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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월당] 수학여행 ㅣ- 기타

Characters: 유단. 백란. 반월당 식구들.
Rating: PG
Warnings: 없음
Summary: 수학여행을 다녀온 유단이 선물을 잘못 사와 백란을 노하게 하다.



어느 대한민국의 고등학교가 홋카이도로 수학여행을 가냐고 하신다면 요괴와 천신과 기타등등이 사는 대한민국의 고등학교가 그런다고 답하오리다.





수학여행을 일본으로 가게 됐다고 발표가 났을 때, 다른 모두는 환호했고 유단은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난 안 가....”
한국에서 집 학교 반월당만 오가는데도 온갖 이상한 게 발에 채는데 귀신 많기로 소문난 동네에 제발로 가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억지로 애들하고 가까이 지내야 하는 것도 싫고 단체여행중이니 무슨 일이 생겨도 제대로 대처하기 힘들 거고 애들 휩쓸리는 것도 남의 수학여행 망치는 것도 싫고 정말 무슨 일이 생기면 도와줄 백란이 없는 것도 싫었다.
그러니 갈 수 없었다. 학교에서 꼭 가라고 하면 집에서 반대한다고 꾸미거나 어디 다친 척을 해서라도 빠져야겠다고 유단은 결심했다.


“네, 잘 다녀오십시오.”
빠질 방법을 의논하려고 수학여행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백란이 대답했다.
“다녀오라고? 할 말은 그뿐이야?”
백란이 유단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선물은 가볍게 과자 같은 게 좋겠습니다. 요새 그 쪽에 새로 맛있는 게 나왔다고 들었는데요.”
“과자?”
“예. 이름이 뭔가 하얗고 간지러운 느낌이었는데...”
솜사탕이라도 사오라는 건가, 라고 유단은 생각했다.
“아, 하얀 연인이었지요. 백연인이라고 한자로 써 있으니 읽을 수 있을 겁니다. ...한자 읽을 수 있는 것 맞지요?”
“그 정돈 읽을 수 있어. 근데 그거 굉장히 오래 전에 나온 과자 같은데?”
자세히는 모르지만 꽤 옛날 만화에 언급된 걸 본 적이 있다.
“그러고보니 들은 지 한 사십 년 된 것 같네요.”
“사십... 아 그래 천 년 묵은 여우에겐 그 정도는 잠깐이겠지.”
안지 그렇게 오래 되었으면 직접 사다 먹으라고 투덜거리다 문득 유단은 백란이 X레이 검색대를 지나면 어떻게 찍힐지 궁금해졌다. 눈 앞엔 사람 모양이 걸어가는데 화면엔 여우가 종종 지나가서 보안 직원이 기겁을 하게 된다거나...
“뭔가 매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표정이로군요.”
백란이 말했다.
“차도 좋겠지만 당신 안목으론 제대로 된 걸 살 수 있을 리 없으니 양보한 건데, 역시 안되겠습니다. 과자 하나 제대로 못 사오는 꼴을 보느니 이름을 정확히 적어주는 게 좋겠군요. 쪽지를 내미는 정도는 다섯 살짜리도 할 수 있습니다.”
“대체 날 어디까지 바보취급 할 거야. 아니,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라. 난 가기 싫다고!”
그 말에 백란 뿐 아니라 서재의 책과 도자기들까지 유단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직 성인도 되지 않았는데 외출을 그렇게 싫어하면 못씁니다.”
“네가 할 소리냐?”
“수학여행이란 건 고등학생이면 누구나 가는 것 아닙니까. 제게 선물을 사오기 싫다는 이유로 학교의 행사조차 참여하지 않으려 들다니....”
“그런 게 아니라!”
유단이 소리쳤다.
“안 그래도 일본은 귀신이 많다고 하잖아. 내가 갔다가 어떤 문제에 휘말릴지...”
“걱정 마십시오. 단체 관광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다른 애들이 휘말릴 우려도 있고.”
“산 인간의 기운보다 강한 건 없습니다.”
백란이 말했다.
“그것도 한창 때 남자아이들 수백 명이 모여서 소리 지르고 떠들 것 아닙니까, 잡귀는 고사하고 웬만큼 강한 요괴도 가까이 가길 꺼릴 겁니다.”
“....그런가.”
확실히 남고생들이 우글우글 모여있는 걸 상상하니 요괴는 고사하고 인간도 가까이 가기 싫을 것 같은 이미지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그렇게 늘 괴이에 휘말렸는데도 학교 내에서 문제가 된 것은 거의 없었던 걸 생각하면, 괴담이 그렇게 많은 것 치곤 학교는 안전한 곳인지도 모른다.
“...그럼 그냥 가도 되겠네.”
유단은 안심했다.
“네. 그리고 덕분에 여기도 며칠은 조용할 것 같군요.”
“알았어. 간다 가.”
그러고 내려오자 나머지 요괴들이 득달같이 달라붙었다.
“선물 뭐 사올 거야?”
“거기 나무 나이테같이 생긴 케이크가 맛있다고 하더구나.”
“가끔은 특이한 술을 마셔보는 것도 좋겠지. 거기도 곡주가....”
“나 미성년자라고! 술 못 사!”
유단이 도망가려다 당근을 밟고 넘어졌다. 그가 당근 요괴를 집어들었다.
“너도 뭔가 사다줘? 아니 말하지 마. 암것도 안 사올 거야.”
당근이 아쉬운 태도로 축 처졌다.
유단은 기가 막혔다. 백란이나 흑요 도씨 채우 채설까진 그렇다 쳐도 당근한테 무슨 선물이 필요하다고.
‘...설마 틈새 귀신이나 수려, 개구리 정승 등등까지 이러는 건 아니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수학여행 사실 자체를 비밀로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뭐 정 곤란하다면 우리 선물은 안사와도 괜찮다.”
도씨가 점잖게 말했다.
“다른 요괴들도 대부분 이해할게다. 전부 선물하긴 힘들고 누군 주고 누군 안 줄 수도 없을 테니. 그러니 딱 천호님 선물만 구해오고 나머지는 그만두도록 해라.”
그 말에 채우 채설도 시무룩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천호님만 받는다면 그건 이해할 수 있고.”
“맞아, 천호님이니까.”
“이건 오라버니 말씀이 맞구나. 네가 천호님 선물만 사온다면 그걸 뭐라고 할 요괴는 없을 거다.”
실망에 찬 표정으로 단체로 끄덕거리고 있으니 선물 사오라고 들들 볶는 것보다 차라리 더 호러였다.
“...나무 케이큰지 뭔지 사올게. 같이 나눠먹으면 되잖아.”


“대체 이런 게 뭐가 좋다고들 난리인거야. 전망대 같은 건 서울 남산에도 있는데.”
TV탑이라길래 TV를 잔뜩 쌓아놓은 설치미술 같은 건가 했는데 그냥 쬐끄맣고 빨간 에펠탑이었다. 앞에 문어 인형이 돌아다니는.
‘저런 아저씨 인형 같은 마스코트가 정말 팔리나?’
이런데까지 와서 전망대 올라가며 땀 뺄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유단은 설렁설렁 1층의 기념품점이나 둘러보았다. 온갖 과자와 아이스크림 사이에 휴대폰줄이 있었다.
‘...어.’
요새 스마트폰엔 다는 고리도 없는데 누가 저런 걸 산다고 쯧쯧하면서 보고 있는데 감자튀김 모형 옆에 여우가 있었다. 정말 여우는 물론 아니고, 엄지손톱만한 여우머리 아래 붓처럼 털이 가지런히 달려있는 휴대폰 줄이었다. 만져보니 부드러운 털이 사라락 손끝을 빠져나갔다.
“....귀엽네. 아, 아니, 이상하잖아. 머리에 바로 꼬리 달린 것처럼 생겼어.”
유단은 고개를 흔들었다.
여우는 귀엽지 않았다. 얼굴은 순진해보여도 사람 놀리고 괴롭히는 거나 좋아한다. 꼬리털이 부드러워봤자 만지게 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만지라고 들이밀어도 만질 생각 없지만.’
백란의 꼬리를 생각하니 그가 요괴 감기에 걸려 고양이가 되었던 때가 생각나려고 해서 유단은 서둘러 머리를 털어 기억을 지웠다. 자기는 여우꼬리 같은 거 만지고 싶지 않다. 그래야 했다.
다시 한 번 그 휴대폰줄을 만졌다. 부드러운 털이 느낌이 좋았다.
‘그래봐야 쓸 일도 없는 구식 핸드폰줄이야. 금방 털이 쑥쑥 빠질걸. 여우도 하나도 안 귀엽.... 아니 조금은 귀엽지만 게다가 비싸! 안 사, 저런 걸 왜 사!’


‘......이걸 왜 샀지?’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수학 여행이 끝나고, 반월당 대문 앞에 서서 유단은 여우 폰줄을 들여다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반월당 식구들에게 들키면 놀림당한다. 백퍼센트 백 년은 놀림당한다. 그렇다고 집에 숨겨두자니 또 어떤 잡귀가 이걸 발견해서 요괴계에 뒷소문이 쫙 퍼질지 모른다. 숨겨뒀다 들키는 게 가지고 다니다 들키는 것보다 더 쪽팔렸다.
대문이 벌컥 열렸다. 유단은 서둘러 여우를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안 들어오고 뭐하세요?”
채우가 수상하다는 눈으로 유단을 위아래로 살폈다. 시선도 차단할 겸 그에게 커다란 면세점 쇼핑백을 내밀었다.
“와, 여행선물인가요!”
“센베인지 뻥튀기인지 작은 게 잔뜩 든 거 샀으니까 잡귀들 나눠줘. 나무 케익은 여기.”
유단이 들어가 보니 무려 백란이 1층에 내려와있었다. 하얀 뭐시기가 그렇게 기대되나 유단은 어쩐지 빈정이 상했다.
‘그냥 쿠크다스라던데.’
“여기 말한 과자. 그리고 흑요 도씨 채우 채설 몫.”
백란 것만 사와도 된다고 했지만 그래도 한식구인 넷한테는 각자 몫을 줘야 할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똑같은 선물용 과자 상자를 하나씩 받아든 요괴들은 모두 기뻐했다.
“그 나머지는 없어. 이것도 과자 사러 일본 왔냐는 소리 들었다고.”
혼자만 과자류를 일곱 상자나 샀으니 그런 말 들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개구리 정승이 떠오르는 작은 유리 개구리도 안 샀고 수려신군이 아주 좋아할 것 같은 초코 감자칩도 안 샀다. 자기는 수학여행을 간 거지 과자 구매대행을 간 게 아니니까.
“차를 내오마.”
흑요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진한 녹차를 내왔다. 유단이 바움쿠헨 포장지를 풀려고 일어섰다.
“으악!”
그가 당근 쪼가리를 밟고 미끄러졌다.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크게 휘청였다.
“어이쿠, 조심.”
도씨가 그를 잡아주었다.
“하아, 집에 돌아오자마자 자빠지다니 여전하군요 정말.”
유단을 바보 취급할 기회가 생기자 백란에게 생기가 돌았다.
“멀리 가 있는 동안 정말 걱정했습니다. 여기서 사고치면 우리가 수습할 수나 있지 일본까지 가서 거기 요괴나 귀신들하고 싸우게 되면 외교 문제로 번질 텐데 어찌해야 좋을지. 운 좋게 싸우지는 않는다 해도 저렇게 어디서 자빠지거나 물건을 흘리고 다니다가....”
백란의 시선이 유단이 ‘흘린’ 물건에 가 박혔다. 유단이 후다닥 여우 폰줄을 주워들었다.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그건....”
“어, 그, 너 선물이야! 보니까 너 생각나서 샀어!”
유단이 백란에게 그걸 확 내밀었다.
‘아, 맞아. 이러면 되는데.’
쪽팔림을 피하기 위한 순간적인 기지였지만 이것이 꽤 그럴듯해서 유단은 좀 안도했다.
명색 모두가 입을 모아 백란 선물만은 사오라고 한 상대인데 미리 부탁받은 과자 한 상자로 때우는 건 조금 소하기도 했고, 봤을 때 백란이 생각난 건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 여우금붕어 건을 생각할 때 백란이 여우같이 생긴 물건을 싫어할 리가 없고.
떳떳해진 유단이 어깨를 폈다.
백란이 손을 뻗어 폰줄을 받아들었다.
“뭐, 넌 휴대폰 없으니까 달고 다니지는 않더라도....”
“....당신.”
막 의기양양해지려던 유단은 백란의 서늘한 어조에 깜짝 놀랐다.
“어, 응?”
“저는 천호이고 보통 여우와는 다르지만 그렇다 해도 어떻게 여우털로 만든 것을 제게 선물할 수 있단 말입니까?”
“뭐?!”
유단의 머릿속이 하얗게 날아갔다. 그야 무지 부드럽긴 했지만, 고작 휴대폰줄 치고는 꽤 비싸기도 했지만.
“몰랐어! 정말 여우털인줄!”
유단이 소리쳤다.
“몰랐으면 다입니까, 당신은 누가 인간 발톱으로 노리개를 만들어주면 기쁠 것 같습니까!”
“왜 하필 발톱... 아 아니 그냥 관광 기념품이잖아, 저런데 진짜 여우털이 들어갈 거라고 누가 생각하냐고.”
미안하다고 생각 안 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억울했다. 모르고 귀여워서 산 것 뿐인데 사람 발톱으로 노리개를 만드는 변태 연쇄살인범 같은 취급을 받다니.
“하기야 당신 안목으로 그런 걸 구별하라는 건 무리한 요구일까요. 보는 것 하나 재주인 사람이 그런 것도 몰라보다니 무슨 쓸모인가 싶긴 합니다만.”
“.....그래, 나 쓸모없다.”
유단이 몸을 돌려 문을 향했다.
“어디 가는 겁니까?”
“집에. 오래 여행했더니 피곤해.”
진심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지만 지금은 집에 가서 자고 싶은 생각밖에 안 들었다.
백란이 더 뭐라 말하기 전에 유단은 서둘러 반월당을 나갔다.
‘그래 나 쓸모없다... 소류와는 다르게.’


유단은 며칠째 반월당에 가지 않았다.
갈 이유가 없었다. 괴이가 발생한 것도 아니고 누가 도와달라고 쫓아오지도 않았다. 거기 간다고 공부가 잘 되는 것도 아니고.
반월당에서도 유단을 부르지 않았다. 벌서 닷새째 모습을 안 보이고 있으니까 궁금해서라도 연락 정도 해볼 수 있을 텐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하기야 쓸모도 없는 녀석한테 일없이 무슨 연락을 하겠어.’
툴툴거리며 유단은 책을 펼쳤다. 아무튼 그는 고등학생이고 바쁠 핑계라면 공부만한 게 없었다. 고양이도 아닌 주제에 펼친 책 위에 자리잡으려는 쬐끄만 요괴를 잡아 뒤로 던지고 그가 책상 앞에 바르게 앉아 교과서와 문제집을 들여다보았다.


우거진 숲속이었다. 나무며 풀들이 여기저기 자라있는데 햇볕은 들었다. 유단이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꿈인가?’
옆에 길이 나있었다. 달리 할 일도 없었으므로 유단은 길을 따라 걸었다. 뭐가 나타날지 경계하며 걷다보니 잔디로 곱게 뒤덮인 언덕이 나타났다. 큰 나무가 그늘을 드리웠다.
유단은 언덕에 올라 나무 그늘에 앉았다.
언덕 아래 여우 한 마리가 뛰어노는 게 보였다. 노란 새끼여우인데 배털은 하얬다.
“...백란?”
“아닙니다.”
옆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유단이 깜짝 놀라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왔어?”
전화도 없는 방구석폐요답게 연락을 하거나 찾아오는 대신 꿈으로 방문한 모양이었다. 유단은 긴장했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화내러 온 거 아니에요.”
“정말로?”
믿을 수 없는 발언에 유단이 되물었다.
“네. 그저 묻고 싶은 게 좀 있을 뿐입니다.”
“뭔데?”
유단은 조금 긴장했다. 어쩌면 새로운 괴이가 나타나 천안이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백란이 유단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요새 왜 반월당에 오지 않습니까?
“어?”
사실대로 쓸모없는 취급을 받아 삐졌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용건은 그것 뿐? 뭐 괴이가 발생했다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상관 없잖아, 나도 고3이고 이제 공부를....”
“합니까? 공부를?”
백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래. 지금도 공부하다가.”
졸았다. 유단은 입을 다물었다.
“별로 내가 반월당에 있어야 할 이유도 없잖아. 필요한 것도 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쓸모 없고, 라는 생각은 속으로만 삼켰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제는 당신이 반월당의 주인입니다. 주인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차이가 큽니다.”
“응, 그래. 그런 명목상 필요.”
유단은 한층 더 기가 죽었다.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하나 했더니만.”
백란이 혀를 찼다.
“명목상 필요가 아닙니다. 안 그래도 한 번 무너졌던 건물인데 주인이 있어서 중심을 잡아주지 않으면 약해진 나머지 어떻게 될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싶다면 이런 때일수록 제자리를 지켜야지요.”
왜 꿈까지 동원해서 찾아왔나 했더니 잔소리를 하려고 그런 거였다. 유단은 조금 허탈해졌다.
“알았어, 알았어. 갈테니까...”
언덕 아래서 뛰놀던 작은 여우가 쪼르르 달려와 유단의 손바닥에 머리를 비볐다. 보드랍고 매끄러운 털이 기분좋아 유단은 자기도 모르게 그걸 쓰다듬었다.
“이건 뭐야?”
“당신이 가져왔던 그 작은 여우털 노리개요.”
“이게?”
노리개가 아니라 폰줄이라고 고쳐줄 마음도 나지 않았다. 유단이 놀라서 작은 여우를 내려다보았다.
“제 손을 타면 이렇게 된다니까요. 이건 여우털이라 더 쉬웠나 봅니다.”
백란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잘 따르는 것 같은데 데려다 키우지 그럽니까.”
“응? 아냐, 너 준 거고....”
그리고 백란은 화냈다. 유단이 어물어물 그의 눈치를 보았다.
“별로 인간이 다른 동물의 고기나 털을 취한다고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백란이 말했다.
“그걸 저한테 들이댄 건 무신경한 짓이지만, 당신이 무신경한 바보짓을 할 때마다 진지하게 화내려면 제가 너무 지칩니다.”
“무신경한 바보라서 미안.”
그가 여우를 조금 더 쓰다듬었다. 그러다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요괴가 될 만큼 손을 탔다고?”
그런 기분나쁜 선물 따위 즉시 내다 버리는 게 맞을 텐데, 그냥 안 버리고 어디 던져놨나보다 하기엔 게임기가 백란의 영향을 받기까진 그가 완전 게임 폐인이 되어 현실에서도 나뭇금을 뛰어넘는 지경에 이를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리 전자기기와 여우털이 다르다곤 해도.
백란이 벌떡 일어났다.
“할 말 끝났으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백란?”
“내일은 꼭 반월당에 오시기 바랍니다. 케익은 생크림이 좋겠군요.”
“그 폰줄 얼마나 가까이....”
땅이 요동쳤다.
나무에 벼락이 내리쳤다. 발밑이 갈라지며 유단은 끝없이 떨어져 내렸다.
“헉!”
벌떡 일어나려다 우당탕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일어나보니 교과서에는 침자국이 가득했고 잡귀며 잡요괴가 쯧쯧..하는 표정을 지으며 지나갔다.
“그래서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유단이 투덜거리며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했다.
그래도 이번엔 이긴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무신경한 바보를 굳이 꿈으로 맞으러 오고, 폰줄도 안 버리고 갖고 있었고.
그러니 내일은 반월당에 갈 것이다.
케익은 초코 케익을 사들고.



일본 여행을 갔다가 실제로 테레비탑에서 사온 폰줄입니다. 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생각이 나더라고요... 진짜 여우털은 아마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이야기상 그렇게 되었습니다. ^^

....사진이 그지같아서 그렇지 실물은 귀엽습니다. 정말로.

검은 남자 75 ㅣ- 회색도시&검은방



하성철은 현장에 직접 와 있었다.
허강민이 본산 깊숙한 곳에서 발견되었다는 무전 연락에 안도하고 본격적인 돌입을 지시했다. 당장 허강민이 정말 무사한지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지만 드러내 그를 감쌀 순 없었다.
“구급차에 태워 현장에서 내보내게. 류태현 순경이 호위하면 되겠지.”
“그게 말입니다.”
권현석이 미심쩍은 얼굴로 말을 꺼냈다.
“류태현은 수호 부적만 챙겨주고 바로 되돌아 들어가서 배 형사를 돕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뭔가 말하기 힘든 사정이 더 있는 것 같습니다.”
하성철의 표정도 권현석만큼 찌푸려졌다. 단순히 내부 수색에 마법이 더 필요해서만이 아니라는 감이 왔다.
“허강민의 상태도 좀 이상하고요. 국장님께서 직접 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성철은 바로 권현석을 따라 허강민을 찾아갔다.
이미 환자 이송용 들것에 실려있었다. 류태현은 그 곁에서 떨어지려다가 두 상관을 보고 경례를 붙였다.
하성철도 권현석이 한 말뜻을 곧 알 수 있었다.
허강민은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로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눈은 뜨고 있지만 의식이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하성철은 그 손을 잡아보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손가락은 아무 반응도 돌려주지 않았다.
“허강민.”
하성철이 간절하게 불렀다.
“내 말 들리나?”
허강민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움직임도 없었다.
하성철은 입술을 깨물며 허강민의 손을 놓고 물러났다. 안타깝지만 그는 할 일이 많이 남아있었다. 주위 눈을 의식하지 않으면 허강민에게도 좋을 것이 없었다.
“류태현 순경.”
그래도 자신보다는 허강민 곁에 매달리기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불렀는데 류태현은 벌써 멀찍이 물러나 있었다.
“저, 다시 들어가봐야 합니다.”
류태현이 딱딱하게 굳어서 변명했다.
“국장님께서 돌봐주시는 편이 나을 거예요.”
그리고 대답도 듣기 전에 도망치듯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 버렸다.
하성철은 권현석을 돌아보았다. 권현석도 두 눈이 동그래져서 고개를 저었다.
뭔가 걱정한 것보다도 더 나쁜 일이 일어났다. 그런 감이 왔다. 그러나 대체 얼마나 심한 일이 벌어졌는지 알려면 압수수색을 마쳐야 했다.
하성철은 일단 백선교에서 허강민을 납치 감금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혐의에 정식 추가할 수 있도록 법적 절차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백선교 본산은 미로 같은 내부 구조 때문에 그저 수색 영장을 집행하는데도 거의 진압작전에 가까운 양상을 띠었다. 그래도 증거물은 잘 나왔다.
“저놈들 너무 방심하고 있던 거 아냐?”
서재호 형사가 서류의 산에 머리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본산에서 찾아낸 증거자료는 워낙 방대해서 서재호가 기댔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런 건 미리 다 어디 옮기거나 파기했을까봐 걱정했는데.”
“자신 있었다는 거겠지.”
오미정 형사가 서류의 산을 노려보았다.
“그동안 별별 더러운 수로 법망을 빠져나간 모양인데, 어디 밀린 이자까지 쳐서 덤터기 써보라지.”
“그 전에 내가 죽을 것 같으니까 그렇지......”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서재호는 서류에서 머리를 떼었다. 문이 열리고 또 한 더미가 들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예 바퀴판에 상자를 싣고 들어온 준혁이 하나도 안녕하지 못한 얼굴로 인사했다. 국장님과 함께 여기저기 불려다니느라 바쁜 현석 형 대신 사무실을 떠맡다시피 하고 있는 유상일이 준혁을 보고 기겁했다.
“어, 어이. 무리하고 있는 거 아냐?”
“여기 무리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까?”
배준혁은 아무렇지 않은 척 응수했지만 그런 얼굴로 그렇게 말해봐야 효과는 없었다. 오미정도 서재호도, 구석에서 숨죽이고 서류에만 처박혀 있던 조용호마저도 한 번 고개를 들어봤다가 입을 딱 벌렸다.
“이, 이봐. 숙직실 가서 눈 좀 붙이고 오라고.”
서재호가 말을 더듬었다.
“붙였습니다.”
두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채 준혁이 대답했다. 오미정도 걱정스럽게 한 마디 보탰다.
“양반 어디 아픈 거 아냐? 전에도 쓰러지더니.”
“이번엔 괜찮을 겁니다.”
그 말을 곧이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준혁은 가져온 상자를 열고 유상일 앞에 내용물을 쌓아놓았다.
“본산에서 비밀 금고가 또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이건 감식반으로 넘어간 목록입니다.”
“웬 비밀 공간이 그렇게 많아?”
서재호가 다시 죽는 소리를 했다.
“건물 뒤질 때도 그랬지. 분명 빈 방 같았는데 양반이 들어갔다 나오니 금고가 있고, 비밀 통로가 있고.”
“제가 없던 비밀 금고를 만들어내기라도 한 것 같지 않습니까.”
배준혁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 책상에 턱을 대고 머리를 쉬었다.
“에이, 농담이야. 농담.”
서재호가 하하 웃었다.
“기계에 익숙해서 더 잘 찾았나? 가만.”
서재호의 눈이 배준혁과 함께 비밀공간 탐지 1, 2위를 다투는 하무열 형사의 자리로 향했다. 하무열은 마침 자리에 없었다.
“하무열 형사님은 기계치인데 어떻게 그런 활약이 가능한 거지?”
“전자기기에 서툴러서 그렇지 아날로그적인 건 잘 다루십니다.”
준혁이 미간을 누르며 대꾸했다.
“밀실에서의 경험도 도움이 될 테고요.”
“하긴. 허강민의 스폰서였던 놈들이니.”
오미정도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갸웃 했다.
“그런데 류태현 순경은 뭐한대? 그쪽도 계속 활약해야 하는 거 아냐?”
“첫날 허강민의 몰골을 보고 충격이 컸던 모양입니다. 그쪽이야말로 휴식이 필요해 보여서 경감님이 허강민을 호위하며 잠시 쉬게 하셨습니다.”
오미정도 서재호도 좋은 사람들이라 겉으로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대한 수사로 다들 죽어나는데 순경이, 정신적 충격처럼 잘 드러나지도 않고 널리 인정받지도 못하는 이유로 먼저 쉬고 있다니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었다.
그런 분위기를 읽고 배준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썩 좋은 핑계가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표면상의 조치는 실제로 그러하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한계였다. 듣기 좋게 포장해서 말하는 재주는 원래 없었다.
‘하무열 형사님이었다면 달랐으려나요.’


하무열은 이를 갈며 눈앞에 무릎 꿇고 앉은 류태현을 노려보았다.
하성철은 수사팀 안에서 배임 및 납치를 저지른 순경을 어떻게 징계해야 잘 징계했다고 소문이 안 날까 고민하느라 노려볼 여유도 없는 듯했다.
표면상으로는 류태현이 무슨 짓을 했는지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전부 강성중을 비롯한 백선교 간부들에게 뒤집어씌워 버린다면 수사팀의 위신에도 더 좋을 터였다.
그러나 덮어주고 싶지 않았다. 용서할 수 없었다.
류태현은 국장실 바닥에 만들어놓은 조각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류태현 순경.”
하성철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나?”
“없습니다.”
류태현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대답했다. 이게 사극이나 무협지였다면 ‘죽여주십시오.’라고 말할 몰골이었다.
그러나 이건 사극도 무협지도 아니고 한 사람 죽는다고 해결될 전근대적인 상황도 아니었다. 하무열이 다시 물었다.
“허강민은 지금 어떤 상태냐?”
“정신에 감당 못할 타격을 받아 무너져내리는 중입니다.”
류태현이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설명했다.
“받아들일 수 없는 타인의 기억이 주입된 것이 주 원인이니 기억을 지우는 주문을 쓰면 효과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전 그 주문 쓸 줄 모릅니다.”
“알아도 네놈한테는 안 시킨다.”
하무열이 내뱉었다. 류태현은 더 움츠러들었다.
“다른 방법은 없나?”
하성철이 물었다. 류태현은 우물거릴 뿐 대답하지 못했다.
“배준혁 형사에게 묻는 게 낫겠군요.”
하무열이 류태현에게서 시선을 돌려버렸다. 류태현이 이토록 망가지다니 화가 나기 이전에 서글펐다.
자신은 이리 될 줄 몰랐었나. 막을 방법이 정말 없었다.
“허강민 놈은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
하무열이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자기가 널 사랑한다고 인정하기 싫어서, 어디까지나 흉내만 내는 중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얄팍한 기만이라도 함부로 두들겨 부쉈다가 그놈이 못 견딜까봐 응석 받아주는 셈치고 보고만 있었는데......”
“하무열 형사.”
하성철이 말을 잘랐다.
“가서 배 형사 불러오게.”
하무열은 진정하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알겠습니다.”
하무열이 나가고 국장실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자네가 정말 허강민과 잘 되지는 못할지도 모른다고 처음부터 걱정했네.”
하성철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가 걱정한 건 기껏해야 자네가 그를 떠나는 정도였지. 아니면 허강민이 견디지 못하고 자멸하거나.”
여전히 꼼짝도 않고 반응도 없는 류태현을 보며 하성철이 한숨지었다. 하무열을 내보낸 건 그 대신 자기가 꾸짖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배 형사가 허강민을 회복시킬 수 있는 게 분명한가?”
“아마 그럴 겁니다.”
류태현이 여전히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깨어나면 제대로 사과하고 벌을 받겠습니다.”
“깨어나면 말이지.”
하성철은 류태현을 노려보며 다시 질문했다.
“자네는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던 건가?”
“제가...... 강성중의 정신공격에 당했습니다.”
설명할 말을 찾느라 류태현은 힘들게 말을 이었다.
“허강민 씨가 여전히 절 미워하면서 겉으로만 사귀는 척 해주는 거라고, 강성중이 그런 과거를 보여주었습니다. 분명 실제로 존재했던 과거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동요하는 걸 기회로 제게......”
류태현이 부르르 떨었다.
“독 같은 것이, 제 안으로 흘러들어온 기분이었습니다. 마치 술에 엄청나게 취했을 때처럼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또 그렇게 되지 않을 방법은 있나?”
류태현이 다시 움찔 했다.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강성중은 사살했지만 생포한 마법사도 여럿 있어. 실버 트와일라잇도 남아있고 자네가 또다시 타락하지 않을 거라고 믿을 수 있나?”
“전 그때 허강민 씨에게 사랑받고 싶었습니다.”
하성철은 류태현이 또 한참 머뭇거린 끝에 힘들게 대답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이번엔 미리 생각해둔 말을 하듯 바로 대답이 나왔다.
“지금 전 바라는 게 없습니다. 뭘 바랄 자격도 없고요. 그러니 전보다는 안전할 겁니다.”
“바라는 게 없다고?”
하성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강민이 빨리 회복하기를 바라지 않는단 말인가?”
다시 할 말을 잃은 류태현 곁으로 다가가 그 앞에 섰다. 류태현은 고개를 들고 싶은 듯 목덜미를 움찔거렸으나 결국 들지 못했다.
“그렇게 자포자기해버리면 무해한 인간이 될 것 같은가? 범죄자를 상대할 때 자포자기한 범인이 가장 위험하다고 배우지 않았나?”
“......”
“안승범에게 살아야 한다고 설득해서 끝내 살려냈던 자네 아닌가. 더 이상 주위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말게.”
“죄송합니다.”
“자네가 여전히 시한폭탄 상태라는 건 잘 알겠어.”
하성철은 혀를 찼다.
“이래선 자네가 한 짓을 생각지 않는다고 해도 지금 수사에 참여시킬 수가 없군.”
“그럼 지금은 마법 관련 대책은 전부 배 형사님과 무열 선배만 전담하고 있는 거예요?”
류태현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숙였다.
“그거 굉장히 위험한 건데요. 이대로 고위 마법사를 상대해야 할지도 모르고, 단순히 과로하는 문제로 봐도 말이에요. 배 형사님 정신이 못 버틸 거라고요.”
“알고 있네.”
하성철이 무뚝뚝하게 말을 받았다.
류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면목없어서만이 아니었다.
마법사가 과로하는 건 그냥 경찰이 과로하는 것과 위험한 정도가 현저하게 달랐다. 그렇다고 배준혁이 쉬어야 하니 수색을 쉬엄쉬엄 하자고 할 수도 없었다.
하성철은 경찰 간부답게 부하 갈아넣는 데 익숙한 사람이기도 했다. 마법사는 과로시키면 위험하다고 말해봤자 쉽게 실감하기 어려울 터였다.
하지만 지금 자신에게 배 형사 혼자 무리하지 않도록 나설 자격이 있는가.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46 ㅣ- 회색도시&검은방


빵 같은 게 있으려니 생각했던 아침 겸 점심 식탁엔 뜻밖에도 제대로 된 두부된장찌개와 달걀말이 우엉조림 등 그럴듯한 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혜, 혜연아?”
현석이 눈을 비비고 식탁을 다시 보았다.
“이거 네가 만든 거야?”
“이 정도는 가사 시간에 배워요.”
“그래도.”
“아빠가 늦잠자서 시간도 충분히 있었고.”
“세상에......”
현석이 감격했다.
“우리 딸이 정말로 다 컸구나....”
“아직 중학생이에요. 다 안 컸다구요.”
“그치만 이렇게 스스로 밥도 해먹을 수 있게 되고....”
현석이 혜연을 꽉 끌어안았다.
“미안해, 그동안 바쁘다면 곁에 있어주지도 못하고 그랬는데...”
“괜찮아요.”
혜연이 아빠를 마주 끌어안았다.
“사실 괜찮은 건 아니지만, 아빠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거 아니까 괜찮은 거예요. 알죠?”
“물론 알지.”
현석이 웃었다.
“이제는 일도 전처럼 막 밤새고 그러지 않을 테니까.”
“정말요?”
“....그야 경찰이니까 큰일 하나 끝냈어도 언제까지나 한가할 리는 없고 그러겠지만 적어도 이번 같지는 않을 거야. 다음에는 인력도 처음부터 많이많이 끌어모아다가 야근 안 해도 되는 팀을 만들.. 거라고.”
“아, 우리 아빤 진짜 선의의 거짓말도 못한다니까.”
혜연이 짐짓 투덜거렸다.
“그래가지고 악당들은 어떻게 상대해요?”
“무슨 소리야, 우리 혜연이니까 내가 거짓말을 않는 거지 피의자들한테는 막 무섭고 속도 안 읽히고 그런다니까.”
“아이고 그러셨어요.”
혜연이 하나도 안 믿는 티가 풀풀 나는 어조로 고개만 끄덕였다.
“정말인데.”
현석이 삐졌다.
“예, 우리 호랑이 경감님 식사나 합시다.”
혜연이 아빠를 식탁으로 미는 시늉을 했다. 현석이 못 이긴 척 밀려가 둘 다 자리에 앉았다.
“맛있어!”
달걀말이를 한 입 먹고 현석은 요란하게 감탄했다.
“세상에, 처음 만든 게 이렇게 맛있다니 우리 딸은 혹시 요리 천재?”
“처음 만든 건 아니에요. 아빠 없었을 때 그 정도는 혼자 해먹었어요.”
그 ‘아빠 없었을 때’는 그가 야근으로 집에 못 들어온 며칠이 아니라 그가 죽고 난 뒤 혜연이 혼자 살던 지난 십년간이었다. 눈물이 날까봐 혜연은 식탁 밑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미안해.”
현석이 말했다.
“우리 혜연이가 혼자 요리를 잘하게 될 만큼 곁에 있어주지 못하고 외롭게 해서 정말 미안해.”
혜연이 어금니를 악물었다. 바빴던 데 대한 사과라는 거 잘 알지만 그런데도 지난 십 년에 대한 사과인 것처럼 들렸다.
“미안하면 다음 휴일엔 어디 놀러가요.”
울지 않으려고 애쓰며 혜연이 말했다.
“정말 오~래간만에 아빠랑 둘이서 놀이동산에 가보고 싶어졌으니까요.”
“그래. 물론 그래야지.”
현석이 환하게 웃었다.
“같이 즐겁게 놀자. 맛있는 것도 먹고. 그동안 섭섭했던 거 싹 날아갈 만큼 다 해줄게.”
“아빠 잘못도 아니잖아요.”
울 것 같아져서 혜연은 크게 웃었다.
“그야 잘못은 범죄를 저지른 나쁜 놈들이 한 거지.”
현석이 엄숙하게 말했다.
“그래도 혜연일 외롭게 했으니까. 시간 날 때 열심히 같이 있기라도 해야지.”
“오늘 늦잠 잤으면서.”
혜연이 혀를 내밀었다.
“하던 일은 이제 다 마무리 된 거에요?”
“그래. 얼마 안 있어 범죄와의 전쟁 수사 본부를 해산하고 딴 일을 맡아 팀을 새로 꾸릴 거야.”
“그, 장희준 회장 죽어서 다 흐지부지 된 거에요?”
“그렇지는 않아. 그야 그 사람은 죽었으니 벌은 못 주지만, 그래도 한 짓은 다 밝혔으니까. 공범이나 하수인도 많이 잡아들였고. 방해가 없어져서 도리어 잘 마무리 되었다고 할 수도.. 쉽긴 했지. 그 딸이 무척 협조적이기도 했고. 난 그 사람도 좀 의심스럽더라만.”
“예? 누가요?”
“장지연씨. 이젠 새 장회장인가. 창업자 딸이라고 해도 뭔가 후계자 수업을 받은 것도 아니고 내내 집에 가만히 있던 사람이 뭘 잘할 수 있을지.... 음, 그러니까 내 말은.”
현석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사람이 뭔가 범죄를 저질렀다 그런 건 아니라, 본인이 주장하는 대로 아버지가 하는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을까 싶어서. 하긴 몰랐겠지. 알았다면 자기가 정말 아무 관련이 없어도 자기 아버지가 저지른 범죄의 증거를 그렇게 전부 순순히 내놓지는 않았겠지...”
현석이 중얼거리다 딸의 눈치를 보았다.
“그걸로 끝이에요? 장희준 회장이 죽은 사건은요?”
“그건 또 딴 부서 일이라서.”
“그래도 뭐 들은 거 없어요? 허강민의 행방이라든가?”
딸이 왜 허강민에 대해서까지 관심을 가지나 신경쓰면서도 현석은 순순히 대답했다.
“없어. 지금껏 보호해주던 후원자를 배신한 셈이니 꼬리가 밟힐 만도 한데 대체 어떻게 도망쳐 어디 숨은 건지 찾을 수가 없다니까. 경찰로서 부끄럽다.”
“아빠 잘못인 건 아닌데요.”
“그야 아니지만.”
“그래도.... 적어도 아빠네 팀 일은 잘 풀린 거 맞죠? 경찰들도 모두 무사하고?”
“그래.”
권현석의 표정이 풀렸다.
“다들 괜찮고 아무튼 우리가 수사하던 건 잘 해결된 셈이니 승진도 하겠지. 음, 국장님은 어떡하시려나.”
“왜, 무슨 일 있어요?”
사실은 매우 궁금했지만 별로 궁금하지 않은 척 지나가듯 물었다.
“원래는 이번 수사 마무리되면 은퇴하실 거라 생각했거든, 그 위쪽으로 가면 승진 연한이라는 게 있어서.... 그렇지만 어쩌면, 진급해서 남으실 지도. 예전보단 뭔가 변하신 것도 같아.”
그가 전해 들었을 십 년 후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변하지 않는 게 이상할 것이다. 역시 아빠한테는 그 이야긴 못하겠다고, 바보 같고 범죄자를 잘 믿고 위태로워 마음이 안 놓이긴 해도 아빠는 이대로가 좋다고 혜연은 굳게 결심했다. 아빠를 보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스로 조심하길 기대할 수는 없으니 다른 사람들이 힘써야 할 것이다. 하성철 국장님과 배준혁 경장이 지켜보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르니.
‘한 번 실패한 사람한테 또 시키는 건 내키지 않지만, 정은창 아. 저. 씨. 하고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경찰 정보원이었으니 배준혁이 노력하면 소재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자리를 주선해 달라고 해야겠다고 혜연이 마음먹었다.
“참, 혜연아. 다음 달 말에 무슨 약속 같은 거 있니?”
“아뇨. 왜요?”
“그게, 아빠 아는 형이 결혼을 하거든....”
“박근태 의.. 경무관님이요?”
“그래.”
현석이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어?”
“아... 수사 관련해서 TV같은 데 많이 나왔잖아요. 아빠 직속 상사고.”
혜연이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렇지만 그 얼굴 봐서 나랑 형이라고 알다니...”
“결혼해요? 누구랑?”
“응, 홍은희씨라고 오래 사귄 사람 있어.”
“사건 끝나자 마자네요. 결혼 준비 시간 걸릴 텐데 서두르다니, 혹시....”
“아 무 무슨 소리야 혹시라니 그런 거 넌 몰라도 돼. 알 필요 없어!”
혜연의 예상대로 아빠는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못했다. 혜연이 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게 뭔데?!”
“아니라곤 안 하네요?”
입만 뻐끔거리다 쓰러지려는 아빠를 그만 놀리고 혜연이 다독였다.
“노총각이라 한시라도 빨리 결혼하려는 거잖아요. 모를까봐요.”
현석은 입을 딱 벌렸다.
“축하할 일이네요. 저도 가는 거죠?”
“으.... 응.”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응.... 그런 데 가는 거 지루하지 않겠어?”
“새 옷 사주시면요.”
“아, 그래.”
이유가 납득되어서인지 현석의 표정이 밝아졌다.
“맞아, 다들 예쁘게 하고 올 텐데 우리 혜연이가 꿀리면 안 되지. 예쁜 옷 사줄게.”
“네.”
혜연은 정말로 기대하고 있었다. 박근태는 몰라도 설희는 만나고 싶었으니까. 자신이 선택하고 집중해서 구해냈던 아이가, 이제는 구해낼 필요도 없이 부족할 것 없는 가정에서 행복하게 자랄 것이다.
‘아, 이번 결혼식에는 그럼 아연이도 오겠구나.’
정말로, 박근태와 홍은희의 결혼식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덥네....”
허강민은 졸라 맨 넥타이 매듭을 잡아당겨 느슨하게 했다. 마음 같아선 확 풀어버리고 싶었지만 망할 사회 생활을 하려면 답답해도 넥타이는 꼭 해야 한다고 한다.
몸을 돌리자 창문에 그의 모습이 비쳤다.
단정하게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머리를 스트레이트 퍼머로 펴고 렌즈를 끼었다. 거기에 사무적인 무표정을 짓는 것만으로 그는 광기에 찬 살인마 허강민과 꽤나 다른 인상이 될 수 있었다. 눈썰미 좋은 사람이라면 그 때 얼굴과 공통점을 찾아낼지도 모르지만 그런 사람도 연쇄 살인범이 대낮에 이런 데서 태연히 돌아다니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백석 그룹 본사.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찰들이 자기 집처럼 드나들던 곳에.
뜻밖에도 새 회장님이 그에게 맡기는 업무는 누굴 죽이라든가 협박하라든가 납치해 정신 조작을 하라든가 하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와는 달리 최대한 깨끗하고 건전하게 회사를 경영하겠다는 게 아주 빈말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것 치곤 강재인은 밤낮으로 아주 바빠보였지만 그가 알 바 아니었다. 시키지도 않은 일까지 찾아 할 만큼 충성이 뻗치는 것도 아니고, 자기 일 만으로 바빠 죽을 것 같고.
그가 오늘 아침에 올라온 서류를 뒤적였다.
“백석에 음료 사업부가 따로 있었어, 식품만이 아니고? 슈퍼에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대체 뭘 생산하는 거야?”
이거 분명 분식회계용 유령회사다. 회계 감사팀 보내서 확인한 뒤 공중분해해버려야지 중얼거리며 그가 보고서를 검토했다. 달동네 밀어 재개발 하고 신도를 착취해 공장 돌리고 아주 잘라낼 곳이 한둘이 아니었다. 장지연 뜻대로 ‘깨끗한’ 기업을 만들고 나면 백석 이름 딴 건 하나도 안 남는 건 아닌가 걱정이 들 지경이었다.
‘그렇다 해도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의를 집행하는 것처럼도 보일 수 있는 일이지만 허강민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이건 복수였다. 자기를 무시하고 억압한 아버지에 대한. 그가 남긴 유산을 철저히 갈아엎어 그가 추구하던 모든 걸 없애버리려는.
이렇게 번듯한 사무직 회사원 같은 꼴을 하고서도 결국 하는 건 복수 대행이라고, 허강민은 자조 어린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일하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고개를 든 허강민은 오늘은 또 어떤 오지랖 넓은 인간이 점심을 먹으라고 독촉하나 싶어 휴대전화를 들었다.




[또봇, 바이클론즈, 회색도시] 회색 지구 39 ㅣ- 크로스오버


딸을 잃은 후 유상일은 자신의 감 따위 믿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겉보기로 아무 일도 없어보이는 평화로워 보이는 날 자신의 전화가 울렸을 때 바로 최악의 상황부터 가정했다.
-상일 선배, 접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서재호 씨와 오미정 씨가 시의 00하수처리장 근처에서 연락두절 되었습니다. 제국의 공격으로 추정되는데 라디오자키는 연락을 받지 않습니다.
“현석이 형은?”
-팀장님은 무사하시고 제 연락받고 재차 오남매에게 보고를 시도중입니다. 우리 팀엔 제국을 당해낼 만한 무력이 없습니다.
“리모 회장이라면 나설 거야.”
상일이 확신을 담아 답했다. 이유가 뭐든 제국은 세모를 건드렸다.
“걱정 말고 기다려.”
전화를 끊자마자 상일은 회장실로 달려가 준혁의 말을 옮겼다. 리모 회장도 벌떡 일어났다.
“제로, 차 준비해.”


서재호와 오미정의 연락이 끊긴 곳에 먼저 도착한 건 배준혁이었다. 거리도 가까웠고 회장보다는 일개 요원이 눈에 안 띄고 움직이기도 더 쉬웠다.
그가 가지고 나온 불가사리 탐지기 역시 양성 반응을 나타냈다. 거기까지만 확인하고 준혁은 탐지기의 전원을 꺼버렸다. 외계 기술을 아예 배제하는 편이 적에게 노출될 위험은 더 줄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쌍안경으로 흔적을 찾던 중 자전거 바퀴 자국을 찾아냈다. 청소년용부터 성인용까지 네 대, 전부 타이어 형태가 같았다.
‘액션 바이크 네 대가 어째서 한 자리에?’
바퀴 자국을 살피던 도중 자국들이 부자연스럽게 끊긴 것을 발견했다. 멈춰 서서 내린 게 아니라 마치 지우개로 지운 듯 그냥 끊겨 있고 그 앞은 아무 것도 없는 산 밑이었다.
외계 기술에 의한 위장임을 직감한 준혁은 물러나며 상일에게 연락해 상황을 설명했다.
-회장하고 제로하고 그리로 가는 중이니까 무모한 짓 하지 말고 기다려. 알았지?
‘무모한 짓’에 유난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알겠습니다. 선배야말로.”


“제국뿐 아니라 오남매도 거기 있는 모양입니다.”
검은 밴에 리모, 제로, 상일 세 사람만 탄 채로 준혁이 알려준 장소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상관없어. 제국이 일으킨 일이라면 오남매도 한편이다.”
리모가 가볍게 한 말에 상일은 역시 리모 회장이 완전히 오남매의 편은 아닌 거라고 다시금 실감했다.
거의 다 도착하자 상일이 다시 준혁에게 연락했다. 준혁의 안내를 듣고 두 사람과 한 로봇은 차에서 내려 걸어서 접근했다.
“상일 선배, 여기입니다.”
준혁이 셋을 자전거 바퀴 자국 끊긴 곳까지 안내했다.
리모 회장이 작은 레이더 같은 것을 꺼내 작동시켰다. 곧 레이더 화면에 우주선 형태가 나타났다.
“흠.”
리모 회장은 그 화면을 보고 방향을 잡아 접근했다. 곧 그쪽에서 먼저 불빛이 번쩍였다.
“어쩐 일이신가요, 리모 회장님.”
숨겨진 우주선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천천히 걸어나온 라디오자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쪽이야말로 가족끼리 소풍 나온 분위기는 아닌데?”
리모가 받아쳤다.
“내 경호원의 후배들도 이 근처에서 실종되었고.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라디오자키가 난처한 기색을 했다.
“그들이라면 잠깐 기절했을 뿐입니다. 다친 곳은 없습니다.”
“왜 잠깐 기절해야 했는데?”
“우리 우주선을 숨겨놓은 바로 위쪽 언덕에서 갑자기 굴러내려와 부딪쳤습니다. 우주선 자체 방어 시스템이 발동해서 전기 충격으로 기절시켰고요. 가만히 있는 우주선에 굴러온 쪽이야말로 책임이 있는 것 아닐까요.”
유상일은 이마를 짚었다. 소식 끊긴 사람이 서재호라고 했을 때 이런 진상을 예견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미정 씨도 소식이 끊겼습니다.”
배준혁도 나섰다.
“오미정 씨가 서재호 씨와 함께 굴러내렸을 리가 없습니다. 분명 혼자 굴러내리게 놔두고 우주선과 부딪친 상황을 파악한 다음 구하려고 했을 겁니다. 라디오자키 씨도 그들이 제국의 첩자가 아니라는 정도는 알 테니 가둬둘 이유는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가둬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CCTV 분석 결과를 보면 오미정 씨도 서재호 씨가 붙잡는 바람에 같이 구른 것이 분명합니다.”
라디오자키가 여전히 난처한 기색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들어가서 두 사람 다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그러면 되겠지요?”
“오남매는 왜 여기 있지? 제국의 불가사리와 대치중인 건가?”
리모는 기색을 풀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뭘 감추고 있는 거지?”
라디오자키가 상일과 준혁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당황했다. 그때 우주선 안에서 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들어오게 해라, 자키야.


라디오자키뿐 아니라 래오와 미오도 불안한 눈으로 태후와 리모 회장을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그러나 태후는 태연자약하게 리모를 맞아들이고 입을 열었다.
“제국 때문에 곤란한 일이 벌어져서 안 그래도 부를 참이었지.”
리모는 ‘퍽이나?’ 하는 표정을 감추지도 않았다. 그러나 태후의 다음 이야기에는 그도 표정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
“태오가 납치되어 있네.”
라디오자키가 곁에서 기겁했다.
“제국이 그를 납치했습니까?”
라디오자키를 흘끔 쳐다보고 리모가 물었다.
“제국에 오태오의 정보가 넘어가게 하다니 생각보다 허술하셨군요. 지금의 오태오는 순전히 피보호자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정보를 유출한 자가 있었겠지.”
태후는 초연한 태도를 무너뜨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지구의 권력 균형이 무너지기를 바라는 자일 거야.”
“이미 위치를 파악하고 공격할 준비까지 마치셨다면 더 거칠 것이 없을 텐데요. 뭘 기다리고 계신 겁니까?”
리모가 우주선 안의 스크린을 가리켰다. 언어는 좀무국의 언어였지만 관의 모습은 알아볼 수 있었다.
“제국의 불가사리 맞지요?”
“맞아. 어떤 타입인지도 알겠는가?”
리모는 태후의 속을 알 수 없는 표정 쪽이 불가사리 구조보다 더 신경쓰였다. 그래도 일단 대답해보았다.
“관 타입이군요.”
제국과 좀무국 사이에 부대끼면서 리모 회장도 이미 불가사리 타입 정도는 꿰고 있었다.
“들어가서 공격하면 간단하지 않습니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아. 놈들이 태오를 인질로 빠져나가려고 하고 있거든.”
라디오자키가 기겁하는 것도 무시하고 태후는 말을 이었다.
“태오를 돌려받고 싶으면 자네를 대령하라더군.”
이제는 모두가 입을 딱 벌리고 태후를 바라보았다. 리모만 빼고.
리모는 표정 변화 없이 끝까지 들었다.
“다른 조건은 말 않던가요? 정말 날 데려가면 끝?”
리모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제로가 경계어린 태도로 감싸려는 것도 손짓으로 저지했다.
“그것뿐이네.”
태후도 끝까지 침착했다.
“물론 자네를 대뜸 넘길 생각은 없어. 그런다고 놈들이 태오를 순순히 내줄 리도 없고. 하지만 놈들을 방심시켜 관 밖으로 끌어낼 방도를 찾지 못하면 놈들은 태오를 인질로 계속 농성하다 틈을 보아 달아나 버릴 거야.”
리모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태후를 노려보았다. 인질 교환당하기 싫으면 빨리 묘안을 짜내보라는 말을 들은 사람치고는 여전히 태연해 보여 주위 사람들이 도리어 더 초조해질 정도였다.
“요점은 저 관에서 놈들이 인질을 데리고 달아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거군요.”
“인질 이름은 오태오야.”
뒤에서 유상일이 저도모르게 끼어들었다. 태후는 뜬금없다는 표정을 했지만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리모도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제로는 혹시라도 정말 박사님을 넘기려 들 것에 대비해 그 앞을 가로막고 섰다.
“앞에서 얼쩡대지 마. 집중 안 돼.”
리모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제로는 옆으로 물러났다. 리모도 더 이상은 아무 말 없었다.
그대로 다들 조용한 걸 보고 피오는 슬쩍 구석으로 물러났다.
상당한 책략가인 줄 알았던 리모 회장이 아무 말도 못하고 고민만 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지금 아무 방법도 안 떠오르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할머니를 해치고 태오 형을 버릴 궁리중인 건 아닌지 무서웠다. 빨리 좋은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피오는 셰이드에게 눈짓했다. 셰이드는 피오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이쪽을 보지 않는 사이 피오가 제국산 부채를 펼쳤다.
조급해진 나머지 실수하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생사리를 잡아준 사람이 다름아닌 화심 소장이었다.


리모는 가만히 고민에 빠져있었다.
여유로운 척하고 있지만 그도 인질극에 맞닥뜨린 건 처음이었다. ‘관’의 특성도 어렴풋이밖에 몰라 뚫고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태후가 상황을 순순히 다 알려줬다고 해서 태후를 믿을 생각도 없었다. 도리어 이렇게 함으로써 리모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공격적으로 나올 명분을 빼앗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혹시나 해서 유상일을 돌아보았지만 그도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가족이 걸린 인질극이니 동요하지 말라는 편이 무리였다.
또 제로가 옆으로 움직였다. 성가시다고 다시 한 마디 하려는데 그가 리모의 팔을 건드려 주의를 끌었다. 어느새 피오의 시삽이 제로의 큰 덩치를 엄폐물 삼아 리모 근처에까지 와 있었다. 그것들이 손 대신 쓰는 가는 광선 끈이 작은 쪽지를 내밀었다.
리모가 눈짓하자 제로가 먼저 받아들어 읽고는 리모에게 넘겼다.
리모는 쪽지를 쥔 채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가 라디오자키의 주의가 이쪽에서 멀어진 틈을 타 쪽지 뒷면에 무언가 적어서 돌려주었다.


“저, 래오 형.”
피오가 손을 들자 오남매의 시선이 바로 집중되었다.
“우리가 이러고 있는 동안 도망치려고 들지도 몰라. 여기서 머리만 싸맬 게 아니라 나가서 관 주위를 포위하는 게 어때?”
남은 셋 생각에도 그럴듯했다. 태후도 허락했다.
“저도 나가보도록 하죠.”
리모가 움직이자 다들 멈칫 했다.
“저만 여기 놔두는 것도 불안할 것 아닙니까.”
그런 반응쯤 예상했다는 듯 리모가 말을 이었다.
“밖에 나가있는 것도 불안하다면 저희는 오남매들과 같이 있도록 하죠.”
래오는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리모 일당과 자신들 중 한 명이 함께 있게 된다면, 액션 바이크 모드라고 해도 위태로웠다. 제로는 로봇이고 유상일도 건장한 전직 경찰이었다.
“다 각자 흩어지는 건 어때요?”
미오가 제안했다.
“리모 회장님 따로, 제로 따로, 유상일 씨 따로.”
“좋아.”
리모가 바로 찬성했다. 제로는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리모는 무시했다.
래오와 미오, 지오, 태후 모두 리모 쪽만 신경쓰고 있는 동안 피오는 다시 부채에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일단 명령대로 하면서도 권현석은 이게 어찌된 일인지 혼란스러웠다.
서재호와 오미정은 무사하다고, 통신기가 망가진 것뿐이라고 상일이가 연락해왔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러나 대체 어쩌다 그런 상황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설마 리모 회장이 딴 마음을 품고 특수반을 뒤통수치려 했다 해도 상일이가 거기 따를 리는 없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애써 자신을 다독이는 중이었다.
그러나 제로의 통신을 통해 받은 새 명령은 그보다 더 황당했다. 시키는 대로 본사에 찾아가면서도 몇 번이고 녹음한 통화내용을 재확인할 정도로.
BM 시큐리티는 어디까지나 BM의 계열사로 정식 등록되어 있었다. 설립과 인가 과정도 공식적으로 처리되어, 리모 회장의 보좌관과 비서진도 권현석 사장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권현석 사장입니다.”
리모 회장의 인간 비서 중 하나가 마뜩찮은 표정으로 준비해둔 비닐 쇼핑백을 내밀었다. 권현석은 받아서 내용물을 확인했다.
“.....예. 회장님이 말씀하신 게 이거 맞습니다.”
비서는 조용히 권현석을 배웅해주었다. 기색을 보아하니 이런 명령을 받는 게 그들에게도 자주 있는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런 명령을 자주 받으면 곤란하지.’
다음으로 갈 곳은 하늘공원이었다. 가보면 눈에 띄는 사람이 하나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에게 넘기고 결과를 받아오면 된다는 게 명령의 전부였다.
‘눈에 띄는 사람이란 건 또 뭐야?’
자신도 경찰 시절부터 이상하거나 막연한 명령을 받은 적도 내린 적도 많았다. 그러나 이 정도로 막연해버리면 명령을 이행할 수나 있는지 불안했다.
마음 졸이며 하늘공원에 도착했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45 ㅣ- 회색도시&검은방


“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어.”
허건오가 빨대로 갸르륵 소리를 냈다.
태성이 걱정했다.
“괜찮겠습니까? 양아버지는..”
“거 대장네 아버지한테 완전 쫄아붙은 것 같아. 나한테까지 눈치를 보더라니까.”
“재벌 회장을 죽게 했잖아. 무서울 만도 하지.”
김주황이 한 말에 하태성이 얼굴을 구겼다.
“아버지께서 죽이신 게 아닌데요. 아버지는 수사를 하셨을 뿐이고.....”
“그치만 관련 있잖아.”
허건오가 말했다.
“그, 뭐시냐, 마법이...”
하태성이 노려보자 허건오가 움츠러들었다. 태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장희준이 수사팀의 적이고 미래 문제의 원흉이고 허강민이 우리 편에서..... 아마도 행동했으니 관련이 없지는 않겠지만 저희 아버지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연쇄살인범과 내통하실 분이 아니고 살인을 청부하실 분은 더 아니고.”
장희준의 죽음이 수사팀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정말 관련이 없을까 하태성 본인조차 의심이 들었지만, 하성철은 모른다고 했고 태성은 그 말을 믿었다. 이전에 안 믿었던 만큼 더 열심히 믿어드리자고 태성은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겉으로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을 만큼 ‘원래 좋은’ 사람은 없고 다 환경과 처한 상황의 영향이라고 믿게 되었으니까.
“마법이라니...”
김주황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솔직히 아직도 못 믿겠다.”
“그럼 왜 왔는데?”
건오가 주황 몫의 감자튀김을 날름 집어먹었다.
“나야 경찰서에 잡혀가 있는 꼴로 대장을 만났으니까 도망칠 수도 없었지만 댁은 그런 것도 아니잖아? 그냥 미친놈이 뭐라고 하든 무시하면 될 텐데.”
태성이 건오를 흘겼지만 그는 모른 척 했다. 태성이 표정을 바로하고 주황을 보았다.
“허건오씨 말이 맞습니다. 싫다고 해도 쫓아다니며 귀찮게 굴 생각은 없고, 그저 김주황씨도 동생분도 잘 살아있는 걸 확인했으니 되었....”
“그런 게 문제란 말이야.”
“네?”
주황이 태성을 노려보다 고개를 휙 돌렸다.
“그렇게 아무런 사심도 없이 오직 날 걱정하고 위할 뿐이란 소릴 하는데 가짜 같지가 않다고, 처음 봤을 때부터 막 울려고 하면서 반가워하고....”
“하긴, 저 얼굴로 그러면 파괴력 장난 아니지.”
건오가 동의했다.
“입 다물고 있으면 딱 재수없는 모범생인데 입만 열면 미친 소리니까 나라도...”
건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아 왜?”
김주황이 귀찮다는 듯 물었다.
“알 거 없어, 고릴라 면상.”
“뭐 고, 고릴라?”
“그래 고릴라. 덩치만 커가지고 얼굴 험상궂지 이마 주름에 콧구멍 넓이에...”
“뭐 뭐야 이 땅콩만한 애송이가 말 다했냐!”
“풉.”
막 서로 멱살을 잡으려던 건오와 주황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태성을 보았다.
“아, 미안합니다.”
여전히 입을 가리고 쿡쿡 웃으면서 태성이 사과했다.
“그, 십 년 후를 보는 것 같아서요. 그 때도 두 사람 지금처럼 서로 애송이니 고릴라니 하며 싸우곤 했는데....”
태성이 물기 어린 눈으로 두 사람을 보며 웃었다. 주황도 건오도 볼이 빨개진 채 시선을 피했다.
“이제 와서 안 믿는 것도 웃기긴 한데.”
김주황이 말했다.
“그래도 정말 이렇게 셋이 친했단 말이야? 게다가 끽해야 며칠이었다며. 정들 시간도 없었을 것 같은데.”
“뭐 흔들다리 효과였을 거라고는 저도 생각합니다.”
태성이 말했다.
“흔들다리가 뭐?”
건오가 되물었다.
“흔들다리 효과요... 모릅니까?”
건오도 주황도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앞으로 십 년 중에 유행하는 거였던가... 좀 더 조심해야겠군요. 유행어나 속어를 써버릇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태성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 흔들다리 효과라는 건 극도의 위기상황을 함께 겪은 사람들 사이에 급속히 유대감이 생기는 걸 말합니다. 직전까지 일면식도 없던 병사들도 같이 전투를 겪고 나면 서로 목숨을 거는 전우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건 말이 되네.”
김주황이 말했다.
“그래도 그거 지금은 혼자만 알고 있는 거잖아. 우리는 그렇게... 대단히 의리 느끼기 어렵다고. 괜찮겠어?”
“일방적인 감정이란 거 압니다. 그러니 귀찮으면 그냥 멀리해도 된다는 겁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태성이 말했다.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니었지만.
“싫으면 고릴라 혼자 가면 되는 거야.”
건오가 태성의 옆으로 붙어앉았다.
“뭐야?”
“난 대장이 그 집구석에서 구해줬거든. 싸움은 같이 안 했어도 의리 생길만 하지?”
“으이구 저게....”
주황이 때리고 싶다는 눈으로 건오를 노려보았다. 건오가 혀를 쏙 내밀었다. 태성은 말리는 대신 둘의 입씨름을 관찰했다.
“재밋냐?”
주황이 쏘아붙였다.
“네.”
태성이 성실하게 대답했다.
“두 사람이 살아서 싸우는 걸 보니까 정말 좋네요.”
“...그..렇게 말하면 민망해서 싸울 수가 없잖아.”
건오가 투덜거렸다.
“안 싸우면 더 좋고요.”
“아 진짜.”
주황도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할 말 없게 만드는 데는 선수구만 아주.”
“불쾌했다면 죄송합니다.”
“그런 거 아냐....”
주황이 고개를 저었다.
“뭐, 모범생 친구가 생겨서 손해 볼 건 없겠지. 나도 언제까지나 아무 생각 없이 살 수는 없을 거고.”
그의 말에 태성의 표정이 환해졌다.
“앞으로 잘해보자고.”
“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참 그런데 앞으로면.... 그냥 이렇게 살면 되는 거야?”
건오가 물었다.
“미래에서 왔는데 그 뭐 세계를 구한다거나.”
“이미 구했습니다.”
태성이 말했다.
“선진화파와 백석그룹의 죄상을 밝혀냈으니까요. 세상을 구한다고 거창하게 말하기엔 부족하지만 이전에 승리했던 악을 패배시킨 거니 우리가 할 일은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태성이 건오를 엄숙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냥 이렇게 사는 건 안되지만요. 허건오씨, 공부 하라고 했지요?”
“으악.”
“김주황씨도 마찬가지입니다.”
강 건너 불구경하던 김주황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앞으로 오 년 안에 나라 경제가 매우 어려워집니다. 미리 대비를 해두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공부를 하라고 우리더러? 이제와서?”
“고등학교는 제대로 마쳐야 하니까요. 거기에 취업에 도움이 될 만한 자격증이...”
“으악 무슨 선생님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애늙은이!”
“겉은 이래도 속은 스물일곱이니까 애늙은이 맞아요.”
태성은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하긴, 공부하는 버릇이 들어있지 않은 사람에게 갑자기 공부하라고 해 봐야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라도 어려우려나요.”
“그, 그렇지.”
건오가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그 말을 잡고 늘어졌다.
“그러니까 쓸데없....”
“그러니 같이 공부하는 게 좋겠습니다.”
“....뭐?”
“같이 공부하자고요. 서로 감시하면서.”
태성의 일방적인 감시가 될 게 본인 생각에도 뻔했지만 그는 천연덕스럽게 덧붙였다.
“너무해. 악당. 악마!”
건오가 팔에 고개를 묻었다.
“날 공부 시키려고 십 년 후에서 쫓아오다니...”
“박근태를 무찌르고 여러분과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만.”
그러기 위해서 일부러 뭘 해서 넘어온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넘어온 뒤에는 저 목적을 위해 힘썼으므로 하태성은 떳떳했다.
“악당 보스를 무찔렀으면 그 후론 공부 같은 거 안 해도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 거 아냐?”
“어쭈, 보스 무찌르는데 아무 것도 안 한 녀석이 영웅 기분 내냐.”
주황이 놀렸다.
“이 고릴라 자식이..... 그러는 넌 공부 잘하냐!”
“아니지만.”
“그런 주제에!”
“자자, 싸우지들 말고요.”
태성이 말리며 주위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목소리를 높인 건 공부 얘기가 나온 이후라 다들 대화 내용에 대해선 그러려니 하는 모양이었다.
“악의 보스를 무찔렀다고 모든 게 갑자기 다 잘 될 리 없지 않습니까, 현실인데.”
태성이 말했다.
“쳇....”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노력합시다.”
“할 수 없는데 공부....”
“허건오씨.”
태성이 엄하게 말하자 건오가 찔끔했다.
“뭐, 못해봤자 지금보다 더 떨어질 리는 없겠지.”
주황이 느긋하게 말했다.
“밑져야 본전이야. 쬐끔만 해보자고.”
“많이 했으면 좋겠지만... 네, 처음에는 조금씩 부터요.”
그러나 친구들과 웃으며 공부계획을 세우면서도 태성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허건오의 말이 옳았다. 악의 보스를 무찔렀으면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아야 했다. 아무리 현실이라고 해도 아무 보상도 없는 건 안 될 말이었다.
자신과 양시백과 권혜연은 잃었던 가족을 되찾았다. 배준혁은 그러진 못했지만 그도 동료가 살아있고 새출발 할 기회도 생겼다.
허강민은 아무것도 되찾지도 지키지도 못했다. 세 번째 밀실의 원래 희생자들을 살려 보내주기는 했지만 그걸로 그가 마음을 고쳐먹고 새출발 할 기회를 얻었다고 그러니 그에게도 좋은 일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남들이 행복해지는 걸 도왔는데 자기는 행복해질 수 없으면 너무 비참하잖아....’


아주아주 오랜만에 집에서 맞은 일요일 아침 권현석은 매우 당연하게 늦잠을 잤다.
“아빠아~”
“으응..... 오형사 잠시만.....”
“아빠!”
“우악!”
권혜연이 펄쩍 이불 위로 뛰어올라 덮쳐누르자 권현석음 깜짝 놀라 버둥거렸다.
“안 일어나시면 간지럼 태울 거에요. 하나, 둘...”
“알았어 알았어 일어날게 해연아, 살려줘어..”
권혜연이 벌떡 일어나 물러섰다. 권현석이 조금 더 버둥대다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
“아 정말 오랜만에 비번인데 어디 놀러가는 것까진 안 바라도 일어나서 얼굴 정도는 보자고요.”
혜연이 억지로 얼굴을 펴며 미소를 만들었다.
“아, 미안해. 내가 그런 맘도 모르고....”
현석이 허둥지둥 일어났다.
“아점 해놨으니까 나와요.”
“아점?”
“아, 아침 겸 점심이요.”
혜연이 후다닥 아빠 방을 나갔다.
“요새 애들은 왜 그렇게 말을 줄일까.”
권현석은 하품하고 일어나 화장실에 갔다.



검은 남자 74 ㅣ- 회색도시&검은방



“하무열 형사님.”
타이밍 좋게 뒤에서 배 형사가 불렀다. 하무열 정도의 강심장이 아니었으면 펄쩍 뛰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쪽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피곤한 기색으로 종이컵을 든 채 배준혁이 다가왔다. 그리고 하무열이 한 것처럼 문 너머를 노려보다가, 돌연 종이컵을 그리로 휘둘렀다.
내용물은 커피가 아니었다. 희석한 피 같은 것이 열려서 탁 트여있어야 할 문에 가로막혀 흘러내렸다. 거울에 끼얹은 것처럼.
거울이었다. 어느 기업에서 증정했다고 하단에 페인트로 적혀있는, 니스칠한 나무 틀에 끼인 크고 네모난 거울. 문이 아니었다.
“......들어가려고 했으면 이마를 박았겠군.”
하무열이 억지로 웃었다. 배준혁은 웃지 않았다.
“수색을 방해하려고 엉뚱한 공간으로 연결해놓은 겁니다. 들어갔으면 이 건물의, 음....‘이 정도는 경찰에 보여줘도 된다’라고 판단된 공간으로 빠졌을 겁니다.”
“아주 정성들여 엿을 고아놓으셨군.”
혀를 차며 주위를 살펴본 끝에 하무열은 다시 거울로 다가갔다. 배준혁이 말리지 않는 걸 보고 틀을 잡아 옆으로 밀어냈다.
거울 뒤에 숨겨져 있던 문이 드러났다. 준혁이 다시 다가가 뭔가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손짓을 하자 쉽게 열렸다.
“잠시만요.”
들어가려다가 배준혁이 머뭇거렸다.
“류태현 순경이 앞서갔다면 그도 이 거울 함정에 빠졌을지 모릅니다. 보통 순경이라면 길 잃고 끝이지만 그는 마법사이니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그놈이 지금 어디 있나 추적 가능한가?”
“예.”
배준혁이 사양하는 기색 없이 주머니에서 작은 지퍼백을 꺼냈다.
“위험할 수도 있지만 지금 여유 부릴 때가 아니니까요.”
대체 언제 뽑았는지 모를 류태현의 머리카락에 은 팔면체를 얹고 배준혁이 주문을 외웠다.
“찾았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아서 배준혁이 눈을 뜨고 한 걸음 움직이려 했다.
“잠깐만.”
하무열이 손을 들어 배준혁을 막았다.
“그렇게 모아둔 머리카락 중에 허강민의 것도 있겠지?”
“예.”
병실에서 새로 찾은 흔적은 미미했지만 그 전에 몰래 거둬둔 것이 있었다.
“그럼 하는 김에 그 녀석도 추적해주면 좋겠군.”
“지금 류태현의 위치를 기억해두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한 명 더 탐색하면 두 사람의 위치가 제 머릿속에서 뒤섞일 수 있습니다.”
배준혁이 주저했다.
“게다가 여기가 본산 안이긴 해도 허강민 본인에게 차단 조치가 되어있다면 추적은 실패할 겁니다.”
“해보기 전엔 모르는 일이지 않나.”
배준혁은 하무열을 빤히 바라보았다.
“허강민이 그 정도로 걱정되십니까?”
“그래. 류태현도.”
뭔가 더 있다는 느낌을 배준혁도 받았다. 더 따지거나 사양하는 대신 다시 부적을 준비하고 주문을 외웠다.


류태현은 서두르고 있었다.
설마 영장이 이렇게 빨리 나올 줄은 몰랐다. 아직 순경인 그는 수사팀 상층부의 분위기를 읽는 데 서툴렀고 강성중도 그의 가치를 과소평가해 정보를 보태주지 않은 탓이었다.
백선교 본산엔 여전히 중요한 제단과 고위 사제들이 꽤 남아있었다. 경찰에 들켜도 흉악한 컨셉의 세트장과 광신자 한 무리로 보일 뿐 위법성을 입증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운 데다가, 함부로 옮길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제단과 영구 마법진은 모두 본산 건물을 짓기 전부터 방위와 환경을 고려해 이세계와의 소통에 가장 적합한 지점을 찾아 그 자리에 설치한 것들이었다. 무턱대고 옮기면 제단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거나 더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따라서 그런 것들은 눈속임 마법으로 출입구를 감추고 노골적인 인신공양의 흔적을 깨끗이 지우는 정도 조치밖에 하지 않았다. 정말 들켜선 안 되는 것들은 파기하거나 공간을 찢어 외부 통로를 열고 반출했다. 경찰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한 지금까지도 그 작업은 끝나지 않았다.
그 일을 거들라는 건지 강성중에게서 전화가 왔지만 류태현은 무시하고 자기 방으로 달렸다. 허강민을 옮기는 일이 무엇보다 급했다.
간부 구역은 구조도 인테리어도 판에 박은 듯 반복되는 패턴으로 되어있었다. 그저 돌아다니는 것만으로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정신이 흐트러지는 건 허강민의 밀실과도 비슷하다고 류태현은 생각했다.
아직 길도 익숙지 않아서인지 두 번째 엉뚱한 복도로 들어섰다. 류태현은 혀를 차며 벽에 손을 짚었다. 벽과 손바닥 사이에서부터 축축한 썩은내가 흘러나왔다.
이렇게 아무 때나 공간을 찢어대면 정신에 무리가 간다고 했다. 강민 씨가 자신에게 한 말이지만 사실일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생긴 두통이 이렇게 공간을 찢고 그 사이를 지날 때면 찌르듯 날카로워지며 전신으로 퍼졌다. 지독한 고통이지만 강 탄산을 마실 때 같은 시원함이 그 뒤를 따랐다.
결코 인간의 정신에 이로운 현상이 아니었다. 아마 신체에도. 지금의 류태현에겐 별로 신경쓰이지 않는 문제였다.
이대로 완전히 미쳐버려서 강민 씨를 잡아먹어 버린다면 그것도 괜찮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려하면서 공간을 넘어 허강민의 방에 도착했다.
“조심해!”
강민 씨의 쥐어짜는 듯한 비명에 류태현은 황급히 몸을 굴렸다. 빛줄기 같은 것이 아슬아슬하게 류태현을 스치고 지나갔다.
“너무 빨리 돌아왔군.”
강성중이 혀를 차며 류태현을 노려보았다. 허강민은 그 앞에 쓰러져 있었다.
“일껏 비밀에 한 발짝 더 다가가게 해줬더니, 경찰들이 코앞에 밀어닥쳐도 이놈 생각밖에 안 나던가?”
류태현은 강성중을 무시하고 허강민에게 달려가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 몸은 이미 차고 뻣뻣했다.
“강민 씨.”
서둘러 맥을 짚어보았다. 맥박이 느껴지지 않았다. 류태현의 뇌리도 차게 굳어갔다.
차차 굳어가던 온몸이 바로 옆의 강성중을 의식했다.
더 이상 생각은 필요 없었다. 그대로 튕겨 일어나 강성중에게 덤벼들었다. 난생 처음 살의에 휘말려 자신을 놓아버렸다.
‘아니, 잠깐.’
강성중에게 살의를 집중해 저주를 완성하기 직전이었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돌탑 아래쪽에 생긴 빈틈처럼 살의를 뒤흔들었다.
‘분명 직전에 조심하라는 강민 씨 목소리를 들었는데?’
류태현은 두 손으로 자신의 뺨을 쳤다. 그리고 두 눈을 꽉 감았다가 다시 떴다.
강성중이라고 생각하고 저주하려 한 상대가 다시 똑바로 보자 허강민으로 바뀌어 있었다. 주문에 걸렸는지 기둥처럼 뻣뻣이 굳은 채 세워져 있지만 숨은 쉬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건 허강민의 옷을 입힌 허수아비였다.
그 목소리가 아니었으면 강성중의 함정에 빠졌으리라는 걸 깨닫고 다급하게 굳어있는 허강민을 감싸 안았다.
탐색할 필요도 없었다. 강성중의 분노와 저주가 방에 가득 차 두 사람을 휘감기 시작했다.
-너희끼리 죽고 죽였어야 우상이 완성되는 건데.
강성중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뭐, 좋아. 이대로 허강민을 살려서 데려갈 수 있다고, 최후까지 헛된 희망에 매달려 싸워보라고. 희망의 우상답게. 그런 네가 죽어야 허강민도 진정한 절망의 우상이 될 수 있겠지.
류태현은 허강민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방어계 주문은 새로 배운 것이 없었다. 그래도 이제까지 해온 대로 정신을 개방하고 검은 남자의 힘을 자신 안에 불러들이려 했다.
개방된 정신은 저주와 마법 공격에 그만큼 무방비해지기 때문에 보통 마법사는 이럴 때 정신 보호 조치를 하고 필요 최소한으로 개방한다. 공격받는 그 순간엔 아예 개방하지 않고 방어에 치중하기도 한다.
그런 요령이 없는 류태현은 강성중의 저주 앞에 벌거벗고 나선 거나 다름없었다.
온몸이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갔다. 비명을 지르며 허강민을 감쌌다가 그에게 불이 옮겨붙는 걸 보고 허겁지겁 손을 떼었다.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강민 씨를 구하고 싶었다. 자신이 불타 죽더라도. 계속 미움만 받는다고 해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흐른 곳마다 석유가 흐른 듯 불길이 타올랐다.
허강민은 여전히 굳은 채 반응이 없었다.
자신이 망가뜨렸기 때문에.
‘내 잘못이야.’
강민 씨 말을 들었어야 했다.
그 순간 뒤에서 차가운 물줄기가 쏟아졌다.
미쳐버린 자신을 질타하는 것 같았다. 자신을 태우는 불꽃으로부터 감싸주는 것 같기도 했다.
“류태현!”
무열 선배의 목소리였다. 류태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선배!”
배준혁의 방어 마법이 류태현과 허강민을 감싸며 저주의 불길을 꺼뜨렸다. 하무열이 달려들어와 류태현을 덥석 끌어안았다.
“야, 임마. 정신 드냐?”
“선배.”
하무열이 쓰러져 있는 허강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류태현이 자기 발로 설 수 있는 것까지 확인한 다음 그를 놓고 허강민에게 몸을 숙여 숨이 붙어있는 걸 확인했다.
“제가 잘못했어요, 무열 선배. 제가.....”
“반성문은 나중에 쓰고 일단 여길 나가자.”
허강민을 들쳐 메고 하무열이 정면을 노려보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강성중이 거기 서 있었다. 배준혁이 침입하면서 위장이 벗겨졌지만 여전히 전신에 흉흉한 기운을 두르고 세 사람을 비웃음 띤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 그 흉악한 기운이 세 사람을 덮치지 못하는 것은 열린 방 문 앞에 버티고 선 배준혁 형사 때문이었다. 그가 쉴 새 없이 주문을 외워 방어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도 그 이상 강성중을 공격하거나 할 재간은 없는 게 분명했다. 얼굴은 이미 창백하고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흘러내렸다.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느라 숨은 쉬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강성중은 여유롭게 미소지었다.
“저 자를 그냥 놔둘 순 없어요.”
류태현이 반쯤 눈이 풀린 채 중얼거렸다.
“처치하기 전엔 못 빠져나갑니다. 내보내주지도 않을 테죠.”
강성중이 발작하듯 웃었다.
“그걸 알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로군!”
강성중의 주위에 불덩어리가 떠올랐다.
“그걸 알면서 나한테 넘어온 건가?”
류태현은 하무열과 허강민을 자신의 뒤로 물리면서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여기엔 무열 선배도 배 형사님도 있었다. 그들에게 자기가 범인이라고 알리고 싶지 않았다. 강민 씨를 납치해 고문하고 수사팀을 곤란에 빠트린 범인이라고, 무열 선배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역시 이놈 짓이었냐.”
나직이 이를 가는 하무열의 목소리에 놀라움은 없었다. 류태현은 더 놀라서 하무열을 돌아보았다.
“멍청아, 저놈 먼저 막아!”
놀라움과 죄책감이 류태현의 정신 방어에 빈틈을 만들었다. 강성중이 만든 핏빛 불덩이들이 그리로 날아들었다.
정신이 멍해졌다. 건물이 백화점처럼 뒤흔들리며 무너지는 것 같았다. 버티지 못하면 강민 씨의 동생이 죽는다.
‘아니야.’
무열 선배의 손을 움켜잡고 류태현은 타버리려는 정신을 붙들었다.
‘지금은 강민 씨를 지켜야 해. 무열 선배와 배 형사님과 함께.’
그러자면 강성중을 죽여야 한다.
“처음부터 수상했다.”
하무열이 류태현의 손을 툭툭 치며 중얼거렸다. 조는 걸 깨우려는 듯한 동작이었다.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상대가 마법사들에게 납치되었다고 해도 넌 너무 빠르게 불안정해졌어. 마법 실력도 이상할 만큼 빠르게 늘었고.”
강성중의 찌푸린 얼굴이 하무열의 눈에도 들어왔다. 그 눈을 마주보며 하무열은 자신의 권총집을 더듬었다. 안전장치는 이미 푼 상태였다.
“널 탓하는 건 나중에 하고 싶다. 네가 얼마나 잘못했든 얼마나 멍청했든 저놈이 부추긴 게 사라지진 않아.”
하무열과 배준혁이 류태현의 타락에 놀라 동요하지 않는 것은 확실히 강성중의 예상 밖이었다. 그러나 강성중도 그들이 그렇게 침착하게 대응하는 것 가지고 동요하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류태현이 정신을 가다듬고 읊은 저주는 강성중을 다치게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니 이 방법밖에 없었다.
‘이건 경찰로서 불가피한 발포야.’
하무열이 총을 뽑아들어 쏘았다.
‘저 바보들을 구하기 위한 일이고.’
명백히 강성중은 하무열이 총을 뽑는 것을 한 발 앞서 눈치채고 있었다. 비웃음 띤 얼굴엔 흔들림이 없었다. 총알을 막을 방어 마법 정도는 두르고 있는 덕이었다.
총알이 방어를 찢고 강성중에게 명중했다. 비웃는 얼굴 그대로 그의 자세가 무너졌다.
그 틈을 타 류태현이 쓴 저주는 성공했으나 효과가 발현하지 않았다. 산 사람의 정신을 쳐서 기절시키는 저주였기 때문에 죽은 자에겐 통하지 않았다.
“경찰이 범인을 한 발에 사살했다고 시비 걸리면 내가 다 뒤집어쓰마.”
하무열은 방금 쏜 총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겁니까?”
배준혁이 주문을 중단하자마자 벽에 기대 한숨을 토하며 물었다.
“총알에 마법은 언제 걸어둔 겁니까? 누구에게 부탁해서요?”
배준혁이 바라보자 류태현이 머리를 흔들었다.
“마법을 제대로 건 것은 아니야.”
하무열은 쓰러진 강성중이 정말로 죽은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허강민을 챙겼다.
“마법책을 왕년에 좀 읽었거든. 그거랑 류태현의 수업 내용을 참고해서 방어 주문을 깨는 데 효과 발휘할 만한 촉매에 총알을 담가 뒀지.”
“혼자 주먹구구식으로 마법을 걸었다는 거잖아요?!”
류태현이 버럭 소리질렀다가 하무열이 대꾸하기도 전에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허강민을 내려다보았다.
숨은 쉬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무열 선배.”
“잘못한 줄 알면 그놈 업어.”
하무열이 내뱉었다.
“경감님께 갖다주고 넌 도로 와. 배 형사 과로사 시키기 싫으면.”
류태현은 입을 다물고 허강민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자 어깨 근육이 소스라치는 것이 느껴졌다.
“죄송하지만 마지막으로 잠시만 참아줘요.”
류태현이 작게 중얼거리고 허강민을 업었다. 굳어 있던 관절은 풀렸지만 이젠 그냥 축 늘어져 있어 여전히 산 사람 같지 않았다.
오늘 얼마나 많은 마법을 쓰게 되든 다시 정신을 잃고 미쳐버릴 걱정은 없겠다고 류태현은 멍하니 생각했다. 이미 자신의 정신은 기능을 다했으니까. 타고 남은 재는 폭발 위험성도 없으니까.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44 ㅣ- 회색도시&검은방


박근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경찰청으로 뛰어들었다.
현석이는 부하들 전부 모아놓고 출동 대기하고 있다고 했다. 국장님이 전화를 안 받으시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이제 곧 가서 별일 없는지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그가 수사팀 사무실로 달려갔다.
“근태형!”
업무 중인 것도 잊고 권현석이 그를 부르며 일어났다. 박근태는 직접 가서 받아온 영장을 번쩍 들어보였다.
“장희준에 대한 구속 영장. 백석 저택과 그룹에 대한 압수 수색 영장 둘 다 나왔다.”
팀원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모두들 서둘러 겉옷을 걸쳐 입으며 출동할 준비를 했다.
“실수가 있어선 안 돼!”
권현석이 호령했다.
“영장 집행 절차 잘 숙지하고 있지? 사소한 거라도 꼬투리가 잡혔다간 일껏 확보한 증거가 휴지조각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고!”
“서형사 서류 함부로 쏟으면 안돼요, 알았지?”
“나 진짜 중요한 일엔 운 좋은 거 알잖아.”
“운은 좋지만 그 운이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불안한 겁니다.”
“좀 봐주라....”
그렇게 다들 막 나가려는 찰나였다. 복도를 달리는 소리가 다가왔다.
쾅!
열려있던 문짝이 활짝 열리며 벽에 부딪혔다.
“아니 국장님?”
하성철이 문틀에 기대 숨을 헐떡였다. 박근태가 재빨리 다가가 부축했다.
“무슨 일이...”
“그.. 영장...”
“네, 무사히 받아왔습니다. 구속영장도 압수 수색 영장도.”
박근태가 그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그.... 무효가, 되어버렸네.”
하성철이 숨을 몰아쉬었다. 박근태도 권현석도 얼굴이 하얘졌다.
“뭐라고요? 어째서? 어떤 놈의 수작이.....”
“죽었어.”
하성철이 말을 짜냈다.
“장희준 회장이. 그래서 구속 영장은 무효야.”
“네?!”
박근태가 일단 그를 사무실 안으로 들여 소파에 앉혔다. 권현석이 문을 닫고 다가왔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게.... 일이 좀 복잡하게 되었어.”
하성철이 숨을 고르며 이마를 짚었다.
“그, 자네들, 허강민이라고 아나? 밀실 연쇄 살인범.”
“그가 장희준을 죽였습니까?”
배준혁이 물었다.
“그래.... 밀실을 구경 중이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잠시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구, 구경이라고요?”
권현석이 말했다.
“그.... 밀실이라는 거, 사람 가두고 죽이는....”
“허.”
“그런 걸 구경? 왜?”
이들은 조직 폭력배를 전담하는 강력계 형사들이었다. 어지간한 폭력이나 가학 행위에는 본의 아니게 익숙한 편이었다.
그렇다 해도 이건.
“무슨 고대 로마도 아니고.”
“검투사도 이렇겐 안 했겠다.”
“어떤 미친 놈들이...”
팀원들이 웅성거렸다. 다들 충격이 커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미안하네. 이렇게 갑작스럽게.”
하성철이 사과했다.
“하지만 사태가 크게 변했으니 다들 나가기 전에 전략을 다시 검토해야 해서.”
“예, 그렇지요.”
박근태가 동의했다.
“아, 그의 사망은 아직은 대외비일세. 같이 죽은 사람들 신원도 아직 다 몰라. 현장이 폭발로 날아가서 시신 수습 하느라 그쪽은 죽을 맛인 모양일세. 사건이 사건이니 큰 스캔들이 되겠지.”
“그런... 짓을 하다 죽다니.”
권현석은 아직 정신을 다 차리지 못했다.
“기왕 죽을 거라면 반인륜적인 불법 행위에 가담하다 죽어서 그건 다행이군요.”
준혁이 중얼거렸다.
“뭐야?”
권현석이 고개를 들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소식이 널리 퍼지면 이제 누구도 장희준을 감싸지 못할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죽은 걸 잘 죽었다고 하긴 그렇지만 보복 걱정이 없어진 건 사실이잖아요.”
최재석이 나서서 준혁을 두둔했다.
“보복 걱정이라니, 그런 거 하고 있었어?”
권현석이 표정을 흐렸다.
“혹시 무슨..”
“그야, 현석이 형도 근태 형도 걱정하고 있었잖아. 설마 몰래 하는 중이었어?”
유상일이 말했다.
“그래, 몰래 하는 중이었다.”
할 말을 잃은 권현석 대신 박근태가 한탄했다.
“일단 생각해보자. 장희준이 죽었으니 그를 처벌하는 건 불가능해졌어. 그렇지만 그의 범죄는 여전히 입증해야 해. 공범이나 협력자도 찾아야 하고. 선진화파 말고도 다른 범죄에 손을 뻗고 있었다면 그것도 그냥 둘 수 없지. 같이 죽은 사람들과의 연관도 밝혀야겠지.”
“허강민 사건을 담당하는 팀에 가서 공조 수사를 요청하지.”
하성철이 다시 일어났다.
“이번 사건에선 피해자겠지만 그들이 공모해 저지른 범죄가 이것만일 리도 없고 백석의 끄나풀은 경찰 내에도 있어. 이 일이 새어나가기 전에 덫을 놔야하니까.”
“물론입니다.”
“일단 자네들은 가서 수색 영장을 집행하게. 일의 범위가 늘어났다는 걸 잊지 말고, 요령껏.”
선진화파 뿐 아니라 허강민에 대한 정보도 찾으라는 소리였다.
“네, 알겠습니다.”
권현석이 대답했다.
“장희준의 비서나 알려진 측근들의 경우 도주 및 증거 인멸의 우려가 높으니 긴급히 구속영장을 신청해야겠고.”
“네?”
최재석이 소리쳤다 목을 움츠렸다.
“최재석 경사?”
박근태가 불렀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그... 수색하러 갈 때, 저는 빼주십쇼.”
재석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잠입할 때 거기... 사람 하나하고 자주 마주쳤는데, 개인적으로도 친해져버렸습니다. 사심이 들어가면 안 되잖아요.”
“재석이 생각에 구속 대상인 사람이야?”
권현석이 물었다. 최재석은 고개만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재석이는 남아서.... 국장님을 호위해.”
권현석이 명령했다.
“장희준 죽었다고 수사를 방해하려는 시도가 없어질 리 없으니까. 이판사판이라고 더 난리칠 수도 있지.”
“예 알겠습니다.”
“결정 났으면 움직이자고.”
박근태가 일어났다.
“다녀오겠습니다, 국장님.”
“그래 모두.... 무사히 다녀오게.”


무시무시한 인상의 경호실장이 저택 정문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걸 보고 권현석은 힘으로 돌파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부하 형사들도 마찬가지 심정인지 긴장된 공기가 뒤로부터 전해졌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직 다섯 걸음 쯤 떨어져 있는데 그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권현석과 박근태가 두 걸음 더 다가가 멈춰섰다. 박근태가 영장을 꺼냈다.
“저택을 수색하러 오신 겁니까.”
“그래. 형사 소송법에...”
“들어오시지요.”
문이 열렸다. 박근태는 말하다 삐끗했다.
“그, 그냥?”
“절차가 더 필요하다면 진행하셔도 됩니다.”
경찰들은 당황했다. 이게 다 경찰들을 당황시켜 수사를 방해하려는 음모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당황했다.
거기에 양태수가 갈색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엉겁결에 받아든 권현석이 안을 살폈다.
“회장님 집무실과 접견실, 금고의 열쇠와 보안카드 등등입니다.”
양태수가 설명했다.
“어째서 이렇게 하는 거지?”
참다 못해 박근태가 대놓고 물었다.
“수사에 적극 협조하는 게 아가씨의 방침입니다.”
“아가씨라니... 설마 벌써 소식이.”
“아.”
양태수가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했다.
“예, 약 두어 시간 전에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그, 장지연 씨는 어디 계시지?”
“그룹의 경영권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긴급 이사회에 참석해야 해서 거기 가셨습니다.”
양태수가 말했다.
“기왕이면 저택에 대한 수색은 아가씨 돌아오시기 전에 마쳐주셨으면 합니다. 아무래도 아가씨 아버님의 일이니까요.”
그 말에는 박근태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서두르도록 하지.”
박근태가 신호하자 형사들이 우르르 저택 안으로 몰려들어갔다. 양태수가 들어오는 경찰들 면면을 훑어보고 있는 걸 눈치채고 권현석이 그에게 다가갔다.
“혹시 최재석 경사를 찾습니까?”
잠깐 놀랐다가 양태수가 표정을 바로했다.
“예, 그렇습니다. 오지 않은 모양이군요.”
“여기에 친구가 있어서 오기 곤란하다기에 뺐습니다.”
권현석이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혹시라도 이번...”
“제 독단이 아닙니다. 정말로 아가씨께서 아버님의 죄과를 청산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권현석이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물론 좋은 일이지만 아버지가 죽자마자 딸이 그의 죄상을 낱낱이 파헤치는데 협력하다니 기껍지만은 않은 이야기였다.
“알고 계셨습니까?”
권현석이 충동적으로 물었다.
“몰랐습니다.”
불신의 눈초리를 보고 양태수가 말을 고쳤다.
“아가씨께선 눈치 정도는 채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알려 하지 않았습니다.”
권현석이 몰려 들어가는 형사들 뒷모습을 보았다.
“차라리 그게 사실이길 바랍니다. 재석이를 위해서.”
권현석이 부하들을 따라 들어갔다. 양태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강재인에게 연락했다.



검은 남자 73 ㅣ- 회색도시&검은방



잠들어 있는 류태현은 예전 그대로 평범하게 보였다. 깨우면 다시 순진한 눈을 때록 굴리며 무슨 일이냐고 물을 것 같았다. 아니면 PDA부터 찾거나.
잠시 더 기다려 봤다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목 위에 얹힌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인형의 팔을 가지런히 놓듯 그 손을 류태현의 몸통 곁에 놓았다.
깨지 않는 걸 보고 안도하며 어떻게 할지 궁리했다.
수갑 열쇠를 찾아보자니 그러다가 깨워버리면 어떻게 될지 무서웠다. 마법사가 되면 정신이 불안정해지기 때문에 깊이 잠들기 어렵고 자는 동안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도 해두기 마련이었다. 지금 류태현의 실력은 어느 정도이며 주문은 얼마나 습득했는지 모르는 이상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다.
‘차라리 자는 내내 옆에 얌전히 누워 아무 짓도 안 했다고 하면 누그러지지 않을까.’
류태현이 지금 자는 척하며 자신을 시험해 보고 있을 경우까지 생각하고 허강민은 계속 얌전히 누워있기로 마음을 정했다.
‘내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굴러떨어진 거지.’
스스로가 나약하고 한심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옆에서 류태현은 여전히 색색 소리내며 잘 자고 있었다.
자는 모습만 보면 역시 폭주해서 미쳐버린 마법사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이렇게 무해해 보이고, 나름 귀여워 보이기까지 하는데.
‘아, 아니. 정신차려라, 나. 저게 어디가 귀엽다고.’
원래도 사람보다 기계를 더 좋아하던 자신이었다.
남의 외모 같은 것 누가 누군지 구별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남들이 저만하면 예쁘다, 잘 생겼다 하는 얼굴에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하물며 저런 평범한 얼굴에.
‘너 여전히 류태현 안 좋아하는 거 맞냐?’
하무열 형사의 심술궂은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머리가 아팠다. 그러나 일어나서 약을 찾기는커녕 조금 뒤척일 수도 없었다.
가위에 눌렸다.
류태현이 평온하게 잠든 얼굴 그대로 다시 손을 뻗어 목을 졸랐다. 침대가 가라앉아 밀실 안으로 떨어졌다.
동생의 시신을 흉내낸 마네킹이 걸려 있던 방으로. 그 방이 빙글 돌아 정은영이 죽은 방으로 변했다. 회전하며 콘크리트 기둥이 내려왔다. 사람을 다치게 하기 직전 높이에서 멎도록 설계한 기둥이 멈추지 않고 내려와 짓눌렀다.


핸드폰 알람이 류태현을 깨웠다.
언제나처럼 허겁지겁 일어나 출근준비를 하면서 익숙지 않은 방 때문에 몇 번 헛손질을 했다. 그러다 침대 위의 허강민을 기억해냈다.
허강민은 침대 위에 누운 채 움직이지 않았다. 옆에서 꽤나 시끄럽게 왔다갔다 하는데도 눈을 뜨지 않았다.
상태가 어떤지 가까이 가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류태현이 심은 기억들과 허강민이 전부터 짊어져온 고통이 그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리고 있었다. 마법사가 되면서 더욱 불안정하게 뒤틀려버린 정신이 한계를 맞이했다.
류태현은 손을 뻗어 허강민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었다.
“이따가 봐요.”
잠복 다녀오면 얼마나 망가져 있을지, 과연 자신을 알아볼 수는 있을지 기대하며 류태현은 공간을 찢고 벽에 문을 내었다.
“아예 경찰청까지 이걸로 도착할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죠. 그럼 한 시간은 더 잘 수 있는데.”
대답은 없었다. 류태현은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자기 집까지만 마법으로 이동하고 이후로는 만원 지하철에 시달려가며 약속장소에 나가 하무열과 합류했다. 어제처럼 잠복 장소까지 다다르자 하무열이 배준혁에게 전화로 교대하겠다고 알렸다.
마법사들이 날밤 새가며 잠복할 수 없기 때문에 첫날 이후로는 2교대로 잠복하기로 했다. 이제 배준혁이 자러 갈 때였다.
“잘 잤냐?”
하무열이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예.”
“힘들면 그렇다고 말해.”
하무열은 여전히 답지않게 무거운 기색이었다.
“너까지 어제의 배 형사 꼴 나게 하고 싶진 않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류태현은 아직 다른 건물들 틈에 가려 보이지 않는 백선교 본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 일 안 나게 주의하고 있어요.”
평소나 다름없는 말투는 하무열을 안심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멀쩡할 리가 없는데. 저렇게 태연하게 굴어도 속은 그럴 리가 없는데.
네 번째 밀실에서 류태현은 여승아를 다시 만날 때까지 극도로 불안정해져 있었다. 지금이 그때보다 나은 점이 전혀 없는데, 지금의 류태현은 기이할 정도로 침착해 보였다.
‘마법사가 되면 저렇게 속을 잘 감출 수 있게 되는 건가?’
미심쩍은 모든 부분을 마법 탓으로만 돌리고 있는 것 같아 하무열은 잠시 반성했다.
그럼 류태현의 이상한 침착함은 어디서 기인한 것인가.
바로 답이 나올 리 없는 암담한 생각에 오래 잠겨 있을 필요는 없었다. 곧 본부에서 전화가 왔다.
-영장 나왔어.
권현석 경감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기다리면서 수상한 움직임이 없는지 확인해. 우리 도착할 때까지 돌출행동은 하지 마.
“예.”
뒷자리를 의식하며 하무열이 전화를 끊었다.
“뭐래요?”
다시 마법진을 그리다 말고 류태현이 물었다.
“오늘은 너무 뱅글뱅글 돌지 말래.”
하무열이 태연히 답했다.
“너무 눈에 띈다 이거지. 놈들도 경계하고 있을 테니.”
“그러네요.”
류태현은 고민하는 눈치가 되었다.
“이 정도 거리에서, 저 가까이 안 가고 할 수 있는 일이.....아니, 뱅뱅 돌지 않으면 한 블럭 정도 가까이 가도 되겠죠?”
“그렇지.”
“그럼 조금만 접근해주세요.”
“위험한 짓 하려는 건 아니겠지?”
잠시 차 시동도 끄고 하무열이 류태현을 돌아보았다.
“지난번 배준혁이 맛이 갔을 때처럼 너도 맛이 가버린다면, 난 네가 한 것처럼 구해줄 자신 없으니까 하는 소리다. 네 정신 챙길 사람은 너뿐이니 무모한 짓은 하지 마.”
류태현은 하무열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제 걱정 하시는 거예요?”
“당연하지, 임마. 내가 아니면 누가 널 걱정하냐?”
류태현은 진지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끄덕였다.
“그러네요. 무열 선배뿐이네요.”
“어이, 너 지금 진지하게 하는 소리냐?”
하무열이 눈썹을 찡그렸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네가 천지사방에 적밖에 없는 비극적인 판타지 주인공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농담은 이 정도로 하고, 그래서 어쩔 작정이냐?”
“본산 정문 가까이 가서, 거기 잠복해 있는 경찰들을 감시해볼 작정입니다.”
“뭐?”
역시 지금 류태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대놓고 이상한 소리가 나왔다.
백선교 감시를 두 마법사에게만 맡겨둔 건 아니었다. 통상적인 수사기법에 따른 잠복근무자들도 당연히 있었다.
“만약 백선교에서 증거를 빼돌리거나 요인을 도주시킨다면 잠복조에서 어련히 적발하겠죠. 그러니 그들에게 최면이나 다른 마법공격을 하려 들 거예요. 전 그걸 적발해볼까 합니다.”
“아, 그래.”
끝까지 듣고 나니 일리가 있었다. 하무열은 안도하며 차를 몰았다.
이번에 류태현은 바로 주문을 외우지 않았다. 전지에 뭔가 마법진 같은 것을 몇 장이나 그리고 접어서 챙겼다.
본산 건물은 겉보기엔 평범한 회관 같았다. 이미 몇 번이나 보아온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날따라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이질감이 들었다. 곧 수사팀이 쳐들어오리라는 사실 때문인지, 본산의 마법이 두 경찰을 가소로이 굽어보고 있는 것인지, 하늘을 회색으로 뒤덮은 구름 탓인지 하무열도 알 수 없었다.
오래된 벽돌 건물이 실제보다 수십 수백 년 전의 유적처럼 보였다. 한쪽 벽을 반쯤 뒤덮은 담쟁이덩굴이 하늘에서 내려온 먹구름 같았다.
“잠복근무중인 사람들이 누구누구인지는 나도 모른다.”
쓸데없는 감상이라고 스스로를 다잡으면서 하무열이 류태현에게 물었다.
“너도 일일이 직접 찾아내서 검사하기는 힘들 텐데 구체적인 계획 있냐?”
“예?”
딴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 류태현이 화들짝 놀랐다. 손으로는 그리고 있던 마법진을 얼른 덮었다.
“아....구체적인 계획이라고 할 만 한 건 아니고요. 마법의 영향을 탐지하는 주문을 저 자신에게 건 다음 이 근방을 훑어볼 작정입니다.”
계획이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대책없는 예정이었다.
그래도 하무열은 군말없이 차를 세웠다. 어차피 영장 나왔고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수사팀이 올 터였다.
지금 류태현이 대단한 뭔가를 해낼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사고나 안 저지르면 다행이었다. 그러니 아예 아무 것도 안 하고 조용히 기다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어쩐지 류태현 하고 싶은 대로 맞춰주고 싶었다.
류태현은 열심히 그린 종이뭉치를 가지고 내렸다. 하무열도 따라 내렸다.
걸으면서 류태현은 입 속으로 무언가 흥얼거리고 있었다. 주문이라기보다 그냥 콧노래처럼 들려서 하무열은 별 생각 없이 곁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 너, 너 방금 뭐라고 했냐?”
귓가에 칼날처럼 덮친 차디찬 음성에 소스라쳤다. 얼결에 되물었지만 하나도 알아듣고 싶지 않았다.
“예?”
돌아보는 류태현의 얼굴이 새까맸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하무열이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무열 선배?”
눈을 감았다 떠보니 류태현이었다.
“왜 그래요? 제가 뭐라고 했는데요?”
평소의 류태현이었다. 얼굴도, 목소리도.
“아무 말도 안 했냐?”
“예.”
류태현은 멀뚱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하무열을 바라보았다.
“잘못 들으신 거 아니에요?”
거리는 한산하고 잘못 들을 만한 소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류태현의 애매한 표정을 보면서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어, 그래. 아무튼......”
조용한 거리에 과속으로 돌진해오는 자동차 소리가 밀어닥쳤다. 그것도 여러 대. 하무열은 안도했다.
“어라?”
두 사람 곁을 지나쳐 쌩하니 달려가는 경찰차들을 보고 류태현이 화들짝 놀랐다.
“영장 나온 거예요? 드디어?”
“그래.”
류태현의 팔을 잡고 하무열도 타고 왔던 차로 되돌아갔다.
“그러니 우리도 빨리 따라가자. 허강민 구해야지.”
“예!”
류태현은 얼떨떨한 듯 허둥대며 하무열을 따라갔다.
류태현을 차에 넣고 하무열은 서둘러 경찰차들을 따라갔다. 잠복용 차였기 때문에 처음엔 경찰차들이 견제하듯 움직였지만 권현석 경감에게 무전을 넣자 곧 무난하게 끼어들 수 있었다.


“어서 와.”
영장 덕에 정문은 무사히 뚫었지만 권현석은 긴장한 기색으로 하무열과 류태현을 맞이했다.
“준혁 형사도 다시 불렀어. 일단 류순경이 앞장서.”
“예.”
류태현은 주저없이 다른 형사들과 요원들을 앞질러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하무열은 그 뒤를 따라가려다가 권현석을 돌아보았다.
“왜?”
“배 형사는 언제쯤 옵니까?”
“철수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금방 다시 올 거야.”
대답하면서 권현석은 류태현의 뒷모습을 흘끗 돌아보았다.
“류순경 한 명으론 못미더워?”
권현석의 질문은 질문이 아닌 확인에 가까웠다. 하무열은 천천히 끄덕였다.
“일단 제가 따라가며 지켜보겠습니다. 배 형사 도착하면 저한테 연락 좀 주라고 전해주세요.”
“그래.”
하무열은 대답을 듣고 바로 따라가는 대신 천천히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마치 류태현을 미행하듯이.
본산 내부는 깊이 들어갈수록 창이 작아지고 조명도 어두워졌다. 인테리어는 얼핏 평범한 낡은 건물 같지만 기분 탓인지 그것만으로도 음산하게 느껴졌다.
막다른 구석 같은 곳에 열린 문이 있었다. 원래라면 문이 있을 만한 위치가 아닌 콘크리트 벽 구석에 뜬금없이 니스칠 된 노란 나무 문이 있으니 문이 아니라 큰 거울처럼 느껴졌다. 공공건물 1층에 으레 있는 “증” 자 찍힌 거울.
하무열은 천천히 그리로 다가가 손을 뻗어보았다.
그 너머도 일단은 그냥 건물 안처럼 보였다. 그러나 조명이 더 붉고 어두웠다. 복도에 일정 간격을 두고 늘어선 문이 기억 속 진압작전 당시의 유스호스텔 내부 같았다.
이것이 정말 열린 문이고 들어가도 될 거라는 생각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러나 류태현이 이쪽으로 가는 건 분명히 봤다.
이번에는 도망치지도, 흔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하무열은 어금니에 힘을 주고 그리로 들어가려 했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43 ㅣ- 회색도시&검은방



내려가보니 옆에 차가 두 대 있었다. 각자 여자 한 사람씩이 옆에 나와 서있었다.
“자, 민간인은 이쪽 범죄자는 저쪽이에요.”
사무직 정장을 입고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여자가 자기쪽 차를 가리켜보였다.
“현장 봉쇄는?”
허강민이 물었다.
“완벽해요. 아무도 살아서 도망가지 못했어요.”
여자가 대답했다. 허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안승범이 허강민을 쳐다보았다.
“그래. 백선교 관계자들. 방금 폭탄으로 날아가버린.”
그가 잠깐 망설이다 말했다.
“이제 네 복수는 끝났어.”
“...”
안승범이 뒤를 돌아보았다. 민지은은 그를 마주 바라보았고 서현진은 그 뒤로 숨었다. 백건영은 도망가려는 걸 하무열이 붙들었다.
그들 뒤로 무너질 것 같은 리조트가 보였다. 하늘에는 아직 연기가 솟고 있었다.
“.....그래.”
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도 저쪽이다.”
허강민이 ‘민간인’ 차를 가리켜보였다.
“잘 가라. 다시는 볼 일 없을 거다.”
“그래......... 고마워.”
안승범이 도망치듯 차로 갔다. 민지은은 허강민을 한 번 처다보곤 그를 따라갔다. 서현진도 붙어갔다.
“저 놈하고 같은 차에 타라고?”
백건영이 항의했으나 허강민이 방긋 웃으며 총을 꺼내자 부리나케 차로 달려갔다.
고급 대형차라 다섯이 타도 좁지 않았다. 차가 출발하고 민지은은 운전자와 안승범의 뒤통수만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저.....”
“집이 어디인지 모르니까, 모두 서울역에 내려줄테니 알아서 찾아가요.”
운전하는 여자가 냉정하게 말했다.
“저희 집 서대문구..... 네, 서울역에서 내릴게요.”
너무나 찬바람이 씽씽 부는 시선에 민지은도 그만 꼬리를 말고 말았다. 안승범이 불쾌한 표정으로 운전자를 노려보았다.
“집 근처까진 태워다 줘도 되잖아?”
“시끄러. 명령하지 마. 니가 뭔데.”
“괜찮아요, 싸우지 말아요.”
울컥하려는 안승범을 민지은이 달랬다.
“아참, 그러고보니 안승범씨 팔 치료해야죠. 병원부터 가야겠는데요.”
“괜찮아, 이 정도쯤.”
“이 정도쯤이 아니에요. 곪기 시작하고 있다고요.”
둘이 대화하는 걸 강재인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흘끔거렸다.
“두 사람 원수 사이 아니었어? 왜 이리 친한 척이야?”
“친한 척이 아니라...”
“아 그쪽이야 말로 무슨 상관이야?”
강재인이 안승범을 째려보았다.
“어차피 남이고 다시 얼굴 볼 것도 아닌데...”
안승범은 강재인에게 한 말이었지만 민지은이 오해했다.
“다시는 안 볼 거에요? 안승범씨?”
“어.”
“저... 그야 이런 일이 있었는데 앞으로 친하게 지내는 건 어렵겠지만요, 그래도....”
“그래도 뭐. 그 안에서 정이라도 든 거야?”
강재인이 끼어들었다.
“거기 아가씨 정신 차려. 이런 양아치 같은 남자 가까이해서 좋을 것이 없어. 어차피 허강민 따까리에 불과하다고.”
“누가 따까리라는 거야!”
안승범이 화냈다.
“그쪽하고야 말로 앞으로 영원히 안 볼 거거든? 그리고 좀 험악하게 생긴 게 뭐가 어때서. 조폭도 아닌데!”
“안승범씨 그렇게 험악하게만 생긴 건 아니에요. 그리고 이유야 어쨌든 함께 목숨 걸고 위험을 지났는데 좀 정이 들 수도 있죠 뭘 그래요?”
민지은까지 항의하자 강재인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별안간 차가 확 튀어나갔다.
“으악!”
뒷줄에 앉은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포장은 되어있지만 산기슭 커브길을 가드레일 밖으로 튀어나갈 듯이 차가 질주했다.
“그런 인상만 험악한 따까리 쫌팽이가 뭐 볼게 있다고...”
강재인이 이를 갈았다. 안승범이 차 손잡이를 힘껏 잡았다.
“아 따까리 아니래도 그러네. 쫌팽이는 또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세 사람이 한 군데 있는데 서로 죽이지 않는다니 놀랍네요.”
장혜진이 말했다.
“오랜만이군.”
하무열이 인사했다.
“그런데 왜 내가 ‘범죄자’ 쪽 차에 타야하는 거지?”
“걸어가고 싶으면 물론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허강민이 차 문을 열었다.
“산길을 걷는 게 건강에 그렇게 좋다던데요. 하무열 형사님은 건강해져서 좋고 전 조용히 갈 수 있어서 좋고.”
“허허, 이 허선생이 뭔 헛소리를 하시나.”
하무열이 그를 꽉 잡고 같이 차에 탔다. 장혜진이 차를 출발시켰다.
“자, 이제 이게 다 무슨 수작인지 소상히 털어놔보실까?”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뒤통수 치려고 했다고? 그러는 너는? 너야말로 나한테 그 놈을 넘겨줄 것처럼 거짓말 해서....”
허강민이 주머니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 하무열에게 넘겼다.
“이게 뭐냐?”
“요양원 주소요. 서태준은 정신이 무너졌습니다. 현실 인식도 제대로 못하고요. 행려병자로 수용되어 있으니 데려다 알아서 하세요.”
하무열은 쪽지를 내려다보았다.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던 거다만.”
하무열이 천천히 말했다.
“내가 서태준을 죽일 생각이 없다는 걸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거. 아까 안승범군한테도, 민지은을 용서할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이야기했고.”
“제가 미리 설득했어요.”
류태현이 말했다.
“어이 류태현 순경?”
“네?”
“선배된 도리로 충고하지. 넌 거짓말 잘 못하니까 시도하지 마라.”
류태현이 시무룩해졌다.
“네,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허강민이 말했다.
“어떻게, 까지는 말하지 않을 겁니다. 하무열 형사님이 알아야 하는 건 백선교가 끝장났다는 것, 제가 복수를 포기했다는 것, 그러니 이제 저에게 신경 끄고 그 넘치는 재능을 범죄자 때려잡는데 쓰시면 된다는 겁니다.”
“그 범죄자에 네놈은 안 들어가고?”
“네.”
“어이 류태현.”
“수배자를 눈앞에 두고 체포 안 하는 것도 범죄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류태현이 말했다.
“그래서 저도 여기 타고 있잖아요.”
하무열이 다시 허강민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 대체 저 녀석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전 아무 짓 안 했습니다. 저 녀석이 제게 무슨 짓을 했죠.”
“전에는 제가 뭘 잘해서 이렇게 된 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응, 잘한 건 아니고. 뭔가 하긴 했고.”
“뭘 했는데요?”
“나도 몰라.”
“뭐에요, 그게.”
류태현이 토라졌다. 하무열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대체.....”
“이 편이 모두에게 좋은 겁니다.”
허강민이 말했다.
“적어도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 모두에게요.....”
허강민이 입을 다물었다. 하무열은 묻고 싶은 게 아직 많은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았다.
서울 경내에 들어서서 처음 보이는 버스 정류장 앞에서 장혜진이 차를 세웠다.
“모셔갈 때는 집 앞까지 왔으면서.”
“형사님의 건강을 기원하는 거죠.”
허강민이 뻔뻔하게 대꾸했다.
“그래, 임마. 잘 가라.”
하무열이 망설이다 덧붙였다.
“또 보지 말자.”
허강민이 웃었다. 차가 출발했다.
“어이, 류태현.”
정류장 표지판을 살피다 류태현이 고개를 돌렸다.
“네?”
“아까 저 녀석, 장희준 회장을 불렀지?”
“네.”
류태현이 다시 표지판으로 주의를 돌렸다.
“딸이 작별인사를 하지 않을 거라고 했고.”
“네.”
“그거, 백석 그룹의....”
“네, 백석의 차기 회장이 될 장지연씨가 허강민씨의 새....”
류태현이 말을 못했다.
“애인?”
“아니오!”
류태현이 강하게 부정했다.
“새... 보스입니다.”
“장희준 회장이 백선교의 일원이라 했지. 그럼 그가 죽어봐야 딸이 물려받으면.”
“어차피 신도 하나하나를 다 잡아다 개종시키거나 처형할 수도 없었던 것 아닌가요. 악행을 주도해 온 간부들을 처리하고 비교적 무해한 집단으로 탈바꿈시켜 서서히 세력을 줄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허강민이 그러디?”
“아뇨, 안승범씨가요.”
뜻밖의 이름에 하무열이 놀랐다.
“그 놈이 그런...... 생각 많이 한 것 같은 소리를 했어?”
“본인이 다 생각해낸 건 아니고요.”
류태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백선교에 복수하고 싶다는 안승범씨 상대로 되도록 인명피해 줄이는 방법을 짜내서 저랑 허강민씨랑 설득했어요.”
“대체 너랑 허강민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화해하고 어떻게 공모한 거냐?”
“육하원칙은 어디가고 전부 어떻게 인가요.”
“너 왜 꼭 허강민처럼 심사가 꼬였냐.”
“그런 거 아닙니다. 그리고 어떻게는 강민씨가 말 안 한다 했으니 저도 안 할래요.”
“야 임마?”
“꼭 무열선배를 따돌릴래서가 아니라, 말해봐야 저만 미친놈 소리 들을 것 같아서 그래요.”
“괜찮아, 말해봐. 실제로 허강민하고 손잡은 것보다 더 미친 소리야 나오겠어?”
하무열이 부드럽게 격려했다. 류태현이 그에게 눈을 흘겼다.
“뭐, 정 말을 안하겠다면 내가 어쩔 수 있는 건 아니지.”
하무열이 항복하듯 양 손을 들어올렸다.
“그래서...... 밀실은 끝이냐?”
“네.”
“정말로?”
“네.”
“확실해?”
“네.”
하무열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못 믿으시겠다면.....”
“아니, 믿는다.”
하무열이 말했다.
“그 놈이 더는 너를 미워하지 않는데, 이런 일이 또 일어날 리는 없지.”
“네, 네.”
“그래서 여승아양에게는 언제 알리 거냐? 이미 알렸냐?”
“아뇨...... 이제 가서 알려야죠. 당장은 아니고 수사 하고 나면.”
좋은 소식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류태현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이걸로 승아도 마음이 치유될 수 있을까요.”
“글쎄다, 그것까진 모르겠다만.”
하무열이 텅 빈 변두리 국도를 바라보았다.
“승아 양에게는 어쩌다 너랑 허강민이 손잡게 되었는지, 그가 왜 복수를 포기했는지 다 말하는 게 좋을 거다.”
류태현이 불신의 시선을 보냈다.
“내가 나중에 승아 양에게 들을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과정이 납득이 가야 결과를 받아들이기 쉬울 것 아니냐? 직접 보고 온 나도 이렇게 혼란스럽고 긴가민가 하는데, 네 말만 전해들은 사람을 제대로 안심시키려면 정보라도 많아야 할 게 아니냐.”
“아.... 그, 그러네요.”
류태현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걱정 안 해도 내가 몰래 가서 묻거나 하지 않을 거고 이유가 정당하면 승아양도 알아서 비밀로 하겠지. 너희 둘 사이엔 비밀을 만들지 말란 말이다. 내 말 알아듣겠냐?”
“네..... 알겠습니다.”
류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무열이 안쓰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승아양은 나을 거다. 안 낫더라도 네 탓은 아니야.”
류태현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냥 위로하는 소리라고만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하고 하무열도 그렇게 들리라고 한 말이었지만 그래도 입맛이 썼다.
“결혼식 하며 나 불러라. 주례 서주마.”
“...저주인가요, 그거.”
“뭐 임마?”
“농담이에요. 꼭 부를게요... 하게 되면요.”
하무열이 눈을 치켜떴다. 류태현이 고개를 숙였다.
“그게.... 여러 사람이 살기 위해서였고, 또 정말 사악하고 나쁜 사람들이었다고는 해도 저 오늘 수십 명의 사람들을 폭사시키는 데 동참한 거잖아요.”
“백선교 간부면 그들 때문에 죽은 사람들은 세 자릿수 가까이 될 거다. 인당 해서.”
“네,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도 압니다. 그 장희준 회장이란 사람만 해도 한창 수사 중인데도 이런데 와서 살인쇼나 감상하던 중이었고요. 법대로 처벌하는 게 거의 불가능할 정도고..... 그래도요.”
그가 발끝으로 땅을 팠다.
“모두를 살리고 싶다고 오만한 소리를 했던 주제에 저나 제 주변 사람만 살리려 드는 치졸한 짓을 또 한 것 같아서.....”
“주변 사람도 못 살렸던 저번보다 훨씬 낫지 왜.”
하무열이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이번엔 네가 이겼어.”
“아뇨 그건 아닐 겁니다.”
류태현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지진 않았어.”
하무열이 다시 말했다.
“네, 지진 않았죠. 허강민씨가 이긴 건 아니에요.”
류태현이 웃었다.
“무승부 좋네요.”


검은 남자 72 ㅣ- 회색도시&검은방



하무열은 백선교 본산 주변을 차로 한 바퀴 천천히 돌았다. 뒷좌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신경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뒷좌석에선 류태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기분나쁜 목소리가 쉼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인신공양을 하거나 어디서 동물 시체를 가져온 것도 아닌데 차 안에 한기가 가득했다.
‘그냥 탐색 주문인데 이 정도까지 여파가 미치는 거야?’
마법이란 원래 이런 거라고 알고야 있었다. 과거 서태준과 함께 처음으로 접했을 때부터. 그래서 재능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이제까지 피해왔다.
류태현이 기어이 마법사가 되면서 때로 후회했다. 자신이 비겁하게 물러나는 바람에 그 짐을 류태현이 대신 지게 된 것이라고.
그러나 과연 자신이 용기있게 나섰으면 달라졌을까.
등 뒤로 느껴지는 작은 여파조차 감당하지 못하면서 과연 스스로 마법사가 될 수 있었을까.
출발지점까지 되돌아왔다. 완전한 원형 궤적은 아니었지만 본산 건물을 에워싸는 궤도는 완성했다. 이 근방은 도로부터가 본산 주위를 둥글게 돌기 좋게 닦여있었다.
별 말 없으면 계속 이대로 돌아달라는 것이 류태현의 요청이었다. 하무열은 뒷자리에서 신경을 돌리고 좌회전했다.
경로 중 본산 건물이 가장 가까이 보이는 곳까지 갔을 때였다. 길가에 세워져 있는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배 형사의 차였다.
“세워주세요!”
모른 척 지나치려는 순간 류태현이 소리질렀다.
일단 두말없이 차를 길가에 대 주었다. 사이드도 걸기 전에 류태현이 차에서 뛰어내려 배 형사의 차로 달려갔다.
하무열도 내렸다. 마법 관련 일이라고 류태현 혼자 하게 둘 수도 없고 여기는 적진 코앞이었다.
배준혁이 탄 차의 차창을 두드리다가 류태현이 뒷좌석 문을 잡아당겼다. 잠겨 있었다.
그걸 보고 하무열은 운전석 쪽으로 달려가며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선팅이 짙으면 도리어 의심받기 때문에 이 차에 선팅은 없었다. 그런데도 차 안은 어두컴컴했다. 선팅으로 가린 게 아니라 차 안이 검은 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앞좌석 역시 잠겨 있었다. 유리를 두드려 보는데 옆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터졌다.
류태현이 잠겨 있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차 안으로 몸을 집어넣어 배준혁을 끄집어냈다. 검은 흙탕물 같은 것에 흠뻑 젖은 채 기절해 있는 걸 보고 하무열도 달려가 같이 부축하려 했다.
“손대지 마세요.”
류태현이 원래 타고 왔던 차를 쳐다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가 배준혁을 바닥에 눕혀놓고 먼저 차로 돌아갔다. 뭘 하는지 차 안에서 플래시라도 터트린 듯한 빛이 번쩍였다.
완전히 구경꾼이 되어버린 하무열은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않는 배준혁을 내려다보았다. 뭔가 응급처치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바다 냄새와 썩은 비린내가 진동해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손대지 말라는 경고가 고마울 정도였다.
다행히 류태현이 금방 되돌아와 배준혁을 들처메고 차로 되돌아가 실었다.
차 안은 얼핏 보기에 내릴 때와 다를 게 없어보였다. 그러나 뒷좌석이 텅 비어있었다.
‘분명 내리기 직전까지 저기에 설계도도 지도도 이상한 제물들도 잔뜩 있었는데?’
직전에 류태현이 차 안에서 터뜨린 ‘플래시’와 관련 있다는 건 분명했다. 하무열은 다시 불길함에 사로잡혔다.
‘류태현이 이렇게 대단한 마법사였나?’
텅 빈 뒷좌석에 배준혁을 눕히고, 류태현은 입 속으로 주문을 읊으며 그 이마에 손을 얹었다. 소금기에 전 악취가 그에게는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는 것 같았다.
시체처럼 하얗게 질려 있던 배준혁의 얼굴에 점차 혈색이 돌아왔다. 돌아오는 혈색에 밀려나듯 더러운 바닷물이 그의 몸에서 흘러내려 차 바닥에 괴었다.
“배준혁 경사님.”
류태현이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찬찬히 말을 걸었다. 그리고 어깨를 잡아 가볍게 흔들었다.
“배 경사님. 일어나 보세요.”
배준혁이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아니에요. 그 주문 쓸 때가 아니에요.”
류태현이 혼자 알아듣고 황급히 말렸다.
“경감님도 서 형사님도 오 형사님도 다 무사해요. 지금 배 형사님은 탐지 주문을 쓰다 실패했을 뿐이고 그런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몇 번 더 입술을 오물거리던 배준혁이 눈을 떴다. 그리고 한 손으로 허공을 휘젓다가 뭔가를 찾는 듯 주머니에 넣었다.
곧 경쾌한 음악이 울려퍼졌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스팸전화 받았을 때나 들을 과장되게 밝은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하무열은 류태현을 쳐다보았다.
“이게 뭐냐?”
“폰 바꾸라는 전화 같은데요?”
류태현도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주로 하무열 자신이 하는 엉뚱한 짓을 보고 당황했을 때 짓던 익숙한 표정을 보고, 비로소 직전까지 류태현이 얼마나 그답지 않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실감했다.
다시 한 번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려는데 배준혁이 눈을 떴다.
눈동자는 여전히 허공을 헤매면서도 손은 주머니에서 제대로 폰을 꺼냈다. 겨우 눈의 초점을 폰에 맞추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화면을 두드려 스팸 메시지를 껐다.
얕은 한숨을 내쉬고 마침내 평정을 찾은 얼굴로 배준혁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류태현을 보고 찡그렸던 눈썹이 하무열을 보고 약간 펴졌다.
“어떻게 된 겁니까? 두 분은 왜 여기 있습니까?”
“배 형사님은 백선교 본산 근처에 잠복근무중이었어요.”
류태현이 미리 이런 상황에 대비해 생각해뒀던 말을 읊듯 설명해주다.
“아마 무리하게 탐지 마법을 쓰다가 정신을 잃고 주문을 폭주시켰던 것 같고요, 이제 괜찮아요.”
“그런 것 같군요.”
배준혁이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 스팸전화는 뭔가?”
하무열이 묻자 배준혁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이성을 잃을 위기가 닥쳤을 때의 응급처치입니다. 공포나 광기에 눌릴 뻔 했다가 되돌아온 사례를 몇 가지 들었는데 그 중 시시한 생활 소음이 갑자기 크게 울리는 바람에 정신이 든 경우가 있었거든요. 간단하게 준비해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 같아 일부러 시끄러운 광고를 녹음해뒀습니다.”
“확실히 그 어떤 위험한 의식중이라도 이런 걸 들으면 확 깨겠군요.”
류태현이 진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게 있으면서 방금은 어쩌다 이런 위험한 지경까지 된 거예요? 르뤼에의 물이 차에 가득 차고 형사님은 그 안에 둥둥 떠 계셨다고요.”
“일단 제가 방심한 탓이 큽니다.”
변명하는 사람치곤 준혁의 얼굴은 평온했다.
“외부의 공격이 아닌 혼자 쓴 주문으로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거든요. 그리고 이 광고가 그렇게까지 효과 좋지는 않군요. 애초 그 사례부터가 심연의 비밀에 정통으로 맞닥뜨린 것도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없는 것보단 낫지만 이것에 의지할 수는 없군요.”
하무열도 류태현도 몰랐지만 배준혁은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양시백은 배준혁뿐 아니라 자신과 아버지까지 그곳의 어둠에 물들지 않을까, 이미 물든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클럽의 진실을 조금이라도 엿본 사람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래서 배준혁은 그들을 안가에 숨긴 날 지난 일을 최대한 자세히 털어놓게 했다. 말하면서 편해질 수 있고, 또 정말 클럽의 악영향이 남아있는지 확인할 목적으로.
다행히 양시백은 잔심부름을 했을 뿐이라 어린 나이에 너무 끔찍한 경험을 한 아이들이 으레 겪는 정신적 고통 외의 다른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그 비밀을 터놓은 밤의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다. 평범하고 현실적인 트라우마라고 해도 정신을 취약하게 만들어 금지된 힘의 영향을 받게 할 수 있었다.
그날 양시백과 양태수가 정신을 차리게 해준 것 같은 스팸 메시지를 녹음해둔 데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실제로 어떤 상황일 때 그런 방법이 효과를 볼 수 있는지, 그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알기 위해.
이제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양시백은 그때 평범하게 겁에 질려 패닉에 빠졌을 뿐이고 심연의 힘이 뻗쳤던 것이 아니라고. 양시백도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안도할 것이다.
안도감과 책임감이 배준혁의 정신을 완전히 현실로 끌어올려주었다.
“민망한 꼴을 보여 죄송합니다. 하무열 형사와 류태현 순경은 어떻게 하고 있었습니까?”
류태현에게 자기가 구해줬다고 뻐기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래도 배준혁은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본산을 한 바퀴 돌며 건물의 방어 주문을 확인하고 있었어요.”
이 차는 뒷좌석과 트렁크 사이가 뚫려있었다. 류태현은 그 틈으로 손을 집어넣어 다 구겨진 전지를 꺼냈다. 뒷좌석에 있던 것들이 다 그리로 옮겨가 있었다.
“역시 밖에서 내부 사정을 파악하는 건 쉽지 않았어요. 마법으로 염탐할까봐 공간 자체를 잘라놓은 걸까요?”
“설마요. 그 정도는 아닐 겁니다. 제가 실버 트와일라잇의 방비상태를 좀 아는데 말입니다.....”
곧 두 사람은 하무열이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중엔 문장 자체가 이상하게 변해갔다. 한국말이 아니라는 것밖엔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언어가 탁해진 공기 속을 떠돌았다.


류태현의 기억은 이번에도 상한 음식덩어리가 위장을 할퀴듯 허강민의 머릿속을 할퀴었다.
방에 혼자뿐이고 누구도 들어와 괴롭히지 않는 것이 이제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강성중이 들어와 괴롭히고 조롱했더라면 류태현의 기억에서 주의를 돌려 외부 공격에 대처할 수 있었을 것 같았다.
외부 자극이 거의 없다시피한 어둡고 조용한 방은 자신 안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류태현의 악몽 속에서 무너져내린 건물, 건물들과 거기 깔린 사람들, 울부짖으며 죽어가는 ‘낯선 아이’가 허강민 위에도 똑같이 무너져내렸다.
여기서 나가야 했다. 이 무너진 백화점에서. 아니, 폐허 더미, 아니 밀실에서, 아니 백선교 본산의.....
백선교 본산의 간부 구역에 있는 방.
점차 눈에 초점이 돌아오고 주변 사물의 윤곽도 또렷해졌다. 류태현이 사라졌을 때 이후로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여기서 나가야 해.’
겨우 의식 속에 제대로 된 문장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순간 벽이 다시 땀 같은 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몇 년이나 비가 새 곰팡이 핀 벽처럼 변했고 얼룩이 더욱 시커매지며 벽을 둥글게 물들였다.
흐물흐물해진 벽을 찢고 류태현이 걸어들어왔다. 허강민을 보고 표정이 환해져서 두 팔을 벌리고 다가오다가 문득 표정을 굳히고 멈춰섰다.
“아, 제가 끌어안는 거 싫으시죠?”
싫어하니까 끌어안지 않을 정도의 상식이 남아있다면 왜 내 정신은 무너뜨리려 하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입을 열지 못했다. 지금 입을 열면 무슨 말을 하든 덜덜 떠는 목소리가 나올 것이 틀림없으므로.
“당장이라도 안아버리고 싶은데......참기 힘들어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산만하게 주위를 돌아보던 류태현이 뭔가 깨달은 듯 아, 소리를 냈다.
“그러고보니 여기 침대가 하나뿐이네요. 저 지금 피곤하고 무지 졸린데.”
‘그거 참 대단한 발견이구나.’
일단 속으로 빈정거렸다. 비록 입 밖에 내지는 못했어도 예전처럼 비웃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불이라도 두 개면 좋은데. 아니면 베개라도.”
“강성중한테 가서 달라고 해보지 그래?”
마침내 목소리가 나왔다.
“나도 여기 처음 와서 비품 부족할 때 자주 달라고 했어. 여기 내부 행정조직은 꽤나 엉망이라 업무분담이고 뭐고 없거든. 그냥 자기보다 윗줄의 간부한테 말하는 수밖에 없어.”
류태현이 다가오는 걸 보고 허강민은 또 맞을 마음의 준비를 했다.
견딜 수 있었다. 지난번엔 류태현이 때릴 경우를 전혀 상상해 본 적 없기에 놀랐을 뿐이었다.
“그렇게 부탁하면 잘 줘요?”
“아니. 요청하는 대로 따박따박 나온 건 밀실 제작에 쓸 자재들이었고, 개인 필수품 같은 건 요령껏 챙기는 수밖에 없었지. 강성중이 항복할 때까지 귀찮게 굴거나.”
밀실 제작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류태현의 얼굴이 경련했다. 하지만 또 때리는 대신 침대에 털썩 누웠다.
“좀 옆으로 가봐요.”
류태현이 꼬물거리며 이불을 넓게 폈다. 1인용 침대라 둘이 누우면 절로 딱 붙게 되었다.
“생각해보니까 새 침대 놓으려면 다른 사람들이 이 방에 들어오게 되잖아요. 그건 싫어요.”
류태현이 허강민에게 몸을 붙이고 머리를 기댔다. 체온이 자신보다 높은 편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시체와 붙어있는 것 같이 차갑게 느껴졌다.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류태현.”
허강민이 다시 용기를 내었다.
“단순히 방에 드나들 때 마법을 계속 쓸 필요는 없어. 아무리 허가받고 드나든다고 해도 여긴 외부 방비가 강력한 곳이야. 그렇게 공간을 매번 찢으면 네게 무리가 갈 거다. 강력한 마법사라도......”
류태현이 한 손을 뻗어 허강민의 목을 움켜쥐었다.
“저 걱정하는 척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왜 말을 안 들어요? 그렇게 제가 우스워요?”
허강민은 류태현의 손을 떼어내려고 발버둥쳤다. 그저 한 손을 옆으로 뻗어 잡았을 뿐인데도 떼어낼 수가 없었다. 사람의 힘이 아니었다.
“이대로 같이 죽는 건 어때요?”
허강민의 저항을 무시한 채 류태현 혼자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럼 서로 힘들 필요 없고 좋을 것 같은데......”
허강민도 그런 생각이라면 밀실 만드는 동안 숨쉬듯이 해왔다. 그랬음에도 지금 류태현의 입으로 같은 말을 들으니 거부감과 공포가 앞섰다.
마치 살고 싶어하는 보통 사람들이 그러듯.
‘왜 이제와서.’
산소가 부족해지기 시작한 뇌로 허강민이 생각했다.
밀실을 만들고 복수에 매진하는 동안은 자살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하무열 형사의 총에 죽거나, 네 번째 밀실에서 임선호 손에 죽거나 강성중이 보낸 쇼고스에게 죽었더라면 그 편이 깔끔하고 사리에도 맞는 죽음이었을 것이다.
왜 이제와서 미친 류태현 손에, 그것도 그동안의 죄 때문이 아니라 미친놈의 스토킹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죽어야 하나. 살려달라고 버둥거리면서.
이젠 류태현뿐 아니라 자신도 자신이 알던 허강민이 아니게 된 것 같았다. 밀실에 류태현을 가두고 괴롭히던 허강민과 지금 미친 스토커 손에 꼼짝 못하고 떠는 허강민이 서로 다른 인물 같았다.
갑자기 숨통이 트였다.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이 풀렸다.
컥컥거리며 뇌에 산소를 퍼 넣었다. 그러면서도 그 소리가, 자신의 몸부림이 류태현을 자극할까봐 두려웠다. 왜 갑자기 손을 놓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눈만 류태현 쪽으로 굴렸다.
류태현은 눈을 감고 몸 전체에 힘을 뺀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허강민의 거친 숨소리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호흡이 안정화될 때까지 기다려서 류태현의 숨소리에 귀 기울여 보았다. 색색 고르고 깊은 숨소리가 들렸다.
‘설마.....자는 거야?’
다시 봐도 분명히 자는 얼굴이었다. 여전히 한 팔을 허강민의 목에 뻗은 채로.
무서워서가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 허강민은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고보니 아까 잠복하다 와서 졸리다고 말했지.’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42 ㅣ- 회색도시&검은방


장희준은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백선교의 중요한 행사일이었다. 희망이 절망으로 뒤바뀌는 폐쇄공간에서 인간의 정신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이 의식은 원래는 백선교와 상관 없이 개인적인 원한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이제는 백선교의 중요 제례로 대접받았다.
이번 밀실에선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배신과 절망이 있을 거라고 밀실 제작자가 장담했다. 단지 같은 죄에 연루되어 같이 갇혔을 뿐인 이전 미궁 동료와는 달리, 이번에는 누구보다 믿고 소중히 여기던, 절대 배신할 리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과 마주하고 붕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고.
개인적으로 장희준은 그런 ‘아름다움’에 큰 관심은 없었다. 그저 이 제례를 통해 추수되는 에너지를 이용해 특수 수사팀을 저주하고 뒤엎어버릴 수 있으면 족했다. 겸사겸사 그 괘씸한 미지의 마법사도 없애고.
나와보니 밖에는 강재인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지연이는?”
“아가씨는 센터로 갔습니다. 오늘 행사엔 불참하신다고 합니다.”
장희준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어째서?”
“그게, 아마도 시간 역전에 관련한 단서를 찾으셔서 시험해 보실 게 있다면서.... 지금 회장님께 큰 적이니까요. 그걸 행한 마법사는.”
“그래? 흠, 지연이가 그런 일도 할 수 있을 줄은 몰랐군.”
“아가씨는 대단한 마법사이십니다.”
강재인이 방어적으로 대답했다.
“뭐 그 일도 중요하긴 하지. 중요 제례긴 하지만 굳이 남들 앞에 내세울 필요도 없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하게. 태수는?”
“아가씨를 모셔갔습니다.”
“알았네. 가지.”
얌전히 장희준을 수행하면서, 강재인은 역시 이 영감은 딸에게 죽어도 별로 억울하진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은 극한 상황에 처하면 인격의 밑바닥을 드러낸다.
그런 면에서 허강민의 밀실은 복수에 이상적인 도구였다. 단지 상대를 죽이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이렇게 죽어 마땅한 인간이라고 자신과 당사자와 온 세상에 확인받는 행위이니까.
그러니 그걸 부정하는 류태현을 특히 용서할 수 없는 거라고 하무열은 생각했다. 그래서도 그를 죽이거나 하는 대신 계속 밀실에 넣는 거라고. 단순히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려고 발버둥치는 인간들의 추한 모습을 계속 보여주어 류태현을 설득하려는 쪽이 목적일지도 모른다고.
그가 자신에게 제안했을 때 그 점을 확신했다. 이렇게 온 힘을 다 해 류태현에게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걸 보여주려고 애쓰는 게 그럼 달리 뭐겠는가.
‘그 놈 뜻대로 따라 줄 생각은 없지만.’
저는 선배와 다릅니다 어쩌구 하며 이 년 가까이 연락도 안 하는 후배였다. 그의 동심을 지켜줄 의리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짓을 했다간 류태현이 어떻게 생각할까 같은 생각이 떠오르는 시점에서 이미 늦었다. 허강민은 불쌍하지만 구할 수 있는 쪽을 구하는 게 나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거짓말을 하지.’
그래서 그 말에 류태현이 말없이 수긍했을 땐 조금 당황했다.
진실을 알아차리길 바라고 해준 충고지만 그래도 류태현이 자기를 믿어줬으면 하는 마음도 여전히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었다.
이제 저 문을 통과해 허강민을 대면하게 되면, 그는 또 류태현에게 범인을 맞추라 할 테니까. 류태현이 속아선 안 되니까.
류태현이 심호흡을 했다.
“가죠.”
그가 굳은 표정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긴장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인 것만 같아서 하무열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옥상으로 올라오자 과연 허강민이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는 총을 들고.
“류태현.”
그가 웃었다.
“안 죽고 올 줄 알았어.”
“....그런가요, 전 몇 번이고 이대로 죽는 줄 알았는데.”
류태현이 투덜거렸다.
“자, 모두가 기대하던 퀴즈쇼의 순간이 왔다.”
하무열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 전에 허강민이 선언했다.
“규칙은 알고 있지?”
류태현이 대답 없이 허강민을 쳐다보았다.
“우리, 꼭 이렇게 해야만 하는 겁니까?”
허강민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응. 꼭 이렇게 해야 해. 그래서, 백건영과 서현진을 죽인 건 누구지?”
류태현이 잠깐 망설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정말 싫으니까 짧게 끝내죠. 범인은 안승범씨 공범은 무열 선배. 백건영씨 경우는 낚싯줄 같은 걸 이용해서 원거리에서 문을 닫아 민지은씨를 속였고, 서현진씨 경우엔 갈고리를 도르래로 이용하면 한 손만으로도 목을 조를 수 있었습니다.”
“야.”
허강민이 들고 있던 총을 내렸다.
“너 정말 이따위로 할 거지. 내 즐거움은 하나라도 망쳐야 속이 시원하다 이거냐.”
“이딴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 편이 잘못된 겁니다.”
류태현이 주장했다.
하무열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류태현이 할 만한 말이 아닌 건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부자연스러웠다. 적어도, 믿고 따르던 선배가 살인자의 공범이 되었다는 소리를 저렇게 안 중요한 정보인 양 말하고 지나가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 류태현 녀석 내가 배신한 게 하나도 놀랍지 않은 건가?’
먼저 배신한 건 자신인데도 배신감이 들었다. 이래서는 뒤늦게 자신이 ‘이건 모두 허강민을 속이기 위한 계책이었다!’라고 진실을 밝혀도 류태현이 아무 관심 없어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 정도였다.
하무열이 내적 위기를 맞고 있는 동안 안승범이 민지은에게 자기가 범인이 된 이유를 설명했다. 십년 전 백선교 진압 작전 때 일어난 살인사건과 진상, 그리고 민지은의 역할에 대해서.
“그때의 난, 이름을 묻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어.”
안승범이 민지은을 노려보았다. 민지은은 안색이 새파래져 떨었다.
“미안해요.”
민지은은 도망가는 대신 안승범에게 가까이 갔다.
“미안해요, 완전히 잊고 있었어요.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
민지은이 안승범의 팔을 잡고 울며 사과했다. 안승범은 어쩌지 못하고 민지은을 내려다보았다.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버렸는데.”
허강민이 장난처럼 말을 건넸다.
“기분이 어때, 안승범?”
“저 놈 말에 넘어가지 마!”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하무열이 소리쳤다.
“저놈이야 말로 백선교 끄나풀이란 말이다. 넌 허강민에게 속고 있었어!”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랍니다, 눈치 없는 양반 같으니.”
허강민이 혀를 찼다.
“뭐....”
허강민이 목소리를 높였다.
“안승범. 그래서, 대답은?”
안승범은 안절부절 못하며 민지은을 보고 허강민을 보았다. 마침내 민지은도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자 안승범이 소리쳤다.
“......젠장, 그래 내가 졌다!”
그 말에 류태현이 환호했다.
“잘 생각했어요, 안승범씨! 역시 복수 같은 거...”
“한 마디만 더 하면 죽여버린다, 류태현.”
허강민이 기폭장치를 쥔 왼 손을 들어올렸다.
“이제 와서요?”
“그래, 이제 와서 죽여버릴 거니까 닥쳐.”
류태현이 닥쳤다. 하무열은 허강민과 류태현과 안승범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지금 뭔가 이상한 거 나뿐이냐?”
“제가 기폭장치를 쥐고 류태현을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게 이상한가요?”
“그래, 이상해! 너 지금 말투는 꼭.....”
“류태현을 안 죽이기라도 할 것 같다는 말씀이죠? 네, 하무열 형사 완전히 녹슬지는 않은 것으로 치죠.”
“뭐야?”
“별건 아니에요, 내기를 좀 했거든요, 미치광이 연쇄살인범 답게 사람 목숨을 걸고.”
“무슨 미친 내기를...”
“마지막에 민지은을 용서하게 될지 계속 복수를 하고 싶을지.”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하무열의 말을 무시한 채 허강민이 귀에 끼고 있던 통신기를 조작했다.
“최종 보고입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끝났습니다. 마지막 지시 부탁드립니다.”
대답은 이들에게까지 들리지 않았다. 허강민이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버지께 마지막 가시는 길 작별 인사를 전해드릴까요?”
“무슨 소릴 하는 거냐?”
하무열이 물었다. 허강민은 또다시 씹었다.
“예, 그럼.”
대화를 끝내고 허강민은 옥상에 숨겨져 있던 감시 카메라를 향해 몸을 돌렸다.
“따님께선 작별인사도 하기 싫으시다는군요, 장희준 회장님. 그럼 안녕히 가세요. 백선교의 어르신 및 일부 간부 여러분.”
허강민이 기폭장치의 스위치를 눌렀다.
폭음이 울리고 발밑이 흔들렸다. 멀리서 연기가 솟았다.
하무열이 연기가 솟는 쪽으로 달려갔다. 리조트 본 건물에서 좀 떨어진, 놀이동산 쪽 건물에 불이 붙어 타오르고 있었다.
“....허강민?”
“절 차려고 했던 사람한테 해명해줄 말 따윈 없습니다.”
허강민이 냉정하게 말했다. 하무열이 고개를 휘휘 돌렸다.
“류태현, 류태현? 이 녀석은 어디로 갔어?”
“지가 아주 하고 싶어 하던 일을 하러요.”
허강민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래층으로, 밀실 희생자들을 살리러 갔어요.”
“저어기....”
민지은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알 거 없어.”
허강민보다 먼저 안승범이 말했다.
“그........ 복수, 말인데....... 으, 그, 그러니까 안 할게. 말이 잘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용서라든가는 좀 그렇지만 죽이고 싶을 정도는 아니야. 이제.”
안승범이 한참 시선을 피하다가 휙 돌아서버렸다.
“류태현씨가 뭐라고 하든 반성도 안 하고 여전히 뻔뻔스러운 백건영 놈은 콱 마저 죽여버리고 싶기도 하지만....”
“안 돼요!”
민지은이 안승범을 잡고 돌려세우려다 안 돌아가서 자기가 그의 앞으로 돌아갔다.
“저도 그 사람은 재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죽이면 안승범씨가 살인범이...... 어라?”
민지은이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했다.
“이, 이미 죽이지 않았어요?”
“데려왔어요~”
철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류태현이 경쾌한 목소리로 소리치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를 따라 백건영과 서현진이 옥상으로 올라왔다.
“어...... 어?”
입을 딱 벌린 채 민지은이 안승범과 류태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이게..... 무........”
“곧 경찰들 몰려올 거야. 우리는 이제 가자.”
허강민이 손짓했다.
“해명도 안 하고 튈 생각은 하지도 마!”
하무열이 그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그리고 ‘우리’라고? 거기 누구누구 포함이냐? 설마 류태현도.”
“여기 인원 모두요.”
허강민 대신 류태현이 대답했다.
“예, 무열 선배. 이미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미리 짰습니다. 저랑 허강민씨랑 안승범씨랑. .....밀실 함정에 대해선 하나도 안 알려줬지만요.”
류태현이 원망스런 눈으로 허강민을 쳐다보았다.
“당연하지. 너 같은 바보가 어려운 트릭을 척척 풀면 관계자 전원이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풀 수 있거든요? 그래서 살아남은 거거든요?”
“어이 잠깐만.”
하무열이 미간을 문질렀다.
“너희 둘..... 아니 어쩌다가.......”
“용서한 건 아닙니다.”
허강민이 힘주어 주장했다.
“그저.... 복수는 안 된다고 쨍알거리는 것들이 주변에 하도 많아서.”
말하다 그가 움찔하고 통신기를 조작했다.
“예, 빨리 가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먼저 피하십시오.”
“누구냐?”
하무열이 물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절 차버리려고 했던 사람 호기심을 왜 충족시켜주는데요.”
“차다니 우리가 사귀기라도 했냐?”
“범죄 공모에 합의해놓고 절 뒤통수 쳐 죽일 생각이었잖아요?”
“난 경찰이고 그런 건 함정 수사라고 하는 거거든?”
“전 범죄자고 경찰한텐 묵비권을 행사할 거거든요?”
“누가 보면 둘 사이 좋은 줄 알겠어요.”
류태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너 같이 눈치 없는 누구라면 그렇겠지.”
허강민은 인정사정없이 류태현을 찔렀다.
“정 알고 싶으시면 저쪽 경찰이나 추궁해보시던가요. 멍청하고 눈치 없긴 해도 진상의 87%정도는 알고 있으니까요.”
“뭐냐 그 미묘한 숫자는.”
그러는 사이 민지은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서현진에게 달려갔다.
“괘, 괜찮아요, 현진 언니? 살아 있어요?”
“으, 으응.”
서현진이 민지은 뒤에 선 안승범을 흘끔거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죽이진 않을 테니까 죽은 척 하라고, 안 그러면 정말로 죽여버린다고 했어.”
“저, 저 경찰까지 한패야!”
백건영이 류태현을 손가락질했다.
“경찰도 아닐 거야, 어디 이따가 진짜 경찰들 오면....”
“대화는 나중에 하고 지금은 가자니까. 몽땅 체포당하고 싶냐?”
허강민이 말했다.
“나, 난 안 가, 경찰들 기다릴 거야!”
백건영이 소리질렀다.
“다 감옥에 처넣어 버릴 거야, 이 살인자들...”
“어?”
안승범이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뭐라고, 마저 죽고 싶다고?”
백건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안승범씨, 참아요.”
류태현이 말렸다.
“잘 끝났는데 고작 저런 놈 때문에 살인자가 되지는 말아요. 그러기로 했잖아요.”
“했지만, 민지은은 용서해도 저 놈은 용서 못하겠는데.”
안승범이 주먹을 꽉 쥐었다.
“용서라니, 내가 뭘! 범죄자인 건 지가....”
“그만 해!”
서현진이 소리를 지르며 백건영의 뺨을 때렸다.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는 거야? 살려준다잖아! 살려준다는데 고맙다고 엎드려 빌어야지 뭘 적반하장이야!”
그가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잘못했어, 미안해, 살려줘, 미안해......”
안승범이 히스테릭하게 통곡하는 서현진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렸다.
“정 뭐하면 내가 죽여줄까?”
허강민이 총을 빼들었다.
“난 이미.... 아무튼 많이 죽여서 하나쯤 더 죽여도.”
“허강민씨이이이이이이.”
류태현이 그의 팔을 잡고 끌고갔다.
“빨리 가기나 하죠. 경찰도 구급대원들도 올 텐데 그렇게 많이 죽인 살인자가 떡하니 현장에 남아있어도 돼요?”
“어이 류태현.”
하무열이 불렀다.
“나중에요. 이 쪽에 계단 있어요. 모두 내려오세요.”
류태현이 앞장서서 허강민을 끌고 내려갔다. 다들 서로 눈치보다 슬금슬금 따라 내려갔다.


검은 남자 71 ㅣ- 회색도시&검은방


“허강민이 백선교에 납치된 것 같습니다.”
이런 중대 사안을 보고 안 한 채 넘어갈 수는 없었다. 배준혁은 권현석 앞을 물러나오자 바로 실버 트와일라잇에 달려가 허강민 실종을 보고했다. 자신이나 경찰들의 수단만으론 막막하니 적의 적을 이용해보고픈 마음도 있었다.
“감시하던 경찰들이나 의료진도 모르게 일어난 일입니다. 납치 자체가 마법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납치가 확실한가?”
스승이 되묻자 배준혁은 당황했다.
“틀림없습니다. 병실의 흔적을 분석해보았고 허강민에게 추적이나 탐지를 방지하는 조치가 취해진 것도 확인했습니다. 죽였다면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스승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침묵했다. 대응이 어딘가 미흡했다고 또 당장이라도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아 배준혁은 마음을 졸였다.
“죽여서 입을 막은 것이 아니라 생포했단 말이지.”
스승은 여전히 준혁을 믿어주거나 실버 트와일라잇의 내부 인원으로 인정해주는 기색이 없었다. 스승과 친해지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적은 데다가 자신이 여전히 의심받고 있는 것 같아 두려웠다.
지금은 약간 다르게 느껴졌다. 이제까지 스승이 자신을 앞에 두고 혼잣말을 한 적은 없었다.
“허강민이 백선교에 여전히 쓸모가 있다고 보나?”
돌연 그런 질문이 날아오자 준혁은 당황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백선교에서 허강민을 살려둬야 할 이유가 정말로 없었다. 이미 쓸모는 다한 데다 경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으니 죽여서 입을 막는 편이 옳았다.
“산 제물로 쓰려는 것일까요?”
“그저 제물이라면 대체할 목숨이 많이 있겠지. 굳이 경찰 손에 있는 놈을 빼갔다는 건 혹시 그놈에게 인질로서의 가치가 있어서라든가 아닌가?”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준혁이 신중하게 대답했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하무열 형사도 허강민을 꽤 신경쓰고 있습니다. 권현석 경감은 원래 정에 약한 사람이고요.”
스승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준혁에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준혁이 살짝 먼저 제의했다.
“하무열 형사 주변을 감시하면서 백선교가 허강민을 인질로 접근해오지는 않는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래.”
스승이 허락해주었다.
“백선교 내부까지 소탕하려면 경찰력은 물론 지금의 네 마법으로도 부족하다. 함부로 나서지 말고 수상한 낌새가 감지되면 바로 내게 보고해라.”
“알겠습니다.”


류태현이 가고 나서 허강민은 방 안에 조용히 방치되어 있었다.
강성중이나 다른 간부들이 들어와 괴롭히지나 않을까 걱정했던 건 기우로 지나갔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덕분에 시간이 지나도 음식물도 들어오지 않는 건 상관없었다. 어차피 음식을 목에 넘길 만한 기분도 아니었다.
벽시계도 하나 없는 방이었다. 불 끄고 나가자 완전히 깜깜해져서 주변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자신도 비슷한 구조의 방에서 지냈던 경험이 있어서 그나마 익숙해질 수 있었다.
류태현이 미쳐버렸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언제나 자신에게 잡혀오고 고통받고 깎여나가는 류태현을 CCTV와 PDA로 지켜보았다.
그동안은 자신이 사냥꾼이고 류태현이 사냥감이었다. 지금은 완전히 뒤집혔다.
수갑과 쇠사슬을 풀 방도는 없었다. 방 안은 여전히 빈 방인 것처럼 단출해 수갑 푸는 데 쓸 만한 도구는 전혀 없었다.
‘나는 항상 탈출 방도를 주고 가뒀단 말이다!’
상황에 안 맞는 불평이라도 해야 했다. 어떻게든 현실감을 되찾고 여기서 나갈 방도를 찾아야 했다.
일어나 앉은 채 침대의 시트를 살폈다. 이거라도 찢으면 괜찮은 끈이 될 텐데 찢을 도구가 없었다. 이로 찢어봐야 이가 나가기도 전에 류태현이 돌아와 반쯤 찢다 만 시트를 발견하는 결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오래 기다렸어요?”
류태현의 목소리와 함께 벽에 다시 일그러진 어둠이 일렁였다. 공간을 찢고 방에 들어온 류태현이 허강민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병실로 찾아올 때도 류태현은 웃었다. 여전히 허강민을 두려워하고 이대로 사랑할 수 있을지 전혀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런 공포와 주저를 감추기 위해 더 환하게 웃었다.
지금은 주저도 공포도 보이지 않았다. 거리낄 것도 감출 것도 없는 사랑스런 애인을 보는 눈으로 다가와 강민이 누운 침대 앞에 눈을 맞추고 앉았다.
“미안해요. 당분간 잠복근무에 동원되어서 짐 싸러 간다고 하고 겨우 빠져나왔어요.”
“잠복?”
“그게 말이죠. 강민 씨 없어진 걸 배 형사님이 바로 눈치챘거든요. 제가 들킨 건 아닌데, 백선교 본산에 있을 건 뻔하니까 여기 주변을 순찰하면서 영장 나오는 대로 덮칠 거래요. 저도 마법사라서 동원되었고요.”
류태현은 마트 상표가 찍힌 커다란 종이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설명하는 동안 손으로는 도시락과 손수건, 그 외 잡다한 물건들을 꺼내고 있었다.
“아, 기대하지는 말아요. 영장 나오면 강민 씨는 제 집으로 옮기면 그만이니까요. 여기가 더 가둬두기 편하긴 한데 들키면 안 되죠.”
“류태현.”
“어차피 다른 간부들도 중요한 건 다 옮기거나 감추는 중일걸요? 영장 나오면 바로 알려달라고 저보고 그랬거든요. 언제까지고 막을 수 있을 거라고는 그들도 생각 안 할 거고.”
“류태현, 잠깐 내 말좀 들어봐.”
허강민이 그에게 손을 뻗었다.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날 가둬둔다고 원한 품을 생각 없어.”
“그렇겠죠. 강민 씨는 이미 원한에 사무쳐 있으니까.”
류태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자르고 도시락 포장을 뜯었다. 그리고 방 반대편 구석에 있는 전자렌지에 가서 돌렸다.
그 잠깐 사이에 허강민은 봉투에서 나온 것들을 눈으로 훑었다. 휴지와 안전면도기, 칫솔, 일회용 속옷 등 정말로 잠복근무에 앞서 준비할 것 같은 위생용품들이었다.
그러나 이 태반은 잠복근무가 아닌 감금에 쓰일 것이다. 당장 류태현을 쓰러뜨리거나 탈출하는 데 도움될 것은 없었다.
“돈가스 좋아하세요?”
등심돈가스 도시락을 들고 되돌아온 류태현이 생수병을 열어 내밀었다. 허강민은 그걸 받아들었다. 류태현도 자기 몫의 도시락을 열었다.
둘 다 먹는 동안엔 조용했다.
아무 말 않고 있을 때의 류태현은 미치기 전과 차이가 느껴지지 않아서 더 허강민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어떻게 잘만 하면 설득해서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싹트게 만든 다음 입을 열어 그 희망을 꺾어버리는 것이 백선교의 익숙한 고문방식 같았다.
다 먹은 도시락 뚜껑을 덮으며 류태현이 허강민의 반 넘게 남은 도시락을 바라보았다. 허강민은 그냥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더 안 드세요?”
“나 원래 많이 안 먹어.”
마음먹은 것보다 더 변명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실제로 요즘은 늘 거의 이 정도밖에 먹지 않았음에도.
“그러고보면 병원에서도 이 정도만 드셨죠.”
류태현이 이해심 많은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기야 갇혀있으니 입맛이 돌 리 없지요. 이리 주세요.”
마치 자기가 가둔 게 아닌 것처럼 싹싹한 태도로 류태현이 허강민 앞의 도시락을 치우고 깨끗이 뒷정리했다. 그리고 되돌아와 허강민의 앞에 섰다.
“아, 맞다.”
여전히 평소와 다름없는 순한 목소리로 류태현이 중얼거렸다.
“제 기억을 옮기는 거 꽤 힘들어하시잖아요. 먹은 직후에 하다가 허강민 씨 토하면 곤란한데.”
대체 미친놈의 논리를 따라갈 수가 없어 허강민이 보고만 있는 동안 류태현은 이리 갸웃 저리 갸웃 하다가 덥석 강민의 머리를 잡았다.
“시간 없으니 그냥 하죠.”


그날 저녁 하무열은 잠복근무용 특색 없는 차를 몰고 백선교 본산으로 찾아갔다.
현장 검증을 위해 밀실에 다시 찾아갈 때 같은 기분이었다. 경찰로서의 의무감, 또다시 맞서 싸울 만한 것을 만났다는 고양감, 거기서 겪은 고통과 공포가 되살아나 하무열을 감쌌다.
허강민이 지금 어떤 상태일지는 최대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 갈 데까지 간 놈이 백선교의 교정실에서 또 어떤 변화를 겪게 될지 두려웠다. 허강민은 이미 너무 많은 일을 겪었고 너무 많이 뒤틀렸다.
체포되어 경찰병원에 들어간 뒤도 마찬가지였다. 백선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살인 밀실에서도 손 떼게 되었으니 잘 되었다고 하기엔 너무 일렀다.
전심을 다 바친 복수극은 시작부터 어긋나 있었다. 국장님이 봐준다고는 해도 지금 그는 체포된 죄수였다. 류태현을 챙겨주게 된 것도 그에게는 큰 부담일 터였다.
‘싫으면 류태현은 배준혁한테 넘겨버리고 안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처음 정신 차리게 한 이후로는 분명 그럴 수 있었다. 류태현도 어린애가 아니니 강민 씨 곁에 있게 해달라고 조를 수 없다는 정도는 알 거다. 수사 진행중인 사건 피의자와 순경이 꾸준히 만나던 직전까지의 상황이 이상한 거였다.
처음엔 허강민이 쓸데없이 책임감 강하다고 생각했다. 미워하는 녀석과 가짜 애인 노릇까지 하다니 무슨 비뚤어진 집착인지 모르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마법 수업을 지켜보는 동안 새로운 불안감이 싹텄다.
허강민은 정말로 세심하게 류태현을 가르쳤다. 증오를 드러내지도 않고 일부러 괴롭히지도 않았다.
류태현을 쓸 만한 마법사로 키워내겠다는 책임감과 실용주의만으로 그럴 수 있었을까?
아직 본산까지 한참 남은 길가에 하무열이 차를 대었다. 류태현을 태워가기로 약속한 장소였다.
때맞춰 맞은편 편의점에서 나온 류태현이 하무열을 보고 서둘러 차에 뛰어올랐다. 하무열은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오래 기다렸어요?”
류태현이 묻자 고개만 저어보였다.
그리고 한동안 차 안은 조용했다. 류태현이 뒷좌석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조금씩 들려왔다.
“백선교 본산은 강력한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을 거예요.”
류태현이 뒷좌석에 전지를 펴고 그 위에 모래 같은 가루를 뿌렸다.
“제가 그걸 뚫고 강민 씨의 위치를 특정해내거나 꺼내오는 건 불가능해요. 하지만 건물의 크기와 모양만으로도 사실은 꽤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어요.”
류태현이 조수석으로 손을 뻗었다. 하무열이 가져온 짐은 거기에 있었다.
백선교 본산 건물의 설계도도 그 중 하나였다. 시공 당시 건축허가를 받기 위해 시에 제출했던 거라 지금의 본산 내부와 얼마나 일치할지는 미지수임에도 배준혁과 류태현 둘 다 그것을 요구했다.
“아무리 무허가 리모델링을 한다고 해도 기둥과 내력벽의 위치, 겉으로 드러나는 건물의 윤곽까지 바꿀 수는 없어요. 건물에 거는 보호 마법은 그런 부분에 의지하고요. 그러니 밖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와 이걸 조합하다보면 분명 약점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런 대단한 마법에 정말 약점이 있는 거냐?”
“아무리 대단하고 강력해도 약점 없이 완벽할 수는 없댔어요.”
류태현이 설계도를 펼쳐 훑어보았다.
“강민 씨도 그랬고 배 형사님도 그랬어요. 그러니 해볼 겁니다. 수색 영장만으로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분명 있을 거예요.”
전지 위에 설계도를 덮고 류태현이 교학사 로고가 찍힌 상자를 꺼내 열었다. 촉매 상자였다.
“무열 선배는 운전에 집중해주세요.”
류태현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낮아졌다.


“눈이 없으나 보고, 귀가 없으나 들으며 혀가 없으나 말하는 존재여. 이 우매한 눈과 귀에 감각이 되시고 보이지 않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을 말씀하소서.”
감은 눈 안쪽으로 온갖 빛깔과 도형이 쏟아져들어왔다. 귀울림이 두개골을 감싸고 뇌리를 채웠다.
손에 쥔 연필이 튀어 일어났다. 설계도의 복사본에 알아볼 수 없는 문자가 새겨졌다. 기둥과 기둥 사이를 잇고 이상한 표지를 그렸다. 건물 전체에 둥그렇게 덧붙여서 무언가가 나타나고 있었다.
건물을 둘러싸고 이어지던 그림이 갑자기 흐트러졌다. 연필이 부러지고 손에서 튀어나갔다.
배준혁은 눈을 뜨고 두 손으로 설계도를 짚었다.
주문은 강제로 중단되었다. 역시 자신의 실력으로 백선교 본산의 방어 마법을 뚫는 것은 무리였다.
방금 본 것들이라도 잊어서는 안 되었다. 정신은 이따 차리기로 하고 설계도에 본 것들을 마구 휘갈겨 기록했다.
이성의 끈을 놓고 본능에 의지해 행동하는 건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덕분에 스승의 뜻대로 미쳐버리지 않는 대신 성취도 느렸다.
조금쯤 무리해서라도 강한 힘을 끌어내고 싶다는 충동이 고개를 들었다.
허강민을 동정하는 건 아니었다. 딱히 호의를 품을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백선교 수사를 끝내고 나면 실버 트와일라잇 클럽도 처리해야 했다. 그래야 자신의 문제도 해결된다. 지금 자신이 백선교 수사에 필요한 인재가 되었듯 그때는 허강민과 류태현이 꼭 필요해질 것이다.
그러니 허강민은 반드시 구해야 했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41 ㅣ- 회색도시&검은방



“아, 왔다. 여기에요!”
문쪽을 바라보고 앉아있던 권혜연이 손을 흔들자 하태성도 뒤돌아보았다. 햄버거 집 안에 막 들어온 두 사람이 이들을 보고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좀 늦었습니다.”
준혁이 웃으며 말했다.
“아, 안녕하세요.”
양시백이 어색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입니다.”
하태성이 미소지었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어, 감사합니다. ........하태성씨?”
“예, 저도 휩쓸렸습니다.”
“아니 그건 아는데.... 너무 똑같아서. 미래랑.”
시백이 머리를 긁적였다.
“의외로 동안이었구나.”
“의외는 뭡니까.”
태성이 조금 샐쭉해졌다.
“똑같은 건 양시백씨도 마찬가지인데요.”
혜연이 놀렸다.
“지금이 더 마르긴 했네요. 범죄 집단에 잡혀있었다더니... 아, 미안해요. 떠올리고 싶지도 않을텐데.”
“괜찮습니다.”
시백이 웃어넘겼다.
“갑자기 이렇게 돼서 고생한 건 다 마찬가지죠.”
“다 마찬가지라고 가볍게 말할 만한 일이 아니었는데요, 시백씨는.”
준혁이 말했다.
“됐어요, 그런 얘긴.”
시백이 말을 끊었다.
“어, 그런데 권혜연 순경님 안경 쓰셨어요?”
“네. 보호 용구가 필요하대서요. 시백씨는.... 그 모자인가요?”
“네. 아, 그 머릿속을 보호한다던 게.”
“네. 실제로 눈이 나쁜 건 아니에요.”
“그렇구나....”
시백이 준혁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선생님도?”
“네. 도수 없는 안경입니다. 십 년후에는 서류 읽을 때 라던가 실제로 쓰기도 했지만 아직은 아니에요.”
“삽십대에 벌써 노안이었던 거에요?”
혜연이 놀랐다.
“아닙니다, 막 살며 나빠진 곳이 췌장만이 아니었던 것뿐입니다.”
말하고 준혁이 시백의 눈치를 보았다.
“저 이제는 막 살지 않을 거니까요.”
“그래야죠.”
시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간 저 뿐만 아니라 관... 재석 아저씨까지 슬퍼한다고요.”
“관장님 만났어요?”
혜연이 물었다.
“예. 아빠도요.”
놀라는 사람들을 보며 시백이 억지로 웃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만나서 좋았고. 이제 관장님을 재석 아저씨라고 불러야 하는 게 젤 힘든 걸요.”
“호칭 문제 말인데요.”
준혁이 말했다.
“시백씨 이제 다시 학교를 다니거나 검정고시를 준비해야겠지요?”
시백의 얼굴이 구겨졌다. 혜연과 태성의 얼굴까지 구겨졌다.
“여기 와서까지 공부하란 말을 듣다니....”
혜연이 한탄했다.
“하지만 하기는 해야 합니다. 이제 과거로 돌아가지도 않을테니까요.”
준혁이 말했다.
“그 얘기 말인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태성이 물었다.
“갑자기 전화가 와서 과거로 갈 수 없다고, 그러니 이제 협력 관계는 끝났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하더니 그 이후로는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혜연이 맞장구쳤다.
“관계가 끝날 때 끝나더라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못 가게 되었는지.... 하다못해 이 ‘보호’는요? 꼭 더 과거로 가려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탐내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몰라요. 자긴 흥미 식었으니 그걸로 끝일 수는 없다고요.”
“맞습니다.”
태성이 찬동했다.
“그가 다른 마법사한테 우리를 팔아넘기지는 않을 거라고 믿지만 누군가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이 우리를 또다시 발견할 경우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는 확실하게 해두고 싶습니다.”
“예, 당연한 말입니다. 그러려고 모인 거고요.”
준혁이 말했다.
“왜 돌아갈 수 없는지는 그도 끝내 말하지 않았고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마법사의 위협에 대해서는, 대충 마법사들 사이에 큰 세력 다툼이 벌어져 우리 신경쓰고 있을 상황이 아니게 될 거라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를 이용해서 싸움에 우위를 점하려고 하면요?”
혜연이 지적했다.
“...우리의 존재를 이미 아는 세력에선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쪽이 이길 테니까요.”
“혹시 그게 우리를 불러온 마법사입니까?”
태성이 물었다.
“....예.”
준혁이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분위기에 질문을 계속하려던 태성과 혜연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그 쪽은 이미 목적을 달성했고, 더 이상 우리에게 상관하지 않겠다나봐요.”
시백이 땀을 뻘뻘 흘리며 대신 설명했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허강민씨도 그 쪽에서 데려갔으니까 무슨 위험한 일은 없을 거고... 그, 그러니까 우리는 학생답게 공부나 열심히 하면!”
“예. 그래서 말입니다.”
준혁이 시백을 잡아 진정시키고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제가 학교 졸업한 지 오래되기는 했지만 중학교 과정 정도는 가르칠 수 있습니다. 대학 다닐 땐 수학 과외한 경험도 있고.”
“스물여섯 아니고 서른여섯인데도 말인가요?”
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중학교 수학 정도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요?”
“......”
“가르치기 전에 저도 한 번 복습은 해봐야겠지요. 공식같은 건 좀 잊었을지도 모르고...”
준혁이 혜연의 눈치를 보았다.
“아, 혹시 권혜연 순경님은.”
“공부 잘해요. 순경 시험도 한 번에 붙었다고요.”
“저, 저는 어차피 암것도 모르니까 도와주시면 감사합니다.”
시백이 서둘러 말했다.
“아, 그럼 관장님 앞에서 선생님이라 불러도 안 이상하겠네요.”
“예, 그게 목적이니까요. 거기에 시백씨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고요.”
시백의 표정이 밝아졌다.
“양시백씨, 괜찮은 겁니까?”
태성이 물었다.
“저 사람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니까, 감시하기 위해서라도 같이 있어야 한다고.”
시백이 말했다.
“이제는 범죄 안 저지르겠다고 했고, 나도 믿지만, 그래도 확인을 하고 싶으니까.”
“용서해주는 거에요? 그렇게 쉽게?”
혜연이 놀랐다.
“용서는 안 했습니다. 쉽지도 않았고요.”
시백이 자기 손만 내려다보았다.
“재발 방지가 목적이라면 양시백씨 말고도 감시할 사람은 있습니다.”
태성이 말했다.
“저는 이미 이 이야기를 아버지께 털어놓아서, 아버지께서도 배준혁 형사를 지켜보겠다고 하셨고요.”
“감시 말고도... 제가 그러고 싶어서요.”
시백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도... 다들 살아났고, 조금쯤은 선생님 덕분이기도 한데, 범죄자 취급하고 영원히 안 보는 것만이 해결책은 아니잖아요.”
“시백씨 너무 물러요.”
혜연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시백이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 딱딱하기만 해도 문제잖아요. 저 정도는 물렁하게 살아도 될 겁니다.”
“양시백씨가 그렇게 살겠다면 간섭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만.”
하태성이 안경을 올렸다.
“부디 최소한의 자기 실속은 챙기며 사셨으면 합니다.”
“그 점에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준혁이 말했다.
“시백씨가 저와 같이 있게 되면 저도 시백씨와 있게 되니까요. 본의 아니게 시백씨의 짐덩이가 된 만큼, 최대한 시백씨에게 도움이 되도록 살 생각입니다.”
태성은 할 말을 잃었다. 혜연이 시백과 준혁을 묘한 눈으로 훑어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이대로 살면 되나요? 학생답게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박근태와 유상일과 배준혁씨를 지켜보면서?”
“예, 지금 같아선 그렇습니다.”
준혁이 말했다.
“미래에 대한 지식도, 이미 많은 것이 바뀌었고 앞으로 더 바뀌면 점점 더 의미없어질 테니 악용하고 싶어도 악용할 여지가 없을 거고요.”
“로또가 있던 시절도 아니고 주식에도 관심이 없었고요.”
혜연이 말했다.
“학력고사가 곧 수능으로 바뀐다는 거 알아도 별로 도움될 것 같지는 않고... 어쩐지 눈에 익은 내용을 배울 땐 한 번 더 복습해보는 정도는 할 수 있으려나.”
“같은 시험을 두 번 보는 거니 메리트가 없지는 않겠지요. 십 년이 지나긴 했지만.”
태성도 찬성했다.
“미리부터 시를 읽어둔다거나요?”
“...그거 읽으면 도움이 되기는 하는 겁니까...”
벌써부터 수험생 모드로 한숨 푹푹 내쉬는 두 사람을 보며 준혁이 조금 웃었다.
“양시백씨는 앞으로 어떻게 할겁니까?”
태성이 물었다.
“응? 어, 뭐 나도 공부를....”
“해서 어디 갈거냐고요. 공부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그 이상은 별로.”
“최재석 관장님은 어쩌실 것 같던가요?”
시백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전과는 달리 경찰을 그만두려는 징조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준혁이 대신 대답했다.
“아마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계기였을 경감님의 사망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겠...”
말하다 말고 준혁이 혜연의 눈치를 보았다.
“안 일어났고, 앞으로도 몇 십 년은 일어나지 않을 거고요. 그러니 괜찮아요.”
혜연이 말했다.
“네. 그러니 재석 선배는 계속 경찰에 남아서... 선진화파 수사가 마무리되면 다른 조직 범죄를 계속 수사할 수도 있고 아예 다른 일을 맡거나 팀이 개편될지도 모릅니다만 웬만하면 다들 경감님 따라가려 할겁니다.”
“그럼 역시 양시백씨는 다른 진로를 모색해봐야겠군요.... 경찰은 어떻습니까?”
태성이 물었다.
“엥?!”
시백이 놀랐다.
“나, 난 경찰은.”
“지금은 전과도 없잖아요? 게다가 아직 IMF 이전이라 경쟁 세지 않습니다.”
“21세기보다 안 센 거지 지금도 그렇게 쉬운 건 아닌데요.”
20세기에 시험을 본 경찰이 항의했다.
“그러는 하태성 경위님은요? 이번에는 경찰대 안 간다고 했지요?”
혜연이 물었다.
“글쎄요.”
태성의 기색이 한풀 꺾였다.
“처음에만 해도 이젠 절대 경찰이 되지 않을 작정이었습니다만.... 요즘 들어선 경찰이 아니라 제가 문제였던 건 아닌가 싶어서.”
그가 컵을 만지작거렸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중입니다.”
“그것도 괜찮을 겁니다. 적어도 박근태가 마수를 뻗지는 못할테니까요.”
준혁이 격려했다.
“아참, 하경위에에는 드릴 것이 있습니다.”
준혁이 지갑에서 쪽지를 꺼내 내밀었다.
“김주황씨의 주소, 전화번호, 다니는 학교 학년 반, 자주 출몰하는 장소입니다.”
“네?!”
하태성이 빼앗듯이 쪽지를 받아들고 펼쳤다.
“이, 이걸 어떻게.”
“운이 좋았죠.”
준혁이 방긋 웃었다.
“시백씨를 조직으로부터 빼돌릴 공작을 하다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태성이 쪽지를 소중하게 주머니에 잘 넣었다.
“우연이었어요? 빡빡이 찾아서 연극 시킨 게 아니라?”
시백이 놀랐다.
“연극을 시킨 건 맞지만 전 그저 근처 불량 청소년 아무나 데려다 시킬 작정이었는데 우연히도 김주황씨가 그 동네 사람이더라고요. 관련자 모두가 운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들인데, 만날 운명이면 이렇게도 되나봅니다.”
태성은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운이 좋았다니, 새롭네요.”
“우리 운 좋은 거 맞잖아요.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건데, 여기에 평생치 운 다 쓴 거면 다른데 운 나쁜 게 뭐가 대수에요.”
혜연이 말했다. 태성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면, 저나 권혜연 순경님이나 양시백씨는 가족을 되찾았지만, 허강민씨는.....”
두 사람은 그중 허강민과 가까웠던 양시백을 쳐다보았다.
“.....도로 살인자가 되어버릴지도 몰라요.”
시백이 우울하게 말했다.
“저 내보내주기 전에, 사람 안 죽이겠다고 한 약속 이제는 못 지킨다고.... 다른 사람들 복수 대신하는 거 계속 하려는 건지도 몰라요.”
“그럼 어쩌면 좋지요?”
“이전의 살인 행각을 계속한다면 체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준혁이 잘라 말했다.
“체포도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반복하다보면 꼬리가 잡히는 건 어떤 범죄자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범행을 그만두고 어디로 숨어버리면 좋겠는데...”
경찰이 살인마를 감싼다고 타박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이들은 모두 가족을 잃어봤고 허강민에게 여러모로 큰 도움을 받았다. 죄를 없었던 것으로 할 기회는 잃었다곤 해도 앞으로 살인을 더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굳이 쫓아가 체포하고 싶지는 않은 게 당연했다.
“가능하면 다시 접촉해서 자수를 권유해보는 수밖에요.”
혜연이 말했다.
“위로하고 싶어도, 가족을 되찾은 우리가 하는 위로가 과연 들리기는 할지 걱정이 되지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 뿐이군요. 전화번호를 바꿔버린다면 그것도 불가능해지겠지요....”
태성도 침울하게 말했다. 시백도 덩달아 숙연해졌다. 준혁은 허강민이 장지연의 부하가 된 것을 알고 있지만 장지연이 마법사인걸 모르는 양시백은 거기까진 알 수 없었다.
“그도 이런 일을 겪고 복수나 살인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깨달을 기회 정도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준혁이 말했다.
“그 점을 깊이 생각해보길 바랄 수밖에요.”
“그거 본인 얘기인가요.”
혜연이 준혁을 째려보았다.
“네. 그러니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는 게 낫겠죠.”
그가 시백을 보며 방긋 웃었다.
“지금은 시백씨 공부 계획을 선택해서 집중하면 어떨까요?”



검은 남자 70 ㅣ- 회색도시&검은방


허강민이 병실에서 사라진 것은 배준혁이 가장 먼저 눈치채었다. 주문 주머니가 부서진 것을 깨달은 덕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바로 병원으로 뛰어갔다. 병실 안까지 뛰어들어가 텅 빈 것을 보고는 제일 먼저 탐색 주문을 썼다.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부분의 흔적은 깨끗이 지워져 있었다. 상당히 강력한 마법사가 빈틈없이 뒤처리한 것 같았다.
‘하긴, 그러니까 방어 주문을 깨고 강제로 들어와서 허강민을 잡아갈 수 있었겠지.’
자신은 아직 햇병아리 마법사에 불과하니 강한 마법사가 힘으로 자신의 주문을 눌러 부술 수 있다고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나니 입맛이 썼다.
당장 이 안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거기까지 확인하고 준혁은 나가서 보안 담당자를 부르는 대신 권현석에게 전화했다.
“허강민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금 류태현 순경은 어디 있습니까?”
-뭐라고?
잠시 시간이 흐른 후 권현석이 한껏 낮춘 목소리로 답했다.
-오늘은 비번이야. 왜? 어떤 문제가 생긴 거야?
“허강민이 마법사에게 납치되었습니다. 류태현 순경이 알면 동요할 테니 당장은 비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알았어.
경감님의 동요가 침묵과 함께 전해져왔다. 이만 끊자고 하려는데 경감님이 질문해왔다.
-어떻게 찾지? 뭘 준비하면 돼?
가장 곤란한 질문이었다.
“저도 당장은 모르겠습니다.”
경감님이 한층 더 충격받으시는 것이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납치범은 저보다 훨씬 강한 마법사입니다. 탐색 마법이라면 이제 써볼 거지만 결과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이대로 찾지 못한다면 수사팀이 곤란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 있는 경관들과 의료진의 눈을 속일 수도 없어. 그들은 허강민이 갑자기 사라진 걸 뭐라고 할까?
“속이는 건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도 잠시 기다려. 국장님께 보고하고 올게.
권현석이 전화를 끊었다. 준혁은 일단 기다리면서 허강민의 침대를 훑어보았다. 생각 같아선 베갯잇을 그냥 벗겨가고 싶은데 그랬다간 경찰병원 관계자나 다른 경관들의 눈에 띌 수 있었다.
한참을 뒤진 끝에 겨우 검고 빳빳한 머리카락 몇 가닥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을 작은 지퍼백에 넣고 배준혁은 위치추적 마법에 쓸 제물을 챙겨보았다. 비상용으로 갖고 다니는 제물이 좀 있지만 자신을 가볍게 압도할 만큼 강한 마법사가 추적 방해 주문을 썼을 게 분명한 상황이었다.
몇 가닥이나마 머리카락이 남은 건 범인이 여유롭다는 증거였다. 충분히 준비를 갖추고 만전의 태세로 시도해도 성공할까 말까인 일이었다.
당장 추적하는 것은 포기하고 일단 경감님의 연락을 기다리기로 했다.


권현석의 보고를 듣고 하성철은 새하얗게 질렸다.
“마법으로 납치해갔다고 합니다.”
잘못한 것이 없어도 권현석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배 형사보다 강한 마법사가 방어 주문을 부쉈다고 합니다. 현장 상황은 잘 구금되어 있던 피의자가 병실 안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상황이고요. 마법으로 찾아보기는 하겠지만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허강민이 사라진 것은 기정사실이 된다. 그것도 경찰병원에서, 공적인 보안을 전부 무시하고. 애매한 담당 경관들이 허강민 실종 경위를 놓고 추궁당할 것이고 수사팀의 체면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허강민 같은 중범죄자를 구치소가 아닌 병원에 둔 것이 트집잡힐 수도 있었다.
“일반적인 수사방법으로 찾을 길은 없나?”
하성철의 질문에 권현석이 정신을 차렸다.
“백선교의 짓이 거의 확실하니 본산을 비롯해 의심가는 건물들을 최대한 서둘러 수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영장을 수월하게 받으려면 사실을 밝히는 편이 좋겠지.”
하성철이 나직이 답했다.
“다른 사람들은 허강민이 스스로 탈옥했다고 믿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정도 루머는 그를 구하면 밝혀낼 수 있어. 최대한 빠르게, 백선교가 대처하기 전에 구출하는 쪽에 초점을 맞추게.”
“예.”
권현석이 주저하다가 물었다.
“그럼 허강민이 사라진 것은 인정하실 건가요?”
“비공개로 수사할 수 있도록 힘써보겠네. 병원 경비 담당이던 경관들도 너무 큰 피해는 보지 않도록.”
배준혁은 경관들에게 마법을 써서 허강민이 사라진 사실 자체를 감출 수 있다고 했다. 권현석은 그 말이 허강민의 실종 사실 자체를 완전히 비밀로 하자는 뜻이었음을 되새겼다.
처음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것은 진실을 감추고 무고한 경관들에게 마법을 쓴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허강민 실종을 인정하고 수사하게 되면 그 자체로 수사팀이나 경비하던 경관들에게나 피해가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국장님은 그 편을 택하겠다고 하셨다. 허강민을 한시라도 빨리 찾기 위해.
“알겠습니다.”
허강민은 체포 이후엔 수사에 협조적이었다. 게다가 정말로 백선교에서 납치한 것이라면 무슨 끔찍한 꼴을 당하고 있을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밀실에서 살아 빠져나왔다. 한 손에 쥔 승아의 손, 다른 한 손으로 부축하고 있는 하무열 형사의 팔, 쏟아지는 햇빛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한 가정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그래서 몇 사람이 더 죽어야 했는지, 방금 쓰러뜨린 그 사람은 자신만 아니었어도 그런 흉악범이 될 필요 없었다는 것까지 지금 생각했다가는 미쳐버릴 것이기에. 의식적으로 텅 비운 머리에 눈앞의 햇빛을 채웠다.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낼게요.”
류태현이 허강민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물러났다. 허강민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침대에 늘어져 버렸다.
류태현도 지친 듯 침대 옆 바닥에 주저앉았지만 허강민은 눈치채지도 못했다.
“생각보다 많이 힘드네요. 그냥 겪었던 일을 허강민 씨한테 흘려넣어주는 것뿐인데.”
류태현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강민 씨가 절 이해해주길 바랄 뿐인데......왜 이렇게까지 힘들어야 하는 거죠?”
대답을 바라는 것처럼 류태현이 입을 다물고 조용해졌다.
허강민은 방금까지 머릿속에 들어온 것들과 싸워야 했다. 다른 사람의 기억과 감정, 그것도 류태현의 것이었다. 내장에 생긴 암종을 피부의 상처처럼 보고 느낄 수 있다면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기억 속 매 순간순간이 뇌리를 고통스럽게 찔러댔다.
이런 식으로 류태현을 이해하게 될 리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눈앞에 류태현의 얼굴이 보였다.
“헉!”
정신 못 차리고 비명을 지르자 그 얼굴이 사라졌다. 그리고 쿵 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놀랐잖아요.”
류태현이 바닥에서 꾸물꾸물 일어나고 있었다. 강민의 얼굴을 살펴보려다가 놀라 넘어졌다는 사실을 허강민은 겨우 깨달았다.
‘미쳐버린 주제에 왜 여전히 류태현인 거야.....’
한심해 하면서도 허강민은 조금 여유를 되찾았다. 백선교 본산의 간부 구역에서 마법도 쓸 수 없는 그가 살아 나갈 유일한 길이 류태현의 마음을 돌려놓는 것이었다.
그 류태현이었다. 어쩌면 아직 제정신을 되찾을 여지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류태현, 괜찮아?”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부드럽게 가다듬었다.
“예, 그냥 넘어졌을 뿐이에요.”
류태현이 툭툭 털고는 허강민을 바라보았다. 그 미소에서 불길한 조짐을 읽기도 전에 류태현이 허강민의 뺨을 후려갈겼다.
“더는 안 속아요.”
그가 부드러운 말투로 경고했다.
“그러니까 가식 떨지 말아요. 강민 씨 저 싫어하는 거 다 알아요.”
싫어한다. 증오한다. 몇 번이고 류태현을 무너뜨리는 자신을 꿈꾸었다.
류태현이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건 거의 꿈꿔보지 못했다.
밀실을 만들고 또 만드는 동안, 그런 상상을 허강민의 뇌리에서 참을성 있게 지워나간 건 류태현이었다. 허강민이 설치한 무대 위에서 철저히 놀아났을 뿐 아니라, 항상 예상을 벗어나는 낮은 공격성으로 그 무대에서 살아남았다. 그는 피식당하지 않는 피식자였다. 포식자였던 적이 없었다.
“절 또 속이려고 하지 말아요.”
류태현은 여전히 부드럽게 위협하고 있었다.
“그저 제가 또 속아서 호구처럼 놓아주길 바라고 그런다는 거 다 알아요. 제가 미쳐서 이용할 수 없게 될까봐 유혹했던 것처럼. 더는 안 속으니까 서툰 연기 그만둬요. 제가 아무리 미워도 그렇지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요?”
허강민은 멍한 얼굴로 류태현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네가 미워.”
띄엄띄엄 말하며 그 얼굴을 살펴보았다. 마치 지금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선 얼굴을.
“그래도 그때 유혹한 건 널 더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었어. 네가 그대로 미쳐버리는 걸 막고 싶었어.”
“미쳐버리면 이용할 수 없으니까 말이죠?”
류태현은 비릿하게 미소지었다. 숨김없이 드러난 욕망이 허강민을 훑어내렸다.
“마음대로 생각해.”
허강민은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실패했으니까.”
류태현이 쿡쿡 웃었다. 그리고 몸을 숙여 허강민을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지금 제가 허강민 씨를 강간할까봐 겁내고 있죠?”
귓가에 느릿하게 속삭이면서도 류태현의 손은 그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걱정 마세요. 안 그래요. 사랑하는데 어떻게 그래요.”
“그럼?”
허강민이 신음하며 물었다.
“사랑하니까 내 정신도 고문하지 않고 놔둘 거냐?”
“아뇨, 그건 해야죠. 허강민 씨가 날 사랑하게 만들어야 하니까.”
깔끔하게 잘라 말하고 류태현은 싱긋 웃었다. 허강민은 할 말을 잃고 입만 딱 벌렸다.
그때 시끄러운 전자음이 울렸다. 류태현이 펄쩍 뛰더니 자기 핸드폰을 확인했다.
“헉, 벌써!”
창백해진 류태현이 그대로 공간을 열고 뛰어나가며 외쳤다.
“저 출근해야 돼요! 아마 늦을 거예요!”


권현석도 하무열도 머리를 싸매고 자료를 끌어모았다.
허강민은 본산에 갇혀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배준혁이 주장했고 권현석도 그 말을 믿었다. 문제는 그곳이 아직도 압수수색 영장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제까지 체포된 간부들의 집이나 직장 쪽 영장은 잘 나왔기 때문에 항의에 집중하지도 못했다.
“영장을 받는다고 해도 늦기 전에 본산을 터는 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하무열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분명 마법도 엄청나게 걸려있을 거고 허강민 놈을 무사히 구출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거든요. 게다가......”
“게다가?”
하무열 형사의 얼굴에서 진정으로 여유가 사라진 모습은 권현석 경감에겐 처음이었다. 네 번째 밀실에 류태현과 하무열에 국장님까지 끌려들어간 걸 깨달았을 때도 이렇게 암담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본산을 털고 허강민을 구하려면 마법사가 필요합니다. 배준혁 한 명 가지고는 부족해요. 류태현도 필요할 겁니다.”
권현석도 나란히 우울해졌다.
“어쩔 수 없잖아. 류태현도 이 상황 알아야 해. 이럴 때를 위해 마법 배운 거고.”
“압니다. 그저 이제 겨우 햇병아리인 그놈이 잘 할 수 있을지.....”
늘 냉정한 모습이나 심술궂은 모습만 보여주는 하무열 형사가 이렇게 후배가 걱정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태도를 보이니 권현석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얼마만한 위험이 기다려서 저러는지 걱정도 배가되었다.
강력계 경찰로 살면서 체포하고 진압해야 할 범죄자들 상대로 공포를 느껴본 적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 건 적어도 권현석이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공포였다. 총, 각종 연장, 난폭하고 범죄적인 인간들.
이건 달랐다. 상대가 어떻게 무엇으로 공격해올지 몰랐다. 무엇을 노리는지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피해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구제해야 하는지까지도.
“류순경 불러와. 감출 수는 없잖아.”
“예.”
여전히 우울한 얼굴로 하무열이 회의실을 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류태현이 허강민과 사귄 이후로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줄 알고 있지만, 하무열 보기엔 전혀 아니었다.
네 번의 밀실은 이미 류태현을 심하게 바꿔놓았다. 버티는 데 성공했다고 다치지 않았다는 뜻이 되지는 않았다.
여승아와 헤어지고 허강민과 사귀게 된 것부터가 정상적인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일들을 겪고서도 겉으로는 예전이나 똑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 자체가 멀쩡하지 않다는 증거로 보였다.
‘제발, 이번 한 번만 더 버텨다오.’
미친 듯이 바쁜 수사팀 사무실로 들어가 류태현을 찾았다. 어제 드디어 비번이 돌아와 퇴근했던 후배가 언제 퇴근했느냐는 듯이 다시 일에 쫓기는 중이었다.
“아, 무열 선배.”
웃으며 인사하려던 류태현이 하무열의 얼굴을 보고 멈칫 했다.
저 둔한 녀석까지 눈치챌 정도라니 자신도 지금 표정관리가 그만큼이나 안 되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그래. 이리 좀 와 봐라.”
하던 거는 대충 류태현의 손에서 떼어놓고 하무열이 회의실로 잡아끌었다.
“허강민에게 문제가 생겼다.”
“예?”
갑자기 충격받지 말라고 조금씩 이야기를 풀려고 했더니 류태현은 시작부터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 무슨 문제요?”
하무열은 류태현을 회의실에 밀어넣고 문을 다시 잘 잠갔다. 권현석 경감이 기다리는 걸 보고 류태현은 더 당황했다.
“어떻게 된 거죠? 자세히 좀 얘기해줘요!”
“그럴 생각이야.”
권현석이 괴로운 표정으로 설명했다.
“어제 저녁 허강민 방의 마법 방어가 깨졌다. 배 형사가 서둘러 가봤지만 이미 허강민은 사라진 뒤였어. 강력한 마법사가 방어를 찢고 들어가서 강제로 납치해간 것 같대.”
“그럼......”
류태현이 길 잃은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권현석과 하무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무열이 무거운 어조로 보충했다.
“당연히 백선교 짓이지. 일단 비공개로 수사하면서 본산 압수수색 영장을 받을 작정이야. 허강민이 사라진 경위를 밝힐 수 없기 때문에 드러나게 수사할 순 없어.”
“제가 뭘 하면 되나요?”
류태현이 하무열에게 매달렸다.
“제가 할 수 있는 일 뭐 없어요?”
“있으니까 불렀지. 지금 국장님 생각은 이거다. 최대한 빨리 본산 압수수색 영장을 받아내고, 놈들이 허튼 수작 부리기 전에 너와 배준혁이 앞장서서 허강민을 찾아내는 것. 물론 영장 받기 전에 놈들이 마법으로 수작부릴 수 있으니까, 지금부터 너와 배준혁이 본산을 감시하면서 수상한 낌새를 최대한 찾아내야 해. 마법으로 싸울 각오도 하고. 할 수 있겠어?”
“해야죠.”
류태현이 다부지게 대답했다.
“그런데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싸우는 게 어차피 공적으로 문제삼기 어려운 일이라면, 아예 저하고 배 형사님이 몰래 들어가서 구해오면 안 되는 건가요?”
“당연히 안 되지.”
하무열이 류태현의 뒤통수를 쳤다.
“호랑이굴도 보통 호랑이굴이 아니란 말이다. 배준혁도 너도 아직 생초보 마법사들인데 자기 집에서 준비 다 해놓고 기다리는 적 상대로 뭘 할 수 있겠냐? 순찰도 조심해서 돌아야 해.”
류태현은 항의하고 싶은 표정을 하면서도 대꾸하지 못했다.
“하무열 형사 말이 맞아.”
기어이 딴 소리 나오기 전에 권현석이 재빨리 못을 박았다.
“그리고 배 형사가 마법사인 건 아직은 우린 모르는 것으로 되어있으니까, 두 사람이 함께 순찰 돌 수는 없어. 자네는 하무열 형사와 돌고 배 형사는 클럽의 입김에 의해 몰래 따로 순찰하는 형식이 될 거야.”
“예.”
류태현이 아쉬운 표정을 하면서도 권현석에게 경례를 붙였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40 ㅣ- 회색도시&검은방



양시백에겐 놀랍게도, 그와 배준혁은 금방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최재석 선배 빼놓고 사정 아는 사람들끼리만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집으로 찾아온 준혁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시백에게 웃어주었다.
“허강민씨는 양태수씨도 사정을 알고, 그러니 그 쪽으로 연락이 가게만 하면 된다고 말했습니다만 정말 그걸로 충분했습니까? 달리 위험한 일은 없고요?”
“네, 저도 너무 쉽게 풀려서 얼떨떨하긴 합니다.”
양태수가 말했다.
“회장님께는 어디까지나 우연히 재석이가 시백이를 발견해서 저한테 알렸다는 식으로 보고가 들어갔습니다. 저는 애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시백이도 말 안 하는 것으로 해서요.”
“믿던가요?”
“회장님의 측근이 직접 와서 시백이한테 직업소개소의 실상을 제게 말하면 둘 다 죽는다고 협박하고 간 것으로 해두었습니다.”
협박한 게 아니라 한 것으로 해뒀다는 말에 준혁이 의구심 어린 표정을 했다.
“....강재인 비서도 아가씨 편으로 돌아갔다더군요.”
“아.”
준혁이 고개를 푹 숙이고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저.....지연씨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양태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예.....아마도. 처음으로 삶에 목적이 생겼다며 즐거워하고 계십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준혁이 애써 웃었다. 그 목적이 뭔지 생각하면 양태수는 웃을 수 없지만.
“지연씨면 선생님 애인이요?”
시백이 물었다. 준혁이 고개를 저었다.
“지연씨는 절 만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연은 이미 끊어져버렸다고.”
“네? 하지만.”
“저 없이 지연씨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됐습니다.”
준혁이 억지로 밝은 미소를 지었다.
“분명 훌륭한 회장님이 되실 수 있을 겁니다.”
“네.... 물어보시면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양태수가 어색하게 말했다.
모시던 회장이 악당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이기 버거운데 지연 아가씨는 마법사고 심지어 쿠데타를 준비중이다. 게다가 그 불륜 애인이었다던 사람이 아들 친구 겸 친구 후배.
‘나 제정신인걸까....’
그러나 그 미친 꿈에 아들이 있고 친구가 있다. 시백이를 찾았는데 이 정도면 싼 거라고 양태수는 납득하기로 했다.
“그럼 허강민 씨한테도 별 문제 없는 거죠?”
시백이 물었다.
“저 놓아준 거 안 들킨거고 그러니까...”
“그래, 그 쪽도 별 불이익은 없을 거다.”
양태수가 말했다.
“그 사람이 걱정되니?”
“저 거기 있을 때 잘해줬거든요.... 보호해주고 결국 아빠랑 관장님도 만나게 해주고.”
“그래.”
양태수의 표정이 펴졌다.
“진작 찾지 못해 미안하다. 앞으로라도 힘껏....”
“아, 됐어요. 그 말 그 동안 백 번은 들었어요.”
시백이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아빠 안 미워해요. 그러니까....”
“그래, 알았다.”
양태수가 안심한 듯 웃었다.
“저, 이제는 저와 시백씨 둘이서만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준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양태수의 기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미래에 있었던 일 때문입니까?”
“에.. 허강민씨가 그것까지 다 말했나요?”
“네. 배신자 셋에 재석이까지 당신이 죽였.”
“아빠.”
시백이 조용히 말했다.
“둘만 이야기하게, 비켜주시면 안될까요?”
양태수가 얼어붙었다가 조심조심 아들을 돌아보았다.
“시백아, 아빠가....”
“둘만 얘기하고 싶은데요.”
뭔가 더 말하고 싶은게 많은 표정을 하고서도 양태수는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갔다. 준혁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양태수씨한테 맞는 줄 알고 떨었네요.”
“저한테 맞는 건 안 무서우세요?”
시백이 툭 내뱉었다. 준혁이 눈을 깜빡였다.
“네, 안 무섭습니다.”
“왜요? 제가 호구라....”
“맞을 짓을 해서 맞는 것인걸요. 아니 맞을 짓보다 더한 짓을 했는데 고작 때리는 걸로 끝낸다면 도리어 고마운 일 아닐까요?”
“아니에요, 그런 거.”
양시백이 고개를 파다닥 털었다.
“나쁜 짓을 했다고 해도 함부로 때리면 안 되는 거라고요. 맞을 짓이라니 그런 게 어딨어요?”
준혁은 말문이 막혔다.
“그....”
“물론 선생님이 한 짓은 그저 나쁜 짓이라고 하기에는 정말 큰 잘못이지만.... 반성도 안 하겠지만 그러니까 때리고 싶은 마음도 있긴 하지만 때리면 반성할 것도 아니잖아요?”
“예.”
말하고 준혁이 자기 입을 흡 막았다.
“역시 선생님은...”
“아 아니 그런 거 아닙니다, 전 그저 시백씨가 저더러 뭘 시키든 뭐라 매도하든 전부 따를작정을 한 것 뿐이고 그래서 반사적으로 긍정을..... 반성 하고 있습니다! 안 때려도 한다고요!”
“정말요?”
시백은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죽는 순간까지 딸만 걱정하다 갔잖아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백을 곁눈질로 쳐다보다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푹 수그렸다.
“죄송...합니다.”
“죄송 말고는요?”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구체적으로 뭘 그러지 않을 건데요?”
“사람 안 죽이고, 시백씨 속이고 이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은요?”
“다른 사람도 속여서 이용하지 않겠습니다.”
“정말이에요?”
“네.”
준혁이 얌전히 머리를 조아렸다.
“이젠 수정이가 없으니까 죽일 필요가 없어져서 그러는 거 아니고요?”
“아닙니다!”
강하게 말했다가 준혁은 다시 꼬리를 말았다.
“정말입니다... 돌아온 이후에도, 죽이고 싶고... 죽이면 상황이 잘 풀릴 것 같은 사람이라면 있었습니다.”
양시백의 표정이 굳었다.
“누굴....”
“박근태요.”
“아.”
그것만은 시백도 뭐라 하기 어려웠다.
“수사팀을 배신하지 못하도록, 십년 후 사건의 원인이 되지 못하도록 미리 죽여두는 게 좋지 않을까 몇 번이고 생각했습니다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반성해서가 아니라 기회가 없어서였지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허강민씨도, 장산 병원에서 일이 잘 풀릴 이후에는 굳이 잘 되어가는데 시간을 또 과거로 돌려 뭔가 또 잘못될 위험을 자초하느니 그를 막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는 수배된 흉악범이라 살인을 들키는 데 대한 부담도 없었습니다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회식날 밤 권총을 갖고 있었다면 죽였겠지만 역시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건.... 다행이네요.”
시백은 속았다.
“그, 그래도, 그것 만으로 안심할 순 없어요.”
“예, 당연하죠.”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앞으로 선생님 감시할 거에요. 나쁜 짓 하지나 않는지. 평생 쫓아다니며 확인할 거라고요.”
“예, 물론... 예? 평생이요?”
준혁이 깜짝 놀랐다.
“저, 그건 시백씨에게 너무 손해가 아닙니까? 시백씨 말고도 절 감시할 사람이라면 더 있으니 그런 인생의 낭비를 할 바에야....”
“낭비 아니에요.”
시백이 일어나서 준혁에게 다가왔다.
“선생님이 악당이고 살인자라고 해도 저는 여전히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 선생님이 나쁜 짓 못하고 바르고 건강하게 살도록 하는 걸로 은혜를 갚을 거에요.”
“.....시백씨.”
“수정이는 이제 지켜볼 수 없으니까, 선생님을 지켜볼래요.”
준혁은 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어째서..... 저한테 이렇게나....”
목이 메어 나오지 않는 말을 겨우 쥐어짰다.
“선생님을 좋아하니까요.”
시백이 담담하게 말했다.
“밉고 화나고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나 이해는 안 가지만 그래도.... 선생님도 행복하길 바라니까요.”
“시백씨.....”
준혁이 손을 내밀어 시백의 손을 붙잡았다. 시백은 저항없이 끌려가 그를 안았다.
“이제 안 놔줄거에요.”
시백이 나직이 말했다.
“예.”
준혁이 시백을 꽉 붙들었다.
“부디 놔주지 마세요.”




반성이 없는 자여 그대 이름은 준혁이니라.



[반월당, 마블 유니버스] 사랑손님과 천호님 6 (완) ㅣ- 크로스오버


사랑채 방향으로 굴러가는 구슬은 사악한 느낌은 없었다. 그러나 로키와 비슷한 느낌인 것으로 보아 그 악당이 뭔가 꾸미는 모양이었다.
‘설마 배은망덕하게 반월당에 무슨 해코지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구슬은 사랑채 안까지 굴러들어갔다. 로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유단은 최대한 기척을 죽인 채 살금살금 뒤따랐다. 그러다가 구슬이 멈추자 유단도 따라 멈췄다.
그냥 복도 구석이었다. 구슬은 딱히 뭔가 하려는 조짐도 보이지 않은 채 그 자리에 보통 구슬처럼 멈춰서 있었다.
어쩌려는 건가 하고 기다리는데 갑자기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인간계에는 얼마나 있을 거지?
로키의 목소리였다. 구슬이 멈춰 선 바로 옆 방이 로키의 방이었다. 유단은 숨을 죽이고 납작 엎드렸다. 백란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넉넉잡아 한두 해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전하 일이 어떻게 되는지도 봐야 하고, 저도 처리할 일이 좀 있습니다.
-그래. 요괴들의 관심을 너의 도깨비 왕에게서 떼어놓는 일도 쉽지 않을 듯하니 말이지.
로키의 말투가 짓궂어졌다.
-상식적으로 말이야, 이제와서 네가 그에게 냉담한 소리 좀 한다고 누가 너랑 그놈 사이를 의심할 수 있겠냐. 겉으로 차갑게 대한다고 속을 놈들은 애초 네게나 그놈에게나 위협이 되지도 않겠지. 네가 이미 그놈을 위해 목숨도 여러 번 걸었고 따라서 그놈이 네 약점으로 노림직한 인간이라고 알 만한 놈들은 일시적이고 얄팍한 연극에 속지도 않겠지.
-약하고 어리석은 요괴들이라고 해서 속일 필요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백란이 뚱하게 대꾸했다.
-그가 제 앞에서 죽는 모습은 이제 질릴 대로 질렸습니다. 없앨 수 있는 가능성은 최대한 없애 두고 싶습니다.
-덕분에 잡요괴들뿐 아니라 그놈 본인까지 네가 자길 귀찮아한다고 오해한 건?
-.....그가 바보여서 그런 걸 어쩌겠습니까.
여전히 뚱한 목소리로 백란이 우물거렸다.
-그도 저 때문에 속 좀 썩어봐야지요.
-그래. 넌 그놈 때문에 천 년이나 애태웠으니 말이지.
-그런데, 그 호칭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응?
-그를 ‘너의 도깨비 왕’이라고 부르는 것 말입니다. 듣기 간지럽기도 하고, 그와 지금의 유단은 분명 다른 인물입니다. 꼭 그가 또 죽을까봐 예방선을 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럼?
-지켜보는 동안 깨달은 것도 있습니다. 그는 과거 도깨비의 왕과 같은 인물이기도, 아니기도 합니다. 저와 팔목귀 때문에, 그리고 천형죄인으로 지내며 새겨진 많은 것들이 그대로 남아있지만 이번 생에서 새로 얻은 것들은 지난 생에선 생각할 수도 없었던 것들입니다. 심지어 전생에 부렸던 가신들과도 다시 만나서는 완전히 다른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니 저와의 인연 역시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 이해했어.
로키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장난칠 때는 완전 철없는 어린애 같던 목소리가 진지해지니 또 그렇게 엄숙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그럼 그 이야기는 됐고. 내가 이번에 네게 진 빚 말이다.
-이미 한 맹약에 따른 행동이었습니다.
-아니. 맹약할 때 우린 분명 자신의 안위까지 소모해 상대를 지킬 필요는 없다고 했어. 네가 이번에 날 숨기느라 얼마만한 위험을 감수했는지 모르지 않는다. 그러니.
잠시 조용해졌다.
-받아라. 목숨이 위험할 만한 공격이라도 이것이 한 번은 막아줄 것이다.
-감사합니다.
사양도 없이 덥석 받는 목소리가 더없이 진지해서 유단은 오싹해졌다.
목숨의 위기라니. 천계에선 근심 걱정 없이 호강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목숨 지켜주는 무언가에 그렇게 혹하다니 사실은 또 목숨이 오락가락할 만한 위기가 있는 거야?
-그럼 저는 나가보겠습니다. 가게를 마저 수습해야 하니까요.
그 말에 정신차려보니 여기까지 안내해준 녹색 구슬은 어느 샌가 사라진 뒤였다. 유단은 허겁지겁 뒤로 물러났다.
간신히 복도 모퉁이로 물러나는 순간 드르륵 하고 문 여는 소리가 났다. 백란의 긴 옷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이러고 금방 유단 앞으로 걸어와 그것도 숨는다고 숨은 거냐고 타박할 줄 알았다. 그러나 백란의 발소리는 그냥 반대쪽 복도를 향해 멀어져 버렸다.
유단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생각해보니 자신이 이제까지 반월당에 드나들면서 백란이 하는 이야기를 엿듣거나 백란 모르게 염탐하는 데 성공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백란은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놀려먹을 기회로나 삼았다.
‘가만, 그럼 백설호 꺼내놓고 한 이야기는?’
“이것도 숨는다고 숨은 거냐, 인간?”
어느새 눈앞에 백란 대신 아스가르드의 장난의 신이 서 있었다. 유단은 쭈뼛해서 올려다보았다.
“천호 모르게 숨겨주느라 고생 좀 했다. 인간이 되어가지고 숨소리는 왜 그리 크고 기척은 뭐 그리 요란하냐? 멧돼지도 너보다는 조용할 것 같구나.”
“그럼.”
유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백란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방금은 정말로 백란 모르게 엿듣게 해준...... 건가요? 왜요?”
로키의 표정이 교사가 한심한 열등생을 보는 표정에서 아예 교실의 쓰레기를 보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천호가 금붕어 자랑할 때 설마 네 발소리를 못 들었을 것 같으냐? 은근슬쩍 내 이름을 흘려 바람잡이로 삼은 것이 우연으로 보이느냐? 너 들으라고 실컷 모진 소리를 뱉어놓고서 그 여우금붕어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더구나. 그것도 모르고 네가 이리 답답하게 구니 한 번쯤 엿듣기라도 해서 네가 그놈의 본심을 대면한다면 어떤 꼬락서니를 할지 궁금해진 거다.”
유단을 돕고 싶었다는 건지 놀리고 싶었다는 건지 헷갈리는 설명이었다. 유단은 납득했다.
오해도 풀어주고 놀리고도 싶었다는 거겠지. 백란이 늘 그러듯이.
쓸데없는 참견이었다고 해주고픈 충동이 일었다. 백란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라고. 그저 그 마음이 가끔은 솔직하게 튀어나오는 걸 보고 싶은 거라고.
“감사합니다.”
어차피 이런 족속들에겐 말해봤자다.
태생이 전혀 다른 로키와 백란이지만 한 일족인 것처럼 생각하는 편이 더 이해가 빠를 것 같다는 감이 들었다.
“다행히 아주 바보는 아니로군.”
로키가 표정을 풀었다.
“이제 가 봐. 가서 그 착해빠진 여우하고 잘 놀아.”
“......여기 그런 여우가 있었어요?”
“아, 내 설명이 부족했군. 선량하고 자비로우며 자기희생적이고 자신에겐 엄격하며 남에게는 관대하기 한량없는 천호하고 잘 놀아.”


서재에 앉아 책을 뒤적이던 백란이 다리를 절며 들어오는 유단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토르는 돌아간 지 오래인데 그새 누구한테 맞고 온 겁니까?”
“아무도 안 때렸어.”
유단이 그 앞에 털썩 앉았다.
“정확히 말해서, 네가 불러들인 그 애물단지 손님이 말로 때렸어.”
“저런.”
백란이 눈살을 폈다.
“그러게 바보짓은 좀 적당히 할 것이지.”
“그냥 복도에서 넘어졌을 뿐이야!”
“책이 놀라겠습니다. 조용히 하십시오.”
백란이 책을 작은 강아지 다독이듯 덮고 쓸었다. 책도 강아지처럼 백란의 손길 아래에서 움찔거렸다.
“대체 뭐하는 책이야?”
“천계에서 가져온 책입니다. 인간계의 혼탁함과 소란에 익숙하지 않으니 잘 달래주어야 합니다.”
“이번에 그래도 오래 있다 돌아갈 모양이네.”
아까 엿들은 걸 들키고 싶지는 않기에 유단은 슬쩍 넘겨짚는 척했다.
“그렇지? 일부러 책까지 가져올 정도면. 얼마나 가져왔어?”
“하루면 다 읽습니다.”
백란이 잘라 말했다.
“볼일 끝나면 돌아간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 볼일은 언제 끝나?”
정곡을 찔린 듯 백란이 유단을 노려보았다. 그래도 대답은 했다.
“짧아도 일 년은 걸립니다. 이제 만족하셨습니까?”
“그래.”
유단이 가볍게 대답했다.
“명색 슈퍼 악당을 숨겨줬으니 어떻게 될지 확인해야겠지. 어벤저들이 정말로 여기 다시 안 올지, 그를 여기 두는 게 정말 괜찮은 일인지......”
마침내 처음부터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왜 그런 악당을 숨겨주는 거야? 뉘우치기라도 했대?”
“모릅니다.”
유단의 입을 틀어막아 놓고 백란이 설명했다.
“그가 뉘우쳤는지, 앞으로 무엇을 하게 될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니 제 눈이 닿는 곳에 두고 지켜보려는 겁니다. 기왕이면 좋은 쪽으로 돌려놓을 수 있기를 바라며.”
백란이 옷소매 속에서 작은 돌조각을 꺼냈다. 그냥 길가 아무 돌멩이나 주워다 네모지게 깎은 것처럼 생겼는데도 기이하게 눈길을 잡아끌었다. 중앙에 새겨진 복잡한 기호 때문일 것이다.
“만에 하나 그와 진심으로 대적하게 된다면 저는 상대가 되지 못할 겁니다. 토르는 오늘 한 것처럼 다음에도 속여서 따돌릴 수 있겠지만 로키는 그렇게 쉽게 속아주지 않을 겁니다. 이미 토르도 여러 번 로키를 힘으로 굴복시켰지만 가둬두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니 저 정도가 어찌 그를 강제할 엄두를 내겠습니까? 그래서 차라리 토르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보려는 겁니다.”
백란의 목소리엔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도 결국 제자리에 돌려놓을 겁니다.”
반대쪽 옷소매에서는 가는 줄 같은 것을 꺼냈다. 꼬아서 둥글게 만드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걸 돌조각에 붙여버렸다. 어떻게 한 건지 신기해서 보고 있는데 백란이 그것을 유단에게 내밀었다.
“한 번 당겨보시지요.”
“응? 그래.”
유단은 돌을 받아들고 줄을 몇 번 당겨보았다. 뭘로 붙였는지 힘껏 당겨봐도 빠지지 않았다.
“어떻게 한 거야?”
“제 비밀스런 술법을 어찌 함부로 공개하겠습니까. 한 번 직접 알아내 보시든가요. 가지고 다니면서.”
퍼뜩 생각난 것에 유단은 돌조각을 다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왼쪽 눈에 힘을 주자 순간적으로 로키가 비쳤다. 잠깐이었지만 로키 같지 않은 쓸쓸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백란은 여전히 그냥 돌멩이라도 주워다가 준 것 같은 무심한 태도였다.
도깨비 뿔을 건네주었을 때도 그랬다.
‘누구한테 빼앗기지만 않으면 참 좋겠습니다. 두 번 다시 제 손에 돌아오지 않게요.’
보기 드물게 후련한 얼굴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실제로 백란이 그때 짊어지고 있던 짐에 비하면 그것도 돌부처나 다름없는 표정이었다. 유단에게 생색 비슷한 것도 내지 않았다.
로키의 주문이 담긴 돌을 유단은 꽉 움켜쥐었다.
이런 건 너나 걸고서 네 목숨 챙기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백란을 안심시켜주고픈 마음이 더 커졌다. 더 이상 자신이 죽을까봐 노심초사하는 일이 없도록. 천계에서든 인간계에서든 안심하고 자기 할 일을 할 수 있도록.
“고마워.”
줄 길이가 목걸이로 하기에 딱 맞아보였다. 목에 걸고 눈에 띄지 않도록 옷 속에 넣고 나니 백란의 의아한 얼굴이 보였다.
“뭣에 쓰는 물건이냐고 안 물어보는 겁니까?”
“어차피 설명 안 해줄 거잖아. 네가 주는 거니까 다 이유가 있겠지. 주의사항 있어?”
백란은 정말로 놀란 듯 두 눈을 깜박깜박 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없습니다. 최대한 몸에서 떼놓지 말고 항상 걸고 다니라는 것밖에는요.”
“그럴게.”
다시 생각해보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백란은 지상에 그렇게나 적이 많은데 또 그 적들 중엔 감히 그와 대적할 수 있는 존재가 드물다. 그러니 천호에 비하면 한참 약하면서도 일단 건드리면 천호가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을 대신 노리는 자들이 생겨날 것이다.
백란이 천계에 돌아가 영영 내려오지 않는다면 그런 놈들의 궁리도 소용없다. 그러나 인간계에 내려와 이전처럼 활동하려면 유단이 표적이 되어 위태로워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필요했다.
“갑자기 무슨 시시한 일이라도 생각해낸 겁니까?”
백란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지금 굉장히 바보처럼 웃고 계십니다.”
“응, 있어. 그런 시시한 일.”
유단은 계속 웃었다. 반월당 경영도 앞으로는 꽤 할 만한 일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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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완결입니다. 노는 기분으로 즐겁게 써서 저도 무척 마음에 드는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아직은 생각이 없지만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또 후속작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39 ㅣ- 회색도시&검은방


분위기라면 많이 누그러졌지만 고깃집은 민감한 대화를 나눌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그래도 시백이 더 이상 마구 화내거나 양태수를 매도하거나 하지는 않고 대화를 나눌 생각이 있다는 걸 확인해서 최재석은 성공이라 생각했다.
“저....”
식당을 나와서 헤어지려는데 시백이 최재석을 잡았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어요?”
“응? 아 그럼, 나 너희 아빠 친구거든. 앞으로 자주 놀러갈게. 아주 귀찮아서 그만 좀 오라고 할 때까지 갈 거니까...”
“일 안 바쁘냐.”
양태수가 태클을 걸었다.
“바쁘지만 잠시 친구 만날 짬도 안 나는 건 아니라고.”
“역시 너 나 말고 친구 없지?”
“무슨 소리야 나 술 마실 약속이 내년까지 잡혀있어.”
“아까는 무척 한가한 것처럼 말하더니만.”
“아 내가 바빠도 아저씨랑 시백일 위해서라면 시간을 낼 수 있다, 이 뜻이지 그게 그렇게 알아듣기 어렵냐.”
사이좋게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며 양시백은 잠시 넋을 잃었다. 살아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관장님이 저렇게 멀쩡하고 유쾌하게 살아있고 친구도 있고 행복하고 앞으로 더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꿈만 같았다. 게다가 아버지가 관장님 친구고 그 군번줄 주인이었다니.
옆에서 살짝 발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준혁이 그를 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선생님....도.”
시백이 작게 말했다.
“또 만날 수, 있는 거죠?”
준혁의 표정이 굳었다.
“또.... 보고 싶은 겁니까?”
시백의 표정이 험해졌다. 그가 준혁의 팔을 잡았다.
“또 도망치려고.”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준혁이 시백의 손을 잡아 살며시 떼어내었다.
“사죄라면 물론 해야 합니다만, 시백씨는 저 같은 거 꼴도 보고 싶지 않아야 맞지 않습니까?”
“그건....”
“자, 그럼 우린 가자.”
최재석이 와서 준혁의 어깨를 잡았다.
“둘이 무슨 얘기 했어?”
“아뇨, 별거 아닙니다.”
준혁이 방긋 웃었다.
“선배, 다음에 양태수씨와 양시백씨 만날 때 말입니다.”
“응?”
“저도 따라가도 될까요?”
“잉?”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고, 우연히 마주친 게 아버지 친구라니 신기하기도 하고요. 20년 가까이 모르고 살았는데 갑자기 만났으니 어디서 문제가 생기거나 감정이 상할지도 모르고.... 어, 제가 성당에서 보육원 봉사 활동을 좀 해서 그런 쪽은 경험이 있거든요.”
그가 양태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주제넘은 참견 같지만...”
“아뇨, 도와주신다면 감사하지요.”
양태수도 찬성했다.
“부끄럽지만, 또다시 시백이에게 상처가 될 짓을 하는 것 보다는 백번 나으니까요.”
“이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준혁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양태수도 마주 인사했다.
“또봐, 아저씨.”
“그래.”
최재석에게도 손을 흔들어주고 양태수와 양시백은 차에 올랐다. 의자에 기대며 시백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 사람이 그..... 흥신소장이지?‘
양태수의 말에 시백이 깜짝 놀라 튕겨 일어났다.
“아세요? 어떻게.”
“그, 허강민에게 들었다.”
“그런데 아까는 만나자고 했네요.”
“그게 좀 대화를 해보고 싶기도 했고....”
양태수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내가 너한테 미안한 게 어렸을 때 버리고 떠난 것만이 아니야. 나는.... 내가 얼마 전까지 모시던 사람이 그 직업소개소 주인이었다.”
시백은 너무 놀라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다행하게도, 너희가 과거로 넘어온 덕에, 사실을 미리 알고 악한 자를 계속 따르지 않을 수 있었어. 그러니 그에게도 조금은 고마워 해야겠지.”
뜻밖의 사실에 시백은 멍하니 어두운 창밖만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왜요?”
한참 만에 시백이 속삭이듯 말했다. 양태수가 도로만 노려보았다.
“내가 최악의 상황에 빠져있을 때 도와주셨다. 그래서 그 땐 그 사람이 내 은인이라고 생각했지. 좋은 사람이 아니란 걸 안 뒤에도... 눈을 돌리고 알지 않으려 했어. 내 죄다.”
“은인이라고 해도, 잘못된 짓을 하면 막아야 하잖아요.”
“그래. 그래야 했는데.”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빠는 이제 어떻게 할 거에요? 그 사람.”
“이미 내 손을 벗어나 버렸단다.”
양태수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미리 알고 막을 수 있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지금은 이미,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죄를 쌓아버려서...”
양태수가 시백 쪽을 흘끔 보았다.
“미안하다. 너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악마일 뿐일텐데 이런 말을 해서.”
“아니에요.”
시백이 고개를 저었다.
“이해해요. 미리... 막을 수 있었다면 좋았겠죠.”
그가 눈을 감았다.
죽어서 도망치지 못한 지금, 선생님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까.
관장님을 선배라고 부를 땐 기겁을 했지만 유상일과 선생님이 선후배고 유상일과 관장님이 동료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꽤 귀여움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상냥해야 할 때는 엄청 상냥하니까, 그 사람.’
죽임당한 사람들이 살아났다 해서 그가 죄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배준혁은 살아있고, 아직은 죽은 사람도 없다.
앞으로도 없게 하겠다고, 필요하다면 평생 쫓아다니고 감시해서라도 나쁜 짓은 절대 못하게 하겠다고 시백은 결심했다.
‘그러고 떠나버렸으면, 내 부탁 하나 정도는 들어줘야 맞잖아요. 안 그래요?’


강재인은 두통이 이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회장님께 전하라며 강성중이 말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사육하던 도사견 하나가 도망쳐서 쫓아가 보았더니 양태수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란히 놓고 보니 굉장히 닮은 게 무슨 관계가 있어 보여 우선 회장님께 먼저 보고한다는 것이다.
뭐라 번지르르하게 말을 늘어놓았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잘못되면 자기가 결과 감당하기 싫으니 회장님한테 미루겠다는 소리다.
양태수에게 잃어버린 아들이 있고 그 아들을 열심 찾아다닌다는 건 강재인도 알고는 있었다. 관심 두진 않았지만. 그런 낮도깨비 같은 면상이 잔뜩 있을 리는 없으니 양태수의 아들이라는 뜻일 터였다.
‘먼저 보고를 해야 할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고 나서 보고하는 게 나을까.’
애가 자기가 어디서 뭐 하고 있었는지 말했다면 양태수와는 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아직 그런 얘기까지 오가지 않았다면 입 다물게 시키고 그냥 양태수 혼자 아무것도 모르고 기뻐하는 선에서 수습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늦기 전에 제거해야겠지만.’
회장님께 바로 가서 보고를 올려도 이런 가능성 외에 다른 명령이 내려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보고를 하고 조사를 지시받고 정보를 모아 또 보고를 하고 처리 방법을 또 지시받느니 추가정보까지 모은 다음에 보고하러 가는 편이 간단할 것 같았다.
‘우선 양실장님이 어디까지 알고있나 알아보자.’
결론을 내리고 막 모퉁이를 돌자 장지연이 나타났다. 강재인은 깜짝 놀랐지만 억지로 미소를 만들었다.
“아, 지연 아가씨. 저 급히 저택에 돌아가 봐야 할 일이 생겨서 그러는데 같이 돌아가시겠어요, 아니면 따로 차를 보낼까요?”
“강재인씨.”
“네?”
장지연 답지 않은 단호하게까지 느껴지는 부름에 강재인은 잠깐 표정관리를 못했다.
“무슨...”
“저, 강재인..씨 많이 좋아해요.”
“아, 감사합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아가씨에게 미움받는 것 보다는 나을 것 같아 강재인은 일단 그렇게 말했다.
“그, 그치만, 와, 완전히 믿....기는 어려워서.”
“네?”
이런 상황에서도 강재인은 뒤에서 접근하는 기색을 눈치챘다. 그러나 뒤돌아 상대를 확인하기도 전에 장지연이 그의 행동을 묶었다.
뒤에서 접근한 사람이 강재인을 붙잡았다.
“이제 어쩌시려고요?”
남자 목소리였다.
“가, 강제로. 복종을.”
그 목소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한테도 그러실 생각이었습니까?
“저, 정 안 되면요.”
“네, 빨리 해치웁시다. 전 또 일이 있어서요.”
그가 강재인을 들처메고 옆방으로 들어갔다. 장지연이 따라들어가 문을 닫았다.


안승범은 옆자리의 허강민을 흘끔거렸다.
복수의 무대가 거의 다 완성되었으니 같이 가서 마무리하고 트릭 연습도 해보자며 아닌 밤중에 불러내서는 가는 동안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뭐라 말 붙여보려다가 지쳐서 안승범은 부옇게 밝아오는 하늘을 보며 크게 하품을 했다.
잡초에 뒤덮여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진입로로 허강민이 차를 꺾었다. 곧 다 삭아버린 리조트 건물이 나타났다.
“저기가....”
안승범이 신음했다. 허강민은 고개만 끄덕였다.
“복수해주겠어. 백건영, 서현진.... 그리고 민지은.”
안승범이 나직이 이를 갈았다. 허강민은 말없이 그를 재촉해 안으로 들어갔다.
셔터 내린 실내 주차장처럼 생긴 공간에 온갖 기계며 전선이 쌓여있었다. 안승범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런 기자재들을 훑어보았다.
“엄청나네... 정말 이런데 갇혀있다 죽으면 복수 하난 끝내주게 되겠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했어?”
“안승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안승범이 깜짝 놀랐다.
“표정이 왜 그래?”
“너, 백선교에도 복수하고 싶댔지?”
안승범이 눈을 번쩍 떴다.
“그놈들 찾았냐!”
“정확히는 그놈들이 날 찾았지.”
“뭐라고?”
안승범이 허강민에게 달려가 어깨를 붙들었다.
“윽....”
안승범이 너무 꽉 쥐어서 아픈 거지만 그는 오해했다.
“그놈들이 너한테 뭔 짓 한거야? 무사히 도망쳐 나왔어?”
허강민이 안승범을 쳐다보았다.
“나 걱정하는 거야?”
“그럼 당연히 걱정하지, 그놈들 진짜 악당 놈들이고 악독한 짓도 태연히 한다고. 찾아낸 건 고마운 데 위험한 짓은.”
“안승범.”
허강민이 그의 팔을 마주잡았다.
“내가 왜 복수 대행 같은 짓을 하는지 얘기했던가?”
“응? 그야, 그 류태현이란 사람에게 복수하려고 그러는 거잖아. 그러면서 남의 복수도 돕고.”
“그건 맞아. 그런데... 다른 목적이 더 있어.”
“아, 역시 그런가.”
“뭐?”
뜻밖의 반응에 허강민이 놀랐다.
“짐작하고 있었어? 뭘?”
“그게,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나 하나뿐일 리도 없는데 굳이 날 선택한 이유 정도는 있을 거 아냐. 내가 뭐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이런 엄청난 일을 하는데 딴 목적이 없을 리가.”
“음.”
허강민은 좀 당황했다.
“너 생각을 하기도 하는 거였냐.”
“뭐야, 그건. 날 바보라고 생각했냐!”
“그래.”
안승범이 노려보았다. 허강민은 말을 계속했다.
“바보라고 생각한 증거를 들려줄까? 너는 쭉 백선교에게 속고 있었어.”
“응? 누가...”
“내가.”
안승범이 조용해졌다.
“백선교 끄나풀이고 이 밀실은 그들의 의식이다. 살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보여주다 뺏어버리는 전개 익숙하지 않아? 너도 약간은 조사했을 거 아냐?”
안승범의 얼굴이 빨개졌다 파래졌다. 한참 걸려 그가 드디어 목소리를 만들었다.
“이... 이 나쁜 새끼!”
“잠깐 퀴즈. 내가 이 얘기를 왜 했을까?”
막 허강민을 때리려다 말고 안승범이 멈칫했다.
“....나한테 맞고 싶어서는 아니겠지.”
“당연하지, 그런 류태현도 안 할 짓을.”
허강민이 쏘아붙였다.
“미, 미안.”
죽도록 패려던 상대한테 사과하는 게 우습긴 해도 허강민이 류태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는데 아무 말도 안 하기도 어려웠다.
“이번 밀실을 통해, 백선교 간부들에게도 복수할 길을 열어줄 수 있어.”
허강민이 말했다.
“다만 그 경우 저 세 사람에 대한 복수가 방해받을 지도 몰라. 어떻게 할래?”



[반월당, 마블 유니버스] 사랑손님과 천호님 5 ㅣ- 크로스오버



백란은 평상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창에 기대 몸을 버티고는 있지만 누가 봐도 상태가 안 좋아보였다. 그 주위를 둘러 감싸고 토르와 캡틴 아메리카에게 무기를 겨눈 채인 도씨, 흑요, 쌍둥이 역시 안색이 창백했다.
“널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다.”
토르가 우울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를 어디에 숨겼는지 말하기 싫다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 로키가 널 뭐라고 협박했든 이건 우리가 한 일이고 네가 로키에게 불성실한 건 아무 것도 없다. 네가 더 무슨 꾀를 부리든 강철 인간과 검은 과부가 로키를 찾아낼 것이다.”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백란이 힘없이 기댄 채로도 싸늘하게 내뱉었다.
“아까는 저와 로키 전하의 친분 때문에 저를 의심했다고 하시더니, 이제는 그분이 저를 협박했다고 하시는군요. 아스가르드에선 친분이 있는 사이에 협박이 흔한 일입니까?”
토르가 움찔 하더니 대답할 말을 궁리해냈다.
“하면 너는 어째서 로키를 숨겨준 것이냐?”
“숨겨주고 있다고 말했던가요?”
이 지경이 되어서도 백란은 로키를 여기 숨겼다고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캡틴 아메리카는 기색이 험악해졌으나 토르는 여전히 백란에게서 일정 거리를 둔 채 더 공격할 기미가 없었다.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 이번엔 백란이 물었다.
“토르 전하는 이제 로키 전하를 증오하시는 겁니까?”
토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로키 전하는 친구 상대로도 협박을 자행하는 성품이었습니까? 제가 겪어본 바로는 아니던데요?”
그 말에 토르의 표정이 묘해졌다.
“로키가 네게 그런 적이 없었다고? 협박하거나, 속이거나 이간질하는 일이 없었다고?”
“예.”
이간질에 있어서는 유단의 생각은 달랐으나 백란은 망설임없이 그렇게 답했다. 토르의 표정이 더 이상해졌다.
“마치 전하께는 그런 적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토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반역자가 되기 전부터였다. 로키는 항상 나도 친구들도 골탕먹이고 속였다. 마땅히 들여야 할 노력과 수고를 거부하고 편법으로 빠져나가는 일이 잦았다.”
백란은 곰곰이 생각하는 기색이 되었다.
“이거 마치 우리가 좀 비슷하기만 한 다른 인물을 두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군요. 저라고 해서 로키 전하께 특별히 더 해드린 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정말인가?”
“그분의 호감을 사기 위해 노력한 적은 조금 있습니다만, 인연이 깊지 못해 정말 하찮은 몇 가지 시도였을 뿐입니다. 아스가르드에서 함께 자란 토르 전하의 눈엔 보잘것없겠지요.”
토르의 눈빛이 반짝였다. 말은 안 해도 백란이 어떤 하찮은 시도로 로키의 환심을 사서 좋은 관계를 맺었는지 아주 궁금한 것이 틀림없었다.
“지난번 뵈었을 때 전하께서 로키 전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계신 것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토르 전하께서도 응당 모든 노력을 기울이셨을 것 아닙니까? 범죄를 저질렀어도 너는 내 형제이니 최대한 편을 들어주겠다, 죄를 씻을 기회를 만들어줄 테니 믿고 기다려달라 말씀하셨을 것 아닙니까? 오딘 폐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노력하고 여전히 가족임을 상기시켰을 것 아닙니까?”
반짝이던 눈빛과 함께 토르의 기색도 푸욱 꺼졌다.
그 꼴을 보니 사정을 전혀 모르는 유단도 방금 백란이 ‘넌 아무 것도 안 했잖아, 이 형 자격도 없는 놈아.’라고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차라리 그렇게 대놓고 외치는 편이 덜 잔인할 것 같았다.
하지만 가족 간에 해야 할 일을 안 했다면 유단도 토르를 동정할 이유가 없었다.
“토르, 정신 차려.”
캡틴 아메리카가 쭈그러들려는 토르를 재촉했다.
“네가 로키에게 좀 부족했는지 몰라도 우린 여기 그를 잡으러 온 거라고. 적이 하는 소리에 넘어가지 마.”
“설령 지금 당장 로키 전하가 여기 나타나서 잡아갈 수 있다고 해도.”
백란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영원히 가둬둘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처형해서, 로키 전하의 사정이나 소망,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들 전부를 그냥 없애버리고 잊어버릴 작정입니까? 그 정도로 모든 미련과 기대를 접었다면 제가 무슨 말을 하든 소용없겠지요. 하지만 아니라면 들어보셔야 합니다.”
토르는 망설였다. 그걸 보고 캡틴 아메리카가 백란을 쏘아보았다.
“뭘 들어보라고? 범죄자의 자기 변명을? 이봐, 로키가 아스가르드에서 무슨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든 뉴욕의 시민들은 거기 아무 책임도 없어. 무고한 사람들을 해친 벌도 주지 않고 감싸기만 해야 한다는 거냐?”
“로키 전하가 무고하다는 말은 한 적 없습니다.”
백란이 캡틴 아메리카를 돌아보았다.
“법정에 판사와 검사, 집행인이 있으면 변호사도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말씀드리고 있을 뿐이죠. 천지의 모두에게 범죄자로 쫓기며, 변명 한 마디 할 기회도 얻지 못하는 자를 가족이자 친구였다는 사람조차 도와주는 대신 적들과 함께 사냥하듯 몰아붙이고만 있다면 그걸 정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천호란 그런 고독과 절망을 모른 척할 수 있을 만큼 매정한 존재가 아닙니다. 캡틴에게도 소중한 가족이나 친구가 있어 그리 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복면 아래로 드러난 입술이 푸르게 질렸다. 방패를 떨어뜨리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말로 로키 전하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백란이 다시 토르를 돌아보았다.
“다음에 만나면 일단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입을 다물고, 망치도 일단 내려놓고. 로키 전하에게 말할 기회를 주세요.”
토르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사랑채에서 요란한 금속음이 들려왔다. 아이언 맨과 블랙 위도우가 뛰어나왔다.
-여기 분위기 왜 이래?
아이언 맨이 두리번거렸다.
-아무튼 저쪽엔 없어. 어디 있는 거야?
아이언 맨의 시선이 백란에게로 향했다. 백란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걸 꼭 제게 물어야겠습니까? 정 다 뒤지기가 귀찮다면 다른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토르를 돌아보았다.
“들어올 때 반월당의 주술을 상당히 깨뜨리셨으니 이제는 헤임달의 눈에 이 안이 비칠 것입니다. 그분께 다시 물어보시지요. 참으로 로키 전하를 이 안에 숨겼다면 그분의 눈에 띌 것입니다.”
토르가 자세를 고쳤다. 조용히 수그리고 집중하자 뭔가 에너지 같은 것이 그에게서 솟아나 하늘 어딘가로 사라졌다.
뭔지 몰라도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벤저들도 반월당 식구들도 일단 기다렸다.
한참 만에야 토르가 눈을 떴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라고 하는데 그래?
아이언 맨이 다시 묻자 토르가 혼란스러운 그대로 답했다.
“로키가......여기 없다고 한다. 있었던 흔적도 찾지 못했다.”
어벤저들 각자에게 토르의 혼란이 퍼져나갔다.
“어이, 확실해?”
블랙 위도우가 토르를 다그쳤다.
“분명히 여기라고 했잖아?”
-그쪽이 잘못 본 거 아냐?
“그럴 리 없다.”
토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헤임달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의 시야를 차단할 수는 있어도 일단 그의 눈이 닿은 곳에서는 모든 것이 드러난다. 헤임달이 찾지 못했다면 이 안에 없다.”
토르가 백란을 바라보았다. 백란은 여전히 뻔뻔한 얼굴로 토르를 마주보았다.
“이제 어찌하시렵니까? 없는 사람을 내놓으라 하시지는 않으시겠지요?”
“여기 말고 딴 곳에 숨긴 거 아냐?”
블랙 위도우가 의심스런 표정으로 한 마디 했다.
“딴 곳 어디에요? 지상에 이제 제 영역이라고 할 만한 곳은 없습니다. 로키 전하께서 어디에 어떻게 숨었든 그분 재량이고 저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어디 정말로 그런지.....
“아니, 됐다.”
토르가 손을 들고 아이언 맨을 막아섰다.
“여기 없다면 더 이상 여기서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물론이죠. 천계에서 이 일을 모르길 바라셔야 할 겁니다.”
백란이 당당하게 지적했다.
로키가 여기서 잡혔다면 모를까, 어쨌든 저들은 천호를 건드렸다. 토르가 속한 아스가르드는 천계와 동맹했고 어벤저들도 천계의 눈엔 그냥 인간들이다.
“지금 돌아가시면 문제삼지 않겠습니다.”
블랙 위도우와 아이언 맨은 납득하지 못하는 기색이었지만 토르는 순순히 백란에게 고개를 숙이고 망치를 땅으로 내렸다.
“부정확한 정보로 소동을 일으킨 것을 사과한다.”
아이언 맨이 캡틴 아메리카를 쳐다보았다. 정말 이대로 물러나는 수밖에 없는 거냐고 채근하는 눈빛이 두꺼운 합금 면갑 너머로도 느껴질 정도였으나 캡틴도 꼼짝하지 못했다.
“가자, 친구들. 오늘 수고해준 것은 반드시 갚겠다.”
토르가 돌아서서 반월당을 걸어나갔다. 캡틴과 아이언 맨, 블랙 위도우도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천호.”
막 부서진 대문을 넘어가려다 말고 토르가 말했다.
“혹시라도 로키를 만나게 된다면 그에게 내 이야기도 전해줄 수 있겠나?”
“뭐라고 전하면 됩니까?”
“미안하다고......그러니까, 다음에 만나면 이야기 해보자고.”
“뵙게 되면 전해드리겠습니다.”
“혹시 이 일에 변상이 필요하다면......”
“피차 조용히 지나갈 수만 있다면 그것이 변상입니다.”
“알겠다.”
토르는 무거운 기색으로 반월당을 빠져나갔다.


어벤저들이 정말로 멀리 가버렸는지 확인하기 위해 흑요가 전통의 거리까지 나갔다가 돌아왔다. 그러자 비로소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단은 백란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다친 데는?”
백란은 귀찮은 듯 손을 휘저어 유단을 밀어냈다. 그리고 부서진 대문 앞으로 다가가 부적을 꺼내들었다.
“여기부터 수리해야 합니다.”
백란이 부적을 던지자 부서진 대문이 훌떡 일어나 원래대로 섰다. 조각들이 퍼즐을 맞춘 듯 끼워지고 부적이 스카치 테이프처럼 고정했다.
그 위에 가는 금줄을 두르고 몇 가지 술법을 더 겹쳐 쓰는 백란을 유단이 멍하니 훑어보았다.
직전까지 창에 기대 쓰러져 있었으면서.
“이제 급한 불은 껐습니다. 대문을 다시 제대로 다는 일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할 일입니다.”
종이여우 하나를 대문 밖으로 던지고 백란이 돌아서서 유단을 보았다.
“다친 데는 없습니까?”
“너야말로.”
유단이 따지고 싶은 수많은 것들 중 하나를 일단 끄집어냈다.
“토르의 그 망치에 맞은 것 아니었어? 직전까지 비실댔잖아?”
“맞았다고 누가 그랬습니까?”
백란이 천연덕스럽게 갸웃거렸다.
“토르는 제가 맞은 줄 알겠지만 아닙니다. 잔상에 스쳤을 뿐입니다. 속임수를 보지도 않았으면서 속다니 바보의 속는 재주란 정말이지 끝을 알 수 없군요.”
“허허, 과연 천호님.”
도씨가 안심한 듯 웃었다.
“그렇게 연기력이 대단하시니 토르도 저 녀석도 속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저야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니 다 그러려니 했습니다만.”
마루를 내려오다가 발이 꼬여 주저앉고도 도씨는 꿋꿋하게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덜덜 떠는 손으로 식은땀을 닦으려다 눈을 찌를 뻔하는 걸 다들 못 본 척 해주었다.
“다 끝난 거야? 그래서?”
다시 유단이 물었다.
“그......는 어떻게 된 건데? 어디다 숨겨서 저들이 못 찾은 거야?”
이미 끝났다고 해도 로키의 이름을 또 언급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반월당 안을 샅샅이 훑어서 못 찾았다면 어디에 있겠습니까?”
때맞추어 대문이 끼익 하고 열렸다. 손에 종이여우를 쥔 로키가 태연히 금줄을 넘어 걸어들어왔다.
“무사하셨군요.”
백란이 다가가 예를 표했다. 로키도 백란에게 웃어보였다.
“그래. 전부 네 덕분이다.”
“이제 안전하게 지내실 수 있을 겁니다.”
“네게 곤란할 일은 정말 없는 거냐?”
“그럴 것 같으면 나서서 모시지 않았습니다. 들키면 곤란할 상대도 잘 따돌려 놓았고 토르 전하도 자기가 실례를 저질렀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더는 문제삼지 못할 겁니다. 다음 행보를 결정할 때까지 여기서 느긋하게 계실 수 있습니다.”
“그래. 어쨌든 이제는 미드가르드 전체를 다 뒤져도 반월당은 빼고 뒤질 테니 말이지.”
마주보고 사악하게 웃는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유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기, 백란. 질문이 있는데.”
“말씀하시지요.”
“혹시 꼬리 잡혀서 어벤저들이 쳐들어오게 만든 거 일부러야? 일부러 로키라는 이름을 흘려서 내가 밖에서 말하게 하고, 때맞춰 청룡과 옥린공주는 레스토랑 평정하게 보내버리고, 로키는 잠깐 반월당 밖에 숨긴 뒤 어벤저들에게 지는 척해서......”
백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진심으로 놀란 것 같았다.
“이럴 수가. 어떻게 그걸 눈치챈 겁니까? 꼭 바보가 아닌 것처럼 보일 지경입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도저히 못 참아! 난 네가 고작 저런 악당 때문에 망치에 맞아 죽을까봐 걱정했는데 너는, 너는......”
백란의 멱살을 쥐고 마구 흔들었다. 간단하게 잡혀 흔들리는 걸 보니 또 허깨비겠지만 신경 끄기로 했다. 허깨비 상대라도 할 말은 하고 싶었다.
“자해로 관심 끄는 거 지겹다고 했지! 언제쯤 네 목숨을 챙길 거야? 이제 팔목귀도 없는데 꼭 그래야겠어? 천계에서 편히 호강하며 살기로 한 거 아니었냐고!”
“절 다시 여기 잡아두고 부려먹을 생각뿐이면서 못하는 말이 없군요.”
“맘 바꿨어. 계속 이렇게 다치고 목숨 걸 거면 그냥 돌아가. 돌아가서 편히 살아. 죽지 말고.”
“누가 들으면 제가 엄청난 부상이라도 당한 줄 알겠습니다. 맞은 척만 했다고 몇 번 말해야 합니까?”
백란이 유단의 손을 붙들고 떼어냈다. 너무 오래 잡혀 목이 아픈지 옷깃을 가다듬고 숨을 몰아쉬는 백란은 속임수가 아니고 진짜였다.
“마음에 없는 소리는 하지도 마십시오. 그동안 천계에서 얼마나 뒤통수가 당겼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의 염원 때문에 아주 귀찮아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절 부르려고 일부러 가게를 말아먹는 거라면 차라리 그러려니 하겠는데, 아주 다양하게 사고를 치더군요. 일부러 하라고 하면 못할 정도로 말입니다.”
“이제 나아질 거야. 요령도 생기는 중이고.”
“퍽이나 그러겠습니다.”
백란은 휙 돌아서서 로키를 보았다.
“이만 들어가실까요? 소동이 지나갔으니 쉬고 싶으시겠지요.”
“그러지.”
로키가 빙긋이 웃으며 유단을 돌아보았다.
“너도 수고했다.”
‘우리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꼴이 한심했다.’라고 뇌내에서 자동 번역되었다. 차라리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역시 저 악당을 그냥 놔두는 건 너무했다. 소동이 나서 다시 반월당에 숨은 것이 발각되기라도 하면 백란이 난처해지니 안 될 일이지만, 따끔한 말 한 마디라도 해줘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다른 요괴들은 각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흑요는 부엌에 들어가더니 소금을 한 바가지 퍼서 나왔다.
“누가 이거 좀 대문 밖에 뿌려라. 그 잡것들 또 올까 무섭구나.”
채우가 받아다가 뿌리러 나갔다. 도씨는 마당에 있던 물건들을 수습했다. 채설은 부엌으로 흑요를 따라들어갔다.
도씨를 도우러 가려던 유단은 문득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녹색 구슬 같은 것이 때그르 구르고 있었다.
‘뭐야?’
채우도 도씨도 못 보고 지나치는 걸로 보아 천안에만 보이는 것이 분명했다. 유단은 도깨비 뿔을 꺼내들고 살금살금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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