관 떠나실 생각 없으니까 나도 안 떠나.”
“그래그래.”
장비가 조운의 등을 펑펑 쳤다.
“나도 도원관을 떠날 생각은 없네.”
황충이 말했다.
“설령 언젠가 나가 살게 된다고 해도, 우리 모두 한식구인건 변하지 않아.”
“맞아.”
마초도 맞장구쳤다.
“그래그래, 우리 큰형님을 위해 건배하자고!”
장비가 술대접을 들어올렸다.
“우리 유비님을 위하여!”
“위하여!”


관우 말대로 찬바람을 쐬기 위해 유비는 도원관 뒤뜰로 나갔다.
“하아....”
이제 슬슬 봄이 짙어져 가도 밤바람은 아직 차가왔다.
언제부터인지 잠시 쉬거나 생각할 게 있으면 꼭 뒤뜰로 나오게 되었다. 서늘한 공기가 정신을 맑게 해준다고 스스로에 핑계대기도 했지만 실은 알고 있었다, 자기가 왜 이러는지.
유비는 몸을 떨며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선계와 인간계는 다른 공간이라고 했다. 차원 중첩이 어쩌고 하며 제갈량이 설명해 준 적이 있지만 유비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여기서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저 별 중 가장 어두운 별 만큼도 옥새는, 제갈량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만 알뿐이었다.
“보고 싶어....”
올려다봐서 볼 수 있는 거면 좋을 텐데. 크고 비싼 망원경을 사서라도 계속 보고 있을 텐데.
“제갈량 보고 싶어...”
눈물이 났다. 이러지 말아야 하는데, 일하는 신선 방해하면 안 되는데 지금까지 잘 참아왔는데 지금은 어째 도저히 참아지질 않았다.
“보고 싶어. 제갈량이 보고 싶어. 내려와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도원관에서 식사를 같이 했으면 좋겠어.”
한 번 말하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가 없었다. 절대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꽁꽁 감춰놨던 바람들이 입 밖으로 줄줄이 튀어나왔다.
“같이 대화하고 싶어. 나만 혼자 이러고 혼잣말 하는 게 아니라 제갈량이 눈앞에서 들어주고 제갈량도 내게 말을 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끓인 커피를 마시고 내가 한 밥을 먹고 저녁 먹고 나면 소파에 기대앉아서 수고했다고 말도 해주고 나랑 같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유비는 계속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제갈량이 일 많이 안 했으면 좋겠어. 도원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여기서 했음 좋겠어. 시간 내서 나랑 놀 수 있었으면 좋겠어. 같이 꽃놀이 가고 싶어. 도시락 싸서 소풍가고 싶어. 여름엔 계곡 가서 물놀이하고. 같이 수박 먹고. 가을엔 단풍 구경도..... 아, 제갈량은 등산 싫으려나.”
유비가 눈물이 흐르는 그대로 입을 당겨 웃었다. 눈물이 입술 가장자리를 타고 입안으로 들어갔다.
‘짜.’
신선은 인간이 아니다. 신선은 인간이 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신선도 눈물을 흘린다. 제갈량과 유비는 서로를 위해 눈물을 흘렸는데. 그걸론 안 되는 걸까.
유비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만 한참 뻐끔거리다 포기하고 제갈량은 유비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왜 진작 그렇게 소원을 빌지 않았냐고 화내고 추궁하고 싶었다. 말했으면 내려왔을 텐데. 바쁜 건 거짓이 아니니 같이 꽃놀이 가고 등산 가는 건 아직 어렵지만 잠깐 내려와서 커피 마시고 대화 하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무릎베개하고 머리 쓰다듬어주며 오늘도 수고했다고 말해줄 수도 있었다.
말만 하면 되었는데, 마음 속으로 원하기만 해도 되었는데.
“왜....”
간신히 나온 목소리는 목이 쉰 듯 탁해져있었다.
“소원을 듣지 말라고 한 겁니까?”
유비의 등이 흠칫했다. 그러고 한참이나 그대로 가만히 있어서, 제갈량은 그가 자기 목소리를 못 들었든지 자기가 목소리를 못 내었나보다고 생각했다.
용기는 바닥이 났으나 그렇다고 여기 계속 서있을 수도 없었다. 그에겐 할 일이 있고 ‘오호대장군이 술 마시고 난동을 부릴지도 모르니 가까이서 지켜보자’는 명분도 이미 효력을 다했다. 그가 헛기침을 하고 목소리를 키웠다.
“유비님...”
“제갈량?”
유비가 고개를 돌렸다.
“진짜...야?”
“네.”
제갈량이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진짜 접니다. 유비님이 방금까지 그렇게 간절히 부르시던....”
그가 고개를 돌려 유비를 외면했다.
“...제갈량이 저 맞습니까?”
유비가 튕겨 일어나 제갈량에게 덤벼들 듯 다가와 그를 꽉 끌어안았다.
“윽.”
숨이 막힐 정도로 힘껏 끌어안기고 제갈량이 낮게 신음했다. 그렇게 큰 소리도 아니었는데 유비가 즉시 제갈량을 놔주고 물러났다.
“괜찮아, 제갈량? 내가 너무 세게 안아서.... 아니면 원래 어디 안 좋았던 건.”
“아닙니다.”
제갈량이 서둘러 말했다.
“작은 소리였는데 잘도 들으셨네요, 아까 말한 건 못 들으시더니.”
역시 자기가 목소리를 못 낸 거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제갈량이 우선 쏘아붙였다.
“아까? 혹시 왜 소원을 듣지 말라고 했냐고... 물은 거?”
유비가 제갈량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바로 그거요.”
“정말 제갈량이 물은 거였어?”
“네. 그러니 대답을 해주세요.”
내친 김에 제갈량이 유비를 압박했다.
“어.... 그치만.....”
“말 못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제갈량은 조금 울컥했다. 그 소원 때문에 그는 유비를 혼자 바라보는 것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 모르는 존재도 아니고 신선이라고는 하나 한때 늘 같이 지내며 조금은 친해졌다고도 할 수 있는 상대에게 속내를 읽히는 건 싫은 게 당연하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좌절감과 배신감에 속이 쓰렸다. 자기가 뭘 요구한 것도 아니고, 유비의 삶에 끼어들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의 소원이나 좀 보고 들어주겠다는데, 그걸 하지 말라고 해놓고 이제 와서.
“나, 그런 소원 빈 적 없는데?”
유비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정말이야, 제갈량더러 내 소원을 듣지 말라니. 그런 소원을 대체 왜 비는데?”
“그런데 비셨습니다. 그것도 매우 간절하게 온 힘을 다해서.”
제갈량이 말했다.
“저도 이해가 안 갑니다. 보통은 소원을 들어달라고 하거든요? 이뤄지지 않을 소원이라도 듣기만이라도 해달라고 바라는 사람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그런데 웬만한 건 다 이뤄주고 싶은 상대는 도리어 자기 안 봤으면 좋겠다고 그러니....”
제갈량이 입을 다물었다. 해선 안 될 말까지 너무 많이 말해버렸다.
“....제갈량....”
유비가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표정을 했다.
“설마..... 나, 좋아해?”
제갈량이 휙 돌아섰다. 수치심에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실망하셨나요?”
제갈량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유비님이 세상을, 꿈을 맡긴 신선이 고작 이런 놈이라서?”
“무, 무슨 소리야!”
유비가 달려가 제갈량의 팔을 잡고 돌려세웠다.
“내가 왜 제갈량한테 실망을 해? 제갈량....”
그가 울어 빨개진 눈으로 활짝 웃었다.
“제갈량이 날 좋아한다는데!”
유비가 제갈량을 부둥켜안았다.
“나도 좋아해, 제갈량. 그래서 같이 있고 싶어. 자주 만나고 싶어. 그치만 그럼 안 된다고 생각했어. 제갈량은 지금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 내멋대로 보고 싶다고 소원을 빌어서 귀찮게 하면 안 된다고. 그래서....”
유비가 몸을 조금 떼고 제갈량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미안해. 내가 바보라, 몰랐어. 제갈량도 날 좋아할 거라고 생각을 못했어.”
그가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그동안 쭉, 오호대장군 가까이서 돌봐주고, 내가 바보 같은 질문 해도 와서 대답해주고, 그랬는데. 바쁜데도 틈을 내서 만나러 와준 거였는데, 그런 것도 눈치 못 채고.”
유비가 헤헤 웃었다. 제갈량은 맥이 탁 풀렸다.
“그럼.... 소원 보지 말라고 간절히 바랐던 건..... 절 보고 싶다는 마음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나요.”
“그랬나봐. 그런 소원 빈 적은 정말 없지만.”
“꼭 입 밖에 내지 않아도 무의식중에 마음을 들키기 싫다고 강하게 바랐던 것이겠지요..... 하아.”
제갈량이 힘이 빠져 유비에게 몸을 기댔다.
“책임져요.”
“.....응?”
“유비님이랑 지내다보니 바보가 옮았습니다. 그러니까 책임을 져주세요.”
“어.... 어떻게 지면 되는데?”
유비가 조금 겁먹은 표정으로 제갈량을 보았다. 제갈량이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이렇게요.”
제갈량이 유비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겹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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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단 하나라도 글이) 있는 건
슬레이어즈 (제르제롯, 제르리나)
아포크리파 제로 (플라제이, 알렉사피 위주 제이드 총수)
안젤리크 (수암 광암 위주 클라비스 총수)
강철의 연금술사(에드로이,하보로이 위주 대령총수)
해리포터(해리-세베루스)
엑스맨(스콧 서머즈)
유희왕(진유우기-카이바)
마비노기(루에타르)
테니프리(..포스팅참조 요망;;)
아이실드 21(히루마 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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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AO3계정입니다. 불펌 아니에요. http://archiveofourown.org/users/hicstans/pseuds/hicsta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